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은 조선왕조 마지막에 등장한 궁궐로 격동의 왕조 말기와 13년만에 막을 내린 대한제국의 역사만큼이나 갖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다. 덕수궁이라고 하면 대개는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에나 머물던 곳으로 알고 근대식 궁궐 건축인 석조전을 떠올리지만, 덕수궁이라 불리기 훨씬 전에 이미 이곳엔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궐이있었고 경운궁의 역사는 임진왜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양도성 건설 당시 원래 이 자리엔 태조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과홍천사라는 원당 사찰이 있었으나 태종이 도성 밖으로 정릉을 이장한 뒤에는 왕가와 권세가의 저택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다 임진왜란때 경복궁·창경궁·창덕궁이 모두 불에 타 소실되는 바람에 1593년 의주 - P195
에서 돌아온 선조가 이곳에 있던 월산대군(月山大君) 후손의 저택에 머물면서 경운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당시 선조가 머물던 건물이 섞어당(昔御堂)이다. 석어당이란 ‘옛날에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이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이곳을 이궁(離宮)으로 삼기 위해 공사를벌였으나 1623년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한 인조가 공사를 중단시키면서왕가의 작은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반정 직후 인조가 임금으로 즉위한즉조당(堂)이 지금도 남아 있어 그 옛날을 말해준다. 그런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주무대에 등장한 것은 1897년 2월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1895)을 겪은 고종이 일제의 감시를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뒤에 경복궁이 아니라 경운궁으로환궁하면서 조선왕조의 마지막 법궁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그해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경운궁은 황궁이 되었다. - P196
당시 경운궁 주위는 러시아, 미국, 영국, 독일 공사관 등이 둘러싸고있었고 배재학당, 이화학당, 정동교회, 성공회 성당 등 근대적 건축물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고종황제는 이런 시류에 맞추어 경운궁 돈덕전정관헌, 중명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을 속속 세웠다. 이때가 경운궁의 전성기였다.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되고 뒤를 이은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이어하면서 경운궁에 상황(上皇)으로 남은 아버지께서 덕에 의지해 장수하시라는 뜻으로 덕 덕(德) 자, 목숨 수(壽) 자, 덕수(壽)라는 이름을지어 바쳤고 이후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철저히 파괴하기 시작해 경복궁에 총독부 건물을 짓고, 덕수궁은 궁궐이 아니라 공원으로 꾸몄다. 훗날 경기여고와 덕수초등학교가 들어선 선원전 구역을매각하고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길을 만들면서 궁궐 - P196
의 일부 영역이 도로 서쪽으로 떨어져나갔다. 8·15해방 후에는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면서 동쪽 담장과 대한문이 궁안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덕수궁은 계속 줄어들어 오늘날엔 기존 궁역의 3분의 1인 약 1만 8천 평에 중화전 권역, 함녕전 권역, 석조전 권역 등이 여기저기 별도의 공간인 양 흩어져 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같은 유기적인 궁궐 체제가 거의 갖춰지지 않은 채 여전히 궁궐 공원처럼 남아 있다. 세상이 바뀌면 건축이 바뀌게 마련이고, 건축이 바뀌었다는 것은 세상이 바뀌었다는뜻이기도 하다. 덕수궁을 보면 확실히 건축은 공간예술인 동시에 시간에술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 P197
2009년 11월 27일 산화신기전 발사 실험에서는 비행중 2단 로켓에해당하는지화통에 불을 붙이는 데 성공했다. 산화신기전은 발사하면 포물선을 그리며 500~600미터를 비행해 내려가다 지화통에 불이 붙고 지화통은 소발화통이라는 폭탄과 함께 빠르게 날아가 폭발한다. 자격루와 신기전기 화차는 비록 덕수궁과 직접 관련된 것은 아니어도 위대한 문화유산들로 조선시대 과학사의 명작이자 큰 자랑이다. 귀중한국보와 보물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수 있다는 것은 덕수궁 답사에서얻는 망외의 ‘득템‘인 셈이다. 그럼에도 이 중요한 유물을 이렇게 옥외에전시하고 스포트라이트 한번 비추는 일 없이 덕수궁을 찾아온 관람객들도 무심히 지나치는 것은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P224
그러나 세월은 여러 가지로 고종 편이 아니었다. 1904년 4월 14일, 불행히도 경운궁에 대화재가일어나 중화전, 함녕전 등 주요 전각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에 황급히복구사업을 벌이게 되었는데, 때는 조만간을사늑약을 당하고 마는 시절인지라 국력을 경운궁 복원에 쏟을 수 없어 단층 건물로 지었던 것이다.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궁궐의 명맥과 명색이 유지되었던 것은 왕조를끝까지 지키려던 고종의 의지 덕이었다. 덕수궁을 답사하자면 이처럼 건물 곳곳에서 가슴 저리게 하는 역사의기억들이 되살아난다. 궁궐 공원으로서 덕수궁을 편안히 즐기자면 때로는 오붓하고 정겨운 서정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답사하는 마음으로 임하면 거부할 수 없는 역사의 우수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이 덕수궁이라는궁궐의 중요한 성격이기도 하다. - P227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화전 곁에 있는 석어당(昔御堂)에서 시작해야 한다. 덕수궁 안에서 유일하게 단청이칠해지지 않은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했던 선조가 한양으로 돌아와 임시 행궁(行宮)으로 삼아 기거하다 세상을 떠난 곳이라 옛석(昔) 자, 어거할 어(御) 자를 써 석어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석어당 또한 1904년 경운궁 대화재 때 소실되었는데, 사실 궁궐 체제에 꼭 필요한 건물은 아니었지만 선조가 전란 중에 임했다는 역사적의의를 저버리지 않고 이듬해에 바로 복원했다. 그런 사연이 깃든 석어당 뜰 앞에는 지금도 늠름하게 잘생긴 살구나무 한그루가 마치 역사의상처를 보듬듯 봄이면 어김없이 하얀 꽃송이를 소담하게 피워내고 있으니, 덕수궁에 와서 석조전, 미술관만 관람하고 무심히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이여, 살구꽃 피는 4월 어느 날 이 석어당 노목 아래에서 나의 경운궁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지 않으시려는가. - P227
광해군은 선조와 마찬가지로 석어당에 기거하고 즉조당에서 ‘청정(聽政)‘했다. 청정이라! 창덕궁 선정전 답사 때도 말한 바 있지만 조선시대임금의 정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 한 것은 재삼 음미해볼필요가 있다. 청정이라는 말의 뉘앙스때문에 대리청정, 수렴청정이라하면 마치 왕이 주변에서 자문이나 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왕이독단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고 대신들의 의견을 들어 업무를 보았다는뜻이다. 국무위원의 대면보고도 받지 않는 통치자가 있었던 것을 떠올리면 이 말뜻이 가슴에 깊이 와닿는다. - P235
광해군이 이처럼 새 궁궐 건축에 집착했던 것은 왕의 지위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본래 광해군은 자질이 뛰어나고 왕세자로서 임진왜란에 적극복해함경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미를 조달하는 등 직접전쟁을 치렀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 광해군은 왕이 된 후 외교·국방에서남다른 수완을 보여주었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힘겨루기를 하던 당시 광해군은 두 나라 사이에서 등거리를 유지하며 관계를 적당히 조율하는 ‘주선(周旋) 외교‘로 전쟁에 휘말리지 않으려 했다. 이 때문에 친명(明) 사대주의 입장이었던서인 세력이 반기를 든 것이 인조반정이고, 인조 때 외교의 균형이 명나라로 기울면서 청나라가 쳐들어온 것이 병자호란이었다. - P243
그런 광해군이었지만 서출인 데다 둘째 아들로 적통이 아니었고 왕이되는 과정도 험난했기 때문에 정통성에 위협을 느껴 ‘살제폐모‘를 저질렀고 왕의 권위를 한껏 보여주고자 무리하게 궁궐 신축을 감행했던 것이다. 그가 술사들의 유혹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쉽게 현혹되었던 것도그런 정서적 불안 때문이었다. 어머니 공빈 김씨가 해산 후유증으로 일 ‘찍 세상을 떠난 것도 그가 정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원인이었다. 치유되지 않는 콤플렉스와 불안한 정서는 광해군 개인과 나라의 불행이 되었다. 이리하여 경운궁, 인경궁, 경덕궁 세 궁궐 공사가 벌어지게 되었으니나라가 온통 공사판이었다. 인력도 달렸고 자재도 턱없이 부족했다. - P243
아관파천 후 꼭 1년 만이었다. 그때 고종은 환궁하면서 다음과 같은 조령(詔令)을 내렸다.
지난번에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덧없이 한 해가 지나갔다. (.…) 실로 부득이한 형세에서 나왔음을 신민(臣民)들이 모두 알 것이다. (...) 아! 내가 정사를 잘못해 (...) 오늘과 같은 상황을 야기하고말았다. 이제부터 모든 일을 맡은 관리들은 한결같이 몸과 마음을 다하라. (...) 비유하건대 배를 같이 타고서 건너갈 때 상앗대로 노를 젓는 것처럼 각각 그 힘을 써야 쉽게 건널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해이해지면 곧 빠지게 되는 경우와 같다. (...) 나의 신하들 역시 함께 건너는 의리를 생각해서 조금도 해이해지지 말지어다.(조선왕조실록 고종34년(1897) 2월20일자)
엿새 뒤인 2월 26일 고종은 온 국민이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자며 대사면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덕수궁의 전신인 경운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게 되었다. - P258
우리나라는 곧 삼한(三韓)의 땅이다. (...) 지금 국호를 ‘대한(大韓)이라고 정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 또한 매번 각국의 문자를 보면조선이라고 하지 않고 한(韓)이라 했으니 (...) 세상에 따로 설명하지않아도 모두 다 ‘대한‘이라는 칭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05년 만에 막을 내리고 대한제국이 개국되었다. 이튿날인 10월 12일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왕후를 명성황후로 책봉했으며 13일에는 국호를 대한이라 공포했다. 연호는 건양(建陽)에서 광무(光武)로 바꾸었다. 사실 갑오개혁으로 들어선 김홍집 내각 때 일련의관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태양력과 함께 건양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다. 건양 2년이 곧 광무 원년이 된 것이다. - P262
10월 14일 대한제국은 이 사실을 각국 공사관과 영사관에 통보했다. 서양 외교관들은 대한제국 수립의 의의를 간취하고 있었다. 당시 주한미국공사관 1등서기관이었던 W. F. 샌즈는 1930년 미국에서 간행된 『조선비망록』(신복룡 옮김, 집문당 1999)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은 황제의 신하가 될 수 있으나 황제는 누구의 신하가 될 수 없기때문에 황제에 즉위하면 중국, 일본, 러시아 황제와 동등해진다는 전통적 이론에 근거했던 것이다. - P262
광무개혁에는 많은 한계가 있었다. 특히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주장한 입헌군주제가 아니라 전제군주제로 나아감으로써 정치적으로 봉건성을 면치 못했던 것은 시대의 한계였다. 그러나 광무개혁은 혹자들이말하듯 ‘일제에 의해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것‘이 아니라 일제의 강탈 탓에 우리의 독자적인 근대화가 좌절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리고 단명했을지언정 대한제국의 꿈과 좌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바로 덕수궁이다. - P271
경운궁을 겨우 복원한 고종이었건만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그해 7월 18일 강제로 퇴위되어 황태자 대리청정을 발표하고 태황제로 물러나게 되었다. 8월 27일에는 순종이 석조전 뒤에 있던 양관인돈덕전(德殿)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이 돈덕전은 1902년에 총해관 터에 지은 양식 건물인데, 고종이 외교사절들을 접견하는 공간으로 사용했고 수많은 연회도 열었던 테라스가있는 예쁜 2층 벽돌집이었다. 1930년대 일제가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면서 헐려나간 것으로 보이는데 근래에 목수현 박사가 돈덕전의 1층 평면도를 찾아내어 문화재청에서 바야흐로 복원을 준비하고 있다. 돈덕전이 복원되면 근대국가의 궁궐로서 덕수궁의 면모가 더 확연히 드러나게될 것이다 - P278
순종황제가 창덕궁으로 이어하면서 경운궁은 법궁의 지위를 내주게되었다. 이때 순종이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에게 ‘덕수‘라는 칭호를 올림으로써 고종이 기거하는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종이 태황제로 머물고 있던 1910년 대망의 석조전(石造殿)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해 8월 29일 일제는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하고고종의 칭호를 ‘덕수궁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했다. 이 때문에 석조전은 황실의 궁궐로는 사용되지 못했다. 덕수궁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던 고종에게 즐거운 일이란 없었다. 1911년 7월 귀비 엄씨(순헌황귀비)가 즉조당에서 세상을 떠났고, 9월엔 고종이 육순을 맞이했으나 순종이 그를 알현하러 왔을 뿐이었다. - P279
1919년 고종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듬해1월 석조전을 제외한 덕수궁 대부분을 철거할 계획을 밝히고 이후 수많은 전각들을 헐어 매각했다. 선원전 구역은 조선은행, 식산은행, 경성일보사에 팔려 나갔다. 1922년에는 덕수궁과 오늘날의 미국대사관저 사이에 도로가 생기면서 귀비 엄씨의 혼전(殿) 등이 도로 건너편으로 떨어져나가게 되었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일제는 옛 궁궐의 훼철에 박차를 가했다. 1931년에는 덕수궁 부지 1만 평을 대공원으로 건설한다는 계획을발표했다. 석조전은 일본 미술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었고, 1933년 일제는 마침내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어 일반에게 공개했다. 석조전에 일본 작품만 전시된 것에 대해 불만이 일어나자 1936년 이왕직(李王職)에서는 석조전 서관을 짓고 창덕궁에 있던 이왕가미술관을옮겨왔다. 그해 9월에 서구식 정원을 본뜬 분수대를 설치하면서 옛 궁궐의 이미지는 완전히 퇴색되었다. - P280
잊힌 제국, 대한제국
이리하여 나는 비로소 경운궁과 덕수궁의 한 많은 역사의 여정을 마친다. 덕수궁 답사기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은 덕수궁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 답사기를 통해 대한제국의 실체를 가슴 깊이 새기기 위해서였다. 대한제국은 1897년 10월 선포되었으니 이 글을 쓰고 있는 2017년은개국 120주년, 옛날식으로 말하면 2주갑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날 이때까지 이를 기리는 사업을 볼 수 없고 이를 각별히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고종이 1893년에 선조가 임진왜란 때 의주로 피란갔다가 한양으로 - P299
환어한 지 5주갑, 즉 300주년이 된 것을 기린 데 비하면 우리가 너무 무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한제국이 불과 13년 만에 막을 내리고 일제강점기로 넘어갔기 때문에 사람들은 조선왕조의 쓸쓸한 마지막만 떠올릴 뿐 대한제국의 실체를역사의 기억으로 거의 간직하지 못한 채 흔히 구한말(韓末)이라고 칭하면서 조선왕조는 1910년 일제의 국권피탈로 막을 내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조선왕조는 1897년 대한제국의 선포와 함께 끝났고 그때부터 대한제국의 13년 역사가 이어졌다. 대한제국은 결코 맥없이 쓰러진 나라가 아니었다. 비록 일제의 강압으로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외세에서 독립된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안간힘을 썼던 그 몸부림을 덕수궁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 P300
그리고 내일의 일이란 밀려들어오는 중국인 관광객 유커(遊客)들이동관왕묘에 열광할 것이라는 기대다. 관왕묘는 중국인을 상대로 할 때더없이 훌륭한 관광자원이다. 관우는 오늘날 중국인들의 삶과 마음속에가장 깊이 자리잡고 있는 최고의 신이다. 중국인들이 행복과 재물을 다가져다주는 신으로 모시는 분은 부처님도, 예수님도, 모택동도 아니고관왕이다. 중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을 가나 관왕묘가 있다. 어떤 통계에따르면 약 30만 개가 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가정집과 상점에 관우사당을 따로 두고 매일 치성을 드릴 정도다. 새해를 맞이하는 춘절(春節)때 집집마다 붙이는 연화年畵) 중 가장 인기 높은 것도 관우 초상이다. 중국인들은 절대로 관왕묘 앞을 그대로 지나치지 못한다. 그들은 왕에게 올릴 향 다발부터 찾을 것이다. 더욱이 유커들은 이처럼 연대가 오래되고 품위 있는 동관왕묘와 관우상이 있음에 놀라고 크게 감동하며 한국문화에 친밀감도 느낄 것이다. - P311
고금도 충무사에서
선조 30년(1597)에 명나라 장수 진(陳)이 세운 고금도의 관왕묘는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이순신 장군을 모시는 ‘충무사(忠武祠)‘로 변신해있다. 이곳 고금도는 13척의 배로 명량대첩(鳴梁大捷)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 퇴각하는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1598년 2월에 조선군 2천명을 거느리고 진영을 세운 곳이다. 이순신 장군의 진지는 덕동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해 7월에는 명나라 구원군 진린 도독이 전함 수백 척과2만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금도 곁의 묘당도(廟堂島)에 주둔하면서 이곳에는 조선과 명나라의 해군 본부가 함께 있게 되었다. 이때 진린 도독은 관왕묘를 세우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며 제향을 받들었다. 이것이고금도 관왕묘의 유래다. 그리고 그해 11월 퇴각하는 왜군을 상대로 한 노량해전에서 조선과명나라 수군은 대승하며 마침내 전쟁을 끝내는 전과를 거두었으나 11월19일 이순신 장군이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순직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시신은 고금도 월송대에 안치되었다가 83일 뒤 아산의 묘소로 운구되었다. - P332
진린 도독은 고금도를 떠나면서 남은 재물들을 섬사람들에게 주며 관왕묘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했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후 현종 때(1666)에는 관왕묘를 동무와 서무를 거느린 품(品)자형 사당으로 중수하고 동무에 진린 도독, 서무에 이순신 장군을 모셨다. 숙종 때 (1710)에는 이이명이 이순신은 벼슬이 비록 정2품에 그쳤지만 그 공로는 건국이래없던 것이었으니 해마다 두 번 관원을 보내 숭배하는 것이 은혜에 보답하는 도리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향사가 국가적 제향이 되었다. 이때 이이명이 쓴 ‘고금도 관왕묘비(古今島關王廟碑)‘가 지금도 남아 있다. 정조는 이순신 장군을 존경하여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고금도에 관왕묘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명나라가 구원군을보내준 은혜에 보답하는 사당(묘)이라는 뜻으로 1791년 ‘탄보묘(誕報廟)‘ 라는 사액을 내려 묘격을 올렸다. 이와 함께 1792년에는 노량대첩 때 전 - P333
사한 명나라 부총병등자룡(龍)도 함께 향사케 하여 동무에 진린과등자룡, 서무에 이순신을 모시게 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들어 일제가 1922년 유(有) 재산처분령을 내려 훼철 위기를 맞았는데, 고금도 유림이 계를 조직하여 관왕묘와 그 부지 1,550평을 공동명의로 매입하여 보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무렵에는 총독부의 항왜 유적 파괴 시책 때문 - P334
에 관왕묘에 있던 관우상이 파괴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관왕묘 또한 훼철될 위기를 맞았으나 이때에도 섬사람들이 기지를 발휘해 관왕묘를 사찰로 쓰겠다며 불상을 모셔놓아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보존했다. 8·15해방 후 1947년 11월 19일 이순신 장군 기일을 맞아 다시 제향을 올리게 되었고 1953년에는 ‘충무사‘라는 현판을 걸고 옥천사를 경외로 옮겼다. 1959년에는 정전에 이순신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동무에는이순신 장군을 보필했던 이영남(李英男) 장군을 배향했으며, 충무사는1963년 국가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진린 도독이 세운 관왕묘는 이렇게 이충무공 유적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 P335
이리하여 지금의 고금도 관왕묘는 더 이상 관왕묘도, 정조가 내려준단보도 아니게 되었다. 내 의견을 말하자면 사당인 묘당도는 원래대로 관왕묘로 복원하여 정전에 관왕, 동무에는 진린 도독, 서무에는 둥자룡 장군을 모시고, 여기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덕동리의 옛 이순신 장군 진지에 이순신 장군의 새 사당을 세워 그곳을 충무사로 모시는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와 함께 이 시대의 정신을 담은 멋진 추모시설도 갖추어 고금도가 임진왜란 극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기억할 수 있는 유적지로 다시 태어나게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렇게 역사적 현장이 갖는 공간의 진정성과 원형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문화유산보존의기본 방향에 맞다. - P335
첫번째 현장답사 때 우리는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에서 백남준 살던 집에 들렀다가 박수근 살던 집을 거쳐 동관왕묘에 이르는 답사 코스를 다음과 같이 잡았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맑은내다리 - 신발도매시장(상가) - 종로50길 -동신교회 - 문구·완구시장 입구 - 창신시장 입구 - 종로53길 골목길 입구 - 백남준 살던 집 - 동묘앞역 4거리-동대문아파트 - 시즌빌딩(옛 동대문스케이트장) - 박수근 살던 집 - 동관왕묘
가는 길에 만나는 동신교회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박수근화백이 다니던 교회인데, 지금은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 뒷동산으로 이장된 박수근 화백의 묘소가 처음 포천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 교회의 장지가 거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 얘기로는 김광석, 윤형주, 조영남이 다 이 교회 합창단 출신이라고 한다. - P366
성균관이 갖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서 가치와 위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크다. 성균관의 대성전과 명륜당, 동무와 서무, 그리고 외삼문까지 일말해 보물 제14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묘에서 해마다 봄가을에 지내는 석전제(釋奠祭)는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유산을 찾아가는 참뜻이 유형의 문화재에서 무형의 가치를 새가는 데 있다고 한다면 성균관에 절절히 서려 있는 조선시대 선비들의채취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국초 이래 왕조의 문신·학자들이 거의 다 성균관을 거쳐갔다. 매월당 김시습, 율곡 이이 등이성균관 출신이었고, 퇴계 이황, 추사 김정희 등은 이 학교 교장인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조선왕조는 쉽게 말해 지식인 관료사회였는데 나라에서 엘리트 관료를 양성하기 위해 성균관을 세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균관은 최고의 교육기관, 유일한 국립대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조선시대 지성의 산실이었다. - P383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부탁하는 말로 끝맺는데 그 비유의 뜻이 자못 사람을 긴장하게 만든다.
아! 제생들아! 그대들은 나의 이 말로 하여 혹 느슨하게 생각하지들말고 한 치 한 푼이라도 오르고 또 올라 마치 100리 길을 가는 사람이항상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듯이 하라. 그리하면 자만하고 싶어도자만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계속해야 할 것이 학업이고 무궁무진한것이 덕이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바라는 것은 제생들이 그렇게계속 노력하여 무궁한 발전을 했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제생들이여! 감히 노력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정조의 ‘100리길을 갈때 90리를 절반쯤으로 생각하라‘는 말에 나는그간 80리만 가도 다간 기분으로 살았던 것 같아 조금 뜨끔했다. - P389
비천당을 둘러보고 다시 명륜당으로 돌아오니 아무리 보아도 넓은 명륜당 앞마당은 은행나무 고목이 있음으로 해서 더 이상 손볼 필요가 없는 완벽한 조경이 되었다는 감동과 찬사가 나온다. 몇 아름이나 되는 커다란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로 맞닿는 가까운 거리에 자리잡고 있다. 나이는 500살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21미터에 가슴높이의 둘레는 12미터에 달하는 웅장한 나무로 발달이 왕성하고 품이 넓다. 그중 동쪽의 나무는 한국전쟁 때 포탄을 맞아 가지가 일곱으로 갈라졌지만 이제는 상처가 회복되었다. 두 은행나무 아래로는 싹이 돋아 한 아름씩이나 되는7개의 ‘싹 나무‘가 주위를 호위하듯이 감싸고 있어 외롭지 않아 보인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 의하면 중종 14년(1519) 대사성 윤탁(尹悼)이 명륜당 아래에 은행나무 두 그루를 마주 보게 심으면서 기초가튼튼해야만 학문을 크게 이루고 나무는 뿌리가 무성해야 가지가 잘 자라니 공부하는 유생들도 이를 본받아 정성껏 잘 키울 것을 당부했다고한다. - P404
성균관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건물 생김새나 둘러보다가 대성전 안을 들여다봤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부끄러운 얘기지만나는 대성전에 공자만 모셔져 있는 줄 알았다. 안자, 맹자 등 중국의성현과 정이, 주희 등 송대 유학자를 함께 모신 것까지는 그랬었구나 하는 새로운 일깨움을 주었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대 유학자 18명의 위패가 있는 것은 신기했다. 설총·최치원·안향·정몽주·조광조·이황 · 이이·송시열 등 교과서에 많이 나오는 낯익은 인물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김굉필·정여창·이언적·김인후·성혼·김장생·조헌·김집·송준길. 박세채 등 그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내 지식으로는 학문과 이력을 말하기 힘든 학자들의 위패도 있었다. "나는 자신의 상식에 큰 회의를 느꼈다. 이른바 ‘문묘배향 동국 18현(東國十八賢)‘을 대성전에 모셨다는 것도 몰랐고, 기실 우리나라 유학을대표하는 18현의 이름도 다 몰랐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 P446
안회가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것은 공자라는 훌륭한 분을 만나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배운 결과라는 뜻이다. 요즘 ‘롤모델‘이라는 화두가 유행해 학생들에게 자기 인생의 롤모델을찾아보라는 숙제를 주는 것도 사실 이와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무명자 윤기가 반중잡영 220수를 읊은 것도 따지고보면 평생 성호 이익을 존경해 그 천리마 꼬리를 놓지 않고 실학정신의 자세를 실천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속되게 풀이하자면 실력 없는 자는 천리마 꼬리라도 붙잡고같이 가는 수밖에 없다는 인생의 한 처세술일 수도 있다. 이는 첫째 뒤통수만 보고 달리면 둘째는 될 수 있다는 상업적·외교적 기술보다 한 수위다. 실력이 없으면 천리마 꼬리를 잡는 것이 상책이 아닐 수 없다. - P465
나는 슬라이드를 분류하면서 전사청 앞 사진을 보고 잠시 놀란 적이있다. 성균관에 이렇게 예쁜 공간이 있었던가 싶어 다시 확인해보았다. 아름답기로 유명한 여주 효종대왕 영릉(寧陵)의 재실 같은 분위기가 있다. 사괴석으로 단정하게 쌓은 기와 돌담 양쪽에 나 있는 아담한 문, 그너머로 보이는 전사청의 맞배지붕과 멀리서 고개를 내민 수복청의 팔작지붕, 그 선의 어울림이 높낮이를 달리하면서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참으로 정겨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이다. - P467
탕평비 앞에 서면 영조대왕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일어난다. 누가 뭐래도 영조는 80여 평생을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창경궁 홍화문 앞으로 나아가 백성들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여론의 힘으로 균역법(均役法)을 강력히 추진했으며, 정신병 탓에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사도세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어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아비로서 슬픈 결단을 내리는 등 평생을 탕평치국에 바쳤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 손자(정조)에게 효(孝孫)이라는 도장을 새겨주면서 유세손서(諭世孫書)」에 이렇게 당부를 남겼다.
아! 해동 300년 우리 조선왕조는 83세 임금이 25세 손자에게 의지한다.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체득하여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 P479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나라를 안정시킴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규장각을 세워 학자를 곁에 두고 국정을 운영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은술잔을 내려주면서 "100리 가는 사람이 90리를 반쯤으로 생각하듯이 끝까지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기도 했다. 인재를 씀에 있어서는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에서 냇물이 만개여도 거기에 비친 달은 하나인바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 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 P479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치며 달이 각기그 형태에 따라 비추듯이 사람들은 각자의 얼굴과 기량에 맞게 대하는것이 군주의 자세라고 했다. 정조가 이처럼 사람을 아꼈기 때문에 이 시대엔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면서 문예부흥을 이루었다. 정치에서 번암 채제공, 문학에서 연암 박지원, 사상에선 다산 정약용, 미술에선 단원 김홍도가 나왔다. 번암과 연암과 다산과 단원이 위대하다면 이들을 낳은 정조시대도 위대한 것이다. 이리하여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예부흥은 정조시대로 이어졌다. 어떤 세상이 좋은 세상이냐고 물으면 태평성대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데 역사상 그런 시대는 없었다. 까마득한 옛날, 증명되지도 않는 요순시대라고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문화사가들은 태평성대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 대신 한 시대의 치세를 칭송하는 최대의 찬사는 ‘문예부흥기‘다. 서양 역사에서 16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동양 역사에서는18세기 청나라 강희·옹정·건륭 연간이 문예부흥기라는 명예를 갖고 있다. - P480
문예부흥기의 국정철학은 ‘경국제민(經國濟民) 문화보국(文化保國)‘ 여덟 글자로 요약된다. 즉 나라를 다스리면서 백성을 구제하고 문화로서나라를 지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8세기 3분기 석굴암·불국사·에밀레종으로 상징되는 신라 경덕왕 때, 12세기 2분기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고려 인종때, 15세기 2분기 한글을 창제하고 종묘제례악을 정비한 세종대왕 때, 그리고 18세기 후반기 영·정조시대가 문예부흥기였다. 영·정조시대의 문예부흥은 영조시대에 일어난 문화적 변혁이 정조시대에 그 결실을 맺었기 때문에 반세기라는 긴 세월 동안 이어졌다. 미술사로 한정해 말하면, 이 시기엔 중국화풍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매몰되어 있던 종래의 그림 세계가 넓어져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린 진경 - P480
산수, 현실 생활상을 묘사한 풍속화가 탄생했고 회화의 진수를 담아낸문인화풍이 안착함으로써 미술사의 꽃을 피웠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역사상 네 차례 나타난 문예부흥기는 영·정조시대 이후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도록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세계를 놀라게 한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루어냈다. 그것을 어떻게 문예부흥기로 승화시킬 것이냐가 우리 시대의 과제인데 나는 영조시대의 예술적 성취를 정조시대가 이어간 모습에서 그 해답의실마리를 읽어본다. - P481
영·정조시대 회화에 등장한 진경산수·풍속화·문인화라는 새로운3대 장르는 영조시대에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관아재 조영석, 능호관이인상 등 양반 출신의 지식인 화가들이 선구적으로 개척한 것을 정조시대에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고송 이인문 등 도화서(圖畵署) 화원() 출신의 전문화가들이 발전시킨 것이다. 그래서 영조시대 그림엔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예술적 고뇌가 서린 내용상의 깊이가 있고 정조시대 그림엔 정교한 테크닉이 두드러지는 형식상의 완결미가 돋보인다. 이를 비약해서 말하자면 의식 있는 지식인들이 제시한 진보적 내용을 능력 있는 테크노크라트(technocrat, 기술관료)들이 형식으로 구현해낸 것이었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값진 경험을 토대로 이제 능력있는 진정한 엑스퍼트(expert, 전문가)들이 경국제민과 문화국의 자세로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게 된다면 혹 후세 사람들이 우리가 살던 이 시기를 문예부흥기였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영광과 사명이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 P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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