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여 년 전부터 대학과 시민단체, 정부기관과 노동조합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고 있다. 상담, 인권, 사회운동, 폭력, 섹슈얼리티(sexuality), 탈식민주의 등 기존의 분과 학문 체계를 횡단하는다양한 주제들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강의한다. 내 강의에 대한 반응은 크게 ˝어렵다˝, ˝재미있다˝ 두 가지다. 어려운 것과 재미있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연속선의 감정인데,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강사와 소통이 된 ‘알아듣는 순간, ‘난해함‘이 쾌락으로 변하는 것을경험한다.
흥미로운 것은, 내 강의를 쉽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주로 전업주부, 폭력 피해 여성, 저학력 생산직 기혼 여성 노동자 등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거나 침묵을 강요받아 온 여성들이다. 심지어 그들은 ˝선생님이 너무 겁이 많다. 더 쎄게 해달라˝며, 내게 (표현의 급진성이 아니라) 인식론적 급진성을 요구한다. ˝여성주의는 중산층 지식인 중심이라 ‘민중 여성‘들이 모르는 이야기만 한다.˝라고비판하는 이들이 있는데,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제도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해 온 여성들일수록 내강의를 좋아한다. 그들은 내가 설명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자크라캉(Jacques Lacan, 1901~1981, 언어를 통해 인간의 욕망을 분석하는 이론을 정립한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30~2002, 지배구조, 혹은 계급구조가 어떻게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문화적으로 분석한 프랑스의 사회학자),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1956~, 본질적인 성별 정체성은 없으며, 정체성은행위 중에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미국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이론에 깨달음의 무릎을 치고, 앎이 주는 환희에 박수를 보낸다. 여성의경험이 그 자체로 이론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깨닫고 삶을 성찰하기 시작하면 여성주의 사상과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전문직 종사자나 이른바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내 강의가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한다. 박사 학위를 소지한 어느 50대 남성은내 강의를 듣고 ˝뇌가 고문당하는 것 같았다.˝라고 말하고, 어느 노동운동가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라고 표현한다. 이런 내용과 비슷한 이메일도 종종 받는다. 그들에게 내 강의가 어려운 것은, 내가 관념적이거나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현학적으로 말해서가 아닐 것이다. 여성주의는 남성 언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사유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그들은 이제까지
˝여성주의는 편파적이고 나는 객관적˝이라고 믿고 있다가, 자신의사고 역시 편파적이며 더구나 강자의 경험을 보편과 객관으로 믿어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물론 나도 여성주의를 접할 때마다,
장애인이나 동성애자들의 이론을 공부할 때마다, 매번 그런 충격에 휩싸이며 나를 다른 세계로 이동시키는 그 순간을 행복해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제까지 통용돼온 지식과 언어가 누구의 삶을 기준으로 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른 목소리인, 여성의 목소리는 존재 그 자체로 전복적이다. 사실, 여성주의는 객관적이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여성주의는 무전제의 전제에서 출발하지도 않고, 그 어떤 전제도 없는 청중들을 설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에 그런 청중은 없기때문이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 1934~, 서구 전통 철학의
‘남근이성중심주의‘ 사유를 비판하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철학자)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를, 역사를, 정치를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고,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위험한 여성 - 젠더와 한국의민족주의>라는 책을 보면, 인식 주체로서 여성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알 수 있다.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p 32~34
˝제도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억압당해 온 여성들일수록 내 강의를 좋아한다.˝ ㅡ > 바로 나다. 정희진을 좋아하는 저학력 생산직 여성.
지금은 돌봄노동자로 늙어가면서 언젠가는 돌봄을 받게 될 아줌마. 밑줄 가득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으면서 하품만 하고있는.
책이 처음 나온 지 27년, 세상은 여전하다.
여성의 목숨은 여전히 파리보다 못하다.

내 경험에서 보면 여성운동(여성학)이 여성학(여성운동)에 대해품고 있는 상호 ‘편견‘, ‘선입견‘, ‘오해‘, ‘고정 관념‘, ‘불신‘, ‘무시‘, ‘분노‘ 또한 만만치 않다. 안 그럴 것 같지만, 여성운동가(여성학자)가 여성학자(여성운동가)에 대해 품고 있는 고정 관념역시, 남성(사회)이 생각하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 P35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 전체주의 비판자이며 참여 민주주의 옹호자인 유대인 출신의 여성 정치철학자)가 말했듯이, 사유하지 않음,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 P36
사회운동 중에 여성운동만큼 편견에 시달리는 운동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예 여성운동을 사회운동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여성운동에 대한 비난은 장애인운동이나 노동운동, 평화운동, 반미운동 등 다른 사회운동에는 절대로 적용될 수 없는 말들이다. 평화운동을 ‘먹고 사는 게 해결된 한가한 사람들의 운동‘, 장애인운동을 ‘중산층 지식인들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노동운동가들은 노동 의식만 있지 사회의식은 없다. 이런 말을들어본 적 있는가? 여성운동가에게 사회 의식이 없다는 말은, 여성문제는 개인의 문제이지 사회 문제가 아니며, 따라서 여성 의식은사회 의식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 P38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P44
물론 이것은, 학문이 어렵고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한 기존 학문은 지배 계급의 도구였다. 만일 여성학이 어렵다면, 그것은 여성학자가 현학적이어서가 아니라 여성주의가 익숙하지 않은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여성학의 내용이, 여성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면‘,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력과 용기를 주지 않는다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여성학은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여성학이 쉽다면, 이는 우리 사회의통념에 도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고, 그런 여성학은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 P45
한국 현대사의 고통과 비극의 성별적인 두 주체, 정신대 할머니‘와 장기수 ‘선생님‘의 존재는 이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전자는 역사의 피해자, 전쟁의 ‘부산물‘이지만 후자는 역사의 치열한주체이며, 인간의 신념과 의지를 상징한다. 전자는 불쌍한 혹은 수치스런 존재지만, 후자는 존경스럽고 경이로운 존재다. 성별 제도로 인한 성역할은 대칭적이지 않다. 남성의 성역할은남성의 모든 정체성을 설명하지 않는다. 남성은 젠더를 경험하지않기 때문에 (성별 제도로 인해 차별받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성역할과 노동자 · 시민·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은 갈등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이라는 말은 여성은 시민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한다). 남성 중에서 아버지가 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있듯이 또한 아버지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고 안(못) 하는 사람도있듯이, 모든 여성이 어머니의 의무나 재능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출산은 전쟁에는 미달하되전쟁만큼 사망률이 높은 유일한, 위험한 사회 활동일 뿐이다. - P53
대부분의 가정폭력은 가해 남편이 아내가 어머니/며느리로서 성역할 규범을 어겼다고 판단했을 때 발생한다. 성역할 불이행이 ‘맞을 짓‘이 된다는 사실은, 이 노동이 여성 자신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몇 해 전 경제 능력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 아내가 돈을 벌러 나간 사이 아버지가 우는 아들을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사건 그 자체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이에 대한 당시 여론이아버지의 ‘육아 스트레스‘에 대한 동정과 아이를 돌보지 않은 어머니의 비정함에 대한 비난에 집중했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그 여성에게 요구한 것은, 돈은 벌되 갓난아이를 업고직장에 나가서 남편을 편안하게 해주라는 것이었으리라ㆍ - P60
그렇다면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바친 인생만큼 우리 사회는 어머니를 기억하고 존중하는가. 우리 기억 속의 아릿한 상처와 안쓰러움으로 남아 있는 헌신과 희생을 다한 어머니와, 음식점에서 떼를지어 큰소리로 웃고 떠들며 지하철에서 자리 쟁탈전을 벌이는 뻔뻔스러운 여성들, 오형근의 사진 작품에 나오는 촌스럽게 화장한 얼굴, 문신한 눈썹, 뚱뚱하고 나이 든 추레한 여성, 창피한 줄도 모르고 물건 값을 깎아대며 시장에서 악다구니를 써대는 여성들은 우리들 각자의 어머니와 다른 사람들인가? 젊은 여성을 포함하여 그 누구라도 ‘아줌마!‘라는 단 한마디로 손쉽게 무시할 수 있는 사람들, "아줌마 주제에…………." 라는 말에 대응 논리를 잃고 주눅드는 여성들은 누구인가? ‘탈특권화된‘ 아줌마와 ‘특권화된‘ 어머니의 차이는 무엇일까.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욕망을 드러내며 집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 P63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공공 장소에서 자기 욕망으로 젖가슴을 드러낼 때 그녀는 필시 몸을 파는 여성이거나 ‘미친 년‘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성스럽고 숭고하다. 우리 사회의 아줌마에 대한 혐오 담론은, 그들이 모성(남을 보살핌)과 섹슈얼리티라는 핵심적인 여성성을 상실한 집단이라는 인식에서 온 것이다. 젊음과 미모라는 여성의 가치를 상실한, 섹슈얼리티가 이미 훼손된, 따라서 아무나 건드릴 수 있는, 아무나 건드릴수 있지만 스스로 성적 욕망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집안의 정숙한중산층 여성이 아니라 집 밖에서 노동하는 여성이라는 이미지에서기인한다. - P64
어머니 억압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보다 20배는 더 오래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어머니는 자신이 원하는 희망과 자신에게 부과된 희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훌륭한 언어는 아니지만 내게언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어떤 쾌락을 느꼈다. 그런 점에서 (물론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겠지만) 내게 언어를 가르쳐준 아버지들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버지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상대화시켜준 여성주의 지식인들에게 감사한다. 앞으로 딸들은 아버지의 검은 잉크를 엎어버리고 어머니의 젖이라는 흰색 잉크로 어머니에 대해 다시 써야 한다. 이제 아들은 어머니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딸은 어머니를 자신에게 투사하지 말고스스로 욕망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사회는 여성과 어머니를 분리하고, ‘성스러운‘ 어머니의 일을 남성에게도 부과해야 한다. - P65
페미니즘은 그렇게 거창하거나 ‘무서운‘ 것이 아니다. 이제까지 잘 들리지 않았던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보자는 것이다. ‘다른 목소리‘는 혼란이 아니라 다양성과 창조력의 원천이다. 사람들도 소품종 대량 생산 사회보다 다품종 소량 생산 사회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다. 5학년 남자 어린이가 별뜻 없이, 또래 여자 아이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하느님이 나는 진흙으로 직접 만드시고, 여자는 내 갈비뼈로 만든 거 알아?" 그러자두 명의 여자 아이들 말이 걸작이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근데, 누가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니?", "그러니까, 너는 질그릇이고 나는 본차이나(Bone China)네!" 여성주의는 남자 어린이의 말이 틀렸다고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여자 어린이들의 재치 있는 대응대로, 다른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여성주의는 그러한 ‘다른 목소리‘가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고, 여성도 남성도 성장시킨다고 믿는다. - P70
나혜석과 동시대에 삶을 마감한 화가 이중섭은 말년에 가족과 헤어져 정신분열로 자해를 거듭하다 정신병원에서 홀로 죽었다. 그러나 이중섭의 죽음은 나혜석처럼 ‘시대를 앞서간 자의 비참한 말로가 아니라, ‘위대한 화가의 치열한 예술혼‘으로 여겨진다. 나혜석의삶은 죽음으로 환원되었지만, 이중섭의 죽음은 삶으로 환원된다. 나는 나혜석의 삶이 행복했다고 본다. 그녀 자신도 그렇게 평가할것이라 생각한다. 자기 시대의 지배 규범에 삶을 일치시키기를 거부한 여성은 가족에게 버림받고 노숙자가 되거나 정신병원에서 죽는다는 신화 ‘나혜석 콤플렉스‘는, 잘못은 사회가 아니라 ‘똑똑한여성에게 있다는 가부장제 사회의 협박일 뿐이다. 여성들을 겁먹게 하는 것은 나혜석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남성 사회의 해석이다. 대개 ‘위대한 여성들‘에 대한 기존의 해석은 여성의 삶을 전유하고싶은 남성의 시선, 욕망일 뿐, ‘역사적 실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살기 위해서, 현실을 바로알기 위해서 여성주의가 필요하다. - P71
우리가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는 거의 모든 말은 백인, 남성, 중산층, 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서울 사는 사람의 시각에서 구성된 것이다. 중립적인 말,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남성의 관점은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왔고, ‘피해‘ 집단도 가장 광범위하다. 또한 성차별은 다른 사회적억압의 모델을 제공하여, 사회적 약자는 여성으로, 강자는 남성으로 성별적으로 재현된다. 여성주의가 중요한 것은 성차별이 가장중요한 모순이어서가 아니라, 지배-피지배의 관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세계에 먹고 먹히는 자가 있다면, 인간 세계는 말을 만드는 사람, 즉 정의하는 자와 정의당하는 자가 있다. 언어는 차별의 - P72
결과가 아니라 차별의 시작이다. 약 5천 년 동안 남성은 재현 주체였고 여성은 재현 대상이었다. 남성은 사람이지만, 여성은 여성이다. 미술 작품 제목을 보자. 로댕의 (생각하는 남성이 아니라) <생각하는 사람>, 앵그르의 (욕탕의 사람들이 아니라) <욕탕의 여인들>이다. ‘유관순 언니‘가 아니라 ‘유관순 누나‘이다. 이처럼 국민, 노동자 민중, 시민의 개념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남성이라고 간주되기 때문에, 여성이 이들 범주에 포함되려면 ‘여성 노동자‘와 같이 기존 개념에 부가적인 명칭을 갖게 된다. - P73
이처럼 여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확산됨에 따라 기존의성차별적 언어들이 개선되고 있다. 이는 단지 개별단어의 표현만 아니라 문장 구조, 사유 방식의 변화까지 동반하는 새로운 삶의양식이다. 대개 남성들은 인과 관계나 의사전달 위주의 말하기 방식(report-talk)에 익숙하지만, 여성들은 원칙적이기보다는 맥락적이고 공감하는 말하기 방식 (rapport-talk)에 능하다. 이제까지 여성들의 말하기 방식은 열등하거나 비논리적, 사적이라고 비하되어 왔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오히려 ‘여성적 방식‘이 타인에 대한 배려와 관용, 민주주의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P7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