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나기 2년 전,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내가 매우 못생겼다고 했다. 신혼시절 장만한 리오네 알토 구역 산 지아코모 데이카프리가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아버지는 속삭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폴리의 모든 공간도, 얼어붙을듯 차가운 2월의 창백한 햇살도, 아버지가 내뱉은 문장까지도.
나만 혼자 그곳에서 살며시 빠져나왔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빠져 헤매고 있다. 내게 완성된 이야기를만들어주려는 문장들 사이에 실은 무의미한 문장들일 뿐인데,
진정 나의 것은 아무것도 담지 못했는데.
나는 이야기를 제대로 시작하지도 완결 짓지도 못했다. 내 글은 혼란일 뿐,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고 있는지, 그저 구원 없이일그러진 고통의 나열일 뿐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지금 글을 써 내려가고 있는 이마저도. - P9

나는 아버지가 책상 앞에 앉아 자로 선을 그어 사진의 일부를직사각형 속에 넣고 선밖으로 색이 삐져나오지 않게 사인펜으로 꼼꼼하게 도형을 색칠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직사각형은 사진 속에 있던 무언가를 지운 흔적이고 그 새까만 도형 밑에는 틀림없이 빅토리아 고모의 모습이 감춰져 있을 것이다.
나는 뭘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 결국 부엌에서 칼을가지고 와서 아버지가 가려놓은 사진의 일부를 조심스레 긁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안가 사진을 긁어내면 하얀 종이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불안해서 작업을 멈췄다. 이것이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일로 나에 대한 아버지의 애정이 더 식어버릴까봐 두려웠다. - P23

고모와의 두 번째 만남은 첫 만남보다 더 강렬했다. 나는 그때처음으로 짧은 순간에 모든 감정을 욱여넣을 수 있는 공간이 내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들통난 거짓말에 대한 부담감, 부모님을 배신했다는 수치심, 그들이 받았을 상처로 인한 괴로움은 어머니가 현관문을 닫는 순간 철로 만든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유리문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건물 입구를 지나 차에 들어가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담배에 불을 붙이는 빅토리아 고모 옆에 앉는 순간, 나는 생소한 감정을 경험했다.
그것은 그날 이후 내가 종종 느끼게 될 감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호기심이 익숙한 환경과 나를 향한 변치 않을애정을 이기는 느낌이었다. 그런 감정으로 인해 나는 때로는 안도감을 느꼈고 때로는 의기소침해졌다. 나는 위협적이면서도 포근한 여인에게 매료되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했다. - P91

잊은 지 오래라고 생각했던 유년 시절 동화 나라로의 회귀는아버지뿐 아니라 나의 책임을 덜어주는 효과도 있었다. 모든 악의 기원에 빅토리아 고모의 마법이 있었다면 현 사태는 내가 태어난 순간 이미 시작되었던 것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다. 나에게 고모를 찾게 만든 그 어둠의 힘은 이미오래전부터 작용하고 있었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는예수님이 내쫓지 말라고 한 아이들처럼 죄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생각조차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해졌다. - P188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방과 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그 팔찌가 내게만 사무치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열쇠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어머니가 내 방 침대 머리맡서랍장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는 서랍에서 팔찌를 꺼내들고 그것이 마치 하르모니아의 목걸이*라도 되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는 그 팔찌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사악한 본질을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새 어머니의 어깨가 축 처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뼈만 앙상한 데다 등이 굽어 있었다. - P189

이웃 사람들, 길을 지나다니는 행인들, 학교 친구들, 선생님들할 것 없이 하나같이 눈에 거슬렸다. 특히 어머니가 그랬다. 어머니는 쉴 새 없이 담배를 피우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진을 마시고 매사에 느린 말투로 투덜거렸다. 내가 공책이나 책을 사야 한다고 할 때마다 걱정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넌덜머리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가장 참기 힘들었던 건 아버지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에 대해어머니가 날이 갈수록 헌신적으로 반응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신의 친구이자 아버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의아내와 최소한 지난 15년간 바람을 피웠는데도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는 그런 어머니의 태도에 질려버렸다.
나는 무관심한 표정 연기를 그만두고 일부러 나폴리 사투리와 표준어를 섞어가며 어머니에게 제발 그만하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를 잊어버리고 영화관에라도 가든가 춤이라도 추러 가라고 고함을 쳤다. 아버지는 이제 어머니 남편이 아니니 죽은 셈 치라고 했다. - P239

솔직히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내용을 잘 모르겠다. 내게 그날 강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아름다운 입과 목에서 나오는 매혹적인 소리의 흐름이었다. 나는 로베르토의 목젖이 지구에 바글거리는 셀 수 없이 많은 복제품이 아니라 실제로인류 최초의 남성이었던 아담의 숨결에 의해 진동하는 것처럼그의 툭 튀어나온 목젖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까무잡잡한 얼굴에 조각한 듯한 두 눈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강렬했던가. 긴 손가락과 빛나는 입술도 마찬가지였다. - P256

나는 인간을 이토록 연약하게 만든 하나님 아버지가 싫었다. 인간을 끊임없이 고통에 노출시키고 이토록 쉽게 부패하게 만든그가 싫었다. 우리가 인형이라도 되는 것처럼 배고픔과 목마름질병과 공포, 잔혹함과 교만함, 때로는 불신으로 인한 배신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좋은 감정까지도 어떻게 다루는지 바라보고만 있는 그가 싫었다.
동정녀를 통해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을 자신의 창조물들 가운데 가장 불행한 자들이 겪는 최악의 상황에 몰아넣은 것도 싫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그 힘을 인류의 상황을 개선하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하찮은 놀이에만허비한 아들도 싫었다. 자기 어머니는 홀대하면서 아버지인 하나님에게는 화낼 용기조차 없는 아들이 싫었다. 자기 아들을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내버려두고 도움 요청에 응하지 않은 하나님이 싫었다.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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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동기 없는 살인에 관해 언급했어요. 우리에게 친숙한 치정이나 사리사욕 같은 범행 동기가 없는 살인에 관해서요……. 또는 강한 신념 없이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중간적 인물이 있죠. "나도 어쩔 도리가 없었어요!" 하고 말하는인물들 말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물려받은 개념들은우리에게 이 문제를 다룰 방안을 전혀 주지 않아요. 책상에앉아서 또는 대중 속에서 저지르는 이런 살인에 관해 말하라면.…… 그건 물론 일반적인 살인자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무시무시한 인간형이에요. 자신에게 당하는 피해자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이잖아요. 정말로 파리 잡듯 사람들을 죽이는 거죠. - P101

나는 내가 누군가의 정당한 ㅡ정당하다라는 말을 강조해주세요!―이해관계를 훼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어쨌든 이게 논쟁적인 이슈고 내가 실제로 그것들을 훼손했다고가정해봐요. 내가 그래야만 옳았을까요? 글쎄요. 나는 그건사학자들이 할 일이라고, 그리고 그 시절을 살았고 그 시절에독립적인 처지에 있던 사람들-그런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사실적 진리 factual truth의 수호자가 될 필요가 있어요-이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회가 이 수호자들을 내쫓았을 때, 또는 국가가 그들을 구석으로 몰거나 담벼락에 밀쳤을 때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역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봐왔어요. - P106

러시아를 예로 들어보죠. 러시아에서는 5년마다 새 역사책이 나와요. 국가나 사회는 자기들의 정당한 이해관계가 진실과 갈등하는 상황이 됐을 때도 여전히 이런 사실적 진리의 수호자들과 원칙적으로 이해관계를 가질까요? 이 사례에서 나는 그렇다고 말하겠어요. 그런 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물론,
이 책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두세 가지 진실을 은폐하려고 구구절절한 변명서를 작성해서 시장에 내놓는 거고요. 그런 책략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역사적으로 그런 종류의 책략들은 결코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정당한 감정이 무엇이냐 하는 거죠. 거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요. 나는 일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줬어요. 내 입장에서는, 내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 P106

줬을 때가 어쩐지 단체들이나 그들의 이해관계에 방해가 됐을 때보다 더 마음이 불편해요. 난 이걸 심각하게 받아들여요. 하지만 그보단 이해관계의 문제가 원칙과 더욱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자, 나는 이런 정당한 이해관계에 본질적으로는 내 스타일을 통해서 그런 것인데 그에 대해 더 많은 얘기는 못하겠네요―상처를 줘왔어요. 그러니까 여기서가져야 할 정당한 감정은 슬픔이라는 게 내 생각이에요. 그게유일한 감정이죠! 자기만족의 감정이 아니고요! 그런데 이걸이해하는 사람이 무척 드물어요. 내가 이 문제와 관련해서 할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사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일에대해 얘기할 때 감정적인 어조를 취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건 스스로를 비하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모든 것에 나는…… 우리가 웃을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건 주권sovereignty의 한 형태니까요. 그리고 나는 내가 사용하는 반어법에 대한 모든 비판이, 정말이지 취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대단히 불쾌해요. 그건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거든요.  - P108

글쎄요, 유대인 단체들은 괴상한 불안감을 느끼는 게 분명해요. 그들은 사람들이 내 주장을 악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반유대주의자들이 "바로 이거야" 하고 쾌재를 부르면서 "비난받을 사람은 유대인들 자신"이라고 말할 거라고생각해요. 반유대주의자들이 그러기는 하죠. 하지만 내 책을읽으면 알겠지만 그 안에 반유대주의자들이 이용해먹을 건없어요.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독일인들은 아직 분별력을 갖고있지 않다고 생각해요. 글쎄요, 독일인들이 아직 분별력을갖추지 못했다면, 우리는 아마 최후의 심판 때까지 기다려야겠죠. - P109

논하고 싶지 않아요.
국가 간 차이를 무시한다면, 물론 그 차이는 대단히 크지만요, 그리고 이게 글로벌한 운동-이런 형태로는 결코 존재한적이 없었던 운동―이라는 점만 고려한다면, 또 (운동의 목표와 견해, 독트린은 별개로 하고) 모든 나라의 현 세대를 이전 세대들과 정말로 차별화해서 고려한다면, 처음으로 나한테 강한 인상을 준 그들의 특징은 정치적으로 활동하려는 투지, 정치적인 활동을 벌이면서 느끼는 기쁨,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상황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확신이에요. 물론 이 특징은 각국의 다양한 정치 상황과 역사적 전통에 따라 나라마다 굉장히상이한 형태로 표현돼요. 나라별로 학생들의 정치적 재능이대단히 상이하기 때문에 다르게 표현된다는 뜻이죠. 이 문제는 나중에 다시 논했으면 해요. - P112

대학들을 상대로 한 활동이 시작된 것은 나중의 일로, 순전히 정치적 활동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었던 것을 그들이 실제로 달성한 뒤의 일일 뿐이에요. 버클리에서 자유언론운동Free Speech Movement으로 시작해 반전운동으로 지속됐죠. 그런데 다시금 그 결과는 꽤나 비범해졌어요. 이런 발단에서, 특히 이렇게 거둔 성공들에서 비롯한 모든 것이 그때부터 세계전역으로 퍼져 나갔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이 새로운 자신감은, 미국에서는 특히 소소한 문제들에서 눈에 잘 띄어요. - P113

대학의 서비스직 직원들이 기준임금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학생들은 파업을 해서성공을 거뒀어요. 기본적으로 이건 대학의 운영 정책에 맞서 ‘자신들‘의 대학과 연대하는 행위였어요. 다른 예로는 1970년에 대학생들이 선거 캠페인에 참여하겠다면서 휴강을 요구한게 있어요. 많은 수의 대규모 대학이 학생들에게 이런 자유시간을 허용했어요. 이건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시민이기도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가능한, 대학 바깥의 정치적 활동이에요. 나는 두 사례를 분명 긍정적으로 간주해요.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덜 긍정적으로 간주하는 다른 사례들도 있어요. 그에 대해서는 나중에 얘기할게요. - P114

근본적인 질문은 ‘정말로 일어났던 일은 무엇인가‘예요. 내가보듯, 단순히 프로파간다만 진행되는 수준에 머무는 게 아닌자발적인 정치적 운동이, 활동만 정치적인 게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도덕적인 동기에서 시작된 정치적 운동이 대단히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일어났어요. 일반적으로 단순한 힘겨루기나이해관계에서 비롯한 행위로 보이는 운동에는 꽤나 드문 이런 도덕적 요인과 더불어, 우리 시대에는 생소해 보이는 또다른 경험이 정치 게임에 등장했어요. 정치적 행위가 재미있다는 것이 밝혀진 거예요. 이 세대는 18세기가 "공적 행복public happiness"이라고 불렀던 것을 발견했어요. 공적 행복이란, 사람은 공적인 생활public life에 참여했을 때, 그러지 않았다면 그에게 닫힌 채로 남았을 인간적 체험의 차원을 혼자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여러 면에서 완전한 - P114

‘행복‘의 일부를 구성한다는 것을 뜻해요.
이런 모든 면에서 나는 학생운동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요. 하지만 학생운동의 추후 발전은 다른 문제예요. 이른바긍정적 요인들이 우수한 상태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이미 해체되는 과정에 들어선것은 아닌지 여부를, 한편으로는 범죄와 맞닿아 있고 다른 편으로는 권태와 맞닿아 있는 광신과 이데올로기와 파괴적 성향이 그들을 잠식하지 않았는지 여부를 그 누가 알겠어요?
역사를 보면 선한 상황은 지속 기간이 대단히 짧은게 보통이지만 이후로 장시간 실제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결정적인영향력을 발휘해요. 그리스의 진정한 고전적 시기classical period가 얼마나 짧았는지 생각해봐요. 그런데 그 시기는 사실상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어요.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언제인지를 알고, 그걸 집어 들 때가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 P115

에른스트 블로흐가 ‘자연법‘이라고 부른 내용은, 학생운동이도덕적으로 우월하게끔 착색coloration 된 것에 대해 내가 말하면서 거론한 내용이에요. 하지만 혁명가라면 누구나 이와 유사한 점을 보여준다는 말도 덧붙여야겠네요. 그리고 그 지점에서 나는 블로흐하고 생각이 다르다는 점도요. 혁명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탄압받고 멸시받던 사람들이 스스로 혁명의길을 이끈 적은 결코 없었고, 탄압도 멸시도 받지 않았지만남들이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을 도저히 참지 못한 사람들이 혁명을 이끌었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 다만 그들은 자신들의도덕적 동기를 인정하는 게 부끄러워서 그런 사실을 대놓고드러내지 않았을 뿐이에요. 이런 수치심은 대단히 유서가 깊은데, 여기서 그 역사를 세세히 설명하고 싶지는 않아요. 혁명의 역사에도 대단히 흥미로운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요. - P116

에른스트 블로흐는 "도래할 혁명"을 믿는데, 나는 혁명이 도래할지, 도래한다면 어떤 구조를 갖게 될지 모르겠어요. 아무튼 그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 경험(매우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프랑스혁명과 미국독립혁명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돼요. 그 이전에는 반란과 쿠데타가 있었을 뿐 혁명은 존재하지 않았어요)으로 볼 때, 혁명이 일어나려면일련의 현상들이 혁명의 전제 조건- 정부 조직이 와해될 거라는 위협, 정부의 존재 기반 약화,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 공공 서비스의 실패, 이 밖에 다양한 다른 것들―으로서발생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모든 열강이 권력과 권위를 상실한 상황을 확연히 볼 수 있어요. 열강 정부들의 손에 폭력을 행사할 도구가 엄청나게 축적되는 일이 동반 진행되지만, 무기가 늘었다는 사실이 상실된 권력을 보상해줄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반드시 혁명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에요.  - P117

지금 당장을 보면, 도래할 혁명을 위한 전제 조건 하나가 ‘진정한 혁명가 집단‘이라는 조건이 결여돼 있어요. 좌익 학생들이 가장 되고 싶어 하는 존재ㅡ혁명가는 그들의 현재 모습하고는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들은 혁명가로서 조직돼 있지도 않아요. 그들은 권력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도 못해요. 권력이 길거리에 떨어져 있고 거기에 그게 있다는 것을안다고 해도 그들은 허리를 굽혀 그걸 집어 들 준비가 가장 덜된 사람들인 게 분명해요. 그런데 정확히 그게 혁명가들이하는 일이에요. 혁명가는 혁명을 만들어내지 않아요! 혁명가는 길거리에 권력이 떨어져 있는 것이 언제인지를 알고, 그걸집어 들 때가 언제인지를 아는 사람이에요. 무장봉기가 그대로 혁명으로 이어진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혁명을 준비한다는 의미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길을 포장해주는 것은 앞선 시대들에 제대로 행해지고는했던 현 상황에 대한 제대로 된 분석이에요. - P118

우리, 학생의 자유라는 게 사실상 무엇인지 생각해봐요. 대학은 젊은 사람들이 다년간 모든사회집단과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을,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가능하게 해줘요. 학생들이 대학을 파괴한다면 그런 상황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겠죠. 결과적으로 사회에 맞선 저항도 존재하지 않을 거고요. 그들은 일부국가에서, 그리고 여러 시기에 걸쳐 자신들이 걸터앉은 나뭇가지를 톱으로 잘라내는 작업을 거의 마쳤어요. 그런 작업이결국에는 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이어져요. 이런 식으로 학생저항운동은 그들의 활동을 요구하는 세력을 얻는 데 사실상 실패할뿐더러 완전히 박살날 수도 있었죠. - P123

결국에는 철저하게 신망을 잃은 옛 슬로건-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보다 훨씬 더 정신나간 표어예요. 나는 우리가 역사로부터 대단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는 확신하지 않아요. 역사는 늘 새로운 내용으로 꾸준히 우리와 대면하니까요. 하지만 마땅히 학습할 수 있어야 할 사소한 것은 몇가지 있어요. 나는 이 세대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 그런 식으로 현실을 인식하는 사람을, 그런 현실에 대해 심사숙고하는수고를 감당하려는 사람을 어느 곳에서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의혹들을 가득 품게 됐어요 - P126

정부는 언제라도 그들에게서 그것들을 앗아 갈 수 있어요. 거부빚기라도 하면 하룻밤 사이에 취업할 권리조차 없는거지로 전락할 수 있어요.(최근 소련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소련의 문학작품은 얼핏만 보아도 모든 경제이론과 정치이론보다더 강렬한 방식으로 끔찍한 현실을 증언한다는 걸 알게 될 거예요.)우리가 한-이론과 이데올로기하고는 구별되는 경험으로서의 모든 경험은 자본주의의 발흥과 함께 시작된 수탈과정이 생산수단을 수탈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줘요. 경제 세력들과 그들이 장악한 장치들로부터 독립한 법적·정치적 제도들이 수탈 과정에 본질적으로 내재한 극악한 가능성들을 통제하고 저지할 수 있어요.  - P128

그런 정치적 통제는, 자신을 사회주의자로 부르건 자본주의자로 부르건 이른바 복지국가에서 가장 잘 기능하는 듯 보여요. 자유를 수호해주는 것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 사이의 분열이고, 또는 마르크스주의 표현을 쓰자면, 국가와 그 구성 세력이 상부구조superstructure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이른바 서구 자본주의국가들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직원들의 사적 영역private sphere을 무단으로침범하려는 대기업 관리진의 몽상이 현실이 되지 않게 막아주는 사법 시스템이에요. 그런데 이런 몽상은 정부 자체가 직원들의 고용주가 되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건 실현돼요. 미국정부를 위해 일하는 공무원들의 취업을 승인하는 시스템이 사생활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죠.  - P128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이런 발전들을 판단해야 한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겠어요. 수탈은 정말이지 현대적 생산의 본질이고 사회주의는, 마르크스가 믿었듯, 자본주의에 의해 시작됐을 때처럼 산업화한 사회가 불가피하게 귀결하는 결과물일 뿐이라고. 그랬을 때 제기되는 의문은, 이 과정이 동구에서 전락한 것 같은 극악한 체제로 전락하지 않도록 통제권 아래 두고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거예요. 이른바 특정 공산주의국가들에서 예를들어 유고슬라비아연방 공화국으로 존재하다 1991년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로 해체된 나라에서, 심지어는 동독에서- 경제 관련 규제를 풀고 분권화하려는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고, 수탈 과정에서 나오는 지독히끔찍한 결과들을 예방하려고 대단히 중요한 양보들이 행해지고 있어요. 무척 다행스럽게도, 중앙집권화와 노동자들의 노예화가 특정 수준에 도달하면 생산자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 증명됐어요. - P129

이 실험들 중 어느 것도 합법적 재산을 만족스러운 방식으로재정의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 실험들은 그 방향으로 걸음을떼었어요. 동독의 협동조합들은 사유재산을 생산과 분배 수단으로서의 공유재산joint property에 대한 욕구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노동자평의회는 사유재산을 보장하는 대신에 고용을보장하는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죠. 두 사례 모두에서 개별 노동자들은 더 이상 원자화돼 있지 않고, 새로운 집단과 계급에소속된 데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 협동조합이나 공장평의회에 속해요.
당신은 실험과 개혁에 대해서도 물었죠. 그건 경제 시스템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어요. 경제 시스템이 사람들에게서 자유를 앗아 가는 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요. - P133

이런 우려는 사회주의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요. 그건 과거에도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순전히 권력정치power politics의이슈죠. 나는 소련이 연방 내부의 반대를 염려하지 않는다면, 지식인들의 반대뿐 아니라 연방에 속한 민족들의 잠재적인 반대까지 염려하지 않는다면 체코슬로바키아에 행군해 들어갔던 것처럼 연방에 속한 나라들로 행군해 들어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체코 정부가 분명 러시아인들의 영향력아래서 최근에야 취소된 상당한 정도의 양보를 ‘프라하의 봄‘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에게 허용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돼요. 권력을 분권화하려는 이 모든 시도는 모스크바의 두려움을 자극해요. 새 모델은, 러시아 입장에서는, 경제적이거나지적인 문제들을 인도적으로 처리하는 수준에 머물지 않고러시아제국을 해체하려 든다는 위협을 뜻하기도 해요. - P139

그런데 세상에 그런 건 없어요. ‘부르주아‘ 정부의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도 자유고 ‘공산주의‘ 국가의 법으로 보장되는 자유도 자유예요. 오늘날 공산주의 정부들이 민권을 존중하지않고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권리와 자유가 ‘부르주아적‘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레 도출되는 것은 아니에요. ‘부르주아적 자유‘를어떤 사람이 실제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벌 자유하고 동일시하는 경우가 꽤나 빈번해요. 사실 이것은 누군가 극도로 부유해질 수 있는 곳인 동구에서도 유일하게 존중하는 ‘자유‘니까요. 소득의 관점에서ㅡ 전문적인 용어가 아니라 알아듣기 쉬운 용어로 얘기한다면ㅡ부자와 가난뱅이의 차이는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동구에서 더 커요.  - P141

자유라는 용어는 항상 ‘반대할 자유‘를 의미해요. 스탈린과 히틀러 이전의 어떤 통치자도 "예" 하고 말할 자유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어요. 히틀러는 유대인과 집시를그의 의견에 동의할 권리로부터 차단했고, 스탈린은 누가 됐건 "예" 하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요" 하고 말할 수도 있다고판단했기 때문에 자기를 열렬히 추종하는 지지자들의 머리조차 자른 유일한 독재자예요. 그들 이전에는 어떤 폭군도 그지경까지 나아가지는 않았고, 그렇게 성공하지도 못했어요.
이 시스템들 중 어느 것도, 심지어 소련의 시스템도ㅡ내가중국을 판단할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네요―여전히 진정한 전체주의 시스템은 아니에요. 현재 그쪽 체제에서 배제당한 유일한 사람들은 체제와 뜻을 달리하면서 반대하는 사람들뿐이에요. 그런데 이게 어떤 식으로건 그곳에자유가 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요. 반대 세력들이르게관심을 갖는 것은 정치적 자유와 기본적 권리의 보장이거든요. - P142

열강들 입장에서 권력을 상실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앞에서 말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할 때 그건 무슨 뜻일까요? 대의정부representative government를 가진 모든 공화국에서권력은 국민에게 있어요. 그건 국민이 특정 개인들에게 자신들을 대표해달라며, 자신들의 이름으로 활동해달라며 권한을이양했다는 뜻이에요. 우리가 권력 상실에 대해 이야기할 때그건 사람들이 그들을 대표하는 자들이 하는 일에 대한, 선거를 통해 권력을 이양받은 관리들이 하는 일에 대한 동의를 철회했다는 뜻이에요.
권력을 이양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힘이 넘친다고 느껴요. 국민들이 그 권력의 토대를 철회했을 때조차 권력을 가졌다는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게 미국이 처한 상황이에요. 미국만 그런 건 아니지만요.  - P144

라이프
당신의 저작 『폭력론』으로 돌아가죠. 책에(즉, 그 책의 독일어버전에) 당신은 이렇게 썼습니다. "민족의 독립, 외세 통치로부터의 해방, 국가의 자주독립, 국제 정세 속에서 제약받지않는 힘을 무제한 주장하는 일이 눈에 띄는 한 그리고 그어떤 혁명도 이런 국가 개념을 흔들 수 없는 한―‘인류의 미래‘보다는 ‘인류에게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데 매달리는 전쟁 문제의 이론적 해법은 상상 가능하지 않을뿐더러, 지구 상의 평화 보장은 동그라미를 네모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유토피아적이다." 당신이 염두에 두고 있는 국가의 다른개념은 무엇인가요? - P153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상이한 국가 개념이라기보다 이 개념을 변화시킬 필요성이에요. 우리가 ‘국가‘라고 부르는 것은기껏해야 15, 16세기에 생긴 개념이에요. 자주독립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고요. 자주독립이란 무엇보다도, 국제적인 성격의 갈등이 최종적으로는 전쟁으로만 해결될 수 있다는 걸뜻해요. 전쟁 말고 다른 최후 방책은 없어요. 하지만 오늘날강대국들끼리의 전쟁은 모든 평화주의적인 고려와는 사뭇별개로 폭력의 수단이 무시무시하게 발전한 덕에 불가능한일이 돼버렸어요. 따라서 이런 의문이 제기되죠. ‘이 최후 방책의 자리를 무엇이 대신하는가?‘ - P154

전쟁은 소국들만 치를 수 있는 사치품이 됐고, 그런 그들도강대국들의 영향권에 끌려들어가지 않고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보유하지 않았을 때만 전쟁을 할 수 있어요. 강대국들은이런 전쟁에 개입해요.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의존국client을방어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이 오늘날 세계 평화가 의지하는 상호 억제mutual deterrence 전략의중요한 일부가 돼버렸기 때문이에요.
독립국들 사이에는 전쟁 말고 최후 방책이 있을 수 없어요.
전쟁이 더 이상 그 목적에 봉사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가 새로운 국가 개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입증하죠. 이 새 국가 개념은 확실히, 헤이그에 있는 국제사법재판소보다 더 잘 작동할 새 국제사법재판소를 창설하거나새로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 UN의 전신을 창설하는 데서 비롯하지는 않을 거예요. 자주적인, 혹은 겉으로만 자주적인 정 - P154

부들 사이의 동일한 갈등이 거기서도 다시금 발생하게 될 테니까요-담론 수준에서 그럴 텐데, 담론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중요해요.
내가 보는 새로운 국가 개념의 기초 원리는 연방 시스템에서찾아볼 수 있어요. 연방 시스템의 이점은 권력이 이동하는 방향이 상향도 하향도 아니라 수평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연방에 참여한 기구들은 각자의 권력을 상호 억제하고 통제해요.
이런 사안들을 사유할 때의 진정한 난점은 최종 방안이 초국가적super-national 시스템이 아니라 국가 간inter-national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초국가적 정권은 비효율적이거나, 어떤식으로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에 의해 독점될 거고,
그러면서-최종적으로 와해될 때까지는-글로벌한 경찰력을 피해서 도망칠 곳이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전제 정권으로 변하기 쉬운 세계정부로 이어질 거예요 - P155

오늘날 쉽게 생길지도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히피와 기성체제 거부자들이 이룬 코민들은 이 시스템하고 아무 관련도없다는 말을 반드시 해야겠네요. 그들의 밑바탕에는 그와는반대로 공적인 삶을, 전반적으로 정치적인 삶을 완전히 포기하는 태도가 놓여 있어요. 그런 공동체는 정치적 조난 사고에시달려온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고, 그들은 개인적인 기반 위에서 철저히 옹호되고 있어요. 나는 독일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런 코뮌 형태를 대단히 그로테스크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반감도 전혀 없어요.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무의미한 존재예요. 평의회는정반대의 것을 욕망해요. 그들이 지역 평의회, 전문직 평의회, 공장 내 평의회, 아파트 단지 평의회 등―대단히 작은 규모로 시작하더라도 말이에요. 정말이지 결코 노동자평의회에만 국한되지 않는 무척이나 다양한 종류의 평의회가 있어요.
노동자평의회는 이 분야에서는 특별한 사례일 뿐이에요. - P157

한 나라의 모든 주민이 반드시 그런 평의회의 멤버가 될 필요는 없어요. 모든 사람이 공적인 사안에 관심을 기울이고 싶어 하지도 않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아니에요. 한 나라의 진정한 정치 엘리트들을 한데로 끌어모으는 자기 선출 과정 self-selective process 이 이런 방식으로 가능해져요. 공적인 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나서서 개입하는 일 없이 그런 사람들이 선출됐다는 사실에 만족해야 할 거예요. 하지만 기회만큼은 각자에게 공평하게 주어져야 해요.
나는 새로운 국가 개념을 형성할 가능성을 이 방향에서 봐요.
자주독립의 원칙이 전혀 들어맞지 않을 이런 종류의 평의회국가council-state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연방에 더없이 적합할거예요. 특히 그런 국가에서는 권력이 수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구성될테니까요. - P158

하지만 그런 국가가 실현될 가망이 있느냐고 지금 나한테 묻는다면 이렇게 말해야겠네요. 있기야하겠지만 매우 희소하다고요. 하지만 결국에는 다음 혁명의결과로 생겨날지 모르죠. - P159

자, 이 나라는 민족국가nation-state가 아니에요. 미국은 민족국가가 아닌데, 유럽인들은 이 단순한 사실을 이해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려요. 결국에는 그 사실을 이론적으로는 인식하게 되죠. 그러니까 이 나라를 통합하는 요소는 유산도 아니고 기억도, 국토도, 언어도, 동일한 혈통도 아니에요…… 이 나라에는 토박이가 없어요. 인디언들이 토박이였죠. 그 외의 사람들은 모두 시민이고, 이 시민들은 딱 한 가지 것으로통합돼 있어요. 즉, 당신은 헌법에 동의한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단순한 절차만 따르면 미합중국 시민이 돼요. 프랑스뿐 아니라 독일의 보편적인 여론에 따르자면 헌법은 그저 종이 쪼가리일 뿐이고 우리는 그걸 바꿀 수도 있어요. 그런데 이 나라에서 헌법은 성스러운 문서로, 건국이라는 성스러운 행위를 항구적으로 기억하게 해주는 기념품이에요. 헌법이라는토대는 완전히 이질적인 소수민족들ethnic minorities과 지역들을하나의 연방으로 묶어내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a) 연합을 유지하면서 (1) 각각의 차이점을 완전히 흡수하거나 차이의 강 - P165

도를 줄여 평준화해요. 외국인 입장에서 이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에요. 외국인으로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일이죠. 미국 정부는 인간에 의한 정부가 아니라법에 의한 정부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 말이 진실인 한, 그리고 국가의 안녕을 위해 진실일 필요가 있는 한…… 국가의 안녕을 위해, 미합중국을 위해, 공화국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말은 정말이지……


"우리가 이 나라에서민주주의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면그건 엄청난 실수예요" - P166

에레라
펜타곤 문서에 관한 에세이 정치에서의 거짓말Lying in Politics: Re-flections on the Pentagon Papers」, <뉴욕리뷰오브북스>, 1971. 11. 18, 30~39쪽-원주 뒤에 "공화국의 위기에 수록되었다에서 당신은 당신이 "전문적인 해결사들professional problem-solvers"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심리를, 당시 미국 정부의 고문이었던 사람들의 심리를 묘사합니다. "그들은 해결사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들은 단순히지능이 좋다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합리적‘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에 ‘감상성sentimentality‘을 상당히 무서울 정도로 웃돌고 ‘이론‘과, 순수한 정신 활동의 세계와 사랑에 빠져 있다……." - P171

아렌트
끼어들어도 될까요?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대단히 좋은 사례가, 정확히펜타곤 문서들에서 가져온 사례가 있어요. 그 사례는 다른 모든 통찰을 모조리 압도해요. 당신도 ‘도미노이론‘에 대해 알거예요. 1950년부터 펜타곤 문서가 공개된 직후인 1969년까지 냉전을 관통한 공식 이론이었죠. 중요한 사실은 펜타곤 문서들을 작성한 대단히 수준 높은 지식인들 중에 그 이론을 믿은 사람은 극히 적었다는 거예요. 내 생각에 행정부 고위층에있는 사람들 중에서는 두세 명뿐이었는데, 정확히 말해 그들은 유달리 지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어요. - P171

이 전체적인 사안과 관련한 골칫거리는, 이건 정말로 미해결된 안건인데, 다음과 같아요. 우리는 미래를 몰라요. 세상 사람은 누구나 미래를 감안하면서 행위를 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몰라요. 미래는 현재 만들어지는 중이니까요. 행위는 ‘우리‘가 하는 것이지 ‘나‘만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유일한 사람인 곳이 있다면, 나 혼자만 있다면, 내가 하고 있는일을 바탕으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언할 수 있겠지만요. 이런 점이 실제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전적으로불확정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요. 우발성은 정말로 모든 역사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에요.  - P173

미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변수들에, 달리 말해 단순한 hasard(우연에 지나치게 많이 의존한다는 간단한 이유 때문에, 앞으로 무슨 일이일어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한편 당신이 역사를 회고적인 시선으로 돌아본다면, 당신은 이 모든 일이 우연한것이었다고 해도―사람들에게 앞뒤가 척척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요.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요? 모든 역사철학 입장에서는 바로 그것이 진정한 문제예요. 과거를 돌아보면 역사가 항상 다른 식으로는 결코 일어날 수 없었다는식으로 보이는 건 어째서일까요? 모든 변수가 자취를 감췄고현실이 우리에게 그토록 압도적인 충격을 가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한히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것들에 신경을 쓸 수 없는 거죠. - P173

에레라
그런데 요즘 커다란 위협은 정치가 추구하는 목표들에는 한계가 없다는 생각 아닌가요? 자유주의 liberalism는 결국 정치적목표들에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을 전제로 합니다. 요즘 가장큰 위협은 스스로를 한계 없는 목표로 설정하는 사람 및 운동의 발흥에서 비롯하지 않나요?


아렌트
나 자신이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걸 전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말할 때 당신이 충격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있잖아 - P177

요, 나는 결코 자유주의자가 아니에요. 그리고 나는 이런 의미에서는 어떤 신조도 갖고 있지 않아요. 나는 하나의 주의ism라고 부를 수 있는 명확한 정치철학이 없어요.


에레라
당연히 그렇겠죠. 하지만 당신의 철학적인 심사숙고는 자유주의 사상의 토대 안에서, 그것이 고대로부터 차용한 사상들과 함께 이뤄집니다. - P178

아렌트
몽테스키외가 자유주의자인가요? 내가 고려하는 모든 사람을 당신은 그리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건가요…….
내 말은 "moi je me sers où je peux(나는 할 수 있는 일을 마음대로 할 거예요)". 나는 내가 취할 수 있고 나한테 적합한 것은 무엇이건 취해요. 우리 시대의 커다란 이점 중 하나는 르네 샤르René Char, 1907~1988. 20세기 중반의 프랑스 시인가 말하기도 했죠. "Notre héritage n‘est garanti par aucun testament. (우리가물려받은 유산을 보장하는 유언장은 존재하지 않는다.)"샤르의 올바른인용문은 "Notre héritage n‘est précédé d‘aucun testament"으로 『히프노스의 장Feuillets d‘Hypnos』(갈리마르, 1946)에 있는 문장이다. 아렌트는 이 인용문을 『과거와 미래 사이』를 여는 문장으로 사용하는데, 이 책에서 그녀는 이 문장을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은 유언장 없이 우리에게 남겨졌다"로 옮겼다원주 - P178

아렌트
이건 어느 곳에서건 우리가 과거 경험과 사유를 나름껏 취하는 데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뜻이에요.


에레라
그런데 이런 극단적인 자유는 몇몇 기성 이론, 기성 이데올로기를 찾아내 적용하길 좋아하는 많은 동시대 사람에게 경고신호가 되지 않을까요?


아렌트
Certainement, Aucun doute. Aucun doute.(분명히 그렇죠.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정말 그래요.)


"자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 P179

에레라
이런 자유가 소수 사람들, 그러니까 새로운 사고방식을 고안해낼 만큼 충분히 강인한 사람들의 자유를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을까요?


아렌트
Non. Non.(아뇨, 아니에요.) 그건 오로지 모든 인간은 사유하는 존재고 나처럼 심사숙고할 수 있는 존재라는, 그래서 원할때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존재라는 확신에만 의지해요. 그의 내면에서 이런 소망을 이끌어내는 법은 나도 몰라요. 내생각에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réfléchir(심사숙고)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유한다는 말은 항상 비판적으 - P179

로 생각한다는 뜻이고,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것은 늘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거예요. 실제로 모든 사유는 엄격한 법칙,
일반적인 확신 등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기반을 약화시켜요. 사유하다가 일어나는 모든 일은, 거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건 비판적으로 검토할 대상이 돼요. 즉, 사유 자체가 그토록 위험한 일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위험천만한사유란 존재하지 않아요. 이걸 어떻게 확신하느냐면………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사유가 위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나는 사유하지 않는 것이, ne pas réfléchir c‘est plus dangereuxencore(사유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할래요. - P180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해요. 오늘날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뒤에서 정말로 단결돼 있어요. 이 발언은 당시 일어난 사건들을 배경으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욤키푸르 전쟁이 촉발됐다원주. 유대인들은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처럼 자신들에게도 국가가 있다고,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대표하는 조직이 있다고 느껴요. 그들은 고국이 있고, 더불어 민족국가를 이루고 있어요. 아랍인들을 향한 그들전체의 태도는 당연히 이런 인식에 크게 의존해요. 중부 유럽출신의 유대인들은 거의 본능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이런 인식을, 즉 국가는 모름지기 민족국가여야만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요.
자, 이스라엘 또는 예전에 팔레스타인이었던 지역과 디아스포라의 관계는 전체적으로 변했어요. 예전에 폴란드는 시오니스트들이 폴란드의 가난한 유대인들을 위해 부유한 유대 - P183

인들에게서 돈을 얻으려고 애쓰던 곳이었는데 요즘 이스라엘은 더 이상 폴란드의 그런 약자를 위한 피난처가 아니니까요. 오늘날 이스라엘은 실제로 세계 전역에 있는 유대인을 대표하는, 유대인의 대리인이에요. 우리가 그걸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여부는 별개의 문제예요. 하지만……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디아스포라 유대교의 생각이 이스라엘 정부의 의견과 항상 일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건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예요. 그리고 국가가 존재하는한, 이 국가는 당연한 말이지만 세계인들의 눈앞에서 우리를 대표해요. - P184

"국적을 바꿀 수 있고 다른 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지식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통일체로서의한민족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아요"


에레라
10년 전, 프랑스 작가 조르주 프리드만Georges Friedmann,
1902~1977은 『유대 민족의 종말?Fin du peuple juif?』 (갈리마르,
1965)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미래에 한편에는신생국 이스라엘이 있을 것이고, 다른 편에는 디아스포라로살다가 거주하던 나라에 동화돼 차츰 고유한 특징을 잃어갈유대인들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아렌트
Cette hypothèse(이 가정은) 무척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내 생각에는 꽤나 틀렸어요. 고대에, 유대인의 국가가 여전히 존재 - P184

하는 동안에도 이미 엄청난 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있었어요. 많은 상이한 형태의 정부와 국가가 있었던 여러 세기를거치면서,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며 살아남은 유일한 고대 민족인 유대인은 결코 동화되지 않았어요……. 유대인이 동화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동화되고도 남았을 거예요. 스페인 지배기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고, 로마 지배기에도 그럴 기회가 있었어요. 18세기와 19세기에도 당연히 그럴 기회가 있었고요. 자, 민족은, 집단은 스스로 목숨을끊지는 않아요. 미스터 프리드만은 틀렸어요. 그는 지식인들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니까요. 국적을 바꿀 수 있고 다른문화를 흡수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통일체로서의 한 민족의 감정과 일치하지 않아요. 우리 모두가 알고있는 그런 법률들로 구성된 국가의 국민들 감정하고는 특히더일치하지 않아요. - P185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 - P190

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사람들에게서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브레히트에게서 이런 문장을 찾아냈어요. 
이 인용문은 작품집: 베를린과 프랑크푸르트 판본에 대한 견해 Werke: Große kommentierte Berliner und Frankfurter Ausgabe』(주어캄프, 1988, 24:315~19)에 실린 희곡 「아르투로 우이의 저지 가능한 출세Deraufhaltsame Aufstieg des Arturo Ui」에 단 브레히트의 주에서 가져왔다 원주.

 "거물정치범들은 사람들 앞에, 특히 폭소 앞에 노출시켜야 한다. 그들은 거물 정치범들이 아니라 거대한 정치적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로,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히틀러가 벌인 일들이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 P192

자, 히틀러가 멍청이라는 것은 물론 모든 사람이 가진-히틀러의 정권 장악 이전에 히틀러를 반대했던 모든 사람이 가진-편견이에요. 따라서 대단히 많은 책이 히틀러를 옹호하면서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려고 애썼어요. 그래서 브레히트는 이렇게 말했죠. "히틀러가 실패했다는 게 그가 멍청이였다는 것을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가 벌인 일의 규모가 그를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주지도 않았다." 즉, 멍청이도 위대한 인물도 아니란 얘기죠. 이 모든 범주의 위대함에는 마땅히 적용할 대상이 없어요. 브레히트는 말하죠. "조무래기 사기꾼이위대한 사기꾼이 되는 걸 지배계급이 허용한다면, 그는 우리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특권적 위치에 설자격이 없다. 즉, 그가 위대한 사기꾼이 됐다는 사실과 그가 한 일이 엄청난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이 그의 위상에 덧붙지는 않는다." 그(브 - P192

레히트)는 그러고는 다음과 같은 갑작스러운 말을 했어요. "비극은 인류가 겪는 고통을 희극이 그러는 것보다 덜 진지한 방식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건 물론 충격적인 발언이에요. 동시에 나는 전적으로 맞는말이라고 생각해요. 정말로 필요한 것은 당신이 이러한 상황에서도 진실성을 유지하고 싶다면―그러한 상황들을 살피던 오랜 방식들을 기억해내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거예요. 무슨 일을 하건, 설령 그가 1000만 명을 죽였더라도그는 여전히 어릿광대다.


"당시 내 폭소는 이를테면 순진무구한 폭소였고, 되새겨볼 것 없는 폭소였죠.
내가 목격한 것은 어릿광대였거든요"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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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고 맑은 공기가 그리워 우수(雨水)지난 공원으로 나섰다.

마른 나뭇잎이 봄꽃 같이 아름다운 나무위로 하늘이 무한하다.

파고드는 바람은 날카롭지만 봄은 머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덮어두고나온 진은영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 속 시가 가뜩이나 무거운 발목을 잡는다.







봄에 죽은 아이



막을 수 없는 일들과 막을 수 있는 일들

두 손에 나누어 쥔 유리구슬

어느 쪽이 조금 더 많은지

슬픔의 시험문제는 하느님만 맞히실까?



부드러운 작은 몸이 그렇게 굳어버렸다

어느 오후 미리 짜놓아 굳어버린

팔레트 위의 물감, 종이 울린 미술 시간

그릴 것은 정하지도 못했는데



초봄 작은 나뭇잎에 쌓이는

네 눈빛이 너무 무거울까 봐 눈을 감았다

좋아하던 소녀의

부드러운 윗입술이 아랫입술과 만나듯

너는 죽음과 만났다



다행이지, 어른에게 하루는 배고픈 개들

온종일의 나쁜 기억을 입에 물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그러니 개장수 하느님께 네가 좀 졸라다오

오늘 이 봄날

슬픔의 커다란 뼈를 던져 줄 개들을

빨리 아빠에게 보내달라고



세월이 어서 가고 너의 아빠도

말랑한 보랏빛 가지를 씹어 그걸 쉽게 삼키듯

죽음을 삼킬 테지만



그 전에, 봄의 잠시 벌어진 입속으로

프리지어 향기, 설탕에 파묻힌 이빨들은

사랑과 삶을 발음하고



오늘은 나도 그런 노래를 부르련다

비좁은 장소에 너무 오래 서 있던 한 사람을 위해

코끼리의 커다란 귀같이 제법 넓은 노래를

봄날에 죽은 착한 아이, 너를 위해







광교수원지의 물도 성급한 봄빛이다.

열흘째 앓고 있는 몸살은 봄을 맞는 통과의례처럼 이쯤에 다녀가는 단골이시다.

또 한번의 봄이 오고있다.

살아가겠지.

물론 그래야하고.







언제나



삶은 부사副詞와 같다고

언제나 낫에 묻은 봄풀의 부드러운 향기

언제나 어느 나라 왕자의 온화한 나무조각상에 남는 칼자국

언제나 피, 땀, 죽음

그 뒤에, 언제나 노래가

태양이 몽롱해질 정도로

언제나

너의 빛







시인의 말



˝불행이 건드리고 간 사람들 늘 혼자지.˝

헤르베르트의 시구를 자주 떠올렸다.

한 사람을 조금 덜 외롭게 해보려고 애쓰던 시간들이 흘러갔다.


2022년 8월

진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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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1933년 2월 27일에 일어난 독일의사당 화재당시 열세던 나치가 이사건을 계기로 독일공산당을 매도해 정권을 장악했다를, 그리고 뒤이어 밤중에 자행된 불법체포들을 이른바 보호감호protective custoly 들을 꼽겠어요. 당신이 알듯, 사람들이 게슈타포의 지하실이나집단 수용소로 끌려갔어요. 당시 자행된 일들은 도무지 말도안 되는 일이지만, 지금은 그 뒤에 일어난 사건들에 가려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죠. 그 사건에서 직접적인 충격을 받은 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책임감을 느꼈어요. 다시말해 나는 이런 판국에 단순히 방관자로서 세상을 살아갈 수있다는 생각을 더 이상은 하지 않게 됐어요. 나는 많은 방식으로 사람들을 도우려고 애썼어요. 그런데 내가 실제로 독일을 떠나게끔 만든 사건은… 그 사건을 말해야 옳은지 모르겠네요.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라 그 얘기는 해본 적이 없거든요. - P29

시오니스트 조직에서 나한테 기회를 줬어요. 나는 그 조직의주도적인 인사 몇 명과, 누구보다도 당시 회장이던 쿠르트 블루멘펠트Kurt Blumenfeld, 1884~1963하고 친한 사이였어요. 하지만 나는 시오니스트는 아니었어요. 시오니스트들도 나를 개종시키려고 하지 않았고요. 그렇기는 해도 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어요. 특히 비판에 의해, 시오니스트들이 유대인들 사이에 퍼뜨린 자기비판에 의해서요. 나는 거기서 강한 인상도 받고 영향도 받았어요. 하지만 나는정치적으로는 시오니즘하고 아무런 관련이 없었어요. 아무튼 1933년에 블루멘펠트하고, 당신은 모르는 누군가 나한테다가와서 말했어요. "우리는 일상적인 상황에서 언급되는 모든 반유대주의적 표현을 한데 수집하고 싶소." 예를 들어 클럽들에서, 모든 종류의 전문직 종사자들이 가입한 클럽들에서 언급되는 표현들, 모든 전문직 종사자 저널에 등장하는 표현들-요약하자면 외국에는 알려져 있지 않은 종류의 표현들을 말하는 거였죠.  - P30

가우스
미스 아렌트, 우리가 언급한 서신에서 당신은, 당신이 유대인들과 유대감을 느껴야 한다는 점을 늘 유념해야 옳다는 숄렘의 불필요한 경고를 분명하게 거부합니다. 당신이 쓴 글을 다시 인용하겠습니다. "제가 유대인이라는 것은 제인생에서의심할 나위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사실과 관련해서는 무엇도 절대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심지어 어렸을 때도 그랬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두어 가지 물었으면 합니다. 당신은 1906년에 하노버에서 엔지니어의 딸로 태어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자랐습니다. 전전戰前 독일에서 유대인 가정 출신이라는것이 어린아이에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기억하나요? - P32

그 문제는 어머니 입장에서는 아무 역할도 못했어요. 물론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죠. 어머니는 결코 내가 세례받게 내버려두지 않았을거예요!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부인했다는 걸 알았다면어머니는 내 따귀를 거세게 날린 다음 곧바로 그 자리를 떴을거예요. 그럴 정도로, 그런 일은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논의해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 질문이죠! 그런데 내가 어렸던 1920년대에 그 질문은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보다 당연히 훨씬 더 중요했어요. 내가 철이 들었을 때는 어머니 입장에서도 당신의 앞선 시절보다 훨씬 더 중요했고요. 하지만 그건 순전히 외적인 상황 때문에 그런 거였어요. - P35

아렌트
칸트를 읽었거든요. 왜 칸트를 읽었느냐고 물을지도 모르는데, 내 입장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왠지 이런 것 같아요.
내게 그건 철학을 공부하거나 물에 몸을 던지거나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였다고요. 그렇다고 내가 목숨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에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앞서말했듯 나한테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은 욕구가 있었어요…… 그 욕구가무척 어린 나이에도 있었어요. 우리 집 서재에는 온갖 책이 다 있었죠. 읽고 싶은 책을 책장에서 꺼내기만 하면 됐어요. - P37

맞아요. 그 책들은 그런 식으로 너무도 잘 맞아들었고, 그래서 내 입장에서 두 사람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들이었어요.
나는 유대인인 사람은 신학과 관련된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대해서만 몇 가지 의혹을 품고 있었어요……. 어떻게 논의를 진전시켜야 할지에 대해서요.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내가 가진 난해한 문제들은 이후에 스스로 해결됐어요.
그리스어는 사정이 달랐어요. 나는 그리스 시를 늘 사랑했어요. 시는 내 인생에서 커다란 역할을 수행해왔어요. 그래서추가로 그리스어를 선택했죠. 그리스 문학을 읽었기 때문에그건 대단히 쉬운 일이었어요! - P38

맞아요. 긍정적인 측면은 다음과 같아요. 당시 나는 내가 되풀이해서 표현했던 이런 문장을 깨달았어요.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라서 공격을 받았다면 그 사람은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옹호해야 한다. 독일인으로서가 아니라, 세계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인권의 지지자로서가 아니라, 그 외의 그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그런데 내가 유대인으로서 구체적으로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하나 더, 이제는 조직과 함께 일하겠다는 의향이 명확해졌어요. 난생처음으로요. 시오니스트들과함께 일하겠다는 의향을 가진 거죠. 그들은 준비가 돼 있는유일한 사람들이었어요. 나치에 동화한 사람들에게 합류하는것은 무의미한 일이었어요. 게다가 나는 그들하고는 정말로 - P46

아무 관계도 없었어요. 심지어 나는 그 시점이 되기 직전까지도 유대인 문제를 얘기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1771~1833.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유명한 살롱을 주재했던 독일 여성 작가에 관한 책은 내가 독일을 떠날 때 완성된 상태였어요.그러나 책 뒤쪽의 두 챕터는 1933년과 1936년 사이에 프랑스에서 집필됐다. ‘라헬 파른하겐Rahel Varnhagen: The Life of a Jewish Woman」 개정판, 하코트 브레이스 조바노비치, 1974 xiii-원주, 그 책에서 유대인 문제는 나름의역할을 수행해요. 나는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 책을썼어요. 나는 유대인으로서 내 개인적인 문제들을 논하고 있었던 게 아니에요. 하지만 유대교에 속한 것은 내 나름의 문제였고, 내 자신의 문제는 정치적 문제였어요. 순수하게 정치적인 문제요! 현실적인 연구에, 전적으로 유대인과 관련된 연구에 종사하고 싶었어요. 이런 생각을 품은 채로 프랑스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어요. - P47

영어로 써요. 그런데 영어에 대한 거리감이 결코 없어지지를않네요. 모어와 다른 언어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그 문제를 정말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독일어의경우 나는 상당히 많은 독일 시를 암송할 수 있어요. 시들은내 마음속 뒷자리에 늘 자리 잡고 있어요. 나는 그런 식의 암기를 다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영어로 하면 스스로 용납되지 않을 일들을 독일어로 해요. 다시 말해, 내가 대담해진 까닭에 때때로 영어로도 그런 일들을 하지만, 대체로 나는 영어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왔어요. 독일어는 나한테 남아 있는 본질적인 요소고, 내가 항상 의식적으로 지켜온 언어예요. - P49

항상 그랬죠.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내가 할 일이 뭘까? 미치광이가 돼버린 것은 독일이지 독일어가 아니었죠. 둘째, 모어를 대신할 언어는 없어요. 사람이 자신의 모어를 망각할 수는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그러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봤어요. 새로 습득한 언어를 나보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들이있어요. 나는 여전히 독일어 억양이 심한 영어를 구사하고,
관용적인 어법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경우도 잦은데요. 그런사람들은 내 그른 점들을 모두 올바르게 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클리셰라 할 표현들이 꼬리를 물고 등장해요. 모어를 망각하면 모어를 써서 달성하던 언어적 생산성을 더 이상은 달성하지 못하니까요. - P49

우리는 어느 시점이 되면 정치적으로 만사에 대한 보상책이 만들어지는 것처럼 다른 만사에대한 보상책도 그럭저럭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 사건의 경우는 아니었어요. 이건 절대로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에요. 단순히 희생자의 규모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런 짓을 자행한 방법, 시신 훼손 등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그와 관련해서 자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이건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에요. 거기서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어요.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그걸용납할 수 없었어요. 당시 일어난 그 밖의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라면, 그 시절이 때때로 꽤나 힘들었다고 말해야겠네요.
우리는 대단히 가난했고, 추적의 대상이었고, 도망다녀야 했고, 어떻게든 상황을 헤쳐 나가야 했어요. 그 시절은 그랬어요. 그래도 우리는 젊었어요. 심지어 나는 그런 상황에서 약간은 재미를 느끼기도 했어요―그 점을 부인하지는 못하겠네요. 하지만 이 사건은 달랐어요. 이 사건은 차원이 완전히달랐어요. 개인적으로 나는 그것 말고 다른 것들은 모두 감내할 수 있었어요. - P51

트물론이죠. 그런데 누군가 진정한 나치로 변해 그에 관한 글을썼을 때, 그 사람이 나한테 개인적으로 충실할 필요는 없었어요. 나는 어쨌건 그 사람과는 다시는 말을 섞지 않았어요. 그는 더 이상 나를 접촉해야 할 까닭이 없었고요. 내 생각에 그는 이미 존재하기를 멈춘 사람이었으니까요. 그건 상당히 명확한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같이 살인자는 아니었어요. 내가 요즘 얘기하고는 하는 것처럼, 그들은 자기가파놓은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었죠. 그들이 나중의 보상을 바랐던 것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우슈비츠라는 심연에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기반이 마련돼야 마땅하다고 봐요. 그건 많은 개인적인 인간관계에도 마찬가지죠. 나는 사람들하고 논쟁을 벌였어요. 나는 딱히 기분 좋은 논쟁상대도아니고 무척 공손한 사람도 아니에요. 나는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는 편이에요. 어쨌건 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다시 - P52

제대로 전달됐어요. 앞서 말했듯이 이 사람들 모두는 두어 달동안, 심한 경우 2년 동안 나치즘에 헌신했던 사람들일 뿐이에요. 그들은 살인자도 아니고 밀고자도 아니었어요. 말했다시피 히틀러에 대한 신념을 ‘날조‘ 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런데독일에 돌아오면 하는 가장 일반적이면서 강렬한 경험이그리스비극에서 항상 행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대중의 인정recognition을 받는 경험을 제외하면-감정을 격해지게 만들었어요. 길거리에서 독일어를 듣는 경험이 그랬죠. 내게 그건뭐라 형언할 길 없는 기쁨이었어요. - P53

아렌트
무엇보다도 먼저, 당신 기분을 상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없지만, 당신 자신이 이 캠페인의 희생자가 돼버렸다는 말을해야겠네요. 나는 내 책 어느 곳에서도 유대인들이 조금도저항하지 않았다고 책망하지 않았어요. 아이히만 재판 때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기는 했죠. 이스라엘 검찰청의 미스터 하우스너 Gideon Hausner, 1915~1990가요. 나는 예루살렘의 증인들을 겨냥한 그런 질문들은 어리석은 데다 잔인한 언사라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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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었기 때문에 나도 그걸 잘 압니다. 그런데 당신에게제기된 일부 비판은 책의 많은 페이지에 걸친 어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 P55

나는 큰 소리로 폭소를 터뜨렸어요!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기분 나쁘게 받아들였어요. 나는 그에 대해서는 도무지 어쩔도리가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나는 숨이 끊어지기 3분 전에도 여전히 낄낄거릴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내어조가 그런 식이라고 말해요. 그 어조가 대부분 비아냥거리는 투라는 건 전적으로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이때 내 어조는 정말로 개인적인 특징이에요. 유대인을 비난했다면서 사람들이 나를 책망한다면 그건 악의에 찬 거짓말이자 프로파간다지 다른 게 아니에요. 아무래도 어조에 대한 비난은 나를사적으로 반대하는 거예요.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일도할 수가 없어요. - P56

두렵지 않아요. 나는 정치적으로 무익한 것은 그런 태도가아니라 다른 태도라고 말할 거예요. 우선, 사람이 어떤 집단에 속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황이에요.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 여러 종류의 집단에 속하게 돼요. 늘 그렇죠. 그런데 당신이 말한 방식으로 집단에 속하는 것은, 내가 말한 소속하고는다른 방식으로 조직된 집단에 가입하거나 그런 집단을 결성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에요. 이런 종류의 조직은 세계와관계를 맺게 돼 있어요. 조직화된 사람들은 대개가 이해관계라고 부르는 것을 공통으로 가져요.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인간관계는 물론 최우선으로는 진짜 사랑에 존재하고, 어떤 의미의 우정에도 존재해요. 그런 관계에서사람은 그가 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하고는 무관하게 직접적으로 호명돼요. 따라서 매우 다양한 개인으로 구성된 조직에개인들이 속하면 여전히 개인적으로 친구가 될 수 있어요.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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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세계world‘라는 단어를 정치를 위한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아렌트
맞아요. 세계는 정치를 위한 공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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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대 민족은 비정치적인 민족이었나요?


아렌트
정확하게 그런 식으로 얘기해서는 안 돼요. 공동체는 당연히어느 정도는 정치적이니까요. 유대교는 민족종교 national religion예요. 그런데 정치적이라는 개념은 상당히 많은 유보 조건을붙일 때에만 타당해요. 유대인들이 세계 곳곳으로 흩어져 고통을 받았던 이 무세계성 worldlessness은, 그리고ㅡ사회에서 버림받은 모든 이들과 함께 집단에 소속된 이들 사이에서 특별한 온기를 창출해낸 이 무세계성은 이스라엘state of Israel이 건국됐을 때 바뀌었어요. - P59

맞아요. 사람은 자유에 대한 대가를 비싸게 치러요. 그들고유의 무세계성에 의해 드러난 유대인의 인간성은 대단히 아름다웠어요. 당신은 너무 젊어서 그걸 경험하지 못했겠지만요. 그건 대단히 아름다웠어요. 내가 완벽하게 열린 마음과편견 없는 태도로 맞았고 특히 모든 유대인 공동체에서 벗어나 자유를 행사하던 어머니와 함께 누렸던, 사회적인 모든 관계의 외부에 서 있던 경험은 말이에요. 물론 그 모든 일이 지나가면서 많은 것이 상실됐어요. 사람은 해방에 대한 대가를치러요. 나는 언젠가 레싱상Lessing Prize 수상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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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함부르크에서죠…… 함부르크 자유도시가 수여하는 레싱상을수상하면서 아렌트가 한 연설은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Men in Dark Times (하코트 브레이스 앤 월드, 1968)에 어두운 시대의 인간성: 레싱에 대한 생각들On Humanity inDark Times: Thoughts about Lessing」로 실렸다―원주.


아렌트
맞아요. 거기서 나는 "이 인간성은…… 해방의 시간을, 자유의 시간을 결코 단 1분도 살아남지 못했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당신도 보듯, 그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났어요. - P60

그건 굉장히 어려운 문제예요. 그 밑바탕에는 아이히만 책을둘러싼 전체 논란에서 내 흥미를 끌었던 한 가지 의문이 있어요. 이 의문은 내가 거론하지 않았다면 절대 제기되지 않았을 의문이에요. 그것이야말로 유일하게 진지한 의문이고,
그 밖의 모든 건 순전히 프로파간다에서 제기된 거예요. 무엇인가 하면 fiat veritas, et pereat mundus (세계가 멸망한다 해도진리가 말해지도록 하라) 예요. 아렌트는 오래된 라틴어 격언 Fiat justitia, etpereat mundus(세계가 멸망한다 해도 정의가 시행되도록 하라)로 말장난을 하고 있다. 과거와 미래 사이Between Past and Future』 (바이킹 프레스, 1968) 228쪽을 참조하YAP라-원주. 그런데 아이히만 책은 사실상 그런 문제들을 다루지 - P62

못했어요. 그 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정당한legitinate 이해관계를 위태롭게 만들지 않아요. 사람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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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무엇이 정당한가?‘라는 의문을 논의의 대상으로 남겼습니다.


아렌트
맞는 말이에요. 당신이 옳아요. 무엇이 정당한가 하는 의문은여전히 논의의 대상으로 열려 있어요. 내가 ‘정당함‘이라는말로 뜻하려던 바는 유대인 단체들이 뜻하는 바하고는 다른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의 이해관계가, 내가 인정하는 이해관계가 위태로웠다고 가정해봐요. - P62

맞아요. 역사과학은 실패했어요. 국가에 의해 통제되고 있죠.
어떤 사학자가 제1차 세계대전의 기원을 다룬 책에 관해 한논평을 들은 적이 있어요. "나는 이 책이 그토록 희망 넘쳤던시대에 관한 기억을 훼손하게끔 놔두지 않겠다."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건 흥미롭지않아요. 사실상 그는 역사적 진리의, 사실적 진리의 수호자예요. 그리고 우리는, 예를 들어 역사책이 5년에 한 번씩 다시집필되고 예컨대 트로츠키는 존재했었는가와 관련된 사실들이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볼셰비키의 역사책을 통해 이런수호자들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요. 바로 이게 우리가 원하는 걸까요? 바로 그게 정부들이 관심을 갖는 걸까요? - P63

개인적 경험 없이 가능한 사유 과정이 존재한다고는 믿지 않아요. 모든 사유는 뒤늦은 사유afterthought 예요. 즉, 어떤 문제나 사건을 사후에 숙고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나는 현대 세계에 살고, 내 경험은 분명히 현대 세계 내부에서 현대세계를 겪어서 얻은 거예요. 결국 이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없어요. 그리고 단순노동과 소비의 문제는 정말로 중요해요.
그 영역에서도 일종의 무세계성이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이유에서요. 더 이상은 어느 누구도 세계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아요. - P66

아렌트
생물학적으로 의지하고,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죠. 그리고 그영역에서 우리는 고독과 관련을 맺게 돼요. 노동하는 과정 중에 독특한 고독이 생겨나요. 지금 당장은 그에 관해 상세히설명하지 못하겠네요. 그러다가는 논의가 지나치게 멀리 나가게 될테니까요. 아무튼 이 고독의 특징은 자기 자신에게의지하는 상태가 된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진정으로 상호 관련된 여러 활동을 소비 행위가 대신하는 그런 상황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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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맥락에서 두 번째 질문을 하겠습니다. 당신은 『인간의조건』에서 "진정으로 세계 지향적인 경험들truly world-orientedexperiences"당신이 뜻하는 바는 가장 드높은 정치적 의의에대한 통찰과 경험이죠―은 "평균적인 인간 삶이라는 경험의지평에서 더욱더 뒤쪽으로 침잠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 - P67

다. 당신은 오늘날 행위하는 능력은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국한돼 있다"라고 말합니다. 현실정치의 관점에서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언가요, 미스 아렌트? 모든 시민의 협조적 책임에기반을 둔 정부 형태는 이런 상황에서, 최소한 이론적으로,
어느 정도나 허구가 되는 건가요?


아렌트
그에 대해 약간 단서를 달고 싶어요. 자, 현실적인 목표를 지향하지 못하는 이 무능력은 대중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회계층에 적용돼요. 정치인조차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어요. 정치인은 전문가 집단에 포위돼 있어요. 따라서 이제 행위와 관련한 문제는 정치인과 전문가 사이에 놓여 있어요. 정치인은 최종 결정을 내려야 해요. 정치인 혼자서 세상만사를 알 수는없는 노릇이니 그런 결정을 현실적으로 내리기가 쉽지 않아요. 그래서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어야만 하죠. 원칙적으로 보면 항상 서로 의견이 모순되게 마련인 전문가들의 조언을요. - P68

으음, 야스퍼스가 나서서 의견을 내놓으면 그 주제와 관련한분야 전체가 너무도 환하게 밝아져요. 그는 믿음직스럽고 이
‘런저런 토가 달리지 않는 의견을 주저 없이 개진하는데,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가 무척 어렸을 때도 그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게다가 그는 내가 하이델베르크에 왔을 때는 전혀 몰랐던, 이성에 관한 자유의 개념을 갖고 있어요. 나는 칸트를 읽었으면서도 이성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말하자면 나는 작동하는 이성을 본 거예요. 이렇게 말해도 좋을지 모르겠는데, 바로 그 이성이 아버지 없이 자란 나를 교육했어요. 내가 이렇게 된 것을 그의 책임으로 돌리고 싶은 생각은 정말로 없지만, 나한테어떤 감각을 주입하는 데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그예요.
그리고 이 대화는,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에는 의미가 사뭇달라요. 그게 정말로 내가 전후에 한 가장 강렬한 체험이었어요. - P70

내게 공공 영역으로 향하는 모험은 명확한 것 같아요. 한 사람이 일개인으로서 대중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 거죠. 사람이자의식에 사로잡혀 공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행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사람은 그가 보여주는 모든 행위를 통해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아요. 말하기도 행위의 한 형태예요. 그게 하나의 모험이죠. 다른 모험으로는, 우리가 무슨 일인가를 시작하는 게 있어요. 우리는 인간관계의 네트워크에 우리 자신이라는 가닥을 엮어 넣어요.
어떤 결과가 나올지 우린 결코 몰라요. 우리 모두는 이런 말을 하라고 배웠어요.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이건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들어맞는 말이에요. 무척이나 간단하고 명확한 말이죠.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모험이 뜻하는 바가 그거예요. 요즘에 나는 이 모험은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고 말하곤 해요. 모든 사람이 가진 인간적인 것에 대한 신뢰만들어내기는 힘들지만꼭 필요한 신뢰말이에요. 그게 없다면 그런 모험은 행해질수 없을 거예요. - P71

그 질문은 사실은 두 가지 질문이군요.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을 먼저 해야겠네요. 내가 보기에 아이히만 재판은 실제로 독일에서 열린 재판들의 촉매 역할을 했어요. 이 재판들 중 일부는 그보다 먼저 열렸고 일부 체포도 그보다 일찍 이뤄졌지만요. 하지만 통계적 관점에서 이 상황을 보고 아이히만 재판이 열린 날짜가 아니라 아이히만을 납치한 날짜를 명심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상황은 당신을 압도할 거예요. 순전히 통계적 관점에서요.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이 자리에서 말하고싶지 않아요. 그건 명백한 팩트니까요.
지금 당신이 한 말은, 그러니까 유대인과 독일인이 정복되지않은 과거에 관한 문제를 공통으로 갖고 있다고 한 말은 맞는말이에요. 거기에 약간의 단서를 달고 싶어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들이 공통으로 보유한, 실제로 존재하는 정복되지 않은과거에 대한 얘기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피해자의 사례와가해자의 사례에서 대단히 달라요.  - P74

심지어 유덴라트Judenräte.
나치가 점령지의 대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통제하려고 유대인들에게 결성하라고 강요한 단체들도, 당연한 말이지만 피해자예요. 그들이 100퍼센트무죄라는 뜻은 아니에요. 하지만 그들은 가해자의 반대편에서 있었던 게 분명해요. 그건 대단히 명백해요.
이제 정복되지 않은 과거는, 적어도 유럽과 미국에서 보기에,
유대인과 독일인이 지구 상의 거의 모든 나라나 민족과 공유하는 것이기도 해요. 나는 미국의 사례를 통해 이걸 알게 됐어요. 나치의 행각이 유발한 바로 그 공포는 유대인과 독일인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인류에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유대인과 - P74

독일인의 공통점은 그 사건에 직접 연루된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이 반응은 독일과 이스라엘에서 동일한가요?" 하고 물었죠? 자, 이스라엘 인구의 4분의 1이, 즉 25퍼센트가 그 사건에 직접 관련된 사람들이에요. 전체 인구에서 엄청난 비율을 차지하죠. 피해자인 그들이, 그 사건에 관해서그저 아무것도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세대를 불문한 평균적인 독일인들과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은 명백해요. 그런데 피해자들 역시도 그 사건에 관해 듣는 것을 원치 않아요. 이유는 완전히 딴판이지만요. - P75

요즘 내가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바로 이스라엘 젊은 세대의 태도 그리고 그 나라에서 태어난 세대의 태도예요. 이스라엘에서도 그 사건에 관심이 없는데, 이런 현상은 독일에서 관심이 없어진 것과 몇 가지 점에서 비슷해요. 이스라엘의 젊은세대들도 느껴요. ‘그건 우리 부모님들 문제야……. 지금이야 물론 다르죠. ‘우리 부모님이 이런 일 저런 일이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그래, 좋아! 그러시라고 해! 하지만 제발 우리는 그 문제에서 벗어나게 해줘.…… 우리는 그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거든.‘ 이게 정말로 일반적인 정서더군요. 결국이건 독일에서처럼 세대 간의 문제예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 P75

그게 정말로 새로운 유형의 범죄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단서를 달고 싶어요. 우리는 어떤 범죄자를 떠올릴 때 범행 동기가 있는 사람을 상상해요. 그런데 아이히만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아무 범행 동기가 없었어요. 우리가 일상적으로 범행동기라고 이해할 만한 게 없었다는 거죠. 그는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를 원했어요. 그는 ‘우리we‘라고 말하고 싶어했는데, ‘나머지 사람들에게 동조하기‘와 ‘우리라고 말하고싶어 하기‘만으로도 역사상 가장 극악한 범죄가 자행되게 만들기에 충분했죠. 사실 히틀러 지지자들은 결국 이런 종류의상황에 전형적인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은 타인의지가 없다면 무력해질 거예요. - P76

그렇다면 여기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나는 아이히만에게만 집중하고 싶어요. 그를 잘 아니까요. 내가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남들에게 동조하는 것ㅡ많은 사람이 함께 행동하는 데 끼고 싶어 하는 것이 권력power을 낳는다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당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여부와는 상관없이 늘 무력해요. 함께 행동하는 데서 유발되는 이런 권력의 느낌은 그 자체로는 절대로 그릇된 게 아니에요. 그건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이에요. 그렇다고 선한 - P76

감정도 아니에요. 그냥 중립적인 감정이에요. 그건 단순히 하나의 현상이라고 기술할 필요가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현상이에요. 그런 식으로 행동하면 극도의 쾌감이 느껴지죠. 여기서 이런저런 근거를 한없이 인용하지는 않겠어요. 미국독립혁명American Revolution 사례를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몇 시간을보낼 수 있어요. 기능하기 functioning는 정말로 변태적인 행위양식이고, 이런 기능하기에는 항상 쾌감이 따른다는 말을 하고 싶네요. 그렇지만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남들과 함께 행동하기, 즉 함께 상황을 논의하기, 어떤 의사 결정에 도달하기, - P77

책임을 받아들이기,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해 사유하기 등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기능하기에서는 제거돼요. 당신이 거기서얻는 것은 그저 관성대로 굴러가는 것freewheeling일 뿐이죠. 이런 단순한 기능에서 얻는 쾌감이, 이런 쾌감이 아이히만에게서 꽤나 눈에 잘 띄었어요. 그가 권력에서 특별한 쾌감을 얻었느냐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전형적인공무원이에요. 그런데 공무원은 공무원 이상도 이하도 아닌존재일 때 정말이지 대단히 위험한 신사 gentleman예요. 여기에서 이데올로기는 그다지 큰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고 봐요. 내 눈에는 이게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여요. - P77

내가 보기에 히틀러를 악마화하는 것은 연합국들 내에서보다는 독일인 망명자를 포함한 독일인들 사이에서 훨씬 더 보편적인 일이에요. 사실 연합국들은 진실이 세상에 드러났을때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이루 헤아리지못할 정도로경악했어요. 이게 독일에서는 참담할 정도로 과소평가되고있어요. 그런 상황을 알게 됐을 때, 평범한 군인이 베르겐벨젠Bergen-Belsen 수용소를 봤을 때,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사건에서, 그들은 존재의 핵심이 흔들릴 정도로 크나큰 충격을 받 - P78

았어요…………. 나는 무수히 많은 대화를 통해 그 모습을 봐왔어요. 나는 해외에서 살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으음, 악마화 자체는 당신이 올바르게 말했듯이 알리바이를제공해줄 수 있어요. "당신들은 악마의 화신에게 무릎을 꿇었기에 죄가 없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봐요. 우리의 총체적인 신화는, 또는 우리의 총체적인 전통은 악마를 타락 천사로 봐요. 타락 천사는 당연히 늘 천사로 남아 있는 천사보다 훨씬 더 흥미로워요. 후자는 우리에게 좋은 이야깃거리를제공하지 않으니까요. 달리 말해 악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특히, 그 자체만으로도 진정한 깊이가 있는 존재라는것을 보장하는 역할을 수행했어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 P79

철학에서도 동일한 상황을 보게 돼요. ‘부정the negative 이야말로 역사를 추동하는 유일한 존재다‘와 같은 상황을요. 우리는이 아이디어를 대단히 멀리까지 논의해나갈 수 있어요. 결과적으로, 우리가 누군가를 악마로 묘사한다면 우린 스스로를흥미로운 존재로 보이게끔 만들 뿐 아니라, 남들은 갖지 못한깊이를 우리 자신에게 몰래 부여할 수 있어요. 그러지 못하는이들은 지나치게 얄팍한 사람들이라서 가스실에서 누군가의목숨을 빼앗지 못해요. 지금 나는 일부러 이런 예를 말하고있는 것이지만, 결국에는 그게 현실이 되었죠. 어쨌든 악마적인 아우라aura를 자기 자신에게 조금도 부여하지 않은 사람이존재했다면, 그건 바로 헤어herr 아이히만이었어요. - P79

맞아요. 사실이에요. 그리고 불행히도 그건 대단히 흔한 일이죠. 우리는 우리가 무슨 일을 하길 즐기느냐 그렇지 않으냐여부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악은항상 유혹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반면 선은 우리가 자발적으로는 절대 하려고 들지 않는 일이라고들 생각하죠. 무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건 터무니없는 헛소리라고 생각해요. 브레히트는 선한 일을 하려는 유혹은 우리가 늘 이겨내야 하는 무엇이라는 점을 항상 보여주고 있어요. 정치이론 분야로 돌아가 보면, 마키아벨리에게서 똑같은 것을 읽을 수 있고 심지어는 칸트에게서도 비슷한 맥락을 읽어낼 수 있어요.
따라서 아이히만과 다른 많은 이들은 우리가 선행이라고 부르는 일을 하려는 유혹을 대단히 자주 받았어요. 그런데 그들은 그런 유혹을 제대로 이겨냈어요. 그건 유혹이었으니까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 P81

페스트
맞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화적 관점, 종교적이고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악을 상상하고 표현해온 방식에는 아이히만 같은 유형을 위한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이미 지적했습니다. 당신의 저작에 담긴 주된 아이디어중 하나가 부제에 이미 드러난"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evil"인데, 이 표현은 많은 오해로 이어졌어요.


아렌트
맞아요. 실제로 이런 오해들이 전체 논쟁에 가득한데, 그건참다운 논쟁의 하찮은 일부에 속할 뿐이에요. 달리 말해 이런오해들은 상황이 어쨌건 생겨났을 거라는 게 내 입장이에요.
그 표현은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는데, 나는 그 이유를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요. 나 자신도 거기에서 큰 충격을받았으니까요. 내 입장에서도 그건 감당할 준비가 전혀 안 된개념이었어요. - P82

자, 오해 중 하나는 이거예요. 사람들은 평범한 것은 아주 흔하다고도 생각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내가 말하려던 바는 그게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반대예요! 나는 내가 누군가를 꾸짖으면 그들이 내가 들어본적도 없는, 그래서 전혀 흔하지 않은 말을 하는 모습을 완벽하게 상상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나는 "너무 평범해banal. ‘진부하다‘라는 뜻도 있다" 하고 말해요. 아니면 "별로 안 좋아" 하고 말하거나요. 그게 내가 말하려던 뜻이에요. - P82

평범성 banality은 정말로 간과할 수 없는 현상이었어요. 그 현상은 우리가 듣고 또 들었던, 솔직하게 말해서 믿기 힘든 클리셰와 표현 방식들에서 저절로 모습을 드러냈어요. 평범성으로 뜻하려던 바를 설명해줄 이야기를 해드리죠. 예루살렘에서 나는 에른스트 윙거 Ernst Jünger, 1895~1998가 언젠가 들려주었지만 한동안 잊고 있던 이야기를 떠올렸어요.
전쟁 중에 에른스트 윙거는 포메라니아독일과 폴란드 북부에 위치한 지역 아니면 메클렌부르크독일 북동부에 있는, 발트 해에 면한 지역에서—아니, 포메라니아였다고 생각해요―소작농 몇 명을 우연히 만났어요.(이 이야기는 방사放射Strahlungen』에 나와요. 방사』는 에른스트 윙거가 제2차 세계대전 때 쓴 일기를 모은 책으로 1949년에 처음 출판됐다 원주.)  - P84

그런데 그 소작농 중 한 명은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을 포로수용소로부터 넘겨받아 자기 집에 거둔 사람이었어요. 당연히 그 포로들은 쫄쫄 굶고 있었죠. 러시아인 전쟁 포로들이 이 나라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는 당신도 알 거예요. 소작농은 윙거에게 말했어요. "글쎄, 그놈들은 인간 이하입니다. 소하고 다를 바가 없단 말이오! 그건 쉽게 알 수 있어요. 그놈들은 돼지 먹이를 먹어치우니까요." 윙거는 이 이야기에 이런 코멘트를 했어요. "독일인들은 때때로 악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표현은 뭔가 ‘악마적‘인것을 뜻한 게 아니었어요. 봐요, 이 이야기에는 뭔가 터무니없이 멍청한 게 있어요. 멍청한 이야기라는 말이에요. 그 소작농은 굶주린 사람은 누구나 그런 짓을 하리라는 걸 알지 못해요. 그 입장에서는 누구라도 그런 식으로 행동할 텐데요. - P84

이 멍청함에는 정말로 터무니없는 게 있어요. ...... 아이히만은 완벽하게 지적이었지만 이 측면에서는 멍청했어요. 너무도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이었어요. 내가 평범성이라는 말로 뜻하려던 게 바로 그거예요. 그 사람들 행동에 심오한 의미는 하나도 없어요. 악마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고요! 남들이무슨 일을 겪는지 상상하길 꺼리는 단순한 심리만 있을 뿐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인간 각자는 입법자예요. 칸트철학에서는어느 누구도 순종할 권리를 갖지 않아요" - P85

또한 아이히만은 ‘노예 같은 순종‘에 대해 말했어요. 예루살렘에서 그는 끔찍하리만치 혼란스러운 심리태를 보이면서 갑자기 그 모든 게 노예처럼 복종하는 문제였을 뿐이라고, 거기에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등의 말을했어요. 맞죠? 그래서 사람들 마음속에서는 그런 생각이 영원토록 꼬리를 물고 맴돌고 있어요. ‘맹세‘에 대한 언급, 사람들에게서 책임을 앗아 갔다는 생각 등등…. 이것들은 아이히만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나는 뉘른베르크 재판 기록에서도 그걸 발견했어요. 거기에도 뭔가 터무니없이멍청한 게 있어요. 봐요, 아이히만은ㅡ남들이 그랬던 것처럼분노에서 비롯한 이런 공격적인 행위들을 저질렀어요. 그러면서 말했죠. "그들은 우리가 책임질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온갖 책임을 다 뒤집어쓴 채남겨졌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물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은ㅡ늘 그렇듯ㅡ책임을 모면했습니다"라고요.  - P88

잘 알려졌듯 아이히만은 "뉘우침과 한탄은 꼬맹이들을 위한것"이라고 말했어요. 뉘우침과 한탄을 표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요. 반면에 우리는, 어느 누구도 뉘우치고 한탄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행위를 옹호하면서 "그래요, 사실 우리는 그 짓을 이런저런 이유에서 했고 내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승패 여부는 그런 일을 한 원인 자체에는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습니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최소한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봐야 해요.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그런 사례는 젖은 행주처럼 무너져버렸어요. 어느 누구도 자신이 한 짓을 옹호하지 않았죠. 자신을 방어할 논리를 아무도 내세우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점은 당신이 방금 간단히 언급한 현상-순종에 꽤나 중요한 듯이 보여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달리 말하면 그들은 그냥 남들에게 동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 P90

그러니까 사람들을 재판에 회부할 때 우리는 그들에게 그 일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요. 법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한테는 그럴 권리가 있어요……. 우리한테는 권리가 있어요. 그들이 명령에 따르는 대신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순교는 아니었으니까요. 대안은 양쪽 모두에게 있었어요. 그들은굳이 동조할 것 없이 스스로 결심할 수 있었어요. "고맙습니다만.…… 당신들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목숨을거는 짓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려고애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모면할 수 있는지 알아보려고애쓰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나는 어느 누구하고도 뜻을 같이하지 않습니다. 내가 억지로 동의해야만 하는 처지가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겁니다." 이럴 수도 있었다고요. ‘우리we‘가 아니라 ‘나‘라고 말하는 것-스스로 판단하는 것ㅡ을 뜻하는 거예요.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대중의 모든 층위에 속한 사람들이, 세상 모든 곳에서 했던 일이에요.  - P93

그것이 대단히 많은 사람을 몰아붙인 충동이에요. 방조자가 되는 것과 관련해서 야스퍼스가 중요한 말을 했다고 생각해요. 그는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것은 죄"라고 말했어요.카를 야스퍼스, 독일 국민의 죄의 문제Questions of German Guilt』 2판, 포드햄대학교 출판부, 2000, 66쪽ㅡ원주. 맞죠? "우리는 입을 굳게 다물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이 알듯, 목숨을 부지할 줄 아는 것과 그 실행 사이에는 거대한 심연이 있어요. 알고서도 외면하고 떠난 사람과 실행에 옮긴 사람 사이에는요. ... 따라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이, 구경만 하고 자리를 뜬 사람이 "우리는 모두 유죄" 하고 말한다면 그건 실제로 철저히 실행한 사람들을 감싸는 게 돼요. 바로 이게 독일에서 일어났던 일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이런 죄책감을 일반화해서는 안 돼요. 그건 진짜 죄인들을 감싸는 짓일 뿐이니까요. 어쨌든, 괜찮다면 이 문제에 대해 약간 더 말하고 싶어요.


"상황이 전체주의적이라는 것이 우리가반드시 범죄자가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아요" - P96

다음 명제가 우리에게 그 이유를 제공하죠. "자기 자신과 불일치disunity 하는 것보다는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편이낫다. 나는 통일체unity 니까." 내가 나자신과 통일돼 있지 않다면 감당할 수 없는 갈등이 일어나요. 이를테면 그건 도덕영역에 모순이 있다는 생각인데, 칸트의 정언명령에서 보아도 여전히 타당한 얘기예요. 이 생각의 전제라면 실제 현실에서 내가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인데, 이를테면 나 자신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나는 이러저러한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에요. 그런 짓을 저지른 누군가와 같이 살길원치 않으니까요. 내가 이러저러한 짓을 저질렀다면 나한테남은 유일한 길은 자살이 될 거예요. 아니면 시간이 흘러 기독교적 방식으로 생각하면서 내 행동 양식들을 바꾸고 회개를 해야겠죠. - P98

자존심을 유지한다는 것은 물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말을 건다는 건 기본적으로 사유를 하는 거예요. 전문적인 사유가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사유를 말하는 거예요. 따라서 이런 생각의 뒤편에 있는 추정은 ‘나는 나 자신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세계와 굉장히 심하게 분열해서 나 자신과-어쩌면 친구와, 그리고 다른 자아와 대화하는 데 의지하는 것 말고는 어쩔 도리가 없는 상황들이 있을 수 있어요. 아리스토텔레스가 근사하게 말한 "자기 안의 타인autos allos"처럼 말이에요. 내가 보기에이것은 무력한 상황이 실제로 어떠할지 보여줘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냥 뚜벅뚜벅 갈 길을 간 사람들은 자신이 무력하지만 이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무력한 누군가도 여전히 사유는 할 수 있다는 명제를 고수한다는 것을 인정한 사람들이죠.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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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대담은 아렌트 사상 전반에 대한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이때는 그녀를 유명한 혹은 논란이 많은 학자의 대열로 올려놓았던 『전체주의의 기원』 (1951) 이 이미 출간되고 수정판까지 나왔던 때고, 또한그녀의 가장 중요한 저술로 꼽을 수 있는 『인간의 조건』(1958)도 이미출간되어 있었다. 그 외에도 『혁명론』(1963)이 이미 출간되었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갓 나왔던 시점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책으로 출간되기 전인 1963년 2월부터 <뉴요커>라는 잡지에 다섯 차례로나누어 게재되었고, 이에 대해 게르숍 숄렘과의 공개 서신 교환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서신 교환에서 숄렘은 "네가 과연 유대인의 딸이냐?"라는 투의 공격을 했고, 아렌트는 "사랑이란 개인 간에 이루어지는 것이지국가에 대한 사랑, 민족에 대한 사랑 따위는 무의미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하고 말하면서 양자 간의 긴장의 수위가 아주 높았던 터라서 여기에 대한 질문과 아렌트의 대답이 대담 속에 담겨 있다. - P9

아렌트 정치사상의 정돈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조건』에서다. 그녀의 최초의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도 일관된 정치관이 드러나지만,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표명되는 것은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이 시기 그녀 사상의 성숙 과정을 잘 보여주는 것은 『정치의 약속』(2005)에 담긴 글들이다. 이 책은 아렌트 사후에 나온 일련의 유고집 가운데 하나로 1950년대의 숙고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정치의 약속』에 나오는 첫 번째 논문은 정치가 철학과 연결될 때 어떤 위험에 빠지는지를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을 비교하면서 잘 보여준다. 아렌트에게 정치철학이란 말은 마치 ‘둥근 사각형‘과 같은 형용모순으로 간주된다. 절대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다양성(아렌트는 이를 인간의 복수성이라 표현한다)을 존중하고 차이를 그 자체로서 다루어야 하는 정치는 서로 어울릴수 없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아렌트는 자신을 정치철학자라고 부르기를 거부하고 정치이론가를 자임한다. - P10

이때 banality는 ‘평범‘
‘낡아빠짐‘ ‘익숙해짐‘ ‘진부성‘ 등을 뜻한다. 일본에서는 ‘진부성‘이라고번역을 했으나 사실 ‘진부성‘이나 ‘평범성‘ 두 단어 모두 아렌트의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 표현 자체도 그렇지만 아렌트의 글은 다소의 풍자 혹은 냉소를 담고 있어서 ‘악의평범성‘ 개념도그러한 냉소를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 두 번째 대담에서 아렌트는 이 개념의 의미를 아주 명확하게설명한다. 즉,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그사람이 내게 처음 듣는 이야기를 전해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내게 아주 평범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너무 평범해!" "별로 안 좋아" 하고 말할 수있다. 이때 평범하다는 것은 특별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흔해빠진 것이나 아주 익숙해 있는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아렌트는 이처럼 ‘평범하다‘라는 말이 ‘흔하다‘라는 의미와는 완전히다르다고 강조한다.(이런 강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평범성‘이라는 표현이 ‘진부성‘보다 더 나은 번역어라고 말하고 싶다.) - P11

이와 같은 지적과 더불어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우리 모두의 내면에 아이히만이 있고,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악의 평범성 개념의 핵심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를 못하는 것이 아이히만에게서 보이는 악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대화를 통해 또 한 가지 분명하게 해명되는 것은 ‘악의 평범성‘이모든 악을 설명하는 유일한 장치 혹은 전가의 보도와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히틀러에 대해 아렌트는 ‘살인 본능을 가진 살인자‘ - P11

라고 말하고 있고, 또 사디스트인 악인도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가 거부하는 것은 악인을 ‘악마의 화신‘으로 여기면서 각 사람이 져야 할 마땅한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논리를 세우는 것과 악에 무엇인가 큰 매력이있고 힘이 있으며 실체가 존재하는 것처럼 여기는 태도인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아렌트는 악에는 아무런 깊이도 없다는 생각을 피력하며, 다만 생각이 없는 가운데 엄청난 일을 저지르면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를 비판하고자 한다.
세 번째 대담은 두 번째 대담과 다소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 이 대담이 이루어진 시기 앞뒤로 공화국의 위기』 (1972)에 실린 논문들이 출간되었다. 따라서 이 대담에는 『공화국의 위기』의 논문들이 다룬 사건들이 많이 나오는데, 1960년대에 미국과 유럽을 풍비한 학생운동과 흑인인권운동과 연관하여 시민불복종의 문제, 그리고 나아가 운동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폭력과 권력의 본질 및 관계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혁명론』의 주요 테제 또한 거론되는데, 특히 ‘공적행복‘의 문제와 ‘평의회 체제‘ 문제가 흥미 있게 다루어진다. - P12

자 모두에게이 대담의 편집 기술 덕분으로 포괄적인 성격을 가지게있을 것이다.
『공화국의 위기』의 주제인 정치에서의 거짓말 문제가 다시 흥미롭게다루어지고 있는 것이 마지막 대담의 한 가지 특징이다. 이 내용은 미국의 베트남 참전의 문제를 폭로한 소위 ‘펜타곤 문서‘와 연관된 것으로정치에서 이루어지는 진실의 은폐와 거짓의 문제에 대한 것인데, 이를
‘국가이성‘ 개념과 직결시켜 논의를 풀어간 것이 흥미롭다.
이 마지막 대담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아렌트가 자신을 두고
‘자유주의자가 아니다‘라고 명확하게 주장하는 점이다. 미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고, 미국의 전통을 사랑했던 아렌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 혹은 자유주의자의 입장과 거리를 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렌트는 "몽테스키외가 자유주의자인가요?" 하고 반문하고 있는데, 아렌트가 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무엇에서 미국 혁명의 추동력, 그리고 현대 정치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으려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렌트에게 ‘그 무엇‘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 더 이상 비밀일 수는 없다. 그것은 공화주의, 곧 아렌트적 공화주의인 것이다. - P13

당시 저명한 저널리스트였고 훗날 빌리 브란트 정부의 고위 관료였던귄터 가우스가 한나 아렌트와 가진 이 대화는 1964년 10월 28일에 서독 TV로 방송됐다. 귄터 가우스는 아돌프 그림메상 Adolf Grimme Prize, 독일 TV 프로그램에 수여하는 명예 높은 상을 수상한 이 인터뷰를 이듬해인 1965년에 뮌헨에서 출판한 책 『추어 페르손Zur Person』에 "Was bleibt? Es bleibtdie Muttersprache(무엇이 남았느냐고요? 모어가 남았어요)"라는 제목으로 실었다. 조앤 스탬보Joan Stambaugh. 헌터칼리지 명예교수가 영어로 옮긴 이 번역본은 제롬 콘Jerome Kohn이 편집한 『이해에 관한 에세이 Essays onUnderstanding』 (하코트 브레이스 조바노비치, 1994)에 처음 실렸다.
아렌트가 그가 진행하는 인터뷰 시리즈에 참여한 첫 여성이라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 가우스는 곧바로 그녀가 "대단히 남성적인 직업"을 가졌다는, 즉 철학자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대화를 잇는다. 그리고 이 언 - P19

급은 그의 첫 질문으로 이어진다―세상의 인정을 받고 많은 존경을 받는 아렌트도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신이 철학계에서 수행하는 역할"
을 독특한 것으로 인식하는가? 아렌트는 대답한다.


미안하지만 그 말에는 동의 못하겠어요. 나는 철학계에 속하지 않아요. 내 전공은, 전공이라고 굳이 말해야 한다면, 정치이론political theory 이에요. 당신이 친절하게 지적한 것과는 달리나는 철학자처럼 느끼지도 않고, 철학계가 나를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고 믿지도 않아요. 그리고 당신이 인터뷰를시작하면서 던진 다른 질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철학을 남성적인 직업으로 생각한다는얘기 말이에요. 철학이 남성적인 직업으로 남을 필요는 없어요! 언젠가는 여성이 철학자가 되는 일도 전적으로 가능해질거예요…… 이곳과 책 여러 곳에 등장하는 말줄임표는 원문에 있는 것으로, 원문을 생략했다는 표시가 아니다―원주. - P20

아렌트

‘정치철학‘이라는 표현은 전통 때문에 극도로 심한 피해를 받고 있어요. 나는 그 표현을 피하는 편이에요. 나는 그와 관련된 사안들을 학문적으로건 비학문적으로건 얘기할 때마다 철학과 정치 사이에는 필수적인 긴장 상태가 존재한다고 늘 언급하고는 해요. 무슨 말이냐면,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행위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사이에는 예컨대 자연철학 naturalphilosophy에는 존재하지 않는 긴장이 있어요. 철학자 역시 다른 모든 사람처럼 자연에 관해서는 객관적일 수 있어요. 자연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할 때는 전 인류의 이름을내걸고 의견을 피력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제아무리 철학자라도 정치에 관해서는 객관적이거나 중립적일 수 없어요. 플라톤 이후로 누구도 그러지 못했어요! - P21

물론이죠. 그런 문젯거리는 늘 존재해요. 사실 나는 상당히고루한 사람이에요. 세상에는, 이런 표현을 써도 된다면, 여성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여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들이 있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어요. 여자가 이래라저래라 명령하는 모습은 그냥 보기가 좋지 않아요. 여성스러운 존재로 남아 있고 싶은 여자는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려고 애써야 마땅해요.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여부는 나도 몰라요. 나 자신은 거의 무의식적으로-아니, 거의 의식적으로라고 말하는 편이 낫겠네요―늘 이런 사고방식에 부합하게 살아왔어요. 개인적으로 이 문제는 그 자체로는 내 인생에서 아무런 역할도 수행하지 못했어요. 단순하게 말해, 나는 늘 내 마음에 드는 일들을 해왔어요. - P23

그러면 연구를 끝낸 거죠. 나한테 중요한 것은 내가 다루는주제를 이해하는 거예요. 내게 저술은 이런 이해를 추구하는문제이자, 이해하는 과정의 일부예요…………. 책을 집필하다 보면 저절로 표현되는 것들이 분명 있어요. 내 기억력이 내 생각을 모두 기억할 정도로 좋다면 나는 글 쓰는 작업을 하지않을 것 같아요. 나 자신이 무척 게으른 인간이라는 걸 잘 아니까요. 나한테 중요한 것은 사유 과정 자체예요. 나는 무엇 - P24

인가 철저히 사유하는 데 성공할 때 개인적으로 상당한 만족감을 느껴요. 내 사유 과정을 글로 적절하게 표현하는 데 성공할 경우에도 만족감을 느끼고요.
내 저작이 남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물어봤죠? 비아냥조로 말하자면, 그건 마초적인 질문이에요. 남자들은 늘 엄청난영향력을 가진 존재가 되고 싶어해요. 나는 남자들의 그런성향을 이를테면 허울만 그럴싸하지 실속은 없는 문제로 봐요. 나 자신을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느냐고요? 아요. 나는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이해한 것과 같은 의미로-세상을 이해한다면 나는 그 사실에서편안함과 만족감을 얻을 거예요.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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