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때문에 이게 뭐야!" 그는 부러진 채찍을 집어들며 화를 냈다. 총나는 가늘게 훌쩍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소년 시절을 통틀어 매질을 당해 눈물까지 흘리고 만 건 그때뿐이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지만 그때도 나는 아파서 운 게 아니었다. 두 번째 매질 역시 별로 아프지 않았던 것이다. 공포감과 수치심이 마취 효과를 낸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운 건 그게 상대가 기대하는 바라는 느낌이 들어서이기도 했고 정말뉘우치는 마음이 있어서이기도 했는데, 그게 다는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만 느끼는 것이라 전달하기 쉽지 않은, 보다 깊은 슬픔이 있었던 것이다. 그건 적대적인 세상에 갇혀버렸다는, 지배가 너무 완강해서 나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선악의 세상에 감금돼버렸다는 처량한 고독감과 무력감이었다. - P378
대개 어느 시기에 대한 사람의 기억은 당시로부터 멀어질수록 약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실을 알아가기에 지난 일들새로운 사실에 자리를 내주기 위해 잊혀져야만 한다. 스무 살 때였더라면 지금으로선 가히 불가능하리만큼 정확하게 내 학창 시절의 역사를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한참 흐른 후에 기억이 더 날카로워지는 경우도 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과거를 새로운 눈으로 볼수 있으며, 전에는 다른 것들과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있던 것을 따로 떼어놓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경우엔 내가 한편으로 기억하고는 있었지만 최근까지 별로 이상하거나 흥미롭게 느끼지는 않았던 점이두 가지 있다. 하나는 두 번째 매질을 내가 정당하고 합리적인 처벌인듯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한 번 매질을 당한 것, 그리고 어리석게도 그게 안 아팠다고 자랑을 하다 그보다 훨씬 심하게 또 매질을 당한 것ㅡ모두 내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 P379
세인트 시프리언스는 학비가 비싸고 속물근성이 넘쳐나는 학교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알기론) 더 그런 곳이 되어가고 있었다. 특별히 연고가 있는 사립학교는 해로우 Harrow 였지만, 내가 다니던 동안에는 이름으로 진학하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부자였다. 단, 그 부모들은 대체로 귀족 혈통은 아닌 부자로, 본머스나 리치몬트에 있는 숲이 우거진 대저택에서 자동차도리고 집사도 두고 살지만 시골에 부동산은 없는 유의 사람들이었다. 학생들 중에는 얼마 안 되긴 해도 외국에서 온 아이들도 있었다. 남미에서 온 아이들도 있고, 아르헨티나 부호의 아들들도 있고, 러시아 아이도 한둘 있고, 삶(태국) 왕자도 있고, 다른 어디 왕자라고 하는 아이도있었던 것이다. - P380
세인트 시프리언스의 경우에는 솔직히 모든 게 일종의 신용사기를 위한 준비 과정이었다. 우리의 임무는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많이 안다는 인상을 심사위원에게 심어줄 것들만 배우고, 뇌에 부담이되는 것들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었다. 시험을 잘 안 보는 지리학 같은 과목은 거의 무시됐고, ‘문과classical‘ 인 경우에는 수학도 무시됐다. 과학은 어떤 식으로도 가르치지 않았고(자연사에 조금만 관심을 보여도 머쓱해질 만큼 멸시하는 분위기였다) 여가 시간에 읽으라는 책들도 ‘국어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뿐이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는 장학생 선발의 주요 과목이어서 중요한데도 의도적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고 부실하게 가르쳤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리스어나 라틴어 저자의 책은 단 한권도 통독을 해본 적이 없었다. 번역 문제로 나올 만해서 골라놓은 짧은 구절들만을 읽을 뿐이었던 것이다. 장학생 선발 시험을 보기 전 1년 남짓 동안,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기출문제를 달달 외는 데 바쳤다. - P384
이 가난한 것들은 사격이나 목공 같은 ‘특활‘은 단념해야했고, 옷이나 소지품 때문에 수치를 맛보아야 했다. 이를테면 나는 나만의 크리켓 배트를 결국 마련하지 못하고 말았는데, "네 부모는 그럴 형편이 못 될걸"이란 말 때문이었다. 이 말은 학창 시절 내내 날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우리는 집에서 가져온 돈을 학교에서 사적으로 보관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매 학기 첫날 돈을 내놔야 했고, 지도를 받아가며이따금 쓰는 것만 허용되었다. 나를 비롯해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은 맡겨둔 돈이 충분한데도 모형 비행기 같은 비싼 장난감을 사려고 하면 언제나 제지당하고 말았다. 특히 플립은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 보잘것없는 처지를 각인시켜주려고 작정을 한 듯했다. "그게 너 같은 애가 사도되는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녀가 어떤 애한테, 그것도 모두가 보는앞에서 이런 말을 했던 것도 기억난다. - P388
나는 사립학교 장학금을 타지 못하는 한 그럴싸한 앞날을 누릴 가망이 없다는 인상을 아주 일찌감치 받았다. 장학금을 타거나, 아니면 열네살에 학교를 졸업한 뒤 삼보가 즐겨 하던 말대로 "연봉 40파운드인 사무실 사환 아이"가 되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내 여건에서는 그런 말을 믿는게 당연했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는 누구나 ‘좋은‘ 사립학교(거기에 해당하는 학교는 15개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에 진학하지 못하면 인생을망치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모든 걸 결정해버리는 끔찍한 전투 같은시험이 다가옴에 따라(열한 살, 열두 살 열세 살 그리고 마침내 운명의 나이!)아이가 느끼는 중압감과 불안감은 어른에게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약2년이라는 기간 동안, ‘시험‘ 이란 것은 깨어있는 동안의 내 의식을 단하루도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시험은 가장 중요한 기도거리였다. - P389
나는 삼보와 플립을 증오했다. 어느 정도 부끄러움과 양심의 가책을느끼면서도 그랬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을 의심하는 법은 없었다. 그들이 내게 사립학교 장학금을 타든지 아니면 열네 살에 사환이 되든지 둘중 하나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것들이 내 앞에 놓인 피할 수 없는 두갈래 갈림길인줄로만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삼보와 플립이 자 - P393
신들은 내 은인이라고 한 말을 믿었다. 물론 지금은 삼보 입장에서 볼때 내가 좋은 투기감이었다는 사실을 안다. 그는 나한테 묻어둔 돈이 있었고, 그걸 명성의 형태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만일 내가 장래성 있던 아이들이 이따금 그랬듯 "맛이 가버렸다"면, 그는 나를 지체 없이 내쳤을 것이다. 결국 나는 때가 되어 장학금 두 개를 따냈으니, 그는 학교안내서에 나를 충분히 활용했을 게 뻔하다. 하지만 학교란 게 우선적으로 장사라는 걸 어린아이가 깨닫기는 어렵다. 아이는 학교라는 게 교육을 위해 존재하며, 교장이 훈육을 하는 것은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면남 괴롭히는 걸 좋아해서라고 생각한다. 플립과 삼보는 내 친구가 되어주기로 했고, 그들의 우정은 매질과 나무람과 창피주기를 아우르는 것이었으며, 그 덕분에 나는 사부터 시작하는 사무실 붙박이 인생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게 그들의 설명이었고,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믿었다. 따라서 나는 그들에게 엄청난 신세를 진 것이었다. - P394
누구든 자신의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서 그 시절이 불행하기만 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 경우에도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의 수많은 나쁜 기억들 사이사이좋은 추억이 있다. 여름날 오후면 가끔 다운스Downs라는 낮은 산맥을넘어 벌링갭Birling Gap이나 비취헤드 Beachy Head 같은 마을로 소풍을가는 신나는 때도 있었다. 우리는 석회암투성이인 그곳 바닷가에서 험하게 물놀이를 하고서 몸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채로 돌아오곤 했다. 그보다 더 신났던 건 한여름 밤에 평소처럼 잠자리로 몰아넣지 않고, 긴황혼 녘 동안 운동장에서 마음대로 노닐다가 마무리로 9시쯤 수영장에뛰어들게 해주는 특별한 경우였다. 여름날 아침엔 일찍 일어나, 모두가잠든 햇빛 쏟아지는 기숙사 방에서 1시간 동안 아무 방해 없이 책을 읽는 즐거움도 있었다. - P395
자기 어린 시절에 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과장과 자기연민을 경계해야 한다. 나는 내가 순교자였거나 세인트 시프리언스가‘두더보이즈 홀‘같은 곳이었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당시의 기억이 대체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고 적지 않는다면, 내 기억을 조작하는 일일 것이다. 바글바글한 곳에서 충분히 못 먹고 잘 씻지 못했던우리의 생활은, 내가 기억하는 한 ‘분명‘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눈을 감고 "학교"라고 말할 때 나에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물론 물리적 환경이다. 크리켓 경기장이 있는 납작한 운동장과 소총 사격장 옆에 있는작은 헛간, 외풍이 심한 기숙사, 먼지투성이에 꺼끌꺼끌한 복도, 체육관 - P400
앞의 아스팔트 광장, 뒤뜰에 있는 멋없는 목조 예배당. 그리고 이것들대부분의 경우 불결한 무언가가 동시에 떠오른다. 일례로 우리에게 죽을 담아주던 백랍 그릇 가장자리에는 돌출된 부분이 있었는데, 그 밑부분에는 상한 죽이 켜켜이 쌓여 있었고, 긁어내면 기다란 띠처럼 벗겨질정도였다. 죽 자체에도 누가 일부러 넣지 않은 이상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많은 덩어리와 머리카락, 그리고 정체불명의 거무튀튀한 것들이 섞여 있었다. 그러니 먼저 검사를 해보지 않고 죽을 먹는다는 건 결코 안전하지 못한 일이었다. 목욕탕 물은 끈적끈적했고(탕은 길이가 12피트 혹은 15피트 정도였는데 아침마다 온 학생들이 다 들어가게 되어 있었지만 물을 자주 갈기는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언제나 축축한 타월에서는 치즈 냄새가났다. 겨울이면 가끔 가던 근처 수영장은 더러운 바닷물을 바로 끌어왔는데, 한번은 사람 똥이 떠다니는 것을 보기도 했다. 땀 냄새 진동하는탈의실의 세면대는 언제나 기름기투성이였고, 바로 옆에 줄지어 있는불결하고 낡은 변소는 문에 잠금장치 같은 게 아예 없어 변기에 앉아 있을 때마다 누가 불쑥 밀고 들어오곤 했다. - P401
아이 입장에서 진정으로 독자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는 플립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학생들 모두가 그녀를 미워하면서 두려워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더없이 비굴하게 그녀에게 아양을 떨었고, 그런감정의 표층을 형성한 건 죄책감에 사로잡힌 충성심 같은 것이었다. 플립은 삼보보다 학교의 규율을 좌지우지하는 영향력이 컸음에도 엄한 법으로 다스리는 척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변덕을부렸다. 어떤 날엔 매 맞을 만한 일을 다음날엔 소년다운 장난으로 웃어넘기고, 심지어 "배짱이 있다"며 칭찬해주기도 했다. 그녀가 움푹한 눈으로 추궁하듯 바라보면 모두가 몸을 움츠리는 날이 있는가 하면, 그녀가 연인 같은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농담하고, 아낌없이 돈을 뿌리거나 그럴 것을 약속하며 추파를 던지는 여왕처럼 행세하는 날이 있었다("너 이번에 해로우 역사상을 타면 내가 카메라 케이스를 사주지!"). - P404
나는 사람이 자기 의지와 어긋나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음을 일찌감치 알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했는지도 그게 왜 잘못됐는지도 모르면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너무미묘해서 설명할 수 없는 죄란 게 있었으며, 너무 끔찍해서 딱히 뭐라할 수 없는 죄도 있었다. 이를테면 언제나 표층 바로 밑에 억눌려 있다가 내 나이 열두 살 무렵 느닷없이 폭발해버려 엄청난 소란을 불러일으킨 성性이란게 있었다. 동성애 문제가 없는 예비학교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 세인트 시리언스가 ‘악평‘을 얻게 된 건 대개 영국 소년들보다 한두 해 더 빨리 성숙해지는 남미 소년들 덕분이었다. 당시 나는 관심도 없었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딱히 알지도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집단 자위행위였다. - P406
나는 육신과 영혼을 망쳐버린 혼이 행복하고건강해 보인다는 사실에서 다른 추론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삼보와 플립이 가르쳐준성에 관한 신화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신비롭고 끔찍한 위험은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다. 아침에 눈언저리가 까만 날이면자기 역시 구제 불능의 영혼임을 알 수 있었던 까닭이다. 더 이상 그게큰 문제가 아닌 듯 여겨진다는 것만 다를 뿐이었다. 아이의 마음속에 그런 모순이 쉽게 공존할 수 있는 건, 그만큼 아이에게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어른이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받아들이되 안 그럴 방법이 있는가?) 아이의 생기 있는 신체와 물질세계의 달콤함은 아이에게다른 얘기를 해준다. 지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열네 살 무렵까지 공식적으로는 지옥을 믿었다. 지옥은 거의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생생한 설교에 몸이 떨릴 정도로 공포스러울 때도 있었다. - P412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내놓는 여러 규범들(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지적 규범들은 그것들이 암시하는 바를 따져보면 서로 모순되기 십상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19세기의 금욕주의 전통과 1914년 이전 시대의사치 및 속물근성 사이의 충돌이었다. 한편에는 교회파 성서 기독교 성적인 청교도주의, 근면에 대한 강조, 학문적 능력에 대한 존중, 방종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똑똑함‘에 대한 경멸과 운동경기에 대한 숭배, 외국인과 노동계급에 대한 멸시, 가난에 대한 신경증적 공포, 그리고 무엇보다, 돈과 특권은 중요한 것이며 그것을자기 힘으로 이루는 것보다 물려받는 게 낫다는 사고방식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로 말해서 그것은 기독교인인 동시에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라는,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나는 우리에게 제시된 여러 이상들이 서로 상쇄되어 무효가 된다는 것을 당시에는 간파하지 못했다. 내가 알았던 건 그것들이 모두(또는 거의 다) 나로서는 얻을 수 없는 것들이라는 사실뿐이었다. 모든 게 내가 무엇을 하느냐뿐만 아니라 내가 어떤신분이냐에도 달려 있었던 것이다. - P413
그래서 제일 중요한 건 축구였는데, 나로서는 젬병이었다. 나는 축구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니 축구에서 무슨 재미나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축구를 하며 나의 담력을 보여준다는 건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보기에 축구는 딱히 공 차는 재미 때문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싸움박질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작은 아이들을 때려눕히고 짓밟는 데 능한 크고, 난폭하고, 속임수에 능한 아이들이었다. 학교생활 돌아가는 게 그런 식이었다. 언제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미덕은 이기는데 있었다. 즉, 미덕이란 남들보다 더 크고, 강하고, 잘생기고, 부유하고, 인기 좋고, 세련되고, 거리낌 없는 데 있었다. 달리 말해 남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고, 바보 같아 보이게 하며, 모든 면에서남보다 앞서는 데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본래 위아래가 있어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자체가 옳은 일이었다. 강자가 있어 그들은 이겨 마땅하고 언제나 이겼으며, 약자가 있어 그들은 져 마땅하고 언제나, 끝없이지기만 했다. - P419
나는 돈도 없고, 약하고, 못생기고, 인기 없고, 기침을 달고 다니고, 겁 많고, 냄새나는 아이였던 것이다. 이런 면모가내 공상만은 아니었다는 점을 덧붙여 말할 필요가 있다. 나는 매력 없는소년이었다. 설령 그 전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세인트 시프리언스는금세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자기 결점에 대해 갖는 믿음은 실제 사실에 크게 영향받는 게 아니다. 예컨대 나는 내가 ‘냄새난다‘ 고 믿었는데, 순전히 개연성만을 근거로 한 판단이었다.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냄새가 난다고 하기 십상이었기에, 나 역시 지레짐작으로 그렇게 단정지어버린 것이다. 또한 나는 그 학교를 영영 떠난 뒤로도 내가초자연적으로 못생겼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했다. 그건 내 학우들이 한말이었고, 나로서는 참고할 만한 다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성공한다는 건 ‘가능하지 않은 일이라는 확신은 어른이 된 지 한참이 지나서까지 내 행동에 아주 깊은 영향을 끼쳤다. 나는 서른 살 무렵까지 내인생 설계를 할 때면 언제나 큰일을 맡다간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을뿐만 아니라 앞으로 몇 년밖에 더 살지 못한다는 가정을 따랐다. - P422
한편으로 그런 자괴감과 반드시 실패한다는 예감을 상쇄하는 것이있었으니, 생존 본능이란 것이었다. 약하고, 못생기고, 겁 많고, 냄새나고, 그럴싸한 데라곤 없는 존재일지라도 살고 싶으며 나름대로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있는 것이다. 나는 기존의 가치 체계를 뒤집거나 성공하는 존재로 변모할 수는 없었지만, 내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최선을 다할 수는 있었다. 그리고 내 처지를 감수하여 분에 맞게 살아남으려고 노력할 수 있었다. 살아남는다는 것, 또는 적어도 나름의 독자성을 유지하는 것은 범죄나 마찬가지였다. - P422
적어도 그게 그녀의 표정에서 내가 읽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그 겨울날 아침 기차가 나를 싣고 떠날 때 나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빛나는(내 기억이 맞다면 짙은 녹색에 밝은 파랑에 검정이었다) 새 실크 넥타이를 목에 감고서! 마치 잿빛 하늘에 파란 균열이 난 것처럼, 세상이 내 앞에 아주 조금이나마 열리고 있었다. 사립학교는 근본적으론 마찬가지로나와는 이질적인 곳일 테지만, 세인트 시프리언스보다는 재미가 있을것이었다. 가장 필수적인 것이 돈, 작위 가진 친척, 운동 실력, 재단사가만든 옷, 단정히 다듬은 머리, 매력적인 미소인 세계에서 나는 변변찮은존재였다. 그곳에서 내가 확보한 것이라곤 숨 쉴 만한 공간뿐이었다. 약간의 정적, 약간의 방종, 벼락공부로부터의 약간의 유예-그리고 그다음은, 몰락, 어떤 종류의 몰락일지는 나도 몰랐다. 식민지나 사무실 걸상, 아니면 감옥이나 요절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처음 한두 해는 느긋하게 지내면서 파우스트 박사처럼 죄의 단맛을 보는 게 가능할 것이었다. - P427
나는 내 운명이 궂으리라 믿으면서도 너무나 행복했다. 순간을 즐기며살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면서 그럴 수 있다는 것, 장래를 예상하되 걱정은 안 할 수 있다는 것은, 열세 살 나이의 장점이다. 다음 학기에 나는 웰링턴에 가게 되어 있었다. 이튼 장학금도 탔지만 결원이 날지 확실치 않아 웰링턴에 먼저 가야 했다. 이튼에는 자기 방이 따로 있었고, 방에 벽난로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 웰링턴에도 작지만 자기방이 있었는데, 저녁이면 손수 코코아도 타먹을 수 있었다. 그런 사생활과 어른 대접이란! 도서관에 가서 어정거려도 되고, 여름날 오후 운동경기를 피해 교장의 인솔 같은 것 없이 혼자 전원으로 나가 빈둥거려도될 터였다. 게다가 당장은 방학이었다. - P427
이 모든 게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렇다면 한가지 질문 지금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같은 식의 경험을 할까? 정직한 답은 ‘우리는 확실히 모른다‘ 뿐일 것이다. 물론 교육을 대하는 오늘의 ‘태도‘ 야 과거에 비한다면 엄청나게 더 인간적이고 분별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받은 교육의 핵심이었던 속물근성은 지금은 거의 생각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런 것을 조장하던 사회 자체가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세인트 시프리언스를 떠나기 1년 전쯤에 했던 대화가떠오른다. 크고 금발이며 나보다 한 살 많았던 러시아 아이 하나가 내게 물었다. - P429
더 낫게 느껴지라고 내가 짐작한 액수에 몇백 파운드를 더해서 말했다. 단정한 걸 좋아하던 러시아 소년은 연필과 수첩을 꺼내더니 계산을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진 너네 아버지보다 200배 이상을 버는구나." 그는 제법깔보듯 흐뭇해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게 1915년의 일이었다. 몇 해 뒤에 그 돈이 다 어떻게 됐을지 자못 궁금하다. 그보다 더 궁금한 건 과연 그런 식의 대화를 요즘 예비학교에서도 하는가 하는 점이다. 확실히 세계관이 많이 변했고, 사람들의 ‘계몽‘ 수준이 별 생각 없이 - P429
사는 일반 중산층의 경우에도 전반적으로 높아졌다. 이를테면 종교적인신념도 다른 종류의 난센스들과 함께 대부분 사라졌다. 요즘은 아이한테 자위를 하면 정신병원에 끌려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아주 적을것이다. 매질도 신뢰성이 크게 떨어져서, 많은 학교에서 아예 하질 않고있다. 충분히 먹이지 않는 것도 더는 정상적이며 칭찬할 만한 행동으로간주되지 않는다. 이제는 공공연히 학생들한테 되도록이면 음식을 적게주려고 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며, 식사는 앉을 때만큼 배고픈 채 일어날정도로 하는 게 건강에 좋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아이들의지위는 전반적으로 향상됐는데, 부분적으론 아이들 수가 상대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간의 심리학 지식이 전파됨에 따라 부모와 교사가 훈육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일탈에 탐닉하는 게 더 힘들어졌다. - P430
두려움과 수줍음이 더해져 이루어진 베일에 의해 차단된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아이가 어른에게서 ‘신체적인 위축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성인의 거대한 몸집, 볼품없고 뻣뻣한신체, 거칠고 주름진 피부, 축 처진 눈꺼풀, 누런 치아, 그리고 움직일때마다 풍기는 퀴퀴한 옷과 맥주와 땀과 담배의 냄새! 아이에게 어른이못나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아이는 대개 밑에서 위로 올려다보며, 그렇게 봤을 때 최상인 얼굴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게다가 아이는 자기자신이 모든 면에서 생기 넘치고 깨끗하기 때문에 피부나 치아나 혈색에 대하여 지극히 높은 기준을 갖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무엇보다 가장큰 장벽은 아이가 나이에 대해 갖는 착각이다. 아이는 서른 이후의 삶을잘 상상하지 못하며, 사람의 나이를 판단할 때 엄청난 실수를 범한다. 이를테면 스물다섯인 사람을 마흔으로 보고, 마흔인 사람을 예순다섯으로 보는 식이다. - P432
그리고 아이는 나이 먹는 일을 거의 가당찮은 재앙처럼 여긴다. 무슨 신비로운 이유 때문에 자기한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일로 보는 것이다. 때문에 아이가 보기에, 서른이 넘은 사람은 누구나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일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살아가는 이유도 없이 그냥 살아 있는 즐거움이라곤 없는 괴상한 존재인 것이다. 아이가 보기엔 아이의 삶만이 진짜 삶이다. 학동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고있다고 생각하는 학교장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아이들이 등뒤에서 그를 흉내내며 웃고 있다. 위험해 보이지 않는 어른은 거의 항상우스워 보이는 것이다. - P432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고, 자신이 믿던 난센스와 자신을괜히 괴롭히던 사소한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론 내 사례는 나름의변주가 있는 경험이겠지만, 본질적으로 무수한 다른 아이들의 그것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아이는 그렇게 잘 믿기 때문에 어른한테 영향받기 쉬우며, 그만큼 열등감에 물들거나 불가사의하고 끔찍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감에 휘둘리기 쉽다. 세인트 시프리언스에서 나에게 일어났던 모든 일은 가장 ‘계몽‘ 된학교에서도(보다 미묘한 방식일진 몰라도) - P434
작가와 리바이어던
국가 통제의 시대에 사는 작가의 위치는 이미 꽤 많은 논의가 있었던주제다. 관련이 있을 만한 대부분의 증거를 아직 입수할 수 없는 형편이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국가가 예술을 후원하는 것에 대한 찬반 의견을 표명하고 싶지는 않으며, 다만 국가가 국민에 대하여 행사하는 ‘어떤 유형‘의 통제는 지배적인 지적 분위기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달리 말해 여기서는 어느 정도작가와 예술가 자신들의 태도에, 그리고 그들이 자유주의 정신을 기꺼이 지켜나가겠다는 자세 같은 것에 달려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앞으로 10년 뒤에 우리가 즈다노프 같은 이 앞에서 굽실거리고있다면, 그건 아마도 그런 현실을 자초한 우리 자신의 책임일 것이다. - P437
영국 문단의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미 전체주의로 가는 유력한 경향이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단, 여기서 나는 공산주의처럼 조직화되고 의식화된 운동에는 관심이 없다. 정치적인 사고가 선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 그리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에 대한 필요성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지금은 정치적인 시대다. 전쟁, 파시즘, 집단수용소, 경찰, 원자탄등등은 우리가 매일같이 생각하는 주제이며, 그래서 대놓고 거론하지는않더라도 상당 부분 우리가 쓰는 글의 주제가 되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우리가 가라앉는 배에 있다면 우리의 생각은 가라앉는배에 관한 것이 될 터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주제는 협소해졌을 뿐만아니라, 문학에 대한 우리의 태도 역시 우리가 적어도 이따금은 비문학적이라고 자각하는 충심에 완전히 물들어 있다. 나는 시절이 아무리 좋을 때라도 문학평론은 사기라는 느낌을 종종 받곤 했다. - P438
물론 정치가 문학을 침범하는 현상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전체주의라는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았어도 분명히 발생했을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조부모들은 느끼지 않았던 일종의 양심의 가책을 세상의 엄청난 불의와 비참에 대한 자각을, 그런 세상을어떻게 해야 한다는 죄책감을 키우게 되었으며, 그런 죄책감 때문에 삶에 대해 순전히 미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게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도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이 오로지 문학에만 전념할 수는없게 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정치적 책임을 받아들인다는게 정통성이나 ‘당 노선에 자신을 내어준다는 뜻이 되어버렸으며, 아울러 온갖 소심함과 불성실이 수반된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빅토리아시대의 작가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는 정치 이데올로기들이 확연히 구분되며, 얼핏 보기만 해도 어떤 생각이 이단인지를 대략 알 수 있는 시대에 산다는 불리함을 안고 있다. - P439
그보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바는, 이런 문제를 좌파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사람들과는 허심탄회하게 논의할 수 없다는 점이다. 임금을 낮추고 노동시간을 늘리는 일은 생래적으로 반사회주의적인 조치라 생각되기 때문에, 경제 상황이야 어떻든 아예 논의 대상에서 제외돼야 할 문제다. 그런 조치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은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딱지들이 붙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러니 이런 문제는일단 비켜가고 기존의 국민소득 재분배함으로써 모든 걸 바로잡을 수있는 척하는 게 훨씬 안전한 것이다. 정통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언제나 해결되지 않은 모순을 이어받는 일이다. 이를테면 민감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업주의와 그 산물에반감을 느끼면서도, 빈곤을 타파하고 노동계급을 해방하기 위해서는산업화가 덜 필요한 게 아니라 더욱더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을생각해보자. - P443
물론 나는 양심적 불성실이 사회주의자들과 좌파 세력 일반에게 특수하거나 아주 흔한 속성이라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어떤 정치 이념을 받아들이면 문학적 성실성을 지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이는 일반적인 정치투쟁의 영역 밖에 있다는 주장들을 하는 평화주의나 개인주의 같은 운동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실무슨 주의ism로 끝나는 말은 소리만 들어도 선전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집단에 대한 충심은 필요하긴 하지만, 문학이 개인의 창작물인 한에서는 문학에 독이 된다. 그런 충심이 창조적인 글쓰기에 어떤 영향을, 심지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면, 창의성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사실상 고사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와 거리는 두는 게 모든 작가의본분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지금 같은 시대에는 생각이 있는 사람치고 진정으로 정치와 거리를둘 수 있거나 실제로 그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P444
다른 어느 누구와도 마찬가지로, 그는 찬바람 새는 회관에서 연설을 하고, 길바닥에 분필로 글을 쓰고, 투표를 호소하고, 전단을 나눠주고, 심지어 필요하다 싶으면 내전에 참가할 각오도 되어 있어야 한다. 단, 자기 당에 대한 봉사로 다른 건 무엇이든 해도 좋지만 당을 위해 글을 쓰는 것만큼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신의 글이당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리고 원한다면 당의공식 이데올로기를 철저히 거부하면서도 당에 협력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이 이단에 다다를지라도 그런 사고의 과정에 등을 돌려서는안 되며, 자신의 비정통성이 남들에게 감지되더라도 너무 개의치 말아야 한다. 오늘날엔 작가가 반동적인 성향이 있다는 의심을 사지 않을 경우, 좋은 작가는 아니라는 증표가 될 수도 있다. 20년 전에는 공산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의심을 사지 않으면 좋은 작가가 아니라는 증표였듯말이다. - P445
창의성 있는 작가가 격동기에 자기 삶을 두 영역으로 나눠야겠다는뜻을 내비친다면, 패배주의자 아니면 어리석은 자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실제로 그가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스로를 상아탑에 가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바람직하지도 않다. 당의 기구는물론이고 집단 이데올로기에도 자발적으로 굴복한다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죽이는 일이다. 우리는 이런 딜레마가 고통스러운 것임을 안다. 정치에 관여할 필요성을 느끼되 그게 얼마나 지저분하고 품위 없는일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들 대부분은 모든 선택이, 그리고모든 정치적인 선택 역시 선과 악의 문제이며, 필요한 일은 옳은 일이기도 하다는 오래 이어져온 신념을 아직도 갖고 있다. 나는 우리가 탁아소에나 어울리는 그런 신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에선 둘 중어느 쪽이 덜 악한지를 판단하는 것 이상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악마나미치광이처럼 행동해야만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는 상황들이 있다. - P446
이를테면 전쟁은 필요할 수도 있지만 옳거나 온전한 일이 분명코 아닌 것이다. 심지어 총선도 딱히 유쾌하거나 그리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런 일들에 관여하게 된다면(나는 노년이나 우둔함이나 위선의 갑옷을입은 게 아닌 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일부는 불가침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생활이 이미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형태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가시간에만진정으로 살아 있으며, 그들의 일과 정치 활동 사이에는 아무 정서적 연결고리가 없다. 또한 그들은 노동자로서 정치적 충심이라는 이름으로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도록 요구받는 일이 없는 게 보통이다. 그에비해 예술가는, 특히 작가는 바로 그런 요구를 받는다. 사실 그것은 정 - P446
치인들이 그에게 유일하게 요구하는 바다. 그런 요구를 거부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전부이기도 한- 그의 절반은 다른 누구 못지않게 단호하게 필요하면 누구보다 맹렬하게 활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글은 어떤 가치를 갖는 한 언제나 보다 온전한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가담하지 않은 채 사태를기록하고 사태의 필요성을 인정하되 속아서 사태의 본질을 잘못 보게되기를 거부하는 절반의 자신 말이다. - P447
간디에 대한 소견
성인이라면 모름지기 결백이 입증될 때까지는 유죄 판결을 받아마땅할 것이다. 단, 성인이 거쳐야 할 시험은 물론 모든 경우에 똑같지는 않다. 간디의 경우 던져봤으면 싶은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간디는얼마만큼이나 허영 (즉 자신을 기도방석에 앉아 영적인 힘으로만 제국들을 떨게 만드는 수수하고 벌거벗은 노인으로 의식하는 것)에 이끌려 행동했을까? 그리고 본질적으로 강제 및 사기와 불가분의 관계인 정치에 입문함으로써 자신의 원칙과 얼마만큼 타협했을까? 정답을 얻으려면 간디의 행적과 글을 아주 꼼꼼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온 삶은 행동 하나하나가 의미심장한 일종의 순례였기 때문이다. 1920년대로 끝나기에 부 - P449
분적이라 할 그의 자서전‘은 그의 편이 되어주는 강력한 증거인데, 그가그의 삶에서 거듭나지 못한 부분이라 말할 면모를 가려주고, 성인으로서의 면모 속에 그가 원하기만 했다면 변호사나 행정가나 심지어 사업가로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을지도 모를 대단한 수완과 능력도 있었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서전이 처음 신문에 연재될 무렵, 나는 인쇄 상태가 엉망인 어느 인도 신문에서 첫 몇 장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글들은 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는데, 그때도 간디 자체에 대한 인상은 좋은 게 아니었다. 간디 하면 연상되는 것(손수 짜는 천, ‘영혼의 힘‘, 채식주의)은 매력적인 게 아니었고, 그의 중세 찬미적 강령은 굶주리고 인구 과밀인 후진국에서는확실히 실현 가능한 게 아니었다. - P450
선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누구의 절친한 친구가 되어서도, 독점적인 연인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간디는 절친한 친구가 위험한 것은 "친구끼리는 서로에게 반응하기" 때문이며, 친구에게 충실하다보면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이라고 말한다.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맞는 말이다. 게다가 하느님이나 인류를 사랑하려면, 특정 개인을 선호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역시 맞는 말인데, 이지점에서부터 인본주의적 태도와 종교적 태도가 더 이상 조화를 이룰수 없게 된다. 보통의 인간에게 사랑이란 것은 남들보다 어떤 누구를 더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다. - P454
그런데 간디의 평화주의는 그의 다른 가르침과 어느 정도 분리될 수있다. 그것의 동기는 종교적이었지만, 그는 그것이 바라는 정치적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분명한 테크닉 또는 방안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간디의 태도는 서구 평화주의자 대부분의 그것과는 달랐다. 그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처음으로 발전시킨 사티아그라하‘ 정신은 일종의 비폭력 전투행위였다. 달리 말해 자기도 다치지 않고 증오를 느끼거나 불러일으키지도 않으면서 적을 무찌르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시민불복종이나 파업, 기찻길 앞에 드러눕기, 경찰의 돌격에 달아나지도 받아치지도 않고서 버티기 등과 같은 행위를 수반했다. 간디는 사티아그라하‘를 ‘수동적 저항‘이라 번역하는 데 반대했다. - P456
누군가가 단추를 눌러 로켓들이 마구 날아다니게 되기 전, 우리에게 남은 몇 년 안에 말이다. 문명이 또 한 번의 대전을 버텨낼 수 있을지는 의문스러우며, 적어도 출구는 비폭력이라는 생각을 해볼 만하다. 간디는 위에서 내가 제기한 것과 같은 식의 질문에 정직하게 고민해볼 준비가 되어 있었을 것이고, 그게 간디의 장점이다. 실제로 그는 그가 쓴 수많은 신문 사설들 어디에서인가 그런 질문들을 다루었을지 모른다. 우리는 그가 이해하지 못한 것이 많긴 했지만 그가 말하거나 생각하기를 두려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간디를별로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정치사상가로서의 그가 대체로 부적절했다고 확신할 수는 없으며, 그의 삶이 실패였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그가암살당했을 때, 그를 흠모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신의 인생 역작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게 될 정도만큼만 오래 살았다며 비탄했다는 건 좀 이상하다. 왜냐하면 인도가 내전에 빠져든 것은 권력 이양의 부산물로서언제나 예견되었던 바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디가 인생을 바쳐 한일은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대결을 진정시키는 게 아니었다. 그의 주된 정치적 목표는 영국의 지배를 평화롭게 종식시키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국 성취되었다. - P459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을 주도한건 노동당 정부인데, 보수당 정권 특히 처칠이 수반인 정부였다면 크게달라졌을 게 분명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1945년에 영국에서 인도의 독립에 동정적인 여론이 크게 일었다고 할 경우, 간디 개인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리고, 만일 인도와 영국이 결국 점잖고 우호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면(그럴 만한 일이다), 끝까지 증오 없이 집요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정치의 공기를 소독한 간디가 기여한 바는 얼마만큼일까? 이런 질문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는 자체가 간디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준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는 간디를 미학적으로 싫어할 수 있고,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자는 주장을 거부할 수도 있다(간디 자신은 그런주장을 한 적이 없다). 성인됨이라는 것 자체를 이상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그때문에 간디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바를 반인간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그를 정치인으로만 볼 때, 그리고 우리 시대의 다른 유력 정치인들과 비교해볼 때, 그가 남긴 향기는 얼마나 맑은가! - P460
역자 후기
언어의 타락과 오늘의 글쓰기
"우리 시대에 정치적인 말과 글은 주로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데 쓰인다" - 「정치와 영어」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 「나는 왜 쓰는가」
1950년 이전에 활동한 작가 중에 오늘날 조지 오웰(1903~1950)만큼널리 읽히는 이는 많지 않다. 오웰이란 작가를 아는사람들 대부분은 그의 이름을 들으면 우선 『동물농장』과 『1984』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럴만도 한 게, 이 두 소설은 10년 전쯤의 추정에 따르자면 공식 영어판만4000만 부 이상이 팔렸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누린, 그의 대표작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소설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리기 위해 그가 쓴 어마어마한 양의 저술 중에서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이라 해도 좋을 만큼 적은 일부에 불과하다. 그는 생전에 11권(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의 책을 낸 것 말고도 수백 편의 길고 짧은 에세이 - P474
를 썼는데(서평과 칼럼 등을 포함해서다) 그의 에세이는 미국의 한 평론가가 그를 18세기 영국 문단 최고의 문사였던 사무엘 존슨 이후 최고의에세이스트로 꼽을 만큼 탁월하다. 생전에 책으로 다 묶이지 못했던 그의 에세이들은 사후에 다종다양한에세이집으로 계속해서 묶여 나오고 있다. 본 에세이집은 지금 우리에게 보다 큰 의미를 줄 수 있다 싶은 오웰의 에세이들을 양적으로 다소무리가 따르더라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보자는 시도의 결과물이다. 오웰의 그 많은 에세이들을 일일이 꼼꼼히 읽어보고 선별한다는 것은 나에게 허락된 시간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오웰의 산문 중 생전에 단행본으로 출간된 소설과 르포 이외의 중요한 글들을 모은 저작집"에서 오늘의 우리에게도 울림이 클 만한 에세이를 골라 번역것은 어렵긴 해도 보람 있는 작업이었다. 오웰의 글이 매력적인 것은 문체 자체가 간결하고 명쾌할 뿐만 아니라 예리한 통찰, 특유의 유머와 독설이 빛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독특한 개성과 경험이 있어야 했을 텐데, 여기서 그의 별난 이력과면모를 간단히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 P475
"자유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다면, 남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그들에게 할 권리일 것이다." 오웰의 전기‘를 쓴 피터 루이스는 『동물농장』의 미발표 서문에 나온다는 이 말이 오웰의 개성을 단적으로 잘 드러내준다고 말한다. 오웰은 "고약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신이 누리던 특권을 내팽개친 사람이다. 그는 사립 명문 이튼 졸업생으로선 유일하게대학을 포기하고 식민지 경찰이 되었고, 안정된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 - P475
고서 부랑자나 접시닦이가 되었다. 2차대전 전에는 런던에서 문단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시골 마을에서 작은 가게를 하며 텃밭을 일구는생활을 했고, 전쟁 후 명사가 되었을 때는 한적한 섬에서 은거하는 쪽을택했다. 그런 그를 동시대 소설가 V. S. 프리체트Pritchett는 "자국 내에서 원주민이 되어버린 사람이라고 했다. 오웰은 자기 이력을 통해 패턴과 인습을 거부한 작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인간의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고 비이성적인 면에 주목한 작가이기도 했는데, 그 점은 본 에세이집의 어느 글을 보아도 뚜렷이 드러나는 그의 개성이지 싶다. 책의 제목을 ‘나는 왜 쓰는가‘로 한 것은, 같은 제목의 에세이가 그의문학론과 정치적 입장을 단적으로 가장 잘 대변해주며, 작가로서의 자신에 대한 짤막한 자서전으로 봐도 좋을 상징적이고 대표적인 작품이기때문이다. - P476
그는 또 이 에세이에서 정치와 문학은 별개가 아니며, 어떤글쓰기도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입장을피력한다. 그렇다고 오웰을 정치적이기만 한 작가로 본다면 큰 오산이다. 작가로서의 그에겐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 가장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그는 또 작가가 정치적인 활동은 하되 일반 시민으로서 개입해야지 작가로서 어떤 정치 노선에 따라 글을 쓰는 것만큼은 거부할 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한다.(작가와 리바이어던) 정치적 충심에 따라 행동하는 자신과 작가적 예술가적 양심에 따라 글을 쓰는 자신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지만 나는개인적으로 오웰의 에세이들 중에 평론적인 글보다는 소설가적 면모가드러나는 경험적인 글이 더 좋았다. 물론 어느 한쪽만이 부각된 오웰은작가 오웰의 온전한 모습이 아닐 테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작가 오웰에게서 구할 수 있는 미덕은 무엇일 - P476
까? 언어에 민감한 사람이라면, 심지어 업으로든 아니든 글쓰기를 하는사람이라면, 오웰이 주목한 언어의 타락(정치와 영어」)에 대하여 오늘우리의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젖줄에 비유되는 강을파헤치고 댐을 쌓아 물을 가두는 일을 강 ‘살리기‘ 라 부르고 ‘녹색‘뉴딜이라 일컫는다. 오웰은 말한다.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죽이면서 살린다고 하고, 나무와 습지를 파내면서 ‘녹색‘ 이라고 하는 것은 1984』의 전체주의 사회에서 선전을 담당하는 기관이 "전쟁은 평화/자유는 예속/무지는 힘"이라는 슬로건을 내거는 것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더구나 이 기관의 이름은 "진실"부다). 이대로 간다면 우리는 전쟁이 나도 평화인 줄 알고, 노예가 되어도자유로운 줄 알고, 모르는 게 자랑인 줄 알며 살게 될 것이다. 하물며 비판은 못할지언정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일에, 그런 타락에 곡학아세하며 동조해서야 되겠는가? - P477
마지막으로 이 에세이집의 구성에 대해 간략한 소개를 하고자 한다. 여기에 실린 29편의 에세이들은 오웰이 글을 써서 발표한 시기에 맞춰순차적으로 배열을 했다. 그리고 각 작품이 발표된 시기의 정황에 대한이해를 돕도록 각주를 달았고, 책의 맨 뒤에는 상세한 오웰 연보를 붙여두었다. 더구나 자전적인 소설처럼 읽히는 작품들이 있는가 하면, 시대상을 반영하는 논평 같은 글들도 있으니 이 한 권의 에세이집은 오웰의자서전 같은 역할을 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오웰은 생전에 자신의 전기를 쓰지 말라는 부탁을 했고, 그래봤자 물론 사후에 많은 전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는데, 실은 그의 작품들 곳곳에 자전적인 서술이 있으며그것은 에세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아울러 각주를 300개 이상단 것은, 오웰의 글이 60여 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오늘의 어떤 영미 - P477
계 작가보다도 잘 읽히는 명쾌한 문체로 씌어졌지만,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오늘의 우리와 거리감이 있는 부분도 있기에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고 기술 진보의 아이러니라고 할까, 각주의 대부분을 ‘위키피디아‘ 라는 인터넷 백과사전에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고 기나긴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데에는 걸으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게 해준 동네 뒷산의 도움이 무엇보다컸다. - P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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