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파성 자체가 가치이고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협한 책 읽기‘는 편협하지 않다.
 모든 책이 편협할 뿐 아니라편협(partiality)을 기점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고, 불호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는 않는다). 선호하는 책이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도 나만의 방식이 있다. 즐겁지않다면 왜 읽겠는가. 다행히(?) 내가 사랑하는 책은 대부분 잘팔리는 책이 아니기에, 나 혼자 열광하더라도 독점 시장의 다양화에 그다지 기여하지는 못한다. 간혹 ‘사회정의 차원에서 좋은 책을 열 권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내 식으로 바꾸면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p11 또 다른 창작, 서평


책과 시장나는 서평, 독후감, 추천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세 가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을 감추지 못한다. 텍스트와 관련한 나의 이런 글쓰기가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알았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사회의 협상의 연속이지만 그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가 글쓰기 자체보다 힘겨울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숨기는 데(?) 지쳤을 때 나도 모르게 지나친 감격이나 솔직한 입장이 부실한 바느질 봉합처럼 터져버린다. 내가 추천사를 쓴 책의 저자에게 팬레터까지 따로 보내는 ‘오버‘가 그런 예중 하나다. - P10

나는 좋은 책,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에 서평이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평 (크리틱)이 가장필요한 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혹은 별 내용이 아닌데‘ 많이 팔려서 비판으로 판매량을 줄여야 하는 책이다. 물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희망한다. 서평이 많이 쓰이고 비평서가 많이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전압이 높은 책, 나를 소생시키는 책을 좋아하지만 여기에 실린 책이 모두 나를 살린 책,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아니다. 어쩌다가 나와 인연이 닿은 책이다.  - P11

내게 글쓰기는 입장과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가 곧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입장 없는 글쓰기는 어느 장르나 불가능하다. 창작으로서 비평, 예술로서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서평, 독후감에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5

정성일이나 김현의 평론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읽은 텍스트 내용보다 그들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쓴 서평을 구매하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기대한다. 책을 읽든 안 읽 - P16

든 그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구입하는 게 아닐까. 서평 쓰기의첫 번째 훈련은 글의 서두에 한두 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야 한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이다. - P17

독후감과 문학 평론, 영화 평론, 음악 평론 등 모든 비평은다르지 않다. 학생이 쓰면 독후감이고, ‘전문가‘나 ‘어른‘이 쓰면 서평인가. 나는 학생들에게도 창작으로서 독후감 교육을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가 왜 서평을 읽는가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서평에 드러난 줄거리로 독서를 대신할 것이 아니라면, 서평이라는 창작 장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비평 역시 창작이자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 ‘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타령이된 세상이다. 소프트웨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아우성이 요란하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닐까. 콘텐츠는 새로운 생각이며 스토리텔링 능력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 P17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사라 러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 인 이유다. - P18

 엄청난 지성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런 ‘무임금 노고를 하겠는가. 내게 그런 능력과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려지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평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인문학 독립 연구자의 양성이 절실하다. (다른 사회 정책 분야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적은 돈‘으로할 수 있는 일이다.) - P19

혼신을 다했고 깊이 있지만 안 팔리는 책, 안 읽히는 글, 보상 없는 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인생사에 이만한 외로움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모두가 궁형(宮刑, 거세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썼던 사마천이 될 수도 없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 궁형은 빈곤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고통을 극복한 글이라면 얼마나
‘위대한 글이겠는가. 나는 평생을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포기하고 오로지 언어에 영혼을 판 채 글쓰기에 인생을 건 이들을 몇몇 알고 있다. 그들이 사투한 책엔 별점 테러조차 없다.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글쓴이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 P21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강하고 대담한 악인이다. 이런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잘 살고 있다. 선과악은 ‘사실‘이 아니라 강한 사람의 뻔뻔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폭력, 악, 비행을 분명히목격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는 일에 조금 개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려워했고 나는 사법처리를 포함한 여러 방식의 문제 제기를 생각했으나 모든 이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예민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자신을 ‘불안증 환자‘ (나)의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결국 사건은 당당한 자(가해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 P26

여전한 논쟁거리는 당사자가 자기의 정체성이나 질병에 대해쓸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방법론이다. 특히 사회 자체가 지극히병리적이고 이중적이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체계는 없는한국이라면 말이다. 나는 "절대 상처를 드러내지 마라." (44쪽)는 말에 동의한다. 나에게도 드러내야만 하고, 드러내고 싶은문제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때문에) 내 시도는 여러번 실패했다. 낙인과 민폐, 자학만 얻었다.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P28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통증은 무엇인가?‘ (331~337쪽)이다.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줄임말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몸들이다. 통증은개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통증의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지식, 인식과 치유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 P32

시몬 드 보부아르나 도나 해러웨이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백인 남성이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흑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
인 백인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앞에서 언급한경찰관처럼 흑인과 여성의 몸을 구타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통제권을 지닐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36

문제는 몸이다. 다시 말해 피부색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물론 인간의 몸을 이루는 어떤 부분도인간의 범주와 관련이 없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권력이다. 피부색은 좀처럼 희석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는 흑인과 다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몸이 부여한 정체성의 지도를 찢을 수 있다‘. 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과 다른 이들의 몸은 계급, 퀴어링, 의료 규범으로
‘혼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흑인의 몸은 있는 그대로의 표식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부여한 영원한 화인(火印)이다. 쉽게 뜯어내고 그냥 버릴 수 있는 라벨이 아닌 것이다. - P38

몸은 사회적 (social/mindful body)이다. 몸은 기억이다. 있는그대로의 몸은 없다(영어 body는 그냥 ‘시체‘라는 뜻이다). 몸은언제나 해석이다. 같은 흑인이라도 힘과 스피드를 상징하는 운동 선수 우사인 볼트나 ‘흑진주‘로 불리는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흑인이라기보다 뛰어나지만 특이한 인간의 범주로 다시구분된다. 이들의 예외성은 해석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책에도나오는 ‘one drop rule‘, 즉 선조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영화화되기도 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의 작품 《휴먼 스테인》(2000년)은 흑인의 피가 인생의 얼룩이자 오점(스테인stain)의 상징임을보여준다. 검은색, 그것은 없애야 하지만 없앨 수 없는 것이다. - P39

몸, 즉 나자신을 향한 적대감, 분노, 좌절, 비참함, 세상을향한 원망, 기력 없음…………. 나는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우선 나(몸) 자신과 싸워야했다. 나에게 몸은 절실히 바꾸고 싶은 그무엇, 그러다 안 되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필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어떤 필자들은 부럽고, 어떤 필자는 존경스럽고, 또 어떤 필자에게는 공감했다. 자기 몸에 ‘대해‘ 쓰는 실천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쓰고 싶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쓸 수 없기도 하고, 결국 쓸 몸이 안 되기도 하고…… - P4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47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혁명에준하는 발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 쓰기, 말하기, 듣기, 이런 책(《몸의 말들>을 읽고토론하는 커뮤니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이 낯설지않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 사회가 만든 몸 이미지에갇혀 있다. 남성의 존재성은 돈, 지식, 권력으로 평가되는 반면여성의 시민권은 외모에서 시작된다. 남성은 정치적, 역사적 존재이고 여성은 생물학석, 의학적 존재라는 인식, 가부장제의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화되어 여성은 완벽한 스펙에 더해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삼은 몇몇 ‘슈퍼 걸‘들이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다. - P48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 화해, 대화라기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정치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위계이다.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 상처가 제일큰법이다. 나도 내 상처가 제일 크다.  - P52

나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 나는 ‘사회정의‘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오해받거나 배신을 당한다. 시간,
배신감, 상처, 자책감에-돈, 평판 등에서 ‘큰 손해를 본다.
분노로 시간을 낭비한다.
복수할 방법에 골몰한다. -→ 해결 방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붕괴가 지속된다.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복귀한다.
몸에 부상을 입은 채 잊는다. 잊게 된다. 잊힌다. - P52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 따위를잊게 해주는 것 같다. - P53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195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치른 지 불과 7년째 되는 해였는데, 사람들은 만일 루이스 자신이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라면 게슈타포를 용서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은 용서할 수있겠습니까?" - P55

나는 이 책의 제목 ‘새벽 세시의 몸들‘이 특히 좋다. 실제로서도 비유로서도 적절하다. 나의 새벽 세시 역시 불면과 잡념의 시간, 하루 중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시간이다. 자살연구에 따르면 자살이 많이 발생하는 시간대는 새벽 세 시에서다섯 시 사이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새벽 세 시는 고통과 통증의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자각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부 의학에서는 장기가 가장 예민한 시간이라고도 한다.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놀라움으로 지각하게 되는 모멘트가 있다. 몸이 아프게 될 때, 또는 나이가 들면서 ..… 겪게 되는 격렬한 ‘몸의 지각‘은 타협 불가능한 ‘자아 탐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이로써 자기 이해나 시간 이해, 타자와의 관계나 - P62

가해자와 피해자는 유동적, 맥락적 개념이므로 가해의 절대성을 전제할 수 없는데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를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구도로 고정해놓았다. 고문은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영원한 관계‘의 장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그린 임철우의 단편 소설 <붉은 방>이잘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피해자를 지지하고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 동일시는 우리 자신이 가해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유 방식이다. 피해자 포지션이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찬은 거꾸로 간다. - P74

나는 그 연배의 한국 문단에서 어떻게 이런 독특한 남성 작가가 나올 수 있는지, 역시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넘어선다는기쁜 진리를 확인한다. 정찬의 작품에는 한국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외세 콤플렉스, 성애 묘사(여성에 대한 타자화가 거의 없다. 자기 도취나 자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이고 문체와 행간의 밀도는 그의 노동을 짐작케 한다.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는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주로 언어, 권력, 몸, 구원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생전에 정찬이 이청준, 복거일, 최인훈의 뒤를 이을 작가라고 주목했다. - P75

삶의 모든 고통은 권력에서 온다. 물론 제일의 권력은 육체적고통이다. 이 역시 사회적 차원의 문제지만 생로병사라는 다른차원의 법이 있으므로 차치하자.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포스트 휴먼‘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진입했고, 지배 세력은가시권에서조차 사라졌다. 한국인들의 희망은 국제 자본을 걸러줄 국가다. 당대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상 민중은 언제나 선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다. 유능하지만 욕심 없는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대개 선한 사람은 약하고, 강한 사람은악하다. 심지어 악함과 강함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79

우리는 <얼음의 집>의 주인공처럼 권력을 정확히 사용하는예술가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한다. 정찬의 <얼음의 집>은 권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고통의백신이다. 고통의 시대에 어찌 백신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P81

나는 예전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잊지 말자."라는 말이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는 그 사고와 무관한 이들의 다짐이다. 유가족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당사자가아닌 이에게는 망각이 필연이고, 당사자에겐 기억이 필연이다.
"잊지 말자." 대신 유가족의 시각에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 P84

말의 의미는 사전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관계에 있다. 고통의 모습은 고통의 위치, 연결 지점(location)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공감의 표현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모든 것을 의식(consciousness)하기가 쉽지 않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지나친 긴장도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들을 때 나를포함한 인간의 주된 반응은 통념과 달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더 정확히는 의심과 비난이 더 많다. "정말?", "설마?", "농담하지 마."………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 P85

고통받는 몸은 사회적 위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를자각하는 일은 곧 사회적 존재로서 투쟁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이다. 사회, 정치, 역사다. 힘있는 사람의 고통의 목소리는 크고 이미 위대한 의미 체계가 정해져 있다. 미국인의 고통과 북한인, 이라크 난민의 고통은 같은 고통이 아니다. ‘남성‘
의 고통과 ‘여성‘의 고통은 원인도 구조도 양태도 깊이도 다르다. 20대 여성은 성차별의 사례로 성폭력과 강남역 살인 사건의공포를 이야기하고, 20대 남성은 초등학교 때 ‘우유당번‘을 예로 든다. - P88

유명해지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하랴. 누가 그런 사람이냐고?
실명 비판을 하라고? 나는 그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그/그녀는 내가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아 개념은사회성이 없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규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물적 기반(예를 들어 SNS…………)이 민주주의든 과학 기술이든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 가장 위험한 심리를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투사(남의탓으로 돌리는 폭력)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르시시스트가 10퍼센트, 타인에게 폭력적인 사람들(갑질 행위자)이 90퍼센트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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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15년 전 김윤식을 따라 일본 교토 거리를 걷고 있다. 그의 교토 문학 기행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의 여정대로 염상섭의 하숙집, 윤동주와 정지용과 김환태가 공부한 도시샤대학,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교토 시 사쿄쿠(左京區) 시내, 정지용의 시 ‘압천(川)‘에 서 있다. 이 작은 강가를 산책했던 윤동주를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나의 냉소를부끄럽게 만든 그의 시와 시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P21

어려운 글은 없으며 익숙하지 않은 사유가 있을 뿐이라는 내주장이 맞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도미야마 이치로가 대표적인필자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숨막히는 구체성과 당파성이다. 특히 도미야마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운동한다. 그의 몸은 유(流)와 착(着)을 반복하면서나아간다.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다. 말이 바로 실천이 되는 현장이 거기 있다. - P25

다시 루쉰으로 돌아가자. 그가 ‘피‘와 ‘먹‘을 통해 말하고자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몸을 믿었다. 실천을 믿었다. 먹은 변신이자 번신(身)한 몸이다. 피는 내가 아니다. 피가 고인 상태의몸은 없다. 말하고 쓰는 행위, ‘먹‘이 곧 몸이다. 실천 과정에서변화하는 몸이다. 먹의 가능성은 미래를,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a transformative present)로 만들 수 있다. 도미야마는 유착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러한 현재 개념에 모든 것을 건다. - P27

용서를 하든 복수를 하든 진짜 피해는, 피해자가 가해자와그 사건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가해자와 함께하는 지옥.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무림의 고수도 몸안에 들어온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기도어렵거니와 창자가 딸려 나오지 않게 뽑았다 해도 살점은 남아있다. - P31

침묵으로 불리는 다양한 상황이 있다. 단지 아는 것이 없어서 과묵, 슬픔과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음, 모르는 외국어가 요구되는 상태, 대응할 논리가 없음,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 육체의 마비, 말할 기운이 없음. 기회주의 사회적 약자의 언어 없음, 말하기 싫음, 저항…………. 모두 소극적 의미의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1888~1965년)는 말로서의 침묵을 주장한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이고,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책일 것이다. 읽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기분, 동시에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 P34

이 책은 말하기를 비판하지 않는다. 침묵이라는 형식의 말의소중함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 고뇌와 연동한다는 사실이다. 고뇌하는 사람은 엄밀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는다." 그러나 침묵의 다리가 균형을이룬다는 보장은 없다. 지나간 생이 무거워서 다리가 기울어진다면, 무너진다면? 두려운 시도다. - P35

글쓰기 원칙 중에 ‘현재 진행형을 쓴다‘가 있다. ‘지금 상태‘
를 쓰라는 것이다. 내 책상 위에 계통 없는 책들이 엎어져 있다.
써야 할 글과 하고 싶은 말이 갈등한다. 당연히 후자 승. 어차피 앞의 것은 안 써지기 때문이다. 이 시는 요즘 나의 타령이다.
나는 꽃도 모르고 시도 모른다. 이희중 시집 《참 오래 쓴 가위》에 수록된 <끝나지 않는 노래> (116, 117쪽) 전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꼭 끝난 줄 알았네
이 노래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이 없는 노랩니까 그런 줄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거야 - P41

제가 신청한 게 아니라구요
그랬던가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해할 수 없군 근데 왜 저만 듣고 앉아 있습니까 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구요 꼭 듣고 싶은 다른 노래도 있습니다 기다리면 들을 수나 있습니까 여기서 꼭 듣고 싶은데, 들어야 하는데 딴 데는 가지 못합니다 세월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노래 좀 그치게 해, 이씨 - P42

수학의 언어는 공식 수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공식 때문이다.
공식은 무한한 언어이자 최소한의 기호로, 삼라만상을 파악할수 있다. (좋은) 시가 미학의 절정인 이유도 이와 같다. 시 한 줄이 사전이다. 은유, 메타포. 말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어떻게 읽어도 말이 된다. 시야말로 읽는 자의 것이다. 리듬감이 좋은 이 시는 내가 아는 작품 중 상당히 큰 사전류에 속한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노래가 한둘이겠는가. 누구에게나 끝나지 않는 노래가 무수할 것이다. 가사의사연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 P42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긋지긋하게 살면 안 된다. 지긋지긋은 끝나지 않음이 아니라 끝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말대로 죽어야 끝난다. 죽음은 끝이어서 좋 - P43

다. 그래서인지 ‘죽다‘는 우리말은 아름답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죽다‘의 영어 표현은 die, pass away,
perish(멸망하다), expire(통조림 유통 기한에 사용하는 단어지만우리말은 고상하다. 지긋지긋한 노래가 끝나는 데 감사한다.
영원히 잠들다(永眠), 세상과 이별하다(別世), 운명을 달리하다.
인류 공통의 표현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다, 먼지가 되어 우주속으로 사라지다."가 아닐까. 한 음절로는, 졸(卒). 마치다.
이 개운함! 개운함에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은하계의입장에서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 먼지다. - P44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김영갑(1957~2005년)을 다시 펼친다. 48년의 생애 내내 혼자였던 그는 이제 제주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4.3으로 제주를사랑하게 되었고 김영갑을 통해 제주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한때 우리 집은 그의 작품으로 도배를 해서 친구들이 ‘짝퉁두모악‘이라고 놀렸다. 한라산의 옛 이름인 ‘두모악‘은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그의 사진 갤러리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P45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 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 P47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바람의 외로움은 피하고 싶을 정도다. - P48

누구나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면 매번 바뀌겠지만 밑그림은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중1 때 읽었던 <상록수>와 고등학생 시절의 《무소유》다. 전자는 내게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지니게 했고, 후자는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실제 내 모습은 사회 의식도 없고 무소유의 삶과도 거리가 멀지만, 무엇을하든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무슨 소개가 필요할까. 1976년에 처음 출판된 《무소유》에는표제작을 ‘넘어서는‘ 빼어난 에세이가 많다. 지금 내 책이 2002년 3판 2쇄이니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읽었겠는가. 다만 이번에 새삼 놀란 것은 수록된 글이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하다.
다음은 내가 줄인 원문이다. "복원된 불국사에서 그윽한 풍경 소리 대신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서운함",  - P49

책의 좋은 점은 머리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책읽기가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고 있다. 생계 노동 외 대부분의 시간을 책 청소와 정리로 보낸다. 책장 청소를 위해 특별 구입한 청소기로 1차, 마른걸레로 2차, 물수건으로 3차. 주제별, 저자별, 저널별, 논문별로 분류한다. 매일 정리해도 끝이없다. 엽서, 포스터, 문구류에 대한 집착도 있어서 그 관리도 만 - P51

만치 않다. 유목은 고사하고 이사를 꿈꾸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후 기증도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병이다.
《무소유》를 읽으면 뭐하나. 법정의 말대로, 제정신도 갖지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니 노예가 따로 없다. - P52

글쓰기 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두 가지. "140자이상을 쓰고 싶다."와 "고전을 다이제스트(요약본)로 읽는 걸어떻게 생각하세요?"다. "줄거리를 아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독서, 특히 어린시절의 책읽기는 활자를 견디는 훈육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잡문‘과 ‘논설‘,
‘예술‘의 위계는 누그러졌고 ‘댓글‘이 여론이 된 지금, ‘말과 글은 더욱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야 한다.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베니스에서 죽다》에는 11편의 눈부신빛나지만 반사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 쓴 메모가 빼곡하다. 그중 <섬진강>에서 한 구절을 골랐다. <섬진강>은 작가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다. - P57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지만 그의 작품 26권을 갖고 있다. 공저도 거의 없다. 내게 정찬은 숲속을 걷다가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견뎌야 한다. "어떤 선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질책이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독자를 위한 공간이 들어갈 틈이없었다. 그 자신이 유일한 독자였다."(309쪽) - P58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는 정찬을 읽을 때 진저리(두통, 멀미, 탈진………)를 넘어 원망(怨望)과 질투가 뒤섞인 폭력적인 인간이 된다. 자신에 대해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저리의 폭幅)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초라하다. 이 깨달음을 표현할 나의 말은 더욱 초라하다.
희미한 흔적, 방향 상실, 잡히지 않는 마음이 초라함을 어찌할까. 더구나 나이들어서. - P59

자살을 <자유죽음>으로 명명한 장 아메리의 그보다 더 깊은책 《늙어감에 대하여》는 나이듦을 직시한다. 이렇게 객관적일수가 "곱게 늙자"거나 위안은 없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부제)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무의미 앞에 세운다.
장 아메리(1912~1978년), 아프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이름(본명이 아니다. 죽음(삶)을 사유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빅터프랭클, 프리모 레비, 장아메리를 순서대로 읽거나 역순으로읽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장 아메리다. 유능한 번역자(김희상)의표현으로는 "정갈한 인생"을 살았다.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전생애를 추방과 투쟁, 수용소 생활, 고문, 글쓰기로만 보냈다. 그는 예순여섯에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호텔방에서 수면제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리(整理)한다‘는 말이 좋다. 인생을 정리할 때란 평균 수명즈음이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가 아니다. 각자 알아서 정하고 정리하면 된다. - P64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97쪽)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아메리는 《자유죽음》과 마찬가지로 삶, 젊음, 나이듦을 존중하지 않는다. 죽어 가며 살아간다는 진실. 단순하다.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이고 늙음은 절대 운명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홀로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한다.
발광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체념이 덜외롭다는 사실을. 삶은 생물학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학인 것만도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저항과 체념을 반복한다. 계급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대한 시선은 매우 차별적이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평등한 죽음이나마 평등하게 누리려면노력이 필요하다. - P65

나는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 이룬 것이 없어서, 여행도 연애도 안 해봐서,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친구들과 달리안경 없는 생활을 자랑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예전이란 예전이 아닐 때에만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는 몰랐다". 이 책은 나이듦을느끼는 독자들에겐 쉽고 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 P65

더는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다썩었는데나만 청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사기당하는 데 이력이 났다. 돈, 시간, 사람 잃기를 반복한다. 잘난 척하다, 순진함과 진정성을 구분 못해서, 일방적이어서, 준비되지 않은 정의감 때문에,
멍청해서 그러다 분노가 폭발, 모든 것을 망치기 일쑤다.
유관순, 윤동주까지 갈 것도 없고 김수영 47년, 나쓰메 소세키 49년, 김현 48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47년을 살았다. 그들과 비교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다‘는 괴로움은 떨칠 수 없다. 다행히 우주의 관점이라는 게 있다. 그렇지, 나는 모래알의 백만분의 일보다 작은 먼지다. 어디로 나가긴? 일단, 이부자리에서 나가자. - P71

사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별것이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게 끝이다. 삶도 죽음도 거창한 주제가 아니다. 남성의 관점이 있고 여성의 관점이 있듯이.
인간의 관점이 있다면 자연의 관점이 있다. 삶의 관점이 있다면죽음의 관점이 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큰사건이 아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짧다. 대부분은 시시하고 잘 안 써지는 글과 같다.
글의 서두에 ‘붓‘ 이야기가 나오지만 소세키는 한번도 붓으로원고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모두 만년필로 썼다. - P74

고령화 사회, 내 걱정거리는 상호 혐오다. 사람들은 노화를의식하면서 자기 혐오와 싸우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겐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특히 여성들이 자주 쓰는 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는 말이 나는 매우 불편하다. 자글자글 스스로에 대한 방어이자 여성의 여성 혐오다.
저자는 노화의 실제 현상보다 시선, 이미지, 인식에 집중한다. 몸은 세월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몸의 이미지는 인생의 초창기에 형성되고 내내 학습된다. 하지만 노화는 전 생애에 걸쳐진행되므로 사실 노인의 범주는 임의적이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노령의 개념이 다르다. 삶은 누구에게나 질병과 피로와 나이듦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이듦은 느낌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 감정인 것이다. - P83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다. 노화는 인생 자체다.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고 죽는다. 특별하지 않다. - P84

 은둔을 고민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은둔이 도피 이상이 되려면 입장이 확실해야 한다. 나의 잠정결론,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이라도 거사居士). - P92

이창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의를 배웠다. 무엇인가를 얻으면반드시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하는 성의는 그의 서명(휘호)이기도 하다. (278쪽) 흔히 성의나 성실은 모범생 기질이나 심지어 답답함으로까지 오해되곤 하는데 그렇지않다. 만사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나는 불성실한사람이 두렵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 이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앞세우면 작게는 기회를, 크게는 신의를 잃는다. (275쪽)가장 신비로운 바둑의 세계는 복기(復棋)다. 누구나 실패 후반성하고 학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실패에서 배우지못하는 인생이 대부분이다. 학창 시절 틀린 시험문제를 다시보는 것도 괴로운데, 프로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직후 복기를둔다. "보이지 않는 창칼"이 오간 상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취재진의 플래시세례 속에서 다시 배우는 것이다. - P116

캐롤의 상황은 보편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작품 행간에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고전은 보편적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쓴‘ 것이다. 캐롤이 부러운 이들이많을 것 같다. 그는 다 가진 듯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의 길. 한가지 불만이 있다. 연인의 뒤를 캐는탐정이라는 작자에게 캐롤은 총을 겨누지 않는다. (286쪽) 나 같으면 그 자식의 몸에 구멍을 냈을텐데. - P144

그는 이미 삶을 완성(죽음)했다.
비루함, 모욕, 분노가 일상인 이 지옥에서 은둔을 생각하는사람에게도 요긴한 책이다.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곳인가. 인류가 멸망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우리는감각을 잃었다. 사는 방법은 세 가지. 하나는 글자 그대로 사는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살 수밖에 없는 생잔(生殘), 또 하나는 유사 죽음인 은둔이나 과다수면, 마지막은 자살 혹은 자살고민 상태다.
굴드의 은둔은 자기 방식의 적극적인 삶이었다. 그는 내가가장 부러워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재능이나 명예, 불후의 음반 따위가 아니다. 짧고 알찬 삶.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alone withthe alone)."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141쪽) 그것이 ‘성공‘
비결이다. 그의 은둔은 사랑하는 음악과 단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고, 당연히 외롭지 않았다. - P153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외롭지 않다 ("미천한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된다. - P154

‘조용히, 가만히 있다‘는 뜻이란다. "드러나지 않아 조용했고은은했으며 떠난 뒤에도 가만한 당신" (뒤표지) 널리 알려지거나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세상의 치명적인 틈새를 몸으로 메운,
인류가 크게 빚진 사람들이다. 가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을 "은은한 당신"이라고 표현하다니. 저자의 독특하고 단단한 정신이 부럽다. 글쓰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P156

내 친구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15년간 치료해 왔던 담당 의사가 "당신은 의사인 내가 봐도 죽을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죽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대신, 며칠만 미루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붙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저자가 파버로의 인생에 붙인 타이틀은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가만한 당신》, 60쪽)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힐링이 어렵다. "양지에서 누릴 것다 누리고 살았지만, 노력 중인 저자가 전한 아름다운 이들 덕분에 어느 ‘음지의 독자‘가 크게 위로받았음을 고백한다. - P157

선물은 드물고 뇌물은 넘쳐난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절대로 애매하지 않다. 뇌물은 당장의 대가가 오가는 불법 구매 행위일 뿐이다. ‘불편해도‘ 선물과 도움이 오가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든지 불특정 다수에게 갚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 마음의 빚으로 이루어진 연대 채무와 채권의 관계가 유동적인 관계. 가진 것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권리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감사가 공적 영역의 의제가 될 때 돌봄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헬조선‘의 대안 아닐까. 이 시대의 비극은 나의 선물 사건처럼 상호 행위인 감사는 ‘부담스럽고‘, 구조적 착취는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 P160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순은 언어를 빼앗긴 이들의 운명이다. 이것이 지배와피지배 관계의 핵심이다.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는누구의 관점인가? 피억압자의 노동을 지배자의 시각에서 정의하는 것, 이것이 가부장제요, 제국주의, 인종주의다. - P165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 든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 도취에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깃이 된다. 상대를 혐오하고, 조롱(‘풍자‘)했을 때 어떤 사회적 처벌과 반응이 벌어질지잘 아는 권력 관계의 달인이다.  - P183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범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나를 포함한
‘여자의 일생‘의 일부다. 몇 주간 인터넷을 달구었던 진보 남성의 폭력, 알고 있던 사건도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실제 상황을 모두 보고한 피해자는 없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통념보다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얘기다.
폭력은 불법이다. 합법적 폭력인 공권력조차 허용범위는 대단히 좁다. 폭력을 당했으면 가해자가 누구든 경찰에 신고하면된다. 피해자의 신원이 공개될 일도 없고, ‘범인‘의 진정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사법 체계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여성이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인권 의식 향상으로 신고율이 높아져도 걱정이다. 검경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까?  - P185

제1의 성. 여성은 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이기에 제2의성이다. 그나마(?) ‘도하걸‘에 들 수 있는 제2의 성은 젊고 예뻐야 한다. 성적 소수자나 아줌마는 ‘제3의 성‘이다.
‘~걸‘은 여성이 자기로 인해 의미를 지닌다는, 조물주 망상이다. 진보? 지금은 중세이고 그는 중세의 신이다. 물론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성은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여성은 ‘마르크스걸‘이다. ‘모던 보이‘도 있다고? 맞다. 이것이 타자성의 본질이다. 모던의 주체는 서구이므로 식민지 조선의 남성은 모던할 수없다. 모던(서구)의 ‘보이‘인 것이다. - P187

위 이야기는 《제2의 성》이 본 2015년 한국 사회다. 1949년 이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프랑스 지성계는 싸늘했지만 대중의호응은 엄청났다. 사르트르의 알제리 독립 투쟁 참여와 파동과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보부아르가 나도 못마땅하지만, 이 책이 현대 페미니즘의 서장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실존주의 철학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사례가 풍부해서 서양의 종교와 문학을 두루 접할 수 있다.
여성주의는 양성 이슈, ‘여혐 남혐‘ 식의 대칭 언어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질문, 즉 인간의 범주에 관한 인식론이고 《제2의 성》은 그 역사를 압축한다. - P187

위에 적은 것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이 한 말이고 제 소견을말한다면, ‘경계(border)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채식주의자는 "~주의자"라는 표현 자체가 평화의 언어는 아니죠. 대개는 적대,
비난, 심문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여성주의적인 것인지는 늘 고민스럽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그 효력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모든 선언은 일시적 전략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 P189

페미니즘의 정의가 불가능한 것은 태생적 모순입니다. 모든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을 여성이라는 울타리로 억지로 묶고 여성의 가치를 남성을 위한 삶이것이 성 역할 규범입니다)으로 정해놓은 것이 성차별이니까요.
지구상에 여성이 약 35억 명인데, 어떻게 여성이 같은 처지일수 있겠어요? 간혹, 부자 여성이 있고 가난한 남성이 있는 것이그렇게 이상합니까.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등 여성들 사이의다름을 인식하고 차이를 갈등이 아니라 자원으로 삼고자 하는세계관입니다.  - P189

성폭력과 성 역할은 문화적 규범으로 인식되어 법적 처벌이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들은 사적 복수를 꿈꿀 수밖에없다. 실행하고 성공하는 사례가 많겠는가, 엄두도 못 내고 평생 분노와 우울증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많겠는가? 우리도 역사가 있다.  - P197

여성이라는 ‘작은‘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일상과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여성은 일시적으로 "너는 나다."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여성의 저항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사회 정의다.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 온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차별은 일상이고 살인은 극단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 살해는 일상의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를비롯해 피해 여성들이 지칠 것이라는 착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스트잇의 가장 많은 내용은 "잊지 않겠다."였다. - P225

문제는 남녀 대립적 사고방식이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죽었고, 여성들은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를 "남성에 대한 혐오"라고 한다. 무슨 대책이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극한의 성차별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더 분한 법. ‘남성 혐오‘는 여성에 대한 비하보다 나를 더 공포에 떨게 했다.
심란한 이 시기에 뤼스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만큼적절한 책이 있을까. 인간의 성은 하나(남성)가 아니라는 것이다(This Sex Which is Not One). 이 책은 정신분석학과 정신분석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이리가레의 전략은 기존 정신분석의 틀 안에서 그들의 이론을 반사(反射)하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유명한 거울 이론의 등장이다.이때 이제까지 스스로 태양이었던 남자들은 눈이 멀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성, 하나의 언어만 존재한다. 이리가레는말한다. "나는 남성-여성의 대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성성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당연하지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없으니까요." (184쪽, 필자가 윤문함) - P227

그는 성차별뿐 아니라 지금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인종차별에 격렬히 저항했다. 이혼, 동거의 자유와 미혼모와 사생아의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의 머리칼을 자르고 길거리에서 그를 끌고 다녔던 공포 정치가들과 후세대들은, 대담하고 똑똑했던 이
‘여성을 ‘괴물‘이라 불렀다. 무모한 여자, 정신이 불안정한 여자,
용감한 미치광이, 부도덕한 괴물………….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억압받아 온 모든집단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역사를 모르는 여성에게 미래는 없다. 공부해야 한다. 여성주의 입문서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이책이어야 한다.
‘문명국‘ 프랑스도 여성 참정권은 법률상으로는 1946년에야보장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단두대 없이 주어진 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을 노골적으로비하하는 정당에 투표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인권의 전제는 여성의 인권이다. 인권이 있고 그 아래에 혹은 나중에 ‘그 외 사람들‘의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P237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기사든, 모두 그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이야기다. ‘자서(自書)‘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는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 P246

《헝거》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심리적 허기가 골격을 이루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자아 개념과 어떤 형태의 몸으로 사느냐에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고 고통스런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협상과 자 - P248

기 검열의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스트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읽고 직면했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수용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사실을. 내가 록산게이의 키와 몸무게라면………. 내 삶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예쁨‘, ‘스타일‘, ‘정상성‘에 온 신경을 쓰면서 자신과 타인을억압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인생이 힘든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용기란, 인생이란, 페미니즘이란, 글쓰기의 모범이란 이런 것이다. 삶은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이라는 진실을 <헝거》보다 더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은 드물것이다. 책을 읽고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 있는데,
나는 록산 게이를 발견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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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이 (그 글을 쓴 당시의) 나다." 사람과 글은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나친 개작이나 윤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욕망일 뿐이다. 얼마 전 TV에서 캐럴 리드감독의 1949년작 영화 <제3의 사나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보았는데, 진행자가 "7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걸작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손 웰스의연기!) 이런 방식의 상찬은 흔하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 미술모두 "시공간을 초월한 걸작, 클래식". - P11

일반적으로 소설가는 ‘감동적인 재미있는 스토리텔러(이야기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는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위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패하기 쉬운 도전이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연구 방법과글쓰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의식에 맞는 형식미를 갖추기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식 자체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 P12

이 책은 ‘글쓰기 이론‘의 맥락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이다.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서가를 기웃거리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knowledge)의 목표와 - P13

방법은 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플라톤과 주디스 버틀러는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을 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의미라기보다는 행위는 곧 행위자라는 뜻이다. 행위자(나)를알려면 자기 행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 P14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P14

다만, 여성주의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학문은 드물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 - P15

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 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실천이 될 수 없다. 여성주의는 하나의 분과 학문(국문학, 영문학・・・・・・)이 아니라 평화학이나 탈식민주의나 생태학처럼 일종의인식론이다. - P16

두 번째 인용구는 스무 살에 최초의 공상 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자 그를 출산하다 서른여덟살에 산욕열로 사망한 영국의 근대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년)의 목소리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여성 저자와독자가 생길 무렵에 활동했던 그의 처지와 2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에 절망과 슬픔을 지나 ‘안도‘했다.
나는 송고할 때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마음속 땅으로 꺼졌다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편집자에게 늘 하는 말도 "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부족한 글을 보내 죄 - P16

송합니다."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크래프트의 걸작도 생계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도 작가 자신의 말대로 "상업적 목적으로 ‘부실하게 나온 책"
이라니! 겸손의 뜻도 있겠지만 절박성이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독립 연구자‘로서 매문(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매일매일 글의 수위를 놓고 나 자신과 사회와 협상을 거듭한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 모두 ‘훌륭한 것도 아니고 ‘좋은‘ 사유가 모두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이야기는 나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용기를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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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서 알바를 못 간, 보너스로 주어진 휴일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었다. 벌써 2년이 되었다는 게 놀랍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 이 책이 왜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을까를 생각했다. 두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한 환경에서 살고있다. 달라졌다면 페미니즘이나 젠더 문제에 내가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체가 아니라 ‘낯섬‘때문에 페미니즘은 그저 어려운 것이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 P10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정치학과 미학은 이 몸부림 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사람마다 행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독특한 글(콘텐츠)이나올 수밖에 없다.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군자의 비현실적인 말이 아니라, 과정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뜻이다. 괴로운 과정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온다. - P16

생각해본다. 나는 타인에게삶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인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죽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이 ‘어쨌든 살아보자‘는 의욕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곳인가.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 - P24

마음이 없는 리더. 그런 리더를 선택하는 사회, 두렵고 심각한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미 극소수는양극화를 넘어 다른 공간에 산다. 그들의 대통령에겐 심서가 필요없다.
대개 관료나 정치인들에게 《목민심서>를 권하는데 그 의미가바뀌었으면 한다. 마음을 갖추라는 것이다. 마음이 없다? 문자그대로 말하면 물리적으로는 심장이 없는 죽은 사람이요, 기능상으로 뇌(생각)가 없는 사람이다. 마음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불필요한 사람이다. - P31

마음이 강하고 큰 사람은 울림이 있다. 심장박동이 자기 몸을 넘어 세상에 들린다. 마음이 크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마음이 있다면 보여주었으면 한다. 마음은 실천을 통해서만 감각할 수 있는 물질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과 마주할 남은 시간, 심란하다. - P32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이다. 이 사실처럼 우리가 자주 잊는현실도 없다. 기억하기엔 너무 벅찬 숨소리인가. 슬픔과 우울은소비의 적이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망각과 무관심이 우리를 자본주의를 향한 환호로 이끈다.
- P43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까‘가 궁금한 이들이 있다. 자기는 잘났거나 억울한데 남이 보기엔 ‘사회악‘.
‘걸어 다니는 재앙‘인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자신이 무슨 일을 왜하는지 매 순간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직업 자체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은 성찰이 업무이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하지 않음은 죄악이다. - P55

‘개인 노무현‘이 불가능한 언설임을 안다. 그에 대한 모든 기억과 판단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이 분명한 사실이 가장 안타깝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자명한 역사가 나를 좌절케 한다.
어느 세월에나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할까.
자살과 다른 죽음의 차이는, 자살이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사실이다. 유언과 유서는 어떻게 다를까.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살은 특별해진다. 자살은 교통사고, 사고사로 숨겨진 사망 신고가 많아 정확한 통계가 어렵지만 4명 중 1명꼴로 유서를 남긴다고 알려져 있다(《자살의 이해》), 10퍼센트라는 이론도 있다. 유서가 자살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통념에 비하면 낮은 비율 같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 P61

일천한 독서 경험이지만 노무현의 유서는 상당한 명문에 속한다. 담백하다. 완벽하게 지쳐서 미련이 남지 않는 사람만이쓸 수 있는 글이다. 전체적인 균형, 깔끔한 표현력, 심정과 사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증상의 전형성("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호소("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구체적 이유("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성숙한 자세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타인에 대한 배려 "너무 슬퍼하지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소박한 요구("화장", "작은 비석"). 그가겪었을 고통을 감안하면 놀라운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 P62

운명은 우주 혹은 세속의 힘이고, 개인의 삶은 그 힘에 종속되는가? 그렇지 않다. 운명은 권력을 탈정치화한 표현에 불과하다.
운명은 구조의 힘에 대한 나의 대응(re/action)이다. 그것이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극단으로 기울어질 때 개인은 생사의기로에 선다. 자살, 타살 여부는 부차적이다. 즉 모든 자살은 사회적(타살)이다. 대개 구조가 개인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팔자를 타령한다. ‘운명을 극복한 경우는 복잡한 세상의 우연 덕분이다. 이 과정에서 ‘승패‘와 무관하게 악의 그물에 걸려 몸이헌신(獻身)될 수 있는데, 이른바 ‘역사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
"운명이다"는 구조, 즉 당시 정권에 대한 노무현의 답이었다.
그는 구조주의자(운명론)도 개인주의자(의지론)도 아닌 구조를넘어서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지 말아야 했다? 우리는 인간의 생사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삶과 죽음 모두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 P63

시인을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각하거나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런 축이다. 시는 언어들의 언어,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왜 잘났겠는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 정치적 분노(유시민의 해석)와 공동체에피해를 주는 행위, 먼지에 대한 공포(나)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 P66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정치적 글쓰기는 사악함과 투쟁하는 일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일입니다."(102) 저자는 낙관적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사회는 ‘사악한 다수‘가 점령했는데………….
조지 오웰의 저자 버전인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 자신을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좋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말로든 글로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는 맙시다." (97쪽)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글을 쓰는데. - P66

거리에서 하는 노동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단지 아르바이트와 피시방 밤샘 일은 저임금 알바 중 하나다. 가출한 이후 ‘원조 교제‘와 성 산업에서(도) 외면당한 10대 소녀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알바가 꿈이다. 나더러길거리에서 전단지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꼭 받아 달라고 당부했다. 수십 장을 그냥 버리고 싶은 유혹 받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 춥고 더운 날씨의 어려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귀찮아한다는 비참함이 일이 끝난 후에도 이어진다. 상상력은 지구 밖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았던 곳을 생각하려는 마음이다. 전단지를 기꺼이 받아주는 작은 선행은, 그들의 노동 상황에 대한 큰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37) - P72

매일매일이 괴로운 뉴스다. 타락이 공기와 같고 언어도단이일상이다. 욕망에 한계가 없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부럽기까지 한‘ 이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가 그들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한다. 천지가 그런 사람이니 ‘너만 다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치고 공동체는 붕괴된다. 누가 멈춰야 할까. - P75

그나마 나는 그의 물신성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지금도 파악 불가능한 상태다.
오로지 박정희의 말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었고, 전 국민과
‘국가 브랜드‘는 회복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됐겠는가 아닌가‘라는 환경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대통령이 아니라 "부모를 흉탄에 잃은 애처로운 큰딸로 생각했다.
여기서, 역사의 반전. 그는 ‘근대화의 역군‘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정말 ‘평범한‘ 최씨네 가족이었다. - P78

연대(네트워킹)와 연줄의 차이는 무엇인가. 좋은 취지의 사회적 약자 모임은 연대이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연인가? 아니다. 연대와 연출의 차이는 새로움에 있다. 기존의 관계를 활용하는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가. 이것이 차이다.
하지만 무연 사회에서 연대와 연줄의 다름을 논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사의 순간은 그렇다고 치자. 사후를 정리할 인간관계가 없는 죽음. 이것이 이제까지 인류가 달려온 문명 사회의 최종 모습인가. 서로 돕고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은 노인, 장애인, 환자를 비롯한 건강 약자들이다. 이들은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연‘과 ‘무연‘은 인간의 조건을 둘러싼 중요한 논쟁거리다.
불성실과 무능력을 연줄로 해결하려는 사람, 나 홀로 간편하게 살려는 사람, 처지가 어려운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는 사람,
타인을 집요하게 괴롭힘으로써 낙오된 자기를 잊으려는 사람.
이들은 모두 달라 보이지만 사고방식이 같은 이들이다. 혼자 살만한 상태가 영원하리라 믿는 오만, 노년은 이토록 멀리 있다. - P84

감옥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접견 횟수와 영치금의 액수가......
같을 리 없다. 사정이 나았던 신영복은 동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거부하는 이들을 보고 이렇게 썼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 돕는다는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은 관계의 최고 형태가 된다. (313쪽) 연대의 의미에대해 이보다 더한 명문이 있을까. 이 당파성과 위치성!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처음 출간된1988년과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독후감은 다르다. 1976년,
신영복은 그의 계수에게 이렇게 썼다. "얼마 전에 읽어본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을 추천합니다. 매우 신선한 책입니다." (95쪽) ‘염려보다 이해를‘ (73쪽)이 이토록 감사한 말임을그때는 몰랐다. - P8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사상이다. 1968년부터 20년 20일 동안 ‘엘리트 사상범‘은 ‘밑바닥 인생들‘과 살면서, 그들과 자신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그는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남성의 ‘특권‘은 누릴 수 없었지만,
타인을 타자로 만들지 않고도 남성이 된 드문 인간이 되었다.
천만 번의 외로움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 P87

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하늘을 두 쪽 낼 만큼 강렬하다. 실현가능성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을 만큼 노력하거나 노력해봤자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의 희망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희망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절망에 대처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희망이 인식이 되어 그 인식을 행동으로 옮길 때다.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명절 인사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아니다. - P94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동시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희망찬 인생‘은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된다.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 P95

"우리는 운동이 없는 배움, 배움이 없는 운동에 대해 ‘운동‘의이름으로 맞선다."(127쪽)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생각은 현실과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서른 살 이후,
나는 이 이슈를 기준으로 억압하거나 비웃거나 불편해하는지여부에 따라 상대방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학습과 사회운동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단체상근자들은 공부할 필요, 조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전문가‘ 의견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실무자와 전문가는 별도로 성립할 수 없다. 사회운동, 회사,
관료 조직을 막론하고 전문성 없는 실무자와 현장 능력이 없는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이들의 결과가 ‘세월호‘다. - P105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 P105

명심하길.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의 연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는 1853년 스쿼미시족의 추장 시애틀은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란 없다. 단지 살아가는 세계가 바뀔 뿐이다."(228)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더라도 빈 머리 (익숙함)에 의존하지 말고 생각하고 발언하라. - P109

정혜윤의 글쓰기는 유독 이 책에서 빛을 발하는데, 유려하면서도 단단하다. 구성이 탄탄한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듯하다.
그는 듣는 자의 위치성을 잘 알고 있다. 상황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대상화하거나 감상적이지 않다. 저자의 주된 질문은 "무엇 때문에 5년간의 길거리 생활을 버틸 수 있었는가?"이다. 생계와 복직, 공권력에 대한 분노, 3년간 동료 22명의 사망… - P111

이것만이 이유였을까. 협업이 중요한 자동차 공장에서 각자가 서로의 몸이 되어 일하던 동료들끼리, 하루아침에 "함께 살자.","같이 죽자는 말이냐", "다 죽일 셈이냐.", "다 죽자는 말이냐.", "너 살자고 날 죽이냐.", "차라리 함께 죽자."는 말이 오가는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사람은 어떻게 살아지는가. "살면서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받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은 바로 배신감이었어요.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것이었어요"
(35) 배신, 사람의 바닥. 여기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사람이싫어지면 삶은 끝이다. - P112

몇 년 동안 매일, 인간의 바닥을 보게 된다면? 병에 걸리거나죽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산다. ‘나와 사람‘이라는 화두 - P112

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니. 드라마 <미생>의 영업3팀이 부러운 이들에게 권한다. 인세 수익은 전액 기부된다. 이책의 노동자들은 진정한 치유자다.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healer), 위로받을 것이다. - P113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다정하지 않다. 가까울수록 적대적이다. 외면, 길항, 동일시∙∙∙∙∙∙. 당사자가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은 보이지만 내 경험은나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자기 시각은 없으나, 자기 뜻대로 쓰는 이른바 ‘객관적인‘ 것들이다. 세상사를 전(專有)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이라고 선포하는 글. 기회주의와 보신주의를 중립과 보편, 심지어 정론으로 포장한 것들이다. 거리를 잡는 것‘(포지셔닝 혹은 주제 파악)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리 두기와 동일시는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반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한 공감과 연대는 어렵다. - P116

"우리는 임금 삭감을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평양 전체 고무 직공의 임금을 깎는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평양의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롭다는 것입니다.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 삭감을 취소하지 않는 한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 죽을 각오로 싸울 뿐입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 나는 울컥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배운 지식 중 ‘가장 귀하다‘는 그의 마음이다.
을밀대 농성과 지금 투쟁을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공통점은 ‘이기려고 올라갔다‘는 점이다.  - P119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삶은 옳고 그름이나 일의 가치를기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냥 사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신성한 노동? 이런 가치들은 소통하기 어렵다. 전쟁은 이런 것이 있다는 가정, 즉 정치경제적 이유와 ‘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때문에 발생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겐 해야 할 일이 필요할 뿐이다. "삶은 지속된다(lasting)"라는 제목의 책,영화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삶에 목적은 없다. 의미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먹기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반성은 필요 없다.  - P124

당연히 먹기 위해 산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우울한인간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 질문만이 유일하게 쓸모 있다. 삶자체가 의미라면 그걸로 만족스러운 것이며, 일상의 괴로움과외로움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라면어떡하겠습니까?" 한나의 질문은 삶이란 최악이자 최선이라는본질을 폭로한다. - P125

이처럼 인생=길이라는 통념은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는 데방해가 된다. 상투성의 원단,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단지 선택하지 않은 삶일 뿐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갈 수 없는 길이고 이미 삶이 아니다. 외출 준비에 한나절 이상 걸리는 장애인, 여성이 피하는 밤거리, 치매와 광장공포증환자에게 길은 도전이자 치열한 정치다. 비장애인의 걷기, 걷기투쟁이 많지만 이진섭, 이균도 부자에게 길은 그들과 같지 않다. 이 책은 길의 의미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한다.
장애인이나 아픈 사람, 화상 환자, 우울증 환자가 집 밖으로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나라처럼 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든 사회도 드물 것이다.
구조적, 심리적으로 ‘총을 든 간수‘가 곳곳에 완강하다. 성형 시술이 성별 이슈로 한정되는 것은 부정의하다. 몸의 외형과 기능문제로 고통받는 장애인은 외모주의의 가장 큰 이해 집단이다. - P128

박래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다. 감히 병렬적으로 쓰자면,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비판이불가능한 사회운동 내부의 문제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서른 살에 단체 활동을 그만둔 이유는 사람이 하는 일과 사람의 질은 반비례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래문제가 많은 사람이 사회운동으로 도피하거나 삶의 진지로 작정한 경우도 있고, 활동 과정에서 망가지고 타락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런 인간사다. 다만, 이 바닥은 아주 뛰어난 은폐 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어리석은 줄 알지만, ‘깨끗한 영웅‘을 찾아서 혐인증(人)을 치유하고 싶은 것이다. - P132

사회 조직은 몸에 비유될 때(政體), 즉 물리적 실재라는 가정에서만 통치가 가능하다. 유기체는 한 생물, 한 단위이다. 생물하나가 단독자로서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사고다. 전자는 전체가 한몸이고,
후자는 개인이 한몸이다. 당연히 (개인의 인권 사상으로는 국가주의를 이길 수 없다. 작은 개인과 큰 개인 중 누가 희생해야.
하겠는가. 국가가 한목숨인데 어떻게 타인 · 이견 차이가 인정되겠는가. ‘국가안보, 적, 간첩, 국론분열‘이 언제나 통하는 이유다.
- P136

전쟁은 없지만 굶주림과 폭력이 만연한 상태, 가진 자의 마음이 평화로운 사회, 여성의 목소리는 불편하다는 진보 남성이 많은 사회를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모임엔 있었다.) 평화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다.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위로. 나는 그런 평화를 기원하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평화다. - P139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피했다.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죽어 가는 엄마의 이야기.
이 책의 지은이는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역사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이다. 남성을 ‘꼰대‘로 규정했지만 여성의구매력을 보여준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의 저자이다. "가르치려 든다"는 너무 점잖은 번역이다.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남자들의 진짜 문제는 가르칠 것이 없다는 사실 아닐까. - P149

삶이 생사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생로병사다. 시간은 나이듦과 병듦으로 채워진다. 이 책을 읽은암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작가에게 말했다고 한다.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전해 달라."
누구나 아프고 죽는다. 슬프고 두려운 것은 ‘인간‘이어서 그렇다. 인간은 의미 중독자다. ‘자연‘이라면 순리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안도감이 아니라 의료 보험 개혁뿐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아픈 사람을 루저로 대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자연에서 다시 만난다. - P162

아서 프랭크는 차이가 인식되어야 돌봄이 가능하다고 본다.
암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은 없다. ‘암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느낌표는 필자) 의학이 환자를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disease)에쓰이는 것이지, 질병(illness)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차이와 독특성을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이를 파악하려면 아픈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75) 치료와 돌봄은 다르다. 돌봄…. 내가 엄마를 간병할 때 가장 많이 한 말(짜증)은 "엄마,정말 원하는 게 뭐야?"였다. 그가 원하는 거즈의 촉감을 찾기위해 몇 종류의 거즈를 샀는지 모른다.
이 책은 번역서 같지 않다. 번역(메이), 표지 디자인(김효은),
추천사(김영옥, 전희경)가 본문보다 심오하다. 특히 번역은 원래능숙한 한국어 사용자가 쓴 문장 같다. 《아픈 몸을 살다》는 아서 프랭크의 첫 저서이며, <몸의 증언>(갈무리, 2013년)도 권하고싶다. 위에 언급한 이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다. 우연만은 아닐 - P165

소설가 정찬의 문장을 부러워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언어의 결정 극한 노동의 산물이다. 게다가 그의 사유는은결정(潔淨)을 향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대결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일부 평자들의 견해와 달리 그의 작품은 시류와 어울린다.
누구나 작가인 시대, 글쓰기의 민주화가 언어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된 지금, 그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예술가다. 데뷔 37년차에 이르러서도 "쉼 없이 언어와 싸우며, 번번이 무릎을 꿇으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가혹한 싸움"을 멈추지 않은 소설가. ‘연륜에 맞는‘ 태작이 없는 작가. - P166

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 P194

누구나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보호의 현실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를 둘러싼 가장 비등한 여론은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냐?"라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위험하다. 국가가 강력한 보호자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세월호의 대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기존의 보호는 보호자(주체)와 피보호자(대상)를 전제한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세금, 충성, 자유의 부분적 포기 같은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존 보호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보험자가 보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보호자 남성은 여성을 성(性)과 외모 혹은 아버지가 누구냐를 기준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여성으로 구분한다. 보호자에게는 차별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가가 보호자일 때 국민이 어느 지역과 계급에 속했는가에 따라보호 의지가 다르다. 지역 차별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은이마저도 아니고 "왜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고 반문한다. - P204

노동으로서 모성이 개념으로서 모성적 사유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생각한 다음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사유를 만든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처럼 ‘틀린‘ 말이 ‘좋은‘
말로 회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 근대의 쌍생아인 생산주의와 ‘상록수 정신‘으로 우리를 들볶는 논리다. 삶은 사유의 실현이 아니라 근거다.
안전은 보호자에게 요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류할 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보호는 상호 보살핌이다. 우리 삶에는 이미보호의 철학적 기반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5천 년간이어 온 가부장제 사회의 ‘어머니‘ 노동이다. - P205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다짐할 필요도 없다. 비처럼 세월호도 삶의 일부다. 어두운 이야기도 남의 일도 아니다. 누구나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베갯잇을 적시게 되는, 보고 싶은 이들이 있지 않은가.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눈물과 함께 흐느끼는소리가 들리게 하라.
바다에 내리는 빗소리는 모호하다. 그러나 진도 바다의 영혼들은 듣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역사에 새길 빗소리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하는, 타닥타닥 존재감 있는 소리. - P208

혀가 면도날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주를 너무 받아서혀를 많이 베인 것인가. 그래서 막말이 막 나오는 것일까. 이들입안의 피비린내가 세상에 진동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모르는 이에게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제발 자기 악취는 스스로 삼키기를 밖으로 뱉지않기를 바란다. 세상도 진실도 혹독하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더 들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통과 상처를 딛고서야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날 것인가. - P212

보편적인 말은 없다. 어떤 이에게 착한 말이 어떤 이들에겐비현실적이다. "잊지 않겠다."는 고통 외부의 시각이다. 기억해
‘주다‘가 아니라 당사자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슬픔이일상의 일부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상실과 상실감은인간성이다. - P240

세월호가 인양될 때 아무 말 없이 며칠을 보냈다. 어떤 상호비교도 적절하지 않지만, <4·3은 말한다》를 다시 읽을 수 없는심정과 비슷했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독후감은 "자기 인식의 한계에 대해 생각함", "세월호에 관해 말하는 방식을다시 생각함"이 아닐까.
세월호의 ‘미수습자‘와 4·3의 ‘행방불명자‘. 세월호는 떠올랐고 4·3은 법의 영역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유족들의 경험과 역사 쓰기는 어떤 차원에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만이 유일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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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일일,
방을 옮겼는데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창가에 놓여있다. 내가 K선생님께 선물한 책인데 읽고 계셨던 모양이다. 절반쯤 읽으셨는지 ‘한라산, 내 영혼의 고향‘에 책갈피가 꽂혀있다. 흐뭇하다.

몇 번을 읽었고
많이 선물한 책인데
오랜만에 휘릭 읽는다.
그리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억새가 손짓하는 중산간도,
향기 짙을 여린 국화들도,
두모악의 바람이 담긴 사진들도
그리움이다.
내 마음의 풍경이다.

내 마음의 풍경

들판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찾아가 세상을 탓하고나 자신을 탓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도 부려봅니다.
하지만 들판은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줄 뿐입니다.
그리고 새들을 초대해 노래 부르게 합니다.
풀벌레를 초대해 반주를 하게 합니다.
구름과 안개를 초대해 강렬한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줍니다.
해와 달을 초대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줍니다.
눈과 비를 초대해 춤판을 벌이게 합니다.
새로운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평온할 때면 나는 그 들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야 그 들판을 생각합니다.
그래도 들판은 즐거운 축제의 무대를 어김없이 펼쳐줍니다.
들판이 펼쳐놓는 축제의 무대를 즐기다 보면 다시 기운이 납니다.
그런 들판으로부터 받기만 할 뿐, 나는 단 한 번도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들판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대신 언제나 나에게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나의 모습은 들판으로 나오기 전까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들판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 풀과 나무들은 온갖 시련을 홀로 견디며무성하게 자랍니다. 소, 말, 노루가 주는 시련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홍수가 나면 뿌리째 뽑혀나갑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잎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풀과 나무들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뭄이 들면 홍수를, 혹서기에는 혹한기를 떠올리며 참아냅니다.
때가 되면 태풍이 옵니다.
태풍은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고 떠납니다.
이제는 사람들도 한몫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과 나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뽑혀나간 뿌리로 땅을 짚고 새 줄기와 가지를 키워 올립니다.

부러진 줄기와 가지를 추슬러 새순이 움트게 합니다.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무들은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나에게도 비극과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입니다.
이때 들판은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는 들판의 친구로 삽니다.
들판을 친구 삼아 나의 비극과 고통을 넘어섭니다.
아픔은 한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슬픔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나의 친구, 들판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해줍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고요한 몸짓으로,
그렇지만 온몸으로……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으면 섬 밖의 섬 마라도로 간다. 거기서 며칠이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라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떨어지면 죽음이다. 정신이 바짝 든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이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산다는 것이 싱겁다. 간이 맞지 않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살다보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튀어나온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도피처를 찾는다. 그 최종 도피처는 죽음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잊기로 했다.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늘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매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그때는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현재가 이어도이다. 아직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날숨과 들숨이 자유로운 지금이 행복이다.

내 사진은 ‘외로움과 평화‘ 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그동안 다양한 크기의 필름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중에서 파노라마(6×17)사진이 내 사진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럽고서글픈 일이라고 고백했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너무 모른다. 나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지를 완성한다. 한장의 사진 속에 담긴 이미지는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사진이 어이없이 재단되고 변형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나의 사진을 나의 의도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이십여 년 만에 얻었다. 허락해준 하응백 사장과 손현미 편집장, 정진이 디자이너 그리고출판사 식구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나 자신이 흡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느끼고 표현할 때까지는 사진으로 밥벌이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메라만 좋으면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전업 사진가로살아가기도 힘들다. 

나는 그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움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사철 억새와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억새의 변화에 따라 기분도 변한다.
내 기분에 따라 정원의 분위기도 쉼 없이 변한다. 내 감정은 고여 있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흐른다.
중산간 초원 억새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이는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억새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구름이 짙게 가라앉은 날아침이나 저녁, 여명에 드러나는 억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바람 부는날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억새를 으뜸으로 꼽는다. 어떤 빛에서 사물을 보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물이 놓인 주변 환경에 따라 우리가 느낄수 있는 아름다움은 확연히 다르다.
장마철이면 안개 짙은 날 치자꽃 향기에 취해 마시는 커피 맛은 유별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보름달을 보며 마시는 차 맛은 누구도 이해할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한다.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황홀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찾으려 한다.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며 마음을씻고 닦아 모두를 사랑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써 나는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바다 사진을 찍을 때 배, 새, 바위, 비행기, 사람 그 어떤 것도 사진 안에 끼어들지 않는다. 바다는 텅 비어 있다. 구름의 양, 구름의 모양, 구름의 색 등에 따라 바다도 변한다. 필터 등을 이용한 기술적인 효과도 배제한다. 필름이나 렌즈도 하나만을 고집한다. 수평선을 프레임 중앙으로 놓고 위는 하늘, 밑은 바다다. 프레임을 결정한 나는 같은 프레임으로 계속촬영한다. 일출이나 일몰도 같은 방식이다.

그릇의 쓰임이 빈 공간에 있듯, 사진 속의 공간도 최대한 비워놓는다.
도예가가 찻잔을 만든다. 그 잔을 쓰는 사람이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된다. 옛날 옹기들이 장독대에서 이제는 방 안으로자리를 옮겼다. 꽃병이 되기도 하고, 우산꽂이가 되기도 한다. 사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나 자신을 위해 찍는 사진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경치가 빼어난 곳을 찾아가면 좋은사진을 찍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떤 바다나 강에도 큰 고기는 있기마련이다.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만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내 존재가 잊혀져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은 변화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어느 한곳을 찾아갑니다. 같은 곳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찾아가지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곳을 삼백예순다섯 날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합니다.
자연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하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충만해 있습니다. 나는 늘 긴장 속에서 자연 속을 맴돕니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동안만은 아무리 작은 욕심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한라산은 온 산이 그대로 명상 센터입니다. 나는 어느 한곳에머물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핑계 삼아 명상을 합니다.
수행자처럼 엄숙하게 자연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내면의 소리에 몰입합니다. 내 마음은 늘 변화했고 그 변화를필름에 담습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소중한 시간이기에

홀로 지내며 그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매일매일 반복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 나의 내면도 성장했습니다.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마음은 중심을 잡았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자연의 소식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사건에 매달려 세월을 잊고 살다보니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지혜를 얻었습니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방황, 분노···내 사건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동박새는 모른다. 동백꽃을 피우기까지 나무가 견뎌낸 고통의 시간을.... 동박새는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눈, 비, 바람, 가뭄, 혹한과 무더위를…. 동박새는 꽃이 떨어지면 동백꽃을 기억하지 않는다. 동박새는 다음해 동백꽃이 피어야 다시 올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점점 야위어가는 나를 보고 더러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해주는 지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방식의 치료를 고집하자 더 이상 권유하지 않는다.
‘빵이 깊어갔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지인들의 발길도 전화도 뜸해졌다.
밤이 되면 갤러리는 적막하다. 적막함을 즐기며 홀로 정원을 걷는다. 몸이 피곤해지면 편안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 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 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팔 힘이 없어 운전을 하기도 힘드니 혼자 몸으로는 외출도 어렵다. 온종일 갤러리에 갇혀 지내며 한적함을 즐기고 내일을 기다린다. 이제 기다림은 나의 삶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삶을경험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나를 몹시 가여워한다.
새로운 길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슬퍼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새길을 발견했으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조금 힘들고 불편해도 나에게허락된 오늘을 즐길 수 있어서 마음이 평화롭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두려움 없이 기꺼이 기쁘게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일 게다.

살다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에서 해답을 구했다.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나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느끼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며 자연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난치병이라는 사실마저 잊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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