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馬와 淑女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生涯와

  木馬를 타고 떠난 淑女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木馬는 主人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像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少女는

  庭園의 草木 옆에서 자라고

  文學이 죽고 人生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木馬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孤立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女流作家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燈臺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未來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木馬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意識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靑春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人生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雜誌의 表紙처럼 通俗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木馬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박인환 시집[목마와 숙녀 <槿域書齋 1976>]중에서


그러나 결국 하룻밤이 무엇이란 말일까? 짧은 시간에 불과하다. 특히 어둠이 빨리 옅어지고, 그렇게나 일찍 새가 노래하고, 수탉이 울고, 혹은 파도의 희미한 녹색 골이, 색깔이 변하는 이파리처럼 생기를 띨 때는 그러하다. 하지만 밤은 밤으로이어진다. 겨울은 밤들을 한 묶음 움켜쥐고는, 지칠 줄 모르는손가락으로 똑같이 공평하게 나눠 준다. 밤들이 길어진다. 밤들이 어두워진다. 어떤 밤들은 밝은 행성을, 환히 빛나는 금속판을 높이 치켜든다. 비록 황량해졌지만 가을 나무들은 차가운 성당 어두운 구석에서 환히 빛나는, 갈가리 찢어진 전승 깃발처럼 섬광을 띤다. 그 구석의 대리석에 황금으로 새긴 글자들은 전장에서의 죽음과 멀리 인도의 모래 속에서 하얗게 변색되고 바싹 마른 뼈들을 묘사한다. 가을 나무들은 추수철 노란 달빛 속에서 어렴풋이 빛나고, 그 빛은 노동의 에너지를 숙 - P206

성시키고, 그루터기를 매만지고, 파도를 몰아와서 새파랗게해안에 철썩이게 한다.
이제 인간의 참회와 그 온갖 노고에 감동을 받은 듯, 성스러운 선(善)이 커튼을 열고 그 너머에 홀로 우뚝 곧추선 토끼 같은 형체, 부서지는 파도, 흔들리는 배를 드러내는 듯하다. 우리에게 자격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언제나 우리 것이어야 하리라. 하지만 슬프게도, 신성한 선은 끈을 홱 잡아당겨 커튼을닫아 버린다. 그 광경은 그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는 쏟아지는 우박으로 자기 보물을 덮어서 부수고 뒤죽박죽으로 해 놓아서, 보물이 혹시라도 무사히 돌아오거나 우리가 그 파편들로완전한 전체를 만들어 내거나 혹은 어수선하게 흩어진 조각들에서 진실의 명료한 글자들을 읽는 일은 있을 수 없어 보인다.
우리의 참회는 그저 흘끗 봐줄 만한 가치밖에 없으니까. 우리의 노고는 그저 잠시 유예해 줄 만한 가치밖에 없으니까.
- P207

그렇게 아름다움이 그리고 정적이 지배했고, 더불어 아름다움 그 자체의 형상을 만들었다. 삶이 떠나 버린 형상이었다.
그것은 기차 창문에서 내다보인, 멀리 떨어져 있는 저녁나절의 연못처럼 고적했다. 저녁 무렵 어슴푸레한 그 연못은 너무나 빨리 사라져 버려서 비록 한 번 보였을 뿐이지만 그 고적감을 잃지 않았다. 아름다움과 정적이 침실에서 손을 맞잡았고,
엿보기 좋아하는 바람과 끈적끈적한 바닷바람의 부드러운 코가, 덮개를 씌운 주전자들과 시트에 덮인 의자들 사이를 문지르고 킁킁거리면서 거듭 질문("이 색깔이 바랠까? 부서져 버릴까?")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 질문에 우리는 계속 남아 있을거라고 대답할 필요가 거의 없는 듯, 그 평화로움과 무심함,
순수히 응집된 공기는 거의 방해받지 않았다. - P210

 그런 거울들에, 사람들의 마음속에 구름들이 끊임없이 바뀌고 그림자가 생기는 불안정한 물웅덩이들에, 꿈들은끈질기게 남아 있었다. 갈매기, 꽃, 나무, 남자와 여자, 그리고흰 대지가 스스로 선언하는 것 같았던(그러나 의문을 제기하면즉시 철회하는 듯했던) 선이 승리하고, 행복이 만연하고, 질서가 지배하리라는 기이한 암시에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혹은 어떤 절대적인 선이나 수정 같은 강렬함을 찾아서, 익히 아는 쾌락이나 미덕과는 무관하고 가정생활의 일상적인 과정과도 동떨어진 것, 소유한 사람에게 안정감을 줄 모래 속 다이아몬드처럼 홀로 확고하고 밝게 빛나는 것을 찾아서 이리저리방랑하려는 특이한 충동에도 도무지 저항할 수 없었다. 더욱이, 부드럽게 다가온 봄은 벌들이 윙윙거리고 각다귀들이 춤추는 가운데 온몸을 망토로 휘감고 눈을 베일로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고, 지나가는 그림자들과 흩날리는 빗줄기 속에서인간의 슬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 P216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잠을 자고 있어도 그 여름의 후반이되자 망치를 펠트 위에 규칙적으로 내리치는 듯이 무디고도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복되는 충격으로 숄이 더 풀렸고 찻잔들에 금이 갔다. 마치 어떤 거인이 고뇌에 차서 큰 비명을 질러 대는 바람에 찬장 안에 늘어선 컵들이 흔들리는 듯이 이따금 찬장 속에서 유리잔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면 다시 정적이 감돌았고, 그런 다음에는 밤마다, 때로는 장미들이 화려하게 피어 있고 햇빛이 벽 위에 선명한 형체를 드러내는 평범한 대낮에도, 무언가 떨어지는 쿵 소리가 이정적 속으로, 이 무심함 속으로, 이 완전무결함 속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 P217

그 계절에 바닷가로 내려가 거닐면서 바다와 하늘에게 어떤 전갈을 알려 주었느냐고 혹은 어떤 환영을 확인했느냐고물었던 사람들은 흔히 드러나는 신의 은총들(바다 위 석양,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떠오르는 달, 달을 배경으로 떠 있는 고기잡이배들, 풀을 한 움큼씩 쥐고 서로에게 던지는 아이들) 가운데서 이명랑함이나 평온함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주시해야 했다. 가령 잿빛 배가 고요한 유령처럼 왔다가 떠나갔다. 바다의 잔잔한 표면에는 그 밑에서 뭔가 보이지 않게 끓어오르다가 피를흘린 듯이 자줏빛 얼룩이 져 있었다. 더없이 숭고한 사색을 유도하고 더없이 안온한 결론으로 이끌어 가리라고 기대되는풍경에 이처럼 침입해 들어온 것들 때문에 그들은 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덤덤하게 보아 넘기거나, 그것들의 의미를 그 풍경에서 지워 버리는 건 어려웠다.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외부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아름다움을 반영하고 있다고 계속 경이를 느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 P218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여자 혼자서 하기에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여기는 아이들 방이었지. 아, 너무 축축해서 회반죽이 떨어져 나가고 있구나. 그런데 대체 무엇 때문에 저기에 짐승의 두개골을 걸어 놓은 것일까? 그 두개골에도 곰팡이가 슬었다. 다락방마다 쥐들이 들꿇고, 빗물이 새어 들어왔다. 하지만 램지 가족은 사람을 보내지도 않았고, 직접 와보지도 않았다. 자물쇠 몇 개가 떨어져나가서 문들이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녀는 어스름 속에서그 집에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여자 혼자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나치게 할 일이 많았다. 움직일 때마다 다리가 삐걱거렸고, 신음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녀는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고, 그 집을 닫히고 잠긴채로 내버려 두었다. - P225

간헐적으로 이어지는 그 소리는 귓전에 닿았다가 잦아들었다. 개 짖는 소리와 양 울음소리는 산발적으로 들렸지만 어쩐지 서로 연결되었고, 곤충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잘린 풀들이떨리는 소리도 서로 제각각이었지만 어쩐지 조화를 이루었으며, 귀에 거슬리는 풍뎅이의 붕붕 소리와 삐걱거리는 바퀴 소리도 시끄럽고 나지막하지만 신비롭게 결합되었다. 귀를 기울여 모아 들을 때, 늘 조화를 이룰 듯한 이 소리들은 분명히들리는 법도 없고, 결코 완전한 조화를 이루지도 않는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하나씩 둘씩 소리들이 사라지고, 조화는 비틀거리며 스러지고, 정적이 드리운다. 해가 지면서 선명한 윤곽이 사라지고, 피어오르는 안개처럼 정적이 솟아오르고 고요함이 퍼져 나가고 바람이 잦아들었다. 나뭇잎들 사이에 가득퍼진 녹색과 창가에 핀 흰 꽃들에 어린 어슴푸레한 색을 제외하면 여기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운 곳에서 세상은 느즈러지게몸을 흔들고는 잠이 든다. - P232

그렇다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이 모두가 무엇을 뜻할수 있을까? 릴리 브리스코는 혼자 남겨진 후 커피 한 잔을 더가지러 부엌에 가야 할지 아니면 그곳에서 기다려야 할지를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어느 책에선가 보았던 이 말이 그녀의 생각을 막연히 드러냈다. 램지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 첫날 아침에 그녀는 자신의감정을 간결하게 정리할 수 없었고, 그저 공허한 망상들이 잦아들 때까지, 텅 빈 마음을 감추도록 그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없었다. 실로 긴 세월이 지나고, 램지 부인이 죽은 후에 돌아와서 그녀가 느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었다. - P239

 왜 느끼지도 않는감정을 끌어내려고 늘 애써야 할까? 불경스러운 일이야. 고작해야 메마르고, 시들어 빠지고, 소진되어 버릴 뿐이야. 이들이나를 초대하지 않았어야 했어. 나는 오지 않았어야 했어. 마흔네 살이나 되어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는 체하는 것을 혐오했다. 투쟁과파멸, 혼돈의 세계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붓밖에 없으므로, 일부러라도 붓을 들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 그녀는그런 일을 몹시 싫어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당신이 줄 때까지는 당신의 캔버스에 손을 댈 수 없소, 그녀에게 접근하며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그가 다시 탐욕스럽고도 얼빠진 듯한 얼굴로 다가왔다. 자, 그렇다면 그 일을 끝내는 편이 차라리 더 수월하겠군, 릴리는 오른손을 툭 떨어뜨리며 절망적으로 생각했다.  - P246

 그는 삼켜 버릴 대상을 찾는 사자 같았으며, 그의 얼굴에는 절박한 기색, 과장하는 기색이 어려 있어서그녀를 놀라게 했고 치맛자락을 그러모으게 했다. 그러고 나면 갑자기 그의 활력이 살아났고, 갑자기 빛이 타올랐으며 (그녀가 그의 구두를 칭찬했을 때) 일상적인 인간사에 대한 활기와관심이 되살아났다. 이런 상태도 지나가고 변하면서(그는 늘변하고 있고, 아무것도 숨기지 않았으므로) 마지막 단계로 나아갔다. 그 단계는 그녀로서는 처음 보는 새로운 것이었으며 자신의 과민한 반응을 부끄러워하게 만들었다고 그녀는 인정했다. 그는 근심이나 야망을 다 떨쳐 버린 것 같았고, 공감에 대한 기대와 칭찬에 대한 욕구는 다른 영역에 들어섰으며, 손에닿지 않는 그 작은 행렬의 선두에 서서 마치 호기심에 이끌린듯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과 말없이 나누는 대화에 빠져든것 같았다. 얼마나 특별한 얼굴인가! 대문이 큰소리를 내며닫혔다. - P256

그래, 그들이 갔어. 이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안도와 실망의한숨을 쉬었다. 휘어졌던 가시나무가 다시 튕겨서 그녀의 얼굴에 부딪히듯이 그녀의 공감이 자기 얼굴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분열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한 부분은 저기로 이끌려 간 것 같았다. 안개가 낀 고요한 날이었고,
오늘 아침 등대는 무한히 멀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다른 부분은 집요하게, 확고하게 여기 잔디밭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마치 캔버스가 둥실 떠올라 비타협적인 하얀 화폭을 눈앞에펼쳐 놓은 듯이 캔버스를 보았다. 그것은 냉정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온갖 조급함과 동요, 어리석음과 감정낭비에 대해서 꾸짖는 듯했다.  - P257

 죽을 때까지 폭정에 저항하기로 약속했음을. 그들은 불만감에 짓눌렸다. 그들은 강요받고, 명령을 받았다. 아버지는자신의 침울한 분위기와 권위로 또다시 자식들을 짓눌렀고,
자기가 원했기에 이맑은아침에 자신의 명령에 따라서 이 꾸러미를 들고 등대에 가도록 강요했고, 자기 나름의 만족감을위해서 죽은 사람을 기념하는 의식에 동참하도록 했다. 그들은 이것이 싫었기에 그의 뒤에서 꾸물거렸다. 그날의 즐거움은 이미 다 망가지고 말았다.
산들바람이 기분을 상쾌하게 해 주고 있었다. 보트는 한쪽으로 쏠리고 물결은 예리하게 갈라지면서 작은 녹색 폭포와물거품, 큰 폭포를 일으키며 멀어져 갔다. 캠은 물거품을 내려다보았고, 온갖 보물을 간직한 바닷속을 들여다보았다. 그 속도에 그녀는 매료되었다. 그녀와 제임스의 유대가 조금 약해졌다. 약간 느슨해졌다. 그녀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무척 빨리가는구나. 우리는 어디를 가는 걸까? 캠이 움직임에 매료되어있는 동안, 제임스는 돛과 수평선에 눈을 고정한 채 꿈쩍도 않고 키를 조종했다. - P270

 누군가 그에게 손을 내밀던 것을. 여자들이란늘 이렇다고 그는 생각했다. 여자들의 흐리멍덩한 마음은구제 불능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사실이 그러했다. 그녀 (자기 아내)도 그랬었다. 여자들은 그 무엇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생각하지 못한다. 하지만 캠에게 화를 낸 것은 잘못이었다. 게다가 자신은 여자들의 이런 모호함을 다소좋아하지 않았던가? 이는 여자들이 지닌 특이한 매력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이 아이가 자신에게 미소를 짓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딸은 겁에 질려 보였고,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는 손가락들을 꽉 움켜쥐고, 이 오랜 세월 동안 사람들의 동정과 찬사를 이끌어 내도록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었던 자신의목소리와 얼굴, 표현이 풍부한 신속한 몸짓을 차분히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아이가 나를 보고 미소를 짓게 할 것이다. 딸에게 건넬 단순하고 편안한 이야깃거리를 찾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야깃거리가 있을까?  - P273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한밤중에 분노로 몸을 떨면서 잠에서 깨었고, "이걸 해라.", "저걸 해라." 하는 그의 명령과 오만, "내게 복종해라." 하는 그의 지배를 기억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평화의 망토에 감긴해안을 슬픈 눈으로 끈질기게 바라보았다. 마치 해안가 사람들이 모두 잠들어서 연기처럼 자유롭게, 유령처럼 자유롭게오갈 수 있는 것 같았다. 저기서는 사람들이 고통을 겪지 않아. 그녀는 생각했다. - P277

 그래, 그녀의 저런 모습을 틀림없이 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회색 옷이 아니었고, 그렇게 고요하지도, 그렇게 젊지도, 그렇게 평화롭지도 않았다. 그 모습은 쉽사리 떠올랐다.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월리엄이 말했다. 하지만 아름다움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름다움에는 이런 형벌이 있다. 아름다움은 너무 쉽사리 다가오고,
송두리째 고스란히 다가온다. 그것은 삶을 고요히 가라앉히고 얼어붙게 한다. 붉게 물들거나 창백하게 질린 얼굴빛, 기묘한 찡그림, 스쳐 가는 빛이나 그림자 같은 동요된 기색은 잊히고 만다. 한순간 얼굴을 알아볼 수 없게 하지만 이후에는 언제나 보이는 독특한 면모를 이루는 것들. 이 모든 것을 아름다움으로 덮어 숨기는 일은 훨씬 더 간단했다. 그러나 그녀가 사냥 모자를 홱 눌러썼을 때, 혹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달려갔을때, 혹은 정원사 케네디를 꾸짖었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릴리는 궁금했다. 누가 내게 말해 줄 수 있을까? 누가나를 도와줄 수 있을까? - P289

여기저기서 이는 실오라기 같은 바람을 제외하면 너무나맑은 아침이어서 바다와 하늘이 온통 한 폭의 천을 펼쳐 놓은것처럼 보였다. 돛들은 하늘 높이 꽂혀 있고 구름들은 바닷속으로 내려앉은 듯했다. 바다 저 멀리에서 기선 한 척이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연기를 공중에 뿜어대자, 연기는 장식적인곡선을 그리고 빙빙 돌면서 공중에 머물렀다. 마치 올이 고운망사천처럼 공기가 무언가를 붙잡아서 망사 안에 포근히 간직하다가 이리저리 살살 흔들어 대는 듯이. - P297

그러나그 순간 돛이 서서히 빙 돌더니 점차 부풀었고, 배는 몸을 흔들며 잠에 취한 상태에서 반쯤 깨어나 출발하려는 듯하더니그런 다음에는 완전히 정신을 차리고 파도를 가르며 내달렸다. 그 순간의 안도감은 엄청났다. 그들 모두 서로에게서 다시떨어져 나와 편안해진 것 같았고 낚싯대들이 팽팽히 뱃전 너머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남몰래 교향곡을 지휘하듯이 신비스럽게도 오른손을 공중 높이 치켜들었다가 다시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 P306

 그의 주머니 속에서 모서리들이 말려 올라간 그 책에 무슨 내용이 쓰여 있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들은 알지못했다. 그러나 그는 책에 몰두해 있었다. 그래서 그가 지금그러듯이 잠시 올려다보아도, 그 행동은 무엇을 보려는 것이아니라, 어떤 생각을 더욱 명확히 정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고 나면 그의 마음은 다시 날아서 책으로 돌아갔고 독서에빠져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인도하는 듯이, 혹은 많은 양 떼를얼러서 몰아가듯이, 혹은 좁은 오솔길에서 밀어제치면서 올라가듯이 책을 읽는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때로 그는 곧바로덤불에 뛰어들어 재빨리 헤치고 나아갔고, 때로는 나뭇가지에 찔리거나 가시나무에 눈이 멀 것 같았지만, 그런 것 때문에패배를 자인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이어지는 낱장들 너머로흔들리면서 계속 나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침몰하는 배에서탈출하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갔다.  - P311

그녀는 다시 바다를, 섬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나뭇잎 같은섬의 뚜렷한 윤곽이 사라지고 있었다. 섬은 무척 작았고, 무척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바다가 해안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 주위에는 온통 일었다 가라앉는 파도뿐이었고, 어느 파도에 실려 온 통나무가 뒹굴었으며, 갈매기 한 마리가 다른 파도를 타고 있었다. 이 근방에서 배 한 척이 침몰했다고 그녀는손가락으로 물을 튀기면서 생각했고, 몽롱한 상태로 꿈꾸듯이 중얼거렸다. 우리는 각자 홀로 죽어 갔지. - P312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서 뭔가 달라진 것을 느꼈다. 그들은 층계에서 마주치거나 하면 하늘을올려다보고 날이 맑겠다든가 하고 서로 중얼거렸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람들을 아는 한 가지 방식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세부적인 것들이 아니라 윤곽을 아는 것. 정원에 앉아서 멀리 히스가 만발한 풀밭으로 흘러내리는 자줏빛 언덕 비탈들을 바라보는 것. 그녀는 이런 식으로 그를 알았다. 그가어딘지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그의 시를 단 한 줄도 읽은 적이 없었지만, 천천히 낭랑한 시구로 이어지고 있음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의 시는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사막과낙타, 종려나무와 석양에 대한 시였다. 그의 시는 개인적 감정을 극도로 억제했다.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했지만,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초연한 면이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거의 필요로하지 않았다.  - P318

창문도 선명하게 보였다.
하얗게 칠해진 창문 하나와 바위 위 작은 녹색 덤불도 볼 수있었다. 어떤 남자가 나와서 안경 너머로 그들을 바라보다가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등대가 저런 거였군. 제임스는 생각했다. 이 긴 세월 동안 만 건너편에서 보아 온 등대, 그것은 살풍경한 바위 위에 서 있는 견고한 탑이었다. 그는 그것에 만족했다. 그 모습은 자신의 성격에 대한 모호한 감정을 확인해 주었다. 노부인들이 정원에서 자기들 의자를 끌고 다녔지. 그는 집의 정원을 생각하면서 생각했다. 예컨대 늙은 벡위스 부인은인생이 매우 멋있고 무척 감미로우며 그들은 무척 자랑스러워하고 무척 행복해야 한다고 늘 말했다. 하지만 사실 제임스는 바위 위에 서 있는 등대를 보면서 인생이 저 등대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리를 꼭 웅크린 채 맹렬하게 책을 읽고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들 두 사람은 그것을 알았다. "돌풍 앞에서 질주하고 있다. 우리는 틀림없이 침몰할 것이다."
아버지가 이 말을 했을 때와 똑같이 그도 반쯤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 P331

거기 있는 무언가에 의해 불현듯 생각이 난 듯 그녀는 재빨리 캔버스로 몸을 돌렸다. 거기 그녀의 그림이 있었다. 그래,
초록색과 푸른색 선들이 올라가고 가로지르면서 무언가를 시도했지. 이건 다락방에 걸릴 거야. 그녀는 생각했다. 결국은파괴되고 말겠지.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녀는 붓을다시 잡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녀는 층계를 바라보았다.
텅 비어 있었다. 그녀는 캔버스를 보았다. 흐릿했다. 갑자기강렬하게, 마치 찰나의 순간 그것이 선명히 보인 듯이, 그녀는그 한가운데 선을 하나 그었다. 완성했어. 끝났어. 그래,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이 밀려오는 가운데 붓을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이제 그것을 보았어. - P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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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리는 눈물을 흘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림은 엉망이었다. 형편없었다. 더할 나위 없이 형편없었다! 분명 다르게 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색깔을 연하고 흐릿하게 칠할 수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표현할 수도 있었을 텐데. 폰스퍼트 씨라면 바로 그렇게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그녀는 강철골조 위에서 선명하게 타오르는 색깔을 보았고, 성당 아치 위에 앉은나비의 날개 빛깔을 보았다. 그 모든 것들 중에서 캔버스에 되는대로 그어 놓은 흔적 몇 개만이남아 있었다. 그리고 이 그림은 결코 남들이 보지 못할 것이다. 벽에 걸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귀에 이렇게 속삭이는 탠슬리 씨도 있었다. "여자들은 그림을 그릴 수없어요. 여자들은 글을 쓸 수 없어요…….…." - P81

하지만 이 그림을 다른 사람이 본 것이다. 그림은 이미 그녀에게서 떠난 것이다. 이 남자는 그녀와 깊은 교감을 나눈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 램지 씨에게 고마워하고, 그것과 그 시간과그 장소에 대해서 램지 부인에게 고마워하고, 예상치 못했던힘이 이 세상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래서 그 긴 난간을 더는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걷게 되었다는 생각(그무엇보다도 기묘하면서도 가장 활기를 북돋워 주는 감정)에 그녀는 그림물감 상자의 걸쇠를 필요이상으로 단단히 맞추었다.
그 소리는 원을 그리며 퍼져 나가서 물감 상자와 잔디밭, 뱅크스 씨, 돌진하듯 지나간 거친 말괄량이 캠을 영원히 둘러싸는것 같았다. - P89

아, 하지만 제임스가 하루라도 더 나이 먹는 것은 결코 바라지 않았고, 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 두 아이가 지금과똑같이 장난꾸러기나 기쁨의 천사로 영원히 남아서, 다리가긴 괴물로 커 가는 것을 보지 않는다면 좋을 텐데. 그 손실은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었다. 이제 제임스에게 "그리고 큰북과 트럼펫을 가지고 수많은 군인들이 몰려왔어요."라고 읽어주고 어두워지는 아이의 눈빛을 보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왜아이들은 자라나면서 이 모든 것을 잃어야 할까? 제임스는 그녀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재능 있고 가장 예민했다. 하지만 다른 아이들도 모두 유망하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프루는 다른사람들에게 더없이 완벽한 천사였고, 요사이 특히 밤에 볼 때면 그 미모에 흠칫 놀랄 정도였다. 앤드루의 수학에 대한 재능은 심지어 남편도 특출하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낸시와 로저는 요즘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온종일 시골을 뛰어다녔다. 로즈는 입이 좀 큰 편이지만 손재주가 놀라웠다. 아이들이 변장놀이를 하면, 로즈가 옷뿐 아니라 모든 것을 만들었다. 로즈는 식탁을 차리고 꽃꽂이를 하고 무엇이든 매만지는 것을 제일 좋아했다. 재스퍼가 새를 사냥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저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았다.  - P96

 삶이 그녀의 눈앞에펼쳐졌다. 삶, 삶이라. 그녀는 생각했지만, 생각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녀는 삶을 바라보았다. 아이들과도, 남편과도 나누지 않은 실재하는 어떤 것, 은밀한 어떤 것이 있음을 분명히느꼈으니까. 한쪽 편에 놓인 그녀와 다른 쪽에 있는 삶 사이에서 일종의 거래가 진행되었고, 삶이 그녀를 이기려고 했듯이그녀도 늘 삶을 극복하려고 안간힘을 써 왔다. 이따금 그녀는(혼자 앉아 있을 때) 삶과 협상을 벌이기도 했다. 대단한 화해를 이룬 장면들이 있었음을 그녀는 기억했다. 그러나 대체로는 무척 묘하게도, 그녀가 삶이라고 부른 이것이 무시무시하고, 적대적이며, 기회를 주기만 하면 재빨리 덤벼들 거라고 느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통이나 죽음, 가난처럼 영원히 풀 수 없는 문제들도 있었다. 심지어 여기에도 암으로 죽어 가는 여자가 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들에게 말했었다. 너희들 모두 겪을 일이란다. 여덟 아이에게 그녀는 무자비하게도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온실 수리에 필요한 비용은 50파운드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 앞에 무엇이 있는지 (사랑과야심, 비참한 곳에서 홀로 고통을 겪으리라는 것) - P98

그래, 아이들은 결코 잊지 않아. 그녀는 제임스가 잘라 놓은 것들(냉장고, 잔디 깎는 기계, 야회복을 입은 신사의 사진)을 그러모으며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무척 중요하고, 아이들이 잠자리에 들고 난 후에야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그제야 누구에 대해서도생각할 필요가 없으니까. 그녀는 온전히 자기 자신일 수 있고,
홀로 있을 수 있었다. 이따금 필요하다고 느꼈던 건 바로 그것이었다. 생각에 잠기는 것. 글쎄, 생각에 잠기는 것도 아니었다. 말없이 있는 것. 홀로 있는 것. 모든 존재와 행위가 팽창하면서 반짝이고 시끌벅적하다가 흩어져 버린다. 그러면 사람은 엄숙함을 느끼며 오그라들어 본연의 자신이, 남들에게는보이지 않는 쐐기 모양 어둠의 응어리가 된다.  - P102

 밀착되어 있던 것들이 떨어져 나간 이 자아는 더없이 자유롭게 기이한 모험을 떠날 수 있었다. 삶이 잠시 침잠할 때, 경혐의 영역은 무한히 넓어 보였다. 그리고 누구나 이처럼 무한한 원천을 늘 느끼는 법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나 릴리,
오거스터스 카마이클, 모두들 제각기 자신의 환영, 자신을 알아볼 수 있게 해 주는 겉모습들이 유치할 따름이라고 느끼기마련이다. 그 환영의 밑바닥은 온통 어둡고, 사방으로 퍼져 있으며, 포착할 수 없이 깊다. 그러나 이따금 표면으로 솟구치는것이 남들에게 보이는 우리의 모습이다. 그녀의 지평은 끝이없어 보였다. 그녀가 가 보지 못한 곳들이 모두 그 안에 담겨있었다. 인도의 평원. 그녀는 로마의 한 성당에서 두터운 가죽커튼을 밀어젖히는 자신을 느꼈다. 이 어둠의 응어리는 누구도 볼 수 없기에 어디라도 갈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걸 막을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는 의기양양해했다.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었다. 무엇보다 반갑게도, 모든 것을 다 그러모아 확고한 기반 위에서 쉴 수 있었다.  - P103

그는 몸을 돌리고 그녀를 보았다. 아! 그녀는 아름다웠고,
지금은 전보다 더 아름답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녀를 방해할 수 없었다. 제임스가 없고 마침내 그녀가 혼자 있었기에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간절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에게서 멀리 떨어져서 자신의 아름다움, 자신의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녀를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그녀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여서 그녀에게 닿을 수 없고 그녀를 돕기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기에 마음이 아팠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을 지나갔다.
그는 또다시 아무 말도 없이 그녀를 지나치려고 했다. 바로 그순간 그가 결코 요청하지 않으리라고 짐작한 그녀가 자발적으로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더라면, 그를 부르고 액자에서 녹색 숄을 떼어 내어 어깨에 두르고 그에게 걸어가지 않았더라면,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고 싶어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있었던 것이다. - P107

암스테르담에 가 본 적이 있소. 뱅크스 씨는 릴리 브리스코와 풀밭을 거닐면서 말했다. 렘브란트의 그림을 보았소. 마드리드에도 갔지. 불행히도 성(聖)금요일이어서 프라도 박물관은 닫혀 있었소. 로마에도 가 본 적 있었소. 브리스코 양은 로마에 가 본 적이 없소? 아, 그렇다면 가 봐야 해요. 경이로운경험이 될 거요. 시스티나 성당이며 미켈란젤로, 조토의 벽화가 있는 파도바 성당이며, 내 아내가 여러 해 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자제하면서 관광을 다녔소. - P117

 그래, 당신이 그러리라고 믿소. 뱅크스 씨가 말했다. 그들이 풀밭 언저리에 닿았을 때 그는 그녀가 런던에서 그림 소재를 찾는 것이 어렵지 않았는지를 물었고 그러면서 몸을 돌리자 램지 부부가 보였다. 그래, 저것이 결혼이라고 릴리는 생각했다. 공을 던지는 딸을 바라보는 한 남자와 한 여자. 저것이 바로 램지 부인이 전날 밤 내게 말하려던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녹색 숄을 두른 램지 부인이 남편과 나란히 붙어서서 캐치볼 놀이를 하는 프루와 재스퍼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이유랄 것도 전혀 없이, 가령 지하 - P118

철에서 걸어 나오거나 현관 벨을 울릴 때 불시에 사람들을 찾아와서 그들을 무언가의 상징으로, 무언가의 표상으로 만드는 의미가 그들에게 드리웠고, 어스름 속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그들을 결혼의 상징으로, 부부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잠시 후 그들과 마주했을 때 실제 인물을 초월하는 상징의 윤곽이 사라져 갔고, 그들은 다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램지 부부로 되돌아와 있었다.  - P119

곧장 그녀에게 가서 말할 것이다. "해냈어요, 램지 부인. 당신덕분에." 그 집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에 들어서면서 그는 위층창문에서 움직이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무척 늦은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석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고있었다. 집 전체에 불이 밝혀졌고, 어둠 속을 걸은 후 불빛이보이자 그의 눈에 빛이 충만한 것 같았다. 그는 현관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어 올라가면서 아이처럼 속으로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하고 중얼거렸고, 집 안에 들어서서도 눈이 부셔서 굳어 버린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며 빛이여, 빛이여, 빛이여 하고되풀이했다. 하지만 맙소사, 그는 넥타이를 매만지면서 속으로 말했다. 바보처럼 굴어서는 안 돼. - P128

 릴리 브리스코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의 말에 신경을 썼단 말인가? 여자들은글을 쓸 수 없다, 여자들은 그림을 그릴 수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 나온 이 말들이 대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에게 이로울 이유만 없었더라면 그 말이 그에게도 진실이 아님이 분명하고, 사실 그 때문에 그가 그렇게 말했을 텐데. 왜내온 존재가 바람에 휘둘리는 곡식처럼 고개를 숙이고, 그 굴욕에서 다시 스스로를 일으키기 위해서 크나큰, 고통스러운 노력을 들여야 했던가? 다시 그림의 구도를 구상해 봐야지. 식탁보 위에 잔 나뭇가지가 있어. 내 그림이 있어. 나무를 한가운데로옮겨야 해. 이거야말로 중요한 일이고, 그 밖의 다른 것은 하등 상관없어. 내가 그 일에 줄기차게 매달릴 수 있을까? 화를내지 않고, 말다툼도 하지 않고 원한다면 그를 비웃어 줌으로써 복수를 할 수 있을까? 그녀는 생각했다. - P141

걱정해야 할 미래가 없으니까. 그녀는 그들에게 일어난 일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알았다. 좋은 책을 다시 읽는 것 같았다. 이십년 전에 일어났으므로 이미 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어디에서 흘러왔는지 모르지만 이 식당의 식탁에서도 폭포처럼 쏟아져 내린 삶이 그곳에서는 밀폐되어 그 둘 사이의 잔잔한 호수처럼 누워 있으니까.  - P151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그러했고, 그녀와 달랐다. 그러나 함께 보았다는 사실이 그들을 하나로 결합해 주었다.
이제 촛불이 모두 밝혀지자, 식탁 양쪽의 얼굴들이 촛불 빛으로 더욱 가까워졌고, 어둑했을 때와는 달리 식탁을 둘러싸고 한 무리를 이루었다. 이제 유리창이 바깥의 어둠을 차단했고, 바깥 세계를 정확히 보여 주기는커녕 그 세계에 너무나 기묘한 파문을 일으켜서, 여기 방 안은 질서정연하고 마른 땅 같았고, 저기 바깥은 물에 젖어 너울거리다가 사라지는 사물들의 그림자처럼 보였다.
이내 어떤 변화가 실제로 일어난 듯이 그들 모두를 뚫고 지나갔다. 그들은 어떤 섬의 동굴에서 함께 일행을 이루고 있는느낌으로 저 바깥 세계의 유동성에 맞서 공동 전선을 폈다 - P157

이런 것이 사물의 복합성이었다. 특히램지가족과 머물면서 그녀는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격렬하게 느끼는일이 종종 있었다. 네가 느끼는 것과 내가 느끼는 것이 서로 달랐고, 그 두 가지는 그녀 마음속에서 지금처럼 격렬하게 싸웠다. 그 사랑은 너무나 아름답고 자극적이어서 나는 그것을 마주하고는 몸을 떨면서 평소의 습관을 다 떨치고 바닷가에서브로치를 찾아보겠다고 제안한다. 또한 그 사랑은 더없이 어리석고 가장 야만적인 인간의 열정이라서, 보석처럼 매끄러운멋진 젊은이(폴의 옆모습은 정교했다.)를 마일엔드 로드에서쇠지레를 든 불한당(그는 으스대고 거들먹거렸다.)으로 바꿔 놓는다 - P164

그녀는 그 온갖 소란스러운 대화 이후에 잠시조용히 서서 어떤 특별한 것, 중요한 것을 찾아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것을 떼어 내어 분리하고, 거기에 달라붙은 온갖 감정들과 잡다한 점들을 말끔히 씻어 내어 그것을 자기 앞에 놓고, 자신이 임명한 판사들이 둘러앉아서 은밀히 회의하는 법정으로 가져가서 결정하고 싶었다. 그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그게 옳은 걸까, 그른 걸까?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걸까? 등등. 이렇게 그녀는 돌연히 물러난 이후에 자신을 바로잡았고,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어울리지 않게도 바깥의 느릅나무 가지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의 세계는변화하고 있었고 나무들은 정지되어 있었다. 갑자기 떨어져나올 때 그녀는 어수선한 움직임을 느꼈었다. 모든 것은 질서정연해야 한다. 그녀는 그 나무들의 기품과 정적, 이제 또다시 바람에 들려 (파도를 타고 솟구친 배의 이물처럼) 장려하게 솟아오른 느릅나무 가지들에 무의식적으로 감탄하면서, 그것을바로잡고 저것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람이 불고렇게 급히 가는사실 그녀가 뛰어가거나 서두른 것은 아니었다.  - P180

그런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위대한 인물, 위대한 책, 명성………. 누가 알 수 있겠는가? 그녀는그것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남편의 태도였고, 진실성이었다. 예컨대 만찬에서 그녀는 본능적으로 절실히 바라고 있었다. 그가 말하기만 한다면! 그녀는 그를 완벽히 신뢰했다. 그녀는 물속에 뛰어들어 여기서 잡초를, 저기서 지푸라기를, 여기서는 물거품을지나치듯이 이 모든 것을 떨쳐 내면서, 더욱 깊이 침잠하면서,
홀에서 다른 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느꼈던 감정을 다시 느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다. 여기서 내가 얻으려는 것.
그것이 무엇인지 딱히 알지 못한 채 그녀는 눈을 감고 더욱더깊이 빠져들었다.  - P189

글쎄, 이보다 더 잘 쓸 수 있으면 써보라고 해. 그 장(章)을다 읽고 나서 그는 생각했다. 그는 누군가와 논쟁을 벌이고 나서 상대를 이긴 것 같았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보다 더 잘 쓸 수는 없어. 자신의 입장이 더 확고해졌다. 연인들에 관한 묘사는 시시하기 짝이 없다고 그는 모든 것을 다시 마음속에서 정리하며 생각했다. 그것은 시시하기 짝이 없지만저것은 최고라고 그는 한 가지를 다른 것 옆에 놓으며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을 다시 읽어야 해. 그 책의 전체적인 형태를기억할 수 없으니, 판단을 유보해야지. 그래서 그는 다른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만일 젊은이들이 스콧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들은 자신의 저서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 P192

그녀는 읽었고, 그것을 읽으면서 꼭대기로, 절정으로 오르고 있다고 느꼈다.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얼마나 평온한가!
그날 있었던 온갖 잡다한 일들이 이 자석에 달라붙어서, 그녀의 마음은 말끔히 일소되어 깨끗해진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아름답고 온당하며, 깨끗하고 완벽하게 갑자기 완전한 형체를 띠고 그녀 손에 들려 있었다. 삶에서 뽑아내져 여기 소네트에서 완성된 삶의 정수가. - P193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그가 자신을바라보고 있음을 알기에, 그녀는 말하는 대신에 양말을 든 채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면서 미소를짓기 시작했다. 그녀에게서 말 한마디 없었지만 그는 그녀가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것은부정할 수 없었다. 미소를 지으면서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고(지상의 그 무엇도 이 행복에 비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말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내일은 비가 올 거예요."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다시 승리를 거두었던 것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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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물론이지. 내일 날이 맑으면 말이야." 램지 부인이말했다. "하지만 종달새가 지저귈 때 일어나야 할걸." 그녀가덧붙였다.
원정을 가는 것이 확정되기라도 한 듯, 어머니의 말은 아들에게 특별한 기쁨을 안겨 주었다. 어두운 밤을 보내고 한나절배를 타고 가기만 하면, 몇 년이나 지난 듯 오랜 시간 바라 마지않았던 그 놀라운 곳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섯 살 나이에도 그 아이에겐 이런저런 감정들을 서로 떼어 놓지 않고가까이 있는 현실에, 기쁘거나 슬픈 미래에 대한 예감을 덧씌우는 대단한 인간들의 속성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에겐 매우어린 시절에도 감정 변화가 일어날 때마다 어둠이나 광휘가발산되는 순간을 응결시켜 마음에 새겨 두는 능력이 있으므로, 마룻바닥에 앉아 아미 앤드 네이비 잡화점 상품 목록에 - P9

서 냉장고 사진을 오려 내고 있던 제임스 램지는 어머니의 말을 들은 순간 더없는 기쁨을 그 사진에 쏟아부었다. 그 사진에환희의 테두리가 둘러졌다. 손수레며 잔디 깎는 기계, 포플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 비 내리기 전에 하얗게 변하는 이파리들, 까악까악 울어 대는 떼까마귀, 부딪히는 빗자루, 사각거리는 드레스, 이 모든 것들이 마음속에 또렷이 채색되고 각인되어 그 아이는 이미 내밀한 암호와 은밀한 언어를 만들어 냈다.
그렇지만 인간의 나약함이 드러난 광경에 절로 찌푸려지는넓은 이마와 한없이 정직하고 티 없이 맑은 푸른 눈 때문에 그아이는 타협할 줄 모르는 엄격함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래서그의 어머니는 냉장고 사진을 가위로 말끔하게 오려 내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붉은 옷에 담비 가운을 두르고 판사석에 앉아 재판하거나 국사가 위기에 처했을 때 엄중하고 중대한 기획을 지휘하는 그의 모습을 상상했다. - P10

어느 모로 보아도 자신보다 만 배나 더 나은(제임스의 생각에는) 아내를 조롱하면서 즐거워하고, 또 자신의 정확한 판단력에 은밀히 자부심을 느끼면서 신랄하게 웃을 때 말이다. 램지 씨의 말은 옳았다. 그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느 누구(특히 자기 자식들)의 기쁨이나 편의를 봐주려고 사실을 임의대로 고치지도 않았고 불쾌한 말을 바꾸지도 않았다. 자기갈빗대에서 생겨난 자식들은 모름지기 삶이란 힘겨운 것이고, 사실이란 타협할 수 없는 것이며, 가장 빛나던 우리의 희망이 꺼지고, 부서지기 쉬운 우리의 배가 어둠 속에서 버둥거리며 전설적인 땅으로 나아가는 여정에는 (이 부분에서 램지 씨는 등을 똑바로 펴고, 작고 푸른 눈을 가늘게 뜨며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무엇보다도 용기와 진실, 인내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어린 시절부터 알아야 한다. - P11

존재의 결, 그 속으로 뒤얽혀 들어가는 분쟁과 분열, 이견,
편견 들. 아, 그런 것들이 이렇게나 일찍부터 싹트다니. 램지부인은 탄식했다. 그녀의 아이들은 너무나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형제자매들과 함께 가지 않으려 했던 제임스의 손을 잡고 식당에서 나왔다. 맹세코, 그러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서로 다른데, 그런데도 차이를 더 만들어내려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일같았다. 지금 존재하는 차이들만으로도 차고 넘칠 지경이라고 그녀는 응접실 창가에 서서 생각했다. 이 순간 그녀가 떠올린 것은 부자들과 빈자들, 지체가 높은 자들과 낮은 자들의 차이였다. 혈통에 대해 생각해보자면 그녀는 내키지는 않더라도 혈통이 좋은 사람들을 존중하기는 했다. 자신의 핏줄에도약간 전설적이기는 하지만 대단히 고귀한 이탈리아 가문의피가 흐르고 있지 않았던가. 그 가문의 딸들은 19세기 영국의여러 응접실들에 흩어져서 매력적인 혀짤배기 소리를 냈고매우 자유분방하게 행동했다. 그녀의 재치와 몸가짐,  - P17

별안간 그는 깨달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그녀는 자기가 지금까지 본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것이다.
별빛이 빛나는 눈, 베일을 두른 머리칼에 꽂힌 시클라멘과야생 제비꽃…………. 이 무슨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부인은 적어도 쉰 살은 되었다. 자식이 여덟 명이나 있었다. 꽃들이 만발한 들판을 걸으면서 움튼 봉오리들과 갓 태어난 새끼 양들을 가슴에 품고, 별빛이 총총한 눈,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는 바람………. 그는 그녀의 가방을 들었다.
"잘 있어요, 엘시." 그녀가 말했다. 그들은 거리를 따라 올라갔다. 그녀가 양산을 똑바로 들고 마치 모퉁이를 돌면 누군가를 만나리라고 기대하는 듯 걷는 동안, 찰스 탠슬리는 난생처음으로 유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하수구에서 땅을 파던 남자가 일을 멈추고 부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팔을 늘어뜨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찰스탠슬리는 특별한 자부심을 느꼈다. 바람과 시클라멘과 제비꽃이 느껴졌다. 난생처음 아름다운 여자와 걷고 있었으니까. 그는 그녀의 가방을 꼭 잡았다. - P25

그러고 보면 9월이었고, 그것도 중순이었으며, 저녁 6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평소에 다니던 대로 천천히 정원을지났고 테니스 코트를 지나 억새밭을 지나서는 울창한 산울타리가 갈라진 틈새로 갔다. 활활 타오르는 석탄 화로처럼 붉은 트리토마가 호위하고 서 있는 산울타리 틈새로 만의 푸른 물결은 전보다 더 파랗게 보였다.
그들은 어떤 필요에 이끌려 저녁마다 늘 그곳으로 산책을나갔다. 마치만의 물결이 마른 땅 위에서는 정체되어 있던 생각들을 띄워서 출항시키고, 그들의 몸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같았다. 처음에는 고동치는 푸른색이 만에 넘쳐흘렀고 그와더불어 마음이 확장되고 몸이유영했지만, 다음 순간에는 주름진 파도 위에 내려앉은 가시처럼 뾰족한 어둠으로 억제되고 냉각되었다. 그러고 나면 거대한 검은 바위 뒤에서 거의 저녁마다 하얀 물이 분수처럼 간헐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 P35

 배나무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는지금, 이 두 남자에 대한 인상들이 강렬하게 밀려왔고, 그녀의생각은 너무 빨라서 연필로 받아 적기 힘든 목소리를 따르듯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것은부정할 수 없고, 지속적이며, 상반되는 것들을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줄줄이 늘어놓았으며, 그래서 배나무 껍질의 갈라진 틈과 옹이들마저 그 자리에서 돌이킬 수 없이 영원히 마음에 새겨졌다. 당신은 위대해요. 그녀는 속으로 그에게 말했다.
하지만 램지 씨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는 마음이 좁고, 이기적이고, 허영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이에요. 그는 응석받이고, 폭군이에요. 그는 램지 부인을 죽도록 지치게 해요. 하지만 그에게는 당신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 P42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면서, 살아 있다는 것에 대체로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지만 동시에 다른 사람들의 공감과 위스키,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험담을 들어 줄 사람을 원한다 한들,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누가 그를 탓할 것인가?
그 영웅이 갑옷을 벗고 창가에 멈춰 서서 자기 아내와 아들을쳐다본다면, 어느 누가 속으로 기뻐하지 않을 것인가? 처음에는 아득히 멀리 있지만 조금씩 가까워지고 마침내 입술과 책,
머리가 눈앞에 선명히 드러날 때까지, 자신의 치열한 고독과세월의 폐허와 별들의 소멸과 동떨어져 있지만 여전히 사랑스러운 그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마침내 파이프를 주머니에 넣고 자신의 당당한 머리를 그녀 앞에 숙이면서 세계의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면, 누가 그를 비난할 것인가? - P61

다가하지만 그의 아들은 그를 미워했다. 아버지가 가까이왔기에, 걸음을 멈추고 내려다보았기에, 그를 미워했다. 자신과 어머니를 방해했기에 그를 미워했다. 그의 의기양양하고숭고한 몸짓 때문에, 그의 당당한 머리 때문에, 그의 가혹함과 자기중심적인 면모 때문에 (그가 서서 자기에게 관심을 기울이도록 명령했기에) 그를 미워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버지가자신의 들떠 있는 감정을 울리는 소리를 미워했다. 그 소리는그들 주위에서 진동하면서 그와 어머니의 더없이 소박하고평온한 관계를 어지럽혔다. 제임스는 책을 뚫어지게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다른 곳으로 걸어가게 하고 싶었다. 손가락으로 글자를 가리키면서 어머니의 관심을 되돌리고 싶었다.
아버지가 걸음을 멈춘 순간 어머니의 관심이 흩어지는 것을느끼고 화가 났던 것이다. 그러나 아니었다. 어떻게 해도 램지 - P62

씨는 꼼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거기에 서서 공감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들을 팔로 감싸고 느긋하게 앉아 있던 램지 부인은 마음을 다잡고 반쯤 몸을 돌려 애써 일어나며, 빗발치는 에너지를,
한 줄기 물보라를 공중에 곧바로 쏟아 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자신의 온 에너지가 응집되어 환히 타오르는 힘이 솟아난듯(그녀는 다시 양말을 집어 들고 조용히 앉아 있었지만) 생기 있고 활기차게 보였다. 그리고 이 감미로운 풍요로움에, 이 생명의 샘과 물보라에, 남성의 치명적인 불모성이 메마르고 적나라한 놋쇠 부리처럼 파고들었다. 그는 공감을 원했다. 그는 실패작이라고 말했다. 램지 부인은 바늘을 반짝이며 뜨개질을계속했다. 램지 씨는 그녀의 얼굴에서 조금도 눈을 떼지 않고자신이 실패작이라고 거듭 말했다. 그녀는 상대하지 않았다. - P63

그 즉시 램지 부인은 꽃잎 하나가 다른 꽃잎 속에 포개지듯온몸이 접히는 것 같았다. 기진맥진하여 무너져 내리면서 그녀는 극도의 피로감에 절묘하게 몸을 내맡겼고, 그림 형제의동화책28)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일 힘밖에 남지 않았다. 그동안 창조를 이루어냈다는 황홀감이, 완전히 늘어났다가 이내부드럽게 멈춘 스프링의 진동처럼 그녀의 몸속에서 고동치며지나갔다.
그가 걸어가는 동안, 이진동이 울릴 때마다 그녀와 남편을 감싸고 그 두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 같았다. 함께 울리는 높고 낮은 서로 다른 두 음조가 결합하면서 서로에게 주는 위안. - P65

자기들의 기호에 대해 품는 사랑이나 시인들이 자신들의 시구에 품는 사랑처럼 온세상에 퍼져 나가 인간을 향상하는 한부분이 될 수 있는 사랑이었다. 진정 그러했다. 그 부인이 왜그렇게 기쁨을 주었는지, 그녀가 아들에게 동화를 읽어 주는광경이 왜 과학 문제를 풀었을 때와 똑같은 희열을 자신에게주었는지를 뱅크스 씨가 말할 수 있었더라면, 그래서 그가 차분히 숙고해 보고 자신이 식물 소화기관에 관해서 확고한 사실을 입증해 보였을 때처럼 야만성을 순화하고 혼돈의 지배를 억제한 듯이 느꼈다고 말할 수 있었더라면, 세계는 틀림없이 그 기쁨을 공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환희(달리 어떤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 것인가?) 때문에릴리 브리스코는 자기가 말하려던 것을 송두리째 잊어버렸다. 램지 부인에 대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이 환희, 이 말 없는 응시 옆에서 무색해졌고, 그 응시에 대해 그녀는 깊이 고마워했다. 그녀에게 이 숭고한 힘.
이 절묘한 선물은 그 무엇보다도 큰 위안을 주었고, 삶의 당혹스러움을 덜어 주었으며, 기적처럼 삶의 무거운 짐을 들어 주었다. 그 응시가 지속되는 한 그것을 방해하지 않으리라. 바닥을 가로질러 수평으로 내려앉은 한 줄기 햇살을 끊고 싶지 않듯이,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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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그 누구의 사유지도 아닙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거기에는 국경도 전쟁도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움없이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 자기 길을 스스로 발견합시다. 그럴 때에, 영국 문학은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아 구렁을 건널 것입니다. 우리 같은 평민이요 아웃사이더들이그 나라를 우리 자신의 나라로 만든다면, 책을 읽고 쓰는법을,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창조할지를 스스로 배울때 말입니다.

버지니아 울프


<전기라는 예술이라고 우리는 말하지만, 대번에 되묻게된다. <전기가 예술이야?> 이런 질문은 아마도 어리석고, 전기 작가들이 우리에게 제공했던 강렬한 즐거움에 비추어 보면 분명 편협한 것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이 그렇게 자주 나오는 것을 보면 그 뒤에 무엇인가 있음이 틀림없다. 새로운 전기가 펼쳐질 때마다 그것이 페이지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그 그림자 안에는 무엇인가 치명적인 것이 들어있는 듯하다. 수많은 전기가 쓰이지만, 살아남는 것은 그토록 적으니 말이다! - P165

여기서 우리는 해결하기 힘든 또 다른 문제에 접근하게된다. 즉, 어떤 책을 가리켜 예술 작품이라 하는 것은 무슨뜻인가? 아무튼 전기와 소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양자는 재료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전기는친지들과 사실들의 도움을 빌려 만들어지고, 소설은 예술가가 스스로 좋게 여겨 따르는 제약 말고는 아무런 제약 없이만들어진다. 그것은 중요한 차이이며, 지난날의 전기 작가들은 그것을 아주 잔혹한 차이로 여겼다고 생각할 만한 충분한근거가 있다. - P167

리턴 스트레이치는 운이 좋은 시기에 작가로 출발했다.
1918년 그가 첫 작품을 내놓았을 때, 전기는 여러 가지 새로운 자유가 허용되는 매력적인 장르가 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작가, 즉 처음에는 시나 희곡을 쓰고 싶었지만 자신의 창조력에 회의하던 작가에게 전기는 유망한 대안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고인에 대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 마침내 가능해졌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고명한 인물들 중에는 덧씌워진 밀랍가면으로 심하게 변형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을 재창조하여 실제의 모습대로 보여 주는 것은 시인이나 소설가에 맞먹는 재능을 필요로 하되, 그에게 부족하다고 생각되던창의적 재능은 요구하지 않는 소임이었다. - P169

그렇지만 그런 결합은 실제로 불가능함이 드러났다. 사실과 허구는 뒤섞이기를 거부했다. 엘리자베스는 빅토리아 여왕이 리얼했다는 의미로는 결코 리얼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클레오파트라나 폴스타프‘가 허구라는 의미로 허구가되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알려진 사실이 너무 적어서 창작을 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알려진 사실들이 있었으므로창작에 제동이 걸린다는 데 있었다. 여왕은 그리하여 사실과허구 사이의 애매한 세계로 들어가, 육체가 있는 것도 없는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어딘가 빈틈이 있고 꾸며 내려 애쓴 티가 나며, 비극이지만 갈등이 없고 인물들은 서로 스쳐 가지만 정말로 만나지는 않는 것 같다. - P173

그리고이 모든 다양성으로부터, 혼란이 아니라 더욱 풍부한 통일성을 이끌어 낼 것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알려졌으므로, 이제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질문은 이런 것이다. 위인들의 생애만이 기록되어야 하는가?
하나의 삶을 살고 그 삶의 기록을 남긴 누구라도 전기의 주인공이 될 만하지 않은가? 성공뿐 아니라 실패도 유명한 사람들뿐 아니라 이름 없는 사람들도?" 위대함이란 무엇인가?
사소함이란 무엇인가? 전기 작가는 공덕에 대한 표준 자체를바꾸고, 우리가 찬미할 만한 새로운 영웅들을 제시해야 한다. - P177

예술가의 상상력은 최고조에 이르면 사실에서 소멸할 수 있는 것을 불살라 버리고, 영속적인 것을재료로 삼는다. 하지만 전기 작가는 소멸할 수 있는 것을 받아들여 그것을 재료 삼아 자기 작품을 짜나가야 한다. 많은것이 소멸하고, 살아남는 것은 얼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기술자이지 예술가가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 그의 작품은 예술 작품이 아니라 그 중간에 끼인 무엇이다.
하지만 그 낮은 수준에서도, 전기 작가의 작품은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해주는일에 대해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는 전적으로상상력의 강렬한 세계에만 살 수는 없으니 말이다. 상상력이란 금방 지쳐 버리므로 휴식과 재충전이 필요한 기능이다. - P178

우리에게 참된 사실들을 말해 줌으로써, 자질구레한 것들을 큰 것들로부터 걸러냄으로써, 전체적인 윤곽을 알아볼수 있도록 전체의 형태를 잡아줌으로써, 전기 작가는 어떤시인이나 소설가보다 더 상상력을 자극한다. 물론 최고의 시인이나 소설가는 제외하고 말이지만, 우리에게 리얼리티를느끼게 하는 고도의 긴장을 제공할 수 있는 시인이나 소설가는 얼마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의 어떤 전기 작가라도 사실들을 존중하기만 한다면 그저 잡학 지식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창조적인 사실, 풍요로운 사실, 암시하고 배태하는 사실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증거가 있다. 전기를 읽고 나면 얼마나 자주 어떤 장면이나 인물이 마음속 깊이 살아남아, 우리로 하여금시나 소설을 읽을 때 마치 전에 알았던 무엇을 기억하기나하는 듯 소스라치며 알아보게 하는가 말이다. - P179

또 다른 예를 들어 봅시다. 기차간의 맞은편 벽면에 이런말이 쓰여 있습니다. 창밖으로 몸을 내밀지 마시오.> 처음읽으면 유용한 의미, 표면적 의미가 전달되지만, 그 말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보면 얼마 안 가서 말들이 뒤섞이고 달라져서 이렇게 중얼거리게 되지요. <창문이라, 그래, 창문, 쓸쓸한 요정 나라에서, 위험한 바다의 거품을 향해 열린 마법의 창문………. 그러고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맙니다. 이국의밀밭에서 눈물 흘리며 서 있는 룻을 보려고요. 그 대가는20파운드 벌금이거나 아니면 부러진 목이겠지요. - P183

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용성을 거부하는지 보아 왔습니다. 말의 본질은 어느 한 가지 진술이아니라 천 가지 가능성을 표현하는 데 있습니다. 말은 그 점을 너무나 자주 보여 왔으므로, 우리도 그 사실을 직시하기시작했지요. 즉 또 다른 언어를 발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유용한 진술을 표현하는 데 최적화된 언어, 기호 언어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빚지고 있는 이 언어의 살아 있는 대가,
그 이름 모를 작가 - 남자인지 여자인지 육신을 떠난 영혼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 P184

말들은 서로서로 속해 있습니다. 물론, 위대한 작가만이 <담홍색>이라는말이 <무량무변의 바다>에 속한다는 것을 알겠지만요. 새로운 말을 오래된 말과 결합시키는 것은 문장의 구성에 치명적입니다. 새로운 말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새로운 언어를 발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새로운 언어의 발명도 가능하기는 하겠지만, 지금 우리 관심사는 그게 아닙니다. 우리의 관심사는 현재 있는 그대로의 영어를 가지고 할 수 있는일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오래된 말들이 살아남아 아름다움을 만들어 내고 진실을 말하게 하려면, 어떻게 그것들을새로운 질서에 결합시킬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요 하지만다. 말이란 별개의 독립체가 아니라 다른 말들의 일부라는명백하고도 신비로운 사실 때문입니다.  - P189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이 줄 수 있는어떤 영광의 관(冠)이라도 받을 만합니다. 만일 글쓰기의 기술을 가르칠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면 어떨지 생각해 보세요모든 책, 모든 신문이 진실을 말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하지않겠습니까. 하지만 말 다루기를 가르치는 데는 방해가 장애물이 나타날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에도 적어도 백 명의교수들이 과거의 문학에 관해 강의를 하고, 천 명의 비평가들이 현재의 문학에 대한 서평을 쓰고, 수백 명의 젊은 남녀가 영문학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얻고 있겠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강의도 비평도 시험도 없던 4백 년 전보다 더잘 쓰거나 더 잘 읽습니까?  - P190

 말들은 사전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사전을 다시 보십시오. 그 안에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보다 더 장려한 희곡이 나이팅게일에게 바치는 송가보다 더 아름다운 시가, 『오만과 편견이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아마추어의 습작으로나 보이게 만들 만한 소설이담겨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옳은 단어를 골라내어 옳은 순서로 늘어놓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말들이 사전이 아니라 마음속에 살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어떻게 사느냐고요? 다양하게, 기발하게 살지요. 사람들이살듯이 꼭 그렇게요. 이리저리 쏘다니고, 사랑에 빠지고, 짝짓기를 하면서요. 사실 우리보다는 예식과 관습에 훨씬 덜얽매이지요. 왕실에나 어울릴 말들이 평민의 말들과 짝이 되니까요. 영어 단어가 프랑스어나 독일어 단어와 결혼하기도합니다. 그럴 마음만 있다면 인도 말, 흑인의 말과도요. 실로우리의 친애하는 모국어인 영어는 과거를 모르면 모를수록그 평판이 한층 더 높아지겠지요. 그녀는 정말이지 종잡을수 없는 떠돌이 아가씨였으니까요. - P191

보이고 그들리그것을 전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은 어떤 사람에게 어떤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한 세대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가, 다음 세대에는 명약관화한 것이 됩니다. 그들이 살아남는 것은 이 복잡성 덕분입니다. 아마도 오늘날 우리에게 위대한 시인이나 소설가,
비평가가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말에게 자유를 주려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말들을 한 가지 의미, 유용한 의미, 기차를 제시간에 탈 수 있게 해주는 의미, 시험에합격하게 해주는 의미로만 못박습니다. 그런데 말은 그렇게못 박히면 날개를 접고 죽어 버립니다. 끝으로, 이것이 가장중요한데, 말이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 프라이버시가 필요합니다. 의심할 바 없이 그들은 우리가 그들을 사용하기 전에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의 무의식이 그들의 프라이버시이고, 우리의어둠이 그들의 빛이지요.  - P193

글을 쓰기 시작하는 젊은 남녀가 일반적으로 듣게 되는그럴싸하지만 전혀 실천할 수 없는 조언은 자신이 쓰고자 하는 것을 가능한 한 짧고 분명하게,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정확히 말하려는 것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고 쓰라는 것이다. 아무도 그런 경우에 정말로 필요한 한 가지, 즉<반드시 네 후원자를 현명하게 고르라>는 말은 해주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문제의 핵심인데 말이다. 왜냐하면 책이란항상 누군가 읽을 사람을 위해 쓰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후원자는 단순히 돈을 대는 사람일 뿐 아니라 아주 미묘하고 음험한 방식으로 어떤 글이 쓰이도록 선동하고 고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가 바람직한 인간이라야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 P195

그러니 모든 작가는 글을 쓰면서 어떤 대중이든 의식하지않을 수 없다고 할 때, 눈 높은 작가라면 대중은 그가 쓰고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양순한 무리라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론은 그럴싸하게 들릴지도「모르지만, 커다란 위험을 안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작가는 자기 대중을 의식하되 대중보다 우월한 위치에 서게 되는데, 이는 불편하고 불운한 조합이니, 새뮤얼 버틀러, 조지메러디스 헨리 제임스 등이 입증하는 바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대중을 경멸했고, 대중을 원했고, 대중을 얻는 데 실패했고, 자신의 실패를 대중의 탓으로 돌렸으며, 갈수록 더해가는 까다로움과 모호함과 허세로 대중과 담을 쌓았다. 후원자를 자신과 대등한 벗으로 여기는 작가라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 P197

 그는 단 한 송이일지라도 진짜 크로커스이기만 하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우리에게 느끼게 해야 한다.
그는 가르침을 받아 더 고상해지거나 더 나은 인간이 되기를바라는 것이 아니라고, 칼라일을 괴롭혀 악을 쓰게 하고 테니슨에게는 목가나 쓰게 하고 러스킨의 정신이 이상해지게만들어 미안하다고, 이제 자기주장을 그치고 작가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준비가 되었다고, 자신은 모성애보다 더한 끈으로 작가들과 결부되어 있다고, 작가와 자신은 한쪽이 흥하면 다른 쪽도 흥하고 한쪽이 죽으면 다른 쪽도 죽을 수밖에없는 쌍둥이와 같다고, 문학의 운명은 양자의 행복한 동맹에달려 있다고 -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입증하는바, 처음에 말했던 대로, 후원자의 선택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옳은 선택을 하나? 어떻게 글을 잘 쓰나? 그것이 문제이다. - P201

작가란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인가를 골똘히 응시하는 자입니다. 이 비유를 잠시 들여다보면 우리 길을 곧장 나아가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는 종이 한 장을 앞에 놓고 앉아자신에게 보이는 것을 모사하려고 애쓰는 예술가입니다. 그의 대상, 즉 모델은 무엇일까요? 화가의 모델처럼 ㅡ 꽃이담긴 화병이라든가, 나체라든가, 한 접시의 사과와 양파라든가 - 단순하지는 않지요. 아주 간단한 이야기라 해도 한인물, 한 시대를 넘어서기 마련입니다. 인물들은 젊었을 때시작하여 늙어 가며, 장면에서 장면으로, 장소에서 장소로돌아다닙니다. 작가는 움직이며 변화하는 모델,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무수한 대상을 지켜보아야 합니다. 작가가 바라보는 그 모든 것을 단 두 마디로 요약하자면, <인간의 삶> - P203

아마도 그 때문에 19세기가작가들은 유형이 아니라 개인인 인물들을 그렇게 많이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계층들 사이를 나누는 울타리를 보지 못하고 울타리 안에 사는 인간 존재들만을 보았기 때문일까요? 그래서 그는 표면을 뚫고 들어가 다면적인 인물들-페크스니프 베키 샤프 우드하우스 씨처럼‘ - 세월이 가고삶이 달라지면서 변화하는 인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제 우리에게는 그 울타리들이 보입니다. 우리는 그작가들 각자가 인간의 삶의 아주 작은 부분만을 다룰 수 있었다는 것을 압니다. 새커리의 모든 인물은 중상류층 사람들이고 디킨스의 모든 인물은 하층 또는 중류층 출신입니다. 이제는 그것이 보입니다. 하지만 작가 자신은 자기가 한 유형, 작가자신이 태어난 계층에 의해 형성된 유형, 자신에게 가장 친숙한 유형만 다루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 무의식은 그에게 크나큰 이점입니다. - P211

작가도 그렇습니다.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볼 수 있는한 보고, 느낄 수 있는 한 느끼고, 마음의 책 속에 무수한 메모를 해가며 힘든 하루 일과를 마치고 나면, 작가는 - 가능하다면 - 무의식 상태가 됩니다. 실상 그의 정신의 위쪽이조는 동안 정신의 아래쪽은 전속력으로 일하는 것이지요. 그러다 잠시 후 베일이 걷히면, 거기 그것이 그가 글로 쓰고싶은 것이 단순해지고 틀이 잡힌 상태로 나타납니다. <고요함 가운데 회상되는 감정>에 관해서는 워즈워스의 유명한말이 있습니다만, 이 고요함이라는 말을 작가가 창작에 들어가기 전에 무의식 상태가 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라고 해석한다면 시인의 말을 곡해하는 것이 될까요. - P212

이 작가들이 저마다 다 다르기는 하지만, 그리고 영향이라는 문제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얕기는 하지만, 그들의 교육과업적 사이에는 분명 연관이 있다고 결론지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교육받은 소수의 계층이 그렇게 훌륭한 문학을 많이생산한 반면, 교육받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이 훌륭한 문학을거의 생산하지 못했다는 것이 그저 우연일 수는 없습니다 - P216

노동자 계급이 영국 문학에 기여한 모든 것을 덜어 낸다 해도 문학은 거의 타격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육받은 계층이 기여한 모든 것을 덜어낸다면, 영국문학은 거의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교육은 작가의일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정황이 이처럼 명백하고 보면, 지금껏 작가의 교육이 별로강조되지 않았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입니다. 아마도 그것은작가가 되기 위한 교육이 다른 교육보다 훨씬 덜 구체적이기때문일 것입니다. 읽기, 듣기, 대화하기, 여행, 여가 등 여러가지가 뒤섞여 있습니다. 삶과 책이 적당한 비율로 뒤섞여 흡수되어야 합니다. 서재에서 홀로 자란 소년은 책벌레가 되고,
들판에서 홀로 자란 소년은 흙벌레가 됩니다.  - P217

작가라는 나비를 키우기 위해서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서 3~4년 동안 일광욕을 하게 해야 한다고나 할까요. 어떤 식으로든 거기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작가가 되기 위한 기술을 배웁니다. 그것도 분명 배워야 하는 기술이니까요. 아무래도 이상하게 들리나요? 아무도 화가가 그림 그리기를 배워야한다거나, 음악가, 건축가가 각기 자기 기술을 배워야 한다는말은 이상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작가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글쓰기라는 기술도 적어도 다른 기술만큼은 어려우니까요. 아마 그 교육이 별로 구체적이지 않기 때문에 무시하는 모양이지만,  - P217

우리가 실제로 기우는탑 위에 있다고 상상하고 우리 느낌을 기록해 봅시다. 우리의 느낌이 그 작가들의 시와 희곡과 소설에서 관찰되는 경향들과 일치하는지 보기로 합시다. 탑이 기운다고 느끼자마자우리는 우리가 탑 위에 있음을 날카롭게 의식하게 됩니다.
그 작가들도 날카롭게 탑을 의식했고, 자신이 중류층 출신임을, 그리고 값비싼 교육을 받았음을 의식했지요. 탑꼭대기로 올라가보면, 얼마나 기이한 조망인지요. 보이는 풍경이완전히 뒤집히지는 않았지만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것도 사탑 작가들의 특징입니다. 즉 그들은 어떤 계층도똑바로 마주 보지 못하고, 아래서 쳐다보거나 위에서 내려다보거나 옆에서 비껴 봅니다.  - P221

물론우리는 - 우리는 평민이요 아웃사이더가 아닙니까? - 숱한 꽃을 짓밟고 유서 깊은 잔디밭을 망가뜨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한때 도보 여행가로 유명했던 빅토리아 시대의 한 고명한 인사가 보행자들에게 준 조언을 명심하기로 합시다.
<침입 금지라고 쓰인 팻말을 보거든 즉시 침입하라>고 말입니다.
즉시 침입합시다. 문학은 그 누구의 사유지도 아닙니다.
문학은 공유지입니다. 거기에는 국경도 전쟁도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걸어 들어가, 자기 길을 스스로 발견합시다. 그럴 때 비로소 영국 문학은 이번 전쟁에서 살아남아구렁을 건널 것입니다. 우리 같은 평민이요 아웃사이더들이그 나라를 우리 자신의 나라로 만들 때, 책을 읽고 쓰는 법을,
어떻게 보존하고 어떻게 창조할지를 스스로 배울 때 말입니다. - P242

누구나 글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다는 생각은 이 선집의 제1권에 소개한 여성 노동자 조합의 추억Memories of aWorking Women‘s Guild」(1930) 말미에서도 시사된 바 있지만, BBC 방송에서 진행한 남편 레너드 울프와의 대담 너무 많은 책이 쓰이고 또 나오는 게 아닐까?Are Too ManyBooks Written and Published?」(1927)에서도 확인된다. <교육받은 남자>인 레너드는 아무나 책을 쓴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반면, 아웃사이더를 자처하는 울프는 왜 그러면 안 되는가? 하고 반문하며 문학은 공유지임을 강변하는 것이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제도권으로부터자유로운 시각을 누리는 당당함이 있다. 이쯤 되고 보면 그녀는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자신이 열어 갈 길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다. - P271

나는 <유명해지거나 <위대>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계속 탐험하고, 변화하고, 마음과 눈을 열고, 규정당하거나 정형화되기를 거부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자유롭게 풀어 주는 것, 아무것에도 방해받지 않고자기 세계의 크기를 발견하게 하는 것이다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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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년 영국 런던에서 당대 저명한 학자이자 문필가였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과 어머니 줄리아 프린셉 덕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자형제들처럼 공식 대학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에서 많은 책을 탐독하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화가인 언니 버네사와 함께 블룸즈버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케임브리지 대학교출신의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가 주축이 되어 활동한 이 모임은 훗날<블룸즈버리 그룹>으로 알려진다. 
1912년 그룹의 일원이던 레너드 울프와 결혼했다. 
1915년에 첫 소설 「출항」을 발표했고, 이후 모더니즘문학의 대표 걸작으로 평가받는 댈러웨이 부인(1925), 등대로(1927) 등의 소설들과 훗날 페미니즘의 필독서가 되다시피 한 자기만의방(1929) 등을 발표했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시골집으로 피신하지만, 심해지는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던 버지니아는 이른 아침 강가로 나가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서재에서 보낸 시간

먼저 한 가지 선입견부터 없애기로 하자.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곧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낡은 등식 말이다. 그 둘 사이에는 아무 연관도 없다. 박학자란 죽치고 앉아책에 몰두해 있는 외로운 열정가로, 그는 책들을 뒤져 가며자신이 추구하는 특정한 진리의 알갱이를 찾아 헤맨다. 만일그가 독서의 열정에 사로잡힌다면, 그의 이득은 줄어들고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것이다. 반면 독서가는 처음부터 지식에 대한 욕망을 자제한다. 만일 지식이 남는다면 잘된 일이지만, 지식을 추구하여 체계적인 독서를 하고 전문가나 권위자가 되려 하는 것은 순수하고 사심 없는 독서에 대한 좀 - P11

커튼 사이로 내다볼 때 낯설게 다가오던 안개 속의 나무들을 우리는 평생 기억할 것이다. 아이들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해 이상한 예감을 갖는 법이니까. 하지만 위의 목록에서 보는 바와 같은, 좀 더 나중의독서는 전혀 다르다. 아마도 처음으로 모든 제약이 풀어져읽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읽을 수 있고, 아무 도서관이나 드나들 수 있으며,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와 같은 처지인 친구들이 있다. 며칠이고 연이어 우리는 책만 읽는다. 극도의흥분과 고양의 시기이다. 도처에서 새로운 영웅들이 나타나는 것만 같다. 우리 마음속에는 자신이 정말로 이 일을 하고있다는 일종의 경이감이 드는 한편, 일찍이 세상에 살았던가장 위대한 인간들과 이렇게 친숙해졌다는 것을 으스대고싶다는 우스꽝스러운 자만심이 일기도 한다. 이 시기는 지식욕이 가장 열렬하고 또 가장 자신만만할 때이며, 위대한 작가들이 인생의 가치에 대해 우리와 견해를 같이하는 것만 같다는 뿌듯함에 한층 더 열렬히 매진하게 된다.  - P15

 우리의 의식에서 이 모든 것을 걸러 낸다면 우리는 정말이지 가난해질 것이다. 그리고 자연이나 역사에 관한 책들이 있다. 꿀벌이나 말벌에 관한 책, 산업과 금광과 여제(女帝)와 외교책략에 관한 책, 강과 야만인,
노동조합과 의회 제정법에 관한 책을, 우리는 노상 읽고 -아쉽게도! - 노상 잊어버린다. 이렇듯 서점이 문학과는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온갖 욕망을 만족시킨다고 말하는 것이서점에는 별 칭찬이 못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에는진행 중인 문학이 있음을 기억해 두자. 이 새로운 책들에서우리 아이들은 우리를 영원히 기억되게 해줄 만한 한두 작품을 골라낼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알아볼 수만 있다면 -우리 시대에 대해 다른 시대들에게 말해 줄 시나 소설, 역사책이 있으니, 우리에게 셰익스피어 시대의 군중이 그의 작품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듯이 우리 또한 다음 세대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진정 그러하리라고 우리는 믿는다.  - P19

요즘은 누구나 책을 쓸 수 있다는 말도 자주들려온다. 아마도 사실이겠지만, 그래도 그처럼 쏟아져 나오는말의 홍수와 거품, 이 무절제하고 속되고 하찮은 수다의 한복판에는, 그중 소질 있는 저자만 만나면 장구히 이어질 형태로 표현될 수 있을 어떤 위대한 정념의 열기가 있으리라는것을 의심할 수 없다. 이 격랑을 지켜보는 것, 우리 시대의사상 및 비전과 드잡이하는 것, 그중 우리에게 소용될 것을포착하는 것, 무가치하게 생각되는 것을 없애 버리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눌할망정 최선을 다해 자신의 생각을 표출하는 이들에게 관대해야 함을 깨닫는 것이 우리의 기쁨이되어야 한다. 어떤 시대의 문학도 우리 시대 문학처럼 그렇게 비권위적이고, 고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우며, 제멋대로경의를 표하고 변덕스러운 실험을 하지 않았다. 예의 주시하는 이들에게도 우리 시대의 시인들과 소설가들의 작품에는이렇다 할 유파의 흔적이나 목표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비관론은 피할 수 없다.  - P20

예술의 본질에 관한 이론을 제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예술에 대해 우리는 원래 아는 이상으로는 결코 더 알지 못할 수도 있고, 경험이 쌓여 가며 알게 되는 것이라고는 단지우리의 모든 즐거움 중에 위대한 예술가들로부터 얻는 즐거움이 단연 최상의 것이라는 사실뿐이다. 그 이상은 알수없다. 하지만 아무 이론도 제시하지 않더라도, 그런 작품들에서는 우리와 동시대에 만들어진 책들에서 발견하기를 기대할 수 없는 특질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월 그 자체에는 나름대로의 연금술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간 이것만은 사실이다. 고전들은 아무리 자주 읽어도 그 장점이 전혀 줄어들지않으며 무의미한 말잔치가 되지도 않는다. 그것들은 완벽하게 완성되어 있다. 그 주위에는 어떤 연상의 구름도 무관한 - P22

생각들을 쑤석이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가장 중요한 경험의순간에 그렇듯이 우리의 모든 기능이 그 순간에 집중되며,
그들의 손으로부터 우리 위에 일종의 축성과도 같은 것이 내려온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선명히 느끼고 더욱 깊이 이해하며 삶에 돌린다. - P23

책은 어떻게 읽을 것인가?

우선 나는 이 제목 끝에 붙은 물음표를 강조하고 싶다. 설령 내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대답은 나에게만 적용될 뿐 당신에게는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독서에관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조언은 아무 조언도 따르지 말고 자신의 본능에 따라, 자신의 이성을사용하여, 자신의 결론에 이르라는 것뿐이다. 만일 우리 사이에 이 점이 양해된다면, 나는 좀 더 자유롭게 몇 가지 생각과 제안을 여러분과 나눠 보겠다. 다시 말해, 그런 생각이나제안이 당신의 독립성을 구속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립성이야말로 독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자질이니 말이다.  - P25

책에는 분류가 있으니 - 소설, 전기, 시, 하는 식으로 -그 분류에 따라 각각의 책이 우리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바를 얻으면 된다고 말하기는 간단하다. 하지만 책에서 그것이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흔히 우리는 막연하고 산만한 마음가짐으로 책을 접하며, 소설이 진짜이기를, 시가 거짓이기를, 전기가 아부하기를, 역사가 자신의 편견을 강화해 주기를 요구한다. 책을 읽을 때 그 모든 선입견을 추방해 버릴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시작이될 것이다. 읽고 있는 책의 저자에게 그가 해야 할 말을 불러주지 말고, 그가 되려고 해보라. 그의 공저자, 공범이 되는것이다. 처음부터 물러앉아 뒷짐을 지고 비판부터 한다면,
읽고 있는 책으로부터 가능한 최대의 가치를 얻어 낼 수 없다. 하지만 가능한 한 넓게 마음을 연다면, 첫 대목부터 문장들이 미묘하게 꼬이고 휘어지는 데서 거의 알아채지 못할 만큼 세미한 신호와 기미 들이 당신을 다른 어떤 사람과도 다른 한 인간의 면전으로 데려다줄 것이다. 이 일에 숙달되면저자가 독자에게 주는, 또는 주고자 하는 훨씬 더 확실한 것을 곧 발견하게 될 것이다. - P27

우선 소설을 읽는 법부터 살펴보자. 어떤 소설이 서른두챕터로 이루어져 있다면, 그 모든 챕터는 무엇인가를 건물처럼 지어 올리고 다스리려는 시도이다. 하지만 말[言]은 벽돌 - P27

처럼 손에 잡히지 않으므로 책을 읽는 것은 건물을 보는 것보다 더 오래 걸리고 복잡한 과정이 된다. 아마도 소설가가하고 있는 일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읽는 것이 아니라 직접 써보는 것이다. 말의 위험과 어려움을 가지고 직접실험을 해보는 것이다. 당신에게 뚜렷한 인상을 남긴 어떤사건을 되새겨 보라. 길모퉁이에서 두 사람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지나쳤다면, 그때 나무가 흔들렸다든가, 전깃불이 춤추었다든가, 대화의 어조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비극적이었다든가 하는 식으로 전체적인 장면을 그 순간에 담긴인상 전체를 말이다.
하지만 사건을 말로 재구성하려 해보면, 그것이 수천 가지 모순된 인상들로 부서지고 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어떤 것은 억제해야 하고 어떤 것은 강조해야 하며, 그과정에서 당신은 아마도 그때의 감정 전체를 그려 낼 수는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P28

하지만 디포에게는 대자연과 모험이 전부였던 반면, 제인 오스틴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녀의 세계는 응접실과,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야기가 거울처럼 세세히 비추어 주는 그들의 성격으로이루어진다. 그렇듯 응접실과 그 거울상에 익숙해진 다음 하디에게로 돌아서면, 또 판이 바뀐다. 우리 주위에는 황무지가 펼쳐져 있고, 머리 위에서는 별들이 반짝인다. 마음의 이면이 드러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밝은 면이 아니라고독 속에서 고개를 쳐드는 어두운 면 말이다. 우리의 관계는 사람들이 아니라 대자연과 운명을 향한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모든 세계는 서로 다를지라도 제각기 일관성을 지니고있다. 각 세계를 만든 사람은 자기 관점의 법칙을 면밀히 준수하므로, 아무리 큰 긴장을 조성하더라도 동일한 작품 안에상이한 두 종류의 리얼리티를 도입함으로써 ㅡ 이것은 이류소설가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인데 독자를 혼란케 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한 대가(大家)에서 다른 대가로, 말하자면 제인 오스틴에서 하디로, 피콕에서 트롤랩‘으로 ‘
서 메러디스로 넘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세계로의 이동이며뿌리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일이다.  - P29

 그러니 그저 친구 집에서 친구 집으로, 정원에서 정원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다니다 보면 우리는 영국 문학의한 끝에서 다른 끝으로 넘어가게 되며, 그러다 다시 여기 현재로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지나간 모든 순간들과 지금 이순간을 구별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이런 것이 우리가 전기와 서한집을 읽는 방식 중 하나이다. 우리는 그런 책들을 통해 과거의 많은 창문들을 밝힐 수도 있고, 고인이 된 유명인사들의 익히 알려진 버릇을 지켜볼 수도 있고, 때로는 아주가까이서 그들의 비밀을 상상으로나마 폭로해 볼 수도 있으며, 그들이 쓴 희곡이나 시 한 편을 꺼내 와 그것이 저자의면전에서는 어떻게 읽히는지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또 다른 문제들을 야기한다. 한 권의 책은 저자의 생애에서얼마나 영향을 받는가 하는 것이 그 질문이다. - P33

하지만 우리는 그런 책들을 또 다른 목표를 가지고 읽을수도 있다. 문학을 조명하기 위해서라거나 유명 인사들과 친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창조력을 새롭게 연마하기 위해서 말이다. 서가 오른쪽에 열린 창문이 있지 않은가? 책을 읽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는 것은 얼마나 상쾌한가! 그럴 때 눈에 들어오는 광경 - 망아지들이 들판을 뛰어돌아다니고, 여자는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채우고, 당나귀는고개를 뒤로 빼고 구슬피 울어 젖히는 - 은 독서와는 무관한 그 무의식적이고 끊임없는 움직임이 얼마나 자극적인가.
어떤 서재에서든 거기 꽂혀 있는 대부분의 책들은 남자들,
여자들, 당나귀들의 삶에서 이처럼 스쳐 가는 순간들의 기록일 뿐이다. 모든 문학은 세월이 가면 폐지 더미가 되어 버리며, 그 사라진 순간들과 잊힌 삶의 기록들은 더듬거리는 힘없는 말투 속에 스러진다. 하지만 이 폐지를 읽는 데 맛들이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정말이지 내버려져 썩어 가는 인간 삶의 유물에 압도될 것이다. - P34

그들은 완전히 숙련되어 뜻대로
재단하는 예술가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삶에 대해서조차 온전한 진실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은 아주근사할 수도 있었을 이야기를 망쳐 놓았다. 그들은 기껏해야사실들을 제공하는 데 그치거니와, 사실이란 허구의 아주 열등한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쪽짜리 진술과 추정을 끝장내고픈 마음이 든다. 인간 성격의 미세한 음영을 찾기를그치고, 더 추상적인 것을, 허구라는 더 순수한 진실을 즐기고 싶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세부를 제쳐 놓고 분위기를, 일반적이고 강렬한 분위기를 창조하며, 규칙적이고 일정한 박자를 찾는다. 그 자연스러운 표현이 시이다. 시를 읽을 때가된 것이다. 우리 자신이 거의 시를 쓸 수 있을 때야말로 시를읽을 때이다.

서풍이여, 그대 언제 불어오려는가?
가는 비 내려도 좋으리,
오 내 사랑 내 품에 있다면내 다시 침상에 있다면!

16세기 작자 미상의 시 - P36

 그럴 때 우리는 얼마나 심오한 깊이를 체험하는지! 얼마나 갑작스레 완전히 몰두하는지! 여기서는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의 비상 속에는머물 데가 전혀 없다. 허구가 불러일으키는 환상은 차츰 퍼져 나간다. 그 효과는 준비된 것이다. 하지만 누가 이 넉 줄을 읽을 때 이것을 쓴 이가 누구냐고 묻거나, 존 던의 집이나시드니의 비서를 떠올리거나, 과거 여러 세대에 걸친 복잡한일과 연관시키려 하겠는가? 시인은 항상 우리와 동시대인이다. 우리 존재는 개인적 감정의 격렬한 충격 속에서 으레 그렇듯 잠시 집중되고 수축된다. 그러고 나서 감각은 우리의정신을 통해 좀 더 넓은 원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하며, 더 먼감각들에도 기별이 간다. 이 감각들이 소리 내어 토를 달기시작하고 우리는 반향과 반영 들을 깨닫는다. 시의 강렬함은광범한 감정을 포괄한다. 시인의 다양한 기술을 알아차리기위해, 우리는 몇 편의 시를 비교해 보기만 하면 된다. 다음과같은 시행들의 힘과 직접성을

나는 나무처럼 쓰러져 내 무덤을 찾으리
오직 내 슬퍼하는 것을 기억하며

프랜시스 보몬트, 존 플래처 <하녀의 비극> - P37

다음 시행들의 떨리는 요동이나

떨어지는 모래알이 분초를 헤아리는
모래시계에서처럼
세월이 우리를 닳아뜨려 무덤에 이르게 하는 것을
우리는 지켜본다.
쾌락의 시절은 흥청망청 탕진된 후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슬픔으로 끝난다.
하지만 인생은 법석에 지쳐 모래알을 헤아린다.
한숨지으며 마침내 마지막 한 알을 떨구고
하여 안식 속에 비운을 마무리 짓는다. 

존 포드 <연인의 우수> - P38

다음 시행들의 명상적인 고요함과

젊었거나 늙었거나
우리 운명, 우리 존재의 심장이자 집은
무한과 함께 있다. 오직 거기에
희망, 죽지 않는 희망과 함께 있다.
노력, 그리고 기대, 그리고 욕망
그리고 아직도 되고자 하는 무엇

윌리엄 워즈워스 <서곡> - P38

그리고 다음 시행의 완전하고 소진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이나

움직이는 달이 하늘에 올라가
어디에도 머물지 않았네.
달은 부드럽게 올라가고
그 곁에는 별이 한두 개 

S. T 콜리지 <노수부의 노래> - P39

다음 시행들의 눈부신 환상과 비교해 보라.

그리하여 저 숲속을 쏘다니는 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으리.
그럴 때 어느 언덕 아래 멀리
온 세상이 타오르는 가운데
솟아나는 여린 불길 하나가
그에게는 그늘 속
크로커스로 보이리.

에버니저 존스 <세계가 불탈 때> - P39

시인에게는 우리를 배우이자 관중으로 만드는 능력이, 마치 장갑에 손을 넣기라도 하듯 등장인물 속에 들어가 폴스타프가 되었다 리어왕이 되었다 하는 재주가, 단번에 압축하고확장하고 진술하는 재능이 있는 것이다.
그저 비교하기만 하면 된다고? - 이 말로 들통이 나버렸다. 독서란 실로 복잡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첫번째과정은 작품이 주는 인상들을 고도의 이해력으로 받아들이는 것인데, 이는 독서의 전반부일 뿐이다. 만일 우리가 책에서 온전한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이 절반은 다른 절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 다양한 인상들에 대해 판단을 내리고 그 스쳐 가는 형태들로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을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는 아니다. 독서의 먼지가 내려앉기를 기다리자. 갈등과 질문이 죽어 없어지기를 기다리자.
걷고, 말하고, 장미에서 죽은 꽃잎을 떼어 내고, 잠드는 거다.
그러면 갑자기 우리가 의도하지 않고도 - 자연은 그런 식으로 이행을 일으킨다  - P40

우리는 더 이상 작가의 친구가 아니라 그를 판단하는 자이다.
우리는 친구로서 아무리 다정해도 지나치지 않듯이, 판관으로서 아무리 엄격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들은 우리의 시간과공감을 낭비하게 했으니, 심판을 받아 마땅하지 않은가? 거짓 책, 날조된 책, 공기를 부패시키고 병들게 하는 책을 쓰는자들은 사회를 타락시키고 더럽히는 가장 불온한 적들이 아닌가? 그러니 우리의 판결에 엄격해지기로 하자. 모든 책을그 분야의 최고와 비교하기로 하자. 우리 마음속에는 우리가읽은 책의 형태들이 우리가 내린 판단에 의해 굳어진 채 매달려 있다. - P41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저 그 자체로 좋아서 하는 일들, 그 자체가 목적인 즐거움들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독서야말로 그중 하나가 아닌가? 나는 때로 꿈꾸었다.
심판의 날이 밝아 와 위대한 정복자들과 법률가들과 정치가들이 보상을 받을 때, 그들이 왕관과 월계관과 영원히 썩지않을 대리석에 각인된 이름을 얻게 될 때, 하느님께서 우리가 책을 끼고 들어서는 것을 보시고는 베드로를 향해 부러움이 섞인 어조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말이다. <저들에게는 상이 필요 없어. 여기서 그들에게 더 줄게없어. 저들은책 읽기를 사랑해 왔으니 말이야.> - P46

자신의 작품을 관습이 아니라 자신의 느낌에기초할 수 있다면, 플롯도 없어지고 희극도 비극도 전형적인스타일의 사랑 이야기도 파국도 없어져서, 단추 한 개도 본드가(街)의 양복쟁이들이 다는 방식으로는 달려 있지 않을것이다. 삶은 규칙적으로 배열된 일련의 마차 등이 아니라빛무리이며, 의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둘러싸고있는 반투명한 외피外皮)이다. 이 다양한, 알려지지 않고 한정 지어지지 않은 정신을 설령 그것이 어떤 탈선이나 복잡성을 보인다 하더라도 가능한 한 외적이고 이질적인것이 섞이지 않게끔 전달하는 것이 소설가의 직무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그저 용기와 성실성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소설의 고유한 재료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믿어 온 것과 다소다르다는 점을 제시하는 바이다.
- P54

분명 그들은 우리보다 멀리, 우리가 가진 중대한 시각 장애없이 바라볼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그들이 보지 못하는 원가를 보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이 암울함에 저항의목소리가 섞여 들겠는가? 이 저항의 목소리는 또 다른 오래된 문명의 목소리이니, 그것은 우리 안에 고통을 감내하며이해하기보다 즐기고 싸우는 본능을 함양해 온 듯하다. 스턴에서 메러디스에 이르기까지 영국 소설은 유머와 희극에서지상의 아름다움에서, 지성의 활동과 육체의 발랄함에서 우리가 누리는 천성적 기쁨을 증언해 준다. 하지만 영국 소설과 러시아 소설처럼 동떨어진 것들의 비교에서 얻어지는 어떤 추론도 그것이 우리에게 소설이라는 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 주고 그 지평선에는 한계가 없으며 허위와 가식외에는 아무것도 - 어떤 <방법>이나 제아무리 자유분방한실험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점을제외하면 다 부질없는 것이다. <소설에 걸맞은 재료 같은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설에 적합한 재료이다.
모든 느낌이, 모든 생각이, 두뇌와 정신의 모든 특질이 동원될 수 있다. 어떤 지각도 그릇된 것이 아니다. - P60

시, 소설, 그리고 미래

대다수의 비평가들은 현재에 등을 돌리고 과거를 응시한다. 분명 현명한 일이겠지만, 요즘 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는다. 그런 임무는 서평가라는 부류에게 - 서평가라는 직함 자체가 이들 자신이나 이들이 탐사하는 대상의덧없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ㅡ 넘겨 버린다. 하지만 때로는자문하게 된다. 비평가의 의무란 항상 과거라야만 할까? 그의 시선은 항상 등 뒤를 향해 고정되어야만 할까? 그도 때로는 돌아서서 앞을 보고, 무인도의 로빈슨 크루소처럼 눈 위에 손 그늘을 만들어 미래를 내다보며, 그 희미한 시야 가운데서 언젠가 우리가 도달할지도 모를 땅의 희미한 윤곽을 그려볼 수는 없는 걸까? - P101

지금껏 소설가를 피해 온 영향들, 즉 음악의힘, 시각적인 자극, 나무의 형태나 색채의 유희가 우리에게미치는 효과, 군중이 우리 안에 불러일으키는 감정, 어떤 장소 어떤 사람들로부터 불합리하게 오는 모호한 두려움과 증오 움직임의 환희, 포도주의 도취 같은 것들을 극으로 만들기에 이를 것이다. 모든 순간이 중심이며, 지금껏 표현되지않은 막대한 지각들이 마주치는 장소이다. 삶은 항상, 그리고 불가피하게, 우리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보다 더 풍부하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제시한 것을 하려고 시도하는 이에게 크나큰 용기가 필요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는 그리 큰 예언의 재능이 필요치 않다. 산문은 아무나 시키는 대로 새로운 스텝을 배우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의 징조들을 아주 무시하지 않는다면 새로운 발전에 대한 필요를감지할 수 있다. 오늘날 영국, 프랑스, 미국 등지에는 거추장스러운 예속에서 풀려나 작업하려는 작가들, 다시금 자신의힘을 중요한 것들 위에 온전히 풀어놓을 위치에 서기 위해태도를 재조정하려는 작가들이 있음이 확실하다.  - P121

서평 쓰기

런던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드는 쇼윈도가 몇 개 있다.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완성품이 아니라 헝겊을 대고 깁는낡아빠진 옷들이다. 사람들은 여자들이 작업하는 것을 구경한다. 거기 쇼윈도 안에 앉아서 그녀들은 좀먹은 바지 같은것에 보이지 않는 바늘땀을 심고 있다. 이 친숙한 광경은 이글의 삽화가 될 만하다. 우리 시인들, 극작가들, 소설가들은말하자면 그렇게 쇼윈도 안에 앉아서 서평가들의 호기심 어린 눈길을 받으며 일하는 것이다. 하지만 서평가들은 길거리의 무리처럼 말없이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 P123

이처럼 19세기의 위대한 시인과 위대한 소설가는 방식은다를지언정 모두가 서평가의 힘을 인정했으며, 그들 뒤에는민감하는 강인하든 다 같은 방식으로 ㅡ 물론 그 방식은 복잡하고 분석하기 어렵지만ㅡ 영향받았을 무수한 군소 시인과 소설가들이 있었으리라고 추정하는 것이 안전할 터이다.
테니슨과 디킨스는 둘 다 상처 입고 분노했으며,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데 대해 스스로 부끄럽게 여겼다. 서평가는 빈대요 그가 무는 것은 무시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물리면 역시 고통스럽다. 서평가의 독설은 허영심에도 명성에도 상처를 냈으며, 매출에도 물론 그랬다. 19세기 서평가는 무시무시한 곤충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저자의 감수성은 물론이고 대중의 취향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작가에게 상처를 입힐 수 있었고, 대중을 설득하여 책을 사거나 안사게 만들 수도 있었다. - P127

적당히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다. <나는 두 극단사이를 빠져나간다. 나는 서평의 대상이 된 책의 저자들에게말을 걸어 왜 내가 그들의 책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런 대화로부터 일반 독자도 약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는 정직한 고백이며, 그 정직성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것은 서평이 개인적 의견의 표현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마감에 쫓기는 필자, 지면의 압박을 받는 필자, 그 옹색함가운데서 다양한 이해관계에 부응해야 하는 필자,  - P131

끝으로, 이 모든 문제중에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문제가 남는다. 즉, 서평가를 없애는 것이 문학에는 어떤 영향을미칠까 하는 것이다. 쇼윈도를 부숴 버리는 것이 저 손닿지않는 곳에 있는 여신의 건강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는 이유들은 이미 시사된 바 있다. 작가는 공방의 어둠 속으로 물러날 것이고, 더 이상 수많은 평자들이 유리창에 코를 박고들여다보면서 한 땀 한땀마다 호기심 많은 군중에게 논평을하는 가운데 옥스퍼드가에서 바지를 깁는 어렵고 미묘한 임무를 계속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자의식은 줄어들고 평판은쪼그라들 것이다. 더는 바람이 들었다 빠졌다 하지 않으면서자기 일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더 좋은 글을 쓸수 있을 것이다.  - P140

서평은 자의식을 고조시키고 힘을 약화시키며, 쇼윈도와 거울은 사람을 가두고 주눅 들게 한다. 그대신 토론을 두려움 없고 사심 없는 토론을 도입함으로써작가는 폭과 깊이와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궁극적으로 대중의 정신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작가라는 인물, 공작새와 원숭이의 잡종은 더이상 조롱 대상이 아니라 공방의 어둠 속에서 자기 일을 하는 이름 없는 장인, 존경받아 마땅한 장인이 될 것이다. 이전보다 덜 치졸하고 덜 개인적인 새로운 관계가 생겨나고 있다. 문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 새로운 경의가 따라올 수도 있다. 재정적 이익을 별도로 한다면, 그것은 어떤 빛을 가져올것인가, 비평적 안목을 갖춘 배고픈 대중은 공방의 어둠 속으로 어떤 순수한 햇빛을 가져올 것인가. - P142

현대 에세이

리스 씨의 지당하신 말씀대로, 에세이의 역사와 기원을- 그것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아니면 페르시아 사람 시란네이에게서 비롯되었는지 - 깊이 파고드는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모든 살아 있는 것이 그렇듯이, 에세이도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가계는 아주 넓게 퍼져 있어서, 그중 대표적인 몇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여 위세를 떨치는 반면, 어떤 이들은플리트가 근처의 빈민가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기도 한다.
에세이는 형태도 다양하다. 길 수도 짧을 수도 있고, 진지할 - P143

수도 시시껄렁할 수도 있으며, 신이나 스피노자‘를 다룰 수도 있고 거북이와 치프사이드를 다룰 수도 있다. 하지만1870년부터 1920년 사이에 쓰인 에세이들이 실린 이 다섯권의 작은 책을 뒤적이다 보면, 그 혼돈 가운데서 몇 가지 원리가 눈에 뜨이며, 그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도 역사의 진보라고나 할 만한 것을 감지하게 된다.
문학의 모든 형식 가운데 에세이는 긴 단어의 사용을 가장 덜 요구하는 형식이다. 에세이를 지배하는 원리는 요컨대즐거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서가에서 에세이집을 꺼낼때 우리는 단지 즐거움을 얻으려 할 뿐이다. 에세이에서는모든 것이 이 목적에 따라야 한다.  - P144

에세이는 그 첫마디로 우리에게 주문을 걸어야 하며, 우리는 그 마지막 한마디에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나야 한다. 그 중간에 우리는 재미와 놀람, 흥미, 분노 등 아주 다양한 경험을 거치게 될 것이다. 램‘
가 더불어 판타지의 정상으로 솟구치기도 하고, 베이컨과더불어 지혜의 심연에 뛰어들기도 하겠지만, 결코 흥분해서는 안 된다. 에세이는 우리를 넉넉히 감싸고 세계를 가로질 - P144

러 장막을 드리워야 한다.
그런 위업은 좀처럼 달성되지 않는다. 물론 그 잘못은 작가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있겠지만 말이다. 습관과 무기력이
독자의 입맛을 둔하게 한 것이다. 소설에는 이야기가 있고 시에는 리듬이 있는 데 비해, 에세이스트는 그렇게 짧은 산문에서 대체 어떤 기술을 동원해야 우리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하고, 황홀경 - 잠이라기보다는 더 강렬한 삶이라고나 할 상태, 모든 기능이 깨어 있는 가운데 감미로운 일광욕을 즐기는 듯한 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겠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그는 제대로 글 쓰는 법을 알아야 한다.  - P145

이 승리는 문체의 승리이다. 왜냐하면 문학에서 자아를활용하는 것은 글 쓰는 법을 터득함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아란 문학에서 본질적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적이다.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않되 항상 자기 자신이라야 한다는 것이 문제이다. 리스씨의 선집에서 몇몇 에세이스트들은솔직히 말해 이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인쇄된 글의 영원성 가운데 분해되는 시시한 개성들을 보며 욕지기를 느낀다. 물론 잡담으로서는 매력적이었을 터이고, 그것을 쓴 사람도 맥주 한잔을 사이에 놓고 만나기에는 기분 좋은 사람이었을 터이다. 하지만 문학은 엄격하다. 매력적이거나 덕이 높거나 심지어 학식이 많고 총명하다 해도, 글 쓰는법을 알아야 한다는 문학의 첫째가는 조건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문학은 거듭 말하는 듯하다. - P155

 삶은 솟아나고 변화하고 더해진다. 책장에 꽂힌 책들도 살아 있는 한 변화한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과 만나기를 원하며, 만날 때마다 그들은 달라져 있다. 우리는 비어봄 씨의 에세이들을 한 편 한 편 반추해 보며, 9월이 오든 5월이 오든 그 글들과 함께 앉아 이야기하게 되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에세이스트가 모든 작가중에서 여론에 가장 민감하다는 것은 사실이다. 응접실은 오늘날 많은 독서가 이루어지는 곳이며, 비어봄 씨의 에세이들도 응접실 탁자 위에 놓인 덕분에 절묘하게 돋보인다. 주위에는 술잔도, 독한 담배도, 말장난도, 술주정이나 미친 짓도 없다. 신사 숙녀는 함께 이야기하며, 물론 이야기되지 않는 것들도 더러 있다. - P156

어떤 이들은 힘들게 간신히 통과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순풍을 타고 날아간다. 하지만 벨록 씨와 루커스 씨와 스콰이어 씨는 어떤 것에도 그 자체에 강한 애착을 느끼지 않는다. 그들이 공유하는 것은 오늘날의 딜레마, 즉 집요한 확신의 결여이다. 그런 확신만이누군가의 언어라는 희미한 영역을 통해 덧없는 말소리를 영속적인 결혼, 영속적인 화합이 있는 땅으로 들어 올리는 것인데 말이다. 모든 정의(定義)가 막연하다고는 하나, 좋은 에세이란 이런 영속성을 지녀야만 한다. 그것은 우리 주위에장막을 치되, 우리를 밖에 두지 않고 안에 들이는 장막이라야 한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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