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대량 학살이나 집단 성폭력 같은 트라우마(끔찍한 정신적 외상)의 생존자들은, 고통을 겪은 자신과 고통을 말하는 자기사이에서 분열한다. 자신의 고통을 믿지 못하는 청자(者)를 위해자기 경험을 조절하거나 의도적으로 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고통자체도 상처지만, 말하는 것은 그보다 더한 상처다. 그래서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commitment)하는실천인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친구는 목격자로서 자아를 조절해야 했던 나의 괴로움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아니, 정희진도 못 쓰는 얘기가 있나?"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책 그리고 평소 내 이야기가 그에겐 이미 충분히 시끄러웠나 보다. "지금까지 이야기도 부담스러운데, 이것도 다 쓴 게 아니라구? 그럼, 얼마나 더 떠들어야 직성이 풀리냐?" 그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 P10
어떤 사람에게 절절한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설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사람들은 표준이나 평균을 현실이라고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사실, 평균이라는 것은 현실에서는실제 존재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가부장제(인종주의, 계급차별……) - P10
는 일종의 색안경이다.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서 육안이 되어 버린그 색안경을 벗어야, 여성의 현실이 보인다. 눈을 감아야 보인다. 나는 갑자기 색안경이 벗겨져서 눈이 먼 상태인데, 그는 이제 다보이니 얼마나 좋으냐, 그러나 그만 보라고 말한다. 나는 아무 말도못했는데, 내가 연단으로 나오는 사이, 세상은 내가(여성이) 말하려고 폼 잡는 것 자체에 이미 충격받은 듯했다. 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평소 여성주의를 이해하는 동료라고 믿었던 그에게마저 그런말을 들으니 정말이지 절망스러웠다. 그럼, ‘보통‘ 사람들은 나를얼마나 이상한 사람으로 보고 있단 말인가! - P11
내가 경험한 이 삽화들은 앎이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 있다.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 P11
그러나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역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생물학자이자 과학철학자인 도너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이렇게 말한다. "과학 지식은 목격에 관한 것입니다. 특정한 것을 안다는 사실은, 설명 가능성의 의미를 변화시킵니다. 목격은 언제나 해석적인, 우발적인, 예약된, 속기쉬운 참여입니다. 목격이란 증언하는 것이고, 서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 것을 해명하는 것이며, 자신이 본 것과 기술한것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 일입니다". - P12
때문에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편안할 수는 더욱이 없다. 다른(alternative)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empower).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머리 좋은 사람이 열심히 하는 사람을 따라갈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즐기는 사람은 고민하는 자를 능가하지 못하는 법이다. 여성주의는 우리를 고민하게한다. 남성의 경험과 기존 언어는 일치하지만, 여성의 삶과 기존 언어는 불일치한다. 남성 중심적 언어는 갈등 없이 수용된다. 하지만 - P12
여성주의는 기존의 나와 충돌하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제공한다.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 문제(젠더)‘를 알아야 한다. 여성 문제는 곧 남성 문제다. 여성이라는 타자의 범주가 존재해야남성 주체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여성주의는 보편과 특수라는 이분법자체에 문제를 제기하지만) 젠더는 특수한 문제도, 소수자 문제도 아니다. - P13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사고는 낡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현실을 파악하기에도, 변화시키기에도 불가능한 체계 (paradigm)이다. 기존의 모든 국가, 공동체, 종교 등 정치적 행위자의 갈등은,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제 더 이상 남성의 시각으로는 성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빈부 격차, 환경 파괴, 폭력, 인종 증오, 근본주의 같은 인류가 직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남성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다. 이분법 사유에서는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他者)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타자성(他者性)은 동일성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우월한 것만이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2, 3, 4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 P13
사실, 앞에서 내가 사용한 ‘색안경‘, ‘렌즈‘, ‘본다‘와 같은 비유는시각 장애인에 대한 차별적 언어다. 만난다는 것이 반드시 본다는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언제 한번 보자." 이 말은 ‘볼 수 없는시각 장애인을 배제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세요?", "살펴 보니 어떻습니까?",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어요.", "여기를 ‘보세요".…………… 이처럼 비(非)시각장애인의 언어에서는 아는 것과 보는 것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이 보는 것이며 어떻게 아는가는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감촉으로 색깔을 본다. 어떤 사람은 읽지 않고 경험으로 안다. 비시각장애인이 보고 있는세계는 인간 세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 P14
이 말은 그리 큰 실례가 되지 않는 평범한 인사말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인에게는 같은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모든 물음은 질문하는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사고 방식을 반영한다. 질문내용은 질문자의 입장과 관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물음에는이미 특정한 형태의 답이 전제되어 있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질문은 묻는 자와답하는 자 사이의 사회적 권력 관계를 반영한다. 여성은 남성에게 "왜 그렇게 취업하려고 노력하니?"와 같은 질문은 하지 않는다. - P16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사람은 누구인가? ‘가난한 + 장애‘ + ‘여성‘인가? 장애 여성은 일주일에 3일은 장애인으로 살고, 나머지는 여성으로 살아가는가? 이런 식으로 불행을 경쟁하고, 가장큰 피해자가 가장 올바르다는 논조의 질문은, 정치적으로 아무런의미가 없다. 인간의 고통은 사회적 환경에 따라 그때 그때 다르다. 여성주의 장애운동 단체인 ‘공감‘에서 일하는 친구는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공감‘에서 레즈비언 인권 운동가를 초청하여 강의를 들었는데, 반응이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강좌에 참석한중증 장애 여성들은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생각했는데, 그런 자신조차 누군가에게 가해자(이 경우에는 동성애혐오증)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복잡한 방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P17
정체성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와 맥락 속에서 구성된다. 모든 정체성은 차이를 가로질러 형성된다. 여성주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의미 체계 중 하나이며, ‘여성주의자‘ 역시 나를 설명하는 다양한 정체성의 일부일 뿐이다. 여성주의는 세상 모든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한국 사회에서 나는 여성으로 간주되지만, 미국에 가면 여성이라기보다는아시아인 혹은 한국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 P17
여성주의는 성별 관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타자들과의 소통, 그리고 다른 사회적 모순과 성차별의 관계에 주목한다. 때문에 여성주의는 그 어느 정치학보다도 다른 사회적 차별에 매우 민감하며, 다양한 피억압자들에게 관심을 갖는 연대와 제휴의 정치이다. 여성이라는 범주, 여성 억압은 젠더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고통, 사회적 불평등은 계급, 민족 등 어느 한 가지 사회적 요인만으로는설명 불가능하다. 계급이든, 민족이든, 젠더 모순이든 모두 다른 사회문제와 관련성 속에서 작동한다. - P21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꼴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 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어떻게 전체 운동이 따로 있고, 부분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 P22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P23
대화는 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한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는말이 필요 없는 관계, 연인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 이와 대조적으로 ‘동무‘란 무엇보다 말이 중요하고, 또 말이 통하는 관계를 향한지속적인 노력이라는 김영민의 말처럼, 나 역시 말을 만들어 가는관계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한다. 친구들은 변한다. 그들이 사라지기도 하고, 내가 그들을 떠나기도 한다. 결국, 성장하면 분리되는 거니까. 그래서 매번 감사한 이들이 다르다. 나는 복이 많아서, 나와 말을 만들어 가는 관계일 뿐 아니라, 머리부터 빠져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충분히 깊은, 누구나 빠지고 싶은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지금은 윤정숙 선생님, 베이컨 신부님에게 사랑을 전하고 싶다. 두 분 모두 내겐 치열하고 뛰어난 ‘적대자‘들로서, 나를 지적으로 정치적으로 인간적으로 성숙시키는 이별하고 싶지 않는 친구들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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