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가 묘사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서 영감을 받은 연구자가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 기묘한 글에 의하면 "동물은다음과 같이 나뉜다. (a) 황제 소유의 동물, (b) 방부처리된 동물, (c) 훈련된 동물, (d) 젖먹이 새끼 돼지, (e) 인어, (f) 우화 속동물, (g) 떠돌이 개, (h) 이 분류에 속한 동물, (i) 미친듯이몸을 떠는 동물, (j)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동물, (k) 아주 가느다란 낙타의 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동물, (1) 그 외의 동물, (m) 방금 꽃병을 깨뜨린 동물, (n)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이 글에서 수행한 사진에 대한 연구가 비록 이 분류만큼철저하거나 기발하지는 못해도,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가능성을 어떻게든 순서대로 정리하려고 했던, 좋은 의도를지닌 앞선 시도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워커 에번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무의식적인 사진가"였는지가 "특별히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라고했다. 월트 휘트먼에게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없었다. - P17
책을 쓰다 보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미국인의 사진또는 미국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다. 그럴 의도는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특별한 사진가나 사진을 정해 놓지 않았다. 누구든 어떤 사진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사진가와 본 적 없는 사진도 많았다. (나는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어쩌다 관심을 가지지못한 중요한 작가들(예를 들면 어빙 펜)도 있었고 예전에 이미글을 썼거나 더 할 이야기가 없는 작가들(카르티에 브레송과로버트 카파)도 있었다. 더 길게 쓸 생각이었지만 짧게밖에 쓰지 못한 작가들(외젠 아제, 이제 예는 그만 들겠다)도 있고 처음엔 다룰 생각이 없었지만 꽤 많이 다루게 된 작가들도 있다. 마이클 오머로드 Michael Ormerod가 그중 한 명으로 이 책의 여러 주제가 그의 사진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전혀의도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는 미국의 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영국인으로 작가가 파견한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 P27
내가 1980년대 후반 재즈에 대한 글을 쓸 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그 글을 쓸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고 여겼던것처럼, 나는 사진에 대해서 쓰려면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이선행되어야 한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음악과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채워 줄 만한책이 거의 없었다. 사진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진의 개념혹은 스티글리츠의 표현대로 "개념 사진"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 롤랑 바르트가 쓴 훌륭한 책들이 있다. 사진의 역사나 역사 속 다양한 장르와 흐름에 대해서도 책 분량의뛰어난 연구서가 많다. 큐레이터들이나 학자들이 특정 사진가에 대해 쓴 매우 수준 높은 책과 에세이도 수없이 많이 있다. 사진가들도 그들의 매체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그 아래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말대로 내가 ‘사물의 특성에 관한 어떤 미세한 부분만큼은 독점할 수 - P28
있기를 바란다. 도로시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법을 가르쳐 주는 도구"라고 말했다. 나는 사진가는 아니지만, 내가 만약 사진가였다면 찍었을 사진이 이제는 보인다. - P29
이 사진을 실제로 보기도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이 사진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워즈워스의 서곡 7권에서 처음 그 사진을 어렴풋이 보았다. 워즈워스는 런던에서 있었던한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북적이는 스트랜드가를가로질러 오던") 그는
벽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는 글이 적힌 종이를 가슴에 건채, 얼굴을 꽂꽂이 들고 있는 한 눈먼 남자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다.
워즈워스는 이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의 마음이 달려가는 동안, 그에게는
이 표시 안에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것 - P32
처럼, 굳어 버린 그의 얼굴과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백 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하나는 시에 하나는 사진에기록된 두 만남이 이만큼 일치하는 것은, 눈먼 남자가 곧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그녀‘로 바뀌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길 뿐이다. 워즈워스는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스트랜드와 피사체 간의 관계를 예측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 P33
워커 에번스는 1930년 브루클린에서 예술가 벤 샨을 만났다. 몇 년 뒤 에번스는 그에게 사진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봐봐, 벤, 별거 없어. 그늘에서는 조리개 값을 9로, 밝은 곳에서는 45로 맞추고 셔터는 20분의 1초에 놓고 흔들리지 않게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돼!" 그 후에 샨은 에번스를 따라 로이 스트라이커가 기획한 농업안정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사 - P51
이에 둘은 로어이스트사이드를 어슬렁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을 촬영했다. 에번스의 전기를 쓴 벨린다래스본에 의하면 그들은 "라이카 위에 스트랜드가 20년 전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썼던 것과 비슷한) 잠만경을 달고 서로를 촬영하는 것처럼 꾸며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격이나 작품 면에서 둘의 닮은 점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에번스는 신중하고 냉정하며 내성적이고 고상했던 반면 (다섯살 더 많은) 샨은 "예술가보다는 노동자처럼 보였고 에번스에따르면 지나치게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은 1932년에서 1934년경 14번가에서 찍은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고스란히 드러난다. [7] 건장하고 강인한 이 남자는 사진가의정치 성향을 대표하고 있다. 샨과 같은 좌파적 충성도를 가진사람이 보통 그렇듯 아코디언 연주자 역시 동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생계를 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더 큰 투쟁에 더욱 고집스럽게 헌산하고 있다. - P52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는 아우구스트 잔더나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내가 특별히 이 피사체와 연결 짓게되는 사진가는 바로 앙드레 케르테스다. 조지 시르테시GeorgeKertész」에Szirtes가 쓴 시 「앙드레 케르테스를 위하여 For André I따르면,
아코디언 연주자는 눈먼 지식인이다. 그는 거대한 타자기를 가지고 다닌다. 악기가 긴 모자처럼 양옆으로 늘어나면서 자판에서날개가 자라지만, 병에 걸린 듯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고만다.
시르테시가 염두에 둔 사진은 헝가리 에스테르에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안경을 끼고 있다.) 아코디언은 우리에게 너무 확실한시각 장애인의 상징이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의 실제상황은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 P54
케르테스는 자신의 고통을 부풀리고 악화시켰지만, 돌아보면 그가 당한 모욕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사진계의 거장 중 하나였지만 길거리 연주자처럼 최소한의 하찮은 인정과 그의 재능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행인들이 컵에 떨궈 주는동전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따뜻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무시 때문에 그는 예전 헝가리에서의 더 행복했던 날들을 향수에 젖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케르테스는 한 여인에게 원본 필름이 가득 들어 있는가방을 맡기고 파리를 떠났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와필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필름들은 나중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1963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세계적인 찬사와 뒤늦은 명성을안겨 주며 그의 인생에 동화같은 결말을 선사했다. - P59
「유랑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The Blind Accordionist와 같은 예전사진들의 묘한 점은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해 당연히 느끼는 목가적인 감정이 전부가아니라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고향에 살고있던 20대 케르테스의 시선이 처음부터 - 옛날이 옛날이 되기 전부터 - 앞으로다가올 상실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섯 살에 카메라를 갖게 되자마자 카메라가 있었다면 찍었을 것이라고 머릿속에 그려온 대로, 카메라가 저평가되고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찍었다. 그 사진들은 추억을 담은 사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그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예언으로 시작했다. - P60
- 또는 오로지 - 오래전에 본 무언가를 다시 보게 된 것만은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다. 시간은 별개의 두 사건을 포용하기위해) 늘어났다가 두 순간을 가깝게 하기 위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1959년에 케르테스가 들은 선율이 1922년에 들었던 선율과 똑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망상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그들 - 사진가와 그의 대리인인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 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결론은 그동안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코디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날 뿐 선율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들판에 흩뿌려진 양귀비다. 우리는 피가 뿌려진 소박한 십자가다. 이 짧은 운율에 감춰진 감정을 주의해라. 지혜롭게 행동하라. 선한 마음을 가지라 - P61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아버스로 하여금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요소다. 1960년대 초반 그녀는 문도그Moondog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 거리 예술가에게 매료되었다. 1960년 마빈 이즈리얼에게 쓴 글에서 그녀는 "그는 자신 ‘만의 바다를 가진 섬만큼 짙고 동떨어진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연약하다. 그리고 세상은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조차도 마치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자와 냄새, 소리로 인식된다."라고 표현했다. "문도그의 믿음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믿고 그는 보이는것을 믿는다." 『알레프』에서 보르헤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이곳을언뜻 본 후 눈물을 흘리는데, "사람들에 의해 이름을 빼앗겼지만 누구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은밀한 가상의 대상인,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을 글로 쓰는 것은 "절망감"을 수반한다. 그가 쓰는 것은 "언어가 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반면, 그가 본 것은 "동시적"이라는명백한 이유 때문이다. - P80
아버스는 "자신의 표정을 속일 수 없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들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의 표정을 모르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는다." 아버스의 작업 전체를 보면 이 말은 정확하면서도 그만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양한 정신 병원의 환자들을 촬영한 말년의 작업은 이 개념을 정신적인 실명의 영역까지 극단적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핼러윈 행진을 위해 가면을 쓰고 차려입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해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외의 상황에서 아버스의 작업이 가지는 힘은 사람들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가면과 그 가면을 잡아당기는 카메라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에 의해 만들어진다. - P83
아버스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자아 인식의 부재만큼이나 사람들이 가진 자아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보여 줬으면 하는 모습이 있지만그와는 다르게 보이게 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결점부터 잡아낸다. 우리가 이런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히다른 모습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에게 우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주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 있다. - P84
9개월 후 - 게드니가 사진을 찍고 2년이 지난뒤 - 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않다." 그렇지만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P87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다고 했던 그때 아버스는 "마릴린 먼로와 헤밍웨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자살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자살이 거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의 예지력에 대한 아버스의 믿음은 어느 정도 빌 브란트에게서 나온 것이고 빌 브란트의 믿음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1948년에 촬영한)여배우 조지핀 스마트의 눈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브란트는 "사진가의 목표는 피사체의 미래 전체를 실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예견해 주는 의미 있는 유사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스는 "내가 사진찍지 않는 이상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반면, 브란트는 "내가 본 것을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의 목재 코닥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 P88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버스의 관심은 그녀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느꼈던, 보다 전반적인 매력의 일부였다. 죽기 바로 전 아버스는 학생들에게 "명료함에 열중해 보고 나니 "내가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물리적 어두움. 어두움을 다시보게 된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아버스가 이렇게 "모호함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게 된 것은 브란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사이 덕분이었다. - P89
그 보잘것없는 도구인 눈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밤의 역사History of the Night」
브라사이가 그의 친구 케르테스가 퐁뇌프의 야경을 장노출로 촬영하는 것을 본 다음 날 처음 카메라를 샀다는 것과, 케르테스가 그에게 자신의 첫 카메라를 빌려준 것, 그리고 브라사이가 케르테스의 접근법과 스타일을 사실상 훔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그에게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고 노출은 얼마나 길게 줘야 하는지 등 야간 촬영에 대한 속성 수업을 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내 야간 촬영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가 거의 평생에 걸쳐 한 일이었다." - P90
파리의 그늘진 삶을 담는 사진가였던 그는 사진이 그를 "그늘 밖으로" 이끌어냈다고 했다. 예술가와 도시 모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낸다. 정신 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도 비슷한방식으로 작동한다. 브라사이는 1931년 발터 벤야민이 명명한 "시각적 무의식"을 찾아다니며 잠든 도시를 배회했다. 이는 센강 위의 다리들을 찍은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리 위로는 거대한 파리의 대로들이 보이고아치 아래에는 독특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반영을 만들며) 어두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안정과-그것이 만들어낸 부작용이자 - 어긋나는 충동을 은밀히 상기시키는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불빛에 비쳐 희미하게 보인다. 그들이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에게 발휘하는 힘은 거의 중력에 가깝다. - P92
파리의 회랑들을 촬영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아치들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 어두운 터널로 이어진다. 도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곳에서 우리는 밤의 무법자와 범죄자로 이루어진 낯익은 - 즉,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본 적 있는 -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에는 성노동자와 동성애자들, ‘센‘ 척하는 앨버트와 그의 ‘일당‘이 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당신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버튼을 누르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구절에서 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문이 열린다." 어디에서 찍었든 브라사이의 사진은 결국 같은 장소, "늘 같은 계단, 늘 같은 방으로 인도한다. - P93
손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손에는 자신만의 문명과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 릴케
손이 그리기 어려운 걸로 악명 높은 것을 생각하면, 힘들이지않고 손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사진의 엄청난 장점중 하나다. 이처럼 카메라는 사람의 손을 보여 주는 방법이자 손이 가진 불확실성과 한계를 회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윌리엄 헨리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은 자신의 부족한 손재주 -좋아하는 물건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는 무능력 에 절망하여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사된 이미지를 "종이 위에 안정적으로 새겨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연의 연필을 사용하여 "빛으로 그린 그림" 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1839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지금까지어떤 사람의 손도 이 그림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선을 그리지못했다."고 단언했다. 1906년에도 이 일은 충분히 신기하고 요긴한 일이어서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의 손이라는 투박한 도구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예술가이자 사진가인 앨빈 랭던 코번을 칭송했다. - P96
랭이 손을 강조하는 것은 농부나 공장 노동자를 환유적으로 일손이라고 축소해서 부르는 언어 관습을 다분히 문자 그대로, 시각적으로 연장한 것이다. 티나 모도티가 192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 세탁일을 하는 여자와 연장 위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화면에 꽉 채워 찍은 사진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성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에 담기는가. 랭과 모도티는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면서 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이 자기를 보지 못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당신이 알아내야 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저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이 나올 수도 있다. - P100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가 "생각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파가 찍은 것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만화가들은 말풍선을 점선이나 하이픈으로 그려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사진가들에게는 그런 유용한 방법이 없다.) 사진이 발명된 순간부터 사진가들은 이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없애보려고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똑똑하고 진지한 - 예를 들어 칼라일 같은 사람을 이용해 그의 눈 뒤로 두뇌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1906년 앨버트 비글로 페인은 마크 트웨인의 집 현관 앞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했다. - P102
동등한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만난 것이다. 누가와 누구를이 정확히 동등하다. 친구 사이가 절대적으로 평등해지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이 순간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진에는 역사적이면서도 전기적인 순간이 담 - P121
겨 있다. 이 순간은 존 버거에 따르면 스트랜드가 찍은 인물사진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순간이 지속되는 시간은초 단위가 아니라 순간과 평생과의 관계로 측정된다. 스트랜드를 찍은 이 사진에서는 두 사람의 평생이다. - P122
우정은 어느 순간 함께 보낸 시간의 추억과 다가올 미래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에 이른다. 지나온 추억의 양이 미래에만들어질 추억보다도 많음을 무언으로 깨달으면서부터 우정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둘 사이의 우정은 추억밖에남지 않아 온전히 추억에만 기대게 되며, 그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끝내는 것이 최선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때문에 때로는 우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티글리츠와 스트랜드에게는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었다. 그 순간은 1932년 스트랜드가그의 말대로, 스티글리츠가 만든 새로운 갤러리인 "아메리칸플레이스를 떠나면서" 찾아왔지만, 두남자가 부인들에게 버림받은 그 여름 스트랜드가 찍은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그 시간을 - 그들에게 추억밖에는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 함께할미래는 없는 순간을 - 미리 보여주고 있다. - P124
그들사이에 나이 차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 사이에는 그들의부인들이 사실상 함께 도망가 버렸다는, 다른 종류의 동등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남으로써 아내의 부재 외에 그들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이드러났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그들에 관한 사실만이 남았다. · 우정이 동등해지는 단계가 있다면 어느 한쪽이 그 단계가 지나간 것을 깨달아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양쪽 다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냉랭하고 불안한 평형이 새롭게 자리잡는다. 서로에게 느끼던 안정감과 편안함 대신 불안감이 찾아온다. 이 불안감은 - 그 증상 중 하나로-이에 대해 얘기할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심해진다. 스티글리츠의 수다가 끝나고스트랜드가 찍은 사진은 말하지 못해 남겨진 모든 것을 담고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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