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택은 너무나 방대해서 바람도 그 안에갇힌 듯 겨울이든 여름이든 이리저리 불어 댔다. 사냥꾼들이그려진 초록색 벽걸이도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의 조상들은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귀족이었다. 그들은 머리에 보관(寶冠)을 쓰고 안개 낀 북부에서 나타났다. 거대한 문장(章)이그려진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햇빛이 방안에 검은 막대 무늬와 노란 웅덩이를 만들어 바닥을 얼룩지게하지 않는가? 지금 올랜도는 햇빛에 투과된 문장 속 사자의노란 몸뚱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가 창틀에 손을 얹고 창문을 밀어낸 순간 그의 손은 나비의 날개처럼 빨강, 파랑, 노랑으로 물들었다. 그러므로 상징을 좋아하고 상징을 해독하려는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올랜도의 맵시 있는 다리와 멋진 몸, 건장한 어깨 전체가 문장의 다양한 색조로 물들었지만, 창문을 활짝 열었을 때 그의 얼굴은 오로지 햇빛을 받아환히 빛났다고 말할 것이다. 그보다 더 정직하고 침울한 얼굴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 P14

그는 어떤 공적을 쌓고 또 다른 공적으로, 어떤 명예를 얻고또 다른 명예로, 어떤 관직을 수행하고 또 다른 관직으로 나아갈 것이고 전기 작가는 그의 뒤를 따를 테니, 결국 그 어떤자리이든 그들 욕망의 최고 정점에 이를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 올랜도는 바로 그런 인생을 살아가기에 딱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발그레한 뺨은 복숭아처럼 솜털에 덮여 있었는데,
입술 위에 난 솜털의 색깔이 뺨의 솜털보다 아주 조금 더 짙었다. 짧은 입술은 아몬드처럼 하얗고 정교한 이빨 위로 살짝 올라가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화살 같은 코는 조금도흐트러짐 없이 곧게 뻗었다. 머리칼은 검고, 작은 귀는 머리에 바싹 붙어 있었다. 그러나 아아, 이 소년의 아름다움을 다열거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마와 눈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아아, 이마와 눈 없이 태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 창문 옆에서있는 올랜도를 흘끗 쳐다보면, 그의 눈은 물에 흠뻑 젖은 제비꽃 같고, 눈이 아주 커서 넘치도록 고인 물로 부풀어 오른듯 보이는 것을, 또 그의 이마는 장식 없는 메달 같은 양쪽 관자놀이에 눌려 봉긋 부풀어 오른 대리석 돔처럼 보이는 것을당장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 그 즉시우리는 그렇게 열광적으로 찬미한다. 그의 눈과 이마를 보면그 즉시 우리는 훌륭한 전기 작가들이 무시하려 드는 수천가지의 불쾌한 것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 P15

얼마 지나지 않아 올랜도는 시를 열 페이지 이상 써내려갔다. 그의 글은 확실히 유창하지만 관념적이었다. 그의 비극 속 등장인물은 <악〉, <범죄>, <고통>이었다. 또 괴상망측한나라의 왕들과 여왕들도 있었는데, 무시무시한 음모에 빠져혼란을 겪었고 고귀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그가 실제로입에 올렸을 법한 단어는 단 하나도 없이 전체적으로 유창하고 감미로운 시였다. 아직 열일곱 살도 되지 않은 그의 나이와 16세기가 끝나려면 몇 년 더 지나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 시는 대단히 놀라운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쓰기를 중단했다. - P16

사물 그 자체를 관찰하였다. 우연히도 창문 밑에서 자라던 월계수 관목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는 더 이상 글을쓸 수 없었다. 자연의 초록색과 문학의 초록색은 전혀 별개이기 때문이다. 자연과 문학은 본래 서로 적대적인 듯하다.
이 둘을 붙여 놓으면 서로를 산산이 찢어발긴다. 지금 올랜도의 눈에 들어온 초록색은 그의 운을 망쳐놓고 운율을 쪼개 놓았다. 더욱이 자연은 그 나름의 술수를 부린다. 일단 창밖의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꿀벌이나 하품하는 개, 지는태양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내가 석양을 얼마나 많이 볼 수있을까>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되면(이런 생각은 너무 잘 알려져 있어서 자세히 쓸 만한 가치도 없다) 펜을 내려놓고 망토를 걸친 뒤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페인트를 칠한 궤에 발을 부딪힌다. 올랜도는 약간 재바르지못했으니까. - P17

그는 깊은 숨을 내쉰 뒤 참나무 발치의 땅에 몸을 내던졌다(그의 동작에는 열정이라 불릴 만한 면이 있었다). 그는 덧없이 흘러가는 이 여름날 하늘 아래에서 땅의 등뼈를 느끼며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참나무의 단단한 뿌리가 대지의 등뼈로 여겨졌던 것이다. 혹은 이미지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그 뿌리는 그가 타고 있는 큰 말의 잔등이 되고 혹은 요동치는 배의 갑판이 되었다 단단한 것이면 뭐든 상관없었다. 그는 떠도는 자기 마음을 끌어다 맬 무언가가 필요했기때문이다. 그의 옆구리를 잡아당긴 그 마음을 저녁나절 이시간쯤에 산책을 나올 때마다 자극적인 사랑의 질풍으로 채워지는 듯한 그 마음을. 그는 그 마음을 참나무에 묶었다. 거기 누워 있다 보면 그의 내면과 주위의 소란한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 P19

올랜도는 더 이상 보고 있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 언덕을내달렸다. 쪽문으로 들어섰다. 나선형 계단을 부리나케 올라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양말을 방 한구석에 내던지고 조끼를 다른 쪽에 내던졌다. 머리를 물에 적시고 손을문질러 닦았다. 손톱을 깎았다. 6인치짜리 거울과 낡은 양초두 개만 앞에 둔 채, 그는 마구간 시계로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진홍색 반바지를 입고 레이스 깃을 달고 호박단 조끼를입고 겹꽃 달리아만큼 커다란 장미 모양의 리본이 달린 신발을 발에 끼워 넣었다. 이제 준비가 다 끝났다. 얼굴은 발갛게달아올랐고 잔뜩 흥분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미 너무 늦었다.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지름길을 통해 수많은 방들과 계단들을 지나 연회장으로 향했다. 저택의 반대편으로 5에이커나떨어진 곳이었다. - P21

그는 너무 수줍어서 장미 향수에 담근 여왕의 반지 낀 손밖에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인상적인손이었다. 여윈 손의 긴 손가락들은 마치 보주(寶珠)나 홀()을 감싸고 있듯이 구부러져 있었다. 초조하고 성마르고병약한 손이었다. 그러나 명령을 내리는 손이기도 했다. 높이 쳐들기만 해도 모가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손이었다. 그손은 좀약을 넣어 모피를 보관하는 장롱 냄새를 물씬 풍기는늙은 몸에 붙어 있으리라고 그는 짐작했다. 하지만 그 몸은온갖 비단과 화려한 보석에 둘려 있었고, 좌골 신경통으로고통에 시달릴지라도 아주 꼿꼿한 자세를 유지했으며, 수천가지 공포에 엮여 있어도 절대 움찔하지 않았다.  - P22

낮은 덧없이 지나가고, 그 짧은 시간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랜도가 날씨가 이끄는 대로, 시인들과 그 시대가 이끄는 대로, 땅에는 눈이 덮여 있고 여왕이복도에서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창턱의의자에 앉아 그의 꽃을 땄다고 해서 우리가 그를 나무랄 수는 없다. 그는 아직 어렸고 소년 같았다. 그는 자연이 명령한대로 행동했다. 그 아가씨의 이름이 무엇인지 우리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마찬가지로 알지 못한다. 도리스나 클로리스,
델리아, 다이애나였을 것이다. 그는 그들 모두에게 차례로시를 써 보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아가씨는 궁녀였을수도, 하녀였을 수도 있다. 올랜도는 다양한 취향을 갖고 있었으니까. 정원에서 자라는 꽃만 좋아하지 않았고, 야생화나잡초에도 언제나 매혹을 느꼈다. - P28

그 혹한은 영국에서 유례없이 극심한 것이었다고 역사가들은 말한다. 새들이 공중에서 날아가다 얼어붙어 돌멩이처럼 땅에 뚝뚝 떨어졌다. 노리치에서는 젊은 시골 여자가 평소처럼 튼튼하고 건강한 몸으로 길을 건넜는데, 길모퉁이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돌풍이 불어닥치자 그 순간 가루가 되어부서져서는 한 줌의 먼지가 되어 지붕 위로 날아가는 것을본 사람들이 있었다. 양들과 소들이 어마어마하게 죽어 나갔다. 자다가 얼어붙은 시신들은 이불에서 떼어 낼 수가 없었다. 길 위에서 얼어붙어 꼼짝 못 하는 돼지 떼는 드물지 않게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들판에 가득한 양치기나 쟁기질하던사람, 말, 새를 쫓던 어린 소년들 모두 그 순간의 동작 그대로, 누군가는 코에 손을 댄 채, 누군가는 술병을 입술에 댄채, 누군가는 1미터쯤 떨어진 산울타리에 박제처럼 앉아 있는 큰 까마귀들을 향해 던지려고 돌을 든 자세로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 P34

그러나 이런 소소한 것들은 그 인물의 몸에서 뿜어져나오는 특이한 유혹적 매력에 가려졌다. 올랜도의 마음속에서 더없이 극단적이고 터무니없는 이미지와 비유들이 솟아올라 뒤엉키고 휘감겼다. 그 3초 사이에 그는 그녀를 멜론이라고, 파인애플이라고, 올리브라고, 에메랄드라고, 눈 속의여우라고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지, 그녀를 맛본 적이 있는지, 그녀를 본 적이 있는지, 아니면 이 세가지를 다 경험한 적이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이야기를끌어가는 동안 한순간도 중간에 끊어서는 안 되지만, 여기서서둘러 말해 두는 편이 좋겠다. 이 순간 그가 떠올린 이미지는 죄다 그의 감각에 어울리게 지극히 단순했고, 대부분 그가 소년 시절에 맛보기 좋아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감각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강렬했다. - P38

어떤 소년도 저렇게 바다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듯한 눈을 갖고 있지 않았다. 마침내 스케이트를 타던 그 인물이, 시중드는 어느 귀족의 팔에 기대어 느릿느릿 발을 옮기던 국왕에게 최대한 우아하게 절하기 위해 미끄러지듯 다가와 멈추었다. 그에게서 한 뼘도 떨어져 있지 않았다. 여자였다. 올랜도는 뚫어져라 응시했다. 온몸이 떨렸고 뜨겁게열이 올랐다가 차가워졌다. 여름날 허공에 온몸을 내던지고싶었다. 발로 도토리를 짓밟아 으깨고 싶었고, 두 팔을 번쩍들어 너도밤나무와 참나무를 흔들어 대고 싶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저 그의 작고 흰 이빨들 위로 입술을 오므렸고, 그러다 뭔가 물어뜯으려는 듯 1센티미터쯤 벌렸다가 깨물듯이다물었다. 레이디 유프로시니가 그의 팔에 기대고 있었다. - P39

 그러면 그는 엎어져서 얼굴을 빙판에 대고 얼어붙은 물속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다. 행복과 우울함을 갈라놓는 것은 칼날보다도 두껍지 않다는 철학자의 말이 옳았던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 철학자는 행복과 슬픔이 쌍둥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모든 극단적 감정은 광기와 결합된다는 결론을이끌어 내면서, 우리에게 참된 교회 (그의 견해로는 재세례파교회)에서 위안을 구할 것을 당부한다. 참된 교회야말로 이바다에서 세파에 흔들리는 모든 이들에게 유일한 항구이자피난처이고 정박지라고 그는 말했다.
「모든 것은 죽음으로 끝나지.」 올랜도는 똑바로 앉아서 우울하고 어두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 P47

그녀를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지 그 숱한 이미지들을 불러일으켰던 여자들처럼 진부해진 수천 가지 이미지들 속에 뛰어들어 철벅거리며뭔가를 건져 내서 말해 주었다. 당신을 눈이나 크림, 대리석, 체리, 설화 석고, 황금 현에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여우나 올리브 같아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 같고, 에메랄드 같고, 아직구름에 가린 푸른 산에 비치는 태양 같고..... 영국에서 내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했던 그 무엇 같아요. 그는 언어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 보아도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다른 풍경과 다른 언어가 필요했다. 사샤를 묘사하기에는 영어가 너무나 거침없고 너무나 노골적이며 너무나 입에 발린 언어였다. 그녀가 하는 말은 대단히 솔직하고 도발적으로 보였지만, 거기에는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그녀의 행동은 아무리 대담하게 보였어도 어딘가 감추어진 부분이 있었다.  - P48

그래서 그는 어둠 속에서 기다렸다. 갑자기 무언가가 그의얼굴을 부드러우면서도 묵직하게 내리쳤다. 그는 기대감에부풀어 잔뜩 긴장하고 있었기에 깜짝 놀라 칼을 움켜잡았다.
그는 이마와 뺨을 열두 번이나 세차게 얻어맞았다. 메마른한파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1분이 지나서야 그것이 빗방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빗방울이 얼굴을내리친 것이다. 처음에는 빗방울이 천천히, 유유히, 하나씩떨어졌다. 그러나 여섯 개의 빗방울이 이내 60개가 되었고그러고는 6백 개가 되었고 그러다가 끊임없이 분출하듯 쏟아져 내렸다. 마치 단단하게 굳은 하늘이 풍부하게 넘치는샘물을 쏟아붓는 듯했다. 5분이 지나자 올랜도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 P62

올랜도의 생애를 서술하면서 지금까지는개인적인 문서와 역사적 자료들 덕분에 전기 작가는 첫 번째의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 의무란 지워질 수 없는 진실의족적을 따라 좌고우면하지 않고 터벅터벅 걷는 것이고, 길가의 꽃에 유혹되지 않고 그늘을 탐하지 않으며 우리가 무덤에털썩 떨어져서 머리 위의 비석에 <끝>이라고 쓸 때까지 끊임없이 체계적으로 그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마주칠 사건은 바로 우리의 길을 가로막고 있기에 무시할 수없다. 하지만 그 사건은 비밀스럽고 불가사의하며 문서화되어 있지 않아서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을 해석하려면 여러권의 책을 쓸 수도 있고, 그것의 진정한 의미에 입각하여 종교적 체계를 세울 수도 있겠다. 우리의 소박한 의무는 오로지 알려진 대로 사실을 기술하고, 독자가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 P69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사건까지도, 윤기와 작열하는 빛으로 아름답게 꾸며 주는 최면이자 치유책이었을까? 인생의 격동이 우리를 산산조각 내지 않도록 죽음의 손가락이 이따금 그 격동 위에얹혀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을 소량씩 섭취해야 하는 존재이고, 그러지 않으면 살아가는 일을 지속할 수없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의 가장 은밀한 곳까지 파고들어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들을 바라지 않는데도 변화시키는 그것은 어떤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을까? 극심한 고통으로 지쳐 버린 올랜도가 일주일간 죽었다가다시 살아난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죽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삶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고30분 넘게 기다렸지만 아무 답도 나오지 않으니 이야기를 계속해 가자. - P72

일단 독서의 질병이 잠식해 들어가면 몸이 너무나 쇠약해져서, 잉크병에 숨어 있고 깃털 펜에서 아가는 치명적 병균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버린다. 가여운 인간이 글을 쓰는데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은 가진 것이라고는 비가 새는 지붕 아래 놓인 의자와 탁자뿐이라서 결국 잃을 것이 많지 않은 가난한 사람에게도 나쁜일이지만, 여러 채의 저택과 가축, 하녀, 당나귀와 리넨을 소유하고있으면서도 글을 쓰려는 부자의 고충은 가련하기 그지없다. 그 모든 재산을 향유하는 즐거움이 달아나버린다. 그는 뜨거운 쇳덩이에 난타당하고 해충에 뜯긴다. 작은 책 한권을 쓰고 유명해질 수 있다면, 가지고 있는 마지막 동전 한 푼까지도(그 세균의 악성은이 정도로 지독하다) 내놓을 것이다. 하지만 페루의 금을 모두 내놓아도 보석처럼 우아한 시 한 줄도 얻지 못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폐결핵에 걸려 앓아눕거나 자기 머리통을 권총으로 쏴버리고 혹은 돌아누워 벽만 바라본다. 그가 어떤 자세로 목격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 P79

이 중단은 그의 인생사에서 대단히 중요하며, 사람들을 무릎 꿇리거나 강물이 핏물이 되어 흐르게 하는 수많은 행위보다 훨씬 더 중요하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가 왜 멈추었는지를 묻고 충분히 숙고한 후에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해야 한다. 자연은 인간에게 수없이 기묘한 장난을 쳐왔는데, 진흙과 다이아몬드, 무지개와 화강암을 조합하여 각양각색으로 인간을 만들고 이것을 종종 걸맞지 않은 상자에 채워넣는다. 그래서 시인은 도살업자의 얼굴을 갖고, 도살업자는시인의 얼굴을 갖고 있다.  - P81

그 잡동사니 전부를 어떻게든 실 한 가닥으로 살짝 엮어 놓았다. 기억이란 재봉사이고, 더군다나 변덕스러운 재봉사이다. 기억은 안팎으로, 위아래로, 여기저기로 바늘을 놀린다.
우리는 다음에 무엇이 올지, 이후에 무엇이 이어질지 알지못한다. 그러므로 탁자에 앉거나 잉크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것과 같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동작도 서로 무관한 수천 개의 단편적인 조각들을 뒤흔들어 놓아, 때로는 밝은 조각이, 때로는 어두운 조각이 빨랫줄에 걸린 열네 명 가족의속옷이 돌풍에 나부끼듯 매달려 까닥이고 펄럭이다가 떨어진다. 더없이 일상적인 우리의 행위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의기양양하게 장담했던 한 가지 일이 아니라, 펄럭이며 퍼덕이는 날갯짓과 명멸하는 빛으로 시작한다.  - P82

셰익스피어와 크리스토퍼 말로, 벤 존슨, 토머스 브라운,존 던이 지금도 글을 쓰고 있거나 바로 얼마 전까지도 써왔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올랜도는 자기가 좋아하는 영웅들의 이름을 줄줄열거하며 말했다.
그린은 냉소적으로 웃었다. 셰익스피어가 꽤 괜찮은 장면들을 쓴 것은 사실이라고 그는 인정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그 장면들을 주로 말로에게서 가져왔다. 말로는 유망한시인이었지만, 서른 살도 되기 전에 죽은 청년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브라운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산문으로 시를 쓰려 했는데 그런 기발한 착상에 사람들은 오래지않아 싫증을 느꼈다. 존 던은 의미의 결핍을 어려운 단어로포장한 사기꾼이었다. 얼간이들은 속아 넘어갔다. 하지만 그런 문체는 앞으로 열두 달만 지나면 한물가고 말 것이다. 벤존슨을 보자면, 존슨은 자기 친구이고, 그는 자기 친구에 대해 나쁘게 말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 P92

요즘의 젊은 작가들은 출판업자들에게 고용되어 돈벌이가 될만한 쓰레기를 쏟아낸다. 셰익스피어가 이런 일의 주범이었고, 벌써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 지금 시대의 특징은 젠체하는 기발한 발상과 무모한 실험인데, 그리스인들은 그런 것을한순간도 용인하지 않았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이런 말을하려면 몹시 가슴 아프지만 자기 생명을 사랑하듯이 문학을 사랑하므로 - 이 시대에는 좋은 점을 하나도 찾아볼 수없고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말하고나서 그는 직접 포도주를 또 한 잔 따랐다. - P93

같은 순간에 닉 그린은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다. 어느날 아침 한없이 부드러운 이불 속에서 더없이 푹신한 베개를베고 누워 수백 년간 민들레나 소루쟁이 같은 잡초 하나 나지 않았던 드넓은 잔디밭을 퇴창 너머로 바라보며, 그는 어떻게든 여기서 달아나지 않으면 산 채로 질식할 거라고 생각했다. 침대에서 일어나 비둘기 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갈아입고 분수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플리트 스트리트의 자갈길에서 짐마차 말이 헐떡거리는 소리를 듣지못한다면 글을 한 줄도 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옆방에서 하인이 꺼져 가는 불을 되살리고 식탁에 은접시를 차려놓는 소리를 들으며, 이런 식으로 더 오래간다면 잠에 빠져들 테고(여기서 그는 입을 딱 벌리고 하품했다) 자다가 죽음에 빠질 거라고 생각했다. - P97

그 후로 그는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해마다 변함없이 그언덕에 올랐다. 너도밤나무가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고, 돌돌말린 어린 고사리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을 보았다. 달이 초승달 모양에서 둥글게 차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또 보았다ㅡ하지만 독자들은 이어지는 변화를 묘사한 문단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초목이 녹색에서 황금색으로 물들어 가는 것을, 달이 떠오르고 해가 지는 것을, 겨울이 지나 봄이 오 - P101

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되는 것을, 낮이 저물어 밤이 되고 밤이 지나 낮이 되는 것을, 폭풍우가 몰려왔다가 맑은 날이 이어지고, 한 노파가 30분이면 쓸어 버릴 수 있는 먼지 조금과거미줄 몇 개를 제외하면 자연이 2백~3백 년간 대체로 변함없이 지속되어 온 것을. 그런데 이 문단은 그저 시간이 흘렀다>(이 부분에서 얼마만한 시간인지 정확하게 괄호 안에 표기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간단한 진술만으로 훨씬 더 빨리 결론에 이를 수 있었으리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P102

하지만 시간은 동물과 식물이 놀랍도록 때맞춰 번성하고서서히 사라지게 하면서도, 불행히도 인간의 마음에는 그처럼 단순하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마찬가지로 기묘하게 시간에 작용한다. 한 시간이 언짢은 상태의 인간 마음에 머물 때는 시계 시간의 50배나 100배 길이로 늘어날 수 있다. 반면에 한 시간이 마음의 시계에서 정확히 1초를 나타낼 수도 있다.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이 희한하게도 일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보다 많이 알려져야 하고 더욱 깊이 연구할 만하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이 관심사가 매우 제한된 전기 작가는 한 가지 단순한 진술에 국한해야 한다. 지금 올랜도처럼 서른 살에 이른 인간에게는생각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길어지는 반면에 행동하고 있을 때의 시간은 지나치게 짧아진다는 것이다. - P102

올랜도가 지시를 내리고 방대한 자기 장원(莊園)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하지만 그가 홀로 언덕에 올라 참나무 밑에 주저앉으면 그 즉시1초 1초가 둥글어지며 채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게다가 그 1초 1초는 더없이 기이하고 다양한 것으로 채워졌다. 그는 가장 현명한 사람들도 곤혹스럽게 여겼던 사랑이란 무엇인가, 우정이란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들에 직면하여 그런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에 잠기면 매우 길고 복잡다단하게 보였던 자신의 과거가 그 즉시, 사라져 가는 1초에밀려 들어가, 그것을 원래 크기의 열두 배로 부풀리고 수천가지 색채로 물들이며 세상의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을 채워넣었다. - P103

이러한 사색 (아니면 그것을 어떤 단어로 부르든간에)에잠겨서 그는 자기 인생의 여러 달을, 여러 해를 보냈다. 그가아침 식사 후에 서른 살의 젊은이로 나갔다가 저녁 식사 시간에 적어도 쉰다섯의 장년으로 돌아오곤 했다는 말은 과장이 아닐 것이다. 몇 주가 지나면 그의 나이에 백 년이 더해지기도 했고, 또 몇 주가 지나면 최대 3초만 더해지기도 했다.
전체적으로 보아, 인간 생애(동물의 생애에 대해서는 주제넘게 언급하지 않겠다)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우리의 능력을넘어서는 일이다. 인생이 아주 길다고 말하자마자 장미꽃잎이 땅에 떨어지는 시간보다도 짧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P103

느닷없이 맹렬한 격정에 압도되어 방을 뛰쳐나갔다면, 분명무언가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종류의 걱정이었느냐고 당연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사랑 그 자체만큼이나 양면적이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하지만 사랑을 잠시 논외로 하자면, 실제로 일어난 일은 이렇다.
황녀 해리엇 그리젤다가 잠금장치를 끼우려고 몸을 숙였을 때, 올랜도는 갑자기 이해할 수 없이 멀리서 퍼덕이는 사랑의 날갯짓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흔들리는 부드러운 깃털이 급히 밀려드는 물결, 눈 속의 사랑스러운 자태, 홍수 속의부정(不貞), 이런 수천 가지 기억을 그의 내면에 일깨웠다. 날갯짓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자 그는 얼굴을 붉히며 몸을 떨었다. 다시는 이렇게 동요되는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는 동요했다.  - P121

그는 양손을 들고 그 아름다운 새가 자기 어깨에 내려앉게 하려 했다. 그때ㅡ끔찍하게도!
끔찍하게도! - 까마귀가 나무에서 굴러떨어지며 찢어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대기는 거친 검은 날개에 덮여 어두워졌다. 깍깍 소리가 들렸고, 지푸라기와 잔가지, 깃털이 떨어졌다. 그러고는 모든 새들 가운데 가장 육중하고 더러운 콘도르가 그의 어깨에 거꾸로 처박혔다. 그래서 그는 방을 뛰쳐나갔고, 하인을 보내 황녀 해리엇을 마차까지 전송하게 했던 것이다.
이제 다시 돌아가서 말하자면, 사랑은 두 얼굴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다. 두 개의 몸이있어 하나는 매끄럽고, 다른 하나는 털북숭이다. 그것은 두 - P121

개의 손, 두 개의 발, 두 개의 발톱이 있고, 실로 모든 부위가두 개이고 정확히 상반된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아주 단단하게 결합된 까닭에 분리될 수 없다. 이번에 올랜도의 사랑은 하얀 얼굴을 그에게로 향하고 매끄럽고 사랑스러운 몸은바깥쪽으로 향한 채 그에게로 날아왔다. 그녀는 순수한 기쁨의 공기를 퍼뜨리며 점점 다가왔다. 갑자기 (어쩌면 황녀를보았을 때) 그녀는 빙 돌아 몸을 돌리더니 검은 털투성이의야만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어깨에 떨어진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은 낙원의 새, 사랑이아니라 콘도르, 욕정이었다.
그래서 그는 달아났고, 그래서 시종을 불렀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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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혼자다 싶을 때
그 많은 잎들 다 어디 가고
혼자 떨고 있나 싶을 때
나무는 본다 비로소
공중으로 뻗어간 뼈를
하늘의 엽맥을


광대무변한
이 잎은 아무도
떼어갈 수 없다


2022년 10월
손택수


귀의 가난


소리 쪽으로 기우는 일이 잦다
감각이 흐릿해지니 마음이 골똘해져서

나이가 들면서 왜 목청이 높아지는가 했더니어머니 음식맛이 왜 짜지는가 했더니
뭔가 흐려지고 있는 거구나

애초엔 소리였겠으나 내게로 오는 사이
소리가 되지 못한 것들

되묻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표정과 눈빛에 집중을 한다
너무 일찍 온 귀의 가난으로
내가 조금은 자상해졌다 - P12

저녁 숲의 눈동자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 P14

한 모금 물방울을 붙들고


아프리카 어느 부족 여인들은 지하수가 흐르는 땅의 나무 그늘엔 실례를 하지 않는다고 하지 지하수를 감지한 나무 그늘은 지하수가 없는 땅의 그늘과는 그 빛깔부터가 달라서, 아무리 급해도 물이 오염되면 쓰나, 멀찌감치 떨어져일을 본다지


그것 참, 내 눈엔 똑같아 보이는 그늘도 그 농도부터가 다르다니, 땅의 체질에 따라 저마다 다른 뉘앙스를 갖고 있다니, 나뭇잎 그늘 한 장에서 수십 미터 지하의 물기를 감지할 줄 아는 눈을 갖기 위해 초원은 얼마나 바짝 목이 탔을것인가


나는 생각한다, 한 모금 물방울을 붙들고 푸르게 타올랐던 시절, 내 안색만 보고도, 눈빛만 보고도, 그 깊은 곳 물소리를 들을 줄 알았던 한 사람을  - P15

바다 무덤


뱃속에 있던 아기의 심장이 멎었다 휴일이라 병원 문이 열리길 기다리는 동안 식은 몸으로 이틀을 더 머물다 떠나는아기를 위해 여자는 혼자서 자장가를 불렀다


태명이 풀별이었지 작명가는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무덤으로 바뀐 배를 안고 신호가 끊어진 우주선 하나가 유영하는 우주 공간을 허우적거린 이틀


그후 여자는 어란을 먹지 않았다 생선의 눈을 마주하는 것도 버거워서 어물전 근처는 얼씬도 않던 여자, 세월호 뉴스앞에 며칠째 넋을 놓고 있던 여자


한동안 가지 않던 바다에 간다 상처라는 게 흔적이 남아야 치료도 되지 둘 사이의 금기였던 아이들 이야기를 나눈다


버리지 못한 초음파 사진 속 웅크린 태아처럼, 부푼 배를끌어안고 자장자장 들려줄 수 없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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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정쩡함! 그건 오래 걸친 외투처럼 내겐 너무도 친근한 말이 아닌가. 한번은 아들녀석이 물었다. 엄마를 무슨 작가라고 소개해야 돼? 엄마가 글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이 묻는단다. 소설가냐,
시인이냐, 드라마 작가냐. 난 아이에게 엄마는 인터뷰 하고 칼럼 쓰고 산문도 쓴다고 설명했지만, 말하면서도 뭔가 잡다하고 애매했다.
오랜 질문이다. 나는 무슨 글을 쓰는 사람인가.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반듯한 명함도 없고 내세울 만한 대표작이 있는 것도 아니나 어쨌든 매일 글을 써서 먹고살았다. 그런데도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할말은 늘 궁했다. 종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지만, 그건 한 편의 글로 완성되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게 되기도 한다. 그럼 난 그날 일을 한건가 논건가, 헷갈렸다. - P18

"춤추는 별을 잉태하려면 내면에 혼돈을 지녀야 한다" 라는 니체의 말대로, 불확실한 삶의 긴장 상태는 글쓰기 좋은 조건이라고 우리는 또 대부분 그렇게 산다. 주변을 봐도 고시 합격생보다는 준비생이 많다. 고액 연봉에 승승장구하는 직장인보다는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노동자가 다수다. 연인 관계도 팽팽한 사랑 감정을 느낄 때보다 지리멸렬하고 느슨해서 친구인지 가족인지 헷갈리는 시기가 길다. 그러니 어정쩡한 상태를 삶의 실패나 무능으로 여기지 말자고 했다. - P19

나도 20~30대엔 애매함을 배척하고 확실함을 동경했다. 표류보다 안착을 원했다. 돈 걱정 없이 원하는 글을 쓰는 안정된 집필 환경을 꿈꿨고, 내 이름으로 된 책이라도 있다면 존재 증명이 수월하리라 기대했다. 그런데 책상과 고요가 확보된다고 글이 싹 바뀌지않았고, 책이 나온다고 삶이 확 달라지진 않았다. 아이가 기저귀만떼면 엄마 노릇 수월할 줄 알았는데 걸으면 넘어질까 걱정, 취학하면 학교적응 못할까봐 걱정, 성장할수록 근심의 층위도 깊어갔다.
어영부영 이만큼 떠밀려오고 나서야 짐작한다. 인간이 명료함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건 삶의 본질이 어정쩡함에 있다는 뜻이겠구나.
이제 나는 확신에 찬 사람이 되지 않는 게 목표다. 확실함으로자기 안에 갇히고 타인을 억압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싶다. 40대 후반이면 그걸 두려워해야 할 나이다. ‘글쓰기는 이런 거야‘ ‘사는 건원래 그래‘라고 의심하기보다 주장하는 사람이 된다는 건 서글프다. - P19

나이 들면서 체지방이 늘 듯 안 쓰는 핸드폰 번호가 쌓인다. 번호는 정리해도 인연은 삭제되지 않고 내가 피해도 삶이 만나게 한다. 사는 동안 운명을 뒤바꿔놓을 결정적인 만남은 거의 일어나지않겠지만 신상 정보 업데이트가 안 된 지인들과의 애매한 만남, 아니 마주침은 종종 일어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은 (..…) 어릴 적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잘고, 협소하고, 단편적이다."(116) 이 단편적 만남, 하찮은 우연에 잘 임하고싶다. 안색을 살피고 고요를 챙길 것. 앞으로 수차례의 결혼식과 장례식 그리고 무수한 대중교통 탑승 기회가 남았다. - P30

많은 글과 논리가 있고 지식이 있다. 그것에 묻힌 너무 작은 목소리가 있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살리는 일을 내심 과업으로 삼았다.
저자의 일침대로라면 육성만 담지 말고 울림과 떨림까지 담아야 하고 그것은 "무언가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저항"으로 가능하다.
이 무위의 글쓰기라는 경지는 아득하지만 일단 쓰기에 대한 열망으로 조급해진 마음은 누그러뜨려준다. 무언가를 즉각적으로 수행하려는 욕심을 무너뜨리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힘을 다스리라는 글쓰기의 이정표 앞에서 나는 또 가던 길 멈추고 숨을 고른다.
글이 불이 되는 글쓰기를 해낼 재주는 없지만 쓰면서 알아가고싶다. 전업 작가가 되고 싶으면, 혹은 되었다면 하루에 이삼십 장씩쓰라는 말보다 이쪽이 더 윤리적이며 매혹적이고 현실적이다. 이미글이 범람하는 시대에 제면기에서 면발 나오듯 줄줄 써대는 게 능사는 아니며, 그렇게 능력을 행위로 소모하다간 4대 보험 적용도 안되는 무명 작가로 과로사하기 딱 좋다는 자각이 아주 세게 드는 조언이다. 고마워요, 아감벤 씨. - P34

싸구려 모텔에서 단기투숙자로 미혼모 엄마와 사는 아이는 가난과 결핍의 공간을 생성과 자극의 놀이터로 만든다. 이 낙담하지 않는 악동은 자신의 신묘한 능력을 고백한다. "난 어른들이 울려고 하면 바로 알아." 엄마의 기후 변화를 귀신같이 감지하는 것도 아이고, 어떤 절망에 빠졌어도라면 수프 같은 복원력으로 생기를 되찾는 것도 아이다.
"고통이 아픔을 준다는 것이 고통에 반대하는 논거가 될 순 없다"는 니체의 말을 생각한다. 인간은 최악의 상태에서 진정한 통찰과 만난다는 뜻이다. 한부모가정 아이는 불행하다기보다 예민하다.
그 예민함의 촉수로 무니가 타인의 슬픔을 포착하듯, 또 다른 무니들이 삶의 무수한 장면을 읽어내고 속 깊은 글을 써내는 걸 나는 본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혼은, 한부모 가정은, 누구의 무엇을 언제를 기준으로 결핍이고 약점인 것이냐고. 나와 내 친구가 오매불망걱정했던 그 작았던 아이들은 자기 고통을 응시하고 기록하는 사람으로 옆에 있다. - P42

소설을 읽다보면 바틀비가 답답하고 불안하다. 제 발로 사무실에 들어갔으면 일은 해야 하지 않나, 안 할 거면 왜 안 하는지 적어도 이유는 말해야 하지 않나,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나 싶은데 그 모든걸 안 하고 ‘끝‘까지 버틴다. 그런 행동에 대한 속 시원한 해명 없이 소설은 장탄식으로 끝난다. "아! 바틀비여, 아! 인간이여." 
그 허탈함, 황망함, 난감함, 쓸쓸함 속에서 사유가 일어난다(좋은 소설인 것이다). 나는 내 생각을 생각했다. 처음엔 바틀비가 이유도없이 일하지 않는 게 이상했는데,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게 이상하다. 바틀비는 왜 자기 생각과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까 궁금했다가,
그럼 나는 구구절절 말함으로써 타인을 이해시키고 타인으로부터이해받은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회의가 들었다. 말하는 대로 이해받는다는 믿음이야말로 헛것 아닌가…… - P45

바틀비가 변호사에게 했던 말이 나를 향한다. "알려주지 않으면 그 이유를 모르시겠어요?"
그간은 글쓰기를 열렬히 원하는 이들만 만났다. 만사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비자발적 집단과의 수업에서 난관에 봉착했고 그 와중에 나는 얼굴이 자주 화끈거렸는데, 평소 목소리 없는자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다고 떠들고 다닌 게 생각나서다. 실상은 목소리 없는 자를 좀처럼 못 견디고, 논리적 전개가 아니면 상황 이해에 서툴고, 원활한 목표 달성에 방해가 되면 구성원을 제쳐두기도 하는 사람이 나였다. 우선은 불안과 조급 없이 목소리 없는 이들과 ‘그냥 있는‘ 연습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합리성으로 포획되지 않는 삶, 실패로서만 확인되는 앎이 있다.그것은 나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아내의 병을 고치겠다는 의지가확고한 남편이 정작 아내의 말을 듣지 못하듯이, 어떤 목표에 사로잡히면 사람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성실함의 중단, 합리성의 거부를 실천한 바틀비처럼 나도 성실함과 합리성의 스위치를 몸에서 꺼두어야 할까보다. 그래야 사람이 보일 것 같다. - P47

결국 딸은 원하는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네 상식과 내 상식의다름, 자기 불안의 겨룸, 상호 애환에 대한 무지, 욕망의 투사, 필요의 거래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관계. 엄마와 딸. 그러나 패자가 정해진 싸움이다. "부모가 원하는 자리로 되돌아오는 자식은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아이는 내 자식이고 나는 그 애의 부모이고, 그사실만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작은 인간‘의 태를 벗고 세상의중심으로 나아가는 딸아이에 비추어 ‘왜소해진 나‘를 본다. 더는 작지 않은 아이가 더는 쪼그라들고 싶지 않은 엄마를 흔들어 깨운다. - P72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동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발견합니다. 글을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무엇을 알고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미리 어떤 것을 써야지 생각하고 머릿속에 준비해둔 원고를 ‘프린트아웃‘한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글쓰기를 시작하는 용기, 그리고 방법은 내 안에 있다. "자기 자신을 단서 삼아 이야기를 밀고 나가" 야 글쓰기에 힘이 붙고 논의가 섬세해지면서 자기의 고유한 목소리가 나온다. 엄마에 관한글쓴이의 고백처럼 우리는 ‘생각보다‘ 자신에 무지하고 자기와 서먹하기에, 글을 쓰면서 나를 알아가는 쾌감도 크다. 그렇게 마음을 다쏟는 태도로 삶을 기록할 때라야 "신체에 닿는 언어"를 낳고 "그런언어만이 타자에게 전해" 진다. - P75

자신이 용감해지는 자리를 알기. 내가 글을 쓰는 이유도 이것이다. 글을 쓸 때 나는 그나마 용감하다. 글 바깥에선 비겁하고 부산스럽지만 글 안에서만은 일관되고 침착하려 애쓴다. 글과 삶의(불)일치는 내 삶의 영원한 화두다. 잘 존재하는 방법은 어렵고, 글쓰는 내가 가장 나으니까, 삶에서 그 비중을 늘리는 전략을 일찍이짰다.
글쓰기 수업도 그 일환으로 재밌게 하고 있다. 학인들은 매번말한다. "우리 수업에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이 와요." 그러면 내가정정한다. 좋은 사람들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서는 우리가 좋은 사람이 되는 거라고.
서로가 경쟁자 아닌 경청자가 될 때, 삶의결을 섬세하게 살피는 관찰자가 될 때 우린 누구나 괜찮은 사람이 된다. 대인배라도 된듯한 그 착각이 좋은 글을 쓰게 하는 동력임은 물론이다. "작가란 최상의 순간에 자기 인격의 최상의 측면을 갖고 주로 글을 쓰고 실제로도 그래야 한다." 저마다 삶에 몰입하고 자기 인격의 최상을만나는 횟수가 잦아지면 우상의 존재도 자연 소멸하지 않을까. - P83

아무려나, 제 몸 써서 일한 사람들이 갖는 삶에 대한 통찰력, 남의 몫 가로채지 않고 자기 손 놀려 ‘저금통‘ 같은 갯벌 일구어 살아온 이들의 가뿐함, 그 와중에도 기역자로 굽은 허리를 펴 "누부리곱과(노을이 고와)" 라며 감탄할 줄 아는 우아함을 배운다. 이 책의최고령 97세 소무의도 윤희분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농땡이가최고야. 젊어서 일 많이 하지 마시오. 늙어서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했어. 젊었을 때는 뼈가 나긋나긋하니까 물불 안 가렸지. 농땡이가 최고야."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작아진 몸피에서 나온 사리 같은 말, 인간다움을 추구하기에 너무도 혁명적인 그 입말을 곱씹는다. - P104

끼니마다 콕쏘는 김치를 허겁지겁 먹어치우면서도 목 안이 따끔하다. 한 여성이 소위 ‘바깥일‘을 하려면 다른 여성의 돌봄노동이 필요하듯이, 내가 김치 담그기에서 해방되자면 누군가의 고단한 노역의 산물인 김치를 먹게 된다. 얼마나 손끝이 얼얼하도록 마늘을 까고 생강을 다지고 배추를 씻고 절이고 버무렸을까.
‘엄마표 김치‘라는 말이 그리운 말에서 징그러운 말이 되어간다. 엄마의 자기희생이 강요된 말, 넙죽 받아먹기만 하는 자들이 계속 받아먹기를 염원하는 말이다. 어느 소설가의 문학관에는 대하소설을 쓰는 동안 사용한 볼펜과 원고지가 탑처럼 쌓여 있다고 하는데, 엄마들이 평생 담근 김치와 사용한 고무장갑을 한눈에 쌓아놓으면 어떤 붉은 스펙터클이 나올지 상상해본다. 어머니가 해주신밥과 김치 먹고 굴러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절대 가시화되지 않는이상한 노동. 피와 살로 스며서 똥으로 나가버리는 엄마의 땀, 부불노동 Impaid work 으로서 가사노동의 불꽃인 김장. - P107

가난은 상대적이나, 한 존재에게서 중요한 것들을 뺏어간다. 밥부터 포기시키고 밥이 매개하는 관계와 건강을 무너뜨린다. 가난은말을 가로챈다. 감추고 싶은 것은 강제로 노출시키고, 말하고 싶은것은 들어주지 않는다. 먹고살기 바빠 일일이 사정을 말할 기회가없다. 설명도 간단치 않다. 저자처럼 수년을 공부하고 책 한권 분량의 구조적 분석을 마쳐야 제대로 이해시킬까 말까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 아마 그건 고생 끝에 낙이 온 사 - P124

람에게만 발언권이 주어졌기 때문일 거다. 그들은 자서전으로, 인터뷰로 자기 말을 퍼뜨리지만 "성실한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성실했다가 개죽음을 당한"이들은 말이 없다. 특정 지역이 사교육 시키기 좋다는 말. 사교육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 기득권층이된 이들의 언어일 것이다. 사교육에 실패했거나 애초에 사교육을받을 수 없는 이들의 말은 배제됐다. 재개발이 지역 발전에 좋다는말도 마찬가지. 매매차익으로 부를 축적한 중산층과 그것을 조장한토건재벌의 말이다. 쫓겨난 원주민의 말은 무음 처리다. 사회적 편견은 그렇게 생산 및 유통된다.
나는 목동 아파트를 떠나 집을 구하며 주택담보대출이란 것을받았다. 용쓰고 살았으나 살다보니 중년에 빚쟁이다. 20년 상환의굴레에 갇혀 죽지도 못할 처지가 된 게 황망하고 서글펐는데 이 책에서 부채에 관한 다른 해석을 얻었다. "개인이 가난해서 빚을 지는것이 아니라, 빚을 지지 않고는 살 수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 적응해나가기 위해 빚을 지는 것이다." 학생-채무자의 글에 노동자-채무자인 나는 위안을 받는다. - P125

한 사람의 공감 능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계속 질문하는 중이다. 여자라서, 아이를 키워봐서, 딸이 있어서처럼 저절로 주어지는 것들은 계기가 될 순 있어도 공감의 지속 조건은 될 순 없다. 배움이 필요하다. 글쓰기 수업에 오는 어른들도 ‘느끼는 능력을 갈구한다. 남 일에 무관심하면 더 빨리 더 높게 사회적 성취를 일굴 수있을지 모르겠으나, 자신과의 서먹함이나 관계맺기의 무능함으로인해 삶의 다른 한쪽이 허물어지는 탓이다.
내가 아는 공감 방법은 듣는 것이다. 남의 처지와 고통의 서사를 듣는 일은 간단치 않다. 자기 판단과 가치를 내려놓으면서, 가령
‘왜 이제 말하느냐‘ 심판하는 게 아니라 왜 이제 말할 수밖에 없었을까 이해하려 애쓰면서, 동시에 자기 경험과 아픔을 불러내는 고강도의 정서 작업이다. 온몸이 귀가 되어야 하는 일. 얼마 전 본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이 할 말을 생각하는 동안 나는 들을 준비를 할 거예요." - P128

삶은 늘 우리의 경험과 인식을 초과한다. 문학으로 타인의 삶을상상할 수는 있다. 소설 속 주인공은 왜 결혼생활 10년이 넘도록 잘참다가 하필 그날부터 호텔로 갔는지, 기껏 가놓고 왜 그 방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지, 결혼 전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스마트한 여성‘인데 어째서 이혼하지 않고 지리멸렬한 결혼을 이어갔는지, 매사합리적인 언어를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설명 불가능하다. 문학의 언어는 보여준다. 스스로 전개되는 삶을 통해 합리와 이성으로 기획된 세계의 빈틈과 모순을 드러낸다. 그래서 《19호실로 가다》의 첫문장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수 있다."  - P131

안희정 성폭행 혐의 사건에는 법리적 판단이 내려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건이 끝나도 여성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이다. 그건성폭행이 계속된다는 말이고, 남성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고 편집하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말하기는 자주 실패하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견고한 지배 질서의 틈을 뚫고 터져나오는 목소리는 그만큼 질긴 생명력을 갖는다. 삶을 대동하고 나온 목소리는 말하기에 실패할 때마다 정교해진다. 나는 거기서 희망을 본다. - P131

여성혐오로 인한 죽음, 그리고 성폭력 피해는 주식 시세나 날씨처럼 매일 생산되는 뉴스다. 한샘 기업 내 성폭력 사건이 폭로된 게불과 몇 달 전이고,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진 게 2년전이다. 누구도 들어주지 않아서 서사가 되지 못한 채 눈송이처럼흩어져버린 힘없는 여성 피해자들 이야기는 반도의 땅 곳곳에 설산을 이루고도 남는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페미니스트가가리키는 여성이 처한 현실의 참담함이다. 여자는 밥하려고 태어나지 않았고 꽃처럼 꺾어도 되는 존재가 아닌데 밥 안 한다고 죽이고꽃 꺾듯 존엄을 꺾어버리는 무수한 사건들에도, 우리는 계속 놀라고 말리고 떠들고 분노해야 한다. - P134

읽고 쓰고 말하고 고치기의 반복. 이 고된 노역을 우리는 왜 자처하는가. 글쓰기의 목적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렇게 정리해본다.
삶이 고차함수인데 글이 쉽게 써지면 반칙이다. 정확한 단어와 표현을 고심하다 보면 자신을 스스로 속일 가능성이 줄어들고, 몸을숙여 한 사람의 내면의 갱도에 들어가는 훈련으로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을 수 있다고.
"모든 사물과 현상을 씨 -동기-로부터 본다"(김수영)는 것, 자기 중심성을 벗어나 타인의 처지가 되어보는 일, 사람살이에 꼭 필요한이것을 교육받을 기회가 드물었던 우리는 글쓰기를 핑계 삼아 공부하고 있다. 꼰대 발언, 혐오 발언이 승한 시대에 말을 지키는 것은나를 지키는 것이기도 하니까. - P149

부모와 산다고 다 행복하지 않듯이 부모가 없다고 꼭 불행하지않다. 복지시설에서 사는 열다섯 살 아이의 비밀이 아픈 것이지, 그아이의 삶 자체가 슬픈 것은 아니다. 아침에 학교에 가고 아이돌 좋아하고 친구들이랑 싸우고 떠들고 치마 기장 줄이기에 연연하며 핸드폰 카톡에 정신이 팔려 있는 모습은 또래 아이와 다르지 않다. 부모의 부재를 무조건 동정하거나 차별하는 시선만 아니라면 아이가기죽을 일도, 거짓으로 둘러댈 일도 없다.
한 아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타인의 돌봄이다. 그 타인이꼭 부모일 필요는 없다. 부모이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인간은 나 - P162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다. 자식을 낳는다고 남을 돌볼 수 있는 육체적·정신적·경제적 상태가 자동으로 세팅되지는 않으며 세팅되었다고 한들 영원하지도 않다. 그러므로 "아이는 무조건 친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식으로 혈연을 강조하고 모성에 대한 환상을 부풀리는방향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 (1284).
한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든 신체적 온전함과 존엄성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후원금을 척척 내는 어른도 필요하지만 동시에
‘부모님 뭐하시느냐‘ 다짜고짜 묻지 않는 어른이 많아져야 하고 이력서에 가족관계를 쓰지 않도록 하는 제도가 생겨야 한다. 이 세상에 ‘불쌍한 아이‘는 없다. 부모 없이 자란 자식이라는 굴레를 씌우고불쌍한 아이를 만들어내는 집요한 어른들이 있고, 정상가족이라는틀로 자율적 존재를 가두거나 배제하는 닫힌 사회가 있을 뿐이다. - P163

며칠 후 찬바람 뚫고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 오늘‘ 전시회 토크콘서트에 갔다. 전시를 주최한 10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피해자에 대해 양육자와 눈 맞추고 말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 그래서 처음엔 뭘 물어봐도 "싫어" "재수 없어" 두 마디로만 답하는 아이들이었다고 표현했다. 어려서부터 가정폭력이나 학대를 당하던 아이들이 ‘살려고 집을 나와 먹여주고 재워주는 사람을 따르다가 피해를 입는 구조라는 것.
그런데도 아이들은 보호받기는커녕 ‘쉽게 돈 번다‘며 비난받고낙인찍힌다. 조 대표는 말했다.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 어렵지 않으냐고 물어보는데 현장을 모르는 행정부 어른들과 싸우는 게 더 어려워요." 심지어 단속에 적발된 성 구매자가 억울함을 호소하러 센터에 직접 찾아오는 일까지 있다며 "어째서 구매한 놈이 당당한가"
분통을 터뜨렸다. - P165

이날 내가 배운 것도 세 가지다. 첫째, 소위 ‘원조교제‘나 ‘조건만남‘으로 불리는 10대 성매매는 동등한 입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진다는 착각을 주지만 한쪽이 취약한 처지이므로 성착취라는 말이 합당하다. 둘째, 전 세계는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에 - P165

대해 엄격하게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는 보호하는 추세로 발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범죄라는 인식조차 미약해서 가해자들이 외려 당당하게 군다. 셋째, 성착취라는 말이 일반화되면 "당당한 놈들도 바퀴벌레처럼 숨을 것"이며 성착취도 사라질 것이다. - P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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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1월 ‘이란 제목이 셋이다.
번호를 붙일까 생각했지만, 모양이 거슬린다.
‘십일월‘로 고칠까? 어쩐지 진중하고 격 있어 보이는데……
아무래도 아직은 ‘11월이다.
이랬다저랬다, 돌아보는 시들을 묶는 마음.

2022년 가을
황인숙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진다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Spleen


이 또한 지나갈까
지나갈까, 모르겠지만
이 느낌 처음 아니지
처음이긴커녕 단골 중에 상단골
슬픔인 듯 고통이여, 자주 안녕
고통인 듯 슬픔이여, 자꾸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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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도 나쁜부류의 나무를 만납니다. 오즈로 가는 길에 있는 ‘싸우는 나무들‘의 숲이 도로시 일행을 지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양철나무꾼이 괴수 나무들에게 과감히 도끼를 휘둘러 길을 낸 덕분에 겨우 빠져나와요. 또한
‘해리 포터‘ 시리즈에는 강력한 파괴자‘후려치는 버드나무‘가 나옵니다. 나쁜 나무에도 다 화려한 족보가 있어요.
단테의 신곡은 미로 은유로 시작합니다. - P130

우리 인생 여정의 한가운데서
나는 곧은 경로를 잃고
어두운 숲속을 헤매고 있었다.

얼마나 울창하고, 험하고, 뒤엉킨 숲이었는지말로 다 할 수 없고
생각만 해도 그때의 두려움이 되살아난다!


추정컨대 이 숲은 과오와 죄, 정도(正道) 이탈을 상징합니다. 숲은 길을 잃고 헤매는 곳입니다. 옛날에는 숲에서 길을 잃는다는 것은 굶주림이나 추위로 죽거나 들짐승의 먹이가 되는 것을 뜻했습니다. 지금도전혀 아니라고는 못 합니다. 오늘날은 숲에 가는 것을 테디 베어의 피크닉(The Teddy Bears Picnic)』을 구경하는 것쯤으로 생각하는데, 조심하세요. 그러다 본인이 테디 베어의 피크닉이 될 수 있어요. 너무 오래 얼쩡대면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 P130

셰익스피어의 숲은 단테의 숲만큼 무시무시하진 않지만 그렇다고가볍고 밝지만도 않습니다. 때로는 『한여름 밤의 꿈』의 숲처럼 초인적존재들이 사는 마법과 환상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유 쟁취의장소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뜻대로 하세요』의 아덴숲은 로빈 후드의셔우드숲처럼 폭군에게서 도망쳤거나 추방된 사람들의 피난처입니다.
이때의 숲은 자연과의 교감, 문명의 부당함으로부터의 해방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는데, 훗날 페니모어 쿠퍼의 ‘가죽 각반 이야기‘가 이 전통을 물려받습니다. 하지만 도망자들은 강도와 살인자이기 쉽습니다.
그중 다수가 문학과 특히 민담에 잠복해 있어요. 다시 말하지만 숲은포식자들의 영역입니다. 항시 이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빨간 망토 소녀가 늑대를 만난 곳도 어두운 숲속이었어요. - P131

넓은 평원에 사는 사람들, 또는 멀리 북쪽 수목한계선 너머에 사는사람들은 청자라기보다 응시자입니다. 거기서는 무엇이 나를 잡으러오든 들리기 전에 보이니까요. 하지만 숲에 사는 이들은 청자입니다.
그들에게는 닥쳐오는 것이 무엇이든 소리부터 들립니다. 바람 소리와빗소리가 몰을 공포에 떨게 한 것은 그 때문이었습니다.
숲 보존의 중요성에 대한 생태학 보고서를 아무리 많이 읽는다 해도, 사실 우리는 내심 숲을 무서워합니다. 그리고 숲을 경외합니다. 우리의 이런 본능이 숲의 허구적 버전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냅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모든 이름이 사라지는 숲. 『반지의 제왕』에서 엘프가 다스리는 황금숲 로스로리엔. 여기에 잘못 들어가면 묶여버립니다. 그리고 아서왕 전설에서 마법사 멀린이 주문에 걸려 잠들어 있는숲. 이런 숲들에 너무 오래 머물다가는 내가 누군지 잊게 됩니다. 숲이매혹적으로 보여도 거기 들어설 때는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 P132

우리가 이 성향에 완전히 굴복하면 우리 상황은 악화일로를 걷게 됩니다. 세상의 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면 우리도 망합니다. 인도에 이런속담이 있습니다. "숲 다음은 문명, 문명 다음은 사막. 이 공식은 인류사에서 이미 수차례 현실화됐습니다. 숲의 파괴가 토양침식과 기근으로, 급기야 식인 행위로 이어진 이스터섬의 이야기는 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숲이 지구의 기후변화를 막는 데 중요하다는 얘기를 숱하게 듣습니다. 하지만 아마존은 계속 벌목되고 있습니다. 지구의 또 다른 허파 보르네오의 숲들도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길가메시의 도끼가 바삐 일하고 있고, 몇몇 신들이 흡족해합니다. 예를 들면 돈의 신들. 공짜를 홍보하고, 자연에게는 아무것도 갚지 않고 끝없이 뜯어 가도 된다는 망상을 촉하는 사람들의 신. 하지만 동물의 수호신은 우리에게 짜증이 날 대로 났습니다. 여신의 경고 중 하나는 이겁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어." - P133

숲에 저혈압은 높이고 고혈압은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연구에서는 학대 피해를 입은 어린이들이 참여했고, 결과는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습니다. 숲은 몸의 치유뿐 아니라 정신의 치유에도 효험이 있습니다.
‘우드랜드 트러스트‘라는 명칭은 중의적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두가지를 말합니다. 숲과 믿음. 우리는 숲에서 생경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대신 숲을 신뢰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가 무분별한 파괴를 멈추고 우리 숲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길일 것입니다. 숲은 태고의고향이고, 천연의 공기정화장치이자 기후 냉각기이고, 종들의 피난처입니다. 숲은 우리를 태양으로부터 보호하고, 마음을 치유하고, 영혼을위로하고, 세상을 열어줍니다.
엔트족 나무수염의 말을 다시 인용하며 말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구호로 삼아도 될 법한 말입니다. "한때 노래하는 숲이 있던 곳에 이제 그루터기와 가시덤불만 있다. 그동안 내가 게을렀다. 내가 팽개쳐두고있었어. 멈춰야 해!" - P136

카푸시친스키는 1978년에 『황제(Cesarz)』를 썼다. 이 책은 표면상으로는 에티오피아의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와 그의부패한 전제 정권의 몰락을 다룬다. 그렇게만 읽혀도 엄청난 책이다.
기자이자 문학가였던 카푸시친스키는 폴란드인 특유의 무모함을 자랑하며 스물일곱 건의 쿠데타와 혁명을 취재했다. 피난민의 물결이 분쟁을 피해 한 방향으로 흐를 때, 카푸시친스키는 매번 그 반대 방향으로, 분쟁의 한복판으로 향했다. 그는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들어갔고, 밤에 몰래 도시를 다니며 은거 중인 전직 조신들을 인터뷰해서 황제에 관한 일화들을 적었다. 그 일화들은 의도치 않게 웃긴것(쿠션 담당은 황제가 의자에 앉을 때마다 그의 짧은 다리가 덜렁거리지 않도록 매번 정확한 두께의 쿠션을 황제의 발밑에 밀어 넣어야 했다)부터, 소름 끼치는 것(걸인들이 궁정 연회에서 남은 음식을 먹어치웠다가 눈알이 뽑히는 벌을받았다)까지 다양했다. - P139

카푸시친스키는 평생 여행을 갈망했다. 다만 재미를 찾는 평범한 관광객은 애써 피할 곳들로 떠나기를 갈망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가 마지막 책 『헤로도토스와의 여행에서 자기 분야의 대선배이자 원조인세계 최초의 여행 작가를 소환한 것은 매우 적절해 보인다. 소환 대상은 바로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다. 카푸시친스키가 젊은 시절 무엇보다 희구했던 것은 ‘국경을 넘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폴란드국경을, 다음에는 넘을 수 있는 모든 국경을 넘고자 했다. 그를 추동한것은 온갖 형태의 인간성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이다. 헤로도토스처럼그도 사람들의 말을 듣고 기록할 뿐 비판하지 않는다. 그의 일생은 탐색이었다. 미션보다는 탐색이었다. 그가 찾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단은 이국적 정황들, 문화적 차이들, 전후 폴란드에는 너무나 결 - P142

핍돼 있던 각양각색의 잡다함이었다. 그리고 그 너머의 것이었다. 그는 최악의 유혈 사태와 가학적 복수와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인간공통의 선을 찾아다녔다. 우리의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어쩌면 그건 존엄성이었다. 어디서나 압제자들이 표적으로 삼지만, 결코 완전히 말살될수는 없는 단순한 존엄성. ‘아니요‘라고 말하는 품격.
그가 목격한 것들을 생각하면 카푸시친스키만큼 비관론으로 기울었을 법한 작가도 없다. 하지만 비관은 카푸시친스키가 자주 드러내던감정이 아니다. 그가 자주 표한 것은 경이감이다. 세상에 그런 것들이,
찬란하면서 동시에 참담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데 대한 경이감.
헤로도토스의 여행의 끝부분에 이 한 문장이 있다. 튀르키예의 어느 박물관 내부를 묘사한 말이었지만, 우리 시대를 목격한 최고의 증인이었던 이 겸손한 남자의 묘비명으로 어울릴 법한 표현이다. 그래서이 말을 그를 기리는 말로 여기에 놓고 간다.


우리는 어둠 속에 빛으로 둘러싸인 어둠 속에 서 있다. - P143

앨리스 먼로는 명실공히 우리 시대의 대표적 영어권 소설가 중 한 명이다. 먼로는 북미와 영국의 평단에서 최상급의 찬사를 한 몸에 받아왔고, 여러 문학상을 휩쓸었으며, 국제적으로 열렬한 독자층을 보유하고 있다. 작가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이름은 경건하게 일컬어진다. 최근에는 먼로의 이름이 작가들의 다양한 설전에서 적을 때리는 매로 소환되곤 한다. "이게 글이야? 앨리스 먼로 알지? 글은 그런 게 글이야!"
비판자들이 실제로 하는 말이다. 먼로에게는 더 유명하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녀가 아무리 유명해져도 이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중 하루아침에 일어난 건 아무것도 없다. 앨리스 먼로는 1960년대부터 글을 썼고, 그녀의 첫 번째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이1969년에 나왔다.  - P157

‘정신적 황량함‘도 먼로가 상대하는 강적 중 하나다. 먼로의 인물들은숨 막히는 관습, 남들의 독한 기대, 부과된 행동 규범, 온갖 종류의 입막음, 정신적 압박에 맞서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투쟁한다. 선한 일을행하지만 진정성도 감동도 없는 사람과 행실은 나쁘지만 자기 감정에충실하고 자신에게 민감한 사람 중에서 선택하라면 먼로의 여성은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심지어 전자를 택할 경우도 그녀는 나중에 자신의 약삭빠름과 교활함과 간교함과 요망함과 사악함을 논한다.
먼로의 작품에서 정직은 최선의 방책이 아니다. 정직은 방책 자체가아니다. 정직은 공기 같은 필수 요소다. 그녀의 등장인물들은 어떻게든 그것을, 적어도 어느 정도는, 확보해야 하며 그렇지 못할 경우 침몰을 예감한다. - P169

「내가 너에게 말하려 했던 것(Something I‘ve Been Meaning to Tell You)」이라는 단편에서 에트는 여동생의 애인이었던 난잡한 바람둥이가 여자들에게 던지는 눈빛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공허함과 차가움과잔해를 통과해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심해 잠수부처럼, 자신이 염원하는 오직 한 가지를 향해서, 해저에 놓인 루비처럼 작고 귀하고 찾기힘든 것을 찾아내기 위해서 강하하는 인간처럼 보인다."
먼로의 이야기들은 이처럼 미심쩍은 탐색자와 손때 묻은 술책으로넘쳐난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통찰도 풍부하다. 어느 이야기, 어느 인간 안에도 위험한 보물이 값을 매길 수 없는 루비가 있을 수 있다. 어느 마음에도 염원이 있을 수 있다. - P174

캐나다의 생태주의 작가 어니스트 톰프슨 시튼(Ernest Thompson Seton)은 21세 생일에 기묘한 청구서를 선물로 받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그를 키우면서 지출한 비용을 모두 기록한 장부였다. 거기에는 그가태어난 병원이 청구한 분만 비용도 있었다. 더 이상한 것은 지불자가어니스트로 돼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때 시튼의 부친이 웃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가 원칙적으로 맞는다면?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빚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얼마나빚졌을까? 누구에게? 무엇에? 그리고 어떻게 갚아야 할까? - P175

우리 모두는 공짜 펀치나 공짜 런치를 바란다. 우리는 공짜라면 뭐든 좋아한다. 하지만 마법의 주문을 장착한 경우가 아니라면 뭐라도공짜로 얻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도 안다. 이렇게 펀치는 다른 펀치를 부르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초기 사회화-유치원에서 찰흙을 놓고 실랑이를 하다가 때리고 깨무는 싸움으로 번졌을 때 깨닫는 것의 결과일까, 아니면 인간 뇌에 내장된 템플릿일까? - P188

처음 만났을 때는 일단 우호적으로 대하고 차후에는 상대가 했던 대로 대응하는 전략, 즉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갚는 전략은 경기장이 평평할 때만 승리 전략이 될 수있다. 이 대회에서는 참가 프로그램이 남보다 우수한 무기체계를 보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참가자 중 하나에게 전차나 칭기즈칸의 이중 곡선 활이나 원자폭탄 같은 이점이 허용됐다면 팃포탯은 실패했을 것이다. 기술적 우위를 가진 플레이어가 단독으로 상대들을 말살하거나, 노예로 삼거나, 그들에게 불공평한 거래 조건을 강제할 수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것이 긴긴 인류사에서 반복되어온 일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이 법을 만들었고, 승자의 법은 그들이 꼭대기를차지한 계층적 사회구조를 정당화함으로써 불공평을 명예의 사당에안치했다.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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