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 찰리 매콜리는 그녀가 오기를기다리며 창가에서 바깥을 지켜보고 있었다. 쓰레기가 나뒹구는아름답지 않은 모텔 주차장이라도 나머지 세상과 당장 전쟁을치를 만큼의 위협이 될 수 있다는 듯ㅡ혹은 그럴 가치가 있다는듯 꺼멓게 검댕이 묻은 주차장 벽 위쪽으로 가시철망이 둘둘감겨 있었다. 찰리에게는 그 모습이 조금 전 그가 피오리아에서반시간 떨어진 이곳, 그들이 함께 찾아낸 이 타운을 걷다가 백화점 유리창을 통해 본 진열된 꿈들의 덧없음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제설기나 아내에게 줄 멋진 양모 드레스를 살 수도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사람들은 모두음식물을 찾으려고 쓰레기더미로 달려가는 쥐 같다는 사실이었 - P127
다. 어떤 쥐는 무거운 것을 날라 깨진 벽돌 틈에 보금자리를 마련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곳을 몹시 불쾌하고 더러운 장소로 만들 것이며,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라고는 그저 배설물을 보태는것뿐이리라. 하지만 창문 왼쪽으로 보이는 단풍나무 꼭대기에는 나뭇가지들이 분홍색이 감도는 노란 잎 두 장을 미안한 듯 조심스럽게 내밀고 있었다. 그것들은 어떻게 11월까지 붙어 있었을까? 찬란한하루의 마지막 햇살이 나무 바로 뒤에서 비치고 있었다. 탁 트인하늘을 배경으로 저무는 해의 다채로운 색깔이 위를 향해 부채처럼 펼쳐졌다. 찰리는 이런 가을 햇살 속에서 메릴린과 함께 작은 언덕 비탈에 쭈그리고 앉아 크로커스 구근을 심던 것을 떠올리며왜 지금 그때 일이 기억난 걸까? 자신의 큰 손을 얼굴1옆에 갖다댔다. 그들이 대학교 1학년 때의 일이었다. - P128
메릴린의열의에 찬 모습이 기억났다. 몰두한 그녀의 눈이 커다랬다. 그는크로커스 구근 심는 법을 전혀 몰랐고, 그녀 역시 흥분해서 가쁜숨을 몰아쉬며 자기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날오후 시내에서 모종삽을 하나 사서 기숙사 뒤의 작은 언덕을 올라 대학 숲 옆으로, 가을 풀밭으로 갔다. "그래, 여기로 해." 메릴린이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열여덟 살에 첫사랑인 그와 함께 처음으로 꽃을 심는 일, 그는 그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 - P128
지 알수 있었다. 긴 모직 코트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그 일에 열중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는 감동받았었다. 그들은 구멍을 파서구근을 심었다. "안녕, 잘 가, 행운을 빌어." 그녀가 어느 구근에게 말했다. 그날, 가을 흙냄새가 모종삽을 든 채 무릎을 꿇고 있는 그를 가득 채울 때, 그의 마음에는 왈칵 사랑과 보호심이 일었고, 지금은 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그것ㅡ그녀의 중심에자리한 순전한 어리석음, 쓸모없고 메스꺼운 다정함이 그를조용히 전율케 했었다. 넋을 잃고 그 일에 몰두해 있던 사랑스러운 메릴린, 그녀의 얼굴은 일을 끝냈다는 기쁨으로 빨갛게 달아올랐었다. "얘들이 싹을 틔울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애처로운 사람, 늘 걱정만 한다. 그는 그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몇 개가 싹을 틔웠다. 하지만 그는 그 부분 또한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지금 이 순간까지 오래도록 잊고 있던 그것, 그들이 그저 어린아이였던 그 가을의 어느 순수했던 하루만 기억해낼 수 있을 뿐이었다. - P129
그는 침묵과 함께 방안에 홀로 남아. 앞서 중단된 그것, 지금그에게 다시 돌아온 그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거대한고요였다. 오래전 그는 그것에 자기만의 이름을 붙였다. 엄지 치기 이론 어린 시절 어느 여름에 할아버지 집 지붕 위에서 망치로타일을 세게 내려치다 알아낸 사실이었다. 실수로 엄지를 내려쳤을 때, 이것 봐, 그렇게 세게 쳤는데도 많이 아프진 않은데……하고 생각되는 찰나의 순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이어-어리둥절한 채 다행이라고 느끼며 안도하는 착각의 순간이 지난 뒤―살을 짓이기는 진짜 아픔이 몰려왔다. 전쟁에서도 이런 일이 수시로, 여러 형태로 일어났기에 그는 이따금 자신이 아주 똑똑하다고-그의 이론은 그만큼 잘 들어맞았다 생각하곤 했다. 전쟁에서 그는 많은 것을 배웠지만 메릴린이 지금 그가 참석중이라고 알고 있는 모임 시간에 그런 것을 언급하는 심리학자는 이제껏 한 명도 없었다. - P137
인격이 제단이고 그 앞에서 모든 품위가 절을 해야 할 것처럼여겨지던, 인격이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던 그 시절이 먼옛날 고대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과학에 의해 유전이 결정적인요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금, 인격에 관련된 모든 것이 폭포로 내던져졌다. 불안은 본래부터 장착되어 있거나 혹은 트라우마 사건 이후 장착되고, 사람은 강하거나 약한 것이 아니라 그저특정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 그랬다, 그에게는 인격이 빠져 있었다! 인격의 고상함. 그래, 그것은 종교의 밑바탕과 원시적인 측면에 맞닥뜨리면 종교를 버릴 수밖에 없게 되는것과 같았다. 가톨릭교회가 소아성애와 끝없는 은폐와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한패가 된 교황들의 온상이라는 사실을 목도하는 것과 같았다. - P149
그것은 고통보다 훨씬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더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 그는 다른 남자들에게서 그것을 보았다-눈 뒤의텅빈 공백, 그리고 그런 이들을 정의하는결핍. 그래서 찰리는 몸을 아주 조금 더 일으켜 앉았고, 텔레비전을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그의 안에는 지금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는 기다렸고, 그는 희망했고, 그는 정말로 기도했다. 오, 다정하신 예수님, 그것이 오게 해주십시오. 사랑이신 하느님, 제발 그래주실 수 있습니까? 제발 그것이 오게 해주실 수 있습니까? - P158
그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그녀는 그의 나이에 대해 정말로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랑에 빠졌다.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는 이십 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지만 그 기간이 오십 년처럼 느껴졌고, 당시에는 혼자였다. 그들은 둘 다 갈증을 느끼는 상태였다. 하지만 메리는 남편을, 그러니까 전남편을 떠올렸고, 요즘은더욱 자주 생각했다. 그가 걱정이 되었다. 누군가와 오십 년을살았다면 그 사람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따금 그녀는 자신이 그를그리워한다는 사실에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앤젤리나는 아직자신의 결혼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고, 메리는 정말로 염려하는 마음으로 앤젤리나가 그 이야기를 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앤젤리나의 남편은 선량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누가 알겠는가. - P183
이 아이 - 어른이 그녀의 딸이기 때문에 조심해야 했다. 자신은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그것에 거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이 아이-지금껏사랑했던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ㅡ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삶이 그녀를 마모시키고 마멸시켜 그녀는 거의 죽을 준비가 되었으며, 아마 지금으로부터그리 멀지 않은 때에 죽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몇 년이라도 더 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고, 메리는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지 않았다. 혹은 정말로는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랬다. 그녀는 지칠 대로 지친 느낌이었고 거의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지만, 이 아이에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그녀 자신도 그 생각에 공포를 느꼈다. - P198
비틀거리며 길을 건너고 있었다. 술 때문은 아닌 것 같았고 노환때문인 것 같았다. 어머니가 노인에게 얼마나 빠르게 다가가는지 앤젤리나는 깜짝 놀랐다. 앤젤리나는 가로등 불빛에 비친 노인의 얼굴을 보았는데, 단순히 어머니를 올려다보며 웃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그 표정에서 묻어나는 인간적인 느낌, 따스하고깊은 감사의 표시에 앤젤리나의 마음이 움직였다. 어머니가 그를 부축해 길을 건널 때 가로등 불빛에 잠시 어머니의 얼굴도 보였다. 어쩌면 빛의 각도 때문이었겠지만 어머니가 노인의 손을 잡을 때, 그리고 노인을 부축해 길을 건널 때 - 앤젤리나는 어머니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길을 다 건넌 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듯했고, 이어 어머니가보도를 걸어가는 노인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 P204
이제 앤젤리나는 창문을 통해 바다를 응시했다. 바깥은 어두웠고 배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어머니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는, 앤젤리나는어머니가 불안정하게 길을 건너는 노인을 부축할 때 자신이 중요한 뭔가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잠시 천장이 훌쩍 높아졌다 하지만 그 순간은 말 그대로 잠시일 뿐이고, 자신은 영원히 아이일 거라는 사실을 앤젤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길을 건너던 노인에게 재빨리 다가가 자애롭고 사랑스러운 모습을보여주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이탈리아 어느 해안 마을의 길 위에서 본 개척자인 어머니의 모습을. - P206
피트 바턴은 동생 루시가 시카고로 북투어를 온다는 사실을알고 있었다. 그는 온라인에서 그녀의 활동을 챙겨보았다. 집에와이파이를 설치한 것은 겨우 몇 달 전이었고, 후에 자신이 쓸작은 노트북도 구입했다. 그가 가장 관심 있게 살펴본 것은 루시의 향후 계획이었다. 그는 루시가 지금의 그녀가 된 것에 경이를느꼈다. 그녀는 이 작은 집을, 이 작은 타운을, 그들이 견뎌낸 그가난을 뒤로하고 떠났다. 그 전부를 두고 뉴욕으로 가버렸고, 이제 그가 보기에 그녀는 유명했다. 그는 청중으로 가득찬 강당에서 그녀가 강연하는 모습을 컴퓨터로 지켜보며 조용한 전율을느꼈다. 그의 동생…… 그가 루시를 본 지도 십칠 년이 지났다. - P207
"그 남자가 거기 주인이면 팁을 안 줘도 돼. 주인이 아니면 줘야 하고." 루시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하지 마. 다시 가면 팁으로 몇 달러줘. 이제 걱정하지 마." 그는 그런 점 때문에 루시를 사랑했다. 그녀는 세상살이를 알았고, 그를 알았다. 그녀는 그가 그런 질문을 해도 당황스러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오, 그는 정말로 행복했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진입로로 차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한 이유였을 것이다. 크게 문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는데, 그와 루시 둘 다 소스라치게놀랐다. 그는 그녀의 두려움을 보았다. 루시는 얼굴이 굳어지며똑바른 자세로 앉았다. 피트도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몸을 숙여 블라인드를 최대한 살짝아주아주 조심스럽게 들쳤다. "오." 그가 말했다. "오, 비키가왔어." - P220
"너도 대단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 같아. 난 루시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거라고 생각해." 피트가 바닥에 나뒹구는 캔들을피해 발을 옮겼다. 그들은 침묵 속에 한참을 더 달렸다. 피트는 곁눈으로 동생을보았다. 그는 그녀가 운전을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녀의 체격 좋은 몸이 좋았고, 차 안에 듬직하게 앉아 당당하게 운전하는모습이 좋았다. 그는 그녀에게 이 말을 해주고 싶었다. 대단하다는 말 이상을 해주고 싶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비키, 지금보면 우리가 그렇게 나쁘게 된 건 아니야, 너도 알겠지만." 그녀가 그를 흘끗 보고 눈을 흘겼다. "그래, 맞아."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뭐, 우리가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진 않지. 그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그녀가 내면 깊숙한곳에서 올라온 듯한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피트는 영원히 이렇게 달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이렇게 달리고 또 달리는 동안 그는 거기 동생 옆에 앉아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P246
특히 그들 가까이 걸려 있는도서관 사진이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사진은 1940년의 도서관을 찍은 것으로, 벽돌 건물에 담쟁이덩굴이 자란 고풍스러운 느낌이었는데, 덕분에 도티는 대번에 그 여자-그리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감을 잡았다. 당연히 도티는 이 업종에 종사하면서 사람들에 대해 대번에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따금 완전히 헛짚을 때도 있었지만 스몰 부부에 대해서는 틀리지않았다. 닥터 스몰은 여행가방을 올려두는 선반이 없다며 즉시방에 대한 불만을 제기했고, 도티는 그것이 아내를 시켜 가장 값싼방을 예약할 때 생기는 일이라고는 당연히 말하지 않았다. - P251
이런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이런저런 사실이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이런 비즈니스에서는 눈을 꾹감고있어도 눈에 띄는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티가 생각하기로 닥터 스몰의 시대, 그 자신의 개인적인 역사와 전문적인 이력의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일 터였다. 그가 전산화된 기록과 병원 운영비와 자신이 더이상 예전만큼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불평을 해댔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뭐, 그렇다고 그녀가 그에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 P253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녀를 놀라게 했다. 스몰 씨와 스몰 부인 같은 부부를 보면 도티는 이따금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오래전에 겪었던 자신의 이혼 과정은 고통스러웠지만, 그 덕에 적어도 스몰 부인즉 불안해하고 약간 징징거리며 남편에게 무시당하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더욱 안절부절못하는 여자같은 사람은 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런 것은 늘 보였다. 그리고 도티는 그런 것을 볼 때마다 거의늘-이상하게도 그녀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남편이없는 자신이 더 강한 사람인 것 같다고 새삼 생각했다. 비록날마다 그를 그리워하긴 했지만. - P253
오전 중반에 그들 부부는 함께 집을 나섰다. 그들이 집에서 나갔고, 그것은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다. 나가는 것. 도티는 사람들이 여기로 오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는 것을 늘 되새겼다. 아니면-스몰 부부의 경우처럼-자신들의 비즈니스 세계에 속해 있기 위해서. 더 빈번하게는 대학에 다니는 자식들을 보기 위해서. 어떤 연유에서건 그들은 일리노이주 제니스버그라는 작은 도시의 뭔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이 거리로 나설 때는 목적이 있었다. 큰 오크나무 문이 닫히면서 그 목적이 강조되는 것, 앞포치로 나가는 순간 그들 - P255
의 목소리가 작게 들리는 것, 속삭임을 동반하는 그런 불가피한버려짐의 순간음, 그것도 비즈니스의 일부였다. - P256
그녀는 요즘 이 나라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는 부분이 이 문화차이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계급이 포함된 문화. 하지만 물론 이나라의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도티는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계급이 무엇인지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예컨대 도티와 그녀의 오빠가 어렸을 때 대형 쓰레기통에서 음식물을 꺼내 먹은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 P273
스몰 부부가 와서 묵기 전까지 도티가 깨닫지 못하고 있던 것은, 이 비즈니스에서 그녀가 접하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 중에는사람들과 연결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고 사람들에게 이용당한다고 느껴지는 경험도 있다는 사실이었다. 예컨대 어느 밤 저녁식사 시간 무렵 어떤 매력적인 남자-나이가 그녀와 엇비슷하지만 약간 어린 듯했다가 민박집으로 들어와 방을 빌렸고, 그러더니 텔레비전을 보는 편이 낫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같이 앉아 영국 코미디 한 편을 보았는데-오, 도티는그것이 웃기다고 생각했지만 그 남자가 웃지 않아서 억지로 웃음을 참았다 어느 순간 그가 몹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76
그리고 그는 그렇게 떠났다. 사람들은 늘 떠났다. 그녀는 어린아이가 특별한 날을 추억하기 위해 입장권 반쪽을기념품처럼 간직하듯 그의 숙박 기록을 간직했다. 그 모든 것이봄날에 졸졸 흘러가는 개울처럼 숨김이 없었다. 그녀는 결코 그를 인터넷에서 찾아보지 않았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적도 없었다. 그의 이름은 찰리 매콜리였다. 말할 수 없는 고통을지닌 찰리 매콜리. - P279
그녀가 느낀 창피함이 이 세상에서일어나고 있는 다른 일들을 고려하면 크지 않다고 생각했다. 굶어죽는 사람들, 아무 이유 없이 폭발로 숨지는 사람들, 자신들의정부에 의해 독가스로 살해되는 사람들, 이들 중 누구와 비교해봐도 그랬다. 이런 이야기는 셸리 스몰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도티는 그녀의 작은-그렇다. 스몰 small 한-인간적 슬픔의순간들에 연민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 셸리는 도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정도의 품위도 갖추지 못했다. 도티는 그런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과연 누가 이런 걸 좋아하겠는가! - P281
그들이 예전에 살던 집은 흙길 위에 있었다. 그들은 그 길 끝에, 4번 도로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 살았다. 그곳은 북쪽, 감자의 고장에 있었고, 애플비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겨울에 얼음이 얼고 눈이 잔뜩 쌓여 사람이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좁아 보이는 시기도 있었다. 그 시절에 날씨는 지금과는 다르게피할 수 없는 식구처럼 받아들여졌다. 날씨에 대해 별생각이 없었다. 엘긴 애플비가 튼튼한 제설기를 그의 가장 튼튼한 트랙터에 매달면 대체로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줄 만큼은 눈을 치울수 있었다. 엘긴은 농장이 있는 고장에서 자랐기에 날씨에 대해,감자에 대해 잘 알았고, 그 고장에서 누가 자루에 돌을 숨겨 무게를 속여 파는지도 알았다. - P287
하지만 결국 햇볕 좋은 날에는 숲과 멀리 떨어져 지낼 수 없었다. 햇살이 아른거리는물리적 세상이 그녀의 첫 친구였고, 세상은 아름다운 자태로 두팔을 활짝 벌린 채 다른 무엇도 그녀의 마음에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설렘을 받아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변 사람들의 생활 패턴, 즉 그들이 언제 어디 있는지를 파악한 뒤 타운 근처의 숲이나 학교 뒤에 있는 숲으로 몰래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노래를 부드럽고 풍부한 목소리로불렀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건 정말로 기쁜 일, 내가 살아 있다는건 정말로 아주 기쁜 일...... 그녀는 기다리고 있었다. - P298
"맞아." 아까 언니가 그게 사실이었다면 그들이 진작 알았을거라고 소리쳤을 때, 애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애니가 말하지 않은 것은 뭔가를 알지 못하는 방법도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녀가 지난 세월 겪어온 경험이 각기 다른 색깔-어떤색깔은 어두웠다-의 털실을 섞어 짠 뜨개질감처럼 펼쳐졌다. 이제 삼십대가 된 애니는 남자들을 사랑했고, 실연에 종종 가슴아파했다. 배반과 기만의 기류는 어디에나 있는 듯했다. 그리고그녀는 그것이 취하는 형태에 번번이 놀랐다. 하지만 그녀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들 또한 그들 자신의 문제로 좌절했으며, 서로밤낮으로 위로하고 위로받았다. 애니는 연극의 세계가 컬트같다고 생각했다. 연극은 그것에 속한 개인에게는 상처를 주더라도 스스로는 철저히 보호한다. 하지만 그녀는 최근에 이른바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되었다. - P306
아버지가 늘 앉아 있던 흔들의자, 지금은 속이 보일정도로 닳고 닳은 방석, 오랜 세월장작난로 위에 변함없이 놓여있는 찻주전자, 창문 위에 드리워진 커튼, 그리고 커튼과 유리창사이의 가는 거미줄, 애니는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가엾은 샬린처럼 매일매일 두려움을 느끼며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실은 늘 거기 있었다. 그들은 수치심을 먹고 자랐다. 그것이 그들의 토양을 만든 자양분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그녀가 가장 잘 이해할 것 같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리고 잠시애니는 놀라움을 느꼈다. 착하고 책임감 있고 품위 있고 바른 마음을 가진 오빠와 언니는 그저 그 시간 동안에는 지구를 뒤로하고 떠나온 듯 눈부시게 하얀 태양 가까이에 있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게 되는 열정을,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모든 것을 무모한 위험에 빠뜨리게 되는 그런 열정을 한 번도 알았던 적이 없었으리라는 사실에 대해. - P310
지난해 루시 바턴이 북투어차 시카고에 왔을 때의 모습이 보였다. 루시 바턴, 어머니 사촌의 딸, 오, 그 불쌍한 아이. 그런데 그녀가 나이든 여인의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는 서점 안으로 들어가 책에 서명을 받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렸다. 그녀가에이블, 하고 말하면서 일어섰고, 눈물을 글썽였다. 잠에 빠져든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그 모든 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주었는데, 어느새 그는 버튼을 눌러도 서지 않는 엘리베이터 안에서어머니를 찾고 있었고, 이어 좁은 복도에서 어머니를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중에 어둠 속에서 어머니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사라졌다. 깊은 꿈속이었지만 그는 패닉 상태와는전혀 다른, 채울 수 없는 오래된 갈망을 다시 느꼈다. 그는 관객석에서 숨소리가 터져나올 때 잠에서 깼다. - P319
에이블에게 좀더 기력이 있었다면 이 낯설고 고뇌하는 남자에게 자신은 오래전 록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록퍼드에서 어느 극장 안내원으로 일했고, 오늘밤 옆문으로 들어오면서 바로 그때의 냄새를, 극장의 그 은밀한 냄새를 맡았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에 그 일자리를 구했다. 열여섯살 때였다. 바로 그해에 6학년이던 어린 동생이 반 친구들 앞에불려나가 옷에 묻은 얼룩을 지적받으며 생리대를 살 돈도 없을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도티는 학교에 가기 싫다고 했고, 에이블은 동생에게 뭔가를 약속했지만 그게 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 P334
그것은 지독히 현실적인 문제라고, 그는 세월이한참 지난 뒤 아내에게 말했다. 이어 그녀의 공포가 제대로 숨겨지지 않은 채 드러나는 순간이 찾아왔다. 창피하지 않았어?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깨달음은 아주 즉각적으로, 심지어 그녀가 말하는 도중에 찾아왔다. 음, 그렇다면 당신은 한 번도 배고파본 적이 없었던 거군, 일레인. 그가 실제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내가 그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때 그는 분명 창피함을 느꼈다. 자식들에게는 아버지가 쓰레기통을 뒤져서 찾은 음식을 먹을 만큼 가난했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라고, 그녀는 그에게 요구했다. - P336
그가 놀란 것은 죽음, 한 사람이 싹 지워지는 것, 그 남자가그렇게 간단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에서 느껴지는 어리둥절함과 관련이 있었다. 사라지는 것의 단순함은 에이블에게 익숙한것이었다. 그는 젊은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버지가 사라진 것부터 시작하여 타인들의 죽음을 봐왔다. 하지만 그때 놀라움에 뒤따른 감정은 활활 타오르는 수치심이었다. 마치 지난 세월 키스에게 자신의 옷을 만들게 한 것이 뭔가 불미스러운 행동이었던것처럼. 그는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미안해요. 오, 정말 미안해요." - P342
곧 구급차가 속도를 높이자 에이블은 공포가 아닌 묘하고 강렬한 기쁨을 느꼈다. 온갖 문제들이 그 껍질이벗겨진 채로, 혹은 지금도 계속 벗겨지면서 돌이킬 수 없이 그의통제를 벗어나는 데서 오는 지극한 행복감을 하지만 그의 손이닿을 수 없는 곳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는 것처럼, 거기 크리스마스 창문이 있는 것처럼, 다른 무언가가 기다란 흔적을 그리고있었다. 그는 그것을 보며 어리둥절해지기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는데, 고단한 황홀경 상태에서 그것은 거의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링크 매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좋은 사람이에요." 에이블은 가슴에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것 같았음에도 그 말을 들으니 미소가 지어졌다. - P346
그래서 그는 어쩌면 그 미소가 그들에게는 고통에 찬 찡그림으로 보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는 지금그들을 남겨둔 채 초록빛 콩밭을 지나며 아주 가볍게 훌훌―그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 날아가고 있었다. 그에게 친구가 생겼다는 더없이 아름다운 사실을 가슴속에 지닌 채 말을 할 수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스노볼을 사랑하는 어여쁜소피아처럼 에이블에게도 친구가 생겼다고. 하지만 말할 필요가없었다. 그리고 그런 선물이 그런 시간에 그를 찾아올 수 있다면무엇이든………… 록퍼드에서 회의에 참석하려고 옷을 잘 차려입고온 그 사랑스러운 여자의 모습이 록강 위로 급물살처럼 흘러갔다…… 그가 눈을 떴고,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 P347
잔잔하면서도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문장의 힘 앞에는 늘숙연해지고, 세상에서 떠받들듯 떠들어대는 긍정 이면에 존재하는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더 다칠까 두 손으로 감싸 조심스럽게 내어놓는 하지만 그것을 데려가 보듬는 역할은독자에게 맡기는 그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온도에는 늘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들이 펼쳐지는 무대 앞에서 등장인물들의 들고 남을 바라볼 때는, 그 동선이나 움직임이나 말보다는 인물들의 마음의 결 마음의 행로, 마음의 흔적을더욱 뒤쫓게 된다. - P352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더욱 그렇다. 일리노이주 앰개시를 배경으로 하는 총 아홉 편의 이야기, 그 속에는 익숙하지만 낯선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를 보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들이 등장하고 퇴장하는 것을 지켜본다. 그러다 어쩌다 그들의 시선이 흘끗 나를 향하는 그 한 번의 순간, 그 하나의 문장에서 나는 그들이 지닌 아픔과 그 견딤을 이해한다. 아마도 조금, 토미가 어린 루시를, 도티가 찰리 매콜리를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것과 비슷할까. 그리고 그들의 아픔과 견딤 이면에 존재하는 폭력과 수치심을 바라본다. - P352
먼저 폭력에 대해 생각해본다. 루시의 팔이나 목에 들어 있던멍처럼 물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심장에 생채기를 내는 언어적인 것인지. 전쟁처럼 큰 규모인지, 아니면 아주 작은 대화 중 오간 한마디인지.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도록 강요하는 더 악질적인 폭력인지 등. 그 형태는 여러 가지일지라도 모든 폭력은 결과적으로 인간 대 인간의 문제, 개개인의 문제가 되고 만다. 시대가 강요한 폭력이라 할지라도 폭력 이후의 감정을 질기게 끌어안고 가야 하는 것은 결국 개개인이다. - P253
또한 우리 모두 폭력의 피해자가, 혹은 가해자가 되는 것에서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생각 없이 던진 말 한마디의 날선 칼, 억제할 수 없었던 공격적인 감정의 분출, 아닌 줄 알면서도 외부의 힘에 굴복하여 하게 되는 잔인한 행위.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혹은 그 희생자가 되지 않겠다는 굳은 마음이 무색해지는 순간들은 늘 존재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을 누구보다아프게 아는 도티마저 셸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말한 ‘페니스‘ 이야기에 웃음이 터지려고 하지 않았는가 - P354
결국 누가 어떤 힘을 더 많이 가졌는지에 따라 계급이 나뉘는것일 텐데, 계급을 없애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계급에 내재된 힘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는 충분히 민감해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부, 지식, 성의 차이가 만들어낸 힘의 강압적인 행사, 그 행위가 일어나는 순간이 우리가 가해자나피해자가 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삶의 어느 시기에 그런 계급과 폭력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는 단연코 수치심일 것이다. 작가는 남을 무시하거나 아래로보면서 느끼는 우월감과 그 우월감의 대상이 되었을 때 느끼는수치심을 여러 상황과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인식의 순간은 주인공들의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를 통해 다가온다. 우리가 충분히 민감하게 깨어 있지 않다면, 즉 현상을 사유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피로와 민감한 태도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이를 불가피한 당위로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계급과 폭력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 P355
폭력의 희생자들. 폭력의 질긴 시간성. 그것을 고통스럽게 견뎌낸, 그러나 아직 고통스러워하는 이들. 같이 쓰레기통을 뒤졌던 루시 바턴과 에이블 블레인은 이른바 사회적 계급이 올라갔지만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루시바턴은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에이블은 돈 많은 사업가가 되었다. 하지만누구보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듯한 루시도 어린 시절의 공간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마도 큰 용기를 내어 그 공간으로 되돌아가지만 그 시절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심리 상태에 빠져 언니 비키에게 "아니, 내가 돌아온 게 잘못이었어, 내가 떠난 게 잘못이었어, 전부 내잘못이야"라는 말만 반복한다. 에이블은 누구에게든 "사과를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일상이 되어 "자신의 차에 탔을 때나 혼자 사무실에 있을 때, 혹은 아침에 옷을 입으면서도 미안하다고자꾸만 중얼거리는 사람이 되었다. - P352
이들의 마음을 좀더 들여다본다. 큰 아픔을 가지고 있으나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들. 이제 그만 좀 미안해해, 그렇게까지 미안해할 것 없어, 미안해야 하는 건 고통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라 우월감을 느끼려고 남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사람들이지. 이제 좀 떨쳐내. 나는 속으로 외친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미안한 마음이 꼭 떨쳐내야만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 P356
그 미안한 마음은 이들을 힘들게 하면서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소중한 마음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초반에 이미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자책한다는 것, 음, 자책하는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한 일에 대해미안해할 수 있다는 것그것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주지." 가해에 대해 자책할 수 있는 마음, 혼자 고통을 벗어났다는 것만으로 미안해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를 계속 인간이게 해준다. 완전히 떨쳐낼 수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죄책감이나 미안함에 괴로워 미쳐버릴 만큼이 아니라면, 그것을 얼마간은 품은 채 뚜벅뚜벅 삶의 걸음을 옮기는 것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 자책과 미안함은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연민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 P357
무엇이든 가능하다』의 아홉 편의 이야기. 몇 번을 다시 읽는동안에도 이 소설이 마치 폭력을 고발하고 있는 것처럼, 내 생각은 그 부분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희망을 잘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옮긴이의 글을 쓰면서 또 한번 읽는 동안 각 이야기들의 마지막 부분에 홀린 듯 관심이 쏠렸고, 그러면서 이 소설『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놀라울 만큼 따뜻하고 희망적인 회복을그려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폭력에 의한 아픔과 연민 사이를 섬세히 오가며 그려낸 이 소설 - P357
은 사랑과 희망을 품은 놀라울 만큼 회복적인 이야기였다. 사랑한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토미, 햇볕 속에 앉아 찰리의 팔을 잠시잡았다가 놓는 패티, 캐런-루시의 손을 잡고 뺨을 어루만지고싶어진 린다. 그리고 "그런 순간"에 친구가 생긴 에이블 블레인의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깨달음까지. 그 순간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벅차오른다. 처음에는 그저 담담한 진술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뒤집은, 사실상 동일한 의미일 거라고 짐작했었던 ‘무엇이든 가능하다. 하지만 이제는 그 ‘무엇‘의 자리에 희망과 회복을 넣고 싶다. 무엇이든 가능하니까. 그리고 찰리 매콜리가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고통 또한 희망이 될 수있음을 깨닫는다. "크로커스 구근 같은 희망"이라도, - P358
「무엇이든 가능하다가 남긴 여운 역시 평생 이어질 것 같다.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이런 일상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자신도 어느 순간 인식하지 못한 채 가해자가, 피해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고, 내 안에 연민이 있음을 내가 알기 때문이고, 그 연민은 타인을, 때로는 나 자신을 향할 것이기 때문이다. 도티에게연민은 혼란스러운 것이었지만, 도티 자신은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을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도티 안에는 연민이 있었다. 도티의 말처럼 분명 혼란스러운 것임에도, 계급의 위아래 없이 수평 - P358
의 높이에서라면, 연민이란 어쩌면 이 각박하고 폭력적인 세상을 치유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간을 성장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은 평가나 판단이아니라 연민이라고 연민이 우리 인간을 구원한다고 연민은 인류에 대한 희망이자 사랑이라고.
정연희 - P359
"그래, 바로 거기 있었다. 온전한 깨달음이. 누구에게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살아간다는 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영원히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알아나가는 일일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러나 그런 공허한 단정에 머무르지 않고, 사랑이 그런 불완전함 속에서도 존재한다고, 더 나아가우리의 불완전함 속에서만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래서 더 귀하고애처로울 만큼 소중한 것이라고 상처받은 마음으로도, 더는 나아갈 수 없다고 생각할 때에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고. 책장을 덮고 ‘무엇이든 가능하다‘라는 제목을 다시 읽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상처를 아는 사람의 삶을 향한 작은 희망을 발견했다. 최은영(소설가)
상처받더라도 황홀한 무대 위의 순간과, 지극히 평온한 일상의 정원을 오가는 보통 사람들의 드라마. 이 소설 속 인물들이 겪는 세계는 우리 모두가 겪어본 흔들리는 우주에 불과할진대 왜 이다지도 강렬한 서스펜스를 남기는 것일까. 다시 한번.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이야기. 어둡고 칙칙한 색깔의 털실이직조한 환하고 강한 스웨터, 올이 풀리지 않는 단단한 이야기. 박민정(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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