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말

내가 여성성을 맞닥뜨린 건 결혼 이후다. 낯선 생활 세계가 열렸다. 해주는 밥만 먹다가 밥을 해먹어야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나는 집안일에 솔선하는 아내가, 그는 잘 도와주는 남편이 되었다.
그도 나도 똑같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다가 결혼을 했는데 가부장제 가족 제도에 편입되는 순간, 여자인 나는 계속 뭔가 불리했다. 자식의 배우자를 대하는 양가 부모의 태도도 달랐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밀어 이불 뒤집어쓰고 울다 잠들곤 했다.
싸움보다 교화를 택했다. 여의도에서 잠실로 남편과 같이 출퇴근하면서 차 안에서 여성주의 책들과 고정희의 시집을 소리내 읽어주었다. 일상의 불평등 구조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론의 주입은 가능하나 감각의 세팅은 불가능했다. 두 아이를 낳았고 엄마가 되었다. 그때부터 공중 삼회전 난이도가 따르는 삼인분의 삶을 살았다. 밥도세 그릇, 빨래도 세 판, 청소도 세 번, 고민도 세 가지. 물론 남편은아이들과 놀이터에 나갔고 설거지를 자처했으며 배우자의 사적 생활을 지지했다. - P5

나는 싸움하는 사람으로 변했다. 공격 대상이 모호했다. 날마다 가슴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혼자 치르는 전투에서 나는 매일 전사했고꿈처럼 깨어나 오늘을 살았다. 시가 무기였다. 둥그런 바가지 머리일 때부터 방바닥에 누워 주섬주섬 먹던 시 이전처럼 한갓 유희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고달플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보시기와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텔레비전은 저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 - P6

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한 30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나를 연민하고 생을 회의했다. 생이 가하는 폭력과 혼란에 질서를 부여하는 시. 고통스러운 감정은 정확하게 묘사하는 순간 멈춘다고 했던가. 마치 혈관주사처럼 피로 직진하는 시 덕분에 기력을 챙겼다. 꿈같은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라 남루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힘이 났다. 시가 주는 묘한 해방감의 정체가 무언지는 몰랐다. 그런데 친구가 소설에서 봤다며 조선조사대부 여인에게는 시가 짓기를 금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책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결혼은 항상 숙명과 같은 엄숙한 얼굴로 가시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아내는 그 울타리 안에서 순치된 가축처럼 고분고분 살아갈 뿐이다. 이것이 남권 사회의 순리다. 가장 무난한 방도는 회의하지 않는 일이다. 남권 사회에 있어서 여인의 회의는 독약이나 같다. 조선조 사대부 여인들에게 시가 짓기를 금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문학에 눈뜨는 것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 아닌가.
- 이영희의 소설 《달아 높이곰 돋아사(1권)》 - P7

문학에 눈뜨는 일은 회의에 눈뜨는 일이고, 회의에 눈뜨는 일은존재에 눈뜨는 일이었다. 시를 읽는 동안 나 역시 생각에서 생각으로 돌아눕고 곱씹고 되씹고 뒤척이기를 반복했다. 흔한 기대처럼 시 - P7

는 삶을 위로하지도 치유하지도 않는다. 백석 시인이 노래했듯이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할 뿐이다.
시는 일이 만족스러운 사람은 굳이 삶을 탐구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내게 알려준 것도 삶의 치유불가능성이다. 니체가 말했듯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끔찍한 재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바닥까지 시는 깊게 내려간다. 옥타비오 파스의 말대로 시는 존재의 심층에 거주한다. 시를 통해 나는 고통과 폐허의 자리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법을 고통과의 연결고리를 간직하는 법을 배웠다.
일명 진실과의 대면 작업.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시를 읽는다고 불행이 행복으로 뚝딱 바뀌지는 않지만 불행한 채로 행복하게 살 수는있다. 불행에 삶의 자리를 선뜻 내어주자 나는 싸움하지 아니하는사람이 되었다. 황동규 시인의 말대로 "시는 행복 없이 사는 훈련"
인 것이다. - P8

생에 울컥한 순간 일상을 추스르며 적어간 글 중 아직 어느 책에도실리지 않은 기록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학보와 《한겨레》에 가장최근까지 연재한 칼럼을 모은 것이다. 이 책은 서른다섯부터 마흔다섯을 경유하는 한 여자의 투쟁의 기록이다. 모성을 수행하는 엄마이자 존재를 이행하는 자아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삶의 조건 속에서 나는 분열했고 분투했다. "존재하는 한 이야기하라"는 페미니즘의 명제대로 말하기를 시도했고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불가피했다. 팸 모리스 말대로 "모든 재현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의 장또는 상반되는 관점들이 서로를 지배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고 있는언어학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현실의 투쟁을 거치며 자기언어를 더듬더듬 찾아갔고 그러는 사이 삼인분의 인격은 각자 분화했다. 딸아이 꽃수레는 미취학 아동에서 중학생이 되었고, 잠꾸러기아들은 군에 입대했고, 나는 글 쓰는 사람 은유가 되었다. - P11

싸울 때마다 질문은 탄생했다. 집안일부터 세상일까지 나의 울컥은 생의 질문이 되었다. 끝도 없고 두서없는 물음의 연쇄는 사람이사람답게 사는 세상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혹서기도 혹한기도 예외 없이 캐리어위에 방석 하나 깔고 앉아 깐 마늘을 파는 할머니의 다 닳아빠진 엄지손톱을 보면서 그의 삶을 가만히 헤아리는 일이다. 세월호에서 아직 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문득 걸음을 멈추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2014년 4월 16일보다 세상이 느리게 돌아가는 것이다.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고 존재가 존재를 닦달하지 않는 세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물음을 내려놓지 않는 한, 나는 계속 무언가와 싸우며 글을 쓰고 있을 것 같다. - P12

"여성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자아가 있다면 그것은 역설적으로 아무런 이익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를 달고유화할 수 있는 능력일 것"이라고 엘렌 식수가 말했던가. 엄마가 내어준 부드러운 자아의 토양에 삶에서 길어낸 언어의 씨앗을 뿌렸더니, 그것이 신기하게도 책으로 자랐다. 내 거친 생각에 빛과 물을 부어준 귀한 인연들,
같이 시를 읽고 글을 쓰고 말을 나눠준 도반들, 이 책에는 그들의 체온과 지분이 들어 있음을 말하고 싶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지는 모든 존재들의 ‘탈고유화‘의 여정 위에 이 책을 내려놓는다. - P13

다른 듯 같은 삶. 할머니와 어머니 세대에는 그 질곡이 더 심했으며, 주로 딸들이 목격자이자 피해자로서 그 원한을 간직한다. 약자에게 원한은 단 하나의 기억의 장소다. 대를 거듭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의 입에서 나오다니, 뜨끔했다. 나는 사과했다. 너무 지랄해서 미안하다고. 그랬더니 선배는 그날의 대화로전시의 방향을 잡았다며 외려 고맙다고 했다. 큰언니가 듣고 있다가쓴소리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발전한다고 거들었다. 덜 민망했다. 집요하게, 치열하게, 고민하다가 가길 얼마나 잘했는지, 소주에 맥주를연거푸 마셔도 취하지 않은 밤이 얼마 만인지. - P29

결혼도 이혼도 인연을 쓰는 한 방편일 뿐이다. 플라톤의 말대로무엇이든 그 자체 단독으로 아름답거나 추하지는 않다.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미이고, 그것을 추하게 만드는 것은 실천의 비열함이다. 이혼도 그런 것 같다. 비열한 이혼도 아름다운 이혼도 있다. 그러니 권장할 일도 배척할 일도 아니다. 삶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골격을 짜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픈 선택일 뿐이다. 삶의 어느국면에서 생을 담은 물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 단지 그것뿐이다.

이별은 언제나 예고 없이 온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어 잊고 산다
어리석어 내 생을 담은 한 잔 물이
잠시 흔들렸을 뿐이다단지 그것뿐이다- 
정일근의 시 <그 후> 부분 - P24

- 김기택의 시 <풀인간적 성숙은 낯선 대상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혼란과 갈등을겪으며 자기와 세상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때 일어나는 것이다. 엄마라는 생태적 지위는 성숙에 이르는 여러 기회 가운데 하나일 뿐저절로 성불하는 코스가 아니다. 그나마 출산과 육아로 인한 고통의자산화가 가능하려면 어느 정도 문화적 자원이 있어야 한다. 애키우고 먹고사느라 하루하루 허덕이는 여성은 그럴 겨를조차 없다.
요즘은 소신 있게 출산을 거부하는 이들도 많다. 불임 여성도 느는 추세다. 그래서 애 낳은 여자, 애 안 (못) 낳는 여자의 일상의 구체적 고통을 외면한 ‘모성의 이상화‘는 참 나쁜 관념이다.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고 윤리적으로도 옳지 않다.
박 대통령이 세월호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애를 안 낳아봐서가 아니라 해결하지 않아도 권력을 유지하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떠받치는 것은 온갖 나쁜 관념에 휩싸여주변의 여린 소리를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이다. - P32

 자기 욕망을 일인칭 시점에서 구사할 수 있는 언어는 여전히 모자라다. 착한 여자는 천당에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는 말대로, 일상의 금기는 넘나들지만 몸에 그은 선은 제자리다. 올여름‘그래도 될까‘를 되묻고 검열하다가 점잖지 못한 핫팬츠 두 개는 버렸고, 머리는 기장만 짧게 손질했다. 내 인생의 두발 자율화가 시행된 지가 언제인데 머리 모양은 중고등학생 때 그대로, 단발에서 어깨까지 길이를 무료하게 오간다. 꼭 한 번 빨간 머리를 원했지만 어느새 흰머리가 정수리부터 증식하는 나이가 되어버렸다.
명동성당 첨탑이 보이는 2층 술집에서, 그날 우리는 늙기 전에 오프숄더 드레스 입고 송년 파티를 열어볼까 호기롭게 떠들었다. 술단지가 비는 동안 ‘남들이 뭐라든 입는‘ 장단지가 드러나는 반바지에서 ‘우리가 입어보고 싶은‘ 어깨가 내보이는 드레스로 논의가 진척됐다. 이게 어딘가 자못 대견하다. 저무는 여름밤, 여자들은 매미처럼 시끌벅적 ‘생의 언어‘를 배양했다. 오규원 시인의 시구처럼 "욕망의 성기이며 육체의 현실인 말"을 - P36

<본분 금메달>이 열렸던 설 연휴에 차례를 지낸 후 나는 제주도로 떠났다. 기름 냄새에 찌든 메스꺼운 기분에서 벗어나 옥빛 바다의 찬 공기를 쐬며 맑은 정신으로 명절을 보냈다. 결혼 후 처음 누리는 호사다. 며느리, 딸, 엄마, 아내의 본분을 벗어나 존재의 오롯함을즐겼다. 바닷가 마을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스무 살의 나로 돌아가전혜린의 에세이 《목마른 계절》을 집어들었고, 그 책에서 "여성의가장 본질적인 약점으로 나는 생 전반에 대한 비본연적 태도를 들고싶다"는 문장에 아프게 밑줄을 그었다.
비본연적 태도로 살아가길 강요받는 이 땅의 모든 <본분 금메달>의 출전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전혜린은 이렇게 글을 매듭짓는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하에 놓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근본적인 생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고 - P49

역할 역할의 꽃, 엄마 역할. 역시 ‘역할‘은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영혼 없이도 가능하다. 현관에 들어서면 나는 엄마가 되어 기차가 레일을 지나가듯 현관에서 부엌으로, 부엌에서 식탁으로, 식탁에서 냉장고로 자동 왕복하는 거다. 사고하지 않아도 그냥 습관대로하던 대로 막힘없이 수행한다. 이런 걸 무슨 숭고한 모성이라고 말하겠는가. 자기 손에 물 묻히기 싫은 사람들이 지어낸 말일 뿐. 누추하고 번거로운 집안일이다. 내가 엄마라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다.
엄마 역할로 주어지는 과다한 몫들이 싫다. 엄마 역할을 하는 동안은 내가 나 같지 않다. 그냥 밥순이, 그냥 아줌마다. - P52

가족들이랑 캐리비언 베이 가는 거 말고, 내가 정말 가고 싶은 데는 여수 밤바다다. 혼자서 가고프다.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수행우등고속을 끊고 떠났다가 여수에서 며칠 묵고 또, 백석이 "자다가도 바다가 보러 나가고 싶다"고 한 통영에도 가고 민박집에서 하루종일 방 끝에서 방 끝으로 뒹굴면서 책 보고 밤이면 파도 소리 들으면서 글 쓰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붙박이 인생 청산하고 떠돌이처럼 살면 내가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사는 일이 덜 지겨울까 역할에서 빠져나오면 나비처럼 자유로울까. 여섯 시간째 뱃속이 텅 비었다고 전화하는 딸내미에게 즉시 달려가지 않아도 되면 나의 인생이 더 고상해질까.
밥에 묶인 삶. 늘 떠남의 욕망에 시달린다. 먼곳에 대한 그리움이 바다 되어 출렁이고 마음만은 지중지중 물가를 거닌다. - P56

열 번 잘하다가도 어느 순간 남처럼 등 돌리는 남자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 씻지도 못하고 이틀째 널려 있는 빨래를 걷는데도 꼼짝 않고 누워 있는 남편 결혼 전에 아빠를 볼 때면 좀 궁금했다. 옆 사람 힘든 게 왜 안 보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못 본 척하는 게 아니라 아예 안 보이는 거다. 대대손손 소통불능의 장애를 겪는 남성들. 그렇게 살아도 삶이 유지됐으므로 타인의 심정을 헤아리는 능력이 퇴화한 것이다. 무심함이 무뚝뚝함, 남자다움으로 미화된데다가 학교나 학원에서 안 가르쳐주니까 관 뚜껑 닫힐 때까지 모른다. 모르고 편하게 살다가 죽는 남자들이 많으니까 그만큼 한평생고생만 하다가 죽는 여자들도 많다. - P58

요즘 집밥이 화제가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오래 전 저 어머니와 밥의 삽화들이 떠올랐다. 지금 나는 아침 안 먹는 아이로 키우는 소설가 엄마보다는 밥 차려주는 어머니에 해당하는 순응적 일상을 겉으로는 살고 있다. 허나 속으로는 끼니마다 회의한다. 나에게 밥은 집밥이냐 외식이냐, 레시피가 간단하냐 복잡하냐, 맛이 있냐 없냐가아니다. 그 밥을 대체 ‘누가‘ 차리느냐의 문제다. 최승자 시인의 시구대로 우리는 "채워져야 할 밥통을 가진 밥통적 존재이고, 누군가차리지 않은 그냥 밥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엄마들은 어디 효도관광이라도 가서야 내가 아무것도 안 했는데 매 끼니밥이 나오는 신비를 경험한다. 그제야 맛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을 - P67

출산은 성스럽지만은 않다. 아이는 모성의 힘으로 낳는 게 아니다.
제 스스로의 힘으로 뚫고 나온다. 그리고 낯선 존재의 출현은 공포와위험으로 다가온다. 첫 아이 키우는 엄마들은 밤잠을 설치며 아기가숨을 잘 쉬는지 코에 손가락을 대보곤 한다.
갓난아기는 신성한 생명인데 어떻게 버릴 수 있느냐는 물음은 바뀌어야 한다. 신성함은 누구에 의해 어떤 상황에서 규정되는가. 왜생물학적 아버지인 남자 친구나 부모에게도 말 못하고 ‘혼자서‘ 한생명체를 쏟아내듯 낳고 치우듯 버려야만 했을까. 왜 미혼모로 살아가는 일이 제 몸 아파 낳은 아기를 죽게 내버리는 일보다 더 공포스럽게 되었을까. 미혼모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학교에 유아원을 두는독일 같은 나라도 있다는데, 왜 우리 사회는 미혼모가 사회 안에 섞여 살아가지 못하고 양육의 짐을 몽땅 떠맡아야 할까. - P70

그간 나는 너무 쉽게 고통의 자산화와 운명애를 말한 건 아닐까.
고통에 대한 분석적 언어는 때로 현실의 구체적 고통을 소거시킨다.
이데올로기 이전의 삶은 이리도 난폭하고 섬뜩하다. 그러니 여자로태어나서 미친년으로 진화한다는 말은 여자의 연대기에 관한 핵심적 진술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느낌의 공동체>를 읽다가 밑줄그었던 부분, "미친년 널뛴다는 말은 폭력적이다. 미친년을 미치게만든 미친놈들의 존재가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새삼 궁금했다. 그길고 오랜 세월 동안 미친놈들의 존재는 어떻게 생략이 가능했을까.
미혼모는 있어도 미혼부는 없지 않은가. 세상은 어째서 여전한가.
느닷없는 물음에 붙들린 2012년 2월 29일.
늦된 엄마는 오늘도 딸을 낳고 앳된 딸은 매일매일 학교에 간다. - P75

나는 아직도 미안하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내게 터놓은 그 친구에게 가해자가 친족이었고 아홉 살에 일어난 일이라고 했다. 나는너무 놀라 "그랬구나………" 말끝을 흐리며 어정쩡하게 다른 얘기로넘어갔다. 그 친구는 더 말하고 싶었을 텐데 난 듣는 법이 서툴렀다.
세월이 흐르고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인터뷰할 때 물었다. 피해 사실을 털어놓았을 때 상대가 무어라고 말해주면 가장 좋은지. 그들은이렇게 답했다. "힘들었겠구나. 나한테 얘기해줘서 고마워."
진실은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듣는 데 있는 것이다. 말할 권리the right to speak 와 들릴 권리the right to be heard는 영어로 같은 표현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집집마다 당도해야 할 것은 가해자의신상 명세가 아닌, 피해자의 들릴 권리가 담긴 서툰 말이다. - P81

첫아이 키울 때는 전화기 건너로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억장이 무너졌다. 그 눈물이 긴 시간의 강물로 보자면 돌멩이 하나 던져진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한참 후다. 늘 입으로는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단다를 주장해왔지만 뜻대로 살기 힘들었다. 자기중심적인 엄마라는 죄의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고작 일곱 살아이 혼자 두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랑 소주잔 기울이는 나를 스스로도 좀 심한 엄마로 규정하게 된다. 정말로 아이 키우는 일은 순간순간이 어려운 시험이다. 노사 협상처럼 하나 양보하고 하나 받아내는 거래를 해보기도 한다. 나의 좋음과 아이의 좋음의 접점을 찾아
‘윤리적 선택‘을 고민해보기도 한다. 그게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겠다. 아이가 다양한 상황에 놓여보는 것이 아이의 감성을 일깨우는 것 같다. 늘 살던 패턴대로 익숙하게 사는 사람은 생각할 일이 없다. 열차 시간처럼 정확히 도착하던 엄마가 늦을수도 있음을 유년시절 윗목에서 체험한 아이는 적어도 상실감, 외로움, 쓸쓸함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감정의 결이 생기고 마음의 살이 포동포동 오르겠지. - P90

엄마의 죽음으로 나는 한 차례 변이를 경험했다.
세상을 감각하는 신체가 달라졌다.
삶이라는 것, 그냥 살아감 정도였는데,
엄마를 통해 죽음을 가까이서 보고 나니까
‘삶‘이라는 추상명사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삶은 이미 죽음과 배반을 안고 시작된다. - P97

왜 엄마들에게 행복은 늘 충족유예 상태로만 존재해야 하는가. 내일을 위해 오늘을 인내하는 삶 자식을 위해 당신은 포기하는삶………. 워낙 가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그러신 줄은 안다. 그래도 난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가 호강 한번 제대로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돌아가시는 바람에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나의 일신의호강은 주체적으로 ‘지금 여기서 챙겨야 한다는 것. 그 엄정한 사실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늙고 아프고 죽는다는 차가운 명제를 상기한다.
어쩔 수 없이 내가 자식에게 의지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고 내가 부모님을 봉양해야 할지도 모른다. 닥치면 살겠지 한다. 미리 걱정하면서 고통을 가불하고 싶지 않다.
늙음, 그 존재의 무너짐을 삶의 과제로 의연히 받아들이고 싶다.
내가 늙은 부모를 봉양하든 내가 늙어 자식에게 의탁하든, 비참하고비루한 생이 지겨워 눈물 바람 할 테고 태어난 걸 후회하다가도 또어떤 날은 살 만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겠지.  - P101

육아가 힘들 때 아이들이 족쇄 같아 괜히 낳았다고 원망했던 것처럼 더러는 괜히 죄없는 부모님을 탓하기도 하겠지. 하지만 나는 안다. 힘든 일 포기하고 떠난다고 자유롭지 않다. 그건 자유에 대한 환영이고 망상이다.
넘지 못할 것 같은 산도 한 걸음 내디디면서 다리 힘이 길러지고 그러면 다음 봉우리는 더 쉽게 건널 수 있다. 근육이 튼튼해지고 체력이 길러지면 삶의 어느 고비에서도 성큼성큼 문제 안으로 들어가는궁극적인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런데 문제를 회피하고 도망가면 걸린 데서 또 걸린다. 살아보니 그랬다. 아무런 상처도 주지 않고 좋기만 한 관계는 가짜이고, 아무런 사건도 생기지 않은 무탈한 일상이행복은 아니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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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석공 일을 배우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포로가 되기도 했던 너지 임레는 공산주의자였다. 사회주의 정부를 세우는 데 참여했고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헝가리 대표를 지냈다. 그러나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이 식량 부족에 신음하는 현실을 보고 정책 노선의 전환을 결심했다. 강제 수용소를 폐쇄하고 집단농장을 해체하는 한편 서방국가와 관계를 개선하고 자율과 창의를존중하는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내가 만난 동상은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얼마 전 헝가리 정부가 너지 총리의 동상을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의사당 북쪽의 한적한 광장으로 이전했다는 뉴스를보았다. 푸틴과 친밀하다고 알려진 오르반 빅토르 총리가 너지 후손들이 반대하는데도 동상을 이전함으로써 그를 정치적으로 격하했다는 논평이 뒤따랐다. 그러나 너지 총리는 그곳에서도 변함없이 헝가리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다뉴브를 지켜볼 것이라 나는 믿는다. - P142

국회의사당의 언드라시 기마상 근처에서 강변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가 세체니 다리 쪽으로 걸었다. 강변에 금속으로 만든 남녀노소의 신발 수십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신발의 주인들은 총을 맞고 강에 버려졌다. 그곳에 그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갔는데도 눈물이났다. 그저 무섭기만 했던 테러하우스와는 달랐다. 그렇게 작은 조형 - P142

이고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빗물이 깨끗하게 고인 구두 너머로 도나우의 탁류가 거칠게 흐르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유대인을 너그럽게 대했기 때문에 헝가리유대인이 많았고 부다페스트에 큰 게토가 있었다. 나치는 80만 명 넘었던 유대인 가운데 60만 명을 죽였다. 43만여 명을 열차에 태워 아우슈비츠를 비롯한 수용소로 보낸 1944년 5월부터 7월까지가 학의 절정기였다. 나치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하고강제노역을 시켰으며 빼앗은 돈과 귀금속을 소위 ‘황금열차‘에 실어 베를린으로 가져갔다. 독립할 때 루마니아와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영토와 인구를 절반 넘게 빼앗겼던 헝가리 정부는 그것을 되찾으려고 나치와 협력했다가 소련군에게 점령당했다. 권력을 잡은 헝가리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의 간섭과 지배를 받아들였지만 민중은 그렇지 않았다. 오스만제국과 합스부르크제국뿐 아니라 나치 독일과 소도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하는 외세로 여겼다. 너지 임레 총리의 개혁정책과 시민들의 반소 무장투쟁의 동력은 그런 정서였다.
강변의 구두는 유대인들의 가슴 미어지는 참극과 헝가리 사람들의 지워버리고 싶은 범죄행위를 되살린다. 거기서 유대인을 학살한범인은 독일이 아니라 헝가리 사람들이었다.  - P143

부다페스트는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슬픈 건 또 그대로 슬펐다.
단것을 먹으면 슬픔이 덜어질까 해서 구도심의 유명한 카페에 들렀다. 19세기 부다페스트의 예술가들이 즐겨 찾았고 시씨의 단골집이기도 했다는 그 카페에서 카라멜 프라페와 카푸치노를 마시고 산딸기 요구르트 케이크를 먹었다. 시씨는 그 집을 ‘부다페스트의 보석‘이라고 했다지만 너무 달아 내 취향에는 맞지 않았다. 벽에 창업자로보이는 커다란 남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독일어로 써놓은 안내문을 보니 이름이 ‘쿠글러 (Kugler)‘였다. 유럽의 성씨는 직업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쿠글러는 공이나 총알을 가리키는 명사 쿠겔(Kugel)에서 파생했다. 총알과 대포알이 아니라 동그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만든 그 남자는 넥타이까지 맨 양복 차림으로 카페 고객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P145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니지만 부다페스트 마지막 일정은 도나우야경 감상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좋은 감정만 느끼면서 작별할수 있어서다. 해가 넘어가자 부다페스트는 더 밝고 더 아름다워졌다.
부다의 겔레르트 언덕과 왕궁단지에 조명이 들어왔고 국회의사당과바실리카를 비롯한 페스트의 공공건물도 화사한 빛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국회의사당 첨탑 위 아스라이 높은 밤하늘에 빛을 받아 하얗게반짝이는 갈매기들이 박힌 듯 떠 있었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시각을 제외한 모든 신경세포가 작동을 멈추었다.
며칠 동안 시내 곳곳에서 목격했던 역사의 비극에 대한 기억이사라졌다. 머저르 독립운동의 순교자도, 홀로코스트의 상처도, 소련군 탱크에 짓밟힌 소녀도 생각나지 않았다.
다음 날 오전 잠깐 시내를 산책한 후에 김포공항보다 작고 소박한 리스트 페렌츠 공항에서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부다페스트는 철도 · 자동차 · 유람선 등 들어오는 경로가 많아서 큰 공항을 만들지 않은 듯했다. 나는 부다페스트를 다른 어떤 도시보다 좋아한다. 그 도시는 스스로를 믿으며 시련을 이겨내고 가고자 하는 곳으로 꿋꿋하게나아가는 사람 같았다. 1천 년 전 말을 타고 거기 왔던 머저르의 후예들이 지난 150여 년 동안 무엇을 성취했는지 보여주었다. 나는 부다 - P162

페스트에서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보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맛보았다. 부다페스트는 슬프면서 명랑한 도시였다. 별로 가진 게 없는데도 대단한 자신감을 내뿜었다. 오늘의 만족보다 내일에 대한 기대거른 도시였다. 나는 그런 사람 그런 도시가 좋다. - P163

프라하, 뭘 해도 괜찮을 듯한
비행기는 해가 저물고 한참이 지나서 프라하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프라하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나는 얀 후스, 밀란 쿤데라 프라하의 봄, 바츨라프 하벨과 벨벳혁명이 떠올랐다. 하지만 백탑의 도시,중세의 향기, 동유럽 문화수도, 보헤미안의 낭만 같은 말도 모르지 않았다.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사진을 찌기어도 화보가 된다는 소문도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예쁜 도시기에 그런 말이 있는지 궁금했다. 소감을 미리 말하자면, 터무니없는 과장은 아니었다. 프라하는 밝고 예뺐다. 걱정 없는 소년 같았다. 여행자에게 친절하고 너그러웠다.
호텔에 짐을 풀고 나니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유럽에 가면 첫날 저녁을 잘 버텨야 한다. 시차가 일곱 시간 안팎이라 평소라면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저녁밥을 먹게 되고, 배가 부른 만큼 눈꺼풀도 더 무거워진다.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해 잠들었다가는 몇시간 지나지 않아 눈을 뜨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으며 후회하게 된다.
자정을 넘겨 잠든다 해서 날이 밝을 때까지 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P169

나무 그늘에 앉아 틴 마당을 보며 5백 년 전 모습을 상상해 보았.
다. 동유럽 슬라브족 거주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던 틴은 밤낮없이 사람으로 북적였다. 아랍인을 포함한 원거리 무역상들이 금·은·구리 · 주석 • 보석 · 소금 · 공구 · 옷감 · 양모 · 말린 과일과 훈제 생선을 사고팔았다. 울타리와 출입문, 창고, 마구간이 있었고 저렴한 숙박업소와 술집 · 식당이 즐비했으며 병원도 있었다. 수공업자들의 작업장은 밤낮없이 분주하게 돌아갔고 무역으로 한몫을 잡은 신흥 부자들이 앞다투어 저택을 지었다. 정부는 세무서를 설치해 상품을 등록하게 하고 세금을 징수했다. 턴 일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도시였다.
중세 프라하는 거기서 태어났다. 한적한 공터에서 이런 생각을 하다니! 나 혼자 뿌듯해했다. - P180

나는 얀 후스를 존경한다. 후스를 모른다고 해서 프라하 여행에 지장이 생기진 않지만 알면 프라하의 공간과 체코 사람들의 정서를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고등학생 시절 세계사 교과서에서 얀 후스(te is, 1572-1415)라는 종교개혁가‘의 이름을 처음 보았다. 그렇지만후스가 그저 종교개혁가로서 프라하의 광장에 서 있는 건 아니다. 후스의 동상은 보헤미아 민족주의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민중의 열망을 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았고 죽음 앞에서도 신념을 버리지 않았다. 그럴 의도가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의 삶과 죽음은 보헤미아와 유럽의 역사를 바꾸었다. - P181

베스트팔렌 조약은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했다. 루터파와 칼뱅파를 비롯한 개신교가 국제적 공인을 받았고 신성로마제국에 속했던국가들이 저마다 영토주권과 외교권을 확보했다. 독일의 패권이 무너져 프랑스가 알자스 지방을 차지했고, 스웨덴은 발트해 연안 지역을 획득했으며,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독립했다. 유럽에 국민국가의시대가 열린 것이다. 보헤미아 민족주의에 불을 질렀던 얀 후스의 사상은 공화국의 시대가 된 지금도 보헤미아 민중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 눈길 주는 이가 별로 없는 얀 후스의 동상 앞에서 나는 잠시 옷깃을 여미고 예를 갖추었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부패를 저질렀던 종교권력을 향해 날 선 비판을 퍼부었고 민중과 소통하려고 체코 말로 설교했던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광장을 사이에 두고 틴 성당을 마주 보는 옛 시청사 앞은 카렐교다음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었다. 14세기 중반 제한적 권한을 가진 시의회가 탄생했을 때 지었던 시청사는 여러 차례 확장 공사를 거쳐 지금의 복합 양식 건물이 되었다. 후스전쟁의 진원지였던 시청사자체는 르네상스 양식이지만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시계탑은 고딕 양식이다. 내부에는 예배당과 갤러리, 시계탑 올라가는 승강기가 있지만 여행자들은 대부분 밖에서 시계탑을 본다. 탑 전면에 있는 ‘천문시계‘ 때문이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 P185

보헤미안은 사회의 지배적인 규범과 관습을 추종하지 않았다. 스스로 옳고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열정을 표현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생계 불안과 사회적편견에 굴복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다. 1960년대 서구사회에 강력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던 히피(hippie)는 긴 머리카락과제멋대로 기른 수염, 미니스커트, 맨발, 샌들, 대마초 같은 것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냈다. 다음 세대인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hippie)는 고학력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면서 명품과 사치품을 과시적으로 소비했다. 디지털혁명 시대를 선도해 엄청난 부와 명성을 얻었지만 색 바랜 청바지와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녔던 이들은 보보스(bobos, Bourgeois Bohemians)라고 한다. 모두가 보헤미안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 P189

중세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독일 로텐부르크의 고문 박물관에멋모르고 들어갔다가 끔찍한 공포를 맛본 기억이 있어서 고문도구박물관은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성기구 박물관도 들어가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남녀가 둘씩이라 서로 민망할 것 같았다. 그 박물관들은히피, 여피, 보보스로 이어진 보헤미안의 문화 유전자가 프라하에서탄생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인간은 본성이 ‘속‘되기에 ‘성스러운 것만으로는 삶을 채우지 못한다. 그러나 ‘속‘된 욕망을 좇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게 또 사람이다. "성과 속둘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않으면 삶도 세상도 온전해질 수 없다. 나는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거룩함이라는 족쇄를 채우지 않았다." 프라하 구시가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프라하는 품이 너른 도시다. - P189

다리 건너면 카페에서 커피와 보드카를 마시며 해가 넘어갈 때를 구시가 쪽으로 다시 넘어왔다. 입장료를 내고 구시가 쪽 다리 초입의 교 옥상에 올랐다. 카렌교와 블타바강 건너편 왕궁과 구시가까지 낮과 밤의 풍경을 한꺼번에 사진에 담기 위해서였다. 프라하의6월은 낮이 길다. 오후 9시 해가 진 뒤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밝았다. 그런데 프라하성이 보이는 강쪽 옥상은 포신만 한 망원렌즈와카메라로 무장한 사람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아내는 중국 말을 하는 젊은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았다. 나는 조그만미러리스 카메라를 들고 사람이 없는 반대편으로 가서 구시가를 내려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어둠이 깔리자 도시 전체가 한순간에 얼굴을 바꾸었다. 틴 성당을 비롯한 구시가의 역사적 건축물과 블타바강 다리에 야간 조명이들어왔고 자동차와 노면전차가 전조등 불빛을 내쏘기 시작했다. 상가와 식당과 카페의 전등이 빛을 뿜었고 가로등도 일시에 눈을 떴다.
어디선가 사람들이 몰려나와 햇살이 사라진 광장과 거리를 메웠고그들이 내는 온갖 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을 타고 올랐다. 교탑 위에서내려다보니 도시 전체가 천천히 위로 떠올라 허공에 걸리는 것 같았다. 프라하는 거대한 야간개장 테마파크로 변신했다. 프라하의 랜드마크 1번은 틴 성당도 바츨라프 광장도 아니었다. 교탑 위에서 본, 해가 넘어간 직후의 프라하 그 자체였다. - P200

체코 사람들은 성 바츨라프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시·소설 · 영화 · 연극 · 노래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많다. 그가 죽은 지 1천 년이 된 1929년 9월 28일부터 체코슬로바키아공화국 정부가 개최한 축제를 보려고 75만 명의 시민들이 프라하에 몰려들었다. 지금도 해마다 그날에는 성당마다 대대적인 추모 미사를 연다. 카렐 4세가 실제적 국가 창설자라면 성 바츨라프는 정신적 국가 창설자이다. 생일이 확실치 않아서 사망한 날을 정신적인 국경일로 삼았다. 통치자로서 거론할 만한 업적도 없고 재위 기간도 짧았지만 도덕적 정치적 비난을 받을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게 중요하다.
게다가 보헤미아의 자존을 지키려고 외세에 대항하다가 사악한 동생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긴 세월 외세와 종교권력의 억압과 핍박을받으며 자존과 독립을 갈구했던 보헤미아 민중이 역사에서 그를 불러냈다. 영웅은 탄생하는 게 아니다. 민중이 찾아내고 만든다 - P209

‘프라하의 봄‘은 1956년 가을에 일어났던 헝가리 반소 민주주의혁명과 거의 같은 사건이었다. 1968년 봄 지식인들과 대학생들의 투쟁과 민중의 지지에 힘입어 체코슬로바키아공산당 서기장이 된 슬로바키아 태생의 반나치 전사 출신 두브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는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워 중앙집권적 관료주의적 경제체제를 자유화하고 복수정당제와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화 개혁을 추진했다. 소련 정부는 이러한 흐름이 동유럽 전체로 퍼져나가는 사태를 막으려고 1968년 8월 21일 군사개입을 감행했다. 동독과 루마니아를 제외한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등 바르샤바조약기구의 50만 병력이 탱크를 앞세우고 체코슬로바키아를 침락해 주요 도시를 점령했다. 체코 사람들은 헝가리 사람들과 달랐다.
그들은 프라하 시내에서 격렬한 전투를 한 적이 없다. 싸울 만하다싶으면 후스전쟁 때처럼 외곽에 나가서 싸웠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면 씩씩하게 항복했다.  - P210

내친김에 성 이르지 성당에도 잠깐 시간을 들였다. 체코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성당은 룩셈부르크 가문으로 왕권이 넘어간 14세기 초까지 보헤미아를 지배했던 프르셰미슬 왕가의 영묘였다. 920년에 신축한 최초의 건물은 화재 사고로 무너졌고 12세기에 재건축한 것이지금까지 존속하고 있다. 원래는 소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로마네스크 양식이었는데 룩셈부르크 가문이 왕권을 차지한 직후 고딕스타일로 증축했고 17세기에는 전면부를 화려한 바로크 스타일로 개조하고 얀 네포무츠키 예배당을 만들었다. 성 이르지 성당의 실내 공간은 곡선을 살린 로마네스크 양식이 남아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 P217

카프카는 문학과 예술에 마음이 끌렸지만 아버지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법학을 공부했다. 낮에는 보험회사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썼다. 몇몇 여인과 사귀었으나 누구와도 혼인하지 못했다. 독일인은유대인이라고 유대인은 시온주의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를 배척했다. 몇 작품을 출간했지만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고 책이 팔리지도않았다. 편두통·불면증 · 우울증을 달고 살다가 결핵에 걸렸고, 빈근교의 요양원에서 외롭게 죽었다. 몸은 프라하 유대인 묘지에 묻혔다. 한때 연인이었던 도라 디아만트에게 맡긴 원고와 편지는 나치 비밀경찰이 빼앗아 없애버렸다. 전기작가이자 절친이었던 막스 브로트가 카프카의 글을 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 P221

자신의 의도를 초지일관 밀고 갔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위대한 작품을 남겼으나 외로움과 고통으로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사람, 그 사람이 머물렀다는 것 말고는 아무 특별함도 없는 곳에서 지구 곳곳에서은 관광객들이 해맑게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다. 카프카가 옳았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만든 세상은 역설과 부조리로 가득하다. - P223

프라하는 아름다웠다. 왕궁과 교회, 거리와 강, 카페와 박물관, 모든 것이 아기자기하게 예뻤다. 그 무엇도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지만 - P239

프라하 자체는 대단했다. 프라하는 역사의 상처를 감추지 않았고, 그상처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도 않았다. 지난날의 상흔은 지난 일로정리하고 오늘은 오늘의 즐거움을 추구한다. 그렇게 하려고 성과 속의 공존을 허락한다. 프라하의 공기는 자유와 관용의 정신을 품고 있는 듯했다. ‘심하게 지나치지만 않다면 뭘 해도 괜찮아. 사람들이 프라하를 좋아하는 것은 이렇게 말하는 도시여서가 아닌가 싶었다. - P241

드레스덴, 부활의 기적을 이룬


드레스덴은 한국에 널리 알려진 도시가 아니었다. 2014년 3월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공대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이라는 강연을 했을 때 이름을 처음 들은 이가 많을 것이다. 그 선언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사람마다 달리 할 수 있겠으나 장소 선정만큼은 이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좋았다고 생각한다. 전쟁을 종식하고평화를 이루자는 호소를 하기에 드레스덴만큼 적절한 도시를 찾기는어렵기 때문이다.

드레스덴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던 날을 기억한다.
1995년 2월 13일이었다. 독일 유학 중이던 나는 그날 아침 신문에서
‘드레스덴 폭격‘ 관련 보도를 처음 보았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면에 실린 그리 크지도 않은 기사였다. 그 폭격의 표적이 독일군과 군사시설이 아니라 드레스덴이라는 도시 자체였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놀랐다. 연합국 공군은 전쟁 막바지에 인구 10만이 넘는 독일 도시의 군사시설과 철도역, 군수공장 등을 폭격했는데 조준이 빗나가 주택이나 교회 건물에 폭탄이 떨어진 일은 많았다.  - P247

 전쟁이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뒤에도 무너진 건물에서 시신이 나왔고 지하 방공호 한군데서 1천여 명의 시신을 찾은 일도 있었다. 체코 접경지 수데텐란트(Sudetenland, 보헤미아의 독일 국경 인접 지역)에서 쫓겨나 드레스덴에임시 거처를 마련했던 피난민들은 거주자 통계에 잡히지도 않았다.
당시 시신을 수습한 사망자만 3만5천 명이 넘었다. 독일이 ‘엘베의 피렌체‘라고 자랑했던 드레스덴에는 공장 몇 개 말고는 전쟁과 관계있는 시설이 없었는데도 연합국 공군은 엄청난 양의 폭탄을 투하했다.
드레스덴 폭격 50주년인데도 독일 정부는 희생자 추모 행사를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방송은 짤막한 뉴스만 내보냈다. 기사를 보여주며 물어보았더니 독일 친구가 나지막이 말했다.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내놓고 말하지 않는 사건이야. 우린 그보다 더 못된 짓을 훨씬많이 했거든. 홀로코스트만 있었던 게 아니야. 코번트리(Coventry) 같은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니었어. 혹시라도 그 사건 가지고 막 떠드는사람 만나면 조심해야 해. 올드나치거나 네오나치일지 모르니까." 코 - P248

번트리는 잉글랜드 내륙의 작은 도시다. 재규어를 비롯한 고급 승용차 공장이 있어서 전쟁 때 군수물자를 생산했다. 1940년 11월 14일밤 독일 공군이 코번트리를 폭격해 수천 명의 민간인을 살상했다. 코번트리 시민들은 그때 완전히 무너진 중세 성당을 그 상태로 보존하고 바로 옆에 새 성당을 지었다. 드레스덴은 ‘가해자의 몸에 남은 상흔‘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그 상흔을 남몰래 만질 뿐 드러내 보이지않으려 했다. - P249

1945년 2월의 참극을 모르면 오늘의 드레스덴이 왜 지금 같은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성모교회를 포함해 구시가의건축물과 광장과 공간은 모두 복원하거나 신축한 것이다. 복원과 신 - P249

축의 주체와 시기는 건물마다 다르지만 부서지고 불타 무너진 시점은 모두 같다. ‘바로크 도시‘ 드레스덴은 그때 영원히 사라졌다. 수많은 건축물을 복원했지만 예전의 도시로는 돌아가지 못한다. 그러나오늘의 드레스덴이 예전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드레스덴은 과거와는 다른 면에서 세상에 하나뿐인 도시가 되었다. 추하면서 아름답고 슬프지만 평화로운, 어딘가 크게 어긋나 있는데도 편안하고 정감있는 도시. 나는 그렇게 느꼈다. - P252

 길은 사람과 상품과정보와 문화를 옮기고 뒤섞는다. 길이 있어서 우리는 풍요로운 삶을살고 낯선 사람을 만나며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와 공감의 폭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그렇지만 오로지 좋은 것만 오간 길은 없었다. 길 위에는 삶만 있는 게 아니었다. 죽음도 함께 있었다. 인간은 길을 따라무기와 세균을 옮겼고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다.
엘베계곡의 길도 다르지 않았다. 절망과 희망, 야만과 환희가 교차했다. 수많은 독일 유대인들이 이 길을 따라 프라하로 피신했다. 나치 군대도 그 길을 따라 보헤미아에 들어가 그들을 학살했다. 전쟁막바지 수세에 빠진 독일군이 본토로 퇴각하자 체코 사람들은 3 백만명의 수데텐란트 독일인들을 강제 추방했다. 그들도 모든 것을 빼앗기고 화물열차에 실려 엘베계곡을 지났다. 1989년에는 특별열차가동베를린 체코대사관에 들어간 동독 시민들을 싣고 그 길을 달렸다.
길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길은 그저 거기 있었을 뿐, 모든 악은사람이 저질렀다. - P254

문화궁전의 외벽에는 사회주의체제의 유산임을 바로 알아볼 수있는 초대형 벽화가 있었다. 1969년 동독의 저명한 예술가들과 드레스덴 미술대학 학생들이 그린 벽화의 제목은 <1849-1969: 드레스덴혁명 세력의 진보와 사회주의를 향한 120년의 투쟁>인데,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만 할 수 있다"든가 "우리가 역사의 승자"
라는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암송하던 문장을 적어두었다. 사회주의집단창작 작품이라 특별한 감흥은 느끼지 못했지만, 내부 공간을 멋진 현대적 공연장으로 개조하면서도 그 벽화를 ‘역사를 증언하는 문화재‘로 지정 보호하는 드레스덴 시민들의 문화 역량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 P271

원래는 16세기에 만든 방어용 군사시설이었다. 그런데 19세기중반 내각 총리였던 브륄(Heinrich von Brühl, 1700-1763) 백작이 테라스를갤러리, 도서관, 궁전, 정원 등과 연결했다. 따라서 하부의 방어용 시설이 아무 쓸모가 없어졌고, 민간인의 출입을 막을 명분도 사라졌다.
나폴레옹전쟁 이후 시정부는 출입 통제를 폐지하고 테라스를 레저시설로 바꾸었다. 곳곳에 조각상을 세우고 출입구와 계단을 만드는 한편 작은 광장을 조성해 해가림 시설과 나무 의자를 설치했다. 군용시설에서 왕과 귀족 전용 테라스를 거쳐 시민공원으로, 브륄의 테라스는 유럽 역사의 궤적을 따라 진화했다.
저녁밥을 배불리 먹고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한적한 테라스를 느리게 걸었다. 구시가는 크지 않았고 조명도 소박했다. 강건너 신시가지도 마찬가지였다. 부다페스트나 프라하의 밤 풍경에 비하면 드레스덴의 야경은 야경이라 할 수도 없었다. 오래 비가 내리지 않아 엘베의 수면은 멀리 내려갔고 유람선들은 선착장에 묶여 있었다. 습도가 낮아서인지 밤바람이 서늘했다. 엘베를 따라 테라스를 걷는 밤 산책, 단 하루라도 드레스덴에 머문다면 놓치지 말아야 할 즐거움이 아닌가 싶었다. - P286

두 번째 밤을 지내고 드레스덴을 떠나왔다. 빈·부다페스트 프라하처럼 아름답거나 볼거리가 많지 않았는데도 드레스덴은 오래 마음에 남았다. 독일 변방의 작은 도시지만 문명사의 여러 시대와 그시대를 이끌었던 열망, 그 열망이 부른 참혹한 비극, 그 참극을 딛고이루어낸 성취를 품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보면드레스덴은 작지 않다. 어마어마하게 크다.
‘바로크 도시 드레스덴‘의 창조주는 ‘정력왕 아우구스트‘였다. 그는 유럽의 봉건 영주가 자신의 능력과 중세적 특권으로 무엇을 이룰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루터파 신교도들은 성모교회를 포함한 드레스덴의 역사적 구시가를 중세와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다. 성모교회는 종교적 신념과 열정이 삶의 동력이 되었던 시대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자유를 허락받았던 바이마르공화국 시대의 드레스덴은 문화예술을 꽃피웠지만 나치의 전체주의 폭력에 숨이 막혀 쓰러졌고연합군의 폭격에 생명이 끊어졌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폐허 위에 세운 공동주택과 문화궁전은 신념의 무모함과 열정의 허망함을 증언하고 있었다. 재통일을 이루어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의 수도가 된 드레스덴 시민들은 성모교회를 재건함으로써 부활의 서사를 완성했다.
성모교회의 부활은 인간의 두 얼굴과 인류의 두 미래에 관한 이 - P312

야기인지 모른다. 성모교회는 우리 모두가 저마다의 내면에 지킬과하이드를 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이기성 · 배타성·공격성 · 잔인함. 독선 · 맹목성에 사로잡혀 드레스덴을 죽였고 이타심 . 너그러움 · 동정심 · 관용의 정신을 회복해 되살렸다. 성모교회의부활은 루터파 기독교인들끼리 이루어낸 종교적 사건이 아니다. 드레스덴을 폭격했던 미국과 영국의 시민들, 기업, 참전군인의 가족들,
희생자의 후손과 이웃, 세계의 시민들이 자유와 다양성과 관용의 정신이 깃든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투사해 이룬 문명사적 사건이다. 나는 부활한 성모교회에서 촛불을 올리고 기도하는 사람들을보면서 그들의 소원이 실현되기를 기도했다.
성모교회는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을 믿지마. 너희는 완전한 진리를 알 수 없어. 너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관용뿐이야. 나와 다른 사람, 나와 다른 생각, 나와 다른 삶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이지. 그러면 모두가 자유로워질 거야.‘
다시 가면 또 촛불하나 켜고 기도하고 싶다. 인간의 부족 본능이 과학과 손잡고 저질렀던 야만의 상처가 다 아물기를 관용의 정신이 더욱 널리 퍼져 인간은 더 자유롭고 세상은 더 평화로워지기를!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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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사 박물관이 더러 오아시스를 만날 수 있는 광활한 사막이었다면 제체시온은 풀과 나무가 제 성정대로 자란 오솔길 같았다. 예술사 박물관에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공간이었지만, 어느 작품도다른 것과 같지 않아서 그런지 내가 느낀 감정은 훨씬 더 풍성했다.
예술사 박물관에서 수백 년 동안 빈을 지배했던 낡은 문화를 보았고,
제체시온에서는 19세기 후반 등장한 새로운 예술과 사상을 만났다.
왕가의 수집품은 대부분 작품을 발주한 사람의 요구와 취향에 맞추어 제작하거나 매입한 예술품이다. 반면 제체시온의 전시품은 예술가들이 자신의 내적 지향과 감정을 표현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군주정과 공화정, 중세의 귀족과 신흥 시민계급, 정치적 종교적인습과 자유로운 예술정신, 세기말 빈에서는 이런 것들이 뒤섞이면서 충돌했다. 만약 빈에서 단 하나의 미술관에만 갈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제체시온을 선택할 것이다. 그곳에서 만난 작품들은 크든 작든 창조자인 예술가의 상상력과 철학과 개성을 보여주었고 내 마음에 저마다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 P53

시대 전시실의 실내장식 · 가구 · 공예품 · 그림을 보면서 그것을만든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지나간다. 반동의 시간도 예외가 아니다. 좌절감이 옅어지고,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분노가 쌓이고, 대중의 이성이 눈 뜨고, 보통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가 번지면, 어느 날 갑자기 역사의 물결이 밀려와진보의 모든 배를 한꺼번에 띄워 올린다. 그런 때가 오기까지 작고확실한 즐거움에 몸을 맡기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비더마이어 시대 전시실은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퇴행과 압제의어둠 속에도 빛이 완전히 꺼지는 법은 없다. 그렇게 믿으며 삶을 이어가면 새로운 시대를 볼 수 있다. 내가 거기서 본 것은 좌절과 도피가 아니었다. 질긴 희망과 포기하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응용예술 박물관은 꼼꼼하게 보려면 하루를 통째로 써도 부족할만큼 크고 전시품이 많았다. 건축가 호프만(Josef Hoffirmann)의 가구 설계도와 스케치를 보여주는 전시실은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취사도구와 식기 컵 · 의자 · 안경 등을 포함한 생필품, 통신장비와 운송기계를 비롯한 산업설비, 글자꼴과 책, 의상 • 보석 · 장신구 등 기호품 디자인이 어떤 아이디어를 통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보여주는 2층의디자인 공방(Design Labor)은 설렁설렁 보았는데도 시간이 무척 걸렸다.
내가 디자인 분야 종사자라면 응용예술 박물관 하나를 보기 위해서라도 빈에 올 것 같았다. - P59

시씨의 생애는 상실의 고통과 외로움으로 얼룩졌고 참혹한 비극으로 끝났다. 1889년 외동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루돌프가 자살했다.
교회를 싫어하고 계급제도를 경멸하는 등 제국의 황태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자유주의 성향을 보였고 정서적으로 매우 불안정했던 루돌프는 사냥터의 별장에서 나이 어린 애인과 함께 권총으로 목숨을끊음으로써 시씨에게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언드라시 백작도 세상을 떠났다. 시씨는 공식 활동에서 완전히 물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 독일 · 스위스·이탈리아 · 발칸반도 등유럽 각지를 여행하다가 스위스 제네바의 호수에서 이탈리아 출신아나키스트가 휘두른 칼에 찔려 목숨을 잃었다.

사람들은 비운의 주인공에게 끌리는 경향이 있다지만, 빈 사람들이 시씨를 사랑하는 것이 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운명에 의해 ‘권력형 셀럽‘이 되었지만 시씨는 ‘자기다운 삶‘을 추구했다. 그녀는 남 - P66

편이 황제여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혼인했다. 황후의 권력과 화려한궁정 생활에서 의미와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 남편이 다른 여인을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빈을 떠나 여행자의 삶을 영위했다. 아름다운 몸과 맑은 정신을 유지하려고 처절한 노력을 쏟았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려 했다. 운명을 거부하거나 극복하지는 않았으나 운명에 갇히지도 않았다. 운명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이 의미를 느끼는 인생을 살아나가려고 번민하고 도전했다. 그리고그런 끝에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비극적 죽음을 맞았다. 역사의 위인은 아니었으나 사랑할 만한 미덕을 지닌 황후였음에는 분명하다. 그러니 시씨의 사진과 초상화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는 빈의 상인들을욕하지 마시라. 그들은 시씨를 정말 사랑해서 그러는 것이다. - P67

쇤브룬 궁전(Schloss Schönbrunn)과 벨베데레 궁전은 호프부르크의
‘별책부록‘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셋을 묶어 보면 합스부르크제국 지배층의 존재 양식과 문화적 취향을 알 수 있다. 쇤브룬은 전철(U4)로손쉽게 갈 수 있지만 내부에 들어가려면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이나로마의 바티칸 박물관 못지않게 긴 줄을 서야 한다. 금요일을 포함한주말에는 입장하는 데만 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매표소 직원은 10시 전에 도착하면 바로 들어갈 수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 P67

라트하우스만을 올려다보며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1914년 6월28일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죽였다. 복수심에 사로잡힌 요제프 황제는 한 달 후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러자 슬라브족의 맹주를 자처한 러시아제국이 세르비아를 편들었고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손을 잡았다.
독일과 견원지간인 프랑스도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되었고 전쟁의 불길은 영국과 유럽 대륙 전체로 번져나갔다. 나중에는 오스만제국이오스트리아 진영에 가담했고 독립을 원한 중동의 아랍 민족이 영국을 지원했으며 일본과 미국까지 전쟁에 뛰어들거나 휘말렸다. 인류역사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글로벌전쟁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거대 제국들을 무너뜨렸다. 합스부르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의 폐허 위에 각각 오스트리아공화국과 터키공화국이라는 조그만 신생국이 탄생했고 러시아제국에서는 볼셰비키혁명이 일어나 최초의 사회주의체제가 들어섰으며 동유럽과 발칸반도, 중동 등에는 수많은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들이 우후죽순처럼 솟아났다. 러시아 동전을 녹여만든 라트하우스만의 껍데기는 그 모든 비극을 예고한 시대의 징후였는지도 모른다. - P85

훈데르트바서 박물관을 보니 훈데르트바서하우스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앞뒤를 바꾸어 보았다면 더 좋았을 뻔했다. 훈데르트바서는 자연의 곡선과 자연의 색을 존중했고 흙, 숯, 돌, 벽돌과 같은자연의 재료를 사용해 예술적 감정을 표현했다. 인간이 만든 직선의경계를 버리고 자연의 곡선에 녹아들도록 집을 지었으며 지붕에 숲을 만들고 발코니에 나무가 자라게 했다. 그가 만든 미래형 주택단지미니어처는 스머프의 움집과 비슷했다. 호모사피엔스 개체 수가 지금의 1/100 정도로 줄어든다면 그런 집을 짓고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숲 살리기 운동, 반핵 운동, 고래 보호 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식물을 이용한 정수 시스템을 개발하기도 했던 훈데르트바서는 2000년 2월 항해 중이던 배에서 세상을 떠났고 뉴질랜드에 만들어 두었던 ‘죽은 자들의 행복한 정원‘ 나무 아래 묻혔다.
훈데르트바서하우스와 박물관은 ‘뜻밖의 발견‘이었고, 시립예술회관 기획전시장에서 마틴 파(Martin Parr) 사진전을 본 것은 덤이었다.
카메라를 든 아내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마틴 파는 평범한사람들의 일상을 찍는다. 그리 멋지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의 사진들은 밑도 끝도 없는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인생이란 원래 이리도 뒤죽박죽인 것인가?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인가?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은 형태만 달라질 뿐 사라지지 않는 게 아닐까?  - P91

오래된 도시들은 저마다 역사의 상처를 지니고 있다. 아테네는의도와 무관하게 상흔이 드러나고 부다페스트는 일부러 드러내며 파리는 감추었지만 보인다. 그런데 빈에서는 그런 것을 찾으려고 해도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으로 치면 ‘사기 캐릭터‘였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수재인데 잘생겼고 키도 크다. 손꼽는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가족 기업을 넘겨받아 성공적으로 경영한다. 예술적 감각을 지닌 교양인에다 성격마저 원만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산다.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 빈은 그런 사람 같았다. 부러워하거나 시샘할 수는 있지만 흉보기는 어려웠다.
여행에도 ‘상대성원리‘가 적용되는 게 아닌가 싶다. 빈만큼 또는빈보다 더 대단한 도시에서 온 여행자라면 모든 게 좋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빈틈이라고는 보이지 않아서, 너무 완벽해서, 내게 편하지만은 않았다. 오스트리아는 한국보다 부유하고 빈은 지구 행성에서가장 호화로운 도시다. 건물도 거리도 사람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노점상이나 거리 음식은 아예 없었고, 치안도 완벽해서 소매치기 걱정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아무 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비가 내릴 때는 모두 실내에 머무는지 거 - P92

리가 텅 비었다. 우산을 들고 걷는 이조차 드물어서 우리도 준비한비옷을 꺼내지 않고 카페와 박물관에서 시간을 보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빈이라고 상처가 없는 건 아니다. 수많은 역사의 상흔을덮어버리는 데 완벽하게 성공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다. 합스부르크제국의 정치적 후진성은 시씨 황후의 아름다움과 바로크 궁전의 화려함으로 가렸다. 독일과 합병해 자의 반 타의 반 인류에 대한 범죄를 저질러 놓고서도 나치 잔재 청산 작업은 하지 않은 채 영세중립국으로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유엔 사무총장을 연임한 쿠르트 발트하임은 나치 돌격대 가입과 독일군 중위 복무 사실이 드러나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지만 무난히 대통령에 뽑혔다. 독일은 모든 도시모든 장소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되새기는 공간과 시설을 만들어두었지만 빈에서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볼 수 없다. 그라벤의삼위일체상도 페스트의 참극을 모르는 여행자에게는 그저 멋지게 금박을 두른 종교적 조형물일 따름이다. - P93

내겐 너무 완벽한 도시였지만 조그만 빈틈도 없는 건 아니었다.
해 질 무렵에 본 바그너 기차역 (Wagner Stadtbahn-Pavillons)은 내가 본 유일한 빈틈이었다. 그래, 완벽하게 잘나 보이는 사람도 쓸쓸한 얼굴을할 때가 있지. 빈의 운하 · 철도역 ·터널·교량 건설 사업을 주도했고미술아카데미 건축과 교수로서 분리파에 참여했던 오토 바그너 (OttoWagner, 1841-1918) 가 1899 년에 지은 카를스플라츠(Karlsplatz) 기차역은수명을 다해 카페와 전시장으로 쓰이고 있었다. 빈에서 본 모든 역사적 건축물 중에서 낡고 쓸쓸해 보인 것은 그곳뿐이었다. 나는 그 집이 마음에 들었다. 그런 표정이 하나라도 있어서, 완벽하게 잘나지 않은 면이 하나라도 있어서, 빈에 정을 붙일 수 있었다. 기차가 중앙역을 벗어났는데도 빈과 작별하는 것 같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려고 잠시 떠나는 기분이었다. 나만 이런 느낌을 안고 돌아온 건 아닐 것이다. - P95

부다페스트, 슬픈데도 명랑한


빈 중앙역에서 부다페스트 동역까지 기차로 세 시간이 채 걸리지않았다. 비행기보다 빠르고 간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의미가 깊은길이라서 일부러 기차를 탔다. 완만한 구릉이 이어지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세계사의 변곡점이었던 1989년을 생각했다. 그해 여름, 늘그랬던 것처럼 많은 동독 시민이 헝가리로 가족 휴가를 떠났다. 가을이 되자 동독의 공장과 학교와 병원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엔지니어 · 교수·교사·의사·간호사를 비롯한 전문직 종사자 수십만 명이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서독에 들어갔다.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유럽 사회주의국가의 내정에 간섭하지않겠다고 하자 헝가리 정부가 오스트리아 쪽 국경의 철조망을 걷어냈다. 친지 방문과 방송 교류를 통해 서독이 풍요롭고 자유로운 사회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동독 시민들은 열차와 자동차를 타거나걸어서 국경을 넘었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들의 입국을 허락했다.
동독 정부가 서독 여행 자유화 조처를 공식 발표하자 동베를린 시민 - P99

100유럽 노시 기행 2들은 서베를린으로 가는 브란덴부르크 문에 몰려들었고 경비부대의지휘관은 발포 금지 명령을 내렸다. 반세기 동안 서베를린을 차단했던 장벽이 무너졌고 분단의 형벌을 받았던 패전국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다. 우리는 그때 동독 시민들이 갔던 길을 거슬러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했다. 이스탄불의 포구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올랐다. ‘길위에 삶이 있다.‘ - P100

며칠 동안 비가 내린 탓인지 도시를 가로지르는 도나우강은 거센탁류였다. ‘다뉴브강의 잔물결‘도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도 존재하지않았다. 다뉴브(Danube), 도나우(Donau), 두너(Duna)는 모두 같은 강을가리키는 영어 독일어 · 헝가리어 이름이다. ‘푸르고 잔잔한 도나우의 물결‘이라는 나의 관념은 아마도 음악 때문에 생긴 것이었으리라.
19세기 루마니아 작곡가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다뉴브강의 잔물결‘ - P100

슈트라우스 2세의 왈츠곡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같은 것이다. 특히 이바노비치의 곡은 1926년 현해탄에 몸을 던진 조선 최초 소프라노 윤심덕의 <사의 찬미> 원곡이어서 한국에 널리 알려졌다.
도나우강은 알프스 남쪽 경계를 타고 동쪽으로 흐르면서 빈을 지난 다음 부다페스트 근처에서 직각으로 몸을 틀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헝가리를 벗어날 때 다시 동으로 전향해 카르파티아산맥과 발칸산맥 사이의 협곡을 따라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등 발칸반도 북부를 가로지른 후 루마니아 남부 평원과 우크라이나 저지대를 거쳐 흑해에 들어간다. 숱한 지류를 끌어안으며 알프스의 발원지에서 흑해까지 3천 킬로미터를 달리는 도나우의 품에서 빈, 부다페스트, 베오그라드 등 크고 작은 도시들이 자라났다. 1990년대에 라인강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어 이제 도나우 물길은 흑해에서 북해까지 통하게 되었다. 하류의 도나우는 잔물결이 흐르는 푸른 강이지만 빈과 부다페스트 구간의 도나우 상류는 그렇지 않다. 탁류가 빠르게 흐르는위험한 강이다 - P101

헝가리왕국은 슬라브족의 바다에 뜬 머저르족의 배였다. 이슈트반이 헝가리왕국을 세웠을 때 게르만족은 로마 가톨릭, 슬라브족은콘스탄티노플에 본부를 둔 그리스정교회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역사·언어·문화 등 모든 면에서 딴판인 머저르족이 종교마저 다른 상태로 살았다면 더 혹독한 시련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역사의시간 속에서 민족이 흩어지고 사라져 버렸을 수도 있다. 이슈트반은국가의 통치자로서 민족의 문화적 고립을 완화하는 방책으로 로마가톨릭을 받아들인 게 아니었을까? 만약 그랬다면 1천여 년이 지나부다페스트의 바실리카에 자신의 이름이 붙여지는 것을 보면서, 자신이 그렸던 큰 그림이 맞아떨어졌다며 어깨를 으쓱할지도 모를 일이다. - P108

부다페스트의 화려함은 헝가리 사람들이 지니고 있었던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역사의 상처를 감쪽같이 지워버린 빈과달리 부다페스트는 그 모든 것을 내놓고 보여줌으로써 여행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을 증언하는 초대형 기억 공간을조성한 베를린 말고는 부다페스트만큼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을적극 홍보하는 도시를 찾아보기 어렵다. 부다페스트에서 반드시 그런 것을 챙겨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알면 부다페스트가 더 정겹게 안겨 오는 느낌이 들 것이다. - P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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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으로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 나지막하게 보이지만 멀리는 아파트가 우뚝우뚝하고, 한쪽으로는 잡목이 우거진 산이 가깝게도 멀게도 중첩되는 풍경 속에 앉아서 ‘내겐 너무 완벽한 빈‘ 을 읽는다.
너무 달라서 닮아있는 풍경이라 그런지 아주 머나먼 곳을 떠도는 기분이다.


서문

오래된 도시에남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서


《유럽도시기행》 1권을 내고 제법 긴 시간이 지났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으로 해외여행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라서 2권 출간을두 해 넘게 늦추었다. 이번에는 빈 부다페스트 프라하 · 드레스덴이야기를 담았다. 다음에는 서쪽 이베리아반도의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리스본 포르투를 탐사하려고 한다.
2권의 중심은 빈이다. 문화 예술에 한정할 경우빈은 파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수준이 높고 가진 것이 많다. 오랜 세월 합스부르크제국의 수도였고, 19세기 후반 짧은 기간에 낡은 중세 도시에서 벗어나 유럽의 첫손 꼽는 문화 예술 도시로 도약했으며, ‘비엔나커
‘피‘에서 모차르트의 음악까지 다양한 매력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특히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여행자는 빈을 빠뜨리지 않는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는 합스부르크제국의 영향권에 있었던 만큼 정치·경제·문화 · 역사 등 모든 면에서 빈과 깊이 얽혀 있다. 하지만 도시 공간의 구조와 문화적 분위기는 크게 다르다. 빈이 지체높은 귀족이라면 부다페스트는 모진 고생을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간직한 평민 같았고 프라하는 걱정 없이 살아가는 ‘명랑소년‘을 보는

듯했다. 온몸이 부서지는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겨우 깨어나 재활 중인 중년 남자라고 해도 될 드레스덴은 프라하에 갈 때들르기 좋은 도시여서 2권에 넣었다.
1권 표지에는 네 도시의 대표 건물을 내세웠다. 유럽의 역사를바꾸었던 그 도시들에는 문명사의 한 시대를 증언하는 집이 있었다.
하지만 2권의 도시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그보다는 도시의 역사에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각인한 사람의 모습이 더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을 표지에 넣었다. 빈은 시씨 황후, 부다페스트는 언드라시 백작, 프라하는 종교개혁가 얀 후스다. 드레스덴은 딱히 내세울 대표 인물을 정하기 어려워서 랜드마크 1번에 해당하는 성모교회를 선택했다. 그 사람들의 삶과 성취, 성모교회의 죽음과 부활은 내마음에 파르테논 콜로세움 · 아야소피아 에펠탑 못지않은 여운을남겼다.

1권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를 꼼꼼히 살폈다. 나는 도시의 건축물 · 박물관·미술관 ·길·광장·공원을 ‘텍스트(text)‘로 간주하고 그것을 해석하는 데 필요한 ‘콘텍스트(context)‘를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도시는 콘텍스트를 아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주며, 그 말을 알아듣는 여행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깊고 풍부한 감정을 느낄 수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소화하기 어렵다거나 거기 사는사람들의 일상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고 하는 독자가 적지 않았다.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지적이다. 그렇지만 무엇을 크게 바꿀수는 없었다. 평범한 한국인 단기여행자와 같은 방식으로 다니고, 그런 여행자에게 유익한 정보를 추려 제공할 목적으로 《유럽도시기행》

시리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욕심이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콘텍스트‘를 이야기하려면 ‘텍스트‘를 먼저 제시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한 도시의 왕궁 · 성당.교회 · 박물관 · 거리 · 광장은 복잡하게 얽힌 입체여서 글로 보여주기 어렵다. 그 도시들을 가본 적이 있는 독자가 더적극적이고 우호적인 평을 남긴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텍스트‘를보지 않은 사람은 ‘콘텍스트‘의 가치를 알기 어렵다. 사진을 많이 실으면 도움이 될 수 있겠지만 무한정 실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번거롭더라도 도시의 사진이나 동영상을 검색해 가면서 읽기를 독자들에게 권할 수밖에 없다. 해보면 의외로 재미가 있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독자들과 공유하면 좋겠다고 판단한 정보를추려서 책을 썼다. 그 정보가 객관적으로 중요한 것이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그 도시들의 여러 공간에서 누구나 같은 감정을 느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인생이 그렇듯 여행도 정답은 없다. 저마다 자신이원하는 방식으로 해나가면 그만이다. 이미 밝혔듯, 이번에도 내가 독자들에게 기대하는 평가는 하나뿐이다. "흠, 이 도시에 이런 게 있단말이지. 나름 재미있군."
코로나19 사태의 끝자락에서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

2022년 7월유시민

빈은, 책으로 말하자면, 유명한 인문학 고전과 비슷하다. 명성 높은 인문학 고전은 모르면 교양인이 아닌 것 같아서 읽는 경우가 많다. 대단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다. 다 읽어도 내용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하지 못한다. 내게는 플라톤 · 공자 · 단테· 괴테 등의 책이 다 그랬다. 빈에 발을 들여놓았을때 내 심정은 그런 책들을 펴들었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빈은 명성만큼 대단해 보였다. 도심의 모든 공간이 영화 속 같았다. 건물은 하나같이 크고 멋졌으며 거리는 넓고 깨끗했다. 상가의 쇼윈도와 사람들의 옷차림에 부티가 흘렀다. 카페와 레스토랑은 실내장식이 화려했고 음식값도 그만큼 비쌌다. 바로크 스타일 건물에 들어선 공공 전시관과 세련미 넘치는 민간 갤러리에는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거장들의 그림과 조각이 넘쳐났고, 오페라하우스와 음악협회 공연장 등에서는 유럽 최고 수준의 악단이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비롯한 대가의 작품을 공연했다.  - P15

 그런데 빈에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만 그런가 해서 그게 더 불편했다. 그런데 빈을 버리고 떠난 황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황후도 버거워했던 곳이라잖아!‘
인문학의 ‘위대한 고전‘을 읽을 때는 서문부터 끝까지 차근차근읽어야 한다. 멋대로 건너뛰거나 앞뒤를 바꿔 읽으면 더 힘들다. 빈여행도 그랬다. 무엇부터 봐야 할지, 어디에서 출발해 어떤 곳을 거쳐 어느 지점에서 하루 일정을 끝내야 좋을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내키는 대로 다니라든가, 길을 잃어야 여행의 진짜 재미를 알 수 있다든가 하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단기여행자가 선택할 수 있는 탐사경로는 하나뿐이었다. 링을 따라 걸으면서 안팎을 살핀 다음 버스나트램을 타고 외곽의 명소를 방문하는 것이다. 숙소가 어디든, 링의 어느 지점에서 출발하든, 그건 상관이 없다. - P16

높은 곳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온 힘을 다해 산꼭대기에 오른다. 몸 고생 없이 눈 호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케이블카와 승강기는 대답한다. 와이낫? 성당의 남탑 슈테플에도 그게 있다. 340개 넘는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된다. 슈테플 전망대는 파리 에펠탑 전망대처럼 도시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시내뿐 아니라 공항 관제탑처럼 보이는 외곽의 쓰레기소각장, 멀리북동쪽 강 건너편의 도나우 전망대, 남동쪽 변두리의 벨베데레 궁전도 훤히 보였다. 비너발트(Wienerwald, 빈 숲)가 넓게 펼쳐진 서쪽 외곽의 구릉지대 말고는 사방이 다 평지여서 그리 감탄할만한 경치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뜻밖의 배움을 얻었다. 대성벽을 왜 쌓았고 왜 헐었는지 알 수 있었다. - P22

링은 워낙 넓은 길이라 슈테플 전망대에서 보아야 그 모양과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링을 따라 가상의 성벽을 세우고 바깥쪽의 건물들을 지우자 중세 도시 빈이 보였다. 그 큰 제국의 수도가 그토록작았다니 믿기지 않았다. 서울 남산 전망대에서 본 한양도성이 떠올랐다. 숭례문-서대문-인왕산-북악산을 돌아 낙산-동대문을 거쳐 남산으로 다시 이어지는 한양도성의 길이는 18.6 킬로미터다. 그것이 조선의 수도 한양의 크기였다. 링은 북쪽 도나우 운하 구간까지 다 합쳐도 5.4 킬로미터에 지나지 않는다.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힌 제국 - P26

의 수도라면 그렇게 작을 수 없었을 것이다. 높고 두꺼웠던 빈의 대성벽은 합스부르크의 권력자들을 지배했던 두려움을 드러낸 건축물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런 감정을 이겨냈기에 그 성벽을 길로 바꾸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 P27

대성벽이 없었다면 빈은 일찍이 이슬람 세계에 편입되었을지 모른다. 1453년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오스만제국 군대는 여세를 몰아 헝가리와 체코 일대를 장악한 다음 1529년 빈을 포위했다. 빈 다음 차례는 독일과 프랑스였다. 유럽 기독교 세계는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러나 빈은 오스만제국 군대의 포위 공격을 견뎌냈다. 성벽을 더 튼튼하게 쌓아 1683년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포위 공격도 물리쳤다. 알프스의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철수한 적군의 요새에서 청동 대포를 3백 개 넘게 노획한 빈 사람들은 그것을녹여 18톤짜리 종을 만들었다. 그게 빈의 대표 볼거리 가운데 하나인품메린(Pummerin)이다. 슈테플 하단에 매달아 두었던 품메린이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러시아군의 폭격에 맞아 크게 부서지자 오스트리아정부는 전쟁이 끝난 후 무게가 4톤이나 늘어난 두 번째 품메린을 만들어 슈테판성당의 북탑인 ‘독수리탑‘에 걸었다. - P27

온몸을 적셔 준 ‘비엔나커피‘의 달콤함이 물 밑으로 가라앉는 듯한 우울함을 덜어주었다. ‘이성은 고상할지 몰라도 사람의 내면을 항구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해 매 순간 더 강하게 인간을 끌어당기는 것은 감각인지도 몰라. 어때? 그런 것 같지 않아? ‘비엔나커피‘는 내게그렇게 말했다. 잠깐, 오해를 피하려면 ‘비엔나커피‘라고 따옴표를 한이유를 말해야겠다.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없었다. 딱 한군데, 부다페스트행 기차를 기다렸던 중앙역 로비의 비스트로에 ‘비엔나커피‘
라고 써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건 ‘비엔나커피‘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길다방 커피‘에 생크림을 올린, 다시는 맛보고 싶지 않은 정체불명 음료였다. - P32

성벽과 길처럼 대조적인 쌍이 달리 또 있을까성벽은 안과 밖을 차단하지만, 도로는 모든 것을 뒤섞는다. 대성벽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길을 내자 빈과 외부세계의 관계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강력하고 새로운 무기 때문에 군사적 가치를 상실한 성벽이 도시의 확장과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판단했다. 외성벽 바깥쪽에 민간 가옥이 제멋대로 들어섰고 대성벽과 외성벽의 사이 공간역시 마찬가지 상태였다. 합스부르크제국이 전통적으로 유대인을 너그럽게 품어준 탓에 북쪽의 도나우 운하 좌안에는 거대한 유대인지구가 형성되어 있었다. 성벽 안팎의 인구가 50만 명에 육박했지만, 성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링을 한 바퀴 돌면서 유럽 역사의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건축양식을 거의 다 만났다. 건축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면 빈을 지나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슈테판 성당과 호프부르크의 구왕궁, 쇤브룬과 벨베데레 궁전은 중세의 유산이다. 그 밖의 이름난 건축물들, 예컨대 빈대학교 본관, 오페라하우스, 호프부르크 신왕궁, 예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국회의사당, 시청사, 응용예술 박물관, 증권거래소, 제체시온 등은 대부분 대성벽 해체 후 짧은 기간에 지어졌다. 모두링 주변에 있고 건축양식은 제각각이다. 그래서 빈의 건축양식을 ‘비엔나 스타일‘ 또는 ‘링 양식‘이라고 한다. 뭐라 특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잡다한건축양식의 집합이라 다른 이름을 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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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도시 기행 2권을 읽으려는데 1권의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무려 3년이나 되었으니 당연하지 않은가. 한 번 읽은 책을 기억한다는 말은 전설 속의 백만 년 전의 얘기다. 1권의 내용을 몰라도 전혀 상관없는 여행기인데도 굳이 1권을 읽었다. 처음 읽는 것과 다름없다라고 쓰면서 어쩐지 쓸쓸하다.






아테네 플라카지구, 로마의 포로로마노, 이스탄불 골든혼, 파리라탱지구, 빈의 제체시온, 부다페스트 언드라시 거리, 이르쿠츠크 데카브리스트의 집, 이런 곳에 가고 싶었다. 다른 대륙에도 관심이 없지는않았지만, 스무 살 무렵부터 내 마음을 설레게 만든 곳은 주로 유럽의 도시들이었다. 그곳 사람들이 훌륭한 사회를 만들어 좋은 삶을 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떻게 더 자유롭고 너그럽고 풍요로운 사회를 만들 수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다가소설보다 더 극적인 역사의 사건들을 만났고, 그 주인공들이 살고 죽은 도시의 공간을 알게 되었다. 삶의 환희와 슬픔, 인간의 숭고함과비천함, 열정의 아름다움과 욕망의 맹목성을 깨닫게 해주었던 사람과 사건의 이야기를 그곳에 가서 들어보고 싶었다. - P5

아테네

비행기 표를 예약했을 때는 이런 정보와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다녔는데, 정작 아테네에 발을 딛자 그 무엇도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아테네 여행자들이 무턱대고 아크로폴리스부터 찾는것은 이런 불안감을 얼른 해소하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괜찮은 동네에 있는 역사 전문 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크지 않아서 비교적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고, 주변의 특색 있는카페와 ‘가성비‘ 좋은 식당들에서 자잘한 즐거움을 맛볼 수도 있다.
사람들이 이 도시에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대 유적을 보기 위해서인데, 고대 유적은 대부분 신타그마 광장에서 아크로폴리스 가는 쪽에 몰려 있다. 여기를 ‘과거의 공간‘이라고 하자. 그 반대쪽 오모니아 광장 방면의 도심과 외곽은 시민들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현재의 공간‘이다. 중간지대라고 할 수 있을 신타그마 광장 부근과 플라카지구는 과거와 현재가 뒤엉긴 ‘혼합 공간‘이다.  - P20

이틀 정도면 아테네의 역사 공간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그래서더 길게 머무르는 여행자들은 미노타우루스의 미로를 품고 있는 크레타섬, 포세이돈 신전의 기둥만 남은 수니온곶, 신탁(神託)의 전설이떠도는 델피 신전 같은 곳으로 당일치기 소풍을 간다. 아테네 관광청은 온오프라인으로 다채로운 당일치기 여행 정보를 제공하고, 한국여행사들은 아테네를 베이스캠프로 삼아 기차를 타고 북쪽 내륙 메테오라의 수도원들을 방문하거나, 흰색 담벼락과 푸른색 지붕으로유명한 산토리니섬으로 날아가 와인 투어와 생선 요리를 즐기는 일정을 권한다. 메테오라와 산토리니는 가볼 만한 곳이긴 했지만, 아테네 여행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는 않겠다. - P21

첫날 아침 신타그마 광장에서 ‘해피트레인‘을 타고 아크로폴리스를 본 다음 아고라를 거쳐 플라카지구로 내려와 점심을 먹었다. 광장모퉁이에서 출발하는 ‘해피트레인‘은 조그만 전기자동차에 폭이 좁고 지붕이 없는 나무 객차를 여러 개 단 꼬마열차인데, 주요 관광지마다 정류장이 있었고 플라카의 좁은 골목길을 누비는 재미가 쏠쏠했다. 오후에는 큰길을 다니는 ‘홉온홉오프 시티투어 버스를 이용해 아크로폴리스 박물관과 국립 고고학 박물관, 국립 아테네공과대학교를 보았다. 정류장이 해피트레인보다 많고 더 먼 곳까지 갈 뿐만아니라 2층은 지붕이 없어서 거리가 잘 보였다. - P21

한국인 여행자야 말할 것도 없다. 경제 발전을 이루고 해외여행의 자유를 얻은 1990년대 이후 한국인은 세계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무리 지어 또는 홀로 탐사하는 중이다. 2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사피엔스는 7만년 전쯤 처음으로 아프리카를 벗어났다는데, 우리의 조상들은 몇만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유라시아대륙을 걸어서횡단했거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의 후손인 한국인에게는 ‘역마살 유전자‘가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토록 미친 듯이 지구 표면의 모든 이름난 도시를 쏘다니겠는가. - P22

고대 그리스 건축물의 핵심은 돌기둥이 아닐까 싶다. 길이, 모양,재질이 무척 다양한데 특히 주두(기둥의 윗부분)의 스타일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주두를 매끈하게 다듬기만 하거나, 부드럽게 부풀려문양을 음각하거나, 꽃잎 모양의 장식이 밖으로 나오게 깎은 돌기둥들을 감상하는 것은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는 승용차의 차종을 알아맞히는 놀이만큼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돌기둥의 다양성을 감상하기에 최적인 공간은 그리스가아니라 터키에 있다. 돌기둥 수백 개가 천장을 받치고 있는 ‘지하궁전‘인데, 자세한 이야기는 이스탄불 편에서 하겠다.
아크로폴리스에서 ‘내 마음의 돌기둥‘을 만났다. 에레크테이온신전의 ‘카리아티드(고대 그리스 신전 건축에서 여신상으로 만든 돌기둥)‘였다. - P28

옷자락을 부드럽게 늘어뜨리고 다리 하나를 살짝 구부린 채 현관 지붕을 이고 선 6개의 여인상은 얼굴이 훼손되어 표정을 알 수 없고 팔꿈치 아래가 떨어져 나갔지만 서로 다른 옷과 머리 모양과 뒤태가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카리아티드가 ‘카리아의 여인‘이라는 해석이 있다. 아테네군은페르시아와 손잡았던 카리아로 쳐들어가 남자는 모두 죽이고 여자를노예로 만들었는데, 그걸로도 부족해서 카리아의 여인들에게 에레크테이온의 지붕을 이고 서 있도록 벌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다. 남자들 대신 징벌을 받는 여인들을뭐 하러 그렇게 멋진 형상으로 빚는단 말인가. 카리아티드의 모델이누구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돌기둥을 여인의 형상으로 조각한 창의적 발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유럽 도시에서는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썼기 때문에 돌기둥이 전혀필요하지 않은 현대식 건물에도 카리아티드를 연상시키는 여인상을부조해 놓은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 P30

그리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와 비슷해서 유럽에서는 가난한 편에 속한다. 게다가 정부가 국내총생산의 두 배에 육박한 대규모 국가 채무의 존재를 회계 분식으로 장기간 숨겨온 사실이 밝혀진2009년에 국가 부도 위기를 맞은 뒤로 실업률이 20%를 넘나드는 등심각한 후유증을 앓았다. 해운업자를 비롯해 부자가 많지만 세금을제대로 걷지 못해 정부는 만성적 재정적자에 허덕인다.
그런데도 아테네 사람들은 돈을 벌려고 아둥바둥 애쓰는 기색이없었다. 모두가 ‘조르바‘처럼 극단적으로 느긋하게 살지는 않겠지만악착같이 무언가를 해보려는 분위기를 감지할 수 없었다. 한국 같으면 누군가 틀림없이 플라카 초입에 튜닉과 가죽 샌들 대여점을 냈을것이다. 서울 서촌이나 전주 한옥마을, 경주 대릉원의 한복 대여점처럼, 그리고 시 정부는 아마도 외국어를 능숙하게 하는 ‘소크라테스복장‘의 문화해설사를 투입해 지나가는 관광객을 붙들고 "좋은 구두를구하려면 어떻게 하슈?" 따위의 질문을 던지게 했을 것이다. 분명 대박이 날 것 같은데, 플라카에는 그런 낌새조차 없었다. - P40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통념을 흔드는 질문을 던졌다. 아테네 시민들에게 자유란 ‘폴리스의 자유‘ 또는 ‘집단의 자유‘였다. 자신들이 페르시아나 다른 도시국가에 지배당하거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 인권, 평등 같은 개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같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도노예제와 성차별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폴리스의 영광이 아니라 개인의 삶에 천착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에서 도덕법을 끌어내려했다. 출신 배경이 어떠하든 만인이 똑같이 자유를 누릴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남자 시민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인격적 이념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대의 인기 극작가아리스토파네스는 <구름>이라는 연극에서 소크라테스를 가리켜 ‘교활한 개자식‘이라고 비난했다. - P71

플라카의 골목을 걸으며 생각해보았다. 아테네 시민들은 왜 소크라테스를 죽였나? 고정관념, 광신, 시기심, 무지, 무관심, 변덕이 그를죽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의 어떤 지식인은 국회의원을 차라리 추첨으로 뽑자고 주장한다. 국회의 무능과 부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는충분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나는 이 주장에 공감하지 못한다.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반드시 중우정치로 흐른다면서 덕과 진리를 아는
‘철학자의 통치‘를 옹호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이 각자 훌륭해지지 않고, 훌륭한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훌륭해지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소크라테스를 죽인 아테네 시민들보다 얼마나 더 훌륭하며 국가와 정치에 대해서 얼마나 더 큰 관심을 가지고얼마나 더 능동적으로 참여하는가? 나는 직접민주주의가 다수의 폭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비관론에 한표를 던지고 싶다. - P73

아테네는 한 국가의 수도이고 3천 년 역사를 품고 있지만 화려하지도고풍스럽지도 않았다. 냉정하게 말하면, 초라해 보였다. 오래된 역사도시는 역사 유적이 시민의 생활 공간과 분리된 경우가 많은데, 그둘이 아테네처럼 분명하게 나뉜 도시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로마와 이스탄불도 어느 정도는 그런 모습이었지만 아테네만큼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없는 인간 본연의 한계 때문이다.
세상에는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되는 일이 많다. 학자들은 ‘경로 의존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런 현상을 설명한다. 우연히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못한다는 것이다. - P74

여러 차례의 영토 빼앗기 전쟁과 주민들의 대규모 상호 이주 사태를 겪었던 만큼, 그리스와 터키는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사이가 좋지 않다. 하지만 오스만제국 시대에 400 년 동안 섞여 살았던 만큼 음식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다. 어떤 것이 어느 쪽에서 먼저생겨서 다른 쪽으로 전파되었는지 밝혀내기도 어렵다.
술도 그랬다. 그리스 국민 술로 통하는 ‘우‘는 이스탄불에서 포도주 찌꺼기로 만든 재탕 와인을 증류해서 만들었지만 그리스에서는곡물 주정으로 제조한다. 40도짜리여서 얼음을 타서 먹는 경우가 많은데 물이 섞이면 뿌옇게 변한다. 숙성할 때 향신료로 쓰는 미나리과풀 ‘아니스‘의 어떤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식욕을 돋운다고 식전에마시는데, 뭐라고 꼭 집어낼 수는 없지만 거북한 냄새가 나서 다시 - P84

마지막 밤, 불 밝힌 파르테논과 리카비토스 언덕 꼭대기가 보이는 식당에서 아테네를 생각했다. 철학과 과학과 민주주의가 탄생한고대 도시, 1천500년 망각의 세월을 건너 국민국가 그리스의 수도로부활한 아테네는 비록 기운이 떨어지고 색은 바랬지만 내면의 기품을 지니고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었던 어제의 미소년이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은 끝에 주름진 얼굴을 가진 철학자가 되었다고 할까.
그 철학자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큰소리로 말하지 않고 오래된 양복에 가려진 기품을 알아볼 책임을 온전히 여행자에게 맡겨두고 있었다.
비행기가 아테네 공항 활주로를 이륙할 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못 볼지 몰라. 하지만 ‘야수(Teld Gou, 잘 있어!‘는 내키지않아. 왠지 모르게 또 보게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거든. 그러니 높고도 쓸쓸한 도시여, ‘따레메 (Ta A&E, 또 봐)!‘ - P87

로마,
뜻밖의 발견을허락하는 도시


피렌체, 베네치아, 밀라노, 나폴리를 비롯해 이탈리아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도시가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로마를 온전히 대신할 만한도시는 없다.
로마는 무엇이 특별한가? 우선 예술적 기술적 수준이 높고 규모가 큰 고대 유적이 유럽의 어떤 도시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많다. 둘째, 세상에 하나뿐인 바티칸 교황청 덕분에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걸출한 건축물과 예술품을 품고 있다. 셋째, 19세기 후반 출현한 이탈리아 국가 수립의 역사를 들여다볼 기회를 제공한다.
서구 문명은 도시국가 아테네에서 ‘빅뱅‘을 일으켰고 로마제국에서 ‘가속 팽창‘을 했다. 로마는 서구 문명의 가속 팽창 흔적을 지닌 도시답게, 고대부터 현대까지 문명의 발전 양상을 압축해 보여준다. 단한 번 여행으로 로마의 모든 것을 보겠다는 욕심은 처음부터 갖지 않았다. 며칠 동안 부지런히 발품을 팔았지만, 도시의 윤곽을 어렴풋이나마 가늠해보면서 반드시 가보고 싶었던 공간 및 군데를 밟아본 게 - P93

고작이었다. 그렇지만 로마도 하나의 도시일 뿐이다. 로마에 가서 이탈리아를 보았다고 생각한다면 아주 큰 착각이다. 이탈리아는 엄청난 다양성을 지닌 나라여서 어떤 도시도 혼자서는 이탈리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알프스에서 지중해 한가운데로 장화처럼 뻗어 나온 이탈리아반도는 면적의 75%가 비탈진 산과 언덕이다. 한반도의 백두대간처럼 이탈리아반도에는 아펜니노산맥이라는 등뼈가 있으며, 한반도의 1.5배인 30만 제곱킬로미터의 국토에 6천만 명이 산다.
프랑스, 스위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북부 지방과 로마를 포함한 중부 지방, 3면을 지중해가 둘러싸고 있는 남부 지방, 사르데냐와시칠리아를 비롯한 섬들은 기후와 지형, 역사, 산업, 언어,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서로 다르다. 국민 대다수가 가톨릭 신도이며 이탈리아 말을 한다는 것 말고는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 P94

어떤 순서로 무엇을 보아야 할지, 로마 여행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오직 로마에만 있는 것은 되도록 빠뜨리지 않으려고 애썼다. 가령콜로세오를 비롯한 고대 유적과 가톨릭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이다.
도시 전체에 널린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건물과 광장, 미술관, 박물관, 기념관들은 마음이 끌리는 곳을 골라서 다녔다. 어차피 다 볼 수없고, 비슷한 것은 다른 도시에도 많으니까.
고대 유적 구경은 콜로세오에서 시작했다. 아테네의 슈퍼스타가파르테논이라면 로마의 슈퍼스타는 콜로세오다. 지중해의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릴 만큼 푸르렀지만, 지하철 B선 콜로세오역 근처를 바삐오가는 직장인과 학생들은 아무도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내게는 여행지였지만 그들에게는 숨 가쁜 하루를 여는 생활의 터전이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어 되도록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 P100

공화정 시대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원로원 건물은 그리 화려하지않은 외관을 어느 정도 간직하고 있었지만, 카이사르가 최후를 맞았던 앞마당은 완전한 폐허였다.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에는 그를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 거의 없다.
그나마 그가 잠시라도 머물렀을 원로원 건물이 보이기에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카이사르는 B.C.1세기 중반 아주 잠깐 최고 권력자로등극했을 뿐 황제가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로마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제국의 황제 또는 강대한 국가의 절대 권력자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되었다. 캐사르, 카이저, 시저, 차르 등은 표기법과 발음이 다르지만 모두 카이사르에서 나온 말이다. - P116

공화파는 암살에 성공했지만 카이사르를 지지했던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감당하지는 못했다. 내전으로 치달았던 로마의 정세는 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내전을 평정하고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됨으로써 안정을 찾았다. 공화정을 공식 폐지한 아우구스투스황제는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할 목적으로 카이사르를 신격화했고,
후임 황제는 아우구스투스를 신격화했다. 로마 황제들은 ‘카이사르‘
라는 칭호를 대물림하면서 청년 카이사르의 조각상을 도시 곳곳에세웠는데, 이 전통은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할때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 P122

폐허가 된 원로원 마당에서 절충하기 어려운 것들이 공존했던 인간 카이사르의 생애를 돌아보았다. 그는 귀족이었지만 평민파에 가담했다. 어떤 술수도 마다하지 않고 권력 투쟁을 벌였지만 이긴 후에는 정적을 너그럽게 포용했다. 군사쿠데타로 집권해 공화정을 사실상 폐지했지만 민중의 소망과 요구를 존중했다. 원로원의 부패 기득권 세력을 무너뜨리고 시민의 권리를 확장했으며 빈민과 해방 노예,
속주의 민중을 돕는 개혁 조처를 밀어붙였다. 보기 드문 정치적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 P122

‘절반 뚜벅이‘로 로마 구경을 했다. 숙소에서 출발점으로 가고 종료지점에서 숙소로 돌아올 때, 그리고 다음 행선지가 멀리 있을 때만대중교통을 이용하고 나머지는 걸어서 다녔다는 뜻이다.
카피톨리노 언덕 앞 베네치아 광장 근처 골목의 식당에서 가벼운점심을 먹은 다음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에서 캄피돌리오 광장, 판테온, 트레비 분수, 스페인 광장을 거쳐 포폴로 광장까지 도심의 북쪽지역을 탐사하려면 계속 걸을 수밖에 없었다. 고달프긴 했지만 저녁밥이 잘 넘어갔고 밤에 잠도 쉬이 들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로마에 있지만 이탈리아 전체를 대표하는 시설이다. 전면에 있는 기마상의 주인공은 이탈리아 통일을 이끈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이고, 기마상 양편에 부조한 사람들은건국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무명용사들이다. 에마누엘레 2세뿐만 아니라 가리발디, 카보우르, 마치니 등 이탈리아 통일 주역들의 유품도전시하는 이 기념관은 현대사와 관련한 기획전을 꾸준하게 연다. 이탈리아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여행자라면 시간을 넉넉하게 들일 만했다. - P128

가리발디의 영웅담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1862년에는 4만 군사를 끌고 오스트리아제국 군대를 제압해 베네치아를 탈환했으며1867년에는 교황청을 가장 악독한 비밀결사체라고 비난하면서 로마로 진군했다. 로마를 이탈리아왕국의 수도로 선언하고서도 실제로는사르데냐왕국의 토리노에 머물렀던 에마누엘레 2세는 프랑스 군대가프로이센과 싸우기 위해 떠나자 지체 없이 로마를 점령해 통일운동의 마침표를 찍었다.
가리발디는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라 확신에 찬 휴머니스트이자 투철한 공화주의자였다. 노예제 폐지에 대한 신념이 불확실하다며 링컨 미국 대통령의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는 소문이 나돌았을 정도로 강력한 신념의 소유자였던 그는 모든 국민에게 선거권을부여하는 정치 개혁을 추진하고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철폐하는 입법을 시도했다.
한 국가와 국민을 위해 가리발디만큼 많은 일을 한 사례는 흔치않다. 역사 공부를 하려고 로마에 가는 건 아니겠지만, 이탈리아 건국역사를 대충이라도 알면 로마 여행의 맛이 더 깊고 풍성해질 수 있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은 그런 기회를 제공한다. - P132

바티칸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곳이다. 로마에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교황이 다스리는 별도의 도시국가인데, 이 특이한 국가의 영토는겨우 0.44 제곱킬로미터이고, 1천 명이 겨우 넘는 시민권자의 직업은성직자, 직원, 근위병이 전부다. 바티칸이라는 지명은 가톨릭 교황청보다 먼저 생겼다. 현재 바티칸의 영토는 바티칸 언덕에서 베드로 광장까지다. 이 구역은 9세기 중반 교황 레오 4세가 사라센족의 공격을막으려고 강둑을 따라 성벽을 쌓아 올리면서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이탈리아왕국은 1871년 교황청의 주권을 전면 부정하고 바티칸을 로마에 통합했지만, 1929년 무솔리니가 라테라노에서 조약을 체결해현재의 바티칸 지역을 교황청의 영토로 인정했다. - P142

나 같은 중년의 관광객은 박물관과 대성당 구경을 마치기도 전에당이 떨어져 허덕이게 된다. ‘화해의 길‘ 이면도로의 식당에 들어가점심을 대충 해결하고 테베레강을 내려다보는 산탄젤로성에 올랐다.
산탄젤로성은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가족묘로 쓰기 위해 지었지만 외부 침략이나 내전이 터졌을 때는 비상 대피소로 썼다. 이 성은 강이한눈에 들어오는 군사적 요충이고 성벽도 높아서 방어하기에 좋았을듯했다. 내부의 예배당은 제법 화려했지만, 시스티나 예배당을 보고온 터라 별 느낌이 없었다.
산탄젤로성의 매력 포인트는 꼭대기에 있는 비스트로였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서,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고 온 것을 크게 후회했다.
음식 맛이 좋지 않아도 괜찮을 비스트로였다. 무엇이든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고성(古城) 레스토랑 분위기가 났기 때문이다. 다른 손님이받은 음식의 비주얼을 보니 맛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속으로 다짐했다. ‘로마에 다시 온다면 한 번쯤은 여기서 점심을 먹어야지.‘ - P150

로마 여행 셋째 날은 대형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는 기분으로 아침부터 해 저물 때까지 정처없이 성당과 광장, 궁전을 찾아다녔다. 로마는 확실히 여러 얼굴을 가진 도시였다. 아무렇게나 다녀도 거리의 향기를 맡고 공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일 먼저 간 곳은 테르미니역 광장 바로 앞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성당이었다. 고대 디오클레티아누스 목욕장에 붙여 지은 이 성당에는 2천 년 전 로마의 돈 많은 자유민이 만든 것을 되살린 내부 정원이 있었다. 연결된 건물을 로마 국립 박물관으로 쓰고 있었는데, 통유리 벽을 통해 고대의 목욕탕 내부를 볼 수 있었다. 훔쳐보는 게 아닌데도 묘한 긴장감이 들었다. - P156

로마는 전성기를 다 보내고 은퇴한 사업가를 닮았다. 대단히 현명하거나 학식 있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뛰어난 수완으로 돈과 명성을 얻었고, 나름 인생의 맛과 멋도 알았던 그는 빛바랜 명품 정장을입고 다닌다. 누구 앞에서는 비굴하게 행동하지 않으며 돈지갑이 얄해도 기죽지 않는다. 인생은 덧없이 짧으며 모든 것이 부질없음을알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때 거두었던 세속적 성공에 대한 긍지를 버리지는 않는다. 로마는 그런 도시인 것 같았다.
"어때? 종종 만나서 놀면 괜찮지 않겠어?" 로마가 물었다. 테르미니역 승강장에서 공항 가는 기차에 오르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래,
가끔 만나는 건 뭐, 나쁠 것 없겠지. 다음에 보자. 바쁜 일 좀 끝나면.
차오(Ciao, 안녕!" - P165

이스탄불, 단색에 가려진 무지개


지하궁전의 돌기둥은 실로 다양했다. 사각기둥, 원기둥, 통으로깎은 기둥 등, 모양도 두께도 다 제각각이었다. 어떤 것은 주두가 아예없었고 어떤 것은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두 장식이 있었다. 저수조 맨 안쪽의 메두사도 재활용한 석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왜 메두사를 그런 식으로 놓았을까? 저수조 기둥은 길이가 모두같아야 한다. 너무 긴 기둥은 잘라 맞추었겠고 너무 짧은 것은 적당한 돌덩이를 괴었을 것이다. 마침 괴물 형상을 그려놓은 돌덩이 2개가 있었는데, 기둥을 받치기에 적당하게 놓다 보니 하나는 거꾸로, 다른 하나는 옆으로 놓게 되었다. 기둥을 안정시킬 수만 있다면 메두사가 바로 서든 뒤집어지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 일을 한 현장감독은 그것이 구름 관중을 불러 모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것이다. 이것이 메두사가 거꾸로 앉게 된 경위에 대한 나의 별 근거없는 추정이다. 그렇지만 제법 그럴듯하지 않은가. - P190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서로 다른 민족, 종교, 문화가 뒤섞이면 갈등이 무력 충돌로 비화할 위험이 커진다. 1990년대에 유고연방이 해체된 직후 세르비아계 군인들이 보스니아의 무슬림 1만여 명을 학살한 ‘인종 청소‘ 사건을 기억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오스만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두 차례나 빈을 포위 공격했다가실패하고 물러났는데, 만약 그들이 빈을 함락시키고 서쪽으로 더 진격했다면 서유럽 전체가 발칸반도처럼 되었을지 모른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세상사를 보는 관점도 달라지는 법. 1453년5월 29일 아침 벌어졌던 사건을 가리켜 유럽 기독교인들은 ‘콘스탄티노플 함락‘이라 했고, 세계의 무슬림들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이라했다. 둘 다 일리가 있다.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했고, 콘스탄티노플은 그에게 함락되었으니까.
메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이스탄불로 바꾸었지만, 도시가사라지거나 몰락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스만제국은 투르크족만의국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종과 민족, 상이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하는제국이 되었고 이스탄불은 그런 제국의 수도다운 도시로 발전했다.
이스탄불에는 투르크인, 그리스인, 이탈리아인, 터키인, 아르메니아인, 조지아인, 쿠르드인이 섞여 살았고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했다. - P200

폴란드 여인 록셀라나였다. 열여덟 살에 전쟁포로로 이스탄불에잡혀 왔던 록셀라나는 노예로 팔렸다가 하렘에 들어가 술레이만 1세의 아내가 되었는데, 여섯 아이를 낳았고 외교 분야에서 중요한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한다.
여성을 제도적으로 차별해 온 이슬람 세계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술탄이 한 여인만 사랑했다고 하니 애틋한 마음이 들었다. 한 여인을진심으로 위하지 못하는 자, 어찌 만백성의 보호자가 될 수 있으랴.
술레이만 1세는 전쟁을 많이 한 술탄이었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것이라고, 쉴레마니예 자미가 보일 때마다 생각하곤 했다. - P203

이스탄불이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터키 사람 가이드 M을 고용했다. 그런데 M은 탁심 광장 근처 뒷골목 어디에 있다는 ‘파묵 하우스‘
를 끝내 보여주지 않았다. 어떤 날은 휴관일이라 했고, 다른 날은 동선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성실하게 우리를 안내했던 M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을 보니 그곳에 고객을 데려가지 말라는 당국의 지시가 있었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이스탄불은 모든 것이 낡고, 한적하고 텅 빈, 흑백의 단조로운도시로 바뀌었으며 거리에서 그리스어, 아르메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히브리어가 사라졌다." 파묵은 자서전에 이렇게 쓴대가를 치르는 것 같았다.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변한 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오스만제국이 해체되어 제국의 수도 지위를 잃은 것, 둘째는 터키인이 아닌 주민들이 도시를 떠난 것이다. - P204

무스타파 케말은 단순한 군사 영웅이 아니었다. 우리의 역사 인물과 비교하자면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 김대중 대통령 등을 모두 뒤섞어 놓은 듯한 사람이었다. 전쟁 영웅, 민족주의 혁명가, 대통령, 계몽 군주, 공화주의자인 동시에 독재자였다.
그는 이슬람 문화와 터키 민족주의에 자신의 철학과 정치사상을 접목함으로써 터키공화국을 ‘창조‘했다.
이스탄불 여행자들은 다른 이슬람 국가에는 없는 것을 본다. 시민 대부분이 무슬림이지만 수많은 자미들 사이에 유대교 회당과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과 개신교회가 끼여 있다. 여성들은 적어도 법적으로는 차별받지 않으며, 머릿수건을 쓰지 않고도 사회생활을 한다. 거리에서 매를 때리는 형벌이 없으며, 하루 다섯 번 해야 하는 예배를 빠뜨려도 처벌하지 않는다. 이정표와 상점 간판의 글자는 알파벳이다. 이 모두를 무스타파 케말이 만들었다 - P210

성을 쓰도록 강제하는 법률을 만들 때 자신은 ‘아타튀르크(Atatürk,투르크인의 아버지)‘라는 성을 만들어 썼다. 무스타파케말은 이때부터아타튀르크가 되었다. 이런 성을 감히 선택한 동기가 애국심인지 자신감인지는 알 수 없다. 둘 다였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일을 한 사람이 했다는 게 믿어지는가? 아타튀르크는 인류 문명사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모순적인 인물이다.
탁월한 군사 지도자인 동시에 만만치 않은 내공을 가진 지식인이었으며, 공화주의자였지만 강력한 독재를 했다. 쿠르드족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주모자들을 냉혹하게 처형했으며, 질서유지를명분으로 야당을 해산하기도 했다.
직책은 공화국의 대통령이었지만 행동은 군주에 가까웠으며,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도 터키공화국을 서구에 접근시켰다. 평생 엄청나게 술을 마셨고 극도로 불규칙하게 생활했던 그가 1938년 11월 10일 아침 심장병으로 사망하자 터키 정부는 시신을 앙카라 민족학 박 - P211

물관에 안치하고 ‘터키공화국의 영원한 지도자‘로 선포했다.
아타튀르크의 신념과 인격은 헌법과 제도, 국민들의 마음에 각인되었고 오랫동안 터키공화국을 지배했다. 그러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카리스마를 휘둘렀던 지도자가 사라진 세상이 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터키공화국은 1950년 선거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아타튀르크에게 세속국가의 원리를 수호하는 것을 사명으로 받았던 군부가 여러 차례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이슬람 근본주의 정치세력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자신을 ‘21세기의 아타튀르크‘라고 생각한 듯했지만, 2019년 3월 뉴질랜드에서 이슬람 사원이 테러를 당해 무슬림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사건이 터졌을 때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다시 자미로 바꾸겠다고 한그의 행태를 아타튀르크가 보았다면 아마도 크게 화를 냈을 것이다.
아타튀르크의 정치철학은 ‘세속국가론‘과 ‘공화주의‘, 그리고 ‘터키민족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아타튀르크는 터키를 ‘터키‘ 했다.
다문화, 다종교, 다민족을 포용했던 이스탄불이 단색의 도시로 바뀐것은 ‘터키화‘의 불가피한 결과였다. 19세기 유럽의 어떤 지식인이
100년 후 ‘세계의 수도‘가 되리라고 예언했던 이스탄불은 변방의 가난하고 슬픈 도시로 변해갔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그 누군가는 아타튀르크일 수밖에 없다. - P212

 그러나 1955년 불어닥친 민족주의 광풍은 그들마저 다 몰아내 버렸다. 아르메니아계를 비롯한 다른 소수민족 주민들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그 사태 이후 이스탄불 거리에 들리는 언어는 터키말하나만 남았다. 오르한 파묵은 자전에세이 《이스탄불: 도시와 기억》에서 그때 목격한 일을 가슴 저린 어조로 회상했다.

"그들은 예전에 어머니와 함께 가곤 했던 베이올루의 상점과 이스탄불 일부를 불태우고 파괴하고 약탈했다. 술탄 메메트 2세가 이스탄불을 정복한 후 군인들이 벌였던 약탈만큼이나 무자비했다. 이틀동안 도시에 공포를 퍼뜨리고 이스탄불을 기독교인과 서양인들이생각하는 최악의 오리엔탈 악몽보다 더 지옥 같은 곳으로 만든 약탈자들을 부추기기 위해, 정부지원 조직들이 그들에게 ‘마음대로약탈하라‘고 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 P213

그 터키식 커피 전문 카페의 옥호에는 무대 뒤의 빈 곳을 가리키는 터키말이 들어 있었는데, 굳이 번역하자면 ‘커피 대기실‘쯤 될 것이다. 잔에 가라앉은 커피 분말을 보며 터키공화국과 이스탄불의 관계를 생각해 보았다. ‘그래, 서울 지하철 역삼역 근처에 있는 문화원이름이 왜 터키문화원이 아니라 이스탄불문화원인지 알겠어.‘ 이스탄불은 확실히 터키공화국보다 큰 도시였다.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의 유산 가운데 터키 민족주의가 포용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터키식커피‘로 이름이 바뀐 ‘오스만식 커피‘ 잔 바닥의 분말처럼 가라앉고말았다. ‘자신의 궁전에 유배당한 왕‘을 보면 이런 느낌이 들까?  - P240

마지막 일정을 마친 밤, 잠들기전에 이스탄불에게 위로를 보냈다.
절망하진 마, 이스탄불, 물기를 머금은 잔 바닥의 커피 분말에서 오스만제국의 향기를 맡는 여행자도 있어. 다음에 오면 생강가루를섞은 커피를 청할게. 후미진 골목 구석에 조용히 엎드려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와 아르메니아정교 교회에도 들어가 보고, 파묵 하우스도가고 말 거야. 귀츨뤼 올(Güçlü ol, 힘내요), 이스탄불! - P241

파리, 인류 문명의 최전선


레알지구에 숙소를 마련한 덕에 편리하게 파리 심장부를 걸어 다녔다. 레알지구는 루브르와 시테섬, 퐁피두센터와 가까웠고 레알역에는메트로와 광역급행전철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근처에 가성비 좋은식당이 많았고 거리 분위기도 젊고 활기찼다.
파리는 문화자산이 너무나 많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자기만의 여행 경로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로마에서처럼 도시의 역사와 그 역사를 만든 인물들을 따라가는 데 첫 하루를 썼다.
시테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출발해 퐁네프다리-루브르 박물관-튈르리 정원-콩코르드 광장-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에펠탑-오르세 미술관-로댕 미술관을 거쳐 앵발리드까지. 스마트폰 기록으로는 열 시간 동안 13킬로미터를 걸었다. 이 코스는 로마로 치면 팔라티노 언덕 황궁 터에서 출발해 콜로세오와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보고 포로 로마노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을 거쳐 판테온까지 가는 것과 비슷하다. 파리의 역사, 종교,정치의 중심 공간을 관통하는 것이다. - P250

대혁명의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수도 파리, 센강의 생 미셸 다리에서 시들어버린 꽃묶음을 보며 생각했다. 민주주의는 어떤 제도의집합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과정이 아닐까? 완성할 수 없음을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려고 도전하는 몸부림이 아닐까? 때로는 망가지고 부서져 절망에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 말고는 이해계와 생각과 취향이 다른 사람들이 평화롭게 다투며 공존하는 다른방법을 찾을 수 없기에 포기하지 못하는 제도와 규칙과 관행, 민주주의란 그런 게 아닐까.
생미셸 다리의 꽃묶음은 프랑스 민주주의도 아직 완성형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 P256

예술 작품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은 루브르에서도 어김없이 작동한다. 끝도없이 나타나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예술작품을 보고 있자니 점차 그게 그것 아닌가 싶어졌다. 게다가 다빈치의 <모나리자>, 들라크루아의 <자유의 여신>, 앵그르의 <오달리스크>처럼 유명한 그림 앞에는 사람이 말 그대로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팔꿈치로 격렬한 전투를 치르면 가까이 갈수는 있지만, 남들도 팔꿈치를 세우기 때문에 차분하게 감상할 수는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뚝 떨어진 곳에서 까치발을 하고 다른 사람들머리 위로 보면,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오버투어리즘‘은 베네치아나 만리장성에서 생긴 현상이 아니다. 루브르에서는 수십 년 전에도 그랬다.
루브르는 한 번에 많은 것을 볼 수 있는 박물관이 아니다. 꼭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여도 두세 시간은 금방 간다. 정치권력의 위세와 예술의 향취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 따로따로보는 게 훨씬 나았다. 대혁명 이전 정치권력의 민낯은 루브르보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더 적나라하게 목격할 수 있었고, 대혁명 이후 프랑스 예술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었다. - P261

루브르에서 샹젤리제 거리로 가려면 카루젤 개선문을 지나게 된다.
여기서부터 튈르리 정원과 콩코르드 광장을 지나고 샹젤리제 거리를따라 에투알 개선문이 있는 샤를 드골 광장까지 걷는 동안 온몸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파리의 심장부인 이 공간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뀐 정치 제제의 교체가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명료하게 보여주었다.
카루젤 개선문은 나폴레옹이 1808년에 세웠는데, 선 곳이 카루젤 광장이라 그렇게 부른다. 개선문은 로마제국의 문화 아이콘이며,
다른 도시의 모든 개선문은 로마 개선문의 복제품이라 할 수 있다.
어디에 어떤 모양으로 서 있는 장군과 권력자의 과시욕을 드러낸다는 건 똑같다. - P262

베르사유 궁전의 왕과왕비,왕자, 공주들의 생애와 관련한 정보를 검색해보면 전염병이 매우 ‘공정‘ 해서 신분과 계급을 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페스트, 콜레라, 천연두, 홍역, 발진티푸스 등 전파가쉽고 치사율이 높은 전염병은 대부분 농업혁명으로 인간과 가축의접촉 빈도가 높아지면서 생겼다.
하지만 19세기 중반까지는 세균과 바이러스 등 미생물이 물이나 체액, 공기를 통해 인체에 들어와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다. 원인을 모르니 예방법과 치료제가 있을 수 없었다. 부르봉 왕가의권력자들 가운데 전염병으로 죽은 이가 그토록 많았으니 훨씬 더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았던 백성들은 얼마나 죽었을지 넉넉히 짐작할수 있을 것이다.
전염병은 지금도 ‘공정‘하다. 권력자 자신이 생명을 위협하는 그공포에서 벗어나려면 만인을 전염병에서 해방해야 한다. 19세기 후반 이후 문명국가들은 생물학, 병리학, 공공보건학, 도시계획학, 건축학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생산하는 전문가들의 능력을 모아 악성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지구촌에는전염병이 창궐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어디선가 전염병이 창궐한다는 뉴스가 들리면 그 지역의 국가조직 자체가 붕괴했거나, 아니면지극히 무능하거나, 사악하거나 또는 둘 모두인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볼 충분한 이유가 된다. - P287

베르사유 궁전을 보고 나온 어머니가 내게 물었다. "여기 살던 임금이 목 잘려 죽었다고?" "예." 한마디 덧붙이셨다. "그럴 만도 하네."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사치를 누린 왕의 목을 자른 것이 마땅한 처사였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 궁전의 왕족과 귀족들이 지극히 인간답지 않은, 자연스러움을 완전히 소거한, 생산적인 활동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했다는 것만큼은 더없이 분명하다.
궁전의 방마다 걸린 초상화에서 왕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아무런 생산적 활동도 하지 않고 산다는 걸 알아주기 바란다.
금실 은실로 수놓은 옷, 정교하게 꾸민왕관, 무거운 망토, 요즘에는‘킬힐‘이라고들 하는 뾰족구두, 보석을 박은 단장, 이런 차림으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운 차림새였다. 왕비들의 초상화가 말하는 것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헤어스타일마저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생활하기에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었다.
왕과 왕비의 침대도 그랬다. 잠을 자려고 그렇게 큰 방에 그처럼높고 큰 침대를 놓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는 침실에 딸린 작은 방의 편안하고 작은 침대에서 잤다. 왕의 침실에 놓인 것은 ‘기침 행사‘를위한 의전용 침대였다.  - P293

에펠탑은 세 가지 측면에서 파리가 지구촌의 문화수도가 될 자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첫째, 에펠탑은 과학혁명의 산물이다. 세계박람회장 관문을 만들기 위한 건축 공모를 할 때 프랑스 정부는 ‘기술적진보와 산업 발전을 상징할 기념물‘이라는 조건을 달았다. 에펠탑은금속 7천300톤을 포함해 전체 무게가 1만 톤이 넘으며, 자체 하중과바람의 압력을 거뜬하게 견뎌낸다. 발명왕 에디슨이 괜히 공학의 발전과 기술자들의 능력을 찬양하는 글을 방명록에 남긴 게 아니다. 프랑스의 과학자, 엔지니어, 수학자 72명의 이름을 탑에 새긴 것도 같은 - P300

맥락이다.
둘째, 에펠탑은 공화정이라는 프랑스 정치제도의 특징을 체현하고 있다. 왕이나 교황이 취향 따라 만든 게 아니라 공모 절차와 전문적 평가를 통해 디자인을 결정했으며 전문가와 비평가들이 아니라대중이 좋아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에펠탑은 민주주의 시대 도시의 주인은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이며, 시민이 선출한 정부가 합당한과정을 거쳐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정치제도가문명의 대세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계기는 1789년에 터진 프랑스대혁명이었다. 에펠탑은 이 혁명의 심장이었던 도시의 대표 건축물로손색이 없다.
셋째, 에펠탑은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대와 중세의 왕궁이나 교회와 달리 에펠탑은 개인이 디자인한 예술품이며 노예 노동이나 강제 노동 없이 축조했다. 디자인을 설계한 에펠은 물론이요 과학자, 수학자, 엔지니어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위험이 따르는 작업을 수행한 노동자들도 저마다의 권리를누리면서 일했고, 당국은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최대한의 안전 조처를 했다. 자본주의는 격차와 불평등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지만 적어도 공공연한 강제 노동이 없다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질서임이 분명하다. - P301

해가 기울어갈 시각, 에펠탑을 뒤로하고 마르스 광장 동쪽 모퉁이 방향에 있는 앵발리드로 향했다. 앵발리드는 루이 14세가 지은 군용병원 옆에 파리 경비사령부와 무기고가 들어오면서 형성된 군사시설이었다. 지금도 군사 박물관이 제일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대혁명 때 시민들은 이곳 무기고에서 총기를 대량 탈취한 다음, 소문과달리 정치범이 아니라 소수의 ‘잡범‘만 갇혀 있었던 시테섬 우안의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해 수비대의 늙은 병사 80여 명을 죽였다. 나폴레옹의 시신을 안치한 성당은 중간에 오르세 미술관과 로댕 미술관을들르느라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들어가지 못했다. 죽은 이의 무덤이야 못 본들 또 어떠리. - P302

하지만 평범한 파리 여행자가 어찌 <미슐랭 가이드>의 별을 받은레스토랑에 감히 발을 들여놓겠는가. 그런 식당에서 한 끼를 먹으려면 예약을 해야 하고, 와인을 포함하면 평소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돈을 내야 한다. 베르사유 궁전의 레스토랑에서 가볍게 먹었던 점심을 제외하고는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고급 레스토랑에 가지 않았지만 음식에 관해서는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파리에서 먹은 음식은다 다르면서 다 맛이 있었기 때문이다.
딱 하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프랑스 사람들이 ‘영혼의 수프‘
라고 한다는 양파수프였다. 버터에 볶은 양파를 고깃국물에 끓이고치즈 가루로 그라탱을 한 다음 월계수 잎을 띄우고 구운 바게트 한토막을 올려 주는데, 파리뿐만 아니라 칸에서도 너무 짜서 먹기 힘들었다.
다른 도시에서처럼 파리에서도 잘 먹어보려고 부지런히 발품을팔았다. 숙소가 있었던 레알지구에는 저렴한 식당이 밀집한 먹자골목이 넓게 포진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 인근 퐁피두센터에 갔다. 1960년대와 70년대에 총리와 대통령을 지낸 조르주 퐁피두의 이름을 붙인 이 센터는 1977년말 개장한 복합 문화시설이다.
시장과 영화관, 서점, 기념품점, 카페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주로젊은이들이 드나드는데, 화장실을 안내하는 발자국 모양의 화살표가마음에 들었다.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본 공공 디자인 중 최고였다. - P318

프랑스는 도버해협과 지중해 사이에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서울강남의 한정식과 전남 진도의 한정식이 다른 것처럼, 파리 음식이탈리아에 인접한 남프랑스 칸의 음식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칸 해변의 영화제가 열리는 극장 근처 해산물 전문점에 가면 바다의 향기가그대로 풍기는 생선회 요리가 나오고, 정통 프랑스 요리를 한다는 식당의 스테이크는 피렌체의 티본스테이크만큼 두껍고 육즙이 줄줄 흘렀다. 나는 파리에서 내가 간 식당 주방장이 만든 음식을 먹었을 뿐,프랑스 음식을 먹은 게 아니었다.
여행할 때는 몰랐는데, 글을 쓰면서 알았다. 보고 왔는데 또 보고싶거나, 이번엔 못 보았지만 다음엔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공간이 파리에 아주 많다는 것을 그렇지만 다시는 갈 수 없다고 상상해도, 아테네나 이스탄불과는 달리 그저 아쉬울 뿐 다른 감정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내가 아무 소식을 전하지 않아도 개의치 않고 자기 색깔대로 씩씩하게 잘 살아갈 친구인데 슬퍼할 게 무에 있겠는가. 그런생각이 들어서 그저 스치듯 가벼운 인사만 남기고 인류 문명의 최전선, 파리를 떠나왔다.
 ‘아비엥또(a bientôt, 또 봐)!‘ - P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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