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했던 길고 때로는 힘들었던 세월 뒤, 오키프는1940년대 초반 "알프레드를 내가 아주 좋아하는 노인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노먼이 스티글리츠를아무리 우러러보아도 그녀의 카메라 역시 그를 늙고 너무나지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사진가나 그 피사체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그 사진들을 손녀가 찍어 준 할아버지의 사진이라고 추측했을 것이다. 노먼이 아무리 애정을담아 관대하게 그를 보았대도 그의 결점을 보지 않을 수는 없었다. - P146

두 사람은 대부분의 삶을 대륙의 반대편에서 보냈다. 그들은 두 번 만났지만, 서로를 한 번도 찍지 않았다. 서로에게한 말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진의 대체물이다. 그렇게 볼 수도있고, 다르게 보자면 그들은 그들의 사진 속에서 계속해서 만났다고 할 수도 있다. - P149

그렇지만 어쩌면 나중에 일어나게 될 일, 오키프를 찍은스티글리츠의 사진에서 보이는 일에 대한 예감이 벌써 느껴질 수도 있다. 즉, 무엇이 화를 불러올지, 채리스가 1930년대후반 웨스턴을 따라 미국을 돌아다니고 난 뒤(이에 대해서는나중에 더 이야기하겠다) 어쩌다 그를 떠나야만 한다고 느끼게 될지에 대한 - 단지 그뿐이거나 아마 그마저도 아닌 - 힌트다. - P163

시간은 흐른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고 사랑이 식으면서각자의 길을 간다. 채리스와 웨스턴은 1934년에 만나 1939년에 결혼했고, 1945년 가을 채리스가 웨스턴에게 그를 떠나겠다고 편지를 쓴 후 1946년 이혼했다. 웨스턴은 1948년 마지막사진을 찍고 1958년 죽었다. 이게 그 날짜들이다. 끊임없이 날짜를 정하고 확인해야 하는 것이 이 책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다. 날짜들이 모두 정확하기를 바라지만 어떤 면에서 날짜는 중요하지 않다. 삶의 가치는 연대순이나 시간순으로 평가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경주의 결승점처럼 - 죽기전 몇 초 동안 어떻게 느끼는지가 유일하게 중요한 문제일것이다.  - P163

1927년 - 또 날짜다! 그새!-웨스턴은 여자의 뒷모습을 감정이 배제된 조각처럼 보이게 하는 사진들을 촬영했다. 물론 누드 사진으로, "대상이 윤이 나는 강철이든 살아 숨쉬는 살갗이든, 카메라는 삶을 기록하고 사물 그 자체의 본질과 정수를표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는 그의 굽히지 않는 믿음을 완벽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또한 사진은 "눈앞의 현재, 그리고 그 현재의 한순간만을 다루기 위해 존재한다고 확신했다.
그 결과로 그의 피사체들은 역사적 맥락이 결여되어 있거나사회적 논의와 동떨어진 경향을 띄었다. 에번스는 그의 작업에어떠한 이념적인 요소도 완강히 거부했다. ("정치적인 것은 전혀없다.") 웨스턴에게는 이런 부인조차도 불필요했다. 뒷모습을찍은 사진은 웨스턴의 작업을 이렇게 확장하고 결정하는 단계를 상징한다. - P164

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랭의 사진을 비스듬히 -말하자면, 측면에서 - 바라보고 싶다.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여인의 옆모습을 찍은 그녀의 유명한 사진 고원지대 여인High Plains Woman」은, 얼굴을 명확하게 직시하게 하는, 같은 여자의 정면 클로즈업 사진보다 훨씬 더 풍부한 감정을 담고 있다. 옆모습에서 보이는 버지니아 울프와의 유사성 - 귀족적또는 예술적 고뇌와 함께 결과적으로 생략된 고난은 후자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굴복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이는 꾹 다문 입술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빠져나간 얼굴에 몸이 가진 우아하고 풍부한 언어는 남아 있지 않다. 1952년 뉴욕에서 랭은,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며 본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매혹적인 신비를 가진 한 여자의 다시는 찾을 수없는 옆모습을 촬영했다. 카메라 쪽으로 더 고개를 돌리자,
그녀는 그저 특색 없이 평범하고 불안한 사람으로, 고원 지대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누군가처럼 쓸쓸한 희망을 품은 채 거리를 돌아보고 있다.  - P165

랭과 디캐러바가 걸어온 길이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에서만 교차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또다시 만난다는 사실은 그런 만남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사진적으로 다뤄졌어야만 하는 분야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다.

당신이 모자로 할 수 있는 일- 리처드애버던

폭넓게 일반화하자면 사진에서 여자와 모자의 역사는 화려함과 패션의 역사다. 반면에 남자와 모자의 역사는 사실주의와(패션의 일시성과는 반대로) 지속성의 역사다. 물론 이런 구분이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한 가지 문제는 대공황을 다룬 고전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이 나중에 가서는 세월의 흔적을 담은고유의 매력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패션의 세계에서 이런 이미지는 미국의 ‘작업‘에 특화된 칼하트나 그외 브랜드 안에남아 끈질기게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 P175

영화감독들은 한 인물이 영화 내내 같은 옷을 입으면 나중에 장면을 편집하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지속성을 크게 해치지 않으면서이야기를 잘라 내고 바꿀 수 있게 된다. 이 책에서 묘사하는1930년대에 대한 계속되는 영화(수많은 스틸 이미지로 만들어진 영화) 속 모자라는 단순한 기표는 많은 사진 속에서 우리가 얼마든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 해도, 엄밀히 말하면 다 같은 사람이다. 이 ‘같은‘ 사람은 비단 랭의 사진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사진가의 작업에도 나타난다. - P179

더 힘든 시간이 오면 - 그 시대의 다큐멘터리 사진이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상황은 언제나 더 힘들어질 수 있다-모자는 베개 역할밖에는 하지 못한다. 랭은 1934년 샌프란시스코의 빈민가에서 두 남자가 하워드가의 딱딱한 바닥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자는 모습을 촬영했다.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그들이 이제는 보도 위에 머리를 뉘었다. 하지만 모자가 여전히 편안함을 주는 듯 보인다. 없는 것보다는 낫다. - P184

사진가들은 때때로 서로의 사진을 찍는다. 가끔 서로가 일하고 있는 모습을 찍기도 한다. 그보다 더 자주 서로의작업 - 또는 그 형태 - 을 촬영한다. 의식하든 아니든 그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동료들 그리고 선배들과 소통하고 있다.
1950년대 언젠가 위노그랜드가 찍은 무제 사진이 일종의 랭을 향한(물론 여기서 랭은 랭과 연관된 주제들을 의미한다) 존경의 표시나 랭에 대한 에세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 P188

 그러나 바로 지금, 이 모자의어떤 면이 그에게 강한 느낌을 주었고 나에게도 그랬다. 우연일까? 이 질문은 말이 안 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이 말한 대로
"모든 것이 우연이다."
여기 또 다른 예가 있다. 1952년 디캐러바가 지하철 계단에서 기다릴 때……….
그런데 잠깐 멈춰 보자. 모든 우연이 그러하듯, 이 사건역시 이 일이 일어나기까지 있었을 수많은 조건과 가능성을따져 보면 훨씬 더 놀랍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또 다른 - P191

질문을 불러올 것이다. 우연은 우연이 아닌 게 될 때까지 얼마나 지속될 수 있나? 우연은 순간적이어야만 하는가? 얼마동안이 순간이고, 지속되는 순간인가?

언제나 같은 계단.
- 진 리스

외젠 아제는 계단을 자주 촬영했다. 그가 만든 파리의 사진 목록에 눈에 띄게 등장하는 길들과 통로들처럼, 계단 역시 우리를 사진 속 깊이 이끌어 사진 밖으로 그리고 사진 너머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듯하다. 순수하게 형태의 관점에서만 보면화면 속 계단이 올라가면서 그 수평선들이 - 기찻길 위의 침목처럼 - 원근법적으로 멀어지는 효과를 고조시킨다. 아제가촬영한 계단은 튀렌가 91번지에 있는 낡고 복잡한 장식의, 화면 밖으로 굽이쳐 나가는 실내 계단일 수도 있고(1926년 만 레 - P192

계단은 대개 위로이어진다. 아제는 계단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은 적이 거의없다. 예외 없이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계단은언덕이 되고 앞에 놓여 있는 계속되는 고난에 대한 은유가 된다.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 아마 더 나은 -풍경, 또 다른 사진이 있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계단은 항상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기분이다. 실제로 늘 그런 것은 아니다-그가 항상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사진에는 계단 아래에서 찾을 수 있는 도시에 대한 더 내밀한 사실, 도시 아래의 도시, (보통 굴욕의 장소인) 지하에서 발견되는 진실에 대한 느낌이 언제나 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진은 1930년대 중반 몽마르트르에서 촬영한 것으로, 나무로 뒤덮여 끝이 안 보이는 계단을 위에서내려다보며 찍은 사진이다.  - P193

브라사이와 달리 케르테스는 내리막이 가지는 심리학적인 의미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올라가는 계단에 대해서는잘 알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미 나이가 들어 피곤한 상태를 이해하고 있던 그가 파리에서 찍은 초기 사진은 그가 뉴욕에서 보내게 될 시간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그는 1928년파리의 소Sceaux 공원에서, 아제가 생클루에서 찍은 나뭇잎이 뿌려져 있는 사진을 의도적으로 암시하는 듯 보이는, 둥그렇게 닳은 계단의 사진을 찍었다. 늘 그렇듯이 계단의 곡선과 사선에 대한 케르테스의 집착은 어느 정도는 형태와 기하학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낙엽으로 뒤덮힌 계단은 - 경력과 인생의 봄을 맞이하는 - 아직 20대밖에 되지 않은 사진가치고는 지나치게 가을 분위기를 풍기는 동시에 조숙한, 차분한 우울감에 흠뻑 젖어 있다.  - P195

디캐러바는 계단을 올라오거나 내려가는 사람들을 즐겨 찍었다. 디캐러바에게 계단은 삶을 이루는 기본 요소 중 하나다. 당신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은 이유로 - 계단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 계단을 올라가고 내려온다. 다만, 산에는 오르지 않아도 되지만, 계단은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으면 언제든 계단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온통계단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 P196

사람들은 사진에 찍히고, 죽는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와 다시다른 사람의 사진에 찍힌다. 일종의 환생이다. 20년 전 랭의 사진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남자가 갑자기 디캐러바의 사진에 다시나타난다. 그동안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 긴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질문들은 말이 안 된다. 케르테스로 돌아와 그가 헝가리, 뉴욕에서 찍은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 대해 다시생각해보자. 사진에 그동안이라는 것은없다. 그때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사진은, 어떤 면에서, 연대순에 대한부정이다. - P199

계단은 쉽게 의자가 된다. 때에 따라서는 침대로도 변한다.
1890년 젊은 스티글리츠는 코르티나의 건물 앞에 있는 네 개의 계단 위에 누워 몸을 뻗은 자신의 사진을 찍었다. 걱정 없는자유로운 영혼의 이미지라기엔 설득력이 떨어진다. 평평한 바닥이라면 몰라도(1937년 웨스턴의 사진 속 채리스 윌슨은 결국옷을 벗은 채 이와 꽤 비슷한 자세를 취하는 처지가 되었다) 완전히 술에 취한 게 아닌 이상, 이런 계단 위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있기는 힘들다. 스티글리츠의 자세는 예술적인 염원을 표현 - P203

하고 있지만, 계단 위에서 잠자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상황에는 어쩔 수 없이 처해지는 것이다. 현관 계단이나 층계위에 앉는 것은 자연스럽고 편하지만, 그 위에서 자는 것은 -적어도 미국에서는 - 거의 자포자기의 상태를 의미한다. - P204

벤치에는 본질적으로 슬픈 면이 있다. 버스 정류장의 벤치는버스에 앉기를 원했던 사람들이 억지로 앉아 떠나기를 기다리며 느낀 좌절과 초조함이 남긴 여파 그리고 체념을 받아들여왔다. 벤치의 본질적인 특징 - 그 절대적인 부동성은 버스나 기차역에서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좀처럼 앉아서 쉬려고 하지 않는다. 차라리 주머니에있는 잔돈을 잘그락거리며, 절대 변하지 않지만 믿을 수도 없는, 어쩐지 수상한 시간표를 계속해서 바라보며 앉아 있다. 벤치에 앉는 것은, 포기하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며 사실상그 상황의 참을 수 없는 벤치성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 P219

벤치에게는 그들의 때가 있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다. 그런데 어찌 보면 공원에 있는 벤치에게 그때는 항상 가을인 듯하다. 케르테스는 두말할 것 없이 공원 벤치를 각별히 좋아했다. 그의 가장 초기 사진 중 하나는 1913년 부다페스트 네플리게트 숲의 벤치에 앉아 있는 동생 예뇌를 찍은 것이다. 예뇌는 외투를 입고 있고 그의 모자는 벤치 위 그의 옆에 놓여 있다. 바닥에는 낙엽이 흩뿌려져 있다. - P220

케르테스의 사진에서 자주 보이는 검은 윤곽의 인물들이모두 죽음을 향하고 있거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고하면 지나친 것이겠지만, 그들이 항상 벤치를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벤치는 일종의 죽음을 상징한다. 벤치는………… 벤치 신세다. 참여하지 못하고 주변에서지켜보기만 해야한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은 삶을 관찰만할 뿐 더 이상 삶에 관여하지 못하는 케르테스 본인의 대리인적이다.하지만-브라사이와위지의 사진 속 사람들처럼어도 그에게는 벤치가 있다. 멸시와 모욕의 세월을 견디고 난후, 1962년 9월 20일 뉴욕에서 케르테스는 자신의 처지를 - - P221

에번스의 전폭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시각 구성에대해 프랭크가 대놓고 드러낸 무관심은 너무 도전적이어서 처음에는 미국 내에서 그의 책을 출판해 줄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1958년 프랑스에서 성공적으로 책이 출간되고 난 다음 해에야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나올 수 있었다. 그다음 해에 오넷 콜맨Ornette Coleman은 앞으로 올 재즈의 형태The Shape ofJazz to Come》를 대담하게 선언하는 앨범을 발매했다. 비록 각자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지만 음악과 사진의 역사에 있어 결정적인 이 순간들은 서로를 조명하고 있다. - P270

재즈의 역사는 처음에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음악에 점점 익숙해져 가는 사람들의 역사다. 프랭크의 사진과 콜
‘맨의 음악은 형식의 경계를 벗어남으로써 경계를 탐색하고자
‘하는 욕구를 공유한다. 콜맨이 도입한 프리 재즈에 대한 거부감은 자연스럽게 프랭크에게 이어진다. 프랭크의 작업은 전통적 기준에 따르면 구도도 맞지 않고 구성도 제대로 되지 않은사진으로 평가되었다. 1950년대 후반 콜맨의 음악은 획기적이며 전례가 없었다. 지금 들으면 이 색소폰 연주자가 텍사스포트워스에서 자라며 들은 블루스에 그의 음악이 흠뻑 젖어있다는 것을 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프랭크도 마찬가지다.
그의 사진 자체가 전통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진들이 어떻게 이전 단계의 전통에서 곧바로 발전해 나왔는지 볼 수 있다. 아무리 프랭크의 사진이 전례가 없다고 해도보통 그의 사진에도 무언가 친숙한, 포장이 의도적으로 훼손되긴 했지만 이전의 더 안전한 회화 논리의 흔적이 어느 정도남아 있다. 빔 벤더스에 따르면, 프랭크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찌 수 있는 능력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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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원

태어나 성장하고 일하며 대략 열 개의 도시를 거쳤다.
사람과 공간을 여의는 것이 이력이 됐다.
대학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단편영화를 세 편 연출했고여러 편에서 연기를 했다. 구석의 무명인들에게관심이 많다. 수도자로 살고자 했으나 이루지 못했고,
지금은 나이든 고양이와 조용히 살고 있다.
읽고 걷는 나날을 모아 『시와 산책을 썼다.
책을 덮고 나면, 아름다운 시들만이 발자국처럼 남기를바란다. 앞으로는 나를 뺀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다.

이것은 사랑에 관한 기록이지만, 나는 ‘사랑‘의 자리에 ‘행복‘을 넣어 다시 읽는다. "행복은 단지 방향을결정하는 것이지 영혼의 상태가 아니다."
행복이 내가 가져야 하는 영혼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토록 자주 절망한다. 어떤 상황과조건에서 피동적으로 얻어지고 잃는 게 행불행이라고규정하고 말면, 영영 그 얽매임에서 헤어나오기 어려울것이다. 가지지 못한 것이 많고 훼손되기만 했다고 여겨지는 생에서도, 노래를 부르기로 선택하면 그 가슴에는 노래가 산다. 노래는 긍정적인 사람에게 깃드는 것이라기보다는, 필요하여 자꾸 불러들이는 사람에게 스며드는 것이다.
매순간 ‘방향‘을 선택한다. 행복을 목표로 삼는 방향이 아니라, 앞에 펼쳐진 모든 가능성 중에 가장 선한길을 가리키는 화살표를 따른다. 그 둘은 처음에는 일

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끝내 행복은 선에 속할것이다.
그러니 역시 ‘행복‘이라는 낱말은 없어도 될 것 같다. 나의 최선과 당신의 최선이 마주하면, 나의 최선과나의 최선이 마주하면, 우리는 더는 ‘행복‘에 기댈 필요가 없다.
에른스트 얀들의 시에 "낱말들이 네게 행하는 것이 아닌 네가 낱말에 행하는 것, 그것이 무엇인가 된다"는 구절이 있다. ‘행복‘이 우리에게 가하는 영향력에 휘둘리는 대신, 우리가 ‘행복‘에 무언가를 행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무언가가 바로 망각이기를 바란다.
그 낱말은 죽은 조상에게 맡기고 그만 잊자고 할 수 있다면 ‘불행‘도 잊자고.
기쁘고 슬플 것이나 다만 노래하자고.

나는 11월을 편애한다. 가을 앞에 붙은 ‘늦‘이라는 말도, 앙상한 나무와 아예 모질지는 못한 바람도 아낀다.
본색을 더 드러내면, 나와 나의 고양이가 태어난달이라는 이유도 덧붙일 수 있다. 우리는 성격이 비슷하고 같은 병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얼굴도 닮아가고있다.

숫자 11의 생김새를 골똘히 보면, 나무 두 그루 모양이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만으로 서 있는 만추의나무. 그 잎들은 바람을 타고 멀리 가기도 하겠지만, 대개는 나무 바로 밑 둥치로 떨어져 모인다. 그래서 나는달력 위 11이라는 숫자의 발치에 둥근 그늘 같은 것을그려 넣는 낙서를 하기도 한다.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여드는 그늘과,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을 가진 11월에 파울첼란의 시를 다시 읽는다. 읽을수록 그의 옆은 빈자리로 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고르자면 ‘무(無)‘를 누일 수 있을까. 그들은 둘이었으나, 첼란이 강 위로 몸을던진 순간 말없이 하나가 되었다. 11월의 잎과 땅처럼.

11월에는 내 고양이의 등을 더 자주 쓰다듬는다.
너에게는, 나에게는, 앞으로 11월이 몇 번 남았을까 물어보면서. 창턱에 엎드려 맞은편 숲을 응시하다 고개를돌리는 열세 살 고양이는 물론 답이 없지만, 큰 눈동자의 고동빛만은 한층 깊어진다.
늦가을은 진실로 깊은 가을이다. 그 깊이의 출발지가 넉넉한 그늘인 것은 알겠고, 종착지가 어디일지는두고 보는 것이다.

이제 11을 살며시 눕혀보면, 하늘을 보고 나란히누운 사람처럼 보인다. 그들 사이에는 나무가 그러하듯거리가 있다.
나는 그중 한 사람의 이름을 ‘파울첼란‘이라고 지어준다. 그 옆은 누굴까. 이십대에 잠시 사랑에 빠졌던잉에보르크 바흐만도 아내 지젤 레스토랑주도 선뜻 옆자리에 두지는 못하겠다. 쉰한 살에 센강에 몸을 던져자살했을 때, 그는 온전하게 혼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1920년 11월에 태어난 파울 첼란은 쇼아(shoah)로부모를 잃은 후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 나왔다. 그러나그가 시로 전했듯 "살았다는 것은 틀린 말, / 숨결 하나가 ‘저기‘와 ‘거기 없음‘과 ‘이따금씩‘ 사이를 눈먼 채 /지나갔을 뿐"이었다. 살아 있다는 실감이 고통 속에 묻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런 첼란에게는 사랑보다 비극이 더 무거웠을 것이라 짐작한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희망을 걸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폭력이 뒤섞인 세계에서 헛되게말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늘‘ 속에 머물기를 택했다.

너의 말에 의미를 주고
거기에 그늘을 드리우라.

거기에 넉넉하게 그늘을 드리우라.
(......)
진실로 말하는 이는 그늘을 말한다.


자신의 존재를 걸어 말하는 이는 당연히 많은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시는 점점 짧아지고 침묵의 비중이커진다. 각각 다른 두 편의 짧은 시에서, 나는 유서와도같은 구절을 찾았다.

여기 떠오르고 있다
가장 무거운 사람이


그리고


물 위를 떠다니는 말은
어스름의 것

파울첼란, 「말하라 너도」, 「죽음의 푸가』, 민음사(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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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옥타비오 파스, 시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보다가 문득 이런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숲 어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은 없고, 세상은 점점더 창백해진다. 내 입술 안에서는 그와 나눴던 말들이고스란히 되풀이되지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그 말들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보다 낮은 소리가 사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그런데 그 마음을 페소아는 다르게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페르난두 페소아, 「기차에서 내리며」,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2018)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대화하는 편인데, 헤어져돌아오면 얼굴은 그새 감감해지고 그의 목소리만 귓전에 남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숨이 끊어지고도 끝까지남는 감각이 청각이라더니, 그래서일까 짐작해본다.
반대로 어떤 이의 목소리를 아무래도 떠올릴 수 없어서 괴로울 때도 있다. 전화를 걸거나 다시 만나면 해결될 마음이지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형편도 있으니까. 그럴 때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은 얼굴에 비해 결코 사소하지 않다. 목소리는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을다 가진, 사무치게 쓰다듬고 싶은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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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실제로 철저히 했던 유일한 것은 철저히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사진은 말하기보다는 불러일으키고, 설명하기보다는암시하는 능력 덕에 수많은 사진 중 한 장을 골라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사용하려는 역사학자나인류학자, 예술사가 들에게 매력적인 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 사진이 본래 가지고 있던서사적 맥락이나, 사진을 만든 사람의 의도 또는원래의 관객들이 소비하던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도있고 없을 수도 있다.

- 마사샌드와이스Martha Sandweiss



『알레프』를 쓸 때 내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월트휘트먼이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던 일, 즉 끝없이많은 것을 제한된 목록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보르헤스가 묘사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서 영감을 받은 연구자가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 기묘한 글에 의하면 "동물은다음과 같이 나뉜다. (a) 황제 소유의 동물, (b) 방부처리된 동물, (c) 훈련된 동물, (d) 젖먹이 새끼 돼지, (e) 인어, (f) 우화 속동물, (g) 떠돌이 개, (h) 이 분류에 속한 동물, (i) 미친듯이몸을 떠는 동물, (j)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동물, (k) 아주 가느다란 낙타의 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동물, (1) 그 외의 동물,
(m) 방금 꽃병을 깨뜨린 동물, (n)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이 글에서 수행한 사진에 대한 연구가 비록 이 분류만큼철저하거나 기발하지는 못해도,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가능성을 어떻게든 순서대로 정리하려고 했던, 좋은 의도를지닌 앞선 시도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워커 에번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무의식적인 사진가"였는지가 "특별히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라고했다. 월트 휘트먼에게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없었다.  - P17

책을 쓰다 보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미국인의 사진또는 미국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다. 그럴 의도는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특별한 사진가나 사진을 정해 놓지 않았다. 누구든 어떤 사진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사진가와 본 적 없는 사진도 많았다. (나는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어쩌다 관심을 가지지못한 중요한 작가들(예를 들면 어빙 펜)도 있었고 예전에 이미글을 썼거나 더 할 이야기가 없는 작가들(카르티에 브레송과로버트 카파)도 있었다. 더 길게 쓸 생각이었지만 짧게밖에 쓰지 못한 작가들(외젠 아제, 이제 예는 그만 들겠다)도 있고 처음엔 다룰 생각이 없었지만 꽤 많이 다루게 된 작가들도 있다. 마이클 오머로드 Michael Ormerod가 그중 한 명으로 이 책의 여러 주제가 그의 사진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전혀의도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는 미국의 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영국인으로 작가가 파견한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 P27

내가 1980년대 후반 재즈에 대한 글을 쓸 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그 글을 쓸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고 여겼던것처럼, 나는 사진에 대해서 쓰려면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이선행되어야 한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음악과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채워 줄 만한책이 거의 없었다. 사진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진의 개념혹은 스티글리츠의 표현대로 "개념 사진"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 롤랑 바르트가 쓴 훌륭한 책들이 있다. 사진의 역사나 역사 속 다양한 장르와 흐름에 대해서도 책 분량의뛰어난 연구서가 많다. 큐레이터들이나 학자들이 특정 사진가에 대해 쓴 매우 수준 높은 책과 에세이도 수없이 많이 있다. 사진가들도 그들의 매체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그 아래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말대로 내가 ‘사물의 특성에 관한 어떤 미세한 부분만큼은 독점할 수 - P28

있기를 바란다.
도로시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법을 가르쳐 주는 도구"라고 말했다. 나는 사진가는 아니지만, 내가 만약 사진가였다면 찍었을 사진이 이제는 보인다. - P29

이 사진을 실제로 보기도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이 사진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워즈워스의 서곡 7권에서 처음 그 사진을 어렴풋이 보았다. 워즈워스는 런던에서 있었던한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북적이는 스트랜드가를가로질러 오던") 그는


벽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는 글이 적힌 종이를 가슴에 건채,
얼굴을 꽂꽂이 들고 있는 한 눈먼 남자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다.


워즈워스는 이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의 마음이 달려가는 동안, 그에게는


이 표시 안에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것 - P32

처럼,
굳어 버린 그의 얼굴과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백 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하나는 시에 하나는 사진에기록된 두 만남이 이만큼 일치하는 것은, 눈먼 남자가 곧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그녀‘로 바뀌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길 뿐이다. 워즈워스는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스트랜드와 피사체 간의 관계를 예측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 P33

워커 에번스는 1930년 브루클린에서 예술가 벤 샨을 만났다.
몇 년 뒤 에번스는 그에게 사진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봐봐, 벤, 별거 없어. 그늘에서는 조리개 값을 9로, 밝은 곳에서는 45로 맞추고 셔터는 20분의 1초에 놓고 흔들리지 않게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돼!" 그 후에 샨은 에번스를 따라 로이 스트라이커가 기획한 농업안정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사 - P51

이에 둘은 로어이스트사이드를 어슬렁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을 촬영했다. 에번스의 전기를 쓴 벨린다래스본에 의하면 그들은 "라이카 위에 스트랜드가 20년 전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썼던 것과 비슷한) 잠만경을 달고 서로를 촬영하는 것처럼 꾸며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격이나 작품 면에서 둘의 닮은 점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에번스는 신중하고 냉정하며 내성적이고 고상했던 반면 (다섯살 더 많은) 샨은 "예술가보다는 노동자처럼 보였고 에번스에따르면 지나치게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은 1932년에서 1934년경 14번가에서 찍은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고스란히 드러난다. [7] 건장하고 강인한 이 남자는 사진가의정치 성향을 대표하고 있다. 샨과 같은 좌파적 충성도를 가진사람이 보통 그렇듯 아코디언 연주자 역시 동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생계를 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더 큰 투쟁에 더욱 고집스럽게 헌산하고 있다. - P52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는 아우구스트 잔더나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내가 특별히 이 피사체와 연결 짓게되는 사진가는 바로 앙드레 케르테스다. 조지 시르테시GeorgeKertész」에Szirtes가 쓴 시 「앙드레 케르테스를 위하여 For André I따르면,


아코디언 연주자는 눈먼 지식인이다.
그는 거대한 타자기를 가지고 다닌다.
악기가 긴 모자처럼 양옆으로 늘어나면서 자판에서날개가 자라지만,
병에 걸린 듯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고만다.


시르테시가 염두에 둔 사진은 헝가리 에스테르에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안경을 끼고 있다.) 아코디언은 우리에게 너무 확실한시각 장애인의 상징이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의 실제상황은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 P54

케르테스는 자신의 고통을 부풀리고 악화시켰지만, 돌아보면 그가 당한 모욕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사진계의 거장 중 하나였지만 길거리 연주자처럼 최소한의 하찮은 인정과 그의 재능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행인들이 컵에 떨궈 주는동전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따뜻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무시 때문에 그는 예전 헝가리에서의 더 행복했던 날들을 향수에 젖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케르테스는 한 여인에게 원본 필름이 가득 들어 있는가방을 맡기고 파리를 떠났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와필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필름들은 나중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1963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세계적인 찬사와 뒤늦은 명성을안겨 주며 그의 인생에 동화같은 결말을 선사했다. - P59

「유랑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The Blind Accordionist와 같은 예전사진들의 묘한 점은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해 당연히 느끼는 목가적인 감정이 전부가아니라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고향에 살고있던 20대 케르테스의 시선이 처음부터 - 옛날이 옛날이 되기 전부터 - 앞으로다가올 상실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섯 살에 카메라를 갖게 되자마자 카메라가 있었다면 찍었을 것이라고 머릿속에 그려온 대로, 카메라가 저평가되고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찍었다. 그 사진들은 추억을 담은 사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그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예언으로 시작했다.  - P60

- 또는 오로지 - 오래전에 본 무언가를 다시 보게 된 것만은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다. 시간은 별개의 두 사건을 포용하기위해) 늘어났다가 두 순간을 가깝게 하기 위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1959년에 케르테스가 들은 선율이 1922년에 들었던 선율과 똑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망상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그들 - 사진가와 그의 대리인인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 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결론은 그동안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코디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날 뿐 선율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들판에 흩뿌려진 양귀비다.
우리는 피가 뿌려진 소박한 십자가다.
이 짧은 운율에 감춰진 감정을 주의해라.
지혜롭게 행동하라. 선한 마음을 가지라 - P61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아버스로 하여금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요소다. 1960년대 초반 그녀는 문도그Moondog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 거리 예술가에게 매료되었다. 1960년 마빈 이즈리얼에게 쓴 글에서 그녀는 "그는 자신
‘만의 바다를 가진 섬만큼 짙고 동떨어진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연약하다. 그리고 세상은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조차도 마치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자와 냄새, 소리로 인식된다."라고 표현했다. "문도그의 믿음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믿고 그는 보이는것을 믿는다." 『알레프』에서 보르헤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이곳을언뜻 본 후 눈물을 흘리는데, "사람들에 의해 이름을 빼앗겼지만 누구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은밀한 가상의 대상인,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을 글로 쓰는 것은 "절망감"을 수반한다. 그가 쓰는 것은 "언어가 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반면, 그가 본 것은 "동시적"이라는명백한 이유 때문이다. - P80

아버스는 "자신의 표정을 속일 수 없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들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의 표정을 모르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는다." 아버스의 작업 전체를 보면 이 말은 정확하면서도 그만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양한 정신 병원의 환자들을 촬영한 말년의 작업은 이 개념을 정신적인 실명의 영역까지 극단적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핼러윈 행진을 위해 가면을 쓰고 차려입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해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외의 상황에서 아버스의 작업이 가지는 힘은 사람들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가면과 그 가면을 잡아당기는 카메라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에 의해 만들어진다. - P83

아버스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자아 인식의 부재만큼이나 사람들이 가진 자아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보여 줬으면 하는 모습이 있지만그와는 다르게 보이게 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결점부터 잡아낸다. 우리가 이런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히다른 모습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에게 우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주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 있다. - P84

9개월 후 - 게드니가 사진을 찍고 2년이 지난뒤 - 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않다." 그렇지만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P87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다고 했던 그때 아버스는 "마릴린 먼로와 헤밍웨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자살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자살이 거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의 예지력에 대한 아버스의 믿음은 어느 정도 빌 브란트에게서 나온 것이고 빌 브란트의 믿음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1948년에 촬영한)여배우 조지핀 스마트의 눈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브란트는 "사진가의 목표는 피사체의 미래 전체를 실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예견해 주는 의미 있는 유사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스는 "내가 사진찍지 않는 이상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반면, 브란트는 "내가 본 것을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의 목재 코닥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 P88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버스의 관심은 그녀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느꼈던, 보다 전반적인 매력의 일부였다.
죽기 바로 전 아버스는 학생들에게 "명료함에 열중해 보고 나니 "내가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물리적 어두움. 어두움을 다시보게 된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아버스가 이렇게 "모호함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게 된 것은 브란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사이 덕분이었다. - P89

그 보잘것없는 도구인 눈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밤의 역사History of the Night」


브라사이가 그의 친구 케르테스가 퐁뇌프의 야경을 장노출로 촬영하는 것을 본 다음 날 처음 카메라를 샀다는 것과, 케르테스가 그에게 자신의 첫 카메라를 빌려준 것, 그리고 브라사이가 케르테스의 접근법과 스타일을 사실상 훔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그에게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고 노출은 얼마나 길게 줘야 하는지 등 야간 촬영에 대한 속성 수업을 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내 야간 촬영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가 거의 평생에 걸쳐 한 일이었다." - P90

파리의 그늘진 삶을 담는 사진가였던 그는 사진이 그를
"그늘 밖으로" 이끌어냈다고 했다. 예술가와 도시 모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낸다. 정신 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도 비슷한방식으로 작동한다. 브라사이는 1931년 발터 벤야민이 명명한 "시각적 무의식"을 찾아다니며 잠든 도시를 배회했다. 이는 센강 위의 다리들을 찍은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리 위로는 거대한 파리의 대로들이 보이고아치 아래에는 독특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반영을 만들며) 어두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안정과-그것이 만들어낸 부작용이자 - 어긋나는 충동을 은밀히 상기시키는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불빛에 비쳐 희미하게 보인다.
그들이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에게 발휘하는 힘은 거의 중력에 가깝다. - P92

파리의 회랑들을 촬영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아치들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 어두운 터널로 이어진다. 도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곳에서 우리는 밤의 무법자와 범죄자로 이루어진 낯익은 - 즉,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본 적 있는 -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에는 성노동자와 동성애자들, ‘센‘ 척하는 앨버트와 그의 ‘일당‘이 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당신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버튼을 누르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구절에서 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문이 열린다." 어디에서 찍었든 브라사이의 사진은 결국 같은 장소, "늘 같은 계단, 늘 같은 방으로 인도한다. - P93

손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손에는 자신만의 문명과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 릴케


손이 그리기 어려운 걸로 악명 높은 것을 생각하면, 힘들이지않고 손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사진의 엄청난 장점중 하나다. 이처럼 카메라는 사람의 손을 보여 주는 방법이자 손이 가진 불확실성과 한계를 회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윌리엄 헨리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은 자신의 부족한 손재주 -좋아하는 물건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는 무능력 에 절망하여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사된 이미지를 "종이 위에 안정적으로 새겨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연의 연필을 사용하여 "빛으로 그린 그림"
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1839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지금까지어떤 사람의 손도 이 그림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선을 그리지못했다."고 단언했다. 1906년에도 이 일은 충분히 신기하고 요긴한 일이어서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의 손이라는 투박한 도구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예술가이자 사진가인 앨빈 랭던 코번을 칭송했다. - P96

 랭이 손을 강조하는 것은 농부나 공장 노동자를 환유적으로 일손이라고 축소해서 부르는 언어 관습을 다분히 문자 그대로, 시각적으로 연장한 것이다. 티나 모도티가 192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 세탁일을 하는 여자와 연장 위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화면에 꽉 채워 찍은 사진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성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에 담기는가. 랭과 모도티는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면서 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이 자기를 보지 못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당신이 알아내야 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저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이 나올 수도 있다. - P100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가 "생각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파가 찍은 것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만화가들은 말풍선을 점선이나 하이픈으로 그려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사진가들에게는 그런 유용한 방법이 없다.) 사진이 발명된 순간부터 사진가들은 이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없애보려고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똑똑하고 진지한 - 예를 들어 칼라일 같은 사람을 이용해 그의 눈 뒤로 두뇌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1906년 앨버트 비글로 페인은 마크 트웨인의 집 현관 앞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했다.  - P102

 동등한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만난 것이다. 누가와 누구를이 정확히 동등하다.
친구 사이가 절대적으로 평등해지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이 순간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진에는 역사적이면서도 전기적인 순간이 담 - P121

겨 있다. 이 순간은 존 버거에 따르면 스트랜드가 찍은 인물사진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순간이 지속되는 시간은초 단위가 아니라 순간과 평생과의 관계로 측정된다. 스트랜드를 찍은 이 사진에서는 두 사람의 평생이다. - P122

우정은 어느 순간 함께 보낸 시간의 추억과 다가올 미래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에 이른다. 지나온 추억의 양이 미래에만들어질 추억보다도 많음을 무언으로 깨달으면서부터 우정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둘 사이의 우정은 추억밖에남지 않아 온전히 추억에만 기대게 되며, 그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끝내는 것이 최선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때문에 때로는 우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티글리츠와 스트랜드에게는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었다. 그 순간은 1932년 스트랜드가그의 말대로, 스티글리츠가 만든 새로운 갤러리인 "아메리칸플레이스를 떠나면서" 찾아왔지만, 두남자가 부인들에게 버림받은 그 여름 스트랜드가 찍은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그 시간을 - 그들에게 추억밖에는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 함께할미래는 없는 순간을 - 미리 보여주고 있다. - P124

그들사이에 나이 차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 사이에는 그들의부인들이 사실상 함께 도망가 버렸다는, 다른 종류의 동등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남으로써 아내의 부재 외에 그들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이드러났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그들에 관한 사실만이 남았다.
· 우정이 동등해지는 단계가 있다면 어느 한쪽이 그 단계가 지나간 것을 깨달아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양쪽 다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냉랭하고 불안한 평형이 새롭게 자리잡는다. 서로에게 느끼던 안정감과 편안함 대신 불안감이 찾아온다. 이 불안감은 - 그 증상 중 하나로-이에 대해 얘기할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심해진다. 스티글리츠의 수다가 끝나고스트랜드가 찍은 사진은 말하지 못해 남겨진 모든 것을 담고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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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뭔 말인지도 모를, 양자역학이니 뭐니 하는 문장들이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다니.


모치즈키가 논문을 발표한 지 1년 뒤인 2013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수학자 여러 명이 증명을 연구하기 위해옥스퍼드에 모였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며칠 동안은 열의가넘쳤다. 일본인 수학자 모치즈키의 모호한 논리가 이해력에굴복하기 시작했으며 사흘째 밤 커다란 진전이 있으리라는소문이 인터넷 토론방과 전문 웹사이트에 퍼졌다. - P78

나흘째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자 아무도 증명의 논증을 더는 따라갈수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치즈키가 세미나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P79

모치즈키 신이치가 자신의 추론을 증명하려고 만들어낸새로운 수학 분야가 너무 기이하고 추상적이고 시대를 앞선탓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스 캠퍼스에서 온 이론수학자는미래에서 온 논문을 연구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기로 이 논문을 접한 사람들은 다들 매우 논리적이지만, 논문을 읽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모치즈키의 체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만큼 따라갈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 체계가 첫눈에 보이지 않는숫자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모치즈키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연구자들이 내 연구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들의 뇌에 주입되어 오랜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사고 패턴들을 비활성화해야 한다. " - P79

절의 내부처럼 단아한 그의 연구실 창문에서는 다이몬지산이 보인다. 1년에 한 번 오본 축제 때 승려들은 그 산에서양팔을 뻗은 사람 모양의 거대한 한자大ㅡ를 태운다. 이글자는 ‘거대하다 크다. 기념비적이다‘라는 뜻으로, 어마어마한 호언장담을 표현할 때 쓰인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새수학 분야를 바로 이런 식으로 명명했는데, ‘우주적 타이히뮐러이론‘이라는 이름에는 겸양이나 농담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 P81

‘a+b=c‘ 추론은 수학의 뿌리에 가닿는다. 그것은 정수의덧셈 성질과 곱셈 성질 사이에 심오한 뜻밖의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만일 증명된다면 이 추론은 수많은 해묵은 난제를 마치 마법처럼 해결할 수 있는 막강한 연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치즈키의 야심은 그보다 훨씬 컸다. 그는 추론을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학자들로 하여금 정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도록 하는 새로운 유형의 기하학을창안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자 중한 명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창조력을분출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획기적으로 바꿨다. 모치즈키가 1996년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로텐디크의 추론 하나를 증명한 뒤였으며, 이 일본인 수학자가 아직 학생일 때 그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그로텐디크를 스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 P83

문이다. 수, 각 곡선, 방정식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으며 그어떤 구체적인 수학적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의 제자 뤼크 일뤼지는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사물의 조화에 남달리 민감했다. 새
‘로운 기법을 도입하고 주요 정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수학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공간은 그가 평생 천착한 주제였다. 그는 천재성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점의 개념을 확장했다. 미천한 점은 그의 눈길이 닿자 무차원의 위치에서 벗어나 복잡한 내부 구조를 품은 채 부풀어올랐다. 남들이 깊이, 크기, 너비가 없는 단순한위치를 본 바로 그곳에서 그로텐디크는 우주 전체를 보았다.
그토록 대담한 제안을 내놓은 사람은 유클리드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 P86

유능한 권투 선수였고 베토벤의 후기 4중주곡과 바흐에열광했으며 자연을 사랑했고 "태양과 생명으로 가득한, 자그맣고 나이 많은 올리브나무"를 존경했지만, 수학을 비롯한이 세상 무엇보다 더 몰두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의 글은 광기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어찌나 열정적으로 썼던지원고 여기저기에 연필심이 종이를 뚫은 자국이 남았다. 계산을 할 때면 공책에 방정식을 쓴 다음 거듭거듭 겹쳐 썼는데,
급기야 각각의 기호가 하도 굵어져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되었다. 그는 흑연을 종이에 긁는 신체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 P90

한 세대의 교수와 학생 전부가 그로텐디크의 꿈에투신했다. 그가 우렁차게 강연하면 그들은 필기를 하고 그의논증을 확장하고 초고를 써서 그에게 교정받았다. 공동 연구자 중에서 가장 헌신적이었던 장 디외도네는 해가 뜨기도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전날의 필기를 검토했다. 그러면 그로텐디크가 여덟시 정각에 교실에 들이닥쳐 새로운 개념들을 전개했는데, 연구소 계단을 오를 때 이미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것들이었다. 그로텐디크의 세미나는 열두 권의 책으로 묶였다. 2만 쪽이 넘는 이 대작은 기하학, 정수론, 위상수학, 복소해석학을 통합했다. - P91

그로텐디크는 하나의 방정식에 들어맞는 수학적 우주를통째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토포스는 무한해보이는 공간으로,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로텐디크는이것을 "이 세계 모든 왕의 모든 말과, 모든 가능 세계의 모든 왕의 모든 말이 한꺼번에 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넓고깊은 강바닥에 비유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면 완전히새롭고 50년 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변화만큼 급진적인 우주 관념이 필요했다. - P92

그는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든 제 의지대로 자고 일어나 연구에 온 정력을 쏟을 수 있었다. 아침에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낡은 남포등의 불빛 아래서 눈을찡그린 채 책상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이브 라드겔레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천재와 함께 연구하는일은 매혹적이었다. 이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P93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의 한 교수는 그를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연하는 것을 듣고서 처음 든인상은 우리의 지적 진화를 앞당기기 위해 머나먼 태양계의외계 문명에서 지구로 파견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로텐디크가 불러일으킨 수학적 풍경은 아무리 급진적이었을지언정 인위적이라는 인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학자의 훈련된눈으로 보면 이 풍경은 마치 자연환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텐디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보다는 풍경이 스스로자라고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마치 각각의 개념이제 나름의 생명 충동을 따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듯한유기적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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