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미술사에서 풍경화라는 장르가 생긴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이었음에 반해, 동양미술사에서 산수화는 5세기부터 발달하기 시작해10세기에 이르면 가장 핵심적인 장르로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된다. 산수화에서 화가의 시각은 고원), 심원(深遠), 평원(平遠)의 삼원법을 기본으로 하는데 고원은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것, 심원은 깊숙이 내려다보는 것, 평원은 멀리 내다보는 것을 말한다.
또 부감법(法)이라는 것이 있다. 부감법은 새가 날아가면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각 구성법으로 풍광을 일목요연하게 장악한다.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가 대표적인 예인데 당시엔 헬리콥터도 없었건만 어떻게 일만이천봉을 하늘에서 내려다본 듯이 그릴 수 있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 P325

그러나 근래 들어 궁궐들을 부감하기 좋은 곳이 많이 생겼다. 덕수궁은 서울시청이 개방되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하고 있고, 경복궁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8층에서 보면 북궐도」를 그릴 수 있을 정도로 훤하게 보인다. 종묘는 세운상가 옥상에서 보면 숲속의 정전이 그림처럼 드러나고, 창덕궁은 근래에 문을 연 ‘공간‘ 신사옥 4층의 카페에서 보면 측면관을 조망할 수 있다.
창경궁은 서울대병원 암센터 6층 옥상에 행복정원이 생겨 더없이 훌륭한 조망을 제공한다. 더욱이 창경궁은 동향 궁인지라 「동궐도」에서는남쪽에서 부감한 측면으로 나타나 있지만 행복정원에서 바라보면 정문인 홍화문, 정전인 명정전, 그 너머 내전 건물의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뿐만 아니라 궁궐 뒤쪽으로 멀리 인왕산 자락이 길게 펼쳐져 나아가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순간 거짓말 같은 풍광이 전개된다. - P326

창경궁 춘당지 주변의 울창한 나무들과 창덕궁 후원이 거대한 숲으로한데 어우러져 낮은 능선을 그리며 길게 뻗어 있는데 그 뒤를 푸름을 머금은 북악산 매봉 자락이 바짝 받치고 있어 한 폭의 산수화 같다. 철마다우리나라 야산의 빛깔을 그대로 발하여, 봄이면 산벚꽃의 빛이 파스텔 톤으로 눈부시고, 여름철이면 진초록의 풍요로움으로 가득하고, 가을이면 갈색으로 물들고, 눈 덮인 겨울이면 그 자체로 단색조의 수묵화가된다.
2015년에 서울시 주관으로 시민과 함께 서울의 명소를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창경궁 답사에 앞서 이곳을 안내했을 때 모두들 감격해 절로 한마디씩 했다.

"이것이 진짜 고궁의 아름다움이네요." - P327

창경궁은 서울의 5대 궁궐 사이에서 그 위상이 좀 애매하다. 경복궁,창덕궁처럼 법궁으로서의 모습도 없고 덕수궁처럼 별격을 지닌 것도 아니고 경희궁처럼 완전히 새로 복원된 것도 아니다. 1909년 일제에 의해식물원·동물원으로 바뀐 창경원 시절을 청산하고 다시 창경궁으로 회복한 때는 1983년이지만 그렇다고 창경궁의 주요 전각들을 모두 새로 지은 것은 아니다. 새로 복원된 것은 회랑과 부속 건물들이다. 창경원 시절에도 명정전(국보 제226호)은 엄연히 건재했다. - P328

에뭇경복궁에서는 이런 그윽한 맛을 느낄 수 없고, 창덕궁 후원은 안내원을 따라다녀야 하는 제약이 있어서 이처럼 홀로 즐길 수 없다. 2005년 경복궁 입장료를 1천 원에서 3천 원으로 대폭 인상할 때도 창경궁은 국민들이 편안히 즐길 수 있는 ‘고궁 공원‘이라는 점을 고려해 인상하지 않았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보아도 역사적 공간, 그것도 왕궁을 이처럼 국민공원으로 개방하는 곳은 없다. 그 규모가 자그마치 7만평에 이른다.
‘고궁 공원‘이라는 콘셉트로 이 넓은 공간에 새로 공원을 짓는다 쳐도이처럼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지는 공원을 설계할 건축가가 어디 있겠으며, 있다 한들 이처럼 품위 있게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창경궁을 어느 궁궐 못지않게 사랑하고 즐겨 찾는다. 봄꽃이 만발한 창경궁, 낙엽이 지는 창경궁, 비 오는 여름날의 창경궁을 홀로 거닐며 나만의시간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서울에 사는 가장 큰 행복의 하나다. - P331

창경궁은 창덕궁과 함께 ‘동궐(東)‘이라 불렀다. 궁궐은 임금이 정무를 보는 곳인 동시에 왕의 직계존속이 생활하는 곳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공간을 확장할 필요가 생겼다. 우선은 왕이 모셔야 할 어머니와 할머니 혹은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가 기거할 전각이 필요했다. 이 전각들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조금은 멀어야 편했다. 그래서 창덕궁 곁에지은 것이 창경궁이다. - P331

결국 영조는 그날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사도세자는) 정축년 무인년(영조 33~34년)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했다.


결국 사도세자는 아버지로부터 따뜻한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고, 어머니 품에서 보호받지 못하면서 정신질환을 앓았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더이상 조선왕조를 짊어지고 갈 왕세자가 아니었기에 영조는 그를 죽일수밖에 없었다. - P354

병석에 누워 임종이 임박함을 느낀 영조의 마음속 걱정이란 오로지 왕세손인 정조가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또 대신들이 제대로 정조를 보필해줄 것인지였다. 자식(사도세자)을 자신의 손으로죽음에 이르게 하면서까지 국정을 반듯하게 꾸려가고자 했던 터라 그걱정은 눈을 감는 순간까지 거두지 못했다.
영조는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인 2월 7일, 집경당에 나아가 세손을 불러 영의정을 비롯한 대신들과 자리를 같이했다. 이때 영조는 세손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승정원일기의 기사를 삭제해달라고요청한 효심에 감동해 직접 ‘효(孝孫)‘이라 쓰고 이를 은(銀)도장으로만들어주겠다고 공표했다. - P355

지금도 국립고궁박물관에는 이 은도장과 관계된 유물이 일괄 소장되어 있다. 하나는 ‘효손 팔십삼서(書)‘라고 새겨진 거북 모양의 은도장이다. 도장은 주칠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상자에는 ‘어필은인(御筆銀印)‘
이라고 쓴 동판이 붙어 있다.
그리고 영조가 ‘세손에게 이르는 글‘이라는 뜻의 「유세손서(諭世孫書)」가 함께 전한다.


아! 해동의 300년 역사를 지닌 조선의 83세 임금이 25세 되는 손자에게 의지한다. 오늘날 종통宗統)을 바르게 하니 나라는 태산과 반석 - P356

처럼 편안하다. (…) 특별히 효(孝) 자로 그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며 이일을 후대의 본보기로 삼으니 산천초목과 풀벌레인들 누가 이 뜻을모르겠는가. (…) 아, 내 손자야! 할아버지의 뜻을 온몸으로 간직해 밤낮으로 두려워하고 삼가서 우리 300년 종묘사직을 보존할지어다.


영조는 이 글을 쓰고 한 달 뒤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의 이 유서는 긴나무통 안에 들어 있는데 곁에는 ‘어제유서(御製諭書)‘라는 동판이 붙어있다. 정조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손‘이라는 은도장을 담은 상자와 유서를 넣은 나무통을 항시 지니고 다녔다. 멀리 행차할 때도 들고오게 하여 자신 앞에 놓게 했다.
정조 때 그린 의궤도를 보면 옥좌 앞에 도장함과 나무통이 놓여 있는것을 볼 수 있다. 정조가 재위 25년 동안 그렇게 지니고 다녔기에 나무통엔 손때가 깊이 배고가죽끈은 다 닳았다.
‘효손‘ 은도장과 「유세손서」 나무, 그리고 영조의 글을 보고 있자면가슴이 절로 뭉클해진다. 아들을 자신의 손으로 죽인 아비의 한과, 눈을감는 순간까지도 나라의 종통을 지켜야 한다는 늙은 왕의 간절한 소망이 절절히 다가온다. 결국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유지를 받들어 세종대왕 다음가는 계몽군주, 문화군주가 되었다. - P357

당시에도 소현세자의 죽음은 독살 때문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었다. 소현세자는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적장자다. 1625년(인조3년) 세자로 책봉된 그는 1636년 병자호란 이후 자진하여 봉림대군 및주전파 대신들과 함께 청나라에 가서 9년 동안 청과 조선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으며 서구 과학 문명에 대해 탐구했다. 1645년 귀국했으나인조와 조정은 세자의 귀국을 못마땅해했다.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담당하면서 청나라의 힘을 알게 되었기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했고, 청이나 서양의 문화를 수용하는 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반해 봉림대군은 부왕의 뜻을 충실히 받아들여 반청의 감정을 더욱 다졌고, 전통을 고수하고 서양문물을 거부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소현세자가 봉림대군(효종)을 남겨두고 먼저 귀국했던 것이다. 인조는 만약 세자가 귀국하면 청나라로부터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라는 요구가 있을까 걱정하며 의심했다. - P367

1645년 2월 18일, 소현세자는 그리던 서울에 돌아와 부왕을 만났지만의외로 부왕의 쌀쌀한 태도를 접했다. 야사에 따르면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사정과 서양 문물에 대해 이야기하자 인조가 매우 언짢아했으며,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소현세자의 얼굴에 벼루를 내리쳤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귀국한 지 석 달 만에 병이 들었다. 세자는 평소에도 몸이건강하지 않았는데, 학질이라는 진단을 받은 뒤 열을 내리려고 세 차례침을 맞고, 병이 든 지 사흘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사관은 이렇게 적었다.


세자는 환국한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을 얻은 지 며칠 만 - P367

에 죽었다. 시체는 온몸이 새까맣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 검은천으로 얼굴의 반을 덮어서 옆에서 모시던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낯빛은 중독된 사람과 같았는데 외부 사람은 이 사실을 아무도 몰랐다. 임금도 이를 알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23년(1645) 6월 27일자)


이 기록으로 보면 소현세자는 독살된 것이 거의 틀림없다. 그 또한 사도세자와 같은 비운의 왕자였던 것이다.
환경전은 이처럼 가끔 사용하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국장 때 빈전이나혼전으로 사용되어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빈전도 여기에 마련되었다. 그런데 1830년, 효명세자의 빈전으로 모셔진 지 두 달 만인 7월에 환경전에 원인 모를 불이 일어나 건물이 전소되었다. 군사들이 화염 속으로 뛰어들어가 효명세자의 재궁을 건져냈지만, 불은 경춘전과 함인전을비롯한 다른 건물들에까지 번져갔다. 1830년 창경궁의 주요 건물을 다태운 동궐의 대화재였다. - P368

조선시대 궁내에 기거하는 여인들 중 품계를 받은 후궁, 궁녀들을 ‘내명부(內命婦)‘라고 한다. 왕비, 세자빈, 왕대비(왕의 어머니), 대왕대비(왕의할머니)는 무품으로 품계를 초월하지만 내명부의 여인들은 품계를 받았고, 내관과 궁관으로 나뉘었다.
내관은 왕과 세자의 후궁으로, 정1품부터 종5품까지였다. 서열은 빈(嬪, 정1품), 귀인(貴人, 종1품), 소의(昭儀, 정2품), 숙의(淑儀, 종2품), 소용(昭容,
정3품), 숙용(淑容, 종3품), 소원(昭, 정4품), 숙원(淑媛, 종4품) 등이다. 정1품빈에 봉해지면 이름 앞 한 자씩 좋은 단어를 얹어주는데 희빈, 숙빈, 수빈 등이 그것이다.
궁관은 흔히 궁녀라고 하며 정5품부터 종9품까지 각 처소마다 소임에 - P381

따라 배치된다. 정5품 상궁(宮)은 총책임자로 제조상궁(그宮)이중 가장 높다. 정7품 전빈(典)은 손님 접대를 맡고, 정8품 전약(藥)은처방에 따라 약을 달이고, 종9품 주치(徵)는 음악에 관한 일을 맡는 식으로 직급이 아주 세세히 나뉘어 있었다. 즉 장희빈은 궁관에서 내관으로 승진한 뒤 종4품 숙원에서 정1품 빈까지 초고속 승진을 했던 것이다.
이 밖에 궁관이 되기 위해 어릴 때 궁으로 들어와 일을 배우는 나인(內人)이 있고, 궁관들의 허드렛일을 하는 무수리와 비자가 있다. 무수리는상궁의 처소에 소속된 하녀로 통근을 하는 데 비해, 비자는 상근하는 하녀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궁녀의 수는 후궁의 수에 따라 달라졌다. 후궁의 수는 임금에 따라 많고 적음이 달랐는데 성종의 경우 왕후가 3명, 후궁이 11명이었다. 그렇다고 왕후가 동시에 3명인 것은 아니었다. 왕이 하나듯 왕후도 1명으로, 왕 - P382

후가 죽거나 폐비되었을 때 다음 왕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 예로성종의 첫 왕비는 한명회의 딸 청주 한씨(공혜왕후)였고, 청주 한씨가 죽은 뒤 왕후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 함안 윤씨(제헌왕후)다. 이분이 왕자(연산군)를 낳았으나 인수대비에게 밉보여 궁에서 쫓겨난 폐비 윤씨다. 그리고폐비 윤씨를 뒤이은 세번째 왕후로 파평 윤씨(정현왕후)가 들어왔다.
성종의 후궁으로는 명빈(明嬪) 김씨, 귀인 정씨, 소의 이씨, 숙의 홍씨,
숙용 심씨 등이 있는데 이중 숙의 홍씨는 남양홍씨 홍일동(홍길동의 형)의딸로 7남 3녀를 낳았다. 내명부에도 이처럼 서열과 직책이 분명했다. - P383

그러나 두 건물의 내력은 아주 크다. 집복헌에서는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고 정조의 후궁인 수빈박씨가 순조를 낳았다. 그리고 영춘헌에서는 정조가 등창을 치료받다 세상을 떠났다. 특히정조는 이 집을 좋아해 자주 머물렀다고 한다. 어쩌면 수빈 박씨가 좋아자주 온 것인지도 모른다.


정조의 아내는 모두 5명으로 왕후가 1명, 후궁이 4명이었다. 왕후(효의왕후 청풍 김씨)는 1762년, 10세 때 세손빈으로 간택되어 들어왔다. 하필이면 궁에 들어온 그해 여름에 시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했다. 왕 - P384

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시어머니 혜경궁 홍씨와 정조의 후궁들과도의좋게 지냈고, 정조가 죽은 뒤에도 21년을 더 살아 1821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는 왕자를 얻기 위해 후궁을 들였다. 첫번째 후궁은 원빈(元嬪) 홍씨로 홍국영의 여동생이다. 1778년 13세 때 후궁으로 들어왔지만 1년 만에 요절했다.
두번째 후궁으로 들어온 분은 화빈(嬪) 윤씨다. 1780년 원빈 홍씨가죽은 이듬해에 들어와 1년 만에 낳은 딸이 일찍 죽고 이후 자식이 없었다. 화빈윤씨 역시 정조가 죽고도 24년을 더 살아 1824년에 세상을 떠났다.
세번째 후궁은 화빈윤씨를 모시던 궁녀였다가 특별상궁으로 봉해진뒤 후궁이 된 빈(嬪) 성씨다. 의빈 성씨는 궁녀 출신이었기 때문에가문을 알 수 없으나 정조가 직접 선택한 유일한 후궁이었다. 그래서 정조가 더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의빈 성씨는 1782년 원자를 낳아 1783년 소용에서 의빈으로 승격되었다. - P385

이듬해에 옹주도 낳았으나 첫돌 전에 죽었고, 1786년 5월 세자가 5세에 홍역으로 죽는 슬픔을 당하고 그해9월에 셋째 아이를 임신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여전히 후사가 없는 정조는 네번째 후궁을 들이게 되었다.
삼간택과 가례 절차를 거쳐 처음부터빈으로 입궁한 수빈(綏嬪) 박씨다.
반남박씨 명문으로 정조의 고모부인 박명원 집안의 딸로 1787년 18세에 후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1790년 6월 18일, 마침 혜경궁 홍씨의 생일날 순조를 낳았고, 3년 후 숙선(善)옹주도 낳았다.
수빈 박씨는 평소 예절이 바르고 사치를 멀리했으며, 성품 또한 온화해어진 후궁이라는 뜻으로 현빈(賢嬪)이라 불렸다. 그녀의 아들이 세자가 되자 아첨하는 무리들이 뇌물을 바쳤으나 이를 고발해 의금부로 잡 - P385

혀가게 하는 청렴한 처신을 보였다.
정조가 죽고 11세의 세자가 순조로 즉위했다. 대왕대비(영조 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자 수빈 박씨는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와 대비인 효의왕후를 잘 모시고 봉양하여 칭송이 끊이지 않았다. 혜경궁 홍씨는 1815년 81세 효의왕후는 1821년 69세까지 장수했다. 수빈박씨는 1822년 53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늘 절약하며 살림도 잘했다고한다. 『조선왕조실록』 순조 23년 1월 27일자 기사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子)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園, 묘소)을만들 때와 후일 별묘(別廟, 사당)를 지을 때 보태 쓰도록 하라. - P386

이런 영춘헌이었고 이런 수빈박씨였기 때문에 정조는 영춘헌에 자주머물렀다.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서 아들의 삶을 이렇게 증언했다.


선왕(정조)은 천품이 검소하시고 만년에는 더욱 검약하셔서 상시 계신 집의 짧은 처마와 좁은 방에 단청의 장식을 하지 않고 수리를 허락하지 않으셔서 숙연함이 한사(寒士)의 거처와 다름이 없었다.


정조가 영춘헌에 있으면서 쓴 시가 여러 편 있는데 그중 아주 인상적인 구절이 있다. 영춘헌 툇마루에 앉아 편안히 봄을 맞으며 쓴 시 가운데일부이다.


마루가 탁 트여 봄을 맞으니 봄이 늙지를 않는구나 - P387

답사기를 쓰기 위해 다시 한번 영춘헌을 찾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둘러보았는데 전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현판 글씨가 눈에 띄었다. 예서풍으로 또박또박 썼는데 필획에 연륜이 담겨 있지 않아 서예가의 글씨가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아주 조신하고 느낌이 있어 누가 썼을까 궁금했다. 사진을 찍어 낙관을 확인해보니 원(元), 필정묵의(筆墨意)라 읽혔다. 헌종의 도장이었다.
헌종의 묘지명」과 「행장」에서는 한결같이 전서와 예서를 잘 썼다고했지만 그의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창덕궁 병영(兵營)에 걸었던 ‘내영(內營)‘이라는 현판으로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또 한 점을 만나니 낙선재의 헌종 모습이 떠오른다. 글씨는 곧 그 사람이라는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는 말이 하나도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남아 있는 건물을 중심으로 할 때 창경궁의 내전 답사는 여기서 끝난다. 그러나 내전 위쪽엔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집필한 자경전 터가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창경궁의 이야기는 이처럼 끝없이 이어진다. - P388

창경궁 내전의 건물들을 두루 답사하고 정일재가 있었다는 넓은 암반위로 나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반듯한 언덕배기가 나온다. 여기가 정조가 즉위하면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기 위해 지은 자경전 자리다.
저 건너편 함춘원에 있는 사도세자의 경모궁이 훤히 바라보이는 곳이다.
「동궐도」를 보면 자경전은 정면 9칸, 측면 3칸의 대단히 큰 전각으로 가운데 3칸이 대청마루로 넓게 열려 있다. 자경전에서는 혜경궁 홍씨를 위한 많은 잔치가 벌어졌으나 그보다는 바로 여기가 한중록』의 집필 현장이라는 의의가 더 크다.
혜경궁 홍씨를 생각하면 한없는 동정과 존경의 마음이 일어난다. 그녀는 80여 년의 한 많은 삶을 견디고 마침내 그 모든 것을 증언한 조선 - P389

최고의 궁중문학 작품 『한중록』을 저술한 위대한 여인이었다. 남편이 뒤주에 갇혀 죽은 뒤에도 혜경궁 홍씨가 생명을 부지한 이유는 두 가지였다고 한다. 하나는 겨우 열한 살 된 아들에게 아버지 어머니를 모두 잃는아픔을 줄 수 없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아들이 왕위에 올라 아버지의한을 풀어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혜경궁은 모자 간의 정을 덮어두고 아들을 영조의 처소로 보내 할아버지와 손자의 정을 쌓도록 했다. 남편의 정신병이 부자 간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왕위에 오른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외가인 풍산홍씨 집안을 치기 시작하여 혜경궁을 더욱 놀라고 슬프게 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엽기적인 살인 방법이 외할아버지인 홍봉한의 아이디어라는 이유였다. 정조는 훗날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되어, 전날의처분을 후회하고 어머니를 더욱 효성으로 모셨다고 한다. - P391

첫번째 저술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잔치를 베풀었던 1795년(정조19년)경에 이루어졌다. 혜경궁은 ‘내가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라는 마음에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래서 이책의 최초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서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세자가 병이 없는데 영조가공연히 죽였다느니 친정아버지(홍봉한)가 뒤주를 들이게 했다느니 하며이런저런 맹랑한 말이 많으나 자신보다 더 잘 알 사람이 없을지니 "이기록을 보면 일의 시종을 분명히 알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영조께서 사도세자께 자애를 베풀지 않으시어 세자께 병환이 생겼고 (…) 병환이 만만(萬) 망극하셔 종묘와 사직이 위태로우니 끝내어쩔 수 없이 일을 당하시니라. - P392

67세(순조 1년) 때의 두번째 집필과 68세(순조 2년) 때의 세번째 집필은정조 사후 대리청정을 맡은 정순왕후에 의해 집안이 풍비박산나 동생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이 유배형을 당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비통한 심정으로 붓을 들었다. 이때의 책 제목은 ‘혈錄)‘이 되었다.
혜경궁은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네번째 집필은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가 죽은 뒤 71세 (순조 5년)에1,2,3편에서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사도세자의 병의 원인과 증세를 상세 - P392

하게 기록한 것이다. 수이렇게 쓰인 『한중록』은 역사적 사건에 대한 개인의 증언을 넘어 후세인들에게 그 당시 인물·정치·풍속·궁중문화를 생생히 전해주는 고전문학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내가 『한중록』에 감동하는 것은 저자인 혜경궁 홍씨가 시아버지에 의해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 (정순왕후 김씨)에 의해 친정이 풍비박산나는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도 엄청난 한이 서린 그 사건의 시말을 담담하게풀어갔다는 점이다.
그것은 두 가지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나는 혜경궁의 너그러운인간성이고, 또 하나는 한(恨)을 한으로 풀지 않고 인생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극복해낸 노년의 용서다. 그 점에서 한중록은 ‘한(恨)중록‘이 아니라 ‘한(閑)중록‘이 맞다고 생각한다. - P393

혜경궁 홍씨가 기거하던 자경전 터는 창경궁 답사의 끝이다. 자경전터에서 그 옛날의 창경궁을 생각하며 내전 쪽을 내려다보면 옛 모습은잃었어도 늠름한 전각들과 아름다운 나무들이 그래도 궁궐의 아름다움과 위용을 보여준다. 지금 상태도 그러하니 그 옛날 여기서 보는 창경궁의 아름다움은 어땠을까. 궁궐지」에 실려 있는 순조의 자경전 기문」에는 자경전에서 본 사계절의 아름다움이 그림같이 묘사되어 있다.
순조는 할머니인 혜경궁 홍씨를 잘 따랐다. 자신은 할머니의 지극한덕행을 돕기에 부족함이 많고 언사는 이 궁전의 아름다움을 덮기에 부족하여 조마조마 조심해서 쓰지만, 글은 성의에 있지 문자에 있지 아니하니 오직 있는 그대로 알린다면서 할머니에 대한 마음을 길게 말한 다음 자경전에서 본 창경궁의 사계절을 노래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창경궁의 아련한 정취를 생생히 감상할 수 있다. - P394

자경전에서는 궁전의 사방을 조망하는 경치가 아름답다. 봄볕은 잔잔하고 맑은 기운은 환히 비추며 돈다. 꽃은 비단 같은 정원에 어울려피고, 버들은 금 같은 못에 일제히 떨치고 있다. 앵무새는 조각한 새장에서 말을 배우고, 꾀꼬리는 좋은 가지를 택해 소리를 보내고 있다. 붉고 푸름이 서로 섞여 흩어지고 어우러지며 만송이 꽃술은 모양과 빛을 발하고 있어 실로 궁궐 정원의 번화함을 맘껏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궁전의 봄 경치다.
난초 끓인 물에 목욕하고 쑥꽃을 꽂으니 이는 궁중에서 예부터 하는 일이란다. 꽃다운 풀에 앉고 무성한 수풀을 그늘로 하니 봄꽃이 향기를 토하는 것보다 낫다. 천도복숭아가 열매를 맺으니 열매는 삼천 - P394

개라, 아름다운 나무에 매미 우니 울음소리 가득하다. 잎을 천 개의 줄기에 실으니 향기가 자욱하다. 맑디맑은연못은 또한 마치 살아 있는물 같다. 정원가에 석류꽃 나무 수십 그루를 심으니 하나하나 붉게 익었고 계단 위에 기이한 풀백여 포기를 심어두니 그릇마다 기이하고오묘하다. 삼복더위에도 더운 기운이 침범하지 않는다. 궁녀가 부채부치는 수고를 하지 않게 하고도 자연히 맑은 바람이 옷깃을 씻어준다. 이것이 궁전의 여름 경치다.
수풀 단풍이 비단처럼 펼쳐 있고 빼어난 국화가 어울려 향기를 낸다. 가을 달은 휘영청 밝게 빛나며 비추인다. 흰 이슬 버선에 스며드니넓은 정원이 낮과 같다. 빗물이 스며든 것을 모아서 맑은 기운을 띄운다. 이에 온 나라가 풍년을 노래하고 만백성이 함께 즐거워한다. 올해는 작년과 같고 내년도 올해와 같으리니 해마다 이와 같으리, 들에는배 두드리는 소리 들리고 조정에는 풍년 진상을 청한다. 이것이 궁전의 가을 경치다. - P395

궁전의 나무는 구슬을 맺어 여섯 가지 꽃이 다투어 춤추는 것을 보고, 궁궐의 비단은 선을 더하여 동짓날의 처음 돌아옴을 다투어 축하한다. 임금의 생일이 돌아오면 만세 삼창기원 소리 높이 오른다. 찬란한 빛과 상서로운 색에 관과 패물이 쟁쟁하다. 사람들은 채색 대오를이루고 조화가 경계에 넘친다. 이것이 궁전의 겨울경치다.


그런 창경궁의 아름다움을 보듬고 있던 자경전이었다. 내가 이 글을더욱 귀하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 관람객이 아니라 사용자 입장에서본 창경궁의 자랑이라는 점이다. - P395

꽃나무에서 민족성을 찾는 것은 옹졸한 생각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식물에도 장소성이라는 것이 있다. 윤중로의 벚꽃은 즐길 수 있어도 창경궁의 벚나무는 허할 수 없는 일이다.
그 대신 창경궁 관람로엔 ‘궁궐의 우리 나무‘가 즐비하다. 봄이면 하얀꽃을 솜사탕처럼 피어내는 귀룽나무도 있고,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하나로 엉켜 겉으로는 사이좋아 보이지만 속으로는 200년을 두고 싸우고 있는 연리목 아닌 연리목도 있다. 그 숲길을 걷는 것이 다른 궁궐에서는 가질 수 없는 창경궁의 큰 매력이다. - P411

일제가 창경궁에 식물원과 동물원을 만들기 기작한 것은 1907년부터였다. 강제로 폐위시킨 고종황제를 덕수궁에 남게 하고 이어 즉위한 순종황제를 창덕궁에 기거하게 하면서 순종황제를 위로한다는 구실로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개원을 앞두고 일제는 일본의 우에노(上野) 동물원에서 일본인 사육사20명을 극비리에 교육시켰다. 조선인을 고용하면 맹수들을 풀어 사회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는 생각에 일본인만 채용했다.
일제는 1차로 창경궁의 행각, 궁장, 궁문을 헐고 이를 경매에 붙였다(이중 몇 채가 지금도 개인 저택으로 남아 있다). 순종은 이를 애석해했지만 소용없는일이었다. 2차로 춘당대 북쪽에 식물원 터를 잡고 내농포에 연못을 파춘당지를 만들었다. 3차 공사로 보루각 자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위치한궐내각사를 모두 헐고 종묘와 인접한 넓은마당까지 동물원을 세웠다.
1909년 초부터는 전국에 산재해 있는 각종 동물들을 수집하고 방방곡곡의 진귀한 식물들을 채집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우리나라에 서식하지않는 코끼리·사자.호랑이·곰· 원숭이 공작 등의 동물들과 파초·고무나 - P411

무·바나나 등 고가의 열대식물들까지 수입해 전시했다. 당시 창경궁은17 만평 규모를 자랑하는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었다.
1909년 11월 1일 아침 10시, 개원식이 열렸다. 순종은 연미복 차림에모닝코트(morning coat)를 걸치고 회색 중절모를 쓴 개화된 예복을 입고 참석했고, 문무백관과 외국 사신을 비롯하여 무려 1천 명에 달하는축하객들이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개원을 총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자리에 없었다. 닷새 전인 10월 26일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었기 때문이다. - P412

순종황제가 창경원의 동물원과 식물원을 공개하여 온 백성들이 구경할 수 있도록 하라는 명을 내렸으나 노대신들이 한사코 반대했다. 그럼에도 순종황제는 뜻을 굽히지 않고 마침내 일반에게 공개했다. 한국동물원 80년사』(서울특별시 1993)에 따르면, 개원 첫해 동물원의 식구는 "반달곰 2마리 · 호랑이 1마리 · 집토끼 18 마리 · 진돗개 1마리 · 제주말 2마리 ·고라니 • 노루 10마리.." 등 총 72종 361 마리였다.
입장료는 어른 10전, 어린이 5전이었다. 그렇게 창경궁은 창경원으로바뀌었고, 마땅한 위락시설이 없던 시절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즐겨 찾는 대공원이 되었다. 창경원은 하루 2~3만 명이 입장할 만큼 나들이 장소로 큰 인기를 얻었다.
1911년 일제는 자경전 터에 2층 규모의 이왕가박물관 건물을 세우고창경궁의 명칭을 창경원으로 바꾸어 격하했으며, 1912년에는 창경궁과 종묘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절단하고 도로를 내어 주변 환경을 파괴했다. 1922년에는 이곳에 벚나무 수천 그루를 심어 숲을 만드는가 하면 - P412

1924년부터 밤 벚꽃놀이를 열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들어서면서 창경원 동물들은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됐다. 패전을 앞둔 1945년 7월 25일, 창경원 동물원 회계과장은전 직원을 모아놓고 도쿄로부터 지령이 떨어졌다며 "미군이 창경원을폭격하면 맹수가 우리에서 뛰쳐나올 수 있으니 사람을 해칠 만한 동물을 모두 죽이라"면서 "동물들의 먹이에 몰래 넣어두라"며 극악을 나눠줬다. 코끼리·사자·호랑이·뱀· 악어 21종 38마리가 그렇게 독살됐다. 동물들이 죽던 날 밤, 창경원에는 맹수들의 스산한 울부짖음이 밤새도록 가득했고 동물원 직원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한다.
해방이 되고 창경원은 다시 재정비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창경원 동물들이 겪은 수난은 더욱 극심했다. 1·4후퇴 때에는 창경원 직원들도 피난을 떠났다. 돌아와서 보니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은 한마리도 없었다. 부엉이·여우·너구리 삶 따위는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고, 낙타・사슴·얼룩말들은 도살당해 먹을거리가 없던 피난민들의 식량이 됐다. - P413

전쟁이 끝나고 1954년에 동식물원재건위원회가 창립되어 정부기관과 기업체, 독지가들로부터 동물원 재건 기금으로 42만2천달러를 모았다. 이 기금으로 1955년에 호랑이·백곰·물개·하마. 낙타 등 10여 종을네덜란드, 미국, 태국 등에서 수입해 다시 동물원다운 동물원의 면모를갖추기 시작했다.
사자는 한국은행이 사주었고, 코끼리는 이병철 당시 제일제당 사장이기증했다. 식물원도 야자수 외에 107종의 관상식물을 기증받았다. 이리하여 창경원 재건 2년 만에 100종 500마리를 헤아리는 동물원이 되었다. 다시 관람객들이 모여들었고, 서울의 초등학교들도 봄가을 소풍 때단골로 창경원에 갔다. 1950~60년대 서울의 최고가는 유원지이자 연인들의 행락지는 단연코 창경원이었다. - P413

1977년 마침내 창경원 동물원의 과천 이전 계획이 수립되어 1983년12월 31일자로 공개 관람이 폐지되고 명칭도 창경궁으로 회복되었다.
1984년 5월 1일 서울대공원 동물원이 개장했고, 창경궁은 동물원과 식물원 관련 시설과 일본식 건물을 철거하고 명정전에서 명정문 사이 좌우 회랑과 문정전을 옛 모습대로 회복하여 1986년 8월23일 일반에 공개했다. 이것이 창경원 74년의 역사다.
내가 창경궁 답사기를 쓰면서 창경원 시절까지 언급한 것은 그것도역사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또래에게는 창경원이 지워지지 않는 추억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창경원에 여러번 갔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창경원으로 소풍을 갔고, 아버지 손잡고 가서 놀이기구를 탄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어린 시절 즐거운 한때로추억에 남아 있다. - P414

나이가 제법 들고 보니 동물을 보던 그때의 시각과 지금의 시각은 너무도 다르다. 어려서는 인간과 다른 모습에 대한 호기심으로 동물원을찾았다. 그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또 예전에는 인간성을 강조해서 말할때 인간은 동물과 달리 문명을 창조한다는 것을 내세웠다.
그러나 요즘 나는 ‘내셔널지오그래피‘에서 방영하는 「동물의 세계」를보면서 인간과 동물의 같은 점을 보게 된다. 존 버거는 다는 것의 의미』(About Looking)의 첫장 왜 동물을 보는가?」에서 인간이 동물원을만든 것이 자연 속에서 동물과 만났던 관계를 단절하는 신호탄이 되었다고 했다.
「동물의 세계」를 즐겨 보면서 나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기고만장하지만 결국 동물의 한 종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텔레비전에서 원 - P414

숭이 편을 만들듯이 원숭이들이 인간 편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생각도해보고 동물원이 아니라 대자연 속 동물의 생태에서 인간이라는 동물의원형질을 유추해보기도 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어떤 동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릴 때 가장 먼저떠오르는 모습은 텔레비전의 영상에서 본 것도 아니고 그림으로 본 것도 아닌 어린 시절 동물원에서 본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야 실체감이있다.
그래서인지 창경궁에 오면 나도 모르게 어릴 적 기억이 자꾸 되살아난다. 그 점에서 창경원을 경험했던 구세대와 그렇지 않은 신세대는 창경궁 답사에 임하는 출발점부터 다를 수밖에 없다. 내가 창경궁 답사의마지막을 창경원 이야기로 마무리한 것은 이 때문이다. 신세대들이 구세대의 이런 독백을 과연 이해해줄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 P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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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눈이 밝지 않은 분이라도 여기서 바라보면 한옥의 다양한 아름다움과 멋을 한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임금이 정무를 보는 선정전은 엄숙하고, 손님을 맞이하는 희정당은 우아하면서도 화려하고, 왕세자의 공간인 성정각은 밝고 안온해 보인다. 전통 한옥의 모든 것이 집약적으로 드러난다.
한옥의 멋은 역시 지붕선에 있다. 백회를 두른 용마루의 지붕선들이직선으로 겹겹이 뻗어나가고 팔작지붕의 삼각형 합각들이 가벼운 곡선을 그리며 정면을 향해 고개를 내밀고 있다. 지붕 너머로 대조전을 비롯한 안쪽 건물들의 지붕선이 드러나 은연중 궁궐의 깊이와 넓이를 암시하며 붉은 주칠의 벽채와 초록색 덧문이 어우러진다. 여염집에서는 볼수 없는 왕가의 품위가 잘도 느껴진다.
우리 한옥이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다는 것이 너무도 즐겁다.
그래서인지 이 공간은 창덕궁을 대표하는 장소로 가장 많이 소개되며사실상 내전의 파사드(façade, 정면관)로 인식되고 있다. - P136

태조가 경연청을 설치한 이래 역대 왕들은 반드시 경연에 참여해야 했다. 세종은 즉위한 뒤 약 20년 동안 매일경연에 참석했고, 성종은 재위25년 동안 매일 아침, 낮, 저녁으로 하루 세 번씩 경연에 참석했다고 한다. 물론 반대도 있다. 세조는 집현전 학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잠시 경연을 중단한 바 있고, 연산군은 공부하기 싫어서 이를 폐지하기도 했다.
경연의 기본 교재는 유교의 경전인 사서와 오경, 그리고 중국 역사책인 ‘자치통감』이었다. 보조 교재로는 주자를 비롯한 송대 유학자들의 학설을 정리한 ‘성리대전(性理大全)』, 당태종의 뛰어난 정치술이 기록된『정관정요(貞觀政要)』, 조선 역대 임금의 치적을 모은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을 사용했다. - P143

결국 경연은 매일 이루어지는 국정 세미나인 셈이었다. 대신들은 이를 통하여 왕권를 제어하기도 했고 왕이 대신들을 몰아붙이기도 했다.
실제로 학문에 뛰어났던 영조와 정조는 경연을 탕평책 등 개혁정책을추진하는 계기로 삼았다. 경연은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그런 점에서 경연은 조선왕조를 500년 이상 이끌어간 힘이었다. 업무에 시달리는 도승지를 보고 거지가 불쌍하다고 했다는 옛이야기가 있는데, 임금의 삶이야말로 개인 생활 없이 주어진 일정과 틀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던 피곤한 인생이었다. - P144

화계에는 앵두나무·진달래.철쭉·미선나무·목단 같은 키 작은 나무들과 금낭화·옥잠화·작약·국화·수·원추리. 무릇 같은 풀꽃이 꽃밭을 꾸민다. 곳곳에 기이한 형상의 괴석을 배치하여 단조로움을 피했다. 괴석은 일종의 추상조각인 셈인데, 구체적 형상을 갖지 않고 거기 있다는 사실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런 것을 현대미술에서는 오브제라고 하는데옛사람들은 이처럼 오브제 개념을 이미 꽃밭에 구현했다.
화계는 우리나라 건축과 조원(造園)의 독특한 형식이자 큰 자랑이다.
산자락을 등지고 집을 앉히다보면 건물 뒤쪽은 자연히 비탈로 남는데,
여기에 꽃계단을 만들어 사태도 막고 꽃밭도 가꾼 슬기롭고도 자연스러운 정원 형식이다. 평지에 집을 지으면 일부러 만들기 전에는 화계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중국과 일본의 조원엔 화계라는 개념이 없다.  - P174

경복궁은 평지에 세운 건축물인지라 화계를 만들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경회루 연못을 만들면서 퍼낸 흙으로 왕비의 공간인 교태전 뒤란에 가산(山)을 만들고 이곳에 아기자기한 아미산 화계를 만들었다.
문화재청장 시절 나는 이 화계를 전통적이고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조경 전문가들에게 자문도 받고 직접 관련 자료를 찾아보기도 했지만속 시원한 답은 얻지 못했다. 기록도 없고 사진도 없어서 상식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담양 소쇄원 화계에는 매화가 심겨 있고, 낙선재 입구의 화계는 다복솔로 이루어져 있는 걸 보면 일정한규칙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금도 창덕궁 관리소에서는 이런저런 예쁜 야생초들을 시험적으로 심고 가꾼다. 마치 풀꽃과 꽃나무로 하는 대지미술 같아서 정말로 힘든 것이 꽃밭 설계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물론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는 못하지만 화계라는 형식 자체가 워낙 강한 메시지를 주기 때문에언제라도 대조전 화계를 지나면 이 공간이 주는 상쾌함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 P175

장락문 앞에서 보면 사랑채 누마루의 팔작지붕이 활개를 펴듯 시원스레 뻗어 있고 그 너머로 평원(平遠樓) 육각정자가 높직이 솟아 낙선재 뒤뜰이 높고 깊음을 암시한다.
낙선재는 모양새로 보나 규모로 보나 문기(文氣) 있는 선비라면 누구나 갖고 싶어할 만한 사랑스런 집이다. 앞마당이 널찍하고, 장대석을5단으로 쌓은 석축 위에 건물이 높이 올라앉아 있으며, 3단의 돌계단이대청을 향해 양쪽으로 나 있다. 또 그 사이에 노둣돌이 있기 때문에 궁궐의 사랑채다운 기품이 있다. 본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몸채 가운데2칸이 마루이고 동쪽엔 온돌방 2칸과 다락 1칸, 서쪽 1칸은 누마루로 나있다.
낙선재 건물은 디테일 하나하나가 대단히 세련된 감각을 보여준다. - P195

낙선재 동쪽에는 ‘보소당(寶蘇堂)‘이라는 아주 예쁜 현판이 있는데 이는 ‘소동파를 보배롭게 생각하는 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옹방강의 당호였지만 헌종이 이를 자신의 집에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 글씨는 전형적인 추사체의 멋을 보여주는데 낙관이 없지만 나는 이것을 헌종의 글씨로 보고 있다.
헌종은 이처럼 추사 김정희를 사모하여 추사 주위의 문인들과 자주교류하면서 그의 예술세계를 따르려고 했다. 사실상 헌종은 ‘추사 일파‘
의 한 문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P198

헌종은 교양이 넘치는 군주였다. 헌종은 아버지 효명세자와 마찬가지로 문예 활동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승화루에서 책과 서화를 즐겼고 특히 예서를 잘 썼다. 헌종의 문예 취미는 그의 인장을 모은 ‘보소당인존장 컬렉션을 인출하여 인보(印)로 엮은 것인데 여기에 실린 인장의 숫자가 500과가 넘는다. - P198

창덕궁이 아름다운 궁궐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후원 덕분이다.
창덕궁 후원은 10만 평에 이르는 산자락의 골짜기를 그대로 정원으로삼고 계곡 곳곳에 건물과 정자를 지어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는 환상적인 정원을 경영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 나아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수 없는 한국 정원의 미학이다.
세계 각국의 역대 왕들은 궁궐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별궁과 별장을 따로 지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에서는 만약을 대비한 이궁(離宮), 임시 거처인 행궁行宮)은 있었어도 임금만을 위한 별장을 따로경영하지는 않았다. 이런 예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 P215

얼마 안 가 언덕마루에 오르면 길은 오른쪽으로 한 굽이 틀면서 더욱깊은 숲속으로 인도하는데 내리막길에 이르면 해묵은 느티나무 너머로홀연히 부용지와 그 너머의 장중한 규장각 2층 건물, 석축 위에 편안히올라앉은 영화당 건물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러면 절로 걸음을 멈추고망연히 사위를 바라보게 된다.
네모난 연못 가운데 섬에는 잘생긴 소나무가 주인인 양 넓게 자리잡고 있고 동서남북 사방으로 영화당, 부용정, 규장각, 사정기비각 네 채의건물이 제각기 이 정원에서 자기 몫을 하면서 의젓이 자리하고 있다. 규모도 다르고 형태도 다르고 연못에 임해 있는 방식도 다르다.
화려한 부용정은 두 다리를 물속에 담근 자세이고, 사정기비각은 멀찍이 산자락에 바짝 붙어 있다. 규장각 주합루 중층 누각은 언덕 위에 높이 올라앉아 이 공간의 주인이 되고, 영화당은 후원으로 들어오는 손님을 맞이하는 대청마루 집으로 환하게 열려 있다. 그 절묘한 배치가 부용지의 경관을 아름답고 풍부하게 만든다.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없어서는 안될것 같은, 공간상의 자기 지분이 있다.
여기에 처음 온 사람은 누구든 "세상에 이런 곳이라는 감탄을 절로발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개 이런 감탄사를 속으로 감추지만서양의 박물관 큐레이터들을 안내해보면 한결같이 "Oh, My God!"이라소리치고는 사람마다 ‘Fantastic‘, ‘Incredible‘, ‘Unbelievable‘ 셋 중 한마디를 되뇌곤 한다. - P224

우리나라 정원에서 건물은 마치 자연이라는 거실에 배치된 가구 같아서 건물이 있음으로 해서 경관이 생기고 건물의 크고 작음에 따라 다양한 표정이 만들어진다.
부용지를 거실이라고 치면 연못은 폭넓은 화문석(花) 같고, 규장각주합루는 듬직한 반닫이와 기품 있는 의걸이장 같고, 부용정 정자는 화려한 화초장(花草 같고, 영화당은 단아한 서안(案) 같고, 비각은 곱상한 연상(床) 같다.
프랑스 건축가 로랑 살로몽이 한국의 건축은 "인위적으로 세운 것이아니라 자연 위에 그냥 얹혀 있는 느낌"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을말한 것이다. - P230

정사를 맡게 된 효명세자는 부조리한 현실을 적극 개선하려고 노력했다. 50여 차례의 과거를 실시해 전국의 인재들을 끌어모았고, 장인 조만영과 그의 동생 조인영 등을 중용해 안동 김씨 세력을 견제했다. 추사김정희 부자와 권돈인 등 반(反) 안동 김씨 세력이 세자를 굳건하게 보좌했다.
그러나 순조 30년(1830) 윤4월 22일 밤, 잦은 기침을 하던 세자가 갑자기피를 토했다. 약원에서 처방을 해도 효험이 없자 다산 정약용까지 불러들였다. 다산이 급히 입궐해 세자의 증세를 살폈는데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결국 5월 6일 새벽, 희정당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22세였다.
세자의 부음을 들은 박규수는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호인 환재에서 굳셀 환(桓) 자를 입을 다문다는 뜻의 재갈환) 자로 바꾸고20년 가까이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효명세자의 요절은 왕조의 큰 불운이었다. 조선왕조의 운세는 그렇게 기울어가고 있었다. - P273

나라의 다스림은 주나라의 융성과 비교될 만하고 책을 얻음은 한나라와 비길 만하니 나에게는 크고 넓은 집이 되리다. 듣자하니 글은 도리를 실은 그릇이라 했다. 중국 50국의 보배로운 책을 다 갖추었고, 조선왕조 21대(태조부터 정조까지의 전사(史)를 갖추었는데, 홍문관에비장된 것이 이미 오래이니 어찌 다섯 수레만 될 것이며, 규장각의 창건이 새로우니 마침내 경사자집(經史子集, 중국의 옛 서적 가운데 경서(經書)·사서(史書)·제자문집(文集)의 네 부류를 아울러 이르는 말) 사부(四部)의 책이 다 모이게 되었다.
이에 「고공기」를 상고하여 서옥(屋)을 짓는데, 널따란 동쪽 누대와 서쪽 마루의 제도를 갖추고 서재에는 여덟 창을 활짝 열었다. 상림원(후원)의 풍광을 독차지했고 춘당대의 물색도 넘보는구나. 아름다운공사는 준공에 박차를 더하기에 긴 들보 올림에 즈음해 짧은 노래 아뢰노라. - P274

어기어차동쪽 들보를 올리나니
아침 알현 끝나자마자 책 읽는 소리
멀리 향기로운 안개 속에 나는구나
어기어차서쪽 들보를 올리나니
우리나라 문운이 열림을 알려거든
오성(五星)이 밝은 곳에서 규성(星)을 보려무나
어기어차 남쪽 들보를 올리나니
목멱산(남산)에 봄이 깊어 푸른 아지랑이 노을이 피어난다
어기어차 북쪽 들보를 올리나니
삼각산 날씨 차가운데 눈빛이 높다랗다
어기어차 위쪽 들보를 올리나니 - P274

해와달같이 밝으니 우주가 밝구나
어기어차 아래쪽 들보를 올리나니
초목은 소생하고 간류(澗流)는 흐르는구나
구중궁궐을 향해 영원키를 비나니
만수무강하시고 참된 복을 내리소서


이것이 18세의 효명세자가 쓴 글이라니 놀라울 뿐이다. 효명세자는훗날 그의 아들 헌종에 의해 익종(宗)이라는 시호를 얻는다. 이후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고종은 5대조까지의 시호를 모두 조(祖)로 모셨다.
그 계보가 익종, 순조, 정조, 영조까지 이어져 영종, 정종이 영조, 정조가되었고 익종은 다시 문조(祖)라는 시호를 얻었다. 문조의 정식 명칭은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이름인데, 아마도 처음 두 글자와 마지막 다섯 글자만 눈에 들어올 것이다. 이 이름 속에는 효명세자의 공덕이 쭉 나열되어 있으며, 읽으려면 4 자씩 끊어 읽으면 된다. - P275

창덕궁 후원의 관람 동선은 이 두 길의 아름다움과 길을 걷는 즐거움까지 고려한 결과물이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지 않고 후원을 한 바퀴 돌아 나온 듯한 기분을 주면서 두 길을 모두 걸을 수 있는 방안을 고려한것이 현재의 관람코스다.
먼저 부용정과 규장각을 본 다음 애련정과 의두합을 보고, 연경당 대신 관람정과 존덕정 영역부터 보고 나서 고개 너머 후원의 마지막 골짜기인 옥류천까지 다녀온 다음, 산길로 내려와 맨마지막에 연경당을 보고 돌계단 길을 통해 규장각 윗길을 거쳐 출구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후원 답사기를 쓰면서 의두합 다음에 연경당을 해설한 것은 효명세자의 이야기가 그렇게 연결되었기 때문이고, 이제 나는 다시 관람코스를 따라 존덕정 영역으로 향한다. - P292

본채의 창방 아래로는 빗살무늬와 꽃무늬교창이 번갈아 설치되어 궁궐의 정자다운 멋이 살아난다. 몸체의 툇간 모서리마다 가는 기둥을 3개씩 세워 마치 24개의 기둥이 지붕을 받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여느 정자와 다른 복잡한 구조에 기둥의 굵기 차이와 배열의 정연함이 엇갈리면서 예사로운 정자가 아님이 확연히 드러난다.
천장의 짜임 또한 육각-사각-육각으로 바뀌는 변화가 있고 마름모꼴 반자로 둘러싸인 정가운데의 육각 평면에는 왕을 상징하는 청룡과황룡을 화려하게 그려넣어 이것이 임금의 건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뒤에서 보면 존덕정은 연못에 두 다리를 담그고 있는 모습이다. 원래는 반달 모양의 연못과 네모진 연못으로 나뉘어 있던 것이 어느 때인가합쳐져 하나가 되었다. 관람지로 흘러내리는 물길 위에는 화강암을 다듬어 둥글게 홍예를 튼 예쁜 다리 하나가 놓여 있고, 다리 이쪽과 저쪽에는몇 점의 석물이 놓여 있는데, 높은 것은 해시계를 받쳤던 일영대(日影臺)라고 하고, 낮은 팔각 석물에는 괴석이 얹혀 있다. - P298

이처럼 아름답고 당당하고 기품있는 정자이기 때문에 인조때 세워진이래로 숙종, 영조, 정조, 순종까지 많은 임금이 존덕정에 와서 시와 문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정조가 지은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自序)」라는 장문의 글이 잔글씨로 새겨져 있어 이 정자의 역사적 주인공이 되었다. ‘만천명월주인옹‘이란 ‘만 개의 냇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
이라는 뜻이고, 정조 자신이 직접 썼다는 의미에서 자서라고 한 것이다.
재위 22년(1798) 정조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47세 때 쓴 이 글은 - P298

제목만 보면 군주의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위상을 강조한 글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글 내용을 보면 자신이 만천명의 주인인 근거와 그렇기 때문에 임금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논리 정연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피력해 놓았다.
이 글은 대문장가이기도 했던 정조의 글 중에서도 명문으로 꼽힌다.
얼마나 잘 썼기에 명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는지, 또 정조가 통치 철학을세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궁금해서라도 한번 읽어볼 만하다. 엄청난장문이고 고전의 인용이 많아 주석 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글인지라 많은 것을 생략하고 정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의 요체만 압축해 옮겨본다.
그래도 긴 글이니 긴장하고 끝까지 읽어주기 바란다.


나는 물과 달을 보고서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우친 바 있다. - P299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숫자는 1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되므로 시냇물이 1만 개면 달 역시 1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달은 물론 하나뿐이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보았는데 아침에 들어왔다가 저녁에 나가고무리 지어 쫓아다니며 가는 것인지 오는 것인지 모르는 자도 있었다.
모양이 얼굴빛과 다르고 눈이 마음과 다른 자가 있는가 하면 트인 자,
막힌 자, 강한 자, 유한 자, 바보같이 어리석은 자, 소견이 좁고 얕은자, 용감한 자, 겁이 많은 자, 현명한 자, 교활한 자, 뜻만 높고 실행이따르지 않는 자,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
모난 자, 원만한 자, 활달한 자,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 말을 아끼는자, 말재주를 부리는 자, 엄하고 드센 자,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 명예를 좋아하는 자, 실속에만 주력하는자등등 그 유형을 나누자면 천 가지백 가지일 것이다. - P300

내가 처음에는 그들 모두를 내 마음으로 미루어도 보고 일부러 믿어도 보고, 또 그의 재능을 시험해보기도 하고 일을 맡겨 단련도 시켜보고, 혹은 흥기시키고 혹은 진작시키고 규제하여 바르게도 하고, 굽은 자는 교정하여 바로잡고 곧게 하면서 그 숱한 과정에 피곤함을 느껴온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근래 와서 다행히도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를 깨닫게 되었고 또 사 - P300

람은 각자 생김새대로 이용해야 한다는 이치도 터득했다. 그리하여대들보감은 대들보로 기둥감은 기둥으로 쓰고, 오리는 오리대로 학은학대로 살게 하여 그 천태만상을 나는 그에 맞추어 필요한 데 쓴 것이다. 그의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고,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숨겨주며,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며, 규모가큰 자는 진출시키고 협소한 자는 포용하고 재주보다는 뜻을 더 중히여겨 양쪽 끝을 잡고 거기에서 가운데를 택했다. - P301

트인 자를 대할 때는 규모가 크면서도 주밀한 방법을 이용하고 막한 자는 여유를 두고 너그럽게 대하며, 강한 자는 유하게 유한 자는 강하게 대하고, 바보 같은 자는 밝게 어리석은 자는 조리 있게 대하며,
소견이 좁은 자는 넓게 얕은 자는 깊게 대한다. 용감한 자에게는 방패와 도끼를 쓰고 겁이 많은 자에게는 창과 갑옷을 쓰며, 총명한 자는 차분하게 교활한 자는 강직하게 대하는 것이다.
술에 취하게 하는 것은 뜻만 높고 실행이 따르지 않는 자를 대하는방법이고, 희석하지 않은 순주(酒)를 마시게 하는 것은 생각은 부족하나 고집스럽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자를 대하는 방법이며, 모난 자는 둥글게 원만한 자는 모나게 대하고, 활달한 자에게는 나의 깊이 있는 면을 보여주고 대범하고 무게가 있는 자에게는 나의 온화한 면을보여준다. 말을 아끼는 자는 실천에 더욱 노력하도록 하고 말재주를부리는 자는 되도록 종적을 드러내지 않도록 하며, 엄하고 드센 자는산과 못처럼 포용성 있게 제어하고 멀리 밖으로만 도는 자는 포근하게 감싸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는 내실을 기하도록 권하고 실속만 - P301

차리는 자는 달관하도록 면려하는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성인을 배우는 일이다. 비유하자면 달이 물속에있어도 하늘에 있는 달은 그대로 밝은 것과 같다. 달은 각기 그 형태에따라 비춰줄 뿐이다. 물이 흐르면 달도 함께 흐르고 물이 멎으면 달도함께 멎고, 물이 거슬러 올라가면 달도 함께 거슬러 올라가고 물이 소용돌이치면 달도 함께 소용돌이친다. 거기에서 나는 물이 세상 사람들이라면 달이 비춰 그 상태를 나타내는 것은 사람들 각자의 얼굴이고 달은 태극인데 그 태극은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았다. 이것이 바로 옛 - P302

사람이 만천(川)의 밝은 달에 태극의 신비한 작용을 비유하여 말한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내가 머무는 처소에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 써서 나의호로 삼기로 한 것이다. 때는 무오년(1798) 12월 3일이다.


과연 통치자로서 정조의 철학이 밝게 드러나는 천하의 명문이다. 정조는 이처럼 만 가지를 생각하고 만 가지 고민을 하면서 지냈다. 그것이나라를 통치하는 분의 마음이고 자세였다. 글을 읽다보면 인간의 심성을그처럼 섬세하게 읽고 있다는 것이 놀랍고 무섭다.
정조는 실제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를 도장에 새겨 여러 작품에 찍었다. 또 수십 명의 신하들에게 이 글을 써오게 하여 자신의 방에붙여놓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면서 대신들이 점을 찍고 획을 그은 것을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와 기상을 상상할 수 있어 그 또한 만천명월 같았다고 했다. - P303

2004년 11월, 어느 날 노무현 대통령이 창덕궁을 찾아와 나와 함께 규장각을 둘러보고 존덕정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노 대통령은 규장각을 둘러본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세운 뜻을 알겠네요. 요즘 내가 위원회를 많이 만든다고 언론에서 위원회 공화국이라고 비꼬는데, 정조는 죽을 때까지 통치하니까 규장각을 세웠지만 나는 5년 임기인데 위원회도 안 만들면 어디서 혁신적인 방책을 내놓겠습니까? 혁신에 대해 청장님은 학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304

참여정부의 모토는 혁신이었다. 개혁도 아니고 혁신이었다. 혁신도시도 그런 기조에서 만든 이름이었고, 인사과도 혁신인사과라고 바꿔 불렀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혁신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개혁을 하면 손해 보는 집단이생겨서 금방 반발에 부딪칩니다. 무를 갖고 동치미 담그는 것이 아니라깍두기를 씻어서 동치미를 담그는 것과 비슷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동치미도 안 되고 깍두기만 버리는 일이 생길까 그게 좀 염려스럽습니다. 그래서 저는 혁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수동적인 관리에 능동적인 큐레이터십을 더하는 문화재 행정을 정책 방향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내가 바라는 혁신이죠. 문화재청장은 그런 식으로 문화재를 적극 활용하면서 관리하면 되겠습니다. 다만 정무위원의 한사람으로서 참여정부 국정 철학의 기조에 대해서도 아실 필요가 있습니다." - P304

그러고는 자세를 고쳐앉아 이렇게 힘주어 말했다.


"저는 특권과 반칙이 없는 사회 만들기를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임기 동안 해낼 네 가지 과제를 세웠습니다. 첫째는 정경유착 근절입니다. 난 재벌들에게 돈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둘째는 지방분권입니다.
지방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셋째는 영호남 갈등 해소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야당에 뭐든 양보할 생각입니다. 여기까지는 내 의지대로 하면 되는데 넷째가 어렵습니다. 권력기관 힘을 빼는 겁니다. 이게 잘 안됩니다."


이때 나는 평소 남들과 대화할 때처럼 의문스러운 부분을 즉시 물었다.


"어디까지가 권력기관입니까?" - P306

윗분이 말씀하시는데 말을 끊는 것은 예가 아니었지만 노 대통령은나를 불경하게 생각하지 않고 지체 없이 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국정원, 검찰청, 경찰청, 국세청, 그리고 언론기관입니다. 쉽게 말해서전화와서 받았는데 기분 나쁘면 다 권력기관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렇게 감성적이고 솔직 담백한 분이셨다. 그뒤로도
‘언론개혁은 언론이 각을 세우고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힘들고, 따로 공수처(고위공직자비리 특별 수사처)를 만들려고 하면 검찰의 반발이 만만치 않아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참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노 대통령은 깍두기를 씻어 동치미를 담그는 도중 임기가 - P306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세상을 일찍 떠나고 말았다는 생각이든다. 정조가 그러했듯이. - P307

길을 따라 내려오다 금호문 못미처에 다다르면 천연기념물 제194호로 지정된 향나무 한그루와 만나게 된다. 1404년 태종이 창덕궁 창건을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것을 심었다고 치면 수령이 700년 가까이 된다. 높이는 6미터,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 4.3미터다. 동서남북으로 가지가 뻗어나갔는데 남쪽 가지는 이미 잘려나갔고 북쪽 가지는 죽었는데동쪽 가지만은 온갖 풍상 속에서도 용틀임을 하며 꿋꿋이 살아남아 주인 잃은 창덕궁을 홀로 지키고 있다. 이 향나무가 그 옛날의 창덕궁을 중언하는 유일한 증인인 셈이다.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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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출간 소식은 언제나 설레임이다. 서울편 답사기 3, 4권이 나왔다. 책을 받아놓고 펴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면서 서울편 1권을 다시 시작한다.

  나는 서울을 모른다. 서울에 살아본 적도 없고 머물러본 적도 없다. 스치듯 잠깐씩 찾아간 곳도 횟수도 기억할만큼 정도이다. 수도권에 사십 년 넘게 살면서도 그 지경이다. 하여 내게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 서울을 달리 보게되었다. 서울이 궁금하고 찾아가고 싶어졌다. 보고 싶다. 특히 종묘.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 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 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p54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가 돌고 돌아 바야흐로 서울로 들어왔다. 내가 어릴 때 단성사, 명보극장 같은 개봉관에 새 영화가 들어올 때면 ‘개봉박두(開頭)‘와 함께 ‘걸기대(乞期待)‘라는 말이 늘 붙어 다니곤 했는데혹시 나의 독자들이 ‘답사기의 한양 입성‘을 그런 기분으로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곳도 아닌 서울이니까.
서울은 누구나 다 잘 아는 곳이다. 굳이 내 답사기가 아니라도 이미 많은 전문적·대중적 저서들이 넘칠 정도로 나와 있다. 그래도 내가 서울답사기를 쓰고 싶었던 것은 서울을 쓰지 않고는 우리나라 문화유산답사기를 썼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자존심이자 세계 굴지의 고도(古都)중 하나다. 한성백제 500년은 별도로 친다 해도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도시이면서 근현대 100여 년이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수도이다.
대한민국에서 서울의 위상이 너무 커서 ‘서울공화국‘이라는 말까지생겨났다. 한편 서울은 최고와 최하가 공존하는 도시이고 그만큼 모 - P4

격차가 많은 도시다. 이것을 하나로 묶어 동질감을 갖게 할 수 있는 것은역시 문화유산이다. 서울 시내엔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이 있다. 이는 누구의 것도 아닌 서울 사람의 것이고 대한민국 국민의 것이며 나아가서 외국인 관광객들 모두가 즐기는 세계유산이다.
또 서울은 다름 아닌 내 고향이다. 서울 사람으로 태어나 서울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간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늘 있어왔다. 특히 내가 느끼는 인사동, 북촌, 서촌, 자문밖, 성북동은 지금 젊은이들이 보고즐기는 것과 너무도 차이가 많아 그 구구한 내력을 알려주고 싶었다. 그것은 훗날 현대 생활문화사의 한 증언일 수 있다는 약간의 의무감 같은것도 있었다. - P5

강진과 해남 땅끝에서 시작한지 햇수로 25년 만에 한양으로 입성하자니 감회가 없지 않다. 내가 답사기를 처음 쓸 때는 시리즈의 완간이라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러다 한 권, 두 권, 권수가 쌓여가고, 10년,
20년, 해를 더해가면서 국내편 8권에 일본편 4권이 나오게 되자 나도 모르게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최종 형태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아직 가보지 않았다거나 자료가 부족하여 쓰지 못할 곳은하나도 없다. 다만 그간의 내 인생이 ‘답사기‘에만 매달려 사는 것이 아니었던지라 주어진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점점 글 쓰는 것이 힘들어지면서 답사기의 마감도 의식하기 시작했다. - P7

그리고 나의 고참 독자들께 각별히 감사드리고 싶다. 새 독자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야 모든 저자가 갖고 있는 꿈이지만, 답사기가 나오기를기다리는 오랜 독자들이 있기 때문에 정년이라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답사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답사기를 쓰면서 나는 항시 옛 친구 같은 독자들과 함께 가고있다는 마음을 갖고 있다. 답사기를 섬세하게 잘 읽으면 문체 자체에 그런 뜻이 들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는 안 하든 나는 그런 마음으로 답사기를 썼다. 그 점에서 독자 여러분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공저자이기도 하다.
내가 삶의 충고로 받아들이는 격언의 하나는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인의 진득한 마음자세이다. 어쩌면그렇게 독자들과 함께 가고자 했기 때문에 답사기가 장수하면서 이렇게멀리 가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계속 그렇게 갈 것이다.

2017년 8월
유홍준 - P9

조선왕조의 상징적 문화유산인간이 자연계의 어떤 동물과도 다른 점은 자연을 개조하며 살아가면서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는 정신문화와 물질문화 두 가지가 있는데 정신문화는 무형유산으로 전하고, 물질문화는 유형유산으로 남는다.
조선왕조 500년이 남긴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종묘(宗廟)와 거기에서 행해지는 종묘제례(宗廟祭禮)는 유형, 무형 모두에서 왕조문화를 대표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모든 것을 다 말해주지는 않지만 종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1995)된 유형유산 중하나이고, 종묘제례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 무형유산에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이는 종묘가 조선왕조의 대표적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인류 - P15

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유네스코의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도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위대한 문화유산임을 확인해준 셈이다.
종묘는 조선왕조 역대 제왕과 왕비들의 혼을 모신 사당이다. 궁궐이삶을 영위하는 공간이라면 종묘는 죽음의 공간이자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일종의 신전이다. 세계 모든 민족은 제각기 어떤 형태로든 고유한 신전을 갖고 있고 그 신전들은 한결같이 성스러움의 건축적 표현이었다.
고대와 중세를 거치면서 동양에서는 불교의 사찰, 서양에서는 기독교의교회당이 1천 년 이상 신전의 지위를 대신했지만 그 이전과 이후에도 여전히 신전은 존재했다. 이집트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여왕의 장제전(葬祭殿), 그리스의 파르테논(Parthenon) 신전, 로마의 판테온(Pantheon),
중국의 천단(天壇, 톈탄), 일본의 이세신궁(伊勢神宮, 이세진구) 등이 대표적이고, 거기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조선왕조의 종묘이다.
종묘는 이처럼 문화유산의 보편성과 특수성, 전통성과 현대성, 민족성과 국제성 모두에서 조선왕조를 대표할 만한 문화유산이다. 국제적인 시각에서 보면 존재감이 더욱 두드러지지만 정작 우리 국민은 그 가치에대해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종묘의 문화유산적 가치를 인식한지 얼마 안되기 때문이다. - P18

이처럼 하나의 제도가 후대로 가면서 원래의 좋은 취지마저 잃어버리는 것을 말폐현상이라고 한다. 말폐현상이 나타나면 그 사회는 머지않아종말을 고하고 마는 법이다. 성균관 대성전에 모신 동국성현 18명의 인물 선정이 일반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린 것도 후대로 가면서 정파적이해가 개입되어 말폐현상을 보였기 때문이다.
종묘 공신당에 배향되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엄청난 평가를 받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여기에 관심을 갖고 그 공신들의 공적을 밝히는 역사학자는 거의 없다.  - P43

세상의 모든 신전에는 본전의 권위를 위한 건축적 장치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회랑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 가장자리에는 회랑 대신 담장이 정연히 둘러져 있다. 그런데 이 담은 특별한 치장도 없이 아주 낮게둘러 있어 조용히 정전을 거룩하게 만들고 있다. 정전에서 내다보면 담의 지붕이 거의 발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공신당과 칠사당 또한 월대 아래 담장에 바짝 붙여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자기 표정을 갖지 않고 함께 있음으로써 그 기능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 공신당과 칠사당이 있음으로 해서 정전 건물은 외롭지 않고 더욱 거룩해 보인다. - P47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정전 앞의 넓은 월대가 아우른다. 네모난 박석으로 조각보를 맞추듯 이어진 월대는 제례를 지내기 위한 공간인데 그 넓이보다 높이가 절묘한 건축적 효과를 자아낸다.
신문에 들어서면 월대는 같은 지표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간격을 두고 우리 가슴 높이에서 전개된다. 그 높이가 주는 경건함과 고요함이 정전의 건축적 아름다움을 경건함과 고요함으로 이끌어준다. 자칫하면 위압적일 수 있을 법도 한데 종묘 정전의 월대는 전혀 그런 느낌을 주지 않는다. 지루한 평면일 수도 있는데 검은 전돌로 인도되는 신뢰가 정전 건물 돌계단까지 이어져 있어 공간에 깊이감을 주면서 우리 마음을 영혼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것이 종묘 정전 건축의 구조이다. - P48

종묘가 이처럼 위대한 문화유산임에도 혹자는 종묘 건립의 배경이『주례」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를 사대적(事大的)이라고 못마땅해하며이 건물의 민족적 정체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왜 독자적으로 만들지 않고 중국의 제도를 따랐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이 따른 것은 중국이 아니라 유교라는 이데올로기다. 유럽의 중세 도시국가들이 교회당을 지은 것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지 유대 문화를따른 것이 아님과 같다.
하나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국민총화를 이룰 이데올로기가 필요한데 중세사회에서 그것을 제공해준 것은 종교였다. 동서양의 모든 고대·중세 국가들은 고유의 종교가 있었음에도 샤먼의 전통에서 벗어나 발달된 종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결국 서양은 기독교, 동양은 불교를 국교로삼았다. 우리나라에서도 통일신라와 고려가 불교를 국가의 주도적인 이데올로기로 삼았고, 근 1천 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 불교가 마침내 말폐현상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에 서양에서 가톨릭교회가 부패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것도 똑같은 현상이었다. - P49

조선왕조는 이와 같이 유교문화의 보편성을 취하면서 이를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거기에 우리 문화의 정체성이 있다. 발달된 이데올로기는 인류의 공동 자산으로 그것을 가져다 쓰는 것은 선택의 문제이다. 맑스가 러시아 사람이 아닌데도 레닌이 맑스주의를 소련의 이데올로기로삼은 것이 그 예이다. 훌륭한 선택일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일 수도 있으며, 이입된 이데올로기로 나라를 망칠 수도 있고 발전시킬 수도 있다. 소련은 맑스주의를 레닌식, 스탈린식으로 변하더니 종국에는 70년 만에해체되고 붕괴되었다. 이에 반해 조선왕조는 유교문화를 조선적으로 변용하고 세련하여 500년을 이어갔다. 한 왕조가 500여 년간 종묘와 사직을 지킨 것은 여간 드문 일이 아니다. - P51

하버드대 에드윈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 등이 공저로 펴내영어권 동양학 연구의 첫번째 필독서로 꼽히는 『동양문화사』(김한규 외 공역, 을유문화사 1991)에서는 조선왕조를 ‘모범적 유교사회‘라 하고 그 문화는 ‘개량된 중국형‘이었다고 했다.
로마가 그리스 문명에 기초했고 네덜란드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은 것이 결코 흠이 아니듯이, 또 이탈리아·독일·프랑스·스페인·영국이 제각기 독자적인 기독교 문화를 갖고 유럽문화의 일원이 되었듯이, 조선왕조는 유교를 받아들여 중국보다 더 잘 짜인 유교문화를 발전시켰고 동아시아 문화 전체에서 확고한 자기 지분을 가진 당당한 문화 주주 국가가 되었다.
이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종묘다. 중국의 종묘는 자금성 동쪽에 있는 태묘(太廟)로 현재 노동인민문화궁 안에 있는데, 그 형식과 내용이 우리와 전혀 다르다. 북경의 태묘에 대해 세계 어느 건축가가 찬미한 것을나는 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아니라 해도 차분한 교양을 갖춘 이라면 이태묘를 보고 감동할 리가 없다. - P52

내가 늘 종묘를 예찬하니까 우리 답사회의 한 40대 여성 디자이너는종묘를 한번 다녀오고는 내게 이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비 오는 아침이었다고 한다.

"맞아요. 고요한 침묵 속 웅장함, 비어 있지만 뭔가 꽉 찬 듯한 느낌,
모든 것이 일순간에 정지된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이 사라진 듯했습니다. 소리도 풍경도 다 사라지고 종묘만 남더군요. 진공상태에서 내가 얼음이 된 느낌이었어요. 참으로 놀라운 종묘입니다."

그런 종묘가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 P52

답사기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친구들로부터 듣는 얘기는 대개 이렇다.
‘아, 거기에 그런 깊은 뜻이 있었는지 몰랐네‘ ‘옛날에 가본 적이 있기는한데 지금은 아무 기억이 없네‘ ‘네 책을 읽으니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마음이 생기는데 거기를 언제 가면 좋은가?‘ 아마도 종묘 답사기를 읽은독자들의 생각도 이와 비슷할 것 같다.
종묘는 봄여름보다 가을 겨울이 더 좋다. 종묘의 단풍은 울긋불긋 요란스레 화려한 것이 아니라, 참나무 느티나무의 황갈색이 주조를 이룬가운데 노란 은행나무와 빨간 단풍나무가 점점이 어우러져 가을날의 차분한 정취가 은은히 젖어들게 한다. 그때 종묘에 가면 아마도 인생의 황혼 녘에 찾아오는 처연한 미학을 느끼게 될 것이며, 그렇게 늙을 수만 있 - P53

다면 잘 산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은 그런 가을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뒷산 너머에 있는 창덕궁 후원의 단풍이 ‘화이불치(華而不,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라고 한다면 종묘의 단풍은 ‘검이불루(儉而不陋,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라 할 만하다.
겨울 어느 날, 눈이 내려 정전의 지붕이 하얗게 덮일 때 종묘는 거대한수묵 진경산수화와 같은 명장면을 연출한다. 건축으로 이런 침묵의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했던, 그 정전의 지붕과 월대가 온통 눈에 덮여 흰빛을 발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에 줄지어 늘어선검붉은 기둥들이 자아내는 침묵의 행렬에 자신도 모르게 깊은 사색의심연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무거운 고요함에 무언가 복받쳐오르는감정이 일어나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른다. 사진작가 배병우가 그런 날을기다려 여러 점의 사진을 남겼는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 찍은 장면은 무게감이 있어 좋고, 얇게 덮여 있는 작품은 햇살에 빛나는 영롱한 빛이 환상적이다. - P54

그래서 종묘 답사의 적기로는 단풍이 끝나가는 늦가을 끝자락과 눈덮인 겨울날을 꼽는다. 가을 답사는 오후 서너 시가 은은하고 겨울 답사는 오전 열 시쯤이 밝고 싱그럽게 다가온다. 현재 종묘는 평소에는 시간대별로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해설자가 안내하는 단체 관람을 시행하고 화요일은 휴관이며 토요일과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에만 자유관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늦가을의 토요일 오후, 눈 내린 겨울날의토요일 오전이 제격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종묘를 보았다고 하면 안된다. 매년 5월 첫째일요일과 11월 첫째 토요일, 춘추로 열리는 종묘제례(宗廟祭禮)를 참관해야종묘의 진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봄에 열리는 춘향대제(大祭)를 보지 않았다면 종묘의 겉만 보았지 속은 보았다고 할 수 없다. - P54

종묘는 흔히 조선시대 역대왕과왕비에게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묘제례를 가정에서 지내는 제사, 또는 양반집 불천위 제사의 국가 버전 정도로 이해하곤 한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생각했다.
그러나 종묘제례는 돌아가신 분을 추모하는 슬픔의 제례가 아니라 유교의 종교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존립 근거를 확인시켜주는 국가 의식이다. 장사지내는 흉례(凶禮)가 아니라 오늘을 축복하는 길례(吉禮)인 것이다. 그래서 종묘제례에는 노래와 춤과 음악이 함께 어우러진다. - P55

1464년(세조 10년) 1월 14일, 세조는 마침내 종묘제례에 친히 제향하면서 새로 다듬은 「정대업」과 「보태평을 연주했다. 실록의 이 기사에는 종묘제례의 전 과정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날 종묘제례악의 기본 골격이 되었다.
종묘제례악에서 악사는 두 팀으로 나누어 배치하는데 당상(堂上)의악사단을 등가(등歌), 당하(堂下)의 악사단을 헌가(軒架)라고 했다. 악기의 편성은 박·편종·편경·피리·장구·대금·해금·북·아쟁·태평소·축·어등 15가지이다. - P69

제례악에 맞추어 추는 춤은 정연하게 열을 지어 춘다고 해서 일무(舞)라고 한다. 일무는 가로세로 8명씩이면 64명이 추는 팔일무이고, 가로세로 6명씩이면 36명이 추는 육일무인데, 대한제국 이후에는 우리나라도 팔일무를 추었다. 성균관문묘제례에서도 팔일무를 추는데 그 춤은종묘제례와 비슷한듯 약간 다르다.
종묘제례에서 「보태평」의 춤은 문치를 기리는 문무(文舞)이고 정대업의 춤은 무공을 찬양하는 무무(武舞)다. 문무에서는 왼손에 약), 오른손에 적(翟)을 들고 추며, 무무에서는 앞의 네 줄은 검(劍), 뒤의 네 줄은창(槍)을 들고 춘다. 문묘에서 팔일무를 출 때는 문무는 같지만 무무에서는 왼손에 방패(干), 오른손에 도끼(戚)를 들고 춘다. - P70

종묘의 길들은 걷기 위한 것이 아니라 멈추기 위한 것이고, 곧게 뻗기 보다는 꺾이고 갈라지면서 호흡을 조절한다. 너무 빨라지면 걸음을 멈추도록 제어하며 멈추어 서면 다시 움직임을 유도하는 길들이계속된다. 엄숙한 건물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마치 길들만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 종묘의 길들은 그 자체가 건축적 질서이며 의례이고 움직임이며 행위가 된다.


신이 가고 제왕이 걷는 길이라면 폭이 넓고 곧게 뻗어 위풍당당하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종묘의 신도는 폭도 좁고 바닥은 거칠며 중간에 꺾여 들어간다. 종묘의 신도는 정전의 건축과 일체를 이루는 디자인이며,
가무악으로 이루어진 제례의식의 경건하지만 위압적이지 않은 길례(吉禮)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 P91

서울은 ‘궁궐의 도시‘다. 세계 어느 나라든 한시대의 수도였던 왕도(王都)의 상징물은 궁궐이다. 그리고 조선 500년의 수도였던 서울에는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등 자그마치 5개의 궁궐이 있다.
세계 어느 역사도시에도 한 도성 안에 궁궐이 5개나 있는 곳은 없다. 문화재청장 재직 시절 덴마크 여왕, 스웨덴 국왕,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가방한했다. 이들은 모두 창덕궁과 경복궁을 참관하면서 서울 시내에 이런고궁이 5개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표하며 그 내력에 대해 묻곤 했다.
서울의 궁궐 중 창덕궁은 종묘와 함께 1997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진즉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때 서울의 5대 궁궐을 한꺼번에 등재했어야 했다는 아쉬움과 후회가 일어난다. 사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규정에 ‘영역의 확대‘라는 것이 있다. 아니면 개별 추가 등재로 서울의 5대 궁궐을 모두 등재하도록 노력해볼 만하다. 개인적으론 그냥 ‘궁궐의 도시‘보다는 ‘5대궁궐의 도시‘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부터 서울의 5대 궁궐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하고 이를 마음으로 동의하며 자랑할 수 있어야 한다. - P97

그러나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상황으로 물러나고 뒤를 이은 순종은 1907년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고종황제가 머무른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이리하여 덕수궁까지 서울에 5대 궁궐이 자리잡게 된것이다.
5대 궁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어느 하나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이없었다. 경복궁엔 조선총독부가 들어섰고, 창경궁은 식물원·동물원이되었으며, 경희궁엔 일본인 중학교인 경성중학교(훗날의 서울중·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훼철되었고, 덕수궁은 공원으로 개조되었다. - P100

그러나 조선왕조 5대 궁궐은 그 기본 골격이 워낙에 튼실하여 근래 들어 복원에 복원을 거듭하면서 궁궐의 멋과 품위를 어느 정도 회복해가고있다. 그러므로 서울을 ‘궁궐의 도시‘라고 불러도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그중에서도 조선 궁궐의 멋을 한껏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역시 창덕궁이다.

서울의 5대 궁궐 중 으뜸은 역시 국초와 왕조 말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데 아무 이론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조선의 역대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좋아하여 여기에 기거하기를 원했고 실제로 더 - P101

많이 살았다. 임진왜란으로 두 궁궐이 모두 소실되었을 때도 경복궁이아니라 창덕궁을 먼저 복원했다. 오늘날 외국인 관광객들도 경복궁보다창덕궁을 훨씬 더 좋아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경복궁보다 창덕궁에서 더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경복궁이 권위적이라면 창덕궁은 인간적인 분위기가 짙다. 창덕궁 경복궁과이렇게 차별화된 건축 양식을 갖게 된 이유는 그 창건 과정에 잘 드러나있다. - P102

사실 이것이 우리나라 조원(園)의 중요한 특색이다. 자연 그대로의모습을 살려 나무들이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한 느낌을 주고 인공적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꾸미긴 꾸몄는데 꾸민 태를 내지 않는다. 있어도있는 태를 내지 않아 창덕궁을 답사하고서도 이 공간이 특별히 기억에남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런 편안한 공간을 여느 궁궐에서나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창덕궁에서 인간적 체취가 물씬 풍긴다고 하는 것이다.
금천 좌우의 여덟 그루 회화나무로 말할 것 같으면 천연기념물 제472호로 지정된 고목들이다. 궁궐 안에 회화나무를 심는 것은 주례』에도 나와 있는 궁궐 조원의 법칙이다. 회화나무는 느티나무와 함께 한자로 괴목(槐木)이라 쓴다. 주나라 때 삼공(三公, 세 정승)이 괴목 아래에서나랏일을 논했다는 고사에서 회화나무 괴(愧) 자에 ‘삼공‘ 또는 ‘삼공의자리‘라는 뜻이 더해졌다. 이런 상징성 외에도 회화나무는 생기기도 늠름하게 잘생겼고, 낙엽의 색조가 갈색으로 차분하며 수명도 길어 궁궐의품위를 잘 지켜준다. - P113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왕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궁궐은 그 시대의문화능력을 대표한다. 정조대왕은 『궁궐지(宮闕志)』에서 궁궐이 장엄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체로 궁궐이란 임금이 거처하면서 정치를 하는 곳이다. 사방에서우러러 바라보고 신하와 백성이 둘러 향하는 곳이므로 부득불 그 제도를 장엄하게 하여 존엄함을 보여야 하며 그 이름을 아름답게 하여경계하고 송축하는 뜻을 부치는 것이다. (절대로) 그 거처를 호사스럽게 하고 외관을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 P126

그러나 조선의 궁궐은 외국의 예에 비해 소박한 편으로 결코 화려하지 않다. 백성들이 보아 장엄함을 느낄 수 있는 딱 그 정도의 화려함이라고나 할까. 그 이유는 조선 건국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하고 한양의 도시 설계와 경복궁 건립을 주도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찾을 수 있다.


궁원(宮苑) 제도가 사치하면 반드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정을손상시키는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고, 누추하면 조정에 대한 존엄을보여줄 수 없게 될 것이다. 검소하면서도 누추한 데 이르지 않고,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데 이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검소란 덕에서 비롯되고 사치란 악의 근원이니 사치스럽게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검소해야 할 것이다. - P126

궁궐 건축에 대한 정도전의 이런 정신은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던 우리궁궐의 미학이다. 일찍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 - P126

(기원전 4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新作宮室 儉而不陋 華而不侈 - P124

그러고 보면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아름다움은 궁의건축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백제의 미학이자 조선왕조의 미학이며 한국인의 미학이다. 조선시대 선비문화를 상징하는 사랑방 가구를 설명하는 데 ‘검이불루‘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고, 규방문화를 상징하는 여인네의 장신구를 설명하는 데 ‘화이불치보다 더 좋은 표현이 없다. 모름지기 우리의 DNA 속에 들어 있는 이 아름다움은 오늘날에도 계속 계승하고 발전시켜 일상에서 간직해야 할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미학이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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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적인 소원. 사건이 글쓰기가 되고 글쓰기가 사건이 되는 것. -미셸 레리스


기억이 사물들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만은 아닐지도. ㅡ쓰시마 유코







바르베스 역에 내렸다. 지난번처럼 지상에 있는 지하철역사 아래로 남자들이 무리 지어 기다렸다. 사람들은 저렴한타티 상점의 분홍색 쇼핑백을 들고 인도를 걸어 다녔다. 마젠타 대로로 접어들자, 밖에다 점퍼를 걸어 둔 빌리 의상점이 눈에 들어왔다. 한 여자가 나를 향해 걸어왔는데, 건장한 다리에 굵은 무늬로 짜인 검정스타킹을 신었다. 병원에 가까워질때까지 암브루아즈파레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궁륭형태로 장식한 엘리자관의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유리로 막힌 긴 복도를 따라가느라 처음에는 뜰에 자리한 야외 음악당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병원을 나설 때,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 생각했다. 15번 문을 밀고 들어가서 3층으로 올라갔다. 검진 창구에 번호가 적힌 종이를 제출했다. 여자는 카드상자를 뒤져 서류가 들어 있는 크라프트지 봉투를 꺼냈다. 손을 내밀어 봤지만 봉투를 내게 주지는 않았다. 그녀는 봉투를책상 위에 놓고, 잠시 앉아 있으면 호명하리라고 말했다.
- P9

과제물 검토가 끝났다. 흐릿하지만 똑같은 장면이 끊임없이 떠오른다. 7월의 토요일과 일요일 사이, 섹스하는 몸의 움직임과 사정. 여러 달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장면 때문에 나는여기 있었다. 벗은 두 몸이 얼싸안고 움직이는 자세가 죽음의춤처럼 여겨졌다. 보채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로 했던 그 남자는 오로지 내게 에이즈 바이러스를 주고자 이탈리아에서 온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섹스를 하는 몸짓과 부드러운피부 그리고 정자, 이 모든 것을 내가 병원 대기실에 있다는사실과 결부시킬 수는 없었다. 무엇도 섹스와 연결시킬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 P11

의사가 내 번호를 불렀다. 진찰실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의사가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좋은 징조이리라 생각했다.
진찰실 문을 닫으며, 그녀는 아주 빠르게 "음성이에요."라고말했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다음부터 진찰실에서 의사가늘어놓는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의사는 유쾌하고 호의적인 인상이었다.
아주 빠르게 계단을 내려왔고, 아무것도 보지 않은 채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한 번 더 구원받았다고 생각했다. 금발여자도 마찬가지일지 알고 싶어졌다. 바르베스 역에 밀집한사람들은 여기저기서 분홍색 무늬가 인쇄된 타티 상점의 쇼핑백을 들고 양방향 플랫폼에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 P12

1963년, 라리부와지에르에서, 지금과 똑같은 공포와 불신 속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N. 의사의 판정을 기다렸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삶은 오기노 방식‘과 1프랑짜리 자판기 콘돔 사이에 자리한다. 이것이 삶을 가늠하는 적절한 방법이다. 심지어 그 무엇보다 더 확실한 - P12

1963년 10월, 루앙에서 생리가 시작되기를 일주일 이상기다렸다. 쾌청하고 온화한 날들이었다. 너무 이르게 외투를꺼내 입었고, 몸은 무겁고 무기력했다. 개강을 기다리며 빈둥거리다가 스타킹이나 사러 다녔던 백화점 안에서는 특히 더그랬다. 에르부빌 거리에 있는 여학생 기숙사 방으로 돌아오며, 팬티에 비친 피를 볼 수 있기를 내내 바랐다. 매일 저녁마다 수첩에 또박또박 ‘아무것도 없음‘이라고 쓰고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 자다가 깨었던 밤에도 곧바로 ‘아무것도 없음‘
을 알아차렸다. 작년 이맘때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 일이 아주 오래전 일처럼, 마치 다시는 되풀이될 수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 P13

진료대에서 내려온 바로 그 순간, 품이 넓은 녹색 스웨터가 허벅지 위로 내려왔고, 산부인과 의사는 임신한 게 틀림없다고 말했다. 위가 안 좋다고 생각했던 것은 입덧이었다. 어찌되었든 그는 생리를 할 수 있게끔 주사를 처방했지만, 효과가있을 거라 믿지 않는 눈치였다. 문 앞에서 그는 명랑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생아는 늘 예쁘더군요."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걸어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다. ‘임신. 끔찍하다.‘ - P17

대학 생활 지원 센터의 간호사는 그날 저녁 아무 말 없이주사를 놔주었고, 그다음 날 아침에 또 한 대를 놓았다. 11월11일, ‘1차 세계 대전 휴전 기념일 휴일이 낀주말이었다. 부모님 댁으로 갔다. 그때 불그죽죽한 피가 빠르고 짧게 흘렀다.
눈에 확 띄게 얼룩이 묻은 팬티와 면바지를 빨랫감 위에 올려놓았다. (수첩: ‘피가 나오다 말았다. 엄마에게 대신 뭘 줘야 하나?‘)루앙에 돌아와서 N. 의사에게 전화를 했는데, 그는 내 상태를확인해 주었고, 임신 진단서는 보냈다고 말했다. 그다음 날 임신 진단서를 받았다. 마드무아젤, 아니 뒤세느 출산 예정일:1964년 7월 8일. 나는 여름과 태양을 떠올렸다. 임신 진단서를 찢어 버렸다. - P17

그 후 몇 달의 시간은 흐릿한 불빛에 잠겨 있다. 끊임없이거리를 배회하는 내가 보인다. 이 시기를 생각할 때면 매번,
‘출항‘이나 ‘선악의 저편‘ 혹은 ‘밤의 끝으로의 여행‘ 같은 문학 작품의 제목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제목들은 매번내가 그 당시 체험했던 느낌, 말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아름다운 무언가에 부합하는 듯했다. - P18

그런 생각을 떨칠 수도없으면서 저항했다. 그 생각에 빠져들면 끔찍했다. 한편으로는 이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죽을 수도 있겠다는생각도 들었다.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면, 바로 그 일이었을 거다. 어느 밤, 나는 임신 중절 경험에 대해 쓴 책을 두손에 들고있지만, 서점 어디에서도 그 책을 찾을 수 없고, 도서목록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는 꿈을 꾸었다. 책 표지 아래에 큰 글씨로
‘절판‘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꿈이 책을 써야만 한다는 의미인지, 아니면 그런 경험을 글로 쓰는 일이 쓸데없는 짓이라는의미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 P19

법. 이들은 금고형과 벌금형을 받았다. ① 몇 건의 임신 중절 시술을 집도한 자. ② 의사들, 산파 전문의들, 약사들 그리고 임신 중절 시술을 추천하고 용이하게 한 이들. ③ 스스로 임신 중절에 나선여성 혹은 그에 동의한 여성. ④ 임신 중절을 선동하고 피임을 선전한 자. 더불어 범법자들에게는 체류도 금지된다. 2번 조항에 속하는범법자들은 고려할 것도 없이 직업 활동을 일시적으로 금지하거나자격을 완전히 박탈한다.
『새로운 라루스 백과사전』, 1948년판,

시험을 준비하고 여름방학을 기다리며 수업과발표, 카페와 도서관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왔다. 이제 시간은 이런 일들로 채워지는 의미 없는 나날의 연속이 아니었다. 시간은 내안에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무슨 수를 써서라도 파괴해야만했던, 형태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버렸다.
문학과 사회학 수업을 들었고, 학생 식당에 갔고, 점심과저녁엔 학생들만 다니는 파뤼쉬 바에서 커피를 마셨다. 이제그들과 같은 세상에 있지 않았다. 배 속에 아무것도 없는 여자애들, 그리고 내가 있었다. - P21

막연하게 내가 태어난 사회 계층과 내게 일어난 일을 연관 지어 생각했다. 노동자와 소상공인 가정에서 고등 교육을받은 첫 번째 수혜자였기에 나는 공장이나 상점 계산대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칼로레아 합격도, 프랑스 문학 학사학위도, 알코올 중독과 같은 취급을 받는 임신한 여자아이가상징하는 가난이 물려주는 운명을 따돌릴 수는 없었다. 섹스때문에 나는 다시 따라잡혔고, 그때 내 안에서 자라나던 무언가는 어떻게 보면 사회적 실패라는 낙인이었다. - P22

순간적으로 그는 벌어진 두 다리 사이로 드러난 성기를본 듯 호기심과 음탕함이 깃든 표정을 지었다. 어쩌면 어제의모범생이 궁지에 처한 여자로 갑작스레 변한 상황을 보면서즐거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누구와, 그리고 언제 임신을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 했다. 내 상황을 털어놓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그 순간 그에게 아무런 해결책이 없을지라도,
그의 호기심이 일종의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는 루앙 외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는 기숙사 방에 홀로 있고 싶지 않았다. - P24

샌드위치를 다 먹고 나자, 장 T.는 의자에 앉아 치아를 다드러내며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먹으니 좋네." 구역질이 났고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 일에 너무 얽매이고 싶지 않아 함을 알게 되었다. 그가 속한 단체에서 가족계획 명목으로정해 놓은 도덕적 범주에는 임신 중절을 원하는 여자아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일등석에 앉아 내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될지 계속 알고 싶은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돈 한 푼안 내고 전부 다 보고 싶어 하는 것. 계획된 임신을 지지하는협회의 일원이기에 그는 ‘윤리적인 문제로‘ 불법 임신 중절을하려는 내게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선수를 쳤다. (수첩에 ‘T.와강변에서 식사. 문제만 쌓여 감.‘ 이라고 쓰여 있다.) - P26

(Perm 484, nos 5 et 6, Norm. Mm 1065. 당시 사용하던 주소록간지에 이런 분류 기호가 적혀 있다. 낯설고 뭔가에 홀린 듯한 감정에젖어 파란색 볼펜으로 휘갈겨 쓴 흔적을 쳐다본다. 침투할 수도 파괴할수도 없는 물질적인 증거들은 기억과 글쓰기의 불안정한 속성 탓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어떤 현실을 간직한 것만 같았다.) - P28

1960년대 대부분의 개인 병원들이 그렇듯이 보부와진 광장 부근, 이제(I‘Yser) 대로에 있는 일반 진찰실에는 양탄자가깔려 있고, 유리문이 달린 책장, 고전적인 책상이 놓인 부르주아 가정의 거실과 비슷했다. 왜 내가 우파 국회 의원 앙드레마리가 사는 부자 동네로 방향을 돌렸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다. 밤이었고, 어쩌면 아무런 시도도 못 한 채 집에돌아가기 싫었던 것 같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의사가 나를맞았다. 의사에게 몸이 피곤하고, 생리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했다. 고무장갑을 낀 손가락으로 진찰한 후에, 그는 임신한 게확실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에게 중절 시술을 해 달라는 말을할 수 없었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생리를 다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답이 없었다. 그러더니 쳐다보지도 않고, 사내자식들은 자기 좋은 일만 하고 여자들을 내팽개친다며 으레 독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는 칼슘제와 에스트라디올 주사를 처방해 주었다. 내가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마침내 태도가 누그러졌다.  - P30

나 같은 여자들은 의사의 하루를 망쳤다. 돈도연줄도 없는-그렇다고 무턱대고 의사들을 찾아가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런 여자들은 자기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 있고, 영영의사 면허증을 앗아 갈 수도 있는 법을 떠올리게 했다. 그렇다고 의사들은 감히 진실을 말하지도 않았다. 여자들을 죽게 방치하는 법을 위반하느니 차라리 당신들이 죽는 편이 더 낫다고 솔직하게 나서지 않는 한, 임신할 정도로 멍청한 젊은 여자의 아름다운 눈 때문에 자기가 이룬 모든 걸 잃고 싶지 않다고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같이 여자들의 임신 중절을 막더라도, 그녀들이 알아서 방법을 찾아낼 거라 생각했으리라. 부서질지도 모르는 자기들 이력에 비하면, 여자들이 질 속에 뜨개질바늘을 넣는 건 아무 일도 아니었다. - P31

(이야기가 나를 이끌고 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불행의 의미를 내게 강요하는 느낌이다. 마치 꿈속에서처럼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고 단지 두터워지기만 하는 시간이 끝없이 지체되도록 온갖 방법으로 - 세부적인 요인들을 찾아 메모하고, 반과거 시제를 사용하고, 사건을 분석하는 일 - 노력해 가며, 나는 몇 날, 몇주를 훌쩍 뛰어넘고 싶은 욕망에 맞서야만 한다.) - P32

이제 ‘이념의 천국‘에는 다가갈 수 없어 보였고, 그 아래로 구토하며 진창에 빠진 내 육신을 질질 끌고 다녔다. 어떤때는 내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다시 그런 것들을 고민해 볼 수있길 바랐고, 또 어떤 때는 지식이란 습득해 봐야 결국엔 무너져 내릴 뿐인 허울 같은 구조물처럼 보였다. 어쨌든 논문을 쓰지 못하는 상황은 중절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보다 더 끔찍했다. 논문을 쓸 수 없음은, 보이지 않는 내 타락의 명백한 징표였다. (수첩에 이렇게 적혀 있다. ‘아무것도 쓸 수 없다. 공부도 되지않는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지식인‘이 아니었다.  - P33

(내 출신이며 심한 정신적 피로‘를 두려워하는 육체노동자의 세계, 혹은 내 육체, 내 육체에 새겨진 그런 기억과 연결된 먼 과거의 무언가에 붙잡혀 있기라도 한 듯, 내가 사물들을 탐구하기 위해 더 깊숙이들어가지 않았다는 생각을 여전히 종종 한다.) - P34

그해 9월에 찍은 사진 속 나는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는데, 목의 팬 부분에는 머플러를 두르고,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고, 짙은 구리빛 피부에, 미소를 지으며, 생기 있는 표정으로앉아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보이지 않는 질서 속에서 변화하지만 끊임없이 실재하는 유혹이라 부를 만한 청춘 시절의 마지막 사진이라 생각했다. - P35

그 전날 밤, 「나의 투쟁 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기숙사 친구들과 보러 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엄청나게 동요했고,
끊임없이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어찌되었든 영화는 나에게 명백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 자신에게 가하게 될고통은 강제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이 겪은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런 생각은 용기를 주고 결심을 하게 했다. - P37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분노나 혐오감을 자극할 수도 있을 테고,
불쾌감을 불러일으켜 비난을 살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이든 간에, 무언가를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일을 쓸 수 있다는 절대적인 권리를 부여한다. 저급한 진실이란 없다. 그리고 이런 경험의 진술을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는다면, 나 또한 여성들의 현실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는 데기여하는 셈이며, 이 세상에서 남성우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 P38

(지난밤, 1963년 상황에 처해서 중절할 방법을 모색하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자, 그 당시 내가 느꼈던 압박감과 무력감을 그 꿈이 정확하게 되돌려 주었다고 생각했다.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절망적인시도처럼 여겨졌다. ‘모든 게 다 있다.‘라고 여기는 아주 짧은 오르가슴을 느낄 때처럼, 꿈을 떠올리자, 내가 단어들로 찾아보려 하는 것이 아무런 노력 없이 얻어 낸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의 기억은 내글쓰기의 시도를 무용하게 했다.
그런데 깨어나면서 꿈꿀 때 느낀 감정이 사라진 이 순간, 글쓰기는꿈이 정당화한 것보다 훨씬 더 강렬한 필연성을 되찾는다.)고 2 - P38

지난 일요일, 루앙을 경유해서 노르망디 해변을 다녀왔다. 그로스오를로주 거리를 걸어서 성당까지 갔다. 새로 조성한 ‘레스파스 뒤 팔레‘ 쇼핑몰에 위치한 카페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집필하던 책 탓에끊임없이 1960년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벽을 닦아 내고 새로 색을칠한 루앙 시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일지 않았다. 도시의 색채를 벗겨내고, 거리 벽에 본연의 어둡고 음산한 색을 씌우고, 인도에도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모습을 만들어 가며, 공상이라는 힘겨운 노력을 통해서만 1960년대에 다가갈 수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책에 들어간 풍경 삽화 속에서 인물들을 찾아야 하는 것처럼, 지나가는 사람들 속에 어쩌면 1963년 당시의 옛날 학생들 한두 명쯤은 있지 않을까. 글을 쓰면서 너무도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지금은 만나 볼 수 없는 사람들. 내가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는 거무스레한 얼굴에 갈색 머리를 지닌, 작지만 두툼한 입술의L.B.를 떠오르게 하는 예쁜 소녀가 있었다. 소녀가 그녀의 딸이리라 생각하고 싶었다.) - P45

그녀는 테이블을 앞에 두고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내 다리 사이로 커튼이 내려진 창문과 길가 반대로 난 다른 창문들, P.-R. 부인의 흰머리가 보였다. 이런 곳에 있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에 학교에서 몸을 숙이고 책을 보는 여학생들을, 콧노래를 부르며 다림질을하고 있을 엄마를, 보르도 거리를 거닐고 있을 P.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자기 주변에 두고 싶다는 이유로 그것들을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래 봐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은이전처럼 계속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만을 깨달을 따름이었다. 더군다나 그들은 계속 내게 ‘대체 나는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고 묻게 할 뿐인데. - P54

(이 글을 쓰던 시기에, 코소보 난민들이 칼레를 거쳐 영국으로 밀입국을 시도한다. 밀항업자들은 엄청난 돈을 요구하고, 때로는 밀항전에 잠적해 버린다. 그럼에도 코소보 난민을 비롯하여 가난한 나라에서 온 이민자들은 밀항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구원받을 다른방법이 없다. 사람들은 밀항업자들을 쫓는다. 삼십 년 전에 임신 중절시술가에게 그랬듯이 밀항업자들의 존재를 몹시 못마땅해한다. 누구도 그 존재를 부추기는 법률이나 국제 사회의 명령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그리고 마치 오래전 임신 중절 시술을 해 주었던 이들처럼, 이민자들의 밀항을 돕는 이들 중에 다른 사람보다 더 올바른 이들도 분명있으리라. - P59

루앙으로 돌아왔다. 춥지만 햇볕은 좋았던 2월이었다. 나는 똑같은 세계 속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 자동차들, 학생식당 테이블 위의 식판들.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의미가 넘쳐 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넘쳐 난다는 바로 그 이유로 단 하나의 의미를 포착할 수없었다. 한편에는 너무나 의미가 많은 존재와 사물이 있었고,
다른 편에는 아무 의미 없는 말들과 단어들이 있었다. 언어를넘어서는 순수한 의식이 흥분된 상태 속에 있었다. 밤도 어쩌지 못했다. 깨어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얕은 잠을 잤다. 내 앞에서 작고 하얀색의 아기 인형이 떠다녔다. 쥘베른의 소설 속우주 비행사들을 계속해서 쫓아다니며 하늘에 떠다니는 개의시체 같았다. - P74

신성한 무엇처럼 1월 20일과 21일 밤의 비밀을 내 몸속에간직한 채 거리를 걸었다. 내가 공포의 끝에 있었는지, 아름다움의 끝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자긍심을 느꼈다. 어쩌면 고독한 항해자들, 약물중독자들과 도둑들, 혹은 다른 이들은 결코가려고 하지 않는 곳까지 경험해본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자긍심처럼 생각되었다. 이런 감정의 무언가가 나로 하여금이 이야기를 쓰게끔 이끌었다. - P75

이른바 정상이라고 부르는, 모호한 진술이지만 다들 그의미를 아는, 즉 반짝이는 세면대와 기차 안 여행객들의 머리를 보는 일이 더는 문제가 되거나 고통스럽지 않은 세계로 되돌아온 게 언제인지 모른다.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중절에 들어간 돈을 조금씩 갚기 위해 저녁에는 아이들을 돌봤고, 심장병 전문의의 전화를 받는 일도 했다. 오드리 헵번과 케리 그랜트가 주연한 「샤레이드」, 잔느 모로와 벨몽도가 나오는 바나나 껍질」과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들을 보았다. 긴 머리카락을 잘랐고, 안경을 콘택트렌즈로 바꿨는데, 렌즈를 끼는일은 질 속에 페서리를 넣는 것만큼 어렵고 불확실했다. - P78


여러 해 동안, 1월 20일에서 21일 밤은 기념일이었다.

이제 아이들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이런 시련과 희생이 필요했음을 안다. 내 몸속에서 재생산이라는 폭력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차례가 되어 세대들이 거쳐 가는 장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 P78

삶과 죽음, 시간, 도덕과 금기, 법을 포함하는 인간의 모든경험, 육체를 통해 극과 극을 오간 경험으로 여겼던 사건을 단 - P78

어들로 표현하는 일을 끝냈다.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이 사건에 대해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유일한 죄책감을 지웠다. 재능을 받았지만 낭비해 버린 듯. 경험한 사건에서 찾을수 있는 사회적이고 심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모든 이유를 넘어서서 무엇보다 가장 확실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하나 있다.
그저 사건이 내게 닥쳤기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내 삶의 진정한 목표가 있다면 아마도 이것뿐이리라.
나의 육체와 감각 그리고 사고가 글쓰기가 되는 것, 말하자면내 존재가 완벽하게 타인의 생각과 삶에 용해되어 이해할 수있는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되는 것이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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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일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잠재된
성차별주의를 공격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플린 케일은 오랫동안 기다린 끝에 돌파구를 만났다. 뉴욕 리뷰 오브북스」의 편집자 로버트 실버스가 그녀에게 손을 내민 1963년 8월의일이었다. 우리 신문을 위해 소설 서평을 써주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순간에 아슬아슬하게 들어온 이 원고청탁으로 그녀가 서평을 쓰게 된소설은 메리 매카시의 그룹이었다.
매카시보다 겨우 일곱 살 아래인 케일은 오래전부터 그녀의팬이었다. 그녀의 친구들이 나왔을 때 그녀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살, 그 책의 성적인 솔직함을 제대로 받아들이기에 딱 맞는 나이였다.
또한 그룹이 엄청난 성공을 거둘 무렵의 케일은 매카시처럼 보눈이 날카로운 영화비평가로 오랫동안 일했으나 이렇다 할 성공을거두거나 인정을 받지는 못한 처지였다. 나이도 이미 마흔넷이라서,
동해안의 지식인 사회에서 과연 기회가 생기기나 할지 확실히의심스러워지던 참이었다. 그때까지는 그녀에게 쉽게 이루어지는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 P281

그러나 인생의 전반기에는 그런 바람이 실현되지 않았다. 케일의뛰어난 머리는 아주 친한 친구들만 빼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그녀를소외시키는 역할을 하는 듯했다. 아렌트의 경우와 비슷했다. 그녀는사람들과의 관계를 이어나가는 데 별로 소질이 없었으며, 작가로서발판을 마련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랜 노력 끝에마침내 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지면을 채우는 뉴욕 지식인들의관심을 끄는 데에는 그녀보다 젊은 손택의 도움이 필요했다. 손택과케일은 그룹이 발표되기 몇 달 전에 만났다. 만난 곳이 어딘지는알 수 없다. 젊은 손택은 케일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는지, 『그룹의서평을 써줄 사람을 찾고 있던 하드윅과 실버스에게 케일의 이름을알려주었다. 케일은 처음 전화가 왔을 때는 무척 고맙게 여겼음이분명하다. 메리 매카시의 책을 비평하는 글이라니. 그 글이받아들여진다면, 그녀 스스로 자격이 충분하다고 여기던 자리에마침내 들어갈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생길 터였다. - P283

케일의 재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그녀는공부를 잘했으며,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토론 팀에서도 활약했다. 그리고 손택처럼 버클리 캘리포니아 대학철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손택과 달리 금방 캘리포니아를 떠나지는않았다. 그녀는 캘리포니아를 사랑했다. 영화 「허드(Hud)를 평한글에서 케일은 사람들이 자신을 지나치게 내세우지 않고 평등하게어울리던 어린 시절 고향의 분위기에 대해 열광적으로 묘사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멕시코인과 인디언 인부들이 언제나 우리가족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한 것은 우리가 공연한 죄책감에선심을 베풀고자 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서부 사람들이살아가는 방식이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는 그녀의 예술적인성향을 충분히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국제적인 도시였다. 영화관도아주 많고, 예술가도 아주 많고, 재즈클럽도 아주 많았다. 대학을마친 뒤 케일은 이 도시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리며, 친구인 시인로버트 호런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호런은 게이였고,
케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 P284

케일은 이런 관객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작품들, 예를들어 수전손택이 극찬한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Hiroshima Mon Amour)같은 영화를 공격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케일의 공격 대상은 주로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쓴 대본이었다.
여성 주인공의 감정에 대해 같은 내용이 지나치게 반복된다는것이었다.


처음에는 더 고결한 수준의 영적이고 성적인 교섭에 대한진정한 고백처럼 보였다. 그러다 나는 이 영화가 우리에게주는 위대한 교훈은 곧 입 닥치라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 여성(에마뉘엘 리바는 이 인물을 아름답게 해석해냈다)은 - P291

지적인 현대 여성의 가장 커다란 결점 하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자신의 감정을 모두 말로 털어놓는다는 것. 마치 침대가감수성을 증명하는 자리인 것 같았다.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믿는 것, 즉 자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곳에 자리한 진실과 비밀, 누군가가 공감하는 시선으로 우리를바라볼 때 우리가 꺼내놓는 진정한 자신은 안타깝게도 남의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헛소리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우리가대체로 그런 자신을 잊고 사는 것은 그만한 머리가 있기때문이다.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가 숨기는진정한 자신은 싸구려 엉터리에 불과하다. 누가 그런 것을원하겠는가?  - P292

케일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의미가 깊은 주장이다. 예술에서 감정의노출은 예나 지금이나 많은 논란의 대상이다. 케일이 여기에서 10지적했듯이, 이 문제가 성별의 영향을 받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들 사이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지는 광경이 to친숙하다. 모든 결점과 감정을 완전히 고백하는 것만이 정직한 글쓰기방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케일처럼 이런 방법은 출여성에 대한 끔찍한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지적인 인간으로서 여성이지닌 최악의 특징들만 겉으로 드러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앞선 인용문의 마지막 줄에 드러난 잔인함, 즉 내면의 자아가싸구려 엉터리이며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것을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결코 예술이나 「히로시마 내 사랑」이나마르그리트 뒤라스만을 겨냥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틀림없이본인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 - P292

이제 케일은 영화비평가로서 특유의 문체를 완전히 갈고 다듬은뒤였다. 그녀는 다른 비평가들의 글, 그들의 논리적 결함과 신앙같은 주장을 다루는 한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반응에도 시선을주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경험이 영화 자체만큼 중요하다고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경험의 ‘재미‘에도 역시 관심을보였다. 재미는 주관적인 요소일 수 있지만, 케일은 아무리 고상한비평가(예를 들어 손택)라 해도 도달할 수 없는 최고의 가치이기도하다고 확신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아둔하다, 배려가 없다,
생각이 단순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 인정한
‘절충주의적‘ 문체를 통해, 재미를 언제나 중요하게 다뤘다. 아예재미를 신조로 삼을 정도였다. - P307

폴린 케일: 열의는 있으나 예의가 없다; 예의바른 남자들을짓밟는 여자


이 헤드라인을 과장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윌리엄 숀은확실히 ‘예의 바른 남자‘였다. 그러나 그는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니고있었으며, 영화 예술 또는 영화비평의 현 상태에 대한 평범한 글을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자신의 우아한 잡지에 그런 글이 실리는 것을막기 위해 케일의 바람막이 역할을 해주었다. 케일 역시 좀 더 평범한비평가의 모습으로 변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1960년대에 그녀는 장편의 비평을 딱 한 편만 더 썼는데,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Trash, Art, and the Movies)라는 제목의 이 글은1969년 2월에 『하퍼스』에 실렸다.
손택의 캠프에 대한 단상이 간혹 캠프 전체를 옹호하는 글로잘못 인식되듯이, 「졸작, 예술, 그리고 영화도 간혹 졸작을 예술로옹호하는 글로 잘못 인식되곤 한다. 케일은 졸작과 예술 사이에는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녀는 어느 단계에서는 왜 기법이 중요하지 않은지 설명하고 싶어했다. - P309

"디디언은 직설적인 싸움보다
우아한 공격을 선호했다."

디디언과 케일은 손택과 함께 언급될 때가 많았다. 모두 캘리포니아출신이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식인들은 이것을 놀라운 우연의일치로 보았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확실히 디디언과 케일은 서로 죽이 잘맞는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존 그레고리 던은 케일이디디언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그녀가디디언의 소설을 싫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영화 역시 싫어한다는 사실뿐이었다고 썼다. 케일은 이 영화를 가리켜
"공주 판타지" " 라고 평했다. "많은 사람들에 비해 내가 이런 것을 잘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이것을 꼭 참아주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존 디디언의 소설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허세가가득하다. 그 책을 읽으면서 나는 어이없는 마음에 계속 키득거렸다."
그래도 던은 두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본인들은 몰랐지만, 그에게는두 사람의 공통점이 보였기 때문이다. "상대의 작품에 대한 상냥한경멸과 몽구스의 본능을 지닌 두 거친 여자들이 착한 여자 행세를하고 있다." - P323

디디언이 그 뒤 몇 세대에 걸쳐 젊은 여성들에게 어떤 존재가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이 말은 정말이지 극적이고 아이러니하다.
후대의 젊은 여성들은 디디언이 글에서 자신들 내면의 가장 깊숙한생각을 표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처음 글을 쓰기 시작했을때 디디언은 그런 식으로 유명해질 생각이 없었다. 사실 샐린저는그녀에게 끌어내려야 할 덩치 큰 남자였을 뿐이다. 그녀는 프래니와주이가 "결국 겉만 그럴싸하다"고 말했다. 샐린저가 독자들에게남들보다 더 멋지게 사는 법을 알고 있는 엘리트라는 의식을 심어주고아첨한다는 것이 디디언의 생각이었다. 사실 샐린저는 사소한 것에만초점을 맞출 뿐이었다. 그는 사소한 일, 피상적인 일에 집착하는 주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해줌으로써 그들에게 기껏해야 일종의자기계발서 같은 것만 제공해주었다. - P329

매카시는 이 책에 그 어느 때보다 섬세한 칼날을 들이댔다.
그리고 디디언과 마찬가지로 샐린저가 잔으로 술을 마시는 일, 담배에불을 붙이는 일 등 사소한 부분에서 글을 너무 길게 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카시가 특히 싫어한 것은 샐린저식 세계관이었다. 자신이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진짜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쟁이라는인식. 매카시는 『프래니와 주이에서 내내 출몰하는 시무어 글래스의자살 사건이 지닌 모호성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가 왜자살했는지, 불행한 결혼 때문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행복했기때문인지 알아야겠다면서, 다음과 같이 잊을 수 없는 문장으로 글을맺었다.


아니면 그가 줄곧 거짓말을 했기 때문일까? 그를 만들어낸
저자가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이 끔찍하고, 그가 가짜였기 때문에? - P330

오래전 어떤 파티에서 디디언은 노라 에프런이라는 젊은 작가를 만나친구가 되었다. 에프런은 나중에 워터게이트 스캔들을 보도해서사실상 닉슨을 탄핵시킨 두 기자 중 한 명인 칼 번스틴과 결혼했다. 두사람의 연애 과정은 마냥 행복하지 않았지만, 결혼생활은 처음에는아주 탄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번스틴은 디디언이 극도로 싫어하던, 백악관의 방침에 아부하는고분고분한 기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1980년대 말에 번스틴이 공산주의자였던 부모에 대한 회고록을쓰면서 가장 먼저 원고를 보여준 사람 중에 디디언도 포함되어 있을정도였다.
그러나 에프런과 번스틴의 관계는 결국 그리 좋지 않게 끝나고말았다. - P358

"에프런은
농담과 코미디를 좋아했다.
이 두 가지가
생존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노라 에프런이 발표한 유일한 소설은 칼 번스틴이 그녀의 삶을 파멸로몰고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70년대의 활기찬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둘 다 호전적인 성격이라서 아마 금방 죽이맞았던 것 같다. 번스틴은 아직 워터게이트 사건이라는 월계관을쓰고 있었고, 에프런은 베스트셀러 저서를 낸 페미니스트 작가이자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인기 출연자로 이미 대중적인 명성을 확보하고있었다. 타블로이드 신문의 용어를 빌리자면, 이렇게 뛰어난 사람둘이 서로 죽이 맞아 잘 어울리는 것은 운명이었다. 두 사람은 금방당대의 커플이 되었고, 1976년에 결혼했다. 그렇게 세계의 정상에서있었으나, 번스틴이 부정을 저지르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되었다. - P363

가슴앓이』는 에프런이 자신의 사명을 묘사할 때 항상 사용하던말인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를 전형적으로 보여준작품이었다. 에프런은 끔찍한 경험을 가져다가 모두가 사랑하는것으로 바꿔놓았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 매체도 몇 군데 있었지만,
‘가슴앓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덕분에 일시적으로 부자가 된에프런은 번스틴에게서 벗어났다. 따라서 애당초 에프런이 이 책을 쓴많은 목적이 달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경험이 항상 에프런을규정하게 되었다는 점은 그 목적에 포함되지 않았다. 노라 에프런은어느 모로 보나 불편한 일을 질질 끄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자기 인생의 희생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세요." 세월이 흐른 뒤웰즐리 대학 졸업식에서 에프런은 청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에프런은 희생자가 되는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이 책에서 다룬 모든 인물 중에서 에프런은 도러시 파커와 직접적인관련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 P365

에프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종의 페르소나를 구축해야 했다.
그녀의 부모는 "모든 것은 표현하기 나름이다"라는 말을 극단적으로신봉했다. 에프런이 아기였을 때, 부모는 브롱크스에서 피비의 부모와함께 살던 때의 일을 『셋은 한 가족』(Three Is a Family)이라는희곡으로 썼다. 가볍게 웃으며 볼 수 있는 코미디를 의도한작품이었으나 반응이 나빴다. 이 희곡이 영화화되었을 때, 폴린케일이 몹시 미워했던 뉴욕 타임스」의 전제적인 영화 비평가 보즐리크로우더는 "완전히 유아적"이라고 평했다. 나중에 에프런이웰즐리에 다니던 시절에 집으로 보낸 편지에서 부모는 영감을 얻어 또다른 작품을 썼다. 그들의 마지막 히트작인 『그녀를 데려가, 그녀는내 거야』(Take Her, She‘s Mine)였다. 두 사람은 재치 있는 딸이자랑스러웠는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희곡에서 딸의 말을 직접인용해버렸다.


추신, 동급생들 중에 치열 교정기를 낀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이런 걸로 개성을 나타내고 싶지는 않네요. 이게 꼭 필요한지쉬크 박사님한테 물어봐주세요. 만약 꼭 필요하다고 하신다면,
난 아마 치열교정기를 잃어버릴 것 같아요.  - P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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