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긴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음에 반해, 동양미술사에서 산수화는 5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해10세기에 이르면 가장 핵심적인 장르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산수화에서 화가의 시각은 고원),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심원은 깊숙이 내려다보는 것, 평원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또 부감법(法)이라는 것이 있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엔 헬리콥터도 없었건만 어떻게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 P325
그러나 근래 들어 궁궐들을 부감하기 좋은 곳이 많이 생겼다. 덕수궁은 서울시청이 개방되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하고 있고, 경복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에서 보면 북궐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게 보인다. 종묘는 세운상가 옥상에서 보면 숲속의 정전이 그림처럼 드러나고, 창덕궁은 근래에 문을 연 ‘공간‘ 신사옥 4층의 카페에서 보면 측면관을 조망할 수 있다. 창경궁은 서울대병원 암센터 6층 옥상에 행복정원이 생겨 더없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한다. 더욱이 창경궁은 동향 궁인지라 「동궐도」에서는남쪽에서 부감한 측면으로 나타나 있지만 행복정원에서 바라보면 정문인 홍화문, 정전인 명정전, 그 너머 내전 건물의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 뒤쪽으로 멀리 인왕산 자락이 길게 펼쳐져 나아가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순간 거짓말 같은 풍광이 전개된다. - P326
창경궁 춘당지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과 창덕궁 후원이 거대한 숲으로한데 어우러져 낮은 능선을 그리며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뒤를 푸름을 머금은 북악산 매봉 자락이 바짝 받치고 있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철마다우리나라 야산의 빛깔을 그대로 발하여, 봄이면 산벚꽃의 빛이 파스텔 톤으로 눈부시고, 여름철이면 진초록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고, 가을이면 갈색으로 물들고, 눈 덮인 겨울이면 그 자체로 단색조의 수묵화가된다. 2015년에 서울시 주관으로 시민과 함께 서울의 명소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창경궁 답사에 앞서 이곳을 안내했을 때 모두들 감격해 절로 한마디씩 했다.
"이것이 진짜 고궁의 아름다움이네요." - P327
창경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사이에서 그 위상이 좀 애매하다. 경복궁,창덕궁처럼 법궁으로서의 모습도 없고 덕수궁처럼 별격을 지닌 것도 아니고 경희궁처럼 완전히 새로 복원된 것도 아니다. 1909년 일제에 의해식물원·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 시절을 청산하고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한 때는 1983년이지만 그렇다고 창경궁의 주요 전각들을 모두 새로 지은 것은 아니다. 새로 복원된 것은 회랑과 부속 건물들이다. 창경원 시절에도 명정전(국보 제226호)은 엄연히 건재했다. - P328
에뭇경복궁에서는 이런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없고, 창덕궁 후원은 안내원을 따라다녀야 하는 제약이 있어서 이처럼 홀로 즐길 수 없다. 2005년 경복궁 입장료를 1천 원에서 3천 원으로 대폭 인상할 때도 창경궁은 국민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고궁 공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인상하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역사적 공간, 그것도 왕궁을 이처럼 국민공원으로 개방하는 곳은 없다. 그 규모가 자그마치 7만평에 이른다. ‘고궁 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이 넓은 공간에 새로 공원을 짓는다 쳐도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설계할 건축가가 어디 있겠으며, 있다 한들 이처럼 품위 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경궁을 어느 궁궐 못지않게 사랑하고 즐겨 찾는다. 봄꽃이 만발한 창경궁, 낙엽이 지는 창경궁, 비 오는 여름날의 창경궁을 홀로 거닐며 나만의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사는 가장 큰 행복의 하나다. - P331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이라 불렀다.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의 직계존속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은 왕이 모셔야 할 어머니와 할머니 혹은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가 기거할 전각이 필요했다. 이 전각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은 멀어야 편했다. 그래서 창덕궁 곁에지은 것이 창경궁이다. - P331
결국 영조는 그날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사도세자는) 정축년 무인년(영조 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지 못하면서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더이상 조선왕조를 짊어지고 갈 왕세자가 아니었기에 영조는 그를 죽일수밖에 없었다. - P354
병석에 누워 임종이 임박함을 느낀 영조의 마음속 걱정이란 오로지 왕세손인 정조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대신들이 제대로 정조를 보필해줄 것인지였다. 자식(사도세자)을 자신의 손으로죽음에 이르게 하면서까지 국정을 반듯하게 꾸려가고자 했던 터라 그걱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거두지 못했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월 7일, 집경당에 나아가 세손을 불러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때 영조는 세손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삭제해달라고요청한 효심에 감동해 직접 ‘효(孝孫)‘이라 쓰고 이를 은(銀)도장으로만들어주겠다고 공표했다. - P355
지금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은도장과 관계된 유물이 일괄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효손 팔십삼서(書)‘라고 새겨진 거북 모양의 은도장이다. 도장은 주칠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상자에는 ‘어필은인(御筆銀印)‘ 이라고 쓴 동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영조가 ‘세손에게 이르는 글‘이라는 뜻의 「유세손서(諭世孫書)」가 함께 전한다.
아! 해동의 300년 역사를 지닌 조선의 83세 임금이 25세 되는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과 반석 - P356
처럼 편안하다. (…) 특별히 효(孝) 자로 그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며 이일을 후대의 본보기로 삼으니 산천초목과 풀벌레인들 누가 이 뜻을모르겠는가.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온몸으로 간직해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영조는 이 글을 쓰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이 유서는 긴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데 곁에는 ‘어제유서(御製諭書)‘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손‘이라는 은도장을 담은 상자와 유서를 넣은 나무통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멀리 행차할 때도 들고오게 하여 자신 앞에 놓게 했다. 정조 때 그린 의궤도를 보면 옥좌 앞에 도장함과 나무통이 놓여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정조가 재위 25년 동안 그렇게 지니고 다녔기에 나무통엔 손때가 깊이 배고가죽끈은 다 닳았다. ‘효손‘ 은도장과 「유세손서」 나무,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비의 한과, 눈을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을 지켜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대왕 다음가는 계몽군주, 문화군주가 되었다. - P357
당시에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 때문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다. 1625년(인조3년) 세자로 책봉된 그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자진하여 봉림대군 및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9년 동안 청과 조선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으며 서구 과학 문명에 대해 탐구했다. 1645년 귀국했으나인조와 조정은 세자의 귀국을 못마땅해했다.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힘을 알게 되었기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했고, 청이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반해 봉림대군은 부왕의 뜻을 충실히 받아들여 반청의 감정을 더욱 다졌고, 전통을 고수하고 서양문물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현세자가 봉림대군(효종)을 남겨두고 먼저 귀국했던 것이다. 인조는 만약 세자가 귀국하면 청나라로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요구가 있을까 걱정하며 의심했다. - P367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는 그리던 서울에 돌아와 부왕을 만났지만의외로 부왕의 쌀쌀한 태도를 접했다. 야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인조가 매우 언짢아했으며,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소현세자의 얼굴에 벼루를 내리쳤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병이 들었다. 세자는 평소에도 몸이건강하지 않았는데,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열을 내리려고 세 차례침을 맞고,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 - P367
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 사람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1645) 6월 27일자)
이 기록으로 보면 소현세자는 독살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 또한 사도세자와 같은 비운의 왕자였던 것이다. 환경전은 이처럼 가끔 사용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국장 때 빈전이나혼전으로 사용되어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전도 여기에 마련되었다. 그런데 1830년, 효명세자의 빈전으로 모셔진 지 두 달 만인 7월에 환경전에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건물이 전소되었다. 군사들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효명세자의 재궁을 건져냈지만, 불은 경춘전과 함인전을비롯한 다른 건물들에까지 번져갔다. 1830년 창경궁의 주요 건물을 다태운 동궐의 대화재였다. - P368
조선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여인들 중 품계를 받은 후궁, 궁녀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왕비, 세자빈, 왕대비(왕의 어머니), 대왕대비(왕의할머니)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하지만 내명부의 여인들은 품계를 받았고, 내관과 궁관으로 나뉘었다. 내관은 왕과 세자의 후궁으로, 정1품부터 종5품까지였다. 서열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이다. 정1품빈에 봉해지면 이름 앞 한 자씩 좋은 단어를 얹어주는데 희빈, 숙빈, 수빈 등이 그것이다. 궁관은 흔히 궁녀라고 하며 정5품부터 종9품까지 각 처소마다 소임에 - P381
따라 배치된다. 정5품 상궁(宮)은 총책임자로 제조상궁(그宮)이중 가장 높다. 정7품 전빈(典)은 손님 접대를 맡고, 정8품 전약(藥)은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고, 종9품 주치(徵)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식으로 직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 즉 장희빈은 궁관에서 내관으로 승진한 뒤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것이다. 이 밖에 궁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는 나인(內人)이 있고, 궁관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비자가 있다. 무수리는상궁의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 통근을 하는 데 비해, 비자는 상근하는 하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궁녀의 수는 후궁의 수에 따라 달라졌다. 후궁의 수는 임금에 따라 많고 적음이 달랐는데 성종의 경우 왕후가 3명, 후궁이 11명이었다. 그렇다고 왕후가 동시에 3명인 것은 아니었다. 왕이 하나듯 왕후도 1명으로, 왕 - P382
후가 죽거나 폐비되었을 때 다음 왕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예로성종의 첫 왕비는 한명회의 딸 청주 한씨(공혜왕후)였고, 청주 한씨가 죽은 뒤 왕후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함안 윤씨(제헌왕후)다. 이분이 왕자(연산군)를 낳았으나 인수대비에게 밉보여 궁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다. 그리고폐비 윤씨를 뒤이은 세번째 왕후로 파평 윤씨(정현왕후)가 들어왔다. 성종의 후궁으로는 명빈(明嬪) 김씨, 귀인 정씨, 소의 이씨, 숙의 홍씨, 숙용 심씨 등이 있는데 이중 숙의 홍씨는 남양홍씨 홍일동(홍길동의 형)의딸로 7남 3녀를 낳았다. 내명부에도 이처럼 서열과 직책이 분명했다. - P383
그러나 두 건물의 내력은 아주 크다. 집복헌에서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그리고 영춘헌에서는 정조가 등창을 치료받다 세상을 떠났다. 특히정조는 이 집을 좋아해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어쩌면 수빈 박씨가 좋아자주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의 아내는 모두 5명으로 왕후가 1명, 후궁이 4명이었다. 왕후(효의왕후 청풍 김씨)는 1762년, 10세 때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들어왔다. 하필이면 궁에 들어온 그해 여름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다. 왕 - P384
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후궁들과도의좋게 지냈고, 정조가 죽은 뒤에도 21년을 더 살아 1821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왕자를 얻기 위해 후궁을 들였다. 첫번째 후궁은 원빈(元嬪) 홍씨로 홍국영의 여동생이다. 1778년 13세 때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1년 만에 요절했다. 두번째 후궁으로 들어온 분은 화빈(嬪) 윤씨다. 1780년 원빈 홍씨가죽은 이듬해에 들어와 1년 만에 낳은 딸이 일찍 죽고 이후 자식이 없었다. 화빈윤씨 역시 정조가 죽고도 24년을 더 살아 18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번째 후궁은 화빈윤씨를 모시던 궁녀였다가 특별상궁으로 봉해진뒤 후궁이 된 빈(嬪) 성씨다.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이었기 때문에가문을 알 수 없으나 정조가 직접 선택한 유일한 후궁이었다. 그래서 정조가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의빈 성씨는 1782년 원자를 낳아 1783년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 P385
이듬해에 옹주도 낳았으나 첫돌 전에 죽었고, 1786년 5월 세자가 5세에 홍역으로 죽는 슬픔을 당하고 그해9월에 셋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여전히 후사가 없는 정조는 네번째 후궁을 들이게 되었다. 삼간택과 가례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빈으로 입궁한 수빈(綏嬪) 박씨다. 반남박씨 명문으로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 집안의 딸로 1787년 18세에 후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790년 6월 18일, 마침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 순조를 낳았고, 3년 후 숙선(善)옹주도 낳았다. 수빈 박씨는 평소 예절이 바르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성품 또한 온화해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이라 불렸다. 그녀의 아들이 세자가 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뇌물을 바쳤으나 이를 고발해 의금부로 잡 - P385
혀가게 하는 청렴한 처신을 보였다. 정조가 죽고 11세의 세자가 순조로 즉위했다. 대왕대비(영조 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수빈 박씨는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대비인 효의왕후를 잘 모시고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는 1815년 81세 효의왕후는 1821년 69세까지 장수했다. 수빈박씨는 1822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늘 절약하며 살림도 잘했다고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3년 1월 27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子)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園, 묘소)을만들 때와 후일 별묘(別廟, 사당)를 지을 때 보태 쓰도록 하라. - P386
이런 영춘헌이었고 이런 수빈박씨였기 때문에 정조는 영춘헌에 자주머물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했다.
선왕(정조)은 천품이 검소하시고 만년에는 더욱 검약하셔서 상시 계신 집의 짧은 처마와 좁은 방에 단청의 장식을 하지 않고 수리를 허락하지 않으셔서 숙연함이 한사(寒士)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정조가 영춘헌에 있으면서 쓴 시가 여러 편 있는데 그중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영춘헌 툇마루에 앉아 편안히 봄을 맞으며 쓴 시 가운데일부이다.
마루가 탁 트여 봄을 맞으니 봄이 늙지를 않는구나 - P387
답사기를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영춘헌을 찾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둘러보았는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현판 글씨가 눈에 띄었다. 예서풍으로 또박또박 썼는데 필획에 연륜이 담겨 있지 않아 서예가의 글씨가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아주 조신하고 느낌이 있어 누가 썼을까 궁금했다. 사진을 찍어 낙관을 확인해보니 원(元), 필정묵의(筆墨意)라 읽혔다. 헌종의 도장이었다. 헌종의 묘지명」과 「행장」에서는 한결같이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했지만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창덕궁 병영(兵營)에 걸었던 ‘내영(內營)‘이라는 현판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또 한 점을 만나니 낙선재의 헌종 모습이 떠오른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하나도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남아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 창경궁의 내전 답사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내전 위쪽엔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자경전 터가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창경궁의 이야기는 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 P388
창경궁 내전의 건물들을 두루 답사하고 정일재가 있었다는 넓은 암반위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반듯한 언덕배기가 나온다. 여기가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자경전 자리다. 저 건너편 함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경모궁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이다. 「동궐도」를 보면 자경전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대단히 큰 전각으로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로 넓게 열려 있다. 자경전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위한 많은 잔치가 벌어졌으나 그보다는 바로 여기가 한중록』의 집필 현장이라는 의의가 더 크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면 한없는 동정과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녀는 80여 년의 한 많은 삶을 견디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증언한 조선 - P389
최고의 궁중문학 작품 『한중록』을 저술한 위대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뒤에도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겨우 열한 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는아픔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한을 풀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경궁은 모자 간의 정을 덮어두고 아들을 영조의 처소로 보내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을 쌓도록 했다. 남편의 정신병이 부자 간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하여 혜경궁을 더욱 놀라고 슬프게 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엽기적인 살인 방법이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아이디어라는 이유였다. 정조는 훗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어, 전날의처분을 후회하고 어머니를 더욱 효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 P391
첫번째 저술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베풀었던 1795년(정조19년)경에 이루어졌다. 혜경궁은 ‘내가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라는 마음에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래서 이책의 최초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서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세자가 병이 없는데 영조가공연히 죽였다느니 친정아버지(홍봉한)가 뒤주를 들이게 했다느니 하며이런저런 맹랑한 말이 많으나 자신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을지니 "이기록을 보면 일의 시종을 분명히 알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조께서 사도세자께 자애를 베풀지 않으시어 세자께 병환이 생겼고 (…) 병환이 만만(萬) 망극하셔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우니 끝내어쩔 수 없이 일을 당하시니라. - P392
67세(순조 1년) 때의 두번째 집필과 68세(순조 2년) 때의 세번째 집필은정조 사후 대리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나 동생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이 유배형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비통한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 이때의 책 제목은 ‘혈錄)‘이 되었다. 혜경궁은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네번째 집필은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71세 (순조 5년)에1,2,3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병의 원인과 증세를 상세 - P392
하게 기록한 것이다. 수이렇게 쓰인 『한중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인의 증언을 넘어 후세인들에게 그 당시 인물·정치·풍속·궁중문화를 생생히 전해주는 고전문학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한중록』에 감동하는 것은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시아버지에 의해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는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엄청난 한이 서린 그 사건의 시말을 담담하게풀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는 혜경궁의 너그러운인간성이고, 또 하나는 한(恨)을 한으로 풀지 않고 인생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극복해낸 노년의 용서다. 그 점에서 한중록은 ‘한(恨)중록‘이 아니라 ‘한(閑)중록‘이 맞다고 생각한다. - P393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던 자경전 터는 창경궁 답사의 끝이다. 자경전터에서 그 옛날의 창경궁을 생각하며 내전 쪽을 내려다보면 옛 모습은잃었어도 늠름한 전각들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그래도 궁궐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보여준다. 지금 상태도 그러하니 그 옛날 여기서 보는 창경궁의 아름다움은 어땠을까. 궁궐지」에 실려 있는 순조의 자경전 기문」에는 자경전에서 본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그림같이 묘사되어 있다.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잘 따랐다. 자신은 할머니의 지극한덕행을 돕기에 부족함이 많고 언사는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덮기에 부족하여 조마조마 조심해서 쓰지만, 글은 성의에 있지 문자에 있지 아니하니 오직 있는 그대로 알린다면서 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길게 말한 다음 자경전에서 본 창경궁의 사계절을 노래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창경궁의 아련한 정취를 생생히 감상할 수 있다. - P394
자경전에서는 궁전의 사방을 조망하는 경치가 아름답다. 봄볕은 잔잔하고 맑은 기운은 환히 비추며 돈다. 꽃은 비단 같은 정원에 어울려피고, 버들은 금 같은 못에 일제히 떨치고 있다. 앵무새는 조각한 새장에서 말을 배우고, 꾀꼬리는 좋은 가지를 택해 소리를 보내고 있다. 붉고 푸름이 서로 섞여 흩어지고 어우러지며 만송이 꽃술은 모양과 빛을 발하고 있어 실로 궁궐 정원의 번화함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궁전의 봄 경치다. 난초 끓인 물에 목욕하고 쑥꽃을 꽂으니 이는 궁중에서 예부터 하는 일이란다. 꽃다운 풀에 앉고 무성한 수풀을 그늘로 하니 봄꽃이 향기를 토하는 것보다 낫다. 천도복숭아가 열매를 맺으니 열매는 삼천 - P394
개라, 아름다운 나무에 매미 우니 울음소리 가득하다. 잎을 천 개의 줄기에 실으니 향기가 자욱하다. 맑디맑은연못은 또한 마치 살아 있는물 같다. 정원가에 석류꽃 나무 수십 그루를 심으니 하나하나 붉게 익었고 계단 위에 기이한 풀백여 포기를 심어두니 그릇마다 기이하고오묘하다. 삼복더위에도 더운 기운이 침범하지 않는다. 궁녀가 부채부치는 수고를 하지 않게 하고도 자연히 맑은 바람이 옷깃을 씻어준다. 이것이 궁전의 여름 경치다. 수풀 단풍이 비단처럼 펼쳐 있고 빼어난 국화가 어울려 향기를 낸다. 가을 달은 휘영청 밝게 빛나며 비추인다. 흰 이슬 버선에 스며드니넓은 정원이 낮과 같다. 빗물이 스며든 것을 모아서 맑은 기운을 띄운다. 이에 온 나라가 풍년을 노래하고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한다. 올해는 작년과 같고 내년도 올해와 같으리니 해마다 이와 같으리, 들에는배 두드리는 소리 들리고 조정에는 풍년 진상을 청한다. 이것이 궁전의 가을 경치다. - P395
궁전의 나무는 구슬을 맺어 여섯 가지 꽃이 다투어 춤추는 것을 보고, 궁궐의 비단은 선을 더하여 동짓날의 처음 돌아옴을 다투어 축하한다. 임금의 생일이 돌아오면 만세 삼창기원 소리 높이 오른다. 찬란한 빛과 상서로운 색에 관과 패물이 쟁쟁하다. 사람들은 채색 대오를이루고 조화가 경계에 넘친다. 이것이 궁전의 겨울경치다.
그런 창경궁의 아름다움을 보듬고 있던 자경전이었다. 내가 이 글을더욱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관람객이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본 창경궁의 자랑이라는 점이다. - P395
꽃나무에서 민족성을 찾는 것은 옹졸한 생각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식물에도 장소성이라는 것이 있다. 윤중로의 벚꽃은 즐길 수 있어도 창경궁의 벚나무는 허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대신 창경궁 관람로엔 ‘궁궐의 우리 나무‘가 즐비하다. 봄이면 하얀꽃을 솜사탕처럼 피어내는 귀룽나무도 있고,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하나로 엉켜 겉으로는 사이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200년을 두고 싸우고 있는 연리목 아닌 연리목도 있다. 그 숲길을 걷는 것이 다른 궁궐에서는 가질 수 없는 창경궁의 큰 매력이다. - P411
일제가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기 기작한 것은 1907년부터였다. 강제로 폐위시킨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남게 하고 이어 즉위한 순종황제를 창덕궁에 기거하게 하면서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개원을 앞두고 일제는 일본의 우에노(上野) 동물원에서 일본인 사육사20명을 극비리에 교육시켰다. 조선인을 고용하면 맹수들을 풀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일본인만 채용했다. 일제는 1차로 창경궁의 행각, 궁장, 궁문을 헐고 이를 경매에 붙였다(이중 몇 채가 지금도 개인 저택으로 남아 있다). 순종은 이를 애석해했지만 소용없는일이었다. 2차로 춘당대 북쪽에 식물원 터를 잡고 내농포에 연못을 파춘당지를 만들었다. 3차 공사로 보루각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위치한궐내각사를 모두 헐고 종묘와 인접한 넓은마당까지 동물원을 세웠다. 1909년 초부터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종 동물들을 수집하고 방방곡곡의 진귀한 식물들을 채집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에 서식하지않는 코끼리·사자.호랑이·곰· 원숭이 공작 등의 동물들과 파초·고무나 - P411
무·바나나 등 고가의 열대식물들까지 수입해 전시했다. 당시 창경궁은17 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었다. 1909년 11월 1일 아침 10시, 개원식이 열렸다. 순종은 연미복 차림에모닝코트(morning coat)를 걸치고 회색 중절모를 쓴 개화된 예복을 입고 참석했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비롯하여 무려 1천 명에 달하는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원을 총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자리에 없었다. 닷새 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 P412
순종황제가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공개하여 온 백성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노대신들이 한사코 반대했다. 그럼에도 순종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했다. 한국동물원 80년사』(서울특별시 1993)에 따르면, 개원 첫해 동물원의 식구는 "반달곰 2마리 · 호랑이 1마리 · 집토끼 18 마리 · 진돗개 1마리 · 제주말 2마리 ·고라니 • 노루 10마리.." 등 총 72종 361 마리였다.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다. 그렇게 창경궁은 창경원으로바뀌었고,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던 시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겨 찾는 대공원이 되었다. 창경원은 하루 2~3만 명이 입장할 만큼 나들이 장소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11년 일제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이왕가박물관 건물을 세우고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했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했다. 1922년에는 이곳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숲을 만드는가 하면 - P412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들어서면서 창경원 동물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패전을 앞둔 1945년 7월 25일,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은전 직원을 모아놓고 도쿄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며 "미군이 창경원을폭격하면 맹수가 우리에서 뛰쳐나올 수 있으니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을 모두 죽이라"면서 "동물들의 먹이에 몰래 넣어두라"며 극악을 나눠줬다. 코끼리·사자·호랑이·뱀· 악어 21종 38마리가 그렇게 독살됐다. 동물들이 죽던 날 밤, 창경원에는 맹수들의 스산한 울부짖음이 밤새도록 가득했고 동물원 직원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창경원은 다시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창경원 동물들이 겪은 수난은 더욱 극심했다. 1·4후퇴 때에는 창경원 직원들도 피난을 떠났다. 돌아와서 보니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은 한마리도 없었다. 부엉이·여우·너구리 삶 따위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고, 낙타・사슴·얼룩말들은 도살당해 먹을거리가 없던 피난민들의 식량이 됐다. - P413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창립되어 정부기관과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동물원 재건 기금으로 42만2천달러를 모았다. 이 기금으로 1955년에 호랑이·백곰·물개·하마. 낙타 등 10여 종을네덜란드, 미국, 태국 등에서 수입해 다시 동물원다운 동물원의 면모를갖추기 시작했다. 사자는 한국은행이 사주었고, 코끼리는 이병철 당시 제일제당 사장이기증했다. 식물원도 야자수 외에 107종의 관상식물을 기증받았다. 이리하여 창경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헤아리는 동물원이 되었다. 다시 관람객들이 모여들었고, 서울의 초등학교들도 봄가을 소풍 때단골로 창경원에 갔다. 1950~60년대 서울의 최고가는 유원지이자 연인들의 행락지는 단연코 창경원이었다. - P413
1977년 마침내 창경원 동물원의 과천 이전 계획이 수립되어 1983년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궁으로 회복되었다. 1984년 5월 1일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개장했고,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23일 일반에 공개했다. 이것이 창경원 74년의 역사다. 내가 창경궁 답사기를 쓰면서 창경원 시절까지 언급한 것은 그것도역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또래에게는 창경원이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창경원에 여러번 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고, 아버지 손잡고 가서 놀이기구를 탄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어린 시절 즐거운 한때로추억에 남아 있다. - P414
나이가 제법 들고 보니 동물을 보던 그때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은 너무도 다르다. 어려서는 인간과 다른 모습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물원을찾았다. 그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또 예전에는 인간성을 강조해서 말할때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명을 창조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요즘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세계」를보면서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을 보게 된다. 존 버거는 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의 첫장 왜 동물을 보는가?」에서 인간이 동물원을만든 것이 자연 속에서 동물과 만났던 관계를 단절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했다. 「동물의 세계」를 즐겨 보면서 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기고만장하지만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텔레비전에서 원 - P414
숭이 편을 만들듯이 원숭이들이 인간 편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도해보고 동물원이 아니라 대자연 속 동물의 생태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원형질을 유추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떤 동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때 가장 먼저떠오르는 모습은 텔레비전의 영상에서 본 것도 아니고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닌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실체감이있다. 그래서인지 창경궁에 오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 점에서 창경원을 경험했던 구세대와 그렇지 않은 신세대는 창경궁 답사에 임하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경궁 답사의마지막을 창경원 이야기로 마무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세대들이 구세대의 이런 독백을 과연 이해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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