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다 아야幸田文(1904-1990)

"한평생 둘러보며 살고 싶다."

1904년 도쿄 출생. 일본의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고다로한 (1867~1947)과 그의 아내 기미코 사이에서 둘째아이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2년후엔 언니를, 그리고 스물두 살이 되던 해엔 남동생마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1928년 청주 도매업을 하는 이쿠노스케와 결혼해 이듬해 딸(훗날 작가 아오키 다마)을 낳았다. 그러나 가업이 기울며 10년 만에 이혼하고 딸과 함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194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함께했다.
아버지 고다 로한의 삶과 문학을 기리며 그와의 일상을 기록한 『잡기 종언」 「장송의 기 등을 발표하면서 문필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54년에 발표한 단편집 『검은 옷자락요미우리 문학상을 수으로상하며 널리 이름을 알렸다. 1956년 소설 『흐르다신초샤 문학상과 일본예술원상을 받았고, 1973년 『싸움으로 제12회 여류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여러 작품을 발표하였으며 특유의 관찰과 섬세한 감성으로 평단과 대중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1990년 가을, 향년 86세로 생을 마감했다.

나무는 고다 아야가 타계한 후 출간된 유작으로 지금까지도 독자들에게 커다란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고단사신초, 헤이본사 등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출판사에서 새로운 장정으로 거듭 출판되고 있다.

궁금하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주인공 히라야마가 헌책방에 가서 고르는 고다 아야의 나무 이야기다. 서점 주인은 그가고른 책을 보고는 "고다 아야 너무 저평가됐죠? 같은 단어도 이분이 쓰면 느낌이 다르다니까"라며 말을 건넨다. 책값을 계산하는 히라야마의 눈은 이미 첫 페이지에 꽂혀 있다. 아마 첫 문장을 읽고 있을 것이다. "이야기는 갑자기 가문비나무의 세대교체로 옮겨갔다."
말년의 노작가가 홋카이도에서 야쿠섬까지 일본의 나무들을 찾아다니며 쓰고 엮은 산문집 『나무는 비전문가의 눈으로 착실하게 초목을 배워가며 그 안에 머문시간 그 자체다. 식물학자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몰랐을, 초목에 눈 밝았던 언니는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소설가였던 아버지는 그 전에도, 후에도, 꽃 이야기, 나무 이야기를 해주었다. 작가의 아버지에서 딸에 이르는 3대가 등꽃을 둘러싸고 나누는 대화는 다감하게 회고적인데,

그 안에 출렁이는 감상이 「나무』를 각별히 빛나게 한다.
고다 아야는 시종 조바심 내며 발걸음을 옮긴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오늘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성급하게 쫓아간다. 다음 기회를 기약하던 지금까지의 여유는 사라져버렸다." 여유 없음이 충만함을 부른다. 매 순간이 귀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하야시 후미코가 "한 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라고 쓴 바 있다는 야쿠섬은 훗날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모티브가 된 장소로도 알려져 있는데, 고다 아야의 글로 야쿠섬을 방문하면 "신은 높은 나무 꼭대기로 강림한다"라는 말이 절절하게 와닿는다.
나무와 문학이 만나 『나무』가 되었다. 이 책의 탐미주의는 곧게 뻗어 자라는 초목의 힘만큼이나 죽음과 붕괴에 격렬하게 반응한다. 말년의 글쓰기가 갖는 깊은 눈짓이 이런 것 아닐까.

이다혜 작가, 『씨네21』 기자

나는 식물을 ‘종‘ 단위로 이야기할 때가 많다. 내가 그리는 식물세밀화 또한 종을 식별하기 위한 그림이다. 나는 줄곧 종보다 더 촘촘한 단위, 이를테면 북한강변에 선 버드나무, 어느 수목원 박물관 앞 복자기나무처럼 ‘개체‘로서 식물을 이야기하기를 꿈꾼다. 하나의 종 이전에 한 그루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내내 나무를 ‘개체‘로 이야기한다. 도쿄 에도가와의 절에 있는 소나무, 미에현 스즈카의 전원 속에 있는 녹나무, 후쿠시마현의 도로 옆 밭에 있는 삼나무...... 작가의 시선은 눈앞의 나무 한 그루에서 시작해 일본 전역의 나무와 식물계, 더 나아가 환경과 인간에 대한 사색에까지 이른다.
이 책은 에세이 같기도 하고, 도감 같기도 하며, 긴 시와 같기도 하다. 나무 이야기 속에 인간의 삶의 이야기가 흐른다. 가을 숲을 묘사하며 다가올 겨울을 예감하고, 지나온 여름을 기억한다. 그야말로 이 책은 내내

오묘하다.
나는 이 책이 나무를 이야기하는 방식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이소영 식물세밀화가

이야기는 갑자기 가문비나무의 세대교체로 옮겨갔다.
홋카이도 자연림에서 가문비나무는 쓰러져 죽은나무 위로 새로운 나무가 자란다. 물론 숲속의 가문비나무가 해마다 지상에 퍼뜨리는 씨앗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홋카이도의 자연환경은 열악하다. 싹이 터도 나무로 자라지 못한다. 하지만 쓰러져 죽은 나무 위에 안착해 싹을 틔운 씨앗은 행복한 씨앗이다. 수월하게 자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무 걱정 없이 여유 있게 커갈 수 - P11

는 없다. 쓰러져 죽은 나무 위는 좁다. 약한 존재는버티지 못하고 사라진다. 열악한 조건에 적응할 수있는 정말 강하고 운 좋은 소수의 몇 그루만 겨우 생존을 허락받는데 현재 수령이 300~400년쯤 된 나무도 있다. 이 나무들은 같은 나무 위에 안착해 자랐기때문에 일렬종대로 가지런하고 반듯하게 열 맞춰서있다. 그러니 아무리 뭘 모르는 사람이라도 한눈에
‘아, 이게 쓰러져 죽은 나무 위로 새로운 나무가 자라난 세대교체의 현장이구나‘ 하고 알아챌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에서 산속의 차가운 공기가 느껴졌다. 감동이 느껴졌다. 이 얼마나 흥미로운 이야기인가. 이 얼마나 인상적인 이야기인가.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내 눈으로 꼭 직접 확인해보리라 결심했다.
- P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만
오늘이 내일을 위한 준비는 아니었으면 해요.
오늘은 오늘의 나를 위한 시작이었으면 해요.


그 어떤 것이든
나를 위한 의미를 두어
지금 나는 특별하다고,
지금 나는 특별한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해요.


따뜻하게 보내요.
의미 있게 보내요.
오늘의 나를 위해. - P79

짐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짐작하지 말고 조건 없이 내어주는 것.
짐작하지 말고 사실만을 바라보는 것.


그렇게 괜한 짐작들로 넘겨짚지만 않아도,
우리의 관계는 더 이상 면역이 필요한 사이가 아니라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면서도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관계가 될 수 있다. - P102

당신을 진심으로 걱정해주고, 당신이 힘들 때 기꺼이 공감하고 힘이 되기 위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많다. 생각보다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을 알아주기 바란다.
이제 혼자 슬퍼하지 말고 손을 내밀자.
나는 내가, 아니 우리가 충분히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우리모두가 비슷한 모양의 힘듦을 느끼며 살고 있기에....


행복하자.
행복하자, 우리 모두.


그리고 단 한 사람에게라도
위안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자. - P126

세상에 혼자인 것 같을 때면 그 감정을 느낄 수 있음에 다행이라고 말해주고, 상처받아 무너졌을 때는 그 상처가 더 큰 성장을 위한 쉬어감이라 용기를 내는 것이 필요하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바란 적도 있지만 스스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어야 한다는 생각을 이제야 한다.
누군가를 도우라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라고 배워왔지만스스로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면 나도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나를 도운 만큼 남도 도울 수 있는 여유가 생기지 않았을까. - P1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요즘 들어 어지럽고 부산한 세상에서 책 한 권 읽을 시간이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세상 살기가 팍팍하고 건조한 와중에도 자리에 앉아 따뜻한 밥 한 끼 먹을 수 있다는 것에 고맙습니다.
하루의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 사치스러운 일도 아닌데 참 많은 시간들을 그저 흘려보냈더군요. 사람마다의 인생은 각자 생각하기 나름인데 그동안 감사함을 잊고 지냈습니다.


어두운 면만 바라보다 아름다운 세상을 
놓쳤고 - P16

불편한 소음에 집중하다 평온한 음악을 잃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물욕에 사로잡혀 가족의 
온기를 느끼지 못했고
잠깐의 즐거움을 좇다
나를 바라봐주는 소중한 이에게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나의 두 눈, 두 귀, 두 손과 두 발
이 모든 것들은 예쁘고 좋은 것들로 향했어야 했는데
좋지 않은 것들로 향하고 있었더군요.


사랑하는 사람의 두 눈을 자주 바라봐주어야 했고
날 필요로 하는 친구의 이야기에 귀 기울어주어야 했으며
어릴 적 항상 잡던 부모님의 손은 내가 더 잡았어야 했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경험을 하기 위해
용기 있는 발걸음을 떼어야 했던 겁니다.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아야 합니다.
내가 누리는 것들이 - P17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어둠이 빛으로 바뀌고
슬픔이 환희로 변하며
고독이 행복으로 뒤집히는 경험을 하게 될 테니까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쉽게 놓치고 살 뿐이죠.


오늘의 나는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 P18

따뜻한 인성을 지닌 사람이 좋다.
자신이 어떤 사회적 위치에 있든 겸손한 사람이 좋다.
상냥한 마음으로 정직하려 애쓰는 사람이 좋다.
성실하고 근면하며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좋다.
나에게 좋은 사람은 선한 사람이었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행복이 늘 나를 따랐다.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좋은 사람이 온다.
당신이 나에게 좋은 사람으로 다가오길 빈다.
나는 당신에게 좋은 사람이 되겠다. - P21

물론 ‘포기‘에도 저마다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기준이 상대여서는 안 된다. 내가 되어야 한다.
타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애쓰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위해 애쓰는 것 원치 않는 관계를 끊기보다는 나에게 편안함과 따뜻함을 주는 사람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포기 속에서도 단 하나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기준이 되어야 할, 나 자신이다.
다른 모든 이가 당신을 포기한다 하더라도 나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일이다. - P24

어쩌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일 텐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지 못해 힘들어지게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죠.
존재의 가치를 아는 사람은 알겠죠.
변함없는 것 또한 그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는 것을요. - P45

나는 다양한 곳을 여행하면서 게으름이 때로는 삶을 윤기 있게 해준다는 것을 몸소 깨달았다. 부지런히 이곳저곳을 다니며많은 것을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한곳에서 유유자적 게으르게 다녀보는 것도 좋다.
하나라도 더 눈에 담는다고 무엇 하나 제대로 담을 새도 없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여행보다 조금은 게으른 여행을 권하고싶다. 한 나라를 관광하는 여행보다 그 나라에 온전히 속해 생활하는 여행자가 되어보는 것도 좋다. - P49

게으름이라는 건 그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좋아 보일수도 나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긍정적인 마음가짐으로 바라본다면 게으르게 다니면서 벌어지는 일들이 신선한 재미로 다가오거나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경험하려면 가끔은 게을러지는 것도 좋다. - P50

나를 완벽히 알 수 없듯이 상대 또한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줄 수 없죠. 타인의 삶이 완벽해 보이더라도 내면 깊숙한 곳에는결핍이 있을 수 있고, 부족해 보이더라도 마음은 풍요로울 수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상대의 행복을 판단할 수 없고 불행의 정도를 가늠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뱉은 말들은 나를 비추는 거울입니다. 마음을 담지 않는 말들은 그대로 돌아오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말 때문에 좌절하고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있으니까요. 타인을 알지 못한 채 추측하고 말을 만들어 내며 전하는 것은, 결국 나를 낮추는 것입니다. 나의 말이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고 그것이 곧 나의 인격일수밖에 없으니까요. - P52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과 진한 우정을 맺거나 애써 찾아간 맛집이 문을 닫아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간 옆집 식당에서 의외로 멋진 식사를 하는 것처럼.


그러니 거기,
오늘도 완벽하려고 애쓰는 당신에게 전한다.


하지 않아도 될 일들에 치여 지쳐 있다면,
이제는 그 꼼꼼함을 잠깐 내려놓고
허술함이 선물하는 행운을 맛보는 건 어떨까.


빈틈이 많다고 해서 인생이 허술한 모양으로 흐르는 건 아니기에, 때로는 작은 빈틈 안에서 사막의 오아시스를 발견할 수 있기에, 그런 인생이 나쁘다고 단정 지을 수 없기에.
오늘도 나는 허술해도 괜찮은 당신을 응원한다. - P5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유인으로 살다가 고요히 사라지고 싶은 욕망은 나를 꽤 두껍게 둘러싸고 있는 세계다. 나는 내가 그런 에너지를 발산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에너지가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나의 자아 깊은 곳의 에너지가 나를 마니로 가게 만들었다. 나는 은둔자, 몽상가, 이상주의자, 게릴라, 난민, 잔존 세력들이 걸었던 그 길로 마니에 갔다. 타이게토스 산맥을 넘으면 구불구불한 언덕들이 나타나고 이어서 그리스에서 흔히 볼수 있는 지붕의 둥근 성당들이 나타난다. 그다음에 눈에들어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마니를 그리스의 다른 어떤 마을과도 다르게 보이게 만든다. 바로 탑들이다. 마니의 탑은 설명하자면 그냥 탑이다. 직사각형 돌탑. 아무런 장식도 없고 특별할 것도 없는 그냥 탑.  - P179

레이먼드 카버의 시 「캅카스」에 이런 구절이 있다.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캅카스에서는 노을이 전부라고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노을로는 부족하다. 페테르부르크 사람들은, 캅카스는 전설이 만들어지는 곳이고, 날마다 영웅들이 태어나는 곳이라고 말했다." 내가 이 시를 읽은 것은 마니를 다녀오고 7년 뒤였다. 처음이 시를 읽을 때 나는 마니를 떠올렸다. 그 뒤로는 언제나 이 시와 함께 마니를 떠올린다.
마니의 노을은 아름다웠지만 노을로는 부족했다. 폐허에 바람이 불면 보이지 않는 할머니가 지팡이에 의지해 "끙!" 어렵게 무릎을 펴고, "끙!" 소리를 신호 삼아 할머니 뒤를 따라서 뭐라고 불리든 보이지 않던 사람들,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 사람들, 현실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소속감을 느낄 어떤 이야기를기다리던 사람들이 "이놈들! 좋은 사람이 뭔지 제대로 맛을 보여주겠다!" 소리를 지르고 뛰쳐나와 토대부터 무너지는 폐허 (폐허인지도 모르고 우리가 사는 사회)가 된 세 - P185

상에,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모든 것에, 피도, 눈물도, 사랑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저항을 선포하면 좋겠다. 우리는 이 폐허에서 무엇을 위해 살고 사랑하고 싸워야했지?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야 했지? 대답을 찾는사람들이 날마다 태어나고 제 몫을 해내다가 어느 아름다운 날의 노을처럼 장엄하게 지면 좋겠다. 황제의 이야기가 죽음 너머 기억되는 것은 그의 책임감과 희생과 헌신 때문이다. 사랑 안에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이 없다면 시간과 우연 너머 살아남는 것은 없다. 사실 그것을 빼면 우리 인생에 무슨 좋은 이야기가 남아 있겠는가. 우리는 우연의 산물이지만, 책임감과 희생과 헌신의 경이로운이야기들의 연속된 흐름 속에 있을 수 있다. - P186

나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 중 포기와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은 많은 포기들이 발명 중이다. 고기 안 먹을래, 모피 안 입을래, 가죽 안 입을래, 비행기 안 탈래, 에어컨 안 켤래, 난방 안 켤래, 빨대 안 쓸래, 종이컵 안 쓸래, 자동차 안 탈래, 비닐봉투 안 쓸래, 농약 안 뿌릴래, 나무 안 벨래. 바다에 쓰레기 버리지 않을래. 이제 더 이상 새 옷은 사지 않을래.. 이렇게까지 다른 생명과의 관계를 고민하는 것에는 감동적인 면이있다. 나와 타인, 나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고민은 당연한 것 같지만 그렇다고 꼭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꼭 다정해야 할 이유는 없다.
꼭 따뜻해야 할, 꼭 친절해야 할 이유도 없다. 꼭 페르난도 페소아 시 「만약 내가 일찍 죽는다면」의 한 구절 같다.
"나도 한 번은 사랑을 했지, 날 사랑하리라고도 생각했지, /그러나 사랑받지 못했지. / 꼭 받아야만 하는 법은 없다는/유일한 큰 이유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지."
"왜 내가 너를 사랑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 P188

없어"가 맞는 대답이다. "왜 내가 다른 생명을, 미래 세대를 생각해야 해?", "꼭 그래야 할 이유는 없어." 이것 역시 맞는 대답이다. 외롭지 않고 싶다는 것은 우리 모두 열망하는 감정이지만 외롭지 않기는 무척 어렵다. 우리가 외톱기를 택할 가능성이 훨씬 높으므로, 무관심, 무책임, 외면, 조롱, 무시, 냉소, 혐오가 많다면 그것은 그렇게 하는것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쉽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구 생명이 겪고 있는 위기 때문에 뭔가 ‘포기‘하는사람, 뭔가 ‘하지 않는 사람‘은 그 쉬운 길을 택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 P189

다정함도 온기도 사랑도 책임감도 없이 사는 것이어떤 것인지... 각자의 어두운 기억이 두텁게 쌓여가는이 세상에서, 결국은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에너지가 발산되는 이 세상에서, 누군가 ‘우리 모두의 것인 삶‘에대해 뭐라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감동적이다. 그래서다른 생명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그 전에 하던 일을 더 이상하지 않게 되는-포기와 자제와 하지 않음 쪽으로의 변화를 살아내는, 그렇게 미래 세계의 일부가 되려는 사람들이 내 눈에는 경이로워 보인다. 지구의 여러 문제에 우선 자신의 삶으로 대답하려고 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제하고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는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줄 - P189

알기 때문에 꼭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런 사람들의 핏속에는 별빛이 흘러다닌다. 피부에는 별빛 가루가 뿌려져 있다. 이 사람들의 빛이 내게로 흘러온다. 이런 사람들이 없다면 말을 건넬 사람도, 기댈 곳도, 기대할 것도 없이 살게 된다. 나는 하늘의 별을 볼 때처럼, 심금을 울리는 희생과 헌신과 책임감의 이야기들에매료된다. 나의 욕망 중 가장 큰 욕망은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에 대한 욕망이고 나는 이 사람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적인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본다. 나는 이 경이로운마음들과 함께 멀리 가보고 싶다. 더 많은 하지 않음, 포기를 발명하면서. - P190

행복해지려고 그렇게 했다고?
좋아. 행복해 보인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외로워 보이는군솔직히 말해도 될까?
네가 예전처럼 근사해 보이진 않아.
네가 행복하려고 한 선택 때문에
너는 내가 예전에 알던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야
너의 행복이라는
그 헛소리를 다 뒤집으면 거기에 희망이 있어
그럴 마음이 들면 전화해
전화번호는 같아

_미상(「바뀌지 않는 전화번호」, 파르테논이 정면으로보이는 카페에서 본 시)

황금 파고다가 있고, 새벽마다 파고다를 스치는 바람이 황금의 소리를 전하고, 황금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땅, 미얀마. 그 땅 속에 묻힌 지하자원이란 이름의 황금 보물들이 피를 부르고 있었다. 욕망이 같다면 동일한 운명이 기다린다. "저주가 같다면 나를 부르는 이름이 뭐가 중요하냐." 이것은 보르헤스의 말이다. "내일 전쟁터에서 나를 생각하라."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말이다. - P211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자연이 아니고 돈이다.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수익을 창출해야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성장은 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이 이야기 속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일부 인간만이 남는다. 이 세상이 최선의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잘 적응한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이것이 우리 시대의 메인 서사다. 이것이 우리가 공유하는 정신적 배경이다.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다면 우리는 적응을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가 지구에 드리운 그림자가 되어서 우리에게 돌아왔다. 코로나바이러스, 기후위기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살아 있고 죽이는 이야기를 한다. 우리는 살아있고 죽이는 언어를 쓴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는 우리가상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힘이 있다. 우리는 현실의 세계를 살지만 허구와 환상의 세계-이야기의 세계에도 살기 - P212

때문이다. 내면에 깊게 뿌리 내린 다음 우리가 그 안에서 굳어져 그것에 따라 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무시무시하고 엄청난 힘이다. 우리가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하는 이유? 하나의 이야기밖에 모른다면 하나의 삶밖에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세계가 다른 삶이 가능함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쨌든 이것들은 내가 마음 편히 깃들 이야기들이 아니다. 나의 좋은 부분을 자극하지 않는다. 이것이 내 이야기이도록 놔둘 수 없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새로운운명을 마련해주고 새로운 가능성에 마음을 열게 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가 얼마나 애타게 지구를 돈을 벌어줄 자원으로 보고 싶어 하는지 잘 아는 아미타브 고시의 지도가 가리키는 출구 쪽 화살표에는 ‘이제 이야기를 바꿔라‘라고 써 있다. 앞으로는 자연을 빼놓고는 미래에대해서 이야기하기가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모든것을 자원으로 보는 이야기 속에는 어떤 탈출도 해방도없다. - P213

더그는 공원의 일부분이 되었다. 훌륭한 꿈과 끝까지서로에게 헌신하고 충실했던 사랑이야기의 일부분이 되었다.
「지도 끝의 모험』은 야생을 모험한 이야기이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친구와 사랑을 찾고 인생을 바쳐 해야 할 일을 찾고 자신의 삶을 만들고 아직 우리가 가보지못한 길을 만들면서 살아간다는 고난이도의 인생 모험이야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조금 더 생각해보고 싶다. 우리가 듣고 나누는 많은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우리 인류가 달라질 미래를 믿지않는다. 사실은 달라질 자신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보는 대로 세상을 본다. 하지만 미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머릿속 생각이고 꿈이다. 세상은 우리의 상상과꿈과 생각대로 만들어지고, 상상하고 꿈꾸지 않으면 영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미래를 믿지 않으면 제일먼저 사라지는 것이 이야기꾼의 능력이다. 이야기는 "그 - P219

다음엔 어떻게 돼?" "그 일 다음엔?" 시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도를 잃는 것이다. 우리는 이야기에 따라살아가기 때문에. 그렇게 결국은 타인이 그린 지도를 따라 타인 ㅡ부동산 개발업자나 파워엘리트, 메인파워, 인싸, 인플루언서, 국회의원 등등의 뭐 그런 파워풀해 보이는 이름을 가진ㅡ이 쓰는 이야기에 따라 살게 된다. 문제는 누구도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따라 하고 있는 이야기 중 뭔가를 잊어버려야한다. 각자를 지배하는 메인서사ㅡ어느새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믿게 만들어버린ㅡ 의 환상을 깨야 한다. 우리가 행복이라고 믿었던 것, 그래서 그 길을 향해 달려가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을 의심해봐야 한다. 그래야 삶과 미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고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곳에 에너지를 쓰면서 다른 미래에 살고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 P220

내 눈에 릭과 친구들의 희망과 열정은 이 불타는 지구에서 지금 가장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열정을 현실 유지가 아닌 없던 것의 창조에 바쳤다. 나는 이 열정을 공유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같은 꿈을 꾸는것에 대해선 극도로 말하지 않고, 그래서 타인으로부터 - P220

에너지를 받는 일이 드물어졌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어떻게 에너지를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발산할수 있겠는가? 입력이 있어야 출력이 있다. 나는 나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감탄할 만한 이야기를 따라 사는 데서,
마음이 가는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려고 하는 데서 나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살 때 나는 어디에 힘을 써야 할지 모르는 슬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나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나 자신을 겨우 신뢰할 수 있었다. 나는이렇게 타인의 이야기에서 에너지를 받는 것을 이야기의 초대라고 표현해왔다. 이제는 이 이야기의 초대에 따라길을 가는 것을 삶의 발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P221

나는 이제 귤을 먹을 때마다 자이로와 친구들을 생각하고 완벽한 의사소통을 이루었던 야쿠시마 섬의 한밤중마임을 생각하고 그날 떠 있던 달, 나의 오랜 친구인 달ㅡ내가 힘들 때마다 숱하게 바라보던 달, 구름을 뚫고 나오던 모습을 지치도록 바라보게 만들었던 달ㅡ을 거북이도 바라보고 길을 찾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달은 내속마음도 들어줘야 하고 거북이, 조개, 아주 많은 생물들이 길을 찾게 도와줘야 하니 정말 바쁘겠다는 생각을 하고, 알 하나하나가 들려줄 수 있는 생명의 신비와 고난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거북이 알은 생명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는 존재다. 달이 그런 것처럼, 파도가 그 - P226

런 것처럼.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고 지구는 더 이상 황금 보물을 찾아 정복할 곳이 아니라 잃어버린 의미와 신비를 되찾는 곳이다. 나는 거북이 알과 맛있는 귤에 걸맞은 이야기를 따라가볼 생각이다. "이 이야기가 딱이야!"
그런 이야기를 찾을 수만 있다면 세상에 돌려줄 것이다. - P2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이스 세풀베다Luis Sepúlveda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행동하는 지성이었던 세풀베다는 소설을 비롯한 여러 장르의 작품들을 발표하며 폭넓은 작품 세계를 펼쳐 왔다. 특히 환경과 소수 민족 등에 관한 모두의 각성을 촉구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 많다. 1949년 칠레에서 태어난 그는 피노체트가 정권을 장악하자 당시 많은 칠레 지식인들이 그러했듯 오직 목숨을 잃지 않기 위해 망명해야 했다. 수년간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여행하며 글을 쓰고 환경 운동을 펼치다가 파리를 거쳐 독일로 이주했으며, 1997년 스페인 북부에 정착해 남은 생을 이곳에서 가족과 함께 보냈다. 2017년 5월, 27년 만에 칠레 국적을 회복했다. 세풀베다는 1989년 연애소설 읽는노인』으로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하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장편소설 『지구 끝의 사람들』(1989), 『귀향, (1994),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1995), 우리였던 그림자』(2009), 중단편 소설집 「외면」(1997), 「그림 형제 최악의 스토리』 (2004), 『알라디노의 램프」(2008), 
에세이 길 끝에서 만난 이야기 (2010) 등을 발표했다. 동화책 생쥐와 친구가 된 고양이』(2012), ‘느림의 중요성을 깨달은 달팽 이(2013), 자신의 이름을 지킨 개 이야기 (2015) 등은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전 세계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다.
2016년 헤밍웨이 문학상을 수상하며 <강렬한 알레고리를 통해 우리 시대의 위기와 가치들을 은유적으로 의미심장하게 표현하는 동화를 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바다를 말하는 하얀 고래』는 2019년 5월 발표된 그의 유작으로,
거대한 향유고래가 바다의 평화를 깨뜨리는 탐욕스러운 인간들에게 맞서 투쟁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자연의 리듬에 따라 조화롭게살아가는 생명체들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절망이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 이 철학 동화는, 우리 현대인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보호하기를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세풀베다는2020년 4월, 코로나19에 감염되어 향년 7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래서 고래는 춤추듯 흔들리는 물결 사이에서
신을 엿보기 위해
물 위로 나갔다.
그러자 고래의 눈에 신이 보였다.

-오메로 아리드히스‘ 「고래의 눈」

고래의 눈은 인간들에게서 본 것을 멀리서도
포착한다. 고래의 눈은 우리 인간이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대플리니우스‘ 『박물지』

2014년 남반구의 어느 여름날, 고래 한 마리가 칠레 푸에르토몬트‘ 부근의 한 자갈해변으로 떠밀려 올라와 있었다. 길이가 15미터가량 되고 신기한 잿빛을 띤 향유고래였다. 하지만 그 고래는 해변에 널브러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본 어떤 어부들은 길 잃은 고래일지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은 반면, 다른 이들은 사람들이 무심코 바다에 내버린 쓰레기로 인해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주변에 있던 모든 이들은 무거운 침묵으로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 드러누운 거대한 해양 동물의명복을 빌었다.
고래는 간조 때의 잔잔한 물결에 흐느적흐느적 흔들 - P11

리고 있었다. 거의 두 시간이 다 되어 갈 무렵, 배 한 척이 다가오더니 고래를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곤 몇 사람이 배에서 뛰어내려 들고 있던 굵은 밧줄로고래의 꼬리지느러미, 혹은 꼬리를 묶었다. 잠시 후, 배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바다 거인의 몸을 끌고 느릿느릿하게 남쪽으로 향했다.
「저 고래를 어떻게 하려는 거죠?」 양털 모자를 손에꼭 쥔 채 서서히 멀어져 가는 배를 바라보고 있던 어부에게 내가 물었다.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려는 거지요. 일단 저만(灣)의 남쪽 출구를 지나 넓은 바다에 이르면, 고래의 몸이다시 뜨지 않도록 배를 갈라 속을 다 비울 겁니다. 그러고 나면 대양의 차가운 어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겠죠」 어부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배와 고래가 바다 위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들 사이로 사라지자, 해변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한 아이는 자리를 떠나지 않은 채 바다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저 먼 수평선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검은 눈동자에서 두 줄 - P12

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도 마음이 아프구나. 넌 여기 사니? 나는 인사를겸해서 아이에게 물었다.
하지만 아이는 대답하기에 앞서 자갈밭 해변에 앉았다. 나도 그 아이를 따라 옆에 앉았다.
「네, 맞아요. 나는 라프켄체니까요. 혹시 그게 무슨뜻인지 아세요?」 아이가 물었다.
<바다의 사람들>이라는 뜻이지. 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아저씨는 왜 슬퍼하는 거예요?」 아이가 궁금한지 물었다.
「고래 때문에, 저 고래는 어떻게 될까?」 아저씨 눈에는 그냥 죽은 고래로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그 이상이에요. 그러니까 아저씨의 슬픔과 나의 슬픔은 똑같지 않아요.」 파도가 밀려오고 밀려가는 가운데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침내 그 아이는 자기 손보 - P13

다 더 큰 무언가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금조개‘였다. 껍질은 울퉁불퉁해서 마치 돌멩이처럼 보였지만, 안은 진주처럼 하얀 빛깔을 띠고 있었다.
「그걸 귀에 대고 있으면 고래가 말을 해줄 거예요.」라프켄체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어두운 빛깔의 자갈해변을 따라 잰걸음으로 떠나 버렸다.
나는 아이의 말대로 해보았다. 세계 남쪽의 잿빛 하늘 아래에서 어떤 목소리가 바다의 옛날 언어로 내게 말을 건넸다. - P14

인간은 나의 덩치를 보고 언제나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를 차지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막연한불안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저렇게 커다란 동물을 무엇에다 쓸까? 태초부터 인간은 그게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인간이 처음 바다로 다가왔을 때부터 쭉 그를 관찰해 왔다. 그 결과 인간의 몸은 깊은 바다 밑을 알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물에 뜨는 것을 이용해 거세게 몰아치는 파도와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인간이 약한 널빤지 네 개를 엉성하게 엮어 만든 것을 타고 어떻게 물 위에서 움직이는지 보았다. 우리 둘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인간은 미심쩍은 눈초리로, 반면 나는 그의 끈기에 놀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말이다.  - P19

인간은 곧 바다에서 움직이는 법을 익혔다. 달빛 고래인 내가 다른 고래로부터 ㅡ그 고래는 또 다른 고래로부터 ㅡ조수와 해류의 비밀을 귀띔받았던 것처럼,
인간도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널리 알림으로써 바다로 나오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더 큰 배를만들었을 뿐 아니라, 돛이라고 하는 가벼운 천으로 바람을 모으는 기술을 터득했다. 머지않아 인간은 자기에게 방향을 일러 주는 하늘과 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은 과감히 어둠을 가르고 망망대해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더 이상 수평선을 무서워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가끔 끝없이 펼쳐진 고독한 바다에서 마주쳤다. 나, 달빛 고래가 숨을 내쉬기 위해 수면 위로 올라가 - P20

면, 뱃전에 기대고 선 인간들의 모습이 언뜻 보이기도했다. 그럴 때면 그들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저기 하얀 고래가 나타났다!> 하고 외치곤 했다. 그들의눈빛에서 위협이 아니라, 놀라움과 감탄이 느껴졌다.
나는 인간들의 배에 절대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그들의 용기를 존중했고, 그들 또한 바다에서 사는 존재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월은 지나갔고, 바람과 해류를 따라 몰려오는 추위, 또는 더위와 더불어 시간은 돌고 돌았다. 태어나서 생을 마칠 때까지 인간들은 자신의 불확실한 운명을 헤쳐 나가려고 애를 썼고, 고래들은 짠맛이 나는 자신의 세상을 가르며 어디론가 나아갔다. - P22

나. 달빛 고래는 바다에서 산다. 내가 사는 곳은 하루해가 떠오르는 육지와, 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해가 잠기는 수평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온 세상이 하얀 저 먼 곳에서 얼음장 같은 해류가 흘러와 물이 굉장히 차갑다. 그리고 바다는 밤이 길어지면 커지고, 낮이끝나지 않을 듯 보이면 작아지는 소금 빛깔의 거대한암석으로 변한다.
내가 사는 바다와 경계를 맞대고 있는 육지에는 인간들이 거의 없다. 대신 해변 가까이까지 울창한 숲이 들어서 있다. 나는 바다를 헤엄쳐 가다가 다른 종들이 이르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곳까지 내려가곤 한다. 커다란허파를 가진 덕분에 나는 숨 쉬러 올라가지 않고도 오랜 시간 동안 물속에 머물 수 있다.  - P25

내 세계는 침묵과 정적으로 둘러싸여 있다. 바다 밑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불평하거나 소리를 지르지도, 투덜거리거나 악을 쓰지도 않는다. 몸집이 가장 큰 존재들만이 가끔 바다 밑의 정적을 깨뜨린다. 향유고래종에 속하는 나는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대왕고래와 - P27

참거두고래는 한밤의 적막을 달래 주는 일련의 화음창법 노랫소리를 통해 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몸놀림이 빠른 돌고래들은 무리 지어 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 휘파람 소리로 모이라는 신호를 보낸다. 하지만 바다밑 깊은 곳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반면 수면 가까운 곳에서는 바람 소리,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갈매기와 가마우지 울음소리가 쉴 새 없이 날 뿐 아니라, 바다에 살기에 그다지 적합하지 않은 존재, 즉 인간의 목소리도 가끔 들린다. - P28

조금 전에 본 것처럼 크고 웅장한 배였다. 그런데 돛에 바람을 잔뜩 실은 배는 빠르게 물살을 헤쳐 나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첫 번째 배를 따라잡았다. 인간들이 바다에서 만나면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짝짓기하기 위해서든, 새끼를 낳는 암컷이나 갓 태어난 새끼를 보살피기 위해서든 우리 고래들은 한데 모이면 원을그리며 움직이다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 등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꼬리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수면 가까이에서 헤엄쳐 나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허파의 공기를 뿜어내면서 빙글빙글 돌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고 휘파람 소리나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만남의 기쁨을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들은 만남의 기쁨을 어떤 식으로 표현할까? - P35

작은 정어리도 다른 정어리를 공격하지 않는다. 느림보 거북이도 다른 거북이를 공격하지 않는다. 탐욕스러운 상어도 다른 상어를 공격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상에서 자기와 비슷한 이들을 공격하는 종은 인간밖에 없는 것 같다. 인간들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알고 나니 영 기분이 언짢았다. - P37

그러나 인간들이 모두 바다의 사람들 같지는 않다. 우리 고래들과 돌고래들은 저 먼 곳에서 온 다른 인간들이 갈수록 많아져서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허락을 구하지도, 그렇다고 나중에 고마움을 표하지도 않고 숲과 땅, 그리고 바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제멋대로 가져가는 낯선 인간들 말이다. 고래잡이배 선원들은 배은망덕과 탐욕에 찌든 세상에서 온인간들의 전형이다. - P52

나는 할머니 고래 넷이 시신을 싣고 섬으로 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리고 섬과 해안 사이의 물길에 고래잡이배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을 넓은 바다로 유인해 맞섰다. 그 덕분에 내 몸에는 더 많은 작살이 박히고말았지만, 이제 견딜 만해진 통증 외에 다행히 다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어차피 나를 죽이기로 작정한고래잡이배를 먼바다로 유인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 내게 닥친 시련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는 끈질기고 집요한 인간들을 볼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다. 당연히 그들이 어디서 오는 건지, 바다나 육지 어느 곳에 많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지, 언젠가 그들이 탐욕을 채우는 모습을 보게 될지 궁금해졌다. - P107

나는 마지막으로 해안과 섬 사이의 물길을 따라 헤엄쳐 갔다. 해변에 모여 있는 라프켄체 사람들은 말없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할머니 고래들이 죽은 자의 시신을 섬으로, 앞으로 꿈도 꾸지 못할 위대한 여행을떠나기에 앞서 들르는 만남의 장소, 응길 첸마이웨로데려가 달라고 청하기 위해 <트렘풀카웨!>라고 다시 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등에 아홉 개의 작살이 꽂힌 채, 다른 고래잡이배를 찾으러 넓은 바다로 나갔다. 인간들이 무서워 벌벌 떨며 모차 딕이라고 부르는 위대한 달빛 향유고래인 나의 임무는 그들을 쫓아 바다에서 몰아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 인간들을 계속 쫓아다녀야 할 저주받은 운명.
나,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의 힘.
나, 바다의 가차 없는 정의.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