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사(佛寺) 의 석굴(窟), 언제부터인지 우리가 석굴암石窟庵) 이라고 잘못 부르고 있는 저 위대한 존상에 대하여 내가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말하려 함이 행여 하나의 오만이 아닐까 두렵다.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高)의 최미(最美)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지금도 석불사의석굴 앞에 서면 숨막히는 감동과 살 끝이 저려오는 전율로 인하여 감히 아름답다는 말 한마디조차 입 밖에 내는 것을 허용치 않으며 오직 침묵 속에서 보내는 최대의 찬미만이 가능하다. 우리는 석굴에 감도는 고요의 심연에서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신비롭고 장중한 정밀의 종교음악을감지할 뿐인 것이다. - P159
석굴에는 불(佛), 보살(菩薩), 천(天), 나한(羅漢)이 모두 마흔 분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천상의 질서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팔만대장경으로 설명한 장엄하고 오묘한 불법이 이 하나의 석굴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 절묘한 만다라를 모두 해석해낼 학자는 아직 없다. 석굴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술로 축조되었다. 석굴의 구조는 그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數理)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있다. 남천우 교수는 석굴을 측정하고서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자르고 깎아 세우면서도 10m를 재었을 때 Imm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 - P159
다. 다시 말하여 1만분의 1의 실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기술에는 우리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보수에 보수를 거듭하면서도 온전한 보존책을 아직껏 마련치 못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기술만 과신하고 고대인의 과학을 무시했던 소치였다. folk okk석굴의 제존상(諸尊像)은 분명 종교예술품이다. 아무런 생명도 성격도없는 돌을 깎아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절대자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종교적 열정에 근거한 예술혼의 산물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 예술성을비판하거나 의심한 사람은 없다. 그 어떤 독설의 비평가도 이 앞에선 입을열지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어떤 시인도 석굴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노래하지 못했다. 고은 선생은 석굴 앞에서 "모든 이 나라의 찬미() 형용사는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른 것을 찬미하기위하여 나갔으니 석굴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 P160
그리하여 나는 석불사 석굴에 대하여 완벽한 인간공력이 이루어낸 경이로움만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 오직 한마디만 덧붙일 수 있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수 없다.
그리하여 이제부터 시작하는 석불사에 대한 나의 이야기는 다만 그 신비와 신비를 밝히기 위한 노력들과 이 위대한 인류의 유산을 지키기 위해자신의 일생을 거기에 걸었던 소중한 인생들에 대한 증언, 그리고 20세기한국사의 슬픈 굴절 속에서 석굴이 겪어야만 했던 쓰라린 아픔을 말하는석불사 석굴의 영광과 오욕의 이력서를 쓰는 일뿐이다. - P160
석불사는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챠이티야(chaitya, 塔)라고 하여 암석을 파고 굴을 만들어 그안에 도량을 세우는 방법이다. 이는 장방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구성되며 주실 중앙에는 스투파(stupa, 탑)가 있어 참배자들이이 스투파를 돌며 예배하게끔 되어 있다. 석불사의 석굴도 기본구조는 이챠이티야와 같다. 챠이티야는 기원전 무불상시대에서 기원후 불상시대로 넘어오면서 주실에 불상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돈황 · 운강·용문석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석굴사원을조영할 수 없었다. 우리나라의 산은 노년기 지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처럼 쉽게 굴착될 수 있는 사암(砂岩)이없다. 그래서 이를 변형하여 백제의 서산 마애불처럼 바위에 새기거나 고신라의 감실부처님처럼 작은 규모로 바위를 깎거나, 통일신라 이후 군위의 삼존불처럼 자연석굴을 이용한 석굴사원이 있었을 뿐이다. - P164
이 당시 모습을 그려보면 지금처럼 목조건축의 전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금강역사상 양옆으로 팔부중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중 하나는 깨져버렸고 사천왕이 늘어선 비도(道) 앞에 무지개 형상의 돌문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그리고 정시한은 그 다음날 봇짐을 진 한 거사를 만났는데 그는아내를 데리고 전주에서 불국사·석굴을 다니러 오는 길이라고 했다 하니당시에도 여전히 탐승객, 참배객이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18세기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의 모든 산사들이 새로운 중창의 시기를맞이하듯이 석불사도 중수(重修) 를 맞게 된다. 1740년에 발간된 『불국사 고금창기(古記)』 를 보면 "1703년에 종열(從)이 석굴암(승방)을 다시 짓고 또 석굴 앞에 돌계단을 쌓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석굴에 어떤 이상이 있었다는 말은 없다. 그후 손영기(孫永)라는 사람이 쓴 「석굴암 중수상동문(重修上陳文)」에 의하면 1891년에 석굴은 조(趙)씨 성을 가진 순상(巡相, 병마사)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였는데 그 중수의 내용과 규모는 확실치 않고 다만 "불국지석굴(佛國之石窟)"이라고 한것을 보아 이미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음만은 확인할 수 있다. - P170
잊혀져가는 명작, 석불사의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1907년 무렵이었다. 때는 1905년 11월 일제의 군사적 협박으로 체결된 을사보호조약 이후이른바 보호정치의 명분으로 조선통감부가 서울 남산, 지금 안기부자리에 설치되고 초대 통감(統監) 으로 이또오 히로부미가 부임해왔을 때이다. 내 언젠가 다시 증언할 기회가 있겠지만 이또오 히로부미는 이 땅에 도굴을 조장한 장본인이었다. 그는 무수한 고려청자를 일본 천황과 귀족사회에 선물하였다. 그로 인해 고려시대 고분이란 고분은 모조리 파괴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 P171
그러나 석굴의 개수공사는 1200년을 유지해온 석굴에 돌이킬 수 없는치명상만 주었다. 그리고 외형상에도 무수한 변조가 가해져 야나기 무네요시는 장문의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을 『예술(藝術)』지 1919년 6월호에 발표하면서 다음과 같은 통탄의 비판을 가하였다.
나는 이것(보수된 돌담)을 보았을 때 그 몰취미한 행위에 크게 놀랐다. 무슨 이해가 있다고 거의 터널의 입구로 잘못 보는 그러한 건설을해놓았을까? 나는 이것이 석불사의 수리가 아니라 새로운 파손행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기사는 비록 과학적인 수리를 했다 하더라도아무런 예술적 수리는 알지 못한 것 같다. … 될 수만 있다면 저 돌담을파괴해서 그 수리는 조선인 자신에게 맡기고 싶다. 석불사는 다행히도 왜구의 화를 면했다. 그러나 수리라는 이름 아래 새로운 모욕을 당했다. ..… 만약 그 수리가 단순히 천장을 덮고 각 돌담의 위치를 제자리에갖추는 데 그쳤더라면 얼마나 아름답게 되었을까? 나는 파손된 채로 있는 그때의 사진과 수리 후의 사진을 비교해보면서 예술을 모르는 죄많은 과학의 행위를 미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180
나는 어느 해인가 리프스의 미학책을 트렁크에 넣어가지고 경주 석굴암을 찾아 그 앞에 있는 조그만 암자에서 한여름을 지낸 일이 있었다. 리프스의 조각에 관한 이론을 기준으로 석굴암을 설명해보려 하였던 것이다. 석굴암 속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무한 애를 써보았으나 어떻게 하였으면 좋음직하다는 엄두도 나지 않았다. 오래 머물러 있었던 덕에 아침 저녁으로 광선 관계가 달라진다든가, 특히 새벽에 해 돋아오를때도 좋지만 둥근 달이 석가상을 비출 때면 석굴암 전체가 그야말로 신비의 세계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우리 미술사는 석굴암을 설명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자 계속할 용기가 없어지고 말았다. 나는 기초적인 학문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되겠다고 절실히 느꼈다.
그리하여 청년 박종홍의 한국미술사 탐구는 여기서 좌절되고 그 이듬해에 개교한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철학개론부터 다시 배우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리고 박종홍은 훗날 야나기가 쓴 석불사에 관한 글을 읽고는 큰 감명을 받았고 그때 그만두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P184
석불사 석굴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최초로 본격적인 글을 발표한 것은야나기 무네요시(柳宗 悅, 1889~1961)였다. 1919년 6월 예술』지에게재된 그의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논문 부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조선의 예술에 대하여 두터운 흠모의 정을 품고 있다. 특히 이 석불사의 조각은 내 여행중 나를 자극한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걸작이 아직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널리 소개하는 최초의 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이 소개를 객관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지극히 멋없는 글이 된것을 마음 괴롭게 생각한다. ... 그러나 다소는 나의 사랑을 전달할 수 - P185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내가 맛본 이해의 어느 부분은 반드시 정당하다는 것을 믿는다.
사실상 야나기의 이 글은 그의 문(文)이 보여주는 아련한 분위기는 상당히 죽어 있다. 『삼국유사』와 『불국사사적』의 장문을 인용하고40개 존상의 배치를 도면으로 그려가며 일일이 설명하자니 그럴 수밖에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물 설명에 들어가면 그 해설이 자못 황홀해진다.
실로 석굴암은 분명히 하나의 마음에 의해 통일된 계획의 표현이다. 인도 아잔타나 중국 용문석굴처럼 ... 누대의 제작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하나의 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연한 구성이다. 서로가서로를 살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적 제작이다. 외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놀랄 만큼 주도면밀히 계획된 완전한 통일체이다. - P186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도 또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불타는 소리없이 조용히 그 부동의 모습을 연화좌대 위에 갖춘다. 우러러보는 자는 그 모습의 장엄과 미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이다. 이곳은 완전히 내적인 영의 세계다. 그는 앞에 네 명의 여보살음을, 뒤에는 십일면관음을, 그리고 좌우에는 그가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영원의 영광을 고한다. 감실에 있는 여러 불상들은 그 법열을 찬송하는 듯하다. 여기는 석굴 밖) 외부의 힘의 세계가 아니다. 내적인 깊이의 세계다. 미와 평화의 시현이다. 또한 장엄과 그윽함의 영기(靈氣)이다.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 안팎에 나타나 있는가! 모든것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간다. 힘에서 깊이로 들어간다. 움직임〔動]보다도 고요함(靜〕 속에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석굴암 속에서 다하는 느낌이다.
야나기의 해설은 그칠 줄 모르는 탄미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는 부질없 - P186
는 형용사의 나열이 아니라 심리적, 철학적, 종교적 인식에 도달하는 사색의 깊이를 지니고 있다. 야나기는 스스로 미술사를 전공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석굴의 여러 조상들을 보면서 굴 밖의 수호신상에서 굴 안의 불보살상으로 들어가면서 힘의 세계에서 내면적 성찰의 계기로 바뀐다는 탁견을 내놓았다. 뿐만 아니라 그 기법과 내용이 점차 진보된 발전의 발자취를 느낀다며그것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씨스띠나 성당 벽화를 5년간 그리면서 최초 작품 「노아의 방주」에서 최후 작품 「천지창조」 사이에 보여준 미묘한 차이와 같다는 점까지 읽어낸 것이다. 야나기의 뛰어난 안목이 밝혀낸 또 하나의 중요한 관찰은 모든 조상들이 갖는 시선의 방향 문제이다. 그는 한 사람의 참배자, 즉 사용자 입장에서 석굴암을 한바퀴 돌 때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 변화를 이 조상들의 시선처리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 P187
나아가서 그는 석굴의 부조들 중에서 왜 정면을 향하고 있는 십일면관음과 인왕상만이 환(丸)의 높은 돋을새김을 했는가를 논하고 있다. 어느 면에서나 야나기는 뛰어난 미술사가였고 탁월한 양식분석가였다. 석불사의 조각에 대한 그의 예찬은 본존불의 설명에서 절정을 이룬다.
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 뜻을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말할 수없다는 사실에 이 불상의 아름다움이 있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아무런 - P188
착잡한 수법도 보지 못한다. ・・・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한 것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실로 아무것도 없는 지순(純)의 그 속에서 작자는불타로서 지고의 위엄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용모에 모여 있다. 그는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입은 다물고 눈은 쉬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는 어둡고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이 석굴 안에앉아서 깊은 좌선에 몰두하고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 간이다. ・・・ 모든 것을 포함한 무(無)의 경지이다. 어떠한 참된 것도 어떠한 아름다움도 이 순간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선 종교도 예술도 하나다.
석불사 석굴에 대한 야나기의 통찰과 그것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찰은미학적 고찰이 추구하는 학문적 모색과는 다른 방향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수필가나 미가(家)로만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침묵의 물체를 보면서 거기서 일어나는 감정이입의 상태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솜씨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는 스스로 미학자(學者)가 아니라고 하였지만ㅡ철학을 배우는것보다 ‘철학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을 때 이미 그는 ‘미학하는 법‘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 P189
거대한 연화대좌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9척 고상(像)이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印相)으로 온화하고 엄숙한 봉의 눈을 반개하고동해 창파를 굽어살펴 듬직이 앉아 계신 위용! 결가부좌하신 발모습[相]도 평안하고 두루원만[ 하시거니와 무릎도 섬세한 듯圓]둥글고 무릎까지 뻗어내린 긴 손도 살찐 듯 부드럽고 온화하시거니와양어깨 양팔도 풍만하고 원하시고-가슴도 장엄하시거니와 등줄기도 곧고 엄숙하시고 귓밥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도 두툼하니 내리셨거니와 콧날도 우뚝하시고 눈동자도 빼어나거니와 머리도 원만하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가슴도 없고 정(情)도 없는 화강 거석에서 맥박이 충일하고 신성(神性)이 횡일하고 호흡이 가지런하고 온화함과 엄숙함이 구비된 위대한 이 상이 드러날 때 환희는 조각공의 손끝에 있지 아니하고 신라 천지에 휩싸였을 것이요, 우주 속에 메아리 쳐 퍼졌을 것이다. - P190
우현 선생은 석굴의 구조에 나타난 유동성(流動性)은 가히 기운생동(氣韻生動的) 경영이라 하며 야나기가 ‘누천의 찬사‘를 보낸 시점의 이동에 덧붙여 본존불의 광배가 석굴 후벽에 설치된 것과 천장덮개돌의 연화문 원석이 어울리는 절묘한 발상을 이렇게 설명하였다.
대개 불상의 후면 광배는 원상에 직접 부착되어 있는 까닭에 매우 공예적 고정성과 비현실적 부자연성이 많은 것이지만 이 불상의 광배는원상과 멀리 떨어져 따로이 벽면에 가 붙어 있는 까닭에 이러한 결점이사라졌을 뿐더러 보는 이의 행보위치를 따라 자유로이 유동되어 급기야원상 직전에 다다라 온안(溫顔)을 우러러볼 때는 이 광배가 어느덧 정상의 연꽃으로 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이것이 천장 정중앙에 남아있는 일타연화(一朶蓮花)의 존재이유이다. 이와같이 배광이 본체에서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체를 항상 떠나지 않고 비추고 있는 점에다른 어느 조각품에서도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일반 불상조각이 그객관적 소재성에서 받는 불가피한 고정감을 끝까지 버리고 이와같이 자연적 사실성을 살려 유동성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경탄할 신기(神)라아니할 수 없다. - P192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불상조각의 흐름을 크게 세 갈래로 보았다. 삼국시대의 그것은 상징주의, 통일신라의 그것은 고전주의 내지 이상주의, 고려시대의 그것은 낭만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측면관을 전혀 무시한 정면성의 강조와 살붙임의 변화를 갖지 않는 부분부분의 조립적, 구축적 특질과 옷주름의 양식화된 도식적 평면전개로 전체적으로 기계적인 경직함과 추상적 신비함으로 충만된 상징주의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조각은 살붙임이 풍부하고따라서 입체적인 깊이와 양적 크기를 증가하여 모든 굴절은 자연적인 유기적 연관을 보유하고 설명적, 평면적 전개는 없고 가장 이상화(理想化) - P192
석굴암의 조각들은 8세기 중엽 신라 조각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이 조각들은 외형과 내면의 미를 함께 융합한 최상의 종교조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6세기에서부터 시작하여 2세기 동안에 연마된 신라인들의 조각기술을 총집산하고 결산한 감이 있다. 침울한 표정, 조용한미소, 이러한 과거의 동작들이 지양되고 이제 신라 불상들은 고요한 정밀의 심연 속에서 정좌하고 있으며 여기에서 멈추어진 웃음을신라불상들은 다시 되찾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그 얼굴은 시대가 내려가면서 점점 굳어지고 무서워지고 무표정해지고 그리고 차디찬 형식적인 불안(佛)으로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석굴암의 불상들은 이러한하강이 시작되기 전의 고비에 서 있는 분수령 같은 존재이다. (김원용. 안휘준, ‘한국미술사, 서울대출판부, 1993) - P193
불상이란 곧 인간이 만들어낸 절대자의 상이다. 신, 절대자, 완전자, 그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곧 이상적 인간상의 구현이다. 그것은 모든 고대인들이 추구한 조화적 이상미이기도 하다. 모든 양극의 모순이 극복되어 하나의 이상적 질서를 이룰 때 우리는 그것을 고전적 가치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고전은 고전으로서 통한다. 그것은 양의 동서, 때의 고금을 관통하는 이상인 것이다. 그리하여 고유섭 선생은 「우리는 고대미술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에서 석불사 석굴(신라미술)의 미학을 세계사적 시각으로 풀어 이렇게 말하고 있다. - P193
석굴구성의 기본은 반지름을 12자 (지름 24자는 1일 24시간에 일치)로 하는 원 (360도는 1년 360일에 일치)이다. 석굴 출구의 12자는 1일(12刻)에 해당하고 궁륭천장(천체우주)은 같은 원둘레에 구축하여 유구한 세계를 표현하고 그 중심 (천장덮개돌)에는 원형 (태양)으로 큼직하게 연꽃덮개돌을 만들고 구면 각 판석의 사이에 팔뚝돌이 비어져별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 P197
나는 요네다의 짧은 일생 속에 담겨진 많은 의미를 생각해본다. 35세의젊은 나이로 죽는 그해까지도 땡볕에서 부소산성을 측량하던 백면의 기술자이고 무명의 건축학도였던 그가 7년간 말없이 성실하고 치밀하게 측량했던 그 경험을 토대로 불과 3년 만에 이처럼 위대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인생을 사는 법과 학문하는 법을 동시에 배우게 된다. 그의 삶과 학문은 ‘작은 것의 힘, 작은 것의 위대함,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미국의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는 그의 조수가 많은 건축시안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 하나만 가져오라며 "적은 것이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고 했다고 한다. 명나라 문인화가 동기창(董其昌)은 역대의 명화를 작은 화첩에 옮겨 그려보고서는 그 화첩의 제목을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들어 있다‘는 뜻으로 ‘소중현대 (小中顯), 라고 하였다. 요네다의 학문에는 곧 ‘소중현대‘의 방법론적 실천이 있었으며 그의 일생은 ‘소중현대적‘ 인생이었다. - P197
나는 항시 관(官)이 하는 일보다도 민(民)이 하는 일이 빛날 때 그 문화는 성숙한다고 믿고 있다. 세상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에 매달리는 스테이지 체질들이 제품에 사그라들고, 남들은 뭐라고 하든 곰바위처럼 자기가 생각한 일에 일생을 거는 쇠귀신 같은 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4천만이 들떠서 레게춤을 흔든다 해도 단 한 명만이라도 그러지 않는 인생이 있다면 우리 문화는 죽지 않고 영원하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지난 1세기 한국역사가 나에게 가르쳐준 값진 교훈이었다. 김효경 박사는 석굴에 기계설비 장치를 할 때의 개인적인 한 에피쏘드를 이렇게 회고하였다. - P228
그날 내게 다가오는 석불사 석굴의 조각은 맹목적 보편성을 드러내는아카데미즘이 아니었다.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엔 절대자의 기품이 강하였다. 엄숙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했다. 젊다고 생각하려니 너무 의젓하고노숙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탄력있었다. 남성으로 보려 하니 풍염하고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였다. 그리하여 혹자의 "아버지라고 보려 하니 너무 자비롭고, 어머니로 보려 하니 너무 엄격했다"는 말도 생각났고, 이 세상의 질서와 평화가 저 한 몸에 있다는 말도 생각났다. 본존불의 고전주의적 기품이 중심을 이루면서 10대제자상의 강렬한 리얼리즘이 포진하고 있는가 하면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의 문수·보현, 제석천·범천이 얇은 돋을새김으로 환상적 이상주의적 자태를 보여주며, 11면관음보살은 여지없는 ‘미스 통일신라‘로 석면을 뛰쳐나올 듯한 자세로 다가온다. 고개를 들어 감실의 세상 둘러보니 지장보살은 의젓하고을유마거사는 열변을 토하는데 유희좌(遊戱坐)로 몸을 비틀고서 무릎에 턱을 괸 어여쁜 보살은 상기도 조는 듯 눈을 내리고 있다. 그 아련한 분위기에 나는 오랫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무어라 표현할 말이 없었다. 그저 종교와 예술과 과학이 어우러진지고의 최미라는 딱딱하고 의례적인 정의 이상 내릴 수 없었다. 내가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아서 말할 수 없다"고한 것은 그때의 경험이었다. - P234
한탄강이 내세우고, 철원땅이 자랑하는 최고가는 명승지는 고석정이다. 철원평야를 가로지르는 한탄강 물줄기가 고석정에 이르러 펼쳐놓는 풍광은 우리나라 어느 지역에서도 볼 수 없는 호쾌한 정경이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강변의 정경은 백사장과 함께 어우러지는 들판아래쪽의 강이다. 그러나 고석정은 이른바 협곡으로, 넓은 들판이 푹 꺼진양 절벽 아래쪽으로 시퍼런 강물이 S자로 맴돌아 흘러가고 그 강 한가운데 우뚝 선 바위섬이 고석정이니 절벽 위에서 강물을 내려다보는 경관은마치도 부감법으로 조망하는 시원스런 눈맛을 갖게 한다. 이런 자연현상은 화산활동 때 일으킨 지각변동이 연출한 것이다. 철원땅 곳곳에 화산 용암이 파편으로 되어 숭숭이돌로 뒹구는 것이니, 궁예가후고구려의 도읍을 여기로 삼았는데 눈에 보이는 돌마다 구멍이 나 있는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는 것도 이 화산암들을 말하는 것이었다. - P245
운문사에 당도하는 그 시각이 몇시이든 여장을 풀고 곧장 운문사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운문사행 답사 정코스이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뻗어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처럼 드리워진 솔밭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저 청정한 솔바람소리에 실려오는 낮은 소리를 들으며 무작정 걷는 순간 나는 법열에 든 스님보다도 더 큰 행복을 느낀다. 냇물이흐르는 소리이든, 풀벌레 우는 소리이든, 바람에 스치는 마른 갈대 몸 뒤척이는 소리이든, 눈보라 속에 산죽이 춤추는 소리이든, 아니면 운문사 비구니의 염불소리이든 붉은 홍송은 하늘로 치솟고 소리는 낮게 가라앉는다. API운문사 솔밭은 우리나라에서 첫째는 아닐지 몰라도 둘째는 갈 장관 중의 장관이다. 서산 안면도의 해송밭, 경주 남산 삼능계의 송림,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솔밭, 봉화군 춘양의 춘양목・・・・・・ 내 아직 백두산의 홍송을 보지 못하여 그 상좌를 남겨놓았지만 남한땅에 이만한 솔밭은 드물 것같다. - P278
운문(雲門) 이라! 그 내력은 운문선사에서 따온 것이지만, 문자 그대로운문사는 구름문을 젖히고 들어오듯 안개가 짙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붉은 홍송줄기가 습기를 머금어 불그스레 피어오를 때 운문사 소나무들은더욱 아름답다. 마치도 늘씬한 각선미의 여인들이 물구나무서기를 하고있는 듯하다. 나는 운문사 소나무의 각선미가 하도 인상깊이 박이어 이화여대 앞 어느 란제리가게 진열장에 도전적으로 배치된 스타킹 마네킹 다리를 보면서 운문사 소나무를 연상한 적도 있다. 아리따운 자태로 말하든, 늘씬한 각선미로 말하든, 늠름한 기상으로 말하든, 연륜의 근수로 말하든 운문사 소나무는 가장 아름다운 조선의 소나무이며, 조선의 힘과 자랑을 가장 극명하게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운문사소나무는 조선의 아픔과 저력, 끈질긴 생명력까지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 P278
나는 겨울날의 운문사를 좋아하였다. 눈 덮인 운문사의 전경은 그 자체가 성속을 떠난 평온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나는 입버릇처럼 겨울날의 운문사를 말하곤 하였는데 나의 지기에게 운문사에 살면서 언제가제일 좋더냐고 물으니 지체없이 봄을 말한다.
사리암 오르는 길을 따라 운문산 학소대 쪽으로 가면 산비탈마다 낙엽송이 즐비하거든요. 이른봄 낙엽송에 연둣빛 새순이 아련하게 피어오르면 얼마나 곱고 예쁜지 몰라요. 새 생명에 대한 예찬이 절로 나와요. - P289
청도 운문사가 보존하고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은 새벽예불이다. 사람들은 기행이나 답사라고 하면 아름다운 경승지나 이름높은 유물을 찾아가는것으로 생각하며 시각적 이미지의 유형문화재만을 염두에 두곤 한다. 그러나 운문사의 답사는 반드시 새벽예불을 관람하거나 참배하는 음악이 있는 기행으로 엮어져야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것이 힘들다면 저녁예불이라도 보았을 때 운문사를 답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답사는 미술사 답사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기행이다. 운문사의 새벽예불은 불교방송국에서 비디오테이프로 제작, 보급하고있는 것이 있고, 통도사 스님들의 예불을 카세트테이프에 담은 「천년의소리도 나왔고, 김영동이 송광사 스님들의 예불에 대금소리를 곁들여 만든 「명상음악 선」도 벌써 전부터 보급되었으니 오늘날에는 그 가치를 인식하고 있는 분들이 많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10년 전만 하여도 나는 새벽예불의 음악성을 알지 못했고, 그처럼 장중한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 P295
이제와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것이 부질없는 일인지도 모르지만 나의문화유산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그 일번지를 놓고 강진과 부안을 여러번저울질하였다. 조용하고 조촐한 가운데 우리에게 무한한 마음의 평온을안겨다주는 저 소중한 아름다움을 끝끝내 지켜준 그 고마움의 뜻을 담은일번지의 영광을 그럴 수만 있다면 강진과 부안 모두에게 부여하고 싶었다. 216실제로 강진과 부안의 자연과 인문은 신기할 정도로 비슷하며, 어디가더 우위를 점하는지 가늠하기 힘든 깊이와 무게를 지니고 있다. 강진에 월출산이 있듯이 부안에 변산이 있다. 강진에 강진만 구강포가 있듯이 부안에는 줄포만 곰소바다가 있다. 강진에 다산 정약용이 유배 와서 『목민심서』를 지었듯이 부안에는 반계 유형원이 낙향하여 『반계수록』을 남겼다. 강진이 김영랑을 낳았다고 말하면 부안은 신석정을 말할 수 있다. 강진에무위사와 백련사가 있음을 자랑한다면 부안은 내소사와 개암사로 답할 수있다. 강진이 사당리의 고려청자를 말한다면 부안은 유천리의 상감청자를말할 것이고, 강진이 칠량의 옹기가마를 말한다면 부안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말할 수 있다. 강진이 동백꽃과 남도의 봄을 내세운다면 부안 역시동백꽃과 겨울날의 호랑가시나무, 꽝꽝나무의 푸르름을 자랑할 것이다. - P315
강진이 해남 대흥사와 가까이 있음을 말한다면 부안은 고창 선운사와 연계됨을 말할 수 있고, 강진이 반남의 고분군을 내세우면 부안은 고인돌까지 말할 것이며, 강진이 귀여운 석인상을 말한다면 부안은 의젓한 돌장승으로 응수할 것이다. 강진이 아름다운 곳이면 부안 역시 아름다운 곳이며, 강진이 일번지라면 부안 또한 일번지인 것이다. 월간 사회평론」에 연재를 시작하면서 내가 제일 먼저 쓴 글은 고창 선운사였다. 그 글은 곧장 부안 변산으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당시편집자가 여러 지역을 고루 써달라는 주문을 해오는 바람에 내포땅, 경주등을 두루 답사하고 강진-해남편에 와서는 편집자 요구를 무시하고 ‘남도답사일번지‘라는 제목으로 내 맘껏 쓰게 되었다. 그것이 책으로 엮어지면서 제1장 제1절을 차지하게 되었고 고창 선운사는 ‘미완의 여로‘를 남겨둔 채 맨 끝항에 실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그때 쓰지 못했던 부안 변산으로 가는 길을 ‘미완의 여로‘라는 제목을 달고 이제야 쓰게 된 것이다. - P316
날이 좋아 서해의 낙조와 노을을 볼 수 있다면 그 여행은 변산의 석양이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남게 되어 여타의 유적답사가 시시해진다. 자연이주는 감동의 크기와 무게를 인공미는 감히 대항하지 못한다. 나의 미완의 여로가 1박2일 일정이면 반드시 변산이나 모항의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묵고, 2박3일이면 또 하룻밤을 선운사에서 묵는다. 그것이정석이다. 답사회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많이 참석한다. 그 여자들과 10년간 답사를 다니다보니 바다에 임하는 여인의 정서가 나이마다 다른 것을알 수 있었다. 노처녀는 노을진 석양의 바다를 더 좋아하고, 숫처녀는 밤바다를 더 좋아하는데, 유부녀는 아침바다를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나도알 수 없는데 현상만은 그렇게 나타난다. - P324
백제 때 묘련(妙蓮) 왕사가 궁전을 고쳐 개암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작은 나라의 궁터가 절터로 바뀌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또 뒤바뀌어 절터가 궁터로 바뀐다. 백제가 멸망한 뒤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날 때 일본에 가 있던 부여풍(扶餘豊) 을 받들어 최후의 항쟁을 벌였다는 주류성(周留城)이 어디인가에 대하여는 충남 한산(韓山) 설과 이곳 부안설로 나뉜다. 울금산성을 놓고 위금(金), 우금(遇金), 우금(禹金), 우진(禹陳) 등 표기가 다양하고, 울금바위의 큰 굴이 백제부흥운동의 스님 복신의 굴이라고도 하고 원효방이라고도 한다. 어느 말을 믿어야 할지 나도 모른다. 다만 폐망하는 나라의 어지러운 모습만은 역력하다. 내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개암사의 저 아늑함과 넉넉함뿐이다. 그것은 끝끝내 지켜온 소중한 아름다움의 한 현장이라는 사실. 아직도 ‘미완의 여로‘ 답사길은 멀고도 먼데 떠나려야 떠날 수 없는 마음으로 돌축대한쪽 계단에 주저앉아 왜 내가 답사일정을 이렇게 짧게 잡았던가만 원망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는 역사의 접력이 아니라 아름다운 자연을 아름답게 경영한 위대한 미학의 강력한 흡입력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로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혼을 바꾸어놓는다는 말까지도 가능해진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숭고한 이념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 P344
농민전쟁의 현장에 대한 답사는 역사탐방길이다. 거기에는 문화재가 아무것도 없다. 있을 리도 없다. 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려한 풍광을 찾거나 기대하는 자는 여기에 올 필요가 없다. 오직 드넓은 들판과 바람, 언덕 위의 솔밭과 시뻘건 황토만 있을 뿐이다. 호남의황토 중에서도 가장 붉은 빛깔을 많이 머금은 황토, 특히나 초봄에 갈아엎은 밭고랑의 뒤집어진 흙들이 아침이슬을 머금어 홍채를 토하고 있을 때우리는 100년 전 농군의 가슴에 조금은 다가설 수 있게 된다. 농민전쟁의 현장 답사에서 그 역사의 체취, 향토의 체취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걷는다는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걷는 것만큼 인간의 정신을 원시적 건강성으로 되돌려주는 것이 없다. 그 미덕을 살려 나는 곧잘 녹두장군집에서 황토재까지 십릿길을 회원들과 걷는다. 버스는 황토현 전적기념관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황토를 걸으면서 시골서 자란 이가 있으면 보릿대를 꺾어 보리피리를 불어보게도 한다. 납작한 토담집을 지날때면 지붕 너머로 널려진 세간살이를 넘겨보면서 무엇이 우리와 같고 무엇이 우리와 다른지를 함께 살펴보기도 한다. - P350
때면 지붕 너머로 널려진 세간살이를엇이 우리와 다른지를 함께 살펴보기도 한다. 가난하게 생긴 꽃밭에 피어난 분꽃과 달리아를 보면서 국민학교 때 가꾸던 학급 화단도 생각해본다. 그것은 동시대 같은 땅에서 다른 삶을 살고 있는 그네들의 궁핍한 양태를 동포애로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답사의 일정에 그만한 여유가 없을 때면 나는 호소력있는 해진목소리의 소유자를 골라 김지하의 「황토길」을 낭독하게 한다. 그럴 때면문학의 효용성과 위대함을 새삼 모두가 느끼게 된다.
황토길에 선연한 - P3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