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민스크를 떠났어. 사람들은 적의 총격 때문에 큰길 대신 숲길을택해 걸었어. 어디선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어린 소녀의 목소리가들렸지. ‘엄마, 전쟁이래요.‘ 우리 부대는 퇴각하는 중이었어. 호밀이 여물어가는 드넓은 들판을 따라 이동했지. 길가에 나지막한 농가 오두막이 나타났어. 이미 스몰렌스크 지역에 접어든 거야....… 길가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어. 그 여자가 그 여자네 작은 집보다 더 커 보이더군. 여자는 러시아 전통 문양이 수놓인 리넨 옷으로 몸을 감싼 채 양팔을 가슴위에서 십자 모양으로 모으고는 고개 숙여 절을 했어. 병사들은 계속 행군했고, 여자는 병사들에게 깊이 고개 숙이며 ‘주님께서 당신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시길‘이라고 했지. 병사 한 명 한 명에게 일일이 고개 숙이며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러자 모든 병사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지..... - P397

침대 시트를 갈아야 했어…… 그래서 침대를 깨끗한 시트로 갈고 남편 다리에도 새 붕대를 감아줬지. 그리고 남편을 베개 위까지 끌어올리려는데 남자라 무겁더라고. 그래서 거의 남편에게 닿을 듯 몸을 기울여 끌어당기는데 느껴지는 거야, 이미 끝이라는 게 일이 분 후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게…… 저녁이었어. 9시 15분…… 몇 분이었는지도 기억나 ..… 나도 죽고 싶었지.…… 하지만 그때 뱃속에 우리 아이가 있었고, 그 아이가 내가 살아야 할 이유였지. 아이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견딜 수 있었어. 1월 1일에 남편을 묻었어. 그리고 38일 후에 우리 아들이 태어났지. 1944년에 태어나 이제는 어엿한 아빠가 되었어, 남편 이름은 바실리였어. 아들 이름도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우리손자도 바샤야∙∙∙∙∙∙ 바실료크……"

류보피 포미니치나 페도센코, 사병, 간호병 - P409

"날마다…… 눈앞에서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었어. 젊고잘생긴 남자가 죽어간다는 현실을 ..... 죽어가는 이에게 ......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지. 죽어가는 이를 위해 의사로서 아무것도 해줄 게 없다면 여자로서라도 뭔가 해주고 싶었어. 웃어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어......
전쟁이 끝나고 숱한 해가 지났을 땐데 어떤 남자가 나한테 당신의 환한 미소를 기억하고 있다고 고백하더군. 나야 당연히 그 사람이 기억나지 않았지. 수많은 부상병들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나한테 그러는 거야. 내 미소가 자기를 이른바 저세상에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오게 했다고 ......여인의 미소가…….."

베라 블라디미로브나 셰발디셰바, 대위, 외과의 - P409

 특무상사는 우리를 위해 시까지 썼어. 아가씨들이 5월의장미처럼 감동적이며, 전쟁 때문에 우리 아가씨들의 싱그러운 정신이 불구가되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지.
우리가 전선으로 출발할 때 맹세한 게 하나 있어. 전장에서는 어떤 연애도 하지 않겠다는 맹세. 하고 싶은 일은 모두, 만약 살아남는다면, 전쟁 후에 하겠다고 전쟁 전에 우리는 키스도 한 번 해본 적이 없었어. 우리는 요새 젊은이들보다 그런 일에 더 보수적이었거든. 우리에게 한 번키스는 평생의 사랑을 의미했지. 전선에서의 사랑은 일종의 금기였어.
만약 누가 연애를 하다가 지휘부에 들키잖아? 그러면 대개 둘 중 한 명이 다른 부대로 전출을 가야 했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단한 방법이었지. 우리는 연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줬어. 우리가 했던 유치한 맹세를 어긴 거야…... 그래, 우리는 사랑을 했어....
사랑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선에서 못 버텼을 거야. 사랑이 구한 거지. 사랑이 나를 구원했어……"

소피야 크리겔, 상사, 저격수 - P410

하지만 나는 그 사람이 고마워. 그 사람 덕분에 사랑이 뭔지 알았고 그 사랑을 누렸으니까. 평생 그 사람을 사랑했어. 숱한 해가 지나도록 그 사랑을 간직했지. 이제 와 무슨 이유로 거짓말을 하겠어. 이렇게 늙어버린걸. 그래, 평생을 가슴에 품고 살았어! 하지만 후회하지않아.
딸아이가 ‘엄마, 엄마는 대체 그런 남자 어디가 좋다고 그래요?‘라며그 사람이 세상을나를 비난했어. 그래도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해떴다는 걸 얼마 전에 알았어. 많이 울었지. 그 일로 우리 딸과 다퉜어. ‘왜 울어요? 그 사람은 엄마한테 진즉에 죽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지금도 그 사람을 사랑해. 내 기억 속에서 전쟁은 내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야. 그곳에서 행복했으니까…..
다만 부탁인데, 내 성은 밝히지 말아줘. 내 딸을 위해서……"

소피야 K-비치, 위생사관 - P413

또하나의 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는 그 누구도 지도에 중립지대가 어디를 통과하며 전선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따위를 표시하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얼마나 많은 무장세력들이 목숨 걸고 싸웠는지 헤아리지도 않았다. 이들은 고사포, 기관총, 사냥총으로 싸웠고, 또 낡은 베르당총으로 싸웠다. 잠깐 숨 고를 여유도 대대적인 총공세도 없이 대부분 많은 이들이홀로 싸웠다. 그리고 홀로 죽어갔다. 사단이니 대대니 중대니 하는 군대가 아니라 민중이 직접 빨치산이 되고 지하공작원이 되어 적과 맞섰다. 남자들, 노인들, 여자들, 그리고 아이들까지. 톨스토이는 이처럼 다양한 인간 군상의 결사항전을 두고 ‘민중전의 곤봉‘이니 ‘애국심의 감 - P435

춰진 온기‘라 칭했고, 히틀러는(나폴레옹에 이어서) 자기 부하들에게 ‘러시아가 규칙대로 싸우지 않는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이 전쟁에서는 죽음이 가장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정말 두려운 건따로 있었다..... 전쟁의 한복판, 전선에서 자기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병사를 상상해보라. 아이들과 아내와 늙은 부모, 언제든 사랑하는 가족을 희생시킬 각오가 돼 있어야 했다. 가족을 죽음의 길로 내보낼 각오가. 그래서 이 전쟁에서는 용맹무쌍함도 비열한 반역 행위도 증언해줄 목격자 없이 묻히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시골마을들에서는 전승기념일에 기뻐하는 대신 눈물을 흘린다. 아니 통곡을 한다. 가슴을 친다.  "정말 끔찍했어….... 피붙이들을 모두 땅에 묻었지. 전쟁터에 내 영혼도 묻고 왔어." (B. G. 안드로츠크, 지하공작원) - P436

지휘관은 항복해야 하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나 번민에 휩싸였지. 우리는 지휘관을 잠시도 혼자 두지 않았어. 계속 옆에 붙어 있었지. 자살이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모스크바와 연락을 취했어. 상황을 보고했지. 지시가 내려왔고 ...... 지시를 받은 바로 그날 부대에서 회의가 소집됐어. 결국 ‘독일군의 도발행위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결정이 내려졌지. 지휘관은 공산주의자로서 당의 규율에 복종했어…… 이틀 후 우리 정찰병이 마을로 내려갔어. 그들이 가지고 온 소식은 끔찍했어. 지휘관의 가족이 교수형을 당했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첫 전투에서 지휘관은 전사하고 말았어……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어. 전혀 예기치 못한 죽음. 내 생각에 일부러 죽음을 택한 게 아닌가 싶어.……
나는 그저 눈물만 흘려 말은 못하고 ......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는 확신이 안 서는 걸 어떡해? 믿게 할 자신이 없는 걸.…… 사람들은 그저 편안하게 살기를 원하지. 고통스러운 이야기 따위는 들으려고 하지 않아...…." (V. 코로타예바, 빨치산 병사)
그래서 나는 더더욱 이 일을 멈출 수 없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 P437

밤에 누워서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엄마는 나 때문에 돌아가신 거야. 아니, 나 때문이 아니야…… 만약 내가 가족 때문에 겁을 먹고 적과 싸우지 않았다면, 만약 다른 누군가도 나와 같은 이유로 똑같이 그랬다면,
또다른 누군가도, 그리고 또다른 누군가도 그랬다면 지금의 승리는 없었을 테니까.‘ 그렇다고 그 일을 다 잊었다고는.... 말할 수 없어….. 엄마가 저만큼 걸어오는데..... 발포 명령이 떨어지는 거야…… 그러면 나는 엄마가 나타나는 쪽에 총구를 겨눠야 했지..… 엄마의 하얀 머릿수건……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당신은 몰라. 알 리가 없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 힘들어. 밤에 문득 창밖에서 아이 웃음소리나 목소리가 들리면 온몸에 경련이 일지. 꼭 그때 그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아서, 비명소리 같아서. 하루는 문득 잠이 깼는데 숨을 못 쉬겠는 거야.  당신은 사람 타는 냄새에 숨이 막혀서..…탈 때 나는 냄새가 어떤지 모를 거야. 특히 여름에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면서도 달짝지근한, 그런 냄새지. 지금 나는 구역집행위원회에서 일하고 있어. 어디든 화재가 발생하면 그곳으로 가서 서류를 작성하는 게 내 일이야. 하지만 농장 같은 데서 불이 나 동물들이 타 죽었다고 하면그곳은 절대 안 가. 갈 수가 없어..…그때가 떠올라서...... 그 냄새 …… 사람들이 불에 타던 냄새 ..... 밤에 잠이 깨면 정신없이 향수를가지러 가. 하지만 향수에서도 그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사방에서 그 냄새가 나…… - P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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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P 373, 374



전쟁터의 수많은 사람들 ...... 그리고 전쟁터의 수많은 일거리들……
죽음의 언저리만이 아니라 삶의 언저리에도 일은 많다. 전쟁터라고해서 총을 쏘거나 맹사격을 퍼붓고, 지뢰를 놓거나 제거하고, 폭격을 가하거나 폭파하고, 백병전에 뛰어드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전쟁터에서도 빨래를 하고, 죽을 끓이고, 빵을 굽고, 부엌 식기들을 씻고, 말을 돌보고 자동차를 수리하고, 관을 짜고, 우편물을 배달하고, 군화에 밑창을대고, 담배를 들여온다. 어쩌면 오히려 전쟁터에 더 많은 일상의 삶이있는지도 모른다. 하찮고 사소한 일들 역시. "이렇게 말하면 이상할 거예요. 그렇죠? 전쟁터야말로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이 산더미같이 많다면말이에요." 위생병 알렉산드라 이오시포브나 미슈티나는 이렇게 회상한다. 군대가 앞서가면 ‘제2전선‘이 그 뒤를 쫓아갔다. 세탁부, 요리사, 기 - P299

계수리공, 우체부.…
그들 중 한 사람이 나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우리는 영웅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대 뒤에 가려졌지요." 그곳, 무대 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진창길을 따라 행군중이었지. 말들은 그 진창에 빠지거나 정신없이 넘어졌어. 화물트럭들도 진흙 속에 박혀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했지…… 병사들은 대포를 자기 몸에 감아서 끌었어. 어디 그뿐이야.
곡식수레며 속옷수레며 이불수레도 끌어야지, 담배상자도 끌어야지. 담배상자 하나가 미끄러져 진흙탕에 빠졌어. 그랬더니 세상에, 욕을 욕을하는데 ...... 병사들에겐 담배도 포탄이나 탄약만큼 중요했거든......
남편이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나한테 그러는거야. ‘두눈똑바로 뜨고 봐! 이건 서사야! 서사라고!"

타티야나 아르카지예브나 스멜랸스카야 종군기자 - P300

-전선에서 무슨 일을 하셨나요?
-부상병들을 돌봤어. 물을 먹여주고 밥을 먹이고 변기를 가져다줬지 이 모든 게 우리 일이었어. 나보다 나이 많은 어떤 언니랑 짝이었는데 그 언니가 처음에 나를 많이 도와줬어. ‘환자가 소변기를 찾으면 나를 불러.‘ 부상자들은 전부 팔 없는 사람, 다리 없는 사람 같은 중환자들이었어. 첫날은 언니가 도와줬지만 그다음부터는 나 혼자 해야 했지. 그언니가 하루종일, 밤새도록 나랑 같이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부상자가나를 불렀어. ‘간호사, 소변기‘
그 환자에게 변기를 내밀었어. 그런데 받지를 않네. 보니까 팔이 없는거야.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더라고.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막연하게나마 알겠는데,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정말 모르겠는 거야. 몇 분을 가만히 서 있었어. 나를 이해하겠어? 그 환자를 도와야 하는데...... 나는그게 뭔지 몰랐어. 한 번도 본 적도 없었고, 학교에서도 그런 건 배운 적이 없었으니까.……

스베틀라나 니콜라예브나 류비치, 위생부대원 - P303

"나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어...... 그래서 꾸며서 말할 줄은 몰라…… 우리는 병사들 옷을 담당했어. 병사들의 옷이란 옷은 죄 가져다빨고 다림질도 했지. 그러니 거기 무슨 영웅담이 있겠어. 기차를 타고가는 일은 별로 없었고 주로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말들이 너무 지쳐서 베를린까지 거의 우리 발로 걸어갔다고 보면 돼. 글쎄, 또 무슨 일을 했더라. 우리가 한 일이라…… 그래, 부상자들을 끌어 나르는 것도 도왔어. 드네프르에서는 탄약이며 포탄도 우리가 직접 다 들어서 나르고, 차로는 운반할 수 없는 상황이었거든. 몇 킬로그램씩을 팔로 안고 날랐지.
그리고 방공호도 파고 다리도 놓고…….
한번은 적에게 포위를 당했어. 그래서 나도 다른 병사들처럼 뛰어다니고 총도 쐈지. 내 총에 사람이 죽었는지 어쨌는지는 나도 잘 몰라. 나는 그저 다른 병사들처럼 뛰고 총 쏘고 한 것뿐이니까.
그런데 어쩜 이렇게 생각이 안 나지. 그 많은 일을 겪어놓고도! 차차기억이 나겠지....… 우리집에 한번 더 와……

안나 자하로브나 고를라치, 사병, 세탁병 - P306

"나는 군대에서 기록병사였어..... 그 일을 맡기기 위해 나를 사령부로 보내려고 설득들을 하는데 ..... 내가 전쟁 전에 사진사로 일한 사실을 안다면서 자기네 사령부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
지금도 똑똑히 기억나는데, 나는 죽음을 카메라에 담는 게 싫었어. 전사한 사람들을 찍고 싶지는 않더라고 주로 병사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지. 담배를 피운다거나 포상을 받고 활짝 웃는다거나 할 때, 그때 나한테 컬러필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흑백필름밖에 없었거든. 아, 연대 깃발하강식 ..... 정말 멋지게 찍을 수 있었는데……
요즘.…. 기자들이 찾아와 물어. ‘전사자들 사진도 찍었나요? 전장은....‘ 그런 사진이 있나 뒤져봤지…… 별로 없더라고. 죽음에 대한 사진은 잘 안 찍었거든…… 부대에서 누군가 전사하면 병사들이 나를찾아와 사진을 부탁했어. ‘혹시 그 친구 살아 있을 때 사진 있나요? 그러면 같이 사진을 찾는 거야…… 환하게 웃고 찍은 사진을……"

엘레나 빌렌스카야, 중사, 기록병 - P307

"우리는 건설 일을 했어…… 철도 건설하고 배다리도 놓고 엄폐호도 만들었지. 전선 바로 옆에서 적에게 들키지 않도록 밤에만 땅을 팠어.
벌목도 했어. 우리 분대원들은 대부분 여자들이었어. 게다가 다들 어렸고, 남자들도 몇 명 있긴 있었지만 벌목을 할 만한 건강이 아니었지. 그러면 그 나무를 어떻게 날랐냐고? 여러 명이 다 같이 달려들어 날랐어, 어떤 나무는 분대원 전체가 힘을 합쳐서 겨우 끌어내오기도 했지. 손바닥이 파이고 까져서 피투성이가 되곤 했어. 어깨도……"

조야 루키야노브나 베르즈비츠카야, 건설대대 분대장 - P308

"나는 전쟁이 치러지는 4년 내내 돌아다녔어.... 도로 표지판을 안내 삼아 각지를 다녔지. ‘슈킨 농장‘ ‘코즈로 농장‘ .… 내가 맡은 임무는 보급기지에서 물품을 받아다 최전방 병사들에게 전달해주는 일이었어. 주로, 병사들에게 꼭 필요한 담배, 궐련, 부싯돌 같은 것들을 가져다줬지. 어디는 차량을 타고 가서 전달하고, 또 어디는 짐마차로 가기도했지만 대개는 병사 한두 명을 데리고 걸어서 갔어. 그 많은 걸 다 우리가 직접 들고서. 참호 같은 곳은 특히나 마차로 갈 수가 없었거든. 독일군이 마차 소리를 들으면 큰일이니까. 그래서 전부 우리가 이고지고 해서 가져갔지. 우리가 직접 다……"

엘레나 니키포로브나 옙스카야, 사병, 물품보급병 - P309

나는 고리키 시 통신학교의 우편근로자 양성 과정에 들어갔어. 과정을 마치고 전방부대인 제60보병 사단으로 발령받았지. 연대 우체국에서 장교로 복무했어. 그래서 최전선 병사들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지. 얼마나 좋은지 눈물을 뚝뚝 흘리고, 편지에 입을 쪽쪽 맞추더라고. 하지만 전쟁통에 가족을 잃거나 가족이 독일군 치하에 사는 병사들도 많았거든. 그런 병사들은 편지를 받을수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익명으로 편지를 썼지. ‘안녕하세요, 군인아저씨! 이름 모를 소녀가 당신께 편지를 씁니다. 아저씨는 어떻게 적군과 싸우세요? 언제 적을 물리치고 돌아오시나요?‘ 밤마다 앉아서 편지를 썼어…… 전쟁 내내 그런 편지를 수백 통도 넘게 쓴 거야.……"

마리야 알렉세예브나 렘네바, 소위, 우편병 - P310

몇 년 사이에 수백 가지 이야기들이 모였다…… 종류별로 책꽂이에 가지런히 정돈된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와 수천 장의 이야기 원고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찬찬히 페이지를 넘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둘씩 예기치 못한 모습을 드러내는 전쟁의 세계, 예전에 나는, 이를테면 이런 건 묻지 않았다. ‘어떻게 몇 년씩 참호안에서 쭈그려 자고, 맨바닥에 모닥불 피워놓고 잘 수 있나? 어떻게몇 년씩 똑같은 군화에 똑같은 군용외투만 입을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몇 년씩 웃지도 않고 춤도 안 추고 살 수가 있나? 여름에 여름옷도안 입고 어떻게? 높은 구두와 꽃도 다 잊어버리고 어떻게……‘ 그네들 모두 열여덟, 열아홉의 꽃다운 나이 아니었던가! 나는 으레 전쟁터에 무슨 여자의 삶을 위한 자리가 있겠느냐고 생각했다. 전쟁터에서 여자로 사는 건 불가능하며 전쟁터는 여자에게 금기의 장소라고 말이다.  - P337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 나는 이미 첫 만남에서부터 곧바로 알아차렸다. 여자들은 무슨 말을 해도, 심지어 죽음을 언급할 때조차도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는 결코 빠뜨리는 법이 없다는 것을(정말이다!). 아름다움은 여자를 여자로서 존재하게 하는 이유였다. "그 아이가 죽어서 관속에 누웠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는 거야..... 꼭 어여쁜 신부 같더라니까……"(A. 스트로체바, 보병) "메달을 받게 됐어. 그런데 내 군복이 너무 낡은 거야. 그래서 가제로 군복 칼라를 만들어 달았지. 어쨌든 하얀색이니까…… 칼라 하나 만들어 달았을 뿐인데, 그 순간 내가 최고로 아름다운 아가씨가 된 것 같더라니까. 거울이 없어서 볼 수는 없었지만. 아휴, 그땐 거울이 다 뭐야, 폭격에 죄 날아가고 남아난 게 없었는데……"(N. 예르마코바, 통신병) 그네들은 그때 어린 아가씨답게 어수룩했던 자신들의 작은 속임수부터 자잘한 비밀들, 남몰래 자기들끼리만통하던 신호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모두 즐겁게 털어놓았다.  - P338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일상 속에서, 전쟁터라는 ‘남자‘들의 임무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 들려주었다. 스스로의 본성을 변질시키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그들은 놀랍게도(40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쟁의 일상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들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소소한 사건들과 그때의 느낌, 색채, 소리 들까지. 그네들의 세계에서는 일상과 존재가 하나였고, 따라서 존재의 흐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전쟁도 평범한 삶의 한때일 뿐이었다. 그네들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사소한 것이 위대한 것을 압도하는 순간을 여러 번 목도했다. 역사마저 간단히 제압해버리는 그 순간을. "내가 전쟁터에서만 예뻤다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곳에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 지나가버렸어.  - P338

다 타버렸지. 그러고는 순식간에 늙어버렸어……" (안나 갈라이, 자동소총병)
수많은 시간의 결을 지나오면서 어떤 일들은 갑자기 커졌고 어떤 일들은 작아졌다. 인간적이고 내밀한 일들은 커졌다. 그리고 그게 나에게는 재미있게도 그네들 자신에게도 더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왔다. 인간적인 것이 비인간적인 것을 이겼다. 단지 인간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내가 울더라도 걱정하지 마. 불쌍해하지도 말고 내가 마음이 아프면 아픈 대로 내버려둬. 하지만 당신이 고마워. 내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줘서……" (K. C. 치호노비치, 중사, 고사포 병사)
그건 나도 몰랐던 전쟁이었다. 그런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 P339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을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그건 아마못다 한 이야기로 남을 것 같아. 한 가지는 분명히 알아. 사람은 전쟁터에서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그런 사람을어떻게 이해하지?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냄새도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아나스타시야 이바노브나 메드베드키나, 사병, 기관총 사수차 - P366

"문득 음악 소리가 들리면…... 아니면 노랫소리…... 여자 목소리도…… 그러면 그때 그 느낌이 되살아나. 그때랑 비슷한 뭔가가 느껴져……
전쟁영화를 봐도 사실이 아니고 책을 읽어도 사실이 아닌 거야. 그러니까, 그게 달라 ∙∙∙∙∙∙ 뭔가가 달라. 그렇다고 전쟁을 직접 겪은 내가 이야기하면 정확하냐. 그것도 아니거든. 전쟁은 그렇게 끔찍하지도 그렇게 아름답지도 않았어. 때론 전쟁터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 전투가 있는 날 아침이면…… 주위를 보며 생각했지. ‘어쩌면 아침을 맞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일지 몰라. 아, 세상은 이렇게도 아름다운데…… 공기도…… 햇살도……"

올가 니키티치나 자벨리나, 군의관 외과의 - P367

"우리는 가시철조망이 쳐진 게토에 살았어…… 화요일에 그 일이 일어났지. 모르겠어, 왜 화요일이었다는 것만 기억에 또렷한지. 화요일 ..… 며칠이었는지, 몇 월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분명 화요일이었어. 우연히 창밖을 봤어. 세상에, 우리집 맞은편 벤치에 소년과 소녀가 앉아서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 끔찍한 살육과 총살이 난무하는 세상 한가운데서! 그 아이들이 키스를 하고 있더라니까. 나는 그평화로운 광경에 충격을 받았어…… - P367

짧았던 우리 거리 한쪽 끝에서 독일군 순찰병이 나타났어. 그들도 당연히 아이들을 봤지. 앞이 훤히 트여 있었으니까. ‘저걸 어째‘ 하며 놀라고 말고 할 틈이 없었어. 정말 그럴 새가 없었어…... 비명소리. 그리고 온 거리를 울리는 굉음, 총소리……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당장 공포심이 밀려오더군. 소년과 소녀가 잠깐 몸을 일으키는가 싶더니 이내 고꾸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어. 둘은 함께 쓰러졌어.
그렇게 그 일이 있고 ..…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 다시 하루가 지나는데....그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 거야. 알아야만했어. 그 아이들은 왜 집이 아닌 거리에서 입을 맞췄을까? 왜? 그런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걸까..... 아이들은 언젠간 게토에서 죽을 운명이란걸 알았던 거야. 그래서 다른 식으로 죽고 싶었던 거고. 그건 사랑이었어. 사랑이 아니면 뭐겠어? 다른 이유는 있을 수 없어..... 사랑밖엔.
당신에게 이야기하다보니 ..... 그 일이 아름답게 들리기도 하네. 하지만 실제로는? 실제로는 너무 끔찍한 경험이었지…. 그래…… 아니면 뭐? 지금 생각해보면 ..… 그 아이들은 맞서 싸웠던 거야…… 아름답게 죽고 싶었던 거지. 나는 그게 그 아이들의 선택이었다고 확신해......"

류보피 에두아르도브나 크레소바, 지하공작원 - P368

나는 늘 같은 것을 말한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그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죽음에 대한 이야기. 죽음에 대처하는 그네들의 태도에 대한 이야기. 죽음은 늘 그네들의 언저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어느새 삶만큼이나 가깝고 익숙한 존재가 되었다. 나는 그네들이 어떻게 이 한없는 죽음의 실험 속에서 무사할 수 있었는지 이해해보려 한다. 어떻게 날이면 날마다죽음을 대면하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었는지. 어떻게 매번 목숨을 내놓는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었는지.
과연 그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우리의 말과 감정이 허락하는 이야기는 어디까지일까? 말과 감정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질문은 자꾸만 많아지는데, 대답은 자꾸만 적어진다.
만남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가끔, 고통은 고독이라는 생각을 한다. - P373

완전한 고립. 한편으로 고통은 앎의 특별한 형태는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삶에는, 특히나 우리네 삶에는 고통 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전달할 수도 지켜낼 수도 없는 뭔가가 있다. 그건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고, 또 우리가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그네들 중 한 명을 벨라루스 국립대학교강당에서 만났다.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즐겁게 떠들며 노트를 챙기고있었다. "그때 우리가 어땠냐고?" 그녀가 내 질문에 역시 질문으로 답했다. "지금 여기 학생들하고 똑같았어. 글쎄, 다른 게 있다면, 옷 입는 거나 액세서리 정도? 그땐 더 검소하게 하고 다녔어. 구리 반지, 유리 목걸이 그리고 고무 슬리퍼 청바지나 녹음기는 없었고."
나는 바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P374

이제 사랑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사랑은 전쟁터에서 사람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개인적인 사건이다. 사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공동의 사건들일 뿐 죽음까지도.
그네들을 만나면서 의외라고 느낀 점이 있었다면? 그건 그들이 죽음을 말할 때보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덜 솔직하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마치 자기방어라도 하듯 줄곧 뭔가를 감추고 털어놓지 않았다. 언제나보이지 않는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았다. 아주 철저하게 선을지켰다. 그네들 사이에 ‘더이상은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존재했다. 장막이 쳐졌다. 무엇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건지 이해가 된다. 전쟁 후에 자신들을 향해 쏟아진 곱지 않은 시선과 악의에 찬 오해이리라. 그네들은 이미 고통을 당할 만큼 당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전쟁이끝나고도 그들은 또하나의 전쟁을 치러야 했다.  - P395

이미 치르고 돌아온 전쟁에 견줘 결코 가볍지도 쉽지도 않은 또다른 전쟁. 만약 누군가 밑바닥까지 솔직하기로 작정하고 무모하리만큼 대담한 고백을 하고 나면 대화를 마무리할 즈음 반드시 이렇게 부탁해왔다. "내 성을 다른 성으로 바꿔서 내줘." "우리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입 밖에 내는 게 아니었어....…
상스러운 행동이었지...." 하지만 내가 들은 이야기들 중엔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연들이 더 많았다.
당연히 이 이야기들이 그네들 삶의 전부도 아니고 모든 진실도 아니다. 하지만 그네들의 진실이다. "전쟁이여 저주 받을지어다. 우리의 가장 아픈 시간이여!"라고 통탄한 전쟁 세대 어느 작가의 솔직한 고백처럼. 이 이야기들은 그네들의 삶에 대한 암호이자 에피그라프다.
아무튼 그곳의 사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음이 맴도는 그곳에서의 사랑은..... - P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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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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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의 이야기 중 몇 가지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하고는 많이 다르네. 우리가 아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ㅡ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P 267, 268

주소가 참 다양도 하다. 모스크바, 키예프, 크라스노다르 지방의 압셰론스크, 비텝스크, 볼고그라드, 얄루토롭스크, 수즈달, 갈리치, 스몰렌스크…… 이 많은 곳을 언제 다 돌아볼 것인가? 이 넓고도 큰 나라에서. 그런데 갑자기 뜻하지 않은 지원군이 나타났다. 기대하지 않은 도움의손길, 우편함을 열어보니 초대장이 하나와 있다. 바토프 장군 휘하 제65군 참전용사들이 보내온 초대장이다. "5월 16일과 17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 모임이 있습니다. 전통의식과 의전행사도 있을 예정입니다. 상황이 허락되는 사람들은 다 오기로 했지요. 무르만스크카라간다.
알마티, 옴스크에서 도착할 겁니다. 전국 곳곳에서 모이는 거지요 우리의 광활한 조국 구석구석에서.……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모스크바‘ 호텔 5월은 전승기념의 달이다. 곳곳에서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 흘리고, 사진을 찍는다. 다들 가슴에 꽃을 달았든 훈장이나 메달을 달았든 아랑곳없다. 나는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들어간다. 몸이 둥실 떠오르고 흘러가고 떠밀리다보니 어느새 낯선 세계에 와 있다. - P233

낯선 섬나라에 아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분명한 사실하나를 깨닫는다. 내가 이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 이들은 대개 우리사이에서 잊힌 존재이고 눈에 잘 띄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제이 세상을 떠날 나이가 되었고 그 수도 점점 줄어들지만 우리는 점점더 많아지니까. 이들은 1년에 한 번씩 다 함께 만남의 자리를 갖는다. 단 한순간이라도 자신들의 그 시간으로 돌아가기 위해. 그 시간이란 바로 그들 자신의 기억이다.
7층 52호에 5257병원 사람들이 모였다.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은 군의관이자 대위인 알렉산드라 이바노브나 자이체바. 내가 나타나자 무척기뻐하면서 방에 모인 사람들과 일일이 인사를 시킨다.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다. 사실 이 방문을 두드린 건 순전히 우연이다. 완벽한우연. - P234

방에 모인 이들의 이름을 적는다. 외과의 갈리나 이바노브나 사조노바, 의사 옐리자베타 미하일로브나 아이젠시테인, 외과 간호사발렌티나 바실리예브나 루키나, 수술 담당 수간호사, 안나 이그나티예브나 고렐리크, 그리고 간호병들이었던 나데즈다 표도로브나 포투즈나야, 클라브디야 프로호로바 보로둘리나, 엘레나 파블로브나 야코블레바, 안겔리나 니콜라예브나 티모페예바, 소피야 카말디노브나 모트렌코, 타마라드미트리예브나 모로조바, 소피아 필리모노브나 세묘뉴크, 라리사 티호노브나 데이쿤. - P234

‘죽고 싶지 않아!‘ 아니면 ‘씨발‘ 같은 욕을 하거나…… 느닷없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 몰다비아 노래...... 사람들은 죽어가는 그 순간에도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아. 믿질 않지. 하지만 머리카락 밑에 샛노란 색이 나타나고 얼굴을 따라 움직이던 그림자가 나중에 옷 밑으로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돼 ...... 사람은 이미 죽었는데 표정은 마치 산 사람 같지 깜짝 놀란 얼굴로 ‘내가 어떻게 죽을 수있지? 정말 내가 죽은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여.
부상병이 아직 들을 수 있는 동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당신이 죽는다니 말도 안 돼요‘라고 말해줬어. 입을 맞추고 안아주며 ‘걱정 마요, 괜찮아요‘라고 위로도 했지. 이미 숨을 거둬서 눈이 허공을 보는데도 나는 계속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였어...… 뭔가 안심시키는 말을…… 그 이름들은 기억에서 지워졌지만 얼굴들은 여전히 기억 속에 남아 있어...…." - P242

"독일군은 여자병사들은 포로로 잡지 않았어..… 바로 총살해버렸지. 아니면 자기 병사들 앞에 끌고 나와 ‘자, 여기 이것들은 여자가 아니다. 추악한 괴물이다‘라고 하거나.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총알을 따로 가지고 다녔어. 불발될 경우를 대비해 두 발씩.
우리 간호병 하나가 독일군에게 붙잡혔어…… 하루가 지나 우리가그 마을을 공격해 들어갔는데 사방에 죽은 말이며 오토바이며 장갑수송차 등이 나뒹굴고 있더라고, 독일군에게 잡혀간 우리 간호병을 찾아냈지. 세상에, 눈알이 도려내지고 가슴이 잘려나가서는…… 놈들이 말뚝에 박아놓았더라고. 몸은 살을 에는 추위에 꽁꽁 얼어 새하얗고 머리는 완전히 백발이 되어 있었어. 그 아이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어. 우리는 그 아이 배낭에서 가족이 보낸 편지들과 고무로 된 작은 파랑새를 발견했어.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장난감 고무새를……" - P243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어...... 어느 마을에 도착했는데, 그곳 숲 주변에 빨치산 병사들이 줄줄이 죽어 있는 거야. 그때 독일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세상에, 지금도 심장이 벌렁거려서 말이 안 나와 다들 갈기갈기 찢겨서는...... 내장은 내장대로 돼지 내장처럼 다 쏟아져나와 있고...... 그렇게들 누워 있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말들이 풀을 뜯고있는 게 보였어. 안장까지 그대로 얹혀 있는 걸로 봐서 빨치산 병사들말인 것 같았어. 독일군을 피해 달아났다가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독일군이 미처 못 잡아간 건지 알 수가 없더군. 녀석들은 멀리도 안 가고 근처에 머물렀어. 풀이 많았거든. ‘어떻게 사람이 돼가지고 말들이보는 데서 이런 끔찍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싶었지. 동물이 있는 데서. 말들이 다 보았을 텐데……." - P248

"들도 숲도 불길에 휩싸였어…… 초원에 연기가 자욱했지. 암소와 개들이 불타 죽어 있고..... 냄새가 특이하더라고. 처음 맡는 냄새였어. 그리고 또…… 토마토절임, 양파절임을 담가놓은 동그란 통들까지 불에 타 뒹굴었어. 새들도 불타고, 말들도 불타고…… 많은 게…… 정말 온갖 것들이 다 불타서 길거리에 나뒹굴었어. 우리는 그 냄새에도 익숙해져야 했지…… 그때 알았지. 불은 모든 걸 태운다는 걸...... 심지어 피까지도 태워없앤다는 걸......" - P248

"그걸 어떻게 얘기하나...... 글쎄, 어떻게…… 왜 있잖아…… 늦가을이면 철새들이 이동하는 거…… 길게 길게 무리 지어서. 우리 대포, 독일군 대포가 한꺼번에 불을 뿜는데 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날아가는 거야. 새들이 어떻게 비명을 지르겠어? 어떻게 새들에게 ‘이리로 오면 안 돼! 여기 오면 죽어!‘라고 알려줘? 어떻게? 끝내 새들은 계속 땅으로 떨어졌어......" - P249

전쟁전에 우리 마을에 꾀꼬리들이 참 많았거든.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2년 동안 아무도 꾀꼬리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지. 온 마을 땅이 뒤집혀 있었으니까. 사람들이 땅이란 땅은 전부 고릿적 똥거름 주던 시절처럼 싹 갈아엎었거든. 3년 후에야 꾀꼬리가 나타났어. 어디에 있다온 걸까? 아무도 모르지. 아무튼 녀석들은 3년이 지나서 자기들 살던고향땅으로 돌아왔어.
사람들이 다시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자 꾀꼬리도 다시 날아든 거야......"


‘난 들꽃을 보면 전쟁이 떠올라 전쟁 때 우리는 꽃을 꺾지 않았어. 꽃을 꺾는다면 그건 누군가의 장례를 치러주기 위해서였지…… 작별을고하려고....."


"아이고, 아이고, 얼마나 추악한지.....… 그놈의 전쟁이란 게...… 먼저 간 우리 동무들이나 추모하자고......" - P252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무엇인가?
나직하면서도 자주 당혹스러워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기억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일어난 사건 앞에섰을 때 놀라고 당황한다. 과거는 사라졌다. 과거는 뜨거운 소용돌이를일으키며 눈을 멀게 하고는 자취를 감춰버렸지만, 사람은 남았다. 평범한 보통의 삶 한가운데 사람만 남은 것이다. 자신의 기억 외에는 주위의모든 것이 평범하다. 나 역시 목격자가 되어간다. 사람들이 무엇을 기억하는지, 어떻게 기억하는지, 무엇을 말하고 싶어하는지, 또 무엇을 기억에서 지워버리거나 기억의 저 깊은 구석으로 밀쳐버리고 싶어하는지.
그리고 장막을 쳐버리고 싶어하는지를 보고 듣는 목격자, 적절한 말을찾지 못해 절망하면서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온전한 표현을 찾아내리라는 희망의 끈을 붙잡고 과거를 되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본 - P255

다. 그때는 보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을 이제는 얼마나 보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하는지를.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며 자신과 새롭게 만난다. 이들은 이미 두 사람이다. 저 사람이면서 이 사람이다. 젊은이면서 늙은이다. 전쟁터에 있는 사람이면서 전쟁 후의 사람이다. 오래전에 전쟁이 끝난 사람, 나는 늘 내가 동시에 두 목소리를 듣는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전승기념일에 모스크바에서 우연히 올가 야코블레브나 오멜첸코를만났다. 다른 여자들은 모두 고운 봄옷에 화사한 머릿수건을 하고 있는데 그녀만 군복에 군인베레모를 쓰고 있었다. 키가 크고 다부져 보이는그녀. 그녀는 대화를 나누지도 울지도 않았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침묵이었다. 바로 그 침묵 안에 말로 내뱉은 어떤 이야기보다 더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은필요치 않은 것처럼. - P256

한번은 내가 피투성이가 됐는데...... 늙은 병사 한 명이 다가와 나를 안고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전쟁이 끝나고 이 소녀병사가 살아남는다해도 더이상 사람 꼴로는 살지 못할 텐데, 어쩌나. 이 아이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그래, 나는 그런 지옥 같은 상황의 한복판에서 견뎌야 했지. 그것도 그렇게 어린 나이에 ! 나는 발작을 일으킨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었고, 사람들이 나를 부축해서 막사로 데려갔어.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았어...... 전기가 훑고 지나간 것처럼 온몸이 떨리고 ...... 글쎄, 어떻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지..…
다시 전투가 벌어졌어...... 셉스크 근처에서 독일군이 하루에만 벌써 예닐곱 번이나 우리를 공격했어. 바로 그날 나는 전장으로 뛰어들어 부상병들을 끌고 나왔어. 당연히 무기도 함께 챙겨서 나왔지. 그리고 마지막 부상병에게 기어갔는데, 팔이 거의 떨어져나갔더라고, 갈가리 찢겨서 건들거리는데…… 힘줄만 남고...... 피범벅이었어…… 상처를 싸매려면 당장 팔을 잘라내야 할 판이었어. 다른 방법이 없었지.  - P263

나는 전쟁터에서 모든 걸 잊었어. 지난 삶은 다. 전부 다………… 사랑도잊었지....…
수색중대 지휘관이 나를 좋아하게 됐어. 자기 부하들을 통해 쪽지를 보내왔더라고. 한 번 그를 만났지 만나서 그랬어. ‘난 아니에요. 이미 오래전에 저세상으로 간 사람을 사랑하고 있거든요.‘ 그러자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가버리더군. 쏟아지는 총탄 속을 그대로 걸어서 고개 숙이지 않고…..… 나중에 우크라이나에서 우리가 큰 마을 하나를 탈환했어. 마을이나 한번 둘러보자 싶어 어귀로 들어섰지. 해가 밝게 비치는 날이었어. 농가들이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났지. 그런데 마을 뒤편 새로 다진 땅에 무덤들이 죽 늘어서 있는 거야....… 이 마을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병사들의 무덤이었어. 나도 모르겠어. 왜 그곳으로 발길이 끌렸는지. 가서 보니 작은 목판에 병사들의 사진과 이름이 붙어 있더군. 무덤 하나하나마다.……  - P265

그러다 갑자기...... 아는 얼굴이 보이는데 ...... 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수색중대 지휘관, 바로 그 사람 얼굴이었어. 이름도 맞고 ...... 순간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 갑자기 무서워지고...... 꼭 그 사람이 나를 보고 있는 것만 같고,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 바로 그 순간 그 사람 부하들이 그러니까 중대원들이 무덤 쪽으로 오는 게 보였어. 모두 나를 알고 있었지. 예전에 나한테 쪽지를 전해주곤 했으니까. 하지만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행동하더군. 내 쪽으론 시선 한번 안주고 그들에게 나는 투명인간이었어. 나중에 그들과 다시 한번 마주쳤는데 마치…… 그들이..… 내가 죽기를 바랐던 것처럼 생각됐지. 나 보기가 힘든 것 같았어∙∙∙∙ 살아 있는 나를 보는 게…… 꼭 그렇게 느껴지더라니까…… 내가 그들 앞에 죄인이 된 것 같았지…… 그 사람한테도…… - P265

전쟁에서 돌아와 심하게 아팠어.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져야 했지. 어떤 노교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분 덕분에 나았어.…약보다는 말로 더 많이 치료해주셨지. 내 병을 알아듣기 쉽게 설명도 해주시고, 그 교수님 말씀이, 만약 내가 열여덟, 열아홉에 전선에 나갔다면 그런대로 몸이 튼튼해졌을 거래. 그런데 나는 열여섯에 갔잖아. 열여섯은 너무 어린 나이라 몸이 많이 손상을 입었다는 거지. 교수님이 설명해주셨어. 물론, 약을 복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긴 해요. 어느 정도는 치료될수도 있어요. 하지만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고 싶다면, 또 살고 싶다면 내 말대로 해요. 결혼해서 될 수 있는 한 아이를 많이 낳아요. 그 방법만이 당신을 살릴 수 있어요. 아이를 낳을 때마다 당신 몸도 그만큼 회복될거요‘
-그때가 몇 살 때였나요?
- 전쟁이 막 끝났을 때니까, 스무 살이었어. 물론, 그때 나는 결혼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았어. - P266

-왜죠?
ㅡ너무 지쳐서. 내가 동갑내기들보다 훨씬 나이든 것 같았고, 어떨 땐 늙은이가 된 것 같고 그랬지. 친구들은 춤추러 다니고 즐겁게 사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어. 인생을 나이든 사람의 눈으로 바라봤으니까.
다른 세상의 시선으로…… 노파의 시선으로! 젊은 남자들이 구애를 해왔어. 아직 어린애들이었어. 그들은 내 영혼을 보지 못했어.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지. 아까 내가 어떤 하루에 대해서 이야기했잖아..… 셉스크 전투에 대해서…… 기껏해야 하루였는데··· 그날 밤 내 양쪽 귀에서 피가 흘렀어. 아침에 일어났는데 꼭 중병을 앓고 난 사람 같더라고. 베개는 온통 피로 물들고..... - P266

병원에서는 어땠냐고? 병원 수술실에 가리개로 칸막이를 친 곳이 있었어. 그곳에 절단한 팔과 다리를 담은 커다란 통을 놓아두었거든…… 최전선에서 대위 하나가 부상당한 자기 동료를 데리고 병원에 왔어. 어떻게 수술실에 들어왔는지 모르겠는데, 대위가 그 통을 본 거야…… 보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렸지.
기억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어. 끝도 없이 ..... 그런데 가장 중요한게 뭔지 알아?
나는 전쟁의 소리를 기억해. 사방에서 으르렁, 쾅쾅, 쨍쨍 불을 뿜어대던 그 소리들...... 전쟁터에서는 사람의 영혼마저 늙어버리지, 전쟁이 끝나고 나는 다시는 젊음으로 돌아갈 수 없었어...... 그게 제일 중요한 점이지. 내 생각엔 그래……
-결혼은 하셨나요? - P267

ㅡ했지. 아들 다섯을 낳아 길렀어. 아들만 다섯. 딸은 하늘이 주시지않더라고, 나 스스로도 가장 놀라운 일은 그 끔찍하고 무서운 일을 겪고도 예쁜 아이들을 낳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야. 게다가 좋은 엄마에 좋은할머니까지 되었다는 사실이지.
이제 와서 모든 걸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내가 아니었던 것 같아. 어느 다른 소녀였지……"


‘또하나의 전쟁‘이 담긴 네 개의 녹음테이프(이틀간의 대화)를 가지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충격과 공포, 의혹과 경탄. 호기심과 당혹, 연민, 친구들에게 그녀의 이야기 중 몇 가지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뜻밖에도 하나같이 똑같은 반응들. ‘어휴, 너무끔찍하다. 어떻게 그걸 다 겪었대? 그러고도 제정신으로 살 수 있었 - P267

대?‘ 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하고는 많이 다르네. 우리가 아는 전쟁은 경계가 확실하잖아. 적과 우리 편, 선과 악, 그런데 이 전쟁은?‘ 하지만 모두들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다들 깊은 생각에 잠겨들었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들이리라. 이미 수천 번도 넘는 전쟁이 이 땅에서 벌어졌음에도(얼마 전에 읽은 책에서 봤는데, 지구상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전쟁들을 합치면 3천 번도 넘는다고 한다), 전쟁은 여전히 인간사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비밀 중 하나로 남았다. 언제나그랬던 것처럼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는 거대한 역사를 인간이 가닿을 수 있는 작은 역사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P268

그래야 뭐라도 이해할수 있을 테니까. 할말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탐색하기 간단해보이는, 그리 넓지 않은 이 작은 영토 ㅡ한 사람의 영혼의 공간—가 역사보다 더 난해하다. 알아내기 더 힘들다. 왜냐하면 내 앞에 있는 그건 살아 있는 눈물이고 살아 있는 감정들이기에. 대화하는 중에도 아픔과 공포의 그늘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살아 있는 사람의 얼굴이기에. 순간 스치는 고통의 표정 앞에서 간혹 나도 모르게 ‘사람은 고통이 있기에 아름다운 건 아닐까‘라는 불순한 생각을 품을 때가 있다. 그러고는 나 자신에게 흠칫 놀란다……
길은 오로지 하나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리고 사랑으로 사람을 이해하는 것. - P268

탐색은 계속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민스크에서 내가 살고 있는 거리의 이름은 소련의 전쟁 영웅, 바실리자하로비치 코르시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코르시는 내전과 스페인전쟁에 참전했고 대조국전쟁에서는 빨치산여단의 여단장을 맡기도 했다. 벨라루스 사람이면 누구나, 적어도 학교에서라도, 그에 대한 책을 읽었을 것이다. 아니면 영화를 보았거나, 벨라루스의 전설. 그의 이름은수백 번도 넘게 각종 봉투며 우편 용지에 새겨졌고,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실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으니까. 신화가 그의 분신이니까. 매일 걷던 낯익은 거리를 지금 나는색다른 감흥에 젖어 걷는다. 트롤리버스를 타고 도시 반대쪽 끝까지 삼 - P271

십 분을 가면 신화의 두 딸들ㅡ두 딸 모두 참전했다ㅡ을 만나게 될 터이다. 그의 아내도. 전설이 생명을 입고 살아나 땅에 발을 딛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이 작고 평범해지는 그 순간을. 하늘이나 바다가 아무리 좋아도 내게는 현미경 렌즈 아래 놓인 모래 한 알이, 바닷물 한 방울의 세계가 더 소중하다. 그곳에서 내가 빗장을 열고 보게 될 위대하고도 놀라운 한 사람의 삶이. 만약 작은것이나 큰 것이나 똑같이 무한하다면, 어떻게 작은 것을 작다고 하고 큰것을 크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 둘을 구별짓지 않는다. 한 사람만으로도 벅차다. 한 사람 안에 모든 것이 있으므로, 그 안에서 길을 잃고 헤맬 만큼. - P272

우리가 마을들을 탈환하고 보면 정말 다 타버리고 재만 한가득이었어요. 사람들에게 남은건 땅밖에 없었죠. 땅이 전부였어요.
언니도 나도 의사의 길을 포기했어요. 전쟁 전에는 의사를 꿈꿨는데 말이에요.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입학시험을 치지 않고 바로 의과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우리한텐 참전용사로서의 특권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사람들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봤기 때문에 더이상은 볼 수가 없었어요. 상상만 해도 싫었어요. 그래서 이미 30년이 흐른 뒤였는데도 딸아이가 그렇게 가고 싶어하는 의과대학을 단념시켰어요. 수십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보여요…… 어느 봄날…… 우리는 이제 막 전투가 휩쓸고 지나간 들판을따라 걸으며 부상병들을 찾아요. 온통 짓밟힌 들판. 저만큼 전사한 병사 두 명이 보여요. 젊은 우리 병사와 역시 젊은 독일군 병사가 어린 밀밭에 하늘을 보고 누워 있죠…… 하지만 전혀 죽은 사람들 같지 않아요. 그저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을 뿐…… 나는 지금도 그 눈길이 잊히질않아요..... - P295

- 전쟁이 끝나기 며칠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에 생생해요. 말을 타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음악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바이올린 소리가…… 그리고 바로 그날이 나한테는 전쟁이 끝난 날이었어요…… 갑자기 음악 소리라, 그건 기적이었죠…… 또다른 소리가 들려왔어요…… 마치 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군요…… 우리는 모두 전쟁만 끝나면, 그 숱한 눈물만 그치면 멋진 삶이 우리를 기다릴 거라고 믿었어요. 아름다운 인생이. 승리만 하면··· 이날들만 견뎌내면...... 모든 사람이 한없이 선해지고 서로 사랑만 할 거라고 믿었죠. 모두 형제자매가 될 거라고, 우리가 얼마나 그날을 기다려왔는지……그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어요……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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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방에서 꽃을 가지고 나와 이웃에게 부탁했던 게 기억나.
ㅡ나 없는 동안 이 꽃에 물 좀 주세요. 금방 돌아올게요.
하지만 내가 돌아온 건 4년 후였지.…
집에 남은 소녀들은 우리를 부러워했고 여인들은 눈물을 흘렸어. 그런데 나랑 같이 전선으로 가는 한 아이만 멀뚱멀뚱 태연한 거야. 남들은다 슬피 우는데 말이야. 하지만 그 아이도 나중에는 안 되겠는지 자기눈에 물을 찍어 바르더군. 손수건으로 그것도 몇 번씩, 다들 우는데 혼자 안 울고 있으려니 어색했던 거지. 그때 우리가 전쟁이 뭔지나 알았겠어? 그 어린 나이에…… 나는 지금도 악몽을 꾸다 잠을 깨곤 해. 여전히 전쟁터에 있는 끔찍한 꿈‥… 비행기를 몰고 하늘로 날아올라 점점고도를 높인다 싶었는데 ...... 곧장 아래로 곤두박질치지...... 비록 꿈이지만 비행기가 추락하는 게 그대로 느껴져.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잠에서 깨. 아, 잠들어 있는 동안, 꿈을 꾸는 동안 얼마나 무섭고끔찍한지. 늙은이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젊은이는 죽음에 코웃음 치지.
젊은이들은 자기가 영원히 살 줄 아니까! 나도 그땐 내가 죽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으니까……."

안나 세묘노브나 두브로비나-체쿠노바, 근위대 대위, 전투기 조종사 - P125

전쟁 내내 생각했어. 내가 지금 집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옆에 우리 고운 엄마 옆에 엄마는 정말 아름다웠지. 나는 못했을 거야…… 나 스스로는 절대. 전쟁터에 나서는 일 따위는...… 하지만...... 나는 우리 도시가 독일군 수중에 떨어졌고, 내가 유대인이라는사실을 알게 됐지. 전쟁이 나기 전에는 모두 사이좋게 잘 지냈어. 러시아인, 타타르인, 독일인, 유대인...... 모두 똑같이 나는 한 번도 ‘유대놈‘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어. 아빠, 엄마의 사랑 속에책만 보며 살았으니까. 우리는 나병 환자 취급을 받기 시작했고, 어디를가나 쫓겨났어. 다들 우리를 두려워했지. 심지어 지인들조차 우리를 모른 체했어. 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고, 이웃들은 우리에게 물건은 전부두고 가라. 가져가봐야 무슨 소용이냐‘고 했어. 전쟁 전까지 그렇게 사이좋게 지낸 이웃들인데, 발로냐 아저씨, 아냐 아줌마.……
엄마는 총에 맞아 돌아가셨어...… 우리가 게토‘로 쫓겨나기 며칠 전일이었지. 도시 곳곳에 포고문이 나붙었어. ‘유대인은 인도로 걸어다니는 것, 미용실에서 머리하는 것, 상점에서 물건 사는 것. 등을 전면금한다.‘  - P129

역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은 더 ‘그건 대체 무엇이었을까?‘라며 고민하겠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디에서 왔을까? 상상을 한번해봐. 임신한 여자가 지뢰를 안고 가는 장면을 ..... 체르노바는 당연히 아이를 기다렸지..... 삶을 사랑했고 또 살고 싶어했어. 당연히 두려워도 했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 길을 갔어..... 스탈린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는 무릎을 꿇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은 거부했어. 적에게 굴종하는 삶 따위는…… 어쩌면 그때 우린 눈이 멀었던 건지도 몰라. 그리고 그때 우리가 많은 것을 놓치고 보지 못했다는 사실도 부인하지 않겠어.
하지만 우리는 눈이 멀었으면서도 동시에 순수했어. 우리는 두 개의 세상, 두 개의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 당신은 그걸 꼭 알아야 해......"

베라 세르게예브나 로마놉스카야, 빨치산 간호병 - P133

"1942년이었는데.… 작전 수행중에 전선을 지나 어떤 공동묘지 근처에 머물게 됐어. 독일군이 우리랑 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주둔하고있었지. 물론 우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어. 캄캄한 밤이 되자 독일군이 계속 조명탄을 터뜨렸어. 낙하산들도 보이고, 조명탄들이 한참을 타면서 아주 멀리까지 그 일대를 환하게 비췄지. 소대장이 나를 묘지 끝으로 데려가더니 로켓탄이 발사되는 곳을 보여주더군. 독일군이 출몰할만한 장소라며 관목덤불이 있는 곳도 보여주고, 나는 망자라고 해서 무서워하거나 그러지 않아. 어릴 때부터 공동묘지도 안 무서웠거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때 나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어. 보초도 처음 서는거였고..…. 딱 두 시간 보초를 섰는데, 그 두 시간 만에 머리가 하얗게 세버렸지......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머리가 백발이 돼 있더라고, 보초를 서면서 그 덤불을 지켜보는데 덤불이 스륵스륵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거야. 거기서 꼭 독일군이 걸어오는 것만 같고…… 뒤이어 또 누군가 나타나고...... 무슨 괴물들도 나오고…… 그 두 시간 동안 나는혼자였어.....
세버렸지..
...... - P151

처음 전투에 나갔는데, 장교들이 자꾸 나를 흉벽 쪽으로 떠다미는 거야. 앞이 잘 안 보여서 고개를 내밀었지. 앞에 뭐가 있나 궁금했거든. 어떤 호기심이 발동한 거지, 어린아이 같은..... 그렇게나 철이 없었을까!
지휘관이 소리쳤어. ‘세묘노바 병사! 세묘노바 병사, 정신 나갔나! 염병할...... 뒈지려고 그래?‘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어. ‘이제 막 전선에 온 사람을 어떻게 죽인다는 거지?‘ 그때는 몰랐어. 죽음은 사람 가려가며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걸. 죽음은 아무리 애원해도, 설득해도 피할 수 없다는 걸......
낡은 트럭을 타고 의용군이 도착했어. 모두 노인들과 어린 남자애들이었어. 소총도 없이 수류탄 두 개씩만 들려서 그 사람들을 전투에 내보냈지. 소총은 전투중에 각자 알아서 구해야 했어. 전투가 끝났지만 붕대를 감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다 죽었거든......‘

니나 알렉세예브나 세묘노바 사병, 통신병 - P155

우리는 비행을 나갈 때 목표물을 찾아서 명중시키고 돌아온다‘ 딱 이 생각만 하면 됐어. 죽은 사람은 보지않아도 됐지. 그래서 우리는 시신을 볼 때의 공포가 뭔지 몰랐어......"
(A. 본다레바, 근위대 중위, 선임비행사) 빨치산이었던 여인은 지금도 전쟁 하면 모닥불 냄새부터 떠올린다. "뭐든 모닥불에서 했어. 빵도 굽고 음식도 끓이고, 재가 남으면 그 위에 가죽외투며 겨울군화도 올려놓고 말리고, 밤엔 모닥불 옆에서 추위도 피하고……" (E. 비소츠카야)
하지만 한없이 내 생각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기차 여승무원이 차를 내온다. 사람들이 서로 인사를 나누는 소리에 쿠페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며 생기가 돈다. 간이식탁에 전통술 ‘마스콥스카야가 오르고 집에서 만든 안줏거리까지 등장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가슴으로 나누는 우리의 대화가 시작된다. 가족의 숨은 사연부터 정치, 사랑과증오, 지도자들과 이웃에 이르기까지 나오지 않는 이야기가 없다.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우리는 길과 대화의 사람들이라는걸...... - P163

나는 예전에, 고통은 사람을 자유롭게한다고, 고통을 견뎌낸 사람이야말로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일 거라고생각했다. 고통의 기억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그런데 이제 언제나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앎, 평범한 보통의 삶에는 있기 힘든 이런 특별한 삶은 손댈 수 없도록 따로 보관해놓은 비축물이나겹겹이 층을 이룬 광석 틈의 희미한 금가루처럼 별도의 공간에 존재한다. 한참을 속이 빈 암석을 공들여 벗겨내고, 함께 사소한 기억의 퇴적물을 헤집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반짝반짝 모습을 드러낸다! 선물처럼 찾아온다!
우리는 정말 어떤 사람들일까. 무엇으로, 어떤 재료로 만들어졌을까? 고통을 이겨낸 사람은 어떤 단단함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 그걸 알기 위해 나는 이곳에 왔다…… - P170

예를 들어, 만약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가족이나 지인, 이웃들(특히 남자들) 중 누군가, 제3의 인물이 동석하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와 단둘이 있을 때보다 덜 진실해지고 덜 솔직해진다. 이미 대중을 의식한 대화가 돼버린다. 관객을 위한 대화, 당사자의 솔직한 감정과 생각을 얻어낼길은 요원해진다. 강력한 자기방어에 부딪친다. 자기통제, 끊임없이 이야기가 다듬어진다. 일종의 패턴까지 생겨난다. 듣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차분하고 깔끔한 이야기가 된다는 것. 신중하게 해야 할 말만 골라 한다는 것. 참혹한 일이 위대한 일로, 인간 내면의 불가해하고어두운 면이 순식간에 이해가 되고 설명 가능한 것으로 둔갑한다. 나는기념비들만 가득한 과거의 사막에 뚝 떨어지곤 했다. 공훈들만 가득한황야에 도도하고, 결코 속을 내보이지 않는 것들만 잔뜩 모여 있는 곳에, 니나 야코블레브나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 P188

그녀는 나를 위한 하나의 전쟁을 들려주었다. "딸이라 생각하고 이야기할게. 어린애나 다름없는우리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세월을 당신이 이해하기 쉽도록 말이야."
그리고 청중을 위한 또하나의 전쟁을 그녀는 준비해두었다.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똑같은 전쟁을 신문에서 떠드는 영웅들과 공훈이 주인공인 전쟁. 젊은이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한 훈육용의 전쟁. 평범하고인간적인 것에 대한 이 불신에, 보통의 삶을 소위 이상이라는 것과 슬쩍바꿔치기하려는 이 욕망에 나는 매번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온기를 차디찬 광채와 맞바꾸려는 욕망에.
나는 우리가 부엌에서 함께 차를 끓여 마시던 그 기억을 지울 수가없다. 우리가 함께 눈물 흘렸던 그 기억을 - P188

‘용맹한 병사‘ 메달을 받고 포상으로 며칠간 집에 다녀오게 된 거야. 나타시카가 집에서 돌아오자 서로 나타시카 냄새를 맡겠다고 난리가 났지. 정말 돌아가며 줄을 서서 맡았다니까. 다들 나타시카한테서 집냄새가 난다며 좋아했어. 그렇게 다들 집을 그리워했지…… 편지봉투 하나만 봐도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 편지에 적힌 아빠 글씨만 봐도 좋고..... 잠깐 쉴 틈이 나면 우린 수를 놓았어. 하다못해 머릿수건이라도붙들고 수를 놓았지. 한번은 발싸개를 지급받았는데, 글쎄 그걸 코바늘로 떠서 스카프로 만들었다니까. 뭔가 여자다운 일을 하고 싶었어. 우린늘 여자들만의 일에 목이 말랐지. 정말 사무치도록 여자다운 일이 하고싶었어. 그래서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바늘을 손에 쥐고 뭐든 만들었어. 잠깐이라도 좋으니 본래 여자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바느질을하면 당연히 깔깔대고 웃고 떠들면서 행복해했지. 하지만 전쟁 전과 같을 수는 없었어. 뭐랄까, 그땐 특별한 상황이었다고 할까.... - P196

녹음기는 사람의 말을 녹음하고 어조도 그대로 담아낸다. 짧은 침묵, 울음소리, 망연자실해하는 소리까지도 나는 이야기란 게 원래 시간이지나 글로 옮겨질 때보다 말로 뱉어질 때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말할 때 그 사람의 눈빛과 팔의 움직임을 녹음하지 못하는 게 늘 안타깝다. 대화하는 동안 드러나는 그들의 삶, 즉 그들본래의 삶과 그들 각자의 삶을, 그들의 ‘텍스트들‘을 녹음하지 못하는게 안타깝다.
- ‘우리집엔 두 개의 전쟁이 산다… 정확한 말이오……
사울 겐리호비치가 대화에 끼어든다.
- 전쟁을 회상하다보니 집사람에겐 집사람만의 전쟁이,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우리 집사람이 당신에게 들려준 고향 - P196

집 이야기나 줄을 서서 집에 갔다 온 동료의 냄새를 맡았다고 한 이야기는 나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소. 하지만 기억은 안 나요…… 있는 듯 없는 듯 지나가버려서…… 그때만 해도 그런 건 사소한 일이라고 여겼으니까. 실없는 소리이기도 했지. 해군모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는데 집사람이 깜박한 모양이오. 여보, 어떻게 그걸 잊어버린 거야?
-잊은 게 아니에요. 그게, 그 일은 그러니까, 무엇보다…… 그 일은 떠올리기가 언제나 두려워. 떠올릴 때마다…… 동이 터올 무렵 우리는발동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어. 한꺼번에 수십 척이 나갔지..... 좀 있으니까 전투가 시작되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기다렸어.…… 귀를 쫑긋 세우고 기다렸지...… 전투는 몇 시간씩 계속되며 끝날 줄을 몰랐어. 그러다 드디어 전투가 우리 근처까지 왔구나 싶은 순간, 갑자기 쥐죽은듯 조용해지더라고. 그래서 날이 어둑해지자 바닷가로 나가봤지. 모르스코이운하를 따라 해군모자들이 둥둥 떠내려오더군. 열을 지어 줄줄이 크고새빨간 피얼룩들과 모자들이 한데 엉겨 물결 속에서 일렁이는데……나뭇조각 같은 것들도 떠내려오고…… 그건 우리 병사들이 네바 강 어딘가에 버려졌다는 의미였지.. - P197

-내겐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지식이 많은 반면, 집사람에겐 전쟁에대한 감정이 더 많아요. 하지만 언제나 감정이 사실보다 더 분명하고 강력한 법이지. 우리 보병 중에도 소녀병사들이 있었어요. 우리 중에 소녀병사가 한 명이라도 끼여 있으면 그만한 가치가 있었소. 당장 사기가 올라갔으니까.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요…… 절대! 실은 이런 이야기도우리 집사람한테서 슬쩍한 거지만. 전장에서 여자 웃음소리를 듣는 게,
여자 목소릴 듣는 게 얼마나 좋은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걸.
전쟁터에도 사랑이 있었느냐고요? 당연히 있었소! 전쟁터에서 우리가 만난 여인들은 정말 멋진 신붓감들이었소 성실하고 신실한 전우들이었고, 전쟁터에서 결혼한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고 가장 행복한 부부라오. 집사람하고 나도 전선에서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됐지. 포탄과 죽음의 한가운데서 말이오.  - P198

우린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한 관계라오 사랑과는 거리가 먼 일들도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어요. 전쟁은 길었고, 전쟁터엔 사람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좋은 일들,
순수했던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해요.
전쟁터에서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됐소…… 확실히! 내가 전쟁터에서 훨씬 괜찮은 인간이 된 건 분명한 사실이오. 그런 고초를 겪었는데 당연하지 않겠소. 수많은 고통을 봤고, 나 자신도 많은 고통을 겪었소. 그곳에선 살아가는 데 중요하지 않은 건 금방 제거돼버리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거든. 그곳에서 그걸 깨닫게 됐소..… 하지만 전쟁도 우리에게 앙갚음을 했소…… 우린 그 사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지만…… 전쟁이 우리를 쫓아와 우리와 나란히 가고 있어요∙∙∙∙ - P198

그건 전쟁터에 나가 싸운 엄마들이 자기들이 살았던 전선의 방식으로 딸들을 키웠기 때문이오, 아빠들도 마찬가지고 전선의 윤리로 말이오. 전쟁터에서 사람은, 당신한테 이미 말했듯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가치를 지닌 사람인지 단박에 드러났소. 그곳에선 감출 수가 없거든. 우리 딸들은 세상엔 다른 방식의 삶도 있다는 걸 상상도 못했소. 부모들이 딸들에게 이 세상의 감춰진 추악한 이면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결국 우리 딸들은 사기꾼 같은작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돼 결혼했고, 그 사기꾼들은 우리 딸들을 잘도속여넘겼소 속이기가 식은죽 먹기였을 테니 말이오. 우리 전우들의 아이들이 참 많이도 그런 일을 당했소. 우리 딸도 그랬고.....
ㅡ우린 자식들에게, 왜 그랬는지, 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아마자식들이 걱정되고 안쓰러워서였겠지.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옳았을까? - P199

다 같이 둘러앉아 이야기도 나누고 옛 시절을 회상했지......그러다 우리 소녀병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는…… 나는 거의 울부짖듯 소리쳤어. ‘존경하는 사령관님, 한번 말씀해보세요. 우리 소녀병사들은 지금 거의 혼자 살아요. 결혼들을 못했죠. 다들 콤무날카에 산다고요.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이 누구라도 있나요? 보호해준 사람은요? 전쟁이 끝나고 당신네 남자들은 다 어디로 숨어버린 거죠? 배신자들!‘ 한마디로 내가 즐겁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쳐버렸지 뭐…… 사령관 어른은 당신이 지금 앉은 그 자리에 앉아 있었어. ‘어디 말해보게‘ 사령관 어른이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어. ‘누가 자네를 화나게 한 거야. 그놈 이름을 대기만 해!‘ 그리고 용서를 구했어. ‘발랴, 자네에게 할말이 없네. 그저 눈물만 흘릴 뿐이야.‘ 우리는 동정이 필요한 게 아나. 우리는 우리가 자랑스러우니까. 열 번이고 백 번이고 역사를 고쳐쓰라고 해. 스탈린을 넣든지 빼든지 알아서 쓰라고. 하지만 이것만은 분 - P224

명히 남겠지. ‘우리가 승리했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고통도 우리가겪은 그 아픔들도. 그건 잡동사니 쓰레기도 아니고 타다 남은 재도 아니야. 그건 바로 우리네 삶이지."
그리고 더이상 말이 없다……
헤어지기 전에 피로그가 담긴 봉투를 내 손에 쥐여준다. "이건 시베리아 피로그야. 특별하지. 이 피로그는 돈 주고도 못 사…….." 그리고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긴 명단도 건넨다. "당신이 연락하면 다들 기뻐할거야. 기다리고들 있어. 그 일을 떠올리는 건 끔찍하지만 그 일을 기억하지 않는 게 더 끔찍하거든."
이제 알겠다. 그들이 결국은 이야기를 시작한 이유를…… - P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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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P 37

원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책상 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벌써 2년째 계속되는 출판사의 거절. 이 일에 대해 잡지들은 입을 닫는다. 답신은 매번 똑같다. 전쟁이 너무 무섭게 묘사되었다는 것. 끔찍한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 지나치게 사실적이라는 것. 선도적이고 지도적인 공산당의 역할이 없다는 것. 한마디로, 제대로 된 전쟁이 아니라는 얘기다. 도대체 어떤 게 제대로 된 전쟁이란 말인가? 장군들이나 현명한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전쟁? 피나 더러운 이가 나오지 않는 전쟁? 영웅들이나 영웅적인 공훈을 이야기하는 전쟁?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넓은 들판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 P36

"전쟁이 끝나고 이 들판에선 오랫동안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단다. 독일군들이 퇴각할 때였는데......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어. 이틀이나 얼마나 무섭게들 싸웠는지...... 사방에 시신들이 짚단 엮어놓은 것처럼 줄줄이 누워 있더구나. 꼭 기차역의 철도 침목처럼 말이다. 독일 병사들과 우리 병사들이 한데 뒤섞여서. 비가 오면 죽은 병사들 얼굴이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그 병사들을 묻어줬지. 꼬박 한 달이나 걸려서."
어떻게 그 들녘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녹취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작고 연약한 한 사람을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빚어내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을 모으고 그 자취를 좇는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는 그곳에서.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더이상 내게 말 못하는 벙어리도,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 사람의 영혼조차 달라진다.  - P36

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 P37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없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살았던 나라도 이젠 없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목숨 바쳐 지켜낸 그 나라조차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창밖의 세상은 모든 게 달라져 있다. 새로운 천년의 도래, 새로운 전쟁들, 새로운 이념들, 새로운 무기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러시아인(정확히는 러시아-소련인). - P37

그때는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당신을 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 일을 입에 담아선 안 됐으니까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의사한테 들었어요. 내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걸…… 모든 걸 털어놓고싶어요……."
얼마 전에는 이런 편지를 받았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사는 게 쉽지 않다오…… 푼돈에 지나지 않는 형편없는 연금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우리가 위대한 과거에서 쫓겨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누추한 현실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오. 이제 어디서도 우리를 부르지 않아요. 학교도 박물관도 이제 우리가 필요 없다는 거지요. 신문을 읽어봐요. 파시스트들은 갈수록 고결해지고, 우리 붉은 군대 병사들은 갈수록 비참해지고 있어요."
시간, 이 또한 우리의 고향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그네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시대는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랑한다. - P40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내 기록물들 중에서 단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출판 검열 당국에서 삭제당한 에피소드를 적어놓은 수첩이었다. 출판 검열 당국과 내가 나눴던 대화에도 새삼 관심이 갔다....… 그리고 수첩에서 내가 직접 삭제한 페이지들도 발견했다. 나의 자가 검열, 나 스스로 단행한 금지령, 그리고 왜 그 내용을 내버렸는지에 대한 나의 설명들…… 출판 검열 당국과 나 스스로 삭제한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이 책에 복원되었지만, 이 몇 페이지들만큼은 따로 정리해 쓰고 싶다. 이것도 이미 기록이기에. 내가 가야 할 길이기에. - P41

"우리는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소…… 하지만 사방에 독일군이 깔려있어서 가망이 없었지. 그래서 ‘날이 밝으면 나가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자. 어차피 죽을 거, 용감하게 싸우다 죽자‘고 결정을 내렸소. 차라리 전장에서 죽자고. 우리 부대에 소녀병사 셋이 있었는데, 이 소녀들이 밤에 일일이 우리를 찾아다니며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서 작별인사를 건네는 거야. 물론 우리가 다 그 소녀들처럼 한 건 아니었지…… 당신도 이해하겠지만, 그땐 다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으니까. 다들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지……
결국 다음날 아침 우리 중 몇 명만 살아남았소…… 겨우 몇 명만.…… 오십 명 중에서 일곱 명 정도만 산 거요. 만약 독일군이 그렇게 총질만 안 했어도.…… 살아남은 병사들 중에 그 어린 아가씨들은 한명도 없었소…… 그후로도 만나지 못했고......" - P44

"우리는 계속 진격해 들어갔고…… 첫번째로 맞닥뜨린 독일인 마을에서였소…… 우리는 젊었소. 건강했지. 4년을 여자 없이 지냈소. 집집마다 지하실에 술이 있더군. 안주도 많고, 독일 여자들을 붙잡아왔소......그리고 한 여자를 열 명이 차례로 덮쳤소…… 여자가 부족하니, 결국 병사들이 소비에트 군대를 몰래 빠져나가 어린아이들을 붙잡아오는 일까지 생겼소, 여자아이들을…… 열두 살에서 열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애들을 말이오…… 아이가 울면 때리고 입안에 아무거나 쑤셔넣었소.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는데, 우리는 그걸 즐겼지. 이제와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지식인 집안 출신인 내가…... 하지만 그게 나였소…...
딱 한 가지 두려운 게 있었다면, 그건 나중에라도 여자병사들이 우리가 한 짓을 알게 되는 것이었소. 우리 간호병들 말이오. 그녀들 보기가 부끄러웠소......" - P49

"적의 포위망에 갇혔소...... 숲속과 늪지대를 헤매고 다녔지. 나뭇잎도 먹고 나무껍질도먹었소. 이름 모를 풀뿌리 같은 것들도 캐 먹고. 우리는 전부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에 이제 막 군대에 불려온, 앳된 소년이 있었소. 그런데 밤에 내 옆의 병사가 이렇게 속삭이는 거요. ‘저 어린녀석은 얼마 못 버틸 거야. 곧 죽을 거라고…… 무슨 말이냐고 내가 물었소. ‘어떤 사람한테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올 때 일부러 어린 녀석을 데리고 나왔대...... 사람고기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다들 목숨을 부지했다는 거야.……‘ - P49

그가 소비에트 병사는 결코 적에게 항복해선 안 된다는 당의 지령을 우리에게 읽어주었지. ‘우리에게 포로란 없다. 반역자만 있을 뿐‘이라는 스탈린 동지의 명령이었어. 그러자 병사들이 권총을 꺼내들었어…… 그런데 루닌이 말리는 거야. ‘그럴 필요 없네. 살아야지. 자네들은 젊으니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리고 1943년…… 우리 소비에트 군대는 계속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어…… 벨라루스를 지날 때였나. 어린 남자애 하나를 만났어. 웬 아이가 느닷없이 어디 땅 밑 같은 데서, 그러니까 지하에서 튀어나오더니 우리에게 달려오면서 소리치는 거야. ‘우리 엄마 좀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엄마가 독일군을 좋아했어요……‘ 아이는 잔뜩 겁에 질린 눈이었어. 그리고 바로 아이 뒤를 쫓아 까만 노파 하나가 달려나왔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감은 노파였어. 노파가 성호를 그으며 말했어. ‘그애 말은 듣지 말아요. 그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라오....‘ - P52

,"낮에는 독일군과 독일군 앞잡이 때문에,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우리는 늘 두려움에 떨었어. 빨치산이 마지막 암소마저 가져가버리는 통에우리집엔 고양이 한마리만 남았지. 빨치산은 늘 배가 고팠고 난폭했어. 우리 소를 끌고 가길래, 막 쫓아갔지…… 10킬로미터쯤 따라갔을까. 제발 소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어. 오두막에 아무것도 못 먹은 아이들 셋을 두고 왔다고. 그랬더니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거야. ‘가, 가라니까, 아줌마! 안가면 쏴버릴 거야.‘ - P53

전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죽이는 일도 있었어. 유형살이 갔던 부농의 자식들이 돌아왔는데, 와보니 부모들이 이미 죽임을 당하고 없는 거야. 그러자 독일군 편에 붙어서는 복수를 하기 시작했지. 또 한 사람은 늙은학교 선생을 농가에서 쏴 죽였어. 바로 우리 옆집에 살던 선생이었어. 선생이 그 사람 아버지를 고발해서 재산을 전부 몰수당했거든. 그 선생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지.
독일군은 처음에 콜호스를 해체하고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줬어. 그동안 스탈린 때문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더군. 독일군에게 소작료를 냈지...… 꼬박꼬박 착실하게 값을 지불했는데…… 아, 이놈들이나중에는 우리를 태워 죽이지 않겠어. 사람도 집도 다 불에 태우기 시작하는거야. 가축은 멀리 쫓아버리고, 사람들은 태워 죽이고,
아, 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서워. 말은 정말 무서운 거야…… 나는 마음을 착하게 써서 살아남았어.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적이 없지.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 P54

"나는 기관총 사수였어. 사람을 참 많이도 죽였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아이 낳기가 무서웠어. 그래서 어렵게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그렇게 되기까지 7년이나 걸렸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어. 용서가 안 돼……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을 봤을 때 정말 기뻤지. 놈들이 처량한 신세가 된 게너무 좋았어. 발엔 군화도 없이 발싸개만 감고, 머리에도 머릿수건만 두 - P55

르고 있는 꼴이 보기만 해도 좋더라고.....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포로들이 빵을 구걸했어. ‘어머니, 빵 좀 주세요..... 빵...…‘ 그러자 마을농부들이 오두막에서 먹을 걸 가지고 와서 놈들에게 주는 거야. 누구는 빵조각, 누구는 감자를 가져다주는데, 그게 나한테는 큰 충격이었지. 사내애들은 행렬 뒤를 따라가며 돌을 던지고……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어…….
어쩌면 나는 두 개의 인생을 살았는지도 몰라. 하나는 남자의 인생, 다른 하나는 여자의 인생 ····" - P56

"많은 사람들이 믿었어……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스탈린은 자신의 민중을 믿을 거라고. 하지만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어. 군용열차들은 이미 마가단으로 향했지. 승전의 주역들을 싣고서...... 당국은 독일군에게 붙잡혀 수용소에서 지낸 사람들과 독일군 밑에서 부역을 한 사람들을 잡아들였어. 유럽에 갔다 온 사람들도 모두 체포됐고, 그들이 유럽에 대해 입을 열 수도 있었으니까. 유럽엔 공산주의자들이 없다고, 유럽의 집과 길들은 얼마나 훌륭한지 모른다고 떠들어대면 큰일이지 않겠어? 유럽 어디에도 콜호스 같은건 없다고 말이야......
승리를 얻고 나서 사람들은 침묵했어. 전쟁 전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고 두려움에 떨었지....." - P58

"나는 역사 선생이었어..… 내 기억에 의하면 세 번인가? 그래, 세번 바뀌었던 것 같아, 역사책이. 그래서 세 종류의 역사책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지금 물어봐……
사람을 죽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나는 지하공작원이었어. 반년 후에 임무를 하나 받았는데, 독일군 장교 식당의 여종업원으로 잠입하는 거였지.…… 젊고 아름다웠던 나는..... 잠입하는 데 쉽게 성공했어. 수프 냄비에 독을 풀고, 그날로 바로 빨치산에 합류하는 게 내 임무였어.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미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지. 아무리 그들이 적군이라도 매일 얼굴을 보고, 나에게 ‘당케 쇤...
당케 쇤……‘ 하는데, 죽이는 게 어디 쉽나…… 살인은 쉬운 일이 아니야...… 어찌 보면 죽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지……
나는 평생 역사를 가르쳤어…… 하지만 이 일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언제나 답을 찾지 못했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 P59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들과 긴 여정을 지나왔다.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 - P59

나 참호에 숨어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 P60

민스크 변두리의 낡은 3층 건물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그 당시로서는 아주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고 할 수 있는 아파트 중 하나로, 재스민 나무들에 둘러싸여 오래되고 아늑해 보인다. 장장 7년에 걸쳐 이어진 탐색이 바로 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나 자신을 위해, 우리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시작된, 경이롭고도 고통스러웠던 7년의 시간 고통과 증오 그리고 유혹을 느꼈던 시간들. 정겨움과 당혹스러움도…… 죽음과 살인은 어떻게다른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경계는 어디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정신 나간생각과 의기투합할 수 있는가? 심지어 죽일 의무가 있다는 생각까지하다니. 전쟁에는 죽음을 제외하고도 다른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며,
전쟁터에도 평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을 - P63

나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쟁, 이 또한 삶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인간의 비밀들과도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질문들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왜 악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가? 정녕 우리안에 악을 향한 놀라움은 없단 말인가?‘와 같은 질문들 앞에서.
길 그리고 다시 길들..... 온 나라를 헤집고 다닌 수십 번의 여행들, 목소리가 담긴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 수천 미터에 달하는 녹음테이프필름. 500여 차례의 만남, 그 이상부터는 세는 걸 포기했다. 얼굴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았다. 내 기억 속에서 합창 소리가 울린다. 웅장한 합창. 때론 노래는 없고 울음소리만 가득한 합창, 고백하건대,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며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 P64

그만 멈춰 서거나 도망치고 싶은, 의심과 두려움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서기엔 너무 늦었다.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악의 노예가 되었고 그 심연을 들여다봤다. 이제 어느 정도 아는 게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그만큼 의문은 더 많아졌고, 해답은 더 적어졌다.
이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건 ‘얼마 전 민스크에 있는 ‘돌격대‘라는 이름의도로장비 생산공장에서 선임회계원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지역 일간지에 난 짤막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그녀가 전쟁중에 저격병이었으며 무공훈장을 11개나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총에 죽어나간 적병의 수만 75명이라고도 했다. 이 여인이 전쟁 때 맡았던 일과 현재의 평온한 직업을 일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보통 여인네였다. - P64

‘이제 사람들 만나는 게 두렵지 않아. 이제늙은이가 다 됐는데, 뭐‘라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래…… 한마디로…… 전쟁은 그런 거야……
밤에 움막에 누워 있을 때가 생각나 잠들지 못해 뒤척이고 있으면 어디선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 아군의 포탄 소리가…… 정말 죽고싶지 않았어…… 맹세는 했지만, 필요하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군인의맹세는 했지만 정말 죽고 싶지는 않더라고. 하지만 거기서 살아 돌아간다 해도 마음이 병들 것 같았어. 지금은 ‘차라리 다리나 팔이 다쳤더라면, 차라리 몸이 아팠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 - P84

음이 ...... 너무 아파.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었는데,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 자랐을까.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내 키를 재보았는데…… 그동안 10센티미터나키가 컸더라니까……"

작별인사를 하며, 이 여인은 자신의 따뜻한 손을 어색하게 내밀어 내손을 꼭 감싸쥐었다. "미안해 ......" - P85

목소리… 수십 개의 목소리들…… 목소리들이 낯선 진실을 외치며 나에게 쏟아져들어왔다. 그리고 진실, 그 목소리들이 전하는 진실은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온, ‘우리는 승리했다‘는 간단명료한 정의와는 딴판이었다. 순식간에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파토스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 안에서 깨끗이 녹아버렸다. 파토스는 그 생이 아주짧은 물질임이 밝혀졌다. 우리 삶 속에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더 존재할 때, 그게 바로 운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러는 걸까? 어떻게 그런 일이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바로 옆에서 일어날수 있었는지 따져 묻고 싶어서? 아니면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라든지 - P89

높고 낮은 언덕들의 이름에서 따온, 지금은 잊힌 전투의 명칭들이 듣고싶어서? 나는 정말 전선이니 전선의 활약이니 진격과 퇴각이니 그런이야기, 전복된 열차가 몇 대고, 빨치산의 기습공격은 어땠는지 따위의이야기가 필요한 걸까? 이미 수천 권도 넘는 책들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영혼에 대한 이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영혼의 삶이 남기고 간 흔적을 따라가며 영혼을 기록한다. 나에겐 영혼이 걸어간 길이 사건 자체보다 중요하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우선순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나를 흥분시키고 놀라게 하는 건 다른 것, 즉 ‘대체 거기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깨달은 걸까? 도대체 삶은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일까?  - P90

그리고 결국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감정의 역사를 쓴다…… 영혼의 역사를 쓴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사람의 역사를 쓴다.
1941년의 소녀들…… 무엇보다 나는 그 소녀들은 대체 어디서 왔는지 묻고 싶다. 그것도 그렇게나 많이. 그들은 어떻게 남자들과 똑같이무기를 들고 싸울 생각을 했을까? 총을 쏘고, 지뢰를 매설하고, 폭탄을터뜨리고, 폭격을 하는 등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이미 19세기에 푸시킨이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푸시킨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여성기병 나데즈다 두로바의 일기 중 일부를『동시대인』에 실으며 이렇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훌륭한 귀족 집안의 젊은 아가씨는 정든 집을 등지고 자신의 여성성도 포기한 채, - P90

남자들도 꺼리는 힘든 노동과 의무를 선택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그녀를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그것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모르는 은밀한 마음의 번민? 불타는 상상력?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기질? 애끓는 사랑?"
정말이지 대체 무얼까?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같은질문을 던진다…...


"말하고 싶어·· 말할 거야! 전부 다 말할거야! 드디어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 숱한 세월을 우리는 입을 닫고 살았어. 심지어 집에서조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어. 전쟁에서 돌아온 첫해에 나는 말하고 또 말했어. 아무도 듣질 않았지.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린 거야…… 당신이 찾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누군가 와주길 늘 기다렸어. 누군가 올 줄 알았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지. 그때 나는 어렸어. 완전히 어린애였지. 참 안타까워. 왜인지 알아? 내가 너무 어려서 그때 일이 다 기억나지 않거든…… - P91

"전선으로 떠나는 날…… 날이 참 좋았어. 공기는 맑고, 이슬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아, 얼마나 아름답던지! 아침에 집밖으로 나와 잠깐서서 생각했어. ‘정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집 마당도…… 우리 동네도…… 언젠가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올까?‘ 엄마가 흐느끼며 나를 붙잡고 못 가게 했어. 내가 이미 걸음을 떼서 저만큼 가고 있는데도 쫓아와서 나를 꼭 부여안고 놓을 줄 몰랐지...…"
올가 미트로파노브나 루즈니츠카야, 간호병 - P110

죽음이라...... 글쎄, 죽는 건 두렵지 않았어.…… 아마 젊어서 그랬을 거야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사방에 보이는 게 죽음이고 늘 죽음이 옆에 따라다녔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않았던 거 같아. 다른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계속 우리 곁을 맴돈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옆으로비켜갔으니까. 한번은 밤중에 우리 연대 작전지역에서 중대 전체가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어. 동틀 무렵 중대는 물러갔는데, 중립지대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야. 부상당한 병사가 남아 있었던 거지. ‘가지마, 죽을지도 몰라‘ 동료들은 내가 부상병을 구하러 가게 내버려두지 않았어. ‘봐, 벌써 날이 밝아온다고.‘
하지만 나는 만류를 뿌리치고 그쪽으로 기어갔어. 부상병을 발견하고 그의 팔을 내 허리띠에 묶고는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 결국 그를 끌고 왔지. 살려서 데려온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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