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이제는 퇴색해가는 낡은 단어입니다.
한없이 원했습니다.
한없이 갈망했습니다.
나는 그를 한없이 사랑했습니다.

나는 인도를 따라 걸어갑니다.
고장난 무릎 때문에 조심하면서하지만 당신이 상상하는 것과 달리
나는 개뿔도 신경 쓰지 않아요.
다른 것들이, 더 중요한 것들이 있으니까요.
기다려요, 알게 될 거예요.

커피 반 컵을
한없이 유감스럽게도
플라스틱 뚜껑을 덮은
종이컵을 들고
단어들이 한때 의미했던 것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한없이.
이 말은 어떻게 사용됐나요?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모였습니다.
한없이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여기 모였습니다.
내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한
이 잊혔던 사진첩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는
세피아 사진들, 흑백사진들, 컬러사진들
모두가 훨씬 젊어요.
폴라로이드 사진들.
폴라로이드가 뭐죠? 갓난아이가 물어요.
10년 전 갓난아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으면 위에서 사진이 나온단다.

무엇의 위요?
내가 많이 접하는 어리둥절한 표정,
이 모든 것들이 어떻게 모였는지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일일이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우리는 쓰레기를
신문지에 싸서 줄로 묶었단다.
신문지는 뭔데요?
이렇다니까요.

하지만 줄은 줄은 아직 있어요.
줄은 사물을 연결해요.
진주 목걸이 한 줄.
그들은 이렇게 말하겠죠.

날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각기 빛나고, 제각기 혼자고,
제각기 가버리는 날들.
그중 일부를 종이에 적어서 서랍에 넣었어요.
이제는 퇴색한 그날들.
구슬은 수를 셀 때 사용하기 좋아요.
묵주처럼.

하지만 나는 목에 돌들을 두르고 싶지 않아요

이 거리에는 꽃이 많군요.
8월이기 때문에 이제는 시들고
먼지 않고, 낙하로 향하는 꽃들.
머지않아 국화꽃이 피겠죠.
프랑스에서는 망자의 꽃이죠.
소름 끼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
그저 현실일 뿐이니까.

꽃을 세세히 설명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이건 수술(stamen)인데, 남자와는 하등 관계없고요,
이건 암술(pistil)인데, 총과는 하등 관계없지요.
번역가에게 좌절을 안기는 세세한 것들일 뿐이죠.
나도 설명하느라 진땀 나고요.
이렇다니까요.
그러다 마음을 딴 데 팔아도 할 말 없어요.
말이란 게 때로 사람을 놓쳐요.

한없이 사랑하는 것들이 여기 모여 있어요.
이 닫힌 서랍 안에,
이제는 퇴색해가요. 당신이 그리워요.
여기 없는사람들, 먼저 떠난 이들이 그리워요

아직 여기 있는 이들조차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모두가 한없이 그리워요.
나는 여러분 때문에 한없이 슬퍼요

슬픔, 그건 또 다른 단어죠.
이제는 많이 들리지 않는 말.
나는 한없이 슬퍼요.

마거릿 애트우드 ˝타오르는 질문들˝ 중에서. p 664~ 668


설사 안전하고 합법적이라 해도 낙태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어떤 여자가 불타는 토요일 밤을 보내자고 낙태를 무릅쓰겠는가. 여자들이 불법 시술을 받다가 욕실 바닥에서 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좋아할 사람도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에 대한 접근 방식을 바꾸기 위해 질문을 바꿔보자. 당신은 어떤 나라에 살고 싶은가? 개개인이 자신의 건강과 신체에 대해 자유로운 결정권을 가지는 나라? 아니면 인구의 절반만 자유롭고 다른 절반은 노예인 나라?
아기를 낳을지 말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여성은 노예나 다름없다. 국가가 여성의 신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고, 여성 신체의 용도를 지시할 권한을 행사하면 그렇게 된다. 남성이 처할 수 있는 유일하게 비슷한 상황은 군대에 징집되는 경우다.  - P550

그리고 국가가 아기들은 그렇게 중히 여기면서 어째서 아기를 많이낳은 여성들은 공경하지 않는 걸까? 마땅히 그들을 존중하고, 가난에서 구제해야 하지 않나? 여성들이 자기의지에 반하면서까지 국가에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그들은 마땅히 노고에 대한 보상을받아야 한다. 국가가 원하는 것이 더 많은 아기인가? 그렇다면 적절한보상이 따를 경우 거기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여성들도 많을 것으로 믿는다. 출산의 보상이 보장되지 않을 때 여성은 자연법을 따르는 쪽으로 기운다. 즉, 태반이 있는 포유동물은 자원 결핍에 직면하면 유산하는 경향이 있다. - P551

하지만 국가는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면서까지 노력할 의사는 없어보인다. 대신 항상 쓰던 비열한 수법을 강화할 생각만 한다. 그 수법은여자들에게 아기 낳기를 강요하고 그 비용까지 여자들에게 떠넘기는것이다. 여자들은 지불하고, 지불하고, 또 지불한다. 아까 말했듯 노예처럼 착취당한다.
아기를 낳기로 선택하는 경우는 당연히 별개의 문제다. 아기는 생명자체가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선물은 자유롭게 주고 자유롭게 받는것이어야 한다. 또한 선물은 거부할 수 있어야 선물이다. 거부할 수 없는 선물은 억압의 징후일 뿐이다. - P551

그렇다면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우리 좋은 자신을 발생시켰고자신을 부양해온 생물학적 시스템을 계속 파괴할까? 그래서 흔적도없이 사라지는 절멸을 향한 고속 행진을 지속할까? 아니면 여기서 멈추고, 그간의 무모한 행태를 반성하고, 잘못을 되돌릴 수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발명들이 파놓은 궁지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발명할 수 있을까? 이미 인간은 인공 슈퍼바이러스 같은 생명공학적 자멸 수단을 개발했고, 인간 게놈을 조작하는 방법도 알아냈다. 이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를 더 착하고, 덜 탐욕스러운 버전으로 대체해버릴 작심을 한다면? 만약 세계 개선에 열중한 박애주의자 또는 어느 정신착란자가 다른 버전의 인류를 설계한다면? 우리 중에 재설정 버튼을 누를 채비를하는 선지자 및/또는 미친 과학자가 숨어 있다면? - P555

소설은 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답을 제공하는 것은 지침서들의 몫이다. 대신 소설은 질문을 던진다.
오릭스와 크레이크』가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아마도 이것이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를 맡길 수 있을까?" 기술 수준이 몰라보게 높아졌다 해도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는 본질적으로 수만 년 동안 변하지않았다. 같은 감정, 같은 집착, 같은 선악미추 개념이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 인간은 영원한 오합지중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악함과 추함을 삭제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럼우리는 무엇을 삭제하게 될까? 그 결과물은 여전히 인간일까? 만약 그결과물이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덕성스러운 말 휴이넘(Houyhnhnm)처럼 공격성과 승부근성이 없는 생물이라면그들은 빠르게 멸종해버리지 않을까?  - P560

북미 원주민 부족들이 16세기와17세기에 유럽인과 조우한 후 줄줄이 사라져간 것처럼? 우리 중 일부는 걸리버 자신처럼, 그리고 오릭스와 크레이크』의 지미처럼 꽤 착하고 상당히 점잖은 사람들이다. 그걸로 충분할까? 지미에게는 ‘착한 마음‘이 있다. 우리를 구하는 데 우리의 착한 마음이면 충분할까, 아니면또 다른 무언가가 요구될까?
우리가 현재의 우리보다 더 아름답고 더 윤리적인 새로운 버전의 우리를 창조할 역량을 갖출 날이 머지않았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우리가 그 버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급속히 파 - P560

괴 중인 생물권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인간 모델을 폐기해버려야 하지 않을까?
크레이크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 P561

세계인권선언은 "인류의 모든 구성원에 내재하는 존엄성이 자유, 정의, 그리고 세계 평화의 토대"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본 선언은 인권은 보편적인 것임을, 즉 어디 사는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향유해야 할 권리임을 선포한다.
세계인권선언은 생명, 자유, 표현의 자유, 사생활에 대한 권리 같은 시민적·정치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또한 사회보장, 건강, 교육에 대한권리 같은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들을 포함한다. - P573

하지만 지구인 여러분, 경고할 말이 있습니다. 첫째, 지금까지의 선언과 협약은 모두 이상에 불과합니다. 거기에 서명한 국가들에서조차 평등은 온전히 구현된 적이 없습니다. 이 약속들이 단지 말에 그치지 않으려면 더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불평등이 많은 곳에 학대도 많습니다.
둘째, 권리는 하늘에서 저절로 떨어지지 않습니다. 권리는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권리를 위해 수 세기 동안 싸웠고, 또 반격당했습니다. 줄다리기는 계속됩니다. 끝난 적이 없습니다. 카인은계속 돌을 집어 들고, 아벨은 계속 살해당합니다. 탐욕, 질시, 권력 싸 - P574

움∙∙∙∙∙….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이것 없이 살았던 때가 있던가요? 안정된 사회란 적어도 이런 성향에 대처할 수단을 가진 사회입니다. 불안정한 사회는 내면의 악마들을 마개 없이 풀어놓는 사회입니다.
셋째, 오늘날 조직력과 재원을 갖춘 여러 세력이 이런 취약한 인권마저 잡아먹으려 공세를 펼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는 준(準)민주주의 정부들의 밋밋함을 따분해하며 20세기 전체주의의 부활을 바라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조심하세요. 처음에는 호쾌한 발상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행진과 코스튬플레이에 눈이 즐겁고, 이전 지도자들과 달리 화끈한 입담을자랑하는 무적의 리더를 섬긴다는 느낌이 짜릿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의 끝이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특히 시민 입장에서 좋게끝난 적이 없어요. - P575

전체주의 정권들은 어떤 이름을 달고 있는 같은 행동을 합니다. 그들의 목표는 전면적이며 도전받지 않는 힘입니다. 그들의 수단은 거짓말을 포함합니다. 그 거짓말은 클수록 좋습니다. 그들은 독립 언론의입을 틀어막습니다. 그러기 위해 예컨대 언론인의 목을 죄고 손발을자릅니다. 또한 그들은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예술가와 작가를 투옥하거나 살해하고, 독립 사법부를 없애고 법 집행 기관을 그저 정권의 산하기관으로 만들어 전체주의 정부가 고안한 부당한 법들을 행사합니다. 그들은 암살 같은 초법적 억압 수단을 사용합니다. 폭도를 선동해특정 집단들에게 폭력적 공격을 가하고, 경쟁 세력 파괴와 자기 세력결집과 대국민 공포 분위기 조성을 위한 규탄과 적발의 판을 깝니다.
이 성토 기계는 일단 전속력으로 올라가면 가공할 추진력을 발합니다. - P575

왜 이런 정권들이 나오는 걸까요? 그들은 어떻게 권력을 잡을까요?
전체주의 정권은 주로 혼란의 시기에, 대개는 경제위기에, 국민 전체나 상당수가 느끼는 부당한 현실에 대한 반감을 딛고 떠오릅니다.
이런 시기에는 무정부주의가 득세하기 좋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집단+폭력 · 린치 ·인민재판이 판치다가 사람들이 더는 그런 혼돈을 참아내지 못할 지경이 됐을 때 전형적으로 군벌과 독재자가 부상합니다. 그들은 대중의 분노를 특정 표적 집단에게 돌리는 방법으로 추종자를 규합합니다. 표적 집단은 나환자, 마녀, 투트시족, 에이즈 환자, 멕시코인,
난민 등 다양합니다. - P576

여러분은 적어도 지금은, 또는 아직은 전체주의 독재 체제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제발 피하세요.
지구인이여, 여러분은 구태여 의심과 혐오의 분리주의 경로를 따를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서로가 같은 인간임을 인식하고, 인류에게 닥친 공동의 문제들을 함께 이해하고 마주하기를 바랍니다.
사실 해결할 대형 문제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우선, 지구의 온도와화학적 구성을 조절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여러분 모두 플라스틱 똥이되고 말 겁니다. 바다가 죽고 여러분은 숨을 쉴 수 없게 되겠죠. 그러면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와는 영원한 안녕입니다. 우리도 여러분의 멸종이 마음 아파요. 여러분에게도 좋은 점이 있거든요. 모차르트는 정말우리 취향이었어요. 물론 우리야 악보를 저장해서 직접 연주하면 그만이지만요.
꼭 망할 필요는 없잖아요. 선택은 여러분의 것입니다. - P578

이곳은 토론 클럽입니다. 말이 이어지는 곳입니다. 말 다음에 말 다음에 말이 오면 힘이 됩니다. 발언이 힘입니다. 그렇게 희망합니다. 복잡한 문법을 가진 언어들,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먼 과거들과 우리가 죽은 후에 존재할 미래들에 대해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언어들이야말로아마도 최초의 진정한 휴먼 테크놀로지입니다. 우리는 인간 조상들로 - P594

부터 언어를 받았습니다. 언어의 기원은 우리가 알지 못할 먼먼 과거로 뻗어 올라갑니다. 이 언어를 진실하게 사용하세요. 공정하게 사용하세요. 그렇게 하면 말이 권력이 됩니다. 물론 가장 좋은 의미의 권력이요.
우리의 말은 이제 여러분 손에 달려 있습니다 - P595

악몽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악몽은 반복적으로 꾸는 흉몽이다.
몹시 익숙하면서도 불길한 장소에 와 있는 나를 발견한다. 으스스한지하실, 살기 어린 호텔, 컴컴한 숲속. 하지만 전에도 겪어본 악몽이기에 생각의 초점은 놀라울 만큼 예리하다. 지난번에 저 뾰족한 막대기가 괴물에게 주효했으니 이번에도 시도해보자.
두 번째 종류의 악몽에서는 익숙해야 할 모든 것들이 낯설다. 나는길을 잃었고, 방향을 알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아득하다.
지금 우리는 이 두 가지 악몽을 한꺼번에 겪고 있는 듯하다. 다만 어느 것을 더 우세하게 겪는지는 악몽을 꾸는 사람의 연령대에 달려 있다. 이런 팬데믹 상황을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젊은 세대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두 번째 악몽에 가깝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 P598

하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전염병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되는 요소였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전쟁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중세 유럽을 휩쓴 흑사병의 치사율은 50퍼센트로 추정된다. 대항해시대에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이 유럽인에게 묻어 온 병원균에 감염됐고, 거기에 대한 면역이 전혀 없었던 원주민의 사망률은 80~90퍼센트에 육박했다. 20세기 초에는 수천만 명이 스페인독감으로 죽었다.
바이러스나 박테리아의 눈에 우리는 소중한 인생사를 가진 애틋한 개인들이 아니다. 그저 미생물이 더 많은 미생물을 만드는 배양접시에불과하다.
팬데믹과 팬데믹 사이에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기 쉽다. 전염병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언제나 다음번팬데믹을 기다린다. - P603

군에 둘러싸였다. 적들은 사방에 도사리고 있다. 다만 이번 적들은 뿔난 꼬마 도깨비처럼 그려놓은 세균이 아니라, 색색의 털 방울 모양의바이러스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SF 영화에서 처음에는 귀엽다가 나중에는 인체를 장악하는 미지의 존재들처럼, 이 털 방울도 사람을 죽인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2008년에 출간한 『돈을 다시 생각한다』에서 과거 흑사병이 퍼질 때 사람들이 보인 여섯 가지 반응을 언급했다.

1. 자기 보호.
2. 자포자기 난동. 여기에는 취태와 도둑질도 포함된다.
3. 남들을 돕기.
4. 남 탓. (주로 나환자, 집시, 마녀, 유대인이 전염병 전파자로 매도당했다.)5. 증인이 되어 기록하기.
6. 일상 유지.

이것은 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2번이나 4번은 추천하지 않는다. 포기와 남 탓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자신을 보호하고,
그다음에 남을 돕거나, 일기를 쓰며 시대의 증인이 되거나, 온라인 시 - P605

스템을 활용해 일상을 최대한 회복하는 것은 가능하다. 14세기에는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이 지금은 상당 부분 가능하다.
그러니 문에 가상의 격리 표시를 붙이고, 낯선 이들을 안에 들이지말고, 자신을 잠재적 전염병 매개체로 여기고, 영화 <외계의 침입자>나<제7의 봉인>을 (다시) 보자. 그리고 아날로그는 디지털이든 가위와 풀이나 펜과 종이를 꺼내자 감염은 됐지만 발병하지 않았다면 팬데믹이여러분에게 선물을 준 셈이다! 그 선물은 시간이다. 한 번쯤 소설을 써보거나 나막신 춤을 배우고 싶었는가? 지금이 바로 기회다.
그리고 용기를 내자! 인류가 전에도 겪었던 일이다. 결국에는 터널끝에 이르게 돼 있다. 우리는 그저 이번 터널을, 전과 후 사이를 잘 통과하면 된다. 소설가들은 이미 알겠지만 중간부분이 가장 생각해내기어렵다. 하지만 해낼 수 있다. - P606

제2세대 페미니즘의 대모 시몬 드 보부아르의 미출간 소설이 있었다니! 이 얼마나 흥분되는 일인가! 이 소설의 프랑스어 제목은 『갈라놓을 수 없는(Les Inséparables)』이며, 『레 리브레르(Les Libraires)』지에 따르면 "반항적인 두 젊은 여성의 열정적 우정을 감동적이고 명료하게 풀어낸 이야기라고 한다. 당연히 읽고 싶던 차에 영역판의 서문을 써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의 최초 반응은 패닉이었다. 과거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젊은시절의 내게 시몬 드 보부아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 P614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거의 신으로 숭배됐다. 카뮈,얼마나 추앙받았던가! 우리는 그의 암울한 소설들을 열광적으로 읽었다! 베케트는 또 얼마나 각광받았나! 그의 희곡들,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는 대학 연극반의 단골 공연작이었다. 이오네스코의 부조리극은또 얼마나 난해했던가! 하지만 그의 희곡들 역시 우리의 무대에 빈번히 올랐다. (그중 파시즘의 득세를 은유한 『코뿔소」 같은 작품은 오늘날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상징성을 발한다.)사르트르 역시, 비록 귀엽지는 않았지만, 당황스럽게 똑똑했다. 당시에 타인은 지옥이다"를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그럼 그때의 우리는 ‘타인은 지옥‘의 필연적 귀결이 ‘고독은 천국‘이라는 것도 깨달았나? 아니, 그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가 오랫동안 스탈린주의에 아첨한 것을 용서했는가? 용서했다. 다는 아니어도 대략 용서했다.  - P615

그가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비난했고, 알제리독립전쟁 당시 프랑스군의 손에 잔혹하게 고문당한 언론인 앙리 알레그(Henri Alleg)의 수기인『고문(La Question)』(1958)에 격렬한 서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문』은프랑스 내에서는 금서로 지정됐지만 우리 같은 촌구석 사람들은 구할수 있었고, 나도 1961년에 읽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협적인 실존주의 명사들 가운데 여성은 딱 한 명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 나는 생각했다. 강철처럼 예리하게 빛나는 초특급 지성들이 모인 파리의 올림포스산에서 한자리를 차지한 여성. 그녀는 얼마나 겁나게 억센 사람일까! 사회가 할당한 성역할(gender role)이상을 열망하는 여자라면 스스로 마초맨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여기던 시대였다. 뭐라도 되려면 냉철해야 했다. - P615

시몬 드 보부아르가 왜 그렇게 두려웠나요? 여러분은 쉽게 물을 수있다. 여러분에게는 거리감이 주는 이점이 있다. 죽은 사람은 산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덜 무섭다. 특히 후대의 전기 작가들이 애초에 미화됐던 면들을 깎아 원래 크기로 줄여놓고 심지어 결함까지 꺼내놓았다면 별로 무섭지 않다. 하지만 내게 보부아르는 거대한 동시대인이었다. 한편에는 토론토라는 변방에 살면서 언젠가 파리로 달아나 낮에는웨이트리스로 일하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걸작을 쓰겠다는 꿈을 꾸던스무 살의 내가 있었고, 다른 먼 한편에는 몽파르나스의 돔 카페(Café leDôme)에서 인문 철학의 궁정을 열고 『레탕 모데른(Les Temps Modernes)』지에 글을 쓰며 나 같은 촌뜨기들을 비웃는 실존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말이 들리는 듯했다. 그들은 지탄 담배의 재를 떨며 이렇게 운을 뗐을 것이다. "부르주아." 더 심한 욕은 캐나다인이었다.  - P616

그러다 나이가 좀 들었을 때 나는 드디어 파리에 갔다. 나는 실존주의자들에게 거부당하지 않았다. 사실 실존주의자들을 보지도 못했다.
파리의 카페에서 음식을 사 먹을 여유도 없었다. 파리행 직후에 밴쿠버에 갔고, 거기서 마침내 ‘제2의 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남들의 눈에 띌까봐 화장실에서 읽었다. (그때는 1964년이었고, 제2세대 페미니즘이 아직 북미의 오지까지 도달하기 전이었다.)이 시점에서 내 두려움의 일부는 연민으로 대체됐다. 어린 시몬은극도로 엄격한 훈육을 감내해야 했다. 일거수일투족 감시를 받는 몸과프릴이 가득한 원피스와 단호히 규정된 규범 속에서 얼마나 갑갑한 기분이었을까? 캐나다 벽촌의 여자애였던 것이 결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내게는 사사건건 비판적인 수녀들도, 고압적인 상류계급 친척도없었다. 나는 바지 차림으로 사방팔방 뛰어다닐 수 있었다. 모기를 막는 데는 치마보다 바지가 유리했다. - P617

그러던 차에 우리에게 원전(原典)이라 할 책이 주어졌다. 그것은 지금껏 출간된 적 없었던 보부아르의 자전적 소설 갈라놓을 수 없는이다. 이 책은 그녀에게 아마도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경험을 담고 있다.
그 경험은 평생의 친구였던 자자(Zaza)와의 관계다. (소설에서 자자는 앙드레라는 소녀로 등장한다. 두 소녀의 우정은 자자가 비극적이고 이른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다층적이고 강렬하게 이어진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을 출간한 지 5년 후인 1954년에 이 책을 썼고, 이것을 사르트르에게 보여주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대부분의작품을 정치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사람이었고, 이 작품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유물론자이자 마르크주의자였다는 것을 생각할 때아이러니한 일이긴 하다. 어쨌거나 이 책은 두 젊은 여성이 처한 물리적·사회적 여건을 치열하게 묘사한 책이 아니던가. 당시 진지하게 여겨지던 생산수단은 공장 노동과 농업이 유일했다. 여성의 저평가된 무보수 노동은 거기 해당되지 않았다.  - P620

흠, 독자여, 사르트르 씨가 틀렸다. 적어도 이 독자의 시각에서는 그렇다. 인류의 완성이나 정의와 평등 같은 추상적 관념에 몰두하는 사람은 원래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든 소설은 개인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연인이 쓴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자기가 연인의 삶에 등장하기 전의 일을다루고, 자기가 아닌 남이 중요하고 재능 있고 사랑받는 인물로 등장하고, 더욱이 그 인물이 여성인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산계급 소녀들의 내적 삶? 너무 사소해. 이런 소소한 감정 유희는 여기까지만해, 시몬, 너의 그 명석한 두뇌를 보다 진지한 문제들에 쓰는 게 어때? - P621

그런데 사르트르 씨, 21세기에서 답변드리자면, 이것이야말로 진지한 문제거든요. 만약 자자가 없었다면, 자자와 보부아르의 열정적이고 헌신적인 관계가 없었다면, 보부아르의 지적 야망에 대한 자자의응원과 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는 보부아르의 욕망이 없었다면, 가족과 사회가 자자에게 그녀가 여성이란 이유로 가했던 치명적인 기대-보부아르가 보기에는 자자의 총명과 기운, 기지와 의지에도 불구하고 자자의 생명력을 그야말로 고갈시켜버린 기대에 대한 보부아르의 견해가 없었다면, 『제2의 성』이 있을 수 있었을까? 또한 이 중추적인 책이 없었다면, 이후에 일어난 일이 과연 일어난 만큼 일어날 수있었을까? - P621

더욱이 지금의 세계에도 얼마나 많은 버전의 자자들이 살고 있는가? 아직도 얼마나 많은 명석하고, 재능 있고, 유능한 여성들이 일부는국법에 의해, 다른 일부는 나름대로 젠더 평등을 이뤘다는 나라에 살면서도 내부의 빈곤과 차별로 인해 억압받고 있는가? 물론 갈라놓을수 없는 모든 소설이 그렇듯 특정한 시간적·공간적 배경을 가진다.
하지만 동시에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초월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책을 읽고 울기를 바란다. 작가 자신도 처음에는 눈물을 흘린다. 그렇다. 이 이야기는 눈물로 시작한다. 살벌한 외관과 달리 보부아르는 자자의 죽음을 두고 평생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우리가 아는 보부아르가 되기 위해 그토록 열심히 노력한 것은어쩌면 일종의 추모였는지도 모른다. 보부아르는 전력을 다해 세상에자신을 개진해야 했다. 자자가 하지 못했던 몫까지 최대한. - P622

1921년의 에세이 나는 두렵다(I Am Afraid)」에서 자마틴은 이렇게말했다. "진정한 문학이란, 문학이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아니라 광인·은둔자·이단자·몽상가·저항자 · 회의론자에 의해 창작될 때에만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낭만주의 운동의 산물이었다. 그건혁명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레닌-스탈린주의의 바람이 어느방향으로 부는지 확인한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이미 검열에착수했다. 그들은 바람직한 주제와 작품에 대한 포고령을 내리고, 변칙과 비정통의 잡초를 뽑느라 바빴다. 전체주의체제에서는 이 일에도늘 위험이 따른다. 독재자의 눈짓 한 번에 잡초와 꽃이 뒤바뀔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우리들을 얼마간 유토피아로 볼 수도 있다. 작중 ‘단일제국‘은 보편적 행복을 목표하면서, 사람은 행복과 자유를 동시에 누릴 수 없기때문에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러면서 19세기에떠들썩하게 논쟁의 대상이 됐으며 지금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거리인
‘민권‘은 얼토당토않은 것으로 무시한다. 즉 ‘단일제국‘이 모든 것을 잘통제하고 있고, 모두의 최대 행복을 위해 움직이는데 민권이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 P625

모든 것은 일명 율법에 따라 이루어진다. 섹스 기회는 모두에게 할당되지만 자녀를 낳는 것은 특정 신체 조건을 충족하는 여성들에게만허용된다. 당시는 우생학이 ‘진보‘로 간주되던 시기였다.
잭 런던(Jack London)의 1908년 소설 『강철군화와 오웰의 『1984럼, 『우리들』에서도 반체제 인사들은 여성이다. 남자 주인공 D-503은처음에는 ‘단일제국‘의 헌신적 일원으로 등장한다. 그는 ‘단일제국‘이완벽한 행복의 비법을 미지의 세계와 공유하겠다는 구실로 건설하는우주선에서 기술자로 일한다. 디스토피아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일기를 쓰는 경향이 있는데, D-503이 쓰는 일기는 우주에 전하기 위한 단일제국 찬가다. 하지만 얼마 안 가 플롯이 빡빡해지며 D-503의 글도걸쭉해진다. 그는 끔찍한 순간들에 에드거 앨런 포에 빙의한 걸까? 아니면 독일 고딕 낭만주의에? 아니면 보들레르에? 가능성 있다. 빙의한것은 D-503 인가, 아니면 저자인가? - P627

『우리들』이 쓰인 시기는 역사의 특정한 순간, 즉 공산주의가 약속했던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퇴색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당시는 모두의 행복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이교도들이 사상범이 되고, 독재 반대자가 혁명 반동분자로 몰리고, 여론 조작용 공개재판이확산되고, 숙청이 일상이 되기 전이었다. 자마틴은 어떻게 미래를 이리도 분명히 내다봤을까?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미래가 아니었다. 그는현재를 보았다. 그리고 현재의 그림자 속에 이미 도사리고 있던 것을보았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가 말했다. "사람의 행로는 특정한 결말을 예고한다. 그 행로에 계속 붙어 가면 그 결말에 이르고 말지만, 행로에서 벗어나면 결말도 바뀐다." 우리들』은 당시의 장소와 시대에 던지는 경고였다. 하지만 이 경고는 들리지 못했기에 주의를 끌지도 못했다. "착실하고 듬직한 공무원들이 자마틴에 대한 검열에 착수했기때문이다. 사람들은 행로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그 결과 수백만 명이죽었다.
『우리들』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경고일 수도 있을까? 만약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경고인가? 우리는 듣고 있는가? - P630

벨 판 주일렌은 프랑스 귀족은 프랑스혁명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스위스에서 만난 귀족 망명자들은적어도 한 가지는 배웠습니다. 만약 귀족의 목이 날아가는 시국이고,
만약 당신이 귀족이라면, 도망쳐라! 최대한 빨리! 설사 내세울 만한 공적이 있다 해도 당신의 선의나 선행이 당신을 구해주지 못할 테니까.
그런 때에 내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내 개인적 정체나 내가 했다고 믿는 선행이 아닙니다. 남들이, 연출과단두대 밧줄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내 운명을 좌우합니다. 더구나 이때는 "선고 먼저, 판결 나중입니다. 『이상한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피에 굶주린 독재자 하트 여왕이 한 말입니다. 종류를 불문하고 도덕적 공황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고발당하면 바로 유죄이고, 유죄면 바로 처형입니다. 사실관계는 더 이상 중요하지않고, 설사 존속한다 해도 사법절차는 요식행위로 전락합니다. 이는역사를 통해 수없이 반복돼온 패턴입니다. 진짜든 상상이든 위기의 시기에는 누군가는 범인이 되어 색출당하고 제거당해야 합니다. - P634

미래의 어느 시점에 우리 시대가 학술 심포지엄의 주제가 될 수도있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최악의 결과는 아니겠네요. 어쨌든 미래에도여전히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여전히 역사 재해석에 기울일 관심이남아 있으며, 표현의 자유와 지적 활동의 자유가 어떤 형태로든 여전히 존재한다는 뜻이니까요. 이는 하찮은 희망이 아닙니다. 우리가 로봇이나 지구 과열이나 치사율 100퍼센트의 통제불능 바이러스로 인해 멸망당하지 않을 거란 희망은 결코 작은 희망이 아니에요.
저는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한 불쾌한 미래에 대한 책들을 씁니다.
우리가 그런 미래를 현실에 허용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주어진 상황에서 우리는, 또는 우리 중 일부는, 그런대로 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격하는 권위주의 정치의 물결이 물러가고, 우리의 공동 상황이 더 이상 악화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공포와 희망이 공존합니다. 두 가지는 분리돼 있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살고 싶은가? 아마 이것이 우리가 자문해야 할 진짜질문일 겁니다. 네, 늑대의 배 속은 어둡습니다. 하지만 늑대 밖은 밝습니다. 그럼, 어떻게 나갈 수 있을까요? - P644

그레임은 삶의 마지막까지 새를 보는 즐거움을 놓지 않았다. 생애마지막 해까지도, 비록 혈관성 치매가 진행되어 더는 읽지도 쓰지도못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새들의 활기찬 삶을 지켜보았다. 우리 뒤뜰의 모이통과 물통에 날아드는 새라고는 참새와 울새, 찌르레기뿐이었고 간간이 비둘기가 찾아올 따름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모든새가 주목받을 가치가 있었다. "이제는 저 새들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어느 날 그가 우리의 친구에게 말했다. "하지만 뭐, 새들도 내 이름을모르니까." - P648

필사에 대한 지식으로부터 보호하는 방책이 된다. 과거에서는 주위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든 적어도 우리 자신은 늘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반면 현재에 산다는 것은 불가피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살지 않고 삶을 온전히 산다고 할 수 있을까? 죽음이라는 신사는 우리 모두를 기다린다.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그는 우리의 비밀공유자이자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친구다. 우리가영원히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드디어보는구나, 말로만 듣던 저 유명한 것을." 헨리 제임스가 임종 시에 한말이라고 한다. 그레임도 익히 알던 인용구다. 물론 로버트 프레이저가 완전히 그레임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레임을 처음 만났을 때 그에게 말했던 것처럼, 그의 창의적 삶과 그의 실제 삶은 하나였다. - P657

시가 해야 할 일(신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이의 매력을 찬미하고, 전쟁 영웅을 기리고, 공작과 공작 부인을 칭송하고, 파워엘리트를 비방하고, 자연과 동식물을 묵상하고, 민중의 봉기를 촉구하고, 대약진운동을 선전하고, 전남편 및/또는가부장제를 욕하는 일)에 대한 믿음은 매우 다양하다. 임무 수행을 위해시가 취할 방식(한껏 고무된 언어, 기악을 곁들인 노래, 운을 맞춘 2행연구시,
자유시, 소네트 워드호드에서 뽑아낸 비유, 적절히 선택된 방언, 속어와 욕설, 시경연 대회의 즉흥시 등)도 못지않게 다양하며, 유행에도 좌우된다.
시가 목표하는 청중도 여러 부류다. 같은 여신을 섬기는 사제들부터 - P662

당대의 왕과 궁정, 지식노동자들의 자기비판 그룹, 동료 음유시인들,
상류사회, 비트족, 문예창작 입문교실, 온라인 팬, 또는 에밀리 디킨슨이 말한 동료 무명인(無名人)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때로 시인은 때와 장소에서 격하게 벗어난 말 때문에 추방되고 총에 맞고 검열당한다. 특히 독재 체제에서 찌푸린 얼굴의 시인이 편히 쉴 자리란 없다.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말을 하면 곤욕을 치를수 있다.
모든 시가 다 그렇다. 시는 때와 장소에 내장돼 있다. 시는 그 뿌리와절연할 수 없다. 다만 운이 좋으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훗날의 독자들이 그 시를 읽을 수는 있어도 그 시가 애초에의도된 대로 읽히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위대하고 무시무시한 여신 이난나에게 바치는 찬가는 적어도 내게는 여전히 매혹적이다. 하지만 고대 청중에게 일으켰을 골수가 녹아내리는 경외심을지금은 일으키지 못한다. 나도 이난나 여신이 느닷없이 현신해 산을납작하게 밀어버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내 생각은 언제든지 빗나갈 수 있다. - P663

낭만파가 불후의 명성과 저작에 대해 부단히 부르짖었지만, 사실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영원한 것은 없다. 명성과 작품은 흥망을 거듭하고, 책은 배척당하고, 불타고, 나중에 출토되고, 재활용된다. 오늘날의불멸의 시가 내일모레는 불쏘시개로 전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내일모레의 불쏘시개가 불길에서 구출돼 격찬을 받고 주추에 새겨질 수도있다. 타로카드 중 ‘운명의 수레바퀴‘가 바퀴인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세상사는 돌고 돈다. 적어도 때로는 그렇다. 운명 카드는 ‘운명의 필연적 직선 도로‘라고 불리지 않는다. 그런 건 없다. - P663

사전 경고는 이쯤 하고, 이제 영화 <일포스티노(Il Postino)>에서 우편배달부가 한 말을 인용하려 한다. 영화 속 우편배달부는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시인 네루다의 시들을 훔친다. "시는 쓰는 사람의 것이 아니다." 그는 말한다. "시는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것이다."시가 작자의 손을 떠난 후에는, 그리고 작자가 시공을 떠나 원자로떠다니게 되면, 과연 그 시는 누구에게 속할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는가? 그대를 위해서다. 친애하는 독자여.
이 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역시 그대를 위한 것이다. - P664

살다 보면 내가 그때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는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은 사람마다 다르다. 내 경우 그런 순간들 중 일부는 역사적 비극이 일어나던 순간이다. 케네디가 암살됐을 때 나는 토론토 시내의 어느 시장조사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고,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는 토론토 공항에서 뉴욕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다른 일부는 날씨와 상관있다. 허리케인을 목격했을 때, 빙설 폭풍에 잡혔을 때 등. 또 다른 일부는 음악과 관계있다. 라디오로 처음 <메어지도츠>를 들었을 때 나는 네 살이었고, 수세인트마리에 있었고, 안락의자에 앉아 곰 인형을 인형 옷에 서툴게 꿰매고 있었다.  - P670

내가 자연주의 작가 배리 로페즈(Barry Lopez)를 처음 만난 것은 수십 년전 알래스카 여행에서였다. 사람들이 말했다. "여자가 남자이고, 남자가 동물인 땅, 알래스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농담이었지만 뼈 있는 농담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다소 익숙한 뼈였다. 나는 북부에서 자랐고, 알래스카는 북부다. 강인한 여자들이 있는 곳.
하지만 동물이 될 거라면 어떤 동물인지가 중요하다. 족제비가 되는것과 늑대가 되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이 늑대를 고른다면 그건 배리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무리에 충실하고, 똑똑하고, 지략 있고, 생존지향적이고, 잘생기기까지 한 동물. 좋아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 늑대들이 헬리콥터를 탄 수렵꾼들에게 살육당하고 있다. 족제비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 P675

배리와의 만남은 자연 세계와 우리를 불가분하게 이어주던 언어, 그러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언어가 아직 사용되는영역으로 들어서는 기분을 안겨주었다. 그곳에 그 언어를 재개하는 화자가 있었다. 배리는 황야의 예언자였다. 하지만 배리는 그곳을 황야로 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 고독한 화자라고 해두자. 그는 수없이궁금했을 테니까. 진정으로 듣고 있는 사람이 있긴 있을까? 그는 이제지극히 중요한 화자가 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그의 동시대인들 대다수가 그가 전하는 메시지의 긴급성을 대체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 멸종저항(Extinction Rebellion, XR) 같은 세계적 운동에 참여하는 젊은 활동가들은 그 메시지를 절감한다. 우리가 들이마시는 숨은 자연에서 온다. 자연을 죽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대양은 지구의 허파다. 특히 북방 대양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구를 골디락스 행성으로 유지해온 거대 시스템의 열쇠다. - P676

기후변화로 북극이 녹아내리고 있다. 인간이 야기하는 대멸종, 이른바 여섯 번째 대멸종이 임박했다. 이런 때 배리의 저작이 가지는 의미는 자명하다. 우리는 우리를 지탱하는 기반과의 연을 놓치고 파멸의위기를 야기했다. 그 위기는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다.
배리 로페즈가 우리가 사랑했지만 잃어버린 것들을 미리 노래한 것이아니기를 희망하자. 사랑하는 푸른 지구, 사랑하는 야생이 돌이킬 수 - P676

없게 상실되면 우리도 상실된다. 배리의 작품을 읽는 것, 또는 다시 읽는 것은 그 상실이 얼마나 엄청나고 얼마나 끝없이 어리석은 것이 될지 스스로 상기하는 일이다.
고마워요, 배리 - P677

바다는 우리 행성의 살아 있는 심장이자 허파다. 바다는 대기 중 산소의 대부분을 생산하고, 해류 순환을 통해 기후를 통제한다. 건강한 해양이 없다면 우리처럼 육지에 살면서 공기로 호흡하는 중형 영장류는죽을 수밖에 없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의 최초 저작 세 권, 『바닷바람을 맞으며』『우리를 둘러싼 바다』 『바다의 가장자리가 재출간됐다. 이는 위의 사실에 대한 대중의 각성과 인식 확산을 시사한다. 레이철 카슨이 이 책들을 집필하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와 1950년대는 지금은 우리 세계의 현실이 된 많은 일들이 아직 일어나기 전이었다. 경고 신호는 있었지만 아직 희미하게 깜박일 때였다. 그때는 우리가 여섯 번째대멸종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이 별로 없었다. 기후위기의 초기 징후들이 있었지만 대중의 의식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 P678

대규모 산업형 어업은 막 시작 단계였다. 뉴펀들랜드 그랜드뱅크스 해역의 대구 어장이 남획으로 황폐해지기 전이었고, 다른 어종들도 무분별한 혼획으로 개체가 급감하기 전이었다. 저인망어선들이 대륙붕 생물계의 회생력을 파괴하기 전이었고, 산호초에 심각한 백화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었다. 아직은 비닐 끈이 만든 ‘유령 그물들‘이 해양을 떠다니며 물고기와 돌고래와 고래들을 얽어매 죽이고 있지 않았다. 해양보호구역을 설정한 국가도 없었다. 그런 게 왜 필요한지도 모르던 때였다. 바다는 원래 끝없이 샘솟는 밑천이잖아? 인류가 마음껏 퍼가도마르지 않는 화수분 아닌가? 해양생태계에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신경을 왜 써?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바다는 언제나 자신을 알아서 챙겼다. 바다는 약해지기에는 너무 거대했다.  - P679

레이철 카슨은 20세기를 변화시킨 인물중 하나다. 카슨이 없었다면, 지구가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명체의 생존이 가능한 곳으로 남을수 있는지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지금처럼 높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위정자들이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통찰에 따랐다면 현재 환경오염과 기후 위기, 그에 따른 기근, 화재, 홍수, 자원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을 것이다.
카슨이 ‘20세기를 변화시켰다‘고 말한 것은 카슨의 1962년 역작 『침묵의 봄』을 계기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카슨은자신의 입장을 고수했고, 자신의 증거 기반 결론을 견지했다. 현재 우리는 과학을 부정하고 사실 직시를 거부하는 신기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살충제와 제초제가 온난화와 생물권 파괴에 미치는 영향만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백신 접종과 선거 개표처럼 우리 생활에보다 밀접한 것들조차 부정하려 든다. 이런 상황이니 카슨의 발견에대한 적대적인 모르쇠 반응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 P680

『침묵의 봄』은 카슨의 네 번째 책이었다. 첫번째 책 『바닷바람을 맞으며』는 1941년에 출판됐다.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고 미국이 직접 참전하기 직전이었다. 당시의 정치상황 외에 다른 주제의 책을 내기에좋은 해는 아니었다. 이 책은 『시튼동물기』의 어니스트 톰프슨 시튼과「수달타카의 일생』과 『연어 살라의 이야기 (Salar the Salmon)』의 헨리 월리엄슨(Henry Williamson)이 개척한 동물 중심 자연주의 저술의 계보를잇는 서정적이고 매력적인 책이다. 지금 같았으면 아동문학이나 청소년문학으로 분류됐겠지만, 카슨이 애초에 의도한 독자층은 이보다 훨씬 넓었다. - P680

카슨의 두 번째 책인 우리를 둘러싼 바다는 전후 시대 긴축정책이드디어 끝난 1951년에 나왔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번 책은 허구화한 설명이 아니라 사실을 담은 설명이었다. 역사와 선사, 지질학과 생물학을 결합한 해양에 바치는 현세적이자 기념적인 찬가였다. 많 - P681

은 이들이 저자를 따라 파도 아래로, 짙푸른 바닷속으로 들어가기를열망했다. 쥘 베른의 고전 사이언스 픽션 『해저2만리』의 네모 선장을기억하는가? 지금은 몰라도 1951년에는 많은 독자들이 네모 선장을기억했다. 바닷속은 모험과 불가사의의 영역이었다. 그토록 박식하고열정적인 가이드와 함께 떠나는 여행은 얼마나 짜릿했던가! 인어는 없었지만 반면에 경이로움은 훨씬 컸다. 이 책은 레이철 카슨을 국제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렸다. - P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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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이 1949년에 출판되고 1953년에 번역됐지만, 제2세대 페미니즘은 아직 어디에도 보이지 않던 때였다. 적어도 나 같은 고등학생들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보부아르의 책은1963년 베티 프리던 여성성의 신화가 나오기 전까지 우리 세대에게 흡인력을 갖지 못했다. 더구나 우리는 이 책들을 우리 자신이 아니라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의 이야기로 느꼈다.)우리 또래의 남자애들도 고통받는 재향군인 세대가 아니었다. 군복을 벗고 회색 양복의 월급쟁이가 된 윗세대 남자들은 전쟁의 아드레날린이 끊어진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미 그들은 역시 참전 용사였던 휴헤프너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교외의 집과 아내를 떠나 플레이보이 버니랜드로 유입되고 있었다. - P418

한편 더 넓은 세상에서는 원자폭탄에 의한 절멸의 공포가 우리 머리위를 음산하게 맴돌았고, 매카시즘이 사회복지나 노동자 권리를 입에올리는 것을 반역적 공산주의 선동으로 만들었다. 헝가리혁명이 소련의 탱크에 의해 진압되는 것을 보며 우리 모두 공산주의가 얼마나 흉포한 것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1930~1940년대에 대유행했던 구호들은 이때쯤 싹 들어갔다. ‘노동계급이나 심지어 ‘세계 평화‘를 언급만해도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었다. B급 영화의 세계에서는 화성인이지구를 침공하고 우리 뇌를 장악해서 동료 시민에게 해코지하게 하는내용이 인기였다. 바깥은 이처럼 공산주의자가 들끓고, 내부라고 다르지 않다는 암시였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 P419

루아의 인기 중 일부는 신데렐라 스토리 같은 그녀의 인생 때문이었다. 루아는 무일푼에서 거부로 일어섰다. 하지만 루아에겐 요정 대모가 없었다. 그녀는 고초를 딛고 성공했고, 캐나다인들은 그 점에 공감했다. 그들도 고초를 겪으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문학적으로도고초가 유행이었다. 포효하는 1920년대는 우리에게 위대한 개츠비』같은 부와 방탕의 이야기들을 주었지만, 더러운 1930년대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처럼 비참한 빈곤을 생생히 담은 책들을 낳았다. 로맨스 소설을 제외하면 소설에서 부자들이 종적을 감추고 대신 ‘민중‘
이 들어섰다. 가브리엘 루아는 작품뿐 아니라 인생마저 시대와 맞아떨어졌다. - P423

그래서 루아는 박물관 구경과 연극 관람과 시골 여행 등 젊은 관광객이 으레 하는 일들을 하는 틈틈이 차선책에 매달렸다. 그것은 저작활동이었다. 인생을 모방하는 재능은 무대에 설 때만큼이나 소설을 쓸때도 유용하다. 거기다 그녀에겐 이미 글을 출판해본 경험이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한 유력 잡지에 세 편의 글을 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역설적이게도 루아가 자신의 천직이 작가라는 것을 깨닫고 성공 가능성을 확신한 곳은 영국이었다.
1939년이 됐다. 많은 사람들의 예견대로 제2차 세계대전이 임박했다. 루아는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번에는 파리가 아니라지방을 여행했다. 그리고 그해 4월 대서양을 건너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더욱 거세진 가족의 압박에도 불구하고-실컷 놀았으니 이제는연로한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지 않겠어? -그녀는 생보니파스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몬트리올에 정착해 길고 고된 무명작가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생은 5년 뒤 ‘싸구려 행복의 대성공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 P427

싸구려 행복』을 통해 루아가 이룬 업적 중 하나는 진부한 경건함을배격한 것이다. 루아는 정직하고 심성 고운 농부에 대한 환상이 없다.
로즈안나의 모친은 시골 사람이지만 인정머리 없고 남을 헐뜯지 못해안달인 괴물이다. 그저 음식에만 후할 뿐이다. 도덕적인 빈민도 루아의 타입이 아니다. 빈민은 미덕을 가지기에는 너무 쪼들린다. (로즈안나가 기도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소설이었다면, 또는 더 옛날 소설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로즈안나에게 성인의 환영이 임했겠지만, 대신 그녀는 묵직한 달러 뭉치의환영을 본다.) 로즈안나의 끈덕진 인내만큼은 정말 놀랍지만, 사실 그녀도 처량한 골칫거리다. - P438

이 소설에서 도덕적으로 고결하다고 할 만한 유일한 인물은 중산층이면서도 겸손한 에마뉘엘이다. 하지만 그도 자신만의 이상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특히 플로랑틴을 이상화한다. 에마뉘엘은 일종의 부자의빈민가 탐방에 나섰다가 플로랑틴을 알게 됐다. 다시 말해 이 불쌍한얼간이는 사회적 양심에 고통받았고, 그 때문에 생탕리의 막다른 인생들과 어울리게 됐고, 결과적으로 신분에 처지는 결혼을 한다. 당연히그의 가족은 이 결혼을 기뻐하지 않는다.
루아는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기존의 통념을 거부하는 동시에 그들이 사회로부터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함을 시사했다. 이 점이 소설의 성공 요인 중 하나였다. 또한 출판 시점도 시의적절했다. 전쟁이 끝나가고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보다 공정한 부의 분배를논할 준비가 돼 있었다. - P438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일까? 시대마다 요구하는 것이 다르고, 작가마다 염두에 두는 바가 다르다. 루아가 싸구려 행복에서 보여준 작가의 역할은 현재에게 내리는 미래의 수태고지였다. 루아가 절망의 바닥에 떨어진 로즈안나 앞에 나타나 "앞으로는 형편이 필 것이다"라고 말하는 상상을 해보라. 기분이 좋아진다.
1847루아의 다른 책들에도 제각기 미션이 있다. 루아는 커튼을 열어 사람들에게 있는 줄도 몰랐던 창문들을 보여준다. 매니토바의 외딴 오지,
평범한 남자의 평범한 삶, 자기 고향 땅의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치열했던 거리들, 예술가의 다양한 여정 등. 그리고 그녀는 독자에게 창밖을 내다볼 것을 요청한다. 그 풍경의 빈약함, 가혹함, 생경함을 있는그대로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할 것을 요청한다. 가브리엘 천사는 모든소통의 천사들 위에 있고, 소통은 루아가중히 여겼던 소양이었다. - P449

캐나다가 2004년에 발행한 20달러 지폐의 뒷면에는 가브리엘 루아의말이 프랑스어와 영어로 쓰여 있다. "예술이 없다면 우리가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까?"
아니, 알 수 없다. 정치적으로 갈가리 분열된 우리 사회를 생각하면더욱 그렇다. 데이터 수집과 과학의 분화와 특화가 한계에 달하면서그 반동으로 마침내 우리가 인간에 대한 보다 전일적 관점으로 돌아서고 있는 지금, 루아의 비전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에게 유의미하다. - P449

이런 작가를 어떤 말로 요약할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하다. 이 정도의 다작과 다양성과 창의성과 강도는 퀘벡 문학에서, 아니 캐나다 문학에서, 아니 사실상 어느 문학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렵다. 마리클레르 블레는 고유하다. 어느 계파에도 속하지 않고, 예술을 제외한 어떤종교에도 가입돼 있지 않다. 그녀는 다만 부단한 탐험가다. "바람이 제멋대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나니, 성령에서 난 이가 모두 그러하니라(요한복음3장 8절)." 마리클레르 블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자신의 영을 따랐고, 그녀의 작품이 그 결과였다. 블레 없는 우리 문학을 상상하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다. - P476

이 일은 현재 우리 대부분이 당연시하는 하지만 오래지 않은 과거에 여성과 소녀들이 어렵게 쟁취해낸 권리가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일깨웁니다. 이 권리는 문화적으로 매우 얕게 심겨 있습니다. 이 권리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고, 해당 문화권의모두가 열렬히 신봉하지도 않습니다. 다가오는 미국 대선의 남성 후보만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듯합니다. 그는 남성과 소년들에게 꽤나 흥미로운 롤모델로 작용합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성폭행 통계도 우리 시대를 잘 말해줍니다. 현재 #NotOkay 해시태그 아래 분노의 봇물을 이루는 여성들과 소녀들의 트윗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분들이 물어보거나 궁금해합니다. "당신도 그런 경험이 있나요?" 저도 지칠 때까지 대답합니다. 물론이죠. 상상하기 힘드시겠지만저도 한때는 10대 소녀였고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도 한때는 기차역 같은 곳에 많이 출몰하는 더듬이들과 노출 아티스트들의잠재적 표적이었습니다.  - P482

예술이 무슨 소용인가? 돈이 주요 가치척도인 사회가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래서 예술과 예술가들을 싫어하는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은 예술가 본인들이 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미국의 작가를 비롯한 예술가들은 확연히 싸늘해진 공기를 느낀다.
독재자는 무릇 억압하는 만큼이나 아부와 공물을 요구한다. ‘든지 닥치든지‘가 그들의 통치 원칙이다. 냉전 기간 중 수많은 작가, 영화제작자,
극작가들이 ‘반(反) 미국적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FBI의 방문을 받았다.
이제 그때의 역사가 되풀이될 것인가? 자기 검열이 시작될까? 미국에지하 출판의 시대가 열릴까? 출판에 따를 보복을 피해 원고가 비밀리에유통되는 시대로 극단적으로 들리지만, 미국의 과거 전적과 오늘날 권위주의 정권들의 세계적 발호를 생각할 때 전혀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 P494

당연히 항의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고, 예술가와 작가들은 거기 동참하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대의에 목소리를 보태는 것, 이것이 그대들의 도덕적 의무가 아닌가? (유독 예술가들이 도덕적 의무에 대한 훈계를듣는다. 다른 직업인들, 가령 치과 의사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운명이다.) 하지만 창작자에게 무엇을 창조할지 지시하거나 남들이 세운 고매한 취지에 봉사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런 권고사항에순응하는 창작자들은 한낱 선전물이나 이차원적 비유만을 만들어낼공산이 크고, 그것은 뭐가 됐든 예술이 아니라 지루한 설교일 뿐이다.
무릇 범작들의 화랑은 선의로 도배된 곳이다. - P498

단기적으로 봤을 때, 아마도 우리가 예술가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우리가 그들에게 늘 기대해왔던 것뿐이다. 한때 굳건했던것들이 무너져 내려도 그들은 그들만의 예술 정원을 가꾸는 것.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하는 것. 그리하여 일시적 도피와 통찰의 순간을 동시에 제공하는 대안적 세계를 창조하는일, 우리가 처한 세계의 바깥을 내다볼 수 있도록 창문을 내주는 일,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트럼프 시대가 왔다. 위기나 공포의 시기에 우리 각자가 투표수나통계치 이상의 존재임을 일깨우는 것은 예술가와 작가들이다. 삶은 정치에 의해 어그러질 수 있고, 또 많은 삶들이 실제로 그렇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시대 정치인들의 총합이 아니다. 역사를 통틀어 예술에 거는 기대는 주어진 시간과 장소에서 최대한 강력하고 웅변적으로인간됨의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 P501

내가 ‘나쁜 페미니스트‘라고 한다. 1972년 이래 내게 붙은 죄목 명단에하나가 더 추가됐다. 참수된 남자들의 머리로 쌓은 피라미드를 올라가서 유명해진 여자(좌익 성향 잡지). 남성 예속에 환장한 도미니트릭스 (우익 성향 잡지, 내가 가죽 부츠를 신고 채찍을 휘두르는 그림까지 실었다). 토론토의 저녁 식사 자리에서 본인에게 비판적인 사람이면 그게 누구든 백색 마녀 마법으로 소멸시킬 수 있는 고약한 인간. 내가 이렇게 무서운사람이다! 그리고 이제 나는 급기야 여성들과도 전쟁을 벌이는 모양이다. 나는 졸지에 강간을 옹호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됐다.
고발자들의 눈에 착한 페미니스트란 어떤 페미니스트일까? - P513

나의 근본적인 입장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도 범죄행위를 비롯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동, 즉 성자 같은 행동부터악마적 행동까지 온갖 행동을 다 할 수 있다. 여성은 범법 행위가 불가능한 천사가 아니다. 만약 여성이 천사라면 여성은 범죄 혐의로 재판정에 설 필요가 없다. 여성은 언제나 옳으니까.
이미또한 나는 여성을 자기 주도나 도덕적 결정 능력이 없는 아이로 보지도 않는다. 만약 여성이 아이라면 우리는 19세기로 후퇴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재산을 소유해서도, 신용카드를 가져서도, 고등교육을 받아서도, 출산 주도권을 가져서도, 투표를 해서도 안 된다. 북미에는 실제로 이 상태로의 회귀를 추진하는 유력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아무도 그런 단체들을 페미니스트로 보지 않는다. - P514

무엇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여성의 시민권과 인권이 존재하려면 우선 (법적 절차에 입각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포함한) 시민권과 인권부터 있어야 한다. 여성의 투표권이 있으려면 우선 투표권이 있어야 하듯이말이다. 오직 여성만 그런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믿어야 착한 페미니스트일까?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남성만 그런 권리를 가졌던 과거 상황의 동전 뒤집기에 불과하다.
나를 고발한 착한 페미니스트도,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도 위의전제에는 동의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우리가 서로 갈라지는 지점은어디일까? 그리고 나는 어쩌다 이 지경으로 착한 페미니스트들과 척을 지게 됐을까?
나는 지금껏 도의상 많은 청원서에 서명해왔다. 2016년 11월에도UBC 어카운더블(UBC Accountable)‘이라는 공개 항의서에 서명했다. - P514

사례의 목록은 길고 좌우익 모두에서 일어났다. ‘덕과 공포‘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저격당한다.
이때 반역자가 없었다거나 모든 목표 집단이 억울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런 시대에는 증거 우선 원칙이 무시된다는 뜻이다.
이런 일들은 늘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한다는 명목으로 행해진다. 때로는 일시적이나마 정말로 더 나은 세상을 실현하기도 한다. 하지만때로는 이런 일들이 새로운 새로운 탄압 형태들의 구실로 쓰인다. 역설적이게도 자경단 정의 - 재판 없는 선고는 정의의 부재에 대한 항거로 시작된다. 혁명 전 프랑스처럼 사법 시스템이 부패했거나 미국서부 시대처럼 무법천지일 때 사람들은 자력 해결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처음에는 양해 가능한 임시 자구책이었던 자경단 정의가 문화적으로 굳어져 집단 린치 관행으로 변질된다. - P517

이런 문화에서는 버젓이있는 사법제도가 팽개쳐지고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권력 구조가 가동되고 유지된다. 예컨대 코사 노스트라도 원래는 폭정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됐다.
지금의 미투 현상은 망가진 사법제도의 징후이다. 여성들, 특히 성적 학대의 고발인들은 기업 조직을 포함한 제도권에서 공평한 발언권을 얻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래서 그들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도구를 들었다. 그 결과 별들이 하늘에서 우수수 떨어졌다. - P517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해 사법제도를 무시한다면 무엇이 그 자리를차지하게 될까? 누가 새로운 실세가 될 것인가? 확실한 건 그게 나 같은 나쁜 페미니스트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는 우파에게도 좌파에게도 환영받지 못한다. 양극화 시대에는 극단주의자들이 승리한다.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종교가 되고, 그들의 견해를 추종하지 않는 사람은변절자 · 이단 · 반역자로 몰린다. 온건 중도파는 전멸한다. 소설가들이우선적으로 용의선상에 오른다. 그들은 인간에 대해 쓰는 사람들인데,
인간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의 목적은애매성을 쓸어내는 것이다. - P518

이 사건을 둘러싸고 작가들이 분열해서 서로 맞서고 있다. 공격자들이 항의서를 여성에 대한 선전포고로 왜곡시켜 비방한 영향이 컸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우리 모두ㅡ착한 페미니스트들과 나 같은 나쁜페미니스트들 모두가 비생산적인 논쟁을 멈추고 힘을 합쳐서 스포트라이트를 애초에 향했어야 했을 곳으로 돌리기를 촉구한다. 그곳은 다름 아닌 UBC다. 심지어 보조 고소인 중에서도 두 명이 UBC의 조치를비난하는 입장을 냈다. 그들의 용기는 감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최근 윌프레드로리에대학교의 경우처럼 UBC도 지난 조치에 대해중립 기관의 조사를 받고, 조사 과정과 결과를 공개할 것을 약속해주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UBC 어카운터블‘ 사이트는 목적한 바를 달성하게 된다. 그 목적은 결코 여성을 억압하는 데 있지 않았다. 책임의식과 투명성을 요구하는 일이 어쩌다가 여성의 권리에 반(反)하는 일이라는 누명을 쓰게 됐단 말인가. - P519

학대받는 이들로 유지되는 부유한 도시,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떠나는 사람들(The Ones Who Walk Away from Omelas)」의 오멜라스는 그런 곳이다. 따라서 내 질문은 이런 뜻이었다. 다수의 행복이 일부의 고통에 의존하지 않는 사회를 세상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고통받는아이 없이 어떻게 오멜라스를 건설할 수 있을까요?
어슐러 K. 르 귄도 나도 답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르 귄이 평생답하고자 노력했던 질문이었고, 그 노력의 과정에서 그녀는 많고 다양하고 매혹적인 세상들을 너무나 능란하게 창조했다. 무정부주의자로서 그녀는 젠더 평등과 인종 평등을 이룬 자치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인간뿐 아니라 비(非)인간 생명체도 존중받는 사회를 원했을 것이고,
출산은 강요하면서 정작 엄마들과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는 사회와 반대되는 아동 친화적인 사회를 원했을 것이다. 그녀의 글에서 나는 그렇게 짐작한다. - P521

학사 일정에 여학생들이 어느 정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전면적 접근은허용되지 않았다. 식당을 지나갈 수는 있었지만, 감히 식당에 얼굴을들이미는 여학생은 남학생들이 돌처럼 던지는 빵에 맞을 각오를 해야했다. 르 귄이 작가, 그것도 사이언스 픽션 작가가 되자 해당 보루를 사수하려던남자들은 배타적인 빵 던지기를 재개했다. 르 귄도 알아챘고, 즐겁지 않았다.)르 귄은 래드클리프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프랑스 문학과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했다. 그녀는 당시에 흔히 하던 말로 남자처럼 생각하도록 배웠다. 폭넓게 별나게, 엄중하게. 하지만 결혼과 함께 학계를 떠난 뒤 자신이 어떤 사회에 있는지 실감했다. 그곳은 법적 견지에서 여자들을 무책임한 열세 살짜리로 취급하는 사회였다. 자신이 성인임을 이미 깨우친 사람에게 이는 깡통 안에 화산을 봉하려는 것과 다름없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의 제2세대 페미니즘에 불을 지핀 것이 바로 이 세대의 미국 여성들이었다. 이때 그 깡통이 폭발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작가로서 르 귄의 에너지가 폭발하던 시기였다. - P522

하지만 정치적 생각과 활동은 이 놀랍도록 재능 넘치는 여성이 이룩한 다차원적 삶과 작품 가운데 단지 한 가지 차원일 뿐이었다. 예를 들어 어스시(Earthsea)‘ 3부작은 삶과 죽음의 관계에 대한 인상적인 탐구다. 어둠이 없으면 빛도 없다. 그리고 죽을 운명이야말로 모든 살아 있는 것에 실존을 허락한다. 어둠은 공포, 오만, 질투 등 우리 내면에 숨겨진 덜 유쾌한 면들을 아우른다. 주인공 게드는 자신의 그림자 자아에 맞서야 한다. 그림자에 먹히지 않기 위해서. 이 투쟁을 통해서만 그는 온전해질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용들의 지혜와 다툰다. 우리의지혜와 다르고 애매모호하지만 그럼에도 지혜인 건 분명하다. - P522

최근 나는 친구를 잃고 슬픔에 잠긴 어느 여성과 대화를 나누게 됐다. 나보다 훨씬 젊은 여성이었다. "어스시 3부작을 읽어요." 내가 권했다. "도움이 될 거예요." 그녀는 읽었고,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이제 어슐러 K. 르 귄이 죽었다.
부음을 듣고 이상한 환영을 보았다.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마법사게드가 한 아이의 영혼을 죽은 자의 땅에서 다시 불러오는 장면과 비슷한 환영이었다. 거기 불변의 별들 아래, 속삭이는 모래의 언덕을 고요히 내려가는 어슐러가 있었고, 멀어지는 그녀를 뒤쫓아 달려가며 울부짖는 내가 있었다. "안 돼! 돌아와요! 지금 이곳에 당신이 필요해요!"
특히 지금 이곳, 여성 비하‘가 일상화되고, 여권이 수많은 전선에서 -특히 보건과 피임 영역에서 후퇴하고, 기량과 지적 우월성으로겨루는 데 실패한 이들이 대신 제 음경을 무기 삼아 여성들을 일터에서 몰아내려는 땅에서 르 귄의 부재는 너무 뼈아프다. - P523

르 귄은 1970년대 초반에 이미 여성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목격했다. 때는 제2세대 페미니즘의 시대였다. 르 귄은 격분이 어디서 오는지 알고 있었다. 억압된 분노는 터질 수밖에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그런 분노가 여러 방향에서 불거졌다. 하지만 대개는 작업량과기여도가 컸거나 더 컸는데도 받는 대우는 훨씬 더 적었던 데서 오는분노였다. 당시의 유명 구호 중 하나가 "집안일도 일이다"였다. 여성들을 가장 분노하게 한 망언 중 하나는 놀랍게도 흑인민권운동계에서 나 - P523

왔다. "민권운동에서 여성의 유일한 위치는 누워 있는 것이다."
분노는 르 귄이 오래 씨름했던 숙제였다. 그녀는 2014년 「분노에 관하여 (About Anger)」라는 에세이에 이렇게 썼다. - P524

장기적 목표, 부단한 정의 추구. 르 귄은 여기에 생각과 시간을 많이들였다.
우리는 어슐러 K. 르 귄을 변치 않는 별들의 땅에서 도로 불러올 수없다. 하지만 다행히도 르 귄은 우리에게 다차원적 작품, 힘들여 얻은지혜, 본질적 낙천주의를 남기고 갔다. 그녀의 분별 있고, 명석하고, 교묘하고, 서정적인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더 요긴하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해야 한다. - P524

소설 역시 투영과 환상입니다. 작가로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환상을그럴싸하게 만드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소설 쓰기를 폄하하는말이 아닙니다. 진실이 투영과 환상을 통해 드러날 수 있고, 또 실제로자주 그렇게 드러나거든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이 시인들에게 명했다시피, 소설은 진실을 말하지만 비스듬히 말합니다. 디킨슨은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실은 점진적으로 빛을 발해야 한다." 한꺼번에 모든 것을 비추는 눈부신 만월이 아닌, 에둘러 보여주는 달빛. 이는소설 작가들을 위한 좋은 조언입니다.
저의 다음 타로카드 역시 달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번 카드의 명칭은 운명의 수레바퀴입니다. 저는 이를 소설의 중반을 대변할 카드로골랐습니다. - P537

소설가는 시간을 어떻게 구상할까요? 시간은 서사 안에서 어떻게배열될까요? 소설을 담는 책은 선형이지만, 다시 말해 페이지에 차례로 번호가 매겨지지만, 이선형 배치 안에서 시간이 처리되는 방식까지 항상 선형인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시간 요소가 원을 닮을 수 있습니다. 서사 끝에서 중심인물이 다시 시작과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되는 거죠. 초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한, 끝에 같은 나이로 돌아오진 않겠지만요. 또는 동시에 일어나는 이야기들이 평행하게 진행되다가 나중에 교차하는 구성도 있고, 시간이 역행하는 회상 장면이 빈번하게 일어나는 구성도 있습니다. - P538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의 진입점은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가 비참한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는 장면입니다. 그의 앞에 예전에죽은 동업자의 유령이 나타나고 이어서 세 개의 분리된 시간 보따리들-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잠재적 미래-이 펼쳐지는데, 각각은 독자에게 스크루지의 인생을 보여주고 동시에 스크루지에게는 그가 어떤인간인지 보여줍니다. 이후 시간이 멈추고 되돌아갑니다. 스크루지는크리스마스이브를 처음부터 다시 살게 되고, 이번에는 훨씬 즐겁게 보냅니다.
A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의 경우는 소설의 진입점이 줄거리의 시작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진입점에서 여주인공캐서린은 이미 죽은 지 오래고, 그녀에게 집착한 나머지 각종 만행을저질러온 남주인공 히스클리프는 이미 중년입니다. 독자는 둘의 이야기를 다른 두 사람의 목소리로 듣게 됩니다. 한 사람은 히스클리프 소유의 집을 임대하려는 신사이고, 다른 사람은 주인공들의 집에서 하녀로 일했기 때문에 내막의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을 아는 넬리입니다.
이상은 소설에서 시간이 배열되는 수많은 방식 중 몇 가지입니다.
이제 시험 삼아서, 누구나 아는 ‘빨간 망토』 이야기의 몇 가지 변형을 만들어봅시다. - P539

아니면 보다 불길한 관점을 취할 수도 있습니다. 수사 스릴러에서 맡아놓고 쓰는 관점이죠. 이 방식은 시체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시체? 『빨간 망토』 이야기에도 여러 버전이 있는데, 어느 버전에서는 할머니와 늑대 모두 죽고, 다른 버전에서는 늑대만 죽습니다. 이야기를 두 가지로 하다가 독자에게 선택하도록 하면 어떨까요? 나만의모험담을 써보자 (Write Your Own Adventure Stories)』의 작가들을 포함해 여러 작가들이 시도했던 방식입니다. 샬럿 브론테도 소설 『빌레트』에서이 방식을 선보였죠. 이 경우는 사건 순서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가지입니다. - P541

화자가 여럿인 경우에도 사건 순서가 여럿입니다. 이런 구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라쇼몽>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서로 모순되는 설명들이 다중으로 얽혀 있는 구조를 일컫는 용어가 됐을 정도입니다. "아, 라쇼몽 기법" 하면 다들 알아듣고 끄덕거리죠.
어떤 소설 구조는 직소 퍼즐과 비슷합니다. 따로 놀던 조각들이 결국 하나의 그림으로 딱딱 맞아 들어가는 거죠. 또 어떤 구조는 클루(Clue) 게임을 닮았습니다. 작가가 단서를 뿌려놓고 독자는 그것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줄거리와 구조가 어떠하든, 모든 스토리텔링 행위와 소설 쓰기 행위에는 공통적으로 있는 게 있습니다.  - P541

인간사회는 끝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잘못된 편(the wrongside of history)‘에서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역사라는 게누가 정권을 잡고 못 잡았는지, 누가 지적 첨단에 있는지 아닌지를 의미하는 거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종류의 역사에는 정해진 편이없거든요. 역사는 필연적 선형 진행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시작해「요한계시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신의 도시가 일어나 모두가 영원히 행복해지는 결말은 없습니다. 인간의 권력과 유행의 진행에서 필연성이란 없습니다. 오늘은 역사의 옳은 편으로 보였던 것이 내일 잘못된 편으로 뒤집힐 수 있고, 그랬다가 내일모레 다시 옳은 편이 될 수도있습니다. - P545

소설 쓰기에서 포르투나 여신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소설가입니다.
소설가가 시간을 배열하고 바퀴를 돌려서, 어떤 인물은 행복으로 들어올리고, 다른 인물은 밀어내거나 심지어 죽여 없앱니다. 어쩌면 소설의 시간은 바퀴와 도로의 조합입니다. 바퀴가 회전하면서 사랑의 부침과 삶의 흥망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바퀴는 회전하는 동시에 길을 따라 죽 굴러가고, 이에 따라 시간이 선형적으로 진행하잖아요 소설을쓸 때 여러분은 시계와 달력을 잘 봐야 합니다. X가 온실에 몰래 들어가 Y를 살해할 시간이 충분합니까? 여러분은 달도 주시해야 합니다.
알다시피 달은 환상을 의미해요.
사람의 운은 달과 같습니다. 항상 차올랐다 이울었다 하죠. - P545

하지만 우리가 어떤 카드를 택하든 저울을 든 정의의 여신만큼은 늘우리 마음 어딘가에 존재하면서, 소설의 사건들이 당위대로 풀리지 않을 때 우리에게 그럼 무엇이 당위인지 알려줍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렇게 공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직관적으로 압니다. 우리는세상사가 공정하기를 바라지만, 상황이 늘 그렇지는 못합니다. 슬프지만 그게 현실입니다. 소설로 치면 그것이 현실의 투영입니다.
이제 저는 카드 덱을 도로 거둬들여 제 마법사 재킷의 주머니에 넣겠습니다. 타로 덱의 마법사는 단지 저글러일까요? 때로는 그렇습니다. 소설가들은 나름 재주를 부립니다. 모자에서 토끼를 뚝딱 꺼내놓을 때도 꽤 많아요.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마법사 카드는 긍정적변화에 관한 것입니다. 바라건대 소설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책이 내인생을 바꿨어요." 사람들이 소설가에게 자주 하는 말입니다. 어떻게바꿨는지는 되묻지 않는 게 좋습니다. 그건 독자가 답해야 할 질문입니다. - P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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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온난화가 섭씨 4도 상승까지 진행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지구온난화 압박이 (기후와 관련 없는) 사회적·경제적·인구적 압박들과 결합함에 따라 사회 시스템 임계점 초과의 위험이 커지고 있다. 한계 상황에 이르면 대응 조치를 지원할 기존 기관들은 효력을 잃거나 심지어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저지대 국가들의해수면 상승이 통제적·적응적 이주가 어려운 수준으로 진행돼 결과 - P316

적으로 해당 섬이나 지역을 완전히 유기할 수밖에 없는 사태에 이를수 있다. 또한 폭염, 영양실조, 해수 침투에 따른 식수 악화 등의 보건악재들이 의료 시스템에 과중한 부담으로 작용해 결국 더는 대응이불가능해져 사회 혼란이 야기될 수 있다.
기후 영향의 성격과 규모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하는 이 같은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지구 온도 4도 상승에 대응이 가능하리라는 확신도없다. 4도 세계에서는 지역사회와 도시와 나라들에 극심한 붕괴・손상.혼란이 닥치고, 이런 위험의 대부분이 불평등하게 확산될 것이다.
빈곤층이 최대 피해자가 될 것이며, 지구 공동체의 분열과 불평등이지금보다 더 심화될 것이다. 4도 상승 예측은 결코 실현돼서는 안 되며, 온도를 반드시 낮춰야 한다. 오직 신속한 국제 협력과 선행 조치들만이 이를 달성할 유일한 방법이다. - P317

로마클럽 보고서와 세계은행 보고서 모두 지구온난화가 인류에 미치는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해수면 상승, 기상이변, 사막화와같은 온난화 결과들에 집중합니다. 이 보고서들에 크게 부각되지 않았지만 인류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요인이 두 가지 더 있습니다.
첫 번째는 메탄가스의 대기중 방출입니다. 방출원도 다양합니다.
영구동토층도 그중 하나입니다. 영구동토층 해빙이 진행되면 식생이부패하고, 메탄수화물이 녹아 엄청난 양의 메탄가스가 방출됩니다. 메탄가스의 지구온난화 효과는 이산화탄소의 스물다섯 배에 달합니다.
앤드루 웡(Andrew Wong)이 얼터너티브스 저널(Altermatives Journal)』 1월호에 썼듯 알래스카만 해도 "빙하의 후퇴와 영구동토층 해빙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50~70퍼센트 더 많은 매탄을 방출하고 있습니다." - P317

우리의 물리적 환경은 인간 생활의 기반이자 사회체제의 기반입니다.
이제 이 물리적 환경이 급변하면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문제들의 관점에서 저는 ‘변화‘, ‘방법‘, ‘세상‘을 극히 원초적인 방식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세상‘이란 총체적 세상을 말합니다. 즉 기체, 액체, 고체로 이루어진 물리적 공간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이자 우리의 사회적 공간들을 에워싼 공간이죠. ‘변화‘는 물리적 변화입니다. 즉 물과 공기와 땅과 기후에 일어나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방법‘이란 우리의 물리적 공간에 영향을 미칠 긍정적 물리적 개입과 부정적 물리적 행동의 조합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물리적 공간을보존해서 목숨을 부지하려면, 우리의 오래된 방식 중 일부는 바꿔야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는 일 중 일부는 멈춰야 합니다. - P318

각각의 기술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쪽 날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자르지만, 반대쪽 날은 우리의 손가락을 베죠.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불과500년 전 사람에게는 마법의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마법사와는거리가 멉니다. 우리가 병에서 지니를 풀어놓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니를 병에 도로 욱여넣는 것은 현재로서는 우리의 능력 밖입니다.
우리는 통제 불능의 소용돌이를 창조했고, 그 안에 살고 있으며, 만약그것이 멈추면 끔찍한 혼돈과 난장판이 닥칩니다. 전기가 모두 나가고 기차와 차가 운행을 멈추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세요. 현재 인류의 대부분은 도시에 사는데, 도시에서는 단 며칠 만에 식량이바닥날 겁니다. 그럼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우리가 구축한 기묘한 메커니즘 안에 있고,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 메커니즘에 근본적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종국에는 이것이 우리를 배속에 넣은 채로 스스로를 잡아먹고 말 겁니다. - P324

아마도 인류 최대의 실패는 현대의 실패일 겁니다. 우리는 나머지세계와의 연을 끊어버렸고, 모두는 나머지 모두와 연결돼 있다는 것을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과 별개가 아닙니다. 하지만 막대한 돈이 암 치료법 같은 멀어지는 무지개들로 계속 향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대부분의 암은 우리가 우리 몸에 쏟아붓는 산업 화합물과 부산물 때문에 생긴 것 아니었나요? 또한 불로장생의 꿈과 우리 뇌를 컴퓨터에 업로드해서 우주로 발사하겠다는 야망에도 막대한 돈이 투입됩니다. 반면 생물권의 기능 보존을 위한 필사의 노력에는 우리 부의 티끌만큼, 기부금 전체의 3퍼센트 미만만이 찔끔찔끔떨어질 뿐입니다. - P327

우리가 지구를 생명 전체에 부적당한 곳으로 만드는 게 빠를까요, 인간만살지 못할 곳으로 만드는 게 빠를까요? 당연히후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발악을 해도 적어도 일부 곤충, 규조류, 혐기성 미생물, 심해 오징어에는 못 당합니다. 어쩌면 자연은 우리의 멸종을 기다릴 겁니다. 그럼 우리에겐 자연이 필요한가요? 결단코 필요합니다. 인간이 호흡하지 않고 사는 방법을 개발하지 않는 한 그렇습니다. 화학과 물리학은 흥정이란 게 없습니다. 항상 장부를 착착 맞춤니다. 열이 증가해서 에너지가 발생했다면 거세진 바람과 높아진 파도의 형태로 방출되어야 하고, 증발로 올라가는 게 있으면 폭우와 눈보라로 내려오는 게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지구는 이제 기후변화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2010년 환경운동가 빌 매키번(BillMcKibben)이 『우주의 오아시스 지구』에서 경고한 덜 친절하고 더 불안정한 새로운 행성이 이미 우리 코앞에 다가와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최선을 다해 거기에 적응하는 것입니다. 사는 규모를 줄여서, 우리가 촉발한 맹렬한 소모의 과정을 되돌리거나 최소한 중단해야겠죠. 아니면 현대사회의 붕괴에 뒤따를 비참함을 감당하든지요. - P328

해변을 뒤덮고, 먹이를 싹쓸이해 토착 어종의씨를 말리는 등 오대호 환경을 파괴하는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저는그 원주민 어부에게 물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당연히 어부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의 생계와 직결된 문제니까요. 하지만 그는 미소만 지었습니다. "자연이 알아서 할 겁니다."
나는 어부의 말을 자연이 얼룩말홍합을 없애줄 거라는 의미가 아니라 결국 새로운 균형이나 질서가 부상할 거라는 의미로 이해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부의 말이 맞습니다. 자연은 항상 그랬으니까요. 그 결과가 우리의 바람과 다를 수는 있지만, 어차피 자연은 인간의 바람 따위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리학과 화학은 기회를 두 번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희망을 포기할 수 없어요. 우리는 두 번째기회를 갈망합니다. 우리의 종교적 우화와 설화와 영화는 두 번째 기회들로 넘쳐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면 그것이 실현된다고 믿습니다.
이제 우리가 인류의 미래 생존을 간절히 빌어야 할 때가 온 듯합니다. 그것을 정말로 원한다면, 우리가 자찬해 마지않는 인간 지능을 이용해 미래를 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P329

우리에겐 번역가들이 있습니다. 번역가들이 더 나아요. 왜냐하면 기계와 달리 그들은 어감을 인식할 수 있고, 각자의 해석을 창조할 수있으니까요. 지금까지 여러 훌륭한 번역가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그들의 눈과 귀를 통해 제 작품을 보는 것은 제 작품에심지어 저에게도 새로운 차원들을 더했습니다. W. G. 제발트가 그의번역가에게 한 말이 제 마음입니다. "이보다 나은 결과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이 일에 쏟았을 긴 시간과 엄청난 노력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번역가 여러분. 작가로서 우리는 여러분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독자로서 우리는 여러분이 열어주지 않았다면 잠겨 있었을문으로 들어가고, 여러분이 아니었으면 침묵했을 목소리들을 듣습니다. 창작 자체처럼 여러분의 일도 인간 소통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에기반합니다. 그것은 결코 작지 않은 희망입니다. - P354

여자아이들은 꽤 이른 나이부터 아름다움과 얽힌다. 거기에는 미의 개념(너 정말 예쁘다!"), 탐미와 연계된 사물(거울 속의 너를 봐), 심지어 미적 현혹에 대한 금기("저건 엄마 립스틱이야. 손대면 안 돼")도 포함된다. 아이에게 아름다움은 어딘지 마법적이다. 아름다움은 분홍색이다. 반짝반짝 빛나고 아른아른 빛난다. 아이에게 아름다움은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동화 속 공주의 발레리나 드레스를 입은 다섯 살배기들은 대개 벗기를 거부한다. - P355

약 오르게 사랑스러운 여주인공을 보면서 그들이 느꼈을 자괴감을 언젠가부터 아이들이 바비 인형의 외관을 일부러 망가뜨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다락방 트렁크에서 머리털이 뽑히고, 보라색 매직펜 문신으로 뒤덮이고,
양팔이 떨어져 나간 바비가 심심찮게 발견된다. 한때 이들의 주인이었던 소녀가 자신이 신데렐라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치공감 주술 의식의 반대 버전처럼, 자기 인형에다 화풀이를 한 건 아닐까? 이렇게 화난 소녀들은 훗날 메이크업 주말강좌, 패션 컨설팅, 일품 손톱 관리로 자존감을 회복했을까? 어쩌면. 하지만 가능성은 낮다. - P357

우리가 어릴 때 책에서 배운 미의 개념의 긍정적 측면은 아름다움이출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좀 더 커서 그리스신화에 본격적으로 빠졌을 때 아름다움에 부정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나치게 아름다우면, 가학적이고 막돼먹은 신들의 반갑지 않은 관심을 끌게 된다. 미녀에게 주목한 신이 남신이면 미녀는 쫓기는 신세가된다. 결과는 페르세포네처럼 납치당해 지하세계로 끌려가느냐, 레다처럼 백조로 변한 제우스에게 겁탈당해서 알을 낳느냐 중 하나다. 이런 운명을 피하는 방법은 나무나 강으로 변하는 것뿐이다. 이는 우리가 원하던 토요일 밤의 데이트가 아니었다. 
미녀에게 주목한 신이 여신이면, 미녀는 대회의 상품이 되거나 불같은 질투의 대상이 된다.  - P357

신반인의 지위와 맞먹었다. 농염한(glamorous), 매력적(charming), 매혹적(fascinating), 황홀한(entrancing), 고혹적(enchanting). 이 단어들의 어원은모두 초자연적 현상과 닿아 있다. 아름다움이 한 꺼풀이든 아니든, 저주이는 축복이든, 오만하든 매혹적이든, 현실이든 고안된 환상이든, 아름다움에는 마법의 힘이 있다. 적어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이것이 립글로스 튜브들이 수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팔려 나가는 이유다. 우리가 여전히 요정을 믿는다는 뜻이다. - P360

에세이 제목은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세계였지만, 이때의 저는 막상거기서 무엇을 이해해야 할지 몰랐던 것 같아요.
저는 열아홉의 제가 논리의 갈피를 잃고 해매는 것을 지켜봅니다.
아버지-권위주의 모티프를 들먹였다는 것은, 카프카의 작품과 그의개인사를 다시 붙이겠다는 뜻인가요? 카프카는 평생 강압적인 아버지와 갈등을 겪은 것으로 유명하거든요. 하지만 저는 이 쟁점을 비껴갑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카프카가 살았던 역사적 시기(제1차세계대전 이전, 도중, 이후 시대. 카프카는 히틀러가 뮌헨 폭동을 일으킨 직후인1924년에 사망했습니다), 그를 둘러싼 지리적 위치와 문화적 환경(체코슬로바키아와 중부 유럽), 그리고 (체코어를 쓰는 프라하의 독일계 유대인이었던그의 처지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그의 취약하고 고립된 정체성에 대한쟁점들도 모두 피해 갑니다. - P366

열아홉 살의 제게 진정한 예술이란 플라토닉한 추상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었고, 현실과 아무 접점 없이 지구 위를 떠도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믿으면 제가 그때 쓰고 있던 어두컴컴한 소설들에 제 전 남자친구들을 투입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없었어요.
그러다 저는 진정한 예술에 대한 카프카의 견해를 잡을 기회를 놓쳤습니다. 카프카의 유명한 단편들 중 몇 편은 사실상 진정한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것이었는데, 저는 그것도 몰랐던 거죠. 예를 들어 가수요제피네 혹은 쥐의 족속(Josefine, die Sängerin oder Das Volk der Mäuse)」의 요제피네는 노래 실력이 별로라서 쥐 관중에게 경멸을 받지만 노래를 멈추지 않습니다. 「유형지에서는 유죄 선고 자체가 형 집행입니다. 무수한 바늘이 작동하는 기계장치가 죄수의 몸에 죄목을 새기며 그를 심판합니다. 또한 「단식 광대(Ein Hungerkinstler)」는 처음에는 열광적인 관심을 받지만 대중이 그의 단식에 흥미를 잃자 방치된 상태로 결국 굶어 죽고 맙니다.  - P367

이제 시간을 빨리 감아서 1984년으로 가볼까요. 25년이 지났고 저는 이제 마흔넷이고, 가족과 함께 서베를린에서 살고 있습니다. 기쁘게도 주(駐)체코 캐나다 대사관의 후원으로 카프카의 도시 프라하를방문할 기회가 왔고, 우리는 그 기회를 잡았습니다.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통제가 삼엄한 소련 위성국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건물 안이나 차안에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예를 들면 연탄 사용에 따른공기 오염 수준이 살인적이라느니 하는 얘기요. 곳곳이 도청되고 있다고 봐야 했습니다. 공원 한복판 정도만 안전해 보였어요. 우리가 호텔방에 이르자 벨보이가 샹들리에를 가리키더니 손짓을 하며 우리를 한구석으로, 숨겨진 마이크에 소리가 잡히지 않는 우묵한 곳으로 불러 모있습니다. 그러더니 달러 환전을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 P368

도시 위로 프라하성이 어둡고 을씨년스럽게 떠올라 있었습니다. 카프카의 『성』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단지 추상적인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실제의 성이었습니다. 카프카가 죽었을 때 성』은 미완으로 남았고, 이후 지금까지도 평단은 작품의 의미를 궁리중입니다. 성의 답답한 미로 속을 헤매는 주인공 K가 찾고 있던 것은 무엇일까? 그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줄 관리? 이 책은 관료주의의 무도함에 대한 비판일까?
아니면 K도, 베케트의 주인공처럼 존재를 드러내는 법이 없지만 그럼에도 거기 존재하는 신을 찾고 있었던 걸까? 1959년 열아홉의 저라면아마 카프카의 성과 관계있거나 아니면 맥락이라도 통하는 여러 문학적 성들을 거론했겠죠. 예를 들어 독일 낭만주의 고딕 양식의 음울한성들, 에드거 앨런 포의 「붉은 죽음의 가면(Masque of the Red Death)」에나오는 성(엄밀해 말해 이 경우는 성이 아니라 대사원이었습니다), 월터 스콧의 『아이반호』에서 처녀들을 감금하고 유대인들을 고문하는 악명 높은 토퀼스톤성, 죽지 않는 자들이 출몰하는 불길한 드라큘라의 성 등.
19세기 사람들에게 성은 그다지 신나고 유쾌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 P369

카프카라면 이런 경험을 여러 관점에서 향유했겠죠?
카프카와의 세 번째 조우는 먼젓번과 몹시 달랐습니다. 다시 빨리 감기를 해보죠. 이번에는 1990년대 후반으로 갑니다. 베를린장벽은 이미허물어졌고, 소련은 붕괴했고, 냉전도 이미 종식됐고, 바야흐로 쇼핑이제2의 섹스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프라하를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서구스타일의 문학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도시는 관광객으로 붐볐고, 각종 보헤미안들의 핫스폿이 되어 있었고, 나중에 알았지만 세계의 부동산 시장에서 암약하는 러시아 마피아의 격전지이기도 했습니다. 프라하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에서 살아남았고, 히틀러가 도시의 아름다움에 반한 덕분에 대대적 파괴를 면했습니다. 휘황하게 불 밝힌 프라하는 동화 속의 도시 같았습니다. 카를 다리의 조각상들도 제자리로 돌아왔고, 한때 귀신의 집 같았던 프라하성은 관광의 중심이 됐고, 구시가 광장은 수공예박람회로 성황이었습니다.  - P371

자신이 이렇게 기념의 대상이자 돈벌이의 수단이 된 것을 알면 카프카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제 생각에 그는 웃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열아홉에서 예순 살 사이에 카프카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가장 의외였던 것이 뭔지 아세요? 카프카는 자기 작품 상당수가 엄청나게 웃기다고 생각했어요. 소송이 웃기다고? 「단식 광대」가 웃겨? 유형지에서가 웃겨? 음, 그래요. 어떤 견지에서 보면 웃기죠. 그리고 당시는 훗날 히틀러가 출현해 현실 세계에서 어떤 일들을 벌일지 몰랐던 때였으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카프카 기념품 모음에서 다소 기괴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니, 카프카적 인상이라고 해야겠죠. 하지만 이 경우는 음울한카프카가 아니라 보다 익살맞은 카프카, 또는 적어도 보다 쾌활한 카프카였어요. 만약 제 1959년 에세이를 21세기의 두 번째 10년에 접어든 지금 다시 쓴다면 저는 이런 면의 카프카에 더 중점을 두렵니다.  - P372

이런 카프카도 있습니다. 고립되고 박해받는 K가 아닌 카프카, 이름없이 익명의 군중에 섞여 있지만 자유로워서 거의 노래 부를 지경인그가 있습니다. 하지만 ‘거의‘일 뿐입니다. 카프카는 언제나 ‘거의‘만허용해요. 삶에서처럼 문학에서도, 여자들과도 그는 어느 한곳에 머무를 줄 모릅니다. 그를 딱 꼬집어 정의할 방법은 없습니다. - P373

저는 아직 노르웨이의 실제 숲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뭐라 평할 수 없습니다. 저는 미래 도서관의 장서실에 들어가 다른저자들의 이름과 그들이 기증한 작품들의 제목을 볼 수도 없습니다.
아흔 번째 저자, 아흔다섯 번째 저자 등 먼 훗날의 저자들은 그들의 봉인된 상자가 열리고 그들의 작품이 출판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그책을 읽는 사람들이 동시대인이 될 겁니다. 하지만 제 작품을 읽을 사람들은 100년이나 떨어진 미래에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도 아직 태어나지 않았고, 그들의 조부모도 아직 세상에 없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미지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까요? 그들은 제가 살았던세상, 제가 미래 도서관에 맡긴 작품의 토대가 되었던 세상에 대해 무엇을 이해하게 될까요? 그리고 그때는 말의 의미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언어 자체는 지각의 암석처럼 압력과 변형에 약하니까요. - P375

사이언스 픽션은 공간여행 - 저자가 한 번도 본 적 없고, 어쩌면 인간의 상상에만 존재하는 장소들로의 여행을 재료로 하는 예술입니다.
시간여행도 비슷합니다. 미래 도서관의 경우 저는 제 원고를 시간 속으로 떠나보냅니다. 그곳에 제 책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인류가 남아있을까요? ‘노르웨이‘가 있을까요? ‘숲‘이 있을까요? ‘도서관‘이 있을까요? 기후변화, 해수면 상승, 삼림 해충의 습격, 범지구적 유행병을 포함해 오늘날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위협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의 모든 요소들이 미래에도 계속 존재할 것으로 믿는 것은 분명 희망의 행동입니다. - P375

미래 도서관이란 그런 것입니다. 한때는 있었지만 이제는 과거로 사라진 삶들의 편린을 담은 용기가 될 겁니다. 하지만 종류 불문모든 글쓰기는 사람의 소리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펜, 인쇄기 잉크, 붓, 침, 끌이 만든 글쓰기 자국들은 악보의 음표들처럼 죽어누워 있을 뿐입니다. 독자가 거기 도착해서 목소리를 회생시키기 전까지는 말이죠.
오랜 세월 침묵하던 제 목소리가 100년 후에 갑자기 깨어난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참 묘합니다. 아직은 세상에 체현되지 않은 미래의 손이 그것을 봉인된 함에서 꺼내 첫 페이지를 열 때, 그 목소리는 가장 먼저 무슨 말을 하게 될까요?
제 텍스트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독자의 만남이란 언젠가 제가 멕시코의 동굴 벽에서 붉은 손바닥 자국을 보았던 경험과 비슷하지 않을까생각합니다. 그 손도장은 3세기 넘게 봉인돼 있었습니다. 지금의 누가그 흔적의 정확한 의미를 판독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그것의 일반적의미는 범지구적입니다. 어떤 인간이든 그 의미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 손자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안녕. 여기에 내가 있었어. - P376

앞서 말했듯 저는 세상에 일어난 적이 없거나 가용 기술로 실현할수 없는 일은 책에 담지 않았습니다. 저는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히틀러가 폴란드를 비롯한 점령국에서 벌인 아동 강탈, 나치친위대를 위한 일부다처 정책,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등 다양한 역사적 사건들을 참고했습니다. 미국 노예에게 강요된 문맹, 초기 모르몬교, 중세의 집단 교수형(모두가 줄을 당기면 죄책감도 공유되니까?)에서도영감을 얻었습니다. 제물로 바쳐진 사람을 손으로 찢어 죽였던 고대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숭배 의식도 참고했습니다. 몇 가지 예만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시녀‘ 의상은 1940년대 ‘올드 더치 세제(Old Dutch Cleanser)‘의 패키지 삽화를 참고했습니다. 얼굴을 가리는 하얀 모자와 풍성한 치마의 여인이 어릴 적의 제게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거든요.  - P391

작중의 전체주의국가 길리어드의 사회구조를 모든 남자가 모든 여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지는 절대적 남존여비 구조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길리어드는 젠더 구분에 따른 독재라기보다 전제주의(主義) 또는 전체주의체제입니다. 따라서 고위층 남성의 아내도 남편보다는 낮지만 높은 지위를 누립니다.
또한 하층민 남성은 고위층 여성보다 낮습니다. 이는 역사상 흔하게작동했던 방식입니다. 길리어드에서는 고위층 남성만 가임기 여성을한 명 이상 가질 수 있습니다. 즉 출산을 위한 ‘시녀‘를 따로 둘 수 있습니다. 이 역시 현실에 분명히 있는 일입니다. 본부인이 가정에서 지배권을 행사하고, 다른 젊은 아내들은 그녀의 처분을 따릅니다. 고위층남성은 이들 모두에게서 자식을 얻습니다. 능력이 되면요. 하층민 남성은 ‘경제부 econowifie)‘한 명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경제부‘는 하층민 남성의 아내를 말하는데, 고위층에서 여러 여성이 분담하는 일본부인의 대외적 사교 기능, 정부와 첩의 섹스 기능, 하녀의 가사노동-을 혼자 다 해야 합니다. 제가 시녀 이야기』의 세계관을 이렇게 정한것은 이것이 현실 세계에 종종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 P392

두 번째 문학적 영향은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왔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책이 아니라 여러 두루마리 기록의 모음집으로 시작된 매우 복잡한 작품입니다. 코덱스북-책등이 있고 거기에 책장을 엮어서 넘기며볼 수 있게 만든 오늘날의 책 형태요-이 개발되자 비로소 ‘비블리아(biblia, 작은 책들)‘가 하나의 책으로 묶였고, 그때서야 성경이 하나로 통합된 작품의 외양을 갖추게 됐습니다. 각 부분이 각기 다른 시기나 시대에 각기 다른 사람에 의해 쓰였기 때문에 성경에는 엇갈리는 메시지들이 수두룩합니다. 과부 · 고아 빈민 · 피지배민 등에게 매우 호의적인메시지들이 있는가 하면, 정반대 분위기의 메시지들도 뽑아낼 수 있습니다. 예컨대 적들을 풀 한포기 남김없이 초토화하고 그들을 자식까지 잡아먹는 처지로 만들겠다는 저주도 등장합니다. 사실 지금껏 많은이들이 이런 메시지들에 더 열광했죠. - P393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변수가 너무 많고 미지의 요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죠. 여럿이 아무리 면밀히 판을 짜도 일은 언제나 빗나갈 수있습니다. 경험에 따른 추측과 그럴듯한 예상은 할 수 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지금까지 저는 시녀 이야기』에 대한 많은 것들을 털어놓았습니다.
그 혈통과 기원, 과거와 현재를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시녀 이야기』의 미래만큼은 여러분의 손에 독자들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책이 됐든 책의 미래는 독자가 결정합니다. 작가는 책을 쓰고 나면 그것에 대한 통제권을 포기하고 기차역에서 손을 흔들어 작별을 고할 뿐입니다. 그러면 책은 미지의 땅들과 미지의 마음들을 향해 여행을 떠납니다.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책에나 일어나는 일이죠. 이렇게 오랫동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이 책을 좋아했다는 것만이 늘 놀라울 따름입니다. - P398

내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어렵게얻어낸 자유를 어째서 여러 서방국가의 시민들은 찍소리 없이 때로는기꺼이 포기했던 걸까? 대개는 공포 때문이다. 그리고 공포는 여러 형태를 취한다. 때로는 그것이 급여를 못 받을지 모른다는 공포로 귀결된다.
기차가 제시간에 다니고 내 일자리가 보장되는 한,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엄지 매달기‘ 고문을 당하고 있다 해서 법석을 떨 이유가 있을까?
그렇게 ‘엄지 매달기‘ 고문이 본격화하면 다른 종류의 공포가 자리잡는다. 엄지손가락을 보전할 유일한 방법은 개구리 연못의 수면 아래에 납죽 엎드려 있는 것이다. 괜히 머리를 들거나 크게 울어대는 건 금물이다. 우리는 아무런 ‘허튼짓‘도 하지 않으면 어떠한 나쁜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하지만 ‘허튼짓‘은 매우 유동적인 범주다.
나쁜 일은 결국 일어난다.
하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자유언론에는 재갈이 물려 있고, 독립적 사법부는 전부 해체돼 있고, 독립적 작가·가수·예술가도 남김없이 진압돼 있을 것이므로 우리를 방어해줄 거라곤 전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아야 할 한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아무 책임감도 견제 장치도, 균형 감각도 없는 전제주의 체제는 가공할 권력 남용을 만들어낸다. 이는 예외 없는 법칙이다. - P405

우리 대부분은 이중으로 부자유하다. 우리의 ‘자유‘는 승인과 감독을 받아야 하는 것들에 한정돼 있고, 우리의 ‘하지 않을 자유‘는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 많은 것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지 못한다. 욕조는 시작에 불과하다. 대기와 물에 퍼진 유독성 화학물질에서 벗어날자유? 홍수와 가뭄과 기근을 겪지 않을 자유? 결함 있는 자동차로부터무사할 자유? 매년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잘못된 약물 처방을받지 않을 자유?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쁘기만 한 건 아니다. 모든 기술은 양날의 도구다. 데이터 - P407

가 새는 구멍들로 가득한 인터넷도 말은 일사천리로 전파한다. 덕분에전보다 권력 남용을 밝히기가 쉬워졌고, 청원에 동의하고 항의의 목소리를 내기가 쉬워졌다. 물론 그 자유도 양면적이다. 내가 서명한 탄원이 내 정부가 나를 공격하는 증거로 이용될 수 있다. 모이솝우화 중에 왕을 원했던 개구리 이야기가 있다. 신은 왕을 내려달라고 청하는 개구리들에게 통나무 하나를 던져주었다. 통나무는 물에 둥둥 떠다닐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개구리들은 한동안은 만족했지만 이내 불평을 늘어놓으며 더 활동적인 통치자를 보내달라고 했다. 귀찮아진 신은 그들에게 황새를 보냈고, 황새는 개구리들을 몽땅먹어치웠다. - P408

우리의 문제는 서방세계 정부들이 점점 통나무 왕과 황새 왕을 합친불쾌한 조합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사찰하고 통제할 자유를 행사하는 데는 능하고, 시민에게 이전에 누렸던 자유를 허용하는 데는 서툰 정부. 보안법을 고안하는 데는 능하지만 그 부작용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데는 서툰 정부. 그 부작용에는 없는 문제도 있다고 하는 긍정오류도 포함된다. "당신이 첩자가 아니라는 증거를 대봐." 내 정체를 정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누구라도 내 데이터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을디지털 기술이 삶을 엄청 편하게 만들어준 것은 사실이다. 일단 클릭하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동안 할양했던영토를 일부라도 탈환해야 할 때가 아닐까? 블라인드를 내리고, 염탐을 차단하고, 사생활 개념을 복구할 때. 오프라인으로 전환할 때.
먼저 나설 사람? 맞다. 그럴 줄 알았다. 쉽지 않은 일이다. - P408

치장은 인간의 아주 오래된 관심사다. 문신에서 가발과 귀걸이, 버슬 엉덩이와 빅토리아시크릿까지 우리는 먼 옛날부터 우리 몸을 장식해왔다. 복장이 그 사람을 말해주진 않아도, 그 사람이 자신을 어떻게생각하는지에 대한 유용한 힌트는 될 수 있다. 소설에서 이는 지극히중요하다. 우리가 셜록 홈스를 사랑하는 것이 그의 추리력 때문만은아니다. 그의 사냥 모자 때문이기도 하다.
혹시 여러분도 이런 디테일에 집착하는가? 당당해져도 좋다. 그래서 만약 내가 양방향 스트레칭 거들에 대해 실수하면, 모쪼록 내게 힐난의 편지를 보내주기 바란다.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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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나는 한 명뿐‘이라고 생각하면 막막하다. 이 삶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그럴 때 여러 나이의 나를 떠올린다. 일곱살, 열다섯 살, 스물세살, 서른여섯과 마흔여덟 살, 쉰아홉 살, 기타 등등의 나를 스스로가 너무 못마땅해서 끈적끈적하고 희뿌연 기분에 잠겨 버릴 때는, 과거의 나와 미래의 내가 현재의 나와 공존한다고 생각한다. 여기나는 무겁게 지쳐 있으나 거기 나는 상심을 털어내고 웃고 있구나.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힘이 난다. 책임감이 조금씩 단단해진다.
다양한 시간, 다양한 공간, 다양한 우주에 내가 존재한다면.…… 어떤 세계에서 내가 슬퍼할 때 다른 세계에서 나는 기쁘다. 저 세계에서 내가 삶의 경이로움에 빠져 있을 때 그 세계에서 나는 전력을 다해 삶을 저주한다. 무수한 나는 나라고 말할수 없고 유일한 나는 찰나의 찰나. 우주는 아주 넓고 깊고 신비로우므로 내가 유일하든 무수하든 상관없을 테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허무를 잊지않으면 낙관할 수 있다.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담대해진다. 괴팍한 불안이혼자 지껄이도록 내버려두고 소설을 쓸 수 있다.
쓰다 보면 견딜 수 있다.


볕은 따뜻하고 바람은 차가운 수요일 오후 2시경, 할머니는 엄마가 쟁반에 차려온 마음도 약도마다하고 창을 조금만 열어달라고 했다. 엄마는 창을 열고 할머니 옆에 누웠다. 할머니의 고맙다는말에 엄마는 무언가를 느꼈고,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창에 담긴 하늘을 바라보며 속삭였다. 지금은 맑다고. 엄마는 할머니의 말을 잘 들으려고 몸을 꿈틀거리며 할머니 가까이 다가갔다.
할머니는 1년 전쯤 병원에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요양원 생활에 불만은 없었고 건강이회복되리라는 기대도 없었다.  - P9

할머니는 대부분 날들 건강했고 노환은 서서히찾아왔다. 늙으면 죽는다. 모두 알고 있잖아. 그렇다 해도 ‘할머니가 죽어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은 내게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기는 일과 비슷했다. 산을 절반도 옮기지 못했는데 할머니는 떠났다. 남아 있는 절반의 산을 바라보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말을 종종 떠올렸다.
지금은 맑다.
엄마는 ‘맑다‘는 단어를 귀중하게 간직했지. 나는 ‘지금‘이란 단어에 집중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나. 지금은 금방 사라지지. 할머니가 죽었다는 건할머니의 시간이 사라졌다는 것. 내가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시간이 있다는 것.  - P11

그때 내가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은 모두 어른의 일이었다. 죽음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사람들, 죽음이란 원래 그런 것임을 어렴풋이 경험한 사람들의 일. 이제 그들의 나이가 되어서 나는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내게 남긴 2백만 원 얘기를 들으면서.
내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하는 거고 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내가 하는 거고.
나를 맡아 보살피던 어느 날엔가 할머니가 무심히 꺼낸 말.
언젠가는 네가 못하는 거를 네 엄마가 할 거고네 엄마가 못하는 거를 네가 할 거고. 그런 거다.
사는 게. 지금이 영영일 것 같지만 나중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고. - P21

나는 내 시간을 사는데 거기 누가 들어오는 거야 그런다고 내 시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해가 뜨고 진다고 시간이 가는 거겠나. 내가 알고 살아야 그게 시간이지. 네가 지금 부모를 원망할 수는 있어. 원망하는 그 시간은 어디 안 가고 다 네거야. 그런 걸 많이 품고 살수록 병이 든다. 병이별게 아니야. 걸신처럼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지.
그때 나는 싱크대에 기대앉아 마늘을 까면서 할머니의 말을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할머니가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지만 잔소리라고 생각했던 할머니의 어떤 말들은 내 몸에 체취처럼 스며들어 지울 수 없는 일부로 남아 버렸다.
시간을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 게 다 병이라면 나는 지금 병이 든 상태인지도 모른다. - P22

교복이 한두 푼도아니고 가게 하는 입장에서야 교복을 또 사러 오면 이득이니까 말리지는 않겠지만 내가 진짜 손님입장에서 하는 말인데 내년이면 분명 후회할 거야.
엄마는 이렇게 대꾸했다.
그 정도 후회는 매일 하고 살아요. 후회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고요.
아빠라면 돈만 주고 알아서 사 입으라고 했겠지. 내가 큰 옷을 입고 있어도 큰 옷인지 모르겠지.
내가 아빠 양복을 입고 있어도 그게 자기 옷인지모를 거다. 정말 그런지 확인해 보고 싶지만 그러려면 부산까지 가야 한다. 아빠도 아빠 양복도 너무 멀리 있다. - P52

‘지름길론‘을 짧게뻔한 대답을 듣지 않으려면 뻔한 질문을 피해야한다. 뻔한 질문을 하지 않으려면 시간과 정성을들여야 한다. 아빠에게는 내게 들일 시간과 정성이 없다. 그래서 나름 지름길을 선택한 것 같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탐구하는 대신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해 놓고 그 틀 안에서만 나를 생각하는지름길. 내가 그 틀을 벗어나면 ‘네가 원래 그런 애가 아닌데‘라고 말하면서 틀을 벗어난 나를 비정상으로 잘라 버리는 거다. 아빠가 생각하는 틀 안의 자식은 공부 열심히 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예의 바르고 싹싹하고 정직한 사람. 아빠는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신경을 써야 하니까. 골치가 아플테니까.  - P53

아빠에 비하면 엄마는 좀 복잡하다. 엄마에대해서라면 나쁜 말도 좋은 말도 하고 싶지 않다.
이 정도 말은 할 수 있겠다. 엄마는 아빠와는 다른방식으로 나를 외롭게 한다.
나는 아빠에게 기대하는 게 없다. 사실 뭘 기대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에게는 기대하는 게 있다. 엄마는 아빠보다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오이와 양파를 싫어한다는 걸안다. 우유를 마시면 배가 아프다는 걸 안다. 필통에 연필을 넣을 때 흑심은 꼭 같은 방향으로 넣어야만 하고 조각난 지우개는 쓰지 않는 걸 안다. 내가 특별히 아끼는 옷과 좋아하는 가수를 안다. 잠을 못 자면 짜증을 부린다는 걸, 눕기 전에 손으로베개를 세 번 치는 습관이 있다는 것도 안다.  - P55

외박을하고 각방을 쓰더라도 같이 사는 건 같이 사는 것.
가구와 생활용품과 공기와 공간과 냄새를 공유하는 것. 상대의 흔적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것. 엄마와 아빠는 그걸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부산과경기도만큼의 거리가 필요했던 거다. 그리고 나를딱 중간에 뒀다. 마치 시소 받침처럼, ‘같이 살고싶지 않다‘와 ‘혼자 있고 싶다‘는 의미가 다르지 않나? 엄마와 아빠의 마음이 두 문장 중 어느 쪽으로기울었는지는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나와 같이살기를 선택하지는 않았다는 것, 내겐 이 사실이가장 중요하다. - P57

오늘 미지를 처음 만났는데도어쩐지 미지와 시내에 여러 번 다녀온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도 그랬다. 처음 가본 장소였고 처음만난 사람들이었는데도 오늘과 같은 날을 여러 번겪어 본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익숙하지? 익숙한데왜 어색하지?
다시 통유리를 쳐다봤다. 거기 비친 나는 과거의 나 혹은 미래의 나였다. 그래서 무수히 겪어 본나였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
.
.

무거운 책가방에는 금세 적응했다.


익숙하고도 어색한 날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 P79

바람을 타고 향기가 왔다. 라일락 향기라고 한수가 말했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아서 비탈을 올랐다. 라일락을 찾으려고 했는데 정상에 올랐다.
정상에 거대한 봄이 숨어 있었다. 숨어서 뽐내고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경쟁하듯 미끄러졌다. 스타킹이 찢어지고 블라우스가 더러워졌다.
웃음은 커졌다. 다람쥐다, 하고 말해서 다람쥐가사라졌다. 우리는 라일락을 찾지 못했다. 비탈을내려오자 다시 향기가 불었다. - P80

편지는 이상하다. 봉투를 열고 편지지를 펼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마음이 펼쳐진다. 말은 사라지고 기억은 희미해져도 글자는 남는다. 비밀스러운 마음이 선명하게 남아 버린다. 내게 그걸 주면 나는 가진다. 편지를 쓸 때의 그 마음을 나는 확실히 가진다. - P86

여름에 나를 훑어보던 눈빛, 과학 선생이 뜬금없이여자들이 생리할 때 나는 냄새가 무슨 냄새랑 비슷하다고, 지금 이 교실에서 누가 생리를 하는지자기는 옆을 지나가기만 해도 알 수 있다고 말하면서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을 때, 사회선생이 우유를 담아 놓은 통을 발로 차면서 젖통이라고 부르고 이상한 농담을 했을 때………. 쉬는 시간이면우리는 재수 없고 더럽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선생들의 기분 나쁜 말과 행동을 떨쳐 내려고 했다. - P87

이전까지 나는 나의 가난에 관심 없었다. 용돈이 부족할 때가 있었지만, 세상에는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기 때문에 용돈이란 언제나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은이 집에 놀러갔을 때, 은이가 주방 식탁 바구니에 담긴 만 원짜리 지폐 서너 장을 자연스럽게 집어서 자기 지갑에 넣는 걸 보고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둑질을 보는 것만 같아서. 하지만은이에게 그건 도둑질이 아니었다. 생활 방식이었다.  - P88

아, 그리고 기말고사 칠 때 시험 감독을 보던 국어 선생이 내가 커닝을 시도한다고 오해하고는 갑자기 ‘이 돼먹지 못한 것이라고 소리 지르면서 화를 냈는데 (나는 문제를 다 풀고 시간이 남아서 잠깐 멍하게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도 상당히 모욕적이었다. 선생은 내게 다가와서 나의 시험지와 OMR 카드를 거칠게 빼앗아 살펴봤다. 문제를 다 풀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도 선생은 계속나를 주시했다. 나는 기분이 나빠서 자리에서 일어나 OMR 카드를 교탁 위에 탁 내려 놓고 교실을나왔다. 너무 분해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자기 멋대로 나를 의심해 놓고 사과도 없이 어쩜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지. 교실 앞문을 열고 복도로 나서자 ‘에이씨 될 대로 되라‘라는 혼잣말이 튀어 나왔다. - P89

모욕감은 남한테서만 받는 게 아니라는 것, 내가나를 모욕하는 순간도 있다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 P90

못된 것을 배웠다. 무례를 권력처럼 썼다. 내가 지금 힘드니까 너에게 너무해도 된다고.
길을 잃은 채로 너무 오래 살아서 길을 잃었다는사실조차 잊은 사람.
이 회사를 나가도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는 생각을 주문처럼 하고 있다. 길을 잃은 게 아니야.
길은 없는 거야. 먹고 사는 건 중요한 문제다. 남지하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다. 젊으니까. 나도늙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늙은이 취급을 하고있지. 삶이 길이라면 돌아갈 수 있나? 과거 어느때로 돌아가고 싶은가? 탈출하고 싶다. 어디로달려도 현재에 갇혀 있을 뿐이다. 나로 계속 사는건 지겹다. 일시 정지 버튼이 없다.
선배, 여기는 정말 너무합니다.
박수원은 나의 미래가 아니다.
누가 대신 살아 주지 않았다. 내가 살았다. 그런데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과거는 꿈이 아니다. 나의 미래는 나,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고 모르겠다는 말이 지겹다. - P97

내게 편지를 쓰면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에 관해서만 가득 썼다. 이것이 지금 내 상태를 말해 준다. 해결될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고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걱정하지 말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지금과 같은 나를 상상한 적도 없다. 과거가 아깝다. 살아갈 날보다 내가 분명히 살아온 지난날이 너무 아까워. 겨우이렇게 되려고 그렇게. - P98

아무도 내가 될 수 없고 나도 남이 될 수 없다. 내가 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자칫하면 나조차 될수 없다.
미래의 내가 이 편지를 아주 우습게 여기기를 바랄뿐이다. - P99

이모가 불을 끄며 말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누웠다.
미안해.
말하면서 이모는 울먹거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이모가 할머니를 이긴 것 같을때가 있다는 말은 취소. 이모는 싸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 P120

넌 이유가 뭔데?
그냥, 짜증나니까.
그 정도로는 부족해.
미지는 가출 전문가처럼 말했다.
그런 이유로는 하루도 못 버텨. 잘 곳 없고 배고픈건 더 짜증나거든. - P121

진짜로?
갈 곳이 아예 없어야 해. 진짜 가출하려면.
미지의 말은 약간 어려웠지만 무슨 뜻인지 알것도 같았다. 외갓집에서 나간다면 엄마의 집을찾아가리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지. 어찌어찌 엄마의 집을 찾는다고 치자. 엄마는 나를 다시 외갓집으로 보내지 않을까? 만약 엄마와 같이 살게 된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가출이 아니다.
돌아갈 집이 없어야 해. 집을 완전히 폭파시키고 나가야 해. 그래야 성공할 수 있어. - P123

기억은 거의사라졌고 마음은 예전처럼 애틋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난감을 간직하는 이유는… 버릴 수 없기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자 장난감에 지저분한 슬픔을 묻히는 것만 같고 내가 더 싫어졌다. 만약에 내가 사라진다면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나를 찾고 슬퍼하겠지. 그리워하겠지. 시간이 흐를수록 드문드문 생각하겠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는 어떤 물건을 봐야 간신히 나를 떠올릴 테고, 언젠가는 그런 기억마저 사라질 것이다. 내가 만약천사의 장난감을 간직하지 않았다면 나도 천사를완전히 잊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버릴 수 없어서 다행이다. 버릴 수 없다는 마음은 중요하다. 버릴 수 없는 것들을 더 많이 떠올리고 싶었다. - P126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떠오르지 않았고.…… 가출이나 하겠다고 마음먹은 내가 우스웠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말한 어젯밤의 나를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싶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엄마가 필요 없는 사람이고 싶었다. 마음대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집을 나갈 필요도 없고 누군가의 허락을 구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모도 어른이잖아. 어른인데도 할머니 눈치를 보고 데이트할 때마다 거짓말을지어내잖아. 생각이 점점 팽창해서 뇌가 간지러운느낌이었다. - P127

그리고 나는 자꾸만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왜 여기에 있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재작년 여름에는 다리가 너무 아팠다. 앉아도누워도 아팠다. 키가 크느라고, 뼈와 근육이 자라느라 아픈 거라고 할머니는 말했다. 머리가 아플때도, 감기에 걸렸을 때도, 배앓이로 고생할 때도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몸이 싸우는 거다‘ ‘몸이 자라는 거다‘ 내 몸은 멋대로 자라면서 나를 아프게 하고 어른들은 나의 모든 통증을 ‘크느라 그런다‘는 한마디로 덮어 버렸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모든 통증을 ‘늙어서 그렇다‘고 설명했다. 몸은자라고 늙는다. 통증을 느낀다. 정신은 몸인가? 영혼은?  - P130

사전에 정의된 ‘마음‘은 내가 생각하던 의미와비슷했지만 아주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마음‘
이 무슨 뜻인지 알고 쓰는 걸까? 우리는 서로 다른
‘마음‘을 같은 글자로 쓰는 거지. 각자 다른 의미를최대한 가까이 이어 보려고 계속 쓰고 말하는 거지. 그런데 어른들은 때로 내게 그 정도의 노력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나를 ‘몰라도 되는 존재‘로 치워 버린다.  - P131

나는 왜 태어났을까. 일찌감치 죽었으면 좋았을거다. 죽음이 뭔지도 몰랐을 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지. 죽은 사람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을 안타까워할 거다.
아픔이 뭔지도 모르는 천사는 엄마를 아프게 하고 죽었다.
천사가 죽었을 때는 그렇게 슬퍼했으면서 살아있는 나를 버렸다.
영혼에게 공간은 필요 없다. 천사는 그렇게 태어났다. 훨씬 넓은 세상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겨우 인간인 주제에 슬프다고 울었다.
내가 있는데 왜 그렇게 불행하냐고 말하고 싶었다. 엄마의 어두운 방에서 나는 나의 빛을 뽐내고싶었다. - P132

이모는사랑한다고 말하는 자기를 사랑한다. 이모는 행복해서 유치한 사람.
한수가 나쁜 년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말했을 때 나는 행복했다. 나는 내가 뭐라도 된 줄알았고 최소한 나쁜 년은 된 거니까.
간직하고 싶은 기억 같은 건 없다. 나는 없는 것같은데 없어지지도 않고.
나는 진짜 울어 본 적이 없다. 우는 나는 우습다.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는서로 모르는 것과 서로 잊은 것을 기억한다. 오직나만 우리를 망칠 수 있다.
나는 천사는 될 수 없다. 나는 악마는 될 수 있다.
모두 나를 견딘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나지 않았다. - P134

진실이라 생각되는 것을 쓰고 나자 시시해졌다.
펼쳐진 진실은 진실이 아니다. 나는 방금 모든 가능성을 닫아 버리는 세계를 경험했다. 이제 더는좋게 생각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예전처럼 틈새의 빛에 마음을 쏟지는 않을 것이다. - P134

해변은 휑했다.
아니, 가득했다. 비와 바람으로 거센 파도로.


휘몰아치는 비바람과 파도소리 때문에 귀가 얼얼했다. 우산을 쓸 필요가 없었다. 눈물을 참을 필요도 울음소리를 감출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에 서서 쓸모없는 우산을 간신히 들고 비 오는 바다를 바라봤다. 그건 정말…… 이상한 풍경이었다.
봄에 비가 내리면 꽃이 진다. 여름에 비가 내리면 개구리가 운다. 가을에 비가 내리면 낙엽이 물들고 겨울에 비가 내리면 눈을 기다리게 된다. 숲에 비가 내리면 나무가 자라고 논밭에 비가 내려서 - P164

면 곡물이 자란다. 운동장에 비가 내리면 흙이 젖고 도로에 비가 내리면 아스팔트가 식는다. 바다에 비가 내리면……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될 뿐이다. 무수한 물방울이 거대한 물에 합쳐질 뿐이다.
대체 무슨 소용이지? 물은 물이 되고 물은 다시 물이 된다는 게 아무리 애를 써도 나는 나밖에 될수 없다는 게? 물고기는 물고기로만 살고 새는 새로만 사는 자연의 이치를 생각하자 너무 갑갑했다. 어째서 그래야만 하지? 신은 신으로만 살까?
신은 우주인가? 우주는 우주로만 존재할까? - P165

나는 계속 나일뿐이지.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것 같고,이별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 같고, 포기를 위해 꿈꾸는 것만 같다. 가방에 국어사전이 있었다면 ‘허무‘라는 단어를 찾아봤을 거다. 내가 지금 느끼는이 감정과 ‘허무‘가 딱 들어맞는 단어인지 확인해봤을 거다. - P166

이별이란 이 정도로 어렵고 복잡한 일이란 걸. 이별은 다시 만나지 않겠다는 약속 아닌가? 엄마와아빠는 아직도 이별 중일까? 벌써 이별했을까? 남과 남이 만나서 사랑하는 사이로 지내다가 다시남과 남이 되는 거다. 그러니까 이별은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는 거겠지만… 완전히 처음과 같은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겠지. 젖은 채로 바람을 맞으니 추웠다. 그만 돌아가자고 말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계속 바라보고도 싶었다. 물이 물이 되는정직하고도 허무한 광경을 분노의 춤을 추는 비내리는 바다를. - P167

샌들을 벗어 젖은 모래를 털어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모는 야단맞은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겨우겨우 고맙다고 말했다. 좋은 옷을 꺼내 입고 반드시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던 엄마의 길 끝에는 집이 있었다. 엄마도 무서웠을까. 나를 보살피며 무서움을 덜어 냈을까. 엄마에게도 그리운마음이 있었던 걸까. 방금 이모가 말하길, 그리운마음은 착각이랬다. 이모는 오늘 무언가를 확인했다. 나도 확인하고 싶었다. - P169

올 때만큼 기나긴 길이 남아 있었다. 택시를 타고 버스를 타고 기차를 타고 집에 닿으면 깜깜한밤일 것이다. 여전히 비가 내릴까? 집은 변함없을것이다. 우리는 어제와 다르지 않은 방에서 똑같은 이불을 덮고 누울 것이다. 하지만 이모는 어제와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 잠들겠지. 비 내리는 바다를 봤고 사실을 확인한 나도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잠들 것이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섞인다고 하나가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이별할 수도 있다.
우리는 또 울겠지만 절대 같은 이유로 울지는않을 것이다. - P170

하지만 글자 그대로 ‘추운 사람‘일 수도 있다. 누군가를 춥게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추운 사람. 따뜻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추운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 그래서 바라보는 사람을 춥게만드는 사람. 나의 문제집에 자기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쓰고 그것을 지우는 엄마는 무척 추워보였다. 나도 나를 형편없다고 생각할 때가 아주많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데 엄마는 했다. 해 놓고 후회하듯 지웠다. 엄마는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훨씬 서투르고 나약한 사람인지도 몰라.
그렇다면 기꺼이 엄마의 핑계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내 핑계를 대고 잘 지내면 좋겠다고. - P181

나는 친구란 뭘까 생각했다. 우리는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떤 기억을 만들었나. 같이 있으면 재밌었고 질투했고 외로웠고 때로는 지겨웠고, 친하니까 더욱 비밀을 감췄던 우리들. 미지가 자조적으로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순간에도 ‘그래도 넌 인기도 많고 예쁘잖아‘라고 생각하면서 미지보다 더 불행한 이유를 찾으려는 내가너무 한심했다. - P204

많은 사람이 미지의그림을 보며 감탄했지만 미지는 자기 그림이 얼마나 특별한지 모르는 것 같았다. 숱하게 고백을 받으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미지는 누구나 고백을 받고 자기만큼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미지는 자기만을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미지가 좋았다. 나의 미래보다 미지의 미래가더 궁금했다. 미지 말이 맞다. 나는 나에 대해서는 - P208

비관적인 사람.
바닥에 닿자마자 녹아 버리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눈은 조금씩 쌓였다.
거뭇한 하늘은 점점 내려앉으면서도 차차 멀어지는 것 같았고.
비슷한 옷을 입고 겨울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은 자세히 보면 저마다 달랐다.
한때 나는 우리 모두 지옥에서 왔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도 있다. - P209

이제 정말오지 않을 거라고 미지는 말했다. 같은 다짐을 계속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겠지. 남들은 절대 알지못할 하루와 마음을 끌어안으며, 중요한 말일수록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하겠다는 생각보다는 하지않겠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하면서. - P210

깊은 비관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의 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일까.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본다면 마음이 편치 않을까.
답장을 쓰고 싶었다. 펜을 들었다. 어린 나에게이런 문장을 주고 싶었다.
나는 불행하지 않다. 그래도 너는 행복하면 좋겠어.
하지만 나는 위와 같은 문장을 줄 수 없다. 행복은 나의 몫이다. - P212

나는 다시 빠르게 일기를 훑었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모와 속초 바다를 보고 왔다‘라고 시작하는 일기에서 멈췄다. 그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비는 비고 바다는 바다다. 나는 나만 될 수 있다. 나는 남이 될수 없다.‘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지난 번 카페에서. 1년 후에 정말 그 편지를 받을 수 있을까.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없지만, 그래도 변치 않은 부분은 존재할 테고, 일기의 마지막 부분을 읽는 순간 마치 만난 것만 같았다. 문장 속에서. 과거의 나를. - P221

말하면서 예감했다. 언제가 되었든 나는 이것을버릴 수밖에 없으리라. 엄마나 할머니의 손이 아니라 내 손으로 할머니가 내게 남긴 진짜 유산은 바로 그런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럼 테이프로 박스를잘 포장해 두라고 엄마는 말했다. 테이프와 가위를 찾아 박스를 밀봉하려다가 일기장을 살짝 들춰봤다. 입 속의 혀처럼 편지 봉투는 거기 잘 들어 있었다. 아주 닫아 버리기 전에 다시 한번 읽어 보고싶었다.
봉투를 열고 종이를 펼쳤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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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랜도는 하루하루를 대개 이와 같이 보낸 듯하다. 7시쯤일어나 긴 터키 망토로 몸을 감싸고, 궐련에 불을 붙인 뒤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곤 했다. 그렇게 서서 도취된 듯 발아래펼쳐진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는 안개가 너무 짙게끼어서 산타 소피아 성당의 반구형 지붕과 다른 건물들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개가 차차 옅어지면서 본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단단히 뭉친 물방울들이 보이기도 했다. 저기에 강이 있고, 저기 갈라타 다리가 있다. 저기에 눈이나 귀가 없는 순례자들이 녹색 터번을 두르고 동냥을 하고있다. 저기에 잡종 개가 죽은 동물의 내장을 파헤치고 있다.
저기에 숄을 두른 여자들이 있다. 저기에 수많은 원숭이들이있다. 저기에 긴 장대를 들고 말을 탄 남자들이 있다. 오래지않아 온 도시가 채찍 소리, 징소리, 기도를 올리는 외침 소리, 당나귀를 내리치는 소리, 놋쇠로 보강된 바퀴가 덜컹거리는 소리로 깨어났다. 그동안 발효된 빵과 향, 향신료에서나는 시큼한 냄새가 페라의 고지까지 올라왔는데, 그것은 피부색이 다양한 야만적 주민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내뿜는 숨결 같았다. - P126

거기에는 목사관도 없고, 영주의 저택도 없었다. 오두막도,
참나무도, 느릅나무도, 제비꽃도, 담쟁이도, 들장미도 없었다. 양치류가 타고 오를 산울타리도 없고, 양들을 방목할 초윈도 없었다. 집들은 달걀 껍데기처럼 하얗고 아무런 꾸밈도없었다. 뿌리부터 속속들이 영국인인 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친 전경에서 마음속 깊이 환희를 느끼고, 멀리 저 산길들과 고원을 거듭 바라보면서 예전에 염소들과 목동들만다녔을 저곳을 혼자 걸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절기에맞지 않는 화려한 꽃들에 열렬한 애정을 느끼고, 너저분한잡종 개를 고향의 사냥개보다 더 사랑하고, 거리의 매캐하고톡 쏘는 냄새를 열렬히 콧구멍에 들이마신 것은 스스로에게도 놀라웠다. 그는 십자군 전쟁 시절에 자기 조상 중 한 사람이 체르케스족의 소작농 여성과 어울리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럴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자기 얼굴이 약간 거무스름한 편이라고 상상하고는 몸을 씻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 P127

그 소문들은 이제 인생의 전성기에 이른 그가 사람들의애정을 불러일으키고 눈길을 사로잡는 힘을 갖고 있음을 입증한다. 그 힘을 보존하기 위한 보다 지속적인 자질들까지모두 잊힌 후에도 그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 힘은아름다운 외모와 혈통, 그리고 희귀한 천부적 자질이 혼합된신비로운 것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매력이라고 부르고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사샤가 말했듯이 그는 촛불 하나를밝히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의 내면에서 1만 개의 촛불이타올랐다. 자기 다리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아도 그가 걸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수사슴 같았다. 그가 평상시의 목소리로 말해도 그 메아리는 은으로 만든 징처럼 울렸다. 그런 까닭에 그를 둘러싼 소문이 무성했다. 많은 여자들과 몇몇 남자들이 그를 흠모했다. 그들은 그에게 말을 걸 필요도, 그를볼 필요도 없었다. 특히 낭만적인 경치가 펼쳐지거나 해가지고 있을 때 그들은 실크 스타킹을 신은 귀족 신사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렸다. 올랜도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부자들에게 그렇듯 똑같이 매력을 발휘했다. - P130

신사들은 모두 정중하고…… 너와 사랑하는 벳시가 이곳에있기를 수천 번이나 바랐고……… 그런데 모든 이들이 바라보고, 모든 눈들이 주목한 대상은.....… 그 점을 부정할 만큼 고약한 사람은 없으니까 모두들 인정했듯이 그건 바로 대사님이었어. 그토록 멋진 다리를 갖고 있다니! 그토록 멋진 얼굴이라니! 그토록 기품 있는 태도라니! 그분이 방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보면! 그분이 다시 나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데 그분의 표정에 어딘가 관심을 끄는 구석이 있어서, 왠지 모르지만 그분이 고통을 받았다고 느끼게 되더구나! 사람들 말로는어떤 숙녀 때문이래. 몰인정한 괴물 같으니! 다정한 존재라고일컬어지는 우리 여성 중 한 명이 어찌 그리 뻔뻔스러울 수 있는지! 대사님은 미혼이고, 그곳에 모인 숙녀 중 절반은 그분을 열렬히 사랑하고 있어...….  - P135

이튿날 아침에 이제는 공작으로 불려야 할 올랜도가 잠옷엉클어진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을 그의 비서들이 발견했다. 침실은 약간 어수선했고, 그의 보관은 굴러떨어져바닥에 뒹굴었고, 망토와 가터 훈장은 의자 위에 무더기로던져져 있었다. 탁자에는 서류가 흩어져 있었다. 전날 밤의피로가 상당했기에 처음에는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가 되어도 그가 여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자 의사를불러왔다. 의사는 연고와 쐐기풀, 구토제 등 예전에도 사용했던 비법을 써보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올랜도는 계속 잠에 빠져 있었다. 그의 비서들은 탁자 위의 서류들을 검토할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를 갈겨 쓴 종이가 많이 있었는데, 참나무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 P138

그가 수면 상태에 빠져든 지 이레째 되는 날(5월 10일 목요일), 브리그 하사가 그 징후를 처음 감지했던 무시무시하고 유혈 낭자한 폭동의첫번째총성이 터져 나왔다. 술탄에 저항해서 봉기한 터키인들이 온 도시에 불을 지르고 눈에띄는 외국인들을 칼로 찌르거나 태형에 처했다. 몇몇 영국인들은 가까스로 달아났지만, 영국 대사관의 신사들은 예상할수 있는 대로 정부 서류함을 지키다가 죽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열쇠 더미를 이교도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삼켜 버리는쪽을 택했다. 폭도들은 올랜도의 방에도 쳐들어왔지만 겉보기에 죽은 듯 쭉 뻗어 있는 그를 보고는 손대지 않고 내버려둔 채 그의 보관과 가터 예복을 빼앗아 갔을 뿐이었다. - P139

그의 기억은 그런데 앞으로는 관례에 따라 <그의> 대신 <그녀의>라고 말해야 하고, <그> 대신 <그녀>라고 말해야 하니 그녀의기억은 아무런 장애도 맞닥뜨리지 않고 과거 생애의 온갖 사건들을 생생히 되돌아볼 수 있었다. 기억의 맑은 연못에 검은물방울 몇 개가 떨어진 것처럼 약간 흐릿한 부분이 있을지도모른다. 어떤 일들은 조금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고통 없이 완벽하게, 올랜도 스스로도 놀란 기색이 전혀없게끔 변화가 일어난 것 같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성의 변화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난 것이라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입증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1) 올랜도는 언제나 여자였다. (2) 올랜도는 이 순간도 남자이다.  - P144

인간의 성과 성징을 다루는 일은 다른 이들에게 맡기자.
우리는 그런 불쾌한 주제에서 가급적 빨리 발을 빼려한다.
이제 올랜도는 몸을 씻었고, 성별과 무관하게 입을 수 있는터키식 코트와 바지를 입고 나서 자기 처지를 생각해 보아야했다. 지금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공감하며 따라온 독자라면그녀가 몹시 위태롭고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으리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오를 것이다. 젊고 아름다운 귀족인 그녀는 잠에서 깨어나 보니 신분 높은 아가씨에게는 더없이 난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녀가 벨을 누르거나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해 버렸다 해도 우리는 그녀를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올랜도는 혼란스러운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행동은 극히 용의주도해서,
미리 계획한 징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할 수 있었다.  - P145

산꼭대기에서 저 멀리 마르마라 바다 너머의 그리스 평원을 바라보면서(그녀의 시력은 놀라웠다) 분명 파르테논 신전일 것이라 짐작되는 희고 기다란 줄한두 개가 보이는 아크로폴리스를 알아보았을 때, 그녀의 동공과 더불어 그녀의 영혼도 확장되었다. 그녀는 자연의 신도들이 모두 그렇듯이 산의 장엄함을 공유하고 초원의 평온함을 나눌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러고나서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면 붉은 히아신스와 자주색 붓꽃에 마음이 동해서 자연의 선함과 아름다움에 황홀해하며 소리쳤다. 다시 눈을 들어날아오르는 독수리가 보이면 그것이 느낄 환희를 상상하며자기도 그런 환희를 느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별과봉우리, 횃불이 제각기 자기에게만 신호를 보내 준 듯이 인사를 보냈다. - P149

올랜도는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집시들을 떠나 다시 대사가 되는 것은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잉크도, 종이도 없고, 탤벗 가문에 대한 존경심이나 수많은 침실에 대한 존중심이 없는 곳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도마찬가지로 불가능했다. 어느 맑은 날 아침에 아토스산의 비탈에 앉아 염소 떼를 돌보면서 그녀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때 그녀가 신봉하는 자연이 아마도 어떤 속임수를썼거나 기적을 만들어 냈을 것이다. - P155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고 또렷해 눈 속에서 벌레를 쪼아 대는 까마귀도 볼 수있었다. 그러고 나서 자줏빛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지더니 수레와 잔디밭과 방대한 저택을 뒤덮었다. 모든 것을 완전히삼켜 버렸다. 이제 그 초록색 구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초록색 잔디밭이 아니라 눈부시게 빛나는 산비탈뿐이었고 수천 마리의 독수리가 쪼아대서 풀 한포기 없이 헐벗은바위 같았다. 그러자 그녀는 격렬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성큼성큼 걸어 집시들의 야영지로 돌아가서, 바로 이튿날 배를 타고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 P157

그녀는 생각했다. <여자들이 (내가여자로서 짧은 기간에 경험한 것으로 판단하자면) 순종적이거나 순결하고, 향기롭고 아름답게 가꾸는 것은 천성이 아니니까. 여자들은 삶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이런 매력을 더없이 따분한 훈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어. 머리치장만 봐도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그것만으로도 오전에 한 시간은 걸릴 거야. 거울을 들여다보는 데 또 한 시간이걸리고. 코르셋을 하고 끈을 졸라매고 몸을 씻고 분을 바르고, 실크 옷을 벗고 레이스를 입고, 레이스를 벗고 실크 드레스를 입고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와도 순결해야 하고…….〉이런 생각을 하다가 짜증이 나서 그녀는 발을 휙 쳐들었는데,
종아리가 몇 센티미터쯤 드러났다.  - P163

 <가난과 무지에 휩싸여 있는 편이 나아. 그건 여성의 검은 옷이지. 세상의 규칙과 원칙을 남들에게 맡기는 편이 나아. 호전적인 야심이나 권력욕, 온갖 남성적인 욕망에서 벗어나는 편이 나아.
인간의 영혼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황홀함을 더 속속들이느낄 수 있으려면 말이야. 그녀는 마음에 깊은 울림이 있을때 습관적으로 그랬듯이 소리내어 말했다. 사색과 고독, 사랑을 만끽할 수 있으려면.」「고맙게도 나는 여자야!」 그녀는 이렇게 소리쳤고, 자신의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극단적인 어리석음에 여자에게든 남자에게든 이보다 더 애처로운 일은 없다―빠져들 뻔했다. 그런데 그때 제자리에 집어넣으려고 아무리 애써도 마지막 문장 끝에 기어 들어온 한 단어, 사랑에서 멈췄다. 「사랑」그녀가 말했다. 그 즉시 - 사랑은 이렇게나 성급하므로사랑은 인간의 형태를 띠었다.  - P167

선원들이 <안녕히가세요, 안녕히, 스페인의 숙녀들>이라고 노래하기 시작했을때, 그 가사가 올랜도의 슬픈 가슴에 메아리쳤다. 뭍에 오르는 것이 아무리 크나큰 안락과 풍요, 높은 지위와 신분을 의미한다 하더라도(의심할 바 없이 그녀는 어떤 귀공자를 선택하고, 그의 배우자로서 요크셔 절반을 지배할 테니까) 그래도 만일 그것이 인습과 노예 상태, 기만을 의미한다면, 자신의 사랑을 부정하고 자신의 팔다리에 족쇄를 채우고 입술을오므리고 혀를 억제하는 것을 뜻한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다시 그 배를 타고 방향을 돌려 집시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 P170

그녀가 가슴 속에 간직한 것은 부적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성이 무엇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따위의 성적 혼란이 가라앉았다.
이제 그녀는 시의 찬란한 아름다움만 생각했다. 말로와 셰익스피어, 벤 존슨, 밀턴의 위대한 시행이 웅장하게 울리고 메아리쳤다. 그녀의 마음이라는 성당 탑의 황금 종에 황금 추가 부딪힌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처음에 아주 희미한 형체를 포착했고 시인의 이마를 연상시키면서 일련의 무관한 생각들을 불러일으켰던 그 대리석 돔의 형상은 사실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 실체였다. 배가 순풍을 받아 템스강으로 올라가면서, 온갖 연상을 불러일으켰던 그 이미지가 진실을 드러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번개무늬로 세공된 흰 첨탑들 사이에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성당의 반구형 지붕이었다.
「세인트 폴 성당입니다.」 - P171

하인들은 돌아온 올랜도가 자신들이 예전에 알던 올랜도가 아니라는 의혹을 한순간도 품지 않았다. 혹시 인간의 마음에 어떤 의혹이 있었다 해도, 사슴과 개들의 행동을 보면그런 의혹이 말끔히 사라졌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말 없는 동물들은 정체나 특징을 인간들보다 훨씬 더 잘 감지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주인님이 레이디가 되셨다면그분보다 더 사랑스러운 숙녀는 본 적이 없고, 또한 그 두 분이 엇비슷해서 어느 쪽이 더 낫고 말고 할 것이 없다고 그림스디치 부인은 그날 밤 차를 마시며 더퍼 씨에게 말했다. 주인님이나 마님이나 똑같이 잘생기셨고, 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복숭아 두 알 같다고 했다. 그런데 자신은 그럴지 모른다고 늘 의심해 왔기에 (이 부분에서 그녀는 아주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놀랍지 않은 일이며(이 부분에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에게는 매우 큰 위안이 되는 일이라고 그림스디치 부인이 속내를 털어놓았다. 수건들을 손질해야 하고, 목사님 응접실의 커튼 가장자리에 좀이슬어서 집 안에 마님이 계셔야 할 때라는 것이었다. - P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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