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랑쉬오름, 아부오름은 둥근 자배기를 엎어놓은 듯하다. 용눈이오름은 기생화산 서너 개가 겹쳐서 터지는 바람에 어깨를 맞대듯 붙어 있어 능선이 굽이치는 곡선을 이룬다. 거문오름은 굼부리가 겹쳐지면서 등근 원이 아니라 쌍곡선을 이루며 말발굽 모양이 되었다. 어떤 오름은 서너 개의 굼부리가 삼태기 모양으로 드러나 있기도 한다. 그래서 오름은저마다의 표정이 다르다. 제주섬 어디를 가나 오름이 없는 곳이 없다.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의수로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오름은 자생식물의 보고(寶庫)며, 지하수 형성지대다. 중산간지대의 오름은 촌락 형성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말을 돌보는 테우리들의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제주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름을 보고 자랐고, 거기에 의지해 삶을 꾸렸고, 오름 자락 한쪽에 산담을 쌓고 떠나간 이의 뼈를 묻었다. 오름이 없는 제주도를 제주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P82
상철이는 창밖을 가리키며 왼쪽은 샘이오름, 오른쪽은 동거문오름, 앞에 보이는 건 당오름 하고 친절한 교사인 양 나에게 오름의 이름을 알려주는데 가까이서, 멀리서, 그리고 겹겹이 펼쳐지는 오름의 능선들은 그이름만큼이나 신비롭고 아름답고 정겹게 다가왔다. 전화하림파이야제주의 동북쪽 구좌읍 세화리 송당리 일대는 크고 작은 무수한 오름들이 저마다의 맵시를 자랑하며 드넓은 들판과 황무지에 오뚝하여 오름의 섬 제주에서도 오름이 가장 많고 아름다운 ‘오름의 왕국‘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 P83
다랑쉬오름에는 목본류와 초본류 25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오름사면은 전체적으로 삼나무, 편백나무로 조립되어 있으며 곰솔, 비목등이 자연식생하고 있다. 오름 서, 북사면은 삼나무,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방화로를 따라 왕벚나무, 비자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곰솔, 비목, 검노린재, 국수나무 등과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정상에는 키가 작은 곰솔, 소사나무 등이 식생하고 있다. 탐방로와 정상 주변에는 초본류가 철 따라 아름다운 꽃들을 피운다. 초본류로는 새끼노루귀, 각시붓꽃, 세복수초, 할미꽃, 산자고, 골등골나물, 층층이꽃 솔체, 절굿대, 바디나물,산비장이, 엉겅퀴, 섬잔대, 한라꽃향유, 한라돌쩌귀, 야고등이 자생하고 있다. - P92
소사나무가 관목림을 형성하고 있어 이것이 철 따라 보여주는 모습은 오름 못지않은 볼거리고 기쁨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삼다도 강풍 때 우리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관목이 소사나무였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분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사랑하는 나무다. 소사나무는 키가 크지 않아 아주 아담하다. 잎은 달걀모양이고 잎자루에 잔털이 있는데 5월에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맺는다.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지만 우리나라가 원산지 격이어서 ‘Korean hornbeam‘이라고 한다. 그 소사나무가 오름의 비탈에서 정원사의 가위가 아니라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야무지면서도 단정하게 무리지어 자라니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장관인지 보지 않아도 알 만하지 않은가. 국립수목원 이유미 연구관의 「우리 풀 우리 나무」(『주간한국』 2010.6)에서는 소사나무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 P93
소사나무는 녹음이 멋진 나무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소사나무들은바람이 가장 많이 들고 나는 바닷가 산언덕 즈음에 무리지어 숲을 이루어 특별한 풍광을 자아낸다. 굶어도 아주 크지 않고, 적절히 자연의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의 이리저리 부드럽게 굽은 줄기 하며, 운치있게 흰빛 도는 수피가 점차 짙어가는 초록의 잎새와 아주 멋지게어울린다. 그 숲을 바라보는 시선의 끝머리에 넘실대는 바다라도 보이면 더욱 근사하다. - P93
능선을 한바퀴 돌고 나면 큰 굼부리가 하나, 작은 굼부리가 셋 있어 어미가 세쌍둥이를 보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용눈이오름엔 여러개의 알오름이 있다. 알오름은 오름 속에서 생긴 새끼오름이다. 남서쪽경사면에는 주뚜껑처럼 오목하게 파인 아주 예쁜 알오름이 있는데 둘레가 150미터 정도 되는 작은 크기로 잔디밭이 에워싸고 있다. 또 북동쪽에 있는 알오름은 위가 뾰족하게 도드라져 아주 귀엽다. 그 기이하고도 변화무쌍한 경관 때문에 용눈이오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용눈이오름은 오름 전체가 잔디로 덮인 잔디밭 오름이다. 그 보드라운 촉감과 아름다운 곡선 때문에 사람의 눈을 여간 홀리는 것이 아니다. 용눈이오름 잔디밭엔 미나리아재비도 많고 할미꽃도 많다. 그 미나리아재비와 할미꽃이 보드라운 잔디밭에 지천으로 피어났을 때를 상상해보라. 화가라는 인간은 형태와 색감과 질감에 대단히 민감한 동물이다. 화가 임옥상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내게 감상을 말한다. - P101
용눈이오름에서 불과 이십 분 거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고 김영갑(金永甲, 1957~2005) 선생만큼이나 소중한 제주의 자산이다. 두모악(혹은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으로 백록담 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모양에서 나온 이름이다. 지독히도 제주도를 사랑했고, 끔찍이도 자신의작업에 충실했던 한 사진작가의 처절한 인생이 낳은 우리들의 갤러리다. 김영갑은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나 학력은 부여 홍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는 제주에 반하고 사진에 미쳐 1982년부터 3년 동안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작업을 하던 끝에 1985년에는 아예 제주에 정착하여타계하기 직전까지 20년간 온 섬을 누비며 제주도의 자연을 소재로 20만여 장의 사진작품을 남겼다. - P102
1985년부터 해마다 서울과 제주에서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중 태반이 ‘제주의 오름‘이라는 주제였다. 2004년에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에세이집에서 김영갑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의 사진을 본사람은 제주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곤 했다. 특히 그는 제주의 바람을 잘 찍어냈다. 그러던 그가 1999년 친구들 앞에서 카메라가 무겁다. 가끔 손이 떨린다고 하더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루게릭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3년 더 살면 잘 사는 거래"라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2002년에는폐교된 삼달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개조한 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했다. 타계하기 직전인 2005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인공없이 열린 전시는 「내가 본 이어도 1-용눈이오름」이었다. - P103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부오름뿐만 아니라 어느 오름이건 오름에한번 올라본 이는 제주를 다시 보며 제주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된다. 오름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던지고 싶어진다. 결국 그렇게 오름에 미쳐 살다 육신을 오름에 묻은 분이 있다. 『오름나그네』 (높은오름 1995)의 저자인 고(故)김종철(金鍾喆, 1927~95) 선생이다. 한라산과 오름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김종철 선생은 제주의 덕망높은 산악인이자 언론인이었다. 당신은 환갑 나이의 고령에 들어서면서330여 오름을 일일이 답사하며 각 오름의 이름과 생태와 그 속에 담긴사연들을 정리해나갔다. 1990년부터 제민일보』에 매주 연재한 ‘오름나그네‘는 5년간 계속되었다. - P107
제주 자연의 보석이지만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귀한 줄 몰랐던 오름의 가치를 선생이 일깨워준 것이다. 골프장에 깔 흙으로 사용하기 위해 오름 하나가 영원히 사라지는 일을 방치했던 제주인들도 이제는 ‘오름 보호‘를 외치게 되었다. 『오름나그네』 이후 오름 등반 모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제주도는마침내 오름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제주의 자연자원을 생태관광과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부지역의 다랑쉬오름, 서부지역의노꼬메오름을 제주도의 오름 랜드마크로 지정했다. 「오름나그네』는 제주의 신이 그에게 내린 숙명적 과제였던 모양이다.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앞에도 없었고, 앞으로도없을 것이고, 오직 김종철 그분밖에 없다. - P108
선생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라산 1700고지 윗세오름 너머백록담을 턱 앞에서 바라보는 곳, "진달래가 떼판으로 피어 진분홍 꽃바다를 이루는 광활한 산중고원" 그래서 "미쳐버리고 싶다"고 하셨던 선작지왓에 뿌려졌다. - P109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사실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에 등재됨으로써 이미 객관적이고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요즘 거론되는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이 관광객들의 인기투표라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지질, 생태, 환경등 자연과학자들의 전문적 평가의 결과였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되면서 유네스코 자연환경 분야 3관왕을 차지했으니 그랑프리와 인기상을 모두 차지한 셈이다. - P111
제주도는 120만 년 된 순상(狀, 방패 모양) 화산으로 많은 양의 현무암질 용암류가 연속적으로 분출되고 퇴적되어 방패 모양의 완만한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제주도는 수중 대륙붕 위에서 발생한 수성 마그마성 분화의 결과로 처음 생성되었고 이후 360개의 단성화산(오름)에서 분출된 현무암질 용암이 그 위로 쌓였다. 그리고 현무암질 용암이관(tube) 모양을 만들면서 광범위한 규모의 용암동굴을 형성했고현재까지 120개의 용암동굴이 알려져 있다.
즉 순상화산이고, 오름이 있고, 용암동굴이 있다는 것이 제주도와 한라산 지질의 개요이며 특질이다. 얼마나 간명한가. 이어서 보고서는 지구 전체에서 본 제주도 화산지질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 P115
조사단은 조명반, 기록반, 측량반, 보급반으로 꾸며졌다니 귀엽다고는할지언정 꼬마라고 얕볼 것은 아니었다. 굴 입구에서 1.2킬로미터 들어가자 무너진 돌이 돌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위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여 찾아낸 것이 지금 우리가 들어가고있는 제2입구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7년 2월 부종휴 선생은다시 탐사에 나서 동굴 끝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동백꽃이 만발하고 겨울딸기가 열매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부종휴 선생은 그 동굴 끝이 지상의 어디인가를 측정한 결과 그곳은마을사람들이 ‘만쟁이거멀‘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고 이로 인해 이 동굴은 만장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종휴 선생은 1968년 5월 만장굴에서 홍정표 선생 주례로 산악인 30명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 결혼식을 계기로 만장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P124
일찍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녕중학교 서무주임을 지낸 김군천(金君天, 1922~2011) 할아버지 덕택이었다. 할아버지는 1960년 퇴임 후 정부에서 관심도 보이지 않고 방치해둔 고항의 김녕사굴지킴이를 자원하여 여기에 정착해 사셨다. 주변 땅 1만2천평을 매입해 정비하여 지금 도로변에 있는 협죽도길, 잔디밭이 모두 이분이 심은 것이란다. 제주에는 이런 고맙고도 위대한 알려지지 않은 분이 곳곳에 있다. - P125
동굴 끝에는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2010년 재조사 결과 길이 800미터. 수심은 8~13미터, 최대 폭은 20미터로 확인되었다. 동굴은 용천동굴, 호수는 ‘천년의 호수‘라고 명명되었다. 용천동굴은 용암동굴이면서 석회암동굴의 성질도 지닌 세계 최대 규모의 ‘유사 석회동굴‘(pseudo limestone cave)이었다. 때문에 천장에서는 지금도 종유석이 생성되고 있는데 가느다란 명주실 같은 것이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 환상적인 분위기는 형언할수 없을 정도이다. 실사단은 우리 조사단의 안내를 받아 용천동굴에 들어가보더니 이런처녀동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며 조사 명목이지만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 P131
동굴과의 상대평가에서도 아주 높은 점수를 주었다.
우리 실사단 대부분은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 특질은 용암동굴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7킬로미터가 넘는 용암동굴은 제주도의 만장굴을 포함해 세계에 단 12개만이 존재한다. 게다가 만장굴은 부근의 김녕사굴 및 용천동굴과도 이어져 13킬로미터 이상의 단일 통로를형성하고 있다.(…)하와이 화산국립공원에도 용암동굴이 여러 개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상태, 접근성 측면에서 모두 제주도에 필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캄차카 및 갈라파고스 제도의 순상화산은 규모도 더 작고 용암동굴등의 부차적 지형을 다양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전세계 용암동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도가 높다. - P133
세계자연보전연맹은 우리나라에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애초에는 실사단 중 많은 분들이 제주도 전체를 등재하는 것까지 검토했다. 최소한 제주도의 다른 응회구 및 용암동굴까지 포함하여 세계자연유산 범위를 폭넓게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국 세 군데로만 후보 지역을 국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토지 소유권, 소유주의 태도, 보존 상태 등관리 측면의 완전성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가장 긴 동굴로 웅장한 3차원 구조를 보이는 빌레못동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기는 하나 상당 부분이 개인 소유로 이미 많이 훼손되었다. 협재에 위치한 쌍용굴, 황금굴, 소천굴은 거문오름 동굴계에 비해 뛰어나지는 않지만 역시 여러가지 석회암 생성물이 동굴 내부를 장식하고 있어 등재할 만했다. 그러나 사유지인 한림공원 내에 있어 추진이 어려웠다. 실사단은 자연유산에 추가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곳으로 산굼부리, 사라오름, 어승생악, 송악산, 산방산 등을 지목했다. 실사보고서는이 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고했다. - P134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지역 이외에 더 넓은 지역의 화산지형과 제주도의 생물다양성 가치를 관리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 추가로 제주도의 자연유산등재 범위를 확대하는 가능성을 고려해볼 것. - P135
"나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주도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공식적으로 제시한 세계자연보전연맹의 다섯 가지 권고사항을 충실히이행하여 훗날 제주도 전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P136
제주답사 일번지의 마지막 테마는 해녀다. 우리는 거문오름을 떠나해녀문화를 답사하기 위하여 구좌읍 하도리로 향했다. 제주 해녀의 상징은 하도리에서 찾게 된다. 하도리에는 현재도 가장 많은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에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탑도 세워져 있고, 2006년에 문을 연 해녀박물관도 있다. 하도리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강의를 시작했다. 가는 길이 짧아 해녀와 해녀의 역사에 대해 핵심만 얘기해주었다.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의 정신이고, 제주의 표상입니다. 해녀 - P137
가 없는 제주는 상상할 수 없죠. 19세기까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뿌리는 육지의 농부와 해안가의 어부였지요. 제주에서는 농부, 어부 외에 해녀와 목자(牧者)가 더 있었습니다. ISI제주에선 목자를 ‘우리‘라고 하고 해녀는 녀(女)‘ 또는 ‘수(潛媛)‘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해녀라는 말로 바뀌었어요. 학자 중에는 해녀는 일제가 업신여겨 만든 말이라고 해서 잠녀와 잠수를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녀나 잠수의 어감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해녀라는 말이 이미 익어 있기 때문에 통상 해녀로 부릅니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니까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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