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 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p224

어린 시절 우리에게 ‘박정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통령‘과 뜻이같은 보통명사였다. 박정희는 곧 대통령이고 대통령은 박정희여야만 했다. 대통령을 다른 이름과 연결하거나 박정희라는 이름에 대통령을 붙이지 않는 것은 모두 불경스러운 행위였다. 내가 첫돌이 되기전에 권력을 잡았던 그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대통령이었다. 우리 세대는 유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시작을온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보냈다. 우리들각자의 개인사에는 많든 적든 대통령 박정희의 인격과 취향이 각인되어 있다.
1961년 5·16에서 1972년 10월 유신까지 민주화운동의 목표는박정희 정권 타도라기보다는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정부는 언제나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하지만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4·19혁명의 봉화를 올렸던 고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자라나 대학생과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이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전위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91

민주화운동의 후위後衛는 수십 년 구절양장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야당이었다. 운동의 주력은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었다. 전위는 강력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에 맞서 싸움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주력을 형성하면 싸움이 커졌다. 야당은 투쟁의 성과를 챙기고 뒷수습을 했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대隊伍는 4·19 때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같은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과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 P191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 P192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 P194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 - P198

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2억 달러로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 P199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월 20일,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 - P204

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월 18일 100만 명의 청중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 - P205

정선거 감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8퍼센트,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퍼센트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 P206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P209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은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월 2일 서울대 - P212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월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그러나 2006년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 P212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
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 P212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년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 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 P217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7년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 P218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년 8월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YH무역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이런 상황에서 자꾸
‘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선포했다. - P219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 - P221

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 P222

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 - P224

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군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 P225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 - P225

운데서 누군가 ‘십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 P227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내가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5월 14일과 15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벌어진 대학생거리시위를 정밀하게 기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 - P227

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5월 13일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김‘이 이끈 여야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월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 P228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월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대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 - P228

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월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복학생 형들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나는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해산하도록 한 다음 밤이 깊을 때까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 P229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밝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 - P229

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을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던 정치인 김대중 씨도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정부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 P230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安일 것이라고 우리는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월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사단 등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 P230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컸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 P232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 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을 발표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 P233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표했다는 신군부의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 - P233

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ㅏ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 P234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 P235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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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라는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 - P235

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 P236

6월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 - P255

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년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 P257

지도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 P257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가늠할 수 없었다. - P258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죄를 완전히 면책받은 것은 아니었다. - P258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 P259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월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의 강경대응과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9월까지 지속되었다.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국민의 관심은 정치에 집중되었다. - P259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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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 전후방 연관 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국민들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퍼센트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 P168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부자감세다. 이명박 대통령은 법인세와 소득세율을 인하함으로써 재임중 누적효과가 100조 원에 육박하는 감세를 했고 혜택은 대부분 대기업 주식 소유자와 고소득층의 몫이었다. 자영업자와 임금근로자 - P168

절반이 소득세 면세점보다 낮은 소득을 얻기 때문에 직접세 감세는중간소득 이하 계층의 국민들에게는 단 한 푼의 혜택도 주지 않는다.
대기업의 투자와 부유층의 소비를 유도한다는 목적을 내세웠지만 감세의 투자촉진 효과는 별로 없었다. 둘째는 부동산 거래 규제완화로단기적 경기부양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부동산 가격은 오히려 하락했다. 부동산 투기 시대의 거품이 덜 걷힌 상황에서는 규제완화로부동산 경기를 살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셋째는 4대강 사업이다. 초대형 토목공사를 벌려 경기를 부양하려 했지만 환경을 파괴하고 국가의 돈을 건설회사 금고로 이전시켰을 뿐 고용증대와 경기진작 효과는 거의 없었다. 넷째는 수출을 증진하기 위해 환율을 인위적으로 올린 정책이다. 이 정책은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파산사태와 맞물려 환율 폭등을 일으킴으로써 달러로 표시한 1인당 국민소득의 대폭 하락을 불렀다. 양극화의 원인이었던 경제력 집중과 오남용,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산, 낙수효과 감소에 대해서는 사실상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 P169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이명박 정부 경제정책의 연장에 지나지 않는다. 박근혜 정부는 부자감세 정책을 철회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가 처음 편성한 2014년도 정부 예산안에는 기초노령연금 수급액을 두 배로 올리는 것 이외에 복지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정책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부는 철도 민영화 정지작업이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수서발 KTX 자회사를 설립했고 비영리 의료법인이 영리 자회사를 세울 수 있게 하는 의료법 개정을 추진했다. 공공부문의 사유화 또는 시장화 정책을 강행한 것이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위한 입법과 정책은 전무했고 재벌 경제력 집중의 폐해를 시정하는 경 - P169

제민주화 공약도 완전히 실종되었다. 2014년 들어서는 규제를 ‘암덩어리‘, ‘쳐부숴야 할 원수‘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규제철폐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은 2007년 이명박 후보와의 후보경선 때 내세웠던 ‘줄푸세‘ 공약, 다시 말해서 세금을 줄이고 규제를 풀고 법질서를 세우는 것으로 귀착되었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에서 4대강 사업 하나를 빼면 곧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이 된다.
소득분배의 개선과 양극화 해소에 관한 한 특별한 기대를 할 수 있는근거는 찾을 수가 없다. - P170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개혁이 불가능한 전제정치에서 폭력 행사는 정당하다. 그런데 그 목적은 오직 폭력을 쓰지 않고도 개혁을 할 수 있는민주정치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민주 헌법과 민주주의적 방법을 파괴하려는 안팎의 공격에 대항하는 폭력 행사 역시 도덕적으로 정당하다. 시민의 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L』 - P172

1984년 가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롯데 자이언츠 최동원 투수가다시는 볼 수 없을 전설을 썼다. 그는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일곱경기를 치르는 동안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를 오가며 4승을 거두어팀을 정상에 올려놓았다. 나는 7차전 경기를 관악경찰서 유치장에서보았다. 그리고 그 겨울을 영등포구치소 0.7평짜리 독방에서 보냈다.
사실 나는 평생 누군가를 때린 일이 ‘거의‘ 없다. 초등학생 때 얄밉게구는 누이동생을 한 번 쥐어박은 것, 그리고 말년병장 시절 상습적으로 후임병을 괴롭힌 상병 하나를 슬리퍼로 때려본 게 전부다. 그런데도 그때 ‘폭력행위등처벌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죄로 옥살이를 했다. "하필이면 왜 이런 나라에 태어났단 말인가. 프랑스나 독일, 영국, 미국 같은 나라에 태어났다면 좋았을걸!" 그렇게 운명을 원망했다. 그 나라들이 부자나라여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나라여서 그랬다.
우리 세대는 세상과 삶에 대한 생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자랐다. 그래서인지 나는 무엇보다도 자유가 좋았다. - P173

민주주의 선진국도 원래부터 그런 나라였던 것은 아니다. 중세 유럽에는 엄격한 신분제도가 있었으며 교회와 귀족계급이 종교적 도그마와 무자비한 폭력으로 민중을 억압했다. 미국에는 19세기 중반까지 노예제도가 있었다.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피가 강물처럼 흐른 폭동, 반란, 혁명과 반혁명, 내전과 전쟁을 겪었다. 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거저 얻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앞에는 두 갈래 길이 있었다. 하나는 대한민국을 떠나 더 자유롭고 풍요로운 나라로 가서 더 나은 삶의 기회를 찾는 길이었다.  - P173

민주화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는 20세기의 대표적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Karl R.
Popper(1902~1994)의 정치이론을 활용할 수 있다. 포퍼는 어떤 국가가 민주주의 체제인지 전제정치 체제인지 가리는 기준을 하나로 정리했다. 다수 국민이 마음을 먹었을 때 정권을 평화적으로 교체할 수있으면 그 나라는 민주주의 국가다. 그게 불가능한 나라는 독재국가다. 평화적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과 제도가 아예 없으면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 제도가 있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않아서 평화적 정권교체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면 그 역시 민주주의가아니다. - P177

칼 포퍼는 특정한 계획이나 목표에 입각해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사회혁명을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는 인간의 능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사람은 현실조차 있는 그대로 인식할 능력이 없으며, 미래를 옳게 설계할 능력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정한 목표 또는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사회 전체를 재조직하려는 혁명가들의 동기는 고상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청사진이 옳고 훌륭하다는 증거는 없다. 그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한 다음 그 청사진에 따라 재조직한 사회가 혁명 이전의 사회보다 확실히 훌륭할 것이라는 보장도 없다. 정의, 평등, 인간해방 등 혁명가들이 내거는 목표가 무엇이든, 어떤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기 위해 폭력으로 사회를 재조직하는 혁명은 반드시 전체주의 독재로 귀결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불행하게도 20세기 세계사는 포퍼가 옳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포퍼는 추상적인 선을 실현하려고 혁명을 하기보다는 현실의 구체적인 악을 제거하기 위한 사회적 개혁과 개량에 집중하자고 호소했다. - P178

항쟁은.
전제정치를 타도하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유일한 방법은 민중이저항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시민들이 스스로를 조직하고 궐기해 경찰과 군대, 사법기관과 정보기관을 동원한 권력집단의 폭력을 힘으로 제압해야 정치혁명을 할 수 있다.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 나라의 환경과 특성에 따라 달라진다. 대한민국은 국토가 좁고 인구가 도시에 밀집해 있다. 역사적·문화적 · 인종적 균질성이 매우 높다.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겨울이 너무 추워서 난방시설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정글도 넓은 산악지역도 없다. 북쪽은철책으로 단절되었고 나머지는 바다로 가로막힌 사실상의 섬나라다.
중국과 베트남, 중남미와 달리 특정 지역을 근거지로 삼아 장기항전을 벌일 수 없다. 중동 국가들처럼 인접국가에 무장투쟁 기지를 만들수도 없다. 게다가 국가는 엄청난 규모의 상비군과 경찰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뿐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유일한, 그리고 가장 적합한 저항권 행사 방식이었다. - P179

민주화운동가들이나 1980년대의 사회주의운동가들이 테러를 투쟁방법으로 쓰지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조선민족해방전선‘ (남민전) 활동가들은 자금을 마련하려고 동아건설 최원석 회장 집을 털려 했을 뿐 사람을 해치려고 하지는 않았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이나 동의대학교 사태에서 무고한 시민과 경찰관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일부러 사람을 죽이려고 일으킨 사건은 아니었다. 독일과 일본 적군과가 벌인 시설파괴, 요인 암살, 항공기 납치와 같은 일은 우리 민주화운동 역사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적 · 동시다발적.
연속적 도시봉기를 일으키려면 대중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데 테러는이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운동가들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죽였다. 스스로 목숨을 버림으로써 대의를 알리고대중의 관심과 각성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테러와 암살이 아니라 분신과 투신을 선택한 투쟁방식은 세계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었다. - P180

그렇게 목숨을 버린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이 역사와 인간에 대한예의일 것이다. 전태일 이후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대부분 분신과 투신이었고,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화,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미국의 독재정권 지원 중단, 노동조합활동의 자유 보장, 임금과 근로조건개선 같은 것이었다. 직업은 주로 대학생과 노동자였다.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1970), 서울대 학생 김상진(1975)과 김태훈(1981), 운수노동자 박종만(1984), 경원대학생 송광영(1985), 구로공단 신흥정밀 노동자 박영진, 서울대 학생 이재호·김세진 · 이동수·박혜정(이상 1986), 서울교대 학생 박선영, 하남 신흥정밀노동자 표정두(이상1987), 성남 고려피혁 노동자 최윤범, 운수노동자 이문철(이상 1988), (주)통일 노동자 이영일, 노동운동가 최동(이상 1990), 전남대 학생 박 - P180

승희, 안동대 학생 김영균, 경원대 학생 천세용,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 성남피혁 노동자 윤용하, 광주시민 이정순과 차태권, 보성고학생 김철수, 인천 운수노동자석광수(이상 1991) 등이 널리 알려진 사람들이다. 분신과 투신은 1986년과 1991년이 가장 많았다. 1986년은 전두환 정권의 인권탄압이 절정을 이룬 가운데 민주화운동이 폭발적으로 확산된 시기였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전두환과 미국에 대한 청년들의 분노가 크게 고조된 시기이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중반기였던 1991년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크게 허물어진 시기였다. 특히 명지대생 강경대 씨가 시위 도중 경찰에 타살당한 사건으로 학생들의 반정부투쟁이 격화하면서 ‘분신정국‘이라는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청년이 죽음으로 정부를 규탄했다. - P182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로 민중이 저항권을 행사한 최초의 사례는 3·1운동이다. 3·1운동의 목적은 민주화가 아니라민족해방이었지만 그 방식은 민주화운동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것이었다. 두 번째 사례는 4·19혁명이다. 4·19는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한국적 전형典型이었다. 우리 국민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독재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교체하는 최초의 역사적 위업을 이루었다. 세 번째 사례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이다. 승리한 6월 민주항쟁과 비극으로 끝난 광주민중항쟁의 차이는 딱 하나였다. 광주민중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만약 그때 서울, 부산, 대구, 울산, 대전 등 다른 대도시 주민들이 용기를 내서 함께 궐기했 - P182

다면 신군부가 광주 한 곳에 그토록 많은 병력을 집중 투입해 시민들을 살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민주화의 역사를 상세하게 알고 싶은 독자에게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가 엮은 『한국민주화운동사』를 권한다. 본문만 합쳐서 2,300쪽이나 되는 세 권짜리 책이다. 정부 수립 이후 노태우 정부까지, 넓은 의미에서 민주화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건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마치 같은사건들이 무한 반복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수십년 동안 같은 ‘패턴‘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이 패턴을 최대한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알고리즘‘이 된다. - P183

또는 정부가 독재, 인권탄압, 부정부패를 저지른다. 야집권세력당과 재야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다. 여기서인사들이재야인사란 정치인이 아닌 지식인, 종교인, 문화인 등 영향력 있는시민사회 리더를 가리킨다. 대중이 크게 호응하지 않으면 집권세력은 신경 쓰지 않고 같은 행태를 반복한다. 그러면 야당과 재야의 투생대열에 청년학생들이 가세한다. 교내에서 규탄선언문을 발표하고항의집회를 하다가 거리시위를 벌인다. 시민들이 여기에 합세하지않으면 정부는 적당히 진상을 은폐하고 몇몇 책임자를 처벌하는 시늉을 한다. 주동자를 구속하고 경찰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한다. 그렇게 해서 투쟁이 끝나고 나면 집권세력은 또다시 독재와 부정부패를저지른다. 같은 패턴의 투쟁이 또 벌어진다. 이것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 호응을 불러일으킬 조짐이 보이면 공안당국이 나선다.  - P183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세 단계를 거쳤다. 4·19에서 10월 유신까지는 민주주의 맹아기라고 할 수 있다. 4·19혁명은 곧바로 5·16쿠데타와 박정희 정권이라는 북풍한설을 만났지만 죽지 않고조금씩 생명력을 키웠다. 10월 유신부터 6월 민주항쟁까지 유신체제9년과 제5공화국 7년은 성장기였다. 그 한가운데 광주민중항쟁이있었다. 이 시기 국민들은 민주화를 이루는 데 필요한 열망과 능력을축적했다. 시민의 힘으로 국가폭력을 이겨내지 않고는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세울 수 없었기 때문에 성장기의 민주화운동은 민주주의정치혁명을 지향할 수밖에 없었다. 6월민주항쟁 이후 현재까지는 민주주의 성숙기다. 우리는 두 차례 평화적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헌법정신에 맞게 국가를 운영하도록 권력집단의 행태를 개선했다. 시민들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
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 있다. - P188

그런데 최근 우리의 민주주의가 과연 성숙해가고 있는지 의문이제기되고 있다. 역사가 거꾸로 돌아가고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개탄도 나온다. 그러나 2014년의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는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가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인 때도 있었다. 검열과 통제가 사라져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가 만개했고 대통령과 정부가 권력 행사를 절제했다.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어제 내린 눈처럼 새롭지도 귀하지도 않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2008년 이후 이것은 착시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 - P188

리의 민주주의는 대통령과 정부, 집권세력이 헌법을 존중하려고 노력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정부는 범죄조직과 비슷한 행동을 한다. 예컨대 국가정보원과 국군기무사령부, 국가보훈처등 여러 국가기관이 온라인 여론을 조작하는 방식으로 2012년 대통령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이것 자체도 문제지만더 심각한 것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대응방식이었다. 대통령과 정부는 헌법정신을 파괴하고 법률을 위반한 국가기관들의 조직적 불법행위를 관련자들의 ‘개인적 일탈‘로 규정했다.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원세훈 국정원장 등 대선 불법개입 주모자들에게 선거법 위반혐의를적용한 검찰총장을 내쫓으려고 ‘혼외아들‘로 지목한 어린이의 개인정보를 불법적으로 수집해 언론에 유포했다. 2014년에는 서울시 공무원이었던 탈북자 유우성 씨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국가정보원과검찰이 중국 정부의 공문서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국정원장과 검찰총장은 아무 책임도 지지 않았고 몇몇 실무자들의 사표제출과 구속으로 끝내려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조직의행태를 보인 것이다. - P189

집권세력의 반민주적 행태는 대통령과 여당 정치인들의 교만과 성숙하지 않은 시민의식을 반영한다.
이승만 정부 시절 어떤 외국 기자는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낸 미군 장성은 한국 국민이 강자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쥐떼와 같다고 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쓰레기통이 아니었으며, 국민은 쥐떼가 아니었다. 세계인이 주시하는 가운데 우리는 보란 듯이 자유를 쟁취하고 민주주의를 세워냈다. 평화적 권력교체를 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그에 맞는 시민의식과 행동양식을발전시켰다. 우리의 민주화 역사는 자유에 대한 욕망과 꿈, 정의를 향한 열정과 헌신, 존엄을 지키기 위한 분투와 희생으로 점철된 고난과 영광의 여정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길을 다 걷지 않았다. 어지러운 오늘의 현실은 민주화의 역사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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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긴요. 딴 애들이 불쌍해서죠. 소설에 쓴 모든 문장이 그 ‘한방을 위해 쓰이는 것 같잖아요. 그 한순간을 들어올리기 위해 팔을 벌벌 떨며 벌을 서고 있는 것 같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뭐 소설계의 대장장이가 되어 모든 문장을 평평하게 두들겨 신scene들의평등을 꾀하겠다. 그런 건 아니고요. 그럴 주제도 못 되고요. 그저모든 자잘함을 지우며 홀로 우뚝 선 한순간을 지지하는 것을 찜찜해한다는 거죠."
"네가 못해서 그래. ‘결정적 순간‘을 만들어내는 건 소신이 아니라 능력의 문제야 할 줄 아는데 안 하는 거랑 못해서 못하는 건깔이 다르단다."
"언니."
동생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못해서 못하니까 좋은 거예요. 무능해서 귀한 거예요. 잘하는데 억지로 안 하는 사람은 반드시 흔적을 남겨요.  - P11

틈 없는 정신과 틈뿐인 몸의 간극을 메운 것은 무수한 규칙이었다. 천가방을 챙기지 않았다면 맨손으로 모든 물건을 옮겨야한다. 유리 용기가 없다면 생고기든 굴이든 가지고 있는 것으로싸야 한다-올드 셀린, 언니가 갈색 핏물이 밴 스카프를 펼치며말했다. 그래야 버릇을 고칠 수 있다.  - P13

두 사람이 손을 잡거나 살을 비비거나 땀방울을 빨아먹는 일 따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를 못박힌 듯 강렬히 보는 눈빛에서 목경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원감이, 깊은 이해가 일어나고 있었다.
"왜 그랬니?"
고모가 물었다.
"나도 해봤어요."
무경이 말했다.
"할 순 있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 고모의 그 일을, 내가 했어요"
고모는 만화에 나오는 사람처럼 웃었다. 그러더니 이런 소릴-목경은 억장이 무너졌다하는 게 아닌가.
"너는 내 딸이구나."
"고모, 나 열나요."
목경이 말했다. 그날이 목경이 고모에게 처음으로 존댓말을 쓴날이었다. - P39

"다른 괄호들은 어땠어요? 한 번에 다른 사람 꿈으로 갔어요?"
눈에 덮여 차선이 사라진 도로를 건너며 나는 바에게 물었다. 규희 다음으로 나는 세모를 생각하고 있었다. 일 년에 서너번, 계절이 바뀔 때나 안부를 묻던 친구보다 서로의 벗은 몸을 본 연인이 나을 듯했다. 싸우면 경쟁하듯 저주를 퍼붓던 애인이 아무래도 덜 미안하겠지. 좀 아프게 해도 괜찮은 사람, 서로에게 준상처보다 사랑했던 기억이 큰 사람, 그런 사람이라면 세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 P79

이혼녀, 정체성이란 스스로 밝히는 게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알게 하는 것이라고, 안다는 것을 알아챌까 오히려 눈치보게 하는 강한 힘이라고 말하던 사람. 힘이 정체성이라니. 세렝게티에 사는 초식동물도 아니고 왜 세상을 온통 적으로 보느냐고 내가 물으면, 세모는 그 경계심이 자신의 유일한 방어수단이라고 했다. 잡아먹히기 전에 들이받을 수 있는 뿔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않겠느냐고 했다.
세모는 치과에 갔을까. 사랑니를 뽑았을까.
내가 꿈에 나타나면 세모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 P84

읽고 쓰는 것만이 제 고집과 고립을 이 불가능성을 잠시라도넘어서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병과 관련된 기억과 감정들은 여전히 저의 내면 한구석에 뿌리박고 있고 저는 자주 그리로 되돌아갑니다. 병에 걸린 몸의 고통과 고독을 잊지 않아야 또 아프게 되었을 때 조금이나마 태연한척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이야기를 읽는 동안 때때로 저는멀리 달아납니다. 저에게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순간의 착각일지라도, 결국 같은 문제로 돌아오게 되고 현실은 변하지 않을지라도, 여러 번 당겨서 느슨해진 고무줄처럼 제마음도 조금씩 고집스러운 탄력을 잃어가며 확장되고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혹시나 여러분도 잠시나마 기진과 진화를 따라 어둡고 축축한버섯 농장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셨다면, 이 이상한 이야기를 어리둥절한 채나마 끝까지 읽어주셨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P140

-노출 관종이네. 가족들이 모르나? 알면 좀 말리지.

나는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다. 가족까지욕먹게 할 줄 알았어!
오후 업무를 어떻게 해냈는지도 모르겠다. 퇴근 시각이 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처음엔 악플에 휘둘려 오근희를 끝까지 말리지 않은 나를 탓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지가 뭔데 남의 가정에 참견인가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속이 터질 듯 갑갑해서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가 캔맥주를 사서 원샷했다. 식도를 훑고 내려가는거칠고 시원한 느낌이 나를 다시 살게 했다.
지들이 뭔데 내 동생을 욕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 있는 권한은 나한테밖에 없었다. - P176

언니, 관종이 되려면 관종으로 불리는 걸 참고 견뎌야 해. 그게얼마나 힘든 일인지 언니는 모르지? 한가지 더 언니가 모르는 게있어. 관종도 직업이 될 수 있다는 거야. 그걸 왜 모를까. 왜겠어.
언니가 꼰대라서 그런 거지.
언니, 나는 언니가 그리 많지 않은 나이에 꼰대가 되어버린 게슬퍼. 혹시 우리 가족이 언니를 그렇게 만든 걸까. 나는 맨날 부동산 얘기, 연금 얘기만 하는 언니가 차라리 대놓고 자긴 꼰대라고말했으면 좋겠어. 정색하면서 안 그런 척해서 얼마나 꼴 보기 싫은지 몰라. 언니는 자기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을깎아내릴 때 쾌감을 느끼는 언니를 볼 때마다 참 속물적이라는생각이 들어. 그런 걸 스노비즘이라고 한대. 책에서 봤어. 나 북튜버 하면서 많이 똑똑해지고 있어. 사기를 당한 이유도 똑똑해져서인 것 같아. 옛날 같았으면 사기꾼이 설명하는 수익 구조가 알아듣기 힘들고 귀찮아서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은 진지하게 수익을 따져본다니까. 그래서 내가 사기를 당한 것 같아. - P184

그때 근희는 무슨생각을 했을까. 언니의 실패가 자신의 실패는 아닐 거라는 생각?
언니의 실패는 자신의 실패이기도 하다는 생각? 한 가지는 알 것같았다. 근희의 행진은 나의 행진과 명백히 다를 것이란 걸.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댓글을 달았다. 처음엔 악플러 못지않게지저분한 욕을 쓰다가, 너는 도대체 뭐하는 놈이냐고 묻다가 너를 낳고 너희 엄마도 미역국을 드셨냐고 모욕하다가 결국 다 지우고 한참을 고심했다. 이걸 근희가 볼 수도 있다. 나는 뺨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콧물을 훌쩍이며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어쩐지 졌다는 심정으로, 나의 동생 근희와 관종 오근희를 바라보는 이 세상을 향해.

-나의 동생 많관부.

나의 동생,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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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제2공화국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 思考實驗을 할 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 P104

로스토는 어떤 나라든 적절한 정책을 쓰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산업화는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는 것과 비슷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사회는 변화가 느리고 성장률이 낮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갑자기 빠른속도로 경제가 성장한다. 이것이 ‘이륙‘이다. 일단 이륙에 성공한 국민경제는 성숙 단계를 거쳐 높은 수준의 대중소비 단계로 나아간다.
유럽의 산업국들은 산업혁명 기간에 이륙했다. 이륙기에는 투자율이높은 수준에서 계속 상승하고 제조업과 광공업이 빠르게 성장하며농업의 생산성도 함께 올라간다. 이 이론 전체의 핵심은 ‘이륙‘이다. - P114

로스토는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피부색이나 기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스토는 마르크스를 이기고 싶었던 것 같다. 냉전시대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경제이론에서도 이겨야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경제성장의 보편적 패턴에 관한 이론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저서 『경제성장의 단계』에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을 패러디한 부제를 달았다. ‘비非공산당선언‘ A Non-communist Manifesto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반反공산당선언‘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 P115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8,000여 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퍼센트, 전문대 이상대학 학력자가 24퍼센트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만 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그들은 각자의 결정에 따라 급여 일부를 가족에게 송금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외화 획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한국 정부가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 상업차관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아무 근거가 없다. 독일의 법률은 근로계약에 따라 독일 기업이 한국인 노동자에게지급하는 급료를 담보로 잡고 정부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하지않는다. - P130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인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한일국교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관광객 68만 명 중 80퍼센트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1973년 한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으며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어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를 유도했다. - P131

노동력의 이동 배치를 위해 정부가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욕망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먹고살기 힘든 농민들이 가족을 데리고농촌을 떠났다. 새로운 삶을 원하는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찾아 혼자 도시로 이주했다. ‘무작정 상경‘ 열풍이 불어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도시 인구는 급증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주변지역에 빈민가와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이동해 온 노동자와 수해로 집을 잃은 이재민, 부동산 투기 열풍과 도시재개발에 쫓겨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상하수도와 도로, 주택과 학교 등 도시기반시설이전혀 없는 곳에 인구가 밀집하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1971년에 터진 광주대단지 폭동이 대표적 사건이다.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구시가지가 바로 그 지역이다. - P137

1969년 ‘원조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시민아파트 2,000동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1970년 4월 8일, 막 지은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시민아파트‘ 한동이 무너져 7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다. 그때는 대형 주거용 건물이 거의없던 시절이어서 이사건은 국민을 크게 놀라게 했다. 1971년 12월 25일에는 서울 충무로의 23층 빌딩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다. 커피숍 프로판가스 폭발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켜 166명이 죽고 68명이 다치는 비극으로 번졌다. 우리 군경과 미군 헬기가 출동했지만 겨우 8명밖에 구조하지 못했다. 이 두 사건은 한국현대사를 억울한 죽음으로 얼룩지게 한 대형 참사의 시작이었다. - P148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난 대형 참사 사례를 잠시 돌아보자. 1993년 10월 10일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침몰해 292명이 숨졌으며 생존자 70명은 대부분 인근 위도의 어선이 구조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길에 한강 성수대교가 무너져 5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서울시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 건물이 주저앉았다. 무려 508명이 사망·실종되었고 9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나왔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 불이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4명이 사망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에서 정신지체자의 방화로 정차 중인 전동차에 불이 났고 탑승자는 대부분 대피했다. 그런데 맞은편 선로 전동차가 그 옆에 정차하는 바람에 불이 옮겨붙었다.
기관사가 전동차 문이 닫힌 상태에서 마스터콘트롤 키를 들고 혼자탈출한 탓에 192명이 죽고 148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 P148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앞바다에서 전복되어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학생과 교사, 일반 탑승객 등 302명이 사망·실종되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토목건축사업은 환경, 교통, 안전 등과 관련해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많다. 법을 제대로 지켜인허가를 받으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인허가권을 쥔 국가기관에 돈을 주어 해결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방법이다. 일단 구조물을 - P149

짓고 나면 겉으로 봐서는 철근이나 시멘트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 덜 넣고도 다 넣은 것처럼 서류를 꾸미거나 하청을 주면서 공사비 일부를 리베이트로 받으면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수 있다.
그 비자금의 일부는 인허가권을 쥔 고위공무원과 실무를 맡은 현장공무원, 설계와 감리 또는 안전진단을 하는 전문가들에게 흘러가며 재벌 총수의 개인금고를 거쳐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국회의 유력정치인과 정당으로 들어갔다. 1995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 P150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도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 - P150

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통한 정치적·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핵심이라고 본다. - P151

수익성 낮은 부실기업을 정리하기 위해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했다. 노동시장 유연성확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실업자 수가 순식간에 130만 명을 넘어섰다.
1998년 기업 도산의 회오리가 일었다. 나산, 현대, 극동, 거평, 한일 등 이름난 재벌그룹들이 부도를 맞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같은 말이었다. 정부는 철도,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남해화학, 대한교과서, 한국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한국통신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민간에 매각되었다.  - P156

금융산업도 퇴출과 인수합병의해일에 휩쓸렸다.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이 문을 닫았고이 회사들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보람은행, 장기신용은행, 강원은행은 다른 금융기관에 합병되었다. 먼저 제일은행이 그다음에는 외환은행이 외국자본에 넘어갔다.
삼성과 현대를 비롯한 5대 재벌은 정부와 구조조정 협약을 맺었다.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프랑스 르노가삼성자동차를 인수했다.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가 사들였다.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합병으로 인한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 때문에 결국 해체되었고 대우자동차는 미국 GM에 넘어갔다. 정부는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했다.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발주하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 P156

민자고속도로는 외국투기자본의 먹이가 되었다. 부실 생명보험사네 곳이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 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다.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 die 재벌이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 P157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 하고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 moralhazard라고 한다. 재벌 대기업은 보험료 한 푼 내지 않으면서도 국가를 파산에 대비한 최후의 보험자로 써먹은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국가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재벌들은 두려움 없이 위험하고 방만한차입경영을 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관리 실패였다. 기체결함이 있는 비행기를 미숙하게 조종한 것이다.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인해 변화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된다.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진다. 1980~1990년대한국의 물가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 - P157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1997년 여름까지 몇 년 간 달러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우리 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환율 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해외에서 대규모 차입을 했고 외국자본의 직접 투자도 증가 추세였다. 서울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율이 낮게 유지된 것이다. 원화가치가 과대평가된 덕분에 1990년대 중반 우리 국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미국 여행을 갈 수 있었고 큰 부담 없이 수입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은 착각이었다. 사실은 빚을 내서 집을 사고 파티를 즐기고 여행을 했던 것이다. 물론 국민들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었다. - P158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데이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2인 이상 가구 도시근로자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0.285였다. 이것이1999년에는 0.304로 상승했고 2007년에는 0.312를 기록했다. 소득5분위 배율은 1996년 4.34에서 1999년 4.88로 급증했으며 2007년까지 5.0 수준을 유지했다. 시장소득 격차 확대가 가처분소득 격차확대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고소득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교육, 복지, 보건, 주거 분야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보조금과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권은 소득세와 법인세 등 누진세를 - P166

인상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퍼센트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P167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퍼센트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뿐만 - P167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A 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 P168

국민들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퍼센트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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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상 
2018년 웹진 비유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이중작가 초롱이 있다. 문지문학상, 2019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김멜라 
2014년 자음과모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적어도 두 번 제 꿈 꾸세요』가 있다. 문지문학상, 이효석문학상, 2021년, 2022년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성혜령 
2021년 단편소설 「윤소정」으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서수 
201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당신의 4분33초 헬프 미 시스터, 중편소설 몸과 여자들이 있다. 황산벌청년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선임 
2018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고양이는 사라지지 않는다가 있다.

함윤이 
2022년 단편소설 「되돌아오는 곰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현호정 
2020년 박지리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단명소녀 투쟁기 고고의 구멍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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