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에 아직도 동의하는 이들이 있을까. 교육이나 환경 문제는 중대한 일이어서 당장 필요에 따르기보다는 멀리 보고 큰 틀에서 정책을 세워야 한다고들말한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다. 비유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구 멸망이 눈앞에 있는데 언제 백년 후를 생각한단 말인가. 마르크스는 1883년에 사망했다. 마르크스의 사후 백 주년인 1993년이 PC통신 시대였던 걸 생각하면 지금 ‘발전‘ 속도는 얼마나빠른가. 백 년 전 지구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장매일 집계되는 코로나19 확진자 숫자가 코앞의 뉴스다. 2021년에는 북미 대륙 서부 기온이 49.5도까지 치솟으면서 수백 명이사망했다. 교육이 아니라 하루의 생존이 큰일, 대계(大計)다. - P129

학교의 역할은 공부를 가르치는 데만 있지 않다. 학교는 ‘가정처럼‘ 미래 세대를 위한 돌봄 기관이 되어야 한다. 지금은 가족도 학교도 아이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말 때가 왔다. 학교를없앨 수 없다면, 다른 학교를 만들어야 한다. - P133

융합은 초월적 위치에서 여러 가지 지식을 합하는 관념이 아니다. 현실에서 출발해 (rooting) 필요한 실천으로 옮겨 가는(shifting) 이동의 사고이자 해결책을 찾는 전술적 사고(실사구시)다. 현실 인식이 너무 늦으면 우리의 자리(뿌리)는 썩는다. 이글은 "타인의 편집된 삶과 나의 전체 삶을 비교하는 불행"이라는 문장을 읽은 후의 감상이다. 나는 근래 이보다 정확한 현실인식과 통찰을 읽은 적이 없다. 앞에서 말한 김영우 작가의 책에서 인용한 것인데 그의 중학교 3학년 자녀가 쓴 글이다. - P133

방송인이나 정치인의 학위 논문 표절은 일상의 뉴스다. 청문회에서 표절이 문제 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었던가. 우리사회는 표절을 관례(ritual)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통과 의례(ritual, ‘儀式)도 있다니! 의례가 아니라면 이 관대함을 설명할길이 없다.
대개 표절을 윤리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표절로받은 학위를 근거로 삼아 방송에 나와 큰돈을 벌거나 평생 고용의 수혜를 입는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공정거래행위가 아니므로 법적 제재가 가해져야 한다. 학계의 표절은 대중적으로 잘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더 횡행한다. 관련 전공자들은 알고 있지만 동료를 고발해서 좋을 일이 없다. - P134

인생 공부를 포함해 공부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일상, 읽기, 여행, 경험과 그 해석, 인간관계, 쓰기………. 그중에서도 나는 ‘쓰기‘가 공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외국어 공부를 할 때도 읽기, 듣기, 말하기, 쓰기 중 쓰기가 가장 어렵다.
쓰기가 최고의 공부이자 지식 생산 방법인 이유는 쓰는 과정에서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쓰기와 실험외에 모르는 것을 아는 방법은 많지 않다. 생각과읽기가 공부의 주요 수단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다. 수학 공부의이치와 비슷하다. 남이 풀어놓은 것을 이해하는 능력(읽기)과자기가 직접 푸는 능력(쓰기)은 완전히 다르다. 전자는 수학 점수가 안 오르는 지름길이다. - P138

이럴때는 글쓰기를 정지하고 모든 것을 재점검해야 한다. 쓰다가길을 잃은 느낌이 드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최초의 문제의식과 다른 내용을 쓰고 있거나, 자기 생각을 뒷받침할 사유 틀(‘이론‘)을 찾지 못해 ‘이론을 창시하는 고통‘을 겪고 있거나, 사례가 적절하지 않거나, 애초에 문제의식 자체가 틀렸다거나….
이 과정에서 내가 모르는 것, 부족한 것을 깨닫고 쓰기를 반복해야 한다. 겪어야만 깨달을 수 있고, 이때 새로운 지식이 생산된다. 과학자는 실험을 반복하고, 글쓴이는 쓰기를 반복한다. - P139

프로 운동선수나 세계적인 아티스트들은 연습을 거듭한다. 연습을 훈련(訓練)이라고 하는 이유다. ‘훈(訓)‘은 해석,
풀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몸에 도장을 ‘새길 만큼‘ 익힌다는 뜻이다. 우리는 위대한 운동선수나 예술가들의 영광을 보지만 사실 그들의 영광은 일반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연습한 몸의 결과다. 연습이 예술(art, 기술)이다. 공부는 쓰기가 연습이다. 글쓰기의 좌절에 익숙한 나는 ‘완벽한 글은 없어도 완벽한인생은 있지 않을까‘하는 망상에 자주 빠진다. - P139

새로운 글, 익숙하지 않지만 뭔가를 시도하는 글, 논쟁적인 글을 쓰려는 이들에게 표절 문화는 우주로 떠나고 싶을 만큼의 절망이다. 한국 지식 사회의 절도 문화는 왜 이리 당당할까.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중세가 안착했다. - P140

"아버지(master)의 연장으로 아버지의 집을 부술 수 없다."
이 말의 주인공인 미국의 시인 오드리 로드는 페미니스트, 흑인, 동성애자, 유방암 환자로 살았다. 로드는 자기만의 언어로현실을 인식하고 변화를 추구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그에게만 국한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기 언어는 ‘중층‘의 억압 속에 살았던 로드뿐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조건이다. - P143

언어의 역할이 분명히 있지만, 기본적으로 언어는 매일 마주치는 삶의 장벽이다. 나는 소통의 불가능성에 희망을 걸겠다. 소통이 가능하다는 환상은 절망과 분노로 바뀌기 쉽다. 세상에서통용되는 말들은 대개 나와 무관한 이들이 만든 말, 소위 이데올로기이다. 물론 그런 말조차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인생이대다수다. "속 시원히 한번 말해봤으면" 같은 소망을 품어보지만, 그 말을 누가 들어줄 것인가도 문제다. 이 시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몸부림이 아닐까. 코로나 시국에 이른바 유명인들이 모여 와인을 마시든 파티를 하든 누가 알겠는가. 그들 자신의 업로드로알려진다. 욕을 먹어도 좋으니 자기를 봐 달라는 이들의 표정은행복하다. - P144

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니 ‘아버지의 도구‘조차 제대로 그 기능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아니, 그래서 ‘아버지의 연장‘일까.
정확한 인식을 방해하는 단어가 산더미다. ‘노동 시장 유연성‘
‘성희롱‘ 같은 노동과 젠더에 관한 번역어들은 현실을 완전히왜곡한다. 기존의 언어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기 검열과 사회적 검열까지 겹치면 침묵이 답이다(글을 쓰지 말아야 한다). 내게 침묵은 완벽한 좌절 혹은 들끓었던 몸이 소진된 상태다. - 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사라지자

마취시킨 다음 통 말을 듣지 않게 될
나를 데리고 가서
사흘 동안 눈 속에 갇힌 사람처럼
그렇게 있다가
가지 않았던 길에 대해 고민할 것이다


그리고 사라지자


이번 생의 등판번호가
45 라 하더라도
이번 생의 좌석번호가
11b 라 하더라도
영원히 지휘자를 만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원래 손상되거나 훼손되기로 약속되어 있었으니
반드시 사라지자

아무리 이 삶이 틀렸다 하더라도
우리는 사라질 때 열쇠 하나를 숨기고
그 또한 의미가 될 거리는 순리를 기억할 것그리고 내 열쇠는 누가 줍게 되는지 염두에 둘 것

압축되어 당당히 사라지자 - P16

당신도 원래 바다였다
당신이 어떤 세월에 휩쓸리다 살 곳을 정했다고
흐르지 않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마라

모든 산은 바다였다
산의 정상에서 조개껍데기가 발견된다고
누군가 가져와 흘렸다고 생각하지 마라 - P17

사람의 금

많은 청귤을 자르다가
손가락을 크게 베고 몇 바늘을 꿰맸다
나는 평생 살을 꿰매일 따위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극단적으로 금이 갔다

한동안 붕대를 감고 사느라 시원하게 씻지를 못하고
손가락 형편이 나아져 목욕탕에 갔는데
죄다 보이는 건 사람 몸에 난 흉터다

꿰맨 자리
어긋난 부위
몸 한쪽이 움푹 패여 젓ㄴ룩일 수밖에 없는 걸음걸이
그나마 무사한 사람은 그동안의 나였나 싶다

그러다 하반신에 의료용 테이프를 붙이고
목욕하러 들어서는 한 사람을 보았는데
목욕의자에 앉아 떼어내는 테이프 길이만도족히 사 미터가 되는 길 걷눈질해서 보았다

태풍에 담이 허물어지면 남의 집 담만 보이고술에 되게 당한 어느 날 이후에는
술에 취해 집에 앉아 정신 놓은 사람만 보인다
자석 앞의 쇳가루처럼 당겨진다 - P46

퀘맨 손가락이 낫기만을 기다린 것처럼
매달리며 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봉합으로 살을 이으려는 것이
쩍 하고 금이 가 벌어진 사람과 사람의 처지를
이어보려는 안간힘하고 뭐가 다르겠나 싶은 것이다

붙지 않는 것들을 참 착실하게도 가려놓고 살고 있다 - P4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글의 주장과 ‘무관하게 일단 글은 잘 읽혀야 한다. ‘위대한소설가‘가 아니라면 문장이 짧고 간결해야 하는 건 기본이고수식어, 감탄과 개탄 같은 ‘감정적인 표현, 작은따옴표도 자제할수록 좋다.
이중 내가 가장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은 작은따옴표 사용을자제하는 일이다.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글쓰기, 창의적 글쓰기를 지향하는 이들에게 작은따옴표는 중요한 문제다. 작은따옴표는 기존의 의미를 재해석했다는 표식 중 가장 간단하게 사용할 수 있는 표식이다. 글쓴이는 작은따옴표를 표기함으로써 사용하는 단어의 뜻이 모호하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공지한다.
가령 내가 생각하는 자유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자유의 의미는 다르다. 표현의 자유가 대표적이다. 그러므로 내게 자유는 - P113

언제나 정의할 수 없는, 작은따옴표가 들어간 ‘자유‘일 수밖에없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쓰다 보면 문장은 온통 작은따옴표투성이가 될 것이다. 작은따옴표는 읽기를 방해한다. 독자를 생각하는 읽기로 안내할 수도 있지만, 보통은 가독성을 떨어뜨리고 문장을 지저분하게 만들기 쉽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도원래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였지만 작은따옴표를 생략했다.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는 정의하기 어려운 개념 혹은정명(正名)을 거부하는 경합하는 언설이다. 논쟁도 익숙해야 가능한데 일단 이 세 가지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낯설다. 내용을알기도 전에 못마땅해하는 이들이 더 많다. 잘사는 나라, 부국강병의 염원이 여전한 한국 사회에서 이 사상들은 왠지 기력이없거나 심지어 한가한 주제로 인식된다. 우연히 어느 경제 전문지에 실린 한 경영자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내 글에대한 이야기였다. 내 글이 이상하다는 요지였다. 발전주의를 향한 나의 문제 제기가 너무 신기한 나머지, 그 글에서는 비판이아니라 놀라움을 표현하고 있었다("대한민국에 경제 발전을 싫어하는 이도 있다니・・・・・."). - P114

법과 문학은 여성과 법, 흑인과 법과 같은 위상의 언설이 아니다. ‘법과 문학‘ 같은 주제에도 글쓴이의 관점이 들어갈 수 있겠지만 문학은 불법 행위의 구성 요건이나 형량을 좌우하는 영역은 아니다.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는 분과 학문이 아니라 융합에필요한 세계관이다. 하지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여성학과‘
‘환경대학원‘ 등 전공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평화주의의 경우
‘북한학‘이 운영되고 있어 더 복잡하다. - P117

융합은 정치(학)이다. 서로 다른 것들끼리의 접속이되, WAF처럼 목적이 분명한 사회 운동이다. 자본이나 폭력에 봉사하는융합인가, 증오와 파괴의 대안으로 작동하는 융합인가. 내가지향하는 생태주의, 여성주의, 평화주의의 공통점은 모두 발전주의에 저항한다는 점이다. 발전주의는 부국강병주의, 즉 국가나 공동체 간의 힘의 경쟁을 부추긴다. 강자들끼리 경쟁하기 위해 사회적 약자와 자연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발전주의의 결과가 지금의 팬데믹이다. 코로나 블루는 이 상태가 지속되리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우울감이지 ‘증상‘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주의를 멈추지 않는 한, 한국의 경우 수도권 인구 분산이라도 해야 ‘인류 멸망‘을 막을 수 있다. - P119

미국에서 9.11 사건이 벌어졌을 때, 텔레비전에 나온 어느여성 노인의 인터뷰 내용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부자입니다. 너무 많이 소비하고 낭비합니다. 더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됩니다. 미국은 이미 다른 나라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부를 나누고 타인을 향한 증오를 멈춥시다." 이 말은 자본주의에 대한 성찰을 요약한다. - P119

마르크스주의도 트럼프에게 투표한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근대 발전주의의 일환이었다. 발전주의적 사고를 누가,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K-방역‘과 백신 개발 모두 한계가 있다. 우리는 여성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 P120

학교와 군대는 근대 초기 산업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훈련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만드는 핵심 기관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기계가 일자리를 차지해서 노동자들이 기계를 부수는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다. 자본주의의 성장, 물질숭배, 첨단산업의 지속적인 등장은 모두 같은 말이다. 그 결과는 빈부 격차와 자연파괴다. 환경 파괴로 인한 고통도 가난한이들의 몫이다. - P123

영어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자 근대성의 요란한 흔적이다. 영국의 지배로 시작된 영어의 세계사적 등장은 북미 대륙을접수했고 이후 맥도널디제이션(McDonaldization)으로 불리는미국 중심의 글로벌 자본주의는 영어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지금은 어떠한가. 번역 기능이 있긴 하지만 매일 전 세계 수십억명의 인터넷 사용자들이 영어로 된 구글 문서를 찾는다.  - P123

‘모든 권력은 끝이 있다. 팍스 로마나는 망했고 팍스 아메리카나도 망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망해도 영어는 안 망한다.
영어로 쓰인 글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화 권력이다.
내가 아는 한 인문·사회·문학 분야에서 미국은 지식 생산이가장 활발한 나라다. 그들은 지식, 돈, 무기를 다 가졌다. 특히지식은 자원을 정의하고 분배하는 자원 중의 자원이다. 탈식민주의, 여성주의도 미국에서 가장 발달했고 많은 진보 담론이 미국에서 생산된다. - P124

미국 내 대학을 제외하고 1997년부터 2006년까지 계열 불문하고 미국 박사 취득자의 출신 학부 1위는 ‘동방의 작은 나라‘에 있는 서울대다. 사실, 이 부분이가장 놀라운 일이다. 미국 전체 대학 중에서도 버클리대에 이어 두 번째다. 중국과 인도가 그 뒤를 이었지만, 세 나라의 인구 비율을 고려할 때 이는 ‘편향‘ 정도가 아니다. 한국은 미국의한 주(州)다. 미연방 대접을 받지 못할 뿐이다. - P125

한국 사회에서 영어를 못하면 취업과 진학에 지장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시민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 능력은지식, 교양, 학력(學力)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실제로 영어와 직결된 업무를 하는 직장인이 몇이나 될까. 생각보다 많지 않다.
‘일반인‘에게 영어 공부를 하는 이유를 질문하면 "외국인에게길 안내를 하기 위해" "해외여행을 다니기 위해"라고 답하는 이들이 많다. 막연한 불안감이다.
- P125

가장 중요한 문제는 영어의 의미가 커질수록 한국 사회의 지식 생산이 후퇴한다는 사실이다. ‘선진국‘이 자국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하고 이를 보편적 지식이라고 우길 때 우리는 영어를공부한다. 지배자는 자국의 언어 능력만으로도 잘난 체하는데피지배자는 두 가지 언어 능력을 갖춰도 억압받으며 지배자의언어를 배우느라 정신이 없다. 두 언어를 동시에 잘하기 힘든상황에서 피억압자만 이중 노동을 하는 구조다. 식민주의가 작동하는 간단한 원리다. - P126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어공부에 관해 두가지 입장을 가지고있다. 첫째, 모국어가 정확해야 외국어도 의미가 있다. 그래야
‘2개 국어‘가 가능하다. 외국어도 모국어로 배운다는 이 간단한 이치를 왜 모를까. 둘째,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 자체는 지식이 아니다. 도구일 뿐이다. 영어를 절대시하기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어떤 분야든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가 되면 저절로통역이 제공된다. 세상은 콘텐츠를 원한다.
예전에는 동네에 하버드 보습학원 같은 소박한 이름이 흔했다. 최근 나는 다음과 같은 상호를 발견했다. "(캐나다의 ‘명문대) 맥길대 박사 직강" 초등학생 대상의 작은 학원이었다. - P12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하지만 《통섭》은 내가 읽은 번역서 중 번역자의 문화(적) 번역, 문제의식, 열정이 가장 잘 표현된 책이다. 융합 혹은 통섭을논할 때 번역자인 최재천 교수와 장대익 교수 이야기를 빠뜨릴수 없을 것이다. 번역은 다른 사회와 나의 현장(Local)을 동시에읽어내는 작업인데 이 책은 그 노고가 역력히 보인다. 번역자들은 몸부림쳤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에서 《통섭>은 ‘최재천의책‘으로 더 유명해졌다. 나역시 통섭(統攝)이 ‘consilience‘의가장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그래도 다른 표현을 제안해본다. 바로 ‘섭(攝)‘이다. 섭은 ‘당기다‘ ‘거느리다‘ ‘다스리다‘ 등 통섭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뜻을 - P44

담고 있다. 손(手) 하나와 귀(耳) 세 개가 결합한 ‘‘의 생김새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이중 섭)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그러므로여기에 ‘手‘를 결합해야 한다.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 일이 통섭인 것이다. 여기서 ‘잘 들리지 않는 소리‘는 소수자의 목소리, 가시화되지 못한 진실, 보이지 않는 현실, 특정한 시각에서만 발명(‘발견‘이 아니다)되는 사실 등으로해석 가능하므로 ‘‘섭"은 멋진 글자가 아닐 수 없다. - P45

여전히 윌슨의 《통섭》에는 명문이 즐비하다. 융합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다음이 아닐까.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되면 될수록 좋다. ‘실수는 빨리 할수록 좋다‘라는 격언은 과학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규칙이다. 과학자들도 자신이 만든 구조물과 사랑에 빠지고는 한다. 물론 나도 예외는아니었다. 불행히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평생을 헛수고하는 과학자들도 있다.....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 P47

선구안은 지식 전반, 국가 경영, 사회의 성숙, 개인의 인생 등모든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좋은 비유다. 비슷한 말로는 판단력, 안목, 착목, 문제의식, 질문이 있다. 공동체의 운명은 지도자와 구성원들의 선구안에 달려 있다. 타석의 선수가 매번 공을판단하듯 스트라이크존은 앎과 삶의 범위를 상징한다. 인생은거창하지 않다. 일상이다. 지식은 일상의 매 순간 필요한 수많은 양식(樣式糧) 중 하나일뿐이다. ‘학자‘도 다르지 않다. - P49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다고 해서 비정규직 문제와 고실업을 해결할 수 있는게 아니고 페미니즘을 공부한다고 해서 난민을 반대하고 박근혜 씨를 지지하는 페미니스트를 설득할 수 있는게 아니다. 우리의 현실은 당면한 볼 카운트에 있다. 지식은 ‘야구장‘이 아니라 ‘스트라이크존‘에서 요구된다. 얇은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타자의 포지션에서 시작된다. - P54

야구에서 1루수는 오가는 공을 가장 많이 상대하는 포지션이다. 야구 인생의 끝자락에서 가난한 구단에 겨우 입단한 그에게 ‘1루수‘는 경기장에서 주어진 포지션을 넘어 생계 수단이자 운명이다. 하지만 그가 언제 어디서나 1루수인 것은 아니다.
인생에서 그의 포지션은 다양할 수 있다. 내가 많이 권하는 책,
<가만한 당신>의 저자 최윤필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요컨대 나는 국적 · 지역·성·젠더 · 학력 차별의 양지에서 살았다. - P55

"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 이 말은 ‘네 주제(능력, 형편, 조・・・・)를 파악하라‘거나 ‘너 자신을 알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만 정의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므로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는 건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 속에서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삶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모르는 인간이 여론을 주도하거나 지도자가 될 때 공동체는 위험해진다. - P59

페미니스트들은 남성 페미니스트를 불편해하는 경향이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 쉽지 않은 포지션이다. 이들은 남성 사회에서도 여성 사회에서도 배척당하기 쉽다. 그래서 R. W. 코넬 같은남성성 연구자는 여러 차례 성전환 수술을 받기도 했다. 다른성별의 몸을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성별은 역지사지가어렵다. 자신의 자리(地)가 포지션이라면 이를 인식하거나 이동하는 과정이 역지(易地), 포지셔닝이다. 역지사지는 공감을 넘어서는 권력과 자원의 문제다. 기득권자는 자신이 손해 보는 역지사지가 싫고, 피억압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지속적으로인식해야 하는 상태 자체가 고달프다. - P60

동성애자의 커밍아웃은 실상 자기 커뮤니티로의 커밍인(coming in)이다. 팬데믹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는 필수다. 그러나 집(home)은 안전한가?
집(부동산)이 있는가? 탈코르셋 운동(외모주의 반대 운동)은 백번옳지만 중년 여성, 장애여성,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같은 의미일까? 지독한 위치성을 인식하는 일, 이것이 삶의 본질이다. - P61

자연, 동물과 구분되는 인간의 중요한 성격으로 여겨졌던 합리성은 근대성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그러나 지구 곳곳에서 여전히 멈추지 않는 홀로코스트는 이성의 예외 상태(공기)가 아니라 권력의 의지로서 이성의 실현이다. 전쟁은 기획된다. 이를테면 가정 폭력, 성폭력 가해자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후 여성주의, 현상학, 인류학 등은 인간에 대한 연구 주제를 몸으로 이동시켰다. 모든 개인은 ‘몸‘이다. 그 몸은 사회적이다(mindful body, social body). 마음은 몸의 ‘일부‘다. 마음이 몸을 빠져나갈 때 우리는 죽음을 맞는다. 사회적 몸으로서 인간개념은 개인과 구조의 이분법을 반박한다. 구조는 개인에게 큰영향을 끼치지만 개인의 대응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이 같은포스트구조주의는 구조주의와 자유주의 모두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융합의 산물이다. - P73

말하기와 듣기가 존중받는 사회에서는 개인도 덜 아프고 사회도 건강하다. 이것이 사회 윤리, 공중 보건으로서 상담이다.
자신의 취약함을 타인에게 말하는 행동은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일‘과 같다는 인식,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강박의 결과는우울과 자살의 사회다. 외로운 침묵, 말하기를 포기한 불신, 소통을 대신하는 물리적 폭력……. ‘환자‘의 말에 사로잡힌 ‘의사‘
프로이트를 다시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예비 내담자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평생을 살아갈 힘이 된다. 좋은 사람은 타인을 분석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장점과 자원을 알아내는데 주력하고 삶의 대처 능력을 함께 모색한다. - P81

하지만 서민의 입장에서는 재벌만큼이나 부자였고 재벌만큼의 규모는 아니지만 소소하게 부패했다. 그런데 재벌을 비판한 공으로 진보라는 명예와 함께 정권에 입성했다. 그 택시 기사는 세상을 알았다.
역사 발전을 가능케 하는 적대와 긴장이 사라진 시대에 기후위기가 겹쳤다. 이제 일자리는 사라질 것이고 몸 아프고 나이든 사람들에게 코로나는 계속될 것이다. 비참하고 고난이 가득한 삶이 확실한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다.
파국은 굉음을 내며 등장하지 않는다. 흐느끼는 소리라면 슬픔이 힘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 부자와 동일시를 넘어 과시로 내지르는 ‘플렉스‘는 파국보다 더 비극적이다. - P91

말은 ‘나의 마르크스주의는문해력은 자신의 가치관과 무지에 대한 자기 인식의 문제다.
그러므로 문해력 향상의 첫걸음은 에포케 (epoche, 판단 정지)이다. ‘나는 모른다‘는 자세가 공부의 시작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해력부터 의심해야 한다. 물론 우리 몸에는 이미많은 의미들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지하다고 가정하는 데는 굉장한 노력이 필요하다. 공부가 중노동인 이유다.
잠깐의 판단중지. 그 잠깐의 시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삶은 자기 진화의 과정이지 시비를 판단하는 행위가 아니다. 지식을 하나의 고정된 정보로 여기는 이들은 타인을 ‘가르치려 들지만, 알아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들은 우리를 가르친다‘. - P98

다른 사람의 몸에서는 다른 일이 벌어진다. 삶은 몸들의 개별적 화학이다. 요컨대 인생사에서 공부는 혼자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일이다. 요즘은 의학의 도움으로 생사에도 외부가 개입하지만 공부는 그렇지 않다. 맨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단 한 가지, 공부뿐이다. 취업이 안 되는 시대라면 공부를 하면 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工夫)는 글자 그대로 특정 분야에자기 몸을 훈련하여 장인(匠人)이 되는 것이다. 거창한 얘기가아니다. 공부는 세상이라는 공방(工房)에서 대장장이에게 망치질을 당하고 불에 녹아 쇳물이 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변환을 거듭하며 내 몸에 기(技)와 예(藝)를 새기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으로 대체 불가능한 완벽한 개체다. 사랑하는 이가 아플 때 대신 아플 수 없고,
‘입시 코디‘를 고용해도 안 되는 공부는 안 된다. 그 어떤 경우에도 타인이라는 별개의 몸을 내 맘대로 할 수 없다. 폭력과 고문이 인문학(humanities)의 주된 주제여야 하는 이유다. - P102

주변에 어떤 사람을 가까이 두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 P102

이 문제에 관한 한, 공부처럼 좋은 예도 없을 것이다. ‘좋은‘ 선생을 만나는 것만큼 큰 행운이 없다.
공동체를 꾸리거나 도(道)을 맺는 것이 함께 공부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두 방식 모두 제도 안팎에 동시에 존재한다.
학교, 배타적인 연애, 가족 제도는 제도권 안에서 가능한 대표적인 공부 모임이다.
반면 개인이 조직하고 참여하는 온·오프라인 공부 모임이나제도로부터 자유로운, 두 사람만의 관계인 도반이 있다. 공부에필요한 적대는 일대일 관계이므로 도반은 두 사람이어야 한다.
세 사람이면 대화가 흩어진다. 도반이 ‘유사 연애‘의 모습을 띠는 이유는 검열 없이 대화가 오가고 상대방의 뇌에 출/입할 수있을 만큼 둘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P103

동무(同舞)는 독무(獨舞)가 전제되어야 한다. 운이 좋으면 아름다운 결과가 나온다. 많은 이들이 그 어감 때문에 융합이 무언가를 합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융합은 합하는 작업이 아니라 융합하는 개별적 몸들이 접속하는 상태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각자의 가치관이 충돌하여 새로운 사유를 만들어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타인과 충돌할 자기만의 몸이있어야 한다. 이처럼 도반은 믿을 만한, 편한 길동무라기보다는자극과 긴장 관계에 가깝다. - P104

융합은 먼저 내 몸에서 일어나고 그 다음에 공동체나 도반에서 일어난다. 혼자 공부하는 방법 한 가지를 소개한다. 굶으면서 공부할 수는 없으므로 최소 비용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다.
걸을 수 있는 거리면 좋겠지만 아니라면 얼마의 교통비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큰 도서관에 가는 것이다. 가방도 필요 없다.
자료를 읽고 조사하면서 필요한 부분은 본인 메일로 보내면 된다. 이런 방식의 공부를 권한다. 누구든 어느 한 분야에도 관심없는 사람은 없다. 본인의 생계를 전문적 지식으로 발전시킬 수있으면 더욱 좋다.
스스로 융합된 몸이 되어야 다른 융합도 가능하다. 그리고그러는 편이 바람직하다. 융합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당파성의지속적인 생산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가치관의 충돌과 재생산이 없는 공동체나 도반이 무슨 소용인가. - P105

말할 것도 없이 팬데믹은 인류에 대한 지구의 복수다. 자본가와 발전지상주의자들은 재난이 자기 턱밑에 오더라도 ‘노아의 쪽배‘까지 부술 태세다.
과학 기술에 관한 가장 바람직하지 않은 논쟁 방식은 장단점나열이다(예를 들어 ‘세탁기로 여성의 노동이 줄어들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핵심은 인간의 삶과 환경의 변화이다. 기술의 발전으로 지금 은행은 희망퇴직자를 받고 있다. 자본주의 초기부터과학 기술의 최대 성과는 실업이었다.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인구는 79억 명이다. 반면 케냐에서는 지구에 홀로 남은 단 한 마리의 하얀 기린이 발견되었다고한다. 사람이 너무 많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람도, 다른 생명체도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후 위기는 인간 활동의
‘불가피한 부작용‘ 정도로 생각할 문제가 아니다.언제까지 방역 시대를 살 것인가. 자연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분명히 할시기가 왔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어야한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우리는 모두 깊이 상처 입었다. 우리는 부활이 아닌 갱생(다시 태어남)을 원한다. -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1991년)의 일부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We have allbeen injured, profoundly. We require regeneration‘, not rebirth‘ and thepossibilities for our reconstitution include the utopian dream of the hope fora monstrous world without gender." 작은 따옴표는 필자.



내 책 《괴델, 에셔, 바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수학, 미술, 음악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다룬 책이라는 평가다. 이 책은 세 사람에 관한 책이 전혀 아니다-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 - 영원한 황금 노끈》,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지음, 박여성·안병서 옮김, 까치, 2017. (번역서 초판은 1999년, 원저는 1979년에 발행됨).


페미니즘이 네 주장의 설득력을 보증해주는 것이 아니라. 너의지식이 너의 페미니즘에 설득력을 가져다주어야 해. 페미니즘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도 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어야 사람들이 네 페미니즘도 신뢰한단다. - 장춘익

삶을 바꾼 페미니즘 강의실 - 장춘익 교수의 여성주의 교육실천 20년을 만나다》, 탁선미·조한진희 외 9명 지음, 장춘익교육실천연구회 엮음, 곰출판, 2022. - P9

이 책은 모든 지식이 이미 융합의 산물임을 상기한다. 이 책은 또 독창적인 글쓰기를 위해 자신이 아는 바를 어떻게 연결할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어떻게‘는 글쓴이의 가치관과 위치, 당파성, 이동, 다시 태어남 따위를 의미한다.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일까. 이 질문은 "왜 쓰는가"와 동격의 물음이다. 나의 삶과 글쓰기와 사회는 어떤 관계인가. 나의 글쓰기 태도는 어떤 가치관에서 나온 것인가. 비슷한 말 같지만 조금 익숙하지 않은 방식으로 표현하면 다음과같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어디에 있으며 나의 글쓰기는 어떤 사고방식 때문에 가능했는가."
나는 이른바 ‘맨스플레인‘이 불편하다기보다 쓸모가 적다고주장해 왔다. 가르치려는 태도도 문제지만, 더큰 문제는 그 ‘맨스플레인‘에 가르칠 만한 게 없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언어가 - P10

쓸모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언어를모든 사회에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존의 제도 교육은 그들의 오래된 이야기를 맥락 없이 반복하고 가르친다. 공부가 사유 방식을 배우는 과정, 창조의 과정이 되지 못하는 이유다. 불행은 바로 옆에 있다. 교육이 고용과 연결되지 않으며 실업이 만성화된 플랫폼 자본주의 시대에, 동기도 흥미도없는 공부는 학교를 붕괴시키고 폭력을 낳는다. 정권을 초월해그들만의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스펙 비리에 우리는 지쳤다.
새로운 지식, ‘나‘와 지구를 살리는 지식을 생산하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공부가 필요하다. 융합 글쓰기는 그중 하나다.
융합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이 아니라 가치관,
연결 능력이다. 평화학, 여성학, 환경학은 하나의 학문 분과가아니라 가치관이다. ‘정의로운 가치에 맞지 않는 융합이라면,
자본주의의 양극화와 지구 파괴에 쓰일 융합이라면, 모든 정보를 끌어모으는 박식(薄)한누더기 공부가 융합이라면, 그런융합이왜필요한가. 무조건적인 융합은 바람직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다. - P11

왜 필요한 지식이 논의되고 생산되지 못하는가. ‘여성‘, 서울 지역 밖에 사는 이들, 몸이 아픈 사람, 나이 든 사람,
외로운 사람, 계급의 양극화가 교육 기회 박탈로 이어진 이들.
직장 생활이 힘든 사람들,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 분단 체제 아래 고통받는 사람들, 수면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 가족주의에 매인 사람들………. 우리 사회 그누구도 여기에 속하지않는 이는 없다. - P12

우리는 모욕당했을 때 자기를 보호할 언어, 더 나아가 더 나은삶을 설계할 수 있는 자기만의 언어, 대체불가능한 언어가 필요하다. 대안적 언어는 ‘내로남불‘ 경쟁이나 ‘여혐/남혐, 진보/보수‘의 대립 구도와 완전히 다른 길을 연다.
대립적인(counter) 상황이 아닌데 대립으로 문제를 풀려니 해결될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특징이 된 엉뚱한대립 구도나 이분법은 큰 문제이고, 이 문제에 약자들이 대응하는 양상이 우려스럽다. 특히 약자는 이러한 이분법적 상황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존의 언어는 약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 P13

 여성 혐오에 저항한다고해서 남성을 혐오한다? 우선 여성이 ‘구사할 수 있는 혐오 언설‘과 남성의 그것은 양적으로 비교가 안 된다. 시작부터 지는게임이다. 그것도 닮고 싶지 않은 이들과 같아지는, 추하게 지는 게임이다. 예를 들어 남녀 임금 비율이 100:66 안팎인 사회에서 남성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주장이 호소력을 얻는 이 당황스러운 상황은 사회 전체가 젠더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젠더를 설명하는 것이지 ‘남혐‘을 퍼뜨리는 것이 아니다. - P13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작더라도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기때문이다. 내 글을 읽는 독자가 적더라도 최선을 다해 다른 세계를 만들고 싶다. 자본에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 - P13

계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많은 글 쓰는 이들의 고민일 것이다. 한국의 어느 예술 감독‘은 해외 영화제에서 여러 번 큰 상을 타고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작은 세계에서 조그맣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도, 작지만 새로운 세계를 열망하는 듯하다.
1700만 명이 본 영화 <명량>과 1만 명도 안 보는, 아니 소개되지도 못하는 영화는 아예 다른 장르다. 만드는 방식이 다르고 다루는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글이
‘보편적인 독자‘를 초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다. 내 글은 당파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장에서 실패한다면, 그 또한 쓸 이유가 없다. 나는 이 문제에 융합으로 ‘대응‘해 왔고 이 책에서독자들과 공유를 시도해보고자 한다.
- P14

공부에는 왕도가 있다. 물론 그 왕도는 지름길이 아니다. 왕도는 공부 방식과 태도, 동기와 관련되어 있다. 글쓰기에도 왕도가 있다. 내 생각에 글쓰기는 공부보다 좀 더 복잡하다. 장르도 다양하고 쓰는 행위 자체가 공부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공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읽기나 생각하기라기보다는 ‘쓰기‘라고 답할 것이다. 공부는 내가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인데,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은 쓰는 과정을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에 왕도가 있다면, 역시 요령이나 기술 차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결국 가치관의 문제다. 글을 쓰는 사람은 - P14

돈이든 명예는 자기실현이든 고통의 승화추구하는 바가 있다. 다시 말해 모든 글쓰기는 왜 쓰는가에 따른‘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 P15

글쓰기는 내가 내 몸을 타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그런 글쓰기의 핵심적인 방법이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융합‘이다. 나는 이제까지 나름대로는 융합 글쓰기를 지향했지만, 이 책에서 그 의미를 분명히 하고 싶다.
가장 큰 이유는 ‘융합‘ 표현이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데그 뜻이 모호한 데다 최소한의 합의도 되어 있지 않아서 융합개념을 둘러싼 논의가 필요하다는 데 있다. 물론 이미 다양한관련서들이 출간되어 있다. 이 책은 나의 소견일 뿐이다. 하지만 명백한 사실은 있다. 융합은 흔히 말하는 "학문 간 대화, 통합(統合), 절충, 비교 더하기, 혼합・・・・・・ "이 아니다. - P15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밖에 없다. ‘칼이냐펜이냐‘ 논쟁은 끝났다. 어떤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가에 따라 공동체의 운명이 달라진다.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언어는 약자와지구에 봉사해야 한다. 융합의 의미를 빨리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예전에 제주가 변방이 아니고 남쪽에서 보면 한반도의 관문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논리를 강정 마을에 군사 기지를 세우려는 미국과 한국 국방부가 ‘가져갔다‘. 그들도 강정이 "세계의 관문"이 - P16

라며 관광과 군 기지를 결합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같은 말이지만 이해관계, 발화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융합의 다른 이름은 인문학 자체다. 흔히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유목적 사유,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다.
융합은 이미 작동하고 있는 삶과 지식 생산의 원리인데, 에드워드 윌슨과 최재천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개념이 되었고, 대학, 기업, 시민사회, 종교단체 등 많은 커뮤니티에서 화두처럼 자리잡았다. 통섭(通攝)*, 융합(融合), 다(多)학제적·간(間)학문적 자율전공, 과학과 인문학의 만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이견은 없다. - P17

글쓰기가 잘 되지 않을 때, 말문이 막힐 때, 표현할 언어를찾지 못할 때가 있다. 이런 곤란은 ‘작가‘의 일상이 아니라 ‘인간‘의 조건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해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니 나의 경우 글을 잘 쓰고 못쓰고‘는 관심사가 - P18

아니다. 내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정확히 쓰는 것이 관건이다.
글이 내 몸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그래서 ‘잡념‘이 몸을 점령하고 있을 때, 이런 순간이 가장 괴롭다.
어떻게 하면 나를 붙잡고 있는 ‘아는 것‘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지금 내게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어떤 기존의 언어가 새로운 관점을 방해하고 있을까? 이 과정을 내 몸은 견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용기를 내서, 잠깐 각성하는 쉬운 ‘부활(rebirth)‘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갱생(regeneration)‘을 할 수있을까. - P19

 장애인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대, 여성의 입장에서 국가주의를 넘어선 연결을 고민할 때 새로운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횡단의 정치가 가장 적절하다. 그리고 여기엔 이미 한국의 여성주의자들이 축적한 지식이 있다. 하지만 남성도 여성도, 여성이 쓴 ‘학문적인 글은 잘읽지 않는 듯하다.
나는 정치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글쓰기의 목적이 분명한 편이다. 당연히 내가 쓴 글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이 들면, 즉 새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그 글은 폐기한다. 그리고 되도록 그 판단은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쓴 글을 향한 사랑을 버리지 않으면 ‘옛 사랑의 그림자‘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처럼 자기 연민에 빠지기 쉽다. 자기 연민은 글쓰기뿐만 아니라삶도 최악으로 이끈다. - P23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고 인문학 책은 팔리지 않는 세상이지만, 이 책이 마음이 통하는 사람끼리 작은 커뮤니티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되기를 희미한 연결의 흔적이라도 남기기를, 개인의 독서 취향을 정치학으로 발진(發)시키는 데 도움이 되기 - P23

를…………. 말도 안 되는 과욕이 이 책을 가능하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여정 (journey), 변화(meta-morphosis), 프레임 조정(framing), 변환(transform), 횡단(trans-verse), 문턱 넘어서기(閔値, threshold), 경계선 안팎 넘나들기(bordering), 협상(tuning), 직면(facing), 온몸의 재구성(사지의재조합, re-membering), 거리낌 없는 수용(embracing), 매사를다시 생각하기 (rethinking), 자신에게 다시 돌아오기 (re-flection)의 과정이 되길 바란다. - P24

한국 사회에서 통용되는 단어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수호‘처럼 기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지구상에서 이 말의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민주주의는 수호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자유의 의미는 ‘무엇으로부터 자유(free from~)‘ 인가에 따라의미가 달라진다.
경쟁 사회, 소음과 먼지, 신분차별, 타인의 시선, 돈, 피곤한인간관계로부터의 자유…………. 이처럼 자유의 개념은 극복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모두 투쟁으로 쟁취해야 한다. 대개는 투쟁이 힘들어서 그냥 부자유 상태로 산다. - P28

반면 개인적 차원의 자유가 있다.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삶은 많은 이들이 꿈꾸는 인생이다.
나 역시 일 안 하고, 여행하고, 은둔하면서 책만 읽으며 내 맘대로 살고 싶지만 모두 돈이 있어야 가능하므로 꿈만 꾼다. 소신대로 살기 어려운 이유도 마찬가지다. 소신대로 살려면 역설적으로 소신이 없어도 되는 삶,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이어야한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거나 노후에 비참해질 위험을 감수하고 중대한 상실과 결핍을 극복하면서까지 소신을 내거는 이들은 드물다. 대개 소신발언)은 잃을 것이 많지 않은 중산층의관념이다. - P29

인간은 현재를 어떻게살고 있는가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는 존재이다. 본질적인 상태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내가 누군데!" "내가 누군지 알아!"
를 외친다. 자기가 누구라는 사실을 이미 정해놓고, 그것도 불안해서 다른 사람에게 재차 확인하는 것이다. 대답은 한 가지다. "왜 그걸 저한테 물으세요?"
니체, 데리다, 버틀러를 잇는‘ 현대 철학의 가장 큰 성과는인간의 본질이란 것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인간은 단지 자기행위로서 구성 중(in process)인 존재다. 사는 대로 생각하자. 그것이 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 P33

‘여성학 강사‘는 비정규직 노동자인 나의 여러 직업 중 하나다. 여성주의는 내 부분적 가치관이다. 하지만 나를 ‘여성주의를온몸에 뒤집어쓴 존재‘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여성학 강사는강의하는 내용 특성상 신체적·정치적으로 고된 직업이다.
지난 25년 동안 대학, 시민사회, 노동조합, 여성주의 모임,
기업 등에서 여성학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겪은 사연에 해석을더하면 책 몇 권이 나올 것이다. 대개 경험한 나조차 믿을 수 없는 희비극들이다. 심호흡으로 분노를 조절한 후 간단히 말하면모욕과 호기심이 주를 이룬다. 화학, 법학 같은 주제를 다룰 때와 달리 말하는 사람이 여성이고 강의 내용이 페미니즘일 때 세상에 없던 일이 일어난다. - P34

 애초부터백인 남성 외의 이들은 선제(先除, foreclosure)되었다. 지동설부터 여성주의까지 새로운 사유는 어느 시대나 파문과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러니 나를 억압하려고 만든 말에 답하려 하면 백전백패다. 융합적 사고는 언어의 전제를 알고 자기 관점에서 기존지식에 대응하는 사고방식이다. ‘답정너‘는 폭력이다. 질문을 되돌려주거나 말을 궤도 밖으로 끌어내 ‘그들을 낙후시키자.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