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은 몇 주 동안 준비했다. 모두 합해 1만3천 명에서 1만 4천 명 정도의경찰관을 베를린 거리에 배치하려고 한다. 이 중 일부는 다른 도시에서지원 온 경찰관이다. 프로이센 내무부 장관카를 제베링Carl Severing은 훗날 "독일 어딘가에서 정적이 총에 맞거나 두들겨 맞거나 칼에 찔리지 않은날이 거의 없었다"라고 한탄한다. 막스 퓌르스트라는 이름의 젊은 목수이자 좌파 운동가가 말한 "마지막 전투가 시작되었다"라는 표현이 아마딱 맞을 것이다. 온갖 위협과 긴장감이 넘쳤지만, 그날은 아주 조용히 시작된다. 아침에몇몇 소규모 집단이 노동자 계층이 사는 동네에 모여 베를린 중심부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멀리 가지 않아 경찰이 그들을 모두 막는다. 그렇지만시간이 지나가면서 경찰과 시위 참가자들의 충돌이 심해지기 시작한다. 경찰은 먼저 경찰봉을 휘두른다. 그다음 경고사격을 한다. - P113
1929년 5월 1일, 오월절이다. 얼마 되지 않아 많은 언론이 이날을 "피의5월 Blutmai"이라고 부른다. 어떻게 봐도 선량한 시민에게 어마어마한 폭력을 휘두른 날이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났을까? 베를린에서 가장 가난하고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경찰의 태도에서도 답을 찾을 수 있다. 경찰은 노이쾰른과 베딩 같은 지역을 증오하고 두려워한다. 범죄자들과공산주의자들의 온상으로 여기며 두 곳을 구별 못할 때도 있다. 《시카고데일리 뉴스 Chicago Daily News>의 베를린 특파원은 "우린 온상 전체를 뿌리뽑고 싶다. 완전히 다르게 공격을 퍼붓고 싶지만, 허용되지 않는다"라는이 지역들에 대한 경찰의 과격 발언을 보도하면서 논조를 잡는다. - P115
1929년, 공산당은 전통인 노동절 시위를 벌이겠다고 우긴다. 노동절 행진 금지를 고집하던 사회민주당 당국이 당황한다면 더욱 좋다. 공산당 매체들은 노동절 시위를 준비하면서 비난을 퍼붓는다. 사회민주당이 "프로이센에서 독재정권을 세우려고 한다"라고 공산당은 주장한다. 공산당은 정치 집회에 대해 똑같은 입장이었던 황제의 관료와 사회민주당을 비교하기 좋아한다. 사회민주당은 "공산당에는 선전을 위한 시체가 필요하다"라고 대답한다. 그런 시체는 아주 많다. 5월 1일에 대한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노동자와 시위자 중 9명이 사망하고, 63명이 심한 부상을 당했다. 경찰 25명도부상을 당했다. 이후 이틀 동안 폭력은 더 심해진다. 경찰 때문에 5월 3일까지 33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98명이 부상당하고, 1천 명이 훨씬 넘는사람들이 체포된다. 경찰도 47명이 부상을 당했지만, 사망자는 없다. 경찰 한 명이 총상을 입었지만, 자기가 쏜 총에 맞아서다. 10 언론인 카를 폰오시에츠키 Carl von Osietzky의 말대로 피의 5월에 죽은 사람은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벌인 전쟁"의 희생자다. 공산당과 나치의 싸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싸움, 경찰에 저항하는노동자들..…. 1929년쯤에는 온갖 극렬한 분열로 독일 사회가 산산조각이나고 있다. - P117
로마니쉐 카페는 대단하거나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베를린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만나는 장소였다. 이러한 이유로 ‘과대망상증 카페‘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손님들이 평등하게 만나지는 않았다. 언론인 마테오 퀸츠Matheo Quinz 는 그 카페를 "수영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웅덩이와 수영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작은 웅덩이가 있는 수영장"으로 비유했다. 어떤 손님을 카페의 어느 쪽으로 안내할지는 수위가 판단했다. 큰 웅덩이에는 영화감독과 배우, 광고 책임자, 몇몇 특별히 성공한 예술가들이 모였다. 작은 웅덩이에는 작가와 기자, 나머지 예술가, 정치운동가, 탈무드 학자들이 모였다. 더 많은 무리로 나뉘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자리를 차지했고, 미술상 알프레트 플레히타임 AlfredFlechtheim이 한쪽에서 좌중을 이끌고, 탈무드 학자들도 자연스럽게 따로모였다. - P118
다양한 작은 무리와 패거리들이 서로 별로 섞이지 않고 따로따로모인다. 오직 기자 에곤 에르빈 키슈Egon Erwin Kisch가 ‘이 자리 저 자리 다니면서 흥미진진한 대화를 동시에 나누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줬다. 모든신문을 읽으면서 모든 여자를 지켜보기까지 했다. 로마니슈 카페는 또한 콧대 높은 곳으로도 유명했다. 수위가 모르는 예술가는 그야말로 존재하지 않는 존재‘였다. 한 잔만 시켜도 온종일 머물수 있는 손님은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 같은 몇몇뿐이었다. 대부분은빨리 계산을 치르고 떠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역사학자 에릭 웨이츠Eric Weitz는 그 카페를 "활기 넘치고, 민주적이고, 분주하고, 이리저리 나뉘고, 분열을 초래하고, 끼리끼리만 이야기하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와 사회를 완벽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표현했다. - P118
정치, 종교, 사회 계층, 지역에 따라 점점 더 타협할 가능성 없이 극심해진 분열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징이었다. 여러 해 동안 동독 정보기관의대외정보국 국장을 지낸 마르쿠스 볼프Markus Wolf는 1920년대에 적극적인 공산주의자 집안의 아들로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았다. 볼프는 당시 우파와 좌파의 정치 싸움은 "집단 패싸움과 같았고, 나치는 "우리 가족과완전히, 종족조차도 다르게 느꼈다고 여러 해가 지난 후 회고했다. 15바이마르 공화국이 결국 히틀러의 독재정권에 무릎 꿇었기 때문에 바이마르의 민주주의자와 반민주주의자 사이의 분열에 초점을 맞추는 게자연스럽다. 의심할 여지 없이 베를린 정치인들에게는 민주주의와 반민주주의 사이 분열이 가장 중요했다. 그러나 나라 전체로 보면 훨씬 더 복잡하다. 당시에는 여론조사가 없었다. 그래서 선거 때마다 독일 유권자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공화국의 수많은 정당을 지지했던 다양한 집단과 지역에 대해서는 잘 밝혀져 있다. - P119
바이마르 공화국의 매우 중대한 분열은 ‘정치적 교화‘와 관련 있었다. 역사학자들이 만든 용어로, 사람들이 이웃·동료·교회·동호회·신문이나 다른 매체 같은 사회적 배경의 영향을 받아 투표할 때가 많다는 뜻이다. 일단 정치적 교파화가 되면 유권자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집단을 절대바꾸지 않으려고 한다. 어느 교파를 이루는 성당이나 교회 공동체에 들어가서 사회화되는 일과 비슷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는 ‘교화‘된 진영이 세 곳 있었다. 사회주의 진영(기본적으로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 가톨릭 진영 (중앙당과 바이에른 지방의 자매당인 바이에른인민당), 신교도 중산층 진영 (보수적인 국가인민당, 자유주의자인 독일민주당과 독일인민당 그리고 소상공인당 같은 다양한 비주류 집단)이었다. 16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불안정이 최고조였는데도(정권 교체가 너무 - P119
잦아 14년이 조금 넘는 기간에만 정부가 21번, 총리가 13명 새로 들어섰다), 진영은1919년부터 1933년까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게 가장 중요한 점이다. 각진영의 폭이 넓어서 그 안에 민주적인 부류도 있고, 반민주적인 부류도 있었다. 유권자들의 표는 보통 각 진영 안에서 움직였다. 진영을 바꿔서 투표하지는 않았다. 사회민주당은 처음에는 독립사회민주당, 그다음에는공산당에 유권자를 빼앗겼다. 그러나 (1919년에 이례적으로 최고 득표율을 기록한 이후) 사회주의 진영의 득표율은 전체의 35~40%라는 예측 가능한범위로 자리 잡았다. 가톨릭 진영의 표는 15% 안팎으로, 더 좁은 범위에서 움직였다. 나치는 사실 득표율이 30% 후반에서 40% 초반에 이르러 사회주의 진영보다 약간 앞서는 신교도 중산층 진영을 장악하면서 상당히많은 표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1925년에 "우리는 코를 움켜쥐고 가톨릭과 마르크스주의 의원들과 맞서면서 국회에 들어가야 합니다" 라고 추종자에게 말하면서 독일 정치의 기본 요소를 이해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 P120
히틀러의 나치는 이미 사회주의 진영으로 ‘교화‘된 유권자 무리를 1932년까지는 잘 끌어들이지 못했다. 가톨릭 진영의 유권자도 별로 끌어오지 못했다. 나치가 1932년과 1933년 선거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둘 때도 두 진영에는 별로 파고들지 못했다. 18세 진영이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는 사실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독일사회가 얼마나 뿌리 깊게 분열됐는지를 또다시 잘 보여준다. 하지만 뭔가다른 점도 보여준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진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처음 진영에 발을 들인 사회화 과정이 공식적인 정치 이념만큼, 아마 그보다 더 표에 영향을 끼친다는 의미다. 가톨릭 신자들은 중앙당이나바이에른인민당에 표를 던졌다. 그게 가톨릭 신자로서 적절한 행동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도시 노동자들은 자신의 사회 계층에 충성하려고 - P120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했다. 그리고 나치는 중산층 신교도들이이미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세계관에 맞는 청사진을 내놓았기 때문에 성공했다. 독일 정치에서 ‘교화‘ 같은 분열은 농촌과 도시, 그리고 무엇보다 베를린에 사는 사람과 살지 않는 사람의 구분으로 더 증폭되었다. 우리가 떠올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은 거의 베를린과 관련된이미지다. 게오르게 그로스의 그림, 쿠르트 바일과 베르톨트 브레히트가함께 만든 오페라, 에리히 멘델존의 건축,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소설에등장하는 카바레 가수 샐리 볼스, 크고 개방적인 동성애자 공동체 그리고온갖 성적 실험 말이다. 하지만 1925년에 독일인 6250만 명 중 4백만 명만베를린에 살았다. 인구의 3분의 1 이상은 농촌 사회, 주민이 2천 명을 넘지 않는 마을에서 살았다. 베를린 밖 주민들의 삶은 베를린의 초현대적인삶과 엄청나게 달랐다. - P121
20세기 초중반의 도시에서는 오늘날 우리 생각보다 계층 차이가 더 뚜렷했다. 또 사회 계층에 대한 유럽인의 생각은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인과다르다. 미국인은 보통 소득으로 계층을 구분한다. 유럽인은 계층을 주위환경, 장래성, 경제 형편 등 훨씬 더 복잡한 문제로 여긴다. 노동자 계층은시장에 자기 노동력만 내놓는 사람이지만, 중산층은 수입과 상관없이 사업을 하거나 변호사나 의사처럼 독립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옷차림, 말씨, 키와 조지 오웰이 인상적으로 묘사했듯) 냄새로 노동자 계층과 중산층이 금방 구별되었다. 이러한 도시 사회 구조는결국 한쪽은 노동자 계층 정당, 다른 한쪽은 중산층 정당으로 분명하게나뉘는 현대 도시 정치를 낳았다. 농촌 마을에는 도시 같은 사회 구조가 없었다. 대신 역사학자 셸리 바라 - P121
노스키Shelley Baranowski가 ‘농촌 신화‘라고 부르는 게 있었다. 농사는 가장고귀한 일이고, 전원생활은 건강에 좋고, 진정성 있고, 사회적 안정과 조화와 평화를 만든다는 신화다. 농촌 신화의 바탕에는 분명 위계질서, 특히 귀족 영주와 농업 노동자 사이 위계질서가 있다. 목사, 교사 같은 전문직은 중간 계층이었다. 그러나 공동체 의식으로 위계질서의 긴장감이 누그러졌다. 위계질서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를 알았고, 자기의무와 책임감도 알았다. 아무래도 ‘반대편‘이 있기 때문에 그런 믿음을유지할 수 있었다. 도시는 적이었다. 바라노스키의 표현에 따르면, 도시는 "공화주의·다원주의·기계화·미국화·파벌주의·교육 실험·도덕적 타락이 팽배하고, 특히 남녀 사이의 적절한 경계가 무너진 곳"이었다. - P122
종교적 믿음은 농촌의 정체성에서 상당히 중요한 요소였다. 시골에서는 교회에 대한 소속감이 도시보다 훨씬 강했다. 1차 세계대전 후 폴란드가 독립해 떨어져 나가자 신교도가 많은 동프로이센에서 신교도의 정체성이 더욱 강해졌다. 폴란드는 가톨릭 국가를 표명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문에 프로이센 사람이라면 무엇보다 신교도라는 사실이 중요하다고생각하는 경향이 훨씬 더 커졌다. 농촌 사람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싫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사회민주당의 득세는 도시 노동자 계층이 전쟁 전보다 더 많은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뜻이었다. 또한 정부가 농산물 가격을 낮게 유지하려고 더큰 노력을 기울인다는 뜻이었다. 수출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자 관세 인하를 위한 무역협정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반면 농촌사람들 입장에서는 수입 식품의 관세와 농산물 가격이 높을수록 이익이 커졌다. 다른 곳도 아니고 폴란드에서 농산물을 수입한다는 1929년 무역협정에 농촌 지역은 격분했고, 절대 비준될 수 없었다. 1927년과 1928년에 이미 떨어지 - P122
고 있던 세계의 농산물 가격이 갑자기 더 빨리 폭락했다. 어떤 농민은 세금을 내지 못했고, 어떤 농민은 파산했다. 1차 세계대전은 다른 면에서도 농촌 지역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총,비행기와 현대전에 필요한 온갖 무기들을 생산하려면 수많은 공장 노동자들이 국내에 남아 있어야 했다. 다른 모든 유럽 군대처럼 독일 군대는도시보다 농촌 지역에서 신병을 더 많이 모았고, 이는 농촌 청년들이 죽어가는 일을 맡았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도시를 향한 농촌 지역의 분노는점점 커졌다(무엇보다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던 지식인이나 전쟁으로 폭리를 취한 사람들의 본거지로 여기는 베를린에 대한 분노가 컸다). 베를린의 문화예술적인 실험은 보수적인 농촌사람들에게 별로 호소력이 없었다. 대도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베를린은 중요한 산업 중심지였고, 아에게나 지멘스 같은 거대한 전자제품 제조업체 그리고 기계·직물과 갖가지 물건을 만드는 제조업체들의 본거지였다. - P123
19세기에 산업화가 시작된 이후 대부분 나라에서 그랬듯 많은 독일인은 공장을 악마로 생각하고, 농경 생활을 동경했다. 베를린은 독일의 금융 중심지이기도 했고, 은행과 증권거래소는 그것으로 생계를 유지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베를린의 사회 구성은 다른 지역과 완전히 달랐다. 베를린은 독일에서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지역이었다. 독일 전체에서 유대인의 비율은 1%였지만, 베를린은 7% 정도로 훨씬 높았다. 베를린은 공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수많은 산업노동자들의 본거지였고, 산업노동자들은 사회민주당이나 공산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높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거의 모든 선거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함께 베를린에서 절반이 넘는 표를 얻었다. 나치나 다른 우파 정당들은 베를린을 "붉은 베를 - P123
린"이라고 불렀다. 그러니 대다수 독일인에게 베를린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싫어하는 점을 모두 모아놓은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대한 반대는 곧 바이마르 질서에 대한 반대를 의미했다. 바이에른의 작가 루트비히 토마LudwigThoma 는 "베를린은 독일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다. 베를린은 타락했고, 갈리치엔갈리치아 지방의 독일어 명칭의 오물로 더럽혀졌다" 라고 말했다. 폴란드 갈리치아 지방에서 온 유대인 이민자가 정말 많았기 때문에 갈리치엔사람‘은 유대인을 부르는 은어였다. 비슷한 이유로 보수 언론인 빌헬름슈타펠Wilhelm Stapel은 베를린을 "공화국의 시궁창"이라고 불렀다. 그는 "너무 많은 슬라브인과 통제받지 않는 너무 많은 동유럽 유대인들이 베를린 사람들에 뒤섞였다"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언짢은 혼합‘이 베를린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 P124
의 특징이 되었다고 덧붙였다. 슈타펠은 이민자들이 들여왔다고 생각하는 "무례한 독선과 끊임없이 낄낄거리며 비꼬는 말과, 지방을 베를린처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식인의 오만을 싫어했다. 베를린을 치유할 약은 무엇일까? 칸트와 괴테 같은 독일의 문화 전통일 수도 있고, 루터교의 ‘단호한 의지‘일 수도 있다. 슈타펠은 독일 전원 지역의 농부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농촌과 교회가 베를린에 갖는 반감에는 대도시의 다양한 성적 취향과탐색을 못마땅해하는 부분도 컸다. 그저 내숭 떠는 게 아니었다. 뭔가 더뿌리 깊은 원인이 있었다. 독일 신교도들이 보기에는 남성 중심의 가족이사회 질서의 핵심이었다. 아버지는 집안뿐 아니라 정치와 경제생활도 다스려야 했다. 남성 중심에서 벗어난 성적 관계나 가족 구조는 모두 정치·사회권력의 근본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어떤 베를린 시민들은 우월감을 보이거나 시골에 사는 동포를 경멸하 - P124
기까지 했다. 시인이자 어린이책 작가인 에리히 캐스트너 Erich Kastner는시골에서 와서 베를린의 분주하고 국제적인 포츠담 광장(무엇보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신호등이 설치된 곳)에 압도된 관광객이 차에 치일‘ 때까지 ‘온갖 잘못‘을 저지르며 ‘고통스럽게 웃는 장면을 상상했다. 언론인 쿠르트투홀스키 Kurt Tucholsky는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포메른 교외에 살고 구닥다리 옷을 입은 교양 없고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을 묘사했다. 그는 ‘목소리를 내서‘ 어두움 속에 사는 지방에 베를린의 빛을 비추자고 베를린사람들에게 촉구했다. 그러면서도 냉정하게 현실적으로 전망했다. 투홀스키는 "여러 민주적인 신문이나 예술가, 자유주의 단체들의 명성은 사실 실제 능력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라고 썼다. ‘반작용의 힘이미 존재했고, 더 교묘하게, 무엇보다 별로 정중하지 않게 휘두르는)‘은 ‘주식 시장과 상인 계층‘의 지원을 받아 조용히 작동했다. - P125
농민들이 저항하기 시작했다고 쓴 빌헬름 슈타펠이 맞았다. 1928년, 독일 농업을 강타한 경제 위기 가운데 급진적인 농촌 저항운동이 벌어졌다. 스스로 란트폴크 Landvolk, 시골 사람라고 부르면서 프로이센 북부의 농촌 지역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시작한 저항운동은 북부와 동부의 농촌전체로 퍼졌다. 란트폴크는 수입 농산물에 관세를 새로 부과하고, 쉽게대출받을 수 있게 하고, (주로 도시가 혜택을 받던 사회 복지를 줄이라고 요구했다. 저항운동은 정치적으로 극우였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부 건물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테러리스트 전략을 사용했다. 1929년, 저항 세력은증오하는 공화국과 베를린에 대한 궁극적이고 상징적인 공격으로 국회의사당에 폭탄을 터뜨렸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나치가란트폴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나치는 곧 농민 유권자들을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 P125
독일의 정치적 분열에서 유대인에 대한 독일 기독교인의 태도 역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수십 년 전에도 독일에서는 반유대주의가 정치적 우파의 특징이었다. 역사학자 슐라미트 볼코프 Shulamit Volkov가 쓴 대로 반유대주의는 사람들의 여러 믿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접착제인 ‘문화코드‘였다. 여러 믿음 중 가장 중요한 건 독일 민족주의였지만, 권력 숭배, 남자다움과 정력 중시, 엘리트주의, 인종차별주의, 여성혐오도 있었다.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에 적대적이었다. 또 도시를싫어하고 시골을 좋아했다. 상업적이기보다 군사적인 가치관을 가지고있었고 군사적인 예법을 중시해서, 물질주의와 자본주의를 반대하기 쉬웠다. - P126
정치에서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 경향이 강했다. 반유대주의 때문에 농민이 곡물상에 맞서고, 소상공인이 백화점에 맞섰다는 주장도 있다. 반유대주의는 엘리트주의, 자본주의, 현대화에 반대했다. 반면 반대쪽 끝에서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은 민주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인 정치 성향, 평화주의, 페미니즘과 강하게 연결되었다. 전쟁 전에 사회민주당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아우구스트 베벨 August Bebel이 반유대주의는 "바보들의 사회주의"라고 선언했던 게 가장 유명한 사례다. 그와 같은 사람은 많았다. 역사학자 테어도어 몸젠Theodor Mommsen은 반유대주의가 유대인뿐 아니라 ‘교육, 자유와 인간애‘를 증오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페미니즘 지지자였던 철학자 테어도어 레싱 Theodor Lessing은 여성과 - P126
유대인은 똑같이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1910년에썼다. 반유대주의는 1918년 이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문화코드로 활용하면서 점점 더 뚜렷해졌다. 전쟁 전 독일에서는 지역 사회나 특정 업계 안에서의 위기 때문에 반유대주의가 폭발하곤 했다. 그러나 1918년 이후에는나라 전체의 위기(패전, 혁명, 내란, 초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가 많아서 반유대주의도 더 심해졌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구조는 어쩔수없이 독일에 사는 유대인에게유리하지 않았다. 반유대주의는 포퓰리즘이기 때문에 전쟁 전의 독일제국 시절에는 약간 권위주의적이던 연방주가 반유대주의를 반대하는 편이었고, 정당의 힘이 강하지 않아 반유대주의 운동가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새로운 민주주의에서는 이러한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당도 때때로 어떤 당 못지않게 반유대주의 발언을했지만, 보통 반유대주의는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전유물이자 특징이었다. 요즘 미국에서 낙태 문제에 대한 태도로 민주당인지 공화당인지 구분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하다. 대다수 사람에게는 반유대주의 편인지 아닌지가 결코 가장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의 상징성때문에 이쪽 혹은 저쪽을 선택해야 했다. - P127
독일에서는 대기업과 군대가 강력한 두 집단이었다. 둘은 각기 다른 이유로 사회민주당이 아무 권력도 갖지 못하도록 몰아내고 싶었다. 이는 사실 법을 만들고 내각을 구성하는 국회의 문을 닫거나 최소한 힘을 제한할길을 찾는다는 의미였다. 기업가와 군인들은 보다 권위주의적인 통치를원했다. 대기업은 국가의 중재 제도로 대부분 시행되는 임금 인상 합의에점점 더 신경이 거슬렸다. 군대는 사회민주당이 군비 지출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으려고 해서 화가 났다. 192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군대와 대기업 모두 새로운 단계의 정치 활동으로 전환했다. 이익집단을 만들고,동조하는 정당들을 끌어들이고, 민주주의의 토대를 흔들 합법적인 전략을 찾았다. 러시아이러한 모든 반정부 활동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좋은‘ 시절 동안, 정확히는 좋은 시절에 대처하면서 새로운 해결책, 새로운 강도로 시작되었다. - P129
이 문제는 이념적인, 거의 철학적인 차원으로 볼 수도 있다. 민주적이든 반민주적이든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진영은 하나같이 타협을 막는강렬한 문화적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국가인민당은 국익을 위해 1920년대에 몇 차례 국회에서 자신들의 이념과 정반대인 정책을 지지했다. 그런 태도라면 국가인민당은 민주적인 공화국을 점차 받아들여야 했다. 로카르노 조약 시기에는 잠시 그렇게 되는 듯했다. 그러나 민주적인 정치인들은 국가인민당의 폭넓은 시야를 칭찬하기보다 "등뼈가 부러졌다"라고조롱했고, "이런 일 이후에도 민족주의자 유권자들이 (국가인민당에 남는다면 어떤 정당도 그런 유권자를 가졌다고 (국가인민당을) 부러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 P130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아돌프 히틀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면에주목하면서 똑같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최신 교훈, 즉 총력전에 대한교훈이었다. 그러한 교훈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독일의 미래를 결정지었다.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금융시장 붕괴가 대공황을 불러일으켰고, 대공황이 히틀러를 자극해 독일의 민주주의가 막을 내렸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사실 대공황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지 감소, 나치의 정치적 성공 사이의 인과관계는 훨씬 더 복잡하다. 또한 모든 일이 월스트리트 금융시장이 붕괴하기 전에 시작되었다. - P143
슈트레제만이 사망하고, 후겐베르크가 세력을 얻고, 농촌의 불만이 점점 더 커지고, 코민테른이 ‘제3시기‘로 접어들었다고 선언하고, 기업가가 좌절감을 느끼고, 군대가 공화국 때문에 제약을 받고, 주의회선거와 지방선거에서 나치가 처음으로 많은 표를 얻는등 1928년과 1929년에 벌어진 일들은 독일이 전후의 세계 공동체에서 확실히 벗어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줬고, 이는 또한 민주주의에 등을 돌린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1920년대 말에는 독일 경제 상황도 최악이었다. 1929년 이전부터 각 분야에서 점점 심각해지던 몇몇 경제·금융 문제가한데 모였다. 문제 중 하나는 농민들의 저항을 불붙였던 전 세계 농산물 가격 하락이었다. 독일 동부의 많은 지역 (슐레지엔, 포메른, 프로이센)과 북부와 서부, 특 - P143
히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니더작센 지방은 대부분 농촌이었고, 1920년대 중반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농민들은 그 문제로 가장 큰 타격을 받아, 유권자들이 먼저 매우 강렬하게 공화국에 등돌린 지방이었다는 게 우연이 아니었다. 1932년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어떤 지역에서는 유권자의 80%가 나치에 표를 던졌다. 그다음 요인으로 산업 생산성을 개선하기 위해 기술을 많이 활용하면서 더 효율적으로 경영하는 ‘합리화‘ (오늘날 우리는 ‘자동화‘라고 부른다)를들 수 있다. 보통 그렇듯 생산성을 개선하면 고용이 줄어든다. 합리화가몇몇 산업에만 집중되었지만, 그 몇몇이 주요 산업이었고, 실업 문제가심각했다. 1922년에서 1928년 사이에 루르 지역의 광부 수가 33% 줄어들었다. 금속과 자동차 제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 P144
어느 정도 이러한 이유로 1928년 중반이 되자 독일의 실업자가 130만명에 이르렀다. 1년 후에는 150만 명으로 늘었다. 실업자들에게 실업급여를 줘야 하니 정부는 세금을 더 거둬들일 방법을 찾거나 다른 부분에서예산을 줄여야 했다. 뮐러 정부는 누가 비용을 부담해야 할지 합의하지못했고, 이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계속 정부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나 독일을 위기로 몰아넣은 건 무엇보다 재정 문제였다. 독일을 불경기로 몰아넣은 건 1929년의 월스트리트 붕괴가 아니라 1928년 월스트리트의 상승장이었다. 독일은 배상금을 지불하고 소비자지출을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 단기인 외채에 크게 의존했다. 그런데 전세계의 자본이 엄청난 이익을 거둘 수 있는 뉴욕으로 몰려가는 바람에 독일은 자본이 부족해졌다. 이것이 새로 취임하는 총리가 맞이한 상황이었다. - P144
그래서 유럽은 완전히 다른 미래로 접어들었다. 브뤼닝 총리는 민족주의 열풍이 치솟고, 주의회 선거에서 나치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현상을 경고 신호로 알아차리고 조금 더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선거를 미뤄야 했다. 그러나 브뤼닝은 1930년 가을에 선거를 치렀고, 이후 그 일로 계속 심한 비난을 받았다. 이전에 총리를 지냈고 1930년에는 독일의 중앙은행 총재였던 한스 루터처럼 충실한 지지자는 훗날 브뤼닝이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몰랐고, 날벼락 같은 결과였다고 주장했다. 브뤼닝 자신은 나치 득표율이 전보다 훨씬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다고 1944년에 썼다. 그러나 당시 실제로 그렇게 예측했다기보다는 과거를 회고하면서 더 통찰력 있어 보이려고 한 말일 수도 있다. 사망 후인 1970년에 출간된 회고록에서 브뤼닝은 불황이 4년 동안 계속 이어지겠다고 예상했고, 강력한 - P152
조처를 할 권한을 원했다고 썼다. 1브뤼닝과 함께 전략을 세운 슐라이허 역시 방심했다. 슐라이허는 나치를 사회민주당을 상대할 우파 정당 정도로 보면서 우려하지 않았다. 그는몇 년 후 빈센츠 뮐러에게 "히틀러에 대한 내 전략은 기본적으로 우리가1918년과 1919년에 군대 최고사령부에서 혁명 세력에 대처했던 전략과같네"라고 설명했다. 1918 년 전략은 ‘사회민주당을 끌어들여 급진적인부분을 제거하고, 폭동을 일으키지 않도록 예방한다‘는 전략을 뜻했다. 나치는 사회민주당과 달리 민족주의자이자 군국주의자였다. 슐라이허는나치의 그런 점이 상당히 좋아 보였다. 군인으로서 나치의 돌격대를 눈여겨보았다. 그는 뮐러에게 "특히 돌격대에는 좋은 점이 많다고 믿었네. 군대는 예비군 확보를 위해 돌격대에 관심이 많았지"라고 말했다. 슐라이허는 나치 득표율이 높아지는 일을 두려워하기보다 환영했다. - P153
이후 2년 반 동안 펼쳐진 독일 정치에서 나치를 끌어들이려는 슐라이허의 노력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슐라이허는 독일을 더 권위주의적으로 개조하고 싶었다. 또한 권위주의 국가에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추종자를 모으기 위해 히틀러와 나치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이상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러려면 매우 교묘히 움직여야 했다. 슐라이허는 나치가 조금이라도 진짜 힘을 가지기 바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언제나 두 가지를 동시에 준비하는 게 슐라이허의 전략이었다. 가능하면 나치를 활용할 계획을 세우고, 활용할 수 없다면 내쫓을 준비를했다. 아마도 자기 꾐수에 자기가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던것 같다. - P153
베를린 북부, 가난하고 음침한 동네의 어두운 밤, 노동자들이 사는 라이니켄도르프 지역 동부, 빌케 거리와 쇤홀처 길의 모퉁이 근처에 많지 않은 가로등이 드문드문 서 있다. ‘일곱 다리‘라고 불리는 지역이다. 북부철도의 육교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인다. 서쪽에는 금속 울타리가 펠제네크 주말농장이자 형편없는 오두막들이 모인 곳을 가른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실직자로, 가난한 사람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다. 공산주의 신문 《디로테파네Die Rote Fabne, 붉은 깃발>의 표현대로 "끝을 내모는 경제 위기와 자동화로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다. - P157
요한 바누셔란 남자와 그의 처제는 빌케 거리에서 서둘러 걷고 있다. 고요한 밤이어서 발소리만 크게 들린다. 그들은 펠제네크 주말농장에 있는 바누셔의 집 앞에서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여덟 명에서 열 명 정도 되는 남자들이 두 사람을 위협한다. 제복이 금지돼 일반인 복장이지만, 분명 나치 돌격대원들이다. 남자들이 바누셔를 둘러싼다. "그 사람이야. 우리가 지금 그를 잡았어"라고 누군가 말한다. "공산당원 맞아. 여기 살고있잖아. 공산당원이지"라고 다른 사람이 말한다. 세번째 남자가 "증거확인했어?"라고 묻는다. 대원들을 이끄는 헤르만 슈르는 "네가 클렘케지?"라고 묻는다. 누군가 바누셔가 코르덴 바지를 입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코트를 벗긴다. 돌격대원들은 무기로 사용하려고 벨트를 푼다. 하지만바누셔는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할 수 있다. 위험한 순간은 금방 지나간 - P157
다. "꺼져, 가자"라고 슈르는 부하들에게 말한다. 외모나 옷차림이 요한 바누셔와 상당히 비슷한 프리츠 클렘케는 얼굴이 말쑥한 젊은 남성이다. 클렘케는 열흘 전 라이니켄도르프에 있는 직업소개소에서 몇몇 돌격대원들과 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바로 어제, 빈터거리 근처에서 공산당원들과 나치가 다시 싸움을 벌였다. 이번에는 형사고발이 기다렸다. 나치는 복수에 나선다. 1932년 1월 16일 새벽이다. 돌격대원은 이틀 후에 다시 그곳으로 온다. 베를린 북부의 몇몇 돌격대원 부대, 모두 합해 200명 정도가 1월 18일저녁에 바이트만슬루스트 지역의 베르크쉴로스라는 식당에 모여 친목을다진다. 밤이 깊어지자 그들의 지도자 베르너 슐체Werner Schulze가 일어서더니 부하들에게 연설한다. 그는 "우리는 오늘 작은 일을 하나 더 할 것"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펠제네크로 곧장 행진하라고 명령한다. "공산당원을 만나면 누구든 죽여버린다." - P158
펠제네크는 베를린 라이니켄도르프의 236군데 주말농장 중 하나다. 평상시에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일요일 오후에 휴식을 취하면서 장미 덤불을 가꾸던 자그마한 땅들이 있는 곳이다. 1932년 1월은 평상시가 아니다. 이제 실직자들이 이곳에서 생활한다. 나무판자나 마분지로 지은 판잣집에서 와들와들 떨면서 지낸다. 놀랍게도 슐체가 이끄는 돌격대원들은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펠제네크로 행진한다. 더욱더 놀랍게도 돌격대원들이 주말농장에 도착하자 호위하던 경찰이 사라진다. 나치는 ‘사격선‘으로 알려진 공격 대형을 갖춘다. 돌격대원들은 찾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다. 몇몇 나치 당원이 어떻게 프리츠 클렘케를 쇠막대로 때려눕혔는지 하인리히 빌보크라는 18세 돌격대원이 훗날 설명한다. 안경을 쓴 키 큰 남자가 코트 깃으로 얼굴을 가린 - P158
채 갑자기 나타나더니 다른 사람들을 밀어젖힌다. 그는 의식을 잃은 클렘케의 등을 권총으로 쏜다. 총알이 클렘케의 심장을 관통하고, 클렘케는곧장 사망한다. 이젠 나치도 무사히 빠져나가지 못한다. 주말농장 근처 어두운 거리에서 싸움이 격렬해지면서 공산당의 준군사조직인 ‘반파시스트 행동‘의 누군가가 에른스트 슈바르츠라는 돌격대원을 칼로 찔러 죽인다. 슈바르츠는 58세로, 돌격대가 되기에는 무척 나이가 많은 미술 교사였다. 1932년 겨울은 대공황으로 독일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져 있다. 불황이심각할 때 나타나는 정치의 모습은 이렇다. - P159
독일을 걱정한 사람들은 독일 자유주의자들만이 아니었다. 선거 결과를 보고 불안해진 외국 투자가들이 독일 은행에서 예금을 인출하면서 금융 위기가 발생했다. 한 달 만에 8억 라이히스마르크(1930년 환율로 1억 9천만 달러 정도, 오늘날에는 28억 달러)의 외국 자본이 독일에서 빠져나갔다. 국제 시장에서 독일의 유가증권 가격이 큰 폭으로 하락했고, 중앙은행이 금보유고의 절반을 잃었다. 그래서 금리를 5%(뉴욕은 2%, 런던은 3%)로 올릴수밖에 없었다. 물가가 떨어지고 있어서 실제로 돈을 빌리는 비용은 12%로 올라갔다. 이미 경기 침체를 겪는 상황이어서 더욱 심각했다. 독일 경제는 더 깊은 불황에 빠져들었다. 프랑스에서 아리스티드 브리앙은 그와 슈트레제만이 이루려고 애썼던일들의 잔해를 뒤적였다. 히틀러가 선거에서 엄청난 승리를 거뒀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브리앙의 반응은 1년 전 슈트레제만이 죽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그는 자신을 "나치의 첫 번째 희생자"라고 불렀다. 왜 나치가 그렇게 많은 표를 얻었을까? 나치는 유권자들에게 무엇을약속했고, 유권자들은 나치에게서 어떤 희망을 보았을까? - P162
나치 운동을 이해하려면 정치의 기본적인 요인을 이해해야 한다. 나치는정당이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를 포함해 모든 정치인처럼 그들 역시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치 공간으로 옮겨갔고, 자신들이 끌어들인 지지자에 맞춰 계획을 바꿔나갔다. 나치의 이념과 목표는 언제나 의도적으로 모호했고, 항상 바뀌었다. 히틀러는 1920년에 큰소리로 팡파르를 울 - P162
리면서 25가지 주장이 들어간 나치 강령을 발표했고, 이러한 주장들은바뀌지 않는다고 엄숙하게 선언했다. 그러더니 히틀러는 이 주장들을 버렵기 때문에, 그가 권력을 잡은 다음에 한 일들은 강령들과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15그렇지만 나치가 초창기에 어떻게 사람들을 끌어들였는지 이해하려면25개 조항에 담긴 주장을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일부는 민족주의자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주장들이다. 나치는 ‘민족자결권‘을 바탕으로 "더 위대한 독일에서 모든 독일인이 하나가 되자" 라고 주장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과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폴란드·프랑스·벨기에에 ‘빼앗긴‘ 땅들을 회복하자는 뜻이었다. 베르사유 조약과 생제르맹 조약(연합국과 오스트리아 사이 강화조약)을 폐지하고, 평화 협상에서 승전국들에 빼앗긴 독일의 해외 식민지를 되찾아야한다는 요구였다. - P163
다른 주장들은 성격이 달랐다. 자본주의와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사회 복지를 지향하는 게 나치가 초기에 내세운 이념의 핵심이었다. 나치는전쟁으로 폭리를 취하는 일을 금지하려고 했고, 대기업과 백화점의 국유화와 대기업의 이익 분배, 조건이 좋은 노령연금, 가난한 아이들이 더 좋은 교육을 받을 기회 보장(국가가 교육 과정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체조와 스포츠를 의무화하는 법률 제정, 그리고 청소년의 체력 단련과 관련 있는모든 조직 지원을 요구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은 성명서의 세 번째 주요 주제였는데, 이는 같은 민족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증오로 쉽게 변질했다. 7조에서는 "시민의 생계를 보장하는 게 국가의 주요 의무다. 국민 전체를 부양할수 없다는 게 입증되면 외국인을 독일에서 내쫓아야 한다"라고 요구했다. - P163
뒤이어 8조에서는 이민자를 향한 증오를 드러내면서 국외 추방을 하자고 했다. "독일인이 아니면 누구든 더 이상 이민을 오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독일인이 아니면서 1914년 8월 2일 이후에 독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든 지체 없이 독일에서 추방할 것을 우리는 요구한다." 나치는 주로 유대인이 이주해 올 것을 걱정했다. 1차 세계대전 때문에유대인 약 8만 명이 대부분 이전 러시아 제국령에서 피난을 왔다. 1922년에는 들어오는 난민이 줄어들었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절대 동쪽 국경을 빈틈없이 통제할 수 없었다. 이는 정치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문제로계속 남았다. 이른바 ‘동유럽 유대인Ostjuden‘은 일찌감치 독일에 정착해서 동화된 유대인과는 문화적으로 완전히 달랐다. 1923년 베데커 여행안내서의 베를린 편에도 동유럽 유대인의 존재가 넌지시 표현되어 있다. 안내서 집필자는 "주로 동유럽에서 잔뜩 몰려온 외국인들이 쉽게 눈에 띄면서 황실의 찬란함은 사라졌다" 라고 한탄했다. 전쟁과 혁명에 시달리면서 이미 달아올랐던 반유대주의를 난민들이 더욱 불붙였다. - P164
그러니 나치 강령에서 반유대주의가 뚜렷했던 게 놀랍지 않다. 4조에서는 일종의 인종차별주의 삼단논법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동포만 시민이될 수 있다. 종교와 상관없이 독일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만 동포가 될 수있다. 그러니 유대인은 동포가 될 수 없다."유대인이냐 아니냐는 종교와거의 관련 없다고 나치는 생각했다. 유대인으로 분류된 사람은 개종해도자신의 신분을 바꿀 수 없었다. 가족이 대를 이어 독일에서 살아왔어도, 독일 사회에 완전히 동화되었어도, 기독교로 개종했어도, 1차 세계대전때 참호에서 피를 흘리며 싸웠어도, 유대인은 나치 제국의 시민이 될 수없었다. 계속해서 나치 강령은 이러한 주장의 몇 가지 다른 의미를 간결하게 설명했다. - P164
5조에서 "시민이 아니면 독일에서 그저 손님으로만 살 수 있다.그리고 외국인 체류자 법률을 따라야 한다"라고 했다. 시민만 공직에서일할 수 있다. 모든 시민에게는 ‘평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다. 물론 이러한 평등은 나치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모두 독일에서 내보낸 다음에야 이룰 수 있다. 실제로 권력을 잡자 나치는 정적, 신체적·정신적 장애인, 상습범, 여호와의증인, 집시, 동성애자 등 평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할 집단들을 더 추가한다. 강령에서는 어느 주장을 다른 주장들보다 몇 배 더 길게 강조했는지 아주 잘 드러났다. 23조에는 반유대주의와 언론과 선전에 대한 히틀러의 집착이 뒤섞여 있다. - P165
우리는 국제적·정치적 거짓말 그리고 언론을 통해 그러한 거짓말을 퍼뜨리는 행동에 대해 법적 투쟁을 요구한다. 독일적인 신문의 창간을 촉진하기 위해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 독일어로 발행하는 신문의 기자와 기고자는 모두 독일인이어야 한다. ⓑ 비독일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정부의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야한다. 이러한 신문은 독일어로 인쇄될 수 없다. ⓒ 비독일인이 독일 신문의 지분을 보유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영향을 끼치는 일은 법으로 금지된다.
이러한 법을 어기면 관련 신문사의 문을 닫고, 독일인이 아닌 관련자를즉각 추방할 것을 요구한다. - P165
공익을 침해하는 신문은 금지해야 한다. 국민 생활에 나쁜 영향을 끼치는 예술과 문학 사조에 대해서는 법정 투쟁을 벌이고, 이러한 요구를어기는 문화행사는 탄압할 것을 요구한다.
이 강령만 보아도 나치가 통치하는 제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없겠다는사실을 알 수 있다. 나치를 향한 어떠한 반대도 ‘비독일인‘의 활동, 따라서 ‘공익‘을 침해하는 활동으로 여기리라는 게 너무 분명했다.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주장도, 애매모호하고 이상한 주장도 있었다(예를 들어 19조는 독일인 대부분이 거의 관심도 없는 로마법 적용에 반대한다는 주장이었다. 정치 단체가 주장하고 약속하는 일과 유권자가 반응하는 일은 별개다. 어떤 주장이 독일 유권자들의 마음을 울렸을까?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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