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란시인을 처음 만난 건 시집 [심장에 가까운 말]을 통해서였다. 시들이 훅! 들어왔다. <노래는 아무 것도>, <다음에>, <주소>, <배가 고파요>, <울음의 방>들에 멈춰서 서성거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산을 추억함>.
여기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필사하면서 읽었던, ‘너무 깊은 오해‘, ‘나의 고양이가 되어주렴‘, ‘감‘, ‘참 따뜻한 주머니‘, ‘노인‘, ‘화장실이 없는 집‘, ‘통속적 하루‘, ‘망명‘, ‘지익‘ 등등.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정서적 주소지를 묻는 시가 있다. 눈으로 몇 번을 읽고 어디서 끊어야 할지 가늠한 다음에 소리내어 읽으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우리가 자주, 꼭 읽어야 할 한 편, ˝심장에 가까운 말˝ 이 시집은 이 한 편의 시로도 충분한 값어치가 있다고 어설픈 나도 감히 말하고 싶어지는 ‘용산을 추억함‘. 역설적이게도 악몽 같은 이 사건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라도 기억해야 하는데 잊고 산다. 2009년 1월 20일의 용산을.
용산을 추억함
폐수종의 애인을 사랑했네 중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용산 우체국까지 대설주의보가 발효된 한강로 거리를 쿨럭이며 걸었네 재개발지구 언저리 함부로 사생된 먼지처럼 풀풀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도시의 몸 구석구석에선 고질의 수포음이 새어나왔네 엑스선이 짙게 드리워진 마천루 사이 위태롭게 선 담벼락들은 저마다 붉은 객담을 쏟아내고 그 아래 무거운 날개를 들썩이던 익명의 새들은 남김없이 철거되었네 핏기 없는 몇그루 은행나무만이 간신히 버텨 서 있었네 지난 계절 채 여물지 못한 은행알들이 대진여관 냉골에 앉아 깔깔거리던 우리의 얼굴들이 보도블록 위로 황망히 으깨어져갔네 빈 거리를 머리에 이고 잠든 밤이면 자주 가위에 눌렸네 홀로 남겨진 애인이 흉만(胸滿)의 몸을 이끌고 남일당 망루에 올라 오 기어이 날개를 빼앗긴 한 마리 새처럼 찬 아스팔트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꿈이 머릿속을 낭자하게 물들였네 상복을 입은 먹구름떼가 순식간에 몰려들었네 깨진 유리창 너머 파편 같은 눈발이 점점이 가슴팍에 박혀왔네 한숨으로 피워낸 시간 앞에 제를 올리듯 길고 긴 편지를 썼으나 아무도 돌아올 줄 모르고 봄은 답장이 없었네 애인을, 잃어버린 애인만을 나는 사랑했네
시집을 읽고 오래 전에 끝부분을 저렇게 썼는데 정작 시인은... 그랬단다. (끄덕끄덕)
˝오독˝ ㅡ 작품은 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독자를 거치게 된다.ㅡ 그것이 어디로 증폭될지.... (더 격하게 끄덕끄덕)
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오독, ‘잘못 읽거나 틀리게 읽음‘. 사전적 의미를 놓고 보면 단지 읽는 입장의 실수나 과실에 초점을 맞춘 듯 하지만 사실 실수도 과실도 아니라는것을 안다. 독자라면 글을 읽는 순간 으레 ‘창조적으로‘ 오독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인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또한 나를 어렵게 만드는 대목 중 하나인데, 즉 오독을 이기는 문학이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얘기니까. 우리가 "사진"이 아니라 "음악이 수반된 감각막을 원하는 한 오독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니까. 이 같은 사실은 매혹이자 동시에 두려움이다. 나는 여태껏 이 오독이 문학을 굴리는 커다란힘 중 하나라고 믿어왔다. 특히 한 번에 여러 뜻을 지시하는 시의 함축적 성질을 시의 가장 매력적인 지점이라 역설해왔다. 시적 신비라는 것이 많은 부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도 생각해왔다. 하지만 오독이 수반될 수 밖에 없는 이런 과정은 때로 얼마나 위험한가. 쓰는 이와 읽는 이 모두에게 말이다. 문학이 바람직한 어떤 방향으로 오롯이 나아가, 그바람직한 방향이란 어느 쪽인지 정확히 알 수는 - P121
없으나, 누군가를 위로하고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축도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 반대에 가까운 듯하다. 카프카가 말한 "도끼날"이 "얼어붙은 호수를가르는" 것은 차치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누군가를 베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야 할 형국이다. 문학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으로 시시각각 증폭되어 누구든 무엇이든 상처 입힐 수 있다. 상처입히고 만다. 이것이 문학의 아픈 숙명이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도끼를 거머쥔 손은 어떤 것인가.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쓰기란, 그러므로가능한가? 나는 아직 답을 알지 못한다. 지금 내게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 쓰기란 그저 신기루에 가까운 듯 보인다. 아무리 애를 써도 쓰는 나는 언제든무너지고 또 무너뜨릴 수 있다. 진심은 전해지지않을뿐더러 너무 쉽게 훼손되고 붕괴되는 처지에놓여 있다. 다시 말하지만, 쓰기란 얼마나 위험천 - P122
만한가. 위태롭기 짝이 없는가. 그리고 그만큼 얼마나 막강한가. 쓰는 나는 얼마나 잔혹한가. 나날이 체감하고 있다. 지금은 간신히 이 정도만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 쓸 수 있을 뿐. 결국 모두 무너진다. 쓰는 이조차 그 붕괴를피할 수 없다. 붕괴하지 않는 쓰기란, 없다. 안 된일이지만 이토록 무서운 쓰기를 내가, 우리가 하고있다는 사실. 재건? 만약, 아주 만약 그런 게 가능하다면, 폐허 가장자리에서 내가 다시금 일어나 절룩이며한 삽 흙을 들어 올릴 수 있다면 먼저 이런 사실을 직시해야 하겠지. 쓰기의 무서움과 참혹함을. 그런 뒤에야 천천히 다시 무엇인가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P123
나는 늘 실패하지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있고, 또다시 실패하면서, 실패를 실패하면서, 나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지었고, 조금 더 견뎠고, 조금 더 썼고, 쓴 것들은 곧잘 지워져버리지만. 익숙한 자음과 모음, 철자들은 막무가내로 쏟아지고. 하는 수 없다는 듯 나는 또 쓰고, 쓰고, 쓰고. 금간 담벼락을 메우는 낙서들. 비뚤어진 글씨들. 때로 진심보다 더 진심인 어떤 것.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어제는 한 사람의 죽음에 대해 썼고 오늘 아침에는 그가 여전히 어딘가에 살아 있을 거라는 확신과 강고한 믿음에 대해썼는데,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쓰자마자 지워져버렸다. 읽기 전에 사라지는 이상한 편지. 이상한 시.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나를 안도하게 한다, 하는 진심은 차마 발설할 수 없는 것이다. - P125
몇 시간이고 몰두하다 일어서면 현기증이 인다. 유치한 잔상에 시달린다. 시선을 가져다 대는여기저기서 기다란 막대기가 마구 쏟아진다. 손을뻗는다. 아아, 나 중독인가봐! 저 사랑스러운 헛것들. 고치고 또 고친다. 어떤 문장은 단지 고치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참 다행이지? 이런 일이 세상에 있다는 게. 어딘가 기꺼이 몰두한다는 게. 시간은 군말 없이 흐르겠지. 우리는 바쁘게 늙겠지. 잊고 잊히겠지. 모든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럴 것이다. 테트리스가 좋다.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하자. 그러다 보면 내일 더 잘하겠지. 잘 짓겠지. 게임은 다시 시작된다. 여지없이 실패하겠지만, 그래도 하자. 테트리스를 하자. - P126
사다리를 타고
새로나세탁소와 정미부동산이 있는 삼층 건물옥상에 사람이 있다 안전모를 쓰고 토시를 낀 사람이 무언가를 뚝딱거리며 고치는 것을 응암정보도서관 일층 조그만 창으로 내다본다 시를 쓰며 본다
둘이었다가 하나였다가 다시 둘이었다가 사람이
기다란 선을 감았다가 풀었다가 사다리를 세웠다가 눕혔다가
망치를 번쩍 치켜든 오후, 해를 탕탕탕 두드리는 - P127
사람이 양손에 빵과 우유를 쥐고 잠시 난간에 걸터앉는 신발을 벗었다가 신었다가 벗었다가
먼 데를 올려다보면 하나같이 높은 곳 그 뒤로 조금 더 높은 곳
그을린 목을 한껏 젖힌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가까웠다가 죽어도, 죽어도 닿을 수 없을 듯 멀었다가
시를 쓰며 본다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 P128
가까웠다가 멀었다가 가까웠다가
창을 열면 기다렸다는 듯 문장은 바깥으로 도망쳐버리고 잽싸게 날아가버리고 돌아오지 않는다
녹슨 사다리를 타고
나는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땀에 전 수건 하나가 물탱크 옆에 걸려 백지처럼 펄럭일 때
하나였다가 둘이었다가 하나도 둘도 아니었다가 - P129
하늘은 천천히 책장을 덮는데 사람이 사라지지 않는다 끝나지 않는다
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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