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라 라 라


오늘이 모자라면 모자처럼 날아가고

모자처럼 하모니카 불고

모자처럼 새 되어

모자처럼 옆으로 돌려 쓰고

모자처럼 구름 위에 올려놓고

모자처럼 뒤집어서

새도 꺼내고

토끼도 꺼내고

사과도 꺼내고

오늘이 모자라면 라 라 라 라

모자처럼 공중에 높이 던졌다 받으며

라 라 라 라 - P40

희망


앞이 있고 그 앞에 또 앞이라 하는 것 앞에 또 앞이 있다

어느날 길을 가는 달팽이가 느닷없이 제 등에 진 집을

큰 소리나게 벼락치듯 벼락같이 내려놓고 갈 것이라는데에

일말의 기대감을 가져보는 것이다

그래 우리가 말하는 앞이라 하는 것에는 분명 무엇이 있긴 있을 것이다

달팽이가 전속력으로 길을 가는 것을 보면. - P43

소금쟁이


수련 핀 연못가에 고요히 앉아 본다

난 처음에 검불이 이리저리 불려다니는 줄 알았다

소금쟁이들이다

소금쟁이들이 이따금 물방울 듣는 파문波紋 위를

긴 다리로 왔다갔다 하면서

건너 뛰기도 하면서

파문을 놀고 있다

그걸 보자니

아다리 한쪽 빠지지 않고 살아온 내 지난至難한 삶이

감사하기만 했다. - P47

세한도歲寒圖


눈 펄펄 날리는 오늘은 내 나귀를 구해

그걸 타고 그 집에 들르리라

그집 가게 되면

일필휘지一筆揮之, 뻗치고 휘어지고 창창히 뻗은 소나무아래

지붕 낮게 해서 엎드린 그 집 주위를

한열 번은 더 돌게 되리라

우선 당호堂戶에 들기 전 헛기침을 해보고

그리고는 내 타고 간 나귀를 살그머니 소나무 기둥에

비끌어 매놓고는

그리고는 냅다 눈발 속으로 줄행랑을 치리라 하는 것이다.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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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정申鉉正서울에서 태어났으며 1974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대립對立」(1983), 「염소와 풀밭』(2003)이 있고, ‘서라벌문학상‘ (2003), ‘한국시문학상‘ (2004)을 수상했다. 20여 년 동안 시쓰기를 중단했다가 최근 다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서라벌고등학교 등에서 국어선생을 지냈으며 한동안 카피라이터 일을 하다가 현재 광고 및 편집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 시인의 말


시가 무엇입니까.
초월, 우주적 자아, 아닐 것입니다.
눈물, 삶의 더러운 때, 아닐 것입니다.
위로, 화해, 더구나 아닐 것입니다.
희망, 절망 아닐 것입니다.
죽음 관념, 아닐 것입니다.
자유, 피의 전율, 그도 아닐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을 이 지상에 초대합니다.
당신이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을 반드시 보고야 말겠습니다.

세 번째 시집을 내며
신현정

신현정의 시는 극소지향적이다. 그의 시선은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에 밀착돼 있다. 오리, 물고기, 염소, 복숭아, 참새, 소금쟁이, 풍뎅이, 달팽이집, 강아지풀, 애늙은이, 이슬 한 개, 그리고 하느님. 그는 이런 미시적인 사물에 대해 情意的인 거리를 유지하고 바라보지만 자신이 들어가 밀착될 수 있는 틈새를 찾아낸다. 그 틈새에서 그가 발견하게 되는 마음은 아름답다. 대상과 자신과의 거리를 소거하며 포개어지려는 이 밀착에의 욕구는 시를 극소화하는 질서를 낳는다. 극소화된 시의 질서와 공간은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허무의 굽은 물결을 저어가기에는 너무나 선한 인성을 지닌 오리떼를 따라가는 마음 속에도 있고 모처럼 소풍을 나와 급행을 보내버리고 천천히 완행을 타려는 마음에도있다. 신현정의 시가 보여주는 시적 공간은 극소화한 일상의 소품적 질서로 이루어져 있다. 그 속에 사회적 자아가 껴들어 있을 틈도 없다. 이것은 엄청난 고통이며 극기의 정신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이 결백주의자의 ‘강아지풀에 대한 명상‘에서 시인 스스로가 삭제하고 삭제해버린 사회적 자아를 애써찾을 필요가 없다. 시인 자신이 시를 꿈꾸는 걸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생각을구걸하는 걸인으로 시적 자아가 변형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정권(시인)

이름을 가려놓고도 누구의 시인지 알 수 있다면, 그런 시를 쓴 시인을 일컬어 흔히 一家를 이룬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신현정은 누가 뭐라고 해도 일가를 이룬 시인이다. 시에 조금만 관심을 지닌 사람이면 신현정의 시는 신현정의 시인지 알 수가 있으니 말이다. 예술가란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는사람이다. 오래 전부터 자신의 시적 스타일을 만들어나간 신현정, 그렇다면 신현정은 참으로 이 시대 몇 안 되는 예술가이며, 예술가의 길을 가는 시인이다. 왜 그런가? 신현정의 시가 다만 외적인 스타일만 유니크한 것이 아니라, 시예술로서의 언어의 싸움까지, 그러므로 시적 이미지까지 유니크하기 때문이다.
尹錫山(시인)

경계


나, 해태상의 머리 위로 뛰어올라

나는 모든 것의 경계에 섰노라 하고

외쳐보려고 한다

해태의 눈을 하고

이빨을 꽝꽝꽝 내보이며

뿔을 나부끼며

경계가 여기 있노라

연신 절을 하려고 한다

어서 오십시오

안녕히 가십시오. - P13

오리 한 줄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뒤뚱뒤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줄 일제히 꽥 꽥 꽥. - P16

자전거 도둑


봄밤이 무르익다

누군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다.

자전거를 슬쩍 타보고 싶은 거다

복사꽃과 달빛을 누비며 달리고 싶은 거다

자전거에 냉큼 올라가서는 핸들을 모으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은빛 페달을 신나게 밟아보는 거다

꽃나무를 사이사이 빠지며

달 모퉁이에서 핸들을 냅다 꺾기도 하면서

그리고 불현듯 급정거도 해보는 거다 - P18

공회전하다

자전거에 올라탄 채 공회전하다

뒷바퀴에 복사꽃 하르르 날리며

달빛 자르르 깔려들며

자르르 하르르. - P19

낮달


와, 공짜달이다

어젯밤에 봤는데 오늘 또 본다

나는 얼마나 운이 좋은 놈이면

오늘 공짜달을 다 보는가 말이다. - P25

기러기 울음


난 그렇게 듣는다

기러기들이 감나무 위를 날아가니까

기럭기럭 우는구나 하고 듣고

억새밭 위를 날아가니까 억새억새 우는구나 하고 듣고

또 달을 지나가니까 달빛달빛 우는구나 하고 듣는다

오늘 기러기들은 임진강에 떠 있는 임진각 위를 지나

북녘 하늘을 날아가니까 북녘북녘 우는구나

하고 나는 듣는다. - P26

일진日辰


오늘따라 나팔꽃이 줄지어 핀 마당 수돗가에

수건을 걸치고 나와

이 닦고 목 안 저 속까지 양치질을 하고서

늘 하던 대로 물 한 대야 받아놓고

세수를 했던 것인데

그만 모가지를 올려 씻다가 하늘 저 켠까지 보고 말았다

이때 담장을 튕겨져나온 보라빛 나팔꽃 한 개가

내 눈을 가렸기 망정이지

하늘 저 켠을 공연스레 다 볼 뻔하였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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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생 이야기에서 가장 흔한 은유 중 하나는 아웃소싱(위탁)이다. 흰개미는 소화를 위한 작업을 곰팡이에게 위탁했다고말하거나, 곰팡이는 식량을 모으고 살기 편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을 흰개미에게 위탁해 해결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생물학적 과정을 현대 비즈니스 방식에 비유하는 것에는 사실상 너무 많은 오류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이것에 한 가지 통찰이 존재할지도모르겠다. 자본주의적 공급사슬에서 이러한 방식의 사슬은 확장될 수 없다. 자본주의적 공급사슬의 구성 요소는 회사든 생물종이든 간에 자기복제를 하는 교환 가능한 사물로 축소될 수 없다. 대신에 그 사슬을 유지하는 마주침의 역사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있다. 경제에서와 마찬가지로, 수학적 모델링보다는 자연사의 서술이 첫 번째 필수 단계다. 급진적인 호기심이 손짓한다. 아마도 관찰과 서술에 가치를 두는, 몇 개 남지 않은 과학적 학문 중 한 분야에서 훈련받은 인류학자가 한 역할을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 P265

풍경은 인간 너머의 드라마가 이루어지는 장소로, 인간의 자만심을 해체하는 급진적인 도구다. 풍경은 역사적 행위의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활동적이다. 풍경이 형성되는 것을 지켜보면 세계 형성에서 인간이 살아 있는 다른 존재에 합류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송이버섯과 소나무는 숲에서 그저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둘은 숲을 만든다. 송이버섯 숲은 풍경을 만들고 변형하는모임 gatherings 이다. 이 책의 3부는 교란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교란을 시작점, 즉 행동을 위한 첫 단추로 삼는다. 교란은 변형적인 마주침을 위한 가능성을 재배치한다. 풍경의 패치들은 교란에서 등장한다. 그리하여 불안정성 precarity은 인간을 넘어서는 사회성에서 일어난다. - P271

그러나 나는 비교를 넘어서서 인간, 송이버섯, 소나무가 숲을창조하는 역사를 찾고 있다. 나는 구분해 범주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직 다루어지지 않은 연구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그 국면들을 연구한다. 나는 서로 다른 겉모습을 가진 똑같은 숲을 찾는다. 각각의 숲은 상대방의 그림자를 통해 모습을 보인다. 그렇게 하는 동시에 단일하고도 다면적인 형성을 탐구하면서 앞으로 펼쳐질네 개의 장에서는 소나무를 살펴볼 것이다. 각각의 장은 교란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삶의 방식이 어떻게 조율되며 펼쳐지는지 설명한다. 삶의 방식이 하나로 모이면서 패치에 기반한 배치가 형성된다. 내가 보여주는 배치는 거주 적합성, 즉 인간이 교란한 지구에서 일반적인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지를 고려하기 위한 장면이다.
불안정한 생활은 항상 모험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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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기 전


우리 아버지 운다, 땅에 엎드려
우리 아버지 운다, 저 바람의 힘줄을 쥐고
우리 아버지 운다, 늙은 잎사귀들을 훑어 뿌리며
우리 아버지 운다, 모래알같이 흩어지며
우리 아버지 운다, 개미들이 기어가는 걸 보며
우리 아버지 운다,
우리 아버지 운다.

누군가 이 세상을
등기 이전도 안하고 옮겨가나 봐.
죽은 자를 문상하고 돌아가나 봐.

발소리 섞여 멀어 가는 빗소리에 귀가 환하게 열린다.

관절이 쑤시는 걸 보니
비가 많이 오려나 봐.
세상의 호수들이 다 넘치도록
비가 오려나봐 - P80

대추 한 알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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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에 구워낸 단단한 소금 같은 그의 시편들은 천근 슬픔의 천일염을 녹이고도 남는다. 사라지는 것도 존재의 한 방식이라고 놀라운 말을 하는 그는 몸을 열어 시를 받은 타고난 시인이다. 그의 시에는 언제나 생취가 있고 생의가 있어, 시의 솟는 힘으로 마음을 불끈 들어올려준다. 그의 시는 벼랑을 품은 자의 장엄이며심지 깊은 은자전(隱者傳)이다. 세상이 그를 까맣게 잊어 마침내 고요의 달인으로 등극하고 싶었다고 쓸 때 그의 시는 고요가 세운 한 채의 요사채며, 땅에서 주저앉은 자 땅에 뿌리를 내린다고 쓸 때 그의 시는 일획으로 직립(直立)하는 한그루 금강송이다. 고요가 그토록 공들여 뜸들이니⋯ 법향(法香)처럼 만리나 퍼질 그의 시여! 우주의 살에다 한 나라를 세우시라.
천양희(시인)

장석주 시가 도달한 이 처사풍(處士風)은 시인이 감당하고 있는 고독의 크기에 비례하여 그윽할 만큼 그윽하다. 그의 마음이 가는 길은 말벗 하나 없는 외로움의 길이면서 또한 무구한 유희와 도취의 길이다. 투명한 ‘혼자임‘ 속에서 단련된 그 마음은 가을 물고기처럼 슬프고도 자유롭다. 그러나 뒤집어 보면 그모든 것이 또한 영혼의 슬픈 허영일 뿐임을 그는 모르지 않는다. 허나 어쩌랴, 그것이 모든 시인됨의 천형인 것을.
김사인(시인)

□시인의 말


내 고혈을 빨고 비명마저 싹싹 핥고
그래도 미진한지 두리번거리는 너,
고문기술자, 악덕 포주, 끔찍한 세리여!


졸렬하고 비루한 걸 오래 잘도 물고늘어졌다.
네가 아니었다면 영혼의 무게를 어떻게 측정할 수 있으며, 꽃 피어나 괴롭고 황홀한 세월을 어찌 견딜 수 있었으랴!
봄 모란꽃 가슴에 품고 가을 매 눈에 담고 
더불어 예까지 왔으니,
그동안 네게 떼어준 약간의 피와 땀방울과 푼돈의 시간들은 후회하지 않겠다.
여명의 시각은 내 것이 아니다.
내겐 해질녘의 긴 그림자 밖에는 없다.
쥐어짜도 더는 나올 게 없으니, 이제 그만,
내 머리끄댕이를 놓아다오.


시여!

수졸재에서
이천오년 여름에 쓰다

단감


단감 마른 꼭지는
단감의 배꼽이다.
단감 꼭지 떨어진 자리는
수만 봄이 머물고
왈칵, 우주가 쏟아져 들어온 흔적,

배꼽은 돌아갈 길을 잠근다.
퇴로가 없다.
이 길은 금계랍 덧칠한 어매의 젖보다
쓰고
멀고 험하다.

상처가 본디 꽃이 진
자리인 것을, - P14

태양초


붉고 메마른 것이
우리에게 왔다.

금햇빛을 쪽쪽 빨아먹고
혈소판마저 투명해졌구나.
가난하고 천하면서 뻣뻣한 것,
너는 본향을 잊었구나.

비릿한 게 마르면 가슴 더 붉어지고
몸뚱이는 가벼워지는가! - P15

수그리다


바람 섞여 진눈깨비 치는 저녁,
흘러나온 불빛이
코뚜레 뚫은 송아지처럼 길게길게 운다.

길 나서지 못한 사람 살고 있다고,
가는 저녁 다시 못 온다고,
다정한 몸 속으로
울음이 뭉툭하게 밀려든다.

저녁마다 밀려오고 밀려나가는 것들 속에서
무릎 아래 그림자 키우는
누군가의 재개봉영화 같은 생이 밀려간다.

누군가 어둠 쪽으로 몸 돌려
꽃피는 머리를 수그린다. - P22

오동나무


먹물 찍어 힘차게 세로로 내리 그었다.
오동나무는
일획으로 직립直立한다.

마른 풀에 서리 앉은 아침,
청어떼 잔구름을 끌며
오동나무는 개간지 위에 서 있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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