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었소˝라는 유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이라는 문인이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서 읽은 천하의 명언도 얘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마치 어린아이의 응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교수가 사경을 헤매어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분은 미망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92. 2. P- 236

첫째는 현대인 특히 도시인의 삶의 패턴이 크게 변하여 주말·휴일이면시내가 거의 철시상태가 되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도시인은 일상의 권태로움, 가정과 직장의 틀 속에 박혀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만성적 피곤과 긴장을 풀어가면서 살기를 원하게 되었다. 특히 자동차문화의 급속한 확산은잿빛 도시를 떠나 싱싱한 자연과 만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커다란 정신적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끔 했다. 수많은 여행안내책과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 같은 저서가 큰 인기를 끈 것은 이같은 현상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람들은 놀기를 좋아하면서도 단순히 노는 것에는 금방 싫증을느낀다. 노는 중에 무엇인가 하나라도 얻을 수 있는 삶의 기쁨이 동반될 때비로소 논다는 일은 더욱 즐겁고 계속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러기 때문에 답사야말로 진짜 즐거운 여행길이 되는 것이다. - P200

둘째는 내 것, 우리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깊이 알고 싶어하는 자주적정서가 우리 세대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60년대 후반 근대화·산업화·서구화 정책의 수행과정에서 남의 것에 대한 동경과 관심이 지난 세대의정서적 성향이었다면, 이제는 내 것도 귀중함을 알게 될 정도로 우리의 문화의식이 고양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박태순의 『국토와 민중, 신경림의 민요기행』, 최영희의 한국사기행 그리고 한길역사기행 같은 저서가 80년대에 쏟아져 나오게 된 시대적 배경은 답사문화의 확산과 궤를 같이한다.
이리하여 답사에 광신도적 취미가 붙은 사람까지 생기게 된 것이 오늘의현상이다. 특히 답사에 처음 맛들인 사람들은 대개 그동안 무심하게 지나쳐버렸던 유물들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면서 기쁨과 회한을 동시에 맛보고,
"한반도는 전체가 박물관"이라는 명제에 이론 없이 동의할 만큼 국토의 구석구석에 박혀 있는 유물들을 보면서 경이로움과 자신의 무지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 P200

그 기쁨과 경이로움의 근저에 흐르는 자신의 무지와 무심함은 답사객의발과 눈을 더없이 부지런하게 만들곤 한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 부지런히가서 열심히 보고 빠짐없이 느끼려는 답사에의 열정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껏 이 답사객들을 위한 올바른 안내서가 나온 적이 없다. 또한현지에서 구하게 되는 안내서와 해설문이란 거의 다 터무니없는 찬사가 아00 S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얘기들뿐이다.
지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는 양양 낙산사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낙산사를 답사할 때 내가 제시할 안내서는 시중 어디에도 없으며, 낙산사에 가도없다. - P201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감탄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다.
창연망망한 동해와 더불어오랜 세월을 그 파도 속에 싸여서 살아온 낙산사를 어찌 감탄부 없이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 낙산사이다. 그러나 나는 어느 답사객이 낙산사를 둘러보고 감탄부호를 찍으면서 "동해 낙산사!"라고 할 수 있을까 의심해본다. 대부분의 답사객은 홍예문으로 들어가 원통보전, 칠층석탑, 범종각, 의상대, 해수관음,
홍련암, 관음굴을 길표시 따라 답사하며, 안내판을 읽으면서 마침표를 찍을것이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이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을 때는 마침표 대신 물음표로 바꿀지도 모른다. 뭐가 좋다는 것이고, 뭐가 "동해 낙산사!"란 말인가? - P202

그 나름의 훈련과 연륜을 필요로 하는 일이라면 거기에는 당연히 급수가매겨질 수 있다. 문화유산답사도 마찬가지여서 오래 다녀본 사람과 이제 막이 방면에 눈뜬 사람이 같을 수 없다.
답사의 초급자는 어디에 가든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을 성심으로 발걸음을바삐 움직이며 골똘히 살피고 알아먹기 힘든 안내문도 참을성을 갖고 꼼꼼히 읽어간다. 그러나 중급의 답사객은 걸음걸이부터 다르다. 문화재뿐만 아니라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는 여유를 갖는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곳에서보았던 비슷한 유물을 연상해내어 상호간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곧잘 비교해보곤 한다. 말하자면 초급자가 낱낱 유물의 개별적·절대적 가치를 익히는과정이라면 중급자는 그것의 상대적 가치를 확인해가는 수준인 것이다.
그러나 고급의 경지에 다다른 답사객은 얼핏 보기에 답사에의 열정과 성심이 식은 듯 돌아다니기보다는 눌러앉기를 좋아하고 많이 보기보다는 오래보기를 원한다. 지나가는 동네분과 시답지 않은 객담을 늘어놓고 가겟방을기웃거리다가 대열에서 곧잘 이탈하곤 한다. 허나 그것은 불성실이나 나태함의 작태가 아니라 그 고장 사람들의 살내음을 맛보기 위한 고급자의 상용수단인 것을 초급자들은 잘 모른다.  - P217

가 된 것이다.
마을에서 10분쯤 더 산길을 오르면 산등성을 널찍하게 깎아 만든 제법평평한 밭이 보이는데, 그 밭 한가운데 까무잡잡하고 아담하게 생긴 삼층석탑이 결코 외롭지 않게 오뚝하니 솟아 있다. 산길은 설악산 어드메로 길길이 뻗어올라 석탑이 기대고 있는 등의 두께는 헤아릴 길 없이 두껍고 든든하다. 석탑 앞에 서서 올라온 길을 내려다보면 계곡은 가파르게 흘러내리고산자락 아랫도리가 끝나는 자리에서는 맑고 맑은 동해바다가 위로 치솟아저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그으며 밝은 빛을 반사하고 있다. 모든 수평선은보는 사람보다 위쪽에 위치하고, 모든 수평선은 빛을 반사한다는 원칙이 여기서도 적용된다. 까만 석탑은 거기에 세워진 지 1,000년이 넘도록 그 동해바다를 비껴보고 있는 것이다. - P219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自心佛)‘과 ‘일문일가(一門一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왕즉불의 논리가 지배하는 한 호족들의 위치는 지배층으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그러나 체제와 질서가중요한 것이 아니라 깨침의 능력이 중요하고 스스로 일가를 이룰 수 있다는사상은 곧 호족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비약하게 된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선종의 구산선문이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로 들어가 보령의 성주사, 명주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 남원실상사, 곡성 태안사, 문경 봉암사, 장홍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 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의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 진전사 폐사지에 서면 나는 항시 변혁의 계절을 살던 한 선각자의 외로움과 의로움을 함께 새겨보게 된다. - P225

‘하늘 아래 끝동네‘, 그것은 반역의 자랑이다. 지리산 뱀사골 달궁마을 너머 해발 900m 되는 곳에 있는 심원마을 사람들이 ‘하늘 아래 첫동네‘ 라며역설의 자랑을 펴는 것보다 훨씬 정직하고 숙명적이며 비장감과 허망이 감돈다.
그 하늘 아래 끝동네 끝번지 되는 곳에 선림원지가 있는 것이다. 56번 국도상의 황이리에서 하차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응복산(1360m) 만월봉(1281m)에서 내려오는 미천(川)계곡을 따라 40여 분 걸어가면 선림원지가 나온다. 군사도로로 잘 다듬어진 길인지라 하늘 아래 끝동네에 온 기분이 덜하지만, 길가엔 향신제로 이름난 산초나무가 유난히 많고 산비탈 외딴집에도 토종꿀 재배통이 늘어서 있어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비경(秘境)에 취해 결코 가깝지 않은 이 길을 피곤한 줄 모르고 행복하게 걷게 한다.
미천계곡은 맑다 못해 투명하며 늦가을 단풍이 계곡 아래까지 절정을 이룰때면 그 환상의 빛깔을 남김없이 받아내곤 한다. - P231

도자기를 전공하는 윤용이교수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박물관 진열실에 있는 도자기들을 보고있으면 어떤 때는 도자기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나도 당신처럼 한때는 세상을 살았던 시절이 있었소"라는 유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고 그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나는 조선 정조시대에 유한준(兪漢)이라는 문인이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수장품에 부친 글에서 읽은 천하의 명언도 얘기해주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마치 어린아이의 응얼거리는 소리를 남들은 몰라도 그 에미만은 다 알아듣고 젖도 주고 기저귀도 갈아준다.
세상을 떠나기 며칠 전 최재현교수가 사경을 헤매어 말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할 때,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을 입모양만 보고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던 분은 미망인 한 분뿐이었다. 오직 사랑만이 그것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992. 2. - P236

답사를 다니면서 나는 어디를 가든 특별한 연줄이나 알음알이 없이 여느여행자와 마찬가지로 입장료를 열심히 내면서 다녔다. 특출나게 전문가라고내세울 형편도 아니었지만 유별난 혜택을 받는다는 것이 겸연쩍기도 했고그렇게 한들 내 마음이 편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가 대접 받아서 될일이라면 만인이 똑같이 누릴 수 있는 대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버리지 않고 있다. 이런 식의 오기 아닌 오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무수한불편과 수모와 억울함을 당해야만 했다. 답사처 어디를 가든 따라붙는 저일방적인 통보의 붉은 색 표지판, 촬영금지와 출입금지 때문이었다. 관계자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면 뜻밖의 호의를 받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대개는 싸늘한 문전박대가 일쑤였다. 동사무소나 경찰서에 가서도 느끼는일이지만 대개 장사꾼 아닌 다음에는 사람을 많이 대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인격으로 대하지 않고 건수로 처리하는 습성이 있다.
The4년 전엔가 경주 안강의 옥산서원에 있는 회재 이언적의 서재였던 독락당에 들렀는데 그 후손이라는 자가 자물쇠로 잠가놓고는 출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군청 문화재과나 유림의 허락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내가 여기에온 것이 예닐곱 번 되었지만 이런 일이 없었고 오늘은 일요일이며 지금 같 - P237

이온 답사객이 역사교사모임이라고 사정했지만 그는 끝내 문을 열어주지않았다. 나는 그때 땅속의 회재가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모든 미술관들이 전시장에서 촬영을 금지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세계의 모든유수한 미술관들은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는 한 얼마든지 촬영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나는 외국에 나갔을 때 이 점이 퍽 신기하게 생각됐다. 하도 많은금지를 당하고 살아온지라 개방되었다는 것이 차라리 이상스러웠던 것이다.
-마치 요즘 서울에서 차가 안 막히고 잘 빠지면 이상스러운 것처럼. 뉴욕메트로폴리탄 뮤지움 관계자를 만났을 때 촬영허가에 대한 그들의 아이디어를 물었더니, 플래시를 사용하면 자외선이 유물보존에 나쁘고 또 다른 관객을 방해하므로 금지하는 것이며, 상업적으로 이용할 사진은 어차피 특수 조명을 해야 하니까 일반 관객이 찍어가는 사진은 박물관 홍보에도 좋다는 것이었다. - P238

모든 문화재의 소유자는 그것의 재산권과 관리의무가 있을 뿐이며, 그것의 인문적 가치를 공유할 권한은 만인에게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민주화의 길에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1983년 가을 어느날, 나는 저 유명한 지(智)대사의 비와 부도를 보기 위하여 문경 봉암사(鳳巖寺)를 찾아갔다. 문경에서 가은을 거 봉암사까지 가는 저 엄청난 비포장길은 시외버스도 두 시간 남짓 걸리는 캄캄한산골이었다. 아침에 서울을 떠나 저녁 나절에 당도해보니, 아뿔싸! 봉암사는 1982년부터 80여 명의 남자가 결제와 산철없이 정진하는 청정도량으로 되었기 때문에 일반인 출입이 군대보다 더 엄하게 통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나는 이 숭고한 뜻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래도 뜻이 있으면 길이 있으리라 믿고 경비 아저씨에게 갖은 엄살과 애교와 궁상을 번갈아 떨며 애원하며 달라붙었더니 자신은 권한이 없고 저기오는 스님에게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지옥에 가서 부처님이라도 만난듯한 기쁨과 희망으로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그 스님은 내 말을 대충 듣고는 절집은 부처님 모신 곳이지 미술사의 대상이 아니라고 자기식의 논리로 - P238

훈계만 하고는 나를 떠밀듯 내쫓았다. 최소한 안됐다는 표정이라도 지어줄줄로 알았던 내가 잘못이었을까.
답사를 다니면서 내가 크게 배운 것은 참는 것이다. 이럴 때는 싸우는 것보다 참는 것이 낫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던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참지만 속으로 치미는 울화까지 참을 정도로 인격이 수양되지 못하여 여관한채 없는 원북마을에서 막차를 타고 나오면서 나는 그 중이 가엾다고 생각하면서 나의 허망을 달랬다. 사실 내가 좀더 인품을 갖추려면 "인연이 닿지 않아서"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풀었어야 했을 것이다. - P239

그리하여 봉암사는 나에게 꿈속의 절집으로 언제나 남아 있었다. 천하의대문장가 최치원이지증대사의 비를 쓰면서 묘사한 봉암사의 모습은 나의상상속 환상의 절집이 되었고 그래서 나는 그 인연을 찾으려고 기회 있을때면 봉암사 타령을 노래하듯 했다. 극작가 안종관형이 명진스님이 거기 있어서 몇 번 가보았는데 정말 좋다고 하였으나 명진스님은 이미 서울 개운사에서 대승불교승가회를 하고 있었고, 신륵사 원경스님께 사정을 말했더니음력 칠월 하순에 보름간 해제기간이 있으니 그때 같이 가자고 했으나 양력으로 살다보니 그 날짜를 맞추지 못하고 또 몇 년이 흘렀다.
1990년 늦겨울 어느날, 정말로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인지 문화유산답사회의 한 열성회원이 봉암사에서 큰 선방을 짓는데 상량식이 있어 초대받았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열 일을 제쳐두고 따라가서 10년의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환상속의 절집 봉암사! 그러나 내가 정말로 행복할 요량이었다면 그때 봉암사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사회학자 아도르노는 음악에 대단한 소양이 있어서 음악사회학』이라는 저서를 남긴 일도 있는데 그가 평소에 하던 말이 "베토벤의 교향곡은 어느 심포니가 연주하는 것보다도 악보를 읽으면서 내가 머리속에서 그려내는 것이더욱 아름답다"고 했다는데, 나에게 있어서 봉암사야말로 글 속의 봉암사라야 아름답다. - P239

"당신, 절에 가면 부처님께 절이라도 한번 해보구려." 
"내가 미치기 전에야 돌덩이, 쇳덩이 앞에 엎어져 빌겠어. 그런다고 소원성취 되는 것도 아닌데."
"절이라는 것이 소원성취 해달라고 비는 것인 줄 아세요."
"그러면, 망하게 해달라고 빈담?"
"그런 게 아녜요."
"그러면 뭐야."
"절이란 돌덩이, 쇳덩이 앞에서도 무릎을 꿇을 수 있다는 자기의 겸손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함께 살아가면서 대개는 내 주장이 이기는데 가끔은 이렇게 결정타를 맞는 것이 나의 가정생활이다.
하심(下心)!  마음을 내린다는 것! 그것은 불자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아름다운 모습이며, 가히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 P254

봉암사에서 진짜로 멋있는 유물은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 쌍의 노주석(柱石) 이다. 정료석 또는 순한글로 불우리라고 하는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얹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평범한 구상으로 그 형태도 단순하지만 둥근 받침돌이 위로 오므라드는 긴장된 맛과 그 위에 얹힌 판석의 듬직스러움이 한 시대의 멋스러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129415그리고 대웅전 건물이야 20세기 후반의 것이니 그렇고 그런 것이지만 그돌축대만은 9세기 지증대사 창건 당시의 모습이다. 특히 이 돌축대에서 맨아래쪽 기단부를 보면 우묵하게 홈을 판 돌받침을 앞쪽으로 길게 깐 것이있는데 이것은 지붕의 낙숫물이 마당을 파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물받침홈통인 것이다. 옛 사람의 철저함과 멋스러움이 여기서도 감지된다. - P267

소쇄원 원림은 결국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곳곳에 인공을 가하여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공간을 창출한 점에 그 미덕이 있는 것이다.
소쇄원에 설치된 집과 담장 그리고 화단과 물살의 방향바꿈 그 모두가 인공의 정성과 공교로움을 다하고 있지만, 그 사람의 손길들은 자연을 정복하거나 자연을 경영한다는 느낌이 아니라 자연 속에 행복하게 파묻히고자 하는 온정을 심어놓은 모습이기에 우리는 조선시대 원림의 미학이라는 하나의미적 규범을 거기서 배우고 감탄하게 되는 것이다.
소쇄원에 처음 가보는 사람들은 우선 길이가 50m나 되는 기와지붕을 얹은 긴 흙돌담의 아이디어에 놀라게 된다. 가지런하게 잘 쌓은 이 흙돌담은소쇄원과 지석마을을 갈라놓는 경계 구실을 하고 있지만, 소쇄원 안에서 바라볼 때는 더없이 아늑한 공간으로 감싸주는 기능을 하고 있다. 본래 자연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두려움 내지 무서움을 유발한다. 그러나 인간의 손길이 적절히 닿아 있을 때 우리의 정서는 안정을 찾는다. 그러니까 담장은외부공간과의 차단, 내부공간의 온화함, 자연에 가한 인간의 손길이라는 3중효과를 갖고 있다. - P286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소쇄원의 구조를 낱낱이 설명하는 일을 애시당초 포기해버렸다.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기도 하거니와 문자 매체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는 독자의 상상력에 맡길 의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과 창의력은 꽤나 근수가 나갈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별것아닌 것이 그것이다. 어떤 화가도 자연 속의 풍경 그 자체의 맛을 만분의 일도 못 잡아내며, 어떤 소설가의 상상력도 광주민중항쟁이나 6월혁명의 파국과 대전환을 드라마로 꾸며내지 못한다.
그러나 모방과 경험에 기초한 상상력과 창의력은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것이니 겸재의 「박연폭포 그림이나 벽초의 『임꺽정』, 나관중의 『삼국지』는 실경이나 사실보다도 엄청난 감동으로 우리 가슴속에 깊이 각인된다. 만약에 당신이 소쇄원이나 윤선도가 보길도에 지은 부용동 원림 같은 것을 본다음에는 그보다 더 훌륭한 원을 조영할 수도 있겠지만 한번도 본 일이없는 상태에서 함부로 원림을 상상할 일이 아니다. 소쇄원 원림에 대한 당신의 상상은 아마도 입구부터 틀릴 것이다. - P288

소쇄원,식영정 ·취가정 환벽당을 양품에 안고 광주댐 너른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증암천을 그 옛날에는 자미탄(紫薇灘)이라 불렀다고 한다. ‘자미‘는 목백일홍나무의 별칭이고 ‘탄‘은 여울이라는 뜻이니 개울 양옆으로늘어선 목백일홍의 아름다움으로 얻은 이름일 것이다.
목백일홍은 순우리말로는 배롱나무라고 부르는데 따뜻한 남쪽이 원산지여서 차령산맥 북쪽에서는 정원수로 가꾸기 전에는 살 수 없다. 그래서 나같은 서울사람은 배롱나무의 아름다움이 차라리 남녘에 대한 향수의 상징같이 각인되어 있다.
배롱나무는 낙엽교목 또는 관목으로 분류될 정도로 키가 크지 않은 나무이다. 하지만 해묵은 배롱나무는 작은 거인과도 같은 늠름한 기품이 배어있다. 줄기는 약간 경사지게 구부러지면서 자라고, 가지는 옆으로 넓게 퍼져서 불균형의 부정형을 이룬다. 그런데 그 줄기와 가지는 아주 단단하고매끄럽고 윤기가 나면서 고귀한 멋이 가득하여 한 터럭의 속기(氣)도 없다. 잎이 다 떨어진 겨울날의 배롱나무는 나신(裸身)과도 같아서 사람의 손이 닿으면 가지끝이 파르르 떤다고 부끄럼나무라고도 하고 간지럼나무라고도 한다. 어찌 보면 뼈마디가 굵은 여인의 팔뚝 같기도 하고 다이어트를 심 - P291

하게 한 무용수의 몸매 같기도 한데, 그렇다고 배롱나무에서 색기(色氣)를풍기는 요염함을 느껴본 적은 없다. 일본사람들은 이 배롱나무를 사루수베리( 즉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고 부른다. 그만큼 배롱나)),
무의 줄기는 매끄럽다.
배롱나무의 진짜 아름다움은 한여름 꽃이 만개할 때이다. 7월이 되면 나무 아래쪽부터 피어오르기 시작하여 9월까지 100일간 붉은 빛을 발한다.
그래서 백일홍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저 꽃이 다 지면 벼가 익는다고 해서쌀밥나무라는 별명도 얻었다. 배롱나무꽃은 작은 꽃송이가 한데 어울려 포도송이가 거꾸로 선 모양으로 피어나는데 탐스런 송이송이가 윤기나는 가지위로 치솟듯 피어날 때 그 화사한 자태에 취하지 않을 인간이 없다.
본래 화려함에는 으레 번잡스러움이 뒤따르게 마련이건만 배롱나무의 화사함 속에는 오히려 청순하고 정숙한 분위기마저 풍기니 어느 격조 높은 문인화가인들 배롱나무꽃 같은 맑은 그림을 그려낸 적이 있었던가 싶기도 하다. - P292

나는 배롱나무꽃이 한여름 땡볕에 피어난다는 사실에 더욱 큰 매력을 느낀다. 춘삼월이 되면 대부분의 나무는 잎이 채 나기도 전에 앞을 다투어 꽃부터 피우며 갖은 맵시를 자랑하다가 5월이면 벌써 연둣빛 신록에 묻혀버리고 마는데, 배롱나무는 그 빛깔 있는 계절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을 준비하고서는 세상이 꽃에 대한 감각을 잃어갈 즈음에 장장 석달하고도 열흘을 피어 보이니 인간세상에서 대기만성하는 분들의 모습이 그런 것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배롱나무를 볼적이면 곱디곱게 늙은 비구니스님의 잔잔한 미소 같은 청아(淸雅)한 기품을 느끼곤 한다.
그런 배롱나무가 지금 증암천변에서는 자취를 감추었다. 아마도 신작로를 낼 때 베어졌을 것이며, 천변에 시멘트 방죽을 쌓으면서 베어지기도 했을 것이다. 식영정의 옛 주인이던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이 쓴 시 「배롱나무꽃 핀 여울에서는 "누군가 가장 아끼던 것을 산 아래 시내에다 심어놓았구나"라고 하였으니, 옛 사람은 없던 배롱나무도 새로 심어놓았건만우리 시대는 어찌하여 ‘잃어버린 자미탄의 여름날‘을 안타까워하는 처참한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 P292

이후 오희도는 높은 벼슬을 마다하고 다시 후서마을로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아들 오명중(吳明仲: 1619∼1655)이 아예 세상을버리고 여기에 칩거할 뜻으로 조영한 원림이 이 명옥헌이다. 
명옥헌은 가운데 섬이 있는 네모난 연못을 파고 그 위쪽에 정자와 서재를겸한 건물을 지은 단조로운 구성이지만 연못 주위에 소나무와 배롱나무를장엄하게 포치하고 언덕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시야를 끌어들임으로써 더없이 시원한 공간을 창출한 뛰어난 조원의 원림인 것이다.
명옥헌의 배롱나무숲은 거대한 고목으로 자라났다. 일조량이 많은 곳이라 남도의 여느 배롱나무와는 달리 키가 크고 가지도 무성하고 꽃송이가 많이 달린다. 한여름 배롱나무꽃이 만개할 때 여기에 들른 사람들은 좀처럼발길을 떼지 못한다.
본래 배롱나무는 자미탄처럼 개울가에 있을 때보다 정원수로 자랄 때가멋있다. 남도의 고찰, 해남 대흥사, 강진 무위사, 고창 선운사 경내의 배롱나무는 극락세계의 안내양처럼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고 최순우관장 이래로 배롱나무를 정원수로 채택하고 있다. 중국의 당나라시절 3성 6부의 하나인 중서성(中書省)에는 배롱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해서 양귀비 애인인 현종이 중서성을 자미성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지금 명옥헌의 배롱나무는 모르긴 해도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한 장관인데 문화재관리국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겠다. - P304

죽림칠현이 얼마나 부자였던가를 알 수 있다. 그 점에서 나의 이번 답사기는 호화판 인생의 풍류를 더듬는 반민중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내 글이절대로 풍류객의 객담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부자라고 모두 그런 정자와 원림을 경영한 것은 아니었다. 또 부자의 정서가 모두 반민중적인 것은 아니다. 지배층의 문화를 모두 반민중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린다면 우리가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모든 문화유산을 모조리 폐기 처분하는 것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의 정서를 고양시키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에는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옛날에는 사대부 지배층만이 독차지했던 정자와 원림의 미학을 보다 넓은 계급적지평에서 그것의 공공성으로 환원시키는 일이 민중적 재창조의 길이 될 것이다. 만약 민중적 삶 속에서 정자의 의미를 찾고 싶으면 다른 현장으로 가야 한다. 그것은 곧 모정(茅亭)이다.
담양의 원림과 정자를 답사하고 올라오는 길, 나는 차창 밖으로 넓은 들판 한쪽에 외롭게 서 있는 모정을 보면서 또 다른 명상에 잠시 잠겨본다. - P307

보길도와 강진의 동백꽃은 3월말이면 다 질 정도로 일찍 피지만, 선운사동백꽃은 동백나무 자생지의 북방한계선상에 있기 때문에 4월말이 되어야절정을 이루며 고창군에서 주관하는 선운사 동백연(冬柏燕)도 이무렵에 열린다. 동백꽃은 반쯤 져갈 때가 보기 좋다. 떨어진 동백꽃이 검붉게 빛바랜채 깔려 있는데 밝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는 이파리 사이사이로 아직도 붉고 싱싱한 동백꽃송이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 속에 점점이 붉은 악센트를 가한 한 폭의 명화를 연상케 한다. 그날따라 하늘이 유난히 맑다면 가히 환상적이다.
그러나 동백꽃이 지는 모습 자체는 차라리 잔인스럽다. 꽃잎이 흩날리며시들어가는 것이 꽃들의 생리겠건만 동백꽃은 송이째 부러지며 쓰러진다.
마치 비정한 칼끝에 목이 베어져 나가는 것만 같다. 1978년 내가 처음으로동백꽃 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이 세상의 허망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며,
유신독재의 비호 속에 영화를 누리는 자들의 초상이 바로 저것이라고 생각했다. - P310

비록 그 추잡한 인간들에 비교하기에는 동백꽃이 너무 밝고 고왔지만. 그러나 1981년, 광주의 아픔을 어떻게 새겨야 할지 가늠하기 힘들던시절, 선운사 뒷산에 버려진 듯 뒹구는 동백꽃 송이들은 마치도 덧없이 쓰러져간 민중의 넋이 거기 누워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자연은 우리에게 이처럼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을 나는 그때 알았다.
이런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때맞추어 본다는 것은 여간한 행운이 아니고는 힘들다. 그것도 평일이 아닌 휴일을 택하자면 일년에 꼭 한 번밖에 없는것이다. 그래서 이 고장 출신 시인 서정주가 말(末) 당이 아니라 미당(未堂)이었던 시절에 쓴 「선운사 동구」라는 명시가 나왔다.


선운사 골짜기로 / 선운사 동백꽃을/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피지 안했고 /막걸릿집 여자의/육자배기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었읍니다/그것도 목이 쉬어 남었읍니다.


선운사 동구 길가의 밭 한 모퉁이에는 서정주가 쓴 이 시의 육필원고를그대로 새긴 ‘미당시비‘가 세워져 있다. -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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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답안을 구해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198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의 한 관계자가 내게 한국의 박물관실태를 물어왔을 때 내 대답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서구의 미술관들은 경쟁적으로 그 규모의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한결같이 "이국문화의 포로수용소"일 뿐, 낱낱 유물의 생명력은 벌써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명작들의 공동묘지"라는혹독한 자기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좁은 땅덩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같은 지역에서, 같은 혈통끼리, 같은 언어로, 같은 제도와 풍습을 지니면서, 같은 운명공동체로서 그토록 오랜 역사를 엮어온 민족국가는 드물다. 길게는 7, 8천년, 줄여잡아도 3천년의 연륜을 헤아리게 된다.
그 역사의 연륜이 좁은 땅덩이에 쌓이고 보니 우리는 국토의 어디를 가더라도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도에서 심심산골 하늘 아래 끝동네까지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거기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물관 유리장에 진열된 유물들이란 어차피 고향을떠나야만 했던 실향유물들의 보호처일 뿐 전 국토가 박물관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태백산맥 전체를 절집의 정원으로 끌어안은 부석사 가람배치의 장대한 기상과 그윽한 암곡동 계곡에서 쫓겨나 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온 고선사탑의애처로움은 국토박물관이라는 나의 표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 P5

게 해버리는면 "대영박물관의 한국미술품 컬렉션은 별볼일 없더사람들은 생래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식의화려함에는 곧잘 현혹되면서도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있음은 쉽게 놓쳐버린다. 게다가 세상의 관심이 아직도 남의 문화에 대한대책없는 선망과 모방에 쏠리다 보니 저 국토박물관의 유물이 말해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국토박물관의 유물에 대한 친절한 안내글이 세상에 있는것도 아니다. 답사길에 문화재안내 표지판을 읽다 보면 저렇게 어려운 전문적 사항의 냉랭한 나열이 과연 관람자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기만 하며, 문화재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일반대중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6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답안을 구해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P6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답사라면 사람들은 으레 경주·부여·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가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나 또한 답사의 초심자 시절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수그러나 지난 20년간 내가 답사의 광(狂)이 되어 제철이면 나를 부르는곳을 따라 가고 또 가고, 그리하여 나에게 다가온 저 문화유산의 느낌을 확인하고 확대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여덟 번을 다녀온 곳이 바로 이 강진 ·해남땅이다.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고산 윤선도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에 이르는 이 답사길을 - P11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일번지‘ 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나의 표현에서지역적 편애라는 혐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남도답사일번지‘가 아니라 ‘남한답사일번지‘라고 불렀을 답사의 진수처인 것이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일번지‘를 멋지게 장식해볼 의욕을 갖고 지난 1992년 3월 28, 29일 1박2일 코스로 다시 한번 답사하고 돌아왔다. 때마침 그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내게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나의 큰 실수였고, 과욕이었다. - P12

남도는 변하고 있었다. 10년 전과 5년 전이 다르고, 재작년이 작년과 다르더니, 올해는 또 작년과 달라졌고 내년은 올해와 다르게 변색되고 말 것이 눈에 훤히 비치고 있었다.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더니 저더러운 손길이 닿을 적마다 옛 정취도, 자연의 생태계도, 인간의 마음씀도1819송두리째 바뀌어버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농촌은 곡식을 길러내는 농사의 터전에서 돈많은도시인의 휴양지로, 소유욕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이 강진땅, 해남의 땅끝까지 내려오고 만 것이다.
18년 유배객이 머물던 귀양지는 이미 오래 전에 별장터가 되었고,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외롭게 서 있는 월남사 폐사지의동그만 시골집 과수밭들은 재벌회사들의 연수원터로 철책이 둘러졌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강포의 너른 갯벌과 아름다운 포구는간척지 긴 뚝방에 절반은 잘려나갔고, 만덕산 등급이 솔밭은 솔잎혹파리로참하게 전멸하였다. 아늑하고 소담한 절집 무위사는 능력있는 주지스님이 - P12

바야흐로 거찰이 될 터닦이를 시작했고, 칠량면 옹기마을은 드디어 그 명맥을 끊고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나의 ‘남도답사일번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옛 정취에 대한 추억으로 써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허망을 여기에 넋두리로 늘어놓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을 가늠치 못하여 무수한 파지만 냈을 뿐 한 달이 다 가도록 이 글의 서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 ‘남도답사일번지‘의 저력은 여전한 것이었다. 지난3월 28일 나의 이곳 답사는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학생 15명을 민주식교수와 함께 인솔하는 일이었다. 일행 모두 강진땅이 초행길이라는 이 TK(대구·경북)의 성골.진골들은 ‘남도답사 일번지‘의 겨우 3분의1을 답사하고서도 황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답사가 끝나고한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는정직한 고백을 듣고 보니 나는 오늘의 상처를 아쉬워 할지언정 그 초행자들의 눈을 빌려 ‘일번지‘의 자랑을 버리지 않고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P13

광주 시내를 빠져나와 나주 남평들판을 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남도땅으로 들어선 기분을 갖게 되었다. 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산둥성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도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으로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여인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의 강약이 있는 리듬을느낀다. 남도사투리에서 말끝을 당기며 "~잉" 소리를 내는 여운과도 같고,
구성진 육자배기의 끊길 듯 이어지는 가락같이도 느껴진다. 그것은 나만이느끼는 별스런 감정이 아니었다. 김 아무개라는 졸업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걸어온다.


남도땅의 산등성은 참으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함이 있네요. 경산의 압량벌이나 안동 쪽에서는 펑퍼짐하거나 육중한 것이 가로막아 저런따스함을 못 느끼거든요. - P16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지금 말한 그 졸업생은 이제 들판의 이미지에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얻게 된것이다. 남도의 들판을 시각적으로 경험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산과들 그 자체뿐만 아니라 풍경화나 산수화를 보는 시각에서도 정서반응의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답사와 여행이 중요하고 매력적인 것이 되는 큰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달리는 차창 밖 풍경이 산비탈의 과수밭으로 펼쳐졌을 때 우리 일행은 남도의 황토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누런 황토가 아닌 시뻘건 남도의 황토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부안, 고창땅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황토현을 가본다면더욱 실감할 남도의 붉은 황토는 그날따라 습기를 머금고 검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한 늙은 학생이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내게 감탄어린 고백을 말한다.


저는 손장섭, 강연균, 임옥상 같은 호남의 화가들이 풍경 속에 그리는시뻘건 들판이 남도의 역사적 아픔과 한을 담아낸 조형적 변형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 보니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였네요. 정말로 강렬한 빛깔이네요. - P17

궁색해 보이지만 정면에 보이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집이 그렇게 아담하고 의젓하게 보일 수가 없다. 조선시대 성종 7년(1476) 무렵에 지은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이다.
세상의 국보 중에는 국보답지 못한 것이 적지 않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국보 제13호의 영예에 유감없이 보답하고 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여기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도 친근함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적선을 슬쩍 글린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 초가 아니면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 있다.
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 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저 극락보전은 나에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모습처럼 되어 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학생들을 법당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P28

 그 수치에 맞추어 제조된 물감과 잉크로 그림 그리는 일, 인쇄하는일, 그렇게 제작된 제품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저 남도의 봄날이 그려보인원색의 향연은 차라리 이국적이고, 저 먼 옛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그림에서나 본 조선왕조의 원색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연지빛, 등황빛, 치자빛, 쪽빛의 청순한 색감을 여기서 더 논해 무엇할 것이냐.
나는 우리 시대의 화가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남도의 봄빛을 보지 못한자는 감히 색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되다란‘ 기름기의 번쩍이는 물감을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 없이 사용하면서 함부로 민족적 서정이니 향토색이니논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화학공학자, 모든 화공품 제조업자, 모든 화장품 회사, 모든염색업자, 모든 물감공장의 관계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그뛰어난 기술, 그 좋은 시설의 100분의 1만이라도 잃어버린 조선의 원색을찾아내는 데 사용해달라고. 우리에게 무한한 평온과 행복한 환희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향토의 원색을 제조해달라고.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원색인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원색의 물결 속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 P34

내가 꼽은 3대 한정식집 중, 인사동 영희네집은 맛의 정갈함과 담백함이가히 일품이지만 예약 안 하고는 발 디딜 재간이 없고 또 셋 중 가장 비싼곳(1인당 2만 5,000원)이며, 천일식당은 맛이 화려하고 푸짐하며 떡갈비같은 별식이 가히 환상적이라고 하겠는데 이 집은 음식맛이 너무 진하다는약점이 있는 데다 값비싼 별식을 주문하지 않으면 손님 대접을 해주지 않는장삿속이 얄미울 정도다. 이에 비해 해태식당은 주인 아줌마의 인상이 넉넉하고 며느님도 상냥하게 맞아주고 한정식 한 상에 태어육(魚肉), 즉 육해공군이 밑반찬과 요리로 28접시나 나온다. 돔배젓 · 토하젓 같은 토산젓갈뿐만 아니라 깻잎 하나를 무쳐도 서울맛과는 다른 접시가 되며, 생선회와 찌개는 철따라 메뉴가 달라진다.
나는 이집 한정식이 1인당 500원일 때부터 드나들었는데 그래 봤자 여덟 번이다-지금은 8,000원이 되었다. 1인당 5,000원을 받던 2년 전 여름답사 때 생선회는 빼고 3,000원짜리 백반으로 우리 답사회 식구들이 아침, 저녁을 먹기도 했는데, 올해 갔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해달라니까 이제는안된다고 거절하였다. 그것은 남도땅이 나를 슬프게 하는 여러 사항 중 하나였다. - P36

서산·당진을 지나 서울로 오는 길에 답사객은 삽교천방조제를 넘을 때면 으레 서해바다의 일몰을 보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불법인 줄알지만 방조제 한쪽에 차를 세우고 붉은 태양이 서해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그것을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리라. 모르긴 해도 저마다 비장한 무엇을생각하거나, 다짐하는 것이리라. 삽교천 방조제에서의 일몰,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삽교천 건설에 얽힌 20세기 한국사의 엄청난 사건 하나였다. 1979년 10월 26일. 난공사 가운데 난공사였던 삽교천이 개막된 날, 박정희 대통령은 거대한 개막식을 치르고 그날 밤 죽었다.ㅣ - P130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답사를 홀로 다닐 때 나는 기차보다 고속버스를 좋아했다. 편하기로 따진다면 기차가 월등 낫지만, 우선 시간 맞추는 구속이 번거롭고 값도 비싸며 무엇보다도 주위가 산만해서 싫다. 모처럼 갖는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는 고속버스가 훨씬 좋다. 기차를 탔다가 만약 앞이나 뒷자리에 수다스런 여자 둘이 앉거나 유별나게 옴지락거리고 칭얼대는어린애가 곁에 있는 날에는 망해도 보통 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위험부담은 고속버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달리는 버스 속에서 사람들은 곧잘 잠들기때문에 수다도 소란도 오래가지 않는다.
표를 살 때면 나는 으레 25번이나 33번을 달라고 한다. 이 두 자리는 운전석쪽 중간 뒷부분 창측 좌석인데 유리창이 넓게 트여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다. 같은 창측이라도 다른 자리는 창틀이 가운데 붙어 있어서 아주 갑갑하다. 20번을 넘어섰으니 금연석도 아니고 비디오를 틀어도 소음이 거기까지는 안 미친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버스 문쪽에 있는 28번과 36번을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줄곧 33번 자리에 앉아 다녔다.
그 고속버스 33번 자리에 앉아 가장 많이 간 곳은 경주였다. - P131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었는데, 맨 위에 마감한 정자석(石)과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29. 한 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숫자는 어디까지 세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362개 즉 1년의 날수가 된다. (이상 박성래교수: 한국사특강편찬위, 『한국사특강, 서울대출판부 1990, 433) - P134

뿐만 아니라 첨성대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준이 되는 일정한 기능도 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分)과 지점 측정의 역할을 한다. (이상 전상운교수:)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75, 54)


얼마나 절묘한 구조이고 기막힌 상징성인가? 또 모든 것을 떠나 첨성대의 생김새를 보라. 얼마나 안정감 있고 아담하며 조순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가.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은 안정감을위한 비례였을 것이며, 유연하게 뻗어 올라간 형태미와 곡선은 친숙하고 아담한 것을 좋아했던 그 시대 미적 정서의 표출일 것이다.
첨성대가 세워진 것은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라고 전해진다. 첨성대 몸체가 27단으로 된 것도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상징성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연한 수치의 일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덕여왕 시절의 문화는 1,000년 신라역사 속에서 아주 독특하고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첨성대도 그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 P135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좋은 유물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내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정양모선생이었다. 선생의 아호는 소불(佛), 소불선생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93년 3월에는 관장으로 승진하셨다)으로 계시지만두 차례에 걸쳐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셨다. 소불선생이 경주에 계실 때 나는 여러번 찾아뵈었다. 답사길에 들르기도 했고, 여쭙고 도움받은 일도 있 - P135

었고, 때론 선생의 일을 도와드리러 가기도 했는데 1985년 어느 여름날,
나는 소불선생이 그저 뵙고 싶어 관사에 찾아가 하룻밤 묵고 돌아온 일이있다.
저녁을 마치고 관사로 돌아온 소불선생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 경주에서 좋아하는 유물을 차례로 대보게."
"석굴암, 석가탑, 고선사탑, 감은사탑, 삼화령 애기부처, 태종무열왕릉거북이, 에밀레종 비천상 남산 용장사 마애불, 불곡 감실부처님, 삼릉게 마애불, 보리사 약사여래상…… 그 정도이겠네요."


아마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주편은 이곳들의 이야기로 엮어질 것이틀림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또 누가 꼽아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소불선생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 P136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장항사 절터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에밀레종 치는 거 직접 들어보았나?"
"아니요."
"자네, 경주를 말하려면 꼭 이 세 가지를 잘 음미해야 할 걸세.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일세."
그 이상의 말씀은 없었다. 조금은 풀이 죽어 더 묻지도 못했고, 일단 답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꼭 다녀오겠다는 말씀만 드렸다.
과연 에밀레종 소리는 위대한 것이었다. 과연 장항사 절터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진평왕릉은 위대하거나 멋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았다. - P136

이 풀지 못한 숙제는 나의 경주행을 언제나 괴롭혔다. 나는 소불선생의안목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평왕릉이 별것 아니군" 하는 생각을가져볼 수도 없었다. 혹시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소불선생을 모시고 함께 가본 것도 세 번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분위기를 좀 봐. 좀 좋아" 하시는 정도였고 그 이상의 말씀은 없었다. 그러면 나는풀죽은 목소리로 "예" 하곤 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금년 봄, 경주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창밖의 보름달이 줄기차게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날 고속버스 33번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바로 그것이었다. 소불선생이 제시한 세 가지 유물들은 사실상 가시적인 형태의 미술사적유물들은 아니었다. 그 대신 찬란한 신라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세 가지 유형, 즉 진평왕릉은 7세기 전반, 장항사지는 7세기 후반, 에밀레종은 8세기 중반 신라문화의 특질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P137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찬란한 문화‘라는 말을 무수히 강요받아왔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도 문화를 설명할 때는 "찬란하였다" 이며, 지배층의 향락과소비의 도덕적 타락을 말하고서도 문화는 ‘찬란‘이었다. 논리적으로 가당치도 않은 이런 미사여구는 맹목적 애국주의의 소산이거나 찬란하지 못했던201문화의 열등의식이 낳은 표현일 뿐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문화에는 기복이 있어서 찬란했던 시절이있는가 하면, 별볼일 없었던 시절도 있다. 침체, 새로운 준비, 새로운 일깨움, 찬란한 창조, 매너리즘과 과소비현상, 문화적 가치의 대혼란, 그리하여다시 침체, 새로운 준비로 흘러가는 문화의 생장소멸이라는 도도한 흐름이있는 것이다.
ERKK - P146

그리하여 나는 감실입구부터 오른쪽으로 꺾어들 만한 길이면 모조리 꺾어들다가 서너 시간만에 감실부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래도 이 부처님을 원망하거나, 미술사에서, 문화사에서 푸대접 받고 있는 이 부처님을 가엾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그 넉넉한 모습이 1,3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여기 이 자리에 건재함을 축하드렸다.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연 암석을 깎았기에 어떤 도굴꾼도 당신을 겁탈하지 못하였고, 바위를 깎아 감실을 만들었기에 풍화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관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람의 손때를 입지 않았으니 어느 불상이 당신처럼 본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상처받지 않은 행복이 있었겠느냐는 축복이었다. 감실부처님에게 매료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일본인 학생은 이 감실부처님을 달밤에 찾아왔다가 너무도 감복하여그 앞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자고 갔단다.  - P148

그는 내강의를 듣고 경주답사에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과에서 답사왔을 때 다 보았다는 식으로 시큰둥해하더니 감은사탑 앞에 이르러서는 "선생님, 정말로장대하네요"라며 나보다 먼저 그 감흥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게좀 쑥스러웠던지 "제 생전에 돌덩이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경험은처음입니다"라며 탑쪽으로 뛰어가서는 이 각도에서도 보고 저 각도에서도보고 올라가 매만지며 즐거워하였다.
그런 감은사탑이다. 본래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없는 법이다. 그저거기서 받은 감동을 되새기면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마치 월드컵축구에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싸운 날, 멋진 골인장면을 되새기고 또되새기며 즐거워하는 축구팬의 모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감은사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 P154

추령고개는 제법 높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높이 올라왔더냐 싶게 저 멀리 동해바다가 희뿌연 안개 속에 가물거리고 내리막 고갯길은 구절양장으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고갯길을 내려오면 갑자기 깊은 계곡 속에 파묻히는 스산한 냉기가 젖어온다. 육중한 산세를 비껴도는이 길은 노루목까지 이어진다. 재작년부터인가 이 계곡도 여름날에는 초만원이다. 그래서 11월 중순에 이 길을 넘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황룡계곡의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이내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 거기가 장항리. 양쪽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 계류가 만나 제법 큰 내를 이룬다. 그것이 대종천이다. 한 갈래는 함월산에서 흘러온 것이고, 또 한 갈래는 토함산 동쪽을 맴돌아 내리뻗어 있다.
함월산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선덕여왕 때 창건된 기림사(寺)가있고 계곡 입구에서 1km쯤 오르면 골굴암 (窟庵)이 있다. 골굴암에는,
몇 해 전에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했지만 통일신라 부처님 중에서 가장 원만한 인상을 풍기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고, 기림사에는 조선 연산군 7년(1510)에 만든 건칠보살상, 조선시대에 지은 잘생긴 절집, 요즘 낙성한박물관이 있어 그것이 한나절 답사코스가 된다. - P158

반대편 토함산쪽 계곡을 따라 10리 길을 올라가면 장항리 폐사지가 나온다. 맑고 넓은 냇물을 징검다리로 예닐곱 번은 건너야 한다. 여기가 소불선생이 "경주를 말해주는 세 가지 유물" 중 하나로 꼽았던 그 절터이다. 폐사지에는 준수한 오층탑 하나, 일제 때 도굴꾼이 다이너마이트로 탑을 허물고 사리장치를 훔쳐간 무너진 석탑이 하나, 주인 잃은 거대한 불상좌대만 남아 있다. 돌보는 이 없어 해묵은 마른 갈대잎만 스산하게 스치는황량감이 감돌지만, 통일신라 초기 - 아마도 문무대왕 시절 -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기백과 의지만은 역력히 서려 있는 곳이다. 신라 고찰의품격이 살아 있는 곳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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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11권 펴내는 동안 박물관·미술관을 주요답사처로 삼은 적은 없다. 그러나 이번 서울 답사기에서는 강서구 가양동에 있는 ‘겸재정선미술관‘과 ‘허준박물관‘으로 향한다.
이 미술관과 박물관은 국립도 시립도 아닌 구립(區)으로 규모가 큰것도 아니고 건물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유물이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 땅에 역사가 열린 이후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문화사의 두 위인, 화성(聖) 겸재(謙齋) 정선(鄭, 1676~1759)과 의성(醫聖) 구암(龜巖) 허준(許浚, 1537~1615)을 기리는 기념관이기에 답사처로서 충분한 의의를 가진다. - P239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가 65세부터 70세까지 5년간 현령으로 근무했던 양천현의 관아가 있던 자리로 ‘양천향교‘가 그 옛날을 증언하고 있고, 허준박물관은 그의 관향(貫鄕)에 세워진 것으로 여기엔 ‘허가바위‘가 있다.
이 미술관과 박물관은 서로 가까이 있으며 주변 환경이 아주 아름답다. 겸재정선미술관은 한강변의 궁산(해발 76미터)이라는 야트막한 동산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궁산 산책로를 따라 오르면 겸재가 그림으로도 그린 정자 소악루(小岳樓)가 복원되어 있어 여기서 한강을 조망할 수있다. 허준박물관 곁에는 구암근린공원이 있고 올림픽대로를 가로질러한강변으로 나아갈 수 있는 구름다리도 있다. 그래서 이 답사 코스는 한강의 어제와 오늘을 그려보는 한 차례 여로가 된다. - P240

겸재가 그린 <양천현아도>(간송미술관 소장)가 있어 양천현 관아의 모습을 여실히 복원해볼 수 있다. 현감의 집무실인 동헌(軒)을 중심으로 하면서 외삼문과 내삼문의 행랑채가 겹으로 감싸고 있는 것이 아주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겸재가 남의 집을 제3자의 입장에서 본 것이 아니라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그렸기 때문에 더욱 정감있게 그린 것 같다.
그림 우측 상단의 화제는 겸재가 양천으로 떠날 때 그의 절친한 벗이자 당대의 시인이었던 사천(桂川)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써준 전별시의 첫 구절이다.


양천을 박(薄)하다고 말하지 말라莫謂陽川薄 - P242

양천의 흥(興)에 여유가 있을지니陽川興有餘


화제 글자 중 박(薄) 자를 낙(落) 자로 읽기도 하지만 문집을 보면 박자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양천은 물산이 박하지 않아 종6품의 현감(縣監)이 아니라 종5품의 현령(縣令)이 다스리는 한 급수 높은 고을이었다.
양천현아를 그린 그림으로 겸재의 제자인 김희겸(金喜謙)이 그린 <양천현해도(陽川縣廨圖)〉(리움미술관 소장)도 있다. 김희겸의 또 다른 이름은김희성(金喜誠)이고 호는 불염자(不染)인데, 그는 겸재의 제자로 도화 - P243

서 회원이 되어 어진과 의궤 제작에 참여하여 사천현감까지 지냈고 중인문학 서클인 송석원시사에도 참여하여 풍요속선(風謠續選)』에 그의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불행히도 요절하여 표암 강세황이 그의 단명을애도한 글을 지은 바 있다. 그는 아마도 스승을 뵈러 양천현을 방문하여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두 그림을 보고 있으면 진경산수는 회화적 아름다움과 동시에 카메라가 없던 시절 당시의 풍광을 그대로 전해준다는 시각적 기록의 기능이 따로 있음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이런 그림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양천현의 옛 모습을 그려볼 수 있었겠는가. - P244

조선시대에 관아가 있는 고을엔 반드시 향교가 있었습니다. 유교는종교이면서 동시에 학문이었기 때문에 향교에서는 교(敎)와 학(學)이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향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대성전과 교육이행해지는 명륜당, 그리고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로 구성되어있습니다.
향교의 학생 정원은 『경국대전』에 따르면 목사 고을엔 90명, 각 현에는 30명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학업은 7, 8세부터 서당에서 시작되고 향교의 입학은 16세부터로 제한했습니다. 이는 16세부터가 바로 군역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향교생에게는 군역이 면제되고 학업 성적이 우수한 경우 생원진사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었습니다.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와 맹자를 비롯한 유교의 4성(聖), 그리고 설총, 최치원을 비롯한 우리나라 18현(賢)의 위패를 모시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향교는 일종의 종교 건축이었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멸망 후에도 각 고을의 유림들에 의해 그대로 보존되어 현재 남한에만 234개의향교가 있습니다. 그 많은 향교 중 서울특별시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이 양천향교입니다." - P245

현재의 양천향교는 1981년에 복원된 것으로 옛날에 관아 앞에 있었더 역대 현령 공덕비가 이곳으로 옮겨져 줄지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정작 겸재 정선 현령의 공덕비는 없다. 이에 겸재정선미술관 개관부터관장을 맡았던 고(故) 이석우 관장은 지금이라도 세워보려고 노력하셨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이석우 관장은 참으로 조용하고 성실한 분으로 경희대 역사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뒤 일생의 후반을 겸재정선미술관장으로 보낸 ‘박물관인생‘으로 나와 가까이 지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고 나니 허전한마음이 일면서 더욱 그리워진다. - P247

양천향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겸재정선미술관(양천로47길36)이 있다. 2009년에 개관한 미술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에 연면적1,000평(3,300제곱미터) 규모로 궁산을 등지고 있고 넓은 호수를 낀 서울식물원이 내려다보이는 풍광 수려한 곳에 위치해 있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겸재정선기념실‘ ‘진경문화체험실‘이 상설전시실로 꾸며져 있고 기획전시실, 세미나실이 따로 마련되어 겸재 정선에 관한 학술행사와 지역 미술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박물관 액티비티 (활동)‘가 자못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특히 어린이 미술관이 활성화되어 있고, 미술관 한쪽에는 겸재 정선이 툇마루에 앉아 국화꽃을 감상하는 장면이 그려진 <독서여가도(입체적으로 재현하여 겸圖)>를재와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든 포토존도 있다.
그중 겸재정선미술관을 답사하는 참 의의는 영상실의 11분짜리 동영 - P247

상과 연대기를 소개한 패널을 통해 겸재의 일생과 예술세계를 새겨보는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친절성이 좀 지나쳐 설명문은 미세한사항까지 쓰여 있어 너무 길고, 작품 사진이 너무 많아서 관객들은 오히려 찬찬히 읽어보지 않고 게걸음으로 지나쳐버리게 하는 것 같다. 본래 안내판의 정보는 짧고 쉽고 간단하게‘ 하는 것이 친절한 것이다. 지난번 답사 때 새로 부임한 김용권 관장에게 내 생각을 말하니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리노베이션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니 그때를 기대해보며내가 알고 있는 겸재 정선의 삶과 예술을 여기에 옮긴다. - P248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그동안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은 산수의 윤곽과 구도를 잡을 때 (중국 화본에 나오는 16준법(法, 산주름을 표현하는 법)을 따랐기 때문에 (…) 오직 한 가지 수묵법으로만 표현하였으니 (…)어찌 (진정한) 산수화가 있다고 하겠는가.
겸재는 일찍이 백악산 아래 살면서 그림을 그릴 뜻이 서면 앞산을마주하고 그렸고 (・・) 금강산 안팎을 두루 드나들고 영남을 편력하면서 여러 경승지에 올라가 유람하여 그 물과 산의 형태를 다 알았다.
그리고 그가 작품에 얼마나 공력을 다했는가를 보면, 쓰고 버린 붓을땅에 묻으면 무덤이 될 정도였다.
이리하여 스스로 새로운 화법을 창출하여 우리나라 산수화가들의병폐와 누습을 씻어버리니, 조선적인 산수화법은 겸재에서 비로소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다 할 것이다.


이어서 관아재는 겸재 정선의 예술적 역량과 성취는 중국회화사상 최고의 화가로 지칭되는 송나라 미불(米), 명나라 동기창(董其昌)과 거의필적할 만하다며 이는 조선 300년 역사 속에 볼 수 없는 경지라고까지말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오늘날 겸재를 화성으로 기리고 있는 것이다. - P249

겸재정선기념실 맨 마지막 진열장에는 ‘원화전시실‘이 따로 마련되어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겸재의 진품들을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에원화전시실이 따로 있는 곳은 아마도 여기뿐일지 모른다. 사실 미술관에 원화를 전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겸재의 중요 작품들은 이미 국립중앙박물관, 간송미술관, 리움미술관 등 유명한 박물관과 유수한 개인 컬렉션에 소장되어 있어 원화를 들이기가 너무 어려워 많은 부분을복제화로 대신하고 어렵사리 소장하고 있는 원화를 한곳에 전시하며 한편으로는 원화도 있음을 자랑하는 것이다. 겸재정선미술관은 개관 때부터 고 이석우 관장과 지역 유지인 전 강서문화원 김병희 원장이 열과 성을 다하여 현재 10건 12점(수탁 소장 포함 24점)의 원화를 소장하고 있으니그것만으로도 장하다고 할 만하다.
원화전시실 한가운데 전시되어 있고 근래에 구입한 <동작진도(銅雀津圖)〉는 비록 소품이지만 한강의 동작나루의 풍광이 아련하게 그려져 있는 진경산수의 걸작이다. 이미 공개된 사실이어서 밝혀두자면2021년 6월 서울옥션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끝에 강서구가 4억 4천만원(수수료 포함 약 5억 원)에 낙찰받은 것이다. - P254

겸재의 <경교명승<경교명승첩>에서 겸재가 그림을 그리고 제목까지 붙인 <양천십경도>에 사천 이병연이 지은 시를 예쁜 시전지에 써서 함께 장황한 작품은 다음과 같다.


〈목멱조돈도(木覓朝圖)> : 목멱산(남산)의 해돋이
<안현석봉도(鞍峴夕烽圖)> : 안산(모악산)의 저녁 봉화
〈공암층탑도(孔巖層塔圖)>: 공암의 다층탑
<금성평사도(錦城平沙圖)> 
: 금성(난지도)의 모래톱
<양화환도도(楊花渡圖)>  : 양화진에서 나룻배를 부르다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 : 행호(행주산성)에서 물고기를 바라보다
〈종해청조도(宗海聽潮圖)〉 : 종해헌(양천현아 건물)에서 조수 소리를 듣다
<소악후월도(小岳候月圖) : 소악루(궁산의 정자)에서 달을 기다리다<설평기려도(坪騎驢圖)> : 설평(눈내린 들판에 나귀 타고 가는 사람 <빙천부신도(氷遷負薪圖)〉 : 빙천(얼어붙은 길에 나뭇짐 지고 오는 사람 - P259

정선의 <목멱조돈도〉,
에는 사천이 예쁜 시전지에 쓴 시가 붙어 있중 서울 남산의 해돋이를 그린 <목멱조돈도>를 보면 예쁜 시전지에 이병연의 다음과 같은 시가 실려 있다.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높은 산봉우리들 희미하게 나타나네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曙色浮江漢
觚棱隱約參
朝朝轉危坐
初日上終南

<목멱조돈도>에는 아침 햇살이 목멱산에 걸린 은은하면서도 평화로운 강변 풍경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서울 남산(목멱산)의 봉우리가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인데 겸재 당년에는 실제로 이처럼 뾰족했다고 한다.
그러던 남산 봉우리가 세월의 흐름 속에 점점 깎이어 일제강점기 사진 - P260

에는 뾰족한 봉우리가 사라져 있다.
근대 한국화 6대가 중 한 명인 심산 노수현은 한국전쟁 때 피란 가지못하고 서울 명륜동 집에 있었는데, 9.28 서울 수복 3일 전부터 서울에폭격이 있어 밖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폭격이 끝나고 나와보니 남산봉우리가 더 낮아져 있어 옛 모습을 회상하며 <남산고의>(南山古意,  남산의 옛 모습)라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경교명승첩>에는 겸재가 누군가와 한강을 따라 뱃놀이를 한 뒤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한강 유람도가 있다. 양수리부터 양천까지 한강을따라 내려오는 명승 여덟 곳을 그린 것이다. - P261

소악루 답사로 겸재정선미술관의 답사는 끝나고 곧바로 한강변의 또 다른 옛 명승인 공암(서울시기념물 제11호)으로 향한다. 공암은 공암(巖), 공암(孔), 또는 구멍바위라고도 하는데 겸재정선박물관에서 걸어서 15분, 차로 5분 거리인 같은 가양동에 있으며 가까이 허준박물관이 있다.
공암은 현재 올림픽대로 안쪽에 위치해 있지만 겸재의 그림에서는한강변에 우뚝한 벼랑으로 그려져 있다. 겸재는 이 공암을 즐겨 그린 듯<경교명승첩>에 <공암층탑도>가 들어 있고 <안현석봉도>에서는 오른쪽강변에 공암을 그려넣었고 <양천팔경첩>에 있는 <소요정도> 그림은 사실상 공암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은 보면 공암 절벽 위에는 석탑이 있었던 모양인데 지금은사라지고 탑산이라는 이름만 남아 있다. 그리고 이 세 폭의 그림에는 한결같이 공암 바로 곁에 2개의 바위가 섬처럼 물속에 잠겨 있는데 이 중 - P268

가 있다.
하나는 광주바위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경기도 광주에서 떠내려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광주바위는 오늘날 구암근린공원 안의 연못 속에 장식 바위처럼윗부분만 보일 뿐이다. 이로써 한강변의 지형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실감하게 되는데 광주바위 뒤쪽으로는 ‘서울탑산초등학교‘라는 팻말이 크게 붙어 있어 그 옛날을 상상하게 한다. - P269

"『동의보감』은 『의방유취(醫方類聚)』,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등조선의 의학서를 집대성했을 뿐 아니라 중국 한나라부터 명나라에 이르는 200여 종의 문헌을 두루 참고했습니다. 특히 중국의 의학책은 책마다 다르게 말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허준은 자신의 학식과 경험으로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의학과 양생이 별개로 전개되었지만 『동의보감』에서는 병났을 때의 치료는 물론이고 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추구하는양생을 하나로 합쳐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책은 총 25권 중 목차만 2권일 정도로 자세히 분류하여 백과사전의 색인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했고 참고자료의 인용처를 일일이 밝힘으로써 근거를 명확히 한 것입니다."


들을수록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잠시 말을 잊고 있었는데 유기덕 회장은 힘주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P274

『동의보감』의 동(東)은 동국(우리나라)의 의학서라는 뜻이지만 실제그 내용은 동양(東洋)의학의 보감입니다."


이에 나는 곧바로 문화재청 실무자를 불러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국제자문위원인 서경호 교수(당시 서울대 중문과)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아태지역 위원인 조은수 교수(서울대 철학과)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라고 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9년 7월 동의보감』은 카리브해의 작은 나라인 바베이도스에서 열린 제9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에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P275

이렇게 개장된 망우리 공동묘지를 경성부에서는 보통묘지, 가족묘지,
단체묘지 3종으로 나누고, 이를 또 1등지에서 5등지, 그리고 등외지까지 분류하여 불하 가격에 차등을 두었다. 보통묘지의 경우 1등지는 1평에 10원, 5등지는 1원, 등외지는 50전에 불하한다는 세칙까지 마련했다.
그리고 1933년 9월 8일자 ‘경성부 고시 제118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고시했다.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와 교문리, 그리고 고,양군 뚝도면 면목리 소재 공동묘지를 망우리묘지라 칭함.


이렇게 시작된 망우리 공동묘지는 40년 동안 47,700여 기가 들어서면서 묘역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1973년 3월에 폐장시킴으로써 매장이 종료되었다. 이후 망우리 공동묘지는 신규 분묘 조성이 금지되었고 이장과 폐묘만 허용되면서 현재 약 7,000기의 무덤이 남아 있다. 이것이 오늘날 망우리 공동묘지이다. - P290

삶과 죽음, 있음과 없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불이(不二) 의 사상이 깔려 있어 한 줌의 재가 되는 화장 문화를 낳았다. 이에 반해 유교에서는 인간은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여 혼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무덤으로 정성스럽게 조성했던 것이다.
봉분을 조성하는 문화는 산지가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우리나라 산천의 자연환경에 어울리는 장례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왕조는신분에 따라 주택 크기에 제한을 두고 호화주택을 금지했듯이 분묘에도엄격한 제한 규정을 두었다. 조선왕조 국가 운영의 기본 틀로 제정된 『경국대전』에서는 양반 사대부 무덤의 규모를 다음과 같이 제한했다.


종친 1품은 사방 100보로 하고 이하 10보씩 줄여 문무관 1품은 사방 90보, 문무관 2품은 사방 80보, 문무관 3품은 사방 70보, 문무관4품은 사방 60보, 문무관 5품은 사방 50보, 문무관 6품 이하 및 생원 · 진사는 사방 40보. - P291

나는 왼쪽 초입에 동떨어져 있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利泰院墓地 無緣墳墓 合葬碑)‘ 부터 찾아갔다. 여기는 본래 묘지로 쓰기에는 부적절한 ‘등외지‘인데 1935년 이태원 공동묘지에 있던 무연고 묘 2만 8천 기를 화장하여 합장하고 작은 위령비를세워놓았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에 세워놓은 비석 앞면에는 ‘이태원묘지 무연분묘 합장비‘라고 쓰여 있고 뒷면에는 설립 날짜와 함께 시행처로 ‘소화 11년(1936) 12월 경성부(昭和十一年十二月京城府)‘라고 쓰여있다.
연고가 없어 제대로 위로받지 못하는 2만 8천 혼백들이 이렇게 작은봉분 속에 묻혔다는 사실에 처연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 합동묘에는 다른 분도 아닌 유관순(柳寬順, 1902~20) 열사도 있다는 사실에 더욱 가슴이 아려온다. - P303

평범한 둥근 무덤이지만 무덤 곁에는 이중섭을 무한히 존경했던 조각가 차근호가 세운 아담한 묘비가 있다. 묘비에는 두 아이가 꼭 부둥켜안고 있는 애잔한 모습을 담은 이중섭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무덤 곁에는 구상 시인이 장례 때 심은 소나무가 굳세게 자라 이 불우했던천재 화가의 넋을 기리고 있다. 그때 3년생을 심었다면 이제 수령 60년이 넘는 노송이다.
‘황소의 화가‘ 이중섭은 국민화가라 일컬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그의 예술은 위대하지만 삶은 불행했다. 41세로 생을 마친 그의 마지막은 너무도 슬프다. 함흥 철수 때 남하하여 부산, 통영, 제주도를 전전하며 살았다.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 처갓집으로 보내고 헤어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한 그는 폭음을 하며 몸부림치다 - P310

마침내 육신은 병들고 정신은 방향을 잃어갔다.
1955년 그림자 같은 벗인 시인 구상과 와사등의 시인 김광균을 비롯한 친구들의 도움으로 서울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연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전시는 그의 예술을 꽃피운 향연이자 행복이었다. 전시회에 성공하면 가족을 만나러 갈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나 그림판매는 여지없이 실패했고 그 좌절 속에 몸과 정신은 점점 더 피폐해졌다. 이따금 그는 발작을 일으켰다.
우울증과 영양실조, 거기에 거식증과 간염까지 겹쳤다. 친구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정신병원에서 그가 그린 정신병 환자 특유의 그림을 보면 더욱 안타까움이 느껴진다. 그는 몇 차례의 탈출 소동으로 여러 병원을 옮겨다니다 결국 1956년 9월 6일에 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반은 이곳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고, 반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죽어서야 혼백의 일부가 그리워하던 아내와 아이들 곁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에게 이중섭을 한마디로 소개하라면 ‘그리움의 화가‘라고 하겠다.
인간 누구나 품고 있는 그리움의 감정을 이중섭처럼 가슴 저미게 형상화한 화가는 드물다. 이중섭의 <황소> <달과 까마귀> <매화꽃 그리고수많은 은지화(紙) 모두 그리움의 감정으로 읽으면 그의 예술이 더욱 절절히 다가올 것이다. 시에 소원이 있다면 그림에 이중섭이 있다. - P311

설산의 무덤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오른쪽으로는 동락정이라는 육각정자가 있고 조금 더 가면 왼쪽 산자락에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1899~1959)의 무덤이 나온다. 죽산을 생각하면 누구나 가슴이 먹먹해질것이다. 묘소 입구에는 그를 기리는 죽산 당신의 어록 하나가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 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 P317

국내외에서 활동하다가 신의주 감옥에서 7년간 복역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당 주요 지도자 중 한사람이었지만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과 결별하고 중도파의 길을 걷기시작하여 1948년 인천에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초대 농림부장관과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1956년에는 진보당을 창당하고 제2대, 제3대 대통령선거에서 연이어 2위를 차지하여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떠올랐다. 그런 죽산이 갑자기 체포되어 ‘북한과 내통해 평화통일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결국 1959년 7월 31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후 죽산 조봉암을 언급하는 것은 금기시됐다. 그리하여 조봉암의묘비는 이름 외에 아무런 글이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로 세워져 있다. 아무 글씨가 없는 이 백비(白碑)야말로 어떤 장문의 비문보다도 - P318

많은 말을 담고 있다.
세상이 민주화되어 죽산 사후 40년 뒤인 1999년에서야 그의 명예회복을 위한 범민족 추진 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2007년 9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조봉암에 대한 사과와 그의 명예회복을 국가에 권고했으며,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대법관 13명 전원 일치 판결로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조봉암의 묘역은 자연석과 회양목으로 돌 축대를 반듯하게 쌓고 장명등과 망주석을 세워 품격있는 무덤으로 정비했으며, 주변의 잡목도 제거하여 묘소에 아주 밝은 기상이 감돈다. 그렇게 해서 죽산은 복권되었지만 영혼이 온전히 신원(伸寃)된 것은 아니었다. 그간에 받아온 ‘빨간 딱지‘는 지금까지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아 2009년에 열린 서거 50주기 행사에는 진보적인 정치인 몇몇과 그의 고향 인천의 후배 정 - P319

치인 몇몇만이 모였다. 그날 아침 갑자기 비가 쏟아져 흰 천막을 쳤는데추모식이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듯이 비가 그쳐 맑은 하늘 아래 식을치르며 모두들 죽산의 혼이 모처럼 밝은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라고들여겼다고 한다.


죽산의 무덤에서 내려와 우리는 길 건너 있는 육각정자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벌써 1시간 반을 걸었다. 정자에 오르니 시야가 갑자기 넓게트이면서 오른쪽 잡목들 사이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한강이 보였다. 정자 아래쪽으로는 샛길이 나 있는데 이 길을 따라가면 고구려시대의 아차산 보루(堡)들이 나온다. - P320

/아차산가 국가사적 제455호로.
정자에서 내려와 다시 답사를 시작하니 순환도로가 멀리까지 뻗어있는 것이 보인다. 이제부터는 사뭇 산등성을 따라가는 편안한 산책길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이 당당히 ‘인문학의 길‘이라는 이름을 내걸 만름이 길에는 역사문화 인물들의 묘소가 집중적으로 모여 있다.
만해 한용운에서 호암 문일평, 위창 오세창, 아사카와 다쿠미, 소파 방정환, 유상규 의사와 도산 안창호 선생 가묘(假墓), 화가 이인성, 조각가권진규, 종두법의 지석영, 시인 김상용 등의 무덤으로 이어진다. 우리는그 길을 따라 심기일전의 발걸음으로 다시 답사를 이어갔다. - P323

망우리 공동묘지를 답사하면서 나는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죽음이란 결국 자연 생물계의 공통된 숙명인데 지구상의 동물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장례를 치른다. 그러나 그 시신을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가는 민족마다 종교마다 다르다. 티베트의유목민들은 시신을 새의 먹이로 바치는 조장(葬)을 치르고, 어느 섬의원주민들은 바다에서 수장 한다고 한다.
을우리나라는 청동기시대 이래로 매장(葬) 문화를 갖고 있다. 지하에안치하는 방식에 따라토광묘·옹관묘·목관묘·적석묘·석실묘 등이 있고 지배층의 무덤은 지석묘(고인돌), 적석목곽묘(돌무지덧널무덤), 전축분(벽돌무덤), 석실봉토분(돌방흙무덤) 등 시대마다 나라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 P325

장례 풍습은 인간의 생활방식 중에서 가장 보수적이어서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장례 풍습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다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화장한 유골을 모시는 납골묘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나 전통적인 매장 문화의 풍습은 좀처럼바뀌지 않았다. 특히 조선왕조가 이데올로기로 삼은 유교에는 사람이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 사당에 모시고 백은 땅에묻고 무덤을 만드는 장례 풍습이 있어서 매장 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장례 풍습이 알게 모르게 많이 바뀌고 있다. 전통적으로 우리의 장례는 집에서 치러졌다. 20여 년 전, 금세기 초만 해도 상갓집으로 문상을 가는 것이 상례였다. 그때만 해도 아파트로 문상가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당시 병원의 영안실은 거의 혐오시설에 가까웠다. - P326

설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1994년 삼성의료원에 장례식장이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영안실은 장례식장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결혼예식장처럼 그 이용이 일반화되었다. 요즘은 궁벽한 농촌에서도 집에서 장례를 치르는 일이 거의 없다. 이와 동시에 매장보다 화장이 더 선호되고 있고 개인 분묘가아니라 납골당에 안치하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이로 인해 요즘 새로조성되는 공동묘지는 공원묘원이라는 이름으로 종래의 어두운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있다.
망우리공동묘지가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름을 바꾸며 ‘공동묘지‘
에서 벗어나 ‘공원‘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우리 장례 문화의 이런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국가유공자를 따로 모시는 현충원은 처음부터 공원으로 조성되었지만, 경기도 남양주 마석의 모란공원묘지에 민주열사 묘역이 따로 조성된 것은 우리 시대 사회상을 반영한 결과이다. - P326

오스트리아 빈의 중앙묘지(Wiener Zentralfriedhof)에는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심지어 주검을 찾지 못한 모차르트의 기념비까지 있다.
고암 이응노의 무덤이 있는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는 소설가 발자크,
화가 쇠라, 대중가수 피아프 등이 묻혀 있는 명소다. 무덤에 있는 조각이나 비석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거기 그분들이 있기 때문에 찾아가는것이다.
망우역사문화공원에는 현재까지 조사된 것만 살펴봐도 역사문화 인물 50여 분의 묘소가 있다. 서양의 공동묘지처럼 요란한 돌 치장을 하는대신 양지바른 산자락에서 나무들의 호위를 받는다. 이 묘소들은 돌아가신 분들이 풀에 덮여 흙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는 점도 특색이다. - P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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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판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刊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이때 봉은사에 머물고 있던 추사는 병들고 쇠약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현판으로 걸 <판전(板殿)> 두 글자를 대자(大字)로 쓰고는 ‘칠십일과병중작(七十一果 病中)‘이라고 낙관했다. 즉 ‘71세 된 과천 사람이 병중에 쓰다‘라는 뜻이다.
이 판전의 현판 액틀에는 작은 글씨로 누군가가 써놓은 오래된 글씨가 하나 있었다. 내용인즉, 추사가 이 글씨를 쓰고 3일 뒤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판전이 건립된 때가 1856년 9월 말이었고 추사가 세상을떠난 날이 10월 10일이었으니 대략 들어맞는다. 이 <판전>은 추사의 절필(絶筆)인 것이다.
추사의 <판전〉 글씨를 보면 추사체의 졸()함이 극치에 달해 있다.
어린아이 글씨 같은 고졸한 멋이 우러나온다. 이쯤 되면 뛰어난 솜씨는어리숙해 보인다는 ‘대교약졸(大巧若拙)‘의 경지라고 할 것이다.
- P230

30여 년 전의 일이다. 내가 추사의 일대기로 『완당평전』을 준비하면서 어느 날 틈을 내어 봉은사에 갔다. <판> 글씨를 보고 있자니 홀연히추사가 7세 때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글씨와 꼭 닮아 보였다. 참으로 신기한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은사이신 동주 이용희 선생을 뵐 일이 있어오늘 본 판전 글씨가 추사의 어릴 때 글씨 같아 보였다고 말씀드렸더니동주 선생은 한참을 생각하시고 나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아버님은 아흔여섯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본래 아버님은 경주와 대구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 경상도 사투리를 썼지만 젊어서 서울로 올라와 사시면서 경상도 말투는 다 없어지고 서울말을 하게 되어사람들은 아버지가 서울 사람인 줄로만 알았죠. 그런데 돌아가시던 그해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아버님이 경상도 사투리로 말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러고는 얼마 안 되어 운명하셨죠."
이승만 대통 - P231

이와 비슷한 또 하나의 전설적인 얘기가 하나 있다.
령은 유언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실은 그렇지않다. 이승만은 하와이에 망명했을 당시 부인 프란체스카와 단둘이 쓸쓸히 지냈다. 두 분은 항시 영어로 대화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한국어를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운명할 때만큼은 침상에 누운 채로 프란체스카를 바라보며 힘들여 한국어로 유언을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프란체스카 여사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고, 끝내 그의 유언은 세상에 전해질 수 없었다.
이렇게 인생이 처음 모습으로 돌아가는가보다. 그것이 자연의 법칙이겠지. - P231

〈판전〉을 보고 일주문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길 바로 아래에는 돌기와 담장을 낮게 두른 한옥이 한 채 보인다. 여기는 주지 스님의 거처로사용되고 있는 다래헌(茶來軒)이다. 한때 법정 스님은 여기에 기거했다.
법정의 대표적인 산문인 『무소유』에는 이 다래헌 때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나는 지난해(1968) 여름까지 난초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싱싱한 난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 - P232

(그러나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버린 것이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승가의 유행기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하고 말았다. (・・・)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우리들의 소유 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理)이니까.


이것이 법정 스님이 무소유 사상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 P233

다래헌을 곁에 두고 일주문을 향해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다 잠시 발길을 멈추었다. 봉은사 경내를 다시 한번 사방으로 훑어보니 빈 하늘엔늠름하게 잘 자란 미송들이 곳곳에서 준수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그리고 저 앞쪽으로는 찻집 연회원 앞마당에 있는 수령 300년의 라 - P234

일락 노목 두 그루가 여전히 기품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한그루는분홍 꽃, 또 한 그루는 흰 꽃을 피우는데 부처님오신날 무렵 만개하면그 짙은 향기가 온 봉은사에 가득하다.
판전 옆에는 추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백송 두 그루가 자못 싱싱히 자라고 있다. 어려서 추사는 서울 통의동 백송나무가 있는 동네에서 살았 - P235

고, 예산 추사고택의 김흥경(추사의 고조부 묘소 앞에는 추사가 북경에 다녀올 때 가져다 심은 백송나무(천연기념물 제106호)가 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명진당이 봉은사에 한창 노송을 심는 것을 보고 문화재청에서 유적지에 심기 위해 기르고 있는 수령 30년 백송 두 그루를 보내주었다. 그 백송들이 고맙게도 잘 자라고 있다. 백송의 줄기는처음엔 초록빛을 띠다가 수령 50년을 넘기면 비로소 껍질을 벗고 흰빛을 띤다고 한다. 이제 5년만 더 지나면 아름다운 백송이 되겠거니 하는기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발길을 돌려 다시 법왕루 아래로 내려와 일주문을 향해 내려가자니부도밭 돌축대 위쪽에 구불구불하게 몸을 비틀고 자란 산사나무 노목새빨간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봉은사에서 간행하는 잡지 판전」(현 월간 『명은판전』)에는 이 나무에서 유래한 ‘산사나무 아래서‘라는 고정지면이 있었다. 이 산사나무는 오랫동안 잡목 속에 갇혀 보이지 않았는데 부도밭을 정비하면서 환히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나무들과 어울리며 자라는 바람에 이처럼 기굴한 모습이 되어 오히려 귀한 정원수인 양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 P236

신경림 선생의 <나무1 지리산에서> 라는 시가 절로 떠오른다.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 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 P236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예부터 전하는 말대로 ‘절집의 큰 자산은 노스님과 노목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산사나무를 뒤로 하고 다시 일주문을 향해 걸어나갔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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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릉(宣靖陵, 사적 제199호)은 조선왕조 9대 왕인 성종의 선릉(宣陵)과 11대 중종의 정릉(靖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선정릉은 지하철2호선 선릉역 10번 출구에서 도보로 약 7분, 9호선 선정릉역 3번 출구에서약 16분 걸린다. 능의 출입구는 본래 선릉로 곁 서쪽에 있었지만 8년전(2014)에 넓은 주차장을 마련하고 동쪽으로 옮겼다.
선정릉의 위치(선릉로100길 1)는 서울 강남의 한복판으로 동쪽으로는봉은사와 무역센터 등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서쪽으로는 선릉로라 불리는 대로가 바짝 붙어 지나가고, 남쪽으로는 빌딩 너머로 테헤란로가 길게 나있다. 현재 선정릉의 면적은 7만 2,800평이며 둘레가 2킬로미터에 달하는 부채꼴 모양으로 능침(무덤) 주변은 솔밭과 숲으로 이 - P151

루어져 있다.
도시공학적으로 볼 때 선정릉은 서울 강남 도심 속의 녹지 공간으로훌륭한 가치를 지닌다. 강남에 선정릉마저 없이 빌딩 숲을 이루었다면그 삭막한 도시경관이 어떠했을까. 상상조차 하기 싫다.
선정릉의 하루 입장객 수는 약 천 명이다. 아침 6시에 문을 열고 밤9시(동절기에는 오후 4시 30분, 2월은 오후 5시에 닫는데 아침에는 대개 인근주민, 점심때는 외지 탐방객과 주변 직장인, 저녁에는 데이트족이 많이이용한다. 봄철 선릉과 정릉 사이로 난 긴 숲길에 벚꽃이 만발할 때면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이런 봄꽃놀이를 만끽한다는 것에 너나없이 놀라움을 느낀다. 공원도 이런 공원이 없다.
그래서 한때는 선정릉에 공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붙여진 이름은 선정릉공원이 아니라 삼릉(三陵)공원이었다.
이는 참으로 엉뚱한 명칭이다. 선정릉에는 선릉과 정릉 둘밖에 없음에도 삼릉이라고 불렀던 까닭은 능침(봉분)이 셋이라 그랬던 모양이다. 그러나 능침이 셋이라고 무조건 삼릉이 되는 것이 아니다. - P153

왕릉이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왕과 왕비는 함께 묻히기도 하고 따로묻히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조선시대 왕릉에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

단릉(單陵): 왕이나 왕비 한분만 묻힌 능 (예: 문정왕후 태릉) - P153

합장릉(葬陵): 두 분이 하나의 봉분에 함께 묻힌능 (예: 세종 영룽)
쌍릉(雙): 왕과 왕비가 곁에 나란히 묻힌 능 (예: 태종 헌릉)
삼연릉(三連陵): 왕, 왕비, 계비 세분이 나란히 묻힌능 (예: 헌종 경릉)
동원상하릉(同原上下): 왕과 왕비가 같은 언덕 아래위로 묻힌 경우(예: 효종 영릉)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왕과 왕비가 같은 산줄기의 다른 언덕에 묻힌 경우 (예: 성종 선릉)

중종의 정릉은 단릉이고 성종의 선릉은 동원이강릉이다. 성종의 능침과 계비인 정현왕후의 능침이 다른 언덕에 있지만 같은 산줄기에 있어홍살문과 정자각이 하나만 있다. - P154

성종대왕 선릉
중종대왕 정릉
세종대왕 영릉
정조대왕 건릉
장조(사도세자) 융릉
문정왕후(중종 비) 태릉 - P155

왕릉을 비롯한 무덤에는 죽음에 대한 그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다. 유교적 사생관(死生觀)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분리되어 혼(魂, 넋)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魄, 형체)은 땅에 묻힌다. 그래서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사당에 모시고 백은 땅에 묻고 무덤을 만들었다. 왕가에서 혼을 모신 곳이 종묘이고 백을 안치한 곳이 왕릉이다.
조선왕조 역대 왕은 27명이지만 왕과 왕비의 왕릉은 총 42기이다. 이 - P156

는 왕과 왕비가 따로 묻힌 단릉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태조의 4대조능과 실질적인 왕은 아니지만 나중에 왕으로 추대된 추존왕들의 까지더하면 숫자는 50기까지 늘어난다.
조선시대 왕릉은 풍수상 길지를 택해 양지바른 남쪽 언덕에 품위있게 조성되어 있다. 왕릉의 구조에는 정연한 건축적·조경적 의장(디자인)이 구현되어 있다. 절대군주의 무덤으로는 규모가 큰 편이 아니지만 다른 나라의 왕릉처럼 인공적인 축조물로 위세를 드러내지 않고 자연과조화를 이루는 탁월한 공간 경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왕릉은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사적으로 그 독특한 문화유산적 가치가 인정되어 2009년에 북한에 있 - P157

는 2기를 제외하고 남한에 있는 40기 모두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북한의 2기는 태조의 원인 신의왕후제릉(齊陵), 정종의 후릉(厚陵)이다.
조선왕릉의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할 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선정릉은빼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왜냐하면 세계유산 심의는 아주 까다로워문화유산으로서의 ‘고유 가치‘ 못지않게 ‘보존 실태‘를 중요한 판단 기준으로 하는데 선정릉은 능역이 크게 훼손되었기 때문에 미리 제외하자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조선왕릉 등재를 위한 2차에 걸친 국제학술대회가 열렸을 때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외국인 학자들을 선정릉에 안내하여 서울의 강남 개발과 이곳 주변의 엄청난 땅값을 알려주자 이들은 오히려 이와 같이 개발 압력이 크고 지가가 높은 지역에서문화재를 끝까지 보존하고 있는 국민정신은 높이 살 만하다며 조선왕릉전체를 빠짐없이 연속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것을 권유했다. ‘보존 실태‘
는 나쁘지만 ‘보존 의지‘를 보여준다고 인정한 것이었다. - P158

정자각 좌우 아래쪽에는 대개 3칸짜리 작은 건물이 마치이 건물을 호위하듯 다소곳이자리하고 있다. 오른쪽(동쪽)은제사를 준비하는 수복방(守僕房)이고, 왼쪽(서쪽)은 제수를넣어두는 수라간(水間)이다. 이 두 건물이 있어 왕릉은 살아 있는 공간이라는 분위기를 얻는다. 중종대왕 정릉이 썰렁해 보이는 것은 이 수복방과 수라간이 없기 때문이다.
두 건물은 비슷해 보이지만 수라간은 벽돌 담장으로 닫힌 공간이고수복방은 콩떡 담장에 툇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이다. 이것이 우리나라건축에서 보여주는 ‘비대칭의 대칭‘이다. 전체적으로는 비슷하면서 디테일을 달리하여 은근히 다양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정자각 오른쪽 계단을 내려와 능침으로 가자면 바로 이 왕릉의 주인을 알리는 비석을 모신 비각(碑閣)이 있다. 비석에는 단정하면서도 흔들림 없는 전서체로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 P165

조선국(朝鮮)
성종대왕(成宗大王)선릉(宣陵)
정현왕후(貞顯王后) 부좌강

부좌강은 왼쪽 언덕에 합사(合祀)되어 있다는 뜻이다. 즉 능침은 달라도 같은 선릉이라고 밝혀둔 것이다. 영조 31년(1755)에 세운 이 비석 뒷면에는 성종대왕의 이력 중 1457년에 태어나 1469년에 즉위하고1494년에 승하했으며 재위는 25년, 향년 37세였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정현왕후 윤씨의 경우, 1462년에 태어나 1480년에 왕비로 책봉되었고1530년에 68세로 승하하여 대왕릉 왼쪽에 장사지냈다는 사실만 간단히쓰여 있다. - P166

중종대왕의 정릉으로 가는 길은 방문객들이 선정릉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산책길이다. 벚꽃나무 숲길을 지나가다보면 왼쪽으로 정릉의 정자각과 능침이 비껴 보인다. 그러나 정릉은 그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쓸쓸하기만 하다. 오늘날 쓸쓸해 보이는 까닭은 바로 곁으로 큰길이 나있고 그 너머로는 빌딩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수복방과 수라간이 복원되지 않아 전체적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 P179

그 옛날에도 쓸쓸했다는 것은 중종에게 3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사후어느 왕비와도 함께 묻히지 못하고 홀로 누워 있는 단릉이기 때문이다.
중종의 첫째 왕비는 단경왕후, 둘째 왕비는 장경왕후, 셋째 왕비는 문정왕후다.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았고, 문정왕후는 명종을 낳았다.
단경왕후(1487~1557)는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로 연산군 5년(1499)에 진성대군 시절의 중종과 결혼했는데 1506년 연산군을 몰아내는 반정으로 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히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중종반정 때 반대편에 있었던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 이에 단경왕후는역적의 딸이라고 하여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어 궁궐에서 쫓겨났다.
궁궐에서 강제로 쫓겨난 신씨는 인왕산 아랫마을 서촌에 살면서 중종을 향한 그리움을 전하기 위해 다홍치마를 산자락 바위에 펼쳐놓고눈물을 흘리다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이 바위가 인왕산 치마바위다. - P180

그러나 명종 20년(1565)에 세상을 떠난 문정왕후는 중종 곁에 묻히지못했다. 대신들은 정릉이 지대가 낮아 또 하나의 능침을 조성하는 것은불가하다고 반대했다. 실제로 정릉은 무리하게 이장한 것이어서 장마때마다 홍살문과 정자각이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은 다시 정릉을 원래있던 희롱으로 옮길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울 노원구 공릉동 언덕에 홀로 묻히고 능호를 태릉(泰陵)이라고 했다. 이리하여 문정왕후의 태릉은 외따로떨어진 단릉으로 조성되었지만 능침과 정자각 사이가 어느 왕릉보다 길고 문신석·무신석의 조각상도 늠름하여 장중한 기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사람들은 과연 여장부 문정왕후의 능 같다고들 말한다.
이처럼 중종의 무덤은 계비 장경왕후 곁에 나란히 모셔져 있던 것을굳이 이곳으로 이장해 결국 외따로 떨어진 단릉이 되었다. 조선왕릉 중왕만 홀로 있는 무덤은 태조의 건원릉, 단종의 장릉 이외엔 중종의 정릉밖에 없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의 곁에 묻혀 있다는 점이다. - P182

과거사 문제 해결을 위해 30년에 걸쳐 이와 같은 치유의 과정이 이루어진 뒤 조선과 에도막부 사이에는 비로소 친선 외교의 길이 열렸다. 다만 일본의 사신이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사신이 일본으로 갈 테니 그 경비는 일본 측이 부담하라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 측은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1636년 일본으로 떠나는 사신은 이제 쇄환사라는 이름을버리고 ‘신뢰가 통한다‘는 뜻의 조선통신사(朝鮮通信使)라는 이름을 달 - P190

고 출발했다. 조선통신사의 일행은 정사, 부사 이하 400명에서 500명에이르는 규모였고 왕복 열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이때부터 1811년까지 조선통신사가 모두 아홉 차례 파견되었다.
이것이 임진왜란 이후 과거사 문제를 해결하고 조일 간의 평화와 선린외교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는 오늘날 일제 식민지배라는 과거사문제를 풀어가는 데 하나의 시사점을 보여주는 역사적 경험으로 삼을만하다. - P191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있는 봉은사(奉恩寺)는 현대사회로 들어와 도심속의 섬처럼 남아 있지만 그렇다고 이 사찰이 갖고 있는 불교계에서의위상과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가 크게 변한 것은 아니다.
봉은사는 명종 5년(1550) 문정왕후(중종의 왕비가 어린 명종을 대신해대리청정하면서 보우(1509~65) 스님을 앞세워 조선불교를 중흥하며 선·교양 부활시킬 때 선종의 수사찰(寺刹)이 되었다. 그때 교)을종의 수사찰은 세조 광릉의 능사인 남양주 봉선사(奉先寺)였다. 그리고보우 스님은 판선종사 도대선사(判事都大禪師)로 봉은사 주지를 맡으면서 사실상 오늘날 봉은사의 중창조가 되었다. - P193

봉은사의 이런 영광은 선정릉의 능침사찰로 한양에서 가까운 경기도광주군 언주면에 위치했다는 지리적 장점 덕분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로 들어와서는 서울과 가깝다는 사실이 정반대 상황으로 작용했다.
서울이 날로 팽창하여 1963년에는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니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는 1975년에는 강남구가 신설되면서 사찰 영역전체가 개발 압력을 받게 되었다. 1976년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전하는경기고등학교 부지를 선정릉과 봉은사의 뒷산인 수도산 일대로 정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봉은사는 건물이 들어선 4천여 평만 남기고 토지를전부 내주게 될 판이었다. 이 위기를 헤쳐나간 분이 당시 주지직을 맡고있던 영암당(廣巖堂) 임성(任性, 1907~87) 스님이었다. 봉은사 주지를 역임한 진화 스님은 "영암 스님이 안 계셨다면 오늘의 봉은사는 없다"고했다. - P194

그런데 일주문이 사라진 봉은사는 절 입구가 너무도 허전하다 생각해모처럼 자리 잡고 잘 있는 오봉산 석굴암에서 다시 이 자리로 옮겨온 것이다. 초정권창륜이 쓴 <수도산 봉은사>라는 현판을 달고 찰주도 반듯하게 깎아 비스듬히 받쳐둔 것이 오늘날 이 봉은사일주문의 모습이다.
이 과정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중창의 개념으로 새로운 환경에 맞는 일주문을 세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다. 이를테면 중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부산 금정산 범어사의 일주문을 벤치마킹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건축가에게 의뢰하여 도심 사찰에 어울리도록 현대건축 개념을 도입한 새로운 일주문을 세워본다든지. 아무튼 이 일주문으로 봉은사는 첫인상에서 꽤나 손해를 보고 있다. - P201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삼으면서 국초부터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을 강력히 시행해 태종 6년(1406) 조계종, 천태종 등 11개종파의 242개 사찰만 공인했는데 이때 견성사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세종 6년(1424)에 조선불교를 선교 양종 체제로 통폐합하고선종은 덕수궁 자리에 있던흥천사(興天寺), 교종은 당시 연희방(연희동)의 흥덕사(興德寺)로 지정하며 최종적으로 36개 사찰만 공인했다. 이때도 견성사는 보이지 않는다.
건성사가 다시 역사 속에 등장하는 것은 1495년에 타계한 성종의 선등이 견성사 곁에 조성되고 나서다. 이에 견성사는 왕릉을 지키는 왕실의 원찰(利)이 되어 연산군 4년(1498)에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도 능침사찰에 걸맞게 봉은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 P207

당시 유학자들은 보우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이다. 보우의불교 중흥은 문정왕후의 권세를 끼고 벌인 사상적 반역이라고 생각했다. 보우에 대한 증오는 오랫동안 유가 사회에 내려와 급기야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는 진짜 ‘요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나 역시 한때는 보우스님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보우 스님은 진심으로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고자 노력했던당대의 능력 있는 스님이었다. 그는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아 열과 성을다해 불교를 일으켰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보우 스님은 비참한 죽음을맞았고 유학자들의 기록에 역사를 더럽힌 죄인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만약에 보우 스님이 없었다면 조선시대 불교는 진짜 미미했을 것이다.
보우 스님이 부활시킨 승과에서 15년 동안 휴정, 유정 같은 엘리트를비롯하여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한 것이 임진왜란 때 의승군(僧軍)이 맹활약을 펼치는 기틀이 되었음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보우 스님은 사라져가는 조선불교에 새 불씨를 일으켜준 조선불교의 중흥조이다. - P213

다. 이 불상에서 발견된 발원문 덕에 제작 과정이 소상히 밝혀져 있기때문이다.
이 세 불상은 1651년 조각승 승일(勝一) 등 9명이 대웅보전에 봉안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인데, 1689년에 발생한 화재로 인해 소실된 본존 석가여래좌상을 1765년에 새로 조성하여 기존의 아미타여래좌상, 약사여래좌상과 함께 봉안한 것이라며 불상들의 이름을 명확히 알려주고 있다.
좀더 설명하자면 조선 후기에 부처님만 세 분 모신 삼존불은 삼세불(三世佛)인 경우도 있고 삼신불(三身佛)인 경우도 있어 이를 구별하기 쉽지 않다. 삼세불은 시간적 개념으로 약사여래(과거불), 석가여래(현재불), - P218

아미타여래(미래불)를 모신 것이고, 삼신불(三身佛)은 존재론적 개념으로비로자나불(법신불) 석가모니불(신불)과 노사나불(보신불)을 모신 것이다.
그런데 봉은사 삼존불은 명확히 삼세불이라고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삼존불상의 인상을 보면 참으로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고개를 약간 앞으로 숙인 모습이어서 더욱 인간미가 느껴진다.
어찌 보면 단정한 선비의 이미지 같기도 하다.
본래 불상이란 그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반영한다. 삼국시대 청동불이 절대자의 친절성을 나타내는 미소가 특징이고, 통일신라 석불이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근엄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나말여초의 철불에 힘있고 현세적인 능력이 강조되어 있고, 고려시대 철불·석불이 파격적인 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에 반하여 조선시대 불상은 이봉은사 삼존불상처럼 거의다 조용히 앉아 있는 침묵의 좌상 모습을 하고 있다. - P219

북극보전(北極寶殿)은 보통 절집에서 산신각, 삼성각, 칠성각이 있는자리에 위치한 건물로 민간신앙을 불교가 받아들인 곳인데, 봉은사에서는 산신님, 칠성님에 더해 나한 중에서도 원력이 뛰어난 독성(獨聖, 나반존자까지 모두 모시고 있어 제법 큰 규모다. 이름 또한 독특하게 북극성을 끌어와 지었다. 북극보전은 대중들이 대웅전 다음으로 선호하는 기도처이다.
영각(閣)에는 봉은사의 역대 주지 중 일곱 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연회국사, 보우대사, 서산대사, 사명당, 그리고 <판전>의 화엄경판을제작한 영기 스님, 오늘의 봉은사를 지킨 영암 스님, 그리고 불교계의 큰스님이었던 석주 스님 등이다. 참으로 봉은사는 영각을 지어 자랑스러운 주지 스님들을 기릴 만하다. - P221

을늙은 스님 한 분이 댓가지를 하나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댓가지끝에 작은 종이 통 하나를 매달았다. 통 가운데에는 바늘과 같은 작은봉(화)이 있었다. 1개를 골라 공의 바른팔 근육 위에 곧추세웠다.
작은 스님이 석유황에 불을 붙여 가지고 와서 작은 봉끝에 붙였다.
타는 것이 촛불 같았으나 바로 꺼졌다.
나로서는 평생 처음 보는 일이었다. 스님이 나간 후 공들에게 물었다. "그 하시는 것은 무슨 뜻이고, 무슨 법이며, 뭐라고 부릅니까?"
어당 이상수 선생이 말씀하기를"이는 자화참회라는 것이다. 수계(受戒)라고도 부른다. (…) 이는 모든 더러운 것을 살라버리고 귀의청정(歸依淸淨)하는 맹세이니 불법(佛法)이 그러하니라." 하였다.
나는 처음으로 이 일을 보았고, 비록 말하지는 않았으나 심히 의아스럽고 괴이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추사처럼 높고 귀한 분이 어찌 이렇게 불심(佛心)에 미망되었는지 늘 의심했다. - P228

추사는 이처럼 말년을 봉은사에서 지내며 대웅전 서편에 있는 전에 기념비적 작품을 남겼다. 판전은 당대에 화엄 강의로 이름 높았던 남호(南湖) 영기(永, 1820~72) 스님이 봉은사에 간경소經所)를 차리고왕실 내탕금(판공비)과 대신들의 시주를 모아 ‘화엄경 소초본(疏鈔本)』80권 등을 목판으로 새기는 불사를 일으켜 마침내 3,175매의 목판으로완성하고, 이를 보관할 경판고로 지은 건물이다. - P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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