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의 해안선? 정말로, 정말로 아름다운 해안이긴 하지만 알고보면 무시무시한 천연 항구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강들은? 강 또한놀랍도록 멋지지만 실제로 대다수는 무언가를 운송하는 데는 하등의쓸모가 없다. 이 점을 감안한다 해도 거의 10킬로미터마다 나타나는폭포는 또 어떤가. 그런데 문제는 아프리카가 정치적, 기술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긴 목록에서 이제 겨우 두 개만 꼽았다는 것이다.
사실 아프리카 말고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 지역은 많다. 하지만 이곳만큼 성공에서 뒤처진 경우도 흔치 않다. 거의 5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가 처음 등장한 땅. 그렇게 일찍 출발한 유리함에도 불구하고말이다. 세계에서 가장 통찰력 있는 저자 중 한 명인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2005년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실린 예리한 분석에서 "이는 부 - P221

랴부랴 출발한 제1주자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라고 일갈했다. 하지만 그 첫 주자들은 사하라 사막과 인도양, 대서양에 의해 분리되었다. 아프리카 대륙의 거의 전 지역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고립된 채 발전했다. 인류의 사상과 기술은 동에서 서로, 서에서 동으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발전했지만 정작 북쪽에서남쪽으로는 전달되지 않았다.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이니만큼 여러 다양한 지역적 특성과 기후, 문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공통된 것은 그들 서로는물론 바깥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정도는 덜하지만 과거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 P222

이 거대한 대륙의 지리는 여러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중 가장기본이 되는 것은 아프리카를 3분의 1의 상부와, 나머지 3분의 2의하부로 나눠보는 것이다.
우선 3분의 1을 점하는 상부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어 사용 국가들이 차지하는 지중해 연안부터 시작된다. 해안평야 지역은 미국에 버금가는 크기인데 이내 세계 최대의 건조 사막인 사하라 사막으로 바뀐다. 사하라사막 바로 아래로 사헬Sabel 지역이 펼쳐진다. 반건조지대인 사헬은 바위가 산재하는 모래가 많은 지역이다. 최대 폭이 4천8백 킬로미터가 넘으며 대서양 연안의 감비아에서 시작해 니제르, 차드를 거쳐 홍해의 에리트레아까지 뻗어 있다. 사헬이라는 명칭은 아랍어에서 해안을 뜻하는 사힐sahil에서 유래했다. 이를 사하라라는 광 - P223

활한 모래바다의 해안이라는 의미로 치환해 보면 이 지역 사람들의삶의 방식을 유추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는 이슬람의 영향이 줄어드는 또 다른 종류의 해안이 된다. 지중해에서 사헬에 이르는 지역에거주하는 주민들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하지만 그 남쪽에는 보다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사헬의 남쪽, 즉 아프리카의 나머지 3분의 2를 차지하는 하부 지역은 거의 전 영역에서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토양도 한결온화해진 덕분에 녹색 식물지대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콩고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면 정글이 된다. 동쪽 해안인 우간다와 탄자니아에는 대규모 호수들이 있는 반면, 서쪽의 앙골라와 나미비아에는 사막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끝자락에 이르면 기후는 다시 지중해성으로 바뀐다. 상부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튀니지의 최북단에서 거의 8천 킬로미터나 내려왔는데도 말이다. - P224

아프리카 대륙의 강들 또한 문제다. 대개 고지대에서 발원한 강들이 가파르게 꺾여 내려오기 때문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일례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긴 장대한 잠베지 강을 보자. 길이만도장장 2,735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강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하얗게 부서지는 급류와 빅토리아 폭포에 매료될 게 분명하지만 정작 이 강은교역로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잠베지 강은 여섯 개 나라를지나는데 모잠비크에서 인도양과 합쳐질 때는 무려 해발 1천4백여미터의 높이에서 흘러내린다. 이 강의 일부에서는 얕은 배를 띄울 수는 있지만 이 부분마저도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물자 수송은 제한돼 있다. - P225

런던, 파리, 브뤼셀, 리스본 같은 대제국의 수도로 돌아온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대략적인 등고선이 그려진 지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제멋대로 선(국경선)들을 그려 넣었다. 아니, 그곳에 대한 보다 공격적인 접근을 위해 선들을 그곳에 놓아두었다고 해야겠다. 그들은 이 선들 사이에 중앙콩고라든지 오트볼타 같은 지명을 적어 넣고 이곳을나라들이라 불렀다. 이 선들에는 정작 그 선들 사이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스스로가 느끼는 것, 또는 그들 스스로가 만들고자 했던 것들보다는 강대국의 탐험가들, 군대, 사업가들이 얼마나 더 멀리 나아갔는지가 담겼을 뿐이었다. 오늘날에도 많은 아프리카인들은 유럽인들이만들어 놓은 지정학과 자연이 남겨준 발전을 가로막는 천연 장벽에 - P228

얼마간은 발목이 잡혀 있는 형편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출발하여 그들은 현대적 가정을 만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활발하게 경제와연결시키기도 했다.
현재 아프리카에는 56개 국가들이 있다. 20세기 중반에 불어닥친독립운동의 열기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이래로 지도의 선들사이에 적혀 있던 몇몇 나라 이름들도 고쳐졌다. 이제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로 불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경선들 대부분은 그대로다. 요컨대 유럽인들이 인위적으로 그 지역을 분할하며 그려놓은 선들이지금도 그대로 남아 국경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러한 분할은 유럽의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남긴 다수의 식민 유산 잔재중 하나다. - P229

수단, 소말리아, 케냐, 앙골라,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말리말고도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민족 갈등은 유럽인의 지리에대한 생각이 아프리카의 인구학적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점을 반증하고 있다. 아프리카에는 늘 분쟁이 있어 왔다. 예컨대 줄루족과 호사족은 유럽인들을 처음 구경하기 훨씬 이전부터 서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식민주의는 이 차이를 인위적인 틀 안에서 해결하도록 강요했다. 다시 말해 민족 국가라는 유럽인의 개념으로 그들을 무조건 한 국가의 국민으로 몰아놓으려 한 것이다. 오늘날 목격되는 내전의 양상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민족들을 한 국가 안에서억지로 단일 민족으로 묶으려던 식민주의자들과 그들이 쫓겨난 뒤에새로 부상하여 모든 것을 지배하려 한 신진 지배 세력, 그리고 그에수반된 폭력의 결과물이다. - P229

이 전쟁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줄잡아 1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고질병과 굶주림으로 6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결과를 낳았다. 특히유엔의 추산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거의 절반이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최근 들어 최악의 전투는 잦아들었지만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이래 최악의 분쟁의 본산이면서 언제 또 발발할지 모를 전면전을 방지하기 위해 유엔의 전면적인 평화유지 임무가 여전히 요구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콩고민주공화국은 한 번도 하나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평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때까지는 단지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유럽 식민주의자들은닭도 없이 달걀을 만들어 냈다. 그로 인해 아프리카 대륙 전체에서 논리적 부조리가 반복되고 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이 지역에 지속적으로 출몰하고 있다. - P234

아프리카에서 자원은 저주이면서 축복이다. 풍부한 천연자원을 보유한 것은 축복이지만 그로 인해 오랜 세월 외부인들의 약탈 대상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는 저주다. 하지만 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이 자원의 공유를 주장할 수 있게 되자 이제 다른 나라들도 훔치기보다는 투자를 하는 편을 택하고 있다. 그럼에도 국민들에게는 그 혜택이 별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천연 광물자원에 더해 아프리카는 풍부한 수자원이라는 축복 받았다. 비록 많은 하천들이 교역에는 도움을 주지 못하지만 수력 발전용으로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이 점 또한 잠재적 분쟁의 씨앗이 되고 있다. - P235

있다.
장장 6,671 킬로미터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는 나일 강은 그 유역에 근접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케냐, 르완다, 수단, 탄자니아, 우간다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10개 나라들에 영향을 미친다. 아주 오래전인 기원전 5세기에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이고, 나일 강은 이집트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그런데 나일강에서 온전히 배로 움직일 수 있는 거리가 이집트의 경우 장장 1,126킬로미터에 달하는데 이는 이집트에게는 부담이 된다. 즉 유사시를 대비할 때 보급로가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 이집트 정부에게는 걱정거리인 것이다. - P235

그런데 앞서 보았듯이 지구상에서 중국인들이 안 가는 곳은 없다. 비즈니스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그들은 이제 유럽인들과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 대륙 구석구석에 개입하고 있다. 중국은 원유의약 3분의 1을(여기서 발견되는 귀금속도)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데 이는곧 중국인들이 일단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터를 잡은 이상 쉽게 나가지 않을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아직은 유럽과 미국의 석유 회사들과 다국적 기업들이 훨씬 많이 개입하고 있지만 중국이 따라잡을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철광석을 찾아 나서고,
콩고민주공화국과 잠비아에서는 구리를 캐고, 역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코발트도 캐가고 있다. 또한 중국은 케냐의 몸바사 항만 개발 사업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케냐의 석유 자산을 겨냥한 보다 원대한 계획에도 손을 댔는데 이 사업은 상업적으로 가시화돼 가고 있다. - P243

두 나라 모두 소말리아에서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연합 African Union의 중추 세력인데다 유엔 또한이슬람 테러와의 전쟁에서 이 두 나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라고 아프리카 대륙에서 비즈니스 측면에서 자신들이 중국에 뒤처지는 입장임을 왜 모르겠는가.
중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석유, 광물, 귀금속, 그리고 시장이다.
이는 정부 대 정부 관계로는 공평하지만, 대형 공사에 투입되는 지역주민들과 중국인 인력 간에 긴장이 증가하는 현상 또한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이 상황은 베이징 정부로 하여금 그 지역 정세에 그만큼더 많이 관여하게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규모나마 여러 나라에서군사력이 요구될 수도 있다. - P247

남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에게 바깥 세계와 사업을 한다는 것은 프리토리아나 블룸폰테인, 케이프타운과의 거래를 의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국의 천연자원과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인접국들을수송 시스템에 편입시켰다. 이는 곧 이 나라에 양방향 철도가 있으며이스트런던, 케이프타운, 포트엘리자베스, 더반의 항만들로부터 쭉쭉 뻗어나가는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도로망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수송망은 짐바브웨 보츠와나, 잠비아, 말라위 그리고 탄자니아를 통해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서 콩고민주공화국의 카탕가 지역과동쪽으로는 모잠비크까지 뻗어나간다. 중국이 건설한 카탕가에서 앙골라 해안에 이르는 새 철도가 콩고민주공화국의 교통량을 흡수해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독점하다시피 하던 기존 수송 시스템에 어느 정도 도전이 되겠지만 그래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갖고 있는 이점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P248

제국주의 영국이 세계를 호령하던 시절, 남아프리카를 지배한다는것은 희망봉을 지배하는 것이었고 이는 곧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의해상 교통로를 장악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현대 해군은 맘만 먹으면아프리카 남단을 훨씬 넘어 항해할 수 있지만 여전히 희망봉은 세계지도상에서 핵심적인 부동산이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아프리카대륙의 하부에서 핵심적인 존재다.
금세기 아프리카에서는 새로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번싸움은 두 개의 장에서 펼쳐진다. 먼저 자원 쟁탈전의 경우 익히알려진 대로 바깥 세계의 관심과 참견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내부패권 쟁탈전이 있다.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또한 할 수 있는 한 신속하게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고 한다. - P249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는 부룬디, 케냐, 르완다, 우간다, 탄자니아가 속해 있는 동아프리카공동체와는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기구다. 탄자니아는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의 회원국이기도 한데 나머지 동아프리카공동체 회원국들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미소를 보내는 탄자니아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대호수 지역과 그 너머까지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탄자니아를 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여기는 것처럼 보인다.
남아프리카공화국 국방군은 유엔의 지휘를 받는 1개 여단을 콩고민주공화국에 공식적으로 주둔시키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광물 부국에서 얻어지는 전리품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정치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행동은 결국 누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할지를 두고 저마다 생각이 다른 우간다, 부룬디, 르완다와의 경쟁을 촉발시켰다. - P250

과거 아프리카에는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이 지역의 지리적 조건이 그렇게 만들었고 이후 들어온 유럽인들은 그들 멋대로 오늘날의 국경선 대부분을 설계했다. 그리고 이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도시들은 확장돼 가고 있는 아프리카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란긴밀하게 연결된 현대화된 세계를 끌어안는 길뿐이다. 물론 갖가지문제점들이 목격되기는 하지만 아프리카는 이를 딛고 성큼성큼 나아 - P250

가고 있다.
교역을 가로막았던 강들은 이제는 수력 발전소로 거듭나고 있다.
대규모 식량 생산을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던 땅에서는 광물과 석유가생산되면서 일부 국가들이 부유해지고 있다. 비록 그 부가 전 국민들에게 골고루 돌아가고 있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다는 아닐지라도 대체로 보건과 교육 수준이 상승함에 따라 빈곤율또한 떨어지고 있다. 영어사용권이 지배하는 세계 경제 체제에서 아프리카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많은 것 또한 유리하게 작용하여 지난 수십 년 동안 아프리카 대륙은 괄목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 P251

무엇의 중간Middle인가? 어디로부터의 동쪽East인가? 이 명칭은 유럽인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말하자면 유럽인들자신이 결정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지역을 바라보는 그들 자신의 시각인 것이다. 그들은 잉크로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선들은 유례없이 인위적인 국경선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를 다시 그으려는 시도가 피를 불러오고 있다.
2014년, 폭발과 참수 장면을 담은 중동발 동영상이 전 세계에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겉만 번지르르한 IS의 선전용 비디오에는 불도저로 이라크·시리아 국경의 모래를 쓸어버리거나 밀어붙여서 없애버리려는 장면도 있다. 사실 이 국경은 높은 모래둔덕에 불과하다. 아닌 게 아니라 모래를 밀어버리면 국경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게된다. 지금의 것도 이론상의 국경일 따름이다.  - P255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의 중동은 지금보다 넓었고 국경선들은 훨씬 적었다. 그 국경이라는 것들도 대개는 지리적 특성에 따라 생겨난 것들이었다. 공간은 느슨하게 나눠진 상태였고 지리와 부족, 종교가 통치하고 있었다. 민족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 또한 없었다.
보다 넓은 중동The Greater Middle East은 서쪽 지중해부터 동쪽의 이란 산악지대에 이르는 1천6백 킬로미터 지역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오만의 아라비아 해 연안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흑해에서 끝나는 남북의 길이는 3천2백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 지역에는 광활한 사막과오아시스, 눈 덮인 산들, 긴 강, 대규모 도시들 그리고 해안평야가 있다. 게다가 공업이 발전했거나 현재 발전 중인 나라라면 누구에게나 필요한 막대한 천연자원도 매장돼 있다. 바로 원유와 천연가스 말이다. - P256

어떤 지역 출신의 사람이 같은 부족의 친척을 만나려고 한 지역을 건너가려 하는데 서류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먼 마울의 제3자에게 보증을 받으라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않는 일이었다. 서류를 발급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이제 이곳은 두 지역으로 나눠졌고 주민들을 위해 이름을 지었다고 하는 외국인들의말 또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는 수세기 동안 그 지역에서 이루어져 온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1299-1922년)은 이스탄불의 통치를 받았다. 제국의 전성기 때는 영토가 비엔나의 초입에서 아나톨리아를 건너 아라비아로내려가 인도양에까지 이르렀다. 제국의 권력은 서쪽에서 동쪽에 이르는 동안 오늘날의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이란 일부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에까지 뻗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지역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이름을 붙이려는 수고를 딱히 하지도 않았다.  - P257

유럽 식민주의는 아랍인들을 민족 국가의 형태로 묶어서 그들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출신 부족과 자신이 속한 이슬람 종파에게만 호의를 베풀게 하는 유산을 남겼다. 이들 독재자들은 유럽인들이 그어둔인위적인 선들 사이의 영토 전체를 자신들이 통치할 수 있는 위임장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라는 구조를 이용했다. 그 선들이 역사적으로올바른지 혹은 어느 날 느닷없이 함께 묶여져 버린 서로 다른 부족들과 종교들에게 공정한지 등은 아예 무시한 채 말이다.
그 결과가 야기한 분쟁과 혼란을 이라크만큼 적절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또 있을까. 시아파 가운데서도 신심이 더 깊은 이들은 수니파가이끄는 정부가 시아파의 성지인 나자프와 그들의 순교자인 알리와후세인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카르발라를 지배 통치하는 것을 결코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집단 정서의 근원은 수세기도 넘는 옛 시절로 올라간다. 이라크 국민으로 불린 고작 수십 년의 세월이 그 기나긴감정을 희석시킬 순 없었다. - P261

많은 분석가들은 오직 강력한 인물만이 이 세 지역을 하나로 묶을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라크에는 강력한 인물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국민들이 전혀 통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서 얼어붙은 것이었다. 독재자들의 시야가 미치지않는 곳에서는 국가의 선전도 사람들의 마음을 거의 끌지 못했다. 철두철미하게 박해를 받아온 쿠르드족들, 사담 후세인의 고향인 티크리트에서 온 수니파 파벌의 지배, 그로 인해 1991년에 일어난 반란의실패에 이어 벌어진 시아파에 대한 대량 학살.
맨 먼저 떠나야 했던 측은 쿠르드족이었다. 독재자 아래에서 힘없는 소수 민족들이 현실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들은 때로 자신들의 권리가 보호받고 있다는 선전을 믿는 시늉이라도하려 한다. 그 예가 이라크의 소수파 기독교도들과 극소수의 유대인들이었다.  - P262

이라크 내에 거주하는 5백만 명의 쿠르드족은 대개 북부와 북동부인 아르빌, 술라이마니야. 그리고 다후크 외곽지대에 몰려 있다. 이곳의 지형은 주로 언덕과 산악지대로 이루어진 거대한 초승달 모양을띄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형제 덕분에 독가스를 분사한 1988년의 알안팔 작전으로 대표되는 부단한 문화적, 군사적 공격에도 불구하고쿠르드족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간직할 수 있었다. 당시 8단계 작전동안 후세인의 군대는 포로를 잡아들이지 않았다. 이 말은 곧 정부군이 지나가는 지역에서 15세부터 50세까지의 남자들은 눈에 띄는 대로 죽였다는 뜻이다. 줄잡아 10여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해당했고 그들이 거주하던 마을의 90퍼센트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 P263

이곳은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는 헤즈볼라가 시리아 내로 진입하기 위해 식량을 얻는 정기 기착지로 이용한다. 다른 도시들은 주로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 아래 있다. 일례로 북쪽의 트리폴리는 주민의 80퍼센트가 수니파로 추산되는 한편 적잖은 알라위파 소수 민족도 거주하고 있다. 바로 옆 동네인 시리아에서 수니파와 알라위파가 야기하는 긴장 때문인지 이곳 역시 산발적인 마찰이 벌어지곤 한다.
레바논은 얼핏 통일된 국가로 보이지만 실은 지도상에서나 그렇게보일 뿐이다. 지도상의 묘사가 얼마나 허상인지는 베이루트 공항에도착해서 단 몇 분만 지나면 알게 된다. 공항에서 차를 타고 시내 중심부로 가다 보면 시아파가 득세하고 있는 시의 남쪽 외곽 지역을 지나는데 아마도 이 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전투력을 자랑하는 헤즈볼라 민병대가 여기저기 정찰을 서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레바논군대는 종이 위에서나 존재한다. 1975년부터 1990년까지 벌어진 또다른 내전의 와중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역 민병대에 가입하는 바람에 레바논 군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다. - P268

시리아는 또 다른 다신앙, 다종파, 다종족 국가다. 그것들을 묻는 순간부터 파가 나눠지는 전형적인 분열 국가인 이 나라 주민의 다수는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니파 무슬림들이지만 다른 신앙을 섬기는 소수파들도 꽤 있다. 2011년까지는 다양한 공동체가 마을과 도시, 시골등지에서 어울려 살았지만 특정 집단이 지배권을 행사하는 독자적인지역들도 있었다.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지방에서는 늘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하나이며 우리 사이에 분열은 없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라크와 마찬가지로 이름, 출생지, 또는 거주지가 그 사람을 말해주는 배경이 되고 따로 분리된 하나를 다수 속으로 밀어 넣는 일 또한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진다.
프랑스인들은 이 지역을 통치하면서 영국이 실행한 분할과 통치의선례를 따랐다. 당시에는 알라위파를 누사이리파라고도 했는데 다수의 수니파는 이들을 무슬림으로 여기지 않았다.  - P269

알카에다와 보다 최근에 탄생한 IS 같은 집단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식민주의에 대한 굴욕감, 이어 등장한 범아랍 민족주의의 실패가 이러한 아랍 민족 국가의 확장세로이어진 것이다. 아랍 지도자들은 번영도, 자유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대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선 이슬람주의가 울리는 경고음은 경건함과 높은 실업률 그리고 압제가 뒤범벅된 이 지역에서 많은 이들의 귀를 솔깃하게 했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외침은 이슬람이제국을 통치하던 황금시대, 곧 당시로선 최첨단의 기술, 예술, 의학,
통치 체계를 자랑했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이것들은 중동 전역에널리 잠재해 있는 타인에 대한 해묵은 의심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데 기여했다. - P272

그런데 보다 심각한 위협은 레바논보다는 더 큰 인접국인 시리아로부터 온다. 역사적으로도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는 늘 해안에 바로진출하기를 원해 왔고 실제로 그것이 필요하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전부터 레바논을 시리아의 일부로 여겨왔고(실제로도 그랬지만) 2005년에가자 지구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던 경험을 여전히 아쉬워하고 있다. 만약 바다에 이르는 길이 봉쇄될 경우 시리아 입장에선 골란고원을 지나 지중해 방향인 갈릴리 호수 주변의 구릉지를 따라 내려가는방법을 대안으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골란 고원은 1973년 전쟁당시 시리아의 공격을 받은 뒤부터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고, 또한이스라엘 주민들의 주요 거주지로 이어지는 연안 평야지대를 돌파하다가는 대규모 반격에 부딪힐 것이다. 그런데 이를 미래 어느 날의 일로만 여길 수만은 없다. 물론 중단기적으로는 지극히 가능성이 낮아보이고 아예 불가능한 일일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 지속되는 한에 있어서는 말이다. - P286

아직 또 다른 문제가 중동에 남아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란이다. 특히핵무기라는 사안에 이르면 보다 심각해진다.
일단 이란은 아랍 국가가 아니다. 인구 다수가 파르시어를 쓰는 거대 국가다. 이란의 영토는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을 합친 것보다크다. 물론 이 세 나라 인구를 합치면 2억 명에 이르지만 이란의 인구는 7천8백만 명에 불과하다. 주거 가능 지역이 한정된 탓에 인구 대다수는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대규모 사막들과 소금 평원으로 이루어진 내륙은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않다. 차를 몰고 이 지역을 통과하는 것만으로도 금세 기분이 가라앉을 정도인데 하물며 이 안에서살려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겠는가.
- P287

이란의 북서부에는 유럽이면서 아시아이기도 한 나라가 있다. 바로아랍 땅의 경계를 차지하고 있는 터키다. 그런데 이 나라 국토 대부분이 중동 지역에 속해 있다고 해서 꼭 아랍 국가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래서인지 터키는 그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으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기색이 역력하다.
터키는 자신들의 북쪽과 북서쪽에 있는 이웃들에게 진정한 유럽으로 받아들여져 본 적이 이제껏 없었다. 만약 터키를 유럽으로 본다면유럽의 경계는 광활한 아나톨리아 평원을 훨씬 넘어 시리아, 이라크,
이란에 이르러서야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터키가 유럽의 일부가 아니라면 대관절 터키는 어디에 있는 것인가? 터키의 최대 도시인 이스탄불은 2010년 유럽 문화 수도로 선정됐고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Eu-rovision Song Contest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 리그가 개최되기도 했다. 그리고 터키는 1970년대부터 이제는 유럽연합이 된 유럽 기구의 회원국이 되기 위해 부단히 도전해 오고 있다.  - P292

책임질 만한 제도가 전무하다시피 한 빈곤한 사회에서 권력은 민병대와 정당의 형태로 위장한 불한당들에게 맡겨진다. 권력을 놓고 싸우는 그들에게 서구의 순진한 동조자들이 때로 환호를 보내는 동안에도 죄 없는 사람들은 숱하게 죽어갔다. 머지않아 리비아, 시리아,
예맨, 이라크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도 그런 식의 일이 벌어질것처럼 보인다.
미국은 자국의 에너지 수입 요구가 감소함에 따라 이 지역에서 정치적, 군사적 투자의 규모 또한 줄여가려 한다. 미국이 손을 뗀다면중국이, 보다 적게는 인도가 그 빈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할지 모른다.
중국은 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이란 등지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전 세계 차원에서의 시나리오는 강대국들 수도에 있는통치자들의 관저에서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는 사람들의상상력과 요구, 희망, 필요 그리고 그들의 삶 가운데서 그 게임이 펼쳐질 것이다.
사이크스-피코 라인은 무너졌다. 비록 모양은 다를지라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피를 수반하는 지난한 작업이 될 것이다. - P301

인도와 파키스탄은 적어도 한가지 사안에서는 의견을 같이할 수 있다. 누구도 상대방이 근처에 있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 3,057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는 늘 껄끄러운상대다. 두 나라는 저마다 적대감과 핵무기를 한 보따리씩 안고 있다.
그리고 이처럼 원치 않는 관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10억이넘는 인구의 생사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인도 인구가 거의 10억 3천만 명에 달한다면 파키스탄은 1억 8천2백만 명에 달한다. 가난하며, 불안정하고, 분열된 파키스탄은 스스로를 인도와 반대 지점에 놓고 있는 듯하다. 물론 인도 또한 파키스탄에 강박관념이 없지는 않지만 보다 여러 방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편이다. 이 가운데는 성장하는 경제와 중산층의 확대라는 신흥 강국의 모습도 있다. 이처럼 인도는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파키스탄을 바 - P306

라보면서 경제면 경제, 민주주의면 민주주의 등 모든 지표에서 파키스탄을 압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양국은 네 번의 큰 전쟁을 포함해 수차례 자잘한 접전을 벌였다. 오늘날에도 양측의 감정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2014년 말 <인디언디펜스 리뷰Indian Defence Review》에 한 파키스탄 장교의 발언이 실렸다.
그가 한 파키스탄이 인도를 천여 개의 조각으로 찢어서 피를 보게 할거라는 말은 이후에도 자주 인용되는데 인도의 군사 전문가 아마르지트 싱 박사는 이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썼다.
"다른 이들이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나 내 의견은 이렇다. 인도는 대가가 큰 파키스탄의 핵 공격에 맞서야 한다. 천 개로 찢어져서 허구한 날 굴욕과 수치와 고통 속에 살아가면서 현실화되지않을 가능성에 에너지를 소모하느니 차라리 수천만 명이 희생되라도 당당히 맞서서 저들을 제압하는 편이 낫다." - P307

다양한 문명들이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인더스와 같은 강을 따라발전했다. 오늘날에도 인구 집중 지역은 이들 강 유역을 따라 점점이분포돼 있다. 시크교도의 본거지인 펀자브 주나 타밀 나두어를 쓰는타밀 주처럼 특성이 다른 지역들도 이와 같은 지리적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인도 아대륙에는 수세기에 걸쳐 숱한 세력들이 침입해 왔지만 이곳을 진정으로 정복한 세력은 없었다. 현재도 수도인 뉴델리가 진정으로 인도를 통치한다고 할 수 없으며 앞으로 보겠지만 뉴델리보다도훨씬 규모가 큰 이슬라마바드도 파키스탄을 온전히 통치한다고 볼수 없다. 인도 아대륙을 단일한 지배력 밑에서 하나로 묶는 데 가장성공을 거둔 세력은 무슬림이겠지만 결국 이슬람조차 언어, 종교,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는 못했다. - P309

당시양측은 핵무기로 무장을 한 상태였고 미국이 외교적으로 개입해서양쪽의 대화가 개시되기 전까지 몇 주 동안 표면적으로 드러나지는않았지만 일촉즉발의 핵전쟁의 암운이 일었었다. 두 나라는 2001년또 다시 전쟁 직전까지 치달았던 적이 있다. 이렇듯 인도와 파키스탄이 마주보는 국경에서는 여전히 산발적으로 총성이 울린다.
군사적으로 인도와 파키스탄은 서로를 겨누고 있는 적수인 건 분명하다. 양측은 방어를 위해서라고 주장하지만 상대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국경지대로 부대를 집결시키는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다.
두 나라 모두 〈죽음으로 몰고 갈 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양상이다.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 관계가 앞으로도 좋아질 일은 별로 없겠지만결정적으로 카슈미르라는 가시만 없다면 화해할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다. 하지만 내분을 겪는 파키스탄을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인도로서는 현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파키스탄대로 2008년 뭄바이 학살처럼 인도 내의 테러리스트들을 지원해서라도 인도 내부를 잠식해 들어갈 궁리를 할 것이다. - P318

파키스탄과 아프간 탈레반과의 협력 관계는 어느 면에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탈레반 구성원 대다수가 파키스탄 북서 국경의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탈레반과 파슈툰족은 결코 서로를 다른 민족으로 생각한 적이 없으며 둘 사이에 그어진 경계 또한 서구인들이 만들어낸 것으로 여긴다. 물론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경계는 듀랜드 라인Durand Line으로 알려져있는 선이다. 1893년 당시 영국령 인도 정부의 외교장관이었던 모티머 듀랜드가 이 선을 긋자 아프가니스탄의 국왕이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1949년 아프간 정부는 이 경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식민시대의 잔재라며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그날 이후 파키스탄은 아프간 정부가 마음을 바꾸도록 줄곧 설득해 오고 있지만 아프간은 꿈쩍도 않고 있다. 그리고 양쪽 산악지대에 사는 파슈툰족은 그 경계를무시하면서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P322

파키스탄 정부는 결과적으로 수많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고 미국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가 희생된 이중 게임을 했다는 것을 줄곧 부인해 왔다. 아보타바드(빈라덴이 최후를 맞았던 도시 이름) 작전 이후에도 파키스탄 정부는 이중 게임을 한 것을 일관되게 부인하고 있지만 현재 그 말을 믿는 이는 거의 없다. 비록 당시 효용가치가 제한적이었다 해도 미국이 최우선으로 찾던 빈 라덴을 도울 생각을 가진 특정 일파가 파키스탄 고위층에 있었다면 그들이 향후 아프가니스탄의 정국을 장악할 야심을 지닌 집단들을 지원하리라는 것 또한 자명했다. 문제는 그 집단들의 파트너들이 파키스탄에 있었으며 이들이 파키스탄의 정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싶어했다는 점이다. 혹을 떼기는커녕 혹을 붙이는 셈이다.
파키스탄 탈레반은 아프간 탈레반의 자연스러운 번식물이다. 파키스탄과 아프간 탈레반 모두 주로 파슈툰족 출신인데다 비파슈툰 세력의 지배를 용인하지 않는다.  - P328

양측이 마찰을 일으킬 만한 사안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티베트다. 주지하다시피중국은 티베트를 원한다. 인도가 티베트를 손에 넣는 것을 막고 또한티베트가 독립하게 됐을 때 인도가 그곳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고지대를 호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다.
중국의 티베트 합병에 대한 인도의 대답은 달라이 라마에게 거처를마련해 주고 히마찰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에 티베트 독립운동의본거지를 허용한 것이었다. 인도 입장에서 이는 장기 보험을 들어둔거나 다름없다. 다만 현금화할 기약 없이 돈만 꼬박꼬박 불입하는 형태이긴 하지만 말이다. 현 상태로는 티베트의 독립은 요원해 보인다.
그러나 비록 수십 년 후가 되더라도 그 불가능한 일이 실현된다면 인도는 티베트 정부의 타향살이 시절에 누가 그들의 친구였는지 티베트에게 일깨울 만한 위치에 있게 된다. - P332

인도는 마오쩌둥주의가 지배하는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조종을 받는 네팔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중국의 돈과 무역이 이 지역에서영향력을 사들이고 있다. 사실 요즘 같은 시절에 중국에게 마오쩌둥주의가 무슨 대수냐 싶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은 티베트에 장기적인보험성 정책에 지불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인도에게 신호를 보낼 양으로 네팔에 신경을 쓴다. 티베트에 인도가 개입하면 중국 또한네팔에 개입하겠다는 뜻을 넌지시 알리면서 말이다. 결국 인도가 인접한 소국들에 신경을 더 써야 하면 할수록 그만큼 중국에 덜 집중할수밖에 없다. - P333

세계는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그런데중국의 약진에 너무 놀란 나머지 우리는 인접 국가인 인도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국토와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다. 또 6개국(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면 7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영토 안에는 14,484킬로미터에 이르는 항행가능한 수로를 보유하고 있으며 물 공급도 나쁘지 않고 경작지도 넓은 편이다. 또한 주요 석탄 생산국이며 원유와 가스도 웬만큼은 매장돼 있다. 비록 앞으로도 이 세 가지 모두를 계속 수입해야 하고 실제로 연료와 난방비에 대한 보조금 지급이 이 나라 재정을 소모시키는요인이 되고는 있지만 말이다. - P335

더불어 인도는 미얀마, 필리핀, 태국과의 관계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그런데 보다 주목할 점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패권이 강화되는것을 감시하기 위해 인도와 베트남, 일본이 협력하고 있는 양상이다.
이 상황에서 인도는 이제껏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던 한 국가를 새로운 동맹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미국이다. 수십 년간인도는 영어 악센트만 다르고 돈만 많을 뿐이지 새로운 영국이나 마찬가지라며 미국을 마뜩찮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 한층 자신감을 얻은 인도는 점점 다극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미국과도 협력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이런 가운데 2015년 오바마 대통령은 인도공화국 선포일에 거행된 군사 퍼레이드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인도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미국산 C-130 허큘리스 수송기들과C-17 글로브마스터 공군 수송기를 러시아에서 도입한 탱크들과 함께주도면밀하게 선보였다. 두 거대 민주 국가들은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중이다. - P336

아이스맨이 힘차게 몰려올 것이다.
그렇다면 그 힘은 누구 것인가? 러시아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만큼 강력한 존재는 없으며 그 혹독한 조건들의 방해를 러시아만큼 잘 대비하고 있는 나라도 없다. 다른 나라들은 뒤에 처져 있다. 심지어 미국조차 러시아를 따라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 같다. 오늘날 점점 뜨겁게 달구어지는 북극 지역에서 미국은 <북극 전략이 없는 북극 국가>다.
현재 북극에는 그 어느 때보다 온난화 효과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얼음이 녹아서 접근이 훨씬 쉬워졌고 막대한 에너지원의 발견과 이를 손에 넣기 위한 기술의 발전 또한 그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척박한 환경에서 얻어질 잠재적 이득과 손실에 북극권국가들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 P342

북극, 즉 arct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아르티코스arktikos에는 그리스어로 <곰 근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마지막 별 두 개가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는 큰곰자리를 말한다.
북극해의 넓이는 1,409만 제곱킬로미터다. 이 정도면 아주 작은 대양 정도의 넓이지만 그래도 러시아만큼 넓으며 미국보다는 1.5배가크다. 하지만 해저에 잠겨 있는 대륙붕은 그 어떤 대양에 비교해도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 주권이 미치는 지역에 대한 일관된 의견 일치가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북극 지역은 캐나다 일부와 핀란드,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러시아, 스웨덴, 그리고 미국의 알래스카 일부까지를 포함한다.
이곳은 한마디로 극한의 지역이다. 짧은 여름에는 섭씨 26도까지 기온이 오르는 지역도 있긴 하지만 긴긴 겨울에는 영하 45도 아래로 떨어지기 일쑤다. 또한 매서운 칼바람에 쓸려서 만들어진 널따란 암반지역, 웅장한 피오르 극지 사막, 그리고 하천들도 있다. 엄청난 적대감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품고 있는 이곳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 P343

20년 뒤 아문센은 이번에는 북극점 상공을 비행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물론 걸어서 가는 것보다야 쉽겠지만 이 또한 대단한 업적이 될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 탐험가이자 항공공학자인 움베르토 노빌레와 14명의 대원들을 데리고 반경식 비행선을 타고 가다 빙산 위 약 90미터 상공에서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국기를 투하했다. 영웅적인 노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21세기인 지금 이 지역에서 그 세 나라의 영유권에 대한 법적 근거로 인정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 카자마 신지 또한 인상적인 모험으로 영웅적 행렬에 가세했다. 1987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북극점에 도달한 최초의 인간으로기록되었다. 카자마는 극빙에도 위축되지 않는 대담무쌍한 인물로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되기 위해 엄청난 눈보라도 견뎌냈다. 물론오늘날에는 건너야 할 얼음이 훨씬 적어진 것은 분명하지만. - P346

빙원이 녹다 보니 캐나다 다도해의 북서항로를 통한 운항이 여름몇 주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중국으로 갈 때 걸리는 시간도 적어도 일주일은 단축할 수 있게 됐다. 2014년에는 쇄빙선의 호위를 받지 않은 화물선이 처음으로 단독 운항에 성공했다. 누나빅 호는 2만3천 톤의 니켈을 싣고 캐나다에서 중국으로 갔다. 북극 루트는 40퍼센트나 단축되었으며 파나마 운하보다 더 깊은 수심을 이용할 수 있었다. 덕분에 화물선은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할 수 있으며 수만 달러의 연료비를 절약하고 1천3백 미터톤의 온실가스 배출량을줄일 수 있다. 2040년경에 이르면 이 뱃길이 연간 2개월은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렇게 되면 북극을 통한 무역 연결고리 자체가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를 통해 적잖은 수입을 올리는 이집트나 파나마 같은 머나먼 나라들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줄 것이다.
한편 북동항로 또는 러시아식으로 북해항로는 시베리아 해안을 품고 있는데 이 항로 또한 현재 일년에 수개월 동안 열리면서 <해양 고속도로로서 그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 P349

북극 접경 국가인 이른바 북극연안 5개국Arctic Five은 캐나다, 러시아, 미국, 노르웨이, 덴마크(그린란드를 책임지고 있으므로)를 말한다. 여기에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웨덴이 합세해 북극이사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북극권 국가들의 자주권, 주권, 재판권을 인정하는 정식 옵서버(의결권을 가지지 않는 참가 자격) 12개국이 더해진다. 일례로 2013년에 북극이사회는 북극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지원하는 일본과 인도,
현대식 쇄빙선을 보유하고 노르웨이 섬에 과학기지를 설치한 중국을옵서버로 받아들였다. (한국도 2013년 5월에 옵서버 자격을 얻었다.)그러나 북극이사회에 끼지 못하는 나라 중에서도 이 지역에 대한합법적 이해관계를 주장하는 나라들이 있다. 인류공동의 유산이라는 개념에서 북극은 누구에게나 개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날로 높아가고 있는 것이다. - P351

세계의 맨 꼭대기에 이르러 이 책을 마친다. 그리고 길은 여기에 있다. 이 최후의 경계는 늘 우리의 상상력에 말을 걸어왔다. 우리 시대에 인류는 미래로 가는 길 위에서 꿈을 키웠고, 우주 공간으로 올라가보기도 했고, 밀리미터를 무한대로 바꾸기도 했다. 인간의 쉼 없는 정진은 칼 세이건이 불렀던 저 유명한 <창백한 푸른 점에 우리의 경계가 한정될 수 없음을 확인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지구로 내려와야 한다. 때로는 덜커덩거릴 수도 있다. 우리가 이 땅의 지리도 아직 정복하지 못했고 그것과 겨루려는 인간의 본성 또한 정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리는 언제나 운명들을 가두었다. 그 운명은 한 국가를 규정하거나 한국가가 될 수 있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또 어떤 것은 세계의 지도자들이 그토록 벗어나고자 몸부림쳤던 운명일 수도 있다.  - P362

그렇다 해도 이 상황은 누가 멕시코 만을 지배하느냐라는 역학관계를 바꾸는 것뿐이지 그 위치의 중요성을 바꾸지는 못한다.
물론 지리가 모든 사건의 방향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위대한 사상과 위대한 지도자들도 역사의 밀고 당김의 일부다. 하지만 그들 또한지리라는 틀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방글라데시의 지도자들치고 벵골만에서 넘쳐흐르는 물을 막아낼 꿈을 꾸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하지만 국토의 80퍼센트가 범람원인데도 땅덩이를 옮길 수는없는 노릇이란 걸 그들도 안다. 주목할 만한 사례는 있다. 11세기에스칸디나비아와 영국을 통치했던 크누트왕은 아첨하는 신하들에게파도를 물러가게 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자연은 혹은 신은 그 어떤인간보다 거대하다. 방글라데시의 경우 자연이 가하는 힘에 인간이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 많은 홍수 방지턱을 쌓고 지구 온난화로 인해물이 불어날 거라는 컴퓨터 모델링이 과장됐기를 기대하는 것밖에없다. - P364

현재 우주 공간에는 작동하고 있는 위성이 대략 1천1백 개가 있으며 작동하지 않고 있는 위성들 또한 적어도 2천 개는 된다. 러시아와미국이 쏘아올린 수만도 거의 2천4백 개에 육박한다. 일본과 중국이100여 개씩, 이 외에도 더 작은 수를 쏘아올린 여러 나라들이 있다.
이 위성들 아래 우주정거장이 있다. 이곳은 처음으로 인간이 지구 바깥의 무중력 상태에서 반영구적으로 거주하면서 작업을 하는 공간이다. 또 더 저쪽 달 표면에는 적어도 다섯 개의 미국 국기들이 아직까지 서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인간이 만든 기계는 그보다 훨씬 더 먼곳, 즉 화성과 목성을 지나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상을 향해 전진 중이다.
우주 공간에서 집단적 및 협력적 미래와 인간을 연계하려는 노력은상상만 해도 멋진 일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지구 바깥에서도 패권을노리는 경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 P366

그 많은 위성들이 텔레비전 방송이나 일기 예보만을 위해 거기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다른 나라를 감시하고 누가 무엇을 가지고 어디로 움직이는지 지켜본다. 미국과 중국은 지금도 레이저 기술 개발에 열중하고 있다. 이 기술을 군사적으로 이용해서 두 나라는 우주 공간에서 경쟁국들의 무기를 무력화하는 미사일 시스템을 확보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두 나라 말고도 우주에서 싸워야 할 때를 대비하는 기술 선진국들이 많다.
우리가 별에 도착했을 때 우리보다 한발 앞서 온 도전들이 우리 앞을 가로막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그 도전에 대처하기 위해 서로 힘을모아야 한다. 러시아나 미국, 중국인의 자격으로가 아니라 인류의 대표로서 우주를 방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우리는 중력이라는 족쇙만을 겨우 풀었다. 게다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 갇혀 있다. 타인에 대한 의심과 자원을 탐하는 원초적 경쟁이 형성한 틀속에 말이다. 우리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 P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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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풀 수 없다. 그냥 관리만 할 일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에는 이 문제 말고도 관심이 필요한 시급한 일들이 널려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이르는 지역 전체는 초조하게 남북한을 주시하고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의 코앞에서 이문제가 폭발하기라도 하면 인접국들까지 말려들게 되고 그 여파가 당장 경제적 피해로 이어질 거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행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통일 한국의 국경, 즉 자신들의 코앞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미국도 남한을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방을 저버리는 짓을 할 수도 없다. 한반도 개입에 있어서는 오랜역사를 지닌 일본은 어떤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입장이기에 되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처럼 보여야 한다.
해결책은 타협이겠지만 남한은 이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고 북한의 지배층 또한 이를 받아들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향후 전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랬듯 이 상황은 마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과도 같다.
수년 동안 미국과 쿠바는 서로의 주위를 조용히 맴돌기만 했다. 2015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은 부분적인 돌파로 이어지는 탱고만을 추었을 뿐이다. 복잡하게 스텝이 꼬이지만 않도록 슬쩍슬쩍 눈치만 주면서 말이다. 그러나 북한은 혹시 플로어로 나가자고 할 신청자가 있는지 목을 빼고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북한은 2천5백만 인구를 가진 빈곤 국가다. 도덕적 부패, 공산주의 일당 체제의 폐해를 겪고 있는 이 나라는 혹시라도 수백만 명의 난민물결이 압록강을 넘어올까 두려워하는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은 거의 3만 명에 달하는 남한 주둔 병력을 철수하는 것이 잘못된 신호로 비쳐져서 북한이 대담한 모험을 감행할까 우려한다. 그리고 한국은 통일로 인해 현재 누리는 번영에 위험이 갈지 몰라 선뜻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펼쳐지는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들은 안다.
잘못된 순간에 답을 냈다간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게다가 이만저만 크게 망치는 게 아니다. 두 나라의 수도가 잿더미로 변하고 내전과 인도주의적 재앙이 발생하고 도쿄 시내나 주변에 미사일이 떨어지거나 한쪽이 핵무기를 가진 한반도 땅에서 중국군과 미군이 대치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다. 만약 북한이 갑작스레 붕괴하거나 하면 이 국면은 국경을 넘는 전쟁, 테러리즘, 난민 등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후폭풍은 이 드라마의 배우들을 강타해서 해결은 차세대 지도자들의 몫으로 넘어갈 것이고 그러면 또 다시 다음 세대로 넘겨질 것이다.
사실 전 세계 지도자들로서는 공공연히 북한정권이 붕괴되는 날을 대비하자고 떠들다가 정말로 그날이 앞당겨져도 큰일이다. 그날에 대해 준비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지금의 상태에서는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최선이다. 현재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북한은 여전히 광적인데다 곧잘 효과가 있는 <강력한 약자 역할>을계속하고 있다. 이들의 대외정책은 본질적으로 중국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데 있다. OEC(Observatory of Economic Complexity)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 수출량의 84.48퍼센트를 수입하는 중국조차도 그들은 온전히 믿지 않는다. 북한은 자신들과 맞서는 통일 전선을 가로막기 위해 모든 외부 세력들이 서로 반목하게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 여기에는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북한 지배층은 볼모나 다름없는 주민들에게 조국은 온갖 역경과 외국 악마들에 당당히 맞서는 강력하고 너그러우며 위엄 있는 나라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 칭한다. 북한은 강력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주정신을 혼합한 주체사상이라는 유일무이한 정치철학을 통치의 기조로 삼고 있다.
실상 북한은 세계 최악의 민주 국가다. 나라가 인민을 위해서도, 공화국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한 가족과 하나의 당이 소유한 왕조 국가다. 아마 독재의 수준을 테스트해 보면 항목이란 항목엔 죄다 해당될 것이다. 제멋대로의 체포, 고문, 여론 조작용 재판, 수용소, 검열, 공포의 법칙, 부패 그리고 21세기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공포 통치까지 말이다. 위성사진과 목격자들의 증언에 미루어볼 때 북한에는 적어도 15만 명의 정치범들이 거대한 노동 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인류 양심의 오점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실상의 전체 규모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수도 키예프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번져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동부에서는 대통령을 지지하는친정부 성향의 주민들이 몰려나왔다. 지난날 옛폴란드 영토였던 서부 리비프 같은 도시에서는 친러시아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2014년 2월 중순에 이르자 리비프를 비롯한 여타의 도회 지역들에더 이상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키예프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자 2월 22일,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급히 피신했다. 이어 친서방파와 파시스트파가 주축을 이루는 반러시아 파벌들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장악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푸틴 대통령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일단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이 거주 - P138

하는 크림 반도를 합병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4년 4월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 반도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정하는 주민투표에서 9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함에 따라 러시아에의 합병을 결정했다. 또한 러시아에게는 무엇보다 크림 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항을 손에 넣는 것이 절실했다. - P139

러시아에게 세바스토폴은 단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부동항이다. 그렇지만 흑해를 나서서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1936년 몽트뢰 협정으로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를 위임받은 나토 회원국 터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 군함들은 그 해협을 항해할 수는 있지만 제한된 인원만이 가능하며 분쟁 시에는 이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혹시 러시아 군함이 보스포루스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지중해에 도달하려면 에게 해도 건너야 한다. 마찬가지로 대서양에 도달하려면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수에즈 운하로내려가는 것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규정이 여전히 유효하다.
러시아는 시리아의 지중해 연안인 타르투스에 소규모 함대를 배치해 두고 있다. 이것은 2011년 시리아에서 내전이 발발했을 때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고 있음을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 P139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는 마음이 급하다. 그들은 세바스토폴항에 흑해 함대를 구축하고 흑해와 접한 러시아 서남부 노보로시스크 시에는 새로운 해군 기지를 건설하고 있다. 노보시스크는 수심이 그리 깊다 할 수는 없지만 러시아에게 추가 능력을 선사할 것이다.
또한 러시아는 잠수함 몇 대와 선박 80척을 새로 건조 중이다. 물론 이 함대가 전시에 흑해를 돌파할 수 있을 만큼 위력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러시아의 방위력은 증가일로에 있다. 2015년 7월, 러시아는 새로운 해군 독트린을 발표했다. 여기서 러시아는 국익을 위협하는 세력들의 목록 맨 꼭대기에 나토를 올려놓았다. 물론 나토의 부대배치와 러시아 국경선에 점점 더 가깝게 장비를 배치하는 행위를 "용인할 수 없다."는 투지에 넘치는 말에 그치고는 있지만. - P140

이에 맞서 향후 10년 내에 미국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저지선을 담당하고 있는 터키에 더해 현재 나토의 파트너인 루마니아를 부추겨흑해 주둔 함대를 보강하는 것도 예상해볼 수 있다.
크림 반도는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1954년에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에 양도하기 전까지는 2백 년 동안 러시아의 지배아래 있었다. 당시 소련은 소련 국민이 크림 반도에 항구적으로 거주 - P140

하는 한 두고두고 그곳을 모스크바의 통제권 밑에 둘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크라이나는 더 이상 소비에트의 일부가 아니며 러시아와 친하지도 않다. 푸틴은 사정이 바뀌었다는 것을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서방 외교관들은 알고 있었을까? 혹시 몰랐다면 이는 그들이 다음의 수칙 A. 즉 초심자를 위한 외교의 제1교훈을 숙지하고 있지 않았던 탓이리라. "실재하는 위협으로 간주되는것과 맞닥뜨릴 때 강대국은 힘을 사용한다." 이 점을 숙지하고 있다면그들은 푸틴의 크림 반도 합병은 서구가 우크라이나를 근대 유럽과서구 영향권으로 끌어넣은 행위의 대가로 봐야 한다. - P141

온건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를 자유로운 제도와법규 체제의 온전한 일원으로 받아들이자는 의견도 나온다. 여기에는 만약 그렇게 되면 모스크바라도 어쩌지 못할 거라는 기대도 작용한다. 그러나 이 입장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지정학이 존재하고 있으며, 러시아가 서구 주도의 법규를 순순히 따를 리 없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은 데서 나온 것이다.
당장의 승리에 우쭐해진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경솔하게도 미련한 성명들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여러 지역에서 제2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어의 지위를 폐지하겠다는 사항이 들어 있었다.
그 지역들에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대다수가 살고 있고 친러시아 정서 또한 강하다는 점과 실제로 크림 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성명이 반발을 불러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게다가 이는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 내의 러시아계 주민들을 보호할 필요성을 공공연히 떠들어대는 격이었다. - P141

크렘린은 각국 정부에게 <러시아 민족ethnic Russians>을 보호할 것을 강제하는 원칙을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러시아 민족이라는 정의를 규정하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과거 소비에트 연방에서 위기가 발발했을 때마다 러시아 정부가 무엇을 선택했는가에따라 그 정의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 정의가 크렘린의 입장과 적절하게 들어맞는 때란 제1언어로 러시아어를 쓰는 사람들을 총칭할때다. 또한 조부모가 러시아에서 살았고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경우에도 러시아 시민권을 수여한다고 명시된 새로운 시민법이적용되기도 한다. 따라서 위기가 고조되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사람들은 러시아 여권을 취득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러시아가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판단할 지렛대 역할을 한다 - P142

크림 반도 인구의 60퍼센트가 민족학적으로 러시아인이라고 하니크렘린으로서도 문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반정부 데모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쓰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군 기지로 활동폭이 제한된 러시아 병력을 결국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게끔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시민들과 러시아군 양쪽 모두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우크라이나 군대는 결국 재빨리 철수해 버리고말았다. 크림 반도는 또 다시 러시아의 실질적인 영토가 되었다.
어쩌면 푸틴 대통령이 선택을 할 수 있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영토보전권리를 존중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신이 러시아에게 준 <지리적 패>를 다루는 상황임을 감안한다면 이를결코 선택의 문제로 볼 수만은 없다. 푸틴은 <크림 반도를 잃어버린 - P142

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있어야 러시아는 유일한 부동항으로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가 벨기에나 미국의 메릴랜드에 버금가는 영토를 잃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러 달려오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와 그 이웃 국가들은 이른바 지리적 진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예컨대 나토에 속해있지 않다면 모스크바가 가까울 것이요. 워싱턴 D. C.는 한참 멀다는것이다. 러시아에게 이는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그들은 크림 반도를잃었을 때 대처할 방도가 없지만, 서방에는 있다. - P143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해 제한적인 제재만을 가했다. 이 제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겨울용난방연료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동과 서를 가로지르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열거나 닫는 권한은 크렘린에 있다.
정치적 무기로써 에너지는 시간을 벌게 해주며, 러시아 민족이라는개념은 향후 러시아가 저지르는 그 어떠한 행동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것이다.
2014년에 푸틴 대통령은 <노보로시야(Novorossiya, 새로운 러시아!)>라는 표현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크렘린의 전문가들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푸틴이 현재 우크라이나 남부와 동부의 원래 지리적 명칭을 되살렸기 때문이다.  - P143

한다.
몰도바에서 흑해를 건너면 또 다른 와인 산지가 펼쳐진다. 바로 조지다. 그러나 조지아는 두 가지 이유로 러시아의 통제 지역 목록 상위에 올라와 있지 않다. 첫째, 2008년에 벌어졌던 조지아와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조지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 군대에 점령당했다.
현재도 아브지아와 남오세티아 전역은 러시아 군대의 통제하에 있다. 둘째, 조지아는 캅카스 산맥 남쪽 지역이고 러시아는 인접한 아르메니아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모스크바로서는 여분의 완충지를더 늘리고 싶겠지만 굳이 조지아의 나머지를 취하지 않고도 견딜 수는 있다. 다만 조지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지금의 형국은 달라질 소지가 있다. 나토 회원국 정부들이 이제껏 조지아에게 퇴짜를 놓았던 것도 굳이 러시아를 건드리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다. - P150

조지아 국민들의 다수는 유럽연합 국가들과 더 가깝게 지내는 것을반길 테지만 2008년 전쟁의 여파로 많은 이들이 <양다리 걸치기>야말로 훨씬 안전한 방편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당시 조지아의 미하일사카슈빌리 대통령은 순진하게도 자신이 러시아를 자극하면 미국이득달같이 구하러 올 거라고 믿었다. 결국 2013년 조지아 국민들은 새정부를 구성하고 러시아에 회유적인 기르기 마르벨리슈빌리를신임 대통령으로 뽑았다.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조지아 국민들도이웃이 인정하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 P151

현 단계에서 핵무기는 제쳐 두고 러시아가 보유한 가장 강력한 무기라면 육군이나 공군이 아니라 바로 <가스와 석유>다. 세계 최대 천연가스 공급 국가인 미국에 이어 제2의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는 당연히 이를 국익 증진을 위한 권력으로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와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다. 일례로 핀란드는 발트해 국가들보다 훨씬 좋은 조건으로 러시아로부터 가스를 들여온다.
하지만 러시아가 이 정책을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행사하면서 유럽의에너지 공급을 좌우하다 보니 한편에선 그 충격을 줄이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많은 유럽 국가들은 보다 덜 공격적인 나라들에 대체송유관을 연결하는 것뿐 아니라 선박 운송을 위한 항구를 짓는 등 러시아에 대한 가스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애쓰고 있다. - P152

보내서위의 사례는 지리적 특성에 바탕을 둔 <경제전쟁>이자 이 지리적특성에 휘둘렸던 전시대의 제약들을 타개하기 위해 기술을 이용하려는 현대적 사례들 가운데 하나다.
2014년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밑으로 추락하자 러시아는 큰 고통을겪었다. 유가가 1달러씩 떨어질 때마다 러시아 수입은 대략 20억 달러씩 줄어든다고 보는데 예상대로 러시아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특히 일반 서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국가 자체가 붕괴될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러시아는 대규모로 방위비를 증액하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최근 몇 년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세계은행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다. 북극의 카라 해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고 원유를 육지로 끌어올 수 있게 되면 좀 더 안정적으로 성장할 거라는 전망도 있다. - P155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공룡들은 경쟁 관계이긴 하나 다양한 차원에서 협력도 이어가고 있다.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을 벗어나려는 유럽 국가들의 야심을 모를 바 없는 모스크바는 그 대안으로 중국을 기대하고 있다. 일단 구매자 시장에서 우위를점한 중국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지만 두 나라의 소통은 대체로 화기애애한 가운데 이뤄지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2018년부터 러시아는 한 해에 380억 세제곱미터에 달하는 가스를 향후 30년간 4천억 달러에 공급하는 계약을 중국과 체결했다.
러시아가 중국에 군사적 위협이 되었던 시절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1945년에 러시아 군대가 만주를 점령한 것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카자흐스탄에서 차후 어떤 세력이 주도권을 쥘지 두 나라 모두 촉각을 곤두세우고는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두 나라는 공산주의 이념의 리더십을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 P156

러시아와 중국은 나폴리에 주둔하는 미국의 제6함대를 포함해서 이 지역에서 나토의 영향력을 제거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러시아는 자국 내에서도 많은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는데 특히 심각한 것이 인구 문제다. 가파른 인구 감소는 어느 정도 잡은 것 같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65세 이하로193개 유엔 회원국들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크림 반도를 제외한 러시아 인구는 현재 1억 4천4백만 명 정도다.
모스크바 대공국을 시작으로 표트르 1세, 스탈린,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지도자들은 한결같은 문제들에 직면했다. 통치이념이 전제주의든, 공산주의든, 정실 자본주의든 간에, 항구들은 반드시 얼어붙었고 북유럽평원은 여전히 평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민족 국가들의 국경선이 다 지워진 오늘날,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반 4세가 마주했던 것과 똑같은 지도를 보고 있다. - P157

한반도라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풀 수 없다. 그냥 관리만 할일이다. 무엇보다 전 세계에는 이 문제 말고도 관심이 필요한 시급한일들이 널려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이르는 지역 전체는 초조하게 남북한을 주시하고 있다. 만에 하나 그들의 코앞에서 이문제가 폭발하기라도 하면 인접국들까지 말려들게 되고 그 여파가당장 경제적 피해로 이어질 거라는 걸 그들은 알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행위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건 바라지 않지만 그렇다고 통일 한국의 국경, 즉 자신들의 코앞에 미군이 주둔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미국도 남한을 위해 싸우고 싶은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그렇다고 우방을 저버리는 짓을 할 수도 없다. 한반도 개입에 있어서는 오랜역사를 지닌 일본은 어떤 사태가 벌어지더라도 모른 체할 수는 없는 - P161

입장이기에 되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처럼 보여야 한다.
해결책은 타협이겠지만 남한은 이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고 북한의지배층 또한 이를 받아들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향후 전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랬듯 이 상황은 마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과도 같다.
수년 동안 미국과 쿠바는 서로의 주위를 조용히 맴돌기만 했다.
2015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은 부분적인 돌파로 이어지는 탱고만을 추었을 뿐이다. 복잡하게 스텝이 꼬이지만 않도록 슬쩍슬쩍 눈치만 주면서 말이다. 그러나 북한은 혹시 플로어로 나가자고 할 신청자가 있는지 목을 빼고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기도 하면서 말이다.입장이기에 되도록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처럼 보여야 한다.
해결책은 타협이겠지만 남한은 이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고 북한의지배층 또한 이를 받아들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향후 전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언제나 그랬듯 이 상황은 마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보이지 않는 풍경과도 같다.
수년 동안 미국과 쿠바는 서로의 주위를 조용히 맴돌기만 했다.
2015년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기까지 그들은 부분적인 돌파로 이어지는 탱고만을 추었을 뿐이다. 복잡하게 스텝이 꼬이지만 않도록 슬쩍슬쩍 눈치만 주면서 말이다. 그러나 북한은 혹시 플로어로 나가자고 할 신청자가 있는지 목을 빼고 주시하고 있는 중이다. 가끔은 표정을 일그러뜨리기도 하면서 말이다. - P162

북한은 2천5백만 인구를 가진 빈곤 국가다. 도덕적 부패, 공산주의일당 체제의 폐해를 겪고 있는 이 나라는 혹시라도 수백만 명의 난민물결이 압록강을 넘어올까 두려워하는 중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미국은 거의 3만 명에 달하는 남한 주둔 병력을 철수하는 것이 잘못된신호로 비쳐져서 북한이 대담한 모험을 감행할까 우려한다. 그리고한국은 통일로 인해 현재 누리는 번영에 위험이 갈지 몰라 선뜻 손을쓰지 못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펼쳐지는 이 드라마에 참여하는 모든 배우들은 안다.
잘못된 순간에 답을 냈다간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것을. 게다가 이만저만 크게 망치는 게 아니다. 두 나라의 수도가 잿더미로 변하고 내전과 인도주의적 재앙이 발생하고 도쿄 시내나 주변에 미사일이 떨어지거나 한쪽이 핵무기를 가진 한반도 땅에서 중국군과 미군 - P162

이 대치하는 것과 같은 상황을 두려워하는 것이 전혀 터무니없는 걱정은 아니다. 만약 북한이 갑작스레 붕괴하거나 하면 이 국면은 국경을 넘는 전쟁, 테러리즘, 난민 등의 사태를 초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그 후폭풍은 이 드라마의 배우들을 강타해서 해결은 차세대 지도자들의 몫으로 넘어갈 것이고 그러면 또 다시 다음 세대로 넘겨질 것이다.
사실 전 세계 지도자들로서는 공공연히 북한정권이 붕괴되는 날을 대비하자고 떠들다가 정말로 그날이 앞당겨져도 큰일이다. 그날에 대해 준비조차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지금의 상태에서는 일단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최선이다. 현재는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 P163

북한은 여전히 광적인데다 곧잘 효과가 있는 <강력한 약자 역할>을계속하고 있다. 이들의 대외정책은 본질적으로 중국 말고는 그 누구도 믿지 않는 데 있다. OEC(Observatory of Economic Complexity)의 통계에 따르면, 북한 수출량의 84.48퍼센트를 수입하는 중국조차도 그들은 온전히 믿지 않는다. 북한은 자신들과 맞서는 통일 전선을 가로막기 위해 모든 외부 세력들이 서로 반목하게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한다. 여기에는 중국도 예외일 수 없다.
북한 지배층은 볼모나 다름없는 주민들에게 조국은 온갖 역경과외국 악마들에 당당히 맞서는 강력하고 너그러우며 위엄 있는 나라 - P163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emocratic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 칭한다. 북한은 강력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자주정신을 혼합한 주체사상이라는 유일무이한 정치철학을 통치의 기조로 삼고 있다.
실상 북한은 세계 최악의 민주 국가다. 나라가 인민을 위해서도, 공화국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나라는 한 가족과 하나의 당이 소유한 왕조 국가다. 아마 독재의 수준을 테스트해 보면 항목이란 항목엔 죄다 해당될 것이다. 제멋대로의 체포, 고문, 여론 조작용 재판, 수용소, 검열, 공포의 법칙, 부패 그리고 21세기에 유례가 없는 대규모의 공포 통치까지 말이다. 위성사진과 목격자들의 증언에 미루어볼 때 북한에는 적어도 15만 명의 정치범들이 거대한 노동 교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인류 양심의 오점이다.
그런데 아직도 그곳에서 벌어지는 잔혹한 실상의 전체 규모를 아는 사람조차 드물다. - P164

18세기에 한국이 얻은 <은자의 왕국Hermit Kingdom>이라는 별칭은 수세기에 걸친 정복과 점령, 약탈 혹은 어디론가 가기 위한 경유지의 대상이 된 뒤에 이 나라가 스스로 고립을 택한 데서 나온 명칭이다. 만약 다른 나라나 다른 민족이 북쪽에서 내려오면 일단 압록강을 건넌뒤 해상까지 진출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천연 장벽은 거의 없다. 반대로 해상에서 육로로 진입한다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이런 배경에서 몽골이 한반도에 들어왔다 나갔고 이어 명나라, 만주족의 청나라그리고 일본도 수차례나 침입했다. 한국이 여러 교역로들과 단절하고 홀로 있기를 희망하면서 바깥 세계와 엮이지 않는 편을 택했던 것 - P166

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일본이 다시 들어왔고 1910년에는 아예 이 나라를 통째로 합병해 버렸다. 그러고 나서 일본은 한국 문화 전체를 말살하는 정책을 개시했다. 한국어사용이 금지됐고 한국 역사를 가르치는 것 또한 금지됐다. 신사참배도 의무적으로 시행됐다. 일제강점기는 오늘날까지도 한일 양국의관계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한국은 북위 38도선을 따라 분단되었다.
북쪽은 소련의 관리를 받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고, 남쪽은 대한민국으로 부르는 친미 독재정권이 세워졌다. 이곳이야말로 상대편의 독자적인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고 곳곳에서 부딪히고 호시탐탐영향력과 주도권을 노리던 초기 냉전시대의 축소판이었다. - P167

역사학자 돈 오버도Don Oberdorfer 교수는 38도선에 따라 이 나라를 남북으로 임의로 분할한 것은 여러 모로 불운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1945년에 미국 정부는 8월 10일의 일본 항복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반도에 대한 명확한 전략을 수립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한반도 북쪽에서 소련군의 이동이 포착되자 미 백악관은 한밤중에 다급하게 회의를 열었고 오로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발간한 지도만을 지참한 두 명의 하급 관리는 북위 38도선을 손으로 찍었다. 즉 이 나라를 반쯤 내려온 소련군의 남하를 중단시킬 지점으로북위 38도선을 찍은 것이다.
이 자리에는 어떤 한국인도 또는 한국 전문가들도 없었다. 만약 있었다면,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장관인 제임스 번스에게 그 선은 - P167

약 반세기 전인 1904년에서 1905년에 치른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와일본이 서로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를 상의하던 선이었다는 것을알려주었을 것이다. 미국이 그때그때 임기응변으로 정책을 수립하고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던 소련은 미국 측이 러일전쟁 당시 소련의주장을 사실상 승인했으며 따라서 한반도의 분단과 북쪽의 공산 정권도 용인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거래는성사됐고 이 나라는 분단되었다. 주사위가 던져진 것이다.
소련군이 1948년 북쪽에서 철수하자 이듬해인 1949년, 이번에는미국이 남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950년 6월, 미국의 냉전시대 지정학 전략을 치명적으로 오판한 북한군은 한반도를 적화통일하기 위해 38선을 넘어왔다. 북한군이 거의 남해안 부근까지 일사천리로 남하하자 워싱턴 정부는 그때서야 큰일났다 싶었다. - P168

엄밀하게 군사적인 개념으로만 보자면 북한정권과 그 후원자인 중국은 제대로 한 셈이었다. 한국은 미국에게 우선적인 핵심 국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북한정권과 중국이 간과한게 있었다. 만약미국이 우방인 남한의 편에 서지 않으면 전 세계 다른 국가들의 신망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미국이 주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냉전의 정점에서 혹시라도 미국의 동맹들이 양다리를 걸치거나 공산진영으로갈아타기라도 하면 미국의 세계 전략은 심각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의 전략은 동아시아와 동유럽을 동일선상에서 다룬다. 예컨대 폴란드, 발트해 국가들, 일본 그리고 필리핀 등은 러시아와 중국과의관계를 정립하는 데 있어 미국이 자신들 뒤에 버티고 있음을 확신할 필요가 있다. - P168

이런 배경에서 1950년 9월, 연합군을 앞세운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연합군은 북한군을 38선 이북까지 밀어붙이면서 중국과 국경을 마주한 압록강 부근까지 일사천리로 진격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국이 결정을 내려야 할 차례가 되었다. 미군이한반도에 발을 디뎠다는 것은, 특히 38선 이북까지와 있다는 것은또 다른 문제였다. 실제로 함흥 위쪽의 북쪽 산악지대는 곧장 중국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는 거리였다. 결국 중국군은 압록강을 넘어 밀려들어왔다. 36개월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양측 모두 엄청난 인명손실을 입었다. 그러다가 현재의 경계선을 중심으로 전투는 서서히소강상태에 머물더니 결국 휴전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는 평화 조약이 아니었다. 그리고 북위 38도선에 갇힌 이들은 여전히이 상태로 남아 있다. - P169

한반도의 지리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다. 남과 북 사이에 인위적인 분단이 가능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오히려 지리상으로 실질적인 분단은 동쪽과 서쪽이다. 반도의 서쪽 지형은 동쪽보다 훨씬 완만하며 인구의 다수도 이곳에 모여살고 있다. 동쪽은 북한에는 함경산맥이, 남쪽에는 좀 더 낮은 산맥들이 누워 있다. 한반도를 절반으로 가르고 있는 비무장지대도 부분적으로는 임진강 및 한강의 물길을 따라가지만 - P169

이 물길이 남과 북 사이의 천연 장벽이 되지는 못한다. 이강은 외부세력의 침탈을 너무 자주 받은 이 통합된 지리적 공간 안에 있는 하나의 하천에 불과하다.
두 개의 한국은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전쟁 상태다. 일촉즉발의 긴장 상태임을 감안해 보면 이 갈등은 단지 포격 몇 번을 주고받는 것으348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일본, 미국, 남한 모두 북한의 핵무기를 우려한다. 특히나 남한은머리 위에 그 위협을 안고 산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해서 성공적으로 발사할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1950년의 사례가 보여주듯 재래전 형식으로 선제 기습 공격을 할 가능성 또한 높다.
남한의 수도인 거대 도시 서울은 휴전선과 비무장지대에서 불과 5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남한 인구의 거의 절반이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 모여 살 뿐 아니라 여러 기업들과 금융 기관들 또한 북한포의 사정거리 안에 놓여 있는 셈이다. - P170

미국은 남한 편에서 싸울 것이다. 그러면 바짝 긴장한 중국군이 압록강 부근으로 모여들 것이고 러시아와 일본은 이 국면을 초조하게 지켜볼 것이다.
한반도에서 또 다른 대규모 전쟁이 터지는 것을 반길 자는 아무도 없다. 양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인데도 과거에는 그런 전쟁을 막지 못했다. 1950년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내려올때 이 전쟁이 3년에 걸쳐 4백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를 내고도 교착 상태로 끝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오늘날의 전면전은 그보다 훨씬 큰 재앙을 부를 것이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북한보다 80배나 크고 인구도 2배나 많다. 한국과 미국의 연합군은 궁극적으로는 북한군을 압도하겠지만, 이는 중국이 한반도에 다시 개입하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할 때다. - P172

만약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할까? 그런 사태를 염두에 두고 진지한 계획을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남한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적이 있는데 대체로 혼돈 그 자체라는 게 일반적인 결론이다. 한국이 문제를 야기하는 외부에서 터지는 그 결과로전쟁이 벌어진다면 그 파장은 몇 배는 클 것이다. 일단 많은 국가들에영향을 미쳐서 그들 또한 결심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심지어 전투에는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 중국조차 미군과 자국 사이의 완충지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국경을 넘어 북한을 지키러 와야 할지 모른다. 중국 입장에서는 통일된 한국이 미국과 합세하면, 다시 말해 일본의 동맹인 미국과 합세해서 잠재적 위협이 되는 것만은 용인할 수 없으므로 결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또한 결정해야 한다. 비무장지대를 넘어 얼마나 더 북진해야할지, 예컨대 핵을 비롯한 다른 대량 살상 무기의 원료를 보유하고 있는 북한 전역을 포괄해야 할 것인지를 말이다. 중국도 이와 비슷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다. 특히 북한의 핵시설이 북한과 중국 국경에서 고작 217킬로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니 더 그렇다. - P173

물론 이런 결정들은 미래를 위한 것이다. 지금 당장은 양측 모두 전쟁 가능성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파키스탄과 인도처럼, 남북한은 두려움과 의심의 틀 안에 서로를 꼭꼭 가두어 두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원이며 대외정책 또한 이를 지향한다. 동, 서, 남 3면은 바다에 면해 있고 천연자원도 부족한 이 나라는 지난 30여 년간 대한민국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동해와 동중국해로 진출할 현대식 해군을 구축하는 데 공을들였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 또한 에너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그 지역 전체 해상 교통로의 정세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종의 양다리 전략을 구사해서 러시아와 중국과도 잘 지내려고 공을 들인다. 이는 그만큼 평양정권의 짜증을 돋우는 일이다. - P174

한국은 일제 강점기 문제로 돌아가면 여전히 일본과 해결해야 할 게많다. 두 나라의 관계는 거의 드물기는 했지만 심지어 가장 좋았을 때조차도 단지 의례적인 수준을 넘지 않았다. 2015년 초반에 미국, 한국, 일본 세 나라는 북한에 대해 각자 수집한 군사 정보를 상호 교환하는 문제를 놓고 본격적으로 세부 협상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때 한국정부는 일본을 통해 워싱턴으로 가는 기밀 정보는 제한된 양만 넘길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는 곧 한국은 일본과 직접적으로 협상하지 않을 거라는 얘기였다.
한일 양국은 아직도 영토를 놓고 분쟁중이다. 그 대상은 한국 측에서는 독도(외로운 섬)라 부르고 일본에서는 다케시마(죽도, 즉 대나무 섬)라 부르는 섬이다. 현재 한국이 실효적 지배(국가가 토지를 유효하게 점유하고 구체적으로 통치하여 지배권을 확립하는 일)를 하고 있는 이 바위섬 주변에는 훌륭한 어장이 형성돼 있는데다 부근에는 가스전도 있을 것 - P175

으로 추정된다. 한일 양국 사이에 깊숙이 박혀 있는 가시와 아직도 생생히 남아 있는 식민 지배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는 어두운 과거를 뒤로하고 서로 협력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한국과는 아주 다른 역사를 걸어왔다. 이 또한 이 나라의 지리적 특성에 부분적으로 기인한다.
일본인은 섬 종족이다. 1억 2천7백만 명의 인구 대다수가 동해를사이에 두고 한국과 러시아를 마주하고 있는 네 개의 큰 섬에 살고 있으며 6,848개의 군소 섬들에는 소수의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다. 일본열도 가운데 가장 큰 섬은 혼슈로, 무려 3천9백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 최대의 메가시티인 도쿄가 이곳에 있다. - P176

하지만 이 나라가 본래 갖고 있는 호전성과 군국주의의 망령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돌무덤 아래, 기진맥진한 민심의 깊숙한 곳에 묻어두었을 뿐이었다. 일본의 전후 헌법은 일본으로 하여금 육군은 물론 공군과 해군 등 군대를 보유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수십 년간 일본의 자위대(自衛隊, 일본이 1954년 자국의 치안 유지를 위해 창설한 조직으로 경찰 예비대로 볼 수 있으며 엄밀히 말하자면 군대는 아니었다.)는 전쟁 전 군대의 희미한 그림자였다. 미국은 전후 협상에서 일본의 방위비 지출을 GDP의 1퍼센트 이내로 제한하는 것에 더불어 수만 명의 미군을 일본 땅에 주둔시킨다는 내용을 넣었다.
현재에도 3만2천 명의 미군이 여전히 일본 땅에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 초반부터 희미하게나마 스멀스멀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가 감지되었다. 일본에는 일본이 전범국가라는 사실을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던 노년 세대와, 부모 세대가 저지른 죄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보다 젊은 세대가 있다. 전후 세계에서 이 태양이떠오르는 나라의 많은 자손들은 태양의 아래라는 자연스러운 자리를잡기를 바랐다. - P180

이민 또한 또 다른 해결책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일본은 상대적으로 배타적인 사회라서 이민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반면 중국 인구는적극적으로 불어 13억에 이르는 것을 감안하면 지극히 매파적인 관점에서 재무장을 시도하더라도 일본은 우선 주변국에서 친구를 찾아야 할 필요에 직면할 것이다.
미국이 한국과 일본 양쪽에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세 나라 간에는 앞서 말한 정보 교류 협정 같은 문제가 불거져 나오는 것처럼 일종의 삼각관계가 형성돼 있다. 일본과 한국 간에는 서로 풀어야할 사안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중국과 북한에 대한 불안을 공유하는 한에서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아무리 노력을 이어간다 해도 - P184

중국은 여전히 거기에 있을 것이며 이는 곧 미군의 제7함대도 도쿄만에 여전히 머물 것이라는 얘기며, 태평양과 중국해들을 드나드는길목을 지키는 미군 잠수함들도 여전히 오키나와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하다. 격류가 휘몰아칠 수도 있다. - P185

라틴 아메리카, 그 중에서도 특히 그 남쪽은 구세계의 지식과 기술을새로운 세계로 가지고 올 수는 있지만 지리가 이를 완강히 거부할 경우 제한적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음을 증명한 곳이다. 특히나 올바르지 못한 정치가들이 있는 곳이라면 더더욱. 미국의 지리가 그 나라를강대국으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면, 남쪽의 20여 개 나라들 가운데 금세기에 이 북아메리카의 거인과 겨룰 만큼 크게 성장할 나라는 없으며 그러기 위해 함께 힘을 모으기도 어렵다는 것은 확실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지리적 제약은 민족 국가들이 형성된 초기에 이미내재된 것이었다. 미국의 경우는 원주민으로부터 접수한 많은 토지가 소규모로 팔리거나 불하되었다.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는 강력한지주들과 노예제가 합쳐진 구시대 문화가 청산되지 못했고 이는 불평등으로 이어졌다.  - P189

초기 독립운동 시대에서 2백여 년이 흐른 뒤에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북아메리카와 유럽 국가들에 비해 한참은 뒤처져 있다. 카리브해 지역까지 포함해 이 지역의 전 인구를 합하면 6억 명에 이르지만 통합 GDP는 1억 2천만 명의 프랑스와 영국 두 나라를 합친 것과비슷한 수준이다. 라틴 아메리카 나라들은 식민주의와 노예제로부터지난한 길을 걸어왔다. 하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P191

질과, 나일강 다음으로드물지만 이 지역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바로 라틴어에 기반을 둔 언어다. 이들 국가 대다수가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 가운데 브라질은 포르투갈어, 프랑스령 기아나는 프랑스어를 쓴다. 하지만 이런 언어적 연결은 기후학적으로 다섯 개의 상이한지역으로 나뉘는 이 대륙에 내재한 차이를 가릴 뿐이다. 상대적으로완만한 안데스 산맥의 동쪽 지역과 남미 원뿔꼴 지역 (Southern Cone,
브라질, 파라과이,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로 이뤄지는 지역)으로 불리는 남아메리카 하부의 온화한 기후는 더 북쪽의 산악과 정글 지대와 대비되면서 경작과 건설에 드는 비용을 절감시켰다. 따라서 이 조건이 이곳을 대륙 전체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지역으로 만들어 주었다. 한편곧 살펴보겠지만 브라질의 경우는 자국 내 시장에 상품들을 수송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 P192

역사를 놓고 볼 때 멕시코에 들어선 정권들치고 나라 전체를 확고히 장악한 정권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정부의 적수인 마약 카르텔들이 정규군 못지않게 무장이 잘된 준군사 조직들을 거느리고 오히려군대보다 더 높은 보수와 더 많은 동기를 부여한다. 심지어 몇몇 지역에서는 마약 산업이 일부 대중들에게 고용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고있기까지 하다. 마약 갱들이 창출해 내는 막대한 돈이 지금도 멕시코전체에 걸쳐 돌아다니고 있으며 그 가운데 상당량은 겉으로는 합법적 사업으로 보이는 방식으로 세탁되었다.
육로를 통한 마약 공급 루트는 이제 확고히 자리 잡았고 미국 내에서의 요구 또한 줄어들 기미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멕시코 정부는 강력한 이웃 나라 편에 서려고 노력하면서 자체적으로 마약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것으로 미국의 압력에 부응하려 한다. 그런데 여기에 미묘한 문제가 깔려 있다. 멕시코는 미국에 소비재를 공급하는 것으로먹고 사는 나라이기 때문에 미국의 마약 소비가 지속되는 한 멕시코 또한 여전히 마약을 공급할 것이다.  - P200

마약이 없다면이 나라 멕시코는 대량의 외화 유입이 막혀 지금보다 훨씬 가난해질것이다. 또한 마약이 있음으로 해서 이 나라는 훨씬 폭력적이 된다.
멕시코 남쪽에 있는 몇몇 나라들의 사정도 이와 다르지 않다.
현재 멕시코는 거의 내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시달리고 있다. 마약카르텔들은 협박을 통해 자기들의 영역을 지배하려 한다. 정부는 법의 지배를 실행하는 척할 뿐이고 그 와중에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가장 최근에 알려진 경악할 만한 과시 행동의 하나는 2014년에 43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마약 카르텔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온 나라를 충격에 몰아넣었고 당국으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하게 펼쳐질 이 싸움에서 단지또 하나의 끔찍한 이정표로만 보인다. - P201

현대 기술은 위성사진을 힐끗 들여다본 중국에게 이 좁다란 땅에서 무역을 해볼 기회를 노려보게 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인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는 대서양을 건너와서 현재의 파나마 땅에 발을 내디뎠다. 그는 정글을 지나고 산을 넘어 또 다른 드넓은 바다와 마주했다. 바로 태평양이었다. 대서양과 태평양 이 두 대양을 이을 수만있다면 그 이득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기술력이 지리를 따라잡는 데는 또 다시 401년이 걸렸다. 마침내 1914년 미국이 관리하는 80킬로미터의 파나마 운하가 열렸다. 그리하여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가는 선박들은 무려 12,874킬로미터를 절약할 수 있었으며 운하 지역의 경제 성장 또한 따라왔다.
1999년 이후 파나마 운하의 관리권을 양도받았지만 아직까지도이곳은 미군과 파나마 해군이 관리하는 중립적인 국제 수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런데 중국에게는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 P202

파나마와 미국은 우방 관계다. 실제로 2014년에 베네수엘라가 파나마와 관계를 단절하면서 <미국의 하인>이라고 부를 만큼 파나마는 미국과 돈독한 사이다. 점점 궁지에 몰린 볼리바르주의 혁명 국가인 베네수엘라가 한 이 발언은 미국이 베네수엘라의 가장 큰 교역 파트너이며 베네수엘라가 미국 원유 공급량의 12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 두 나라 간의 에너지 무역은 미국의 셰일 혁명이 시작되면서 더욱 둔화될 전망인데 이 틈을 타서 중국이 베네수엘라의 적극적인 원유 수입국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중국과 베네수엘라 두 나라는 파나마 운하라는 통로에 의존하지않고 중국으로 원유를 보낼 방도를 궁리 중이다. - P202

1장에서 봤듯이 중국은 초강대국이 되려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목표를 이루려면 무엇보다 자국의 상품과 해군이 편하게 드나들 수 있되 지속적으로 열려 있는 해상로가 필요하다. 파나마 운하는중립적인 통로일지는 모르나 따지고 보면 결국은 미국의 호의에 기대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니카라과에다 운하를 직접 건설해 보는게 어떨까? 한창 커가는 초강대국이 5백억 달러쯤 쓴다고 해서 무슨 대수겠는가.
니카라과 대운하 사업에 자금을 댄 인물은 왕 징이라는 홍콩 사업가인데 전기통신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건설 분야 경험은 없는 이 인물이 인류 역사상 가장 원대한건설 사업의 지휘를 맡은 것이다. 왕징은 중국 정부가 이 사업에 대놓고 간섭하지 못하도록 하는단호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기업 문화나 삶의 전 영역에 걸쳐 정부가 개입하는 중국의 특성으로 볼 때 이는 흔치 않은 경우다. - P203

= BIS 19아르헨티나도 사정이 별로 다르지 않다. 하지만 어떤 점에선 브라질보다 제1세계 국가(부유한 선진국들)가 되기에 더 좋은 위치에 있다. 다만 브라질이 예약해 놓은 라틴 아메리카 내의 패권국이 되기에는 국토의 크기나 인구가 브라질에 못 미친다. 하지만 양질의 토지는 이나라가 유럽 국가들 못지않은 생활수준을 창출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그것만으로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단순한 얘기지만 만약 아르헨티나가 경제적 패권을 획득한다면 이 나라는 그 지리적 특성 덕분에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강대국이 될 수도 있다.
이 잠재력의 근원은 19세기에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군사 대치에서 승리하고 라플라타 강 유역의 농업 지역 지배권을 확보한 것에 있다. 또한 하천을 통한 물류 시스템도 한몫했다. 전체 라틴 아메리카대륙을 통틀어 이보다 값진 자산은 드물 것이다. 이 조건은 아르헨티나에게 브라질이나 파라과이, 우루과이보다 더 많은 경제적, 전략적이득을 가져다주었다. 현재에도 이 같은 상황은 마찬가지다. - P214

죽은 소 혹은 바카무에르타는 이 나라에 퍼져 있는 셰일층을 합쳐부르는 말이다. 이 지역에는 아르헨티나가 150년 동안이나 쓰고도 남을 에너지에 수출까지 할 수 있는 양이 매장돼 있다. 아르헨티나 중부지역인 파타고니아, 즉 칠레와 맞대고 있는 서쪽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지역은 벨기에만한 면적으로 나라로 치면 상대적으로 작겠지만 셰일층의 규모로는 꽤 큰 편이다. 현재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다. 만약 셰일에서 생산되는 에너지에 대한 반감만 없다면 말이다. 단조건이 있다. 일단 셰일에서 가스와 기름을 얻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해외 투자가 필요한데 아르헨티나는 해외 투자자들에게 우호적인 국가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원유와 가스가 더 많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있다. 사실 남단은 1833년부터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섬 주변과 그안쪽의 연안지대다. 그리고 이 문제의 지역은 웬만해선 뉴스에서 사라지지 않는 곳이다. - P215

영국이 포클랜드Falkland라 부르는 이곳을 아르헨티나에서는 라스말비나스Las Malvinas라고 부른다. 혹시라도 F를 쓰는 아르헨티나 사람은 험한 꼴을 당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이 지역을 지도에 이슬라스 말비나스Islas Malvinas라고 표기하지 않았다가는 위법 행위로취급받는다. 모든 아르헨티나 초등학생들은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큰 섬(포클랜드 제도는 두 개의 큰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을 그리도록 교육받는다. <꼬마 자매들>(포클랜드의 애칭)을 되찾는 것은 아르헨티나 후대에게 주어진 국가적 사명이며 라틴 아메리카 이웃들 또한 이 명분을지지하고 있다.
1982년 4월, 영국의 수비가 느슨한 틈을 타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독재자 갈티에리 장군은 이곳의 침공을 명령했다. 8주 뒤 영국군 기동부대가 들이닥쳐서 아르헨티나군의 짧은 승리를 끝장내고 이 섬을탈환하기 전까지는 아르헨티나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사태는 독재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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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측을 오가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방에 추파를 던지면서도 모스크바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틴이 그를 용인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대규모 무역협정에 서명을 앞두고 조만간 유럽연합 회원 가입으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이 되자 푸틴은 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 (red line, 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푸틴은 야누코비치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자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상을 깨고 모스크바 쪽과 협정을 맺으려 했다. 결국 이 행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다. 특히 독일쪽에서는 전前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다가 정치가로 변신한 비탈리 클리츠코를 내세웠다. 서방 측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민주 세력을 육성하고 자금을 대면서 지식인 사회와 경제계를 자기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수도 키예프에서 시작된 반정부 시위는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번져갔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동부에서는 대통령을 지지하는친정부 성향의 주민들이 몰려나왔다. 지난날 옛폴란드 영토였던 서부 리비프 같은 도시에서는 친러시아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2014년 2월 중순에 이르자 리비프를 비롯한 여타의 도회 지역들에더 이상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키예프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자 2월 22일,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급히 피신했다. 이어 친서방파와 파시스트파가 주축을 이루는 반러시아 파벌들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장악했다. 주사위는 던져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푸틴 대통령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일단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크림 반도를 합병하는 수밖에 없었다. 2014년 4월 우크라이나의 자치공화국이었던 크림 반도는 러시아와의 합병을 결정하는 주민투표에서 90퍼센트 이상이 찬성을 함에 따라 러시아에의 합병을 결정했다. 또한 러시아에게는 무엇보다 크림 반도에 있는 세바스토폴항을 손에 넣는 것이 절실했다.
P137~139










미국은 유럽에 공을 들인다. 또한 나토에 공을 들이면서도 때로 미국의 국익과 관련된 일이라면 행동에 옮길 것이다. 그러나 현재 미국에게 러시아는 대체로 유럽의 문제 가운데 하나다. 물론 그렇다고 감시의 끈을 늦추진 않겠지만. - P76

이제 남은 것은 중국이다. 떠오르는 중국 말이다.
분석가들이 지난 10년에 대해 쓴 것을 보면 대다수가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며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본 이유로 인해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적어도1세기는 걸릴 거라고 본다.
경제로만 보면 중국은 미국에 견줄 만큼 성장했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주빈석의 한 자리를 사들일 수 있었지만, 군사력과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에 수십 년은 뒤처져 있다.
그 수십 년을 미국은 자국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데 쓸 것이다. 물론 그 간격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듯하지만 - P76

한 예를 들어보겠다. 워싱턴 정부는 적대국인 시리아에서 벌어지는인권 유린 상황에 분개하면서 자국의 입장을 크게 떠들어대는데 반해 정작 바레인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에 대해서는 잠잠하다. 바레인 정부의 허락하에 이곳에 정박 중인 미국 제5함대가 이를 덮어버린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원조는 미얀마 정부에게 제안할 수 있는 권한을 사는 것인데 여기에는 곧 중국 정부의 접근을 거절하기를바라는 의도가 포함돼 있다. 이 사례는 미국이 애매한 위치에 있는 특수한 경우인데 그 이유는 미얀마 정부가 최근에야 바깥 세계에 문호를 개방한데다 베이징 정부가 일찌감치 이곳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했기 때문이다. - P77

하지만 일본, 태국, 베트남, 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타 국가들의 경우 미국은 일찌감치 문을 열고 있다. 이나라들은 하나같이 거대한 이웃에 불안해하며 워싱턴과 관계 맺기를열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나라들 또한 제각기 이런저런 문제로 엮여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중국의 패권 아래차례로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통된 인식이 있는 한 그 문제들은 크게부각되지 않을 것이다. - P77

 어떤 한 지역을 향한 회귀가 반드시 다른 지역의 포기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어느 쪽 발에 얼마만큼 더 힘을 실어주느냐의 문제다.
미국 정부의 대외전략 전문가들 중 다수는 21세기 역사는 아시아와태평양이 주도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이 지역에 거주한다. 특히 인도까지 포함하면 2050년경에는 이지역이 세계 경제 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 P78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국이 점점더 많은 시간과 돈을 이 지역에 투자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한 예로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해병대 기지를 건설했다. 하지만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적대행위가 발생했을 때 그들을 구하러 미군이 온다는 점을 우방국들이 확신하도록 제한적인 군사 행동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일례로 중국이 일본의 구축함을 향해 포격을 시작했다고 치자. 이는 향후 더 큰 군사 행동으로발전할 경우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미 해군도 중국 해군을 향해경고 사격을 하거나 혹은 직접 조준사격을 가하는 것으로 만일의 경우 전쟁까지 감수하겠다는 신호를 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한국을 향해 발포를 하면 한국이 맞대응을 하지만 현재 미국은 그러지않는다. 대신 미국은 군대의 경계 태세를 높이는 것 같은 공식적인 방식으로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북한을 향해경고 사격을 가한 다음 직접 발사를 할 것이다. 이는 선전포고 없이도전쟁으로 확대되는 과정이다. 위험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P78

흔히 분석가들은 주눅이 들거나 체면이 손상당하는 것을 기피하는 일부 문화권의 특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비단 아랍이나 동아시아 문화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가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뿐이다. 물론 이 두 문화권에서 그 점이 유독 선명하게 부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의 대외정책 전략가들은 다른 강대국 못지않게 이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영어에도 이런 사고를 깊이 담고 있는 두 격언이 있다. "1인치를 주면 1마일을 얻을 것이다."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0년에 한 말로 오늘날 주요 정치 어록에 들어간 "말은 부드럽게 하되 힘을 과시하라!"이다.
금세기에 치명적인 게임은 향후 중국과 미국, 그리고 그 지역 다른국가들이 체면을 잃지 않고 서로 분노와 원망의 우물을 깊이 파는 법없이 위기를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성패가 달려 있다. - P79

21세기에 태평양에서는 강대국들 간에 이뤄야 할 타협들이 점점더 많아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100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들에게 분쟁 지역 내로 들어오기 전에 통지할 것을 요구하며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중국과 일부러 통지하지 않고 비행을 강행하는 미국 간의 타협 여부가 초기 사례로 부각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방공식별구역을 지정하고 쟁점화하면서 얻은 게 있다. 또 미국은이를 준수하지 않는 것처럼 보임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 결국은 기나긴 게임이 될 것이다. - P80

중국은 자국의 상품들이 전 세계로 전달되는 항로 대부분의 경비를 미국이 담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미국의 영향력이 중국에 지나치게 근접하지 않는 선에서의 얘기다.
물론 논쟁의 소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은 때로 민족주의를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양측은 타협점을 찾을 것이다. 다만 서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하거나 지나친 도박을 걸 경우 사태는 위험해진다.
이 경우에도 발화점은 있다. 미국과 대만이 맺은 조약에 따르면, 중국이 자국의 23번째 성으로 주장하는 대만을 침공할 경우 미국은 개입하게 되어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촉발할 임계점은 미국이 대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경우나 대만의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아직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이 지역의 수평선에서 중국군이 쳐들어오는 장면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 P81

미국 제5함대는 바레인에 있는 기지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도 콘크리트 블록의 한 조각이어서 미국은 섣불리 포기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카타르의 원유가 미국의 불빛을 밝히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데 더 이상필요하지 않게 됐을 때 미국 국민과 의회는 물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바레인에 기지가 필요한가?" 만약 대답이 단지 "이란을 견제하기위해서"라고만 하면 이는 논쟁을 불식시키기엔 역부족이다. 특히 이란의 핵 보유 문제를 두고 테헤란 정부와 협상하려는 오바마 대통령을 두고 보면 더 그렇다. - P82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정책은 파나마운하의 개방을 연장하고, 파나마 운하의 대안으로 떠오른 니카라과 운하의 이해득실을 따지고, 브라질이 세력을 키워 카리브 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경우를 대비해 지속적으로 주시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겠지만 쿠바에서만큼은 카스트로 사후 내지 공산당 이후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려고 갖은 공을 들이고 있다. 쿠바와 플로리다의 근접성,
(비록 혼합된 것이지만) 역사적 관계, 그리고 중국의 실용주의로 볼 때 미국이 새로운 쿠바에서 반드시 지배 세력이 될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프리카에서도 미국은 천연자원을 찾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중국이 선점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주의자들과의 싸움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도 지상에서9천 미터 이상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지나친 개입은 피하려고 한다. - P83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미국은 약소국들과 부족들의 정신력과 지구력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물리적 보안과 통합이라는 자국의 역사 때문인지 미국은 자신들의 민주적이고합리적인 논쟁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족, 아랍, 또는 무슬림이 됐든 기독교도가 됐든, 타협과 각고의 노력, 심지어 투표를 통해 인간 본연의 뿌리 깊은 타인에 대한 역사적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미국은 사람들이 하나로 통합되고싶어 한다고 전제한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경험적으로 떨어져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데도 말이다. 이는 인류의슬픈 현실이지만 시기와 장소를 막론하고 역사에서 자주 드러났던불행한 진실이기도 하다. 미국의 행동들은 당장은 진실을 밑바닥에감춘 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젖힌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다고 이 현실이 일부 교만한 유럽 외교관들이 믿고 싶은 대로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을 나약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미국인들은 "할 수 있다."와 "고칠 수 있다."는 입장을 더욱 견지하는데 이생각이 늘 맞아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 P84

지구상에서 가장 성공을 거둔 이 나라는 이제 에너지 자급자족마저 - P84

이룰 참이다. 여전히 탁월한 경제 대국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나토국가들의 방위비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국방력 증강과 발전에 투입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인구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고령화하지 않았다. 201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25퍼센트가이민을 갈 경우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같은 해, 상하이 대학은 전문가들이 뽑은 세계 최고의 대학 20개를 발표했는데 그가운데 17개 대학이 미국에 있다.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세기도 훨씬 전에 이중의 의미가 담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은 바보들과 주정뱅이들, 그리고 미국에게 특별한 섭리를 베푸신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 P85

근대 세계는 좋든 나쁘든 유럽으로부터 나왔다. 이 광대한 유라시아대륙의 서쪽 전초 기지는 계몽주의를 탄생시켰고 이는 산업혁명의모태가 되어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고마워하거나 혹은 비난할 수 있다. 유럽이라는 지리적 위치를 말이다.
걸프 만이 키워준 <기후의 축복>을 받은 이 지역은 대규모 경작에적합한 강수량과 생육에 좋은 토양을 지녔다. 이 같은 조건은 이 지역 인구가 느는 데 일조했다. 한여름은 물론이고 사시사철 일할 수 있으니 인구가 느는 건 당연하다. 겨울 또한 실질적으로 덤을 제공했다.
기온은 실내에서 일할 수 있을 만큼 온화하고 어떤 지역에서는 골칫거리 오염원인 세균들이 살 수 없을 만큼 춥기 때문이다. - P90

서유럽에는 진정한 의미의 사막이 없다. 빙하는 일부 북쪽 지역에한정돼 있는데다 지진이나 화산, 대규모 홍수 또한 드물다. 하천들은길고 평탄해서 선박을 띄워 교역하기가 좋았다. 여러 바다나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들은 서쪽, 북쪽, 남쪽의 연안지대로 흘러가면서 천연 항구를 여럿 만들었다.
알프스의 눈사태로 고립되었다거나 홍수로 넘친 다뉴브 강물이 빠지기만을 기다린다는 소식을 접하다 보면 실상 유럽의 <지리적 축복>도 그리 대단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지구상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볼 때 유럽이 상대적으로 축복받은 곳임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최초로 산업화된 민족 국가들이 세워지고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전쟁을 수행케 한 요인들이 되었다. - P91

그렇다면 왜 이 지역에 유독 많은 민족 국가들이 존재하는가? 유럽전체를 놓고 볼 때 눈에 띄게 많은 산맥과 강, 계곡들을 보면 이내 납득이 간다. 미국은 하나의 지배 언어와 문화 덕분에 발전이 빠를 수밖에 없었으며 거기에 적극적으로 서쪽으로 진출한 덕분에 거대 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반면 유럽은 기본적으로 천 년 이상의 시간을 두고 천천히 성장해온데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리적, 언어적으로 분리돼 있다. - P91

일례로 이베리아 반도의 다양한 민족들은 피레네 산맥 때문에 프랑 - P91

스 쪽으로의 진입을 방해받았고 따라서 수천 년의 세월을 두고 차츰안으로 모여들어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형성했다. 그런데 오늘날카탈루냐 지역의 독립 요구가 점점 높아가는 스페인조차 완전한 통일 국가로 보기는 어렵다. 또 프랑스도 피레네 산맥, 알프스 산맥, 라인강, 대서양 같은 천연 방벽으로 인해 형성된 나라다.
베오그라드에서 다뉴브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바 강을 제외하면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왜 유럽에 상대적으로 소규모 국가들이 많은지 이를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어떤 면에선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이런 양상은 각 하천 유역마다 적어도 하나의 주요 도시를 발전시켰다. 그리고여기서 성장한 일부 도시가 수도들이 되었다. - P92

그 길이가 2,858킬로미터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다뉴브 강은 이를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다. 다뉴브 강은 독일의 블랙 포리스트(BlackForest, 독일 남서부 삼림지대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흘러 흑해로 간다.
이 여정을 거치는 동안 무려 18개 나라에 영향을 주는 다뉴브 연안은그 자체로 천연 국경을 형성한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그리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국경선이 그것들이다. 2천 년도 훨씬 전에 다뉴브 유역은 로마 제국국경의 일부였다가 이후 중세에 들어와서 주요 교역로로 정착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오늘날의 수도들인 비엔나, 브라티슬라바(슬로바키아의 수도), 부다페스트 그리고 베오그라드(세르비아의 수도)가 다뉴브유역에 탄생했다. 한편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두 개의 제국인 오스 - P92

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민족 국가들로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다뉴브 지역의 지리, 특히 최남단의 지리를 보면 북유럽평원의 큰 나라들에 비해 왜 유독 이지역에 상대적으로 작은 나라들이 많은지 수긍이 간다. - P93

서유럽 국가들은 일부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다. 북쪽이남쪽보다 일찍 산업화를 이룬 덕분에 경제적인 성공도 그만큼 크게이루었다. 서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유럽의 심장부를 이루는데 이 덕분에 교역 라인을 지속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는 곧 한 부자 이웃이또 다른 이웃과 교역을 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와 달리 스페인은교역을 하려면 피레네 산맥을 넘거나 아니면 포르투갈과 북아프리카같은 제한된 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 P94

북쪽 국가들의 프로테스탄트 노동 윤리가 그 나라들을 보다 높은수준의 번영으로 끌어올린 반면, 남쪽에는 그곳의 지배적인 가톨릭정서가 그 지역을 퇴보시켰다는 이론은 이견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나 또한 바이에른 지방의 뮌헨을 방문할 때마다 이 이론을 새삼 떠올린다. 차를 몰고 가다 BMW, 알리안츠생명, 지멘스 본사의 휘황찬란한 사옥들을 지나치다 보면 어찌 그 이론에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독일 인구의 34퍼센트가 가톨릭 신자이고, 특히 바이에른은 가톨릭이 지배적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종교적 편향성이 남유럽 지역의 발전은 물론이거니와 그리스인들이 일을 더하고 세금을 더 내야한다는 주장에 딱히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 P94

북유럽평원 지역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지리적 이점을 가장 많이누리는 나라는 뭐니 뭐니 해도 프랑스일 것이다. 유럽에서 북쪽과 남쪽을 전부 아우르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국은 프랑스 말고는 없다.
프랑스에서 서유럽에 면한 지역에는 광대하고 비옥한 대지가 펼쳐져있을 뿐 아니라 상당수의 강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 서쪽으로 쭉 흘러가다 대서양에 이르는 강이 있는가 하면(센강), 남쪽을 흐르는 론 강은 지중해로 흘러들어간다. 이 지리적 특징은 상대적으로 평탄한 지형과 어우러져 특히 나폴레옹 시대부터 지역 통합을 이루고 권력을중앙으로 모으는 데 적합했다. - P95

물론 현재의 상황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라고 믿을 만한 이유들이없지는 않다. 그러나 갈등의 잠재적 거품들이 수면 아래서 보글보글피어오르고 있다. 게다가 유럽인들과 러시아인들 간의 긴장은 언제갈등을 유발할지 모른다. 그 적절한 예가 역사와 지리적 형태 바꾸기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폴란드의 대외정책이다. 현재 폴란드는 평화를 구가하고 있고 이제는 3천8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한, 유럽연합 내에서도 대체로 큰 국가로 자리 잡고 있는데도 말이다. 물리적으로도 폴란드는 대형 국가군에 속하며 철의 장막 뒤에서모습을 드러낸 뒤로 경제 규모 또한 두 배나 늘었다. 그런데도 미래의안위를 도모하는 데에 여전히 과거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북유럽평원의 통로는 북으로는 폴란드의 발트해 연안과 남으로는카르파티아 산맥의 초입 사이, 즉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군의 편에서 보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지점은 없다.
또 공격자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로 진격하기 전에 병력을 바짝 집결할 수 있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 P100

독일과 러시아의 지리적위치에 결부된 폴란드인들의 경험으로 인해 바르샤바 정부가 이들 나라와 자연스레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없는건 당연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폴란드 독일을 유럽연합과 나토의 틀 안에 묶어두기를 원한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목격한 폴란드인들은 코앞에 있는 러시아에 대한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공포를 떠올렸다. 수세기동안 폴란드는 밀물과 썰물처럼 러시아가 제 땅에 드나드는 것을 보아왔다. 소비에트 제국 말미에 마지막 썰물이 빠져나간뒤이 나라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과의 균형추로서 영국과 폴란드와의 관계는1939년의 뼈아픈 배신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회복되었다. 당시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할 시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이 시작되자 독일의 전격전(기습 공격)에 대한 응답은 교착전, 소위 앉은뱅이 전쟁이었다. 영국과프랑스 양동맹국은 독일이 폴란드를 삼키는 동안 팔짱을 낀 채 마지노선 뒤에 앉아 있었다. 이러한 쓰라린 기억에도 불구하고 영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확고한 편이다. 물론 1989년 새로이 해방된 폴란드가찾아 나선 주요 동맹국은 미국이지만. - P101

이 긴장감은 저 위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뻗어 올라간다.
덴마크는 이미 나토에 가입했고, 최근 스웨덴에서는 근 2세기 동안이어온 중립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을 촉발한 계기는 2013년 한밤중에 러시아 제트기들이 스웨덴에 모의 폭탄을 투하한 사건이었다. 당시 스웨덴 방공망은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제트기들의 출현을 감지하는 데 실패했다. 정작 러시아 전투기들의 궤적을 감시하고 영공을 지킨 측은 덴마크였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나토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 여전히 우세하다. 이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모스크바는 스웨덴이든 핀란드든 어느 쪽이든 나토에 가입할 경우 응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 P103

앞서 봤듯이 프랑스는 유럽의 기후와 교역로 그리고 천연 국경선의수혜를 가장 많이 누리는 최적의 위치를 점한 나라다. 하지만 프랑스는 현재 독일 땅이 된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로 인해 지리적으로 완전히 보호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독일이 단일 국가가 아닐 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러시아에서도 꽤 멀고,
몽골 유목민들과도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있으며, 영국과는 해협이가로막고 있다. 이는 곧 전면적인 공격 시도나 프랑스 전 국토에 대한점령 시도는 격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프랑스는 모스크바 턱밑까지 치고 들어가 세력을 과시할 수 있었을 정도로 유럽대륙에서는 막강한 나라였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고 말았다. - P104

독일이 처한 지리적 위치라는 딜레마와 호전성은 흔히 독일 문제로알려진 상황을 야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이후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을 뒤로하고 유럽이 이에 대한 해답으로 삼은 것은 유럽 땅에서 유일한 압도적인 세력, 즉 나토 설립을 주도하고 향후 유럽연합의 태동을 가능케 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거였다.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러나 미군에 의해 보장받은 안전으로 유럽인들은 경이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바로 서로를 믿으라는 요구를 실천하는 것이었다. - P106

유럽연합의 설립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하도록 서로를 꼭 끌어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생각은 멋지게 들어맞았고 이윽고 세계 최대의 경제권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리적 공간이 태어났다.
무엇보다 이 국면은 1945년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한때 그토록 두려워했던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게 된 독일에게 보탬이 되었다.
독일은 유럽 최고의 제조업 국가 자리에 올랐다. 독일은 평원 너머로 군대를 보내는 대신, 일류를 상징하는 <메이드 인 저머니 Made inGermany〉 상표를 붙인 상품들을 보낸다.  - P106

독일은 선량한 유럽 국가로 남아 있기로 했다. 독일인들은 유럽이분열되면 자신들에 대한 해묵은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 것이라는 걸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특히나 현재로선 8천만 명의 인구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서 인구로 보나 경제 규모로 보나 가장 큰 유럽 국가이니 더욱 그렇다. 실패한 유럽연합은 독일 경제에도 좋을 것이 없다.
세계 3위의 수출 대국인 독일로서는 가장 가까운 시장이 보호주의로인해 분해되는 것이 반갑지 않다. 2015년 여름에 그리스를 두고 벌어진 골치 아픈 논쟁 이후 유로존 국가들이 진정한 재정 연합을 이루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독일이 이끌어간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이제껏 유럽에서 볼 수 없었던 회원국들 간의 예산 공유 같은주권들을 일정 수준 단일 체제 안에 모으는 형태가 요구될 것이다. 만약 이 작업이 진행된다면 여전히 독일이 통솔하는 연방화한 유럽 국가들과 나머지 국가들로 구성된 이른바 <서로 상반된 경제 양상이 동 - P108

거하는 유럽>의 윤곽이 보다 선명해질 것이다.
그 역사가 채 150년이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민족 국가는 유럽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강대국이 되었다. 특히 경제 부문에서의 영향력은 독보적이다. 독일은 나긋나긋한 목소리 한편으로 유로화라는무기를 내세우며 으름장을 놓는다. 전 유럽대륙은 독일을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독일은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대외정책에서만은 얌전하기 그지없다. 가끔은 아예 실력 행사 자체를 혐오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그림자는 여전히 독일에 드리워져 있다. 미국과서유럽은 소련의 위협 때문에 결국은 독일의 재무장을 용인해 주려했다. 하지만 독일은 거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무장을 했으며 그나마 갖고 있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조차 꺼린다. 독일은 코소보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미약한 역할만을 담당했으며 리비아 사태 때는 아예 뒤로 물러앉아 있었다. - P109

대서양을 마주보는 대륙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술수들을 지켜보는영국은 때론 유럽 대륙에 발을 들이밀기도 하고 때론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택하면서 향후 유럽에서 자기들보다 더 강한세력이 부상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하기야 아쟁쿠르 전투와 워털루 전투 또는 발라클라바 전투의 주인공이 영국이었던 만큼 유럽 외교가에서도 이를 부인키는 어려울 것이다.
영국은 할 수만 있다면 유럽연합 내에서 프랑스독일 동맹 사이에끼어들려고 한다. 만약 이 시도가 실패하면 영국이 동의하지 않는 사안에 반대하고 나설 만한 보다 작은 나라들과의 동맹을 모색한다. - P110

현재도 영국인에게는 <위대함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남아 있다.
이 기억에 따르면 세계가 그렇게 되길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영국은 그것을 해야 할 나라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생각은 여전히 많은 영국인들에게 설득력을 지닌다. 영국은 유럽 가운데 남아 있으면서도 여전히 유럽 바깥에 있다. 그리고 이것은 해결해야 할 숙제다.
영국을 유럽연합의 바깥쪽으로 자꾸 내모는 두 가지 쟁점은 서로연결돼 있다. 그것은 바로 <주권>과 <이민자 문제다. 일부 유럽 통합회의론자들의 지지를 받는 반유럽연합 정서는 유럽연합이 정하는엄청난 분량의 법률과 그 내용에 반발한다. 하지만 회원국들간의 합의의 일부이므로 영국도 이를 준수할 수밖에 없었다.  - P112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몰려오는 경제적 이민과 난민의 물결 속에서영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반유럽연합 정서 또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영국인들은 다른 유럽연합 국가들이 더 많은 이민자들을 영국으로 보내려 한다고 믿고 있다.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은 최근 유럽이 겪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더욱 깊어지고 있다. 그 영향은 대륙 전체에 걸쳐 우파 정당의 약진등 범민족주의에 반대하는 일체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유럽연합이라는 구조도 약화시킨다.
유럽의 전통적인 백인 인구는 점점 고령화되어 가는 추세다. 현재인구 추계가 다수의 노인 인구가 상부를 차지하고 이들을 돌보거나세금을 내는 젊은이들은 적은 역삼각형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너무빠르게 변해가는 세계를 보는 영국 토박이 주민들의 반이민 정서 기세는 누그러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 P113

유럽인들은 이제 방위 비용을 진지하게 다시 계산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쓸 돈이 그리 많지 않은 상태라 그들은 어려운 결정에 직면해 있다. 이 결정을 놓고 토론을 벌이던 그들은 묵혀두었던 지도를다시 꺼내들었다. 그리고 외교관들과 군사 전략가들은 샤를마뉴, 나폴레옹, 히틀러, 소련의 위협은 사라졌을망정 북유럽평원과 카르파티아 산맥 그리고 북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역사학자 로버트 케이건은 미국 VS. 유럽 Of Paradise and Power』에서,
서유럽인들은 낙원에서 살고 있지만 일단 그들이 권력의 세계로 이동하고 나면 더 이상 그 낙원의 법칙에 따라 운영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로존 위기가 진정되면서 우리는 낙원을 둘러보게 된다. 옛날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불과수십 년 만에 얼마나 많은 것이 변했는지 역사는 말해 주고 있다. 그리고 지리는 인류가 〈지리의 법칙>을 극복하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하지 않는 한 그 법칙들이 우리를 이길 거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속하는 영토로서 지역적으로 연속하는 영토를 여전히 두고 있다. - P116

1998년에 헬무트 콜이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했던 경고도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마지막 세대의 총리로서 그는 전쟁이 초래한 공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2012년콜은 독일의 최대 일간지인 <빌트Bild>에 기고한 글에서, 재정 위기를겪는 현재의 유럽 지도자들 세대가 전후 유럽인에게 맡겨진 <서로간의 신뢰>라는 실험을 성공시킬 가능성이 여전히 낮은 건 사실이라고썼다.
"특히 전쟁 시절을 겪어보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맞은 이들은 유럽의 통합이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유럽은지난 65년 이상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려왔다. 비록 우리 앞에는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와 난관이 있지만 해답은 그것밖에 없다. 평화 말이다." - P117

러시아는 넓다. 가장 넓다. 아니 넓다 못해 광활하다. 면적이 무려 1천7백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며, 표준시간대 time zone 또한 무려 11개나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나라다. 이 나라의 숲과 호수, 얼어붙은 툰드라, 스텝, 타이가, 산맥 또한 마찬가지로 넓다. 이 어마어마한규모는 오래도록 우리의 집단의식에 스며들어 있었다. 어느 쪽으로가도 러시아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러시안 베어 Russian Bear가산다.
그러고 보면 이 광활한 나라의 상징이 곰이라는 것은 순전한 우연이 아니다. 이 땅에 웅크리고 앉은 곰은 겨울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그러나 험악하게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곰이라는 러시아 단어가 있지만 정작 러시아 사람들은 이 짐승을 그렇게 부르는 것을꺼린다. 그 이름에 내포된 어두운 부분을 두려워해서다.  - P122

이 곰의 속내를 알아내고픈 작가들이 흔히 인용하는 유명한 말이있다. 1939년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관찰하고 나서 이런말을 했다. "러시아라는 <수수께끼>는 <미스터리>라는 포장지로 여러겹 싸매져서 <불가사의 > 안에 있다." 그러나 이 말이 제대로 완성되려면 몇 마디 더 덧붙여져야 한다. "하지만 열쇠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국익이다." 이 말을 한 지 7년 뒤에 처칠은 이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본인의 답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확신하건대, 강인함만큼 러시아인들이 경외하는 것은 없으며 나약함보다 경시하는 것은 없다. 특히 군사력에서 말이다."
처칠의 말은 겉으로는 민주주의라는 망토를 두르고 있으면서 안으로는 국익 추구라는 권위주의 잔재가 남아 있는 현 러시아 정권에도 여전히 해당된다. - P123

러시아 입장에서 이는 <양날의 칼>이다. 폴란드는 러시아가 군대를이동시켜야 할 때는 상대적으로 좁은 통로지만, 반대로 적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시킨다. 그런데 V자가 넓어지기 시작하는지점부터 러시아 국경까지 거리는 장장 3천2백 킬로미터가 넘는다.
게다가 모스크바와 그 너머는 평지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대군이라해도 전선 전체를 효과적으로 방어하는 데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러시아는 어찌 보면 이 전략적 깊이 덕분에 이 방향으로부터정복당해본 적이 없다. 만에 하나 모스크바로 접근해 온다 해도 적군은 이미 길어질 대로 길어진 보급로를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1812년에 나폴레옹이 그랬고 1941년에는 히틀러가 이 실수를 되풀이했다. - P124

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약속한 나라들과협력을 다지는 한편으로 나토의 접근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1999년의 체코공화국에 이어 헝가리와 폴란드, 2004년에는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가 그리고 2009년에는 알바니아까지 나토에 가입한다. 이에 대해 나토는나토대로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했다는 약속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여느 강대국들처럼 러시아도 향후 100년 안에 어떤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1세기 전만 해도 미국의 군대가 모스크바에서 겨우 몇 백 킬로미터 떨어진 폴란드와 발트 해 국가들에 버젓이 주둔하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또한 1989년 베를린장벽 붕괴가 있은 지 고작 15년이 지난 2004년 무렵에 러시아를 제외한 거의 모든 바르샤바조약기구 회원국들이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하리라고 그 누가 생각했겠는가? - P126

러시아는 무역을 장려하고 민족주의를 고취시키면서 유럽의 맹주들 가운데 하나로 세력을 키워갔다. 이제 보다 안전해지고 강력해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발트해 국가들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육로는 물론이고 발트해 방면의 침략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러시아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모스크바를 에워싸는 거대한고리가 형성되었다. 이 고리는 북극에서 시작한다. 이어 발트 해 지역으로 내려와서 우크라이나를 지나고 카르파티아 산맥, 흑해, 캅카스산맥과 카스피해, 우랄 산맥을 두루 돌아 다시 북극권 한계선까지 뻗어 올라간다.
20세기에 공산주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했다. "만국의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 뒤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제국 그 자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에도 러시아는 태평양부터 베를린까지, 북극에서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이르기까지 확장을꾀했다.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미국에 대적할 만한 명실상부한 초강대국 반열에 올라선 것이다. - P129

20세기 후반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돈을 쏟아 부었기만 했지인민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 복마전 경제와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의 패배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러시아 제국의 유럽 경계선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종결됐고 공산주의 이전과 비슷해진 형태로위축되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반反공산주의 무슬림 게릴라들을 소탕하려는 당시 아프간 공산정권의 지지하에 이뤄졌지만 정작 아프간 국민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희열을 알게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늘 그랬듯이 이는 만일의 사태를 막기위해 그 지역의 통제를 공고히 하려는 모스크바 정권의 의도일 뿐이었다. - P133

대양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부동항의 부재>는 늘 러시아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북유럽평원만큼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러시아는 지리적 약점을 지녔지만 그나마 석유와 천연가스 덕분에 더 약한 나라로의 추락만은 모면했다.
일찍이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긴이유도 납득이 간다.
"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라. 누가 되든 그곳을 통치하는 자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꾸준히 싸움을 도발하라. 터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도! 할 수있는 한 페르시아 만 멀리 침투할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인도의 안까지도 깊숙이 들어가라." - P134

붕괴된 소비에트 연방은 15개 국가들로 나뉘어졌다. 소비에트 이념이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한 뒤 보다 논리적인 지도가 등장했다.
이 지도는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분리되는지, 어떻게 저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는지를 산과 강과 호수와 바다를 통해 알려준다. 그런데 이 지리적 법칙에도 예외가 있으니 바로 타지키스탄처럼 이른바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 집단이다. 이들의국경선은 스탈린에 의해 치밀하게 그어졌다. 이를 통해 스탈린은 거대한 소수 민족 집단을 다른 지역으로 유입시킴으로써 각 나라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 P135

혹시 우리가 외교관이나 군사 전략가들처럼 긴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었던 국가들, 그리고 바르샤바조약의군사동맹 이전의 일부 국가들에게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게 여전히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이들 국가들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립 성향, 친서방 그룹, 그리고 친러시아 진영이다.
먼저 중립 성향의 국가들로는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꼽을 수 있다. 이 나라들에는 러시아나 서방과 손을 잡을 명분이 별로 없다.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안보나 무역을위해 굳이 어느 편의 신세를 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친러시아 진영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그리고 아르메니아를 넣을 수 있다.  - P135

다음은 친서방 성향의 국가들로, 지난 시절 바르샤바조약 체제의 일원이었다가 현재는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다.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체코공화국,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나라들이 소비에트 압제 시절 큰 고통을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나라들 외에 조지아, 우크라이나, 몰도바를 더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을 원하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러시아와의 지리적 인접성도 그렇거니와 러시아 군대나 친러시아 군대가 그들 나라에 상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나라 가운데 한 나라만 나토에 가입하더라도 즉시 전쟁이 발발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의 노선을 두고 갈등이 고조되던 2013년 무렵, 모스크바가 이 문제에 유독 심하게 몰입했던 것도 이 같은 현실을 설명해 준다. - P136

우크라이나의 친러시아 정부가 수도 키예프를 계속 지배하는 한 러시아는 자국의 완충지대가 손상되거나 북유럽평원을 지키지 못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며 부동항인 크림 반도의 세바스토폴항의 임대차 계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하는 등 신중한 중립국의 행보만 보인다면 우크라이나를 용인할 수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러시아에 에너지를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중립적 행보의 폭을 점차 넓혀가는 우크라이나가 괘씸하더라도 그 정도는 봐줄 수 있다. 그런데만약 우크라이나에 친서방 정부가 들어서고 나토와 유럽연합이라는서방의 양대 기구에 가입하려는 야심을 품고 러시아 선박의 흑해 항구 입항에 반대한다면? 한 술 더 떠 우크라이나가 나토의 군함을 받아들이는 날이 온다면? 물론 이는 현재로서는 어불성설에 가깝다. - P137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측을 오가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방에 추파를 던지면서도 모스크바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푸틴이 그를 용인한 것은 여기까지였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대규모 무역협정에 서명을 앞두고조만간 유럽연합 회원 가입으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이 되자 푸틴은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 P137

일종의 레드 라인 (red line, 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푸틴은 야누코비치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자 야누코비치는 유럽연합과의 협상을 깨고 모스크바 쪽과 협정을 맺으려 했다. 결국 이 행태는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다. 특히 독일쪽에서는 전前 세계 복싱 챔피언이었다가 정치가로 변신한 비탈리 클리츠코를 내세웠다. 서방 측은 서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민주 세력을 육성하고 자금을 대면서 지식인 사회와 경제계를 자기들 편으로끌어들이려 했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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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의 모든 것은지리에서 시작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스로를 일컬어 러시아 정교회의 열렬한 후원자이면서 신심이 깊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매일밤 잠들기 전, 신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우크라이나에 산맥을 펼쳐두지 않으셨나이까?"
만약 신이 우크라이나에 산악지대를 펼쳐두었다면 건너편 세력들이 북유럽평원 North European Plain이라는 드넓은 평지를 넘어 그처럼꾸준히 러시아 땅을 침략하고픈 유혹을 느낄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푸틴이라도 달리 선택할 게 없다. 서쪽으로 펼쳐진 평지를 관리하는 정도밖에는. 그리고 이런 사정은 크든 작든 간에 어느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지리적 특성>은 지도자들에게 훨씬 적은 선택지만 주고 이를 조정하고 관리할 여지 또한 생각보다 훨씬 적게 남 - P8

겨둔다. 아테네 제국이나 페르시아 제국, 바빌로니아, 혹은 그 전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는지도자의 사명은 고지대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전쟁, 권력, 정치는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 사는 인간이 거둔 사회적 발전은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뤄졌다. 물론 현대의 기술이 정신적, 물리적 거리를 어느 정도는 줄여줄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게 있다. 지구라는 행성의 70억 인구에게 주어진선택들은 늘 우리를 제약하는 강과 산, 사막과 호수, 그리고 바다에의해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살아가고, 일하고, 자녀를 길러내는 땅이 중요하다. - P9

이 가운데 다른 것보다 유독 중요한 지리적 요소가 따로 있는 것은아니다. 사막이라고 산악지대만큼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강도정글만큼이나 중요하다. 지구상의 서로 다른 지역의 서로 다른 지리적 특성들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는 지배적인 요소들에 포함된다.
넓게 말하면, 지정학 geopolitics은 지리적 요인들을 통해 국제적 현안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산맥 같은 천연의 장애물이나 하천망의 연결 같은 물리적 지형뿐 아니라 기후, 인구 통계, 문화지역, 그리고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성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치, 군사 전략부터 시작해서 언어, 교역, 종교 등을 포괄하는 인류의 사회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명의 여러 국면에 중대한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 P9

실제로 역사를 다룬 저술이나 오늘날 국제문제를 다룬 보고서들에서 자주 도외시되는 것이 바로 국내외 정치의 근간을 이루는 <물리적 현실이다. 확실히 지리학은 <무엇〉 못지않게 <왜>라는 질문의 근간을 이룬다. 중국과 인도를 예로 들어보자. 엄청난 인구를 보유한 이두 대국은 상당히 긴 국경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정치나 문화는 공통점이 많지 않다. 물론 이 두 공룡 국가들 간에 몇 차례마찰이 있었던 것도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다만 1962년에 국경 분쟁으로 근 한 달간 지속됐던 전쟁 이후로 두 나라는 부딪힌 적이 없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바로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산이 두 나라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는 데 있다. 군대가 히말라야를 관통하거나 넘어서 진격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현대 기술이 좀더 정교해지면서 이 장애물을 정복할 방도도 나오고는 있지만 이 물리적 장벽은 여전히 두 나라 사이의 충돌을 막는 억제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중국과 인도는 서로에 대한 감시는 게을리하지 않으면서도 대외정책은 주로 다른 지역에 집중하고 있다.
한 나라나 국제 정세에는 개개의 지도자들의 성향과 이념, 기술 말고도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일시적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낸물리적 장애물, 우기에서 비롯된 난관들, 천연자원이나 식량자원에대한 제한적인 접근 등은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는다. - P10

코소보(세르비아의 자치주로 있다가 2008년 2월 17일 독립을 선언)의 이바르강River Ibar이야말로 최적의 사례다. 1389년에 벌어진 코소보폴레 전투를 계기로 오스만 제국은 세르비아 지배를 공고히 했다. 전투는 코소보 중북부에 위치한 도시 미트로비차를 흐르는 이바르 강 근처에서 벌어졌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 말레시하산악지대에서 내려왔고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이바르 강 뒤로 점점밀려나기 시작했다. 18세기 중반에 이르자 이 지역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의 차지가 되었다. 20세기로 넘어가서도 대략 이바르 강을 경계로 뚜렷한 민족적, 종교적 구분이 잔존했다. 그러다가 1999년, 나토군의 공습 지원을 받으면서 코소보 민족 해방군이 진격하자 세르비아군은 이바르 강을 건너 퇴각했다. 그러자 그 지역에 남아 있던 세르비아계 대다수가 이내 그들에게 가세했다. 현재 이바르 강은 코소보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하는 일부 국가들에게는 사실상의 국경으로받아들여지고 있다. - P11

이미 미군 전투기들은 카불로 진출할 통로를 트기 위해 마자르에샤리프 동부의 춥고 먼지 풀풀 날리는 평원과 언덕에 있는 탈레반과알카에다 진지들에 폭격을 퍼붓고 있었다. 몇 주가 지나자 북부동맹군이 남부로 이동할 채비를 갖추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때 상황이돌변했다.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강력한 모래폭풍이 몰려와서 주변을 온통 누런색으로 물들여 버렸다. 폭풍의 최정상에서도 몇 미터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분명한 사실은 미국의 최첨단 위성 기술도 이 척박한 땅의 기후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점이었다. 부시 대통령과 합동참모본부는 물론 북부동맹의 지상군 부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저 손을놓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사방을 뒤덮었던 모래가 이제는 모든 것을 진창으로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비는 어찌나 세차게 쏟아지는지 우리가 머물고 있던 오두막이통째로 진흙에 녹아내린 것 같았다. 날은 개었지만 남쪽으로의 진격은 〈지리의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정지되었다. 한니발도, 손자도,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인정했던, 이른바 <지리의 법칙>은 이렇듯 현대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 P13

시리아가 전면적인 내전 상태로 접어들었을 때 나는 한 언덕에서서 하마 시의 남쪽 계곡을 조망하고 있었다. 저 멀리 작은 마을 하나가 불타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곁에 있던 시리아 친구들이포탄이 날아오고 있는 지점을 가리켰다. 작은 마을로부터 약 1.6킬로미터쯤 떨어진 보다 큰 마을이었다. 그러면서 설명하기를, 만약 한쪽편이 다른 편 사람들을 계곡 바깥쪽으로 밀어낼 수만 있다면 계곡을통해 이 나라의 유일한 고속도로로 이어지는 다른 지역과 연결될 수있을 거라고 했다. 게다가 만약 시리아가 원상회복이 안 될 경우 이길은 향후 작은 자치주를 설립할 만한 인접 영토를 확보하는 데 요긴할 거라고 덧붙였다. 이전 같았으면 불길에 휩싸인 작은 마을만 보았을 테지만 이제는 그것이 상징하는 전략적 중요성을 볼 수 있게 된 나는 가장 기본적인 물리적 현실이 정치 현실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똑똑히 깨달을 수 있었다. - P14

먼저 중국의 경우, 국제적인 해군력 없이는 패권국이 되기 어려운현실에 대해 살펴볼 것이다. 드넓은 땅을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 년을 써버린 중국은 이제는 막강한 대양 해군력을 구축해 해양 강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남중국해를 비롯해 여러 해협에서 치르고 있는영유권 분쟁은 <해상 수송로>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보여준다. 러시아는 이 나라에 미치는 북극의 영향부터 시작해서 왜 이 나라가 진정한 강대국이 되기 어려운지 그 지리적 제약 조건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러시아는 한마디로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했다고 볼수 있다. 미국을 다룬 장에서는 주요 지역들에서 자국의 영토를 확장했던 기민한 결정들과 어떻게 그 나라가 오늘날 두 대양을 아우르는초강대국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는지를 지리적 측면에서 조명해볼것이다. 미국은 특히 다른 어느 곳보다 기후와 <지리의 축복>을 많이받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 P15

인류 역사에서 지리적 특성을 결정적인 요인으로 보는 것은 한편으론 암울한 세계관으로 인식될 수 있다. 일부 지식인들은 자연이 인간보다 훨씬 강한 존재여서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에 반감을 표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인류사에 분명히 영향을 미치는 다른 요인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현대 기술이 철옹성처럼 단단한 지리의 법칙을 깨트리고 있음을 안다. 현대의 기술은 일부 지리적 장애물들의 위 또는 아래를 관통하는 길을 찾아냈다. 미국인들은 이제 미주리 주부터 이라크 모술까지 급유를 위해 착륙하지 않고도 단번에 폭격 임무를 수행하는 비행기를 만들어 냈다. 이는 항공모함(전투단)까지 더해지면 굳이 동맹국이나 식민지 없이도 단독으로 범세계적인전개를 시도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미국이 인도양에 있는 영국령 디에고 가르시아 섬에 공군 기지를 건설하거나 바레인에 - P17

있는 항구에 영구적으로 접근할 수만있다면 더많은선택지를 얻는셈이다. 그러나 이는 문제의 본질이 아니다.
인터넷이 그랬던 것처럼 공군력이 다른 방식으로 이 법칙을 바꾸고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지리는, 그리고 어떻게 각 나라들이 각자의지리적 특성 안에서 형성돼 왔는가의 역사는 오늘날은 물론 미래 세계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부분이다.
이라크와 시리아 간의 분쟁이 지리적 법칙을 무시한 유럽 식민 세력의 무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면, 중국의 티베트 점령은 오히려 지리의 법칙에 순응한 것이다.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미국의 대외정책조차 이 지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또 가장 최근에 초강대국들이 대치하는 세력 투사 행위 (해상 기지, 즉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해상 전력을일시에 진입시키는 일종의 상륙 작전 행위)들도 자연 혹은 신이 부여한 법칙들을 완화시키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법칙들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논의는 세계 초강대국이자 강력한 해양 대국을 꿈꾸는 중국부터 시작하겠다. 그들은 현재끊임없이 영토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거대한 당사자다. - P18

2006년 10월, 1천 피트급 미국 항공모함 키티 호크Kitty Hawk 호가 이끄는 초대형 항공모함 대대가 일본 남부와 대만 사이에 있는 동중국해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해군잠수함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미 항공모함 군단 사이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보통 그 사이즈의 미국 항공모함이 이동할 때는 대략 12대의 다른전함들이 에워싸고 공중은 물론 잠수함의 엄호도 따른다. 중국의 송클래스 Song-class 잠수함은 동력이 전기라 매우 조용할지는 모르지만그럼에도 이 행동은 마치 펩시콜라의 경영자가 코카콜라 사 회의장책상 밑에 숨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몰래 엿듣다가 벌떡 일어선 거나마찬가지인 사태였다. - P22

현재 한족은 중국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면서 중국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는 만다린어, 광둥어 및 다른여러 지방 언어들로 나뉘지만 민족적으로 하나로 묶여지며 정치적차원에서도 심장부를 지키려는 지정학적 욕구를 통해 하나로 묶여있다. 북부에서 유래한 만다린어는 현재까지 정부는 물론 국영 방송과 학교에서 사용하는 주요 언어다. 만다린어는 문자로 썼을 때는 광둥어나 여타 다른 언어들과 같은데 다만 발음할 때는 현저히 달라진다.
북중국평원은 정치, 문화, 인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농업의 중심지다. 이 지역에 무려 10억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 면적은 3억 2천2백만 명이 사는 미국의 절반 크기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 심장부의지형이 정착과 농경생활에 적합했던 관계로 초기 한족 왕조들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민족들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용맹한 유목민 전사들을 보유한 몽골은 항상 두려운 존재였다. - P25

한일각의 기대와는 달리,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와 마오쩌둥이이끄는 공산당 군대는 1949년까지 중국 땅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결국 공산군에 패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했다. 그 해 베이징라디오 방송국은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해방군은 모든 중국 영토를 해방시킬 것이다. 여기에는 티베트와 신장, 하이난, 그리고 대만도 포함된다."
마오쩌둥은 기존의 그 어떤 왕조도 성공한 적이 없는 권력의 중앙집중화를 달성했다. 그는 내몽골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몽골 내에서 베이징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951년에는 한족 땅이 아니었던 또 다른 광활한 지역 티베트를합병했다. 그러자 중국 학생들의 교과서에는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에까지 확대된 중국의 지도가 실리기 시작했다. 중국은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오는 이 확대된 중국의 영토를 수호하고 인민의삶 모든 영역에서 공산당의 주도권을 공고히 다지는 데 나머지 생의대부분을 바쳤다. 그러나 이 정책은 한편으로 바깥 세계와의 단절을불러왔다. 특히 연안 지역과 멀리 떨어진 지역은 여전히 극심한 빈곤에 시달렸다. 물론 통합은 지속되었다. - P29

이렇게 하여 티베트에 도달한다. 여기서 중국에게 티베트가 왜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인도 국경을 내달리다 하강해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걸쳐 있는 카라코람 산맥이 된다. 히말라야는 중국에게는 훌륭한 <천연의 만리장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도의 뉴델리 쪽에서 봤을 때는 <인도판만리장성>이기도 하다. 세계 최대 인구를 보유한 두 나라는 히말라야를 가운데 두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나라는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를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인도 측은 중국이 자국의 악사이친을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히말라야라는 천연의 장벽 꼭대기에서 상대편을 향해 포신을 겨누고 있다 하더라도 일련의 대규모 산악전으로까지 번졌던 1962년의 무력 분쟁을 재현하는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음을 양측은 알고 있다. 긴장이 여전히 상존하는 한 양측은 신중하게 이 상황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 - P33

인도가 티벳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되는데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이 있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티베트를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사실 관건은, 인도가 중국의 강물 공급을 중단시키고 싶은가가 아니라 과연 인도에게 그럴 능력이 있는가이다. 수세기에 걸쳐 중국은이런 일만은 절대로 발생하지 못하도록 해왔다. 배우 리처드 기어와자유티베트운동Free Tibet Campaign은 티베트에 대한 중국의 부당한점령을 줄곧 규탄해 왔고 이제는 한족의 티베트 정착 정책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달라이 라마, 티베트 독립운동 단체, 할리우드 스타들과 세계 2위의 경제대국과의 싸움은 그 결과가 불을 보듯 뻔하다.
- P34

리처드 기어가 됐든 오바마 대통령이 됐든, 서구인들이 티베트 문제를 거론하면 중국은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한다. 위험하다거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것도 아닌데도 신경질적으로 반응한다. 중국인들은 티베트 문제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보다는 <지정학적 안보>의 틀에서 본다.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중국의 안보를 침해하려 한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중국의 안보가 저해된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티베트에서 한족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인구학과 지정학이 티베트 독립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 P34

정확한 수치를 얻기는 힘들지만 자유티베트운동에 따르면, 오늘날보다 넓은 티베트 문화권에서 티베트인은 이미 소수로 전락했다고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공식적인 티베트 자치구에서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티베트인이라고 말한다. 사실 양측의 주장 모두 과장된측면이 있지만 중국 정부가 좀 더 과장하고 있다는 근거는 있다. 중국정부가 밝힌 수치에는 거주민으로 등록하지 않고 있는 한족 이주민수가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티베트 도시 지역을 점유하고있는 이들이 주로 한족이라는 것은 거리만 걸어 다녀도 알 수 있다.
예전에는 만주와 내몽골, 신장 지역 주민의 대다수는 만주족과 몽골인, 그리고 위구르족이었다. 그러나 이 세 지역의 대다수도 중국계한족이 점하고 있거나 적어도 다수에 근접해 가고 있다. 그리고 티베트라고 예외가 아니다. - P36

마지막으로 시곗바늘은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주로 산악 지형을 이룬 키르기스스탄을 돌아 카자흐스탄과 마주보는 국경에 도달한다. 뒤를 돌아 북쪽의 몽골로 이어지는 지역을 보면 이곳이 과거 중앙아시아 지역의 왕국들과 세계를 잇는 육상 무역의 다리 역할을 했던 고대의 실크로드임을 알 수 있다. 이론상으로만 보면 산맥과 사막사이에 낀 이곳은 중국 방위에서 허약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카자흐스탄이 중국을 위협할 입장도 아니고 러시아 또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카자흐스탄 국경의 남동부는 평온할 틈이 없는 반semi 자치구인중국령 신장 지구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터키어와 비슷한 언어를쓰는 위구르족이다. 신장 지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까지 합해 무려 8개국에 이른다.
예나 지금이나 신장 지역은 잠잠할 날이 없다. 위구르족은 1930년 - P37

대와 1940년대 두 번이나 동투르키스탄Fast Turkestan이라는 이름으로독립국가를 선포한 적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목격했고 그 결과로 <스탄으로 끝나는 소비에트 시절의 이웃들이 주권 국가로 재탄생한 것도 지켜보았다. 티베트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이들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외치고 있다.
2009년, 이 지역에 대규모 민족 분규가 발발해서 2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지역에 대한 베이징의 대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둘째 그 지역에돈을 쏟아 붓기, 셋째 꾸준히 한족 노동자들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독립운동의 불길을 방관하기에는 중국에게 신장 지구는 전략적으로 몹시 중요한 곳이다. 이곳이 8개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고, 그래서중국 심장부의 완충지 역할을 하고 있어서만이 아니다. 다량의 원유가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국 핵무기 실험장도 이곳에 있다. - P38

그러나 중국이 이 땅을 포기할 리 없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신장에서도 독립으로 향한 창문은 닫혀가고 있다. 두 지역 모두 완충지이며 한 곳은 육상 무역의 주요 통로다. 또한 중요한 것이 비록 소득수준은 낮지만 두 지역 모두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해서 대량 실업을 막으려는 중국 정부에게는 상품의 생산지이자 시장으로도 기능한다는점이다. 만약 이 정책이 실패해서 이들 지역에서 주민들의 소요가 확산되기라도 하면 이 사태는 공산당 지배와 중국의 통합에 심각한 위18-45협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에 반대한다.
자유로운 선거권이 주어지면 한족의 단결은 깨어질지 모른다. 더 나아가 지방과 도시 간에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 P39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들 간에 체결된 계약은 현세대에게는 유효하다. "우리가 당신들을 잘살게 해줄 테니 당신들도 우리를 따르라."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는 한 이 계약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발전이 멈추거나 상황이 역전될 경우 이 계약은 종료된다. 부패와 무능에 반발해 현재에도 종종 일어나는 시위와 분노의 수위는 당과 인민 간의 계약이 깨졌을 때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가늠케 하는 표본이다.
중국 공산당에게는 또 다른 골칫거리가 있다. 바로 그 많은 인구를먹여 살리는 능력이다. 중국 농림부에 따르면현경작지의 40퍼센트가 오염됐거나 나무를 솎아낸 토양이라고 한다.
중국은 곤경에 직면하고 있다. 근대화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산업화를 멈출수 없지만 이 과정에서 정작 식량 생산이 위협받고 있다.
중국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불안감은 더욱 증폭될 것이다. - P41

드넓은 땅을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 년을 써버린 중국은 이제는 대양 해군력을 구축하고 있다. 지역 해군이 영해를 순시하고 대양 해군은 대양을 순시한다. 현재의 경제 발전 속도를 감안해 보면, 중국이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해상 수송력을 자랑하는 미 해군에 필적할만한 능력을 갖추려면 3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중단기적으로 보면 현재 중국이 해군력을 구축하고 군사들을 훈련, 교육시키고 있는 중이니 중국 해군이 대양에서 경쟁자들과 맞닥뜨릴 일이 머지않아 있을 걸로 보인다. 특히 중국과 미 해군 사이에 벌어질수 있는 충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금세기 강대국 외교의 향방이 결정될 것이다.
지금 중국의 젊은 해군 병사들은 우크라이나의 고물 집적소에서 건진 중고 항공모함에서 훈련을 받는다.  - P42

중국은 점점 더 많은 선박들을 자국의 연안뿐 아니라 태평양으로내보내고 있다. 미국도 이 점을 모르지 않는다. 또 중국 해군이 육상기지를 기반으로 한 대함미사일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또한 알고 있다. 언젠가는 미 해군이나 그 동맹국들이 남중국해를 통해,
아니 중국해라 이름 붙여진 모든 바다에서 항해하는 것이 두 배로 어려워질지도 모른다. 그동안 중국의 우주 탐사 기술도 발전을 거듭해미국과 그 동맹국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속속들이 감시할 수 있게 될것이다.
이제 육상 국경 주변에서 동쪽과 남쪽,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남서쪽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이곳 바다 밑에서 중국은 잠수함을타고 따라잡기 게임을 펼치고 있다. 미국 항모전단에 바짝 다가와 수면 위로 불쑥 올라올 수는 있겠지만 현재 중국의 잠수함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적의 잠수함을 사냥하기에는 지나치게 소음이 크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중국군은 대잠함정 (적의 잠수함에 대한 초계, 수색, 공격을 주 임무로 하는 함정)을 도입하는 한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수중 센서망을 구축하느라 분주하다. - P41

인도양과 벵골 만의 항구들은 중국의 미래를 공고히 다지는 보다큰 계획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미얀마 서부 해안부터 시작해서 벵골만을 지나 중국 남서부로 들어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이는 에너지 공급량의 거의 80퍼센트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것에 불안을 느낀 베이징 정부가 그 의존도를 줄여보려고 고안해낸방법이다. 중국이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얼마간 이해되는 것은 2010년 미얀마 군사정권이 조금씩 바깥 세계를 향해 문호를개방하기 시작했을 때 이 나라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나라들 가운데 중국이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미얀마와 잽싸게 우호 관계를 수립했고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미얀마 정부에 개인적인 호감을 표하기까지 했다. 이들 나라가 미얀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면 중국을 지속적으로 견제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지금까지 중국은 지구라는 거대한 체스판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게임에서선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미국이 미얀마 정부를 신뢰하는한 워싱턴은 미얀마를 수호하는 한편 언제고 중국을 이곳에서 밀어낼 수 있다. - P52

중국은 케냐에도 항구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앙골라에는 철도를, 에티오피아에는 수력 발전용 댐 건설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은 광물과 귀금속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업들과 노동자들도 세계 곳곳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군대도 슬그머니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큰 힘에는 큰책임이 따르는 법이다. 중국은 오직 미국만이 전 세계의 치안을 담당 - P52

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면 언젠가는 중국도 행동에 옮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중국 노동자들, 다수가 연루된 자연재해나 테러 또는 인질 사건이 발생한다면 중국 정부도 마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응하려면 전진기지라든지 적어도 중국군이 그 나라의 영토를 통과할 수 있는 승낙이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현재 족히 1천만 명은 되는 중국인들이 전세계에 퍼져 있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경우에는 거대한 중국인 노동자 단지까지 형성돼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향후 10년 내에 좀 더 기민해지고자 안간힘을 쓸 것이다.
2008년 쓰촨성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중국 정부는 피해 현장에 인민군 부대를 투입해서 그럭저럭 복구를 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군대를이동시킬 수는 있지만 군수품은 쉽지 않다. 신속하게 해외로 이동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도전이다. - P53

는 것은 훨씬그러나 이런 국면 또한 바뀔 것이다. 전 세계와 상대하는 중국은 인권 문제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외교적, 경제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중국은 확고한 국경과 중국 본토와 1천 킬로미터 떨어진 제1선이라는 끈을 꼭 쥔 채 당당하게 세계를 누비고 있다. 만약 일본이나미국과의 마찰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게 유일한 위험은 중국 자신밖에 없다.
중국이 성공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14억 가지는 된다. 또한 중국이 미국을 넘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없는 이유도 14억 가지는 된다.
1930년대에 미국에 몰아친 대공황 같은 사태가 중국에서도 발생한다면 중국은 수십 년은 후퇴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세계 경제라는 틀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가 물건을 사지 않는다면 중국은 만들지 않는다. - P53

위치.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만약 당신이 복권에 당첨돼서 살고싶은 나라에 땅을 사고 싶다고 해보자. 부동산 중개인이 가장 먼저 소개해 주는 곳은 바로 미합중국이리라.
마크 트웨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는 엉터리 기사를 언급했지만,
그라면 미합중국이 종말을 맞을 거라는 과장된 기사에 대해서도 할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멋진 동네다. 경치도 좋고 인공 폭포도 몇 개 있다. 교통망도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그렇다면 이웃들은? 이웃들 또한 하나같이훌륭해서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이곳의 생활공간을 좀 더 세부적으로 쪼개본다면 그 가치는심각하게 하락하고 만다. 특히 임차인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임대료도 저마다 다른 통화로 지불한다. 하지만 한 가정만 - P58

rninCK D을 위한 집이라면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만 오히려 28개 주권 국가들의 모임인 유럽연합은 결코 이루지 못할 방식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대다수유럽연합 국가들은 미국의 주들보다 훨씬 강하고 분명한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프랑스 사람을 예로 들면, 그는 첫째가 프랑스인이요 유럽인은 그 다음이다. 유럽이라는 개념에 그다지 헌신하지 않는프랑스 사람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반면 미국인은 유럽인과는달리 합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 현상은 미국의 지리적 특성과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 P59

프랑스는 골치 아픈 주인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해결책은 전쟁이 아니었다.
1803년, 미합중국은 프랑스로부터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이 지역은 멕시코 만에서 시작해서북서쪽으로 로키 산맥의 미시시피 강 지류들의 상류까지 뻗어 있다.
이 땅의 면적은 오늘날의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통일 독일을 합친 넓이와 맞먹는다. 신생 미합중국은 이 땅을 흐르는 미시시피 강의 유역을 기반으로 번영으로 가는 길을 닦는다.
1천5백만 달러짜리 서명 하나로 1803년에 미국은 루이지애나를 구입하여 영토를 두 배로 늘렸다. 이는 곧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내륙수로 수송권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의 역사학자 헨리애덤스는 이렇게 썼다.
"미합중국이 투자 대비 이렇게 많은 것을 얻은 일은 이제껏 없었다."
거대한 미시시피 유역에는 전 세계 다른 하천들에 비해 훨씬 긴 가 - P63

항수로들이 많다. 수원이 산악지대에 있지도 않으며, 그토록 광대한거리를 가로질러 대양으로 가는 길 내내 그만큼 차분하게 흐르는 강은 그 어디에도 없다. 풍부한 유역 수계의 공급을 받는 미시시피강은 미니애폴리스 부근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약 2,897킬로미터를흘러 멕시코만에서 끝난다. 이렇듯 강들은 큰 항구로 이어지며, 수상기를 이용한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 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처럼 미국은 지리적으로 전략적 깊이를 확보함과 동시에 방대하고 비옥한 토지, 그리고 사업을 펼치기에 적합한 대서양 항구들이라는 대안을 얻었다. 또한 동부 해안을 새 영토와 연결해 주는 동서 루트를 확보했고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수계는 인구 밀도가 희박한 지역들을 서로 묶어주면서 단일 통합체를 형성하는 데 일조했다. - P64

당시 신생 국가는 거인, 다시 말해 대륙의 강대국이 되고자 하는 의식이 있었다. 미국인들은 점차 서쪽으로 전진하면서도 남쪽을 호시탐탐 엿본 것은 물론 〈왕관에 박힌 보석>인 미시시피의 수호에도 신경 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1814년, 영국은 물러갔고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포기했다. 이제스페인 사람들만 내보내면 됐다. 그리고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스페인은 유럽에서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느라 이미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미국이 세미놀족을 스페인령인 플로리다까지 밀어내자 스페인 본국은 머지않아 정착민 물결이 밀려오리라는 것을 감지했다. 1819년, 스페인은 플로리다뿐 아니라 덤으로 꽤 넓은 토지까지 미합중국에 넘겼다. - P64

루이지애나 구입은 미국 입장에서는 심장부를 얻은 격이었다. 그런데 1819년에 맺은 대륙횡단조약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가치를 안겼다. 스페인은 미국이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인 북위 42도선 위인 극서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 스페인은 그 아래인 미국 영토의 서쪽을 지배한다는 계약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태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즈음 대다수 미국인들은 1819년에 플로리다를 얻은 것을 가장큰 승리로 여겼지만 당시 국무장관인 존 퀸시 애덤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태평양 방향의 경계선을 획득한 것이 우리 역사에 위대한 시대를 열게 한다."
그런데 스페인어 사용자들과 관련된 또 다른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멕시코였다. - P65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그 위협은 제거됐다. 그리고 1962년소련과의 분쟁에서는 소련이 마지못해 굴복함으로써 다시 한 번 그위협은 제거됐다. 현재 특별히 쿠바를 지원하는 강대국은 없는 상황이고, 쿠바 또한 문화적으로나 어쩌면 정치적으로도 점차 미국의 영향권 아래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2014년 말, 미국과 쿠바의국교정상화가 선언됐다.)미국은 신속히 움직였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을 확보함으로써 카리브 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와이의 퍼시픽 아일랜드를 합병해서 자국의 서부 해안으로의 안전한 접근을 도모했다. 또한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무역 붐이 일어났다.
이 시기야말로 미국에게는 세계무대로 나선 것 이상을 보여주는 시기였다. 전 세계를 향해 무력시위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 P70

1949년 워싱턴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 즉 나토NATO의 창설을주도했다. 이로써 미국은 독일에 잔류하는 서방 군사력의 지휘권을효과적으로 넘겨받았다. 나토의 민간인 수장은 일년은 벨기에가, 다음해엔 영국이 맡게 되지만 군 사령관은 늘 미국인이 맡는다. 지금까지도 나토의 가장 큰 화력 부대는 미국이다.
조약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나토의 최고사령관은 궁극적으로 워싱턴의 입장과 일치해야 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1956년 수에즈 운하위기 때 운하 지역 점령을 풀라는 미국의 압박에 굴복하고 말았던 경험을 통해 값비싼 교훈을 얻었다. 결국 중동 지역에서 자신들의 영향력 대부분을 상실한 나토 가입 국가들은 우선 워싱턴에 묻지 않고서는 해군 전략을 수립,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토 창립 멤버인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영국, 이탈리아도 자국의기지에 대한 미국의 권한과 접근을 보장해 줌으로써 미국은 태평양뿐 아니라 북대서양과 지중해의 패권까지 쥐게 되었다. 1951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동맹을 맺고 남반구에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 후에는 북쪽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 P73

1991년, 소련이 해체하자 러시아의 위협이 걷혀지는 것으로 보였다. 소련의 붕괴는 무능한 경제, 과잉 군비 확장, 강제 노동 수용소들과 농업 부문의 몰락, 국비 지원 트랙터의 과잉 생산 같은 계획경제에서 비롯된 산적한 문제들을 푸는 것에 실패한 데 따른 결과였다. 최근에 나타나는 러시아의 반발은 미국 측에게는 가시 같은 존재지만 그렇다고 미국의 지배력에 위협을 가할 정도는 아니다. 2014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를 "지역 강국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은 쓸데없이 자극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러시아의 <지리적 감옥의 창살>은 지금까지도 견고하다. 러시아에게는전 세계의 해상 항로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부동항이 여전히 부족하고 전시에 발트 해와 북해 또는 흑해와 지중해를 경유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할 군사 능력 또한 부족하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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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이 불탔다는 이유로 체포됐다. 불이 났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10대 때부터 공산당 운동가였던 리나 하고 Lina Hag의 말이다. 리나는남편도 공산당 청년 모임에서 만났다.
화요일 오후 리나의 아파트 문 앞에 트렌치코트를 입고 회색 모자를 쓴두 사람이 나타난다. ‘악랄한 입과 노르스름한 얼굴도 점점 더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차갑고 불쾌한‘ 소리가 들린다. 경관들은 서두른다. "그들은 내가 점심거리를 불 위에 올려놓았고, 아기를 돌보고 있어서 꼼짝도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라고 리나는 훗날 회고한다. 그들은 상관하지않는다. 경찰들은 리나의 딸을 이웃에 맡긴 후 옷걸이에서 그의 코트를벗겨서 던졌다. 그들은 "가자! 서둘러!"라고 말한다. 리나는 그 경찰들이새 주인들에게 ‘충성‘을 증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들은 죄수들로 감옥을 채워야 한다. 리나의 말대로, "역사상 가장 피를 덜 흘린‘ 혁명에는 희생물이 필요하다."
1933년 2월 28일이다. 전날 밤에는 국회의사당이 불길에 휩싸였다.
"계단을 내려갈 때 아파트 여기저기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닫지만, 소리가 들린다." 거리로 나서자 갑자기 정말 추워진다. 리나는 등 뒤에 꽂히는 시선을 느낀다. 창문마다 그를지켜보고 있다. "뒤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라고 썼다. 경관들은 리나를 고테스첼 교도소로 데려가 독방에 감금한다. - P283

그들은 리나의 남편을 이미 체포했다. 남편 알프레트 하그Alfred Haag는뷔르템베르크 주의회의 공산당 의원이다. 28세의 최연소 의원이다. 리나는 남편을 외국으로 도피시키려고 했지만, 남편은 거절했다. "내가 돌볼노동자들을 두고 떠나? 이제?"라며 남편은 아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새벽 다섯 시에 돌격대원들이 그를 잡으러 왔다. 히틀러가 총리가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들은 장롱을 열어젖히고, 옷들을 꺼내서 집어던지고, 서랍을 뒤집어놓고, 책상을 샅샅이 뒤졌다"라고 리나는 기억했다. 그들은 사실 특별히 무언가를 찾는 게 아니었다. 그저 난폭한 행동을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데려가려고 준비할 때 리나는 남편에게 "당신은 의원이잖아요!"라고 말했다. 돌격대원 중 한 명이 비웃었다. 그는
"의원이라니, 너네도 들었어?"라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어서 하그 부부에게 "너네는 빨갱이잖아! 너희 쓰레기 같은 범죄 조직은 이제 깨끗이처리될 거야!"라고 외쳤다. - P284

리나는 창가에서 돌격대원들이 알프레트를 끌고 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격대원들이 남편을 때리기 시작하는 모습을 봤다. 리나는 어린 딸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지 못하도록 딸을 창가에서떼어놓아야 했다.
리나는 크리스마스 특사 때 풀려난다. 알프레트는 그렇게 운이 좋지 않다. 정치범들끼리 정보를 주고받고, 리나는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게슈타포가 리나의 옛 친구를 뜨겁게 달아오른 난로에 밀어붙여 죽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알프레트 소식도 듣는다. 알프레트는 오베러 쿠베르크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 그곳에서도 체포되기 전과 똑같이 용기 있게 행동했다. 그가 나치 깃발에 경례하지 않겠다고 하자 교도관들은 그를 잔인하게 - P284

다렸다. 교도관들의 강요로 "나는 더러운 놈입니다. 나는 노동자들에게거짓말하고, 그들을 배신했습니다!"라고 외치며 언덕을 기어올라야 했던적도 있다. 알프레트의 얼굴은 피범벅이어서 알아볼 수 없었다. ‘
리나 하그가 체포된 지 몇 주 후 돌격대원들이 마리아 얀코프스키 Mariabeamski의 현관에 들이닥친다. 얀코프스키는 베를린 쾨페니크 구의회의사회민주당 의원이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쾨페니크 본부로 데리고 간다. 그곳의 뜰에서 돌격대원들은 옷을 벗기고 나무판에 눕힌다.
그 후 검정-빨강-금색의 공화국 국기로 덮은 다음 2시간 동안 채찍, 곤봉과 쇠막대기로 마구 때린다. 때리면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의 이름을 대라고 하고, 국기를 "검정-빨강-똥"이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들은 "네가 실직 노동자들을 속였지? 불매운동을 할 나치 관련 기업 목록을 준비했지?"라고 물었다. 얀코프스키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때마다 괴롭히는 사람 중 한 명이 그의 얼굴을 낡은 넝마 조각들 사이로 밀어넣었다.
- P285

얀코프스키는 훗날 "최소한 백 대 이상 맞은 후 난 나무판에서 떨어졌다. 그들이 나를 다시 끌어올린 후 얼굴을 너무 심하게 때려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라고 회고한다. 돌격대원들은 "무엇보다 독일"이라는 구절이 들어간 독일 국가를 부르라고 한다. 1922년 이후 공식적인 국가가되었지만, 훨씬 오랫동안 국가인민당을 상징하는 노래였다.
돌격대원들은 사회민주당을 떠나고, 다시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고, 매주 목요일마다 나치 사무실에 보고하겠다는 각서에 서명하도록 얀코프스키에게 강요한다. 그 후 갑자기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라고 그는 훗날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에게 물 한잔과 옷을 준다. 돌격대 지휘자는 부하 한 명에게 "숙녀를 밖으로 모셔다드려라"라고 명령하고, 정중하 - P285

게 인사한다. 돌격대원들은 얀코프스키를 거리에 두고 간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간다. 그는 간신히 살아남고, 평생 구타후유증으로 고생한다. 그리고 화재 사건 직후 자신이 체포되었던 사실을해외 언론에 알린다. 나치는 ‘잔혹 행위를 거짓 유포한 혐의로 얀코프스키를 기소한다. 2이것이 나치가 "전국 봉기"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1932년 8월에는 잔혹한 포템파 살인사건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아직 많았었다. 이제 1933년봄이 되자 돌격대원들은 법적인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리나 하그는 "눈길을 돌리는게 낫다. 이렇게 아름답고 행복한 독일에서 그렇게 많은 걸 보는 일은 좋지 않다"라고 쓴다. - P286

히틀러가 총리가 되고,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경찰을 장악한 게 무슨의미인지 곧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1933년 2월 초부터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평화주의자, 지식인과 언론인, 예술가, 인권운동가와 그들의 언론 등 나치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겨냥해 법적 조치를 하거나 경찰을 동원하는 일들이 꾸준히 일어났다. 2월4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경찰이 정치 집회를 해산하고, 단체 결성을 금지하고, 언론을 폐쇄하는 광범위한 권력을 가질 수 있는 법령에 서명했다. - P286

2월27일의 국회의사당 화재가 그렇게 중요해졌다. 히틀러 정부는 총선거를 다시 치르기 엿새 전에 국회의사당 본회의장에서 일어난 화재가 테러범의 방화이자 공산주의자 폭동의 서막이라고 주장했다. 다음 날 아침, 비상사태를 이용해 공식적으로는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 긴급명령‘, 비공식적으로는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알려진 긴급명령을 내각이 통과시키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서명했다. 이 긴급명령은 언론과 집회의 자유, 우편과 전보의 비밀유지, 무단으로 수색·체포구금되지 않을 자유를 단번에 없애버리면서 민주적인 바이마르 공화국 헌법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국회의사당이 불타는 순간부터정부는 전국에서 수천 명을 체포하면서 반대파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은 12년에 걸친 히틀러 독재정권의 법적 토대가 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그 긴급명령을 히틀러 제국의 헌법이라고 불렀다.  - P287

판데르 뤼버가 혼자 행동한 게 아니라면 누군가의 음모에서 희생양이된게 거의 분명했다. 그렇다면 누구의 음모였을까? 공범자가 구체적으로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의문이고, 우리는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1933년 2월의 상황에서 나치가 아니면 누가 경찰이 찾을지도 모르는(아니면 적어도 찾고 싶어 할 흔적을 남기지 않고 여러 공범자를 국회의사당에 드나들게 할 수 있는지 상상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식적인 논쟁 말고도 나치 돌격대의 특정 집단이 범인이라는몇몇 구체적인 증거도 있다. 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1933년에 나치의 비밀경찰 간부였던 루돌프 딜스와 한스 베른트 기제비우스Hans Bernd Gisevius는 돌격대원이었던 한스 게오르크 게베어 Hans GeorgGewehr가 국회의사당 화재의 주범이었다고 증언했다. 게베어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1933년에 그는 돌격대원들 중 방화 전문가로 유명했다. 게베어는 국회의사당에 불이 났던 밤에 어디에 있었는지에 관해 일관성도 신뢰성도 없는 말을 했다.  - P289

한편 돌격대원들은 불을 질렀든 아니든 화재 사건 후 며칠과 몇 주 동안마음껏 폭력을 휘둘렀다. 이러한 폭력, 그리고 그러한 폭력 때문에 생긴공포가 반대파를 억누르고 새로운 정권에 대한 지지를 단단히 확보하는데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그게 집권하기 오래전부터 나치가 생각했던 일이었다. 1932년 8월에 히틀러와 힌덴부르크가 만난 직후, 펜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에르빈 플랑크는 브뤼닝 정부의 국무부 장관이었던 헤르만 핀더 Hermann Prinder에게 히틀러가 총리가 되면 나치가 돌격대를 국회로 보내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몰아낸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말했다. 퓐더는 이를 기록하며 "그뿐 아니다. 헬도르프 백작(베를린 돌격대 지휘관)은 돌격대를 며칠 동안 풀어놓으면 명단에 기록한 5천 명 정도의 반대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해를 끼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라고 썼다. 또한 백작의 말이 사실인지 의심하며 "나는 분명 나치의그러한 행동을 그냥 넘기지 않겠다"라고 썼다. 팬더가 서술한 일들은 국회의사당 화재 이후 실제로 벌어졌다. - P290

결국 나치에게 필요했고, 나치가 계획해 온 계기를 국회의사당 화재가제공했다. 공산주의 쿠데타 미수 사건이 나타났기 때문에 나치가 돌격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폭력 행위가 나타나면 공산주의자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그러려면 적당히 부정직하고 언론조작을 잘해야 했다. 괴벨스의 주된 임무였다.
괴벨스는 1933년 11월의 마리뉘스 판데르 뤼버 재판에서 증언하면서나치가 공산당원의 폭력에 대처했다고 설명하는 사례를 잘 보여줬다. 괴벨스는 1930년에 호르스트 베셀Horst Wessel이라는 나치 돌격대원이 살해당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공산당원이었던 노동자들을 전향하게 해서나치로 많이 데리고 왔던 나치 운동가를 겨냥한 계획적인 암살이라고 했다. - P294

그 시대 독일에는 여론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많은 독일인이 나치의 선전을 받아들였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증거에 따르면, 이미 나치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선전을 믿었고, 나치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브라운슈바이크에 살던 한여성은 3월 초에 네덜란드에 사는 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치가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을지도 모른다고 외국 언론에 이야기해서 사회민주당언론인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어서 "더는 놀랄 필요도 없어.
외국 언론은 언제나 나치에 대한 그런 가짜 뉴스를 퍼뜨리니까"라고 썼다. "독일 국민이 히틀러를 얼마나 사랑하고, 찬양하고, 숭배하는지 어떤 외국인도 아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 P295

괴벨스는 사람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나 히틀러나루덴도르프와 달리, 다른 종류의 정치 선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상업광고를 본떠서 정치 선전을 했다. 괴벨스는 광고가 간단하면서도 어느정도 잠재의식에 파고드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소비자에게영향을 주는 걸 목표로 삼아야 함을 알고 있었다. 그러려면 귀에 쏙 들어오고 기억하기 쉬운 구호가 정말 중요했다. 괴벨스는 뭐든 금방 배우는사람이었다. 히틀러의 이미지를 포장하고 선전하는 기술은 당대 최고의상업광고에 맞먹을 만큼 세련되거나 더 뛰어났다. 23 히틀러가 괴벨스를새로 만든 ‘국민계몽선전부 장관으로 임명하자 독일의 광고 전문가들은(일거리를 잃었다고 생각해서) 어느 정도 실망하기도 했지만,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다. 정부는 그들이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규모로 광고를 해서광고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보여줬다. 광고 전문가들은 괴벨스도 자신들처럼 광고 전문가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 P296

1차 세계대전 경험 때문에 더욱 비합리성을 받아들이게 되기도 했다.
그 전쟁에는 합리적인 면이 하나도 없었다. 기관총의 포화 속으로 천천히걸어 들어간 게 무슨 소용이 있었을까? 죽거나 다친 사람들의 희생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전쟁에서 얻을 수 있었던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4년 내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원초적인 증오를 강조하는 선전을 계속해서 들어야 했다.
히틀러는 의도적인 부정직성, 대중의 비합리성에 대한 걱정, 그러면서도 이러한 비합리성에 빠져들고 싶은 욕망 등이 모든 걸 모두 이용했다.
나치가 역사를 해석하는 열쇠로 인종을 강조하고, 모든 문제의 해답을 인종에서 찾았던 사고방식은 전쟁 전의 비합리성 그리고 전쟁 때의 폭력에서 자라났다. 인종에 대한 나치의 사고방식은 대놓고 반지성적이었다.
"피 끓는 생각"이 나치의 좌우명이었다. - P298

합리성에 대한 거부는 나치 운동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의 극우파 대부분이 정말 중요하게 여겼던 서구 자유자본주의에 대한 거부와 맞물릴때가 많았다. 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의 소설가 토마스 만은 독일 ‘문화‘를 찬양하면서 자신이 깎아내리던 영국과 프랑스의 자유자본주의 ‘문명‘과 비교했다. 그는 나중에 마음을 바꿨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보수 성향 민족주의 작가 에트가어 율리우스 융은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은 "1789년에 거둔 승리의 상징"이었다고 경멸하듯이 썼다.
1789년에 거둔 승리는 다시 말해 프랑스혁명의 자유주의, 민주주의적 가치관을 의미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역시 "계몽주의 운동으로 인해 뒤늦게 유럽 한복판에 등장했다", 독일인은 "전통, 혈통과 역사 정신으로 계몽주의 운동에 반대해야 한다고 융은 말했다."
당대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한 사람들은 나치가 비합리성에 호소하면서어떻게 이득을 얻었는지 잘 알았다. 훗날 미국에서 경영관리 전문가로 유명해진 피터 드러커 Peter Drucker 도 예리한 관찰자였다.  - P299

드러커는 역사학자들이 수십 년이 지난 다음에도 계속 알아내려고 애쓰는 몇몇 나치즘 요소를 직감으로 알아차렸다. 그는 나치와 파시즘의 주장이 자본주의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도 잃어버린 분위기에서자라났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회문제에도 건설적인 해답을 찾을 수 없어서 나치 사상은 그저 모든 것에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상반되는 것을 모두 반대하기까지 했다. 자유주의와 보수주의를 모두 반대하고, 신앙심이깊은 사람과 무신론자를 모두 반대하고, 자본주의자와 사회주의자를 모두 반대하고, 무엇보다 유대주의를 반대했다.
이를 특별히 예리하게 관찰한 드러커는 사람들이 나치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라, 믿지 않는데도 나치즘이 성공했다고 말했다. 그는 "나치에 적대적인 언론, 적대적인 영화계, 적대적인 교회와 적대적인 정부가 나치의세력이 커지는 모습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 P300

나치의 거짓말, 나치가 하는말의 모순 그리고 나치가 얼마나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하는 일은 또얼마나 위험하고 어리석은지 지치지 않고 알려줬다"라면서, "만약 나치의 약속이 합리적이라고 믿어야 나치 당원이 될 수 있었다면 아무도 나치당원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결론을 분명하게 내렸다. 28드러커는 나치 선동가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이 나치 사상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생각했다. "몇 년 전, 농민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환호성을 지르는 곳에서 그가 선언하는 말을 들었다. 그는 ‘우리는 빵값이 내리기를 바라지 않는다. 빵값이 오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빵값이 변하지 않기도바라지 않는다. 우리는 민족사회주의(나치)의 빵값을 바란다‘라고 선언했다." 논리적인 일관성이 없는 분노와 증오가 만족스러운 사회 발전을 결 - P300

코 이뤄줄 수 없었기 때문에, 나치는 이러한 식의 비합리성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나치즘은 "기적을 통해서만 과제를 이룰 수 있었다. 높은 빵값, 낮은 빵값, 변하지 않는 빵값 "모두 실패했다. 그래서 유일한 희망은 이것들과는 다르고, 아무도 본 적이 없고, 이성을 벗어나는 어떤 빵값에 있었다"라고 드러커는 말했다. 그 결과, 빈곤층과 소외계층을 위해 가장 열심히 싸워온 독일인이 대중의 민주주의 역량에 가장 환멸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1930년 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을 때 프로이센주총리 오토 브라운은 민주주의 사상이 실패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보다 "갑자기어깨에 얹힌 책임감을 감당할 자격을 증명하지 못한 "상당히 많은 독일인"에게 실패의 책임이 있다고 했다.  - P301

1933년 초, 노련한 사회민주당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볼프강 하이네 Wolfgang Heine는 친구 카를 제베링에게 편지하면서 "내가 보기에는 노동자 계급 역시 민주주의에 대한 의지가아직 무르익지 않은 것 같다"라고 썼다. 제베링은 답장에서 "말할 것도없다"라면서 동의했다. 그는 바이마르 헌법 때문에 그러한 결과가 나온게 아니라고 지적했다. "정치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 그들에게 주어진권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였다. 혁명적 사회주의자 에른스트 톨러 Ernst Toller는 1933년에 추방당한 후 완성한 우울한 자서전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은 이성에 지쳤다. 생각하고 성찰하는 일에 지쳤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성이 무슨 역할을 했는지, 통찰력과 지식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의문스러워 했다." 관찰력이 뛰어난 정치 전문 기자 콘라트 하이덴 역시 독자들이 나치가얼마나 진실을 외면하는지를 파악하게 하고 나치의 거짓말에 잘 대응하게 이끌지 못하는 자신에게 좌절했다.  - P301

히틀러가 실제로 의회 토론에 참여한 건 이날뿐이었다. 사회민주당 대오토 벨스 Otto Wels 는 일어나 반대 의견을 말했다. 나치의 돌격대원들과 친위대원들이 사회민주당 의원들을 협박하고, 많은 좌파 의원들이 이미투옥되어 구타와 고문, 죽임까지 당하는 상황에서 벨스는 유창하고 감동적일 뿐 아니라 용기 넘치는 연설을 했다. "상대가 우리의 명예를 노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는 언젠가 나치에게 고스란히 되돌아갈것이며, 전 세계적인 비극에도 우리의 명예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라면서, "자유와 생명은 뺏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명예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치의 정치 깡패들이 조롱하면서 비웃고, 큰소리로 욕설과 협박을 퍼붓는 가운데 벨스는 히틀러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수권법도 영원불멸한 신념을 파괴할 힘을 당신에게 주진 못합니다... 우리는 박해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우리 나라의 우리 친구들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들의 확고한 신념, 애국심은 칭송을 받아 마땅합니다.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용기, 굳건한 믿음이 더 밝은 미래를 보장합니다"라고 연설을 마무리했다.  - P309

그날 늦게 투표를 했고, 사회민주당 외의 모든 정당은 수권법에 찬성표를 던졌다. 14년 동안 공화국의 정신적 지주였던 중앙당 그리고 오랜 자유주의 정당인 독일인민당과 독일민주당이 모두 나치의 기세와 위협 앞에서 그들의 원칙을 버렸다.
하인리히 브뤼닝은 2차 세계대전 후 그와 몇몇 독일 국회의원들이 수권법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고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했다고 주장했다. 수권법의 지속 기간을 6개월로 제한하면서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빼앗은 시민의 자유를 되돌려주는 법률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이었다.
포츠담의 날에 가르니존 교회 행사 직전, 국가인민당의 원내 대표 에른스트 오베르포렌이 브뤼닝에게 이 계획을 이야기했고, 다음 날에는 오베르포렌의 친구 오토 슈미트 하노버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와 저녁을 먹을때 브뤼닝을 초대했다.  - P310

브뤼닝은 수권법이 2차 심사에 부쳐져서야 이를 깨달았다. "모든의석 뒤에 나치 친위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슈미트 하노버가 지나가면서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라고 브뤼닝은 회고했다. 슈미트 하노버는전날 밤 모임이 누설되었고, 자신은 감시당하고 있으며, 법률 개정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권법의 진짜 의미는 국회가 히틀러 정부에 4년 동안 입법권을 준다는것보다는, 히틀러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뜻과 상관없이 권력을 휘두를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다. 보수주의자들이 히틀러를 견제하던 보장책 중하나가 단번에 사라졌다. 이후 넉 달 동안 법치주의와 자유 같은 다른 보장책들도 대부분 무서운 속도로 사라지고, 히틀러의 권력은 거침없이 강화되었다. - P311

대도시 베를린은 거의 완전히 박살났고, 독일 대부분을 외국 군대가점령했고, 독일인 수백만 명이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에서 사망했다. "우리가 1933년에 하고 싶었던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습니다. 총통님!"이라는 몬케의 말은 진지했다. 히틀러도 동의하는 듯했다. 그리고 놀라운이유를 댔다. 1년 반만에 너무 빨리 권력을 잡아서 옛 체제가 아직 너무많이 남아 있었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가 아직 살아있을 때 권력을 잡았고, 기성 보수주의자들과 협상해야 했다. "여기저기에서 타협해야만 했지"라고 그는 불평했다. 믿을 수 없는 관리들을 많이임명해야만 했고, 그 때문에 정보가 자주 밖으로 새어 나갔다고 설명했다. 히틀러는 또 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 슐라이허 그리고 사실 "이러한해충들 주변의 모든 패거리"에 "인정사정없이 책임을 물을 계획을 세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권 18개월 후에는 자신의 태도가 훨씬 너그러워졌고, 어쨌든 독일의 경제·정치 상황이 크게 좋아지고 있었다고 했다. 히틀러는 "너무 친절했던 걸 나중에 후회했지"라고 말했다.
재임 초기에 대한 그 자신의 평가(친절해서 잘못되었다는)는 완전히 틀렸다. 총리가 된 후 18개월 동안 히틀러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기성 보수 세력이었다. 그들만이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권력의 지렛대를 조절해서 히틀러를 총리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만이 히틀러를 제거할수도 있었다. 51기성 보수 세력, 그리고 히틀러 모두 이 사실을 알았다. - P313

히틀러를 지키는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부대원들이 보르지궁을 장악한다. 힘러의 친구로 게슈타포 고위 관리인 안톤 둔케른이 지휘하는 부대다. 친위대 정보 조직인 보안대(SD)의 사복 장교도 그곳에 있다. 베를린보안대 우두머리인 헤르만 베렌츠가 지휘한다. 친위대원들은 외부와 연결된 전화선을 모두 끊어버린 후 사무실 문마다 무장 경비병을 배치한다. "
파펜의 직원들은 조심스럽고 침착한 태도로 상황을 받아들인다. 헤르베르트 폰 보제는 "오늘 우리 모두 딱 걸렸는데"라고 동료들에게 썰렁하고 으스스한 농담을 한다. 다른 직원은 무력 저항은 하지 말자고 하면서할 수 있는 일은 오직 ‘의연히 버티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하인리히 힘러가 직접 습격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제는 "좋은 조짐이 아니다"라고 무미건조하게 말한다. 동료들을 안심시키려고 태연한 척하지만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아차린다. 보제는 ‘최악의 경우를 생각해 가족에게 전해달라며 동료들에게 서류 가방, 도장이 새겨진 반지, 지폐 조금 등 자기 물건을 건넨다. - P319

그러나 히틀러가 권력을 얻자 융은 갑자기 신념을 바꿨다.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융이 보기에 나치는 그저교육받지 않은 대중의 의견이 세상에 달리 표출되었을 뿐이었다. 융은 폭력적이고, 법을 무시하고, 정직하지 않고, 반지성적이고, 기독교 원리를무시하는 나치를 경멸했다. 또 자신이 《열등한 자들의 지배》라는 제목의유명한 책을 쓴 걸 후회한다고 말했다. 13 어느 날에는 사회민주주의자 기자에게 "이제 사회민주주의자 누구하고도 팔짱을 끼고 싶다" 라고 말했다. 융이 1933년 2월에 친구 루돌프 페헬에게 쓴 편지의 한 구절이 가장주목할 만하다. 루돌프 페헬은 《도이체 룬트샤우Deutsche Rundschau, 독일 전망》이라는 지식인층 대상 보수 성향 잡지의 편집장이었다. 융은 "이 사람이권력을 잡은 데는 우리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어. 우리가 그를 제거해야해"라고 썼다.  - P323

사실 융의 생각은 1929년 정도부터 상당히 미래지향적인 방식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그는 유럽 국가들의 소수자 권리와 관련된 문제의 해결책으로 연방제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1924년에는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융이 유럽 대륙의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킬 방법으로 새로운 형태의 유럽연방을 구상했다는 사실이 더욱더 놀랍다. 15 프랑스 외무부 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이 꿈꾼 유럽과 그리 다르지 않다. 다만 융은 하나의 정치 연합체가 아니라 연방국가가 모인 연방 형태의 유럽을 구상했던 것 같다. 16그러나 융의 저돌적인 성격이나 낡은 사고방식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나치가 너무 제멋대로이고, 너무 대중적이라는 생각 때문에도 나치를 싫어했다. 또 기독교가 독일과 유럽 정치를 구성하는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생각했다. 융은 나치의 폭력적인 반유대주의에 반대했지만 생각이 진보 - P323

적으로 바뀐 건 전혀 아니었다. 유대계 독일인이 탄압받는 건 그들 자신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한편 융은 철강왕의 재정 지원을 받는 사람으로서 정치적인 글을 쓸 때 기업가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항상 신경을 썼다. 그러나 나치를 비판할 때는 두려움 없이 공격하고, 대놓고 빈정거릴때가 많았다. 17 1933년 6월, 그와 가톨릭 신자인 그의 친구 에트문트 포르슈바흐Edmund Forschbach는 베네딕토회인 마리아 라흐 수도원에서 열린 가톨릭 학술 모임에 참석했다. 그들은 그곳에서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나치의 전체주의 방식 그리고 의회민주주의와 정당을 없애버린 방식을 찬양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융은 모든 정당이 없어져야 한다면 왜 나치는 없어지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이제 정당들이 사라진 나라에서분명 나치도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 말을 듣고 나치 지도자가 "저녀석을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보내야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 - P324

부총리실 집단의 계획대로 되려면 파펜이 곧장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연락하는 게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머무는 노이데크 집을 급히 찾지 않도록 설득했다. 부총리실 참모들은스스로 좌절감에 빠져 있었지만, 파펜부총리는 히틀러의 말을 고분고분들으면서 더는 연설 내용을 퍼뜨리지 말라고 직원들에게 명령하기까지했다. 그다음 파펜은 며칠 동안 베를린을 비웠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을만나러 동쪽으로 간게 아니었다. 북쪽의 킬과 함부르크를 거쳐 베스트팔렌에서 가족 모임에 참석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실수를인정하는 일이 거의 없던 파펜이 1934년 6월의 기회를 놓치는 실수를 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인정했다. 그러나 파펜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났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 P339

다음 날, 게슈타포가 융을 체포하고 그의 아파트를 뒤졌다. 게슈타포는 웅이 파펜의 마르부르크 연설문을 썼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연설문 원고료로 파펜이 융에게 얼마를 줘야 할지 말다툼하면서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였다. 파펜은 융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스트팔렌에서 날아와 융을 풀어주려고 했다. 그러나 히틀러도 괴링도 파펜을 만나주려고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파펜이 "그의 융 선생 때문에 " 자신을 만나려고한다고 로젠베르크에게 경멸하듯 말했다. 그러면서 히틀러 자신이 직접명령해서 융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혔다. 게슈타포의 우두머리 하인리히 힘러는 융이 왕정 복귀를 주장하는 ‘오스트리아의 왕정복고주의자‘ 집단과 관련되었다는 몇몇 유죄 입증 자료를 찾아냈다고파펜에게 말했다. 이 문제를 처리해야 하지만, 융은 며칠 안에 풀려날 것이라고 힘러는 약속했다.  - P343

히틀러는 총통 겸 총리‘라는 공식 직함을 얻었다. 모든 군인과 공무원은 히틀러에게 개인적으로 충성을 맹세해야 했다.
이제 히틀러가 독재통치를 할 수 있는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졌다. 그를통제하거나 길들이려는 노력은 모두 완전히 실패했다. 제도적인 기반이있어야 정치적으로 제대로 맞설 수 있다. 1934년 늦여름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당, 노동조합, 국회, 내각, 연방주와 돌격대 모두 힘을잃었다. 군대만 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대 규모를 늘리기만 하면 장교와 병사들은 만족했다. 1934년 8월부터 시곗바늘이 전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영국과 미국을 물리치고, 독일이 동유럽에서 거대한 땅을 차지하면서 경제 강국이 되기 위한 전쟁이었다.
그렇다고 융과 보제의 희생이 모조리 헛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본보기로 저항세력이 계속 나타났다. 1938년에 비슷한 집단(군대와 보수파정치인들)에서 시작되었고, 시간이 흘러 히틀러 암살을 모의한 발퀴레 작전으로 이어졌다. - P347

"무슨 일이 있어도 계획대로 쿠데타를 해야 한다. 실패하더라도 쿠데타를 시도해야 한다. 실제로 성공할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일 저항운동 조직이 세계와 역사 앞에서 목숨을 걸고 결정적인 시도를 했다는 게 중요하다. 다른 모든 건 상관없다"라고 트레스코는 말했다."
융과 보제도 슈타우펜베르크, 트레스코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확실히 결함이 있는 영웅이었다. 자신이 속한 계층, 배경과 시대의 편견에서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히틀러를 제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고, 목숨을 잃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그렇게까지 하면서 히틀러를 집권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갚았다. 암흑의 시대에 목숨을 걸었던그들의 용기 덕분에 독일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도덕적 토대를 가지게되었다. - P348

언론인들은 종종 복잡한 정치 과정을 간단한 공식으로 줄이려고 한다. 그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선거‘나 ‘항의 투표현 정치에 불만을 표하기 위해 비주류후보에게 던지는 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가 왜 무너지고, 히틀러와 나치가 어떻게 권력을 잡았는지 간단한공식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나치 운동은 1차 세계대전 그리고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에 겪은 유럽의 각종 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이 시기에는 유럽 전역, 특히 패전한 나라들(패전한 것처럼 느꼈던 이탈리아에서도)에서 비슷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한편 나치가 그 시대에 잘 맞기는했지만, 1932년까지도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후 히틀러가 그렇게 권력을 - P348

차지하리라고 미리 내다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 사람도 거의 없었다. 히틀러가 권력을 차지하는 데는 분노와 증오만큼, 계산착오와 근시안이 많은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없었다면 나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지점을 살폈다. 패전의 충격 가운데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전쟁에 대한 특정 이야기를 믿었다. 명백하게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정서적으로 필요해서였다. 독일인 대부분은 1914년 8월의 태양 아래 나라가 멋지게 하나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배신과 비겁함 때문에(등을 찔려서) 1918년 11월의 차가운 빗속에서 패전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의 어느 부분도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나치는 8월과 11월을 끊임없이 대조하면서, 11월의 반역을 물리치면 하나되었던 8월로 돌아갈 수 있다고 약속했다. 국민이 과거를 어떻게 믿고 있는지는 과거가 실제로 어떠했는지 이상으로 중요하다. - P349

지는 과거가 실세.
사실 독일은 영국과 미국, 프랑스의 압도적인 경제력에 기진맥진했다.
1차 세계대전 후 서구의 세계 질서에 적응할지, 저항할지가 독일인에게던져진 질문이었다. 독일의 안과 밖은 동전의 양면처럼 연결되어 있다는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세계에 통합되고 이웃 국가와 평화롭게 지내는 독일이 곧 민주적인 독일이다. 세계를 향해 날을 세우는 독일은 전례 없이무자비한 독재국가가 된다.
초인플레이션 그리고 히틀러의 1923년 11월 비어홀 폭동 시도로 최고조에 올랐던 5년간의 정치·경제 위기를 겪은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새로운 민주주의가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한 가운데 독일은 국제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돌아왔다. 용기 있고 능수능란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정치인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슈트 - P349

레제만은 국내의 극우 민족주의자들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들은 평화를 추구하는 세계에서 독일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그가 극복해야 할장애물이었다.
독일의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반민주적인 민족주의자들은 점점 더 필사적으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대기업은 노조를 약하게 만들고, 국가가 관리하는 임금 중재 제도를 없애고 싶었다. 군대는 무기 구매 비용을 더 확보하고 싶었다. 농부들은 독일 농업을 집단 파산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하는 농산물 수입과 무역 협상을 중단시키고 싶었다. 불만의 뿌리는 같았다. 세계에서 독일의 위치가 1차 세계대전 패배 그리고 영국과 미국의 경제력으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기업·군대·농부들은 똑같은 해결책을 들먹였다. 독일의 최대 정당인 사회민주당(군국주의에 반대하고, 국제 협력을 좋아하고, 민주주의·노동자·도시를 수호하는)의 권력을 빼앗는 일이었다. 이는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를 끝내고, 농부·군인·대기업 경영자들을 위한 새로운 정치 기반을 찾는다는 뜻이었다. - P350

바이마르 공화국은 다른 종류의 분노와 증오로도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독일 국민은 온갖 이유로 극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시골 사람들은종교, 성 정체성과 도덕의 전통을 깨뜨리는 대도시가 싫었다.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특히 동유럽에서 1차 세계대전 후에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들을 보고 불안해졌다. 기독교와 가톨릭 집단 모두 전쟁과 혁명으로 인한스트레스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심해졌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불만이 특히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신교도들 사이에서 합쳐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너무 유대인과 가톨릭의 세력이 강하고, 너무 현대적이고, 너무 도시적이고, 결국 도덕적으로 너무 타락했다고 느꼈다. 반유대주의 같은 문화코드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향한 불만을 실제 이상으로 표현한다. 반유 - P350

대주의 때문에 독일의 민주주의가 끝장나거나 히틀러가 등장한 건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는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들이 몹시싫어하는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비판할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18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뒤집으려고 했던 집단 중 히틀러 같은 인물이통치하는, 야만적이고 무법적인 독재정부를 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저 각자의 문제를 가장 쉽고 빠르게 해결하고 싶었을 뿐이다. 또한 반대 세력과 타협하는 게 죽도록 싫었다. 나치가 불만세력, 특히 농촌 지역신교도의 분노를 가장 잘 포섭한다는 걸 증명하면서 정치 방정식이 바뀌었다. 1929년 이후의 어느 정도 세력 있는 반민주연합에 히틀러와 나치가 빠진 적이 없었다. - P351

그들의 관심사는 유권자의 과반수 표는커녕 최다 득표도 이끌어낼 수 없어서였다. 반면 히틀러는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군대를 재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을까? 독일의 보수적인 정치 엘리트는 점점 더 히틀러와 협력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히틀러와 나치 운동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지 않으면자신들이 자기 이익을 너무 많이 포기해야 했다.
장검의 밤은 히틀러를 향해 주류 정치인들이 추파를 보낸 일의 결말이었다. 후겐베르크에서 브뤼닝, 펜과 슐라이허, 융과 보제까지 보수주의자들은 차례차례 허를 찔리고, 밀려났다. 그들은 적잖이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배신당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위대한 지휘관이자 통합의 주역으로서의 명망을 지키면서 우파 민족주의 정부를만들겠다는 대단히 중요한 목표를 이루려고 노력했다. 결국, 힌덴부르크 - P351

는 한때 ‘보헤미아 졸병‘이라며 무시했던 히틀러에게 사로잡혔다. 그러고는 히틀러가 1930년대 초의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고, 자신의 명망을 지켜줬다고 믿으면서 평온하게 눈을 감았다. 사실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총리로 임명하는 바람에 자신이 그렇게 노심초사하며 지키려고 했던 명망을 분명히 그리고 영원히 망쳐버렸다.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종말은 갈수록 배타적인 음모론과 비합리성에 치우치는 문화 속에서, 거대한 반정부 운동이 엘리트들의 복잡한 이기주의와 결합한 결과였다. 바이마르에서의 민주주의 종말을 이국적인 나치 깃발, 다리를 높이 들어 올리는 돌격대원들의 행진과 분리해 바라보자. 갑자기 모든 게 가깝고 친숙해 보인다.
바이마르 시대 독일 정치가들은 대체로 교활했지만, 이상할 정도로 순진한 면이 있었다. 최악의 가능성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P352

문명국가에서는 히틀러에게 투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히틀러가 총리가 되자 수백만 명의 독일인은 그의 재임 기간이 짧고, 힘이 없을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은 법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데다 문화적인 나라였다. 독일 정부가 어떻게 제도적으로 독일 국민을 야만적으로만들 수 있었을까? 유대계 독일인은 독일에 깊이 동화되었고, 애국심이넘쳤다. 많은 유대계 독일인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져도 고향인 독일을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나는 독일인이고 독일인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어딘가에 숨어 있다"  라고 빅토르 클렘퍼러Victor Klemperer는 일기에 썼다. 그는 유대교 랍비의 아들이자 1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로 독일에 머무르기로 했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트레블링카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 바비 야르 학살이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마지막 몇 달 동안 이뤄진 죽음의 행진을 1933년에 상상 - P352

할 수 있었던 독일인은 거의 없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미리 내다보지 못했다고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순진해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도통 몰랐기 때문에 끔찍한 비극이 벌어졌다. 나중에 태어난우리에게는 당시 독일인보다 유리한 점이 한 가지 있다. 그들의 사례를참고할 수 있다는 점이다. - P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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