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지 않는것이다.˝

- 수전 손택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무자비한 과정 속으로 내몰고 그들을 조직하는데, 이 과정은 현실로부터의 자멸적인 도피 행각처럼 보인다.
〔……) 단 한 사람의 전제적·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 p206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동안 제대로 등교하지 못하면서, 역설적으로 학교의 위상이 분명해졌다는 점이다. 부모들도 자녀가 종일 집에 머물면 본인이 힘든 것만이 아니라 아이의 성장이제대로 이뤄질 수 없음을 확인했다. 아이들도 오랫동안 외롭게지내다가, 학교가 다시 열리면서 예전보다 등교를 더욱 즐거워한다는 이야기를 교사들로부터 자주 듣게 된다. 학교교육에서수업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아이들 사이의 관계 맺기다. 코로나19의 후유증으로 당분간 소통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아이들은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익히면서 ‘사회‘를 복원해갈 수있다. 어른들은 그 회복력을 믿고 지지하고 격려해주어야 한다. - P104

소통에서 양념 역할을 하며 지루한 분위기를 반전시켜주는 유머는 우스갯소리 자체보다 표정과 소리를 통해 드러나는사람들의 반응이 더 큰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줌에서는 웃는 얼굴은 보이지만 웃음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기에, 유머로 촉발되고 고양되는 집단 에너지를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언젠가 카메라에 달려 있는 센서가 웃는 얼굴을 인식하여, 몇초동안 음소거 기능을 해제하고 자동으로 웃음소리를 전달해주는 시스템이 등장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화상회의시스템을통해 우리는 소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새삼 확인하게 된다. - P109

얼굴을 자주 보는 사람들끼리도 서먹해지는 경우가 있다.
특별히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관계가 어색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보지만 시선이 자꾸만 흩어지고, 안부를 묻거나 축하해주는데 ‘영혼‘이 없는 말로 떠다닌다. 내 말에 귀를기울이는 듯해도 건성으로 흘려듣는 것만 같다. 앞서 인용한 시구처럼 찾아온 친구를 ‘마음도 없이‘ 맞아들이고, 애인과 길게 - P122

통화할 때도 마찬가지다. 몸은 여기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가 있다. 정보가 폭증하고 두뇌에 과부하가 걸리기 쉬운 미디어환경에서, 우리는 상대방을 온전하게 대면하기 어려운 정황을 자주 맞닥뜨린다. - P123

 반면,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화상 시스템을 통해 서로를 오롯이 응시하며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면 충만한 대면이 경험된다. 대면이나 비대면이냐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가가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대면의 반대말은 비대면이 아니라 ‘외면‘이다.

‘외면‘의 사전적 정의는 ‘상대한 사람과 마주 대하기를 꺼리어 얼굴을 다른 쪽으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어떤 이유로 외면하는가 싫어하는 사람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가 하면, 아무 생각 없이 상대에게 소홀해질 때도 있다. 왜 소홀해지는가. 상대방을 업신여기는 마음 때문일 수 있다. 또는 산 - P123

두려움이 외면을 낳기도 한다. 내 잘못이나 약점을 추궁하는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기는 무척 어려운 일이다. 불안에 휩싸이면 안으로 움츠러들면서 외부 세계를 차단하게 된다. 권력의격차가 큰 사람들 사이에는 편안한 시선이 오가기 어렵다. 힘의우열이 억압적으로 작용하는 관계에서 약자는 강자의 눈치를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실수나 허물이 드러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마음의 문을열지 못하면 상대를 정면으로 응시하기가 어렵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갈등이 생겼을 때 어떻게하는가. ‘애써‘ 외면할 때가 많다. 마주하는 것이 무서워서 자꾸회피하게 되는데, 그럴수록 문제가 더 꼬인다. 상황을 직면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모면하려고만 든다. - P124

사람들은 저마다 가치관이나 취향을 갖고 살아간다. 그것이 비슷할수록 관계 맺기가 쉬워지고 집단의 결속력도 높아진다. 전통사회에서는 대체로 동질적인 문화를 공유했기에 그 내부 갈등이 비교적 첨예하지 않았다. 그에 비해 현대사회는 전혀다른 생각과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뒤섞여 살아간다. 다양성은즐거움과 창의성의 원천이 되기도 하지만, 이질감을 자아내면서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후자의 경우, 역학 관계에 따라 한쪽이 다른 쪽을 일방적으로 배척하는 상황으로 비화되기 쉽다. 장애인이나 성 소수자가 보기 싫다는 선언은 전형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다. - P132

왜 보고 싶지 않은가. 자기를 위협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욕망을 갖고 있다. 자신에게 체화된 삶의 문법에 상대방을 온전히 포섭하고 싶은 것이다. 근대적 주체는 그러한 자기 동일화의 경향을 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제각각이기에 자기 질서로 환원되지않는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을 수용하려면, 자기 아닌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철학자 레비나스는 그것을 ‘타자성altérité‘이라고 불렀다." 결코 대상화하거나 환원할수 없는 절대적 타자성을 마주하게 될 때 우리는 불편함 또는불쾌함을 느끼게 된다.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다름을 제거해버리려는 충동이 폭력적으로 표출되기도 하고, 그 에너지가 집단화되어 전체주의로 나아가기도 한다. - P133

자기 안의 타자성을 대면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 수 있다. 오랫동안 견지해온 세계관이 흔들리면서 존재가 위협받는다고느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단초를 제공한 타인을, 자아의 온전함을 훼손하는 이물질처럼 여긴다. 기생충 같은 벌레로 취급하면서 아예 시야에서 사라지게끔 박멸하려고 한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바탕에 깔려 있는 선입관과 편견은 동질적인(엄밀히말해 스스로 동질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비좁은 응집 속에서 증폭되고, 이질적인 집단을 더욱 철저하게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나아간다.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밀어낼뿐더러 목소리도 들리지 못하게 그들의 입을 막거나 자신의 귀를 닫는다.
2022년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확보하고자 시민들에게 불편함을끼쳐가면서 지하철 시위에 나서게 된 것도, 정치인과 미디어 등사회의 주류 세력이 그들의 아우성을 묵음mute 처리해왔기 때문이다. - P135

다시 말해 혐오감은 싫음과 미움의 복합체로서, 거기에 적개심, 우월감, 두려움 등의 감정도 혼재되어 있을 수 있다. 특히공포감과 강한 친화력을 갖는다. 따라서 그 대상에 대한 태도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회피, 외면, 격리, 비아냥, 멸시, 조롱, 모욕, 악마화, 적대시, 비난, 공격, 정죄, 저주…… 이모든 것이 합성되면 이른바 ‘극혐‘이 될 것이다. 혐오의 수위가 점점 높아져서 극단에 이르게 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신조어다. 누군가가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극혐이야‘라고 서슴없이 내뱉는다. 과장법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언어와 마음은 상호 순환적이다. 극단적인 표현을 통해 감정은 증폭된다. 사회는 점점난폭해진다. - P136

사람다움은 타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 인사를 주고받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다. 몸짓과 표정과 말로 이뤄지는 미시적인 의례를 통해 인격에 대한 기본적 경의를 나누면서 관계의 안전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 상호작용의 문법과 질서를 위반하는 것은 타자의 존엄을 위협하는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상대방의 악수를무시하는 것은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리는 모욕이자, 일종의 도덕적 폭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 P140

몸짓과 표정, 말투 그리고 침묵에 배어 있는 감정을읽어내지 못해서 엉뚱하게 반응하고 만다. 글을 읽고 이해하는
‘문해력‘이 지성의 발달에서 필수적 능력으로 강조되는데, 말을이해하는 능력 (굳이 명명하자면 ‘언해력‘이 될 수 있겠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것은 지적 능력의 문제인 동시에태도의 문제다. 상대방에게 마음을 온전히 기울이지 못하면 그의 말을 속 깊게 이해하지 못한다.
왜 마음을 다하지 못하는가. 빡빡한 업무나 생계에 쫓기고있거나, 갈등 상황이나 복잡한 생각과 씨름하고 있거나, 두려움이나 분노 등 부정적 감정에 시달리고 있거나, 아니면 심신이너무 지쳐서 그렇다. 거기에 덧붙여, 적정 용량을 초과하는 정보를 처리하느라 주의력이 분산되는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어느 경우든, 자기 앞에 있는 사람을 소홀하게 여기는 태도로 나타난다. 몸으로는 함께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다. 귀가열려 있기는 해도 경청은 이뤄지지 않는 것이다. - P145

아이들의 발육과 성장에 필요한 것은 유기적인 경험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표정을 읽으면서 상호작용하는 것, 울퉁불퉁한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면서 그 질감을 느끼는 것, 알쏭달쏭한 공간을 탐색하면서 신체감각을 익히는 것,
아기자기한 풍광을 자유롭게 관찰하면서 상상의나래를 펴는것…… 이 모든 것이 이른바 인성교육의 필수아미노산이고 창의성의 바탕이다. - P154

부모가 스마트폰을 과용하는 또 하나의 유형이 있다. 아이를 너무 많이 촬영하는 것이다. 모처럼 공원에 아이를 데리고나온 부모가 아장아장 돌아다니는 모습을 영상에 담느라 여념이 없는 장면을 종종 접한다. 잠깐이 아니라, 영화를 찍듯이 아주 오랫동안 전화기를 붙들고 있다 보니 함께 놀아주지 못한다.
스마트폰에 빠져 아이를 방치하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지만, 촬영할 때 아이는 단지 피사체로 격리되어 있을 뿐 부모와의 상호작용이나 교감은 없다. 부모는 영상 기록을 위해 머리를 쓰느라가슴으로 ‘지금 여기를 누리지 못한다. 그 시선은 불과 20, 30센티미터 앞에 있는 화면에 갇혀 있다. 아이도 부모 대신 카메라만 쳐다보아야 한다. - P159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공부가 직업인 나도 주의력의 지속 시간이 점점 짧아지는 것을 느낀다. 지금도 원고를 쓰면서 조금만 막히면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뉴스를 검색하고 싶어지는데, 그 습관적 욕망을 애써 억눌러야 한다. 정보 미디어가 발달할수록 생각의 근육이 퇴화하기 쉽다. 사물의 여러 모를 찬찬히 짚어보면서 깊이헤아리는 일에 점점 서툴러지는 한편, 단편적인 지식이나 뉴스에 현혹되어 엉뚱한 믿음에 사로잡힌다.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일들은 외면하면서, 정치적인 선동에 휩쓸리고 적대와 혐오에감정 에너지를 낭비하기 일쑤다. 그렇게 해서 증폭되는 반지성주의는 개인과 사회의 안녕을 위협한다. - P169

고요함은 모든 것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우리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는 ‘정신적인 찌꺼기‘의 흐름을 관찰하게 한다.
고요함은 마음을 열고 여유와 인내심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
아무 도움도 안 되면서 시간을 빼앗고 고요함을 방해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잡지 기사는 피하자. 그런 눈요기는 우리를수동적인 상태로 빠뜨려 어리석게 만들 뿐이다. 고요함은 그빈 공간 안에서 우리가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고요함은 열린공간이다. 그 고요함이 우리를 이끌게 하자.
-도미니크 로로, 『심플하게 산다』에서 - P170

불필요한 것에 대한 관심을 줄이면, 주의력을 통제하고 조절할 수 있는 역량이 늘어난다. 그리고 삶이 풍요로워진다. 주어진 환경에 일방적으로 예속되지 않고, 다각적으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내공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대화를 나누면서 말로 표현된 것이면에 깔려 있는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살필 수 있다. - P172

정보의 폭주 속에서 만성적인 주의력 결핍에 시달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행여 가족이나 가까운 동료들에게 정성이 소홀하여 섭섭하게 대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자.
주의력이 자라나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담백해야 한다. 그를 위해 과잉 섭취되는 정보를 의식적으로 줄여가야 한다. 주의력 다이어트attention diet 또는 디지털 디톡스가 필요하다. 그러 - P172

려면, 심심함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금단증세처럼 힘들겠지만, 곧 익숙해지면서 오히려 일상이 윤택해진다. 무료함속에서 마음의 부피가 자라나고 문화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안에서 솟아오르는 힘으로 인간은 자신만의 탄탄한 삶을 창조해갈 수 있다. 자아 형성의 공간을 다양하게 열어놓을 때, 우리는자기를 정당하게 사랑하며 타인을 존중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무의식과 즐거운 소통을 할 수 있도록, 세계와 자유롭게 교섭할 수 있도록 자신에게 여백을 허락하자.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의 사물들에 물음표를 달면서 다가갈 일이다. - P173

정확한 발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면, 구연동화 전문가들이읽어주는 목소리를 녹음이나 유튜브로 듣는 것이 더 효율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와 몸으로 함께 있으면서, 어떤 대상에 오롯이 마음을 모으는 경험이다. 존재의 온전한 연결을 통해 살아가는 힘을 키워가는 만남이다. 아이들은 책을 읽으면서 부모와 눈을 포개어 또 다른 세계를 두드릴 수 있다. 그러한 탐험의 원체험은 성장하는 동안 부모 이외의 타인들과 함께, 책 이외의 다른 대상을 매개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확장될 수 있다. - P178

지성은 여러 가지 지적 역량으로 구성된다. 기억력, 이해력,
분석력, 추리력, 표현력, 판단력, 문제 해결력, 인내력, 자제력,
결단력, 추진력, 실행력, 회복력, 공감력, 상상력…… 이른바 ‘사고력‘이라는 것은 이렇듯 여러 범주로 세분화할 수 있으며, 타고난 유전자와 후천적 학습 및 경험에 의해 다르게 배합된다.
어떤 상황에서 특별히 더 요구되는 것이 있고, 생애의 단계에따라 강조되는 것이 달라질 뿐이다. 그런데 어느 역량이든 ‘주의력‘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주의를 집중하고 목표하는 대상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아무리 지능이 뛰어나도 소용이 없다. 주의력을 훈련함으로써 수학 성적을 향상시킨 사례가 그것을 반증한다. - P190

이러한 훈련을 통해 주의력이 신장되면 인지능력의 향상에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 예술적 감수성 또한 고양된다. ‘아름답다‘는 말의 어원이 ‘알음+답다‘라는 견해가 있다. 무엇을 제대로알고 나면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아는 만큼보이고, 보는 만큼 느낀다‘라는 말과도 상통한다. 심미적 감각은 섬세한 관찰력을 요구한다. 눈으로 빤히 보면서도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깊이 들여다보면 새로운 것이 드러나면서 발상과 혁신의 실마리가 된다. 인공지능으로 대신할 수 없는 것 가운데 하나가 ‘안목‘이다. 주의 깊은 관찰은 창의성의 토대를 이루고, 행복한 삶의 원천이 된다. - P191

관찰의 즐거움을 전해주는 작가로, 프랑스의 미셸 투르니에를 빼놓을 수 없다. 전통적인 이야기 형식과 신화적 상상력으로 현대사회를 조명한 그는 소설 이외에도 많은 산문을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외면일기』로, 여행을 하면서 또는 한적한마을에 혼자 살면서 겪은 일들을 틈틈이 메모해두었다가 묶어낸 책이다. 짤막한 글들이지만 평범한 일상사에서 비범한 무언가를 발견하는 눈썰미가 탁월하다. 형형색색으로 변모하는 자연에 대한 예찬, 인생의 흐름에 대한 단상, 프랑스어의 몇몇 관용구에 대한 새로운 해석, 동네 사람들과의 익살스러운 대화 둥다채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책을 왜 썼는지에 대해 작가는이렇게 말한다. - P193

‘외면 일기‘는 사물의 겉모습이라는, 잊혀가던 외면의 고전적인 뜻을 새삼 환기시켜주었다. 겉모습은 겉치레나 꾸미기 등을 연상시키면서 부정적인 뉘앙스를 띨 때가 많다. 그러나 미셸 투르니에처럼 겉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표면에 머물지 않고심층의 실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능력은 무엇일까. 외면으로 드러나는 것을 관찰하기. 그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통찰하기. 그 지성과 감성으로 내면을 성찰하기………외면과 내면은 대립하는 개념이 아니다. 바깥을 자세히 응시하면 안쪽이 보인다. 안으로 시선을 뻗어가다 보면 겉모습이 다시보인다. - P195

보이는 것이 많아질수록 보는 것은 오히려 줄어든다. 시각정보의 범람 속에서 시선의 주체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찬찬히 살펴보고 요모조모 따져볼 때, 정보를 조합하고 지식을 창조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관계에도 정성을 기울인다. 섣불리단정하지 않고 애매한 것을 견디며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을 겸허하게 기다릴 줄 아는 경청의 공간이 열리는 것이다.
나는 어느 야간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매시간 수업이 끝날무렵 불을 끄고 다 함께 음악을 듣는다. 어둠을 꽉 채우는 선율은 각별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밝음 속에서 보이지 않던 삶의무늬가 드러나는 듯하다. 그리고 배움을 함께하는 동료들이 새삼스럽게 의식된다. 눈을 감을 때 비로소 열리는 차원이 있다.
일상의 이면을 더듬으면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생각의 씨앗을돌보게 된다. 더 나아가 미망과 맹목의 굴레를 자각하기도 한다. 이따금 조명을 끄고, 자신의 무명을 응시해보자. "인생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우리에게 들리는 것도 읽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닌, 우리에 의해 살아지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말이다. - P200

어느 노인복지센터의 센터장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매일방문하는 한 할아버지가 민원을 남발해 직원들을 힘들게 했다.
저녁에 귀가하고 나면 센터에 전화해서 시설의 운영 방식이나직원들의 서비스에 대해 시시콜콜 트집을 잡고 불만을 늘어놓는 것이 일과일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것만으로 기분이풀리지 않았는지, 센터에 다시 찾아와서 고성을 지르며 소란을피웠다. 게다가 분을 못 이기고 112에 전화를 걸어 신고까지 했다. 경찰이 출동하여 상황을 파악했고 아무 일도 아님을 확인했다. 경찰은 노인의 마음을 달래준 다음, 차에 태워 귀가시키기로 했다. 그 모습을 보던 센터장이 안타까운 마음에 물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셨어요?"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외로워서 그랬어" - P203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비전체주의 세계의 사람들이 전체주의 지배를 맞이할 자세를 갖게 된 것은, 한때 노년처럼 사회적으로 주변부적 조건에서 겪는 한계 경험이었던 외로움이 이제 우리 세기의 점점 더많은 대중이 매일 겪는 일상 경험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체주의는 대중을 무자비한 과정 속으로 내몰고 그들을 조직하는데, 이 과정은 현실로부터의 자멸적인 도피 행각처럼 보인다.
〔……) 단 한 사람의 전제적·자의적인 의지에 의해 지배당하는 모든 사람의 비조직적인 무기력보다 조직적인 외로움이 훨씬 더 위험하다. - P206

각자도생의 시대로 치달아온 세상, 코로나19로 더욱 고립되고 분절된 마음을 추스르고 ‘사회‘를 복원하는 작업이 시급하다. 어디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다행히 우리 안에는 타인과 공명하면서 행복감을 느끼는 유전자가 살아있다. 에고의비좁은 울타리를 넘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고 느끼는 체험을 통해 마음은 고양된다. 사회적 감각은 인간이라는 종을 하나로 묶으면서 서로의 존엄을 일깨워준다. 그러한 자각 속에서 파편화된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다시 ‘면‘으로확장될 수 있다. - P216

고립과 외로움을 극복하려면 사람들 사이의 연결이 중요하ㅣ만, 관계 맺기에는 적절한 경계 또한 지켜져야 한다. ‘좋은 담함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일정한 경계와 거리를 유지하지 못하면 관계에 탈이 나기 쉽다. 지나친 친밀감이집착으로 변질되어 과도한 요구를 하게 되고, 그것이 충족되지않을 때 섭섭함과 원망을 품게 된다. 자기와 다른 상대방의 고유한 영역(생각, 취향, 감정, 욕구 등)과 자율성을 간과하면서, 일방적인 지배 또는 과도한 의존으로 흐를 수도 있다. 저마다의내밀한 세계를 침해하지 않는 정도의 선線을 지킬 때, 무리하지않으면서 서로 의지하고 신세도 질 수 있다. - P227

경계는 각자 온전히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울타리다. 나를보호하면서 너를 지켜주는 방어막이다. 자기다움을 잃지 않을수 있는 한계가 명료하게 의식되고 존중되어야, 대등한 교류가가능하고 건강한 정체성과 자존감이 유지된다. 그러려면 자아의 밀실에 갇히지 않고 주책없이 상대방에게 휘둘리지 않도록균형 감각과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공감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면서 이뤄지는 정서적 지지다. 감정이입도 마찬가지다. 심리학자 하이코 에른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 P228

참된 감정이입은 모든 것을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정한거리두기를 요한다. (・・・・・…) 공감이란 단순히 ‘함께 느꼈기 때문에 분노하거나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배울 점을 찾고 배운 것을 적용해서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잘 공감하는 것이 끝이 아니라는 얘기다. 공감을 통해 우리는 지식의 레퍼토리와 행동의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으며, 세계와 사람에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문제를 풀고 위기를 극복하며 더 깊은 원인을 포착하는 것이 모두 쉬워진다. 그래서 감정이입은 ‘사회적인 좋은 삶‘을 여는 가장 큰 열쇠다. - P228

타인의 곁에 있으면서도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최악은, 곁에 있지 않으면서 아무 때나 내키는 대로 선을 넘어 훅 들어오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애정도 없으면서 함부로 조언하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기분을 상하게 하며, 제멋대로 평가하는 행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신중함에서 비롯된다. 서로에게 손을내밀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해야 관계가 지속 가능하다. ‘사이좋게 지내려면, ‘사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적절한 넓이의 사이가 확보되면, 상대방을 통해 자기의 마음을 더욱 명료하게 비추어볼 수 있다. 마치 어떤 사람이 들고 있는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려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어야 하는 것과 같은원리다. 서로를 아끼면서도 각자의 개별성과 고유한 영역에 유념해야 한다. 그렇게 형성되는 안전한 경청의 공간에서 우리는저마다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다. - P229

타인을 충분히 배려하되, 나에게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적절한 거리를 두거나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상대방의 속 깊은 이야기나 나를 위한진심 어린 조언에는 귀를 쫑긋 세워야 하지만, 별생각 없이 툭툭 던지는 말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야 한다.
"지혜란 무엇을 간과해야 하는지를 아는 기술이다."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의 말이다. 『둔감력 수업이라는 책의 제목처럼, 둔감해지는 것도 능력이 될 때가 있다. 핵심은 분별력이다. 지나쳐버려야 할 것들을 붙잡고 있지 않은가. 멈춰서 짚어보아야 할 일들을 놓치고 있지 않은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의얼굴을 계속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마음을 써야 할 사람에게무심하지 않은가. 피상적 판단을 거두어내자. 상투적 감정을 내려놓자. 속물적 통념에 삐딱선을 그으면서 틈새를 만들어보자.
그 자유로운 공간에서 너와 나의 진면목을 대면할 수 있을 것이다. - P230

이런 생물학적 역설은 사회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 ‘나‘(또는 우리)는 ‘나 아닌 것‘(또는 우리가 아닌 것)과 구별되는 정체성을 추구하지만, 이질성을 배제하면서 동질성만을추구하면 위험한 상황이 초래된다. ‘나 아닌 것‘을 받아들여야온전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나 아닌 것‘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이다. 자기 안의 타자성을 수용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드러나는 여러 모순을 편안하게 긍정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와 다르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너그러워질 수 있다. 그 결과 사회적으로 다양성이 증진되면서, 개인적으로도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 P232

도저히 상종할 수 없다고 여기던 사람들인데, 막상 얼굴을맞대고 대화하면 이해의 틈새가 열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면상황에서는 글이 아닌 말로 생각을 나누기에 표정이나 몸짓 등의 신호를 감지하면서 섬세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를몸으로 만나게 되면 그 ‘존재‘의 엄연함을 마주하게 되고, 상대방을 어떤 틀이나 범주로 섣불리 재단하기 어려워진다. 각자의생각에 갇히는 대신, 감정을 나누고 인격을 체감하면서 공유의지점을 탐색해갈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결과,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른 감정과 상태로 헤어질 수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애매함을 견디는 마음이다. 우리 두뇌는무엇이든 확실하게 규정하고 싶어 하지만, 인식의 대상은 늘 분명하지 않다. 사람이든 현실이든 언제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품고 있기 마련이다.  - P243

확신을 내려놓고, 명료함을 구해야 한다.
자기를 겸허하게 비우고 경청하기. 정직하고 열린 질문으로 다가가기. 모름을 투명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한 삶을 향하여 함께나아가는 마음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 그여백에서 상호 이해의 길이 열린다. 이해의 폭이 넓어지면 문제에 대한 진단과 해법도 더욱 유연하고 우아해질 수 있다. 그런의미에서 겸허한 질문과 경청은 창의성의 원동력이 된다. - P247

시선이 머무는 곳이 곧 삶이 깃드는 장소다. 깊이 응시하다보면, 보이지 않던 것이 눈에 들어온다. 탁 트인 벌판(野)에 설때, 시야視野가 펼쳐지면서 가슴이 열린다. 거기서 만나는 공동의 세계에 접속하면서, 우리는 타인과 세계에 충만하게 연결될수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산등성이를 따라가고 숲의 언저리를 찾아가고 들판도 걸어보자. 야외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멀리 닿고, 아득한 풍경에 눈길이 머문다. 시인의 말대로, 이런 습관은 눈 건강에 도움이 되고 마음의 부피도 키워준다. 그대면에서 우리는 근시안을 벗고 세상과 인생을 드넓게 조망할수 있다. 맑고 밝은 호연지기 일상을 충전할 수 있다. - P263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보는 것이 줄어든다. 윤해서 작가의말대로 "보이는 것들이 보는 것을 가로막는다. 보여지는 것들이 보아야 하는 것들을 뒤덮는다." 그 결과,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방치되고 마는 사각지대가 곳곳에 생겨난다. 보아야 할 사람을 놓친다. 아예 보이지 않아서 못 보기도 하고, 보긴 보았지만 무심결에 지나쳐버리기도 한다. 코로나19 속에서 시선은 더욱 가로막혔다. 거리두기와 격리 기간이 길어지며 왕래가 두절되었는데, 그동안 번거로운 만남과 접촉에 시달리다가 홀가분해진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고립과 단절 속에서 생계와 일상이빈곤해진 경우도 많다. 우울증의 증가가 한 가지 지표다. 마음이 연결되는 사회적 공간을 어떻게 회복할까. - P266

3년에 걸친 비상사태는 일상의 속살을 예리하게 드러냈다.
기존의 상식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해주었다. 거기에서 존재에대한 자각이 일어났다. 삶은 거대한 그물망으로 존립한다는 것.
생명은 무한한 사슬로 얽혀 있다는 것. 우리는 서로의 일부라는것….… 길게 지나온 재난의 터널을 돌아보면서 그 여정에서 일어난 배움을 되새겨보자.
퇴계 선생은 말씀하신다. "마음을 두 갈래 세 갈래로 흩트리지 말고, 한 가지로 올곧게 모아 만 가지 변화를 주시하라."
시선의 속도를 늦추면 마음이 보인다. 눈에 보이는 것의 안과밖을 넘나드는 직관이 자라난다. 로그인과 로그아웃이 유연하게 교차하고, 대면과 비대면은 순환해야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관심의 주권을 회복할 수 있다. 마스크 너머로 주고받던 따스한 눈빛으로 악수를 나누면서, 경청과 환대의 공간을 빚어낼수 있다. 팬데믹 시대를 건너가는 사회적 면역력은 거기에서 배양된다. - P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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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에 섬이 있었다
한때 다들 그 섬에 가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 섬에 가본 사람이 없었다
애초에 섬이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사이 다른 것이 들어섰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었다
아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있지 않았다
스마트폰과 스마트폰 사이에
사람이 있었다 아니
스마트폰 안에 사람이 들어가 있었다


이문재, 「사람」 부분,
시집<혼자의 넓이>



"지금 혼자가 되지 않으면 영영 혼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슬로건은 2020년 서울시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장려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표현이 다소 섬찟하다. 인간이 외톨이로 지내기는 어려운 일이고, 자칫하면 삶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다. 다행히 앞의 메시지는 경고이면서 희망 또한 암시하고 있다. 잠시멈춰서 코로나 19를 잘 극복하면 더 이상 혼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잠시‘가 아니었다. 3년째팬데믹이 이어지면서 ‘비상‘이 ‘일상‘이 되었다. 이른바 ‘뉴노멀‘
이 정착되었고, 이제 코로나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 P5

의들혼자 있다는 것은 어떤 공간에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상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리적으로 누군가가 내 옆에 있다 해도 그가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면, 혼자 있는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기준에서 본다면, 우리는 혼자 있는 시간이많다. 주변이 북적거리고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있지만, 마음 - P7

은 각자의 골방에 갇혀 있기 일쑤다. 주된 원인으로 미디어 환경을 지목할 수 있다. 거의 항상 접속해 있는 디지털 네트워크에 마음이 쏠려서 타인에게 무심해지기 쉬운 것이다. 그리고 코로나19로 비대면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오프라인 관계는 더욱소원해졌다. - P8

외면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소홀히 여기는 것만이 아니라,
무언가를 회피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를 뜻하기도 한다.
우리는 불편한 진실이나 고통스러운 현실을 애써 외면할 때가많고, 권력자들은 민생 관련 정책이나 약자들의 요구를 흔히 외면한다. 사회가 거대하고 복잡해질수록 삶이 여러 공간으로 분절되며, 그 결과 시야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비가시화는 사실상 성원권의 박탈로 이어진다. 다른 한편 미디어가 첨단화되면서 정보와 이미지가 폭주하게 되는데,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그를 통해 증폭되는 경향이 있다. 직접 대면하지 못하는 타자일수록 엉뚱한 모습으로 왜곡되기 쉬운 것이다. - P9

이제 우리의 일상과 마음을 다각적으로 살피면서 관계의기틀을 점검하는 작업이 요청된다. 위드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든 또 다른 팬데믹을 맞이하든, 의료적인 접근만으로는 한계가분명하기 때문이다. 심리적 방역의 버전을 업그레이드하면서사회적 면역력을 높이는 전략이 나와야 한다. 핵심은, 사람들사이의 유대다. 마음이 담긴 눈길로 서로가 연결될 때 삶은 단단해진다. 우리는 어떤 생각과 정서를 공유하면서 무슨 경험을함께 창조하는가. 몸으로 함께 있든 따로 있든, 서로를 온전히맞아들이는 환대의 시공간을 빚어가야 한다. - P12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생각해보았다. 만일 혼자 걷다가 비를 맞았다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있기에 어린아이처럼 빗방울과 놀이를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온몸이 젖어서 짜증 날 수 있는 경험을 일종의 축제처럼 승화시키는 힘은 서로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관계에서 생겨나는것이리라. 삶의 토대가 점점 위태로워지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 가운데 하나는 ‘안전 기지‘다. 사랑과 자유가 공존하고 너와 내가 상생하는 우정의 마당이다.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관계에 대한 기억 또는 소망을 불러내면서 세상을 조금씩 ‘새로 고침해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일상에 생기가 스며들 것이다. 이책이 그 작업에 작은 보탬이 되길 바란다. - P13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물리적 거리는 인간관계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는 말이 있듯, 누구나 가까이에 있는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그런가 하면, 관계의 성격이 물리적 형태로 드러나기도 한다. 권위주의적 조직의 경우, 회의나식사를 할 때 위계 서열에 따라 엄격하게 자리 배치를 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런 조직에서는 권력자의 측근이 막강한힘을 행사한다. 보스를 아무 때나 ‘접견‘할 수 있고, 제삼자의 바석 없이 ‘독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일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의 사회적 위치를 파악하려면그가 누구를 자주 만나는가를 확인하면 된다. - P20

"교도소에서 최고 잘못한 죄수들을 독방에 보내잖아요. 독방도 보면 화장실이 있어요. 근데 우리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왜 쪽방에 갇혀 있어야 하냐고요." 서울 용산구 동자동의 2평짜리 쪽방에 사는 주민의 말이다. 2022년 3월 오미크론 전염이폭증했을 때, 확진 판정을 받아도 생활치료센터에 들어갈 수 없는 이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노숙인, 쪽방 및 고시원 거주민 같은 주거 취약 계층은 어려움이 더욱 컸다. 확진자가 폭증하면서업무가 과중해진 보건당국이 제대로 안내를 하지 못한 채 결과적으로 다른 보완 조치 없이 자가 격리만 하도록 했기 때문인데, 비좁은 공간에서 종일 지내고 화장실도 이웃의 눈치를 보면서 최소한으로 이용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더욱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 P27

가정에서의 돌봄 노동도 가혹했다. 온라인 수업을 듣는 자녀와 온종일 집에서 지내야 하는 부모들의 스트레스는 점점 높아졌다. 치매 등을 앓는 환자나 장애아를 보살피는 이들의 고통도 한계 수준을 넘어서면서 비극적인 일들이 일어났다. 특히 발달장애인은 종일 실내에 고립되어 있다 보니 퇴행 증상을 보이거나 생활 리듬이 흐트러지는 경우가 많았다. 일례로, 어느 가정에서는 자폐 스펙트럼 장애가 있는 18세 아들이 한밤중에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 식구들을 지치게 했다고한다. 가족이 책임지고 감당할 수 있는 돌봄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 P29

이렇듯 거리두기는 사회적 안전망을 해체하여 삶을 피폐하게 하는 측면이 있다. 가정 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통로와 완충지대가 줄어들고, 경로당의 폐쇄 등으로 인해 이웃 간에교류를 하지 못하면서 외로움이 깊어졌다.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도 병문안을 받지 못했다. (내 지인도 2022년 초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1년 넘게 투병하는 동안 한 번도 찾아갈 수 없었다.)고립무원의 상태에서는 건강도 위태로워지고, 경제력도 떨어지기 일쑤다. 사회적 연결망이 끊겨서 생계에 위협을 받고 그로인한 불안과 스트레스가 몸에 악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다. 결국
‘고립‘과 ‘빈곤‘과 ‘질환‘ 사이에 악순환이 일어나는 것이다. - P30

과제는 거리두기의 후유증을 다스리는 일인데, 핵심은 인간적유대를 복원하고 확장하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은 무엇으로 이어지는가. 마음이 오가는 길은 어떻게 열리는가. 삶이 연결되는접점과 계기들을 다양하게 마련하고 사회의 토대를 새롭게 다지는 작업이 절실하다.
코로나19가 지나간다 해도 머지않아 또 다른 팬데믹이 창궐할 수 있다. 예전에 비정상으로 여겨지던 것이 정상으로 바뀌는 뉴노멀 시대, 이제 기존의 상식을 점검하면서 일상을 재구성해야 한다. 각종 재난으로 인한 비상사태를 슬기롭게 통과하려면 무엇이 삶의 기본 값(디폴트)이 되어야 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촘촘하면서도 광범위한 사회 안전망을 유지하면서,
재해에 대비하는 시스템을 가동시킬 때 불확실성과 리스크를최소화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문명으로의 전환을 도모하는 지혜와 동력은 사회 그 자체를 건실하게 꾸려가는 과정에서 우러나온다. - P31

얼굴은 서로를 알아보는 ‘표지판‘으로서, 인간관계의 기본토대를 이룬다. 선천적 시각장애인도 손으로 얼굴을 만지면서지인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다. 이목구비의 특정한 조합을 간파하는 능력은 타고난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다른 동물들도 얼굴로 상대를 식별하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은 그 데이터베이스가엄청나다. 생김새를 말로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순간적으로 알아맞힌다. 심지어 시간이 한참 지나서 얼굴모양이 변했는데도 알아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이들은엄마가 어릴 때 찍은 단체 사진에서 엄마를 찾아낼 수 있고, 기억력이 특별히 뛰어나지 않은 사람이라도 몇십 년 만에 만나는동창을 알아본다. - P38

인간이 손으로 어떤 일을 하든, 그의 얼굴은 진실을 말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얼굴은 몸의 일부이면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다른 신체 부위들은 상황에 따라 옷으로 감추어도 되고, 어떤 부위는반드시 가려야 한다. 그에 비해 얼굴만큼은 평생 ‘나체‘로 드러내야 한다. (다행히 웬만큼 추워도 얼굴은 얼지 않는다.) 서로의얼굴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은 대인 관계의 전제요 의무라고 할수 있다. 그러다가 사람이 숨을 거두면 흰 천으로 얼굴을 덮어 - P39

준다. 그리고 입관식이나 일부 장례식장에서는 곱게 단장한 얼굴을 드러내 유족이나 조문객들이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게끔한다.
얼굴은 무엇인가? 그 어원을 살펴보면 ‘얼의 꼴‘이라는 설이 있고, 얼이 들어오고 나가는 굴 즉 영혼의 통로라는 풀이도있다. 어느 경우든 혼魂이 담긴 곳이라는 뜻을 품고 있다.
 ‘얼빠진‘ 사람이나 ‘얼간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제정신인지 아닌지는 얼굴의 상태로 즉각 확인되는 것이다. - P40

인간에게 대면은 삶의 기본 값이다. 태어나면서부터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누군가의 얼굴을 바라본다. 서로의 안색을 살피고 표정을 지으면서 감정의 통로를 만든다. 아기에게 타인의 얼굴은 세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원초적 기억 때문일까. 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때 처음에는 아무렇게나 선을 긋다가 어느 정도 인지가 발달하면 특정한 대상을 의식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때 거의 모두 얼굴을 그린다. 원을 그리고 그 안에 점을 찍는 식으로, 매우 엉성하고 거칠지만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곧 정교하게 묘사하기 시작한다. 얼굴을 그리는데 왜 그렇게 몰입하는가. 자신의 마음에 뿌리 깊게 각인된 형상을 직접 그려내면서 즐거워하는 것이리라. - P40

얼굴은 그 사람의 인생 여정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그것을 입증하는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자원자들에게 남편들과 아내들의 독사진을 한 무더기 주었는데, 결혼식 날 사진과 결혼25주년 기념사진이었다. 그 사진들을 보고 누가 누구와 부부인지를 알아맞히는 것이 과제였다. 자원자들은 결혼식 날 사진으로는 부부를 찾아내기 어려워한 반면, 25주년 사진으로는 많이적중시켰다. 부부가 오래 함께하면서 닮아가기 때문인데, 서로의 미소나 찌푸린 표정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한 결과 자주 사용하는 얼굴 근육과 사용하지 않는 근육이 인상을 비슷하게 만든다고 한다. - P41

얼굴 이미지에 그토록 반짝이는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인간의 어떤 속성이 투영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리라. 얼굴은 그 사람 자신과 동일한 실체로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본적 없는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를 들을 때, 또는 라디오나 전화를 타고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 자연스럽게 그사람의 얼굴을 상상하게 된다. 누군가를 그리워하거나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을 무심코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몸매나 걸음걸이 같은 것을 연상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이렇듯 인간의 얼굴은 해부학적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거기에는 정신성과 사회성 내지 윤리성이 깃들어 있다. 얼굴은 인격의 그릇이고 사회적 자아의 표식이다.  - P43

얼굴은 인격을 가늠하는 표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누군가가 발언을 하면,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얼굴을 본다. 운전할 때도 앞차가 꾸물거리거나 차선을 갑자기 확 바꾸면, 그 차를 추월하면서 고개를 돌려 운전자의 얼굴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얼굴은 사람됨의 깊은 본질을 드러내는 바탕 화면이다. 인간의 존귀함이 상당 부분 사회적 차원에서구현된다고 할 때, 타인이 나의 얼굴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비참한 치욕의 바닥으로 추락하기도 하고 더없이 고결한 경지에 오르기도 한다. 타인 앞에 나를 드러내는 것, 누군가와 대면하는 것이 다소의 긴장을 수반하게 되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있다.  - P44

마음은 얼굴빛으로 드러나고, 강렬한 의지는 눈빛으로 확인된다. 그래서 의기투합하거나 결의를 다질 때 서로의 눈길을맞추는 것은 자연스럽다. 반면, 거짓말하는 사람이 시선을 자꾸만 피하는 것은 자신의 내심이 들킬까 봐 두려워서 그렇다. 똑바로 쳐다보고 거짓말을 하는 경우 눈을 자꾸만 깜빡인다고 하는데, 그 또한 마음을 감추려는 동작이다. 전문 사기꾼들은 그런 무의식적인 신체 반응을 제어하면서 감쪽같이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 - P52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는 눈길은 마음을 부드럽게 확장시킨다. 인간에게 그 첫 경험은 갓난아기 때 젖을 빨며 자연스럽게엄마를 바라보는 가운데 이뤄지는데, 그러한 교감은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도 가능하다. 아프리카 케냐에서 인간에게 희생당하는 야생동물들을 돌보아온 동물 양육 전문가 데임 대프니 셀드릭은 어미를 잃은 아기 코끼리에게 인공 수유를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육법과 우유 조제법이 뒷받침된 덕분이지만, 야생동물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도 빼놓을 수없다. 그가 수유하기 전에 반드시 거치는 순서가 있는데, 아기코끼리를 오랫동안 바라보는 일이다. 그 조용한 응시를 통해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고 한다. - P56

안과의사가 검진을 목적으로, 또는 친구가 눈에 들어간 이물질을 빼주기 위해 자세히 들여다볼 때의 눈은 신체의 일부에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서로 소통할 때 바라보는 상대방의 눈은단순한 지각의 대상이 아니다. 내가 보고 있는 그 눈은 동시에나의 눈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사람이 마주 볼 때, 그시선의 역학은 복잡하다. 내가 상대방을 보는 것을 그 사람이본다. 내 눈을 보는 그의 눈을 내가 보고, 그렇게 보고 있는 눈을상대방이 또 보고…… 마치 두 개의 거울을 맞대면 거울 속에거울이 끝없이 나타나듯, 마주 보는 시선은 무한의 연쇄 고리로이어진다. 그리고 거기에 깃드는 여러 감정이 실시간으로 피드백되면서 대화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어떤 감정은 증폭되기도하고, 다른 감정은 상쇄되면서 사그라들기도 한다. 또는 전혀새로운 감정이 우러나와 가슴을 맴돌기도 한다. - P57

대화는 맥락을 함께 창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글쓰기를어려워하는 사람도 말로 하라고 하면 청산유수처럼 쏟아낼 수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때는 의미의 장이 쉽게 생성되고 공감대도 잘 구축된다. 그래서 표정이나 억양만으로 중요한 메시지가 전달되기도 한다. 표현이 부실해도 다른 사람이 질문이나 첨언으로 보완해주고, 단어가 정확하지 않아도 눈치껏 해석한다. 속된 표현으로,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것이다. 반면에 글의 경우, 개떡같이 썼는데 찰떡같이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입체적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오직 글자만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따라서 문장을 정확하게 구성해야하는데, 그것은 고도의 훈련을 요구한다. - P60

대화는 ‘라이브 커뮤니케이션‘이다. 눈 맞춤으로 마음을 접속하면서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는 언어의 예술이다. 구불구불이어지는 말, 더듬더듬 꿰어지는 생각으로 삶의 지평을 넓혀가는 작업이다. 그러한 시간을 함께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일상의 이런저런 괴로움과 어려움을 견디고 넘어서는 데 커다란 힘이 될 것이다. 대면으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우리는 ‘살아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 P61

온라인으로 소통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효율적인데, 몇 가지를 나열해보면 이렇다.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도 언제든 연락할 수 있다. 아무 데서나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수신·발신할 수 있다. 메시지를 무료로 얼마든지 전송할 수 있다.
사진이나 첨부 파일을 대량으로 올릴 수 있고, 동영상 등 관련사이트를 간편하게 하이퍼링크할 수 있다. 여러 사람이 정보를공유하면서 다자간 통신이 가능하다. 주고받은 대화 내용이 입력된 시간까지 표시되어 고스란히 보관된다. 자판을 눌러서 문장을 작성하기에 완성도 높은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감사함,
미안함, 축하, 격려, 기원 등을 전해야 할 때 말로 하면 자칫 쑥스럽고 어색해질 수 있는 이야기를 편안하게 전달할 수 있다.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은 이모티콘이라는 상형문자로 보완할 수 있다. - P95

디지털 공간에서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침묵의 언어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오프라인에서는 말이 오가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편안할 수 있다. 서로를 향해 온전히 현존하는 가운데, 말 없음 자체가 또 다른 언어로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한침묵은 더 깊은 생각이 꿈틀거리는 여백이 될 수 있다. 반면, 온라인에서 침묵은 무의미한 공백으로 느껴질 때가 많다. 도우리작가는 그 차이를 이렇게 통찰한다. - P97

침묵은 단지 답장을 기다리는 상태와는 다르다. 서로의 말을곱씹는 시간을 주고받으며 대화하는 일이다. 침묵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란 그만큼 대화의 맥락이 많이 쌓인 관계다. 그런데 메시지 플랫폼들은 상대가 메시지를 읽었는지, 입력 중인지, 실시간으로 접속 중인지, 몇 분 전에 접속했는지까지 알려준다. 미세먼지처럼 온갖 푸시 알림, 뉴스, 이모티콘, ‘좋아요‘가 떠돌아다니는 와중에 침묵의 공간을 지킬 방법은 무엇일까. - P97

‘말을 곱씹는 시간‘과 ‘침묵의 공간‘이 허락되기 어려운 온라인 세계에서 우리의 마음은 촉박해지기 쉽다. 그렇지 않아도디지털 공간에서는 무한의 정보가 빛의 속도로 순환한다. 우리는 시시각각 답지하는 정보들의 진위 여부나 가치를 찬찬히 따질 여유가 없고, 그 의미를 여러 맥락 속에서 헤아리기도 어렵다.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를 즉흥적으로 판단한 다음, 옳음과 그름 또는 호감과 비호감의 이분법으로 재빨리 결론짓는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생각으로 함께 나아가기가 매우 어렵다. 수많은 사람이 일방적으로 발언을 쏟아내는 공간에서 순식간에 감정이 충돌하고, 이편과 저편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게다가 사용자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선별하여 제공하는 추천 알고리즘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뭉치도록 만들어 집단 사고와 확증 편향을 부추긴다. 이른바 필터 버블 filter bubble, 또는 메아리방 ccho chamber 효과다. - P98

코로나19의 후유증은 다방면에 걸쳐서 나타났는데, 경제적타격 및 빈부의 양극화와 함께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이 학교교육에서의 학습 손실과 그에 따른 학력의 격차다. 온라인 수업이시행되면서 디지털 매체에 익숙하지 않거나 가정환경이 열악한 학생들, 그리고 배움에 대한 열의가 없거나 공부 습관이 배어 있지 않은 아이들의 학습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실에서와 달리, 교사들이 그런 격차를 인지하면서 개별적으로 지도할수 없기에 뒤처지는 아이들은 방치된다. 저학년일수록 지적 발달의 정체는 심각한 결과로 이어지고, 오랜 기간에 걸쳐 부작용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된다.
17 유기적인 연 - P99

비인지능력의 핵심 가운데 하나가 사회적 지능이다. 코로나19로 등교가 막히면서 학생들의 성장이 지체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친구들을 사귀지 못한 것이다. 어린 나이일수록 복합적이고 균형 있는 지성의 발달이 필요한데, 사회성을 익히지 못하면 지적 능력과 인격 발달에 지장이 생긴다. 그렇다면 사회성의 결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는가. 광주광역시의 어느중학교에 근무하는 이 모 교사에 따르면, 2022년 전면 등교 수업이 이뤄지면서 드러나는 학교 폭력의 양상이 매우 기이하고 당황스럽다고 말한다. - P100

인간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맥락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상대방이 말하는 단어와 문장의 의미를 아무리 정확하게파악한다고 해도, 맥락을 놓치면 엉뚱한 해석에 이르고 만다. 맥락이 무엇이길래? 국어사전에서는 ‘어떤 일이나 사물이 서로 연관되어 이루는 줄거리‘라고 풀이하고 있다. 똑같은 행위나 사건,
발언이라 해도 그 앞뒤에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흐름의 얼개가 맥락인 것이다.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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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저녁, 늘 그렇듯 서로 어울리지 않는 여섯 명의 목적 없는 수다로 채워진 긴 하루의 끝에, 나는 로더의 수영 의식을 위해 그와 함께 해변으로 걸어 내려갔다. 로더는 돌들을 밟으며 조심스레 물가로 걸어갔고, 나는 곁에서 그를 쳐다보지않고 걸었다. 우리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은서늘하고 눈부셨으며 가슴이 아플 만큼 감미로웠다. 그러다 내가 로더를 향해 몸을 돌렸다. 사라져가는 빛 속에서 로더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거기, 물가에 수평선을 내다보며 서 있었다.
그의 뒤로는 사람들이 있었고, 앞으로는 자연의 세계가 펼쳐져있었다. 로더의 얼굴에는 강렬한 안도감이 담겨 있었다. 그의식을 하게 만드는 것은 그 강렬함이었다. 문득, 로더가 혼자 갇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더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외로움을 잊도록 자연이로더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 P151

나는 마치 로더 안에서 분노를 찾아냄으로써 내 안의분노를 줄이려는 것 같았다. 로더와 함께 지내는 동안 나는 정말로 그의 불능 상태를 숭배하게 되었다. 그런 식으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자신의 일부에 계속 몰두할 수 있었다.
나는 장례식장에 놓인 로더의 관을 바라보았다…. 내가 밑바닥으로 가라앉혀버린 수년 동안의 멋진 대화를, 침몰해버린황금과 건져낸 쓰레기들을….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내가 무엇을 할수 있을까? 배는 벌써 몇 시간 전에 가라앉았고, 나는 경험이너무도 부족한 수영 선수였다. 나는 몸을 돌려 열린 문을 향해걸어갔다. - P166

얼마 전 뉴욕에서 열린 어느 파티에서 샬럿과 우연히 마주쳤다. 다음 날에는 식당에서 대니얼을, 그다음 날에는 우체국에서 마이라를 만났다. 나는 이 사람들을 무척 좋아했는데 (얼마나좋아했는지 모른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 머릿속에 들어있는 문장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으니까.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내가 그들을 사랑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말하는 문장의 형태에 반응할 때면 내 문장들도 풍요로워지고 자유로워진다. 생각은 풍부한 표현으로 넘치고, 감정들은명확해지고, 다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진다. 내게 곧바로 반응해주는 누군가의 지성이 있는 곳에서 내 지성이 작동하는 소리만큼 나를 살아 있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없다. 샬럿이나 마이라, 대니얼과 대화할 때면 서걱거리는 느낌이 씻겨나간다. 나 자신에게 연결된 나는 이제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된다. 고독이 사라진다. 피부 아래, 나의 내면은 평화롭다. - P169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언어는 일상적용도로 쓰이지 않게 되었고,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기 위해서가아니라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야기를 한다.
대학에서의 시간을 헤쳐나가는 여정은 내게 마치 순례길과도 같았다. 나는 지역 인사들, 존경받는 사람들, 귀하신 분들 사이를 이리저리 오갔다. 때로는 환영받았고, 때로는 무시당했으며, 또 때로는 동등한 사람을 대하는 정중한 태도로 받아들여졌다. 만남마다 제각기 다른 결과가 뒤따랐다. 나는 받아들여지면서 무언가를 배웠고, 무시당하면서 또 다른 무언가를 배웠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어떤 경우든 나는 매일의 대화가 굴러떨어지는 텅빈 공간에, 열렬한 수다를 둘러싼 그윙윙거리는 침묵에 충격을 받는다. 내가 학교에서 알게 된 것이 있다면 그 침묵의 역사다. - P176

내가 처음으로 ‘대충 만들어낸 반응 증후군‘을 구분하게 된것은 임팔라에서였다. 그때는 내가 그 증후군의 피해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이번에는 나 자신이다소 큰 규모로 ‘대충 만들어낸 반응‘을 보였고, 그러자 그 역학이 뚜렷하게 다가왔다. 일의 앞뒤가 딱 맞았다. 학기가 진행될수록 낭독회의 객석이 점점 비어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맥 디엔스택이 왜 소외당하는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지도. - P208

나는 커피를 한 잔 타려고 일어났다. 이건 바보 같은 짓이야, 나는 물이 끓어오르기 직전인 주전자에 대고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책망해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안 좋은 생각은몇 시간이나 며칠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내가 무엇을 하든, 강의를 하든, 책을 읽든, 운전을 하든 갑자기 ‘로이드와 캐럴과폴‘이 기억났고, 그 생각은 바늘처럼 내 마음을 찔러댔다. 내가원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그들과 함께 있는 것, 그들의 관심, 그들의 즐거움뿐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꼴찌에게 주는 상처럼 감흥이 없었다. - P213

저녁이 끝날 무렵, 배가 부른 나는 식당을 나섰다. 늦은 시간이었다. 열기는 사라져 있었다. 나는 사막의 깨끗한 공기에숨을 깊이 내쉬며 잠깐 걸었다. 임팔라 어느 곳에서도 나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았다.
그런 대화를 많이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한 번 정도만 있어도충분할 텐데, 그 한 번이 내겐 없었다. 비슷한 대화는 많이 나눴지만, 정확히 그런 대화는 나누지 못했다. 그러니 로이드와 캐럴과 폴에 관한 생각을 곱씹을 수밖에. - P214

결혼은 친밀감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유대감은 부서져 내린다.
공동체는 우정을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참여는끝이 난다.
지적인 삶은 대화를 약속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 삶의 신봉자들은 괴상해진다. - P216

사실은 정말로 혼자 있는 게 더 쉽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면서 그것을 해결해주려 하지 않는 존재와 함께 있는 것보다는.
그럴 때 우리는 결핍과 함께하게 되는데, 그건 어째선지 참을수 없는 일이다. 그결핍은 가장 나쁜방식으로 우리가 정말로혼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다시 말해 우리의 상상을 억누르고, 희망을 질식시킨다. 우리가 처음에 갖고 있던 활기를 억누른다. 사기가 꺾이고 무기력해진다. 무기력은 일종의 침묵이다. 침묵은 공허함이 된다. 사람은 공허함과 함께 살아갈 수 없다. 그 압박감은 끔찍하고, 사실 참기 힘들며, 견뎌서는 안 되는것이다. 그 압박감을 견디다 보면 사람은 폭발하거나 무뎌지고만다. 무뎌진다는 것은 슬픔 속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 P216

하루 일이 끝나고 그들이 헤어질 때에도 어머니와 대화하고 싶었던 레빈슨 씨의 욕구는 종종 다 해소되지 않았고, 그는밤늦게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는 습관이 생겼다. 이 편지들은분위기와 내용에 있어 놀랄 만큼 다채로웠다.
편지는 그날 그들의 대화가 끝난 시점을 반영하면서 시작되기도 했고, 그가 극장에서 알 수 없는 그 무언가에 대한 갈망에 흠뻑 젖었노라고 갑작스레 알리기도 했으며, 아이가 아파서집이 혼란스럽고 인생이 지옥 같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편지에 - P219

적힌 언어는 시적일 때도 냉소적이거나 자포자기한 어조일 때도 있었는데, 그가 오직 글에서만 드러낼 뿐, 베이커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는 드러내지 않는 다양한 반응들이었다. 주제가무엇이든, 분위기가 어떻든, 자정에 자리에 앉아 레빈슨 씨는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길게 그리고 느긋하게 편지를 썼다.
그는 만약 극장에 갔다면 그 공연과 배우들의 연기와 14번가에 모인 사람들을 묘사했고, 아이가 아프면 방 안의 분위기와 아픈 아이의 안색, 의사가 어떻게 해주었는지를 털어놓았으며, 전에 나누던 대화를 이어갈 때면 뉘앙스와 여담을 넉넉하고 자유롭게 섞어 넣었다. 필연적으로, 그는 자신이 얼마나 생각이 많은지, 그리고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갈망에 차 있는지를 드러내곤 했다. 그는 바로 그 순간의 날씨를, 그가 앉아 편지를 쓰고 있는 테이블 너머 창문으로 보이는 거리의 모습이 어떤지를 글로 옮겨놓기도 했다.  - P220

로라와 나의 우정은 20년 넘게 친밀하게 이어져 왔는데,
우리 삶의 일상성에 대한 논평 거의 대부분이 전화선을 통해이루어져 온 것이 특징이다.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는 각자 거치대에 수화기를 놓고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척 자기 방의 텅빈 곳을 노려보면서 대화에 집중한다. 이 대화들에는 문학, 정치, 분석처럼 우리가 공통으로 몰두하는 주제들이 필연적으로엮여 있지만 산만해지지는 않는다. 몇 분이 지나면 대화가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라는 우리의 지속적인 관심사를 다시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마치 둘이서 장거리 전화로어떤 세미나에 영원히 참여하고 있는 것만 같다. - P221

정말, 나는 왜 더 이상 편지를 쓰지 않는 것일까? 편지를쓰는 일이 내게는 솔직히 귀찮게 느껴지고, 가능하면 피하고싶은 의무가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 편지를 쓰려고 애써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분명 기쁨의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그러다 보면 기운이 회복되는데도, 내가 편지 쓰기를 에너지를 소모하고 머릿속을 굳어버리게 하는 행위로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나는 왜 편지 쓰기와 싸우는 걸까? 왜 내 의지는 이렇게분열되는 걸까? - P224

이층으로 달려 올라가 구두를 벗어 던지고, 편안한 의자에 털썩 앉아 봉투를 뜯어 열고는, 좋은 읽을거리에 집중하곤 했다. 그 점이 설레는 부분이었다. 좋은 읽을거리가 약속된다는 점 말이다. 그런 읽을거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내 친구들이 편지를 잘 못 쓸 수도있었으니까) 그 약속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상관없었다.
나는 편지를 손에 들고 거듭 읽고, 편지와 의견을 주고받고, 편지를 참조하곤 했다. 이 마지막 부분이 중요했던 건 내가 편지읽기를 끝내자마자 거의 곧바로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기 시작하곤 했기 때문이었다. 하루나 이틀 뒤에 자리에 앉아 답장을 쓰면서 종이에 적어넣을 문장들이었다. - P226

나는 편지를 받고 나서 답장을 쓰기 전까지의 이런 시간을소중하게 여겼다. 생각을 정리하고, 주제들을 음미하는 일을 사랑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떤 순서로말할 것인가? 친구에게 내 근황을 알리기 위해 사실과 느낌을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기분을 묘사할 수도, 정보를 전달할 수도, 책이나 행사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말할 수도, 분위기를 사실보다 부풀려 페이지 위에 만들어낼 수도 있었다. 편지를 받는 일도 설렘을 공유하는 일이었지만, 편지를 쓰는 일은 그보다 더 큰 기쁨이었다. 문장들은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시에흠없이 유창하게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수동 타자기로 타이핑한 내 편지들이 레빈슨 씨의 편지들처럼 보였다는 걸 고쳐 쓰거나 지워진 문장 하나 없이 깔끔했다는 걸 이제 나는 깨닫는 - P226

다. 마치 우리 두 사람 모두 숙련되고 실수 없는 솜씨로 편지를써내는 공통의 생산 방식을 이용하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오늘날 편지 쓰기는 하기 싫은 일이 되었다. 나는 문장을쓰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편지를 쓸 때 나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자세히 말을 하지 않고, 폭넓게 여러 가지를 끌어오지 않으며, 길게 혹은 느긋하게 묘사를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럼에도, 편지 한 통을 제대로 쓰려면 몇 시간이 걸린다. 나는 결국 한 편의 제대로 된 글을 작성해야 한다. 일련의메모를 그저 휘갈겨 쓸 수는 없다. 온전한 문장들을 온전한 단락을 갖춰 써야만 한다. 단락들이 서로 호응하고 서로에게 말을 걸게 해야 하고, 한 편의 글로서 일관성이 있게 해야 한다.
표현하는 능력은 글쓰기에 달려 있고, 결국 그것이 편지 쓰기의 과업이다. 의미가 잘 드러나게 소통하는 것. - P227

레빈슨 씨는 방심한 채 이루어지는 대화의 즐거움을, 힐링을 추구하는 문화가 주는 그 비범한 선물을 알지 못했다. 한밤중에 혼자서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를 지닌 채, 그는 그저 형태를 갖춘 문장이 주는 즐거움만을 얻었다. 그 즐거움은 말로 하는 대화가 데려갈 수 없는 곳으로 그를 데려갔다. 그로 하여금자신 안에 있는, 편지가 아니었으면 갈 일이 없었을 장소들에비집고 들어가게 했다. 그 편지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의혼돈을 꿰뚫어 보며, 쓰는 것으로부터 자신이 무엇을 느끼는지알아내고자 한 갈망의 기록이다. 다른 종류의 내적인 추구다.
다시 말해, 지도에 없는 공간으로의 여행이다. - P235

정보의 전달이란 표면을 건드려보기 위해 일련의 연결 신호들을 발신하는 일이다. 반면 이야기하기란 황무지 한가운데한 줄기의 길을 내는 일이다. 삶에는 둘 다 필요하다.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경험이 부족해진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데는 반드시 커다란 대가가 따른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두 가지를 모두 갖는 것은 비경제적이며 둘 중 하나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 P236

1937년, 작가 에드먼드 윌슨Edmund Wilson은 시인 루이스보건Louise Bogan에게 작업으로 돌아옴으로써 신경쇠약에서 회복할 수 있을 거라고 충고하는 편지를 썼다. "우리는 삶을, 사회와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우리 눈에 들어오는 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윌슨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 진실로 만들어낼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우리가 쓴 작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지성과 상상력과 손으로,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사숙고를 거쳐 해낸 작업들이 결국에는 세상을 다시 만들어냅니다." 그와는 반대로, 작업을 하지 않는 일, 심사숙고를회피하는 일 역시 세상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편지를 쓰고자하는 욕구가 내 안에서 유산될 때마다 나는 내가 비난하는 세상을 만들어낸다. 이야기를 하고픈 충동을 표류시킨다. 소음이세상에 만연하게 내버려둔다.
편지 쓰기가 고귀한 일인 게 아니다. 자신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고귀한 일이다. - P237

이 책에 실린 캐츠킬산맥 호텔들에서의 경험(‘똑바로 앞을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나, 로더 멍크라는 가명으로 등장하는 자신과 친밀했던 한 여성에 대한 고닉의기억(나는 경험이 너무도 부족한 수영 선수였다)을 읽다 보면누구라도 그의 시선이 얼마나 예민하고 집요한지, 그가 얼마나가차 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냉정한 동시에 뜨거운 작가인지 실감할 수 있다.
고닉은 피상적인 시선으로는 결코 가닿을 수 없는 곳을 꿰뚫어 본다. 정신없고 고된 노동 한가운데에서 벌어지는 욕망과권력의 소리 없는 악다구니를, 한 사람이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때 취하는 방어기제들을, 누군가가 우리를 악의 없이소외시킬 때 우리 마음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함을, 도시를채우는 수많은 익명의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우울속으로 가라앉는 순간과,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기적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무섭도록 정확하게 포착해낸다. - P239

이 글이 "함께가 아니라면 우리가 존재할 다른 곳은 없었다고 느껴질 만큼 열렬하고 충만했던 최초의 자매애와 행복감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삶에 있어
‘일‘과 ‘사랑‘을 예전과는 다른 의미로 재정립할 수밖에 없게되는 과정에서의 갈등과 혼란, 운동의 가장 뜨거운 시기가 지나가면서 여성들의 연대가 서서히 해체되는 시기에 찾아온 상실감과 고통, 그리고 마침내는 그 상실로부터 더욱 견고하게자신을 재정립하는 ‘두 번째 각성‘의 시간들까지 다루고 있기에 특히 그렇다. 고닉은 페미니스트로서 역사적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고, 그 변화의 물결을 온몸으로 맞아냈다. 그 시간과경험들은 이후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해, 여러모로 불가능하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꼭 이뤄내야 할 이상인 평등에 대해,
결혼제도에 대해, 대도시에서 여성으로서 글을 쓰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해 고닉이 써낸 많은 에세이와 문화비평에 영향을미쳤다.
- P240

에세이스트로서 고닉의 전문 분야는 외로움이고, 그 전문성에 있어 그는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사람의 마음에 타인들과 세계를 감각하고 받아들이는 촉수가 있다면, 고닉은 남들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그리고 민감한 촉수를 지닌 사람일 것이다. 외로움이라는 인간 본연의 상태를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람 사이의 단절과 침묵과 소통 불능상태 같은 "영혼을 죽이는 사소한 일들"의 관행을 어느 정도묵묵히 체념하고 사는 것이 보통의 삶이라면, 고닉은 그렇듯절망 속에 갇힌 상태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어 이렇게 묻고 또묻는 사람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이 사람은 왜 나를 알고 싶어 하지 않지? 저 여자는 왜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왜 이토록 가까워졌는데도 여전히 의견이 분열될까?‘ 우리는 왜 조금 더 자기 자신에 가까운 모습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수 없을까? 왜 조금 더 서로의 말에 귀를기울일 수 없는 것일까? - P241

그런 질문들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애정이 필요한지를.
하지만 마음을 드러내다 상처받는 게 두려워 불 꺼진 방 전화기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대신, 고닉은 끊임없이 다가가고 말을 걸고 질문한다. 우리의 지성이 서로 만나 한없이 확장되고뻗어 나가는 순간의 기쁨을, 우리의 목소리가 방해받지 않고경청될 때 찾아오는 충만한 감정을, 거리의 이름 모를 사람들이 말없이 전해주는 든든한 안도감을, 믿고 소망하고 찾아 헤맨다. 외로움 앞에 꼿꼿하고 싶은 마음과 타인과 연결되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어떻게도 할 수 없을 때 ‘거리로 나가 걷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고닉의 에세이를 읽으며 배운다.
자신이 산책을 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이만큼멋들어진 방식이 또 있을까. - P242

또 하나, 고닉의 문장들은 정말이지 독특하다. 전반적으로밀도가 높고, 종종 시적으로 압축되어 있으며, 독자에게 의미를일방적으로 전하기보다는 함께 생각하기를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메트로놈이 내는 소리처럼, 혹은 도시 한복판에서 버스킹을하는 누군가가 울려내는 비트처럼 특유의 음악적 리듬과 박동들로 가득한 문장들이기도 하다. 혈관에 직접 주사되는 약물처럼 짙고 강렬하게 스며드는 그 통찰 하나하나가 독자들에게도고스란히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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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츠킬 산맥의 낡은 호텔 지역이 보르시 벨트 농담‘의 배경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1950년대 후반, 대학생시절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던 내게 캐츠킬 산맥은 위험하고 짜릿하며 거친 공간, 포식동물만 득시글하고 온순한 동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이었다. 그곳의 호텔들에서 몇 년을 보내며 나는 직무의 야수성을, 환상의 살인적인 면을, 쾌락을 제공하기 위해 꾸려진 세계에 사는 사람에게 가해지는 고립을 처음 - P83

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최근 들어 그 고립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곳에 처음 닿는 순간부터 그 고립이 얼마나 두드러졌으며 적나라하고 선명하게 드러났는지에 대해.
- P84

가먼트 지구의 세일즈맨과 미드타운에서 일하는 비서들로 꽉 찬 크고 화려한 호텔에서, 열기와 악다구니로 가득한음식들이 날아다니고, 쟁반들이 부딪히고, 종업원들은 욕설을 퍼부어대는) 엄청나게 큰 주방을 어색하게 들락날락하며 보낸 그첫 주말, 쟁반을 너무 꽉 움켜쥔 나머지 그 뒤로 며칠이나 내열 손가락 관절은 전부 하얘져 있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나는내 바로 옆에서 그릇 치우는 일을 하던 소년이 메인 요리 세가지를 맛본 손님에게 주먹을 내밀며 "관절 샌드위치 좀 드릴까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던 일이 떠올랐다. 하지만 일요일 밤, 입을 쩍 벌린 엄마 앞에서 식탁 위에 1달러짜리지폐 50장을 내던졌을 때는 달콤한 기쁨을 느꼈고 내가 다시일하러 가리라는 걸 알았다. 그토록 자신만만한 도덕주의자처럼 굴던 나라는 노동자 계급 소녀의 내면에는 처음으로 욕망할 기회가 생긴 데서 오는 예기치 않은 흥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 P85

다섯 번째 호텔에서 나는 목에서부터 무릎까지 온통 가슴밖에 안 보이고, 조그만 발에 앙증맞은 신발을 신고, 부드럽고포동포동한 손에 보기 좋게 매니큐어를 칠하고, 화장한 얼굴에앳된 두 눈이 돋보이는 한 여자 손님에게 서빙을 하게 되었다.
정확하게 3분 동안 익힌 달걀들을 테이블에 가져다주자 여자는 내게 말했다. "아가씨, 달걀 좀 까줘. 껍데기가 뜨거워서 손이 아파." 나는 몸을 돌려 벽에 놓인 준비 테이블로 가서 달걀껍데기를 갔다. 그 일은 나라는 존재는 그저 직무의 연장일 뿐이라고 처음 말해준 일이었고, 분명 그 사실을 말해줄 마지막일도 아닐 것이었다. 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든 건 어린 시절 아버지 무릎 위에서 들었던 사회주의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라 캐츠킬 산맥에서의 경험들이었다. - P89

아니, 고집 센 얼굴이 대답했다. 충분하지 않구나. 충분한것 근처에도 못 갔는걸.
"넌 해고야." 급사장이 내게 말했다. "아침식사 서빙하고정리해서 나가"
내 몸의 모든 피가 단번에 빠져나가는 듯했다. 잠깐 동안기절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내일 아침이면이 자리에는 내가 늘 받던 손님들이 돌아와 있을 테고, 그들 대부분은 아침식사 후에 떠날 테고, 나는 당연히 이 모든 일이 없었던 것처럼 정확히 꽉 채워서 팁을 받을 것이다. 급사장은 사실 나를 벌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그도 알았고, 이제는 나도 안다. 금발 여자만 모르고 있었다. 그 여자의 엉망진창인 삶을, 그러니까 주름이 쪼글쪼글한 얼굴과 짜증나는 남편, 실망스러운 섣달그믐 밤을 위로하기 위해 나는 해고되어야 했다. 급사장은 그 요구를 들어주어야 했고.
나는 처음으로 권력에 관해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모욕을 당한 급사장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갇혀 있다는 걸, 늘 누군가는 굴욕을 당해야만 하는노동하는 삶에 붙들려 꼼짝 못 하는 신세라는 걸 알게 되었다. - P95

스물한 살이 되던 여름, 나는 시티 대학과 캐츠킬산맥을모두 졸업했다. 그해 여름, 그 호텔에서의 시간은 절정이라 할만했다. 누구도 그리고 어떤 것도 사소하거나 단순하다고, 혹은현실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소유주들은 호텔 자금을 횡령하고 있었고, 급사장은 뇌물을 받고 있었으며, 요리사는 우리에게식중독을 선사했다. 그릇 치우는 소년들과 남자 종업원들 사이에 흐르는 악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거리낌이 없었다. 여자 종업원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그건 다시 말하면 급사장이 음흉하게 말한 것처럼 밤에 카지노에 나와서 남자 손님들과 함께 ‘춤을 추라‘는 얘기였다. - P96

나는 잔디밭 위에선 채 나 자신의 멍청한 갈망을 노려보았다. 적막함이 밀려들어왔다. 나는 외로웠다.
그 후에 내가 외로움에서 나 자신을 비틀어 떼어냈던 게 기억난다. 외로움은 나를 겁에 질리게 했다.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 균형이야말로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내 주위 잔디밭을, 건물들을, 주차장을, 직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 조그맣고 빈틈없는 세계를둘러보았다. 이 세계에서 내가 훌륭하게 작동하는 방법을(다시말해 무례한 모욕을 피하고 어디까지 굴복할지 한도를 조절하는방법을) 익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오직한 가지. 똑바로 앞을 보고, 입을 다물고, 온전하게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 삶의 크기가 얼마나 되든 그것이 무엇으로 구성 - P102

되든, 삶은 순간이라는 좁고 똑바른 길을 걸어 나가는 데 달려있다고 나는 단호하게 생각했다. 나는 몽상으로부터 몸을 돌려걸어갔고, 주방 문을 통과했다.
그럼에도 그해 여름에는 모든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들게 느껴졌다. 팁은 시원찮았고, 요리사는 가학성애자였으며,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고기와 과일과 우유를 훔쳐내야 했다. 산맥에서 지내는 기간은 늘 장기적으로 비타민이 부족해지는 괴로운 기간이었다. 아무도 어떤 도움도 주려 하지 않았다. 그릇치우는 소년이 오렌지주스를 마시거나 램 참을 먹고 있는 걸발견했을 때 호텔 소유주의 얼굴에 떠오를 괴로운 표정이 손에잡힐 듯했다. 어느 날 밤에는 한 남자 종업원이 해고되었다. 식당을 나서던 그를 급사장이 붙잡아 불룩 튀어나온 셔츠 앞섶을잡아 뜯듯 열어 보니 스테이크 두 조각이 맨가슴에 납작하게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까지 여섯, 아니면 여덟 명쯤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 입을 열거나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경우에는 상황이 더 나빴는데, 돈 상납을거부한다는 이유로 급사장이 그 종업원을 해고하려 한다는 걸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P103

 비니의 집착이 그의 내면에 있는 은밀한 무언가를 건드렸고, 우리 둘 모두의 내면에서 일종의 방탕한 기질이 불타오른 것이었다. 아름다운 사람들, 영리한 사람들, 나혼자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을 상상 속에 그렸을 때, 그환상은 나를 외롭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제 비니와 마리가 나오는 망상을 시작하자 내 안에서 너무도 솔직하고 격렬한 갈망이 솟아오른 나머지 나는 무아지경에 빠져버렸다. 무모하고 달콤하며 저항할 수 없는 그 갈망은 환상이 되어 사타구니에 들어앉았다. 비니의 욕망은 우리 둘의 욕망이 되었고, 그의 절박함은 우리 둘의 절박함이 되었으며, 그에게 필요한 무언가는그도 나도 충분히 가질 수 없는 극적인 상상의 대상이 되었다. - P113

공모 관계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었다. 무엇에 대한 공모인지는몰랐지만, 차 안의 분위기가 비밀로 풍성해졌다는 것만 알 수있었다. 비니는 이야기를 했고, 나는 그에게 질문을 던져주었다. 내 질문들은 집착을 더 길어지게, 극적인 상상을 더 깊어지게 했다. 우리가 주고받는 은밀한 대화 속으로 어떤 생생하고유동적인 움직임이 기다란 자국을 남기며 이어졌다. 속도를 높이며 다가오는 어둠 속에서 숨겨진 약속의 파도가 솟아올랐다부서져 내렸고, 다시 솟아올랐다. 나는 영원히 그 파도를 타고싶었다. - P113

일요일에는 막사 전체가 병을 앓고 난뒤 같은 일종의 무기력한 분위기에 하루 종일 뒤덮여 있는 것 같았다.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요란한 수다가 계속되던 복도의 분위기와 강렬하게 대조되는 분위기였다. 그 여름은 우리를 수다 떨게 한 갈등들에 대한 해결책을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 채 갑자기 멈춰 서버렸다. 우리의 동요는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이제 우리는 오직 풀려나기만을 기다리며 버티고 있었다. 저녁식사 서빙은 그어느 때보다도 딱딱한 분위기로 진행되었는데, 다들 마음이 이미 호텔을 떠나 있어서였다. 사람들의 얼굴은 차분하고 조심스럽고 냉정했다. 특히 비니는 누구의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는 표정이었다. - P121

그곳은 무분별한 갈망에 따라 앞날이 가늠되는 세계였다.
그곳의 모든 것이 그 무분별함에 달려 있었다. 무지한 채 남아있기 위해서는 힘겨운 노력이 필요했다. 모르는 채 남아 있는일에 실패한 사람들은 고립되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의 굴욕을 필요로 했다. - P123

우리가 만났을 때 나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로더는 쉰 살이었다. 나는 인생 대부분을 여기저기 헤매며, 문이 잠긴 나 자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느끼면서 보냈다. 사랑, 명성,세속의 모험 같은 것들은 매일 아침 책상 앞에 앉아 생각이라는 걸 해보려는 내 안의 갈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내혼란스러운 정신은 내가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작정한 것같았다. 나는 소파에 앉아 글을 쓰고자 하는 내 욕망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에 대해 격하게 화를 내고 울고 강박적으로 생각을 거듭하면서 수년을 보냈다. 절뚝거리며 나아가는 동안 스스로를 분석하며 "난 못해, 안 할 거야, 해야 돼, 못해"라고 불평을 반복해서 늘어놓았다. - P131

로더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은 처음부터 나를 놀라게 했고, 그를 싫어하게 했다가 다시 이끌리게 했으며, 그렇게 그에게 돌아갈 때면 나는 새롭게 삶의 힘을 느꼈다. 그날 만나고 나서 열흘이 지난 뒤 우리는 다시 만나 어퍼웨스트사이드의 어느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했다. 몇 시간 뒤 나는 걸어서 그를 집에 바래다주었다. 이른 봄이었다. 자기가 사는 건물 현관에서 로더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두 눈을 감고는 막 찾아온 밤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그의 눈꺼풀이 떨렸고, 꽤 오래라고느껴지는 시간 동안 그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그 몸짓이 너무 길어져서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P133

로더는 큼직한 방을 가로질러 바다를 향한 포치로 걸어갔다. 낮은 나무 칸막이 위에 놓인 긴 막대 하나를 발견한 그는그걸로 덧문 하나를 열어 받쳐놓았다. 선명한 바다 빛깔을 한작은 정사각형 하나가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로더는 나머지 덧문들을 하나씩 차례로 열어 일렬로 된 나무 차양처럼만들었고, 그러자 방은 그늘을 품은 빛으로 둘러싸였다. 포치에는 테이블 하나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하나에 앉자 세상은 내 눈높이에서 녹색 절벽과 은빛 바다, 푸르디푸른하늘로 구성된 하나의 작은 작품으로 변했다. 기쁨이 내 심장을 가득 채웠다. 그늘지지 않은, 알록달록한 원색으로 칠해진기쁨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 테이블에라면 영원히 앉아 있을 수도 있겠어. 영원히 앉아 있고 싶어. 그리고 이 자리를 떠난다면, 오직 로더와 함께 저 아래 돌투성이 해변을 걸으며 여자와 남자, 그리고 우리가 발견하는 세상을 이야기할 때였으면좋겠어. - P143

첫 일주일은 상상 속에서 그려보던 것이 그대로 눈앞에 실현되는 삶에서 믿기 힘든 순간 중 하나였다. 다 허물어져 가는별장에 함께 틀어박힌 채 이야기를 나누고, 작업을 하는 데 행복하게 익숙해져 가는 로더와 나. 나는 2년인가 3년째 조금씩조금씩 읽던 책을 붙잡고 있었고, 로더는 《여성과 권위》를 1부로 계획해둔 3부작의 2부를 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음 책은심지어 <여성과 권위》보다도 중요한 책이 될 것이었다. 로더의관심사의 폭과 상상력의 범위를 명료히 드러내줄 책이었다. 로더는 몇 년 동안 그 책을 구상해오고 있었다. 개념은 아직 정립되지 않았지만 막 시작한 단계도 아니었다. 로더는 작업에 착수하기 직전이었다. 그가 당장이라도 시작하리라는 걸 우리는알았다. 로더가 나를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는 존재로 생각한다는 게 영광스러웠다. - P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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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지금 눈보라가 휘몰아치고있다.
저 흉흉한 바깥으로 나가야한다.
‘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하는 세상속으로.

여기는 서귀포다.
˝서귀 피안˝



비비언 고닉Vivian Gornick


에세이스트이자 저널리스트, 비평가. 예민하고 집요한시선으로 자기 자신과 주변을 관찰하고, 솔직하고 냉정하게 의미를 발견해내는 작가다. 특히 내면 깊숙이까지들여다보는 솔직하고 생생한 글로 회고록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뉴욕 시티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뉴욕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9년 <빌리지 보이스>의 기자로 일하면서 페미니스트를 취재했고, 자신의 인생을 바꿀 페미니즘에 빠져들었다. 그 밖에도 <뉴욕 타임스> <네이션> <뉴욕 리뷰 오브 북스> 등에 글을 기고해왔다.
2019년 어머니와 애증의 관계를 날카롭게 풀어낸 《사나운 애착》이 <뉴욕 타임스>에서 지난 50년간 최고의 회고록‘으로 선정되었고, 2021년에는 윈덤 캠벨 문학상의 논픽션 부문을 수상했다. 그 밖에도 《사랑 소설의 종말TheEnd of the Novel of Love》 《내 인생의 남자들The Men in MyLife>이 전미도서비평가협회 비평 부문 후보에, 《이상한여자와 도시The Odd Woman and the City》는 전미도서비평가협회 자서전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귀감이 되는 글을 썼다.
이 책에서 고닉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멀어지면서도 기꺼이 낯선 이들 사이로 들어가연결되고자 했던 자신의 노력과 변화를 그대로 내보인다. 마치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글을 읽다 보면,
20세기 뉴욕 거리를 걷던 비비언 고닉의 감정과 마음을지금 여기에서 온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이 도시 그 자체처럼 넓은 범위에 걸쳐 있지만, 하나로 어우러져 있지는 않다. 내 친구인 사람들이 서로 친구는 아니다. 가끔씩 내 세계가 확장되는 기분이들고 뉴욕 사람들이 모두 동류로 느껴질 때면, 이런 우정들은느슨하게 연결된 목걸이의 구슬처럼 느껴진다. 각각이 서로 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두 내 목 아래쪽에 가볍지만 단단하게자리 잡고 있어서 내게 마법 같은 따스한 연결감을 불어넣어주는 구슬.
그럴 때 삶은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도시의 정수를, 다시말해 변두리에서 살아가는 삶의 빡빡하고도 독특한 면을, 그모든 것을 매일 새롭게 짜 맞춰야 하는 데서 오는 위태로움과 짜릿함을 보여주는 것 같다. - P15

아무도 곁에 없고 아무도 만날 수 없을 때 나는 창문 밖을노려보며, 도시 생활을 낭만적이라고 여기다니 그런 바보가 또어디 있을까 생각한다. 외로움이 덥고 건조한 공기처럼 나를에워싼다. 그것은 부끄러움으로 얼굴을 달아오르게 하는 뉴욕의 외로움, 당신은 바보이고 실패한 인간이라고 말하는 외로움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마음껏 즐기고 있는데, 당신 혼자만파티에 초대받지 못한 거다.
나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내 삶이 짐 끄는 말의 삶과 같다는 걸 깨닫는다. 마구를 걸치고 있기만 하면 나는 걸음을 놓치는 일 없이 한 발을 다른 발 앞에 디딜 수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균형을 깨뜨리면 나는 또다시 목에 걸린 형편의 무게를, 그밑에서 스스로 똑바로 걷는 법을 익혀야 했던 짐의 무게를 느낀다. - P16

엄마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걔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야. 중요한 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거 하나야."
어깨가 똑바로 펴지고 보폭이 넓어진다. 가슴속의 절망이녹아 사라지기 시작한다. 도시가 내게 자신을 열어 보이고 있다. 나는 마치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의 품에 안긴 것 같다. 남들눈을 신경 쓰지 않는 풍부한 표정이라는 초대장만 있으면 거절당할 염려는 없을 것이다. - P18

마지막 순간까지 애쓰는 모습, 그 다양하고도 독창적인 생존기술을 지켜보다 보면 나를 짓누르던 것이 덜어지고 넘치던 감정이 비워지는 걸 느낀다. 나는 그들의 불안과 함께한다. 그들의 문제를 나눠 갖는다. 쓰러지지 않겠다는 공동의 의지가 내신경 끄트머리에서 느껴진다.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에서 혼자일 때가 가장 외롭지 않다. 혼자일 때 나는 나 자신을 상상한다.
혼자일 때 나는 시간을 번다. 나와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나와 내 뉴욕 친구들 모두가 그렇다. - P20

그날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전화벨이 울린다. 이번에는 로라다. "내 말 못 믿을 거야." 로라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한테 전화한 용건을 꺼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그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에 반응하는 순간부터 로라는 온전히 믿을 수있는 상대다. 로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우리는 함께 웃음을터뜨리고, 심리학 지식을 담은 문장들이 우리 사이에 오간다.
"언제 저녁이나 같이 먹자." 내가 말한다. "너무 좋지." 로라가말한다. "어디 보자." 로라 역시 자신의 수첩을 들여다본다. "아이고, 진짜 어처구니가 없네. 다음 주 초까지는 시간이 안 돼.
잠깐만 기다려봐, 잠깐만." 대화를 나누면서 엄청 즐거워졌는지 로라는 그 기쁨이 사라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 "여기 이 일정을 바꾸면 되겠다. 목요일 어때?" - P21

뉴욕에서의 친구 관계는 우울에 몰두하는 일과 표현하는능력에 매혹되는 일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을 내게 가르쳐준다. 어떻게든 좀 더 높은 수준의 균형 상태에 도달하는 일. 나는 친구 사이에서는 그 일이 일반적인 부부 사이에서와 다르게일어날 줄 알았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지. 우리는 모두 예전에 결혼이란 걸 해본 사람들 아닌가. 많은 사람들은 결코 이길 수 없는 내면의 싸움을, 오직 죽음에 의해서만 결론이 나는 전쟁을 하며 삶을 보낸다. 하지만 우리 각자의 인생에는 우위를 차지하는 한두 가지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도시는 이런 역학의 영향 아래에서 돌아간다. 각각의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설명하기 어렵다. - P22

얼굴을 안다는 것이란! 당신도 보면 알겠지만, 그것은 한때
‘기대에 부풀었던‘ 여자의 얼굴이었다. 엉망이 된 입술, 도도한턱, 대담한 색깔의 립스틱, 총명하지만 세상에 알려질 수는 없다는 걸 받아들인 두 눈. 아침 열시에 여기 8번에서, 자신이경험한 모든 것이 선명히 새겨진 얼굴로 그 거리를 등지고 선여자는 내게 화려한 매력을 지닌 사람으로, 호화로운 방식으로초췌한 자연 그대로의 환경 속 보석 같은 사람으로 보였다. 그것은 오직 도시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얼굴이었다. - P23


‘어디서든‘ 꽃을 피우려면 사람은 주변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낼 만큼 뛰어나거나, 속한 환경에 맞춰 살 만큼 겸손하게나 둘 중 하나여야 한다. 둘 중 어느 쪽도 아니라면 뜻이 맞는최소한의 사람들이 곁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평범한 식물들이 교외의 잔디밭에 심어지는 것과(여기 따분해 보이는 관목이나 저기 쓸쓸한 화단처럼) 풍요롭게 가꾼 정원에 심어지는 것의차이다. 정원에서는 똑같이 수수한 나무과 꽃인데도 한데 모인그 풍성함 덕분에 ‘있어야 할 자리‘에서 빛나는 것처럼 보인다.
8번로에서는 여자가 경험한 것들이 그를 흥미진진한 사람으로만들었다. 하지만 남부의 어느 도시 대학에 데려다놓는다면, 그는 이내 쓸쓸한 사람으로 변해버릴 것이다.
그 머리칼. 그 뉴욕 스타일 곱슬머리. 그 머리에는 우리상상 이상으로 ‘한데 모인 풍성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 P24

나는 모여든 사람들 가장자리에 혼자 서 있다. 여자의 목소리와 몸짓이 나를 전율하게 한다. 여자의 유창한 언변에 나는놀란다. 자신의 서사를 전하기 위해 언어와 몸짓을 얼마나 능숙하게 사용하는가. 여자와 내가 하나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여자는 혼자고, 나 역시 혼자다. 하지만 그는 저기 있고, 나는여기에 있다. 여자 역시 뉴욕 스타일 곱슬머리를 하고 있다. 지금으로선 그것만으로도 동지가 되기에 충분하다.
내가 자라날 때 뉴욕은 안전했고, 모든 것은 값이 싸거나공짜거나 둘 중 하나였으며, 미드타운에서는 게이들도 흑인들도 여자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이제 이 도시는 난폭해졌고, 뭐든지 엄청나게 비싸며, 우리 모두는 보이는 존재가 되었다. - P26

거리는 계속 움직이고, 당신은 그 움직임을 사랑해야 한다.
그 리듬으로 된 작품을 찾아내고, 그 동작에서 이야기를 건져내고, 모든 것이 우리가 갑작스레 누군가의 시야에 들어갔다가다시 안 보이게 되는 그 빠른 속도에 달려 있음을 받아들이고서운해하지 말아야 한다. 연결이 만들어졌다 풀리는 바로 그속도에 기쁨과 안도감이 존재한다. 매달릴 필요는 없다. 연결은어디에나 있지 특정한 곳에만 있는 게 아니니까. 하나의 연결바로 뒤에는 또 다른 연결 하나가 따라온다. - P28

거리는 서사적인 충동의 힘을 증명해 보인다. 인간으로서살아가는 일이 역사상 가장 힘든 시대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그 무한한 힘을. 문명이 붕괴되고 있는가? 도시가 혼란스러운가? 이 세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가? 더 빨리 움직여라.
더 빨리 스토리라인을 찾아내라. - P30

뉴욕에서 가난하고 저속한 사람들, 결함 있는 사람들이 없는 동네는 없다. 도시에서 사회적 유동성이란 ‘누구도 다른 누구에게서도 도망칠수없음‘을 의미한다. 어디든 대로들은 거리의 삶으로 지나칠 만큼 번쩍거린다. 그럼에도 동네에는 저마다의 개성이 쌓인다. 파크애비뉴는 여전히 부유층을, 웨스트엔드애비뉴는 중산층을 상징한다. 업타운을 생각할 때면 나는 계급을 떠올리게 된다. - P33

"그 사람들은 어른인 척한 거야." 레너드가 말했다. "그뿐인 얘기지. 40년 전에 사람들은 결혼이라고 불리는 벽장에 들어갔어. 벽장 안에는 옷이 두 벌 있는데 너무 뻣뻣해서 저절로서 있을 정도야. 여자는 ‘아내‘라고 불리는 드레스 속으로, 남자는 ‘남편‘이라고 불리는 정장 속으로 걸어 들어갔지. 그게 다야.
그 사람들은 옷 속으로 사라졌어." 레너드는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지금 우리는 척을 하지 않아. 벌거벗은 채로여기 서 있지. 그런 거야." 그가 담배를 빨아들인다. 나는 몇 달만에 처음으로 그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지켜본다.
"나는 이 삶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야." 내가 말한다.
"누군들 적합하겠어?" 레너드가 내 쪽으로 연기를 내뿜으며 말한다. - P41

하늘이 어두워지고 주위의 모든 건물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북적거리는 도시의 지평선과 나 사이에 내가 낮에 본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빨대로 소녀를 찌르던 소년이, 로드 앤테일러 쇼핑백을 들고 있던 여자가 떠오른다. 그들이 했던 말이 다시 귓가에 울리고, 그 얼굴과 몸짓이 눈앞에 떠올라 나는혼자 웃는다. 나는 여기에 대화를 저기에 해석을, 또 그다음에딘가에는 논평을 덧붙이며 그 장면들을 수정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나는 내가 시간을 뒤로 돌리며 나와 마주치기 전의 그들을 상상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다. 나는 흠칫 놀라, 내가 하루의 이야기를 쓰고 있음을 막 나를 지나간 시간에 형태와 질감을 부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오늘 하루 나를 스쳐간 사람들이 이제 나와 함께 방 안에 있다. 그들은 친구가, 거대한 친구들의 집단이 되었다. 오늘 밤 나는 내가 아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그들은 내게 서사적인 충동을되돌려준다.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준다. 내 삶이 할 수 없는이야기를 하도록 나를 일깨워준다.
ד - P46

첫 사흘 동안 나는 페미니스트들, 티그레이스 앳킨슨Ti- Grace Atkinson, 케이트 밀렛 Kate Millett, 슐라미스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을 만났다. 그다음 사흘 동안에는 필리스 체슬러Phyllis Chesler, 엘런 윌리스ellen willis, 앨릭스 케이츠 슐먼 AlixKates Shulman을 만났다. 그들은 모두 동시에 말을 했고, 나는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들었다. 아니, 그보다 내 귀에는 그들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고 해야겠다. 하나의 생각에 강렬한 인상을 받으며 그 일주일을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 생각이란 이런 것이었다. 남성은 자신의 지적 능력을 선천적으로 중요시하고 여성은 중요시하지 않는다 - P51

는 생각은 근거 없는 믿음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 믿음은 문화에 기여하는데, 우리의 삶 전체는 그 문화를 따라간다. 정말이지 단순한 이야기다. 그리고 분명 이미 나온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어째서 나는 이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것처럼느꼈을까? 왜 내 귀에 이제야 이 이야기가 들려온 것일까?
사랑뿐 아니라 정치에서도, ‘준비된 순간‘이란 여전히 삶의가장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도록여러 요소가 충분히 결합하는 그 순간 말이다. 그 순간에 응답하는 사람은 결코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묘사할 수 있을 뿐이다. - P52

나는 언제나 삶과 욕망하고 얻어내는 일은 동의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지하고 분노에 찬 착한 여자의 방식으로 ‘의미‘를 추구했다. 의미 있는 일(다시 말해, 지성이나 정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적절한 파트너가 될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중요했다. 이 두 가지가 내게 필요한 쌍둥이 같은 조건임을 알았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얽혀 있어서 하나 없이 다른 하나를 상상할수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강박적으로 수다를 떨어댈 뿐, 공부를 할 만큼 고독을 오래 견뎌내지는 못하는 사람으로 자라났다. 생각이 꾸준하게 나아가도록 다스리는 법을 배우지 못했던것이다. 나는 소설을 읽었고, 의미 있는 삶에 대한 공상에 잠겼고, 남자를 생각하며 넋을 잃었다. 진지함에 대해 끝없이 도덕 - P52

적으로 고찰했지만, 나는 남자를 뒤쫓을 수는 있어도 일을 계속할 수는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부분이 결정적인데, 나는그 사실을 몰랐다. 내가 사랑은 할 수 있지만 일은 할 수 없는상태라는 것을. 나는 사정이 괜찮아지면 일을 할 거라고 쭉 생각해왔다. 사정이 안 좋은데도 내가 이 남자, 아니면 저 남자에게 계속 사로잡혀 있을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던 적은 없었다.
나는 20대 중반에 어느 예술가와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나에게는 모든 게 준비되어 있었다. 앉을 책상이 있었고, 나를격려해줄 파트너가 있었으며, 충분한 시간과 돈이 있었다. 이제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53

또다시 틀렸다. 10년 뒤, 나는 몇 편의 기사를 써낸 공격적인 스타일의 이혼한 서른다섯 살 ‘여자‘가 되어 뉴욕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허세 아래 혼란은 깊었고, 막막함 역시엄청났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지? 날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리고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나는 ‘여성 해방 운동가들‘
의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야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았다. 그러자 내가 상황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찾아왔다. 나는충분히 나이가 많았고, 충분히 지루했고, 충분히 지치고 고통받아왔다.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노동자라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바로 이것이 한 여자의 존재 중심에 있는 딜레마였다. - P53

똑바로 들여다보기엔 힘겨운, 너무도 힘겨운 진실이다.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사랑과 공동체를 갈망한다. 그 두 가지모두 삶에 있기를 바라기에는 썩 괜찮은 것들이지만 갈망할 만한 것들은 아니다.
갈망은 살인자와 같다. 갈망은 우리를 감상적으로 만든다.
감상적이 되면 우리는 낭만만을 추구하게 된다. 내게 있어 페미니즘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것이 로맨스가 아니라 힘겨운 진실을 더 소중하게 여기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전히힘겨운 진실을 추구한다. - P60

내가 방금 적어놓은 모든 것을 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몇 번이고 잊어왔다. 불안과 권태와 우울이 나를 압도하면, 그것들은 나를 지워버리고 나는 ‘잊는다.‘ 영혼의 노예 상태란 일종의 기억 상실이어서, 우리가 아는 것을 붙잡지 못하게 만든다. 이는 것을 붙잡지 못하면 우리는 경험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리고 경험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 변화가없으면 우리 자신 안에 있던 연결은 끊어져버린다. 그건 견딜 - P60

수 없는 일이기에, 삶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끝없이 ‘기억하는‘ 일의 연속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있을까? 끊임없는 투쟁 속에 있다.
나는 세 차례나 구원 같았던 로맨스의 상실을 견뎌냈다. 사랑이라는 환상, 공동체라는 환상, 일이라는 환상의 상실이 그것이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잃을 때마다 나는 나도 모르게1970년 11월의 그 계시적이었던 첫 순간으로 돌아갔다. 초기의 페미니즘은 나에게 투명해지는 통찰의 생생한 번쩍임으로남아 있다. 그것은 나를 자기연민에서 구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싶은 마음이라는 비할 데 없이 훌륭한 선물을내게 선사했다. - P61

나는 여전히 사랑 때문에 고심한다. 내 단단한 마음을, 그리고 또 다른 인간 존재를 동시에 사랑해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나는 일을 한다. 매일의 노력은 여전히 몹시도 고통스럽다. 그러나 노력하는 한, 나는 로맨스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로맨스에 저항할 때,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힘겨운 진실을 꾸준히 바라볼 때 나는 조금 더 나 자신에 가까워진다.
페미니즘은 내 안에 살아 있다. - P61

언제든 같이 있었다. 같이 있는 일이 즐거웠던 건 절대 아니었고, 그저 떨어져 있는 일을 견디지 못했을 뿐이다. 같이 있으면 우리 사이에는 긴장이 피어올랐지만, 혼자 있을 때면 극심한 외로움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그 외로움은 긴장보다 고통스러웠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피하고 싶었다. 결국 내가 우유 한 통을 사러 간다고 하면 남편이 같이 가겠다고 하는 지경이 되었다. 우리가 아는 사람들(그들은 모두 우리처럼 젊었다)은 이렇게 말했다. "저 사람들, 정말 서로에게 헌신적이네." 불안이 헌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리고 외로움은 인간에게 있어서정의 내리기 가장 힘든 상태라는 것. 결혼은 내게 그런 것을 가르쳐주었다.
우리는 집요하게 우리자신을 외면했고, 그 외면은 모멸적인 것이 되어갔다. 우리의 감정은 이제 우리의 적이 되었다. 모든 감정을 둘러싸고 보호막이 자라났다. 이 보호막이 두꺼워질때면 가운데에 있던 살은 쭈그러들었다. 젊고 건강했던 나는산 채로 파묻히는 기분이었다.
결국 우리는 헤어졌다. - 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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