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려서 알바를 못 간, 보너스로 주어진 휴일을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쓴다˝를 읽었다. 벌써 2년이 되었다는 게 놀랍다. ˝페미니즘의 도전˝을 다시 읽으면서 처음에 이 책이 왜 그토록 어렵게 느껴졌을까를 생각했다. 두번째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한 환경에서 살고있다. 달라졌다면 페미니즘이나 젠더 문제에 내가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다. 문체가 아니라 ‘낯섬‘때문에 페미니즘은 그저 어려운 것이었다.


"왜 쓰는가"와 "왜 사는가"는 같은 표현이다. 사실, 이 물음은-누구나 작가인 시대지만 작가에게만 해당하는 질문이아니다. "왜 사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특히 어려운 시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일수록 그렇다. 삶은 행위의연속이다. 모든 행위는 침묵이든 폭력이든 놀이든 노동이든 인간관계든, 그리고 죽음의 방식까지 자신을 표현하는 퍼포먼스다. 이러한 표현은 기호(signs), 즉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오늘날 널리 쓰이는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이 그것이다. 좀 더정확히 말하면, 모든 표현은 자기만의 사유(특정한 렌즈)를 거치므로 각자의 몸을 통과해 걸러진‘ 재현(再現, re-presentation)이다. 표현이 아니라 재현이 맞는 말이다. - P10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 쓰려면, 나부터 ‘나쁜‘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글을 쓰는 과정은 나의 세계관, 인간관을 찾아가는 과정이며 나를 검열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이문제를 감당하지 못하면 글쓰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글쓰기의 정치학과 미학은 이 몸부림 과정의 ‘자연스러운‘ 산물이다.
사람마다 행로가 다르기 때문에, 이른바 독특한 글(콘텐츠)이나올 수밖에 없다. 흔히, 결과보다 과정이라는 말의 의미는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는 군자의 비현실적인 말이 아니라, 과정에서 결과가 나온다는 뜻이다. 괴로운 과정에서 ‘최선의 올바름‘,
아름다운 문장이 나온다. - P16

생각해본다. 나는 타인에게삶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인가. 인간에 대한 혐오로 죽고 싶은 마음을 부채질하는 사람인가. 우리 사회는 구성원들이 ‘어쨌든 살아보자‘는 의욕을 일으키는 매력적인 곳인가.
고통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가능성뿐이다. 생사의 갈등으로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에게 제시되어야 할 것은 미지라는 기대가 있는 사회다. - P24

마음이 없는 리더. 그런 리더를 선택하는 사회, 두렵고 심각한 현상이다. 새로운 시대의 징조일지도 모른다. 이미 극소수는양극화를 넘어 다른 공간에 산다. 그들의 대통령에겐 심서가 필요없다.
대개 관료나 정치인들에게 《목민심서>를 권하는데 그 의미가바뀌었으면 한다. 마음을 갖추라는 것이다. 마음이 없다? 문자그대로 말하면 물리적으로는 심장이 없는 죽은 사람이요, 기능상으로 뇌(생각)가 없는 사람이다. 마음이 없으면 죽은 것이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불필요한 사람이다. - P31

마음이 강하고 큰 사람은 울림이 있다. 심장박동이 자기 몸을 넘어 세상에 들린다. 마음이 크기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마음이 있다면 보여주었으면 한다. 마음은 실천을 통해서만 감각할 수 있는 물질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과 마주할 남은 시간, 심란하다. - P32

삶은 본질적으로 비극이다. 이 사실처럼 우리가 자주 잊는현실도 없다. 기억하기엔 너무 벅찬 숨소리인가. 슬픔과 우울은소비의 적이다. 삶의 비극성에 대한 망각과 무관심이 우리를 자본주의를 향한 환호로 이끈다.
- P43

‘저 사람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까‘가 궁금한 이들이 있다. 자기는 잘났거나 억울한데 남이 보기엔 ‘사회악‘.
‘걸어 다니는 재앙‘인 사람들을 자주 본다. 자신이 무슨 일을 왜하는지 매 순간 생각을 놓치지 않는 것.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런 자세가 직업 자체여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 종교인,
지식인은 성찰이 업무이다. 따라서 이들의 생각하지 않음은 죄악이다. - P55

‘개인 노무현‘이 불가능한 언설임을 안다. 그에 대한 모든 기억과 판단은 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이 분명한 사실이 가장 안타깝다. 이 움직일 수 없는 자명한 역사가 나를 좌절케 한다.
어느 세월에나 ‘그 사건‘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가능할까.
자살과 다른 죽음의 차이는, 자살이 개인적이고 생물학적이며 동시에 사회적이라는 사실이다. 유언과 유서는 어떻게 다를까. 다르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살은 특별해진다. 자살은 교통사고, 사고사로 숨겨진 사망 신고가 많아 정확한 통계가 어렵지만 4명 중 1명꼴로 유서를 남긴다고 알려져 있다(《자살의 이해》), 10퍼센트라는 이론도 있다. 유서가 자살의 증거처럼 여겨지는 통념에 비하면 낮은 비율 같지만 자연스러운 일이다.  - P61

일천한 독서 경험이지만 노무현의 유서는 상당한 명문에 속한다. 담백하다. 완벽하게 지쳐서 미련이 남지 않는 사람만이쓸 수 있는 글이다. 전체적인 균형, 깔끔한 표현력, 심정과 사유가 잘 조화되어 있다. 증상의 전형성("글을 읽을 수도 쓸 수도 없다."), 호소("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구체적 이유("너무 많은 사람에게 신세를 졌다."), 성숙한 자세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타인에 대한 배려 "너무 슬퍼하지마라. 미안해하지 마라."), 소박한 요구("화장", "작은 비석"). 그가겪었을 고통을 감안하면 놀라운 정신력이 아닐 수 없다. - P62

운명은 우주 혹은 세속의 힘이고, 개인의 삶은 그 힘에 종속되는가? 그렇지 않다. 운명은 권력을 탈정치화한 표현에 불과하다.
운명은 구조의 힘에 대한 나의 대응(re/action)이다. 그것이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드물다. 극단으로 기울어질 때 개인은 생사의기로에 선다. 자살, 타살 여부는 부차적이다. 즉 모든 자살은 사회적(타살)이다. 대개 구조가 개인을 압도하기 때문에 우리는 팔자를 타령한다. ‘운명을 극복한 경우는 복잡한 세상의 우연 덕분이다. 이 과정에서 ‘승패‘와 무관하게 악의 그물에 걸려 몸이헌신(獻身)될 수 있는데, 이른바 ‘역사의 밀알‘이 되는 것이다.
"운명이다"는 구조, 즉 당시 정권에 대한 노무현의 답이었다.
그는 구조주의자(운명론)도 개인주의자(의지론)도 아닌 구조를넘어서고자 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지 말아야 했다? 우리는 인간의 생사를 대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삶과 죽음 모두자연의 한 부분일 뿐이다. - P63

시인을 최고의 지식인으로 생각하거나 자부하는 이들이 있다. 나도 그런 축이다. 시는 언어들의 언어, 메타포이기 때문이다. 은유는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한다. 시 한 줄이 사전 한 권이 될 수도 있다. 시인이 왜 잘났겠는가? 언어를 창조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시도 정치적 분노(유시민의 해석)와 공동체에피해를 주는 행위, 먼지에 대한 공포(나)로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 P66

"소수의 사악함보다 다수의 어리석음이 사회악을 부르는 때가 더 많습니다. 정치적 글쓰기는 사악함과 투쟁하는 일이 아니라 어리석음을 극복하려고 하는 일입니다."(102) 저자는 낙관적이다. 내가 보기에 지금 한국 사회는 ‘사악한 다수‘가 점령했는데………….
조지 오웰의 저자 버전인 글을 쓰는 네 가지 이유. 자신을돋보이게 하려는 욕망, ‘미학적 열정‘, 역사에 무엇인가 남기려는 의지, 좋은 정치적 목적. 나는 모두 아니다. 나는 승부욕이다. "말로든 글로든, 싸워서 이기려고 하지는 맙시다." (97쪽)아,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나쁜 사람‘에게 지지 않으려고글을 쓰는데. - P66

거리에서 하는 노동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단지 아르바이트와 피시방 밤샘 일은 저임금 알바 중 하나다. 가출한 이후 ‘원조 교제‘와 성 산업에서(도) 외면당한 10대 소녀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편의점이나 패스트푸드알바가 꿈이다. 나더러길거리에서 전단지 돌리는 사람이 있으면 꼭 받아 달라고 당부했다. 수십 장을 그냥 버리고 싶은 유혹 받지 않는 사람에 대한 분노, 춥고 더운 날씨의 어려움,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
세상 모든 사람이 자신을 귀찮아한다는 비참함이 일이 끝난 후에도 이어진다. 상상력은 지구 밖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보이지 않았던 곳을 생각하려는 마음이다. 전단지를 기꺼이 받아주는 작은 선행은, 그들의 노동 상황에 대한 큰 상상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37) - P72

매일매일이 괴로운 뉴스다. 타락이 공기와 같고 언어도단이일상이다. 욕망에 한계가 없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부럽기까지 한‘ 이들. 그들은 멈추지 않는다. 사회가 그들 편이기 때문이다.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그만하라‘고 한다. 천지가 그런 사람이니 ‘너만 다친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모두가 다치고 공동체는 붕괴된다. 누가 멈춰야 할까. - P75

그나마 나는 그의 물신성이 ‘국가‘라고 생각했다. 한국 사회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랐고, 지금도 파악 불가능한 상태다.
오로지 박정희의 말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이 되었고, 전 국민과
‘국가 브랜드‘는 회복할 수 없는 대가를 치렀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지금처럼 됐겠는가 아닌가‘라는 환경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가정 아래, 그를 대통령이 아니라 "부모를 흉탄에 잃은 애처로운 큰딸로 생각했다.
여기서, 역사의 반전. 그는 ‘근대화의 역군‘ 박정희의 딸이 아니라 정말 ‘평범한‘ 최씨네 가족이었다. - P78

연대(네트워킹)와 연줄의 차이는 무엇인가. 좋은 취지의 사회적 약자 모임은 연대이고 그렇지 않은 관계는 연인가? 아니다. 연대와 연출의 차이는 새로움에 있다. 기존의 관계를 활용하는가, 의식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가. 이것이 차이다.
하지만 무연 사회에서 연대와 연줄의 다름을 논하는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독사의 순간은 그렇다고 치자. 사후를 정리할 인간관계가 없는 죽음. 이것이 이제까지 인류가 달려온 문명 사회의 최종 모습인가. 서로 돕고 보살핌이 필요한 사람들은 노인, 장애인, 환자를 비롯한 건강 약자들이다. 이들은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연‘과 ‘무연‘은 인간의 조건을 둘러싼 중요한 논쟁거리다.
불성실과 무능력을 연줄로 해결하려는 사람, 나 홀로 간편하게 살려는 사람, 처지가 어려운 타인과 엮이지 않으려는 사람,
타인을 집요하게 괴롭힘으로써 낙오된 자기를 잊으려는 사람.
이들은 모두 달라 보이지만 사고방식이 같은 이들이다. 혼자 살만한 상태가 영원하리라 믿는 오만, 노년은 이토록 멀리 있다. - P84

감옥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접견 횟수와 영치금의 액수가......
같을 리 없다. 사정이 나았던 신영복은 동료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만 거부하는 이들을 보고 이렇게 썼다. "사람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이며, 남을 돕는다는 것은 그 ‘스스로 도우는 일‘을 도울 수 있음에 불과한지도 모릅니다. ………… 돕는다는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으며 함께 걸어가는 공감과 연대의 확인이라 생각됩니다."(244쪽) 그래서 "입장의 동일함은 관계의 최고 형태가 된다. (313쪽) 연대의 의미에대해 이보다 더한 명문이 있을까. 이 당파성과 위치성!
당연한 이야기지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처음 출간된1988년과 30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독후감은 다르다. 1976년,
신영복은 그의 계수에게 이렇게 썼다. "얼마 전에 읽어본 《여성해방의 이론과 현실>(이효재)을 추천합니다. 매우 신선한 책입니다." (95쪽) ‘염려보다 이해를‘ (73쪽)이 이토록 감사한 말임을그때는 몰랐다. - P87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감옥의 사상이다. 1968년부터 20년 20일 동안 ‘엘리트 사상범‘은 ‘밑바닥 인생들‘과 살면서, 그들과 자신의 같음과 다름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렇게 그는 생각 없이 살아도 되는 남성의 ‘특권‘은 누릴 수 없었지만,
타인을 타자로 만들지 않고도 남성이 된 드문 인간이 되었다.
천만 번의 외로움 끝에 다다를 수 있는 경지다. - P87

기형도가 살았던 1980년대에 비해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하늘을 두 쪽 낼 만큼 강렬하다. 실현가능성은 그 반대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죽을 만큼 노력하거나 노력해봤자 불가능한 일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시대의 희망은 통치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대중은 ‘착해 보이는 말‘, 희망으로 대응한다. 현실은 물질이고 희망은 생각이다. 현실을 변화시키는것보다 ‘마음가짐‘을 바꾸는 것이 쉽기 때문이다.
희망과 현실의 간극이 클 때 우리는 절망한다. 절망에 대처하는 가장 위험한 방법은 희망이 인식이 되어 그 인식을 행동으로 옮길 때다. 나는 희망을 버리는 것이 치유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명절 인사처럼 ‘모든 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이아니다. - P94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인 동시에 두려울 것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희망찬 인생‘은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인간은 무엇인가의 볼모가 된다. 희망은 욕망의 포로를 부드럽고 아름답게 조종하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 P95

"우리는 운동이 없는 배움, 배움이 없는 운동에 대해 ‘운동‘의이름으로 맞선다."(127쪽) 장애인에게 공부의 의미는 이동, 관계 투쟁・・・・・ 그리고 내가 알 수 없는 그 이상일 것이다. "장애인은 공부해도 어디 가서 써먹을 데가 없다."는 생각은 현실과정반대다. 공부야말로 사회적 약자가 해야 가장 효과적이다. 언어는 그들의/우리의 유일한 자원이기 때문이다. 서른 살 이후,
나는 이 이슈를 기준으로 억압하거나 비웃거나 불편해하는지여부에 따라 상대방의 인간성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사회는 학습과 사회운동을 분리하는 경향이 강하다. 사람들은 장애인이나 단체상근자들은 공부할 필요, 조건, 시간이 없다고 생각한다. 공부는 ‘전문가‘ 의견으로 대체된다. 그러나 실무자와 전문가는 별도로 성립할 수 없다. 사회운동, 회사,
관료 조직을 막론하고 전문성 없는 실무자와 현장 능력이 없는전문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다. 이들의 결과가 ‘세월호‘다. - P105

장애인이나 여성이 자기 언어를 지니는 것은 지식의 개념을재정의하는 전복적인 행위다. 사회적 약자에게 공부는 취업, 성장 같은 당연한 의미 외에 자신의 삶과 불일치하는 기존의 인식체계에 도전하는 무기가 된다. - P105

명심하길. 아메리카 원주민 지도자의 연설 중 가장 널리 인용되는 1853년 스쿼미시족의 추장 시애틀은 이렇게 말했다. "죽음이란 없다. 단지 살아가는 세계가 바뀔 뿐이다."(228) 우리는 언제 어디서 어떤 관계로 다시 만날지 모른다. 그러니 거짓말을 하더라도 빈 머리 (익숙함)에 의존하지 말고 생각하고 발언하라. - P109

정혜윤의 글쓰기는 유독 이 책에서 빛을 발하는데, 유려하면서도 단단하다. 구성이 탄탄한 흥미진진한 소설을 읽는 듯하다.
그는 듣는 자의 위치성을 잘 알고 있다. 상황에 깊이 개입하면서도 대상화하거나 감상적이지 않다. 저자의 주된 질문은 "무엇 때문에 5년간의 길거리 생활을 버틸 수 있었는가?"이다. 생계와 복직, 공권력에 대한 분노, 3년간 동료 22명의 사망… - P111

이것만이 이유였을까. 협업이 중요한 자동차 공장에서 각자가 서로의 몸이 되어 일하던 동료들끼리, 하루아침에 "함께 살자.","같이 죽자는 말이냐", "다 죽일 셈이냐.", "다 죽자는 말이냐.", "너 살자고 날 죽이냐.", "차라리 함께 죽자."는 말이 오가는 상황에서 나라면 어떻게 살았을까.
사람은 어떻게 살아지는가. "살면서 두 번 다시 그런 고통을받지 않기를 바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은 바로 배신감이었어요.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 마음의 밑바닥을 보는 것이었어요"
(35) 배신, 사람의 바닥. 여기서 나는 오래 서 있었다. 사람이싫어지면 삶은 끝이다. - P112

몇 년 동안 매일, 인간의 바닥을 보게 된다면? 병에 걸리거나죽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 때문에 산다. ‘나와 사람‘이라는 화두 - P112

를 이렇게 구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니. 드라마 <미생>의 영업3팀이 부러운 이들에게 권한다. 인세 수익은 전액 기부된다. 이책의 노동자들은 진정한 치유자다.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healer), 위로받을 것이다. - P113

글과 글쓴이 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그 거리는 다정하지 않다. 가까울수록 적대적이다. 외면, 길항, 동일시∙∙∙∙∙∙. 당사자가자기 현실을 쓰려면 공감받기 어려운, 헤쳐도 헤쳐도 계속 달려드는 칡넝쿨을 쳐내야 한다. 타인의 경험은 보이지만 내 경험은나조차 믿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글은 자기 시각은 없으나, 자기 뜻대로 쓰는 이른바 ‘객관적인‘ 것들이다. 세상사를 전(專有)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의 기준이라고 선포하는 글. 기회주의와 보신주의를 중립과 보편, 심지어 정론으로 포장한 것들이다. 거리를 잡는 것‘(포지셔닝 혹은 주제 파악)은 극도로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리 두기와 동일시는 자신을 이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에서 동일하다. 반면, 자신을 변화시켜야만 가능한 공감과 연대는 어렵다. - P116

"우리는 임금 삭감을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이 평양 전체 고무 직공의 임금을 깎는 원인이 될 것이므로 죽기로서 반대하는 것입니다. 평양의 2,300명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해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이 가장 명예롭다는 것입니다. 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 삭감을 취소하지 않는 한 결코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기지 못하면 죽은 거나 다름없으니 죽을 각오로 싸울 뿐입니다." 내가 배운 지식 중에 가장 귀한 것은 대중을 위해 죽는 것. 나는 울컥한다. 중요한 것은 타인을 위해 죽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배운 지식 중 ‘가장 귀하다‘는 그의 마음이다.
을밀대 농성과 지금 투쟁을 비교하는 것은 난센스다. 그러나공통점은 ‘이기려고 올라갔다‘는 점이다.  - P119

세상은 그렇게 굴러간다. 삶은 옳고 그름이나 일의 가치를기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그냥 사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 의미를 추구하는 삶? 신성한 노동? 이런 가치들은 소통하기 어렵다. 전쟁은 이런 것이 있다는 가정, 즉 정치경제적 이유와 ‘진리는 하나‘라는 확신 때문에 발생한다.
살아 있는 인간에겐 해야 할 일이 필요할 뿐이다. "삶은 지속된다(lasting)"라는 제목의 책,영화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삶에 목적은 없다. 의미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먹기위해 사는가, 살기 위해 먹는가라는 반성은 필요 없다.  - P124

당연히 먹기 위해 산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는 우울한인간만의 고민이 아니다. 이 질문만이 유일하게 쓸모 있다. 삶자체가 의미라면 그걸로 만족스러운 것이며, 일상의 괴로움과외로움으로부터 조금 자유로울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라면어떡하겠습니까?" 한나의 질문은 삶이란 최악이자 최선이라는본질을 폭로한다. - P125

이처럼 인생=길이라는 통념은 다양한 경험을 이해하는 데방해가 된다. 상투성의 원단,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은단지 선택하지 않은 삶일 뿐이다. 선택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갈 수 없는 길이고 이미 삶이 아니다. 외출 준비에 한나절 이상 걸리는 장애인, 여성이 피하는 밤거리, 치매와 광장공포증환자에게 길은 도전이자 치열한 정치다. 비장애인의 걷기, 걷기투쟁이 많지만 이진섭, 이균도 부자에게 길은 그들과 같지 않다. 이 책은 길의 의미가 사람마다 얼마나 다른지를 생각하게한다.
장애인이나 아픈 사람, 화상 환자, 우울증 환자가 집 밖으로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리나라처럼 거리에서 장애인을 보기 힘든 사회도 드물 것이다.
구조적, 심리적으로 ‘총을 든 간수‘가 곳곳에 완강하다. 성형 시술이 성별 이슈로 한정되는 것은 부정의하다. 몸의 외형과 기능문제로 고통받는 장애인은 외모주의의 가장 큰 이해 집단이다. - P128

박래군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이들이다. 감히 병렬적으로 쓰자면,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비판이불가능한 사회운동 내부의 문제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내가서른 살에 단체 활동을 그만둔 이유는 사람이 하는 일과 사람의 질은 반비례할 수도 있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원래문제가 많은 사람이 사회운동으로 도피하거나 삶의 진지로 작정한 경우도 있고, 활동 과정에서 망가지고 타락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어느 집단에서나 있을 수 있는 자연스런 인간사다. 다만, 이 바닥은 아주 뛰어난 은폐 논리를 지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나도 어리석은 줄 알지만, ‘깨끗한 영웅‘을 찾아서 혐인증(人)을 치유하고 싶은 것이다. - P132

사회 조직은 몸에 비유될 때(政體), 즉 물리적 실재라는 가정에서만 통치가 가능하다. 유기체는 한 생물, 한 단위이다. 생물하나가 단독자로서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와 개인주의는 정반대처럼 보이지만 실은 같은 사고다. 전자는 전체가 한몸이고,
후자는 개인이 한몸이다. 당연히 (개인의 인권 사상으로는 국가주의를 이길 수 없다. 작은 개인과 큰 개인 중 누가 희생해야.
하겠는가. 국가가 한목숨인데 어떻게 타인 · 이견 차이가 인정되겠는가. ‘국가안보, 적, 간첩, 국론분열‘이 언제나 통하는 이유다.
- P136

전쟁은 없지만 굶주림과 폭력이 만연한 상태, 가진 자의 마음이 평화로운 사회, 여성의 목소리는 불편하다는 진보 남성이 많은 사회를 평화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모임엔 있었다.) 평화는 상태가 아니라 관계다.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버림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의 위로. 나는 그런 평화를 기원하고 믿는다. 이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평화다. - P139

‘이야기‘는 곧 읽기와 쓰기다. 반응하지 않는, 감정 이입 없는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그러지 않아야 더 잘 쓸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의 뇌는 진공 상태다. 글이란 자기 생각을 외부로 물질화하는 일인데, 생각이 없다면? 생각 없는 글쓰기가 가능하고 심지어 널리 읽히는 세상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피했다. 생각하기 힘겨웠기 때문이다. 엄마와 딸, 죽어 가는 엄마의 이야기.
이 책의 지은이는 미국의 유명 작가이자 역사가이자 사회운동가인 리베카 솔닛이다. 남성을 ‘꼰대‘로 규정했지만 여성의구매력을 보여준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든다》의 저자이다. "가르치려 든다"는 너무 점잖은 번역이다.
인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남자들의 진짜 문제는 가르칠 것이 없다는 사실 아닐까. - P149

삶이 생사로만 끝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생로병사다. 시간은 나이듦과 병듦으로 채워진다. 이 책을 읽은암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작가에게 말했다고 한다. "삶이 소중하다는 것을 전해 달라."
누구나 아프고 죽는다. 슬프고 두려운 것은 ‘인간‘이어서 그렇다. 인간은 의미 중독자다. ‘자연‘이라면 순리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동정이나 안도감이 아니라 의료 보험 개혁뿐이다. 아프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아픈 사람을 루저로 대하지 말자. 어차피 우리는 자연에서 다시 만난다. - P162

아서 프랭크는 차이가 인식되어야 돌봄이 가능하다고 본다.
암환자에게 해주기 적당한 말‘은 없다. ‘암환자‘는 포괄적인 실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느낌표는 필자) 의학이 환자를분류하는 데 사용하는 일반적인 진단 범주는 질환(disease)에쓰이는 것이지, 질병(illness)에는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사람들은 차이와 독특성을인식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차이를 파악하려면 아픈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75) 치료와 돌봄은 다르다. 돌봄…. 내가 엄마를 간병할 때 가장 많이 한 말(짜증)은 "엄마,정말 원하는 게 뭐야?"였다. 그가 원하는 거즈의 촉감을 찾기위해 몇 종류의 거즈를 샀는지 모른다.
이 책은 번역서 같지 않다. 번역(메이), 표지 디자인(김효은),
추천사(김영옥, 전희경)가 본문보다 심오하다. 특히 번역은 원래능숙한 한국어 사용자가 쓴 문장 같다. 《아픈 몸을 살다》는 아서 프랭크의 첫 저서이며, <몸의 증언>(갈무리, 2013년)도 권하고싶다. 위에 언급한 이들은 모두 페미니스트다. 우연만은 아닐 - P165

소설가 정찬의 문장을 부러워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언어의 결정 극한 노동의 산물이다. 게다가 그의 사유는은결정(潔淨)을 향하면서 동시에 그것과 대결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일부 평자들의 견해와 달리 그의 작품은 시류와 어울린다.
누구나 작가인 시대, 글쓰기의 민주화가 언어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전화된 지금, 그는 우리 사회에 절실한 예술가다. 데뷔 37년차에 이르러서도 "쉼 없이 언어와 싸우며, 번번이 무릎을 꿇으면서도 다시 일어서야 하는 가혹한 싸움"을 멈추지 않은 소설가. ‘연륜에 맞는‘ 태작이 없는 작가. - P166

어 미칠 것 같은데) 잊어라.", "(이미 너무 참고 있는데) 참아라.",
심지어 착취 구조에 갇힌 사회적 약자에게 "왜 그렇게 분노가많냐."고 분노하지 않기를 바란다. 돕고 싶다면 그들의 분노를있는 그대로 수용하라. 가장 비윤리적인 분노, 그래서 참아야할 분노는 딱 하나, 분노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다. - P194

누구나 보호받기를 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보호의 현실 또한 간단하지 않다. 세월호를 둘러싼 가장 비등한 여론은 "누가 우리를 보호해주냐?"라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불안감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보호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위험하다. 국가가 강력한 보호자이기를 희망하는 것은 세월호의 대책이 아니라 원인에 가깝다.
기존의 보호는 보호자(주체)와 피보호자(대상)를 전제한다.
피보호자는 보호자에게 세금, 충성, 자유의 부분적 포기 같은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기존 보호 개념의 가장 큰 문제는 보험자가 보호할 대상과 그렇지 않을 대상을 결정하는 권력을 지닌다는 점이다. 보호자 남성은 여성을 성(性)과 외모 혹은 아버지가 누구냐를 기준으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과 그렇지 않은여성으로 구분한다. 보호자에게는 차별할 권리가 주어진다. 국가가 보호자일 때 국민이 어느 지역과 계급에 속했는가에 따라보호 의지가 다르다. 지역 차별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정권은이마저도 아니고 "왜 그런 걸 요구하세요?"라고 반문한다. - P204

노동으로서 모성이 개념으로서 모성적 사유의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관념이다. 생각한 다음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가 사유를 만든다. 생각하며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이 말처럼 ‘틀린‘ 말이 ‘좋은‘
말로 회자되는 경우도 드물 것이다. 몸과 정신의 이분법에 근대의 쌍생아인 생산주의와 ‘상록수 정신‘으로 우리를 들볶는 논리다. 삶은 사유의 실현이 아니라 근거다.
안전은 보호자에게 요구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류할 때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보호는 상호 보살핌이다. 우리 삶에는 이미보호의 철학적 기반이 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5천 년간이어 온 가부장제 사회의 ‘어머니‘ 노동이다. - P205

세월호를 기억하자고 다짐할 필요도 없다. 비처럼 세월호도 삶의 일부다. 어두운 이야기도 남의 일도 아니다. 누구나 밤마다 잠들지 못하고 베갯잇을 적시게 되는, 보고 싶은 이들이 있지 않은가. 슬픔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눈물과 함께 흐느끼는소리가 들리게 하라.
바다에 내리는 빗소리는 모호하다. 그러나 진도 바다의 영혼들은 듣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없지만 역사에 새길 빗소리를 만들어낼 수는 있다. 생각을 멈추지 않도록하는, 타닥타닥 존재감 있는 소리. - P208

혀가 면도날일 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주를 너무 받아서혀를 많이 베인 것인가. 그래서 막말이 막 나오는 것일까. 이들입안의 피비린내가 세상에 진동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모르는 이에게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다 버릴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제발 자기 악취는 스스로 삼키기를 밖으로 뱉지않기를 바란다. 세상도 진실도 혹독하다.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더 들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통과 상처를 딛고서야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날 것인가. - P212

보편적인 말은 없다. 어떤 이에게 착한 말이 어떤 이들에겐비현실적이다. "잊지 않겠다."는 고통 외부의 시각이다. 기억해
‘주다‘가 아니라 당사자의 언어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슬픔이일상의 일부라면 기억 투쟁은 필요하지 않다. 상실과 상실감은인간성이다. - P240

세월호가 인양될 때 아무 말 없이 며칠을 보냈다. 어떤 상호비교도 적절하지 않지만, <4·3은 말한다》를 다시 읽을 수 없는심정과 비슷했다. 이 책을 읽은 이들의 공통적인 독후감은 "자기 인식의 한계에 대해 생각함", "세월호에 관해 말하는 방식을다시 생각함"이 아닐까.
세월호의 ‘미수습자‘와 4·3의 ‘행방불명자‘. 세월호는 떠올랐고 4·3은 법의 영역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인가. 유족들의 경험과 역사 쓰기는 어떤 차원에서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질문만이 유일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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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일일,
방을 옮겼는데 [그 섬에 내가 있었네]가 창가에 놓여있다. 내가 K선생님께 선물한 책인데 읽고 계셨던 모양이다. 절반쯤 읽으셨는지 ‘한라산, 내 영혼의 고향‘에 책갈피가 꽂혀있다. 흐뭇하다.

몇 번을 읽었고
많이 선물한 책인데
오랜만에 휘릭 읽는다.
그리움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억새가 손짓하는 중산간도,
향기 짙을 여린 국화들도,
두모악의 바람이 담긴 사진들도
그리움이다.
내 마음의 풍경이다.

내 마음의 풍경

들판에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풍경이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할 때마다 찾아가 세상을 탓하고나 자신을 탓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도 부려봅니다.
하지만 들판은 한결같이 반갑게 맞아줄 뿐입니다.
그리고 새들을 초대해 노래 부르게 합니다.
풀벌레를 초대해 반주를 하게 합니다.
구름과 안개를 초대해 강렬한 빛을 부드럽게 만들어줍니다.
해와 달을 초대해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줍니다.
눈과 비를 초대해 춤판을 벌이게 합니다.
새로운 희망을 보여줍니다.
마음이 평온할 때면 나는 그 들판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지냅니다.
마음이 불편해져야 그 들판을 생각합니다.
그래도 들판은 즐거운 축제의 무대를 어김없이 펼쳐줍니다.
들판이 펼쳐놓는 축제의 무대를 즐기다 보면 다시 기운이 납니다.
그런 들판으로부터 받기만 할 뿐, 나는 단 한 번도되돌려주지 않았습니다. 들판은 그런 나를 나무라지 않습니다.

대신 언제나 나에게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나의 모습은 들판으로 나오기 전까지와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들판을 만나고 오는 날에는 잠자리가 편안합니다.

풀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나무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바람이 지나가는 길목, 풀과 나무들은 온갖 시련을 홀로 견디며무성하게 자랍니다. 소, 말, 노루가 주는 시련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홍수가 나면 뿌리째 뽑혀나갑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잎들이 다 말라버립니다.
하지만 풀과 나무들은 하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가뭄이 들면 홍수를, 혹서기에는 혹한기를 떠올리며 참아냅니다.
때가 되면 태풍이 옵니다.
태풍은 온몸을 상처투성이로 만들어놓고 떠납니다.
이제는 사람들도 한몫을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풀과 나무들은 삶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뽑혀나간 뿌리로 땅을 짚고 새 줄기와 가지를 키워 올립니다.

부러진 줄기와 가지를 추슬러 새순이 움트게 합니다.
끊임없는 비극과 고통 속에서도 풀과 나무들은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불평 한번 없이,
절대로 도망치는 법도 없이 묵묵히 새 삶을 준비합니다.
다가오는 비극과 고통이 그들을 오히려 더 강한 존재로 만들어줍니다.
나에게도 비극과 고통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는 것입니다.
이때 들판은 나에게 가르쳐줍니다.
어떻게 하면 시련을 성장의 또 다른 기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그래서 나는 들판의 친구로 삽니다.
들판을 친구 삼아 나의 비극과 고통을 넘어섭니다.
아픔은 한동안 머물다 떠납니다.
행복과 즐거움보다는 불행과 슬픔이 나를 더 성숙하게 만듭니다.
나의 친구, 들판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가 되도록 해줍니다.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아주 고요한 몸짓으로,
그렇지만 온몸으로……

산다는 일이 싱거워지면 나는 들녘으로 바다로 나간다. 그래도 간이 맞지 않으면 섬 밖의 섬 마라도로 간다. 거기서 며칠이고 수평선을 바라본다. 마라도에선 수평선이 넘을 수 없는 철조망이다.
외로움 속에 며칠이고 나 자신을 내버려둔다. 그래도 모자라면 등대 밑절벽 끝에 차려 자세로 선다. 아래는 30미터가 넘는 수직 절벽이고, 바닥은 절벽에서 떨어진 바위 조각들이 날카로운 이를 번뜩인다. 떨어지면 죽음이다. 정신이 바짝 든다. 잡생각이 끼어들 틈이 없다. 불안과 두려움이계속된다. 눈을 감고 수직 절벽을 인식하지 않는다. 마음이 편안하다. 수직 절벽임을 인식하면 다시 두려운 마음이 든다.

산다는 것이 싱겁다. 간이 맞지 않는다, 살맛이 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것은 마음의 장난이다. 살다보면 때때로 죽고 싶다는 말이 습관처럼튀어나온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도피처를 찾는다. 그 최종 도피처는 죽음이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나는 당황했다.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죽음을 잊기로 했다. 죽음을 인식하지 않으면서 늘 평상심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이젠 끼니를 걱정하지 않는다. 필름값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만큼 형편이 좋아졌다. 그런데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다. 병이 깊어지면서 삼 년째 사진을 찍지 못하고 있다. 끼니 걱정 필름 걱정에 우울해하던 그때를,
지금은 다만 그리워할 뿐이다. 온종일 들녘을 헤매 다니고, 새벽까지 필름을 현상하고 인화하던 춥고 배고팠던 그때가 간절히 그립다.
그때는 몰랐었다. 파랑새를 품안에 끌어안고도 나는 파랑새를 찾아 세상을 떠돌았다. 등에 업은 아기를 삼 년이나 찾아다녔다는 노파의 이야기와 다를 게 없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낙원이요, 내가 숨쉬고 있는현재가 이어도이다. 아직은 두 다리로 걸을 수 있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하지 않고도 날숨과 들숨이 자유로운 지금이 행복이다.

내 사진은 ‘외로움과 평화‘ 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그동안 다양한 크기의 필름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중에서 파노라마(6×17)사진이 내 사진의 주제를 표현하는 데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부끄럽고서글픈 일이라고 고백했다. 사진의 홍수 속에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은 사진에 대해 너무 모른다. 나는 셔터를 누르기 전에 이미지를 완성한다. 한장의 사진 속에 담긴 이미지는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사진이 어이없이 재단되고 변형되는 것을 숱하게 봐왔다. 한 장의 사진에는 사진가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나의 사진을 나의 의도대로 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이십여 년 만에 얻었다. 허락해준 하응백 사장과 손현미 편집장, 정진이 디자이너 그리고출판사 식구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갤러리 두모악에서
김영갑

모두에게 인정받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인정받는 게 우선이다. 나 자신이 흡족할 수 있는 그 무엇을 느끼고 표현할 때까지는 사진으로 밥벌이하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으리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다른 사람들은 속일 수 있어도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없기에 늘 자신에게 진실하려했다.
이 땅에서 자기가 원하는 사진만을 찍으며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카메라만 좋으면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편견 때문에 전업 사진가로살아가기도 힘들다. 

나는 그 심술궂은 바람을 좋아한다. 바람은 멀리서 씨앗들을 한 움큼씩 가져와 내게 잘 보이려 아양을 떤다. 나는그 바람을 품에 안고 사시사철 함께 중산간 초원을 떠돈다.
사철 억새와 함께 생활하는 나는 억새의 변화에 따라 기분도 변한다.
내 기분에 따라 정원의 분위기도 쉼 없이 변한다. 내 감정은 고여 있지 않고 주변 분위기에 따라 흐른다.
중산간 초원 억새의 아름다움은 시시각각 변한다. 어떤 이는 파란 하늘과 조화를 이루는 억새를 사랑하고, 어떤 이는 구름이 짙게 가라앉은 날아침이나 저녁, 여명에 드러나는 억새를 좋아하고, 어떤 이는 바람 부는날 너울너울 춤을 추는 억새를 으뜸으로 꼽는다. 어떤 빛에서 사물을 보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사물이 놓인 주변 환경에 따라 우리가 느낄수 있는 아름다움은 확연히 다르다.
장마철이면 안개 짙은 날 치자꽃 향기에 취해 마시는 커피 맛은 유별나다. 눈이 소복하게 쌓인 날 보름달을 보며 마시는 차 맛은 누구도 이해할수 없는 나만의 즐거움이다.

눈으로 보아도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들리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는 것. 형상도 없는데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 중산간 광활한 초원에 존재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최고의 것은,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을 깨닫기 위해 나는 중산간을 떠나지 못한다.
눈에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존재하는 영원한 것을 이곳에서 깨달으려한다. 말할 수 없으나 느낄 수 있고, 보이지 않으나 느낄 수 있는, 사람을황홀하게 하는 신비로움을 찾으려 한다. 자연 속에 묻혀 지내며 마음을씻고 닦아 모두를 사랑하려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은 영원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느끼고 확인하고 싶다.

초원에도, 오름에도, 바다에도 영원의 생명이 존재한다.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느낌으로써 나는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 나는 자연을통해 풍요로운 영혼과 빛나는 영감을 얻는다. 초원과 오름과 바다를 홀로 거닐면, 나의 영혼과 기억 그리고 자연이 하나가 되어 나의 의식 속으로 스며든다. 그럴 때면 훌륭한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간절한 바람도 사라진다.

바다 사진을 찍을 때 배, 새, 바위, 비행기, 사람 그 어떤 것도 사진 안에 끼어들지 않는다. 바다는 텅 비어 있다. 구름의 양, 구름의 모양, 구름의 색 등에 따라 바다도 변한다. 필터 등을 이용한 기술적인 효과도 배제한다. 필름이나 렌즈도 하나만을 고집한다. 수평선을 프레임 중앙으로 놓고 위는 하늘, 밑은 바다다. 프레임을 결정한 나는 같은 프레임으로 계속촬영한다. 일출이나 일몰도 같은 방식이다.

그릇의 쓰임이 빈 공간에 있듯, 사진 속의 공간도 최대한 비워놓는다.
도예가가 찻잔을 만든다. 그 잔을 쓰는 사람이 물을 담으면 물잔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잔이 된다. 옛날 옹기들이 장독대에서 이제는 방 안으로자리를 옮겼다. 꽃병이 되기도 하고, 우산꽂이가 되기도 한다. 사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나 자신을 위해 찍는 사진이 아니라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름다운 곳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고 아우성이다. 물론 경치가 빼어난 곳을 찾아가면 좋은사진을 찍게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어떤 바다나 강에도 큰 고기는 있기마련이다. 운이 좋아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운은 사진가 스스로 준비해서 맞이하는 것이다.

날마다 사진을 찍는 나는 날마다 사진만을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일에 몰입해 홀로 지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내 존재가 잊혀져갈지라도 나의 사진 작업은 계속될 것입니다.
하늘의 변화에 따라 내 마음은 변화하고 마음의 변화에 따라어느 한곳을 찾아갑니다. 같은 곳을 수십 번, 수백 번 반복해서찾아가지만 늘 새로움으로 다가옵니다. 같은 곳을 삼백예순다섯 날하루도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기만 합니다.
자연은 늘 사람을 설레게 하는 신비로움과 경이로움으로충만해 있습니다. 나는 늘 긴장 속에서 자연 속을 맴돕니다.
자연에 묻혀 지내는 동안만은 아무리 작은 욕심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나에게 한라산은 온 산이 그대로 명상 센터입니다. 나는 어느 한곳에머물지 않고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며 사진을 핑계 삼아 명상을 합니다.
수행자처럼 엄숙하게 자연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내면의 소리에 몰입합니다. 내 마음은 늘 변화했고 그 변화를필름에 담습니다. 그 시간이 하루 중 제일 소중한 시간이기에

홀로 지내며 그 순간만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매일매일 반복됩니다.
자신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통해 나의 내면도 성장했습니다.
변화를 거듭하는 동안 마음은 중심을 잡았고,
이제는 흔들리지 않는 평화를 얻었습니다.
명상을 계속하는 동안 자연의 소식은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사건에 매달려 세월을 잊고 살다보니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지혜를 얻었습니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 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방황, 분노···내 사건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동박새는 모른다. 동백꽃을 피우기까지 나무가 견뎌낸 고통의 시간을.... 동박새는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눈, 비, 바람, 가뭄, 혹한과 무더위를…. 동박새는 꽃이 떨어지면 동백꽃을 기억하지 않는다. 동박새는 다음해 동백꽃이 피어야 다시 올 것이다.

나에게 내일이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 허락된 것은 오늘 하루, 그하루를 평화롭게 보낼 수 있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아픔도 잊혀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통증을 의식하지 못한다. 통증을 잊으려고 몰입할 수 있는 일을 찾는다. 또 다른 하루가 허락되면 또 다른 일을 찾는다.
몰입할 수 있는 일은 끝이 없어서 찾으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하나에 몰입해 있는 동안은 오늘도 어제처럼 편안하다. 하루가 편안하도록 오늘도 하나에 몰입한다.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

점점 야위어가는 나를 보고 더러 새로운 치료법을 소개해주는 지인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 방식의 치료를 고집하자 더 이상 권유하지 않는다.
‘빵이 깊어갔고 나는 혼자가 되었다. 지인들의 발길도 전화도 뜸해졌다.
밤이 되면 갤러리는 적막하다. 적막함을 즐기며 홀로 정원을 걷는다. 몸이 피곤해지면 편안한 상태로 침대에 눕는다. 건강이 나빠지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사진 작업에 매달렸을 테지만 이젠 한가로운 일상에 익숙해졌다. 루게릭 병이 내게 준 선물이다.
팔 힘이 없어 운전을 하기도 힘드니 혼자 몸으로는 외출도 어렵다. 온종일 갤러리에 갇혀 지내며 한적함을 즐기고 내일을 기다린다. 이제 기다림은 나의 삶이다.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세상과 삶을경험할 수 있는 지금이 나는 행복하다. 나의 하루는 평화롭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또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내 앞에 펼쳐진 새로운 길을 볼 수 없는 이들은 나를 몹시 가여워한다.
새로운 길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슬퍼한다. 막다른 골목에서 새길을 발견했으므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조금 힘들고 불편해도 나에게허락된 오늘을 즐길 수 있어서 마음이 평화롭다.
구원은 멀리 있지 않다. 두려움 없이 기꺼이 기쁘게 떠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구원일 게다.

살다보면 불현듯 찾아오는 슬픔, 분노, 두려움, 절망, 그리고 힘든 상황을 극복해야 할 때마다 나는 자연에서 해답을 구했다.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아름다움을 통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지금 나는 모든 치료를 거부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아름다운 것만느끼고, 아름다운 것만 생각하며 자연 안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난치병이라는 사실마저 잊고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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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전 캐나다의어느대도시 공항에 내렸을 때다. 첫눈에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항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피부색 밝기에 따른 노동분업이었다. 승무원, 청소부, 쓰레기 수거원, 스낵바 점원, 경찰, 세판원, 짐을 나르는 포터. 이들은 모두 자신의 피부색에 따라 다른노동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청소부 중에 백인은 한 명도 없었고 세관원 중에 흰색도 하나의 유색이지만 유색인종은 거의 없었다. 이런 식의 직종 분리는 공항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직업은 인종에 따라 달랐다. 한국인들은 주로 식료품 가게를 독점하고 있었고 택시기사는 모두 인도인 차지였다.
이주 노동자에 대한 인종주의(나는 우리 사회의 인종 문제는 지역주의와 학벌이라고 보지만,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한다), 장애, 성별, 성정체성(동성애/이성애), 연령주의…….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학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소위 소수자 문제들을생각해보면, 하나같이 몸에 대한 위계적인 해석의 결과라는 것을 - P183

한국사회에서 노인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나이 듦은 생물학적 문제라는 전제 아래 사회운동이나 정치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소외 계층에 대한 잔여적 복지 정책의 시혜 대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노인 문제를 포함한 연령주의에 대해, 편견과 차별이라는 언어는 빈곤해 보인다. 나는 연령주의를 우리 모두의 삶을 근본적으로 규율하고 있는 심각한 혹은 ‘결정적‘인 사회적 모순이라고생각한다. 또 여성의 나이 듦은 연령주의와 성차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연령주의는 성별주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 억압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이것은 여성 노인, 중년 여성의 문제가 연령주의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차별로 인한 것이라고 보는 ‘주요 모순론‘ 주장이 아니다. - P185

나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사회운동으로서 여성노인운동, 반(反)연령주의운동이 전개되어야 하고 정치적 주체인 여성 노인 활동가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 노인의 사회적 위치(position)와 ‘피해‘ 상황은 ‘드러난‘ 억압의 구체적 사례와 통계를제시함으로써 나타날 수 있겠지만, 이 글에서 나는 그러한 사실을알리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방식은 연령주의를 우리 자신의 문제로 정치화시키기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 노인 문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나이 듦의 의미를살펴보는 과정의 결과로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 P186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자 범주이다. 지식인, 여성 지식인, 게이 지식인이란 말은 있지만 노인 지식인이란말은 없다. 지식인이나 정치인, 재벌 등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고 불리지 않으며 그들도 스스로를 노인으로 정체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란 칭호를 붙인다.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 P186

지식인의 사명, 청년의 사명이라는 말도 같은 착각에서 나온 언설이다. 매력, 열정, 가능성, 순수, 치열함은 젊은이만의 표상으로간주되기 때문에 나이 든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일 때는 ‘철이 없거나 주책이 된다. 사회의 주체, 즉 노동과 성과 사랑, 욕망의 주체는 젊은 사람(남성)으로 한정된다. 따라서 표준적 인간 범주에서 제외된 노인은 복지의 대상일 뿐이다.
한국 사회에서 연령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논의되고 있다). 나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는 이른바 ‘생애 주기‘식의 연령주의와 나이가 차별의 근거가 되는 연소자/연장자 우선주의다.  - P187

나이 듦이 적용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나이 듦은 권력에 접근하는 유용한 방식으로 작동하지만 어떤 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어떤 이에게 나이 듦은 돈으로 감출 수 있는개인의 힘으로 통제 가능한 문제이지,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문제가 아니다. 나이는 개인의 성별과 계급에 따른 적용 방식이 정반대가 될 정도로, 저마다 다르게 경험되는 정치적 제도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을 개선하기 두려워하는 사회는 성별 제도를 생물학적 문제로 환원하고 이를 정치화하려는 페미니스트에게 적대감을 숨기지않는다. 마찬가지로 연령주의의 문제화를 회피하는 사회는 나이 듦이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질서라는 식의 담론을 끊임없이 생산한다. - P189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 (woman)은 모든 여성(female)을 가리키는 개념이 아니다. ‘아줌마‘는 여자가 아니라 제3의 성인 것처럼 계급과 나이, 외모, 결혼 여부 등에 따라 ‘진정한 여성‘과 그렇지 않은여성이 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 혹은 여성 지식인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 P191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분류된 타자이다. 남성의 몸과 다르다는 것이 여성억압의 근거가 되는 성차별 사회에서는 여성의 존재성은 언제나 몸으로 환원된다. 남성의 몸과다르다는 것이 여성의 존재 의의‘ 방식이 되기 때문이다. 가부장제사회에서 몸의 경험을 근거로 형성되는 여성의 정체성은 남성 중심사회가 ‘부여한 것이지만, 남성은 행위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남성은 어떠한 경우에도 몸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들의 정체성은 몸의 기능과 상태 (나이)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에 의해 형성된다. - P193

이들이 제기하는 것은 여성주의가 차이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가 기존 여성주의를 어떠한 방식으로 수용, 해체,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여성주의 ‘실천‘과 ‘이론‘의핵심적인 이슈들이다. ‘차이‘를 둘러싼 대화와 소통의 정치는, 예를 들어) 비장애 여성과 장애여성들 사이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
‘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남성(사회)과 대화하며, 구성중인 존재로서 과거의)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살아간다. 소통의 정치는 여성주의 정치학의 기본 주제이다. 여성들 간의 차별과 억압을 이해하지 못하면, 남녀 간의 그것도 파악 불가능하다. 역사를 초월하여 수행되는 젠더는 없기 때문이다. - P205

20성매매는 기본적으로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성별 정치학의 문제이다. 그러나 성매매를 반대하는 여성들과 성매매를 통해 생계를 이어가는 ‘성판매 여성‘의 갈등과 대립은, 이 문제를 둘러싼 여성과 여성의 ‘차이‘를 질문하고 있다.
그동안 성매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관점은 ‘도덕‘ 혹은계급의 문제였다. 성매매는 가장 성별화된(gendered) 사회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몰성적 (gender blind)으로 이해되어 왔다. 성산업에 직접 종사하는 여성이든 그렇지 않은 여성이든, ‘피해‘ 집단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목소리가 가장 드러나지 않았던 영역이다. 성매매는 여성과 남성의 서로 다른 성적 실천에 의해 유지되는 가족, 국가, 자본주의 제도의 매트릭스다. 성매매는 성 정치학의핵(core)이자 성 정치학에 의존한 한국 사회 정치경제학의 주요요소인 것이다. - P221

성매매 방지법의 제정과 시행은 성매매 근절의 근거라기보다는,
이 문제를 공적인 문제로 만드는 가시화의 첫 출발점에 불과하다.
현재 전국적으로 성매매 관련 전문가(활동가)는 수십 명이 채 되지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프트웨어는 준비되지 않은 채, 하드웨어만 만들어진 셈이다. 성매매 방지법은 성급하게 추진되었지만,
‘단속‘은 잘 되고 있는 편이다. 이 법의 내용이 기존의 윤락행위방지법과 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업주들의 저항이 큰 것은 순전히 강력한 단속 때문이다. - P222

이름 짓기 (naming)는 정치학이다. 명명(命名)의 과정과 결과는명명하는 집단의 시각과 이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때문에 객관적이거나 보편적 언어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재 사용되는 언어는 그언어를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연속선의 한 지점일 뿐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매매만큼 사회적 투쟁과 인식의 변화가 극명하게 반영된언어도 없을 것이다. - P226

만일 남성 사회의 주장대로 성매매가 평등한 교환이라면, 왜 유독 파는 여성만이 그토록 혐오의 대상이 되며, 성을 파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여성 집단 전체에 대한 비하와 통제로 연결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여성도 인신매매에 의해성판매 여성이 된다. 가난한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성을 팔지는 않는다. 성매매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 P229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성판매 여성을 가부장제의 피해자로간주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판매 행위는 당사자 여성이 의도하건의도하지 않건 간에 남성의 성적 실천에 기여하게 된다고 본다. 이러한 논리에서는, ‘자율적 의지‘로 성판매를 ‘선택‘ 했다고 주장하는성판매 여성들의 주장은 남성들에게 ‘세뇌‘된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이 점이 바로, 섹슈얼리티와 여성 종속에 대한 풍부한 이론을생산했으며 실천적으로도 헌신해 온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많이 비판받는 부분이다. 이들의 관점은 성판매 여성의 행위성을 무시하고, 피해자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P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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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베티 프리단도 매 맞는 아내였다. 그녀는 여성운동 집회에 나가 연설할 때마다 친구들의 도움으로 남편이 때린 얼굴의 푸른 멍을 짙은 화장으로 가려야 했다. 얼마전 여성 연예인의 가정폭력 피해 사건이 충격을 준 이유 중 하나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도 남편에게 10~20여년 동안 구타당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가정폭력은 계급 문제로 인한 억압이 아니라 성별 권력 관계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여성이라면 누구나 피해자가될 수 있다. 가해자가 피해 여성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기 때문에 남편이 더 큰 피해자라는 황당한,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설득력‘
있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바로 여성에게는 다른 어떤 사회적 권력보다도 성별 권력이 더 압도적으로 작용함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 P118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P119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 P125

폭력을 당한 아내의 고통은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부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매맞은 아내들이 고통을 표현하는 행위는, 그들의 고통에 의해 유지되어 왔던 가부장제 가족 제도의 효율적 작동을 위협한다. 그들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안식처 가족‘의 신화, ‘보호자 남성‘의 신화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존경받지만, 어떤 고통의 경험자들은 ‘더럽다‘고 추방되고 낙인 찍힌다. 가정폭력은 인정되지않는 고통, 믿을 수 없는 고통이다. 정치적이고 공적인 장에서 인정되는 고통과 달리 재현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지 못한 타자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 P127

사회운동은 매순간 새롭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운동이란 정해진 어떤 입장을 현실에 적용, 실현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우리/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계속 걷지(進步) 않고 멈춘다면(守舊), 즉, 삶에 존재하는 다층적인 억압과 고통을 복잡하게 사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누구나 ‘수구 세력‘이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사회에는 과거의 한 순간에 자신이 선택한 정치적 입장을 변화와성찰 없이 믿으면서, 혹은 자신이 하는 정치가 정치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자신을 계몽의 주체로, 타인을 계몽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이것은 폭력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
- P130

문제는 ‘아들들‘이 힘을 갖기 시작하면서, ‘아버지가 자신들에게가했던 억압 논리와 규범을 다른 진보 세력(대표적으로 여성주의 진영)에게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70~80년대에 보수 세력은 부정부패와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민주화운동 세력을, "너희들.
한국이 그렇게 싫으면 북한 가라."는 식으로 탄압했다. 이런 인식체계 안에서 민주화운동은 ‘친북‘을 의미했고, 이 같은 논리는 오랜세월 동안 그리고 지금까지도 보수 세력이 마음 놓고 휘두르는 칼이다. <100분 토론>에서 열린우리당 송영길 의원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의 일부 발언은 그들이 폐지하고자 하는 국가보안법의논리와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다 - P133

일제 시대 ‘군 위안부‘ 문제의 가시화와 역사화는 물론 바람직한일이지만, 이는 여성의 성 피해가 민족주의의 이해와 일치할 때에만 문제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다수 한국 남성들이 일제 시대 ‘군위안부‘ 경험을, "우리 여성들을 육체적으로 파괴함으로써, 여성은물론 겨레 전체를 정신적으로 파괴한 민족의 수치"라고 본다. 즉,
전시 성폭력을 여성인권 침해라기보다는, 여성의 생식 능력 훼손이라 보고 이를 민족 말살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여성의 몸은,
남성 집단 간 갈등을 의미하는 ‘정치‘에서 가장 확실한 동원의 토대로 기능하게 된다.
한국 남성들이 "우리도 일본 여자를 강간하자."라고 심심찮게 말하는 것은, 여성의 몸을 볼모로 한 남성 정치학의 순환 구조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 대한 영토 침략과 정복은, 곧 ‘자궁 점령‘을 의미하게 되고, 일제의 경우처럼, 그리고 한국이 베트남에서그랬던 것처럼, 상대방 여성에 대한 집단 성폭력이 공식적인 전쟁정책이 되는 것이다. ‘군 위안부‘ 사건은 민족 모순이자, 여성 인권침해이다. 이 사건을 민족 간 갈등으로만 환원하려는, 한국 남성들의 그 집요한 욕망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 남성들이 한국 여성에게 행하는 성폭력과 성매매는 괜찮다는 것인가? - P141

오랜 기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하려는 여성들이 법정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이제까지 잘 참았는데, 왜 갑자기 이혼하려고 하는가(남자가 생겼나?" 이다. 하지만 남편의 초기 폭력을문제삼아도, "참을성이 없다"고 비난받기는 마찬가지다. 흉기를 들이대는 강간범을 만났을 때, 소리쳐야 할까? 빌어야 할까? 잘못 소리쳤다가는 죽을 수도 있고, 잘못 빌었다가는 "너도 즐겼지." 라는말을 듣기 십상이다.
피임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피임 준비를 잘하는 여성은 ‘선수‘, ‘걸레‘ 취급받기 쉽고, 피임을 못해 임신하면 남자에게 부담 주는 ‘칠칠치 못한 여자‘가 된다. 성차별에 저항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로 찍히고, 가만 있으면, "여자들이 의식이 없어서 문제다.", "딸들아 깨어나라"며 계몽이 덜 된 인간으로 본다. 남성 언어 안에서는, 여성의 저항과 순종 모두 남성 폭력과 성차별의 ‘원인‘이 된다. - P143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 권리를 가진다." 라는 말은, 당위적인진리가 아니라 추구해야 할 희망적 가치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에서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가 인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때문이다. 인간의 범위는 자연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차별주의, 인종주의, 서구 중심주의, 가부장제, 비장애인 중심주의,
이성애주의 등이 복잡하게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권력 관계의 역동 속에서 결정된다. 인종주의 사회에서 ‘유색 인종은 표준적 인간이 아니며, ‘비장애인‘의 몸이 인간을 대표하는 사회에서 장애인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탈락한 타자(他者)로 간주된다. 흔히, 흑인은인간과 동물의 중간으로, 여성은 인간과 자연의 중간 존재로 ‘다루어진다‘. - P151

인간과 인간 아님의 경계는 한 사회의 지배 규범에 의해 임의적으로 정해진다. 해방 후 이승만 정부가 친미 반공 국가 건설을 위해다수의 제주 도민을 학살한 제주 4·3 사건에서 우익 테러 조직인서북청년단이 "우리는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빨갱이‘를 죽였다."라고 말한 것이나, 아내폭력 가해자들이 "나는 사람을 때린 것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다."라고 주장하는 사례 등은 가해자가피해자를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 P152

임으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남녀의 성 기관을 모두 가진
‘자웅동체‘ 인간인양성구유자(性具有者)의 존재는, 인간이 원래부터 양성으로 구분되어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통념에 도전한다.
성별 구분은 계급. 인종·학력·성격· 사회적 지위 등에서 여성과여성의 차이가 남성과 여성의 차이보다 클 경우와 모순된다. 모든사람은 한 가지 정체성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중적 주체인데, 인간을 성별이나 피부색을 기준으로 ‘여성‘, ‘흑인‘으로 환원하여 규정하는 것이 바로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이다. 동성애 인권운동가들은 이성애와 동성애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한다. 동성애와 이성애의 ‘차이‘는 성별 구분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을 남성, 여성으로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라 이성애 제도의 산물인 것이다. - P153

인권 이론에 대한 여성주의의 가장 큰 공헌은, 국가 권력으로부
‘터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고자 했던 근대적 인권 개념의 한계를 뛰어넘어, 이제까지 비정치적인 공간으로 간주되었던 ‘사적인 영역에 인권 개념을 적용함으로써 인권의 범위를 확장한 것이다. 여성주의 인권은 기존 공적 영역에서 ‘국가 대 개인의 억압뿐만 아니라
‘개인 대 개인의 억압도 중요한 인권 문제로 보며 일상을 정치화했다. 사실, 기존의 인권 범위는 대단히 협소한 것이었다. 인구의 과반수를 훨씬 넘는 여성, 동성애자, 장애인들은 국가의 법과 제도에의해 차별받기도 하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보이지 않는 차별과 고통은 더욱 심각하다. 일상의 폭력이 인권의 문제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성차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많은 이들의 일상을 규율하고 있는 외모 · 학벌·나이·서울 중심주의 등으로 인한 차별 사안도 인권 침해의 문제로 다루어져야 한다. - P164

않기여성폭력은 언제나 피해 여성 개인의 고통보다 그 여성이 속한집단의 명예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왔다. 특히, 유교 전통과 성의 이중 규범이 강력하게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은범죄나 인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명예나 도덕과 관련한 문제로 인식하게 되면, 여성은 피해 사실에 분노하기보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피해 여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명예를 ‘더럽힌‘ 존재가 된다. - P171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몸은 단순히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몸을 주체의 소유물로 보는 관점에서는 몸은 마음이 아닌 어떤 것이며, 몸은영혼, 이성, 마음의 배반이자 감옥으로 간주된다. 몸은 존재를 담아두는 보관 장소에 불과하게 된다. 페미니즘 역시 사회, 정치, 문화전반에 걸쳐 남성이 가정한 몸과 정신의 이분법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해 온 것이다. - P177

이 같은 인권, 평등 개념의 재구성은 성별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장애인과 두 발로 걷는 비장애인에게 동일.
한 조건에서 달리기 경쟁을 하라는 것은 평등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인권운동은 사회적 약자에게 인권의 개념이 확대 적용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인권 개념을문제시, 재구성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인권의 운동‘ 과정이기도하다. 인권운동은 인권 개념의 운동을 낳고, 동시에 새로운 개념은인권 운동을 발전시킨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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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습득한 책 읽기 습관을 요약해 본다.

1. 눈을 감아야 보인다(in/sight).

2.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기존의 인식을 잠시 유보하라.(판단 정지, epoche).

3. 한계와 관점은 언어와 사유의 본질적인 속성이지, 결함이 아니다.

4. 인식이란 결국 자기 눈을 통해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나의 시각을 객관화하는 것이다.

5. 본질적인 나는 없다. 내가 추구하는 것이 나다.

6. 선택 밖에서 선택하라.

7. 궤도 밖에서 사유해야 궤도 안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8. 대중적인 책은 나를 소외시킨다.

9. 독서는 읽기라기보다 생각하는 노동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4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 이 책에는 내가 그간 겪은 ‘책, 글쓰기, 공부와 여성/아줌마‘와 관련해 차별, 편견, 무시, 경멸, 혐오당한 일화는 쓰지 않았다. 남들이 봐도, 지금 내가 생각해도 재미있는 일화가 무궁하다. 20여 년 동안 거의 매일 하루에 한 건 이상 겪었다. 너무 많아서, 너무 어이가 없어서, 누가 믿을까 싶어서 쓰지 않았다. 새삼스런 이야기지만 가장 강력한 지배는 사람들에게 여행과 독서를 금지하거나 접근하기 어렵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계에서 ‘갑‘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 잃을 것이 없는 사람, 덜 사랑하는 사람일지 모르지만 권력이 두려워하는 인간은 분명하다. 세상이 넓다는 것,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이다. - [정희진처럼 읽기] P25

정찬의 [새의 시선]의 인용 부분 때문에 [정희진처럼 읽기]를 펴게 된 저녁, '누구나 독서 이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문장이 무겁게 남았다. 나한테 책 읽기는 무엇일까. 책을 생각하면 학교에 들어가서야 내 이름을 알게 되고 한글을 뗀 내가 교과서 외에 첫 그림책을 만난 아홉 살의 도서관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새로 지은 건물이라 지독했던 페인트 냄새처럼 여전히 나한테 강렬하고 지독한 냄새로 따라다니는 책은 내게 무엇일까.

'숨쉬기'다.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공기가 책에서 오고 책을 통해 숨을 쉰다.' 이런 표현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책' 없는 나란 사람은 상상할 수 없으니. 읽기보다는 사들이고 쌓아두면서도 흡족하던 때, 이건 지적 허영심이라고 자책하기도 했다. 아직도 읽지 못한 책이 꽤 많이 꽂혀있지만 이 정도의 허영은 스스로에게 허락하기로 한지 오래되었다.

도서관의 책들을 다 읽고도 책에 대한 허기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서 친구들 집에 쌓아둔 책들을 탐하기 시작했다. 좀 먹고산다는 집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전집들이 몇 질씩 꽂혀있기 마련이었고 그렇게 친구들의 집을 들락거리면서 책이 가득한 책방의 로망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Y네 집의 책방은 여전히 로망이다. 지역 유지에다 손꼽히는 재력가였던 그 친구의 집에는 별채가 있었다. 별채에는 '식모 언니'방이 있고 벽마다 종류별 책으로 가득한 책꽂이가 천장에 닿아 있었다. 언니 오빠들도 많았고 대학생이거나 고등학생이었던 그 집에는 다양한 책들이 도서관보다 많았다. 툇마루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마당을 뒤덮은 포도나무 덩굴을 벗어난 햇살이 발목을 간지럽히던 아른아른한 그림자의 풍경과, 그 시간, 그 여유가 열두 살의 봄으로 나를 데려간다. 집에 돌아가면 4년째 앓고 계신 아버지가 야윈 팔다리를 주물러주기를 기다리시고, 농사 일하랴 집안 살림 챙기랴 종종걸음으로 바쁜 엄마는 도와줄 손길이 간절한 걸 알면서도, 털고 일어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책 속으로 빠져들던 갈래머리의 내가 거기 있다. 저녁밥 때가 오기 전에 일어나서 어스름 저녁 시오 리 길을 타박타박 걷노라면 배는 고프고 검어지는 산모퉁이 커다란 바위는 신성한 기운으로 무서워 걸음은 자동 빨라진다. 도착했다는 안도감도 잠시, 오늘도 늦었다고 엄마의 큰 손은 어김없이 등짝을 후려치고 욕을 한 상 푸짐하게 차려주셨다. 그 친구의 집에서 간식으로 내어주는 처음 보는 과일도, 가사 일을 돌보는 식모 언니도, 내가 책을 읽는 동안에 친구가 과외 선생과 함께 치는 피아노도, 레이스 가득하고 질감 좋은 드레스를 입은 우아한 친구의 엄마도, 마당에서 탁구를 치며 환하게 웃던 친구의 오빠들도 부럽지 않았다. 오로지 책방, 책방만이 부러웠고 그 책방의 책들을 다 읽고 싶어서 조바심이 났다. 책장의 한 칸도 채 읽지 않았는데 그 집에 돈 빌리러 오신 초라한 엄마와 마주친 이후로는 그 친구네 집에 가지 않았다. 돈 빌리러 오는 양수장 집 딸인지도 모르고 왜 안 오는지 묻는다는 친구 엄마의 전언에도 '나한테 삐진 거냐'라는 친구의 채근에도 그 친구의 집에는 다시 가지 않았다. 포도나무는 베어지고 그 자리엔 등나무가 심기고, 별채는 허물어지고 장미 밭으로 만들었다는 소식을 중학생이 되어서 듣고 그 풍경이 아련해졌다.

돌아보면 그립고 평온한 봄밤이었다. 그 봄 이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평온한 저녁은 맞을 수 없었다. 평생을 가정에 소홀하고 가족에게는 무능한 분이었지만 지역의 한량이었던 아버지가 떠나시자 우리들은 순식간에 '애비 없는 자식'들이 되어버렸다. 특히 엄마는 많은 것을 놓아버리셨는데 '장남'에게 아버지를 대신할 관심과 책무와 의존과 기대를 고스란히 전가했다. 스물다섯의 우유부단하면서도 나르시스 청년에게 넘겨진 일곱 식구는 너무 과한 무게였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와 의존은 제왕적 권력의 힘으로 작용했고 뭐든 할 수 있게 했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는대서 발전해서 노름에 빠졌던 것이다.

내 유년은 끝나버렸다. 어두운 십 대의 터널이 시작되었다. 온통 회색이었고 절망이었고 죽음을 곁에 두고 살았다. 애증의 '엄마'만 아니라면 모든 걸 놓아버릴 수 있었고 놓아버리고 싶었다. '가족'이라는 올가미가 항상 목에 걸려 있었다. 앎에 대한 갈망은 지속되는 목마름이었고 책은 유일한 샘물이 되어주었다.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살지 못했으리라.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책을 읽고 있으면 다른 세상, 다른 곳에서 사는 나를 꿈꿀 수 있었고 그 꿈이 나를 살게 했다.

[아주 친밀한 폭력].

오랫동안 무거운 마음에 밀어두고 밀어두었던 책이다. [아주 친밀한 폭력]의 그 '아주 친밀한'의 시작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른 척하고 싶었다. 잊고 싶었다. 그러나 '독서는 저항, 불복종의 시작이다.'에 용기를 냈다. '아주 친밀한 폭력'은 책 속의 얘기만도 아니고 남의 일도 아니고, 내 주변에서도 흔하고 나에게도 흔痕이다.

노름에 빠진 장남은 돈이 되는 무엇이든 가져가느라 눈이 벌게져갔고 엄마는 포기와 의존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도 우리들에게는 '장남이 잘 되어야 집안이 선다'라는 말을 수없이 주입했다. '돈 내놓으라'라는 협박의 강도가 세질수록 더 이상 돈 한 푼 빌릴 데도 없는 엄마는 비굴해져갔고 그런 엄마를 밀쳐버린 것은 엄마를 향한 폭행의 시작이었다. 술을 먹고 들어오면 '내 인생을 왜 이렇게 만들었느냐'라고 주정하기가 일쑤였고 자신의 인생을 저당한 동생들 중에서도 가장 어린 나와 내 동생은 꼼짝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잠에 곯아떨어질 때까지 자기가 얼마나 잘나가는 사람이었는데 이 꼴이 되었는지를 듣고 또 들어야 했다. 울분으로 똘똘 뭉친 막내 오빠는 집을 떠났고 객지로만 떠돌다 우연히 집에 들른 둘째 오빠는 엄마한테 패악질 하는 것을 보고 죽여버리겠다고 부엌칼을 휘두르다 만류하는 엄마 때문에 대성통곡을 쏟아내고는 그 길로 집을 떠나 다시 몇 년 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엄마는 아프기 시작했다. 일 년 내내 툭하면 코피를 흘리셨지만 여전히 들에서 허리가 꺾이도록 일을 하고 우리를 위해 밥을 짓고 장남의 노름 돈을 대고 우리를 학교에 보냈다. 코피가 잡히자 두통이 덮쳐서 엄마의 이마에는 흰 머리띠가 자리 잡았다. 병원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고 겨우 침을 놓는 집에 저녁마다 찾아가 침을 맞으셨다. 중 2, 열다섯 살의 나는 저녁마다 엄마를 모시고 침쟁이 집 어둑신한 골방을 찾아갔다. 이불 바늘만 한 침들을 꽂고 잠드신 엄마를 무기력하게 바라보다가 부축하고 돌아오던 깜깜한 길들이 어제처럼 선명하다. 그 가을, 친구 하나는 집에 있던 농약을 마셨다. 선배 오빠가 변심했다고 부모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재주 많고 착하던 동네 오빠는 겨울마다 찔레 열매에다 청산가리를 넣어서 꿩을 잡고는 했는데 그 청산가리를 마셔버리고 고통 속에서 하루를 소리 지르다 떠나갔다. 좋아하던 동네 언니와 결혼을 집안에서 반대했다는 이유였다. 총각은 무덤도 쓰지 못하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에다 묻는 거라고 내가 즐겨 걸어 다니던 둑에 몰래 묻었다. 살짝 튀어 올라온 그곳을 지날 때마다 풀피리를 불던 그 오빠가 생각나서 결코 밟지 않으려고 길 끝으로 걸었다. 죽음은 멀리 있지 않았다. 죽음의 유혹은 강렬했다.

그때 나는 게오르규의 '25시',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심훈의 '상록수'와 삼중당 문고판에서 이광수의 책들을 읽고 다시 친구들의 책장을 뒤졌다. 중학생이 된 기념으로 집에 들인 양장본 전집들에서 '전쟁과 평화', '죄와 벌'을 읽어 치웠다. 돌아보면 조판 엉망, 번역 엉망의 해적판들이 포장만 그럴싸했던 것이다. 나중에 그 책들을 다시 읽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때 나를 살게 한 책은 앞 뒷장이 찢겨서 나중에 다시 읽고서야 제목을 알게 된 '25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 가운데', 레마르크의 '개선문'이었다. 특히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서나 '개선문'의 [조앙 마두]에게 빠졌다. 그런 세월을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그 시절을 통과하는 나를 위로했다. 그 어떤 위무보다, 그 무엇보다 그 시절을 견디는 힘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폭력의 세월을 견디다 결국은 엄마와 동생을 두고 도망쳤다. 고등학교를 포기하는 것만이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이었으므로.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나는 체벌이 싫다. 너무너무너무 싫다.

학교에서 손바닥을 자로 맞는 것도 싫었고, 아버지가 동생하고 싸운다고 호박 들기 벌을 내리는 것도 실어서 다시는 동생하고 싸우지 않았고 맞기 싫어서 공부를 잘해버리는 쪽을 선택했다. 키가 크다고 차출당한 배구부에서는 이유도 모른 채 단체 기합을 받거나 탱자나무 몽둥이로 맞았다. 코치가 때리고 선배들이 돌아가며 때리고. 배구는 하고 보니 매력적인 운동이었지만 맞는 거 싫어서 안 한다고 그만두었지만 집안에서 이뤄지는 폭력에는 답이 없었다. 맞는 동안 나는 점점 졸아들어서 먼지가 되어가고 맞다 보면 맞는 이유도 불분명해져서 '맞을 짓'을 해서 맞고 있으니 그 시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게 된다.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피해 여성이 피해 여성에게 주는 편지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제 생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우리는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어요.

그가 던진 수많은 잔인한 말들에 저는 정말 가슴이 아팠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그리고 그가 한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것도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우리의 기념일도 아니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벽으로 밀어붙이고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마치 악몽 같았어요.

현실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죠.

오늘 아침 깨어났을 때 제 몸은 온통 아프고 멍투성이였어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어머니의 날‘도 아니고 다른 특별한 날도 아니었답니다.

지난밤 그는 저를 또다시 때렸어요.

이제까지 어느 때보다 훨씬 심하게요.

만약에 그를 떠난다면, 저는 어떻게 될까요?

어떻게 제 아이들을 돌보나요? 돈은 어떻게 하고요?

저는 그가 무섭지만 그를 떠나기도 두려워요.

하지만 지금 저는 그가 틀림없이 미안해할 거라는 걸 알아요.

왜냐하면 그가 오늘 제게 꽃을 보냈거든요.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답니다.

제 장례식 날이었거든요.

지난밤 그는 결국 저를 죽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때려서요.

만약에 그를 떠날 만큼 용기와 힘을 냈다면,

저는 아마 오늘 꽃을 받지는 않았을 거예요.

* 이 시는 가정 폭력 생존자이자 여성운동가인 폴레트 켈리(Paulette Kelly)의 작품이며,

신혜수의 번역문을 다듬어 수정했다.

--정희진 [아주 친밀한 폭력]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폭력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게 하는 다양한 문화적 구조들을 생산해 왔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종교의례, 민족 문화, 전통, 놀이 따위로 정상화, 합리화, 일상 문화화되었다. 이는 여성 폭력을 은폐하고 해결을 지체시켜온 사회 구조로 작용해 왔고 특히 ‘아내 폭력‘은 가족 내에서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수천 년 동안 폭력으로 간주되지 않았다.

여기서는 피해 여성의 폭력 해석, 수용 방식을 통해 폭력의 발생과 지속 구조를 알아보고자 한다. 아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폭력을 해석하는 사회 문화적 맥락을 가족 구조와 가족 내 남성과 여성의 관계 방식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폭력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면, 폭력 당하는 현실이 부정의 하다고 생각하기 힘들다. 폭력을 남성의 정당한 자원으로 인정하는 한국 사회에서 피해 여성들은 남편을 제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폭력을 견딜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몸이 경험하는 육체적 고통을 상대화하고 다른 종류의 문제로 치환하면서 폭력을 수용한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5

남편의 폭력은 아내를 훈육하려는 폭력에 그치지 않는다. 실제의 많은 폭력은 이보다 훨씬 더 도구적이다. 남편은 폭력을 통해 자기이해(利害)를 실현한다. ‘맞을 짓‘에 대한 성별적 적용은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남편이 ‘맞을 짓‘을 해도 아내가 맞게 된다. 어떤 남편들에게 폭력은 생활 방편이다. 가정만 유지한다면 아내의 경제력으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 폭력은 남편이 ‘노상(언제나 하는 일)‘로서 직업이자 노동이 된다. 이때 아내는 가족을 벗어나길 바라지만, 남편은 가족 없이 살아가지 못한다. 결혼 관계에서 폭력은 남편이 관계의 유지를 위해 서건 청산을 위해 서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다. 두 사람 간의 이해 갈등 상황에서 남편은 아내보다 훨씬 쉽게 폭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폭력은 남성적인 자원이다. 가정 외 폭력에서도 폭력 행위 주체가 대부분 남성이라는 점에서 폭력은 성별화된 사회 현상이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156

여성의 탈출 의지는 아내, 어머니 역할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정체성에 회귀함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여성의 가족 내 성 역할 수행이 여성의 인권보다 우선시되면서 어머니, 아내로서의 ‘도리‘는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맞지 않을 권리‘를 유보하거나 산소화하였다. 또한 피해 여성의 공포심, 자기방어, 저항 행동은 한국 사회 전반의 성별 규범에 의해 인정되지 않았다. 결국 현재의 가족 제도 아래서는 남편의 폭력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저항 모두가 ‘아내 폭력‘을 재생산하였다. -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 P247

첫 직장에서 같이 일하던 선배 언니 한 명은 애인이 있었다. 일이 끝나는 시간이면 왜소하고 성말라 보이는 남자가 껌을 씹으며 기다리고 있다가 그 언니를 보면 날름 팔짱을 끼고 사라졌다. 그 언니는 아기 팔뚝보다도 가늘게 마른 몸이었는데 일요일에 쉬고 나오면 멍투성이였다. 이유는 넘어졌거나 부딪혔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알았다. 일을 안 하고 빈둥거리는 남자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꺼냈다가 툭하면 맞고 있다는 것을.

또래의 멋쟁이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미모며 몸매며 애교도 뛰어났지만 화장도 잘했다. 화장의 변신술을 그녀를 통해서 보았을 정도다. 주말이면 곱게 화장하고 잔뜩 들떠서 남자친구를 만나러 나가고는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만두었다. 친구들하고 놀다가 약속에 늦었다고 길에서 막무가내로 때려서 팔이 부러졌다는 뒷얘기를 들었다. 거의 45년 전 이야기다. 아마 그들은 그 남자들과 헤어지지 못하고 결혼해서도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을 것이다. 좋아해서 놓아주지 못하고 사랑해서 놓을 수 없다는 흔하디흔하고 뻔한 이유들이다.

사귀던 남자아이가 있었다. 같이 공부를 했고 같이 많은 길들을 걸었다. 앞으로 살아갈 세상을 이야기했고 암담했던 지난 시절들을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씩 길 위에 있고는 했다. 비가 오는 날은 공원의 미끄럼틀 밑이 비를 안 맞게 하는 것도 알았고, 팔달산에 그렇게 많은 오솔길들이 있는 것도 그 아이를 통해서 알았는데 만날수록 헤어져야 할 시간에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스무 살, 남자와 자버리는 일은 너무 두려운 미래였다. 그 거듭되는 거절에 결국은 주먹으로 얼굴을 가격 당했다. 너무 놀라서 아픔도 느끼지 못했는데 찰칵, 칼을 꺼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둑한 골목에서 순간적으로 공포가 목구멍까지 차올라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문소리가 나자 칼을 거두고 돌아서서 씹어뱉듯이 나이트클럽 같은 데서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고, 공부나 하라면서 뛰어가 버렸다. 다행인지 그 이후로 다시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우연히 자주 마주치면서 만나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한 번씩 생각해 본다. 그 아이와 밤을 같이 보냈다면 나는 영영 그와 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맞고 살았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위가 꼿꼿해진다. 체할 것 같다. 저녁밥(밥보다는 국수나 수제비였을 때가 훨씬 많았지만)을 먹고 있을 때 술에 취한 '장남'이 들어오면 위부터 뒤틀려서 꼭 체하고는 했다. 쳇기는 설사로 이어지고 몸살을 앓고서야 끝이 났다. 그 이후로도 자주 체한다. 조금만 불편한 자리에서 식사만 해도 밥알이 차곡차곡 얹히는 기분이 든다. 이 이야기를 풀어 놓는 지금도 쳇기가 명치를 누른다.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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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01: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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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30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