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가 힘이 있을 때는 이러한 순환이 가능했다. 속주 역시식량이 빠듯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전쟁 기계‘ 로마의 눈치를 볼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가 흔들리면서 속주는 로마에 식량이나세금을 보내지 않기 시작했고, 무리한 세금 요구와 재정 악화의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결국 게르만족이 밀려 들어오면서 로마는속절없이 무너졌다. 만약 로마가 포도와 밀의 황금 비율을 적절하게 지켰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로마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 P171

카토는 평민 출신으로 제2차 포에니 전쟁 때 공을 세워집정관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엄격한 도덕주의자로 유명했으며, 특히 로마 귀족들의 사치와 도덕적 해이를 경계했다. 우리나라로치면 막걸리에 김치 안주를 즐기는 안빈낙도형 인물이었던 셈이다.
그는 "농업이 도덕적 가치를 놓고 볼 때 고리 대금이나 무역보다분명히 바람직하다"며 "농민은 유일하게 좋은 시민으로 높이평가되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 P171

받았다.
중세 이탈리아에는 이런 우화가 있다. 어떤 나그네가 선량해보이는 농민에게 물을 청했다. 그러자 농민은 화를내며 "왜 하필담장과 기둥마저 썩게 하는 천한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 좋은포도주라면 얼마든지 드리겠지만 물은 못 드립니다"라고 대답했다고한다. 이탈리아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 요청해도 절대주지 않는 건 이런 이유다. 이탈리아에서는 와인을 시키지 않는다면대신 탄산수나 생수라도 시켜야 한다. 레스토랑에서 수돗물을달라고 하는 것은 그 식당을 무시하는 행동이다.
옛날에는 와인의 가격이 지금처럼 비싸지 않았다. 지금의 독일맥주의 가격과 비슷하게 생각하면 될듯하다. 지금까지 전해져오는중세 이탈리아 수도원의 지출 기록을 보면, 수도원은 미사에 쓰고일상적으로 마시는 와인 값보다 밀가루 값에 더 많은 돈을 썼다. - P173

협동조합은 이탈리아 와인의 맛뿐 아니라 이야기를 풍부하게만든다. 협동조합의 진짜 매력은 실제론 여기에 있다. 이탈리아농민이 보유한 와이너리 면적은 평균 2헥타트로 프랑스(11헥타르)는물론 호주(25헥타르), 미국(27헥타르) 등보다 훨씬 작다. 이렇게 작은와이너리는 와인 맛에 대한 연구 개발은커녕, 독자적인 마케팅을시도하기도 어렵다. 규모가 작은 와이너리가 도태되기 쉬운 이유다.
미국, 영국 등에서 산업혁명 이후 현대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아왔던농촌의 현실이 사실 그렇다. 산업혁명 이후 농민들은 거대 자본은물론, 심지어는 양들에게까지 밀려나 토지를 잃어버리고 도시의하층민이 되었다. 이런 현상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서 지금도똑같이 진행 중이다. - P186

하지만 협동조합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농민에게 선물했다.
조합원이 된 농민은 단순히 포도나 와인을 거대 유통업자나 주류제조사에 넘기는 가난한 생산자가 아니라 조합의 결정에 1인 1표를행사하는 경영자다. 또 조합원은 해마다 작황과 상관없이 정해진가격으로 포도를 공급할 수 있어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농장을경영할 수 있다. 게다가 조합원의 생산물 판매가는 비조합원의판매가보다 평균 20퍼센트 가량 높다. 물론 손실이 날 경우에는조합원이 이를 부담해야 하지만 그런 경우가 홀로 경영할 때보다는드물다. 이런 특혜 덕분에 소규모 포도밭에서 포도를 키우는 많은생산자가 조상 때부터 키워오던 고유의 품종을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밀려 들어오는 외국산 저가 와인의 침공으로부터 지켜낼 수 있다. - P186

람브루스코의 색깔은 어떤 와인의 색보다 짙다. 거의 보랏빛에 가깝다. 그리고 잔잔하고 달디단 거품이 인다. 이 와인에는 프로슈토와 모르타넬라 한 점을 얹은 치아바타나 혹은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를 잔뜩 얹은 볼로네제 파스타가안성맞춤이다. 이런 맛있는 음식과 멋진 와인은 혼자 즐기기보다는여러 명이 함께 먹고 마셔야 제격이다.
볼로냐에서는 음식도 와인도 가격이 저렴해 도심 곳곳의 노천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여럿이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을 볼수 있다. 관광객인 것 같기도 하고 학생들 같기도 한 사람들은푸짐하고 맛있는 볼로냐식 마른안주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왁자지껄먹고 마신다. 나도 중세를 떠올리게 하는 볼로냐 광장에서 그들처럼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람브루스코를 마시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람브루스코는 혼자서 마시는 와인이 아니라 볼로냐 사람들처럼어깨를 걸고 신나게 마셔야 하는 와인이다. - P189

나처럼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던 시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뭐든 조심스럽다. ‘아, 이게 될까‘라는 말로 스스로를 검열하는 값싼알고리즘이 대학을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작동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마르크스나 레닌 혹은김일성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책을 가지고만 있어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처벌될 수 있었다. 많은 선배가 집에 그런 책을 가지고 있다는이유로 입건되었고 운이 나쁘면 재판을 받았다.
생각해보면 참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런 책을 읽는다고 무조건그 생각을 추종하고 사회에 위해를 끼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아마당시의 정치인이나 공안 당국자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양심의 자유에 배치되는 국가보안법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더위험할 수도 있었다. 이제는 패배한 과거가 되어버린 ‘공산주의‘를인류 보편에 입각해 생각해보려 해도, 아직까지 그 말을 들으면 몸이경직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 P191

이 광장의 벽에는 늘 공산당 관련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림이매번 바뀌는데 내가 가 있을 때는 중국 인민복을 입은 공산당원이깃발을 들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벽화 옆으로는 대자보와구호가 붙어 있었다. 1980년대 우리나라 대학가를 보는 듯한 착각이들었다.
볼로냐에서는 학생들이 사회적 이슈로 시위를 하는 게 매우익숙한 풍경이다. 내가 볼로냐에 머물 때에는 일어나지 않았지만볼로냐 대학 학생들은 여러 가지 이슈로 자주 시위를 한다. 심지어도서관 등에서 점거 농성에 들어가서 학생들이 강의실을 옮기거나 시내의 다른 도서관으로 흩어지는 일도 빈번하다고 한다. - P194

그런데 이후에 머문 볼로냐에서는 책을 펼칠 공간을 찾으러 다닐필요가 없었다. 다른 지역과는 다르게 볼로냐 도서관에서 대출증을바로 발급해주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갔을 때 나는 여권도 없고,
휴대폰 배터리도 나가서 신원을 증명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친절한 직원은 내 이메일 주소만 받고 대출증을 발급해주었다. 하나더 놀란 것은 이 도서관의 대출 전산 시스템에 한글 서비스가 있었다.
"비바 볼로냐(볼로냐 만세)." 이탈리아의 공공 서비스는 종종 사람을속 터지게 만드는데, 볼로냐는 내 이런 울분을 토닥거려준 이탈리아유일의 도시였다.
내가 오래 머물렀던 토리노와 팔레르모의 도서관과는 전혀다른 개방성이었다. 시칠리아 팔레르모 도서관의 직원은 대출을원하는 나에게 "여기는 이 도시에 세금을 내는 이탈리아인만 이용할수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토리노는 여권만 있으면 대출증을 만들수는 있지만 출입증 소지자만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다. 두 도시의도서관에 견줘 볼로냐의 도서관 시스템은 탁월했다. - P197

재미있게도 역사적으로 커피가 퍼진 곳에서는 기존의 관습을거부하는 혁명이 일어났다. 유럽보다 앞서 커피를 적극적으로받아들인 곳은 이슬람 제국이었다. 처음에는 이슬람에서도 커피를금지했다. 하지만 이후 이슬람에서는 술 대신 커피 정도는 받아들일수 있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알코올을 카페인으로 대체한 셈이었다.
‘이슬람의 와인‘으로 불리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 변화를가져왔다. 이슬람은 커피를 즐기면서 9세기에 이미 종교와 철학을분리하는 냉철함을 보였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받아들여 신학과 철학의 진리가 각각의 영역임을 논증했다.
이슬람에서 철학의 독립은 사회과학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이는정치가 종교로부터의 독립하는 논리적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이런유연한 사고방식 덕분에 아랍에서는 수학, 과학, 의학 등 새로운 학문이 쏟아져 나왔다. - P202

이 시기에 커피는 영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커피는 그들에게 맥주나 진을 대신하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었다. 커피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정보를 교류하는 장을 영국에 선물했는데, 바로 커피를 마시는 커피하우스였다. 커피하우스는처음에는 옥스퍼드 등 대학가에 먼저 생겨났다. 그리고 커피의 효능이 입소문을 타면서 런던, 리버풀, 브리스톨 같은 대도시로도커피하우스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런던의 커피하우스에는해운업자, 무역업자, 금융가 같은 경제 분야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교수나 과학자, 변호사, 정치가, 예술인 등 다양한 직업을가진 사람들이 출입했다. 커피하우스에서는 늘 토론이 벌어졌는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신분이나 재력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계급장을 떼고 만나 서로 배우는 자리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커피하우스를 커피값 1~2페니만 가지고도 세상을 배울 수 있는곳이라며, ‘페니 대학‘이라 부르기도 했다. 당시 영국 여성들은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커피하우스를 폐지해달라는 청원을 내기도했다. - P205

볼로냐에는 권력자의 시선에서 가장 골치 아픈 존재인 커피와 대학이모두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이 된다. 그런데 커피를마시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어떻게 될까?
그래서 볼로냐는 로마나 나폴리, 교황령의 지배 아래에서 만족하며지내왔던 옆 동네 로마냐와 달리 생태적으로 기존의 질서에반대하는 반골의 기질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라틴어로 자유를뜻하는 ‘리베르타스libertas‘를 부르짖어온 것이 볼로냐의 역사였다.
가까운 로마냐에서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를 선보인 독재자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883~1945가 나온 것과는 매우대조적이다.
볼로냐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 중의하나다. 문화적, 교육적 여건은 이탈리아 최고 수준이다. 볼로냐가 - P214

‘음악의 도시이자 문화의 도시, 미식의 도시‘로 불리는 것은 이런부와 지적 토양에서 비롯되었다. 볼로냐 같은 도시가 황제와 교황의간섭을 고분고분 받아들일 리가 없지 않은가. 어떻게 보면 저항은볼로냐의 숙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볼로냐는 그 저항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를 적극적으로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1892년 이탈리아 사회당을 창당한 필리포투라티Filippo Turati, 1857~1932는 볼로냐 대학 출신이었다. 1895년총선에서 사회당 의원을 최초로 배출한 지역도 에밀리아와 그 인근지역이었다(당시 로마냐는 에밀리아와 다른 주였다).
볼로냐가 주도인 에밀리아가 ‘좌파의 요새‘라고 불리는 이유는세 가지다. 먼저 이탈리아 사회당이 19세기 말 선거를 통해 의회에최초로 진출한 것은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의 지지 때문이었다. - P215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1917년 혁명으로 소련이 등장하고 나서,
볼로냐가 반파시즘 운동의 본산이었을 때부터 볼로냐는 공산당을지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볼로냐는 이탈리아 공산주의의 거점도시가 되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에밀리아로마냐를 비롯해토스카나, 마르케, 리구리아 4개의 주는 사회당과 공산당의 주요정치적 무대로 분류되어 왔다. 이탈리아의 언론은 이 4개 주를지금도 ‘레드 벨트‘라고 부른다.
볼로냐에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이처럼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것은 볼로냐가 중세 때부터 왕이나 교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주민자치로 운영되던 자유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 P215

볼로냐 성당의 또 한 가지 좋은 점은 다른 지역 성당처럼 비싼입장료가 없다는 것이다. 내부에 금을 발라놓은 시칠리아의팔레르모에 있는 노르만궁의 팔라티나 성당 Cappella Palatina은 입장료가무료 20유로다(물론 금박 예수 모자이크 등 볼 만한 것은 많지만 감흥은크지 않았다). 심지어 피렌체의 두오모는 돈을 주고도 들어가기가어렵다.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이 몰려 끝도 없이 줄을 서야 하기때문이다. 휴가철인 7~8월에 피렌체에 가면 한국인 관광객 팀을하루에도 10여 팀은 만날 수 있다. 한국에서만도 이렇게 많이 가는데세계 각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렌체를 찾아올까? "여름에피렌체에 가는 건 바보짓." 이탈리아 친구들이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또 볼로냐의 성당은 수시로 미사를 해서 항상 많은 사람이 성당안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가톨릭 신자인 나도 볼로냐 두오모를 자주찾아 기도를 했다. 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이탈리아 친구와 갈 때 빼고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집전되는 미사를 지켜보기만 했다. - P233

성당보다 더 멋진 건 이 성당을 오르는 길이다. 이 성당은 길이3.7킬로미터의 회랑(이탈리아어로는 ‘Portico)으로 볼로냐시내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회랑이란 ‘기둥과 기둥사이로 지붕을 올린 인도나 복도‘를 말한다. 이 회랑은 세계에서 가장긴 회랑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다.
볼로냐인들이 이 긴 회랑을 만든 것은 이 성당의 성화를보러오는 순례자들을 위해서였다. 순례자들이 햇빛을 피하거나 비에젖지 않고 성당에 오를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회랑은 볼로냐시민들이 돌과 나무 등 건축 자재를 날라 무려 120년 동안 지었다고한다. 부족한 예산은 부자의 기부를 받았다. - P243

하지만 볼로냐에서는 이런 일을17세기부터 시작했다. 그것도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도시를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한 것이었으니 그 아름다운 이타심이놀랍다. 왜 이탈리아인들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가 다른 지역사람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고 친절하다고 말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부분이다. - P246

물론 언덕 위의 성당으로 가는 산중 회랑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볼로냐 도심에는 가지각색의 회랑이 있다. 여러 사람이 지나갈 만큼넓은 회랑도 있지만, 중심가에서 벗어나면 사람이 어깨를 마주치며지나갈 만큼 좁은 회랑도 있다. 볼로냐 중심가를 남북으로 가르는인디펜덴자 거리와 동서로 가르는 리촐리 거리의 회랑이 가장 넓다. 반대로 동쪽과 남쪽의 볼로냐 대학으로 가는 길의 회랑은 폭이 가장좁다.
나는 볼로냐 도심에서 두 곳의 회랑을 가장 좋아한다. 한 곳은아름답고, 다른 한 곳은 매우 붉다(산 루카 성모마리아 대성당의 회랑은도심 밖의 회랑이다. 세 곳 모두 볼로냐에 가면 꼭 가봐야 한다).
볼로냐에서 가장 아름다운 회랑은 마조레 광장에 있는 두 개의탑에서 산토 스테파노 성당Chiesa di Santo Stefano까지 동남쪽으로이어지는 회랑이다. 일단 이곳의 회랑은 다른 회랑에 견줘 두 배 가량높고 넓다. 그리고 회랑의 기둥이 아주 정교한 코린트식으로 되어있다. 길을 따라 이어진 회랑이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삼각형 모양의잔디광장이 나오고, 그 광장 끝에 붉은 벽돌로 쌓은 산토 스테파노성당이 있다. - P249

 그들의 관대함은 이방인을 미워하고격리시켰던 그 당시 대부분의 도시와 교회와는 많이 달랐다.
16세기에 로마 교황청은 로마로 들어오는 유대인을 모아 게토에 격리하고 야간 통행을 금지했다. 이런 조치가 금세 사라지기는했지만 교회의 이런 전례는 유럽의 많은 나라에 나쁜 영향을 미쳤다.
"성을 쌓는 자는 망하고 길을 내는 자는 흥한다"라는 말이있다. 역사나 신화에서 이기심으로 인해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 성이야기는 참 많다. 그러나 결국 그런 성은 신의 노여움을 사거나 자신보다 탐욕스러운 이웃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 볼로냐는이방인을 위해 성문을 열고 길과 회랑을 만들어 도시를 연결하고, 그 회랑을 높은 산으로 이어갔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빛의 교회를 세웠다. - P253

볼로냐가 내뿜는 활력의 중심은 의심할 여지없이 볼로냐대학이다. 볼로냐 대학은 하버드나 옥스퍼드처럼 넓은 캠퍼스도없고, 기념비적인 건물도 없다. 볼로냐 대학은 왕이나 주교, 혹은선지적 교육자 어느 한 사람의 명으로 세워진 게 아니라, 학생들이모여서 만든 학생조합을 모태로 만들어졌다. 아래에서부터 올라온대중의 열망이 세운 학교였다. 그래서 볼로냐 대학은 고대 그리스와고대 중국의 많은 고등교육기관을 뒤로 하고 ‘모든 대학의 모교‘라는영광스러운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
볼로냐 대학은 그 열망대로 중세의 어둠을 환하게 밝혔다.
볼로냐 대학이 밝힌 빛 에너지는 법학과 의학에서 비롯되었다. 이빛은 서양인에게 중세의 어둠 속에서 산업혁명과 근대 문명을 일굴수 있는 길을 찾게 해주었다. - P262

이 시대 이탈리아에는 베네치아뿐 아니라 제노바, 피사, 피렌체, 밀라노와 같은 도시 국가가 생겨났다. 볼로냐도 그런 도시국가 중 하나였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상업과 무역활동으로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특히 볼로냐, 피렌체, 제노바등에서 베네치아처럼 시민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만드는 공화정을운영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는 자신의자치를 지키고 황제와 교황의 권력을 견제하기 위해 여러 가지장치를 검토하였고, 그중 하나가 법이었다. 로마법은 이미 고대 로마시대에 "황제의 권위는 법에 의해 부여 받는다"고 규정했기때문이었다. - P269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는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다. 철학이 신학에서 분리되는 데 시간이걸렸듯이, 아름다움도 종교와 인간의 이성으로부터 독립하는 데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어쩌면 아름다움을 숫자로 생각했던피타고라스 Pythagoras, BC 582?~BC 497? 나, 이데아 외에는 다 가상의세계라고 말했던 플라톤Plato, BC 427?~BC 347? 의 지독한 그림자 탓일지도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커피를 마시며 철학을 종교와 구분했고,
근대가 되면서 철학에서 다시 미학을 떼어냈다. 미학자들이 내린결론은 인간 상반신과 하반신 길이의 비율이 1:1.618 가 되어야한다는 따위의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거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정확하게 말하면 편견에 가깝다. 양귀비는석기 시대 유물인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처럼 통통했기 때문에 당현종의 눈길을 끌었다. 비슷하게 한때 우리나라에서 유행했던
‘부잣집 맏며느리‘ 같다는 미의 기준은 지금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다. - P292

거기다 볼로냐 대학 출신이나 볼로냐 주교를 역임했던 사람이자주 교황에 올랐다. 볼로냐 주교들은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에맞서면서 자정 노력을 위한 반종교 개혁의 거점 도시로 볼로냐를활용했다. 그중의 하나가 볼로냐 여성 화가가 그리는 새로운스타일의 성화였다. 볼로냐에서 많은 여성 화가가 나올 수 있었던것은 당시 교황을 비롯한 교회의 적극적인 후원 덕분이었다. 그들의후원으로 여성 미술학교가 생겨났고, 많은 여성이 화가로 활동할 수있었다.
이와 관련해 좀 더 정치경제학적인 분석도 있다. 캐롤리나머피 Caroline P. Murphy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는 "교황을 포함해 교계의후원을 받았던 볼로냐 여성의 남편들이 사업적으로 성공했고, 그성공에 따른 수익을 여성들이 관리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볼로냐여성들이 자신의 활동으로 넓힌 사회적 명성을 이용해 여러 가지 - P310

사업을 벌였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본인들이 관리했다는 것이다.
관점이 어떻든, 볼로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당시 어떤 지역에 사는여성의 지위보다 높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회의 후원을 받았건혹은 교회에 맞섰건, 볼로냐는 일반적인 중세 사회와는 다른사회였다. 이는 볼로냐의 역사나 예술사를 연구한 학자들의 공통된전제다.
이렇듯 볼로냐를 뒷받침해준 것은 휴머니즘(인문주의)였다.
그리스에서 만들어 로마로 이어져 내려온 인간 중심의 사고는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유럽에서 사라졌다. 이것이 다시 시작된곳은 볼로냐였다. 거기다 볼로냐의 인문주의는 새롭기까지 했다.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에는 없었던 여성 존중과 노예 해방을추구했기 때문이었다. 볼로냐는 여성에게 인간이 가진 권리를인정해주었을 뿐 아니라 1257년 세계 최초로 노예 해방 법안을
"만들어 이를 실현한 곳이기도 하다. 여성과 흑인에 대한 사회적인정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건너간미국인들도 20세기가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던 문제였다. 그런데 볼로냐는 이를 13세기에 이미 시작했던 것이다. - P311

볼로냐가 이렇게 남다른 생각을 한 이유는 사실 수수께끼다.
인류사를 봤을 때 이런 새로운 생각은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등의거대한 변화로 인해 엄청난 규모의 자본이 쌓이거나, 모든 것을앗아갈 정도의 대재앙(페스트 혹은 세계대전) 뒤에나 나올 법한 것이다.
그런데 볼로냐는 그런 계기와 상관없이 한결같이 새로운 생각을발전시켜왔다. 그런 점에서 볼로냐는 참 유별난 곳이다.
사실 볼로냐는 단순히 미녀의 도시가 아니다. 변화를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과감함을 지니고 과거의유산을 발전시켜 온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시‘다. - P311

하지만 내가 이탈리아에서 요리유학을 하면서 깨달은 것 가운데 하나가 내가 기존의 레스토랑 산업에 뛰어들기에는 내 나이가 제법 많다는 사실이었다. 매일 아침 9시부터 자정까지 자는시간을 빼고 하루 15시간 계속 주방에 서서 요리하는 일은 고통스러웠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인턴을 하면서 나의 체중이 10킬로그램 가까이 빠졌다. 내 목이 그렇게 길다는 것을 이탈리아에서 처음 알았지만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요리는 너무도 즐거웠지만 쉰이라는 나이는 그 즐거움에 혹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나이 오십은 귀가순해진다는 이순이라더니 나는 비로소 운명의 속삭임을 수긍하기시작했다. 혹시 레스토랑을 연다며 가뜩이나 없는 살림을 거덜낼까봐 두려워하던 아내는 나의 이런 변화에 "철들었다"며 반겼다 - P315

무엇보다도 와인은 맛이 있었다. 바디감이 단단할수록 안주는역시 눅진해야 했다. 고기 자체에 향기가 있는 양고기나 야생 고기와탄닌이 강한 와인은 놀라운 조화를 선보였다. 치즈나 빵 조각을 놓고레드 와인을 음미하려고 잔을 열심히 돌리는 짓을 이탈리아에서는하지 않아도 되었다. 화이트 와인도 만만치 않았다. 그냥 마시면맹탕인 피노 그리지오는 해산물 요리와 함께 먹으면 완전히 다른얼굴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렇게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한 잔 두 잔 기울이다와인에 빠졌다. 징용살이 같았던 인턴이 끝난 뒤, 나는 자유를만끽하며 여러 곳의 와이너리를 돌았다. 이 때 나의 막연했던 생각은더욱 가닥을 잡았다. 아직 어떻게 이탈리아 와인을 한국에서풀어낼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일주일에 2~3일만저녁에 문을 여는 서퍼supper 클럽이나 이탈리아 와인만을 소개하는 와인 클래스를 열어볼 생각도 해본다. 와인수입법인이나 소매상을 해보는 것도 고민 중이다. - P316

나는 한국에 와서도 스스로를 볼로네제라고 부를 정도로 볼로냐에푹 빠졌다. 체류 기간 내내 나에게 윙크를 해주었던 많은 볼로냐의멋진 아가씨들의 때문일 수도 있고, 입에 삼삼한 볼로네제 파스타와프로슈토 덕분일 수도 있다.
한국에 돌아와서 나는 이탈리아를 가는 지인들에게 볼로냐를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어떤 이들은 볼로냐를 다녀와 나에게고맙다고도 말했지만 어떤 이는 내 말과 달리 볼로냐에는 볼 게없었다고 푸념하기도 했다. 심지어 볼로네제 파스타가 미국식미트볼 파스타보다 맛이 없다는 이도 있었다. 정말 ‘아는 만큼 보이는건가‘라는 탄식이 나왔다. 어쩌면 나의 볼로냐에 대한 애정이 지나친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볼로냐에 가봤더니 책에서 말한것과 달리 별로더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겠다는 노파심이 들기도한다. - P317

나는 역사가 전진한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살아오면서유감스럽게도 그 전진을 감격스럽게 느껴본 적은 드물었다. 그런감정은 그저 역사책에서만 볼 수 있는 공허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렇지만 자유도시 볼로냐의 광장에 섰을 때 느껴지는 공기는 전혀달랐다. - P317

시민들이 손을 잡고 교황과 황제에 맞서 자유를 얻어냈던 이도시의 역사는 인류 역사에서 참 특별했다. 시민들이 왕을 쫓아내고자치도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도시의 깃발에 ‘자유‘라는 단어를새겨넣었다. 또 학생들은 스스로 대학을 만들었다. 심지어 이들은라틴어로 ‘공동체‘라는 멋진 이름을 대학에 붙여주었다. 그리고 그공동체는 알프스 바깥의 이방인은 물론이고 여성들까지 받아들였다.
비슷한 시기 남녀유별을 하늘의 섭리인양 외쳤던 수많은 지역과달리 볼로냐는 분명 독보적인 도시였다.
작은 도시인 볼로냐가 어떻게 이런 성취를 이루었는지는나에게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하지만 분명한 건 볼로냐는 왕이나신이 아니라 사람을 가장 최우선으로 여겼다는 점이다. 인간 한 명 한명이 위대한 소우주며 신의 선물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 P318

그렇지않았다면 왕이나 교황을 부정하며 그들로부터 공동체를 지켜야한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볼로냐 사람들은 그공동체에서 서로를 믿으며 서로가 빛날 수 있도록 도왔다. 가난한자나 여성이나 이방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자유도시, 대학, 미술과 음악 그리고 협동조합까지볼로네제들이 어깨를 걸고 함께 만든 성취는 그 크기를 떠나서아름답다. 그리고 그 성취가 몽롱한 단어로 가득한 책들이 아니라와인과 살루미와 치즈와 파스타 같은 일상의 음식으로 느낄 수있다는 것이 좋았다. 앎과 행함이 나란히 누워있는 볼로냐식 한 접시요리는 나에게는 늘 영감을 준다. 반백의 나이에 요리유학을 떠나여러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볼로냐에서 새로운 길을보았고 볼로냐에서 다시 그 길을 시작해볼 계획이었다. 하지만코로나가 나의 발목을 잡았다. - P318

이탈리아와의 하늘길이 열리면 모교인 ICIF에 가서, 나의 와인 선생님인 에지오를비롯해 나의 스승이자 인턴 레스토랑의 셰프인 프랑코 그리고 나에게 볼로냐행을 권해주었던 제빵과정 동기인 부르노 등의 지인들을 만나 와인과 관련한 나의 구상을 물어볼 계획이다.
하지만 볼로냐를 소개한 이 책을 들고 가서 그들에게 건네야할지는 좀 난감하긴 하다. "너는 피에몬테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웠는데 볼로냐 책부터 쓰냐"라는 지청구는 피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 P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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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는 마법 같은 음식이다. 이 세상에 치즈를 넣어서 맛없는 음식은없다. 심지어 우리는 라면이나 떡볶이, 김밥 같은 우리 음식에도치즈를 넣어먹는다. 치즈는 영양과 맛의 덩어리여서 우리 몸은치즈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
밥과 빵이 농경 문화의 정수라면, 치즈는 유목 문화의 정수다.
치즈는 동물의 젖을 가열해 멀건 유청을 제외하고, 나머지 영양분인단백질, 지방, 무기질 등을 굳힌 뒤 미생물에 의해 발효시켜서 먹는음식이다. 인간을 비롯해 포유류가 태어나서 얼마 동안 어머니의것으로 모든 영양분을 섭취하는 점을 떠올려보면, 치즈가 가진영양가에 필적할 만한 음식은 없을 것 같다. - P131

이탈리아를 종단해본 경험이 있다면 아마 내 말에 수긍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많은 문필가들은 알프스와 아펜니노산맥 그리고아드리아해에 둘러싸인 파다노 평원 지대를 ‘벨파에제 Bel Pacse",
우리말로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송했다. 단테의 《신곡》에 처음등장했던 이 말은 오랫동안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말로 쓰였다.
유럽의 상징은 높은 알프스나 푸른 지중해가 아니라 광활하게펼쳐진 평야다. 지금도 유럽연합은 밀 생산량 세계 1위다. 여기에세계 3위의 밀 생산국인 러시아까지 합친다면 유럽은 ‘밀의땅‘이다(밀 생산량 2위는 중국이다). 이탈리아에서 광활한 평원의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은 이탈리아 북쪽에 있는 파다노 평원뿐이다.
중부인 로마를 지나 이탈리아 남부로 가면 이탈리아 반도의등줄기를 형성하는 아펜니노산맥 탓에 이런 대평원은 만나기가 힘들다. - P134

재미있는 점은 이 넉넉한 대평원의 남과 북에서 각각 비슷한치즈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북쪽의 그라노 파다노grano padano와 남쪽의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다. 공정에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만드는법도, 생긴 것도, 맛도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포강 남쪽에서생산되는 파르미지아노가 좀 더 가격이 비싸고, 이탈리아 내에서는좀 더 많이 팔린다. 이 치즈는 프로슈토처럼 이탈리아를 상징하는음식 중 하나다. 와인을 제외한 이탈리아 농산품 가운데 가장 많이수출하는 것이 치즈다. 2019년 기준으로 치즈가 농산물 수출에서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44퍼센트다. 이 가운데 가장 많이 수출하는것이 그라노 파다노다(파르미지아노는 좀 더 고가이기 때문에 수출량은2위지만 이탈리아 내수 판매량은 1위다. 두 치즈의 수출량 차이는 미미하다).
재미있게도 이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사가는 나라가음식에서라면 자신들이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는 프랑스다. 치즈에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랑스도 이탈리아 치즈를 인정한다는의미가 아닐까 싶다. - P135

치즈를 만드는 것도, 치즈를 점검하는 것도, 심지어 치즈를잘라내 파는 것도 모두 수작업이었다. 이 경성 치즈를 처음 만들기시작한 곳은 10세기 베네딕토 수도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의수도사들은 양젖으로 만드는 페코리노 치즈의 제조법을 우유에적용했고, 그렇게 탄생한 이 치즈는 오늘날 이탈리아를 대표하는치즈가 되었다.
지금도 이 치즈를 대부분 수작업으로 만드는 것은 1,000년 전수도사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고집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이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수작업으로 일관하다가 마지막 과정에서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하는반전을 보여준다. 이 치즈에는 과거의 전통과 미래의 기술이 녹아들어가 있었다. 거기에 슬로푸드라는 지속가능한 테마까지 입혀져있어 매력을 더했다. 전통을 이어간다는 멋진 명분이자 지갑을 열게하는 귀신같은 마케팅이다. - P143

이탈리아 치즈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는 프랑스, 독일, 영국 그리고 그 다음이 미국이다. 한번은 미국 여성 두 명이나보다 앞서 이 가게에서 치즈를 사갔다. 이곳에서는 치즈를덩어리째가 아니라 쪼개 팔아서, 10유로 정도면 굉장히 푸짐하게 살수 있다. 다만 치즈를 살 때는 몇 년 숙성 제품을 달라고 꼭 말해야한다. 숙성 정도에 따라 사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파스타에 뿌려먹는 것은 부드러운 1년산을, 샐러드 등 치즈맛을 입히는 요리에는 2년산을, 와인 안주로는 3년산 치즈를 쓰는것이 좋다. 심지어 5년 이상 숙성된 것도 판다. 치즈는 숙성 기간이길수록 수분이 빠지고 아미노산이 응축된다. 이런 성분들이미생물에 의해 발효되면서 다채로운 풍미가 나는 것이다. 이런 것을구분하지 못하면 볼로냐에서는 촌놈 취급을 받는다. 아니이탈리아에서는 어쩔 수 없이 촌놈이 되고 만다. - P151

① 우리는 소에게 건초와 풀만 먹인다.
② 우리는 우유에 어떤 비자연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는다.
오직 우유만을 사용한다.
③ 우리는 최소 12개월을 숙성한다(참고로 그라노 파다노는 최소9개월을 숙성해 출하한다)."
그들이 이렇게 멋진 고집을 부리는 근거는 상당히 과학적이다.
옥수수나 사료가 아니라 풀로 소를 키워야 조상들이 먹던 치즈와똑같은 맛이 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지역에서 자라는 같은 풀을먹어야 우유에 동일한 미생물이 생긴다는 게 그들의 근거다. 그들은자기 고장에서 생산하는 치즈 맛의 기원이 토양에서 자라는미생물에 기초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유에 아무것도 넣지 않고저온살균해 응고시킨 뒤, 형태를 만들어 오랫동안 숙성하는 것이다. - P156

이런 고집 덕분인지 이 지역 파르미지아노의 금전적 가치는굉장히 높은 편이다. 이 치즈는 40킬로그램 한 통(숙성 과정에서수분이 빠져나가고 아미노산이 응축되어 무게가 줄어든다)에 우리 돈으로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와 비슷한 가격이다.
나는 이탈리아인들이 정치도 엉망이고, 실업률도PIGS(포르투갈, 그리스, 스페인 등 유럽에서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는나라를 말한다)와 함께 유럽 최고이고, 철도나 버스가 툭하면 다니지않아도 늘 웃음을 머금는 이유를 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여기는이탈리아야Siamo in Titalia." 이들이 왜 짜증스러운 상황에서도 이렇게외치며 짐짓 여유를 부리는지 말이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높은 - P156

하늘, 중세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예스러운 거리와 집들, 그리고맛있는 음식들. 이 모든 것에서 이탈리아인 특유의 여유가 만들어진것은 아닐까? "너희가 잘살면 얼마나 잘살아? 우리도 예전에잘살았어"라고 말하는 듯한 그들의 허세 아닌 허세가 이탈리아에서지내다 보면 그렇게 미워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한때 그들의 부유했던 영광은 파르미지아노 같은 그들의 먹거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이탈리아 치즈 맛에 겨우 감을 잡았을 때, 쉰이라는 나이에 음식을 공부하겠다고 정년이 보장된 회사를 때려치우고 20대젊은이들 틈에서 요리를 배운 나의 결정이 아주 잘못된 것은아니었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어쩌면 치즈 덕에 나는 한발 더 나아갈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국에 돌아가면 우리나라에서이탈리아의 치즈와 같은 역할을 하는 우리의 식재료, 간장과 된장그리고 두부를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P157

우리나라의 간장, 된장, 두부의 종류와 맛은 서양의치즈만큼이나 오랜 역사와 다채로움을 지녔다. 된장만 놓고 보아도
‘옻된장, 겨된장, 담북장, 청국장‘ 등 종류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방방곡곡 색다른 지역된장의 제조법과 맛에 대한 표준화와세분화는 이탈리아의 기준에서 보면 많이 부족하다. 각 지방의된장을 지역을 대표하는 상품으로 만드는 노력도 부족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캔에 든 미국산 파르메산 치즈를 내미는 레스토랑을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파랑새는 집 안에 있다." 이탈리아가 내게 준 깨달음이다.
‘맛의 파랑새‘는 반백이 넘은 나를 또 다른 길로 안내할지도 모른다. - P157

이미 앞에서 눈치를 챘겠지만 나는 심각한 볼로냐빠다. 한국에돌아와서도 나는 나를 서슴없이 볼로네제(‘볼로냐 사람‘이라는 뜻)라고말하곤 한다. 내가 졸업한 ICIF는 피에몬테주 아스티에 있었는데, 정작 에밀리아로마냐주의 볼로냐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볼로냐에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이있었다. 바로 볼로냐를 대표하는 레드 와인 람브루스코 Lambrusco다.
이름은 전에도 많이 들어봤지만 처음 이 와인을 마셔본 것은볼로냐에 와서였다. 그런데 볼로냐에 있을 때 나는 이 와인을 세 번쯤마셔보고 다시는 마시지 않았다. 오히려 에밀리아의 람브루스코대신 옆 동네인 로마냐의 산지오베제 Sangiovese를 즐겨 마셨다.
로마냐의 산지오베제는 내가 좋아하는 베리 맛이 풍부하고, 탄닌이약간 있어 이탈리아 요리와 잘 맞았다. 거기에 토스카나의산지오베제에 견줘 값도 착했다. - P159

그렇게 내가 마셨던 이탈리아 와인을 정리하면서 볼로냐에서 나를당황하게 했던 람브루스코에 대해서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나는 비로소 이 와인의 저력을 알게 되었다. 나를 당황하게 만들었던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오히려 그 와인이 지나온 역사의 무게에서비롯된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피에몬테의 네비올로가 혀로, 시칠리아의 에트나 로쏘가 마음으로 마시는 와인이라면 람브루스코는 머리로 마셔야 하는 와인이었다.
포도의 원산지는 중동 혹은 중앙아시아다. 포도와 포도주는중동을 거쳐 페니키아인 혹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유럽으로전달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에서 포도주가 처음 들어온지역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았던 이탈리아 남부나 그리스와 중동과활발히 교역했던 에트루리아인들이 살던 이탈리아 서쪽 지역이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풀리아나 칼라브리아Calabria 등에 그리스란 뜻의이탈리아어인 ‘그레코Greeo‘가 붙은 포도 품종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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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음식,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가? 어떤사람은 피자를, 어떤 사람은 파스타를, 또 다른 사람은 치즈를 떠올릴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서양요리를 대표하고 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국 런던이나 미국 뉴욕그리고 일본 도쿄에 가도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어디에나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분식집만큼이나 많은 피자집이골목골목마다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파스타와 피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스파게티를 먹었던것은 서울 신촌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1988년에 맥도널드햄버거가 처음 한국에 들어오고, 그 후 피자헛이 들어오더니 어느새미국의 새로운 음식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1980년대 말이었다.
당시 새로운 음식 문화를 접하는 수업료는 꽤 비쌌다. 그때 나는 젊은층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였던 종로2가 종로서적에 갈 일이 있으면근처의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었다. 시집이 한 권에 있2,000원이고, 구내식당의 장국밥이나 돈가스가 500원, 1,000원 하던시절이었다.  - P21

빅맥 세트는 4,000~5,000원이나 했다. 교내 매점의 햄버거가 250원인것에 견주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요즘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점심 세트 메뉴를 먹을 수 있는 20,000원정도다.
피자는 한술 더 떴다. 국내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자 체인점인피자헛의 피자 한 판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0,000원이었다.
심지어 샐러드 작은 그릇 한 접시가 2,000원이었는데 한 번밖에 담을수 없었다. 그래서 샐러드를 켜켜이 눌러 담는, 다소 점잖지 못한기술을 익히려 애쓰기도 했다. 피자를 맘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은1990년대 말 피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부터였다. - P22

피자도 사정은 비슷해서 한국인이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피자와 이탈리아 피자는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절대 미국의 파르메산 치즈처럼 공장에서 만든 치즈를 식사와 함께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식 이탈리아음식의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피자를팔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동네에나 피자만 파는 피체리아pizzeria가따로 있다. 피자 가격은 한 판에 10유로선으로 저렴하고푸짐하면서도 맛있다. 당연하게도 피체리아는 내가 이탈리아에서가장 많이 간 음식점 중 하나였다. 또 피자의 원조인 이탈리아 남부식피자는 도우가 두껍지 않다. 나폴리 피자협회AVPN에서는 피자 중심의두께가 3밀리미터를 넘으면 나폴리 피자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규정했다. 그래서 두툼한 도우를 쓰는 중부 지방의 피자는 피자가아니라 ‘핀자pinzza‘ 등 다른 이름을 쓴다. 나는 토스카나 Toscana의두툼한 핀자를 좋아하며 두툼한 라치오 Lazio식 피자도 좋아한다. - P24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인 스파게티와 피자는 어떻게이탈리아 음식을 대표하게 된 것일까?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스페인의 식민지였기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1년 이탈리아통일 후에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등의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많은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미국에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는 50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80퍼센트는 남부 사람들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남부사람들의 음식인 피자와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의 전부인 것처럼알려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미국 문화권인 우리나라도 그중하나였다.
핀자에는 피자처럼 바질이 아니라 민트를 뿌려주는데 그 향과 맛이 매우 독특하다. - P26

이탈리아 파스타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의 토마토 고기 소스인 라구 소스를 남부의 스파게티 면에버무려주면 큰일이 난다. 쫄면으로 만든 평양냉면처럼 경계를허무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경계를 오가는음식을 ‘불경‘으로 간주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시도가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는 것이다.
그런 음식을 이탈리아인에게 대접하면 그 음식을 받아든 사람이접시를 요리사 얼굴에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파스타는 자국 음식을대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식재료다. - P26

이들의 보수성은 좀 더 근본적이다. 이들에게 ‘전통‘은 자신의정체성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인은 완전히 별개의지역에서 별개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이들에게는 지금도 이탈리아의국가적 정체성보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강하다. 내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탈리아는 월드컵 기간에만 한국가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2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라고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지역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의 특징을증명해주는 게 바로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열쇠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지역마다 완전히 개성이 다르다. 같은북부 지역이라도 피에몬테 주에서는 파스타 반죽에 계란을 넣고,
리구리아 Liguria 주에서는 계란을 넣지 않는다. 리구리아주의 파스타로는 - P27

바질 페스토를 이용한 파스타가 대표적인데, 대부분 건면인 링귀니를쓴다. 바질 페스토는 바질 잎과 구운 잣을 찧어 올리브 오일과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 치즈 가루에 버무린 소스다. 바질 특유의상큼한 향과 오일의 부드러움, 치즈와 잣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진소스로 파스타는 물론이고, 샐러드나 생선구이 등에도 어울린다.
리구리아주는 바질과 올리브의 대표적인 산지 가운데 하나다. 고도가 높은 편인 리구리아주의 올리브는 남부의 올리브에 비해열매는 작지만 풍미가 뛰어나다. 리구리아의 바질 역시 원산지보호"를 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바질 페스토처럼 산뜻한소스의 파스타에는 계란으로 반죽한 생면보다는 건면이 더어울린다. 리구리아주가 북부인데도 생면을 잘 먹지 않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시칠리아Sicilia에서 밀을 수입해 건면을 만들어 주변지역에 판매해오던 그 지역의 상업적 전통 때문이다.
리구리아에서는 심지어 치즈도 북부의 치즈가 아니라 남부의페코리노 치즈를 수입해 먹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파스타에는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 P28

볼로냐 역시 또 다른 파스타의 성지다. 시칠리아가 건면의 성지라면, 볼로냐는 생면 파스타의 성지다. 이탈리아의 생면 파스타는 기원전에트루리아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1세기 고대 로마의작가 아피키우스Apicius는 파스타에 고기와 생선을 곁들인 양념에 대한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볼로네제 파스타는 전 세계에서즐겨먹는 토마토 고기 소스 파스타의 원조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많이 먹는 파스타가 바로 이 볼로네제 파스타다. 내가 대학 때 처음먹었던 미트볼 스파게티도 이 볼로네제 파스타의 미국적 해석이다.
볼로네제 bolognese란 ‘볼로냐의‘란 뜻의 이탈리아 형용사다. 영어 단어차이니즈나 재패니즈와 비슷하게 ‘-ese‘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볼로네제 파스타는 아마 이탈리아의 파스타 이름 가운데 도시지명이 붙은 보기 드문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파스타에는 각양각색인 파스타 면의 이름이 붙는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Pesto Genovese에 ‘제노바의‘란 뜻의 제노베제 Genovese가붙기는 하지만 볼로네제의 명성에 견주기는 어렵다.  - P29

볼로냐에서는 건면 파스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스타를 만날수 있다. 파스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라자냐에서부터 볼로네제라구 소스와 어울리는 두꺼운 면인 탈리아텔레tagliatelle와 같은 다양한길이와 모양의 파스타를 파는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을 도시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에는 키오스크 매장이있는가 하면, 클래식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도 단품 메뉴로 생면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볼로냐 파스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매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에몬테의 고유한생면 파스타인 타야린이나 수제 라비올리인 아뇰로티는 가격이 좀비싼 편이다. 반면 시칠리아의 스파게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노점이 아닌 레스토랑에서도 10유로도 안 되게 파는 파스타를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반 인분씩 팔기도 한다. 여행 중에 자주갔던, 시칠리아 팔레르모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 파스타작은 접시의 가격은 6유로였다(와인 반병은 5유로, 맘마미아! 저렴한가격임에도 엄청 맛있었다). - P32

내가 요리학교 인턴을 마치고 볼로냐와 시칠리아 딱 두 곳만을선택해서 각각 한 달씩 머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시칠리아를 선택한 것은 우리 요리학교인 ICIF에 강의를 하러온셰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면시칠리아는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우리에게 시칠리아를 거의 이탈리아 미식의 원류쯤으로 강조했다.
평양냉면을 먹으려면 서울의 냉면집이 아니라 평양 옥류관을 가봐야한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시칠리아에 가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거의 모든 음식의 고향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밀, 소금, 쌀의 고향이다. 또 오렌지,
아몬드, 피스타치오, 체리 같은 과일과 가지, 펜넬 같은 채소가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에 전달되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탈리아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밀이 파스타가, 시칠리아의 쌀이 리소토가, 시칠리아의과일이 젤라토와 디저트가 됐다. 이탈리아인들이 왜 볼로냐를
‘미식의 수도‘라 부르고, 시칠리아를 ‘미식의 고향‘ 혹은 ‘미식의조국‘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 P34

볼로냐에서 특히 생면이 발달한 까닭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자연환경 덕택이다. 볼로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리구리아주제노바와 베네토 Veneto주 베네치아에서는 건면을 주로 먹은 반면에, 볼로냐에서는 생면을 먹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각각 시칠리아와 풀리아, 동유럽의 경질밀로 만든 스파게티나 링귀니를 먹었던 반면, 볼로냐는 일반적인 밀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손칼국수를 먹은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면을 고집했을까?
볼로냐 사람들이 먹는 생면 파스타를 탈리아텔레라고 부른다.
탈리아는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 ‘탈리에레tagliere‘에서 왔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 칼과 국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칼국수‘다. 여기에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뜻의 ‘손-‘이 붙으면 ‘손칼국수‘가 된다. 이탈리아의 손칼국수 면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탈리아텔레다. - P39

볼로네제 파스타 외에도 볼로냐 사람들이 자주 먹는 파스타가 있다.
관광객들보다는 볼로냐 사람들이 더 즐기는 로컬 음식이라고 해야할 듯하다. 관광객이 뜸한 볼로냐 주택가나 대학가에 들어서면볼로네제 파스타 가게는 찾아볼 수 없고 그 대신 무수히 많은토르텔리니 가게가 나타난다. 볼로냐는 손가락 마디 하나만 한 작은만두, 토르텔리니의 성지이기도 하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라비올리는 이탈리아 만두를 총칭하는말이다. 이 중에 토르텔리가 있는데 보통 네모나게 만드는 북부식라비올리를 가리킨다. 토르텔리 가운데에서도 조금 큰 만두 형태로빚는 것을 ‘토르텔로니‘라고 하고, 아주 작게 만드는 만두를
‘토르텔리니‘라고 한다. 따라서 레스토랑에 가서 주문할 때에는 어떤 것을 주문할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 P45

나는 해외여행을 다닐 때 늘 말린 다시마를 가방 속에 가지고다닌다. 언제든 한식을 손쉽게 해먹기 위해서다. 다시마의 감칠맛을내는 아미노산은 소고기의 감칠맛을 내는 아미노산과 비슷하다.
말린 다시마는 부피도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유용하다. 타지에서한국식 국물이 간절할 때 다시마와 파를 넣고 간단히 계란탕만끓여도 충분하다. 어느 날엔가는 이렇게 아끼던 다시마에 양파와당근, 샐러리 등을 넣고 간단히 채수를 내어, 삶은 토르텔리니나토르텔로니를 넣고 만둣국처럼 끓여먹기도 했다. 이 레시피는한국의 사찰 요리 레시피를 변주한 것이다. 사찰에서는 떡국을 끓일때 다시마와 표고버섯 육수를 사용한다. - P49

실제로 볼로냐와 모데나는 특이한 동네다. 이 지역프로슈토prosciutto와 경성 치즈가 이탈리아뿐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인기 있는 농산물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지역에는 이런 독특한 특산품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비싼 식초 중의 하나로 꼽히는 발사믹이다.
나는 발사믹 식초의 고향인 모데나에 가서 식초 박물관과거기에 달린 매장을 돌아봤다. 이곳에 가면 5년, 10년 숙성 식초는물론이고, 50년, 100년 숙성된 발사믹 식초도 있다. 10년이 넘은발사믹은 그냥 먹어도 시큼한 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 이미식초가 아니라 풍미 진한 음료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25년 된식초가 가장 맛있었는데, 식초의 향도, 설탕의 맛도 느껴지지 않는완숙미가 있었다. 와인을 응축해 놓은 것 같은 세월의 맛이었다.
모데나에서는 이 발사믹을 별다른 양념 없이 고기와 음식에는 물론디저트 위에도 무심하게 뿌려먹는다. - P59

한편 볼로냐를 비롯해 많은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에서는여전히 고집스럽게 손으로 생면을 만들어 먹는다. 그리고 자신들의소스인 볼로네제 라구 소스는 기계로 뽑은 스파게티에 얹어먹어서는안 된다며 열을 올린다. 나는 볼로냐 사람들의 이 고집스러운
‘면부심‘이 재미있다. 볼로냐가 미식의 수도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그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특이하게도볼로냐는 음식과 관련해서는 처음부터 끝을 생각했던 것 같다.
프로슈토도, 치즈도, 파스타도 그렇다. 서양 요리와 음식 문화의정점인 와인에 있어서도 그렇다. 볼로냐는 언제나 이탈리아 음식의시작과 끝에 서 있으려 한다. 그래서 볼로냐는 ‘뚱보의 도시‘라는별명과 ‘현자의 도시‘라는 별명을 동시에 차지했나 보다. - P61

이탈리아 북부 에밀리아로마냐의 중심 도시인 볼로냐 중앙역첸트랄레에 내리면 두 가지에 놀란다. 먼저 역사의 규모에 놀란다.
생각보다 작아서다. 볼로냐는 우리나라의 경부선과 호남선이갈라지는 대전과 같은 전통적인 교통의 요지다. 나폴리와 로마에서출발하여 밀라노, 토리노를 거쳐 프랑스로 뻗어나가는 철도 노선과,
베네토, 베네치아, 트리에스테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동유럽으로가는 노선의 분기점이다. 역사적으로 이탈리아와 가장 빈번한전쟁과 교역을 해왔던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로 가는 갈림길이 바로볼로냐에서 시작된다. 프랑스와 스페인은 도시 국가로 분리되어있던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두고 중세 내내 전쟁을 벌였다. 이 지난한전쟁은 18세기까지 이어졌는데, 전쟁을 벌인 두 세력은 스페인이나헝가리 등의 동유럽에까지 걸쳐 넓은 영역을 장악했던 오스트리아의합스부르크 왕가와 프랑스를 지배했던 발루아 부르봉 왕가였다.
볼로냐는 이 두 국가의 왕가와 계속해서 전쟁을 벌여왔다. - P63

살루미는 사실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인 피자나파스타보다 한 수 위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그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지켜오고 있는 음식으로, 파스타나 피자가중세 이후 외국과 교류하던 중에 자연스레 탄생했던 것과는대조적이다. 파스타는 아랍에서, 피자는 대항해시대 이후 토마토가신대륙에서 들어온 뒤에 등장했다. 따라서 살루미는 세계에서인정받는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 음식의 대표 주자다.
멀쩡하던 이탈리아인들이 잠시 이성을 잃고 떠들게 만드는대화 주제가 있다. 하나는 축구이고, 다른 하나는 음식이다.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정말 열정적으로 이야기한다. 왜그럴까? 이탈리아인들은 19세기 말까지 도시 국가에서 살아왔다.
우리나라처럼 1,000년 넘게 한 나라로 통일되어 살아온 게 아니다. - P84

그래서 "이탈리아는 도시가 시골이고 시골이 도시"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작은 소읍이라도 자기들만의 탄탄한 이야기와 역사를 지니고있다는 뜻이다. 이들 이야기의 첫 장은 거의 대부분 음식에서시작한다. 아무리 작은 동네라도 자기 동네만의 와인이 있고, 치즈가있고, 살루미가 있다. 뭐든지 서울식으로 통일해야 직성이 풀리는한국과는 퍽 다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탈리아인들은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전통‘을강조하곤 한다. 내가 다녔던 ICIF에서나 현지 레스토랑에서 인턴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전통이란 뜻의 ‘트라디지오네radizione‘
였다(두 번째로 많이 들었던 단어는 ‘빠삭빠삭하게‘라는 뜻의
‘크로칸테(croccante였다). 이들은 음식이 전통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큰일 나는 것처럼 군다.
이렇게 먹는 것에 유별난 이탈리아인들은 전통 햄도 유별나게만든다. 이들은 살루미를 만드는 돼지를 숲에 방목해서 적어도 2년동안 키운다. 그래야 육질이 더 맛있단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다른많은 나라에서 돼지를 6개월 정도 키운 후에 도축하는 것과는 사뭇다르다. 그만큼 가격도 비싸서 잘 만들어진 프로슈토 한 덩이는100만 원을 훌쩍 뛰어넘는다. - P85

이탈리아 햄은 생햄(프레스코)과 조리햄(코토)으로 나뉘는데, 보통생햄을 더 쳐준다. 이탈리아식 생햄에는 소금이나 향신료를제외하고는 인공적인 것을 가급적 첨가하지 않는다. 그게 전통이기때문이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편리와 효율이라는 이름으로 햄을만들 때 밀가루도 넣고 인공 조미료에 발색제에 방부제까지 넣는다.
대량 생산을 하니 그만큼 가격도 저렴하다. 반면 이탈리아에서는아직까지도 고집스럽게 전통을 지켜서 만든다. 대신 가격이 비싼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동네가 이 제품을 칭찬하고 격려하며앞장서서 소비한다. 그리고 자기 동네 음식이 이만큼 독특하다는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긴다.
맥도날드가 자기 나라에 매장을 열자마자 그에 반대해서 ‘슬로푸드 운동‘을 한 것도 이탈리아인들이었다. 또 스타벅스가 가장늦게 들어온 나라 중 하나도 이탈리아다. 지금도 이탈리아 전역에서밀라노와 토리노 단 두 도시에만 스타벅스가 들어와 있다. 그래서내게 이탈리아 하면 떠오르는 추상명사는 ‘전통‘과 ‘지역‘이다. - P87

그는 수업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러 온 외국의젊은이들에게 "햄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숨겨진 제조 비법이아니라 돼지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먼저"라고 강조했다. 돼지를미국의 공장식 축산 방식으로 넓이가 1제곱미터도 채 되지 않는축사에 가둬놓고 유전자변형GMO 사료를 먹여 키울 경우, 소금만써서 자연 바람에 말리는 이탈리아 전통 프로슈토를 만들 수가없다는 그의 이야기는 큰 울림이 있었다. 레지노 대표는 학교에서강의를 했던 강사 가운데 가장 연장자였고, 가장 기억에 남는강사였다. 내가 수업을 마친 후 다가가서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자고청했던 사람은 주로 셰프가 아니라, 살루미 장인과 치즈 장인 그리고와인 소믈리에였다. 생각해보면 이탈리아에서 유학할 당시 나는요리법보다는 식재료 그 자체에 호기심을 더 가졌던 것 같다. - P89

완벽한 프로슈토를 만드는 데 필요한 3대 요소는 방목해서 키운 돼지뒷다리와 소금 그리고 풍부한 바람이다. 산맥과 평원을 모두 끼고있는 에밀리아 지역에는 돼지와 바람이 풍부하다(에밀리아로마냐주와함께 프로슈토가 유명한 프리울리 Friuli주 역시 알프스산맥과 아드리아해를끼고 있다. 둘을 비교해보면 프리울리주의 산 다니엘 프로슈토가 좀 더짜다). 이탈리아 반도의 서쪽에 위치한 데레니아해 (우리로 치면 서해에 해당하는 위치다)에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아펜니노산맥과 부딪쳐 습기를 잃고 건조해진 뒤 에밀리아를 향해 분다. 이런 바람은에밀리아가 프로슈토의 중요한 산지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 P91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로냐 사람들은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대중화되어 많은 귀족과부자들이 가난한 자의 음식이라고 여기던 파스타를 좀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미식의 도시라는 볼로냐의 명성은 프로슈토를 얇게 썰 수 있는기계인 고기용 슬라이서가 볼로냐에서 세계 최초로 만들어지면서더욱 공고해졌다. 1873년 볼로냐의 젊은 엔지니어 루이지 주스티 LuigiGiusti가 고안한 이 기계는, 오직 숙련된 장인만이 할 수 있었던프로슈토를 얇게 저미는 일을 누구나 손쉽게 할 수 있게 해주었다.
기계식 슬라이서 덕분에 종잇장처럼 얇게 썬 프로슈토와모르타델라를 꽃처럼 돌돌 말아서 접시를 화려하게 장식할 수 있게되었다. 그때부터 볼로냐의 식자재는 탄탄한 스토리와 독특한맛에다가 멋진 형식미까지 갖추게 된다. ‘볼로냐 사람들은 늘산해진미를 멋지게 차려놓고 먹는다‘는 시샘이 다른이탈리아인들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P99

세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나라는 어딜까? 토마토생산량 1위를 차지하는 국가는 의외로 중국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 FAO 통계자료를 보면 중국은 2017년 1,033만 톤의토마토를 생산했다. 이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20퍼센트에 이른다.
2, 3위도 다소 예상 밖인데, 인도와 나이지리아다. 이탈리아는 10위로세계 생산량의 불과 2.1 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토마토 하면 이탈리아가 떠오른다. 아마 이렇게생각하는 게 나 혼자만은 아닐 것이다. 언젠가부터 ‘토마토=이탈리아‘
라는 불문율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는 이탈리아의 음식이 아니라 전세계인의 음식이 된 파스타와 피자 덕분이다. - P101

만들었다. 볼로냐 특유의 ‘볼로네제 소스‘가 비로소 탄생한 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생면 파스타에 이 라구 소스를얹어서 볼로네제 파스타를 만들었다. 향신료와 설탕 범벅이던과시적인 음식이 볼로냐에서 비로소 미식의 음식으로 재탄생한것이다.
볼로냐와 나폴리의 토마토소스 대결은 어떻게 보면 사골국물로 만든 손칼국수와 멸치국수의 대결처럼 기호의 차이 때문에벌어진 큰 의미 없는 싸움처럼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손칼국수와멸치국수 사이에서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 것처럼, 이탈리아에서는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 골라먹으면 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서로 다른 맛을 자랑하는 북부의 파스타와 남부의 파스타는 전혀다른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맛도 매우 다르다. 이렇게 맛과역사가 다른 파스타가 미국으로 건너가 뒤섞이면서 문제가 시작된것이다 - P122

볼로냐, 아니 이탈리아에서는 정작 먹지 않는 미트볼스파게티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음식으로 여겨지니 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사실 이탈리아에서는 스파게티같은 가는 면은 주로 해산물이나 바질 페스토처럼 가벼운 소스에 곁들여 먹었고, 주로 이탈리아 남부나 남부의 밀로 파스타를 만드는 해안 도시에서 주식으로 먹었다. 목축이 발달해 버터와 치즈가풍부한 이탈리아 북부는 눅진한 소스를 만들어 두께가 넓은 면에 비벼먹었다. 그들에게 파스타는 끼니를 때우는 용도가 아니라 명절이나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는 정성스러운 음식이었다.
이렇게 각 지역마다 파스타에 대한 역사와 기호가 다른데 그걸하나로 뭉뚱그려 제멋대로 바꾸어버리니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손칼국수와 멸치국수가 엄연히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탈리아인에게 파스타는 제각기 다른 역사와 맛을 지닌 존재다. - P122

이탈리아는 아마 세계에서 가장 음식과 관련해 ‘하면 안 된다‘는규제가 많은 나라다. 그중에 가장 강력한 원칙 중 하나가 볼로네제소스를 스파게티 면과 먹으면 안 된다는 거다. 볼로냐 사람뿐 아니라이탈리아인에게는 상식인 이야기다. "볼로네제 소스에 스파게티면을 쓰는 건 개인의 자유다"라고 이야기하는 이탈리아 정치인이있다면 적어도 에밀리아로마냐에서는 정치적으로 매장을 당할지도모른다. ‘근본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인신공격을 감내해야 할 수도있다. 이렇듯 이들에게 파스타는 이념보다 앞서는 정체성의 문제다.
- P123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볼로냐 사람들의 자부심 때문이아닐까 싶다. 고대 에트루리아인이 세운 도시였던 볼로냐는켈트족이 다스리면서 ‘볼로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켈트족의목축 기술을 전수받은 그들은 다시 게르만족의 새로운 유목 문화를흡수했다. 특히 그들은 롬바르디아인의 돼지 사육에 대한 지식을그대로 배워 프로슈토나 모르타델라 같은 새로운 살루메를만들어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치즈인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도, 또 가장 독특하면서 가장 비싼 식초인 발사믹 식초도 이 지역의 작품이다. 이들이 잘 만드는 것에는 볼로냐와 모데나에서 생산하는슈퍼카 페라리, 람보르기니, 마세라티도 포함된다. 볼로냐를 포함한 에밀리아로마냐 사람들이 "우리는 필요하면 우리가 직접 만든다. 그리고 잘 만든다"라고 자신하는 이유다. - P125

이탈리아에서 토마토를 가장 많이 생산하는 주는 시칠리아다. 그다음으로는 캄파니아(주도는 나폴리), 라치오, 풀리아 순이다(2018년기준 유엔식량농업기구 통계). 이탈리아 중부의 라치오를 제외하고는전부 남부에 위치해 있다. 이탈리아인들은 1년에 1인당18.2킬로그램의 토마토를 먹는데, 유럽에서 1인당 토마토를 가장많이 먹는다. 아울러 이탈리아는 토마토 관련 소스를 생산해가공수출을 많이 하는데, 이탈리아의 토마토 관련 식품기업은대부분 볼로냐와 그 주변에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큰 토마토가공식품 회사는 미국의 ‘모닝스타Morning Star‘다. 2위, 3위는 중국기업이다. 중국과 미국의 ‘규모의 경제‘에 밀려 이탈리아 회사는 세계13위를 차지하고 있다. 콘세르베이탈리아ConserveItalia가이탈리아에서는 1위의 기업이다 - P126

콘세르베이탈리아는 볼로냐의 협동조합에서 시작한 기업이다.
‘콘세르베cconserve‘는 이탈리아어로 ‘보존‘이라는 뜻이다. 이협동조합은 1976년에 설립되었으며 약 1만 4,500 명의 회원을 둔51개 이상의 대형 협동조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탈리아와 유럽각국에 12개의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2017년 기준으로 매출은 9억유로나 된다. 이탈리아 내에서 매출 2위인 카살라스코(롬바르디아),
3위인 무티(에밀리아로마냐)도 볼로냐 주변 지역의 기업이다.
카살라스코 역시 롬바르디아와 에밀리아로마냐의 접경 지역인크레모나에서 출발한 협동조합이다. 무티는 볼로냐 인근 파르마에서시작한 주식회사다.
이탈리아는 2015년 기준으로 유럽에서 협동조합에 고용된인구가 전체 생산가능인구에 대비해 가장 많을 정도로 협동조합이 - P126

발달되어 있다. 유럽 협동조합 가운데 매출이 가장 큰 상위 8개기업이 이탈리아 협동조합이며, 이 가운데 에밀리아로마냐가협동조합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볼로냐에 발달한 협동조합은볼로냐의 생활물가와 실업률을 낮추는 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다. 전체실업률은 물론, 30퍼센트에 육박하는 이탈리아의 청년실업률이 가장낮은 곳도 볼로냐를 비롯한 에밀리아로마냐의 도시들이다. 더불어여성의 취업률도 가장 높다. 볼로냐에 가면 느낄 수 있는 이곳사람들의 친절함은 이런 경제적인 이유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볼로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넉넉한 풍경이었던 듯하다.
러시아의 작가 파벨 무라토프 Pavel Muratov, 1881~1950는 19세기 말《이탈리아의 이미지》라는 책에서 볼로냐를 이렇게 찬양했다.
"볼로냐는 복잡하지 않고 경쾌하며, 눈을 즐겁게 하는 가벼운무언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하고 신체는건강하다. 이곳은 기름진 곡창지대와 유명한 와인을 생산하는 포도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풍성함과 다양함에서 볼로냐를 따라올 도시는 없다."
볼로냐에 가면 100년 전 러시아 작가가 느낀 감정이 과장이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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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이탈리아 하면 으레 옛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중세 도시국가를 떠올린다. 그래서 대다수 여행자들은 이탈리아반도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로마-나폴리를다녀온다. 이는 1786년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선보였던 이탈리아기행 루트와도 비슷하다. 당시 30대 초반의 괴테는 "로마에 들어섰을때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큰영감을 받았다. 괴테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의 이탈리아 여행코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크게 변함이 없을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이한 이탈리아 여행자다. 나의 여행은 이런고전적인 이탈리아 여행 루트에서 한참 벗어났다.
로마-베네치아-나폴리 등을 대신해 내가 고른 도시는 볼로냐였다.
나는 2019년 이탈리아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 인턴실습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볼로냐와 시칠리아에 - P6

각각 한 달씩 있다가 귀국했다.
볼로냐와 시칠리아를 고른 데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했던셰프들의 영향이 컸다. ICIF는 토리노가 주도인 이탈리아 북부피에몬테주에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피에몬테는 프랑스 문화와 이탈리아 문화의 교차점에 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그런데 이 자부심 강한 피에몬테 사람들이 이탈리아 맛의 원조로 꼽는 도시가 바로볼로냐와 시칠리아다.
볼로냐가 자리한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이탈리아인들의골수라고 할 수 있는 치즈와 살루미 (햄)이 유명하다. 우리가 ‘샌드위치 햄‘으로 부르는 커다랗고 둥근 햄은 볼로냐에서 만든 모르타델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햄은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스페인으로 전해졌고 남미로 퍼졌다. 이 햄뿐 아니라 이탈리아인의자존심으로 불리는 돼지 뒷다리로 만드는 생햄인 프로슈토의 집산지도 볼로냐다.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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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인생 여정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최상의 장비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몽테뉴의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발견하고메모해두었는데요, 여러분은 이 표현 어떠세요? 저는 접하자마자 고개를 끄덕였어요. 온몸, 온 삶으로 동의합니다. 몸에 물이 필요하듯 삶에 책이 필요했어요. 매일매일 일상은 비슷한데 왜 매일매일 새삼스럽게 힘이 들까요. 이제 좀 살 만하다 싶으면 왜 또 발목을 잡는 문제들이 불쑥 등장하는지. 한 번씩 알수 없는 허무감에 시달리는데, 환절기 감기처럼 찾아오는 번뇌를 풀어가거나 잠시 도망치려고 할 때 책에 크게 의지했습니다. 제게 책은 생각의 갈피를 잡아주고 마음을 잠잠하게 해주는, 현명하고 너그러운 존재죠. 멋진 책을 읽으면 몸에 통째로 저장해두고 싶은 마음이 드는데, 책을 빨리 떠나보내지 않고 더 잘 사랑하는 방법이 저에겐 글쓰기입니다. - P225

당신을 보려고 애쓸수록
내 두 눈이
혼란스러워진다
지금 이 순간에조차
굶주린 아이처럼
당신 자리를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그들이 찾는 것은
당신 얼굴이 아니니까
내가 만들고 싶은 건
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


미국 시인 오드리 로드의 <치료Therapy>라는 시입니다. - P230

떤 느낌이 들었나요? 저는 "내가 만들고 싶은 건 / 시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에서 가슴이 쿵 했거든요. 황지우 시인의 <나는 너다>라는 연작시도 생각이 났고요. 당신을 나 자신의 일부로 만드는게 아니라 일부에 가깝게 만든다는 표현이 시적이어서 울림이컸어요. 완전한 합일이 아니라 하나됨을 위해 애쓰는 조심스러움이 느껴져서요. 저 시구에서 "시"와 "당신"의 자리에 ‘글‘을넣어도 될 것 같아요.


내가 만들고 싶은 건
글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글을
나 자신의
일부에 가깝게 만드는 것. - P231

그렇습니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읽는 시간도 글쓰기에 대한 나의 생각, 느낌, 의견을 최대한 나에 가깝게 만드는방법을 모색하는 시간입니다.


"글을 잘 쓰고 싶은데 시를 읽는 게 도움이 되나요?" 이렇게묻는 분을 종종 만납니다. 아마 제가 쓴 책에 시가 많이 나와서 그런 듯해요. - P231

제 글쓰기는 시에서 매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에 좋은 영양제를 챙겨 먹듯이 글 쓰는 데 도움받으려고 시를 의도적으로 골라 읽은 건 아니고, 단지 좋아해서읽다보니 시가 글에 스민 것 같아요. 그래서 시가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일목요연하게 증명하며 답하긴 어렵습니다만, 시에서 얻어온 것들을 하나씩 짚어볼게요.
시를 허겁지겁 폭식하듯 읽은 시기는 인생이 가장 괴로웠을 때였어요. 정신이 탁해지고 마음이 울렁이면 출구가 필요했고, 그때마다 시집을 폈어요. 시에는 어지러운 것들, 하찮은것들, 삐뚤어진 것들, 버려진 것들, 다친 것들의 이야기가 늘나와요. 읽노라면 내 안의 어둠이 환하게 드러났어요. 특히 저는 최승자 시인을 가장 좋아해요. 고통의 발산과 응축으로 단련된 그의 단단한 시어를 보며 고통도 아름다움이 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 P232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열망과 허망을 버무려
나는 하루를 생산했고
일년을 생산했고
죽음의 월부금을 꼬박꼬박 지불했다. 


"나는 흘러가지 않았다." 다음에 "생산했고/생산했고"
라는 식으로 생산했고"라는 시어가 3 행, 4행에 반복되죠. 생산했고/ ~생산했으며 "로 조사 한 개만 바꿔도 시의 느낌이 달라져요. 언어적 긴장이 덜해집니다. 여운이 덜 고여요. 조사 하나 바꾸는 게 뭐 대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글에서는 조사하나의 무게가 문장 하나의 무게와 다르지 않습니다. 피아노를칠 때 음 하나하나가 중요한 것처럼 글에서도 그런 것 같아요.
조사가 만든 작은 뉘앙스 차이가 모여서 문장을 이루고 단락이되고 글이 되면서 자기만의 문체를 형성합니다. 문체의 최소 단위인 조사 하나, 단어 하나가 굉장히 낯설어지고 소중해지는 경 - P235

험을 시를 읽으며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시에서 언어를 경제적으로 사용하는 방법 그리고 어둠을 직시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권해드리고 싶어요. 시를 읽어보시라고요. 글 쓰는 사람은 문자와 단어에 민감할 때 더 정확한 단어, 속 깊은 단어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 읽기가 녹록지 않죠.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하느냐는 질문도 자주 받아요. 읽어도 그 뜻을 도통 모르겠다면서 말이죠. 최승자 시인의 시는 비교적 이해하기 나은 편이에요. 이번 글 도입부에 소개한 오드리 로드의 시집 <블랙 유니콘》도 글쓰기 수업 교재로 썼는데, 게시판에 질문이 올라왔어요. 도저히안 읽힌다고요. "시 근육이 없는 사람은 시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수능 시험 끝나고 시 한 편도 안 읽어봤어요."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요. 느낌도 안 와요." 이런 항의성 질문은 시수업마다 반복됩니다. 그래서 시 읽는 방법을 친절하게 답변해드렸어요. 그 답변을 공개합니다. 별건 아닙니다만. - P236

시 읽는 법
1번.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는 시는 읽고서 넘어간다.
2번 ‘이러다가 한 편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 아닌가?‘ 싶어도 넘어간다.
3번. 어쩌다 하나 얻어걸리는 시구가 있으면 밑줄을 긋는다.
4번. 맨 끝까지 인내심을 갖고 일독한 후 해제까지 읽는다.
5번. 다시 시집 한 앞으로 가서 그나마 읽을 만했던 시 위주로 골라서 소리 내어 읽는다.
6번. 세상에는 원래 이해 안 되는 말이 많다는 것, 내가 모르는 게않다는 엄정한 사실을 받아들인다.
7번. 또다시 시집을 편다.
8번. 1~7번을 체력과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반복한다. - P236

저도 시가 여전히 어렵습니다. 한 번 읽고 나면 이게 무슨말인가 싶어서 어리둥절하죠.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를 읽는 것 같아요. 글자는 알아도 맥락을 모르는 문장이 세상에 많다는 사실에 대한 환기이죠. ‘왜내말을 못알아들어!‘라고 서로 아우성치는 인간 세상에 대한 축소판이 시집입니다.
시를 읽으면 언어에 대한 유희와 긴장과 겸손을 잃지 않게 되더라고요.
마음에 들어오는 시 한 편 얻기가 얼마나 어렵게요. 그렇지만 운명처럼 마주한 시 한 구절은 한 사람이 한 시절을 버티게도 해줍니다. 여러분도 어서 삶에 시를 들여서 언어의 섬세함과 아름다움을 탐닉하시길 바랍니다. - P237

문체는 한 작가의 고유함, 즉 글 안에 들어 있는 세계관, 정서,
문제의식, 표현력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집니다. 그러니까 글쓴이의 이름을 가리고 글을 읽었는데 누가 썼는지 알겠으면그 작가는 고유한 문체를 지녔다고 말할 수 있겠죠. 저에겐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 글이 그래요. 아무런 정보 없이 읽어도 선생님 글인 걸 바로 알겠더라고요. 시대의 풍속화와 삶의 세목을 그려내는 대가죠. 박완서 선생님이 쓴 글은 소설이든 산문이든 흉내 낼 수 없는 단단함과 날카로움이 있어요. 전개 속도가 빠르면서, 생활과 체험의 무게가 실린 튼튼한 문장을 쓰는
‘사실주의 문체‘의 소유자입니다. - P238

제 글에 대한 피드백을 종합해보면 문장의 밀도와 온도에관한 이야기 같아요. 그래서 생각한 저의 문체는, ‘두부체? 몰랑몰랑하고 맛있고 단백질 함량이 높고 몸에도 좋잖아요. 그런 글을 쓰고 싶었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습니다. 문체를 갖겠다고 의식하지 않았는데, 글을 쓰면서 ‘정확하되 아름답게쓰자‘ ‘현실을 날카롭게 짚더라도 글에 칼날을 넣지 말자‘라는신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저격하는 글이나 과격하고신랄한 글을 읽으면 마음이 힘들어요. 독자로서도 그런 글을잘 읽지 못하기에 쓰지도 못하는 것 같아요.
저는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글로 담아내요. 일하다가 죽는노동자의 문제를 파헤치고, 헌신과 희생을 요구당하고 자기몫의 삶을 빼앗긴 여성의 존재, 시민권을 얻지 못하는 존재, 고생 끝에 낙이 온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서 계속 패배하 - P239

다른 작가의 문체도 살펴볼게요. 《계속해보겠습니다》를 쓴 황정은 작가도 고유한 문체를 가진 대표적인 소설가입니다.
<백의 그림자>라는 소설은 작가만의 문체를 비롯해 주제 표현등 참고할 만한 내용이 많아서 글쓰기 수업 교재로 썼었고요.
<계속해보겠습니다》는 읽었을 때, 이건 정말 황정은 작가만쓸 수 있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좋았던 구절이 여러군데 있지만 한 단락만 여러분께 공유해볼게요. - P241

목숨이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그뿐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문장이 덤덤한데 기저에는 삶에 대한 뜨거움이 있어요. 문장에 쉼표를 많이 쓰고 행도 자주 바뀌어서 장시 같고요. 소설전반에 ‘간장 한 방울‘과 같이 굉장히 사소한 것들과 무의미에가까운 덧없는 존재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읽다보면 가 - P241

슴에 점점 파문이 인다고 할까요. "그래서 소중하지 않은 걸까,
생각해보면 도무지 그렇지는 않은 것입니다." 라고 쓴 문장때문입니다. 사람이란 존재가 애틋하게 느껴지고, 생에 대한사유를 자극합니다.


여러분도 고유한 문체를 갖고 싶다면 이렇게 해보세요. 자신의 글이 어땠으면 좋겠는지 고민해보는 거예요. ‘웃기면 좋겠다.‘ ‘담백한 문장을 쓰고 싶다.‘ ‘서늘하면 좋겠다.‘ ‘독자가얻어갈 게 글에 꼭 있어야 한다.‘ 이런 지향점을 두고 글을 쓰다보면 자기만의 세계관과 정서, 읽는 호흡에 따라 고유한 문체가 생기지 않을까요. 문체는 남들이 가진, 좋아 보이는 걸 가져오는 게 아니라 내 안의 가장 고유한 본질에서 형성되는 것이기에, 글쓰기는 자기 탐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 P242

글쓰기는 기본적으로 나의 좋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 지혜를 글로 엮으면서 내 것과 의미의 파장이 맞는 다른 이의 표현을 넣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쓴 문장을 곁들이는 일이 ‘인용‘이죠. 저는 인용구를 즐겨 씁니다.
인용구로 이루어진 책 《쓰기의 말들》도 냈고요.
인용구를 쓸 때 주의할 점은 ‘애매하면 뺀다‘입니다. 모자를떠올려보세요. 기껏 옷 잘 입고 안 어울리는 모자를 쓰면 스타일이 망가지잖아요. 글도 마찬가지죠. 글 전반에 맞춤한 인용구를 고르는 게 관건입니다. - P244

극단 작품개발팀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뷰 강의 의뢰가오기도 했죠. 이처럼 인터뷰는 소통의 도구이자 타인의 삶의맥락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쓰입니다.


우선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인터뷰가 상대의 마음을 여는 일이고, 마음은 마음으로만 얻을 수 있어요. 제가 인터뷰어로서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지만 작가로서 인터뷰이로 인터뷰에 응하기도 하는데요, 상대의 태도에 따라 제 자세도 달라져요. 상대가 최선을 다하면 저도 허리를 곧추세우고 진지하게 임하게 되더라고요. 안 하려던 이야기도 막 하고요. 또 제가인터뷰어로서 ‘이 인터뷰, 특별히 잘하고 싶다‘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임하면 처음엔 덤덤하던 인터뷰이의 눈빛도같이 깊어지는 걸 느끼기도 합니다. - P250

좋아하는 영화 《캐롤》에 이런 대사가 있어요. "궁금한 것들이 있는데 당신에게 물어봐도 될지……" 테레즈 (루니 마라)가캐롤(케이트 블란쳇)에게 말해요. 캐롤이 답하죠. "뭐든 물어봐줘요, 제발." 아, 저는 이 장면을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꼽아요. 당신을 알고 싶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요. 캐롤은 중산층으로 가족이나 지인과의 관계가 피상적인 인물이에요. 주변엔 그를 전시하려고만 할 뿐, 그의 내면까지 깊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러니 테레즈가 자기의 존재를 궁금해하면서 말을 걸어올 때 캐롤이 얼마나 벅찼을까요. - P250

인터뷰도 ‘나는 너를 알고 싶어‘라는 프러포즈입니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일, 인터뷰할 때 저는 두 가지를 상기해요.
첫 번째,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을 뭐하러 인터뷰해요"라고말하는 인터뷰이가 더러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은 세상에 둘도없어요. 사람은 존재 자체로 귀합니다. 역사적으로 미천한 존재, 고귀한 존재를 나누는 신분 제도가 사회에 관습처럼 남아있을 뿐이죠. 지금도 권력이 있거나 업적을 이룬 인물의 서사만 주목하죠. 그런 무의식의 지배를 받아서 우리도 사회적 성취나 쓸모에 따라 자신을 평가해요. 그런데 ‘그냥 사는 사람‘은없어요.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도 다들 엄청난 자기 서사를 품고 있어요.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평범하지 않은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요.
인터뷰해보면 ‘한 사람이 저마다 우주‘라는 말을 수긍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이든 존경하는 마음으로 만나보세요. - P251

두 번째로 상기하고 내려놓지 않는 점은 ‘그렇게 훌륭한 인물‘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진순의 열림>이라는 인터뷰 기사를 연재했던 이진순 선생님은 6년 동안 122명을 만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많이 물어본대요. 지금까지 만난사람 중에 누가 제일 훌륭하냐고요. 이진순 선생님은 이렇게답합니다. "누구의 인생도 완벽하게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한 방은 있다." 인터뷰하는 사람은 그 한 방과 - P251

누추함이 버무려진 이야기를 발견하고 끌어내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모자란 구석과 빛나는 구석이 있는 복합적 존재라는 것, ‘그냥 사는 사람‘은 없지만 ‘그렇게 훌륭한 사람도 없다는 것. 이러한 모순을 통합해내는 게 지성입니다.


인터뷰에서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질문이죠. 질문은 인터뷰의 꽃입니다. 사전 준비를 잘하는 건 기본인데요, 준비한 내용에만 의존한 채 이미 아는 사실을 확인만 하고 오는 인터뷰는 좋은 인터뷰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에게 좋은 인터뷰란, 그사람을 만나기 전에는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인터뷰입니다.
틀에 박힌 이야기가 아니라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시간이고, 그러려면 ‘열린 질문‘이 필요합니다. - P252

인터뷰에 대해 말하려면 책 한 권으로 풀어도 모자랄 것 같은데요. 제게 인터뷰란 ‘나를 흔들어놓는 대화‘입니다. 독서와경험으로 형성된 인식의 지반이 있는데, 인터뷰를 하면서 들은 타인의 말이 틈을 만들어내요. 균열과 혼란에서 다른 사유로 넘어가고,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깊어지는 계기가 생깁니다. 그래서 인터뷰가 ‘인생 수업 심화반‘ 같다는 생각을 자주하죠. 인생 수업, 일대일 과외 같기도 하고요.
"우리는 경험을 가진 개인들이 아니라 경험을 통해 구성된주체들 20이라고 미국의 페미니즘 역사학자 조앤 스콧은 말했죠. 인터뷰이는 자기 경험과 생각을 말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자기 자신이 됩니다. 인터뷰어도 타인의 삶을 경유하고 나면 이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겠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과 삶의신비를 배우는 ‘인생 수업 심화반‘에 여러분도 등록하시길 바랍니다. - P256

제 하루는 글쓰기를 중심으로 굴러가요. 아이들이 학령기일 땐 아침 먹이고 학교 보내고 나서 바로 책상 앞에 앉았어요.
서너 시간 쓰다가 집중력도 떨어지고 허리도 아프고, 그러면그때부터 다른 일을 처리했습니다. 청소도 하고, 빨래도 하고,
장도 보고, 이메일 답장도 하고요. 여러분도 글을 쓰고자 한다면 ‘글쓰기와 기타 등등‘으로 하루 또는 일주일 계획을 짜보세요. 초고를 쓰기 위해 통으로 최소한 네다섯 시간을 비워두는거죠. 퇴고는 자투리 시간이 날 때마다 써도 되거든요. 저의 경우, 빈 문서 상태에서 뭐라도 써야 하는 초고 작업에 가장 많은에너지가 들지, 써놓은 글을 고치는 퇴고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덜해요. 물론 퇴고하다가 미궁에 빠지는 경우도 많지만요.
글을 붙들고 있다보면 시간이 뭉텅이로 흘러가잖아요.  - P258

들지현대인은 시간의 빈자이죠. 돈에 쪼들리듯 시간에 쪼들려요. 프랑스 시인 샤를 보들레르는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라는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취할 시간! 시간의 학대받는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끊임없이 취하라!" 22 이런 사회 구조에서 어떻게 마시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이 될 것인가. 앨리스 매티슨은 말합니다. "나는 운이 좋았지만 노력도열심히 했다. 이기적이었다. 나는 글 쓰는 시간을 사수하는 법을 배웠다. "23 여러분도 글쓰기를 우선으로 하여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며 일상을 재편해보세요. 그렇게 써나갈때 시간의 학대받는 노예로 살지 않고,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을 글쓰기가 알려줄 것입니다. - P261

그래서 매일 ‘무슨 일이 있어도‘ 글 쓰는 시간이나 ‘무슨 일이 있어도‘ 책 읽는 시간을 확보하진 않았습니다. ‘무슨 일‘이쓰는 일보다 시급한 경우가 있으니까요. 대신 글 쓰는 날을 정했어요. 칼럼 마감일이 정해지면 일주일 전에 하루를 비워놓고, 귀엽고 도도한 방해꾼 고양이 무지를 피해서 아침부터 카페에 가서 글쓰기 활동에 진입합니다. 한 1, 2년 전부터는 주로 신체 배터리가 제일 짱짱한 아침에 쓰기 시작했어요. 밤이되면 하루치 피로가 몰려오고 눈이 침침해서 글쓰기에 집중할수 없더라고요. 30대에는 취재하고 와서 새벽 한두 시까지도거뜬히 글을 썼어요. 전생의 일처럼 아득하지만 과거의 저는그랬고, 지금의 저는 아침에 초고를 씁니다. 제게 글이 잘 써지는 시간대는 배고프지 않고, 체력이 비축되어 있고, 마감을 일주일 앞둔 아침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 P263

언제부턴가 이렇게 생각해요. 글 한 편을 잘 쓰는 것이 아니라 하루를 잘 보내는 일이 중요하다고요. 글 한 편을 잘쓰더라도 글 쓴답시고 하루가 엉망이 되면, 그게 또 마음이 편치 않더라고요. 무엇을 위한 글인가, 회의가 들고요. 잘 살려고쓰는 건데 쓰다가 잘 살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안 되잖아요.
저한테 ‘잘 사는 일‘은 하루를 잘 보내는 일입니다. ‘인생‘을잘 사는 건 어려운데 ‘하루‘를 잘 보내는 건 해볼 만하죠.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한 편을 초고라도 완성하고, 아이들 먹을 닭볶음탕이라도 한 냄비 가득 만들어놓고, 카페 가서 거품 곱게 내려진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책두어 시간 읽다가 산책하고, 저녁에 친구 만나서 생맥주 한잔하면서 수다 떨고, 잠들기 전 한 시간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 오전에 쓴 원고를 퇴고한 날. 이런 날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하루에요.  - P264

공감합니다. 저도 노는 것을 좋아하지만, 마냥 놀기만 하면불안해요. 써야 할 글이 있으면 편히 놀지 못하고, 글을 쓴 뒤놀아야 개운해요. 주말이나 연휴의 무질서가 싫고요. 하지만올리버 색스가 저렇게 일 중독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데는 집안의 누군가가 재생산 노동을 해주지 않았을까 짐작해보아요.
제 손으로 밥상을 차리고 옷을 빨아 입고 타인을 돌보면서 글을 쓰는 사람의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사는 일에 쓰는 일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서, 당장만 쓰는사람이 아니라 오래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에너지를 안배하고 시간을 조율하는 지혜를 각자 삶에서 발휘하시길 바랍니다. - P266

앞서 리베카 솔닛,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최승자 등 수많은 작가를 언급했는데요. 저는 한두 명이 아니라 여러 작가를멘토로 삼아요. 그들의 말과 글에 영향을 받았고 닮고 싶어서몸살을 앓았죠. 그렇게 쓰다가 글이 쌓이니까, 언제부턴가 다른 작가가 아니라 과거의 나한테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첫 마음, 그야말로 ‘글쓰기의 최전선‘에있다는 긴박함과 절실함으로 다졌던 다부진 각오, 무모한 결의, 순정한 마음을 여전히 잘 간직하는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일전에 어느 분이 《쓰기의 말들>에서 "글쓰기에는 충분한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시간이 필요하다"라는 구절이 인상깊어서 필사했다고 말했어요. 사실 뜨끔했어요. 저야말로 시간을 안배해놓지도 않고서 글 쓸 시간이 부족하다며 글 못 쓰는 핑계를 댈 때가 있거든요. 젊었을 때 한 말에만 책임지고 살아도 훌륭한 인간이 되겠구나 싶었죠. 특히 글에는 온갖 사려깊은 말과 훌륭한 생각을 쏟아내니까요. 이렇게 말해도 될까요. "내가 어떻게 써야 할지는 내 글에게 물어라." - P272

대작가들은 햇살이고 물이고 바람이에요. 이 햇살과 물과바람은 자기 삶에 뿌리내린 사람에게만 지속적인 양분이 되는 것 같아요. 대작가의 말과 글을 자기만의 관점으로 해석하고 녹여내지 않으면 고유한 글을 써내기 어렵죠. 멘토로 삼은작가를 모방하는 글로 글쓰기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언제까지흉내만 낼 수는 없어요. 한그루 나무처럼 자기만의 중심이 있어야 하니까 글쓰기에서 궁극의 멘토는 나 자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 P273

제가 정의 내린 작가란 ‘쓰는 사람‘입니다. 나만 보는 글을쓰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 공개로 어디에서든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 그래서 이번 글 도입부에 소개한 칼럼에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작가를 꿈꾸는 학생에게 말했다. 쓰고 싶으면 빨리 쓰세요. 작가는 쓰는 사람이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수 있겠죠. ‘쓰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쓰라고 답하겠습니다. 작가는 독자와의관계에서 태어나는 존재입니다. 독자가 당장 내 눈앞에 있든,
내가 죽은 뒤 미래에 존재하든, 내 글을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쓰는 행위에 비로소 의미가 발생하고 작가라는 이름에 피가 도는 것 같습니다. - P275

내가 내려는 책과 유사한 도서를 찾아 참고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끝까지 긴장을 내려놓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할 수 있는 것을 해보는 집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결국 쓰는 일은 체력 문제이고요.


미국 해양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침묵의 봄》이란 작품으로 잘 알려진 작가인데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희귀한 기적을 제외하고, 책을 쓰는 것은 경제적으로 승산 없는 도박과도 같다" 고 말합니다. 맞아요. 고역이죠. 그런데 왜 썼을까요? 자신의 첫 에세이 《바닷바람을 맞으며》에서 "바다의 생명에 대해 알아야 한다는 깊은 확신에서 우러나 이 책을 썼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의 확신은 무엇인가요? 그에 대한 답변이 첫 책의 주제로 담길 것입니다. - P279

능감이 저를 글쓰기 앞으로 자꾸 데려다놓는 것 같습니다. 이재밌는 글쓰기를 저만 할 수 없어서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라는 책으로 여러분과 글쓰기 이야기를 열심히 나눠봅니다.
어서 이 혼란과 재미의 세계로 건너오세요. 마중 나가 있겠습니다. - P295

세월호 1주기 즈음인 2015년 4월에 글쓰기의 최전선》이 출간되었다. 책을 본격적으로 집필하는 1년 내내 슬픔을 등짐 지고썼던 기억이 난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를 마감하는 중에 이태원에서 젊은 목숨 158명이 무참히 스러져갔다. 이번에도살릴 수 있었는데 살리지 못했다. "아이들은 놀러 갔다가 죽은게 아니고, 노느라 정신이 팔린 자들 때문에 죽은 것"이라던 세월호 유가족의 말이 이태원에서 일어난 참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이 시대의 절망이고 비극이다.
대참사와 대참사 사이에서 책을 내자니 고개가 숙여진다.
글쓰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왜 쓰는가, 거듭 되묻게되는 시절. 그런데 글쓰기가 아니면 또 어떻게 슬픔에 닿을 수있을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사회적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사회 구성원이 맡은 바 자기 일을 하지 않을 때 어떤 참사가 발생하는지 두 눈으로 보았으므로 나는 정신 차리고 슬픔에 집중하는 것으로써 쓰는 사람의 본분을 다하고 싶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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