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에게로의 추억


토끼에게서는 달의 향기가 난다

분홍 눈은 단추 같다

앞이빨이 착하게 났다

토끼의 두 귀를 꼬옥 쥐어봤으면 했다

몽실했다

두 귀를 잡고 공중으로 들었다가 내렸다도 해보았다

토끼와 시소를 타고 싶었다

그러면 토끼는 올라가고 나는 내려오겠지

토끼는 구름이 되겠지

아하함 이 참에 토끼와 줄행랑이나 놓을까. - P36

순한 구름


나 흰 구름 가는거 본다

어디로 가느냐

저 구름 가는데로 가면서 양으로 가고 싶다

착한 나사螺絲 같은 뿔을 달고 입을 오물거리며 구름으로 가고 싶다

그러면 어디 순례하는 자 있어 나를 몰고 가겠지

그도 고개를 숙이고 나를 몰고 가겠지

나는 순하지

암, 서쪽으로 가겠지

서쪽은 순하지. - P37

바람난 모자


모자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다

휘파람새 같은 것으로

너구리 같은 것으로

물고기 같은 것으로

아니 사르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 같은 것으로

푹 눌러쓰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쓰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모자를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악어 같은 것으로

뒷주머니에 구겨 넣고 쏘다니고 싶을 때가 있다. - P74

길 위에서


신발끈을 고쳐 맬 때가 있다.

길 가다가 신발끈이 풀어져서 신발끈을 고쳐 매주었다

도중에 쭈그리고 앉아 가슴을 무릎에 돌처럼 눌러놓고

신발끈을 엇방향으로 집어넣어 빼내면서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단단히 옭맸다

신발끈이 또 풀어졌다

나비로 해서 그런가

다른 것은 없을까

두루미 같은 것은 어떨까

저 청산을 훨훨 가고 있는 두루미로 어찌 안 될까

두루미로 하면 영 안 풀어질 것 같기도 한데 - P94

그런데 어디서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네가 불현듯 나타나더니

야 이놈아

신발끈 풀지 말고 그래 길 위에서 평생 살아라 소리치는 게 아닌가. - P95

소망은 온전하다


나도 내 자전거가 있었으면 하는 것으로

그러면 자전거를 아주 잘 탔을 텐데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아버지를 지나 나를 지나 비로소 우리 애한테 가서 이루어졌는데

그참 이제라도 이루어지는 소망, 소망아 고맙다

내가 봐도 우리 애, 자전거를 참 잘 탄다

어쩌면 바람이 내준 자리가 아닌가 하였으며

바람이 내다르는 것 같았으며

수양버들 휙휙 늘어진, 저수물 찰랑거리는 뚝방길을 달리는데

바람이 바람을 가르는 것이었으며

새소리가 났으며 - P118

바퀴살은 햇살을 훼살지으며 돌았으며

소망은 아직도 새것인 양 반짝거렸으니 소망아 고맙다

허참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더니만

타라고 해서 얼떨결에 그만 손바닥만한 짐칸에 올라타고 말았는데

이놈 보게 처음에는 핸들에서 한 손을 떼어놓더니

어렵쇼 양손 다 놓아버리고 냅다 달리니

내 등 뒤에선 잠바가 바람이 하나가득

아 내 소망은 온전하였다. - P119

고슴도치는 함함하다


나는 고슴도치가 슬프다

온몸에 바늘을 촘촘히 꽂아놓은 것을 보면 슬프다

그렇게 하고서 웅크리고 있기에 슬프다

저 바늘들에도 밤이슬 맺힐 것을 생각하니 슬프다

그 안에 눈 있고 입 있고 궁둥이 있을 것이기에 슬프다

그 몸으로 제 새끼를 끌어안기도 한다니 슬프다

아니다 아니다

제 새끼를 포근히 껴안고 잠을 재우기도 한다니

나는 고슴도치가 함함하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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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시인은 평생 환자입니다.

내게 있어서는 결백증과 결벽증이 한 가지로 되어 있어 참으로그 치유를 기대하기란 어렵겠습니다.

일류 살청殺靑 기술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몽상가로도 고급 스타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일들은 즐거운 숨바꼭질입니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영원한 술래로 만들어보려구요.

왜 무의미일수록 내 심장은 붉고 크고 게걸스러워지는 것일까요.

무위無爲와 실컷 놀다 갔으면 합니다.

2008년 여름 장마
신현정

바보사막


오늘 사막이라는 머나먼 여행길에 오르는 것이니

출발하기에 앞서

사막은 가도가도 사막이라는 것

해 별 낙타 이런 순서로 줄지어 가되

이 행렬이 조금의 흐트러짐이 있어도

또 자리가 뒤바뀌어도 안 된다는 것

아 그리고 그러고는 난생처음 낙타를 타본다는 것

허리엔 가죽 수통을 찬다는 것

달무리 같은 크고 둥근 터번을 쓰고 간다는 것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에 이르러서

단검을 높이 쳐들어 - P12

낙타를 죽이고는

굳기름을 꺼내 먹는다는 것이다

오, 모래 위의 향연이여. - P13

와불臥佛


나 운주사에 가서 외불臥佛에게로 가서

벌떡 일어나시라고 할 거야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와불이 누우면서 발을 길게 뻗으면서

저만큼 밀쳐낸 한세상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아마도 잠버릇 사납게 무심코 내찼을지도 
모를

산 두어 개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그만큼 누워 있으면 이무기라도 되었을 텐데

이무기 내놓으시라

이무기 내놓으시라 - P20

이무기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정말 안 일어나실 거냐고

천년 내놓으시라

천년 내놓으시라고 할 거야.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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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뜩 긴장하고서 mbc앵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5분 남았다. 이제~!
환자들 돌아올 시간은 10분 남았다.

나팔꽃들의 행진行進


이른 아침, 마당 수도가에 나와 양치 및 세수하다

나팔꽃 핀 것 보면서 아ㅡ 아ㅡ 아ㅡ 아 입안에서 물을 우물거리다

문득 나팔꽃을 따라 높다랗게 오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면서 오르고 싶어지다

이대로 줄 타는 광대이면 어떨까 싶어지다

신명이 좀 나면 어때서, 아뿔싸 발을 헛딛는 척도 해볼까나

나팔을 일부러 놓아버릴까나

나팔을 아래로 아래로 까마득히 떨어뜨려보고 싶어지다

나팔을 불며 춤추듯 나팔을 불며 높다랗게 오르며

나팔을 떨어뜨리며 - P60

개인 날


하늘이 개였다, 흐렸다,

아하, 개이기는 개이려나 보다

비 온 뒤 조금 흐린 날

어디서 지렁이 나와 기고 있는

땅 한 줄 향기롭다. - P72

매미울음


한시적이라는 것

얼마나 지독한 사랑의 맹세인지는 몰라도

매미가 운다

녹음을 찢듯이 운다

금강석을 찢듯이 운다

구름은 부풀고

등짝을 찢듯이 운다

수천 마리로 운다. - P74

외면外面


연잎 위에 개구리 가부좌를 하고 있다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어쩌면 저렇게 꼼짝 않고 있는 개구리 그게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바람 불어 연잎 날리고

급기야는 개구리 첨벙하고 못 속으로 뛰어들 것 같아서

아 못이 한순간에 뒤집어질 것 같아서

가부좌란 저런 동작이 세상 것 아닌 것 같아서

나는 얼른 연잎 위에 개구리 애써 외면하며

하늘 본다 흰구름아 어디 가느냐. - P77

산수山水


산 첩첩

기암괴석 첩첩

물 첩첩 떨어지는 어디 그런 곳 있다

저 까마득한 폭포를 타고 오르는 물고기 바라보며

폭포 아래를 지나가면서

나, 오줌 눈다

힘주고 힘주고 오줌발에 무지개 서리도록 힘주고

오줌발에 물고기 올라타도록 힘주고 힘주고

나, 오줌 눈다

저 폭포를 타고 오르는 물고기 아찔하게 올려다보며

나, 오줌 다 눗고 몸을 부르르 떨어보는 것이다.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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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라 라 라


오늘이 모자라면 모자처럼 날아가고

모자처럼 하모니카 불고

모자처럼 새 되어

모자처럼 옆으로 돌려 쓰고

모자처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모자처럼 뒤집어서

새도 꺼내고

토끼도 꺼내고

사과도 꺼내고

오늘이 모자라면 라 라 라 라

모자처럼 공중에 높이 던졌다 받으며

라 라 라 라 - P40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 P43

소금쟁이


수련 핀 연못가에 고요히 앉아 본다

난 처음에 검불이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줄 알았다

소금쟁이들이다

소금쟁이들이 이따금 물방울 듣는 파문波紋 위를

긴 다리로 왔다갔다 하면서

건너 뛰기도 하면서

파문을 놀고 있다

그걸 보자니

아다리 한쪽 빠지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至難한 삶이

감사하기만 했다. - P47

세한도歲寒圖


눈 펄펄 날리는 오늘은 내 나귀를 구해

그걸 타고 그 집에 들르리라

그집 가게 되면

일필휘지一筆揮之, 뻗치고 휘어지고 창창히 뻗은 소나무아래

지붕 낮게 해서 엎드린 그 집 주위를

한열 번은 더 돌게 되리라

우선 당호堂戶에 들기 전 헛기침을 해보고

그리고는 내 타고 간 나귀를 살그머니 소나무 기둥에

비끌어 매놓고는

그리고는 냅다 눈발 속으로 줄행랑을 치리라 하는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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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정申鉉正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이 있고, ‘서라벌문학상‘ (2003), ‘한국시문학상‘ (2004)을 수상했다. 20여 년 동안 시쓰기를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서라벌고등학교 등에서 국어선생을 지냈으며 한동안 카피라이터 일을 하다가 현재 광고 및 편집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신현정

신현정의 시는 극소지향적이다. 그의 시선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밀착돼 있다. 오리, 물고기, 염소, 복숭아, 참새, 소금쟁이, 풍뎅이, 달팽이집, 강아지풀, 애늙은이, 이슬 한 개, 그리고 하느님. 그는 이런 미시적인 사물에 대해 情意的인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지만 자신이 들어가 밀착될 수 있는 틈새를 찾아낸다. 그 틈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마음은 아름답다.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소거하며 포개어지려는 이 밀착에의 욕구는 시를 극소화하는 질서를 낳는다. 극소화된 시의 질서와 공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허무의 굽은 물결을 저어가기에는 너무나 선한 인성을 지닌 오리떼를 따라가는 마음 속에도 있고 모처럼 소풍을 나와 급행을 보내버리고 천천히 완행을 타려는 마음에도있다. 신현정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공간은 극소화한 일상의 소품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 사회적 자아가 껴들어 있을 틈도 없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며 극기의 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결백주의자의 ‘강아지풀에 대한 명상‘에서 시인 스스로가 삭제하고 삭제해버린 사회적 자아를 애써찾을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이 시를 꿈꾸는 걸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생각을구걸하는 걸인으로 시적 자아가 변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권(시인)

이름을 가려놓고도 누구의 시인지 알 수 있다면, 그런 시를 쓴 시인을 일컬어 흔히 一家를 이룬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현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시에 조금만 관심을 지닌 사람이면 신현정의 시는 신현정의 시인지 알 수가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란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신현정, 그렇다면 신현정은 참으로 이 시대 몇 안 되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길을 가는 시인이다. 왜 그런가? 신현정의 시가 다만 외적인 스타일만 유니크한 것이 아니라, 시예술로서의 언어의 싸움까지,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까지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尹錫山(시인)

경계


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 P13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줄 일제히 꽥 꽥 꽥. - P16

자전거 도둑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 P18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 P19

낮달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 P25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P26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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