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둘은 정말 높은 자리에 올랐지."
그렇게 말할 때 나는 니노의 눈빛에서 나를 자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그의 말이 속임수에 불과하다는 것을 읽어냈다. 니노는 자기가나보다 훨씬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이 성공은 했지만내가 탄원자로서 니노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니노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면서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 같은 남자를 놓친거야.‘
나는 임마와 함께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 자리에 내가 아닌 릴라가 있었다면 니노의 태도는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왠지 모를 위압감을 느끼고 말을 웅얼거렸을 것이다. 그렇게 허풍을떠는 자기 자신이 우스꽝스러웠을 것이다. - P563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사실이 떠올랐다. 니노가 자신의 야망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은 릴라뿐이었다. 이스키아 섬에서, 그 후 일 년간 니노는 골치 아플 것이 뻔한 위험에 몸을 내맡겼다.
지금까지 그의 행적을 되돌아보면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니노는 이미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나디아와 사귄 이유도 나디아가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그때만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보다 상류사회인 것 같은 환경으로 진입할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니노의 선택은 언제나 니노의 야망과 연관이 있었다. 엘레오노라와 결혼한 것도 그만큼 얻는 게 있어서가 아니었던가. 나 역시 니노 때문에 피에트로와 헤어졌을 때 중요한 출판사와 연관이 있었고 어 - P563

느 정도 자리를 잡은 성공한 작가가 아니었던가. 그런 내 배경은 니노의 경력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니노를 도와준 다른 여자들도 결국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물론 니노는 여자를 좋아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관계를 선호했다. 니노의 지성이 만들어낸 산물은 소년 시절부터 그가 정밀하게 짜온 권력의 그물망 없이는 스스로 빛을 발할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 비해 릴라는 어떠한가. 릴라는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데다 상점 주인의 젊은 아내일 뿐이었다. 스테파노가 릴라와 니노의관계를 눈치챘다면 둘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니노는 왜 릴라와의 사랑에 자기 미래를 걸었던 걸까. - P564

나는 임마를 차에 태우고 아빠를 보러 간다고 마음먹고 사준 새옷에 아이스크림을 흘린 임마를 야단쳤다. 나는 자동차에 시동을 걸고 로마를 떠났다. 지난날 니노가 릴라에게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니노 자신에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없는 어떠한 것을 릴라에게서 발견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순간 니노는 릴라와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인했을 것이다.
릴라는 지적이었지만 이를 활용해 뭔가를 얻어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이란 저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부인처럼 자신의 지성을 허비했다. 니노는 바로 릴라의 이런 점, 즉 대가를 바라지 않는릴라의 지성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릴라의 특성은 다른 수많은 여성과 차별되는 것이었다. 릴라는 그 어떠한 가르침이나 필요 또는 목적에 굴복하지 않았다. 릴라를 제외한 우리 모두에게는 무언가에 굴복했던 경험이 있었다. 우리는 그런 경험을 통해 시험과 실패와 성 - P564

공을 겪고 나서 우리 자신을 현실에 알맞게 재조정했다.
릴라는 달랐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릴라를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릴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제멋대로인 데다 우매해지고 있지만 우리가 릴라에게 부여한 능력은 변치 않을 것이다.
오히려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굉장해질 것이다.
지난날 우리는 릴라를 증오하다가도 결국 릴라를 존중하고 두려워하게 되곤 했다. 그러니 잘 생각해보면 나디아가 몇 번 만나지도않은 릴라를 싫어하고릴라를 해코지하고 싶어 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릴라는 나디아에게서 니노를 빼앗았고 혁명에 대한 나디아의 신념을 비웃었다. 릴라는 못된 데다 자신이 공격당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을 공격할 줄 알았다. - P565

릴라는 구제받고 싶어 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였다. 다시 말하면 나디아에게 릴라는 존경할만한 적이었고 그런 릴라에게 해를 가하는 것은 나디아에게 순수한 만족감을 줄 것이었다. 릴라에게 해코지를 하면서 파스콸레처럼 한 명을 마음먹고 희생양을 삼을 때와 같은죄책감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모든 것이 비참해졌다. 갈리아니 선생님도 나폴리 만이 내려다보이던 선생님의 집도, 수많은 장서도, 그림도, 선생님과 나누었던 수준 높은 대화도, 아르만도도, 그리고 나디아까지.
나디아는 처음 학교 앞에서 니노 곁에 있었을 때만 해도, 부모님의아름다운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나를 맞이했을 때만 해도 정말 사랑스럽고 예의 바른 소녀였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에서 훨씬 더 빛나는 옷을 입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자신이 누리던 수많은 혜택을내려놓았을 때까지만 해도 나디아에게는 특별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 P565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모든 혜택을 벗어던졌던 고귀한 이유는 사라지고 말았다. 나디아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그토록 아둔하게 수많은 사람을 피 흘리게 한 끔찍함과 모든 잘못을 벽돌공에게 돌리는파렴치함뿐이었다. 나디아가 한때 신인류의 선봉이라고 여기던 파스콸레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기 책임을 전가하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불안했다. 나폴리를 향해 운전하는 내내 데데를 생각했다.
나는 데데가 나디아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기 일보직전이라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본모습을 잃게 하는 그런 실수 말이다.
7월 말이었다. 바로 전날 데데는 최고 점수로 졸업시험에 합격했다. 데데는 아이로타 집안의 일원이었다. 데데는 내 딸이었다. 그렇게 똑똑하니 결과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곧 있으면 데데는 나를 넘어설 것이다. 제 아빠도 마찬가지다. 내가 힘들게 노력하고 운이 좋아 이루어낸 모든 것을 데데는 마치 타고난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너무나 쉽게 성취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P566

그런 데데의 계획은 무엇인가. 겨우 리노에게 고백이나 하는 것이다. 리노와 함께 침몰하는 것이다. 정의감과 연대감, 우리와는 다른어떠한 매력에 취해 자신이 누리는 모든 혜택을 포기하는 것이다.
데데가 허구한날 불평만 늘어놓는 리노에게서 대체 어떤 특출한 면을 보고 그 모든 것을 포기하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백미러로 임마를 바라보면서 불쑥 물었다.
"너는 리노가 좋으니?"
"난 별로예요. 리노는 데데 언니가 좋아하죠."
"어떻게 알아?"
"엘사 언니가 말해줬어요." - P566

"엘사 언니한테는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데데 언니요."
"너는 왜 리노가 싫어?"
"너무 못생겼거든요."
"그럼 너는 누가 좋은데?"
"아빠요"
나는 순간 임마의 눈에서 불꽃을 보았다. 그 불꽃은 임마가 조금전에 세 아빠에게서 본 것이었다. 니노가 릴라와 나락에 빠졌다면절대로 가지지 못했을 불꽃이었다. 파스콸레와 나락에 빠짐으로써 나디아가 영영 잃어버린 불꽃이었다.
리노를 따라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데데도 그 불꽃을 잃어버릴 것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자기 딸이 파스콸레 무릎에 앉는 것을 보고 갈리아니 선생님이 느꼈을 불쾌감을이해할 수 있었고 그런 태도가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릴라를 버리기로 결정한 니노가 이해되고 타당하게 느껴졌다. 솔직히말하면 자기 아들과 나의 결혼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P567

엔초는 리노나 리노가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가 아니라 티나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아이가 몇 년 살다가 죽으면 죽는 거야. 그걸로 끝이지. 언젠가는포기하게 돼. 하지만 아이가 사라져 버린다면, 그러고서 아이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되면 살면서 그 무엇도 아이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게 돼. 티나는 돌아올까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까? 돌아온다면 살아서 돌아올까 아니면 죽어서 돌아올까?"
엔초가 속삭였다.
"매 순간 티나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 묻곤 해. 거리에서 집시처럼구걸하고 있으려나? 슬하에 아이가 없는 부잣집으로 들어간 걸까? 사람들이 아이에게 몹쓸 짓을 시킨 다음 그 장면을 찍어서 사진이나영상으로 팔지는 않을까? 아이를 갈가리 찢어 다른 아이의 가슴에넣으려고 티나의 심장을 비싼 가격으로 팔아넘긴 건 아닐까?  - P575

만약그랬다면 티나의 나머지 부분은 땅에 묻혔을까? 아니면 태워버렸나? 그도 아니면 납치됐다가 사고로 죽어버려서 통째로 땅에 묻힌걸까? 만약 흙이나 불이 티나의 몸을 갉아먹은 것이 아니라면, 티나가 어디에선가 잘 자라고 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세월이 흐르면 어떻게 변할까? 길에서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까? 설령 알아본다 한들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잃은 것을 누구에게서 돌려받을 수 있을까? 티나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을 텐데 그런 어린 티나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누가 우리에게 알려줄까?"
엔초가 평소처럼 힘겹게 그렇지만 진중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눈물 맺힌 그의 눈을 보았다. 그제야 나는 엔초가릴라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표현하려고 한 - P575

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초와 함께한 여행은 의미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도 엔초보다 감수성이 섬세한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엔초는 지난 4년 동안 릴라가밤낮을 가리지 않고 자기에게 속삭이거나 악을 쓰면서 한 이야기를들려주었다. 그러다 서서히 내가 내 일과 내 불만에 대해 이야기할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엔초에게 딸들 문제와 책, 남자 문제, 시시때때로 밀려드는후회와 인정받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글 쓰는 일이 이제는 의무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존재감을 잃지 않기 위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나를 실력 없고 무례한 별볼일 없는 여자 취급하는 사람들과 싸우느라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 P576

"그 사람들은 오직 내게서 독자들을 빼앗으려고 나를 괴롭혀 원가 심오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야. 그저 내가 발전하는게 싫어서 그러는거야. 자기들과 자기 애제자들을 보호하려고 보잘것없는 권력을 동원해 내게 해를 끼치려는 사람들이야."
엔초는 내가 감정을 쏟아내도록 내버려두었다. 엔초는 내가 모든일에 열정을 보인다고 칭찬했다.
"봐. 너는 매사에 열정적이잖아. 그렇게 열심히 사니까 네가 선택한 세계에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야. 그렇기 때문에 폭넓고 깊이 있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던 거야. 무엇보다도 이 열정에 네 모든 감정을 쏟아부을 수 있었던 거야. 그래서 너는 삶의 흐름에 떠밀려 갈 수 있는 거야. 물론 티나에게 일어난 일은 네게도 끔찍하겠지.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슬픈거야. 하지만 그 일은 이제 네게 먼 과거일 뿐이야. 릴라는 아니야. 지난 몇 년 동안 릴라의 세계는 떠도는 풍 - P576

문처럼 무너져 내려 티나가 남기고 간 공백 속으로 쓸려들어가 버렸어, 빗물이 홈통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말이야. 릴라의 삶은 티나에게서 멈췄어. 그래서 릴라는 티나가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살아숨 쉬고 성장하고 번영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는 거야."
엔초는 말을 이어갔다.
"물론 릴라는 강해. 나를 막 대하고 네게 화를 내고 못된 말을 해. 하지만 멀쩡하게 설거지를 하거나 창밖으로 큰길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던 적이 그동안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 - P577

나는 일에 치여서 한 번도 릴라의 새로운 열정에 대해 이야기를나눌 시간도 의지도 갖지 못했다. 릴라는 릴라대로 내게 아무런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다. 나는 릴라가 어떤 일에 흥미를 느끼면 집착 수준으로 집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릴라가 그토록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쏟는 게 별로 놀랍지 않았다. 다만 엔초와 고함을 치면서 한바탕 싸우고 난 다음 릴라가 사라지고 밤늦도록 도시를떠도는 릴라 위에 티나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면 조금 걱정이 됐다.
그럴 때면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나폴리의 지하 터널과 망자의 머리가 겹겹이 줄지어 놓여 있는 지하 묘지가 떠올랐다. 방문객을 불행한 영혼들의 세계로 인도하는 푸르가토리오 아르코 성당의 까맣게 변색된 청동 해골 상들이 떠올랐다.  - P593

나는 다시 니노를 찾았다. 마리사에게서 니노의 도움을 바라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며 니노가 자기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긴 했다. 그러나 니노는 임마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간접적으로나마 릴라에게 자기 권력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내 부탁에는 바로 응해주었다. 하지만 니노마저 엔초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니노는 몇 번에걸쳐 몇 가지 가정을 들려주기는 했지만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신빙성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확실한 것은 나디아가 흐느끼며 자백할 때 엔초의 이름을 언급했다는 사실이다. 앤초와 파스콸레가 트리부날리 가에서 열린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었던 일을 폭로했다는 사실이다. 까마득히 먼 옛날 만초니 가에 있는 나토군 장교들의 사유지 앞에서 있었던 소규모 시위들에 대한 혐의를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돌렸다는 사실이다. - P594

조사관들은 분명 파스콸레가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수많은 범죄에 엔초도 연루된 것으로 몰고 가려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이정도일 뿐 그다음부터는 모든 일을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나디아는 엔초가 비정치적인 성격의 범죄를 위해 파스콸레의 힘을 빌렸다고 증언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브루노소카보의 살인을 포함한 몇몇 살인사건을 엔초가 기획하고 파스콸레가 실행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아마 나디아는 파스콸레에게서 직접 솔라라 형제를살해한 범인이 파스콸레와 안토니오 카푸초와 엔초 스칸노였다는말을 들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세 친구가 오랜 유대감과 그에 못지않게 해묵은 원한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P595

복잡한 시대였다. 우리가 성장했던 세계의 질서가 사라지고 있었다. 올바른 정치 노선에 대해 오랫동안 공부하고 연구하며 습득한기존의 능력이 언젠가부터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정부주의자니 마르크스주의자니 그람시 추종자니 공산주의자니 레닌추종자니 트로츠키 추종자니 마오쩌둥 추종자니 노동자니 하는 표현들은 어느덧 한물간 구호나 심한 경우 야만을 상징하는 것으로 취급당했다. 지난날 혐오의 대상이었던 타인에 대한 착취와 최대 이윤추구의 법칙이 지금은 장소를 불문하고 자유와 민주주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그러는 동안 국가와 혁명 조직 내에서 해결되지 않았던 일들이 합법적이거나 불법적으로 혹독하게 정산되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너무나 허무하게 살해당하거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마저 우르르 떼를 지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니노나 아르만도 같은 사람들은 벌써 오래전부터 기류의 변화를감지하고 새로운 시기에 재빨리 적응했다. 그렇게 해서 니노는 국회 - P595

에 자리를 잡았고 아르만도는 방송 덕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주변사람들에게서 현명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던 나디아 같은 사람들은눈물 고백으로 양심 세탁을 했다.
파스콸레와 엔초 같은 사람들은 달랐다. 나는 그들이 여전히1960년대와 70년대에 배웠던 좌우명에 따라 생각하고 그러한 자기신념을 표현하고 공격하고 방어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파스콸레의 투쟁은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다. 그는 정부의 끄나풀에게 다른 사람을 고발하지도 않았고 변변한 변명 한마디 하지 않았다. 파스콸레와는 달리 엔초는 분명 뭔가를 말했을 것이다. 그는 언제나처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를 계산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정했을 것이다. - P596

릴라는 나름대로 자신의 뛰어난 지력과 못된 성격과 비싼 변호사들을 총동원해 엔초를 곤경에서 구해내기 위한 싸움에 전력을 다했다. 엔초가 전략가라고? 투사라고? 수년 동안 아침부터 저녁까지 베이직 사이트에서 일하면서 대체 그럴 시간이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솔라라 형제가 살해당했을 때 엔초는 아벨리노에, 안토니오는 독일에 있었는데 어떻게 셋이 함께 그들을 죽일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세 친구가 솔라라 형제를 살해했다 할지라도 삼총사는 고향 동네에서 워낙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얼굴을 감춘다 해도 동네사람들은 이들을 바로 알아보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게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의의 수레바퀴는 계속굴러갔고 나는 이러다 릴라까지 체포될까봐 두려웠다. 나디아의 입에서는 계속 새로운 이름이 튀어나왔다. 경찰은 트리부날리 가 모임에 참석했던 사람을 몇 명 더 체포했다. 그 가운데에는 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었 - P596

다. 경찰은 에넬사의 기술자와 결혼해 평범한 주부로 잘 살고 있는아르만도의 전 부인 이사벨라에게까지 손을 뻗쳤다. 나디아가 건드리지 않은 사람은 단 두 명, 자기 오빠와 우려했던 것과는 달리 릴라였다.
아마 갈리아니 선생님의 딸은 엔초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미 릴라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릴라를증오하기는 했지만 동시에 존경했기 때문에 오랜 망설임 끝에 릴라를 끌어들이지 않기로 결정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가장 믿고 싶은 것은 나디아가 티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아파 릴라를 자기 일에 연루시키지 않기로 했다는 가정이었다. 아니 나디아는 그보다 어머니로서 그런 일을 겪은 이상 릴라가 다른 어떤 일에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었다. - P597

엔초의 혐의는 서서히 실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정의는 전투력을 상실하고 기운을 잃었다. 수개월동안 제대로 따져본 결과 엔초가 저지른 일이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파스콸레와 오랜 친구사이라는 사실과 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서 노동자와 학생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석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스콸레가 숨어 있던 세리노산의 허름한 산장을 아벨리노에 사는 엔초의 친척 이름으로 임대했다는 것 정도가 사실로 판명되었다.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엔초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테러리스트 집단의 두목이자 야만적인 범죄의 기획자이자 집행인에서 일개 테러활동 지지자에 지나지 않는 걸로 밝혀졌다. 그 지지마저 일반적인 상식 수준에서 한 개인의 의견일 뿐 그것이 한 번도 범죄행위로 발전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자 엔초는 집으로 돌아왔다. - P597

마리아로사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 내린 모순적이고 이중적인 평가는 사실로 드러났다. 아이로타 교수를 둘러싸고 휘몰아쳤던 언론의 광풍은 조금씩 수그러들었고 시아버지는 다시 자기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제 그가 법적으로는 결백하지만실은 분명 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가 죄인 취급을 받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결백할 거라고 생각했다.이미상황이 이 정도로 진정된 다음에야 나는 시어머니에게 전화해도되겠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내 배려에 고마움을 표했다. 시어머니는 데데와 엘사의 생활과 학업에 대해 나보다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시어머니가 말했다.
"이 나라는 말도 안 되는 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곳이야. 존경받을만한 사람들은 서둘러 이민을 가는 게 나아." - P610

솔직히 릴라는 니노의 운명에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니노가 법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빠졌다는 소식에 릴라는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릴라는 이 모든 상황을 설명해줄 만한 일이 기억났다는 듯 말했다.
"니노는 돈이 필요할 때마다 브루노 소카보에게 손을 벌렸지. 분명 한 푼도 돌려주지 않았을 거야."
릴라는 일이 어떻게 된 건지 빤히 보인다고 했다.
"니노는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과 악수하면서 자기가 최고로 잘난줄 알았을 거야. 모든 상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려고 애썼을 거야. 죄를 저질렀다면 분명 사람들이 자기를 더 좋아하게 만들고 싶어서 그랬을 거야. 제일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언제나 위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렇게 했을 거야."
그게 다였다. 그런 다음부터 릴라는 니노를 없는 사람 취급했다. - P612

어찌됐든 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엄마에게 한마디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엄마에게 조심스럽게 핵심이 명확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리나 이모는 네게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는구나. 엄마는좋아. 리나 이모가 뭔가에 빠지면 이모를 말릴 사람이 없지. 그렇다고 사람들이 가볍게 나쁜 행동을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구나. 더구나 그 대상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나 상원위원이나 은행가들이나 카모라라면 말이다. 세상 일이 쳇바퀴 돌 듯 반복될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돼. 으레 한때는 상황이 좋아졌다가 안 좋아졌다가 때가 되면 다시 좋아질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는 항상 열심히 노력해야 한단다. 우리 주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실수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야 해. 실수하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임마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 P621

나는 엄마의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사실 내 딸은 내가 자기아빠에게 못되게 굴었으며 자기 아빠가 얼마나 뛰어난 사람인지 내가 몰랐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정작 내게 예기치못한 영향을 미친 것은 ‘엄마는 책을 쓰지만 리나 이모 같은 선견지명은 없다‘는 말이었다. 임마의 말 때문에 나는 딸이 보기에 선견지명이 있는 여인인 릴라가 50세가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책을 읽고공부를 하고 글까지 쓴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피에트로는 예전에 그런 릴라의 행동을 티나가 사라짐으로써 생긴 괴로움을 잊기 위한 일종의 자가치유법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보낸 마지막 일 년 동안 나는 피에트로의 세심한 의견 - P623

릴라는 말을 얼버무렸다. 내게는 좀처럼 마음을 털어놓으려 하지않았다. 하지만 가끔 릴라답게 갑자기 흥분해서 나폴리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폴리가 평범한 길과 일상적인 장소로만 만들어진 곳이 아닌 것 같았다. 나폴리는 오직 릴라에게만 자신의 비밀스러운 광채를 드러낸 것 같았다. 릴라는 몇 마디안 되는 문장만으로 나폴리를 상징과 의미가 가득한 세상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으로 바꾸어 놓았다.
릴라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일을 시작할 때면 영감이 불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폴리에서 태어나 살면서 나폴리에 대해 더 자세히 알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너무나 큰 태만이었다. 나는 이제두 번째로 나폴리를 떠나려 하고 있다. 내 인생의 전성기 삼십 년을여기서 보내고도 나는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예전에는 피에트로가 나의 무지를 비난했었는데 지금은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릴라의 말을 듣다보면 나의 공허함이 느껴졌다. - P624

릴라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다른 생각을 가슴속에 품어왔을까. 지금은 또 어떤 생각을 품고 있을까. 릴라의 눈치아티나가 나의 임마콜라타 대신 납치됐다니 자기 딸이 납치된 게 내 성공 때문이라니. 그렇다면 엄마에게 그토록 애정을 보인 것도 불안한 마음에임마를 지키고 보호해주고 싶어서였던 것일까. 티나의 납치범들이실수로 데려간 아이를 내다버리고 원래 납치하려던 아이를 데리러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면 또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예나 지금이나 릴라의 머릿속에는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자신을 떠나려는 내게 벌로 마지막 독을 부어넣으려는 것일까. 아, 엔초가 왜 릴라를 떠났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릴라와 사는 것이 너무나 끔찍해졌던 것이다.
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기를 바라보는 것을 눈치챈 릴라는회피하듯 요즘 자기가 읽고 있는 책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 P631

하지만 말에 두서가 없었고 얼굴은 괴로움으로 일그러졌다. 릴라는웃으면서 아픔이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오는 법이라고 중얼거렸다.
성당이나 수도원이나 책으로 가리려고 해도 소용없어. 책이 정말 중요한 것 같지? 그러니 너도 책에 네 평생을 바쳐왔겠지. 그래봤자 소용없어. 악은 결국 예기치 못한 곳에서 바닥을 뚫고 기어 나오16-458는 법이야."
릴라는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티나와 엄마와 나에 대한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회유적인 말투였다. 조금 전 자기가한 말에 대해 내게 사과하고 싶은 것 같았다. 릴라가 말했다.
"사방이 너무나 고요할 땐 별 생각이 다 떠오르곤 해. 너무 신경쓰지 마. 모든 사람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올바른 말을 하고, 모든일에는 그에 따른 결과가 있고, 호감과 비호감,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오고 마지막에는 반드시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은 형편없는 소설에서나 일어나는 일이야" - P632

릴라가 속삭였다.
"오늘 저녁에라도 당장 티나가 돌아올 수 있어. 그러면 지금까지일어난 일은 아무 상관없어. 중요한 건 티나가 다시 이곳에 있다는사실이야. 정신을 딴 데 팔았던 엄마를 용서해주는 거야."
릴라가 말했다.
"너도 나를 용서해."
릴라가 나를 껴안으면서 그날의 대화를 끝맺었다.
"어서 떠나. 가서 지금까지 해온 일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도록해. 내가 임마 곁에 있었던 것은 누가 그 애를 데려가 버릴까봐 겁이나서이기도 했어. 너는 너대로 네 딸이 리노를 버렸는데도 변함없이 - P632

리노를 사랑해줬지. 리노 때문에 많이 참았다는 거 알아. 고마워. 우리가 이토록 오랫동안 친구였고 지금도 친구여서 정말 기뻐."

티나가 내 딸인 줄 알고 납치했을지도 모른다는 릴라의 생각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일리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나는 릴라가 그렇게까지 생각하게 된 복잡하게 뒤엉킨 모호한 감정에 대해 생각하면서 그런 릴라의 감정을 나름대로 정리해보려 했다.
그러다보니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 자기 딸에게 어린 시절 내가 애지중지하던 내 인형의 이름을 붙였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물론순전한 우연이었다. 하지만 가장 무의미한 것 같은 사건 속에는 한번 발을 내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모래늪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법이다. - P633

그 인형은 어린 시절 다른 사람도 아닌 릴라가 제 손으로 창고 속에 내던진 바로 그 인형이었다. 내가 그 일을 두고 생각에 잠긴 것은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래 생각하지 못하고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희미한 불빛이 반짝이는 어두운 우물 앞에서 나는 끝내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사람들 사이의 깊은 관계 속에는 수많은 덫이 있고 관계를 오랫동안 지속하려면 그 덫을 피하는법을 배워야 한다.
그때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 일로 결국 우리 우정의 빛과 그림자와 릴라의 길고 복잡한 고통을 다시 한번 느꼈을 뿐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릴리를 괴롭히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라는 사실을 또다시 깨달았을 뿐이다. - P633

릴라는 뛰어난 지성과 놀라운 기억력과 평생에 걸쳐 방대한 양의 책을 읽었는데도 (가끔 내게 책 이야기를 할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내게 자기가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숨겼다) 기본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한 데다 서술가로서 갖춰야 할 능력이 없었다. 나는 릴라의 글이 너무나 좋은 글들을 그저 산만하게 모아놓은 것에 불과할까봐 두려웠다. 경이로운 문장을 잘못된 곳에 배치했을까봐 두려웠다.
하지만 맹세컨대 나는 단 한 번도 릴라가 상투적인 문구로 가득 찬하찮고 별 볼일 없는 글을 쓸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니 나는 릴라가 뛰어난글을 쓸 거라고 절대적으로 믿었다. - P635

릴라의 집착은 때에 따라 온도차가 있었다. 한번은 내 명성을 트집 잡아 악의적인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이름 하나에 딸린 이야기가 너무 많아. 유명하는 유명하지 않는이름이란 결국 피와 살과 말과 똥과 하찮은 생각으로 가득 찬 자루를 묶고 있는 끈에 불과해."
릴라는 이름 이야기로 나를 한참 놀려댔다.
"엘레나 그레코라는 끈을 푼다고 그 자루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야. 그 기능은 변하지 않아. 물론 그전보다 엉망이 되겠지. 특별히 장점이랄 것도 단점이랄 것도 없이 망가져갈 거야."
릴라는 기분이 특별히 우울할 때면 씁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내 이름이라는 매듭을 풀어 버리고 싶어. 풀어서 내다버리고 싶어. 잊어버리고 싶어." - P639

릴라는 평소에는 그보다 평온했다. 나는 가끔 릴라가 자기가 쓰고있는 글에 대해 말해주기를 바라면서 전화를 걸었다. 그럴 때마다릴라는 여전히 글을 쓴다는 사실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럴 때면 나는 왠지 릴라가 한참 창작에 열중하다 내 전화 때문에 놀란 것 같은느낌을 받았다. 어느 날 저녁 전화를 걸었는데 그날 릴라는 마침 딱기분 좋을 정도로만 정신이 나가 있었다. 릴라는 모든 위계질서를부정하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위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수없이 많지만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장점인지는 잘 모르겠어. 주사위를 던졌는데우연히 좋은 숫자가 나온 것과 다를게 없는 것 같아."
평소 릴라가 하던 말과 별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날따라 릴라는 정확한 어휘력과 창의력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나는 릴라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면서 즐거워하는 것을 느꼈다.  - P639

그해 12월은 정말이지 즐거웠다. 나는 58세에 벌써 할머니가 됐다. 나는 하미드를 품속에 꼭 껴안았다. 크리스마스 저녁, 나는 하미드를 안고 한쪽 구석에 앉아 평온한 마음으로 내 딸들의 젊고 활기넘치는 육체를 바라보았다. 셋 다 나를 닮기도 했고 전혀 닮지 않기도 했다. 아이들의 삶은 내 삶과는 너무나 달랐지만 그 아이들은 내게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나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고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생각했다.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포기하고 멈춰설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고향을 떠났다가돌아갔다가 다시 떠나왔다. 그 무엇도 나를 내가 낳은 내 딸들과 함께 나락에 빠뜨리지 못했다.
우리 넷은 이제 안전했다. 나는 세 딸 모두를 안전한 곳으로 이끌었다. 이제 그 아이들은 나와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살면서 다른 언어를 쓴다. 아이들에게 이탈리아는 휴가기간에나 잠시 머무르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찬란한 장소이자 하찮고 비효율적인 곳이기도 하다. - P641

나는 하미드를 어루만지면서 이대로가 좋다고 생각했다. 결국나보다 훨씬 뛰어난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나와같은 어려움은 한 번도 겪지 않고 살아온 내 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64 b아이들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감히 생각조차 못하는 태도와 목소리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며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남녀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내 딸들과 같은 행운을 가진 것은 아니다. 부유한 국가에 만연한 평범함 속에는 부유하지 않은 세계의공포가 내재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공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폭력이 우리들의 도시와 일상에 침투하면 그제야 흠칫 놀라며 불안해했다. - P642

지난해 텔레비전에서 성냥을 가볍게 부딪혀 불을 붙이듯 비행기들이 뉴욕의 쌍둥이 빌딩에 불을 붙이는 장면을 보고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데데와 엘사, 피에트로와 한참 동안 통화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보다 아래에 있는 세계에는 지옥이 있다. 딸들도 그것을 알기는 하지만 글로만 배웠을 뿐이다. 딸들은 분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삶의 기쁨을 누린다. 아이들은자신들의 안락한 삶과 성공을 제 아빠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그 어떤 특권도 누려본 적이 없는 나야말로 아이들이 성공한 근원이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데 무엇인가가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아마 딸들이 쾌활하게 각자의 파트너를 내 책을 꽂아둔 책장 앞으로이끌었을 때였던 것 같다. 내 딸들 가운데 누구도 내 책을 단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았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내 딸들이 내 책을 읽는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딸들에게서 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들은적도 없었다. - P642

그랬던 딸들이 그때만큼은 책을 꺼내 책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몇 문장을 큰 소리로 낭독하기도 했다.
그 책들은 내가 살아온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탄생한 글이었다. 나에게 영감을 주고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을 바탕으로 쓴 글이었다. 나는 나의 시대를 한 걸음 한걸음씩 걸어오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사유하면서 살아왔다. 나는 악행을 지적했고 사람들을 악행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끝내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사회 구제방안을 예측하고 제시했다. 일상적인 어휘로 일상을 표현했다. 나는노동과 계급투쟁, 페미니즘과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 딸들이 그때 내 글을 되는대로 골라서 읽는 것을 듣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P643

엘사는 은근히 비아냥조로 내 데뷔작과 남성이 주조한 여성에 대한글,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을 낭독했다. 데데만 해도 엘사보다는 나를 더 존경했고 임마는 더 신중했다. 엘사는 글의 결점과 과한 부분, 과도한 감탄사를 연발한 부분과 지난날 내가 부정할수 없는 진실이라고 주장했지만 이제는 고루해진 사상을 목소리로교묘하게 부각했다. 특히 엘사는 어휘를 짓궂게 물고 넘어졌다. 엘사는 유행이 지나서 지금은 우스꽝스럽게 들리는 단어를 두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저 아이는 내 앞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나폴리에서 흔히 그러했듯 애정을 담아 사람을 놀리고 있는 건가. 엘사의 말투는분명 나폴리에서 익힌 것이었다. 하지만 한 줄 한줄 읽어나가는 동안 엘사는 번역본들과 함께 가지런히 꽂혀 있는 내 모든 작품의 하찮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 P643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 않기 위해 릴라와의 통화를 최대한 피했다.
이제는 릴라가 ‘내가 쓴 글을 좀 읽어봐 줘 몇 년 동안 작업한 결과야, 메일로 보내줄게‘라고 말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릴라가 정말 그렇게 말할까봐 두려웠다. 정말 두려웠다. 릴라가 내 전문 분야에 불쑥 침입해 작가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공허하게 만들 경우 내가어떻게 대응할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분명 「푸른 요정」을 읽었을 때 그랬던 것처럼 찬탄을 금치 못할 것이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릴라의 글을 출간할 것이다.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 모든방법을 총동원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나는 짝꿍의 놀라운 재능을 발견한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나는 정체성이 확고한 어엿한 성인이었다. 나는 릴라 스스로때로는 농담 삼아, 때로는 진심으로 반복해 말했던 것처럼 ‘라파엘라 체룰로의 눈부신 친구 엘레나 그레코‘였다.  - P645

지금은 내게 속한 그 무엇도 세월을 견뎌내지 못할까봐 두려웠다. 내 작품들은 비교적 빨리 빛을 보았고 그 알량한 행운 덕에나는 수십 년 동안 내가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살아왔다. 갑자기 그 환상이 희미해졌고 이제는 내 작품이 중요한 것같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릴라의 인생도 막을 내리고 있었다. 릴라는 자기 부모님이 살던 집에 틀어박힌 채 도무지 내용을 예측할 수 없는 생각과 느낌으로 컴퓨터를 채워가면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할머니가 다 된 지금이나 아니면 죽은 후에라도 예전에 릴라가 그저 자루를 묶는 끈에 불과하다고 했던 릴라의 이름이단 하나의 위대한 작품으로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상상했다. 나처럼 수백만 페이지의 글을 쓰거나 내가 내 책으로 누렸던 성공을만끽하지는 못하겠지만 릴라의 책은 시간을 이겨낼 것이다. 수백 년동안 수많은 사람이 릴라의 책을 읽고 또 읽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허비해버린 나와는 달리 릴라에게는 아직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내 운명은 질리올라의 운명과 다를 바가 없지만 릴라는 아니었다. - P648

또박또박 자기표현을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다 보면 티나 생각이 났다. 기분이 특히 우울할 때면 릴라가 자기 딸에 대해 자세히 썼을 것이라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 나는 릴라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 특유의 오만한 순진함으로 티나 이야기와 나폴리 이야기를 뒤섞었을 것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놀라운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확신했다.
나는 이내 모든 것이 내 상상일 뿐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나도 모르게 불안과 질투와 증오와 애정을 더하고 있었다. 릴라에게는 그런욕망이 없었다. 릴라에게는 평생 욕망이 없었다. 자기 이름을 연관지을 만한 계획을 세우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그런데 릴라는 내게 자기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아할만한 점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 P649

그럴 때면 나는 애초에 릴라의 원고는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그럴 것이라고 확신하곤 했다. 나는 지금까지 릴라를 과대평가했다.
릴라에게서 영원히 기억될 만한 것이 나올 리 없었다. 그런 생각을하면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해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릴라를 사랑했다. 릴라가 잊히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릴라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은 나여야만 했다. 그것이 내 임무라고생각했다. 나는 어린 시절 릴라가 직접 내게 그런 과제를 주었다고 확신했다. - P650

나중에 『어떤 우정』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설은 내가 가벼운 우울증에 빠져 있던 그 시절 나폴리에서 탄생했다. 그때 일주일 내내 비가 내렸었다. 물론 나는 그 글이 릴라와 내가 암묵적으로 합의한 것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릴라가 내 행동을 참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결과만 좋으면 결국 릴라가 내게이렇게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 스스로에게조차 말할 용기가 없었는데 네가 대신 내이름으로 말해주었어."
이른바 예술가, 특히 문학가들은 주제넘은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 우리는 그 누구에게서도 그 어떠한 권리도 위임받지 못했는데 마치 위임받은 것처럼 작업을 착수한다.  - P650

릴라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두려운 마음에 그러지 못했다. 릴라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고향동네 사람들과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을 쓰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었다. 내가 그럴 때마다 릴라는 고통스러울지라도 기어코 내 책이 형편없다는 말을 하고야 말았다. 무질서함까지 고스란히 담아 현실을있는 그대로 들려주든지 아니면 상상력을 발휘해 이야기의 가닥을새로 만들어내야 한다고 했다.
나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나는 릴라에게연락하는 것을 포기하고 ‘이번에도 결국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릴라는 내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할 테고 내게 내색하지 않다가 몇년 후에야 내게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내게 이보다는 목표를 높게 잡아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겠지‘라고 생각하면서 마음을가라앉혔다. - P651

어느릴라는 언제나 그랬다. 내가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나를 소외시키고 나를 벌하고 좋은 작품을 썼다는 만족감까지 손상시켰다.
나는 화가 났다. 이런 식으로 자기삭제를 연출하는 행위도 이제 내게 걱정보다는 분노를 자아냈다. 아마 어린 티나와는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아직까지도 끈질기게 네 번째 생일을 앞둔 아이의 모습으로, 가끔은 현재 임마처럼 30세의 다 큰 여인의 모습으로 릴라를쫓아다니는 티나의 유령과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은오직 그리고 영원히 우리 둘만의 문제일 것이다.
타고난 천성과 자신이 처했던 환경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을 내가 이루기를 바랐던 릴라와 그런 릴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나의 부족함 때문에 화가나서 나에게 복수하기위해 나도 자기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만들려는 릴라와 수개월동안 쓴 글로 그런 릴라에게 경계가 해체되지 않은 형태를 만들어주고 릴라를 이겨내 릴라에게 평안을 찾아주고 그로써 나도 평안을 찾으려 하는 나만의 문제일 것이다. - P654

나 자신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영원히 끝내지 못할 것 같았던 이이야기를 끝마친 것이다. 이야기를 완성한 후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글을 꼼꼼하게 다시 읽어 보았다. 글을 다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 몇 줄이라도 릴라가 내 글에 들어와 글에 이바지한 흔적이 없는지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내 이 기나긴 글이 오롯이 나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릴라는 종종 내 컴퓨터에 침입하겠다고 나를 위협하곤 했지만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애당초 그럴 능력이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네트워크니 케이블이니 연결이니 전자세계의 요정들이 벌이는 일에 대해 무지한 늙은 여인의 오랜 상상의 산물일 뿐이었을 것이다.
내 글에 릴라는 없었다. 내가 글로 쓸 수 있었던 내용만 있을 뿐이었다. 물론 릴라가 어떤 글을 어떻게 쓸지를 상상하다보니 내 글과릴라의 글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 것일 수도 있다. - P657

그러니 이 긴 글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나는 릴라를 다시붙잡고 싶었다. 내 곁으로 다시 불러들이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내가 해낸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가끔 릴라가 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혼자 되묻곤 한다. 바닷속으로 사라진 걸까. 오직 릴라만 아는 지하 터널이나 갈라진 틈 사이로들어가버린 걸까. 강력한산을 가득 채운 오래된 욕조 속에 들어간걸까. 아니면 내게 공들여 설명해주었던 예전에 쓰레기 폐기장으로쓰이던 ‘석탄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버린 걸까. 산속 깊이 버려진 작은 성당의 납골당에 있는 걸까. 우리는 아직 모르지만 릴라는 알고있는 다른 수많은 차원 가운데 하나의 세계에서 자기 딸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닐까. 릴라는 돌아올까. 늙은 릴라와 다 큰 어른이 된 티나가 함께 돌아올까. 오늘 아침, 포 강이 마주보이는 작은 발코니에 앉아나는 기다려 본다. - P661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릴라는 나를 속였던 것이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그 순간부터 나를 제멋대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평생 ‘내‘ 육체와 ‘내‘ 존재를 빌려 자신의 구원을 이야기한 것이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반세기 이상이 걸려 토리노까지온 그 두 인형은 릴라가 잘 지내고 있으며 나를 사랑하고 이제 드디어 틀을 깨고 세계 일주를 할 생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지난날 릴라의 세계만큼 작아진 세계를 여행하며 새로운 진실에따라 젊은 시절 다른 사람들 때문에 또는 자기 자신 때문에 누리지못했던 삶을 살아가면서 늙어갈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 안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는 두 인형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곰팡이 냄새가 났다. 나는 인형들을 내 책등에 기대어 놓았다. 보잘것없고 못생긴 인형들을 바라보고 있으니혼란스러워졌다. 소설과는 달리 진짜 인생은 일단 지나간 후에는 명확해지기보다 모호해지는 법이다. 릴라가 이토록 명확하게 자신을드러냈으니 이제 다시는 릴라를 보지 못해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 P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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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 말이 맞아. 글은 그저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야. 정말 상처주고 싶은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쓰는 거야.‘

몇 달 만에 릴라와 나는 좀 더 가까워졌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함께 장을 보기 시작했다. 일요일에는 큰길을 따라 허구한 날 똑같은 노점 사이를 돌아다니는 대신 나폴리 시내로 가자고 했다. 우리는 엔초와 함께 딸들을 데리고 따스한 햇볕 아래 바닷바람을 쐬러갔다.
우리는 카라치올로 가나 빌라 코무날레 공원을 산책했다. 그럴 때면 엔초는 티나를 목마 태우고 다녔다. 엔초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티나를 애지중지했다. 그렇다고 내 딸들을 소홀히 대하는 법도없었다. 엔초는 아이들에게 공과 달콤한 과자를 사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그럴 때면 나와 릴라는 일부러 뒤처져 걸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과는 달랐다. 그 시절은 - P372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릴라는 자기가 텔레비전에서 들은내용에 대해 물었고 나는 릴라의 질문에 유창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릴라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라든지 출판계의 문제라든지 페미니즘계의 새 소식 등에 대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들려주었다.
그러면릴라는 살짝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내 말에 주의 깊게 귀기울였다. 질문할 때 빼고는 끼어들거나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식으로 릴라와 대화하는 것이 좋았다. 릴라가 감탄하는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때도 좋았고 내게 "너는 정말 아는 것도 많고생각도 많구나"라고 말할 때도 좋았다. 가끔 나를 놀리는 것 같기도했지만 그마저도 괜찮았다. 내가 릴라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부추길때마다 릴라는 괜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게 만들지 말고 너나계속 이야기하라며 몸을 사렸다.
릴라는 종종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대면서 내가 그들과 개인적인친분이 있는지 묻곤 했다. 내가 아니라고 하면 실망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내가 나와 친분이 있는 유명 인사들을 보통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끌어 내릴 때도 그에 못지않게 실망하는 눈치였다. - P373

내가 대답했다. 나는 릴라가 나를 상류사회의 일원이기는 하되 그들과는 다른 존재로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릴라 자신도 내가 그런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릴라는 내가 내 동료들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들이 계속내 동료로 남기를 바랐다. 가끔 릴라가 내가 정말로 대중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 어떤 방식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려고 나에게 집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내가 책을 쓰고, 잡지와 신문에 기고하고 가끔텔레비전에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만 내가 고향에 남기로 한결정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게 그런 후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릴라의 친구이자 릴라와 이웃으로 지낼 수 있는 전제 조건인 것 같았다. - P374

전북릴라는 때때로 나와 아이들을 저녁식사에 초대했고 그런 릴라보다 내가 더 자주 릴라와 엔초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릴라 커플은우리 집에 올 때마다 당연히 티나를 데려왔지만 젠나로는 데려오지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젠나로는 우리 집에 오지 않았다. 젠나로는 하루 종일 밖에 있다가 늦은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엔초가 젠나로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면에 릴라는 ‘이제 다 컸는걸.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라는 주의였다. 하지만 나는 릴라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불안해하는 엔초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럴 때 릴라의 말투는 나와 이야기할 때 쓰던 말투와 똑같았다. 엔초가 고개를 끄덕이면 강장제 같은 무엇인가가 릴라에게서 엔초에게로 옮겨갔다. - P376

길을 가다가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릴라와 함께 장을 보러 나갈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릴라는 우리 동네의 중요 인사로등극했고 사람들은 너도나도 릴라를 불러 세웠다. 그들은 릴라를 한쪽으로 데려가 존경을 담아 자신들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그들이 릴라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속삭이면 릴라는 특별한 반응 없이 그들의말에 귀를 기울였다. 릴라가 새로운 사업에서 성공해서 사람들이 릴라를 그렇게 대하는 걸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여서일까. 아니면 마흔을 목전에 둔 지금 릴라가 발산하는 특유의 기운이무르익어 사람들의 눈에 릴라가 때로는 매혹적이고 때로는 두려운마법사처럼 보이는 것은 아닐까.
나도 잘 모르겠다. 물론 사람들이 나보다 릴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기는 했다. 나는 유명한 작가인 데다 새책의 출간을 앞두고 출판사에서 신문지면에 내 이름을 최대한 많이초가 고개를 끄덕게로 옮겨갔다. - P376

거론하려고 한창 힘쓰고 있을 때였으니까. 『레푸블리카』지는 신간도서를 소개하는 짧은 기사를 게재하면서 내 사진을 꽤나 크게 실었다. 기사에는 "특히 엘레나 그레코의 신작에 대한 기대가 높다. 엘레나 그레코의 이번 소설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유혈이 낭자한나폴리를 배경으로 한다‘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태어난 고향에서 릴라 곁에 서면 나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릴라의 공적을 목격한 증인에 지나지 않았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를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길을 가다 나처럼 존경받는 유명 인사를직접 볼 수 있는 것도 다 릴라와 릴라의 매력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 P377

안토니오는 릴라를 위해 그런 일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돈 때문이 아니었다. 릴라와의 우정과 릴라에 대한 존경심 때문이었다.
아니면 릴라가 안토니오의 고용주인 미켈레에게서 그를 빌려온 것일 수도 있었다. 릴라가 요구하는 것은 뭐든 허락하는 미켈레라면릴라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미켈레가 정말로 릴라의 요구를 다 들어주고 있는 걸까.
내가 고향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는 확실히 그랬던 것 같지만 아직도그런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나는 먼저 예전과는 다른 몇 가지 징조를 느꼈다. 우선 릴라가 미켈레 이름을 언급할때 예전처럼 흡족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해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무엇보다도 미켈레가 베이직 사이트에 나타나는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 P382

그 기사를 쓴 사람은 고향 동네의 역사에 대해 말했다. 심지어는돈 아킬레 카라치와 마누엘라 솔라라의 살해사건까지 언급했다. 특히 마누엘라 솔라라 살해사건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세우며 이를자세히 다뤘다. 그는 마누엘라 솔라라의 죽음을 두고 카모라 집안간의 세력 다툼이 가시화된 사건이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태어나 성장한 벽돌공이자 동네 공산당 의회의 전직 서기관인 ‘악명 높은 테131212러리스트 파스콸레 펠루소‘의 작품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파스콸레에 대해서는 한 줄도 쓴 적이 없었다. 돈 아킬레나 마누엘라 솔라라에 대해서 언급한 적도 없었다. 카라치도 솔라라도 나에게는 희미한 윤곽일 뿐이었다. 사투리 억양과 몸짓과 때로는 공격적인 말투로 순수한 상상의 산물인 소설 속 인물들을 풍요롭게 해주는 희미한 윤곽과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사업에 참견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솔라라 형제의 영지‘가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소설을 썼을 뿐이다! - P396

릴라는결국 나는 그러기로 했다. 릴리는 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자기가또다시 내 책에 대해 안 좋게 말했다는 것도 잊게 하려고 했다. 릴라는 처음에는 사투리로 말하다가 나중에는 중요한 순간에만 나오는표준어 실력을 발휘했다. 나는 릴라가 그런 식으로 말할 때마다 깜짝 놀라곤 했다.
릴라는 지진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2년 동안 릴라는 지진 때문에동네가 더 안 좋아졌다고 불평할 때 빼고는 그날 겪은 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해왔다. 릴리는 그 사건 이후로 자기는 인간이 복잡한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고 했다. 인간이란 물리학, 천체물리학, 종교, 영혼,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 자본, 노동, 이윤, 정치, 수많은 조화로운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 내적인 혼란과 외적인 혼란으로 가득 찬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 P399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평생 내가 누린 행운을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내 책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가독성이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었고 주인공 캐릭터를 완성한내 능력에 찬사를 보내는 사람도 있었다. 내 작품을 두고 비정한 현실주의라고 표현한 사람도 있었고 바로크적인 상상력을 강조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부드럽고 편안한 여성적인 서술방식을 높게 평가한 사람도 있었다. 긍정적인 평이 쏟아졌지만 각기 다른 부분을 강조했고 종종 서로 모순적이었다. 마치 비평가들이 서점에 있는 내책을 읽은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가상의 책을 소환하는 것 같았다.
파노라마지 기사가 나온 뒤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는 모든 이가 동의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 소설이 나폴리라는 도시를 서술하는 일반적인 방식과 전혀 다르게 나폴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고했다. - P402

병원 복도에서 릴라를 바라보니 나보다 더 지쳐보였다. 내가 없는동안 릴라는 한결같이 엄마 곁에서 자신의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를불어넣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릴라는 며칠동안 집에도 가지 않고잠도 거의 못 잔 탓에 너무 피곤해서 시선이 흐릿해보였다. 나도 릴라와 마찬가지로 피곤한 상태였지만 그런 릴라와는 달리 내면에서환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다. 내 딸이 아팠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도 지금 내 모습에 대한 만족감을 지울 수 없었다.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맛본 자유를잊을 수 없었다. 스스로를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는 과거가 없는 사람처럼 규정하며 맛본 희열감을 떨쳐내기 힘들었다 - P410

임마가 퇴원하자 나는 릴라에게 이런 내 감정을 털어놓았다. 나는죄책감과 자부심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릴라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 대신 임마에게 무엇을 해줬는지 세세히 듣고 싶었다. 하지만 릴라는 내게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만둬, 레누. 이미 다 지나간 일인걸. 임마는 다 나았잖아. 이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가 있어"
처음에 나는 릴라 회사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문제였다. 릴라는 엄마가 병에 걸리기 직전에 내 앞으로 소송장이 - P410

날아올거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다름 아닌 카르멘이 나를 고소한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마음이 아팠다. 카르멘이, 다른 사람도 아닌 카르멘이 내게 그런 짓을 했다니.
성공에서 오는 희열은 그 순간 끝났다.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는 죄책감에 소송을 당해 돈과 명예와 기쁨을 비롯한 모든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해졌다. 갑자기 나자신이, 나의 일장춘몽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나는 릴라에게 지금당장 카르멘과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지만 릴라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릴라는 내게 말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릴라의 충고를 듣지 않고 카르멘을 만나러 갔다. - P411

나는 전보다 더 불안에 떨면서 신문 가판대에 갔다. 신문에는 티나와 함께 찍은 내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번에는 흑백사진이었다.
제목부터 소송을 언급하고 있었다. 기사는 이번 소송을 보기 드물게용기 있는 소설가의 입에 재갈을 물리려는 시도로 평했다. 고향 동네 이름이나 솔라라 형제 이름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는 않았다. 기사는 상당히 숙련된 솜씨로 이번 사건을 나라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탈리아의 현대화를 막는 중세적 잔재와 드디어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한 거스를 수 없는 정치적·문화적 개혁의 흐름 간의 충돌 현상‘의 일환으로 해석했다. 짧은 글이었지만 - P416

문학의 권리를 ‘암울한 지역 분쟁‘과 분리하면서 특히 결론 부분에서 이런 주장을 효과적으로 변론했다.
나는 안정을 되찾았다.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편집장에게 전화를 걸어 기사를 극찬한 다음 릴라에게 신문을 보여주러 갔다. 나는 릴라가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릴라가 내게 기대했던 것도 이런 게 아니었던가. 그간 릴라가 내게 부여한 힘이 실제로발휘된 것이다. 그런 내 기대와는 달리 릴라의 반응은 냉랭했다.
"왜 이 사람에게 기사를 쓰게 한거야?"
"뭐가문제야? 출판사가 내 편을 들어줬잖아. 이 소동을 잠재워주겠다는 거잖아. 나는 좋은 일인 것 같은데?"
"다 쓸데없는 소리야, 레누. 이 작자는 책 판매에만 관심이 있을뿐이야."
"그럼 안돼?"
"물론 그래도 돼. 하지만 기사는 네가 썼어야지." - P417

며칠 동안 나는 대참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기사가 일으킨 파장은 꽤나 컸다. 나폴리 지역 신문들은 『코리에레 델라 세라지의 기사를 언급하면서 내용을 좀 더 심도있게 다뤘다. 나는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 응원의 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몇 주가 지나자 소송당했다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작가 중에서 나와 같은 일을 겪거나 나보다 더 큰 위험에 노출된 사람이 많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 후 일상이 모든 것을 잠식했다. 나는 얼마동안 릴라를 피했다.
잘못된 행동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특히 주의를 기울였다.
책은 꾸준히 잘 팔렸다. 8월이 되자 나는 산타마리아 디 카스텔라바테로 휴가를 떠났다. - P422

베이직 사이트를 찾아갈 때마다 릴라는 알폰소와 뭔가를 모의하고 있었다. 내가 가까이 가려 하면 릴라는 무심한 동작으로 내게 잠시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동네로 돌아온 카르멘과 알 수 없는 이유로 출발을 무기한 연기한 안토니오와 이야기할 때도 릴라는내게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릴라의 주변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릴라는 나를 자기 일에 끌어들이려고 하지 않았다. 나도 그 편이 좋았다. 그러다 두 가지 끔찍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났다. 릴라는 우연히 젠나로팔에 가득한 주사 자국을 보게 됐다. 릴라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것은 처음이었다. 릴라는 엔초를 부추겨 젠나로를 죽도록 두들겨 패게 했다. 건장한 두 사내는 서로 처절하게 치고받았다.  - P423

알폰소는 어느새 살이 쪄서 무거워진 자기 몸에서 계속해서 도망치려 했다.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출 때도 있었다. 다시 나타날 때면 언제나 얻어맞은 흔적이 있었다. 다시 일을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마지못해서였다.
어느 날 알폰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릴라와 엔초가 사방으로 찾아다녔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며칠 후 코롤리오 해변에서 알폰소의시신이 발견되었다. 어디선가 맞아죽은 다음 바다에 버려진 것이었다.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잔혹한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없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의 알폰소를 떠올렸다. 친절하고 세심한성격의 알폰소 마리사의 사랑을 담뿍 받고 약국집 아들 지노에게는괴롭힘을 당하던 알폰소를 말이다. 가끔 알폰소가 여름방학 동안에억지로 식료품점 진열대 뒤에서 일하던 모습을 애써 떠올려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그 이후의 그의 삶은 생각나지 않았다. - P425

알폰소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몇 시간이 지난 후였다. 릴라는 알폰소가 죽었다는 것을 알면서도며칠 전부터 그에 대한 분노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는 믿지 못할 놈이라는 말만 우악스럽게 반복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난리를 치던 릴라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우리 집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 나는 릴라가 나나 마리사보다 알폰소를 더 많이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알폰소 스스로 자주 말했듯이 릴라야말로 어느 누구보다 알폰소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몇시간동안릴라는 모든 의욕을 잃고 하던 일을 멈췄다. 젠나로에 대한 관심도 잃고 티나도 내게 맡겼다. 릴라와 알폰소의 관계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복합적이었던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릴라는 알폰소를 거울처럼 마주보고 알폰소에게서 자기의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그의 몸에서 자신의 일부를 끌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두 번째 책에 쓴 내용과 정확하게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알폰소는 그런 릴라의 노력이좋았던 것이다. 그는 릴라에게 자기 자신을 살아 있는 재료로 제공했고 릴라는 그런 알폰소에게 형태를 만들어준 것이다. - P426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보니 내 자신이 미켈레에게 잔혹하게 복수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그를 때리고 손톱으로 할퀴고물어뜯었다. 심장이 강하게 뛰었다. 그러다 내 파괴 본능은 차츰 사그라들었다. 나는 생각했다.
‘릴라 말이 맞아. 글은 그저 쓰기 위해 쓰는 게 아니야. 정말 상처주고 싶은 자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쓰는 거야.‘
말의 힘으로 주먹과 발길질과 치명적인 무기에 맞서는 것이다. 대단치는 않겠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물론 릴라는 유년 시절 우리가꿨던 꿈을 아직도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릴라는 누군가가 - P431

글을 써서 명성과 돈과 권력을 얻었다면 그 사람의 글은 천둥번개처럼 강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오래전부터 실제 글의 힘이란 릴라가 상상하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책이나기사로 시끄럽게 떠들어댈 수는 있었다. 그런 시끄러운 소리라면 고대전사들이 전투에 나가기 전에도 내지 않았던가. 진짜 힘과 가공할 만한 폭력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그건 모두 연극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시끄러운 소리로도 그들을 조금은 아프게 할 수 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릴라에게 물었다.
"솔라라 형제가 두려워하는 게 뭐야? 뭘 알고 있는 거야?"
릴라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키지 않은 듯 말을돌리다가 릴라가 대답했다.
"미켈레 회사에서 일할 때 나는 많은 서류를 봤어. 나는 그 서류들을 꼼꼼히 살폈지. 어떤 것은 미켈레가 직접 내게 주기도 했고."
릴라의 얼굴에는 아직 멍이 들어 있었다. 릴라는 괴로운 듯 인상을 찡그리면서 거친 사투리로 덧붙였다. - P432

티나와 임마가 바닥에 앉아 인형과 장난감 마차와 말을 가지고 놀면서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리는 동안 우리는 부엌 식탁에 자리를 잡았다. 릴리는 가방에서 많은 서류와 자기가 메모해 놓은 종이와 여기저기 얼룩이 묻은 붉은색 표지의 공책 두권을 꺼냈다. 나는 호기심에 붉은색 표지의 공책 두 권부터 먼저 펼쳐보았다. 먼 옛날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던 글씨체로 모눈종이에 쓴 회계장부였다. 문법이엉망인 문장으로 주석이 세세하게 달려 있었고 페이지마다 M.S.라는 이니셜로 서명되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동네 사람들이 이른바 마누엘레 솔라라 부인의 붉은장부라고 부르던 것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았다. 유년 시절과 사춘기시절 ‘붉은 장부‘라는 표현은 위협적이지만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 P433

아니 위협적이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명칭이나 (예컨대 그냥 평범하게 회계장부라고 불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색상에 상관없이 우리는 마누엘라 부인의 공책이 유혈이 낭자한 모험의 중심에 있는 비밀문서라고 생각하면서 흥분하곤 했다. 그 장부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확히 모두 몇 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마누엘라 부인의 붉은 장부는 내 눈앞에 있는 두 권의 공책처럼 학생들이 흔히 쓰는 공책 묶음이었다. 낡아서 오른쪽가장자리 아래가 파도처럼 일어난 흔하디흔한 공책 말이다.
나는 문득 기억 자체가 이미 문학작품이며 릴라 말이 옳았을지도모른다고 생각했다. 크게 성공했을지라도 내 책은 정말 형편없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글이기 때문이다. 거의집착 수준으로 세심하게 다듬은 글이기 때문이다. 일관성 없고 미학과는 거리가 먼 데다가 비논리적이고 뚜렷한 형태가 없는 지극히 평범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지 못한 글이기 때문이다. - P434

보이지 않는 움직임에 따라 문장이 사라지거나 아니면 어느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펜도 연필도 필요 없었다. 종이를 바꾸거나 타자기 롤러에 종이를새로 끼울 필요도 없었다. 화면 자체가 종이였다. 수정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항상 똑같아 보이는 유일한 종이였다. 화면에 쓰인 글은절대로 더럽힐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줄의 배열도 완벽했다. 솔라라 형제의 추잡한 짓거리와 캄파니아 지역의 비리를 규탄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도 정갈한 기운을 발산했다.
우리는 며칠 동안 함께 작업했다. 글은 인쇄기의 소음을 통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종이 위에 찍힌 까만색 점들로 구체화되었다.
릴라가 만족하지 못해 우리는 다시 펜을 들었다. 우리는 글을 힘겹게 고쳐 썼다. 릴라는 걸핏하면 화를 냈다. 나에 대한 기대치가 너무높았다. 릴라는 내가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기를 바랐다. - P436

릴라는 내가 지식의 샘인 줄 알았는데 막상 지역 지리도 잘 모르고 관료 체계의 세밀한 부분에 대해서도 무지한 데다 시의회의 기능이나 은행의 위계, 범죄와 형벌에 대해 잘 몰라 문장마다 막히자나에게 화를 냈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정말 오랜만에 릴라가나와 우리의 우정을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느꼈다.
"그 자식들을 파멸시켜야 해, 레누. 이렇게 해도 안 되면 내가 그자식들을 죽여버리겠어."
우리의 머리는 오랫동안 서로 충돌하다 결국 하나가 되었다. 지금생각해보면 그런 경험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끝으로 우리는 모든것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할 것은 다했다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지루한 시기가 시작되었다. 릴라는 우리의글을 다시 인쇄했고 나는 그것을 봉투에 넣어 출판사에 보냈다.  - P436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일이 지났다. 어느 날 아침 편집장은 내게전화를 걸어 나에 대한 과찬을 늘어놓았다.
지금이 자네 재능의 황금기인가보네."
편집장이 말했다.
"제 친구랑 같이 쓴 글이에요."
"최고의 실력을 발휘했어. 정말 멋진 글일세. 부탁이 있네. 이 글을사라토레 교수에게 좀 보여줘. 그가 이 글을 읽고 어떻게 해야 뭐든열정적인 글로 바꿀 수 있는지 배우게 말이야."
"니노와는 헤어졌어요."
"그래서 자네 컨디션이 그렇게 좋아진 게로군."
나는 웃지 않았다. 변호사들이 뭐라고 했는지 빨리 듣고 싶었다.
편집장의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이걸로는 부족해."
편집장이 말했다.
"개인적으로 만족하는 정도라면 모를까 단 하루도 그들을 감옥에보낼 수 없어. 이 정도로 솔라라 형제를 감옥에 넣기는 힘들어. 특히
"자네가 쓴 것처럼 그들이 지역 정치세력과 결탁한 데다 뭐든 살 수있을 정도로 돈이 많다면 더 힘들어." - P437

순간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지 않은척했다. ‘에스프레소지에 글을 보낸 것이 릴라라는 걸 깨닫는 데는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항의를 하려고릴라에게 달려갔다. 나는 정말 화가 났는데 릴라는 평소보다 다정한 데다 기분이 좋아보이기까지 했다.
"네가 결정을 못 하기에 너 대신 내가 결정했어."
"나는 출간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을 내렸어."
"나는 아니야."
"그러면 네 이름으로 출간하도록 해."
"무슨 말이야? 작가는 너잖아."
릴라에게 내 불만과 불안한 마음을 이해시키기는 불가능했다. 내가 비판적인 말을 할 때마다 릴라는 태평한 태도로 맞섰다. 여섯 장의 페이지를 빡빡하게 채운 기사는 비중 있게 다루어졌고 예상했던대로 서명란에는 단 하나의 이름, 그러니까 내 이름만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나는 릴라와 싸웠다. 나는 잔뜩 화가나서 릴라에게 말했다. - P440

‘너는 숨어 있고 싶어서 네 이름을 뺀 거야. 돌만 던지고 숨는 게편하니까. 네 계략에 이젠 넌덜머리가 나."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
릴라가 말했다. 릴라는 샐쭉해져서 에스프레소지에 내 이름만넣은 것은 자기는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부를 제대로하고 유명한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라면 그 누구라도두려움 없이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릴라의 말에 나는 릴라가 순진하게도 내 지위를 과대평가한다고 내 생각을 말했다. 하지만 릴라는 짜증을 내면서 나야말로 내 자신을 너무 과소평가한다고했다. 릴라는 내가 더 열심히 노력해 주변 사람들에게 더 많이 지지받길 원한다고 했다. 자기는 오직 내 가치가 더 인정받기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릴라가 외쳤다.
솔라라 자식들이 무슨 일을 당할지 지켜봐."
나는 전보다 더 기운이 빠져 집으로 돌아왔다.  - P441

실제로는 내 이름으로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나는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었다. 기사 덕분에 그동안 흩어져 있던 나에 대한 파편적인 정보들이 꿰맞춰졌다. 내가 소설가라는 직업적 소명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노동운동에 참여하고 여성이 처한 현실을 비판하는 데 힘썼듯이 지금은 내 고향을 타락시키는 세력과도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 말에 형성됐던소수의 독자층에 어느 정도 기복을 겪으면서 70년대에 형성된 독자층이 합해졌고 여기에 그보다 더 많은 새로운 독자층이 유입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첫 두 작품에 영향을 미쳐 두 책 모두 다시 출간되었고 세 번째 책이 꾸준하게 팔리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작품을 영화화하려는 계획도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 P433

그 모든 것이 내 일의 일환이었고 나는 날마다 내 일을 더 잘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중이었다.
법률적인 부분에서 도움을 주는 출판사 측과 나를 지지해주는 진보언론사,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참석하는 독자와의 만남과 내가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에 보호받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 내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완전히 안심하게 된 것은 솔라라 형제가 결코나를 해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대중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그들은 최대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다. 마르첼로와 미켈레는 새로운 소송을 걸지 않았을뿐 아니라 이후 모든 일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법률 집행관 앞에서마주칠 때에도 차갑지만 정중하게 인사를 건넬 뿐이었다.
상황은 이렇게 진정됐다. 실질적으로 일어난 일은 솔라라 형제에대한 몇몇 수사가 시작되고 그에 대한 수사 파일이 만들어진 정도였다. 하지만 출판사 법무팀이 예견했던 것처럼 수사는 곧바로 난항을겪었고 파일은 다른 수백 개의 파일 아래 파묻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됐을 거라고 상상했다. 결과적으로 솔라라 형제는 여전히 활개를 치고 돌아다녔다. - P443

릴라 품에는 엄마가 안겨 있었다. 임마는 평소에 내가 자기한테신경을 써주지 않을 때 내 귀를 잡아당겼던 것처럼 릴라 귀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릴라는 엄마가 자기 귀를 지지든 볶든 신경 쓰지 않고 니노에게 푹 빠져 있었다. 니노는 유쾌한 태도로 미소를 띤 채 기다란 팔과 손을 움직이면서 릴라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저러느라 니노가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저런 식으로 자기 딸을 돌보다니. 나는 니노를 불렀지만 그는 내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내 목소리에 뒤를 돌아본 것은 데데였다. 데데는 엘사와 함께 내 목소리가 너무 얇다고 비웃었다. 아이들은 내가 고함을 지를 때면 항상 그랬다. 나는 다시 한번 니노를 불렀다. 나는 당장 니노가 릴라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혼자서 내 딸들만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으면 했다. 하지만 땅콩장수의 휘파람소리 때문에귀청이 터질 것 같은 데다 마침 부품 하나하나가 다 덜컹거리는 것같은 엄청난 소음과 먼지를 일으키면서 트럭이 지나갔다. - P463

"티나는 어디 있어?"
"데데와 엘사랑 있겠지."
2011 (6릴라는 아직도 방금 전까지 니노와 수다를 떨면서 지었던 상냥한표정 그대로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없던데."
나는 엄마 아빠가 시간을 내준 유일한 날에 릴라가 내 딸과 임마아빠 사이에 끼어들지 말고 엔초와 함께 자기 딸이나 돌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엔초가 티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서 주변을 살피는동안 릴라는 여전히 니노와 이야기를 계속했다. 릴라는 그에게 예전에 젠나로가 사라졌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릴라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 날 아침 젠나로가 사라졌지 뭐야.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서나왔는데 젠나로만 없었어. 나는 정말 놀랐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알고 보니 공원에 얌전히 앉아 있었어." 그 이야기를 하면서 릴라의 안색이 순간 변했다. 눈빛이 공허해지더니 바뀐 목소리로 엔초에게 물었다.
"티나 찾았어? 어디에 있어?" - P464

나는 1995년에 나폴리를 완전히 떠났다. 모두들 나폴리의 부활을 떠들어대던 시절이었다. 나는 부활을 믿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는 새 역사가 완성되는 것을 보았다. 노바라 가에 개성 없이 밋밋해보이는 고층 빌딩이 들어서는 모습과 스캄피아 지역에 새건물들이 우뚝우뚝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아레나차와 타데오가,
세사와 나치오날레 광장의 잿빛 바위 위로 화려한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으로 솟아나는 모습을 보았다.
프랑스와 일본에서 설계한 그 건축물들은 예측된 시행착오와 공사 지연 끝에 폰티첼리와 포지오레알레 사이에 위용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후 빠르게 광채를 잃어가더니 결국 빈민들의 소굴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활은 무슨 부활이란 말인가. 그 모든 것은 부패한 이도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 아무렇게나 분칠해놓은 현대화라는 이름의 화장품일 뿐이었다. - P469

마흔 살 이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빠르게 흐르는 시간을 뒤쫓기가 버거웠다. 달력의 날짜는 마감일자로 대체되었고 햇수는 책출간을 기준으로 흘렀다. 나나 아이들과 관련된 일이 언제 일어났는지 정확한 날짜를 말하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글로 남기려 했지만 갈수록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일은 언제 일어났고 그일은 언제 일어났더라? 나는 반사적으로 모든 사건을 출간일 기준으로 기억했다.
그새 책도 많이 냈다. 덕분에 어느 정도 권위와 명성을 얻었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에 대한 부담감도 줄어들었다. 데데와 엘사는 피에트로의 권유에 따라 차례대로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났다. 피에트로는 7,8년 전부터 하버드에서 정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제 아빠와 지내는 것을 편하게생각했다. 우울한 날씨와 거만한 보스턴 사람들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한 편지를 빼면 아이들은 자기들의 삶에 만족했다. - P470

아이들은 지난날 내가 강요했던 선택에서 빠져나온 것에 만족스러워했다. 데데와 엘사를 떠나보낸 데다 임마까지 언니들처럼 유학에 집착하자 내게는 고향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때는 마음만 먹으면 다른 곳에서 살 수 있는데도 고향의 현실을 글 쓰는 자양분으로 삼기 위해서 위험한 고향 동네의 외곽 지대에 남기로 한 결정이 작가의 이미지에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그런 지식인이 너무많다.
PW그동안 내 작품세계는 방향이 달라졌다. 고향이라는 소재는 뒤로밀려났다. 어느 정도의 명성과 온갖 혜택을 누리고 있는데도 스스로 - P470

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한 장소에만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오히려위선적인 태도가 아닐까. 그곳에 머물러 봤자 내 형제자매와 친구들, 그들의 자식과 손자손녀의 삶이 기울어가는 모습을 불편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말이다. 자칫하면 내막내딸도 그 대상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때 임마는 14세였다. 나는 엄마에게 남부럽지 않게 생활할 수있게 해주었고 임마도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임마는 상황에 따라사투리를 심하게 썼고 임마의 학교 친구들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 임마가 외출할 때마다 내가 너무 불안해하니 임마는 스스로 외출을 포기하고 집에 머무르곤 했다. - P471

내 삶도 제한적이었다. 나폴리 상류층 친구들을 만나기도 했고 남자들에게 구애도 받고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항상 얼마가지 못했다.
처음에 똑똑하게 보이던 사람들도 결국 자기 불운에 실망해 화가 나있는 사내들일 뿐이었다. 유머 감각이 있었지만 사악한 면도 있는사람들이었다. 내게 자기 원고를 보여주거나 방송계나 영화계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나를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했다. 돈을 빌려가서 갚지 않기도 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분발했다. 사회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만족스러운 삶을 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나는 세련되게 차려입고저녁에 외출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불안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미처 현관문을 닫을 틈도 없이 집 앞에서 13세도 안 된 것 같은 두 소년에게 얻어맞고 물건을 강탈당했다. 두 걸음도 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던 택시 운전기사는 창문 밖으로 얼굴도 내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떠나기로 결심했다. 1995년 여름, 나는 엄마와 함께 나폴리를 떠났다. - P471

처음 몇 달 동안은 나는 내가 내 생애 최고의 작품을 썼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한번 작가로서 뛰어난 명성을 떨쳤다. 주변 사람들에게서 그렇게나 많은 호응을 얻은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2007년 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일 무렵 어떤 우정을 소개하기 위해 마르티리 광장에 있는 펠트리넬리 서점에 갔을 때 갑작스러운 수치심이 나를 엄습했다. 청중 가운데서 릴라를 발견할까봐 두려웠다. 릴라가 맨 앞에 앉아 있다가 내가 말하는 도중에 끼어들어나를 곤란하게 할 것 같았다.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그날 행사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내 작품에 열광했다.
호텔에 돌아가 자신감을 조금 되찾은 뒤 나는 릴라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처음에는 집전화로 그다음에는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가 다시 집전화로 전화를 했다. 릴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후 다시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 P475

어떻게 해야 릴라의 슬픔을 글로 옮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도 릴라는 원래 그런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병이나 사고나 폭행이아닌 갑작스러운 증발로 딸을 잃을 운명이 삶속에 숨어서 릴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릴라의 슬픔은 응고될 수 없었다. 생명이 떠나간 육체를 절망하면서 부둥켜 안을 수도 없었고 장례식도 치를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걷고 달리고 말을 하고릴라를 껴안았지만, 이제는 망가져버린 티나의 유해를 앞에 두고 잠시나마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아마도 릴라는 방금 전까지 자기 몸의 일부분이었던 팔다리가 미처 - P475

고통을 느낄 틈도 없이 그 형태와 실체가 통째로 사라진 것처럼 느꼈을 것이다. 이 일로 릴라가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 나는 잘 모른다. 그런 고통을 상상할 수도 없다.
티나가 실종되고 나서 10년 동안 나는 릴라와 같은 건물에 살면서 매일 릴라와 마주쳤지만 한 번도 릴라가 울거나 절망하는 모습을본 적이 없었다. 처음 얼마간 티나를 찾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 동네를 헤맸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자 릴라는 너무 지쳐버린 것처럼 더는 티나를 찾지 않았다.
릴라는 부엌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는 거라고는 철길의 일부와 약간의 하늘밖에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포기한것은 절대 아니었다. 모진 세월이 릴라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원래부터 좋은 편이 아니었던 릴라의 성격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릴라는주변에 불편함과 두려움을 퍼뜨리고 다녔다. 고함을 지르고 다투면서 늙어갔다. - P476

그것은 릴라가 슬픔을 치유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그 시절 릴라는 생기를 되찾았고 티나에 대해서도 같은 방법을 택했다. 릴라는 이제 티나가 당장 돌아올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릴라는 자신의 내면과 집 안의 공허한 공간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든 것 같은 빛나는 작은 형상으로 채우려 했다. 그렇게 해서티나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 일종의 홀로그램이되었다.
이제 릴라는 티나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보다는 티나를 자기 삶속으로 다시 불러들였다. 릴라는 내게 티나가 제일 예쁘게 나온 사진들을 보여주거나 티나가 한 살, 두 살, 세 살일 때 엔초가 녹음해두었던 테이프로 티나의 작은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티나의 기발한 질문과 놀라운 대답을 들려주기도 했다. 그럴 때면 릴라는 항상 현재형으로 티나는 가지고 있고 티나는 그렇게 하고 티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했다. - P504

나는 이게 언어 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표준어의장벽 뒤로 몸을 숨겼고 나는 그런 릴라에게 사투리를 쓰도록 유도했다. 우리끼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때는 사투리를 썼으니까. 릴라가 사투리로 생각한 것을 표준어로 번역했다면 시간이 갈수록 나는표준어로 생각한 것을 사투리로 번역해야 했다. 결국 우리는 거짓된언어로 대화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릴라는 감정을 드러내야했다. 스스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을 쏟아내야 했다. 나는 릴라가 유년시절의 언어로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하기를 바랐다.
‘레누,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내가 이렇게 된 것은 딸을 잃었기 때문이야. 티나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도 죽었다고 생각해도 힘든건 마찬가지야. 티나가 살아 있다면 살아 있는데도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에 힘들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곳에 있을 것 같아서 힘들어. 그런 장면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 밤낮으로 내 눈앞에서 티나가 끔찍한 일을 당하는 모습이 보여.
하지만 티나가 죽었다면 내 마음도 죽은 거야. 그건 진짜 죽음보다도 견디기 힘든 죽음이야. 진짜로 죽으면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 P508

없게 되지만 마음이 죽으면 매일 모든 것을 느낄 수밖에 없으니까.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을 입고 먹고 마시고 일을 해야 해. 도대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건지 알수없는 너와도 이야기를 해야 해. 이렇게 예쁘게 차려 입고 미용실을 막다녀온 것처럼 머리를 하고 공부도 잘하고 뭐든 완벽하게 해내는 딸이 있는 너와 말이야.
쓰레기 같은 우리 동네 환경도 네 딸들을 망쳐 놓지 못하는 것 같아. 아니, 오히려 아이들에게 더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이런곳에서 살면서 네 딸들은 더 자신감이 넘치게 되고 거만해지고 뭐든다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 같아. 그런 딸들이 있는 너를 보면 화가나서 피가 거꾸로 솟을 것 같아.
그러니 가. 제발 가버려. 나를 가만히 내버려둬. 티나는 너희들 중누구보다 뛰어나게 될 운명이었는데 그런 티나를 데려가버렸어. 더는 견딜 수 없어‘
- P509

나는 릴라가 술에 취한 듯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나에게 이런 말을털어놓게 하고 싶었다. 나는 릴라가 마음만 먹는다면 헝클어진 머릿속에서 그런 말을 꺼내놓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 릴라는나와의 관계에서는 오히려 다른 때보다 덜 공격적이었다. 내가 릴라에게서 듣고 싶었던 말은 실은 내 감정의 산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히려 내가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릴라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때로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입에 담지 못할 무엇인가가 릴라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 P509

나는 릴라가 삼천포로 빠져서 투덜거리면서 한 이야기를 치밀하고 세련되게 정리했다. 나는 내 엉덩이의 통증과 어머니에 대해 썼다. 주변에서 인정받을수록 내가 릴라와 나눈 대화에서 영감을 받아연관성 없어 보이는 사물이나 사건들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점을 찾게 된다는 사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정할 수 있었다.
릴라와 위아래 한 층을 두고 가까이 사는 동안 그런 일이 자주 있었다. 릴라가 나를 조금만 자극해도 텅 빈 머리가 영감으로 차오르면서 빠르게 돌아갔다.
나는 릴라에게 선견지명이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앞으로도 항상그런 릴라의 능력을 인정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않은가. 나는 이제 내가 정말 성인이 되었기 때문에 내게 릴라가 주는 자극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릴라가 내게 영감을 준다는 사실을 나 자신에게조차 숨기려 했지만 지금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한번은 이런 사실을 글로 쓰기까지 했다. ‘나는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마음속에 릴라를위한 자리를 마련해놓고 그런 릴라의 모습에 견고한 형태를 부여할 - P520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릴라는 릴라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나처럼 하지 못하는 것이다. 티나의 비극과허약해진 릴라의 신체와 불안한 머리 역시 릴라가 처한 위기를 구성하는 일부 요인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경계의 해체‘라고 부르는 병의 근본적인 원인은 릴라가 릴라이기를 원치 않는 데 있었다. 그날밤나는 새벽 3시에 잠자리에 들어 다음날 아침 9시에 일어났다.
그새 데데는 열이 내렸지만 엄마가 기침을 시작했다. 나는 집 청소를 하고 릴라가 어떤지 보러 내려갔다. 오랫동안 문을 두드렸지만릴라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나는 발을 질질 끌면서 오는 발소리와 사투리로 욕을 하며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한참동안손가락을 초인종에서 떼지 않았다. 릴라는 땋은 머리가 반쯤 풀린데다 얼굴에 화장이 번져서 전날보다 더 비탄에 잠긴 가면처럼 보였다. - P521

살다보면 삶의 주변부에 자리를 잡아 평생 변치 않을 배경으로 남을 것 같았던 것이 예기치 않게, 그것도 한창 바쁜 일에 쫓기고 있는순간에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제국, 정당, 신념, 기념비 아니면 일상의 일부였던 주변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때가 바로 그랬다. 하루 걸러 하나씩 몇 달 동안 힘든 일이 잇달아 일어났고 전율에 전율이 뒤를 이었다. 소설이나 그림을 보면 암초나 뱃머리에 서서 영원히 휩쓸리지도 스쳐가지도 않을 폭풍을 마주하고 서 있는 인물들이 있는데 나는 한동안 내가 딱 그런 인물이된 것 같았다.
우리 집 전화가 쉴새 없이 울렸다. 솔라라 형제의 영역 안에 살고있다는 이유로 나는 엄청난 양의 글과 말을 쏟아내야 했다.  - P523

엔초는 처음으로 릴라에 대해 냉정하게 말했다.
"리나는 평생 분별력 있게 산 적이 없어."
그렇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릴라는 침착하고 사려 깊게 행동할 수 있었다. 신경이 극도로 예민했던 그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기분 좋은 날이면 릴라는 평온하고 다정했다. 나와 내 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고 내 출장 일정은 어떻게 되고 지금 어떤 글을 쓰고 있으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있는지 나에게 물었다. 데데와 엘사, 임마가 들려주는 비합리적인 교육 제도와 정신나간 선생들 이야기. 아이들끼리 다툰 이야기와 연애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으면서 가끔분개하기도 했다. 게다가 릴라는 관대했다. 어느 날 오후 릴라는 젠나로의 도움을 받아 오래된 컴퓨터를 우리 집에 가지고 와서 내게사용법을 가르쳐준 다음 통보했다.
"선물이야."
나는 다음 날부터 컴퓨터를 사용해 작업하기 시작했다. 정전이 돼서 몇 시간 동안 들인 노고가 수포로 돌아갈까 두렵기는 했다. 그런 두려움을 제외하면 나는 컴퓨터에 열광했다. - P533

‘매일 아버지 노릇을 할 필요가 없어지니 정말 좋은 아버지가 되었네. 임마도 피에트로를 정말 좋아하고. 남자들은 다 똑같은가봐.
잠깐 같이 살다 아이를 낳으면 떠나보내야 하나봐. 니노처럼 경솔한 사람이면 아무런 책임감 없이 떠나는 거고 피에트로처럼 진지한 사람이면 아버지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필요할 때 최선을 다하는거야.‘
확실한 것은 정절과 믿음을 바탕으로 한 동거의 시대는 남녀를 불문하고 끝났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나는 리노라 불리는 불쌍한젠나로를 위험하게 생각하는 걸까. 데데는 자신의 열정을 다 불태워버리고 난 다음 자기 길을 갈 것이다. 그러다 가끔 서로 만나기도 하고 다정한 말을 주고받을 수도 있다. 어차피 이런 순서를 밟을 텐데왜 나는 내 딸에게 딸이 원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요구하는 걸까. - P550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 니노는 틈만 나면 릴라 이름을 들먹여 멀리서나마 자신이 릴라를 염려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니노의 눈앞에는 내가 있었다. 나는 지난날 그를 사랑했던 여자이자 지금 니노 곁에서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핥아 먹고 있는 그의 딸의 엄마가 아닌가. 하지만 니노에게 나는 고등학교 책상에서부터 국회 의석에 앉기까지 자기가 걸어온 놀라운 행적에 대해자랑을 늘어놓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의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니노와 만났을 때 그가 내게 해준 가장 큰 칭찬은 나를 자기와 수준이 같은 사람으로 취급해준 일이었다. 무슨 말을 하려다 내게 그런 말을 한 것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니노가 내게 말했다. - P5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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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배 속에서 마치 움직이는 공기 방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신없이 움직여대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하는 밤이면 나는 모두가 예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게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했다. 니노를 닮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니노의 마음에들었으면 좋겠다고, 니노가 제일 사랑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언제나 비참한 감정이나 폭력적인 감정을 현명하게 다스릴 줄 아는 균형 잡힌 성격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이상적인 모습을 되찾으려 애를 써봐도 임신 말기에 나는도무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지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에는지진이 내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알고 보니 내면 깊은 곳, 배 속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다. - P251

하지만 내 기분을 엉망으로 만든 것이 지진의 여파만은 아니었다. 묘사력이 뛰어난 릴라의 암시도 한몫했다. 언젠가부터 나는 길을 가면서 밀라노에서는 별 생각 없이 보고 지나쳤던 주사기가 길가에 떨어져 있는지 유심히 살피게 됐다. 동네 공원에서 주사기를 찾아내면분노가 뭉게구름처럼 피어나 당장 마르첼로와 내 동생들에게 쫓아가 한바탕 해대고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다. 결국 나는 가증스러운 말과 행동을 하고 말았다. 어느날 혹시 릴라에게 페페와 잔니 이야기를 했냐면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어머니에게 나는 쌀쌀맞게 쏘아붙였다.
"어머니, 리나는 그 애들에게 일자리를 줄 수 없어요. 마약쟁이 오빠만으로도 버겁다고요. 게다가 자기 아들도 걱정되겠죠. 우리 가족이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리나에게 떠넘길 수는 없어요."
어머니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단 한번도 마약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그제서야 나는 입에 담아서는안 될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 P252

그 시절 나는 너무나 우울해서 선의의 거짓말조차 할 수 없었다.
엘리사가 어머니에게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고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한 데다 페페와 잔니도 어머니에게 내가 무슨 경찰이라도되는 것처럼 자기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늘어놓게 하는 일이 다시는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나는 결국 거짓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릴라와 이야기를 했는데 릴라가페페와 잔니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내가 자신 없어 하는 것을 알아채고 우울하게 말했다.
"그래, 잘했다. 이제 그만 가보렴. 아이들을 돌봐야지."
나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났다. 며칠 동안 어머니는 더 불안해했다.
빨리 죽고 싶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갔는데 그날 어머니는 평소보다 편안해 보였다. - P261

"불안해하지 마. 모유 안 나올라."
모유 이야기는 확실히 내게 도움이 됐다. 나는 임마콜라타와 가까이 있어야만 젖이 잘 나오는 것처럼 요람 옆에 꼭 붙어 앉았다. 여성의 몸이란 무엇인가. 배 속에 있을 때 아이에게 영양분을 주었는데태어난 후에도 아이는 여전히 내 가슴에서 영양분을 취하고 있지 않은가.
나에게도 어머니 배 속에 있던 시절과 어머니의 가슴에서 젖을 빨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어머니의 가슴은 내 가슴만큼이나 컸다. 아니 어쩌면 더 클 수도 있다. 어머니가 아프기 전까지만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가슴을 두고 야한 말을 하곤 했다. 나는 어머니가 브래지어를 푼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젊었을 때도 늙었 - P276

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는 아픈 다리 때문에 자기 몸에 자신이 없었다. 항상 몸을 감추려고만 했다. 그러면서도 포도주 한 잔이면 아버지 못지않은 야한 말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면서 아버지의 외설적인 성향을 자극했다. 순전히 뻔뻔스럽게 연기하는 것이었다. 다시 전화벨이 울리기에 나는 달려갔다. 또 릴라였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퉁명스러웠다.
"여기 문제가 좀 있어, 레누."
"상태가 안 좋아지셨어?"
"아니, 의사들은 침착해. 그런데 마르첼로가 와서 미친 짓을 하고있어" - P277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관심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머니는 자기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5세 때로 돌아가는가하면 어느새 12세 때로, 그러고는 14세 때로 미끄러져 들어가 그 시절 자신이 겪었던 일과 친구들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어느 날아침 어머니는 내게 사투리로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단다. 나는 항상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내 차례가 될 거라고는 한 번도생각해본 적이 없단다. 지금도 도무지 믿기지 않는구나."
한번은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웃음을 터뜨리더니 내게 속삭였다.
"아이에게 세례를 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다. 다 부질없는 짓이야 이제 죽으면 나도 한낱 조그만 조각으로 부서져 버리겠지."
느릿느릿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나는 그제야 어머니가 가장 사랑하는 자식은 나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다. 어머니는 나와 작별인사를 할 때면 먼 옛날 내가 어머니 배 속에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어머니가 내 안에 쏙 들어와 계속 남고 싶다는 듯이 내 품에 꼭 안겼다. 어머니가 건강할 때는 어머니의 몸이 내 몸에 닿는 것이 싫었지만 지금은 좋았다. - P286

가끔 나를 다정하게 대해줄 때도있었지만 아버지는 대개 내 일에 무심했다. 어쩌다 어머니와 싸울때 내 편을 들어준 적이 있는 정도였다.
아버지와는 항상 피상적인 관계만을 유지했을 뿐이었다. 어머니는 필요에 따라서 아버지에게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고 박탈하기도했다. 그런데 내 인생에 이래라저래라 참견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특히 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아버지를 주변부로 내몰았다. 그런 아내가 기력을 잃자 이제 아버지는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랐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인사하면 아버지는 내 인사를 받아주면서 말했다.
"네가 어머니와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나가서 담배나 한 대 피우고오마."
가끔 이토록 평범한 아버지가 그 험한 나폴리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직장에서도 동네에서도 하물며 집에서조차 말이다. - P287

카르멘이나 알폰소와 보내는 아침시간은 기억에 남고 흥미로웠다. 두 친구와 있다 보면 몰락을 앞둔 어머니의 고향과 릴라의 영향아래 발전하고 있는 고향이 서로 가까워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카르멘에게 릴라가 내 어머니를 위해 한 일을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만족스러워하면서 말했다.
‘누가 리나를 막을 수 있겠어."
카르멘은 릴라에게 무슨 신통한 능력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했다.
어머니가 진료를 받을 동안 알폰소와 함께 깨끗한 병원 복도에서15분 남짓한 시간을 보내면서 나는 더 많은 사실을 알게 됐다. 알폰소도 언제나처럼 릴라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는 데 열을 올렸다. 내가 충격을 받은 것은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가감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는 내게 전도유망한 일을 가르쳐줬어." - P289

알폰소가 말했다.
"리나가 없었으면 나는 뭐가 됐을까. 아마 보잘것없는 존재가 됐을 거야. 평생 성취감을 맛보지 못했을 거야. 그저 살아 숨 쉬는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1019알폰소는 릴라와 마리사를 비교했다.
"나는 마리사와 헤어졌어. 어차피 마리사는 마음 내키는 대로 바람을 피우고 다녔으니까. 자기 아이들에게 내 성을 물려주었는데도내게 화가 나 있었어.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나를 괴롭혀. 내 얼굴에 수없이 침을 뱉었어. 마리사는 내가 자기를 속였대."
알폰소가 변명했다.
"속이다니, 레누. 너는 지성인이니까 나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제일 크게 속은 사람은 바로 나야. 나 자신에게 속았거든. 리나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평생 그렇게 살다 죽었을 거야."
알폰소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 P290

"리나가 내게 준 최고의 선물은 내가 명확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게 해준 일이야. 리나는 내가 여자의 맨발을 스칠 땐 아무것도 느낄수 없지만 남자의 맨발을 만지고 싶은 욕망에 죽을 것 같다고 말할수 있게 해줬어. 그의 손을 쓰다듬고 손톱깎이로 그의 손톱을 다듬어주고 거뭇한 여드름을 짜주고 싶다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무도회장에서 그에게 왈츠를 줄 알면 내게 춤을 청해 달라고, 내게 얼마나 리드를 잘 하는지 보여 달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줬어."
알폰소는 머나먼 과거 이야기를 꺼냈다.
"너랑 리나가 우리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인형을 돌려달라고 했던 일을 기억해? 그때 아버지가 나를 부르면서 비아냥댔지. ‘알폰소! 네가 인형을 가져간 게냐?‘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던 건 내가 가 - P290

문의 수치였기 때문이었어. 내가 누나 인형을 가지고 놀고 어머니의목걸이를 하고 다녔거든."
알폰소는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자기의 정체성에 대해 누군가 말할 대상이 필요한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어.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과도 달랐지. 나는 속으로 생각하곤 했어. ‘내안에는 뭔가 다른 것이 있어. 이름조차 없는 어떠한 존재가 내 혈관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어. 하지만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어. 무엇보다도 그 존재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어. 그러다 리나가내게 억지로 리나 모습의 일부를 취하게 한 거야. 달리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리나가 어떤지 잘 알잖아. 리나는 이렇게 말했어.
‘이것부터 한번 해봐.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섞이기 시작했어. 정말 재미있었어. 이제 나는 예전의 나도 아니고 리나도 아니야. 조금씩 뚜렷한 형태를 갖춰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거야." - P291

람이알폰소는 내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어 기뻐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우리 사이에 새로운 신뢰 관계가 형성됐다. 학창시절 집까지 함께 걸어오면서 생겼던 신뢰와는 또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카르멘과도 더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그러다 카르멘과 알폰소둘다 각자 표현은 다르게 했지만 내게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는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두 사건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두번 다 마르첼로가 병원에 왔을 때였다.
내 동생 엘리사와 조카 실비오는 평소 도메니코라는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병원에 왔다. 도메니코는 두 모자를 병원에 데려다주고 가는 길에 아버지를 동네까지 태워다주곤 했다. - P291

하지만 명단의 일 순위는 누가 뭐래도 마르첼로였다. 알폰소 말로는 자기를 가장 증오하는 인간은 마르첼로라고 했다.
알폰소는 만족감과 불안감이 뒤섞인 말투로 말했다.
"마르첼로는 나 때문에 미켈레가 미친 거라고 생각해."
알폰소는 키득거렸다.
"리나는 내가 자기를 닮아가도록 나를 유도했어. 내가 자기를 닮으려고 애쓰는 게 좋았던 거야. 내가 자신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 왜곡하는지 보는 게 좋았던거야. 그 왜곡이 미켈레에게 끼친 영향도마음에 들었을 테고, 사실 나도 그래."
알폰소는 말을 멈추고 내게 물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나는 알폰소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서 임마에게 젖을 먹였다. 알폰소와 카르멘은 내가 나폴리로 이사 와서 우리가 가끔 만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둘은 내가 고향에 완전히 동화되기를 원했다. 내가 수호신처럼 릴라를 보좌해주기를 바랐다. 그들은 나와 릴라에게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면서 자기들을 언제나 곤경 - P293

에서 구해주는 신처럼 행동해달라는 무언의 압력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 나는 자신들의 일에 더 관여해주길 바라는 그들의 요청이 부당한 압박으로 느껴졌다. 릴라도 나름대로 내게 항상 그런 압력을행사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내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알폰소의 목소리에 동네 사람들에게 나를 자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것처럼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내 어머니의 힘겨운 목소리가 겹쳐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엄마를 품에 꼭 껴안고 바람을 막아주려고 포대기를 여몄다. - P294

릴라는 필요할 때마다 바로 나에게 달려와 주었다. 물론 카르멘이나 알폰소처럼 나를 병원에 데려다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데데와엘사가 열이 나서 학교에 못 가게 될 때마다(임마가 태어난 후 약 3주 동안은 날이 추운 데다 비까지 와서 아이들이 자주 아팠다) 기꺼이 나서주었다. 릴라는 엔초와 알폰소에게 회사를 맡기고 타소 가까지 올라와 세 아이를 돌봐주었다.
나는 릴라가 내 아이들을 돌봐주는 게 좋았다. 아이들이 릴라와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유익했다. 릴라는 데데와 엘사를 막내와 친해지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데데에게 책임감을 키워주고 엘사를 통제할 줄도 알았다. 미렐라처럼 아이가 울 때마다 젖꼭지를 입에 물리지 않고도 임마의 울음을 잠재울 줄도 알았다.
유일한 문제는 니노였다. 내가 혼자 있을 때는 항상 바쁜 니노가하필 릴라가 세 아이와 있을 때 기적적으로 시간을 내 나를 도와주러 집에 오기라도 할까봐 두려웠다.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속 깊은곳은 잠시도 편안하지 않았다. 릴라가 도착하면 나는 릴라에게 온갖당부를 늘어놓았고 병원 전화번호를 써주고 이웃집 안토넬라에게급할 때 연락을 달라고 부탁한 뒤 카포디몬테를 향해 달려갔다. - P295

하지만 그보다 더 끈질기게 나를 괴롭히는 두려움은 따로 있었다.
운전하면서 생각하다보면 그 일이야말로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이가장 큰 것 같았다. 그 일은 바로 니노가 집에 있을 때 릴라의 산통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나는 겁이 나 죽겠으면서도 분별력 있는 어른 흉내를 내는 데데와 그 틈을 타 뭐라도 훔쳐보려고릴라의 가방을 뒤지고 있는 엘사와 배고픔과 기저귀 때문에 생긴 발진으로 괴로워서 흐느껴 우는 엄마를 요람에 내버려두고 니노가 급히 릴라를 병원까지 데려다주는 장면을 상상했다.
실제로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니노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시간에 맞춰 30분 만에 집으로 돌아와 보니 릴라가 없었다. 산통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릴라는 사물이 진동하면서 형태가 망가지는 순간을 참지못했다. 릴라는 어떤 고통도 힘들어했고 언어가 의미를 잃고 공허해지는 순간을 끔찍해했다. 그런 릴라를 알기에 나는 릴라가 고통을잘 견뎌내기를 빌었다.  - P296

의사는 한층 더 격앙된 어조로 외쳤다.
"친구들끼리 있으니 하는 말이에요."
의사는 기분이 상했는지 갑자기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의사는 뭔가 어색한 듯한 진지한 태도로 우리가 정말 릴라를 좋아한다면 (물론 여기서 우리란 니노와 나를 말한다) 릴라가 정말 좋아하는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릴라를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춤추는 것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릴라의 불안한 머리가 그렇다.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릴라뿐만 아니라 릴라 주변에 있는 모든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거라고 했다. 의사는 그날 분만실에서 자연의 섭리에 반하는 투쟁, 즉 어머니와 아이의 끔찍한 싸움을 목격했다는말을 되풀이했다.
"정말이지 기분 나쁜 경험이었어요."
의사가 말했다.
그렇게 태어난 릴라의 피조물은 여자아이였다.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아들이 아니라 딸이 태어난 것이다. 내가 병원에 가자 릴라는정신을 잃을 정도로 지쳐 있었는데도 내게 자랑스럽게 자기 딸을 보여주었다. - P300

아이들이 태어나자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었다.
릴라와 나는 서로 통화도 하고 두 갓난아이를 데리고 함께 산책도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아이들 이야기를 끊임없이 나눴다. 적어도 우리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실제로도 서로의 아이에게 세심하게관심을 기울이면서 우리 관계는 예전보다 풍요롭고 완전해졌다. 우리는 한 아이의 건강과 질병이 다른 아이의 건강과 질병을 선명하게비추는 거울이라도 되는 것처럼 엄마와 눈치아를 모든 면에서 비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두 아이의 건강을 지키고 병에 걸릴위험을 없애기 위해 언제라도 행동할 수 있는 태세를 갖췄다. 이우리는 아이들을 건강하게 키우는 데 좋고 유용한 모든 정보를 공유했다. 누가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유아식을 발견하고 더 편한 기저귀를 찾고 기저귀 발진에 가장 효과 있는 로션을 찾는지 선의의경쟁을 벌였다. - P301

어머니는 릴라가 가진 힘과 마르첼로가 가진 힘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양쪽에 똑같은 압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어머니에게는 세상의 전부인 고향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식들의 안위를 보장받아 그저 행복할 뿐이었다.
어머니는 평화로운 기쁨 속에서 이틀을 더 버텼다. 나는 어머니가 사랑해 마지않는 데데를 어머니에게 데려갔다. 임마도 어머니 품에 안겨드렸다. 어머니는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던 엘사까지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00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예순인데 어머니는 얼굴이 쭈글쭈글한 반백의 노인이 다 돼 있었다. - P304

나는 처음으로 세월의 힘을 실감했다. 세월은 이제 나도 마흔의문턱으로 이끌고 있었다. 세월의 속도에 삶이 마모되고 죽음의 가능성도 구체화되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어머니에게 일어나는 일이라면 언젠가는 나에게도 일어날 거야.
피할 수 없어‘
임마가 태어난 지 두 달이 조금 지난 어느 날 아침 어머니가 내게가냘픈 소리로 말했다.
"레누, 이제 나는 정말로 행복하구나. 이제 내 걱정은 너밖에 없다.
하지만 너는 너니까. 너는 언제나 네가 원하는 대로 상황을 바로잡 - P304

았지.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
어머니는 그대로 잠이 든 후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머니는 그 상태로 며칠을 더 버텼다. 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임마와 함께 어머니 병동에 있는데 어머니의 고통스러운 숨소리가 멈추지 않았던 것이 기억난다. 그 소리는 병원에서 들리는 일상적인 소리의 일부가된 것 같았다. 아버지는 그 소리를 참지 못해 그날은 울면서 집에 계셨다.
엘리사는 실비오에게 바람을 쐐주러 뜰로 나갔고 내 남동생들은어머니 병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침대시트 밑으로 드러난 밋밋한 굴곡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울 만큼 거대했던 어머니가 이제는 거의 사라질 것같았다. 나는 어머니의 무게 때문에 평생을 거대한 바위에 눌린 벌레처럼 살아왔다. 나는 그런 어머니에게 보호와 억압을 동시에 받았다. 나는 이제 그만 어머니가 헐떡거리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 당장그렇게 되기를 빌었다. - P305

놀랍게도 내 바람은 현실이 됐다. 갑자기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나는 잠시 기다렸다. 일어나서 어머니 곁으로 다가갈 힘이 없었다.
그때 임마가 입술을 오물오물 빨면서 정적을 깨뜨렸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우리 둘, 그러니까 나와 잠결에도 아직자신이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느끼고 싶어 내 젖가슴을 열심히 찾는 내 아이는, 그 병든 공간에서 어머니가 남긴 것 가운데 유일하게건강하고 살아 숨 쉬는 것이었다.
마침 그날 나는 어머니가 20년도 더 지난 먼 옛날에 내게 선물해준 팔찌를 차고 있었다. 평소에는 시어머니 취향인 세련된 장신구를착용했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에 그 팔찌를 찬 것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어머니에게 받은 그 팔찌를 자주 찼다. - P305

나는 좀처럼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눈물 한 방울흘리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따른 고통은 오래갔다. 아니 사실아직도 그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어머니가 무디고 속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두려워했고 그런 어머니에게서 도망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머니의 장례식을 마치고 나니 갑작스럽게 불어온 거센 비바람에 주변을 둘러 봐도 피할 곳이 하나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몇 주 동안 밤낮 할 것 없이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어머니의 모습은 내 상상속에서 심지 없이 타오르는 수증기 같았다. - P306

어머니를 간호하던 때가 그리웠다. 그때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도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었다. 나는 내가 어렸을 적 젊었던 어머니와 좋았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때의 느낌을계속 간직하려 했다. 내 죄책감은 어머니를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나는 서랍에 어머니의 머리핀이며 손수건, 가위 등을 넣어두었지만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팔찌도 마찬가지였다. 임신 중에 엉덩이께의 통증이 재발해 임마를 낳고 나서도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은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 통증을 어머니가 내 몸에 남기고 간 유산처럼 키웠다.
어머니가 임종 직전에 내게 한 말("너는 너니까. 그러니 나는 너를 믿는다")도 오랫동안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타고난 - P306

내 성향과 내가 받아온 교육을 고려할 때 나라면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며 돌아가셨다. 이런 생각은 나의 내면에영향을 미쳤고 궁극적으로 내게 도움이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제대로 봤다는 사실을 증명해보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다시 나 자신을 열심히 돌보기 시작했다.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나는 지엽적인 정치적 현안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다섯 개의 정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싸움에 얽힌 음모에 관심이 가지 않았다. 그것은 니노의 전문 분야였다.
그 대신 나는 부패와 폭력 속에 표류하는 이탈리아의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예의 주시했다. 페미니즘 관련 서적도 꾸준히 읽었다. 두 번째 책의 성공에 힘입어 여성독자를 겨냥해서 새로 창간한 잡지에 기사를 제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새소설 작업이 꽤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밀라노 출판사가 믿게 하는 데가장 많은 기력을 쏟아부었다. - P307

니노는 그전에도 내게 아이들을 돌보고 장을 보고 음식을 해주고집안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해보라는 말을 했었다. 하지만나는 니노에게 과한 요구를 하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 않아 언제나필요 이상으로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고 싶지는 않다고 대답했었다.
평소 나는 내게 도움이 되는 일보다 니노가 좋아할 만한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게다가 나는 지난날 피에트로와 겪었던 문제가 우리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나는 니노의 예상을 뒤엎고 바로 좋다고 답했다.
"그래. 좋아. 최대한 빨리 누군가를 좀 구해줘."
순간 내가 내 어머니의 목소리로 말하는 것 같았다. 돌아가시기전의 가녀린 목소리가 아니라 전투력 충만하던 시기의 목소리 말이다. 돈이 무슨 상관이람. 나는 내 미래를 생각해야 했다. 여기서 내미래는 몇 달 내에 소설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한소설을 그 무엇도, 심지어 니노까지도 내가 내 일을 잘 해내는 것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 P311

나는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두 권의 전작은 내게 어느 정도의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여기에는 번역본 출간도 한몫했다. 하지만 얼마전부터는 인세가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집필할 소설의 선금으로 받은 돈과 아직 받지 못한 돈은 곧 바닥날 것이다. 늦은 밤까지 기사를써봤자 소정의 원고료를 받거나 그마저도 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러니 나는 결국 피에트로가 매달 꼬박꼬박 보내주는 돈과 니노가집 임대료와 공과금 명목으로 보태주는 돈으로 생활하고 있었다. 니노가 아이들과 내게 옷을 사 입으라고 종종 따로 돈을 줬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폴리로 이사 오면서 내가 겪게 된변화와 수많은 불편과 고통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 P312

그날 저녁 나는 최대한 빨리 경제적으로 자립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정기적으로 글을 쓰고 책을 내야 했다. 작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해야 했다.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것은 문학적인 소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의 미래 때문이었다. 니노가 과연 나와 내 딸들을 평생 보살펴줄까.
내가 약간이나마 (정말로 약간일 뿐이었다) 니노만 믿고 있을 수없다고 의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 때문에 특별히힘들지도 않았다. 예전에 니노가 나를 떠날까봐 두려워했던 감정과는 달랐다. 갑자기 시야가 확 좁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먼 미래를 생각하는 대신에 지금 당장 니노에게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은돈을 받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돈이 과연 내게 충분한지 결정을 내려야 했다. - P312

나는 여전히 니노를 사랑했다. 나는 그의 길고 호리호리한 몸매와논리 정연한 지성을 좋아했다. 나는 그가 이뤄내는 일의 성과로도그를 매우 존경했다.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니노의 재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발전해 많은 사람에게 각광받았다. 경제 위기와건축업, 금융업과 민영방송을 잠식한 비밀스러운 자본의 움직임을분석한 니노의 최근 글은 큰 호응을 얻었다. 시아버지 마음에 들었다는 글도 아마 이 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니노가 어딘지 거슬리기 시작했다. 예컨대 니노가 내전 시아버지가 다시 자기에게 호의를 보였다면서 좋아하는 모습에기분이 상했다. 니노가 언젠가부터 피에트로는 자기 아버지와 다르다고 말하기 시작한 것도 탐탁지 않았다. 니노는 피에트로가 오로지물려받은 이름과 공산당에 대한 미련한 집착 때문에 존중받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별 볼일 없는 교수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 아이로타야말로 진짜 교수이자 사회주의 좌파 투쟁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면서 헬레니즘 문명의 근본에 대해 그가 집필한 저서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 P313

니노가 시어머니에 대해 새삼 호감을 표현했을 때도 나는 상처를받았다. 니노는 계속해서 시어머니를 홍보 능력이 뛰어난 대단한 여자라고 칭송했다. 한마디로 니노는 권위 있는 사람들에게 인정받는데 민감했다. 하지만 그만한 권위가 없거나 지금은 권위가 없지만앞으로 권위 있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밀어내버리거나 때로는 질투심 때문에 그들을 모욕하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때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분위기가변하고 있었고 기존의 글과는 다른 종류의 글이 힘을 얻고 있었다.
이제 아무도 극단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 P313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하지.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그렇지만 엄마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잘 몰라. 그러니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마치 그게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전부 뒤엎자고 하지. 하지만 너는 선생님께 지금이미 존재하는 세계가 제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씀드리렴."
"어떻게?"
내가 물었다.
"법으로."
"판사들이야말로 통제해야 할 대상이라고 네 입으로 말했었잖아."
니노는 지난날 피에트로가 그랬던 것처럼 못마땅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들어가서 책이나 쓰도록 해."
니노가 말했다.
"나중에 우리 때문에 일하지 못했다고 하지 말고."
니노는 데데에게 권력 분할에 대해 강의하기 시작했다. 가만히 들어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 - P317

그제야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릴라와 사랑을 나눈 다음에 나타난 사내와 릴라와 사랑에 빠지기 전, 어린 시절 내가 사랑에 빠졌던 소년 사이에 분열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니노는 언제나 한 사람이었다. 나는 실바나의 몸을 범할 때 니노가 지은 표정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니노의 표정은 그의 아버지 도나토 사라토레의 표정과 똑같았다. 마론티 해변에서 내 처녀성을 빼앗을 때의표정이 아니라 빌라 아주머니의 부엌에서 침대 시트 아래로 손을 넣어 내 다리 사이를 만지던 때의 표정이었다.
외계인 따위는 없었다. 그저 지극히 추악한 인간이 있을 뿐이었다. 니노는 애초부터 자신이 그렇게도 되고 싶지 않아 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실바나의 엉덩이에 리드미컬하게 배를 부딪치면서 친절하게도 그녀가 쾌락을 느낄 수 있도록 애쓰던 그 순간, 니노는 진심이었다. 잘못을 저지른 후에 내게 후회하면서 미안하다고 용서해달라고 애원하고 나를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진심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니노는 애초부터 그런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위로가 되어주지는 않았다. 나는 끔찍한 공포가 희미해지기는커녕 내 생각 속에서 확실한 안식처를 찾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참에 무릎 아래로 뜨끈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벌거벗은 임마가 내 무릎에 오줌을 싼 것이다. - P331

내가 대답을 피하자 릴라는 나를 몰아세웠다. 릴라는 이런 식으로내 삶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겐 다른 운명이 있다고 했다. 이렇게 살다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나 자신을 잃어버릴 거라고 했다.
나는 릴라의 목소리가 쌀쌀맞아지는 것을 느꼈다. 나를 릴라가 말리기 위해서 오랫동안 입을 다물어 왔던, 내가 알고 싶어 하던 일까지 말할 준비가 된 것을 직감했다.
나는 두려웠다. 하지만 그동안 몇 번이나 릴라에게서 진실을 들을기회를 엿보지 않았던가. 릴라에게 그 비밀에 대해 듣는 것도 지금릴라에게 달려온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던가.
"내게 할 말이 있으면 해."
내가 속삭이듯 말했다. - P341

그제야 릴라는 마음을 먹었다. 릴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했지만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릴라는 니노가 자기를 여러 번 찾았다고 했다. 나와 만나기 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자기랑 같이 살자고 청했다고 했다. 둘이 함께 병원에 내 어머니를 모시고 갔을 때는 평소보다 더 끈질기게 매달렸다고 했다. 릴라에 따르면 의사가 어머니를진찰하고 둘이 대기실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니노는 릴라에게나와 함께 사는 이유는 오직 릴라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였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나좀 봐."
릴라가 속삭였다.
"이런 말을 하는 내가 못됐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보다 훨씬 못된 건 니노야 니노가 가진 최악의 악덕은 그가 얄팍한 인간이라는거야." - P341

그는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가끔은 돈에 복종하고 가끔은 존경심에 복종하고 때에 따라서는내 생각을 따르지."
안토니오가 속삭였다.
"상대방의 배신은 말이야. 적절한 시기에 알게 되지 않으면 알아봤자 소용이 없어. 사랑에 빠져 있을 때는 뭐든 다 용서하게 되거든.
배신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애정이 조금이라도 식어야만 해."
안토니오는 그런 식으로 눈먼 사랑에 대한 고통스러운 문장을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안토니오는 그에 대한 예로 지난날 솔라라 형제의 명령에 따라 니노와 릴라를 미행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자기는 솔라라 형제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었다고 안토니오는 당당하게 말했다.
안토니오는 릴라를 미켈레에게 갖다 바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릴라를 곤란한 상황에서 구출해달라고 엔초를 불렀다. 안토니오는 그때 자기가 니노를 두들겨 팼다는 이야기도 했다.
안토니오가 중얼거렸다. - P344

"내가 그렇게 한 건 무엇보다도 네가 나 아닌 그 자식을 사랑했기때문이야. 또 그 형편없는 자식이 리나에게 돌아가면 리나가 그 자식한테 정이 들어 평생 신세를 망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안토니오가 결론을 맺었다.
"내 말 들어봐. 그때도 말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리나는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야. 사랑에 빠지면 눈만 머는 것이 아니라 귀도 멀게 되거든."
나는 기가막혀서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니노가 그날 밤 리나한테 돌아가려 했다는 사실을 지금껏 한 번도 리나에게 알려주지 않은 거야?"
"말은 해줬어야지."
"왜? 일단 내 머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면 나는 그렇게 하고는 다시는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해봤자 골치 아픈 일만 일어날 뿐이야."
- P345

안토니오는 그새 정말 현명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안토니오가 니노를 두들겨 패서 릴라에게서 억지로 떼어놓지 않았다면 릴라와 니노의 사랑이 얼마간 더 지속됐을 거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평생 헤어지지 않고 릴라도 니노도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은 머리에서 바로 지워버렸다. 가능성이 없을 뿐 아니라 견디기 힘든 생각이었다. 나는 성마른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날 안토니오는 자기 나름대로 판단해 릴라를 구원했고 이제 릴라는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를 보낸 것이다.
나는 안토니오를 바라보면서 여자들의 보호자가 나타나셨다며 대놓고 비아냥댔다. - P345

나는 피렌체에도 안토니오가 나타났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내가한창 불안정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을 때 안토니오가 나타나 그울퉁불퉁한 손으로 나 대신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생각했다. 수년 전 릴라 대신 결단을 내렸던 때처럼 말이다. 나는 심술궂게 안토니오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은 무슨 명령을 받았어?"
"리나는 나를 여기로 보내기 전에 그 얼간이의 면상을 박살내지말라고 했어. 하지만 예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싶어."
"너는 믿을만한 사람이 못 되는구나."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무슨뜻이야?"
"상황이 복잡해, 레누. 너는 뒤로 빠져 있어. 만약 네가 사라토레아들 녀석이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달라고 하면 내가 그렇게해줄게." - P346

나는 안토니오의 어설픈 진지함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소년 시절 동네에서 배운 말투였다. 강인하고 과묵한 사내다운 말투였다. 본래 수줍고 겁 많은 안토니오가 그렇게 되기까지얼마나 노력했을까. 하지만 이제 그 말투는 완전히 안토니오의 것이되었다. 다른 식으로 말하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예전과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표준어로 말하려고 애를 쓰다보니 힘들어서 외국어 억양이 나온다는 정도일 것이다.
내가 웃자 안토니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창문의 까만 유리를 바라보면서 속삭였다.
"웃지마."
나는 날씨가 추운데도 안토니오의 이마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 P346

내게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에 수치스러워서 땀까지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안토니오가 말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다는 거 알아. 나는 이탈리아어보다 독일어가더 편해."
나는 안토니오의 체취를 느꼈다. 먼 옛날 저수지에서 밀회를 즐길때와 똑같은 체취였다. 내가 사과했다.
‘난 지금 이 상황 때문에 웃은 거야. 너는 평생 니노를 죽이고 싶어했는데 나는 니노가 지금 이 순간 집에 오면 네게 그 자식을 죽여버리라고 할 테니까. 나는 절망해서 웃는 거야. 평생 이토록 수치스러웠던 적이 없어.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너는 상상조차 못할 거야. 지금 이 순간 너무 아파 기절할 것 같아서 웃은 거야." - P347

실제로 나는 힘이 없었다. 내 마음은 이미 죽어버렸다. 갑자기 다른 사람이 아닌 안토니오를 내게 보내준릴라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꼈다. 안토니오는 그 순간 나에 대한 애정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유일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의 깡마른 몸과 큼지막한 뼈, 짙은 눈썹과 투박한 얼굴은 내게 너무나 친숙했다. 나는 그런 안토니오에게 혐오감도 두려움도 느끼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저수지에 있을 때면 추워도 춥지 않았지. 몸이 떨려. 네게 가까이가도 될까?"
안토니오는 나를 불안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토니오의 무릎 위에앉았다.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 닿을까봐 두려워 팔을 벌려 소파의 양끝으로 떨구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몸을 기댔다.
안토니오의 목과 어깨 사이에 얼굴을 기댔다.  - P347

"맞아. 하지만 나는 지금껏 그 누구도 그때 너를 원했던 것처럼 간절히 원하지 않았어. 니노마저도."
나는 오랫동안 말을 했다. 내가 안토니오에게 한 말은 진실이었다. 그 순간의 진실이자 먼 옛날 저수지에서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진실이었다. 안토니오는 내게 처음으로 성적인 흥분을 경험하게 해준 사람이었다. 안토니오 덕분에 배 속의 구덩이가 뜨거워졌다가 열리기도 했고 액체가 되어 뜨거운 나른함을 느끼기도 했다. 프랑코와도 피에트로와도 니노와도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도중에 발을헛디뎌 결국은 한 번도 그런 만족감에 도달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치 않은 대상에 대한 기다림이기 때문이었다. 충족하기 가장 어려운 쾌락에 대한 희망이기 때문이었다. 안토니오의 입에서 나는 맛과그의 욕구가 내뿜는 냄새와 그의 손과 허벅지 사이에 꼿꼿이 선 그의 커다란 성기는 비교 불가능한 ‘이전‘을 상징했다. ‘이후‘는 결코 - P348

통조림 공장 폐허에 숨어서 보내던 오후 시간과 비교할 수 없었다.
비록 삽입도 하지 않고 오르가슴을 느끼지도 못할 때가 많았지만 말이다.
나는 표준어로 안토니오에게 복잡한 이야기를 했다. 안토니오에게라기보다는 내가 저지르려는 일에 대해 나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내 행동이 안토니오에게 믿음을 주었는지 그는 만족스러워했다. 안토니오는 나를 껴안고 처음에는 어깨에 다음에는 목에 마침내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평생 다시는 그런 사랑을 하지 못했다.
그날의 사랑은 20년도 지난 예전의 저수지와 타소 가의 방과 소파와 바닥과 침대를 이어주었다. 그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쓸어가버렸다. 우리를 갈라놓은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나라는 사람을구성하는 모든 것을, 그라는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 안토니오는 때로는 부드러웠고 때로는 거칠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분노와 불안감 속에서 그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고 그도마찬가지였다. 규율을 어기고 싶은 욕망이 내 마음속에 그토록 강하게 존재했는지 나는 미처 몰랐었다. 마지막에 안토니오는 경이로움에 정신을 잃었다. 나도 그랬다. - P349

농담삼아 한 말인데 안토니오는 내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안토니오는 사투리로 말했다.
"나는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어. 내 아내는 ‘지금 이 순간 전‘에는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모호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안토니오는 자기도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상적인 시간의흐름 밖에 또 다른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기 나름대로 내게 설명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인 현재의 시간이아니라 20년 전에 해당하는 어느 날 중에서도 아주 짧은 시간을 살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키스하고 속삭였다.
"고마워."
나는 안토니오에게 우리가 격정적인 섹스를 하게 된 각자의 잔혹한 이유를 눈감아줘서 고맙다고 했다. 우리의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필요성만을 봐줘서 고맙다고 했다. - P350

나는 자랑스러웠다. 순식간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내 글에 대해 어린아이처럼 열광적으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나는 헤프게 웃으며 내 글에 대한 칭찬을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에 편집장을 집요하게 심문했다. 나는 이내 그가 내 글을 일종의자서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폴리에서 가장 빈곤하고 가장 폭력적인 곳에서 겪은 내 경험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내가 고향에 돌아가서 좋지않은 영향을 받을까봐 걱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결국 내게 도움이 되었음을 인정해야겠다고 했다. 나는실은 그 책을 수년 전 피렌체에서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거친 소설이야."
편집장이 강조했다.
"남성적인 소설이지.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섬세한 측면도 있어. 자네 정말 장족의 발전을 했어."
편집장은 기획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 P359

"나폴리 공기가 자네 재능을 꽃피우게 해주었나보군."
전화를 끊고 나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기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나는 특히 아이들에게 다정해졌다. 출판사에서 남은 계약금을 지급했기 때문에 주머니 사정도 나아졌다. 갑자기 나폴리, 특히 고향 동네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존재 정도가 아니라 좋은 글을 쓰기위해 필수적인 내 삶의 중요한 일부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에대한 불신으로 가득 차 있던 감정이 순식간에 기분 좋은 만족감으로도약했다. 파국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던 일로 되레 문학적 수준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이는 내 글의 문화적·정치적 성향을 특징 짓는결정적인 선택이 되었다.
편집장은 이러한 사실을 권위 있는 말로 인정해주었다.
"출발점으로 돌아간 것이 자네에게는 일보 전진의 계기가 되었군."
물론 나는 편집장에게 피렌체에서 그 책을 썼다는 사실을 말하지않았다. 나폴리로 돌아간 것이 그 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 P360

스토리상의 전환점도 고향에서 일어났다.
나의 전 시어머니에게는 그런 사실을 이해할 만한 감수성이 없었고그렇기 때문에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해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 모두 그랬다. 니노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다른 여자들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명단에 있는 여자들가운데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의미 있는 것은 릴라도 내 글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릴라는 내 원고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혹독하게 비판했다. 내 원고를 좋지 않게 평가해 내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게 되자 릴라는 그녀로서는 드물게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나는릴라가 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오히려 릴라가 틀려서 기뻤다. 어린시절부터 나는 릴라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이제야 짐을 내려놓은 기분이 들었다. - P361

드디어 나는 나고 릴라는 릴라라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내게는 이제 릴라의 권위가 필요하지 않았다. 나만의 권위가 생겼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 강해졌음을 느꼈다. 이제는 내가 출신의 피해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출신을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출신에 어떠한 형태를 부여하고 나와 릴라를 비롯한 모두를 위해서 우리의 출신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날 나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던 것이 이제는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 해줄 바탕이 되었다.
1982년 어느 날 아침 나는 릴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좋아. 너희 집 위층을 얻을게. 고향으로 돌아갈게." - P361

그때는 내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행복으로 충만했던 시기였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나의 친구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뚜렷하게 느꼈다. 나는 릴라의 장점과 단점을 있는 그대로 좋아했다. 릴라가 세상에 내놓은 그 작은 생명체에게도 똑같은 애정을느꼈다. 티나는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뭐든 단숨에 익혔고 어휘력이풍부한 데다 놀라울 정도로 손재주가 뛰어났다. 나는 생각했다.
‘티나는 릴라랑 똑같네. 엔초는 별로 닮지 않았어. 눈을 크게 뜨는모습이나 가늘게 뜨는 모습도 그렇고 귓불이 없는 것까지 릴라를 똑닮았어.‘
나는 차마 내가 내 친딸보다 티나에게 더 이끌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릴라가 자신의 능력을 다 뽐내자 나는 컴퓨터의 놀라운 기능에 대해 열렬한 반응을 보이고 엄마가 괴로워할 거라는 것을알면서도 티나에게 칭찬을 퍼부었다.
"우리 티나 정말 똑똑하네. 아유, 예뻐라. 말도 잘하고. 아는 것도많네."
나는 무엇보다도 내 책이 출간될 거라는 소식으로 불편해진 릴라의 마음이 누그러지기를 바랐기에 릴라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는 내 세 딸과 릴라 딸의 미래가 밝을 거라고 했다. - P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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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즈음 나는 처음으로 릴라에게 자신의 행동반경에 대해 세운 엄격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세월이 흐를수록 릴라는 고향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고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유년시절을 함께한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때만 관심을 보였다. 내가알기로는 컴퓨터에 관한 일까지도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관심을 가졌다. 엔초는 때때로 밀라노나 토리노까지 출장을 다니곤 했지만 릴 - P102

라는 달랐다. 릴라는 절대로 나폴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여행의 참맛에 눈뜬 이후부터 나는 릴라의 이러한 폐쇄성에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기회만 있으면 해외로 나가려고 했다. 니노와 함께나갈 수 있을 때면 더 그랬다. 내 책을 출간한 소규모 독일 출판사가서독과 오스트리아 홍보 여행을 기획했을 때 니노는 모든 일을 제쳐놓고 홍보 기간 내내 쾌활하고 말 잘 듣는 운전기사 역할을 해주었다. 우리는 보름 동안 서독과 오스트리아 방방곡곡을 누볐다. 지역마다 색다른 풍경이 눈부신 색채의 그림처럼 우리 곁에 펼쳐졌다. 이동 중 마주치는 산과 호수, 도시와 웅장한 건축물이 그 순간 오직 우리가 한 쌍의 연인으로 그곳에 함께 있다는 사실을 더욱 즐겁게 해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모든 것이 제 나름대로 우리의행복을 더 완벽하게 만들어주었다. 가끔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감각이되돌아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현실이 그 당시 내가 매일 저녁 극단적인 관중 앞에서 늘어놓던 암울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와 일치한다는 것을 깨닫고 두려움에 휩싸이곤 했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는신나는 모험담처럼 서로의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 P103

미지의 외국 도시에서 내 책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보면 마지막에는 언제나 그 당시 엄중했던 정치적 분위기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고나는 상식적인 대답으로 사태를 모면하곤했다. 내대답의 골자는거의 ‘탄압‘이었다. 나는 소설가라면 상상력이 풍부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거대한 증기 롤러를 예로 들었다. 나는 어디든 예외는 없다고 말했다. 거대한 증기 롤러가 국경을 지나 모든 것을 정돈하며동쪽에서 서쪽으로 진격하는데 그것이 지나가고 나면 노동자는 일을 하고 실업자는 쇠약해지고 굶주린 자는 굶어죽고 지식인은 허풍 - P104

을 떨고 흑인은 흑인답게 행동하고 여자는 여자답게 행동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때로는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더 진정성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럴 때면 나는 파스콸레 이야기를 했다. 나는 청중들에게 파스콸레가 유년시절부터도피생활을 선택하기까지 겪은 그의 비극적인 인생을 시기별로 들려주었다. 내게는 그보다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능력이 없었다.
내 어휘는 10년 전에 습득한 상태 그대로였고 그 표현들은 고향 동네에서 일어난 사건과 연결될 때야 비로소 의미를 얻었다. 그렇지않을 때면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하게 예측할 수 있는 진부한 표현으로 끝날 뿐이었다. - P105

순간 시어머니의 안색이 창백해지면서 말을 잃었다. 시어머니는날카로운 표정으로 뻣뻣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거의 귓속말에 가까운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정말 못돼먹은여자라고 했다. 나 같은 사람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사람을 포기하는 것이 무엇인지 절대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했다. 남의 비위를 잘 맞추고 유순해 보이는 내 겉모습 뒤에 뭐든 다 차지하려는 천박한 욕망을 감추고 있다고 했다.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책을 많이 읽어도 그 천박한 욕망은 다스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 P126

기차에 오르고 나서야 나는 내가 돌연히 목적지를 바꾼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내 마음은 여전히 니노를 사랑하는마음 때문에 괴로웠고 그렇기 때문에 니노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었던 것이다. 여성의 독립에 대한 글을 쓰고 여기저기에이야기하고 다녔는데도, 나는 니노의 육체와 목소리와 지성 없이 살수 없었다. 인정하기는 끔찍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원했다. 나는내 자식보다 니노를 더 사랑했다.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다시는보지 않을 생각에 나는 고통스럽게 시들어갔다. 교양 있고 자유로운여인은 꽃잎을 잃고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여인은 유부남의 정부인 여인에게서, 유부남의정부인 여인은 광분한 창녀에게서 멀어져갔다. 우리는 모두 다른 방향으로 뿔뿔이 흩날릴 참이었다 - P128

밀라노에 가까워질수록 릴라와 멀어진 지금, 나라는 인간의 정체성의 기준이 될 사람은 니노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게는스스로 자신의 기준이 될 만한 능력이 없었다. 니노가 없으면 고향동네를 넘어 세계적으로 나의 역량을 뻗어나갈 수 있는 핵심마저 사라져버렸다. 니노가 없는 나는 그저 한 무더기의 쓰레기에 지나지않았다.
나는 지칠 대로 지치고 겁에 질려 마리아로사의 집에 도착했다. - P128

우선 나는 먼지가 쌓이고 지저분하고 잡동사니가 가득한 방을 정리해보려 했다. 나와 아이들을 위한 잠자리를 준비하고 필요한 물품목록을 만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뭔가 정리해보려는의욕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산만한 데다 아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처음 며칠 동안은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니노가 너무나 그리워서 나는 밀라노에 도착하자마자 그에게 연락을 하고 말았다. 니노는 마리아로사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 후로는 끈질기게전화를 걸어왔다. 니노와의 통화는 언제나 다툼으로 끝났다.
처음 니노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다. 가끔은 못 이기는 척 그의 말을 따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나도 예전에 피렌체에 있을 때 피에트로가 집으로돌아와 그와 같은 지붕 아래 있었다는 사실을 니노에게 숨겼지 않은가‘ - P130

나는 자기모멸감으로 가득 찬 나날을 보냈다. 머리에서 니노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는 마지못해 글을 쓰고 책임감 때문에 어쩔수 없이 출장을 떠났다가 어쩔 수 없이 돌아오고 혼자 절망하고 망가져갔다.
나는 릴라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나는 내 아이들을 잊고 있었다.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도 않고 학교에도 보내지 않은 채 방치하고 있었다.
데데와 엘사는 새로운 환경에 빠져들었다. 아이들은 자기들 고모를 잘 몰랐지만 마리아로사가 분출하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동경했다.
산탐브로지오 가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은 항구처럼 붐볐다. 마리아로사는 편견에 사로잡히지 않은 수녀나 친자매 같은 태도로 집에 찾아온 모든 사람을 받아주었다. 지저분하거나 정신병이 있거나범죄를 저질렀거나 마약에 중독된 사람도 개의치 않았다. 특별히 할일이 없었던 아이들은 늦은 밤까지 호기심 어린 태도로 집안 곳곳을 누볐다. - P131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난다. 이제 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만큼 사랑과 섹스는 비이성적이고잔혹한 것이니까.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나는 그런 니노의 고백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엘레오노라가 임신 7개월이라는 사실은 니노가 나에 대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실수처럼 느껴졌다.
문득 릴라가 떠올랐다. 릴라가 마치 내게 해야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카르멘과 불안한 시선을 주고받던 순간이 생각났다. 안토니오는엘레오노라의 임신을 알고 있었던 걸까. 릴라와 카르멘도 이미 그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렇다면 릴라는 왜 내게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자기에게 감히 내 고통의 강약을 조절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걸까. - P139

가슴속에서 뭔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니노가 불안에 떨면서 엘레오노라가 임신한 덕분에 그녀가 안정을 되찾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녀와 헤어지기가 더 힘들어졌다고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변명을 늘어놓는 동안 나는 너무나 괴로워서 팔짱을 낀채몸을 앞으로 굽혔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말을 할 수도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다.
나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파트에는 프랑코밖에 없었다.
정신 나간 여자도, 비탄에 빠진 여자도, 노래를 흥얼거리는 여자도,
병든 여자도 없었다. 마리아로사는 내가 니노와 편히 이야기할 수있게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방문을 열고 가냘픈 소리로 피사 대학 시절 내 남자 친구를 불렀다. 프랑코는 즉시 내게달려왔고 나는 손으로 니노를 가리켰다. 나는 숨을 헐떡이면서 말했다. - P139

내가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은 그로부터 몇 주 후에 일어난 사건 때문이었다. 그때 마리아로사는 보르도에 일정이 있어 얼마간 집을 비우게 됐다. 떠나기 전에 마리아로사는 나를 따로 불러 프랑코에 대한 이야기를 다소 혼란스럽게 늘어놓았다. 마리아로사는 내게 자기가 없는 동안 프랑코를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가 몹시 우울한 상태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지금껏 때때로 느낌이왔다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리곤 했던 일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와의 관계에서만큼은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프랑코를 사랑했다. 마리아로사는 그의 어머니이자 누나이자연인이었다. 힘들어 보이는 마리아로사의 표정과 야윈 몸은 프랑코에 대한 걱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너무 약해져언젠가는 부서져버릴 거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 P144

밀라노 출판사와 맺은 새로운 계약과 계약을 지키기 위해 써야 할새 책에 대한 고민이며 나폴리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과 니노에 대한 걱정을 털어놓았다. 프랑코는 내 문제를 일반화하거나 피상적인 말로 위로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직설적으로 말했다.
"니노가 네 자신보다 소중하다면 말이야."
유난히도 멍해 보이던 어느 날 저녁 프랑코가 말했다.
있는 그대로 그를 받아들여 유부남에 애까지 딸린 데다 평생 여기저기 씨를 뿌리고 돌아다니겠지만 말이야. 비열한 인간인 데다 앞으로 얼마나 더 비열한 짓을 저지를지 모르지만 있는 그대로 그를받아들이도록 해. 아! 레나, 레누차・・・ - P145

받아프랑코는 다정스레 속삭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갑자기웃음을 터뜨리더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프랑코는 암울한 목소리로 자기는 사랑이란 아무런 두려움이나 혐오감 없이 제정신으로돌아올 수 있게 될 때야 비로소 완전히 끝나는 거라고 생각한다고했다. 그러고는 마치 발밑에 바닥이 진짜로 있다는 것을 확인이라도하고 싶은 것처럼 발을 질질 끌면서 방에서 나갔다. 그 순간 왜 파스콸레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배경으로 보나 문화적 배경으로 보나 정치적 성향으로 보나 프랑코와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잠시 내 소꿉친구가 그를 집어삼킨 어둠에서 다시 솟아난다면 꼭 지금의 프랑코처럼 걸어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 P145

어나는 불을 켰다.
베개와 침대 시트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검붉은 얼룩이프랑코의 발까지 길게 내려왔다. 죽음이란 이토록 혐오스러운 것이다. 여기서는 그저 내가 그토록 속속들이 알고 있던 그 육체가, 한때행복과 생기가 넘치던 그 육체가 그토록 많은 책을 읽고 그토록 많은 경험을 했던 그 육체가 생명력을 잃고 쓰러져 있는 광경에 연민과 혐오감을 동시에 느꼈다고만 해두자.
프랑코는 정치적 소양이 풍부하고 이타적인 취지와 희망을 가졌으며 언제나 정중했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였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끔찍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 것이었다. 프랑코는 자기 자신과 자신을 감싸고 있는 피부와 감정, 말과 생각 그리고 엉망이 되어버린 주변 세상을 증오했음이 분명했다. - P146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 모든 추억과 언어, 모든 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을 그토록 잔혹한 방식으로 제거해버릴 수 있단 말인가.
그 후 며칠 동안 파스콸레와 카르멘의 어머니 주세피나 아주머니 생각이 났다. 주세피나 아주머니도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견디지 못했다. 자기 몫으로 남은 보잘것없는 삶의 파편을 견디지 못하게 됐다. 하지만 주세피나 아주머니만 해도 우리보다 전 세대에 속했다.
프랑코는 달랐다. 그는 나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러한 지친 퇴장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정도가 아니라 나를뒤흔들어 놓았다. 나는 오랫동안 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메모를생각했다. 그 글은 내게 남긴 것이었다. 프랑코는 아이들이 자신의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바꾸어말하면 나는 방에 들어와도 되고 자신의 모습을 봐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직도 나는 그가 남긴 중의적 명령에 대해 생각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명확한 명령이었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인 명령이었다. - P147

한 무리의 열혈 활동가들이 힘없는 주먹을 쥐고 참석했던 장례식이 끝난 후 (그때까지만 해도 프랑코는 존경받는 유명 인사였다)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녀 곁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프랑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는 내가 다가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마리아로사는 갈수록 기력이 쇠해졌다. 병적인 불신의 흔적이 외모에도 영향을 미쳐 생기 넘치던 눈빛마저 흐려졌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서서히 텅 비어갔다. 마리아로사는 이제 나를친동생처럼 대하지 않았고 갈수록 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였다. - P147

하지만 나는 매일 온갖 어려움에 만신창이가 됐고 마음속 균열은커져만 갔다. 그동안 나폴리의 상황은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이도시의 고질병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타소 가는 살기 불편했다.
니노는 내게 하얀색 중고 르노4를 마련해주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차가 마음에 들었지만 초반에는 교통체증 때문에 운전하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나폴리에서는 수 없이 많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기가피렌체나 제노바, 밀라노에서보다 훨씬 힘들었다. 데데는 수업 첫날부터 담임선생님과 학급 친구들을 증오했고 그새 초등학교 1학년이된 엘사는 매일 붉게 충혈된 눈으로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오곤했다. 엘사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식용나는 두 아이를 야단쳤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려움을 이겨낼 줄도, 자기주장을 관철할 줄도 모르는 데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제대로 못한다고 야단치면서 어떻게 해서든 배워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 P150

엔초는 회사의 최대 주주이자 경영자였다. 하지만 엔초는 릴라를가리키면서 회사의 영혼은 회사의 진짜 영혼은 릴라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로고 좀 봐."
엔초가 말했다.
"이것도 릴라가 디자인한 거야."
나는 로고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세로로 그은 획 주위에 소용돌이모양의 무늬가 그
려져 있었다. 로고를 바라보고 있자니 새삼 감정이복받쳐 올랐다. 통제할 수 없는 릴라의 머리에서 나온 새로운 결과물이었다. 나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것을 놓쳤을까.
나는 예전에 릴라와 즐거웠던 순간이 그리워졌다. 릴라는 뭐든 새로운 것을 배웠다가 익힌 것을 뒤로하고 다시 새로운 것을 배웠다.
절대로 멈추거나 후퇴하지 않았다. 컴퓨터도 마찬가지였다. 34시스템과 5120모델, 베이직과 베이직 사이트 그리고 로고 디자인까지. - P166

모두들 내가 자신들과 함께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모두 넉넉한 마음으로 나를 자신들의 삶에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엔초는 사업이 잘되고 있지만 자신은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특유의 건조한 화법으로 공장을 전전하면서 목격한 일을들려주었다. 엔초는 사람들이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끔찍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더러운 착취의 흔적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가끔 수치심을 느낄 때도 있다고 했다. 릴라는 이른바 업주라 불리는 작자들이 겉보기에만 깔끔한 외형을 갖추기 위해 자신들이 저질러 놓은 쓰레기 같은 짓거리를 보여주었다고 했다. 릴라는 잘 정돈된 회계 장부 뒤에 감추어진 거짓말과속임수와 사기 행각에 대해 비아냥댔다. - P167

카르멘도 이에 지지 않고 정유업계의 비리를 이야기했다. 그 바닥도 지저분하기는 마찬가지라고 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 이야기를 꺼냈다. 카르멘은 파스콸레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카르멘은 우리의 어린 시절과 사춘기 시절의 동네를 추억했다. 그날 카르멘은 처음으로 자신과 오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자기들에게돈 아킬레가 이끄는 파시스트 일당의 만행을 조목조목 들려주었다고 했다. 카르멘은 아버지가 터널 입구에서 파시스트에게 뭇매를 맞기도 했고 무솔리니의 사진에 입을 맞추라는 강요를 당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때 주세페 아저씨는 사진에 입을 맞추는 대신 침을 뱉었는데 그 일 때문에 살해당하거나 다른 공산당원들처럼 행방불명되지 않은 것은 목공소를 운영하고 있었던 그가 동네에서 꽤 명망이높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사라지면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도 했다. - P167

파스콸레는 건강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멀끔한 데다 세련된 옷차림 덕분에 겉보기에 외과 의사처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몹시 우울한 상태였다. 그의 사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의 감정 상태는 슬프고 슬프고 또 슬펐다. 파스콸레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자신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파스콸레는 잠든 조카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카들 이름도 몰랐다. 이 말을 하면서 카르멘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들이 쫓아오지 않도록 숨죽여 흐느꼈다.
우리는 모두 파스콸레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이탈리아와 세계 전역을 휩쓸고 있는 피비린내 나는 혼란에 혐오감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는 파스콸레가 우리와 똑같다고 믿었다. 신문에서 떠들어대는 수많은 끔찍한 일 가운데 그가 실제로저지른 일이 무엇이든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 컴퓨터, 주유소, 라틴어와 그리스어, 책에 파묻혀 각자 - P168

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결코 파스콸레를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서 그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은 카르멘이었다. 카르멘은 나나 릴라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말했다. 릴라는 말을 아꼈고 엔초는 고개만끄덕이는 정도였다. - P169

릴라로 말하자면 릴라는 성공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었다. 미켈레는 오래전부터 그런 릴라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엘리사가 릴라에게 그토록 적대적인 것은 마르첼로와의 마찰 때문만은 아니었다. 릴라가 또 한 번 솔라라 형제에게서 떨어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실컷 우려먹은 후 혼자서 잘나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베이직 사이트 덕분에 릴라는 날이 갈수록 변화에 발 빠르고 이재에 밝다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릴라는 어려서부터 상대방의 머리와가슴속의 혼란을 끄집어내 잘 정돈해주었다. 만약 상대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반대로 생각을 더 혼란스럽게 해 결국에는 상대방을 비참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는 특출난 소녀였다. 그런데 이제는그 정도가 아니었다. 릴라는 새로운 일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상징했다. 아무도 릴라가 하는 일이 무슨 일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어찌 됐든 릴라는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 P172

하지만 아무리 똑똑한 엔초가누구였던가. 엔초는 릴라에게 종속적인 존재였다. 정말로 사업체를움직이는 것은, 모든 것을 만들고 해체하는 것은 릴라였다. 약간 과장하면 얼마 안 되는 사이 고향사람들은 마르첼로와 미켈레처럼 사는 법을 배우든가 아니면 릴라처럼 사는 법을 배우는 두 부류로 나뉘었다.
내 집착 때문일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 시기에는 릴라와 가까웠거나 여전히 가까운 관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릴라의 모습이 보였다. 한번은 스테파노를 만났는데 그는 그새 살이 많이 찐 데다 안색이 누리끼리했고 옷차림도 형편없었다. 돈은 말할 것도 없고릴라와결혼했던 시절 젊은 사업가의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그런데도 대화를 몇 마디 나누는 동안 나는 스테파노가 릴라와 상당히비슷한 표현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다도 마찬가지였다. - P173

마음만 먹으면 더 자세한 내용을 알 수도 있었다. 사실 그러고 싶기도 했다. 릴라네 집에 들르거나 전화기만 들면 되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번은 길을 가다 우연히 릴라와 마주쳤는데 릴라는 마지못해 멈추어 섰다. 릴라는 내가 틀린 전화번호를알려주고 젠나로의 공부를 도와준다고 해놓고 사라져버린 데다 자기는 나와 화해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나는 몸을 사렸기 때문에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릴라는 급한 일이 있다면서 내게 사투리로 물었다.
"여전히 타소가에서 사는 거야?"
"응."
"불편할 텐데."
"그 대신 바다가 보여."
"그 먼 곳에서 바다가 보여봤자 얼마나 보인다고. 푸른색이 조금보일 정도지. 바다를 보려면 가까이에서 봐야지. 그래야 그 바다가쓰레기투성이에 흙탕물같이 더러운 오염된 오줌 물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너희 같은 식자들은 진실보다 거짓을 더 선호하지." - P174

가장 피상적인 내 자아는 릴라가 바쁜 상황에서아이들을 맡아준다고 해도 데데와 엘사를 까탈스럽고 요구사항 많은 인형 취급을 할 거라고 생각했다. 릴라가 아이들을 괴롭히고 젠나로의 손에 방치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숨겨진내 다른 자아는 릴라야말로 아이들이 잘 지내도록 최선을 다해줄 유일한 사람이라고 믿었다.
사실 릴라야말로 유일하게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믿는 내 자신이더 싫었다. 뭐든 해결방안을 찾아야 했기에 급한 마음에 결국 릴라에게 연락했다. 내가 몇 번이나 도중에 말을 끊어가면서 빙빙 돌려부탁하자 릴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네 아이들은 내 아이들보다 더 소중해. 언제든 데려와 필요한 시간을 충분히 가져."
나는 언제나처럼 그런 릴라에게 놀랐다.
내가 니노와 함께 떠난다는 말을 했는데도 릴라는 니노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수많은 주의사항을 늘어놓으며 아이들을 맡기러 갔을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해서 1980년 5월 불안감에 지칠 대로지쳤지만 부푼 가슴을 안고 나는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 여행은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또 한 번 한계를 넘어선 - P176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서양을 날아 내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할 수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흥분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물론 2주 내내 일정에 쫓긴 데다 경비도 많이 들었다. 내 책을 출간한 여자들은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잘 해주려고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그런데도 내 개인적인 지출이 꽤 컸다.
니노의 경우에는 비행기 티켓 비용을 돌려받는 데도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적어도 나는 그때처럼 행복했던 적이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내가 임신했다고 확신했다. 미국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몸 상태가 조금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니노에게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여행 내내 나는 혼자서 무책임한 만족감을 느끼며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행복감을 음미했다. 아이들을 데리러 갔을 때즈음에는 임신을 완전히 확신했고 너무 기뻐서 그 사실을 릴라에게털어놓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처럼 포기하고 말았다. - P177

나는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하지만 그 대화로 기분이 한결좋아졌다. 그날을 기점으로 새로운 시기가 시작된 것 같았다. 나는릴라가 들려준 진짜 아빠와 가짜 아빠 이야기와 과거의 이름과 새로운 이름에 대한 이야기 덕분에 데데와 엘사가 나 때문에 자신들이처하게 된 상황을 받아들이게 됐을 뿐 아니라 흥미롭게 느끼게 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그때부터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제 할머니와 마리아로사 고모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피렌체에서 돌아올 때마다 아빠와 도리아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툴툴댔었는데 이제는 그러지 않았다. 베이비시터인 미렐라를 원수 취급하며 말썽을 피우지도 않았다. 학교와 선생님과 학교 친구들 그리고 나폴리 자체를거부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은 니노가 나와 한 침대에서 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 P183

한마디로 둘 다 온순해졌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변화에 안도감을느꼈다. 릴라가 내 딸들의 인생에 들어와 딸들과 가까워졌다는 사실이 거슬리기도 했다. 하지만 릴라가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보살펴주고 아이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릴라야말로 내가 사랑하는 릴라였다. 때때로 못돼먹은 평소의 릴라에게서 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하는 또 다른 릴라였다.
갑자기 릴라에게서 받은 모욕감이 희미해졌다.
‘릴라는 못됐어. 언제나 그랬지. 하지만 릴라에게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어. 그렇기 때문에 힘들어도 릴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거야‘ - P183

"나는 행복한데 내 배 속에 들어 있는 이 녀석은 아닌가봐. 나한테심술이 난 것 같아."
엔초는 릴라의 말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이야말로 가장 행복할거야."
릴라는 엔초를 놀렸다. 릴라 말에 따르면 엔초의 진의는 이러했다.
"내가 네 배 속에 넣은 아이니 믿어봐. 내가 들어가서 직접 본 바로는 아주 착한 녀석이야. 걱정하지 마."
엔초를 만나면 만날수록 나는 그가 더 좋아지고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원래 릴라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는데 릴라가 임신한 후에는자랑거리가 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결과 엔초는 전보다 백 배는 더 열심히 일했다. 또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길에서 자신의동반자를 보이는 위험과 보이지 않는 위험을 막론하고 모든 위험에서 지켜주고 그녀의 모든 욕망을 미리 채워주려는 의지로 불탔다.
엔초는 자기가 직접 나서서 릴라의 임신 소식을 스테파노에게 전했다. 스테파노는 릴라의 임신 소식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 P185

잔인하고 직선적인 말이었다. 릴라는 내게 숨기는 것이 많았지만니노와 나의 관계에 대한 반감만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기분이나쁘지 않았다. 아니, 릴라가 그렇게 확실하게 말해준 것이 다행이었다. 릴라는 결국 내가 차마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그러니까 니노의 반응이야말로 우리 관계가 얼마나 견고한지 가늠해볼 수 있는증거라는 사실을 말해준 셈이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자"
잠시 후에 카르멘이 아들들과 함께 도착하자 릴라는 카르멘도 우리 대화에 끌어들였다. 그날 오후 우리는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것같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을세웠다. 카르멘은 미리 화부터 내면서 만약 니노가 못마땅해하면 자기가 직접 가서 몇 마디 해줘야겠다고 했다. 카르멘이 말했다.
"너처럼 수준 높은 사람이 어떻게 그런 굴욕을 참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나는 내 상황과 내 동거인을 변호했다.  - P189

나는 니노를 집에서 쫓아냈다가 다시 받아들였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내 모습을 깨달았다. 나는 니노가 원하는 것이라면 언제나 뭐든지 하는 니노의 몸종이었다. 나는 그의 마음을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기위해 너무 나서지 않으려고 애썼다. 니노를 위해 요리하고 그가 벗어놓고 간 더러운 옷을 빨고 학교일에 대한 푸념과 그가 맡은 수많은 일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었다. 그리 대단할 것 없는 처갓집의권력과 주변 사람들의 호의 덕분에 니노는 날이 갈수록 많은 일을맡게 되었다.
나는 니노를 언제나 기쁘게 맞이했다. 나는 니노가 엘레오노라 집보다 우리 집에서 더 편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내 집에서 안식을 취하고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를 바랐다. 일 때문에 항상 지쳐 있는니노가 안쓰러웠다. - P193

걱정이 태산이었는데도 나의 임신 기간은 빠르게 지나갔고릴라의 임신 기간은 한없이 느리게 지나갔다. 우리는 둘 다 똑같이 출산을 기다리면서도 각자 받는 느낌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종종 깨닫곤 했다. 내가 "벌써 임신 4개월째네"라고 말하면 릴라는 "이제 겨우 4개월이네"라고 말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릴라는 안색도나아지고 얼굴선도 다시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과정은 똑같은데도릴라와 나의 신체 기관은 임신 기간에 따라 반응하는 방식이 전혀달랐다. 내 몸은 임신을 아주 잘 받아들이는 데 비해 릴라의 몸은 무기력한 체념 상태에 가까웠다. 우리를 둘 다 아는 사람들은 빨리 흘러가는 내 시간과 더디게 흘러가는 릴라의 시간에 놀라곤 했다.
어느 일요일 릴라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톨레도 가를 걷던 중질리올라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 일은 꽤나 중요한 사건이었다.
질리올라와의 만남은 내 마음에 적잖은 파문을 일으켰다. 나는 그날의 만남으로 릴라가 정말로 미켈레의 미친 짓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P207

정말 그랬다. 릴라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변한 것이 하나도없었다. 릴라는 언제나 그랬듯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불안한 영혼의 소유자였고 그 매력은 릴라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임신에 대한 반응이든, 미켈레에게 한 일이든, 미켈레를 제압한 것과 고향에서 권위를 떨치게 된 일까지 릴라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 우리가 하는 일보다 밀도 있게 느껴졌다.
아마도 그래서 릴라의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 P210

나는 어머니를 간병하느라 고향 동네에 올 일이 많아졌기 때문에릴라와 더 자주 만났다. 이제는 우리 사이에 새로운 균형점이 생겼다. 내가 공적으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간 수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인지 나는 릴라보다도 내가 더 성숙해졌다고느꼈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제 괴로워하지 않고릴라의 매력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게는 갈수록 릴라를 있는 그대로 내 삶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시절 나는 헉헉대며 정신없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가느라 도시를 가로지를 때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웠다.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으면카르멘에게 부탁하거나 가끔 알폰소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알폰소는 몇 번이나 전화를 해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가장 신뢰하고 무엇보다도 데데와 엘사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릴라였다. 릴라는 항상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고 임신 때문에 지쳐있었다. 날이 갈수록 내 배와 릴라의 배는 확연히 달라졌다.  - P211

숨이 막혔다. 잠시 동안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커피 잔이 찻잔 받침 위에서 흔들렸고 식탁 다리가 내 무릎에부딪혔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릴라도 긴장했는지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순간 의자가 릴라 뒤쪽으로 기울어졌다. 릴라는 의자를 붙잡으려 했지만 동작이 너무 느렸다. 릴라는 구부정한자세로 한쪽 손은 나를 향해 앞쪽으로 뻗었고 다른 한 손은 의자 등받이를 향해 내뻗었다. 어떤 일에 반응을 나타내기 전에 집중할 때처럼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는 동안 건물 아래에서 계속 천둥이 쳤고 지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보이지 않는 바다처럼 벽을 향해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전등이 분홍색 유리 전등갓과 함께 요동치고 있었다.
"지진이야!" - P231

나는 릴라를 거칠게 잡아당기고 밀치고 애원하며 밖으로 이끌었다. 우리를 마비시킨 진동에 이어 그보다 더 끔찍하고 치명적인 지진이 뒤따를까봐 두려웠다. 모든 것이 우리 위로 무너져 내릴까봐두려웠다. 나는 릴라를 질책하고릴라에게 애원했다. 배 속에 있는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우리는 겁에 질린 고함소리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미쳐 날뛰는 사람들과 갈수록 커지는 아우성이 뒤섞여 도심과 고향 동네의 중심부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뜰로 나오자마자 릴라는 토했고나는 배를 쥐어짜는 듯한 구역질을 애써 참아냈다.
1980년 11월 23일에 발생한 지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파멸과 함께 우리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지진은 일상의 견고함과안정감을 앗아갔고 매일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라는 확신을 없애버렸다. 익숙한 소리와 행동,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사라졌다. 모든 확신에 의심이 스며들었다. 모든 불운을 예고하는 예언이신빙성을 얻고 사람들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징조에 불안한 관심을 쏟게 되었다. 통제력을 되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 P233

그때 릴라는 분명 ‘경계의 해체‘라는 표현을 썼다. 릴라가 그 표현을 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릴라는 힘겹게 그 말의 뜻을 설명했다. 릴라는 내가 ‘경계의 해체‘가 무엇인지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그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 알아주기를 바랐다. 릴라는 숨을 헐떡이면서 내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릴라는 사물과 사람의 경계는 섬세해서 무명실처럼 잘 끊어진다고 말했다. 릴라는 자기는 항상 어떠한사물이나 사람의 경계가 해체되어 그 내용물이 다른 대상 위로 쏟아지는 모습을 봐왔다고 했다. 이질적인 물질이 녹아 서로 합쳐지고뒤섞이는 모습을 목격해 왔다고 했다. 릴라는 평생 삶의 경계가 단단하다고 믿으려고 애써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현실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우리의 삶이 상처나 충격에 내구력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고 했다. - P238

릴라는 방금 전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과장된 표현을 마구내쏟았다. 릴라 입에서는 사투리가 뒤범벅된 문장이 튀어나오기도했고 어린 시절 다독가다운 표현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릴라는 자기는 절대로 정신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거칠고 고통스럽게 뒤틀린 사물의 본모습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했다.
릴라는 사물의 거짓된 모습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잘 정돈됐기 때문에 오히려 자기 마음을 안정시킨다고 했다. 그런 사물의 거짓된모습을 사물의 본모습이 밀쳐내 버리면 자기는 혼란스럽고 끈적거리는 현실의 나락으로 떨어져 감정에 뚜렷한 경계를 그을 수 있는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다. 촉각이 시각으로, 시각이 후각으로 녹아내린다고 했다.
"아! 세상의 본질이란 무엇일까? 지금 너도 봤잖아, 레누. 확실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 건 아무것도 없어."
릴라는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 쓰지 않으면, 사물의 경계에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모든 것이 응고된 생리 혈과 악성 종양과누런 섬유질이 되어 흘러가버리는거라고 말했다. - P239

릴라는 한참 동안 말을 이었다. 그날 릴라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내게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설명해주었다. 이제부터 하는 말은 릴라가 한 말을 지금 내 나름대로 요약한것이다.
"이제껏 나는 그런 힘든 순간이 일종의 성장통처럼 스쳐가는 건줄 알았어. 예전에 내가 말한 터진 구리 냄비 이야기를 기억해? 솔 - P239

라라 형제가 우리에게 총을 쐈던 1958년 섣달 그믐날 밤을 기억해? 그날 나는 총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어. 내가 두려웠던 건불꽃 색깔이 너무 예리해 보였기 때문이었어. 특히 녹색과 보라색이 너무나도 날카로워 보였어. 그 불빛에 난도질당할 것 같았어. 폭죽이 지나가면서 남긴 비행운이 물건을 가는 데 쓰는 줄처럼 리노를 쓸고 지나가 리노의 살이 찢어져 그 안에서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리노의 다른 모습이 흘러나올 것만 같았어. 그 순간 바로 원래 몸속으로 그것을 집어넣지 않으면 그것이 덤벼들어 나를 해칠 것만 같았어.
레누, 나는 평생 그런 순간에 저항해왔어. 마르첼로가 두려우면스테파노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고 스테파노가 두려우면 미켈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했어. 미켈레가 두려우면 니노를 이용해서, 니노가 두려우면 엔초를 이용해서 나 자신을 보호해왔어.
사실 보호라는 말 한마디로는 부족해. 내가 몸을 감추기 위해 지금껏 꾸며낸 크고 작은 일을 네게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거야. 결국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만. - P240

이스키아 섬에서 내가 얼마나 밤하늘을 두려워했었는지 기억해?
너희들은 모두 밤하늘이 아름답다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었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달걀 껍질과 흰자 속에 갇힌 녹색빛이 감도는 상한 노른자 맛이 입 안에 느껴지는 것 같았어. 깨져서속이 드러나 보이는 삶은 달걀말이야. 입 속에 독이 든 달걀 같은 별을 머금은 느낌이었어. 고무 같은 질감의 하얀 별빛이 새까만 아교같은 밤하늘과 함께 이빨에 쩍쩍 들러붙는 것 같았어. 구역질을 참으면서 그걸 잘게 부수면 입 속에서 모래알 부서지는 느낌이 났지.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제대로 설명하는 건가? 이스키아 - P240

섬에서 한창 사랑에 빠져 행복했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들었어. 그래봤자 소용없었던 거야. 내 머리는 언제나 틈새를 찾아내거든. 사방팔방에서 현실 너머 공포가 도사리고 있는 곳이 보이는 틈새를 찾아내고 말지.
예를 들면 브루노의 공장에서 일할 때 동물 뼈를 손가락으로 스치기만 해도 거기서 악취 나는 골수가 흘러나오곤 했어. 그때 나는 너무 혐오스러워서 내가 병들었다고 생각했어. 그렇지만 나는 그때 정말 병들었던 것일까? 정말 심잡음 증세가 있었나? 아니 내 유일한문제는 항상 불안한 마음이었어. 나는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해. 항상 무엇인가를 하거나 다시 시작하지. 진실을 감추기도 하고 밝혀내기도 하고 뭐든 튼튼하게 만들었다가 갑자기 파괴하거나 부서뜨려버리지. - P241

알폰소만 해도 그래. 알폰소는 어렸을 때부터 나를 불안하게 했어. 그의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무명실이 끊어질 것만 같았거든. 미켈레는 또 어떻고. 자기가 무슨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굴지만 경계를 구성하는 선을 찾아내 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어. 하하하. 그래. 나는 그의 실을 끊어버렸어. 그러고는 알폰소의 실과 엉클어 놓았지. 사내의 물질을 다른 사내의 물질 속에 뒤섞어 놓은 거야. 낮에 짜놓은 직물이 밤새 풀려버린 거야. 내 머리가 그렇게 만들어놓은거지.
하지만 그래도 소용없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거든. 두려움은 정상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에 있는 틈 속에 언제나 존재해. 그곳에서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야.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레누. 언제나 그럴 거라고 의심해 왔었는데 오늘 저녁 확신을 가지게 됐어. 네 배 속에 있는 생명체도 오래갈 것 같지만 그러 - P241

지 못할 거야.
‘내가 스테파노와 결혼했을 때를 기억해? 동네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싶어 했던 것을 기억해? 과거의 추악한 일이 더는 반복되지 않게하고 싶었어. 좋은 것만 남기고 싶었지. 하지만 그 상태가 얼마나갔지? 좋은 감정은 연약한 거야. 내게는 사랑조차 오래가지 못해. 남자에 대한 사랑도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오래가지 못하고 구멍이 나버려. 구멍을 들여다보면 선의로 형성된 성운이 악의로 형성된 성운과 뒤섞이는 것이 보이지. 젠나로를 보면 죄책감이 들어. 배 속에 있는 이 작은 것은 나를 베고 할퀴지만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야. 사랑은 언제나 증오를 동반해. 나는 선의에 집중할 수가 없어. 그럴 능력이 없어.
다올리비에로 선생님이 옳았어. 나라는 사람은 못 돼먹었어. 우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지. 너는 정말 친절해, 레누. 항상 인내심을 가지고 나를 대해주었지. 하지만 오늘 저녁 나는 확실히 깨달았어. 어디건용매 작용을 하는 것이 있어. 굳이 지진이 나지 않아도 따스한 열로 서서히 모든 것을 파괴하지. 그러니 부탁이야. 나 때문에 기분이상하거나 내가 안 좋은 말을 하면 귀를 막아버려. 내가 하고 싶어서그러는 게 아니야. 제발 부탁이니 지금 나를 떠나지 말아줘. 네가 떠나버리면 나는 추락하고 말 거야." - P242

가끔 경미한 여진이 다시 느껴지기도 했다. 자동차 안에서 공포에 질려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이제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배 속에서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릴라의 배를만져보니 릴라의 아이도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지면 아래에서 흐르는 화염의 바다도 용광로처럼 일렁이는 별빛도 행성도 우주도 암흑 속의 빛과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 속의 침묵까지도나는 여전히 릴라가 겁에 질려 쏟아낸 파도 같은 말을 떠올리며생각에 잠겼다. 두려움은 내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용암도, 모든 것을 녹여버리고 지구 내부에서 흐르는 상상 속의 불타는 강물마저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했다. 모든 두려움은 내 머릿속에서 정돈된 문장과 조화로운 이미지로 정리되어 나폴리의 길처럼 까만돌로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그 도로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나였다.  - P243

한마디로 나는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공부든 책이든프랑코는 피에트로는 아이들이든 니노든 지진이든 그 무엇이 내게부딪혀 올지라도 결국 다 지나갈 것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늘어나는나의 수많은 자아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터였다.
나는 연필심이 원을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않는 컴퍼스의 고정된 축이었다.
그런 나에 비해 릴라는 좀처럼 안정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야그런 사실에 확신이 생겼고 뿌듯했다. 그 덕분에 침착할 수 있었고릴라가 더 애틋하게 느껴졌다.
릴라는 도무지 안정을 되찾지 못했다. 릴라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었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도 없었다.  - P243

나는 릴라가 지진이 난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릴라는 지진으로 인한 충격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은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추스르기 위한 기준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릴라에게 지진에 대해 말했다.
릴라가 자기 통제력을 찾아갈수록 이탈리아 남부 전체를 휩쓸고간 파멸과 죽음의 흔적이 뚜렷해졌다. 릴라는 얼마 지나지 않아 민망해하지 않고도 지진에 대한 두려움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했다. 하지만 뭐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흔적이아직도 릴라에게 남아 있었다. 릴라의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졌고목소리에서도 불안감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지진에 대한 기억은 오래갔다. 나폴리는 지진의 기억을 간직했다.
안개처럼 희뿌연 숨결 같은 더위만이 굼뜨고 거친 도시의 생명과 육체에서 떠나가고 있었다. - P246

릴라는 솔라라 형제의 불법거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릴라는 컴퓨터에 입력하기 위해 데이터를 수집하면서 그들의 사업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릴라는 그들이 마약으로 벌어들이는수입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르첼로가 릴라를 증오하고 내 동생 엘리사가 릴라를 미워하는 것이다. 릴라가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릴라가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생물이든 사물이든 상관없이 모든 것에 대한 순수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릴리는 니노의 악행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릴라가 멀리서 내게 말하는 것같았다.
‘그만둬. 그 자식이 자기 가족만 챙겨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간 것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잖아. 네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말이야.‘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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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폴리에 다시 정착한 것은 1979년이었다. 1976년 10월부터 1979년 나폴리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릴라와 자주 연락하는일을 되도록 피했다. 쉽지는 않았다. 릴라는 언제든 억지로라도 내인생에 끼어들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런 릴라를 무시하기도하고 참기도 하고 견뎌보기도 했다. 릴라는 가장 힘든 순간 내 곁에있어주고 싶은 것처럼 행동했지만 나는 나를 경멸하던 릴라의 태도를 잊을 수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릴라가 내게 퍼부었던 모욕적인 말 때문에상처받은 것은 아니었다. 릴라에게 전화로 나와 니노의 관계를 이야기했을 때 릴라는 내게 바보 멍청이라면서 악을 썼다. 그때까지 릴라가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한 번도, 정말이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 때문에만 상처받은 것이었다면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내가 마음이 아팠던 이유는 릴라 입에서 데데와 엘사 이름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릴라는 아이들 생각을 하라고 나를 질책했었다. 그때는 릴라의 말을 흘려들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릴라의 말이 심각하게 느껴졌고 자주 뇌리에 맴돌았다. 이때껏 릴라는 한 번도 데데나 엘사에게 관심 - P15

을 보인 적이 없었다. 아이들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가끔 통화하다 내가 아이들이 재치 있게 했던 말을 들려주려고 하면릴라는 내 말을 싹둑 자르고 화제를 돌렸다. 마르첼로 집에서 데데와 엘사를 처음 봤을 때도 릴라는 아이들을 건성으로 흘낏 바라보고성의 없이 몇 마디 했을 뿐이었다. 내 딸들이 얼마나 예쁜 옷을 잘 차려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고 나이가 어린데도 의사 표현을 잘하는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릴라의 평생 친구인 내가 낳아 키운 내 몸의 일부 같은 아이들이었는데도 말이다. 릴라는 내게 조금이라도 엄마로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어야 했다. 나에 대한 애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더라도 적어도 예의상으로라도 그렇게 했어야했다. - P16

하지만 릴라는 가벼운 농담 한마디 하지 않았다. 아이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랬던 릴라가 지금에 와서 내 아이들을 기억해내고 내가 엄마로서 최악이라고 나를 비난하는 것이다. 내가 내 한 몸행복하자고 아이들을 불행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게 니노를 빼앗겼다는 생각 때문에 질투심에 사로잡힌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나는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그러는 릴라는스테파노를 떠났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공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이유로 젠나로를 이웃집에 내버려둘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건 버리듯 젠나로를 내게 보냈을 때 젠나로 생각을 했었던가.
물론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히 나는 릴라보다는 좋은 엄마였다. - P16

나는 습관처럼 그런 생각에 빠지곤 했다. 데데와 엘사를 위해 특별히 해준 것도 없으면서 잔인한 말 한마디로 릴라는 데데와 엘사의권리를 지켜주는 변호사가 된 것 같았다. 그 후 내 일에 바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마다 나는 릴라가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것은 우울한 마음이 만들어낸 속삭임일 뿐이었다. 사실나는 아직도 릴라가 나를 엄마로서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 말을 해줄 사람은 릴라밖에 없다. 그러려면 릴라가 정말로 길고긴 이 언어의 사슬에 손을 대야 한다. 교묘한 솜씨로 빠진 사슬을 끼워 넣고 필요 없는 사슬은 슬쩍 빼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내가 원하는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들려주어야 한다. - P17

주어야 한다.
나는 진정 릴라가 내 이야기에 끼어들기를 바란다. 우리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나는 릴라가 그렇게 해주기를 간절히원해왔다. 하지만 릴라가 정말로 내 이야기에 끼어들었는지 확인하러면 우선 이 이야기의 끝에 도달해야 한다. 지금 당장 확인하려 한다면 시작하자마자 막힐 것이다.
글을 너무 오래 쓴 탓에 피곤하다. 몇 년 동안 계속된 혼란과 크고작은 사건, 변화하는 감정 속에서 이야기의 가닥을 유지하기가 점점버거워진다. 릴라와 릴라에게 얽힌 복잡한 일을 회상하다보면 자꾸만 내 이야기를 건너뛰게 된다. 그보다 심한 경우 쉽게 써내려갈 수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이야기만 늘어놓게 된다.
이제 이 갈림길에서 결단을 내릴 때가 왔다. 첫 번째 길로 갈 수는 없다. - P18

우리 관계의 성격상 나를 통해야만 릴라에게 닿을 수 있으므로 나를 이 이야기에서 제외한다면 릴라의 흔적은 갈수록 찾기 힘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두 번째 길로 갈 수도 없다. 내가 내이야기나 자세히 늘어놓는 것이야말로 분명 릴라가 원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릴라는 말할 것이다.
‘그래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줘. 나 같은 사람의 인생에 누가 관심을 가지겠어. 사실 너부터 그렇잖아. 솔직히 말해봐.‘
릴라는 이렇게 결론지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낙서 위에 덧쓴 낙서일 뿐이야. 네 책에 적합하지 않아. 그러니 나를 내버려둬, 레누. 사람들은 소멸에 관한 이야기 같은것은 하지 않아‘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에도 릴라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나.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몸을 숨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사실을받아들여야 하나. 나이가 들수록 릴라를 잘 모르겠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나.
오늘 아침 나는 피곤함을 이겨내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우리둘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적어도 이 글에서만큼은 나와 릴라 사이의 균형을 찾고 싶다. 평생나 자신과의 관계에서조차 찾지 못했던 균형을 말이다. - P18

내게 몽펠리에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와 별다를 바가 없다. 호텔과 니노가 참석한 학회가 열렸던 거대한 강당 이외에 지금 내 눈앞에 떠오르는 장면은 바람이 세차게 불던 가을 전경과 새하얀 구름 위에 몸을 기댄 푸른 하늘뿐이다. 그런데도 내게 몽펠리에라는 지명은 여러 가지 이유로 도피의 상징처럼각인되었다.
그전에도 프랑코와 함께 파리에 가느라 이탈리아를 떠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 과감함에 짜릿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해도 나의 세계는 아직 고향 동네와 나폴리에 국한되었고 앞으로도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고향 동네나 나폴리가아닌 다른 장소에 있을 때면 잠시 소풍을 나온 것 같았다. 일상에서벗어났다는 생각 때문에 평소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 P19

몽펠리에는 파리보다 짜릿함은 덜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아가기존의 경계가 허물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내 영역이 확장된 것 같았다. 몽펠리에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고향 동네와 나폴리,
피사와 피렌체와 밀라노, 아니 이탈리아 전체가 드넓은 세상 속 작은 조각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런 조각에 만족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몽펠리에에 가서야 내 비좁은 시야와 지금껏 말하고써온 내 언어의 한계를 실감했다. 나는 32세의 나이에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몽펠리에에서 확실히 깨달았다.
니노와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며칠 동안 나는 생전 처음으로 그동안 나를 옭아맨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느꼈다. 태생에 대한속박, 학문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속박, 살아오면서 내가 내린 수 - P20

많은 선택, 그중에서도 결혼이라는 선택 때문에 생긴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나는 내 첫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었을때 왜 그토록 기뻤는지 알았다. 해외에서는 큰 반향이 없었다는 소식에 왜 그토록 속상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내가 지금껏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가치가 국경을 넘어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는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멋진일이었다. 몽펠리에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릴라가 평생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것이 릴라의 선택이라고 생각했었다. 릴라는 나폴리를 떠나기는커녕 산 조반니 아 테두초로 거처를 옮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나는 선택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어쨌든 결과적으로 릴라는 항상자신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어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릴라가 나폴리를 떠나지 않은 이유가 단순히 사고의 한계 때문이라는생각이 들었다. 나는 릴라가 나를 비난했을 때와 똑같은 논리를 릴라에게 적용해보았다. - P20

우리는 긴 여행을 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가끔 비가 오기도 했다. 주변 풍경은 두텁게 녹이 슨 것처럼 창백했지만 가끔 하늘이 열리면 빗방울은 물론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눈부시게 빛났다. 나는여행하는 내내 니노 곁에 꼭 붙어 있었다. 가끔 그의 어깨에 기대어잠이 들곤 했다. 또다시 내 한계를 뛰어넘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차 안에 퍼지는 낯선 언어의 울림도 좋았다. 내 책이 마리아로사 덕분에 이탈리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먼저 출간된다는 것도, 우리가바로 그 책을 향해 여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좋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겐 정말 경이로운 일이 수없이 일어나고 있었다. 곧 출간될 내 책은 속도와 궤도를 예측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어린 시절 릴라와 함께 사내아이 무리를 향해 던졌던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돌멩이 같았다 - P30

내게는 일상의 소소한 일을 자연스럽게 공적인 사유의 소재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나는 매일 즉흥적으로 내 사적인 경험을 소재삼아 모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세계의 빈곤과 비참한 환경, 분노에 찬 남성과 여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카르멘 이야기도 했다. 카르멘과 오빠파스콸레와의 유대 관계, 파스콸레가 저질렀을 리 없는 폭력 행위에대한 카르멘의 변명을 이야기했다. 나는 청중 앞에서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 어머니를 비롯한 고향 동네 여자들에게서 가정생활과 모성애, 남성을 받들며 사는 삶의 가장 비참한 면모를 봐왔다고 했다.
나는 여자들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 때문에 다른 여자나 자기가낳은 자식들에게까지 어떤 파렴치한 짓을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 P64

나는 얼마 전 솔라라 구둣가게에서 30분 남짓 시간을 보낼 때 일어난 일에서 많은 소재를 얻었지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지나고 나서였다. 아마 그 무렵 릴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아서였던 것같다. 청중 앞에서 이야기할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도 왠지 모르게나는 한 번도 우리 둘의 우정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릴라는 자기 자신과 유년 시절 친구들의 거친 욕망의 바닷속으로 나를 잡아끌기는 했어도 그로 인해 내가 목격한 광경의 의미를 해석할 능력은없었다. 아마도 그래서 나는 우리 우정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같다.
예컨대 릴라도 내가 알폰소를 보자마자 알아챈 것을 알았을까.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봤을까. 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릴라는 동네의 흙탕물 속에 가라앉았고 그곳에 안주했다. 반면,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시절, 나에게는 혼돈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속에서 어떠한 법칙을 구분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느꼈다.  - P65

그러한 확신은 내가 쓴 짧은 책이 다소 성공함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그 덕분에 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있었다. 말이나 글을 이치에 맞게 할 수 있으면 실제 상황도 그렇게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나는 생각했다.
‘부부도, 가정도, 문화라는 이름의 틀도, 모든 사회 민주주의적 합의도 결국은 다 무너지는 거야. 그 과정에서 모든 것은 격렬하게, 지금까지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를 취하려 하지. 나와니노, 내 아이들과 그의 아이들, 노동 계급의 패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무엇보다도 예측할 수 없는 주체인 여성과 나 자신도 말이야.‘
나는 매일 저녁 총체적인 분열과 새로운 재구성이라는 매혹적인생각에 내 상황을 대입하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프랑스 일정을 소화하는 도중 때때로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시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데데와 엘사와 통화할 때면 아이들은언제나 내 질문에 "네, 아니요"라는 단답형으로 대답하거나 노래의후렴구처럼 "엄마, 언제 와요?"라고 묻곤 했다. - P66

물론 나는 저항했다. 화가나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려는 생각을하지 않은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피렌체든 밀라노든 나폴리든 상관 없었다. 단 일 분이라도 아이들을 시댁에 더 머무르지 않게 할 수있다면 어디든 괜찮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나는 계속해서출발을 미뤘다. 어쩔 수 없는 일이 잇따라 일어났다. 예컨대 니노가전화하면 나는 참지 못하고 그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갔다.
게다가 이제는 이탈리아에서도 내 책이 작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시작했다. 주요 언론사 측에는 무시당했지만 나름대로 독자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책과 관련된 행사에 나갈 때는 일부러 거기에서 니노와 만날 일을 만들었기 때문에 아이들과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 P93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매번 힘들었다. 나를 원망하는 듯한 아이들의 시선이 온몸에 느껴져 괴로웠다. 하지만 기차에 올라 책을 읽고 공식 석상에서 할 토론을 준비하고 니노와 해후할 상상을 하면어느새 마음속에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끓어올랐다. 얼마 지나지않아나는 내가 행복과 불행을 동시에 느끼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가 내 삶의 피할 수 없는 새로운 규율이 된 것 같았다.
제노바로 돌아갈 때면 나는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데데와 엘사는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집을 편하게 생각했다. 내가 없어도 아이들은 그곳에서 학교도 다니고 친구들도 있는 데다 원하는 것은 뭐든지할 수 있었다.
일단 제노바를 떠나고 나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죄책감은 그저 귀찮은 장애물 같았고 자연스럽게 희미해졌다.  - P93

나는 그런 내 감정 변화 때문에 비참했다. 약간의 명성과 니노를 향한 사랑 때문에 데데와 엘사를 등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굴욕적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받을지 생각해봐."
릴라의 말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비문이 되어 나를 불행으로 이끌었다. 여행이 잦다보니 잠자리가 자주 바뀌어서 제대로 자지 못할때가 많았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내게 퍼부었던 악담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말이 릴라의 말과 한데 뒤섞였다. 평생 동전의 양면 같던어머니와 릴라가 그럴 때면 동일인물처럼 느껴졌다. 둘 다 내 새로운 삶에 적대적이었다. 둘 다 내 새로운 삶과는 관계가 없었다. 나는한편으로는 드디어 내가 독립적인 개체가 된 것 같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로웠다. 나 홀로 속수무책의 상태로 난관에 봉착한 것 같았다. - P94

나는 마리아로사와 다시 가깝게 지내려고 했다. 시누이는 언제나처럼 호의적이었다. 그녀는 밀라노의 한 서점에서 나를 위한 독자토론회를 기획해주었다. 행사 참가자들은 주로 여성이었다. 그날 나는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그룹의 참가자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기도하고 격찬을 듣기도 했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마리아로사가 무게있게 중재에 나서주었다.
그날 나는 찬성과 반대 의견을 요약해서 중재자 역할을 수행하는데 의외로 재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제가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에요"라고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내 말을 꽤나설득력 있게 받아들였다. 행사가 끝날 즈음에는 참석자 모두에게, 특히 마리아로사에게 칭찬을 받았다. - P94

이 얼마나 혼란스러운 삶인가. 우리 몸은 폭발이 일어나 수많은파편으로 조각난 것처럼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밀라노에는 미르코가, 제노바에는 내 딸들이, 나폴리에는 알베르티노가있게 된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실비아, 마리아로사, 프랑코와 함께 환멸에 빠진 논리학자 같은 태도로 이러한 흩어짐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실 나는 내 전 남자 친구가 언제나처럼 대화를 주도하기를바랐다. 현재를 정리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현란한 논증법으로 우리를 안심시켜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날 프랑코는 의외의 태도를 보였다.
‘프랑코는 ‘객관적으로‘ 혁명적이었던 시대의 종말이 가까이 다가왔다고 했다. 프랑코는 ‘객관적‘이라는 수사를 냉소적으로 사용했다. 혁명의 종말과 함께 지금껏 나침반 역할을 하던 모든 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 P95

무엇이 데데와 엘사에게 이롭고 무엇이 해로울까. 내게 이로운 일과해로운 일은 무엇이며 그것은 내 딸들에게 이로운 일과 해로운 일과일치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을까. 그날 밤 내 마음속에서 니노는 주변부로 밀려나고릴라가 다시 등장했다. 릴라는 어머니의 도움 없이혼자 힘으로 내 마음을 차지했다. 나는 릴라와 싸우고 싶은 욕구를느꼈다. 릴라에게 악을 쓰고 싶었다.
"그렇게 잔소리만 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책임지고 말해보란 말이야!"
나는 겨우 잠이 들었다. 다음 날 나는 제노바로 돌아가 시부모님이 보는 앞에서 밑도 끝도 없이 데데와 엘사에게 물었다.
"얘들아. 요즘 엄마가 너무 바쁘단다. 며칠 후면 또다시 떠나야하고 그 후로도 마찬가지일 거야. 엄마와 함께 갈래, 아니면 여기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을래?"
이런 질문을 한 것에 대해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처음에는 데데가 다음에는 엘사가 입을 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랑 있을래요. 그 대신 돌아올 때 꼭 선물 사다주세요" - P98

쓴 1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 얼마지나지 않아 독일어와 영어로도 번역되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10년 전에 출간됐던 내 첫 소설도 재조명을 받았고 나는 다시 신문과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과 얼굴은 나름대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는 한때 그랬던 것처럼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당시 꽤나 공신력 있는 사람들이 내게 호기심을 가졌고 이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존경심을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자신감을 되찾은 것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게 호의적이었던 밀라노 출판사의 편집장이 털어놓은 내 책의출간과 관련된 일화 덕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와 저녁식사를 하면서 출판계에서의 내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내심 이번 기회에 니노의 에세이집 출간을 제안해보려는 속셈도 있었다. 그날 저녁 편집장은 내게 시어머니가 지난해 크리스마스 즈음 내 책이출간되는 것을 막으려고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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