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피에트로는 나를 위로해주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방에 틀어박혀 다시 책과 씨름했다.
몇 주가 지난 다음에야 피에트로는 내게 그동안 사복 차림을 한경찰이 두어 번 자기를 찾아와 몇몇 학생의 사진을 보여주며 정보를물었다고 했다. 처음에 피에트로는 이들을 예의 바르게 맞이했지만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채 예의 바르게 돌려보냈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이 두 번째로 피에트로를 찾아왔을 때는 그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 학생들이 범죄를 저질렀나요?"
"아직은 아니죠."
"범죄도 저지르지 않은 학생들인데 대체 내게 뭘 원하는 거죠?"
피에트로는 예의를 갖추어 최대한 노골적으로 경멸감을 드러내며 경찰들을 문까지 바래다주었다. - P501

몇 달 동안 릴라는 한 번도 나를 찾지 않았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나는 릴라가 필요했지만 내가 먼저 릴라에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마리아로사와 가깝게 지내려했지만 이 또한 쉽지 않았다. 장애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그새 프랑코가 나의 시누이 집에 아예 눌러앉았다. 피에트로는 내가 자기 누나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도 싫어했고 내 옛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내가 밀라노에 있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하루 이상 머무르면 피에트로는 기분 나빠했다. 상상속의 증상이 도지고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프랑코도 내가 찾아가는 것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아이들이시끄럽게 재잘거리는 소리를 견딜 수 없어했다. 그 무렵 프랑코는정기적인 치료를 위해 병원을 방문할 때 빼고는 거의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우리가 갈 때면 가끔 아무 말 없이 집에서 사라져 마리아로사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 P502

마리아로사는 마리아로사대로 너무 바빴다. 그녀는 항상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마리아로사의 집은 일종의 집회소 같았다.
여성 지식인에서부터 중산층 기혼녀, 폭력을 휘두르는 동거인을 피해 도망친 여성 노동자, 가출소녀까지 가리지 않고 집에 들였다. 그러다보니 내게 신경 쓸 여유가 거의 없었다. 만인의 친구 같은 마리아로사의 태도를 보면 우리 관계가 과연 특별한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마리아로사의 집에 머무르다보면 며칠 동안이나마 공부하고싶은 욕망이 되살아났다. 가끔은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내게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P502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런 모임이있는 날이면 프랑코는 외출하거나 자기 방에 틀어박혀 아예 나오지않았기 때문에 집 안에는 여자들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여자란 무엇인지 이해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여성의 모든 행동과생각과 논의와 꿈을 깊이 파고들어가 보면 결국은 그 무엇도 우리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심오한 통찰은 정신력이 가장 약한 여성들을 지치게 했다. 이들은 과도한 자아성찰을 견디지 못하고 여성해방을 달성하려면 그저 남성을 자신의 삶에서 내쫓기만 하면 된다, 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 P503

모든 것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요동치는 불안정한 시기였다. 우리들 대부분은 평온하지만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워 극단적인 명제에 매달렸다. 파도의 물마루에 모여 두려움과 분노로 가득 차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급진 좌익 단체 ‘로타 콘티누아‘가 분리주의 여성운동 시위대를공격하라는 지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우리는 너무나 실망했다. 우리 가운데 가장 극성스러운 참가자 중에는 마리아로사의 집에 남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격렬한 말싸움을 벌이고 마리아로사와 관계를 단절하는 사람도 생겼다. 마리아로사는 프랑코의 존재를 먼저 알리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굳이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런 상황이 싫었다. 건설적인 자극을 받고 싶었지 갈등을원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를 위한 가정을 세우고 싶은 것이지 독단적인 교리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고가끔 마리아로사에게 이런 내 의견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마리아로사는 조용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 P503

"내 생각에는 남자가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같아. 그때 나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나를 변화시키려는 프랑코의욕망이 사실은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증거라는것을 깨닫지 못했어. 그는 내가 다른 사람이기를 원했던 거야.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단순히 여자를 원한 게 아니었어. 자기가 만약 여자라면 되고 싶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여성을 원했던거야. 프랑코에게 나는 자신을 여성으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어. 여성성을 취해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였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증명할 수 있는 기회였던 거야. 자신이 남성으로서뿐 아니라여성으로서도 완벽하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존재였던 거야. 지금은 내가 자신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때 나는 정확히 이런 말을 했고 마리아로사는 진심으로 관심을보였다. 평소에 모든 사람에게 관심 있는 척하는 태도와는 달랐다.
"지금 한 이야기를 글로 한번 써봐." - P504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리아로사의 칭찬에 기쁘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해서 다소 황망히 피에트로와의 관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였다. 나는 그가 자꾸만 내게 자신의 관점을 강요하려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가 웃음을 터뜨렸다. 진지했던 분위기가 변했다.
프랑코와 피에트로를 비교하는 거야? 지금 농담해?"
마리아로사가 말했다.
"남성성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아이인데 자신의 여성적인감성을 네게 강요할 만한 힘이 어디 있어? 비밀 하나 알려줄까? 나는 네가 피에트로와 절대로 결혼하지 않을 줄 알았어. 결혼한다 해도일년이 못 되어 헤어질 거라고 생각했어. 아이가 생기지 않도록조심할 거라고 생각했어. 아직도 둘이 함께 있는 것을 보면 기적 같아. 불쌍한 레누.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 P505

나는 성숙이란 결국 삶의 굴곡을 호들갑 떨지 않고 있는 그대로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일상적인 삶과 이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며 길을 걸어가는 것이라고, 변화를 기다리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데데는 이미 읽고쓰기가능숙한 상태에서 남들보다 조금 먼저 초등학교 입학했다. 엘사는 아침 내내 조용한 집에서 나를 독차지하게 되자 너무 기뻐했다. 남편은 대학가에서 가장 고리타분한 교수인데도 드디어 두 번째저서의 집필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이번 책은 첫 번째 책보다 학술적으로 더 중요한 저서가 될 것 같았다. - P506

나는 아이로타 부인이었다. 엘레나 아이로타 나는 그동안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생활 때문에 비탄에 잠겨 있었지만 이제는 시누이에게 고무되어, 그리고 나 스스로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막아보고자 남성에 의해 만들어지는 여성상을 주제로 고대사와 현대사를 넘나드는 연구를 남몰래 시작했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마리아로사와 시어머니, 지인들에게 뭔가를 하고 있다고말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나는 내 이론을 성경의 아담과 이브의 창조에서 시작해 대니얼 디포의 플랜더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톨스토이의 카레니나, 프랑스 유행잡지 최신 유행』, 마르셀 뒤샹의 로즈 세라비뿐 아니라 그이후의 시대까지 밀어붙여서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놀라운 사실을밝혀냈다. 나는 서서히 만족감을 느꼈다. 어디에서든 남성에 의해 - P506

주조된 꼭두각시 같은 여성상의 흔적이 보였다.
진정 여성적인 것은 없었다. 조금이나마 뭔가 나타날 만하면 이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남성들이 여성을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
피에트로는 직장에 가고 데데는 학교에 가고 엘사는 내 책상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놀고 있을 때면 그제야 나는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함축된 의미를 파헤치며 살아 있음을 느꼈다. 가끔은 릴라와 내가 함께 중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대학교까지 졸업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에 빠지곤 했다.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찰떡궁합을 자랑하면서 학교에 다녔으면 어땠을까.
우리는 정말 완벽한 짝을 이룰 수 있었을 텐데. 서로의 지성을 합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각자 이해한 내용과 머릿속에 떠오른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기뻐했을 텐데, 함께 글도 쓰고 공동저자로 이름을 알리고 서로의 존재에 힘을 얻고 그 누구도 감히 우리 둘만의 것을 흉내 내지 못하도록 함께 싸웠을 것이다. - P507

여성의 고독은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름의 문화나 전통을 만들어낼 기회도 없이 그런 식으로 자기 인생에서 상대방을 쫓아내버리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때면 생각이 중간에서 멈추는 것 같았다. 그 생각은 매력적이지만 결함이 많아서 당장 확인이 필요하고 더 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내 생각에 자신감도 믿음도 없었다. 그럴 때면 다시 릴라에게 전화해서 내 생각을 말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혔다.
‘내 생각 좀 들어봐. 같이 이야기하자. 네 의견을 말해줘. 지난번네가 해줬던 알폰소 이야기를 기억해?‘
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 P507

우리는 십수 년 전부터 이미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나는 혼자서도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 어느 날이었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가들렸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피에트로가 데데를 데리고 점심식사를하러 집에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책과 공책을 덮었다. 데데는 벌써거실로 뛰어들었고 엘사는 그런 언니를 반갑게 맞았다. 데데는 배가많이 고픈 것이다.
‘엄마, 오늘 점심은 뭐예요?‘
나는 데데가 이렇게 말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학교가방을 미처 내려놓기도 전에 데데가 외쳤다.
"아빠 친구가 왔어요. 우리랑 함께 점심을 먹는대요."
나는 아직도 그날을 정확히 기억한다. 1976년 3월 9일이었다. 나는 기분이 가라앉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데가 내 손을 잡고 복도 쪽으로 이끌었다. 모르는 사람이 집에 왔다는 언니의 말에 엘사는 벌써 조심스럽게 내 치마에 꼭 달라붙었다. - P508

니노는 정말 박학다식했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그랬다. 그는모든 일에 호기심을 가졌다. 니노가 장자크 루소와 버나드 쇼 이야기를 꺼내기에 나도 끼어들어 내 의견을 말했다. 니노는 내 이야기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였다. 아이들이 튀김을 더 달라면서 나를 잡아당기는 바람에 내 신경이 날카로워지자 니노는 식당 주인에게 튀김을 한 접시 더 준비해 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니노가 피에트로에게 말했다.
"엘레나에게 시간을 더 마련해줘야 해."
"지금도 하루 온종일 마음껏 시간을 쓰고 있는걸."
"농담이 아니야. 엘레나를 배려하지 않는 것은 인류 차원에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차원에서도 죄악이야."
"죄악이라니?"
"지성을 허비하는 죄악이지. 육아와 가사에 온 힘을 쏟도록 강요함으로써 여성의 지성을 억압하는 사회는 도끼로 제 발등을 찍는 격이야. 다만 이를 깨닫지 못할 뿐이지." - P518

"지금 내 남편은 내게 진정한 열정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거야."
순간 침묵이 흘렀다. 니노가 물었다.
"정말 그래?"
나는 니노에게 잘 모르겠다고 충동적으로 대답해버렸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수치심과 분노심에 말하는 내내 두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제 튀김은 그만들 먹어."
제대로 통제되지 않는 감정이 아이들을 향한 말에 묻어 나왔다.
니노가 나를 위해 나섰다.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는 하나만 더 먹을게. 엄마도, 아빠도 하나씩만 더 먹을거야. 너희들은 두 개씩 더 먹자. 하지만 이게 마지막이란다." - P519

가끔은 피에트로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피에트로는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경솔하거나 논리가 빈약하거나바보같은 글을 쓰지 않게 해줄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백과사전 같은 그의 지식 때문에 주눅 들고 싶지는않았다. 그때 나는 특히 성경에 나오는 첫 번째 창조와 두 번째 창조에 집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이 두 사건을 순서대로 배치했다. 나는 첫 번째 창조인 아담의 창조를 신의 창조 행위의 종합체로두 번째 창조인 이브의 창조를 이보다 더 확장된 이야기로 간주했다. 나는 이를 바탕으로 꽤나 생생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글을 쓰면서도 내 글이 경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 글의 요지는 대충 이러했다. - P521

형과 여성형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만들었냐고? 신은 먼저 흙으로Ish‘ 의 형태를 만든 다음 콧구멍으로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었다. 그런 다음 가공되지 않은 원자재 상태가 아니라 이미 형상을 갖추고생명을 얻은 남성을 재료로 Ishah, 즉 여성을 만든다. 신은 남성의옆구리에서 여성을 취한 다음 즉시 살로 상처를 아물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Ish는 여성을 두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이는 다른 모든 창조물과는 달리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다. 그녀는 내 살의 살이며 내 뼈의 뼈다. 신께서 나로부터 만드신 것이다. 내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다음 그녀를 내 몸에서 뽑아내신 것이다.
나는 Ish이고 그녀는 Isah‘h이다. 여자를 부르는 명칭에서부터 그녀가 신성한 영혼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나에게서 유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여자는 내 어근에붙은 접미사일 뿐이며 오직 내 언어 속에서만 스스로를 표현할 수있다." - P522

나는 엘레오노라가 니노를 감당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생각하고 싶었다. 그녀는 격정적으로 살아가는 니노의 삶에서 작은조각 가운데 하나일 뿐 그에게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니노는그녀에게 큰 의미를 두지 않고 제 갈길을 가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내 팔찌를 알아봤다는 뜻으로 니노가 내 손목에 잠시 손을 갖다 대며 살짝 쓰다듬었을 때는 더 그랬다. 피에트로에게 그동안 나를 위한 시간을 조금마련해주었느냐고 놀리듯 묻고 나서 나에게 작업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물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 P529

했지만 결국에는 솔라라 집안사람들의 돈과 다를바 없이 불법적인거래나 파괴 행위를 통해 얻은 것이다. 이 중에서 몇 푼 안 되는 돈은우리 아버지의 팁이 되어 내 교육비에 보탬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더러운 돈과 깨끗한 돈의 경계는 어디일까. 엘레오노라가 피렌체의 무더위 속에서 하루 종일 마음껏 뿌린 돈은 과연 얼마나 깨끗할까. 내가 선물로 받아 집으로 가져가는 이 물건들을 사기 위해 사용된 수표가 미켈레가 릴라의 임금을 지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표와다를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이들과 오후 내내 선물받은 옷을 입고 거울에 비춰보며 시간을 보냈다. 다 맵시 있고 화사한 고급 제품이었다. 그중에 40년대스타일의 톤 다운된 적색 드레스가 있었는데 내게 특히 잘 어울렸다. 그 옷을 입은 내 모습을 니노에게도 보여주고 싶었다. - P536

세상일은 내게서 멀어져 갔다. 내 자아가 내 안으로 꺼져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내가 머무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자 유일하게 투쟁할만한 가치가 있는 내 육신 속으로 한없이 꺼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내 이성과 혼란을 목격했던 피에트로가 등 뒤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자 나는 안도했다. 그의 시선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내 입술이
키스로 얼얼하다는 것을 알아챌 것만 같았다. 지난밤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것을 눈치챌 것만 같았다. 불에 덴 것처럼 민감하기 그지없는 내 몸 상태를 알아차릴 것만 같았다.
혼자 남게 되자 나는 다시는 니노를 보지도 못하고 연락도 할 수없을 것이라고 또 한 번 확신했다. 이와 동시에 다른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이제는 피에트로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와같은 침대를 쓸 생각을 하니 끔찍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나. - P559

그래도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기분이 너무 고조되어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고통받고 내가 그들에게서 공격당하고 치욕을 겪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내게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힘겨운 과정을 겪으면서 드디어 내가 만족할 만한 그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모든 일이 궁극적으로는 지금 고통받고 있는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엘레오노라는 결국 사랑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떠나려는 사람에게 남아달라는 말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피에트로는 이론상으로는 이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이를 받아들이고 지혜로 승화해 관용을 실행에 옮길 시간이 필요한 것뿐이었다. - P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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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로사의 자극적인 발언과 행사에서 만난 마리아로사 친구들의 초대 덕분에 예전에 시어머니가 내게 준 여성문제에 관한 소책자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책자는 책 무더기 아래깔려 있었다. 나는 그 책자를 가방에 넣고 밖으로 나가 늦겨울 잿빛하늘 아래에서 바깥공기를 마시면서 책자를 읽었다. 나는 호기심을자극하는 제목에 이끌려 「헤겔에게 침을 뱉어라」라는 글부터 읽기시작했다. 글을 읽는 동안 엘사는 유모차에서 곤히 잠들었고 앙증맞은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르고 울 모자를 쓴 데데는 자기 인형과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글에 사용된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에서 신선한 충격을 느꼈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자유로운 사고방식이 제일 인상적이었다. 나는 수많은 문장에 힘주어 줄을 긋고 느낌표로 표시하고 문단 옆에 세로로 획을 그었다. - P393

헤겔에게 침을 뱉는 것은 남성 중심 문화에 침을 뱉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와 레닌에게 침을 뱉는 행위다. 유물론적 역사관과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과 남근 선망 사상에 침을 뱉는 것이며 결혼과 가족이라는 제도에 침을 뱉는 것이다. 나치즘과 스탈리니즘과 테러리즘에 침을 뱉는 것이다. 전쟁과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침을 뱉는 것이다. 평등이라는 이름의 함정과 모든 가부장적 문화의 징후와 제도적 형태에 침을 뱉는 것이다.
여성의 지성이 허비되는 것을 막고 사회에서 남성 중심적인 문화의특성을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부장적인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모성이라는개념을 없애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아이를 낳아주어서는 안 된다. - P393

주인-노예 변증법 따위는 집어치우자. 머릿속에서 열등감을 깡그리 없애야 한다. 여성의 자아를 되찾아야 한다. 여성은 남성의 안티테제가 아니다. 여성의 ‘다름‘을 인정하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야한다.
대학은 여성을 해방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여성 억압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관문이다. 이는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남성의 영역이 우주까지 확장되는 데 비해 지구상에서 여성의 삶은 아직 시작하지도않았다. 여성은 지구의 또 다른 얼굴이다. 여성은 예측할 수 없는 주체다. 동시대, 지금 이 순간, 이곳에서부터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 P394

글의 저자는 카를라 론치였다.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여자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동안 나는 수많은 책을 읽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지금껏 나는 그 힘든 과정을 견뎌냈을 뿐 책에서 습득한 지식을 제대로사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에 쓰인 내용에 대해 한 번도 반문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생각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비판적인 사유란 이런 것이다. 그렇게나 노력했지만 나는 제대로 생각할 줄도 모른다.
마리아로사도 마찬가지다. 마리아로사는 다독가인 데다 내용을솜씨 좋게 재구성해 그럴싸하게 소개하는 능력은 뛰어나다. 하지만그것뿐이다. 릴라는 다르다. 릴라에게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공부만계속했다면 릴라도 이 책의 저자처럼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은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즈음 어떤 책을 읽어도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국에는 릴라가 떠올랐다.  - P394

머릿속에 이상적인 여성상을 만들어냈는데 그 여성상은 약간의 차이를 제외하면릴라에게서 내가 느껴왔던 것과 똑같은 열등감과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을 때도 나는 릴라를 생각했다. 릴라의 삶에서 단편적인 사건을 떠올리고 릴라가 공감했을 법한 문장과싫어했을 법한 문장을 생각하면서 책을 읽었다. 그런 유의 책을 읽고 나면 책의 내용에 고무받아 자주 마리아로사의 친구들 모임에 합류했지만 막상 단체의 구성원들과 섞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데데는 끊임없이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징징댔고 엘사는 시도 때도 없이기쁨의 환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것은 아이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나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내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기때문이었다. 토론은 대부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조악하게요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지루함을 느꼈다. - P395

요약하는 것나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미 잘 알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구태여 여성으로서 자의식을 찾는 데 힘들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사회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남자의 본성은 다 똑같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두가 듣는앞에서 피에트로나 다른 남자들과의 관계에 대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남성 중심적인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기 위해서 의식을 남성화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나처럼 잘 아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는 그런 모임 때마다 생성되는 미묘한 긴장감이나 질투, 인정받기 위해서 일부러 권위주의적인 말투를 쓰거나 비굴하게 가녀린 목소리를 내는 데 전혀 관심이 없었다. - P395

나는 여자들이 자칫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서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대립하는 것이 좋았다. 상대방에게 동의를 표하다가 이야기가 가십거리로 흐르는 것은 싫었다. 그런 식의 대화법은 어린 시절부터 능숙했다. 그보다는 어떻게 해서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갈급함이 좋았다. 나는 한 번도 그런 갈급함을 느껴본 적이없었다. 아마도 타고난 성향 때문일 수도 있었다. 모임 중에 나는 그런 갈급함을 표출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릴라와는 꼭 그렇게 하고 싶었다. 꼬일 대로 꼬인 우리의 복잡한 관계를 약간의 여지도 용납하지 않고 확실하게 되짚어보고 싶었다. 지금껏 침묵해온 것을 숨김없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실패작에 대해 말하다 릴라가 예기치 않게 울음을 터뜨린 일부터이야기를 풀어나가면 좋을 것 같았다. - P396

각했다. 하지만 적임나는 먼저 내 자신을 이해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 여성성을탐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너무 과하게 애를 썼다. 남성의 능력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다. 뭐든 다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뭐든 다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사실 정치나 투쟁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남자들에게잘 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남자들보다 수준이 떨어지지 않는다는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수준의 기준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인 남성의 이성? 유행하는 표현을 외우려고나는 얼마나 노력했던가.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내 사고방식과 언어는 지금까지 내가 받은 교육에 의해 형성되었다. 남보다 뛰어나게되려고 나는 나 자신과 어떤 비밀스런 협상을 맺었던가. 배우기 위해 그렇게 노력했는데 이제 와서 배운 것 가운데 무엇을 잊으려 애써야 하나. 게다가 나는 릴라와 닮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에 대한 잘못된 이미지를 가지고 살아왔다. - P397

나는 자꾸만 내 자신을 릴라와 일치시키려 했다. 릴라에게서 분리되려고 할 때마다 불구가 되는 것 같았다. 릴라가 없으면 생각조차제대로 할 수 없었다. 릴라 없이는 내 생각에 확신이 생기지 않았고어떠한 그림도 그려지지 않았다.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나. 물론 다시 글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실은 나에게는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해야 하는 과제를 해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 글쓰기마저 그만두어야 하나. 뭐든 다른 일을 찾아야 하나. 어머니 말처럼 사모님 노릇이나 하면서 살아야 하나. 식구들만 돌보면서. 그도 아니면 가정과 아이들과 남편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내팽겨쳐야하나. - P398

피에트로는 제대로 쉬지 못해 신경이 날카로웠던 걸까. 아니면 지금껏 수많은 책과 예의범절 교육 뒤에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걸까.
나는 다시 한번 내가 그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아직도 피에트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었다. 피에트로가 아르노 강에뛰어들었는지, 피렌체 어디선가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는지 아니면어머니 품에 안겨 징징대며 위로받기 위해 제노바로 떠났는지 알 수없었다.
‘이제 그만‘
나는 두려웠다.
지금까지 쌓아온 지식이나 책에서 읽은 내용이 내 삶에서 그다지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아이가 둘인 마당에 경솔한 태도는 금물이었다.
피에트로는 새벽 5시가 다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니 너무나 안심이 되어 나는 그를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피에트로가 중얼거렸다.
"당신은 나를사랑하지 않아. 단 한번도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
그는 덧붙였다.
"어찌 됐든 당신은 내게 과분해." - P400

실은 피에트로는 이미 자신의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버린 혼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자기 삶이 따로 설명이 필요 없는 규칙적인 일과에 따라 진행되기를 바랐다. 공부를 하고, 강의를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고, 섹스를 하고, 매일 혼란스러운 이탈리아사회문제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서 해결하는 데 조금이나마 일조하기를 바랐다.
그런 그의 소망과는 달리 피에트로는 매일 대학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시달렸다. 해외에서는 나날이 명성이 높아졌지만 동료 교수들은 그의 글을 평가절하했다. 그는 자신이 항상 무시당하고 위협받고있다고 생각했다. 내 불안한 성격 때문에 (불안한 성격이라니. 나처럼 무던한 여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가정이 위험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 P401

새로운 방문객의 등장에 실비아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엘사를 품에 꼭 껴안고 엘사에게 가볍게입을 맞추며 한쪽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그러는 동안 지난날 스테파노가 릴라에게 저질렀던 만행과 실비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상상했던 장면이 함께 떠올랐다. 릴라와 실비아의 이야기가 공포에 질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느껴졌다.
불현듯 나는 데데를 찾아 나섰다. 데데는 미르코와 함께 복도에서인형을 가지고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은 엄마 아빠 역할을, 인형에게는 아이 역할을 시킨 듯했다. 그런데 평온한 일상이 아니라 부부싸움을 하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나는 멈춰 서서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데데가 미르코에게 지침을 내리고 있었다.
"이제 내 뺨을 때려봐. 알았지?"
풋풋한 어린 생명체가 나이 든 생명체를 장난삼아 흉내 내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 나는 데데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피에트로와 많이 닮은 것 같았다. 그에 비해 미르코는 니노와 똑같았다. - P411

"리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거예요."
나는 그런 말을 당당하게 하는 엔초의 모습도 혼란스러웠다. 엔초는 릴라에 대한 자신의 헌신적인 사랑을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표현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특별함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면서 스스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피에트로와는 달랐다.
나는 피에트로가 나를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나는 그저 자기 딸자식들의 어머니일 뿐이었다. 피에트로는 내가 제대로 교육을 받았음에도 나에게 독립적으로 생각할 수있는 능력이 없기를 바랐다. 내가 읽는 책, 나의 관심사, 나의 이야기를 무시함으로써 내게 굴욕감을 주었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나 스스로 끊임없이 내 무능함을 증명해야만 할 것 같았다. - P421

비아냥대는 릴라의 목소리와 무례할 정도로 뭐든 하찮게 취급하는 말투는 엔초가 들려준 이야기를 별일 아닌 것처럼 만들었다. 그바람에 그 무렵 내가 읽고 있던 책과 피렌체 여성들, 마리아로사에게 배운 용어들 그리고 나 스스로 해답을 찾으려 애쓰던 문제들을릴라와 함께 논의할 기회도 사라져버렸다. 릴라에게 기본적인 개념만 알려주면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 됐어. ‘
나는 생각했다.
‘나는 내 일을, 너는 네 일을 하는 거야. 성장하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해. 내일모레면 이제 서른 살이 될 텐데 그렇게 동네 뜰에서 소꿉장난이나 하고 있으라고. 이제 나도 신경 쓰지 않을 테야. 나는 해변에나 가야겠어?
그리고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 P432

나는 어떻게 해서든 내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애쓰는 데 반해 릴라는 스스로에게조차 자기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릴라를 밝은 곳으로 이끌어 모든 것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내 욕망에끌어들이려 하면 할수록 릴라는 자꾸만 그늘 속으로 몸을 숨기려 했다. 숲속 너머로 몸을 숨겨 나뭇가지로 얼굴을 가린 보름달 같았다.
나는 9월 초에 피렌체로 돌아갔다. 하지만 릴라에 대한 좋지 않은생각은 흐려지기는커녕 갈수록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피에트로에게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그는 나와 아이들이 돌아온 것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다. 원고 마감이 늦은 데다 학기가 시작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걸핏하면 화를 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식사를 하다가 데데와 젠나로가 별것 아닌 일로 싸우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부엌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동작이 어찌나 거칠었던지 부엌문 유리가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 P441

릴라는 상상력이 뛰어나고 용감무쌍하니까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릴라는 거사를 치른 후에 찬란한 승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위대한 업적으로 찬양받는 혁명지도자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때가 되면 릴라는 내게 말할 것이다.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
밤이 되면 수많은 상상이 실제로 일어났거나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아 릴라가 걱정됐다. 혼란에 빠진 다른 수많은 사람처럼 릴라가 쫓기고 있는 모습이나 부상을 당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는 그런 릴라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릴라가 부럽기도 했다.
어린 시절 릴라가 놀라운 일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굳은믿음이 점점 확고해졌다. 나는 나폴리에서 도망쳐 나온 것을 후회했다. 릴라에게서 멀어진 것을 후회했다. 다시 릴라 곁으로 돌아가야할 것만 같았다. - P445

릴라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릴라는 왜 내게 묻지도 않고 혼자 그런 선택을 한 걸까. 내가 그 정도 수준도 안 된다고 생각한 걸까. 나도 자본주의나 착취, 계급투쟁,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데, 릴라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데, 릴라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불행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머니이자유부녀인 현재 나 자신의 상황에 불만이 가득 차 침대에 누워 괴로워했다. 죽을 때까지 부엌데기처럼 매일 똑같은 집안일을 하고 침대에서 부부의 의무를 수행하면서 시들어갈 거라는 생각에 괴로웠다.
아침이 오면 정신이 맑아져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나는 치밀하게주변 사람들의 증오심을 자극하다 점점 더 폭력적인 일에 연루되어가는 변덕스러운 릴라의 모습을 상상했다. 릴라는 원래 과감한 면이있었다. 한번 마음먹으면 정당한 이유를 가진 자 특유의 관대한 잔혹함으로 결연하게 일을 밀어붙였다.  - P446

하지만 나는 생각만 할 뿐 실제로 릴라에게 전화하지는 않았다.
릴라도 내게 전화하지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서로 이야기를 나눈 것이 우리 관계에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끈을 놓지는 않았지만 우리 관계는 갈수록 예전만 못했다. 우리는서로에게 추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지금 릴라를컴퓨터 전문가인 동시에 완강하고 인정사정없는 도시의 게릴라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릴라는 릴라대로 나를 전형적으로 성공한 지식인이자 머릿속에는 온통 아이들과 책 생각밖에 없고 학구적인 남편과 해박한 대화나나누는 교양 있고 부유한 사모님이라는 두 가지 모습으로 생각하고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한 실체감을 회복해야 했지만 너무나멀어져 이제는 그럴 수가 없었다. - P447

뭐라고 반박해야 하나, 대화를 시작할 때나 지금이나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때도 이렇게 말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경험해볼 게 뭐 있겠니, 엘리사. 내겐 빤히 보여, 마르첼로는 네몸을 취하고 네 육체에 익숙해지면 너를 버릴 거야."
하지만 막상 입에 담기에는 너무 구닥다리 표현 같았다. 어머니도그 정도로는 말을 못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나는 집을 떠났고 엘리사는 남았다. 내가 나폴리에 있었다면 나는어떻게 됐을까.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생각해보면 나부터도 어린 시절 솔라라 형제를 좋아하지 않았나. 나폴리를 떠난 대신 나는 무엇을 얻었는가. 내 여동생의 신세를 망치지 않기 위한 현명한 조언조차 못하고 있지 않나. - P461

한참을 오가던 공허한 대화와 거친 바다에 이는 파도를 따라 떠밀리듯 들려오던 목소리가 한순간 멈췄다. 릴라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파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깡말랐지만 강단 있어 보였다. 그래서인지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있었는데도 평소보다 키가 커보였다.
입가와 눈가에는 주름이 깊게 파였지만 얼굴은 하였고 이마와 광대뼈 주위 피부는 팽팽했다.
머리는 포니테일로 묶었는데 귓불이 거의 없는 귀 위로 새치가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릴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나는너무 놀라서 미소에 응답하지도 릴라에게 인사를 하지도 못했다. 그때 우리는 둘 다 서른이었는데 릴라는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였고나보다 더 지쳐 보였다.  - P468

이 연극의 연출자는 대체 누구인가.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는이 사람들을 도대체 누가 한자리에 모아놓은 걸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엘리사가 나선 것이지만 엘리사 뒤에 누가 있는 걸까. 마르첼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르첼로는 대부분 미켈레의 말을 따른다. 미켈레는 내 옆에 앉아서 속편하게 먹고 마시면서 자기 부인과 자식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듯 심술궂은 눈빛으로 릴라에게 이끌리는 듯한 내 남편을 쳐다보고 있었다.
미켈레는 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그곳이 솔라라 집안의 영토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아무리 도망쳐봤자 나도결국에는 그곳에, 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걸까. 마음만 먹으면 사람들의 감정과 말과 관습을 총동원해서 내게 뭐든 강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필요하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자신은 필요에 따라 아름다운것을 추하게 만들 수도 있고 추한 것을 아름답게 만들 수도 있다는것을 보여주려는 걸까.  - P470

미켈레는 주위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리나의 머릿속에는 살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것이죠. 그건 엄청나게 강해서 어디로 튀어 나갈지 알수도 없고 멈출 수도 없어요. 의사들에게도 보이지 않죠. 내 생각에는리나 자신도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었으면서 말이지요. 리나는 그 존재에 대해서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지금도 저 못된 표정을 좀 보세요.
리나의 머릿속에 있는 그것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문제를 일으키지만 일단 마음을 먹으면 정말 놀라운 일을 해내죠. 나는 오래전부터 리나의 재능을 사고 싶었어요. 그래요, 말 그대로 사고 싶었어요. 나쁠 것도 없잖아요. 진주나 다이아몬드를 사는 것처럼 사고 싶었던 거지요. 불행히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이제 드디어 첫걸음을 내디뎠고 오늘 밤 그 작은 도약을 축하하고싶군요. 나는 여기 체룰로 부인을 아체라에 세운 데이터 프로세싱센터장으로 채용했어요. 엄청나게 현대적인 시설이죠. 레누, 너와 교수님이 관심 있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보여줄게. 꼭 내일이 아니더라도 떠나기 전에 말이야. 어때, 리나?" - P476

하지만 일은 지루해.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느려서 많은 시간을 허비해. 빨리 새 기계가 도착했으면 좋겠어. 새 기계는 속도가 훨씬 빠르대. 아니야. 차라리 이대로가 좋을지도 몰라. 속도는 모든 것을 삼켜버리거든. 사진이 흔들릴 때처럼 말이야. 알폰소가 했던 말인데, 알폰소는 자기는 태어날 때부터 흔들리게 나왔다고 웃으면서 말했어. 그래서 윤곽이 모호하다고 말이야.
요즘들어 알폰소는 내게 친한 척해 나랑 친해지고 싶대, 복사지로 베낀 것처럼 나랑 똑같아지고 싶대. 자기가 여자라면 나처럼 되고 싶대. 그래서 내가 똑바로 말해줬어. ‘여자라니. 너는 사내야, 알폰소 너는 내가 어떤지 몰라. 우리가 아무리 친해도, 네가 아무리 나를 관찰하고 훔쳐보고 흉내 내려 해도 너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끝까지 모를거야‘라고 말이야.
알폰소는 내 말에 재미있어하는 것 같았어. 알폰소는 ‘그럼 어떻게 해. 나는 지금 내 모습대로 살아가는 게 너무 괴로워‘라고 했어. - P492

알폰소는 예전부터 미켈레를 사랑했다는 거야. 그래 맞아. 미켈레솔라라 말이야. 미켈레가 나를 좋아하는 것처럼 자기도 좋아해주었으면 좋겠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니?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겠어? 우리 몸에 든 게 너무 많아서 몸이 부풀어 오르다가그만 터져버리는 거야.
나는 알폰소에게 말했어. ‘좋아. 그럼 우리 친구가 되자. 하지만 나처럼 진짜 여자가 되겠다는 생각일랑은 버려. 너는 기껏해야 너희사내들의 고정관념에 부합하는 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니까. 아무리 나를 따라하고 내 모습과 완벽하게 똑같은 초상화를 그린다 해도내 망할 자아는 내 것이고 네 망할 자아는 네 것이니 말이야‘라고 말이야. - P493

아! 레누 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우리는모두 동파된 수도관 같아. 도무지 만족하지 못하는 머리를 가진다는것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야. 내가 신부복을 입고 찍었던 사진을우리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나? 나는 지금도 그렇게 하고 싶어. 언젠가 내 몸마저 도식화되어버릴 날이 올 거야. 구멍 뚫린 컴퓨터용 카드가 되어서 나를 다시는 찾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그게 다였다. 말을 마친 릴라는 깔깔대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날복도에서 나눈 대화에서 나는 우리 사이에 더 이상 친밀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다. 우리는 그저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한 짤막한 소식이나 주고받고,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쏘아붙이고 나오는 대로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이제 릴라는 더 이상나에게만 속마음이나 중요한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릴라의 인생은릴라의 것일 뿐이었다. 릴라는 누구와도 자기 삶을 공유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 P493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릴라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누구를 만나고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에 대해 쓰기에는 나에게 정보가 부족하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차를 타고 피렌체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발전과 낙후가 혼재하는 나폴리에서 사는 릴라가나보다 말할 거리가 훨씬 많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뭔가대단한 삶을 살고픈 생각에 나폴리를 떠남으로써 나는 얼마나 많은걸 잃었는가. 나와는 달리 나폴리에 머문 릴라는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돈도 많이 버는 데다 남들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자기만의계획에 따라 완벽하게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다. - P494

릴라는 자기 아들을 아낀다. 아이가 어렸을 때 아이를 돌보는 데많은 시간을 바쳤고 지금도 아이에게 정성이다. 하지만 원하면 언제든 아이에게서조차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처럼 자식 일로 불안해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친정 식구들과 연을 끊었다가도필요하면 항상 가족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다했다. 불행한 처지에있는 스테파노를 도와주면서도 관계를 회복하지는 않았다. 솔라라형제를 증오하면서도 그들에게 복종했다. 알폰소를 비꼬면서도 그 - P494

와 친했다. 다시는 니노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안다. 릴라는 분명 니노와 다시 만날 것이다.
릴라의 삶은 동적인 데 비해 나의 삶은 정적이다. 피에트로가 말없이 운전을 하고 아이들이 티격태격하는 동안 나는 한참을 릴라와니노에 대해 생각했다. 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상상했다. 나는 릴라가 다시 니노를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해서든다시 만나 언제나처럼 니노를 조종해 그의 아내와 아들에게서 멀어지게 할 것이다. 결국에는 상대를 알 수 없는 자신의 전쟁에 니노를끌어들여 그의 아내와 이혼하게 만들 것이다.
돈을 빼앗을 만큼 빼앗은 다음에는 미켈레에게서도 빠져나올 것이고 엔초와도 헤어질 것이다. 결국에는 스테파노와도 이혼할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니노와 결혼할지도 모르겠다. 아닐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둘이 자신들의 지능을 합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게되면 둘이 함께 뭔가 대단한 존재가 되겠지. - P495

무엇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은 어린 시절부터 나를 사로잡았지만 나는 그제야 처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원했다. 그 무엇인가가 뭔지는 알지 못했지만 말이다.
물론 그동안 무엇인가가 되기는 했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뚜렷한 대상도, 진정한 열정도, 확실한 야망도 없이 말이다. 릴라는 중요한 사람이 되는데 나만 혼자 뒤처질까봐 무엇인가가 되고 싶었을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뭐라도 되는 것이었으니까. 나는 무엇인가 되기를 바랐지만 릴라의 영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 - P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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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라는 엔초에게서 무엇을 본 걸까. 나는 릴라가 엔초에게 본 것이 그녀가 지난날 스테파노나 니노에게서 본 것과 별반 다를 것이없다고 생각한다. 릴라는 엔초를 통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를 원했다. 스테파노의 경우에는 일단 돈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실체 없1 - P136

고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드러났었다. 니노의 경우에는 지성이라는 보호막이 사라지자 릴라에게 아픔만 남기고 시꺼먼 연기처럼 증발해버렸다. 지금 이 순간엔초만큼은 릴라에게 예기치 못한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릴라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엔초를 존중했다. 그런 그가 이제 모든 행동 하나하나에 내적으로 단단하고, 모든 일에 의연하게 대처하고 릴라에게는 너무나 온순하면서 매사에 속이꽉 찬 남성으로 성장한 것이다. 릴라는 이런 엔초가 스테파노나 니노처럼 갑자기 망가져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물론 둘은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릴라가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둘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았다. 릴라는 벽 너머로 엔초가 움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주변이 잠잠해져 집과 건물과거리에서 나는 소리만 들릴 때까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몹시 피곤했지만 릴라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어둠 속에 누워 있다 보면조심스러운 마음에 일부러 정의내리지 않은 허다한 불행의 이유가뒤섞여 생각이 젠나로에게 집중되었다 릴라는 생각에 잠겼다. - P137

릴라는 엔초가 다른 여자에게 반해서 자신을 쫓아낼까봐 두려웠다. 살 곳이 없어지는 것이 두려운 게 아니었다. 당장은 햄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자신이 강하다고 느꼈다. 놀랍게도 예전에 스테파노와 결혼해 수중에 돈은 많았지만 그에게 종속되어 있을 때보다 더 강하다고 느꼈다. 그보다는 엔초의 상냥함을 잃을까봐 두려웠다. 자신의 모든 걱정에 대한 엔초의 관심과 그가 발산하는 평온한 기운을 잃게 될까봐 두려웠다. 릴라는 그런 엔초 덕분에 니노의 부재와 스테파노의 존재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엔초는 릴라에게 위안을 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엔초는 여전히 릴라가 놀랍도록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 P139

"독일어잖아, 엔초 난 독일어는 몰라."
"하지만 너라면 잘 생각해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엔초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릴라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엔초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목표를 이루어낸 후에도 초등학교 5학년의 학력이 전부인 릴라가 자기보다 훨씬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엔초는 릴라에게 어떤 과목이든 빨리 배울수 있는 천재적인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디선가접하게 된 빈약한 정보를 바탕으로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에 인류의 미래가 있을 뿐 아니라 먼저 그 언어를 정복하는 새로운 엘리트층이야말로 미래 사회에서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 엔초는 즉시 릴라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를 좀 도와줘."
"난 지금 정말 피곤해."
"리나, 지금 우리의 삶은 형편없어. 변화가 필요해."
- P140

엔초는 그러는 동안 서서히 릴라를 공부에 동참하도록 유도했고 릴라는 릴라대로 엔초를 돕기 위해 애썼다. 이번에 릴라의 태도는니노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때는 자기가 모든 면에서 니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오히려 그를 힘들게 했다. 이에 비해 엔초와 공부할 때 릴라는 평안했다. 애써 그를 압도하려 하지도 않았다. 저녁 공부는 엔초에게는 노고였지만 릴라에게는 안정제 같았다. 그랬기 때문에 엔초가 늦게 돌아와 릴라를찾지 않을 때마다 릴라는 불안감에 잠 못 이루고 화장실 물소리에귀를 기울인 것일지도 모른다. 엔초가 애인의 흔적을 몸에서 지워내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 P141

공장의 과다한 노동은 직장 내에서 성욕을 자극했다. 직원들은 퇴근 후 지칠 대로 지쳐서 이미 욕구를 상실한 채 자기 집에서 부인이나 남편과 섹스를 하기보다는 오전이나 오후에 공장에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다.
릴라는 공장에서 근무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바로 눈치챘다. 사내들은 틈만 나면 여자들에게 손을 뻗쳤고 여자가옆으로 지나가기만 해도 음탕한 제안을 했다. 그러면 여공들, 그중에서도 특히 나이 든 여자들은 사내들의 제안에 웃음을 터뜨리면서거대한 가슴을 사내들에게 비벼대고는 곧 사랑에 빠졌다. 사랑은 힘겨운 노동과 작업의 무료함을 잊게 해주는 힘겨운 일상의 활력소였 - P141

다. 그들은 사랑을 나눌 때만큼은 정말 살아있음을 느꼈다.
릴라가 출근한지 며칠 되지 않아 사내들은 릴라의 체취라도 맡고싶은 것처럼 그녀와의 거리를 좁히려 했다. 릴라가 밀어내면 사내들은 낄낄거리면서 가사가 추잡한 노래를 흥얼거리며 멀어져 갔다.
어느 날 아침 릴라는 본때를 보여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녀 옆을 지나가면서 음탕한 말을 던지며 목 뒤에 입맞춤을 한 사내의 귀를 거의 뜯어내다시피 했다. 그는 에도라는 이름의 잘생긴 축에 속하는 40대 사내였다. 에도는 공장의 모든 여자를 은근하게 유혹했고 야한 농담을 곧잘 했다.
릴라는 한 손으로 손톱이 살점을 파고들도록 사내의 귀를 세게 움켜잡고 비틀며 온 힘을 다해 잡아당겼다. 에도가 릴라의 발차기를막아보려고 애쓰면서 비명을 질렀지만 릴라는 끝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런 다음 릴라는 길길이 날뛰며 브루노의 사무실로 항의하러갔다. - P142

브루노가 취직을 시켜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 후로 릴라는 그를 거의 보지 못했다. 몇 번인가 마주쳤을 때에도 릴라는 그에게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급히 지나쳤다. 그렇기 때문에 릴라는 그제야 비로소 브루노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브루노는 릴라가 들어오자책상 뒤에서 일어섰다. 여성을 맞이하는 신사다운 태도였다. 하지만릴라는 브루노의 외모에 놀랐다. 얼굴은 부어 있었고 부유한 생활때문인지 눈빛은 흐릿했다. 가슴이 답답해 보였다. 무엇보다도 마그마같이 시뻘건 얼굴이 인상적이었다. 가뜩이나 까만 머리와 늑대처럼 길고 뾰족하고 하얀 이빨 때문에 빨갛게 상기된 안색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릴라는 생각했다.
‘여기 이 사람이 과거 니노의 친구였던 법대생과 같은 사람인가?‘ - P142

릴라는 이스키아섬에서 보낸 시간과 현재의 햄 공장 사이에 연속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빈 공간밖에 없었다. 릴라는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 뛰어 넘어오는 과정에서 브루노가 망가져버렸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그의 아버지가병들어 회사에 대한 부담이 그의 어깨에 고스란히 지워졌기 때문일수도 있었다. 공장에 빚이 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릴라가 브루노에게 자신이 화가 난 이유를 설명하자 브루노는 코웃음을 쳤다.
"이봐, 리나."
브루노가 책망하는 투로 말했다.
"난 네 부탁을 들어준 거야. 은혜를 말썽으로 갚으면 안 되지. 여기서는 모두 힘겹게 일하고 있어. 그렇게 잔뜩 곤두서 있지 좀 마. 가끔은 직원들의 긴장을 풀어주기도 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진단 말이야."
"긴장을 풀려면 너희들끼리나 풀어." - P143

브루노는 갑자기 릴라의 허리를 잡고 입술로 릴라의 긴 목을 훑었다. 동시에 재빨리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손이 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라운 속도로 앞치마를 헤집고 치마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인의 몸을 침범해야겠다는 집착에 사로잡힌 것 같았다.
릴라는 햄에서 나는 악취에서부터 브루노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스테파노의 폭력을 떠올렸다. 순간 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살해당할까봐 두려웠다. 그것도 잠시일 뿐 격렬한 분노가 릴라를 덮쳤다. 그녀는 브루노의 얼굴을 때리고 다리 사이를 발로 차면서 소리 질렀다.
"쓰레기 같은 자식! 아랫도리에 아무것도 없는 주제에 이리 와!
네 물건을 꺼내 보라고, 내가 당장 잡아 뜯어줄 테니 말이야. 이 나쁜자식아!"
브루노는 릴라를 놔주고 뒤로 물러섰다. 피가 흐르는 입술을 손으로 만졌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키득거리다 중얼거렸다.
"미안해. 나는 그래도 네가 내게 조금은 고마워할 줄 알았어." - P145

릴라는 브루노의 속삭임을 뒤로하고 숙성고에서 나왔다.
릴라는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릴라는 그때 수증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수영장 같은 곳에서 일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작업을 보조해주는 역할로 바닥이 물에 젖지 않게 틈틈이 닦아야 했다. 아무리해도 생색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릴라에게 거의 귀를 잡아 뜯길 법했던 에도라는 사내가 릴라를 호기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일하던 이들모두 릴라가 화를 내면서 숙성고에서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릴라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릴라는 걸레를 집어 벽돌바닥에 거칠게 내리친 다음 질척한 바닥을 닦으면서 위협적으로 크게 외쳤다.
"또 어떤 개새끼가 나를 건드리는지 두고보자고."
이 말에 릴라의 동료들은 모두 일에 열중했다. - P146

릴라는 엔초에게 동료의 귀를 거의 잡아 뜯을 뻔했다는 이야기도브루노의 추행도 매일같이 당하는 고약한 장난과 고생에 대해서도말하지 않았다. 엔초가 햄 공장일이 어떤지 물으면 릴라는 비꼬듯이 그러는 너는 왜 네 직장이야기는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엔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릴라는 그를 조금 놀리다가 함께통신 교육 과정에서 보내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둘이 현실에서도피라도 하듯 교육 과정에 열중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가장 큰 이유는 둘의 미래에 의구심을 갖지 않기 위해서였다.
72.17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 엔초는 왜 릴라와 젠나로를 돌보고 있는 것인가. 릴라는 왜 그런 엔초를 받아들이는 것인가. 오래전부터 같은 집에 살면서 엔초는 왜 매일 밤 그녀가 자기 옆에 와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는 것인가. 왜 침대에서 뒤척이다 물을마신다는 핑계로 부엌에 가서 릴라가 아직 불을 끄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윗부분이 반투명 유리로 된 릴라의 방문을 향해 시선을던지고 그녀의 움직임을 훔쳐보는 것인가.
그럴 때면 침묵 속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 P147

둘은 아주 간단한 행동에서 복잡한 행동으로 서서히 연습 문제의 난이도를 높였다. 함께 머리를 짜내 일상의 모든 동작을 도식화했다. 취리히 통신 교육 과정에는 없는 내용이었다. 엔초가 그러자고 한 것이 아니었다. 늘 그랬듯이 마뜩잖게 시작했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열정을 불태우는 릴라의 생각이었다. 이제 릴라는 밤이 되면얼어붙을 듯 추운 집에서 비참한 현실을 오직 0과 1로만 구성된 세계로 전환하는 데 열중했다. 릴리는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관념적인 선형성을 추구했다. 그것은 모든 추상적 관념의 기원이 되는 절대적인 추상성이었다. 릴라는 0과 1이라는 숫자 외에는 그 어떤 진실도 허용치 않는 완벽한 선형적 세계 안에서 평온함을 찾으려했다. - P148

이미 아슬아슬하던 둘 사이의 균형은 파스콸레의 등장으로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 무렵 파스콸레는 산 조반니 아 테두초 근처에 있는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마침 지역 정당 모임 참석차산 조반니 아 테두초에 왔다가 길에서 우연히 엔초와 마주치게 된것이었다. 둘은 금방 예전의 신뢰를 회복했다.
둘은 정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의 불만에 공감했다. 처음에는 비교적 신중한 태도를 보인 엔초에 비해 파스콸레는 가장 신중해야 하는 동네 공산당위원회 서기관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수정주의 노선을 걷고 있는 당과 그러한 당의 태도를 눈감아주는 노동조합을 가차 없이 비판했다. 엔초와 파스콸레가 급속도로 우정을회복하는 바람에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릴라는 파스콸레를 보고서둘러 그의 몫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했다. - P149

하지만 가끔 파스콸레의 장광설을 듣고 있다 보면 어린 시절의 기억에 사로잡혀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어서 힘들었다. 그 시절 잔혹했던 동네의 기억과 돈 아킬레 그리고 그의 살해사건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린 시절 릴라는 돈 아킬레의 살해 장면을 자주 이야기하고 다녔다. 상상력을 발휘해 얼마나 세밀히 묘사했던지, 아직까지도 직접 그 광경을 목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파스콸레 아버지가 체포되는 장면으로까지 이어졌다. 목수아저씨는 고래고래 악을 써댔었다. 주세피나 아주머니와 카르멘도 마찬가지였다.
릴라는 그런 기억이 싫었다. 실제 기억과 허구가 뒤섞여 폭력이 난무하고 선혈이 낭자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럴 때면 고개를 내젓고 회한에 찬 파스콸레의 넋두리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써 파스콸레에게 가족과 함께 보낸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에 대한 이야기, 주세피나 아주머니가 해준 맛있는 음식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켰다. - P153

릴라는 일행과 함께 비록낡았지만 장엄함이 느껴지는 계단을 올라갔다. 장소에 비해 참가 인원은 많지 않았다. 릴라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도부와 평당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언변이 화려한 지도부와는 달리 평당원들은 떠듬떠듬 말을 늘어놓았다.
릴라는 왠지 모르게 불편했다. 학생들의 주장은 릴라에게 위선적으로 들렸다. 그들의 현학적인 표현과 주눅든 태도가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게다가 그들의 주장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당신네 노동자들에게 배우기 위해 모임에 나왔다는 똑같은 말을 노래의 후렴구처럼되풀이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저 자본주의, 노동 착취, 사회민주주의 배신, 계급투쟁 방식 등에 대한 새로울 것 하나 없는 그들의 지식을 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릴라는 모임에 참석한 얼마 안 되는 여자들이한마디 발언도 하지 않으면서 엔초와 파스콸레에게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P157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릴라는 자리로 돌아갔다. 자신이 나디아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발언을 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릴라가 돌아갔을 때는 마침 곱슬머리 청년이 이탈시데르 화학사의 도급 계약에 대해 상당한 전문 지식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릴라는 청년이 말을 끝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의아한 눈초리로 자신을 바라보는 엔초를 무시하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젠나로가 품 안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데도 릴라는 꽤나 오랫동안 표준어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조용히 이야기하다 나중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이 조용한 데 비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소리를 높였다. 릴라는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자기는 노동계급이니 뭐니 하는 것은 잘 모른다고 했다. 자기는 지금 일하고 있는 공장의 노 - P159

동자들밖에 모르며 이들에게서 배울 것은 빈곤함 빼고는 아무것도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청중에게 물었다.
"하루 여덟 시간을 모르타델라 햄을 익히는 물속에서 허리까지몸을 담그고 일하는 게 어떤 느낌인지 상상이 되나요? 동물 뼈에서살점을 발라내느라 손이 상처투성이가 되는 느낌을 아나요? 한 시간에 고작 10리라를 더 받겠다고 영하 20도의 냉동고를 들락거리는 게 어떤 일인지 상상이 되나요? 그래요. 10 리라 때문에 말이에요. 상상이 간다고요? 그렇다면 대체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뭘배우겠다는 거죠?
우리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은 공장장이나 남자 동료들이 엉덩이를 주물럭대도 찍소리도 못해요. 사장이란 작자가 원하면 그를 따라 숙성고로 가야 하죠.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대부터 그래왔겠죠. 그 자식은 여공의 몸을 덮치기 전에 숙성고에서 나는 햄냄새가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는 일장 연설까지 늘어놓죠. - P160

게다가 남자든 여자든 언제든 몸을 수색당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공장 출구에는 탐지기가 있거든요. 이 앞을 지나갈 때 녹색 대신적색 불이 들어오면 살라미나 모르타델라 햄을 훔쳐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이 기기는 사장의 첩자 노릇을 하는 수위가 조절하는데 이첩자 놈은 햄을 훔쳐갈 만한 사람이 지나갈 때만 불을 켜는 게 아니에요. 수줍고 예쁘장한아가씨들이나 골치 아픈 말썽꾼이 지나갈 때면 으레 적색불을 켜지요.
이것이 내가 일하는 공장의 현실이에요. 노조는 이곳에 발을 디뎌본 적도 없고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위협에 시달리는 불쌍한 사람들이죠. 이들에게는 사장의 말이 법이에요. 사장은돈을 준다는 명목하에 노동자들을 자기 소유물처럼 대하죠. 그들의 - P160

삶도 가족도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자기 것인 양 굴어요. 자기 말대로 하지 않으면 무참히 박살내버리겠다는 심보예요."
릴라가 말을 마치자 잠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릴라의 뒤를이어 발언한 사람들은 모두 릴라의 이야기에 감동받았다고 했다. 모임이 끝나자 나디아는 릴라에게 다가가 릴라를 껴안더니 칭찬을 늘어놓았다. - P161

이불을 덮었는데도 몸이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아 일어나서 잠옷 위에 울 스웨터를 껴입었다. 다시 침대에 누우려는데 특별한 이유 없이 갑자기 심장이 목에서 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자기 심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심장 같았다.
이미 익숙한 증상이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그러니까 1980년에릴라 스스로 이른바 ‘경계의 해체‘라고 정의 내린 바로 그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하지만 그날처럼 격렬했던 적은없었다. 혼자 있을 때 그런 증상이 나타난 것도 처음이었다. 평소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경계의 해체 현상을 유발하는 사람들이 항상 주변에 있었다.
릴라는 불현듯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했다.
혼란에 빠진 릴라의 머리에서 그날 만났던 사람들의 형상과 목소리가 빠져나와 공중에 떠다니기 시작했다. 위원회 소속의 두 청년과수위, 직장 동료들, 숙성고에 있던 브루노, 나디아의 형상이 눈앞에나타나 무성영화 배우들처럼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짧은 간격으로 번쩍이는 공장 탐색기의 적색 불과 자신을 위협하면서 손에서 소시지를 빼앗아 드는 필리포의 모습도 나타났다. - P169

‘상상이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야. 방에는 젠나로밖에 없는걸‘
젠나로는 릴라 침대 옆에 있는 작은 침대에서 고르게 숨쉬며 자고있었다. 실제로 방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을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두려움만 커져갔다.
거센 심장 박동 때문에 단단하게 맞물린 사물의 견고한 이음새마저 끊어질 것 같았다. 사방의 벽을 굳게 지탱하고 있던 힘이 느슨해지고 목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박동에 침대가 흔들거리고 회벽에 금이 가고 두개골 윗부분이 떨어져나갈 것 같았다. 이대로 가다가는젠나로마저 부서질 것 같았다. 그렇다. 젠나로는 셀룰로이드로 만든인형처럼 망가져버릴 것이다. 격렬한 진동에 젠나로의 가슴과 배와머리가 갈라져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이다. - P170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전에도 사내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압력을 가하거나 말 잘 듣는 애완동물을 다루듯 그들을 자신이 원하는방향으로 유도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스테파노, 니노, 솔라라 형제 그리고 엔초에게도 그런 식으로 행동했다. 그때는 자기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혼자 힘으로 모든 난관을 헤쳐 나갈 것이다. 수위에게도, 직장 동료에게도, 위원회의 학생들에게도, 브루노에게도 혼자 힘으로 맞설 것이다. 모든 사물과 사람들과의 거듭되는 충돌에지칠 대로 지쳐 무너져 내리면서도 도무지 포기할 줄 모르는 교만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혼자 감내할 것이다. - P172

릴라는 니노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를 간절히 원했었다. 그의마음에 들기 바랐기에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었다.
스테파노에게는 맞아 죽지 않기 위해서 혐오감을 억누르며 마지못해 해주던 짓도 니노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했다.
하지만 남성이 여성의 몸에 들어올 때 응당 느껴야 할 쾌락을 릴라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스테파노와의관계에서만이 아니었다. 니노와 사랑을 나눌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내들은 자기 물건에 대한 애착과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들은 여자들이 자기 물건을 자신들보다 더 소중히 여길 거라고 굳게 믿었다. 젠나로마저 자그마한 고추를 가지고 손장난을 치곤 했다. 어찌나 손으로 조몰락대고 당겨대는지 가끔은 쳐다보기 민망했다. 릴라는 그러다 아이가 다칠까봐 두려웠다.  - P196

릴라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에게 맞장구를 쳐주었고 화를 내는 사람들에게는 이해한다는 듯한 태도를보였다. 또 사장의 횡포에 욕설을 퍼붓는 사람들에게는 동의를 표했다. 릴라는 그런 식으로 개개인의 불만을 이끌어내 현란한 말솜씨로다양한 불만을 하나로 연결했다.
그 후 며칠 동안 릴라는 누구보다도 에도와 테레사를 중심으로 모인 소수의 무리가 마음껏 의견을 표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덕분에 점심시간마다 비밀집회가 열렸다. 릴라에게는 마음만 먹으면 직접 앞으로 나서지 않고도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여론을 형성할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릴라 주위에는 어느새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지금껏 입에 달고 살던 불평불만이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정당한 문제들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릴라는 고깃살을 제거하는 작업장과 고기 저장고와 고기를 거대한 물통에 담그는 작업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요구사항을 규합했다.
그러는 동안 어느 한 작업장의 문제점이 다른 작업장의 문제로 이어지며 결국 모든 문제가 궁극적으로는 거대한 착취구조를 완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릴라 스스로도 놀랐다. - P204

릴라가 말했다.
"침묵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엿 먹어도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야."
카포네의 말이 옳았다. 나디아와 아르만도도 옳았다. 그들의 계획은 아직 취약했다. 억지로 단행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릴라는 맹렬히 고기를 썰었다. 누구라도 걸리면 상처를 주고 싶었다. 자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칼로 손을 찌르고 싶었다. 지금 당장 저 죽은 짐승의 고기가 아닌 살아 숨 쉬는 자신의 살덩이에 칼날을 찔러넣고 싶었다.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모두에게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도무지 균형을 잡을 줄 모르는 자신을 자극한 대가를 그들에게치르게 하고 싶었다. - P220

‘아, 리나 체룰로. 너는 정말 구제 불능이구나. 대체 왜 그 목록을적은 거지? 착취당하고 싶지 않아서? 너 자신과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근무 조건을 향상시키려고? 지금 투쟁을 시작하면 전 세계프롤레타리아 승리의 행진에 합류라도 하게 될 것 같아? 이런 곳에서 일하고 있는 주제에? 저기 저 사람들을 데리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무엇이 되기 위한 행진인데? 앞으로도 계속 노동자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어라 일만 하는 노동자의 손에 권력을 쥐어주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쓰디쓴 노동의 노고를 감내하게 하려고 만들어낸 흰소리일 뿐이다. 끔찍한 실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끔찍한 실태를 나아지게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완전히 해결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오지 않았나. 상황을나아지게 한다는 것이 가능한일인가? 우리는 더 나아질 수 있는 건가? 네 자신은 예전보다 나아졌어? 나디아나 이사벨라처럼 됐다고 - P220

생각해? 네 오빠가 아르만도 같은 사람이 되었어? 네 아들은 마르코처럼 되었어? 아니. 우리는 우리고 그들은 그들이야. 그런데도 너는대체 왜 포기하지 않는거야?
끊임없이 뭔가를 해보려는 통에 도무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머리탓이야. 구두를 디자인하고 구두공장을 열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니노의 기사를 다시 쓰고 네 말대로 할 때까지 그를 몰아붙였어. 엔초와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너는 취리히의 통신 교육 과정을 네 마음대로 이용하고 있어. 그리고 이제는 나디아가 혁명가라면 너는 그녀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은 거야.
맞아. 모든 악의 근원은 네 머리에 있어. 머리가 만족하지 못해 몸까지 병드는 거야. 이런 자신이 지긋지긋해. 모든 것이 넌덜머리가나. 젠나로도 마찬가지야. 그 아이도 결국 잘 돼봤자 이런 곳에서 일하면서 고작 5리라 더 벌어보겠다고 사장 앞에서 설설 기겠지. - P221

그렇다면? 그래, 리나 체룰로. 그렇다면 이제 책임을 지고 생각했던 바를 실행하자. 브루노 자식을 위협하는 거야. 숙성고에서 여공들을 따먹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쳐놓는 거야. 그 옛날 늑대같이 생긴대학생에게 능력을 보여주는 거야. 이스키아 섬에서 보낸 그해 여름브루노가 사주던 음료며 포리오 가에 있던 그의 별장, 니노와 함께사랑을 나누었던 호사스러운 침대는 모두 여기에서 쥐어짜낸 돈에서 나온 것들이야. 몇 푼 안 되는 돈 때문에 이 더럽고 냄새나는 곳에서 일하며 흘리는 땀에서 나온 것이야.
지금 내가 뭘 자른 거지? 걸쭉한 누런 액체가 사방에 튀네. 역겨워라. 그래. 그래도 다행이야. 지구는 돌지만 돌다가 떨어지면 부서져버릴 테니 말이야.‘ - P221

미켈레는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릴라를 원했다. 상상력과 창의력이 풍부한 릴라 본연의 모습을 원했다. 릴라를 망가뜨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릴라를 가능한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원했다. 성적인 이유로 릴라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미켈레는 릴라를 섹스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미켈레가 릴라를 원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키스하고 그녀를 쓰다듬어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릴라가 자신을 어루만져주고 도와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때로는 명령을 내려주기를 원하기 때문이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릴라의 모습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는지 곁에서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었다. 함께 생각하고 릴라에게서 영감을 받고 싶기 때문이었다.
- P286

끝내 비는 오지 않았지만 종일 어두웠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갔다.
그날 일어난 일 때문에 겉보기에는 회복기에 접어들었던 릴라와 나의 관계가 갑작스럽게 국면 전환을 맞게 됐다. 그날 이후 나는 릴라일에 나서기를 그만두고 내 삶에 집중하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사실 자각하지 못했을 뿐 그전에 일어난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조금씩상처를 받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그런 일들이 쌓이고 싸여 표면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의 탐방은 나름대로 유용했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나는 불만으로 가득했다. 내가 알폰소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있으면서도 이토록 오랫동안 내게 입 한 번 벙끗하지 않은 릴라를진정한 친구라 할 수 있을까. 릴라는 자신이 미켈레에게 절대적인존재라는 사실을 정말 눈치채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나름의 이유 때문에 내게 숨기려 한 것일까. 따지고보면 나는 나대로 얼마나 많은일을 릴라에게 감추었던가. - P293

나는 릴라가 내게 정말로 사과하기 위해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감추기 위해 거짓된 말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게영원히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릴라가 본심을 감추고 있으며 내게 전혀 고마워하지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변화가 많았는데도 내가 여전히 릴라에게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평생 그 열등감에서벗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순간 나는 진심으로 심장전문의의 진단이 오진이기를 바랐다. 아르만도가 옳았기를 바랐다. 릴라가 정말로 병들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바람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몇 년 동안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았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지 못한 채 음성의 조각들로만 존재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릴라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욕망은 내 맘 한구석에 뿌리를 내려 내가 아무리 쫓아버리려해도 사라지지 않았다. - P314

심란한 마음에 급기야 나는 평생 한 번도 하지 않은 일을 저질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동이 트기도 전에 혼자 집을 나선 것이다. 나는 몹시 우울했다.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잘못된 행동과 못된 생각에 대해 벌 받기를 바랐다. 내게 나쁜일이 생겨서 결과적으로 릴라도 벌 받게 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달리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인적 없는 길을 따라 홀로 걸었다. 사람이 많을 때보다 훨씬안전한 것 같았다. 그새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갔다. 해변에 도착하니 아침 햇살에 테두리가 분홍빛으로 물든 구름이 드문드문 떠다니고 있었고 아직은 창백해 보이는 하늘 아래로는 바다가 잿빛 종이처럼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오보성의 윤곽이 빛 때문에 둘로 선명하게 나뉘어 보였다. 베수비오 화산과 가까운 부분은 저 멀리 떠오르는 태양빛을 받아 황톳빛 윤곽이 찬란히 빛났고 메르겔리나나포실리포와 가까운 부분은 아직도 어슴푸레 어둠에 잠겨 어두운 밤색 얼룩처럼 보였다. - P315

해변을 따라 이어진 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는 고요했지만 강한 체취를 내뿜었다. 매일아침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 멀리 해안 근처에 들어선 건물에서 눈을 뜰 수 있었다면 나폴리에 대한 내 감정이 지금과는 달라졌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내 출생성분을 바꾸기라도 하려는 건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태생도바꾸려는 건가. 빈곤과 탐욕 때문에 괴로워해본 적도 없고 원한과분노를 알지도 못하는 시민들로 이 황량한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건가. 태초에 이 땅에 거주하던 신처럼 이 황홀한 풍경을 있는 그대로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들로 이 도시를 다시 채우고 싶은 건가. 내안에 있는 악마를 만족시키고 악마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행 - P315

복해지기를 바라는건가.
내가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대대로 투쟁해왔고 파스콸레나릴라 같은 서민을 위해 애써온 아이로타 집안의 힘을 빌린 것은 사회의 위악을 바로잡는다는 거창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 것 같아서였다. 그런 내 판단이 잘못되었나. 곤경에 처한 릴라를 내버려두었어야 했을까. 이제부터는 절대로, 다시는 타인을 위해 애쓰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나는 결혼식을 위해 나폴리를 떠났다. - P316

나는 속이 상했다. 화가 났다. 나는 그의 반응이 성당에서 식을 올리기를 거부한 젊은 지식인답지 못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을 여과 없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심하게 다퉜다. 결혼식 당일까지 화해하지 못하는 바람에 결혼식 내내 피에트로는 벙어리마냥 입을 꾹다물고 있었다. 나 역시 싸늘한 태도로 일관했다.
결혼식에 관해 아직도 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는 일이 또 하나있다. 예상치 못했던 결혼 피로연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시청에서식을 올리고 가족들과 인사를 한 뒤 따로 피로연 없이 바로 집으로돌아오기로 했었다. 이는 피에트로의 금욕적인 성향과 이제 더 이상어머니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내 성향에 따라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방침은 시어머니의 은밀한계획 때문에 실행에 차질을 빚게 되었다. - P317

그 무렵 내 마음은 시작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실뭉치 같았다. 오래되어 색이 바랜 실과 막 자아낸 새로운 실,
현란한 색상의 실과 무채색 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가는 실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릴라의 예상에서 벗어났다고 안도하는 순간 나의 평온함도 끝이 났다.
아이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진 것이었다. 무심결에 실뭉치를 잘못 건드려 뒤엉킨 부분 가운데 가장 오래된 부분이 표면으로 올라온것 같았다. 병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별다른 문제없이 젖을 잘 빨았다. 그런데 집에 돌아온 후부터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더이상 나를 원하지 않았다. 겨우 몇 초쯤 젖을 빨다가도 화난 작은 짐승처럼 악을 써댔다.
나는 심신이 약해져 오래된 미신에 빠져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일어난 걸까. 내 젖꼭지가 너무 작아서 자꾸 놓치는 걸까. 내 몸에서나오는 젖이 마음에 안 드는 걸까. 아니면 누군가 멀리서 아이가 엄마인 나를 미워하도록 사악한 주술이라도 건걸까 - P330

우연히 니노가 쓴 글을 두세 번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을읽어도 전처럼 니노의 모습과 목소리와 사유를 상상하며 즐거워할수 없었다. 물론 나는 니노의 성공이 기뻤다. 니노의 기고문이 실린다는 것은 그가 잘 지낸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디선가 누군가와함께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의미했으니까. 나는 니노의 이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몇 줄 읽어 내려갔다. 하지만 하얀 종이에 검은색으로 인쇄된 그의 글을 읽다보면 왠지 모르게 현재 내 신세가더 견딜 수 없어 끝까지 읽을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일에 흥미를 잃고 외모에도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사실 외모를 가꿔봤자 볼 사람도 없었다. 그즈음 나는 피에트로 말고는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겉보기에 피에트로는 나를 예의 바르게대했지만 실은 그에게 나는 희미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 P337

먼저 이번 글의내 생각은 대략 이랬다.
‘이야기의 맥락이 끊긴 것 같은 느낌이야. 너에게서 흘러나오던일종의 흐름 같은 것이, 내게 항상 긍정적인 영향을 주던 그 흐름이멈춰버린 것 같아. 이젠 정말 혼자가 된 것 같아.‘
하지만 나는 릴라에게 내 본심을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자조적인말투로 그 글을 그토록 힘겹게 쓴 이유는 고향 동네와 관계를 마무리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고 했다. 우리 동네가 지금 주변에서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기때문이라고 했다. 돈 아킬레와 솔라라 형제 어머니에 대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영감이 되었다고 했다. 내 말에 릴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릴라는 사물의 추악한 민낯만으로는 소설을 쓸 수 없다고했다.
"상상력이 더해지지 않으면 현실은 진짜 얼굴이 아니라 가면처럼보일 뿐이거든." - P384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그날 흐느끼며 울음을 터뜨렸던 덕분에 릴라는 내게 이의를 제기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 글을 신랄하게 평할수 있었고 내 원망을 피할 수 있었으며 무려 자신을 실망시키지 말라는 높은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다시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싹 사라질 만큼이나 어려운 목표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날 대화의 의미를 아무리 분석해봐도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알수 없다. 그때가 우리 우정사에서 최상의 순간이었는지 아니면 최악의 순간이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나의 무능력함을인정하는 데릴라가 예전보다 더 확실하게 거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내 실패를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이다. 나는 릴라의 의견이 시어머니의 의견보다 훨씬 권위 있게 느껴졌다.
더 납득할 만하고 더 애정 어린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 P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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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나 페란테 Elena Ferrante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출생한 작가로, 나폴리를 떠나 고전 문학을 전공하고 오랜 세월을 외국에서 보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바가 없다. ‘엘레나 페란테‘라는 이름조차도 필명이다.
작품만이 작가를 보여준다고 주장하는 페란테는 어떤 미디어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서면으로만 인터뷰를 허락한다. 이탈리아에서는 여전히 작가의 정체와 관련된 여러 가지소문이 떠돌지만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1992년 첫 작품 『성가신 사랑』을 출간해 이탈리아 평단을놀라게 한 페란테는 2002년 『홀로서기』를 출간한다. 에세이집 라 프란투말리아』(2003)와 소설 『어둠의 딸』(2006), 『밤의 바다』(2007)를 출간한 뒤 2011년 ‘페란테 열병‘ (#Ferrante-Fever)을 일으킨 ‘나폴리 4부작 제1권 『나의 눈부신 친구』를출간한다. 이어서 새로운 이름의 이야기』 『떠나간 자와 머무른자』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까지 총 네 권을 출간해 세계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나폴리 4부작‘은 이탈리아와 영미권을 비롯해 프랑스, 스페인, 독일 등 총 43개국에서 번역·출간되고 있다. 2014년 ‘나폴리 4부작‘ 제2권으로 국제 IMPAC 더블린 문학상에 노미네이트되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 스트레가상의 최종 후보로 선정되었다. 2016년에는 ‘나폴리 4부작‘의 제4권으로 맨부커 인터내셔널상 최종 후보에 올랐으며, 『타임』지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가운데 한 명으로 엘레나 페란테를 선정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릴라를 만난 것은 5년 전 2005년 겨울이었다.
그날 우리는 비교적 이른 아침에 만나 큰길을 따라 산책했다. 벌써몇 년 전부터 둘이 함께 있는 것이 예전처럼 편하지 않았다.
그때도 나만 혼자서 일방적으로 떠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이야기를 하는 동안 릴라는 노래를 흥얼거리거나 자신을 본체만체지나가는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따금 감탄사를 내뱉으며 내말을 끊곤 했는데 그마저도 내 이야기의 맥락과는 별 상관없는 반응이었다.
그동안 좋지 않은 일이 너무 많았다. 끔찍한 일도 있었다. 서로에게 속내를 털어놓으면 예전의 믿음과 친밀감을 되찾을 수 있었겠지만 당시 내게는 그럴 기력조차 없었고릴라는 기력은 충분한 것 같았지만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릴라를 매우 아꼈다. 나폴리에 들를 때마다되도록 릴라와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는 릴라가조금 두렵기도 했다. - P15

그제야 나는 고향 동네와 나폴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빈곤은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끊임없이 흘러들었다. 고향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나폴리가 계절의 변화마저 감당할 수 없을정도로 취약한 곳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폴리는 더위에도 추위에도약했으며 특히 폭풍에 약했다.
나폴리에서는 연이어 사고가 일어났다. 가리발디 광장의 기차역이 물에 잠기는가 하면 박물관 앞의 아케이드가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산사태가 나서 도시 전체가 정전이 된 일도 있었다. 온갖 위험이도사리고 있는 음침한 길과 통제할 수 없는 혼잡한 교통, 엉망진창인 포장도로와 여기저기 파인 거대한 물웅덩이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 P19

하수구가 넘치는 바람에 더러운 물이 하수구 밖으로 튀거나 넘쳐서 흘러내렸다. 부실한 신축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선 언덕에서 폐수와 오물과 박테리아가 뒤섞인 물이 용암처럼 바다로 흘러가거나 땅속으로 스며들어 지하 세계를 침식했다.
사람들은 위정자들의 무관심과 부패와 탄압으로 죽어가면서도선거철이 되면 자신들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드는 정치인들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데도 나는 나폴리에 갈때마다 기차에서 내리면 언제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나도 당신들과 같이 이곳 사람이니 해치지 말아달라는 의미로 언제나 사투리를쓰려고 애썼다. - P19

차라리 떠나라고 말하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서 멀리, 영원히 도망가라고. 모든 것을 이룰수 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가는 그런 곳에 자리를 잡으라고 말하고싶었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나는 그때 내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실은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야 나는 생각한다. 병든 것은 우리 고향 동네가 아니라, 나폴리가 아니라 지구 전체다. 유일한 우주 또는 무수히 많은 우주가 모두 병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조차 사물의 본질을 숨길 줄 아는 능력이다. - P22

그날 이후 삶은 한순간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몇 개월이 흘렀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아무 일 없이 지나가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나는 니노 생각에 잠겨 나폴리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않았지만 우리의 만남을 잊을 수 없었다. 때때로 릴라에게 달려가고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그녀가 퇴근하기를 기다렸다가 상처받지 않을 내용만이라도 이야기해주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렇지만이내 릴라가 니노 이름만 들어도 가슴 아파할 것이라고 생각해 그만두기로 했다.
릴라는 릴라의 길에, 니노는 니노의 길에 들어섰고 나는 나대로 - P50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감정에 형태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에 집중했다. 이 책은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었고 그 안에는 내가 있었다. 책장에 꽂혀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는 나 자신을보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비단 내 책뿐만 아니라 소설에는 나를홍분시키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소설에는 날것 그대로 요동치는 심장이 있었다. 아주 먼 옛날 릴라가 내게 함께 이야기를 지어보자고했을 때도 그런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느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로그런 일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이 일을 원했던가. 나는 글쓰기를 원했던 것인가. 우연에 의한 결과물이 아니라 지금까지 써온 글보다 더 좋은 글을 쓰고싶은 건가. 과거와 현재의 이야기에 대해 연구하고 그것들이 어떻게소설로 작용하는지 이해하고 세상에 관한 모든 일을 배우려는 이유도 결국에는 나 말고는 그 누구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릴라에게 같은 기회가 주어졌더라도 나보다더 잘 해낼 수 없게 말이다 - P60

나는 이제 돈을 벌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꽤 많이 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난날에 놓친 것을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그러기에는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지나치게 교육을 많이 받았고 어떤 면에서는너무 무지했다. 나 자신을 통제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다른이들의 사상과 사건을 머릿속에 꾸역꾸역 집어넣느라 열정 없는 인생을 사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었다. 게다가 결혼과 안정적인 삶이너무 빨리 시작될 예정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그곳에서 이미 몰락해버린 기존의 질서 체계 속에 너무 깊이 자리 잡게 된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두려워졌다. 어서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가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노력에 대한 모독이었다.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나는 사람들로꽉 찬 강의실 안으로 더 깊숙이 들어갔다. - P85

내 책 때문에 얻게 된 자유로운 여성이라는 명성 때문일까. 내가했던 정치적인 발언 때문일까. 그 발언이 그저 나의 논리를 과시하기 위한 어법이나 내가 남자들만큼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유희에서 끝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을 전체적으로 정의내리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일까. 그 때문에 내가 성적으로 개방되었다는 인상을주게 된 것일까.
그 사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내 방에 들어온 것은 마리아로사가조금도 거리끼지 않고 프랑코를 자신의 방으로 이끈 것과 같은 행동인가 아니면 그날 대학 강의실에서 느껴지던 성적 흥분감에 감염되어 나도 모르게 그런 기운을 방출하게 된 것일까.
생각해보면 피에트로를 배신하고 니노와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망을 느꼈던 것도 밀라노에서였다. 하지만 니노에 대한 열정은 오래전부터 가슴에 품고 있었던 감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성적으로 갈망하고 피에트로를 배신할 생각까지 한 것이었다. 오히려 성관계 자체, 적나라한 오르가슴에 대한 욕구는 나를 흥분시키지 못했다. 나는 그런 욕구에 준비가 덜 된 상태였고 그런 욕구가 역겹게 느껴지기도 했다. - P103

"미르코가 정말 니노의 아이야?"
"그래"
실비아는 하품을 참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니노는 매력적이야. 여자들은 그를 가지지 못해 안달이지. 여기저기에서 그를 유혹해. 다행히 요즘은 시대가 좋아져서 원하면 누구와도 관계를 가질 수 있지. 게다가 니노는 함께 있는 사람을 기쁘게하고 움직이는 힘이 있으니까 인기가 더 많은 거고."
마리아로사는 학생운동에 니노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며 그런 사람을 잘 돌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잘 성장시키고 올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마리아로사는 그렇게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소시민적 민주주의자나 전문 기업인, 맹목적인 현대화 신봉자의 본능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들을 잘 이끌어야 한다고했다. 우리는 함께 보낸 시간이 부족했음을 아쉬워하며 다음 기회를기약했다. 나는 호텔에서 가방을 찾아 나폴리로 향했다. - P109

니노는 결국 릴라와 나를 모두 배신했다. 둘 다 그에게 굴욕당했고 그를 향한 사랑을 되돌려 받지 못했다. 니노는 재능은 뛰어났지만 결국은 경솔하고 깊이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땀과 체액을 흘리고 다니는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여성의 뱃속에 잉태되어영양을 섭취하고 형태를 갖춰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를 부주의한 쾌락의 잔여물처럼 남겨두고 다녔다.
나는 몇 년 전 니노가 나를 찾아 동네까지 왔던 때를 생각했다. 우리가 뜰에서 대화를 나눌 때 창문에서 니노를 본 멜리나는 그를 그의 아버지와 혼동했었다. 도나토 사라토레의 옛 정부는 그때까지만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던 부자간의 유사성을 감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멜리나가 옳고 내가 틀렸다.
니노는 자기 아버지처럼 되기 싫어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니노는 원래 자기 아버지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뿐이다. - P110

그날 오후는 끔찍했고 저녁에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식사가 이어졌다. 나와 피에트로는 두 집안의 어색함을 없애려고 애를썼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전혀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었다. 식사를하면서도 종종 기나긴 침묵이 흘렀다. 아이로타 집안사람들이 내 어머니가 억지로 떠안긴 엄청난 양의 남은 음식을 가지고 떠나가자 순간 모든 것이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가정에서, 피에트로는 자기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라났다. 우리 몸속에는 서로 다른 조상들의 피가 흘렀다.
우리의 결혼은 어떻게 될까. 어떤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공통점으로 차이점을 극복할 수 있을까. 나는 또 다른 책을 쓸수있을까. 대체 언제 무엇에 대한 글을 쓴단 말인가. 피에트로는 나를 지지해줄까. 시어머니 아델레와 시누이 마리아로사도 나를 지지해줄까. - P128

아마도 이번이 릴라에 대해 자세히 쓸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것이다. 그날 이후로 릴라는 내게서 멀어져갔고 그만큼 이야기를 쓰는 데 필요한 자료도 빈약해졌다. 그만큼 우리 둘의 삶이 전혀 다른방향으로 전개되어 서로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도시에 살게 되어 서로 거의 만나지 못하는 동안 언제나 그랬듯이 릴라는 좀처럼 내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릴라의안부를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참았다. 그렇지만 릴라의 그림자는멀리서 나를 자극하기도 했고 우울하게 만들기도 했다. 자부심을 한층 고취시켰다가 어느 순간 위축시키기도 하면서 나를 도무지 가만내버려두지 않았다. - P135

내버려두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그런 자극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금 이 순간 릴라가 나와 함께하기를 원한다. 이 글을쓰는 목적도 바로 그것이다. 나는 릴라가 내 글의 내용을 삭제하거나 덧붙이기를 원한다. 릴라가 마음 가는 대로 이야기에 그녀의 지식과 말과 생각을 덧붙여 우리 이야기를 완성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원한다. 파시스트가 된 지노와 마주쳤을 때의 이야기, 갈리아니선생님의 딸 나디아를 만났을 때의 이야기, 오래전 자신이 환영받지못한다고 느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가에 있는 갈리아니 선생님댁을 다시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 자신의 성경험을 적나라하게 되돌아봤을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원한다. 그날 저녁 릴라의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느꼈던 민망함과 아픔, 내가 릴라에게 해준얼마 되지 않는 몇 마디 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생각해봐야겠다.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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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란 이따금씩 본심을 숨기기 위해서 무의미한 말을 하거나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 때가 있다. 돌이켜보면 나도 다른 때 같으면처음에는 망설였을지라도 결국에는 브루노의 유혹에 넘어갔을 것같다. 물론 그는 내가 좋아할 만한 타입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따지자면 안토니오도 특별히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남자들과는 천천히 정이 드는 법이다. 그때까지 가지고 있던 이상적인 남성상에그다지 부응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때 브루노는 정중하고 관대했다. 상황이 달랐다면 쉽게 내 애정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내가 그를 거부한 이유는 그가 보기 싫어서가 아니었다. 릴라의 행동을 막고릴라와 니노의 관계에 장애물이되고 싶어서였다. 그녀의 행동 때문에 나와 그녀가 처하게 된 상황을 똑바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 P375

우리는 오랫동안 함께 고민했다. 릴리는 정신이 멀쩡했다. 그녀는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속삭였다. 니노를 사랑하고 원한다고 내게 속삭였다. 그렇다. 릴라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썼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올 법한, 우리 동네에서는 아무도 사용하지않는 표현이었다. 나도 속으로 생각할 때만 쓰는 표현이었다. 우리동네에서는 ‘좋아한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릴라는 아니었다. 릴라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릴라는 니노를 사랑하는 것이다. 결국에는 송두리째 없애버려야 할 감정이었지만.
릴라는 실제로 그렇게 할 생각이라고 했다. 스테파노가 돌아오는토요일 저녁부터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릴라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내게 자기를 믿어달라고 했다. 대신 이제 얼마 남지않은 시간은 오롯이 니노에게 바치고 싶다는 것이었다. - P381

영리한 거짓말을 생각해냈다는 만족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공범으로서의 희열은 사라지고 분노가 되살아났다. 나는 왜 이렇게 릴라를 도와주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건지 자문해보았다. 남편을 배신하고 성스러운 결혼의 언약을 어기고 아내라는 짐을 던져버리려는릴라를 말이다. 스테파노가 알게 되는 날이면 릴라의 머리를 박살내려 할 것이다. 불현듯 릴라가 신부복을 입은 자신의 사진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나서 속이 뒤틀렸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이번에는 그 대상이 사진이 아니라카라치 부인 자신이었다. 이번에도 릴라는 자신을 도와달라고 나를끌어들였고 니노는 도구인 것이다. 그렇다. 니노는 가위나 풀, 페인트같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망가뜨리는 데 필요한 도구였다. 릴라는내게 무슨 짓을 시키려는 걸까. 왜 나는 매번 그녀에게 휩쓸리고 마는 걸까. - P387

이에 비해 릴라가 침묵하는 이유는 그녀가 할 말을 잃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릴라가 무념무상의 백지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니노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남겨두고 온 것 같았다. 무슨 일을 겪었고 지금은 어떤 심정인지 설명할 수 있는 능력까지도.
나는 우리 둘의 차이를 깨닫고 우울해졌다. 릴라는 고통과 행복이 뒤섞인 혼미한 상태였다. 지난밤 일을 되짚어볼수록 내 경험이 릴라의 경험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바라노 마론티 해변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에서 눈을 뜬 내 새로운 자아마저도 그곳에 남겨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신의 일부분을 남겨둔 채 이별한 이에게 당장이라도 되돌아가 재결합하고싶은 절박한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릴라는 달랐다. 나는 릴라의 시선과 반쯤 열린 입, 꼭 쥔 주먹에서 돌아가고자 하는 갈급한 심정을 읽어 내릴 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내가 더 당당하고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막상 릴라 곁에 서니 물을 잔뜩 먹은 흙처럼 질척이는 느낌이었다. - P412

릴라의 공책을 나중에 읽게 되어 다행이었다. 공책에는 그날 니노와 지냈던 일이 여러 장에 걸쳐서 묘사되어 있었다. 릴라가 쓴 내용은 내가 다룰 수 없는 영역의 글이었다. 릴라는 육체적 쾌락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쓰지 않았다. 그녀의 경험을 나의 경험과 비교할만한 내용이 전혀 없었다. 대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묘사를 했 - P412

는데 그런 그녀의 글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미처 깨닫지 못했을 뿐릴라는 결혼식 이후 이스키아 섬에 오기 전까지 자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고 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당시의 느낌을 세세히 묘사했다. 갑자기 기운이 빠지면서 졸음이 쏟아졌고뇌와 두개골사이에 공기방울이 부풀어 오르는 것처럼 머리가 무거웠다고 했다.
모든 것이 다급히 움직이면서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고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과 사물에 몸이 부딪쳐 상처받는 느낌이었다고했다. 배와 눈이 정말로 아팠다고 했다.
릴라는 언제나 감각이 둔한 상태였다고 했다. 온몸이 탈지면에 꽁꽁 싸여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자신의 육체와자기를 감싼 탈지면 틈새에서 상처가 빚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했다. 곧 죽게 될 거라는 상상은 너무나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 아무것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 P413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이 사라졌다고 했다. 아무것도소중하게 느껴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했다. 불현듯 극단적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격렬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도 했다고 했다. 멜리나처럼 미쳐버리기 전에, 대로변을 가로지르다 트럭에 치여 끌려가기 전에. 그런 릴라를 변화시킨 것이 바로 니노였던 것이다.
그는 릴라를 죽음에서 구해냈다. 처음 갈리아니 선생님 댁에서 함께 춤추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다. 그때 릴라는 그가 내민 구원의 손길이 두려워 춤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이스키아섬에서 함께 시간을보내면서 니노가 내민 구원의 힘은 강해졌다. 그는 릴라에게 감성을되돌려주었다. 무엇보다도 자존감을 부활시켰다. 그랬다. 말 그대로부활시켰다. - P413

릴라는 여러 장에 걸쳐 부활의 의미를 다루었다. 부활이란 무아지경에 빠지는 것이다. 기존의 모든 구속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형용할수 없이 기쁜 새로운 구속에 얽매이는 것이다. 다시 생명을 얻는 것이자 기존 현실을 뒤집는 봉기이기도 한 것이다. 니노와 릴라, 릴라와 니노는 함께 인생을 다시 배우게 되었다. 인생에서 독기를 제거하고 오직 사유와 삶의 즐거움만으로 재구성하게 된 것이다.
릴라의 글은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릴라의 표현은 훨씬 더아름다웠고 나는 그녀의 글을 요약했을 뿐이다. 그때 차에서 내게이런 심정을 털어놓았다면 그녀의 충만함에 내 공허함이 비교되어나는 더 괴로웠을 것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 내가 니노에 대해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릴라가 경험했다는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는 실은 그런 감정을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나중에 그런 감정을 느끼더라도 결코 릴라처럼 강렬하지 않고 미약할 것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 P414

니노와의 사랑이 그저 여름휴가 동안의 불장난이 아니라는 사실을, 릴라의내면에서 그녀를 깊이 동요케 할 격렬한 감정이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지만 각자 금기를 깨뜨린 후 눈치아 아주머니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언제나처럼 자격지심과 릴라가 쟁취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릴라에게 지고 싶지 않아 내가 밤하늘 아래 바닷가에서, 마론티의모래사장에서 처녀성을 잃었다는 말을 해버리고 싶은 충동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상대가 니노 아버지였다는 사실만 감추면 된다고생각했다. 선원이나 미제 담배를 파는 밀수꾼이었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얼마나 멋진 경험이었는지 이야 - P414

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내게 일어난일과 내가 느낀 쾌락을 릴라에게 들려주고 싶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나는 이내 깨달았다.
나는 그저 릴라에게서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내 이야기를하려는 것이었다. 그녀가 니노에게 얻은 쾌락에 대해서 듣고 나의쾌락과 비교해서 우월성을 느껴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다행히 나는 릴라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절대로 하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챘다. 말해봤자 멍청이처럼 나만 모든 일을 떠벌리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릴라처럼 침묵을 지켰다. - P415

나는 그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내 자신과 한 약속을 지키기로 했다. 니노와 릴라가 없는 미래를 계획하고 그들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모든 일에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 법을 익히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는 법을 습득했다. 서점 주인이 내 몸에 손을 대도 분개하지 않고 조용히 밀쳐냈고 진상 손님들에게도 선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어머니와 대화를 나눌 때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나는 매일같이 되뇌었다.
‘이렇게 생겨먹은 이상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사투리를 쓰고 돈은땡전 한 푼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러니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가질 수 있는 만큼만 가지자. 참아야 할 때는 끝까지 참자. - P427

실은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는 체하기 싫어하는 나의 또 다른자아는 릴라가 어디로 튈 줄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시라도 빨리 그 집에서 나오고 싶었다. 대체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끔찍한 이야기와 마르첼로의 소심한 복수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 돈, 자동차, 좋은 집, 가구와 장식품을 잃고 돈이 없어서 휴가를 못 가게 될까봐 안절부절못하면서 서로 다투는 것이 나와는 무슨상관이란 말인가. 이스키아 섬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니노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릴라는 또다시 카모라 집단과 거래를 벌일생각을 했단 말인가.
나는 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 시험이나 봐서 합격해야겠.
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이 지저분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최대한 멀리 떠날 수 있다. 그러는 사이에 마리아 아주머니가 팔에아이를 안고 내 앞으로 다가오자 마음이 풀어져서 나도 모르게 말했다. - P440

니노가 이성을 되찾았다는 소식에 마음이 놓였지만 한편으로는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와 소설과 예술이라고? 사람이 변하는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인가보다. 관심을 보였던 분야도 감정도 쉽게변하는가보다. 번지르르한 말을 또 다른 번지르르한 말로 대체하면그만이다. 시간은 겉으로 보기에만 연계성이 있는 단어들의 흐름일뿐이고 결국에는 말이 많은 사람이 이기게 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나는 니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좋아하는 것을 포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래. 현실을 받아들이고이제 각자의 길을 걷도록 하자. 마리사가 니노에게 나를 만났고 내가 그에 대해서 물었다는 이야기를 전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 후부터 알폰소와 이야기할 때도 니노와 릴라의 이름을 입에 담지 않았다. - P442

이렇게 해서 나는 처음으로 나폴리를, 캄파니아 주를 벗어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두려웠다. 기차를 잘못 탈까봐, 화장실에 가고 싶은데 화장실을 찾지 못할까봐, 날은 저물었는데 생면부지의 도시에서길을 잃을까봐,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웠다. 수중의 돈을 어머니처럼모두 브래지어 안에 넣었다. 몇 시간을 불안한 경계심과 시간이 갈수록 커져가는 해방감이 공존하는 미묘한 상태로 보냈다.
시간이 지나자 기분은 좋아졌지만 시험 결과는 그다지 좋지 않을 것 같았다. 하늘색에 가까운 은발의 선생님은 이 시험이 고등학 - P455

특히 라틴어가 정말 어려웠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시험은 전반적으로 난도가 높았다. 교수님들은 모든 과목에서 내 지식을꼼꼼하게 검증했다. 나는 더듬더듬 두서없이 말을 늘어놓았다. 답은아는데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 척했다. 이탈리아어 교수님은 내 목소리마저 거슬리는 듯한 태도로 나를 대했다.
"학생은 글을 쓸 때 논리적으로 주제를 전개하지 않고 논지가 흔들리는군요. 내가 보기에 학생은 비판적인 논리전개 방식을 적용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 지식이 없는 분야에 무모하게 뛰어드는 것 같아요.
나는 절망했다. 내가 하는 말에 자신감을 잃었다. 교수님은 이런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비웃듯이 바라보면서 최근 읽은 책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분명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을 뜻하는 것이었을 텐데 순간 미처 이해하지 못하고 떠오른 생각 중에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주제를 골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야기했다.  - P456

나는 펑펑 울었다. 정신을 놓고 있다가 가장 전도유망했던 내일부분을 어딘가에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절망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정말로 뛰어난 아이가 아니란 것은 이미 알고있지 않았던가. 그래, 진정 뛰어난 것은 릴라지. 진정 뛰어난 것은 니노야, 나는 그저 오만방자했을 뿐이야. 이번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른거야.
그런데 의외로 나는 시험에 합격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 방과매일 폈다 접었다 할 필요 없는 침대와 책상과 필요한 모든 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수위의 딸인 나 엘레나 그레코는 태어나고 자란 우리 동네를, 나폴리를 19세의 나이에 혼자서 떠나게 되었다. - P457

노르말레 대학교에서 보낸 시기는 릴라와 나의 우정을 떠나 내 인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처음 대학교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수줍음 많은 촌뜨기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표준어를 쓸 때 내 말투가 자칫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 있을 정도로 문어체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애써서 생각해낸 문장을 말하다가 표준어로 적당한 단어가생각나지 않아 사투리를 표준어화해서 만들어낸 단어로 문장을 메울 때 가장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이런 말투를 고치는 데 꽤나 애를 먹었다. 일반적인 에티켓에 대해서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말하고 음식을 씹을 때도 쩝쩝거렸다. 다른 사람들이 민망해하는 것을 눈치채고서야 그러지 않으려고 주의했다.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대화를 끊기도 하고 잘 알지도못하면서 문외한인 분야에 끼어들기도하고 상대방을 가리지 않고 지나치게 친밀한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나중에야 문제를 깨닫고 친절하되 어느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려고노력했다. - P464

무엇보다도 나는 적을 만들지 않았다. 여학생 중에서 적의를 보이는 아이가 있으면 상냥하면서도 조심스러운 태도로 상대방을 공략했다. 친절하면서도 겸손한 자세로 대하면서 상대방의 태도가 누그러져 그쪽이 오히려 나를 찾게 될 때도 항상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교수님들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교수님들을 대할 때는 더신중한 태도를 취했지만 목적은 같았다. 그들에게 인정받고 호감과애정을 얻고 싶었다. 엄격하고 다가가기 힘든 교수님은 헌신적인 자세와 평온한 미소로 대했다.
나는 시험에 성실하게 임했고 예의 그 혹독한 자제력으로 공부했다. 힘들기는 하지만 지상낙원같은 이곳에서 성적 때문에 쫓겨날까봐 두려웠다. 나만의 공간에 전용 침대,책상,의자, 수많은 책이있는 곳. 나폴리 촌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 주변은 언제나 공부를하고 공부한 것을 토론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 내가 어찌나 무섭게 공부했는지 어떤 교수님도 차마 내게 30점 이하의 점수를 주지 못했다. 1년 후 나는 학교에서 가장 전도유망한 학생 가운대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 P465

시간은 평온하게 흘러갔고 중요한 사건들도 공항 컨베이어벨트 위에실린 여행 가방처럼 지나갔다. 하나씩 순서대로 들어 올려서 페이지위에 옮겨다놓기만 하면 그걸로 끝이다.
그동안 릴라에게 일어난 일을 되짚어보는 일은 이렇게 쉽지 않다.
릴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컨베이어벨트의 속도가 갑자기 느려지거나 빨라진다. 급커브를 돌기도 하고 경로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그러면 여행 가방이 떨어지고 가방이 열려 안에 든 것들이 여기저기흩어지게 되는 것이다. 흐트러진 물건이 내 짐과도 섞여버려서 결국에는 릴라의 물건을 주워 담기 위해서 막힘없이 술술 써내려갔던 내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지금까지 너무 요약해서 썼던 이야기를 다시풀어써야 했다. - P470

만약 릴라가 나 대신에 노르말레 대학에 입학했다면 릴라도 나처럼 힘든 상황에서도 언제나 최선을 다했을까. 로마 출신 여학생의뺨을 때렸을 때, 나는 릴라의 영향을 얼마나 받은 것일까. 멀리 떨어져 있는 릴라가 어떻게 내 가식적인 온화함을 걷어내고 내게 필요한결단력을 주었으며 욕설까지 퍼붓게 만들었을까. 나는 어디까지 릴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도 결국은 프랑코의 방에서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 것도 릴라의 과감함을 배웠기 때문이었다. 프랑코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와 내말라붙은 감성에 대해 깨달았을 때의 불만도 릴라가 진정한 사랑이란 어떤것인지 보여주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내 글쓰기를 힘들게 만드는 것은 바로 릴라다. 나는 평생내게 일어난 일이 릴라에게 일어났다면 어떻게 됐을지 끊임없이 상상해왔다. 릴라에게 내게 일어난 것과 같은 행운이 따랐다면 릴라는어떻게 행동했을까. 릴라의 삶은 계속해서내삶에 투영된다.  - P47

내 말에서는 릴라가 한 말의 메아리가 느껴지고 내 결연한 행동은 릴라의 행동을 재각색한 것이다. 내 부족함은 릴라의 과함 때문이었고내과함은 릴라의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함이었다. 릴라는 굳이 말하지 않고도 내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를 주었고릴라에 대해전혀 몰랐던 사실도 나중에 릴라의 공책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모든 사건을 서술하면서 어느 정도의 여과와 시간차, 부분적인 진실과 반쪽짜리 거짓말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않을 수 없다. 여기에서 언어라는 불확실한 도구를 기반으로 힘들게지난 시간을 측정한 결과물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나는 릴라의 고통을 전혀 몰랐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릴라가 니노를 차지하고 그녀만의 비밀스러운 기술로 스테파노가 아닌 니노의 아이를 가졌기에 나는 릴라가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P471

릴라가 우리가 자라온 환경에서는 용납할 수 없는 짓을 하려고 했기에,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남편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부유함을 버리고 애인과 뱃속의 아이와 함께 자신의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려 했기에 나는 릴라가 그만큼이나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설이나 영화, 만화에 나올법한 격정적인 행복감을 느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부부간의 행복은 내 관심 밖이었다. 내 관심은 열정에 의한 행복이었다. 내가 아닌 릴라를 찾아온 선과 악이 뒤섞인 극단의 혼동 상태와 같은 행복이었다.
그렇지만 이제 내가 틀렸음을 안다. 스테파노가 우리를 데리고 이스키아 섬을 떠날 때를 돌이켜볼 때 배가 해안에서 멀어지는 순간릴라가 느꼈을 아픔을 이제는 실감한다. 릴라는 당장 다음 날부터매일 아침 해변에서 니노와 만나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누고, 사랑 - P471

을 속삭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함께 수영도, 키스도, 포옹도, 사랑도 나누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닫고 격렬한 아픔을 느꼈을것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카라치 부인으로서의 그녀의 인생은 사라져 진정성을 잃고 말았다.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를 쓰고 전략을 짜고 전투를 벌이고 전쟁을 준비하거나 동맹을 맺는 삶. 짜증스런 공급업자들과 고객들, 무게를 속여 계산대 서랍에 돈을 쌓는 데 전념하는 삶은 의미를 잃었다. 그녀의 삶에서 구체적이고 진실한 존재는니노뿐이었다.
릴라는 그런 니노를 갈망하고 있었다. 단 한순간도 그를 원치 않은 적이 없었다. 밤이면 어둠에 잠긴 침실에서 잠깐이라도 그를 잊어보려고 남편에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그 순간 니노에 대한 욕망이 오히려 더 강렬하고 생생하게 느껴져 스테파노를처음 본 사람처럼 밀어냈다. 릴라는 침대 한구석에서 울면서 욕설을퍼부으며 그를 거부하거나 욕실에 들어가 열쇠로 문을 잠가버렸다. - P472

평생 릴라는 ‘경계의 해체‘ 현상이 사물보다 사람에게 더 심각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허물어져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가장 두려워했다. 지난날 가족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오빠의 경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고 기운을 잃었고 스테파노가 약혼자에서남편으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망가지는 것을 보고서도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릴라의 공책을 보고서야 첫날밤 경험이 릴라에게 얼마나 큰상처로 남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면의 욕망과 분노 때문에 또는 음흉한 계획이나 비열함 때문에 남편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할까봐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게 되었다. 밤에 눈을 뜰 때마다 남편이 변형된 상태로 침대에 누워 있을까봐 두려움에 떨었다. 남편이 물집같은 것으로 변할까봐 두려워했다. 체액으로 꽉 차서 물집이 터지면살이 흐물흐물해져 흘러내릴 것을 두려워했다. 가구와 아파트와 스 - P496

테파노의 아내인 릴라 자신까지도 주변의 모든 것과 함께 부서져서살아 숨쉬는 더러운 그 물질에 흡수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날릴라는 등 뒤로 집 문을 닫는 순간 하얀 구름에 둘러싸여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릴라는 그 상태에서 지하철을 타고 캄피 플레그레이에 도착했다. 그제서야 형체가 없는 물체들이 점령하고 있는 물컹한 공간을 떠나서 드디어 자기가 온전한 상태 그대로 머무를 수 있는 곳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자신도 자기 주변에 있는 사물도 망가지지 않을 곳이라고 생각했다. - P497

그때 릴라는 또 한 번 자기 자신을 지워버리는 행위에 대해 매력을 느꼈던 것 같았다. 과거의 릴라와는 안녕이었다. 익숙한 큰길도구두도, 식료품점도, 남편도, 솔라라 형제도, 마르티리 광장과도 이제 끝이었다. 나와의 관계도, 신부이자 부인이라는 사회적 신분도 흩어져 사라졌다. 기존의 릴라에서 오직 니노의 연인이라는 모습만 남겨두었다. 니노는 저녁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니노는 매우 감동했다. 릴라를 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누가 들이닥칠까봐 걱정이 되는지 문이란 문과 창문이란 창문을 꼭꼭 잠갔다. 포리오에서 보낸 밤 이후 처음으로 둘은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그런 다음 니노는 일어나서 공부를 했다. 불빛이 너무 약하다고 불평을 하면서.
릴라도 침대에서 일어나 니노의 복습을 돕기 시작했다. 일 마티노지에 보낼 기사까지 함께 검토한 다음에야 새벽 3시에 함께 잠자리에 들어서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밖에는 비가 내렸고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렸다. 새로운 환경이 아직 어색하기는 했지만 릴라의 마음은 평안했다. - P498

그랬던 그가 대학교에서 쫓겨나 그의 명성이 사라지자 나도 그 후광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좋은 가문 출신의 학생들은 이제 일요일마다 나를 그들의 파티나 소풍에 초대하지 않았다. 몇몇은 다시 내나폴리 억양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프랑코가 내게 선물했던 모든 것은 이제 유행이 지난 한물간 물건이 되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내 삶에 들어온 프랑코의 존재가 내 현실을 잠시 가려 주었을 뿐 전적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다른 이들과 완전히 동화된 것이 아니었다. 기를 쓰고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어내고 어느 정도의 호감과 존중을받기는 했지만 당당한 태도로 터득한 지식에 대한 최고의 결과를 보여주는 학생 축에는 속하지 못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 할까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봐, 옹졸한마음을 들킬까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 P563

"북대서양조약기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지켜보겠어요."
"우리 입장은 언제나 반전주의였다.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고."
"기독교민주당과 협력하면서 반미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이런 식의 문장들이 빠르게 오갔다. 둘 다 이런 토론을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익혀온 습관 같았다. 두 부녀를바라보면서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을 평생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지는 못하겠다. 사회 문제를 아주 사적인 문제로 만드는 일종의 훈련이라고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회 문제를 그저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정보로 과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것을 개인적인 문제나 실력을 인정받기위한 이용 수단으로 축소하지 않으려는 사고방식이었다. - P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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