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에게 ‘박정희‘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대통령‘과 뜻이같은 보통명사였다. 박정희는 곧 대통령이고 대통령은 박정희여야만 했다. 대통령을 다른 이름과 연결하거나 박정희라는 이름에 대통령을 붙이지 않는 것은 모두 불경스러운 행위였다. 내가 첫돌이 되기전에 권력을 잡았던 그는 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대통령이었다. 우리 세대는 유아기와 청소년기, 그리고 청년기의 시작을온전히 박정희 대통령이 만든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보냈다. 우리들각자의 개인사에는 많든 적든 대통령 박정희의 인격과 취향이 각인되어 있다. 1961년 5·16에서 1972년 10월 유신까지 민주화운동의 목표는박정희 정권 타도라기보다는 정부의 잘못을 비판하고 바로잡는 것이었다. 정부는 언제나 주도권을 행사했으며 모든 싸움에서 이겼다. 하지만 손쉬운 승리는 아니었다. 4·19혁명의 봉화를 올렸던 고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자라나 대학생과 사회인이 되었다. 그들이 재야세력과 함께 민주화운동의 전위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191
민주화운동의 후위後衛는 수십 년 구절양장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야당이었다. 운동의 주력은 조직되지 않은 시민이었다. 전위는 강력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정부에 맞서 싸움으로써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용기를 북돋웠으며 시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시민들이 대거 참여해 주력을 형성하면 싸움이 커졌다. 야당은 투쟁의 성과를 챙기고 뒷수습을 했다. 이와 같은 민주화운동의 대隊伍는 4·19 때부터 오늘날까지 거의 같은 형태로 유지되어왔다. 모든 국민이 ‘군인 박정희‘의 쿠데타와 ‘대통령 박정희‘의 장기집권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5·16과 3선 개헌, 10월 유신을 환영하고지지한 국민도 많았다. 그때는 일반 가정에 전화가 보급되지 않았기 - P191
때문에 5·16에 대한 국민의 판단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 자료가 없다. 하지만 일반 시민은 물론이요, 대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도 군사정부에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5·16이 일어났을 때 4·19 주역들은 민주당 장면 정부를 지키려고 궐기하지 않았다. 박정희 장군이 여러 차례 공언한 민정이양과 병영복귀약속을 파기했지만 국민들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무려 일곱 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강력한반공주의와 더불어 경제적 자주와 자립을 강조하는 ‘민족적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걸었다. 그런데 유력한 경쟁자였던 윤보선 후보는 그의 남로당 전력을 폭로하고 민족적 민주주의를 공산주의 또는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를 편드는 중립주의로 몰아가는 색깔론을 펼쳤다. - P192
박정희의 참모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다니다 육사로 진학해 군인이 된 후 준장으로 예편한 김종필이었다. 그는 5·16 이후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초대 부장을 지냈고 1963년에는 공화당 당의장이 되었으며 2004년까지 아홉 번이나국회의원을 했다. 부정축재자로 몰려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던 전두환정권 시기를 제외하고, 박정희 정부에서 김대중 정부까지 무려 40여년 동안 정권의 ‘2인자‘ 역할을 했다. 술도 잘하고 골프도 잘 치며 독서도 많이 한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 가운데 하나다. 대선이 끝난 직후였던 1963년 11월 초, 그는 고려대학교에서 강연을 한 데 이어 서울대 문리대에 가서 학생들과 토론회를 했다. - P194
정부는 야당과 혁신계 인사들을 투쟁의 배후로 지목하고 이념공세를 시작했다. 1964년 8월 14일 중앙정보부는 ‘인민혁명당(인혁당)사건‘을 발표했다. 도예종, 이재문, 박현채, 김중태, 김정강, 현승일김정남, 김도현 등 기자, 교사, 대학생들이 인민혁명당이라는 지하당을 만들어 국가변란을 획책했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벌였다며 47명을 구속했다. 그런데 서울지검 이용훈 부장검사와 김병리, 장원찬 등 수사검사들이 양심상 도저히 기소할 수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했다. 결국 도예종 씨가 반공법 위반으로 최고징역 3년을 받는 등 일부 유죄선고가 나기는 했지만 북한과 연계된 증거가 드러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것이 바로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1차 인혁당 사건‘이다. 1965년 2월 한일 양국 정부 회담 실무자들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했고 양국 외무부장관은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과 네건의 협정문에 정식 서명했다. 「한일기본조약」은 한일강제병합조약 - P198
을 포함해 대한제국과 일본제국이 체결한 모든 조약과 협정이 무효임을 선언하고, 일본이 대한민국 정부를 유엔결의 제195호에 따른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하는 바탕 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일부 약탈 문화재 반환을 합의한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연안 기점 12해리 수역의 배타적 관할권을 인정한 어업협정」, 해방 이전 일본 거주 대한민국 국민과 가족의 영주허가를 규정한 「재일교포 법적 지위와 대우에 관한 협정」, 무상 3억 달러와 장기저리 차관2억 달러로 양국 국민 간의 청구권 문제를 완전히 그리고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확인한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었다. 바로 이 협정을 근거로 오늘날까지 일본정부는 징용, 징병, 정신대, 위안부 강제동원피해자들의 개별적 청구권이 모두 소멸되었다고 주장해왔다. - P199
1971년 4월 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기간 내내 대학가는 교련철폐투쟁으로 끓어올랐고 휴강, 교내집회, 거리시위가 이어졌다. 투표일을 코앞에 둔 4월 20일, 김재규 국군보안사령관이 서울대와 고려대에 다니던 재일동포 학생들을 포함해 50여 명이 연루된 ‘재일교포 유학생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민중봉기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려고 암약하던 유학생 간첩들에게 북한이 교련반대투쟁을 벌이도록 지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은 곧바로 교련철폐투쟁을 전격 중단하는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런데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는 정치 신인이나 다름없었던 김대중 후보에게 고전 - P204
을 면치 못했다.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끈질기게 싸운 끝에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한 정치 지도자 김대중은 바로 이선거에서 탄생했다. 김영삼, 이철승과 3파전을 벌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역전승을 거둔 ‘40대 기수‘ 김대중 후보는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평화보장론, 3단계 통일론, 자립경제와 빈부격차 완화를 위한 대중경제론으로 의제를 선점했으며 향토예비군과 학생 군사교육을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그는 우리 정치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정책선거를 보여주었다. 4월 18일 100만 명의 청중이 모인 서울 장춘단공원 유세에서 김대중 후보는 "이번에도 정권교체를 하지 못하면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시대가 오는 것"이라고 예언했다." 재야인사들은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전국적인 투개표 참관과 부 - P205
정선거 감시운동을 조직했고 교련철폐투쟁을 중단한 대학생들이 투개표 참관운동을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금지하자 수천 명이 신민당참관인으로 등록해 전국 산간벽지의 투표소로 흩어졌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정당과 조직적으로 연대한 최초의 사례였다. 학생운동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특정 정당과 손잡지 말아야한다는 고정관념을 과감하게 깨뜨린 것이다. 김대중 후보는 득표율8퍼센트, 90만 표 차이로 졌다. 공무원을 동원한 관권선거와 금품 살포, 군 부재자 부정투표, 야당 참관인 매수와 부정 투개표 등 만만치않은 부정선거를 한 사실을 고려하면 사실상 김대중 후보가 이긴 선거라고 할 수도 있었다. 곧이어 치른 국회의원 총선에서 공화당은 득표율 4.4퍼센트 차이로 신민당을 눌렀다. 하지만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합법적으로 개헌을 해서 박정희 대통령의영구집권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이 막히고 말았다. 10월 유신이라는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는 바로 이 총선에서 배태되었다. - P206
10월 유신은 현직 대통령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제3공화국 헌법에는 대통령의 국회해산권이 없었다.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을 받지 않으면 헌법개정안을 확정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폭력으로 국회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유신헌법 초안을 만든 인물은 중앙정보부와 청와대 파견 근무를 했던 김기춘 검사로 알려져 있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92년 대통령 선거 때 그는 공무원과 공공기관장들을 모아놓고 화끈한 지역감정 조장 발언을 한 ‘초원복집 사건‘을 일으켰다. 다시 20여 년이 지난 2013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되어 국정운영을 전횡함으로써 ‘기춘대원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 P209
1973년 8월에는 김대중 납치사건이 터졌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김대중 씨를 도쿄 호텔에서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한 것이다. 이 사건을 실행한 주일 외교관은 나중에 두둑한 현금을 들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때 중학교 1학년이었던 그의 아들 성김Sung Kim은 35년이 지난 2008년 주한 미국대사가 되어 서울에 돌아왔다. 중앙정보부는 김대중을 죽이지 못하고 자택 근처에 내려주었다. 대학가에서 다시 유신철폐투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월 2일 서울대 - P212
문리대에서 시작된 교내시위가 경북대를 비롯한 다른 대학으로 번져나갔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10월 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발표했다. 이 사건과 관련해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서울법대최종길 교수가 사망했다. 중앙정보부는 그가 총책 이재원에게 포섭되어 북한에 갔고, 공작금을 받고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했다는 사실을 자백하고 조사를 받던 중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다. 그그러나 2006년 2월 법원은 국가의 배상판결을 내림으로써 중앙정보부의 고문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를 사실상 인정했다. 11월 들어 대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교내시위가 전국 대학으로 번졌으며 경기고, 대광고, 광주일고 등 고등학교까지 확산되었다. - P212
기자들은 언론자유수호 결의대회를 열었고 재야인사들의 시국선. 언도 줄을 이었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을 시작하자 신민당이 합류했고 문인들도 집단으로 가세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마침내 유신헌법이 부여한 비상대권을 휘둘렀다. 1974년 1월 8일 대통령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발동한 것이다. 정부는 유신헌법을 비판하거나 개헌을 청원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개헌청원 서명운동 주동자들을 대거 구속해 군법회의에 넘겼다. 대학생들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유신반대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전국적인 연대를 모색했다. 1974년 3월 개학과 동시에 여러 대학에서 시위가 벌어졌고 민청학련(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을 기재한 유인물이 뿌려졌다. 4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이 특별담화를 발표하고 민청학련이라는 반국가단체‘를 뿌리 뽑기 위한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민청학련에 가입하거나 연락· 선전, 수업거부, 집회, 농성, 관련 사실에대한 보도를 모두 처벌대상으로 삼았다. - P212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사주들은 언론자유수호투쟁을 벌인 기자들을 무더기로 해고함으로써 정부에 굴복했다. 검찰은 1976년 3·1절 명동성당 기념미사에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한 이우정, 문동환, 윤반웅, 이문영, 안병무, 서남동, 은명기, 문익환, 이태영, 함세웅 · 김승훈 신부, 김대중과 이희호, 정일형 의원을 연행했고 ‘정부전복 선동‘ 혐의를 씌워 20명을 구속했다. 일제에 징병되었다 탈출한 후 6,000리 길을 걸어 임시정부를찾아갔던 ‘영원한 광복군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 계곡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2013년 묘소 이장 때 모습을 드러낸 그의 두개골에는 망치 크기의 동그란 구멍이 있었다. 실족사가 아니라 타살이었던 것이다. - P217
정부가 대학생과 재야인사들을 단속하느라 분주했던 1970년대후반, 다른 곳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이었다. 1976년 가을 전라남도에서는 고구마 농사가 풍년이었다. 그런데 농협이 약속과 달리 생고구마를 전량 수매하지 않아 농가의 고구마가썩어나갔다. 가톨릭농민회가 고구마 주산지였던 함평군에서 고구마피해보상대책위원회를 만들어 피해보상요구투쟁을 시작했다. 함평군 고구마 농가 피해 전액이 1억 원 정도에 지나지 않았지만 농협이보상을 거부하면서 싸움이 전라남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1977년4월 농민들은 광주에서 거리행진을 벌인 데 이어 서울과 전국 대도시를 돌면서 불합리한 농정의 실상을 폭로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것이 아마 한국전쟁 이후 첫 대규모 농민투쟁이었을 것이다. - P218
다른 한편에서는 노동운동이 힘을 키워가고 있었다. 1979년 8월경찰이 신민당사에서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훗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된 최순영 씨가 지부장이었던YH무역 노동조합원들은 돈을 외국으로 빼돌리고 노조를 탄압하기위해 위장폐업을 한 악덕사업주를 처벌하고 회사를 살려달라는 요구를 들고 신민당에 들어왔고 신민당 지도부는 그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경찰은 제1야당 당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노동자들을 체포했으며 신민당 당직자와 국회의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얼굴이 떡이 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사진이 기억에 생생하다. 이때 YH무역노동자 김경숙 씨가 4층에서 떨어져 사망했다.이런 상황에서 자꾸 ‘라‘로 비난받던 이철승 의원을 누르고 신민당 총재가 된 김영삼 의원은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고 강력한 반정부투쟁을 선포했다. - P219
부마항쟁은 국지적 도시봉기였다. 우리에게는 아직 연속적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를 통해 민주주의를 쟁취할 역량이 없었다. 그런데 부마항쟁의 충격은 집권세력의 내분을 부추겨 유신체제를 무너뜨렸다. 1979년 10월 26일 밤, 서울 궁정동 안전가옥 만찬장에서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차지철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을 권총으로 쏜 것이다. 김재규 부장의 군법회의 진술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사태가 더 악화되면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자유당 때 최인규나 곽영주가 발포 명령을 했으니까 총살됐지. 내가 발포 명령을 하는데 누가 날 총살하겠느냐."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이나 죽였는데 우리가 100만에서 200만명 희생시키는 것쯤이야 뭐가 문제냐"고 맞장구쳤다. 김재규는 ‘각하‘와 ‘자유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야수의 심정으로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10·26은 민주혁명이며, 5·16이 정당하다면10.26도 정당하다고 주장했던 그는 1980년 5월 24일 교수대에 올랐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성공의 희생자‘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생물학적 생명을 빼앗은 것은 총탄이었지만 정치적 생명을 앗아간 것은그 자신이 이룬 성공이었다. 그는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대중의 욕망 - P221
을 무제한 분출시키고 그 탁류에 기대어 권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산업화의 성공으로 절대빈곤의 수렁에서 빠져나온 대중은 다른 욕망에끌리기 시작했다. 자유, 정의, 민주주의, 인간적 존엄성을 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그 욕망을 존중하지 않자 많은 국민이 마음으로 그를버렸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으로 하여금 방아쇠를 당기게 한 것은그와 같은 민심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나는 10·26사건을 그렇게 이해한다. - P222
1980년 5월 15일 오후, 나는 서울역 광장에 있었다. 몇만 명인지모를 대학생들이 대오를 맞추고 앉아 있었다. 광장 가장자리와 인근고가도로는 구경하는 시민들로 빼곡했다. 그들은 불안한 표정으로아무 말 없이 그저 구경만 했다. 내가 느끼기엔 그랬다. 경찰은 남대문 근처 도로를 차단했다. 해가 기울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광장에서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대한민국을 상상했다. 마음이 아찔하게 설레었지만 한편으로는 겁이 났다. 이 혼돈에서 도대체무엇이 나올까? 피가 강물처럼 흐르고 주검이 산더미를 이루는 끔찍한 비극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무서웠다. 그 시각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때는 휴대전화도 카톡도 트위터도 없었다. 남대문 근처에서 누군가 버스를 몰아 경찰대오를 덮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용산 효창운동장과 강남 잠실운동장 인근에 중화기와 장갑차로 무장한 대규모군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총학생회장들이 어디선가 대책회의를 한다고 했다. 마이크로버스 위에 서서 집회를 이끄 - P224
데 서울대 총학생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조직이었다. 심재철도 나도, 그 조직의 결정에 따라 총학생회장과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들이 그 혼돈 속에서 어떻게 나를 찾아냈는지 신기했다. 마이크로버스 지붕에 올라가 소형 확성기로 연설을 했다. "우리의 형이요 오빠이며 국민의 아들인 군인들은 우리에게 총을 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이 오면 박수로 반겨주면서 충심으로 호소합시다. 우리는 오늘 밤 이곳을 지켜야 합니다. 이 집회를 해산하면 신군부의 역습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학우 여러분, 역사의 대의와 나라의미래가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충 그렇게 말했다. 이 연설 때문에 나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한 ‘매파‘로 알려졌다. 하지만 그것은 정직한 연설이 아니었다. 나는 두려움과 번민을 감추고 ‘조직의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다. - P225
그런데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던 총학생회장들이 집회해산과 대학별 교내농성을 결정했다. 더 준비하고 더 많은시민들의 이해와 지지를 구함으로써 더 크고 성공적인 투쟁을 전개하자는 취지였다. 정부가 휴교령을 내리면 전국의 모든 대학생이 일제히 가두투쟁에 나서자는 결의를 덧붙였다. 곳곳에서 항의와 욕설이 터져 나왔지만 학생들은 대오를 지어 각자의 학교로 걸어 돌아갔다. 이것이 바로 1980년 5월 15일의 ‘서울역 회군‘이었다. 나는 어떻게 되든 이 싸움이 패배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울역 광장을 지켜도 질 것이요, 학교로 돌아가도 질 것이다. 시민들이 저렇게 구경만 하고 있는데 무슨 수로 신군부의 폭력을 이길 것인가. 그러던 차에 철수 결정이 나오자 가슴 밑바닥에서 안도감이 차올랐다. 내일모레 죽는 한이 있어도 일단 오늘 죽는 것은 면했다. 저 신입생들이 죽지 않아도 된다 걸어서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대오 한가 - P225
운데서 누군가 ‘십원짜리‘, ‘백 원짜리‘ 욕을 섞어가며 학생회 지도부를 성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는 단정해 보이는 여학생이었다. 이름을 물어보았다. 심상정. 아, 저 친구가 여러 학회의 여학생들을 모아 별도의 서클을 만든 다음 서울대 학생운동 지도부에 들어가겠다고 해서 ‘무림의 남자들을 열 받게 만들었던 바로그 심상정이구나. "예쁜 입술에서도 험한 소리가 나오네요!" 그렇게웃으며 한마디를 건넸다. 그 뒤 6년 동안 그를 보지 못했다. 인류 역사는 숱한 반란, 봉기, 내전, 혁명,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사태의 원인과 계기, 전개과정과 결과는 저마다 다르지만 적어도 한가지는 같은 게 있었다. 사건의 한가운데에 있는 사람들을 덮친 것이혼돈이었다는 사실이다. 무리를 지어 폭력으로 부딪치는 격동의 순간에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동기와 지향에 따라 제각기 활동한다. 모두에게 익숙한 일상의 소통방식이 무너진 상황에서는 냉철한 논리와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충동이 행동을 지배한다. - P227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지 누구도 전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끝나고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역사가들이 사태의 전모를 명료하게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때에야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분명하게 알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역사, 대한민국현대사도 예외가아니다. 제주 4·3사건, 6·25전쟁, 4·19혁명, 5·16쿠데타, 5·18광주민중항쟁, 6·10민주항쟁의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본 것은 혼돈이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내가 본 것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5월 14일과 15일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벌어진 대학생거리시위를 정밀하게 기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연과 필연이 뒤섞 - P227
여 벌어진 사건이었다. 5월 13일 밤 연세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학생들이 각자 학교 근처 거리에서 시위를 벌었다. 누가 어떤 의도로그랬는지 나는 그때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당시 대학가에는 유신체제를 연장하려 하던 신군부와 어떻게 투쟁해야 할지를 두고 생각을 달리하는 두 흐름이 있었다. 하나는 신군부와의 전면적 정치투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 다양한 자생적 학생조직이었다. 다른 하나는 정치정세와 국민여론, ‘3김‘이 이끈 여야 정당들의 움직임과 보조를 맞추어가면서 점진적으로 투쟁수준을 높여나가려 한 주류 학생운동조직이었다. 5월 13일 밤 가두시위를 벌인 것은 아마도 전면투쟁론을 주장한 급진적 학생조직이었을 것이다. - P228
그날 자정이 다 된 시간에 고려대학교 학생회관에 모인 서울의 총학생회 대표들이 대규모 거리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군대를 갔다 온 복학생이었던 고려대 신계륜 총학생회장이 모임을 이끌었다. 나는 심재철 총학생회장을 대신해 이 회의에 갔다. 학생대표들은 정부가 휴교령을 내릴 명분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학생들 사이에 전면투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급격하게 세를 불리는 형국이라 거리시위를 더는 막을 수 없다고 보았다. 충분한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앉아서 선제공격을 당할 수는 없었다. 전국의 대학 총학생회에 결정사항을 알려주었다. 5월 14일 아침 대학생들은 교문의경찰 봉쇄망을 무너뜨린 후 걸어서 도심으로 진출했다. 혼돈은 그때시작되었다. 서울의 경우 어느 대학 총학생회도 가두시위를 이끌지못했다. 방송시설도 없었고 전투조직도 갖추지 못했다. 학과별 대오는 모두 흐트러졌다. 학생들은 사방에서 광화문을 향해 걸어갔지만세종로 사거리와 남대문 일대에 구축한 경찰의 강력한 방어망을 뚫 - P228
지 못했다. 휴교령을 내리지는 않았지만 신군부는 전국적 학생시위를 단숨에 제압하기 위해 군 병력을 이동 배치하는 중이었다. 5월 17일 오후 전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이화여대 교정에 모여향후 투쟁방침을 논의했다. 대규모 경찰 병력이 회의장을 급습했다. 총학생회장 심재철의 체포 여부는 알 수 없었다. 학생처장 이수성 교수가 총학생회장실로 전화를 해서 오늘 밤은 편한 곳에서 자라고 했다. 계엄군이 들어오니까 도망치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 전화를 한죄로 계엄사 합수부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어야 했다. 복학생 형들과 친구들이 와서 함께 나가자고 했지만 그러기 싫었다. 나는 학생회관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해산하도록 한 다음 밤이 깊을 때까지 총학생회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 P229
학생들이 고립된 캠퍼스에서 계엄군에게 짓밟히도록 둘 수는 없었다. 전국의 여러 대학 학생회에서 전화가 왔다. 상황을 설명한 다음 휴교령이 내리면 학교 근처에서 시위를벌이기로 한 계획을 상기시켰다. 밤 10시 반경 비상계엄을 제주도까지 확대한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밝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우리 국민은 아직 민주주의를 누리는 데 필요한 용 - P229
기와 의지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유신독재를 끝내지 않았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을 죽였을 뿐이었다. 10-26에서 5.18까지. 그 다섯 달은 안개 속이었다. 짙은 안개너머에 있는 것이 유신의 연장일지 새로운 민주주의일지 알 수 없었다. 권력의 심장을 잃어버린 집권 공화당은 ‘영원한 2인자‘ 김종필을새 총재로 선출했다. 그는 신민당 김영삼 총재를 만나 시국 수습책을논의했다. 유신시대에는 재야인사로 일컬어졌던 정치인 김대중 씨도오랜 가택연금에서 풀려나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정치가 다시 살아날 징후를 보였다. 정부는 1979년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소집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던 최규하 국무총리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죽었지만 유신체제는 여전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 P230
최규하 대통령의 임무는 유신체제의 안락사安일 것이라고 우리는기대했다. 그가 헌법 개정과 선거 관리를 제대로 해서 새로운 정부가출범하면 유신체제는 조용히 무너질 것이라 믿었다. 최규하 정부는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고 양심수들을 일부 석방했다. 그런데 전두환과 노태우, 정호용 등 육사 11기 정치군인들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유신체제를 수호하기로 결의했다. 그들은 12월 12일 밤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수경사, 특전사, 보병 사단 등휘하 병력을 동원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하는 등 온건파 국군 지휘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들은 계엄사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그 내막을 알 수 없었으며 전두환이 정권을 잡을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봄이 와서 언 땅이 녹으면 모든 풀과 나무가 한꺼번에 움튼다. - P230
이것은 사실상 대학생들만의 투쟁이었다.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지 않았다. 본대없이 선봉대 혼자 싸운 것이다. 결국 5월 17일 밤 신군부가 전국 주요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함으로써 학생시위는 막을 내렸다. 휴교령이 내릴 경우 연속적 · 동시다발적 ·전국적 시위를 벌이기로 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유일하게 약속을 지킨 곳이 광주였다. 그곳에서만 시민이 참여하는 도시봉기가 일어났다.
광주민중항쟁의 시작은 1979년 10월의 부마항쟁과 비슷했다. 김영삼 총재에 대한 정치적 박해가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것처럼 신군부가 김대중 씨를 체포한 것이 광주 시민의 격분을 불러일으컸다. 5월 18일 오전부터 전남대 앞에서 학생과 계엄군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계엄군이 학교 밖으로 나와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짓밟는것을 본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하면서 도시 전체가 궐기했다. 여기까지는 부마항쟁과 같았다. 그런데 광주 시민들은 부산·마산 시민들보다 더 절박했고 더 용감했다. 공수부대는 시내 곳곳에서 대검을 장착한 소총과 ‘충정봉‘이라는 박달나무 몽둥이로 마구잡이 폭력을휘둘렀다.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하자 시위는 더 확산되었다. 계엄사는 더 많은 특전사 병력을 광주로 보냈다. - P232
비무장 시위가 무장투쟁으로 번진 것은 계엄군이 발포를 했기 때문이다. 5월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정문 앞에 진 치고 있던 제11공수여단 병력이 갑자기 흘러나온 애국가 연주에 맞추어 일제히 M16소총과 M60기관총을 공중으로 발포했다. 그래도 시위대가 흩어지지않자 곧바로 사람을 향해 총을 쏘았다. 전일빌딩, 상무관, 수협 전남지부 건물 옥상에서는 저격수들이 조준사격을 가했다. 그것은 명령에 따른 조직적·계획적 집단발포였다. 5월 19일과 20일에도 제1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 병력이 권총과 M16을 발표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왔지만 그것은 산발적 · 돌발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도청 앞발포는 달랐다. 거리는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다. - P233
분개한 시민들은 광주 시내뿐만 아니라 나주, 화순, 장성, 영광, 담양 등 인근지역 파출소와 예비군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소총과 M1소총을 확보했고 화순탄광의 다이너마이트를 반입했다. 시민들이 먼저 총을 쏘았기 때문에 자위권 차원에서 발표했다는 신군부의주장은 거짓이었다. 군의 모든 기록 가운데 최초로 등장하는 무기탈취 사례는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작전상황일지」에 기록된 5월 21일오후 1시 35분 전남 화순파출소 무기 피탈‘ 사건이었다. 특전사가전남도청 앞에서 발포를 할 때에는 시민들에게 총이 없었다. 시민들이 무장항쟁을 시작하자 경찰관들이 사복으로 갈아입고 광주를 빠져나갔고 특전사 병력은 외곽으로 이동해 광주의 교통과 통신을 차단했다. 그들은 인근 도시로 가는 국도에서 광주를 빠져나가는 민간차량을 저격하고 주둔지 인근의 민가에 총을 쏘았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 - P233
함해 많은 시민이 죽었다. 다른 도시에서는 대중투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신군부는 모든 화력을 광주에 집중했다. 특전사 3개 여단3,500명, 보병 20사단 5,000명, 광주 전투교육사령부 소속 병력 1만2,000명 등 무려 2만이 넘는 병력을 광주시 일원에 투입한 것이다. 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은 부대를 편성하고 치안질서를 유지했으며시민들은 그들에게 음식과 물을 제공했다. 시민자치에 들어간 광주시내는 평온했으며 범죄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에는 헌혈 신청자들이 줄을 섰고 도청 공무원들이 다시 출근했다. 지역사회 원로들이 수습대책위원회를 만들어 광주 상무대에 있던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했다. 그러나 계엄사는 협상 자체를 거부했다. 광주항쟁에 대ㅏ 소식은 닷새째인 5월 22일에 가서야 석간 『동아일보』가 처음으로 보도했다. 그 닷새 동안 광주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으며 국민들은 - P234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신군부는 광주 시민을 폭도로 규정했고 계엄군은 광주시를 포위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사는 6,000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광주를탈환하는 ‘상무충정작전‘을 전개했다. 도청을 중심으로 최후의 항전을 준비한 시민군은 카빈총과 M1소총을 든 157명뿐이었다. 계엄군은 전남도청에서 윤상원 씨를 비롯한 열세 명을 사살하고 100여 명을 체포했다. 또 다른 거점이었던 광주공원과 전일빌딩도 손쉽게 점령했다. 그들은 도청 앞 상무관에 있던 광주 희생자들의 시신 129구를 덤프트럭에 싣고 가서 망월동 산비탈에 묻었다. 5·18유족회의 집계에 따르면 항쟁 당시 사망자는 166명, 행방불명 65명이었다. 부상후 사망자는 400명이 넘는다. 군경 사망자는 27명이었는데 군인들끼리 벌인 오인전투 사망자가 많았다. 계엄사는 광주항쟁과 관련하여무려 2,500명이 넘는 시민과 대학생을 체포해 600명 이상을 검찰에 송치했다. - P235
송치했다. 정동년, 배용주, 박남서는 군법회의와 대법원 최종심에서사형을 선고받았다. 홍남순, 정상용, 허규정, 윤석루 등 일곱 명은 무기징역, 김상윤, 김성용, 명노근, 전옥주, 윤강옥 등 열한 명은 징역20년에서 10년, 152명은 징역 10년에서 5년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두 풀려났다. . 광주민중항쟁은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가능성과 당시 민주화운동의 현주소를 명료하게 보여준 역사적 사건이었다. 전제정치를 타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라는것, 그리고 아직 대한민국 국민은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참혹한 패배로 막을 내린 광주민중항쟁은 많은 국민의 가슴에 깊은 죄책감을 남 - P235
겼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자비한 살상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지역 시민들이 계엄군의 폭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로부터7년이 지난 1987년 6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어느 지역도고립되지 않는 전국적 도시봉기를 정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했다. 광주 시민들만 홀로 고립의 아픔을 겪게 만든 1980년 5월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광주민중항쟁의전국적 확대판이었다. 전두환의 신군부는 유신쿠데타 이후 박정희 대통령이 저질렀던독재를 능가하는 철권통치를 휘둘렀다.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해동, 조성우, 이신범, 이해찬, 설훈 등 재야와 학생운동 핵심 인사들에게 내란음모 혐의를 씌워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김대중 씨에게는사형, 다른 사람들에게는 징역 1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했다. - P236
6월 10일 오후 여섯 시, 나는 유인물 몇백장을 품에 감추고 서울시청 광장에 서 있었다. 국본 지도부 인사들이 대회 개막을 선포하기로 한 성공회 본부를 경찰이 미리 봉쇄했지만, 미사에 참여할 피아노반주자 등으로 위장해 성공회 교회에 잠입하는 데 성공한 몇몇 인사들이 여섯 시에 종탑으로 올라갔다. 종소리와 동시에 유인물 뭉치가날아올랐고 구호가 터져나왔다. 서울시청 일대 거리는 그야말로 눈깜짝할 사이에 시위대로 뒤덮였다. 최루탄이 터졌고 버스와 택시, 승용차들이 경적을 울렸다. 남산 아래 힐튼호텔에서 대통령 후보 지명축하연을 하던 민정당 국회의원들이 최루탄 가스에 쫓겨 흩어졌다. 거리시위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전국 22개 도시에서 50만 명의시민들이 참여했고 4,000여 명이 연행되었다. 서울에서는 경찰이 시위대에 밀려 청와대와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부근 전략거점으로 후퇴했다. 시위대 일부가 명동성당에 들어가 닷새 동안 농성하면서 투쟁분위기를 이어갔다. 명동 일대는 아무나 와서 대자보를 붙이고 연설 - P255
을 해도 되는 ‘해방구‘로 변했다. 나는 노동자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 청년지식인들이 뒤섞인 자생적 비밀결사에 속해 있었다. 한 시간 간격으로 세 곳의 중간집결지를 정하고 나갔다. 모든 것이 오판이었다. 유인물은 금방 동났고, 조직원들은 모두 흩어져 찾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큰 시위가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1980년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1987년 6월 10일 서울 도심에서 내가 본 것도혼돈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과 더 나이 든 시민들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본이라는지도부가 있었고 양김이 이끄는 야당도 있었다. - P257
지도6월 18일 ‘최루탄 추방 국민대회‘에서 더 큰 민심의 파도가 밀어. 닥쳤다. 전국 16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참여한 이날 시위의 하이라이트는 서울이 아니라 30만 명이 시위를 벌인 부산이었다. 부산 시민들은 거리에서 교대로 잠을 자면서 밤샘시위를 벌였다. 연속적 · 동시다발적 · 전국적 도시봉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경찰은 전국에서 1,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시위를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정부가계엄령을 선포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고 주한미군방송AFKN이 미군과 군속, 가족들의 외출자제령을 보도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전두환 대통령에게 긴급친서를 보냈고 국무부 동아시아 담당 차관보가 서울에 왔다. 6월 24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청와대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만나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요구했다. 회담을 마치고 나온 김영삼 총재는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선언했다. 그가 투박한 부산 사투리로 "햅상은 갤랠되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내가 본정치인 김영삼의 모든 모습 중에서 단연 최고였다. - P257
세 번째 파도는 6월 26일 ‘국민평화대행진‘이었다.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에서 180만 명이 거리시위에 나왔다. 맨손으로 시위를 한6·10대회와 달리 시민들은 도처에서 투석전을 벌였으며 대학생들이던지는 화염병에도 큰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사태추이를 지켜보던 광주 시민들이 마침내 궐기했다. 그들은 이번만큼은 결코 고립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했다. 광주에서만 2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 목포, 순천, 여수, 광양 등 전남 전역의 도시에서도 수만명이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전국에서 3,500여 명을 연행했지만 점점수세에 몰렸다. 30개가 넘는 경찰서와 파출소가 화염병에 맞아 불이났다. 민정당 지구당사와 공공기관 건물 여러 곳에 화염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량 20여 대가 불타고 전복되었다. 전국 거의 모든 도시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를 10만여 명의 경찰력으로 진압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아무도 정부와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다음 국민대회에서 얼마나 더 큰 시위가 벌어질지가늠할 수 없었다. - P258
6월 29일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가 8개 항으로 이루어진 시국수습 특별선언을 전격 발표했다. 소위 ‘6·29선언‘이다. 대통령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과 정치범 석방, 국민기본권과 언론자유 보장, 지방자치제 실시와 교육자율화, 자유로운 정당활동 보장 등을 담은 이 선언으로 전국적 도시봉기는 막을 내렸다. 전두환 정권은 야권의 분열을 일으키면 선거를 통해서도 재집권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품고 6·29선언을 했으며, 이 희망은 결국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12.12군사반란과 광주학살, 그리고 천문학적 부정부패를 저지른죄를 완전히 면책받은 것은 아니었다. - P258
7월 5일 이한열 씨가 끝내 숨을 거두었다. 7월 9일 서울역 광장에서 100만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영결식이 열렸다. 이 행사는 6월 민주항쟁의 에필로그였다. 영결식이 끝나고 경찰이 해산을 종용하면서페퍼포그와 최루탄을 쏘자 100만 시민은 조용히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다. 헌법을 고치고 선거를 하면 정권을 바꾸고 민주화를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그들의 희망은 다섯 달 뒤에 물거품이 되었다. 하지만 6월 민주항쟁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시민들의 정치투쟁이 소멸된 공간은 노동자들이 채웠다. 독재정권의정치적 억압이 약화되자 곧바로 전국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결성과 파업, 거리시위가 폭발했다. - P259
노동자들은 재벌그룹 대공장에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7월 5일 현대엔진을 시작으로 현대미포조선 등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조설립 신고가 줄을 이었다. 마산,창원, 울산 등 영남지역 중화학공업 대공장을 휩쓴 노동조합 결성과 임금·근로조건 개선투쟁은 중장비를 동원한 거리시위로 이어졌다. 8월22일 거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거리시위 도중 경찰이 쏜 직격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검찰은노동자들을 지원한 노무현 변호사와 이상수 변호사를 ‘장례방해‘ 혐의로 구속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투쟁은 수도권 중소기업으로 확산되었으며 정부의 강경대응과 여론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9월까지 지속되었다. 1987년에만 1,500개에 육박하는 노동조합이 새로 결성되었고 조합원 수는 23만 명이 늘었으며 7월에서 9월까지 3,300건이넘는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어 헌법 개정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국민의 관심은 정치에 집중되었다. - P259
누가 하는 어떤 것이든, 민주주의와 관련한 헌법의 규정을 실현하려는 활동은 민주화운동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대통령에 대해서든 정치에 대해서든, 통일문제에 대해서든, 혁명에 대해서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가 있다. 헌법이우리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는 정부가, 또는 압도적 다수의 국민이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위한것이 아니다. 대다수 국민이 터무니없다고 판단하는 견해까지도 제한 없이 표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다. 비록 진리가 아닌 견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는다면 정부가 그것을 제약해서는안 된다. 이것이 헌법의 정신이며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노태우 정부는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에 대한 대학생과 시민들의 의사표현을 탄압했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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