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그들이 그렇게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가치체계를 가졌거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전체주의 이전의 판단 척도를 여전히 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떤 행위를 저지른 후 지금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동행‘을 거부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한 사람들이었다. p241

한나는 외로움을 독일어로 ‘verlassenheit‘라고 썼는데, 이는 버려진 상태 또는 버림받음을 뜻한다. 이러한 상태에서 사람은 인간으로서 행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새롭게 나아가지도 못한다. 전체주의는 사람들의 사유 능력 및 그들 자신과 맺는 관계를망가뜨려, 인간 사이에 있는 공간을 파괴한다. 내 생각에만 사로잡혀고립되면 무엇이 진짜이고 가짜인지 그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외로움은 사유의 필수 조건인 고독의 공간을 파괴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 - P198

한나는 유럽의 새로자연의 색과 건축물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한 한나는풍경에 감탄해서 <프랑스 드라이브Drive through France〉라는 시를 블뤼허에게 써 보냈다.


땅은 곳곳에 시를 쓴다.
가지런히 나무를 땋아놓고
우리더러 나아가라고 한다.
이 세상 곳곳을.

활짝 핀 꽃은 바람을 맞으며 기쁨을 누리고
풀은 연하고 나긋한 바닥에 싹을 틔우며
하늘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밝게 인사하고
태양은 부드러운 체인처럼 회전한다.

한껏 취한 사람들…
땅, 하늘, 햇살, 나무…
봄마다 새로 태어나
전지전능한 놀이 속에서 즐거워한다. - P199

미국에 돌아온 한나는 상원의원 매카시(극단적 반공주의인 매카시즘열풍을 몰고 온 미국 정치가)가 한창 인기를 구가할 때 마르크시즘을 가르치고 강의했다. 지식인들이 냉담한 시선을 보내도 한나는 마르크시즘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반공산주의운동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한나는 ‘전직 공산주의자‘라는 글을 발표해, 전직 공산주의자(공산주의국가를 건립했지만 독재자가 된 레닌과 스탈린을 지칭함)와 과거 공산주의자(칼마르크스 등을 지칭함)를 구분했다. 한나에 따르면 전직 공산주의자는 이데올로기는 바꿨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즉 계급은 유지한 반면,
과거 공산주의자는 방식과 목표는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
하필이면 매카시즘 열풍이 가장 뜨거울 때 이런 대담한 글을 발표하는 건 웬만한 용기로는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법무장관이 ‘국적이 다른 시민‘을 조사해 불온하다고 판단되면 추방하겠다고 선언한상황이었다. 하지만 한나는 결코 논쟁을 피하거나 이데올로기의 요구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 P200

1953년 가을, 한나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비평‘에 관한 크리스찬가우스 세미나(프린스턴대학교에서 연 2회 개최) 진행을 요청받았다.
지금껏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여성이 이 세미나를 진행한 적은 없었다. 교수진들과 학생들은 기존 분위기를 바꿀 여성 교수가 와서 기뻤지만 한나는 그런 식의 ‘마스코트‘ 취급이 불쾌했다.
쿠르트 블러멘펠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나는 말했다.
"폐회식에서 조금 술에 취했지만, 점잔 떨면서 품위 있는 척하는 남자들에게 특별한 유대인은 어떤 사람인지 분명히 알려줬어요.
그리고 내가 특별한 여성임을 이 자리에서 필연적으로 알게 됐다는사실을 똑똑히 전달하려고 애썼죠."
한나는 ‘특별한 유대인‘으로 취급받고 싶지도 않았고 ‘특별한 여성‘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다. - P201

한나는 하나의 정치 문제만 다루지 않았고, 정치철학을 논하지않았으며, 당대 정치 문제의 해결방법을 제시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삶의 필수 활동을 논하고 이 활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폈다.
시인 위스턴 휴 오든은 《인간의 조건》을 읽고 1959년 잡지 《인카운터 Encounter》에 비평을 게재했다. 여기서 그는 이 책이 특별히 그를위해서 씌어진 느낌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평생 기다려온 세상을 저자가 구현해준 느낌이다. ‘사유하게 하는‘ 책의 경우 내가 던진 질문에 스스로 정확한 답을 내놓은기분이다."
《인간의 조건》은 사유활동 그 자체를 보여주는 책이다. - P205

1950년대에는 자동화와 핵전쟁에 대한 공포로 미래가 암울한색채를 띠었다.
"역사상 인간은 항상 미래를 불안해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도, 내가 속한 계급이나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서도 하지만 지구상에서 현재와 미래를 위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지금처럼 이토록 많은 사람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다."
오든은 《인간의 조건》을 지구, 세상, 노동, 작업, 행위, 개인, 공공, 사회, 정치, 약속, 용서가 무엇인지 거의가 그 개념을 정의하는사전처럼 읽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그 기저에는 개념을 구별하는 장치가 있다. 이 장치는 한나가 인간의 조건으로 꼽는 세 가지 필수 활동, 즉노 - P205

동labour, 작업 work, 행위action에 초점을 맞춘다. 이 세가지 필수 활동을 한가지 기본 조건으로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생명을 부여받는다.
노동이란 인간의 조건은 생명유지 활동 그자체이며 인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한다. 작업이란 인간의 조건은 세속적인 성질로 인간이 존재하는 데 자연스러운 성질은 아니다. 다시 말해 작업은 인위적인 것이다. 그리고 "다원성은 인간 행위의 조건이다. 그 이유는 우리인간이 모두 똑같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에 살았던, 지금 살고있는, 그리고 앞으로 태어나 살아갈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은 아무도없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이 똑같다는 말이다"." 노동, 작업, 행위,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조건들은 "태어나고 죽는 것, 즉 탄생과 죽음이라는 실존적이고 근본적인 조건들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 P206

이러한 구별에서 우리는 한나가 ‘조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다양한 방식을 볼 수 있다. 한나는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언급하는데,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우리를 어떻게 조건 짓는지, 우리가접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곧 인간 실존의 조건이 되는지 사유한다
한나는 노동, 작업, 행위를 서로 구분했을 뿐 아니라 개인, 사회,공공을 공간적으로 구분했다. 우리가 넘나드는 삶의 각기 다른 영역들로서 이 공간들을 생각해보려 함이었다. 한나는 이 공간들을 독일어로 raumen 또는 ‘rooms‘라고 번역했다(raumen과 room은 ‘방‘을 뜻하는 단어들), 현시대에 인간의 조건은 자유에 달렸다. 자유를 위해서는삶의 각기 다른 영역을 넘나들 수 있어야 한다. 현대사회가 도래하면서 인간의 다양한 활동과 그에 상응하는 각각의 공간들이 더 이상 구 - P206

분되지 않았다. 이는 우리가 더 이상 삶의 다양한 영역들을 자유롭게오가지도, 인간 활동에 참여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모든 것이사회적인 것으로 전락했고 모든 활동이 단지 소비를 위한 노동 활동이 되어버렸다.
대중사회가 등장하고 그것이 어떻게 모든 일을 노동으로 전환시키는지 지켜보며 한나는 ‘현대사회의 세계소외‘라는 하나의 개념을만들었다. 이를 인간이 지구에서 우주로 도피하고 세계를 떠나 자기자신에게로 도피하는 이중 도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사회화, 소비사회의 시작, 공유지 상실은 모두 부의 축적을통해서 일어난다. 부의 축적을 위해 "인간의 세계와 바로 그 세계성이 제물이 된다" - P207

<전체주의의 기원>이 사람들을 한곳에 가두어 움직일 수 없도록 만드는 전체주의라는 철의 속박ironband을 자세히 다룬다면 <인간의 조건》은 사회적인 것의 부상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공적영역과 사적영역간) 이동의 자유가 상실되고 있는지 살핀다.
현대 대중사회가 출현하면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구분하는능력이 약화되었고, 그에 따라 상식이 무너지고 서로 공유하는 세계가 사라졌다. 한나는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1782)과 르네 데카르트의 <명상록》(1641)을 바탕으로 현대화가 어떻게 인간을 내면으로 도피시켜 새로운 유형의 개인주의를 만들어냈는지 분석했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인간에게 자신의 감각적 세상 경험을 더 이상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 대신 사람들에게는 세계가 인식 가능하고, 정량화 - P207

할 수 있고, 복제 가능한 대상으로 변모했다. 인간 조건의 기본 특징인 다원성은 일원화되었고, 공유하는 세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의미가 있을 수 없으며, 나를 나타내고 인정받을 수 있는 공적영역이 없기 때문에 기억도 있을 수 없다.
한나가 말하길,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더 이상 위대함이나 영속성을 추구하지 않고 인간의 조건에서 완전히 벗어나려고 안간힘을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이 온전하게 존재하기 위해서는공적영역에 나아가 타인 앞에 서야 하고, 사유라는 걸 하기 위해서는고독 속에서 사유하는 사적영역을 가져야 한다. 그 고독의 공간 안에서만 세속의 일들을 내적 경험으로 치환할 수 있다. ‘이 내적 경험은진실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그 진실의 일부는 우리가 함께지구에 살고 공동으로 세상을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 P208

현대사회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자유와 정치적 행위다.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사회화는 자유를 위해 필요한, 이 두 영역을 구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이로 인해 자유롭게 이동하는 능력도 상실되었다. 모든 게 사회적인 것이 될 때 혹은 모든 게 정치적인 것이 될 때 움직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나는 자유를 바다에 나타나는 섬이나 사막의 오아시스로 표현했다.
5한나는 1956년 4월 시카고대학교에서 ‘마르크시즘의 전체주의적 요소‘를 연구하기 위한 자료로서 일련의 강의를 진행했는데, 《인간의 조건》은 이 강의들에서 탄생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는 전체주의 출현 이전의 철학적 사상의 변천 과정을 다루었고, 20세 - P208

기 대재앙을 초래하는 데 기여했을지도 모를 마르크스 작품들의 특성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런데 마르크스의 저서를 읽으면서 그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 서구 전통철학을 바탕으로 글을 썼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한나는 그 누구도 마르크스를 전체주의의 아버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마르크스 이전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기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서구의 정치철학 전통을 깨고 전체주의라는새로운 장을 연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구의 정치철학 전통이 결코그런 상황을 위한 게 아니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그 전통의 끈을 끊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 P209

한나는 글쓰기를 시작하면서 카를 야스퍼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야스퍼스가 마르크스와 프로이트에 대한 에세이를 학술지 <모나트Der Monat》에 발표한 직후였다. 이 에세이의 맥락이 야스퍼스의 전작이자 마르크스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진리에 대하여 Von derWahrheit〉와 같다고 생각한 한나는 야스퍼스에게 말했다.
"선생님 앞에서 마르크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싶어요. 선생님이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정의와 자유에 대해 한나와 야스퍼스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야스퍼스와 한나의 남편 블뤼허는 마르크스의 계획이 정의가 아닌 노동해방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마르크스를 칸트와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고자 했는데, 마르크스의 계획이 정의사회 구현이었다고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P209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대한 테제》에서 열한번째 테제leveth Thesis를 통해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뿐이고, 핵심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나가 마르크스를 비판한 주된 이유는 마르크스가 노동 활동을인간 조건의 근본적 활동으로 격상시켰다는 것이었다.
"노동은 인간의 창조자다."
마르크스의 이 한 문장은 한나에게 모든 걸 말해주었다. 한나는노동, 작업, 행위라는 세 가지를 각각 구분하면서 우리를 자연 그리고우리의 동물 상태에 묶는 것이 노동이라고 가정한다. 한나에 따르면 좋은 삶이란 노동 활동만으로는 얻을 수 없으며, 노동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공적영역으로 나아가 말과 행동으로 타인 앞에 모습을드러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 - P211

한나는 《인간의 조건》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제목을 ‘활동적삶 또는 행동하는 삶에 대해‘로 바꾸었다. 한나는 지금까지 활동적삶의 근간이 되는 활동들이 주로 관조하는 삶의 관점에서 논의되어왔다고 주장했다. 한나는 더 나아가 전문 사상가들의 전통적 일로서의 관조하는 삶과 어떤 전문 계급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의 정신의삶 사이의 구분을 이끌어낸다. 한나의 연구 일부는 세상속에서의 인간 경험과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활동적 삶을 고려하는 것이었다. - P211

<인간의 조건》 서문 말미에서 한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 "10이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내 발밑의 세계가 아닌 우주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이며, 잠시 멈추고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인간 조건의 활동에 대한 생각에 다가갈 수 있을지 고려하라는 간청이다.
한나의 1955년 8월 사유 일기를 보면 첫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하이데거는 틀렸다. 인간은 ‘세상에‘ ‘던져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지구상에서 동물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은 던져진 게 아니라 정확하게 나아갈 방향을 갖고 있는 존재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그의 지속성이 생겨나고 그가 속해 있는 길이 드러난다." - P212

한나는 하이데거의 ‘던져짐‘ 개념을 자포자기로 보고 거부했다.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함께 있다는 뜻이며 이는 정확히 하이데거가오랫동안 제시하지 못한 생각이다. 어떤 면에서 《인간의 조건》은 하이데거의 사유 개념에 대한 거부이자 비판으로, 한나는 마지막 저서에서 다시 한번 똑같이 비판했다. - P212

편지 중간에 나오는 이 구절에 한나는 ‘우울한 작업‘ 중이라고덧붙였다.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친구 헤르만 브로흐와 발데마르 구리안(러시아 출신 유대인 정치학자)의 작품 소개글을 쓰는 중이었다. 이 말을 통해 한나가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였는지 엿볼수 있다. 그런 커다란 상실을 겪으면서도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건어떤 의미일까? 한나가 ‘정치 이론의 역사‘를 주제로 강의했던 시절의 강의 노트에서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정치를 논하는 작가는 이 세계를, 인간사pragmata ton athropon뒤얽힌 이 세계를 사랑한다."
이 세계를 사랑한다는 건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혹은 한나의 표현에 따르면 "실제로 벌어진일들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모르 문디는 한나가 《인간의 조건》 서문에 적은 "멈추어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라"는 구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 P214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한쪽으로 비켜서서 균형감과 사유를 위한 고독의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생각안에서 자아 성찰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다. 이 세계를 사랑하려면 먼저 이 세계를 살펴야 한다한나에게 그것은 나의 경험을 들려주려면그 경험과 약간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 P215

카프카의 ‘He‘에게 전쟁터는 바로 지구상의 인간 세상이다. 한나는 이를 물리적 전쟁터가 그 자체로 형이상학적 전쟁터에 자리를내준 것으로 이해했다. 한나는 카프카를 이용해 존재와 의미를 융합하는 형이상학의 오류를 바로잡고 있다.
경험 세상과 가까이 있기 위해서는 경험을 바탕으로 사유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형이상학적 추측에 빠질 위험이 있다. 한나는
"사유는 직접 겪은 사건들에서 생겨나고,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인 이 사건들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사유할 때만 비로소 스토리텔링이라는행위를 통해 그들의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한나는 사유를 ‘하나 안의 둘‘ 대화, 즉 나 자신과 대화하는 행위라고 말했다. 사유함으로써 자의식이 양심에 호소할 수 있고, 타인이바라보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으며,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 P219

한나의 주장은 《인간의 조건》에서 강조한 사회와 정치의 구분에 기초한다. 한나는 정치적 변화는 힘이 아닌 설득을 통해 이뤄져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나가 이해하는 설득은 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설득과 달랐기에, 오해를 불렀다.
한나는 진보주의자도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 설득에 대한 한나의 이해는 야스퍼스의 철학과 칸트의 판단력비판》에 뿌리를 두고있다. 한나가 이해하는 설득은, 언어의 차이와 다름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타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자유롭게free 상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야 할도덕적 의무가 있다. - P222

재판은 처음부터 실망스러웠다. 한나는 재판에서 아이히만이저지른 잔학행위를 다룰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나가 마주한 건유리 케이지 안에 갇힌 광대였고 "형편없는 연극"" 공연이었다. 끝날 때까지도 아이히만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고, 재판은 이 악인에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유대인의 슬픔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실태 조사"에 가까웠다. 한나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싶었지만 막상 그러지는 못했다. 혹시라도 뭔가를 놓칠지 몰라서다."
1961년 12월 15일 재판이 끝났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대인에게 저지른 만행‘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후 아이히만 측에서항소를 제기했으나 이스라엘 항소법원은 받아들이지 않았고 1962년6월 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 P232

한나는 1963년 2월 15일부터 3월 16일까지 이 재판에 대한 보고서를 잡지 《뉴요커》에 5회의 시리즈로 실었다. 그해 5월 이 보고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라는 책으로출간되었다.
한나는 책 말미에 재판부가 내린 판단과 판결을 거부하고 스스로 아이히만에게 판결을 내렸다. - P232

정치는 탁아소 같은 게 아니다. 따라서 정치에서 복종과 지지는같은 말이다. 그리고 유대인 및 다른 수많은 민족과 이 지구를 공유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피고가 지지하고 실행했듯이, 설령 피고와 피고의 상관에게 이 지구에 누가 살고 살 수 없는지 결정할 권한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우리 인류 구성원 가운데 그 누구도 피고와 이 지구상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치 않음을 밝힌다. 이게당신이 교수형에 처해져야 할 이유, 바로 유일한 이유이다.


한나는 전쟁범죄를 법적 테두리를 넘어, 인간끼리 지구를 공유하는 문제로 다루었다. 아이히만이 저지른 짓들은 우리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는 이 세상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기에 아이히만은 죽어 마땅했다. 즉 아이히만은 인간 조건의 기본 원칙인 다원성을 위반했다. - P234

한나의 판결은 법에 따른 판결이 아니라 아이히만과 그의 재판과정에 대해 스스로 내린 판결이었다. 한나는 정의를 판결의 문제라생각했고 전후 재판이 보여주기식 재판에 그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식의 재판에서는 정의를 주장하면서도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저지른 범죄를 제대로 따지지 않는다.
한나가하고 싶었던 말은,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판결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재판 자체는 기록을 제공하고 개인에게 증언 기회를 주려는 목적에서 이용되었다. 증거와 법 위반을 증명하는 증언을통해 개인과 개인의 행동들을 심리하는 것이 전후 재판의 목적이라면아이히만의 재판은 실패했다. 아이히만은 엄밀히 말해서 어떠한 법도 위반하지 않았다. 그저 생기지 말았어야 할 법을 따랐던 것뿐이다. - P234

한나가 보기에 아이히만은 광대였다. 우스운 모습 때문이 아니라 분별력이 없고 폭넓게 생각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한나는 "악마의 거대함, 악마의 힘에 대한 전설을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한나는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를 인용했다. 브레히트는 "최악의정치범들은 특히 웃음에 노출되고 또 노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말에는 비극보다 코미디가 고통을 덜 심각하게 다룬다는 뜻이 숨어 있다.
한나는 "이런 상황에서 고결함을 지키려면" 이 말을 기억하고,
아이히만이 얼마나 최악의 범죄를 저질렀든 그를 늘 광대로 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웃음은 나의 자주권을 지키는 수단이 되고악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는 방법이 된다. - P239

한나는 법적 문제와 도덕적 문제를 구분했다. 둘은 다르지만 판단력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법적 문제와 도덕적 문제의 구분은 한나가 사유와 판단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에 중요했다. 엄밀히 말해 나치 정권 아래 자행된 모든 일은 합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법을 지키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아이히만은 일반적으로 기소될 만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한 행동은 명백히 잘못이었다. 잘못인지 아닌지의 문제는 법적 판단이 아니라 도덕적 판단의 문제다. 법이 아닌 도덕규범을 위반한 사람에게 어떻게 개인의 책임을 물어야 할까? - P240

전체주의 이전의 도덕적 판단 범주는 전체주의가 등장하면서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기 때문에 한나의 판단으로는, 아이히만은 사회의 규범적 도덕 질서를 위반한 것이 아니다. 한나는 개인의 책임과정치적 책임을 더욱더 구분하면서 유럽에서 개인적 판단이 전반적으로 어떻게 불가능해졌는지 그리고 어느 정도 선에서 어떻게 모두 정치적 책임을 지게 되었는지 설명한다. 한나는 타인의 잘못에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 P240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그들이 그렇게할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가치체계를 가졌거나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전체주의 이전의 판단 척도를 여전히 따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들은 어떤 행위를 저지른 후 지금처럼 평화로울 수 있을지 자기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
‘문이다. ‘동행‘을 거부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한 사람들이었다. - P241

한나는 빈곤 같은 사회 문제는 정치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 문제는 경제 분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에 대해 읽으면서 사회 문제를 정치로 해결하려 드니폭력이 발생했음을 알 수 있었다. 프랑스혁명, 쿠바혁명, 헝가리혁명을 살펴본 한나는 "빈곤 타파는 그 절박함 때문에 언제나 자유 실현보다 우선한다"는 성질을 발견했다. <인간의 조건>에서도 말했듯이의식주가 충족돼야만 자유를 생각할 여력이 생긴다. 한나는 프랑스혁명과 달리 미국혁명은 경제적 불평등에 발목 잡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미국혁명을 이끈 사람들은 평등이 아니라 자유라는 정치 문제를 목표로 삼았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혁명적‘이란 단어는 목적이 자유인 혁명에만 붙일 수 있다."  - P251

혁명은 자유를 위한 정치 공간을 만들고, 이 공간에서 사람들은동등한 시민으로 서로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정치 개념은 한나가 이해하는 다원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한나가 말하는 다원성은인간 실존 그 자체이며, 행위를 위한 필수 조건인 동시에 차별과 평등을 모두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행위를 위한 필수 조건인 이 다원성은 사회 평등이 대두되면서 위협받게 되었다.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부상은 사적이익을 공적영역에서 추구하도록 해 정치가 경제적이익과 직결되면서 정치 제도의 붕괴를 이끌었다.
오늘날 무언가를 혁명이라 칭하려면, 한나가 말하길 그 무언가는 혁신적이어야 하고, 정부 및또는 사회의 전체 기본 구조를 변화시킬 만큼 급진적이야 한다.  - P251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기꺼이 증언하려는 사람 없이는 어떤 영속성도, 인내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떠한 것도 품을 수 없다."10아이히만 논란은 이해하고 싶은 수많은 질문을 한나에게 불러왔다. 진실의 본질은 무엇인가? 진실이 공공의 미덕으로 여겨지지 않을때 정치영역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치영역에서 진실이 무력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소크라테스 이래 진실을 말하는 자들은 정치영역 바깥에 서 있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비정치적이고, 권력자에게 도전하는 일이기에 위험하다. 정치에서는 의견만 존재할 수 있다. - P257

주어진 문제를 관찰하며 마음속에서 더 많은 사람의 관점을 떠올릴수록, 내가 그 사람들 처지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느낄지 더자세히 상상할수록, 타인을 대변하는 나의 사고 능력이 더 강해질수록 타당한 결론, 즉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끝없는 거짓말은 내 발밑의 땅을 앗아가 내가 설 땅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 논문은 "진실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답하며 끝난다.
"개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을 진실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은유적으로 표현하면, 진실은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고 내 머리 위로 펼쳐진 하늘이다."12진실은 이 세상에서 내게 안정감을 준다. 하지만 항상 움직이는땅과 하늘과도 같다. - P258

한나는 3월 4일 바젤에서 치른 장례식에 참석해 그를 추도하면서 "야스퍼스의 삶과 글에 관해, 즉 철학자이자 한 시민으로서의 야스퍼스"에 관해 되돌아보았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아는건 오직 그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뿐입니다. 우리는 그의글들에 의지했지만 잘 아시다시피 그 글들은 우리를 필요로 하지않습니다. 떠난 그가 이 세상에 남긴 것들이지요. 이 세상은 그가오기 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떠난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습니다. 그가 남긴 글들이 앞으로 어떤 운명을 맞을지는 이 세상에 달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글들이 한때 살아 있는 삶이었다는 이 단순한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잊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는 가장 무상하고 가장 위대했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말과 유일무 - P268

이했던 행동은 그가 떠남으로써 사라졌지만 그래서 우리가 필요합니다. 그를 생각하는 우리가 그를 생각함으로써 그와의 관계가되살아나고, 그 관계에서 그에 대한 대화가 샘솟고 이 세상에 다시울려 퍼질 겁니다. 떠난 자와의 관계, 우리는 이 관계를 배워야 합니다. 그 시작으로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함께 슬픔을 나눕니다.


한나는 야스퍼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신만의 개인적 시바 Shiva(유대교에서 사별한 부모나 배우자를 위해 일주일간 애도하는 기간)를 가졌다. 애도 기간 내내 한나는 검은색 옷을 입고 밝은색 스카프를 걸쳤다. 친구이자 멘토였던 야스퍼스의 죽음은, 단지 육체의 사라짐만 의미할뿐이었다.
- P269

1968년 집필을 시작한 《정신의 삶》에서 한나는 ‘하나 안의 둘‘대화에 대해 말한다. 이는 내면의 대화로서 나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한나가 주장하길, 사유라는 행위를 할 때 나는 절대 혼자가 아니다. 키케로(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만큼 더 활동적일 때가 없고, 혼자 있을 때만큼 덜 외로울때가없다"고 했다.
한나에게 《정신의 삶》은 1933년에 떠나온 전통 철학으로의 회귀였다. 한나에겐 이 책이 악인 자체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왜 사람들은 악을 저지를 수 있는가 하는 질문과 직접 대면할 기회였다.
총 3부작으로 된 《정신의 삶》은 한나의 인생 최고의 걸작이 되었다. - P283

사랑은, 거기에 없는 것을 갈망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는다.
이 관계를 드러내어 만천하에 알리고자 사람들은 연인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관계에대해 이야기한다. 탐구는 사랑과 갈망의 일종이므로 사유의 대상은 오직 사랑스러운 것들, 즉 아름다움과 지혜, 정의 등일 수밖에없다.


한나는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듯이 사유를 하면 악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유할 수 있는 건 오직 선뿐이며, 나는 내가 사유하는 대로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악은 선이 아니어서 우리가 사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정치 및 도덕 관련 사안에 사유하지 않는 것은사회에서 주어진 시간에 정해진 행동 규칙이 무엇이든 맹목적으로따르라고 사람들을 가르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규칙에 익숙하기 때문에 스스로 결정하는 데 익숙지 않다.  - P285

<의지>는 가장 쓰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사유와 달리 의지는 자기 결정이며 자율적이다. 의지는 사고력을 갖춘 상태에서 탈감각의사유 대상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의지는 사유 및 판단모두에서 독립적이다. ‘사유‘는 ‘하나 안의 둘‘이라는 조화의 필요성이 특징인 반면 ‘의지‘는 부조화가 특징이다. 의지 활동은 경쟁을 요구하며, 자아를 둘 이상의 부분으로 나누고 분열된 자아를 다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이 같은 의지는 미래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만들어내는데 개인의 자아가 하나로 회복되고 세상에 나가 행동하는 것은의지가 정지되어야만 가능하다.
부터 1974년 5월 애버딘대학교에서 ‘의지‘를 주제로 두 번째 시리즈의 기포드 강연을 할 무렵, 한나는 부쩍 피곤함을 느꼈다. 블뤼허가세상을 떠난 후에도 애도로 지쳤을 뿐 전혀 피곤하지 않다던 한나였다. 단시간 많은 사람을 떠나보냈고, 미국 정치는 한순간도 조용할날이 없었으며, 강의와 강연 일정으로 한나는 늘 바빴다. - P297

 《정신의 삶> 마지막 편 제목 ‘판단‘이 적혀있었다.
두 가지 문구도 적혀 있었는데 첫 번째는 루카누스(에스파냐 태생로마 시대 시인의 내전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관해 쓴 서사시)에 등장하는 인물카토에 관한 구절이었다. "VictrixCausa diis placuit sed victa Catoni", 즉 "승리의 대가는 신의 기쁨이었으나 패배의 대가는 카토의 기쁨이었다"라는 뜻이다. 한나는<사유> 마지막 부분에 이 구절을 추신으로 덧붙인 바 있다.
두 번째는 괴테 《파우스트> 2부 5막에서 가져온 구절이었다.


내 길에서 마법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리고 모든 마법의 주문을 완전히 잊는다면,
자연이여, 나는 단지 한 인간으로 그대 앞에 서고 싶소.
그렇다면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 보람이 있을 거요. - P301

한나의 책을 출판한 출판인 윌리엄 요바노비치는 한나를 다음과같이 기억했다.


한나는 정의를 믿는 사람들만큼이나 그리고 자비를 믿는 사람들이 응당 그래야 하듯이 열정적이었다. 폭력은 싫어해도 시민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불복종은 지지했다. 진지하게 탐구할 일에는언제나 서슴없었다. 혹여 적을 만들었다면 그건 결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내 둘도 없이 소중한 친구…. 한나 덕분에 나는 인간인 게 그나마 덜 수치스러웠다. - P302

매카시는 한나를 한 명의 ‘물리적 존재‘로 묘사했다.


한나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여성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또렷한 눈동자는 마치 지성의 광선이 뿜어져 나오기라도 하듯이 반짝였지만 그 내면에는 캄캄하고 깊은 웅덩이가 자리했다. 한나에게는 헤아릴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건 생각에 잠긴 듯한 그녀의 깊은 눈동자를 보면 알 수 있다. - P302

한나의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두 눈을 관뚜껑이 가리고, 고결한 이마 위로는 잔잔한 꽃무늬 천을 드리웠다. 한나는 더 이상 한나가 아니었다. 죽음이라는 가면을 쓰고 누워 있는 18세기 철학자였다. 나는 예배당에서 위험이 풍기는 이 낯선 사람을 차마 만지지 못했다. 부드럽지만 주름이 깊게 팬, 한때 공공의 머리였던 것이 그녀 목에서 휴식 중이었다. 나는 그 목을 향해서만 작별의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그해 봄 한나는 한 줌 재가 되어 뉴욕 애넌데일ㅡ온ㅡ허드슨의 바드대학교 공동묘지에 안장된 블뤼허 곁에 묻혔다. 인간사의 영역안에서 주어진 모든 찬사와 위로를 뒤로하고 한나는 흔치 않은 드높은 위업을 이루었다. 그건 바로 한나가 《인간의 조건》에서 격조 높게묘사한 불멸이었다. - P304

한나는 명성이 사회적 현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절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파마가 축복을 가져다줄지 저주를 퍼부을지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한나가 남긴 유산은 파마의두 가지 힘이 모두 발휘된 결과물이다. 한나는 살아생전 삶과 연구를두고 끊임없이 루머와 반쪽짜리 진실에 시달렸으나 죽어서는 불후의명성을 얻었다.
한나를 철학자나 정치 이론가로 생각하는 건 무리다. 한나의 업적을 설명하다 보면 일련의 모순과 맞닥뜨린다. 한나는 시를 썼지만시인이 아니었다. 대신 시인 같은 사상가였다. 철학에 몰두했지만 철학자도 아니었다. 인간의 조건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 여러 전기를 썼지만 전기 작가도 아니었다. 또한 조금씩 몸담은 적은 있어도기자, 비평가, 수필가, 문학평론가, 편집자, 정치운동가도 아니었다.
긍정적으로 접근하면, 이를테면 메리 매카시가 그랬듯 위대한 사상가의 표상으로서 소크라테스와 카를 야스퍼스의 대열에 한나를 합류시킬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나라면 이 역시 거부했을 것이다. - P306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로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있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은유에 따그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유산이었다.
한나는 단 한 번도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정의하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는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사를 논하는 공적영역에서 말과 행동으로 나 자신이 누구인지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누구인지는 그 자체로 내 존재를 나타내며 나의 세상경험에 달렸다. 하지만 내 정체성이 내 운명을 결정짓지는 않는다. - P307

한나가 살면서 딱 한 번 스스로 정체성을 밝힌 것은, 유대인 난민 지위를 인정받아야 했을 때였다. 그리고 당시의 한나는 오로지 시오니즘만이 유대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한나가 시오니즘을 지지한 데는 어릴 때 들었던 어머니 말씀의 영향이 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받았다면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한나는 민족에 대한 사랑은 알지 못했으며, 그러한 개념이 주는 이념적 자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P307

여성으로 그리고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도 한나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게 세상이 말하는 그녀의 정체성이었다. 한나는 민족에대한 사랑이 없다는 게르솜 숄렘의 비난을 부인하지 않았다. 민족을사랑하라는 요구는 경험 세상은 보지 말라는 일종의 맹목적 사랑을요구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이러한 한나의 입장에 한가지 모순이 있다면, 한나처럼 비판하고 판단하려면 그 대상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한나가 말하는 세계 사랑에 숨은 뜻이기도 하다. 악을 못 본체하며 선만 취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한나의 생각과 행동이 그녀의 정체성에서 나온다고 주장했는데, 한나는 이런 말을 몹시 싫어했다. 한나의 삶을 잠깐만 들여다봐도, 어느 누구도 한나에게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 말한 적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P308

한나의 저서를 공공연하게 매도한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새커와토론할 때 그녀는 평소처럼 재치 있게 응수했다.
"어려운 건 질색인데, 제가 그런 사람일까봐 겁나요."
엘리자베스 영-브뤼엘이 쓴 《한나 아렌트 전기: 세계 사랑을 위하여》가 큰 인기를 끌면서 1980년대 초부터 한나의 유작과 편지가엄청나게 출간되고, 독자들은 이를 통해 한나의 삶과 사상에 가까워졌다. 번역서를 비롯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한나의 글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후 소문의 여신 파마의 야누스적 판단을 부채질한 사실은 놀랍지도 않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끝없는 논쟁을 낳고, 새로운 독자들에게 아낌없는 영감을 주는 동시에 그만큼 분노를 샀다. - P308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한나의 말대로 우리는 새로운 현상이나타나는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눈앞에 놓인 것과 똑바로 마주해야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한나가 살던 시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
한나가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은, 이 세상을 끊임없이 새롭게 바라보고, 새로이 한계를 설정하며, 다시 배열하라는 것 그리고 새로운언어로 새 이야기를 들려주라는 것이다. 이것이 한나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나무 책상 너머 파란 타자기 앞에 서서 손에는 커다란 은빛 가위와 스카치테이프를 든 채, 이해 욕구를 반짝이며 텍스트처럼 보이는무언가를 만드는 한나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 P309

한나가 말했듯 글을 쓰려면 모습을 감추고 고독의 영역에 들어가야 한다. 나의 예고 없는 긴 부재를 참아준 가족과 친구들, 수전 길레스피Susan Gillespie, 마르크 구츠머 Mark Gutzmer, 클라라 즈위클KlaraZwickl, 부모님, 엘리 Eli, 스콧Scott, 알렉산드라 Alexandra, 리 Lee, 소피아Sophia, 잭슨 Jackson, 크리스토퍼 Christopher, 비비안vivian, 루스Ruth, 이자벨로즈 수더비 힐Isabel Rose Sutherby Hill에게 사랑의 말을 전한다.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 너이길 바라는 것"이라는 한나의 통찰력은 토머스 루크 바트셰어 Thomas Luke Bartscherer, 당신을 위한 거야.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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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처음엔 한나 아렌트가 어려웠습니다


2006년 독일은 ‘사상과 이념의 나라‘라는 슬로건 아래 한나 아렌트 탄생 100주년을 공식적으로 기념했다. 실제로 한나 아렌트는 21세기에 더욱 이름을 얻은 20세기 철학자다. 돌이켜보면, 2003년 여름 박사학위 과정을 밟기 위해 도착한 뉴스쿨은 한나 아렌트에 대한 열기로 가득차 있었다. 자신의 전공 분야가 무엇인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모두가 한나 아렌트에 대해 논쟁하고 있었다. 한나 아렌트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없으면 때론 사적인 대화에조차 끼어들기 힘들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 열기가 너무나 이상했다. 석사학위로 존 롤스에 대한 논문을 썼던 나로선 그 열기가 더 이상하게 느껴졌다. 존 롤스와 비교하면 한나 아렌트의 이론은 아무리 읽어봐도 방법론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너무 허술해 보였다. ‘처음엔‘ 그랬다.
- P6

한나 아렌트의 저작중 가장 먼저 읽은 <전체주의의 기원》이 특히 그랬다. 이 저작의 영문 제목은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
으로 우리말로 대할 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영문 그대로의 의미에집중하면 기원이 여러 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방법론적으로 보자면 전체주의의 원인이 여러 개라는 뜻이고 한편으론 그중 무엇이진정한 원인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제목부터 이상했던 이책을 열어보니 막상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논의는 한마디도 없었다. 분명 ‘기원‘에 관한 책인데 그 여러 기원들 중 단 하나의 기원도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전체주의의 기원>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의 다른 저작 역시 이와 비슷했다. - P7

한나 아렌트는 자신은 철학자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녀에게 철학이란 ‘홀로 되어 이 세계를 관조하는 일‘이었다. 이런 활동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야 하는 인간 조건에 상응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정치 이론가라 불렀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를 정치 이론가가 아니라철학자라 부른다. 그 까닭은 명백히 한나 아렌트가 이 세계에 던졌던질문에 있다.
한나 아렌트는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이 하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20세기에 새롭게 탄생한 전체주의란 무엇인가?" "노동에 대한 숭상은 어떻게 근대를 병들게 했는가?" "폭력이 아닌, 말로 하는 혁명은 가능한가?" 한나 아렌트는 이런 도전적인 질문을《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으로 구성된 3부작에담아내는 동시에 자신만의 독특한 진단과 해법을 제시했다. - P8

특히 《인간의 조건》에서 던진 "우리는 열심히 노동하는 삶 이후의 세계에 대해 제대로 사유해본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현시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잠시 멈춰 서서 진지하게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열심히 노동하는 삶, 그다음 세계에 대해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로봇과인공지능이 인간의 수많은 노동을 대체하는 이 순간에도 대부분의사람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는 삶만이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다. 대체왜 우리는 ‘그렇게‘ 믿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문제는 한나 아렌트 - P8

의 저작이 읽기가 만만치 않다는 데 있다. 한나 아렌트 강의를 다니며만난 많은 수강생들은 한나 아렌트의 책이 책장에 꽂힌 채 그럴듯한장식품이 되어버렸다고 털어놓았다. 앞서 고백했듯 전공자인 나 역시 한나아렌트의 저작을 처음 대했을 때 비슷한 경험을 했다. 다행히도 당시 나에겐 뛰어난 철학자들이 열어놓은 관련 수업이 있었다. 만약 그 수업들이 없었다면 나는 확신 없이 더 오래 헤매었을 것이다.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을 처음 읽었을 때 기뻤던건 입문자들이 느낄 난감함을 해소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한나 아렌트의 일대기를 따라가며 아렌트가 ‘어떤 저작‘을 ‘왜 그 시기‘에 쓰게 되었는지 소개해준다는 데 있다. 물론 각 저작의 핵심 내용 역시 모두 다루고 있다. 소위
‘삶의 방식으로서의 철학 philosophy as a way of life‘이라는 방법론을 바탕한나 아렌트의 삶과 저작을 조화롭게, 무엇보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더하여 젊은 연구자답게, 내가 아는 한 한나아렌트에 대한 가장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다. - P9

열망의 덫에갇히다


우리는 진주처럼 보일 때까지
진흙을 만지작거린다.
그러고는 진흙을 털어내고
자신을 바보라고 여긴다.
그래도 모양은 비슷했다.
우리의 새로운 손은
모래로 보석 만드는 법을
연습했던 것이다.
_에밀리 디킨슨


"생각의 바탕은 무엇일까요? 경험!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1972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한 회담에서 이같이 외쳤다.  - P15

한나의 저서들은 이모저모 살펴봐도 사유에 관한 것이다. 한나는 자신의 생각을 적은 <사유 일기>에서 이렇게 물었다.
"폭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
그리고 《인간의 조건》 초반부에서 자신의 의견을 분명하게 밝혔다.
"내가 제안하는 건 그러므로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지금 뭘 하는지 생각하라는 것, 그뿐이다."

한나는 《뉴요커》에 게재할 목적으로 이스라엘 예루살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취재했고 이때 아이히만이 성찰적 사고를 하지도 못하고, 타인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도 못한다고 느꼈다. 한나의 마지막 저작 <정신의 삶》 1부 제목은 바로 ‘사유‘이다.
한나는 사유와 경험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20세기의 사회적·정치적 상황이 그녀의 삶과 사상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1906년 독일의 한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한나는 일찍이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한나는 국외자였고 반역자였다. 또는 훗날 스스로가 말했듯이떠돌이 망명자였다. 한나의 삶이 이를 증명한다.  - P16

아마도 한나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어려운 부분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하듯 가히 범접할 수 없는그녀만의 독창성이 아닐까.
한나 아렌트의 젊은 시절 자화상 <그림자Die Schatten>(The Shadows)에서 한나는 세상 경험을 향한 자신의 갈망을 "열망의 덫에 갇혔다"고 표현했다. 한나가 일찍이 학문에 몰두할 수 있었던 건 바로 세상을 경험하고 이해하고 싶다는 이 채워지지 않는 갈망 때문이었다."세월이 흐른 뒤 한나가 말했듯 이해는, 알고자 하는 욕구와 달리 멈추지 않는 사유 활동을 요한다. 이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한나가 작가가 된 건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자신의 생각과 기억할 가치가 있는 일들을 기록하기 위해 그리고 글쓰기가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기에 글을 쓴 것뿐이다. 그녀의 일기와 저작들이 이를증명하며 한나에게 글쓰기란 일종의 ‘사유 훈련‘이었다. 한나는 《과거와 미래 사이: 정치사상에 관한 여덟 가지 철학 연습> 서문에서 말했다. - P18

"생각은 살아 있는 경험에서 나오며, 방향을 알려주는 유일한 이정표로서 항상 경험과 함께 가야 한다."
한나에게 사유 훈련은 이해의 필수조건이자 스스로 독일철학의전통을 깨고 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 P19

한나는 이른바‘전문 사상가‘라는 사람들이 국가사회주의의 태동을 알지 못했을 뿐아니라 심지어 나치당의 문화·정치 제도 장악에 동조한 사실에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이 ‘전문 사상가‘들은 히틀러가 정권을 잡는 것에저항하는 대신 그저 역사의 물결에 휩쓸리는 편을 선택했다. 한나는이런 ‘환경 milieu‘과 선을 긋고, "앞으로 어떠한 학문적인 일도 일절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한나의 사유 일기》를 보면 "폭압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을까?"라는 질문에 이어서 "아예 처음부터 물결에 휩쓸리지 않는 방법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직업이 사상가인 사람들에게 사유는 전혀 어려운 활동이 아니다. ‘지적 intellectual‘이라는 단어를 가리켜 한나는 혐오스럽다고 말했다. 한나는, 사람은 누구나 자아 성찰적인 비판적 사고를 할 수 있으며, 눈앞의 파시즘 앞에서 이데올로기적 사상의 흐름을 거스르고 개인의 책임을 주장하려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P19

한나는 고독해야만 사유와 이해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사적영역과 사방이 뚫린 공적영역을철저히 구분했다. 한나는 고독을 좋아하는 동시에 인정을 갈망했으며 아주 어릴 적부터 이 둘 사이에서 갈등했다. 심지어 책을 읽는 것조차 어느 정도 고립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사유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스포트라이트에서 빠져나와 고독한 대화를나눠야 한다.
한나는 이 같은 대화를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뜻하는 ‘하나 안의둘‘로 표현했다. 사유는 또한 나에 대해 아는, 즉 나 자신을 이해하는과정이다. 고독한 대화, 즉 사유는 자아를 둘로 나누고, 내가 다시 세상에 나갔을 때 둘로 나뉜 자아는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나는 이 사유라는 공간 안에서 내 경험과 신념 그리고 내가 안다고 믿는 것과 마주한다고 한나는 말했다.
"어떤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면, 그 같은 생각은 잘못이다. 생각은 원래 그 자체로 모든 교리와 신념, 견해에 위협적이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한나의 사유 훈련이 위험을 수반하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경험과 실험은 모두 ‘시도하다‘라는 뜻의 experiri라는 어원에서 나왔으며 이는 ‘위험‘을 뜻하는 periculum과 관련되 - P21

어 있다. 한나가 "위험한 생각은 없다. 단지 생각 그 자체가 위험할뿐이다"라고 말할 때 이 점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사유 활동, 세상을 이해하게 되는 이 활동은 내가 믿는 모든 것을 뒤흔드는힘을 갖고 있다. 사유는 내 빗장을 여는 힘을 갖고 있다.
한나는 이념적 사고라면 깡그리 거부했다. 특정 사상이나 철학적 교리를 따르지 않았으며, 자신의 삶과 저서를 통해서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지 몸소 알려주었다.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 가르치려고하기보다 사유하는 방법에 대해 말한 것이다. 그 결과 한나의 저서를읽은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런저런 정치 전통의 틀 안에서 한나를 규정하려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인데, 사실 한나의관심은 오로지 ‘이해‘였으며 이처럼 규정하려는 사고방식을 완전히멀리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복잡한 과정으로 올바른 정보나 과학적지식을 얻기 위함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또 사유하는활동을 통해서 나 스스로를 받아들이고 현실을 감내할 수 있다.  - P22

우리는 지금 자유민주주의 쇠퇴, 가짜뉴스 확산, 사회적 영역의 부상, 고도로 발달한 기술, 사적영역의 상실, 외로움으로 물든 사회를 경험하고 있다. 이런세태 속에서 한나의 삶과 저서는 다시금 새롭게 조명받는다. 왜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한나의 말에 공감할까? 21세기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한나를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나가 과거를 되돌아보았다면 그건 현대와의 유사점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귀중하고 신비한 보석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한나가 건져 올린 보석은 우리가 최근에 겪은 현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줄지 모른다. 장담하건대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한나를 찾는 이유다. - P23

한나는 무신론자였다. 성경이나 유대교 경전을 별로 마음에 두지 않았고 진보 신화도 믿지 않았다. 오로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즉현재에만 관심을 가졌다. 미래가 지금보다 나으리란 생각에서 미래중심으로 삶을 꾸리고 정치를 구성하기보다 지금 해야 할 바람직한일들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나는 만족을 모르고, 변명하지 않으며, 굽히지 않는 성격이었다. 페미니스트가 아니었고 마르크스주의자, 진보주의자, 보수주의자가 아니었으며, 민주주의자나 공화주의자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을 사랑하고 인간의 조건이라고 생각한 근본적 특징을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일 뿐이었다. 그 근본적 특징은, 우리는 홀로 존재하지 않고, 각자 다르며, 이 세상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걸 말한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이 공간에 무언가로 존재하며, 그렇게 존재하는 우리는 지구를 보살피고 함께 공동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 - P24

민족국가 체제는 실패했으며 철학은 파시즘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리하여 한나는 전통과 결별했다.
한나는 프랑스 저항시인 르네 샤르가 했던 말을 즐겨 인용했다.
"우리의 유산은 우리에게 유서 없이 남겨졌다."
한나가 남긴 저서는 우리의 유산이 되었고, 이 유산은 우리에게‘이해‘와 관련한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적 위기와 닮은 점을 찾고자 한나의 저서를 읽는다면 그녀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한 인터뷰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으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재와 닮은 점을 과거에서 찾으려고 하는 건 터무니없는 일이에요."
한나는 사유하는 방법, 즉 행동을 멈추고 최근의 경험과 내 마음속 두려움, 욕망을 바탕으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을 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냉전 체제와 테러와의 전쟁, 디지털 기술의 출현으로 정의되는 20세기 초중반과는 다르다. 한나는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서구 전통 정치사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법을 알려주었다.  - P25

반면 이 책은 아주 쾌활한 한 여성에 관한 글이다. 그녀가 정신의 삶만큼이나 활동적인 삶을 살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한나의 이해를 향한 열정과 삶에 대한 갈망은 그녀의 자아비판적 사유 능력만큼이나 중요하다. 이 둘은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세상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기는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자살을 생각할 때였다. 그녀는 삶을 너무 사랑했기에 결국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고 살겠다고 결심한 다음에는 그저 웃어버렸다. 그러한삶의 어둠 속에서 한나가 보인 용기는 "지금까지의 세상 중 가장 아름답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눈앞의 어둠과 싸울용기를 준다. - P27

"독일 하노버 린덴, 1906년 10월14일 일요일 저녁 9시 15분, 내 딸 요한나 아렌트가 태어나다."
딸의 출생을 기념하여 한나 아렌트의 어머니 마르타 콘이 육아노트에 적은 문장이다. 마르타는 22시간 산고 끝에 3.695그램의 한나 아렌트를 출산했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적·정치적 격변이 한창이던 20세기 초에 태어났다. 훗날 한나는 이 시대를 "끊임없는 전쟁과 혁명의 연속으로정의했다. 마르타와 파울 아렌트 부부에게 한나는 처음이자 유일한자식이었다. 전기 엔지니어였던 아버지 파울은 고대 그리스·로마 서적을 능숙하게 읽었고 어머니 마르타는 독일에 오기 전 가정교사에게 프랑스어와 음악을 배웠다. 파울과 마르타 두 사람 모두 조부모님과 함께 부모님을 따라 러시아에서 독일로 이주했으나, 가족들과 달리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이었고 독실한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다. - P31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독일 자유군단 손에살해당한 해, 한나는 고작 열세 살이었다. 그럼에도 한나의 정신에는룩셈부르크의 철학이 배어들었고 어머니 마르타의 정치적 행동주의를 느낄 수 있었다.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은 한나는 훗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는 정치 경제와 제국주의에 대해, <인간의 조건>에서는 몰수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한나는 룩셈부르크에게서 닮고 싶은독립적이고 열정적인 여성을, 자유와 사회참여를 위해 자신을 헌신한한 인간을 보았다.
하지만 한나의 정치 세계 입문까지는 그 후로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2차 세계대전이 한나가 공적영역에 집중하도록 했다면, 1차 세계대전과 독일의 경제불황은 한나로 하여금 지식인의 삶과 시, 철학,
문학에 심취하도록 했다. 독일혁명기 동안 한나는 거의 두문불출했으며, 아버지 서재에 틀어박혀 프리드리히 실러 (독일 시인, 극작가), 괴테, 프리드리히 횔덜린(독일 시인)과 호메로스를 읽고 외웠으며, 철학을 탐구하면서 카를 야스퍼스(실존철학을 대표하는 독일 철학자)의 《세계관의 심리학>(1919)과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1781)을 탐독했다. - P44

"언젠가는 철학을 공부할 거란 사실을 항상 알았어요. 열네 살때부터요. 그것 말곤 달리 할말이 없네요."
가우스가 재차 그 까닭을 묻자 아렌트는 다시 대답했다.
"칸트를 읽었어요. 왜 칸트냐고 물으시겠죠? 굳이 대답하자면철학을 공부하든가 물에 빠져 죽든가 둘 중 하나였어요 이를테면 그랬죠."
한나는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했다고 가우스에게 분명히 말했다. 아버지 서재에 들어서는 순간에도한나의 이해 욕구는 존재했다.
"집 서재에는 모든 책이 있었어요. 책장에서 그 가운데 하나를꺼내면 그만이었죠."1"
10어린 시절 한나가 마주한 작품들은 일평생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전후 시대 독일을 이해하는 밑바탕이 되었다. 그중에서도단연 독일의 시와 철학이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 P47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현상학의 기존 문제를 해결할새로운 언어의 발굴에 힘썼다. 신학 이전의 사유 조건을 알고 싶었던그는 새로운 차원의 사유를 제시할 목적으로 서양 전통철학을 파헤쳐, 서로 광범위하게 연결된 사유의 길과 그 길의 자취를 찾아냈다.
1951년 한나는 하이데거의 언어를 빌려 짧은 시 한 편에서 이러한 사유의 개념을 묘사했다.

사유는 내게로 오고,
나는 더 이상 사유가 낯설지 않다.
나는 자라서 사유의 집이 된다.
마치 밭갈이를 마친 들판처럼.‘ - P54

하이데거는 연구실에서 처음 단둘이 만났을 때 한나에게 반해버렸다. 1925년 3월 21일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한나가 비옷을 입고연구실에 들어서는 모습, ‘큰 눈‘을 모자에 가리고 수줍게 질문에 답하는 모습을 묘사하며 처음 본 순간을 회상했다. ‘첫 만남 며칠 후 하이데거는 한나에게 편지를 썼다.

1925년 2월 10일
친애하는 아렌트!
오늘 저녁 꼭 만나서 말할 거야.
우리 사이는 모든 게 단순하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해.
그래야만 우리에겐 만날 자격이 주어질 거야.
아렌트는 내 제자고 나는 스승, 그게 우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한
유일한 기회지.
아렌트를 결코 내 것이라 부르진 못할 테지만 이제부터 아렌트는
내 삶의 일부이며, 내 삶은 아렌트와 함께 나아갈 거야."

연구실에서 처음 만난 지 2주도 안 돼 하이데거는 한나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첫 한 해 두 사람은 하이데거의 사무실에서, 한나의다락방에서, 숲속에서 오랜 시간 산책하며 남몰래 만났다.  - P57

한나는 하이데거와 17 년 동안 말을 섞지 않았다. 
한나는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함구했다. 낭만적 사랑에 대해서도, 열정적 사랑에 대해서도 별로 쓰지 않았다. 한나는 사랑이 정치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면 모두가 함께인 이 세계가둘만의 세계로 변해버린다. 그럼에도 한나에 대한 사랑은 커다란 구원을 가지고 왔다.
한나는 마지막 저서 《정신의 삶》(1977)에서 ‘의지‘를 다루었다. 가장 쓰기 어려운 부분이었고 하이데거의 현존재 개념, 사랑 그리고 악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부분이었다. 한나는 어떻게 어떤 사람들은 악을 행하는 반면 어떤 사람들은 이에 저항하는지 알고 싶었다.
의지를 분석하면서 한나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노력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읽었는데 그는 악을 인간이 신에 복종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선의 결핍이라고 정의했다. 신은 악을 주지 않았으나 인간이 죄를 저지른 결과로서 고통을 겪도록 내버려둔다.  - P64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도 허용하는 것이다.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읽은 건 신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함이아니었다. 한나는 심지어 영혼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나에 따르면 우리가 마주해야 할 세계는 단 하나,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다. 한나는 신의 구원 대신 세속적 사랑에 기댔다. 사랑으로변모한 의지는 무게, 즉 성격을 형성하는 중력을 지녔고, 어떤 행동을 취할지 스스로 의사 결정을 하도록 자아를 길들인다.
한나는 "사랑은 영혼의 무게다"라고 썼다.
사랑에는 세 가지가 있다. ‘사랑하는 자, 사랑받는 자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다. 사랑은 특정 대상에 대해 느끼는 애정, 감상적 형태가 아니라 정신에 감명을 주는 ‘발자국‘ 내지 ‘지성적 행동‘이다. 정신이 지성으로 변모한 이 영속성의 발자국은 사랑하는 자도 사랑받는 자도 아닌 사랑 그 자체이며, 이 사랑은 서로 주고받는 사랑이다.
의지가 사랑으로 변모할 때 그 힘은 그대로다 - P65

"사물이든 사람이든 그 대상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대상에 대해깊은 말을 하는 건 없다. 다시 말해, 사랑은 상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길 바라는 것이다. ‘Amo: Volo ut sis‘, 즉 사랑이란 있는 그대로너이길 바라는 것이다."
이 사랑만이 영생과 구원을 가져오며, 이는 정신이 할 수 없는일로, 이 사랑은 해방을 필요로 한다. - P65

야스퍼스가 생각하기에 철학은 살아 있는 경험을 향한다. 정신과 의사로서의 그가 과학적 지식의 심리학적 측면에 관심을 보였다면, 철학자로서의 그는 인식론에 관심을 가졌다. 그 결과 18세기 말과 19세기 초 독일관념론 전통과 자기 이해 selbstbewusstsein 를 배경으로, 야스퍼스는 자신만의 실존철학 Existenzphilosophie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그는 독일관념론 전통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훨씬 넓은 범위에서 철학을 이해했다. 이 점은 야스퍼스와 리케르트의 토론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리케르트 역시 베버와 함께 공부한 적이 있다. - P68

플라톤의 <향연>에서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에게 말했듯이 야스퍼스도 지혜란 이 병의 와인을 빈병에 붓는 것처럼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 옮겨 갈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겼다. 그 대신 배움은 대화하는과정에서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언어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언어는인간에게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러려면 대화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독일관념론 사상가 프리드리히 폰셸링에 대한 세미나 및 사유하는 방식과 그 과정에 대한 세미나를 열어 철학의 본질을 다루기도 했다.
야스퍼스의 사유와 가르침에 대한 방법론은 이상적 유형, 인간행동, 문화 현상 그리고 사람들이 특정한 세계관을 갖는 이유, 쉽게말해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사유하고 행동하고 특정한 선택을 하게 하는지 밝히려는 유형론의 한계를 분석한 베버의 체계에 영향을받았다. 야스퍼스는 순수한 철학적 사색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 세계와 마주하는 현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 P69

야스퍼스 철학의 이러한 핵심 요소들은 한나의 사상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한나의 사유 개념의 핵심도 대화였으며, 한나는 나 자신과 대화하는 ‘하나 안의 둘‘을 이야기한다. 야스퍼스에게 가르침을받는다는 것은 한나에게 사유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영역에 국한되는 게 아님을 의미했다. 한나의 박사학위 논문주제는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였다. 한나는 신학과 철학을 하나로 접목해, 그가 말하는 이웃 사랑을 이 세계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세속적 가치로서 재해석했다. - P69

한나는 이 논문을 쓸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나문헌을 의도적으로 찾아 읽지 않았다. 그를 신학자 혹은 초기 기독교사상의 역사를 널리 알린 인물로 바라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안에서 그의 <고백론>을 읽은 한나는 그가 말하는 다원성과 이웃 사랑을 공동 세계 건설에 필요한 하나의 구성 요소로만 이해했다.
야스퍼스의 실존철학은 한나에게 참된 존재란 속세와 떨어질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여러 비판 세력이 있었으나 한나의 사랑 개념과 성아우구스티누스는 독창성과 통찰력 면에서 만점을 받았다.
이후 1950년대 중반까지 한나는 오랫동안 아우구스티누스를 찾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그는 일평생 한나의 대화 친구였다. 새로운 시작이라는 표현 및 이웃 사랑, 세계 사랑은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과거와 미래 사이》,
《정신의 삶》 등 한나의 여러 저서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한나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다시 찾은 것은 1953년 《전체주의의기원》 마지막 장 ‘이데올로기와 테러‘를 쓸 때였다. ‘새로운 시작‘을성찰하며, 독자들이 제대로 된 희망을 일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 P72

하지만 역사에서 모든 끝은 반드시 새로운 시작을 내포한다는 진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시작은 가능성이자 끝이 유일하게 줄 수있는 ‘메시지‘다. 시작은, 하나의 역사가 되기 전까지는 인간이 지닌 최고의 능력이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다름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했다. "Initium ut esset homo creatus est", 즉시작이 있고 나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시작은 새로운 탄생이 있을때마다 생겨난다. 새로운 탄생은 바로 인간의 탄생이다. - P73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이후에는 시민권 정지 명령을 내렸다.
한나는 독일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학문으로서의 철학은 관두고 눈앞에 벌어지는 정치적 일들에 전면 맞서기로 결심했다. 철학이 도덕적 행동을 낳는다는 가정은 현실에선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나치 정권과 마주한 지식인은 그 누구보다도 용기가 없고 무능했다. 글라이히샤일퉁Gleischschaltung(획일화를 뜻하는 나치 용어로, 나치체제에서 강제 조정을 통해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전체주의적 통제를 확립한 일련의과정) 또는 정치적 협력이 원칙이 되었다. 대학교수와 지식인은 저항이 아니라 자리를 보전하는 편을 선택했다.
1946년 한나는 미국 월간지 《코멘터리 Commentary》에 <지옥의이미지>라는 논평을 실어, 당시 일부 독일 지식인들이 자신이 나치정권에 협조한 것을 어떤 식으로 합리화했는지 밝혔다. - P98

히틀러 체제하에서 독일 대학교수들의 자세가 대개 어떠했는지조금이라도 궁금하다면 1946년 4월 프라이부르크대학교 역사학교수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발표한 일종의 고해성사 《정치학 비평》을 읽기 바란다. 리히터 교수는 실상 반나치주의자였지만 본심을 꼭꼭 숨겼다. 그리고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거의 알지 못했기에 고작 "히틀러 제국이라는 기계는 .… 잘 작동하지 않았다" 정도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몰두해 "
"불가피한 피해가 너무 커지지 않도록 막느라 바빴다. 또한 "학자로서의 자유에는 한계가 있어도 역사적 · 정치적 문제에 독자적 - P98

의견을 개진할 기회"가 왔다고 확신했다. 그가 어찌나 그 기회를확신했는지 게슈타포는 리히터 교수를 해외 선전에 이용하기로결정했다"


이 구절에서 한나의 반어적 어조는 ‘판단‘에 대한 그녀의 이해를보여준다. 초창기 홀로코스트에 대한 글에서도 반어적 어조를 취했으며 1963년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도 이런 어조가 두드러진다. 반어법은 한 걸음 떨어져 희화적으로 논리적 모순을 꼬집는다는 특징이 있다. 한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해하기를 거부했으며, 그녀의 어조는 형식을 통해 비평을 제공하는 방식이었다. 매우진지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건 어느 모로 보아도 비논리적이고 끔찍한 것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되었으리라. 한나에 따르면악인 앞에서도 웃을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웃음만으로도 내 존엄성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 P99

나치 같은 악에 직면한 한나는 최초로 반유대주의와 맞닥뜨렸을때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받았다면, 다른 무엇이 아닌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 독일인으로서도, 세계시민으로서도아닌, 또 인권을 옹호하는 사람으로서도 아닌, 바로 유대인으로서 말이다."
한나의 질문은 분명했다.
"유대인으로서 특별히 무엇을 할수 있을까?" - P99

유대인들은 대략 2,000 년을 짐을 든 채 아이들을 데리고 고향을그리워하며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타향살이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다반사였다. 얻은 건 뭘까? 슬픈 경험 그리고 어디서든 적응하고 나를 지키는 능력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기도 전에 모두 다 잃었다. 안정된 집, 평범한 일상, 고향, 친구, 언어.… 모두 다. 터전을 잃었고, 이내 어디로 갈지 길도 잃었다. - P115

블뤼허는 학자가 아니었고 자기 자신을 지식인으로 생각하지도않았다. 출판이나 집필에 관심이 없는 것만큼이나 사상에도 관심이없었다. 블뤼허는 한나에게 자신은 태어날 때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받았다며, 선한 요정이 명석한 두뇌를 주었으되 악한 요정이 작가적재능을 주지 않았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의 아버지는 공산주의자였고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베를린 거리를걷다가 블뤼허는 우연히 정치에 눈을 떴다.
자수성가한 그는 대화를 무척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여자도 좋아했다. 한나는 파리에서 블뤼허를 만나 함께 사는 2년 동안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그의 아내나타샤 제프로이킨Natasha Jefroikyn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 P121

한나는 강제수용소 생활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고 이를 언급한 적은 단 세 번뿐이다. 그중 한 번은 <우리는 난민>(1943)에서다.


귀르스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는데 이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살에 대해 들었다. 나는 집단자살을 제안받았다. 프랑스정부를 자극하기 위한 일종의 시위였다. 누군가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죽을 운명을 뜻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삶을 향해 맹렬한 용기를 보였다. 이 일을 그저 나의 사사로운 불운에 불과하다고 여겨 개인적으로 목숨을 끊는다면, 우리는 그 밖의 사건들에도자기중심적이고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어야 했으나 그렇지 않다는 게 다수 의견이었다. - P131

그런데 그때까지도 루르드에 있던 한나의 소중한 친구 벤야민은미국 비자를 받지 못했다. 1940년 8월 사회연구소는 마침내 그의 긴급 비자를 발급받았고 벤야민은 소식을 들은 즉시 마르세유에 가서미국 영사관에 비자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해서 벤야민, 한나, 블뤼허 세 사람은 마르세유에서 다시 만났다. 한나가 마르세유에서 벤야민을 마지막으로 본 날은 1940년 9월 19일이다. 그녀가 마르세유를 떠나고 7일 후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트보우에 도착한 벤야민은 국경을 통과할 수 없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벤야민의 사망 소식을 거의 4주가 지나서야 알게 된 한나는 리사 피트코와, 에리히 프롬의 아내로 철학자이자 사진작가인 헤니 구어란트에게 자초지종을 듣는다. 피트코와 구어란트는 벤야민과 난민들을 데리고 피레네산맥 넘어 스페인 국경 마을 포르트보우에 도착했다. 밀출국하려는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이용하는 경로였다. 피트코에 따르면 벤야민은 10분 걸으면 10분 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 P140

것이다. "
뉴욕행 기니호Guiné에 승선했을 때 한나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그 나이에 이르기까지 한나는 세계대전을 두 번 겪으며 망명자가 되고, 게슈타포에 체포되고, 강제수용소를 탈출하기도 했다.
벤야민의 《계몽》을 펴내며 한나는 서문에서 불운에 대해 언급했다.
"그러나 ‘죽음으로 승리를 거둔 사람들‘의 삶에는 콕 집어 정의하기는 힘든,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뭔가가 존재했다. 그건 불운이었다" 다행히 한나의 인생에는 불운이 작용하지 않았다. 철학자들이오랫동안 잔인하다고 생각해온, 행운이라는 이 예측할 수 없는 신비의 여신은 필요할 때마다 한나를 찾아왔다. - P144

미국에 온 뒤 시오니즘을 향한 한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독일과프랑스에 있을 때 한나는 적극적 시오니스트였다. 유대인 단체 브네이브리스B‘nai B‘rith 후원으로 유대인 대상 강연을 진행하고, 히브리어 강좌를 개설했으며, 유대인 청년들을 인솔해 직접 팔레스타인을방문했던 한나였다.
미국에서 한나는 주다 매그니스와 함께 일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의 이쿠드Ikhud 당을 창당하고 이쿠드당 소개 자료를 UN에 제출하고자 UN 사무총장이 임명한 정무 담당자를 만나기도 했다. 그는 한나에게 이쿠드당 대변인 자리를 제안했으나 한나는 매그니스식 정치행보를 따르지는 않았다. - P154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정치적 문제였다.
<전체주의의 기원> 서문에서 한나는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의 역사에서 유감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유대인 문제가정치적 문제임을 적군은 알았으나 정작 유대인 친구들(유대인 자신들)은 몰랐다는 것이다. "13한나는 유대인에게 고향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유대 민족국가 건립은 반대했다. 《아우프바우》에 게재한 칼럼에서 한나는 모든 유대인이 고향을 가질 수 있는 유럽식 연방제를 지지했다. 그래야만 유럽에서 그랬듯 민족국가 체제가 실패하더라도 안전을 보장받기때문이다. 한나는 국가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지 않으면 이에 항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는 이를 "권리를 가질 권리"로 공식화했다. 한나는 유대인 전선을 원했고여러 국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의 연대를 바랐다.  - P157

어둠은 두 사람의 만남을 비밀에 부쳐야 했음을 뜻한다. 하이데거가 직접 배달했으나 한나가 읽지 못한 그 편지에서 하이데거는 엘프리데가 그들의 관계를 안다고 고백했고 다음날 오후엔 분위기를바꾸려고 직접 점심을 준비했다. 한나에게 그날 밤과 다음날 아침은
"평생 잊을수 없는 순간"이었다. "
한나에 관한 많은 책이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과 이후 한나와하이데거의 관계를 다룬다. 모든 책이 둘의 관계에 주목한다. 한나는<인간의 조건>에서,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관심 inter-esse(사이에 존재함)에 대해 논했다. 한나와 하이데거, 둘의 관계는 그저 추측만 가능한 주제로 남겠지만 한글속에 등장하는 두 가지 개념이 두사람의 관계를 설명해준다. 첫 번째는 용서, 두 번째는 화해다. 한나는 용서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 P185

"용서와 그 용서를 받아들인 관계는 반드시 개인적이거나 사적일 필요는 없지만 언제나 지극히 개인적 일로서,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상대에 대한 배려다."
사랑하는 사이는 정치적 관계가 아니다. 그렇기에 한나에 따르면 사랑은 계산적이지 않다.
상대를 사랑하고 용서함으로써, 서로의 ‘장점과 단점, 잘한 일과 못한 일, 잘못‘을 토대로 두 사람의 과거를 돌아보고 앞으로 어떤사이가 되어야 할지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 잘못을 용서해주는 건순전히 상대가 일평생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매몰되어 있지 않기를바라는 마음에서다. 용서가 개인적인 성격에 복잡한 인간의 감정을 - P185

다룬다면 화해는 이성을 바탕으로 평정심과 판단을 요구한다.
유럽에서 돌아온 직후 한나는 사유 일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1950년부터 쓴 사유 일기 앞부분에는 용서 verzeihung와 화해 Versöhnung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긴 글이 적혀 있다. 여기서 한나는 용서가 용서한 자와 용서받는 자 사이에 계급을 형성함으로써 어떻게 평등한 인간관계를 망치는지 고찰한다. 용서를 하는 자는 용서를 구하는 자보다 자신이 높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는 제삼자나 어느 누구도 아닌 오직 상대방에게만 용서를 구할 수 있기 때문에용서라는 행위는 인간관계를 망친다. 이 같은 용서의 대안이 화해다.
화해는 용서라는 행위를 하지 않고도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 P186

훗날 발간한 《인간의 조건》에서도 복수를 비롯해 용서와 화해를 논하지만 이때만큼 용서와 화해를 뚜렷하게 구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새로운 시작‘이라는 그 근본 특징은 변함이 없다. 이 세상에서 새로운 시작은 무한하며 행동할 때마다 주어진다.
한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함으로써 용서와 화해를 논할수 있었다.
유럽을 돌아다니며 반가운 친구들을 다시 만났지만 집을 비운3개월 동안 블뤼허와의 사이는 틀어졌다. 블뤼허는 답장을았다. 한나가 답장을 재촉해도 그에겐 들리지 않았다. - P186

한나가 생각하는 결혼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말하는 사랑을실현하는 것이었고, 그 사랑은 상대만의 고독을 지켜주는 것이었다.
한나와 블뤼허, 두 사람의 결혼은 그들 사상의 구현이었고, 이 부부에게 결혼이란 서로에게 비밀을 만들지 않고, 상대를 구속하지 않으며, 언제나 새로움의 가능성을 열어둔 채 각자에게 생각을 위해 필요한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인간사에서 사랑도 우정과 마찬가지로 공적영역과 분리된 사적영역에 속한다. 사적영역은 자유를 필요로 하고, 자유가 있어야만이 두 영역을 자유롭게 오가며 내 사생활을 지킬 수 있다. 한나는 끊임없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을 구분했다. 이 두 영역을 구분하지 않으면 자유가 제한된다. 자유가 제한되면 우리는 그 두 영역을 오고갈수 없다. 생각과 이 두 영역 간 이동을 제한받는다면 그건 전체주의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다. - P188

한나는 1951년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했다. 그해 한나는 미국 시민권을 받기도 했다. 한나는 18년이 지나고서야 마침내 ‘무국적자라는 대단히 복잡하고 붉은 딱지를붙인 존재"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시민권 선서식에 참석한 한나는 새로운 시작을 기념하며 요한나 블뤼허에서 한나 아렌트 블뤼허로 개명했다.
한나는 1941년부터 《전체주의의 기원> 집필을 시작해 1949년유럽 방문을 코앞에 두고 완성했다. 이 책은 20세기에 전체주의가 출현한 현상을 설명하는 거의 600쪽에 달하는 서사 작품이다. 히틀러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고 스탈린만 남았을 때 쓰기 시작했고, 그간 유럽에서 일어난 일들과 소비에트연방에서 벌어진 일들을점차 알게 되면서 그 스타일도 조금씩 변화를 겪었다. - P189

한나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가 무서운 진짜 이유를 이렇게말한다.
"어쩌다 살아남는다 해도, 수감자들은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것보다 더한 단절을 겪는다. 공포가 망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1948년 2월, 책의 진행 방향을 설정한 한나는 휴튼 미플린 출판사에 편지를 보내, 책은 모두 3부로 구성할 예정이며 각각의 제목은
‘반유대주의 Antisemitism‘, ‘제국주의 Imperialism‘, ‘나치즘Nazism‘이고,
이제 막 시작한 3부 ‘나치즘‘에서는 나치즘을 인종차별적 형태를 띠는 하나의 전체주의 체제로 다루겠다고 전했다. - P192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핵심은 2부 ‘제국주의‘에 포함된 5장‘부르주아 계급의 정치적 해방‘이다. 한나는 여기서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간 경계의 무너짐에 대해 논했다.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공공의정치영역에서 힘을 발휘할 때, 다시 말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정치사유화 현상이 발생할 때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간 경계가 무너진다.
예를 들어, 한때 사업가들은 소비 생활을 즐기며 가족과 개인의 사생활에만 신경썼으나 이제는 개인의 사업모델을 가지고 공적영역에 적극 뛰어든다.
2부 ‘제국주의‘에서 한나는 민간 기업이 어떻게 국가의 기능을점점 더 많이 넘겨받았는지 자세히 논한다. 계속 성장하기 위해 그들에게는 새로운 시장이 필요했다. - P195

더욱 근본적으로는 공적영역을 파괴해 안정적 정치 제도를 무너뜨림으로써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간 차이를 허물고 모두 사회화시킨다. 한나는 전체주의가 이러한 현상으로 말미암아 개인의정치 행동을 불가능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는 사람들이자발적으로 행동할 가능성을 아예 차단하기 때문이다.
행동하는 힘이 다른 사람과 ‘함께일 때‘ 나온다면 각자 고립된개개인은 당연히 무력할 수밖에 없다. 전체주의 정권은 공포를 통해개개인을 타인에게서 분리하고, 외롭게 고립된 개개인을 다른 모두의 적으로 돌린다. 세상은 황무지로 변하고 한나의 말처럼 경험도 생각도 모두 불가능해진다.
전체주의가 사람을 고립되고 외로운 개인으로 만드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체계적으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는 공포가 확산될 때 힘을 얻는데 이러한 이데올로기와 마주했을 때 분별 있게 판단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면 현실과 가상을 구분할 수가 없다. - P196

한나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인용해 사람이 외로울 때 얼마나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지 강조했다. 외로운 사람은 현실이 아닌 상상에 뿌리를 두고 생각의 논리를 펼치기 때문이다.
한나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외로운 상태에서, 자명하다는 말은 더 이상 지식을나타내 보이지 않고, 나만의 독자적인 생각이 발달했음을 보여줄 뿐이다. 전체주의운동에서 가장 악명이 높은 극단주의는 진정한 급진주의와는 거리가 멀고, ‘이 모든 것을 최악으로 생각하는 것이며, 이러한 연역 방식으로 언제나 가능한 한 최악의 결론에 도달한다."
현대 세계에서 의미 상실은 돌아갈 곳 없음, 뿌리 없음, 외로움이라는 근본 조건들을 특징으로 한다. 한나는 <전체주의의 기원> 마지막 장에서, 외로움이 모든 전체주의운동을 초래한 근본 원인이라고 말했다. 한나가 말하길, 공포의 기저에는 대개 외로움이 있다. 고립은 "삶의 정치적 영역에만 영향을 미치는 반면 외로움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폭정은 개인을 고립시켜 정치 행동을 할 수 없게 만듦으로써 공적영역을 파괴하지만 전체주의는 또한 개인의 사적 삶도파괴할 것을 주장한다. 전체주의의 "기반은 이 세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험, 즉 외로움에 기반한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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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혼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 찰리 매콜리는 그녀가 오기를기다리며 창가에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다. 쓰레기가 나뒹구는아름답지 않은 모텔 주차장이라도 나머지 세상과 당장 전쟁을치를 만큼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듯ㅡ혹은 그럴 가치가 있다는듯 꺼멓게 검댕이 묻은 주차장 벽 위쪽으로 가시철망이 둘둘감겨 있었다. 찰리에게는 그 모습이 조금 전 그가 피오리아에서반시간 떨어진 이곳, 그들이 함께 찾아낸 이 타운을 걷다가 백화점 유리창을 통해 본 진열된 꿈들의 덧없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제설기나 아내에게 줄 멋진 양모 드레스를 살 수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은 모두음식물을 찾으려고 쓰레기더미로 달려가는 쥐 같다는 사실이었 - P127

다. 어떤 쥐는 무거운 것을 날라 깨진 벽돌 틈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곳을 몹시 불쾌하고 더러운 장소로 만들 것이며,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배설물을 보태는것뿐이리라.
하지만 창문 왼쪽으로 보이는 단풍나무 꼭대기에는 나뭇가지들이 분홍색이 감도는 노란 잎 두 장을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11월까지 붙어 있었을까? 찬란한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나무 바로 뒤에서 비치고 있었다. 탁 트인하늘을 배경으로 저무는 해의 다채로운 색깔이 위를 향해 부채처럼 펼쳐졌다. 찰리는 이런 가을 햇살 속에서 메릴린과 함께 작은 언덕 비탈에 쭈그리고 앉아 크로커스 구근을 심던 것을 떠올리며왜 지금 그때 일이 기억난 걸까? 자신의 큰 손을 얼굴1옆에 갖다댔다. 그들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 P128

메릴린의열의에 찬 모습이 기억났다. 몰두한 그녀의 눈이 커다랬다. 그는크로커스 구근 심는 법을 전혀 몰랐고, 그녀 역시 흥분해서 가쁜숨을 몰아쉬며 자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날오후 시내에서 모종삽을 하나 사서 기숙사 뒤의 작은 언덕을 올라 대학 숲 옆으로, 가을 풀밭으로 갔다. "그래, 여기로 해." 메릴린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열여덟 살에 첫사랑인 그와 함께 처음으로 꽃을 심는 일, 그는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 P128

지 알수 있었다. 긴 모직 코트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그 일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감동받았었다. 그들은 구멍을 파서구근을 심었다. "안녕, 잘 가, 행운을 빌어." 그녀가 어느 구근에게 말했다. 그날, 가을 흙냄새가 모종삽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가득 채울 때, 그의 마음에는 왈칵 사랑과 보호심이 일었고, 지금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것ㅡ그녀의 중심에자리한 순전한 어리석음, 쓸모없고 메스꺼운 다정함이 그를조용히 전율케 했었다. 넋을 잃고 그 일에 몰두해 있던 사랑스러운 메릴린, 그녀의 얼굴은 일을 끝냈다는 기쁨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얘들이 싹을 틔울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애처로운 사람, 늘 걱정만 한다. 그는 그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몇 개가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는 그 부분 또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 순간까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것, 그들이 그저 어린아이였던 그 가을의 어느 순수했던 하루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 P129

그는 침묵과 함께 방안에 홀로 남아. 앞서 중단된 그것, 지금그에게 다시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고요였다. 오래전 그는 그것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였다. 엄지 치기 이론 어린 시절 어느 여름에 할아버지 집 지붕 위에서 망치로타일을 세게 내려치다 알아낸 사실이었다. 실수로 엄지를 내려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전쟁에서도 이런 일이 수시로, 여러 형태로 일어났기에 그는 이따금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그의 이론은 그만큼 잘 들어맞았다 생각하곤 했다. 전쟁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메릴린이 지금 그가 참석중이라고 알고 있는 모임 시간에 그런 것을 언급하는 심리학자는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 P137

인격이 제단이고 그 앞에서 모든 품위가 절을 해야 할 것처럼여겨지던, 인격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던 그 시절이 먼옛날 고대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과학에 의해 유전이 결정적인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인격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폭포로 내던져졌다.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그랬다, 그에게는 인격이 빠져 있었다! 인격의 고상함. 그래, 그것은 종교의 밑바탕과 원시적인 측면에 맞닥뜨리면 종교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것과 같았다. 가톨릭교회가 소아성애와 끝없는 은폐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한패가 된 교황들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과 같았다. - P149

그것은 고통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그것을 보았다-눈 뒤의텅빈 공백, 그리고 그런 이들을 정의하는결핍.
그래서 찰리는 몸을 아주 조금 더 일으켜 앉았고, 텔레비전을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안에는 지금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는 기다렸고, 그는 희망했고,
그는 정말로 기도했다. 오, 다정하신 예수님, 그것이 오게 해주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 제발 그래주실 수 있습니까? 제발 그것이 오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 P158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그녀는 그의 나이에 대해 정말로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지만 그 기간이 오십 년처럼 느껴졌고, 당시에는 혼자였다. 그들은 둘 다 갈증을 느끼는 상태였다.
하지만 메리는 남편을, 그러니까 전남편을 떠올렸고, 요즘은더욱 자주 생각했다. 그가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와 오십 년을살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그를그리워한다는 사실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앤젤리나는 아직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메리는 정말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앤젤리나가 그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젤리나의 남편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겠는가. - P183

이 아이 - 어른이 그녀의 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자신은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에 거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이 아이-지금껏사랑했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ㅡ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삶이 그녀를 마모시키고 마멸시켜 그녀는 거의 죽을 준비가 되었으며, 아마 지금으로부터그리 멀지 않은 때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몇 년이라도 더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메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혹은 정말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고 거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그녀 자신도 그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 P198

비틀거리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노환때문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노인에게 얼마나 빠르게 다가가는지 앤젤리나는 깜짝 놀랐다. 앤젤리나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단순히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웃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그 표정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느낌, 따스하고깊은 감사의 표시에 앤젤리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그를 부축해 길을 건널 때 가로등 불빛에 잠시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어쩌면 빛의 각도 때문이었겠지만 어머니가 노인의 손을 잡을 때, 그리고 노인을 부축해 길을 건널 때 - 앤젤리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길을 다 건넌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고, 이어 어머니가보도를 걸어가는 노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P204

이제 앤젤리나는 창문을 통해 바다를 응시했다. 바깥은 어두웠고 배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앤젤리나는어머니가 불안정하게 길을 건너는 노인을 부축할 때 자신이 중요한 뭔가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시 천장이 훌쩍 높아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고, 자신은 영원히 아이일 거라는 사실을 앤젤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던 노인에게 재빨리 다가가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을보여주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탈리아 어느 해안 마을의 길 위에서 본 개척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 P206

피트 바턴은 동생 루시가 시카고로 북투어를 온다는 사실을알고 있었다. 그는 온라인에서 그녀의 활동을 챙겨보았다. 집에와이파이를 설치한 것은 겨우 몇 달 전이었고, 후에 자신이 쓸작은 노트북도 구입했다.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본 것은 루시의 향후 계획이었다. 그는 루시가 지금의 그녀가 된 것에 경이를느꼈다. 그녀는 이 작은 집을, 이 작은 타운을, 그들이 견뎌낸 그가난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전부를 두고 뉴욕으로 가버렸고, 이제 그가 보기에 그녀는 유명했다. 그는 청중으로 가득찬 강당에서 그녀가 강연하는 모습을 컴퓨터로 지켜보며 조용한 전율을느꼈다. 그의 동생…… 그가 루시를 본 지도 십칠 년이 지났다.  - P207

"그 남자가 거기 주인이면 팁을 안 줘도 돼. 주인이 아니면 줘야 하고." 루시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다시 가면 팁으로 몇 달러줘. 이제 걱정하지 마."
그는 그런 점 때문에 루시를 사랑했다. 그녀는 세상살이를 알았고, 그를 알았다. 그녀는 그가 그런 질문을 해도 당황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 그는 정말로 행복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진입로로 차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와 루시 둘 다 소스라치게놀랐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을 보았다. 루시는 얼굴이 굳어지며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피트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몸을 숙여 블라인드를 최대한 살짝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들쳤다. "오." 그가 말했다. "오, 비키가왔어." - P220

"너도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난 루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라고 생각해." 피트가 바닥에 나뒹구는 캔들을피해 발을 옮겼다.
그들은 침묵 속에 한참을 더 달렸다. 피트는 곁눈으로 동생을보았다. 그는 그녀가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체격 좋은 몸이 좋았고, 차 안에 듬직하게 앉아 당당하게 운전하는모습이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대단하다는 말 이상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비키, 지금보면 우리가 그렇게 나쁘게 된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그녀가 그를 흘끗 보고 눈을 흘겼다. "그래, 맞아."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뭐, 우리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진 않지. 그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녀가 내면 깊숙한곳에서 올라온 듯한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피트는 영원히 이렇게 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그는 거기 동생 옆에 앉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246

특히 그들 가까이 걸려 있는도서관 사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사진은 1940년의 도서관을 찍은 것으로, 벽돌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자란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도티는 대번에 그 여자-그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감을 잡았다. 당연히 도티는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대번에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따금 완전히 헛짚을 때도 있었지만 스몰 부부에 대해서는 틀리지않았다. 닥터 스몰은 여행가방을 올려두는 선반이 없다며 즉시방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고, 도티는 그것이 아내를 시켜 가장 값싼방을 예약할 때 생기는 일이라고는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 P251

이런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사실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이런 비즈니스에서는 눈을 꾹감고있어도 눈에 띄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티가 생각하기로 닥터 스몰의 시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와 전문적인 이력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그가 전산화된 기록과 병원 운영비와 자신이 더이상 예전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불평을 해댔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 P253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스몰 씨와 스몰 부인 같은 부부를 보면 도티는 이따금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오래전에 겪었던 자신의 이혼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덕에 적어도 스몰 부인즉 불안해하고 약간 징징거리며 남편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여자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것은 늘 보였다. 그리고 도티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거의늘-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남편이없는 자신이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새삼 생각했다. 비록날마다 그를 그리워하긴 했지만. - P253

오전 중반에 그들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이 집에서 나갔고, 그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나가는 것. 도티는 사람들이 여기로 오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늘 되새겼다. 아니면-스몰 부부의 경우처럼-자신들의 비즈니스 세계에 속해 있기 위해서. 더 빈번하게는 대학에 다니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서. 어떤 연유에서건 그들은 일리노이주 제니스버그라는 작은 도시의 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거리로 나설 때는 목적이 있었다. 큰 오크나무 문이 닫히면서 그 목적이 강조되는 것, 앞포치로 나가는 순간 그들 - P255

의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 속삭임을 동반하는 그런 불가피한버려짐의 순간음, 그것도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 P256

그녀는 요즘 이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부분이 이 문화차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계급이 포함된 문화. 하지만 물론 이나라의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티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계급이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도티와 그녀의 오빠가 어렸을 때 대형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꺼내 먹은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P273

스몰 부부가 와서 묵기 전까지 도티가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은, 이 비즈니스에서 그녀가 접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는사람들과 연결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어느 밤 저녁식사 시간 무렵 어떤 매력적인 남자-나이가 그녀와 엇비슷하지만 약간 어린 듯했다가 민박집으로 들어와 방을 빌렸고,
그러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같이 앉아 영국 코미디 한 편을 보았는데-오, 도티는그것이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가 웃지 않아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어느 순간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76

그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사람들은 늘 떠났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특별한 날을 추억하기 위해 입장권 반쪽을기념품처럼 간직하듯 그의 숙박 기록을 간직했다. 그 모든 것이봄날에 졸졸 흘러가는 개울처럼 숨김이 없었다. 그녀는 결코 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찰리 매콜리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지닌 찰리 매콜리. - P279

그녀가 느낀 창피함이 이 세상에서일어나고 있는 다른 일들을 고려하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굶어죽는 사람들, 아무 이유 없이 폭발로 숨지는 사람들, 자신들의정부에 의해 독가스로 살해되는 사람들, 이들 중 누구와 비교해봐도 그랬다. 이런 이야기는 셸리 스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티는 그녀의 작은-그렇다. 스몰 small 한-인간적 슬픔의순간들에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셸리는 도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정도의 품위도 갖추지 못했다. 도티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과연 누가 이런 걸 좋아하겠는가! - P281

그들이 예전에 살던 집은 흙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그 길 끝에, 4번 도로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곳은 북쪽, 감자의 고장에 있었고, 애플비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겨울에 얼음이 얼고 눈이 잔뜩 쌓여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좁아 보이는 시기도 있었다. 그 시절에 날씨는 지금과는 다르게피할 수 없는 식구처럼 받아들여졌다. 날씨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엘긴 애플비가 튼튼한 제설기를 그의 가장 튼튼한 트랙터에 매달면 대체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만큼은 눈을 치울수 있었다. 엘긴은 농장이 있는 고장에서 자랐기에 날씨에 대해,감자에 대해 잘 알았고, 그 고장에서 누가 자루에 돌을 숨겨 무게를 속여 파는지도 알았다.  - P287

하지만 결국 햇볕 좋은 날에는 숲과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없었다. 햇살이 아른거리는물리적 세상이 그녀의 첫 친구였고, 세상은 아름다운 자태로 두팔을 활짝 벌린 채 다른 무엇도 그녀의 마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설렘을 받아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생활 패턴, 즉 그들이 언제 어디 있는지를 파악한 뒤 타운 근처의 숲이나 학교 뒤에 있는 숲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를 부드럽고 풍부한 목소리로불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 내가 살아 있다는건 정말로 아주 기쁜 일......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 P298

"맞아." 아까 언니가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진작 알았을거라고 소리쳤을 때, 애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애니가 말하지 않은 것은 뭔가를 알지 못하는 방법도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지난 세월 겪어온 경험이 각기 다른 색깔-어떤색깔은 어두웠다-의 털실을 섞어 짠 뜨개질감처럼 펼쳐졌다.
이제 삼십대가 된 애니는 남자들을 사랑했고, 실연에 종종 가슴아파했다. 배반과 기만의 기류는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그리고그녀는 그것이 취하는 형태에 번번이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로 좌절했으며, 서로밤낮으로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애니는 연극의 세계가 컬트같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그것에 속한 개인에게는 상처를 주더라도 스스로는 철저히 보호한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이른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 P306

아버지가 늘 앉아 있던 흔들의자, 지금은 속이 보일정도로 닳고 닳은 방석, 오랜 세월장작난로 위에 변함없이 놓여있는 찻주전자, 창문 위에 드리워진 커튼, 그리고 커튼과 유리창사이의 가는 거미줄, 애니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가엾은 샬린처럼 매일매일 두려움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늘 거기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먹고 자랐다.
그것이 그들의 토양을 만든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그녀가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잠시애니는 놀라움을 느꼈다. 착하고 책임감 있고 품위 있고 바른 마음을 가진 오빠와 언니는 그저 그 시간 동안에는 지구를 뒤로하고 떠나온 듯 눈부시게 하얀 태양 가까이에 있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게 되는 열정을,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모든 것을 무모한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그런 열정을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대해. - P310

지난해 루시 바턴이 북투어차 시카고에 왔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 바턴, 어머니 사촌의 딸, 오, 그 불쌍한 아이.
그런데 그녀가 나이든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책에 서명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가에이블, 하고 말하면서 일어섰고, 눈물을 글썽였다. 잠에 빠져든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데, 어느새 그는 버튼을 눌러도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어머니를 찾고 있었고, 이어 좁은 복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중에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깊은 꿈속이었지만 그는 패닉 상태와는전혀 다른, 채울 수 없는 오래된 갈망을 다시 느꼈다. 그는 관객석에서 숨소리가 터져나올 때 잠에서 깼다. - P319

에이블에게 좀더 기력이 있었다면 이 낯설고 고뇌하는 남자에게 자신은 오래전 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록퍼드에서 어느 극장 안내원으로 일했고, 오늘밤 옆문으로 들어오면서 바로 그때의 냄새를, 극장의 그 은밀한 냄새를 맡았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에 그 일자리를 구했다. 열여섯살 때였다. 바로 그해에 6학년이던 어린 동생이 반 친구들 앞에불려나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적받으며 생리대를 살 돈도 없을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도티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에이블은 동생에게 뭔가를 약속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334

그것은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라고, 그는 세월이한참 지난 뒤 아내에게 말했다. 이어 그녀의 공포가 제대로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창피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깨달음은 아주 즉각적으로, 심지어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찾아왔다. 음, 그렇다면 당신은 한 번도 배고파본 적이 없었던 거군, 일레인. 그가 실제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때 그는 분명 창피함을 느꼈다. 자식들에게는 아버지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은 음식을 먹을 만큼 가난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녀는 그에게 요구했다. - P336

그가 놀란 것은 죽음, 한 사람이 싹 지워지는 것, 그 남자가그렇게 간단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어리둥절함과 관련이 있었다. 사라지는 것의 단순함은 에이블에게 익숙한것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버지가 사라진 것부터 시작하여 타인들의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그때 놀라움에 뒤따른 감정은 활활 타오르는 수치심이었다. 마치 지난 세월 키스에게 자신의 옷을 만들게 한 것이 뭔가 불미스러운 행동이었던것처럼. 그는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오, 정말 미안해요." - P342

곧 구급차가 속도를 높이자 에이블은 공포가 아닌 묘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꼈다. 온갖 문제들이 그 껍질이벗겨진 채로, 혹은 지금도 계속 벗겨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그의통제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을 하지만 그의 손이닿을 수 없는 곳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거기 크리스마스 창문이 있는 것처럼, 다른 무언가가 기다란 흔적을 그리고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어리둥절해지기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는데, 고단한 황홀경 상태에서 그것은 거의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링크 매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좋은 사람이에요." 에이블은 가슴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 같았음에도 그 말을 들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 P346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미소가 그들에게는 고통에 찬 찡그림으로 보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지금그들을 남겨둔 채 초록빛 콩밭을 지나며 아주 가볍게 훌훌―그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 날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실을 가슴속에 지닌 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노볼을 사랑하는 어여쁜소피아처럼 에이블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하지만 말할 필요가없었다. 그리고 그런 선물이 그런 시간에 그를 찾아올 수 있다면무엇이든………… 록퍼드에서 회의에 참석하려고 옷을 잘 차려입고온 그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록강 위로 급물살처럼 흘러갔다…… 그가 눈을 떴고,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 P347

잔잔하면서도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문장의 힘 앞에는 늘숙연해지고, 세상에서 떠받들듯 떠들어대는 긍정 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더 다칠까 두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하지만 그것을 데려가 보듬는 역할은독자에게 맡기는 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에는 늘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이 펼쳐지는 무대 앞에서 등장인물들의 들고 남을 바라볼 때는, 그 동선이나 움직임이나 말보다는 인물들의 마음의 결 마음의 행로, 마음의 흔적을더욱 뒤쫓게 된다. - P352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더욱 그렇다. 일리노이주 앰개시를 배경으로 하는 총 아홉 편의 이야기, 그 속에는 익숙하지만 낯선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다 어쩌다 그들의 시선이 흘끗 나를 향하는 그 한 번의 순간, 그 하나의 문장에서 나는 그들이 지닌 아픔과 그 견딤을 이해한다. 아마도 조금, 토미가 어린 루시를, 도티가 찰리 매콜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까.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견딤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과 수치심을 바라본다. - P352

먼저 폭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루시의 팔이나 목에 들어 있던멍처럼 물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심장에 생채기를 내는 언어적인 것인지. 전쟁처럼 큰 규모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대화 중 오간 한마디인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는 더 악질적인 폭력인지 등. 그 형태는 여러 가지일지라도 모든 폭력은 결과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문제, 개개인의 문제가 되고 만다. 시대가 강요한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 이후의 감정을 질기게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다. - P253

또한 우리 모두 폭력의 피해자가, 혹은 가해자가 되는 것에서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의 날선 칼,
억제할 수 없었던 공격적인 감정의 분출, 아닌 줄 알면서도 외부의 힘에 굴복하여 하게 되는 잔인한 행위.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혹은 그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은 늘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누구보다아프게 아는 도티마저 셸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 ‘페니스‘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려고 하지 않았는가 - P354

결국 누가 어떤 힘을 더 많이 가졌는지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것일 텐데, 계급을 없애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계급에 내재된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는 충분히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부, 지식, 성의 차이가 만들어낸 힘의 강압적인 행사, 그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이 우리가 가해자나피해자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어느 시기에 그런 계급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는 단연코 수치심일 것이다. 작가는 남을 무시하거나 아래로보면서 느끼는 우월감과 그 우월감의 대상이 되었을 때 느끼는수치심을 여러 상황과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의 순간은 주인공들의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가온다. 우리가 충분히 민감하게 깨어 있지 않다면, 즉 현상을 사유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피로와 민감한 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를 불가피한 당위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급과 폭력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P355

폭력의 희생자들. 폭력의 질긴 시간성. 그것을 고통스럽게 견뎌낸, 그러나 아직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같이 쓰레기통을 뒤졌던 루시 바턴과 에이블 블레인은 이른바 사회적 계급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루시바턴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에이블은 돈 많은 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듯한 루시도 어린 시절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마도 큰 용기를 내어 그 공간으로 되돌아가지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심리 상태에 빠져 언니 비키에게 "아니,
내가 돌아온 게 잘못이었어, 내가 떠난 게 잘못이었어, 전부 내잘못이야"라는 말만 반복한다. 에이블은 누구에게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일상이 되어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도 미안하다고자꾸만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 P352

이들의 마음을 좀더 들여다본다. 큰 아픔을 가지고 있으나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들. 이제 그만 좀 미안해해,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것 없어, 미안해야 하는 건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월감을 느끼려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지. 이제 좀 떨쳐내. 나는 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미안한 마음이 꼭 떨쳐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 P356

그 미안한 마음은 이들을 힘들게 하면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중한 마음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초반에 이미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가해에 대해 자책할 수 있는 마음, 혼자 고통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미안해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준다.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죄책감이나 미안함에 괴로워 미쳐버릴 만큼이 아니라면, 그것을 얼마간은 품은 채 뚜벅뚜벅 삶의 걸음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책과 미안함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연민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P357

무엇이든 가능하다』의 아홉 편의 이야기. 몇 번을 다시 읽는동안에도 이 소설이 마치 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내 생각은 그 부분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희망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또 한번 읽는 동안 각 이야기들의 마지막 부분에 홀린 듯 관심이 쏠렸고, 그러면서 이 소설『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놀라울 만큼 따뜻하고 희망적인 회복을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폭력에 의한 아픔과 연민 사이를 섬세히 오가며 그려낸 이 소설 - P357

은 사랑과 희망을 품은 놀라울 만큼 회복적인 이야기였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토미, 햇볕 속에 앉아 찰리의 팔을 잠시잡았다가 놓는 패티, 캐런-루시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지고싶어진 린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친구가 생긴 에이블 블레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깨달음까지. 그 순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처음에는 그저 담담한 진술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뒤집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일 거라고 짐작했었던 ‘무엇이든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의 자리에 희망과 회복을 넣고 싶다.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그리고 찰리 매콜리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고통 또한 희망이 될 수있음을 깨닫는다.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라도, - P358

「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남긴 여운 역시 평생 이어질 것 같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이런 일상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자신도 어느 순간 인식하지 못한 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고, 내 안에 연민이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그 연민은 타인을, 때로는 나 자신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티에게연민은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도티 자신은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도티 안에는 연민이 있었다. 도티의 말처럼 분명 혼란스러운 것임에도, 계급의 위아래 없이 수평 - P358

의 높이에서라면, 연민이란 어쩌면 이 각박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치유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을 성장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은 평가나 판단이아니라 연민이라고 연민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고 연민은 인류에 대한 희망이자 사랑이라고.


정연희 - P359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살아간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알아나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러나 그런 공허한 단정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이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도 존재한다고, 더 나아가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귀하고애처로울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상처받은 마음으로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책장을 덮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제목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상처를 아는 사람의 삶을 향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최은영(소설가)


상처받더라도 황홀한 무대 위의 순간과, 지극히 평온한 일상의 정원을 오가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세계는 우리 모두가 겪어본 흔들리는 우주에 불과할진대 왜 이다지도 강렬한 서스펜스를 남기는 것일까. 다시 한번.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야기. 어둡고 칙칙한 색깔의 털실이직조한 환하고 강한 스웨터, 올이 풀리지 않는 단단한 이야기. 박민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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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거프틸은 한때 낙농장을 소유했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그 낙농장은 일리노이주 앰개시 타운에서 2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그 일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여전히토미는 낙농장이 홀랑 불타버린 그날 밤 느꼈던 두려움에 휩싸인 채 한밤중에잠을 깨곤 했다. 집도 깡그리 불탔다. 바람이 헛간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불똥을 날려보냈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1는 늘 자신의 실수였다고 생각했다. 그날 밤 그가 착유기 전원이꺼졌는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화재가 시작된 곳이 바로 거기였기 때문이다. 불길은 일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번져 그곳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들은 거실에 있던 황동거울틀만 빼고 모든것을 잃었는데, 그는 다음날 잿더미 속에서 그것을 찾아냈고, 발 - P9

견한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사람들이 이런저런 구호품을 보내주었다. 그가 정신을 수습하고, 자신이 가진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모을 때까지 그의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반 친구들의 옷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그는 그 땅을 이웃 농부에게 팔았지만 큰돈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와 그의 아내인 키 작고 예쁜 셜리는 옷을 새로 샀고, 그는 집도 샀다. 셜리는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기운을 잃지 않고 감탄스러울 정도로 잘 버텨냈다. 그들은 쇠락한 타운인 앰개시에 집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의 농장이 칼라일과 앰개시 두 타운을 나누는 경계에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이전에는 칼라일에 있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앰개시 소재의 학교에 다녀야 했다.  - P10

거대한 불길이 밤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이어 소들이 죽어가며 내지르는 끔찍한 비명을 들으면서 그는 느낀 것이 있었다. 여러 가지를 느꼈으나, 하느님의 현존이라고밖에 생각할 수없는 그것을 명백하게 느낀 것은 집의 지붕이 폭삭 주저앉아 바로 아래쪽, 아이들 사진과 그의 부모 사진이 있는 침실과 거실로 무너져내릴 때, 그 일이 벌어지는 것을 지켜볼 때였다. 그 순간 그는 천사들이 왜 늘 날개 달린 모습으로 그려지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의, 심지어 소리도 아닌 것의감각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하느님이, 얼굴은 없으나 하느님인 그분이 그에게 몸을 밀착시키고 무언으로 아주 간단하게, 그리고 아주 순식간에 괜찮다, 토미, 라고 그가 알아들은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러자 곧 토미는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자신의 이해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이후로도 줄곧 괜찮았다.  - P13

그럼에도 오늘 같은 봄날 아침에 흙내음을 맡으면 소들의 냄새가, 그것들의 축축한 콧구멍이, 그것들의 따뜻한 배가 그리고 그의 헛간-두 개였다-이 생각났고, 그러면 그는 마음이 자신을 찾아오는 장면 장면들로 자연스럽게 흘러다니도록 내버려두었다. 어쩌면 방금 바턴 씨네 집 쪽을 지났기 때문에 그 가난하고 슬픈 아이들의 아버지이자 이따금 토미의 농장에서 일했던그 남자 켄 바턴이 그리고 대학에 가면서 집을 떠나 결국 뉴욕시티에 정착한 루시 그는 그 아이를 더 자주 생각했다가 떠올랐을 것이다. 그녀는 작가가 되었다.
루시 바턴. - P14

한번은 그들이 타운 여자들한 무리를 데리고 수용소를 돌아다니면서 바로 그 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었는데, 형 말로는 어떤 여자들은 눈물을 흘렸지만 어떤 여자들은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을 거부하겠다는 듯 턱에 힘을 주고 화난 표정을 지었다고 했다. 그 이미지가늘 토미의 마음에 남아 있긴 했지만, 왜 하필 지금 떠올랐는지그는 궁금했다. 그는 차창을 끝까지 내렸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그는 이미 나이가 들었다 자신이 선과 악의 이 혼란스러운 다툼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어쩌면 인간은 애초에 이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었다. - P22

토미는 운전하면서 문득 루시가 중학생일 때 앉곤 하던 책상 근처에 자신이 1쿼터를 놓아두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애는 늘 헤일리 선생의교실을 이용했다. 그 선생은 일 년 동안 사회를 가르치다가 군에 입대했는데 아마 루시에게 잘해주었는지, 나중에 그 교실이과학실이 된 뒤에도 루시는 그곳을 자주 이용했다. 그래서 토미는 어느 날 루시가 즐겨 앉는 책상 근처에 1쿼터를 놓아두었다.
학교에 자동판매기가 막 들어온 시점이었고 1쿼터면 아이스크림 샌드위치를 사 먹을 수 있어서, 루시가 볼 수 있는 자리에 1쿼터를 놓아둔 것이었다. 그날 밤 루시가 집으로 돌아간 뒤 토미가교실로 가보니 1쿼터가 놓아둔 그 자리에 정확히 그대로 있었다. - P35

잠시 뒤 토미는 백미러를 흘끗 쳐다보았고, 피트 바턴이 간판을 망치로 때려부수는 장면을 보았다. 그것을 때려부수는 방식에 담긴 무언가ㅡ힘ㅡ때문에 토미는 운전하면서 그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그가 지켜보니 그 아이ㅡ그 어른ㅡ는 간판을 내려치고 또 내려칠 때마다 점점 더 강한 힘을 싣는 것 같았다. 차가 살짝 내리막길을 지나며 그 모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을때, 토미는 이렇게 생각했다. 가만있어봐. 그리고 차가 다시 오르막을 오를 때 백미러를 보니, 거기 분노에 차 맹렬하게 간판을때려부수는 그 아이ㅡ어른이ㅡ다시 보였다. 그 남자가 간판을 두들기며 표출하는 분노가 토미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웠다. 토미는 자신이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 불온하게 느껴졌는데, 그 행동에서 엿보이는 걱정이 그 아이의 아버지가 그날 헛간 뒤에서 하고 있던 행동만큼이나 은밀한 느낌을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토미는 차를 몰면서 깨달았다. 오ㅡ문제는 어머니였어. 어머니가 문제였어. 그녀가 정말로 위험한인물이었던 거야. - P36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토미는 타이어 바람이 빠져버린 듯한 감각을 느꼈다. 마치 자신을 지금까지―평생―지탱해오던 내부의 공기가 이제 완전히 빠져나간 것처럼. 그는 운전을 하면서 공포감이 점점 커지는 것을 느꼈다. 이해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것을 말해버린 것이다화재가 일어난 그날 밤 하느님이 그를 찾아왔다는 것을. 왜말했을까? 어머니의 간판을 그토록 무자비하게 때려부수던 불쌍한 아이에게 뭔가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 아이에게 그것을 말했다는 사실이 왜 문제가 되는가? 토미는 확실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토미는 자신에게 끼워져 있던 플러그를 쓰로 뽑아버린 기분이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한 그것을 말함으로써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스스로를 작은 사람으로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그에게 정말로 공포를 일으킨 것은 그것이었다. 그래서 그걸 믿으세요? 피트 바턴은 그렇게 말했다.
토미는 더이상 자신이 자신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 P43

패티는 마치 자신의 머리가 잘려나가 몸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말로이상한 느낌이었지만, 그 느낌은 계속되었다. 그녀와 언니들은아버지가 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가 욕설을 내뱉고 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예전에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울지도 않았고 욕설을 내뱉지도 않았고 돌처럼무표정한 얼굴을 하지도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 되었고, 가정-그전에는 그들 모두 호수 위의 보트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은 사라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한 뭔가로 변해버렸다. 타운 사람들의 쑥덕거림은 그치지 않았다.  - P73

루시 바턴의 회고록에서 루시는 사람들은 늘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느낄 방법을 찾는다고 썼는데, 패티는 그것이사실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밤 달은 거의 패티 뒤를 따라오다시피 했고, 그녀는 백미러를 쳐다보며 달에게 윙크했다. 그녀의 마음에 언니 린다가 떠올랐다. 린다는 패티가 어떻게 청소년들을 상대하는 일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다. 패티는 운전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마 린다는 결코 모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서배스천 말고는어느 누구도 결코 모를 것이었다. 시비가 죽은 뒤 패티는 심리치료사를 찾아갔다. 그 여자에게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 P79

하지만감청색 블레이저를 입은 그 여자는 커다란 책상 뒤에 앉아 부모의 이혼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패티에게 물었다. 기분이 안 좋았죠, 패티가 말했다. 패티는 이 심리치료사와의 상담을 어떻게그만둘지 방법을 궁리하다가 결국 비용을 더 감당할 수 없다고거짓말을 했다.
진입로로 접어들던 패티는 나갈 때 켜두었던 불빛을 보았고,
그 순간 루시 바턴의 책이 패티를 이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랬다. 책이 그녀를 이해한 것이었다. 입안에 노란 캔디의 달콤한맛이 남아 있었다. 루시 바턴에게는 자신만의 수치심이 있었다.
오, 세상에, 그녀는 정말로 자신만의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다. - P79

"너는 열다섯 살이야. 나는 어른이고 잘못한 사람은 나여야 해."
패티는 소녀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놀랐고, 소녀는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그냥 피곤해서요." 라일라가 말했다. "그냥 너무 피곤해서요."
패티가 일어서서 상담실 문을 닫았다. "얘야." 그녀가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얘야. 내가 너를 위해 뭔가 해줄 수 있을 것 같아. 너를 대학에 보내줄 수 있다고. 돈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아까 말했듯이 네 등급은 훌륭해. 나는 네 등급을 보고깜짝 놀랐고, 네 성적은 정말로 뛰어나. 나는 너만큼 등급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도 내가 대학에 간 건 우리 부모님이 나를 대 - P82

학에 보내줄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네가 대학에 가게 해줄 수 있고, 그러면 너는 가는 거야."
소녀가 패티의 책상에 올려놓은 자기 팔에 머리를 내려놓았다.
소녀의 어깨가 들썩였다. 잠시 뒤 소녀가 젖은 얼굴로 고개를 들고 말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누군가가 저한테 잘해주면…………오 이런, 그러면 마음이 미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 패티가 말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소녀가 다시 울었고, 계속 소리를내어 훌쩍였다. "오 이런 "소녀가 얼굴을 닦으며 말했다.
패티가 화장지를 건넸다. "괜찮아.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다괜찮아질 거야." - P83

그날 오후 패티가 우체국 계단을 올라가는데 환한 햇살이 그위로 쏟아져내렸다. 우체국 안에 찰리 매콜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패티." 그가 말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찰리 매콜리" 패티가 말했다. "요즘 어딜 가나 만나네요. 어떻게 지내세요?"
"살아내는 중이죠." 그는 문으로 걸어가던 길이었다. - P83

나중에, 앞으로 다가올 세월 동안 패티는 그들이 계단에 앉아있던 것과, 그것이 시간의 바깥에서 일어난 듯 느껴졌던 것을 되돌아볼 것이었다. 길 건너 철물점이 있었고, 더 멀리로는 오후햇살을 받아 건물 측면이 환히 빛나는 파란 집이 있었다. 패티의마음에 키 큰 하얀 풍차들이 떠올랐다. 그 길고 가는 팔들은 일제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지만, 이따금 풍차 두 개의 팔이 동시에돌며 하늘을 배경으로 같은 위치에 놓일 때를 빼고는 결코 똑같이 돌지 않았다.
마침내 찰리가 말했다. "요즘 잘 지내는 거죠, 패티?"
그녀가 말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은 그 속으로 영원히 들어갈 수 있을 것처럼, 그만큼깊었다. - P84

잠시 뒤 찰리가 말했다. "중서부 출신이로군요. 괜찮다고 하는걸 보면요. 하지만 늘 괜찮지는 않을 텐데요."
그녀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목울대 바로 위에는 면도하는 것을 잊은 듯 흰 수염 몇 가닥이 남아 있었다.
"물론 뭐가 괜찮지 않은지 내게 말할 필요는 없어요." 그가 이제 앞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나도 물어볼 생각이 전혀 없고요.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건 가끔은 "그가 그녀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고, 그녀는 그의 눈동자가 옅은 푸른색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끔은 그렇게 괜찮지는 않다는 거예요. 절대로 그렇지 않죠. 늘 괜찮은 건 아니에요."
오, 그녀는 뭐라고 말하고 싶었고, 자신의 손을 그의 손 위에없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가 지금 그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사실을 그때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 P85

린다 피터슨-코넬은 이번 한 주 동안 그들의 집에 묵기로 한여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오, 이 여자가 되겠군. 여자의 이름은이본 터틀로, 사진 페스티벌에 참가한 또다른 여자인 캐런-루시토스의 소개로 그들의 집에 오게 되었다. 캐런-루시는 린다가이본을 맞이할 때 이본 옆에 말없이 서 있었다. 이본은 키가 매우 컸고 약간 굽슬굽슬한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왔는데, 십년전에는 상당히 예뻤을 것 같았다. 지금은 눈 밑에 주름살이 생겨 파란 눈빛이 주는 강렬함이 약해졌고, 분명 마흔을 넘겼을 나이치고 화장이 너무 진했다. 린다는 쉰다섯 살이었다. 이본의 샌들은 높은 코르크 웨지 굽이어서 그녀의 키를 더욱 커 보이게 했다. 린다는 그 구두를 보고 이본이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 - P89

을 가능성이 높다는 걸 눈치챘다. 늘 구두가 단서였다.
린다와 제이 피터슨-코넬의 집 정원에는 알렉산더 콜더의 조각상 두 점이 있었는데, 두 작품 다 크고 눈부시게 푸른 수영장한편에 있었다. 집안 거실 벽에는 피카소 그림 두 점과 에드워드호퍼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손님들이 사용하는 구역으로 이어지는 경사진 복도 끝에는 필립 거스턴의 초기 그림 한 점이 걸려 있었다. - P90

연중 이맘때에는 집집마다 포치에 제라늄과 페튜니아가 심긴 큰 화분들이 가득했다. 타운에는 키 큰 오크나무와 검은호두나무가 심겨 있었고, 쥐엄나무와 초크체리 가지들은 출렁출렁 늘어져 공원이나 학교 운동장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없으면 나무들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끔은 물푸레나무의 잎들이 살랑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꽤오래전 파산해 결국 문을 닫아야 했던 사립 고등학교 교실-그일부-이 아직 사진 페스티벌 강의실로 쓰였다. 그 건물로 가려면 무성한 덤불과 나뭇가지를 헤치고 나아가야 했기 때문에, 타운의 집들은 지나는 길에 흘끗 쳐다볼 수 있을 뿐이었다. 거의동화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타운 자체가 그랬다. 이본 터틀이캐런-루시 토스에게 그렇게 말하자 캐런-루시는 자기도 그렇게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환영회가 열리고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 P93

그것은 그녀의 부모와 형제들이 견뎌야 하는 절망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다.
이 년 동안 타운은 그런 식으로 돌아갔다.
그 기간 동안 린다 피터슨-코넬은 가슴속 깊은 곳에 어두운 혼돈의 원판 같은 것을 지닌 채 살아갔고, 남편이 신문기사를 읽고텔레비전으로 사건의 추이를 지켜보는 모습을 보면서 종종 진땀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미친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몸이왜 그런 식으로 반응하는지, 마음이 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지못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종결되었을 때, 마침내, 마침내 종결되었을 때, 그녀는 자신이그런 식으로 느꼈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가끔 기억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실제로 겪었던 신체 증상이 다시 나타난 적은 결코 없었다. 그리고 기억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어리석은 여자야. 나는 불평할 게 아무것도 없어, 정말로, 그렇겐 못하지, 오맙소사. - P99

린다는 일어서서 거실로 들어가 카우치 한쪽 끝에 앉았다. 그녀는 영혼이 얼마간 육체에서 빠져나온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다시 어려져 이른 여름 어느 저녁, 학교의 여자 친구들과 길을걸으면서 옥수수밭을, 또 옥수수밭을 지나고 이어 콩밭을 지나는 느낌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새생명의 연초록빛으로 가득했고, 해가 넘어가면서 온 하늘이 찬란한 축하의 색깔을 입었다. 맨팔에 닿던 공기도 떠올랐고, 그 모든 자유, 그 모든순수함, 그 웃음도...… - P117

"오, 차일드, 당연히 그렇겠네요. 정말 미안해요." 그녀가 시선을 린다에게로 돌렸지만 초점은 여전히 먼 곳에 닿아 있는 듯 보였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당신 남편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말할 입장은 아니네요. 내가 유리로만들어진 집에 돌을 던졌어요." 미안해요."


그것은 거의 언제나 놀라운 일이다. 예전에는 영원히 닫힌 장소로 보이던 곳으로 들어가도록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그리고그것이 놀라서 멍해 있던 린다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린다는 그날 콘칩 봉지들 위로 햇살이 쏟아지는 편의점 안에 서서 그 같은동정의 말-캐런-루시는 자신의 남편이 어떤 마음 상태였는지몰랐던 반면, 린다는 남편의 마음 상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말을 들을 자격이 없었다—을 들으면서 그 일의 결말이 결 - P124

국 어떻게 될지 감지했다. 이본 터틀과 캐런-루시는 이 타운에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재판은 열리지 않을 것이며, 카메라에 대한 언급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린다가 남편과 함께 밤에뉴스를 보거나 전원을 산책하거나 레스토랑에 앉아 담소를 나눌때, 그는 자신이 궁지에서 벗어난 것이 아마도 혹은 부분적으로아내의 신중함 덕분이라는 것을 언제나 의식하고 있을 것이기에, 그리고 그뒤로 더이상 다른 여자는 없을 것이기에, 게스트룸은 아마 누구도 들어가지 않고 벽에 캐런-루시의 금 간 접시 사진이 걸려 있는 햇볕 잘 드는 서재가 될 것이기에, 린다는 자유의 상태에서 남편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 P125

의 상태에서린다는 그날 그 사건의 본질을 느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고 그 여자의 눈을 깊이 바라보았다. 린다는 그녀의 손을 잡고싶어졌다. 심지어갑작스럽고 놀랍고 다급하게-그녀의 뺨을어루만지고 싶어졌다. 캐런-루시가, 자신이 줄곧 중요하고 사랑받는 존재라고 생각하다가 어느 날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사라진 것을 알고 뒤통수를 맞은 듯 괴로워하던 그 프리티 나이슬리 걸인 것처럼.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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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는 차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풀이 길가 콘크리트의 틈을 뚫고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제한속도 75MPH*라고 되어 있는 표지판 옆을 지나갔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오렌지빛이감도는 붉은색의 잎이 달린 나무 꼭대기가 보였고, 더 달리자 나뭇잎은 노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줄지어 선 모든 나무들 사이 작은 선홍색 나무가 한 그루 보였다. 길가의 풀은 색깔이 좀바래 있었다. 풍부한 녹색이 빠지니 완연한 8월의 풍경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자 키 큰 나무들이 서 있었다. - P138

그와 함께 차를 타고 달리면서 나는 어떤 익숙한 감각을 의식했는데, 그 감각은 전날 밤 공항이 너무 초현실적이라는 거의공항 같지 않다는 느낌과 함께 시작된 것이었다. 내가 의식한 것은 이것이었다.
내가 겁을 먹었다는 것.
나무들은 점점 땅딸해졌고, 몸통이 굵은 소나무들이 줄지어있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왼쪽으로 비쩍 마른 자작나무 들판이나타났다. 그걸 제외하면 탁 트인 넓은 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표지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차들도, 지나가는 한두 대 말고는 없었다. - P139

나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뉴욕은 내가 오래 살아온 곳이고, 익숙한 곳이다. 내 아파트, 내 친구들, 경비원,
정류장마다 한숨을 토하는 도시 버스들, 내 딸들…… 그 모든 것이 익숙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가 있는 곳은 익숙하지 않았고,
그래서 무서웠다.
나는 그게 몹시 무서웠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는데, 겁이 난다고말할 만큼 내가 그를 충분히 잘 아는 건 아니라고 문득 느꼈기때문이다. - P140

이들은 나와 같은 족속이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어느 집단에 소속감을 가져본 적이 결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순간 여기 메인주 시골에 있었고, 방금 내게 일어난 일은 그 집들, 우리가 지나쳐 간 몇 채의 집과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이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같다-이해였다. 그건 이상한 감정이지만 진짜였고, 잠시 나는 이렇게 느꼈다. 내가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겠다고. 그리고 심지어, 그 몇 채의 집에실제로 살고 있고 집 앞에 트럭을 세워놓은 그 사람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사랑한다고. 거의 그렇게 느꼈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149

나는 잔해만 남은 콘크리트를 보았고, 녹색 잎이 콘크리트를뒤덮으며 자라고 있었다. 그 자리에 햇빛이 비쳐 녹색 잎이 반짝거리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덜컹했고, 나는 랠프가말하는 모든 것이 내가 그의 입에서 나오리라 이미 예상한 내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떤 단어가 그의 입을 통해나오기 직전에 그게 어떤 단어일지 내가 알았다는 뜻이다. 중요한 말은 아니었고, 그저 그곳이 어떻게 지어졌고 단열재로는 무엇을 사용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다만 내 머릿속에서 랠프가얘기하는 내용을 정확히 미리 말해준 것은 어떤 여인의 목소리였다. 정말로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건 데자뷰인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건 데자뷰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아주 기이한 순간이었다. 혹은 일련의 순간들. - P158

내가 자란 곳에서도 사방에 하늘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 하늘에는 해가 찬란했지만, 또한 군데군데 퀼트처럼 아주 낮게 구름이 드리워 있었고, 해는 구름 안을들락거리며 녹색 목초지에 환한 빛을 쏟아냈다. 그리고 우리는드넓은 해바라기 들판을 지나갔다. 우리는 또한 토양에 영양분을 주려고 간작으로 클로버를 심은 들판도 지나갔는데, 내 어린시절 경험으로는 봄이 되면 그것을 갈아엎을 터였다. 거의 익숙하다고 할 수 있는 그 풍경을 보고 작은 행복을 느낀다는 것이,
그날 아침의 고립감이 이런 감정으로 변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나는 행복을 느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걸 보면서 나는 어린아이인 내가 트럭을 모는 아버지 옆에 타고가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 P163

나중에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윌리엄은 울었지만결코 내게 그런 식의 말은 하지 않았다. 그는 말했다.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워, 루시." 나는 기다렸지만, 그가 "제발 떠나지 마, 왜냐하면 당신은 루시니까!"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듣지 못했다.
윌리엄을 떠난 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한 적이 한 번있었다. 우리가 정말로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할까? 그러자 그가말했다. 당신이 우리 결혼에 뭔가 다른 요소를 가져올 수 없다면.
내가 가진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 결혼에새롭게 가져올 다른 요소를 전혀 생각해낼 수 없었다는 것이다. - P167

권위에 대해.
나는 작문을 가르칠 때 그 일을 오래 했다-권위에 대해 말했다. 가장 중요한 건 글을 쓸 때 권위를 가지는 것이라고 학생들에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헬름 게르하르트의 사진을 봤을 때 나는생각했다. 오, 권위가 느껴지는데, 나는 캐서린이 왜 그와 사랑에 빠졌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지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의 외모가 풍기는 인상, 보이는 방식 때문이었다. 그는 명령에 따르기는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영혼까지 소유할 수는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그리고 문밖으로 걸어나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 P168

그리고 나는ㅡ천천히ㅡ이것을 깨달았다. 이 권위가 바로 내가 윌리엄을사랑하게 된 이유임을 우리는 권위를 갈망한다. 
진실로 그렇다.
누가 뭐라고 말하건 우리는 권위라는 감각을 갈망한다. 혹은 그런 사람과 함께 있으면 안전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힘든 일‘ㅡ나는 그걸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을 겪으면서도 윌리엄은 이 권위를 결코 잃지 않았다. 우리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라고 느껴질 때조차 나는 늘 그의 - P168

존재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한 사람에 대해 이런 식으로 느끼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와 결혼한뒤에도, 심지어 우리가 ‘힘든 일‘을 경험하는 와중에도 나는 월리엄에 대해 여전히 그렇게 느꼈다. 그와 결혼하고 처음에, 그리고 (앞서 말했듯) 우리에게 곧바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을 때한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던 게 기억난다. "내가 빙빙 돌며 헤엄치다가 이 바위에 부딪힌 물고기처럼 느껴져." - P169

차를 타고 가는 도중에, 문득 윌리엄과 함께 살던 시절에 결혼이라는 것이 내게 종종 얼마나 끔찍한 것이었는지 생생히 떠올랐다. 방안 가득 익숙함이 짙어지고,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실들로 목구멍이 거의 꽉 막혀 실제로 콧구멍까지 밀고 올라온 것같은 느낌상대의 생각이 내뿜는 냄새, 입 밖으로 나온 한마디한 마디에서 느껴지는 자의식, 한쪽 눈썹이 살짝 올라가면서 약간 씰룩이는 모습. 거의 알아차릴 수 없게 살짝 기울어지는 턱,
상대 말고는 아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것들, 그런 걸 느끼고 살면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영원히 그럴 수는 없다.
친밀함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것이 되었다. - P177

캐서린은 밤에 내 딸들을 돌봐줄 사람을 고용했다. 내기억에 한 번의 예외ㅡ우리가 그녀의 병에 대해 알게 됐을 때,캐서린이 병에 대해 알리려고 뉴욕에 왔을 때, 그녀는 몸을 떨고있었고, 그렇게 떠는 모습을 보니 우리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를 ㅡ제외하면 그녀는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고,대부분의 시간 동안ㅡ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ㅡ우리는 어떤면에서, 그냥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지금 그때를 생각해보면 그녀가 곧 죽으리란 걸 내가 정말로 믿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캐서린도 정말로 그걸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치료를 받았고, 우리는 그것도 충실히 해나갔다.
치료가 끝나고 한 시간 뒤면 후유증이 나타나리란 걸 알아서, 우리는 치료가 끝나면 같이 식당으로 가서 머핀을 먹었는데, 캐서린이 머핀을 먹고 커피를 마셨던 모습이 기억난다.  - P180

그리고 딸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온 윌리엄이 내가 집 옆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딸들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기고 다시 나왔던게 기억난다. 내 기억에 그는 별말 없이 다정하게, 정말로 다정하게 나를 대했다.
윌리엄은 집안에 들어와서 어머니의 방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누구도 면회는 안 돼." 그리고 나는 윌리엄이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어머니의 부고를 쓰는 것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 여인은 아직 죽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부고를 쓰고 있었고, 왠지 모르지만 그후로 내내나는 윌리엄의 그런 행동을존경했다.
앞서 말한 권위 때문일 것이다.
나도 모르겠다. - P184

나는 내 어둑한 호텔방 의자에 돌처럼 가만히 앉아 그 일을 생각했다. 크리시가 그만큼 아팠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어떤면에서는 그게 내 잘못이었음을 처음으로 이해했던-마음속에서 조금도 축소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했다는 말이다―것 같다.
가족을 버리고 떠난 사람이 나였으니까. - P188

내가 아무리 마음속 깊이 그렇다고 느껴도 나는 투명인간이아니다. - P189

신기하게도, 그날 그 순간 뭔가가 분명해졌다ㅡ그리고 메인주의 어두워지는 호텔방 의자에 앉아 있는 동안 또 한번 분명해졌다. 내가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가 그 한순간에 분명해졌다. 나는 그런 행동을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다시는 잊지않았다.
하지만 윌리엄에게 또 그렇게 하고 말았다. 그가 내게 리처드백스터에 대해, 그의 연구에 대해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그 말을 곧장 덮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그의 지적이 절대적으로 옳 - P191

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 방에 앉아 있었고, 가슴속에 아주 생생한 고통이-육체적인 통증을 느꼈다는 말이다-작은 파도가자꾸만 출렁이는 것처럼 존재했다. 날이 완전히 컴컴해졌을 때나는 천장등을 켜고 방으로 치즈버거를 갖다달라고 주문했다. - P192

윌리엄은 고단해 보였고, 손을 들어 내 말을 끊었다. 그리고반사적으로 콧수염을 쓸어내리고 일어서서 천천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떠나기로 선택했다고?" 윌리엄이 나를 돌아보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말해봐. 당신이 정말 가족을 떠나기로 선택했어? 아니, 내가 지켜본 바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은 그냥 떠났어. 그래야만 해서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나는 그런 불륜을 저지르기로 선택한 건가? 오, 알아. 안다고. 책임이라는 거―심리치료사를 찾아갔었어. 혹시 내가 그러지 않았다고 생각할까봐 말하는 건데, 조앤과 같이 찾아간 그 심리치료사를 계속 만났어. 한동안 혼자 찾아갔고, 그 사람이 책임에 대해 말하더군. 하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봤어, 루시.
그에 대해 많이 생각해봤고, 알고 싶어 정말로 알고 싶어-사람이 뭐든 실제로 선택하는 건 언제인가? 당신이 말해봐."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 P194

이제 내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러면 당신도 비열한 말을하겠다고 선택한 게 아닌 거네, 윌리엄."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가 대답했다.
내가 말했다. "나도 그건 알아!" 그리고 덧붙였다. "내 머릿속은 정말로 비열해서, 당신은 내가 얼마나 비열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믿지 못할걸."
윌리엄이 한 손을 들고 말했다. "루시, 누구든 머릿속은 다 비열해. 맙소사."
"그래?" 내가 물었다.
그러자 윌리엄이 어정쩡하게 웃었는데, 그렇지만 기분좋은 웃음이었다. "그래, 루시, 다들 머릿속은 비열해. 혼자 하는 생각말이야. 그런 건 흔히 비열한 생각이야. 당신은 아는 줄 알았는데, 작가잖아. 오 맙소사, 루시." - P196

나는 결코 나 자신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엄마다. 내가투명인간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엄마다.
어린 시절 나의 어머니는 자살하겠다는 협박을 하곤 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디 먼 데로 차를 몰고 가서 나무를 찾아 목을 매달거다." 나는 어머니가 진짜로 그렇게 할까봐 잔뜩 겁을 먹었다. 어머니는 말했다. "네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나는없을 거다." 나는 매일 겁에 질려 돌아왔다. 그리고 어머니는 매일 그대로 있었다. 그뒤로 나는 수업이 끝난 후에 학교에 남기시작했는데, 매일 수업이 끝난 후 학교에 남았고 그렇게 하기 시작한 건 따뜻하게 있고 싶어서였고-우리집은 너무 추웠고, 나는 추운 게 늘 싫었다-거기 남아 숙제를 할 수 있는 게 안심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따금 어머니에 대해, 할 거면 해버려요! 하고 생각했던 게 기억난다. 자살할 거면 해버려요! 이런 뜻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로 그렇게 하면 그 작은 타운에서이미 이상할 대로 이상한 우리가 더욱 이상해 보일까봐 걱정이되었다. - P205

"그만하자." 내가 말했다. "중요하지 않아." 그 일은 더이상내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말을 할때 내 안에서 물이 찰랑이는 듯한 작은 감각이 일어나긴 했지만.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그가 조앤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고,
에스텔하고 결혼해서 살 때도 그랬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건 내가 아니었던 거네? 그러니까 나 때문이 아니었던 거네? 나는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전날 밤 선택에 대해서 말한 것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그런 면에 대해 아마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것이다.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모른다. - P208

그러자 로이스가 슬픈, 거의 닫힌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고,
나는 그녀가 그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렸다. 로이스가 말했다. "미안해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나는 이제 젊지 않아요. 당신과 이야기하는 건 충분히 즐거웠지만, 그를 만나보고 싶지는 않아요. 그래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아요."
"알겠어요." 내가 말했다. 내가 떠나려는 동작을 하자 그녀가일어섰고, 그래서 나는 우리 대화가 끝난 것을 알았다.
그녀는 현관까지 나를 배웅해주었고, 문을 당겨 열었다. 문은자주 사용하지 않은 것처럼 열릴 때 좀 뻑뻑했다. 그리고 나는지금으로부터 아주 오래전에 그 문을 통과해 들어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을 캐서린을 상상했다. - P235

나는 로이스를 돌아보았고, 그녀는 손을 들어올려 아주 살짝내 팔을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당신 책을 읽었을 때 회고록말이에요-나는 거기 감자 농부, 내 아버지가 나온 걸 보고 깜짝놀랐어요! 그리고 계속 생각했죠. 내 이야기도 나오겠지, 그 농부의 아내가 아기인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갔다는 이야기도 나올거야. 하지만 전혀 나오지 않았어요."
"첫 남편을 떠난 건 알았지만 남기고 온 다른 존재에 대해선몰랐으니까요." 내가 말했다.
"음, 이제는 알겠어요. 하지만 그때는 몰랐어요. 그리고 그거 - P235

알아요? 바보 같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어요. 캐서린을 향해 다시 분노가 일었죠. 그리고 당신에게도 화가났어요- 내가 그 책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오, 로이스." 나는 묘한 비현실감을 느꼈고, 머리가 제대로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뭔가를 먹어야 할 때처럼. 다만 그보다 더 심하게.
"음." 그녀가 작게 웃었다. "이걸로 책을 쓴다면, 나도 등장하고 싶어요."
"오, 그럼요, 물론이죠." 내가 말했다.
그러자 로이스는 다시 작게 웃으며 말했다. "나를 좋게 그려준다는 조건으로요."
돌아보는데 햇살이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고 있었고, 그 순간나는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피곤한 표정을 보면서 우리 대화가그녀에게 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이 많이 들었던 모양이었고, 나는 미안했다. - P236

로이스의 말처럼 여기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기차역으로 들어갔고 다른 차는한 대도 보이지 않았고, 사람도 누구 하나 얼씬하지 않았다거기 앉아 캐서린이 눈 내리는 11월 저녁에 기차역을 향해 반쯤 뛰고 반쯤 걸었을 그 길을 바라보았다. 기차역은 작고 물막이 판자로 지은 것이었다. 기차역이라기보단 정거장이었다.
오, 나는 젊은 날의 캐서린이 바람 부는 11월의 어두운 거리를반쯤 뛰고 반쯤 걷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는데, 부츠도 신지않고 땅에는 그저 그녀의 신발과 눈뿐, 들키지 않으려고 진짜 코트도 걸치지 않은 채 짙은 색 옷을 입고, 스카프로 머리를 꼭대기까지 덮어 가리고서, 반쯤 뛰고 반쯤 걸어 기차역에 도착해 기다리는 모습을, 아주 겁먹은, 아주 많이 겁먹은ㅡ어쩌면 아버지손에 오랫동안 학대를 당해서 늘 겁을 먹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P240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얼마간 알고 있다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다.
입학처의 그 남자는 내가 자기와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걸, 타이거라는 단어를 듣고 무언가 다른 단어로 그를 불러줄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로그 컵 홀더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오지않았지만 슬프진 않았고, 무엇보다 애초에 그가 나를 좋아했던게 늘 신기했다. 하지만 다시 말하면, 내 요점은 이것이다! 윌리엄이 나에 대해 알고 있는 어떤 점과 내가 윌리엄에 대해 알고있는 어떤 점이 우리를 결혼하게 만들었을까? 하는 것. - P243

 "그리고 나는 여전히 당신이 어떻게 그걸 해냈는지 모르겠어. 당신은 독특한 사람이야,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야. 그날 막사에 갔을 때 당신이 두 개의 우주인지 어딘지 사이를 오갔다고 했던 거, 나는 믿어, 루시, 당신은 특별한 영혼이니까. 세상에 당신 같은 사람은 결코 있었던 적이 없어." 잠시 뒤그가 덧붙였다. "당신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쳐 루시"
윌리엄은 다시 차를 몰고 도로로 나갔다.
나는 그의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고, 그 옛날 내시 선생님의 차에 탔을 때도 이런 행복감이 단번에 나를 휘감았었다는 생각이들었다. "오 필리." 나는 조용히 말했다.
하지만 윌리엄은 더이상 말하지 않았다. - P249

나는 다시 공항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ㅡ그리고 그 남자가 어떤 기분인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는 모른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투명인간이라 생각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사회에서 이질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게어떤 기분인지 알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겉모습을 보고는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것만 달랐다. 하지만 나는 그 뚱뚱한 남자에 대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에대해.

공항 창가에서 나는 아주 넓은 주차장을 돌고 있는 윌리엄을보았다. 그는 내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만큼 한쪽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서 반대쪽으로 걸었다. 나는 계속 지켜보았고그는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고 서서 고개를 자꾸 내저었다. 그러고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오 윌리엄, 나는 생각했다.
오 윌리엄! - P254

내가 얼마나 끔찍한 행동을 했던가.
지금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었다. 남편에게 나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는 사실을-오, 그건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삶이 흘러가는 방식이다. 우리는 많은 것을 너무 늦을때까지 모른다는 것. - P257

나는 로이스 부바에 대해 생각했다. 그녀가 건강해 보였다는생각을 했다. 앞서 말했듯, 그녀가 편안한 방식으로 자기 세계안에 있는 것 같았다는 뜻이다. 그녀의 집에는 가족사진이 많았고, 그곳은 원래 그녀의 어머니 집이었다. 나는 그녀가 어머니가자란 집에서 살고 할머니의 장미 관목을 돌본다는 사실에 속으로 조용히 놀랐다. 하지만 그게 왜 나를 놀라게 하는 걸까? 그건그녀가 가지고 있는 집에 대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싶은데, 그집에 대한 느낌은 내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사랑했다고, 로이스는 계속 말했다. 물론 그 어머니란매릴린 스미스, 그녀의 아버지와 결혼한 그 여인을 말한 것이다. - P272

하지만 로이스 부바가 생의 첫해를 방치된 채 보낸 것 같지는 않았다. 캐서린은 분명 그녀를 사랑했을 것이다. 그녀를 안고 보듬어주었을 것이고, 처음 열이 났을 때 걱정했을 것이고, 그녀가아기 침대에서 처음으로 몸을 일으켜 일어선 것을 보고 속으로조용히 전율했을 것이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 생각이계속 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결코 알 수 없다.
하지만 내 어머니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지불한 대가를 알고, 그게 오빠와 언니가 지불한 대가에는거의 미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 P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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