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동과 동석

남들은 아무리 미운 엄마라 해도 엄마가 암에 걸려 결국 병원 의사로부터 사형선고(의사는 엄마가 지금 당장 돌아가셔도 이상할 게 없다 했다)를 받게 되면,그간 쌓아뒀던 원한을 풀고 화해를 한다는데, 그건 남 얘기. 동석은 엄마와 그럴 맘이 추호도 없다. 엄마의 사형선고를 듣고 동석은 오직 한 생각만했다. 마지막으로 대차게 한번 붙어보리라. 그간 살면서 나한테 미안은 했는지, 날 사랑은 했는지, 나에게 상처 준 걸 알기는 하는지, 내 인생이 이렇게 망쳐진 게 엄마 당신 때문인 걸 인정은 하는지, 꼬치꼬치 물어서, 답을 들으리라. 그래서, 기필코 미안했다 잘못했다 사과 받으리라. 그런데, 내 엄마강옥동씨, 낼모레 죽는다는데, 나한테 할 말 없냐니까, 없단다. 미안은 하냐니까, 염병 지랄을 한단다. 그러며 죽기 전 소원이니, 나보고 이복형제 (내겐 웬수 같은) 집에 자신을 데리고 가달란다. 와, 썅! 이건 선전포고다. 좋다.
썅, 살아 있는 모든 날 어디 한번 악랄하게 피 터지게 붙어보자, 그래! 동석은 죽음을 앞둔 엄마와 이길 수도 없는 싸움에 기꺼이 뛰어드는데..
- P42

강옥동 (여, 일흔 중반, 작은 밭에 이런저런 고추, 감자, 깨농사 등등을 지어서, 오일장에 내다 판다, 동석의 엄마)

남들이 벙어리라 할 만큼 말수 적고(혼자선 자주 구시렁대지만), 투박하고, 감정없는 사람처럼 무뚝뚝하며, 그저 일만 한다. 남들 눈엔 순해 보여도, 동석에겐 살갑지도 그닥 순하지도 않다. 취미라곤 종일 바다를 보거나, 하늘의 구름, 밭의 꽃이나 보며 앉아 있기가 전부 무학에 일자무식, 목포 태생.
뱃일하는 엄마 아버지를 열 살 때 집에 화재가 나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의집 일이나 식당 일을 하며 살다(동생은 목포서 살다, 몇 달 전 암으로 죽었다. 죽기 전그렇게 언니 옥동을 찾았다는데, 글 모르고 길 모르는 옥동은 갈 엄두가 안 났다. 그리고부고를 들었다), 동네 사람이 막일하는 동석아버질 소개시켜줘 제주로 시집와 지 - P42

금껏 산다. 동석아버진, 제주에 와 남의 배를 탔다. 그는 남들한텐 호인이었지만,
여잘 너무도 좋아했다. 살림 차린 여자만 해도 족히 열둘, 옥동은, 첨엔 울고불고여자들과 싸우고, 동석아버지 팔을 물고 뜯었지만, 나중엔 포기했다. 치매 걸린시어머니와 애들 건사를 해야 했다. 근데 태풍에 남편이 죽었다. 미운 남편도 죽으니 아쉬웠다.
이후, 물이 무섭다는 딸년을(자신도 무서워, 그동안은 일만 했는데) 끌고 바다로 들어가 함께 해녀가 됐다.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근데, 이게 또 무슨 일, 딸년도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물질 시작할 때 바다에선 욕심 내면 안 된다고 그렇게 무던히 상군 할망들이 가르쳤는데, 딸년은 전복에 욕심내다 그만 물속에서숨을 거뒀다. 고작 열아홉에 죽어가면서도 뭐 하러 지랄한다고 전복은 쥐고 있었는지.. 남편 죽인 바다는 안 무섭더니, 딸년 죽인 바다는 정이 떨어졌다. 어떻게 살지? 거친 동석이 저 새낀 어찌 키우지. 그때였다.  - P43

더는 삶에 자신이 없어진건. 그래서, 남편의 친구 박선주가 같이 살자는 말에 덥석 그러자 했다. 그와 산단 건 첩이 된단 거고, 그의 병든 아내 수발(거의 식물인간)을 해야 한단 거고,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키워야 한단 거고, 동네에서 남편친구와 붙어먹는 걸레같은 년 소릴 들어야 한단 거였지만, 마다하지 않았다. 동석일 키울 수 있고, 다시 바다에 들어가지 않을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됐다. 그까짓 개 · 쌍 * 창녀 소리듣지 뭐. 옥동은 야멸차게 시어머니, 근처 사는 시동생에게 보내버리고, 그길로거적때기 같은 짐을 리어카에 싣고 박선주의 집으로 향했다.
근데 인생의 환난은 이후로도 끝나지 않았다. 이복형제의 원망(나중에 사업한다고 박선주의 집이며 논을 다 팔아, 육지로 나감), 본처의 병수발, 이후 선주의 죽음, 밑도 끝도 없는 동석의 포한 그래서일까, 병원 의사가 슬픈 눈으로 ‘할머니,
병원에서 더는 해드릴 게 없네요. 맛난거나 많이 드세요‘ 할 때, 슬프기보단, 아프던 속도 편했다. 아, 이제 끝나는구나, 이 지겨운 인생. 근데, 아들 동석이 새끼가 시비를 걸어온다. 제 인생이 엿 같고 지랄 같은 건 다 엄마 때문이라나. 그러든 말든, 옥동은 개의치 않았다. 사실이 아니니까. 미안하다고 말하란다. 미안할게 없는데.. 짧게 남은 인생 한두 달도 시끄럽게 생겼다.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그것도 못 하게 된 이 별난 인생. - P4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란과 은희

서울에서 미란이 제주로 은희를 보러 왔다. 누가 봐도 서로가 서로에게 베프인 미란과 은희, 우리 평생 친구 하는 거다. 너한테 진 빚 죽어서도 갚을게. 소녀 시절, 은희는 미란에게 그렇게 절절한 맹세를 했었다. 철없어 한 짓이라기보단 그땐 정말 그럴 맘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삼십 년 흐른 지금도그러냐고, 누가 묻는다면? 은희는 ‘그럼!‘이라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이유를 꼽으라면 너무 많다. 뻑하면 남잘 갈아치우며 이혼하는 것도 싫었고, 늘 남들에게 관심받는 것도 싫었고, 긴 듯 아닌 듯 자신을 깔보는 듯한 말투도 싫었고, 무엇보다 자기가 낳은 애를 제가 안 키우고 남편에게 맡긴 것도 싫었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 까발려 뭐 할까 싶다. 구질스럽기밖에 더 하겠는가. 그냥 참고, 의리 좋은 년 소리 듣는 게 낫지. 어차피 둘 다늙어가는 마당이고, 미란이 서울살이 하는 까닭에 몇 년에 한 번 보는 게 전부이니, 대충, 남에게도 자신에게도 절친, 베프라고 우기며, 넘어가고 싶다. 그런데, 그럴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미란에게 성질날 때마다 미란을 이중인격자, 치졸한 년, 잘난 척하는 년 하며, 씹어 조진 일기장을 그만 미란이죄다 깡그리 보고 만 것이다. 젠장, 이렇게 끝내고 싶진 않았는데...
- P16

고미란 (여, 사십 대 후반, 마사지숍 운영)

제주 푸릉 태생. 이쁘고, 천성이 낙천적이고, 당차고, 똑똑하고, 화끈하고, 유머러스에 장난기 많고, 아쌀하다. 미란은 어려서부터 모든 이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푸릉을 넘어서서 서귀포에서 가장 넓은 정원이 있는 집에, 서귀포 부시장을 지낸 고급 공무원인 아버지와 대학교수였던 엄마, 늘 전교 일등을 안 놓치는 멋진 오빠(현재 부모와 오빠는 미국에서 이민생활을 한다), 게다가, 점입가경으 - P16

로 미란은 잘 놀고, 이쁜 데다, 공부까지 잘하고, 가난한 은희, 인권, 호식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정말 퍼펙트한 인성 좋은 멋진 친구였다. 그런 미란에게도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밖에서 보면 늘 인자할 것 같은 아버진, 가끔 술을 마시면,
엄마를 했고, 엄마는 제 아픔을 숨겼다. 남들 알면, 어쩌니? 엄마는 자신보다 남이었다. 그런 어느 한 날, 미란은 은희에게 이런 집안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근데, 은희가 하는 말, ‘니네 아버지 하는 짓을 사진으로 찍으라, 그래서, 무사 그리하맨? 하고 물으맨, 그 사진을 보며 영원히 아방을 원망하려고 한다, 그리 말하라. 그것도 안 통하맨 신문사에 제보한다, 그러라. <부시장의 민낯>이란 제목으로!‘ 하하! 그런 신박한 방법이?! 미란은 은희의 조언을 실행에 옮기고, 아버진딸년의 진심 어린 협박에 그날로 술을 끊었다. 그리고, 미란의 집안은 더욱더 퍼펙트해졌다. 미란에게 은희는 그렇게 베프가 됐다. 똘똘하고, 당찬 은희, 돈이 있어 대학을 갔다면 최소 장관은 할 아이, 미란은 은희를 두고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가며, 정말 맘이 아팠다. - P17

서울에 와서도 미란은 제 인생이 유년 시절처럼 찬란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삶은 녹록지 않았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 그리고 지금은 혼자 대학 시절 만나 처음 결혼한 첫사랑은 변호사였는데, 사무장과 바람이 났다.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딸 지윤이 열살 때, 야근한다는 남편에게 미란이 서프라이즈를 한다고 야밤에 사무실에 불쑥 갔다 둘의 애정행각을 보고 말았다. 미란은 구차해지기 싫어,
이혼을 요구했고, 남편은 거절하지 않았다. 위자료도 충분히 줬다. 이후, 남편은변호사 일을 접고 프랑스로 애인과 유학을 가서, 거기서 정착했다. 미란은, 이혼의 상처가 컸지만, 은희에게나 하소연을 했을 뿐, 가족은 물론 엄마에게조차 말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그만 행복해도 돼. 나 때문에 속 썩는 짓은 그만, 덕분에 사정 모르는 엄마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단 미란을 탐탁지 않아 했다. 미란은서운했지만, 훌훌 털었다. 딸 지윤이만 있으면 됐다 싶었다. 그런데 초등학교를졸업한 지윤이, 갑자기 친부가 있는 파리로 가고 싶단다. 한국 학교생활은 숨이막힌다고 했다. 미란은 딸을 친부에게 보내고 싶은 맘이 추호도 없었지만, 숨이막힌다는 말엔, 잡을 수가 없었다. - P17

살 부비고 산 남자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미란의 베프라 우기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그녀의 베픈 어려서도 지금도 오직 은희 하나다. 가난하면서도 늘 당당했던 아이, 버리고 싶을 만큼 징글징글한 가족의 생계를 모두 거뜬히 짊어진 아이, 자수성가해 주변을 돕는 아이, 내가 부르면 언제든 제주에서 서울로 한달음에 달려오는 아이, 이젠 늙어버린 나를 늘 이쁘다고 치켜세우며 소피 마르소를닮았다고 하는 아이, 정은희. 힘들고 외롭고 서글플 때도 미란은 굵고 거침없는은희 목소리만 들으면, ‘야, 기운 내 새끼야! 니 옆엔 내가 있잖아! 의리!‘, 그 소리만 들으면 다시 깔깔댈 힘이 났다. 그날도 그랬다. 딸이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수석으로 졸업식을 한다고 해서, 오 년째 못 보다 가기로 했는데, 졸업식 이후 딸의 소원, 두 달간 세계일주를 같이 하기로 해서, 여비 마련하려 잘나가는마사지숍까지 정리했는데, 딸이 결혼까지 생각하는 프랑스 남자친구도 너무 보고 싶었는데, 남편이 전화해 하는 말. ‘지윤이가, 졸업식장에 내와이프랑 있고싶대, 세계일주도 나랑 양엄마, 남친이랑 가고 싶대, 남자친구는 당신이 세 번이나 결혼한 줄 모른다고... 근데 엄마가, 이 남자 저 남자랑 살았다고 말하긴 죽기보다 싫다고... 미안하다고 우네..  - P18

정은희 (여, 사십대 후반, 생선가게 운영)

미란이 첫 번째 이혼할 때까지만 해도, 은희는 완벽한 미란의 편이었다. ‘감히, 우리 미란이한테 상철 주다니! 이 개자식!‘ 은희는 미란보다 더 길길이 뛰며,
첫 남편을 욕하고 맘 아파 진심 울었다. 그리고 평생 그렇게 의리를 지키며 한편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일 장담하면 안 된다 했던가? 언제부턴가, 은희는미란이 이해되지 않았다. 정확한 시점도 기억난다. 지윤이를 제가 안 키우고, 전남편에게 보낸 그때, 미란은 술 취해 시원섭섭하다고 했다. 섭섭만이 아니라, 시원? 에미가 돼서 이건 뭐지? 이기적이다 싶었다. 이후, 두 번째 이혼 사유가 성격 차이인 것은 더더욱이 이해가 안 됐고, 세 번째 이혼 사유가 애를 낳기 싫어서란 말도 이해가 안 됐다. 연하남과 결혼하며, 애를 안 낳겠다니, 그러려면 첨부터 결혼한 게 잘못이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일 말고도 은희가 미란에게 실망한 자잘한 일들은 너무도 많았다. 일년 전이었다. 새벽부터 죽어라 일해 피곤해 죽겠는데, 갑자기 오후에 미란에게서 문자가 왔다. ‘니가 보고 싶어, 죽을 것같아.‘ 가슴이 쿵 했다. 이혼의 상처 때문인가? 얘가 왜이러지 싶었다. 그래서,
놀라 전화를 해도 안 받고, 문자를 해도 답이 없고.. 은희는 그길로 팔던 생선을내팽개쳐놓고 비행기를 타고, 제주서 서울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런데 미란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여는 순간, 깔깔대는 미란의 웃음소리와 박수 소리! 그리고방 안 가득 들어찬 미란의 친구들! 이건 뭐지 했는데, 이유를 들으니 더 화가 났다. 미란이 제 친구들과 의리 게임을 했다나. 제 방에 있는 친구 중, 필요할 때 당장 달려올 친구를 가진 자가 이기는 게임이란다. 미란은 제가 이겼다며, 깔깔대고 웃었고, 은희는, 화가 나 머리꼭지까지 돌았다.  - P19

어쩌면 그 모든 말들이 사실인지도... 그런 미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들때마다, 은희는 미란에게 고마운 것들을 생각해내 덮었다. 중학교 때 여자는 고등학교 갈 필요 없단 부친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 미란은 물에 제초제를 두방울타 은희에게 먹이고, 부친을 찾아가, 은희가 고등학교 못 가 자기 집에서 죽으려고 약을 먹었다며, 생쇼를 해주었다. 결과는 부친의 백기, 은희는 결국 고등학교에 갔다.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서 더는 학업을 할 수 없어 중단했을 때도, 미란은 학교 수업 후 은희를 찾아와 공부를 가르쳐 고등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하게해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버스비도 없는 은희는 백하면 미란의 부친 차를 얻어타고 학교를 갔고, 미란이 싸온 도시락을 얻어먹었고, 학용품이 없어, 문방구에서 도둑질을 했을 때도, 미란은 자기가 했다며 문방구 아저씨에게 울며불며 대신 무릎을 꿇어주었다. - P20

 미란이가 어쩌든 저쩌든 난 의리를 지키고, 받은 은혜를 갚아야한다(물론, 이렇게 쓸 때마다 의리도 지킬 만큼 지켰고, 은혜도 갚을 만큼 다 갚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순 없었지만). 미란이에 대한 서운함은 무덤까지 덮고 가자. 치졸하게, 어린애들처럼 옛날 일 꺼내 무엇 하나. 어차피 갠 서울, 난 제주 사는데....
잘 만나지도 못하는데... 나이 오십 돼서, 쌈질을 할 것도 아니고... 참자, 참자, 참자...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은희는 그 다짐이 평생 지켜질 줄 알았는데.... - P21

은희는 호식이 동조하는 것도 짜증나 버럭, 지랄한다 욕을 했는데, 호식이 진지하게 말했다. 미란인 니가 의릴 지킬 만큼 좋은 애가 아니라고, 지윤이 낳을때 제주서 서울 가산구완한 걸로 아니, 세 번 결혼식할 때마다 외국에 있는 부모 대신해 수발든 걸로 넌 이미 미란에게 진 빚을 다 갚고도 남았다고... 자신은,
이미 오래전에 미란이가 별로였다고..그러며 자신도 모르는 어릴 적 얘길 해댔다. 내용인즉, 어려서 미란이 가난한 은희의 도시락을 싸 왔는데, 은희가 농담 삼아소시지가 없네! 그 말 했다고 미란이가 도시락을 뺏어서, 은희가 굶었다는 얘기였다. 은희는 그 말을 듣고... ‘내가 잘못했네, 그건 얻어먹는 주제에!‘ 했다. 그런데 호식 왈, 그건 니가 니 자신한테나 할 수 있는 말이지, 친구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니란다. 그러며 밥 대신 물 먹으러 나가는 은희 등에 대고 미란이 ‘얻어먹는 주제에!‘라고 말했다고 했다. 그러며 자신은 그때부터 미란이 인간성이 진짜별로였다고. 은희는 호식에게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러냐, 어릴 때 그럴 수도 있지 했지만, 그 말이 상처가 됐다. 어떻게 지가 나한테 친구라며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는가 그 밤 은희는 일기장에 미란을 이중인격자 같은 년이라고 욕을 바가지로 했다. - P22

그리고 그 밤, 은희가 인정의 편에 섰다. 너 인생 왜 그렇게 사냔다. 명보 얘길했는데도, 남의 남편 안은 건, 정신 있는 년이 할 짓이 아니란다. 은희의 본심이드디어 터져 나오나 싶었다. ‘남의 남편? 난 맞고 사는 친구 안은 건데?‘ 미란은이제 은희와 진짜 한판 맞짱을 뜰 시간이 도래했음을 직감했다. 피하지 말자, 그래, 한판 붙어보자, 화끈하게. 미란은 책꽂이에 꽂힌 은희의 일기장을 꺼내, 은희앞에서 차분히 읽기 시작했다. 은희의 얼굴이 파랗게 질리는 걸 보면서.... 그런은희를 비웃고 싶었지만, 은희를 믿어왔던 시간이 무너지는 슬픔은 어쩔 수가없어서.. 자기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은희는 알까, 지금 내 맘이 어떤지... 과연, 우린 서로 없이 행복할 수 있을까? 이 상처를 안고, 사오십 년 우정을 지켜낼수 있을까? - P24

영옥과 정준 그리고 영희

그냥 둘이서 지금처럼 이렇게 가볍고 경쾌하게 심각하지 않고 쿨하게 아슬아슬하고도 짜릿하게 동네 사람들 눈 피해 잠자리나 하면서 깔깔대고 즐겁게 지내면 될걸 왜 정준은 결혼을 하자고 해서, 내 속을 뒤집는 건지. 나는 안다. 결혼은 둘만 좋다고 되지 않는 일. 가족과 가족이 만나는 일. 나는 나도 버거운 내 가족 영희를 그들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같이 안 살면 되지 않을까? 잘하면 영희의 존재를 영원히 숨길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궁리가 한창인데... 갑자기 영희가 내게로 온단다. 잠시인 줄 알았는데,
다신 저 살던 시설로 돌아가지 않겠단다. 더는 정준에게 숨길 수도 없게. 내인생을 망치는 짐 같은, 쌍둥이 언니 영희 이년, 대체 어쩌면 좋은가? - P25

박정준 (남, 서른셋, 선장)

천성이 맑고 따뜻하고, 그렇다고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하는 일마다 열심이고 성실해 누구에게나 신뢰가 높다. 건강하게 농사짓는 아버지 어머니 (육십대, 정준이 사는 항구와 떨어진 윗동네에서 기준과 함께 산다)가 계시고, 자신과 함께뱃일하고 잡일하는 동생 기준이 있다.
제주 사람 대부분이 그렇듯 서너 개의 직업을 동시다발적으로, 다시 말해, 돈되는 일은 다 한다. 물질하는 해녀들을 바다와 육지(제주는 제주와 다른 섬들도 다육지라 부른다)로 데려가고 데려오며 뱃삯을 받고, 바다나가 낚시를 해서 인근횟집에 활어나 선어를 대고, 은희의 생선가게의 경매를 돕고, 함께 오일장에서일당을 받고 생선을 팔기도 한다. 공부에 관심이 없어, 육지로 유학을 안 나간것도 있지만, 바람 없는 육지에 가면 머리가 아팠다. 뼛속 깊이 제주 사람인 것.
버려진 버스를 리모델링 해 이쁘게 카페처럼 꾸며 바닷가에 살 만큼 낭만도 있다. 곧 배 살 때 빌린 은행 대출을 갚고, 다시 대출받아 바닷가 근처에 십팔 평짜리 아파트도 살 계획이다.  - P25

이영옥(여, 삼십 대 중반, 애기해녀 1년차(하군))

정준은 영옥이 가끔 쌈닭 같긴 해도 천성이 밝고 맑고 재밌고 아쌀하고 귀엽고 무조건 사랑스럽다지만, 그건 사랑의 콩깍지가 씌인 탓, 그리고 언니 영희를대하는 자신의 혐한 꼬라질 보지 못한 까닭인 걸, 영옥은 명명백백 알고 있다.
남들 앞에선 온갖 밝은 척 착한 척 내숭 떨지만, 저 깊은 속내는 음흉하고 야멸차고 이중적인, 저만 아는 이기적인 못된 기집애. 엄마 아빠는 늘 그러셨다. 장애아이는 부모가 가족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고, 장애아이가 지상에 오기 전 하늘에서 제 부모를 제 가족을 선택한다고. 누가 장애 가진 나를 감당할 수 있지, 누가 날 감당할 만큼 착하지? 엄마 아빠 영희가 우릴 선택했다 했다. 우리 가족은영희가 선택할 만큼 착하다 했다(그래서 그녀의 닉네임은 어려서부터 착한옥이었다. 강요된 착함. 짜증 나는 애칭이다). 그렇다면 영희의 선택은 잘못된 거다. 부모님은 착하지만 일찍 죽어버렸고, 언니 영희를 스리슬쩍 보호시설에 버리고 싶은나는 절대 착하지 않으니. - P27

옷장사를 하던 부모님(아버지는 장사치였지만, 엄마는 화가였다. 그러나 영희의 병원비며 치료비 때문에 화가이길 포기하고, 아버지 따라 장사치가 되었다)은 영옥이 열두살 때 새벽시장을 다녀오다 과로로 졸음운전을 해 길거리에서 비명횡사했다. 부모님이 죽었단 소식은 경찰로부터 영희가 먼저 전화로 전해 들었다. 서너살의 지능을 가진 영희는 그 소식을 듣고도 울지도 않고 감사합니다, 배운 대로전화를 끊고, 앙문에 밥을 맛나게 비벼 먹으며, 해맑게, 자다 일어난 영옥에게
‘엄마 아빠가 주주, 죽었대. 죽는 게 뭐야?‘ 물었었다. 영옥은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피를 토하듯 엉엉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셔서슬프기도 하지만, 영희를 데려가지 않은 원망이 더 컸다. 그리 죽으시려면, 영희저년도 데려가시지. - P27

둘은 그렇게 18살까지 보육원에서 지냈다. 영희를 놀리는 애들과 영옥은 매일 싸우다시피 했다.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이후, 영희는 보육원에서하는 발달장애인 보호시설 은혜의 집으로, 영옥은 일거릴 찾아 인천 시계공장으로 그리고 다시 강원도 카페로 옷가게로 그리고 현재는 제주로 내려와 해녀학교를 나와 애기해녀가 되었다(밤엔 실내포장마차를 한다). 남들이 보면 먹고살기 위해 흘러흘러 제주로 온 듯 보이지만, 내심 영희에게서 멀어지고 싶은 계획적인 이주였다. 영희와의 접촉은 거리만큼 멀어졌다. 첨엔 한 달에 두 번 시설을찾았고, 몇 년 후엔 한 달에 한 번, 다시 몇 년 후엔 두 달에 한 번, 그리고 제주 온후로는 딱 한 번밖에 가지 않았다. 영희가 끝없이 전화해 왜 안오냐? 하면, 물질해서 못 간다고, 비가 와 비행기가 못 뜬다고, 서울은 비가 안 온다고 하면, 서울은 안 와도 제주는 온다고 하고, 니가 시설에 살려면 난 돈을 벌어야 한다고, 그렇게 갖은 거짓말을 했다. 보육원 때부터 영희를 이뻐하던 장선생님이 다행히도시설로 옮겨 영희를 알뜰살뜰 케어하고 있는 것도 한몫했다. 미련한 이영옥, 영원히 그렇게 점점 영희와 멀어질 수 있다고 착각하다니. - P28

이영희 (여, 삼십 대 중반, 영옥의 쌍둥이 언니, 다운증후군이면서, 그림작가(본인 생각,
남들에겐 그냥 그림 좋아하는 사람일 뿐))

나는 사람들과 영옥과 다르게 생겼다. 나는 미간이 넓고 피부가 나쁘고 눈도나쁘고 말도 더듬고, 숫자를 잘 못 세고 뚱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이상하게 빤히 본다. 내가 별짓을 안 했는데도 싫어하는 눈치다. 살아생전 엄마 아빠는나만 보면, 말씀하셨다. 영희야, 넌 특별하단다. 맞다, 난 특별하다. 특별히 이상하게 생겼다. 특별하단 뜻은 남들과 다르단 뜻이다. 나는 보통이고 싶다. 사람들관심 안 받는 들풀이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원해도 난 보통이 될 수 없다.
그게 속상하다. 그래서 가끔 죽고 싶다. 그러나 나에겐 착한 영옥이가 있다. 이쁜내 동생, 눈도 반짝이고 코도 뾰족하고, 13살 때 보육원에 나를 버리려다가, 안버린 착한 내 동생,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는 내 동생. 엄마가 그립고 아빠가 그립고 동생이 그리워 엄마의 그림을 보다가, 나는 그림작가가 됐다. 아무도 모른다. 나는 혼자만 그림을 그린다. 내 그림은 수천 점(공책에 빼곡한)이다. 현재 내가 작가인 건 아무도 모른다. 남들에겐 알리고 싶지 않다. 내가 작가가 된 건, 동생 영옥이가 젤 먼저 알아야 하니까(영옥이 뜸하게 오기 시작한 삼사년 전부터 그림을 그렸다, 진짜 잘 그릴 때까지 영옥이 제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랄 때까진 영옥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으리라 작심하고, 지금껏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다). - P29

나는 동생이 바빠서 못 온단 소릴 진짜 믿었다. 그래서, 내가 동생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소를 아니까. 동생이, 보내준 택배 상자의 주소를 아니까. 그래서, 복지관 알바 갔다가 동생에게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그리고 기사에게 말했다. ‘제제제제, 제, 주도 서귀포시 푸푸푸릉리..‘ 그런데 웬걸, 이 택시 기사가 나를 제주도가 아닌, 경찰서에 데려다주는 게 아닌가. 그리고 다시 보호시설, 은혜의 집. 나는 울었다. 밥도 먹기 싫었고, 그림도 그리기 싫었고, 씻기도 싫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 없는 삶이라면 당장 죽어도 아쉬울 게 없었다. 오직 영옥이만 보고 싶었다. 그렇게 몇 날 며칠이 지나고, 장선생님이 말했다. 영옥이한테 가자, 눈물이 쏙 들어가게 기분이 좋았다. 야호! 브라보! - P30

그리고 뜨거운 연애가 시작됐다. 그러다, 영옥이 물질하는 중에 욕심을 내다 미역에 감기는 사건이 나고, 춘희와 다른 해녀들에 의해 목숨을 구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영옥은 물질이 그냥 돈이나 버는 일터가 아닌 운명 혹은 목숨공동체란 걸 몸으로 체험하게 되고, 그 계기로, 영옥은 춘희에게만은, 영희 얘길 할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시도 때도 없이 걸려 오는 전화(영희의 전화)를 정준은 궁금하면서도 묻지 않아주었다. 언젠간 말할 때가 오겠지.. 숨겨둔 진실은 세상에 없으니... 어떤 사연이든 내가 품으면 그뿐.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문제의 그날이 왔다. 최근 일이 많아 이 주 만에 공공칠 작전처럼 사람들 눈을 피해, 간만에정준과 모텔 잠자릴 하는 날이었다. 영옥은 그날 하루 종일 맘이 설렜다. 밤새거릴 돌아다니고, 거리의 악사 음악에 맞춰 춤도 추고 웃고, 술을 마시고, 잠자리까지 즐거웠고, 이뻤다. 그런데, 은혜의 집 장선생님의 전화가 왔다. 아, 분위기깨는 이 반갑지 않은, 짜증 나는 전화, 영옥은 욕실에서 샤워하는 정준에게 먼저갈게 하며 모텔을 나와 장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늘 영옥의 편에 서서, 따듯한말을 해주던 장선생님은 그날따라 목소리가 굳어 있었다. - P31

영옥은 화들짝 놀라 다시 전활 했지만, 장선생님은 전활 받지 않았다. 그리고온 문자, 〈낼 오후 2시, 비행기 끊었다>. 하늘이 샛노랬다. 드디어 정준이 영희의존재를 알게 되겠군. 영옥은 영희가 창피했다. 가족을 창피해하는 게 부끄러워도 영희는 창피해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 그날 각자의 차로 집으로 오는 길에 정준이 전화로 말했다. 얼굴 보고 말하기 부끄러워 전화로 한다며, 결혼하잔다. 그렇게 내가 심각해지지 말자 했는데, 결혼이라니. 영옥인 잘됐다. 이 김에 그냥 헤어지자 싶었다. 걱정적인 섹스 후, 곧바로 이별, 이건 좀 너무하다 싶지만, 어차피 헤어질 건데 뭐. 영옥인, 설레서 프러포를 하는 정준의 전화를 그냥 끊어버리며, 바로 성준에게 야멸차다. 맘이 안 아픈 건 아니었지만,
그런다고 질질 끌기도 싫었다. 질질 끌다 보면 예전처럼 내가 당한다. 스물네 살그때 제 언니 영희를 보고, 스리슬쩍 연락을 끊은 이 년 사귄 남친, 서른 살 때 영희와 놀아주며 선량한 척 자신에게 환심을 사곤 동거까지 했으면서도 결국엔영희가 싫다며 떠난 개자식에게 당한 것처럼. - P32

가 스물넷에 만난 놈, 서른에 동거한 놈과 정준이 똑같이 후지다고 했다. 딴 놈이야기에 동거한 남자가 있었다는 얘기도 화나는데 후진 게 같다니? 그 말은 더화가 났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화를 참고, 물으니, 제 언니를 첨 봤을 때 놀란 내 눈빛이 놈들과 똑같았다나.. 정준은 화도 나고 울고 싶었다. ‘나도 놀라죠!
난 멍청해서, 다운증후군이 뭔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 있잖아요?! 놀랄 수 있잖아요!‘ 정준은, 악을 쓰며 울어서라도 영옥을 잡고 싶었다. 그래서 키스를 하려했는데, 저를 슬며시 밀치며 영옥이 싸늘히 하는 말, 자기랑 결혼하려면 영희와같이 살아야 한단다. 정준은 순간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머릿속에 순한 부모님이스쳐갔다. 할말 잃은 정준을 문밖에 놓고, 영옥이 문을 쾅 닫았다.
사실, 영옥은 정준이 저를 좋아하는 만큼 정준이 애타게 좋았다. 그리고 영희랑 같이 살 맘이 추호도 없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냥 어깃장이고 시험이다. 저도 못 하면서 남더러.. 대책 없는 모순덩어리, 이영옥. 빨리 은혜의집수리가 끝나, 영희(자신을 만나, 좋아서, 계속 춤을 추는)가 갔으면, 근데, 그날 잠자리에서 영희가 싱글거리며 하는 말, - P34

춘희와 은기

할머니라고 해도 전화로 어쩌다 목소리나 듣고 화상통화나 서너 번 해봤을까, 실제론 단 한 번 본 적도(은기 두 살 때 아빠 엄마가 제주에 은길 데려왔다지만, 은기 기억엔 없으므로, 은기 입장에선 생판 모르는 사이) 없는데, 갑자기 엄마가 할머니 집에 2주간 은기를 맡겼다. 서럽기 그지없다. 춘희 역시, 단 하나뿐인 손녀 은기가 이쁘긴 해도 낯설긴 마찬가지, 애 키운 지 오래돼 애한테 뭘 해줘야 좋아할지 당최 모르겠는데.. 애는 뻑하면, 성질을 피고, 징징대고 울고 떼를 쓰고, 그래도 며느리가 2주면 데려간다니, 버텨봐야지 했는데, 웬걸 며느리가 오지 않는다. - P35

현춘희 (여, 일흔 초반, 상군 해녀)

말수 적고, 일을 하는 것도 사람을 대하는 것도 까탈스럽지 않고 그저 무던하다. 어려선 명랑하단 소릴 듣기도 했지만, 세파가 그녀를 그리 말없이 덤덤히 큰어른으로 만들었다. 집이 좀 살았으면 양장 같은 기술이라도 배웠겠지만 형편안 되는 집에서 태어나 열셋에 보말 주우면서 시작한 물질이 벌써 60년. 지금은먼바다까지 나가는 해녀 중에 해녀, 상군 해녀다. 그러나, 물질로 돈 버는 것도다 옛말, 요즘 바다엔 물건도 많이 없고, 양식도 많아, 돈이 안 된다. 서운하지 않다. 그리 잡아먹으니 없을 만도 하다 받아들인다. 생계를 위해서도 있지만, 시간죽이는 데 노동만큼 좋은 게 없어서, 옥동과 여기저기 밭에 날품을 팔러 다니기도 하고, 은희 가게에서 생선 다듬기 (염장 생선(말린 생선) 만드는 것)를 하기도 하고, 또 그것들을 오일장에 내다 팔기도 한다.
가난한 집에 열여덟에 시집와서 억척스럽게 살며 아들 넷을 낳았지만, 현재는마흔에 얻은 늦둥이 막내 만수만 남았다. 결혼 후 십 년 만에 얻은 귀한 쌍둥이아들들은 초등학교 때 홍역을 쌍으로 앓더니 갑자기 한꺼번에 죽고, 둘째, 아니셋째(은희 인권 호식의 동창) 만영이는 애지중지 키워놨더니, 스물이 되기도 전에 - P35

술 먹고 고랑에 빠져 죽었다. 그리고, 셋째가 가버린 그해, 덜컥 남편이 폐병으로죽었다. 인생 참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자식이 있으니 살았다. 무엇보다 친구 옥동 팔자도 비슷해서, 인생이란 원래 그리 힘든 것이려니 받아들였다.
막내 만수는 학생 땐 참 지독히도 그녀 속을 썩이며 학교도 안 가고, 쌈질하고, 다니더니 성인이 돼서는 에미 돈을 몽땅 털어 양식사업으로 말아먹고, 반드시 성공해 오겠다며 목포로 떠나 덤프트럭 기사가 됐다. 그리곤, 에미한테 말도없이 여자를 얻어 결혼해 살더니(식은 안 올리고, 신고만 한 것), 은기를 낳아 들고는 오 년 전(은기 두 살 때) 밝은 얼굴로 찾아왔었다. 그러며, 하는 말, ‘애는, 이제고만 낳을라고요. 그녀는 잘했다 했다. ‘많이 낳지 마라. 나는 멋모르고 많이 낳았다. 그냥 애는 낳으면 저 알아서 크는 줄 알았고, 머리가 모잘라 나 죽고 자식죽고 그리 순서대로 갈 줄 알았지, 자식 먼저 보낼 수도 있단 생각은 추호도 못했다. 잘했다, 잘했다, 자식은 근심이다, 은기 하나로 족해라.‘  - P36

손은기 (여, 일곱 살, 춘희의 손녀, 유치원생)

목포에서 엄마 아빠랑 산다. 아빠 집인 제주도는 두 살 때 왔다 하는데 기억에없고, 할머니 춘희는 가끔 일 년에 한두 번 아빠가 해주는 화상통화로 본 게 전부다. 또래에 비해서 늦된 편이라 아직 한글도 더듬더듬 읽고 숫자도 10 넘어가면 잘 모른다. 춤추는 걸 좋아하지만, 수줍음이 많아, 남 앞에선 안 하고 엄마 아빠한테만 보여준다. 아빠는 큰 덤프트럭 장거리 운전을 해 자주 못 보지만, 그래서 볼 때마다 더 반갑고 더 좋다. 어느 날 아빠가 은기의 팔에 볼펜으로 (이그림은 은기아빠 만수의 팔에 있는 문신이다. 만수는 고향을 떠나며 엄마 춘희를 잊지 않기 위해 춘희에게 있는 문신(제주 해녀들끼리 서로 공동체를 다지며 어려서 새긴 것, 그래서 조악한 그림 같은)과 같은 걸 문신가게에서 새겼다. 이 사실을 춘희는 몰랐는데, 나중에 며느리에게서 전해 듣게 된다)을 그림 그리듯 써주며 말했다. ‘은기야, 내년에초등학교 들어갈 때는 제주도로 이사하자.‘ 은기는 목포에 친구가 많아, 제주도가 싫다 하니, 아빠가 다시 말했다. ‘제주도 바다에는 달님이 백 개씩 뜬다? 엄청멋있는데! 너 진짜 그거 보러 안 갈래?‘ 은기는 그 말에 혹했다. 달님 하나도 이쁜데 백 개의 달님이라니! ‘좋아!‘ 은기는 그렇게 아빠에게 제주 이사를 허락했다. - P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주(N) 육지 사람들은 맨날 봐도 똑같은 이 바다가 뭐가 좋다고 구경하려는오는지 서울이 재밌지, 이 시골이 대체 뭐가 좋다고?! 무공해? 청장: 연라 지루해... (하고, 바다를 향해, 침을 작게 뒷 밑고, 속상한, 씩씩대며, 동아서며) 다 더럽히고 싶다.
* 점프컷 - 오일장 가는 길》영주, 땀이 잔뜩 난 속상한 얼굴로 빠르게 걸어가며, 할머니나 이름들이게 계속 건성으로 투덜대듯 일일이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며, 인사하는 인사가 바쁜* 점프컷 - 섭섭오일장 입구 》일 시작하는 풍경 보이는 손님보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영주, 섭섬오일장 입구에서부터 계속 진성으로 인사하는 짜증 나는 그런영주의 그림으로 장사하는 사람들의 발소리 들리는,
(장사 물건 정리하는 가는 영주 보며) 저거 호식이 몰래미 아니?
(할망1 옆에서 장사하는 가는 영주에게) 요즘도 전교 1등 햄시냐? 어멍도이시 잘도 요망지게 커부런(기억이 안 난다는 듯 어멍이 어시 (없어)?
(크게 말하는) 영주 애기 때 도망가게 몰린?
(가면서, 그 소리 다 듣는, 싸증 난, 다른 장사꾼들에게 인사하며, N) 나를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 촌동네.. 도망치고 싶다! 하루 종일 인사만하다목 떨어지겠네. 지겨워.
* 점프컷 - 할망장터 >춘희, 잡은 소라, 전복, 물미역, 해삼 등을 컬러풀한 소쿠리에 조금씩 담아서 진열하고, 쪼그려 앉아서 멍게 손질하는,
옥동, 그 옆에서 각종 곡물과 뿌리채소류를 소쿠리에 담아 진열하고 있다가, 달이, 커피 들고 뛰어와, ‘커피 배달이요!‘ 하고, 준희 옥동에게 주면, 두사람, 커피 받고, 옥동, 달이에게 돈 주려 하면,

선아
(한라산 보며) ...와..!
동석
(한라산을 보며, 투박하게) 나중에도 뭔가 사는 게 답답하면, 뒤를 봐 이렇게 등만 돌리면 다른 세상이 있잖아.. (옥동생각하며) 그저 바다만 바보처럼.
선아
(차분히 보면)
동석
(옥동 생각에 맘이 불편해, 답답하고 투박하게, 미간을 찡그리고 한라산만 보며) 울 엄마 얘기야. (답답한, 남일처럼 툭툭, 너무 무겁지 않게) 아버지가 배 타다 죽고, 동이누난 물질하다 죽고, 엄마 말 바다만 봤어. 바로등만 돌리면, 내가 있고, 이렇게 한라산이 턱하니 있는데.. 이렇게 등만 돌리면, 아버지 동이누나 죽은 바다도 안 볼 수 있는데 그저 맬 바다를 미워하면서도 바다만.. (하고, 선내로 가는)
선아
(한라산 보다 가는 동석을 보며, 편안하게) 나중에... 우리 열이 오면 같이한라산 가자?
동석
(가며, 투박하게) 나중은 나중에 얘기해, 지금 말고. 말했잖아. 난 나중은 없다고, 바람 분다. - P3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 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 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병률 시집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드라마로 보는 것과는 다른.
활자 중독이 맞다.
슬프다.

돈 때문에 꿈을 포기한다는 것, ()들 때문에 슬프다.





한수 (눈물 흐르는 맘 아픈, 은희 못 보는 참담한)

은희
(맘 아픈, 눈물 나는, 눈물 닦고, 모질게, 그러나 맘 아픈) 니가 날 친구로생각해시민(했으면), 첨부터 그렇게 말했어야지? 이런 데 끌고 오지 말고 잘 사는 마누라랑 별거니, 이혼이니, 그런 말을 한 순간... 넌 날 친구가 아닌, 그냥 너한테 껄떡대는 정신 빠진 푼수로 본 거라? 기지? 내 감정을 이용한 거라, 기지(그렇지)?

한수
(은희 보는, 울 것 같은, 참고, 맘 아픈, 고개 끄덕이고, 낮게) 그래.. 이용할수 있다면, 이용하고 싶었어.... 우리 애, 보람일 나처럼... 돈 때문에 지 꿈을 포기하게 하기 싫어서... 꿈 없이 사는 게 어떤 건지.. 나는 아니까.

은희
(꿈 없이 산다는 말에 맘이 아픈, 참고, 가만 눈물 그렁해 보며) 나는 오늘, 지금.. 평생 친구 하날 잃언... (너무 맘 아픈 눈물 참고, 일어나, 화장실로 가서, 수건 들어, 얼굴을 파묻고, 잠시 울고, 이내 나오다, 바닥의 한수가족사진 펜던트를 들어, 보고, 한수 앞에 놓고, 자리에 앉아 술 따라 마시고, 창가 보며, 한수에게, 낮게) 가

한수
(그런 은희를 보다, 펜던트를 집어 옷에 넣고, 은희 보며, 진심으로, 눈가붉어...너한테 왜 첨부터 돈 빌려달란 말을 안 했냐고?

은희
(눈물 그렁해, 속상해, 화나 보면)

한수
(눈물 그렁해, 차분하게) 세상 재밌는 일은 아무것도 없는 너한테 맬 죽어라 생선 대가리 치고, 돈 벌어 동생들 뒤치다꺼리나 하며 사는 너한테 기껏 하나 남아 있는, 어린 시절 나에 대한 좋은 추억... 돈 얘기로.. 망쳐놓고싶지가 않았어.

은희
(맘 아픈, 이해가 되는 속도 상한)

한수
(애써, 맘 다잡고, 눈물 흘리려 하며, 맘 아픈 진심) 그래도 너무 미안하다. 친구야 (하고, 맘 아프지만, 담백하게 일어나, 나가는) - P1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