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 국토가 박물관이다." 198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움의 한 관계자가 내게 한국의 박물관실태를 물어왔을 때 내 대답의 요지는 그것이었다. 서구의 미술관들은 경쟁적으로 그 규모의 방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시대의 산물로 한결같이 "이국문화의 포로수용소"일 뿐, 낱낱 유물의 생명력은 벌써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한 평론가는 "명작들의 공동묘지"라는혹독한 자기비판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는 참으로 좁은 땅덩이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같은 지역에서, 같은 혈통끼리, 같은 언어로, 같은 제도와 풍습을 지니면서, 같은 운명공동체로서 그토록 오랜 역사를 엮어온 민족국가는 드물다. 길게는 7, 8천년, 줄여잡아도 3천년의 연륜을 헤아리게 된다. 그 역사의 연륜이 좁은 땅덩이에 쌓이고 보니 우리는 국토의 어디를 가더라도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영광의 왕도에서 심심산골 하늘 아래 끝동네까지 아직도 생명을 잃지 않고 거기에 의연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박물관 유리장에 진열된 유물들이란 어차피 고향을떠나야만 했던 실향유물들의 보호처일 뿐 전 국토가 박물관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유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에만 온전히 제 빛을 발할 수 있다. 태백산맥 전체를 절집의 정원으로 끌어안은 부석사 가람배치의 장대한 기상과 그윽한 암곡동 계곡에서 쫓겨나 경주박물관 뒤뜰로 옮겨온 고선사탑의애처로움은 국토박물관이라는 나의 표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 P5
게 해버리는면 "대영박물관의 한국미술품 컬렉션은 별볼일 없더사람들은 생래적으로 흔한 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 습성이 있다. 가식의화려함에는 곧잘 현혹되면서도 평범하고 소박한 가운데 진실과 아름다움이있음은 쉽게 놓쳐버린다. 게다가 세상의 관심이 아직도 남의 문화에 대한대책없는 선망과 모방에 쏠리다 보니 저 국토박물관의 유물이 말해주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국토박물관의 유물에 대한 친절한 안내글이 세상에 있는것도 아니다. 답사길에 문화재안내 표지판을 읽다 보면 저렇게 어려운 전문적 사항의 냉랭한 나열이 과연 관람자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기만 하며, 문화재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이 일반대중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책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P6
미술사를 전공으로 삼은 이후 내가 주위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어떻게 하면 미술에 대한 안목을 갖출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막연한 물음에 대하여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최선의 묘책은 "인간은 아는 만큼느낄 뿐이며, 느낀 만큼 보인다"는 것이었다. 예술을 비롯한 문화미란 아무런 노력 없이 획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것을 아는 비결은 따로 없을까? 이에 대하여 나는 조선시대 한문인의 글 속에서 훌륭한 모범답안을 구해둔 것이 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 P6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답사라면 사람들은 으레 경주·부여·공주 같은 옛 왕도의 화려한 유물을 구경가는 일로 생각할 것이며, 나 또한 답사의 초심자 시절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다. 수그러나 지난 20년간 내가 답사의 광(狂)이 되어 제철이면 나를 부르는곳을 따라 가고 또 가고, 그리하여 나에게 다가온 저 문화유산의 느낌을 확인하고 확대하기를 되풀이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 여덟 번을 다녀온 곳이 바로 이 강진 ·해남땅이다.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며, 지금도 반도의 오지로 어쩌다나 같은 답사객의 발길이나 닿는 이 조용한 시골은 그 옛날 은둔자의 낙향지이거나 유배객의 귀양지였을 따름이다. 그러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지,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고산 윤선도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에 이르는 이 답사길을 - P11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일번지‘ 라고 명명하였다. 사실 나의 표현에서지역적 편애라는 혐의를 피할 수만 있다면 나는 ‘남도답사일번지‘가 아니라 ‘남한답사일번지‘라고 불렀을 답사의 진수처인 것이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무형의 문화유산이 있고, 저항과 항쟁과 유배의 땅에 서려 있는 역사의 체취가 살아 있으며,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흙내음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에 나는 주저 없이 ‘일번지‘라는 제목을 내걸고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일번지‘를 멋지게 장식해볼 의욕을 갖고 지난 1992년 3월 28, 29일 1박2일 코스로 다시 한번 답사하고 돌아왔다. 때마침 그럴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내게 생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나의 큰 실수였고, 과욕이었다. - P12
남도는 변하고 있었다. 10년 전과 5년 전이 다르고, 재작년이 작년과 다르더니, 올해는 또 작년과 달라졌고 내년은 올해와 다르게 변색되고 말 것이 눈에 훤히 비치고 있었다. 인간의 손때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다더니 저더러운 손길이 닿을 적마다 옛 정취도, 자연의 생태계도, 인간의 마음씀도1819송두리째 바뀌어버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농촌은 곡식을 길러내는 농사의 터전에서 돈많은도시인의 휴양지로, 소유욕과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것이 강진땅, 해남의 땅끝까지 내려오고 만 것이다. 18년 유배객이 머물던 귀양지는 이미 오래 전에 별장터가 되었고, 월출산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는 자리에 외롭게 서 있는 월남사 폐사지의동그만 시골집 과수밭들은 재벌회사들의 연수원터로 철책이 둘러졌다.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훤히 내려다보이는 구강포의 너른 갯벌과 아름다운 포구는간척지 긴 뚝방에 절반은 잘려나갔고, 만덕산 등급이 솔밭은 솔잎혹파리로참하게 전멸하였다. 아늑하고 소담한 절집 무위사는 능력있는 주지스님이 - P12
바야흐로 거찰이 될 터닦이를 시작했고, 칠량면 옹기마을은 드디어 그 명맥을 끊고 문을 닫았다. 그렇다면 나의 ‘남도답사일번지‘는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잃어버린 옛 정취에 대한 추억으로 써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허망을 여기에 넋두리로 늘어놓아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을 가늠치 못하여 무수한 파지만 냈을 뿐 한 달이 다 가도록 이 글의 서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초심자에게 ‘남도답사일번지‘의 저력은 여전한 것이었다. 지난3월 28일 나의 이곳 답사는 영남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학생 15명을 민주식교수와 함께 인솔하는 일이었다. 일행 모두 강진땅이 초행길이라는 이 TK(대구·경북)의 성골.진골들은 ‘남도답사 일번지‘의 겨우 3분의1을 답사하고서도 황홀한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 답사가 끝나고한 달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마치 꿈결 속에 다녀온 미지의 고향 같다"는정직한 고백을 듣고 보니 나는 오늘의 상처를 아쉬워 할지언정 그 초행자들의 눈을 빌려 ‘일번지‘의 자랑을 버리지 않고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 P13
광주 시내를 빠져나와 나주 남평들판을 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남도땅으로 들어선 기분을 갖게 되었다. 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산둥성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들판은 넓고 평평한데도 산은 가깝게 다가오니 참으로 이상스럽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여인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의 강약이 있는 리듬을느낀다. 남도사투리에서 말끝을 당기며 "~잉" 소리를 내는 여운과도 같고, 구성진 육자배기의 끊길 듯 이어지는 가락같이도 느껴진다. 그것은 나만이느끼는 별스런 감정이 아니었다. 김 아무개라는 졸업생이 내게 이렇게 말을걸어온다.
남도땅의 산등성은 참으로 포근하게 감싸주는 아늑함이 있네요. 경산의 압량벌이나 안동 쪽에서는 펑퍼짐하거나 육중한 것이 가로막아 저런따스함을 못 느끼거든요. - P16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만큼만 느끼는 법이다. 그 경험의 폭은 반드시 지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경험, 삶의 체험 모두를 말한다. 지금 말한 그 졸업생은 이제 들판의 이미지에 새로운 시각적 경험을 얻게 된것이다. 남도의 들판을 시각적으로 경험해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산과들 그 자체뿐만 아니라 풍경화나 산수화를 보는 시각에서도 정서반응의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답사와 여행이 중요하고 매력적인 것이 되는 큰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달리는 차창 밖 풍경이 산비탈의 과수밭으로 펼쳐졌을 때 우리 일행은 남도의 황토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누런 황토가 아닌 시뻘건 남도의 황토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전라북도 정읍·부안, 고창땅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황토현을 가본다면더욱 실감할 남도의 붉은 황토는 그날따라 습기를 머금고 검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현대미술에 관심이 많은 한 늙은 학생이 망연히 창밖을 바라보다가 내게 감탄어린 고백을 말한다.
저는 손장섭, 강연균, 임옥상 같은 호남의 화가들이 풍경 속에 그리는시뻘건 들판이 남도의 역사적 아픔과 한을 담아낸 조형적 변형인 줄 알았는데, 여기 와 보니 그것 자체가 리얼리티였네요. 정말로 강렬한 빛깔이네요. - P17
궁색해 보이지만 정면에 보이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집이 그렇게 아담하고 의젓하게 보일 수가 없다. 조선시대 성종 7년(1476) 무렵에 지은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이다. 세상의 국보 중에는 국보답지 못한 것이 적지 않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국보 제13호의 영예에 유감없이 보답하고 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여기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도 친근함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적선을 슬쩍 글린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치장이 드러나지 않은 문살에도 조선 초가 아니면볼 수 없는 단정함이 살아 있다. 내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한다 해도 이 한적한 절집의 분위기에 척 어울리는 저 소담하고 단정한 극락보전의 아름다움을 반도 전하지 못할 것 같다.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저 극락보전은 나에게 "너도 인생을 가꾸려면 내모습처럼 되어 보렴" 하는 조용한 충언을 들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학생들은 극락보전의 낮은 목소리를 못 듣는 것 같았다. 본래 단순한 미는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학생들을 법당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 P28
그 수치에 맞추어 제조된 물감과 잉크로 그림 그리는 일, 인쇄하는일, 그렇게 제작된 제품에 익숙한 우리의 눈에 저 남도의 봄날이 그려보인원색의 향연은 차라리 이국적이고, 저 먼 옛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그림에서나 본 조선왕조의 원색으로 느껴진다. 하물며 연지빛, 등황빛, 치자빛, 쪽빛의 청순한 색감을 여기서 더 논해 무엇할 것이냐. 나는 우리 시대의 화가들에게 단호히 말한다. 남도의 봄빛을 보지 못한자는 감히 색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 ‘되다란‘ 기름기의 번쩍이는 물감을 아무런 정서적 거부감 없이 사용하면서 함부로 민족적 서정이니 향토색이니논하지 말라. 그리고 모든 화학공학자, 모든 화공품 제조업자, 모든 화장품 회사, 모든염색업자, 모든 물감공장의 관계자들에게 민족의 이름으로 부탁드린다. 그뛰어난 기술, 그 좋은 시설의 100분의 1만이라도 잃어버린 조선의 원색을찾아내는 데 사용해달라고. 우리에게 무한한 평온과 행복한 환희의 감정으로 다가오는 향토의 원색을 제조해달라고. ‘남도의 봄, 그것은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자연의 원색이고 우리의원색인 것이다. 나는 그날 그 원색의 물결 속을 거닐고 있었던 것이다. - P34
내가 꼽은 3대 한정식집 중, 인사동 영희네집은 맛의 정갈함과 담백함이가히 일품이지만 예약 안 하고는 발 디딜 재간이 없고 또 셋 중 가장 비싼곳(1인당 2만 5,000원)이며, 천일식당은 맛이 화려하고 푸짐하며 떡갈비같은 별식이 가히 환상적이라고 하겠는데 이 집은 음식맛이 너무 진하다는약점이 있는 데다 값비싼 별식을 주문하지 않으면 손님 대접을 해주지 않는장삿속이 얄미울 정도다. 이에 비해 해태식당은 주인 아줌마의 인상이 넉넉하고 며느님도 상냥하게 맞아주고 한정식 한 상에 태어육(魚肉), 즉 육해공군이 밑반찬과 요리로 28접시나 나온다. 돔배젓 · 토하젓 같은 토산젓갈뿐만 아니라 깻잎 하나를 무쳐도 서울맛과는 다른 접시가 되며, 생선회와 찌개는 철따라 메뉴가 달라진다. 나는 이집 한정식이 1인당 500원일 때부터 드나들었는데 그래 봤자 여덟 번이다-지금은 8,000원이 되었다. 1인당 5,000원을 받던 2년 전 여름답사 때 생선회는 빼고 3,000원짜리 백반으로 우리 답사회 식구들이 아침, 저녁을 먹기도 했는데, 올해 갔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해달라니까 이제는안된다고 거절하였다. 그것은 남도땅이 나를 슬프게 하는 여러 사항 중 하나였다. - P36
서산·당진을 지나 서울로 오는 길에 답사객은 삽교천방조제를 넘을 때면 으레 서해바다의 일몰을 보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불법인 줄알지만 방조제 한쪽에 차를 세우고 붉은 태양이 서해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그것을보면서 느끼는 감정은 저마다 다르리라. 모르긴 해도 저마다 비장한 무엇을생각하거나, 다짐하는 것이리라. 삽교천 방조제에서의 일몰, 그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삽교천 건설에 얽힌 20세기 한국사의 엄청난 사건 하나였다. 1979년 10월 26일. 난공사 가운데 난공사였던 삽교천이 개막된 날, 박정희 대통령은 거대한 개막식을 치르고 그날 밤 죽었다.ㅣ - P130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답사를 홀로 다닐 때 나는 기차보다 고속버스를 좋아했다. 편하기로 따진다면 기차가 월등 낫지만, 우선 시간 맞추는 구속이 번거롭고 값도 비싸며 무엇보다도 주위가 산만해서 싫다. 모처럼 갖는나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는 고속버스가 훨씬 좋다. 기차를 탔다가 만약 앞이나 뒷자리에 수다스런 여자 둘이 앉거나 유별나게 옴지락거리고 칭얼대는어린애가 곁에 있는 날에는 망해도 보통 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위험부담은 고속버스도 마찬가지이지만 달리는 버스 속에서 사람들은 곧잘 잠들기때문에 수다도 소란도 오래가지 않는다. 표를 살 때면 나는 으레 25번이나 33번을 달라고 한다. 이 두 자리는 운전석쪽 중간 뒷부분 창측 좌석인데 유리창이 넓게 트여 시야를 가로막는 것이 없다. 같은 창측이라도 다른 자리는 창틀이 가운데 붙어 있어서 아주 갑갑하다. 20번을 넘어섰으니 금연석도 아니고 비디오를 틀어도 소음이 거기까지는 안 미친다. 햇볕을 피하기 위해 버스 문쪽에 있는 28번과 36번을택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나는 줄곧 33번 자리에 앉아 다녔다. 그 고속버스 33번 자리에 앉아 가장 많이 간 곳은 경주였다. - P131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었는데, 맨 위에 마감한 정자석(石)과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29. 한 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숫자는 어디까지 세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362개 즉 1년의 날수가 된다. (이상 박성래교수: 한국사특강편찬위, 『한국사특강, 서울대출판부 1990, 433) - P134
뿐만 아니라 첨성대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준이 되는 일정한 기능도 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分)과 지점 측정의 역할을 한다. (이상 전상운교수:)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75, 54)
얼마나 절묘한 구조이고 기막힌 상징성인가? 또 모든 것을 떠나 첨성대의 생김새를 보라. 얼마나 안정감 있고 아담하며 조순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가.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은 안정감을위한 비례였을 것이며, 유연하게 뻗어 올라간 형태미와 곡선은 친숙하고 아담한 것을 좋아했던 그 시대 미적 정서의 표출일 것이다. 첨성대가 세워진 것은 선덕여왕(재위 632~646) 때라고 전해진다. 첨성대 몸체가 27단으로 된 것도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상징성으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우연한 수치의 일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선덕여왕 시절의 문화는 1,000년 신라역사 속에서 아주 독특하고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첨성대도 그중 하나였다는 사실이다. - P135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좋은 유물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내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정양모선생이었다. 선생의 아호는 소불(佛), 소불선생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 (93년 3월에는 관장으로 승진하셨다)으로 계시지만두 차례에 걸쳐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셨다. 소불선생이 경주에 계실 때 나는 여러번 찾아뵈었다. 답사길에 들르기도 했고, 여쭙고 도움받은 일도 있 - P135
었고, 때론 선생의 일을 도와드리러 가기도 했는데 1985년 어느 여름날, 나는 소불선생이 그저 뵙고 싶어 관사에 찾아가 하룻밤 묵고 돌아온 일이있다. 저녁을 마치고 관사로 돌아온 소불선생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에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자네, 경주에서 좋아하는 유물을 차례로 대보게." "석굴암, 석가탑, 고선사탑, 감은사탑, 삼화령 애기부처, 태종무열왕릉거북이, 에밀레종 비천상 남산 용장사 마애불, 불곡 감실부처님, 삼릉게 마애불, 보리사 약사여래상…… 그 정도이겠네요."
아마도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경주편은 이곳들의 이야기로 엮어질 것이틀림없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니까. 또 누가 꼽아도 비슷할 것이다. 그런데 소불선생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 P136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장항사 절터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에밀레종 치는 거 직접 들어보았나?" "아니요." "자네, 경주를 말하려면 꼭 이 세 가지를 잘 음미해야 할 걸세.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일세." 그 이상의 말씀은 없었다. 조금은 풀이 죽어 더 묻지도 못했고, 일단 답사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라 믿고 꼭 다녀오겠다는 말씀만 드렸다. 과연 에밀레종 소리는 위대한 것이었다. 과연 장항사 절터는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진평왕릉은 위대하거나 멋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않았다. - P136
이 풀지 못한 숙제는 나의 경주행을 언제나 괴롭혔다. 나는 소불선생의안목을 의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진평왕릉이 별것 아니군" 하는 생각을가져볼 수도 없었다. 혹시 귀띔이라도 해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고소불선생을 모시고 함께 가본 것도 세 번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이 분위기를 좀 봐. 좀 좋아" 하시는 정도였고 그 이상의 말씀은 없었다. 그러면 나는풀죽은 목소리로 "예" 하곤 했다. 그리고 7년이 지난 금년 봄, 경주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창밖의 보름달이 줄기차게 나를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지던 날 고속버스 33번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분위기 좀 봐 좀 좋아" 바로 그것이었다. 소불선생이 제시한 세 가지 유물들은 사실상 가시적인 형태의 미술사적유물들은 아니었다. 그 대신 찬란한 신라문화를 창조해낼 수 있었던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것도 세 가지 유형, 즉 진평왕릉은 7세기 전반, 장항사지는 7세기 후반, 에밀레종은 8세기 중반 신라문화의 특질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 P137
우리는 역사를 배우면서 ‘찬란한 문화‘라는 말을 무수히 강요받아왔다. 외세의 침략을 받아 국토가 만신창이가 되고 말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도 문화를 설명할 때는 "찬란하였다" 이며, 지배층의 향락과소비의 도덕적 타락을 말하고서도 문화는 ‘찬란‘이었다. 논리적으로 가당치도 않은 이런 미사여구는 맹목적 애국주의의 소산이거나 찬란하지 못했던201문화의 열등의식이 낳은 표현일 뿐이었다.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문화에는 기복이 있어서 찬란했던 시절이있는가 하면, 별볼일 없었던 시절도 있다. 침체, 새로운 준비, 새로운 일깨움, 찬란한 창조, 매너리즘과 과소비현상, 문화적 가치의 대혼란, 그리하여다시 침체, 새로운 준비로 흘러가는 문화의 생장소멸이라는 도도한 흐름이있는 것이다. ERKK - P146
그리하여 나는 감실입구부터 오른쪽으로 꺾어들 만한 길이면 모조리 꺾어들다가 서너 시간만에 감실부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래도 이 부처님을 원망하거나, 미술사에서, 문화사에서 푸대접 받고 있는 이 부처님을 가엾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신의 그 넉넉한 모습이 1,35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여기 이 자리에 건재함을 축하드렸다.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연 암석을 깎았기에 어떤 도굴꾼도 당신을 겁탈하지 못하였고, 바위를 깎아 감실을 만들었기에 풍화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관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람의 손때를 입지 않았으니 어느 불상이 당신처럼 본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상처받지 않은 행복이 있었겠느냐는 축복이었다. 감실부처님에게 매료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일본인 학생은 이 감실부처님을 달밤에 찾아왔다가 너무도 감복하여그 앞에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자고 갔단다. - P148
그는 내강의를 듣고 경주답사에 따라온 적이 있었는데, 과에서 답사왔을 때 다 보았다는 식으로 시큰둥해하더니 감은사탑 앞에 이르러서는 "선생님, 정말로장대하네요"라며 나보다 먼저 그 감흥을 흘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내게좀 쑥스러웠던지 "제 생전에 돌덩이가 내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은 경험은처음입니다"라며 탑쪽으로 뛰어가서는 이 각도에서도 보고 저 각도에서도보고 올라가 매만지며 즐거워하였다. 그런 감은사탑이다. 본래 명작에는 해설이 따로 필요없는 법이다. 그저거기서 받은 감동을 되새기면서 즐거워하는 것으로 그만이다. 마치 월드컵축구에서 우리나라가 아르헨티나와 싸운 날, 멋진 골인장면을 되새기고 또되새기며 즐거워하는 축구팬의 모습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만약에 감은사답사기를 내 맘대로 쓰는 것을 편집자가 조건 없이 허락해준다면 나는 내원고지 처음부터 끝까지 이렇게 쓰고 싶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아! 감은사… - P154
추령고개는 제법 높다. 언제 우리가 이렇게 높이 올라왔더냐 싶게 저 멀리 동해바다가 희뿌연 안개 속에 가물거리고 내리막 고갯길은 구절양장으로 가파르기 짝이 없다. 굽이굽이 돌고 돌아 고갯길을 내려오면 갑자기 깊은 계곡 속에 파묻히는 스산한 냉기가 젖어온다. 육중한 산세를 비껴도는이 길은 노루목까지 이어진다. 재작년부터인가 이 계곡도 여름날에는 초만원이다. 그래서 11월 중순에 이 길을 넘으라고 권하는 것이다. 황룡계곡의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이내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 거기가 장항리. 양쪽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 계류가 만나 제법 큰 내를 이룬다. 그것이 대종천이다. 한 갈래는 함월산에서 흘러온 것이고, 또 한 갈래는 토함산 동쪽을 맴돌아 내리뻗어 있다. 함월산쪽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선덕여왕 때 창건된 기림사(寺)가있고 계곡 입구에서 1km쯤 오르면 골굴암 (窟庵)이 있다. 골굴암에는, 몇 해 전에 대대적인 성형수술을 했지만 통일신라 부처님 중에서 가장 원만한 인상을 풍기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고, 기림사에는 조선 연산군 7년(1510)에 만든 건칠보살상, 조선시대에 지은 잘생긴 절집, 요즘 낙성한박물관이 있어 그것이 한나절 답사코스가 된다. - P158
반대편 토함산쪽 계곡을 따라 10리 길을 올라가면 장항리 폐사지가 나온다. 맑고 넓은 냇물을 징검다리로 예닐곱 번은 건너야 한다. 여기가 소불선생이 "경주를 말해주는 세 가지 유물" 중 하나로 꼽았던 그 절터이다. 폐사지에는 준수한 오층탑 하나, 일제 때 도굴꾼이 다이너마이트로 탑을 허물고 사리장치를 훔쳐간 무너진 석탑이 하나, 주인 잃은 거대한 불상좌대만 남아 있다. 돌보는 이 없어 해묵은 마른 갈대잎만 스산하게 스치는황량감이 감돌지만, 통일신라 초기 - 아마도 문무대왕 시절 -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려는 기백과 의지만은 역력히 서려 있는 곳이다. 신라 고찰의품격이 살아 있는 곳이다. - P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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