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두대의 트럭에서 철모에 흰 띠를 두른 군인들이 우르르 뛰어내렸다.
˝이제부터 작전 개시다! 이제 너희들 앞에 평생 잊지못할 엄청난 추억거리가 기다리고 있다. 작전 시간은 삼십분. 작전이 시작되면 각자 알아서 행동한다. 마음대로 불 지르고 마음대로 죽여라. 이것이 상부의 명령이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태워라! 노인,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다 죽여라. 목숨 달린 것들은 다 죽여라! 이 명령에 불복하는 자는 즉시 총살한다. 분대장급 이상의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반드시 총살한다. 알았나? 자, 돌격!˝ P187


와흘1리에서 검은 연기구름이 솟아오르는 것을 본 와흘2리 사람들은 그야말로 혼비백산했다. "군인들이 불지르레 오람져온다)! 불 지르레오람져!" 묶여 있는 소와말을 풀어 밖으로 내몰고, 병풍, 궤, 이불 따위를 마당으로 내놓고, 뒤꼍의 채소밭에 묻은 항아리 속에 식량을 갈무리하고, 놋그릇과 좋은 옷가지를 헌치마에 싸서 항아리 속에 넣고 그 위에 덕석을 덮고 또 그 위에 흙을 덮어 위장하느라 정신없이 허둥댔다. - P187

방화와 살인에 도취된 자들이 환각 속에서 계속 불을지른다. 고함치고 총을 난사한다. 겨우 불을 피해 벗어난사람들을 향해 총알이 사정없이 날아간다. 참새떼가 날고, 닭이 날고, 사람들과 개, 돼지, 소, 말들이 달아난다.
총격에 쫓긴 사람들이 혼비백산 울담을 타고 넘어 산 쪽으로 도망친다. 근처의 대숲이나 덤불에 뛰어든다. 닭들도 덤불 아래로 오르르 숨어든다. 사람과 가축이 달아나다가 총에 맞아 쓰러진다. 죽어가면서 고통의 비명을지른다. 내년 농사를 위해 보관 중이던 씨앗 망태가 타고, 이집 저집 곳간에서 쥐를 없애고 곳간을 지켜주던업신 구렁배암들이 타 죽는다. 닭 한마리라도 구해보려고 옆구리에 끼고 달아나던 소년이 총에 맞아 쓰러지고, 울담을 넘어 도망치던 청년이 총에 맞아 돌덩이 하나 가슴에 안고 엎어지고, 아기 안은 아낙이 솜옷 입은 등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른 채 허둥지둥 달아나다가 쓰러진다. - P189

검은 연기로 자욱해진 마을이 삽시에 주황빛 불바다가 되어버린다. 초원에 방목중이던 수백마리의 마소가 불길과 총소리에 놀라 산 쪽으로 우르르 떼지어 달아난다.
마음대로 죽이고 마음대로 불 지르며 군인들은 눈이 뒤집힌다. 천지간에 가득 찬 불이 그들을 실성하게 만든다.
자기가 쏜 총에 쓰러진 자의 붉은 피가 그들을 미치광이로 만든다. 그러한 광기의 와중에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것이 두려워 허공에다 총질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인 가운데 총성이 계속해서 터진다. - P190

노인이 외양간에 매인 소를 밖으로 내몰려고 무진 애를 쓴다. 불을 겁내 꼼짝도 하지 않는 소를 밀고 때리면서 겨우 내쫓는데, 총알이 날아와 노인과 소를 맞힌다.
노인은 쓰러지고 총알에 빗맞은 소가 울부짖는다. 무섭게 날뛰면서 뿔을 숙여 총 쏘는 군인들을 향해 돌진하다가 총알을 몇방 더 맞고 쓰러진다. - P190

지붕에 올라가 멍석을 덮어 불을 끄던 아낙이 총에맞아 굴러떨어진다.


죽창을 겨누고 소리치며 토벌대에 달려들던 청년이총에 맞아 쓰러진다.


좁쌀항아리를 맞들고 서둘러 집 밖으로 옮기다가 엎어져 쏟아진 좁쌀을 쓸어담는 노부부를 향해 총알이 날아든다. - P191

애써 마당까지는 내놓았으나 미처 땅을 파서 비장하지 못한 쌀 항아리들이 개머리판에 맞아 깨지고 쌀이맨땅에 쏟아진다. 쏟아진쌀더미 위에 건초가 덮이고불길이 솟는다.


자기 집을 태우는 불길을 보면서 급기야 실성한 노인이 소리 지른다. "아이고아이고, 시원하다! 잘 탄다, 잘도 탄다!" 그러고는 총을 맞고 쓰러진다. - P191

가슴에 총을 맞은 노파가 죽어가면서 불길이 닿지 않도록 손주 아기를 담요로 감싼다.


건초가리에 불을 지르던 군인이 죽일까봐 벌벌 떠는여자아이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한다. "날래 도망치라우! 다른 군인이 오면 반드시 독일 테니 날래 도망치라우!"


지붕에 불을 지르려는 군인에게 목초 베는 장낫을 들고 덤비던 노인이 총을 맞고 쓰러진다. - P192

마당에 내놓은 궤 안에서 명주 한필을 발견한 군인이누가 볼세라 얼른 군복 상의를 벗고 명주를 몸뚱이에둘둘 말아 챙기고는 다시 상의를 입어 숨긴다.


총성이 계속해서 터진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죽여라! 숨쉬는 것들은 다 죽여라! 목숨 달린 것들은 다 죽여라!


제 집이 불타는 것을 바라보면서 노인이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귀를 막는다. 머리칼은 불에 타고, 공포에 질린 입에서는 비명도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숨이 가빠 헐떡거릴 뿐이다. - P193

"중대장님, 이건 뭐 죄다 민간인들 아닙니까? 산군새끼는 하나도 없고......"  신참 소위가 불평한다.
"하긴 대항하는 적군이 있어야 싸울 맛이 나는데 말이야. 좀 싱겁군." 일본군 출신 중대장이 말한다.
"죽을 염려라고는 없는 이런 것도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하하, 세상에 이런 싱거운 전투는 나도 처음이야.
내가 사이판에서 싸워봤는데, 그땐 정말 짜릿했지. 죽지만 않으면 전쟁만큼 재미있는 게 없어. 여자와 관계하는 것보다 더 짜릿해. 생명의 위협이 있어야 짜릿한법이지." - P194

"이건 전쟁도 전투도 뭣도 아닙니다. 그냥 살인 아닙니까?"
"야, 소위, 말이 많다. 정신 차려라, 이 새끼야! 위에서 내려온 작전명령이 살아 있는 건 다 죽이라는 것 아닌가? 우린 살인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하고 있는 거야.
알았나?"
"옛, 알았습니다!" - P195

불타고 있는 마을은 와흘리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대흘리, 와산리, 선흘리, 교래리에서도 불길이 솟았다. 조천면 중산간 지역은 온통 검은 연기로 뒤덮이고 연기 아래로 주황빛 불길이 넘실거렸다.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이른바 삼광(三光) 작전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도였다. 마을 안 여기저기에서 총소리와 함께 인간과 가축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불길은 마을 외곽을 향해 마른 풀밭 위로 물 흐르듯연기를 내뿜으며 번져갔다. 검은 연기와 주황색 불빛, 뜨거운 열기와 타는 소리와 냄새가 천지간에 가득했다. 성글게 눈이 내렸으나 눈은 불에 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증발해버렸다. - P198

이승만이 명령한다. "공비토벌을 빨리 끝내라시일을 끌면서 이렇다 저렇다 보고하지 말고, 공비가 없어졌다는 보고를 듣고 싶다.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지체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조병옥이 맞장구친다.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월남민 교회의 목사가 설교한다. "한없이 기꺼운 마음으로 서청 여러분을 위해 하느님께 축복을 청합니다. 여러분의 승리는 곧 하느님의 승리입니다. 어서 그 붉은 무리들을 소탕하고 오시오!"
연대장 송요찬이 외친다. "일본 군대는 이러지 않았어! 더 잔인하게! 더 잔인하게!"


...... 움직이는 것은 다 죽여라! 눈에 보이는 것은 다죽여라! 숨쉬는 것들은 다 죽여라!
......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진압뿐이다!
····· 지체 말고 단숨에 처리하라! 남녀노소 가리지말고 불순분자를 제거하라! 가혹하게 응징하라!
- P200

...... 그러니 너희는 당장에 가서 아말렉을 치고 그 재산을 사정 보지 말고 모조리 없애라. 남자와 여자, 아이와 젖먹이, 소떼와 양떼, 낙타와 나귀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라!
...... 구세주 이승만 박사 만세!
...… 동지들이여, 조국과 하느님을 위하여!
…… 온 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태워버려야 한다!
……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태우고, 모조리 빼앗아라!
...... 아아, 삼팔선 넘어와서,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나? 왜 나는 여기에 와 있나?
...... 카인아,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모릅니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들어보아라,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 - P201

밤이 되었지만 지상의 불길이 하늘에 번져 불타는 마을은 오히려 대낮같이 밝았다. 하늘과 땅이 맞붙은 듯했다.
낮에 주황색으로 보이던 불빛은 이제 검게 그을린 진홍색으로 바뀌었다. 불빛은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한 크기로 확대되어 모든 그늘, 모든 그림자를 삼켜버렸다. 와흘1리와 2리의 불은 다른 세 마을,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를 태우는 불빛과 합쳐져 드넓은 들판을 환하게 밝혔고, 밤하늘 높이 치솟아 구름떼를 붉게 물들였다. 괴로워 몸부림치는 대지를 밤하늘이 그대로 반영하여 온통 벌게졌다.  - P203

수많은 이랑을 만들고 있는 구름떼가 불빛에 물들어 마치 핏물 먹은 거대한 내장 꾸러미처럼, 묵시록의 거대한 붉은 용처럼 무섭게 꿈틀거렸다. 땅도 타고 하늘도탔다. 하늘과 땅이 모두 시뻘겠다. 화광충천(火光衝天),
어둠을 사르며 활활 타오르는 화염, 붉은색, 주황색, 푸른색 불길이 뒤섞여 맹렬히 소용돌이쳤다. "저 불 보라! 저 불, 저불보라!" 숲속 아지트에서 다른 청년들과 함께 은신하고 있던 안만옥, 안창세, 부대림, 정두길들도 새미오름에 올라 그 불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해변마을 사람들도 집밖으로 나와 재앙처럼 거대한 불을 바라보았다.  - P203

양산도가 대숲에서 어머니의 시신 옆에 꿇어앉아 눈앞에서 불타는 자신의 집을 바라본다. 노여움에 주먹을쥔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지붕을 태운 큰 불더미가 바닥에 풀썩 무너져 내려앉는 것을 본다. 그 불이 다시 바닥에서 기어올라 기둥과 서까래를 휘감고 깃발처럼 바람에 펄럭거린다. 탁탁탁탁 마구 후려갈기는 채찍질 같은 불타는 소리를 듣는다. 자욱한 검은 연기, 바람이 불어와짙은 연기를 헤집어놓을 때마다 그 열린 틈새로 널름거리며 드러나는 시뻘건 불길을 본다. 불길은 물 흐르듯 일렁거리며 흘러 뒤꼍의 감나무에 가고, 유자나무에 가고, 이제 갓 꽃이 피어난 동백나무에도 옮아가 붙는다. 불길은 나무를 휩싸고 빠르게 우듬지까지 기어오르고, 드디어 나무가 토벌대의 총소리를 흉내내면서 펑펑 폭발한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이 드디어 멸망한다. 마을이멸망한다. 양산도의 눈에 핏발이 선다.  - P204

불에 탄 시신은 나뭇둥걸처럼 두 다리가 뻣뻣하게 들려 있어 모로 눕혀 문어야 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붉은 피가 불에 타 새까맸다. 화기가 미치지 않은 시신들 역시 끔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최후의 안간힘으로 땅을 후벼파느라 양 손톱이 참혹하게 젖혀져 피가 엉겨 있었다. 하나같이 아 하고벌어진 입들, 컴컴한 입, 죽음의 비명이 터져나오던 순간그대로 벌어져 있는 입들이었다. 아! 아!아! 아! 그 시신들을 타다 남은 멍석 쪼가리나 돗자리로 싸서 매장했다.
허리춤에 호상옷 보따리를 매단 채 쓰러진 노파들은 보따리에서 호상옷을 꺼내 입혀드렸다. 눈물도 곡성도 없었다. 거기에는 슬픔이 없었다. 공포가 슬픔을 삼켜버렸다. 들끓는 분노가 슬픔을 삼켜버렸다. 그들은 묵묵히 힘주어 삽질을 했다. - P210

사오일간 집중된 초토화 작전으로 한라산 둘레의 중산간 마을 백삼십여개, 일만 오천채의 집이 소각되었다.
온 섬에 가득한 화염의 붉은빛, 정두길은 그것을 피라고생각했다. 피바다가 곧 해일처럼 들이닥칠 것이고 그 피에 자신의 피도 흘러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먼바다에서 해상봉쇄의 임무를 띠고 감시 중인 미 해군 극동함대의 존재를 떠올려보았다. 캄캄한 밤바다 한가운데서 온섬을 휩싼 화염과 불빛을 보면서 그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멀리서 본 그 불은 그들에게기막힌 아름다움이었을까? - P213

산에는 자주 눈이 내렸고, 눈이 깊이 쌓이자 토벌대의추격전이 잠시 주춤했다. 물론산군의 반격도 없었다. 정적이 온 산을 지배했다. 산군과 피란민들은 동굴 속 침묵속에 누워 있었다. 음울한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다. 해가 있는 날에도 엷은 구름에 가리곤 했다. 거무스레한 테두리 속에서 해는 창백해 보였고, 그 창백한 빛은 기우는달빛보다 더 슬퍼 보인다고 정두길은 생각했다. ‘장차이 사태는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 흐린 날씨에도 어쩌다 구름 틈새가 벌어져 하늘의 파란빛이 희망처럼 나타날 때면 그 파란빛이 하느님의 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 P226

어둠이 모두를 짓눌렀다. 어둠과 함께 절망이 불가항력의 막심한 무게로 가슴을 짓눌렀다. 과거의 모든것으로부터, 모든 인연으로부터 단절되어버렸다는 무서운 고립감, 미래마저 단절되어 살아 있는 것은 임시일뿐이라는 두려움의 무게였다. 그들은 자주 악몽을 꾸었는데, 토벌대가 굴속으로 쳐들어와 가슴팍에 총검을 꽂는 무서운 꿈들이었다. 불안에 짓눌린 그들은 숨소리마저 위축되고 맥박도 느리게 뛰었다. 그러한 상태를 혼자만 겪는 것이 아니라 굴속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어보려고 그들은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 P238

사람은 누구나 미워하는 마음 없이는, 증오 없이는 싸우지 못하는 법, 지휘관은 신병의 마음속에 증오의 불씨를 지피려고, 인간 정신의 가장 어두운 부분, 밑바닥 깊이 숨어 있는 야만성을 일깨우려고 악을 써댔다. 그러나빨갱이에 대한 증오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니, 증오조차없이 죽여야 했다. 아무리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명령이라지만 무고한 사람을 학살하고 있다는 생각이 신병을괴롭혔다. 그러나 우물쭈물할 수가 없었다. 상관이 무서웠다. 한라산의 산군보다 더 무서웠다.  - P245

선덕은 총에맞은 노인이 비명을 지르며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뒤로 자빠진 노인의 가슴팍에서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노인의 깡마른 몸에 그렇게 많은 피가 들어 있을 줄 몰랐다. 그로서는 처음 보는 엄청난 피였고, 노인의 피도 젊은이의 피와 마찬가지로 생생하게 붉다는 것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헛구역질이 발작처럼 일어났다. 사나운 군홧발에차여 앞으로 고꾸라지면서도 구역질은 그치지 않았다.
아아, 주님이 이런 일을 시킬 리 없어! 이건 주님의 뜻이 아니야!


처음에는 특별히 선량하지도, 특별히 악하지도 않은보통의 인간들이었던 그들은 그렇게 상관의 매질이 두 - P248

려워 마지못해 우물쭈물 명령을 따르다가, 차츰강제에의해 설득당하면서 그런 상황에 적응해갔다. 그들은 실체가 아닌, 머리에 주입된 관념으로만 섬사람들을 인식하려고 했다. 섬사람들에 대해 빨갱이라는 것 말고 더이상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들은 흔들리는 양심을 깔아뭉개고 더 잔혹해지기 위해 용기를냈다. 그것도 용기라고 생각했다. - P249

그들 중 상당수는 광적인 신앙심과 광적인 애국심을갖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애국의 이름으로 살인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살인을 저지를 때 생기게 마련인 연민의 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양민을 학살하려면 먼저 자신의 마음속 연민의 정을 학살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신병들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인간으로 주조되어갔다. 그들은 애국적으로고문하고 애국적으로 살인했다. 선악의 구별, 어른과 아이의 구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P249

잔혹함이 군인 정신으로 여겨졌고, 명령과 지시 이상으로 잔혹해야 용감하다고 평가되고 빨리 진급할 수 있었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직급의 경찰에게 즉결처분권이 주어져 있었다. 고문과 살인이 너무도 흔해졌고그 자체에 쾌감을 느끼는 자들이 생겨났다. 그 무서운 광증은 집단 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광기에 중독된 자들이 법을 가진 자, 법을 쥔 자가 되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죽이고, 시키지 않아도 내 마음대로 죽이고, 닥치는 대로 마구 죽였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것은 대단히어렵다. 인간에게 목숨을 준 신에게만 그것을 빼앗을 권리가 있을 것이다.  - P250

그래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을 때 그들은 마치 신의권능을 부여받은 것 같은 황홀감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 죽이는 일은죄인데 마음대로 죽여도 좋다니, 게다가 그것이 애국 행위라니, 참으로 기묘한 희열이고 최상의 쾌락이자 최고의 자유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그 힘에 도취되었다. 희생자들은 그렇게 죽어 마땅한 존재처럼 보였다. 매일한명이라도 죽이지 않으면 밥맛이 없다고 떠벌리는 자들도 생겨났다. - P250

피살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 저항 없이 총알을 받았다. 죽음 앞에서 거부와 반항의 목소리는 매우 드물었다. 총살당하기 직전 몇십분 동안은 자유였다. 그 시간동안 군인들에게 저주와 분노를 외칠 수도 있고, 저항가를 부를 수도 있고, 통곡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에 질려 벌벌 떨기만 할 뿐 침묵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포식자의 아가리 앞에 놓인 한마리 토끼와 다름없이, 삼켜지기 직전의 의식 마비 상태에 빠졌다. 저주와 분노의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조용했다.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그 침묵, 그 무력함에 총살조의 일부병사들은 당황스러웠다.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양심적인 병사도 명령을 거부하지 못했다.
어떤 피살자도 분노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다만 총알이 가슴을 꿰뚫는 순간 터져나오는 단말마의 비명만이 있을 뿐이었다.
- P251

성공적으로 전투를 치렀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이겨도 이긴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의 총공세 속에 최후가 머지않았다는 것을 그들은 예감하고 있었다. 총알도 떨어지고, 먹을 것도 거의 바닥났다. 행필은 손깍지를 껴 무릎을 감싼 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활동 중에도 틈만나면 떠오르는 것이 그리운 아내와 아기의 얼굴이었다. 포동포동한주먹을 입에 가져가 빠는 아기 얼굴과 아기 젖내가 묻어있는 아내의 적삼 냄새, 조를 추수하던 날 밤 어둠 속에서 발광체처럼 떠오르던 아내의 알몸이 생각났다. 그런생각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던 그가 고기 굽는 냄새에 화들짝 깨어났다. - P266

총알도 떨어지고 식량도 떨어졌다. 이 목숨을 언제까지 지탱할 수 있을까? 완전한 패배가 분명하고 최후의 순간이 바로 눈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빼도 박도 못하게 갈데까지 가버렸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전투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절망을 이기는 방법은 전투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것저것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하기가 싫었다. 생각할 기력도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관성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싸우다 죽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말없이 눈을 감고 무슨 의식을 치르듯이, 마치 혀가 아니라 영혼으로, 목숨으로 고기 맛을 음미하는 듯이 신중하고 경건하게 씹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밤의 정적 속에서 멀리 해안선에 부딪히는 파도 소리가 먼 우렛소리처럼 아련히 들려왔다.  - P267

동굴 생활이 한달 보름쯤 되자 한라산 피란민들은 더이상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땅이 얼어칡뿌리마저캘 수 없었다. 토벌대의 이만 병력이 한라산 둘레를 에워싸고 피란민들을 깊은 눈 속에 가둬놓았다. 그것은 토끼몰이식 포위 작전이면서 동시에 아사 작전이기도 했다.
죽음이 그들을 포위해 목에 걸린 올가미 죄듯 점점 죄어들고 있었다. 눈은 거의 매일 내렸다.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처럼 눈이 내렸다. 지금 이 상황이 영원히 끝나지않을 것처럼. - P301

병이 깊어 기침이 더욱 잦아진 부대림은 토벌대에 발각될까봐 기침할 때마다 눈치를 보며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더니, 어느 날 다른 굴로 옮아갔다. 정두길도 함께갔다. 곶자왈을 벗어난 억새밭 한가운데 있는 그 굴은 서너 사람밖에 들어갈 수 없는 아주 작은 굴이었다. 옮아가면서 두길은 창세에게 자신이 쓰던 만년필을 물려주었다.
"창세야, 너, 작가가 되고 싶댄 했어? 부디 넌 죽지말앙 꼭 살아남으라이. 살아남아서 이 만년필로 좋은 글을 써라이. 나도 좋은 글 쓰고 싶었지만, 이젠 허사가고 말았구나." - P304

눈 속에서 몇번의 전투가 있었고 그때마다 산부대는 몇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백여명으로 줄어든 그들에게 이만병력은 도무지 불가항력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싸웠다. 지휘 계통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그들은 홀로 싸우고, 홀로 죽어갔다. 항복해도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다.
죽음이 두렵긴 했으나 그토록 격렬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죽음이 일상이 되어 도처에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삶과 죽음이 잘 구별되지 않았다. 두려울수록 필사적으로 싸웠고, 두려움을 없애는 방법은 필사적으로 싸우는것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산부대는 탄약은 물론 식량까지 바닥나면서 완전히 전투력을 상실했다. - P305

이제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산부대가 할 수 있는 것은 피란민들과 함께 숨는 일뿐이었다. 물장올 근처의 이덕구 부대가 낮게 떠 수류탄을 투척하던 L19 한대를 격추시키고 숲에 추락하여 나무에 걸쳐진 비행기를 보면서 두 팔을 들어 환호성을 질렀다는 소식이 있었지만, 절망적 상황에서 그것조차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조직이 무너져 뿔뿔이 개인별로 움직였다. 자신은 물론 가족과다른 피란민들까지 보호해야 하는 그들은 노천에서 자면서 토벌대의 기습에 대비했다. 가마니 한장씩을 지고다니며 밤이면 눈 위에 깔아 추위를 견디면서 잠을 잤다.
그들은 피란민들이 숨어 있는 굴이 적발되지 않도록 일부러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겨 토벌대를 다른 곳으로 유인하기도 했다, 메추라기가 제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그러듯이. - P317

바람이 거세게 불어왔다. 강풍이 북쪽의 먼바다 수평선으로부터 검은 구름떼를 몰고 왔다. 구름떼가 하늘을가득 메우고 섬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수평선 너머 육지로부터 쳐들어오는 토벌대처럼 무섭게 달려왔다. 마치 하늘 전체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강풍은거세게 파도를 일으켜 해안선을 강타하고 드넓은 초원을 질펀하게휩쓸며 오름들을 하나씩 집어삼키고 달려와 높이 솟은한라산 멧부리에 거세게 부딪혔다. 한라산 숲이 크게 흔들리며 큰 물결과 포효를 일으켰다. 숲의 나무들을 후려치는 쉭쉭 채찍질 소리, 서로를 부르며 아우성치는 숲의나무들.….… - P318

그리하여 한라산을 뒤덮은 구름은 산기슭까지 내려앉아 수천의 피란민들이 그 구름 속에 들었다. 동결의 땅,
피가 얼어붙는,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었다. 동굴들이숨어 있는 숲 지대에 박격포탄이 퍼부어졌다. 동굴이 잇따라 적발되면서 피란민들이 수없이 총 맞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총 맞아 죽고 죽창, 철창에 찔려 죽느니 차라리 굶어 죽겠다고 굴속 어둠 깊이 들어가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 P318

모두 뜨겁고 매운 눈물이 솟구쳐 목이 메었다. 전에는어떤 아픔, 어떤 슬픔도 참아낼 수 있는 그들이었지만 이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김의봉이 치미는 울음을 참기 위해 목울대를 누르면서 말했다.
"도대체 우리가 잘못한 게 뭔가? 무얼 잘못했단 말인가? 아아, 우리의 죽음이 아무 보람도, 아무 가치도 없는죽음이 되어버렸어. 그게 원통해! 도대체 이건 인간의죽음이 아니여. 짐승이라도 이런 떼죽음은 없어. 너무 억울해, 원통하고 절통해 ! 우린 결코, 우린 결코 죽어도 죽지 않을 거여! 너무도 원통해 죽어도 죽을 수 없어!"
계곡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불길이 거칠게 파닥거렸다. - P323

나직이 떠 있는 구름 밑으로 눈안개가 너울거리면서하얗게 밀려오고 있었다. 눈안개는 벗은 나무들의 자잘한 빈 가지에 달라붙어 하얀 눈꽃을 만들면서 뿌옇게 화약 연기와 뒤섞였다. 눈안개가 모든 것을 지웠다. 공간도, 시간도 모조리 지웠다. 어지럽게 뿌려진 삐라, 흰 눈에 번진 붉은 피, 흰 눈 위에 흩어진 노란 탄피, 시신의벌어진 입, 고무신 자국, 군화 자국, 고무신이 벗겨진 맨발 자국도 지웠다. 시신 위에 눈을 덮어주는 청년들도, 검은 까마귀들도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총성도, 비명도지웠다. 정적 속에서 눈안개는 너울거리며 날아와 수의처럼 살육의 현장을 하얗게 지웠다. - P330

억새밭 한가운데 바위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자란 서어나무, 그 뿌리 아래에 숨겨진 조그만 동굴 안에 부대림과 정두길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밤늦은 시간이었다. 밖은 눈보라가 치고 있었지만 속은 불이 없어도 포근했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은 지 여러날이 지났다. 보름쯤 지났을 것이라고 두길은 생각했다. 작고 비좁은 굴속에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워 있는 자신들이 고치 속의 유충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은 조만간 성충이 되어 고치를 뚫고 세상 밖으로 날아갈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더이상 먹지 않기로 결심했으므로 이제 두길은 별로 배고프다는 느낌이 없었다. 처음 며칠 동안은 위가 몹시 쓰라렸는데 이제는 그 통증마저 사라지고 위가 졸아든 느낌이었다. 배는 등에 가 붙고,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고통도 욕망도 없는 텅 빈 공허, 그 공허 속으로 온몸이 삼켜진 듯했다. - P350

"대림아, 이 굴을 우리의 무덤이 아니라 대지의 사이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대지의 자궁 속에 들어와 있는 거야. 따뜻한 자궁! 아아, 따뜻하고 아늑하구나!"
그렇게 말하면서 두길은 두 무릎을 안고 가슴팍으로 끌어당겨 자궁 속의 태아처럼 몸을 말았다.
"대지의 자궁! 멋진 말이네. 역시 시인은 달라."
"우리는 죽지만 다시 태어날 거다. 대지의 자궁은 죽음 속에서 새 생명을 잉태하니까. 모든 것이 불에 타고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그러나 어머니 대지는 죽은 자식들을 끌어안을 거여. 땅속 혈맥들이 고동치는 소리가 지금 내 귀에 들려. 대지가 자기의 자궁 안으로 죽은 자식들을 받아들이고 있는 거라. 낭자한 피와 총성과 비명도, 죽창, 철창에 묻은 살점도 대지는 남김없이 받아들이고 있어. 아, 그리고 마침내 그 자궁에서 새 생명들은 솟아나 대지 위에 다시 번성할 거여." - P351

왜냐고? 자신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죽은 자"라고 했다. 그 말이 옳았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기전에 증언청취를 위해 만난 노인 네명의 삶도 바로 ‘살아 있는 죽은자‘의 삶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그때 아버지는 나를 품에 꼬옥 껴안안 엎드린 채 총알을 맞았어, 나를 살리젠…… 아, 아버지의 품이 생각나. 그 땀 냄새가 생각나! 난 이제 늙었지만 지금도 그 냄새를 맡을 수 있어!" - P356

"하지만 창근아, 우리의 상상력이 그렇게 압도당해버리면 다큐를 만들 수가 없잖아. 그 참혹함의 무게에 압도당해서 너무 진지하고 너무 슬픈 다큐가 돼버리면 안 돼.
큰 슬픔일수록 좀 가볍게, 관객들이 견딜 수 있게…… 삼만의 슬픈 원혼들을 눈물로 애도하고, 즐거운 웃음으로기쁘게 해드리기도 하면서……"
"눈물과 웃음이 함께 있는 영화! 그래, 그렇게 풀어내자. 슬픈 영혼 영신님네 그 맺힌 설움, 그렇게 풀어내자!" - P358

불쌍한 영혼 영신님네
어서옵서, 어서옵서
젖은 구름도 넘엉 옵서
마른 구름도 넘엉 옵서


아아, 무자년 기축년에
재앙불이 대지를 덮쳐 물어뜯고
하늘과 땅이 뒤집어지고 피바람 불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었네
아침에 본 사람 저녁에 못 보고
저녁에 본 사람 아침에 못 보고
낫에 풀 베이듯이 사람마다 쓰러졌네 - P359

죽어도 죽을 수 없어
사무친 원한으로 저승에 못가
이승의 천공을 무리 지어 떠도는
수만의 영혼 영신님네


가슴에 피 절어
피 묻은 옷 아직도 벗지 못해
흰 두루마기, 학생복,갈옷, 무명치마, 명주 호상옷 - P359

펄럭거리며 허공을 흘러가네
바람따라구름 따라 흐르면서
살아 있는 자들의 세상을 내려다보네


자, 이제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애통하고 절통하신 영혼 영신님들
자, 이제 열려 맞자, 열려 맞자
아주 활짝 풀어 열려 맞자
맺힌 간장, 맺힌 설움 아주 활짝 풀어내자 - P360

사나 사나 사니나 사나
맺힌 간장, 맺힌 시름 풀어내자
날로 달로 불살라 갑서
맺힌 간장, 맺힌 설움
날로 달로 불살라 갑서
하올하올 청나비 몸으로 환생합서
하올하올 흰나비 몸으로 환생합서
사나 사나 사니나 사나 - P360

 작가의 말 


광복의 1945년에서 대한민국 수립의 1948년까지를 흔히 해방공간이라고 하는데, 온 국민이 새 국가 건설의 꿈에 한껏 부풀었던 그때는 불행히도 한국사에 유례없는무서운 폭력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소설은 그 삼년의 기간을 지나면서 국가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거의 절반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제주도 청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로운 미래, 새로운 국가, 분단국가 아닌 통일국가를 꿈꾸며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격렬하게 활동했던 그들이 어찌하여 그런 참사를 당하고 말았던가요?
그 당시 청년들을 사로잡았던 열정의 정체는 무엇이고, 어떻게 그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는지, 삶과 죽음은 무엇이고 인간은 또 무엇인지를 작가는 이 소설에서 탐구하고 싶었습니다. - P361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이야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당시의 복잡한 정치 상황에 대한 언급은 최소화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의 대부분은 실제있었던 것들입니다. 그 사건이 비록 이 소설 속의 그 시간, 그 장소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당시 제주도 어디에선가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소설 속의 에피소드는 주로 작가 자신이 만들어낸것이지만, 이미 책으로 발간된 여러 청취록 작가가 직접 취재한 내용에서 나온 것도 있습니다.
등장인물의 경우에는 역사적 인물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허구의 인물임을 밝힙니다. 혹여 그 허구의 인물이 실존했던 인물의 이름과 일치하더라도 그것은 우연의 일치일 뿐입니다. - P362

너무도 많은 참혹한 유혈에서 그 핏빛의 생생한 묘사를 될 수 있으면 자제하려 했지만, 모두 뜻대로 되지는않았습니다. 그래서 작가가 지나치게 감정적이라고 비난하더라도 마음이 슬픈 작가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 - P362

독자여, 그대가 이 소설을 읽기로 작심하였다면 그 길은 작가와 동행해 너무도 낯선 삶과 죽음의 비경을 찾아가는 여행길이 될 것입니다. 작가는 이것저것 살피면서그 먼 길을 느리게 걸어갈 텐데, 독자도 그 느린 행보의리듬에 맞춰 천천히 걸어가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많은 분량의 이 소설의 편집을 맡아 오랜 시간 고투하면서 작가가 저지른 오류들을 찾아 바로잡아준 박지영팀장과 김정혜 실장에게 각별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2023년 초여름 현기영 - P363

문이란 무엇인가? 돌이나 마음에 뜻을 새김이 아니런가? 광풍을 가르고 노도(怒濤)를 헤치며 삶으로 나아간 제주 사람들. 여기 그 영구한 의지를 알알이 새겨놓은 거비(巨碑)를 보라.

 강요배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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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까지 터져 공포가 극대화된 상황에서 조 추수가 있었다. 수시로 총성이 울리는 들판에서 사람들은두려움에 떨며 곡식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해 조농사는풍년이었다. 입산자들이 가을걷이를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포고령 이후 토벌대는 들녘에 젊은 남자가 보이면무조건 총격을 가했기 때문에 가을걷이가 매우 두려운일이 되어버렸다. 여자들도 들일을 하다 총에 맞아 죽는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중산간마을 사람들은 동산에 망꾼을 세워놓고 조를 베어야 했다. 토벌대가 보이면망꾼이 그쪽을 향해 흰 기를 매단 장대를 휘둘러 신호를 보냈다. - P174

늦가을의 들녘은 조밭도 목장도 누런빛으로 물들었는데, 조를 베는 사람들도 갈옷이 조밭의 누런색에 녹아들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누런색 일색의 넓은 들녘은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을 것처럼 텅 비고밋밋하게 느껴졌다. 바람도 불지 않아 사방이 조용했다.
거대한 정적 속에서 문득 아주 미세하게 차 엔진 소리가들려왔다. 일주도로에 군용트럭 두대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나타났다. 혹시나 하고 긴장했으나, 다행히 차들은 와흘리로 올라오는 마찻길로 꺾지 않고 그대로 서쪽으로 달려갔다. 거리가 멀어 트럭들이 풍뎅이처럼 작아보이고 달리는 속도도 아주 느리게 느껴졌다. - P178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의 통행을 금지하고어길 경우 총살한다는 포고령이 떨어진 이후 중산간 마을의 청년들은 토벌대의 습격이 두려워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토벌대에게 습격을 당한 와흘리 청년들도새미오름 근처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외갓집에 머물던만옥과 창세도 곶자왈 속 아지트로 들어갔다. 토벌대의막강한 공세 앞에서 산부대는 자연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매복 기습을 위주로 하는 산부대로서는 들판의 나무들에 낙엽이 지고 풀이 시들어 가라앉자 몸을숨기고 움직이기가 더욱 어려워졌다. - P181

그 위로 맑은 햇빛이 가득했다. 하늬바람이 살랑살랑 가볍게 불어오고, 그 바람길을 따라 햇빛이 물결처럼굽이치며 흘러갔다. 꽃들이 하얗게 핀 억새밭 사이로 마찻길이 구불거리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 길 끝에 해변이있고 그들이 떠나온 내 마을, 내 집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곳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피안처럼 느껴졌다.
"두길아, 우린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우리가 죽더라도 저런 데 가서 죽어야 하는데, 어쩌다 여기에 와 있나………" 대림이 탄식했다. "아아, 이 공포, 이 불안이 언제 끝나나.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다. 애가 타고 심장이말라붙어버렸어."
"조만간에 끝날 거야. 시작된 것은 모두 끝이 있어."
두길이 아픈 벗의 등을 쓰다듬었다. - P182

11월 중순에 한라산 둘레 중산간 지역의 백육십여개마을 중 백삼십여개 마을을 소각하고 주민들을 대량 학살하는 대방화,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우리 외가 마을 와흘리가 불탄 것은 양력 11월 13일이었주. 이웃 마을인 대흘리 와산리, 교래리도 바로 그날 불탔어. 불길이 엄청났주. 하늘과 땅, 천지사방이 시뻘겅했어! 조추수가 끝나고 이어서 고구마, 콩, 산디(밭벼), 메밀을 거둘 때였어. 그날은 눈이 성글게 희끗희끗 내렸지. 약간 추운 날씨였주


그날 조천면의 중산간 마을들에 출동하여 방화하고학살을 자행한 부대는 함덕에 주둔한 제3대대, 서청 대대였다.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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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천리도 일주도로변의 다른 마을들처럼 군 토벌대에 장악되었다. 어쩌다 보이던 군용차량이 이제는 요란한 폭음과 함께 상시적으로 일주도로에 나타났다. 이웃 마을 함덕리에는 9연대 3대대가 주둔했는데, 구성원 대부분이 서청 출신이어서 ‘서청 대대‘라고 불렸다. 대대에서 조천리에 파견한 한개 중대는 소학교 자리에 진을 쳤다. 그들의 업무란 도피자를 찾아낸다면서 마을 사람들을 족치고 들볶아대고, 이틀에 한번꼴로 술판을 걸게 벌여 질탕하게 노는 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 술판을 마련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대접이 소홀하다 싶으면 총을난사해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젊은 여자들이 술심부름을 해야 했고, 허리띠를 풀고 배불리 먹은 그들은 여자들에게 덤벼들곤 했다. 젊은 여자들은 강간이 두려워외출을 삼갔고, 집 안 마루 밑이나 장독대 밑, 외양간 바닥에 구덩이를 파서 군인이 나타나면 그 안에 숨었다.  - P102

이제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아가리 앞에 놓인 신세가되어버렸다. 호루라기 소리, 고함치는 호령 소리, 부대의군홧발 소리, 군용차량의 엔진 소리가 수시로 들렸다. 대낮에 함부로 쏘아대는 총탄에 비석거리의 비석들과 팽나무, 멀구슬나무가 상처를 입었다. 밤이면 더욱 무서웠다. 한밤중에 순찰대가 도피자를 수색한다며 수시로 민가를 급습했던 것이다. 창문앞에서 갑자기 군홧발 소리가 우르르 나고, 다음 순간 발길에 걷어차여 문이 벌컥열리면서 방 안으로 검은 그림자들이 뛰어들고 손전등불빛이 쏟아지곤 했다. 소학교 운동장에서 한밤중에 군인들을 집합시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도 무서웠고, 출동하는 차량이 전조등 불빛을 내쏘면서 터뜨리는엄청난 엔진 소리에도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어떤 때는 밤중에 방향도 모르게 총성이 울렸는데, 그때마다 사람들은 다투어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오들오들 떨어야했다. 누가 쫓기고 있는가보다. 누굴까? 우리 집으로 뛰어들지 몰라! 공순네 네살짜리 아기에게도 그 공포가 전해졌는지 늘 입에 물고 있던 울음이 사라졌다. - P103

토벌대의 최고 지휘관 로스웰 브라운 대령은 천명했다. "사태의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오직 진압뿐이다." - P104

경비대 연대장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본때를 보인다고화북리의 주민 한명을 총살하고, 그 죽은 아비를 안고 울부짖는 소년마저 쏘아 죽였다. 산군이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그곳에 산군이 없자 총살해버렸고, 사격연습을 한다며 마을의 말과 소를 함부로 쏘아 죽였다. - P105

산부대가 경비대 영내에 삐라를 뿌렸다.
"친애하는 국방경비대 장병 여러분! 우리의 적은 오직 경찰과 서북청년단이다. 우리는 미군정과 경비대를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친애하는 장병 제형이여! 제형의 민족적 양심과 정의에 불타는 올바른 행동을 우리는믿노라." - P105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자 서로의 얼굴이 또렷이 드러났다. 두 연인은 준비해온 담요를 깔고 나란히 누웠다. 하늘에 가득한 별빛이 그리운 서로의 얼굴을 비추어주었다. 천지에 가득한 공포와 그 속에서 조마조마하게 이어온 사랑, 자유롭게 만날 수 없었기에 그리움은 깊어져 참을 수 없는 갈증으로 변했다. 그토록 오랫동안 만나기 어려웠는데 오늘 만나고 헤어지면 그보다 더 오랜 이별이될지 모른다는 생각, 앞으로 그들의 사랑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들의 가슴을 쓰리게 했다. - P107

초원에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물결치면서 서걱거리는 풀잎 소리에 묻혀 선조들의 아우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수많은 연대에 걸친 고난과 투쟁의 흔적이 저 질펀한 초원의 들풀 아래에 묻혀 있었다. 양수, 번석, 문행노,
김통정, 강제검, 방성칠, 이재수와 함께 일어난 수많은인간들의 피가 스며든 곳이었다. 그들이 싸우라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바람은 옛 바람 그대로 불고, 세찬 바람에 밀려 초원의 풀들이 그 옛날의 인간들 무리처럼 물결치며 앞으로 내달리는 듯했다. - P111

고문은 빈틈없는 완벽한 고통이었다. 극단의 고통 속에서 생명은 한점으로 위축되어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몸과 정신을 송두리째 몰수당한 채 모진 고문을 당하기만 하는 피해자는 무력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리고고문 끝에 기다리는 것은 총살이었으니, 그런 절대 절망,
극한의 고통 속에서 그가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뿐이어서 고문 도중에자살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 P114

고문의 무서운 고통이 지나간 후 완전히 탈진한 몸에서는 그 고통이 만들어낸 송장 냄새 비슷한 야릇한 냄새가 풍겼다. 죽지만 않을 만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가는혹독한 고문이 만들어낸 냄새였다. 고문을 받다가 그 자리에서 죽거나, 풀려나더라도 한달 안에 맷독으로 죽는일이 드물지 않았다. - P115

중산간 지대에서 잡힌 청년들 예닐곱명이 포승줄에묶이는 중이었다. 지서에 끌려가 고문당할 생각에 가슴이 오그라들고 무릎에서 힘이 빠져 비틀거렸다. 머뭇거리며 포승줄을 받으려고 두 손을 내밀던 한 청년이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덤벼들어 경찰의 면상을 주먹으로갈기고는 아아아, 소리치며 산을 향해 내달렸다. 그를향해 수십발의 총알이 날아갔다. 자살이었다. - P115

장 경찰지서의 취조실, 시멘트 바닥에 쓰러진 채 한번만 봐달라고, 살려달라고 쉴 새 없이 애원하는 청년의입을 고문자의 군홧발이 걷어찼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죽기로 결심한 청년이 난로의 부삽을 들고 덤벼들어 고문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다른 경찰이 부삽을 든 청년을 사살했다. 자살이었다. - P115

쇠좆매, 사쿠라 몽둥이, 목검, 장작개비로 두들기고, 후려치고, 개머리판으로 어깨를 찍고, 집게로 손톱을뽑고, 드럼통에 넣어 마구 굴리고, 꿇어앉혀 장작개비와 각목을 무릎 안쪽에 끼우고 허벅지를 군홧발로 자근자근 밟고, 일본도 칼등으로 머리통과 어깨를 내리치고, 군홧발로 복부와 고환을 걷어차고, 벗은 가슴팍에 담뱃불을 비벼 끄고, 노인의 수염을 라이터 불로 태우고, 남자 여자 가리지 않고 발가벗겨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푼 물을 코에 졸졸 붓고, 긴 머리를 말꼬리에 묶어 말을 달리고, 두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비틀고, 말고삐 올가미를 목에 걸어 끌고 다니고, 개머리판으로 입을 부숴 부러진 앞니가 옥수수알처럼 토해지고, 찌르르찌르르 전기 고문으로 까무러뜨리고, 어깨뼈를무너뜨리고, 고막을 파열시키고・・・・・ - P118

이러한 무차별 강경 진압은 경비대 내부에 큰 반발을불러일으켰다. 경비대 병사 마흔한명이 집단 탈영하여 입산했는데, 이틀 후 그중 이십명이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8월 15일, 마침내 삼팔선 이남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 P119

그런 상황에서 삼팔선 이남에 단독정부가 수립되자민심은 급격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수립되었으니 이제는 모든 게 끝나버렸다고, 싸움은 비참한 패배로 끝나고 말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얼마전까지는 모든 활동이 분단을 획책하는 외세, 즉 미군정에 대한 정당한 투쟁이었지만, 단독정부일망정 정부가수립된 지금 더이상의 투쟁은 반역 행위가 될 뿐이라는생각이었다. - P125

살기 위해서는 굴복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똘똘 뭉치게 하더니, 절망적 상황이 된 지금에는 공포가 사람들을 갈라놓았다. 군경 토벌대의 무자비한 파괴 공작은 그때까지 한 몸 같았던 도민공동체를두쪽으로 찢어놓았다. 두쪽으로 찢겼을 뿐만 아니라 서로 적대 관계가 되도록 내몰렸다. 한 몸의 오른팔과 왼팔이 서로 적이 되어버렸다. 모든 사람이 좌냐 우냐, 산이냐 해변이냐, 철저하게 양분되어 찢겨나갔다. 저항 세력을 산부대, 산군 혹은 산사람이라고 부르던 것이 토벌대가 시키는 대로 차츰 폭도 혹은 산폭도로 변해갔다. 폭도놈, 폭도 년이라고 흔히 불렀다. 처음에는 차마 그 말을입에 담지 못했으나 차츰 그렇게 부르는 것이 살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산사람은 이제 두렵고 낯선 대상이되었다. - P127

불 속의 나무들이 하나씩 타서 바스라져 가라앉을 때마다 무수한 금빛 불티가 화르르 날아올랐다가 허연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 두길이 조금씩 작아져가는 모닥불에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넣어 불길을 키웠다. 모닥불 주위의 사람들은 취기에 몸이 무거워지면서 말이 점점 느려졌다.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가 이어지면서 자주 침묵이 끼어들었다. 펄럭이는 주황빛 불길의 황홀한 춤이 그들의 정신을 빼앗았다. 불은 따뜻한 온기로 그들의 몸을감싸주었다. 혈육처럼 따뜻하고 다정한 온기였다. 두길은 그 불 속에 영혼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한 느낌은 조상들이 그 들판에서 노숙하면서 피웠을 모닥불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 P168

활활 타는 불 속에서 조상들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불 주위의 사람들은 모두 같은 표정으로홀린 듯이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그 불 속에 모든 게 있다는 듯이, 그 불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처럼. 그 모닥불은 옛 조상들이 피웠던 모닥불과 똑같고, 조상들의 표정과 똑같은 표정으로 자신들이 불을 바라보고 있다고두길은 생각했다. 추방당한 자들, 유배자들, 망명자들, 착취당한 자들의 설움, 초원에 뿌려진 문행노, 김통정, 강제검, 이재수의 군사들의 사나운 피…… - P169

보름달이 구름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밤이 늦어 사람들이 모닥불을 끄고 아지트로 돌아갈 무렵이었다. 대림을 부축하고 천천히 걸어가면서 두길은 달빛 비치는 초원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묻혔던 드넓은 공간이 달빛에 하얗게 드러나 있었다. 그 환한 빛이 뼛속까지 스미는 듯시리게 느껴졌다. 사방은 바람도 없이 고요했다. 드넓은 하얀 정적 속에서 문득 어떤 야릇한 울림이 들리는 듯했다. 우우우우우, 땅속 깊은 데서 울려나오는 듯한 대지의 탄식 소리, 거기에 묻힌 조상의 탄식 소리…… - P169

그러나 허서방을 경찰의 첩자로 의심한 산군들은 그를 전송하는 척 산길을 함께 내려가다가 처형해버렸다.
그 사실은 다른 아지트에도 알려져 조천리 입산자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우리가 적을 닮아가고 있다고, 사람을 함부로 죽인다고, 왜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느냐고 개탄했다. 그러나 증오에 가득 차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된 산군들 앞에서는 두려움에 차마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없었다. - P170

10월 17일, 해안선에서 5킬로미터 이상 지역의 통행을금지하고 이를 어길 경우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떨어졌다.
10월 18일, 해상봉쇄령이 내려 공무를 수행하는 공무원을 제외한 민간인의 육지부 출입이 금지되었다.
10월 19일, 여수의 14연대가 제주도 파병에 반대하여무장봉기를 일으켰다.
그 직후 경찰이 산부대 대장 이덕구와 그의 두 형제의집에 방화했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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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총격 사건 이후 반년 가까이 계속된 경찰의 가혹한 탄압은 도민의 가슴에 깊은 적개심을 심어주었다.
많은 젊은이가 피의자 신분이 되었고, 쫓기면서도 곡식공출 반대와 단독정부 반대 삐라 투쟁을 필사적으로 벌였다.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서북청년단은 이러한 상황을 당분간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육지 경찰에 대한 도민의 적대감을 익히 아는 터라 섣불리 본색을 드러내지않았다. 그들은 각 지서에 배치되었는데, 그중에는 글자를 좀 알아 경찰학교에서 일개월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순경으로 탈바꿈한 이들도 있었다. - P9

봉급이 없는 그들에게는 폭력 행위만이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폭력을 사용해 약탈할 수밖에 없었다. 잔인한 폭력일수록 피의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내기 쉬웠다. 잡혀가면 다짜고짜 사정없이 구타했는데, 처음에 사람들은 그것이 돈을 달라는 뜻인 줄 모르고무조건 살려달라고 애원하기만 했다. 미군정이 서청에게 봉급을 주지 않는 것은 굶주린 야수처럼 그들의 잔인성을 극대화해 민중의 저항을 짓밟게 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고 리베라 상회의 장영발은 판단했다. 또한 그들은 세관이 하는 일에 불법적으로 관여하여 복시한 사
건때처럼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었으니, 일본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밀수품이라고 압수하여 육지 상인들에게 팔아넘겨 이득을 챙겼다. 미군정의 조선인 일인자 조병옥이 "공산주의자를 없애기 위해서는 어떠한 악마와도 손을 잡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 악마가 바로 서청이었다. - P12

날씨 화창한 10월의 어느 날, 문득 자기가 공부하던 책상을 보고 싶어진 창세가 몰래 학교 울담을 넘어 들어갔다. 학교 바로 뒤, 길건너에 경찰지서가 있기 때문에 무척 조심스러웠다. 학생들이 사라진 학교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쾌활한 목소리들, 몸짓들이 가득하던 운동장은 텅빈채 잡풀만 자라 있었다.
살그머니 교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창세는 오래고여 있던 뻑뻑한 공기에서 기분 나쁜 묵은 냄새를 맡고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언젠가 행필과 함께 상여막 안에 들어가 맡았던 바로 그 냄새, 묵직한 죽음의 냄새였다. 한쪽 유리창으로 들어온 햇빛이 창의 조그만 사각 무 - P17

늬를 바닥에 떨구고 있을 뿐 교실 내부는 전체적으로 그늘져 어두웠다. 학생들이 사라진 텅 빈 교실에 살아 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은 책걸상들과 그 위를 덮은 먼지뿐이었다. 낯선 정적 속에 잠겨 있는 책걸상들, 그 위에 두꺼운 천처럼 덮여 있는 뿌연 먼지…… 그 야릇한광경이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어떤 불길한 징후처럼 느껴져 몸서리가 났다. 어둠 속으로, 그늘 속으로 사라진이들이 다시는 이 교실의 자기 책상으로 돌아오지 못할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발을 떼고 몸을 움직이자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창세는 소매로 코를 가리고 재채기를 참으면서 자기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를덮은 잿빛 먼지는 고르게 반반하고 부드러워 뜻밖에 아름답게 보이기까지했다. 창세먼지 위에다 손가락으로 자기 이름을 써보았다. 안창세. - P17

그와 반대로 창세의 모친은 서청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종종 공짜로 군복을 수선해주었다. 만옥과 창세 두남매에게 장차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미리 그들을 사귀어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군복을 수선하는 동안 그들은 툇마루에 얌전히 앉아서 능란한 미싱 박음질을 홀린 듯이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의 얼굴은사악한 그늘이 조금도 없는 앳된 모습이었다. 창세 모친은 그런 모습이 신기하고 가슴이 뭉클해 찐 고구마 같은것을 내놓았는데, 그러면 진심으로 고맙다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 P39

해가 바뀌어 1948년 무자년이 왔다.
창세는 이제 열여섯살이 되었다. 이팔청춘의 십육세, 아이에서 어른으로 탈바꿈하는 나이였고, 그래서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는 위험한 나이였다.

탄압 일변도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 새해를 맞았는데, 벽두부터 다시 한번 검거 선풍이 휘몰아쳤다. 배신자 한명에 의해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이 누설되었다. 이름을빼앗긴다는 것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었는데, 그만 당원명부를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미군 트럭 여러대가 동원된 가운데 단시일 내에 수백명이 체포되었다. 1.22사건이었다. - P42

3월 6일, 조천중학원 자치회 회장 김용철이 조천 지서에 잡혀간 지 이틀 만에 돌연사했다. 마을 청년들과 학생들 수십명이 나서서 샅샅이 수색했는데, 시신은 마을 밖냇가 덤불 속에 버려져 있었다. 얼굴이 피투성이였고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구타로 인한 뇌출혈임이밝혀졌다. 천장에 거꾸로 매달아놓고 사쿠라 몽둥이로때렸다고 지서에서 심부름하는 급사 아이가 증언했다.
학우의 등에 업혀 집으로 돌아온 김용철은 마당 한가운데 깔린 멍석 위에 눕혀졌다. 넓은 마당은 뒤따라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들의 시신을 보자마자 어머니는 날카롭게 비명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단 한번의 비명이었다. 그러고는 입이 굳어버린 듯 더이상 비명도 울음도 내지 않았다. 아들의 시신을 안고 퍼들퍼들 미친 듯이 나뒹굴었다. - P63

김용철의 죽음은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않았던 마을 청년들에게 완전한 좌절을 의미했다. 그들은 밤잠을 이룰 수 없었다. 두려움에 가슴이 짓눌려 잠을이룰 수 없었고,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정의로운 국가를 갈망하여 지난 삼년간 열정적으로뛰어온 그들이 아닌가! 나와 세계가 하나였던 열광의 시간, 이제 그 세계가 무너지고 말았다. 희망이 살해당했다는 크나큰 좌절감이 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몰고 왔다. 그것은 자기파괴의 불씨가 되었다. 그 분노가 그들을 떠밀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돌이키기 어려운 고집 세고 완강한 기질, 참다참다 못 참게 되면 눈이 뒤집혀 물불 가리지 않는, 먼 조상으로부터 유전된 기질에 불이 붙고 만 것이다. 지난 일년간 죄 없이 모진 탄압을 당하면서 쌓여온분노, 서청과 경찰에 대한 분노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이제는 더이상 참을 수 없다고 청년들은 생각했다. - P71

행필이 마침내 자기 집 왕대숲에서 죽창을 깎았다. 다른 청년 두명과 함께 죽창을 깎았다. 솔개가 낮게 날면암탉이 병아리들을 데리고 오르르 숨어들곤 하는 대숲이었다. 솔개에 쫓긴 병아리들처럼 경찰에 쫓겨 대숲에숨던 행필이 이제 거기에서 죽창을 깎았다.
봄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는 짙푸른 대숲, 무수한 댓잎들이 눈부시게 햇빛을 튕기며 초록 물고기떼처럼 파닥거렸다. 결의에 찬 눈빛의 그들은 대숲에 들어가 적당한 왕대를 골랐다. 톱날에 베인 왕대가 쓰러지면서 스댓잎들이 우수수 소리를 냈다. 이제 막 땅거죽을 뚫고 솟아나기 시작한 죽순들이 발에 차였다. 지난 삼년간 왕대발의 죽순처럼 왕성한 생명력으로 빠르게 성장해온 그들이었다. 그 성장의 열정이 무자비하게 짓밟힌 지금, 그들은 왕대를 베어 죽창을 깎았다. 낫자루를 꽉 쥔 손의뼈마디가 하얗게 두드러졌다. 왕대 끝을 낫으로 깎아 말의 귀처럼 뾰족하게 날을 세웠다. 그 뾰족한 창끝에서 싱싱한 풋내가 짙게 풍겼다. 창끝을 숯불에 굽고 콩기름에담갔다. - P77

4월 3일,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 자정이 넘은 시간, 어둠을 태우면서 이 오름 저 오름, 이 동산 저 동산에서 펄떡펄떡 봉화가 솟아올랐다. 봉홧불을 신호로 각 지역의산부대가 일제히 경찰지서들을 습격했다. 곳곳의 전신주와 전화선이 이미 절단되어 통신이 마비된 상태였다.

만세동산, 서우봉, 원당봉, 기시네오름에도 봉화가 올랐다. 대장 양순태가 열댓명의 산군을 이끌고 조천 지서를 향했다. 강행필도 죽창을 들고 참여했다. 총을 가진 자는 단 두명뿐, 나머지는 모두 죽창이었다.  - P79

강경 무력 진압 명령을 받은 박진경은 취임사에서 말했다. "제주도 폭동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삼십만명이 희생되더라도 무방하다. 제주 백성 아니라도 나라가 선다." - P87

경무부장 조병옥 역시 서청 오백명을 증파하면서 공언했다. "건국에 저해가 된다면 비행기로 휘발유를 뿌려온 섬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 P88

5.10총선거를 앞두고 전국적으로 반대 투쟁이 일어났다. 한민당을 제외하고 좌우를 막론한 모든 정당이 투쟁의 대열에 나섰다. 상황은 내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으니,
무력 충돌로 쌍방간에 백오십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주도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산부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선거인명부를 탈취했고, 선거위원들에게사표를 제출하도록 강하게 압박하면서 죽창을 휘둘렀다. 어느 마을에서는 선거위원장이 살해당하기도 했다.
그러한 무력 충돌에서는 당연하게도 죽창이 미제 카빈총을 당해낼 수 없어 산부대 쪽 사망자가 세배나 많았다. - P88

때는 개망초꽃도, 찔레꽃도 하얗게 피어나는 5월이었다. 몇발짝 떨어진 돌덩이 위로 얼크러진 찔레 덤불 속 흰 꽃들이 두길의 눈에 들어왔다. 센 바람에 흔들린 꽃향기가 짙게 풍겨왔다. 초원은 지대가 높아 바람이 세고 구름이 빨리 움직였다. 바람에 풀밭이 물결처럼 굽이치고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찔레 덤불, 망개나무 덤불이 들판위로 굴러갈 듯이 마구 뒤흔들렸다.
질주하는 구름들이 초원에 그림자를 던질 때마다 햇빛이 밝았다 흐렸다 했다. 두길에게는 그것이 마치 대지의 불안한 맥박, 가쁜 숨결처럼 느껴졌다. 무사하고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이었지만 숨죽이고 뭔가를 기다리는듯, 금방 무슨 큰일이 닥칠 것만 같은 느낌, 아니,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이미 어떤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만 듯한 느낌이었다.  - P99

제주도민의 총선거 보이콧에 크게 분노한 미군정은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발동했다. 박진경의 경비대가 토벌의 주도권을 잡고 나섰다. 경비대가 토벌작전을 전담하게 되자 경찰은 한발 물러나 경비대가 잡아온 사람들에대한 심사를 맡았고, 때로는 군경 합동으로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다. 미군이 토벌 작전을 감독하고, 토벌대를 훈련시키고, 잡혀온 사람들을 심문했다. 미 극동사령부는구축함을 급파하고 날마다 전투기와 정찰기를 띄웠다.
이때부터 섬 도처에서 노골적인 학살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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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나고 사귀었던 한사람 한사람을설명해 나가는 작업은 의외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그 삶들 속에 모든 삶의 비밀이 숨어 있음을알게 되었고, 그래서 그들의 실체가 정확하게알려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한 인물에 대한 보고서는 곧 그 인물의 삶이박혀 있는 사회에 대한 보고서일 수도 있다.
앞으로도 나는 이 작업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화자가 되어 ‘당신‘을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를계속하여 기록해 나가고 싶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를모색하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애정과 신뢰를 쌓으면서사람 살 만한 세상을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다.
-「머리말을 대신하여」에서

겨울해는 일찍 저문다. 어찌나 일찍 어둠이 찾아오는지 늦은점심 찾아먹고 돌아서면 벌써 밤이다. 요즘은 더욱 그렇다. 아침에 받아보는 네 개의 조간신문을 꼼꼼하게 다 읽고나면 어느새 석간이 오고 다시 혼미한 정치판 기사 속에 빠져 헤매다 보면창 밖으로 이미 저녁이 날아와 있곤 한다.
밤의 그물망에 포위되어 있는 우리 동네를, 멀고 아름다운 동네를, 원미동을 보노라면 문득 적막해진다. 추위가 사람들을 꼼짝 못하게 하는 겨울밤만 아니라면 원미동의 밤도 상당히 발랄한 편이니까. 적막함을 관망하기 위해서, 라는 명분을 앞세워나는 종종 창 앞에 바싹 붙어서서 관찰하는데 이때 필수적인 것은 조명이다. 바깥은 어두운데 안쪽에만 휘황하게 불을 밝혀 놓으면 구경거리의 자리가 달라지는 법이었다. 거리의 모든 시선에 노출당하여 실없이 구경거리가 되지 않으려면 일단은 불을꺼야 한다. 그래서 나는 종종 마루의, 혹은 방의 불을 꺼버린 채 바깥 찬공기를 마시며 거리를 내려다 본다.  - P11

갈등에 대하여, 그처럼 많은 시간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외벽의 누수방지를 위해 공사를 하고나면 그것의 완벽성이 입증되기까지 그는 고민하고 갈등하였다.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옥상의 방수공사를 맡게 되었을 때, 그는 사흘간 식음을전폐하고 일에 매달렸고 그뒤 장마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한 달동안 수없이 갈등하며 초조하게 공사 결과를 확인하였다.
보일러도 그런 까닭에 손대지 않았다. 방이 따뜻하지 않다거나 곁불이 새어 화덕만 망가지는 결과가 종종 있었으며 그럴 경우 그는 갈등을 뛰어넘는 자기 불안에 식욕을 잃을 지경이었다.
말하자면, 우리 동네의 그 페인트공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는 대단히 철학적인 인식구조를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손 댄 모든 공사의 내용에 분석과 해석을 거듭하다가 모순에 빠져 회의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종류의 하자 보수공사에서 오직 갈등만 익힌 그는 페인트공으로 스스로를 낙착짓고자 하였다.
페인트는, 초조롭게 결과를 기다릴 만큼 노골적인 하자는 없을 분야였다. - P27

며칠 전에 여대생 셋이 우리집을 찾아왔다. 8년 전쯤 내게서국어를 배우던, 말하자면 제자들의 방문이었다. 학교를 떠난 후로는 서로간에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우리들은 금세 서로서로를 확인하곤 옛기억들을 펼쳐나갔다. 두 사람은 대학 졸업반이고 하나는 이제 졸업반이 된다고 하였다. 착하고 귀여운 내제자들은 기특하게도 내 책들을 모두 사 읽은, 독자들이기도 하였는데 그녀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독후감이 이랬다.
"선생님께서 왜 원미동처럼 가난한 동네에 살게 되었는지 정말 궁금했어요. 형편이 안 좋으신 것이나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했구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그다지 가난한 동네가 아니네요.
아니, 되려 중산층 이상의 동네로 보여요."
나는 우선 제자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격했다. 옛 스승의 처지가 곤란한 것은 아닐까 염려했다니 감격할밖에.
『원미동 사람들』이란 제목의 연작소설집이 나온 뒤부터 나는종종 이와 비슷한 소리를 듣는다.  - P31

한 동네에서 오래 살다보면 이웃들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아는것이 많아진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사건을 통해서 어떤 인물을더욱 자세히 알게 되기도 하며, 때로는 전혀 다른 모습을 발견하고는 한 인물에 대한 인식에 수정을 가하게 된다.
나는 오랫동안 이웃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일에 꽤 애정을 바치고 있었는데 그 일은 내가 바로 그들에게 애정을 바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주는 작업이기도 하였다. 그런 마음 없이는 도저히 어떤 누구도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웃들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묘사하면서 가끔 즐거웠고많이 쓸쓸하였다. 그들의 삶이 성공적이든 실패한 것이든 관계없이 내 느낌이 그러했다. - P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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