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는 이미 오래전부터 책상 위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벌써 2년째 계속되는 출판사의 거절. 이 일에 대해 잡지들은 입을 닫는다. 답신은 매번 똑같다. 전쟁이 너무 무섭게 묘사되었다는 것. 끔찍한 내용이 너무 많다는 것. 지나치게 사실적이라는 것. 선도적이고 지도적인 공산당의 역할이 없다는 것. 한마디로, 제대로 된 전쟁이 아니라는 얘기다. 도대체 어떤 게 제대로 된 전쟁이란 말인가? 장군들이나 현명한 총사령관이 등장하는 전쟁? 피나 더러운 이가 나오지 않는 전쟁? 영웅들이나 영웅적인 공훈을 이야기하는 전쟁?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넓은 들판을 걸었던 적이 있다. 그때 할머니가 들려주신 이야기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 P36
"전쟁이 끝나고 이 들판에선 오랫동안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단다. 독일군들이 퇴각할 때였는데......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어. 이틀이나 얼마나 무섭게들 싸웠는지...... 사방에 시신들이 짚단 엮어놓은 것처럼 줄줄이 누워 있더구나. 꼭 기차역의 철도 침목처럼 말이다. 독일 병사들과 우리 병사들이 한데 뒤섞여서. 비가 오면 죽은 병사들 얼굴이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온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그 병사들을 묻어줬지. 꼬박 한 달이나 걸려서." 어떻게 그 들녘을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저 녹취만 하는 게 아니다. 나는 고통이 작고 연약한 한 사람을 크고 강인한 사람으로 빚어내는 곳에서 인간의 영혼을 모으고 그 자취를 좇는다. 인간이 자라고 성장하는 그곳에서. 그러면 그 사람은 이제 더이상 내게 말 못하는 벙어리도,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프롤레타리아도 아니다. 그 사람의 영혼조차 달라진다. - P36
그렇다면 내가 권력과 갈등을 빚는 이유는 뭘까? 나는 위대한 사상에 필요한 건 작은 사람이지, 결코 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념에 큰 사람은 쓸모없고 불편한 존재라는 것을. 큰 사람은 완성되는 데 손이 많이 간다. 나는 바로 그런 사람을 찾는다. 작으면서도 큰 사람, 그는 멸시당하고 짓밟히고 학대당했지만, 스탈린 수용소와 배반의 아픔을 겪었지만, 결국은 승리를 거뒀다. 그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전쟁의 역사를 승리의 역사로 몰래 바꿔치기해버렸다. 작으면서 큰 사람, 그가 직접 그 사실을 말해줄 것이다…… - P37
옛 일기장을 펼쳐본다…… 일기를 쓸 당시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리려고 애를 쓴다. 그때의 나는 이미 없다. 심지어 그때 우리가 살았던 나라도 이젠 없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조국이라는 이름으로 목숨 바쳐 지켜낸 그 나라조차 이젠 존재하지 않는다. 창밖의 세상은 모든 게 달라져 있다. 새로운 천년의 도래, 새로운 전쟁들, 새로운 이념들, 새로운 무기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러시아인(정확히는 러시아-소련인). - P37
그때는 모든 걸 다 말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도 침묵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어요……." "당신을 다 믿을 수가 없었어요.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이 일을 입에 담아선 안 됐으니까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의사한테 들었어요. 내가 무서운 병에 걸렸다는 걸…… 모든 걸 털어놓고싶어요……." 얼마 전에는 이런 편지를 받았다.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사는 게 쉽지 않다오…… 푼돈에 지나지 않는 형편없는 연금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니오. 우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우리가 위대한 과거에서 쫓겨나 참을 수 없을 만큼 누추한 현실로 내몰렸다는 사실이오. 이제 어디서도 우리를 부르지 않아요. 학교도 박물관도 이제 우리가 필요 없다는 거지요. 신문을 읽어봐요. 파시스트들은 갈수록 고결해지고, 우리 붉은 군대 병사들은 갈수록 비참해지고 있어요." 시간, 이 또한 우리의 고향이다...… 하지만 나는 예전처럼 변함없이 그네들을 사랑한다. 그들의 시대는 사랑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랑한다. - P40
모든 것은 문학이 될 수 있다. 내 기록물들 중에서 단연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출판 검열 당국에서 삭제당한 에피소드를 적어놓은 수첩이었다. 출판 검열 당국과 내가 나눴던 대화에도 새삼 관심이 갔다....… 그리고 수첩에서 내가 직접 삭제한 페이지들도 발견했다. 나의 자가 검열, 나 스스로 단행한 금지령, 그리고 왜 그 내용을 내버렸는지에 대한 나의 설명들…… 출판 검열 당국과 나 스스로 삭제한 내용들 중 많은 부분이 이 책에 복원되었지만, 이 몇 페이지들만큼은 따로 정리해 쓰고 싶다. 이것도 이미 기록이기에. 내가 가야 할 길이기에. - P41
"우리는 포위망을 뚫으려고 했소…… 하지만 사방에 독일군이 깔려있어서 가망이 없었지. 그래서 ‘날이 밝으면 나가서 독일군과 맞서 싸우자. 어차피 죽을 거, 용감하게 싸우다 죽자‘고 결정을 내렸소. 차라리 전장에서 죽자고. 우리 부대에 소녀병사 셋이 있었는데, 이 소녀들이 밤에 일일이 우리를 찾아다니며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다 만나서 작별인사를 건네는 거야. 물론 우리가 다 그 소녀들처럼 한 건 아니었지…… 당신도 이해하겠지만, 그땐 다들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 있었으니까. 다들 죽음을 각오한 상황이었지…… 결국 다음날 아침 우리 중 몇 명만 살아남았소…… 겨우 몇 명만.…… 오십 명 중에서 일곱 명 정도만 산 거요. 만약 독일군이 그렇게 총질만 안 했어도.…… 살아남은 병사들 중에 그 어린 아가씨들은 한명도 없었소…… 그후로도 만나지 못했고......" - P44
"우리는 계속 진격해 들어갔고…… 첫번째로 맞닥뜨린 독일인 마을에서였소…… 우리는 젊었소. 건강했지. 4년을 여자 없이 지냈소. 집집마다 지하실에 술이 있더군. 안주도 많고, 독일 여자들을 붙잡아왔소......그리고 한 여자를 열 명이 차례로 덮쳤소…… 여자가 부족하니, 결국 병사들이 소비에트 군대를 몰래 빠져나가 어린아이들을 붙잡아오는 일까지 생겼소, 여자아이들을…… 열두 살에서 열세 살 정도 되는 여자애들을 말이오…… 아이가 울면 때리고 입안에 아무거나 쑤셔넣었소.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는데, 우리는 그걸 즐겼지. 이제와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오, 내가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는지....……지식인 집안 출신인 내가…... 하지만 그게 나였소…... 딱 한 가지 두려운 게 있었다면, 그건 나중에라도 여자병사들이 우리가 한 짓을 알게 되는 것이었소. 우리 간호병들 말이오. 그녀들 보기가 부끄러웠소......" - P49
"적의 포위망에 갇혔소...... 숲속과 늪지대를 헤매고 다녔지. 나뭇잎도 먹고 나무껍질도먹었소. 이름 모를 풀뿌리 같은 것들도 캐 먹고. 우리는 전부 다섯 명이었는데, 그중에 이제 막 군대에 불려온, 앳된 소년이 있었소. 그런데 밤에 내 옆의 병사가 이렇게 속삭이는 거요. ‘저 어린녀석은 얼마 못 버틸 거야. 곧 죽을 거라고…… 무슨 말이냐고 내가 물었소. ‘어떤 사람한테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수용소에서 도망쳐 나올 때 일부러 어린 녀석을 데리고 나왔대...... 사람고기도 먹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결국 다들 목숨을 부지했다는 거야.……‘ - P49
그가 소비에트 병사는 결코 적에게 항복해선 안 된다는 당의 지령을 우리에게 읽어주었지. ‘우리에게 포로란 없다. 반역자만 있을 뿐‘이라는 스탈린 동지의 명령이었어. 그러자 병사들이 권총을 꺼내들었어…… 그런데 루닌이 말리는 거야. ‘그럴 필요 없네. 살아야지. 자네들은 젊으니까.‘ 하지만 정작 자신은 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 그리고 1943년…… 우리 소비에트 군대는 계속 치고 올라가는 중이었어…… 벨라루스를 지날 때였나. 어린 남자애 하나를 만났어. 웬 아이가 느닷없이 어디 땅 밑 같은 데서, 그러니까 지하에서 튀어나오더니 우리에게 달려오면서 소리치는 거야. ‘우리 엄마 좀 죽여주세요…… 죽여주세요! 엄마가 독일군을 좋아했어요……‘ 아이는 잔뜩 겁에 질린 눈이었어. 그리고 바로 아이 뒤를 쫓아 까만 노파 하나가 달려나왔지. 온몸을 검은색으로 휘감은 노파였어. 노파가 성호를 그으며 말했어. ‘그애 말은 듣지 말아요. 그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라오....‘ - P52
,"낮에는 독일군과 독일군 앞잡이 때문에, 밤에는 빨치산 때문에 우리는 늘 두려움에 떨었어. 빨치산이 마지막 암소마저 가져가버리는 통에우리집엔 고양이 한마리만 남았지. 빨치산은 늘 배가 고팠고 난폭했어. 우리 소를 끌고 가길래, 막 쫓아갔지…… 10킬로미터쯤 따라갔을까. 제발 소를 돌려달라고 애원했어. 오두막에 아무것도 못 먹은 아이들 셋을 두고 왔다고. 그랬더니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거야. ‘가, 가라니까, 아줌마! 안가면 쏴버릴 거야.‘ - P53
전쟁에 착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죽이는 일도 있었어. 유형살이 갔던 부농의 자식들이 돌아왔는데, 와보니 부모들이 이미 죽임을 당하고 없는 거야. 그러자 독일군 편에 붙어서는 복수를 하기 시작했지. 또 한 사람은 늙은학교 선생을 농가에서 쏴 죽였어. 바로 우리 옆집에 살던 선생이었어. 선생이 그 사람 아버지를 고발해서 재산을 전부 몰수당했거든. 그 선생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지. 독일군은 처음에 콜호스를 해체하고 사람들에게 땅을 나눠줬어. 그동안 스탈린 때문에 막혔던 숨통이 트이는 것 같더군. 독일군에게 소작료를 냈지...… 꼬박꼬박 착실하게 값을 지불했는데…… 아, 이놈들이나중에는 우리를 태워 죽이지 않겠어. 사람도 집도 다 불에 태우기 시작하는거야. 가축은 멀리 쫓아버리고, 사람들은 태워 죽이고, 아, 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무서워. 말은 정말 무서운 거야…… 나는 마음을 착하게 써서 살아남았어. 누구한테도 해를 끼친적이 없지.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까....." - P54
"나는 기관총 사수였어. 사람을 참 많이도 죽였어……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은 아이 낳기가 무서웠어. 그래서 어렵게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나니까 괜찮아지더라고. 그렇게 되기까지 7년이나 걸렸지만…… 하지만 나는 아직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았어. 용서가 안 돼…… 포로로 잡힌 독일군들을 봤을 때 정말 기뻤지. 놈들이 처량한 신세가 된 게너무 좋았어. 발엔 군화도 없이 발싸개만 감고, 머리에도 머릿수건만 두 - P55
르고 있는 꼴이 보기만 해도 좋더라고..... 어느 마을을 지나는데 포로들이 빵을 구걸했어. ‘어머니, 빵 좀 주세요..... 빵...…‘ 그러자 마을농부들이 오두막에서 먹을 걸 가지고 와서 놈들에게 주는 거야. 누구는 빵조각, 누구는 감자를 가져다주는데, 그게 나한테는 큰 충격이었지. 사내애들은 행렬 뒤를 따라가며 돌을 던지고……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어……. 어쩌면 나는 두 개의 인생을 살았는지도 몰라. 하나는 남자의 인생, 다른 하나는 여자의 인생 ····" - P56
"많은 사람들이 믿었어……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달라질 거라고…… 스탈린은 자신의 민중을 믿을 거라고. 하지만 전쟁은 끝난 게 아니었어. 군용열차들은 이미 마가단으로 향했지. 승전의 주역들을 싣고서...... 당국은 독일군에게 붙잡혀 수용소에서 지낸 사람들과 독일군 밑에서 부역을 한 사람들을 잡아들였어. 유럽에 갔다 온 사람들도 모두 체포됐고, 그들이 유럽에 대해 입을 열 수도 있었으니까. 유럽엔 공산주의자들이 없다고, 유럽의 집과 길들은 얼마나 훌륭한지 모른다고 떠들어대면 큰일이지 않겠어? 유럽 어디에도 콜호스 같은건 없다고 말이야...... 승리를 얻고 나서 사람들은 침묵했어. 전쟁 전처럼 굳게 입을 다물었고 두려움에 떨었지....." - P58
"나는 역사 선생이었어..… 내 기억에 의하면 세 번인가? 그래, 세번 바뀌었던 것 같아, 역사책이. 그래서 세 종류의 역사책으로 아이들을 가르쳤지….. 우리가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우리한테 물어봐.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멋대로 역사를 바꾸지 말고. 지금 물어봐…… 사람을 죽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당신은 모를 거야. 나는 지하공작원이었어. 반년 후에 임무를 하나 받았는데, 독일군 장교 식당의 여종업원으로 잠입하는 거였지.…… 젊고 아름다웠던 나는..... 잠입하는 데 쉽게 성공했어. 수프 냄비에 독을 풀고, 그날로 바로 빨치산에 합류하는 게 내 임무였어.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미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지. 아무리 그들이 적군이라도 매일 얼굴을 보고, 나에게 ‘당케 쇤... 당케 쇤……‘ 하는데, 죽이는 게 어디 쉽나…… 살인은 쉬운 일이 아니야...… 어찌 보면 죽이는 게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하지…… 나는 평생 역사를 가르쳤어…… 하지만 이 일은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언제나 답을 찾지 못했어.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 P59
나에겐 나만의 전쟁이 있었다…… 나는 나의 여주인공들과 긴 여정을 지나왔다. 나도 그네들처럼 오랫동안 우리의 승리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다. 하나는 아주 멋진 얼굴, 다른 하나는 무시무시한 얼굴. 하지만 둘 다 흉측한 상처투성이라 봐줄 수가 없다. "육탄전에서는 상대방을 죽일 때 상대의 눈을 보게 돼. 그건 폭탄을 떨어뜨리거 - P59
나 참호에 숨어서 총을 쏘는 것과는 다른 일이지." 그네들이 들려준 말이다.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 그가 사람을 죽이고 죽어간 이야기를듣는 것은 상대의 눈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 P60
민스크 변두리의 낡은 3층 건물 전쟁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그 당시로서는 아주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고 할 수 있는 아파트 중 하나로, 재스민 나무들에 둘러싸여 오래되고 아늑해 보인다. 장장 7년에 걸쳐 이어진 탐색이 바로 이 집에서 시작되었다. 나 자신을 위해, 우리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전쟁이라는 세계의 문을 열어젖히면서 시작된, 경이롭고도 고통스러웠던 7년의 시간 고통과 증오 그리고 유혹을 느꼈던 시간들. 정겨움과 당혹스러움도…… 죽음과 살인은 어떻게다른지,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의 경계는 어디인지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다른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정신 나간생각과 의기투합할 수 있는가? 심지어 죽일 의무가 있다는 생각까지하다니. 전쟁에는 죽음을 제외하고도 다른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며, 전쟁터에도 평범한 우리네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사실을 - P63
나는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쟁, 이 또한 삶이라는 사실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의 진실들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수많은 인간의 비밀들과도 예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질문들 앞에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될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왜 악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가? 정녕 우리안에 악을 향한 놀라움은 없단 말인가?‘와 같은 질문들 앞에서. 길 그리고 다시 길들..... 온 나라를 헤집고 다닌 수십 번의 여행들, 목소리가 담긴 수백 개의 녹음테이프, 수천 미터에 달하는 녹음테이프필름. 500여 차례의 만남, 그 이상부터는 세는 걸 포기했다. 얼굴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목소리만 남았다. 내 기억 속에서 합창 소리가 울린다. 웅장한 합창. 때론 노래는 없고 울음소리만 가득한 합창, 고백하건대, ‘과연 내가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낼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며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가 있었다. 과연 끝까지 갈 수 있을까. - P64
그만 멈춰 서거나 도망치고 싶은, 의심과 두려움의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뒤돌아서기엔 너무 늦었다.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 나는 악의 노예가 되었고 그 심연을 들여다봤다. 이제 어느 정도 아는 게 생긴 것도 같다. 하지만 그만큼 의문은 더 많아졌고, 해답은 더 적어졌다. 이 여정을 시작할 때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나를 이 집으로 이끈 건 ‘얼마 전 민스크에 있는 ‘돌격대‘라는 이름의도로장비 생산공장에서 선임회계원 마리야 이바노브나 모로조바의 은퇴식이 있었다‘는 지역 일간지에 난 짤막한 기사였다. 그 기사에는 그녀가 전쟁중에 저격병이었으며 무공훈장을 11개나 받았다고 쓰여 있었다. 그녀의 총에 죽어나간 적병의 수만 75명이라고도 했다. 이 여인이 전쟁 때 맡았던 일과 현재의 평온한 직업을 일치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신문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봐도 그랬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보통 여인네였다. - P64
‘이제 사람들 만나는 게 두렵지 않아. 이제늙은이가 다 됐는데, 뭐‘라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풀이했어. 그래…… 한마디로…… 전쟁은 그런 거야…… 밤에 움막에 누워 있을 때가 생각나 잠들지 못해 뒤척이고 있으면 어디선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렸지. 아군의 포탄 소리가…… 정말 죽고싶지 않았어…… 맹세는 했지만, 필요하면 목숨을 내놓겠다고 군인의맹세는 했지만 정말 죽고 싶지는 않더라고. 하지만 거기서 살아 돌아간다 해도 마음이 병들 것 같았어. 지금은 ‘차라리 다리나 팔이 다쳤더라면, 차라리 몸이 아팠더라면‘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 - P84
음이 ...... 너무 아파.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전쟁터로 갔어. 아직 어린애나 다름없었는데, 얼마나 어렸으면 전쟁중에 키가 다 자랐을까. 집에 돌아왔을 때 엄마가 내 키를 재보았는데…… 그동안 10센티미터나키가 컸더라니까……"
작별인사를 하며, 이 여인은 자신의 따뜻한 손을 어색하게 내밀어 내손을 꼭 감싸쥐었다. "미안해 ......" - P85
목소리… 수십 개의 목소리들…… 목소리들이 낯선 진실을 외치며 나에게 쏟아져들어왔다. 그리고 진실, 그 목소리들이 전하는 진실은어릴 때부터 익히 들어온, ‘우리는 승리했다‘는 간단명료한 정의와는 딴판이었다. 순식간에 화학반응이 일어났다. 파토스는 인간의 운명이라는 살아 있는 조직 안에서 깨끗이 녹아버렸다. 파토스는 그 생이 아주짧은 물질임이 밝혀졌다. 우리 삶 속에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더 존재할 때, 그게 바로 운명이 되는 것이 아닐까.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어 이러는 걸까? 어떻게 그런 일이 모스크바나 스탈린그라드 바로 옆에서 일어날수 있었는지 따져 묻고 싶어서? 아니면 군사작전에 대한 묘사라든지 - P89
높고 낮은 언덕들의 이름에서 따온, 지금은 잊힌 전투의 명칭들이 듣고싶어서? 나는 정말 전선이니 전선의 활약이니 진격과 퇴각이니 그런이야기, 전복된 열차가 몇 대고, 빨치산의 기습공격은 어땠는지 따위의이야기가 필요한 걸까? 이미 수천 권도 넘는 책들에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들이? 아니,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영혼에 대한 이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은다. 영혼의 삶이 남기고 간 흔적을 따라가며 영혼을 기록한다. 나에겐 영혼이 걸어간 길이 사건 자체보다 중요하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최소한 우선순위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나를 흥분시키고 놀라게 하는 건 다른 것, 즉 ‘대체 거기서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거기서 사람은 무엇을 보고 또 무엇을 깨달은 걸까? 도대체 삶은무엇이며 죽음은 무엇일까? - P90
그리고 결국 나 자신은 누구인가? 나는 감정의 역사를 쓴다…… 영혼의 역사를 쓴다….… 전쟁이나 한 나라의 역사, 영웅들의 인생역정이 아닌, 그저 평범한 삶을 살다가 거대한 사건의깊은 서사 속으로,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 작은사람의 역사를 쓴다. 1941년의 소녀들…… 무엇보다 나는 그 소녀들은 대체 어디서 왔는지 묻고 싶다. 그것도 그렇게나 많이. 그들은 어떻게 남자들과 똑같이무기를 들고 싸울 생각을 했을까? 총을 쏘고, 지뢰를 매설하고, 폭탄을터뜨리고, 폭격을 하는 등의 사람을 죽이는 일을. 이미 19세기에 푸시킨이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푸시킨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던 여성기병 나데즈다 두로바의 일기 중 일부를『동시대인』에 실으며 이렇게 물었다. "대체 무슨 이유로 이 훌륭한 귀족 집안의 젊은 아가씨는 정든 집을 등지고 자신의 여성성도 포기한 채, - P90
남자들도 꺼리는 힘든 노동과 의무를 선택했단 말인가? 대체 무엇이그녀를 전장으로 내몰았을까! 그것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남모르는 은밀한 마음의 번민? 불타는 상상력?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타고난 기질? 애끓는 사랑?" 정말이지 대체 무얼까? 100년도 훨씬 더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같은질문을 던진다…...
"말하고 싶어·· 말할 거야! 전부 다 말할거야! 드디어 사람들이 우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으니까. 그 숱한 세월을 우리는 입을 닫고 살았어. 심지어 집에서조차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지. 그렇게 수십 년이 흘렀어. 전쟁에서 돌아온 첫해에 나는 말하고 또 말했어. 아무도 듣질 않았지. 그래서 입을 다물어버린 거야…… 당신이 찾아와서 다행이야. 나는 누군가 와주길 늘 기다렸어. 누군가 올 줄 알았어. 반드시 올 거라고 믿었지. 그때 나는 어렸어. 완전히 어린애였지. 참 안타까워. 왜인지 알아? 내가 너무 어려서 그때 일이 다 기억나지 않거든…… - P91
"전선으로 떠나는 날…… 날이 참 좋았어. 공기는 맑고, 이슬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아, 얼마나 아름답던지! 아침에 집밖으로 나와 잠깐서서 생각했어. ‘정말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우리집 마당도…… 우리 동네도…… 언젠가 다시 보게 되는 날이 올까?‘ 엄마가 흐느끼며 나를 붙잡고 못 가게 했어. 내가 이미 걸음을 떼서 저만큼 가고 있는데도 쫓아와서 나를 꼭 부여안고 놓을 줄 몰랐지...…" 올가 미트로파노브나 루즈니츠카야, 간호병 - P110
죽음이라...... 글쎄, 죽는 건 두렵지 않았어.…… 아마 젊어서 그랬을 거야 아니면 뭐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사방에 보이는 게 죽음이고 늘 죽음이 옆에 따라다녔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않았던 거 같아. 다른 사람들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계속 우리 곁을 맴돈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옆으로비켜갔으니까. 한번은 밤중에 우리 연대 작전지역에서 중대 전체가 대대적인 수색작전을 펼친 적이 있었어. 동틀 무렵 중대는 물러갔는데, 중립지대에서 신음 소리가 들리는 거야. 부상당한 병사가 남아 있었던 거지. ‘가지마, 죽을지도 몰라‘ 동료들은 내가 부상병을 구하러 가게 내버려두지 않았어. ‘봐, 벌써 날이 밝아온다고.‘ 하지만 나는 만류를 뿌리치고 그쪽으로 기어갔어. 부상병을 발견하고 그의 팔을 내 허리띠에 묶고는 장장 여덟 시간에 걸쳐 결국 그를 끌고 왔지. 살려서 데려온 거야.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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