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촌의 상태도 충격적이었다. 지저분했고 악취를 풍기는 초록색 물웅덩이들이 길을 따라 이어졌다. 임시 변소가 많다고, 3만 개가 있다고 구호본부장이 나중에 내게 말했다. 그러나 워낙 급하게세우다 보니 많은 변소가 이미 막힌 상태였고 잠금 장치가 있는 곳은 하나도 없었다. 게다가 많은 변소가 아이들이 물을 받아가는 우물 옆에 있었다. 우물을 워낙 얕게 판 탓에 4분의 3이 분뇨로 오염됐다고 구호원들이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설사로 고생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이들 가운데 4분의 1은 영양실조였다. 아기를 키우는 여성들 가운데 많은 이는 너무 심한 스트레스로 젖이 말라버렸다.
또한 사생활이 조금도 없었다. 방글라데시는 안 그래도 세계 최대의 인구 밀집국이며 1억 6500만 명의 국민이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속한다. 그러므로 난민 수십만 명이 머물 공간을 찾는일이 쉽지 않았다. 맨체스터 인구 전체가 갑자기 문 앞에 나타난 것과 다름없다고 한 구호원은 말했다.
- P97

홍역은 이미 터졌고 내가 있는 동안에는 디프테리아가 발생했다. 안토니우 쿠테흐스 António Guterres UN 사무총장은 이곳의 상태를 ‘인권의 악몽‘이라 표현했다.
매일 저녁 해가 질 무렵이면 수많은 모닥불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눈이 따갑고 공기가 어둑해졌다. 곳곳에서 들려오는 기침은 난민촌의 배경음악처럼 느껴질 정도다. 기침 소리와 ‘바이바이‘라는 외침 소리가.
외국인들은 오후 5시 이후에는 난민촌에 머물 수 없었다. 나는저녁에 벌어지는 일들을 소문으로 들었다. 오토바이를 탄 남자들이나타나 매춘을 위해 소녀들을 낚아채 간다고 했다. 난민들은 밤이면납치당하는 아이들의 비명이 들린다고 했다. 이런 식으로 딸을 잃었다는 사람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나는 콕스바자르의 긴 해변에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어린 로힝야 여성들이 호객 행위를 하는모습을 보았다. 배급되는 쌀과 렌즈콩만으로는 살 수 없는 가족들이여성들을 팔아넘겼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 P99

"그들은 제게 아무 일도 시키지 않아요. 저는 아직 밖에 나가지 않고안에서 지내며 요리를 거들어요. 가끔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가요 원학교에 가서 글을 배우고 싶어요. 강간당하고 죽은 소녀들도 있는데 저는 살았으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요. 그 군인들은 세상에서가장 나쁜 사람들이에요. 그들에게는 딸이나 자매가 없을까요?"
내가 떠나기 전에 야스민은 내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제게 일어난 일은 정말 끔찍해요. 어떤 남자도 저와 결혼하지 않을거예요. 누가 저와 결혼할 수 있겠어요?"
가슴 아픈 질문이었다. 물론 야스민 또래의 소녀들을 결혼시키곤 하는 그들의 고향에서도 로힝야 소녀들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적어도 야스민은 임신하지 않았고 그녀를 돌봐주는 가족을 찾았다. 그러나 이런 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난민촌에서는 사춘기 소녀들을 집 밖으로 잘 내보내지 않기 때문에 소녀들이 마음을 쓸 만한 일이 거의 없다. - P104

이 모든 이야기가 충격적이었을 뿐 아니라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다. 나는 불교 신자들을 생각하면 평화와 연꽃과 명상을 떠올리고, 아웅산수치 Aung San Suu Kyi를 독재에 저항한용기의 상징으로 존경하며 자랐다. 오랜 세월의 투쟁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수 치는 15년 동안 가택 연금된 상태에서 영국인 남편 마이클 아리스와 두 아들과 떨어진 채 지냈다. 남편이 옥스퍼드에서암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가 좋아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머리에 장미장식을 꽂은 채 그에게 작별영상을 찍어 보내는 것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낸 영상은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이틀 뒤에야 도착했다.
그러나 이제 아웅산수치는 사실상 버마의 정부 수반인데도 - P104

이 모든 로힝야족이 그녀의 정부에 의해 나라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버마군이 섬뜩한 잔학 행위를 저지르는 동안 그녀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버마 당국은 로힝야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았다. 대신에 마치 이들이 방글라데시에서 건너온 이주민인 양 벵골인이라 부르거나 ‘구더기‘ ‘침략자‘ 또는 ‘검은 쓰나미‘라 부르며 악마화했다.
사실 로힝야족은 여러 세기 동안 버마에 살았다. 그들이 사는벼 재배 지역인 라카인은 예전에 아라칸왕국이 있던 곳으로, 몇몇기록에 따르면 8세기부터 무슬림이 살고 있었다.
박해와 강간은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버마왕정은 1784년 아라칸을 정복한 뒤 그곳을 약탈했다. 동인도회사의 외과 의사였던 스코틀랜드인 프랜시스 뷰캐넌은 아라칸 정복 이후에 그곳을 여행하며이렇게 썼다. "버마족은 4만 명을 죽였다. 예쁜여자를 발견할 때마다 남편을 죽인 뒤 차지했고 어린 소녀들을 거리낌 없이 범했다."  - P105

2016년 10월, 수치가 선출되고 1년 뒤 버마 보안부대는 라카인북부에서 이른바 ‘소탕 작전‘을 실시했다. 마을을 불태우고 아이들을 비롯해 수백 명을 죽였으며 여성들을 집단 강간했다. 약 9만 명이 폭력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UN 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52 퍼센트가 강간당했고 여덟 달된 아기들까지 목이 잘렸다. "로힝야 어린이들이 당한 끔찍한 잔학행위는 참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 UN 인권고등판무관으로서보고서를 제출한 요르단의 외교관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Zeid Ra‘ad alHussein이 말했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증오를 품었기에 엄마 젖을찾아 우는 아기를 찌를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아기의 어머니가 살해 장면을 지켜보게 하고, 그녀를 보호해야 할 바로 그 군대가 그 어머니를 집단 강간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도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사실, 이 작전으로 수치 정권은 ‘침략하는 이슬람 무리‘에 맞선 불교 가치의 수호자로 국내에서 인기를 얻었다. 군부는 버마에서 무척 인기 있는 페이스북을 이용해 로힝야족에 대한 증오를 부추겼다.  - P107

나는 내가 무척 존경하는 《뉴욕 타임스》 기자 해나 비치 HannahBeech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가 내게 그날 하루에 대해 물었고, 나는강간 희생자와 아이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인물 소개 기사를 쓰기 위해 부모 없는 아이 셋과 그들의 삼촌과 함께 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츰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부모 없는 아이들이아니었고 상냥한 삼촌인 척했던 남자가 그들의 아빠였다.
우리는 둘 다 그날 일로 마음이 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런 일을 하거나 그런 이야기를 지어낼까 생각했다. 혹시 트라우마가 너무 심해서 무엇이 진짜인지 더는알지 못하는 것일까? 난민촌 소장은 로힝야족 중에는 워낙 정신이혼란스러워서 살균제를 우유로 혼동하고 마시는 사람도 있다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가. 조금 더, 조금 더 끔찍한 이야기를 끝없이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어떤 괴물을 키우도록 부추기고 있는 건 아닌가? 포위됐던 콩고 동부에서 막 구출되어 비행기에 가득 태워진 벨기에 수녀들에게, 아마 실화는 아니겠지만, "여기에 강간당했고 영어 할 줄 아시는 분 계세요?"라고 외쳤다는 그 텔레비전 리포터와 우리는 정말 다를까? - P114

어린 소년 하나가 우유통을 들고 자말푸르의 길을 건너는데 경비병 하나가 파키스탄군 캠프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경비병은 우유를 받고 소년에게 동전 두 개를 주었다. 그 안에서 소년은 온몸에고문당한 흔적이 있는, 발가벗은 여성 세 사람을 보았다. 소년은그 장면을 결코 잊을 수 없었고 그 동전을 결코 쓸 수 없었다.

_방글라데시, 다카의 독립전쟁박물관에 게시된 전쟁 기록물 - P115

우리 사회가 보수적이고 여성들이 수줍음이 많다 보니 그 일을감히 폭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전사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죠. 그 희생자들을 생각하며 전투의지를 다졌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저 같은 남자들은 화환과 지원을 받았지만 여성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형편이괜찮은 여성들은 침묵했고, 가난한 여성들은 구걸하는 삶으로 내몰렸죠. 몇몇은 사리로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당신이 로힝야족에게서들은 것보다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이곳 여성들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허공만 응시했죠."
노인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저는 이 여성 순교자들을 기리는 여학교를 세웠습니다. 달리 무얼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제가 죽으면 다른 해방 투사들처럼 정부에서 사람을 보내 제 관에 국기를 덮고 나팔을 울리게 할 겁니다. 비랑고나가 죽으면 아무것도없습니다." - P118

"분쟁에서 여성은 항상 쉬운 과녁이지요." 그가 말했다. "파키스탄군은 대량학살로 사람들을 한 방에 굴복시킬 거라 생각했어요. 벵골 민족주의자들을 말살시킬 일종의 ‘최종 해결‘로 여긴 겁니다. 그래서 시골로 들어가서 주둔지를 세운 뒤 곧바로 하는 일이 여자들을찾는 거였어요. 나이에 상관없이 소녀와 여성들이 집에서, 거리에서,
밭에서, 버스정류장이나 학교에서, 우물가에서 납치되었지요."
더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이른바 현장 강간-강간당했다. 그들의 침대에서, 가족 앞에서 강간당할 때가 흔했다. 바나나나무에묶여 집단으로 강간당하기도 했다. 군부대로 끌려가 성노예가 된 여성은 도망갈 수 없도록 벌거벗은 상태로 감금되었다. 사람들은 트럭에서 의식을 거의 잃은 여성들을 끌어내는 걸 보았다고 말했다. 부대에서는 포르노영화를 보여줘 부대원들을 흥분시킨 다음 마음대로 발산하게 했다. 많은 여성이 군부대 주둔지에서 죽었다. 총검으로 성기가 관통당한 채 피를 흘리며 죽기도 했다. - P119

먹을 것도 충분히 주지 않았어요. 아파도 아무 치료도 받지 못했습니다. 많은 여성이 끌려간 주둔지에서 죽었습니다. 그 모든 이야기가 믿기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있었지요. 누군들 진짜 그런 일이일어났다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진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증거들이 있습니다."
강간당한 여성의 수는 전시 강간을 ‘전쟁의 흔한 부산물‘로 여길 만한 수치를 훨씬 넘어섰다. 강간의 목적은 적에게 모멸감을 주고 사기를 꺾는 것만이 아니었다. 야지디족과 보코하람에 납치된 나이지리아 소녀들, 로힝야족에게서 내가 목격한 것처럼 파키스탄군에게는 강간도 체계적인 전쟁 무기였다.
"개별적으로 벌어진 일들이 아닙니다. 고의적인 정책이고 이념에 근거한 정책입니다." 모피둘이 말했다. "무슬림에 의한 무슬림의 대량 학살이지요. 우리를 열등한 존재로, 적절한 무슬림이 아닌 존재로 낙인찍고 우리를 학살한 겁니다. 강간은 불신자들을 정화해야할 그들의 ‘의무‘였습니다." - P121

나이지리아에서 보코하람에 납치된 소녀들처럼 이들은 이중의희생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강간을 겪었고,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갔을 때는 외면당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모피둘이 이야기했다. "한 소녀가 강간당해서 임신을 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자기 금 귀걸이를 빼주면서
‘이걸 갖고 떠나라. 다시 돌아오지 마라‘고 했다더군요. 소녀는 항구의 어느 짐꾼 집에 신세를 지면서 사내아이를 낳았어요. 그러자 이짐꾼의 가족이 아기를 죽이고 다카로 가서 새 삶을 살아야 한다고 소녀를 설득했대요. 그래서 소녀는 아기 입에 소금을 채우고는 강에 빠뜨려 익사시켰어요. 그 뒤로는 제정신이 아니었죠."
몇몇 여성은 자신이 겪은 강간에 대한 이야기로 돈벌이를 한다고 비난받기도 했다. 돈 가방을 받았다는 둥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돈을 받기 위해 이야기를 지어냈다고 비난받은 여성들도 있었다. - P123

2010년 셰이크 하시나 정부는 그녀의 아버지가 1973년 제정한법령을 토대로 마침내 국제전범재판소International Crimes Tribunal를 구성했다. 다카의 구 고등법원 건물에서 열린 이 재판은 2019년 3월까지 88명의 부역자와 정당 지도자들을 고문과 살해, 강간 혐의로 재판했다. 26명이 종신형을 받았고 6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으며, 그가운데 여섯 명의 사형이 집행되었다.
파키스탄은 결코 사과하지 않았다. 방글라데시 독립전쟁과 파키스탄이 영토의 절반을 잃게 된 경위를 조사한 조사위원회는 상급장교들의 ‘부끄러운 잔학 행위‘를 비난했다고는 하지만 조사 결과를공개하지도, 책임을 묻지도 않았다. 파키스탄의 라호르에 있는 군사박물관에는 잔학 행위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으며 학교에서는 파키스탄이 사실상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역사를 가르친다. - P138

내가 본 것처럼 이 여성들은 오늘날까지도 어둠 속에 산다. "여전히 감춰진 고통이지요." 모피둘이 말했다. "최근에 한 소녀를 만났어요. 어머니 몸에 흉터가 있는데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딸에게 그이유를 말해줬대요. 그 소녀는 노래를 하나 썼어요. <나는 비랑고나의 딸입니다〉라는 노래였어요. 아름다운 노래지만 공개할 수 없었어요. 사회는 지금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요. 이 여성들에게 국가가 경의를 표해야 한다고 말하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가 다시 덧붙였다. "이 나라에서는 강간이 많이 일어나고 요즘도강간당한 여자들은 외면당하고 비난받을 때가 많지요.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밝혀야 합니다. 우리가 교훈을 배울 수 있도록 말입니다.
젊은 연구자들은 ‘비랑고나‘를 만나면 그들의 회복력에 무척 큰 영감을 얻었다고, 그들로부터 힘을 얻었다고 늘 말한답니다." - P139

저는 남편이나 아이들이 어디 있는지 몰랐어요. 아기였던 딸아이만 업고 도망치는데 누군가 뒤에서 몽둥이로 저를 내리쳤어요. 제머리를 치려고 했는데 아기를 치는 바람에 아기의 머리가 깨졌어요.
퍽 소리가 들린 뒤 울음소리가 멈춰서 저는 아기가 죽었다는 걸 알았지요. 저는 죽은 아기를 등에서 내려놓고 계속 뛰었어요. 아기를묻어주지도 못했어요.
투치족 몇몇은 나무들 뒤에 여러 날 숨어 있었죠. 4월이라 우기여서 무척 습하고 땅이 질었어요. 숨어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죽음이 우리의 종착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어요.
어느 날인가는 제 여동생의 시체를 우연히 마주쳤어요. 마체테로 난도질당해 죽어 있었어요. 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여러 차례, 거듭해서 강간당했어요. 누구든 저를 붙잡을 때마다 강간했어요. ‘투치 여자 맛을 보고 싶다‘면서요. 한 사람씩, 차례로 얼마나 많이 강간당했는지 셀 수도 없어요. - P145

당신은 상상도 못할 겁니다. 강간당하고 씻지도 못하고, 옷도갈아입지 못하고, 그러다 아침이면 비가 쏟아붓고 비가 내리다 내리다 그치면 밤이 되어 또 비가와요.
어느 날 남자 넷에게 너무 거칠게 강간당해서 걸을 수가 없었어요. 한 여자가 밭에 가다가 저를 발견하고는 카사바를 하나 주며 조금씩 먹으라고 말했지요. 그때쯤에는 워낙 여러 날 굶어서 턱도 거의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어요.
한동안 저희는 시청 앞에 피신했어요. 거기에 여자와 아이들 수십 명이 있었죠. 시장이 학살을 지시했다는 걸 알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었어요. 이후 몇 주 동안 민병대와 지역 사람들이 저희를 반복해서 강간하고 구타했어요. 개들이 시신을 먹어 대서 우리가 묻어주려 하면 그들이 우리를 구타했어요. 저희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없으니 죽여 달라고 아카예수 시장에게 애원했지요. 그는 우리에게 ‘총알 낭비‘를 하지 않겠다고 하더군요. - P146

신은 다른 곳에서 그날을 보내고 있었는지 몰라도 르완다에서는 잠을 자고 있었다. 라고 르완다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투치족을절멸시키기 위해 르완다 곳곳에서 이웃들이 몽둥이와 마체테를 들고 이웃들에게 달려들던 그때 신은 어디에 있었을까?
르완다의 모든 사람이 무척 다정했고 모든 것이 무척 아름다웠지만, 모든 사람과 모든 곳이 이처럼 끔찍한 악에 대한 이야기를 품 - P147

"저는 두 달 반 동안 분뇨 정화조에 숨어 있었어요." 운전사 장 폴Jean Paul이 말했다. "정화조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온 가족이 살해당한 뒤였어요. 의사였던 아빠와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엄마, 일곱 형제자매 모두요."
그는 사람들 수백 명이 떠밀려 죽었다는 다리를 보여주었다. 용감한 지배인이 돈과 조니워커로 르완다군을 매수하는 동안 1200명이 겁에 질려 숨어 있던 밀콜린호텔도 보여주었다. 은신처를 찾아온 사람들이 몽둥이로 맞아 죽은 성당도 보여주었다. 금이 간 두개골들이 신도석을 따라 놓여 있었다.
나는 주말 브런치로 유명한 게스트하우스 헤븐에 묵고 있었는데 그곳을 운영하는 미국인 조시 Josh와 알리사 럭신Alissa Ruxin에 따르면 2003년 게스트하우스를 짓기 시작할 당시에는 비가 올 때마다 뼈들이 쓸려 나오곤 했다.
르완다 인구 800만 명 가운데 80만 명이 100일 동안 살해되었다. 나치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살인이었고 UN은 창립 이래 최초로제노사이드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제노사이드를막기 위해 UN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 P148

"그 여성은 여섯 살짜리 딸과 함께 나무에 올라가 숨었는데 그때 그 아이가 이미 세 명의 남자들에게 강간당했고 그들의 이름을안다고 말했어요. 하지만 검사가 증인의 말을 끊었죠. ‘네, 그 점에대해선 묻지 않았습니다‘라면서요. 조사관들이 그것에 대해 물어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가 증언 진술서에 없기 때문에 검사는 증인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면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질까 걱정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 생각은 이랬습니다. 이 사람은 용기를 내 이곳까지와서 증언하는데, 그 끔찍한 일을 되살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하겠구나. 대체 우리가 뭐라고 이것만 듣겠다, 저것만 듣겠다 할 수 있나 싶었죠. 그녀는 일어난 일을 전부 말할 권리가 있잖아요. 그녀는시청에서 벌어진 다른 강간들에 대해서도 들었다고 말했어요." - P167

"저희는 서로 함께했기 때문에 힘이 있었어요." 세실 무카루그위자Cecile Mukarug wiza가 말했다. 증인 중 가장 젊은 그녀는 제노사이드 당시 열네 살밖에 되지 않았고, 그 모든 세월이 지난 뒤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는 서른여덟 살이었다. "그 일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겁니다."
세라피나처럼 그녀도 키갈리로 옮겨 와 키갈리 동쪽의 카카Kabuka 라는 시골 동네에서 흙길로 도착할 수 있는 언덕 비탈의 한 움막에 살고 있었다. 새소리가 들렸고 가끔 소가 울었다. 집 밖 관목에널어둔 빨래가 마르고 있었다. 집 안 벽에는 잡지에서 찢어낸 르완다 팝스타 조디 피비의 사진이 의무적으로 걸어야 하는 카가 포스터 옆에 붙어 있었다. - P169

그들은 아빠를 몽둥이로 때린 다음 변소 통에 던지고는 그 위로 변소를 부숴 무너뜨렸어요. 일곱 살짜리 남동생이죽는 모습도 봤어요. 동생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려 했는데 그들에게붙잡혀서 몽둥이로 맞아 죽었어요. 아홉살짜리 남동생에게는 연장을 주며 구덩이를 파라고 시킨 다음 거기에 집어넣고 산 채로 매장해버리더군요.
누군가를 붙잡을 때마다 그들은 언덕에서 소리를 지르곤 했어요. ‘우리가 아무개를 잡았ㅣ다. 오늘이 그의 마지막 날이다!‘
아빠는 아내가 둘이었어요. 우리 엄마와는 다섯 아이를, 다른아내와는 두 아이를 낳았는데 모두 살해됐어요.
저는 죽음을 기다렸어요. 당신도 강간당하고 거기에 누워 있는데 그들이 막대와 이런저런 것들을 사용한다면 죽음 말고 다른 건생각할 수 없을 거예요. 육체적 고통이 너무 심했어요. 아마 당장, 아니면 몇 시간 뒤에, 아니면 내일 죽을 거라 생각했어요. 매일 그렇게살았어요.
민병대 한 사람이 저를 노예로 데려갔어요. 집에다 가둬 놓고계속 강간하다가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녔어요." - P172

"외국의 법정에서 외국어를 쓰는 법복 입은 외국 판사에게 이야기해야 했지만 저는 두렵지않았습니다. 진실을 말할 때는 두려울 게 없는 법이니까요." 빅투아가 말했다.
두 딸의 엄마인 필레이 판사는 2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타바 여성들의 증언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여자로서 그걸 듣는다는건, 여성들이 집단 강간당하고 남자들이 임신한 여성에게 달려들어강제로 낙태시킨 그 이야기를 듣는다는 건, 결코 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몸과 마음으로 그 일을 느끼거든요."
‘남자 판사들은 경악했다. "그들은 손으로 귀를 막고 싶어 했죠.
더는 듣고 싶지 않았어요. 이 증거들로 무얼 할 수 있는지 자기들은모르겠으니 저한테 맡기겠다고 하더군요. 강간과 성폭력에 대해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의가 없었던 터라 저는 정의부터 내리기로 결심했어요." - P175

1998년 3월 아카예수는 결국 증인석에 섰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다. 자신은 그저 명목상 최고 책임자일 뿐이며 그의 행정구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줄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요 주장은 UN 평화유지군 사령관 로메어 달레어 RoméoDallaire 소장도 막을 수 없던 학대 행위를 자신이 어떻게 막을 수 있었겠냐는 것이다. 그는 강간을 직접 지켜봤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자신의 강간 혐의는 여성운동이 대중적 압력을 행사한 결과이지 사실을근거로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증인들의 신빙성도문제 삼았다. 예를 들어 임신 6개월이었다는 증인 JJ가 어떻게 나무에 올라갈 수 있었겠냐고 물었다. 14개월에 걸친 재판 끝에 법정은 심의를 위해 퇴장했다. - P175

"저는 유죄판결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강간범을 감자나염소를 훔친 도둑과 같이 분류할 때마다 늘 괴로웠으니까요. 그건정말, 정말 부당하잖아요." 세라피나가 말했다. "우리는 세상을 깨웠어요. 그 일로 목소리를 낼 자신감을 얻었다고 제게 말한 여성들이많았어요. 하지만 그 판결로 제 삶이 나아지지는 않았지요. 제노사이드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저는 여전히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 집이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그 이후로 관계를 맺어본 적52.6 440도 없어요."
세실이 동의했다. "처음에 증언하러 갈 때는 정말 무서웠지만일단 저희가 첫걸음을 떼고 나자 다른 사람들이 뒤를 이었어요. 그판결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이웃으로 살지 못한 채 악의에 찬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을 겁니다.
저는 아카예수가 유죄판결을 받아서 행복했지만 개인적으로는힘들었어요. 제안이 망가졌다고 느껴요. 사람은 치유되지 않아요.
하지만 치유는 하나의 여정이니까요. 같은 곳에 머무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더 이상 과거를 그리 많이 생각하지 않아요. 매일 아침에 잠을 깨면 무엇을 먹을지 등록금은 어떻게 낼지 생각하니까요."
그들은 어떤 배상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본 것처럼 모두 힘들게 살아가고 있었다. - P181

"저희는 국제사회와 UN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희가 강간당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고 비난했는데, 같은 일이 세계 곳곳에서거듭, 거듭 일어나고 있어요." 빅투아가 말했다. "저희는 배운 것 없는 여자들일 뿐이지만 어떻게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지는지 이해하기어렵습니다."
타바의 언덕에 자리한 오두막에서 자신이 몇 번이나 강간당했던 바나나 숲을 내다보는 그녀는 아주 외로워 보였다. "어쩌면 당신은 저희가 제노사이드에서 살아남았고 병에 걸리지 않았으니 운이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희는 걸어 다니는 죽은 여자들이나 다름없어요.
저는 죽이는 것보다 강간하는 것이 훨씬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매일매일 살아내야 하니까요. 다 자라서 겪은 일이니 저는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어요. 같은 나라에서 같은 마을에서 같은 언어를 쓰고 피부색도 같고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제게그 짓을 했어요. 저는 여전히 그들과 함께 삽니다. 저를 돕던 그 소년도 후투족이에요. 사람들은 묻지요. ‘왜 쟤를 옆에 놔두는 거야?"
타바의 여성들은 신체적 통증도 호소했다. - P182

이제 위협이 없으니 삶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 여성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게 바로 강간이 의도적으로 계산된 무기인 이유입니다. 강간했고 강간을 기획한 그들은, 강간당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죽든 나중에 죽든 그 모든 시련을 겪고 나서는 결코 사람으로 다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여기 도시에서든 마을에서든 타바에서든 그 여인들을 만나면겉으로는 멀쩡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밤에 집으로 돌아가 문을닫으면 그들 안에는 누가 무슨 수를 써도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 있을 겁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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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야는 온통 카리부의 바다였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혹은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존재를 위하여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그바닷속에서 수만 마리의 카리부가 울려내는 발굽소리에 그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베이스캠프를 세우던 5월만 해도 이곳은 황량한 설원이었다. 지금은 벌써 7월, 툰드라에는 흐드러지게 꽃이 피고 북극권은 여름햇살로흘러넘친다. 나는 두터운 다운점퍼를 벗고 스웨터도 벗어버렸다. 땀에전 티셔츠에 북극 바람이 상쾌하게 스친다. 그 거대한 카리부 떼는 어디로 가버렸을까.
벌써 한 달 이상을 아무하고도 말을 해보지 못했다. 소형 비행기의프로펠러 소리가 그리웠다. 알래스카를 여행할 때면 늘 이 소리를 기다렸던 것 같다. 부시파일럿 돈이 나를 데리러 세스나를 몰고 올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 나는 아마 능선을 응시하면서 온 신경을 귀에 모으고 있을 것이다. 귓전을 앵앵거리는 한마리 모기 소리도 세스나 소리로 착각하기쉽기 때문이다. - P66

인간의 삶이 그림이 되는 순간이 있다.
백야의 북극해에 하얀 물보라가 솟아오르더니 그 자리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온다. 참고래가 바닷물을 뿜어 올리며 북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래잡이 캠프는 쥐죽은 듯 고요하다. 빙원에 있는 에스키모의 눈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다가오는 참고래 한 마리에 쏠려 있다.
해안에서 바다로 1백 미터쯤 나간 곳에 설치된 각 캠프마다 언제든바다로 나갈 수 있도록 우미악(턱수염바다물범 가죽으로 만든 에스키모의전통적인 카누)이 준비되어 있다. 지금은 그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보름달이 떴다. 사위는 백야의 엷은 빛에 싸여 있다. 바다는 고요히잠들어 있다. 마치 입을 맞춘 것처럼 십수 척의 에스키모 우미악이 일제히 바다로 미끄러져 나갔다. 반짝이는 바닷물 위로 많은 그림자들이 소리도 없이 한 점을 향해 미끄러지고 있었다. 감동적이었다. - P67

5월이 되었다. 남쪽에서 도요새나 물떼새를 비롯하여 많은 철새가떼 지어 날아와 더욱 북쪽으로 향한다. 그들은 알래스카북극권에 둥지를 틀러 찾아가는 중이다. 봄의 전령 흰멧새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봄의 노래. 나는 자연의 질서를 느끼고, 그 철석같은 당연함에 종종 압도된다.
그날도 다른 날처럼 오후 시간을 얼음 감시대 위에서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거대한 얼음덩어리의 꼭대기로, 리드를 멀리 내다볼 수 있어서, 멀리서 찾아오는 고래를 일찌감치 발견하는 장소였다. - P72

저녁이 되어 이웃 캠프의 사람이 달려 왔다.
"조 프랭클린 패가 고래를 잡았다!"
몸 전체가 떨릴 듯한 흥분이 일었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없었다. 고래가 우미악에 끌려 돌아온다. 사진을 찍어야지. 나는 캠프를향해 달렸다. 전령이 캠프 전체에 소식을 전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카메라를 준비한 나는 재빨리 얼음 전망대로 달려갔다. 가까이 다가가자누군가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오래된 에스키모의 노래였다. 보니, 아무도 없는 얼음 위에서 노파가 바다를 향해 춤을 추고 있다. 느릿느릿한움직임으로 무엇엔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보인다. 마이라였다.
아마도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래에 감사하는 춤일 것이다. 가까이가보니 마이라는 울고 있었다. 나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계속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지금 춤의 원형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 하고 생각했다.
때로는 마음의 필름에만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 있다. - P73

커피가 바짝 졸아 있었다. 맥킨리 산의 잔조도 거의 사라졌다. 이제곧 동이 틀 시간이다. 일몰 2시간 후에는 해가 뜨는 것이다. 쓰디쓴 커피를 홀짝이며 푸르스름한 백야에 싸늘한 미풍을 맞고 있었다.
그 카메라를 지금도 쓰고 있다. 종종 그날 밤 사건을 생각한다. 이리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내 카메라들 가운데 그 카메라는 이제 작은 사연을 가지게 된것이다.
언젠가 내가 늙었을 때 이 카메라를 들고 아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예전에 알래스카에서 말이야. 어느 날 밤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단다 ...... 이리 한 마리가……." - P83

마른 나뭇가지를 모으며 석양 무렵의 가문비나무숲을 걷는다. 축축한 대기가 느슨하고 따뜻하다. 숲속 카펫에 떨어지는 무스(사슴과의 포유류) 똥에 물기가 조금 배어 있다. 버드나무의 새싹이 트기 시작했을것이다. 붉은다람쥐 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숲도 조금씩 꿈틀대기 시작했다.
작은 장작불이 흔들리고 있다. 타닥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나의 마음을 풀어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 더는 아무것도 필요 없다.
역시 묘한 거야, 사람의 마음이란. 아주 자잘한 일상에 좌우되면서도 새 등산화나 봄기운에 이렇게 풍족해질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은 깊고, 또 이상할 만큼 얕다. 사람은 그 얕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밤이 되고 별이 나왔다. 랜턴을 켜놓고 일기를 쓴다. 올해가 다시시작되었다. - P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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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코하람은 이해하기 복잡했고, 언론이 이에 주목한 시간은 짧았다. 위성안테나들은 곧 짐에 실렸고, 기자들은 새로운 이야기, 이라크와 시리아의 넓은 지역을 차지한 IS의 이야기를 찾아 떠났다.
캐머런 총리가 보낸 영국 정찰기는 다른 곳으로 조용히 이동했고,
FBI는 인질 협상가들을 철수시켰다.
소녀들은 마치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이듬해 2015년3월 굿럭 조너선 대통령은 ‘굿럭‘이 다했는지 현직 대통령으로서는나이지리아 역사상 최초로 선거에서 패배했다. 치복 소녀들을 찾아내지 못하고 폭동을 끝내지 못한 것이 패배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승자는 1980년대에 나이지리아를 통치했던 군부 독재자 모하마두 부하리 Muhammadu Buhari였다. 아홉 명의 딸이 있던 그는 치복 소녀들을 찾는 것이 취임 이후 100일 안에 최우선으로 완수해야 할 임무라고 군대에 지시했다. 그러나 100일이 지났어도 보코하람의 공격은 계속됐고 셰카우와의 협상은 진전이 없었다. 2016년 1월 부하리 대통령은 약 300명의 부모를 만난 자리에서 그의 행정부는 소녀들의 행방이나, 사실상 그들의 생존 여부에 대해서도 "믿을 만한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 P71

"그들은 더러운 손으로 우리 입을 틀어막으며 가슴을 그들에게보이게 했어요." 바 암사Ba Amsa가 말했다. 에스더의 딸 도르카스처럼 그녀도 보코하람에게 포로로 붙잡혔을 때 열여섯 살이었다. "저항할 수가 없었어요. 그들에게는 총이 있으니까요. 저항하면 숲으로데려가서 죽이거든요."
그녀는 바마 Bama라는 소도시 출신이었다. 바마는 보코하람의공격을 여러 차례 받았고, 치복 납치 사건 다섯 달 뒤인 2014년 9월보코하람에 점령당했다.
잔혹하기로 잘 알려진 보코하람의 기준으로도 유난히 잔인한점령이었다. 나중에 보코하람이 올린 비디오 영상에는 총을 든 대원들이 지역 학교의 기숙사 2층 침대 옆에 고개를 숙이고 엎드린 민간인을 살육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대부분 성인 남성으로 보였다.
시체가 너무 많아서 대원들이 간신히 비집고 다니며 여전히 몸을 실룩거리는 사람들을 확인 사살해야 했다.
"우리는 이곳 바닥을 피로 붉게 물들였다. 이것이 앞으로 모든공격에서 체포된 불신자들에게 일어날 일이다." 집단의 지도자가 영상 메시지에서 말했다. "지금부터 살인과 학살, 파괴, 폭파가 우리가침략하는 곳에서 수행할 종교적 임무가 될 것이다." - P77

그녀의 얼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린 딸 켈루가 엄마의 빨간스카프 끄트머리를 집어 눈물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저항했다면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학살하는 걸 지켜보게 했을 거예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른 대원 몇 명이 와서 다른 곳으로이동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그 사람이 안 가겠다고 하니 그들이 그를 쏴 죽였어요. 그러고는 제게 다른 대원과 결혼하라고 했어요. 거절했더니 여동생을 데려갔어요."
나중에 군용기가 마을을 폭격할 때 그녀는 탈출할 기회를 잡아가시잡목이 우거진 숲으로 달아났다. 그녀는 여동생과 다른 가족이어떻게 됐는지 모른다고 했다.
"아무도 저를 돌보지 않아요. 여기에서 저는 혼자예요. 죽는 게낫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지만 그러면 누가 켈루를 돌보겠어요?"
하루에 두 번 배급되는 쌀과 한 달에 한 번 배급되는 비누 말고는 다른 음식이나 도움을 구할 수 없었다. 수입을 보충하기 위해 그녀는 전통적인 기도 모자를 뜨개질해서 판다. 하나를 완성하는 데한 달이 걸리는데, 하나당 2000~3000나이라(7~10파운드)를 받는게 고작이었다. - P82

도르카스가 할 수 있다면 제게 연락했을 거라는 걸 알아요. 제번호를 외우고 있으니까요. 5년 동안 아이의 옛 휴대전화로 전화를하고 또 하는데 응답이 없어요. 아이가 이슬람으로 개종을 했든 안했든, 아기가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아요. 그냥 돌아오기만 했으면좋겠어요. 147-20305사람들 말이 소녀들 몇 명은 죽었다고 하지만 저는 도르카스가살아 있다고 확신해요. 매일 교회에 가서 딸이 돌아오길 기도합니다. 언젠가는 하느님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 P89

버마 군인이 총을 겨눌 때 자식 중 어느 아이를 살려야 할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결정과 함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그것이 2017년 12월 내가 만난 로힝야족 엄마 샤히다Shahida가 부딪혔던 불가능한 딜레마였다. 내가 샤히다를 만난 것은 그녀가고향을 도망쳐온 수십만 명의 사람들과 함께 쿠투팔롱Kutupalong 난민촌에 도착한 직후였다.
나중에 그 난민촌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소음이었다. 그리고 어디에나 있던 아이들이었다. 기분을 알 수 없는 표정과 선의의기증품에서 구한 것 같은 어울리지 않는 옷을 걸친 아이들, 모피 깃이 달린 크림색 여성용 울 카디건에 벨트를 두른 소년이 있었고, 분홍색 발레 스커트가 달린 요정 드레스를 입고 작은 발에 큰 하이힐을 신은 소녀가 있었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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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개종하고 《코란》을 읽어야 했지만 한 문단을 더듬거리는 바람에 눈앞에서 자기 아기가 학대당하고 살해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어머니가 있었다. 이 남자 저 남자에게 팔려 다니며 수백 번강간당한 여덟 살 소녀가 있었다. 너무나 절망적인 나머지 자기 몸에 불을 붙여 얼굴과 목에 깊은 흉터가 남은 젊은 여성도 있었다.
"저는 남자로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제 아내도 그랬지요. 무슬림이었으니까요. 독일인으로서 저는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과거에 우리 유럽 문명도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고, 그러고도 여전히 교훈을 배우지 못한 것 같다는 사실을 잘 알지요."
독일이 야지디 여성을 받아들인 시기에 독일 지도자 앙겔라 메르켈 Angela Merkel이 "우리는 할 수 있다"고 외치며 100만 명의 난민에국경을 연 것은 아마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다. 나머지 유럽이 국경을 닫아건 그 시기에 말이다.
"가장 힘든 건 누구를 데려갈지 결정하는 일이었죠." 블룸박사가 말했다. "두 아이를 잃은 여성과, 한 아이를 잃었지만 그 아이가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여성 중에 누구를 선택할 수있을까요?"
최우선 순위는 응급조치가 필요한 경우였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여성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병으로부인과적 손상이나 분신 시도로 얻은 심한 화상-생명이 위태로운 여성들도 있었고요." - P40

그녀는 탈출을 두 번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심지어 그녀를 사기 위해 ISIS로 변장한채 알레포 근처의 노예 시장까지 간 적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전화했을 때 그녀는 죽고 싶다고 했어요. 너무 지친 목소리였어요."
그녀의 마지막 문자는 "빨리 나를 찾아줘, 셰이커. 빨리"였다.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결국 그는 딜미르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내게 휴대전화의 바탕화면을 보여주었다. 적갈색 긴머리에 환한 웃음, 생기 있는 눈매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저는 그녀를 구하지 못했어요. 지금쯤 스물한 살이 됐을 텐데요."
- P43

그의 눈이 눈물에 젖었다. "그게 제가 이 일을 하는 이유입니다." 그가 잠시 뒤 말했다. "제가 그 산에서 본 것, 그들이 제 약혼녀에게 저지른 짓은 제 마음을 바위처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더는 제가 죽든 살든 상관없었죠. 처음에는 그들과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최고의 복수는 유럽으로 가서 살아남은 소녀들을 돕고 세상에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그들이 살던 터키의 난민촌을 떠나 강을 건너 불가리아로 갔고 세르비아와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로 왔다. 결혼을 위해 모아둔 4000달러를 불법 난민 브로커에게 냈다. 독일까지 오는 데 23일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여러번 억류되었다. 독일에서 난민 신청이 승인되자 그는 야지디 활동가의 페이스북 그룹을 운영하며 다른 여성들을 구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나 한때 그가 그렸던 삶은 분명 아니었다. - P43

구글에서 검색하면 그중 1퍼센트만 맞습니다." 그가 말했다.
야지디교는 원래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한 오래되고 신비로운종교로, 이슬람보다 오래되었고 기독교와 이슬람의 수피 신앙, 조로아스터교의 요소를 포함한다. 야지디족은 자신을 예지디 Yezidi 라고표기한다. 야지디족의 언어로 신을 뜻하는 에지드 Ezid에서 나온 말로, 신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야지디교는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와 달리 경전이 없으므로진정한 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셰이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검은 책이라 불리는 책이 있어요. 그 안에 모든게 적혀 있는데 도둑맞았어요."
나는 그가 파란색 셔츠를 입고 있어서 놀랐다고 말했다. 야지디족은 파란색을 혐오하고 상추도 싫어한다는 글을 읽었기 때문이다.
셰이커는 웃었다. "그건 저희 엄마 같은 옛날 세대 이야기죠. 엄마는 샐러드도 절대 안 드세요!" - P44

얼굴에 커다란 자국이 생길 정도로 저를 때리고 후려쳤어요.
‘너희 야지디족은 불신자니까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어‘라면서요.
그러고는 제 등을 깔고 앉아서 숨을 쉬지 못하게 했죠. 그는 저를 뒤에서 강간했어요. 그 뒤로 매일 서너 번씩강간했어요.
그런 식으로 여섯 주가 지났어요. 제 삶은 그냥 강간당하는 것이 전부였어요.
그러더니 그가 어느 날 또 다른 소녀를 사올 거라더군요. 저는조금 편해지겠구나 싶어서 안도했어요. 그 사람이 데려온 소녀는 열살밖에 안 된 아이였어요.
그날 밤 두 사람이 옆방에 있었는데, 저는 누군가 그렇게 많이비명을 지르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는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저자신을 위해 울었던 것보다 더 많이 그 어린 소녀를 위해 울었어요."
나는 로지안의 손을 잡았다. 손이 찼다.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날 그 남자가 히잡을 주며 우리를 시내로 데려갔어요." 그녀는 말을 이었다. "검정색과 흰색의 [ISIS] 깃발이 곳곳에 보였어요.
저는 달아나려 했지만 또 다른 여성이 저를 붙잡아 다시 데려왔어요. - P49

우리는 멜론즙을 턱에 묻히며 이야기를 다시 시작했다. 나중에 한 사람씩 다가와 나를 안아주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뒤에 누군가가 와서 저희와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는 처음이에요." 투르코가 말했다.
그들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주 찾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운 숲을 구불구불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작은 방에서 비명을 지르는 아이들과 함께 악몽을 꾸며 밤을 보낼 투르코와 로지안을 생각했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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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이후에 사라진 언어의 화석이 그곳에서는 아직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말(馬)의 마늘이란 뜻이다. 여리고 아름다운 꽃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데, 그 여린 꽃 또한 생명력이 강해서 예전부터 제주 사람들의 괄시를 받으면서도 아직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밭에 번지는 수선화를 그곳농부들은 호미로 캐어서 밭둑으로 던져버리곤 했다. 추사 김정희선생이 그곳에서 귀양살이할 때 그 광경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시를쓴 것이 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수선화는 그 던져진 돌더미위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모진 목숨을 이어나갔다. 그러므로 수선화는 이중적이다. 가녀리고 아름답지만 그 뒤에 아주 강한 삶의 의지를 감추고 있다.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의 식물 사전에는 수선화가 화훼식물로 분류되어 있다. 그것은 야생의 수선화는 없다는 뜻이다.  - P14

그러나 제주 남녀 대정 땅의 수선화는 엄연히 야생으로 여러 대를 이어오고 있다. 아마도 머나먼 옛날 중국 땅으로부터 해류에 실려온 모진 뿌리들이 제주 땅에 정착한 것이리라. 수선화는 저, 물에비친 아름다운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황홀해하다가 빠져 죽은 미소년 나르시스가 꽃으로 피어났다는 신화의 바로 그 꽃이다. 그래서꽃말이 "자기애‘ 이다.
바닷가뿐만이 아니라 그때쯤의 볕바른 한라산 자락에서는 복수초가 샛노랗게 피어나며 새봄의 깃발을 수줍게 편다. 눈 속에서도 - P14

핀다고 하여 설련화(蓮花) 또는 얼음새꽃이라고도 하는 복수초는온 나라의 여러 지역에서 두루 핀다. 그러나 중부지방에서는 4, 5월에야 그 꽃을 볼 수 있다. 다른 지역의 그것은 꽃이 먼저 피었다 진뒤에 잎이 나지만, 제주의 것은 꽃과 잎이 함께 핀다. 그러므로 초록빛 후광을 두른 제주의 것이 훨씬 더 아름답다. 이 꽃 또한 저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아도니스가 서양 이름이다. 유럽의 복수초는붉은빛인데, 아도니스의 피가 꽃이 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그래서서양에서는 꽃말이 "슬픈 추억이다. 그러나 그 신화와 관계없는동양에서는 전혀 다른 꽃말인 "영원한 행복" 이다. 서양과 동양은 그만큼 멀고 멀다.
짐승이건 식물이건 간에 다 같은 종족끼리 모여 살기는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제가끔 대를 이으며 번성하기 좋은 조건을 찾아서정착한다. 수선화 무리, 복수초 무리 같은 몇백 년 또는 몇천 년에걸쳐서 이루어진 그런 무리들은 이제 이 땅에서 서서히 와해되어가고 있다. 산중을 가로지르는 느닷없는 길, 그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의 무참한 파괴에 맞설 대책이 작고 아름다운 꽃들에게는 없다. - P19

그에 견주면 산과 들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나마 기나긴 겨울잠을자고 스스로 깨어나 꽃피우는 얼레지, 둥굴레, 원추리, 은방울꽃은행복하다. 그래서 저 자연의 품속은, 자연의 것은 더 아름답다. "자연을 보호하자"라고 말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연을 보호할 만한 능력이 물론 없다. 그것을 있는 자리에 그대로 두고 보기만 하면 된다.
그 것을 자기 집, 자기 방으로 못 옮겨서 안달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한 해에 두어 번 들이나 산의 숲에 가서 조용히 시간을 보낼 수있는 사람이라면, 그곳의 모든 꽃은 그 사람의 것이다.
북한산, 오대산, 태백산, 설악산의 숲에서, 숲의 녹음이 짙어지기 전에 풀들은 서두른다. 그늘이 덜 질 때 빨리 꽃피우고 열매 맺으려고 숨가쁘게 뛴다. 그래서 숲 그늘의 풀들은, 풀꽃들은 날마다다르게 아름답다. - P33

세상이 어수선하기 때문에 식물들 중에도 얼이 빠져서 얼떨떨해하는 것들이 더러 있다. 온도만 비슷하면 언제든지 피는 민들레나따스한 늦가을을 봄인 줄 착각하고 피는 개나리 같은 것들이 그렇다. 이른 봄에 피는 꿀풀과의 광대나물이 따스한 늦가을에 피어났다가 느닷없이 눈을 맞고 있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때가 아닌 계절에 잘못 피어난 것들은 다행히 기온이 내내 따스하다고 치더라도꽃가루를 매개해주는 곤충들을 만날 수가 없다. 이미 겨울잠에 들었다가도 따스한 기온이면 나와서 돌아다니는 얼빠진 곤충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 얼빠진 것들끼리 만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봄의 광대나물부터 여름의 꿀풀, 그리고 가을의 꽃향유에 이르기까지 꿀풀과의 꽃들은 차례로 곤충들을 불러들여서 꽃가루를 옮기게 한다. 수정하여 씨를 맺게 하려는 식물들의 종족 보존 본능은 꽃을 아름답고 향내 나며 꿀이 많게 한다. 꽃들은 곤충을 찾아 떠날 수는 없으므로 꽃 빛깔의 파장이나 향내로 멀리 있는 곤충들을 초대하여 꿀을 대접한다. 한갓 미물이라는 곤충들도 먹을 꿀만 밝히는 게아니라, 그 향내와 빛깔과 모양까지도 제가끔 좋아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만물의 영장이라면서도 작디작은 곤충이 좋아하는 것은다 좋아한다. - P41

복수초도 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며, 매발톱, 자주종덩굴, 꿩의바람꽃, 동의나물, 작약, 그리고 미나리아재비는 말할 것도 없이미나리아재빗과의 식물이다. 미나리아재비꽃은 노랗게 무리지어있어서 신선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미나리아재빗과의 다른 식물들처럼 독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세상의 여러 이치들과 크게 다르지않아서, 잘 쓰면 약이 되나 잘못 쓰면 독이 된다.
봄비에 흰 작약 꽃잎이 힘없이 스러져 땅 위에 뒹굴고 미나리아재비꽃의 노란빛이 사위고 나면 이내 여름이다. 봄의 함성은 그렇게 지나가는 바람결에 실려가버린다. - P89

장마철이 지나면 그동안의 흐림을 보상하려는 듯이 해가 작열한다.
그 빛을 받은 식물들은 견디기 힘들어 잠시 시들기도 하지만 영 싫어하는 눈치는 아니다. 식물들은 막바지의 결실을 위해서 그 뜨거운 빛을 묵묵히 소화한다. 그래서 여름에 피는 꽃들은 빛깔이 더 선명하다. 고원지대의 한여름은 뜨겁고 밝은 해와 뭉게구름이 장대한아름다움을 펼치고 있다. - P90

봉선화과의 학명은 임파티엔스(Impatiens)인데, "참지 못한다"는뜻의 라틴어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래서 꽃말이 "나를 건드리지 마세요"이다. 그런데 그 말은 실제로는 "나를 건드리세요" 라고 유혹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 씨앗이 여물었을 때 건드리면 탄력 있는 껍질이 터지면서 씨앗들이 튀어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씨앗이 무거워서 그리 멀리 튀지는 못한다. 한해살이 풀이면서도 한곳에 무리지어 사는 것은 그렇기 때문이다.
높아가는 하늘에 비낀 저녁노을이 펼쳐졌다. 그것은 그 하늘 아래의 모든 것에게 가을이 왔다고, 서두르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 P107

참 더웠다. 지난 여름은 그래서 이 가을이 더 반갑다.
잎들은 눈부신 빛깔로 일생을 끝낸다. 저물어가는 숲을 잠깐 밝하는 저 물든 잎들의 아름다움은, 해질 녘 대기를 물들이는 장엄한노을과 같다.
해가 차츰차츰 짧아지고, 아침저녁의 온도가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하면, 나무들의 시계는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포기할 때는 포기하자. 더 버티다가 느닷없이 겨울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빛깔도모양도 내보지 못하고 쪼그라든다. 나무는 내년을 기약하지만, 올해의 잎에게는 올해 가을이 모든 시간의 끝이다. 이 세상 한 귀퉁이의 저물어가는 작은 산비탈을 잠깐 밝히다가, 실바람의 도움으로 미련 없이 땅으로 돌아가는, 눈부신 나뭇잎들은 이렇게 살랑살랑속삭인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잎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끝낼때라고 해서 다 아름답지는 않다.  - P117

싱그러운 풀빛 잎들이 꽃처럼 피어난다. 일렁이는 봄빛을 받은 푸른 파장은 현란한 빛으로 번쩍인다. 봄빛을 받고 어른거리는 생명의 빛깔은 눈부시다. 우리는 그 빛깔을 모두 "푸르다"고 한다. 그러나 푸르름은 초록빛이다. 풀빛이다. 그런 풀빛은 다 푸른빛에 노란빛을 합한 것이다. 그 비율에 따라 풀빛은 몇백 가지나 된다. 거기에 먹 또는 붉거나 흰빛이 아주 조금이라도 섞이면 또다른 풀빛이된다. 나무에 따라서, 풀에 따라서, 시기에 따라서 그 풀빛은 다 다르다. 푸른 잎으로 된 배경 없이, 냅다 꽃부터 피운 성질 급한 것들보다는, 푸른 잎을 후광으로 두르고 핀 꽃들의 빛깔이 더 고와 보인다. 풀빛은 저 혼자 튀기보다는, 꽃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게 하는보색 노릇을 한다. 풀빛은 모든 다른 빛을 떠받치는 보색이다. 들판에서부터 산꼭대기로 스멀스멀 풀빛은 번져나간다. 신록은 생명력이 뻗어나가는 싱싱하고 화려한 풀빛의 잔치이다. - P150

세상에는 늘푸른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고, 갈잎나무들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 나무들이 그렇듯이 사람으로서의 도리만 지킨다면 어느 쪽이 더 낫거나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나무와는 달리,
몇십 년마다 오는 사람의 계절은 양쪽 모두의 모습을 변하게 한다.
그런데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계절에 따른 변화를 담담하게받아들이지만, 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갈잎나무와는 달리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늘푸른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주름살이 늘고,
머리칼이 낙엽 지듯이 우수수 빠지거나, 머리에 서리가 내려도 그것을 제 나이에 알맞은 모습으로서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갈잎나무와 같은 사람들은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고, 가발을 쓰거나 물을 들이기도 하며, 오히려 변화를 거스르는 경향이 있다. 삶의 가을에 찾아오는 백발은 단풍과 같은 것이다. 나잇값을 하고 사는 이의 곱게 물든 은빛 백발은 투명한 가을 빛을 받은 단풍처럼 아름답다. - P178

작은 씨앗들을 바람에 날려서 멀리까지 이민을 보내기도 하고, 큰 열매들을 잘 익혀서 그 그루터기에 떨어지게 하거나 더러는비탈에 굴려 얼마쯤 떨어진 곳에서 싹이 돋아나도록 한다. 어떤 식물이건 좋아하는 자리가 있게 마련이며, 제가 좋아하는 곳에 자리잡은 식물들은 그 근처에 많은 동족들을 자라게 하여 군락을 형성한다. 굳이 군락이 아니더라도, 어떤 식물이건 그 근처에는 똑같은종류가 얼마쯤은 있기 마련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지금은 비록 내력뿐인 곳이 많지만, 씨족부락 같은 것이다.
식물들도 살기 위한 싸움을 한다. 그 싸움은 동족끼리 벌이는 수도 있으나 그리 심한 편은 아니다. 솔 숲, 그 빽빽한 줄기 위를 수더분한 곡선의, 꼭 공동으로 쓰고 있는 듯한 지붕 같은 잎들의 어울림이 그런 것의 한 보기가 되겠다. 그러나 키 큰 나무와 키 작은 나무또는 잎이 크고 많은 나무와 그렇지 못한 나무가 우연히 곁에서 자랄때는, 한 나무가 마침내 죽을 때까지 몇십 년 또는 몇백 년에 걸친 길 - P236

고 집요한 싸움을 한다(비유를 잘못 드는 것일까? 그것은 꼭 사람들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좀처럼 끝나지 않는 싸움과 닮아 보인다).
상대방보다 먼저 가지를 길게 뻗고 키를 보다 높게 자라게 하는것은, 시야가 툭 터진 경치를 즐기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더 많은빛과 땅속의 물과 자양분을 차지하기 위해서이다. 그야 그 나무가사는 동안 쾌적하고 튼튼하게 살자는 뜻인데, 그것은 사람들처럼내가 더 잘났다고 재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열매를 잘 맺어서 종족을 번성하게 하겠다는 거룩한 본능을 따른 것일 터이다.
꽃이 지고 나서부터 자라기 시작했을 야생의 열매들은 잎이 무성할 때는 애써 찾아보기 전까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해가빨리 설핏해지고 밤이 그만큼 더 길어질 무렵부터 한 해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챈 식물들은 마지막 모양을 낸다. 마지막 잎새들은 장엄한 빛 부심, 그 현란한 빛깔로 차린잔치를 끝내면 훌훌미련없이 날려서 영원한 흙으로 돌아간다. 마침내 앙상한 가지들만 - P237

남아 문득 산이 여위었다고 느꼈을 때 이미 가을은 가버린다. 진한빛으로 여문 작은 열매들은 그럴 때쯤에는 눈으로 쉽게 다가온다.
열매 맺은 나무들은 해거리를 한다. 어떤 해에는 열매가 작고 적게 열리기도 한다. 열매를 크고 많이 맺는 해에 나무들은 섭취한 영양분을 열매를 만드는 데에 다 써버린 것이다. 그런 해의 나무들은거의 자라지 못한다. 열매가 중요하다고 해서 그것을 키우는 데에만 골몰하면 다른 나무들보다 몸집이 허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나무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지만, 2-3년에 한 번은 열매를 포기하고제 몸을 돌보는 해가 있는데, 그것을 해거리라고 부른다.
나무들도 나이를 먹으면 노파심이 생겨서 더 강한 본능의 지배를받는다. 그리하여 늙은 나무는 자잘한, 그러나 수없이 많은 열매를맺는다. 그것은 곧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하고 쓰러지기 전에 종자나 많이 퍼뜨리겠다는 뜻이다. 야생이 아닌 과수원의 나무들도 마찬가지이다. 나이 든 나무는 좋은 거름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결코 큰 열매를 맺지 않는다. 작으나 많은 열매를 맺을 뿐이다. 과수의 나이를 셈하고 있던 농부는 나무들이 그런 망녕을 부리기 전에 베어버린다. 그러므로 천수를 다할 수 있는 자연의 나무는, 곧 제 수명을 다하고 나서도 몇 년씩이나 기념비처럼 의연하게버티고 서 있는 고사목은 그에 비하면 행복하고 행복하다. - P242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그것이 가령 개미 한 마리라고 할지라도 온우주의 중심이 자기라고 생각한다던가? 그렇다면 산에서 자란 작은열매들 또한 예외는 아니겠다. 작은 열매, 그 견고하고 정교한 조직과 모양, 그리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지만 그 빛깔! 그 속에 여러 대를 이 세상에서 이어나가게 할 미래의 생명까지 잉태하고 있으니 그 자체가 아름다운 우주라고 하겠다.
산과 들에 자란 식물의 열매는 사람이 먹을거리로 보면 보잘것없으나 볼거리로 보자면 보석보다 낫다.
저무는 계절에 이윽고 빛을 내는 작은 열매, 결실, 한 해의 그 정교한 집약을 보노라면 연말이 다가오는 것이 문득 두렵다. - P243

가을에 수확한얼마 안 되는 곡식들은 긴 겨우내 다 먹어버렸고, 먹을 것이 아직 자라지 않은 배고픈 봄을 그렇게 불렀다. 그때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어린 소나무의 줄기를 벗겨서 먹기도 했다. 그와는 달리 좀 사치스러운 것이지만, 일부의 잘사는 계층에서는 소나무의 꽃가루를 받아서 꿀로 버무린 송화다식을 만들어먹기도 했다. 또한 가을에는솔잎과 함께 쪄서 그 향기를 배게 한 송편을 빚어먹기도 했다.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한국 사람들의 전통 가옥인 초가집이나기와집들은 다 소나무를 중요한 재료로 삼아 지었다. 그리고 그 집들에는 온돌이라는 난방시설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궁이에 불을 때서 따뜻하게 하는 것이다. 그 중요한 땔감은 역시 소나무였다. 뿐만아니라 대부분의 가구들 또한 소나무로 만들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죽으면 거개가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넣어져서 그 사람 고향의 솔밭에 묻히게 된다.
그 솔밭에 비 오고 눈 오면서 세월이 흐르고 흐른다. - P266

단풍은 내장산이 최고라고 하더라, 아니다 설악산이라던데, 아니야그보다는...…… 하고 사람들은 외우기를 좋아한다. 단풍조차 자기 눈으로 찾거나, 자기만이 좋아하는 어떤 단풍을 가지기보다는, 이렇다더라는 평판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많다. 평판 좋은 곳이 좋은 것은 물론 사실이다. 그러나 단풍보다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므로 어지러워서 단풍을 보기가 쉽지 않다. 단체로 줄을 서서 내장산이나설악산을 넘는다고 한들 단풍잎을 들여다볼 겨를이 있을 리 없다. - P270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인 낙엽송은 그런 것의 잎보다도 짧고가는 잎에 노랗게 물을 들여서 떠나는 통과의례를 성의껏 치른다.
보잘것없는 잎일지라도 수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물든 낙엽송은 눈부시며, 절정일 때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소리도 없이 꽃가루처럼날려서 쌓인다. 어째서 남아 있는 것들은 무심한 척하며, 떠나는 것들은 빛깔이 아름답게 차려입는 것일까? 늘 마지막 순간은 처참하게 아름다워야 한다고 떠나는 잎새들은 간곡하게 말한다.
10월 초부터 텔레비전과 신문들은 마치 그해에 처음 벌어진 진기한 일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단풍, 단풍 하며 야단들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덩달아 바람에 휩쓸리는 낙엽들처럼 단풍을 따라 몰려다닌다. 어디냐에 따라서, 취향에 따라서 단풍이 절정인 시기는 다르다.
내내 무심한 척하며 버티는 상록수보다는 솔직하게 때에 순응할줄 아는 나무들이 더 담백한 식물이다. 그런 나무들은 아직 맑고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숲을 비출 때, 곱게 차려입었던 치장을 훌훌 털어버리며 이 땅의 가을과 아름다운 이별을 한다. 절정이 한참 지나거개의 잎들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는 11월 중순께, 이미 가을은 - P282

다 가버린 거라고 사람들이 체념할 때쯤 남쪽 지방의 여러 낮은 산자락 호젓한 숲에서 뜻밖의 아름다운 시간을 만날 수 있다. 알몸을드러낸 숲의 나무들이 텅 빈 것 같은 공간에 허허롭게 자리잡을 때,
여름 내내 은밀했던 숲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피기라도한다는 듯이 맑은 가을 햇살이 두리번거린다. 그럴 즈음 그 숲 가장자리의 작은 나뭇가지 끝에 겨우 남아 있는 몇 잎이 가장 아름답다.
잎새의 저 무게, 또는 건듯 스치는바람 한 자락, 아니면 안개 같은부슬비가 잠깐 지나간 뒤에 가을의 마지막 모습은 자취를 감추고만다. 그리고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은 채로 저희끼리 몸 비비며 뒹구는 것들은 다른 깊이로 아름답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아름다운 시간은 길지 않다. 이윽고 그런 시간은 다음 계절의 급습에 어느 날 문득 소멸되어버린다. 낙엽처럼 떨어져 뒹구는 시간위에 다른 시간이 겹치며 한 해는 이윽고 막바지로 치닫는다. 막바지에는 늘 숨가쁘다. - P283

담백한 나무들은 봄부터 가을까지의 시간을 다 털어버린 알몸,
그 정수만으로 기나긴 침묵을 지키다가 차디찬 바람이 스치고 지나갈 때는 때로는 마지못해 우우 신음 소리를 내기도 하며 여윈 팔을하늘로 벌리고 서 있다. - P283

우리나라의 식물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이 땅의 고유한풍경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꽃을 포함한 자연 그 자체가나의 주된 관심사는 아니었지만, 그것들은 이 땅의 사람들과 풍경을 떠받치고 있었으므로 관찰을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꼴 난 사진하는 데온갖 잡학이 다 소용된다. 그래서 자생식물에도 꽤 많은 시간과 정성을바쳤다. 그러다 한 발 더 들어가자 이른바 "토종 식물에 대해서 궁금해졌다. 설악산에서 한라산까지, 그 사이의 거의 모든 땅을 오래도록 여러번 헤매었다. 들길이나 산자락을 지나다가 어떤 작은 풀꽃 한송이가 눈에 뜨이면, 시간이 허락하는 한, 무릎 꿇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꽃을 "이름 모를 꽃" 항목에 밀어넣고 말 수만은 없었으므로 이리저리 묻거나 이 책 저 도감을 뒤져서 조금씩 이름과 생태를 알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그 꽃들이 점점 더 예뻐 보였다. 그래서 아주 조금씩 천천히 그것에 더 다가갔다. - P285

우리가 애착을 가지는 토종식물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자생식물이나특산식물과는 어떻게 구별될 수 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가 없다. 그말을 사전에서는 특산식물이라고 하는데, 그런 것은 몇 종 되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에 있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다. 세포나 염색체, 형태와 빛깔이 좀 달라서 특산식물이 된 것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보통 사람들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뿐만 아니라 구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큰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다. 사전에 나와 있는 뜻과는 좀 다르게흔히 쓰는 "토종"이란 이 땅에서 몇 세대나 살아온 것을 일컫는지도 알수 없는 막연하고 애매한 말이지만, 대개는 그 말이 주는 정서적인 울림에는 친숙하다. 이 땅의 고유성, 전통, 애국…… 마침내는 국수주의에까지 이르는 숨은 뜻을 그 단어는 가지고 있는 듯하다. - P286

누구나의 고향 집 마당에, 장독대에 토종인 듯 피어 있는 맨드라미는열대지방이, 채송화는 남아메리카가, 접시꽃은 중국이 고향이다. 장미나 해바라기, 미루나무, 나는 수입되거나 귀화한 식물이라고 해서무조건 타박하지 않는다. 토종이 아니더라도 아름다운 것은 아름답고,
확실한 토종이라도 미운 것은 밉다. 들어온 것들에는, 이국적이어서,
어쩌면 더 끌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 땅의 정서와 연계될 때는 가능하다면 그런 식물들은 배제하려고 한다. - P286

다른 경계-토종과 아닌 것의 구별도 그렇다.
다만 "토종"과 전래된 지가 그리 오래지 않은 외래식물이나 화훼식물은구별하기가 쉽다. 우리나라 자연에 없는 것들은 다 언젠가 들어온 외래종이다. 그게 몇 세대나 이 땅에서 살아야 "토종 자격을 획득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인도, 말레이시아, 중국이, 쌀은 인도와 말레이시아가, 여름날 해질 녘에 초가지붕 위에서 흰 꽃을 피우는 박은 아프리카가, 호박은 열대 아메리카가 고향이다. 그리고 우리가 경의를 바치는 무궁화는 시리아가 본적이다. 그렇다면, 일본이나 중국 또는 아프리카나 아메리카에도 있는 것들을 우리의 토종이라고 부를수 있을까? - P287

풍경, 한국 풍경, 이 땅만의 풍경은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이뤄내는 것이다. 마침내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풍경에 나오는 소재들보다는 그것들이 발산하는 정서적인 울림에 이 땅의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 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사는 사회적인 풍경을 찾는다고 쏘다녔다. 그러나 온종일 긴장한 채 두리번거리며 헤매다가 느닷없이 다가오는 자연 풍경도 마다하지 않고 즐겼다. 그렇지 않았다면 쏘다니는 일이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다" (시간의 빛」)라고 쓴 적이 있다.


이 사진과 글들은 즐거움의 열매이다. - P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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