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린 오쇼네시는 6월 9일, 화요일에 아일린 블레어가 되었다. 그녀의 새 집에서 그늘진 오솔길을 따라 타르로 검게 칠한 매너 농장과 작은 연못을 지나 조금 걸어 올라가면 나오는 교회에서 조촐한 예식이 거행되었다. 이 작은 교회는 12세기부터조금씩 지어진 것으로, 지역에서 나는 어두운 빛깔의 수석을제각각의 모양대로 시멘트를 사용해 이어 붙인 특이한 외관의 건물이었다. 그 돌멩이들은 마치 책의 한 쪽에 늘어놓은 상형 문자들처럼 보인다. 희게 칠한 내부는 밝고 휑하다. 목재 서까래에는오래전에 새겨놓은 천사들이 있고, 바닥은 흘림체로 비문을 새긴 18세기의 검은 묘석들로 포장되어 있다. - P62

오랜 전통, 산업화 이전 영국 시골 마을의 전통을 중시하는 전통주의자였다"라고 시인 스티븐 스펜더Stephen Spender는 말했다. "그는 이웃들이 서로 잘 아는 작은 공동체를 신봉했고, 그래서 무정그러므로 그가부주의자들과 상당한 공감을 지니고 있었다.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고 오웰은 공산주의자였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있을 것이다."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와 마찬가지로, 그도천국은 우리 앞에, 도시화되고 산업화된 미래에 있다기보다 우리의 등 뒤에, 구식의 삶에 유기적인 세계에 있다고 믿었다.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한 것도 아마 그런 예스러운방식이 좋아서였을 것이다. 물론 마을이나 가게를 떠날 필요가없는 장소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가게는 거의 연중무휴로 열려 있었다. 피로연은 신혼집 근처의 펍에서 열렸다.  - P63

아일린의 집에서는 그녀의 사랑하는 오빠 로런스 프레더릭 오쇼네시가 ‘에릭‘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므로, 그녀는 에릭 블레어와 결혼하여 블레어라는 이름을쓰게 된 후 남편을 ‘조지‘라고 불렀다. ‘조지 오웰‘이라는 이름은 갑자기 필명으로사용되기 시작했지만, 차츰 편지에서나 친구들 사이에서도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그는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 중 다수에게 ‘조지 오웰‘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니까 조지 오웰의 첫 아내는 ‘아일린 오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아일린 블레어‘였다. 그녀의 묘비에도 그의 묘비에도 ‘블레어‘라는 이름이 새겨졌고, 1944년그들이 입양한 아들은 ‘리처드 블레어‘가 되었다. 나는 아일린 오쇼네시 블레어를 ‘아일린‘이라고 불러야 하는 것이 유감이지만, 너무나 많은 기혼 여성의 경우가 그렇듯, 그녀가 평생 지녔던 자신만의 이름은 그것뿐이다. 반면 오웰이 죽기 두어 달 전에 결혼했던 소니아 브라우넬은 오웰이라는 성을 따랐다. 마치 그 사람보다는 전설과 결혼하기나 하는 것처럼. [원주] - P63

헨리 데이비드 소로 같은 작가라면 콩을 심고 은유와 잠언을 거두었을 법하지만, 이런 일지에서 오웰의 콩은 엄격하게 콩으로 자랐다. 즉 그는 그런 관찰이나 기록을 상상력의 도약판이나 공공연한 문학적 기초 공사로 삼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것은사적인 성격이 없는 일지로, 발표하려고 쓴 것도 아니고 그의 감정적·창조적·사회적·신체적 삶의 기록도 아니다. 단지 그의 노동과 작업 계획을 담고 있을 뿐이다. 때로는 무엇을 사고 무슨 일을해야겠다는 식의 목록도 있는데, 너무나 단순하고 가까운 미래의 계획이라 다른 많은 일들이 실현 불가능할 때에도 충분히 실현 가능한 것들이었다. 그가 왜 이런 자세한 기록을 남겼는지 이유는 분명치 않지만, 그는 그 일지에 워낙 열심이었으므로 그가부친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월링턴을 떠나야 했을 때는 아일린이기록을 계속했고,  - P66

1940년 그는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어느 설문 조사에서자신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다. "글 쓰는 본업 외에 내가 가장좋아하는 일은 정원 가꾸기, 특히 텃밭 가꾸기이다."‘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중요했던가는 1933년 처음 시민농장을 분양받았을 때부터 그 자신이 죽어가던 무렵 생명을 불어넣으려 애썼던마지막 정원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 일에 쏟은 정성과 노동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척도는 덜 계량적이지만 더 의미심장한 것, 즉그가 그 일에서 발견했던 기쁨과 의미에 있다. 그는 정원을 원했고, 정원에서 일하기를 원했다. 자기가 먹을 것과 좀 더 무형의 것들을 생산하기 원했다. 그는 꽃과 과일나무와 채소와 닭과 염소를 원했고, 새와 하늘과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기를 원했다. 그는1946년 「나는 왜 쓰는가」에서 밝혔던 소신대로 이 땅을 사랑했던것이 분명하다. 그는 수선화와 고슴도치와 민달팽이에 대해 궁금해했고, 동식물과 날씨를 관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 P67

작가로서, 당신은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연을 끊지만, 그것은 좀 더 폭넓게 세상과 연결되기 위해, 즉 이 관조적인 상태에서 짜 맞추어진말들을 다른 곳에서 읽을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서이다. 글쓰기에서 생생한 것은 그것이 오감을 어떻게 자극하느냐가 아니라 상상력에 어떻게 호소하느냐이다. 전쟁터와 탄생과 진창길을, 또는냄새를 오웰은 그의 책들에 묘사된 악취로 유명해지게 된다묘사할 수는 있지만, 그래 봤자 그것은 진짜 피도, 진흙도, 삶은양배추도 아닌, 백지 위의 검은 글자들일 뿐이다. - P68

정원은 글쓰기의 육체 없는 불확실성과는 정반대인 것을제공한다. 그것은 모든 감각에 생생하게 와닿는 육체노동의 공간, 최상의 그리고 가장 문자 그대로의 방식으로 더러워질 공간이며, 즉각적이고 이론의 여지 없는 효과를 볼 기회이다. 땅을 판다면 하루의 끝에는 얼마나 팠는가가 닭들이 낳은 달걀의 개수만큼이나 분명하다. 문학 평론가 쿠니오신 Kunio Shin은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에 대해 이렇게 썼다. "경험의 견실성뿐 아니라 외적 현실의 존재 자체가 당에 의해 암묵적으로 부인되는 세계에서, 윈스턴이 ‘돌은 단단하고 물은 축축하며 떠받치지 않은 물체는 지구 중심을 향해 떨어진다‘ 같은 뻔한 진리를 붙들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정치적 저항의 필사적인 몸짓이다."『1984』의 또 다른 곳에서 오웰은 이렇게 선언한다. "당은 당신에게 눈과 귀의 자명성을 거부하라고 명했소." - P68

이는물질적,감각적 세계에서의 직접적 관찰과 일차적 만남을 저항 행위로, 또는적어도 저항할 줄 아는 자아를 강화하는 행위로 만든다. 이런 직접적 경험으로 자주 시간을 보내는 것은 사태를 명확하게 하는방법이요, 단어의 소용돌이와 그것이 휘저어 올릴 수 있는 혼돈으로부터 벗어나는 한 방법이다. 거짓과 환상의 시대에 정원은 성장 과정과 시간의 흐름의 영역에, 물리학·기상학·수력학·생물학의 법칙의 영역에, 그리고 감각의 영역에 뿌리박는 한 방식이다. - P69

미국 시인이자 열성적인 정원사인 로스 게이Ross Gay는 한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정원 일만큼 내게 느리게 사는 법을 훈련시킨 일은 없을 겁니다. 정원 일은 내게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게 했어요. 내 정원이 주는 기쁨의 일부는 도대체어떤 일도 시작하기 전에 그 안에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1년 중 몇차례는 뒷마당에 나가 채 30피트(9미터)도 가기 전에 20분씩이나걸음을 멈춥니다. 뜰보리수에 손질이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각다귀가 눈에 뜨이고, 라벤더와 그 바로 곁의 백리향 덤불에서 잡초를 뽑아주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지요. 난 내 정원이 생산성의 논리를 떠나 아주 생산적이라는 게 좋아요. 거기서는 먹을수 있고 영양가 높은 것도 많이 나지만, 꼭 계량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는 방식으로도 생산적이랍니다."3" 글쓰기의 대부분은 생각하기이지 자판 두드리기가 아니며, 생각하기는 때로 무엇인가 다른 것을 하고 있을 때 가장 잘 이루어진다.  - P69

생계를 위해 글을 쓸 때 돌아오는 것(영향력, 수입, 인정 같은것)은 뜬구름처럼 확실치 않을 수 있지만, 정원에 씨를 뿌린 것은날씨나 병충해로 망하지 않는 한 반드시 거두기 마련이다. 식용작물을 키우는 것은 단어 속에서 헤매다가 감각으로 또 자아 감각으로 돌아오는 한 방법이 시금석이 될 수 있다. 또 그것은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 찬 창조적 과정과의 만남이 될 수도 있으니, 그 과정에는 날씨나 다른 생물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온갖힘들이 끼어들기 마련이다. 정원 일은 종이(또는 컴퓨터 스크린) 위에서 일어나는 일과 달리 인간이 아닌 것들과의 협동 작업이다.
원고는 우박에 두들겨 맞을 일이 거의 없지만 말이다(오웰의 원고하나가 독일군의 폭탄에 산산조각이 나기는 했다). 1984」의 뉴스피크Newspeak(신어)가 뿌리 뽑으려 하는 은유적이고 이미지가 풍부하여 상상력을 자극하는 언어는 자연스럽고 전원적인 농경 세계에뿌리박고 있다.  - P70

그가 회상하는 한 사건, 아마도 웰링턴에서 일어났음직한 사건은 또 다른 전원적 비유를 쓰자면, 전원적인 것이 그에게서 얼마나 풍부한 열매를 맺었던가를 보여준다. "나는 한 어린 소년, 아마 열 살쯤 되었을 소년이 커다란 수레 말을 몰고 좁다란 길을 가면서 말이 돌아보려 할 때마다 채찍질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문득 그런 동물들이 자신들의 힘을 알게 되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아무 힘도 행사하지 못할 것이며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방식은 부자가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하는 방식과 같다는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해서 동물농장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는 전쟁 동안 런던에서 그것을 썼지만, 다양한 가축들의 기질을 익히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정원은 삶과 죽음의 불가분성이 무수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장소이기도 하다. 1939년 10월 말에 오웰은 정원 일기에 된서리 때문에 "달리아들은 대번에 시커메졌고, 익으라고 두었던 호박들도 다 망가졌을 것"이라고 썼다." 그날 그는 뿌리 덮기를 하려고 낙엽을 쓸어 모으고 퇴비 더미에서 작업을 했는데, "H 영감이 전에 쌓아둔 뗏장이 잘 썩어서 훌륭한 부식토가 되었다.  - P71

오웰의 무정부주의자 친구 조지 우드콕George Woodcock은 이렇게 썼다. "그의 자기 재생 능력은 그가 평범한 것, 하루하루 살아가는 평범한 경험, 그리고 특히 자연과의 접촉에서 누리는 기쁨에 있었다. 그는 마치 안타이오스처럼 땅에서 양식을 취했다.43 행복과 기쁨의 차이는 중요하다. 행복은 마치 끝없는 햇살처럼 지속적인 상태로 상상되는 데 비해, 기쁨은 번개처럼 번득이는 것이다. 행복은 난관이나 불화를 피하는 질서 잡힌 삶을요구하는 듯한 데 비해, 기쁨은 어디서든 불현듯 나타날 수 있다.
칼라 버그먼earla bergman과닉 몽고메리Nick Montgomery는 함께 쓴 - P72

책 기쁜 분투Joyful Militancy에서 이렇게 구분 선을 그었다. "기쁨은 종속(즉굴종)시키는 힘들과의 싸움을 통해 사람들을 새롭게 만든다. 기쁨은 탈종속적 과정이요, 삶을 강렬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 확산되는 과정이다. 행복이 의존을 유도하는 마취제로 사용되는 반면, 기쁨은 사람들이 그 의존성에서 탈피하는방식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고 느끼는 능력의 성장이다." - P73

오웰은 자신이 글로써 반대한 것들, 즉 권위주의와 전체주의 거짓말과 프로파간다(그리고 대충 넘어가기로 인한 언어와 정치의 타락, 정치적 자유의 근간인 프라이버시의 잠식 같은 주제들로 널리 알려졌다. 그런 힘들로부터, 그가 긍정적으로 추구한 것들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다. 평등과 민주주의, 언어의 명확성과 의도의 정직성, 사생활과 그 모든 즐거움과 기쁨, 정치적 자유와 어느 정도 그 기반이 되는, 감독과 침범을 받지 않는 프라이버시, 그리고 즉각적 경험의 즐거움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긍정적인 것들을 굳이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유추할 필요는 없다.
그는 긍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도 많이 썼다. 그런 에세이들이 그가 쓴 글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며, 그렇지 않은 다른 작품들곳곳에서도 그는 삶을 살아갈 만하게 하는 것들에 대해 썼다. 그의 가장 암울한 글에도 아름다움의 순간들이 있다. 그의 가장 서정적인 에세이들도 실제적인 문제들과 드잡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 P73

그는 이 광업 및 제조업 지역에서 사람뿐 아니라 장소 자체도 면밀히 관찰했다. 석탄이 어디에나 있었다. 석탄은 일이었고먼지였고 연료였고 스모그였고 위험이자 질병이자 죽음이었으며거의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의 밑에 깔린, 어디에나 있는 풍부한 재료였다. 그는 점차 그것에 다가갔다. 처음에 석탄은 풍경으로 눈에 들어왔다. "슬래그] 더미와 굴뚝들, 고철 무더기, 더러운 운하늘, 그리고 나막신 자국이 이리저리 나 있는 재투성이 진창길이라는 끔찍한 풍경. 모든 건물이 검댕으로 시커겠고, 눈조차도 검었으며, 검은 연기가 온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위건은 "식물이라고는 추방되어버린 세계"처럼 보였다. "연기와 셰일, 얼음,진창, 재, 더러운 물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갱도가 주저앉은 자리에 고인 물웅덩이들이 "로엄버 빛깔" 얼음에 덮인 것을 묘사했다. 또 다른 곳에는 슬래그 더미에 불이 붙어서 "어둠 속에서 보면 붉은 개울 같은 불길이 이리저리 구불대며흐르고, 유황에서 나오는 불길한 푸른 불길이 천천히 움직이는것도 보인다. 이 불빛은 항상 꺼질 듯하다가 또다시 피어오르곤한다" - P80

식물들이 세계를 만들었으니, 이는 바다에서 유래한 단세포 유기체가 지구 대기에 최초로 유의미한 양의 산소를 배출한 때로부터 계속되어온 일이다. 석탄림의 시대에 식물들은 대기에서 단열 효과를 갖는 이산화탄소를 너무나 많이 끌어냈기 때문에 결국 그 시대는 기후 급변climate crash에, 즉 빙하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과학자들은 탄소 급변carbon crash이 ‘눈덩이 지구Snowball Earth‘, 즉 극에서 극까지 얼어붙은 행성을 만들어낼 뻔했다고 말한다. 2017년 포츠담 연구소의 기후과학자 게오르크 퓰너Georg Feulner는 추위 그 자체가 대기에서 탄소를 끌어내고 지구를 얼어붙게 하는 식물 생장의 주기를 늦추거나 정지시켰다는 이론을 제출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리가 그 과정을 역전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석탄기의 6000만 년 동안 식물들이 하늘에서 빨아들인 이산화탄소를 지난 200년 동안 가공할 인간 기술이 내뿜음으로써 식물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해온 것을 무효화했다고 생각해보라. - P87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이라는 단편소설이 있다.
한 도시국가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 번성하는 근사한 도시는 계몽되고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의 기반은 한 아이를 학대하는 데 있다. 아이는 어두운 지하실에 홀로 감금된 채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영양실조에 걸린 상태다. 그 아이의 비참은말하자면 형이상학적 목적에 기여하는 셈인데, 오웰의 시대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도 영국에는 실제로 그런 아이들이 많았고, 그들의 비참은 실제적인 목적에 기여했다.  - P91

세라 구더라는 여덟 살짜리 트래퍼는 검사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불빛 없이 트랩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무서워요.
잘 수도 없어요. 가끔 불빛이 있을 때는 노래도 하지만, 어둠 속에서는 안 해요. 겁이 나서 못해요."" 엥겔스도 그의 1845년 영국노동계급의 상황이라는 보고서에서 광부들의 실태에 대해 쓰면서, 그런 아이들 중 일부는 땅 위 세상으로 돌아가면 탈진한 나머지 집에 가는 도중에 잠들거나 집에 가자마자 곯아떨어져 부모들이 뭘 먹일 수도 없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그는 아이들이 일 때문에 흔히 발육 부진이고 기형이 되는 예까지 있다고, 탄광에서는누구나 자주 치명적인 폐 질환을 앓기 십상이라는 점도 지적했다. 석탄은 연소되어 여러 종류의 독소를 남기지만, 광부들이나주위 사람들이 들이마시는 탄진도 그에 못지않게 해롭다. - P93

오웰이 글에서 즐겁게 추억한 가정용 석탄난로 못지않게,그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런던에 머무는 동안 들이마신 스모그도 그의 폐 질환을 악화시켜 이른 죽음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음에 틀림없다.
화석연료의 채취는 너무나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었으므로, 전 세계적으로 전쟁을 촉발했고 외교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동시에 그것은 너무나 해로운 일이기도 했으므로, 지구상 모든대륙의 광대한 땅을 파괴하고 물을 오염시켰으니, 남극 말고는그 피해를 면한 곳이 없다. 그것은 우리의 하늘을 바꿔놓았고, 이어 바다와 땅을 바꿔놓았다. 그것은 지구와 대기에 대해 벌인 전쟁이었다. 하지만 1936년을 돌아볼 때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시기만 해도 생태학적으로 보면 얼마나 오래전이었던가 하는 점이다. - P100

초토화한 제2차 세계대전의 처참한 폐허 가운데서도, 한 걸음 물러나 인간의 삶과 그 구조에서 그 배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인간이외의 세계는 대체로, 또는 적어도 비교적 건재했음을 볼 수 있다. 대양들은 아직 산화되지도 온난화되지도 않았고, 극지방의얼음, 그린란드의 빙상**, 그리고 빙하와 기후 자체도 안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후는 상당히 예측 가능했고, 온대 및 열대숲의 훨씬 더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탄소격리 작용을 수행하고 있었다. 현재 위험에 처하거나 멸종한 상당수의 종이 번창하고 있었고, 화학물질과 플라스틱의 여러 종류가 아직사용되기 전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여러 가지 손상이 있기는 했다. 태즈메이니아의 에뮤, 아프리카의 블루벅(파란영양), 북대서양의 큰바다오리, 남태평양의 수수께끼찌르레기 등 다양한 장소의 다양한종이 멸종된 터였다. 지구는 전혀 새것이 아니었다.  - P101

1936년의 사람들이 갖고 있던 확고한 자신감은 마치 그들의 의식 내에 아직 발굴되지 않은 지층과도 같았다. 세상은 충분히 크고 우리가 무슨 해를 가하든 너끈히 회복하리라는 확신 말이다. 손상은 기껏해야 국지적인 것이며,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그 적은 부분이 전체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리라는 항상 더 많은 것이 있으리라는 확신 말이다. 인간들은 마치 자기가 무슨 짓을 하든 어머니는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 믿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하지만 아이는 도구와 기계와 화학적 발명을 갖게 되자 인간의 한계 이상으로 거대하고 강력해졌으며, 시스템 자체를 훼손하고 변모시키는 타격을 가하게 되었다. 그것은 전쟁이었고, 우리가 정신이 들었을 때는 식물들이 이미 해놓은 일과 화해하는 것이 과업이 되었다. 그것은 때로는 삼림복구의 형태로 나타나 기존의 숲과 초지와 토양을 보호하는 일이 되었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식물들의 편을 들어, 오래 묻혀 있던 탄소를 하늘로 뿜어 올리는 프로젝트에서 물러나는 일이 되었다. - P103

장미를 심고 정원을 가꾸는 행위는 수많은 것을 의미할수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식물 세계 및 식물이 하는 일과의 협동을 의미하도록 내버려두자. 얼마간 더 탄소를 격리하고 산소를 생산하는 유기체들을 심고 돌보는 것,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싶다는 욕망, 장미와 유실수가 장차 여러 해 동안 꽃 피우고 유실수들은 수십 년 후, 어쩌면 한 세기 후까지도 열매 맺을 미래에투자하려는 욕망을 의미하도록 말이다. 정원을 가꾼다는 것은 이미 산산이 부서진 것을 다시금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가 되는 관계, 땅의 풍요로움을 직접 거두며 무엇인가가 어떻게 하여 존재하게 되는가를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 일은 규모는 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설령 고작 도시의 고층건물 창턱에 제라늄을 가꾸는 것이라 해도, - P104

의미에 있어서는 중요할 수 있다.
나무 심기를 대부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래가는행위로 제안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해, 어떻게 하면 미래에 기여할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1936년에는 아무도 탄소격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런 의식 없이도 식물의 편에 서는편을 택할 수는 있었다. 브레이 본당신부를 위한 한마디」라는 글에 담긴 그 제안에서, 장미를 심은 남자는 그것이 또한 미래의 편에서는 일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P105

꽃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동시에 촉각과 후각에 속하는 아름다움이다. 꽃은향기를 맡을 수 있고 만져볼 수 있고 때로는 맛볼 수도 있다. 어떤꽃들은 열매나 씨앗, 그 밖에도 인간들이 귀하게 여기고 심지어의존하기까지 하는 선물을 가져다주며, 따라서 꽃은 약속이기도하다. 어느 한 단계에 있는 꽃을 보면, 이전에 지나간,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단계들을 알 수 있다. 장미의 아름다움은 꽃봉오리에서부터 시들어 죽을 때까지 모든 단계가 매혹적이라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장미는 그 천천히 시드는 모양조차도 우아하다. 만개한 동백은 장미 비슷한 모양이 되지만, 단단한 꽃봉오리에서 대번에 활짝 핀 꽃이 되며, 줄기에서 뚝 떨어져 땅바닥에서 갈색으로 지저분하게 썩어간다. 다른 많은 꽃들이 그런 식으로 시들어간다. "시든 백합은 잡초보다도 냄새가 고약하다."  - P112

토드는 《아메리칸 매거진》에 실은 글에서 장차 여성 참정권 운동과 노동 운동, 그리고 1970년대 및 이후의 급진파들을 위한 후렴구가 될 이 문구에 대한 생각을 개진했다. 여성의 투표는"집과 안식처와 안전이라는 인생의 빵과, 음악과 교육과 자연과책이라는 인생의 장미를 이 나라에서 태어나는 모든 아이가 누리게 될 때가 오도록 도울 것이다. 여성이 발언권을 갖는 정부에서는 그러할 것이다. ‘모두를 위한 빵과 장미‘가 있게 되는 날에는감옥도, 교수대도,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도, 빵을 벌기 위해 거리로 내몰리는 소녀들도 없을 것이다."
- P120

1911년에 시인 제임스 오펜하임 James Oppenheim은 토드가 기고했던 같은 잡지에 빵과 장미Bread and Roses]라는 제목의 시를 실었다(그래서 종종 그가 그 문구를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 일부는 이렇다.


아름다운 대낮에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어두컴컴한 부엌들과 잿빛 공장 다락들이
갑자기 나타난 태양이 비추는 빛을 받는다.
"빵과 장미, 빵과 장미"라는 우리
노랫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
우리가 행진하고 행진하는 동안,
무수히 많은 죽은 여자들이
빵을 달라는 그네들의 해묵은 노래를
우리 노래를 통해 외친다.
고되게 일하는 그네들의 영혼도 예술과
사랑과 아름다움을 알았으니ㅡ
그렇다, 우리는 빵을 위해 싸운다―그러나
우리는 장미를 위해서도 싸운다. 


빵은 육신의 양식이지만, 장미는 좀 더 섬세한 무엇의 - P121

단순히 마음만이 아니라, 상상력과 정신과 감각과 정체성 같은것들의 양식이다. "빵과 장미라니 멋진 구호이지만, 거기에는생존과 신체적 복지 이상의 것이 필요하고 또 권리로서 요구된다는 맹렬한 주장이 들어 있다. 그것은 또한 인간 존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계량 가능한 것,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재화 및 여건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강력한 반발도 담고 있다. 이런 선언들에서 장미란, 인간이라는 존재가 복잡하고 욕망들은환원 불가능하며 우리를 지탱하는 것은 종종 훨씬 더 섬세하고손에 잡히지 않는 무엇이라는 생각을 나타낸다. - P122

1912년 중반에는 뉴욕의 전설적인 노동 운동가 로즈 슈나이더먼 Rose Schneiderman이 그 문구를 채택해 여러 차례 사용했다(그래서 그 문구는 그녀에게서 나온 것으로도 여겨졌다). 그녀는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이렇게 연설했다. "노동하는 여성이 원하는것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삶에 대한 권리이다. 부유한 여성이 삶과 태양과 음악과 예술에 대한 권리를 가진 것과 마찬가지로, 삶 - P123

에 대한 권리 말이다. 당신이 가진 것이라면 가장 가난한 노동자라 해도 가질 권리가 있는 것이다. 노동자에게는 빵이 필요하지만, 장미도 필요하다. 도와달라, 특권층 여성들이여, 노동자 여성도 투쟁을 위한 한표를 얻을 수 있도록."
20세기 초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빵과 장미‘는 상투적인 문구가 되었다. 1912년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서 일어난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 한 파업자가 든 팻말에 그 문구가 들어 있었던 것이 시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 때문에 ‘빵과 장미 파업‘이라 불리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지만말이다. 오펜하임의 시가 발표된 것은 이 파업이 시작되기 전이기는 해도 헬렌 토드가 같은 잡지에 농장 여성들과 나눈 대화에 대해 쓴 다음이었고, 토드는 자신의 여러 연설에서 그 문구를 여러다른 형태로 말했던 터였다. - P124

장미는 즐거움과 여가와 자기결정권, 내적인 삶, 물량화할수 없는 것 등을 나타내지만, 장미를 위한 투쟁에는 때로 노동자를 압살하려는 고용주나 상사뿐 아니라 그런 것들의 필요성을 폄하하는 다른 좌익 분파들과의 싸움도 포함된다. 좌익에는 즐거움의 추구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들이 고통당하는데, 그리고 어딘가에는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마련인데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것은 비정하고 비윤리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청교도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은 자신의 엄격함이나 기쁨 없는 삶의 태도로 민중에게 감명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해방에 실제적으로 기여하지는 못할 것이다. - P127

이 모든 것의 저변에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반혁명적이고 부르주아적이요 퇴폐적이고 향락적이라 보며 그런 것들에 대한 욕망은 근절하고 경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실용주의적 이데올로기가 깔려 있다. 자칭혁명가들은 오직 물량화할 수 있는 것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은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보다 마땅히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으로 만족해야 하고, 현실적으로 어떠한 것보다 마땅히 어떠해야 할 것에 맞추어가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빵과 장미‘에서 장미란 단순히 더 많은 것이아니라 좀 더 손에 잡히지 않는 섬세한 무엇을, 로즈 슈나이더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저 생존이 아니라 삶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을 살 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어느 정도 측량 불가, 예측 불가하며 사람마다 다르다는 주장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는 또한 주관성과 자유와 자기결정권을 뜻한다. - P128

때로 그는 ‘빵과 장미‘에서 장미가 의미하는바, 손에 잡히지 않는 일상적인 즐거움과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을 경하하기도 했다. 1946년 봄에 쓴 에세이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단상 Some Thoughts on the Common Toad」에서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비쩍 마르고 굶주린 모습으로 나타나는 두꺼비들을 봄의 전령으로 환영하며 그 금빛 눈알의 아름다움을, 봄과 즐거움 그 자체를찬양한다. 그는 이 글을 《트리뷴》에 실었는데, 《트리뷴》이 사회주의 잡지이다 보니 그의 글은 다분히 방어적인 어조를 띠고 있다. 그것은 오웰답게도, 두꺼비와 봄에 대한 글인 동시에 사회주의 정통 노선에 이의를 제기하며 원칙과 가치를 논하는 글이기도하다. - P129

하지만 그는 블런트가 말한 의미에서의 프로파간다, 즉 예술이나 예술가가 정당이나 국가의 의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했다. 또 다른 곳에서 그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정말로 비정치적인 문학 같은 것은 없다."
페르메이르의 그림은 왜 고요함이 필요한지, 운하나 푸른빛깔이나 네덜란드 부르주아지의 가정생활의 가치를 바라보는것이, 또는 그저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말해준다. 자세히 들여다보는 일 그 자체가 우리를 지탱해주는일종의 양식이 되어주는 것이다.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은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주목을 끌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 미학적인경험이 없다면, 나는 책은 물론이고 잡지의 기사를 쓰는 일도 할수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의제는 빵이라 하더라도, 장미가 곁들여지게 마련인 것이다. - P134

그곳에 모인 물길들이 흘러나가 개울과 강이 되어 작물들과사람들을 먹인다. 또 그런 곳에는 농경 시스템의 일부인 야생동물들-작물의 수분을 가능케 하는 곤충들, 땅다람쥐의 개체수를 제한하는 코요테 같은―이 살기도 한다. 그것들은 정신의 황야요 미개간지로, 경작된 땅이 보존할 수 없는 다양성과 복잡성과 재생 체계를, 더 큰 전체를 보존한다. 오웰은 문자 그대로의 전원 녹지 공간과 자신이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정원을 옹호하는 만큼이나, 자유로운 사색과 감시당하지 않는 창조의 형이상학을 옹호했다. 그리고 이런 쟁점들에 대해 적들과 싸웠다.
두꺼비와 봄과 즐거움에 관한 그 에세이에서 그는 봄이나자연이나 전원을 즐기는 것에 대한 또 다른 표준적인 반대 입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지금은 기계의 시대이며, 기계를 싫어하거나 기계의 지배를 제한하고자 하는 태도는 퇴영적이고 반동적이며 약간 우스꽝스럽다는 것이다." - P135

빵은 권위주의적 체제에 의해 관리될 수 있지만, 장미는 주어지기보다 개인들이 자유롭게 추구하고 발견하고가꾸어야 하는 무엇이다. "우리는 상상력이란 어떤 야생동물과도 같아서 갇힌 상태로는 번식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 뿐이다"라고 오웰은 「문학 예방The Prevention of Literature」의 말미에 썼다. 
‘빵과 장미‘에서 장미란 프라이버시와 독립성을 가질 때 번성하는 일종의 자유를 의미한다.
그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에는 구속이 없다. 그는 계속하여쓴다. "사회주의의 진짜 목표는 행복이 아니다.
진짜 목표는 인류애다...
인간들이 서로 속이거나 죽이는 대신사랑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런 세상을 원하는 것은 첫걸음으로서이다." 사랑을 부패시키고 약화하기는 쉽지만, 제대로 관리하기는 어렵다. 결론적으로 그는 유토피아라는 것을 이렇게 일축해버린다. "그들은 단지 일시적이기 때문에 소중했던 무엇인가를 끝없이 지속함으로써 완벽한 사회를 만들려 했다." 다시말해 그들은 욕망이나 기쁨처럼 본질상 유동적이고 통제 불가능한 무엇을 고정시키고 통제하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장미를 빵으로 만들기를, 또는 빵을 획득하고 장미를 던져버리기를 원했다. - P140

오웰은 즉각적이고 특수한 것들에 대한 놀라움에 대해,
그것들이 얼마나 단정적인 사고를 약화하는지에 대해 여러 번 썼다. 1931년 에세이 「교수형」에서 그는 한 버마인 죄수가 사형대로걸어가면서 물웅덩이를 피하려고 옆으로 비키는 것을 보았다고썼다. 그 작은 몸짓이 그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상한 일이지만, 바로 그 순간까지 나는 건강하고 의식 있는 사람의 목숨을 끊어버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죄수가 웅덩이를 피하느라 몸을 비키는 것을 보는 순간, 한창 물이 오른 생명을 뚝 끊어버리는 일의 불가사의함을 말할 수 없는부당함을 알아본 것이었다." - P148

"그는반쯤 벗은 상태였고, 양손으로 바지를 추스르며 달리고 있었다.
나는 그를 쏘지 않기로 했다.
......
그 바지를 추스르는 광경 때문에도 총을 쏠 수가 없었다. 나는 ‘파시스트를 쏘러 거기에 간 것이었는데, 바지를 추스르는 남자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그는 나자신과 다를 바 없는 인간으로 보였고, 그래서 그를 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그는 현실적인 것들을 위협하는 절대적이고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것들을 믿지 않았다. (1938년, 그와 아일린은 그들이 키우는 개에게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우리가 실제로 마르크스를 읽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말이야"라고 아일린은 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이제 조금 읽어보았는데 그 사람이 너무 싫어져서 개를 똑바로 볼 수도 없어.")" 우드콕이 오웰을 대지에서 힘을 얻는 안타이오스에 비유한 것은 그가 구체적이고 손에 잡히는, 직접적인 경험에서 지적인 힘을 얻는다는 의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이데올로기들이 수많은 사람을 방황하게 했던시대와는 맞지 않았다. 특히 권위를 옹호하고 반대 의견과 독립성을 불법화하는 주의들과는 더욱 그랬다. - P149

오웰은 웰링턴으로 돌아간 후 전에는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전원의 평온함에 불편함을 느꼈다. "이곳은 내가 어린 시절에알던 영국 그대로이다. 철로 때문에 파헤쳐진 곳에는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고, 깊은 목초지에서는 윤이 자르르한 늠름한 말들이 풀을 뜯으며 생각에 잠겨 있다. 천천히 흐르는 냇가에는 버드나무들이 우거지고, 느릅나무들의 품이 푸르러지고, 시골집 정원들에서는 참제비고깔이 피어난다"라고 그는 스페인에 관한 책 말미에 썼다. "모두가 영국의 깊고 깊은 잠을 자고 있다. 나는 때로우리가 폭탄의 굉음 때문에 깜짝 놀라 깨기 전에는 결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스페인에서 벌어진 갈등을 서막으로하는 세계대전과 함께 폭탄들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 P160

그 앞의 팻말에는 "여기 심은 것이 현대 장미의 복잡한 선조라는사실을 20세기 초 유전학자 찰스 허스트Charles Hurst가 이곳에서 25년간의 교배를 통해 밝혀냈다"라고 적혀 있었다. 유전학이란 들뢰즈와 과타리가 지양하고자 했던 바로 그 나무 모양의 계보를 찾아내는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유전과 진화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모델을 찾아내는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 도서관에 가서 허스트의 서류상자들을 대출하여 뒤적이며 하루를 보냈다. 폴더들을 연이어 열어보며, 한 사람이 어떻게 살고 일했는가 하는 이야기와 만났다.
그는 내가 읽은 장미에 대한 문헌들 가운데서도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지만, 서류 상자 안에는 훨씬 더 복잡한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 P175

그 장미들의 이름은 온갖 가능성을 망라한다. 아일랜드의 불꽃, 아도니스,
레이디 리딩, 스노우퀸, 붉은 글자의 날, 골든 오필리어, 롤리타 아머, 인어, 로스앤젤레스, 그 밖에 특정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수두룩하고, 그중에는 ‘미세스 아서 존슨‘처럼 결혼한 여성의 이름을기념하는 동시에 익명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도 있다.
책들과 오래된 문서들을 헤집는 것은 풍경 속을 쏘다니는것과 아주 비슷하다. 나는 대학의 장미정원에서 허스트와 마주치곤 했고, 오웰이 주라섬에서 보낸 말년에 관한 학술 논문에서는 그가 스탈린의 소련에서 벌어진 유전학 논쟁에 흥미를 보였다는 언급과도 마주쳤다. 그것은 내려가볼 만한 토끼굴이었으니, 그 - P177

논쟁은 오웰에게 진실과 사실, 거짓과 조종 및 그 결과라는 더 큰문제들을 고찰할 기회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어느정도 영감의 원천이 되었고, 특히 1984년』에 대해 그러했다.


영감이라는 말은 종종 긍정적이고 바람직한 것들에 대해쓰이며, 뮤즈의 감상적인 이미지는 작가의 열정의 대상인 어여쁜여성으로 그려지곤 한다. 정치적 작가에게 글쓰기를 위한 영감내지 적어도 불쏘시개는 종종 가장 역겹고 경악스러운 것이고,
반대가 자극제가 되곤 한다. 스탈린은 분명 오웰의 주된 뮤즈였으니, 한 개인으로서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거짓말을 휘감은 무시무시한 권위주의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그러했다. - P178

그곳에서는 생존이 자원을 얻기 위한 개인주의적 경쟁이 아니라 자원은 풍부했으므로 거친 여건과 싸워나가기 위한 협동적 사업이었다. 크로포트킨은 그런 종내부의 협동을 상호부조라고 불렀고, 동물 및 인간의 삶에서 그역할들을 기록했으며, 진화와 협동은 상반된 것이 아니라 종종얽혀 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가 1902년에 낸 책 만물은 서로돕는다」는 당시의 논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오늘날의 진화 과학은 크로포트킨의 시각에 좀 더 가까워졌다. 자연계는 점점 더 협동적이고 상호의존적이며, 점점 덜 경쟁적이고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보이게 되었다. - P184

그러나 오웰의 시절에 진화론이란 곧 다윈주의였고 다윈주의란 대개 사회적 다윈주의로 해석되었다. 소련 정부는 생물학과 관련된 사실들이나 생물학을 옹호하고 발전시키려는 이들 모두에게 가혹한 처사를 했다. 서구 과학자들에게도 잘못이 있었다. 다윈의 진화론이 사회적 정태성을 확인해준다고, 즉 부자가빈자보다, 귀족이 평민보다, 백인이 유색인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많은 사람들이 우생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우월한 또는열등한 인간 집단이 있다는 개념을 신봉했으며, 우월한 집단을양성하고 열등한 집단을 근절하기 위해 징벌적인 사회적 통제나노골적인 인종 말살 같은 방식들을 주창했다. 장미 연구가 허스트는 우생학자였고, 오웰로 하여금 소련의 사이비 과학에 관심을 갖게 했던 베이커도 우생학자였으며,  - P184

그 결과로 닥친 ‘기근 학살‘, 일명 홀로도모르 Holodomor로약 500만 명이 굶어 죽었으며, 그 대부분은 우크라이나에서였다.
굶주린 농부들이 음식 찌꺼기라도 얻으려고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어떻게든 달아나려고 기차역으로 가거나 가다가 죽었다. 길가에는 그들의 피골이 상접한 시신이 널렸다. 굶주림으로 정신이이상해진 사람들은 식인 행위를 자행했으며, 심지어 제 자식을잡아먹기도 했다. 소련 정부는 수백만 명의 아사자와 공산주의의 성공이라는 이미지가 양립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의 운명을 은폐했으며, 그러기 위해 러시아에 있던 서방 기자들을 동원했다. 이들은 검열당했고 진실을 말할 경우 추방될 위협에 놓였지만, 대부분이 기꺼이 협력했다. - P187

야생식물의 종자를 채취하러 우크라이나에 갔다. 산기슭에서 견본을 찾고 있는데, 관리들이 검은 관용차를 끌고 올라와그를 데려갔다. 이후 11개월 동안 그는 400차례에 걸쳐 심문당했고 그 대부분은 심야에 이루어졌다―첩자요 반역자요 방해자요 기근의 주된 원인이라는 이유로 고발당했다. 거의열 시간 내리 계속된 심문 끝에 그는 자신이 우익 단체의 일원이라는 거짓자백을 했다. 항소 끝에 사형선고는 철회되었지만, 그는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거기서 날 밀가루와 언 양배추라는 식사 끝에,
인민의 굶주림을 해결하느라 그토록 많은 일을 했던 사람은 결국굶어 죽었다. 1943년 1월 26일이었다. - P192

하지만 이 권력도 밀로 하여금 사이비 과학에 복종하게하거나, 레몬나무로 하여금 추운 겨울을 견디고 살아남게 만들지는 못했다. 라마르크주의는 출현 당시에 이미 오류였고, 스탈린의 시대에는 거짓이었다. 밀에 대한 리센코의 약속들도 거짓이었다. 1930년대 초에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대기근을 부인하는 것도 거짓이었다. 공개재판에서 사람들을 고문하여 인정하도록 강요했던 범죄들은 대부분 거짓이었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거짓말을했고,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죽었으며,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거짓말을 했고 죽음에 이르렀다. 다른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아예 감을 잃어버렸다. 러시아혁명의 주동자들이 동료 혁명가들에 의해 처형될 때마다 역사는 매번 다시 쓰였다. - P198

처형자들이 처형당했고, 심문자들이 굴라크로 보내져 자신이 심문했던사람들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책들이 금지되었고, 사실들이 금지되었으며, 시인들이 금지되었고, 사상들이 금지되었다. 그것은 거짓말의 제국이었다. 거짓말이라는 언어에 대한 공격은 다른 모든공격에 필요불가결한 기초이다.
오웰은 1944년에 이렇게 썼다. "전체주의가 진짜 무서운것은 그것이 ‘가혹 행위‘를 자행한다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 진실이라는 개념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와 미래를 통제하려 한다." 이를 밑바탕으로 한 것이 빅브라더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다. "과거를 통제하는 자가 미래를 통제한다. 현재를 통 - P198

제하는 자가 과거를 통제한다."진실과 언어에 대한 공격은 가혹행위를 가능하게 한다. 만일 실제로 일어난 일을 지워버리고 증인들을 침묵시키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지지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납득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에게 겁을 주어 침묵과 복종과 거짓을 강압한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결정하는 것을 불가능하거나위험하게 만들어 아무도 감히 그러려고 하지 않게 된다면, 얼마든지 범죄를 영속시킬 수 있다. 전쟁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라는 옛말이 있다. 진실에 대한 상시적인 전쟁은 국내적으로나 전 지구적으로나 모든 권위주의의 기반이다. 따지고보면,
모든 권위주의는 우생학과 마찬가지로, 권력은 불평등하게 배분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전제로 하는 일종의 엘리트주의이다. - P199

러시아의 현재 권위주의적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은 스탈린의 명성을 복권시켜왔다. 리센코의 명성도 이 복고주의에,후성유전학의 의의를 왜곡하는 일에 편승하는 듯하다. 반면 바빌로프의 업적은 그가 발견하고 수집하고 재배한 종자들, 그의제자들이 레닌그라드 포위전 동안에도 씨앗 은행에 보관했던 종자들을 통해 살아남았다. 내브한은 이렇게 썼다. "그가 죽은 후대략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 그가 수집한 씨앗들로부터 선택된400가지 새로운 작물들이 소련 인민의 큰 비중을 실제로 먹여 살렸으며, 기근의 빈도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
스탈린의 레몬은 실패했고, 설령 한 그루 나무올리브나무이든 주목이든 세쿼이아나 인도보리수이든―가 1000년 또 - P199

는 그 이상을 살 수 있다 하더라도, 월링턴 주위의 밀밭들은 일년생 식물의 종자나 농업의 관행이 체제나 독재자나 한 무더기 거짓이나 과학에 대한 전쟁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음을 상기시켜준다. 거짓말은 씨앗보다 더 자유롭게 돌연변이를 일으키며,
거짓말의 새로운 작물도 있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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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봄, 한 작가가 장미를 심었다. 나는 그 사실을 안지 30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몇 년 전11월의 어느 날까지도 제대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의사들의 명령에 따라 건강회복을 위해 샌프란시스코의 집에서 안정을 취해야 했는데, 그날은 내가 쓴 책에 대해 다른 작가와대담을 하기 위해 런던에서 케임브리지로 가는 기차에 타고 있었다. 마침 11월 2일, 내 고향에서는 ‘디아 데 로스 무에르토스Día deLos Muertos, 즉 망자들의 날이었다. 이웃들은 그 전해에 죽은 이들을 위해 제단을 마련하고 촛불과 음식, 천수국, 고인의 사진이나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같은 것들을 차려놓았다.  - P11

하지만 나는 런던의 킹스크로스 역을 떠나 북쪽으로 달리는 아침 기차에서 차창 밖으로 런던의 밀집한 시가지가 멀어져가고 건물들이 점차 낮아지고 띄엄띄엄해져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기차가 농지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하자, 풀을 뜯는 양 떼나 소, 밀밭, 잎진 나무 같은 것들이 창백한 겨울 하늘 아래서도 아름답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여행길에 해야 할 일, 아니 탐색 과제가 하나 있었다. 내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인다큐멘터리 제작자 샘 그린 Sam Green을 위해 나무 몇 그루 (아마도콕스 오렌지 피핀 사과나무나 몇몇 다른 유실수들)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와 나는 여러 해 전부터 나무들에 대해 이야기를, 그리고좀 더 빈번하게는 메일을 주고받아왔다. 우리 둘 다 나무를 사랑했고, 언젠가 그가 나무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든가 아니면둘이서 어떤 식으로든 힘을 합쳐 나무를 위해 모종의 예술 작품을 만들게 되리라는 느낌을 공유하고 있었다. - P12

샘은 2009년 동생이 죽은 후 힘든 한 해를 보내며 나무에서 위로와 기쁨을 발견한 터였고, 내 생각에 우리는 둘 다 나무가주는 굳건한 지속성의 느낌을 사랑했던 것 같다. 나는 여러 종류의 참나무가 월계수나 칠엽수와 어우러져 있는 캘리포니아의 구릉진 지형에서 자랐다. 내가 어렸을 때 알던 많은 나무들은 지금가 보아도 여전히 그대로이다. 내가 그렇게 달라지는 동안 나무들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자란 카운티의 반대쪽 끝에 뮤어우즈가 있었다. 그 일대의 다른 지역이 다 벌목된 후에도, 그곳의 유명한 레드우드 숲에는 노거수老巨樹들이 건재했다. 키가200피트(61미터)나 되는 침엽수들이 안개 낀 날이면 공기에서 습기를 빨아들이고 마치 소낙비와도 같은 것을 땅에 뿌렸다. 그런소낙비는 노천이 아니라 침엽수가 천장을 이룬 곳에서만 내리는것이다. - P13

내가 영국에 가기 전, 그해 여름 샘이 시내에 돌아와 있었을 때, 우리는 메리 엘런 플레전트Mary Ellen Pleasant가 샌프란시스코에 심은 나무들을 구경하러 갔다. 플레전트는 1812년경에 노예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지하철도의 주역으로 활동하다 인권운동가가 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 엘리트 금권정치에서도 일을했던 인물이다. 그녀가 죽은 지 100년도 더 지나, 그녀가 심은 유칼립투스 나무들 아래 서 있노라니, 나무들은 우리 손이 닿지 않는 과거의 산증인처럼 느껴졌다. 그 나무들은 그녀의 인생 드라마 일부가 일어난 목조 저택보다 더 오래 살아 있었다. 너무나 넓게 가지를 펼쳐 보도를 가로막았고, 주위의 건물 대부분보다 더높이 솟아올랐다. 잿빛황갈색으로 벗어지는 껍질이 그 둥치를휘돌아 올랐고, 낫 모양의 잎들이 보도에 흩어져 있었다. 나무 꼭대기에서는 바람이 속살거렸다. 나무들은 다른 어떤 것도 할 수없는 방식으로 과거를 소환해준다. 여기 땅에 나무를 심고 보살피던 사람은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지만, 그녀의 생전에 살아 있던나무들은 우리의 생애 동안에도 살아 있고, 어쩌면 우리가 떠난다음에도 살아남을 것이다. 나무들은 시간의 형태를 바꿔놓는다. - P15

모스크바에는 차르 시대에 심긴 나무들이 있다. 러시아혁명이 진행 중이던 여러 해 동안에도 그 나무들은 자라며 가을이면 잎을 떨구었고 겨우내 굳건히 섰다가 봄이면 꽃을 피웠다. 스탈린 시대의 숙청과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과 기근을, 냉전과 글라스노스트와 소비에트연방의 와해를 겪는 동안에도 여름이면 방문객들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었고, 스탈린 찬미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부상하던 가을에도 잎을 떨구었다. 그리고 푸틴과샘과 나보다, 그 11월 아침 나와 함께 기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나무들은 우리 자신의 덧없음과우리보다 훨씬 더 오래 살아남을 지속성을 상기시키면서, 풍경속에서 보호자이자 증인처럼 의연히 서 있었다. - P16

오웰은 1943년부터 1947년까지약 여든 편의 에세이를 이 사회주의 주간지에 기고했는데, 이에세이는 4월 26일에 「브레이 본당 신부를 위한 한마디A Good Wordfor the Vicar of Bray」라는 제목으로 실렸다. 버크셔 교회 묘지에 있는 한그루 주목을 묘사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이 글은 오래전에그 나무를 심은 것으로 알려진 본당신부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거기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며 종횡무진하는 대가적인 솜씨를보여준다. 문제의 신부는 종교전쟁에서 거듭 입장을 바꾼 정치적변절자로 유명한데,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달아나야 했던 시기에도 그 변절 덕분에 나무처럼 그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오웰은 그 신부에 대해 이렇게 쓴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후, 그에게서 남은 것이라고는 우스꽝스러운 노래와 아름다운 나무 한그루뿐이다. 이 나무는 대대로 사람들의 눈을 쉬게 해왔으니, 그가 정치적 변절로 초래했을 어떤 악영향도 상쇄하고 남았음에 틀림없다." - P17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나무를 심는 것, 특히 오래가는 단단한 나무를 심는 것은 돈도 수고도 별로 들이지 않고 후세에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만일 나무가 뿌리를 내리면, 당신이 선악간에 행한 다른 어떤 일이 갖는 가시적 효과보다도 훨씬 오래갈 것이다." 그러고는 10년 전에 자신이 심은 값싼 장미들과 유실수들에 대해, 그리고 얼마 전에 그것들을 다시 찾아 자신이 후세에 남길 조촐한 식물학적 기여를 바라보았던 일에 대해 들려준다. "유실수 한그루와 장미 한 그루는 죽었지만, 나머지는 모두 잘 자라고 있다. 도합 유실수 다섯 그루에 장미가 일곱 그루, 그리고 구스베리 덤불이 둘인데, 다해서 12 하고도 6펜스밖에 들지 않았다. 이 식물들에는 별다른 일거리도 따르지 않았고, 애초에 들인액수 이상의 비용도 전혀 들지 않았다. 심지어 거름도 따로 준 일이 없었다. 그저 이따금 주변 농장의 말들이 울타리 밖에 멈춰 섰다 지나갈 때면 양동이를 들고 나가 주워 담아 온 것이 전부였다." - P18

그의 삶은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1903년 6월 25일,
즉 보어전쟁 직후에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사춘기가 되었으며(열한 살 때 쓴 애국적인 시가 그가 처음 공개 지면에 발표한 글이었다), 러시아혁명과 아일랜드독립전쟁이 1920년대까지, 즉 그의 성년기 초입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1930년대 내내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대참사의 조짐들이 고조되어가는 것을 지켜본, 그리고1937년에는 스페인내전에서 싸운 사람 중 하나였다. 독일군의 공습 동안 런던에 살았으며, 살던 집이 폭격당해 길거리에 나앉았고, 1945년에는 ‘냉전cold war‘이라는 말을 처음 만들었다. 그리고말년에는 냉전과 핵 병기고가 갈수록 무시무시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1950년 1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 P19

나는 나무 심기에 관한 그의 에세이를 오웰 독본The Orwell Reader」이라는 제목의 큼직하고 볼썽사나운 페이퍼백으로 읽었다. 책장 모서리가 수없이 접힌 그 책은 내가 스무 살 무렵 한 중고서점에서 싸게 사서 여러 해를 두고 뒤져가며 샅샅이 읽은 것이었다. 그 책을 통해 나는 그의 에세이스트로서의 문체와 어조를, 다른 작가들이나 정치나 언어나 글쓰기에 대한 견해들을 알게 되었다. 워낙 젊었을 때 탐독한 책이라 나 또한 에세이스트가되어가는 암중모색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족했다. 1945년에 발표된 우화 『동물농장」은 어린 시절에 만났는데, 처음에는그것을 동물들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충실한 말) 복서의 죽음을 슬퍼했을 뿐 그것이 러시아혁명이 스탈린주의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알레고리라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 P20

「1984』는 10대 때 처음 읽었고, 그가 스페인내전을 몸소겪고 쓴 카탈루냐 찬가를 알게 된 것은 20대 때였다. 이 책은 내두 번째 책인 야만의 꿈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것은 자기편의 단점들에 대한 정직성과 동시에 충성심을 보여주는 표본이자, 개인적 경험과 의심이나 불편 같은 속내를 정치적 서사로만들어가는 법을, 다시 말해 크고 역사적인 것 안에서 사소하고주관적인 내면을 다루는 법을 보여준 본보기였다. 그는 내게 가장 중요한 문학적 영향을 끼친 사람 중 하나였지만,  - P20

그것은 미래를 우리가 기여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그뿐 아니라 최초의 핵폭탄이 투하된 이듬해에도 여전히어느 정도 신뢰를 걸 만한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희망적이었다. "사과나무도 100년은 너끈히 산다. 그러니까 내가1936년에 심은 콕스 사과나무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열매를 맺을것이다. 참나무나 너도밤나무는 수백 년을 살면서 수천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후에야 마침내 목재로 켜질 것이다. 나는 개인적인 조림 사업으로 사회에 대한 모든 의무를 다할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반사회적인 행동을할 때마다 일기장에 적어두었다가, 적당한 계절이 오면 땅에 도토리를 하나쯤 묻어보는 것도 나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이 에세이는 개별적인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에서 중대한 것으로 이 경우에는 한 그루 사과나무에서 과오에 대한 보상과후세를 위한 유증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그의 작품에서 흔히 나타나는 글쓰기 방식을 잘 보여준다. - P21

어떻든 중요한 것은 그 과일나무들이 이제 없다는 것이었다. 집 내부는 하얀 석고 벽에 어두운빛깔의 목재로 되어 있었고, 지붕이 낮은 작은 방들이 보기 좋고아늑했다. 내가 오웰과 관련지어 떠올림 직한 어떤 것보다도 그랬다. 그가 집에 대해 말한 것은 대체로 암울하게 들렸으니 1936년에는 가스, 전기, 실내 화장실 같은 현대적 설비도 없었을 테고,
이엉을 얹은 지붕도 당시에는 양철 지붕이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한 그는 그 집에 사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그레이엄은 내게오웰이 서재로 쓰던 부엌 옆방과 당시 가게 역할을 하던돈과그레이엄은 거실로 쓰는―그다음 방 사이의 나지막한 출입구를보여주었다. 키 큰 오웰은 매번 고개를 숙였든가 아니면 상인방에머리를 찧었을 것이었다. 문에는 몇 개의 틈새를 내어 작업 중에도 손님이 들어오는지 볼 수 있게 해놓았다. - P25

정원의 나무들은 없어졌지만, 나이절을 만나고 나무 그루터기를 돌아보고 사진들을 보고 나자, 그들은 오웰이 심은 장미들은 아마 그대로 있으리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나는 화들짝놀랐고, 과일나무에 대한 실망이 갑자기 흥분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관심이 일었다. 우리는 다시 정원으로 나갔고, 그곳에는 그11월의 날에도 멋대로 자란 커다란 장미 두 그루가 꽃을 피우고있었다. 한 그루에는 연분홍 꽃봉오리가 조금 벌어져 있었고, 다른 한 그루에는 거의 새먼핑크 빛깔의 꽃이 피었는데, 꽃잎들의밑동은 금빛이었다. 따져보면 여든 살은 되었을 이 나무들은 왕 - P25

성하게 살아 있었다. 이 살아 있는 나무들을 심은 살아 있는 손(과삽질)의 주인은 그 여든 해 중 처음 몇 년 사이에 세상을 떠났지만말이다. 그레이엄의 말로는 장미들이 워낙 많이 피어서 오웰이 임차를 끝낸 후 1948년에 그 집을 샀던 교사 에스더 브룩스는 그 장미를 마을 축제의 입장권으로 썼다고 한다. 1983년에 그녀는 오웰이 심은 알버틴 장미가 "정원의 영광"이며 "아직도 핀다"는 기록을 남겼다. 5그의 장미들은 1939년 11월에도 피고 있었으며, 오웰은 그의 가사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은 패랭이꽃들을 거둬내고, 바람에 쓰러진 국화들을 세워 묶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니 오후에많은 것을 하기가 힘들다. 국화는 지금이 한창인데, 대개 어두운적갈색이고, 몇 그루는 보기 흉한 보라색과 흰색이 섞인 것이라패어버려야겠다. 장미나무들은 여전히 꽃을 피우려 한다. 그러지않으면 이제 정원에는 꽃이 없어질 것이다. - P26

갯개미취 철도 지났고, 일부는 패어버렸다." 그를 알았던 거의 모든 사람이 세상을떠났지만, 그 장미들은 오웰을 포함하는 일종의 사에쿨룸이다.
나는 문득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그를 만나는 느낌이었다. 그 에세이의 살아 있는 잔재와 마주하고 있었고, 그것들은 그에 대한내 오래된 생각들을 새롭게 해주었다.
두 그루 장미가 그에 대해, 또 장미와 과일나무에 관한 오래전의 에세이에 대해, 그리고 지속성과 후세에 대해 갖는 관계의 직접성이 나를 기쁨으로 들뜨게 했다. 조지 오웰은 전체주의 - P26

와 프로파간다에 대한 선견지명으로, 불유쾌한 사실들을 직면하는 것으로, 건조한 산문체와 굴하지 않는 정치적 견해로 유명하던 작가이다. 그런 그가 장미를 심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나 공리주의자, 실용주의자나 또 아니면 그저 실제적인 사람이 과일나무를 심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과일나무는 가시적인 경제적 가치를 갖고 있고 먹을 수 있는 실용적인 산물 물론 그 이상이지만을 내니 말이다. 하지만 장미 한 그루를 또는 그가1936년에 복구한 이 정원의 경우처럼 일곱 그루를, 그리고 나중에는 더 많이 심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일이다. - P27

나는 30년도 더 전에 처음 읽은 그 에세이 속의 장미들에대해 그다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장미라니, 오웰에 대해 내가 오래전부터 받아들이고 있었던 전통적인 시각을 접고 그를 더 깊이 알아보라는 초대와도 같았다. 그 장미들은 그가 어떤사람이었는지, 우리는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질문이자, 즐거움과아름다움이, 계량 가능한 실제적 결과가 없는 시간들이, 정의와진실과 인권과 세상을 변혁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어떤 사람의 삶에, 어쩌면 모든 사람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 P27

오웰에 대해서는 많은 전기가 나와 있고, 이 책을 쓰는 데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이 책은 서가의 전기 칸에 한 권을 더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책은 한 작가가 몇 그루 장미를 심었다는 그행위를 출발점으로 하여 거기서 뻗어나가는 일련의 탐구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단 장미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장미는식물 왕국의 일원이자 특별한 종류의 꽃으로, 시에서부터 소비산업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방대한 인간적 반응들을 불러일으켜왔다. 장미는 널리 퍼져 있는 야생식물 내지 다양한 종의 식물을 가리키는 동시에, 널리 재배되고 매년 새로운 품종들이 만들어지는 원예식물이다. 후자의 경우 장미는 큰 산업이기도 하다. - P29

장미는 모든 것을 의미하며, 그러다 보니 사실상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것이나 진배없다. 중세 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élard가 보편 탐구에서 장미를 예로 든 것을 비롯해 모터니스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의 "장미는 장미는 장미다Rose is a rose is a rose"에 이르기까지, 장미는 더 큰 어떤 것을 말하는데 원용되어왔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가 한 말이있는데, 그 취지인즉슨 모든 것이 몸을 상징하듯이 몸도 다른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서구 세계에서의 장미에 대해서도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지로서 장미는 안 쓰이는 데가없어서 여성용 속옷에서부터 묘비에 이르기까지 판에 박힌 듯 장미가 그려지니, 그야말로 ‘월페이퍼‘라 할 만하다. 실물 장미도 구애, 결혼, 장례, 생일, 그 밖의 여러 계제에 등장하여, 기쁨과 슬픔과 상실과 희망과 승리와 즐거움을 말해준다. 2020년 여름 흑인인권운동의 지도자이자 국회의원이던 존 루이스 John Lewis가 죽자, 그의 관이 마차에 실려 앨라배마 다리를 건넜는데, 그 다리는그가 항의 시위로 도보 행진을 하다가 주 경찰관들에게 죽도록몰매를 맞은 곳이었다. 그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길가에는 당시뿌려졌던 피를 상징하는 붉은장미 꽃잎이 흩뿌려졌다. - P30

장미는 지상 어디에서도 인간의 주식은 아니지만, 중세에는 장미 꽃잎이 들어가는 요리법도 있었고, 장미 열매(로즈힙)는 여전히 차나 그 밖의 탕제를 만드는 데 쓰인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 식품성(오웰의 아내 아일린 오쇼네시 블레어EileenO Shaughnessy Blair가 거기서 일했다)은 수입 식량, 특히 감귤류가 끊어지자 국민에게 비타민 C를 공급하기 위해 로즈힙을 채집하는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42년 무렵에는 200톤에 상당하는 1억3400만 개의 로즈힙이 채집되었다고 한다." 그 대부분은 시럽으로 만들어졌지만, 식품성에서는 수제 로즈힙 마멀레이드 요리법을 개발했으며, 이것은 독일에서 여전히 흔한 식품이라고 한다.
장미는 물론 향수와 향유를 만드는 데도 쓰인다. - P35

지난 몇 세기 동안 재배자들은 그런 형태를 다양화했고,
그래서 오늘날에는 수천가지 다양한 장미가 있다. 오래된 사향장미, 다마스크장미,백장미(알바 로즈) 등에서부터 잡종 티 로즈의 무수한 변종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거대한 것까지 있는 캐비지 로즈, 한 줄기에 한 송이만 피는 것에서부터 여러 송이가 모여 피는 것, 관목에서 덩굴, 순백에서 자주와 보라의 수많은 색조들, 그리고 온갖 색조의 진흥과 분홍과 빨강과 노랑의 장미가 있으며, 향기도 달콤하다, 짜릿하다, 새콤하다, 과일향이다, 몰약 같다, 사향 같다 등등 다양하다. 장식으로서도 장미꽃은 생명 그 자체를 나타낸다. 다산성, 필멸성, 무상함, 사치, 그 모든 것으로 장미는 우리의 예술과 의례와 언어에 들어와 있다. - P36

1936년 4월 2일, 서른세 번째 생일을 맞이하기 두어 달 전에 오웰은 웰링턴에 막 도착하여 집을 빌리고 정원을 손질하고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해 봄을 전후한 두 차례 여행을 통해 그는 정치에 눈을 뜨고 정치 저널리스트이자 에세이스트, 나아가지대한 영향력을 지닌 작가로 성장하는 길에 들어서게 된다. 월링턴 집은 그가 처음으로 정착하여 다른 어떤 주소보다도 오래유지하는 주소가 되었고, 시골의 정원 있는 집에서 아내와 함께주로 작가로서 생계를 꾸리며 산다는, 그의 꿈이 처음으로 실현되는 곳이기도 했다. - P37

1927년 그는건강 악화를 이유로 공식적으로 그곳을 떠났고, 다시 돌아가기를거부했다. 13년 후에 그는 자신의 버마 시절 직무에 대해 이렇게말했다. "내가 그 일을 그만둔 것은 그곳 기후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고 또 막연하게나마 이미 책을 쓸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주된 이유는 갈수록 협잡으로 여기게 된 제국주의에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는 데 있었다.""그런 문학적 야심과 당시프랑스의 저렴한 물가가 귀국 직후 파리로 간 이유였겠지만, 한편으로 그는 부모가 원하는 상류 지향이 아니라 하류 지향의 삶을살기로 결심한 터였다. 스스로 가난할 뿐 아니라 가난한 자들 사이에서 살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식민지에서 보낸 시절에 대한속죄이자, 자라면서 멀리하도록 배운 계층들에 동참하려는 결의였다. - P39

그가 머물렀던 다른 곳들, 즉 고달팠던 예비학교, 이튼스쿨, 버마, 파리, 그리고 내전기의 스페인, 극빈 시절과 제2차 세계대전 동안의 런던, 그리고 그가 말년에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스코틀랜드의 외딴 섬에 비하면, 윌링턴은 그다지 주목받지못했다. 버마, 파리, 런던, 스페인이 모두 그의 책의 배경이 되었던것도 사실이고, 내가 그 가을 장미들을 만난 후로 그에 관한 책들을 읽으며 거듭 만나게 된 오웰의 면모들과 더 잘 어울리는 것도사실이다. 이런 책들은 그의 정치적 참여, 동년배들일부와의 조화롭지 못한 관계, 프로파간다와 전체주의가 어떻게 상생하며 인 - P40

권과 자유를 위협하는가에 대한 드문 통찰력, 그리고 마침내 마혼여섯의 나이에 그의 목숨을 앗아갈 호흡기 질환 등을 강조한다. 그중에는 「오웰, 한 세대의 겨울 양심Orwell: Wintry Conscience ofa Generation이라는 제목도 있었다. 하나같이 그를 잿빛으로 근엄하고 우울하게 그린 책들이었다. - P41

어쩌면 현재와 장래의 기괴함과 잠복해 있는 위험에 대한끈질기고 철저한 검토야말로 그의 특징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때문에 그가 본 것이 곧 그인 양, 또는 그것이 그가 본 전부인 양규정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장미를 보고 놀란 후에 다시 그의 글들을 읽어보았는데, 그러면서 정치적 기괴함에 대한 냉철한 시각과 균형을 이루는 듯한 또 다른 시각들을 지닌 오웰을 만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그가 얼마나 즐거움에 대해 말했던가 하는 것이었다. 아늑함이라고 부를 만한 가정적 편안함의다양한 형태로부터 외설적인 그림엽서에 이르기까지, 19세기 미국 아동 서적들과 디킨스 같은 영국 작가들의 "좋은 악서들",
그 밖에도 수많은 것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물, 식물, 꽃, 자연경관, 정원 일, 전원 등에서 얻는 즐거움이 그의 책들 곳곳에서ㅡ「1984」에서도 ‘골든 컨트리‘에 대한 서정적 환기, 그 빛과 나무들과 목장과 새들의 노래, 자유와 해방의 느낌에 이르기까지 다시 나타난다. - P41

다. 오웰은 후자에 속했던 것 같다. 그는 여러 면에서 군인처럼 엄격하게 살았고, 신체적 불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신체적 한계를 무릅쓰고 자신을 몰아세우다 몸져누웠고, 그래도 몇 번이고다시 일어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때때로 만나게 되는 딸기에 손을 뻗치곤 했다.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자신의 생물학적여건에 대한 반항아요 사회적 여건에 대한 반항아였다. 이 두 가지는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
그렇다고 해서 그가 결점 없는 인물이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그녀의 생전에 마땅히 그래야 했던 만큼 다정하지도 충실하지도 못했던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도 자기 계급과 인종과 국적과 성별과 이성애와 시대에 고유한 편견 중 일부를 지니고 있었다. 특히 초기에 발표한 작품들과 편지들에서는 그런 편견에서 우러난 경멸과 조롱이 강하게 드러난다. 다른 사람들에게 날을 세움으로써 자기 입지를 확보하는듯한 태도는 그가 작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좀 더 자신감이 생기고 너그러워지면서 차츰 사라졌다. - P44

그의 글은 때로 총기에 넘치고 대체로 유용하며 선견지명으로 유명하다. 때로는 아름답기까지 한데, 그 아름다움이란 예쁨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다. 물론 글에도 편견과 맹점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는 비록 어떤 면에서는 그리 본받을 만하지 못했지만, 또 다른 면에서는 용감하고 헌신적이었다. 그는 영국적인 것을 사랑하는 동시에 대영제국과 제국주의를 - P44

혐오했으며,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많은 말을 했다. 약자와 외부인을 위해 나섰으며, 그가 인권과 자유를 옹호한 방식은 여전히유효하다. - P45

그는 1984』의 이런 문장들로 엄청나게 유명해지게 된다.
"미래의 모습이 보고 싶다면, 인간의 얼굴을 짓밟는 장화books 발을 상상해보게. 영원히 말일세." 그는 1946년부터 언어의 사용과 오용에 대한 이런 문장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 "정치적 언· 거짓말이 진실처럼 들리게 하고 살인을 존경받을 만하게 만들며 헛바람을 견고해 보이게끔 하도록 고안되었다. 그는 냉소에 능했고, 잭부츠jackboots(군용장화)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것에 대해 은근한 반대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던1944년의 이런 문장은 그 일례이다. "신문 기자에게 잭부츠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그러면 그가 모른다는 걸 알게 될 거다. 그래도그는 여전히 잭부츠 얘기를 한다." - P46

지만 조금씩 정리가그의 글에는 흉측한 것과 아름다운 것이 종종 공존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취재차 독일에 갔던 그는 보행자용 다리 근처에서 시신을 하나 발견했다. 그 다리는 슈투트가르트를 지나가는 강에 놓인 다리들 가운데 끝까지 폭파되지 않은몇 개 중 하나였다. "죽은 독일 병사 한 명이 계단 발치에 드러누워 있었다. 얼굴은 밀랍처럼 노랬다. 가슴에는 누군가가 놓아둔라일락 한 다발이 있었다. 사방에서 라일락이 피어나던 무렵이었다." 4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그림 같은 장면이다. 노란 얼굴과 라일락, 죽음과 삶, 봄의 생기와 전쟁의 참상. - P47

만일 오웰의 작품을 파고든다면, 꽃과 즐거움과 자연에 대한 수많은 문장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런 문장들을 읽노라면흑백 초상화가 총천연색으로 살아나고, 그런 대목들을 찾다 보면 그의 마지막 걸작인 1984」조차 인상이 달라진다. 그런 문장들은 정치적 분석보다 호소력이나 예지력이 덜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름대로의 시정과 힘과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 따지고 보면 자연 자체가 엄청나게 정치적인것이다. 우리가 자연을 상상하고 자연과 상호 반응하고 자연에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이 정치적인데, 그의 시대에는 이 점이 별로 인식되지 않았다. - P48

감정은 신체적인 두려움과 욕망에서 비롯되지만, 또한 이념과 참여와 문화로부터도 생겨난다.
1946년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오웰은 바로 그 점에 대해 말한다. "내 작품을 주의 깊게 읽은 사람이라면누구든 알아차릴 것이다. 내 글은 노골적인 프로파간다일 때도본격 정치인이 본다면 엉뚱하다고 여길 만한 내용을 많이 담고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습득한 세계관을 완전히버릴 수 없으며 버리고 싶지도 않다. 살아 건재하는 한, 나는 산문문체에 매력을 느끼고, 이 세상을 사랑하며, 구체적인 대상들과쓸모없는 정보 조각들에서 즐거움을 얻기를 계속할 것이다. 내 이런 면을 억누르려 해도 소용없다. 문제는 내 안에 깊이 자리한 좋고 싫음을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들과 조화시키는 것이다." - P49

가운데 문장에서 느끼고feel, 사랑하고 love, 얻는다 take라는 동사들로 연이어 표출되는 소신이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그사랑과 즐거움의 대상에 대해 극히 구체적이다. 그가 그런 현상들에 많은 시간을 바쳤고 거기서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는 것은그 자신의 글이 보여주는 바이지만, 그에 관한 책이나 소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인상은 대개 전혀 딴판이다. 그는 꽃과 함께 많은시간을 보냈으며, 전원에서나 전혀 전원적이지 못한 환경에서나꽃에 관심을 기울였다. 1944년, 수년째 폭격당해온 런던에 살면서 그는 독자들에게 "폭격 맞은 자리에 풍성하게 피어나는, 분홍 - P49

꽃이 피는 잡초"의 이름을 아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 무렵 시인 루스 피터Ruth Pitter가 그를 방문하기 위해 상경했고, 그녀는 오랜 후에 그때 일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당시런던에서는 살 수 없는 두 가지를 갖고 갔다. 하나는 에식스주의어머니 집에서 딴 먹음직한 포도 한 송이였고, 다른 하나는 붉은장미 한 송이로, 둘 다 드문 보물이었다. 나는 그가 감탄과 기쁨이가득한 얼굴로 포도를 받아들던 모습, 그리고 앙상한 손으로 장미를 감싸며 일종의 경의가 담긴 기쁨으로 그 향기를 맡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하다. 그것이 내가 그에 대해 뚜렷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다.  - 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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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대공이 스포츠와 경마에 정통하므로 그 속임수를 곧 알아챌테고, 루 게임에서 속이는 행위는 더없이 가증스러운 범죄이고 그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인간사회에서 열대의 원숭이사회로 영원히 추방되었으므로, 그가 남자답게 그녀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겠다고 맹세할 거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다정한 귀족의 단순함을 잘못 판단했다. 그는 파리들을 자세히 관찰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죽은 파리나 살아 있는 파리나 똑같아 보였다. 그녀는 그 속임수를 스무 번 정도썼고, 그는 1만 7,250파운드(현재 화폐로는 대략 4만 885 파운드 6실링 8페니)가 넘는 돈을 그녀에게 지불했다. 그러다결국 올랜도가 너무나 지독히 속이는 바람에 그도 더 이상은속을 수 없었다. 마침내 그가 사실을 깨달았을 때, 보기 괴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대공은 몸을 쭉 펴고 일어섰다. 얼굴은시뻘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눈물이 방울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가 자기에게서 큰돈을 가로챘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대로 해도 좋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를 속였다는 사실은 중요했고,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P189

이런 견해를 가진 일부 철학자들과 현자들이 있지만, 대개우리는 다른 관점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양성 간의 차이란 다행히도 매우 심원한 것이다. 의상은 그 아래 깊이 숨어
것의 상징에 불과하다. 올랜도로 하여금 여자의 옷과여자의 성을 선택하도록 영향을 미친 것은 그녀의 내면에서일어난 변화였다. 어쩌면 여기서 그녀는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지만 명백히 표현되지 않는 것을 유난히 솔직하게 --솔직함은 실로 그녀의 천성이었다ㅡ 표현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또다시 우리는 진퇴양난에빠지게 된다. 양성은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서로 뒤섞여 있다. 어느 인간에게서나 한 성에서 다른 성으로의 전환이 일어나고, 남성이나 여성의 모습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의상밖에 없으며, 성의 밑바닥에는 위에 있는 것의 정반대가존재한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는 누구나 경험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 올랜도라는 특정 인물의 경우에 그것이 미친 특이한 영향만 주목하겠다. - P195

강아지들은 꼬리를 흔들고 앞다리를 숙이고 뒷다리를 들어 올리며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낑낑거리고 짖어 대고 침을 흘린다. 또 자기들 나름대로정중하게 행동하기도 하고 재주를 부리지만, 말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전부 다 소용이 없다. 자신이 알링턴 하우스훌륭한 사람들과 벌인 말다툼도 그랬다고, 그녀는 강아지를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그들 역시 꼬리를 흔들고 숙이고 구르고 뛰어오르고 발로 긁고 침을 흘리지만,
말을 하지 못했다. 「내가 사교계에 나간 이 몇 달 동안……」올랜도는 스타킹 한 짝을 방구석에 내던지며 말했다. 내가들은 말이라곤 그저 피핀이 했을 법한 말이었어. 난 추워요.
난 행복해요. 난 배가 고파요. 난 쥐를 잡았어요. 난 뼈를 묻었어요. 내 코에 키스해 줘요.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않았다. - P202

한시간도채 지나지 않은 바로 얼마 전에 몰아친 것과 같은 지독한 환멸을 맛보게 되면 마음은 좌우로 흔들린다. 모든 것이 전보다 열 배는 더 황량하고 삭막하게 보인다. 인간의 영혼에 가장 큰 위험이 적재되는 순간이다. 그런 순간에 여자들은 수녀가 되고, 남자들은 성직자가 된다. 그런 순간에 부자들은자기 전 재산을 양도하는 증서에 서명하고, 행복한 남자들은조각칼로 자기 목을 긋는다. 올랜도는 기꺼이 이런 일들을했겠지만 그보다 더 경솔한 일을 할 수도 있었는데, 그녀가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자기 집으로 포프 씨를 초대한 것이다.
무장하지 않은 채 사자굴에 들어가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노 젓는 배로 대서양을 항해하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세인트폴 성당 꼭대기에 한 발로 서 있는 것이 경솔한 일이라면, 시인과 단둘이 집에 가는 것은 더더욱 경솔한 일이다.
시인은 대서양인 동시에 사자이다. 대서양은 우리를 익사시키고, 사자는 우리를 물어뜯는다. 설령 우리가 사자의 이빨을 견디고 살아난다 해도 파도엔 굴복할 수밖에 없다. 환상을 부숴 버릴 수 있는 남자는 짐승이자 밀물이다. 영혼에 환상이란 지구를 둘러싼 대기와 같다.  - P209

다시 어둠 속에 들어서자 시인의 무릎밖에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분노는 당장 사그라졌다.
<하지만 가여운 사람은 바로 나야.> 다시 완전히 깜깜한 곳에 들어서자 그녀는 생각했다. <당신이 아무리 비천한 인간일지라도 나야말로 더 비천하지 않을까? 나를 감싸고 보호하는 것은 당신이고, 야수를 겁주고 야만인들을 위협하고 내게누에 실로 만든 옷과 양털로 만든 카펫을 만들어 준 것도 당신이지. 내가 숭배할 대상을 원하면, 당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내게 제공하고 그것을 하늘 높이 박아 놓지 않았던가? 당신이 보살펴 주고 있다는 증거가 도처에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나는 아주 겸손하게 고마워하며 고분고분해야 하지 않을까? 당신에게 봉사하고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내 모든기쁨이 되게 하라.> - P212

하지만 앞 문단을 근거로 판단해서 천재성이(그러나 천재병이라는 이 질병은 이제 영국 제도에서 뿌리 뽑히고 말았다.
세평에 의하면, 작고한 테니슨 경이 그 질병을 앓은 마지막인물이다) 한결같이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매 순간 만물을 명료하게 봐야 하고, 어쩌면 그 과정에서 불에 타 죽을지 모른다. 오히려 천재성이란 광선을 한 번 내쏜 다음 한동안 빛을 발하지 않는 등대와 비슷하다. 다만 천재성은 등대처럼 규칙적이지 않아서,
(포프 씨가 그날 밤에 그랬듯이) 예닐곱 번의 광선을 재빨리연속적으로 쏘아 대고는 1년간 혹은 영원토록 암흑 속에 묻혀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그 광선을 믿고 항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천재들은 암흑기에 빠져 있을 때 보통 사람들과매우 유사하다고 한다. - P214

우리는 그 신사의 삼각모와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쥐고 있다. 다시 한번 수정을 들여다보자. 그가 신은 양말의 주름까지도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가? 그의 기지가 일으킨 온갖 파문과 굴곡, 그의 온화함과 소심함, 그의 세련미, 그가 어느 백작 부인과 결혼할 것이며 결국은 아주 품위 있게 죽으리라는사실이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모든 것이 명료하다. 애디슨 씨가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을 했을 때맹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제멋대로 행동하곤했던 스위프트 씨가 예고도 없이 들어왔다. 잠깐만, ‘걸리버여행기』가 어디 있더라? 여기 있다! 휴이넘의 땅으로 항해하는 문단을 읽어 보자.
<나는 완벽하게 건강한 신체와 평화로운 마음을 누렸다.
친구의 배신이나 변덕을 보지 못했고, 은밀한 적이나 공공연한 적의 침해 행위도 보지 못했다. 나는 어떤 위대한 인간이나 그의 충신에게 호감을 사려고 뇌물을 주거나 아부하거나매춘을 알선할 필요가 없었다.  - P217

4월 초의 맑은 밤이었다. 초승달과 어우러진 수많은 별빛에 가로등 불빛이 더해져, 사람들의 얼굴과 렌 씨의 건축물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사물의 형체가한없이 부드럽게 보였는데, 만물이 막 용해되려는 듯한 순간에 은방울 같은 것이 떨어지자 선명해지고 활기를 띠었다.
대화도 그래야 한다고 올랜도는 엉뚱한 공상에 빠지면서)생각했다. 사회는 이래야 하고, 우정은 이래야 하고, 사랑은이래야 한다.  - P222

그녀는 품위 있는 바지와 유혹적인 속치마를 번갈아 입었고, 양성의 사랑을똑같이 누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을 구별하기 어려운 중국식 가운을 걸치고 쌓인 책들 사이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는 그녀의 모습을그려 볼 수 있다. 그 차림새로 그녀는 의뢰인 한두 명을 맞이했고(그녀에게는 수십 명의 탄원자가 있었으므로), 그러고는 정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개암나무 가지를 잘랐는데, 그런 일에는 반바지가 편했다. 그런 다음에 그녀는 마차를 타고 리치먼드로 달렸고 신분 높은 귀족에게서 청혼을 받는 데가장 적합한 꽃무늬 견직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다시런던 시내로 가서는 변호사의 옷 같은 황갈색 가운을 입고법원에 가서 자신의 소송 사건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를알아보았다. 그녀의 재산은 매 시간 줄어들고 있었는데, 그사건은 1백 년 전보다 조금도 마무리 단계에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그런 다음 마침내 밤이 되면 그녀는 종종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귀족 청년 차림으로 모험을 찾아 거리를 헤맸다. - P228

그 순간 올랜도는 세인트 폴 성당의 둥근 지붕 뒤에 모인 작은 구름을 처음 보았다. 종소리가 울리면서 그 구름은 점점 커졌고, 놀랍게도 재빨리 시커메지면서 퍼져 나갔다. 동시에 산들바람이 일었고, 여섯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동쪽하늘 전체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어두운 구름에 뒤덮였다. 하지만 서쪽과 북쪽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그러더니 구름이 북쪽으로 퍼져 나갔다. 도시너머의 언덕과 산들이 구름에 완전히 에워싸였다. 불빛이 빛나고 있던 메이페어만 대조적으로 더욱 휘황찬란하게 타올랐다. 여덟 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는 찢어진 구름 조각들이 급히 피커딜리 너머로뻗어 나갔다. 그 구름들은 모여들면서 급속히 서쪽 끝자락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았다. 아홉번째와 열 번째, 열한번째 종소리가 울렸을 때, 어마어마한어둠이 런던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열두 번째 종소리가 울리자 어둠이 완벽하게 내려앉았다 사납게 요동치는 어마어마한 구름이 런던을 덮어 버렸다. 사방이 깜깜했다. 사방이의혹이었다. 사방이 혼란이었다. 18세기가 끝나고, 19세기가시작된 것이다. - P232

영국의 기후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듯했다. 비가 자주 내렸는데, 변덕스럽게 몰아치는 바람에 실려 온 까닭에 비가 그쳤다 싶으면 다시 시작했다. 물론 태양이 빛날 때도 있지만 구름에 둘러싸여 있었고, 공기는 물기를 흠뻑 머금고 있어서 광선이 퇴색했다. 칙칙한 자주색과오렌지색, 붉은색이 18세기의 보다 선명한 풍경을 대신했다.
멍들고 음침한 하늘 아래서 양배추의 초록색은 예전처럼 선명하지 않았고, 눈의 흰색은 희끄무레했다. 하지만 그보다더 고약한 일은, 이제 어느 집에나 습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햇빛은 블라인드로 차단할 수 있고 서리는뜨거운 난롯불로 말릴 수 있지만, 습기는 우리가 자는 동안에도 몰래 스며들기 때문에 가장 음험한 적이다. - P233

이처럼, 어느 누구도 변화가 일어난 날이나 시간을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은밀히 눈에 보이지 않게 영국의체제가 변했고,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했다. 도처에서 그 영향이 느껴졌다. 고전적 품위를 갖추도록 애덤 형제‘가 설계했을 방에서 맥주와 쇠고기를 먹으려고 즐거운 마음으로 식탁에 앉은 강인한 시골 신사는 이제 방 안에 스며드는 냉기를 느꼈다. 그래서 양탄자가 등장했고, 턱수염을 길렀고, 바지를 발등 밑으로 단단히 조였다. 그 시골 신사는 자기 다리에 도는 한기를 이내 자기 집에도 이입했다. 그래서 모든 가구에 덮개를 씌우고 벽과 탁자를 덮어서, 덮이지 않은 것이없었다. 그다음에 음식의 변화는 필수적이었다. 따뜻하게 먹는 머핀이 나오고 크럼펫이 나왔다. 정찬 후의 포트와인은커피로 대체되었다.  - P234

아이들이 태어난 침실에 스며들어간 빛은 당연히 혼탁한 녹색이었고, 어른 남녀가 지내는응접실에 스며든 빛은 갈색과 자주색 벨벳 커튼을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변화는 외적인 것에서 멈추지 않았다. 습기는 내부를 공격했다. 사람들은 가슴속에서 냉기를 느꼈고마음속의 습기를 느꼈다. 자신들의 감정을 어떤 따뜻한 것에감싸 보려는 필사적인 노력으로 그들은 잔꾀를 하나씩 부리기 시작했다. 사랑과 탄생, 죽음은 온갖 멋진 문구에 감싸였다. 남성과 여성은 점점 더 멀리 떨어져 나갔다. 솔직한 대화는 절대로 용인되지 않았다. 양성 모두 얼버무리고 은폐하는데 공을 들였다. 바깥의 축축한 땅에서 담쟁이덩굴과 상록수가 무성하게 자라듯이 안에서도 생식력이 왕성해졌다. 평범한 여자의 일생은 출산의 연속이었다. 열아홉 살에 결혼해서서른살쯤이면 열다섯이나 열여덟 명의 아이를 낳았다. 쌍둥이가 많이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영국 제국이 탄생하게되었다. 그리하여 ㅡ 습기를 막을 길이 없었다.  - P235

그는 지상의 어떤 불도 방대하게 뻗어 나간 저 거추장스러운초목을 태워 버릴 요량을 낼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디를 돌아보아도 걷잡을 수 없이 자란 식물들뿐이었다. 오이줄기들이 <풀밭을 가로질러 뒹굴며 그의 발치까지 뻗어 왔다. 거대한 꽃양배추가 층층이 솟아올라, 그의 혼란스러운상상력에는, 느릅나무와 경쟁하는 듯했다. 암탉들이 쉴 새없이 뚜렷한 색깔이 없는 달걀을 낳았다. 그는 자신의 생식력과 지금 실내에서 열다섯 번째 출산의 진통을 겪고 있는가여운 아내 제인을 떠올리며 한숨을 쉬었고, 자신이 어떻게가금을 탓할 수 있겠느냐고 자문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국 그 자체도 아니 천국의 방대한 현관인 하늘도, 실로 천사들의 동의를, 부추김을 보여 주지 않았던가?  - P236

영국 전역에서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동안, 올랜도는 아무문제 없이 블랙프라이어스의 자기 집에 파묻혀 지냈다. 그녀는 기후가 달라지지 않은 척하면서, 사람들이 아직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기분 내키는대로 반바지를 입거나 스커트를 입을 수 있다는 듯이 행동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그녀도 시대가 달라졌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세기 초의 어느 날 오후에 그녀가 장식 판자로 꾸민 자신의 구식 마차를 타고 세인트제임스 파크를 드라이브하고 있을 때, 종종 있는 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간신히 땅에 도달한빛줄기가 내려오면서 몸부림치다가 기묘하게도 무지갯빛 색깔구름에 무늬를 넣었다. 18세기의 한결같이 맑은 하늘을보다가 그런 광경을 보게 되자 너무나 신기해서 그녀는 창문을 내리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 P237

그녀는 우울한 소년이었고, 소년들이 대개 그렇듯 죽음을 사랑했다. 그러고 나서는 혈기 왕성하고 호색적인 청년이었다. 그다음에는 활기차고 풍자적이었다. 그녀는 때로 산문을 시도해 보았고, 때로는 희곡을 써보았다. 하지만 이런 변화를 겪으면서도 자신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예전과 똑같이 우울한 사색에 잠기는 기질을 갖고 있었고,똑같이 동물과 자연을 사랑했고, 똑같이 시골과 계절을 열정적으로 찬미했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 집과 정원은 예전에 있던 그대로야. 의자 하나 옮기지 않았고, 장신구 하나도 팔지 않았어.
똑같은 산책로와 똑같은 잔디밭, 똑같은 나무들, 똑같은 연못이 있고, 그 연못에는 똑같은 잉어가 살고 있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지. 물론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라 빅토리아 여왕이 왕좌에 있지만, 그렇다고 무슨 차이가…….〉 - P243

다음 날 아침에 펜을들어 글을 쓰려 했을 때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펜이 눈물을 글썽이듯 커다란 얼룩을 하나씩 만들어 냈다. 그러지않으면 펜은 더욱 놀랍게도 때 이른 죽음과 타락에 관한 감미롭고 유창한 글을 느긋하게 써내려 갔는데, 그것은 생각을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더 고약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손가락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온몸으로 그녀의 경우가 입증했듯이 ㅡ 쓰는 듯하기 때문이다. 펜을 조절하는 신경은우리 몸의 모든 조직을 휘감고, 심장을 누비고, 간을 헤치고나아간다. 통증이 일어난 부위는 왼손 같았지만, 그녀는 온몸이 구석구석 감염되었음을 느꼈다. 결국 그녀는 필사적으로 치유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시대정신에완전히 고분고분하게 순종하여 남편을 얻는 것이었다. - P249

이렇게 저렇게 그녀의 옛친구들은 모두 떠나 버렸고, 드루리 레인의 넬과 키트 같은여자들이 더 좋기는 했지만 기대기에는 적합지 않았다.
그녀는 창틀 위에 무릎 꿇고 앉아서 두 손을 움켜쥐고 실제로 그렇듯 호소하는 여인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빙빙 돌아가는 구름에 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내가 누구에게 기댈 수있을까?」 그녀의 펜이 스스로 글을 썼듯이 이런 말이 저절로흘러나왔고, 양손이 저절로 쥐어졌다. 그 말을 한 것은 올랜도가 아니라 시대정신이었다. 그러나 누가 물었든 간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떼까마귀들이 보랏빛 가을 구름 사이에서 허둥지둥 공중제비를 넘었다. 마침내 비가 그쳤고, 하늘에 무지갯빛이 떠올라 그녀는 깃털 달린 모자를 쓰고 끈 달린 작은 신발을 신은 뒤 저녁 식사 전에 산책을 해야겠다고생각했다. - P253

다시 말해서 그녀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파도 위에 서린 푸른 인광을 보았고, 돛대 밧줄에 매달려 쨍그랑거리는 고드름을 보았다. 그가 돌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돛대꼭대기에 올라가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 숙고하고, 다시 내려오고, 소다수 넣은 위스키를 마시고, 뭍으로 올라가고, 어떤흑인 여자의 함정에 빠지고, 후회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파스칼을 읽고, 철학서를 쓰기로 결심하고, 원숭이 한 마리를 사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에 대해 토론하고, 혼곶으로 가기로 결정한 것 등등을 보았다. 그가 들려준 이 모든 것과 수천 가지 다른 것도 이해했다.  - P265

그녀는 몸을 굽혀 어떤 사람에게는 바로 그 단어를 뜻하는 가을 크로커스 한 송이를꺾어,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푸른빛을 내며 굴러떨어진 어치깃털과 함께 가슴에 꽂았다. 그러고 나선 소리쳤다. 다인 그 소리는 숲속에서 이리저리 튀어나가, 풀밭에서 달팽이 껍데기로 모형을 만들며 앉아 있던 그에게 가서 부딪혔다.
그는 그녀를 보았고, 크로커스와 어치 깃털을 가슴에 달고다가오는 그녀의 발소리를 들었고, <올랜도!>라고 외쳤다.
그 말은(파란색과 노란색처럼 밝은 색깔들이 우리의 눈에서혼합될 때 그 가운데 어떤 것은 우리의 생각을 물들인다는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선 무언가 뚫고 나가는 듯 휘어지고 흔들리는 고사리를 뜻했는데, 그것은 돛을 활짝 펼치고약간 꿈꾸듯이 들썩거리며 흔들리는 배라는 것이 드러났다. - P267

채색된 창문을 통해 빛과 그림자가 허겁지겁 날아 들어와 그들의 얼굴은 환히 빛났다가 어두워졌다. 수많은 문들이 탕탕거리고 놋쇠 냄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오르간이울렸고, 우르르 울리는 오르간 소리는 번갈아가며 커졌다가작아졌다. 몹시 늙은 더퍼 씨가 그 요란한 소음보다 더 큰 소리를 내려고 애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한순간 사방이 고요해졌고, 한 구절이 - 아마 <죽음의 손아귀였을 것이다 ㅡ 또렷이 울려 퍼졌다. 그동안 장원의 모든하인들은 갈퀴와 채찍을 손에 든 채 몰려들어 귀를 기울였고,
누군가는 노래를 불렀고 다른 이들은 기도했다. 새 한 마리가 판유리에 부딪히기도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기도 해서, 그누구도 순종하라는 말은 듣지 못했고, 손에서 손으로 건네진반지를 금빛 광채 말고는 보지 못했다. 오르간이 우렁차게울리고 번개가 치고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그들은 일어섰다. - P270

이제 우리에게 남은 유일한 것은 창밖을 내다보는 일뿐이다. 제비들이 있고, 찌르레기가 있고, 많은 비둘기와 까마귀한두 마리가 있다. 모두들 제 나름대로 무언가에 몰두하고있다. 어떤 것은 벌레를 찾고, 다른 것은 달팽이를 찾는다. 어떤 것은 퍼덕거리며 나뭇가지로 날아가고, 다른 것은 잔디밭에서 조금씩 뛰어다닌다. 그때 어떤 하인이 녹색 베이즈 앞치마를 두른 채 안뜰을 가로지른다. 아마 그는 식품 저장실의 어떤 하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을지 모르지만, 눈에보이는 증거가 없으므로 우리는 그저 최선을 바라며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얇거나 두터운 구름이 지나가면서 그 아래잔디밭 색깔이 약간 탁해졌다. 해시계는 평소처럼 아리송하게 시간을 가리킨다. 우리의 마음은 인생에 대한 한두 가지질문을 한가하게, 헛되이 던지기 시작한다. 인생, 그것은 노래한다. 아니, 인생은 벽난로 시렁에 올려놓은 주전자처럼흥얼거린다. 인생아, 인생아, 그대는 무엇인가? 빛인가 어둠인가, 하급 하인의 베이즈 앞치마인가 아니면 풀밭에 드리워진 찌르레기의 그림자인가? - P278

인생이 무엇이냐고 우리는 농장 대문에 기대서서묻는다. 인생, 인생, 인생! 찌르레기가 외친다. 마치 우리의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다음에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는작가들이 늘 그러듯, 안팎에서 질문을 해대고 살짝 엿보고데이지 꽃을 따면서 성가시게 캐묻는 이 습관이 무슨 의미가있는지를 정확히 안다는 듯이. 그럴 때면 저들이 여기 와서인생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 거야, 라고 새가 말한다. 인생,인생, 인생!
그러면 우리는 야생화가 만발한 황야를 터벅터벅 걸어 검붉고 푸르고 짙은 자줏빛이 어우러진 언덕의 높은 등성이에올라 털썩 몸을 던지고는 거기 누워 몽상에 빠지고, 작은 구멍 속의 자기 집으로 지푸라기를 운반하는 메뚜기 한 마리를본다. 메뚜기는 (메뚜기의 쓱싹쓱싹 소리에 그토록 성스럽고다정한 이름을 붙여 줄 수 있다면) 말한다. 인생은 노동이야. - P279

혹은 먼지에 막힌 식도에서 나오는 붕붕 소리를 우리는 그렇게 해석한다. 개미가 동의하고, 꿀벌도 동의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오래 누워 있다가, 저녁이 되어야 나타나 색깔이 흐릿해진 야생화 벨 헤더 사이에서 살금살금 움직이는 나방에게 묻는다면, 나방은 몰아치는 눈 폭풍 속에서 떨리는전신선의 거칠고 무의미한 소리를 우리의 귀에 대고 속삭일것이다. 히히, 하하. 웃어라, 웃어라! 나방이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과 새와 벌레에게 물어보았고, 수년간 녹색동굴에 홀로 살면서 물고기의 말을 들어 보려 했던 사람들의얘기로는 물고기는 결코, 절대로 말을 하지 않으므로 - P279

이 순간, 이 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 줄 시간에 딱 맞춰,
올랜도가 의자를 뒤로 밀었고 팔을 쭉 뻗어 펜을 내려놓고는창가에 가서 소리쳤다. 「끝났어!」그녀는 이제 눈에 와닿은 특이한 광경 때문에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정원이 있고, 새들이 있었다. 세상은 평소와 다름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그녀가 글을 쓰고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내내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전혀 달라지지 않겠지!」 그녀가 소리쳤다.
이 감정이 너무도 강렬하게 밀려와서, 그녀는 해체되는 자기 몸도 상상할 수 있었다. 실제로 쓰러질 듯 현기증이 났을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무심한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잠시 서 있었다.  - P280

그런데 어쩐지 예전의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던 활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이야기는 실로 재치가 있었지만, 이제는 그리 허물없고 편안하게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내 가까운 친구 포프>나 <내 너그러운 친구 애디슨>을 2초마다 한번씩 언급한 것은 사실이지만, 점잖은 분위기가 그를 감싸서 짓눌렀다. 그는 예전처럼시인들에 관한 스캔들을 들려주기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친척들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그녀에게 알려주는 것이 더 좋은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게 올랜도는 실망했다. 그녀는 이 오랜 세월 동안(그녀의 은둔 생활과 신분, 그녀의 성이 그 핑곗거리가 되겠지만) 문학이란 바람처럼 거칠고, 불처럼 뜨겁고, 번개처럼 신속한 것이라고, 정도에서 벗어나 예측할 수 없고 돌연히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보라, 문학은 공작 부인에 대한 이야기나 늘어놓는 회색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던 것이다.  - P288

「원고로군요!」 니컬러스 경이 금테 코안경을 쓰며 말했다.
「매우 흥미롭군요. 대단히 흥미로워요! 한번 읽어 보게 해주세요! 그래서 약 3백 년의 시차를 두고 니컬러스 그린은 다시 올랜도의 원고를 집어 커피 잔과 술잔들 사이에 내려놓고는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그가 내린 판단은 과거와 판이하게 달랐다.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는 이 시가 애디슨의「카토」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톰슨의 사계절」과 비교해볼 때 양호했다. 현대 정신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말하면서 다행스러워했다. 진실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가슴이 명하는 바를 심사숙고함으로써 태어난 시이고, 그것은 실로 무원칙한 기벽이 넘쳐나는 시절에 매우 찾아보기 어려운자질이다. 이 시는, 물론, 당장 출판되어야 한다.
사실 올랜도는 그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드레스의 가슴 부분에 늘 그 원고를 품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러자니컬러스 경은 상당히 재미있어 했다. - P289

올랜도는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이제 그 시가 사라지고나니 - 원고를 품고 다니던 가슴이 텅 빈 듯했다ㅡ그녀는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인간 운명의 예사롭지 않은 우연에 대해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지금 세인트제임스 스트리트에 있었다. 기혼 여성으로서 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었다. 과거에 커피하우스가있던 곳에 지금은 레스토랑이 있었다. 햇살이 빛나고 비둘기세 마리와 잡종 테리어 한 마리, 이륜마차 두 대와 4인승 랜도 마차가 있었다. 그렇다면 인생이란 무엇일까? 이 생각이맹렬하게, 느닷없이 늙은 그린이 왠지 그 생각을 불러일으킨게 아니라면) 떠올랐다. - P290

긴 생애를 살아오면서 그녀는 주로 원고를 보아 왔다. 스펜서가 작고 읽기 힘든 필체로 쓴 거친 갈색 종이 원고도 직접 들고 보았었다. 셰익스피어와 밀턴의 원고도 본 적이 있었다. 사실 그녀는 4절판과 2절판 원고를 꽤 많이 소장하고있었는데, 그녀를 칭송하는 소네트도 종종 끼여 있었고 때로머리칼 한 타래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선명한 글씨에, 모양이 동일하고, 판지로 제본되고 얇은 종이에 인쇄되었기에 단명할 수밖에 없는 이 무수한 작은 책들은 그녀를 한없이 놀라게 했다. 반 크라운에 살 수 있고 주머니에 넣을 수도 있는셰익스피어 전집이 있었다. 활자가 너무 작아서 거의 읽을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놀라운 책이었다. 작품들 - 그녀가 직접 보았거나 들어 본 적이 있던 작가들의작품과 그 밖의 더 많은 책들이 긴 선반들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늘어서 있었다. 탁자들과 의자마다 더 많은 <작품들>이 쌓여 뒹굴었다. 그녀는 한두 장 넘기다가 이것들이 종종 다른 작품에 대한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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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3-01-08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에서 이룬 트렌스젠더...아니 젠더트랜스라고 해야 할까요. 놀라운 소설..덕분에 다시 읽고 싶습니다!

2023-01-08 14:27   좋아요 0 | URL
놀라운 소설이예요. ㅎ~그죠. 저는 해리포터의 시작이 올랜도였구나, 싶었어요. 습한 영국의 기운이 환상성을 만드나 싶어졌다지요.
여튼 대단한 작가의 대단한 소설임은 분명해요.
 



˝타오르는 질문들˝
부끄럽게도. 마거릿 애트우드를 처음 만났다. 당연하게도 이 책에서 거론되는 많은 책들도 거의 읽지 못했고 심지어 이름조차도 ‘듣보잡‘인 작가들과 책도 넘쳐났다.
부끄러움은 나름 50년 독서 인생을 돌아보게 만든다. 마침 2023년을 맞아 생각은 많아졌고 근무 중 짬 내서 읽느라 집중은 강 건너에 있었다.
찰나에 가까운 짧은 여유들 사이에 훅~ 들어오는 물음표들, 생소하고 신선했다.
날카로운 지성의 화살 같은 질문들 덕분에 얼굴도, 머리도, 심장도 창상으로 타오를 지경이다. 특히 환경과 젠더 문제는 지금 우리의 주변을 돌아보면... 암담하기 짝이 없다. 우리는 뒤로 가고 있다. 얼마쯤 가게 될지, 언제까지 가게 될지도 알지 못해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지구는 더욱 불행해질 것이다.

작가의 ˝시녀 이야기˝부터 시작해야겠는데, 레이첼 카슨의 ˝바다˝ 삼부작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넣는 걸로 책을 덮는다.



마거릿 애트우드 Margaret Atwood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 문학비평가. 1939년 11월 18일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났다. 시집 서클 게임(The Circle Game)」(1964)과 소설 먹을 수 있는 여자」(1969)로 이름을 알린 이래, 장르를 뛰어넘는 빼어난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대표작으로 소설 시녀 이야기 고양이 눈」 「도둑 신부」 『그레이스」와 ‘미친 아담‘ 3부작 등이 있으며, 눈먼 암살자」(2000)와『증언들」(2019)로 두 차례 부커상을 받았다. 
이 .외에도 아서 C. 클라크상, 프란츠 카프카상, 독일도서전 평화상, 미국PEN협회 평생공로상, 데이턴문학평화상 등을 수상했고,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화가, 일러스트 작가, 오페라 작사가, 극작가, 인형극 공연자로도 활동한 애트우드는 현존하는 가장 치열한 작가이자 독자로서 ‘타오르는 질문들‘을 세계에 던지고 또 답하며, 현재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있다.


카슨의 바다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바다의 가장자리』는 1955년에나왔다. 당시 열다섯이었던 내게 이 책은 마치 내 이야기를 읽는 느낌을주었다. 이 책은 비치코밍‘에 대한 것이었고, 비치코밍은 내가 1940년대 후반과 1950년대 초반 여름에 노바스코샤의 친척을 방문할 때마다펀디만의 해안을 누비며 많이 했던 일이었다. 조수웅덩이와 해안 동굴, 식물군과 불가사리와 복족류는 내가 있던 해안이나 만 건너편이나같았다. 따라서 ‘바다의 가장자리의 처음 3분의 1은 내가 본 생명체들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도 썰물이 바위 사이에 남기고 간 작은 웅덩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늘 그 안에 뭐가 있을지 들여다본다. - P682

이 세 권의 책에는 하나의 공통된 후렴이 있다. 찾으라. 보라. 관찰하라. 배우라. 궁금해하라. 의문을 가져라 판단하라. 레이철 카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바다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녀는 바다를 대할 때와 같은 사고방식으로 새들의 생태를 관찰 - P682

했고, 새들의 삶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이 발견이 『침묵의봄』을 낳았다. 대양에 대한 연구가 선행하지 않았다면 카슨이 살충제의영향을 추적할 방법들을 개발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또한 바다 3부작이 가져다준 명성과 발판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녀가 전하는 우려의메시지에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고,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면 현재 독수리도, 송골매도, 결국에는 삼림 울새도 남아 있지 않았을지 모른다.
레이첼 카슨은 오늘날 환경운동의 어머니다. 인류는 그녀에게 막대한 빚을 졌다. 만약 우리 인간이 무사히 22세기를 맞게 된다면 그것은일정 부분 카슨의 덕분이다. 바다 3부작의 신판을 맞이하는 것은 크나큰 기쁨이다. 성자가 된 레이철 카슨이여, 그대가 지금 어디에 있든, 고맙습니다. - P683

가장 먼저 이 세월 동안 내 에세이와 조각글을 읽어주신 많은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내게 도달한 독자의 반응들에 감사한다.
내 동생이자 첫 번째 편집자인 루스 애트우드에게 감사한다. 루스는1차, 2차 잡초 제거를 맡았다. 장황함의 밭을 불굴의 정신으로 갈았고,
주체하지 못할 만큼 많은 글들을 가지치기해서 적당한 분량으로 줄였다. 그리고 루시아 시노에게 감사한다. 루시아는 원본을 찾아내고 출간 버전들을 추적하느라 고생했다. 솔직히 그 과정에서 내가 써놓고도까먹은 글들이 다수 출토됐다. 도서관들이 폐쇄된 코로나19 시국에서이는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원고의 상당수를 보관하고 있는 토론토대학교 토머스 피셔 레어 도서관(Thomas Fisher Rare Book Library)도예외가 아니었다. 직무의 범위를 넘어선 도움을 아끼지 않은 사서 여러분에게도 감사한다. - P684

이 세월 동안 내가 기고했던 많은 잡지와 신문의 편집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대서양 양편의 내 책 편집자들에게 감사한다. 그들의 배려와 열정이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이 그룹에는 펭귄랜덤하우스 UK의 베키 하디, 펭귄랜덤하우스 캐나다의 루이즈 데니스와 마사카포스트너, 펭귄랜덤하우스 US의 리 부드로와 루앤 월서가 포함된다. 헤더 생스터가 이번에도 교열 담당으로 활약했다. 헤더는 미처 부화하지않은 것들을 포함해 좀벌레들을 있는 족족 잡아냈다. 제스 애트우드깁슨은 나를 나로부터 구하려 애썼다. 하지만 늘 성공하지는 못했다. - P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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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이제는 퇴색해가는 낡은 단어입니다.
한없이 원했습니다.
한없이 갈망했습니다.
나는 그를 한없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인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고장난 무릎 때문에 조심하면서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나는 개뿔도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기다려요, 알게 될 거예요.

커피 반 컵을
한없이 유감스럽게도
플라스틱 뚜껑을 덮은
종이컵을 들고
단어들이 한때 의미했던 것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한없이.
이 말은 어떻게 사용됐나요?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모였습니다.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여기 모였습니다.
내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이 잊혔던 사진첩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는
세피아 사진들, 흑백사진들, 컬러사진들
모두가 훨씬 젊어요.
폴라로이드 사진들.
폴라로이드가 뭐죠? 갓난아이가 물어요.
10년 전 갓난아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위에서 사진이 나온단다.

무엇의 위요?
내가 많이 접하는 어리둥절한 표정,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모였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일일이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우리는 쓰레기를
신문지에 싸서 줄로 묶었단다.
신문지는 뭔데요?
이렇다니까요.

하지만 줄은 줄은 아직 있어요.
줄은 사물을 연결해요.
진주 목걸이 한 줄.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날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각기 빛나고, 제각기 혼자고,
제각기 가버리는 날들.
그중 일부를 종이에 적어서 서랍에 넣었어요.
이제는 퇴색한 그날들.
구슬은 수를 셀 때 사용하기 좋아요.
묵주처럼.

하지만 나는 목에 돌들을 두르고 싶지 않아요

이 거리에는 꽃이 많군요.
8월이기 때문에 이제는 시들고
먼지 않고, 낙하로 향하는 꽃들.
머지않아 국화꽃이 피겠죠.
프랑스에서는 망자의 꽃이죠.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저 현실일 뿐이니까.

꽃을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건 수술(stamen)인데, 남자와는 하등 관계없고요,
이건 암술(pistil)인데, 총과는 하등 관계없지요.
번역가에게 좌절을 안기는 세세한 것들일 뿐이죠.
나도 설명하느라 진땀 나고요.
이렇다니까요.
그러다 마음을 딴 데 팔아도 할 말 없어요.
말이란 게 때로 사람을 놓쳐요.

한없이 사랑하는 것들이 여기 모여 있어요.
이 닫힌 서랍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요. 당신이 그리워요.
여기 없는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그리워요

아직 여기 있는 이들조차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없이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때문에 한없이 슬퍼요

슬픔, 그건 또 다른 단어죠.
이제는 많이 들리지 않는 말.
나는 한없이 슬퍼요.

마거릿 애트우드 ˝타오르는 질문들˝ 중에서. p 664~ 668


설사 안전하고 합법적이라 해도 낙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어떤 여자가 불타는 토요일 밤을 보내자고 낙태를 무릅쓰겠는가. 여자들이 불법 시술을 받다가 욕실 바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기 위해 질문을 바꿔보자. 당신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개개인이 자신의 건강과 신체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권을 가지는 나라? 아니면 인구의 절반만 자유롭고 다른 절반은 노예인 나라?
아기를 낳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은 노예나 다름없다. 국가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여성 신체의 용도를 지시할 권한을 행사하면 그렇게 된다. 남성이 처할 수 있는 유일하게 비슷한 상황은 군대에 징집되는 경우다.  - P550

그리고 국가가 아기들은 그렇게 중히 여기면서 어째서 아기를 많이낳은 여성들은 공경하지 않는 걸까? 마땅히 그들을 존중하고, 가난에서 구제해야 하지 않나? 여성들이 자기의지에 반하면서까지 국가에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노고에 대한 보상을받아야 한다. 국가가 원하는 것이 더 많은 아기인가? 그렇다면 적절한보상이 따를 경우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여성들도 많을 것으로 믿는다. 출산의 보상이 보장되지 않을 때 여성은 자연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운다. 즉,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은 자원 결핍에 직면하면 유산하는 경향이 있다. - P551

하지만 국가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면서까지 노력할 의사는 없어보인다. 대신 항상 쓰던 비열한 수법을 강화할 생각만 한다. 그 수법은여자들에게 아기 낳기를 강요하고 그 비용까지 여자들에게 떠넘기는것이다. 여자들은 지불하고, 지불하고, 또 지불한다. 아까 말했듯 노예처럼 착취당한다.
아기를 낳기로 선택하는 경우는 당연히 별개의 문제다. 아기는 생명자체가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은 자유롭게 주고 자유롭게 받는것이어야 한다. 또한 선물은 거부할 수 있어야 선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억압의 징후일 뿐이다. - P551

그렇다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우리 좋은 자신을 발생시켰고자신을 부양해온 생물학적 시스템을 계속 파괴할까? 그래서 흔적도없이 사라지는 절멸을 향한 고속 행진을 지속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그간의 무모한 행태를 반성하고,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발명들이 파놓은 궁지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미 인간은 인공 슈퍼바이러스 같은 생명공학적 자멸 수단을 개발했고, 인간 게놈을 조작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더 착하고, 덜 탐욕스러운 버전으로 대체해버릴 작심을 한다면? 만약 세계 개선에 열중한 박애주의자 또는 어느 정신착란자가 다른 버전의 인류를 설계한다면? 우리 중에 재설정 버튼을 누를 채비를하는 선지자 및/또는 미친 과학자가 숨어 있다면? - P555

소설은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답을 제공하는 것은 지침서들의 몫이다. 대신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맡길 수 있을까?" 기술 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해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수만 년 동안 변하지않았다. 같은 감정, 같은 집착, 같은 선악미추 개념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 인간은 영원한 오합지중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악함과 추함을 삭제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럼우리는 무엇을 삭제하게 될까? 그 결과물은 여전히 인간일까? 만약 그결과물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덕성스러운 말 휴이넘(Houyhnhnm)처럼 공격성과 승부근성이 없는 생물이라면그들은 빠르게 멸종해버리지 않을까?  - P560

북미 원주민 부족들이 16세기와17세기에 유럽인과 조우한 후 줄줄이 사라져간 것처럼? 우리 중 일부는 걸리버 자신처럼, 그리고 오릭스와 크레이크』의 지미처럼 꽤 착하고 상당히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걸로 충분할까? 지미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다. 우리를 구하는 데 우리의 착한 마음이면 충분할까, 아니면또 다른 무언가가 요구될까?
우리가 현재의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윤리적인 새로운 버전의 우리를 창조할 역량을 갖출 날이 머지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그 버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급속히 파 - P560

괴 중인 생물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간 모델을 폐기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크레이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 P561

세계인권선언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에 내재하는 존엄성이 자유, 정의, 그리고 세계 평화의 토대"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본 선언은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을, 즉 어디 사는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향유해야 할 권리임을 선포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생명,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생활에 대한 권리 같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또한 사회보장, 건강, 교육에 대한권리 같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 P573

하지만 지구인 여러분, 경고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의 선언과 협약은 모두 이상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서명한 국가들에서조차 평등은 온전히 구현된 적이 없습니다. 이 약속들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불평등이 많은 곳에 학대도 많습니다.
둘째, 권리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권리는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수 세기 동안 싸웠고, 또 반격당했습니다. 줄다리기는 계속됩니다. 끝난 적이 없습니다. 카인은계속 돌을 집어 들고, 아벨은 계속 살해당합니다. 탐욕, 질시, 권력 싸 - P574

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이것 없이 살았던 때가 있던가요? 안정된 사회란 적어도 이런 성향에 대처할 수단을 가진 사회입니다. 불안정한 사회는 내면의 악마들을 마개 없이 풀어놓는 사회입니다.
셋째, 오늘날 조직력과 재원을 갖춘 여러 세력이 이런 취약한 인권마저 잡아먹으려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준(準)민주주의 정부들의 밋밋함을 따분해하며 20세기 전체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심하세요. 처음에는 호쾌한 발상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진과 코스튬플레이에 눈이 즐겁고, 이전 지도자들과 달리 화끈한 입담을자랑하는 무적의 리더를 섬긴다는 느낌이 짜릿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의 끝이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특히 시민 입장에서 좋게끝난 적이 없어요. - P575

전체주의 정권들은 어떤 이름을 달고 있는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전면적이며 도전받지 않는 힘입니다. 그들의 수단은 거짓말을 포함합니다. 그 거짓말은 클수록 좋습니다. 그들은 독립 언론의입을 틀어막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컨대 언론인의 목을 죄고 손발을자릅니다. 또한 그들은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예술가와 작가를 투옥하거나 살해하고, 독립 사법부를 없애고 법 집행 기관을 그저 정권의 산하기관으로 만들어 전체주의 정부가 고안한 부당한 법들을 행사합니다. 그들은 암살 같은 초법적 억압 수단을 사용합니다. 폭도를 선동해특정 집단들에게 폭력적 공격을 가하고, 경쟁 세력 파괴와 자기 세력결집과 대국민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한 규탄과 적발의 판을 깝니다.
이 성토 기계는 일단 전속력으로 올라가면 가공할 추진력을 발합니다. - P575

왜 이런 정권들이 나오는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까요?
전체주의 정권은 주로 혼란의 시기에, 대개는 경제위기에, 국민 전체나 상당수가 느끼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반감을 딛고 떠오릅니다.
이런 시기에는 무정부주의가 득세하기 좋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집단+폭력 · 린치 ·인민재판이 판치다가 사람들이 더는 그런 혼돈을 참아내지 못할 지경이 됐을 때 전형적으로 군벌과 독재자가 부상합니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특정 표적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추종자를 규합합니다. 표적 집단은 나환자, 마녀, 투트시족, 에이즈 환자, 멕시코인,
난민 등 다양합니다. - P576

여러분은 적어도 지금은, 또는 아직은 전체주의 독재 체제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제발 피하세요.
지구인이여, 여러분은 구태여 의심과 혐오의 분리주의 경로를 따를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서로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인류에게 닥친 공동의 문제들을 함께 이해하고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해결할 대형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 지구의 온도와화학적 구성을 조절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여러분 모두 플라스틱 똥이되고 말 겁니다. 바다가 죽고 여러분은 숨을 쉴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는 영원한 안녕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의 멸종이 마음 아파요. 여러분에게도 좋은 점이 있거든요. 모차르트는 정말우리 취향이었어요. 물론 우리야 악보를 저장해서 직접 연주하면 그만이지만요.
꼭 망할 필요는 없잖아요.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 P578

이곳은 토론 클럽입니다. 말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말 다음에 말 다음에 말이 오면 힘이 됩니다. 발언이 힘입니다. 그렇게 희망합니다. 복잡한 문법을 가진 언어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먼 과거들과 우리가 죽은 후에 존재할 미래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들이야말로아마도 최초의 진정한 휴먼 테크놀로지입니다. 우리는 인간 조상들로 - P594

부터 언어를 받았습니다. 언어의 기원은 우리가 알지 못할 먼먼 과거로 뻗어 올라갑니다. 이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세요. 공정하게 사용하세요. 그렇게 하면 말이 권력이 됩니다. 물론 가장 좋은 의미의 권력이요.
우리의 말은 이제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 P595

악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악몽은 반복적으로 꾸는 흉몽이다.
몹시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장소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으스스한지하실, 살기 어린 호텔, 컴컴한 숲속. 하지만 전에도 겪어본 악몽이기에 생각의 초점은 놀라울 만큼 예리하다. 지난번에 저 뾰족한 막대기가 괴물에게 주효했으니 이번에도 시도해보자.
두 번째 종류의 악몽에서는 익숙해야 할 모든 것들이 낯설다. 나는길을 잃었고, 방향을 알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득하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악몽을 한꺼번에 겪고 있는 듯하다. 다만 어느 것을 더 우세하게 겪는지는 악몽을 꾸는 사람의 연령대에 달려 있다. 이런 팬데믹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두 번째 악몽에 가깝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P598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전염병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요소였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치사율은 50퍼센트로 추정된다.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 유럽인에게 묻어 온 병원균에 감염됐고, 거기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의 사망률은 80~90퍼센트에 육박했다. 20세기 초에는 수천만 명이 스페인독감으로 죽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눈에 우리는 소중한 인생사를 가진 애틋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저 미생물이 더 많은 미생물을 만드는 배양접시에불과하다.
팬데믹과 팬데믹 사이에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전염병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다음번팬데믹을 기다린다. - P603

군에 둘러싸였다. 적들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이번 적들은 뿔난 꼬마 도깨비처럼 그려놓은 세균이 아니라, 색색의 털 방울 모양의바이러스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SF 영화에서 처음에는 귀엽다가 나중에는 인체를 장악하는 미지의 존재들처럼, 이 털 방울도 사람을 죽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2008년에 출간한 『돈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과거 흑사병이 퍼질 때 사람들이 보인 여섯 가지 반응을 언급했다.

1. 자기 보호.
2. 자포자기 난동. 여기에는 취태와 도둑질도 포함된다.
3. 남들을 돕기.
4. 남 탓. (주로 나환자, 집시, 마녀, 유대인이 전염병 전파자로 매도당했다.)5. 증인이 되어 기록하기.
6. 일상 유지.

이것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2번이나 4번은 추천하지 않는다. 포기와 남 탓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자신을 보호하고,
그다음에 남을 돕거나, 일기를 쓰며 시대의 증인이 되거나, 온라인 시 - P605

스템을 활용해 일상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14세기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은 상당 부분 가능하다.
그러니 문에 가상의 격리 표시를 붙이고, 낯선 이들을 안에 들이지말고, 자신을 잠재적 전염병 매개체로 여기고, 영화 <외계의 침입자>나<제7의 봉인>을 (다시) 보자. 그리고 아날로그는 디지털이든 가위와 풀이나 펜과 종이를 꺼내자 감염은 됐지만 발병하지 않았다면 팬데믹이여러분에게 선물을 준 셈이다! 그 선물은 시간이다. 한 번쯤 소설을 써보거나 나막신 춤을 배우고 싶었는가? 지금이 바로 기회다.
그리고 용기를 내자! 인류가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결국에는 터널끝에 이르게 돼 있다. 우리는 그저 이번 터널을, 전과 후 사이를 잘 통과하면 된다. 소설가들은 이미 알겠지만 중간부분이 가장 생각해내기어렵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 - P606

제2세대 페미니즘의 대모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출간 소설이 있었다니!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 소설의 프랑스어 제목은 『갈라놓을 수 없는(Les Inséparables)』이며, 『레 리브레르(Les Libraires)』지에 따르면 "반항적인 두 젊은 여성의 열정적 우정을 감동적이고 명료하게 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당연히 읽고 싶던 차에 영역판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의 최초 반응은 패닉이었다. 과거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젊은시절의 내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614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거의 신으로 숭배됐다. 카뮈,얼마나 추앙받았던가! 우리는 그의 암울한 소설들을 열광적으로 읽었다! 베케트는 또 얼마나 각광받았나! 그의 희곡들,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학 연극반의 단골 공연작이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은또 얼마나 난해했던가! 하지만 그의 희곡들 역시 우리의 무대에 빈번히 올랐다. (그중 파시즘의 득세를 은유한 『코뿔소」 같은 작품은 오늘날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성을 발한다.)사르트르 역시, 비록 귀엽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럽게 똑똑했다. 당시에 타인은 지옥이다"를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럼 그때의 우리는 ‘타인은 지옥‘의 필연적 귀결이 ‘고독은 천국‘이라는 것도 깨달았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에 아첨한 것을 용서했는가? 용서했다. 다는 아니어도 대략 용서했다.  - P615

그가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고, 알제리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손에 잔혹하게 고문당한 언론인 앙리 알레그(Henri Alleg)의 수기인『고문(La Question)』(1958)에 격렬한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문』은프랑스 내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지만 우리 같은 촌구석 사람들은 구할수 있었고, 나도 1961년에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협적인 실존주의 명사들 가운데 여성은 딱 한 명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생각했다. 강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초특급 지성들이 모인 파리의 올림포스산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여성. 그녀는 얼마나 겁나게 억센 사람일까! 사회가 할당한 성역할(gender role)이상을 열망하는 여자라면 스스로 마초맨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던 시대였다. 뭐라도 되려면 냉철해야 했다. - P615

시몬 드 보부아르가 왜 그렇게 두려웠나요? 여러분은 쉽게 물을 수있다. 여러분에게는 거리감이 주는 이점이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덜 무섭다. 특히 후대의 전기 작가들이 애초에 미화됐던 면들을 깎아 원래 크기로 줄여놓고 심지어 결함까지 꺼내놓았다면 별로 무섭지 않다. 하지만 내게 보부아르는 거대한 동시대인이었다. 한편에는 토론토라는 변방에 살면서 언젠가 파리로 달아나 낮에는웨이트리스로 일하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걸작을 쓰겠다는 꿈을 꾸던스무 살의 내가 있었고, 다른 먼 한편에는 몽파르나스의 돔 카페(Café leDôme)에서 인문 철학의 궁정을 열고 『레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에 글을 쓰며 나 같은 촌뜨기들을 비웃는 실존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은 지탄 담배의 재를 떨며 이렇게 운을 뗐을 것이다. "부르주아." 더 심한 욕은 캐나다인이었다.  - P616

그러다 나이가 좀 들었을 때 나는 드디어 파리에 갔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에게 거부당하지 않았다. 사실 실존주의자들을 보지도 못했다.
파리의 카페에서 음식을 사 먹을 여유도 없었다. 파리행 직후에 밴쿠버에 갔고, 거기서 마침내 ‘제2의 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남들의 눈에 띌까봐 화장실에서 읽었다. (그때는 1964년이었고, 제2세대 페미니즘이 아직 북미의 오지까지 도달하기 전이었다.)이 시점에서 내 두려움의 일부는 연민으로 대체됐다. 어린 시몬은극도로 엄격한 훈육을 감내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는 몸과프릴이 가득한 원피스와 단호히 규정된 규범 속에서 얼마나 갑갑한 기분이었을까? 캐나다 벽촌의 여자애였던 것이 결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사사건건 비판적인 수녀들도, 고압적인 상류계급 친척도없었다. 나는 바지 차림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닐 수 있었다. 모기를 막는 데는 치마보다 바지가 유리했다. - P617

그러던 차에 우리에게 원전(原典)이라 할 책이 주어졌다. 그것은 지금껏 출간된 적 없었던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 갈라놓을 수 없는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경험을 담고 있다.
그 경험은 평생의 친구였던 자자(Zaza)와의 관계다. (소설에서 자자는 앙드레라는 소녀로 등장한다. 두 소녀의 우정은 자자가 비극적이고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다층적이고 강렬하게 이어진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출간한 지 5년 후인 1954년에 이 책을 썼고, 이것을 사르트르에게 보여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대부분의작품을 정치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유물론자이자 마르크주의자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아이러니한 일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두 젊은 여성이 처한 물리적·사회적 여건을 치열하게 묘사한 책이 아니던가. 당시 진지하게 여겨지던 생산수단은 공장 노동과 농업이 유일했다. 여성의 저평가된 무보수 노동은 거기 해당되지 않았다.  - P620

흠, 독자여, 사르트르 씨가 틀렸다. 적어도 이 독자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인류의 완성이나 정의와 평등 같은 추상적 관념에 몰두하는 사람은 원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은 개인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연인이 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자기가 연인의 삶에 등장하기 전의 일을다루고, 자기가 아닌 남이 중요하고 재능 있고 사랑받는 인물로 등장하고, 더욱이 그 인물이 여성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산계급 소녀들의 내적 삶? 너무 사소해. 이런 소소한 감정 유희는 여기까지만해, 시몬, 너의 그 명석한 두뇌를 보다 진지한 문제들에 쓰는 게 어때? - P621

그런데 사르트르 씨, 21세기에서 답변드리자면, 이것이야말로 진지한 문제거든요. 만약 자자가 없었다면, 자자와 보부아르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관계가 없었다면, 보부아르의 지적 야망에 대한 자자의응원과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보부아르의 욕망이 없었다면, 가족과 사회가 자자에게 그녀가 여성이란 이유로 가했던 치명적인 기대-보부아르가 보기에는 자자의 총명과 기운, 기지와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자의 생명력을 그야말로 고갈시켜버린 기대에 대한 보부아르의 견해가 없었다면, 『제2의 성』이 있을 수 있었을까? 또한 이 중추적인 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일어난 일이 과연 일어난 만큼 일어날 수있었을까? - P621

더욱이 지금의 세계에도 얼마나 많은 버전의 자자들이 살고 있는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명석하고, 재능 있고, 유능한 여성들이 일부는국법에 의해, 다른 일부는 나름대로 젠더 평등을 이뤘다는 나라에 살면서도 내부의 빈곤과 차별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가? 물론 갈라놓을수 없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특정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책을 읽고 울기를 바란다. 작가 자신도 처음에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눈물로 시작한다. 살벌한 외관과 달리 보부아르는 자자의 죽음을 두고 평생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가 아는 보부아르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것은어쩌면 일종의 추모였는지도 모른다. 보부아르는 전력을 다해 세상에자신을 개진해야 했다. 자자가 하지 못했던 몫까지 최대한. - P622

1921년의 에세이 나는 두렵다(I Am Afraid)」에서 자마틴은 이렇게말했다. "진정한 문학이란, 문학이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아니라 광인·은둔자·이단자·몽상가·저항자 · 회의론자에 의해 창작될 때에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건혁명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닌-스탈린주의의 바람이 어느방향으로 부는지 확인한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이미 검열에착수했다. 그들은 바람직한 주제와 작품에 대한 포고령을 내리고, 변칙과 비정통의 잡초를 뽑느라 바빴다. 전체주의체제에서는 이 일에도늘 위험이 따른다. 독재자의 눈짓 한 번에 잡초와 꽃이 뒤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얼마간 유토피아로 볼 수도 있다. 작중 ‘단일제국‘은 보편적 행복을 목표하면서, 사람은 행복과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없기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19세기에떠들썩하게 논쟁의 대상이 됐으며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인
‘민권‘은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무시한다. 즉 ‘단일제국‘이 모든 것을 잘통제하고 있고, 모두의 최대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데 민권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 P625

모든 것은 일명 율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섹스 기회는 모두에게 할당되지만 자녀를 낳는 것은 특정 신체 조건을 충족하는 여성들에게만허용된다. 당시는 우생학이 ‘진보‘로 간주되던 시기였다.
잭 런던(Jack London)의 1908년 소설 『강철군화와 오웰의 『1984럼, 『우리들』에서도 반체제 인사들은 여성이다. 남자 주인공 D-503은처음에는 ‘단일제국‘의 헌신적 일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단일제국‘이완벽한 행복의 비법을 미지의 세계와 공유하겠다는 구실로 건설하는우주선에서 기술자로 일한다.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기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D-503이 쓰는 일기는 우주에 전하기 위한 단일제국 찬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플롯이 빡빡해지며 D-503의 글도걸쭉해진다. 그는 끔찍한 순간들에 에드거 앨런 포에 빙의한 걸까? 아니면 독일 고딕 낭만주의에? 아니면 보들레르에? 가능성 있다. 빙의한것은 D-503 인가, 아니면 저자인가? - P627

『우리들』이 쓰인 시기는 역사의 특정한 순간, 즉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퇴색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교도들이 사상범이 되고, 독재 반대자가 혁명 반동분자로 몰리고,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이확산되고, 숙청이 일상이 되기 전이었다. 자마틴은 어떻게 미래를 이리도 분명히 내다봤을까?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현재를 보았다. 그리고 현재의 그림자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던 것을보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가 말했다. "사람의 행로는 특정한 결말을 예고한다. 그 행로에 계속 붙어 가면 그 결말에 이르고 말지만, 행로에서 벗어나면 결말도 바뀐다." 우리들』은 당시의 장소와 시대에 던지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 경고는 들리지 못했기에 주의를 끌지도 못했다.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자마틴에 대한 검열에 착수했기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로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 수백만 명이죽었다.
『우리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일 수도 있을까? 만약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경고인가? 우리는 듣고 있는가? - P630

벨 판 주일렌은 프랑스 귀족은 프랑스혁명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위스에서 만난 귀족 망명자들은적어도 한 가지는 배웠습니다. 만약 귀족의 목이 날아가는 시국이고,
만약 당신이 귀족이라면, 도망쳐라! 최대한 빨리! 설사 내세울 만한 공적이 있다 해도 당신의 선의나 선행이 당신을 구해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 때에 내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내 개인적 정체나 내가 했다고 믿는 선행이 아닙니다. 남들이, 연출과단두대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내 운명을 좌우합니다. 더구나 이때는 "선고 먼저, 판결 나중입니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피에 굶주린 독재자 하트 여왕이 한 말입니다. 종류를 불문하고 도덕적 공황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고발당하면 바로 유죄이고, 유죄면 바로 처형입니다. 사실관계는 더 이상 중요하지않고, 설사 존속한다 해도 사법절차는 요식행위로 전락합니다. 이는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돼온 패턴입니다. 진짜든 상상이든 위기의 시기에는 누군가는 범인이 되어 색출당하고 제거당해야 합니다. - P634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 시대가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가 될 수도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최악의 결과는 아니겠네요. 어쨌든 미래에도여전히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여전히 역사 재해석에 기울일 관심이남아 있으며, 표현의 자유와 지적 활동의 자유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하찮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로봇이나 지구 과열이나 치사율 100퍼센트의 통제불능 바이러스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을 거란 희망은 결코 작은 희망이 아니에요.
저는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한 불쾌한 미래에 대한 책들을 씁니다.
우리가 그런 미래를 현실에 허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또는 우리 중 일부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권위주의 정치의 물결이 물러가고, 우리의 공동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공포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두 가지는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살고 싶은가? 아마 이것이 우리가 자문해야 할 진짜질문일 겁니다. 네, 늑대의 배 속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늑대 밖은 밝습니다. 그럼,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 P644

그레임은 삶의 마지막까지 새를 보는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생애마지막 해까지도, 비록 혈관성 치매가 진행되어 더는 읽지도 쓰지도못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새들의 활기찬 삶을 지켜보았다. 우리 뒤뜰의 모이통과 물통에 날아드는 새라고는 참새와 울새, 찌르레기뿐이었고 간간이 비둘기가 찾아올 따름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새가 주목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제는 저 새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어느 날 그가 우리의 친구에게 말했다. "하지만 뭐, 새들도 내 이름을모르니까." - P648

필사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책이 된다. 과거에서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적어도 우리 자신은 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에 산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살지 않고 삶을 온전히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신사는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는 우리의 비밀공유자이자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친구다. 우리가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드디어보는구나, 말로만 듣던 저 유명한 것을." 헨리 제임스가 임종 시에 한말이라고 한다. 그레임도 익히 알던 인용구다. 물론 로버트 프레이저가 완전히 그레임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레임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의 창의적 삶과 그의 실제 삶은 하나였다. - P657

시가 해야 할 일(신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이의 매력을 찬미하고, 전쟁 영웅을 기리고, 공작과 공작 부인을 칭송하고, 파워엘리트를 비방하고, 자연과 동식물을 묵상하고, 민중의 봉기를 촉구하고, 대약진운동을 선전하고, 전남편 및/또는가부장제를 욕하는 일)에 대한 믿음은 매우 다양하다. 임무 수행을 위해시가 취할 방식(한껏 고무된 언어, 기악을 곁들인 노래, 운을 맞춘 2행연구시,
자유시, 소네트 워드호드에서 뽑아낸 비유, 적절히 선택된 방언, 속어와 욕설, 시경연 대회의 즉흥시 등)도 못지않게 다양하며, 유행에도 좌우된다.
시가 목표하는 청중도 여러 부류다. 같은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부터 - P662

당대의 왕과 궁정, 지식노동자들의 자기비판 그룹, 동료 음유시인들,
상류사회, 비트족, 문예창작 입문교실, 온라인 팬, 또는 에밀리 디킨슨이 말한 동료 무명인(無名人)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때로 시인은 때와 장소에서 격하게 벗어난 말 때문에 추방되고 총에 맞고 검열당한다. 특히 독재 체제에서 찌푸린 얼굴의 시인이 편히 쉴 자리란 없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말을 하면 곤욕을 치를수 있다.
모든 시가 다 그렇다. 시는 때와 장소에 내장돼 있다. 시는 그 뿌리와절연할 수 없다. 다만 운이 좋으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훗날의 독자들이 그 시를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시가 애초에의도된 대로 읽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여신 이난나에게 바치는 찬가는 적어도 내게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고대 청중에게 일으켰을 골수가 녹아내리는 경외심을지금은 일으키지 못한다. 나도 이난나 여신이 느닷없이 현신해 산을납작하게 밀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은 언제든지 빗나갈 수 있다. - P663

낭만파가 불후의 명성과 저작에 대해 부단히 부르짖었지만, 사실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없다. 명성과 작품은 흥망을 거듭하고, 책은 배척당하고, 불타고, 나중에 출토되고, 재활용된다. 오늘날의불멸의 시가 내일모레는 불쏘시개로 전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일모레의 불쏘시개가 불길에서 구출돼 격찬을 받고 주추에 새겨질 수도있다. 타로카드 중 ‘운명의 수레바퀴‘가 바퀴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 적어도 때로는 그렇다. 운명 카드는 ‘운명의 필연적 직선 도로‘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 - P663

사전 경고는 이쯤 하고, 이제 영화 <일포스티노(Il Postino)>에서 우편배달부가 한 말을 인용하려 한다. 영화 속 우편배달부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인 네루다의 시들을 훔친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시가 작자의 손을 떠난 후에는, 그리고 작자가 시공을 떠나 원자로떠다니게 되면, 과연 그 시는 누구에게 속할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그대를 위해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역시 그대를 위한 것이다. - P664

살다 보면 내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 그런 순간들 중 일부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던 순간이다. 케네디가 암살됐을 때 나는 토론토 시내의 어느 시장조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토론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날씨와 상관있다. 허리케인을 목격했을 때, 빙설 폭풍에 잡혔을 때 등. 또 다른 일부는 음악과 관계있다. 라디오로 처음 <메어지도츠>를 들었을 때 나는 네 살이었고, 수세인트마리에 있었고, 안락의자에 앉아 곰 인형을 인형 옷에 서툴게 꿰매고 있었다.  - P670

내가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Barry Lopez)를 처음 만난 것은 수십 년전 알래스카 여행에서였다. 사람들이 말했다. "여자가 남자이고, 남자가 동물인 땅, 알래스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농담이었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다소 익숙한 뼈였다. 나는 북부에서 자랐고, 알래스카는 북부다. 강인한 여자들이 있는 곳.
하지만 동물이 될 거라면 어떤 동물인지가 중요하다. 족제비가 되는것과 늑대가 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늑대를 고른다면 그건 배리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무리에 충실하고, 똑똑하고, 지략 있고, 생존지향적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동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늑대들이 헬리콥터를 탄 수렵꾼들에게 살육당하고 있다. 족제비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 P675

배리와의 만남은 자연 세계와 우리를 불가분하게 이어주던 언어,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가 아직 사용되는영역으로 들어서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곳에 그 언어를 재개하는 화자가 있었다. 배리는 황야의 예언자였다. 하지만 배리는 그곳을 황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고독한 화자라고 해두자. 그는 수없이궁금했을 테니까. 진정으로 듣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그는 이제지극히 중요한 화자가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그의 동시대인들 대다수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긴급성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 같은 세계적 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활동가들은 그 메시지를 절감한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은 자연에서 온다. 자연을 죽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대양은 지구의 허파다. 특히 북방 대양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구를 골디락스 행성으로 유지해온 거대 시스템의 열쇠다. - P676

기후변화로 북극이 녹아내리고 있다. 인간이 야기하는 대멸종, 이른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임박했다. 이런 때 배리의 저작이 가지는 의미는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기반과의 연을 놓치고 파멸의위기를 야기했다. 그 위기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배리 로페즈가 우리가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을 미리 노래한 것이아니기를 희망하자. 사랑하는 푸른 지구, 사랑하는 야생이 돌이킬 수 - P676

없게 상실되면 우리도 상실된다. 배리의 작품을 읽는 것, 또는 다시 읽는 것은 그 상실이 얼마나 엄청나고 얼마나 끝없이 어리석은 것이 될지 스스로 상기하는 일이다.
고마워요, 배리 - P677

바다는 우리 행성의 살아 있는 심장이자 허파다. 바다는 대기 중 산소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해류 순환을 통해 기후를 통제한다. 건강한 해양이 없다면 우리처럼 육지에 살면서 공기로 호흡하는 중형 영장류는죽을 수밖에 없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의 최초 저작 세 권, 『바닷바람을 맞으며』『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가 재출간됐다. 이는 위의 사실에 대한 대중의 각성과 인식 확산을 시사한다. 레이철 카슨이 이 책들을 집필하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와 1950년대는 지금은 우리 세계의 현실이 된 많은 일들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경고 신호는 있었지만 아직 희미하게 깜박일 때였다. 그때는 우리가 여섯 번째대멸종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후위기의 초기 징후들이 있었지만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 P678

대규모 산업형 어업은 막 시작 단계였다.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스 해역의 대구 어장이 남획으로 황폐해지기 전이었고, 다른 어종들도 무분별한 혼획으로 개체가 급감하기 전이었다. 저인망어선들이 대륙붕 생물계의 회생력을 파괴하기 전이었고, 산호초에 심각한 백화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아직은 비닐 끈이 만든 ‘유령 그물들‘이 해양을 떠다니며 물고기와 돌고래와 고래들을 얽어매 죽이고 있지 않았다.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한 국가도 없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던 때였다. 바다는 원래 끝없이 샘솟는 밑천이잖아? 인류가 마음껏 퍼가도마르지 않는 화수분 아닌가? 해양생태계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을 왜 써?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는 언제나 자신을 알아서 챙겼다. 바다는 약해지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 P679

레이철 카슨은 20세기를 변화시킨 인물중 하나다. 카슨이 없었다면, 지구가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명체의 생존이 가능한 곳으로 남을수 있는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위정자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통찰에 따랐다면 현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그에 따른 기근, 화재, 홍수, 자원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카슨이 ‘20세기를 변화시켰다‘고 말한 것은 카슨의 1962년 역작 『침묵의 봄』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카슨은자신의 입장을 고수했고, 자신의 증거 기반 결론을 견지했다. 현재 우리는 과학을 부정하고 사실 직시를 거부하는 신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살충제와 제초제가 온난화와 생물권 파괴에 미치는 영향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신 접종과 선거 개표처럼 우리 생활에보다 밀접한 것들조차 부정하려 든다. 이런 상황이니 카슨의 발견에대한 적대적인 모르쇠 반응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 P680

『침묵의 봄』은 카슨의 네 번째 책이었다. 첫번째 책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1941년에 출판됐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고 미국이 직접 참전하기 직전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 외에 다른 주제의 책을 내기에좋은 해는 아니었다. 이 책은 『시튼동물기』의 어니스트 톰프슨 시튼과「수달타카의 일생』과 『연어 살라의 이야기 (Salar the Salmon)』의 헨리 월리엄슨(Henry Williamson)이 개척한 동물 중심 자연주의 저술의 계보를잇는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책이다. 지금 같았으면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됐겠지만, 카슨이 애초에 의도한 독자층은 이보다 훨씬 넓었다. - P680

카슨의 두 번째 책인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전후 시대 긴축정책이드디어 끝난 1951년에 나왔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책은 허구화한 설명이 아니라 사실을 담은 설명이었다. 역사와 선사, 지질학과 생물학을 결합한 해양에 바치는 현세적이자 기념적인 찬가였다. 많 - P681

은 이들이 저자를 따라 파도 아래로, 짙푸른 바닷속으로 들어가기를열망했다. 쥘 베른의 고전 사이언스 픽션 『해저2만리』의 네모 선장을기억하는가? 지금은 몰라도 1951년에는 많은 독자들이 네모 선장을기억했다. 바닷속은 모험과 불가사의의 영역이었다. 그토록 박식하고열정적인 가이드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인어는 없었지만 반면에 경이로움은 훨씬 컸다. 이 책은 레이철 카슨을 국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렸다. - P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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