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과 혼자인 상태는 다르다. 혼자라고 해서 꼭 외로운 것은 아니다. 혼자라고 느낄 때는 외롭지만, 자기만의 세계에서 스스로 충만한 시간은 외롭지 않다. 인간이 외로울 때는 상대방(사회)과 대화가 통하지 않거나 외부를 지향하는 경우이다. 외로움을 잘못 해결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데이비드 리스먼의 《고독한 군중》은 우리가 왜 혼자 있을 때보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더 외로운지를 설명해주었다.
외로움은 나와 어떻게 만날 것인가, 즉 자기 자신과 맺는관계에 관한 질문이다.  - P9

그래서 객석에서 나 혼자 본 영화가 생각보다 꽤 있다. 와타나베 켄이 주연한 〈내일의 기억〉,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타임 투 리브〉, 이 책에 꼭쓰고 싶었으나 쓰지 못한 페르난두 메이렐리스, 카티아 룬드감독의 걸작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이 그런 경우다. 이영화는 마지막 상영일, 마지막 회차에 보았다. 늦을까 봐 광화문 ‘씨네큐브‘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모른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가 방점이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한다‘. 그렇게 된다면, 역설적으로 천만 영화는 사라질 것이다(물론 배급 시스템이 문제지만). 내가 원하는 사회는 각자의 해석이 가시화되고, 다양한 목소리들이 이어지는 사회다. - P13

이때부터 영화는 정말로 책이 되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영화 ‘보기‘가 아니라 영화 ‘읽기‘라고 표현하는데, 이미지나 음악에 무지한 내게 영화는 원래부터 읽기였다. 영화제에서 만난 영화들은 한국 사회에서는 ‘절대로‘ 생산될 수 없는지식을 제공했다. 내 경험너머 새로운 앎의 세계, 나는 고급도서관을 통째로 가진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알기 위해 영화를 본다. ‘지식을 습득한다‘와
‘안다‘는 것은 다르다. 안다는 것은 깨닫고, 반성하고, 다른 세계로 이동하고, 그리고 타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과정이다. 이것이 인생의 전부 아닐까. 영화는 나의 세계를 확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인생 문제가 영화에서
‘대부분‘ 해결되기 때문에, 나는 그다지 타인이 필요치 않게되었다. 나만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혼자있고 싶다.  - P19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것은 독후감을 쓰는 것과 비슷하다. 다만, 더 어렵고 더 즐겁다. 이 책을 쓰는 시간이 행복해서
‘쓰기를 아껴 가며‘, 하루에 20장 ~ 30장씩만 썼다. 이 책은 ‘영화 오타쿠‘의 타인에게 말 걸기이다. 나의 감상문이므로 나를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지나치게 드러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는 행위는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내가 나를 알게 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후회도 없다. 한 가지 확실하게 배운 점은, (모르지 않았지만) 내가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이다. - P20

보는 영화마다 내 인생의 영화가 된다. 모든 영화에 내 사연이 있다. 나는 특히 동일시의 여왕이다. 영화를 볼 때마다나는 여러 사람의 여러 인생을 산다. 전미선의 열연이 인상적이었던 〈연애〉(2005년)는 여성으로서 ‘끔찍한‘ 영화였지만, 그녀는 바로 나였다. 외로운 여성을 이용하는 남자들…………. 조용한 남자, <콰이어트 맨>(2007년)은 직장에서 총기 난사를 꿈꾸며 늘 혼자 도시락을 먹는 외톨이 밥 맥코넬(크리스찬 슬레이터분)의 이야기인데, 이 역시 평소 나의 모습이다.
하여간, 나는 영화를 보는 ‘지‘가 없다. 나는 장률이나미하엘 하네케, 고레에다 히로카즈, 마를레인 고리스, 데이비드 크로넌버그, 두치펑의 영화를 거의다 본, 그리고 여러 번본, 이들의 광팬이다. 이들의 영화 세계는 매우 다르다. 한마디로, 나의 영화 취향과 이데올로기는 ‘문란‘하기 짝이 없다. - P21

한국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인 영역은 북한이나 섹슈얼리티가아니라 가족 담론이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문제적인 제도, 가장 부패한 제도, 가장 비인간적인 제도는 가족이다. 가족은 곧계급이다.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성차별을 만들어내는 공장이다. 부(富)뿐만 아니라 문화 자본, 인맥, 건강, 외모, 성격까지 세습되는 도구다. 간단히 말해, 만악의 근원이다. 과장이아니다. 동성애,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도 가족과 연결되어있다. ("남자 며느리가 웬 말이냐!") - P27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인간관계다. 사랑은 그중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다. 사랑은 모호한 개념이고, 계산할 수없는 노동이며, 돌변하는 퍼포먼스다. 지금 <하얀 궁전(whitePalace)>을 본다면, 거의 판타지다. 계급이 다르면 사는 동네도 다른 세상인데, 사랑은 무슨. - P35

<인 더 컷〉은 이 공식을 뒤집는다. 이 영화에서는 욕망으로 고통받으며 사랑에 빠질까 봐 고뇌하는 사람이 여성이고매력적이나 치명적인 유혹자는 남성이다. 여성이 유혹자가 아니라 유혹당하는 사람으로 재현되며, ‘여성‘도 갈등, 사유, 선택, 책임 같은 인간의 행위를 하는 살아 움직이는, 변화하는존재가 된다. 행위자로서 여성, 역사적 주체로서 여성, 그리고여성의 성적인 욕망은 남성 사회를 위협한다. 여성이 원하는것은 언제나 그 사회의 경계와 만나고, 결국 정치적 갈등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라고말로이가 불평하자, 프래니는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게될까 봐 두려워."라고 말한다. - P50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정의되지도 않고 알 수도 없는 ‘여성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게무기력과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 프로이트뿐만 아니라 대개의남성들에게 여성은 ‘검은 대륙‘이다. ‘검은 대륙‘에 접근하지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남성들이 짜증스럽고 히스테리컬하게 말한다. "도대체 요점이 뭐야! 원하는 게 뭐야!" - P50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변화시킨 사람을 사랑한다. 영원한사랑 - 일부일처제, 배타적인 낭만적 사랑- 을 믿고 실천하는 자의 고통은 상대가 자신을 변화시킨 그 순간을 영원한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 순간을 지속시키기 위해, 흘러가는 시간을 붙잡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고통은 필연적이다. 조증()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면,
대개 사랑의 황홀감은 몇 개월 이상 지속되지 않는다. 인생의매 순간을 혁신하며 ‘나날이 새롭게(日) 사는 사람은매우 드물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중단없는 상호 발전을 통해 관계의 질이 진화하지 않는다면, 그 뒤시간은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권태와 제도를 통한 감정의 구속만이 남을 뿐이다. - P68

사랑은 유기체다. 그래서 모든 사랑은 부패한다. 문제는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변치 않아야 하는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이다. <디 아워스>는 이 오래된 질문을 성찰적인 남성(감독 혹은 게이인 리처드)의 시선으로 새롭게 던진다.
클라리사는 30년 전 연애의 판타지에 평생 동안 매달린다. 레즈비언 파트너가 있는데도, 아니, 심지어 파트너의 격려와 위로, 노동까지 동원하여 리처드를 돌본다. 이에 대한 리처드의답변은, "이제 나를 그만 주체로 만들고 네가 주체가 되어라."
라고 말하며, 사랑의 대상이 되어줌으로써 ‘그녀를 위해 살았던 생을 마감한다. 그녀 눈앞에서 실행한 그의 자살은 그녀에대한 복수이다. - P69

몇 년 전 나는, 오랫동안 몰두해 온 어떤 관계의 상실을인정해야만 했다. 물 밖으로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숨이 가빠끊어질 것 같았고 매일 밤 흐르는 눈물로 귀에 물이 찼다. 그누구의 위로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한 친구가 이렇게 말해주었다.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어." 이 말이 나를 살렸다. 지금의 나는, 나의 일부분일 뿐이다. 현재 나의 감정, 고통, 기쁨,
슬픔, 지식, 업적………… 이 모든 것들은 곧 과거의 것이 된다. 그리고 과거는 돌아오지도 않고 반복되지도 않는다. "어제를 잊자." - P70

고통이 고통스러운 것은 그것이 계속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그 어떤 것도 계속되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한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은 인생이 허무하다는 뜻이 아니다.
인생에는 상(常)의 상태가 없다는 것, 즉 삶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는가.
살아 있는 한,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한,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한,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한다.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삶은 곧 움직임(movement)이고, 움직임은 변화하는 순간(moment)들의 분절적인 연속이다. 고로 영원한 사랑도 안전한 삶도 없다. - P70

여성들 간에는 차이가 있다. 여성들은 다 다르다. 그러나나는 메릴 스트립이 많은 여성들에게 인생의 롤모델이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무슨 말을 더 보태리. 지적인 이미지가 강한배우지만 그가 젊은 날 출연했던 〈디어 헌터>(1978년),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1979년), <소피의 선택>(1982년)을 보면 메릴 스트립은 ‘미모의 배우‘다.
메릴 스트립은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 연극에 출연했지만 나는 주로 그녀의 ‘로맨스‘ 영화들을 좋아한다. 물론, 간단한 로맨스는 별로 없다. 로버트 드 니로와 <폴링 인 러브〉, 로버트 레드포드와 <아웃 오브 아프리카>, 클린트 이스트우드와<매디슨 카운티의 다리>……특히 <폴링 인 러브>의 기차 장면,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모차르트…… 사실 나 같은 ‘오타쿠에게 영화는 이런 이야기들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계 걱정 없이 혼자, 혼자 본 영화를 혼자 생각하면서 가슴 뛰다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완벽한 인생이다. - P74

"영화 평론가 김혜리 씨"다. 염치없지만 그녀의 언어를 빌리는 것이 낫겠다. "음악성은 이 배우의 특기가 아니라 연기의연장이다. 영화 속 메릴 스트립의 노래와 율동은 언제나 퍼포먼스라기보다 액팅에 가깝다. 즉, 노래 한 곡을 남부럽지 않게흡족하게 공연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사나 표정 연기와같은 맥락에서 노래의 매너와 감정을 통해 인물의 퍼스낼리티를 표현한다는 의미다. 가무에 능한 많은 배우 가운데에서도메릴 스트립에게 유독 돋보이는 이 속성은 어디서 오는 걸까?
예전 인터뷰에서 스트립이 밝힌 음악을 듣는 방식이 힌트가될 법하다. 어린 시절부터 메릴 스트립은 노래 자체보다 가수의 들숨과 날숨, 거기 실린 감정에 귀 기울이는 습성이 있었다고 한다. 달리 표현하면 음악 너머 노래하는 인간의 상태가 주된 관심사라는 의미다."(<씨네21> 1070호) 그녀의 의견이 그대로 반영된 장면이 〈The winner takes it all> 5분이다.  - P76

 그리움으로 인생을 견뎌 온주인공이 드디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 별거 중인 그가 운영하는 식당은 문 닫기 직전이다. 시간은 없고 상대의 마음도확신할 수 없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먼 곳에서 온 주인공은 오늘밤 어디로 갈까, 어디서 잘까, 온 길을 되돌아갈까. 내 심장은두근거렸다. 식당 테이블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의 간격은 50cm쯤 될 것이다. 어색한 대화와 긴장………… 상대의 말 한마디, 몸짓 하나하나가 상처가 되고 불안하다. 영화는 두 사람이 손을잡으며 웅크린 듯 포옹하는 모습으로 끝난다. 그렇게 부자연스런 자세도 처음 본다. - P96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이 지루하고 아까운 유형과 파트너와의 관계가 좋은 사람들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를 수밖에없다. 나는 내내 애달프고 쓰라리고 슬펐는데, 내 친구들은 마이애미의 해변처럼 행복하고 밝은 영화라고 했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 완전히 다른 결론이 났다.
새삼스러울 것 없는 얘기지만,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 P97

나는 말세를 억지로 지속시키려는, 매사에 열심인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끝난 세상의 지옥도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을 대신해, 세상이 끝난 이후의 모든 고통을 감당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교실의 아이들은 서로를 이지메하고, 여학생을 골라 윤간한 후 ‘원조교제‘ 시장에내보낸다. 주인공의 단짝은 ‘악마‘가 되어 학교를 지배하고현실에서 이지메를 당하는 주인공은 온라인 공간에서 위안을찾는다. - P103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주체이자 타자이다. 물론 이것은 곡예다. 주체가 되는 방식은, 여성이지만 남성의 규범을 따르는 ‘주변부 남성‘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타자 되기는 전략적선택일 수도 있고 낙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성폭력과 성매매라는 제도에 강제당함으로써 성적 타자로 만들어진 상태에서는, ‘반(反)여성‘이 되어야 한다. 남자들이 원하지 않는 여자가되어야 한다. 이 영화에서는 삭발, 즉 자원으로서 외모를 버리는 것이다. - P106

나만의 영화 분류 방식이 있다. 별다른 원칙은 아니고 그냥 주관적 느낌이다. 쓸쓸한 영화, 치열한 영화, 감독이 궁금한 영화, 깊은 영화, 처절한 영화, 기가 막힌 영화, 깨달음을 주는영화, 저우언라이 같은 영화, 트럼프 같은 영화・・・・・・ 이런 자의적인 구분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 유형이 있다. 바로 주인공을 사랑하고 존경하게 되는 영화다. 이때 등장인물은 현실이 된다. 인생의 동반자로 나는 그/그녀와 함께 산다.
<타인의 삶>의 주제는 다층적이고 복잡하다. 어느 진보신문‘에서, 이 영화의 주제를 "자유의 소중함, 도청과 국가 권력의 문제"라고 쓴 기사를 읽고 한국 사회답다고 생각했다. - P108

사랑이나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것은 ‘쉽다‘. 그것은 동일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전엔 적대했으나 지금은 선망하게된 타인, 나는 다가갈 수 없는 다른 세계에 사는 타인을 위해희생하는 일은 경험하기 힘든 인간성이다. 한마디로 질투하는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상, 사랑, 권력으로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만이 변화시킬 수 있다. 이작품은 타인의 삶이 나의 삶에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으며, 나는 타인을 위해 얼마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인간인가를 질문한다. - P110

이 영화가 ‘내 인생의 영화‘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혐인증인 나에게 ‘다른 인간‘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해주고, 인간도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내가 더 타락하지 않도록 도와주고 격려해준다.
비즐러의 도움으로 생존하게 된 예술가(제바스티안 코흐분, <블랙북>에서도 멋있었다)는 비즐러를 위해 책을 쓴다. 비즐러는 서점에 전시된 자기 이야기를 펼쳐보고, 카메라는 멀리서 서점을 잡는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점 이름은 ‘KarlMarx‘.
비즐러 역의 배우 울리히 뮈어 (Ulrich Mühe, 1953~2007)는이 영화로 유럽 여러 영화제의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이 영화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그는 다음 해 암으로 사망했다. - P112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은 무엇일까? 나는 억울한 일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억울한 일에는 원인이 너무 많아서 원인이없다. 고통에는 위계도 수량도 총량도 없다. 회복할 수 없는고통을 겪고 있다면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남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해야 한다.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의 원작은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 이야기>(1985년)이다. 이창동 감독은 1988년에 이 소설을 "광주 항쟁에 관한 이야기로 읽고 반드시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소설과 영화의 내용은 다소 다르다.  - P113

자녀가 유괴되어 살해당한 어머니의 고통과 대비되는 가해자의 마음의 평화. 이 이야기에서 이창동 감독이 ‘80년 광주‘를 연상한 것은 이 작품이 한국 사회에 만연한 부정의, 즉피해자 비난, 낙인, 고립을 상징적으로 그렸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억울한 일은 없다.
더구나 가해자는 피해자가 그토록 원했던 ‘하느님의 구원‘을받은 데다, 피해자를 걱정하고 가르치려 한다. - P115

문제는 이것이다. ‘선‘의 힘으로 ‘악‘을 이기려 할때, 인간은 부서지고 무너진다. 도덕적 우월감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더구나 우리에겐 이 영화처럼 ‘송강호‘도 없으며, 마지막 미용실 장면에서 만난 가해자 소녀와도 함께 살아가야한다.
나는 잠들기 전에 언제나 조용히 되뇐다. 잠들기 위해서.
"구원, 해결, 복수...... 세상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없습니다. 저는 이것을 받아들입니다……" - P118

‘악‘의 의미는 간단하다. 어린 시절, 힘이 센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몸집이 작은 아이를 왕따시킨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가방을 들게 한다. 키가 작은 아이는 자기 몸집의 몇 배가되는 여러 개의 가방을 질질 끌면서 그들의 뒤를 따른다. 자기짐을 권력(젠더, 계급, 인종…)을 이용해 희생자의 어깨 위에강제로 얹어 놓고,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 한다. ‘여섯 살소녀‘에게 그 짐은 돌 갑옷과 쇠뭉치를 어깨에 걸친 듯, 몸이휘청일 정도로 무거운 것이다. 그런데 "내가 도와주마."라니? - P122

76분짜리 영화의 힘은 대단했다. 나는 지금도 이 영화에기대어 산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생겼을 때(내가 당했을 때) 가해자를 찾아가는 일, 대화를 시도할것인지 고민한다. 쉬운 일도 아닐뿐더러 의미가 있을까, 효과가 있을까. 밤마다 상황을 그려보지만 아침에 일어나면 잠만못 잤을 뿐이다. 불면 때문에 무기력한 하루가 반복된다. 변호사와 같이 갈까. 기가 센 친구와같이갈까. 권투 같은 운동을배운 후 담력을 키운 다음에 찾아갈까. 자객을 보낼까.
나는 생각만 거듭하다가 결국 두 가지 이유로 포기하는데, 하나는 실제로 귀찮고 시간이 아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무서워서다. 어차피 그/그녀‘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발뺌하며 내 이야기를 부인할 것이 뻔하다.  - P123

약자에게 대화는 어려운 일이고, 강자에게는 귀찮은 일이다. 가해자가 대화를 먼저 요구할 때는 자기 필요에 의해서이고, 피해자가 대화를 청할 때는 "나한테 왜 그랬나요?"라고 묻기 위해서이다. <끔찍하게 정상적인>은 피해자와 가해자의 대면을 다루지만, 피해자는 무너지지 않고 가해자의 멱살을 잡는다.
피해자에게 도움까지 주겠다는 가해자의 팽창된 자아는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찌질하고 비겁하면서도 동시에 배려와 시혜의 주체가 되려는 이들. 이들은 자신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자기의 잘못을 알고 있는 타인이 지치기를 바란다. 증인살해. 군 위안부 문제가 그렇고, 세월호가 그렇다. 약자의 투쟁에 시간 끌기로 대처하는 것이다. 끔찍한 정상성이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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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은 겪은 것이 아니다. 선택적인 기억이다. 경험은 철저히정치적인 것이다. 무엇을 잊고, 무엇을 의미화하는가, 내가 겪은 일은 어떤 것인가. 경험은 저절로 기억되지 않는다. 자신의경험을 인식할 수 있는 시각이 생길 때 비로소 ‘떠오르고‘ 인지되고 해석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에게는 자기 경험을 바로 볼 수 있는 렌즈가 주어지지 않는다. 남성의 언어가 여성의삶을 규정하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자기 경험을 믿지 못한다. 자기가 겪은 일을 남 이야기하듯 말한다. 나도 그랬다. 가부장제는 모든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한다.  - P102

장애인,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문제‘, 심지어 저출산도 무관심할지언정 사소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여성‘이 맞고 강간당하고 죽으니까 ‘사소한 것이다. 사소하지 않다는 말에는이미 사소하다는 인식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그렇지 않다는 얘기다. 사소하지 않다는 것이 곧 중대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예 ‘사소‘라는 말의 궤도를 벗어나야 한다. - P104

지난 30년 동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이 공간을 위해 노력한수많은 여성들을 존경한다. 우리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 우리는 살아남았다. 이 책에 실린 글은 살아남은 이들의 궤적이고, 우리가 살아갈 방향이다. - P107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살아 있는 전설 샬럿 번치는 아내 폭력이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이유가 역설적으로 "여자가 가정에서 구타당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아내 폭력처럼 가사 노동과 육아를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사고가 거의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다. 문제는 가정 폭력과 가사 노동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너무나 낮고 무지하다는 것이다. ‘집밖의변화 속도와 집 안의 변화 속도의 차이‘가 이만큼 큰 사회 문제가또 있을까? - P107

20세기에 출간된 책 중에서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과 베티 프리던의 《여성성의 신화》만큼 찬사와 논쟁의 대상이된 텍스트도 드물 것이다.
특히 <여성성의 신화》는 이론 자체에서 여전히 내파와 여진.
확장과 변태(變態)를 거듭하고 있는 자유주의 사상의 특징을 잘보여준다는 점에서 영원한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알고 있는 근대의 거의 모든 지식체계가 자유주의의 자장場)에서 자유롭지않기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 이 책을 읽지 않으면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과 사회,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 - P115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문제는 미국 남성이나 한국 남성이나별 차이 없음을 알게 된 것이 반갑다면 반가운 일이었다. 그리고 아직 한국 사회에서 저자와 같은 여성 지식인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사이보그 선언문(A Cyborg Manifesto)‘으로 근대 철학에 인식론적 전환을 가져온 영장류 생물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1970년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에서 동물 행동을 기술하는 과학자의 언어는 객관적이지 않다는 주장으로 당시 학계에서 추방되었다. 자연과학의 언어는 그 사회의 정치, 사회문화적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중립적인 학문은 없다는 주장이생물학을 모욕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해러웨이는 세계적인석학이지만, 자연과학자들의 중립적, 보편적 주체라는 자기 환상은 여전하다. - P123

겸손도 아니고 두려움 때문도 아니다. 나는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본 적이 별로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페미니스트‘가 뭐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런데도 페미니즘 책읽기와 쓰기를 계속하는 가장 큰 이유는 쾌락 때문이다. 정의감, 타인을 돕는다, 세상을 바꾼다…………. 만일 이런 일이 있다면이는 우연일 것이다.
어쨌든 단언하건대 여성주의만이 주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도 ‘여성스러운‘ 행복감(joy)이 아니라 ‘남성적인 쾌감(pleasure)이다. 지적인 쾌락, 깨닫는 쾌락(열반‘!), 분노와 분열과 고통이주는 쾌락, ‘나쁜 사람‘을 골탕 먹이는 쾌락, ‘대세‘에않고 비웃으며 무시할 수 있는 힘의 느낌….  - P136

 나는 "페미니즘은 무능력한 여자들의 투정"이라고 생각하는 ‘명예 남성‘으로 살다가 졸업했다. 그런데 완전히 우연한 제기로 졸업하자마자 곧장 여성 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 전혀 관심이 없던 분야에서 새로운 20대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만난 가정 폭력, 성폭력 현실은 나를 완전히 ‘전향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것은 서른 살에 여성학과 대학원에 입학하면서부터였고 그뒤로 20여년이 흘렀다. 여성 단체에상근한 기간까지 포함하면 20여 년 넘게 이 분야에서 지낸 셈이다. 그런데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다‘.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말하는(275쪽) 의미에서도 아니고, 타인의 시선 때문에 숨기려는 것도 아니다. 나의 착한 여자 콤플렉스, 신데렐라 콤플렉스, 아버지 콤플렉스는 거의 중독에 가까우며 매일 이 문제와 사투를 벌이며 분열 속에 살고 있다. - P146

 하지만 나는 페미니즘을 ‘열심히 공부한다‘. 내가 아는 한 페미니즘은 인류가 만들어낸 그 어떤 지식보다 수월(越)하다. 정치적, 이론적, 학문적으로 다른 어떤 언설보다 세련되고 앞서 있으며 상상력조차 뛰어넘는 참신한 문제의식과 질문을 던지는 사상 체계다. 지식이 지속적으로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면, 또 지식이 윤리적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지식이 사유 능력을 의미한다면 최소한 페미니즘을 따라올 지식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페미니즘은 지난 모든 언어에 대한 의문과 개입에서 시작됐으며, - P146

캐럴 길리건과 주디스 버틀러는 자주 오해받는 페미니스트사상가들인데, 이들의 사상을 이렇게 쉽고 분별력 있게 ‘정리한‘ 저자의 지적 역량과 글쓰기 능력이 놀랍다. 길리건은 여성성의 재평가보다는 돌봄 노동의 언어화와 여성적 윤리가 공적영역의 규범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단순한 모성찬양이 아니다. 길리건은 자신의 논의가 남성다움, 여성다움운운하는 젠더 문제가 아니라고("This is not gender issue.") 책서두에 못 박았는데도 그녀를 향한 페미니즘 진영 내부의 비판 - P148

버틀러가 주장한 것은 여성 범주의 정치학과 그 구성, 효과에관한 것이다. 여성 운동이 반드시 같은 여성 정체성으로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다는 것인데, 이 논의 역시 지금까지도 오해에서자유롭지 못하다. 《젠더 트러블》의 부제는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보‘이다.) ‘남자‘와 ‘여자‘라는 우리의 개념은 원본 없는 복사본에 불과하지만(395쪽, 주디스 버틀러 재인용) 여성이라는 범주의수행 가능성을 확장하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401쪽).
또한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다루고 있는 뤼스 이리가레이, 엘렌 식수, 자크 라캉의 이론은 구조주의나 영미 페미니즘에 익숙한 한국 독자들에게는 쉽지 않는 내용이다. 우리에게어려운, 아니 익숙지 않은 일부 페미니즘 이론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저자의 뛰어난 능력은 기본적으로 지적 감수성에 기인한것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 대한 관찰력이 남다른 ‘예술가‘
만의 특권이기도 하다. 이 점이 이 책의 실질적인 유용성 중 하나다. - P149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은 ‘그들의‘ 교과서임에 분명하고, 저자 또한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이 세상에는 현장(local)에 따라 수많은 페미니즘이 존재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사회학이나 물리학에 한 가지 입장만 있겠는가? 그런데 왜유독 페미니즘만 ‘한 가지‘로 인식되는가? 이는 마치 ‘유색 인종대 백색 인종‘의 패러다임과 비슷하다. 주체는 개별성으로 인식되지만 타자는 집단으로 지칭된다. 이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같은 페미니즘이라도 포르노, 성매매, 가족, 출산, 모성 등에 서로 상반된 입장을 취하며, 1970년대 미국의 포르노 금지 법안제정 운동 때 전투는 남녀가 아니라 자유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주의 페미니즘 사이에서 벌어졌고 자유주의의 승리로 끝났다.
페미니즘을 ‘하나‘로 사고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나는평소 숱한 사람이 사상가들을 언급할 때 마르크스, 프로이트,
푸코, 루소.... 그리고 페미니스트 식으로 나열하는 데 분노한다. 남성들은 ‘개인‘으로 호명되는데, 어째서 페미니즘은 한 덩어리로 간주되는가? 이는 마르크스 한 사람과 모든 여성이라는식의 발상이다. 물론 이러한 경계의 정치학은 페미니즘 내부에도 있다.  - P150

내가 생각하는 지식으로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매력은 나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준다는 점이지만, 페미니즘의 정수는 스스로 내파와 파생을 거듭하는 지식이라는 데 있다. 이 변화는 멈출 수가 없다. 왜냐하면 여성의 현실, 그리고 현실의 운동이 끊임없이 언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를 비롯해 모든 진보적 사상이 그러하다. 지식은 현실의 필요에 의한것이지 유행을 타는 공부가 아니다. ‘한물가거나‘ ‘이제는 필요없는‘ 페미니스트는 있을지 몰라도 페미니즘 자체가 그럴 일은절대 없다. 이 과정이 진화다. 아직도 혁명과 개량, 진화와 일상을 이분법적으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면 어쩔 수 없다.  - P151

거듭 강조하건대 알선업자들이 다루는 것은 상품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강제냐 아니냐 혹은 협의의 강제성이냐 광의의 강제성이냐가 그렇게 중요한 문제일까. 문제는 강제성 여부라기보다는 전쟁에서의 철저한 성별 분업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제성 담론은 여성 인권의 시각에서 보면 문제의 본질을 비껴가게 만드는 ‘맥거핀‘이다. 왜 남성의 성은 여성을 위해 강제든 자발이든 봉사하지 않는가? 왜 국가든 알선업자든 남성의 성을매매하는 제도는 만들지 않는가? 이 질문이 황당한가? 자발적
‘담요 부대‘든 납치든 여성의 성을 종군(從軍)의 상수(常數)로놓는 전제부터 문제시하는 논의를 시작하자. - P171

《대화》를 읽고 리영희를 한국 최초의 평화학자라고 생각했다. 그의 삶은 인생의 매 순간을 새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누구나 몰두해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다. 이것은 그가 뛰어난비판적 지식인인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치환의 시에 등장하는 ‘바람‘처럼 평생을 쉼 없이 뉘우치고 탄식하고 회의하고헤맸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에는 정박의 흔적이 없다.
평화는 변화이다. 폭력의 반대말은 평화라기보다는 ‘대화‘인데, 여기서 대화는 비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기존 관계의 격렬한(violent) 변화를 뜻한다. ‘주례사 비평‘을 피하기 위한 비판을위한 비판, 경의의 헌사 모두 대화 단절의 언어이며 텍스트를외롭게 만든다. - P175

인간은 무지하다. 그러나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어쩔 수 없이벌어지는 일은 없다. 이 책은 불가피하게 희생된 피해자에게 인도적 차원의 사과와 용서를 구하는 책이 아니다. 그 반대 입장에서 논쟁이 시작되어야 한다. 역사가 전진한다는 것을 믿지 않지만, 이런 책의 존재는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는 위로를 준다.
알려졌다시피 베트남은 한중일과 더불어 세계 4대 한자 문화권국가이다. 중국과 베트남 관계는 국제정치학 교재에 모델로 등장하는 강대국 - 약소국 평화 지속 관계의 모범이다. 베트남의지혜가 낳은 결과다. 한미 관계는 비정상적 동맹의 모델로서 국제정치학의 ‘시조‘인 한스 모겐소가 쓴 책 《국가 간의 정치》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베트남에게서 배울 것이 많다 - P189

팬데믹의 원인은 ‘돌봄 노동‘ (살림)을 비하하고 ‘자연 파괴‘ (죽임)를 추구해 온 인간의 경제 활동이다. 그리하여 많은 이들이팬데믹의 대안으로 돌봄 윤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흐름은지금 여기의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팬데믹의 결과로 또다시 여성들이 강도 높은 보살핌 노동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재평가해야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공적 영역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인류가 욕망하는 주된 가치인 물질적 풍요와 경쟁과 승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고,
많은 가치 중에 ‘돌봄‘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돌봄노동의 의미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고 돌봄노동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 P203

많이 ‘배울수록 좋은 것과 많이 알수록 좋은 것은 다르다.
인간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몰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모르는 방법이 작동하는 기제는 이데올로기, 개인의 방어 심리,
정보 통제와 같은 통치 기술, 몰라도 되는 권력, 회피 등 여러가지가 있다. 지금 우리 앞의 진실은 이렇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2022년까지는 마스크를 써야 하며, 코로나19가 ‘해결‘된다해도 다른 전염병이 찾아오고 그 주기는 사스, 메르스, 코로나 - P204

팬데믹 시대에 국가의 역할, 개인의 자유, 경제 활동, 봉쇄와방역의 조건, 극도로 성별화되고 계급화된 ‘집‘의 의미, 정치 지도자나 자본가들이 ‘결정할 수밖에 없는‘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진단, 인류의 미래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근본적인 사유의 전환을 요청하려면 각자가 자기의 공간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광범위하게 기록하는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성을 획득하지 못한 추상적인 논의로는 이 시대를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양한 《우리는 밤마다 수다를 떨었고, 나는 매일 일기를 썼다》들이 나와야 한다. - P209

부르주아 여성인 시몬 드 보부아르는 위 세 여성과 또 다른삶을 살았다. 제국주의 프랑스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실존주의 페미니즘 이론을 정립했고, 《제2의 성》은 지금도 여성학입문서이다. 또한 그녀는 《제2의 성》 분량의 ‘연애 편지‘ (사르트르에게 쓴 것이 아니다)를 썼다.
나는 이들의 삶을 비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여성들의 삶을다르게 만들었던 20세기 역사. 서구의 근대성과 자본의 발달은식민 지배로 가능했고, 그 ‘덕분에‘ 스메들리나 보부아르는 우리의 선배들처럼 독립 운동이나 ‘건국‘에 참여하기를 요구받지도 않았고 친일이니 부역이니 하는 역사적 짐 없이 ‘개인적 삶을 살 수 있었다. 미국이나 프랑스 여성은 빈부와 상관없이 자기 실현으로서 페미니즘이 가능했던 것이다. (물론 자기 실현이페미니즘의 본령은 아니다.) - P224

남성성이 자국 여성과의 관계, 가족 내에서 발현되기보다 남성들끼리의 경쟁 논리가 되고 자신의 ‘대의‘에 여성을 동원하는것. 이것을 패권적(헤게모니적) 남성성과는 대비되는 식민지 남성성(colonial masculinity)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여성은 동등한 시민이 아니라 남성 사회의 ‘자원‘이 된다. 이 책은가부장제 사회의 근본 구조인 남성들 간의 투쟁에 동원되는 여성이 스스로 그 위치성을 거부하고 시민으로서 거듭나는 이야기로 읽혀야 한다. 다시 말해 이 책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아니라 한국 사회 남성성에 대한 질문으로 보아야 한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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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파성 자체가 가치이고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편협한 책 읽기‘는 편협하지 않다.
 모든 책이 편협할 뿐 아니라편협(partiality)을 기점으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나는 매사에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고, 불호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물론 마음이 잘 다스려지지는 않는다). 선호하는 책이 있고, 즐거움을 느끼는 데에도 나만의 방식이 있다. 즐겁지않다면 왜 읽겠는가. 다행히(?) 내가 사랑하는 책은 대부분 잘팔리는 책이 아니기에, 나 혼자 열광하더라도 독점 시장의 다양화에 그다지 기여하지는 못한다. 간혹 ‘사회정의 차원에서 좋은 책을 열 권 사서 지인들에게 보내기도 한다. ˝읽을 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것˝이라는 김영하 작가의 말을내 식으로 바꾸면 책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다.
p11 또 다른 창작, 서평


책과 시장나는 서평, 독후감, 추천사를 구별하지 않는다. 세 가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가 쓰고 싶은 내용을 감추지 못한다. 텍스트와 관련한 나의 이런 글쓰기가 문제적이라는 사실을 최근에알았다. 글쓰기는 내 생각과 사회의 협상의 연속이지만 그 긴장을 유지하는 상태가 글쓰기 자체보다 힘겨울 때가 있다. 내 생각을 숨기는 데(?) 지쳤을 때 나도 모르게 지나친 감격이나 솔직한 입장이 부실한 바느질 봉합처럼 터져버린다. 내가 추천사를 쓴 책의 저자에게 팬레터까지 따로 보내는 ‘오버‘가 그런 예중 하나다. - P10

나는 좋은 책, 알려진 책, 많이 팔리는 책에 서평이 몰리는 현상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서평 (크리틱)이 가장필요한 책은 ‘바람직하지 않은 내용 혹은 별 내용이 아닌데‘ 많이 팔려서 비판으로 판매량을 줄여야 하는 책이다. 물론 이런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나는 희망한다. 서평이 많이 쓰이고 비평서가 많이 출간되어야 하는 이유다.
나는 전압이 높은 책, 나를 소생시키는 책을 좋아하지만 여기에 실린 책이 모두 나를 살린 책, 가장 도움이 되었던 책은 아니다. 어쩌다가 나와 인연이 닿은 책이다.  - P11

내게 글쓰기는 입장과 표현이 가장 중요하다. 장르가 곧 내용인 것은 분명하지만 입장 없는 글쓰기는 어느 장르나 불가능하다. 창작으로서 비평, 예술로서 비평을 지향하는 나는 서평과그 외 글을 구분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개는 서평, 독후감에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 P15

정성일이나 김현의 평론을 읽을 때, 우리는 그들이 읽은 텍스트 내용보다 그들의 생각에 더 관심이 많다. 내가 쓴 서평을 구매하는 독자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기대한다. 책을 읽든 안 읽 - P16

든 그 책에 대한 나의 생각을 구입하는 게 아닐까. 서평 쓰기의첫 번째 훈련은 글의 서두에 한두 줄 정도로 책의 내용을 집약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책의 내용을 완전히 파악하고, 그것을 군더더기 없이 표현해야 한다. 육화된 책의 내용을 몸속에서 뽑아내는‘ 작업이다. - P17

독후감과 문학 평론, 영화 평론, 음악 평론 등 모든 비평은다르지 않다. 학생이 쓰면 독후감이고, ‘전문가‘나 ‘어른‘이 쓰면 서평인가. 나는 학생들에게도 창작으로서 독후감 교육을 희망한다. 이것은 우리가 왜 서평을 읽는가와 중요한 관련이 있다. 서평에 드러난 줄거리로 독서를 대신할 것이 아니라면, 서평이라는 창작 장르가 따로 있을 이유가 없다. 비평 역시 창작이자 새로운 이야기여야 한다. ‘콘텐츠‘, ‘스토리텔링‘이 타령이된 세상이다. 소프트웨어, 아이디어를 내놓으라는 후기 자본주의의 아우성이 요란하다. 문제는 누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아닐까. 콘텐츠는 새로운 생각이며 스토리텔링 능력은 문제의식에서 나온다.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 - P17

모든 글쓴이들도 나와 같다고 생각한다. 쉬운 글은 있을지몰라도 쉽게 쓰인 글은 없다. 글쓰기는 체력, 재능, 돈, 정치, 좌절과의 싸움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글을 존중하고, 책을 쓰고만든 이들을 존경한다. (특히 내게 번역은 어려운 일이다. 번역은 우리말 능력을 시험하는 과정이다.)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책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타인의 글을 다루려면 자신의 윤리와 정치적 판단에 관한 여러 번의 점검이 필요하다. 이것이 여성학자사라 러덕이 말한 "비판이 실천적인 개입" 인 이유다. - P18

 엄청난 지성과 노동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누가 그런 ‘무임금 노고를 하겠는가. 내게 그런 능력과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알려지지 않는 책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평을 전문으로 공부하는 인문학 독립 연구자의 양성이 절실하다. (다른 사회 정책 분야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적은 돈‘으로할 수 있는 일이다.) - P19

혼신을 다했고 깊이 있지만 안 팔리는 책, 안 읽히는 글, 보상 없는 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권력자를 비판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어떤 삶일까. 인생사에 이만한 외로움이 있겠는가.
그렇다고 모두가 궁형(宮刑, 거세형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사기》를 썼던 사마천이 될 수도 없다. 아니, 어쩌면 이 시대 궁형은 빈곤일 것이다. 한편 이러한 고통을 극복한 글이라면 얼마나
‘위대한 글이겠는가. 나는 평생을 ‘사랑도 명예도 권력도 돈도포기하고 오로지 언어에 영혼을 판 채 글쓰기에 인생을 건 이들을 몇몇 알고 있다. 그들이 사투한 책엔 별점 테러조차 없다.
알려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이 그런 글쓴이들에게 전해지기를 희망한다. - P21

내가 가장 경계하는 사람은 강하고 대담한 악인이다. 이런이들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어디에서나 잘 살고 있다. 선과악은 ‘사실‘이 아니라 강한 사람의 뻔뻔함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잉그리드 버그먼처럼 폭력, 악, 비행을 분명히목격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피해자를 돕는 일에 조금 개입한 적이 있다. 그러나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려워했고 나는 사법처리를 포함한 여러 방식의 문제 제기를 생각했으나 모든 이들의 만류로 실패했다. 이유는 상대방이 나의 ‘예민한 성격을 문제 삼아, 자신을 ‘불안증 환자‘ (나)의 피해자라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는 것이다. 나는 성폭력 피해 상담을 오래 해 왔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많이 겪었다. 결국 사건은 당당한 자(가해자)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 P26

여전한 논쟁거리는 당사자가 자기의 정체성이나 질병에 대해쓸 때 우리를 괴롭히는 방법론이다. 특히 사회 자체가 지극히병리적이고 이중적이면서 이러한 상황에 대한 인식 체계는 없는한국이라면 말이다. 나는 "절대 상처를 드러내지 마라." (44쪽)는 말에 동의한다. 나에게도 드러내야만 하고, 드러내고 싶은문제가 있다. 그러나 순전히 개인적 능력 때문에) 내 시도는 여러번 실패했다. 낙인과 민폐, 자학만 얻었다.
사회의 ‘크기‘는 고통에 대한 태도와 그것을 품을 용량(capacity)으로 가늠할 수 있다. 나를 비롯해 한글판 제목대로
"피할 수 없는 모든 고통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의목소리는, 우리 자신의 그릇에 온전히 담길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불안하지 않은‘ 이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 P28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통증은 무엇인가?‘ (331~337쪽)이다.
나는 통증을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시도와 접근 방식이 전제하는 사유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인간관계의 줄임말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각기 다른 몸들이다. 통증은개인의 몸에서 일어나는 주관적인 현상일 수밖에 없다. 통증의개념을 정의하는 것보다 이를 둘러싼 물리적 권력 관계, 권력과지식, 인식과 치유과정의 사회성, 정치학, 언어가 ‘통증학‘의 핵심 주제가 아닐까. - P32

시몬 드 보부아르나 도나 해러웨이 같은 여성주의자들은 백인 남성이 여성은 자연과 인간의 중간으로, 흑인은 동물과 인간의 중간으로 간주해 왔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인간‘
인 백인 남성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앞에서 언급한경찰관처럼 흑인과 여성의 몸을 구타하거나 살해할 수 있는 통제권을 지닐 수 있다. 타인에 대한 통제권을 지닌다는 것. 흑인에 대한 백인의 지배가 문화적으로 합의된 사회에서 흑인의 몸은 백인의 것이다. 백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강간, 고문, 살인, 감금이든 모두 합법적‘이다. 압도적 폭력을 마음으로, 평화로, 정신력으로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 P36

문제는 몸이다. 다시 말해 피부색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물론 인간의 몸을 이루는 어떤 부분도인간의 범주와 관련이 없다.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생물학이 아니라 권력이다. 피부색은 좀처럼 희석되지 않는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트랜스젠더는 흑인과 다르다.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몸이 부여한 정체성의 지도를 찢을 수 있다‘. 백인/남성/이성애자/비장애인과 다른 이들의 몸은 계급, 퀴어링, 의료 규범으로
‘혼란‘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흑인의 몸은 있는 그대로의 표식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부여한 영원한 화인(火印)이다. 쉽게 뜯어내고 그냥 버릴 수 있는 라벨이 아닌 것이다. - P38

몸은 사회적 (social/mindful body)이다. 몸은 기억이다. 있는그대로의 몸은 없다(영어 body는 그냥 ‘시체‘라는 뜻이다). 몸은언제나 해석이다. 같은 흑인이라도 힘과 스피드를 상징하는 운동 선수 우사인 볼트나 ‘흑진주‘로 불리는 뛰어난 미모의 여성들은 흑인이라기보다 뛰어나지만 특이한 인간의 범주로 다시구분된다. 이들의 예외성은 해석의 힘을 보여준다. 한편 책에도나오는 ‘one drop rule‘, 즉 선조 중에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이면 ‘인간‘이 될 수 없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영화화되기도 한 미국 소설가 필립 로스의 작품 《휴먼 스테인》(2000년)은 흑인의 피가 인생의 얼룩이자 오점(스테인stain)의 상징임을보여준다. 검은색, 그것은 없애야 하지만 없앨 수 없는 것이다. - P39

몸, 즉 나자신을 향한 적대감, 분노, 좌절, 비참함, 세상을향한 원망, 기력 없음…………. 나는 이 글을 쓰기 이전에 우선 나(몸) 자신과 싸워야했다. 나에게 몸은 절실히 바꾸고 싶은 그무엇, 그러다 안 되면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는 이 책의 필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의 어떤 필자들은 부럽고, 어떤 필자는 존경스럽고, 또 어떤 필자에게는 공감했다. 자기 몸에 ‘대해‘ 쓰는 실천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쓰고 싶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쓸 수 없기도 하고, 결국 쓸 몸이 안 되기도 하고…… - P42

거듭 말하지만 "내 몸은 나의 것이다."가 아니라 "내 몸이 나다." 우리의 정신이 몸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바로나다. 정신은 몸에 속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몸에 대한생각은 곧 자아관이 된다. 문제는 이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는자기 몸을 긍정하기 어려운 사회인데,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아만 팽창한다는 사실이다. 이 사실에 모든 ‘비극‘이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책이 절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P47

이런 상황에서 자신을 몸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혁명에준하는 발상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위해서는 몸에 대해 쓰기, 말하기, 듣기, 이런 책(《몸의 말들>을 읽고토론하는 커뮤니티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페미니즘이 낯설지않은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여성은 남성 사회가 만든 몸 이미지에갇혀 있다. 남성의 존재성은 돈, 지식, 권력으로 평가되는 반면여성의 시민권은 외모에서 시작된다. 남성은 정치적, 역사적 존재이고 여성은 생물학석, 의학적 존재라는 인식, 가부장제의 전제는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심화되어 여성은 완벽한 스펙에 더해 ‘예쁘고 날씬하고 풍만해야 한다. 그리고 부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삼은 몇몇 ‘슈퍼 걸‘들이 매스컴을 지배하고 있다. - P48

용서에 대한 나의 입장을 굳이 밝힌다면 나는 용서에 관심이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용서라는 말이 싫고 용서의 필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들을 의심한다.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생각은 용서, 화해, 대화라기보다는 부정의한 사람들과 그들의 행위가 가능한 사회적 조건이다.
고통에는 육체적, 정치적 차이가 있다. 그것은 위계이다. 모든 고통은 같지 않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자기 상처가 제일큰법이다. 나도 내 상처가 제일 크다.  - P52

나는 다음과 같은 패턴을반복하며 살고 있다.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있다. → 나는 ‘사회정의‘나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돕는다는 생각에서그들의 요구에 응한다. 오해받거나 배신을 당한다. 시간,
배신감, 상처, 자책감에-돈, 평판 등에서 ‘큰 손해를 본다.
분노로 시간을 낭비한다.
복수할 방법에 골몰한다. -→ 해결 방안이 없음을 깨닫는다.→ 이 과정에서 일상생활의 붕괴가 지속된다. 어쩔 수 없이 생활 전선에 복귀한다.
몸에 부상을 입은 채 잊는다. 잊게 된다. 잊힌다. - P52

내게 용서는 저절로 잊히는 것이지, 용서를 위해 고민하거나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내겐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스트레스고 참을 수 없는 부정의다. 내가 생각하는 용서는 관련된 사건을 잊는 것이다. 사건을 무시한다(ignore), 살기 위해 나자신에게 몰두하고, 그 일을 잊는다. 물론 가해자에 대해서도생각하지 않고 다시는 접촉하지 않는다. 나의 경우가 일반 법칙이 될 수는 없다. 나의 완벽주의 성향, 결벽증, 비사회성에 상응하는 능력은 없지만, 일중독과 자기 몰입 성향이 ‘용서‘ 따위를잊게 해주는 것 같다. - P53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람들은 용서가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한다. 정작 자신이 용서할 일을 당하기 전까지는…………." 1952년은 제2차 세계대전을치른 지 불과 7년째 되는 해였는데, 사람들은 만일 루이스 자신이 폴란드인이거나 유대인이라면 게슈타포를 용서하겠냐고 물었다. 그는 즉답을 피했다. 대신 그보다 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 사람은 용서할 수있겠습니까?" - P55

나는 이 책의 제목 ‘새벽 세시의 몸들‘이 특히 좋다. 실제로서도 비유로서도 적절하다. 나의 새벽 세시 역시 불면과 잡념의 시간, 하루 중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는 시간이다. 자살연구에 따르면 자살이 많이 발생하는 시간대는 새벽 세 시에서다섯 시 사이이다. 이 책에도 나오듯이 새벽 세 시는 고통과 통증의 감각이 가장 선명하게 자각되는 시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일부 의학에서는 장기가 가장 예민한 시간이라고도 한다. "몸으로 사는 존재라는 사실을 놀라움으로 지각하게 되는 모멘트가 있다. 몸이 아프게 될 때, 또는 나이가 들면서 ..… 겪게 되는 격렬한 ‘몸의 지각‘은 타협 불가능한 ‘자아 탐험‘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이로써 자기 이해나 시간 이해, 타자와의 관계나 - P62

가해자와 피해자는 유동적, 맥락적 개념이므로 가해의 절대성을 전제할 수 없는데 작가는 영리하게도 이를 고문자와 피고문자의 구도로 고정해놓았다. 고문은 죽음과 고통을 매개로 한
‘영원한 관계‘의 장이기 때문이다. 고문에 대한 일반적인 접근방식은 피해자의 고통을 그린 임철우의 단편 소설 <붉은 방>이잘 보여준다. 이때 우리는 피해자를 지지하고 동일시한다. 그러나 그 동일시는 우리 자신이 가해자일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하기 어렵게 만드는 사유 방식이다. 피해자 포지션이 정체성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정찬은 거꾸로 간다. - P74

나는 그 연배의 한국 문단에서 어떻게 이런 독특한 남성 작가가 나올 수 있는지, 역시 인간의 경험은 구조를 넘어선다는기쁜 진리를 확인한다. 정찬의 작품에는 한국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외세 콤플렉스, 성애 묘사(여성에 대한 타자화가 거의 없다. 자기 도취나 자의식도 없다. 그러나 그의 소설을 읽으면 잘난 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의 주제는 물론이고 문체와 행간의 밀도는 그의 노동을 짐작케 한다. 고개 숙이지 않을 수 없다. 초기에는 광주항쟁을 집중적으로 다루었지만 나중에는 주로 언어, 권력, 몸, 구원을 테마로 한 작품을 많이 썼다. 문학 평론가 김현은 생전에 정찬이 이청준, 복거일, 최인훈의 뒤를 이을 작가라고 주목했다. - P75

삶의 모든 고통은 권력에서 온다. 물론 제일의 권력은 육체적고통이다. 이 역시 사회적 차원의 문제지만 생로병사라는 다른차원의 법이 있으므로 차치하자. 우리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문제는 자원을 둘러싼 권력에서 일어나는 배제와 소외, 착취다.
인간이 사회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것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서라고 믿는다. 그러나 지금 글로벌 금융 자본주의의 ‘포스트 휴먼‘들은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계로 진입했고, 지배 세력은가시권에서조차 사라졌다. 한국인들의 희망은 국제 자본을 걸러줄 국가다. 당대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역사상 민중은 언제나 선하지만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했다. 유능하지만 욕심 없는사람을 원했다. 하지만 대개 선한 사람은 약하고, 강한 사람은악하다. 심지어 악함과 강함이 구별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 P79

우리는 <얼음의 집>의 주인공처럼 권력을 정확히 사용하는예술가를 만날 확률이 거의 없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되어야한다. 정찬의 <얼음의 집>은 권력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고통의백신이다. 고통의 시대에 어찌 백신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 P81

나는 예전에 세월호 사건을 두고 "잊지 말자."라는 말이 누구의 관점인가에 대해 쓴 적이 있다. 이는 그 사고와 무관한 이들의 다짐이다. 유가족들은 잊으려야 잊을 수 없다. 당사자가아닌 이에게는 망각이 필연이고, 당사자에겐 기억이 필연이다.
"잊지 말자." 대신 유가족의 시각에서 다른 언어가 필요하다. - P84

말의 의미는 사전에 있지 않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관계에 있다. 고통의 모습은 고통의 위치, 연결 지점(location)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공감의 표현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데, 이 모든 것을 의식(consciousness)하기가 쉽지 않다.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지나친 긴장도 부담스럽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 들을 때 나를포함한 인간의 주된 반응은 통념과 달리 놀라움과 당황스러움,
더 정확히는 의심과 비난이 더 많다. "정말?", "설마?", "농담하지 마."……… 이에 해당하는 단어들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다. - P85

고통받는 몸은 사회적 위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의미를자각하는 일은 곧 사회적 존재로서 투쟁의 시작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명이다. 사회, 정치, 역사다. 힘있는 사람의 고통의 목소리는 크고 이미 위대한 의미 체계가 정해져 있다. 미국인의 고통과 북한인, 이라크 난민의 고통은 같은 고통이 아니다. ‘남성‘
의 고통과 ‘여성‘의 고통은 원인도 구조도 양태도 깊이도 다르다. 20대 여성은 성차별의 사례로 성폭력과 강남역 살인 사건의공포를 이야기하고, 20대 남성은 초등학교 때 ‘우유당번‘을 예로 든다. - P88

유명해지기 위해 무슨 짓을 못하랴. 누가 그런 사람이냐고?
실명 비판을 하라고? 나는 그들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런데그/그녀는 내가 비판하는 사람이 자신인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을 아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자아 개념은사회성이 없다. 타인과 사회와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을규정하고 조작하는 것이 가능한 물적 기반(예를 들어 SNS…………)이 민주주의든 과학 기술이든 진보의 이름으로 우리 몸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심리학에서 가장 위험한 심리를두 가지로 본다. 하나는 나르시시즘이고 다른 하나는 투사(남의탓으로 돌리는 폭력)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나르시시스트가 10퍼센트, 타인에게 폭력적인 사람들(갑질 행위자)이 90퍼센트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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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15년 전 김윤식을 따라 일본 교토 거리를 걷고 있다. 그의 교토 문학 기행 《청춘의 감각, 조국의 사상>의 여정대로 염상섭의 하숙집, 윤동주와 정지용과 김환태가 공부한 도시샤대학, 윤동주와 송몽규가 살았던 교토 시 사쿄쿠(左京區) 시내, 정지용의 시 ‘압천(川)‘에 서 있다. 이 작은 강가를 산책했던 윤동주를 생각한다. 아름다움과 순수에 대한 나의 냉소를부끄럽게 만든 그의 시와 시대가 한꺼번에 쏟아진다.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 P21

어려운 글은 없으며 익숙하지 않은 사유가 있을 뿐이라는 내주장이 맞다면, 주디스 버틀러와 도미야마 이치로가 대표적인필자일 것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숨막히는 구체성과 당파성이다. 특히 도미야마의 문장은 연결되어 있지 않다. 문장과 문장 사이가 운동한다. 그의 몸은 유(流)와 착(着)을 반복하면서나아간다. 과정으로서의 글쓰기다. 말이 바로 실천이 되는 현장이 거기 있다. - P25

다시 루쉰으로 돌아가자. 그가 ‘피‘와 ‘먹‘을 통해 말하고자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몸을 믿었다. 실천을 믿었다. 먹은 변신이자 번신(身)한 몸이다. 피는 내가 아니다. 피가 고인 상태의몸은 없다. 말하고 쓰는 행위, ‘먹‘이 곧 몸이다. 실천 과정에서변화하는 몸이다. 먹의 가능성은 미래를, 변화할 가능성이 있는 현재(a transformative present)로 만들 수 있다. 도미야마는 유착이라는 주제를 통해 이러한 현재 개념에 모든 것을 건다. - P27

용서를 하든 복수를 하든 진짜 피해는, 피해자가 가해자와그 사건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인생을 가해자와 함께하는 지옥. 피해자가 가해자와 분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무림의 고수도 몸안에 들어온 뾰족한 창을 스스로 뽑기도어렵거니와 창자가 딸려 나오지 않게 뽑았다 해도 살점은 남아있다. - P31

침묵으로 불리는 다양한 상황이 있다. 단지 아는 것이 없어서 과묵, 슬픔과 고통으로 할 말을 잃음, 모르는 외국어가 요구되는 상태, 대응할 논리가 없음, 상대를 괴롭히려는 의도, 육체의 마비, 말할 기운이 없음. 기회주의 사회적 약자의 언어 없음, 말하기 싫음, 저항…………. 모두 소극적 의미의 침묵이다.
막스 피카르트(1888~1965년)는 말로서의 침묵을 주장한다.
침묵은 말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다. 침묵은 독자적인 실체이고,
능동적인 완전한 세계다. 침묵과 말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침묵하지 못하는 것은 말을 못 하는 것이다. 《침묵의 세계>는 침묵의 가치를 가장 널리 알린 책일 것이다. 읽으면서 침묵하고 있는 기분, 동시에 침묵으로 말하고 있다는 느낌을 즐길 수 있다. - P34

이 책은 말하기를 비판하지 않는다. 침묵이라는 형식의 말의소중함을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침묵이 고뇌와 연동한다는 사실이다. 고뇌하는 사람은 엄밀할 수밖에 없다. "지나간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침묵을 놓는다." 그러나 침묵의 다리가 균형을이룬다는 보장은 없다. 지나간 생이 무거워서 다리가 기울어진다면, 무너진다면? 두려운 시도다. - P35

글쓰기 원칙 중에 ‘현재 진행형을 쓴다‘가 있다. ‘지금 상태‘
를 쓰라는 것이다. 내 책상 위에 계통 없는 책들이 엎어져 있다.
써야 할 글과 하고 싶은 말이 갈등한다. 당연히 후자 승. 어차피 앞의 것은 안 써지기 때문이다. 이 시는 요즘 나의 타령이다.
나는 꽃도 모르고 시도 모른다. 이희중 시집 《참 오래 쓴 가위》에 수록된 <끝나지 않는 노래> (116, 117쪽) 전문이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까
꼭 끝난 줄 알았네
이 노래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이 없는 노랩니까 그런 줄 알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거야 - P41

제가 신청한 게 아니라구요
그랬던가요 그 사람이 누굽니까 이해할 수 없군 근데 왜 저만 듣고 앉아 있습니까 전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노래를 듣고 싶다구요 꼭 듣고 싶은 다른 노래도 있습니다 기다리면 들을 수나 있습니까 여기서 꼭 듣고 싶은데, 들어야 하는데 딴 데는 가지 못합니다 세월이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이 노래 좀 그치게 해, 이씨 - P42

수학의 언어는 공식 수학이 아름다운 이유는 공식 때문이다.
공식은 무한한 언어이자 최소한의 기호로, 삼라만상을 파악할수 있다. (좋은) 시가 미학의 절정인 이유도 이와 같다. 시 한 줄이 사전이다. 은유, 메타포. 말뜻이 정해지지 않았으므로 독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다. 어떻게 읽어도 말이 된다. 시야말로 읽는 자의 것이다. 리듬감이 좋은 이 시는 내가 아는 작품 중 상당히 큰 사전류에 속한다. 세상에 끝나지 않는 노래가 한둘이겠는가. 누구에게나 끝나지 않는 노래가 무수할 것이다. 가사의사연은 또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 P42

그러므로 우리는 행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지긋지긋하게 살면 안 된다. 지긋지긋은 끝나지 않음이 아니라 끝이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 말대로 죽어야 끝난다. 죽음은 끝이어서 좋 - P43

다. 그래서인지 ‘죽다‘는 우리말은 아름답다.
내가 아는 수준에서 ‘죽다‘의 영어 표현은 die, pass away,
perish(멸망하다), expire(통조림 유통 기한에 사용하는 단어지만우리말은 고상하다. 지긋지긋한 노래가 끝나는 데 감사한다.
영원히 잠들다(永眠), 세상과 이별하다(別世), 운명을 달리하다.
인류 공통의 표현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가다, 먼지가 되어 우주속으로 사라지다."가 아닐까. 한 음절로는, 졸(卒). 마치다.
이 개운함! 개운함에도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은하계의입장에서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 먼지다. - P44

금요일 저녁, 비까지 내리니 라디오는 감상(感傷)으로 넘친다. 외로운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내가 외로움에 대해 무슨 견해가 있을까마는, 분명한 것은 나 같은 타입은 외로움을 견뎌야지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다가는 우리 엄마 말대로 ‘인생 망조의 지름길‘이다. 외로움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책이있는데 그들은 너무 쌈박하다. 분석하고 이해하면 뭐하나. 그들이 가버린 후(읽고 난 후에도 외롭긴 마찬가지인데.
김영갑(1957~2005년)을 다시 펼친다. 48년의 생애 내내 혼자였던 그는 이제 제주의 일부가 되었다. 나는 4.3으로 제주를사랑하게 되었고 김영갑을 통해 제주의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한때 우리 집은 그의 작품으로 도배를 해서 친구들이 ‘짝퉁두모악‘이라고 놀렸다. 한라산의 옛 이름인 ‘두모악‘은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는 그의 사진 갤러리다. <그 섬에 내가 있었네》 - P45

김영갑은 젊었을 적 죽고 싶어 했지만, 난치병 선고를 받자생명과 평화에 대해서 썼다. 그것은 기다림이다.(207쪽) 그는 병이 악화되자 "누군가에게 길을 묻는 일도 없으리라."고 다짐한다. 빠른 길은 없다. 외로움은 견디는 것이다. 외로움은 시간을참는 것이다. 죽었다 깨어나는 일이다.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그가 말한 "나는 수없이 보아 왔다. 다리 한쪽이 잘린 노루가뛰어다니고, 날개에 총상을 입고도 살아남은 꿩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마음이 조금 간절한 상태다. 취약함은 외로움의 일부일 뿐이다. 그는 외로움‘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 P47

고독은 고스란히 화면으로 남았다. 작가의 일상이 이토록 작품자체인 경우가 있을까. 사진이 그다. 찬탄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놀라움은 그가 외로움을 극복해서가 아니라 그 외로움에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바람의 외로움은 피하고 싶을 정도다. - P48

누구나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면 매번 바뀌겠지만 밑그림은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중1 때 읽었던 <상록수>와 고등학생 시절의 《무소유》다. 전자는 내게 타인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지니게 했고, 후자는 생활 방식에 영향을 끼쳤다. 물론 실제 내 모습은 사회 의식도 없고 무소유의 삶과도 거리가 멀지만, 무엇을하든 그 세계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무슨 소개가 필요할까. 1976년에 처음 출판된 《무소유》에는표제작을 ‘넘어서는‘ 빼어난 에세이가 많다. 지금 내 책이 2002년 3판 2쇄이니 그 뒤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읽었겠는가. 다만 이번에 새삼 놀란 것은 수록된 글이 1969년에서 1973년 사이에 쓰였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여전하다.
다음은 내가 줄인 원문이다. "복원된 불국사에서 그윽한 풍경 소리 대신 새마을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서운함",  - P49

책의 좋은 점은 머리에 저장할 수 있다는 것인데, 나는 책읽기가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하고 있다. 생계 노동 외 대부분의 시간을 책 청소와 정리로 보낸다. 책장 청소를 위해 특별 구입한 청소기로 1차, 마른걸레로 2차, 물수건으로 3차. 주제별, 저자별, 저널별, 논문별로 분류한다. 매일 정리해도 끝이없다. 엽서, 포스터, 문구류에 대한 집착도 있어서 그 관리도 만 - P51

만치 않다. 유목은 고사하고 이사를 꿈꾸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사후 기증도 마음이 놓이질 않으니, 병이다.
《무소유》를 읽으면 뭐하나. 법정의 말대로, 제정신도 갖지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니 노예가 따로 없다. - P52

글쓰기 강의를 할 때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 두 가지. "140자이상을 쓰고 싶다."와 "고전을 다이제스트(요약본)로 읽는 걸어떻게 생각하세요?"다. "줄거리를 아는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그게 또 무슨 의미가 있나요?" 독서, 특히 어린시절의 책읽기는 활자를 견디는 훈육 과정 자체가 중요하다. 매체의 발달로 누구나 글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잡문‘과 ‘논설‘,
‘예술‘의 위계는 누그러졌고 ‘댓글‘이 여론이 된 지금, ‘말과 글은 더욱 논쟁적인 영역이 되어야 한다.
소설가 정찬의 작품집 <베니스에서 죽다》에는 11편의 눈부신빛나지만 반사되는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예전에 쓴 메모가 빼곡하다. 그중 <섬진강>에서 한 구절을 골랐다. <섬진강>은 작가자신의 이야기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광주항쟁을 화두로 삼아가장 많은 작품을 쓴 작가다. - P57

나는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독자지만 그의 작품 26권을 갖고 있다. 공저도 거의 없다. 내게 정찬은 숲속을 걷다가구덩이에 빠졌을 때 목이 아프게 올려다보는 세상 같다. 그의활자들은 칼춤을 춘다. 어렵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치열함을견뎌야 한다. "어떤 선배 작가는 그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진저리를 쳤다고 했다. 독자를 위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것에 대한질책이었다. 그의 정신 속에는 독자를 위한 공간이 들어갈 틈이없었다. 그 자신이 유일한 독자였다."(309쪽) - P58

독자 역시 최소한의 비슷한 경험, 진저리의 연대가 필요하다.
그래서 특정 작가의 작품을 좋아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다. 인간의 변화는 진저리를 동반한다. 독서에는 반드시 몸의 반응이 따른다. 가벼운 바람도 있고 통곡할 때도 있다. 어쨌거나 읽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여성들이 여성학 책을 읽을 때가 대표적인 경우다.
나는 정찬을 읽을 때 진저리(두통, 멀미, 탈진………)를 넘어 원망(怨望)과 질투가 뒤섞인 폭력적인 인간이 된다. 자신에 대해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진저리의 폭幅)만큼 세계는 넓고 깊어진다. 초라하다. 이 깨달음을 표현할 나의 말은 더욱 초라하다.
희미한 흔적, 방향 상실, 잡히지 않는 마음이 초라함을 어찌할까. 더구나 나이들어서. - P59

자살을 <자유죽음>으로 명명한 장 아메리의 그보다 더 깊은책 《늙어감에 대하여》는 나이듦을 직시한다. 이렇게 객관적일수가 "곱게 늙자"거나 위안은 없다. "저항과 체념 사이에서"(부제) 방황하는 평범한 사람들을 무의미 앞에 세운다.
장 아메리(1912~1978년), 아프고 치열하고 아름다운 이름(본명이 아니다. 죽음(삶)을 사유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빅터프랭클, 프리모 레비, 장아메리를 순서대로 읽거나 역순으로읽는 것이다. 물론 나는 장 아메리다. 유능한 번역자(김희상)의표현으로는 "정갈한 인생"을 살았다. 유대인 혈통이라는 이유로 전생애를 추방과 투쟁, 수용소 생활, 고문, 글쓰기로만 보냈다. 그는 예순여섯에 고향으로 돌아와 한적한 호텔방에서 수면제로 생을 마감했다. 나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정리(整理)한다‘는 말이 좋다. 인생을 정리할 때란 평균 수명즈음이나 죽을병에 걸렸을 때가 아니다. 각자 알아서 정하고 정리하면 된다. - P64

타인의 시선은 사회적 연령(97쪽)이자 곧 나의 시선이다. 자신에게는 "이 나이가 되도록", 타인에게는 "저 나이가 되도록".
상호 혐오 사회다. 아메리는 《자유죽음》과 마찬가지로 삶, 젊음, 나이듦을 존중하지 않는다. 죽어 가며 살아간다는 진실. 단순하다. 인간은 시간의 피조물일 뿐이고 늙음은 절대 운명이다.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홀로 있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를 권한다.
발광에 가까운 저항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다. 체념이 덜외롭다는 사실을. 삶은 생물학인 것만도 아니고, 사회학인 것만도 아니다. 두 가지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저항과 체념을 반복한다. 계급과 성별에 따라 나이에 대한 시선은 매우 차별적이지만 우리는 모두 죽는다. 평등한 죽음이나마 평등하게 누리려면노력이 필요하다. - P65

나는 요즘 열심히 살고 있다. 이룬 것이 없어서, 여행도 연애도 안 해봐서, 읽을 책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친구들과 달리안경 없는 생활을 자랑하지만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예전이란 예전이 아닐 때에만 절실하게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때는 몰랐다". 이 책은 나이듦을느끼는 독자들에겐 쉽고 깊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물론 "이미 알고 있어요."라고 말할 젊은이들은 없을 것이다. - P65

더는 이런 세상에서 살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다썩었는데나만 청정하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사기당하는 데 이력이 났다. 돈, 시간, 사람 잃기를 반복한다. 잘난 척하다, 순진함과 진정성을 구분 못해서, 일방적이어서, 준비되지 않은 정의감 때문에,
멍청해서 그러다 분노가 폭발, 모든 것을 망치기 일쑤다.
유관순, 윤동주까지 갈 것도 없고 김수영 47년, 나쓰메 소세키 49년, 김현 48년, 내가 좋아하는 배우 필립 시모어 호프먼은47년을 살았다. 그들과 비교할 일은 없다. 하지만 ‘나이만 먹는다‘는 괴로움은 떨칠 수 없다. 다행히 우주의 관점이라는 게 있다. 그렇지, 나는 모래알의 백만분의 일보다 작은 먼지다. 어디로 나가긴? 일단, 이부자리에서 나가자. - P71

사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별것이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 있을 뿐이다. 그게 끝이다. 삶도 죽음도 거창한 주제가 아니다. 남성의 관점이 있고 여성의 관점이 있듯이.
인간의 관점이 있다면 자연의 관점이 있다. 삶의 관점이 있다면죽음의 관점이 있다. 자연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죽음은 큰사건이 아니다. 죽음의 관점에서 보면, 삶은 짧다. 대부분은 시시하고 잘 안 써지는 글과 같다.
글의 서두에 ‘붓‘ 이야기가 나오지만 소세키는 한번도 붓으로원고를 쓴 적이 없다고 한다. 모두 만년필로 썼다. - P74

고령화 사회, 내 걱정거리는 상호 혐오다. 사람들은 노화를의식하면서 자기 혐오와 싸우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겐안도감과 우월감을 느낀다. 특히 여성들이 자주 쓰는 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는 말이 나는 매우 불편하다. 자글자글 스스로에 대한 방어이자 여성의 여성 혐오다.
저자는 노화의 실제 현상보다 시선, 이미지, 인식에 집중한다. 몸은 세월 앞에 노출되어 있지만 몸의 이미지는 인생의 초창기에 형성되고 내내 학습된다. 하지만 노화는 전 생애에 걸쳐진행되므로 사실 노인의 범주는 임의적이다. 시대마다 지역마다 노령의 개념이 다르다. 삶은 누구에게나 질병과 피로와 나이듦의 시간이다. 그래서 나이듦은 느낌이다. 타인의 시선을 내재화한 자기 감정인 것이다. - P83

그렇게 느끼는 것뿐이다. 노화는 인생 자체다. 태어나고 시간이 흐르고 죽는다. 특별하지 않다. - P84

 은둔을 고민하지만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은둔이 도피 이상이 되려면 입장이 확실해야 한다. 나의 잠정결론, 은둔의 이유는 세상이 나를 더럽혀서가 아니다. 내가 세상을 더럽히므로 떠나야 한다. 마음이 편하다. 마음만이라도 거사居士). - P92

이창호는 할아버지로부터 성의를 배웠다. 무엇인가를 얻으면반드시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누구에게나 정성을 다하는 성의는 그의 서명(휘호)이기도 하다. (278쪽) 흔히 성의나 성실은 모범생 기질이나 심지어 답답함으로까지 오해되곤 하는데 그렇지않다. 만사를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의미한다. 나는 불성실한사람이 두렵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에 관해 말하고 싶어 하지만, 실제 이룰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말을 앞세우면 작게는 기회를, 크게는 신의를 잃는다. (275쪽)가장 신비로운 바둑의 세계는 복기(復棋)다. 누구나 실패 후반성하고 학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아니, 실패에서 배우지못하는 인생이 대부분이다. 학창 시절 틀린 시험문제를 다시보는 것도 괴로운데, 프로기사들은 대국이 끝난 직후 복기를둔다. "보이지 않는 창칼"이 오간 상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취재진의 플래시세례 속에서 다시 배우는 것이다. - P116

캐롤의 상황은 보편적이지만 매력적이다. 작품 행간에 심리적, 문화적, 정치적 배경이 빼곡하기 때문이다. 고전은 보편적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쓴‘ 것이다. 캐롤이 부러운 이들이많을 것 같다. 그는 다 가진 듯하다. 세상에 다시없을 친구, 연인, 그리고 자신의 길. 한가지 불만이 있다. 연인의 뒤를 캐는탐정이라는 작자에게 캐롤은 총을 겨누지 않는다. (286쪽) 나 같으면 그 자식의 몸에 구멍을 냈을텐데. - P144

그는 이미 삶을 완성(죽음)했다.
비루함, 모욕, 분노가 일상인 이 지옥에서 은둔을 생각하는사람에게도 요긴한 책이다. 지금 여기가 사람이 살 곳인가. 인류가 멸망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그 사실을 모를 만큼 우리는감각을 잃었다. 사는 방법은 세 가지. 하나는 글자 그대로 사는것이 아니라 ‘죽지 못해서‘ 살 수밖에 없는 생잔(生殘), 또 하나는 유사 죽음인 은둔이나 과다수면, 마지막은 자살 혹은 자살고민 상태다.
굴드의 은둔은 자기 방식의 적극적인 삶이었다. 그는 내가가장 부러워하는 호모 사피엔스다. 재능이나 명예, 불후의 음반 따위가 아니다. 짧고 알찬 삶. 부질없고 어리석은 시간이 없었던 듯하다. 그는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alone withthe alone)."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141쪽) 그것이 ‘성공‘
비결이다. 그의 은둔은 사랑하는 음악과 단둘이 하나가 되기 위한 최상의 방법이었고, 당연히 외롭지 않았다. - P153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외롭지 않다 ("미천한 저의 사랑을 받아주세요").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 권력자다. 자기 충족적 삶은 최고로 힘을 지닌 상태다. 인간은 권력 지향적이기 때문에 권력감이없으면 외로운데, 자기 몰두형 인간은 권력에 무심하다. 사실,
이 행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된다. - P154

‘조용히, 가만히 있다‘는 뜻이란다. "드러나지 않아 조용했고은은했으며 떠난 뒤에도 가만한 당신" (뒤표지) 널리 알려지거나 요란스럽지 않았지만 세상의 치명적인 틈새를 몸으로 메운,
인류가 크게 빚진 사람들이다. 가만한 사람들이었지만 결코 가만히 있지 않았던 이들이다. 이들을 "은은한 당신"이라고 표현하다니. 저자의 독특하고 단단한 정신이 부럽다. 글쓰기는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 P156

내 친구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15년간 치료해 왔던 담당 의사가 "당신은 의사인 내가 봐도 죽을 만큼 고통을 겪고 있다. 죽어도 된다."고 허락(?)했다. "대신, 며칠만 미루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말을 붙잡고 지금까지 살고 있다. 저자가 파버로의 인생에 붙인 타이틀은 "죽음을 이해하는 것으로 예방하다."
(《가만한 당신》, 60쪽)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을 통해서만 회복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힐링이 어렵다. "양지에서 누릴 것다 누리고 살았지만, 노력 중인 저자가 전한 아름다운 이들 덕분에 어느 ‘음지의 독자‘가 크게 위로받았음을 고백한다. - P157

선물은 드물고 뇌물은 넘쳐난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는 절대로 애매하지 않다. 뇌물은 당장의 대가가 오가는 불법 구매 행위일 뿐이다. ‘불편해도‘ 선물과 도움이 오가는 사회가 바람직하다. 사회 구성원이 언제든지 불특정 다수에게 갚을 빚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세, 마음의 빚으로 이루어진 연대 채무와 채권의 관계가 유동적인 관계. 가진 것의 크고 작음과 관계없이 사회에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권리로 인식되기를 희망한다. 감사가 공적 영역의 의제가 될 때 돌봄 사회가 가능해진다. 이것이 ‘헬조선‘의 대안 아닐까. 이 시대의 비극은 나의 선물 사건처럼 상호 행위인 감사는 ‘부담스럽고‘, 구조적 착취는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 P160

글은 아는 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버리는 과정이다. 앎이란,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지식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이다. 지식이 자료에 불과함을 증명하는 일이다. 그래서 진보(進步)의 방식은 계속 걷기고, 보수(保守)의 도구는 과거를 지키는 익숙함(진부함)이다. 쉬운 말은 지배자, 사기꾼, 게으른 이들의 언어다. 한국 사회처럼 스트레스가 많은 곳에서는 선호될수밖에 없다. 생각은 엄청난 노동이기 때문이다.
자기 모순은 언어를 빼앗긴 이들의 운명이다. 이것이 지배와피지배 관계의 핵심이다. 강자의 삶과 기존의 언어는 일치하지만 약자의 삶과 언어는 불일치한다. ‘세계문화유산 군함도‘는누구의 관점인가? 피억압자의 노동을 지배자의 시각에서 정의하는 것, 이것이 가부장제요, 제국주의, 인종주의다. - P165

나는 최근 우리 사회의 여성 혐오 현상이 ‘혐오‘일까 다소 의문이 든다. 전통적인 혐오(포비아)는 공포와 무지로 작동한다.
지금 일련의 사건들은 무지나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그냥 약자를 함부로 취급하는 것이다. 이들의 자기 도취에는 타인을 짓밟겠다는 의지가 있다. 근대적 인권상식은 규범적으로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는 것인데, 규범에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말만 하지 않으면 된다. 생각은 자유지만 발화는 공동체를 파괴하는 행위다.
이들은 어떤 규범은 지켜야 하고 어떤 규범은 무시해도 된다는, 게임의 법칙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어떤 부분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약하고 편한 집단만 타깃이 된다. 상대를 혐오하고, 조롱(‘풍자‘)했을 때 어떤 사회적 처벌과 반응이 벌어질지잘 아는 권력 관계의 달인이다.  - P183

역사상 가장 오래된 범죄, 여성에 대한 폭력은 나를 포함한
‘여자의 일생‘의 일부다. 몇 주간 인터넷을 달구었던 진보 남성의 폭력, 알고 있던 사건도 있었는데, 내가 아는 한, 실제 상황을 모두 보고한 피해자는 없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통념보다훨씬 광범위하고 심각하다는 얘기다.
폭력은 불법이다. 합법적 폭력인 공권력조차 허용범위는 대단히 좁다. 폭력을 당했으면 가해자가 누구든 경찰에 신고하면된다. 피해자의 신원이 공개될 일도 없고, ‘범인‘의 진정성을 놓고 공방전을 벌이는 것은 더욱 이상한 일이다.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은 사법 체계가 할 일이다.
하지만 여성이 피해를 신고할 수 있다면 이미 가부장제 사회가 아닐 것이다. 인권 의식 향상으로 신고율이 높아져도 걱정이다. 검경이 가해자를 제대로 처벌할까?  - P185

제1의 성. 여성은 남성의 소유, 부속, 기호이기에 제2의성이다. 그나마(?) ‘도하걸‘에 들 수 있는 제2의 성은 젊고 예뻐야 한다. 성적 소수자나 아줌마는 ‘제3의 성‘이다.
‘~걸‘은 여성이 자기로 인해 의미를 지닌다는, 조물주 망상이다. 진보? 지금은 중세이고 그는 중세의 신이다. 물론 새삼스럽지는 않다. 남성은 ‘마르크스주의자‘인데 여성은 ‘마르크스걸‘이다. ‘모던 보이‘도 있다고? 맞다. 이것이 타자성의 본질이다. 모던의 주체는 서구이므로 식민지 조선의 남성은 모던할 수없다. 모던(서구)의 ‘보이‘인 것이다. - P187

위 이야기는 《제2의 성》이 본 2015년 한국 사회다. 1949년 이책이 처음 출판되었을 때 프랑스 지성계는 싸늘했지만 대중의호응은 엄청났다. 사르트르의 알제리 독립 투쟁 참여와 파동과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보부아르가 나도 못마땅하지만, 이 책이 현대 페미니즘의 서장임을 부정하는 이는 없다. 실존주의 철학 입문서로도 훌륭하고 사례가 풍부해서 서양의 종교와 문학을 두루 접할 수 있다.
여성주의는 양성 이슈, ‘여혐 남혐‘ 식의 대칭 언어가 아니다. 여성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여자‘로 나누는 권력에 대한질문, 즉 인간의 범주에 관한 인식론이고 《제2의 성》은 그 역사를 압축한다. - P187

위에 적은 것은 유명한 페미니스트들이 한 말이고 제 소견을말한다면, ‘경계(border)에 대한 사유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페미니스트냐고요? 페미니스트는 직업도, 정체성도, 멤버십도 아닙니다. 실망스러우시겠지만 어쩌면 그냥 지칭(指稱) 명사에 불과할지도 모르죠.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는 채식주의자는 "~주의자"라는 표현 자체가 평화의 언어는 아니죠. 대개는 적대,
비난, 심문하기 위한 단어입니다.
물론 저는 페미니스트를 지향합니다. 하지만 어떤 행동이 여성주의적인 것인지는 늘 고민스럽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다."는 효과적인 전략이지만, 그 효력을 잘 계산해야 합니다.
모든 선언은 일시적 전략이지 목표가 아닙니다. - P189

페미니즘의 정의가 불가능한 것은 태생적 모순입니다. 모든여성은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입니다. 그 다양한 사람들을 여성이라는 울타리로 억지로 묶고 여성의 가치를 남성을 위한 삶이것이 성 역할 규범입니다)으로 정해놓은 것이 성차별이니까요.
지구상에 여성이 약 35억 명인데, 어떻게 여성이 같은 처지일수 있겠어요? 간혹, 부자 여성이 있고 가난한 남성이 있는 것이그렇게 이상합니까.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등 여성들 사이의다름을 인식하고 차이를 갈등이 아니라 자원으로 삼고자 하는세계관입니다.  - P189

성폭력과 성 역할은 문화적 규범으로 인식되어 법적 처벌이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성들은 사적 복수를 꿈꿀 수밖에없다. 실행하고 성공하는 사례가 많겠는가, 엄두도 못 내고 평생 분노와 우울증으로 살아가는 여성이 많겠는가? 우리도 역사가 있다.  - P197

여성이라는 ‘작은‘ 공통분모 하나 때문에 일상과 목숨을 잃는 세상에서, 여성은 일시적으로 "너는 나다."라는 정체성의 정치를 주장한다. 여성의 저항은 그 자체로 보편적인 사회 정의다. 이들의 목소리가 가시화되면 여성의 복종으로 성립되어 온가부장제는 이전과 같을 수 없다.
차별은 일상이고 살인은 극단인가? 그렇지 않다. 여성 살해는 일상의 연결이자 수순이다. 성소수자나 ‘흑인‘의 경우와 같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포기를 해결책으로 삼는다. 하지만 나를비롯해 피해 여성들이 지칠 것이라는 착각은 접는 것이 좋을 것이다. 포스트잇의 가장 많은 내용은 "잊지 않겠다."였다. - P225

문제는 남녀 대립적 사고방식이다. 오로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사람이 죽었고, 여성들은 두려움을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를 "남성에 대한 혐오"라고 한다. 무슨 대책이 가능하겠는가? 이러한 현상은 극한의 성차별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반영한다. 적반하장(賊反荷杖)이 더 분한 법. ‘남성 혐오‘는 여성에 대한 비하보다 나를 더 공포에 떨게 했다.
심란한 이 시기에 뤼스 이리가레의 <하나이지 않은 성》만큼적절한 책이 있을까. 인간의 성은 하나(남성)가 아니라는 것이다(This Sex Which is Not One). 이 책은 정신분석학과 정신분석 페미니즘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이리가레의 전략은 기존 정신분석의 틀 안에서 그들의 이론을 반사(反射)하는 주체가 되자는 것이다. 유명한 거울 이론의 등장이다.이때 이제까지 스스로 태양이었던 남자들은 눈이 멀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성, 하나의 언어만 존재한다. 이리가레는말한다. "나는 남성-여성의 대립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남성성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요? 당연하지요.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전혀 없으니까요." (184쪽, 필자가 윤문함) - P227

그는 성차별뿐 아니라 지금생각해도 놀라울 정도로 인종차별에 격렬히 저항했다. 이혼, 동거의 자유와 미혼모와 사생아의권리를 위해 싸웠다. 그의 머리칼을 자르고 길거리에서 그를 끌고 다녔던 공포 정치가들과 후세대들은, 대담하고 똑똑했던 이
‘여성을 ‘괴물‘이라 불렀다. 무모한 여자, 정신이 불안정한 여자,
용감한 미치광이, 부도덕한 괴물………….
"역사를 모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억압받아 온 모든집단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역사를 모르는 여성에게 미래는 없다. 공부해야 한다. 여성주의 입문서가 필요하다면, 반드시 이책이어야 한다.
‘문명국‘ 프랑스도 여성 참정권은 법률상으로는 1946년에야보장되었다. 대한민국은 1948년 단두대 없이 주어진 권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여성을 노골적으로비하하는 정당에 투표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자존심이다. 인권의 전제는 여성의 인권이다. 인권이 있고 그 아래에 혹은 나중에 ‘그 외 사람들‘의 인권이 있는 것이 아니다. - P237

장르를 불문하고 모든 글은 글쓴이 자신의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쓰는 형식이 다를 뿐이다. 영화든 소설이든 논문이든 신문기사든, 모두 그 글을 쓴 사람의 이야기다. 따라서 ‘자전적 소설‘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다. 자기 현실과 재현 사이의 거리는 글마다 다르지만, 가장 어려운 글쓰기는 <헝거》 같은 형식의이야기다. ‘자서(自書)‘는 자서전(自敍傳)과 다르다.
성별과 인종, 계급 등 사회적 위치성과 무관하게 자서는 상처와 고통의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이 이슈는 ‘드러내기 어렵다기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다.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은 최악의 인성이자 글쓰기 태도인데, 그 덫에 걸리기 쉽다. 예술에서 권력자는 상처받은 사람,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하긴 상처가 아니라면, 왜 쓰겠는가? 상처가 없으면 쓸 일도 없다. - P246

《헝거》는 여성에 대한 폭력과 심리적 허기가 골격을 이루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자아 개념과 어떤 형태의 몸으로 사느냐에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다. 여성에게는 더욱 절실하고 고통스런 질문이다. 페미니스트는 이중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반대의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늘 협상과 자 - P248

기 검열의 긴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페미니스트에게 몸은 어떤 의미일까. 이 책을 읽고 직면했다. 내가 가부장제 사회에서수용되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여자라는 사실을. 내가 록산게이의 키와 몸무게라면………. 내 삶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예쁨‘, ‘스타일‘, ‘정상성‘에 온 신경을 쓰면서 자신과 타인을억압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그리고 인생이 힘든모든 이들에게 권한다. 용기란, 인생이란, 페미니즘이란, 글쓰기의 모범이란 이런 것이다. 삶은 완성될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이라는 진실을 <헝거》보다 더 구체적으로 배울 수 있는 책은 드물것이다. 책을 읽고 글쓴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책이 있는데,
나는 록산 게이를 발견했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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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쓴 글이 (그 글을 쓴 당시의) 나다." 사람과 글은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나는 지나친 개작이나 윤문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작가의 욕망일 뿐이다. 얼마 전 TV에서 캐럴 리드감독의 1949년작 영화 <제3의 사나이>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보았는데, 진행자가 "70년이 지난 지금 봐도 걸작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오손 웰스의연기!) 이런 방식의 상찬은 흔하다. 문학이든 영화든 음악, 미술모두 "시공간을 초월한 걸작, 클래식". - P11

일반적으로 소설가는 ‘감동적인 재미있는 스토리텔러(이야기꾼)‘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소설가는 사상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학위 논문에서 가장 중요한 평가 요소는, 기존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질문, 문제 제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역시 모든 사람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실패하기 쉬운 도전이다. 새로운 질문은 새로운 연구 방법과글쓰기를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의식에 맞는 형식미를 갖추기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의식 자체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 P12

이 책은 ‘글쓰기 이론‘의 맥락에서, 글을 쓰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게 글쓰기는 삶이자 생계이다.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이리저리 서가를 기웃거리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깨달은 사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앎(knowledge)의 목표와 - P13

방법은 같다는 것이다. 거칠게 말해, 플라톤과 주디스 버틀러는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앎의 이유와 목표는 자신을 우리 자신을 아는 데 있다. "주제 파악을 하라, 너 자신을 알라."라는의미라기보다는 행위는 곧 행위자라는 뜻이다. 행위자(나)를알려면 자기 행위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아는 지식을, 내가 쓴 글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나는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는 ‘나‘를 알기 힘들다. 이 질문은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라는 탐구로 바뀌어야 한다. - P14

내가 알고 싶은 나, 내가 추구하는 나는 협상과 성찰의 산물이지 외부의 규정이어서는 안 되므로/아니므로 우리는 늘 생각의 긴장을 놓을 수 없다. 글은 그 과정의 산물이다. - P14

다만, 여성주의와 글쓰기의 관계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하고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여성주의만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학문은 드물다. 아니, 글쓰기와 여성학의 인식론, 방법론은 거의 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문학은 언어의 역사이고, 여성주의는 언어의 역사가 형성된 과정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 - P15

다. 언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개입된 권력 관계를 질문한다면, 기존 여성주의를 포함해 세상의 모든 언어는 상대화와 붕괴(의미의 다변화)의 운명을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여성주의와 글쓰기 공부는 별개의실천이 될 수 없다. 여성주의는 하나의 분과 학문(국문학, 영문학・・・・・・)이 아니라 평화학이나 탈식민주의나 생태학처럼 일종의인식론이다. - P16

두 번째 인용구는 스무 살에 최초의 공상 과학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의 어머니이자 그를 출산하다 서른여덟살에 산욕열로 사망한 영국의 근대 사상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1759~1797년)의 목소리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여성 저자와독자가 생길 무렵에 활동했던 그의 처지와 2백여 년이 지난 지금 나의 처지가 다르지 않음에 절망과 슬픔을 지나 ‘안도‘했다.
나는 송고할 때쯤 스스로에 대한 비참함으로 마음속 땅으로 꺼졌다가 책상에 얼굴을 박고 머리를 흔드는 버릇이 있다. 편집자에게 늘 하는 말도 "시간에 쫓겨 완성도가 부족한 글을 보내 죄 - P16

송합니다."이다.
근대 페미니즘의 선구자, 울스턴크래프트의 걸작도 생계 수단으로 탄생했다는 사실이 나를 위로한다. 《여성의 권리 옹호》도 작가 자신의 말대로 "상업적 목적으로 ‘부실하게 나온 책"
이라니! 겸손의 뜻도 있겠지만 절박성이 느껴진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 독립 연구자‘로서 매문(文)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나는 매일매일 글의 수위를 놓고 나 자신과 사회와 협상을 거듭한다. 그렇다고 내 생각이 모두 ‘훌륭한 것도 아니고 ‘좋은‘ 사유가 모두 글로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울스턴크래프트의 이야기는 나의 스트레스와 부끄러움에 ‘역사성‘을 부여했다.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용기를내리라. 물러서지 않고 기다리리라.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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