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택은 너무나 방대해서 바람도 그 안에갇힌 듯 겨울이든 여름이든 이리저리 불어 댔다. 사냥꾼들이그려진 초록색 벽걸이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의 조상들은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귀족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안개 낀 북부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문장(章)이그려진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안에 검은 막대 무늬와 노란 웅덩이를 만들어 바닥을 얼룩지게하지 않는가? 지금 올랜도는 햇빛에 투과된 문장 속 사자의노란 몸뚱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창틀에 손을 얹고 창문을 밀어낸 순간 그의 손은 나비의 날개처럼 빨강, 파랑, 노랑으로 물들었다. 그러므로 상징을 좋아하고 상징을 해독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올랜도의 맵시 있는 다리와 멋진 몸, 건장한 어깨 전체가 문장의 다양한 색조로 물들었지만,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은 오로지 햇빛을 받아환히 빛났다고 말할 것이다. 그보다 더 정직하고 침울한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 P14
그는 어떤 공적을 쌓고 또 다른 공적으로, 어떤 명예를 얻고또 다른 명예로, 어떤 관직을 수행하고 또 다른 관직으로 나아갈 것이고 전기 작가는 그의 뒤를 따를 테니, 결국 그 어떤자리이든 그들 욕망의 최고 정점에 이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올랜도는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발그레한 뺨은 복숭아처럼 솜털에 덮여 있었는데, 입술 위에 난 솜털의 색깔이 뺨의 솜털보다 아주 조금 더 짙었다. 짧은 입술은 아몬드처럼 하얗고 정교한 이빨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 같은 코는 조금도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었다. 머리칼은 검고, 작은 귀는 머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아, 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다열거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마와 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아아, 이마와 눈 없이 태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 창문 옆에서있는 올랜도를 흘끗 쳐다보면, 그의 눈은 물에 흠뻑 젖은 제비꽃 같고, 눈이 아주 커서 넘치도록 고인 물로 부풀어 오른듯 보이는 것을, 또 그의 이마는 장식 없는 메달 같은 양쪽 관자놀이에 눌려 봉긋 부풀어 오른 대리석 돔처럼 보이는 것을당장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 그 즉시우리는 그렇게 열광적으로 찬미한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그 즉시 우리는 훌륭한 전기 작가들이 무시하려 드는 수천가지의 불쾌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얼마 지나지 않아 올랜도는 시를 열 페이지 이상 써내려갔다. 그의 글은 확실히 유창하지만 관념적이었다. 그의 비극 속 등장인물은 <악〉, <범죄>, <고통>이었다. 또 괴상망측한나라의 왕들과 여왕들도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음모에 빠져혼란을 겪었고 고귀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실제로입에 올렸을 법한 단어는 단 하나도 없이 전체적으로 유창하고 감미로운 시였다. 아직 열일곱 살도 되지 않은 그의 나이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지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 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쓰기를 중단했다. - P16
사물 그 자체를 관찰하였다. 우연히도 창문 밑에서 자라던 월계수 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글을쓸 수 없었다. 자연의 초록색과 문학의 초록색은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학은 본래 서로 적대적인 듯하다. 이 둘을 붙여 놓으면 서로를 산산이 찢어발긴다. 지금 올랜도의 눈에 들어온 초록색은 그의 운을 망쳐놓고 운율을 쪼개 놓았다. 더욱이 자연은 그 나름의 술수를 부린다. 일단 창밖의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이나 하품하는 개, 지는태양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내가 석양을 얼마나 많이 볼 수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되면(이런 생각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자세히 쓸 만한 가치도 없다) 펜을 내려놓고 망토를 걸친 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페인트를 칠한 궤에 발을 부딪힌다. 올랜도는 약간 재바르지못했으니까. - P17
그는 깊은 숨을 내쉰 뒤 참나무 발치의 땅에 몸을 내던졌다(그의 동작에는 열정이라 불릴 만한 면이 있었다).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이 여름날 하늘 아래에서 땅의 등뼈를 느끼며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대지의 등뼈로 여겨졌던 것이다.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뿌리는 그가 타고 있는 큰 말의 잔등이 되고 혹은 요동치는 배의 갑판이 되었다 단단한 것이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떠도는 자기 마음을 끌어다 맬 무언가가 필요했기때문이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당긴 그 마음을 저녁나절 이시간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사랑의 질풍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마음을. 그는 그 마음을 참나무에 묶었다. 거기 누워 있다 보면 그의 내면과 주위의 소란한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 P19
올랜도는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언덕을내달렸다. 쪽문으로 들어섰다. 나선형 계단을 부리나케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말을 방 한구석에 내던지고 조끼를 다른 쪽에 내던졌다. 머리를 물에 적시고 손을문질러 닦았다. 손톱을 깎았다. 6인치짜리 거울과 낡은 양초두 개만 앞에 둔 채, 그는 마구간 시계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홍색 반바지를 입고 레이스 깃을 달고 호박단 조끼를입고 겹꽃 달리아만큼 커다란 장미 모양의 리본이 달린 신발을 발에 끼워 넣었다. 이제 준비가 다 끝났다. 얼굴은 발갛게달아올랐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름길을 통해 수많은 방들과 계단들을 지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저택의 반대편으로 5에이커나떨어진 곳이었다. - P21
그는 너무 수줍어서 장미 향수에 담근 여왕의 반지 낀 손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상적인손이었다. 여윈 손의 긴 손가락들은 마치 보주(寶珠)나 홀()을 감싸고 있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초조하고 성마르고병약한 손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손이기도 했다. 높이 쳐들기만 해도 모가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손이었다. 그손은 좀약을 넣어 모피를 보관하는 장롱 냄새를 물씬 풍기는늙은 몸에 붙어 있으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하지만 그 몸은온갖 비단과 화려한 보석에 둘려 있었고, 좌골 신경통으로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아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수천가지 공포에 엮여 있어도 절대 움찔하지 않았다. - P22
낮은 덧없이 지나가고, 그 짧은 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랜도가 날씨가 이끄는 대로, 시인들과 그 시대가 이끄는 대로, 땅에는 눈이 덮여 있고 여왕이복도에서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창턱의의자에 앉아 그의 꽃을 땄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어렸고 소년 같았다. 그는 자연이 명령한대로 행동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무엇인지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도리스나 클로리스, 델리아, 다이애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시를 써 보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아가씨는 궁녀였을수도, 하녀였을 수도 있다. 올랜도는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었으니까. 정원에서 자라는 꽃만 좋아하지 않았고, 야생화나잡초에도 언제나 매혹을 느꼈다. - P28
그 혹한은 영국에서 유례없이 극심한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새들이 공중에서 날아가다 얼어붙어 돌멩이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노리치에서는 젊은 시골 여자가 평소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몸으로 길을 건넜는데, 길모퉁이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돌풍이 불어닥치자 그 순간 가루가 되어부서져서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지붕 위로 날아가는 것을본 사람들이 있었다. 양들과 소들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다. 자다가 얼어붙은 시신들은 이불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길 위에서 얼어붙어 꼼짝 못 하는 돼지 떼는 드물지 않게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들판에 가득한 양치기나 쟁기질하던사람, 말, 새를 쫓던 어린 소년들 모두 그 순간의 동작 그대로, 누군가는 코에 손을 댄 채, 누군가는 술병을 입술에 댄채, 누군가는 1미터쯤 떨어진 산울타리에 박제처럼 앉아 있는 큰 까마귀들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든 자세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 P34
그러나 이런 소소한 것들은 그 인물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특이한 유혹적 매력에 가려졌다. 올랜도의 마음속에서 더없이 극단적이고 터무니없는 이미지와 비유들이 솟아올라 뒤엉키고 휘감겼다. 그 3초 사이에 그는 그녀를 멜론이라고, 파인애플이라고, 올리브라고, 에메랄드라고, 눈 속의여우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그녀를 맛본 적이 있는지, 그녀를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경험한 적이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이야기를끌어가는 동안 한순간도 중간에 끊어서는 안 되지만, 여기서서둘러 말해 두는 편이 좋겠다. 이 순간 그가 떠올린 이미지는 죄다 그의 감각에 어울리게 지극히 단순했고, 대부분 그가 소년 시절에 맛보기 좋아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감각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강렬했다. - P38
어떤 소년도 저렇게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듯한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스케이트를 타던 그 인물이, 시중드는 어느 귀족의 팔에 기대어 느릿느릿 발을 옮기던 국왕에게 최대한 우아하게 절하기 위해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추었다. 그에게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자였다. 올랜도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온몸이 떨렸고 뜨겁게열이 올랐다가 차가워졌다. 여름날 허공에 온몸을 내던지고싶었다. 발로 도토리를 짓밟아 으깨고 싶었고, 두 팔을 번쩍들어 너도밤나무와 참나무를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저 그의 작고 흰 이빨들 위로 입술을 오므렸고, 그러다 뭔가 물어뜯으려는 듯 1센티미터쯤 벌렸다가 깨물듯이다물었다. 레이디 유프로시니가 그의 팔에 기대고 있었다. - P39
그러면 그는 엎어져서 얼굴을 빙판에 대고 얼어붙은 물속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행복과 우울함을 갈라놓는 것은 칼날보다도 두껍지 않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철학자는 행복과 슬픔이 쌍둥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모든 극단적 감정은 광기와 결합된다는 결론을이끌어 내면서, 우리에게 참된 교회 (그의 견해로는 재세례파교회)에서 위안을 구할 것을 당부한다. 참된 교회야말로 이바다에서 세파에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항구이자피난처이고 정박지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올랜도는 똑바로 앉아서 우울하고 어두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 P47
그녀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지 그 숱한 이미지들을 불러일으켰던 여자들처럼 진부해진 수천 가지 이미지들 속에 뛰어들어 철벅거리며뭔가를 건져 내서 말해 주었다. 당신을 눈이나 크림, 대리석, 체리, 설화 석고, 황금 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여우나 올리브 같아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 같고, 에메랄드 같고, 아직구름에 가린 푸른 산에 비치는 태양 같고..... 영국에서 내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그 무엇 같아요. 그는 언어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풍경과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사샤를 묘사하기에는 영어가 너무나 거침없고 너무나 노골적이며 너무나 입에 발린 언어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단히 솔직하고 도발적으로 보였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아무리 대담하게 보였어도 어딘가 감추어진 부분이 있었다. - P48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얼굴을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내리쳤다. 그는 기대감에부풀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칼을 움켜잡았다. 그는 이마와 뺨을 열두 번이나 세차게 얻어맞았다. 메마른한파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1분이 지나서야 그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빗방울이 얼굴을내리친 것이다. 처음에는 빗방울이 천천히, 유유히, 하나씩떨어졌다. 그러나 여섯 개의 빗방울이 이내 60개가 되었고그러고는 6백 개가 되었고 그러다가 끊임없이 분출하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단단하게 굳은 하늘이 풍부하게 넘치는샘물을 쏟아붓는 듯했다. 5분이 지나자 올랜도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 P62
올랜도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지금까지는개인적인 문서와 역사적 자료들 덕분에 전기 작가는 첫 번째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의무란 지워질 수 없는 진실의족적을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는 것이고, 길가의 꽃에 유혹되지 않고 그늘을 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덤에털썩 떨어져서 머리 위의 비석에 <끝>이라고 쓸 때까지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주칠 사건은 바로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에 무시할 수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하며 문서화되어 있지 않아서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을 해석하려면 여러권의 책을 쓸 수도 있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입각하여 종교적 체계를 세울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소박한 의무는 오로지 알려진 대로 사실을 기술하고,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 P69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사건까지도, 윤기와 작열하는 빛으로 아름답게 꾸며 주는 최면이자 치유책이었을까? 인생의 격동이 우리를 산산조각 내지 않도록 죽음의 손가락이 이따금 그 격동 위에얹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소량씩 섭취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가는 일을 지속할 수없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을 바라지 않는데도 변화시키는 그것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극심한 고통으로 지쳐 버린 올랜도가 일주일간 죽었다가다시 살아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30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 답도 나오지 않으니 이야기를 계속해 가자. - P72
일단 독서의 질병이 잠식해 들어가면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잉크병에 숨어 있고 깃털 펜에서 아가는 치명적 병균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가여운 인간이 글을 쓰는데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비가 새는 지붕 아래 놓인 의자와 탁자뿐이라서 결국 잃을 것이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쁜일이지만, 여러 채의 저택과 가축, 하녀, 당나귀와 리넨을 소유하고있으면서도 글을 쓰려는 부자의 고충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재산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달아나버린다. 그는 뜨거운 쇳덩이에 난타당하고 해충에 뜯긴다. 작은 책 한권을 쓰고 유명해질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그 세균의 악성은이 정도로 지독하다)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페루의 금을 모두 내놓아도 보석처럼 우아한 시 한 줄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앓아눕거나 자기 머리통을 권총으로 쏴버리고 혹은 돌아누워 벽만 바라본다. 그가 어떤 자세로 목격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P79
이 중단은 그의 인생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사람들을 무릎 꿇리거나 강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수많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가 왜 멈추었는지를 묻고 충분히 숙고한 후에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수없이 기묘한 장난을 쳐왔는데, 진흙과 다이아몬드, 무지개와 화강암을 조합하여 각양각색으로 인간을 만들고 이것을 종종 걸맞지 않은 상자에 채워넣는다. 그래서 시인은 도살업자의 얼굴을 갖고, 도살업자는시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 - P81
그 잡동사니 전부를 어떻게든 실 한 가닥으로 살짝 엮어 놓았다. 기억이란 재봉사이고, 더군다나 변덕스러운 재봉사이다. 기억은 안팎으로, 위아래로, 여기저기로 바늘을 놀린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더없이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의기양양하게 장담했던 한 가지 일이 아니라, 펄럭이며 퍼덕이는 날갯짓과 명멸하는 빛으로 시작한다. - P82
셰익스피어와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토머스 브라운,존 던이 지금도 글을 쓰고 있거나 바로 얼마 전까지도 써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올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름을 줄줄열거하며 말했다. 그린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셰익스피어가 꽤 괜찮은 장면들을 쓴 것은 사실이라고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장면들을 주로 말로에게서 가져왔다. 말로는 유망한시인이었지만,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은 청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브라운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산문으로 시를 쓰려 했는데 그런 기발한 착상에 사람들은 오래지않아 싫증을 느꼈다. 존 던은 의미의 결핍을 어려운 단어로포장한 사기꾼이었다. 얼간이들은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문체는 앞으로 열두 달만 지나면 한물가고 말 것이다. 벤존슨을 보자면, 존슨은 자기 친구이고, 그는 자기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P92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출판업자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가 될만한 쓰레기를 쏟아낸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일의 주범이었고, 벌써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 시대의 특징은 젠체하는 기발한 발상과 무모한 실험인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것을한순간도 용인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말을하려면 몹시 가슴 아프지만 자기 생명을 사랑하듯이 문학을 사랑하므로 - 이 시대에는 좋은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는 직접 포도주를 또 한 잔 따랐다. - P93
같은 순간에 닉 그린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어느날 아침 한없이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더없이 푹신한 베개를베고 누워 수백 년간 민들레나 소루쟁이 같은 잡초 하나 나지 않았던 드넓은 잔디밭을 퇴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는 어떻게든 여기서 달아나지 않으면 산 채로 질식할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둘기 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분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플리트 스트리트의 자갈길에서 짐마차 말이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지못한다면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방에서 하인이 꺼져 가는 불을 되살리고 식탁에 은접시를 차려놓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식으로 더 오래간다면 잠에 빠져들 테고(여기서 그는 입을 딱 벌리고 하품했다) 자다가 죽음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 P97
그 후로 그는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 변함없이 그언덕에 올랐다. 너도밤나무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돌돌말린 어린 고사리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달이 초승달 모양에서 둥글게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보았다ㅡ하지만 독자들은 이어지는 변화를 묘사한 문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초목이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달이 떠오르고 해가 지는 것을, 겨울이 지나 봄이 오 - P101
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는 것을, 낮이 저물어 밤이 되고 밤이 지나 낮이 되는 것을, 폭풍우가 몰려왔다가 맑은 날이 이어지고, 한 노파가 30분이면 쓸어 버릴 수 있는 먼지 조금과거미줄 몇 개를 제외하면 자연이 2백~3백 년간 대체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것을. 그런데 이 문단은 그저 시간이 흘렀다>(이 부분에서 얼마만한 시간인지 정확하게 괄호 안에 표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간단한 진술만으로 훨씬 더 빨리 결론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102
하지만 시간은 동물과 식물이 놀랍도록 때맞춰 번성하고서서히 사라지게 하면서도, 불행히도 인간의 마음에는 그처럼 단순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시간에 작용한다. 한 시간이 언짢은 상태의 인간 마음에 머물 때는 시계 시간의 50배나 100배 길이로 늘어날 수 있다. 반면에 한 시간이 마음의 시계에서 정확히 1초를 나타낼 수도 있다.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희한하게도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욱 깊이 연구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관심사가 매우 제한된 전기 작가는 한 가지 단순한 진술에 국한해야 한다. 지금 올랜도처럼 서른 살에 이른 인간에게는생각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에 행동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진다는 것이다. - P102
올랜도가 지시를 내리고 방대한 자기 장원(莊園)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홀로 언덕에 올라 참나무 밑에 주저앉으면 그 즉시1초 1초가 둥글어지며 채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1초 1초는 더없이 기이하고 다양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여겼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면 매우 길고 복잡다단하게 보였던 자신의 과거가 그 즉시, 사라져 가는 1초에밀려 들어가, 그것을 원래 크기의 열두 배로 부풀리고 수천가지 색채로 물들이며 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채워넣었다. - P103
이러한 사색 (아니면 그것을 어떤 단어로 부르든간에)에잠겨서 그는 자기 인생의 여러 달을, 여러 해를 보냈다. 그가아침 식사 후에 서른 살의 젊은이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적어도 쉰다섯의 장년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 그의 나이에 백 년이 더해지기도 했고, 또 몇 주가 지나면 최대 3초만 더해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 생애(동물의 생애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언급하지 않겠다)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넘어서는 일이다. 인생이 아주 길다고 말하자마자 장미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보다도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P103
느닷없이 맹렬한 격정에 압도되어 방을 뛰쳐나갔다면, 분명무언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걱정이었느냐고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사랑 그 자체만큼이나 양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하지만 사랑을 잠시 논외로 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황녀 해리엇 그리젤다가 잠금장치를 끼우려고 몸을 숙였을 때, 올랜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이 멀리서 퍼덕이는 사랑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흔들리는 부드러운 깃털이 급히 밀려드는 물결, 눈 속의 사랑스러운 자태, 홍수 속의부정(不貞), 이런 수천 가지 기억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날갯짓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다시는 이렇게 동요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동요했다. - P121
그는 양손을 들고 그 아름다운 새가 자기 어깨에 내려앉게 하려 했다. 그때ㅡ끔찍하게도! 끔찍하게도! - 까마귀가 나무에서 굴러떨어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기는 거친 검은 날개에 덮여 어두워졌다. 깍깍 소리가 들렸고, 지푸라기와 잔가지, 깃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모든 새들 가운데 가장 육중하고 더러운 콘도르가 그의 어깨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래서 그는 방을 뛰쳐나갔고, 하인을 보내 황녀 해리엇을 마차까지 전송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두 개의 몸이있어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북숭이다. 그것은 두 - P121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개의 발톱이 있고, 실로 모든 부위가두 개이고 정확히 상반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아주 단단하게 결합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다. 이번에 올랜도의 사랑은 하얀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고 매끄럽고 사랑스러운 몸은바깥쪽으로 향한 채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녀는 순수한 기쁨의 공기를 퍼뜨리며 점점 다가왔다. 갑자기 (어쩌면 황녀를보았을 때) 그녀는 빙 돌아 몸을 돌리더니 검은 털투성이의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에 떨어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은 낙원의 새, 사랑이아니라 콘도르, 욕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고, 그래서 시종을 불렀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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