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15년 전 김윤식을 따라 일본 교토 거리를 걷고 있다. 그의 교토 문학 기행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의 여정대로 염상섭의 하숙집, 윤동주와 정지용과 김환태가 공부한 도시샤대학,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교토 시 사쿄쿠(左京區) 시내, 정지용의 시 ‘압천(川)‘에 서 있다. 이 작은 강가를 산책했던 윤동주를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나의 냉소를부끄럽게 만든 그의 시와 시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P21
어려운 글은 없으며 익숙하지 않은 사유가 있을 뿐이라는 내주장이 맞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도미야마 이치로가 대표적인필자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숨막히는 구체성과 당파성이다. 특히 도미야마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운동한다. 그의 몸은 유(流)와 착(着)을 반복하면서나아간다.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다. 말이 바로 실천이 되는 현장이 거기 있다. - P25
다시 루쉰으로 돌아가자. 그가 ‘피‘와 ‘먹‘을 통해 말하고자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몸을 믿었다. 실천을 믿었다. 먹은 변신이자 번신(身)한 몸이다. 피는 내가 아니다. 피가 고인 상태의몸은 없다. 말하고 쓰는 행위, ‘먹‘이 곧 몸이다. 실천 과정에서변화하는 몸이다. 먹의 가능성은 미래를,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a transformative present)로 만들 수 있다. 도미야마는 유착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러한 현재 개념에 모든 것을 건다. - P27
용서를 하든 복수를 하든 진짜 피해는, 피해자가 가해자와그 사건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가해자와 함께하는 지옥.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무림의 고수도 몸안에 들어온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기도어렵거니와 창자가 딸려 나오지 않게 뽑았다 해도 살점은 남아있다. - P31
침묵으로 불리는 다양한 상황이 있다. 단지 아는 것이 없어서 과묵, 슬픔과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음, 모르는 외국어가 요구되는 상태, 대응할 논리가 없음,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 육체의 마비, 말할 기운이 없음. 기회주의 사회적 약자의 언어 없음, 말하기 싫음, 저항…………. 모두 소극적 의미의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1888~1965년)는 말로서의 침묵을 주장한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이고,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책일 것이다. 읽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기분, 동시에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 P34
이 책은 말하기를 비판하지 않는다. 침묵이라는 형식의 말의소중함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 고뇌와 연동한다는 사실이다. 고뇌하는 사람은 엄밀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는다." 그러나 침묵의 다리가 균형을이룬다는 보장은 없다. 지나간 생이 무거워서 다리가 기울어진다면, 무너진다면? 두려운 시도다. - P35
글쓰기 원칙 중에 ‘현재 진행형을 쓴다‘가 있다. ‘지금 상태‘ 를 쓰라는 것이다. 내 책상 위에 계통 없는 책들이 엎어져 있다. 써야 할 글과 하고 싶은 말이 갈등한다. 당연히 후자 승. 어차피 앞의 것은 안 써지기 때문이다. 이 시는 요즘 나의 타령이다. 나는 꽃도 모르고 시도 모른다. 이희중 시집 《참 오래 쓴 가위》에 수록된 <끝나지 않는 노래> (116, 117쪽) 전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꼭 끝난 줄 알았네 이 노래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이 없는 노랩니까 그런 줄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거야 - P41
제가 신청한 게 아니라구요 그랬던가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해할 수 없군 근데 왜 저만 듣고 앉아 있습니까 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구요 꼭 듣고 싶은 다른 노래도 있습니다 기다리면 들을 수나 있습니까 여기서 꼭 듣고 싶은데, 들어야 하는데 딴 데는 가지 못합니다 세월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노래 좀 그치게 해, 이씨 - P42
수학의 언어는 공식 수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공식 때문이다. 공식은 무한한 언어이자 최소한의 기호로, 삼라만상을 파악할수 있다. (좋은) 시가 미학의 절정인 이유도 이와 같다. 시 한 줄이 사전이다. 은유, 메타포. 말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어떻게 읽어도 말이 된다. 시야말로 읽는 자의 것이다. 리듬감이 좋은 이 시는 내가 아는 작품 중 상당히 큰 사전류에 속한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노래가 한둘이겠는가. 누구에게나 끝나지 않는 노래가 무수할 것이다. 가사의사연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 P42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긋지긋하게 살면 안 된다. 지긋지긋은 끝나지 않음이 아니라 끝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말대로 죽어야 끝난다. 죽음은 끝이어서 좋 - P43
다. 그래서인지 ‘죽다‘는 우리말은 아름답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죽다‘의 영어 표현은 die, pass away, perish(멸망하다), expire(통조림 유통 기한에 사용하는 단어지만우리말은 고상하다. 지긋지긋한 노래가 끝나는 데 감사한다. 영원히 잠들다(永眠), 세상과 이별하다(別世), 운명을 달리하다. 인류 공통의 표현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다, 먼지가 되어 우주속으로 사라지다."가 아닐까. 한 음절로는, 졸(卒). 마치다. 이 개운함! 개운함에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은하계의입장에서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 먼지다. - P44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김영갑(1957~2005년)을 다시 펼친다. 48년의 생애 내내 혼자였던 그는 이제 제주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4.3으로 제주를사랑하게 되었고 김영갑을 통해 제주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한때 우리 집은 그의 작품으로 도배를 해서 친구들이 ‘짝퉁두모악‘이라고 놀렸다. 한라산의 옛 이름인 ‘두모악‘은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그의 사진 갤러리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P45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 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 P47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바람의 외로움은 피하고 싶을 정도다. - P48
누구나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면 매번 바뀌겠지만 밑그림은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중1 때 읽었던 <상록수>와 고등학생 시절의 《무소유》다. 전자는 내게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지니게 했고, 후자는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실제 내 모습은 사회 의식도 없고 무소유의 삶과도 거리가 멀지만, 무엇을하든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무슨 소개가 필요할까. 1976년에 처음 출판된 《무소유》에는표제작을 ‘넘어서는‘ 빼어난 에세이가 많다. 지금 내 책이 2002년 3판 2쇄이니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읽었겠는가. 다만 이번에 새삼 놀란 것은 수록된 글이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하다. 다음은 내가 줄인 원문이다. "복원된 불국사에서 그윽한 풍경 소리 대신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서운함", - P49
책의 좋은 점은 머리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책읽기가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고 있다. 생계 노동 외 대부분의 시간을 책 청소와 정리로 보낸다. 책장 청소를 위해 특별 구입한 청소기로 1차, 마른걸레로 2차, 물수건으로 3차. 주제별, 저자별, 저널별, 논문별로 분류한다. 매일 정리해도 끝이없다. 엽서, 포스터, 문구류에 대한 집착도 있어서 그 관리도 만 - P51
만치 않다. 유목은 고사하고 이사를 꿈꾸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후 기증도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병이다. 《무소유》를 읽으면 뭐하나. 법정의 말대로, 제정신도 갖지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니 노예가 따로 없다. - P52
글쓰기 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두 가지. "140자이상을 쓰고 싶다."와 "고전을 다이제스트(요약본)로 읽는 걸어떻게 생각하세요?"다. "줄거리를 아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독서, 특히 어린시절의 책읽기는 활자를 견디는 훈육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잡문‘과 ‘논설‘, ‘예술‘의 위계는 누그러졌고 ‘댓글‘이 여론이 된 지금, ‘말과 글은 더욱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야 한다.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베니스에서 죽다》에는 11편의 눈부신빛나지만 반사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 쓴 메모가 빼곡하다. 그중 <섬진강>에서 한 구절을 골랐다. <섬진강>은 작가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다. - P57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지만 그의 작품 26권을 갖고 있다. 공저도 거의 없다. 내게 정찬은 숲속을 걷다가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견뎌야 한다. "어떤 선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질책이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독자를 위한 공간이 들어갈 틈이없었다. 그 자신이 유일한 독자였다."(309쪽) - P58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는 정찬을 읽을 때 진저리(두통, 멀미, 탈진………)를 넘어 원망(怨望)과 질투가 뒤섞인 폭력적인 인간이 된다. 자신에 대해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저리의 폭幅)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초라하다. 이 깨달음을 표현할 나의 말은 더욱 초라하다. 희미한 흔적, 방향 상실, 잡히지 않는 마음이 초라함을 어찌할까. 더구나 나이들어서. - P59
자살을 <자유죽음>으로 명명한 장 아메리의 그보다 더 깊은책 《늙어감에 대하여》는 나이듦을 직시한다. 이렇게 객관적일수가 "곱게 늙자"거나 위안은 없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부제)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무의미 앞에 세운다. 장 아메리(1912~1978년), 아프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이름(본명이 아니다. 죽음(삶)을 사유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빅터프랭클, 프리모 레비, 장아메리를 순서대로 읽거나 역순으로읽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장 아메리다. 유능한 번역자(김희상)의표현으로는 "정갈한 인생"을 살았다.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전생애를 추방과 투쟁, 수용소 생활, 고문, 글쓰기로만 보냈다. 그는 예순여섯에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호텔방에서 수면제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리(整理)한다‘는 말이 좋다. 인생을 정리할 때란 평균 수명즈음이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가 아니다. 각자 알아서 정하고 정리하면 된다. - P64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97쪽)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아메리는 《자유죽음》과 마찬가지로 삶, 젊음, 나이듦을 존중하지 않는다. 죽어 가며 살아간다는 진실. 단순하다.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이고 늙음은 절대 운명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홀로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한다. 발광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체념이 덜외롭다는 사실을. 삶은 생물학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학인 것만도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저항과 체념을 반복한다. 계급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대한 시선은 매우 차별적이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평등한 죽음이나마 평등하게 누리려면노력이 필요하다. - P65
나는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 이룬 것이 없어서, 여행도 연애도 안 해봐서,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친구들과 달리안경 없는 생활을 자랑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예전이란 예전이 아닐 때에만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는 몰랐다". 이 책은 나이듦을느끼는 독자들에겐 쉽고 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 P65
더는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다썩었는데나만 청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사기당하는 데 이력이 났다. 돈, 시간, 사람 잃기를 반복한다. 잘난 척하다, 순진함과 진정성을 구분 못해서, 일방적이어서, 준비되지 않은 정의감 때문에, 멍청해서 그러다 분노가 폭발, 모든 것을 망치기 일쑤다. 유관순, 윤동주까지 갈 것도 없고 김수영 47년, 나쓰메 소세키 49년, 김현 48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47년을 살았다. 그들과 비교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다‘는 괴로움은 떨칠 수 없다. 다행히 우주의 관점이라는 게 있다. 그렇지, 나는 모래알의 백만분의 일보다 작은 먼지다. 어디로 나가긴? 일단, 이부자리에서 나가자. - P71
사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별것이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게 끝이다. 삶도 죽음도 거창한 주제가 아니다. 남성의 관점이 있고 여성의 관점이 있듯이. 인간의 관점이 있다면 자연의 관점이 있다. 삶의 관점이 있다면죽음의 관점이 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큰사건이 아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짧다. 대부분은 시시하고 잘 안 써지는 글과 같다. 글의 서두에 ‘붓‘ 이야기가 나오지만 소세키는 한번도 붓으로원고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모두 만년필로 썼다. - P74
고령화 사회, 내 걱정거리는 상호 혐오다. 사람들은 노화를의식하면서 자기 혐오와 싸우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겐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특히 여성들이 자주 쓰는 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는 말이 나는 매우 불편하다. 자글자글 스스로에 대한 방어이자 여성의 여성 혐오다. 저자는 노화의 실제 현상보다 시선, 이미지, 인식에 집중한다. 몸은 세월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몸의 이미지는 인생의 초창기에 형성되고 내내 학습된다. 하지만 노화는 전 생애에 걸쳐진행되므로 사실 노인의 범주는 임의적이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노령의 개념이 다르다. 삶은 누구에게나 질병과 피로와 나이듦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이듦은 느낌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 감정인 것이다. - P83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다. 노화는 인생 자체다.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고 죽는다. 특별하지 않다. - P84
은둔을 고민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은둔이 도피 이상이 되려면 입장이 확실해야 한다. 나의 잠정결론,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이라도 거사居士). - P92
이창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의를 배웠다. 무엇인가를 얻으면반드시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하는 성의는 그의 서명(휘호)이기도 하다. (278쪽) 흔히 성의나 성실은 모범생 기질이나 심지어 답답함으로까지 오해되곤 하는데 그렇지않다. 만사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나는 불성실한사람이 두렵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 이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앞세우면 작게는 기회를, 크게는 신의를 잃는다. (275쪽)가장 신비로운 바둑의 세계는 복기(復棋)다. 누구나 실패 후반성하고 학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실패에서 배우지못하는 인생이 대부분이다. 학창 시절 틀린 시험문제를 다시보는 것도 괴로운데, 프로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직후 복기를둔다. "보이지 않는 창칼"이 오간 상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취재진의 플래시세례 속에서 다시 배우는 것이다. - P116
캐롤의 상황은 보편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작품 행간에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고전은 보편적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쓴‘ 것이다. 캐롤이 부러운 이들이많을 것 같다. 그는 다 가진 듯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의 길. 한가지 불만이 있다. 연인의 뒤를 캐는탐정이라는 작자에게 캐롤은 총을 겨누지 않는다. (286쪽) 나 같으면 그 자식의 몸에 구멍을 냈을텐데. - P144
그는 이미 삶을 완성(죽음)했다. 비루함, 모욕, 분노가 일상인 이 지옥에서 은둔을 생각하는사람에게도 요긴한 책이다.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곳인가. 인류가 멸망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우리는감각을 잃었다. 사는 방법은 세 가지. 하나는 글자 그대로 사는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살 수밖에 없는 생잔(生殘), 또 하나는 유사 죽음인 은둔이나 과다수면, 마지막은 자살 혹은 자살고민 상태다. 굴드의 은둔은 자기 방식의 적극적인 삶이었다. 그는 내가가장 부러워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재능이나 명예, 불후의 음반 따위가 아니다. 짧고 알찬 삶.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alone withthe alone)."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141쪽) 그것이 ‘성공‘ 비결이다. 그의 은둔은 사랑하는 음악과 단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고, 당연히 외롭지 않았다. - P153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외롭지 않다 ("미천한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된다. - P154
‘조용히, 가만히 있다‘는 뜻이란다. "드러나지 않아 조용했고은은했으며 떠난 뒤에도 가만한 당신" (뒤표지) 널리 알려지거나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세상의 치명적인 틈새를 몸으로 메운, 인류가 크게 빚진 사람들이다. 가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을 "은은한 당신"이라고 표현하다니. 저자의 독특하고 단단한 정신이 부럽다. 글쓰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P156
내 친구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15년간 치료해 왔던 담당 의사가 "당신은 의사인 내가 봐도 죽을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죽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대신, 며칠만 미루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붙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저자가 파버로의 인생에 붙인 타이틀은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가만한 당신》, 60쪽)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힐링이 어렵다. "양지에서 누릴 것다 누리고 살았지만, 노력 중인 저자가 전한 아름다운 이들 덕분에 어느 ‘음지의 독자‘가 크게 위로받았음을 고백한다. - P157
선물은 드물고 뇌물은 넘쳐난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절대로 애매하지 않다. 뇌물은 당장의 대가가 오가는 불법 구매 행위일 뿐이다. ‘불편해도‘ 선물과 도움이 오가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든지 불특정 다수에게 갚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 마음의 빚으로 이루어진 연대 채무와 채권의 관계가 유동적인 관계. 가진 것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권리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감사가 공적 영역의 의제가 될 때 돌봄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헬조선‘의 대안 아닐까. 이 시대의 비극은 나의 선물 사건처럼 상호 행위인 감사는 ‘부담스럽고‘, 구조적 착취는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 P160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순은 언어를 빼앗긴 이들의 운명이다. 이것이 지배와피지배 관계의 핵심이다.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는누구의 관점인가? 피억압자의 노동을 지배자의 시각에서 정의하는 것, 이것이 가부장제요, 제국주의, 인종주의다. - P165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 든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 도취에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깃이 된다. 상대를 혐오하고, 조롱(‘풍자‘)했을 때 어떤 사회적 처벌과 반응이 벌어질지잘 아는 권력 관계의 달인이다. - P183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범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나를 포함한 ‘여자의 일생‘의 일부다. 몇 주간 인터넷을 달구었던 진보 남성의 폭력, 알고 있던 사건도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실제 상황을 모두 보고한 피해자는 없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통념보다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얘기다. 폭력은 불법이다. 합법적 폭력인 공권력조차 허용범위는 대단히 좁다. 폭력을 당했으면 가해자가 누구든 경찰에 신고하면된다. 피해자의 신원이 공개될 일도 없고, ‘범인‘의 진정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사법 체계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여성이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인권 의식 향상으로 신고율이 높아져도 걱정이다. 검경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까? - P185
제1의 성. 여성은 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이기에 제2의성이다. 그나마(?) ‘도하걸‘에 들 수 있는 제2의 성은 젊고 예뻐야 한다. 성적 소수자나 아줌마는 ‘제3의 성‘이다. ‘~걸‘은 여성이 자기로 인해 의미를 지닌다는, 조물주 망상이다. 진보? 지금은 중세이고 그는 중세의 신이다. 물론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성은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여성은 ‘마르크스걸‘이다. ‘모던 보이‘도 있다고? 맞다. 이것이 타자성의 본질이다. 모던의 주체는 서구이므로 식민지 조선의 남성은 모던할 수없다. 모던(서구)의 ‘보이‘인 것이다. - P187
위 이야기는 《제2의 성》이 본 2015년 한국 사회다. 1949년 이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프랑스 지성계는 싸늘했지만 대중의호응은 엄청났다. 사르트르의 알제리 독립 투쟁 참여와 파동과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보부아르가 나도 못마땅하지만, 이 책이 현대 페미니즘의 서장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실존주의 철학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사례가 풍부해서 서양의 종교와 문학을 두루 접할 수 있다. 여성주의는 양성 이슈, ‘여혐 남혐‘ 식의 대칭 언어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질문, 즉 인간의 범주에 관한 인식론이고 《제2의 성》은 그 역사를 압축한다. - P187
위에 적은 것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이 한 말이고 제 소견을말한다면, ‘경계(border)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채식주의자는 "~주의자"라는 표현 자체가 평화의 언어는 아니죠. 대개는 적대, 비난, 심문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여성주의적인 것인지는 늘 고민스럽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그 효력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모든 선언은 일시적 전략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 P189
페미니즘의 정의가 불가능한 것은 태생적 모순입니다. 모든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을 여성이라는 울타리로 억지로 묶고 여성의 가치를 남성을 위한 삶이것이 성 역할 규범입니다)으로 정해놓은 것이 성차별이니까요. 지구상에 여성이 약 35억 명인데, 어떻게 여성이 같은 처지일수 있겠어요? 간혹, 부자 여성이 있고 가난한 남성이 있는 것이그렇게 이상합니까.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등 여성들 사이의다름을 인식하고 차이를 갈등이 아니라 자원으로 삼고자 하는세계관입니다. - P189
성폭력과 성 역할은 문화적 규범으로 인식되어 법적 처벌이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들은 사적 복수를 꿈꿀 수밖에없다. 실행하고 성공하는 사례가 많겠는가, 엄두도 못 내고 평생 분노와 우울증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많겠는가? 우리도 역사가 있다. - P197
여성이라는 ‘작은‘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일상과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여성은 일시적으로 "너는 나다."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여성의 저항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사회 정의다.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 온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차별은 일상이고 살인은 극단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 살해는 일상의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를비롯해 피해 여성들이 지칠 것이라는 착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스트잇의 가장 많은 내용은 "잊지 않겠다."였다. - P225
문제는 남녀 대립적 사고방식이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죽었고, 여성들은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를 "남성에 대한 혐오"라고 한다. 무슨 대책이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극한의 성차별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더 분한 법. ‘남성 혐오‘는 여성에 대한 비하보다 나를 더 공포에 떨게 했다. 심란한 이 시기에 뤼스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만큼적절한 책이 있을까. 인간의 성은 하나(남성)가 아니라는 것이다(This Sex Which is Not One). 이 책은 정신분석학과 정신분석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이리가레의 전략은 기존 정신분석의 틀 안에서 그들의 이론을 반사(反射)하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유명한 거울 이론의 등장이다.이때 이제까지 스스로 태양이었던 남자들은 눈이 멀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성, 하나의 언어만 존재한다. 이리가레는말한다. "나는 남성-여성의 대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성성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당연하지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없으니까요." (184쪽, 필자가 윤문함) - P227
그는 성차별뿐 아니라 지금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인종차별에 격렬히 저항했다. 이혼, 동거의 자유와 미혼모와 사생아의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의 머리칼을 자르고 길거리에서 그를 끌고 다녔던 공포 정치가들과 후세대들은, 대담하고 똑똑했던 이 ‘여성을 ‘괴물‘이라 불렀다. 무모한 여자, 정신이 불안정한 여자, 용감한 미치광이, 부도덕한 괴물………….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억압받아 온 모든집단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역사를 모르는 여성에게 미래는 없다. 공부해야 한다. 여성주의 입문서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이책이어야 한다. ‘문명국‘ 프랑스도 여성 참정권은 법률상으로는 1946년에야보장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단두대 없이 주어진 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을 노골적으로비하하는 정당에 투표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인권의 전제는 여성의 인권이다. 인권이 있고 그 아래에 혹은 나중에 ‘그 외 사람들‘의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P237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기사든, 모두 그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이야기다. ‘자서(自書)‘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는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 P246
《헝거》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심리적 허기가 골격을 이루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자아 개념과 어떤 형태의 몸으로 사느냐에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고 고통스런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협상과 자 - P248
기 검열의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스트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읽고 직면했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수용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사실을. 내가 록산게이의 키와 몸무게라면………. 내 삶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예쁨‘, ‘스타일‘, ‘정상성‘에 온 신경을 쓰면서 자신과 타인을억압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인생이 힘든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용기란, 인생이란, 페미니즘이란, 글쓰기의 모범이란 이런 것이다. 삶은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이라는 진실을 <헝거》보다 더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은 드물것이다. 책을 읽고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 있는데, 나는 록산 게이를 발견했다. - P24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