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으면서도 윤기나는 푸른 잎을 잃지 않은 생게남을 영험하게 생각하여여기를 신당으로 삼은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기도하는 마음이 서려 있는 오색천과 소지, 그리고 자연의 산물을 대표한 과일 몇알로 신과 마음을 나누는 모습이 제주 신앙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 아닐까. 누가 이를 미신이라고 할 것이며 추하다고 할 것이며 가난하다고 비웃을 것인가.
수많은 해녀 노래 중에서 가장 애달픈 구절은 "이여싸나이여싸. 칠성판을 머리에 이고 바다 속에 들어간다"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서사시인 석북(北) 신광수(申光洙)는 자녀가(潛女歌)」에서 매일같이 생사를 넘나들며 물질을 하는 해녀의 수고로움을 노래한다. 깊고 푸른 물에 의심 없이 바로 내려가 날리는 낙엽처럼 공중에 몸을 던지며 길게 휘파람 불어 숨 한번 토해낼제 그 소리처량하여 멀리 수궁 속까지 - P165

흔들어놓는 것 같다며 "잠녀여! 잠녀여! 그대는 비록 즐겁다 하지만, 나는 슬프구나"라며 애잔한 서사시를 바쳤다.
생사를 초월한 처연한 마음이 일어나는 종달리 돈지할망당. 아! 그것은 애절하고도 아름다운 풍광이다. 그래서 나의 제주답사일번지 종점을이곳 종달리 생게남 돈지할망당으로 삼는다.
그날도 숨비소리 아련한 빈 바다엔 노을이 짙게 내리고 있었다. - P166

한라산 백록담까지 등반은 8, 9시간 걸리는 관음사 코스(8.7km), 성판악 코스(9.6km), 돈내코 코스(7km)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답사객에게는 해발 1,700미터의 윗세오름까지만 가는 것이 제격이다.
윗세오름은 한라산 위에 있는 세 개의 오름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여기에 이르면 선작지왓 너머로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통째로드러난다. 그것은 장관 중에서도 장관으로, 이렇게 말하는 순간 내 가슴은 뛰고 있다.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한라산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의 반은 만끽할 수 있다. 거기서 백록담까지는 1.3킬로미터 산행길이다. - P168

윗세오름에 이르는 길은 어리목 코스(4.7km)와 영실 코스(3.7km) 두가지다. 왕복 8킬로미터, 한나절 코스로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환상적이면서 가장 편안한 등산길일 것이다. 답사든 등산이든 왔던길로 다시 돌아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그러나 나는 나이들면서는 영실로 올라가서 영실로 내려오곤 한다. 영실 코스는 윗세오름을 올려다보며오르다보면 백록담 봉우리의 절벽이 드라마틱하게 나타나는 감동이 있고, 내려오는 길은 진달래밭 구상나무숲 아래로 푸른 바다가 무한대로펼쳐지는 눈맛이 장쾌하기 때문이다.
영실 코스는 승용차가 영실 휴게소까지 올라갈 수 있어서 2.4 킬로미터(40분) 다리품을 생략할 수 있다. 그러나 영실이 아무 때나 운동화 신고 오를 수 있는 곳은 절대 아니다.  - P169

한라산등반기를 쓴 문필가들은 이 대목에서 모두들 한목소리를 내는데 그중 이형상 목사의 묘사가 가장 출중하다.


기암괴석들이 쪼아 새기고 갈고 깎은 듯이 삐죽삐죽 솟아 있기도 하고, 떨어져 있기도 하고, 어기어 서 있기도 하고, 기울게 서 있기도 하고, 짝지어 서 있기도 한데, 마치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하고, 대화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서로 돌아보며 줄지어 따라가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조물주가 정성들여 만들어놓은 것이다.
좋은 나무와 기이한 나무들이 푸르게 물들이고 치장하여 삼림이 빽빽한데 서로 손을 잡아 서 있기도 하고, 등을 돌려 서 있기도 하고, 옆으로 누워 있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 있기도 하니, 마치 누가 어른인지다투는 것도 같고, 누가 잘났는지 경쟁하는 것도 같고, 어지럽게 일어나 춤추고 절하며 줄지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는 토신이 힘을 다하여 심어놓은 것이다.
신선과 아라한이 그 사이를 여기저기 걸어다닌다. 이쯤 되면 경개(景槪)를 갖추었다고 할 만하다.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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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쉬오름, 아부오름은 둥근 자배기를 엎어놓은 듯하다. 용눈이오름은 기생화산 서너 개가 겹쳐서 터지는 바람에 어깨를 맞대듯 붙어 있어 능선이 굽이치는 곡선을 이룬다. 거문오름은 굼부리가 겹쳐지면서 등근 원이 아니라 쌍곡선을 이루며 말발굽 모양이 되었다. 어떤 오름은 서너 개의 굼부리가 삼태기 모양으로 드러나 있기도 한다. 그래서 오름은저마다의 표정이 다르다.
제주섬 어디를 가나 오름이 없는 곳이 없다. 한 섬이 갖는 기생화산의수로는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오름은 자생식물의 보고(寶庫)며, 지하수 형성지대다. 중산간지대의 오름은 촌락 형성의 모태가 되기도 했고, 말을 돌보는 테우리들의 생활터전이기도 하다. 제주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오름을 보고 자랐고, 거기에 의지해 삶을 꾸렸고, 오름 자락 한쪽에 산담을 쌓고 떠나간 이의 뼈를 묻었다. 오름이 없는 제주도를 제주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 P82

상철이는 창밖을 가리키며 왼쪽은 샘이오름, 오른쪽은 동거문오름, 앞에 보이는 건 당오름 하고 친절한 교사인 양 나에게 오름의 이름을 알려주는데 가까이서, 멀리서, 그리고 겹겹이 펼쳐지는 오름의 능선들은 그이름만큼이나 신비롭고 아름답고 정겹게 다가왔다.
전화하림파이야제주의 동북쪽 구좌읍 세화리 송당리 일대는 크고 작은 무수한 오름들이 저마다의 맵시를 자랑하며 드넓은 들판과 황무지에 오뚝하여 오름의 섬 제주에서도 오름이 가장 많고 아름다운 ‘오름의 왕국‘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다랑쉬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린다. - P83

다랑쉬오름에는 목본류와 초본류 250여 종이 분포하고 있다. 오름사면은 전체적으로 삼나무, 편백나무로 조립되어 있으며 곰솔, 비목등이 자연식생하고 있다. 오름 서, 북사면은 삼나무, 편백나무 숲이 울창하다. 방화로를 따라 왕벚나무, 비자나무가 식재되어 있고 곰솔, 비목, 검노린재, 국수나무 등과 잡목이 우거져 있으며 정상에는 키가 작은 곰솔, 소사나무 등이 식생하고 있다. 탐방로와 정상 주변에는 초본류가 철 따라 아름다운 꽃들을 피운다. 초본류로는 새끼노루귀, 각시붓꽃, 세복수초, 할미꽃, 산자고, 골등골나물, 층층이꽃 솔체, 절굿대,
바디나물,산비장이, 엉겅퀴, 섬잔대, 한라꽃향유, 한라돌쩌귀, 야고등이 자생하고 있다. - P92

소사나무가 관목림을 형성하고 있어 이것이 철 따라 보여주는 모습은 오름 못지않은 볼거리고 기쁨이라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다. 삼다도 강풍 때 우리의 바람막이가 되어준 관목이 소사나무였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무과의 낙엽 소교목으로 분재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사랑하는 나무다. 소사나무는 키가 크지 않아 아주 아담하다. 잎은 달걀모양이고 잎자루에 잔털이 있는데 5월에 꽃이 피고 10월에 열매를 맺는다. 한국,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지만 우리나라가 원산지 격이어서
‘Korean hornbeam‘이라고 한다.
그 소사나무가 오름의 비탈에서 정원사의 가위가 아니라 제주의 바람을 맞으며 야무지면서도 단정하게 무리지어 자라니 얼마나 예쁘고 얼마나 장관인지 보지 않아도 알 만하지 않은가. 국립수목원 이유미 연구관의 「우리 풀 우리 나무」(『주간한국』 2010.6)에서는 소사나무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 P93

소사나무는 녹음이 멋진 나무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소사나무들은바람이 가장 많이 들고 나는 바닷가 산언덕 즈음에 무리지어 숲을 이루어 특별한 풍광을 자아낸다. 굶어도 아주 크지 않고, 적절히 자연의선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의 이리저리 부드럽게 굽은 줄기 하며, 운치있게 흰빛 도는 수피가 점차 짙어가는 초록의 잎새와 아주 멋지게어울린다. 그 숲을 바라보는 시선의 끝머리에 넘실대는 바다라도 보이면 더욱 근사하다. - P93

능선을 한바퀴 돌고 나면 큰 굼부리가 하나, 작은 굼부리가 셋 있어 어미가 세쌍둥이를 보듬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용눈이오름엔 여러개의 알오름이 있다. 알오름은 오름 속에서 생긴 새끼오름이다. 남서쪽경사면에는 주뚜껑처럼 오목하게 파인 아주 예쁜 알오름이 있는데 둘레가 150미터 정도 되는 작은 크기로 잔디밭이 에워싸고 있다. 또 북동쪽에 있는 알오름은 위가 뾰족하게 도드라져 아주 귀엽다. 그 기이하고도 변화무쌍한 경관 때문에 용눈이오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용눈이오름은 오름 전체가 잔디로 덮인 잔디밭 오름이다. 그 보드라운 촉감과 아름다운 곡선 때문에 사람의 눈을 여간 홀리는 것이 아니다.
용눈이오름 잔디밭엔 미나리아재비도 많고 할미꽃도 많다. 그 미나리아재비와 할미꽃이 보드라운 잔디밭에 지천으로 피어났을 때를 상상해보라. 화가라는 인간은 형태와 색감과 질감에 대단히 민감한 동물이다. 화가 임옥상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내게 감상을 말한다. - P101

용눈이오름에서 불과 이십 분 거리에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고 김영갑(金永甲, 1957~2005) 선생만큼이나 소중한 제주의 자산이다. 두모악(혹은 두무악)은 한라산의 별칭으로 백록담 봉우리에 나무가 없는 모양에서 나온 이름이다. 지독히도 제주도를 사랑했고, 끔찍이도 자신의작업에 충실했던 한 사진작가의 처절한 인생이 낳은 우리들의 갤러리다.
김영갑은 1957년 부여에서 태어나 학력은 부여 홍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는 제주에 반하고 사진에 미쳐 1982년부터 3년 동안 카메라 하나 달랑 메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작업을 하던 끝에 1985년에는 아예 제주에 정착하여타계하기 직전까지 20년간 온 섬을 누비며 제주도의 자연을 소재로 20만여 장의 사진작품을 남겼다. - P102

1985년부터 해마다 서울과 제주에서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중 태반이
‘제주의 오름‘이라는 주제였다. 2004년에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에세이집에서 김영갑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사랑했다. 그의 사진을 본사람은 제주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새삼 깨닫곤 했다. 특히 그는 제주의 바람을 잘 찍어냈다. 
그러던 그가 1999년 친구들 앞에서 카메라가 무겁다. 가끔 손이 떨린다고 하더니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루게릭병이란 진단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3년 더 살면 잘 사는 거래"라며 사진을 계속 찍었다. 2002년에는폐교된 삼달초등학교 분교를 임대하여 개조한 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을 개관했다. 타계하기 직전인 2005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주인공없이 열린 전시는 「내가 본 이어도 1-용눈이오름」이었다.  - P103

다랑쉬오름, 용눈이오름, 아부오름뿐만 아니라 어느 오름이건 오름에한번 올라본 이는 제주를 다시 보며 제주를 사모하고 사랑하게 된다. 오름에 빠지면 거기에 몸을 던지고 싶어진다. 결국 그렇게 오름에 미쳐 살다 육신을 오름에 묻은 분이 있다. 『오름나그네』 (높은오름 1995)의 저자인 고(故)김종철(金鍾喆, 1927~95) 선생이다.
한라산과 오름을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김종철 선생은 제주의 덕망높은 산악인이자 언론인이었다. 당신은 환갑 나이의 고령에 들어서면서330여 오름을 일일이 답사하며 각 오름의 이름과 생태와 그 속에 담긴사연들을 정리해나갔다. 1990년부터 제민일보』에 매주 연재한 ‘오름나그네‘는 5년간 계속되었다. - P107

제주 자연의 보석이지만 지천으로 깔려 있어 귀한 줄 몰랐던 오름의 가치를 선생이 일깨워준 것이다. 골프장에 깔 흙으로 사용하기 위해 오름 하나가 영원히 사라지는 일을 방치했던 제주인들도 이제는 ‘오름 보호‘를 외치게 되었다.
『오름나그네』 이후 오름 등반 모임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제주도는마침내 오름의 소중한 가치를 널리 알리고 제주의 자연자원을 생태관광과 체험학습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동부지역의 다랑쉬오름, 서부지역의노꼬메오름을 제주도의 오름 랜드마크로 지정했다.
「오름나그네』는 제주의 신이 그에게 내린 숙명적 과제였던 모양이다.
그가 아니면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앞에도 없었고, 앞으로도없을 것이고, 오직 김종철 그분밖에 없다. - P108

선생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한라산 1700고지 윗세오름 너머백록담을 턱 앞에서 바라보는 곳, "진달래가 떼판으로 피어 진분홍 꽃바다를 이루는 광활한 산중고원" 그래서 "미쳐버리고 싶다"고 하셨던 선작지왓에 뿌려졌다. - P109

제주의 자연이 아름답고 경이롭다는 사실은 200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UNESCO World Heritage Site)에 등재됨으로써 이미 객관적이고 국제적인 평가를 받았다. 요즘 거론되는 세계 7대 자연경관 선정이 관광객들의 인기투표라면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등재는 지질, 생태, 환경등 자연과학자들의 전문적 평가의 결과였다. 그리고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인증되고,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지정되면서 유네스코 자연환경 분야 3관왕을 차지했으니 그랑프리와 인기상을 모두 차지한 셈이다. - P111

제주도는 120만 년 된 순상(狀, 방패 모양) 화산으로 많은 양의 현무암질 용암류가 연속적으로 분출되고 퇴적되어 방패 모양의 완만한대지를 형성하고 있다. 제주도는 수중 대륙붕 위에서 발생한 수성 마그마성 분화의 결과로 처음 생성되었고 이후 360개의 단성화산(오름)에서 분출된 현무암질 용암이 그 위로 쌓였다. 그리고 현무암질 용암이관(tube) 모양을 만들면서 광범위한 규모의 용암동굴을 형성했고현재까지 120개의 용암동굴이 알려져 있다.


즉 순상화산이고, 오름이 있고, 용암동굴이 있다는 것이 제주도와 한라산 지질의 개요이며 특질이다. 얼마나 간명한가. 이어서 보고서는 지구 전체에서 본 제주도 화산지질의 위상을 말하고 있다. - P115

조사단은 조명반, 기록반, 측량반, 보급반으로 꾸며졌다니 귀엽다고는할지언정 꼬마라고 얕볼 것은 아니었다.
굴 입구에서 1.2킬로미터 들어가자 무너진 돌이 돌동산을 이루고 있는데 위쪽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여 찾아낸 것이 지금 우리가 들어가고있는 제2입구인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47년 2월 부종휴 선생은다시 탐사에 나서 동굴 끝을 찾아냈다. 거기에는 동백꽃이 만발하고 겨울딸기가 열매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부종휴 선생은 그 동굴 끝이 지상의 어디인가를 측정한 결과 그곳은마을사람들이 ‘만쟁이거멀‘이라고 부르는 곳이었고 이로 인해 이 동굴은 만장굴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부종휴 선생은 1968년 5월 만장굴에서 홍정표 선생 주례로 산악인 30명의 축하를 받으며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그 결혼식을 계기로 만장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P124

일찍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관광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녕중학교 서무주임을 지낸 김군천(金君天, 1922~2011) 할아버지 덕택이었다.
할아버지는 1960년 퇴임 후 정부에서 관심도 보이지 않고 방치해둔 고항의 김녕사굴지킴이를 자원하여 여기에 정착해 사셨다. 주변 땅 1만2천평을 매입해 정비하여 지금 도로변에 있는 협죽도길, 잔디밭이 모두 이분이 심은 것이란다. 제주에는 이런 고맙고도 위대한 알려지지 않은 분이 곳곳에 있다. - P125

동굴 끝에는 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2010년 재조사 결과 길이 800미터. 수심은 8~13미터, 최대 폭은 20미터로 확인되었다. 동굴은 용천동굴, 호수는 ‘천년의 호수‘라고 명명되었다.
용천동굴은 용암동굴이면서 석회암동굴의 성질도 지닌 세계 최대 규모의 ‘유사 석회동굴‘(pseudo limestone cave)이었다. 때문에 천장에서는 지금도 종유석이 생성되고 있는데 가느다란 명주실 같은 것이 동굴을 가득 메우고 있어 그 환상적인 분위기는 형언할수 없을 정도이다.
실사단은 우리 조사단의 안내를 받아 용천동굴에 들어가보더니 이런처녀동굴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며 조사 명목이지만안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미안할 정도라고 했다.  - P131

동굴과의 상대평가에서도 아주 높은 점수를 주었다.


우리 실사단 대부분은 제주도의 가장 중요한 자연적 특질은 용암동굴이라고 생각한다. 길이 7킬로미터가 넘는 용암동굴은 제주도의 만장굴을 포함해 세계에 단 12개만이 존재한다. 게다가 만장굴은 부근의 김녕사굴 및 용천동굴과도 이어져 13킬로미터 이상의 단일 통로를형성하고 있다.(…)하와이 화산국립공원에도 용암동굴이 여러 개 있으나 전체적인 규모나 상태, 접근성 측면에서 모두 제주도에 필적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캄차카 및 갈라파고스 제도의 순상화산은 규모도 더 작고 용암동굴등의 부차적 지형을 다양하게 보여주지 못한다. (…)단적으로 말해 거문오름용암동굴계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된전세계 용암동굴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며 중요도가 높다. - P133

세계자연보전연맹은 우리나라에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애초에는 실사단 중 많은 분들이 제주도 전체를 등재하는 것까지 검토했다. 최소한 제주도의 다른 응회구 및 용암동굴까지 포함하여 세계자연유산 범위를 폭넓게 확장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결국 세 군데로만 후보 지역을 국한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토지 소유권, 소유주의 태도, 보존 상태 등관리 측면의 완전성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제주도에서 가장 긴 동굴로 웅장한 3차원 구조를 보이는 빌레못동굴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법적으로 보호되고 있기는 하나 상당 부분이 개인 소유로 이미 많이 훼손되었다. 협재에 위치한 쌍용굴, 황금굴, 소천굴은 거문오름 동굴계에 비해 뛰어나지는 않지만 역시 여러가지 석회암 생성물이 동굴 내부를 장식하고 있어 등재할 만했다. 그러나 사유지인 한림공원 내에 있어 추진이 어려웠다.
실사단은 자연유산에 추가로 포함될 가능성이 있는 여러 곳으로 산굼부리, 사라오름, 어승생악, 송악산, 산방산 등을 지목했다. 실사보고서는이 점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대한민국에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고했다. - P134

자연유산으로 등재된 지역 이외에 더 넓은 지역의 화산지형과 제주도의 생물다양성 가치를 관리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여 추가로 제주도의 자연유산등재 범위를 확대하는 가능성을 고려해볼 것. - P135

"나와 이 자리에 함께 있는 제주도지사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가공식적으로 제시한 세계자연보전연맹의 다섯 가지 권고사항을 충실히이행하여 훗날 제주도 전 지역이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P136

제주답사 일번지의 마지막 테마는 해녀다. 우리는 거문오름을 떠나해녀문화를 답사하기 위하여 구좌읍 하도리로 향했다. 제주 해녀의 상징은 하도리에서 찾게 된다. 하도리에는 현재도 가장 많은 해녀가 물질을 하고 있고, 일제강점기에 해녀들의 항일운동이 일어났던 곳으로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공원에는 기념탑도 세워져 있고, 2006년에 문을 연 해녀박물관도 있다. 하도리로 가는 버스에 오르자마자 나는 마이크를 잡고강의를 시작했다. 가는 길이 짧아 해녀와 해녀의 역사에 대해 핵심만 얘기해주었다.


"해녀는 제주의 상징이자, 제주의 정신이고, 제주의 표상입니다. 해녀 - P137

가 없는 제주는 상상할 수 없죠. 19세기까지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뿌리는 육지의 농부와 해안가의 어부였지요. 제주에서는 농부, 어부 외에 해녀와 목자(牧者)가 더 있었습니다.
ISI제주에선 목자를 ‘우리‘라고 하고 해녀는 녀(女)‘ 또는 ‘수(潛媛)‘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일제강점기에 해녀라는 말로 바뀌었어요. 학자 중에는 해녀는 일제가 업신여겨 만든 말이라고 해서 잠녀와 잠수를고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잠녀나 잠수의 어감이 별로 좋지 않은데다해녀라는 말이 이미 익어 있기 때문에 통상 해녀로 부릅니다. 언어는 변하는 것이니까요."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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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지금 나는 구좌에 있다.


연북정, 비석거리, 번듯한 기와집 마을이 있고, 중산간지대에 와흘리 선흘리의 본향당신당이 신령스럽다. 교래리엔 자연휴양림도 있다. 특히나 구좌엔 김녕리, 평대리, 송당리, 세화리, 하도리, 종달리 등 이름도 아름다운 동네 열두 개가 있고 중골, 연등물, 검은흘, 솔락개, 글막개, 첫동네 등제주토속을 그대로 느끼게 하는 60여 곳의 묵은 동네가 있다.
구좌는 한라산 북사면의 저지대로 넓은 초지가 바다 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제법 넓고 비탈진 들판의 긴 밭담 속에서 당근·양파·마늘이 철따라 푸른빛을 발하고 송당목장이 있는 송당리 일대는 마지막 테우리 (목동)들이 여전히 소와 말을 키우고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비자림 (子林)도 구좌에 있다.
하도리에는 지금도 제주 해녀의 10분의 1이 변함없이 물질을 하고 있고, 갯가 곳곳엔 해녀들의 쉼터인 불턱과 세화리 갯것할망당, 종달리 돈지할망당 같은 해안가 신당이 옛날 그 모습으로 성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구좌에는 제주의 농업, 목축업, 어업이 과거 그대로 이어져오고 있어 제주인의 건강하면서도 애틋한 삶을 속살까지 만질 수 있다. - P15

구좌는 기생화산(寄生火山) 인 오름의 왕국이다.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오름, 굽이치며 돌아가는 능선이 감미로운 용눈이오름도 여기있다. 만장굴, 김녕사굴, 용천동굴이 있는 제주도 용암동굴의 종가이기도 하다. 문주란 자생지로 유명한 토끼섬도 구좌에 있다. 게다가 1만 8천신들의 고향인 송당본향당도 여기에 있으니 구좌는 제주 자연과 인문의 원단이 모여 있는 곳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읍소재지 세화리에서 하도리 거쳐 종달리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멀리성산일출봉이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져 있어 제주도 일주도로 중에서도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보여주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 조천과 구좌는어느 면으로 보나 당당히 ‘제주답사일번지‘로 삼을 만하다. - P15

심어놓았다. 그러나 하와이나 사모아 섬에서 장대하게 자라는 나무들이제주에서는 억지로 겨우겨우 자라 대빗자루 몽둥이처럼 길게 올라간 것을 보면 감동은커녕 측은지심이 일어날 때가 많다.
진짜 제주도에서 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주는 것은 자생종 나무들이다. 구실잣밤나무, 담팔수, 먼나무, 동백나무, 후박나무, 녹나무,
협죽도 같은 늘푸른나무들이다. 자생나무로 이루어진 가로수들은 한껏우리의 눈과 마음을 기쁘게 해준다.
제주시내의 구실잣밤나무 가로수길, 서귀포의 담팔수 가로수길, 대정제주 추사관 언저리의 먼나무 가로수길, 사려니 숲길 가는 길의 삼나무가로수길, 남원 일주도로의 야자나무 가로수길, 종달리 해안도로의 수국꽃길은 그 자체가 일품이어서 차 타고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눈과 마음이 황홀해진다. - P26

‘소원을 새긴 백지!‘


사연이 많은 사람은 소지를 몇십 장 겹쳐서 가슴에 대고 빈다고 한다.
이런 높은 차원의 발원 형식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을까 보냐. 본래는 글모르는 할머니들을 위해 생겨난 의식이었다고 하는데 어떤 글을 써넣은것보다 진한 감동을 주지 않는가!
일본의 사찰에 가면 소원을 써서 절 마당에 걸어놓는 강까께(願掛)가 있고, 이스라엘 ‘통곡의 벽‘에선 소원을 적어 돌 틈에 끼워넣는다고하는데 우리 제주도에선 백지에 소원을 전사(轉 寫)해서 걸어놓는 것이다. 팽나무 신목에 흰 소지가 나부끼는 와흘본향당은 제주인의 전통과정체성을 웅변해주는 살아 있는 민속인 것이다. - P41

는 제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팽나무 대여섯 그루 아래 모셔진 이 다섯 석상을 보면 그야말로 서민적이고 해학적이고 무속적이고 제주도적인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면서깊은 정을 느끼게 된다. 불상을 보거나 돌하르방을 볼 때는 전혀 느낄 수없는 인간적 체취이다. 삼다도의 그 많은 돌 중에서 인체를 닮은 것, 얼굴을 닮은 것 다섯 개를 골라 거기에 이목구비만 슬쩍 가했을 뿐인데 누구도 석상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인간미가 넘친다. 조형적으로 세련되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세련되기는커녕 조형이라는 개념도 없이 민초들이자신들의 정서에 맞는 돌을 주워다 세워놓았을 뿐인데 우리는 거기에서말할 수 없는 친숙감을 느끼니 이것이 민속의 힘이고 아름다움이라고할 만한 것이다. - P46

제주도 답사에서 돌아와 학생들과 얘기하는 도중에 사실 ‘회천 석인상‘이라는 아주 별격의 옛 석인상이 있었다며 사진을 보여주자 학생들은 제각기 다른 재미있는 모습들을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띠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이런 곳을 데리고 가지 않은 선생이 원망스럽고 너무도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생각해보자니 제주의 유서 깊은 중산간마을인 세미마을은 오래도록많은 상처를 입었다. 마을 이름은 회천동으로 둔갑했고, 포제를 지내던신당의 석인상은 화천사 오석불이라고 불리고 몸에는 유교식 위패가 새겨졌다. 거기다 4·3사건 때 이 마을들은 전소되고 많은 희생자를 내어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세워놓은 ‘4·3희생자 위령비‘가 길가에 쓸쓸히서 있다.
- P47

성에 배치된 인원도 대대적으로 보강하여 진지의 대장 아래 상비군약 100명과 예비군 100명을 두었고 전용배가 한 척 있었다고 한다. 이때성 위에 망루를 짓고 쌍벽정(雙碧亭)이라고 했는데 선조 32년(1599)에 성윤문(成允文) 목사가 다시 건물을 수리하고는 정자 이름을 연북정이라고 바꾸었다.
오늘날 조천진의 성벽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동남쪽 정면은 높이 14자의 반듯한 축대이고 북쪽은 타원형의 성곽으로 둘러싸여 있어 그 옛날의 장했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모양으로 보나 크기로 보나 둥그렇게 둘러진 옹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 P50

연북정 정자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에 앞뒤 좌우로 퇴(退)가 딸린일곱 량 집이다. 일곱 량이란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도리가 일곱 개 있다는 뜻으로 세 량, 다섯 량이 아니라 일곱 량이나 되는 큰 집이라는 뜻이다. 기둥의 배열과 가구의 연결방식이 모두 제주도 주택과 비슷하며 지붕은 합각지붕으로 물매가 아주 낮다. 바람이 세기 때문에 육지의 정자처럼 기둥을 높이 올리지 못하는 제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북정은 시원스런 멋이 아니라 야무진 집이라는 인상을 준다.
모든 정자는 건물 자체보다 거기서 내다보는 전망이 더 중요하고, 더아름답다. 연북정에 오르면 조천항이 멀리 내다보인다. 연북정 너머 펼 - P50

 조천진지붕이 육지의 그것처럼 활짝쳐지는 먼바다에서 파도가 넘실넘실 춤을 추듯 포구로 밀려들어오다가바위섬에 부딪칠 때는 ‘처얼썩!‘ 소리를 내며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부서진다. 그러고는 해안에 다다라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가만히 뒷걸음으로 물러나며 자취를 감춘다. 열지어 들어오는 한 무리 파도가 밀려가는끝까지 눈길을 주면서 몇번 일렁이나 헤아려보기도 하고, 낮은 바위를거뜬히 타고 넘는지 숨죽여 기다려보기도 한다.
연북정 정자에 앉아 검은 바위를 넘나들며 부서지는 파도의 흰 포말을 망연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몸과 마음이 홀연히 가벼워진다. 이상(李箱)의 표현대로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아진다. 그것이 연북정에오르는 맛이다. - P51

신영복 선생은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아버님께 보낸 편지에 연북정에 대한 역설을 이렇게 말했다.


유배지에서 다산 정약용이 쓴 글을 읽었습니다. 조선시대를 통틀어대부분의 유배자들이 배소에서 망경대나 연북정 따위를 지어 임금에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연모를 표시했음에 비하여 다산은 그런 정자를짓지도 않았거니와 조정이 다시 자기를 불러줄 것을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해배만을 기다리는 삶의 피동성과 그 피동성이 결과하는 무서운 노쇠를 일찍부터 경계하였습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런 마음으로 20년간 감옥살이를 했고 그랬기에 오늘날 존경받는 지식인상이 된 것이리라. - P54

너븐숭이에서 진짜 우리의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추모의 염을 일으키는 것은 길가에 있는 애기무덤들이다. 관도 쓰지 않은 무덤인지라 대야만 한 크기로 동그랗게 현무암을 둘러놓은 것이 전부인 애기무덤 여남은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애처롭고 슬픈 풍경을 나는 다 표현하지못한다. 무덤가에는 시민단체들이 연합하여 세운 작은 까만 대리석 비석이 놓여 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평화와 상생(相生)의 꽃으로 피어나소서. 4·3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남겨진 유가족들에게도 깊은 형제적 연대감과 평화를 기원하나이다."


조촐할지언정 위로하고 추모하는 마음이 진실되어 가슴이 뭉클해진 - P72

다. 누가 이 애기무덤과 비석을 보면서 4·3을 불온분자의 폭동이라고 할수 있겠는가. 유적지의 진정성이란 이런 것이다. 그래도 더러는 애기무덤을 보면서 "아이들까지도 죽였단 말인가?"라고 적이 놀라고 의심이 가는 분도 있을 것같다. 그러나 정말 당시는 그랬고, 그보다 더 이해하기힘든 사실도 있다. 제주의 화가 강요배가 4·3사건을 주제로 한 「동백꽃지다」 연작을 전시할 때 얘기다. 요배 그림을 좋아한 그의 팬 한 분은 그의 이름까지 멋있다고 생각해서 "선생님은 이름도 예술적이에요. 아버님이 멋있는 분이었나 봐요"라고 친근하게 말하자 요배는 멋쩍은 듯 아무 말하지 않고 빙긋이 웃기만 했다.
그때 요배는 모르는 사람이라 말해주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에는 4·3사건의 아픔이 그대로 배어 있다. 4·3사건의 양민학살 당시 지금 제주공항인 정뜨르에 토벌대가 수백 명의 주민들을 모아놓고 호명할 때 "김철 - P73

수"라고 불러 동명을 가진 세 명이 나오면 누군지 가려내지 않고 모두 처형했다는 것이다. 그때 요배 아버지는 내 아들 이름은 절대로 동명이 나오지 않는 독특한 이름으로 지을 것이라고 마음먹어 요배의 형은 강거배, 요배는 강요배가 된 것이다. 제주인에게 4·3의 상처는 그렇게 깊고오래 지속되었던 것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곁으로 큰길 안쪽에는 ‘순이삼촌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순이삼촌‘이라고 새긴 기둥이 하나 서 있고 그 주위에는 순이삼촌 소설의 문장들이 새겨진 수십 개의 장대석이 널부러져 있다. 마치북촌리 학살 때 시신들이 쓰러져 있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비석을 향해가는 동안 소설의 구절들을 스치듯 읽게 되니 자연히 고개가 땅을 향하여 추모하는 자세가 된다. 제주도에서 본 가장 진정성이 살아 있는 기념설치물이었다. 그중 한 대목을 읽어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 P74

‘순이삼촌네 그 옴팡진 돌짝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은 시체가 둘있었는데 큰아버지의 손을 빌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았다. 그해고구마 농사는 풍작이었다. 송장거름을 먹은 고구마는 목침 덩어리만큼큼직큼직했다."


지금도 사람들은 행여 무슨 오해라도 살까봐 4·3을 쉬쉬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4·3사건을 당당히 얘기해야 한다. 그것은 외면한다고 잊혀질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니다. 조천에 왔으면 마땅히 너븐숭이를들러야 진정한 답사객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 P74

"오름은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표정이자 제주인의 삶이 녹아 있는 곳이라!"

나는 당장 다랑쉬오름을 가보고 싶었다. 그것을 보지 않고 어떻게 그의 그림에 평을 쓸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의 화실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 일단 제주시내로 가서 민예총의 김상철에게 전화를 걸어 답사팀을 꾸려 다랑쉬오름에 가자고 했다. 이런 일은 상철이에게 부탁하면 차질 없이, 아니 150퍼센트 해낸다. 여지없이 상철이는 자동차가진 사람을 꼬드겨서 우리 팀에 끌어넣었다.
다랑쉬오름은 구좌읍 세화리와 송당리에 걸쳐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제주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 비자림의 동남쪽 1킬로미터 지점이다.
제주시내에서 가자면 번영로97번 도로)와 비자림로, 중산간동로를 거쳐가거나 산천단을 지나 일단 5·16도로(1131번 도로)로 들어섰다가 산굼부리를 거쳐가는 1112번 도로로 갈 수도 있다. 제주시내에서 37킬로미터거리로, 탐방로 입구 주차장까지 45분 정도 걸린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단정적으로 말하기를 잘하는 상철이는 무조건 후자로 가야 한다고했다.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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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 할 때, 두껍게 깔린 낙엽층 위에 누운 변사자 기도수 얼굴에 손전등빛이 도착, 선명한 주황색 등산복 차림, 부패가 진행 중 해준, 스마트폰으로 플래시 터뜨리면서 사진 찍는다. 폴리스 라인 안의 활동복들 사이에서 그의 양복/ 넥타이 차림은 이질적이다. 비록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지만 고급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힌고인의 귀에 대고 찰칵. 손가락 관절마다 옹이처럼 단단하게 불룩하고 손톱이 다깨진 손도 찍는다. 손목의 롤렉스 시계도 찰칵. 유리 뚜껑은 깨졌고 작동도 멈췄다.
월요일 10시 2분에 해준, 망자의 시선 방향을 따라 다시 산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 P7


해준
(쌍안경에서 눈 떼지 않은 채, 한손으로 안마기를 치우며)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


심심한 듯 기도수 휴대폰을 꺼내 켜는 수완. 서래와 도수의 셀카 배경 화면을 보며심드렁하게 - - P29

해준

그래서 기도수씨 손톱에서 송서래 씨 디엔에이가 나왔단 말입니까?
(끄덕이는 서래를 보면서 끄덕이는 해준)
산이 그렇게 싫으세요?


진저리치는 서래, 전화기를 만지더니 빠르게 중국어를 한다. 당황하는 해준에게전화기를 돌린다. 통역기 앱의 목소리 -


남자 성우
공자님 말씀에,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인자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난 인자한 사람이 아닙니다.
(해준의 ‘이 여자, 뭐지?‘ 표정)
난 바다가 좋아요. - P37

해준
젊고 예쁘고 외국인이라서 피의자가 돼야 해?


수완
예쁜 건 인정하시는 거네요?
(한숨 쉬는 해준)
역차별이라고요…………. 여자 아니고 외국인 아니고그냥 남자 한국인이었으면
팀장님, 가서 밤새 잠복하자고 하셨을 걸요?
집에는 곧바로 가는지, 누가 찾아오는 건 아닌지 본다고.
잠복이 취미잖아요, 예? 잔소리하고.


수완을 노려보는 해준. - P52

돌아보는 해준, 서래의 진지한 표정을 읽더니 고무장갑 벗고 온다.


해준
그러게………. 그런 놈이 감옥 갈 거 각오하고 사람을 때렸네………?


서래
죽을만큼 좋아한 여자네?


서류에 붙은 ‘오가인‘이라는 여자의 사진을 함께 본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질문들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해준.


해준
죽기보다 감옥을 무서워하는 놈이 살인을 이백만 원 때문에?
지구하고 나눠 가졌으니까 백만원인데?
이 오가인, 먼 데 사는데? 경기도서 미용실 하는데?
게다가 결혼도 했는데?


서래
한국에서는 좋아하는 사람이 결혼했다고 좋아하기를 중단합니까?


서래를 돌아보는 해준, 눈 피하지 않는 서래. 마주치자 무안해져서 허공으로 눈길을 올리는 해준. - P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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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독자들에게


나는 이 책을 사십 년 전에 썼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책에 담긴 생각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이 책을 새로운 한국어번역본으로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축하드립니다.
이와 함께 나는 여러분들께 위대한 일본 시인 고바야시 잇사(小林茶, 1763-1827)가 두 세기 전에 쓴 하이쿠 한 편을 보냅니다. 그는 단열한 단어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부자들을 위해
새 눈에 대해 너절한 글을 쓰는 것은
예술이 아니다.

계속 싸워 나가시기 바랍니다!

2012년 6월
존 버거

말 이전에 보는 행위가 있다. 아이들은 말을 배우기에 앞서 사물을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러나 보는 행위가 말에 앞선다는 것에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는 행위는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결정해 준다. 우리는 우리 주위으로를에워싼 이 세계를 말로 설명하고는 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든 우리가보는 이 세계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며 결코 한가지 방식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매일 저녁 해가 지는 것을 볼 때, 우리는해가 지평선 아래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기 때 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지식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광경과 꼭 맞아 떨어지지는 않는다. - P9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또는 우리가 믿고있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던 중세 사람들이 보는 불타는 광경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불타는 광경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옥에 대한 그들의 관념은 불에 타서 재만 남고 모든 것이다 소멸되는 시각적 정경과 불에 덴 고통의 체험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완벽해 보인다. 그 어떤 단어도 이 완벽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으며, 사랑의 행위만이 일시적으로 그 완벽함을 표현할 수 있다. - P10

우리가 어떤 것을 볼 수 있게 되자마자, 타인도 우리를 볼 수 있다는사실을 의식하게 된다. 이렇게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시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 자신 역시 가시적 세계의 일부라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게된다.
만약 우리가 저 너머의 언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그 언덕에서도 역시 우리가 보일 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의 상호작용적 성격은 대화의 상호작용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때로는 문자 그대로 또는 은유적인 의미에서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상대방에게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상대방은 무엇을 어떻게 보았는지 알아내기 위해 대화하는 경우도 있다.
우리가 이 책에서 사용하는 이미지라는 단어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가리킨다. - P11

세잔(P. Cézanne)이 화가의 입장에서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있다. "세상의 삶에서 한순간이 지나간다! 그 순간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어버리는 것! 바로 그 순간이 되고, 예민한 감광판(感光板)이 되는 것… 우리가 본 것을 이미지로 남기고, 우리 시대 전에 나타났던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는 것…." 그림에 그려진 순간이 눈앞에 바로 나타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미술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고, 그러한 기대는 우리가 복제를 통해서 체험한 그림들의 의미가 어떤 것이었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고 모든 미술이 저절로 이해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아니다. 누군가 잡지에서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고대그리스 두상의 복제 사진을 오려, 판때기에 아무런 공통점도 없는 다른 이미지들 옆에 붙여 놓는다고 해서 그 두상의 의미를 온전히 알게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P38

이미지의 새로운 언어를 다르게 사용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 그 새로운 언어를 통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영역의 경험들을 더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말 이전에 보는행위가 있다.) 이때 경험이란 개인적 경험뿐 아니라, 과거에 대한 우리의 관계라는 본질적인 역사적 경험을 말한다. 즉, 우리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경험, 우리 자신이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는 그런역사를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경험 말이다. - P40

과거의 예술은 더 이상 과거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권위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미지의 언어가 들어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 언어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복제본의 저작권 문제, 미술 매체와 출판사의 소유권 문제, 공공 미술관이나 박물관의 정책 같은 문제로 이어진다. 일반적으로 이런 문제들은 극히 작은 전문적인 문제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 책의 목적 중 하나는 현재의 위기가 훨씬 광범위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다. 스스로의 과거와 단절된 개인이나 계급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있는 개인이나 계급에 비해, 선택이나 행동을 함에 있어 훨씬 덜 자유롭다. 바로 그 점이 과거의 예술 전체가 이제 정치적 문제가 된 이유-단 하나의 이유-이다.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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