크라스키노에서 자동차로 이십 분 거리에 있는 포시에트는 한인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았던 곳이다. 두만강을 건너 포시에트 항에 도착한 한인들은 이곳을 거쳐 빨치산스크, 쁘질로프카, 우수리스크 등지에 정착했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지은 지 꽤 오래된 건물에서 지난흔적들이 켜켜이 묻어났다. 도색이 벗겨지고 색이 바래면서 건물들이마치 흉물처럼 보였다.
안중근이 배를 탔던 곳은 출입이 어려웠다. 외부를 차단한 채 석탄과 목재를 운반하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접근이 금지된 항구를 벗어나해안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을을 등진 쪽빛 바다는 파란 물감을풀어놓은 듯 강렬한 빛으로 다가왔다. - P39

일본의 을사5조약은 한반도를 뒤흔들어놓을 중대한사건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일 때 선포한 글이 있습니다.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한국의 독립을 굳건히 하겠다는…………. 그런데 일본은 지금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필시 일본의 대정치가인 이토히로부미의 정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중근은 아버지 앞에서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을사늑약의 배후로 이토 히로부미를 지목한 것이다.
1909년 10월 18일, 포시에트에 도착한 안중근은 한인동포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우리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척결하지 못하면 이천만 국민에게자결로 속죄하겠소!‘
날이 밝자 안중근은 동의단지회 동지들과 맺은 피의 맹세를 가슴에 안고 우수리호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가려면 아홉 시간 넘게 배를 타야 했다. - P48

조선인의 첫 이주는 1863년 겨울에 시작되었다. 삼정문란이 발생하면서 조선은 탐관오리로 들끓었다. 빈민 구제를 위한 환곡제도는 고을 수령들의 비리 온상으로 전락한 지 오래였고, 굶주린 백성들에게되로 꾸어주고 말로 받는 일이 허다했다. 청년 안중근도 이에 대해 핏대를 세운 적 있다. 지방 관리들의 학정으로 말미암아 관리와 백성 사이가 원수처럼 되었노라고. 오죽하면 연해주 이주한 동포들 사이에서 ‘카우리‘라는 말이 나왔을까? 조선을 떠나온 동포들은 생지옥이나다름없는 국명을 아예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구려인이나 고려인(카우리)으로 불리길 원했다.
두만강을 건너 포시에트에 도착한 조선인들은 물길을 찾아 나섰다. 벼농사를 지으려면 사람보다 물이 우선이었다. 비노그라드노예 강 - P50

가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얼마 뒤, 러시아 당국에 조선 정부의 항의가 빗발쳤다. 조선인의 불법 체류를 허가해선 안 된다는 통보였다. 러시아 당국은 조선 정부의 요청에 따라 불법 체류자 색출에 나섰고, 두만강을 지키고 있던 조선 병사들은 귀환하는 자국민을 총구로 응징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도 굶주린백성들의 월경을 더는 막지 못했다. 한 명이 죽으면 세 명이 넘어가고,
다섯 명이 죽으면 열명이 넘어갔다. 무사히 국경을 넘은 조선인들은몸을 피해 인적이 뜸한 지신허로 들어갔다.
연해주 군무지사 푸르겔름 제독이 지신허를 방문한 날이었다. 지금 즉시 본국으로 돌아가줄 것을 종용했지만 조선인들은 미동조차 없었다. 차라리 이곳에서 맞아 죽는 게 낫다며 끝내 귀국을 거부했다. 군사시설 보호구역으로 묶여 지신히 마을을 볼 수는 없지만, 가수 서태지가 헌정한 기념비가 세워졌다. - P51

이곳은 연해주 핫산 지역 비노그라드노예에 있던 자신허라고 하는 옛마을로서, 1863년 함경도 농민 13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정착한 극동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로 현재는 옛터만 남아 있다. 그러나 1937년까지 1700여 명의 한인들이 모여 살던 매우 큰 마을이었으며, 현재50만에 이르는 CIS(독립국가연합)지역 거주 한인들의 발원지가 되는곳이다. 이에 우리는 이 비를 세워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과 러시아의 친선우호를 돈독히 하며 우리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는 바이다.

-2004년 5월 9일 대한민국 음악인 서태지 헌정 - P51

가을 단풍이 절정인 도로변에서 꿀과 과일, 채소를 파는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눈길을 끄는 점은 가지고 나온 농산물의 양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일용할 양식처럼 소박해 보였다. 과일도 채소도 모두 한끼 정도의 양이었다.
유인석, 이상설을 중심으로 ‘13도 의군‘이 결성된 바라바쉬를 지나서였다. 들꽃을 파는 초로의 노인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차에서 내려 가격을 묻자 ‘드바짜찌‘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20루블을 지불한 후들꽃을 받아드는데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래서 그런 말이 나왔던 것일까? 러시아 사람들은 빵 없이는 살 수 있어도 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여든을 훌쩍 넘긴 러시아 할머니에게 산 들꽃 한 줌은 그 어떤 꽃보다 청초하고 향기로웠다. - P55

우지미동, 개, 동개허, 십여촌, 고려개…. 1896년 개척 당시 불렸던 한인 마을의 지명이 정겨웠다. 또한 빨치산스크는 안중근에게도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곳이다.
의병 모집과 군자금 모금을 하러 다닐 때, 빨치산스크에 거주하는동포들이 가장 열성적이었다. 어려운 살림에도 동포들은 6000루블의군자금을 내놓았다. 안중근 일행이 하얼빈 거사에 쓴 100루블을 생각하면 6000루블은 거액의 돈이 아닐 수 없다. 고려인 1세대를 독립운동가라고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안중근에게 1907~1908년은 더없이 바쁜 해였다. 의병 모집에서성과를 내지 못하면 연해주 망명은 실패로 끝날 수도 있었다. 다행히하늘은 안중근의 손을 들어주었다. 빨치산스크에서만 백여 명의 청년들이 의병에 자원했는데, 그들을 일컬어 ‘수청파‘라고 불렀다.
빨치산스크를 방문할 때면 뜨거운 포옹으로 안중근을 반겨주는 사람이 있었다. 연해주 의병부대에서 핵심 대원으로 활동한 조순서와 장봉금이다. 두 사람은 영산 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했을 때도 안중근과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였다.
《대동공보》에서 첫 인연을 맺은 우덕순과 자주 만난 곳도 빨치산스크였다. - P57

《해조신문》이 있던 개척리 344호는 어디쯤일까? 연해주로 망명한 안중근은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에 긔서를 발표했다.


《해조신문>이 창간된 지 한 달 만이었다.
슬프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 참혹한 지경에 이른 것은 다름 아니라,
뜻이 서로 맞지 않는 불합병이 깊이 든 탓이다. 불합병의 근원은 교병(교만하고 건방진 병)이니 교만은 악의 뿌리라. 그러나 교오병의 약은겸손이니, 개개인이 자신을 낮추고 타인을 존경한다면 어찌 화합을 이루지 못하리오.
오늘날 이천만 동포가 화합을 이루지 못한 탓에 삼천리 강산을 빼앗기고 이 지경이 되었도다. 동포들은 무슨 심정으로 자국의 내정을 정탐하여 왜적에게 주고, 충성을 다하는 동포의 머리를 베어 외적에게 바치는가. 오, 통재로다. 나무뿌리가 썩으면 나뭇가지도 병드는 법, ‘불합‘의 두글자를 버리고 단합‘의 두 글자를 속히 취할 때다. - P73

‘만고 의사 안중근전‘을 집필한 사람은 역사학자 계봉우였다. 카자흐스탄에 묻힌 그의 유해가 2019년 4월, 63년만에 국내로 봉환되었다.


하느님께서 가시밭길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의 인도자 모세를 택하듯,
다마섹에서 외방 사람의 구원자 보라를 부르듯, 공(안중근)이 열일곱 살에 천주교에 들어가 을사늑약이 됨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몸을 희생에 바침은 평등주의나라. 공은 항상 학문으로 입신하는 선비들을 못마땅히 여겼으며, 동지들을 모아 조련시키며 총포탄은 집과 밭을 팔아 준비해두었다. - P81

하바롭스크 거리는 정겹고 쓸쓸했다. 3·1운동을 기리기 위해 세운신한촌 독립문 터는 가로수 숲으로 변했고, 상하이 임시정부로 떠나기전 묵었던 이동휘 집터에는 상가 건물이 들어섰다. 바닷가 옆 기찻길언저리에서 만난 ‘세울스카야(서울 거리) 2A‘ 명판이 반가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남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유일한 흔적이랄까. 고려인 강제이주가 벌어졌던 뻬르바야레치카 역과 고려인 시장도 멀지 않은 곳에있었다.
국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일본의 만행이 오히려 만주와 연해주에서 더 잘 보일 때가 있다. 오케얀 거리 7번지에 남은 일본 영사관 건물이 그러했다.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앙갚음으로 저지른 간도 양민학살, 중국인을 대상으로 강간과 학살을 자행한 난징대학살, 하얼빈 731부대에서 벌어진 생체실험, 고려인 강제이주 때 숙청당한 연해주 독 - P81

립운동가들……. 해외에 남아 있는 일제의 잔재를 보면 우리가 왜 그들을 전범국이라 불러야 하는지 더욱 명료해진다. 여전히 피비린내가 묻어난다.


상아색으로 단장한 블라디보스토크 역 대합실은 미술관에 들어온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해양을 상징하는 실내 벽화가 19세기를 배경으로 천장까지 이어졌다. 우수리스크행 기차표를 예매한 후 대합실 의자에 몸을 기댔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동쪽 종착지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여러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다. 헤이그 밀사 일행도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네덜란드로 향했던 것이다.
1909년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토크 역에는 네 명의 얼굴이 보였다. 안중근과 우덕순, 유진률과 이강이었다. 안중근은 총과 여비를 마련해준 이강의 손을 굳게 잡았다. - P83

"이번 길에 꼭 총소리를 내리다. 이(강) 동지는 우리의 뒷일을 맡아주시오."
"염려치 마시오. 지금 삼천리 강산을 두 동지가 등에 지고 가오"
작별 인사를 마친 안중근과 우덕순은 오전 8시 55분에 출발하는하얼빈행 우편열차에 몸을 실었다. 돌아와서도 안 되고, 실패해서도 안되는 길이었다.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은 안중근은 짤막한 시를 읊조렸다.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의 물 차가운데장사는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 P83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안중근은 <역수송별>이라는 연나라 시편을몇 번이고 되뇌었다. ‘지금 두 동지가 삼천리 강산을 등에 지고 간다‘는이강의 말이 심장을 강하게 찔렀다.
세찬 바람에 아무르만이 넘실거렸다. 저 바다처럼 우리도 마음껏자유롭고 평화로울 수는 없는 걸까? 연해주에서 보낸 3년이 바람결에 스쳐 갔다. 공교롭게도 ‘10‘이라는 숫자가 겹쳤다. 국권회복을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날도 10월이었고, 하얼빈으로 떠나는날도 10월이었다.
고향을 떠나오던 날 안중근은 두 동생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지금은 자기 몸이나 건사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몇 해 전부터 나는 집을 떠나 나랏일에 평생을 바치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꾀하는 것이야 사람에게 달렸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늘에 계시지 않더냐. 그러니 너희들도 마음을 비우고 몸을 낮춰 상대를 존중하길 바란다." - P84

돌아가신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 얼굴이 한 사람 한사람 차창에박혀왔다. 안중근은 속으로 자신의 빈자리가 너무 크지 않길 바랐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는 780 킬로미터.
국경이 가까워오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안중근은 우덕순과미리 의견을 나눴다.
첫째, 이토 히로부미를 반드시 쏠 것.
둘째, 달아나지 말고 총을 내던진 다음 ‘코레야 우라(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칠 것.
셋째, 산 채로 잡혀 우리의 억울함과 정당성을 세계에 알릴 것. - P84

"쑤이펀허 세관에서 물으면 나는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하겠네. 우 동지는 신문사 일로 출장을 간다고 입막음하게나."
"알겠네."
짤막하게 밀의를 마친 안중근은 그만 웃음이 나왔다. 국내 진공작전 때 우덕순은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일본군 포로를 돌려보낸 일로 대원들이 엄인섭의 부대를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애꿎은 하늘만 쳐다보고 있던 우덕순이 입을열었다.
"죽으려면 차라리 일본군 총에 맞아 죽세.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다낫지 않겠는가? 나한테 러시아 돈 1루블과 금시계가 있으니 잠깐만 기 - P85

다리게. 이걸 팔아서 먹을 것과 입을 것, 신을 것을 사 오겠네."
그러나 산을 내려간 우덕순은 감감소식이었다. 벌써 사흘째 소식이 없자 안중근은 남은 대원들을 이끌고 퇴각을 서둘렀다. 이대로 산속에서 지체했다간 전멸당할 수도 있었다.
그 시각 우덕순은 일본군 수비대에 붙잡혀 함흥 헌병대로 넘겨졌다.
‘아, 내 인생도 여기서 끝이구나!‘
일본군 헌병대에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있었다.
갖은 고문 끝에 감옥을 탈출한 우덕순은 국경을 넘어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죽었다는 자네가 어찌 된 일인가? 우리는 벌써 자네의 추도식까지 - P86

다 마쳤단 말일세."
"아무려면 내가 맥없이 죽을 것 같은가 왜놈하나쯤 죽이고 죽어야지."
다섯 달 만에 돌아온 우덕순을 바라보며 안중근은 껄껄 웃었다. 어딘가모르게 어설퍼 보이면서도 강한 심지를 가진 사람이 바로 우덕순이었다. 그는 한번 맺은 인연을 제 몸같이 여겼다.
백 년 전 두 사람이 걸어간 길을 따라 우수리스크행 기차에 올랐다.
세 명씩 앉아가는 완행열차 어디에도 동양인은 보이지 않았다. 칠팔십년대의 풍경처럼 잊을 만하면 잡상인이 다녀갔다. 양 어깨에 여성용 타이즈와 양말을 걸쳐멘육십대 초반의 러시아 남성이 객실을 훑고 지나더니, 곧이어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하늘색아이스박스를 머리에 인 모습이 새로웠다. - P87

"이 모든 것이 왜놈들 머릿속에서 나온 치밀한 계산 때문이었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왜놈들이 소련 정부에 압력을 가하는데 스탈린이라고 배겨낼 수 있겠소. 우린 그렇게 6000킬로미터를 한 달 넘게 달려 중앙아시아 벌판에 버려진 것이오."
고려인 3세 라지크 씨가 빠트린 부분도 있었다. 일본만큼이나 러시아 정부도 내심 고려인 추방을 반겼다는 점이다.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내쫓을 수만 있다면 두 가지 계획은 분명해 보였다. 황무지 개발과군량미였다. 실제로 스탈린 정부는 고려인들이 수확한 곡식을 러시아혁명군 군량미로 사용했다.
객실을 오가는 잡상인에게 개당 10루블 하는 팔찌를 세 개 샀다.
여섯 명의 사제와 여섯 명의 성녀를 칠보로 입힌 자석팔찌였다. 그중하나를 라즈돌리노예 역을 눈짓으로 알려준 러시아 할머니에게 선물했다. 남은 두 개는 십자가를 등에 지고 떠나는 안중근과 우덕순 팔목에 채워주고 싶었다. 건투를 비는 마음으로! - P88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던 특사단의 노력은 그 뜻을 이루지 못한채 막을 내렸다. 화병으로 병사한 이준을 헤이그 공원묘지에 안장한이상설은 순방길에 올랐다. 대한제국 밀사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고자 함이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구미 각지를 돌며 일제의 침략상을 폭로하고, 한반도 독립에 협조해줄 것을 호소했다.
헤이그 밀사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상설은 사형수의 몸이되고 말았다. 군대를 동원한 일본이 헤이그특사 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자, 뒤이어 즉위한 순종은 피고인도 없는 궐석재판을열어 이상설에게 사형을 언도했다. 구미 순방을 마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이상설은 ‘성명회‘와 ‘권업회‘를 결성하는 등 본격적인 항일운동에 나섰다. 연해주 한인사회는 이상설을 ‘큰사람‘으로 여겼다. - P94

택시가 도착한 곳은 우쩨스노예 마을 인근 쑤이펀 강변, 그곳에 ‘돌아오지 못한 헤이그 밀사‘ 이상설이 잠들어 있었다.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외로운 혼인들 어찌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모든 것을 불태우고 남은 재마저 바다에 날려라. 나라를 잃었는데 어느 곳 어느 흙에 누를 끼치랴. 다만 동지들은 힘을 합쳐 기필코조국광복을 이룩하라.


1917년 3월 2일, 우수리스크 대병원에서 자신의 임종을 지켜본이동휘, 이회영 등 동지들에게 남긴 이상설의 유언이다. 안중근이 그토록 숭모한 이상설의 유해는 쑤이펀 강에 뿌려졌고, 그를 기리는 추모비 - P94

가 우수리스크에 세워졌다. 발해국 5경 15부 중 솔빈부가 있던 자리다.
조선의 마지막 과거 급제자로 성균관 관장을 지낸 이상설은 연해주를 일컬어 ‘바람의 땅‘이라고 했다.
‘나는 바람을 따라 울었고 바람을 따라 길을 나섰고, 바람을 따라다시 일어섰다.
48세를 일기로 눈을 감은 보재이상설의 전언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연해주는 가는 곳마다 일렁이는 파도처럼 바람이 불었다. - P95

소왕령, 쌍성자, 니콜리스크로 불린 우수리스크는 안중근 가족이살았던 곳이다. 안중근 사망 후 크라스키노, 무링(중국)을 거쳐 우수리스크로 이주한 가족은 잡화상을 운영했다. 미국에 머무는 안창호의 도움이 컸다. 안창호가 보내준 자금을 바탕으로 안중근의 두 동생은 우수리스크 최초로 벼농사에 성공해 200석의 수확을 올렸다. 이후 두동생은 대규모 농장을 개설해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힘을 쏟았다. 1920년 1월 30일자 <독립신문》은 안중근의 어머니조성녀에 대해서도 노고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안중근 의사의 모친은 해외에 온 이래 거의 쉬는 날이 없었다. 동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토크, 서쪽으로는 바이칼 호수에 이르기까지 동포들을각성시키는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 P103

역사는 때로 강물의 걸음걸이로 흐른다 했던가. 안중근 기념비에가족들 소식을 전한 뒤 찾아간 곳은 아게에바 거리에 있는 고려사범전문학교였다. 1917년 러시아 한족중앙총회에서 설립한 고려사범전문학교는 조명희 작가가 재직한 곳이다.
이상설과 고향이 같은 조명희는 3·1운동 때 투옥되었다가 러시아로 망명했다. 1927년 《조선지광》에 <낙동강>을 발표한 조명희는 줄곧시베리아 땅에서 집필 활동을 펼쳤다. 그의 대표작 <낙동강>에 독립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른 주인공이 만주로 망명하는 장면이 그려졌는데, 일제강점기 민족해방과 계급운동을 담고 있다.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명희는 1938년 스탈린 정부의 - P103

탄압정책으로 하바롭스크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기념비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세워졌다.


일본 제국주의의 무지한 발이
고려의 땅을 짓밟은 지도 벌써 오래이다.
그놈들은 군대와 경찰과 법률과 감옥으로온 고려의 땅을 읽어놓았다.
칭칭 읽어놓았다. 온 고려 대중의 입을 눈을 귀를 손과 발을
그리고 놈들은 공장과 상점과 광산과 토지를 모조리 삼키며
노예와 노예의 떼를 몰아 채찍질 아래에 피와 살을 사정없이 긁어 먹는다.
보라! 농촌에는 땅을 잃고 밥을 잃은 무리가북으로 북으로, 남으로 남으로, 나날이 쫓기어가지 않는가.

-조명희, <짓밟힌 고려인>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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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우라 테일러Sunaura Taylor


장애운동가, 동물운동가 겸 작가, 인간의 동물 이용과 착취전체에 반대하는 비건 동물 착취 철폐론자로 살고 있다. 이운동들에 대한 열정을 동력 삼아 활발히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선천성 관절굽음증을 가지고 태어났고, 조지아주 애선스에서 홈스쿨링을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미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고,
뉴욕대학교 사회문화분석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캘리포니아주립대 버클리 캠퍼스에서 ‘생태 과학·정책 · 관리 분과의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테일러가 제작한 미술 작품은 CUE 예술재단, 스미스소니언예술협회, 버클리 미술 박물관을 비롯하여 미국 곳곳에 전시되었다. 또한 조앤 미첼 재단 예술 기금·문화와 동물 기금의지원을 받았고, 장애와 예술 두 분야를 아우르는 국제 조직VSA에서 주관하는 신인 장애예술가 발굴 프로그램 입선작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 책을 출간하기 전에는 주로 《먼슬리 리뷰》, 《예스 매거진》, 《아메리칸 쿼털리》, 《퀴 파를레》 등의 잡지에 글을 발표했다. 지금도 여러 잡지와 웹진 등에 글을 쓴다. 함께 쓴 책으로 에코페미니즘: 다른 동물들 및 지구와의 페미니즘적 교차》(2014), 《점거하라! : 점령된 미국의 정경》(2011) 등이 있고,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가진 대담이 다큐멘터리 <음미된 삶>(2008, 애스트라 테일러)의 한 장면으로 삽입되었다.
《짐을 끄는 짐승들》은 수나우라 테일러의 첫 번째 단독 저작으로, 2018년 아메리칸 북 어워드를 수상했다.




이 복잡한 세계를 종횡무진하던 테일러는 결국 이 알 수없는 세계 앞에 나를 데려다놓았다. 그의 치밀한 논증을 따라가기 위해 몸과 정신이 팽팽히 긴장해 있던 나는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하지만 테일러가 ‘여기서부턴 함부로 선고해도 돼‘라고 하지 않고 ‘알 수 없으므로 우리는 그들에게 유리한 판단을 해야한다‘고 말할 때 가슴이 뜨거워지고 코가 시큰거렸다. 거부할 도리가 없는 아름다운 말이었다. 인간이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인간중심주의와 비장애중심주의를 그가 보기 좋게 조각 내었다. 세계의 확장은 내가 아는 만큼이 아니라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할 때 가장 혁명적으로 이루어진다. 동물의 권리라는 세계에 눈떴을 때, 그 아득하고 거대한 세계에 들어선 기분이 무엇이었는지 설명할 언어를찾았다. - P20

관절굽음증이라는 신체적 장애와 뛰어난 지적 언어적 능력을 통합해 장애해방과 동물해방, 페미니즘을 종횡무진 오가는 테일러의 글쓰기는 너무나 매력적이다. 그는 나에게 언어를 주었다 빼앗길 반복하고 나는 언어를 쌓았다 무너뜨리길 반복했다.
테일러는 어떤 몸들을 열등하다고 낙인찍고 감금하고 때리고죽일 수 있는 존재로 바라보는 한 동물해방도 장애해방도 일어날 수 없음을 보인다. 장애인 차별에 저항한다면 종차별에도 저항해야 하며, 종차별에 반대하는 비거니즘에 대해선 동시에 비장애 중심주의에도 반대하는 급진적 입장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비거니즘을 ‘불구화‘한다. 비거니즘 또한 사회적·정치적·경제적 맥락 속에 있어서 누군가는 음식을 선택함으로써 저항할 수있는 더 나은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고, 더 다양한 실천의 영역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 P25

짐과 짐승이 서로를 끌고 해방을 위해 함께 나아가자고 제안하는 이 책의 모든 장이 좋았다. 이 치열한 책을 네 번 읽었다.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내가 기쁘게 이 글쓰기에 응한 이유는필사적으로 읽기 위해서였다. 동물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동료들과 인권을 위해 싸우는 동료들 모두에게 간절하게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인간들 그리고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고 외치는 동물들과 함께 둘러앉아이책을 읽고 싶다. 경쟁과 효율성, 자립, 언어와 이성을 중심에 두지않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함께 상상하며 서로가 꿈꾸는 세계가놀랍도록 닮았다는 것을 기쁘게 확인하고 싶다. - P26

그러나 더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동물산업 곳곳에 장애를 가진 몸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또한 동물의 몸이 오늘날미국에서 장애를 가진 몸과 마음이 억압당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동물을 둘러싼 억압과 장애를 둘러싼 억압이 서로 얽혀 있다면, 해방의길역시 그렇지 않을까? - P33

고기에 대한 깨달음은 나 자신의 몸에 대한 깨달음보다더 오래 남았다.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가진 나로서는, 몸이 드러나는 다른 방식을 알지 못한다. 나로 사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진 나머지, 세 번째로 바닥에 넘어졌을 때 깨달았던 것은 금방 잊어버렸다. 남들과 신체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내게는 추상적인 것이었고, 너무 추상적이어서 의식적인 차원에서는 별차이가 없는 것이었다. 처음 휠체어에 탔던 때, 잠시동안 물리치료를 받던 때, 손을 교정하는 보조장구가 고통스럽기만 하고 내게 필요하지 않다고 엄마 아빠를 설득하던 때를 나는 잘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고기가 동물로부터 만들어진다는것을 깨달았을 때 받았던 강렬한 감각과는 달랐고, 나는 이 잊기 힘든 감각으로 인해 항상 잔인성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 P38

사람들이 동물들을 학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믿음으로 항의에 나서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게 된 건 여섯 살 때였다. 나는 동물들이 억압당하는 방식들에대해 말할 수 있었고, 동물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들을 바꾸는데 도움이 되고 싶었다. 장애인들에 관해서도 동일한 것을 깨달은 건 스물한 살이 되고 나서였다. - P42

장애억압과 장애운동은 장소와 경험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며, 각 집단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제와 마주한다. 문제를 더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비장애 신체able-bodiedness와 장애 사이의구분이 전혀 명확하지도 영구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장애는 어떤 사람이 떠안는 정체성이기도 하고, 투쟁의 조건이기도 하고, 해방을 발견하는 장소이기도 하고,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억압하는 데 활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동시에, 장애는 이 모든 것이기도 하다.
장애가 한 개인의 삶을 구축하는 체험일 뿐 아니라, 우리의 역사, 정치 그리고 문화가 구축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이데올로기이기도 하다는 것이 점차 분명해지고 있다. 장애란 단순히 주변부에만 속하는 것도, 의약계만의 사안인 것도, 소수의 특정한 역사적 사건들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 P59

우리가 장애가 있는 몸에 대해 갖는 전제와 선입견의 뿌리는 매우 깊다. 너무나 깊은 나머지 이 인간의 비장애 중심주의를 비인간 동물에게까지 투사할 정도다. 비인간동물들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몇몇 비장애중심주의 서사들에 예속되어 있다. 이를테면 여우를 쏘는 일로 이어진, "죽느니만 못하다"라는가치판단에 관한 서사는 반려동물 안락사peteuthanasia나 축산업관련 논의에서 흔한 화두로 등장한다. 이 밖에도, 큰 역경을 딛고 우리의 감동을 자아내는 장애동물 disabled animal 이야기도 있다. 이런 유의 이야기는 다소 예상 밖의 것이지만, 날로 인기를 더해가는 듯하다.  - P69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비인간 동물을 대하는 방식, 더 정확히 말하자면 비인간 동물을 학대하는 방식에 심각한 윤리 문제를 제기한다. 이 경우, 장애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을 시작하기조차 어렵다. 어떻게 감금, 학대, 방치, 교배 그리고 고통과 장애를 분리할 수 있겠는가. 그 어떤 움직임이나 욕망도 인정받지못한 채 무시당하는 환경에서 사는 암탉에게 장애란 무엇을 의미할까? 환경이 모든 것을 한계 지어 스스로의 몸으로 자유롭게 움직이고 탐색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고 할 때 신체적인 제약이나 차이는 무엇을 뜻할까? 많은 장애인들이 그렇듯, 이 동물들에게도 신체적·정신적 손상 그 자체는 자신이 안고 있는 다른문제들에 비해 사소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을 것이다. - P96

동물을 이용하는 산업이 만들어낸 장애들, (인간이 다른동물에 비해 우월하다고 믿는) 종차별주의 speciesism와 잔인성이 낳은 장애들은 장애에 대한 나의 이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내게는 고통이라는 문제가 남았다. 장애에 대한 정치적 이해에 천착하는 많은 이들은 이 고통에 관한 문제를 멀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장애운동가와 연구자들은장애는 고통과 다름없다는 등식에 맞서 수십 년을 싸워왔다. 많은 이들이 장애를 둘러싼 고통 대부분이 비장애중심주의, 이를테면 장애인들이 마주하는 차별과 소외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장애운동가들이 고통의 서사를 밀어내려 했던 것과 달리동물윤리 연구 영역에서 고통의 서사는 도처에 널려 있다. 동물운동가들은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고, 인간이 왜 이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하는지 역설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다.  - 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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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설명

표지에는 노란색 배경에 짙은 청록색 실루엣 두 개를 그렸다. 오른쪽 중단에 위치한 실루엣은 휠체어에 앉은 인간의 모습으로, 머리,
가슴, 다리 그리고 휠체어의 앞바퀴와 뒷바퀴가 있다. 인간의 머리위에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 인간의 시선은 표지페이지의 왼쪽 방향으로 약간 아래를 향하는데, 거기에 소가 목을 떨군 채 앞쪽을 바라보며 서 있다. 아치 모양으로 구부러진 소의 등, 가슴, 앞다리, 머리가 보이고, 뒷다리 곁에는 커다란 바퀴의 일부도 보인다. 이미지가 잘려 있기 때문에 이것을 보는 사람은 바퀴가 소가 끌고 있을 수도 있는 수레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아니면소를 위한 휠체어 바퀴인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이 이미지를 더 오래 들여다보면 인간의 머리 위에 있는, 형태를 특정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사실 소의 꼬리와 엉덩이이고, 소 뒷다리 쪽의 바퀴가 인간이 탄 휠체어에 달린 것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림의 양쪽 끝이 이어지는 듯한 효과를 내는 셈이다. 즉 우리는 이것을 분리된두 개의 실루엣으로 볼 수도 있고, 서 있는 소의 엉덩이 쪽에 인간이 탄 휠체어가 이어지는 하나의 전체 이미지로 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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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통

김종삼


희미한
풍금소리가
툭 툭 끊어지고
있었다

그동안 무엇을 하였느냐는 물음에 대해

다름아닌 인간을 찾아다니며 물 몇 통 길어다준 일밖에 없다고

머나먼 광야의 한복판 얕은
하늘 밑으로
영롱한 날빛으로
하여금 따우에선

스무 살 무렵, 학교 앞 카페의 벽에 걸려 시인이 되고싶던 나를 내려다보던 <물통>. 그것이 삶이든 시 쓰기든 인간에게 물 몇 통 길어다준 게 전부였다는, 이상하게 사무치는 고백으로 여러 청춘들에게 문학병을 선사했던 시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가슴에 와 맺히는 건 그 겸허함보다 물 몇 통 길어다 바치는 일의 어려움이다.
아마 저 "물통"은, 여백이 더 많던 시인의 작품들처럼 비어 있기 일쑤였으리라. 이분은 나중엔 역력히 술을 억누르질 못했는데, 그 또한 이것과 관련돼 있겠지.
물 몇 통 얻기 위해 술병들 적잖이 쓰러뜨리는 일도 이런 시쯤 되면 적잖이 용납되겠지.

서풍 앞에서


황지우

마른가지로 자기 몸과 마음에 바람을 들이는 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는 순교자 같다. 그러나 다시 보면저 은사시나무는, 박해받고 싶어하는 순교자 같다.

두 번의 직유로 간신히 몇 발짝 이어간 단 두 문장. 하지만 이 짧은 중얼거림은 제 실존적 결단의 힘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누름으로써 피로 얼룩져 거덜 난 시대를 구출하여 역사의 반열에 받들어 올린다.
오월 광주의 비극을 알리려다 고초를 겪은 시인의 이력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박해받는"에서 "박해받고 싶어하는"에 이르는 인식의 질적 전환에는 읽는 이를 무장해제시키는 전율이 들어 있다. 고난받고 싶다는 뜨거운 자발성에 닿기까지 그는 얼마나 피를 말렸을 것인가.
불가능한 것은 이렇게 어떤 영혼에게는 불가피한 것이 된다. 순결한 것들은 다 아름답게 미친것들이다.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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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다. 말은 인격이다. 고사성어나 전문용어, 어휘를 많이 안다고 ‘사람으로서의 품격‘을 갖췄다 할 수 없다. 그건 그냥 유식하고 교양 있는 거다. 나는 소위 유식하고 교양 있다는 사람들이 인격을 갖추지 못한 경우를 너무많이 봤다. 인격은 기본적인 어휘를 어떤 상황에서 어떤 상대에게 어떠한 의도로 쓰는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으로, 사람의 감정이나 마음을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면서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식조차 못 하는 이가 최악이다. 그런 사람들이 하는 말은 씨알머리가 없다. 도사리 같다. 말의 힘은 말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획득된다. 인격은 연출이 불가능하다. - P104

‘세상을 바꾼다 ‘고들 한다. 사회변혁이나 개혁을 의미한다. 나는 멀쩡하니까 세상만 바꾸면 좋아질 것 같은 뉘앙스가 없지 않다. 세상은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사회를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생각이 언어를 바꾸기도 하지만 언어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어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졌다. 영혼을 베는 말과 일으키는 말,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조지 오웰이 한 말이다. 가격을 매길 수 있는 상품이나 가축 등에 쓸 어휘를 사람에게 쓰지 않는지, 사람이 - P106

하는 일을 도구나 수단으로 취급하고 있지 않은지, 늘 말본새를 점검해야 한다. 많은 속어나 욕설 등이 가축과 관련한 어휘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그때는 가축이 흔했고 지금은 물건이 흔하다. 이 대목에서 "존중할 만해야 존중하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악머구리 끓듯 악한과 파렴치한이 적지 않으니 심정이야 이해하나 경계한다. 그 옛날 양반이 백정과 노비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남성이 여성에게, 부자가 빈자에게, 어른이 어린이에게 같은 말을 했다. - P107

‘사람에 대한 존중‘은 내가 옳다고 느끼면 옳은 것이라는 식으로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상대주의가 아니라 절대적 가치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우선에 두는 것이 인격이며 인격은 타고 나는 게 아니라 - 타고 나는 것은 인성이다. - 배움과 습관을 통해 갖출 수 있다. 사람을 존중하는자세는 생각보다 훨씬 우리에게 배어 있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적절치 못한 어휘를 쓸 수 있다. 아직 배우지 못했거나 잘못 알아 그렇다. 문제는 다음이다. 모르거나 잘못 아는데 올바로 알려 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성별이나 출신, 외모, 나이 등을 차별하는 어휘가 아닌 - P107

지도 살펴야 한다. "여자가 할 수 있겠어?", "남자가 그것도못 해?", "뚱뚱해", "키가 작아", "어린 사람이 뭘 알아?", "나이가 있는데 할 수 있겠어요?" 등이 쉽게 떠오른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도 해당한다. "여자가 능력 있어",
"남자치고 세심하네", "가정교육을 잘 받았네", "좋은 대학나와서 스마트해", "예쁘게 생겼어", "키가 크고 날씬해서 뭘입어도 잘 어울려", "젊은 사람이 아주 예의바르고 겸손해",
등등.
"젊게 사시네요", "나이보다 훨씬 건강하고 젊어 보이세요" 등등. - P108

칭찬으로 들리는가? 고정관념에 기준한 수직적 평가다.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칭찬으로 착각하기 쉬운 이런발언은 부모 자식 간에도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어린이들에게 칭찬이랍시고 하면 칭찬이기 때문에 더욱 인상적으로성별이나 외모, 능력 등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고 남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다.
평가가 해악인 이유는 사람을 물건이나 상품, 가축처럼 등급을 매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등급을 왜 매기겠는가? 물건이나 상품, 가축 등과 별반 다르지 않다. 비싼 값에 팔기위해서다. 무엇이 쓸모 있을지 계산하는 것이다. 평가는 필연적으로 차별로 이어진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관종‘이라는 말로 놀림 받지만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는 생존과 직결돼 - P108

있다. 그러나 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방법이 앞서의 조건들을 채워야 하는 거라 주장한다면 사람을 수단화하는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사람에 대한 존엄이라니, 턱도 없다.
사람을 평가하면서 세를 과시하는 어휘를 쓰지 않도록조심하자. 인간의 도구화를 피할 길 없는 세상이라지만 이것만 지켜도 영혼을 다치는 사람들이 한결 줄어들 것이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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