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초, 새로운 밀레니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몇몇 신문들이 새로운 세기, 새로운 밀레니엄에 필요한, 주목해야 할 사상을 꼽았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인물이 한나 아렌트였다. 그즈음 우리나라에는 아렌트의 사상이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이후지금까지 그녀의 주요 저술들이 하나 둘씩 번역되었고, 학문 연구에서도 그 수준이 점차 향상되어가고 있다.
아렌트의 저술 가운데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어온 것이 바로 이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일 것이다. 아렌트를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로주목받게 한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사후에 출간된 『칸트 정치철학 강의와 정치의 약속』에 이르는 모든 저술들이 학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데 반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유일한 예외로 대중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이 책은, 말하자면 어렵게 읽히는 철학적, 정치사상적 저술이 아니라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책이다. 그러면서도 깊은 고민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다면, 오늘의 시대에 아렌트가 주는 메시지를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 P13

여기서 ‘평범성‘이라고 번역한 banality는 ‘진‘
라고도 번역될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단어가 아렌트의원의를 가장 잘 담아낼 수 있는가이다. 앞서 언급한 아이히만의 특성을생각한다면, 악이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아렌트가 우리에게 말하려 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banality를 ‘진성‘이라고 번역한다면 우리는 이 말을 "평범하고 또익숙할 정도로 많이 접해서 진부해졌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하며, 결코
"시간적으로 오래되었다"거나 "구식"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또한 그 말을 ‘일상성‘이라는 말로 번역한다면, 그 의미를 "엄청나게 충격적인 일이 일상적일 정도로 자주 일어나서 그만 그것이 당연하게 느껴지게 되었다"는 의미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악의 평범성을터무니없는 잔혹상이 일반화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아렌트의 본의와는 거리가 아주 멀기 때문이다. - P15

이 책은 쉽고 평범하게 쓰인 책이지만 격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 책과 관련된 첫 번째의 논쟁은 아렌트와 유대인과의 관계, 또는아렌트와 시온주의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1963년에 저명한 시온주의 학자인 거솜 숄렘(Gershom Sholem)은 아렌트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을 담은 유명한 공개서한을 보낸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대해 유대인의 민족적 관점에서 날린 직격탄이었다. 아렌트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한 채 마치 유대인이 아닌 것처럼 보편적 관점에서 아이히만 재판을다루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렌트는 사랑이란 개인의 문제이지 집단의 문제가 아니라고응수했고, 숄렘이 시온주의자였던 점을 의식하여 아렌트는 자신이 시온주의자들을 도와주었던 독일에서의 이력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때도움을 주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숄렘이기도 했다. 나중에 아렌트는 이 논쟁을 "나와 유대인 간의 전쟁"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 P16

이렇게만 보면 아렌트는 영락없는 보편주의자이지만, 아렌트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즉, 앞서 언급한 레싱의 입장을 넘어, 우리가서로 정치적으로 소통하고 좋은 삶을 나누는 근거로서의 인간됨이라는것이 있음을 입증하려는 것이다. 아렌트는 인간성이 마치 인간의 본질로서 주어져 있는 것으로 보는 입장을 거부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그 책의 제목이 그 같은 고정된 인간성이 있는 것처럼 오해를불러일으킬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긍정적 의미의 인간성이 존재한다는 일상적 믿음이 잘 드러나는 예인 양심의 문제에서도 아렌트는 회의적이었다. 양심에 바탕을 둔 시민 불복종의 경우에도 아렌트는 양심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도의 보편성을 지닌다는 믿음에 대해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 P18

말의 능력과 관련하여 볼 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이지만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던 것이 독일 개신교 목사인그뤼버 감독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독일인으로 유일하게 예루살렘법정의 증언대에 서서 검찰 측을 위한 증인이 되었다. 그는 유대인을구하기 위해 아이히만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고, 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에게 사태의 위험성을 알리는 등의 일을 했다. 그에 대한 반대심문에서 아이히만의 변호사인 세르바티우스는 그에게 "당신은 그에게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를 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라고 물었다. 여기에 대해 그는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말해 봤자 쓸데없었을 것입니다"고 대답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해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의 대답이 상투어(cliché)를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아렌트는 단순히 말을하는 것 자체가 행동일 수 있으며, 또한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는 말이쓸모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고 지적한다. - P20

상투어들은 아이히만으로 하여금 심지어 죽음의 힘조차도 느끼지 못하게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현실을 느끼고 알 수 있는 능력, 나아가 판단을 할 수 있는 능력자체가 결여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을 그뤼버 감독 이야기에서알 수 있다. 아렌트는 그뤼버 감독이 아이히만에게 말을 했어야 했다고했다. 말의 유용성은 말이 현실을 알게 하여 사람에게서 변화를 기대할수 있게 하는 데 있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아렌트는 목사의 임무가 말이 과연 쓸모가 없는지를 알아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목사가 영향력 있는 존재라면 그 영향력은 전적으로 말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아렌트는 생각한 것이다. - P22

상투어나 관용어, 또는 최종 해결책 수행을 위해 고안된 암호화된 언어도 말이나 일상 언어와 마찬가지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이 양자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차이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자연어인지, 의도적으로 만들어져 반복적으로 사용된 인공어인지의 차이로 보인다. 상투어나 관용어 등은 늘 변화하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특징을 갖는다. 현실-말-사유의 관계가 유기적이지 못하고, 언어가 고정되어 버림으로써 사유와 판단이 현실과 유리되어 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아렌트가 이야기의 방식으로 자신의 입장을 풀어낸 이유는 이야기를 통해서만 우리는 단순히 과거를 기술하고 이해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미래 지향적으로 이해가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벤하비브의 말처럼 "마음을 미래로 향하게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얻기 위해서라는것이다.
이야기가 중요하다. 이야기는 이론과는 달리 현실의 힘을 반영하는 - P22

일상 언어를 사용한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이야기는 보편적인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춘다. 구체적인 현실의 힘을 반영하면서도보편적 설득력을 가질 자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이야기는 구체와 보편의 양 측면의 힘을 동시에 반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어떤 이론이 정치적으로 수용 가능한지를 검증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이야기될 수 있다는 것은 곧 받아들여지기 위한 첫 단계에 해당된다. 실제로 수용될 것인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제시될 수 없다. 그 기준을 제시한다면 자유주의적 준거를 제시하는 것과 같은 특성이 될 수 있겠으나, 동시에 그것은 공허할 것이다. 수용의 여부는 이야기가 사람들의입에 회자되는가에 달려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이야기되는가와 연결된다. 이때 전제되는 것은 보편적 원리나 준거가아니라,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사람의 존재이다. 이를 달리 표현한 것이 ‘칸트 정치철학 강의』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공통감(sensuscommunis) 개념이다. - P23

하이데거와 아렌트의 주요 차이점은, 아렌트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일반, 특히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논의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으므로 이를 간략히 살펴보자. 아렌트에게 있어서 정치적, 법적 윤리적 이론화 작업의 주요 범주는 ‘인간의 복수성‘ (human plurality) 또는 다원성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의 복수성이 없다면 인류 또는인간성이란 말 자체가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는 주저 없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행위와 말, 이 두 가지의 기본 조건이 되는 인간의 복수성은 평등과차이라는 이중적 성격을 갖는다. 인간들이 평등하지 않다면 그들은서로 그리고 자신들에 앞서 왔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고, 또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들 다음에 올 사람들의 필요를 예견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들이 다르지 않다면 현재 존재하고 과거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사람들과 구별되는 각 사람들은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말을 하거나 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아렌트에게는 복수성이 인류의 가장 근본적인 실존적 조건이다. - P28

‘출생‘ (탄생)이란 생물학적 현상으로, 각 사람들이 이미 항상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속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는 ‘출산‘(또는 노동)(노동인, homo laborans)"의 현상이다. 후자의 ‘두 번째의 탄생‘을 통해우리는 점점 더 철저하게 사회적으로 된다고 말한다. 첫 번째의 ‘생물학적‘ 탄생과 두 번째의 상징적‘ 탄생은 동일한 인간적 공적의 연속이다. 이 둘은 동시에 발생한다. 아렌트는 『뉴욕 서평』에 하이데거의 팔순생일에 헌정하는 논문, 80세의 마르틴 하이데거>를 기고한다. ‘생일‘
은 모든 문화권에서 모든 인간 존재를 위해 축하하는 행사이다. 아렌트의 ‘탄생‘ 개념은 그녀의 정치적 이론화 작업에 특별한 중요성을 갖는다. 탄생이란 생명의 시작이며, 인간을 사회적·정치적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으로 탄생하는 한 우리는 사회적 존재로서 우리의 삶을 시작한다. "어떠한 인간의 삶도, 자연 속 광야에서 살아가는은둔자의 삶조차도, 다른 인간의 현존을 직간접적으로 입증해 줄 수 있는 세계가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고 아렌트는 강조한다. - P29

이와는 대조적으로 하이데거에게는 ‘죽음‘이 현존재(Dasein)의 실존의 표지이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결코 경험할 수 없기에 하이데거는현존재를 ‘죽음을 향한 존재‘ (Sein-zum-Tode)라고 정의했다. 죽음은현존재의 실존의 표지가 되는데, 왜냐하면 나는 내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며, 어떤 다른 사람도 나를 위해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의 진정성 (Eigentlichkeit)를 입증한다. 죽음,
오직 죽음만이 현존재의 실존을 진정한 것으로 만든다.  - P29

인간을 정치적 존재로 만들어 주는 것은 그의 행위의 능력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동료들과 어울리게 해주고, 공동의 행위를 하게 해주며, 그 재능―새로운 어떤 일을 착수하는 능력 (새로운 것의 시작으로서의 탄생)—이 없었더라면 마음의 욕망은 물론이고 정신의 생각으로도 결코 들지 않았을 일과 목표를 위해 나서게 해준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행위한다는 것은 탄생성의 조건에 대해 인간적인 응답을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탄생을 통해 본질적으로 복수적으로 존재하는 신참자로서 또 시작으로서 이 세상으로들어오기 때문에,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있다. 탄생의 사실이 없다면 우리는 새로움이 무엇인지를 알지도못했을 것이고, 모든 ‘행위‘는 단순지 행태나 도착적 행동에 불과할것이다." - P30

인간은 어머니가 그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날에 단 한 차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은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탄생을 해야할 의무를 부여한다.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각각의 탄생과 더불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출생시키고 세계를 자연적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변형시킨다. 더욱이 이러한 산출은 항상 이미 공동 프로젝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복수적인 세계, 즉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도록 되어 있는 세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만으로는 사회적 실체인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수 없다. ‘이성의 보편성‘ 사르트르(Jean-Paul Sartre)의 표현을 빌리자면을 믿었던 헤겔은 현실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이요, 이성적인것이 현실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쉽게 모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장 프랑수아 료타르는 홀로코스트가 현실적인 것이었으나 이성적인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반유대주의 자체는 열정이었다. 계몽주의적 합리주의는 그것이 헤겔적인 것이건 다른 것이건 간에 이성으로만 모든 것을판단하려고 하는 한 한계를 지닌다.  - P31

그런데 그녀가 의미한 판단‘의 의미를 알 수 있는실마리들이 그녀의 저술 속에는 충분히 있다. 판단은 ‘특수한 상황에대해 그의 일반성에서가 아니라 ‘그의 특수성 안에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아렌트는 두 종류의 책을 썼다. 하나는 어떤 주제나 안건에 대해 그의 일반성을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과 관련이 되고(예컨대 인간의 조건),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정치에서의 거짓말‘, ‘리틀락에 대한 반성‘, ‘안식할 집‘과 같은 논문과 관련이 되는데,
이 논문들은 『공화국의 위기』(1972)와 책임과 판단』(2003)에 포함되어 있다.
아렌트는 판단의 기능-칸트의 발견물이 사유의 기능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판단은 항상 ‘특수자들과 아주 가까이 있는 일들‘ [예컨대시사적인 일들)과 관계한다. 물론 좋은 판단뿐만 아니라 나쁜 판단도있다는 것과 위대한 철학자라도 나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은 흥미롭다. 헤겔과 칸트뿐만 아니라 하이데거와 슈트라우스도―정치나 다른 일에 대해 크거나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 위대한 사상가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좋은 판단을 한다고 보증할 수는 없다. - P32

유대 민족에 대해 자행된 그의 범죄의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은 어떠한 후회도, 또 어떠한 가책의 감정도 표하지 않았다. 이것이 아렌트에 대한 비판가들 사이에 있었던 도덕적 분노에 기름을 끼없음으로써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그리고 그와 유사한 많은 사람들은 "도착적이거나 가학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아이히만은 "잘못을 행하려는 의도가 범죄를 구성하는 데필수적이라는, 모든 현대 법체계에서 통용되는 가정" (379쪽)을 무시했다. 아이히만에 대해 이스라엘 경찰의 심문 기록은 아이히만의 ‘악의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보고를 지지한다. 아렌트가 최초의 보고를 한지 10년이 지나 사회 연구」(Social Research)에 게재된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다음과 같은 꽤 긴 반성에 주목할 가치가 있다.


수년 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아이히만의 재판에 대해 보고를 하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는 어떠한 이론이 - P36

나 사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아주 사실적인 어떤 것, 엄청난규모로 자행된 악행의 현상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었다. 이 악행은 악행자의 어떤 특정한 약점이나 병리학적 측면, 또는 이데올로기적 확신으로 그 근원을 따질 수 없는 것으로, 그 악행자의 유일한 인격적특정은 아마도 특별한 정도의 천박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또 그에 앞서 있었던 경찰심문에서보인 그의 행동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서 사람들이 탐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특징은 전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흥미로운, 아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그는 한때 자기가 의무로 여겼던 것이 이제는 범죄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이러한 새로운 판단의 규칙을 마치 단지 또 다른 하나의 언어규칙에 불과한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의 다소 제한된 양의관용구에다 몇 가지의 새로운 것들을 추가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그 관용구 가운데 어떤 것도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는 전혀 어찌할 수 없었다.  - P37

가장 기괴한 순간은 그가 교수대에 서서말을 하게 되었던 때로, 그는 장례식 연설에서 사용하는 상투어에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자기가 살아남아 있는 자가 아니기때문에 이 경우에는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줄곧 예상했을 사형선고의 순간에 그가 남겨야 했을 마지막 말이 무엇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해 보건대, 이러한 단순한 사실을 그는 생각 못했던 것 같다.
마치 재판 때의 심문과 반대심문에서 드러난 불일치와 심각한 모순들로 인해 그가 괴롭게 느끼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투어, 관용구, 관습적이고 표준화된 표현과 행위 규칙의 고수 등은우리를 현실로부터 막아주는, 즉 모든 사건과 사실들이 발생함으로써 일으키게 되는 우리의 생각하는 주의력에 대한 요구를 막아주는사회적으로 인정된 기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요구에 대해항상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곧 지쳐버리게 될 것이다. 아이히만 - P37

의 경우에 달랐던 점은 분명히 그는 어떠한 그 같은 주의에 대해서도알지 못했던 것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이히만은 거의 초현실주의적(현실 초월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극단적으로 ‘몽상하는 사람이거나, 또는 아렌트가 위에서 언급한 인용문에서 묘사한 그의 모든 특성들을 다 더해본다면 그는 ‘몽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특별할 정도로 ‘천박하지만 ‘악마적‘이지도 또 ‘어리석지도 않은 아이히만의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 또는 ‘사유의 전적인 부재‘는 인간적 실존성을 결여하고 있고 또 그것을 초월해 있는 것이다. 그는 정신병으로 무죄를 요구할 수있을 정도로 이데올로기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았다. 아렌트에 따르면그의 ‘인류에 대한 범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근본악‘이 아니었다.  - P38

왜냐하면 그것은 말하자면 아무것에도 뿌리를 내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근본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구체적이고 확실한 것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 한다. 수전 니만은 그의 잘 알려진 저서 『근대적 사유에서의 악: 철학의 대안적 역사에서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악의 문제에 대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 기여" 15)로 간주했다. 첫째, 이 책은 20세기에 쓰였지만 그의 윤리적 함축은 20세기보다훨씬 더 거슬러 올라간다. 둘째, 이 책은 악이라는 주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윤리적인 것의 전 영역과 관련된 것이라고 나는생각한다.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사유할 능력이 없는 일반적이고 정상적인사람이라고 규정했을 때, 의미한 것은 진정 무엇이었을까? 아렌트는 아 - P38

이히만이 ‘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했다(106쪽). 이것은 아렌트가 인간의 복수성에 있어서 ‘평등‘ (정체성또는 동일성)의 다른 측면, 또는 다른 갈고리인 ‘차이‘라고 불렀던 것에대한 문제이다. 인간의 복수의 우선은 활동적 삶(행위와 작업과 노동)과 관조적 삶(즉, 사유) 양자를 연결시키는 조직이다. 이 양자에 대해서 아렌트는 기포드 강의에서 ‘사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
와 ‘판단‘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의한 바 있다. ‘특별히 천박했던 아이히만은 ‘사유‘도 ‘의지‘도 ‘판단도 할 수 없었다.
‘차이‘가 없으면 소통의 필요가 없다고 아렌트가 생각한 것은 옳았다.
그렇다면 ‘말‘과 ‘행위‘도 필요없게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만일 우리 모두가 똑같다면 우리는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된다. 차이가 없다면결국 인간의 복수성 자체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개념이 될 것이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월처 (Michael Walzer)가 차이란 인간관계에서 관용을 필수적으로 만드는 반면 관용은 차이를 가능하게 만든다고 말한 것은 논박의 여지가 없다. 여기서 하이데거가 차이 (Differenz)를 구별(Unterschied)이라고 말놀이한 것은 ‘차이‘를 ‘관계적인 것과 연결지었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차이는 실로 구별인 것이다. - P39

아이히만은 타인 또는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그는 또한 ‘행위‘할 능력, 또는 더 잘 말하자면 도덕행위를 ‘수행‘할 능력도 없다. 예컨대 그에게는 어떤 것을 ‘말하기‘란 언어놀이를 하는 것과 동일했다. 그는 수행행위로서의 말하기에 대한 이해, 즉 필연적으로윤리적인 발화행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본질적으로 혼돈에 빠진(함께 뒤섞여버린) ‘동일주의자‘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ㅡ라는 점이다. 예컨대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교수대 아래에서 자신의 사형선고를 ‘회피하는 것을 죽음의 수용소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것과 부적절하게 동일시했다. 아이히만은 또한 자신의 ‘복종‘과 칸트의 ‘의무‘ 또는 ‘책무‘와 구별하지도 못했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의국가(Der Judenstaat)를 쓴 테오도어 헤르츨(Theodor Herzl)과 같은 ‘이상주의자‘라고 잘못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에게 ‘이상주의자‘란 단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P40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아이히만에 의해 자행된 ‘인류에 대한 범죄는 폭력의 행위(즉 홀로코스트)를 포함한다.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인종차별주의로서의 나치즘의 경우가 그러했다. 나치즘의 반유대주의의 목표는어떠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유대인종을 이 지구상에서 쓸어내려는,
멸절시키려는 것이었다. 전쟁도 또한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으로 되었다. 전쟁은 정치만큼이나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카를 클라우제비츠(Karl Clausewitz)에 따르면 전쟁은 폭력적 형태의 정치이다. 전쟁은 ‘다른 수단을 사용한 정치의 연장‘이라고 했던것이다. 그의 말은 20세기의 국제정치에서 당연시되었고 으레 그런 문제로 받아들였다.  - P42

필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점점 더 일차원적으로 그리고 전체주의적으로 되어왔고, 또 그렇게 되어가게 될 이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아이히만의 ‘악의 평범성‘에 대한 아렌트의 담론에서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장 궁극적이지는 않다고 하더라도―두 번째로 궁극적인 메시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없어 보인다.
지구상의 인류뿐만 아니라 자연에 대해서도 불필요한 잔인함, 죽음, 고통을 끼치는 데 이를 것이라고 필자가 두려워하는 ‘무사유‘를 우리 모두의 모습으로 갖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18) 바로 이때 인류의 역사-아무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표현을 사용하자면—는 깨어날 길이 없는 악몽이 될 것이다. - P43

"베스 하미쉬파스" (Beth Hamishpath, 정의의 집). 법정 정리가 큰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세 명의 판사가 도착했음을 알렸을 때 우리는 모두 벌떡 일어섰다. 판사들은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검은 법복을 입은 채 옆문을 통해 법정으로 들어와 높게 만든 단 제일 앞줄에자리잡았다. 곧 수많은 책과 1500편 이상의 기록 문서로 가득 채워질긴 탁자 좌우 양편에는 법정 속기사들이 앉아 있다. 판사 바로 아래에는 피고인과 변호인, 그리고 법정 사이에서 직접적인 의견 교환을 도와줄 통역사들이 있다. 재판은 히브리어로 진행되어, 독일어를 쓰는 피고측 사람들은 대부분의 방청객들과 마찬가지로 무선 동시통역 장치를통해 재판 진행 과정을 따라가고 있다. 통역사들의 불어 통역은 탁월하고 영어 통역은 참고 들어줄 만한데, 독일어 통역은 완전 코미디 수준이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이 재판을 위한 기술적 장치들은 꼼꼼히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인구가운데 독일 출신이 높은 비율을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피고인과 그의 변호사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언어인 독일어 통역을 제대로은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새로운 국가 이스라엘의 작은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이다. - P49

판사들의 행동에 극적인 요소가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은일부러 꾸민 듯한 걸음걸이를 하지 않았고, 그들의 맑고 강한 집중력이나 고통스러운 이야기를 청취할 때 눈에 띄게 나타났던 경직된 모습 등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증언을 무한정 끌고 가려는 검사의 시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즉각적으로 제동을 걸었는데, 이러한 태도는 오히려상쾌한 느낌을 주었다. 또 세르바티우스 박사(Dr. Servatius)가 격렬한 전쟁과 같은 이처럼 불편한 환경 속에 거의 혼자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기라도 하듯 판사들의 태도가 좀 지나치게 공손한 듯했지만, 피고인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항상 비난의 소지가 없었다.  - P50

그러나 판사들이 아무리 지속적으로 사람들의 주목을 외면한다 해도 그들은 마치 연극 무대에서 관객들을 바라보듯 단의 제일 윗자리에서 방청객을 마주 대한 채 바로 거기에 앉아 있었다. 방청객들은 전세계를 대표하는 듯 생각되었는데, 실제로 처음 몇 주간은 방청객들이주로 세계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든 신문기자와 잡지 작가들이었다. 그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광경을 지켜볼 수 있겠지만, 이번 경우는 "유대인의 비극 전체가 주요 관심사가될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비유대인에 대한 범죄를 이유로해서도 [아이히만을 처벌한다면, …… 이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놀랍게도 "우리가 어떤 인종차별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검사가 논고 서두에서 내뱉은 이 주목할 만한 말은 분명 이번기소에서 핵심 문장임이 입증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송사건은 아이히만이 무엇을 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이 무엇을 겪었느냐를 바탕으로 이룩된 것이기 때문이다.  - P53

그가 보기에 이 재판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파도 위에서 출렁이는 배‘와 같은, 피투성이의 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를 방지하려는 그의 노력이 자주 실패한 것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피고 측의 잘못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부적절하고 하찮은 증언이라도 피고 측은 적절히 이의를 제기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를 세르바티우스박사라고 불렀는데, 그는 증거 자료를 제출하는 문제에서는 보다 용감했다. 그가 원고를 방해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원고 측이 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전 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의 일기를 증거로 제출했을 때였다. "제가 할 질문은 한 가지뿐입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 즉 피고인의 이름이 저 29권 (실제로는 38권에 언급된 적이 있습니까?
·· 아돌프 아이히만이라는 이름은 29권 가운데 어디에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 더 이상 질문이 없습니다. 감사......
합니다." - P57

그렇다면 그가 살인의 방조자로 기소되었다면 유죄라고 인정했을까?아마 인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조건들을 달았을 것이다.
자신이 한 일은 회고를 할 때에만 범죄일 뿐, 자기는 언제나 법률을 준수하는 시민이었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최선을 다해 수행한 히틀러의 명령은 제3제국에서는 ‘법의 효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피고 측은 아이히만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 제3제국 시대에 가장 유명한 헌법 전문가 중 한 사람으로 현재 바바리아의 교육과 문화장관으로 있는 테오도어 마운츠의 말을 인용하려 할 것이다.  - P77

그는 1943년에
"총통의 명령은∙∙∙∙∙∙ 현재 법적 질서에서 절대적인 중심이다"라고 썼다). 오늘날 아이히만에게 그가 달리 행동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단적으로 그 당시 상황이 어땠는지 알지 못했거나 아니면 잊어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와서 자신들은 언제나 반대한 척하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 자신이 명령받은 일을 수행하는 데매우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시대는 변했고, 마운츠 교수처럼 그도 "다른 통찰에 도달했다." 그가 한 일들은 한 것이고, 이를 굳이 부정하고싶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지구상의 모든 반유대주의자들에 대한경고로 공개적인 교수형을 당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말은 그가 무엇을 우회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후회는 어린아이들이나 하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 P77

시간의 회오리바람 속의 낙엽처럼 그는 마법으로 차려진 식탁에서통닭이 입으로 날아드는 환상세계인슐라라피아(더 정확히 말하자면,학위와 보장된 직업과 세련된 유머의식‘을 가진, 가장 큰 악덕이란 농담 섞인 장난을 치고 싶어 참을 수 없어하는 충동인, 존경받는 속물들의 모임)에서, 정확히 12년 3개월간 지속된 천년제국의 행군 대열로 달려갔다. 어쨌든 간에 그는 신념을 가지고 당에 가입한 것도 아니었고,또 어떤 신념에 설득된 적도 없었다. 당에 가입한 이유를 말해달라고하면 그는 언제나 ‘베르사유 조약‘과 ‘실업‘과 같은 똑같은 진부한 표현들(clichés)을 반복했다. 또는 그가 법정에서 ‘어떠한 기대나 사전 결심 없이 그냥 당에 의해서 집어삼켜진 것과 같았습니다. 너무도 빠르고갑작스럽게 일어났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그는 제대로 정보를 입수할 시간도 없었고, 알고 싶은 욕구는 더더욱 없었다. 그는 당의 정강도 몰랐고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칼텐브루너가 그에게 "친위대에
"가입하는 것이 어때?" 라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하지 뭐"라고대답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졌고 그게 전부였다. - P87

따라서 뉘른베르크 법은 독일 제국에서 유대인이 처하게 된 새로운 상황을 안정시킨 것처럼 보였다. 조심스럽게 말하면 그들은 1933년 1월 30일 이후로는 2급 시민이었다. 이들이 나머지 주민으로부터 거의 완벽히 분리되기까지는 몇 주 또는 몇 개월밖에 걸리지않았다. 이 일은 공포를 줌으로써, 그리고 주위 사람들의 일상적인 묵인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에는 벽이 있었습니다"라고 베를린의 베노콘 박사는 증언했다. "독일 내에서 어디로 여행하든 나는 기독교인과 대화한 기억이 없습니다." 유대인은 이제 자신만의 법을 부여받았으므로 더 이상 법적 국외자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느꼈다. 어차피 그들에게 강요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들끼리 산다면 간섭받지 않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독일 소재 유대인 제국대변단(모든 유대인 공동체와 조직의 전국 연합으로 1933년 9월에 베를린공동체의 주도 하에 창설되었는데, 이는 결코 나치스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의 말에 의하면, 뉘른베르크 법령의 의도는 ‘독일과 유대 민족 간에 참을 만한 관계 수준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 P95

모두 오랫동안 지위를 유지해온 저명한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지도층인사들과 그의 첫 개인적인 접촉은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가 ‘유대인문제‘에 그렇게 매혹된 이유는 그 자신의 이상주의‘ 때문이었다고 그는설명했다. 그가 언제나 멸시한 동화론자들이나 그를 지루하게 만든 정통파 유대인과는 달리 이 유대인은 그와 같은 이상주의자‘였다. 아이히만의 생각에 따르면 ‘이상주의자‘란 단지 어떤 ‘이상‘을 신봉하거나,
또는 도둑질하거나 뇌물을 받지 않는 사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조건은 필수불가결하기도 하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한 사람이었고(따라서 사업가 같은 사람은 아니었음),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것, 특히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력한 명령을 받고 있었는지만을 말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다.  - P97

이것은 불성실 (bad faith)의 교과서적인 예, 즉 터무니없는 어리석음과 허위의 자기기만이 결합한 전형적인 예인가? 아니면 이것은 단지 영원히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일기에서, 시베리아에 있는 수많은 살인자와 강간범, 도둑들 사이에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의예일 뿐인가? 그런 사람이란 자신의 범죄가 현실의 한 부분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에 현실을 대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의 경우는 평범한 범죄자의 경우와 다르다. 평범한 범죄자는 자기의 범죄집단이라는 좁은 한계 내에서만 범죄 없는 현실로부터 효과적으로자신을 분리할 수 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고,
스스로를 기만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을 느끼기 위해서는 단지 과거를상기하기만 하면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살았던 세상과 그는 한때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8000만 명으로 이루어진독일 사회가 동일한 방법, 동일한 자기기만, 거짓말, 어리석음을 통해현실과 사실성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아이히만의정신 속에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 P109

문제에 대한 그 자신의 신념은 겸손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명이 내게부여한 얼마 안 되는 재능 가운데 하나는 진실에 대한 능력입니다. 그것이 내게 달린 일인 한에서는 말이죠." 검사가 아이히만이 저지르지않은 범죄를 그에게 뒤집어씌우려고 하기 전에도 그는 이 재능에 대한주장을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가진 자센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그당시 자신이 지적한 것처럼 "내가 전적으로 물리적, 정신적인 자유를소유하고 있었던" 때) 만든 정리가 안 된 장황한 메모 속에서 그는 ‘여기에 기록된 이 진실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미래의 역사가들은 충분히 객관적이도록 하라‘는 환상적인 경고를 했다. 이러한 경고가 환상적이라고 한 이유는, 이처럼 갈겨쓴 모든 문장에서 자신의 일에 기술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직접 연관이 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철저한무지가 나타나며, 또한 그의 기억력에 엄청난 결함이 있음을 보여주기때문이다. - P112

그 후에 판사로부터 자신의 변호를 위한 증언을하고 싶으면 "선서를 한 뒤 할 수도 있고 선서 없이 할 수 있다"는 말을분명히 듣고 난 뒤, 두말 않고 즉시 선서 아래에서 증언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또는 경찰심문관에게 그랬듯이, 법정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짓은 자신의 진정한 책임을 벗어나 자신의 목숨을 위해 싸우거나 자비를 간청하는 것이라고 반복해서 매우 감정적으로 확언한 뒤, 자신의 변호인의 지시에따라 자비를 호소하는 자필 문서를 제출한 사람과 당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아이히만에게는 이것은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들이었고, 그가기억 속에서나 즉흥적으로 자신의 기분을 북돋우는 관용구들을 찾을수 있다면 그는 ‘모순‘ 따위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은 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이 끔찍한재능은 죽음의 순간에도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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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빗속에서 길거리를 걸어가는 ‘노숙자‘는 그렇게 걷고 또 걸어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끝없이 얽히고설킨 길거리들뿐이었다. 아니면 어쩌다가 길모퉁이에서 경찰 두 명이 잡담을 하는 모습이나 경위나 경사가 부하들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일 뿐이었다. 밤에 누가 집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모습이 보일 때도 있었지만, 아주 드문 일이었다. 누군가 어느 문으로 슬며시 고개를 내미는 걸보고 가까이 가보면 웬 남자가 어두운 문 앞에 뻣뻣하게 서 있었다. 특별히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 험상궂은 달과구름은 양심의 가책에 잠 못 드는 악인처럼 이리저리 뒤척였다. 런던이라는 거대한 도시가 강물 위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 그 자체가 악인의 답답한 몸부림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 디킨스는 런던의 공동묘지를 좋아하고 런던의 "수줍어하는 동네들"을 좋아하고 "목가적 런던(ArcadianLondon, 사교계가 한꺼번에 시골로 떠나고 런던 전체가 무덤 같은 평화 속에 잠기는계절을 가리키는 디킨스의 엉뚱한 표현)"을 좋아했듯, 런던의 그 고독한 밤거리"도 좋아했다. - P301

 한편 도시에서 사람이 고독한 이유는 낯선 사람들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인 낯선 사람이 되어보는 일, 비밀을 간직한 채로 말없이 걸어가면서스쳐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이 간직하고 있을 비밀을 상상하는 일은 더없는 호사 중 하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은 가능성들 앞에 열려 있다는 것은 도시생활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고,가족의 기대, 공동체의 기대에서 벗어나게 된 사람들, 하위문화 실험, 정체성 실험을 시도하게 된 사람들에게는 해방적 상태이기도 하다. 아울러관찰자의 상태(냉정한 상태, 대상에 거리를 둔 상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하는 상태)이기도 하고, 성찰해야 하는 사람, 창작해야 하는 사람에게 유익한 상태이기도 하다. 약간의 우울, 약간의 고독, 약간의 내성은 삶의 가장 세련된 재미에 속한다. - P302

얼마 전에 들은 라디오 방송에 가수 겸 시인 패티 스미스(PattiSmith)가 나왔다. 사회자가 무대 공연을 앞두고 무슨 준비를 하느냐고 묻자 그녀는 답했다. "두세 시간 동안 길거리를 배회합니다. 그 짧은 대답은 그녀의 무법자적 낭만주의와 함께 그녀에게 길거리 배회가 의미하는 바를 잘 요약하고 있다. 길거리 배회는 그녀의 감성을 더 터프하고 날카롭게 만들어주고, 배회자의 고요한 상념을 깨뜨릴 수 있을 만큼 격렬한 노래와 절실한 노랫말의 자양분인 고독의 베일로 그녀를 휘감아준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호텔 건물을 나가면 주차장이 있고 주차장을 나가면 6차선 도로가 있을 뿐 인도는 찾아볼 수 없는 도시)에서는 그런 식의 길거리 배회가 성공하기 어려웠겠지만, 그녀의 발언은 뉴요커로서의 발언이었다. 한편 버지니아 울프가 1930년 수필 「길거리 떠돌기(Street Haunting)」에서 익명성을 근사하고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한 것은 런더너로서의 발언이었다. 뛰 - P302

어난 등산가 레슬리 스티(Leslie Stephen)을 아버지로 둔 그녀는 언젠가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산이니 등산이니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낭만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어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내 방에는등산지팡이와 아버지가 정복한 봉우리가 모두 표시되어 있는 입체 지도가 있었잖아요? 내가 런던과 습지를 제일 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랍니다."「길거리 떠돌기가 나왔을 당시의 런던은 디킨스가 밤 산책을 다니던 때보다 두 배 이상 커져 있었고, 길거리가 다시 한 번 피난처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울프는 한 사람의 정체성이 그 사람을 답답하게 옥죈다는 것을 언급하고, 집에 놓여 있는 물건들이 "우리가 경험한 것들의 기억을 굳히는 방식" 을 언급한 후, 연필을 사러 길을 나섰다. 겨울 저녁이었고, 젊지 않은 여자에게 안전과 정숙은 더 이상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행로의 기록(혹은 상상)인 길거리 떠돌기는 도시를 걸어 다니는 일을다룬 위대한 수필 가운데 하나다. - P303

길거리로 나선다는 것에 대해 "4시에서 6시 사이의 상쾌한 저녁에집을 나설 때는 내 친구들이 나라고 여기는 나의 껍데기를 벗으면서 익명의 떠돌이들로 구성된 거대한 공화국 군대의 일원이 된다. 방에 혼자있다가 그렇게 그들과 함께 있게 되면 참 기분이 좋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인생 속으로 어느 정도는 들어가 볼수 있었다. 한 사람이 하나의 정신에 붙들려 있는 것은 아니라는 환상, 다만 몇 분간이나마 다른 사람들의 정신이나 육체를 빌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어볼 수는 있을 만한 정도였다. 세탁부도 될 수 있었고 술집 주인도될 수 있었고 거리의악사도 될 수 있었다." 이 익명성에 대해. "각자의 영혼은 다른 영혼들과 다른 모양으로 존재하기 위해 굴 껍데기 같은 외피를 만들어내는데, 그꺼끌꺼끌한 외피가 깨져 없어지면굴알맹이 같은 - P303

"통찰만 남는다. 거대한 눈알이라고 할까. 한겨울의 길거리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드러나 있으면서도 가려져 있는 곳. 울프는 한때 드퀸시와 앤이 걸었던 옥스퍼드 스트리트를 걸어 내려갔다. 상점 창문으로 들여다보이는 화려한 상품을 가지고 상상 속의 집, 상상 속의 삶을 장식해보는가하면, 그런 집과 삶을 내던지고 다시 현실 속의 길로 걸어 나오기도 했다.
울프의 언어는 주관의 언어워즈워스 등이 만들어내고 드퀸시와 디킨스 등이 더욱 발전시킨 언어)였다. 울프의 상상을 자극하는 것은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새들, 상점에서 구두를 신어보는 난쟁이 여자 같은 아주 작은 사건들이었다. 상상이 걷는 길은 두 발이 걷는 길보다 멀리 뻗어 나갔기에 현실 속의 거리로 돌아오는 것은 썩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거리를 걷는 일은 이런 글을 통해 지금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워즈워스, 드퀸시, 디킨스 등에게는 괴로움의 상태였던 고독과 주관이 울프에게는 즐거움의상태였고, 울프에게 길거리를 걷는 일은 자신의 짐스러운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었다. 울프의 보행이 현대적 의미의 보행인 것은 그 때문이다. - P304

휘트먼의 시를 보면, 그가 행복하게 애인 품에 안겨 있는 사람으로나오는 대목도 많지만, 그런 시보다는 그렇게 자기를 안아줄 애인을 찾아서 혼자 길거리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게이 크루징의 선구자)으로 나오는 대목이 더 정말처럼 들린다. 풀잎』최종판에 실린 「먼 훗날의 기록관들이여(Recorders Ages Hence)」라는 꽤 거창한 시에서는 자기를 "대개 홀로 걸으면서 소중한 친구들, 소중한 애인들을 생각하던" 사람으로 기록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더 뒤쪽에 실린 또 한 편의 시는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 걸어갈 길이 있는 도시, 기쁨을 주는 것들이 있는 도시여."라는 돈호법으로 시작된다." 이 시에서 휘트먼은 한 도시를 반짝이게 할수 있는 모든 것(건물, 기선, 퍼레이드 등등)을 열거한 후, 이런 것들 대신 길을걷는 경험("내가 지나갈 때, 오 맨해튼이여, 나를 사랑하겠다는 눈빛으로 반짝 또 반짝 또 반짝하는 너의 눈동자들"을 택한다. - P306

잔치를 즐기는 것보다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기쁨이고, 약속이 지켜지는 것보다는 약속이 맺어지는 것이 기쁨이라는 뜻이다. 휘트먼은 수많은 것들을 열거하고 다양한 것들을 묘사하는 탁월한 목록 작성자였고, 최초로 군중을 사랑한 작가 중 하나였다. 군중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연애의 가능성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적 이상, 드넓게 퍼지는 활기의 표현이었다. 잔치가 벌어지는 도시(City of Orgies)」 뒤에 실린 시 가운데 어느 낯선 사람에게 (To aStranger)」가 있다. "거기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여! 내가 당신을 얼마나 그 - P306

혼자 걷는 도시
"그리운 마음으로 바라보는지 당신은 모른다. 휘트먼에게 스쳐 지나가는사람의 눈빛과 친밀한 사랑은 익명의 군중과 그의 강력한 자아의 관계처럼 상보적이었다. 이렇듯 휘트먼의 시는 맨해튼이라는 점점 넓어지는메트로폴리스에 대한 찬양, 대도시의 크기에서 비롯되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대한 찬양이었다.
휘트먼이 죽은 1892년은 모두가 뉴욕을 찬양하기 시작할 때였다. 파리가 19세기의 수도였다면, 뉴욕은 20세기 중반까지의 수도였던것 같다. 급진파와 재벌 총수가 똑같이 도시에 사활을 걸고 희망을 걸었던 시절, 뉴욕은 호화 여객선이 입항하고 이민자가 엘리스 섬으로 밀려들어오는 도시, 그야말로 최고의 현대 도시였다. 조지아 오키프(GeorgiaOKeeffe조차 뉴요커 시절에는 뉴욕의 마천루 그림을 안 그릴 수 없었다. 1920년대에는 뉴욕 사람들을 위한 《뉴요커>라는 잡지가 나왔다. 그중 타운 토크(Talk of the Town)」라는 수필란 (18세기에 런던에서 나온 <스펙데이터》와 《램블러>의 전통을 잇는 지면에서는 필자들이 엮은 길거리의 작은 사건들이 눈부시게 반짝였다.  - P307

긴즈버그가 샌프란시스코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실제로 긴즈버그가 시인으로서의 목소리를 찾은 곳은 1950년대의 샌프란시스코와 버클리였다. 하지만 그는 뉴욕의 시인이었고, 그의 시에등장하는 도시들은 크고 무정한 대도시다. 백인 중간층이 도시생활을뒤로하고 교외로 몰려가던 그때, 긴즈버그와 그 시대의 시인들은 열렬한도심 애호가들이었다.(다만 소위 비트 작가들 다수가 샌프란시스코로 몰려왔다고는 해도, 그들 대부분은 시에서 자기네들이 걸어 다니는 길거리를 다루기보다는 좀더 개인적인 내용, 또는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을 다루었다. 그들에게 샌프란시스코라는도시는 아시아로 가는 관문, 또는 서부 풍경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긴즈버그의경우, 교외를 다룬 시가 없지는 않다. - P308

 "가까운 곳에 지하철이 있고, 음반 가게 같은, 사람들의 인생 유감이 진심이 아니라는 증거들이 있다. 그런 것이 없었다면 내가 풀잎 하나인들 흐뭇하게 바라볼 수 있었을까. 불성실한 것일수록 믿어주는 게 더 중요하다. 저 구름은 저 모습그대로 관심의 대상이 되는데." 직장에 걸어가면서(Walking to Work)」라는 시는 이렇게 끝난다.


나는 길거리에녹아들고 있어.
당신은 누구를 사랑해?
나를?
빨간불인데 그냥 건널래."


역시 걸어가는 길을 그린 또 한 편의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속옷을 안 입고 다니는 일에 지치다가도
또 괜찮아져요
길을 걷다 보면
바람이 내 생식기로 살며시 불어와주니까" - P311

나는 다른 사람들이 있는 데서 입을 열어 말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 나중에 연필을 집어 들고 종이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를 무겁게 짓누르는 장면들, 감정들이 풀려나왔다." "길거리에서 떨어져 나온 후"라는 표현은 길거리가 하나의 총체적 세계라는 점, 즉 길거리에 속한 사람들이 따로 있고, 길거리를 다스리는 법과 길거리에서 쓰이는 언어가 따로있다는 점을 암시한다. 트라우마를 낳은 집에서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길거리"라는 집 밖 나라의 원주민이다.
오만과 편견이 거의 200년 전에 어느 시골 숙녀가 보행의 효용을기록한 깔끔한 연대기였다면, 칼들과 가까이 중 미국에서 퀴어로 산다는 것: 분열의 일기(Being Queer in America: A Journal of Disintegration)」라는 글은 1980년대 미국 도시에서 어느 퀴어 남자가 길거리의 효용을 기록한 『오만과 편견』 못지않게 깔끔한 연대기다. 보행은 우선 성애가 된 - P313

길거리에서다. "지금 내가 지나가는 복도의 창문은 느릿느릿 죽어가는 하늘을 몇 조각으로 깨뜨리고 있다. 그 애가 멀리 문 열 개 너머에서 갑자기 어느 문 안으로 들어간다. 조용한 바람이 따라 들어간다." 그도 그 방으로 따라들어가서 펠라치오한다. 왠지 모르지만 그가 전에 크루징하던 선창, 아니면 창고와 비슷한 방이다. 몇 페이지 뒤에서는 보행이 그의 친구이자에이즈로 죽은 사진작가 피터 후자(Peter Huiar)에 대한 애도가 된다. "그가 죽고 나서, 나는 길거리를 몇 시간씩 배회했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차가 많아졌다. 몸뚱이들이 차도 가장자리에 쓰레기처럼 버려져 있었고,
문간의 개들은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들을 헤집어놓고 있었다. 빌딩 위의구름들에 녹색 테두리가 생기는 시간이었다. [……]  - P314

"풍경화였다가 숙소였다가" 발터 베냐민이 보행자의 파리 경험에 대해 쓴 구절이다. 도시를 연구하고 도시를 거니는 기술을 연구한 뛰어난 학자 중 하나인 베냐민은 파리의 매력에 이끌려 파리의 뒷골목들을 헤매는 신세로 전락한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다. 파리라는 주제는 1940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마지막 10년간의 모든 글 속에서 다른모든 주제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가 처음 파리를 여행한 1913년 이후로 그의 파리 여행 기간은 점점 길어졌고, 1920년대 말에 결국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고향 베를린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펜 끝은 파리를향해서 걸었다. "도시에서 길을 잘못 찾는 일은 흥미로울 것도 없고 새로울 것도 없다. 길을 잘 모르기만 하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도시를 헤매는 일, 마치 숲속을 헤매듯 도시를 헤매는 일에 필요한 훈련은 길을 찾는 일에 필요한 훈련과는 전혀 다르다. 도시를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간판들, 도로의 이름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집들, 노점들, 술집들로부터 메시지를 듣는 방식은 숲속을 헤매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자기 발에 밟힌 잔가지로부터,  - P318

 내게 이 배회의 기술을 가르쳐준 도시가 파리였다. 학창 시절의 공책 압지에 찍힌 미로 속에서 최초의 흔적을드러낸 나의 꿈을 실현해준 것도 파리였다." "그는 세기 전환기에 모범적 독일인 아이로 교육받은 결과 산과 숲을 경외하는 사람이 되었다. 어릴 때 사진 중에는 등산용 지팡이를 들고 알프스 산맥이 그려진 배경 앞에 서 있는 사진도 있고,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덕분에 슈바르츠발트나스위스로 긴 휴가를 다녀오는 일도 많았다." 그럼에도 그의 사랑이 향하는 곳은 도시였다. 그의 도시 사랑은 자연 경외 따위의 케케묵은 낭만주의에 대한 거부이면서 동시에 모더니즘의 도시주의를 향한 열정이었다. - P319

베냐민에게 도시는 매혹적 구성물이었다. 연대기가 깔끔한 직선의시간적 구성물이라면, 도시는 배회하지 않고서는 지각할 수 없는 공간적 구성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베를린 연대기에서 그는 자기의 인생이 지도나 미로 같은 것으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적 구성물이 아닌 공간적 구성물이라고 하면서 그 깨달음을 얻은 곳이 파리의 한 카페라고 말한다. "파리일 수밖에 없었다. 그곳의 담벼락과 강둑길, 포장도로, 박물관과 쓰레기, 창살과 광장, 아케이드와 노점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언어는 그토록 특별하기에 ----- 58 모스크바 일기는 그의 인생을 모스크바라는 도시에 대한 설명과 뒤섞은 글이고, 『일방통행로』는 도시를 흉내 내는 형식의 책이다. 이 책은 「주유소」, 「건설 현장」, 「멕시코 대사관,「최고급 가구가 딸린 방 열칸짜리 집」, 「중국 골동품」 등 도시의 특정한장소나 안내문을 연상시키는 소제목의 짤막한 구절들을 이어 붙인 전복적 몽타주다. 이야기 한 편이 쭉 이어진 길 하나라면, 일방통행로』의 짧은 이야기들은 뒤엉킨 골목길들이다. - P319

베냐민 자신부터가 뛰어난 배회자였다. 베냐민의 친구 하나는 그가 어떻게 걸었는지를 말해준다. "그 사람이 머리를 치켜세우고 걷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걸음걸이,
신중하게 한 발 한 발 더듬어 나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근시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근시가 심한 베냐민과 근시가 더 심한 또 한 명의 망명자 제임스 조이스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조이스는 파리에 1920년부터 1940년까지 살았다. 더블린 거리를 배회하는한 유대인에 대한 막연한 정보로 점철된 다층적 소설을 쓴 가톨릭 망명자 조이스와, 파리 거리를 거닐고 또 시로 쓴 가톨릭 신자(샤를 보들레르)에 관한 서정적 역사를 기록하면서 파리 거리를 배회하는 베를린 출신유대인 망명자 베냐민 사이에는 모종의 대칭이 존재한다.  - P320

조이스는 생전에 최고의 명성을 얻었지만, 베냐민은 그 명성을 한참 나중에야 얻게 된다. 독일에서 그의 작업을 재발견한 것은 1960년대와 1970년대였고, 영어권에서는 더 나중이었다. 지금 그는 문화연구의 수호성인으로 자리 잡았고, 그의 글은 지금까지 수백 권이 넘는 논문과 저서를 낳고 있다. 베냐민을 해석하는 글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것은 그의 글이 혼종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베냐민의 글은 주제 면에서는 학술적이지만 아름다운 아포리즘과 창조적 비약으로 가득하고, 정의를 내리는 연구가 아니라 영감을불러일으키는 연구다. 그중 특히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파리에 관한 연구였다. 『아케이드 프로젝트』는 베냐민이 책을 쓰기 위해 작성한 방대한 분량의 인용과 메모다. 보들레르, 파리, 파리의 아케이드, 플라뇌르(Hâneur)라는 일련의 주제를 다루었을 연구였다. 파리를 "19세기의 수도"
라고 부른 사람이 바로 베냐민이고, 플라뇌르를 20세기 말의 학문적 주제로 만든 사람도 바로 베냐민이다. - P320

베냐민에게 처음 아케이드에 관심을 갖게 해준 작가, 보행을 문화적 행위로 성좌(星座)화할 가능성을 포착하게 해준 작가는 보들레르가 아니라 베냐민의 동시대인들이었다. 같은 베를린 출신이자 친구였던 프란츠헤셀(Franz Hessel)과 초현실주의 작가 루이 아라공(Louis Aragon)이 그들이다.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Paysan de Paris)』(1926)를 읽고 너무 흥이 났던 베냐민은 "저녁마다 침대에서 읽었는데, 두세 장 읽으면 책을 내려놔야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뛰던지 더 읽어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노트가 처음 나온 것이 실은 그때였습니다. 헤셀과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우정의 제일 멋진 부분을 길러나간 것은 베를린으로 돌아온 이후였습니다."  - P333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는 1920년대 후반에 출간된초현실주의3대 저서 중 하나다. 나머지 둘은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의 『나자』와 필리프 수포(Philippe Soupault)의 『파리의 마지막밤들 (Les Dernières nuits deparis)』이다. 세 작품 모두 파리를 배회하는 남자를 일인칭으로 서술하고있고, 매우 구체적인 지명과 장소 묘사를 제시하고 있고, 창녀를 주요 목적지로 설정하고 있다. 초현실주의가 중시한 것은 꿈에 나온 것들, 무의식적·비(非)자의식적 정신의 자유 연상, 충격적 병치, 요행과 우연, 일상의 시적 가능성 등이었다.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이런 모든 것에 관여하는 이상적 방법이었다. 브르통도 그 점을 지적했다. "산책의 탁월한 동행이 되어주었던 아라공이 눈에 선하다. 그에게서는 파리에서 가장 재미없는 곳을 더없이 흥미진진한 곳으로 만드는 마술적이고 몽상적인 이야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이야기가 막힌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야기가 폭발하는 데는 길모퉁이 하나 도는 것, 아니면 상점 창문 한 번 보는 것만으로충분했다." - P334

베냐민은 자기를 가리켜 "악어 아가리를 지렛대로 비틀어 열고 거기 들어가 사는 사람" 같다고 말했다. 그는 프랑스 문학을 제일 좋아했고 거의 일평생을 프랑스 문학에 나오는 조연들처럼 배회하면서 살았다. 그를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 바로 프랑스 문학인 것 같기도 하다. 파리를 탈출할 시기를 놓친 것이 프랑스 문학 때문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말년에 제3제국의 어두운 그림자를 헤쳐 나가는 데는 프랑스 문학보다는 소년 모험소설이나 탐험일지 같은 것이 좀 더 유익하지 않았을까 싶다. 1939년9월에 전쟁이 발발했을 때 프랑스에 있던 다른 독일인들과 함께 검거된 - P339

그는 억류자로 분류되어 수용소가 있는 느베르까지 남쪽으로 150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길을 걸어가야 했다. 살이 찌고 심장에 병이 생긴 탓에파리의 길거리에서도 몇 분에 한 번씩 걸음을 멈추어야 했던 그는 수용소로 가는 길에 여러 번 정신을 잃기도 했지만, 세 달 가까이 되는 수용소 억류 기간 중에는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다. 담배 몇 개비를 수업료로철학 강의를 열기도 했다. 국제펜클럽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이어나가면서 비자를 받고자 애썼다.
통렬하게 서정적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를 쓴 것도 그 무렵이었다. 나치의 프랑스 점령 후 남유럽으로 도망친 그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에스파냐의 포르트부까지 걸어갔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야 하는 가파른 도주로였지만, 그는 무거운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원고가 그 안에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경사 급한 포도밭 구간에서는걸음을 옮기지 못할 만큼 지친 그를 동행자들이 부축해주어야 했다. 그의 동행자 중 하나였던 구를란트 부인이라는 여자에 따르면 "길을 아는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네 발로 기어서 넘은 구간도 있었다. - P340

에스파냐당국이 요구한 것은 프랑스 출국 비자였다. 베냐민의 친구들이 마지막순간에 마련해준 미국 입국 비자로는 통과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시 그 험난한 산길을 걸어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자기의 처지를비관한 베냐민은 에스파냐 국경에서 모르핀을 과다 복용했고, 1940년 9월 26일에 사망했다. 한나 아렌트가 쓴 글에 따르면 "그의 자살로 마음이 움직인 출입국관리 공무원들은 그의 동행자들이 포르투갈에 입국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의 서류 가방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같은 글에서 아렌트는 자기도 1960년대에 파리에 산 적이 있다고말했다. "파리에서 외국인이 고향 같은 편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파리라 - P340

는 도시 전체가 내 방 같기 때문이다. 집을 안락한 곳으로 만드는 방법이집을 그저 자고 먹고 일하는 곳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집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것이듯, 도시에 마음을 붙이고 사는 방법은 아무 정처 없이, 아무목적 없이 도시를 마냥 걸어 다니는 것이다. 그러니 파리에서 체류를지탱해주는 것은 무수한 카페들이다. 길거리에는 그런 카페들이 줄지어늘어서 있고, 보행자들은 카페들 앞을 지나가면서 도시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대도시 중에서 걸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이제 파리뿐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로부터 활기를 얻는 도시는 단연 파리다."내가 1970년대 말에 가출해서 파리로 왔을 때만 해도 (일부 파리 남자들의 하찮은 색욕과 무례를 무시한다면) 파리는 보행자의 천국이었다. 돈 없고 어렸던 나는 어디든 몇 시간씩 걸어 다녔고 박물관에 잘 들락거렸다. - P341

평일의 걷기는 혼자 걷기 (기껏해야 두어 명이 함께 걷기)이고, 보도 걷기이다. 평일의 큰길은 운송 공간이다. 기념일(역사적, 종교적 사건을 기리는 공휴일, 또는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드는 특별한 날)의 걷기는 다 함께 걷기다. 그런 날의 큰길은 그날의 의미를 두 발로 다지는 공간이다. 걷기는 기도도될 수 있고 섹스도 될 수 있고 땅과의 교감도 될 수 있고 사색도 될 수 있으니, 그런 날의 걷기는 발언이 된다. 많은 역사가 시민의 발걸음으로 만들어졌다. 자기 도시를 걸어서 헤쳐 나가는 일은 정치적·문화적 신념의육체적 표현이자 비교적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공적 표현 형태 중 하나다. 공동의 고지를 향해서 함께 걷는다는 의미에서는 행군이라고 할 수있지만, 행군하는 군인들은 개체성을 포기한 존재들인 반면, 행진하는시민들은 개체성을 간직하고 있다.  - P350

그로부터 몇 년 앞서 일어난 또 다른 반란에서도 광장이 무대가 되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무용담은 이 여자들이 경찰서와 정부청사 이곳저곳에서 서로를 알아보면서 시작됐다. 1987년에 정권을 장악한잔인한 군부 요원들에 의해 ‘실종‘당한 자식들을 찾아다녔지만 모두가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다. 마게리트 구츠만 부바르(Marguerite GuzmånBouvard)에 따르면 "숨기기는 군부가 벌인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의특징이었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정상화라는 허울 아래 유괴 사건들이 자행되었다. 항의는 불가능했고, 유괴당한 사람들의 가족조차도끔찍한 실상을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112 대부분 교육받은 적이 거의 없고 정치적 경험도 전혀 없는 전업주부였던 여자들은 자기네가 그 비밀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이 대의를 위해 싸우면서 자기의 안위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1977년 4월 31일, 열네 명의 어머니가 부에노스아이레스 도심의 5월 광장으로 갔다. 1810년에 아르헨티나가 독립을 선언한 곳이었고, 후안 페론이 대중주의 연설들을 한 곳이었다. 나라의 심장 같은 광장이었다. 거기 앉아 있는 - P362

것은 불법 집회나 마찬가지라고 한 경찰이 소리쳤다. 그래서 그들은 광장한복판에 있는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기 시작했다.
군부가 최초의 전투에 패하고 5월 광장의 어머니회가 자기들의 정체성을 발견한 것은 바로 그때 그곳에서였다고 한 프랑스인은 말하기도했다. 그 광장이 그들에게 이름을 주었고, 금요일마다 광장을 걸은 일이그들을 유명하게 만들었다. 부바르에 따르면 "언젠가부터 그들은 그렇게 걷는 일을 행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목적 없이 한곳을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걸어 나가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렇게 금요일마다 걸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경찰은 상황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대형경찰차에서 쏟아져 나온 경찰들이 폭언과 폭행을 퍼부으며 그들을 강제해산시켰다.  - P363

개들에게 공격당하고 곤봉으로 구타당하고 체포당하고심문당하면서도 그들은 또 나와서 또 걸었다. 그렇게 수년간 걸음으로써그들은 기억하면서 걷는다는 이 단순한 행동을 의례로, 나아가 역사로만들었다. 그리고 이 광장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렸다. 행진하면서 그들은 실종된 아이의 사진을 정치 플래카드처럼 막대기에 붙이거나 목에 걸기도 했고, 아이의 이름과 실종된 날짜를 수놓은 흰 손수건을 머리에 쓰기도 했다. 수놓인 글자가 "살아 돌아와라(Aparición con Vida)"로 바뀐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그들과 함께 걸은 시인 마저리 아고신(Marjorie Agosin)에 따르면 "행진하는 동안에는 아이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그들은내게 말했다. 진실을 이야기하자면, 망각이 허용되지 않는 이 광장에서는 기억이 원래의 의미를 회복한다." 국가의 트라우마를 행진으로 표출하는 이 여자들이 수년 동안 가장 공공연한 반체제 세력이었다. 1980년 - P363

대에 이르면 그들은 전국적 규모의 어머니 네트워크를 만들어낸다. 1981년, 그들은 첫 번째 인권의 날 기념 연례 24시간 행진을 시작했고, 아울러전국 곳곳의 종교 행렬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 무렵은 5월 광장의 어머니회의 행진이 큰 관심을 얻은 후였다. 5월 광장은 계엄 상황 속에서 중년여성들이 행진을 이어나가는 기이한 현상을 취재하러 온 외신 기자들로북적거렸다" 군사정권이 몰락한 1983년, 5월 광장의 어머니회는 새로선출된 대통령 취임식의 국빈이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어머니들은 매주5월 광장의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걷는 일을 계속해나갔고, 그 전까지두려움 때문에 동참하지 못했던 수천 명이 어머니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들은 매주 목요일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시계 반대 방향으로 걷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 P364

하지만 영원히 영웅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라앉는다는 것은 혁명의 본질이다. 가라앉는 것은 실패하는 것과는 다르다. 혁명은 낡은 기성 제도들의 무지몽매함을 조명하고 새로운 가능성을계시하는 번갯불이다. 혁명의 빛을 받았던 것을 예전 그대로 바라보기란불가능하다.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모종의 절대적 자유, 혁명이 극에 달했을 때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품는 희망 속에서만 생겨나는자유를 위해서다. 혁명으로 독재자를 몰아낸 경우도 있지만, 또 다른 독재자가 나타나서 인민을 협박하고 예속하는 다른 방법을 들여오는 경우도 있다. 혁명으로 모두가 투표권을 확보하기도 하고 식량과 정의를 아쉬운 대로 확보하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자동차들이 도로를 뒤덮고포스터는 자취를 감추고 혁명가들은 주부나 학생이나 청소부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내 마음은 다시 사사로워진다. - P369

1870년에 영국의 채텀에서 열아홉 살의 캐럴라인 와이버그는 선원과 산책을 나갔다. 산책은 이미 오래 전에 구애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산책은 돈이 안 들고, 연인들에게 공원에서든 광장에서든 큰길에서든 샛길에서든 부분적인 사적 공간을 마련해준다.(연인의 오솔길 같은 으슥한 곳은 완전한 사적 공간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행진은 한 집단이 연대를 확인하고조성하는 방법인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나란히 걷는다는 이 섬세한 행위는 두 사람이 감정적, 육체적으로 한 편이 되는 방법인 것 같다. 두 사람이 처음 한 쌍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그렇게 함께 저녁을 보내고 함께 거리를 지날 때, 그렇게 함께 세상을 누빌 때인 것 같다. 함께 걷는 행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는 다르면서도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가장 비슷한 그 행위를 통해서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 필요나 대화를 피하게 해주는 다른 일에 열중할 필요도 없이 함께 있음을 한껏 누릴 수 있다.  - P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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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 이런 문학은 이상향의 문학(근본적으로 잘못된 점이 없는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따라서 주인공(건강하고 경제적 기반을 갖췄으며 매인 데가 없는 인물)이 가벼운 모험을 찾아 나설 수 있다. 이상향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자기 자신의 생각, 동료들의 성격, 그리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과 주변 환경 정도다. 안타깝게도 이런 장거리 여행 전문 작가가 지루하지 않은 사유를 펼치는 경우는 별로 없고, 그 사람과 한블록을 함께 걷기가 지루하다면 그 사람이 6개월을 걸은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점이 멀리까지 걸어갔다는 사실뿐인 사람에게 걷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듣는 것은 파이 먹기 대회에서 우승을 한 것이 유일한 이력인 사람에게 음식에 대한조언을 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양보다 질이다. 하지만 뮤어는 질도 뛰어나다.  - P208

자신을 둘러싼 자연계의 예리한 관찰자인 한편, 수시로 열광에빠지는 관찰자인 뮤어는 자기가 왜 걷는지에 대해 『멕시코 만까지 걸어서 1000마일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몸은 튼튼한데 돈은 없고, 내가 좋아하는 식물 연구를 실컷 하려면 걷는 것이 제일 좋다는 것은 굳이듣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어쨌든 뮤어는 역사에 길이 남을 뛰어난 보행자 가운데 한 명이면서도 좀체 보행 그 자체를 주제로 삼지 않는다. 보행 수필과 자연 수필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존재하지는 않지만, 자연 수필에서는 보행이 나오는 경우가 별로 없고 나온다고해도 기껏해야 배경, 즉 눈앞의 자연과 만나게 해준 수단일 뿐 주제로 다뤄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육체과 영혼이 주변 환경 속으로 사라져 없어지는 것 같다고 할까. 다만 뮤어의 글에서는 뮤어의 육체가 다시 나타나는 때가 있다. 이상향 문학의 주인공이 누리는 행운이 고갈될 때, 돈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굶주릴 때, 그리고 나중에 중병에 걸렸을 때가 그 - P208

것이다. 소로의 보행 기록들은 보행 수필이라기보다는 자연 수필, 곧 자가를 둘러싼 자연과 그 속을 걷는 자기의 경험을 똑같이 과학적으로 관찰하는 종류의 글이다.
뮤어가 그렇게 걸은 지 17년이 지났을 때, 찰스 루미스(Charles F.Lammis)라는 또 한 명의 이십 대 청년이 더 먼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는신시내티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미국의 떠돌이(TrampAlons the Continent)』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한다. "왜 걸어가? 기차 노선이 없는 것도 아니고, 풀만[Pullman, 안락한 설비가 갖춰진 특별 객차옮긴]도 많은데, 걸어갈 이유가 없잖아? 오하이오에서 캘리포니아까지 걸어가겠다는 나의 말에 정말 많은 친구들이 던진 질문이었다. 걷는 즐거움을 위한여행 중 기록상으로 가장 긴 이야기 앞에서 독자들도 똑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을 쓰는 사람의 머릿속에는 걷는 기쁨에 대한생각과 함께 친구들, 독자, 기록에 대한 생각이 있다는 뜻이다. - P209

하지만 그가 내놓는 대답은 좀 다르다. "내가 추구한 것은 시간이나 돈이 아니었다. 내가 추구한 것은 생명이었다. 그것은 건강 지상주의자가 추구하는한심한 생명이 아니라(나는 완벽하게 건강했고, 운동선수로서 체력이 단련돼 있다.), 좀 더 참된 의미의 생명, 좀 더 폭넓고 좋은 의미의 생명, 곧 사회의안타까운 장벽들을 넘어선 곳에서 완벽한 육체와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느껴지는 그 용솟음치는 기쁨이었다. [………] 나는 미국인이지만 그때는 미국이라는 나라를 잘 몰랐고, 잘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미국을 잘 모른다." 79쪽을 더 읽고 나면, 그가 잠시 동행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 사람은 긴 여행을 통틀어 내가 만난 유일하게 살아 있는 진짜 보행자였다. 그런 사람과 함께수 킬로미터를 걸으며 얼어붙은 길을 이야기로 녹이는 일에는 얼얼한 묘 - P209

정원에서 자연으로미가 있었다." 허풍이 심한 루미스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터프함이 서부의 총잡이도 이기고 방울뱀도 이기고 눈보라도 이긴다. 심각한 트웨인풍(風) 농담은 불발로 끝날 때가 많다. 반면에 남부 사람들과 땅에 대한커다란 애정, 그리고 자기를 깎아내리는 일화들은 장점에 속한다.(그 당시만 해도 남부에 애정을 표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여하간 이 책이 터프함과 길 찾기 능력과 적응력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인 것은 분명한다. 북미의 장거리 도보 여행은 신사들의 도보 유람과는 완전히 달랐다. 잉글랜드에서하루 종일 걷는다면 술집이나 여관(요즘은 호스텔)이 나오기 마련이다. 하지만 미국에서 계속 걷는다면 오지 한복판에서 밤을 보낼 가능성이 높고, 아니더라도 최소한 그 정도는 고속도로와 적대적인 도심 등 잉글랜드와는 스케일이 다르게 꺼림칙한 공간들을 맞닥뜨릴 것이다. - P210

이런 장거리 도보 여행은 세 가지 동기의 결합인 듯하다. 장소의 자연적·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것,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기록을 세우는 것. 아주 긴 여행은 일종의 순례로 여겨질 때가 많다. 달리 말하자면, 장거리 여행이 영적 발견이나 실리적 발견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자 일종의 믿음 내지 의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기능하는 것이다. 또 여행이 흔해지면서 여행 작가들이 더 극단적인 경험, 더 멀리 있는 장소를찾아 나서기도 했다. 그런 유형의 글을 보면, 여행한 사람보다는 여행 자체가 이례적이어야 읽어볼 가치가 있다는 전제를 내포한다.(버지니아 울프는 연필을 사러 나갔던 런던의 어느 날 밤에 대한 뛰어난 수필을 썼고, 제임스 조이스는 어느 땅딸막한 광고업자가 더블린의 길거리를 걸어 다닌 이야기로 20세기 최고의 소설을 썼지만 말이다.) 작가에게 장거리 도보 여행은 내러티브의 연속성을 마련하는 쉬운 방법이다. 내가 이 책 앞부분에서 말했듯 한 번 걸어가는 길이 한 편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면, 계속 걸어가는 일은 일관성 있는 - P210

이야기가 될 수 있고, 아주 오래 걸어가는 길은 긴 책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요즘에 나오는 책들의 논리인데, 아주 틀린 논리는 아니다. 걸을 때는눈앞에 나타난 것들을 그냥 뛰어넘기보다 자세하게 관찰하게 되고, 많은일을 온몸으로 겪게 되고, 현지 사람들이나 장소들과 접촉하게 되기 때문이다.한편 걷는 일 자체에 온 힘을 쏟아붓는 탓에 주위 환경에는 관심을 가지지 못하는 도보 여행자도 있다. - P211

 "매일 30킬로미터씩 날마다 몇달을 걸어가다보면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비로소 깨닫게 되는것들이 있다. 일례로 나는 과거에 일어났던 모든 일과 만났던 모든 사람을 세세하고 선명하게 기억했다. 내가 나눴던 모든 대화 엿들었던 모든단어 하나하나가 기억났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유년 시절까지 기억났다. 이런 식으로 나는 과거의 사건들을 정서적인 거리를 두고 돌아볼 수있었다. 마치 이런 일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나는오래전에 죽은, 잊고 있었던 사람을 다시 발견하고 새롭게 알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는 행복했다. 행복했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그녀는 우리를 철학자의 영역, 걷기를 다루는 수필가의 영역으로데려가며 걷기와 정신의 관계를 알려준다. 그녀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거의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극단적인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 P213

캠벨이 걷는 이유는 많은 경우 명분 있는 모금을 위해서였다. 그 점에서는 걷기 마라톤 참가자들과 비슷한 데가 있다.(캠벨이 스태프 인건비, 홍보비 등 종종 크게 불어나는 여행경비 마련을 위해서 명분을 물색한 것이라고 말할수도 있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하루에 80킬로미터를 걷는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또 그렇게 걷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음습한 날씨에 황량한 도로를 날마다 그렇게 걸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아웃백을 도파한다는 것은 지독한 일이다. 그 일을 캠벨은 해냈다. 95일 만에 5000킬로미터 오스트레일리아 횡단에 성공한 것은 세계 신기록이었다. 그녀의 두 다리는 목표를 향해서 가차 없이 매진하지만, 그렇게 걸은 후에 남는 것은 걸었다는 사실밖에 없다. 아름다운 풍경도, 즐거움도 없고, 사람들과의 만남도 거의 없다. 12만8000킬로미터를 걸어가는 그녀의 목표는 자신을 옥죄는 고통을 두 발로 털어내고 자기 자신을찾는 것이지만, 그녀가 자기의 가치를 설파하는 대목들은 걱정스러우리만치 불투명하다.  - P216

캠벨은 우리에게 그냥 걷기만 하는 순수한 보행이 어떤 것인지를보여준다. 보행을 중요한 행위로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불순함이다. 보행이 풍경, 생각, 만남과 불순하게 뒤섞일 때, 걸음을 옮기는 육체는 마음과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된다. 그리고 그럴 때 세상이 마음에 스며든다. 이런 책은 역설적으로 보행이라는 주제가 다른 주제로 미끄러지기쉽다는 것, 걷는 것 자체에 집중하면서 다른 것들을 외면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걸어가는 사람의 성격, 걸어가면서 만난 사람들, 걸어갈 때 보이는 자연, 걸어가는 길에 해낸 일 등을 담고 있는 보행에 대한글은 다른 어떤 것에 대한 글일 때가 많다. 보행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는 글도 많다. 하지만 우리가 이 땅을 걸어 다니는 이유들의 역사, 또한 구불구불 이어져온 200년의 역사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보행 수필과 여행 문학의 정전들로 구성되어 있다.  - P217

보행 문화가 이렇게 걸어왔다면, 우리 셋은 숲을 벗어나서 시내가흐르는 아름다운 고원들을 가로질렀다. 1968년에 시에라 클럽의 마지막등반 여행 몇 건을 이끈 것이 마이클과 발레리였다. 전설적인 등산가이자괴팍한 ‘산속의 노인‘ 노먼 클라이드(Norman Clyde)가 아직 참여하는시기였지만, 단체 캠핑과 단체 등산의 여파가 시에라 클럽을 곤혹스럽게만들기 시작했던 때이기도 했다. 등반 여행 전통이 막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우리 셋이 모노 패스로 가는 길에 본 들꽃은 내가 그지점에서 500킬로미터 미만 거리에 있는 마린 헤드랜즈에서 3월에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였다. - P251

즐거움을 위해 걷는 일은 인간의 가능성을 구성하는 레퍼토리 중 하나가되었고, 그 가능성의 실현을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세상을 바꾸는 작업에 나섰다. 그 결과로 세상은 일종의 정원, 요컨대 모두가 출입할수 있는 담장 없는 정원이 되었다. 보행 단체들이 발로 그린 땅은 나라마 - P272

다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고 있다. 미국에는 곳곳에 조성된 국립공원들과 함께 광범위한 정치운동으로 만들어진 지형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지좋은 21개국으로 퍼져나가는 수백 개의 숙소와 함께, 각양각색의 환경주의 취향을 가진 50만 명 이상의 야외 애호가들이 만들어냈다. 영국의 지좋은 2만 2500킬로미터의 산길과 함께 지주를 대하는 공격적 태도로 이루어져 있다. 보행이 지금의 세상을 형성해온 세력 중 하나라고 할 때, 보행이라는 세력은 경제 세력에 맞서는 경우가 많았다. - P273

자유롭게 걸을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은 또 있었다. 이 장에서는 오직 자연과 시골 공간을 위해 싸운 사람들을 주로 다루었지만,도심의 공원 조성과 관련해서도 풍요로운 역사가 있다. 예컨대 센트럴 파크는 뉴욕을 떠날 만한 여유가 없는 도심 주민에게 전원의 미덕을 선사한다는 민주적·낭만적 기획이었다. 한편 자유로운 육체는 자유로운 시간이나 자유롭게 걸을 장소에 비해서 미묘한 주제다. 초창기 시에라 클럽에서 샤프롱을 동반하지 않은 여자들이 반바지를 입고 등산을 하거나 솔가지를 모아 침대로 삼았듯, 캘리포니아에서는 육체의 자유를 위해 걸었다기보다 걸음으로써 육체가 자유로워졌다. 의복이 여자를 얕은 호흡, 좁 - P273

은 보폭, 불안정한 균형이라는 예의범절 안에 가두어두는 감옥의 역할을하는 빅토리아 시대였기 때문이다. 또 초창기 독일과 오스트리아 야외활동 단체들의 나체주의에서도 알 수 있듯, 어떤 사람들에게는 산에 가는 일이 에로스를 포함한 자연스러움 전체를 받아들이는 포괄적 기획의일부였다. 나체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옷은 몸이 드러나는 편한 반바지였다. 한편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파란 하늘 아래에서 활보할 권리를 위해 투쟁했는지는 엥겔스(Friedrich Engels)의 『영국 노동자계급의상태를 읽어보기만 해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책은 공장 노동자들의육체에 기형과 질병을 초래할 정도로 처참한 생활환경과 노동환경을 고발한다. 요컨대 자연 속을 걷는 일은 중류층의 육체를 집과 사무실에 갇혀 있는 시대착오적 물건으로 변형시키는 환경, 노동자의 육체는 공장의기계 부품으로 변형시키는 환경에 대한 거부반응이었다.
자연으로 걸어 나간 이 역사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루소와 워즈워스라는 두 작가는 사회적 자유와 자연에 대한 사랑을 연결시켰다. 이후의 보행 문화는 보이스카우트, 야외장비 산업 등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지만, 다행히도 루소와 워즈워스는 거기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보행 단체들은 보행의 이상이 자연 속을 막힘없이 자유롭게 걸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그 이상을 심어주었다. - P274

오랫동안 뉴멕시코의 시골에서 살던 나에게는 샌프란시스코가 낯설게느껴졌다. 그해 봄의 풍요로움까지도 도회적으로 느껴졌다. 화려한 도시불빛의 유혹을 노래하는 모든 컨트리 음악을 그제야 비로소 이해할 수있었다. 5월의 향기로운 낮과 밤을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보냈다. 산책이 수많은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하고, 문 밖을 나서기만 하면 그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에 전율하기도 했다. 모든건물 입구, 모든 가게 입구는 다른 세계로 통하는 출구인 듯했다. 다양한인생의 가능성이 압축돼 있는 곳, 다양함이 다채로움을 만들어내는 곳이었다. 일본의 시, 멕시코의 역사, 러시아의 소설이 아무렇게나 꽂힐 수있는 책꽂이처럼, 내가 사는 도시의 건물들에는 선(禪) 연구소, 오순절교회, 문신 시술소, 채소 가게, 부리토 가게, 극장, 딤섬 가게가 들어차 있었다. 더없이 평범한 것들이 내게는 신기해 보였고, 길거리의 사람들은나의 삶과 아주 비슷하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한 삶의 단면들을 무수히 엿보게 해주었다. - P277

면서 바구니를 만들 만한 줄기가 있는지 살펴보듯이, 도시 보행자는 늦게까지 문을 여는 식료품 가게나 구두 수선 가게 같은 곳을 기억해둘 수도 있고, 먼 길을 돌아서 우체국에 들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시골 보행자는 흔히 전체 풍경, 전체적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고 그때의 풍경은완만하게 변화하는 연속체로 펼쳐진다. 예컨대 멀리서 산을 바라보면서걷다가 그 산에 올라가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나, 숲에서 나무가 듬성듬성해지다가 어느새 초원이 될 때의 풍경처럼 말이다. 반면 도시 보행자는 특정한 것들(기회들, 사람들, 필요한 물건들을 찾아다니게 되고 그때의 풍경은 급한 변화 속에 펼쳐진다. 물론 도시가 원시생활과 더 비슷하다는말에는 부정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인간이 아닌 포식자의 개체 수가 북아메리카에서는 급격히 감소했고 유럽에서는 아예 멸종했지만, 그런 지역에서도 도시 보행자는 인간 포식자가 나타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계속 (최소한 특정 시간과 특정 장소에서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P282

고향으로 돌아와서 처음 몇 달 동안 모든 것에 너무 매료된 나는 산책 일기를 써나갔다. 그 멋진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일곱 시간 동안 거의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음을 갑자기 깨달음. 신경은 날카로워지고, 등은 굽고. 필모어 스트리트 위쪽 클레이 극장에 갈까 하고 집을 나옴. 가는 길에 브로더릭 스트리트에서 처음 보는 길 하나를 발견함. 임대주택 단지 근처인데, 예쁜 단층집들이 옛날 빅토리아 시대풍이었음. 너무 잘 아는 장소에서 모르는 장소가 튀어나올 때 언제나그렇듯 기분이 좋았음. 「각자의 고양이를 찾아서(Chacun cherche son chat)」라는 영화를 봄. 바스티유 광장 동네에서 혼자 사는 젊은 파리지엔느가사라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웃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 - P282

이야기. 평범한 사건들,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관계들, 건물의 옥상들, 불분명하게 발음되는 속어들로 가득 극장을 나오니 들뜬 기분. 검은밤, 진주색 안개. 빠른 걸음으로 돌아오는 길. 일단 캘리포니아 스트리트를 따라 걸으면서 한 쌍의 남녀를 지나감. 여자는 평범, 남자는 고급 갈색양복 차림에 오다리. 한동안 다리에 부목을 댔었나. 그렇게 버스를 그냥보냄. 디비자데로 스트리트에서 또 그 버스를 그냥 보냄. 어느 골동품 가게 진열창 앞에서 걸음을 늦추고 커다란 꽃병을 구경함. 꽃병은 크림색,
꽃병에 그려진 중국 현자들은 파란색. 길을 좀 더 내려오다 보니 어느 가게 앞에서 머리가 벗겨진 중국 남자가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진열장 높이로 안아 올림. 가게 안에 있는 여자가 진열창 너머로 아이와 장난침, 내가 너무 웃어 보였는지 그 사람들이 당황함. 밤 산책의 인공적 조명과 자연적 어둠이 낮의 연속체를 연극 속 활인화, 비네트, 세트피스로 탈바꿈시키는 방식들. 가로등을 하나하나 지나가는 나의 그림자가 커졌다 작아졌다 할 때의 어두운 설렘. 길을 건너갈 때 신호등이 바뀌길래 차를 피하느라 달리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단숨에 몇블록을 더 뛰어감. 더워지는 것이 단점. - P283

디비자데로 스트리트를 쭉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들, 문 연 곳들을주시(주류판매점, 담배 가게), 내가 사는 스트리트와 만남. 교차로에 서 있는데 젊은 흑인 남자(와치캡, 검은 옷)가 나를 향해 엄청난 속도로 달려 내려오길래 만약을 위해서 주위를 둘러봄. 무슨 편견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나한테 질주해왔다면 신경이 쓰였을것 같음. 그는 내가 주춤주춤하는 것을 보더니 더없이 상냥한 청년의 목소리로 ‘쫓아온 거 아니고요, 약속에 늦어서.‘라고 말하면서 달려가고,
나는 ‘조심해서 가요.‘라고 말함. 그가 내가 가는 길로 앞서 가고 나도 생 - P283

각을 정리할 여유가 생겨서, ‘의심하는 사람같이 보였으면 미안한데, 너무 빨리 달려와서.‘라고 말함. 그가 웃고 나도 웃음. 그러고 나니까 최근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과 마주쳤던 일들이 다 떠오름. 그냥 인사해오는 것을 보고 말썽을 일으키려는 줄로 오해할 뻔 했던 일들. 이제여유 있게 대처할 수 있게 된 데 뿌듯함을 느낌. 그러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어느 건물 꼭대기 층 창문에 붙어 있는 만 레이 ((Man Ray)의 동정을살필 시간 (A Pheure de Pobservatoire: les Amoureux)」(해 지는 하늘에 길쭉한 붉은색 입술이 떠 있는 그림)의 포스터가 보임. 어젯밤인가 그젯밤에 시내 어느 다른 건물 창문에서 본 그림과 똑같음. 오늘밤에 본 그림이 더 큼. 오늘밤이 더 활기참, 「동정을 살필 시간을 두 번 보다니 신기함. 집에 오는 데 20분도 안걸림." - P284

길거리는 건물이 없는 빈 공간이다. 집 한 채는 빈 공간이라는 바다에 떠있는 섬이다. 도시보다 앞서 존재한 소읍은 그저 그 바다에 떠 있는 군도였다. 그러나 건물이 점점 많아짐에 따라 군도는 육지가 되었고, 바다였던 빈 공간은 넓은 땅 사이로 흐르는 강, 운하, 개울이 되었다. 예전 사람들이 시골 땅이라는 바다를 아무렇게나 지나다녔다면, 이제 사람들은거리를 따라 지나다니게 되었다. 물길의 폭이 줄어들면 물살의 강도와속도가 늘어나듯, 빈 공간이었던 곳이 거리가 되면 보행자들의 흐름이방향과 세기를 갖게 된다. 대도시에서는 장소뿐 아니라 공간도 설계 대상이다. 실내에서 먹거나 자거나 신발을 만들거나 사랑을 하거나 음악을하는 일과 마찬가지로, 걷거나 주변을 둘러보거나 공공장소에서 시간을보내는 것이 주요한 설계 목적이라는 뜻이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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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대의 과학자들은자신의 조상이 아프리카인이라는 것도 싫었고, 뇌는 작으면서 두 다리로 서서 걸어 다닌 때가 있다는 증거, 즉 우리가 머리가 좋아진 게 진화의초기가 아니라 후기였으리라는 증거를 받아들이기도 싫었던 것이다. 인간의 머리뼈 하단에는 척수와 뇌를 연결하는 큰구멍 (foramen magnum)이있는데, 타웅 아이는 그 큰구멍이 원숭이처럼 뒤쪽에 있지 않고 지금 우리처럼 머리뼈 중간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타웅 아이가 직립보행을 했으리라는 증거, 곧 머리가 척추에 매달려 있지 않고 척추 위에 세워져 있었으리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신 유인원의 머리뼈가대개 그렇듯이, 타운 아이의 머리뼈도 현대인이 보기에는 균형이 안 맞는 건물 같다. 예를 들면 눈썹과 턱의 돌출부에 해당하는 포치는 엄청나게 튀어나와 있고, 오늘날 뇌가 커진 공간에 해당하는 다락방은 아예 없다. 대부분의 초기 진화론자들은 보행, 생각, 창조와 같은 우리의 인간적 속성들이 같은 시기에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인간성의 한 부분만 갖고 있는 생물체를 상상하는 일이 어렵거나 불쾌해서가 아니었을까 싶다. - P65

팻의 오두막집을 떠나는 날 아침, 나는 국립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출발 지점은 팻이 암벽등반을 가르치고 있는 곳이었고, 보행 속도는 더위나 갈증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갈 때 보이는 풍경과 올 때 보이는 풍경이 전혀 다르니까 가는 길에 수시로 뒤돌아보면서 오는 길에 보일 풍경을 미리 봐놓아야 한다. 나에게 이 말을 해준 사람은 팻이다. 팻에게 이말을 해준 사람은 팻의 아버지다. 암벽들이 돌섬이나 돌무더기처럼 촘촘하게 뭉텅이져 있는 그 헷갈리는 풍경 속에서는 과연 좋은 충고다. 각각의 암벽이 고층 건물만 하고, 실제로 고층 건물처럼 시야를 가로막는다. 다른 사막에서라면 길을 찾을 때 멀리 보이는 풍경에 의지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때그때 지형지물을 알아놓아야 한다. 아침 해를 왼쪽으로 두고 남쪽으로 향한 나는 큰길을 가로지르게 될 샛길로 들어섰다. 이샛길 한복판에서는 풀이 자라고 있었다. 작은 도마뱀들이 나를 피해 덤불로 푸드덕 뛰어들자 응달 곳곳에서 신록의 풀들이 바스락거렸다. 두세 - P80

주 전에 폭우가 쏟아진 후로 더욱 뾰족해진 풀잎들이었다. 남서쪽으로휘어지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큰길로 이어질 샛길을 벗어나 길없는 거대한 사막을 느릿느릿 가로질렀다. 참으로 오랜만에 구속을 벗어난 느낌, 서두르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을 맛보았다. 사막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걷다가 사유지에 길이 막힌 나는 둥그렇게 돌아가는 길로 들어섰다. 왔던 길은 아니지만 팻이 있던 암벽 뭉텅이로 이어지는 길일 것 같았다. 그러다가 길을 잃게 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지평선에서산맥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굽잇길이었다. 어느새 아까 벗어났던 그샛길이 나타났다. 지난 며칠 동안 그 길로 지나간 이들의 희미한 발자국위로 내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나는 한 시간 전의 내가 지나갔던 흔적을 거꾸로 되짚어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다. - P81

보행의 시작에 아프리카, 진화, 필요가 있었다면, 보행의 끝에는 온갖 것이 있다. 보행이 보통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라고 할 때, 순례라는보행은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찾으러 떠나는 행위다. 우리는 순례중이었다. 잣나무와 노간주나무 사이로 이어진 붉은 흙길에서는 석영 자갈과 운모 조각, 매미들이 17년의 시간을 보낼 땅속으로 들어가며 벗어놓은 허물이 한데 섞여 반짝거리고 있었다. 돌과 매미 허물로 포장된 이상한 길, 뉴멕시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화로우면서 누추한 길이었다.
그날은 ‘성(聖)금요일‘이었고, 우리는 치마요로 가는 길이었다. 그날의 치마요행(行) 크로스컨트리 모임의 여섯 명 중에서 나는 최연소 참가자이자유일한 외부인 참자가였다. 모임은 며칠 전, 나를 포함해서 몇 사람이 그레그에게 동행을 부탁하면서 결성되었다. 그중 두 명은 그레그의 암 생존자 모임 사람들 (측량기사와 간호사)였고, 한 명은 내 친구 메리델이 데려온 이웃사람 데이비드(목수)였다. - P82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에서 이 점을 포착하고 있다. 마리아 공주는 자기 집 앞으로 지나가는 무수한 러시아 순례자들에게 먹을 것을내주면서 모종의 열망을 느낀다. "그녀는 순례자들에게 이야기를 청해들을 때가 많았다. 그들의 소박한 말투,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하지만 그녀의 귀에는 깊은 의미로 가득한 것처럼 들리는 그 말투에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했던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길을 나설 뻔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럴 때 이미 그녀는 누더기를 걸친 차림으로 보따리와 지팡이를 들고 흙먼지 자욱한 길을 걸어가는 자기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곳의 목적지를 향해 명료하고 검소하고 강렬하게 나아가는 고상한 은둔자의 삶을 상상한다. 순례자의 발걸음은 단순 명료함의 표현이자 목적의식의 표현이다.  - P91

낸시 프레이(NancyFrey)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의 긴 순례길에 대해 이렇게말한다. "순례자가 걷기 시작하는 순간 세계를 느끼는 방식 몇 가지가 한꺼번에 변하는데, 그 변화는 여정 내내 이어진다. 시간 감각이 바뀌고, 오감이 예민해지고, 자기 몸과 자기 몸을 둘러싼 자연경관에 대한 새로운인식이 생긴다. [......] 그것을 한 독일 청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걷는 경험 속에서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사유가 된다. 자신으로부터도피하기란 불가능하다." 순례길에 나선다는 것은 가족 관계, 애착 관계, 지위, 의무와 같은자신의 복잡한 세속적 자리를 뒤로하고 일개 순례자로서 걸어간다는 뜻이다. 순례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다. 은총과 헌신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터너 부부는 순례를 경계선 상태(liminality)라 말한다.  - P91

나는 몇 달 째 냉장고에 맷 헤론(Matt Heron)이 찍은 1965년 셀마 몽고메리 행진 사진을 붙여놓고 있다. 행진의 감동을 잘 보여주는 이 사진에서 행렬은 서너 명씩 한 줄 한 줄 안정적으로 이어지며 사진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움직여나간다. 사진 속의 사람들이 구름 낀 하늘 쪽으로높이 솟아 있는 것을 보면, 땅에 엎드려서 찍은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사진속 사람들은 자신이 변화를 향해 걸어 나가고 있음을, 그러면서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음을 알고 있는 듯하다. 크게 내딛는 발걸음, 높이들어 올린 손, 자신 있는 자세는 역사와 마주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있다. 그들은 이 행진에서 역사를 견디는 대신 역사를 만들어내는방법을, 자신들의 힘을 가늠해보고 자유를 시험해보는 방법을 발견했다. 마틴 루서 킹의 우렁차고 호매한 연설에서 메아리치는 운명의 감각과 사명감이 사진의 움직임에 표현되어 있다. - P104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먼저 간 사람의 해석을받아들인다는 것, 학자나 탐정이나 순례자처럼 먼저 간 사람의 뒤를 밟는다는 것이다. 같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어떤 중요한 일을 똑같이 따라한다는 것이다. 같은 공간을 같은 방식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같은 생각을 하는 방법, 같은 사람이 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따라한다는 것은 그 누군가의 행동을 흉내내는 연기가 아니라, 그 누군가의 영혼을 닮기 위한 노력이다. 순례가 다른 모든 보행과 다른 점은 이렇게 반복과 모방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신을 닮기란 불가능하지만, 신이 걸어간길을 똑같이 걸어가는 일은 가능하다. 예수가 인류의 실족(Fall)을 대속하는 과정에서 가장 인간적인 모습, 발을 헛디디고 진땀을 흘리고 상처입고 세 번 넘어지고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14처에서다. 하지만 이 14처가 어느 성당에서나, 아니, 아무 데서나 볼 수있는 일련의 그림이 되면서, 신도들이 따라가는 것은 이제 수난의 장소가 아니라 수난 이야기가 되었다. 성당에 그려진 14처는 신도들이 예루살렘으로 걸어 들어가는 통로,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이야기 속으로들어가는 통로이다. - P117

이렇듯 한 편의 이야기와 한 번의 여행 사이에는 특별한 관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는 글을 쓰는 일이 걷는 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상의 영토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일, 혹은 익숙한 길 위에서 새로운 면들을 가리켜 보이는 일이다. 글을 읽는 일은 저자라는 가이드를 따라가는 일이다. 우리가 그의 말에 항상 동의하거나 그를 항상 신뢰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가이드가 우리를 어딘가로데려다주리라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내가 쓰는 모든 문장들이 한 줄로멀리까지 이어지면서 글이 곧 길이고 독서가 곧 여행임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실제로 계산을 해본 적도 있었는데, 실이 둘둘 말려 있는 실타래처럼 글이 빽빽이 차 있는 책을 한 줄로 쭉 풀면, 내가 쓴 책 한권의 길이는 6킬로미터가 넘는다). 펼치면서 읽는 중국 족자에는 이런 의미도 담겨 있지 않을까. 풍경과 이야기 사이의 융합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는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의 노랫길(songline)이다. 노래는 깊은 사막 한복판에서 길을 찾는 내비게이션이고, 사막 속 풍경은 노래 속 이야기를 떠 - P122

올리는 기억 증진 장치다. 한마디로, 노래는 지도요 풍경은 이야기다.
이야기가 여행이고 여행이 이야기인 것은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상징적 길을 비롯해서 모든 길이 이런 울림을 갖는 이유는 우리가인생 그 자체를 여행으로 그려보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어떤 것인지를 그려보기가 어려운 것처럼 정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영혼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려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을 공간상에 존재하는 물리적 대상에 비유하게 된다. 그렇게 대상과 물리적, 공간적 관계를 맺게 되면, 대상을 향해 나아가거나 대상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시간을 공간으로 보게 되면,인생이라는 시간도 여행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살면서 실제로 여행을 많이 하느냐 적게 하느냐 같은 것은 상관없다. 보행과 여행은 우리가 하는생각과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너무나 중요한 비유로 자리 잡은 탓에 이제는 그것이 비유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 P123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 혹은 삶 그 자체를 여행에 비유할 때 가장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는 걷는 여행, 혹은 개인사의 풍경을 가로지르는순례자의 역정이다. 나 자신을 상상할 때 자주 떠오르는 이미지도 내가걸어가는 모습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승을 걷는 것(walk the earth)‘이고, 직업은 ‘이승의 행보(walk of life)‘이고, 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walking encyclopedia)‘이다. 구약성서는 은총을 받은 상태를 "하느님과함께 걸었다(he walked with God)"고 묘사한다. 걷는 사람, 즉 한곳에 머물 - P124

기보다 혼자 한 발 한발 앞으로 나가는 사람의 이미지는, 초원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유인원이든 시골길을 어기적어기적 걸어 내려오는 사뮈엘베케트(Samuel Beckett)의 등장인물이든 인간의 의미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걷는다는 비유가 비유이기를 그칠 때는 우리가 실제로 걸을 때다.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가 실제로 여행할 때 우리 삶은 실제의 삶(도착이 가능한 목표 지점, 확인이 가능한 진행 과정, 이해가 가능한 평가 결과가 수반되는 삶이된다. 비유가 행동과 하나가 된다고 할까. 미로를 걸으면서, 순례에 나서면서, 산을 오르면서, 어떤 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에게 할당된 시간을 글자 그대로의 길(오감을 통해서 영적차원에 접근하는 길)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걸어가는 것, 여행하는 것이 살아가는 것의 중요한 비유라면, 모든 걷기와 모든 여행을 통해(그중에서도특히 십자가의 길과 미로를 통해) 우리는 모종의 상징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수 있다. - P125

두 사람이 북부 잉글랜드의 페나인 산맥을 걸어서 넘었다는 것, 그리고그 전에도, 그 후로도 또 다른 여러 곳을 걸었다는 것은 참 특별한 일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 특별한 일이었는지를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걸어서 여행한 사람은 전에도 있었다. 더 먼 길도 있었고 더 험한 길도있었다. 영국 시골 지역에서 가장 험한 풍경들(산맥, 벼랑, 황야, 폭풍, 바다, 그리고 폭포)이 경탄의 대상이 된 것은 이 시인 남매가 태어나기 거의 30년전부터였다. 프랑스와 스위스에서도 등산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중이었다. 누군가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정인 몽블랑 정상에 처음 오른 것은 19세기가 시작되기 14년 전이었다. 많은 평자들은 워즈워스와 그의동행들이 보행을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그 무엇으로 만들었고, 이로써수많은 일들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이 제1세대 낭만주의자들이 보행 그 자체를 위한 보행, 즉 자연 속을 걷는 즐거움의 계보를 만들었다는것, 이로써 문화적 행위로서의 보행과 예술적 경험으로서의 보행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 P137

보행의 역사는 이렇듯 보행의 공간을 만든 또 다른 역사 속에 감추어져 있다. 18세기 내내 보행의 공간은 점점 더 넓어졌고, 아울러 보행의 문화적 의미는 점점 더 커졌다. 또보행의 역사는 취향에 근본적 변화가 일어난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격식에 맞는 것, 양식화된 것을 선호하는취향이 격식 없는 것, 자연 그대로의 것을 선호하는 취향으로 바뀐 것이다. 그 변화의 기원은 나태한 귀족계급과 그들의 건축에 일어난 변화라는 하찮은 역사에 불과하지만, 그 변화의 결과로 그 시대에 가장 전복적이면서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장소들과 관행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듯 보행 취향과 자연 취향이 트로이의 목마 같은 역할을 담당하면서, 많은 의미 있는 공간들이 민주화되기에 이르렀고, 20세기에는 귀족영지들을 에워싸고 있던 장벽들이 그야말로 허물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 P143

도보 여행 내내 냉대받는 기분을 느꼈던 독일인 여행자 모리츠는 사실노상에서 무수한 보행자들을 만났다. 그들에 대해서 신경 쓰지 않기는오늘날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예컨대 많은 사람들이 그리니치에서 런던까지 걸어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모리츠는 그들에 대해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런던의 세인트 제임시즈 공원에서 걷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록을 남겼다. "이 공원의 별볼일 없음을크게 상쇄해주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날씨가 좋으면 사람들이 모여든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여름의 가장 멋진보행로라고 해도 사람들이 이 정도로 모여들지는 않는다. 이렇게 모여든사람들은 대부분 잘 차려입었고 잘생겼다. 그런 사람들과 자유롭게 한데 섞이는 짜릿한 기쁨을 나는 오늘 저녁 처음으로 경험했다."사실 이글에서 모리츠는 영국이 독일에 비해 보행, 특히 공공장소에서의 보행을더 품위 있는 취미로 간주한다는 걸 말하고 있다. - P155

『오만과 편견』의 어디를 보나 걷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주인공은걸을 수 없는 상황만 아니면 온갖 곳에서 걷는다. 이 책에서는 결정적 만남이 성사되거나 결정적 대화가 오가는 순간이 두 등장인물이 함께 걷는 동안일 때가 많다. 이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점잖은 사람들(오스틴의 등장인물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걷는 일은 일상의 근간이었다. 잉글랜드에서 18세기 내내, 그리고 19세기 이후까지 보행은 특히 여자들에게 중요한 일상이었다. 도시 워즈워스가 1792년에 쓴 편지에 따르면
"그들은 시골 숙녀이기에, 보행이라는 시골 숙녀의 취미생활을 즐기는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보행은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남자들이 쓴 글을 보면, 정원을 설계하고 감상하는 내용이 많지만, 실제로정원을 걷는 사람들이 등장하는 글은 대개 여자들이 쓴 편지나 소설이다. 아마도 여성들이 일상을 더 세밀하게 다루기 때문이기도 하고, 잉글랜드 여자들(특히 귀부인들)이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기때문이기도 하다. 『오만과 편견의 여주인공 엘리자베스 베넷이 자신의 - P160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시간 사이사이에 한 일은 다량의 독서, 편지 쓰기, 약간의 바느질, 그런대로 들어줄 만한 피아노 연주, 그리고 걷기였다.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 후, 제인 베넷이 말을 타고 구혼자 빙리 씨의저택이 있는 네더필드로 가면서 감기에 걸린다. 동생 엘리자베스는 언니를 간호하기 위해 네더필드까지 걸어간다. 걸어가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기도 있지만(엘리자베스는 "말 타는 여자"가 아니고, 마차를 타고 가려면 두마리의 말이 필요한데 남은 말은 한 마리뿐이다.) 용감한 활기가 매력적인 여주인공답게 걷기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걸어가면 되잖아요.
가야 한다면 멀든 가깝든 상관없어요. 겨우 3마일인 걸요." 그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그녀의 비인습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첫 번째 신호다. 그녀는 그 거리를 걸어감으로써 자기 계급 여자들이 지켜야 할 예법을 위반한다. - P161

워즈워스라는 거대한 존재에 대해서 대부분의 다음 세대 시인들은 존경심과 적대감이 뒤섞인 감정을 가졌다. 그것은 토머스 드퀸시(Thomas DeQuincey)도 마찬가지였다. "두 다리에 일가견이 있는 모든 여성들이 그의두 다리에 신랄한 비난을 가했다. [……. 심하게 흉하게 생긴 것은 아닐뿐더러 평균치 인간의 다리에 비해서 많은 일을 해낸 다리였다. 믿을 만한자료를 토대로 계산해본 결과 워즈워스는 바로 이 다리로 28만2000~29만 킬로미터를 답파했다. 포도주나 독주 같은 것으로 혈기를 얻는 다른사람들과 달리 워즈워스는 이렇게 몸을 움직이면서 혈기를 얻었다. 워즈워스 자신이 구름 한점 없이 행복한 인생을 영위해온 것도, 우리 독자들이 워즈워스의 글 중에서도 아주 탁월한 글들을 읽을 수 있게 된 것도그 덕분이다."38 사람들은 워즈워스 이전에도, 이후에도 걸었다. 다른 낭만주의 시인들 중에서도 걸어서 여행한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워즈워스만큼 걷는 일을 인생과 예술의 중심에 놓은 이는 그 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 P171

그의 보행을 이해하려면 쾌적한 장소를 잠시 거닌다는 뜻의 ‘산책‘개념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동시에 낭만주의적 보행을 장거리 도보 여행이라고 규정하는 현대 저작물들의 또 다른 정의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에게 보행은 여행하는 방법이 아니라 존재하는 방법이었다. 스물한 살에 걸어서 3000킬로미터를 여행했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50년 동안은 시를 쓰기 위해 작은 정원 테라스를 왔다 갔다 했다. 그에게는 둘 다중요한 보행이었다. 파리와 런던의 길거리를 쏘다니고 산을 올라가는 것도, 여동생 혹은 친구들과 함께 거니는 것도 모두 중요한 보행이었다. 이모든 보행이 그의 시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앞서 보행을 사유의 과정으로 창안한 철학적 작가들을 다룬 장이나, 뒤에서 대도시 보행의 역사를다룰 장에서 그의 보행을 함께 다룰 수도 있었지만, 워즈워스 자신은 보행을 전적으로 새롭고 강력한 방식으로 자연, 시, 가난, 부랑과 연결 지었다. 도시보다 시골에 훨씬 가치를 두었음은 물론이다. - P172

 이 시가 그 모든 이탈과 우회에도 불구하고 한 편의 시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걷는 사람의 이미지가 되풀이되는 덕이다. 이 시의 독자는 워즈워스를 천로역정』의 크리스천 같기도 하고 「신곡」의 단테 같기도 한 형상, 다시 말해 두 발로 걸어서 온 세상을 여행하는 작은 형상으로 그려보게 된다. 단, 시에 나오는세상은 호수들, 춤들, 꿈들, 책들, 우정들, 그리고 많고 많은 장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서곡은 한 시인이 성장하기까지 어떤 곳을 거쳐 갔는가(이 도시는 어떤 역할을 했나, 저 산은 어떤 역할을 했나.)를 보여주는 지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이 시에서는 장소가 사람보다 중요하게 등장한다. 드퀸시가 워즈워스의 두 다리에 존경 어린 독설을 던졌듯, 수필가 월리엄 해즐릿(William Hazlitt)도 비슷한 어조의 재담을 던졌다. "그의 눈에보인 것은 우주, 그리고 자기 자신뿐이었다. - P174

워즈워스는 이렇게 길을 걷고, 이런 사람들을 던짐으로써 자신의 문체를 찾아나갔다. 그가 아주 초기에 쓴 시들은 고고하고 애매모호하면서 관습적 이미지들이 가득하다는 점에서 톰슨의 『사계절 양식인 데 비해, 그 후 혁명적 열정,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감적 동일시가 생겨나면서 그런 이류 풍경 시인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도러시의 글이 존슨 박사(Samuel Johnson)나 제인 오스틴 같은 심오한 아포리즘을 벗어나 묘사의 생생함과 현실성을 얻으면서, 비슷하게 변한 것도 1790년대 10년동안이었다.) 소재와 문체 둘 다 변화했다. 워즈워스가 서정 가요집 (LyricalBelds)』 (워즈워스와 콜리지가 1789년에 함께 낸 획기적 시집)을 되돌아보면서 쓴서문에 따르면, "요컨대 이 시들을 쓸 때 중요시했던 원칙은 서민 생활에서 펼쳐지는 사건이나 장면을 다루어야 한다는 것, 서민들이 실제로 쓰는 언어를 선별해 사건은 최대한 철저히 서술하고 장면은 최대한 철저히묘사해야 한다는 것, - P181

그러면서도 그 서술과 묘사에 상상의 빛깔을 가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 미천하고 조야한 이들의 삶을 주로 택했던이유는 그런 상태에 있을 때라야 근원적 희로애락이 더 나은 토양에서[......] 더 소박하고 더 강력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는 풍경에 대해서 말할 때 거창하게 일반화하거나 고전을 인유하는 대신 구체적으로 묘사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할 때도 그들이 우화 속의 등장인물인 양 미덕과 연민을 설교하는 대신 그들의 현실을 그려 보이고자 했다. 그가 더 소박한 언어를 택한 것은 정치적 행동이었고, 바로이 정치적 행동이 스펙터클한 예술적 결실로 이어졌다. - P181

워즈워스에게 보행은 시의 주제이기도 했지만, 시를 쓰는 방식이기도 했다. 그 방식이란 주로 걸으면서 소리내어 이야기하는 것이었던 듯하다. 같이 걷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고, 혼자 걸을 때는혼잣말을 했다. 그것 때문에 종종 우스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래스미어에 사는 사람들이 그를 좀 이상하게 보기도 했다. "딴 사람들한테는말을 많이 안 했는데 혼자서 그렇게 말을 많이 했더라고. 입모양을 보면알지. "머리는 앞으로 내밀고 두 손은 뒤로 하는 거야. 그 자세로 슬슬걷는 거야. 걷다가 걷다가 또 걷더니 딱 서는 거야. 그러고는 또 걷다가 걷다가 길 끝까지 쭉 걸어가는 거야. 그러더니 어디 앉아서 종이를 꺼내 뭘쓰는 거야."『서곡』에서 그는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개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가 걸어갈 때 모르는 사람이 다가오면 개가 그에게 입을 다물라는신호를 보내서 그가 미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것을 막아준다는 이야기이다.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였던 워즈워스는 예전에 보았던 장면의 시각적 디테일과 감정적 생생함을 그릴 수 있었고, 자기가 존경하는 시인들의긴 시구를 인용하거나,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쓴 시를 나중에 글로 옮길수 있었다.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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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의 글쓰기를 훔치고 싶었다. 현장에서 길어 올린 용감한 언어, 오래들여다본 자의 통찰, 성실함으로 쌓아올린 단단한 지성, 행간마다 일몰처럼 번지는 수려한 감성으로 빚어낸 글에 나는 매번 압도당했다. 걷기의 인문학』을 읽고 나니, 그 비결이 조금은 짐작된다. "몸을 통해 세계를인식하고 세계를 통해 몸을 인식"하는 걷기가 그 동력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직 몸으로 밀고 나가는, 걷기라는 곡진한 행위는 어떤 사람을 환경운동가로, 철학자로, 페미니스트로, 예술가로, 명상가로 만들어줄 수 있음을 이 팽창하는 텍스트는 증명한다. 그것을 증명하면서 솔닛은 그 모든 존재가 된다.
이 책은 때로 척척하고 울퉁불퉁한 길로 이끈다. 친절하거나 익숙하지 않다. 이대로 걷다 보면 어디가 나올지 힌트를 주지 않고 그렇기에‘우연한 발견‘이라는 기쁨을 선사한다. 이 얼마나 고마운가. 자신을 ‘다른자리‘에 데려다놓는 사람을 만나야 좋은 글을 쓸 수 있음을 알기에, 나는 솔닛의 지적 여정에,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잡는 걷기에 기꺼이 함께할작정이다."
-은유(작가)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볼 때가 있다. 봉우리나 지평선과 같은 곳을 바로 내가 걷고 있을 때다. 아무리 높고 멀리 있다 해도 걸어가는 한,바라볼 수밖에 없다. 덕분에 걷는 일은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바라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간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학적으로 걸어왔다. 그들의 걸음 덕분에 이 세계는 더 높이, 그리고 더 멀리 오게 됐다. 리베카 솔닛이 말하는 걷기란 바로 그처럼 이 세계를 좀 더 높고, 먼 곳으로 보내는 일, 즉 ‘진보‘를 뜻한다. 이 책에서 소개한 걷기의 달인들, 그러니까 장 자크 루소, 워즈워스 남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개리 스나이더, 존 무어, 발터 베냐민 등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모두, 진보주의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걸어간 길의 끝에서 인류는 다시 걸음을내딛는다. 세계 도처에서 사람들은 인종과 남녀의 차별을 메우기 위해걷고 있다. 걷기의 역사를 말하는 리베카 솔닛의 목소리에서 희망의역사를 듣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김연수(소설가)

"요리를 예찬하는 사람들은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보라. 그럼 당신이 누군지 말해주겠다‘는 문장을 믿지만, 걷기를 예찬하는 리베카 솔닛은 아마도 ‘당신이 어디를 걸었는지 말해보라. 그럼 당신이 누군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나에게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멋진 무기가 있음을 깨닫는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걸으면서 나 아닌 다른 것과의 소통을 꿈꾸는 나, 걸으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고, 걸음으로써 걷기 전과는 분명 달라진 나. 리베카 솔닛은 이책을 통해 눈부시게 증언한다. 더 많이, 더 오래, 더 깊이 생각하며 걸을때마다 조금씩 다른 존재가 되어가는 인간의 힘을."
-정여울(작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힘의 경험


지난해 한국사람들이 부정한 정권에 맞서 뭉치는 모습은 감동적이고 경이로웠습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공적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비무장 시민들이 엄청난 힘이라는 것, 때로 자치의 힘이기도 하고 때로 압제 정권, 불량정권을 막아내는 힘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입니다. 혁명을생각할 때 흔히 폭력, 군대 등을 떠올리지만, 많은 중요한 일을 해내는 것은 사실 폭력이 아니라, 군대나 군인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모인 시민사회입니다. 사람들의 의지에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 힘은 공적으로 가시화될 때,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발휘됩니다.
의지에 내재된 힘을 발휘하는 데는 일상의 경험을 통한 연습이 필요합니다. 길을 걸으면서 자기 몸의 힘을 느끼는 경험, 집 밖에서 집처럼 편하게느끼는 경험, 스스로를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고 느끼는 경험, 낯선 사람들과 공존하는 경험입니다.
21세기 들어 우리는 이 힘이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떨쳐 일어나는
- P9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네팔, 튀니지, 이집트, 폴란드, 아이슬란드,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서 비무장의 시민들이 하나로 뭉쳐 정권에 맞섰습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저투표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 하지만 민주주의란 종종 일종의 경험입니다. 공적 공간에서 육체적으로 한데 모이는 경험, 눈으로 확인하는 경험,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경험, 목표에 도달할때까지 걸어가는 경험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아름다운 힘의 경험입니다. 정의와 자유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힘이반세계화 운동에서 최근 사건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펼쳐지는 나라에서 이 책이 출간된다는 사실을 저자로서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 P10

내가 이 책을 쓴 것은 거의 20년 전입니다. 이 책이 담고있는 보행의 여러 가지 기쁨과 성과와 의미에 관한 이야기는 지금도 거의 그대로통할 듯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도시와 시골의 모든 열린 공간에서 자유롭게 걸을 가능성, 그 가능성을 위협하는 요소들은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점점 사적 공간에 틀어박히고, 점점 몸을 망각하고, 실리콘밸리가만들어낸 컴퓨터, 스마트폰, 온라인 기반의 여가 활동에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이런 현상이 지나치게 과도해질 때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삶의 기쁨, 삶의 역동, 그리고 그 밖의 삶의 중요한 것들에 대해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 정신과 육체, 내면의 성찰과 사회의 결성,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도시와 시골, 개인과 집단. 이 양쪽은 대립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립하는 듯한 두 항이 이 책에서는 보행을 통해하나로 연결됩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고 걸어가는 길이 실이라면, - P10

걷는 일은 찢어진 곳을 꿰매는 바느질입니다. 보행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입니다.

2017년 8월
리베카 솔닛 - P11

어디에서 시작할까? 근육이 긴장한다. 한쪽 다리가 기둥처럼 땅과 하늘사이에서 몸을 지탱한다. 다른 쪽 다리가 뒤에서 휙 옮겨 온다. 발바닥이바닥에 닿는다. 몸무게가 앞쪽 발볼로 쏠린다. 엄지발가락이 바닥을 밀어내면, 몸무게는 또 한 번 미묘한 균형을 찾아간다. 두 다리가 위치를 바꾼다. 그렇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이 이어지면서, 탁, 탁,탁, 탁, 보행의 리듬이 생긴다. 더없이 자명하면서도 더없이 모호한 이 보행이라는 주제는 어느새 슬며시 종교, 철학, 풍경, 도시 정책, 해부학, 알레고리, 그리고 애통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보행의 역사는 글로 쓰이지 않은 은밀한 역사다. 노래의 작은 패시지, 노상의 작은 패시지, 인생사의 작은 패시지, 그리고 책 속의 작은 패시지에서 그 역사의 편린들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육체적 보행의 역사는 직립보행과 인체 해부의 역사다. 대부분 보행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가는 데 필요한 대수롭지 않은 이동 수단으로서의 실용적 행동일 뿐이다. - P17

걸었기에 골목과 도로와 무역로가 뚫린 것이고, 걸었기에 현지의 공간 감각과 대륙 횡단의 공간 감각이 생겨난 것이고, 걸었기에 도시들, 공원들이 만들어진 것이고, 걸었기에 지도와 여행안내서와 여행 장비가 생긴 것이다. 멀리까지 걸어갔으니 걷는 이야기책들과 시들이 쓰인 것이며, 순례와 등산과 배회와 소풍을 기록한 방대한 분량의 책들이 쓰인 것이다. 역사의 풍경에는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우리를 역사의 현장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은 바로 그 이야기다.
걷기가 아마추어적 행동이듯 걷기의 역사는 아마추어적 역사다.
걸음의 비유를 쓰자면, 걷기의 역사는 허락 없이 남의 땅(해부학, 인류학,건축, 조경, 지리, 정치사와 문화사, 문학, 섹슈얼리티, 종교 연구)에 걸어 들어가지만 그중 어느 땅에도 머물지 않고 계속 먼 길을 걸어간다. 전문 영역이라는 땅을 진짜 땅(기름지게 경작되어 특정 농작물을 산출하는 반듯한 사각형의 농지)에 비유하면, 걷기라는 주제는 경계가 따로 없다는 점에서 진짜 걷기와 비슷하다. 걷기의 역사는 모든 땅의 일부이자 모두의 경험의 일부라는 점에서 무한한 역사다. - P18

걷기의 역사는 모두의 역사이며, 누가 쓰든 자기가 잘 다니는 길에 관해 쓸 수밖에 없다. 내가 따라가는 길이 유일한 길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봄날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걷기에 대한 글을 쓰려다가 말고다시 일어섰다. 책상 앞에서는 큰 생각을 할 수 없으니까 밖으로 나간 나는 골짜기 언덕을 올라 능선을 따라 걷다가 태평양 쪽으로 내려갔다. 버려진 군사기지가 드문드문 박혀 있는 골든게이트 북쪽 곳이었다. 유난히 습했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와 있었다. 언덕에는 내가 매년 잊었다가매년 다시 마주치는 기세등등한 풀빛이 가득했다. 비를 맞고 황금색에서흐린 회색으로 탈색된 작년의 풀들이 그 신록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활기찬 새 봄에 어울리는 색은 아니었다. 소로(Henry David Thoreau)는 이 대륙의 반대편에서 나보다 훨씬 더 활기차게 걸으면서 그곳 길에대해 썼다.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는 것은 큰 행복이다. 지금도 나는 이 행복을 언제라도 맛볼 수 있다. 두세 시간의 오후 산책은 언제나 나를 낯선 나라로, 내가 평생 가볼 수 있는 그 어느 나라 못지않게 낯선 나라로 데려다준다. 처음 가본 외딴 농가 하나가 다호메이 왕국의 모든 영지를 합한 만큼이나 좋을 때가 있다. 반경 10마일, 즉 오후 산책 한 번의거리 안에 있는 풍경이 보여줄 수 있는 것들과 70년이라는 사람의 한평 - P19

생 사이에는 실은 공통점이 하나 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가 걷는 길도 도로와 샛길을 합쳐서 구불구불 얼추 10킬로미터가 된다. 나는 힘들었던 10년 전 이 길을 걷기 시작했다. 걸으면 불안이떨쳐질까 해서였다. 그 후로도 나는 자꾸 이 길로 돌아왔다. 일을 쉬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고 일을 하기 위해서일 때도 있었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 P20

내 주위로 검은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바람에 날리기도 하고, 날개를 파닥거리기도 했다. 검은 나비들을 보니 또 옛날 어느 때가 떠올랐다. 장소를 넘나들다 보면, 시간을 넘나드는 일이 더 쉬워지는 것 같다. 계획에서 추억으로 넘어가고, 거기서 또 관찰로 넘어가고.
보행의 리듬은 생각의 리듬을 낳는다. 풍경 속을 지나가는 일은 생각 속을 지나가는 일의 메아리이면서 자극제이다. 마음의 보행과 두 발의 보행이 묘하게 어우러진다고 할까. 마음은 풍경이고, 보행은 마음의풍경을 지나는 방법이라고 할까. 마음에 떠오른 생각은 마음이 지나는풍경의 한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일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일이라기보다는 어딘가를 지나가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보행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두 발의 움직임을 따라가는 것은가능하잖은가 말이다. 걷는 일은 곧 보는 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 P21

보면서 동시에 본 것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고, 새로운 것을 이미 알고 있는것 속으로 흡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느긋한 관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색하는 사람에게 걷는 일이 특별히 유용한 이유도 그 때문일것이다. 여행의 경이와 해방과 정화를 얻자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도 좋겠지만 한블록을 걸어갔다 와도 좋다. 걷는다면 먼 여행도 좋고 가까운 여행도 좋다. 아니, 여행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제자리를 건는 것도 가능하고, 좌석벨트에 묶인 채 전 세계를 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보행의 욕구를 만족시키자면 자동차나 배, 비행기의 움직임으로는부족하다. 몸 자체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마음속에서 일이 일어나려면 몸의 움직임과 눈의 볼거리가 필요하다. 걷는 일이 모호한 일이면서 동시에 무한히 풍부한 일인 것은 그 때문이다. 보행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여행인 동시에 목적지다. - P21

걷는 사람에게는 모든 곳이 연결돼 있다. 걷는 사람이 실내와실내 사이의 공간을 점하는 방식은 실내에 있는 사람이 실내를 점하는방식과 같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은 세계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이런저런 실내가 아니라, 그런 실내들을 모두 포함하는 세계 그 자체다.
샛길은 오르막으로 휘면서 끝났고, 거기서부터는 유도미사일 발사장으로 올라가는 군용도로였다. 샛길을 벗어나 도로를 밟으면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보인다. 일본까지 이어지는 바다. 이렇게 샛길과 도로의 경계를 넘어서 바다를 마주할 때마다 기쁨의 충격이 나를 엄습한다. 아주맑은 날은 은박지처럼 빛나고, 흐린 날은 녹색이 되고, 비가 많이 오는 겨울에는 강의 상류에서 흘러내려오는 흙탕물 때문에 갈색이 되고, 비가갠 날은 유백색이 섞인 청색이 되는 바다. 다만 안개가 자욱한 날은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런 날 바다의 변화를 알려주는 것은 대기에 배어 있는 소금 냄새뿐이다. 그날의 바다는 온통 청색이었고, 흐린 수평선의은 안개가 푸른 바다와 구름 없는 하늘의 경계를 지우고 있었다.  - P27

바로 그때 뱀이 나타났다. 검은색 몸통에 노란색 줄무늬가 있는 가터뱀이었다. 작은 뱀은 구불구불 물결 모양으로 길을 가로질러 길가 풀숲으로 사라졌다. 넋을 잃고 바라보던 나는 소스라쳤다기보다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겨우 생각에서 빠져나와 나를 둘러싼 것들에게로 관심을돌렸다. 버드나무에는 꼬리꽃차례가 달려 있었고, 바다에는 남실남실하는 파도가 있었고, 길 위에는 어른거리는 잎 그림자가 있었다. 그리고 길을 걷는 내가 있었다. 수 킬로미터를 걸은 후에 비로소 생겨난 리듬을 따라서 팔다리는 느슨한 대각선으로 움직이고 몸통은 길게 뻗어나가는 느낌, 유연한 한 마리 뱀이 된 느낌이었다. 곶 산책이 끝날 참이었고, 나는무엇을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대략 10킬로미터를 - P31

4걷기 전에는 없었던 깨달음, 순간적 에피파니가 아닌 점진적 확신이었다.
공간이 파악되듯이 의미가 파악되었다.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장소로 돌아가면 그 씨앗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 - P32

"나는 걸을 때만 사색할 수 있다. 내 걸음이 멈추면 내 생각도 멈춘다. 내두 발이 움직여야 내 머리가 움직인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고백록』에 나오는 말이다. 보행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보다도 길다. 하지만보행을 단순히 수단으로 보는 대신 모종의 의식적 문화 행위로 본다면,
보행의 역사는 불과 몇 세기 전에 유럽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원에 루소가 있다. 그 역사는 18세기 다양한 사람들의 발로 만들어졌지만, 그중에서도 좀 더 학예적인 사람들은 보행의 기원을 고대그리스에서 찾음으로써 보행의 위대한 전통을 만들고자 했다. 그리스의습속들을 기쁜 마음으로 숭배하고 왜곡하던 시대였다. 영국의 혁명가겸 작가 텔월(John Thelwall)은 소요자(The Peripatetic)』라는 두껍고 따분한책을 쓰기도 한 별난 인물인데, 바로 이 책에서 텔월은 그 가짜 전통(보행의 기원이 고대 그리스에 있다는 생각과 루소적 낭만주의를 결합했다.  - P33

고대인들이 사유하기 위해 걸었다는 것은 건축과 언어의 우연한 일치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테네에 학당을 세우겠다고 하자, 아테네 시에서 작은 땅을 내주었다. 그라이에프(Felix Grayeff)는아리스토텔레스학파의 역사를 쓰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그 학당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곳에는 아폴로 신전과 뮤즈 신전이 있었다. 다른 작은 건물들도 있었을 것이다. [……] 기둥이 늘어선 지붕 덮인 통로가아폴로 신전까지 이어져 있었고, 아폴로 신전에서 뮤즈 신전까지 이어지는 길이었을 수도 있다. 원래 있었던 길인지 아니면 학당을 지을 때 새로세워진 길인지는 알 수 없다. 이 열주 회랑(peripatos)이 바로 이 학파의 이름이 되었다. 적어도 학당 설립 초기에는 학생들과 선생들이 이 길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며 배우고 가르쳤던 것 같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어 다니면서 가르쳤다는 말이 나온 것은 바로 그런 까닭이다."  - P34

아리스토텔레스와 소요학파 철학자들이 항상 걸어 다니면서 철학을 이야기했는지를 이제 와서 밝히기란 불가능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사색과 보행이 만나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고, 고대 그리스 건축양식이 사교 및 대화와 직결된 행동으로서의 보행에 적합했던 것도 사실이다. 소요학파라는 명칭이 아테네 학당의 열주 회랑에서 왔듯, 스토아학파(Stoics)라는 명칭 또한 아테네의 스토아(stoa), 즉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고 하는, 금욕과는 거리가 먼 색깔로 칠해진 열주 통로에서 왔다. 그 후 오랫동안 걷는 일과 사색하는 일 사이의연상이 널리 확산되면서, 나중에는 중부 유럽에서 그 연상을 반영하는지명들이 생기기에 이르렀다. 하이델베르크에는 헤겔이 걸었던 것으로유명한 ‘철학자의 길(Philosophenweg)‘이 있고, 쾨니히스베르크에는 칸트가 날마다 산책한 (지금은 기차역이 들어선) 철학자의 길(Philosophen-damm)‘
이 있다. 키르케고르(Sören Kierkegaard)는 코펜하겐에서 ‘철학자의 길‘을걸었다.‘ - P36

몸이 허약했던 칸트는 날마다 식후 산책으로 (그저 운동삼아) 쾨니히스베르크 외곽을 걸었다. 칸트에게 사색의 시간은 걸을 때가 아니라 난롯가에 앉아 창밖으로 교회 탑을 바라볼 때였다. 청년 니체는 "나에게 세 가지 오락이 있으니, 첫째는 나의 쇼펜하우어, 둘째는 슈만의 음악, 마지막은 혼자만의 산책"이라고 했다. 더할 나위 없이평범한 말이다. 20세기에는 러셀(Bertrand Russell)이 친구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어떻게 걸었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는 한밤중에내 거처로 찾아오곤 했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이제 돌아가면 바로 자살하겠다고 선언하곤 했다. 그러고는 우리에 갇힌 호랑이처럼 몇 시간씩왔다 갔다 하곤 했다. 그랬으니 나는 졸음이 쏟아지기는 해도 그를 돌려보낼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두 시간의 완벽한 침묵 끝에 그에게 물었다. ‘비트겐슈타인, 자네는 논리에 대해서 생각하고있나, 아니면 자네의 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나?‘ 그는 ‘둘다‘라고 대답하더니 다시 침묵 속에 빠졌다. 많은 철학자들이 걸었다. 하지만 걷는일을 사유한 철학자는 드물었다. - P37

독창적으로 사유했다기보다는 대담하게 사유했던 루소는 기존의갈등을 가장 과감한 언어로 폭로하고, 새로 출현하는 감성을 가장 열렬한 언어로 찬양한 논객이었다. 신과 군주와 자연이 모두 같은 편이라는주장이 점점 근거를 잃어가는 시대였다. 중하층 계급의 원한, 왕과 가톨릭교에 대한 스위스 칼뱅주의자로서의 의심, 세상에 충격을 주고 싶은욕망,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의 소유자였던 루소는 멀리서 들려오는 불화를 특정 정치 사안으로 만들기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학문과 예술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루소는 학문과 예술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쇄술 그 자체가 개인과 문화를 타락시켰다고 외쳤다. "고금을 통틀어 사치와 방탕, 예속은 영원한 지혜가 우리에게 내준 행복한 무지를 벗어나겠다는 오만한 노력에 가해진 형벌이었잖은가." 학문과 예술은 행복이나자기 인식으로 가는 길이기는커녕 혼란과 타락으로 가는 길일 뿐이라는것이 루소의 주장이었다. - P38

루소는 수시로 자신을 보행자로 그리면서 이상적인 선사시대 보행자의 후예를 자처했고, 실제로 평생에 걸쳐 여기저기를 걸어 다녔는데,그 유랑 인생은 어느 일요일에 시골 산책을 마치고 제네바 성문 앞에 도착했을 때 시작되었다. 이미 굳게 닫혀 있는 성문 앞에서 순간의 충동에휩쓸린 열다섯 살의 루소는 고향을 떠나자, 견습직을 그만두자, 종교를버리자고 결심했다. 그렇게 제네바를 뒤로하고 스위스를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여러 직업과 후원자와 친구들을 전전하면서 정처없이부유하던 그의 젊은 날은 《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자기의 사명을 발견한 그날로 끝났다. 하지만 젊은 날의 태평한 유랑생활을 되살리려는 그의 노력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던 것 같다.  - P40

하지만 루소가 걸을기회를 놓치는 법은 없었다. "그 정도로 사색하고 그 정도로 존재하고 그정도로 경험하고 그 정도로 나다워지는 때는 혼자서 걸어서 여행할 때밖에 없었던 것 같다. 두 발로 걷는 일은 내 머리에 활기와 활력을 불어넣어준다.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할까, 몸이 움직여야 마음도 움직인다고 할까. 시골 풍경, 계속 이어지는 기분 좋은 전망, 신선한 공기, 왕성한 식욕, 걷는 덕에 좋아지는 건강, 선술집의 허물없는 분위기, 내 예속된 상태와 열악한 상황을 생각하게 하는 것들의부재.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내 영혼을 속박에서 풀어주고, 사유에 더 많은용기를 불어넣어주고, 나를 존재들의 광활한 바다에 빠지게 해준다. 그덕분에 나는 그 존재들을 아무 불편함이나 두려움 없이 마음껏 결합하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다.13 여기에서 루소가 그려 보이는 보행은 물론 이상적인 보행, 즉 건강한 사람이 쾌적하고 안전한 길에서 자발적으로선택한 보행이다. 나중에 루소의 무수한 상속자들이 행복, 자연과의 조화, 자유, 미덕의 표현이라고 여기게 되는 보행도 바로 이런 보행이다. - P41

홀로 걷는 사람은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과 동떨어져 있다. 홀로 걷는 사람의 존재 방식은 노동자나 거주자나 한 집단 구성원의 유대감보다는 여행자의 무심함에 가깝다. 걷는 동안 루소는 사유와 몽상 속에 살며 자족할 수 있었고, 자기를 배반한 것 같은 세상을 이길 수 있었고, 그런 이유에서 걷는 것을 아예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선택했다. 루소는 걸음으로써 그야말로 발화의 형식을 얻었다. 논문 같은 엄격한 형식,또는 전기문이나 역사서 같은 연대기적 형식과는 달리, 여행기는 탈선과 연상을 장려한다. 루소가 세상을 떠나고 거의 한 세기반 후, 마음의작동 방식을 그려내고자 한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문체를 발전시킨다. 조이스의 소설『율리시스』와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에서 주인공들의 머릿속에뒤죽박죽 뭉쳐 있는 생각들, 기억들은 그들이 길을 걸을 때 가장 잘 풀려나온다. 바꾸어 말하면, 보행이라는 비분석적, 즉흥적 행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유는 이런 비체계적, 연상적 유형의 사유다.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은 바로 사유와 보행의 이러한 관계를 그려 보여주는 최초의 그림 중 하나다.
- P44

루소의 글이 철학적 보행을 다루는 문헌의 효시라면, 그것은 루소가 자기의 사색이 어떤 정황 속에 행해지는지를 상세히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최초의 저술가 중 한 명이기 때문이다. 루소가 과격파였다면, 루소의 가장 과격한 행동은 (보행, 고독, 자연 등을 기반으로 조성되는) 개인적, 사적 경험의 가치를 재평가한 일이었다. 루소가 다양한 혁명, 이를테면 정치조직의 혁명뿐 아니라 상상의 혁명과 문화의 혁명을 고취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루소에게 혁명이 필요했던 이유는 그런 사적 경험의방해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일 뿐이었다. 루소가 자신의 지성을 십분 발휘해 가장 강력한 주장을 펼칠 때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에서 드높이고있는 정신 상태와 생활 방식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할 때였다. - P45

루소가 일흔다섯 살에 「열 번째 산책을 미완성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을 때, 에름농빌 영지의 소유주였던 지라르댕 후작(marquis de Girardin)은 포플러 나무가 무성한 영지 내의 작은 섬에 루소의 무덤을 만들면서 감상적인 루소신도들을 위한 순례 코스도 함께 만들었다. 덕분에 루소의 무덤을 찾아온 사람은 무덤까지 어떤 길로 가야 하는지뿐 아니라 그 길로 가면서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었다. 루소의 사적 저항이 후대의공적 문화로 자리 잡는 과정이었다.


키르케고르도 보행과 사유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는 철학자 중 한명이다. 키르케고르의 경우에는 걸으면서 인간을 연구할 장소로 도시, - P46

정확히 말하면 코펜하겐이라는 한 도시를 선택했다. 다만 그는 도시를걸으면서 인간을 연구하는 일을 시골에서 식물을 채집하는 일에 비유했다. 그렇게 보면, 그가 마주치는 사람들은 그가 수집하는 식물표본이었다. 키르케고르가 태어난 때는 루소가 태어나고 100년 후였고, 키르케고르가 태어난 곳은 루소가 태어난 곳과 마찬가지로 프로테스탄트의 도시였다. 하지만 키르케고르의 삶은 몇 가지 면에서 루소의 삶과는 완전히달랐다. 루소가 방종한 생활을 한 것과 달리 키르케고르는 스스로 부과한 엄격한 금욕적 기준을 따랐고, 루소가 유랑 생활을 한 것과는 달리 키르케고르는 평생 고향과 가족, 자기 종교를 떠나지 않았다.(물론 다툼은 항상 있었다.) 하지만 이 두 철학자 사이에는 대단히 흡사한 면도 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다는 것, (문학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한) 무수한 저작들을 쏟아냈다는 것, 자의식에 시달렸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부유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경건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키르케고르는거의 평생 동안 물려받은 유산으로 살면서 아버지의 손에 휘둘렸다.  - P47

키르케고르는 저술 활동 초기인 1837년의 한 일기에서 이미 소음이 사유를 돕는다는 말을 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내가 가장 창의적이 되는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혼자 앉아 있을 때, 머릿속에 떠오른 것들을 잃지 않기 위해 혼란과 소음에 맞설 때다. 그렇게 적당한 환경을 찾지 못할 경우, 내 사유는 막연한 사념을 붙잡아보려는 피로한 노력 끝에 죽음을 맞는다." 그로부터 10년 이상 지난 후의 한 일기에서는 길거리에서 그런 소음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정신에 긴장이 심한 나 같은 사람은 이완이 필요하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사람을 만나는 일은 이완에 도움이 된다. 몇몇 사람과 따로 만나는 일은 이완에는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20 주위가 소란스러울 때 생각이 잘 되고, 주변이 조용할 때보다는 주변 소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애쓸 때 집중이더 잘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주장한다. 어느 일기에서는 도시생활의 시끌벅적함이 실은 즐겁다고 말하기도 했다. "지금 이 순간, 거리의 악사가 손풍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멋지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다." - P49

루지는 않지만, 보행을 철학의 주제로 다루는 방법과 관련해서 한 가지 힌트를 주고 있다. 길을 걷는 몸은 상처 입고 아파하고 부서질수 있는 본래적 한계로 되돌아가지만, 길을 걷는 일 그 자체는 마치 몸을연장하는 도구처럼 세계로 열린다. 길은 걷는 일의 확장이고, 걷기 위해만든 공간들은 걷는 일의 기념비들이며, 길을 걷는 일은 세계속에 존재 - P56

하면서 세계를 생산하는 일이다. 길을 걷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들에 흔적을 남긴다. 거리와 공원과 보도는 길을 걷는 상상,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의 흔적들이다. 지팡이와 신발, 지도, 물통, 배낭은 그 욕망의 물질적 산물들이다. 몸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고 세계를 통해 몸을 인식한다는 것, 그것이 보행과 생산적 노동의 공통점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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