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에는 정치가 ‘대중적‘이 되었지만, 아직 방송을 잘 이용하지는않는다. 정치인들이 라디오 방송을 이용하기 시작했지만, 잘 활용하는 사람은 아직 거의 없다. 그들은 집회에서 소리치듯 라디오 마이크에 소리를지르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못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의 메시지를 영화와 음반을 통해 퍼뜨리는 실험을 하고 있지만 이 방법들은 아직은 새롭다. 신문과 집회로는 이미 나치 지지자가 된 사람들을 만날 수있다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포스터가 필요하다. 1932년 초, 괴벨스는 히틀러에게 "우리의 전쟁은 주로 포스터와 연설로 치러질 것"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포스터가 놀랍도록 비슷해 보인다. 웃옷을 입지 않고 주걱턱인 근육질 노동자가 손목에 묶인 쇠사슬을 끊는다. "인제 그만!"이라는 글도적혀 있다.  - P207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서는 웃옷을 입지 않은 주걱턱 근육질 노동자가 칼을 들고 있다. 노동자는그 칼로 "나치 독재"라고 표시된 머리 셋 달린 뱀을 벤다. 중앙당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의 포스터다. 또 다른 정치 포스터에도 반쯤 벗은 근육질 노동자가 등장한다.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지만 분명 심한 고통을느끼고 있다. 갈고리 십자가 모양으로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에 그리스도처럼 묶여 있다. 그리고 "하켄크로이츠 제국의 노동자"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사회민주당의 포스터다. 자유주의 성향의 독일국가당독일민주당의 후신은 일부만 벗은 게 아니라 완전히 벗은 근육질 남자를 등장시켜차별화했다. 독일인민당은 최소한 허리에 천은 둘렀다. 스프여성이 등장할 때는 옷을 모두 입고 있다. 얌전한 옷을 입고,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묶고, 꿈꾸는 듯 눈을 반짝이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오른팔을 올리고, 독일국가당과 함께 하는 "통합, 진보와 국가 공동체" 의 미래를 바라본다.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단호해 보이는 두 여성 중 한 명은 미래를 생각하며 웃는다. 나머지 한 명은 침울한 표정으로 "우리 여성"은 민족사회주의당(나치)에 투표하고 있다고 말한다. - P208

브뤼닝은 사실 선거 후 몇 개월 동안 사회민주당에 의존했다. 그가 불황을 이기려고 활용하는 어떤 긴급명령이든 사실 국회의 과반수 투표로 뒤집힐 수 있었다. 하지만 사회민주당이 ‘관용‘이라고 부르는 방침으로 보뤼닝 정부를 거듭거듭 지원했다. 브뤼닝의 정책으로 노동자 계급은 끔찍한 실업과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렇지만 사회민주당은 브뤼닝이 아무리못마땅해도 히틀러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서 지원했다. 브뤼닝이 물러나면 히틀러가 그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고, 히틀러는 최악이 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그렇더라도 ‘관용‘은 고통스러운 방침이었다. 때문에 사회민주당 핵심 지지자 중 많은 수가 화가나고 환멸을 느꼈다. - P210

슐라이허는 나치와 협력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이 왜 나치를 지지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점이 한 가지 이유였다. 나치의 지지 기반은 불안정해서 정부 압력이나 지속적인 반대만으로도 흩어진다고 슐라이허는 생각했다. 또 대다수 나치 지지자가 사실공산주의자이고, 나치가 해체되면 공산당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걱정되는 점은 공산당이 너무 강력해져 제어할 수 없게 되는 일이다. 많은 나치 당원이 공산주의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모스크바‘가 오래전에깨닫고, 그들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고 슐라이허는 의심했다.
또 다른 이유는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완전히 과소평가했다는 점이다.
1939년 전에는 수많은 독일인과 세계 정치인들이 히틀러를 과소평가했다. 1931년 10월에 두 차례 만났지만, 슐라이허가 히틀러를 개인적으로만나도 평가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첫 만남 후 슐라이허는 히틀러가 "연설가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흥미로운 남자"라고만 개인적으로 기록했다. 슐라이허가 나치 지도자에 대해 유일하게 고민한 점은 그가 자신의계획대로 움직일 것인지였다. "그렇다면 실제로 당선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점을 보여줘 그를 유인해야 한다."  - P211

군대식 사고방식을 가진 브뤼닝은 자신을 힌덴부르크 대통령 부하로여겼고, 어느 정도 대통령이 시키는 대로 했다. 자기 정부의 각료들을 우파로 바꾸고, 자신이 외무부 장관을 맡았다. 이전에 국가인민당 소속이었지만 후겐베르크의 극단주의에 반대해서 당을 떠났던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가 교통부 장관이 되었다. 이미 국방부 장관을 맡고 있던 빌헬름그뢰너 장군이 내무부 장관을 겸했다. 그러나 나치는 물론이고, 후겐베르크와 국가인민당의 주요 인물들은 계속 브뤼닝 정부를 반대했다. 브뤼닝은 여전히 국회에서 사회민주당에 의존했고, 따라서 우파가 보기에 프로이센의 상황은 해결되지 않았다. 슐라이허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좌절감도 커졌다. 16브뤼닝의 엉뚱한 충성심은 자신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재선을 위해 쉬지 않고 노력하는 바람에 총리 자리에서 빨리 물러나게 되었다. - P215

힌덴부르크는 은혜를 모르는 어린아이처럼 선거 결과로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는 조금이지만 선거운동을 해야 했고 두 차례나 선거를치러야 했다며, 히틀러나 후겐베르크가 아니라 브뤼닝을 비난했다. 힌덴부르크의 불만은 계속 쌓였다. 실직자들을 동프로이센의 파산한 농촌사유지에 정착시키는 방안이 불경기를 이겨내기 위한 브뤼닝의 구상 중 하나였다. 힌덴부르크가 동프로이센 노이데크의 할아버지 집에서 지냈던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귀족 지주들은 그 구상을 정말 싫어했다. 힌덴부르크와 가까운 사람들은 브뤼닝 총리를 "농업 볼셰비키"라고 맹렬하게 비난했다.
한편 1932년 봄에는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돌격대 금지 문제도 있었다. - P219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독일의 크고 작은 도시에서 점점 더 심해지는 정치폭력은 대부분 나치 돌격대가 벌인다는 사실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했던 1932년 3월과 4월에 돌격대는 비상대책반을 소집했고, 히틀러가 승리하면 폭동을 일으키려는 것 같았다. 그러니돌격대를 금지하는 안은 정말 타당했다.
하지만 이는 나치, 특히 돌격대를 이용하려는 슐라이허의 바람, 그리고그의 목적과 맞지 않았다. 슐라이허의 생각은 사건에 따라 오락가락했지만, 1932년 4월에는 돌격대를 금지하면 나치가 순교자처럼 보이게 되고,
다가오는 주의회 선거에 나쁜 영향을 줘서, 힌덴부르크의 평판이 나빠질것으로 예상했다.  - P219

슐라이허가 느끼는 스트레스는 5월 2일 저녁에 브뤼닝과 개인적으로만날 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브뤼닝은 특유의 침착하고, 합리적이고, 무신경한 태도로 슐라이허가 계속 뒤에서 조종할 수만은 없다고 설득하려고 했다. 슐라이허가 용기를 갖고 앞으로 나서서 총리가 되어야 한다고말했다. 그리고 슐라이허가 힌덴부르크에 영향력을 발휘해서 브뤼닝이몇 달 더 총리 자리를 지킨다면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슐라이허가 자신과의 대화를 이성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느낀다는 사실을 브뤼닝은 알아차렸다. 브뤼닝보다 인간관계에 능숙한사람이라면 누구든 예측할 수 있는 결과였다. 슐라이허가 간 질환을 앓는다는 사실을 알던 브뤼닝은 "앉아 있는 슐라이허 장군의 얼굴은 잿빛과누런색을 오갔고, 피곤하고 거의 아파 보였다. 몇 분 후 그는 흥분해서 나를 쏘아보았다. 누구든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몇 년 동안 그 얼굴의 특징을 보아온 사람이라면 ‘이제 끝났다‘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 P220

슐라이허와 나치는 함께 모의하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원하는 일들이 있었다. 돌격대 금지를 무효로만들고, 브뤼닝과 그뢰너, 프로이센의 브라운-제베링 정부를 무너뜨리는일이었다. 33슐라이허가 상처 입은 감정과 브뤼닝과 그뢰너에게 복수하려는 욕망때문에 어떻게 그렇게 나치와 합의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않다. 또한 실질적인 우익 정부를 세우려는 좀 더 장기적인 전략과도 들어맞는 합의였다. 그들의 합의가 독일 민주주의에는 재앙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두 달 동안 모든 게 그들의 합의대로 진행됐다. - P222

1932년 4월 말, 브뤼닝과 그뢰너는 "날씨가 눈부신 날에 차를 타고 라인강을 따라 " 달리면서 보통 때보다 더 길고 사적인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가졌다. 달리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브뤼닝의 마지막 기대는 하나씩 무너졌다. 그뢰너는 슐라이허가 자신에 대해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그뢰너는 슐라이허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가 경력을 쌓도록 어떻게 도왔는지 이야기하면서 "슐라이허를아들처럼 좋아했다"라고 말했다. 34Ne브뤼닝은 그뢰너에게 전쟁 때 최고사령부에서 일한 경험을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에 관해 이야기했다. 1919년 여름부터힌덴부르크의 인격에 ‘심한 의구심‘을 가졌다고 그뢰너는 말했다. 군대가 계속 독일을 지킬 수 있다고 힌덴부르크가 약속하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정부는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으려고 했다.  - P222

파펜은 군대를 떠나 정치계에 들어갔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파펜은중앙당에 들어갔고, 1921년에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념적으로는 국가인민당이 더 잘 맞았지만, 그는 국가인민당이 너무 신교도 색채가 강하다고 생각했다. 독일 정치에서 종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였다. 파펜은 첫 의원 임기 중 연설을 많이 했고, 이후10년 동안 때때로 여러 고위직 후보로 이름이 오르내렸다. 중앙당의 주요기관지인 《게르마니아Germania)의 대주주가 되었지만, 파펜은 점점 더 자신의 당에서 고립되었다. 당의 규율을 자주 어겼고, 1925년 대통령 선거때에는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와 대결하는 힌덴부르크를 지지하기까지 했다. 이로써 파펜은 다시 한번 힌덴부르크의 신뢰를 얻었다. 하지만1932년까지 파펜은 대중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라기보다 그저 연줄이 좋은 사람일 뿐이었다. 50파펜은 어느 모로 보나 귀족이었다. 온화하고, 세련되고, 항상 우아한옷차림이었다. 분위기가 세속적인 데다 가볍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프랑스어도 능통했다. 어느 면에서든 카리스마가 없고 진지한 브뤼닝과는 정반대였다. - P227

브뤼닝은 긴급명령을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리는 대통령 내각의 총리였다. 의회민주주의에서 한 발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의회 과반수의 지지를 끝까지 받았다. 브뤼닝 내각은 이론보다 실제에서 더 민주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힌덴부르크와 슐라이허는 브뤼닝 내각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파펜 내각은 완전히 달랐다. 브뤼닝은 의회의 교착 상태에 대처하기 위해 긴급명령에 의존했지만, 펜과 슐라이허는 의회 정치를 완전히 끝내기 위해 긴급명령을 이용했다.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일기 작가 하리 케슬러 백작은 금방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브뤼닝이 물러나면서그저 "당장 의회민주주의가 멈췄을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계의 위기가 높아지기도" 했다고 보았다. "아마 제3제국이란 축복을 기대해서인지" 베를린 증권거래소의 주가가 급등했다고 케슬러 백작은 냉소적으로 기록했다. - P229

1932년 7월 31일, 나치는 선거에서 이제까지 중 가장 놀라운 승리를 거뒀다. 38.3% 득표율로 국회에서 230석을 차지했다. 큰 차이로 이제 독일의최대 정당이 되었다. 두 번째로 큰 정당인 사회민주당은 21.5% 득표율에133석으로 한참 뒤처졌다. 완전 자유선거에서 나치가 그렇게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일은 이후에도 없었다. 1931년 이후 경제 상황이 너무 나빠졌고, 외국 세력들에 휘둘리는 상황에 대한 독일 국민의 분노가 점점 더치솟고 있는 데다, 종교로 분열된 독일의 독특한 정치 구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놀랍지 않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같은 신교도 농촌 지역이 또다시 나치를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다.
선거일 밤, 독일 북부와 동부를 휩쓴 나치 돌격대의 폭력이 개시되었다.
폭력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사회민주당 본부와 어느 진보적인 신문사에10여 차례 방화를 저지르면서 여섯 명을 살인하고, 지방 관리나 공산당정치인을 살인하려고 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며칠 동안 돌격대의 폭력은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까지 퍼졌다.  - P233

슐라이허의 참모는 나치를 선제공격하는 일까지 포함해 내란에 대처할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회의하면서 간단히 기록한 메모들을 보면 나치에대한 슐라이허의 생각이 드러난다. 늘 그렇듯 여러 가능성을 생각했다.
슐라이허는 "협력할까? 그렇지 않으면 싸워야 할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분위기로 치른 선거의 결과는 용두사미였다. 정치적 교착 상태에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나치는 최대 정당으로 남았지만, 득표율은37%에서 33%로 떨어졌다. 나치 지지자 중 일부가 신교도 중산층 진영에계속 머물면서 국가인민당으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정치적 변화는 시작되고 있었다.
파펜이 슐라이허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 시작했다. 이 ‘신사 기수‘는명망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걸 즐겼지만, 일에는 별로 열의가 없었다.  - P243

파펜은 오트가 한 말을 힌덴부르크에게 보고했다. 또한 대통령이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설명했다. 대통령은 파펜에게 계속 총리를 맡길 수도있었다. 그 경우 파펜은 국방부 장관을 바꾸고 싶어 했다(그가 더는 슐라이허와 함께 일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걸 이해할 수 있다). 아니면 대통령이 슐라이허를 총리로 임명할 수도 있었다.
"육군원수 출신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내 설명을 열심히 들었다"라고파펜은 몇 년 후 회고했다. 마침내 일어선 대통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여보게 파펜, 내가 마음을 바꾼다면 나를 악당이라고 생각하겠죠. 그렇지만난 너무 늙어서 삶의 끝자락에서 내란에 대한 책임을 떠맡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폰 슐라이허 씨가 운을 시험해 보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악수했고, 파펜은 힌덴부르크의 뺨에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굵은 눈물‘을 보았다.  - P247

여러 해 동안 정치 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쿠르트 폰 슐라이허장군은 이제 무대 앞으로 나섰다. 12월 3일, 슐라이허는 55세에 독일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폭을 넓힌 연립정부에 자신의 운을 걸어보려고 했다.
우익의 자리를 지키면서 내란 없이 정치적인 안정을 찾으려고 마지막으로 필사적으로 노력하려고 했다. 그가 이용한 오트의 모의전은 파펜을 몰아내는 데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그 효과는 곧 자신에게 되돌아온다. - P248

1933년 1월 30일이다.
그날 아침 아돌프 히틀러가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임명을 받아독일 총리로 취임했다. 이제 히틀러 추종자들이 횃불을 들고 베를린 중심부를 거쳐 행진하며 축하한다. 나치의 준군사조직인 돌격대, 그리고 조금더 엘리트층이고 검은색 제복을 입은 나치 친위대가 눈에 띈다. 그러나히틀러 총리와 함께 새로 들어서는 정부는 연립정부여서 철모단 같은 다른 우익 단체 대표들도 함께 행진하며 축하한다.
히틀러 운동에서는 독일 국민이 하나가 되었던 1914년 8월과 등을 찔린1918년 11월이라는 두 순간의 차이를 항상 강조한다. 1933년 1월은 나치입장에서 1914년 8월로 돌아간 날이다. 횃불을 든 사람들이 히틀러 총리관저 창문 앞을 지나가고, 라디오 방송에서 헤르만 괴링은 이런 분위기는오직 1914년과 비교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 P253

 나치 신문 《푈키셔 베오바흐터》는 "우리 기억은 1914년 8월의 활기찬 시기로 되돌아간다. 그때도 오늘처럼 사람들이 들고일어났다"라고 보도한다. 나치의 괴벨스와 로베르트 라이Robert Ley 같은 인물들은 그들의 ‘혁명‘이 사실 1914년 8월에시작되었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독일이 하나되었다는 게 히틀러 총리 취임의 의미 중 정말 중요한 요소다. 1929년 이후 브뤼닝, 슐라이허, 펜과 힌덴부르크 모두 분열된 독일우파를 통합할 방법을 찾았다. 또한 나치가 기성 정치권을 지지하도록 끌어들일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히틀러를 총리로 만들기 위해 특히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많이 설득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이제 옛 총리관저 창문 앞에 서서 나치 돌격대원들의 연주를 듣는다. 돌격대 악단은프로이센 병사들이 육군 원수를 찬양할 때 연주하는 전통적인 행진곡을 - P253

연주하면서 대통령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라인강의 파수꾼〉 같은애국적인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모습이 힌덴부르크가 소망해 온 국가통합이다. 1월 30일의 분위기를 보면서 힌덴부르크는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한 게 잘한 일이라고 안심한다. 몇 주 후 그는 딸에게 편지하면서 "사람들의 애국심이 치솟는 모습을 보니 아주 흐뭇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통합을 지켜주시길 기도한다"라고 쓴다. - P254

슐라이허의 오른팔인 오이겐 오트는 국가비상사태 선포를 주장하라고조언했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을 만난 슐라이허는 조언대로 했다. 슐라이허는 ‘임시정부‘ 시나리오를 제시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시나리오가 가장 그럴듯하고 헌법적으로도 큰 문제없이 권력을 유지할 방법이었는데, 왜 그 방법을 우기지 않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슐라이허는 1월 13일에베를린에서 언론인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임시정부 시나리오대로 하면과반수를 이루는 파괴적인 정당들이 계속 내각의 행정명령을 부결하면서 경제를 망칠 수 있고, 결국 정부는 다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사실은 다른 이유가 더 있었을 수 있다. 총리 시절 슐라이허와 이야기를 나눈 많은 사람은 그가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기진맥진하고, 더는 총리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 기자는 1월중순에 슐라이허가 창백해 보이고, "전보다 얼굴이 많이 야위었다"라고기록했다. 슐라이허는 늘 그러듯 "과대망상증이 없어서 안타깝다" 라고자신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했다. 그는 체념, 심지어 안도까지 느끼며 1월말의 종말로 향했다.  - P270

1월 29일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괴링은 괴벨스에게 "히틀러가 총리, 파펜이 부총리, 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 후겐베르크가 경제부와 농업부 장관이 될 것"이고, 새로 선거를 하기 위해 국회를 해산할(그들은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약속했다)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파펜 말이 맞을까? 누가 알까?"라고 말하면서 믿기지 않아 했다. 
히틀러와 측근들은 슐라이허와 국방부 관리들이 군사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사실 몇몇 관리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다고 의논했지만, 슐라이허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나치의 핵심 인물들은 1월 30일 새벽 다섯시까지 카이저호프 호텔에서 밤을 새웠다. 무슨 일이든 일어나면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뒤이어 히틀러가 취임 선서를 하러 대통령 집무실로 갈 시간이 되었다. - P276

1월 30일에는 히틀러의 위치가 압도적으로 강력하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나치가 11명의 각료 중 세 자리만 차지했다. 히틀러 총리 외에 빌헬름프리크가 내무부 장관, 헤르만 괴링이 무임소 장관이었다. 철모단을 대표하는 프란츠 젤테 Franz Selate가 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나머지는 기성 우파인물이었다. 파펜이 부총리,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Konstantin von Neurath 가외무부 장관,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경제와 관련한 장관 다섯 가지 직책을 차지했다. 노이라트와 재무부 장관 슈베린 폰 크로지크, 교통부 장관파울 폰 엘츠-뤼베나흐Paul von Eltz-Ribenach와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중앙당의 눈치를 보면서 보류하는 인상을 주려고 지명을 며칠 미뤘다는 파펜과슐라이허 내각의 장관에서 유임되었다. 안정성과 지속성을 약속하는 듯했다. 독일인 대부분은 내각 안의 보수주의자들의 존재, 힌덴부르크의 권위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군대가 있으니 분명 히틀러가 함부로 행동할수 없을 것으로 믿었다. 파펜은 여느 때처럼 바보같이 확신했다. 그는 한친구에게 "우리가 그를 고용했지"라며 "몇 달 안에 궁지로 몰아넣어 꼼짝 못 하게 할거야" 라고 말했다. - P278

히틀러 집권을 걱정한 사람들이 못 보고 넘어간 것 같은 중요한 점이 한가지 있다. 프로이센 주정부를 넘어뜨린 펜의 1932년 쿠데타 때문에 프로이센의 핵심 부서가 독일 정부 소속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을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려고 준비했다. 그렇게 하면 괴링과 나치가 중요한 권력 요소인 프로이센주의 경찰을 장악할 수 있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 슐라이허는 프로이센 경찰이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파펜에게 쿠데타를 일으키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슐라이허의 뒤를 이은 사람들은 그렇게 주도면밀하지 않았다.
나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총리 자리가 아니었다. 총리는 그저 권력을 넓히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괴벨스는 "첫 단계! 계속 싸워야 한다"라고 일기에 썼다. 그다음에는 히틀러 총리 아래 보수 성향 장관들의 이름을 적었다. "이 사람들은 얼룩이야. 지워야 해." "
‘얼룩‘을 ‘지우려는‘ 나치의 욕망과 괴링이 장악한 경찰이 이후 몇 달동안 펼쳐지는 독일 역사를 판가름하는 조건이 된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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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P296, 297



파리의 고급 호텔에 자리를 잡은 그는 각 지점에 6~7개 언어로 편지를 써서 사업 지시를 하고 직접 돌아다니며 감독을 했다. 그러는 동안 시를 쓰고 한편으로 프랑스의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와 사귀어 그로부터 ‘백만장자 방랑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양편 모두에 군수물자를 팔며 큰돈을 벌었지만,
그의 마음이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을 인간혐오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마음은 세계평화를 기원하는 이상주의와 비관적인 시니시즘 사이를 오갔다. "한순간에 양쪽 군대가 서로를 몰살시키는 게가능한 날이 오면 문명국들은 공포심을 느끼며 전쟁을 후회하게 될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가 하면 자기 형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자신이죽으면 시체를 뜨거운 황산에 녹여버리라는 비탄조의 말을 했다. "1분 - P182

만에 시체가 녹을 겁니다. 거기에 석회를 섞으세요. 황산과 석회가 섞이면 버릴 것 하나 없는 훌륭한 비료가 되니까요."
그의 장례식을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그의 재산을 스웨덴과학아카데미에 맡겨 노벨상을 제정했다. 그의 사후 창설된 재단은매년 물리, 화학, 의학, 문학 분야의 수상자에 더해서 평화상 수상자도 선정했다(노벨 경제학상은 1968년에 추가되어 1969년도에 첫 수상자가나왔다.
von노벨은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귀족 부인인 베르타 폰 주트너Berthacutner(1843~1914)를 사랑했는데, 그녀는 이 죽음의 상인이 내면에 품고 있던 이상주의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어느 날 노벨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파괴력이 너무나 엄청나서 오히려 그 때문에 더이상 전쟁이 불가능하게 되는 어떤 물질이나 총을 만들어낼 수 있으면 좋겠소." 실제 그런 무기들이 속속 개발됐지만 여전히 전쟁은 지속되고 있고, 누구는 그 기회를 이용해서 큰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바 있는 아인슈타인은 1945년 노벨상 수상식 만찬에서 노벨이 가공할 파괴 수단을 만든 데 대한 양심의가책으로 이 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하긴 아인슈타인 자신도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만들라는 편지를 쓰지 않았던가. - P183

"바닷물 닿는 곳에 화교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화교들은세계 각지에 퍼져 있다. 타이완에서 발표된 공식통계中華民國 僑務統計에 따르면 세계의 화교는 3600만 명이 넘는다.
화교들이 아시아 각지로 이주해간 것은 대체로 남송시대인 12세기부터로 잡는다. 장사를 하기 위해 해외로 떠난 경우도 있고, 흉년이 들어 먹고살기 어려워지자 생존을 위해 나간 경우도 있다. 화교의해외 진출에서 큰 전환점을 이룬 계기 중 하나는 명대 초에 시행된해금정책이다. 명나라 조정은 허락 없이 바다로 나간 자들을 사형에 처할 정도로 민간인의 해외 진출을 강력하게 억압하려 했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이 그렇다고 해도 몰래 해외로 빠져나간 사람들은계속해서 일본, 필리핀, 자바 섬 등지에 거류지를 형성했다. 그렇지만모국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나니 화교들은 늘 불안정하고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됐다. 예컨대 마닐라에서는 16~17세기에 약 2만~3만 명의화교들이 집단학살을 당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 - P196

서 그들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친족들 간의 상호 협력 시스템을구축하고 이를 이용해서 사업을 확장해나갔다.
화교들은 그들이 정착한 사회에서 소수 인종이라 하더라도 막강한경제력을 행사하곤 한다. 예컨대 인도네시아에서는 화교가 인구의 4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전체 경제 부문의 80퍼센트를 장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총인구의 29퍼센트가 중국계 후손이며 이들이 상장 주식의 1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또 화교가 말레이시아 행정 · 경영 부문의 전문 인력 중 60퍼센트나된다. 화교는 동남아시아 인구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치지만 역내무역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동남아시아 거부의 86퍼센트가 화교라고 한다. 현재 전세계에서 화교들이 운용하는 자본은 적게 잡아도 2조 달러가 넘는다. 화교는 유대인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인종집단ethnic group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 P197

화교들은 중국인으로서의 혈연적·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현지 사회에 동화되어갔다. 역사적으로 모국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까닭에 더더욱 그들을 받아들인 사회 속에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런 사정 때문에 화교네트워크는 세계화 시대에 가장 유리한 조직으로 자라나게 됐다. 화교들은 대부분 여러 나라에 가족과 친척들을 두고 있어서 자연스럽게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있다. 꼭 친척 관계가 아니라 하더라도 화교들 간에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해서 이들의 총체적인 인적 유대와 자본력은 막강하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지역 통치자나 관료들과 공식적·비공식적 노력을 통해 협력 관계를 맺어놓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사업 방식이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사업을 공개 - P197

하지 않고 증권시장에 상장하지도 않은 채 자기네들끼리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지난 시대에는 장점일지 모르지만 앞으로도 계속 긍정적인효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상표가 없는 기업도 많은데, 이런 태도도 앞으로 변화가 필요한 부분일 것이다. 가부장적인 경영 관행이나 아들에게 소유권과 경영권을 넘기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지난날과는 달리 이제 화교 기업인들은 중국 정부와 손잡으면서 더욱 막강한 경제적 힘을 행사하게 됐다. 앞으로 더욱 강력한 힘을 행사하게 될 중국, 그리고 이미 막강한 자본과 사업 능력으로 전 세계적 네트워크를 조직한 화교의 결합을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 P198

이상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에서는 화약이 발명됐지만 무기로 사용되지 않았고 단지 불꽃놀이 용도로만 쓰였다고 믿고 있다.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중국에서는 적어도 13세기 말 이전에 총포가 널리 쓰였고, 14세기에는 초보적이긴 하지만 많은 화포가다. 예컨대 명나라 건설 과정 중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1363년의 포양 호 전투에서 주원장(후일의 명나라 태조)은 군 지휘관에게 이런 명령을 내린다.
"적선에 접근하면 우선 총을 쏘고 다음에 활을 쏴라."
14세기의 전투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십 문의 철제 대포는 이 시대에공성전이나 수상 전투에서 총포가 많이 사용됐다는 증거다. 다만 그다음 시대에 총과 화약이 주변 지역에 전해져서 크게 발전할 때정작 본산지인 중국에서 상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더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문제다. - P227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 약 8,800명이 바스티유 앞에 운집했다.
바스티유는 원래 중세에 파리 시를 수비하는 성채로 건설됐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파리 시 자체가 팽창하는 바람에 이 성채가 시내 한복판에 위치하게 됐고 용도도 감옥으로 바뀌었다. 대개는 일반 범죄자들이수용됐지만, 금지된 책이나 팸플릿을 인쇄한 출판인 혹은 유명한 문인들이 갇히기도 해서, 그러지 않아도 음침한 분위기를 풍기던 이 건물은 자유를 억압하는 전제정치의 상징이 됐다.
파리 시민들은 이곳에 갇혀 있다고 믿고 있던 자유의 투사들을 구하고 동시에 화약과 무기를 탈취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다. 전투 과정에서 공격하던 시민 98명과 수비대원 1명이 죽었다. 오후에 수비대의 방어선이 뚫리고 시민들이 성안으로 난입해 들어갔다. 수비대가 항복을 선언했지만 흥분한 군중들은 이를 무시하고 린치를 가했다. 그들은 바스티유 소장이었던 드로네를 시청 앞으로 끌고 가서 그를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 논쟁을 벌였다. 그동안 수도 없이 맞은 드로네는 - P235

"그만하고 차라리 나를 죽여!" 하고 소리를 지르고는 가까이 있던 사람의 가랑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흥분한 군중들이 달려들어 칼로 찔러댔고 곧 톱으로 그의 목을 잘라 머리를 창에 꽂고 거리를 행진했다.
수비대 장교 세 사람도 살해됐다.
그러나 이렇게 큰 전투를 벌여 함락한 바스티유 요새에 실제로 갇혀 있던 사람은 7명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들은 자유의 순교자와는거리가 멀었다. 위조범 4명, 정신병자 2명, 그리고 행실이 부정한 귀족한 명이 전부였다. 유명한 사드 백작이 열흘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감됐는데, 만일 이 역사적인 날에 바스티유에 있다가 구출됐다면 또 하나의 신화가 만들어질 뻔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은 논격적으로 막이 올랐다. 오늘날 7월 14일은 프랑스혁명 기념일이 됐다 - P236

혁명 당시의 국왕 루이 16세에 관해서는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전해진다. 그는 파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사유 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당시의 정세에 대해완전히 무심했다고 할 수는없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혁명이 시작된 그날, 국왕은 일기에 딱 한 단어만 썼다.
Rien(Nothing). - P237

이는 루이 16세가 그날 사냥을 나갔는데 짐승을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는 뜻이라고 한다.
한편, 국왕의 편에 서서 그를 지켜주기 위해 노력하던 라 로슈푸코리앙쿠르 공작은 바스티유 함락 이틀 전인 7월 12일에 국왕을 찾아가파리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고 경고했다. 국왕은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러자 공작이 답했다.
"전하, 반란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 P237

구데리안과 롬멜Erwin Johannes Eugen Rommel(1891~1944) 장군은 원래의 작전에 따라 전진을 멈추라는 독일군 지도부의 명령을 어기고 독단적으로돌진해갔다. 결국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이것은 지극히 위험한 태도였다. 실제 전격전과 가장 비슷하게 사전 준비된 소련 침공은 오히려 실패로 끝났다. 전격전은 이론적인 바탕이 없고 다시 반복할 수 없다는점에서 모델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개념이라는 것이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격전 개념이 사후적으로 합리화된 것은 냉전이 극성이었던 1950년대 초에 서독 군대를 재창건하기 위해 전직 나치 장군들의 협력이 필요했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다. 구데리안과 그의 탱크 부대는1945년 5월 10일 미군에 투항했다. 그는 미군 포로로 구류 상태에 있다가 1948년에 석방됐는데, 소련과 폴란드 쪽의 항의에도 불구하고뉘른베르크 재판에 전범으로 기소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영국에서 과거의 적들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전투에 대해 분석하는 일을 자주 했고, 1950년대에는 서독 연방군 Bundeswehr 창설과 발전을 위해 일했다.
역사 해석이 경우에는 차라리 역사 왜곡은 시대 상황에 따라달라지게 마련이다. - P240

한때는 불가피한 것으로 체념하고 감내하던 폭정도 일단 그것에서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즉시 더 이상견디기 어려운 억압으로 여겨지게 된다. 왜냐하면 일부 폐단이 시정될경우 아직 시정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폐단은 더욱 참기 힘든 것으로돋보이게 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사람들은 고통을 덜 받는 만큼 감수성이 더욱 예민해지는 것이다. 봉건제는 절정기에 있을 때 오히려 해체기의 경우보다 프랑스인들에게 증오감을 덜 불러일으켰다. 마찬가지로루이 16세의 사소한 권력 남용이 루이 14세의 혹독한 전제정치보다 더참기 힘든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보마르셰의 짧은 투옥 기간이 드라고 - P248

나드Dragonnades 사건 때보다 훨씬 엄청난 동요를 파리에서 불러일으키지 않았던가.

-A. 토크빌, 이용재 옮김, 구체제와 프랑스혁명, 일월서각, 1989, 220쪽.



드라고나드란 루이 14세 통치 초기인 1681년에 있었던 신교도 박해 사건이다.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이지만 앙리 4세 때 낭트 칙령을통해 신교도들에게도 사실상 예배의 자유를 허용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자신의 힘을 과신해서 ‘하나의 국왕 하나의 종교‘라는 원칙을 선언하고 신교도의 종교적 자유를 다시 억압했다. 그 방식이 매우 억압적이고 졸렬해서 기마부대kdragoon 병사들을 신교도 집에 기숙시켜 피롭히도록 했다. 집 주인이 신교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전향하든지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군인들이 그 집에 숙영하며 온갖 행패를 부리도 - P249

록 국가가 사주한 것이니, 있을 수 없는 학정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에는 생각보다 저항이 크지 않았다. 그런데 혁명기에 세비야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같은 극작품으로 유명한 보마르셰Pierre-AugustinCaron de Beaumarchais Beaunmarchais (1732~99)가 며칠 동안 투옥된 사건은엄청난 동요를 일으켰다.
우리의 역사가 바로 이런 경우로 볼 수 있다. 분명 민주화와 경제성장 면에서 북한보다 훨씬 진전된 남한 사회에서 오히려 불만과 항의가 더 격렬한 것도 이런 논리로 설명할 수 있다. 이미 많은 것을 얻었지만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많은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향이다.
계속해서 가혹하게 억누르는 데 성공하면 장기간 체제가 지속될 수있다. 그렇지만 어쩌면 북한에서도 작은 변화가 대격변을 초래할 수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 P250

고문 기술자로 악명을 떨친 경관은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며 애국자라고 강변했다. 그는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신문 기술자‘가 맞을 것"이라면서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라고주장했다.
미국도 다를 바 없었다. CIA가 9.11 테러 용의자들에게 고문을 가한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진 것이다. 한 용의자에게는 무려 183차례나물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한 논란을 지켜보면 오늘날미국이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지를 알 수 있다. - P256

부시 행정부 시절 CIA 국장이었던 마이클 헤이든은 이런 정보들이밝혀지는 것이 국가 안보를 위험하게 한다고 오바마 정권을 강력하게비난했다. 전직 CIA 국장들은 용의자를 천장에 매달아놓고 잠을 재우지 않을 수 있는 시간은 최장 7일로 제한하며, 좁고 어두운 박스에용의자를 감금했을 경우 하루에 6시간 이상은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는 식의 규정을 두었다며, 결코 야만적인 고문을 한 것은 아니라고 강변한다.
세계의 패권hegemony을 차지하는 것은 단지 군사력과 경제력이 강하다고만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가치를내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한다. 예를 들어 노예무역과 해적 행위로 엄청난 이익을 누리던 영국이 19세기에 스스로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더나아가서 다른 국가들에 대해서도 금지시킨 것은 이 나라가 유럽의일개 강대국에서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제국으로 상승했다는 표시라 할 수 있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목청껏 소리치던 미국이 야만적인 고문 행위를 옹호하고 나선 것은 이제 이 나라가 세계의 패권국가가 아니라 그저 여러 강대국 중 하나로 격이 떨어져가는 징후로 보인다. - P257

그러나 페히터처럼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사람도 적지 않다. 모두1,245 명이 서쪽으로 탈출을 시도하다가 사망했고, 그 가운데 장벽 바로 근처에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만 136명이나 된다. 장벽을 넘다 총에 맞아 죽은 마지막 사례는 1989년 2월 6일에 있었던 크리스 구프로이Chris Goulffroy 다. 죽음은 면했으나 탈출을 기도하다가 체포된 사람도6만 명에 이르는데, 이들은 평균 4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해야 했다.
통일 이후 1990년에 페히터가 죽은 자리에 새로 세워진 기념물에는이런 글이 쓰여 있다.


그는 오직 자유를 원했을 뿐이다……er wollte nur die Freiheit. - P267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곧이어 9월 17일에 소련은 폴란드 정부가 더 이상 자국 영토를 통치할 능력이 없으며 따라서 모든 외교협정도 무효화됐다고 선언한 후 곧바로 폴란드 영토를 침공했다. 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진격해 들어간 소련의 적군은 수십만 명의 폴란드 군인과 경찰을 포로로 잡았다. 이들 가운데 사회 지도자급 인사 수만 명이소련 비밀경찰인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넘겨져서 수용소에 갇혔다.
1940년 봄에 이들 가운데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가장 큰 규모로 학살이 자행된 곳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이라는 숲이었기 때문에 ‘카틴 숲 학살 사건‘이 주로 거론되지만, 사실은 이 시기에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학살이 이루어졌다. 당시 카틴 숲에서 살해된 사람만 해도 해군제독 1명, 장군 2명, 대령 24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을 비롯해서 폴란드군의 장교 절반이 넘었고 대학교수20명, 의사 300명, 그리고 100명이 넘는 작가와 저널리스트, 수백 명 - P272

의 변호사, 엔지니어, 교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한 나라의군의 핵심 멤버들과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제거하려 한 것이다.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한 이후인 1943년 4월에 한 독일 병사가 거대한 시체 구덩이를 발견하고 나서야 학살 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사실을 보고받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Goebbels(1897~1945)는소련을 비난하기 좋은 소재로써 카틴 숲 학살 사건을 이용했다. 그러나 소련은 역으로 나치독일이 학살을 자행한 것이라고 공격했다. 오랫동안 이 학살 사건이 정말로 두 악마 중 누구의 소행이었는지에 대해서 논란이 있었다. 냉전 시기에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당연하다는 듯 상대편을 비난할 뿐이었다. 아마 1950~70년대라면 소련 사학자 중에 이것이 스탈린의 소행이라는 것을 알았더라도 과연그 사실을 발표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든다. 사실상 소련의 통제하에있었던 폴란드 역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언급할 사정은 못됐다. 폴란드 역사학계에서 카틴 사건은 금기 주제였다. - P273

소련은 전후 나치에 대한 군사재판 과정에서 사실을 왜곡했다.
1945년 12월에 레닌그라드 군사법정에서 열린 7명의 독일군에 대한 재판에서 아르노 디레 Arno Diere는 자신이 카틴 숲에서 구덩이를파고 약 2만 구의 시체를 매장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기관총으로민간인을 살해한 죄로 기소됐는데,
이 자백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15년 중노동형으로 감형됐다. 이는아무리 보아도 의심이 가는 자백이었다. 실제로 그는 나중에 자신 - P274

이 소련 쪽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허위 사실을 자백했다고 말했다.
진실이 밝혀진 것은 1989년에 소련의 역사가들이 폴란드인 학살 관련 문건을 찾아내 공개하면서다. 내무인민위원장 라브렌티 베리야가제안하고 스탈린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서명한 이 문건은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의 여러 캠프에서 25만 700명의 폴란드인을 처형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90년에 소련은 내무인민위원회가 학살을주도했고 그동안 소련 당국이 이를 은폐하려 했음을 공식 인정했다.
2010년에 카틴 숲 학살 사건 70주년 추모행사에 참가하러 가다가비행기 사고로 폴란드 대통령 내외와 국가안보국장, 참모총장, 육·해·공군 사령관, 중앙은행 총재, 다수의 역사학자들이 사망했다. 폴란드의 비극은 언제 끝날 것인가. - P274

라파엘 씨가 이야기를 마쳤을 때 그가 설명한 유토피아의 관습과 법가운데 적지 않은 것들이 아주 부조리하게 보였다. ……………우리가 나중에 시간을 내어서 이 문제들에 대해 더 깊은 의견을 나누고 조금 더 자세한 사실들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실 언젠가 그런 기회가주어지기를 지금도 고대한다. 비록 그가 의심할 바 없이 대단한 학식과경험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나는 그가 말한 모든 것에 동의할 수는없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유토피아 공화국에는 실제로 실현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어쨌든 우리나라에도 도입됐으면 좋겠다고 염원할 만한 요소들이 많다고 본다.
- 토머스 모어, 주경철 옮김, 『유토피아』, 을유문화사, 2007, 155쪽.


결국 『유토피아』라는 작품이 흥미로운 것은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사회의 답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게 아니라, 과연 이상적인 사회란어떠해야 하는지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데에 있다.
요즘처럼 힘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선 새로운 미래를꿈꾸는 능력인 것 같다. 그 꿈은 실현 불가능한 황당한 꿈이어서는안 되고 무엇보다 현실에 대한 예리한 비판에서 출발한 지성적인 꿈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에는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하는 실천 의지가 따라야 한다. - P282

려운사고하고 있었으니 심란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행복‘과 비교적 유사한 기능을 했던 단어는 ‘안심‘이나
‘안락‘이라고 한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감이 잘 안잡히지만 ‘안심‘과 ‘안락‘은 훨씬 더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 사회와 나 자신이 안심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한 기준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더라도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일을 피할 수는 없다. 일단 심리학자들의 충고를 참고해보도록 하자. 다음은 저명한 경제학자 송병락 선생이 저서에서 ‘행복 경제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인용한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한 아홉 가지 사항이다. 한번 깊이 생각해볼일이다. - P296

1.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비하하는 말을 하지 말라. 그리고 자신이나 남에 대하여 건설적이지 않은 비판은 하지 말라.
2. 현재의 불행, 좌절 또는 실패는 위장된 행복일 수 있다. 전화위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라.
3.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운 친구를 잘 사귀어라.
4. 자신의 강점과 특성을 잘 살리고 성공과 행복에 대해서는 자신의공을 인정하라.
5.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취미 활동을 개발하라.
6. 과거, 현재 및 미래의 일을 균형 있게 하라.
7. 생각, 행동의 사회적 기준을 알고 자신의 경우를 판단하라.
8. 곤경에 처할 때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
9. 도저히 감정을 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자리를 피하라. - P297

독립국가가 되기 전 네덜란드는 에스파냐 합스부르크 왕실의 지배하에 있던 속주에 불과했다. 경제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에스파냐가심한 압박을 가하자 네덜란드의 17개 주 중 북부 7개 주가 반기를 들고일어나 80년에 걸친 독립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중 하나가 1573~74년에 있었던 전략 요충지 레이던 시의 포위 공격이었다.
에스파냐가 파견한 진압군을 이끌고 네덜란드에 들어온 알바 공은 1573년에 1차로 레이던 시를 포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다음 해 2차 포위 공격 때에는 진압군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데다가 식량이 떨어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레이던 시민들은 더 이상 지탱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여 항복을 고려했다. 이때 네덜란드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이며 오늘날 이 나라의 국부로 추앙받는 오라녀공 빌렘Oranje Willem (1533~84. 흔히 영어식으로 오렌지 공이라고 부름)은 전령 비둘기를 날려 보내 석 달만 버텨줄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를 - P323

전했다. 그가 생각해낸 최후의 방책은 이 도시 상류에 위치한 제방을터뜨려 이 지역을 물바다로 만들어 진압군을 곤경에 빠뜨리고, 바다로부터 시내로 직접 선박들을 들여보내는 방식으로 군사를 투입시키자는 것이었다.
이럴 경우 레이던 시가 엄청난 피해를 입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라녀 공은 비밀리에 시민 대표들과 연락을 취하여 차후에 보상을 해주기로 약속하고 공격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5월에 시작된 이반격작전은 몇 달이 지나서야 끝났다. 그동안 여러 차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수천 명의 시민들이 굶어 죽었다.
마침내 1574년 10월 3일, ‘바다의 거지들Gueux de mer ‘이라는 특이한 별칭으로 불리는 네덜란드 해군이 넘치는 물을 이용해 보트를 타고 시내로 진격해 들어갔다. 시내에서는 시민들이 낫을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에스파냐군과 백병전을 벌였다. 격렬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 P324

에스파냐군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국토의 많은 부분이 해수면 아래에위치한 이 나라에서 제방을 터뜨린 결과는 실로 참담했다. 모든 것이진흙탕에 묻혀버린 것이다.
시에 진군한 구원군은 우선 굶주리는 시민들에게 흰 빵과 청어를제공했다. 에스파냐군은 퇴각하며 성벽 가까이에 스튜를 끓이는 커다란 솥을 남겨놓았다. 오늘날에도 이날의 승리를 기념하는 축제일Leidens onzet(10월 3일)에는 시청에서 이 솥에다 비프스튜를 끓이고 흰빵과 청어를 무료로 나누어준다.
한편, 막대한 피해를 입은 레이던 시에 보상을 하고 싶었던 오라녀공은 시민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었다. 시민들은 대학을 설립해달라고부탁했다. 그리하여 1575년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이 레이던 시에 설립됐다. 이것이 자유로운 학풍으로 유명한 레이던 대학의 기원이다. 이대학은 흐로티위스Grotius(그로티우스, 1583~1645)와 다니엘 하인지우스 - P325

Daniel Heinsius(1580~1655) 같은 걸출한 학자들을 배출했고, 데카르트가 『방법서설』을 출판했으며, 유럽 최고의 동양학 연구센터가 됐다.
레이던 대학과 관련된 또 한가지 의미 깊은 고사는 나치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했을 때 일이다. 나치는 네덜란드를 점령한 이후 유대인들을 공직에서 내쫓고, 초등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과 교사,
교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레이던 대학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서유대계의 저명한 법학 교수인 메이여르스E M. Meiers를 쫓아냈다. 그러자 1940년 11월 26일 법대 학장인 클레베링아Rudolph Pabus Cleveringa교수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비판하는 강연을 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어 끌려갔고, 대학은 조만간 폐쇄됐다. 다행히 클레베링아 교수는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왔다. 그는 레이던 대학의 모토가 ‘자유의 요새Praesidum libertatis‘라는 것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 P326

일본의 저명한 문예평론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行人의책 『일본 정신의 기원』을 읽다가 흥미로운 내용들을 발견했다. 그는일본 사상의 특징에 대해, 모든 외래 사상들이 일본에 들어올 때 결코억압되는 적 없이 기존의 것들과 잡거한다는 점을 든다. 불교든유교든 혹은 서구 사상이든 적당히 변조되어 신토에 포용된다는것이다.


외부에서 도입된 사상은 결코 억압되는 일 없이 단지 공간적으로 잡거할 뿐이다. 새로운 사상은 본질적인 대결이 없는 상태에서 보존되고, 또 새로운 사상이 오면 갑자기 꺼내진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는 뭐든지있게 된다. ...... 근대 서양과 접촉하면 아시아 국가들, 특히 중국에서는반동적인 저항이 있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 P336

그는 일본이 주변부 섬나라이며, 또 한번도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았다는 데에서 그렇게 된 근본 원인을 찾는다. 역사 전체가 근본적으로 뒤집어지는 경험이 없었고, 또 그로부터 강력한 억압과 그에 저항하는 주체 같은 것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또 일본이그처럼 군사 정복을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그이유를 한반도의 존재로 설명한다.
중국, 몽골,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한반도가 있어 이곳에서 침입이일차적으로 저지됐다. 14세기에 중국에서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을순식간에 정복한 몽골도 한반도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에는 30년이나걸렸다. 몽골이 일본 정복을 단념한 이유는 흔히 몽골 정복군을 몰살시킨 태풍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다. 일본에서는 말하자면 신이 지켜주었다는 의미로 이를 가미카제라 부른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암만해도 문제가 있다. 그처럼 강력한 세력이라면 태풍 때문에 원정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다시 준비를 하여 재침을 시도할 수 있다.  - P337

그런데 몽골이 다시 일본을 침략하지 않은 것은 고려의 저항에 힘을 소진해버렸기 때문이다. 고려는 결국 몽골에 지배당했지만, 다른 국가들과는달리 매우 오랜 기간 강력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몽골로서도 다시 힘을모아 바다를 건너 공격하는 데에 힘이 부쳤던 것이다.
그 반대로 일본의 힘이 엄청나게 강해져서 대륙의 지배로 향할 때그것이 좌절된 것 역시 한반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도요토미 히데요시臣秀吉(1537~98)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명나라를정복하겠다고 나섰다. 당시 일본의 군사력이 어느 정도 수준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서구의 총포를 들여와개량한 후 수십만 정을 생산한 일본군의 화력이 당시 세계 최강이라 - P337

주장하기도 한다. 전통적인 사무라이 세력에 이처럼 강력한 화력이 더해졌으니 중국을 정복하겠다는 것이 반드시 허무맹랑한 이야기만은아니었다. 사실 명나라 쇠퇴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왜구라는 점은 많은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이런 강력한 해양력이 대륙을 향해 팽창하려다가 한반도에서 좌절되고 만 것이다.
단지 군사 문제만은 아니다. 일본에 원리적이고 체계적인 것에 의한억압이 없었다는 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러한 체계적인 억압이 강했던조선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이민족 침략의 거듭된 경험이 ‘억압‘과 ‘주체‘를 강화해왔다. 중국에 인접해 있으면서 정치적·문화적 압박에 노출된 조선은 중국보다 오히려 더 원리적이고 체계적이려는 경향이 생겨났다. 조선에 들어온 주자학이 그런 사례 중 하나일 것이다.
정통에서 벗어나는 경향에 대해서는 사문난적이라는 꼬리표를달아 아예 박멸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던가. 원산지보다 본래의속성이 더 강해진다고나 할까. - P338

문예비평가의 예리한 견해를 통해 동아시아 역사의 특성에 대해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한국과 일본, 중국 등 각국의 역사는 결코홀로 성립되지 않는다. 각국의 역사만 따로 떼어서 보면 많은 것을 놓치기 쉽다. 역사 교육을 강화하려 한다면 ‘우리만의 역사‘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세계사 속의 한국사‘를 가르쳐서 학생들이 넓은 시야를 갖추도록 해야 할 것이다. - 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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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을까.
지진 예측이 가치가 있으려면 지진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 규모를정확히 맞혀야 한다. 학교와 공장의 문을 닫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한 지진학자는 유용한 지진 예측은 ˝50퍼센트는 맞아야 하고, 하루 정도의 정확도를 가져야 하며, 50킬로미터 이내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예측은불가능하다.
그동안 지진 발생을 예측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1990년 아이벤 브라우닝ben Browning (1918~91)이라는 생물학 박사가 12월 1일에서 5일사이에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 시기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을 이루는데, 이때 강해진 중력이 일으킨 조수력에 의해 뉴마드리드 단층 지역의 스트레스가 한계 이상으로 올라가 지진이 일어난다는 설명이었다. 미국 중동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고, 사회 전체가 엄청난 혼란에 빠졌지만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의 과학자들은 일본 중부에 대지진이 엄습한다고 경고했다. 이들의 추론은 매우 단순했다. 지진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다음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일본 당국은 조기경보체계를 만들고, 지진 데이터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즉시 조사위원회를소집하여 원자로, 고속도로, 철도, 학교와 공장을 닫을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상시 대피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그런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국가에서는 그동안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지진 예측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특히 큰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구물리학자들이 100년 넘게 연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믿을 만한 전조 현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누구는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땅에 이상한 전류가 흐른다고 주장했고, 누구는 개나 소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했다. 혹은 날씨가 아주 변덕스럽거나 이상한 빛이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도쿄대의 지구물리학자인 로버트 겔러는 이런 식으로 지진의 전조 현상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연구 논문을 700편 이상 검토했으나 어느 하나 신뢰성이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지진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것일까.
지구물리학자들은 ˝지진의 에너지 방출 규모와 발생 빈도 사이의관계는 멱함수(power function) 형태를 띤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은 사람이 느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지진이나 아이티 대지진이나 모두 똑같은 원인으로 일어나, 다만 작은 지진이 큰 지진보다 일정한 비율로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1999년 8월 30일캘리포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조사한 지질측량국의 기록을 보면, 지진이 22회 일어났다. 그러나 규모 3에 도달한 것은 1회뿐이다. 그 나머지 규모 3 이하의 지진은 창에 앉은 파리도 꿈쩍하지 않는 작은 흔들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개념상으로는 분명 지진이다. 말하자면 거의 매일같이 작은 지진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워낙 미미한 정도라 사람들은 그것을 지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크고 작은 지진들이 무수히 일어나는데, 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진의 강도와 빈도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뿐이다.
1987년에서 1996년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일어난 지진들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에너지 방출이 두 배가 되면 빈도는 네 배로 줄어든다. 즉 우리가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지진들은 수없이 많이 발생하며, 규모가 커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든다. 그래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는 정도의 큰 지진은 매우 적게 발생한다. 이런 사실의 의미는 큰 지진이라고 해서 특별한 원인이 따로 있지 않으니 특별한 징조도 없고, 따라서 큰 지진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전혀 알 수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진 예측이 아니라 다른 일일 수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지진 발생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지진에 대한 대비,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복구 사업은 전적으로 인간 사회의 몫이다. 저명한 역사가 에릭 존스의 주장처럼 선진국이란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충격에 대한 대비를 충실히 하는 국가를 말한다.
P 70~72




더 나아가서 향은 일반적인 사치품을 넘어 종교적인 물품으로 격상됐다. 몰약은 영생永生의 준비를 위해 미라를 만드는 데에도 쓰였고,유향은 종교 제의에 필수품이었다. 유향을 태우면 미묘한 연기가천천히 원을 그리며 하늘로 올라간다. 고대인들은 상상 속에 이 연기가 하늘에 닿아 좋은 냄새와 아름다운 형상으로 신들에게까지 즐거움을 선사하리라고 믿었다. 초기 유대교도들은 제단의 향로에서 피어올린 자욱한 향 뒤에 신이 현현해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먼 과거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의 사고를 넘는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 P16

개인 집에 욕실(sathroom이 등장한 것은 먼 훗날이었으므로 대개 침실에서 목욕을 했다. 공중목욕탕이 사라진 것은 나체를 남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종교적 가르침도 작용했다. 실제로 목욕탕은 매춘이 빈번히 일어나는 장소였다. 또 여러 사람이 모이고 물을 함께 쓰는 것이전염병을 옮기는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물론 고대 로마제국만큼 중세 이후 유럽 문명이 체계적으로 물을 관리하지 못한프라‘의 문제가 배후에 있었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베르사유 궁에 화인장실과 욕실이 없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러니 급한 사람은숲으로 뛰어가서 해결해야 했고, 근엄한 왕족과 대귀족 사람들의 청결상태는 매우 의심스러운 수준이었다.
문명의 핵심은 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 P20

심지어 왕궁도 난방 문제에서는 전혀 나을 것이 없었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는 양쪽 벽에 각각 하나씩 벽난로가 있었지만 이 거대한 공간을 따뜻하게 데울 수는 없었다. 1695년 2월 3일,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루이 14세가 식사하는 모습에 대해 한 궁정인은 이렇게 썼다. "왕의 식탁에서 유리잔 속의 물과포도주가 얼었다." 당시 실내의 난방 시설이 어떤 수준에 처해 있었는지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도 드물 것이다.
중세 사회의 실상을 설명하는 한 역사가는 돌로 지은 성의 추운 방에서 덜덜 떨며 살던 귀족보다는 초가집 방에서 밤에 돼지를 껴안고자던 농민들이 더 따뜻하게 겨울을 났으리라고 추정한다. 그들이 온돌에서 온몸을 지지며 자는 우리 조상들을 봤으면 꽤나 부러워했을것 같다. - P23

그런데 수세식 변기의 보급은 도시의 위생을 개선했을까. 초기에는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식수원인 템스 강으로 오물을 직접 흘려보내악취가 극심하게 됐고, 만조 때에는 오물이 낡은 하수도관을 타고 가정집의 지하실로 역류하기도 했다. 당연히 수인성 질병이 만연했다. 특히 여러 차례 콜레라가 발병하여 엄청난 피해를 불러일으켜, 이것이 위생 상태의 근본적인 개선을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영국의 변호사이자 사회 개혁의 선구자인 에드윈 채드윅 Edwin Chadwick(1800~90)이 영국 노동 계급의 위생 상태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도시 빈민들의 비위생적인 환경을 개선하자고 역설한 덕분에 완전히 새로운 상하수도 시스템이 마련됐다. 하수도관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거주지로부터 먼 곳에서 하수를 처리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수세식 화장실이 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수세식 변기는 오랜 세월에 걸친 각고의 노력의 산물이다. - P26

그때가 되면 새로운 통제소를 통해 원격 조정이 가능한 최첨단 상수도 시스템의 시대가 열리게 될 것이다.
뉴욕 시만이 아니라 미국 내 모든 주요 도시들이 뉴욕 시와 비슷한종류의 기반시설 문제에 직면해 있다. 미국 내 급수 시스템의 핵심 시설인 112만 6,540킬로미터에 달하는 노후한 상하수도관과 정수장 및기타 시설들을 개선하는 데 향후 20년간 2750억 달러에서 1조 달러의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전 세계적인 수자원 기반시설 수요는 이보다 훨씬 규모가 크다. 아마도 전 세계 도시에 공급되는 식수의절반 가까이가 가정에 공급되기 전에 소실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갑자기 서울이나 부산 같은 우리나라 도시의 땅 아래 사정이 궁금해진다. - P30

우리나라는 일찍이인쇄술이 발달해 있었다는 점을 자랑한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光大陀羅尼」(706~751)은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로 알려져 있고,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1377)은 구텐베르크 Johannes Gutenberg(1397~1468)의 발명보다 수십 년 앞서 있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물이다. "
이처럼 ‘역사상 최초‘라는 점도 의미가 크지만,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인쇄술이 지식의 보급이라는 면에서 어떤 공헌을 했는가다. 우선어떤 책이 얼마나 출판됐으며, 또 그것들이 당대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읽혔는지를 연구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해서 유럽에서 금속활자의발명 이후 일어난 책의 출판과 지식의 보급에 대한 연구를 참조할 필요가 있다. - P31

책만이 아니라 신문의 발행 역시 주목할 만하다. 1605년에 상업 관련 기사를 실은 정기적인 신문이 창간됐고, 1693년에는 영국에서 최초의 여성 잡지가 보급됐으며, 1702년에는 최초의 일간신문이 발행됐다.
1753년에 영국의 출판업자들은 매일 2만 부의 신문을 판매했다.
에스파냐 왕실은 1476년부터 국가의 공식적인 결정 사항들을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 인쇄기를 적극 활용했지만 오스만 제국과 무굴제국 등 아시아의 대국들은 계속 필경사에 의존했다. 무슬림 국가들은 신성한 『쿠란』을 인쇄기로 찍는다는 것을 신성모독으로 치부해서오랫동안 인쇄술을 거부했다.
1450년 이후 인쇄술을 적극 활용한 유럽은 지식과 정보 면에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과 확연히 구분됐다. 아마도 이것이 근대에 유럽이 앞서간 중요한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 P33

다소 놀라운 이야기일지 모르겠지만, 원래 낙타는 북아메리카가 원산지다. 진화 초기에는 토끼만 하던 이 동물 Protylopus이 어떻게 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동물로 변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지금부터 약 1만 3천 년 전까지 지속됐던 소빙하기에 해수면이 현재보다 크게 낮아져서 오늘날의 베링 해협이 베링기아Beringia 라 불리는 육로가 되어 알래스카와 시베리아 동부 지역이 연결됐을 때 낙타가 시베리아 쪽으로들어왔다. 이때 낙타의 모습이 어땠는지, 예컨대 혹이 하나였는지 둘이었는지는 불확실하다. 아마도 원래 쌍봉낙타camel였다가 그중 더운지방으로 들어간 것들이 단봉낙타(dromedary로 진화해가지 않았을까생물학자들은 추론하고 있다.
그 후 정작 북아메리카에서는인간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동물들이 많이 있지만 그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례로 낙타를 들 수 있다. - P34

19세기에 기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유라시아-아프리카 대륙의 문명권들과 그 주변 지역을 연결하는 일은 ‘사막의 배‘라고 불리던 낙타가없이는 불가능했다. 게다가 더운 사막 지역에서는 단봉낙타가 추운스텝 지역에서는 쌍봉낙타가 적응하여 일을 하는 ‘세계적인 낙타의 분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니, 사람들은 이를 신의 섭리로 해석했다. 현재의 관점에서는 한 마리당 약 50킬로그램 정도(과거 역사 시대의 단봉낙타의 경우)에 불과한 수송량이 가소로운 정도로 보이지만, 아랍 지역 · 인도·중국·북아프리카·중앙아시아 등 여러 지역 간의 경제적 혹은 문화적 교류가 진행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낙타 덕분이었다. 낙타는 우리 역사와는 큰 인연이 없었지만, 세계사적인 관점에서 보았을때 여러 문명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나가는 데에 결정적인공헌을 했다. - P37

소금은 사람의 생명유지에 필수불가결한 물품이다. 사막을 건널 때물 부족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소금 부족이라고 한다. 그래서 낙타를 몰고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대상은 물이 나는 곳과 함께 암염이 나는곳 혹은 소금을 숨겨둔 곳을 잘 기억하고 여행을 해야 한다. 바닷가에서 먼 내륙 지방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경우에는 암염 광산이 가까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금 장사꾼들이 닿을 수 있어야만 한다. 과거의권력 당국은 이처럼 소금 공급이 필수불가결하다는 사실을 이용해 세금을 걷었다.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소금 거래에 소비세를 부과하는 것만큼 손쉬운 징세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 P45

도시에서 사용되는 용수도 거의 재활용되지 않고 있다. 주택의 3분의 2가 하수 처리 공장과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하수오염물질이 표층 지하수에 흘러들어가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물부족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이런 속도로 진행될 경우 빠르면 2025년에 아라비아 반도의 대수층은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서서히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 황금 시대의 종말이 가까워오고 있다. 석유 채굴이 한계에 도달하면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석유보다는물이 인간에게 훨씬 중요한 자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지난 시대에 우리는 석유가 한 방울도 나지 않는 나라에 산다고한탄했지만, 조만간 물이 풍부한 우리나라야말로 실로 복 받은 나라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 P50

중국의 역대 왕조는 안정 단계에 들어서면 늘 대규모 치수 사업을벌였다. 남수북조 공정 역시 그러한 고대 제국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이 사업의 아이디어는 1950년대에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이 처음제안했다. 당시 마오쩌둥은 "남부에는 물이 풍부한 반면 북부엔 물이부족하니 가능하다면 남부 물을 조금 빌려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0년대에 중국이 극심한 가뭄 피해를 입은 후 이 아이디어가 되살아나 논의를 거친 끝에 본격 추진하게 됐다. 그러나 이 거대 사업은사회적·환경적 영향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이루어져서 과연 어떤결과를 초래할지 관심 있게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 P54

로마 제국은 왜 멸망했을까. 이것은 역사학의 고전적인 질문이지만,
사실 로마 제국이 왜 멸망했는지 묻기보다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망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는지 묻는 것이 더 타당할지 모른다. 신화상의시대나 왕국은 차치하고 로마 공화국부터 따지면 고대 로마는 약 500년 정도 공화정으로 존속했고, 아우구스투스 이래 다시 500년 가까운세월 동안 제정으로 존속했으니, 무려 1천 년 가까이 유지된 것이다.
제국 말기에는 유럽 대륙과 아프리카 북부 지역을 포괄하는 거대한영토를 지배했는데, 당시 교통수단이나 인구 수준을 고려하면 똑같은 크기의 영토라 하더라도 오늘날에 비하면 훨씬 더 관리하기가 어려운 광대한 제국이었다. 그러니 이 공룡과 같은 거대 제국이 말년에 심각한 중병을 앓으면서도 그토록 오래 버틴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할 수 있다.
하여튼 사망진단서에 기록할 만한 구체적 사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설이 제기됐다. 노예제 대농장(라티푼디움)의 비효 - P55

율성과 노예 공급의 중단으로 경제가 전반적으로 불황에 빠진 기점,
독교를 비롯한 외래 종교의 전파로 군인들의 강건한 상무정신精神이 쇠퇴한 점, 국가 기구가 비대해진 데다가 과도한 세금과 인플레이션으로 민생이 파탄난 점 등이 흔히 거론되는 요소들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망국의 원인들의 목록에 한 가지 특이한 요소를더할 수도 있다. 미국의 한 학자가 시민들의 납중독을 중요한 요소로 거론한 것이다. 로마의 상층 계급 사람들은 음식을 조리하는 데청동 그릇 대신 납으로 된 그릇을 사용했고, 배수관과 물 단지도 납으로 만들었으며, 화장품·약·염료를 만드는 데에도 납이 많이 들어갔다. 특히 포도주를 잘 보존하고 단맛을 더 내기 위해 내부를 납으로입힌 단지 속에 포도즙을 넣고 끓여서 맑은 액을 건져내어 포도주에첨가했는데, 이런 과정에서 상층 계급 사람들은 상당히 많은 양의 납을 흡수하게 됐다고 한다. - P56

체내에 하루 1밀리그램 이상의 납이 흡수되면 변비와 식욕 감퇴, 수족 마비부터 시작해서, 남자들의 불임, 임신부의 유산 등이 유발될 수있다. 그리하여 몇 세대에 걸쳐 서서히 집단적으로 납 중독에 걸린 상층 계급이 높은 사망률과 낮은 출생률을 보이게 됐다는 것이다. 이탈리아 동부의 권력 핵심 지역인 라벤나 같은 곳에서 이런 현상이 특히심했다고 한다. 변방에서 이민족의 압박이 점차 거세졌지만 사회 지도층 인물들이 서서히 사라져가면서 로마는 내부의 활력을 상실해갔고 그 결과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 4세기 말에 이르면 밀라노 주교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340?~397)는 주변에서 볼 수 있는것이라고는 "반쯤 파괴된 도시들에 널린 시체들뿐이었다고 한탄했다.
납 중독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로마 제국의 멸망을 전부 설명할 수는없지만 그렇다고 전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어 보인다. 복잡다기한 역사현상의 이면에는 이처럼 예기치 않은 흥미로운 측면들이 숨어 있다. - P57

개인이든 사회든 고립 상태가 계속되면 지체와 퇴보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문명과 문화는 지속적으로 외부 세계와 만나고 상호 교류를 해야발전을 기할 수 있다. 홀로 고립될 경우 아무런 자극을 받지 못하고정체하기 십상이며,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의 고립 끝에 갑자기 외부세력과 접촉할 경우 식민 지배를 받거나 심하면 절멸당하는 사례가 많다. 지구적인 시각을 가지고 세계의 흐름을 잘 타야만 발전할 수 있다. - P63

유럽인들에게는 희망이었을지 모르지만 원래 이곳에 살던 코이산족khoisan("호텐토트‘라는 말은 네덜란드인들이 경멸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같은 현지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불행의시작이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 원거리 항해 중에 선원들이 휴식을취하고 보급품을 충전하는 중간 정박지로서 좋은 여건을 가진 이 지역은 1652년에 네덜란드인들이 조직적인 정착을 시도하여 곧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위한 보급기지가 됐고, 후일 케이프타운으로 발전했다.
그 후 프랑스계 신교도들(위), 독일인, 영국인 등이 차례로 들어와 주변 지역으로 팽창해가면서 전쟁과 약탈, 인종차별의 복잡한 역사가 전개됐다. 1815 년에 영국의 식민지가 되자 네덜란드계 사람들(즉 보어인들이 영국 식민 지배를 피해 주변 지역으로 확산해나가서 새로운 정치 단위들을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2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다이아몬드 생산지라는 것이 알려졌고, 금도 - P65

발견되어 더욱 해외 세력의 유입이 증가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잔혹한 식민지 전쟁인 보어 전쟁의 무대가 됐다. 20세기에는 세상에서 유례를 찾기힘든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및 인종차별)의 역사가 진행됐다. 희망봉으로 명명된 이 지역의 역사는 대부분의 시대에 절망적인 암흑의 역사였다. 드디어 1994년 넬슨 만델라NelsonMandela (1918~ )가 대통령으로집권한 이후 오랜 비극의 역사는 일단 진정됐다.
태즈메이니아가 외부 세계와의 고립 때문에 역사 발전의 흐름에서뒤처져 몰락했다면, 남아프리카 희망봉 지역은 아무런 대비 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고통을 당했다. 결국 철저한 대비를 한 연후에 세계의흐름을 타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될 터다. - P66

17~19세기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개체 수가 많은 새는 나그네비둘기 passenger pigeon (여행비둘기라고도 한다)였다. 당시의 기록들을 보면이 새가 얼마나 많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컨대 1854년 미국 뉴욕주의 웨인 타운에서는 "며칠씩이나 새들로 하늘이 뒤덮일 때가 있고, 새 떼가 안 보이는 시간은 반나절도 안 됐다." 하늘을 덮은 이 새 떼의 무리는 1.6킬로미터 폭에 길이가 500킬로미터에 이르기도 했다. 나무 한 그루에 심지어 100개 가까운 새 둥지가 만들어졌다가 그 무게때문에 가지가 부러지거나 뿌리가 뽑히기도 했다. 새 떼를 향해 총을한 발 쏘면 30~40마리가 떨어졌고, 언덕에서 나뭇조각만 던져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인디언들은 막대기로 이 새들을 때려잡았고 따라나선 아이들도 새 모가지를 쉽게 비틀어 잡았다고 한다. 학자들은 한창때에 이 새의 개체 수가 최소 수십억 마리에서 많게는 10조 마리까지였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어떻게 한 종의 개체 수가 이토록 많을 수 있을까. - P67

생태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아마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 도래한이후 생태계를 교란시킨 결과 이런 비정상적 현상이 일어났을 것으로추론한다. 그 이전에는 이 새가 생태계 내에서 다른 종들과 적절한 균형 상태에 있었으나 어떤 이유에선지 생태계가 통제력을 상실한 후 비정상적으로 수가 늘었다는 것이다. 가능성이 큰 가설 중 하나는 기술적으로 불을 지르며 숲을 다스리던 인디언들이 몰락하자 생태계의 변화가 유발됐다는 것이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왔을 때 그들은 이곳의 자연이 인간의 손길이 거의 닿지 않은 본래의 상태 그대로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유럽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강에는 어살이 있었고, 인공 둔덕들이 있었으며, 숲도 많이 변형된 상태였다. 특히 인디언들은 불을 질러 숲을 통제하여 어떤 곳에서는 원하는 과실수들이많이 자라도록 만들어놓고, 어떤 곳에는 원하는 사냥감들이 많이 모이도록 해놓았다. 이럴 때 사람은 말하자면 이곳 생태계의 핵심종(다른 - P68

많은 종들의 생존과 개체 수에 영향을 미치는 종)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의 도래 이후 인디언들의 수가 줄어들자 생태계의 균형이깨졌고, 그때 일어난 이상 현상 중 하나가 특별한 종의 동물 수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것이다.
나그네비둘기의 수가 엄청나게 많았던 것만큼이나 이 새가 사라져간 것도 극적인 일이다. 삼림 황폐화로 인해 이 새들의 먹잇감인 도토리, 밤 같은 것들이 크게 줄어들었다. 게다가 19세기에 이 새는 대랑 포획의 대상이 됐다. 초기에는 한 해에 약 25만 마리를 잡았는데,
이 정도만 하더라도 멸종 위기에 몰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곧 사냥꾼들과 상인들이 회사를 만들어 이 새를 무차별 포획하여 대도시에새고기를 공급했다. 이것은 노예들과 빈민들의 식량으로 많이 쓰였다.
1860년 7월 23일자 이 회사의 기록을 보면 하루에 23만 마리 이상의새를 잡아서 동부로 보냈다. 이런 정도의 남획이 지속되자 그 많던 새들도 결국은 사라져갔다. 드디어 1914년 9월 1일, 미국의 신시내티 동물원에서 ‘마사Martha‘라 불리던 마지막 나그네비둘기가 죽음으로써 이새는 지구상에서 영구히 사라졌다.
2011년 초에 새들이 떼죽음을 당해 하늘에서 떨어지는 일들이 자주벌어졌다. 지구온난화로 인해 새들의 서식지 환경이 변화했기 때문이아닐까 추정된다고 한다. 암만해도 인간이 다른 동물들에게 너무 큰폐를 끼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P69

지진의 발생을 예측할 수 있을까.
지진 예측이 가치가 있으려면 지진이 일어나는 장소와 시기, 규모를정확히 맞혀야 한다. 학교와 공장의 문을 닫고 주민들을 대피시키는데에는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이다. 한 지진학자는 유용한 지진 예측은 "50퍼센트는 맞아야 하고, 하루 정도의 정확도를 가져야 하며, 50킬로미터 이내로 맞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수준의 예측은불가능하다.
그동안 지진 발생을 예측한 사례가 많이 있었다. 1990년 아이벤 브라우닝ben Browning (1918~91)이라는 생물학 박사가 12월 1일에서 5일사이에 미국 미주리 주의 세인트루이스에서 강력한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 시기에 태양, 지구, 달이 일직선을 이루는데, 이때강해진 중력이 일으킨 조수력에 의해 뉴마드리드 단층 지역의 스트레스가 한계 이상으로 올라가 지진이 일어난다는 설명이었다. 미국 중동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졌고, 사회 전체가 엄청 - P70

난 혼란에 빠졌지만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0년대 후반에 일본의 과학자들은 일본 중부에 대지진이 엄습한다고 경고했다. 이들의 추론은 매우 단순했다. 지진이 일어나는 전형적인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지진이 일어난 뒤에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곧 다음 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 의견을 받아들인 일본 당국은 조기경보체계를 만들고, 지진 데이터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즉시 조사위원회를소집하여 원자로, 고속도로, 철도, 학교와 공장을 닫을지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비상시 대피 훈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도록 그런 지진은 일어나지 않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지진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국가에서는 그동안막대한 자금을 투입해서 지진 예측을 위한 연구를 수행했다.  - P71

특히 큰지진이 일어나기 직전에 나타나는 특별한 징후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구물리학자들이 100년 넘게 연구를 했음에도불구하고 현재까지 믿을 만한 전조 현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누구는 큰 지진이 일어나기 전에 땅에 이상한 전류가 흐른다고 주장했고,
누구는 개나 소가 이상한 행동을 보인다고 했다. 혹은 날씨가 아주변덕스럽거나 이상한 빛이 난다고도 했다. 그러나 도쿄대의 지구물리학자인 로버트 겔러는 이런 식으로 지진의 전조 현상을 찾아냈다고 주장하는 연구 논문을 700편 이상 검토했으나 어느 하나 신뢰성이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왜 지진의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든 것일까.
지구물리학자들은 "지진의 에너지 방출 규모와 발생 빈도 사이의관계는 멱함수(power function) 형태를 띤다"고 이야기한다. 이말은 사람이 느낄 수도 없는 아주 작은 지진이나 아이티 대지진이나 - P71

모두 똑같은 원인으로 일어나, 다만 작은 지진이 큰 지진보다 일정한 비율로 더 자주 일어나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1999년 8월 30일캘리포니아의 여러 지역에서 조사한 지질측량국의 기록을 보면, 지진이 22회 일어났다. 그러나 규모 3에 도달한 것은 1회뿐이다. 그 나머지 규모 3 이하의 지진은 창에 앉은 파리도 꿈쩍하지 않는 작은 흔들림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이것 역시 개념상으로는 분명 지진이다. 말하자면 거의 매일같이 작은 지진들이 발생하고 있지만 워낙 미미한 정도라 사람들은 그것을 지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따름이다. 크고 작은 지진들이 무수히 일어나는데, 그에 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지진의 강도와 빈도 사이에 특별한 관계가 있다는 것뿐이다. - P72

1987년에서 1996년까지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일어난 지진들의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에너지 방출이 두 배가 되면 빈도는 네 배로 줄어든다. 즉 우리가 거의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지진들은 수없이 많이 발생하며, 규모가 커질수록 일정한 비율로 줄어든다. 그래서 사회에 큰 충격을 주는 정도의 큰 지진은 매우 적게 발생한다. 이런 사실의 의미는 큰 지진이라고 해서 특별한 원인이 따로 있지 않으니 특별한 징조도 없고, 따라서 큰 지진이 언제 어디에서 일어날지 전혀 알 수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지진 예측이 아니라 다른 일일 수밖에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지진 발생은 하늘의 뜻이라고 하더라도 지진에 대한 대비, 그리고 지진이 일어났을 때의 복구 사업은 전적으로 인간 사회의 몫이다. 저명한 역사가 에릭 존스의 주장처럼 선진국이란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충격에 대한 대비를 충실히 하는 국가를 말한다. - P72

요루바족은 ‘말하는 북alking drum‘ 을 사용한다. 성조언어(소리의 높낮이를 달리하여 서로 다른 뜻을 전달하는 언어)인 아프리카어의 특징을 살려 북소리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의사소통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북소리만으로 누가 오는지도 미리 알 수 있다. 마을 어귀에 있는 사람이북소리로 마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들이 춤을 출 때 춤꾼과 고수는 북소리로 대화를 나눈다. 고수가 원하는 춤동작을 북소리로 지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탄하는 춤꾼은고수의 지시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사람인데, 말없이 북소리로만 의사를 전달한다.
아프리카 열대우림 지역에서는 긴 나무를 재료로 음량을 키운 북을사용하여 마을과 마을을 잇는 연락망으로 왕국의 소식을 전달하기도한다. 아메리카에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은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다가정기적으로 밤에 모임을 가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때 노예들이 가장 신경을 쓰며 기어이 빼앗으려 한 것도 북이었다. 노예들이 북을 치며 흥을 돋우는 것이 단순히 노는 정도를 넘어 위험한 수준으로 응집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북을 치며 소리 지르고 노래하고 춤추는 행위는 인간을 서로 엮는핵심적인 행위다. 그렇게 보면 가무는 일종의 ‘문화적 페로몬‘이라고할 수 있지 않을까. - P86

해마다 4월 말이 되면 네덜란드의 하를럼 시 주변 지역은 지평선 끝까지 튤립으로 덮여 장관을 연출한다. 이 아름다운 튤립이 한때 광란에 가까운 투기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는 강렬하고 다양한 색상을 가진 튤립이 큰 인기를 끌면서 가격이 급등했다. 이를 이용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데생각이 미치자 수많은 사람들이 전 재산을 털어 텃밭을 사고 튤립 구근을 키웠다.
이는 곧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투기 현상으로 이어졌다. 값이 오르리라고 예상되는 구근을 10퍼센트의 선금만 지급하고 미리 확보해놓는다. 수확기가 되면 잔액을 지급한 다음, 값이 훨씬 올라 있는 이구근을 다른 사람에게 되판다. 이렇게 되면 소액의 선금만 이용해서큰 이윤을 남길 수 있다. 사실 이런 방식은 우리에게는 아주 친숙하지만, 당시에는 꽤나 충격적인 것이었다. 허황된 방식으로 돈을 번다고해서 이런 거래를 ‘바람장사vinchance)‘라고 불렀다. - P87

콜럼버스의 생각대로라면 현지 주민들의 언어는 언어도 아니고, 기독교가 아닌 종교는 종교도 아니다. 그들을 지배하고 노예로 삼으면될 것이며, 우선 그중 몇 명을 짐승 잡아가듯 맘대로 잡아다가 통역겸 앞잡이로 키우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유럽인들의 태도였다. 실제로이 이후 일어난 일들은 ‘인디언‘이라고 잘못 명명한 이 사람들에 대한착취와 노예화, 학살이었다. 이날 일어났던 일 가운데 아마도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콜럼버스 일행이 보여준 칼을 현지인들이 움켜쥔 일이다. 칼을 처음 본 현지인들은 어디가 날이고 어디가 칼등인지 몰라 날 - P91

을 잡았다가 손을 베고 만다. 조만간 이들은 서양의 무력 앞에 상처를받고 굴복하게 될 것이다.
소위 지리상의 ‘발견‘이나 식민지 ‘개발‘의 실상은 이런 것이었다. 그동안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기리던 미국 학교에서도 점차 실상을 숨김없이 가르치고 있다. 최근 신문지상에 보도된 바에 따르면,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의 한 초등학교 4학년 학생들이 콜럼버스를 피고로 해서모의재판을 열었는데, 그 결과는 "에스파냐 왕실을 빙자하여 절도를한 혐의로 무기징역이 선고됐다고 한다.
일부 국가나 지역에서 ‘콜럼버스의 날‘을 다른 이름으로 기념하는것도 이런 흐름과 통하는 일이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 P92

칠레, 멕시코는 이날을 ‘인종의 날Dia de la Raza‘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유럽인과 아메리카 주민이 처음으로 만난 것을 기념하는 의미다. 미국에서도 사우스다코타 주는 이날을 ‘아메리카 원주민의 날Native Americans‘
Day‘로, 하와이 주는 폴리네시아인이 하와이를 처음 발견한 날이라는의미로 ‘발견자의 날Discoverers‘ Day‘로 바꾸었다.
과거 역사 인물 중 콜럼버스만큼 격정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는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이제 ‘신대륙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상을 연 인물이라기보다는 침략자, 학살자로 그려지는 경향이 있다. 역사를 보는시각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바뀌어간다. - P93

1886년 미국 대법원의 수석재판관인 모리슨 웨이트는 미국 수정헌법 제14조에 근거하여 회사는 사람과 똑같은 권리를 가지는 존재라고판결했다. 회사는 적어도 법적으로는 실제 사람과 똑같은 존재인 법인이 되어서, 그 자신의 이름으로 사업을 운영하고 자산을 취득하며 노동자를 고용할 뿐 아니라 법원에서 자기 권리를 옹호하게 됐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회사는 어떤 성격의 존재였던가. 캐나다의법률가이자 작가인 조엘 바칸Joel Bakan 은 저명한 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D. Hare 박사가 창안한 심리검사 기준을 적용하여 회사(법인)가실제 사람(자연인)과 같은 존재라고 가정하면 과연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분석해보았다.
회사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다른 모든 사람을 위험에 빠뜨리는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다. 여론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조종‘
하려고 하며, 자신이 늘 최고라고 주장하는 ‘과대망상‘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신 때문에 희생하는 사람들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 ‘동 - P105

정심 부족‘과 ‘비사회적 태도‘라는 특징도 보인다. 회사가 위법 행위를하다가 발각되면 약간의 벌금을 물고는 다시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점에서 ‘자기 행동에 대해 책임감이 없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존재다. 회사는 일반 대중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려는 의도로만 관계를 맺으려고 하므로 대인관계는 언제나 ‘피상적‘이다. 실제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사이코패스, 즉 폭력성을 동반한상심리 소유자다. 지금까지 많은 회사는 분명히 이런 성격의 존재였다. 예컨대 멕시코 만에 엄청난 원유 유출 사고를 일으킨 영국의 글로벌 석유회사 BP아모로의 행태를 보면 그런 분석에 공감하지 않을 수없다. - P106

그러나 현대 사회경제 역시 진화를 거듭하여, 이제는 과거와 같은행태를 고집하기가 쉽지 않다. 현대 마케팅 이론의 대가인 필립 코틀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k(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다하는 ‘착한 기업만이 살아남는다고 주장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은 소비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그 회사제품을 더 사려 하고, 회사는 더 좋은 인재를 유치할 수 있으며, 협력회사로부터는 더 유리한 업무 협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익을위해서는 온갖 악행도 마다하지 않는 천민자본주의식 기업은 큰 장사를 못한다.
기업의 선행은 단순히 위장된 쇼가 아니라 국내외 경제 환경에서 다 - P106

른 사람들(자연인이든 법인이든)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데 필수적 요소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물론 기업들에게 천사 같은 박애주의자가되라고 할 수는 없다. 기업의 1차 목표는 결국 돈 버는 일이다. 다만이 사회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며 선한 방식으로 돈을 버는 성숙한 인격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 P107

세계의 대학 입학제도 가운데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프랑스의 바칼로레아가 있다. 이것은 중등교육과정을 잘 수료하여 대학에 입학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는지 검정하는 시험으로, 우리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리세lycée 마지막 학년에 치른다. 이 제도는 나폴레옹 시대인1808년에 처음 도입됐으니, 무려 2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바칼로레아는 프랑스의 사회 변화를 반영하며 진화를 거듭해왔다.
초기에는 대학 입학이 상층 계급의 전유물이어서, 1808년 첫해에는 과학 영역 바칼로레아 한 종류만 있었고, 구술시험을 통해 31명의 자격자 bachelier만 배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야만 해도 여전히 자격자는7천 명에 불과할 정도로 소수였으나, 1960년대에 이르러 큰 변화가찾아왔다. 이때까지 대학은 대부분 도시 상층민에게만 문호가 개방되어 있었고, 농촌 지역에서는 초등교육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1960년대에 이러한 사실상의 구분이 사라져서 전국의 모든 학생이 바칼로레아를 거쳐 대학에 가는 길을 택하게 됐다. - P108

여기에 베이비붐의 영향이 더해졌다. 청소년의 수가 크게 늘어났고,
이들 중 많은 수가 교육을 더 많이 받아 사회 상층으로 상승하려는욕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바칼로레아 응시자가 크게 늘어날 수밖에없었다. 1960년에 5만 명이었던 자격자는 5년 안에 10만 명에 육박했다. 이때는 또한 소위 ‘68년 혁명‘의 시대였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낭테르 대학(파리 10대학) 학생 시위를 우파 정권이 진압하면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의 항의 시위는 5월 13일 무려 100만 명의 파리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서서 행진하게 됐고, 그 후에는 무려 1천만 명이 넘는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사회·정치적 변화에 맞추어 대학 체제에도 변화가 찾아왔고(예컨대 단기공과대학 만들어졌다) 그런 변화에 맞추어 바칼로레아 체제 역시 조정됐이다. 1985년에 세 번째 영역인 전문 분야 바칼로레아가 만들어져 이제학생들은 자신의 진로에 맞춰 일반·전문·기술 세 영역의 바칼로레아 - P109

중 한 가지를 선택하여 응시한다. 프랑스 교육당국은 한 연령층 학생중 80퍼센트가 바칼로레아 자격자가 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자격 미달인 학생들이 많아 오늘날 그 수치가 대체로 65퍼센트정도에 머물고 있다.
영역에 관계 없이 모든 응시자들이 치르는 철학시험에서는 광범위한 독서와 독창적 사고를 요하는 논술 문제가 출제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우리는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만을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식의 문제들은 응시자만 아니라 전국민이 한번쯤 이야기하는 화제가 되곤 한다.
이 제도 역시 여러 문제를 안고 있고 많은 개선 요구에 직면하지만,
장구한 기간 큰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사회의 민주화와 다양화를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품위와 권위를 누린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다.
말로는 교육이 백년대계라고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제도를 바꾸면서 그때마다 수험생들과 학부모들을 고통 속에 밀어넣는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앞으로도 또 어떤 새로운 대입제도가계속 나타날지 궁금하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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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카터 헷
BENJAMIN CARTER HETT

미국의 역사학자이자 뉴욕시립대학 헌터칼리지 ·대학원의 역사학 교수, 토론토대학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하버드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변호사로도 활동했던 헷은 사법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 독일의 역사적 사건 · 인물을 추적한 책을 선보여 왔다. 독일제국 전환기 베를린에서 일어난 형사사건 · 재판을 통해 당시의 사회변화를 조망한 첫 저서 <티어가르텐에서의 죽음>, 용감한 반나치 변호사 한스 리텐의 전기 《히틀러와 맞서며》, 1933년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의 미스터리를 탐구한 《국회의사당 불태우기》 등이 그 결과물이다.

최근 몇 년간 헷은 관심을 더 넓혀 1930년대 초 독일의 민주주의 위기가 어떻게 2차 세계대전으로 번졌는지 탐구하고 있다. 최근
연구를 반영한 이 책에서는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과 원인을 돌아보면서, 세계적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를 맞았던 1930년대와 오늘날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틀러와 맞서며》로 에른스트 프랭켄상을, 《국회의사당 불태우기》로 한스로젠베르크상을,《히틀러를 선택한 나라》로 바인상 역사 부문을 수상했다. 현재 뉴욕에서 거주하며 연설, 라디오, TV, 역사 다큐멘터리에정기적으로 출연하고 있다.





어떤 사회 집단이 나치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는지 돌이켜 보는 게 중요하다. 1930년에는 뚜렷한 흐름이 나타났다. 앞에서 말했듯 나치는 중산층신교도 진영을 넘겨받았다. 가톨릭 진영 표를 약간 가져오고, 사회주의진영에서 약간 더 가져왔지만, 신교도 진영에서 가져온 표가 훨씬 더 많았다. 그래서 나치를 뽑은 유권자는 기본적으로 농촌 지역, 특히 독일 북부와 동부의 농촌 지역 신교도와 도시에 사는 중산층 신교도였다. 가톨릭신자와 노동자는 대부분 자신들의 전통적인 진영에 남아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종교적·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신교도는 인간 본성을 비관적으로 생각했고, 권위주의 국가만이 인간의 죄악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느꼈다. 권위주의 국가는 하나님 - P166

의 도구이고, 혁명은 하나님에 맞서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프로이센에서는 1817년에 루터파와 칼뱅파 교회가 통합되면서 프로이센 교회 연합이만들어졌고, 1918년 이전까지 프로이센 왕이 이 연합의 수장이었다. 독일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선 1517년 이래, 독일 개신교가 극도로 민족주의적으로 된 일은 자연스러웠다. 훗날 주교가 된 오토디벨리우스Otto Dibelius 목사는 "교회는 정치적으로 중립이지만 국가인민당에 투표한다"1" 라고 말했다(그는 모순을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신교도가 싫어하는 요소들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1918년 이전에 신교도들은 강력한 군주제가 정치를 넘어서는 국가 기관으로서 도덕적인 사회생활을 보장한다고 생각했다. 정당이 권력을 가지고 세속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서자 신교도들은어찌할 줄 몰라 했다. 타협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가 국민 생활을 지배하고, 오랫동안 확고했던 도덕이 사라졌다고 여겼다. - P167

게다가 혁명으로 새 국가가 들어섰고,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헌법을 만들고, 가톨릭을 대변하는 중앙당이 매우 중요한 정당으로 자리잡았다. 중앙당은 중도인 데다 선거에서도 표를 많이 얻어 바이마르 공화국의 어떤 연정에서도 중요 위치를 차지했다. 1932년까지 모든 프로이센주정부와 연방정부 구성에 참여한 정당이었다. 신교도는 그렇게 정치적힘을 얻은 가톨릭을 질투하며 화를 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같은 사람들은 보수주의 정당과 자유주의 정당들을 한데 모아 개신교적인 대안을만들어 균형을 잡으려고까지 했다. 독일 신교도 세계관으로는 전쟁을 끝내고 혁명을 일으킨 일을 반역으로 보는 게 당연했다. 한 신교도는 사회민주당이 "쓸데없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바보 같은 혁명을 일으켰"을 뿐아니라, "그저 자기 당이 집권하려고 나라를 배신했다"라고 말했다.  - P167

새로 들어선 공화국은 현대적이고, 세속적이고, 도시적이고, 물질주의적이었다. 신교도들은 이 모든 특징이 불쾌했다. 한 신교도 신학 교수는
"물질주의적인 개화와 민주주의와의 결합은 보통 문화민족이 쇠퇴할 때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 이라고 말했다. 공화국에서는 가톨릭뿐 아니라 유대인의 세력까지 강했다. 민족주의 우파는 1919년 헌법의 기초를 만든 사람이 유대인 법학 교수 후고 프로이스라는 점을 항상 집중적으로 공격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독일인이 이제 "유대인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는 시가 베를린에서 돌아다녔다.  오토 디벨리우스는 자신이 항상 반유대주의자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현대 문명의 타락을 보여주는 온갖 현상에서 유대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앞에서 보았듯 ‘유대인 문제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독일인의 태도를 결정하는 문화코드였다.  - P168

신교도들은 자신들이 경멸하는 공화국에 맞서 저항할 전략을 세웠다.
개신교 공동체 구축 후 20세기의 대중 정치에 동원할 ‘국민교회 Volkskirche‘
를 만든다는 생각이었다. 국민교회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나라에서 개신교와 독일의 가치관(신교도는 둘을 똑같이 생각했다)을 지킬 방법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신교도는 그런 구상이 나치가 민족 통합을 위해 내세운 ‘민족공동체(폴크스게마인샤프트)‘ 개념과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스나브뤼크 출신 목사로, 유명한 신학자 카를 바르트의 친구인 리하르트 카르벨Richard Karwehl은 바이마르 신교도의 생각을 잘 보여줬다. 카르벨은 나치에 반대했고, 나치 이념을 예리하게 비판했다. 그렇지만 바이마르 공화국도 좋아하지 않았고, 신교도들이 왜 나치에 끌렸는지 이해할수있었다. 카르벨은 신교도들이 나치와 함께 ‘진정한 의미의 국민교회‘를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하나님은 각각의 독일인을 - P168

‘우리 국민‘ 속에, 그리고 ‘우리 조국‘의 땅에 두셨다고 한다. 카르벨이 느끼기에는 나치는 개인이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재발견했다. 반면 공한국은 ‘현실과 동떨어진 개인주의적 합리주의‘ 그리고 ‘서로 간섭하지않는 문학적 지식인‘을 내세웠다. 나치 운동에는 "이러한 부자연스러운현상, 현대 문화에서 타락하고 후퇴한 측면‘에 대한 근본적인 분노가 있다고 카르벨은 생각했다. 한편 카르벨이 나치즘의 어떤 면을 좋아하지 않았는지(주로 나치의 인종차별주의)를 보면, 독일 신교도들이 나치즘에 반대할 수 있었다는 걸 알수있다. 민주주의·관용·다원주의를 받들어서가 아니라 그저 나치의 절대주의와 상반되는 또 다른 절대적인 이념을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나치에반대한 신교도들의 세계관에서 정말 중요한 요소였다.  수년 후 신교도레지스탕스 헬무트 야메스 폰 몰트케Helmuth James von Moltke 백작이 나치 인민법정에서 반역죄로 재판을 받을 때 롤란트 프라이슬러Roland Freisler 판사가 "기독교와 민족사회주의(나치즘)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어요. 둘 다전인적인 인간을 요구하죠"라고 말하자 폰 몰트케 백작은 전적으로 동의했다. - P169

목사이자 나치에 저항했던 영웅 마르틴 니묄러Martin Niemöller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위해 전체주의 제도를 요구했다"라고 전쟁 후에 말했다. 카르벨은 나치즘과 자유주의가 근본적으로 비슷하기 때문에 나치즘이 절대 자유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치즘은 그저 자유주의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오만‘을 ‘민족의 오만‘으로 바꾸려고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어느 이념도 하나님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이것이 두 이념과 개신교의 아주 중요한 차이였다. 그렇지만 분명 많은(결국, 아마도 대부분) 신교도들이 카르벨보다 훨씬 더나치에 마음을 빼앗겼다. 1931년, 루터교 단체 ‘내적 선교 Innere Mission‘ 모 - P169

임에서 연설자마다 나치에 대해 열변을 토해 ‘우레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다. 나치가 종교에 관해 아직 입장을 정하지 않았을 때, 한 나치 고문은모임에서 "그리스도, 주의 사람, 주의 말씀, 주의 일을 중심에 두고 ・・・ 어느 편을 들지 정하자! 볼셰비즘과 맞서 싸우자! 복음주의 교회는 본질이나 역사를 볼 때 독일 민족주의와 가장 가깝다!"라고 말했다. 신교도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에 품은 적대감이 공화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증명된다. 가톨릭 교회도 공화국을 그리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샤를 모라스의 반공화주의 단체 ‘악시옹 프랑세즈‘처럼, 가톨릭 권위주의가 목소리를 높이던 시류에 발맞춘 우파 민족주의 가톨릭 단체가 이탈리아와 스페인 등 유럽 곳곳에 많았고 독일에도 있었다. 그렇지만 독일 가톨릭은 중앙당이라는 확고한 정치적 보금자리가 있었다. 중앙당은 공화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정당이었기때문에 가톨릭 신자가 반민주적이더라도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 P170

바이마르공화국의 중산층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평등주의 정치를 원하면서도 민족주의자였다는 증거는 많다. 나치로 옮겨간 한 독일 유권자는 "옛날 정당들은 국민들을 제대로 대하지 않고 기꺼이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포퓰리즘적인 정치 운동은 거의 언제나 사회개혁과 민족주의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난다."
아마 중산층은 자신이 추구하던 바를 사회민주당에서 찾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노동자층과 중산층이 사회적으로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중산층이 사회 개혁과 사회 복지를 원할수도 있지만,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은 사회주의가 어떻게 될 수 있는지보여준 무시무시한 경고였다. 또 중산층 중 누구도 자신이 노동자층의 일원이라고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중산층은 절대 사회민주당에 투표하려 하지 않았고, 물론 공산당에도 투표하지 않았다. 어쨌든 슐라이허같은 중산층 대부분은 사회민주당은 민족주의자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독일은 또 다른 유럽 국가와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당시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발달한 곳에서만 파시즘이 고개를 들었다. 중산층이 두려워할 정도로 사회주의 좌파가 약진했기 때문이었다.  - P171

나치의 지도자 대부분은 보잘것없는 집안 출신이라 자신들이 내세우는사회적 의제의 강력한 사례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분명 특정층의 이익을 옹호했다. 예를 들어 25개조 강령은 특별히 소작농과 영세 상인의 이익을 옹호했다. 하지만 나치는 항상 ‘폴크스게마인샤프트‘라는 민족공동체를 들먹이며 호소했다. 폴크스게마인샤프트는 ‘1914년 신화‘를 바탕으로 한 개념으로, 결국 나치의 정치적 자산이 된다. 나치는 모두가 자기 자리를 가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독일을 건설하겠다고 약속했다.
최소한 유대인과,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르크스주의자를 뺀 모두였다.
나치의 민족주의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세계화라는 단어를 아무도 쓰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에 너무나 익숙했다.
나치는 무엇보다 세계화에 맞선 민족주의 저항운동이었다. - P172

다음 구절들은 오늘날 읽어도 놀랍다. 시대를 뛰어넘어 요즘 이야기처럼느껴진다.
"독일 국민은 독일 금융그룹과 독일 선박회사가 상하이에 이른바 자회사를 설립해 중국 노동자를 고용하고, 외국산 철강을 사용해 중국 배를 - P172

만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독일 회사는 그렇게 해서 이익을 거두겠지만, "매출이 해외로 빠져나가면서 독일 국민은 계속 손해를 볼 것이다." 자본가가 경제와 정치를 좌지우지할수록 이렇게 외국에 설립하는자회사가 점점 더 많아지고, 독일인은 점점 더 외국에 일자리를 빼앗길것이다. "지금은 미래가 어떻게 펼쳐질지 모르고 웃을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30년이 지나면 유럽에서 빚어진 결과를 보고 한탄할 것이다" 35라고 히틀러는 썼다.
히틀러가 그렇게 쓴 건 1928년 출간되지 않은 《나의 투쟁> 속편에서다. 그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를 언급했다. - P173

그는1920년대 말에 히틀러는 세계 경제 및 금융 체제에서 독일의 취약한 위치를 주로 들먹이면서 독일 국민, 특히 나치의 기반이 된 신교도 집단을정치적으로 동원했다. 농민들은 무역협정에 분노해서 시위를 벌였다. 캐나다, 미국과 아르헨티나가 엄청난 양의 농산물을 수출해 세계 농산물 가격이 내려가던 시기에 들려온 수입 농산물 관세 인하 협정이었다. 히틀러는 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영 플랜 반대 운동에 참여하면서 사회적으로인정받으려고 했다. 후겐베르크는 배상금을 모으는 데 참여하는 독일 관리를 처벌하는 법률을 채택하자고 주장했다. "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여러 면에서 독일이 통제할 수 없는 국제적인역학 관계의 희생물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자유무역과 금본위제를 바탕으로 세계 경제 체제를 재편해 부와 권력을 누렸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부와 권력으로 1차 세계대전에서 이겼고, 독일이 헤쳐나가야 하는 세계를 계속해서 좌지우지했다. - P173

베른하르트 폰 뷜로 국무장관은 ‘적국 국민‘들을 ‘계몽‘하면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브뤼닝 총리는 독일이 자유를 되찾는게 ‘평화의 길‘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수입·수출·해외 투자를 전혀 하지 않고 세계 경제와 완전히 관계를 끊으며, 자국 자원에만 의존해 경제적으로 자급자족하는 국가를 만들자는 더 급진적인 주장도 나왔다. 사실 독일은 이러한 정책에 맞지 않았다. 중앙은행의 한스 루터는 정통적 견해를 밝히며 "독일 국민은 자급자족할 수 없다. 공산품을 외국에 팔고, 그 돈으로 농산물을 수입해야 한다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다"라고 설명했다. 루터의 말이 사실이라면 독일의 정치·경제 지도자는 ‘독일 국경 너머에서도 신뢰를 얻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민이 세계 경제 질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가능한 결론이었다. 독일 국민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자급자족 국가에 찬성하는 반대하는 모든 독일인은 국가의 경제 정책이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 P176

자급자족 국가는 나치 정치 유세의 핵심이었다. 적대적인 세계에 의존하던 독일을 해방한다는 주제는 확실히 유권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나치의 약삭빠른 선전부장 요제프 괴벨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공간과천연자원을 확보하지 못하는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외국에 의존하면서자유를 잃게 될 것"이라고 1932년에 썼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와 전후세계의 본질이 이를 확실히 보여줬다고 괴벨스는 주장했다. "그래서 독일 주위에 두꺼운 벽을 쌓아야 할까?"라고 그는 묻고 적었다. "우리는 분명히 벽, 보호 장벽을 쌓고 싶다." 1930년대 초에 독일인이 정말 많이 공감한 정치 연설이 자급자족 국가를 주제로 다룬 연설이었다. 이는 나치 안에서 괴벨스의 팽팽한 맞수였던그레고어 슈트라서의 연설이었다.
- P177

슈트슈트라서는 나치의 틀에 잘 들어맞지 않는 나치 지도자였다. 빡빡 밀은머리에 목소리는 멋진 데다가 몸집이 큰 남자였고, 언제나 정적과 싸울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예술가·작가들과 어울리는 걸 좋아했고,
쉴 때는 호머나 다른 고전 작가들의 책을 읽었다. 슈트라서는 감성적이면서 다정했고, 나치 지지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존경한 유일한 나치지도자였다. 영국 대사는 그를 "가장 유능한" 나치 지도자라고 불렀다.
회의주의자인 미국 기자 휴버트 렌프루 니커보커H. R. Knickerbocker는 슈트라서가 총리가 될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고, 비관적인 역사학자 오스발트슈펭글러Oswald Spengler는 자신이 만난 사람 중 슈트라서가 사업가 후고 슈티네스 다음으로 "가장 똑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 P177

슈트라서가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후 1932년 5월 10일에 나치의원총회에서 한 연설을 보면 왜 정적(예를 들어 빌헬름 회그너)조차 슈트라서를 경멸하지 않았는지 알수 있다.
그날 연설은 한 구절 때문에 유명해지면서 두고두고 이야기되었다. 슈트라서는 "오늘날 우리 국민의 95%는 아마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자본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연설했다. 자본주의를 향한 이러한 반감이 "타락한 경제에 맞서는 국민 저항"에 이를 것이라고 슈트라서는 전망했다. 독일이 "악마의 금금본위제, 세계 경제, 물질주의와 관계를끊고 수출 통계나 중앙은행 대출금리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국민의 요구"라고 그는 말했다.  - P179

슈트라서는 나치가 농촌 경제를 살리고, 농촌 주민들이 도시로 쏟아져들어오는 일을 막아 "폐쇄경제를 확고히 다지면서 내수를 늘리고자 한다"라고 주장했다. 슈트라서는 약간 간접적인 반유대주의를 섞어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나치 기준으로는 조심스러운 표현이었지만, 반유대주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슈트라서는 금융계 지도자들이 "자급자족 경제가 시작될까봐 걱정하는데, 이는 "대규모 국제 금융거래로 쉽게
‘레바흐 Rebbach 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레바흐는 유대인 언어로 ‘떼돈을 벌다‘라는 뜻이다. 슈트라서가 어떤 금융인들을 말하는지는 의심할 여지 없이 알 수 있었다. "
53독일인은 국제 금융 외에도 외부의 다른 적대적인 힘들에 대항할 수 없다고 느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 길고 구불구불한 국경이 새로 생겼다. 1차 세계대전 전에는 독일 영토였던 땅(슐레지엔 일부와 서프로이센)이강화조약으로 폴란드에 넘어갔다. - P179

히틀러는 ‘생존 공간‘을 더 넓게 확보하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자 "우리에게 선견지명으로 보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이 ‘생존 공간‘은 유럽, 그중에서도 동쪽, 소련과 우크라이나 흑토지대 쪽에서 찾을 수 있었다.
히틀러는 집권 전 공개 선언에서 그런 생각의 전체 의미를 부드럽게 밝혔다. 다만 프리트와는 달리, 히틀러는 독일이 장악한 중부 유럽과 동유럽 국가의 연합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소련을 정복해서 독일 경제가 근본적인 자급자족을 이루는 것이 히틀러의 전체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큰 전쟁을 치러야 하고, 독일 국민은 지난 전쟁에서 교훈을 얻어야 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참모였던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1919년부터 1935년까지펴낸 여러 책과 글에 이러한 교훈이 가장 명확하게 적혀 있었다. 독일이총력전을 하려면 이전보다 훨씬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동원해야 한다.  - P182

군인이나 산업 역군으로 헌신하도록 국민들을 쥐어짜야 한다. 사기가 꺾이지 말아야 하고, 반체제적 좌파가 반대하거나 외국인인 유대인이 내부에서 배신하는 일(루덴도르프와 히틀러 모두 이 점을 중시했다)이 생기지 말아야했다. 총력전을 하려면 정부의 철권통치가 꼭 필요했고, 국민이 육체적으로도 강인해져야 한다. 반체제 인물뿐 아니라 정신적 혹은 신체적 장애인도 총력전에서 싸울 수 없다. 독일은 자국민뿐 아니라 세계를 향해 더 효과적으로 선전해야 한다. 히틀러는 루덴도르프의 해결책을 완벽하게받아들였다. - P183

나치즘은 세계화에 저항한 혁명이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혁명의 일부이기도 했다. 히틀러와 나치는 전 세계에서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분명 터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1차 세계대전 때 터키 북서부의 겔리볼루갈리폴리에서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물리친 군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전쟁 후 수립된 터키 공화국의 첫 번째 대통령이된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독일에서 열렬히숭배하던 인물이었다. 히틀러는 무스타파 케말을 "빛나는 별"이라고 불렀다. 1924년에 히틀러는, 전에 쿠데타를 시도했던 비어홀에서 최근 혁명 중 무스타파 케말의 혁명이 가장 위대했고, 그다음으로는 무솔리니의혁명이 위대했다고 말했다. 한참 뒤인 1938년, 히틀러는 평소와 달리 겸손하게, 무스타파 케말이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 무스타파 케말의 첫번째 학생은 무솔리니, 두 번째 학생은 히틀러였다.  - P183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연합국이 오스만제국을 압박하는 수단이었던 세브르 조약을 떨쳐버릴 수 있었던 무스타파 케말을 나치는 존경했다. 터키인이 독립전쟁이라고 부르는 조약 반대 운동은 1923년에 훨씬 호의적인 로잔 조약으로 다시 체결하게 했고, 무스타파 케말을 앞세운 근대 공화국을 수립시켰다. 특히 무스타파 케말 정권이 세브르 조약에 서명한 터키 사람들을 매국노로 몰면서 시민권을 빼앗았기 때문에 나치가 어느 부분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느꼈을지 쉽게 알 수 있다.
나치는 또한 오스만 정부가 최소 75만 명에서 최대 15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인 1915년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알고있었고, 찬성했다. 로잔 조약의 조건에 따라 터키에서 그리스인을 내보낸일 역시 찬성했다. 나치는 강력하고 번영하는, 그들이 감탄하는 터키를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그러한 민족 청소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P184

히틀러는 처음부터 독일의 ‘생존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무솔리니가 지원한다면 기꺼이 정치적으로 큰 대가를 치르려고 했다. 그 대가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가 1918년에이탈리아로 넘어간 티롤 남부 지역과 관련이 있었다. 그곳 주민 대부분은독일어를 사용한다(지금도 마찬가지다).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언젠가 오스트리아와 통합하고 싶었기 때문에 티롤 남부도 독일 영토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무솔리니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던 히틀러는 티롤 남부를 기꺼이 이탈리아에 그대로 남겨두려고 했다. 한편으로 히틀러는 온갖민족주의자들(그리고 기회를 엿보던 사회민주당도)이 독일의 이익을 외국 세력에 팔아넘기는 배신 같은 자신의 행동을 두고 정치적으로 이용하리란사실도 알았다.  - P186

브뤼닝은 관세동맹 계획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관계가 나빠지고, 결국프랑스 차관이 무산되리란 사실을 잘 알았다. 원하던 결과였다. 브뤼닝이차관을 거절하기는 정치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관세 동맹을 추진하면 불황을 이용해 배상금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전략을 잃지 않으면서 민족주의자들에게 점수를 딸 수도 있었다. 그러면서도브뤼닝은 오스트리아와의 관세 동맹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덕분에 프랑스와 영국에서 브뤼닝의 평판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지는 않았다. 
이 일에서 두 가지가 명확하다. 첫째,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 유럽에서 금융 협상이 얼마나 안보, 특히 독일을 단속하는 일과 밀접한 관련이있는지 알 수 있다. 배상금과 금본위제로 꼼짝 못 할 동안에는 독일이 이웃 나라들을 위협할 수 없었다. 독일이 이 장애물들을 피할 수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었다. " 둘째, 브뤼닝은 불황에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었다. 대통령 내각의 총리라서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만 설명하면 됐기 때문이다.  - P192

브뤼닝이 세계 경제 상황과 씨름하는 동안, 독일 도시들에서는 불황 때문에 정치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베를린을 위한 투쟁 Kampfum Berlin》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이 달린 책에는
"물고기에 물이 필요하듯 베를린에는 자극이 필요하다. 이 도시는 자극으로 먹고 산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어떤 정치 선전이든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 101 이라는 직설적인 문장들이 나온다. 나치에서 떠오르는인물인 36세의 요제프 괴벨스가 이 책의 저자였다. 1926년에 히틀러는 괴벨스를 베를린에 보내 나치 조직을 이끌게 했다.
베를린에서 나치를 홍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베를린은 노동자들의도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요새였다. 또한 베를린은 17세기 말,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신교도 위그노 16-17세기경 프랑스의 칼뱅 신교도를 쫓아낸 - P197

이후 줄곧 박해를 피해 도망친 난민을 포함해 이주자들의 터전이었다. 위그노들은 베를린에 여러 방식으로 흔적을 남겼다. 프랑스어 영향을 많이받은 베를린의 독특한 사투리, 베를린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불레테‘라는 완자 요리, 위대한 작가인 19세기 소설가 테오도어 폰타네TheodorFontane에서 위그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한편 다른 이주민의 물결도 잇따랐다. 프로이센 왕인 프리드리히 2세는 습지대의 물을 빼려고 네덜란드 기술자들을 데려왔다. 그들은 ‘오라니엔부르크‘처럼 베를린과 베를린주위 많은 지역의 이름에 ‘오렌지‘를 붙였다. 1880년대부터는 유대인이러시아 제국의 박해를 피해 베를린으로 와, 1918년 이후에는 물밀듯이 들어왔다. "진짜 베를린 사람은 슐레지엔 출신이다"라는 유명한 속담도 있다. 독일 기준으로 볼 때 베를린은 분명 민족적·종교적으로 굉장히 다양하게 뒤섞여 있는 곳이었다. 베를린은 독일의 지적·문화적·경제적 수도이자 언론의 수도였다. 나치는 농촌의 신교도 집단에 뿌리내린 당이라 베를린을 근거지로 삼기가 가장 어려웠다. - P198

괴벨스가 베를린에 왔을 때 나치 추종자는 거의 없었고, 아무도 나치를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괴벨스는 베를린 사람들에게 처음 연설할때 나치가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덕분에 "훗날 나를 항상 규탄하던 유대인 신문도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라고 했다.
그 신문은 "괴벨스 선생이란 사람이 익숙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라고만 보도했다. 102베를린이 나치와 잘 맞지 않은 도시였다면, 괴벨스는 숙적인 그레고어 슈트라서와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나치 당원이 아니었다. 정치계에 들어오기 전,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유대인 교수들 밑에서 공부했다. 정치 광신도로는 아주 드물게 반짝이는 지성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 P198

노이쾰른, 프리드리히스하인, 베딩, 샤를로텐부르크의 일부 같은 베를린의 특정 지역은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따라서 공산당의요새였다. 괴벨스가 들어온 다음에는 공산당과 싸우는 게 나치의 전략이었다. 돌격대는 노동자들이 사는 지역에서 한 선술집을 찾아냈고, 매달어느 수준 이상의 맥주를 마시겠다고 주인에게 약속했다. 주인은 돌격대가 선술집을 본부로 사용하게 해 주기만 하면되었다. 그러자 그 선술집은 ‘돌격대 선술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돌격대는 그곳을 보통 밤에 공격할 공산당원들을 찾으러 나가기 전에 모이는 기지처럼 활용했다. 나치와공산당 사이에 격렬한 싸움이 벌어질 때가 많았고, 때때로 다른 정당의준군사조직이 끼어들기도 했다. 1930년대 초에는 베를린과 다른 독일 도시들이 내란과 비슷한 상태에 이르렀다. 나치의 전략은 여러 면에서 효과적이었다. 나치는 조금씩 베를린의 험악한 동네들을 장악해 나갔다. 그래서 그들이 선거운동을 하고, 포스터를붙이고, 집회를 열기가 더 쉬워졌다. 무엇보다 언론에 실리는 점이 정말 결정적이었다. - P200

괴벨스는 돌격대의 폭력이 언론의 관심을 끈다는 사실을 알았다. 대부분 나치가 싸움을 걸면서 폭력이 시작되었지만, 나치는 항상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폭력적이고 복수심에 불타는 공산당원들이 언제나돌격대원들을 맹렬하게 쫓고 있다고 끊임없이 선전했다. 펠제네크 주말농장을 습격해서 프리츠 클렘케를 죽인 일도 그러한 사례였다. 나치는 그일을 한 공산당원이 숨어 있다가 돌격대원들을 공격한 사건이라고 선전했다. 많은 중산층 언론, 경찰, 검사, 심지어 형사법원까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말도 안 되는 선전일 때가 많았는데도 사람들에게 통했다. 법을 준수하는 중산층 독일인은 돌격대원들이 다소 거칠기는 해도 선량하고 애국적인 청년들이며, 공산주의자들을 막을 만한 배짱을 유일하게 가졌다는 결론을 점점 내려갔다.  - P201

1931년과 1932년에 내란과 같은 상황이 계속 심각해지면서 바이마르공화국 정부가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졌다. 브뤼닝이 경제 안정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족주의자들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했던 것처럼, 안정을 유지시키지 못하는 무능력이 많은 국민 눈에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당성을 좀먹는 걸로 보였다. 폭력이 점점 더 일상이 되면서 국민들은 훗날 나치가 저지르는 국가 폭력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다고 나치가 권력을 잡기 쉬워졌다거나, 1931년이나 1932년에 집권할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1923년 비어홀 폭동에 실패한 후 히틀러는 군대와 경찰의 반대에 맞서면서 권력을 절대 잡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웠다. 1931년과 1932년을 거치는 동안 히틀러가 아무리 적극적으로 노력해도 기득권력의 문은 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 P202

집단들이 하나의 세력으로 정말 잘 통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는 후겐베르크의 꿈이지, 히틀러의 꿈은 아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사실 후겐베르크와 협력하면서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고 가능한 많은 홍보 효과와 정당성을 얻고 싶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모임직전에야 히틀러와 헤르만 괴링의 편지를 처음 받았다. 나치가 국가인민당과 협력하면서 사실 히틀러 운동이 존중받는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나치는 아직 보잘것없었지만 전혀 정중하지 않았다. 히틀러는 거리 행진에서 돌격대가 지나가자 다른 집단의 행진은 보려고도 하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괴벨스는 국가인민당과 협력은 순전히 전략적 목적으로, 합법적으로 집권할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고 사설에서 단언했다. 바트 하르츠부르크 행사에 대한 괴벨스의 개인적 생각은 더 냉 - P203

혹했다. 특히 국가인민당 원내 대표인 에른스트 오베르포렌Ernst Oberfohren이 잘난 척한다며 싫어했다. "오, 우리 야만인이 얼마나 더 나은 사람들인지!"라며 "그를 보면 토할 것 같다"라고 덧붙일 정도였다. 연합하든 말든나치가 드디어 권력을 잡으면 "보수주의자들을 가능한 한 빨리 내쫓는게 목표다. 우리 혼자 독일의 주인이 될 것이다"라고도 말했다. 그러나 나치가 독일의 주인이 되려면 다른 사람들이 필요했다. 나치를지지하는 유권자들, 연합을 제안하는 보수 세력, 권력의 문을 열어주는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필요했다. 이 중 누가 나치를 위해 행동해 줄지가1932년의 문제가 된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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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나치의 권력 장악 과정에 의문을 품을 때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1930년대 독일인들은 우리와 다르다고 여기며, 당대인들의 실수를 살필 때도 우리의 우월함을 찾는 데서 그치기 마련이다.
실상은 그와 다르다. 
헷은 신중한 문체와 탁월한 학식, 인물 각각에 대한 섬세한 묘사, 경제계와 제도에 대한 명쾌한 논의를 통해 당대의 사건을 오늘날 우리에게 끌어온다.

* 티머시 스나이더, 역사학자, 
《피에 젖은 땅》 저자


빠져든다.
남의 나라 역사서가 이렇게 재밌을 일인가, 싶다. 그런데 읽어갈수록 꼭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구나 싶은 이 느낌은 또 뭐지.





경찰은 몇 주 동안 준비했다. 모두 합해 1만3천 명에서 1만 4천 명 정도의경찰관을 베를린 거리에 배치하려고 한다. 이 중 일부는 다른 도시에서지원 온 경찰관이다.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카를 제베링Carl Severing은 훗날
"독일 어딘가에서 정적이 총에 맞거나 두들겨 맞거나 칼에 찔리지 않은날이 거의 없었다"라고 한탄한다. 막스 퓌르스트라는 이름의 젊은 목수이자 좌파 운동가가 말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라는 표현이 아마딱 맞을 것이다. 
온갖 위협과 긴장감이 넘쳤지만, 그날은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아침에몇몇 소규모 집단이 노동자 계층이 사는 동네에 모여 베를린 중심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멀리 가지 않아 경찰이 그들을 모두 막는다. 그렇지만시간이 지나가면서 경찰과 시위 참가자들의 충돌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경찰은 먼저 경찰봉을 휘두른다. 그다음 경고사격을 한다. - P113

1929년 5월 1일, 오월절이다.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언론이 이날을 "피의5월 Blutmai"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봐도 선량한 시민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두른 날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경찰은 노이쾰른과 베딩 같은 지역을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범죄자들과공산주의자들의 온상으로 여기며 두 곳을 구별 못할 때도 있다. 《시카고데일리 뉴스 Chicago Daily News>의 베를린 특파원은 "우린 온상 전체를 뿌리뽑고 싶다. 완전히 다르게 공격을 퍼붓고 싶지만, 허용되지 않는다"라는이 지역들에 대한 경찰의 과격 발언을 보도하면서 논조를 잡는다. - P115

1929년, 공산당은 전통인 노동절 시위를 벌이겠다고 우긴다. 노동절 행진 금지를 고집하던 사회민주당 당국이 당황한다면 더욱 좋다. 공산당 매체들은 노동절 시위를 준비하면서 비난을 퍼붓는다. 사회민주당이 "프로이센에서 독재정권을 세우려고 한다"라고 공산당은 주장한다. 공산당은 정치 집회에 대해 똑같은 입장이었던 황제의 관료와 사회민주당을 비교하기 좋아한다.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에는 선전을 위한 시체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시체는 아주 많다. 5월 1일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자와 시위자 중 9명이 사망하고, 63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 경찰 25명도부상을 당했다. 이후 이틀 동안 폭력은 더 심해진다. 경찰 때문에 5월 3일까지 3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98명이 부상당하고, 1천 명이 훨씬 넘는사람들이 체포된다. 경찰도 4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망자는 없다. 경찰 한 명이 총상을 입었지만, 자기가 쏜 총에 맞아서다. 10 언론인 카를 폰오시에츠키 Carl von Osietzky의 말대로 피의 5월에 죽은 사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벌인 전쟁"의 희생자다.
공산당과 나치의 싸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싸움, 경찰에 저항하는노동자들..…. 1929년쯤에는 온갖 극렬한 분열로 독일 사회가 산산조각이나고 있다. - P117

로마니쉐 카페는 대단하거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베를린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이러한 이유로 ‘과대망상증 카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평등하게 만나지는 않았다. 언론인 마테오 퀸츠Matheo Quinz 는 그 카페를 "수영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웅덩이와 수영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웅덩이가 있는 수영장"으로 비유했다. 어떤 손님을 카페의 어느 쪽으로 안내할지는 수위가 판단했다. 큰 웅덩이에는 영화감독과 배우, 광고 책임자, 몇몇 특별히 성공한 예술가들이 모였다. 작은 웅덩이에는 작가와 기자, 나머지 예술가, 정치운동가, 탈무드 학자들이 모였다. 더 많은 무리로 나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미술상 알프레트 플레히타임 AlfredFlechtheim이 한쪽에서 좌중을 이끌고, 탈무드 학자들도 자연스럽게 따로모였다.  - P118

다양한 작은 무리와 패거리들이 서로 별로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모인다. 오직 기자 에곤 에르빈 키슈Egon Erwin Kisch가 ‘이 자리 저 자리 다니면서 흥미진진한 대화를 동시에 나누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모든신문을 읽으면서 모든 여자를 지켜보기까지 했다. 
로마니슈 카페는 또한 콧대 높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수위가 모르는 예술가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한 잔만 시켜도 온종일 머물수 있는 손님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몇몇뿐이었다. 대부분은빨리 계산을 치르고 떠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사학자 에릭 웨이츠Eric Weitz는 그 카페를 "활기 넘치고, 민주적이고, 분주하고, 이리저리 나뉘고, 분열을 초래하고, 끼리끼리만 이야기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와 사회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 P118

정치, 종교, 사회 계층, 지역에 따라 점점 더 타협할 가능성 없이 극심해진 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징이었다. 여러 해 동안 동독 정보기관의대외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는 1920년대에 적극적인 공산주의자 집안의 아들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았다. 볼프는 당시 우파와 좌파의 정치 싸움은 "집단 패싸움과 같았고, 나치는 "우리 가족과완전히, 종족조차도 다르게 느꼈다고 여러 해가 지난 후 회고했다. 15바이마르 공화국이 결국 히틀러의 독재정권에 무릎 꿇었기 때문에 바이마르의 민주주의자와 반민주주의자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는 게자연스럽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베를린 정치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이 분열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나라 전체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하다. 당시에는 여론조사가 없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독일 유권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공화국의 수많은 정당을 지지했던 다양한 집단과 지역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다. - P119

바이마르 공화국의 매우 중대한 분열은 ‘정치적 교화‘와 관련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사람들이 이웃·동료·교회·동호회·신문이나 다른 매체 같은 사회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 투표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일단 정치적 교파화가 되면 유권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집단을 절대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교파를 이루는 성당이나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서 사회화되는 일과 비슷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교화‘된 진영이 세 곳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기본적으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 가톨릭 진영 (중앙당과 바이에른 지방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 신교도 중산층 진영 (보수적인 국가인민당, 자유주의자인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 그리고 소상공인당 같은 다양한 비주류 집단)이었다. 16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최고조였는데도(정권 교체가 너무 - P119

잦아 14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만 정부가 21번, 총리가 13명 새로 들어섰다), 진영은1919년부터 1933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각진영의 폭이 넓어서 그 안에 민주적인 부류도 있고, 반민주적인 부류도 있었다. 유권자들의 표는 보통 각 진영 안에서 움직였다. 진영을 바꿔서 투표하지는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독립사회민주당, 그다음에는공산당에 유권자를 빼앗겼다. 그러나 (1919년에 이례적으로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득표율은 전체의 35~40%라는 예측 가능한범위로 자리 잡았다. 가톨릭 진영의 표는 15% 안팎으로, 더 좁은 범위에서 움직였다. 나치는 사실 득표율이 30% 후반에서 40% 초반에 이르러 사회주의 진영보다 약간 앞서는 신교도 중산층 진영을 장악하면서 상당히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25년에 "우리는 코를 움켜쥐고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 의원들과 맞서면서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라고 추종자에게 말하면서 독일 정치의 기본 요소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 P120

히틀러의 나치는 이미 사회주의 진영으로 ‘교화‘된 유권자 무리를 1932년까지는 잘 끌어들이지 못했다. 가톨릭 진영의 유권자도 별로 끌어오지 못했다. 나치가 1932년과 1933년 선거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둘 때도 두 진영에는 별로 파고들지 못했다. 18세 진영이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는 사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게 분열됐는지를 또다시 잘 보여준다. 하지만 뭔가다른 점도 보여준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진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처음 진영에 발을 들인 사회화 과정이 공식적인 정치 이념만큼, 아마 그보다 더 표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가톨릭 신자들은 중앙당이나바이에른인민당에 표를 던졌다. 그게 가톨릭 신자로서 적절한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회 계층에 충성하려고 - P120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했다. 그리고 나치는 중산층 신교도들이이미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세계관에 맞는 청사진을 내놓았기 때문에 성공했다.
독일 정치에서 ‘교화‘ 같은 분열은 농촌과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에 사는 사람과 살지 않는 사람의 구분으로 더 증폭되었다.
우리가 떠올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은 거의 베를린과 관련된이미지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그림,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함께 만든 오페라, 에리히 멘델존의 건축,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에등장하는 카바레 가수 샐리 볼스, 크고 개방적인 동성애자 공동체 그리고온갖 성적 실험 말이다. 하지만 1925년에 독일인 6250만 명 중 4백만 명만베를린에 살았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농촌 사회, 주민이 2천 명을 넘지 않는 마을에서 살았다. 베를린 밖 주민들의 삶은 베를린의 초현대적인삶과 엄청나게 달랐다.  - P121

20세기 초중반의 도시에서는 오늘날 우리 생각보다 계층 차이가 더 뚜렷했다. 또 사회 계층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인과다르다. 미국인은 보통 소득으로 계층을 구분한다. 유럽인은 계층을 주위환경, 장래성, 경제 형편 등 훨씬 더 복잡한 문제로 여긴다. 노동자 계층은시장에 자기 노동력만 내놓는 사람이지만, 중산층은 수입과 상관없이 사업을 하거나 변호사나 의사처럼 독립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옷차림, 말씨, 키와 조지 오웰이 인상적으로 묘사했듯) 냄새로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이 금방 구별되었다. 이러한 도시 사회 구조는결국 한쪽은 노동자 계층 정당, 다른 한쪽은 중산층 정당으로 분명하게나뉘는 현대 도시 정치를 낳았다.
농촌 마을에는 도시 같은 사회 구조가 없었다. 대신 역사학자 셸리 바라 - P121

노스키Shelley Baranowski가 ‘농촌 신화‘라고 부르는 게 있었다. 농사는 가장고귀한 일이고, 전원생활은 건강에 좋고, 진정성 있고, 사회적 안정과 조화와 평화를 만든다는 신화다. 농촌 신화의 바탕에는 분명 위계질서, 특히 귀족 영주와 농업 노동자 사이 위계질서가 있다. 목사, 교사 같은 전문직은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으로 위계질서의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위계질서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를 알았고, 자기의무와 책임감도 알았다. 아무래도 ‘반대편‘이 있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유지할 수 있었다. 도시는 적이었다. 바라노스키의 표현에 따르면, 도시는 "공화주의·다원주의·기계화·미국화·파벌주의·교육 실험·도덕적 타락이 팽배하고, 특히 남녀 사이의 적절한 경계가 무너진 곳"이었다.  - P122

종교적 믿음은 농촌의 정체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시골에서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도시보다 훨씬 강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해 떨어져 나가자 신교도가 많은 동프로이센에서 신교도의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신교도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더 커졌다.
농촌 사람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득세는 도시 노동자 계층이 전쟁 전보다 더 많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정부가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려고 더큰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었다. 수출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자 관세 인하를 위한 무역협정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면 농촌사람들 입장에서는 수입 식품의 관세와 농산물 가격이 높을수록 이익이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폴란드에서 농산물을 수입한다는 1929년 무역협정에 농촌 지역은 격분했고, 절대 비준될 수 없었다. 1927년과 1928년에 이미 떨어지 - P122

고 있던 세계의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더 빨리 폭락했다. 어떤 농민은 세금을 내지 못했고, 어떤 농민은 파산했다. 
1차 세계대전은 다른 면에서도 농촌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총,비행기와 현대전에 필요한 온갖 무기들을 생산하려면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다른 모든 유럽 군대처럼 독일 군대는도시보다 농촌 지역에서 신병을 더 많이 모았고, 이는 농촌 청년들이 죽어가는 일을 맡았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도시를 향한 농촌 지역의 분노는점점 커졌다(무엇보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던 지식인이나 전쟁으로 폭리를 취한 사람들의 본거지로 여기는 베를린에 대한 분노가 컸다). 베를린의 문화예술적인 실험은 보수적인 농촌사람들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다. 대도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베를린은 중요한 산업 중심지였고, 아에게나 지멘스 같은 거대한 전자제품 제조업체 그리고 기계·직물과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체들의 본거지였다.  - P123

19세기에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 나라에서 그랬듯 많은 독일인은 공장을 악마로 생각하고, 농경 생활을 동경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고, 은행과 증권거래소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베를린의 사회 구성은 다른 지역과 완전히 달랐다. 베를린은 독일에서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독일 전체에서 유대인의 비율은 1%였지만, 베를린은 7% 정도로 훨씬 높았다. 베를린은 공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산업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산업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함께 베를린에서 절반이 넘는 표를 얻었다. 나치나 다른 우파 정당들은 베를린을 "붉은 베를 - P123

린"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대다수 독일인에게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싫어하는 점을 모두 모아놓은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대한 반대는 곧 바이마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바이에른의 작가 루트비히 토마LudwigThoma 는 "베를린은 독일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베를린은 타락했고, 갈리치엔갈리치아 지방의 독일어 명칭의 오물로 더럽혀졌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 갈리치아 지방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가 정말 많았기 때문에 갈리치엔사람‘은 유대인을 부르는 은어였다. 비슷한 이유로 보수 언론인 빌헬름슈타펠Wilhelm Stapel은 베를린을 "공화국의 시궁창"이라고 불렀다. 그는
"너무 많은 슬라브인과 통제받지 않는 너무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베를린 사람들에 뒤섞였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언짢은 혼합‘이 베를린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 P124

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슈타펠은 이민자들이 들여왔다고 생각하는 "무례한 독선과 끊임없이 낄낄거리며 비꼬는 말과, 지방을 베를린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인의 오만을 싫어했다. 베를린을 치유할 약은 무엇일까? 칸트와 괴테 같은 독일의 문화 전통일 수도 있고, 루터교의 ‘단호한 의지‘일 수도 있다. 슈타펠은 독일 전원 지역의 농부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촌과 교회가 베를린에 갖는 반감에는 대도시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탐색을 못마땅해하는 부분도 컸다. 그저 내숭 떠는 게 아니었다. 뭔가 더뿌리 깊은 원인이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보기에는 남성 중심의 가족이사회 질서의 핵심이었다. 아버지는 집안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생활도 다스려야 했다. 남성 중심에서 벗어난 성적 관계나 가족 구조는 모두 정치·사회권력의 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어떤 베를린 시민들은 우월감을 보이거나 시골에 사는 동포를 경멸하 - P124

기까지 했다. 시인이자 어린이책 작가인 에리히 캐스트너 Erich Kastner는시골에서 와서 베를린의 분주하고 국제적인 포츠담 광장(무엇보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신호등이 설치된 곳)에 압도된 관광객이 차에 치일‘ 때까지 ‘온갖 잘못‘을 저지르며 ‘고통스럽게 웃는 장면을 상상했다. 언론인 쿠르트투홀스키 Kurt Tucholsky는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포메른 교외에 살고 구닥다리 옷을 입은 교양 없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서‘ 어두움 속에 사는 지방에 베를린의 빛을 비추자고 베를린사람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전망했다. 투홀스키는 "여러 민주적인 신문이나 예술가, 자유주의 단체들의 명성은 사실 실제 능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썼다. ‘반작용의 힘이미 존재했고, 더 교묘하게, 무엇보다 별로 정중하지 않게 휘두르는)‘은 ‘주식 시장과 상인 계층‘의 지원을 받아 조용히 작동했다.  - P125

농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쓴 빌헬름 슈타펠이 맞았다. 1928년, 독일 농업을 강타한 경제 위기 가운데 급진적인 농촌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스스로 란트폴크 Landvolk, 시골 사람라고 부르면서 프로이센 북부의 농촌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시작한 저항운동은 북부와 동부의 농촌전체로 퍼졌다. 란트폴크는 수입 농산물에 관세를 새로 부과하고, 쉽게대출받을 수 있게 하고, (주로 도시가 혜택을 받던 사회 복지를 줄이라고 요구했다. 저항운동은 정치적으로 극우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부 건물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테러리스트 전략을 사용했다. 1929년, 저항 세력은증오하는 공화국과 베를린에 대한 궁극적이고 상징적인 공격으로 국회의사당에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나치가란트폴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나치는 곧 농민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 P125

독일의 정치적 분열에서 유대인에 대한 독일 기독교인의 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도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정치적 우파의 특징이었다. 역사학자 슐라미트 볼코프 Shulamit Volkov가 쓴 대로 반유대주의는 사람들의 여러 믿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인 ‘문화코드‘였다. 여러 믿음 중 가장 중요한 건 독일 민족주의였지만, 권력 숭배, 남자다움과 정력 중시, 엘리트주의,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도 있었다.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또 도시를싫어하고 시골을 좋아했다. 상업적이기보다 군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있었고 군사적인 예법을 중시해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기 쉬웠다.  - P126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 경향이 강했다. 반유대주의 때문에 농민이 곡물상에 맞서고, 소상공인이 백화점에 맞섰다는 주장도 있다. 반유대주의는 엘리트주의, 자본주의, 현대화에 반대했다.
반면 반대쪽 끝에서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민주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 평화주의, 페미니즘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전쟁 전에 사회민주당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이 반유대주의는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던 게 가장 유명한 사례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많았다. 역사학자 테어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반유대주의가 유대인뿐 아니라 ‘교육, 자유와 인간애‘를 증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지지자였던 철학자 테어도어 레싱 Theodor Lessing은 여성과 - P126

유대인은 똑같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1910년에썼다. 반유대주의는 1918년 이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문화코드로 활용하면서 점점 더 뚜렷해졌다. 전쟁 전 독일에서는 지역 사회나 특정 업계 안에서의 위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곤 했다. 그러나 1918년 이후에는나라 전체의 위기(패전, 혁명, 내란, 초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가 많아서 반유대주의도 더 심해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구조는 어쩔수없이 독일에 사는 유대인에게유리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전쟁 전의 독일제국 시절에는 약간 권위주의적이던 연방주가 반유대주의를 반대하는 편이었고, 정당의 힘이 강하지 않아 반유대주의 운동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당도 때때로 어떤 당 못지않게 반유대주의 발언을했지만, 보통 반유대주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전유물이자 특징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낙태 문제에 대한 태도로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구분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반유대주의 편인지 아닌지가 결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의 상징성때문에 이쪽 혹은 저쪽을 선택해야 했다.  - P127

독일에서는 대기업과 군대가 강력한 두 집단이었다.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민주당이 아무 권력도 갖지 못하도록 몰아내고 싶었다. 이는 사실 법을 만들고 내각을 구성하는 국회의 문을 닫거나 최소한 힘을 제한할길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기업가와 군인들은 보다 권위주의적인 통치를원했다. 대기업은 국가의 중재 제도로 대부분 시행되는 임금 인상 합의에점점 더 신경이 거슬렸다. 군대는 사회민주당이 군비 지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려고 해서 화가 났다.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와 대기업 모두 새로운 단계의 정치 활동으로 전환했다. 이익집단을 만들고,동조하는 정당들을 끌어들이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 합법적인 전략을 찾았다. 러시아이러한 모든 반정부 활동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좋은‘ 시절 동안, 정확히는 좋은 시절에 대처하면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강도로 시작되었다. - P129

이 문제는 이념적인, 거의 철학적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진영은 하나같이 타협을 막는강렬한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인민당은 국익을 위해 1920년대에 몇 차례 국회에서 자신들의 이념과 정반대인 정책을 지지했다. 그런 태도라면 국가인민당은 민주적인 공화국을 점차 받아들여야 했다. 로카르노 조약 시기에는 잠시 그렇게 되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정치인들은 국가인민당의 폭넓은 시야를 칭찬하기보다 "등뼈가 부러졌다"라고조롱했고, "이런 일 이후에도 민족주의자 유권자들이 (국가인민당에 남는다면 어떤 정당도 그런 유권자를 가졌다고 (국가인민당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 P130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아돌프 히틀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면에주목하면서 똑같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최신 교훈, 즉 총력전에 대한교훈이었다. 그러한 교훈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금융시장 붕괴가 대공황을 불러일으켰고, 대공황이 히틀러를 자극해 독일의 민주주의가 막을 내렸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사실 대공황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지 감소, 나치의 정치적 성공 사이의 인과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또한 모든 일이 월스트리트 금융시장이 붕괴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 P143

슈트레제만이 사망하고, 후겐베르크가 세력을 얻고, 농촌의 불만이 점점 더 커지고, 코민테른이 ‘제3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고, 기업가가 좌절감을 느끼고, 군대가 공화국 때문에 제약을 받고, 주의회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많은 표를 얻는등 1928년과 1929년에 벌어진 일들은 독일이 전후의 세계 공동체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고, 이는 또한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1920년대 말에는 독일 경제 상황도 최악이었다.
1929년 이전부터 각 분야에서 점점 심각해지던 몇몇 경제·금융 문제가한데 모였다.
문제 중 하나는 농민들의 저항을 불붙였던 전 세계 농산물 가격 하락이었다. 독일 동부의 많은 지역 (슐레지엔, 포메른, 프로이센)과 북부와 서부, 특 - P143

히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니더작센 지방은 대부분 농촌이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민들은 그 문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아, 유권자들이 먼저 매우 강렬하게 공화국에 등돌린 지방이었다는 게 우연이 아니었다. 1932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어떤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80%가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다음 요인으로 산업 생산성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을 많이 활용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합리화‘ (오늘날 우리는 ‘자동화‘라고 부른다)를들 수 있다. 보통 그렇듯 생산성을 개선하면 고용이 줄어든다. 합리화가몇몇 산업에만 집중되었지만, 그 몇몇이 주요 산업이었고, 실업 문제가심각했다. 1922년에서 1928년 사이에 루르 지역의 광부 수가 33% 줄어들었다. 금속과 자동차 제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 P144

어느 정도 이러한 이유로 1928년 중반이 되자 독일의 실업자가 130만명에 이르렀다. 1년 후에는 150만 명으로 늘었다. 실업자들에게 실업급여를 줘야 하니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둬들일 방법을 찾거나 다른 부분에서예산을 줄여야 했다. 뮐러 정부는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지 합의하지못했고,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 정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독일을 위기로 몰아넣은 건 무엇보다 재정 문제였다.
독일을 불경기로 몰아넣은 건 1929년의 월스트리트 붕괴가 아니라 1928년 월스트리트의 상승장이었다.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비자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단기인 외채에 크게 의존했다. 그런데 전세계의 자본이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뉴욕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독일은 자본이 부족해졌다. 
이것이 새로 취임하는 총리가 맞이한 상황이었다. - P144

그래서 유럽은 완전히 다른 미래로 접어들었다. 브뤼닝 총리는 민족주의 열풍이 치솟고, 주의회 선거에서 나치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경고 신호로 알아차리고 조금 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선거를 미뤄야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 1930년 가을에 선거를 치렀고, 이후 그 일로 계속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전에 총리를 지냈고 1930년에는 독일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한스 루터처럼 충실한 지지자는 훗날 브뤼닝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몰랐고, 날벼락 같은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브뤼닝 자신은 나치 득표율이 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1944년에 썼다.
그러나 당시 실제로 그렇게 예측했다기보다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더 통찰력 있어 보이려고 한 말일 수도 있다. 사망 후인 1970년에 출간된 회고록에서 브뤼닝은 불황이 4년 동안 계속 이어지겠다고 예상했고, 강력한 - P152

조처를 할 권한을 원했다고 썼다. 1브뤼닝과 함께 전략을 세운 슐라이허 역시 방심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를 사회민주당을 상대할 우파 정당 정도로 보면서 우려하지 않았다. 그는몇 년 후 빈센츠 뮐러에게 "히틀러에 대한 내 전략은 기본적으로 우리가1918년과 1919년에 군대 최고사령부에서 혁명 세력에 대처했던 전략과같네"라고 설명했다. 1918 년 전략은 ‘사회민주당을 끌어들여 급진적인부분을 제거하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한다‘는 전략을 뜻했다.
나치는 사회민주당과 달리 민족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였다. 슐라이허는나치의 그런 점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군인으로서 나치의 돌격대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뮐러에게 "특히 돌격대에는 좋은 점이 많다고 믿었네. 군대는 예비군 확보를 위해 돌격대에 관심이 많았지"라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나치 득표율이 높아지는 일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했다.  - P153

이후 2년 반 동안 펼쳐진 독일 정치에서 나치를 끌어들이려는 슐라이허의 노력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슐라이허는 독일을 더 권위주의적으로 개조하고 싶었다. 또한 권위주의 국가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추종자를 모으기 위해 히틀러와 나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려면 매우 교묘히 움직여야 했다.
슐라이허는 나치가 조금이라도 진짜 힘을 가지기 바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나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게 슐라이허의 전략이었다.
가능하면 나치를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활용할 수 없다면 내쫓을 준비를했다. 아마도 자기 꾐수에 자기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것 같다. - P153

베를린 북부, 가난하고 음침한 동네의 어두운 밤, 노동자들이 사는 라이니켄도르프 지역 동부, 빌케 거리와 쇤홀처 길의 모퉁이 근처에 많지 않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다. ‘일곱 다리‘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북부철도의 육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서쪽에는 금속 울타리가 펠제네크 주말농장이자 형편없는 오두막들이 모인 곳을 가른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실직자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공산주의 신문 《디로테파네Die Rote Fabne, 붉은 깃발>의 표현대로 "끝을 내모는 경제 위기와 자동화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 P157

요한 바누셔란 남자와 그의 처제는 빌케 거리에서 서둘러 걷고 있다.
고요한 밤이어서 발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들은 펠제네크 주말농장에 있는 바누셔의 집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여덟 명에서 열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두 사람을 위협한다. 제복이 금지돼 일반인 복장이지만, 분명 나치 돌격대원들이다. 남자들이 바누셔를 둘러싼다. "그 사람이야. 우리가 지금 그를 잡았어"라고 누군가 말한다. "공산당원 맞아. 여기 살고있잖아. 공산당원이지"라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 세번째 남자가 "증거확인했어?"라고 묻는다. 대원들을 이끄는 헤르만 슈르는 "네가 클렘케지?"라고 묻는다. 누군가 바누셔가 코르덴 바지를 입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코트를 벗긴다. 돌격대원들은 무기로 사용하려고 벨트를 푼다. 하지만바누셔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다. 위험한 순간은 금방 지나간 - P157

다. "꺼져, 가자"라고 슈르는 부하들에게 말한다. 
외모나 옷차림이 요한 바누셔와 상당히 비슷한 프리츠 클렘케는 얼굴이 말쑥한 젊은 남성이다. 클렘케는 열흘 전 라이니켄도르프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 몇몇 돌격대원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바로 어제, 빈터거리 근처에서 공산당원들과 나치가 다시 싸움을 벌였다. 이번에는 형사고발이 기다렸다. 나치는 복수에 나선다. 1932년 1월 16일 새벽이다.
돌격대원은 이틀 후에 다시 그곳으로 온다.
베를린 북부의 몇몇 돌격대원 부대, 모두 합해 200명 정도가 1월 18일저녁에 바이트만슬루스트 지역의 베르크쉴로스라는 식당에 모여 친목을다진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의 지도자 베르너 슐체Werner Schulze가 일어서더니 부하들에게 연설한다. 그는 "우리는 오늘 작은 일을 하나 더 할 것"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제네크로 곧장 행진하라고 명령한다. "공산당원을 만나면 누구든 죽여버린다." - P158

펠제네크는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의 236군데 주말농장 중 하나다. 평상시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장미 덤불을 가꾸던 자그마한 땅들이 있는 곳이다. 1932년 1월은 평상시가 아니다.
이제 실직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무판자나 마분지로 지은 판잣집에서 와들와들 떨면서 지낸다. 놀랍게도 슐체가 이끄는 돌격대원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펠제네크로 행진한다. 더욱더 놀랍게도 돌격대원들이 주말농장에 도착하자 호위하던 경찰이 사라진다. 나치는 ‘사격선‘으로 알려진 공격 대형을 갖춘다.
돌격대원들은 찾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몇몇 나치 당원이 어떻게 프리츠 클렘케를 쇠막대로 때려눕혔는지 하인리히 빌보크라는 18세 돌격대원이 훗날 설명한다.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코트 깃으로 얼굴을 가린 - P158

채 갑자기 나타나더니 다른 사람들을 밀어젖힌다. 그는 의식을 잃은 클렘케의 등을 권총으로 쏜다. 총알이 클렘케의 심장을 관통하고, 클렘케는곧장 사망한다. 이젠 나치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다. 주말농장 근처 어두운 거리에서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공산당의 준군사조직인 ‘반파시스트 행동‘의 누군가가 에른스트 슈바르츠라는 돌격대원을 칼로 찔러 죽인다. 슈바르츠는 58세로, 돌격대가 되기에는 무척 나이가 많은 미술 교사였다.
1932년 겨울은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 불황이심각할 때 나타나는 정치의 모습은 이렇다. - P159

독일을 걱정한 사람들은 독일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를 보고 불안해진 외국 투자가들이 독일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면서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한 달 만에 8억 라이히스마르크(1930년 환율로 1억 9천만 달러 정도, 오늘날에는 28억 달러)의 외국 자본이 독일에서 빠져나갔다. 국제 시장에서 독일의 유가증권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했고, 중앙은행이 금보유고의 절반을 잃었다. 그래서 금리를 5%(뉴욕은 2%, 런던은 3%)로 올릴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떨어지고 있어서 실제로 돈을 빌리는 비용은 12%로 올라갔다. 이미 경기 침체를 겪는 상황이어서 더욱 심각했다. 독일 경제는 더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그와 슈트레제만이 이루려고 애썼던일들의 잔해를 뒤적였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브리앙의 반응은 1년 전 슈트레제만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는 자신을 "나치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불렀다. 
왜 나치가 그렇게 많은 표를 얻었을까? 나치는 유권자들에게 무엇을약속했고, 유권자들은 나치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을까? - P162

나치 운동을 이해하려면 정치의 기본적인 요인을 이해해야 한다. 나치는정당이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를 포함해 모든 정치인처럼 그들 역시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 공간으로 옮겨갔고, 자신들이 끌어들인 지지자에 맞춰 계획을 바꿔나갔다. 나치의 이념과 목표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모호했고, 항상 바뀌었다. 히틀러는 1920년에 큰소리로 팡파르를 울 - P162

리면서 25가지 주장이 들어간 나치 강령을 발표했고, 이러한 주장들은바뀌지 않는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더니 히틀러는 이 주장들을 버렵기 때문에, 그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한 일들은 강령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15그렇지만 나치가 초창기에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 이해하려면25개 조항에 담긴 주장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일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주장들이다. 나치는 ‘민족자결권‘을 바탕으로 "더 위대한 독일에서 모든 독일인이 하나가 되자"
라고 주장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폴란드·프랑스·벨기에에 ‘빼앗긴‘ 땅들을 회복하자는 뜻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연합국과 오스트리아 사이 강화조약)을 폐지하고, 평화 협상에서 승전국들에 빼앗긴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되찾아야한다는 요구였다. - P163

다른 주장들은 성격이 달랐다. 자본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 복지를 지향하는 게 나치가 초기에 내세운 이념의 핵심이었다. 나치는전쟁으로 폭리를 취하는 일을 금지하려고 했고, 대기업과 백화점의 국유화와 대기업의 이익 분배, 조건이 좋은 노령연금, 가난한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 보장(국가가 교육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체조와 스포츠를 의무화하는 법률 제정, 그리고 청소년의 체력 단련과 관련 있는모든 조직 지원을 요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성명서의 세 번째 주요 주제였는데, 이는 같은 민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쉽게 변질했다. 7조에서는 "시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게 국가의 주요 의무다. 국민 전체를 부양할수 없다는 게 입증되면 외국인을 독일에서 내쫓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 P163

뒤이어 8조에서는 이민자를 향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국외 추방을 하자고 했다. "독일인이 아니면 누구든 더 이상 이민을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독일인이 아니면서 1914년 8월 2일 이후에 독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지체 없이 독일에서 추방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나치는 주로 유대인이 이주해 올 것을 걱정했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유대인 약 8만 명이 대부분 이전 러시아 제국령에서 피난을 왔다. 1922년에는 들어오는 난민이 줄어들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절대 동쪽 국경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없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계속 남았다. 이른바 ‘동유럽 유대인Ostjuden‘은 일찌감치 독일에 정착해서 동화된 유대인과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1923년 베데커 여행안내서의 베를린 편에도 동유럽 유대인의 존재가 넌지시 표현되어 있다. 안내서 집필자는 "주로 동유럽에서 잔뜩 몰려온 외국인들이 쉽게 눈에 띄면서 황실의 찬란함은 사라졌다" 라고 한탄했다. 전쟁과 혁명에 시달리면서 이미 달아올랐던 반유대주의를 난민들이 더욱 불붙였다. - P164

그러니 나치 강령에서 반유대주의가 뚜렷했던 게 놀랍지 않다. 4조에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 삼단논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포만 시민이될 수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독일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만 동포가 될 수있다. 그러니 유대인은 동포가 될 수 없다."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종교와거의 관련 없다고 나치는 생각했다.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개종해도자신의 신분을 바꿀 수 없었다. 가족이 대를 이어 독일에서 살아왔어도,
독일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어도, 기독교로 개종했어도, 1차 세계대전때 참호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어도, 유대인은 나치 제국의 시민이 될 수없었다.
계속해서 나치 강령은 이러한 주장의 몇 가지 다른 의미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 P164

5조에서 "시민이 아니면 독일에서 그저 손님으로만 살 수 있다.그리고 외국인 체류자 법률을 따라야 한다"라고 했다. 시민만 공직에서일할 수 있다. 모든 시민에게는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물론 이러한 평등은 나치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두 독일에서 내보낸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 실제로 권력을 잡자 나치는 정적, 신체적·정신적 장애인, 상습범, 여호와의증인, 집시, 동성애자 등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집단들을 더 추가한다. 
강령에서는 어느 주장을 다른 주장들보다 몇 배 더 길게 강조했는지 아주 잘 드러났다. 23조에는 반유대주의와 언론과 선전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이 뒤섞여 있다. - P165

우리는 국제적·정치적 거짓말 그리고 언론을 통해 그러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행동에 대해 법적 투쟁을 요구한다. 독일적인 신문의 창간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 독일어로 발행하는 신문의 기자와 기고자는 모두 독일인이어야 한다.
ⓑ 비독일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야한다. 이러한 신문은 독일어로 인쇄될 수 없다.
ⓒ 비독일인이 독일 신문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영향을 끼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된다.

이러한 법을 어기면 관련 신문사의 문을 닫고, 독일인이 아닌 관련자를즉각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 P165

공익을 침해하는 신문은 금지해야 한다. 국민 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예술과 문학 사조에 대해서는 법정 투쟁을 벌이고, 이러한 요구를어기는 문화행사는 탄압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강령만 보아도 나치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없겠다는사실을 알 수 있다. 나치를 향한 어떠한 반대도 ‘비독일인‘의 활동, 따라서 ‘공익‘을 침해하는 활동으로 여기리라는 게 너무 분명했다.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주장도,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주장도 있었다(예를 들어 19조는 독일인 대부분이 거의 관심도 없는 로마법 적용에 반대한다는 주장이었다. 정치 단체가 주장하고 약속하는 일과 유권자가 반응하는 일은 별개다. 어떤 주장이 독일 유권자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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