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검사의 무죄 구형과 항소 포기로 신속한 1심 판결 확정. 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 2017년 9월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수사와 기소 등 검찰권을 오남용한 검사들, 무익한 즉시항고와 상소로 무죄 확정을 지연시킨 검사들에대한 문책 역시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일인데, 언론은 검찰의직권 재심 청구와 무죄 구형에 감읍하고 환호했습니다. 정의일까요? 최선입니까?
잘못을 저지른 간부들에 대한 감찰 요구와 공익신고, 고발,국가배상 소송 제기 등 검찰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전부 할 각오이고, 하고 있습니다. 칼럼 기고와 SNS,책 발간도 제 발버둥의 일환입니다. 검찰이 바로 서려면, 안과밖에서 함께 검찰을 바로 세워야 하지요.
검찰이 검찰다울 수 있도록 시민과 언론이 끊임없이 관심을기울여주시고, 검찰의 해명과 홍보 발언에 고개를 바로 끄덕이지 마시고 진의가 무엇인지,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권 행사에 대한요구와 비판을 잠시도 멈추지 말아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p138, 139


징계 소감

2013. 2. 14.


얼마 전 후배에게 전화 한받았습니다. 물기가 번진 목소리가 흔들린 건 제 처지가 안타까워서였겠지요. 검사직을 그렇게 쉽게 던질 수 있냐고 야속해하며, 저를 타박하더군요. 후배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제 마음을 몰라주는 후배가 야속하여한참 동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간 제일 많이 들었던, 그리고 들을 때마다 마음이 가장 아팠던 말은 ‘무죄 구형이 직을 걸 만큼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입니다. 검사의 무게가 쉬이 던질 수 있을 만큼 가벼워서가아니라, 구형이 그만큼 중요해서 부득이 직을 건 것입니다. 제가 직을 걸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구형의 무게를 동료들은너무 가볍게 보는 듯합니다. 안타까워하는 동료들의 마음을 헤아리면서도, 요 근래의 격랑에 많이 지친 제 가슴에 그 말들이멍울이 됩니다 - P75

하지만 ‘마치 검찰이 부당한 구형을 하고 과거사에 대한 입장도 잘못되었다는 취지로 해석할 수 있는 <징계 청원〉이라는글을 게시하여 외부에 전파되도록 하여 검찰 조직 내부의 혼란을 초래하고, 검찰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게 하는 등 검사로서의 체면이나 위신을 손상하는 행위를 했다‘고 명시된 검사징계위원회 결정서를 들여다보며, 구형 변경 협의 당시 제가느꼈던 그 현실의 장벽이 얼마나 철옹성인지를 다시 한번 처절하게 절감했습니다. 그럼에도 백지 구형은 결국 시정될 관행이라는 희망을 저는 절대 놓지 않습니다.
검사게시판에 게시한 글을 징계 사유로 한 것에 대하여, - P79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글 게시를 징계 사유로 삼는 것은 극히 위험합니다. 연못의 물을 말린 다음 물고기를 잡으면 결코잡지 못하는 일이 없지만 이듬해에 다시는 물고기가 없을 것이고, 숲을 불태워 사냥하면 짐승을 못 잡는 일이 없지만 다음 해에는 짐승을 보지 못할 것이란 말이 있습니다.
제 징계 사유를 풍부하게 하는 것이 저를 중징계하는 것에당장은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는 결국 검찰의 내부 소통을 막는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검사징계위원회에서제가 아니라 검찰을 위해 검사게시판 글 게시를 징계 사유로삼는 것만은 결단코 안 된다고 간곡히 말씀드렸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아니하여 답답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 P81

지난주 금요일, 제 징계를 취소하라는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막무가내 검사라는 등 언론 비난에 신문을 가려보시게 된 부모님께 바로 전화드리니 부모님의 목소리가 떨리시네요. 걱정말라고 큰소리쳤는데도, 많이 걱정하셨나 봅니다. 승소를 확신하기도 했고, 대법원까지 갈 것을 각오하고 있어 1심 판결 결과를담담하게 전화로 확인했습니다. 궁금해하는 분들이 많고 언론에 단편적으로 소개되어 오해하는 분들도 많은 듯하여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립니다. - P87

2013년 12월 11일 원고의 최종진술

법은 법이 필요 없는 가지고 쥔 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 - P88

신을 보호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보호 장치입니다.
권력은 끊임없이 관행이라는 미명으로 법조문을 잠재우고,
사문화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원과 검찰은 잠든법조문을 흔들어 깨워 사법 정의를 바로 세우고, 사회적 약자들의 인권을 옹호할 숭고한 의무를 부여받았습니다.
사법은 소리입니다. 법정에서 당사자의 잘못을 충고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뜻한 소리입니다. 그리하여 사법은개개인의 양심을 일깨우고, 이 시대와 우리 사회에 따뜻한 정의를 일깨워 사회적 약자들의 의지처가 되고, 희망이 되어야합니다. 그러한 막중한 사명을 법원과 나눠가진 검사에게 법률과 국민이 어떠한 자세를 요구하는지, 법원은 아름다운 합창을 위하여 검사에게 어떠한 하모니를 원하는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 P89

징계 취소소송 경과 2
2014. 11.6.


2014년 8월 28일 항소심 최종 의견

제 사건을 간단히 정리하면, 저는 무죄 사건을 무죄라고 논고하여 징계를 받은 것입니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무죄 구형이 아닌 상사의 직무 이전 지시위반으로 징계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그 지시는 무죄를 무죄라고 말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서 결국 무죄를 무죄라고 하여 징계한 것과 다를 바 없겠지요.
저는 대학과 사법연수원에서, 선배들에게서 ‘검사는 세상에서 가장 객관적인 국가기관이자 정의에 대한 국가 의지의상징‘이라고 배웠습니다. 검사는 국회의원처럼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고, 행정부 공무원처럼 국가이익을 위해 저울질하지 않는,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준사법기관입니다. 검사동일체의 원칙은 검사의 권한 행사 적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 P90

검사는 위법하거나 부당한 상사의 지시가 아니라, 법과 정의에 따라야 합니다. 법률적인 불법gesetzliches Unrecht에는 복종의무가 없습니다. 검사는 상사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충성해야 합니다. 검사는 검찰과 국가의 권력의지가 - P92

아니라, 국민과 국가의 정의에 대한 의지를 표시해야 합니다.
저는 배운 대로 검사의 본분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결과로 징계를 받아 이 자리에 선 현실이 참 서글픕니다. 준사법기관이자 단독 관청으로서 검사가 어떠한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바랍니다. - P93

오늘 제 징계 취소소송 항소심 선고가 있었습니다. 예상대로법무부 항소가 기각되었네요. 검사가 무엇인지를 두고 법무부와 다투는 비극적인 일이 없었다면 좋았겠지만, 사법 피해자가법무부에 따져 묻는 것이 아니라 검사가 법무부에 따져 묻는것이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검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만, 보잘것없는 제가 우리 검찰을 위해 무언가를 한 듯하여 뿌듯하네요.
대법원까지 가겠지만 기왕 가는 길 기쁘게 가겠습니다. 이또한 넘치는 축복일 테니까요. 저는, 우리는 권력이 아니라 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 P93

지난 몇 년 동안 간부들에게 사직을 종용받았고, 검사게시판글 게시 등을 이유로 징계 재회부 경고를 받기도 했습니다. 저와 친한 후배는 ‘임은정 부역자‘로 놀림받았고, 의정부지검 등지에서 저를 도와주거나 저에게 연락했던 검사들이 조직적으로 색출되는 소동을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국가배상 소송과 직권남용 고발을 결심하고 비망록을 작성하고 보이스펜을 구입하기까지 했지요. 저와 제 가족에게 참혹한 시간이었고, 우리 검찰에게도 참담한 시간이었습니다.
징계 취소소송을 제기하여 수년간 서류 공방전을 벌이며, 검사와 검찰에 대한 수뇌부의 황당한 인식과 억지를 엿보았습니다. 법무부는 검사가 무죄를 구형할 수 있는지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이에 대한 확립된 해석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형사소송법 교재, 사법연수원과 법무연수원 검사 교육 실무 교재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 P95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검찰권을 올바르게 행사하려다가 오히려 중징계를 받고, 쫓겨나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하며 수년간고통받은 저와 제 가족들 역시 직접적인 피해자입니다. 지휘권과 징계권, 인사권을 잘못 행사한 관계자들의 진솔한 사과를기대하는 것이 과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검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검사의 직을 거는 용기와 희생이 요구되는 불행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원회 권고처럼 이와 같은 비극이 재발되지 않도록 관계 부서에서 이 사건에 관여한 분들의 권한 오남용에 대한 조사와 그 결과에 상응하는 문책, 제도 개선을 검토하고 있을 겁니다. 이에 더해 관련자들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통해 제가 막무가내 검사, 부끄러운 검사 등으로 매도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고통받았던 제 가족들이 다소나마위로받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P97

잠든 사람은 깨울 수 있어도 잠든 척하는 사람은 깨울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검과 공안부에서 과거사 재심 사건 구형에 대하여 정식으로 검토하게 할 방안이 무엇인지 궁리를 거듭한 끝에 작성한 글이 <징계 청원>입니다. 날 징계하라고 몸을 던지면 징계하려고 달려들 테고, 그렇다면 백지 구형이 타당한지 여부를 정식으로 검토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소통이되지 않아 부득이 소통을 강제하려는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이런 검찰이 건강한 조직일까요?
얼마 전 대검에서 전국 일선 청에 세월호 참사 관계자인 유병언과 관련된 개인 의견을 이프로스에 올리지 말라고 업무 연락을 돌린 것으로 압니다. 위기에 처하여 널리 의견을 구한 사례는 숱하게 보았어도, 가만히 있으라고 하는 것은 세월호 사건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여기가 세월호입니까?
‘트리어 다다 - P111

2012년 12월 29일
어제 〈징계 청원>을 검사게시판에 11시에 올라가도록 예약게시하고, 법정 공판검사 출입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후 무죄구형을 했다. 후환을 예상하고 오후 반차를 미리 결재받아 놓고 재판을 끝낸 후 계속 법원을 배회하다 점심 무렵 휴대전화를 끈 채 서울 시내 인파 속으로 숨어들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지만, 그래도 겁이 나 뭘 먹어도체하고,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아침에도 그냥 눈이 번쩍 뜨인다. 겁이 나지만 어제로 시계를 돌린다고 하여 다르게 행동할게 아닌데 견뎌내야지. 겁이 나지만, 오늘 하루도 축복임을믿는다. 역사는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쓰인다. 당장 바뀌지는 않더라도 결국 바뀔 터. 내 의지가 그 시기를 앞당기리라고 믿는다. 난 검찰이 역사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인데, 왜 이렇게 비장해져야 하는가. - P133

과거사 재심 사건에서 검사의 무죄 구형과 항소 포기로 신속한 1심 판결 확정. 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 2017년 9월에야 비로소 이루어졌습니다. 수사와 기소 등 검찰권을 오남용한 검사들, 무익한 즉시항고와 상소로 무죄 확정을 지연시킨 검사들에대한 문책 역시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일인데, 언론은 검찰의직권 재심 청구와 무죄 구형에 감읍하고 환호했습니다. 정의일까요? 최선입니까?
잘못을 저지른 간부들에 대한 감찰 요구와 공익신고, 고발,
국가배상 소송 제기 등 검찰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제가 할 수 있 - P138

는 일은 전부 할 각오이고, 하고 있습니다. 칼럼 기고와 SNS,
책 발간도 제 발버둥의 일환입니다. 검찰이 바로 서려면, 안과밖에서 함께 검찰을 바로 세워야 하지요.
검찰이 검찰다울 수 있도록 시민과 언론이 끊임없이 관심을기울여주시고, 검찰의 해명과 홍보 발언에 고개를 바로 끄덕이지 마시고 진의가 무엇인지,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지를 숙고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법과 원칙에 따른 검찰권 행사에 대한요구와 비판을 잠시도 멈추지 말아 주시기를 더욱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 P139

갑자기 입안으로 들어오는 물컹한 혀에 술이 확 깼지만, 어찌할 바를 몰라 "부장님, 살펴 가십시오"라며 아무 일 없는 척인사를 하고 돌아서 복도식 아파트를 걸어 관사로 돌아오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을 정리하느라 뒤따라오는 걸음소리도 못 들었지요.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제 등을 확떠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순간적으로 주저앉아 문이 닫히지않게 문턱에 발을 걸고 한 손으로 문 모서리를 잡았는데, 안으로 들어간 부장이 제 오른손을 힘껏 잡아당겼습니다. "임 검사,
괜찮아. 들어와." 비명을 지를 수 없었습니다. 복도식 아파트가운데 있는 집이었고, 경주지청 관사인 것이 널리 알려져 있었거든요.
밖에 알려지면 검찰이 망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습니다. 비명을 지르겠다고 위협하고 실랑이 끝에 겨우 내보냈는데, 복도서쪽으로 가는 걸 보고 잽싸게 일어나 문을 잠그자, 되돌아와 초인종을 계속눌렀습니다. 그 소리가 아직 생생합니다. - P141

수석 검사를 통해 부장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했는데, 확답없이 휴가를 가버렸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그 직전 근무지인인천에서 같이 근무했던 선배에게 상의 전화를 드렸습니다. 저보고 "그냥 네가 사표 써라. 알려지면, 너만 손해다. 여기 와서변호사 개업해라. 밀어주겠다"고 했습니다. 결국 지청장을 찾아가 "주거침입강간미수 고소도 불사하겠다. 사표를 받아 달라"고 단도직입적으로 통보하여 겨우 사표를 받았습니다. 오른손등에 생긴 동전 크기 만한 멍이 한동안 지워지지 않더군요. 그리고 제 마음의 멍은 아마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겁니다. - P142

〈PD수첩: 검사와 스폰서>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부산지검에서 있었던 일을 취재한 방송입니다. 저는 2005년 고향인부산으로 발령이 났기에, 그런 질펀한 밤 문화가 아직 횡행하던 때 부산지검에서 근무했지요. B부장은 점심시간에도 자신의 섹스 능력을 자랑했습니다. 6시간씩 섹스를 한다거나, 절정의 그 순간이 오래 가려면 마지막 순간에 숨을 끊어야 한다거나, 평소 복식호흡이 중요하다며 복식호흡을 따라 하라고 한다거나. 정신이 혼미해지는 와중에 좋게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처녀, 총각도 있는데 듣기 그렇습니다." 그러자 처녀, 총각에게더 중요하다며 그래도 복식호흡을 따라 하라고 했습니다.
막 개업한 전관 변호사가 스폰서로 붙은 어느 저녁은 정말 - P142

질펀했습니다. 청사포 횟집에서 예의 정력 자랑을 하고, 일부검사가 감탄으로 추임새를 넣는 걸 지켜보며 구석에서 얼음이되어 있었지요. 2차를 따라가지 않으려는 저에게 선배들은 "경력 검사가 회식 중 도망가면 어떻게 하느냐? 힘든 거 아는데,
설마 더 심해지겠느냐?"면서 굳이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해운대 오션타워 지하 유흥 주점에서 분노로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요. 그런 저에게 모 선배가 귓속말을 했습니다. "부장님 잘 모셔. 훌륭한 분이야." 저는 그 선배 얼굴에 침을 뱉어 주고 싶은걸 겨우 참았습니다. 그리고 스폰서는 B부장을 포함한 검사들의 화대를 계산했고, 성매매 전담이었던 B 부장 등은 결국 성매매를 갔습니다. - P143

다음 날 오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 모 선배에게 ‘그 자리에 당신의 아내와 딸이 있었다면 그런 소리를 했겠느냐? 만약 당신이 그런 사람이라면 당신은 인간이 아니므로 선배라 부를 수 없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사람이라면, 당신은 남편과아버지의 자격이 있을지언정 선배의 자격이 없으므로 당신을선배라 부를 수 없으니 향후 호칭상의 결례를 양해하라‘는 메일을 보냈습니다. 부산지방검찰청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모 부부장을 찾아가 전날 밤 일을 이야기하며 "부장이 성매매 피의자로 보여 결재를 받지 못하겠으니 부서를 바꿔 달라"고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 P144

덧붙임 1: 박은정 선배님, 연찬회가 있고 일주일 뒤 광주로전화를 주셔서 자기 일처럼 분노해 주신 것, 그 마음이 정말 고마웠어요. 저는 그때 하늘 같은 선배들한테 말하면, 뭔가 다 해결해 주실 줄 알았다가 이내 실망했지만, 선배님의 그 마음만은 절대 잊지 못합니다.
덧붙임 2: 조희진 단장님. 그때 무언가 조치해 주셨다면 - P145

2010년 서지현 검사의 불행한 피해가 없었거나, 최소한 피해가있었다고 하더라도 즉시 적절한 조치가 취해졌을 수 있었을 텐데 많이 아쉽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조 단장님의 조사단장 자격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입니다. 직장 내 성폭력이 왜지금껏 덮였는지에 대해, 조 단장님도 조사받아야 할 객체니까요. - P146

그렇게 가지가 부러지고, 도끼질을 당하는 것도 고통스러웠지만, 목이 타서 죽을 거 같았습니다. ‘이대로 말라죽을 순 없어, 수맥이 닿을 때까지 뿌리를 깊이, 더욱 깊이 내리자. 언젠가 수맥에 닿아 땅 위로 확 뻗어 나갈 수 있는 그때가 오면, 많은 후배가 내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쉴 수 있을 테고, 하늘로 뻗어 올린 내 나뭇가지가 이 부조리한 현실을 뛰어넘을 사다리가되어줄 거다‘ 그런 희망으로 저는 버텼습니다. 여자 선배들을포함한 간부들이 덮기에 급급했던 검찰 조직 내 성폭력 문제를공개해 버린 서 검사의 결단, 상부의 위법한 압력을 폭로한 안미현 검사의 용기 등 일련의 일들을 바라보며, 견뎌낸 보람을이제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 P148

거듭 말씀드리지만, 서 검사가 입은 피해는 안태근 등 몇몇 검사의 개인적 일탈이 아닌, 검찰의 조직적 일탈로 인한 것입니다. 진상 조사와 제도 개혁은 서 검사를 비롯한 여성 검사들의성폭력 피해에 국한할 것이 아닙니다. 검찰 간부들이 업무적,
업무 외적 일탈에 왜 거침이 없었는지, 감찰 등 브레이크 장치는 왜 작동하지 않았는지, 검사들은 왜 침묵하고 방관했는지등을 전체적인 틀에서 진단하여 검찰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조직 전부에 퍼진 암의 극히 일부만 떼어내고 암을 완치했다고
주장하시겠습니까? - P150

불이익이 두려워 말도 안 되는 일들에 침묵하고 또 침묵하다가 더는 참을 수 없을 때, ‘꽃뱀 여검사‘에서 ‘막무가내 검사‘로거듭났습니다. 꽃뱀 여검사가 처음엔 트라우마였지만, 지금은
‘난 검찰계의 꽃뱀 구미호다. 목숨 9개 중 8개를 검찰에서 쓰고나가겠다. 아직 몇 개 남았다‘고 농담할 만큼 어느 정도 극복했고, 참지 못하고 일어서는 후배들에게 조언하고 곁에 서서 우산이 되어줄 정도의 생존 기술과 맷집이 생겼습니다.
제가 검찰 내부에서 겪은 일은 여러 선후배에게 수시로 이야기해 왔기에 검찰에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부산지검 스폰서 B 부장 등도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하소연하는 척 제 험담을 많이 하고 다녔었고, 간부인 그의 동료들이 부서원들에게 전달하니 전파 속도가 정말 빨랐지요. 저 역시 스폰서 성매매 이야기를 전파하는 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야이미 접하거나 앞으로 곧 접할 꽃뱀 헛소문으로 인한 오해를풀 수 있고, 검찰 내 성희롱·성폭력 실태에 대한 경각심도 끌어올릴 수 있어 일거양득입니다. - P153

검찰은 정의의 대변자이자 법 집행자인데, 정작 내부에서의정의 실현은 참으로 요원합니다. 서 검사의 미투가 사회 흐름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되었지만, 사건 발생지인 검찰 내에서는서울남부지검 김형렬 전 부장, 진동균 전 검사 등 몇몇 성폭력사범의 처벌을 뒤늦게 이끌어 내는 데 그쳤습니다.
의정부지검 시절, 모 검사장이 저를 불러 ‘검찰이 얼마나 깨끗해졌는데, 도대체 왜 이러느냐?‘고 꾸짖었습니다. 그 검사장처럼 적지 않은 간부들은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며 검찰이 깨끗해졌다고 뿌듯해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현재의 검찰이 국민의 기대와 요구에 얼마나 부응하고 있는가를 평가하고 비판하지요. 기준 잣대가 달라 평가가 다르고, 그로 인해 말과 생각이 서로 부딪치게 됩니다. - P155

지금은 속이 상하고 울분이 폭발하는 동료에게 제 말이 가닿지는 않겠지만, 언젠가는 알아주었으면 좋겠네요. 검찰청법 개정안, 형사소송법 개정안에 관심을 두고 목소리를 높이는 분들이 검찰의 잘못을 바로잡는데도 목소리를 높였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싶어 서글픕니다. 검찰을 고치지 않으면 파고는 계속 밀려올 것입니다. 검찰의 잘못을 바로잡는데도 목소리를 높여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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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은정

1974년 7월 14일 부산에서 나고 자랐다.
등록기준지는 경북 영일군(현 포항시)이다.
1998년 사법시험 40회에 합격했고,
1999년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2001년 인천지검 검사로 임관한 후 경주지청,
부산지검, 광주지검, 법무부(법무심의관실),
서울중앙지검, 창원지검, 의정부지검, 서울북부지검,
충주지청, 울산지검, 대검, 법무부(감찰담당관실)를거쳐 현재 대구지검에서 근무하고 있다.



검사 임은정님을 좋아한다.
존경한다.
응원한다.
부디 [ 계속 가보]시기를.
부디, 검찰이 바뀌어가기를.
부. 디.



프롤로그
함께 꾸는 꿈의 힘을 믿습니다

자식들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준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을 잘 알기에, 차마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부모님이 저에게바라시는 꿈을 저도 꾸었습니다. 마침 부모님과 함께 꾼 꿈이제 적성에 맞아 후회 없이 21년째 검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사춘기 때 외모와 가난에 대한 열등감으로 좌충우돌 방황하기도 했지만, 대개 부모님과 선생님께 칭찬받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사법시험도 그리 늦지 않게 합격하여 20대에 ‘영감님‘ 소리를 들으며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 P13

결과를 보고할 날이 언젠가 오겠지만, 저와 이 책을 읽는 모든분에게 ‘일취월장은 못 해도 그날까지 한결같겠노라‘는 다짐을담고, 흐뭇한 결과를 담은 결과 보고서를 빠른 시일 내에 썼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꾹꾹 눌러 담습니다. 내부 고발자로서 지난 10년간의 주저함과 흔들림, 선택과 결단을 돌이켜 보니, 아쉬운 순간들에 대한 후회와 반성이 쌓여 산이 되고, 벅찬 순간들에 대한 보람과 감사가 넘쳐 바다가 됩니다. 후회와 반성을나침반으로 삼고, 보람과 감사를 동력으로 삼아 새로이 출발선에 선 듯 더욱 씩씩하게 가겠습니다. - P16

환자가 제대로 치료받으려면 의사에게 자신의 상태를 사실대로 말해야 합니다. 검찰 내부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을 가리던 암막 커튼을 걷어내고 치부가 드러나야 무엇이 문제인지를정확히 판단할 수 있고, 진단이 정확해야 처방전도 효과가 있겠지요. 검찰을 속속들이 다 안다고 감히 말할 수 없겠지만, 검찰에서 나름 인정받던 검사가 흔들리고 방황하다 결국 내부 고발자로 거듭나 차이고 밟히며 겪은 검찰과 검사들의 모습을 여기에 담습니다. - P23

2007년 3월 12일
오늘 내가 특히 예민해하는 성폭력 사건 재판이 있었다. 6시간에 걸친 증인신문, 이례적으로 법정은 고요하다. 법정을 가득 채운 농아자들은 수화로 이 세상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는다.
그 분노에, 그 절망에 터럭 하나하나가 올올이 곤두선 느낌. 어렸을 적부터 지속되어온 짓밟힘에 익숙해져 버린 아이들도 있고, 끓어오르는 분노에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눈물을 말리며 그 손짓을, 그 몸짓을, 그 아우성을 본다. 변호사들이 증인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는데 내가 막을수가 없다. 그들은 그들의 본분을 다하는 것일 텐데, 어찌 막을 수가 있을까. 피해자들 대신 세상을 향해 울부짖어 주는것. 이들 대신 싸워주는 것. 그리하여 이들에게 이 세상은 살아볼 만한 곳이라는 희망을 주는 것. 변호사들이 피고인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나 역시 내가 해야 할 일 - P25

을 당연히 해야겠지.
해야만 할 일이다.

2009년 9월 20일
《도가니》. 베스트셀러란 말을 익히 들었지만, 읽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가 잘 아는 아이들의 이야기인 걸 알기에. 어제친구들을 기다리며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결국 구입하고, 빨려들 듯 읽어버렸다. 가명이라 해서 어찌 모를까. 아, 그 아이구나, 그 아이구나……… 신음하며 책장을 넘긴다.
객관성을 잃지 않으려면 한발 물러서서 사건을 바라보아야 하지만, 더러는 피해자에게 감정 이입이 돼버려 눈물을 말려야 할 때가 있다. 그 사건 역시 그러했고. 1심에서 실형이선고되었지만, 2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로 피고인들이 풀려났다는 뉴스를 들었다. 2심에서 어떠한 양형 요소가 추가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현실적으로 성폭력에 관대한 선고 형량을잘 아는 나로서는 분노하는 피해자들처럼 황당해하지 않지만, 치가 떨린다. 나 역시. - P26

2007년 외압이나 내압이 없었던 광주 인화원 성폭력 사건재판에서 정의를 외치는 것은 수뇌부가 격려하고 장려하는 일이라 전혀 어렵지 않았습니다. 외압과 내압, 불이익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외치는 것이 검사의 의무지요. ‘도가니 검사‘라는버거운 별명에 다소 걸맞은 검사가 이제 되었구나 싶어 고통스러운 와중에 뿌듯했습니다. 피해 아이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조금 갚았습니다. 평생 갚아 나가겠습니다. - P30

언제부턴가 신문을 도배하는 검찰 뉴스를 읽다 보면 그리스 신화의 카산드라를 떠올리게 됩니다. 예언의 신인 아폴론에게 예언 능력을 선물받았지만, 사랑을 거절하여 불신을 덤으로 받았지요. 아무리 진실을 예언해도 그 말을 아무도 믿지 않았던 가여운 카산드라가 우리인 듯싶어 마음이 아파옵니다.
휴일 없이 매일 출근하여 기록을 끌어안고 고민한 세월을 억울해하는 마음이 고개 들곤 합니다. 그러나 오해를 살만한 일들이 그간 적지 않았고, 얼굴을 차마 들지 못할 각종 부끄러운일들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그런 동료들의 위태로운행동을 알면서 혹은 동료로서 알아야 함에도 알지 못하여 말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씨줄과 날줄로 엮여 검사라는, 검찰이라는 조직을 이루는 이상 검사동일체의 원칙이 어디 검찰 내적으로만 적용되겠습니까? - P31

바람에는 13등급이 있다고 합니다. 0인 고요에서부터 12인싹쓸바람까지. 바람이 불지 않는 고요에서부터 바람은 비로소시작됩니다. 참으로 서글프지만, 더 잃을 것이 없는 듯한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하늘을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우리역시 막중한 책임과 의무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만큼의 요구와 비난이 있는 것이겠지요. 지칠 때도 많지만 그 고단함 만큼의, 고단함 이상의 보람에 감사할 때 역시 적지 않습니다. - P33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고민이 계속 깊어졌고, 검찰을 바꾸기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지요. 어떻게 할 것인가.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어 죽어있는 검사게시판을 되살려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료의 말문이 트이면 생각이 살아나고, 생각이 살아나면 행동이 따를 테니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삭제하지 않고 바람이 일 때까지 계속 바람을 일으키기로 작심하고, 검사게시판에 올린 첫 글입니다. 첫걸음이다 보니 주저되고 겁이 나 두리뭉실 말을 돌리고, 따뜻하고 온정적으로 썼지요. 그래서 이때는 간부들에게 불려가지 않았습니다. - P35

이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결과적으로 두 달 뒤 과거사 반성 논고로 간부들에게 불려가 봉변을당할 때 방어용으로 유용하게 활용했지요. 2012년 상반기에 저는 타진요 사건이나 조폭 양은이파 사건 등 실형을 이끌어 낸중요 사건 논고문을 이프로스에 올렸고, 법무부와 대검에 선고결과를 보고할 때도 첨부했습니다. 간부들은 칭찬과 격려만 했을 뿐, 논고문을 사전에 보고해 달라고 요구한 적이 단 한 번도없었습니다. 재판 심리를 마무리 짓는 결심일, 검사는 자백여부, 피해자와의 합의, 피해회복 정도 등 당일 법정에서 확인한 정보까지 모두 종합하여 최종적인 의견을 밝혀야 합니다.
따라서 상급자들은 현실적으로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논고에일일이 관여할 수도 없습니다. - P43

오늘 오전 1974년 유신헌법 반대 투쟁을 주도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배후로 몰려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옥고값苦를 치렀던 박형규 목사의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등 과거사 재심 사건 재판이 있었습니다. 당시 법의 이름으로 그분 가슴에날인했던 주홍글씨를 이제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우는 역사적인 순간, 저에게 중요한 배역이 주어진 것에 흥분하여 며칠 동안 많이 떨리고 설렜습니다. 무죄를 구형하고 법정을 나서며그 시절 검사와 판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자는 지금의 잣대로 그 시절을 재단하는 것이 타당하냐고 반론할 수 있겠지만, 역사로 정리된 사건에 대해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평가하는 것은 후세의 몫이 아니겠습니까? - P45

너무 지쳐 쉬고 싶을 때마다, 최선을 다했지만 당사자들에게오해를 사 속이 상할 때마다 저는 ‘나는 대한민국 검사다!‘라는말을 곱씹으며 다시 털고 일어서곤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재판을 끝내고 서울중앙지검으로 돌아오며 다시 한번 벅찬 마음으로 다짐합니다.
저는 권력이 아니라 법을 수호하는 대한민국 검사입니다. - P47

이 땅을 뜨겁게 사랑하여 권력의 채찍에 맞아가며 시대의 어둠을 헤치고 걸어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몸을 불살라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고 묵묵히 가시밭길을 걸어 새벽을 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으로 민주주의의 아침이 밝아, 그 시절 법의 이름으로 그분들의 가슴에날인했던 주홍글씨를 뒤늦게나마 다시 법의 이름으로 지울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모진 비바람 속에서 온몸으로 민주주의의 싹을 지켜낸 우리 시대의 거인에게서 그 어두웠던 시대의 상흔을 씻어내며 역사의 한 장을 함께넘기고 있습니다.
피고인이 위반한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와 제4호는 헌법에위반되어 무효인 법령이므로 무죄이고, 내란선동죄는 관련사건들에서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관련 증거를 믿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피고인이 정권교체를 넘어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한 폭동을 선동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 피고인에게 무죄를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 P48

마침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인혁당 2개의 판결‘ 발언과 검찰의 과거사 반성이 대비되면서, 판결문에 실린 제 논고문 일부가 언론 보도를 통해 외부까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언론에서 검찰의 과거사 반성을 호평하던 그때, 저는 밤낮으로 불려 다녔지요.
후배들이 저처럼 마음고생하지 않도록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소위 공안통들 역시 저에게 이를 갈았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2012년 12월 윤길중의 과거사 재심사건 격돌 전, 그렇게 전초전을 치르며 서로의 결심은 단단해지고 있었습니다. - P51

 과유불급이라는데 고쳐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제가 느끼고 깨달은 법의 정신은 36.5도의 체온이담긴 인간에 대한 신뢰와 연민입니다. 공판검사에게는 피해자의 고통과 절망, 우리 사회의 분노와 자책, 피고인에 대한 연민과 충고 등을 모두를 대신하여 법정에서 말할 의무가 있지요.
판사, 피고인은 물론 방청하는 피해자와 그 가족들, 더러는 법정을 떠돌고 있을 가여운 영혼에게 설명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제 진심을 논고문에 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2007년 광주지검 근무 시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울면서작성하고, 법정에서 눈물을 참느라 애를 먹었던 아동 상해치사사건 논고문을 소개해 드립니다. - P53

한 아이를 생각합니다. 아빠에게 맞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만을 가진 채 세상을 향해 날갯짓 한 번 못 해보고, 엄마에게 외면당한 채 아빠라고 불렀던 자에게 얻어맞아 방에 갇혀죽어간 한 아이를 생각합니다.
어린아이가 영문도 모른 채 아빠에게 구타를 당하며 얼마나 처절한 공포에 떨었을지, 장이 파열되어 죽어가면서, 체했을 거라며 등을 토닥이며 돌아서는 엄마의 뒷모습에 얼마나절망했을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햇살 한 조각 들지않는 방에서,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는 세상을 향해 처절한비명을 지르며 그렇게 아이는 죽어갔습니다. - P53

또 다른 아이를 생각합니다. 아빠에게 맞아 신음하며 죽어간 오빠 옆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을 한여자아이를 생각합니다. 그 여자아이가 죽어가는 오빠를 지켜보며 얼마나 무서웠을지, 집에 돌아오지 않는 엄마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누구 하나 와주지 않는 세상이 얼마나 원망스러웠을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여자아이에게 세상은오빠의 시신처럼 가혹하리만큼 차가웠을 것입니다.
‘피고인들의 범행으로 6살 어린아이는 생명을 잃어버렸고,
4살 어린아이는 평생 지울 수 없는 가혹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습니다. 피고인들에게 어떠한 처벌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늘나라로 간 아이는 살아 돌아오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에게악몽 같은 그 시간의 기억은 지워지지 않을 것입니다만, 뒤늦게라도 피고인들에게 그 행위에 상응하는 책임을 묻는 것이우리의 맡은 바 소임이라 할 것입니다.
본 검사의 논고가, 재판장님의 판결이 피고인들에 대한 준엄한 질책이고, 쓸쓸히 하늘나라로 간 피해 어린이에게 바치는 제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본 검사는・・・・・・. - P54

광주지검 근무 이후 검사 생활을 몇 년 더 하다가 논고문을다시 보니, 그간 제 논고에 피고인에 대한 연민이 너무 부족했던 게 아닌가 반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강력 사건 피고인에 대한 연민을 논고에 담아낼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 없네요. 여하튼 논고문에 피해자와 피고인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모두 담아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만, 늘 아쉽고 아쉽습니다.
공판검사의 권한 내에서 의무를 이행한다는 마음으로 작성한 박형규 목사의 대통령긴급조치위반 등 과거사 재심 사건 논고문에 세상이 들썩이는 걸 보니 당황스럽습니다. 제 논고가너무 튀는 스타일인가? 고쳐야 하나? 다시 돌아보고 있습니다. 민망합니다만, 많은 동료와 생각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싶어 예전 논고문까지 끄집어내어 선후배 앞에 늘어놓습니다. - P55

"그들은 빨갱이였네", "자네는 모든 검찰 선배를 권력의 주구로 몰았어!" 등 도저히 수긍하는 체 연기조차 할 수 없는, 과거사 반성을 칭찬하는 검찰 밖 사람들이 결코 들어서는 안 될말들이 거침없이 쏟아지더군요. 견디다 못해 검사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저는 원래부터 논고 열심히 했습니다. 논고의의미와 중요성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제 생각이 틀렸나요?‘
과거사 반성 논고로 인해 빨갱이 검사라며 제사상을 의심하고,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걱정하고, 총선 출마 등 의도를 확신하는 뒷말들이 검찰 내외에 들끓었습니다. 하지만 대학과 사법연수원, 법무연수원에서 배운 대로 한 것이기에, 제 글에 대한 공개적인 반론은 전혀 없었습니다. 검사의 언행과 결정의무게, 그 파급력을 안다면 생각 없이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없지요. 책임은 위가 아니라 검사가 지는 거니까. 짊어진 하늘을 버거워했던 아틀라스처럼 모든 검사가 검사의 권한과 책임의 무게를 버거워했으면 좋겠습니다.  - P56

중고등학교 때 아버지의 배달 자전거로 등하교했습니다. 사춘기 시절 가난을 들키는 게 너무 창피하면서도, 지각을 피하려고 아침마다 자전거 뒤에 올라탔지요. 나날이 불어나는 딸과책가방 무게로 언덕길에서 아버지가 숨차하는 소리를 바람결에 들으면서도, 아침 단잠이 아쉬워 늦잠을 자다 매번 신세를지곤 했습니다. 사춘기 갈등이 최고조로 달아오르던 고등학교2학년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와 크게 다투고 며칠 말 한마디섞지 않고 걸어서 등하교하던 어느 아침, 아버지가 뒤쫓아와제 이름은 차마 부르지 못하고 언니 이름을 부르며 타라고 했을 때, 못 이기는 체 자전거 뒤에 올라탔습니다. 익숙한 아버지의 숨소리를 다시 바람결에 들으며 눈물이 왈칵 쏟아지더군요.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를 제 사춘기가 이제 끝났다는 걸 그때깨달았습니다. - P58

마음을 다잡습니다.
2008년 봄 무렵 제 앞에서 고단한 인생을 한탄하며 이제 손을 씻겠다고 말씀하시던 그분의 회한과 간절함을 아직 기억합니다. 그분은 자신이 내민 손을 제가 뿌리치지 않은 것이 고마워, 일거리 없는 추운 겨울 굶주림과 사투를 벌이며 정직하게하루하루를 견뎌내고 계시지요.
제가 이성을 잃은 한 달 동안 저를 통해 새 출발을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그분‘이 저의 외면에 낙담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아차 싶습니다. 저에게 몹시도 따뜻했던 윤 모 선배 등에게 모진 말을 쏟아낸 것도 죄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미 쏟아낸 것이라 주워 담지는 못하지만, 상처받은 분들에게깊이 사과드립니다. - P60

1. 징계 대상자: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 임은정
2. 처분 일자: 2013년 2월 15일
3. 징계 종류: 정직 4개월
4. 징계 사유: 2012년 12월 28일 다른 검사에게 재배당된 공판사건에 무단으로 관여하여 지시 위반 등 - P65

공안부 주장처럼 ‘동일한 행위와 증거를 놓고 지금의 기준으로 과거 법원의 판단을 재단하는 것이 옳은지는 의견이 갈릴수 있음‘을 이유로 사실상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 ‘법과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요? 의문을 계속 제기했지만 상급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저는 해당 사건에서 배제되었습니다. 하지만 ‘법과 원칙에 따라 선고해 달라‘는 소위 백지 구형이 피고인의 죄에 상응하는 구형을해야 할,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의 구형인지 아직도 납득할 수없습니다. - P67

해당 재심 사건의 무죄 구형은 재량권 행사가 아니라 의무라고 확신하기에, 저는 지금 무죄 구형을 위해 법정으로 갑니다.
절차 위반과 월권의 잘못을 통감하기에 어떠한 징계든 감수하겠습니다. 하지만 공범들에 대하여 이미 무죄가 확정되었고,
공안부 역시도 무죄 선고가 확실시된다고 예상하는 사안입니다. 제 소신이 근거 없는 고집이 아니라는 변명을 사족으로 덧붙입니다.
제가 중징계를 받아 검사의 직분을 내려놓게 되더라도, 이로써 과거사에 대한 검찰의 입장이 전향적으로 재검토되는 전기가 마련된다면, 하여 검찰이 재심 사건을 포함한 모든 사건에서 일관되게 죄에 상응하는 구형을 하게 된다면 검사로서 제가할 도리를 다한 것이어서 여한이 없습니다. - P68

항으일요일 주일 예배에서 사도신경을 암송하며 고민했습니다.
‘무죄를 무죄라고 하지 않는, 검사들을 앵무새 취급하는 검찰을 내버려 둔다면, 내가 예수를 십자가를 못 박은 본디오 빌라도 Pontius Pilatus와 무엇이 다른가? 내가 이의 제기를 했으니 할 만큼 했노라고 손을 씻고 물러선다고 하여 책임을 피할 수 있나?
본디오 빌라도가 되어 검찰이 과거사 피해자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걸 내버려 두느니, 내가 검사의 십자가를 감당하자‘
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 P71

 그간 저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고 부족한 저에게마음을 열어준 소중한 가족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개별로전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마음의 준비 없이 급히 사직하게 되어 부득이 고마웠다는 말씀을 게시판으로 우선 전합니다.
제 능력 부족으로 상급자를 설득하는 데 실패했지만, 해당재심 사건의 무죄 구형은 검찰의 마땅한 의무라고 확신하기에, 저는 지금 무죄 구형을 하기 위해 법정으로 갑니다. 절차위반과 월권의 잘못을 통감하기에 사직서를 제출합니다만,
공범들에 대하여 이미 무죄가 확정되었고, 공안부 역시도 무죄 선고가 확실시된다고 예상하는 사안이어서 제 소신이 근거 없는 고집이 아니라는 변명을 사족으로 덧붙입니다.
저의 사직이 과거사에 대한 종래 입장의 전향적인 재검토를 이끌어 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사랑합니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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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으로 향하는 하나의 도로를 찍은 두 사진보다 자코우스키가 묘사한 - "사회적 대의를 위해 공헌하던" 다큐멘터리 사진의 "개인적 목적으로" - 변화가 더 선명하게 표현된경우는 상상하기 힘들다. - P277

구름을 설명하려면
정말 빨라야 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다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니까.

비스와바 쉼브르스카 - P288

1850년대 초반에는 하늘도 없고 구름도 없었다. 그저 희끄무례하기만 했다. 적어도 그 당시 사진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땅과 하늘을 찍는 데 필요한 노출 시간의 차이를 측정하는 게문제였다. 땅의 더 어두운 부분에 노출을 맞추면 하늘은 노출 과다가 되어 균일하게 아무 형태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1850년대 후반 귀스타브 르 그레이는 두 개의 원본 필름을 합쳐 사실상 존재한 적이 없는 바다, 또는 땅과 하늘의 환상적인 조합을 보여 주는 사진을 만들어서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고안해 냈다. 이 기술이 1800년대 말까지 널리 퍼지자 사람들은 합성된 풍경에 대해 "잔잔한 물 위에 낮게 뜬 구름이 물에도 비치지 않고 그림자도 드리우지 않는다."며 불평했다.  - P289

대해장면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 담긴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던 브란트는 두 개의 원본 필름으로 콜라주를 만들었다. 호크니에게 이와 같이 의도된 속임수는 "스탈린주의 사진"의 형태로까지 느껴졌다. 반면에 브란트의 전기 작가인 폴 딜레이니는 사진가도
"아마 알고 있었을" 워즈워스와 연관지으며 이 작업을 정당화했다.

아! 그때, 내 손이 그때 내가 본 것을 표현할 수 있는
화가의 손이었다면, 그래서 어슴푸레한 빛, - P289

바다나 땅 위에 결코 없었던 빛
그 신성한 변화 그리고 시인의 꿈을 더할 수 있었다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리려던 워즈워스의 꿈은 폴 스트랜드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는 회화에서조차도 이런식으로 작업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땅과 전혀 연결되지 않는 하늘을 담은 예술 작품이 너무나 많다. 피사로와 같은 인상주의자들이 그런 실수를 했다."라고 주장했다. 스트랜드는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고 엄격한 선별작업을 거쳐 계획을 세우는 원칙을 고수했다. 그가 미국 남서부 지방의 특징에 잘 맞는다고 여긴, 폭풍을 동반한 낮게 드리운 구름은 그 지역을 찍은 여러 사진에 등장한다.  - P290

 다음 해 7월 그는다시 한번 구름의 유혹에 빠졌다. "순간적인 표정을 기록하거나 어떤 인간의 병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 다음으로 구름의형태를 포착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있을까!" 구름을 포착하기 위한 기술적 도전은 빛과 형태의 조형적인 특성에 대한웨스턴의 관심과 일치했다. 그런 면에서 그의 구름 사진은 후에 과일과 채소를 대상으로 한 탐구를, 하늘에 있는 것으로선행한 작업과 같았다. 멕시코의 하늘을 찍은 그의 사진 중가장 유명한 사진에서 수평선을 따라 길게 뻗은 구름은 그가 일년 뒤인 1925년 촬영한 누드 사진 속 여인의 상체와 엉덩이처럼 사진 프레임을 가득 채우고 있다. 구름을 찍는 것과사람의 몸을 찍는 것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었다. - P291

에번스의 작업에서 하늘은 거의 부수적인 것이다. 하늘은 그저 우연히거기에 있을 뿐이다. 비록 빛 바랜 광고판이랄지 손으로 쓴 표지판 같은흔적으로만 보일지라도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인간의 행위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완전히 이례적인 동시에 완벽하게 에번스적인 한 사진이특별히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1947년 샌타모니카에서 찍은 이 사진은호텔 건물의 윗부분과-윈더미어 호텔HOTEL WINDERMERE이라고 쓰인 -지붕 위 네온사인, 그리고 야자나무가 하얀 글씨 자국이 남겨진 드넓은캘리포니아 하늘에 둘러싸여 있는 모습을 보여 준다. 글씨는 ‘ST PP‘로보이는데 ‘T‘인 듯한 글자는 야자나무에 일부분이 가려져 알아보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윈더미어에서 ‘IN‘으로 보이는 부분은 호텔 모퉁이에 가려져 있다.) 첫 번째 ‘P‘가 ‘O‘였으면 완벽했을 뻔했다. 만약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이 글자가 무언가를 의미한다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 이대로는 알 길이 없다. - P293

나는 한 가지 색을
생각하고 있다. 오렌지색.
-프랭크 오하라

도로시아 랭은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 중 오렌지보다더 보기 좋은 것은 없다"던 할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할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린아이였지만 그게 무슨뜻인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 P295

랭은 1958년 사이공의 한 시장에서 오렌지 더미를 촬영했다. 또는 촬영하려고 했다. 사진이 흑백이라는 단순한 이유때문에 사진에 찍힌 게 오렌지인지는 완전히 확신하기 힘들다. 이는 중대한 사진-철학적 질문이다. 오렌지를 흑백으로찍을 수 있는가? 오렌지를 오렌지로 만들려면 컬러로 사진을찍어야만 하지 않는가?
19세기 후반에 색은 흑 아니면 백의 문제였다. 사진 약품이 색상의 범위에 민감하지 못해서 붉은색과 파란색의 어두운 부분이 똑같이 어두운 검은색으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1900년에 이 어려움은 상당히 해소되었다. 흑백의 농도 차가훨씬 더 섬세하게 표현되면서 모든 영역의 색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 1929년까지도 - 빨간 수염의 D. H. 로렌스를만족시킬 만큼 민감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내가 이틀 전에 찍은여권 사진을 좀 봐라. 나한테는 없는 검은 수염을 기른 웬 앙증맞은 녀석이 찍혀 있다며 투덜댔다.)  - P296

문맹에도 시가 있다면("스타베리starwbery", "초클레이트choclate"30) 저속함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에번스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가 색에 대해 한 유명한 비난은 사실 그보다 덜인용되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사진의 핵심적 주제가 바로 저속함이라면 컬러 필름만이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이글스턴의 1976년 전시는 기술적이고 미학적으로 충분히 세련되게 접근한다면 저속함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아름다움처럼, 저속함도 보는 사람의 눈 속에 있었다. - P301

사진가가 가능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 그 사진을 찍을 때 사진가는 알 길이 없었다-그게 의미가 있을지, 사진이 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기회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다시말해, 그 장면이 사진으로서 어떻게 보일지는 알 수가 없다. 내 말은, 그가 보는 것을 사진으로 만들리라는 것은 완전히 알면서도 여전히 사진으로서 어떻게 보일지는 모른다는 것이다. 무언가가, 사진으로 무언가를 찍는다는사실이 바꾼다. - P317

도로와 거리는 무엇이 다를까? 크기의 문제는 아니다. (어떤도시의 거리는 시골의 도로보다도 크다.) 도로는 마을 바깥으로향하지만 거리는 그 안에 머문다. 그래서 시골에서는 거리가아니라 도로를 보게 된다. 만약 거리가 도로로 이어지면 마을밖으로 나가게 된다. 도로가 거리가 되면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도로를 오랫동안 따라가면 결국 거리가 되지만 반대로 거리가 반드시 도로가 되지는 않는다. (거리는 거리에서끝날 수도 있다.) 거리는 그 옆에 집이 있어야 거리라 할 수 있다. - P324

 좋은 거리는 당신을 머물게 하지만, 도로는 끝없이 떠나게한다.
1935년에 찍은 사진 서배너의 니그로 쿼터Savannah NegroQuarter」에서 에번스는 거리가 도로가 되는 묘하게 모호한 순간을 담았다. [69] 거리 하나는 사진 중앙에서 사라지고 다른 거리는 왼쪽으로 프레임을 넘어 이어진다. 가운데로 뻗어있는 거리는 거리의 모든 요소를 담고 있다. 주차된 자동차들, 사진 찍는 걸 보면서 서 있거나 앉아서 쉬는 사람들. 추워보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두꺼운 옷을 입고 있다. 그림자는 흐릿하게 드리워져 있다. 현관 계단에 앉아 있는 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며 왼쪽에 서 있는 여자의 흰 치마가 바람에 - P325

흔들린다. 에번스는 어딘가를 향해 가던 중, 지나가는 느낌으로 도로에 서서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속 사람들은 꼼짝 않고 있다. 그들한테 여기는 그저 거리일 뿐이다. 아마도 그것이우리가 이 사진에서 "마을 밖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 블루스가 있는 거리의 슬픔을 느끼는 이유일 것이다. - P326

사진의 단순한 구도는 불가사의한 느낌을 만들고 가능성을 확장시킨다 - 이 가능성은 이후의 사진가들이 탐색할 것이다. "버튼을 누르면, 진 리스는 말했다. "문이 열린다." - P342

1974년 폴 스트랜드는 촬영할 대상을 어떻게 선택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선택하지 않는다." 그는 답했다. "그들이 나를선택한다. 예를 들어 나는 평생 창문과 문을 찍었다. 왜냐고?
그들이 나를 매료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선 어딘지 인간 삶의특징이 보인다." 뉴잉글랜드에서의 시간Time in New Englands(1950)으로 출판된 사진 시리즈 중 하나로 1946년 찍은 옆 현관의 사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속열려 있는 문은 내부로 이어지고 오른쪽에 있는 또 다른 열린문을 통해 정원이 보인다. [76] 세월과 날씨에 닳은 현관 위에는 의자가 놓여 있다. 의자와 입구 사이 빗자루가 못에 걸려있다. - P343

랭은 사람을 찍는 데 탁월한 사진가다. 하지만 사람으로 가득한 작품들 중 내가 가장 끌리는 나를 가장 강하게 끌어당기는 사진은 사람이 없는, 사실상 랭의 사진처럼 보이지 않는작품들이다. 랭의 사진에서는 혼자 있는 사람 - 특히나 혼자있는 사람 - 마저도 의미로 당신을 가득 채운다. 그들의 얼굴에 담긴 소리 없는, 멈추지 않는 증언은 당신을 밀어붙이며 애원한다. 그들에게서 벗어나 낮에 자는 사람DAY SLEEPER이라고쓰여진 표지판을 붙여 둔 문을 찍은 그녀의 사진을 보면 안심이 된다. 문에는 1D라는 번호가 붙어 있지만 ID로도 읽히기 쉬워, 마치 1D에 사는 사람의 정체성identity은 오로지 그의 수면습관에 의해 결정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료한 메시지를 통해 얼마나 많은 정보가 전달되거나 암시되는가.  - P345

사람은 지시 사항(방해금지)을 전하고 은연 중에 (밤에 일하는) 그들의 직업을 암시한다. 처음에는 둥근 것이라고는 문손잡이와 자물쇠 그리고 D의 볼록한 곡선밖에 없고 나머지는모두 날카로운 각도와 빈틈없는 선(대각선, 수직선, 수평선)으로 이루어진 듯 보인다. 하지만 곧 휘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메시지대로 잠을 청하려고 웅크리는, 비바람에 낡은 표지판으로 시선이 돌아온다.
잠을 자고 꿈을 꾸려고.. - P347

에번스가 잘 알고 있었듯이 기찻길은 사람들을 과거로이동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적으로 말하자면 기차는 몇 킬로뿐 아니라 몇 년 떨어진 지점으로도 이어진다.
기찻길은 공간뿐 아니라 시간 속으로도 멀어진다. 에번스는호퍼만큼이나 시간적인 것이 공간적인 것으로 표현되는 시각적 방법에 굉장히 예민했다. 베레니스 애벗을 통해 아제의1929년 또는 1930년 작품을 발견한 것이 그가 이를 이해하게되는 데 결정적이었다. 에번스는 말년에 그가 아제의 작품과는 관련 없이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고 말했다. 어느 정도는 "그만큼 훌륭한 힘과 스타일이 우연히 당신의 것과 아주 비슷하다면..… 당신이 얼마나 독창적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게 된 주장이다. - P358

우리 가족에게 전해 주십시오…………‘라고 쓰면서도 더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른다. 채리스는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해 주지 않는다. 유일한 메시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이 사진이다. 삶의 연료가 모두 떨어져 버린 이 남자는 한 걸음도 더 갈 수 없었거나, 아니면 한 걸음을 더 가더라도 세 걸음이나 네 걸음, 백 걸음은 절대 못 간다는 것을 알았고, 적어도 사천 걸음이나 오천 걸음을 더 걷지 않는 한 한 걸음을 더 가는 것은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리에 앉은 그 순간, 그는 채리스가믿었던 대로 평화를 느꼈을 것이다. 그가 바라는 딱 한 가지는 눈을 찌푸리게 하는 햇빛을 가려 줄 모자였다. 그것만 아니면 그가 지금 있는 곳이 그가 가게 될 어느 곳만큼이나 좋았다. 일단 그 결론에 이르면 당신에게 필요한 유일한 베개는딱딱한 땅바닥뿐이다. 그렇게 그는 거기에 누웠고 햇빛이 그의 눈을 파고들었다. 벌레 소리가 귀에 들리고 파리가 얼굴을간지럽혔다. 결국에는 이마저도 사라지고 언제 깎일지 모르는 짧은 수염만 그의 뺨에 남았다. - P3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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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했던 길고 때로는 힘들었던 세월 뒤, 오키프는1940년대 초반 "알프레드를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인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노먼이 스티글리츠를아무리 우러러보아도 그녀의 카메라 역시 그를 늙고 너무나지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진가나 그 피사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 사진들을 손녀가 찍어 준 할아버지의 사진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노먼이 아무리 애정을담아 관대하게 그를 보았대도 그의 결점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 P146

두 사람은 대부분의 삶을 대륙의 반대편에서 보냈다. 그들은 두 번 만났지만, 서로를 한 번도 찍지 않았다. 서로에게한 말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진의 대체물이다. 그렇게 볼 수도있고, 다르게 보자면 그들은 그들의 사진 속에서 계속해서 만났다고 할 수도 있다. - P149

그렇지만 어쩌면 나중에 일어나게 될 일, 오키프를 찍은스티글리츠의 사진에서 보이는 일에 대한 예감이 벌써 느껴질 수도 있다. 즉, 무엇이 화를 불러올지, 채리스가 1930년대후반 웨스턴을 따라 미국을 돌아다니고 난 뒤(이에 대해서는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어쩌다 그를 떠나야만 한다고 느끼게 될지에 대한 - 단지 그뿐이거나 아마 그마저도 아닌 - 힌트다. - P163

시간은 흐른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사랑이 식으면서각자의 길을 간다. 채리스와 웨스턴은 1934년에 만나 1939년에 결혼했고, 1945년 가을 채리스가 웨스턴에게 그를 떠나겠다고 편지를 쓴 후 1946년 이혼했다. 웨스턴은 1948년 마지막사진을 찍고 1958년 죽었다. 이게 그 날짜들이다. 끊임없이 날짜를 정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날짜들이 모두 정확하기를 바라지만 어떤 면에서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삶의 가치는 연대순이나 시간순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경주의 결승점처럼 - 죽기전 몇 초 동안 어떻게 느끼는지가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일것이다.  - P163

1927년 - 또 날짜다! 그새!-웨스턴은 여자의 뒷모습을 감정이 배제된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 사진들을 촬영했다. 물론 누드 사진으로, "대상이 윤이 나는 강철이든 살아 숨쉬는 살갗이든, 카메라는 삶을 기록하고 사물 그 자체의 본질과 정수를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그의 굽히지 않는 믿음을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진은 "눈앞의 현재, 그리고 그 현재의 한순간만을 다루기 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 결과로 그의 피사체들은 역사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거나사회적 논의와 동떨어진 경향을 띄었다. 에번스는 그의 작업에어떠한 이념적인 요소도 완강히 거부했다. ("정치적인 것은 전혀없다.") 웨스턴에게는 이런 부인조차도 불필요했다. 뒷모습을찍은 사진은 웨스턴의 작업을 이렇게 확장하고 결정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 P164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랭의 사진을 비스듬히 -말하자면, 측면에서 - 바라보고 싶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을 찍은 그녀의 유명한 사진 고원지대 여인High Plains Woman」은, 얼굴을 명확하게 직시하게 하는, 같은 여자의 정면 클로즈업 사진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다. 옆모습에서 보이는 버지니아 울프와의 유사성 - 귀족적또는 예술적 고뇌와 함께 결과적으로 생략된 고난은 후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는 꾹 다문 입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얼굴에 몸이 가진 우아하고 풍부한 언어는 남아 있지 않다. 1952년 뉴욕에서 랭은,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며 본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매혹적인 신비를 가진 한 여자의 다시는 찾을 수없는 옆모습을 촬영했다. 카메라 쪽으로 더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그저 특색 없이 평범하고 불안한 사람으로, 고원 지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누군가처럼 쓸쓸한 희망을 품은 채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 P165

랭과 디캐러바가 걸어온 길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에서만 교차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또다시 만난다는 사실은 그런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진적으로 다뤄졌어야만 하는 분야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당신이 모자로 할 수 있는 일- 리처드애버던

폭넓게 일반화하자면 사진에서 여자와 모자의 역사는 화려함과 패션의 역사다. 반면에 남자와 모자의 역사는 사실주의와(패션의 일시성과는 반대로) 지속성의 역사다. 물론 이런 구분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문제는 대공황을 다룬 고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이 나중에 가서는 세월의 흔적을 담은고유의 매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패션의 세계에서 이런 이미지는 미국의 ‘작업‘에 특화된 칼하트나 그외 브랜드 안에남아 끈질기게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 P175

영화감독들은 한 인물이 영화 내내 같은 옷을 입으면 나중에 장면을 편집하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지속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이야기를 잘라 내고 바꿀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1930년대에 대한 계속되는 영화(수많은 스틸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 속 모자라는 단순한 기표는 많은 사진 속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다 같은 사람이다. 이 ‘같은‘ 사람은 비단 랭의 사진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진가의 작업에도 나타난다. - P179

더 힘든 시간이 오면 - 그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상황은 언제나 더 힘들어질 수 있다-모자는 베개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랭은 1934년 샌프란시스코의 빈민가에서 두 남자가 하워드가의 딱딱한 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촬영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들이 이제는 보도 위에 머리를 뉘었다. 하지만 모자가 여전히 편안함을 주는 듯 보인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 P184

사진가들은 때때로 서로의 사진을 찍는다. 가끔 서로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찍기도 한다. 그보다 더 자주 서로의작업 - 또는 그 형태 - 을 촬영한다. 의식하든 아니든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동료들 그리고 선배들과 소통하고 있다.
1950년대 언젠가 위노그랜드가 찍은 무제 사진이 일종의 랭을 향한(물론 여기서 랭은 랭과 연관된 주제들을 의미한다) 존경의 표시나 랭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P188

 그러나 바로 지금, 이 모자의어떤 면이 그에게 강한 느낌을 주었고 나에게도 그랬다. 우연일까? 이 질문은 말이 안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우연이다."
여기 또 다른 예가 있다. 1952년 디캐러바가 지하철 계단에서 기다릴 때……….
그런데 잠깐 멈춰 보자. 모든 우연이 그러하듯, 이 사건역시 이 일이 일어나기까지 있었을 수많은 조건과 가능성을따져 보면 훨씬 더 놀랍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또 다른 - P191

질문을 불러올 것이다.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게 될 때까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나? 우연은 순간적이어야만 하는가? 얼마동안이 순간이고, 지속되는 순간인가?

언제나 같은 계단.
- 진 리스

외젠 아제는 계단을 자주 촬영했다. 그가 만든 파리의 사진 목록에 눈에 띄게 등장하는 길들과 통로들처럼, 계단 역시 우리를 사진 속 깊이 이끌어 사진 밖으로 그리고 사진 너머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듯하다. 순수하게 형태의 관점에서만 보면화면 속 계단이 올라가면서 그 수평선들이 - 기찻길 위의 침목처럼 - 원근법적으로 멀어지는 효과를 고조시킨다. 아제가촬영한 계단은 튀렌가 91번지에 있는 낡고 복잡한 장식의, 화면 밖으로 굽이쳐 나가는 실내 계단일 수도 있고(1926년 만 레 - P192

계단은 대개 위로이어진다. 아제는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적이 거의없다. 예외 없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계단은언덕이 되고 앞에 놓여 있는 계속되는 고난에 대한 은유가 된다.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 아마 더 나은 -풍경, 또 다른 사진이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계단은 항상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기분이다. 실제로 늘 그런 것은 아니다-그가 항상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계단 아래에서 찾을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더 내밀한 사실, 도시 아래의 도시, (보통 굴욕의 장소인) 지하에서 발견되는 진실에 대한 느낌이 언제나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진은 1930년대 중반 몽마르트르에서 촬영한 것으로, 나무로 뒤덮여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위에서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 P193

브라사이와 달리 케르테스는 내리막이 가지는 심리학적인 의미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올라가는 계단에 대해서는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미 나이가 들어 피곤한 상태를 이해하고 있던 그가 파리에서 찍은 초기 사진은 그가 뉴욕에서 보내게 될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1928년파리의 소Sceaux 공원에서, 아제가 생클루에서 찍은 나뭇잎이 뿌려져 있는 사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는 듯 보이는, 둥그렇게 닳은 계단의 사진을 찍었다. 늘 그렇듯이 계단의 곡선과 사선에 대한 케르테스의 집착은 어느 정도는 형태와 기하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낙엽으로 뒤덮힌 계단은 - 경력과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 아직 20대밖에 되지 않은 사진가치고는 지나치게 가을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조숙한, 차분한 우울감에 흠뻑 젖어 있다.  - P195

디캐러바는 계단을 올라오거나 내려가는 사람들을 즐겨 찍었다. 디캐러바에게 계단은 삶을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다. 당신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이유로 - 계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온다. 다만, 산에는 오르지 않아도 되지만, 계단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으면 언제든 계단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온통계단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 P196

사람들은 사진에 찍히고, 죽는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와 다시다른 사람의 사진에 찍힌다. 일종의 환생이다. 20년 전 랭의 사진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가 갑자기 디캐러바의 사진에 다시나타난다. 그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들은 말이 안 된다. 케르테스로 돌아와 그가 헝가리, 뉴욕에서 찍은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 대해 다시생각해보자. 사진에 그동안이라는 것은없다. 그때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어떤 면에서, 연대순에 대한부정이다. - P199

계단은 쉽게 의자가 된다. 때에 따라서는 침대로도 변한다.
1890년 젊은 스티글리츠는 코르티나의 건물 앞에 있는 네 개의 계단 위에 누워 몸을 뻗은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걱정 없는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라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평평한 바닥이라면 몰라도(1937년 웨스턴의 사진 속 채리스 윌슨은 결국옷을 벗은 채 이와 꽤 비슷한 자세를 취하는 처지가 되었다) 완전히 술에 취한 게 아닌 이상, 이런 계단 위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있기는 힘들다. 스티글리츠의 자세는 예술적인 염원을 표현 - P203

하고 있지만, 계단 위에서 잠자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상황에는 어쩔 수 없이 처해지는 것이다. 현관 계단이나 층계위에 앉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하지만, 그 위에서 자는 것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를 의미한다. - P204

벤치에는 본질적으로 슬픈 면이 있다. 버스 정류장의 벤치는버스에 앉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억지로 앉아 떠나기를 기다리며 느낀 좌절과 초조함이 남긴 여파 그리고 체념을 받아들여왔다. 벤치의 본질적인 특징 - 그 절대적인 부동성은 버스나 기차역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좀처럼 앉아서 쉬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주머니에있는 잔돈을 잘그락거리며, 절대 변하지 않지만 믿을 수도 없는, 어쩐지 수상한 시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앉아 있다. 벤치에 앉는 것은,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실상그 상황의 참을 수 없는 벤치성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 P219

벤치에게는 그들의 때가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그런데 어찌 보면 공원에 있는 벤치에게 그때는 항상 가을인 듯하다. 케르테스는 두말할 것 없이 공원 벤치를 각별히 좋아했다. 그의 가장 초기 사진 중 하나는 1913년 부다페스트 네플리게트 숲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생 예뇌를 찍은 것이다. 예뇌는 외투를 입고 있고 그의 모자는 벤치 위 그의 옆에 놓여 있다. 바닥에는 낙엽이 흩뿌려져 있다. - P220

케르테스의 사진에서 자주 보이는 검은 윤곽의 인물들이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거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하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그들이 항상 벤치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벤치는 일종의 죽음을 상징한다. 벤치는………… 벤치 신세다. 참여하지 못하고 주변에서지켜보기만 해야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삶을 관찰만할 뿐 더 이상 삶에 관여하지 못하는 케르테스 본인의 대리인적이다.하지만-브라사이와위지의 사진 속 사람들처럼어도 그에게는 벤치가 있다. 멸시와 모욕의 세월을 견디고 난후, 1962년 9월 20일 뉴욕에서 케르테스는 자신의 처지를 - - P221

에번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시각 구성에대해 프랭크가 대놓고 드러낸 무관심은 너무 도전적이어서 처음에는 미국 내에서 그의 책을 출판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1958년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책이 출간되고 난 다음 해에야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은 앞으로 올 재즈의 형태The Shape ofJazz to Come》를 대담하게 선언하는 앨범을 발매했다. 비록 각자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음악과 사진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이 순간들은 서로를 조명하고 있다. - P270

재즈의 역사는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음악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사람들의 역사다. 프랭크의 사진과 콜
‘맨의 음악은 형식의 경계를 벗어남으로써 경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욕구를 공유한다. 콜맨이 도입한 프리 재즈에 대한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프랭크에게 이어진다. 프랭크의 작업은 전통적 기준에 따르면 구도도 맞지 않고 구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사진으로 평가되었다. 1950년대 후반 콜맨의 음악은 획기적이며 전례가 없었다. 지금 들으면 이 색소폰 연주자가 텍사스포트워스에서 자라며 들은 블루스에 그의 음악이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의 사진 자체가 전통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진들이 어떻게 이전 단계의 전통에서 곧바로 발전해 나왔는지 볼 수 있다. 아무리 프랭크의 사진이 전례가 없다고 해도보통 그의 사진에도 무언가 친숙한, 포장이 의도적으로 훼손되긴 했지만 이전의 더 안전한 회화 논리의 흔적이 어느 정도남아 있다. 빔 벤더스에 따르면, 프랭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찌 수 있는 능력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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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

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나는 11월을 편애한다. 가을 앞에 붙은 ‘늦‘이라는 말도, 앙상한 나무와 아예 모질지는 못한 바람도 아낀다.
본색을 더 드러내면, 나와 나의 고양이가 태어난달이라는 이유도 덧붙일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이 비슷하고 같은 병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얼굴도 닮아가고있다.

숫자 11의 생김새를 골똘히 보면, 나무 두 그루 모양이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으로 서 있는 만추의나무. 그 잎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나무 바로 밑 둥치로 떨어져 모인다. 그래서 나는달력 위 11이라는 숫자의 발치에 둥근 그늘 같은 것을그려 넣는 낙서를 하기도 한다.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여드는 그늘과,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을 가진 11월에 파울첼란의 시를 다시 읽는다. 읽을수록 그의 옆은 빈자리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고르자면 ‘무(無)‘를 누일 수 있을까. 그들은 둘이었으나, 첼란이 강 위로 몸을던진 순간 말없이 하나가 되었다. 11월의 잎과 땅처럼.

11월에는 내 고양이의 등을 더 자주 쓰다듬는다.
너에게는, 나에게는, 앞으로 11월이 몇 번 남았을까 물어보면서. 창턱에 엎드려 맞은편 숲을 응시하다 고개를돌리는 열세 살 고양이는 물론 답이 없지만, 큰 눈동자의 고동빛만은 한층 깊어진다.
늦가을은 진실로 깊은 가을이다. 그 깊이의 출발지가 넉넉한 그늘인 것은 알겠고, 종착지가 어디일지는두고 보는 것이다.

이제 11을 살며시 눕혀보면, 하늘을 보고 나란히누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나무가 그러하듯거리가 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파울첼란‘이라고 지어준다. 그 옆은 누굴까. 이십대에 잠시 사랑에 빠졌던잉에보르크 바흐만도 아내 지젤 레스토랑주도 선뜻 옆자리에 두지는 못하겠다. 쉰한 살에 센강에 몸을 던져자살했을 때, 그는 온전하게 혼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 11월에 태어난 파울 첼란은 쇼아(shoah)로부모를 잃은 후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 나왔다. 그러나그가 시로 전했듯 "살았다는 것은 틀린 말, / 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 사이를 눈먼 채 /지나갔을 뿐"이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고통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첼란에게는 사랑보다 비극이 더 무거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폭력이 뒤섞인 세계에서 헛되게말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늘‘ 속에 머물기를 택했다.

너의 말에 의미를 주고
거기에 그늘을 드리우라.

거기에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라.
(......)
진실로 말하는 이는 그늘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걸어 말하는 이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점점 짧아지고 침묵의 비중이커진다. 각각 다른 두 편의 짧은 시에서, 나는 유서와도같은 구절을 찾았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그리고


물 위를 떠다니는 말은
어스름의 것

파울첼란, 「말하라 너도」, 「죽음의 푸가』, 민음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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