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 깜깜할 때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젖은 채로, 소총과 탄약통까지 들고는 절대 될 수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오십 명에서 백 명 가량 되는 무장 군인들이 쫓아온다고 생각하니 언제라도 뛸 수 있다는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빨리 뛸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은 나보다 더 빨리 뛸 수도 있었다. 열심히 달아나고 있는데 마치 한 줄기 유성 같은 것이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스쳐갔다. 전진시 나보다 앞서 나아갔던 세 명의 스페인 병사였다. 그들은 아군 흉벽에 돌아가서야 발을 멈추었고, 나는 그때서야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사실 우리는 신경이 극도로 곤두서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는 다섯 명이 뭉쳐있으면 눈에 잘 띄어도, 한 명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것을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혼자 다시 수색에 나서기로 했다. 나는 적의 외곽 철조망까지 갔다. 최선을 다해 그곳을 수색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수색은 아니었다. 줄곧 기어다녔기 때문이다.
호르헤나 히들스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기어서 돌아왔다. 호르헤와 히들스톤은 가장 먼저 응급 치료소로 후송되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호르헤는 어깨에 경상을 입었고히들스톤은 심한 부상을 당했다. 그의 왼쪽 팔을 관통한 총알이뼈를 몇 조각으로 부수어 버렸다. 그렇게 꼼짝 못하고 땅바닥에누워 있는데 옆에서 또 다른 수류탄이 터지며 그의 몸의 다른부분들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다행히 그는 회복되었다.  - P134

날이 많이 밝아졌다. 폭풍이 지나간 뒤에도 계속 내리는 비처럼 전선 몇 킬로미터에 걸쳐 무의미한 사격이 계속되면서 귀에 거슬리는 큰소리를 냈다. 모든 것이 황량해 보였다. 진흙으뒤덮인 늪지, 흐느끼는 포플러, 참호 바닥에 고인 황톳물.
지친 병사들의 얼굴은 면도를 못해 꺼칠했고, 뺨에는 흙탕물이줄줄 흘러내렸으며, 연기 때문에 눈까지 시꺼멨다. 개인호로돌아왔을 때 나와 참호를 함께 쓰는 세 사람은 이미 깊이 잠들어 있었다. 군장을 그대로 걸친 채였다. 진흙 범벅인 소총도 꼭움켜쥐고 있었다. 모든 것이 비에 젖었다. 참호 안이나 밖이나다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여기저기 뒤진 끝에 나는 간신히 불을 지필 만한 마른 장작 조각들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그동안아껴두었던 시가를 피웠다. 그런 밤을 겪었는데도 시가가 부러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나중에 우리는 그 작전이 성공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P135

배급받은 식량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한 일이라고는 기껏 추위와 수면부족을 견딘 것뿐이었다. 어쩌면 그것이 대부분의 전쟁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겪어야 하는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와서 좀더 긴 안목으로 그 시기를 돌아보면, 전선에 간 것이 다후회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스페인 정부에 좀더 효과적으로 봉사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그랬다. 개인적인입장에서 볼 때, 그러니까 나 자신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전선에서 보낸 처음 서너 달은 내가 당시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 무익했다. 그 시기는 내 인생에서 일종의 휴지 기간이었다. 이전에 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으며, 아마 앞으로 살게될 어떤 삶과도 다를 것이다. 그 시기에 나는 다른 방식으로는결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배웠다.
lll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 P139

요점은 내가 이 기간 내내 고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전선은 바깥 세계와 거의 완전히 단절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지는 일들조차 어렴풋이 짐작해 볼 뿐이었다. 대충 혁명가라 불러도 무방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는데도 그랬다. 이것은 의용군 체제의 결과였다. 아라곤 전선에서 이 체제는 1937년6월 무렵까지 근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노동자 의용군들은노동조합에 근거를 두고 있었으며, 각각의 의용군은 비슷한 정치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결과적으로 그 나라의 가장 혁명적인 정서를 한곳으로 모으는 효과를 가져왔다.
나는 우연히 정치적 의식과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이 그 반대의경우보다 더 정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었다. 제법 규모를 갖춘 것으로서는 서유럽에서 유일했다. 이곳 아라곤에 모여든 사람들의 수는 만 명 정도였다. 전부는 아니지만 주로 노동 계급 출신이었다. 모두들 똑같은 수준에서 생활하였으 - P139

며, 평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어울렸다. 이론적으로는 완전한평등이었다. 실제적인 면에서도 완전한 평등에 가까웠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았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 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자본주의 사회에 일반적인 계급 분리는 돈에 물든 영국의 분위기에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없을 정도로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곳에는 농민과 우리만 있었다. 누구도 주인으로서 다른 사람을 소유하지 않았다. 물론 그런 상태는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그것은 지구 전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한 게임 속에서의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한 국면일 뿐이었다. - P140

그러나 그것을 경험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줄만큼은 지속되었다. 당시에는 그것을 아무리 욕했을지라도 나중에는 뭔가 신기하고 귀중한 어떤 것과 접해보았다는 사실을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인것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지금은사회주의가 평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유행임을 나도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상당한 수의 어용 문사(文士)와 말주변 좋은 교수들이 사회주의란 약탈적 동기를 그대로 놓아둔 계획적인 국가 자본주의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느라 바쁘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와는 아주 다른 사회주의에 대한 비전도 존재한다. 보통 사람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사회주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이유, 즉 사회주의의 〈비결〉은 평 - P140

등 사상에 있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란 계급 없는 사회일 뿐이다. 그것말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용군에서 보낸몇 달이 나에게 귀중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다. 스페인의용군은 그것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일종의 계급 없는 사회의축소판이었다. 아무도 자기 이익에 급급해하지 않는 공동체,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특권이나 아첨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사회주의의 서막을 막연하게나마 감지했던것 같다. 결국 나는 그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는 대신 깊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의 수립을 갈구하는 내 욕망은 전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 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스페인 사람들과 함께 있는 행운을 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타고난 품위와 변함 없는 무정부주의적기질 때문에, 기회만 얻는다면 사회주의의 초기 단계조차도 견딜 만하게 만들어줄 사람들이다. - P141

물론 당시에는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변화를 거의 의식하지 못했다.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가 주로 느끼는 것은 권태, 더위, 추위, 더러움, 이, 궁핍, 이따금씩의 위험 따위였다. 그러나 지금은 사뭇 다르다. 당시에는 그토록 무익하고 지루할 정도로 평온하게 느껴지던 시기가 지금은 매우소중하다. 그 시기는 내 인생의 다른 시기들과는 워낙 달라서, 빌써부터 마술 같은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런 속성은 보통 오래된 기억에만 생기는 것인데 말이다. 당시에는 지긋지긋했지만, 이제 그 기억은 내 마음이 뜯어먹기 좋아하는 좋은 풀밭이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를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앞장들에서 조금이라도 전달됐기를 바랄 뿐이다. 내 마음의 모든기억들은 겨울 추위, 의용군 병사들의 넝마가 된 제복, 스페인 - P141

사람들의 달걀 같은 얼굴, 모르스 신호 같은 기관총 소리, 지린내와 빵 썩는 냄새, 더러운 접시에 담아 후루룩 들이키던 함석내 나는 콩스튜 등에 연결되어 있다.
고양이만한그 시기 전체가 이상하리만큼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나는 되돌아볼 가치도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건들을 다시 살고 있다. 나는 다시 몬테 포세로의 개인호 속에 들어가 침대 역할을 하는 석회암 선반에 누워 있다. 내 어깨뼈 사이에 코를 처박고 자는 젊은 라몬이 시끄럽게 코를 곤다. 더러운 참호 안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안개는 차가운 증기처럼 내주위에서 소용돌이친다. 산비탈의 갈라진 틈 사이로 반쯤 기어올랐다. 균형을 잡고 땅에서 야생 로즈메리의 뿌리를 캐려고 애쓴다. 머리 위 높은 곳에서는 의미 없는 총알들이 노래를 한다.
나는 몬테 오스쿠로 서쪽 저지대의 자그마한 도금양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엎드려 있다. 옆에는 콥과 보브 에드워즈, 스페인 병사 셋이 있다. - P142

버마 북부의 만달라이에서 기차를 타면 마이미오까지 갈 수있다. 마이미오는 샨 고원 지대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중요 주둔지이다. 그 기차 여행은 묘한 경험이었다. 기차는 동양 도시의전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출발한다. 이글거리는 태양, 먼지 낀종려나무, 생선과 양념과 마늘 냄새, 질퍽한 열대 과일, 떼를지어 몰려다니는 시커먼 얼굴의 사람들. 이런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기차 안에서도 그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되는 느낌이었다. 기차가 해발 천이백 미터의 마이미오에 이르렀을 때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만달라이에 있게 된다. 그러나기차에서 내리는 순간, 마치 지구의 반대편에 들어선 기분이든다. 갑자기 영국에서와 같은 시원하고 달콤한 공기가 코로 들어온다. 주위에는 푸른 풀밭, 고사리, 전나무가 펼쳐져 있다. 뺨이 발그레한 고지의 여자들은 바구니에 담은 딸기를 판다. - P144

전선에서 석 달 반을 보내고 바르셀로나로 돌아가자 그 기차여행이 생각났다. 그때처럼 분위기가 놀랄 만큼 갑자기 바뀌어버린 것이다.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 안에서는 줄곧 전선의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흙, 소음, 불편함, 넝마가 된 옷, 궁핍감, 동지애와 평등, 바르바스트로를 떠날 때부터 이미 의용군으로 만원이던 기차는 역에 설 때마다 농민을 더 태웠다. 어떤농민은 야채 꾸러미를 들었고, 어떤 농민은 겁에 질린 닭의 발을 쥐었고, 어떤 농민은 배낭을 들고 탔다. 바닥에 놓인 배낭들은 둥글게 말리며 꿈틀거렸는데, 알고 보니 그 안에는 살아 있는 토끼들이 가득했다. 마지막에는 양떼가 밀려 들어와 빈 공간으로 비집고 들어갔다. 의용병들은 혁명가를 소리 높여 불렀다.
노랫소리에 열차의 덜그덕거리는 소리도 묻혀버렸다.  - P145

군중의 변화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용군 제복과 푸른 작업복들은 거의 사라졌다. 모두들 스페인 재단사들이 만든 멋진여름 양복을 입고 있는 것 같았다. 어디를 가나 뚱뚱한 부자,
우아한 여자, 늘씬한 차들이 눈에 띄었다. (아직 자가용은 없는것 같았다. 그래도 한다하는 사람들은 차를 마음대로 부렸다.)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날 때는 거의 없던 새로운 인민군 장교들이놀랄 만큼 많이 돌아다녔다. 인민군은 장교가 열에 하나꼴이었다. 이 장교들 가운데 일부는 의용군에서 복무하다가 기술 교육을 위해 후방으로 불려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의용군에 입대하는 대신 전쟁 학교를 택했던 젊은이들도 다수 있었다. 이들장교와 부하의 관계가 부르주아 군대와 똑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분명한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이것은보수와 제복의 차이로 표현되었다. 사병들은 거친 갈색 작업복을 입었고, 장교들은 우아한 카키색 제복을 입었다. 영국군 장 - P146

교복처럼 생겼는데, 허리가 좀더 잘록했다. 아마 스무 명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전선에 가본 적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모두들허리에는 자동권총을 차고 있었다. 우리가 전선에 있을 때는 애걸로도, 돈으로도 구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가 거리를 걸어갈때마다 사람들이 우리의 더러운 외관을 빤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물론 전선에 몇 달 있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몰골은 형편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 눈에 내가 허수아비처럼 비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 가죽 저고리는 넝마나 다름없었다. 모직 모자는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자꾸밑으로 내려와 한쪽 눈을 가렸다. 군화 밑창은 거의 다 떨어져나가고, 윗덮개도 끝자락이 옆으로 벌어져 보기 흉했다. 우리모두 대체로 비슷한 몰골이었다. 게다가 우리는 더러웠고 면도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도 나는 좀 당황스러웠다. 동시에 지난 석 달 동안 그곳에뭔가 야릇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절실하게 느꼈다. - P147

며칠 동안 나는 수없이 많은 증거들을 통해 내 첫인상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도시 전체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사람들, 즉 민간인들이 전쟁에 관심을 잃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빈부 상하의 계급 구분이라는 일반적인 사회현상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전쟁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은 놀랍기도 했고, 또 좀 역겹기도 했다. 마드리드나 심지어 발렌시아에서 온 사람들조차 그런 무관심에 혐오감을 느꼈다. 우선 바르셀로나가 싸움터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이 한 가지 원인이었다. 나는 한 달후 타라고나에서도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그 멋진 해변 도시에서는 일상적인 생활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 P147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충분히 살 수 있었다. 빵은 예외였다. 매우 엄격하게 배급되는 편이었으니까. 어쨌든 빈부간의 이 같은 노골적인 격차는 노동 계급이 지배하던 몇 달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것을 단지 정치적 권력의 이동 때문이라고만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바르셀로나가 안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곳에는 이따금씩 벌어지는 공습 외에는 전쟁의 위협이 거의 없었다. 마드리드에 있던 사람들 누구나바르셀로나의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했다. 마드리드에서는공통의 위험 때문에 거의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일종의 동지애를 느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쪽에서는 뚱뚱한 사람이 메추라기를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이들이 빵을 구걸하는 모습은 역겨운 광경이다. 그러나 총소리가 들리는 곳에서는 이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 P153

5월 1일 노동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이 모두 참여하는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벌어질 거라는 소문이 돌았다. 자신들의 추종자들보다는 더 온건한 전국노동자연맹 지도자들은 오래전부터 노동자총연합과의 화해를 시도해 왔다. 실제로 그들의 정책 기조는 두 단위의 조합을 하나의 거대한 연합체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전국노동자연맹과 노동자총연합의 조합원들이 노동절에 함께 행진함으로써 단결력을 대외에 과시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시위는 취소되었다. 폭동이 일어날 게 너무나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5월 1일에는 아무런 행사도 치러지지 않았다. 묘한상황이었다. 파시스트에게 장악되지 않은 유럽에서 그날 기념식을 열지 않은 도시는 이른바 혁명 도시라는 바르셀로나 하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나는 안심이 되었다. 영국의독립노동자당 대표단은 통일노동자당 쪽에 끼어 행진하기로 되어 있었다. 누구나 일이 터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의미 없는 시가전에 휘말려드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사기를고취하는 구호들이 적힌 붉은 기 뒤에서 거리를 행진하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거리의 창문에서 쏜 기관총에 맞아 죽는 것-이것은 내가 보기에 가치 있게 죽는 방식이 아니었다. - P158

관측소의 작은 창문으로 주변 몇 킬로미터씩을 내다볼수 있었다. 높고 날씬한 건물들에 이어 유리 돔, 밝은 녹색과구리색 타일을 얹은 환상적인 나무결 모양의 지붕들이 끝도 없이 뻗어나갔다. 멀리 동쪽으로는 푸르스름한 바다가 희미하게반짝거렸다. 스페인에 온 후로 처음 보는 바다였다. 그러나 인구 백만의 거대한 도시가 일종의 광포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었다. 동작은 없고 소리만 있는 악몽이었다. 햇빛이 비치는 거리들은 완전히 텅 비었다. 바리케이드나 모래주머니를 댄 창으로부터 총알이 물줄기처럼 날아오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차량도 없었다. 람블라스거리 여기저기에 전차들이 꼼짝 않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전투가 시작되자운전사들이 달아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옥 같은 소음은수천 동의 석조 건물들을 울리며 끝도 없이 이어졌다. 열대의폭풍우 같았다. 땅땅, 덜컹덜컹,우르릉. 때로는 몇 발의 총성으로 잦아들었다가 때로는 귀가 멍멍할 정도의 일제사격으로바뀌었다.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 P171

그러나 해가 지기 전에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동이 트는 것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누가 누구와 싸우는 것이고 누가 이기고 있는 것인지 알아내기가 무척힘들었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시가전에도 익숙하고 동네 지리에도 밝아서 어느 정당이 어느 거리와 건물들을 장악하고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았다. 이 점에서 외국인은 불리하기 짝이 없었다. 관측소에서 보니 바르셀로나의 중심 거리들 가운데 하나인 람블라스가 경계선을 형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람블라스 오른쪽의 노동 계급 거주지는 무정부주의자들의 견고한 터전이었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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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들이 딱히 아름답다고 할 수는없었지만, 이 진지에 다른 소대의 남자 병사들이 접근하는 것은 막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오른쪽으로 5백 미터 거리에는 통일사회당 진지가 있었다. 알쿠비에레로 향하는 도로가 휘어지는 지점이었다. 바로 그곳에서부터 도로의 주인이 바뀌었다. 밤이면 우리의 보급 물자를 싣고 알쿠비에레로부터 구불거리며다가오는 화물 트럭의 불빛이 보였다. 사라고사로부터 오는 파시스트 화물 트럭의 불빛도 동시에 보였다. 남서쪽으로 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라고사도 보였다. 불을 켠 배의 현창들처럼 불빛들이 가는 띠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군은 1936년 8월부터 그 거리에서 사라고사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 P55

우리는 스페인 병사 한 명(윌리엄스의 처남 라몬이었다)을 포함하여 서른 명 정도였다. 우리 외에 스페인 기관총 사수도 여남은 명 있었다. 언제나 끼어들기 마련인 짜증 나는 사람 한두명을 제외하면 —— 모두가 알다시피 전쟁에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꾀기 마련이니까 영국인들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예외적일 만큼 훌륭한 사람들이었다. 우리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은 아마 보브 스마일리였을 것이다. 그는 광부들의 유명한 지도자의 손자였는데, 나중에 발렌시아에서 덧없이 참혹하게 죽고 말았다. 언어 장벽에도 불구하고 영국 병사들과 스페인병사들이 늘 잘 지낸 것을 보면, 스페인 사람들의 성격을 잘 알수 있다. 스페인 사람들 누구나 영어 표현 두 가지씩은 알고 있었다. 하나는 「오케이, 베이비였고 또 하나는 바르셀로나의 창녀들이 영국인 선원들을 상대할 때 사용하는 말이었다. 아마 그말을 이 글에 올린다 해도 식자공이 인쇄해 주지 않을 것이다. - P55

날씨는 대체로 맑았지만 추웠다. 한낮에는 가끔 해가 환하게빛나기도 했다. 그러나 늘 추웠다. 산기슭 여기저기에 부리처럼생긴 야생 크로커스의 녹색 열매가 보이기도 했고, 붓꽃이 머리를 내밀기도 했다. 분명 봄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느리게 왔다. 밤은 평소보다 추웠다. 새벽에 경계 근무를 끝내면, 취사실에서 불을 때고 남은 것을 긁어모아 발갛고 뜨거운 깜부기불 앞에 서 있곤 했다. 군화에는 좋지 않았지만 발을 녹일 수 있어좋았다. 때로는 봉우리들 사이로 동트는 것을 보기 위해, 이른시간에 잠자리에서 빠져나오는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산을 싫어한다. 좋은 위치에서 바라다보이는 아름다운 산들조차 싫다. 그러나 이따금 우리 뒤편 봉우리들 뒤로 동이 트면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줄기들이 검처럼 어둠을 가르고, 이어빛이 밝아지면서 가없이 펼쳐진 구름 바다가 붉게 물들 때, 그광경은 설사 밤을 꼬박 새고 난 뒤 무릎 아래로는 아무런 감각이 없고 앞으로 세 시간은 아무것도 못 먹는다는 생각에 마음이우울해질 때라도, 한번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 나는 이 짧은전쟁 기간 동안에, 인생의 나머지 기간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이 일출을 보았다. 바라건대는, 앞으로 살아야 할 세월 동안 보아야 할 것들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본 것이면 좋겠다. - P57

전선에 투입되고 나서 처음 서너 달 동안에는 잠 한숨 못 자고 24시간을 버틴 적이 여남은 번을 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고 푹 자본 밤도 여남은 번을넘지는 않았다. 일주일에 총 스무 시간 내지 서른 시간을 자면지극히 정상이었다. 이로 인한 결과는 생각만큼 나쁘지 않았다.
머리가 매우 멍해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일이 되레 어려워지긴했지만 몸은 건강했고 늘 배가 고팠다. 맙소사, 얼마나 배가 고프던지! 모든 음식이 맛있게 느껴졌다. 심지어 스페인에 있는모든 사람이 보기도 싫어했던, 그 어딜 가나 빠지지 않던 강낭콩조차도. 얼마 안 되는 물은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노새나 심하게 부려먹는 작은 당나귀에 실어 왔다. 왠지 모르지만아라곤 농부들은 노새한테는 잘해 주었지만 당나귀는 구박을했다. 당나귀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면 불알을 걷어차기 일쑤였다. 초 보급은 중단되었다. 성냥도 줄어들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연유깡통, 탄약클립, 걸레조각으로 올리브유 램프를 만드는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행여 올리브 기름이라도 생기게 되면, 램프 기름으로 사용했다. 램프의 불꽃은 깜빡거리며 연기를 내뿜었다. 밝기는 촛불의 4분의 1쯤 되는것 같았다. 옆에 있는 소총을 찾을 수 있을 정도였다. - P58

어둠 속에서 총알들이 우리 주위를 날아가며땅ㅡ핑ㅡ땅 하는 소리를 냈다. 포탄 몇 개가 휘파람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 근처에는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대부분은 터지지도 않았는데, 이 전쟁에서는 보통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후방의 봉우리에서 또 한 정의 기관총이 불을뿜는 순간, 나는 이제 끝이구나 싶었다. 사실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올라온 기관총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완전히포위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기관총은 금세 망가졌다. 그형편없는 총알 때문에 늘 그 모양이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이라 탄약 꽂을대는 찾을 수도 없었다. 그냥 가만히서서 총알을 맞는 것 외에는 달리 수가 없는 것 같았다. 스페인기관총 사수들은 숨는 것을 경멸했다. 사실 그들은 일부러 몸을노출했다. 나도 그렇게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찮은 일이었지만, 이런 경험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총탄 사례를 받았다고 할만한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창피한 일이지만, 무지하게겁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총알이 빗발칠 때는 늘 똑같은느낌이었던 것 같다. 총알에 맞는 것 자체가 무섭다기보다는,
디에 맞을지 모르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총알이 도대체 어디에 박힐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몸 전체가어불쾌할 정도로 예민해진다. - P62

처음에 나는 전쟁의 정치적 측면은 무시했다. 그러나 이 무렵이 되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혹시 정당 정치의 소름끼치는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라면 이 부분은 건너뛰기 바란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이 이야기에서 정치적인 부분은 별도의 장으로 다루려 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전쟁을순전히 군사적인 각도에서만 쓴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전쟁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전쟁이었다. 어쨌든 정부 방어선 뒤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당 내부의 투쟁을 파악하지 못하면 첫해 동안에 이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했다.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떤 종류의 전쟁인지도 몰랐다. 그런데도 왜 의용군에 입대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시즘과 싸우기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싸우느냐고 묻는다면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 P66

그러나 정당 사이에 심각한 차이가 있는 줄은 몰랐다.
포세로 산에서 병사들이 우리 왼쪽 진지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저쪽은 사회주의자들이야(통일사회당이라는 의미였다)」나는 어리둥절해서 말했다. 「우리 모두 사회주의자 아니야?」나는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정당에 속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했다. 내 태도는 늘 이런 식이었다. 「왜 다들 이런 말도 안 되는 정치적인 짓거리를 그만두고전쟁이나 잘하지 못하는 거야?」물론 이것은 올바른「반파시스트」적 태도였다. 또한 영국 신문들이 주도면밀하게 퍼뜨리는 태도이기도 했다. 그런 태도를 퍼뜨리는 주된 목적은 사람들이 이투쟁의 진정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페인, 특히 카탈로니아에서는 아무도 그렇게 막연한 태도를 유지할 수 없었다. 또 유지하지도 않았다. 암만 내키지 않아도 모두가 조만간 어느 한편을 선택해야 했다. 아무리 정당과그들의 모순되는 「노선」에 관심이 없다 해도, 자신의 운명이 그것과 결부되어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의용병으로서 프랑코와 싸웠다. 그러나 병사들은두 개의 정치적 이론을 놓고 벌어지는 거대한 투쟁의 볼모이기도 했다.  - P67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 정부라기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응대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일에는 확실한 답이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있다. 인민전선 정부는 반란을미리 막으려는 노력을 거의 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반란은 오래전부터 예측되어 오던 것이었다. 막상 문제가 터지자 정부는주저하는 유약한 태도를 보였다. 수상이 하루에 두 번 바뀌었을정도이다. 게다가 눈앞의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노동자의 무장을 한참 머뭇거리다가 강력한 대중적 요구에못 이겨 마지못해 허용했다. 결국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무기를나누어주게 되었다.  - P69

실제로는 모든 곳의 교회가 약탈당했다.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스페인 교회가 자본주의적인 돈벌이의 일부라는사실을 완벽하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스페인에 여섯 달을 있으면서 내가 본 교회들 가운데 파괴되지 않은 것은 딱 두 개였다.
그리고 1937년 7월까지는 교회가 다시 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는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마드리드에 있는 개신교 교회 한두 개만예외였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혁명의 시작에 불과했지 혁명의 완성은아니었다. 노동자들은 그럴 힘이 있었음에도――카탈로니아에서는 분명히 그랬고, 아마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정부를 전복하거나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프랑코가대문을 망치로 두드리고 중간 계급의 일부 계층들이 그들 편에있는 상황에서는 물론 그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 쪽으로 갈 수도 있고, 일반적인 자본주의 공화국으로갈 수도 있는 과도기 상태였다. 대부분의 땅은 농민이 가졌다.
프랑코가 승리하지 않는 한 농민들이 그 땅을 그대로 가지게 될가능성이 높았다. 큰 공장들은 모두 집산화가 이루어졌지만, 그런 상태를 유지할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재도입될지는 어떤 그룹이 통제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될 문제였다.  - P73

카탈로니아에서는 한동안, 노동조합들의 대표단이 다수를 이루는 반파시스트 방어 위원회"가 헤네랄리테를 대신하다시피 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중앙정부는 개편될 때마다 우익 쪽으로 움직여갔다. 처음에는통일노동자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여섯 달 뒤에는 카발례로가 물러나고, 우익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 직후 전국노동자연맹이 정부에서 쫓겨났다. 그 다음에는 노동자총연합이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전국노동자연맹이 헤네랄리테에서 쫓겨났다. 전쟁과 혁명 발발 1년 뒤, 결국중앙정부에는 우익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공산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우익으로의 전환은 1936년 10월, 11월 무렵에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소련은 정부에 무기를 공급하기 시작했고, 그와 더불어 권력이 무정부주의자들에게서 공산주의자들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러시아와 멕시코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스페인 정부를 지원하는 친절을 보여주지 않았다. 멕시코야 물론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할 수 없었다. - P74

정부는 러시아정부가 직접적 압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을 부인해 왔다. 그러나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모든 나라의 공산당은 러시아의 정책을 이행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통일노동자당에 반대했고 나중에는 무정부주의자들과 카발례로의 사회주의일파에 반대했으며, 혁명적 정책 전반에 대해서 반대했던 주동자가 공산당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소련이 개입한 이상 공산당의 승리는 보장된 것이었다. 우선 공산주의자들의 위신이 크게 올라갔다. 그것은 무기 공급에 대해 러시아에감사하는 분위기 때문이기도 했고, 특히 <국제 여단>의 도착 이후 공산당이 전쟁에서 승리할 능력을 갖춘 것처럼 보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 P75

그러나 의용군을 노동조합의직접적인 통제하에 두면서 좀더 능률적으로 재조직하는 방법도얼마든지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용군 해체의 주목적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소유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의용군의 민주적 분위기 때문에 혁명적 사상들이 양성되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시행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간의 평등 보수 원칙을 쉴새없이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 결과 전체적인 〈부르주아화〉, 즉 혁명 초기 몇 달 간 이루어졌던 평등 정신의 고의적 파괴가 일어났다. 모든 일이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는 바람에 몇 달 간격으로 스페인을 다시 찾은사람들은 같은 나라에 온 것 같지 않다고 이야기하곤 했다. 스페인은 잠깐이지만 언뜻 노동자 국가로 보였다. 그러나 노동자국가는 눈앞에서 평범한 부르주아 공화국으로 바뀌어 갔다. 이제 그곳에는 부자와 빈자라는 일반적인 구분이 존재했다. 1937년가을이 되면 <사회주의자> 네그린이 대중 연설에서 <우리는 사적 소유를 존중한다〉고 선언하게 된다.  - P77

스페인의다른 지역에서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형식적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의 관점과 우익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은 어디에서나 똑같다고 볼 수 있다. 거칠게 말해서, 통일사회당은 U.G.T. (Unión General deTrqbqjqdores, 노동자총연합), 즉 사회주의 노동조합들의 정치적기관이다. 스페인 전역에 걸쳐 이 노동조합의 조합원은 이제 약백오십만에 이른다. 여기에는 많은 계층의 육체 노동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중간 계급으로부터 유입된사람들이 그들을 삼켜버렸다. <혁명> 초기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노동자총연합(U.G.T.)이나 전국노동자연맹(C.N.T.)에 가입하는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원들은양 조직에 이중 가입되어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 전국노동자연맹이 단연 노동 계급을 대표하는 조직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통일사회당은 일부의 노동자와 일부의 프티부르주아지 상점 주인, 공무원, 부유한 농민로 이루어진정당이었다.  - P81

스페인 사람들 모두가그렇듯이 무정부주의연합의 모든 구성원들도 어느 정도 무정부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반드시 순수한 의미에서의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전쟁 초기 이후 그들은일반적인 사회주의 방향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상황 때문에 중앙 집권적 행정부에 참여했고, 심지어 모든 원칙을 어기고 정부에 들어가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통일노동자당과 마찬가지로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노동자들의 통제를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들은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는 통일동자당의 구호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통일노동자당보다는 덜 교조적이었다.  - P84

그러나 혁명 정당들이 상황을통제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초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무정부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사이에는 해묵은 반목이 있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인 통일노동자당은 무정부주의에 회의적이었다.
반면 순수한 무정부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노동자당의〈트로츠키주의>가 공산주의자들의 <스탈린주의>보다 더 나을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전술 때문에 두 정당은 연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5월에 통일노동자당이 바르셀로나에서 시가전에 뛰어들어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것도 전국노동자연맹을 지지해야 한다는 본능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나중에 통일노동자당이 탄압을 당했을 때, 대담하게도 그들을 옹호하여 목소리를 높인 사람들은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다.
따라서 대략적인 세력 배치는 이렇다. 한쪽에서는 전국노동자연맹-무정부주의자연합,통일노동자당, 사회주의자들 일부가 노동자들의 통제를 지지한다. 다른 쪽에서는 우익 사회주의자들, 자유주의자들, 공산주의자들이 중앙 집권적 정부와 정규군을 지지한다. - P85

당시에 내가 왜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통일노동자당의 관점보다 더 좋아했는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분명한 실질적 정책이 있었다. 겨우 몇 달 앞만을 내다보는 상식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것이 분명 더 나은 정책이었다. 확실히통일노동자당의 일상적인 정책, 선전 등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훨씬 더 많은 대중이 그들을따랐을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을 종결지은 것은 우리와 무정부주의자들이 가만히 서 있는 동안 공산주의자들은 전쟁에 발맞추어 나갔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또한이것이 당시의 일반적 느낌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얻고 또 그 당원이 엄청나게 증가한 것은 그들이 혁명가들에반대하여 중간 계급에게 호소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집단으로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 P86

어쨌든 이것이 그들이 우리에 대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트로츠키주의자,파시스트, 반역자, 살인자, 겁쟁이, 간첩 등등이었다. 솔직히 기분 나쁜 일이다. 특히 그런 일을 자행하는 자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들것에 실려 전선을 내려오며 모포사이로 눈부신 듯 바깥을 내다보는 하얀 얼굴의 열다섯 살짜리스페인 소년을 보면서, 이 소년이 위장한 파시스트임을 증명하는 팸플릿을 쓰고 있는 런던이나 파리의 말쑥한 사람들을 생각한다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전쟁의 가장 끔찍한 특징가운데 하나는 모든 전쟁 선전물, 모든 악다구니와 거짓말과증오가 언제나 싸우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다.
내가 전선에서 알게 된 통일사회당 의용군 병사들이나, 이따금씩 만나는 국제 여단의 공산주의자들은 나를 결코 트로츠키주의자나 배반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 P88

기자들이 보여준 모습으로만 본다면, 이 전쟁은 다른 모든전쟁들과 마찬가지로 말잔치였다. 그러나 한 가지 차이가 있었다. 기자들은 보통 가장 지독한 욕설은 적을 위해 아껴두기 마련인데, 이번 전쟁에서는 시간이 흐르면서 공산주의자들과 통일노동자당이 서로에 대해 파시스트들보다 더 심하게 비난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시에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당간 불화는 짜증 나고 역겹기까지 했지만, 내눈에는 사소한 집안 싸움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 때문에 뭔가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둘 사이에 정말로 양립할 수 없는 정책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공산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혁명의 진전에 강력히 저항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후퇴시킬수도 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 P90

장군과 사병, 농민과의용군은 여전히 평등한 자격으로 만났다.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받고,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고, 서로를〈당신>이나 〈동지〉라고 불렀다. 고용주 계급도 없었고, 하인 계급도없었고, 거지도 없었고, 창녀도 없었고, 변호사도 없었고, 사제도 없었고, 아침도 없었고, 모자에 손을 대는 인사도 없었다. 나는 평등의 공기를 숨쉬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공기가 스페인 전역에 퍼져 있다고 상상할 정도로 순진했다. 대체로 우연때문에 나는 내가 스페인 노동 계급의 가장 혁명적인 일파 속에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정치적인 교육을 많이 받은 동지들이 나에게 순수하게 군사적인 태도로만 전쟁을 바라볼 수 없다거나, 선택은 혁명과 파시즘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그냥웃어 넘기곤 했다. 대체적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들의 관점을 받아들었다. 그것은 간단히 말해 <전쟁에서 승리하기 전에는 혁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통일노동자당의 관점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것은 <전진 아니면 후퇴뿐이다〉로 요약되었다. 후에 통일노동자당이 옳다고, 어쨌든 공산주의자들보다는옳다고 판단한 것은 전적으로 이론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 P91

먼저 <민주주의는 사기다>라고 말한 다음에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전술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라는 엄청난 위세를 등에 업고 세계의 노동자들에게 <민주적 스페인>이 아닌 <혁명적 스페인〉의 이름으로 호소했다면 아마 큰 호응을 얻어낼 수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혁명적 정책으로 프랑코의후방을 공격하는 것이 어려운―― 불가능하지는 않을지라도–– 일이었다. 1937년 여름, 프랑코는 정부와 비슷한 규모의군대로 정부보다 더 많은 인구를 장악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주민들까지 헤아리면 훨씬 더 많은 숫자였다.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후방에 적대적인 주민이 있을 경우에는 이들의 통신 시설을지키고 파업을 진압하는 등의 일을 해야만 전방의 군대도 유지할 수가 있다. 따라서 프랑코의 후방에서는 이렇다 할 저항 운동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프랑코의 영토 내에 있는 인민, 적어도 도시 노동자와 가난한 농민들이 프랑코를 좋아했다거나 그를 원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가계속 우익 쪽으로 움직여가면서 정부의 우월성은 점점 빛을 잃었다. - P94

프랑코는 악명 높은독재를 수립하려 했다. 그런데 무어인들은 실제로 인민전선 정부보다 프랑코를 더 좋아했다! 명백한 사실은 모로코에서는 반란을 선동하려는 시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전쟁에 혁명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무어인들에게 인민전선 정부의 선의를 보여주기 위한 우선적인 조치는 바로 모로코의 해방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기뻐했을지 상상이 간다! 그러나 인민전선 정부는프랑스와 영국을 회유하려는 헛된 희망 때문에 전쟁에서 가장좋은 전략적 기회를 날려보내고 말았다.  - P95

공산주의 정책의 전체적 경향은 이 전쟁을 평범하고 비혁명적인 전쟁으로 축소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전쟁에서는 인민전선 정부가 극도로 불리했다. 그런 종류의 전쟁은 기계적 수단, 즉 궁극적으로무제한의 무기 공급에 의해서만 승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부의 주된 무기 지원국인 소련은 이탈리아나 독일과비교해 볼 때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어쩌면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이 내건 <전쟁과 혁명은 분리할 수 없다>라는 구호가 언뜻 보기보다 덜 환상적이었는지도모른다.
지금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반혁명 정책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내 나름의 이유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책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할 때, 내 판단이 옳지 않기를 바란다. 정말이시 내 판단이 틀리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나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인민전선 정부가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바란다.
그러나 물론 어떻게 될지 아직 말할 수는 없다. 정부가 다시 좌경화할 수도 있다.  - P95

그러나 1937년 2월에 나는 상황을 이런 관점에서 보지 못했다. 아라곤 전선에서의 교착 상태가 지겨웠다. 나는 주로 내가싸울 만큼 싸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에서 보았던 모병포스터를 자주 생각했다. 그 포스터는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질책하듯이 묻고 있었다. <당신은 민주주의를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식량만 축냈습니다.> 나는 의용군에 입대하면서 파시스트 한 명은 죽이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우리 각자가 하나씩 죽이면 파시스트들은 곧 소멸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하나도 죽이지 못했다. 그럴 기회조차 없었다.
물론 나는 마드리드로 가고 싶었다. 군대 내의 모든 사람들이정치적 견해에 관계없이 마드리드로 가고 싶어했다. 그렇게 하려면 국제군으로 들어가야 했다. 통일노동자당은 이제 마드리드 주둔 부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정부주의자들도 이제그곳에 전처럼 많은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았다. - P96

하루하루, 특별히 밤마다 같은 일들이 되풀이되었다. 경계근무, 정찰 근무, 땅파기. 그리고 진창, 비, 잉잉거리는 바람, 가끔 내리는 눈. 밤에도 따뜻한 기운이 분명하게 느껴진 것은 4월에 접어들고도 한참을 지나서였다. 이곳 고지대의 3월은영국의 3월과 아주 비슷했다. 하늘은 맑고 푸르지만 바람은 끈질겼다. 겨울 보리가 두 뼘 가량 올라왔고, 벚나무의 진홍색 봉오리들이 영글었다(이곳의 방어선은 버려진 과수원과 밭들을 관통했다). 도랑을 뒤져보면 제비꽃이나 블루벨 가운데서도 볼품없는 쪽에 속하는 야생 히야신스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방어선 바로 뒤로는 물거품이 보글거리는 상쾌한 녹색의 내가 흘렀다. 전선에 온 뒤로 처음 보는 투명한 물이었다. 어느 날 나는 이를 악물고 물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여섯 주 만의 첫 목욕이었다. 대충 몸만 담그고 나온 꼴이었다.  - P98

이 무렵 우리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여전히 추운 날씨였지만 이가 슬 만큼은 따뜻했다. 나는 몸에 기생하는 다양한 종류의 벌레들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만큼 지독한 벌레는 없었다. 가령 모기 같은 다른 곤충들도 사람을 괴롭히긴 하지만적어도 몸에 상주하진 않는다. 이는 작은 가재를 연상시키는데, 주로 바지 안에 산다. 옷가지를 모두 태우는 것 외에는 이를 없앨 방법이 없다. 이는 바지의 솔기에 반짝거리는 하얀 알을 낳는다. 마치 작은 쌀알갱이 같다. 이 알들이 부화하여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기 식구들을 불려나간다. 평화주의자들은이의 사진을 큼지막하게 확대하여 팸플릿에 실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것이야말로 전쟁의 영광이다! 전쟁에서는 모든 병사의 몸에 이가 들끓는다날씨만 어느 정도 따뜻하면.
베르덩, 워털루, 플로든, 센락, 테르모필레 등지에서 싸운 모든 병사들의 사타구니에는 이들이 기어다녔다. 우리는 알을 태우고 가능한 한 자주 목욕을 함으로써 그 지겨운 놈들의 수를어느 정도는 줄일 수 있었다. 이만 아니었다면 나는 얼음처럼차가운 강물에 뛰어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 P103

날씨가 푹해지자 농부들은봄갈이를 하러 밖으로 나왔다. 스페인의 토지 개혁은 그 내용이모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의 땅이 집산화된것인지, 아니면 농민이 자기들끼리 땅을 나누어 가진 것인지도분명히 알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집산화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곳이 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통제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주들은 사라졌고, 농민들 밭을 경작했다. 농민들은 만족하는 것 같았다. 농민이 우리에게 친절했기때문에 나는 늘 놀라곤 하였다. 일부 나이 든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무의미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전쟁 때문에 모든 물자가부족했고, 모든 사람이 우울하고 따분한 생활을 해야 했다. 게다가 농민들은 아무리 좋은 시절이라도 군부대가 자기들 마을에 주둔하는 것을 싫어하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농민들은 변함없이 친절하였다. 우리가 다른 무리한 짓을 하더라도, 과거의지주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아주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내란이란 묘한 것이다. 우에스카까지의거리는 8킬로미터도 안 되었다. 그곳의 시장은 이 농민들이 이용하던 곳이었다. 모두들 그곳에 친척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평생 닭도 팔고 채소도 팔았다. 그런데 이제 여덟 달 동안이나 기관총과 뚫을 수 없는 철조망의 장벽이 그 사이에 가로놓여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따금씩 장벽을 잊었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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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시인은 슬픔을 희망으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다. 우리가 그를 막무가내로 진창에 떠밀었을 적에도, 그는 누굴탓하기보다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강함으로 몰지각한 ‘맹금류‘와 거침없이 맞서 싸워냈다. 여전히 그는 왜곡에 대항해역사와 민중 앞에 놓인 ‘덫‘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있다. ˝이제 사월은 내게 옛날의 사월이 아니다˝ (화인(火印)」)라고말하는 도종환 시인은 시와 몸을 따로 두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고 고마운 일이다. 몰염치에 맞서 떳떳하고 용기 있는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우리에게 이렇듯 서정의 깊이와격과 감동을 더한 시집을 들고 왔으니, 시집 갈피에서 전나무와 삼나무 냄새가 난다. 감자 잎과 도요새가 몸을 펴는소리 들린다. 사과 익어가는 내가 손에 묻고, 오르간 음이귀에 닿아 젖는다. 마른 가슴에 들어온 눈물이 격렬한 희망‘ 되어 온몸으로 퍼진다. ˝어디서 이렇게 따뜻한 위로를받을 수 있으랴˝ (「해장국」). 시인이 말아 내미는 한그릇 국밥은 뜨겁고도 든든하다. 사무치는 위로가 있는 매혹적인시집이다.


박성우 시인




내소사


내소사 다녀왔으므로 내소사 안다고 해도 될까
전나무 숲길 오래 걸었으므로
삼층석탑 전신 속속들이 보았으므로
백의관음보살좌상 눈부처로 있었으므로
단청 지운 맨얼굴을 사랑하였으므로
내소사도 나를 사랑한다고 믿어도 될까
깊고 긴 숲 지나
요사채 안쪽까지 드나들 수 있었으므로
나는 특별히 사랑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붉은 단풍으로 절정의 시간을 지날 때나능가산품에 깃들여 고즈넉할 때는 나도
그로 인해 깊어지고 있었으므로
그의 배경이 되어주는 푸른 하늘까지
다 안다고 말하곤 하였다
정작 그의 적막을 모르면서
종양이 자라는 것 같은 세월을 함께 보내지 않았으면서
그의 오래된 내상(內傷)과 함께 있지 않았으면서
그가 왜 직소폭포 같은 걸 내면에 지니고 있는지
그의 내면 곳곳이 왜 낭떠러지인지 알지 못하면서

어찌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의 곁에 사월 꽃등행렬 가득하였으므로
그의 기둥과 주춧돌 하나까지 사랑스러웠으므로
사랑했다 말할 수 있을까
해 기울면 그의 그리움이
어느 산기슭과 벼랑을 헤매다 오는지 알지 못하면서
포(包)  하나가 채워지지 않은 그의 법당이몇백년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면서
그의 흐느낌 그의 살에 떨어진 촛농을 모르면서

희망의 이유


떡갈나무 잎을 들추고 도토리를 파묻는
다람쥐의 분주한 발걸음을 보라
그대도나도 가을까지 왔다
숲의 정강이를 싹둑싹둑 잘라버리는 기계톱의 질주에
우리의 안락한 정원이 있다고 믿지 말라
우리의 미래는
불에 탄 나무에서 다시 솟는 연둣빛 새순
하늘 꼭대기에서 거기까지
햇살의 화살 한개를 쏘고 있는
태양의 따스한 손길에 있다
국경을 넘어와 땅속 깊이 감춰진 벽을 뚫어버리는
가공할 폭탄의 힘에 한 시대의 가능성을 걸지 말라
밤의 거리에서 평화를 구하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작은 촛불과
그 불을 받쳐든 어린 두 손에 희망이 있다
이웃나라를 손쉽게 굴복시키는 폭력을
부러워하지 말라
만년을 녹지 않는 히말라야 숫눈처럼
빛나는 순백의 영혼

오체투지로 낮아지고 가난해져서
다시 일어서는 정신에
영원한 미래의 날들이 숨어 있다
우리가 잔인하게 쓰러뜨린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승리의 포만감으로 가득한 식탁과 살찐 육신은
우리가 죽이고 짓밟은 것들의 묘지를 이루고 있나니
오래오래 주류로 살아온 이들이 잘 차려놓은화려한 연회장이 아니라
그들이 경멸하고 손가락질하는 소수가
소박하고 정결하게 차린 두레반에 미래가 있다
어미 잃은 어린 짐승을 감싸안으며 눈물겨워하는
모성과 연민과 자비 아니면 희망 아니다
새 한마리의 목숨과 내 목숨의 무게가 같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직도 그대는 일주문 밖이다
속도와 경쟁과 승리의 갈망에 휘둘리지 말고그만 내려서라
댓잎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바람의 속도
낙화 이후의 긴긴 날을 걸어가는
꽃의 발자국을 보지 못하면

그대가 달려가는 속도의 끝은 반드시 벼랑이다
증오의 말을 가르치지 말라
세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경전 같은 말들이 있음을 가르치되
시인의 음성으로 하라
나약하지도 않고 사납지도 않은 목소리로
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게 하라
거기 희망이 있다 그들이 희망이다
그래야 우리의 미래 오래도록 희망이다 

나머지 날


고립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이층집을 짓고 살았으면 좋겠네
봄이면 조팝꽃 제비꽃 자목련이 피고
겨울에는 뒷산에 눈이 내리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고니가 떠다니는 호수는 바라지 않지만
여울에 지붕 그림자가 비치는 곳이면 좋겠네아침기도가 끝나면 먹을 갈아 그림을 그리고못다 읽은 책을 읽으면 좋겠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소음의 물결에서 벗어나적막이 들판처럼 펼쳐진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자작나무들과 이야기하고
민들레꽃과도 말이 통하면 좋겠네
다람쥐 고라니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고도
평화롭게 하루를 살았으면 좋겠네
낮에는 씨감자를 심거나 남새밭을 일구고 
남은 시간에 코스모스 모종과 구근을 심겠네


고요에서 한계단 낮은 곳으로 내려가

단풍 드는 잎들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네
나무들이 바람에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곳에서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이들과 어울려 지내면 좋겠네
울타리 밑에 구절초 피는 곳이면 어디든 좋겠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굽은 길이면 좋겠네
추녀 밑에서 울리는 먼 풍경소리 들으며
천천히 걸어갈 수 있으면 좋겠네


짐을 조금 내려놓고 살았으면 좋겠네
밤에는 등불 옆에서 시를 쓰고
그대가 그 등불 옆에 있으면 좋겠네
하현달이 그믐달이 되어도 어디로 갔는지 묻지 않듯
내가 어디로 가게 될지 묻지 않으며
내 인생의 가을과 겨울이 나를 천천히 지나가는 동안
벽난로의 연기가 굴뚝으로 사라지는 밤하늘과
나뭇가지 사이에 뜬 별을 오래 바라보겠네

어느 저녁


끓어오르며 소용돌이치던 것들을
찬물에 헹구어 채반 위에 얹어놓고 나니
마음도 국수 타래처럼 찬찬히 자리를 틀고 앉았습니다
애호박을 싸박싸박 채 썰어 밀어놓는 동안
마음 한쪽이 그렇게 소리를 내며
잘려나가는 듯한 초저녁
묵은 김치를 더 잘게 썰어 얹어 한그릇의
국수를 비우는 동안 누구도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녁산 위로 짙은 쪽빛의 시간이
잉크처럼 번져 내려오듯
무어라 이름 지을 수 없는 아릿한 것이
명치끝을 타고 내려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승에서 이렇게 애틋함과 슬픔을
한그릇씩 나누어 먹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찔레꽃에게 말하고
한세상 사는 동안
좋은 사람과 함께 호젓한 풍경이 되어
저물 수 있던 날을 고마워하며

찬물에 젓가락을 씻어 물방울을 털어내다가잠시 뼈와 살 사이가 시큰해졌습니다
일어서기 전에 듣고 싶어하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하고
오늘 처음 붓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돌아가는 그이의 발소리를 붙잡지도 못하였습니다
밤에도 검은등뻐꾸기는 울고
북두칠성 일곱 별은 그가 가는 길을 따라
몸을 틀며 별자리를 조금씩 옮기고
아까시꽃이 향기의 긴 꼬리를 그으며
별자리 뒤를 따라 올라갔습니다
불빛 하나 고개를 넘어가다 잠깐 눈물처럼
반짝이며 떨어지고 난 뒤 사방은 더 어두워졌고
호랑지빠귀가 한숨을 길게 쉬는 듯한 울음을 내뱉는 걸
숲은 다 듣고도 지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들국화


들국화 꽃잎에 가을 햇볕이 앉아 있다
얇고 여린 피부에서 윤이 난다
내게 들국화는 들국화 이상이다
이 세상 모든 꽃이 저마다 빛나는 얼굴을 지녔고
하나의 성기와 몇개의 꽃술을 갖고 있지만
나는 들국화만 그걸 갖고 있는 것 같다
저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꽃이 아니에요라고
들국화는 말하지만 나는
들국화에 마음을 빼앗긴 지 오래다
꽃이파리 하나하나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고
꽃잎의 표정을 과장하여 해석하는 걸 보면서느티나무는 내가 들국화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망을 들국화라 부르는 거라고 말한다그러나 들국화를 보면 마음이 끌리고
연한 빛깔 위에 내린 햇살 곁에 나란히 있고 싶고
작고 투명한 모습에서 위안을 받는다
내 팔에 기댄 채 들국화가 눈을 감고 있는 동안
그의 몸에서 번져오는 맑은 기운이 내 몸의
언덕과 골짜기를 지나 구석구석 따스하게 번져나가고

내 영혼의 물줄기가 그에게 흘러가
그의 뿌리를 적실 때도 있다
오늘도 들국화와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싶고들국화 곁에서도 문득 들국화가 궁금해진다특별할 것 없는 들국화의 소박한 나날과
꽃잎의 흔들리는 머리칼과
짙은 녹색의 이파리와 이파리 밑에 감춰진 그늘과
가을까지 오는 동안 그를 사랑했던 짐승들과상처와 빗줄기까지 사랑한다는 걸
들국화가 믿어주길 바란다
사랑이 왜 편애일 수밖에 없는지 알기에
가을 햇볕도 들국화 꽃잎 위에서는
반짝반짝 윤이 나는 것이리라

들국화 2


너 없이 어찌
이 쓸쓸한 시절을 견딜 수 있으랴


너 없이 어찌
이 먼 산길이 가을일 수 있으랴


이렇게 늦게 내게 와
이렇게 오래 꽃으로 있는 너


너 없이 어찌
이 메마르고 거친 땅에 향기 있으랴

정경
할슈타트에서


아름다운 정경은 사람을 선하게 한다
풍경의 전신을 대하는 순간
짧은 탄성이 저절로 새어나오지 않으면
아름다움이 아니다
탄성이 물무늬처럼 미소로 바뀌어 번져나가고
마음은 천천히 선한 빛깔로 물들게 된다
아름다운 사람을 만났을 때도 그렇다
예쁜 어린아이를 만났을 때도 그렇다
사막에 별들이 하얗게 떴을 때도 그러하다
설산 기슭 순백의 눈을 볼 때도 그러하다
마음을 선하게 하는 초저녁 성당의
성가야말로 좋은 노래다
천천히 눈가에 눈물이 맺히게 하는
오래된 영화가 좋은 영화다
할슈타트 호수에 저녁빛이 내리고 있다
그대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러하다

사과꽃


아프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피었습니다
보고 싶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피었습니다
하얀사과꽃 속에 숨은 분홍은
우리가 떠나고 난 뒤에
무엇이 되어 있을까요
살면서 가졌던 꿈은
그리 큰 게 아니었지요
사과꽃같이 피어만 있어도 좋은
꿈이었지요
그 꿈을 못 이루고 갈 것만 같은
늦은 봄
간절하였다고 썼다가 지우고 나니
사과꽃 하얗게 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


눈이 그쳤는데 그는 이제 아프지 않을까
지는 해를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내내 아팠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동안
내 안에 저녁노을처럼 번지는 통증을 그는 알까 
그리움 때문에 아프다는 걸
그리움이 얼마나 큰 아픔인지를 그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누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돌이킬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왜 그리움은 혼자 남아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눈은 내리다 그쳤는데
눈발처럼 쏟아지던 그리움은
허공을 헤매다 내 곁에 내린다 아프다

업연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여기까지 왔다
멈추자 멈추어야 한다 하면서
오늘도 다리를 건넜다
잘 드는 칼로 끊어버린 날도 많았다
달맞이꽃도 밤별도 알고 있으리라
바보같이 천치같이를 되풀이하며
회초리로 나를 때리며 새운 밤도 많았다
오늘도 안되는데 안되는데 하면서
오늘도 돌아가자 돌아가자 하면서

노란 잎


누구나 혼자 가을로 간다
누구나 혼자 조용히 물든다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그대 인생의 가을도 그러하리라
몸을 지나가는 오후의 햇살에도
파르르 떨리는 마음
저녁이 오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저 노란 잎의 황홀한 적막을 보라
은행나무도
우리도
가을에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난중일기


새벽에 안개비 뿌리다가 늦게 개었다
잘 죽을 일을 생각하자
치유불능인 걸 알면서
고통스럽게 연명하는 하루하루는 치욕
죽도록 일하고 죽도록 박해받는 날들이 너무 길다
오늘도 열순의 활을 쏘고
찬술을 마시고
저녁엔 여진이와 잤다고
붓 들어 거짓 없이 쓰자
살아 있는 동안은 전선을 떠날 수 없는데
우린 늘 중과부적
이길 수 있다고 과신하지 말고
두려움에 주눅 들지 말고
물살치는 두려움의 복판으로 배를 저어나가자
존엄하게 죽을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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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허연은 서울에서 태어나 1991년 현대시세계」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나쁜 소년이 서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가 있다. 현대문학상, 시작작품상을 수상했다.


허연을 읽을 때 우리는 마치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머나먼이국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말을 나누는 연인을 만나듯,
경계에서 새어 나오는 삶의 내밀함을 캐내게 된다. 달력의날짜와는 다른 시간을 지금에 새기고 싶어지고, 서 있는곳과는 다른 공기의 밀도를 입고 싶어진다. 그것은 시인이종래의 공화국의 소속이 아니기 때문. 오지 않은 자멸에대해 먼저 생각하고, 남겨질 잔해에 대해 앞서 생각하는,
자신만의 공화국의 시원(始原)이기 때문이다.


구름은 신비스러운 사상이다
구름의 이름을 지은 사람
자신보다 구름이 주목받기를 원한 사람
구름을 가져다 이야기를 만든 그 사람 생각을 해봤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다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무한할 수 있었고
학습되지 않았으므로 소멸하지 않았던 말
그 말을 꺼내고 싶었다

시인의 말

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생은 그저 가끔씩 끔찍하고,
아주 자주 평범하다는 것을.

2016년 겨울
허연

아나키스트 트럭 1


슬픈 사람들이 트럭을 탄다. 트럭은 정체에 걸릴때마다 힘겹게 멈췄다. 정체가 풀리면 트럭은 부식된 하체 어디선가 슬픔을 흘리며 느리게 움직였다.


트럭에 올라탄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신을 그려보지만 이내 슬픔이 신을 덮는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들에겐 이상하게 어깨가 없다.


찌그러지고 때 묻은 트럭은 세월을 등에 업고 생의 마지막 질주를 했다. 낙오한 사람들은 어느새 세월의 등에 올라타 있었고.


도시는 어두웠고 트럭은 주저앉았다.


낙오자들은 뿔뿔이 골판지 같은 골목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트럭은 도시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렇게 밤이 왔다. 이미 어두웠지만 트럭은 어두워지지않았다. 안녕, 트럭.

오십 미터


마음이 가난한 자는 소년으로 살고, 늘 그리워하는 병에 걸린다


오십 미터도 못 가서 네 생각이 났다. 오십 미터도 못 참고 내 후회는 너를 복원해낸다. 소문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지만, 내게 그런 축복은 없었다. 불행하게도 오십 미터도 못 가서 죄책감으로 남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무슨 수로 그리움을 털겠는가. 엎어지면 코 닿는 오십 미터가 중독자에겐 호락호락하지 않다. 정지 화면처럼 서서 그대를 그리워했다. 걸음을 멈추지 않고 오십 미터를 넘어서기가 수행보다 버거운 그런 날이 계속된다. 밀랍 인형처럼 과장된 포즈로 길 위에서 굳어버리기를 몇 번. 괄호 몇 개를 없애기 위해 인수분해를하듯, 한없이 미간에 힘을 주고 머리를 쥐어박았다.
잊고 싶었지만 그립지 않은 날은 없었다. 어떤 불운속에서도 너는 미치도록 환했고, 고통스러웠다.

때가 오면 바위채송화 가득 피어있는 길에서 너를 놓고 싶다

북회귀선에서 온 소포


때늦게 내리는
물기 많은 눈을 바라보면서
눈송이들의 거사를 바라보면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도
언젠가는
눈 쌓인 겨울나무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추억은 그렇게
아주 다른 곳에서
아주 다른 형식으로 영혼이 되는 것이라는
괜한 생각을 했다


당신이
북회귀선 아래 어디쯤
열대의 나라에서
오래전에 보냈을 소포가
이제야 도착했고

모든 걸 가장 먼저 알아채는 건 눈물이라고
난 소포를 뜯기도 전에
눈물을 흘렸다
소포엔 재난처럼 가버린 추억이
적혀 있었다


하얀 망각이 당신을 덮칠 때도 난 시퍼런 독약이 담긴 작은 병을 들고 기다리고 서 있을 거야 날 잊지못하도록, 내가 잊지 못했던 것처럼


떨리며 떨리며
하얀 눈송이들이
추억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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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소리에 대꾸하지 마라. 너도 같은 사람이 되리라.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래야 지혜로운 체하지 못한다.
소리엔 같은 말로 대꾸해 주어라. 
잠언 26:4-5

의용군에 입대하기 전날이었다. 나는 바르셀로나의 레닌 병영에서 장교 탁자 앞에 서 있는 한 이탈리아인 의용병과 마주쳤다.
스물대여섯 살의 강인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금발은 붉은색이 감돌았고 어깨는 단단했다. 챙이 있는 가죽모자를 밑으로 세게 잡아당겨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다. 나와는 직각 방향으로서 있었는데, 고개를 숙인 채 찌푸린 얼굴로 어떤 장교가 탁자에 펼쳐놓은 지도를 곤혹스러운 듯 살피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풍기는 어떤 분위기가 나를 강하게 끌었다. 친구를 위해서라면살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던질 사람의 얼굴이었다. ㅡ무정부주의자에게서 기대해볼 만한 얼굴. 물론 그는 - P9

공산주의자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 얼굴에는 정직함과 잔인함이 공존했다. 그에게는 무식한 사람들이 자기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가지는 감상적인 존경심도 있었다. 그는지도에서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강인지도 가릴 줄 모를 터였다.
지도를 읽으려면 엄청난 지적 능력이 필요하다고 여길 터였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나는 보자마자 이토록 마음이 끌리는 사람―정확히 말하자면, 남자―을 거의 만난 적이 없다. - P10

밖으로 나가는데 그가 가로질러 오더니 내 손을 아주 강하게움켜쥐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낄 수도 있다니, 신기한 일이었다! 그의 영혼과 내 영혼이 언어와 관습의 간극을뛰어넘어 순간적으로 완전히 밀착된 것 같았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그도 나를 좋아했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그에 대한 첫인상을 유지하려면 두번 다시 그를 만나서는안 된다는 것도 알았다. 물론 나는 그를 다시 보지 않았다. 스페인에서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만나고 헤어질 수 있었다.
이 이탈리아인 의용병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가 내 기억에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남루한 군복과 사나우면서도 애처로워 보이는 얼굴은 당시의 특별한 분위기를 상징하는것 같다. 그는 그 전쟁과 관련한 내 모든 기억과 얽혀 있다. 바 - P10

르셀로나의 적기(赤旗), 초라해 보이는 병사들을 가득 태우고전선으로 기어가던 가늘고 긴 기차, 전선 쪽으로 한참 올라가면 나오는 전쟁에 찌든 잿빛 소도시, 질퍽질퍽하면서도 얼음속처럼 추운 산속 참호.
1936년 12월 말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으로부터 불과일곱 달 전이다. 그럼에도 이미 엄청난 거리 밖으로 멀어져버린시기이다. 뒤에 일어난 사건들이 그 시기를 지워버렸다. 1935년이나 1905년을 지운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지워버렸다. 나는신문 기사를 쓸까 하는 생각으로 스페인에 갔다. 하지만 가자마자 의용군에 입대했다. 그 시기, 그 분위기에서는 그것이 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카탈로니아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혁명은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중이었다. 처음부터 그곳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12월이나 1월에 들어서면서 이미 혁명기가 끝나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에서 막 건너온 사람에게는 바르셀로나의 상황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 P11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었다. 나로서는 노동 계급이 권력을 잡은 도시에 들어가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좀 크다 싶은 건물은 거의예외 없이 노동자들이 장악했다. 건물마다 빨간색 깃발이나, 검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정부주의자들의 깃발이 드리워져 있었다. 담벼락마다 소련 국기나 혁명 정당들의 머리글자를 휘갈겨놓았다. 교회는 내부가 거의 다 박살났고, 성상들은 불에 탔다.
노동자 무리들은 여기저기서 조직적으로 교회를 철거했다. 상점과 카페마다 집산화(集産化)되었다는 글이 붙어 있었다. 심지어 상자 같은 구두닦이들의 점포조차 집산화되어,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 P11

자가용은 없었다. 모두 징발되었다. 모든 전차와 택시, 그리고 다른교통 수단도 대부분 빨간색과 검은색으로 칠해 놓았다. 도처에혁명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빨간색과 파란색이 선명한 포스터들은 벽에서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몇 개 남지 않은 다른광고물들은 서툴고 하찮게 보였다. 도시의 대동맥이라 할 수 있는 람블라스 거리는 언제나 사람들의 이동이 많은 곳이었다. 그거리를 따라 낮 동안은 물론이고 밤늦게까지 확성기에서 혁명가가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가장 신기한 것은 군중의 모습이었다. 겉으로 볼 때 그 도시는 부유한 계급이 실질적으로 사라진곳이었다. 소수의 여자와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옷을 차려입은>사람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거의 모두가 노동 계급의 거칠거칠한 옷을 입었다. 또는 파란 작업복을 입거나, 의용군 군복을 약간 고쳐서 입었다. 이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감동적이었다. - P12

이 모든 것과 더불어 전쟁 특유의 흉흉한 분위기도 얼마간느껴졌다. 도시는 을씨년스럽고 깔끔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도로와 건물은 보수가 안 돼 있었다. 공습을 염려하여 밤거리의가로등은 침침했다. 상점들은 대부분 초라하고 진열대의 반은비었다. 고기는 귀했다. 우유는 거의 구할 수 없었다. 석탄,설탕, 석유는 부족했다. 그 가운데도 빵 부족은 정말 심각했다.
이 시기에도 빵을 구하려는 줄은 종종 수백 미터씩 늘어서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사람들은 만족해했고 희망이 넘쳤다. 실업은 없었다. 생활비는 여전히 매우 낮았다. 눈에 띄게 해보이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집시를 제외하면 거지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혁명과 미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갑자기평등과 자유의 시대로 들어섰다는 느낌이 있었다. 인간은 자본주의 기계의 톱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 P13

우리를 보러 나온 우호적인 군중이거리를 가득 메웠다. 여자들은 창문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때는그 모든 것이 얼마나 자연스러워 보였는지! 그런데 지금은 왜그것이 그렇게 멀게 느껴지고, 비현실적인 일로 느껴지는지!
기차에는 병사들이 꽉꽉 들어차, 좌석은커녕 바닥에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 윌리엄스의 부인이 플랫폼으로 달려오더니 포도주 한 병과 어른 팔뚝만한 붉은색 소시지를주었다. 설사를 일으키곤 하는, 비누 냄새가 나는 소시지였다.
기차는 전시의 평상 속도인 시속 20킬로미터 이하로 카탈로니아를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이윽고 아라곤 고원 지대로 다가갔다. - P24

바르바스트로는 전선에서 먼 곳이었다. 그런데도 박살이 난듯 황량해 보였다. 허름한 제복을 입은 의용병 무리는 추위를이기려고 거리를 따라 어슬렁거렸다. 거의 무너져내린 벽에는지난해에 붙은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몇 월 며칠에 투우장에서<멋진 황소 여섯 마리>를 죽일 것이라는 광고였다. 포스터의 바랜 빛깔이 어찌나 처량해 보이던지! 그 멋진 황소들과 멋진 투우사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 즈음에는 바르셀로나에서조차 투우 경기가 거의 열리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훌륭한 투우사들은 전부 파시스트들이었다.
우리 소대는 화물차를 타고 시에타모로 갔다. 우리는 그곳에서 서쪽 알쿠비에레로 갈 예정이었다. 알쿠비에레는 사라고사를 마주 보는 전선 바로 뒤쪽에 있는 도시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무려 세 번의 전투 끝에 10월에 시에타모를 점령했다.  - P25

이틀이 지났는데도 소총은 지급되지 않았다. 코미테 데 게라에 가서 벽에 뚫린 구멍들을 살펴보았다면, 알쿠비에레의 전모를 다 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구멍들은 소총 일제사격때 뚫린 것으로, 파시스트들이 처형된 흔적이다. 전선은 매우 고요했다. 부상자들이 이송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가장 흥분되는일은 파시스트 탈주병이 건너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감시를 받으며 전선으로부터 알쿠비에레로 후송되었다. 이쪽 전선 건너편에 있는 병사들 가운데 다수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들은전쟁이 발발했을 때 때마침 병역을 때우고 있던 불쌍한 징집병들이었다. 따라서 어서 도망 가고 싶은 마음밖에 없었다. 이따금씩 그들 가운데 몇 명이 무리를 지어 우리 쪽으로 건너오는모험을 감행했다. 만일 파시스트 지역에 사는 가족만 없었다면더 많은 병사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이 탈주병들이내가 처음으로 본 <진짜> 파시스트들이었다. 나는 그들이 우리와 별다를 것이 없다는 데 놀랐다. 카키색 바지를 입었다는 것만 달랐다.  - P27

5월에는 잠시 상사 대리로서른 명 정도를 지휘해 보았다. 영국 사람도 있었고, 스페인 사람도 있었다. 우리 모두 몇 달 동안 포화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나는 명령을 따르게 하거나, 위험한 일의 자원자를 얻는 데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혁명적〉 규율은 정치적 의식에달려 있다. 왜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지 이해하는 것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정치적 의식을 확산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연병장에서 사람을 자동인형으로 조련하는 데도 시간이걸리기는 마찬가지다. 의용군 체제를 비웃는 기자들은 인민군이 후방에서 훈련을 하는 동안 의용군은 전선을 지탱해야 했다.
는 사실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사실 의용군이 전장에 그대
‘로 남아 있었다는 것 자체가 <혁명적> 규율의 힘 덕분이다. - P42

처음 한동안 나는 무질서한 상황, 전반적인 훈련 부족, 명령 하나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때때로 5분 동안 논쟁을벌여야 했던 일 등 때문에 경악했고 또 격분했다. 영국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 의용군은 영국군과는달랐다. 그러나 상황을 고려할 때, 그들은 예상보다 뛰어난 군대였다.
한편, 땔감 늘 땔감이 문제였다. 그 기간 동안 내 일기장에서 땔감이 언급되지 않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땔감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언급했다고 해야겠다.
우리는 해발 6백 미터에서 9백 미터 사이에 있었다. 한겨울이었다. 추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기온이 그렇게 낫지는 않았다. 얼음이 얼지 않은 밤도 많았다. 낮이면 겨울 해가한 시간 정도 비추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그리 춥지는않았으나, 꼭 그렇게 추운 것 같았다. 때때로 사나운 바람이 불어와 모자가 벗겨지고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 P43

우리는 특별한 생활을 했다. 그것을 전쟁이라 부를 수 있다면, 전쟁을 하는 특별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의용병들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 화가 나 있었다. 왜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지 알고 싶어 늘 아우성이었다. 그러나 적이 먼저 도발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오랫동안 전투가 벌어지지 않을 것은 매우 분명했다. 조르쥐 콥은 정기적인 검열 때면 우리에게모든 것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오」 그는말하곤 했다. 이따금씩 사람이 죽어나가는 희가극이오 사실아라곤 전선의 교착에는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 나는 당시에는그것을 몰랐다. 그러나 순수하게 군사적인 어려움―지원병부족은 별도로 하고라도 역시 누구의 눈에나 분명해 보였다.
우선 그 지역의 자연이 문제였다. 우리의 전선과 파시스트의전선 모두 천혜의 요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보통 한쪽으로만접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고지는 참호만 몇 군데 파놓으면, 압도적 숫자가 아닌 한 보병만으로는 점령할 수 없다.  - P47

간헐적으로 소총소리가 땅땅 메아리쳤다. 이괴상한 전쟁에 조금이라도 생기를, 아니 죽음의 기운을 불어넣어 줄 만한 일이 과연 일어날까 궁금해졌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점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인간이아니라 폐렴이었다. 참호들이 서로 5백 미터 이상 떨어져 있을때는 우연이 아니고서야 총알에 맞지 않는다. 물론 부상자는 있지만, 대부분은 자기 스스로 입은 부상이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내가 처음으로 스페인에서 본 다섯 명의 부상자는 모두 자기 무기에 부상을 당했다. 그렇다고 의도적이었다는 뜻은아니다. 사고나 부주의 때문이었다. 우리의 낡은 소총은 그 자체가 위험물이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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