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재판이 피고 측과 원고 측의 줄다리기를 통해서 진실을 밝히고 양편 모두를 정당하게 다루어야 하는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이제는 피고 측의 입장으로 주의를 돌려서 아이히만의 눈에 뜨인 일들 외에도 아이히만의 빈에서의 행위에 대한 자신의 기괴한 설명에 대해 다른 것이없는지, 그리고 그의 현실 왜곡이 실제로 한 개인의 거짓말하는 버릇그 이상의 어떤 것 때문이 아닌지를 알아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재판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아이히만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나위 없이‘ 확립되었고, 나치 정권을 공부하는 모든 학생들에게도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 P115
검찰이 확립하려고 한 추가적인 사실들이 판결에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그러한 사실들도 만일 피고 측이 소송과 관련된 자신들의 증거를 제시했다면 결코 ‘의심할 나위없이 보일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충분히 잘 알다시피 세르바티우스박사가 무시하기로 선택한 어떤 사실들에 대해 상당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아이히만 재판과는 구별되는 아이히만 사건에 대한 어떠한보고도 완전한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 문제‘에 관한 아이히만의 불분명한 의견과 이념에서특별히 잘 나타난다. 대질심문에서 그는 재판장에게 빈에서 "유대인을서로 수용할 만하고 서로에게 공평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상대로 간주했다"고 말했다. - P115
그들은 "사무실의 일벌레일 뿐"이었고,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문장을 통해, 명령을통해" 결정되었으며, "다른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요약하자면그들은 바로 ‘작은 톱니바퀴‘였는데, 피고 측에 의하면 아이히만이 그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총통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그들은 모두 작은 톱니바퀴였다. 심지어 힘러의 안마사였던 펠릭스 케르스텐에 의하면, 힘러가 최종 해결책을 열정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상관인 하인리히 뮐러가 ‘신체적 전멸‘과 같은 ‘거친‘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경찰심문관에게 확언했다. 분명한 것은, 아이히만의 눈으로 볼 때 작은 톱니바퀴 이론이 상당히 논점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물론 그는 하우스너 씨가 묘사하려고한 것처럼 비중이 큰 인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히틀러가 아니었고, 그런 점에서 유대인 문제의 ‘해결책‘에 관해서는 뮐러나 하이드리히, 또는 힘러와 그 중요도에서 비교할 수 없었다. 그는 과대망상증환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피고 측이 보여주려 한 것만큼 작은 인물도 아니었다. - P117
그런데 그 어떤 객관적 사실보다도 더 빌어먹을 것은 아이히만 자신의 결점투성이인 기억력이었다. 빈에는 그가 아주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몇 명의 유대인(뢰벤헤르츠 박사와 상업 고문관 스토퍼)이 있었지만 이들은 그의 이야기를 뒷받침해줄지도 모르는 팔레스타인의 밀사들이 아니었다. 아이히만과의 협상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비망록 (재판에서 새로 공개된 몇 안 되는 문서 중 하나로, 아이히만이 그 일부를보고는 주요 진술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했다)을 전쟁 후에 쓴 요제프뢰벤헤르츠는 나치 당국을 돕기 위해 유대인 공동체 전체를 조직하여기구화 한 첫 번째 유대인 고위층 인사였다. 그리고 그는 조력의 대가를 받은 매우 적은 인사들 중 한 사람이었다. - P123
히틀러 정부가 유대인을 나가게 할 의향이 있었다는 것은옳다(모든 유대인 이민을 중지하라는 지시는 2년 후, 1941년 가을이되어서야 내려왔다. 그리고 어떤 ‘최종 해결책‘이 이미 결정되더라도,그 누구도 그와 같은 효과를 가진 명령을 아직까지는 내리지 않았다. 동부에서는 유대인이 이미 강제거주구역(게토)으로 수용되고 있었고또한 돌격대에 의해 살해당하고 있긴 했지만, 베를린에서 아무리 ‘협동작업라인 원칙‘에 맞추어서 영리한 시스템을 만든다 해도 이민이 점차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은 이 과정을 이빨을 뽑는 것 같다"고 묘사했다. "…… 양쪽이 모두 무관심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쪽에서 말하자면 이민 가능성을 얻는 것이 정말로 어려웠기 때문이었고, 우리 쪽에서는 어떠한 소동이나 급한 일이 없었으며,사람들이 오가는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거대하고 힘있게생긴 건물에 앉은 우리는 삼킬 듯한 공허 속에 있었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전문영역인 유대인 문제가 이민 문제로 머물러 있는 한, 그는 곧 실직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 P128
1939년 9월 1일, 전쟁이 발발하자 비로소 나치 정부는 공개적으로전체주의적으로 되었고, 또 공개적으로 범죄적 성향을 띠었다. 조직의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단계 가운데 하나가, 1934년 이래로 아이히만이 소속된 당조직인 친위대 정보부와 게슈타포라 불린 국가비밀경찰을 포함한 정규 국가보안경찰을 통합한다는 힘러가 서명한 포고령이었다. 이 통합의결과 제국중앙보안본부(R.S.H.A.)가 등장했는데, 최초의 국장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였다. 1942년 하이드리히가 사망한 뒤 아이히만이 린츠에서부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박사가 그 직책을 넘겨받았다. 게슈타포뿐만 아니라 형사경찰, 치안담당경찰에 속하는 모든 경찰 간부들은 당원 여부와 상관없이 그들의 이전 계급에 따라 친위대 계급이부여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루 만에 과거 공무원 중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치스 계통에서 가장 근본적인 부분으로 통합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어느 누구도 저항하거나 자기의 직책을사임하지 않았다. - P129
그러나 재판기간 동안 ‘객관성‘으로 상을 받을 사람은 피고인 상급대대 지휘관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쾰른 출신의 세법 및 상법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 박사였다. 그는 나치당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법정에서 가르쳐주었는데, 이 사람의 말을 들으면 누구도 그 말을 잊지 못할것이다. 전 재판 과정 중 몇 안 되는 대단한 순간 가운데 하나가 피고측의 짧은 구두 변론 때 나타났다. 이 심문이 끝나면 법정은 4개월 동안판결문 작성을 위해 휴정할 예정이었다. 세르바티우스는 "유골의 수집, 종족 근절, 가스를 사용한 살인, 그리고 이와 유사한 의학적 문제들‘에대한 책임에 기초한 고소 내용에 대해서는 무죄라고 선언했다. 그러자할레비 판사는 그의 말을 중지시키고 "세르바티우스 박사, 가스 살인을의학적 문제라고 말한 것은 말실수라고 생각되는군요"라고 말했다. 여기에 대해 세르바티우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것은 실제로 의학 - P130
적인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은 의사가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인의 문제이고, 살인 역시 의학적 문제입니다." 오늘날 다른 나라에서는 살인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독일인들(전 친위대 요원이나 나치 당원이 아니라 보통의 독일인들)이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예루살렘의 판사들이 잊지 않도록 아주 확실히 해두려고 세르바티우스는 대법원에서이 사건을 검토할 때 사용할 ‘1심 판결에 대한 코멘트‘에서 이 표현을반복해서 사용했다. 그는 다시, 아이히만이 아니라 그의 부하 중 한 사람인 롤프 귄터가 "의학적 문제에 항상 개입했다"고 말했다. (세르바티우스 박사는 제3제국에서 일어난 ‘의학적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뉘른베르크에서 그는 히틀러의 주치의이자 ‘위생 보건 전담위원이며, 안락사 프로그램 책임자였던 카를 브란트 박사의 변호사로 활동했다.) - P131
나아가 이 모든 기관들이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면서 서로 격렬한 경쟁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은 희생자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의 야심은 항상 같은 것, 즉 가능한 한 많은 유대인을 죽이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책에 강한 충성심을 고취시킨 이러한 경쟁정신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는데, 지금은 그 방향이 정반대가 되었다. 이제는 다른사람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자신의 직책상 무죄를 입증하는 것‘이 당사자의 바람이 된 것이다. 이것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회의비망록을 대했을 때 아이히만이 설명한 것인데, 그 비망록에는 아이히만이 자기가 결코 하지도 않았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도 않다고 주장한 일들을 한 것으로 고발되어 있었다. 자기와 스가아주 친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결백한 일로 자기를 옭아맬행위를 할 개인적 이유가 회스에게는 없다는 것은 아주 쉽게 인정했다. - P133
자기의 유대인을 위한 영토를 획득하려는 아이히만의 열성은 그 자신의 경력을 중심으로 아주 잘 이해될 수 있다. 니스코 계획은 그의 빠른 진급 시기에 ‘탄생한 것이었고. 그는 자신이 폴란드의 한스 프랑크처럼 미래의 총독, 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하이드리히처럼 미래의 섭정관으로 ‘유대인 국가‘에서 있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전체계획이 완전히 실패로 끝남으로써 그는 이 같은 ‘사적‘주도권이 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한 교훈을 얻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와 슈탈렉케르가 하이드리히의 지시에 따라그리고 그의 분명한 동의를 받고 행동했기 때문에, 경찰과 친위대에게는 분명한 잠정적 패배를 의미하는 이 같은 유대인의 별난 귀환은 점차로 증가하는 자신의 직책에 따른 권력이 전능할 정도로까지는 미치지못한다는 점, 그리고 국가 장관들과 다른 당 기관들로서는 축소되고 있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싸움을 잘 준비하고 있다는 것도 그에게 교훈으로 남겨 주었다. - P138
‘유대인 발아래 확고한 땅을 두려는‘ 아이히만의 두 번째 시도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었다. 400만의 유대인을 유럽에서 아프리카 동남부해안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프랑스령 섬 (437만 명의 원주민과 22만7678평방마일의 척박한 땅으로 이루어진 섬으로 옮기려는 계획은 원래 외무부에서 나온 것이지만 후에 제국중앙보안본부로 넘겨졌는데, 그 이유는 마르틴 루터 박사의 말에 따르면 오직 경찰만이 "유대인을집단적으로 옮기고 피난민들의 감독을 보장할 수 있는 경험과 기술력을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 국가‘는 힘러의 관할하에 경찰총독을 갖게 될 것이었다. 이 계획 자체가 기묘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마다가스카르와 우간다를 혼동한 아이히만은 "유대인 국가라는 이념을주장한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이 한때 꾸었던 꿈을 자신이 꾸고 있었다고 늘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이전에 이미 꾸었던 것이었다. 폴 - P138
다가오는 세대들에게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 아이히만이 그런사악한 계획들의 존재를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무위로 끝난 것은 시간 부족 때문이었고, 시간은 다른 부서들의 끊임없는 간섭 때문에 낭비되었다. 예루살렘에서 법정이나 경찰은 그를 흔들어 스스로 만족에 겨워하는 그를 깨어나게 하려고 애를썼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1939년 9월 21일 회의에 관한 두 건의 서류를 그에게 갖다 댔다. 그 중 하나는 하이드리히가 텔레타이프로 쓴 편지로 돌격대에 내리는 어떤 지시를 담고 있었는데, 여기에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최종 목표‘와 ‘이 최종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단계들‘ 을 처음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고, 이 문서는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그 ‘최종 목표‘란 당연히 그의 마다가스카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 계획은 당시 독일의 모든 부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있었다. - P140
그런데 아이히만은 이 문서를 조심스럽게 읽은 뒤 즉각적으로‘최종 목표‘가 ‘신체적 전멸‘을 의미할 수밖에 없다고 확신한다고 말하며, "이 기본적 생각은 고위 지도자들과 최상층인사들의 마음속에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아마도 사실이었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그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단지 사기에 불과하다는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자신의 마다가스카르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수정한 적이 없었고, 또한 분명코 그것을 수정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기억 속에 있는 다른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자신이 기억하는 것이 이성과 논증, 정보, 그리고 여하한 종류의 통찰에도 반대하는 증거자료가됨을 보여준 것은 이 테이프와 같은 기억이었다 - P140
분명히 그때도 제국과 합병된 지역에서는 여러 부서에서 ‘적,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최선을 다하고 있었겠지만 어떠한 통일된 정책은 없었을 것이다. 모든부서가 각각의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적용하도록 허가를받았거나 다른 부서와 해결책을 찾도록 했을 것이다. 아이히만의 해결책은 경찰국가였고 이를 위해 그는 어떤 지역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그가 기울인 모든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관련된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고." ‘경쟁‘, 싸움, 말다툼 때문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경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늦었다.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 "갑자기 청천벽력처럼" 발발했다. 그것은 그의 꿈의 종말을 의미했고, "양편의 이익에 맞추어해결을 추구하려던 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깨닫고 비망록에 쓴 것처럼, "개별 유대인을 다루기 위한법과 조례와 칙령이 존재하는 시대의 종말이었다. 그런데 그에 따르면그것은 그 이상을 의미했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그의 경력의 종언이기도 했다. - P141
또 일부 죽음의수용소들 인근에 지사를 차려놓고 노예 노동자들을 이용하여 이익을보려는 수많은 기업체들의 노동력에 대한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친위대가 운영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산업체들 외에도 파르벤(I. G.F.arben), 크루프 베르케(Krupp Werke), 지멘스-슈케르트 베르케(Siemens-Schuckert Werke)와 같은 유명한 독일 회사들이 루블린의죽음의 수용소 인근과 아우슈비츠 내부에 공장을 세웠다. 친위대와 사업가들 사이에는 탁월한 협조가 이루어졌다. 아우슈비츠의 회스는 파르벤의 대표들과 아주 진실한 마음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관계에 대해증언했다. 노동 조건을 고려해 보면 분명히 노동을 통한 살인을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힐베르크에 따르면 파르벤 소속 공장 한 곳에서 일한 대략 3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적어도 2만5000명이 사망했다.) 아이히만이 관계된 한에서 볼 때 초점이 되는 것은 이동과 운송이 더 이상 최종단계의 ‘해결책‘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의 부서는 단지 도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따라서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보류되었을때 아주 ‘격분하고 실망할‘ 좋은 이유가 된 셈이다. 그리고 위로를 받은 유일한 일은 1941년 10월에 있었던 상급대대 지휘관으로의 승진이었다. - P142
(마흐는 심각하게 반유대적인 가톨릭 정부 내에서 독일판 반유대주의를 대표했다. 그는 가톨릭 신앙에 따라 영세받은 유대인을 예외로 간주하기를 거부했으며, 슬로바키아 유대인의 집단 이주에 대해 주된 책임이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아이히만이 이 점을 기억한 까닭은자신이 정부 각료로부터 사교적 초대를 받은 것은 통상적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하기에마흐는 자신을 볼링게임에 초대한 사람 좋고 대하기 쉬운 사람이었다. 그는 전시에 브라티슬라바에서 내무부 장관과 볼링을 하러 간 것말고는 다른 할 일이 정말로 없었던가? 그렇다. 다른 일은 결코 없었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공을 쳤고, 하이드리히에 대한 암살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술이 어떻게 제공되었는지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 P145
‘정치적 해결책‘의 시대가 가고 ‘신체적 해결책‘의 시대가 시작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그가 다른 맥락에서 인정한 것처럼 최종 해결책에 대한 총통의 명령에 대해 그가 이미 통지를 받은 때 일어났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서 하이드리히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날짜까지 실제로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드는 것은 유대인이 쉽게 죽음의 센터로까지 이송될 수 있도록 하는 지점들에로 수용하고 이동시킨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테레지엔슈타트가 실제로 다른 목적, 즉 외부 세계에 대한 전시장으로서의 목적으로 사용된 것(그곳은 국제적십자사 대표들이 들어가도록 허용된 유일한 게토 또는 수용소였음)은 별개의문제였다. 여기에 대해 아이히만은 당시에 알지 못한 것이 거의 확실한데 여하튼 자신의 지위에서 알 수 있는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는 일이었다. - P146
1941년 6월 22일, 히틀러는 소련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6주일 내지 8주일 후에 아이히만은 베를린에 있는 하이드리히의 사무실로 소환되었다. 7월 31일 하이드리히는 공군사령관이자 프러시아 수상, 4개년계획 전권위원, 그리고 결코 가장 작은 권력이 아닌, 국가 조직(당 조직과 구별된)에 있어 히틀러의 대리인 역할을 담당한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편지에는 하이드리히가 유럽내 독일 영향권에 있는 지역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 해결책(Gesamtlösung)‘을 준비해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바람직한 최종 해결책(Endlösung)을 보충하는······ 일반적 제안‘을 제출하도록 위임하고 있었다. 하이드리히가 이러한 지시를 받았을 때 그는 이미 (1942년11월 1일자 편지에서 육군최고사령관에게 그가 설명한 것처럼) "유대인 문제 최종 해결책을 준비하는 과제를 수년 동안 위임받아 왔다." (라이트링거) 그리고 러시아와의전쟁이 시작된 이후 줄곧 그는 동부지역에서 돌격대를 통한 대량학살을 책임지고 있었다. - P147
"총통께서는 유대인의 신체적 전멸을 명령하셨다." 그러고는 "평소의 습관과는 아주 다르게, 자기 말의 영향력을 테스트하고 싶기나 한 듯 그는오랫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것을 기억합니다. 처음에는 그가 단어를 선택하는 데 무척 조심스러워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의의미를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후 저는 이해하게 되었고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할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저는그러한 일, 폭력을 통한 그 같은 해결책에 대해서는 결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 저는 모든 것, 제 일에 대한 모든 기쁨, 모든 주도권, 모든 관심을 잃어버렸습니다. 말하자면 저는 지쳐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말했습니다. ‘아이히만, 당신은 루블린에 있는 글로보크니크(힘러의 친위대 고위층 및 일반정부의 경찰 수뇌부 중 한 사람)를가서 만나게. 제국지휘관(힘러)이 이미 그에게 필요한 명령을 하달했고, 그동안 그가 완수한 일을 살펴보았네. 내 생각에 그는 유대인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탱크용 참호를 이용하는 것 같아. 저는 아직도 그말을 기억해요. 제가 아무리 오래 살아도 그 말을 잊지 못할 겁니다. 면담이 거의 끝나가던 때에 그가 말한 그 문장들을 말이죠." 실제로 하이드리히는 좀더 많은 말을 했다. - P148
이것을 아이히만은 아르헨티나에서도기억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는 잊어버렸다. 그 말은 실제 학살 과정에서의 자신의 권한 문제와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상당한 불이익을 가져다줄 내용이었다. 그는 아이히만에게 전체계획이 "친위대행정경제본부의 권한 아래 두었다"고 말했다. (그 자신의 제국중앙보안본부가 아니었다.) 그리고 몰살을 위한 공식 암호는 ‘최종 해결책‘이라고도 말했다. 후아이히만은 결코 히틀러의 의중을 처음으로 전달받은 사람들 중에속해 있지 않았다. 하이드리히가 수년 동안 아마도 전쟁이 시작된 이래이 방향에서 일을 해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힘러는 1940년 여름 프랑스를 패배시킨 직후 이 ‘해결책‘에 대해 들었다고 (여기에 대해저항했다고 주장했다. 아이히만이 하이드리히와 면담을 갖기 약 6개 - P148
월 전인 1941년 3월까지는 "유대인이 곧 제거되는 것은 당 고위직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 아니었다"고 총통의 자문관 빅토르 브라크가뉘른베르크에서 증언했다. 그러나 아이히만은 예루살렘에서 주장했으나 허사인 것처럼, 결코 당 고위층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특정한 제한적 직책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상은 결코 듣지 못했다. 이 같은 ‘특급비밀‘ 사안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하부 피라미드에서는그가 첫 번째 인사들 가운데 한 사람인 것은 사실이다. 이 소식이 모든당과 국가의 사무실, 노예노동과 관련된 모든 기업들, 그리고 군대의(말단에 이르기까지) 전 장교들에게 두루 전파된 이후에도 이것은 여전히 특급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비밀로 한 것에는 실질적목적이 있었다. 총통의 명령을 명시적으로 들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단순한 ‘명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비밀을 가진 자‘가 되었고 따라서 그들은 특별서약을 했다. (1934년 이래로 아이히만이 소속되어 있는 정보부 요원들은 여하튼 보안서약을 했다.) - P149
나아가 이 문제를 다루는 모든 문서들은 엄격한 ‘언어규칙‘을 따랐다. 돌격대로부터 오는 보고서를 제외하고 ‘제거‘ ‘박멸‘ 또는 ‘학살‘ 같은 명백한 의미의 단어들이 쓰여 있는 보고서를 발견하기는 거의 드문일이다. 학살을 처방하는 암호는 ‘최종 해결책‘ ‘소개‘ (Aussiedlung)와‘특별취급‘ (Sonder-behandlung) 등이었다. 이송에는 ‘거주지 변경‘이라고 불린 특권층 유대인을 위한 ‘노인들의 게토‘ 테레지엔슈타트로가는 유대인을 포함한 경우는 제외하고) 재정착‘ (Umsiedlung)과 동부지역 노동‘ (Arbeitseinsatz im Osten)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런이름을 붙인 것은 유대인이 실제로 게토에서 종종 일시적 재정착을 했고, 또 그들 가운데 일정 비율은 노동을 위해 임시로 부려졌기 때문이다. 특별한 상황에서는 언어규칙에서 약간의 변화가 필요했다. 예컨대외무부 고위관료가 바티칸과 교환되는 모든 서신에 유대인 학살을 ‘근본 해결책‘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한 적이 있었다. - P149
그래도 그는 운이 좋았다. 그는 트레블링카에 있었던 미래의 일산화탄소 방을 마련하는 작업만을 보았을 뿐인데, 이는 수십만 명이 죽게될 동부의 여섯 개의 죽음의 수용소 가운데 하나였다. 이 일이 있은 직후인 그해 가을에 그는 직속상관인 뮐러의 지시에 따라, 제국에 통합된바르테가우라고 불렸던 폴란드 서부 지역의 학살센터를 조사하러 갔다. 이 죽음의 수용소는 쿨름(폴란드 말로는 헤움노)에 있었는데, 이곳은 유럽 전역에서 이송되어 우츠(Lódz) 게토에 ‘재정착‘ 한 30만 명이상의 유대인이 1944년에 살해된 곳이다. 여기서 일은 이미 한창 진행중이었는데 그 방법이 달랐다. 가스실 대신 이동용 가스차량이 사용된것이다. 아이히만이 본 것은 다음과 같았다. 유대인은 큰 방에 있었다. 그들은 옷을 모두 벗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고는 트럭이 도착해서그 방의 출입구 바로 앞에 정차했고, 벌거벗은 유대인은 그 트럭으로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문은 닫혔고 트럭은 떠났다. "얼마나 많은유대인이 들어갔는지 저는 알 수 없었어요. 저는 거의 쳐다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죠. 저는 볼 수 없었습니다. 볼 수 없었어요. - P152
그들은 구덩이 속으로 던져졌고, 한 민간인이 치과용 집게를 가지고 이빨을 뽑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떠났습니다. 제차에 올라타서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저는몇 시간 동안 운전기사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저는 충분히 보았습니다. 저는 두손 두발 다 들었습니다. 저는 흰옷을입은 한 의사가 제게 구멍을 통해 트럭 안을 들여다보라고 한 것을 기억할 뿐입니다. 아직도 그들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지않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그는 더 끔직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 이 일은 그가또다시 뮐러의 명으로 백러시아 민스크로 파견되었을 때 일어났다. 뮐러는 그에게 "민스크에서는 유대인을 총살시킨다고 하는군. 그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고해 주길 바라네" 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갔고,처음에는 운이 좋은 것 같았다. - P153
그가 도착했을 때 우연히도 ‘일이 거의끝나가고 있었는데, 이것이 그를 안도하게 했다. "큰 구덩이에 있는 죽은 사람들의 머리를 겨냥하고 있는 몇몇 젊은 사수들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 여성이 팔이 뒤로 꺾여 있는 모습을 보았고, 그것으로제게는 아주 충분했습니다. 제 무릎은 곧 떨렸고, 저는 그곳을 떠났습니다." 차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엘보브(Lwów)에 들를 생각이 났다. 이것은 좋은 생각이었던 것처럼 보였다. 엘보브(또는 렘베르크)는 오스트리아의 도시였고, 그가 도착했을 때 거기서 그는 "끔직한 일을 경험한 다음 처음으로 정겨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프란츠 요제프의 통치 6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된 기차역이었습니다." 이 시기는 아이히만이 항상 ‘찬미한‘ 시기였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부모 집에서 그에 관한 아주 많은 좋은 일들을 들었고 또 계모의 친척들이 말이 유대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그는 분명히 말했다)이 편안한 사회적 지위를 얼마나 누렸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를 들 - P153
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기차역의 모습은 모든 끔직한 생각들을 떨쳐버리게 했고, 그는 이 일을 세세하게, 예컨대 그곳에 새겨졌던 기념 연도까지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사랑스런 엘보브 바로 그곳에서 그는 큰 실수를 범했다. 그는 지역 친위대 사령관을 만나러 가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다. "이 근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끔직했습니다. 저는 젊은이들이 사디스트로 만들어지고 있다고 말했지요. 어떻게사람이 그럴 수가 있는가?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마구 총을 갈겨댔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우리들은 미치거나 돌아버릴 지경입니다. 우리 민족이 말이지요라고 말이죠." 문제는 그곳 엘보브에서도 민스크에서와 동일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점않게 사양하려 했지만 그를 맞이한 사람은 기꺼이 그에게 그 광경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끔직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구덩이가거기에 있었는데 시체가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마치 샘처럼 피가 땅에서 솟아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이전에는 결코본 적이 없었습니다. 임무와 관련하여 저는 충분히 보았습니다. 그래서저는 베를린으로 가서 뮐러 소장에게 보고했습니다." - P154
사실 아이히만은 많은 것을 보지 않았다. 사실 그는 가장 크고 가장유명한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를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18평방마일에 세워진 지역인 아우슈비츠가 상부 실레지아에 위치하는 유일한학살 수용소는 아니었다. 그것은 100만에 달하는 수감자를 거느린 거대한 기업이었고 모든 종류의 죄수들이 그곳에 유치되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비유대인과 노예 노동자들 등 가스실로 가지 않을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학살시설들을 피해다니는 것은 쉬운 일이었고, 아이히만과 아주 친근한 관계에 있던 회는 그가 끔직한 장면들을 보지 않도록 해주었다. 그는 대량총살 집행을 실제로 참관한 적은 없었고, 가스가 주입되는 과정이나 그에 앞서 아우슈비츠에서 이루어진, 일하기에적합한 사람들을 골라내는 작업 (수송 인원 가운데 평균 25퍼센트)을실제로 본 적도 없었다. 그는 살상 설비들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학살 방법으로는 총살과 가스 주입이라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는것을, 총살은 돌격대가 실행했고 가스 주입은 수용소에서, 즉 작은 방에서 또는 이동차량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수용소에서는 희생자들을 끝까지 속이기 위해서 면밀한 주의를 기울인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 만큼만은 보았다. - P155
(덧붙이자면, 회스는 젊었을 때 살인한 적이 있었다.그는 발터 카도브라는 사람을 암살했는데, 카도브는 레오 슐라게터(라인란트의 민족주의 테러리스트로 후에 나치스에 의해 민족적 영웅으로만들어졌음)를 프랑스 점령 당국에 밀고한 배신자였다. 독일 법정은 그를 5년 동안 수감시켰다. 물론 아우슈비츠에서 회스는 살인할 필요가없었다.) 그러나 아이히만이 그런 종류의 일을 제안받았을 것 같지는않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어느 정도까지일을 해낼 수 있는지 그 한계를 아주 잘 알았다." 그렇다. 그는 ‘임박한죽음의 위협‘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맹세한 대로 모든 명령에 복종했고, "자신이 의무를 항상 완수" 하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물론 ‘범죄행위의 결과들을 경감시키려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데 항상 최선을 다했다. 그가 주장한 유일한‘정상참작‘은 그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가능한 한 불필요한 어려움을 피하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것이 참이었는지의 여부와는 별개로, 그리고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이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서 정상참작을 구성할 요건을 거의 갖추지 못했다는 점과는 별개로, 그주장은 타당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불필요한 어려움을 피하는 것은그가 받은 표준 지령 가운데 있는 내용이었다. - P158
‘국가적 행위‘ 란 독일 법에서는 그 효과를 보다 잘 설명해 주는 방식으로 이름이 붙어져 ‘면책의‘(gerichtsfreie) 또는 ‘재판권이 면제된 사법적 행위 (justizloseHoheitsakte)라고 불렸는데, 이것은 ‘주권적 권력의 행사‘에 의존하는것이다. 따라서 그런 행위들은 전적으로 사법권 밖에서 이루어지지만, 다른 한편 모든 명령과 지시는 적어도 이론 상 여전히 사법적 통제하에 있다. 만일 아이히만이 한 일들이 국가적 행위였다면, 그의 상관들 즉 국가수반인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어느 누구도 어떠한 법정에서도 재판받을 수 없다. ‘국가적 행위‘ 이론은 세르바티우스 박사의 일반적 철학과 아주 잘 일치했기 때문에 그가 이 이론을 다시 주장한 것은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놀랄 만한 일은 판결문이 낭독되었지만선고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상관의 명령에 의한 행위이므로 정상참작을 해달라는 주장을 그가 하지 않은 점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이 재판이 평범한 재판이 아니므로 사람들은 안도하면서 반길수 있었다. - P159
동부지역의 학살센터를 처음으로 공식 방문한 직후인 1941년 9월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희망‘에 따라 독일과 보호령으로부터 첫 번째 대량이송을 체계화했다. 히틀러는 힘러에게 가능한 한 신속하게 제국을 유대인이 없는 지역으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첫 선적은 5000명의 집시들과 라인란트에서 온 2만 명의 유대인이었는데, 이 최초의 이송과 연관해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자기 스스로 어떠한 결정도 내려본 적이없었고, 명령으로 둘러싸이도록 항상 극단적으로 조심했으며(그와함께 일을 한 사실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유롭게 청취된 증언에서확인된 것처럼), 자발적인 제안조차 원하지 않아서 항상 ‘지시‘해 주기를 바란 아이히만이 이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명령과 반대되는 제안을 했다. 돌격대에 의해 즉각적으로 총살될 리가와 민스크 같은 러시아 지역으로 이 사람들을 보내는 대신 우츠 게토로 이송하도록지시했는데, 그곳은 그가 어떠한 학살 준비도 아직 되지 않은 곳으로알고 있었다. - P160
("나는 결코 돌격대가 학살 명령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내가 몰랐던 것은 동부지역으로 소개된 제국출신의 유대인이 동일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나는 모르고있었다" ). 이러한 양심은 과거 당의 일원이었고 러시아 점령지 총경이었던 빌헬름 쿠베라는 사람의 양심과 같은 것이었다. 이 사람은 철십자훈장을 받은 독일계 유대인이 ‘특별취급‘을 받기 위해 민스크에 도착했을 때 격분했다. 쿠베의 진술이 아이히만의 진술보다는 더 상세하기 때문에, 아이히만이 양심으로 번민했을 때 그 마음속에 무엇이 오갔는지에 우리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는 1941년 12월에 자신의 상관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분명히 강한 사람이고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울 준비가 되어 있소. 그러나 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동물과 같은 토착민 군중들과는 분명히 다른 존재요." 이러한 종류의 양심이 저항을 한다면, 그 양심은 ‘내 자신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가진 사람들의 학살에 저항하는 부류의 것으로, 이는 히틀러의 통치기간을 지나서도 남아 있었다. 오늘날 독일인들 가운데에는 ‘오직‘ 동부유럽 유대인만 학살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잘못된 정보‘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존재한다. - P163
‘원시적인‘ 사람과 ‘문화적인 사람들에 대한 학살을 구별하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독일인들의 전유물은 아니다. 유대인의 문화적 정신적업적에 대한 바론(Salo W. Baron) 교수의 증언과 관련해 하리 물리슈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어떻게 갑자기 자신에게 떠올랐는지를 말했다. "유대인이 만일 문화가 없는 민족이라면 그들의 죽음은 보다 덜 악한일이 되었겠는가? 아이히만은 인간 도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아니면 문화의 파괴자로 재판을 받고 있는가? 인간 도살자가 그 과정에서문화도 또한 파괴했다면 그 죄는 더 무거운가?" 그가 이러한 질문을 법무장관에게 했을 때 대답은 "그[하우스너 씨)는 그렇다고 생각하고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 P163
귄터 바이젠보른의 『조용한 봉기』 (Der lautlose Aufstand, 1953)에 나오는 이야기와 연관된 두 소년 농부가 있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날 무렵 친위대로 징집되었으나 입대를 거부했다. 그들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처형당하기 전날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 두 사람은 그런 끔직한 일로 우리의 양심에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런일도 하지 않은 이러한 사람들의 입장은 음모자들의 입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옳고 그른 것을 구별하는 그들의 능력은 온전하게 남아 있었고 결코 ‘양심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다. 레지스탕스 요원들 가운데도 그런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의 수가 일반 사람들보다 고위직의 음모자들 가운데 더 많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 사람들은 영웅도 성인도 아니었고 완전한 침묵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오직 한 경우에, 유일한 절망적인 몸부림으로, 이러한 전적으로 고립된 무언의 요소가 공개적으로 나타났다. 그들은 무니히 대학에 다니던 두 남매이다. 그들의 선생 쿠르트 후버의 영향을 받은 숄 남매는 그 유명한 전단을 - P172
뿌렸는데 거기서 그들은 히틀러를 마침내 그의 실재의 모습대로, 즉 ‘대량학살자‘라고 불렀다. 그런데 7월 20일의 음모가 성공하면 히틀러를 계승했을 이른바 ‘다른 독일‘에 대한 서류와 준비된 선언문을 검토해보면 그들조차 세계 다른 지역과 얼마나 큰 거리를 갖고 있었는지 알면 놀랄 것이다. 특히 괴르델러의 환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혹은 어느 누구보다도 힘러나 심지어 리벤트로프 같은 사람이 종전을 몇 달 앞둔 시점에서 패전국 독일을 위해 연합군과 협상할 상대로서의 막대한 새로운 역할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달리 설명할 수 있겠는가. 리벤트로프가 단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힘러는 그의 인간성이 어떻든간에 결코 바보는 아니었다. - P173
그런데 자신의 충격적인 반응을 더 이상 이웃과 공유할수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인식하게 된 신실한 사람들이 쓴 전시의 일기장에서 진실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몇몇 이야기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이야기들은 국민 전체의 도덕적 붕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전해져왔다. 앞서 언급한 레크말레체벤은 농부들에게 격려 연설을 하기 위해1944년 여름에 바바리아로 갔던 한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녀는 ‘기적의 폭탄‘과 승리에 대해 말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녀는 다가올 패배에 대해 농부들에게 솔직히말했고, 여기에 대해 훌륭한 독일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하면 총통이 "자비심 많게도 모든 독일 국민들을 위해 전쟁이 불행한종말을 맞을 경우를 대비하여 가스 사용을 통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있도록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 - P179
다. "오, 맙소사. 나는 이 장면을 상상할 수 없다. 이 사랑스런 여성이허깨비가 아니라니, 나는 내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40대를 바라보는 노란 피부의 미친 눈을 가진 여성을 ...... 그런데 무슨 일이 있어났던가? 이 바바리아 농부들이 죽음에 대한 그녀의 준비된 열정을 식혀주기 위해 호숫물에 빠뜨렸는가? 그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머리를 저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다음 이야기는 핵심에 더욱 근접한다. 왜냐하면 ‘지도자‘도 당원도 아닌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1945년 1월,러시아가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고 폐허지를 점령하여 연방으로 합병시키기 며칠 전 독일의 다른 변방인 동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일어났다. 이 이야기는 한스 폰 렌스도르프 백작이 프러시아의일기』(Ostpreussisches Tagebuch, 1961)에서 언급한 것이다. - P180
철수가 불가능한 부상병들을 의사로서 돌보기 위해 그는 그 도시에 남아 있었다. 그는 교외에 있는 한 커다란 피난민 센터로 불려갔는데 그곳은 이미 붉은군대가 장악해 있었다. 거기서 어떤 여성이 다가와 수년 동안앓은 정맥류를 보여주면서 지금 시간이 있으니 바로 치료해 주길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로서는 쾨니히스베르크를 탈출하고 치료는 나중에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그녀에서 애써 설명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고싶냐고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들이 제국으로 모두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러시아인들은 결코 우리를 잡지 못할 것이에요. 총통께서는 결코 그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전에그가 우리에게 가스를 줄 것이니까요. 나는 은밀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말이 정상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아차린 것 같지않았다." 대부분의 실화처럼 이 이야기는 완전하지 않다. 한 목소리, 더욱이 여성의 목소리가 무거운 한숨과 함께 들려왔다. 이제 그 모든 좋고 값비싼 가스를 모두 유대인에게 낭비해버렸으니! - P180
아이히만의 양심에 대한 내 보고서는 지금까지 아이히만 자신이 잊고 있었던 증거들을 따라가며 쓰였다. 이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설명에 전환점이 나타난 것은 4주 후가 아니라 4개월 후 즉 1942년 1월에있었던 국가 차관회의에서였는데, 나치스는 이 회의를 반제회의라고불렀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다. 하이드리히는 베를린 교회에있는 한 집에 관계자들을 초청했다. 이 회의의 공식명이 가리키듯 만일최종 해결책이 유럽 전체에 적용될 경우 제국의 국가기구의 암묵적 수용 이상의 것이 요구될 것이기 때문에 이 회의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모든 장관들과 전체 공무원들의 적극적 협조가 요구되는 일이었다. 장관들 면면은 히틀러가 권좌에 오른 뒤 9년이 지나도록 모두가 오랫동안 당직을 유지해온 당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권의 초기 시절에 단지 상황에 맞게 대처해 나간 사람들은 아주 유연하게 그 자리가대체되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전폭적인 신뢰를 받지 못했는데, 냐하면 이들 가운데 하이드리히 힘러처럼 전적으로 나치스에 의존하여 자신의 경력을 쌓은 사람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사람들도 외무성의 수장이며 전 샴페인 상인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처럼 하잘것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장관들 바로 아래에 있는 고위 공무원에 관해서는 아주 민감하다. - P181
이 회담 날이 아이히만에게 잊혀지지 않게 된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비록 그가 최종 해결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해 왔지만 그는 여전히 ‘폭력을 통한 그러한 피투성이의 해결책‘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갖고 있었는데, 이러한 의구심들이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이곳에서, 이 회담에서 가장 유망한 사람들이, 제3제국의 교황들이 말씀하셨다." 이제 그는 히틀러뿐만 아니라, 하이드리히와 스핑크스 뮐러뿐만 아니라, 친위대나 당뿐만 아니라, 착하고 연륜 있는 엘리트 공무원들이 이 ‘피투성이의 문제에서 주도권을 갖는 명예를 얻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싸우는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귀로 들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일종의 본디오 빌라도"의 감정과 같은 것을 느꼈다. - P183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롭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를 심판할 자가 누구인가? ‘이 문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각을 가진 자가 누구인가? 그는 조심성 때문에 패망하게 된 최초의 사람도 최후의 사람도 아니었다. 아이히만이 기억한 것처럼 그 이후로는 점점 더 쉬워지고 또 곧 일상적이 되어 버렸다. 그는 ‘강제이주‘의 전문가였던 것처럼 재빨리 ‘강제소개‘의 전문가가 되었다.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유대인은 등록을 해야했고, 손쉬운 식별을 위해서 노란색 표지를 달도록 강요받았으며, 함께집결해서 이송되었고, 다양한 운송수단을 통해 그때마다의 센터의 상대적 수용능력에 따라 동부지역에 있는 이곳저곳의 학살센터로 옮겨다녔다. 유대인을 실은 기차가 센터에 도착하면 그들 중 힘센 사람들은 사역하도록 뽑혀서 때때로 학살 장치를 가동하게 했고 다른 모든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처형되었다. - P184
교통부는 필요한 열차편을 준비했는데, 철도 차량이 아주 부족할 때도 주로 화물열차가 준비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운송 열차 스케줄이 다른 시간표와 충돌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유대인 장로회는 아이히만과 그의 부하들을 통해 각 열차를 채우는 데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필요한지에 대해 들은 다음 수송될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주었다. 유대인은 등록을 하고, 무수히 많은 서류들을 작성했으며, 재산을 보다 손쉽게 탈취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장의재산 관련 질문지들을 작성하고 또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집결지에모여 열차에 탑승했다. 일부 숨거나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유대인 특별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아이히만이 아는 한에서는 아무도 저항하지않았고 아무도 협력을 거절하지 않았다. 1943년 베를린에서 한 유대인목격자가 쓴 것처럼 "매일매일 사람들은 자신의 장례식장을 향해 이곳을떠났다." - P185
아이히만이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의 양심을 무마시킨 가장 유력한요소는 실제로 최종 해결책에 반대한 사람을 한명도, 단 한 명도 볼 수가 없었다는 단순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단 하나의 예외를 만나게되는데, 그와는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이 일은 1만 대의 트럭과 교환하는 조건으로 100만 명의 유대인을 석방한다는 힘러의 제안에 대해 그가 카스트너 박사와 형가리에서 협상할 때였다. 새로운 국면 전환에 용기를 얻은 카스트너는아이히만에게 ‘아우슈비츠의 죽음의 공장‘을 중지할 것을 요구했는데, - P186
아이히만은 ‘진정으로 기꺼이‘ (herzlich gern) 그렇게 하고 싶지만 아쉽게도 이 일은 자신의 능력 밖이고, 또 자신의 상관들의 능력 밖이기도 하다고 대답했다. (사실이 그랬다. 물론 그는 유대인이 자신의 파괴작업에 대한 일반적 열정을 공유할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그는 단순한 순응 이상의 것, 즉 그들의 협조를 기대했다.) 그래서 그는사실상 상당한 정도로까지 협조를 얻었다. 이것은 빈에서의 활동에서그러한 것처럼 자신이 한 모든 일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행정과경찰 업무에 유대인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베를린에서 유대인을 최종적으로 처리하던 일은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적으로 유대인 경찰에 의한 것이었음) 완전한 혼돈상태에 빠졌거나 독일의 인력 공급이 불가능할 정도로 심각한 누수현상이 발생했을 것이다. - P187
모든 진실은 만일 유대인이 정말로 조직이 되어 있지 않았고 또 지도자가 없었더라면 혼란과수많은 불행들이 있었겠지만 희생자들 전체가 400만, 500만, 600만에탈할 리가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프로이디거의 계산에 따르면유대인위원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그들 가운데 절반은 목숨을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단순한 추산에 불과하지만, 이 추산치는 네덜란드에서 나온, 즉 네덜란드 국립전쟁문서연구소소장인 드 종(L. de.Jong) 박사에게서 내가 입수한 더욱 믿을 만한 수치와 이상하게도 일치한다. 모든 국가 당국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위원회도 아주 재빠르게 ‘나치스의 도구‘가 되어버린 네덜란드에서는 10만3000명의 유대인이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되었고, 대략 5000명은 테레지엔슈타트로 통상적인 방법을 통해 이송되었는데, 이는 물론 유대인위원회의 협력을 받아서였다. 이 가운데 단지 519명의 유대인만이 죽음의 수용소로부터 돌아왔다. 이 숫자와는 대조적으로 그 2만 내지 2만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1만 명의 유대인은 나치스를 탈출(이것은 유대인위원회로 부터의 탈출도 의미함)하여 지하로 잠적해서 살아남았다. 이것은 40 내지 45퍼센트에 해당한다. 테레지엔슈타트로 보내졌던대부분의 유대인은 네덜란드로 되돌아왔다. - P197
예루살렘 재판이 세계의 눈앞에 그 진정한 차원을 드러내 보이지 못하고 있는 이 장의 이야기에 내가 집중하는 것은, 이 이야기가 존경할만한 유럽 사회에서 발생한 나치스의 전반적인 도덕적 붕괴에 대한 가장 놀랄 만한 통찰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일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나라들에서도, 또 학살자들뿐만 아니라 피해자들에 대해서도그렇다.) 아이히만은 나치 운동의 다른 요소들과 대비하여 항상 ‘좋은사회‘라는 관념에 의해 압도되었고, 그가 종종 독일어를 말하는 유대인지도층 인사들에게 보여주었던 공손함은 대체로 자기가 다루고 있는사람들이 사회적으로는 자기보다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는 한 증인이 자기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십계명이존재하지 않으며 갈망을 느끼게 해주는 지역으로 도피하기를 원하는 - P197
그가 끝까지 열렬히 믿은 것은 성공이었고, 이것이 그가 알고 있던 ‘좋은 사회‘의 주된 기준이었다. 히틀러(그와 그의동지 자신이 자신들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기를 원한 사람)에 관한 주제에 대해 그가 한 마지막 말은 전형적인 것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히틀러가 "모든 것이 틀린 것은 아니고, 이 하나만큼은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노력을 통해 독일 군대의 하사에서 거의 8000 만에달하는 사람의 총통의 자리에까지 도달했습니다. ...... 그의 성공만으로도 제게는 이 사람을 복종해야만 할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는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그 ‘좋은 사회‘가 모든 곳에서 열정과 열성을 가지고반응하는 것을 보았을 때 사실상 그의 양심은 휴식상태에 있었다.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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