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깊이 상처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갱생(다시 태어남)을 원한다. -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1991년)의 일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allbeen injured, profoundly. We require regeneration‘, not rebirth‘ and thepossibilities for our reconstitution include the utopian dream of the hope fora monstrous world without gender." 작은 따옴표는 필자.
내 책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수학, 미술, 음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룬 책이라는 평가다. 이 책은 세 사람에 관한 책이 전혀 아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안병서 옮김, 까치, 2017. (번역서 초판은 1999년, 원저는 1979년에 발행됨).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어야 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장춘익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 교육실천 20년을 만나다》, 탁선미·조한진희 외 9명 지음,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곰출판, 2022. - P9
이 책은 모든 지식이 이미 융합의 산물임을 상기한다. 이 책은 또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해 자신이 아는 바를 어떻게 연결할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떻게‘는 글쓴이의 가치관과 위치, 당파성, 이동, 다시 태어남 따위를 의미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왜 쓰는가"와 동격의 물음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나의 글쓰기 태도는 어떤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나는 이른바 ‘맨스플레인‘이 불편하다기보다 쓸모가 적다고주장해 왔다. 가르치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더큰 문제는 그 ‘맨스플레인‘에 가르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언어가 - P10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를모든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 교육은 그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맥락 없이 반복하고 가르친다. 공부가 사유 방식을 배우는 과정, 창조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불행은 바로 옆에 있다. 교육이 고용과 연결되지 않으며 실업이 만성화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동기도 흥미도없는 공부는 학교를 붕괴시키고 폭력을 낳는다. 정권을 초월해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펙 비리에 우리는 지쳤다.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아니라 가치관이다. ‘정의로운 가치에 맞지 않는 융합이라면,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지구 파괴에 쓰일 융합이라면,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는 박식(薄)한누더기 공부가 융합이라면, 그런융합이왜필요한가. 무조건적인 융합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 P11
왜 필요한 지식이 논의되고 생산되지 못하는가. ‘여성‘, 서울 지역 밖에 사는 이들, 몸이 아픈 사람, 나이 든 사람, 외로운 사람, 계급의 양극화가 교육 기회 박탈로 이어진 이들. 직장 생활이 힘든 사람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분단 체제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족주의에 매인 사람들………. 우리 사회 그누구도 여기에 속하지않는 이는 없다. - P12
우리는 모욕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할 언어, 더 나아가 더 나은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 대체불가능한 언어가 필요하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 대립적인(counter) 상황이 아닌데 대립으로 문제를 풀려니 해결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특징이 된 엉뚱한대립 구도나 이분법은 큰 문제이고, 이 문제에 약자들이 대응하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특히 약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3
여성 혐오에 저항한다고해서 남성을 혐오한다? 우선 여성이 ‘구사할 수 있는 혐오 언설‘과 남성의 그것은 양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시작부터 지는게임이다. 그것도 닮고 싶지 않은 이들과 같아지는, 추하게 지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남녀 임금 비율이 100:66 안팎인 사회에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주장이 호소력을 얻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사회 전체가 젠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젠더를 설명하는 것이지 ‘남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 P13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 - P13
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한국의 어느 예술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번 큰 상을 타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작은 세계에서 조그맣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도, 작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듯하다. 1700만 명이 본 영화 <명량>과 1만 명도 안 보는, 아니 소개되지도 못하는 영화는 아예 다른 장르다. 만드는 방식이 다르고 다루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이 ‘보편적인 독자‘를 초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내 글은 당파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융합으로 ‘대응‘해 왔고 이 책에서독자들과 공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 P14
공부에는 왕도가 있다. 물론 그 왕도는 지름길이 아니다. 왕도는 공부 방식과 태도,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에도 왕도가 있다. 내 생각에 글쓰기는 공부보다 좀 더 복잡하다. 장르도 다양하고 쓰는 행위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읽기나 생각하기라기보다는 ‘쓰기‘라고 답할 것이다. 공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쓰는 과정을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왕도가 있다면, 역시 요령이나 기술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 P14
돈이든 명예는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 P15
글쓰기는 내가 내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런 글쓰기의 핵심적인 방법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융합‘이다. 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는 융합 글쓰기를 지향했지만, 이 책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융합‘ 표현이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데그 뜻이 모호한 데다 최소한의 합의도 되어 있지 않아서 융합개념을 둘러싼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있다. 물론 이미 다양한관련서들이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나의 소견일 뿐이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있다. 융합은 흔히 말하는 "학문 간 대화, 통합(統合), 절충, 비교 더하기, 혼합・・・・・・ "이 아니다. - P15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밖에 없다. ‘칼이냐펜이냐‘ 논쟁은 끝났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지구에 봉사해야 한다. 융합의 의미를 빨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제주가 변방이 아니고 남쪽에서 보면 한반도의 관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를 강정 마을에 군사 기지를 세우려는 미국과 한국 국방부가 ‘가져갔다‘. 그들도 강정이 "세계의 관문"이 - P16
라며 관광과 군 기지를 결합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같은 말이지만 이해관계, 발화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융합의 다른 이름은 인문학 자체다. 흔히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유목적 사유,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융합은 이미 작동하고 있는 삶과 지식 생산의 원리인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고, 대학, 기업, 시민사회, 종교단체 등 많은 커뮤니티에서 화두처럼 자리잡았다. 통섭(通攝)*, 융합(融合), 다(多)학제적·간(間)학문적 자율전공,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이견은 없다. - P17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쓰고‘는 관심사가 - P18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이 내 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래서 ‘잡념‘이 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롭다.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있을까. - P19
장애인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대, 여성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횡단의 정치가 가장 적절하다. 그리고 여기엔 이미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축적한 지식이 있다. 하지만 남성도 여성도, 여성이 쓴 ‘학문적인 글은 잘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목적이 분명한 편이다. 당연히 내가 쓴 글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즉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은 폐기한다. 그리고 되도록 그 판단은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쓴 글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 연민은 글쓰기뿐만 아니라삶도 최악으로 이끈다. - P23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인문학 책은 팔리지 않는 세상이지만, 이 책이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작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미한 연결의 흔적이라도 남기기를, 개인의 독서 취향을 정치학으로 발진(發)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 P23
를…………. 말도 안 되는 과욕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 (journey), 변화(meta-morphosi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 넘어서기(閔値, 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사지의재조합, 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다시 생각하기 (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 (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 P24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수호‘처럼 기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이 말의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수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유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free from~)‘ 인가에 따라의미가 달라진다. 경쟁 사회, 소음과 먼지, 신분차별, 타인의 시선, 돈, 피곤한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극복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 대개는 투쟁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 - P28
반면 개인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이다. 나 역시 일 안 하고, 여행하고, 은둔하면서 책만 읽으며 내 맘대로 살고 싶지만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꿈만 꾼다. 소신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신대로 살려면 역설적으로 소신이 없어도 되는 삶,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한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노후에 비참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중대한 상실과 결핍을 극복하면서까지 소신을 내거는 이들은 드물다. 대개 소신발언)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중산층의관념이다. - P29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친다.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도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다.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 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P33
‘여성학 강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의 여러 직업 중 하나다. 여성주의는 내 부분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나를 ‘여성주의를온몸에 뒤집어쓴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학 강사는강의하는 내용 특성상 신체적·정치적으로 고된 직업이다. 지난 25년 동안 대학, 시민사회, 노동조합, 여성주의 모임, 기업 등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겪은 사연에 해석을더하면 책 몇 권이 나올 것이다. 대개 경험한 나조차 믿을 수 없는 희비극들이다. 심호흡으로 분노를 조절한 후 간단히 말하면모욕과 호기심이 주를 이룬다. 화학, 법학 같은 주제를 다룰 때와 달리 말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강의 내용이 페미니즘일 때 세상에 없던 일이 일어난다. - P34
애초부터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先除,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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