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수 없다. 5·16이 없었다면? 제2공화국이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면? 박정희 장군이 병영으로 복귀했다면? 3선 개헌을 하지 않았다면? 10월 유신을 하지 않고 1975년에 퇴임했다면? 그랬다면 대한민국 경제가 어떤 길을 걸어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디에 와 있을까? 뭐라고대답할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종의 ‘사고실험‘ 思考實驗을 할 수 있을뿐이다. 그러나 그 사고실험의 결론이 타당한지 여부는 검증할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객관적 사실을 근거로 한국 경제의 발전과정과 현주소를 점검하고, 그연장선에서 앞으로 이루어야 할 변화의 길을 탐색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 P104
로스토는 어떤 나라든 적절한 정책을 쓰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산업화는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는 것과 비슷하다. 농업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사회는 변화가 느리고 성장률이 낮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갑자기 빠른속도로 경제가 성장한다. 이것이 ‘이륙‘이다. 일단 이륙에 성공한 국민경제는 성숙 단계를 거쳐 높은 수준의 대중소비 단계로 나아간다. 유럽의 산업국들은 산업혁명 기간에 이륙했다. 이륙기에는 투자율이높은 수준에서 계속 상승하고 제조업과 광공업이 빠르게 성장하며농업의 생산성도 함께 올라간다. 이 이론 전체의 핵심은 ‘이륙‘이다. - P114
로스토는 마르크스와 달리 경제를 움직이고 사회를 변화시키는것이 계급투쟁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욕망이라고 주장했다. 피부색이나 기후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로스토는 마르크스를 이기고 싶었던 것 같다. 냉전시대 체제경쟁에서 승리하려면 군사력뿐만 아니라 경제력과 경제이론에서도 이겨야 했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경제성장의 보편적 패턴에 관한 이론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붕괴와 공산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언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을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저서 『경제성장의 단계』에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을 패러디한 부제를 달았다. ‘비非공산당선언‘ A Non-communist Manifesto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반反공산당선언‘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니라고 본다. - P115
박정희 대통령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도모했다. 일제의 착취와 수탈과 학살에 대한 배상청구권을 3억 달러라는 헐값에 넘겨주었다. 베트남전쟁에 청년들을 보내 무려 5,000여명을 희생시켰다. 독일에는 광부와 간호사들을 보냈다. 1963년부터8,000여 명이 파견된 광부의 학력은 고졸이 50퍼센트, 전문대 이상대학 학력자가 24퍼센트였다. 간호사 파견은 1966년 독일 마인츠대학병원 이수길 박사가 독일병원협회와 한국해외개발공사를 중재한 데서 시작되었다. 1969년 두 기관이 협약을 한 후 1만 1,000여 명의 간호사가 독일로 갔다. 그들은 각자의 결정에 따라 급여 일부를 가족에게 송금했고, 그것이 결과적으로 외화 획득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때 한국 정부가 그들의 급여를 담보로 상업차관을 얻었다는 이야기는 아무 근거가 없다. 독일의 법률은 근로계약에 따라 독일 기업이 한국인 노동자에게지급하는 급료를 담보로 잡고 정부차관을 제공하는 것을 허용하지않는다. - P130
예나 지금이나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다. 하지만 정부는 일본인관광객을 상대하는 소위 ‘기생관광‘을 공공연하게 허용했다. 1965년한일국교정상화 이후로 일본인 관광객이 급증했다. 1973년 외국인관광객 68만 명 중 80퍼센트가 일본인이었는데, 그 대부분이 기생관광을 즐기러 온 일본의 하위 소득계층 남자들이었다. 외화벌이를 한다면 안 될 일이 없었다. 종로 10곳을 비롯해 서울에만 14곳, 부산에 7곳, 경주에 4곳, 제주도에 2곳의 관광요정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삼청각과 대원각에는 ‘관광기생 수가 800명이나 되었다. 여행사와 관광요정, 호텔이 삼각동맹을 맺은 이 국제적 성매매사업은1973년 한해에만 2억 달러의 관광수입을 안겨준 것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중화학공업 투자를 위해 직접 대규모 차관을 도입했으며철도, 도로, 통신, 철강, 석유화학, 금속 등 국가기간산업을 직접 또는 공기업을 세워 운영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산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어 외국자본의 직접투자를 유도했다. - P131
노동력의 이동 배치를 위해 정부가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잘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했다.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욕망이 사람들을 움직였다. 먹고살기 힘든 농민들이 가족을 데리고농촌을 떠났다. 새로운 삶을 원하는 젊은이들은 일자리와 더 나은 삶을 찾아 혼자 도시로 이주했다. ‘무작정 상경‘ 열풍이 불어 농촌 인구가 급격하게 줄고 도시 인구는 급증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와 주변지역에 빈민가와 달동네가 형성되었다. 이동해 온 노동자와 수해로 집을 잃은 이재민, 부동산 투기 열풍과 도시재개발에 쫓겨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상하수도와 도로, 주택과 학교 등 도시기반시설이전혀 없는 곳에 인구가 밀집하자 심각한 문제가 생겼다. 1971년에 터진 광주대단지 폭동이 대표적 사건이다. 지금의 성남시 수정구와 중원구 구시가지가 바로 그 지역이다. - P137
1969년 ‘원조 불도저‘ 김현옥 서울시장이 시민아파트 2,000동 건설사업을 시작했다. 그런데 1970년 4월 8일, 막 지은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시민아파트‘ 한동이 무너져 70여 명의 사상자를 낸 참사가 벌어졌다. 그때는 대형 주거용 건물이 거의없던 시절이어서 이사건은 국민을 크게 놀라게 했다. 1971년 12월 25일에는 서울 충무로의 23층 빌딩 대연각호텔에 불이 났다. 커피숍 프로판가스 폭발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건물 전체를 집어삼켜 166명이 죽고 68명이 다치는 비극으로 번졌다. 우리 군경과 미군 헬기가 출동했지만 겨우 8명밖에 구조하지 못했다. 이 두 사건은 한국현대사를 억울한 죽음으로 얼룩지게 한 대형 참사의 시작이었다. - P148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자주 일어난 대형 참사 사례를 잠시 돌아보자. 1993년 10월 10일 여객선 서해훼리호가 전북 부안 앞바다에서침몰해 292명이 숨졌으며 생존자 70명은 대부분 인근 위도의 어선이 구조했다.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길에 한강 성수대교가 무너져 50여 명의 사상자가 났다. 1995년 6월 29일 오후 서울시 서초동에 있던 삼풍백화점 건물이 주저앉았다. 무려 508명이 사망·실종되었고 900명이 넘는 부상자가 나왔다. 1999년 6월 30일 새벽 경기도 화성군 씨랜드 청소년수련원에 불이나 유치원생 19명과 인솔교사4명이 사망했다. 2003년 2월 18일 대구 지하철에서 정신지체자의 방화로 정차 중인 전동차에 불이 났고 탑승자는 대부분 대피했다. 그런데 맞은편 선로 전동차가 그 옆에 정차하는 바람에 불이 옮겨붙었다. 기관사가 전동차 문이 닫힌 상태에서 마스터콘트롤 키를 들고 혼자탈출한 탓에 192명이 죽고 148명이 다치는 참사가 벌어졌다. 그리고 - P148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가던 여객선 세월호가 전남 진도앞바다에서 전복되어 경기도 안산시 단원고 학생과 교사, 일반 탑승객 등 302명이 사망·실종되었다. 대한민국 건설사가 중동 국가를 비롯한 외국에서 지은 건물과 교량이 무너진 일은 없었다. 그런데 나라 안에서 지은 것은 종종 무너졌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결정적인 것은 부정부패였다. 우리나라 재벌그룹은 대부분 건설사를 계열사로 보유하고 있다. 없으면 만들었고, 만들지 못하면 인수합병이라도 했다. 그 목적이 불법 비자금 조성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토목건축사업은 환경, 교통, 안전 등과 관련해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 많다. 법을 제대로 지켜인허가를 받으려면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인허가권을 쥔 국가기관에 돈을 주어 해결하는 것이 훨씬 저렴한 방법이다. 일단 구조물을 - P149
짓고 나면 겉으로 봐서는 철근이나 시멘트가 제대로 들어갔는지 여부를 알기 어렵다. 덜 넣고도 다 넣은 것처럼 서류를 꾸미거나 하청을 주면서 공사비 일부를 리베이트로 받으면 거액의 비자금을 만들수 있다. 그 비자금의 일부는 인허가권을 쥔 고위공무원과 실무를 맡은 현장공무원, 설계와 감리 또는 안전진단을 하는 전문가들에게 흘러가며 재벌 총수의 개인금고를 거쳐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 국회의 유력정치인과 정당으로 들어갔다. 1995년 12월 김영삼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군사반란과 내란목적살인혐의 등으로 구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천문학적 규모의 소위 ‘통치자금‘은 대부분 재벌 총수들이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 바친 뇌물이었다. - P150
윗물이 혼탁하면 아랫물도 흐리기 마련이어서, 우리 사회 전체가 부패문화에 젖어들었다. 정치권과 정부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업, 언론, 대학, 문화예술계까지도 사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적 권력을 휘두르는 ‘완장문화‘에 감염되어 있었다. 이 모두가 재벌 탓은 아니겠지만, 부패문화의 진원지가 재벌과 정치권력의 유착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에게 재벌은 애증의 대상이다. 재벌이 없는 일상은 생각하기어렵다. 국민들은 재벌기업이 지은 아파트에 살면서 재벌기업이 만든 텔레비전, 냉장고, 에어컨을 쓰고 재벌기업이 만든 승용차를 탄다. 재벌기업이 만든 옷을 입고 재벌기업이 생산한 스마트폰을 쓰며재벌기업이 운영하는 프로야구와 프로축구 경기를 본다. 재벌기업이만든 화장품을 바르고 재벌 계열의 백화점과 대형 마트에서 쇼핑을하며 재벌기업이 공급하는 생명보험에 가입한다. 청년들은 지불능력이 탄탄하고 근로조건이 좋은 재벌기업에 취직하기를 원한다. 자식 - P150
이 재벌회사에 취직하면 부모는 고시합격이라도 한 것처럼 기뻐한다. 재벌은 우리의 일상생활을 몸과 마음을 지배하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의 미래마저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 재벌이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헌법 위에 군림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국가권력을통한 정치적·민주적 개입과 통제뿐이다. 나는 이것이 ‘경제민주화‘의핵심이라고 본다. - P151
수익성 낮은 부실기업을 정리하기 위해금리를 대폭 높이고 정부의 재정지출을 축소했다. 노동시장 유연성확보라는 명분으로 노동자를 대량 해고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모든 것은 IMF가 중남미와 동남아시아 등 구제금융을 받은 모든 나라에 내린 표준처방이었다. 실업자 수가 순식간에 130만 명을 넘어섰다. 1998년 기업 도산의 회오리가 일었다. 나산, 현대, 극동, 거평, 한일 등 이름난 재벌그룹들이 부도를 맞거나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구조조정은 대량해고와 같은 말이었다. 정부는 철도, 통신, 전력 등 국가기간산업의 공기업을 민영화 또는 사유화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결국 남해화학, 대한교과서, 한국종합기술금융, 대한송유관공사, 포항제철, 한국종합화학, 한국중공업, 한국통신공사, 한국담배인삼공사 등이 민간에 매각되었다. - P156
금융산업도 퇴출과 인수합병의해일에 휩쓸렸다.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이 문을 닫았고이 회사들의 주식은 휴지조각이 되었다. 보람은행, 장기신용은행, 강원은행은 다른 금융기관에 합병되었다. 먼저 제일은행이 그다음에는 외환은행이 외국자본에 넘어갔다. 삼성과 현대를 비롯한 5대 재벌은 정부와 구조조정 협약을 맺었다. 삼성은 자동차를 포기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 프랑스 르노가삼성자동차를 인수했다. 기아자동차는 현대자동차가 사들였다. 대우그룹은 과도한 인수합병으로 인한 천문학적 규모의 부채 때문에 결국 해체되었고 대우자동차는 미국 GM에 넘어갔다. 정부는 IMF의 긴축재정 요구에 굴복해 사회간접자본을 해외투기자본에 개방했다. 엉터리 교통량 예측을 토대로 사업을 발주하고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 - P156
민자고속도로는 외국투기자본의 먹이가 되었다. 부실 생명보험사네 곳이 알리안츠생명, 삼성생명, 대한생명, 교보생명으로 넘어갔다. 부실금융기관과 부실기업을 회생시키기 위해 막대한 규모의 공적 자금을 투입한 탓에 국가채무가 급증했다. 그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끝에 대한민국은 2001년 구제금융 전액을 상환함으로써 IMF 경제신탁통치를 마감했다. 한국 경제의 기체결함은 ‘죽기에는 너무 큰‘too big to die 재벌이국민경제의 중심이라는 것이었다. 삼성, 현대, LG, 대우, SK 같은 대형 재벌그룹이 망하면 수많은 협력업체와 자금을 대출한 금융기관이망하고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실업자가 된다. 재벌 총수들이 회사를 잘못 운영해 망할 위기에 빠져도 국민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정부가 회사를 살려주어야 한다. - P157
재벌 입장에서는 위험한 투자를 해서돈을 벌면 자기 것이 되고 방만한 경영을 해서 문제가 생기면 국가와 국민에게 짐을 떠넘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이익을 ‘사유화‘ 하고손실은 ‘사회화‘하는 행동을 경제학 전문용어로 ‘도덕적 해이‘ moralhazard라고 한다. 재벌 대기업은 보험료 한 푼 내지 않으면서도 국가를 파산에 대비한 최후의 보험자로 써먹은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국가안전망‘이 있기 때문에 재벌들은 두려움 없이 위험하고 방만한차입경영을 할 수 있었다. 외환위기의 두 번째 원인은 정부의 환율관리 실패였다. 기체결함이 있는 비행기를 미숙하게 조종한 것이다. 환율은 세 가지 요인으로인해 변화한다. 첫째, 장기적으로 환율은 물가인상률에 좌우된다. 물가인상률이 높으면 그 나라 화폐는 값이 떨어진다. 1980~1990년대한국의 물가인상률은 미국, 유럽, 일본보다 높았다. 장기적으로 달러 - P157
환율은 오르는 게 정상이었다. 둘째, 단기적으로 환율은 경상수지에좌우된다.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적자를 보는 나라의 화폐는 가치가떨어진다. 그렇게 해서 수입가격은 오르고 수출가격이 떨어져야 경상수지 적자가 해소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 우리나라는 지속적으로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했다. 그런데도 1997년 여름까지 몇 년 간 달러환율이 점진적으로 하락했다. 우리 돈의 가치가 계속 오른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환율 변동의 초단기 요인인 자본수지가 흑자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기업과 금융기관들이 해외에서 대규모 차입을 했고 외국자본의 직접 투자도 증가 추세였다. 서울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이 늘어났기 때문에 환율이 낮게 유지된 것이다. 원화가치가 과대평가된 덕분에 1990년대 중반 우리 국민들은 저렴한 비용으로 동남아시아와 유럽, 미국 여행을 갈 수 있었고 큰 부담 없이 수입 소비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은 착각이었다. 사실은 빚을 내서 집을 사고 파티를 즐기고 여행을 했던 것이다. 물론 국민들이 그런 사실을 알면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었다. - P158
가처분소득의 분배지표 악화가 멈춘 것은 기초노령연금, 노인장기요양보험, 학교무상급식, 보육비지원 등 새로운 복지제도를 도입하거나 기존 사업을 확대한 것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이런 추측이 옳다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외환위기 이후 현재까지 시장소득 분배는 지속적으로 악화되어왔다. 정부가 조세와 복지지출을통해 가처분소득 격차를 줄이려고 노력했지만 시장소득 분배의 급격한 악화를 상쇄하기에는 부족했다." 데이터를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자. 외환위기 직전인 1996년2인 이상 가구 도시근로자 시장소득 지니계수는 0.285였다. 이것이1999년에는 0.304로 상승했고 2007년에는 0.312를 기록했다. 소득5분위 배율은 1996년 4.34에서 1999년 4.88로 급증했으며 2007년까지 5.0 수준을 유지했다. 시장소득 격차 확대가 가처분소득 격차확대로 이어지지 않게 하려면 고소득층에게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해교육, 복지, 보건, 주거 분야에서 저소득층을 위한 보조금과 서비스를 지원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정권은 소득세와 법인세 등 누진세를 - P166
인상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국회와 대결하는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2003년 한나라당이 주도해 국회에서 의결한 법인세율 인하 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 기초노령연금 등 새로운 제도를 도입했지만 확대되는 시장소득의 격차 확대를 막기에는 부족했다. 진보정권 10년 동안 임금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의 비중이 급속히 증가했다. 집계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비정규직 비중은 2007년에 40퍼센트 넘는 수준까지 증가했다. 명예퇴직이나 정리해고로 직장을 그만둔 사람들이 자영업자로 변신했다. 전체 취업자가운데 자영업자 비율이 급증해 35퍼센트 수준이 되었다. 그러나 재벌 대기업들이 소비재산업과 유통업에 진출함으로써 골목상권은 붕괴 상황에 빠졌고 영세자영업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 P167
진보정권 10년 동안 연평균 4퍼센트 수준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는데도 소득분배가 악화되고 중하위 소득계층의 경제생활이 어려워진 데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더욱 심화된 경제력 집중, 정리해고제 도입, 비정규직 확대, 낙수효과의 약화 등 여러 원인이 있다. 재벌대기업들은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방식으로 협력업체를 약탈했다. 내부거래를 통해 계열사를 부당하게 지원함으로써 그 계열사와 경쟁관계에 있는 기업의 경영을 악화시켰다. 중소 협력업체의 지불능력악화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근로조건 악화와 고용축소로 연결되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소비재산업과 유통업까지 진출해 영세소기업과영세상인들의 몰락을 부추겼다. 노무현 정부가 도입한 비정규직 관련 법률들은 기대와 달리 비정규직의 확산과 비정규직 제도의 악용을 막지 못했다. 중소기업뿐만 - P167
아니라 재벌 대기업들까지 비정규직 제도를 임금을 삭감하고 노동조합을 파괴하는 데 악용했다. 사내하청, 파견 등의 명목으로 자기네회사 제품을 만드는 노동자들에 대한 직접고용을 거부했으며 계약해지 방식으로 비정규직의 노조설립을 막았다. 낙수효과 약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예전에는 대기업이 돈을 벌면전후방 연관효과 때문에 원료나 중간재, 부품을 공급하는 관련 산업과 협력업체도 함께 호황을 맞았다. 그러나 수출대기업들이 가격이더 저렴한 외국업체의 중간재와 부품을 직접 조달해 쓰는 ‘글로벌 소싱‘A global sourcing을 본격화하자 낙수효과가 급격히 약화되었다. - P168
국민들은 2007년 12월 대선에서 기업인 출신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킴으로써 정부에 대한 불만을 표출시켰다. 많은 국민이 7퍼센트 경제성장으로 1인당 국민소득 4만 달러와 세계 7위 경제대국을 만들겠다는 소위 ‘747공약에 기대를 보냈다. 유권자들은 2012년에도 보수정권 연장을 선택했다. 여론조사 회사들이 발표한 통계를 보면 소득수준이 낮은 유권자일수록 보수정당 후보를 더 높은 비율로 지지했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경제성장률을 높여야 서민의경제생활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도 적지 않은 영향을미쳤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보수정권이 진보정권보다 경제성장을 더 잘 이루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경제성장률이 높아진다고 해서 저소득층의 소득이 향상되는 것도 아니다. - P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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