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테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1 - P136
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었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아픔만 남기고 시꺼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엔초만큼은 릴라에게 예기치 못한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릴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엔초를 존중했다. 그런 그가 이제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내적으로 단단하고,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릴라에게는 너무나 온순하면서 매사에 속이꽉 찬 남성으로 성장한 것이다. 릴라는 이런 엔초가 스테파노나 니노처럼 갑자기 망가져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둘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릴라가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둘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릴라는 벽 너머로 엔초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이 잠잠해져 집과 건물과거리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때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몹시 피곤했지만 릴라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보면조심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정의내리지 않은 허다한 불행의 이유가뒤섞여 생각이 젠나로에게 집중되었다 릴라는 생각에 잠겼다. - P137
릴라는 엔초가 다른 여자에게 반해서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웠다. 살 곳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당장은 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놀랍게도 예전에 스테파노와 결혼해 수중에 돈은 많았지만 그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보다 더 강하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엔초의 상냥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자신의 모든 걱정에 대한 엔초의 관심과 그가 발산하는 평온한 기운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그런 엔초 덕분에 니노의 부재와 스테파노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엔초는 릴라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엔초는 여전히 릴라가 놀랍도록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 P139
"독일어잖아, 엔초 난 독일어는 몰라." "하지만 너라면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엔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릴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엔초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목표를 이루어낸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의 학력이 전부인 릴라가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엔초는 릴라에게 어떤 과목이든 빨리 배울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접하게 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인류의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먼저 그 언어를 정복하는 새로운 엘리트층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 엔초는 즉시 릴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를 좀 도와줘." "난 지금 정말 피곤해." "리나, 지금 우리의 삶은 형편없어. 변화가 필요해." - P140
엔초는 그러는 동안 서서히 릴라를 공부에 동참하도록 유도했고 릴라는 릴라대로 엔초를 돕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 릴라의 태도는니노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자기가 모든 면에서 니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그를 힘들게 했다. 이에 비해 엔초와 공부할 때 릴라는 평안했다. 애써 그를 압도하려 하지도 않았다. 저녁 공부는 엔초에게는 노고였지만 릴라에게는 안정제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엔초가 늦게 돌아와 릴라를찾지 않을 때마다 릴라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고 화장실 물소리에귀를 기울인 것일지도 모른다. 엔초가 애인의 흔적을 몸에서 지워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 P141
공장의 과다한 노동은 직장 내에서 성욕을 자극했다. 직원들은 퇴근 후 지칠 대로 지쳐서 이미 욕구를 상실한 채 자기 집에서 부인이나 남편과 섹스를 하기보다는 오전이나 오후에 공장에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릴라는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바로 눈치챘다. 사내들은 틈만 나면 여자들에게 손을 뻗쳤고 여자가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음탕한 제안을 했다. 그러면 여공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은 사내들의 제안에 웃음을 터뜨리면서거대한 가슴을 사내들에게 비벼대고는 곧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힘겨운 노동과 작업의 무료함을 잊게 해주는 힘겨운 일상의 활력소였 - P141
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때만큼은 정말 살아있음을 느꼈다. 릴라가 출근한지 며칠 되지 않아 사내들은 릴라의 체취라도 맡고싶은 것처럼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릴라가 밀어내면 사내들은 낄낄거리면서 가사가 추잡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져 갔다. 어느 날 아침 릴라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 음탕한 말을 던지며 목 뒤에 입맞춤을 한 사내의 귀를 거의 뜯어내다시피 했다. 그는 에도라는 이름의 잘생긴 축에 속하는 40대 사내였다. 에도는 공장의 모든 여자를 은근하게 유혹했고 야한 농담을 곧잘 했다. 릴라는 한 손으로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도록 사내의 귀를 세게 움켜잡고 비틀며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에도가 릴라의 발차기를막아보려고 애쓰면서 비명을 질렀지만 릴라는 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다음 릴라는 길길이 날뛰며 브루노의 사무실로 항의하러갔다. - P142
브루노가 취직을 시켜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 후로 릴라는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마주쳤을 때에도 릴라는 그에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급히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그제야 비로소 브루노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릴라가 들어오자책상 뒤에서 일어섰다. 여성을 맞이하는 신사다운 태도였다. 하지만릴라는 브루노의 외모에 놀랐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부유한 생활때문인지 눈빛은 흐릿했다. 가슴이 답답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마그마같이 시뻘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가뜩이나 까만 머리와 늑대처럼 길고 뾰족하고 하얀 이빨 때문에 빨갛게 상기된 안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릴라는 생각했다. ‘여기 이 사람이 과거 니노의 친구였던 법대생과 같은 사람인가?‘ - P142
릴라는 이스키아섬에서 보낸 시간과 현재의 햄 공장 사이에 연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빈 공간밖에 없었다. 릴라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뛰어 넘어오는 과정에서 브루노가 망가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의 아버지가병들어 회사에 대한 부담이 그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졌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공장에 빚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릴라가 브루노에게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자 브루노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리나." 브루노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난 네 부탁을 들어준 거야. 은혜를 말썽으로 갚으면 안 되지. 여기서는 모두 힘겹게 일하고 있어. 그렇게 잔뜩 곤두서 있지 좀 마. 가끔은 직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긴장을 풀려면 너희들끼리나 풀어." - P143
브루노는 갑자기 릴라의 허리를 잡고 입술로 릴라의 긴 목을 훑었다. 동시에 재빨리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이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릴라는 햄에서 나는 악취에서부터 브루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스테파노의 폭력을 떠올렸다.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일 뿐 격렬한 분노가 릴라를 덮쳤다. 그녀는 브루노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 사이를 발로 차면서 소리 질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이리 와! 네 물건을 꺼내 보라고, 내가 당장 잡아 뜯어줄 테니 말이야. 이 나쁜자식아!" 브루노는 릴라를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가 내게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어." - P145
릴라는 브루노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숙성고에서 나왔다. 릴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릴라는 그때 수증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수영장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조해주는 역할로 바닥이 물에 젖지 않게 틈틈이 닦아야 했다. 아무리해도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릴라에게 거의 귀를 잡아 뜯길 법했던 에도라는 사내가 릴라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하던 이들모두 릴라가 화를 내면서 숙성고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릴라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릴라는 걸레를 집어 벽돌바닥에 거칠게 내리친 다음 질척한 바닥을 닦으면서 위협적으로 크게 외쳤다. "또 어떤 개새끼가 나를 건드리는지 두고보자고." 이 말에 릴라의 동료들은 모두 일에 열중했다. - P146
릴라는 엔초에게 동료의 귀를 거의 잡아 뜯을 뻔했다는 이야기도브루노의 추행도 매일같이 당하는 고약한 장난과 고생에 대해서도말하지 않았다. 엔초가 햄 공장일이 어떤지 물으면 릴라는 비꼬듯이 그러는 너는 왜 네 직장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엔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릴라는 그를 조금 놀리다가 함께통신 교육 과정에서 보내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둘이 현실에서도피라도 하듯 교육 과정에 열중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둘의 미래에 의구심을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72.17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엔초는 왜 릴라와 젠나로를 돌보고 있는 것인가. 릴라는 왜 그런 엔초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같은 집에 살면서 엔초는 왜 매일 밤 그녀가 자기 옆에 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것인가. 왜 침대에서 뒤척이다 물을마신다는 핑계로 부엌에 가서 릴라가 아직 불을 끄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윗부분이 반투명 유리로 된 릴라의 방문을 향해 시선을던지고 그녀의 움직임을 훔쳐보는 것인가. 그럴 때면 침묵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 P147
둘은 아주 간단한 행동에서 복잡한 행동으로 서서히 연습 문제의 난이도를 높였다. 함께 머리를 짜내 일상의 모든 동작을 도식화했다. 취리히 통신 교육 과정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엔초가 그러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마뜩잖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을 불태우는 릴라의 생각이었다. 이제 릴라는 밤이 되면얼어붙을 듯 추운 집에서 비참한 현실을 오직 0과 1로만 구성된 세계로 전환하는 데 열중했다. 릴리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선형성을 추구했다. 그것은 모든 추상적 관념의 기원이 되는 절대적인 추상성이었다. 릴라는 0과 1이라는 숫자 외에는 그 어떤 진실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선형적 세계 안에서 평온함을 찾으려했다. - P148
이미 아슬아슬하던 둘 사이의 균형은 파스콸레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무렵 파스콸레는 산 조반니 아 테두초 근처에 있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역 정당 모임 참석차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 왔다가 길에서 우연히 엔초와 마주치게 된것이었다. 둘은 금방 예전의 신뢰를 회복했다. 둘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불만에 공감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인 엔초에 비해 파스콸레는 가장 신중해야 하는 동네 공산당위원회 서기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당과 그러한 당의 태도를 눈감아주는 노동조합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엔초와 파스콸레가 급속도로 우정을회복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릴라는 파스콸레를 보고서둘러 그의 몫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 P149
하지만 가끔 파스콸레의 장광설을 듣고 있다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어서 힘들었다. 그 시절 잔혹했던 동네의 기억과 돈 아킬레 그리고 그의 살해사건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해 장면을 자주 이야기하고 다녔다. 상상력을 발휘해 얼마나 세밀히 묘사했던지, 아직까지도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스콸레 아버지가 체포되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졌다. 목수아저씨는 고래고래 악을 써댔었다. 주세피나 아주머니와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릴라는 그런 기억이 싫었다. 실제 기억과 허구가 뒤섞여 폭력이 난무하고 선혈이 낭자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럴 때면 고개를 내젓고 회한에 찬 파스콸레의 넋두리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파스콸레에게 가족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대한 이야기, 주세피나 아주머니가 해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 P153
릴라는 일행과 함께 비록낡았지만 장엄함이 느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장소에 비해 참가 인원은 많지 않았다. 릴라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부와 평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변이 화려한 지도부와는 달리 평당원들은 떠듬떠듬 말을 늘어놓았다. 릴라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릴라에게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들의 현학적인 표현과 주눅든 태도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신네 노동자들에게 배우기 위해 모임에 나왔다는 똑같은 말을 노래의 후렴구처럼되풀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본주의, 노동 착취, 사회민주주의 배신, 계급투쟁 방식 등에 대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릴라는 모임에 참석한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이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으면서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5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릴라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나디아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언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릴라가 돌아갔을 때는 마침 곱슬머리 청년이 이탈시데르 화학사의 도급 계약에 대해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릴라는 청년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엔초를 무시하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젠나로가 품 안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도 릴라는 꽤나 오랫동안 표준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조용히 이야기하다 나중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이 조용한 데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높였다. 릴라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자기는 노동계급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잘 모른다고 했다. 자기는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의 노 - P159
동자들밖에 모르며 이들에게서 배울 것은 빈곤함 빼고는 아무것도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청중에게 물었다. "하루 여덟 시간을 모르타델라 햄을 익히는 물속에서 허리까지몸을 담그고 일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되나요? 동물 뼈에서살점을 발라내느라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느낌을 아나요? 한 시간에 고작 10리라를 더 받겠다고 영하 20도의 냉동고를 들락거리는 게 어떤 일인지 상상이 되나요? 그래요. 10 리라 때문에 말이에요. 상상이 간다고요? 그렇다면 대체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뭘배우겠다는 거죠?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공장장이나 남자 동료들이 엉덩이를 주물럭대도 찍소리도 못해요. 사장이란 작자가 원하면 그를 따라 숙성고로 가야 하죠.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그래왔겠죠. 그 자식은 여공의 몸을 덮치기 전에 숙성고에서 나는 햄냄새가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는 일장 연설까지 늘어놓죠. - P160
게다가 남자든 여자든 언제든 몸을 수색당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공장 출구에는 탐지기가 있거든요. 이 앞을 지나갈 때 녹색 대신적색 불이 들어오면 살라미나 모르타델라 햄을 훔쳐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기기는 사장의 첩자 노릇을 하는 수위가 조절하는데 이첩자 놈은 햄을 훔쳐갈 만한 사람이 지나갈 때만 불을 켜는 게 아니에요. 수줍고 예쁘장한아가씨들이나 골치 아픈 말썽꾼이 지나갈 때면 으레 적색불을 켜지요. 이것이 내가 일하는 공장의 현실이에요. 노조는 이곳에 발을 디뎌본 적도 없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위협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죠. 이들에게는 사장의 말이 법이에요. 사장은돈을 준다는 명목하에 노동자들을 자기 소유물처럼 대하죠. 그들의 - P160
삶도 가족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굴어요.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무참히 박살내버리겠다는 심보예요." 릴라가 말을 마치자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릴라의 뒤를이어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릴라의 이야기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자 나디아는 릴라에게 다가가 릴라를 껴안더니 칭찬을 늘어놓았다. - P161
이불을 덮었는데도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아 일어나서 잠옷 위에 울 스웨터를 껴입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자기 심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심장 같았다. 이미 익숙한 증상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러니까 1980년에릴라 스스로 이른바 ‘경계의 해체‘라고 정의 내린 바로 그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날처럼 격렬했던 적은없었다. 혼자 있을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경계의 해체 현상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다. 릴라는 불현듯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혼란에 빠진 릴라의 머리에서 그날 만났던 사람들의 형상과 목소리가 빠져나와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위원회 소속의 두 청년과수위, 직장 동료들, 숙성고에 있던 브루노, 나디아의 형상이 눈앞에나타나 무성영화 배우들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간격으로 번쩍이는 공장 탐색기의 적색 불과 자신을 위협하면서 손에서 소시지를 빼앗아 드는 필리포의 모습도 나타났다. - P169
‘상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방에는 젠나로밖에 없는걸‘ 젠나로는 릴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고르게 숨쉬며 자고있었다. 실제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만 커져갔다. 거센 심장 박동 때문에 단단하게 맞물린 사물의 견고한 이음새마저 끊어질 것 같았다. 사방의 벽을 굳게 지탱하고 있던 힘이 느슨해지고 목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박동에 침대가 흔들거리고 회벽에 금이 가고 두개골 윗부분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젠나로마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다. 젠나로는 셀룰로이드로 만든인형처럼 망가져버릴 것이다. 격렬한 진동에 젠나로의 가슴과 배와머리가 갈라져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 P170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전에도 사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압력을 가하거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을 다루듯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방향으로 유도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스테파노, 니노, 솔라라 형제 그리고 엔초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때는 자기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 수위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위원회의 학생들에게도, 브루노에게도 혼자 힘으로 맞설 것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들과의 거듭되는 충돌에지칠 대로 지쳐 무너져 내리면서도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혼자 감내할 것이다. - P172
릴라는 니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의마음에 들기 바랐기에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었다. 스테파노에게는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혐오감을 억누르며 마지못해 해주던 짓도 니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했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의 몸에 들어올 때 응당 느껴야 할 쾌락을 릴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스테파노와의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니노와 사랑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들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자기 물건을 자신들보다 더 소중히 여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젠나로마저 자그마한 고추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곤 했다. 어찌나 손으로 조몰락대고 당겨대는지 가끔은 쳐다보기 민망했다. 릴라는 그러다 아이가 다칠까봐 두려웠다. - P196
릴라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주었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를보였다. 또 사장의 횡포에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는 동의를 표했다. 릴라는 그런 식으로 개개인의 불만을 이끌어내 현란한 말솜씨로다양한 불만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릴라는 누구보다도 에도와 테레사를 중심으로 모인 소수의 무리가 마음껏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비밀집회가 열렸다. 릴라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직접 앞으로 나서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론을 형성할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릴라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입에 달고 살던 불평불만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당한 문제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릴라는 고깃살을 제거하는 작업장과 고기 저장고와 고기를 거대한 물통에 담그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규합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 한 작업장의 문제점이 다른 작업장의 문제로 이어지며 결국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착취구조를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릴라 스스로도 놀랐다. - P204
릴라가 말했다. "침묵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엿 먹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야." 카포네의 말이 옳았다. 나디아와 아르만도도 옳았다. 그들의 계획은 아직 취약했다. 억지로 단행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릴라는 맹렬히 고기를 썰었다. 누구라도 걸리면 상처를 주고 싶었다. 자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로 손을 찌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저 죽은 짐승의 고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자신의 살덩이에 칼날을 찔러넣고 싶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모두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도무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자신을 자극한 대가를 그들에게치르게 하고 싶었다. - P220
‘아, 리나 체룰로. 너는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대체 왜 그 목록을적은 거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서? 너 자신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지금 투쟁을 시작하면 전 세계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행진에 합류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주제에? 저기 저 사람들을 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이 되기 위한 행진인데? 앞으로도 계속 노동자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일만 하는 노동자의 손에 권력을 쥐어주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디쓴 노동의 노고를 감내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흰소리일 뿐이다. 끔찍한 실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끔찍한 실태를 나아지게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지 않았나. 상황을나아지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일인가?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네 자신은 예전보다 나아졌어? 나디아나 이사벨라처럼 됐다고 - P220
생각해? 네 오빠가 아르만도 같은 사람이 되었어? 네 아들은 마르코처럼 되었어? 아니. 우리는 우리고 그들은 그들이야. 그런데도 너는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거야? 끊임없이 뭔가를 해보려는 통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머리탓이야. 구두를 디자인하고 구두공장을 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니노의 기사를 다시 쓰고 네 말대로 할 때까지 그를 몰아붙였어. 엔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너는 취리히의 통신 교육 과정을 네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어. 그리고 이제는 나디아가 혁명가라면 너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맞아. 모든 악의 근원은 네 머리에 있어. 머리가 만족하지 못해 몸까지 병드는 거야. 이런 자신이 지긋지긋해. 모든 것이 넌덜머리가나. 젠나로도 마찬가지야. 그 아이도 결국 잘 돼봤자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고작 5리라 더 벌어보겠다고 사장 앞에서 설설 기겠지. - P221
그렇다면? 그래, 리나 체룰로. 그렇다면 이제 책임을 지고 생각했던 바를 실행하자. 브루노 자식을 위협하는 거야. 숙성고에서 여공들을 따먹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쳐놓는 거야. 그 옛날 늑대같이 생긴대학생에게 능력을 보여주는 거야. 이스키아 섬에서 보낸 그해 여름브루노가 사주던 음료며 포리오 가에 있던 그의 별장, 니노와 함께사랑을 나누었던 호사스러운 침대는 모두 여기에서 쥐어짜낸 돈에서 나온 것들이야.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며 흘리는 땀에서 나온 것이야. 지금 내가 뭘 자른 거지? 걸쭉한 누런 액체가 사방에 튀네. 역겨워라.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지구는 돌지만 돌다가 떨어지면 부서져버릴 테니 말이야.‘ - P221
미켈레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릴라를 원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릴라 본연의 모습을 원했다. 릴라를 망가뜨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릴라를 가능한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원했다. 성적인 이유로 릴라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켈레는 릴라를 섹스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 P286
끝내 비는 오지 않았지만 종일 어두웠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날 일어난 일 때문에 겉보기에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던 릴라와 나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국면 전환을 맞게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릴라일에 나서기를 그만두고 내 삶에 집중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전에 일어난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조금씩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일들이 쌓이고 싸여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의 탐방은 나름대로 유용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나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내가 알폰소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이토록 오랫동안 내게 입 한 번 벙끗하지 않은 릴라를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릴라는 자신이 미켈레에게 절대적인존재라는 사실을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내게 숨기려 한 것일까. 따지고보면 나는 나대로 얼마나 많은일을 릴라에게 감추었던가. - P293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 P314
심란한 마음에 급기야 나는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동이 트기도 전에 혼자 집을 나선 것이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잘못된 행동과 못된 생각에 대해 벌 받기를 바랐다. 내게 나쁜일이 생겨서 결과적으로 릴라도 벌 받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인적 없는 길을 따라 홀로 걸었다. 사람이 많을 때보다 훨씬안전한 것 같았다. 그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해변에 도착하니 아침 햇살에 테두리가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이 드문드문 떠다니고 있었고 아직은 창백해 보이는 하늘 아래로는 바다가 잿빛 종이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오보성의 윤곽이 빛 때문에 둘로 선명하게 나뉘어 보였다. 베수비오 화산과 가까운 부분은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황톳빛 윤곽이 찬란히 빛났고 메르겔리나나포실리포와 가까운 부분은 아직도 어슴푸레 어둠에 잠겨 어두운 밤색 얼룩처럼 보였다. - P315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강한 체취를 내뿜었다. 매일아침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 멀리 해안 근처에 들어선 건물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나폴리에 대한 내 감정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내 출생성분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태생도바꾸려는 건가. 빈곤과 탐욕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도 없고 원한과분노를 알지도 못하는 시민들로 이 황량한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건가. 태초에 이 땅에 거주하던 신처럼 이 황홀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로 이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 건가. 내안에 있는 악마를 만족시키고 악마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행 - P315
복해지기를 바라는건가. 내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대로 투쟁해왔고 파스콸레나릴라 같은 서민을 위해 애써온 아이로타 집안의 힘을 빌린 것은 사회의 위악을 바로잡는다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였다. 그런 내 판단이 잘못되었나. 곤경에 처한 릴라를 내버려두었어야 했을까. 이제부터는 절대로, 다시는 타인을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결혼식을 위해 나폴리를 떠났다. - P316
나는 속이 상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의 반응이 성당에서 식을 올리기를 거부한 젊은 지식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여과 없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심하게 다퉜다. 결혼식 당일까지 화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혼식 내내 피에트로는 벙어리마냥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나 역시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혼식에 관해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일이 또 하나있다. 예상치 못했던 결혼 피로연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시청에서식을 올리고 가족들과 인사를 한 뒤 따로 피로연 없이 바로 집으로돌아오기로 했었다. 이는 피에트로의 금욕적인 성향과 이제 더 이상어머니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내 성향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방침은 시어머니의 은밀한계획 때문에 실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 P317
그 무렵 내 마음은 시작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실뭉치 같았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실과 막 자아낸 새로운 실, 현란한 색상의 실과 무채색 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가는 실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릴라의 예상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순간 나의 평온함도 끝이 났다. 아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었다. 무심결에 실뭉치를 잘못 건드려 뒤엉킨 부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분이 표면으로 올라온것 같았다. 병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별다른 문제없이 젖을 잘 빨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부터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더이상 나를 원하지 않았다. 겨우 몇 초쯤 젖을 빨다가도 화난 작은 짐승처럼 악을 써댔다. 나는 심신이 약해져 오래된 미신에 빠져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일어난 걸까. 내 젖꼭지가 너무 작아서 자꾸 놓치는 걸까. 내 몸에서나오는 젖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멀리서 아이가 엄마인 나를 미워하도록 사악한 주술이라도 건걸까 - P330
우연히 니노가 쓴 글을 두세 번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을읽어도 전처럼 니노의 모습과 목소리와 사유를 상상하며 즐거워할수 없었다. 물론 나는 니노의 성공이 기뻤다. 니노의 기고문이 실린다는 것은 그가 잘 지낸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디선가 누군가와함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나는 니노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하얀 종이에 검은색으로 인쇄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현재 내 신세가더 견딜 수 없어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외모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외모를 가꿔봤자 볼 사람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피에트로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겉보기에 피에트로는 나를 예의 바르게대했지만 실은 그에게 나는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 P337
먼저 이번 글의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보일 뿐이거든." - P384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날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던 덕분에 릴라는 내게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 글을 신랄하게 평할수 있었고 내 원망을 피할 수 있었으며 무려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높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다시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싹 사라질 만큼이나 어려운 목표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날 대화의 의미를 아무리 분석해봐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수 없다. 그때가 우리 우정사에서 최상의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최악의 순간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의 무능력함을인정하는 데릴라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거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내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릴라의 의견이 시어머니의 의견보다 훨씬 권위 있게 느껴졌다. 더 납득할 만하고 더 애정 어린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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