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보는 것과 내가 말하는 것
내가 말하는 것과 내가 침묵하는 것
내가 침묵하는 것과 내가 꿈꾸는 것
내가 꿈꾸는 것과 내가 잊는 것, 
그 사이

옥타비오 파스, 시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이유는 백 가지쯤 되는데, 1번부터 100번까지가 모두 ‘눈‘이다. 눈에 대한 나의 마음이그렇게 온전하고 순전하다. 눈이 왜 좋냐면 희어서, 깨끗해서, 고요해서, 녹아서, 사라져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만난 횟수를 차곡차곡 세어가듯이, 나는 눈을 만난 날들을 센다. 첫눈, 두 번째 눈, 세번째 눈……… 열한 번째까지 셀 수 있었던 해는 못내 아름다웠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커튼은 닫혀 있고 누운 채로는 바깥이 보이지 않는데도, 내 주변으로 서름한 빛이느껴지는 날이 있다. 눈에 보이는 빛이 아니라서 아까꾸던 꿈이 이어지고 있는가 싶기도 하다.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그 환상의 빛을 가늠해보다가 문득 이런확신에 이른다. ‘뭔가 찾아온 거야!?
몸을 단번에 일으키고 커튼을 걷으면 아, 눈이 거기 있다. 창을 내내 올려 보다가 내 얼굴이 뜨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힘차게 흔드는 애인처럼.
눈을 그렇게 발견하는 날은, 사랑을 발견한 듯 벅차다.

숲 어귀에 닿을 때까지 인적은 없고, 세상은 점점더 창백해진다. 내 입술 안에서는 그와 나눴던 말들이고스란히 되풀이되지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다. 이제그 말들은 사람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보다 낮은 소리가 사는 곳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것을 잃었을 때, 사람의 마음은 가장 커진다. 너무 커서 거기에는 바다도 있고 벼랑도 있고 낮과밤이 동시에 있다. 어디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아무데도 아니라고 여기게 된다. 거대해서 오히려 하찮아진다. 

그런데 그 마음을 페소아는 다르게 바라봤다.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속에선 죽음이요이 세계의 슬픔이다.
이 모든 것들이, 죽기에,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이 온 우주보다 조금 더 크다."
페르난두 페소아, 「기차에서 내리며」, 「초콜릿 이상의 형이상학은 없어..
민음사(2018)

눈은 흰색이라기보다 흰빛이다. 그 빛에는 내가 사랑하는 얼굴이 실려 있을 것만 같다. 아무리 멀어도, 다른 세상에 있어도, 그날만은 찾아와 창밖에서 나를 부르겠다는 약속 같다. 그 보이지 않는 약속이 두고두고눈을 기다리게 한다.
내일은 눈이 녹을 것이다. 눈은 올 때는 소리가 없지만, 갈 때는 물소리를 얻는다.
그 소리에 나는 울음을 조금 보탤지도 모르겠다.
괜찮다. 내 마음은 온 우주보다 더 크고, 거기에는울음의 자리도 넉넉하다.

상대방의 얼굴을 유심히 보며 대화하는 편인데, 헤어져돌아오면 얼굴은 그새 감감해지고 그의 목소리만 귓전에 남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숨이 끊어지고도 끝까지남는 감각이 청각이라더니, 그래서일까 짐작해본다.
반대로 어떤 이의 목소리를 아무래도 떠올릴 수 없어서 괴로울 때도 있다. 전화를 걸거나 다시 만나면 해결될 마음이지만,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형편도 있으니까. 그럴 때 목소리에 대한 그리움은 얼굴에 비해 결코 사소하지 않다. 목소리는 눈동자와 입술과 손가락을다 가진, 사무치게 쓰다듬고 싶은 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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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실제로 철저히 했던 유일한 것은 철저히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



사진은 말하기보다는 불러일으키고, 설명하기보다는암시하는 능력 덕에 수많은 사진 중 한 장을 골라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사용하려는 역사학자나인류학자, 예술사가 들에게 매력적인 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그 사진이 본래 가지고 있던서사적 맥락이나, 사진을 만든 사람의 의도 또는원래의 관객들이 소비하던 방식과 관련이 있을 수도있고 없을 수도 있다.

- 마사샌드와이스Martha Sandweiss



『알레프』를 쓸 때 내가 겪은 가장 큰 문제는 월트휘트먼이 아주 성공적으로 해냈던 일, 즉 끝없이많은 것을 제한된 목록으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



보르헤스가 묘사한 "어떤 중국 백과사전"에서 영감을 받은 연구자가 내가 처음은 아니다. 이 기묘한 글에 의하면 "동물은다음과 같이 나뉜다. (a) 황제 소유의 동물, (b) 방부처리된 동물, (c) 훈련된 동물, (d) 젖먹이 새끼 돼지, (e) 인어, (f) 우화 속동물, (g) 떠돌이 개, (h) 이 분류에 속한 동물, (i) 미친듯이몸을 떠는 동물, (j)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은 동물, (k) 아주 가느다란 낙타의 털로 만든 붓으로 그린 동물, (1) 그 외의 동물,
(m) 방금 꽃병을 깨뜨린 동물, (n) 멀리서 보면 파리처럼 보이는 동물"
이 글에서 수행한 사진에 대한 연구가 비록 이 분류만큼철저하거나 기발하지는 못해도, 사진이 가진 무한히 다양한가능성을 어떻게든 순서대로 정리하려고 했던, 좋은 의도를지닌 앞선 시도들로부터 용기를 얻는다. 워커 에번스는 제임스 조이스나 헨리 제임스 같은 작가들이 어떤 식으로 "무의식적인 사진가"였는지가 "특별히 다루기 좋아하는 주제"라고했다. 월트 휘트먼에게 무의식적이라는 것은 없었다.  - P17

책을 쓰다 보니 전부는 아니더라도 주로 미국인의 사진또는 미국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 다루게 되었다. 그럴 의도는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특별한 사진가나 사진을 정해 놓지 않았다. 누구든 어떤 사진이든 상관없었다. 내가 들어본 적 없는 사진가와 본 적 없는 사진도 많았다. (나는 사진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다.) 어쩌다 관심을 가지지못한 중요한 작가들(예를 들면 어빙 펜)도 있었고 예전에 이미글을 썼거나 더 할 이야기가 없는 작가들(카르티에 브레송과로버트 카파)도 있었다. 더 길게 쓸 생각이었지만 짧게밖에 쓰지 못한 작가들(외젠 아제, 이제 예는 그만 들겠다)도 있고 처음엔 다룰 생각이 없었지만 꽤 많이 다루게 된 작가들도 있다. 마이클 오머로드 Michael Ormerod가 그중 한 명으로 이 책의 여러 주제가 그의 사진으로 결론을 맺는다. 이것은 전혀의도치 않은 행운이었다. 그는 미국의 사진에 대한 연구를 수행할 영국인으로 작가가 파견한 대리인이나 마찬가지다. - P27

내가 1980년대 후반 재즈에 대한 글을 쓸 때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 것이 그 글을 쓸 수 있는 전제 조건이라고 여겼던것처럼, 나는 사진에 대해서 쓰려면 사진을 찍지 않는 조건이선행되어야 한다는 예감을 가지고 있다. 그 당시에는 음악과그 음악을 만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호기심을 채워 줄 만한책이 거의 없었다. 사진은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사진의 개념혹은 스티글리츠의 표현대로 "개념 사진"에 대해서는 수전 손택이나 존 버거, 롤랑 바르트가 쓴 훌륭한 책들이 있다. 사진의 역사나 역사 속 다양한 장르와 흐름에 대해서도 책 분량의뛰어난 연구서가 많다. 큐레이터들이나 학자들이 특정 사진가에 대해 쓴 매우 수준 높은 책과 에세이도 수없이 많이 있다. 사진가들도 그들의 매체에 대해 굉장히 잘 설명했다. 덕분에 일이 훨씬 쉬워졌다. 기준이 워낙 높았기에 그 아래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이앤 아버스의 말대로 내가 ‘사물의 특성에 관한 어떤 미세한 부분만큼은 독점할 수 - P28

있기를 바란다.
도로시아 랭은 "카메라는 사람들에게 카메라 없이 보는법을 가르쳐 주는 도구"라고 말했다. 나는 사진가는 아니지만, 내가 만약 사진가였다면 찍었을 사진이 이제는 보인다. - P29

이 사진을 실제로 보기도 전부터 나는 어느 정도 이 사진을 알고 있었다. 열일곱 살 때 워즈워스의 서곡 7권에서 처음 그 사진을 어렴풋이 보았다. 워즈워스는 런던에서 있었던한 사건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 전 "북적이는 스트랜드가를가로질러 오던") 그는


벽 앞에 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겪었는지
설명하는 글이 적힌 종이를 가슴에 건채,
얼굴을 꽂꽂이 들고 있는 한 눈먼 남자의 모습에
마음을 뺏겼다.


워즈워스는 이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시인의 마음이 달려가는 동안, 그에게는


이 표시 안에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우리 자신과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남자의 모습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다.
나는 마치 또 다른 세상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것 - P32

처럼,
굳어 버린 그의 얼굴과 보이지 않는 두 눈을 바라보았다.


백 년 이상의 간극을 두고, 하나는 시에 하나는 사진에기록된 두 만남이 이만큼 일치하는 것은, 눈먼 남자가 곧 하나의 유형 또는 상징이라고 한 워즈워스의 말이 옳았음을 증명한다. ‘그‘가 ‘그녀‘로 바뀌고, 사진에 대한 설명이 길 뿐이다. 워즈워스는 ‘보이지 않는 두 눈‘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자세히 이야기하면서 스트랜드와 피사체 간의 관계를 예측하고 정확하게 설명하기까지 한다. - P33

워커 에번스는 1930년 브루클린에서 예술가 벤 샨을 만났다.
몇 년 뒤 에번스는 그에게 사진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봐봐, 벤, 별거 없어. 그늘에서는 조리개 값을 9로, 밝은 곳에서는 45로 맞추고 셔터는 20분의 1초에 놓고 흔들리지 않게 카메라를 들고 있으면 돼!" 그 후에 샨은 에번스를 따라 로이 스트라이커가 기획한 농업안정국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그 사 - P51

이에 둘은 로어이스트사이드를 어슬렁거리며 거리의 사람들을 촬영했다. 에번스의 전기를 쓴 벨린다래스본에 의하면 그들은 "라이카 위에 스트랜드가 20년 전 로어이스트사이드에서썼던 것과 비슷한) 잠만경을 달고 서로를 촬영하는 것처럼 꾸며 거리에서 일어나는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방해하지 않았다." 성격이나 작품 면에서 둘의 닮은 점이라고는 그게 전부다.
에번스는 신중하고 냉정하며 내성적이고 고상했던 반면 (다섯살 더 많은) 샨은 "예술가보다는 노동자처럼 보였고 에번스에따르면 지나치게 나서는 경향이 있었다. 이 경향은 1932년에서 1934년경 14번가에서 찍은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의 사진에고스란히 드러난다. [7] 건장하고 강인한 이 남자는 사진가의정치 성향을 대표하고 있다. 샨과 같은 좌파적 충성도를 가진사람이 보통 그렇듯 아코디언 연주자 역시 동정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생계를 꾸리고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기 위한 더 큰 투쟁에 더욱 고집스럽게 헌산하고 있다. - P52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는 아우구스트 잔더나 다른 사진가들의 사진에도 등장하지만 내가 특별히 이 피사체와 연결 짓게되는 사진가는 바로 앙드레 케르테스다. 조지 시르테시GeorgeKertész」에Szirtes가 쓴 시 「앙드레 케르테스를 위하여 For André I따르면,


아코디언 연주자는 눈먼 지식인이다.
그는 거대한 타자기를 가지고 다닌다.
악기가 긴 모자처럼 양옆으로 늘어나면서 자판에서날개가 자라지만,
병에 걸린 듯 쌕쌕거리는 소리를 내며 찌그러지고만다.


시르테시가 염두에 둔 사진은 헝가리 에스테르에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속 사람은 시각 장애인이 아니다. (그는 선글라스가 아니라 안경을 끼고 있다.) 아코디언은 우리에게 너무 확실한시각 장애인의 상징이어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사람의 실제상황은 보이지 않게 되는 듯하다  - P54

케르테스는 자신의 고통을 부풀리고 악화시켰지만, 돌아보면 그가 당한 모욕은 믿기 힘들 정도다. 그는 사진계의 거장 중 하나였지만 길거리 연주자처럼 최소한의 하찮은 인정과 그의 재능에 무관심하고 무지한 행인들이 컵에 떨궈 주는동전에 만족해야 했다. 그의 시선은 예리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따뜻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 이런 무시 때문에 그는 예전 헝가리에서의 더 행복했던 날들을 향수에 젖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감정은 예전에 찍은 사진들이 사라지면서 더욱 심해졌다. 케르테스는 한 여인에게 원본 필름이 가득 들어 있는가방을 맡기고 파리를 떠났었는데, 전쟁이 터지면서 그녀와필름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 필름들은 나중에 기적적으로 나타나, 1963년 프랑스국립도서관과 뉴욕 현대 미술관의 개인전을 통해 세계적인 찬사와 뒤늦은 명성을안겨 주며 그의 인생에 동화같은 결말을 선사했다. - P59

「유랑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나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The Blind Accordionist와 같은 예전사진들의 묘한 점은 돌아갈수 없는 고향에 대해 당연히 느끼는 목가적인 감정이 전부가아니라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고향에 살고있던 20대 케르테스의 시선이 처음부터 - 옛날이 옛날이 되기 전부터 - 앞으로다가올 상실을 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여섯 살에 카메라를 갖게 되자마자 카메라가 있었다면 찍었을 것이라고 머릿속에 그려온 대로, 카메라가 저평가되고 환영받지 못하고 제대로 사용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사진을찍었다. 그 사진들은 추억을 담은 사진이 되었지만, 처음에는그의 운명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예언으로 시작했다.  - P60

- 또는 오로지 - 오래전에 본 무언가를 다시 보게 된 것만은아니었을 것이다. 아니다. 시간은 별개의 두 사건을 포용하기위해) 늘어났다가 두 순간을 가깝게 하기 위해) 줄어들었다.
그러므로 1959년에 케르테스가 들은 선율이 1922년에 들었던 선율과 똑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망상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그들 - 사진가와 그의 대리인인 눈먼 아코디언 연주자- 은 무얼 하고 있었을까? 결론은 그동안이란 없다는 것이다.
그때에는 그 순간이 있었고 지금은 이 순간이 있을 뿐 그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코디언이 줄어들었다가 늘어날 뿐 선율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들판에 흩뿌려진 양귀비다.
우리는 피가 뿌려진 소박한 십자가다.
이 짧은 운율에 감춰진 감정을 주의해라.
지혜롭게 행동하라. 선한 마음을 가지라 - P61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아버스로 하여금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요소다. 1960년대 초반 그녀는 문도그Moondog라는 이름의 시각 장애인 거리 예술가에게 매료되었다. 1960년 마빈 이즈리얼에게 쓴 글에서 그녀는 "그는 자신
‘만의 바다를 가진 섬만큼 짙고 동떨어진 공기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독립적이고 연약하다. 그리고 세상은살아 움직이고 있을 때조차도 마치 기억 속에 있는 것처럼 그림자와 냄새, 소리로 인식된다."라고 표현했다. "문도그의 믿음은 우리와 다르다. 우리는 안 보이는 것을 믿고 그는 보이는것을 믿는다." 『알레프』에서 보르헤스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동시에 볼 수 있는 곳에 대해 이야기한다. 화자는 이곳을언뜻 본 후 눈물을 흘리는데, "사람들에 의해 이름을 빼앗겼지만 누구도 실제로 본 적은 없는 은밀한 가상의 대상인,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보았기 때문이다. 이런 광경을 글로 쓰는 것은 "절망감"을 수반한다. 그가 쓰는 것은 "언어가 연속적이기 때문에 연속적인" 반면, 그가 본 것은 "동시적"이라는명백한 이유 때문이다. - P80

아버스는 "자신의 표정을 속일 수 없다."는 이유로 시각 장애인들 찍는 것을 좋아했다. "그들은 자신의 표정을 모르기 때문에 가면을 쓰지 않는다." 아버스의 작업 전체를 보면 이 말은 정확하면서도 그만큼 오해의 소지가 있다. 다양한 정신 병원의 환자들을 촬영한 말년의 작업은 이 개념을 정신적인 실명의 영역까지 극단적으로 끌고 간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보이는지 전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핼러윈 행진을 위해 가면을 쓰고 차려입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들은 자신이 받아들여지는 방식에 대해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이외의 상황에서 아버스의 작업이 가지는 힘은 사람들이 보여 주고 싶어 하는 가면과 그 가면을 잡아당기는 카메라 사이에서 생기는 긴장감에 의해 만들어진다. - P83

아버스 자신도 자신의 작업이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게 만든 자아 인식의 부재만큼이나 사람들이 가진 자아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보여 줬으면 하는 모습이 있지만그와는 다르게 보이게 되고, 사람들이 보는 것은 바로 그 모습이다. 거리에서 누군가를 보면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결점부터 잡아낸다. 우리가 이런 특이한 점을 갖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완전히다른 모습을 만들어 낸다. 우리의 겉모습은 세상에게 우리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라는 신호를 주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기를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알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사이에 있다. - P84

9개월 후 - 게드니가 사진을 찍고 2년이 지난뒤 - 아버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이후로 아버스의 피사체는그녀가 숨겨진 마음을 표면적으로 분출시키는 방법으로 "기괴한 사람들"을 찍은 것처럼, 그녀의 운명을 간접적으로 재현한 것이 되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피부를 뚫고 나와 다른 사람의 피부 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게 이 모든 것이 조금이나마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불행은 당신의 불행과 같지않다." 그렇지만동시에 "모든 차이점은 닮은 점이기도 하다." 웰티가 주장한대로 아버스가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면 아버스는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가진 고통과 두려움을 드러내었다. - P87

시각 장애인들을 찍고 싶다고 했던 그때 아버스는 "마릴린 먼로와 헤밍웨이의 얼굴에 드리워진 자살을 찍을 수 있기를 바랐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거기에 있었다. 자살이 거기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진의 예지력에 대한 아버스의 믿음은 어느 정도 빌 브란트에게서 나온 것이고 빌 브란트의 믿음은 앙드레 브르통에게서부터 온 것이다. (1948년에 촬영한)여배우 조지핀 스마트의 눈에 있는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브란트는 "사진가의 목표는 피사체의 미래 전체를 실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예견해 주는 의미 있는 유사성을 담아내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스는 "내가 사진찍지 않는 이상 아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고 믿었던 반면, 브란트는 "내가 본 것을 찍는 게 아니라 카메라가 보고 있는 것을 찍는 것이다."라고 하며 그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그의 목재 코닥 카메라가 볼 수 있는 것을 강조했다.  - P88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아버스의 관심은 그녀가 사진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느꼈던, 보다 전반적인 매력의 일부였다.
죽기 바로 전 아버스는 학생들에게 "명료함에 열중해 보고 나니 "내가 사진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진정한 물리적 어두움. 어두움을 다시보게 된 것은 매우 흥분되는 일이다." 아버스가 이렇게 "모호함에 대한 관심을 자각하게 된 것은 브란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브라사이 덕분이었다. - P89

그 보잘것없는 도구인 눈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는 것.

보르헤스「밤의 역사History of the Night」


브라사이가 그의 친구 케르테스가 퐁뇌프의 야경을 장노출로 촬영하는 것을 본 다음 날 처음 카메라를 샀다는 것과, 케르테스가 그에게 자신의 첫 카메라를 빌려준 것, 그리고 브라사이가 케르테스의 접근법과 스타일을 사실상 훔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나는 그에게 뭘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하고 노출은 얼마나 길게 줘야 하는지 등 야간 촬영에 대한 속성 수업을 해 주었다. 나중에 그는 내 야간 촬영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고 그게 그가 거의 평생에 걸쳐 한 일이었다." - P90

파리의 그늘진 삶을 담는 사진가였던 그는 사진이 그를
"그늘 밖으로" 이끌어냈다고 했다. 예술가와 도시 모두 숨어서 자신을 드러낸다. 정신 분석학에 따르면 무의식도 비슷한방식으로 작동한다. 브라사이는 1931년 발터 벤야민이 명명한 "시각적 무의식"을 찾아다니며 잠든 도시를 배회했다. 이는 센강 위의 다리들을 찍은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다. 다리 위로는 거대한 파리의 대로들이 보이고아치 아래에는 독특한 모양으로 일그러진 반영을 만들며) 어두운 강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적인 안정과-그것이 만들어낸 부작용이자 - 어긋나는 충동을 은밀히 상기시키는 부랑자들과 노숙자들이 불빛에 비쳐 희미하게 보인다.
그들이 예술가들이나 작가들에게 발휘하는 힘은 거의 중력에 가깝다. - P92

파리의 회랑들을 촬영한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아치들은 멀어질수록 작아지는 어두운 터널로 이어진다. 도시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곳에서 우리는 밤의 무법자와 범죄자로 이루어진 낯익은 - 즉, 브라사이의 사진에서 본 적 있는 - 무리를 보게 된다. 그 무리에는 성노동자와 동성애자들, ‘센‘ 척하는 앨버트와 그의 ‘일당‘이 있다. 결국 이 사진들은 당신이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버튼을 누르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게 될 구절에서 리스는 이렇게 표현했다. "문이 열린다." 어디에서 찍었든 브라사이의 사진은 결국 같은 장소, "늘 같은 계단, 늘 같은 방으로 인도한다. - P93

손은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사실 손에는 자신만의 문명과 자신만의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 릴케


손이 그리기 어려운 걸로 악명 높은 것을 생각하면, 힘들이지않고 손을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은 사진의 엄청난 장점중 하나다. 이처럼 카메라는 사람의 손을 보여 주는 방법이자 손이 가진 불확실성과 한계를 회피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윌리엄 헨리폭스 탤벗William Henry Fox Talbot은 자신의 부족한 손재주 -좋아하는 물건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는 무능력 에 절망하여 카메라 옵스큐라에 투사된 이미지를 "종이 위에 안정적으로 새겨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가 이런 식으로 "자연의 연필을 사용하여 "빛으로 그린 그림"
을 만드는 데 성공하자, 1839년 마이클 패러데이는 "지금까지어떤 사람의 손도 이 그림이 보여 주는 것과 같은 선을 그리지못했다."고 단언했다. 1906년에도 이 일은 충분히 신기하고 요긴한 일이어서 조지 버나드 쇼는 "인간의 손이라는 투박한 도구로부터 벗어났다"는 이유로 "예술가이자 사진가인 앨빈 랭던 코번을 칭송했다. - P96

 랭이 손을 강조하는 것은 농부나 공장 노동자를 환유적으로 일손이라고 축소해서 부르는 언어 관습을 다분히 문자 그대로, 시각적으로 연장한 것이다. 티나 모도티가 1920년대 중반 멕시코에서, 세탁일을 하는 여자와 연장 위에서 쉬고 있는 노동자의 손을 화면에 꽉 채워 찍은 사진에서도 거의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인간성이 노동으로 거칠어진 손에 담기는가. 랭과 모도티는 굽히지 않는다.
자신의 작업 방식을 설명하면서 랭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대로 다 이야기하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 뒤에 숨어 당신이 자기를 보지 못하길 바라는 사람도 있다. 이 사람이 당신이 알아내야 할 사람이다."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가장 주저하는 사람에게서 가장 설득력 있는 진술이 나올 수도 있다. - P100

존 스타인벡은 로버트 카파가 "생각을 찍을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사실 카파가 찍은 것은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로 둘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만화가들은 말풍선을 점선이나 하이픈으로 그려서 생각을 표현할 수 있지만, 사진가들에게는 그런 유용한 방법이 없다.) 사진이 발명된 순간부터 사진가들은 이 간극을 극복하려고 애쓰거나 아니면 전자와 후자의 차이를 없애보려고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똑똑하고 진지한 - 예를 들어 칼라일 같은 사람을 이용해 그의 눈 뒤로 두뇌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1906년 앨버트 비글로 페인은 마크 트웨인의 집 현관 앞에서 그의 사진을 찍는 작업을 했다.  - P102

 동등한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만난 것이다. 누가와 누구를이 정확히 동등하다.
친구 사이가 절대적으로 평등해지는 순간이 있다. 때로는 이 순간이 평생 지속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로 주고받는 것이 완벽한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 스티글리츠는 자신도 모르게 이를 인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사진에는 역사적이면서도 전기적인 순간이 담 - P121

겨 있다. 이 순간은 존 버거에 따르면 스트랜드가 찍은 인물사진들의 본질을 규정하는 것으로, 순간이 지속되는 시간은초 단위가 아니라 순간과 평생과의 관계로 측정된다. 스트랜드를 찍은 이 사진에서는 두 사람의 평생이다. - P122

우정은 어느 순간 함께 보낸 시간의 추억과 다가올 미래가 균형을 이루는 시점에 이른다. 지나온 추억의 양이 미래에만들어질 추억보다도 많음을 무언으로 깨달으면서부터 우정은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그 뒤로 둘 사이의 우정은 추억밖에남지 않아 온전히 추억에만 기대게 되며, 그 추억을 지키기 위해서는 둘 사이를 끝내는 것이 최선임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때문에 때로는 우정이 사실상 끝났음을 알고 상당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한다. 스티글리츠와 스트랜드에게는 아직 그 순간이 오지 않았었다. 그 순간은 1932년 스트랜드가그의 말대로, 스티글리츠가 만든 새로운 갤러리인 "아메리칸플레이스를 떠나면서" 찾아왔지만, 두남자가 부인들에게 버림받은 그 여름 스트랜드가 찍은 스티글리츠의 사진은 그 시간을 - 그들에게 추억밖에는 남아 있지 않고 더 이상 함께할미래는 없는 순간을 - 미리 보여주고 있다. - P124

그들사이에 나이 차는 중요하지 않아졌다. 그들 사이에는 그들의부인들이 사실상 함께 도망가 버렸다는, 다른 종류의 동등함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내가 떠남으로써 아내의 부재 외에 그들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음이드러났다. 그들에게는 단순히 그들에 관한 사실만이 남았다.
· 우정이 동등해지는 단계가 있다면 어느 한쪽이 그 단계가 지나간 것을 깨달아 균형이 깨지는 순간도 있다. 양쪽 다알게 되면 그때부터는 냉랭하고 불안한 평형이 새롭게 자리잡는다. 서로에게 느끼던 안정감과 편안함 대신 불안감이 찾아온다. 이 불안감은 - 그 증상 중 하나로-이에 대해 얘기할수 없기 때문에 더욱 심해진다. 스티글리츠의 수다가 끝나고스트랜드가 찍은 사진은 말하지 못해 남겨진 모든 것을 담고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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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뭔 말인지도 모를, 양자역학이니 뭐니 하는 문장들이 이토록 강하게 끌어당기다니.


모치즈키가 논문을 발표한 지 1년 뒤인 2013년 12월, 세계에서 가장 저명한 수학자 여러 명이 증명을 연구하기 위해옥스퍼드에 모였다. 세미나가 시작되고 며칠 동안은 열의가넘쳤다. 일본인 수학자 모치즈키의 모호한 논리가 이해력에굴복하기 시작했으며 사흘째 밤 커다란 진전이 있으리라는소문이 인터넷 토론방과 전문 웹사이트에 퍼졌다. - P78

나흘째 모든 것이 무너졌다.
일정한 시점이 지나자 아무도 증명의 논증을 더는 따라갈수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위대한 수학적 정신의 소유자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으며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치즈키가 세미나 참석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 P79

모치즈키 신이치가 자신의 추론을 증명하려고 만들어낸새로운 수학 분야가 너무 기이하고 추상적이고 시대를 앞선탓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스 캠퍼스에서 온 이론수학자는미래에서 온 논문을 연구하는 것 같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가 알기로 이 논문을 접한 사람들은 다들 매우 논리적이지만, 논문을 읽은 뒤에는 어떤 식으로 표현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모치즈키의 체계를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만큼 따라갈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들은 이 체계가 첫눈에 보이지 않는숫자들 사이의 기본적 관계들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모치즈키는 블로그에 이렇게 썼다. "연구자들이 내 연구를 이해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들의 뇌에 주입되어 오랜 세월 동안 당연하게 여겨진 사고 패턴들을 비활성화해야 한다. " - P79

절의 내부처럼 단아한 그의 연구실 창문에서는 다이몬지산이 보인다. 1년에 한 번 오본 축제 때 승려들은 그 산에서양팔을 뻗은 사람 모양의 거대한 한자大ㅡ를 태운다. 이글자는 ‘거대하다 크다. 기념비적이다‘라는 뜻으로, 어마어마한 호언장담을 표현할 때 쓰인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새수학 분야를 바로 이런 식으로 명명했는데, ‘우주적 타이히뮐러이론‘이라는 이름에는 겸양이나 농담의 기미가 전혀 없었다. - P81

‘a+b=c‘ 추론은 수학의 뿌리에 가닿는다. 그것은 정수의덧셈 성질과 곱셈 성질 사이에 심오한 뜻밖의 관계가 있다는 주장이다. 만일 증명된다면 이 추론은 수많은 해묵은 난제를 마치 마법처럼 해결할 수 있는 막강한 연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모치즈키의 야심은 그보다 훨씬 컸다. 그는 추론을 검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수학자들로 하여금 정수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상상하도록 하는 새로운 유형의 기하학을창안했다. 

알렉산더 그로텐디크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수학자 중한 명이었다. 과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창조력을분출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획기적으로 바꿨다. 모치즈키가 1996년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그로텐디크의 추론 하나를 증명한 뒤였으며, 이 일본인 수학자가 아직 학생일 때 그를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가 그로텐디크를 스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았다. - P83

문이다. 수, 각 곡선, 방정식은 그의 흥미를 끌지 못했으며 그어떤 구체적인 수학적 대상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대상들 사이의 관계였다. 그의 제자 뤼크 일뤼지는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사물의 조화에 남달리 민감했다. 새
‘로운 기법을 도입하고 주요 정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수학에 대한 우리의 사고방식을 변화시켰다."
공간은 그가 평생 천착한 주제였다. 그는 천재성을 여지없이 발휘하여 점의 개념을 확장했다. 미천한 점은 그의 눈길이 닿자 무차원의 위치에서 벗어나 복잡한 내부 구조를 품은 채 부풀어올랐다. 남들이 깊이, 크기, 너비가 없는 단순한위치를 본 바로 그곳에서 그로텐디크는 우주 전체를 보았다.
그토록 대담한 제안을 내놓은 사람은 유클리드 이후로 아무도 없었다. - P86

유능한 권투 선수였고 베토벤의 후기 4중주곡과 바흐에열광했으며 자연을 사랑했고 "태양과 생명으로 가득한, 자그맣고 나이 많은 올리브나무"를 존경했지만, 수학을 비롯한이 세상 무엇보다 더 몰두한 것은 글쓰기였다. 그의 글은 광기의 경계에 놓여 있었다. 그가 어찌나 열정적으로 썼던지원고 여기저기에 연필심이 종이를 뚫은 자국이 남았다. 계산을 할 때면 공책에 방정식을 쓴 다음 거듭거듭 겹쳐 썼는데,
급기야 각각의 기호가 하도 굵어져서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되었다. 그는 흑연을 종이에 긁는 신체적 쾌감에 사로잡혔다. - P90

한 세대의 교수와 학생 전부가 그로텐디크의 꿈에투신했다. 그가 우렁차게 강연하면 그들은 필기를 하고 그의논증을 확장하고 초고를 써서 그에게 교정받았다. 공동 연구자 중에서 가장 헌신적이었던 장 디외도네는 해가 뜨기도전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전날의 필기를 검토했다. 그러면 그로텐디크가 여덟시 정각에 교실에 들이닥쳐 새로운 개념들을 전개했는데, 연구소 계단을 오를 때 이미 머릿속에서 자기 자신과 논쟁을 벌이던 것들이었다. 그로텐디크의 세미나는 열두 권의 책으로 묶였다. 2만 쪽이 넘는 이 대작은 기하학, 정수론, 위상수학, 복소해석학을 통합했다. - P91

그로텐디크는 하나의 방정식에 들어맞는 수학적 우주를통째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를테면 그의 토포스는 무한해보이는 공간으로, 상상력의 한계에 도전한다. 그로텐디크는이것을 "이 세계 모든 왕의 모든 말과, 모든 가능 세계의 모든 왕의 모든 말이 한꺼번에 물을 마실 수 있을 정도로 넓고깊은 강바닥에 비유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려면 완전히새롭고 50년 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변화만큼 급진적인 우주 관념이 필요했다. - P92

그는 필요하다면 몇 시간이든 제 의지대로 자고 일어나 연구에 온 정력을 쏟을 수 있었다. 아침에 개념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이튿날 새벽까지 낡은 남포등의 불빛 아래서 눈을찡그린 채 책상 앞에서 꼼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이브 라드겔레리는 이렇게 회상한다. "천재와 함께 연구하는일은 매혹적이었다. 이 단어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로텐디크는 다른 어떤 말로도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매혹적이면서도 두려웠는데, 그것은 이 남자가 어떤 인간과도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 P93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크루즈 캠퍼스의 한 교수는 그를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강연하는 것을 듣고서 처음 든인상은 우리의 지적 진화를 앞당기기 위해 머나먼 태양계의외계 문명에서 지구로 파견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로텐디크가 불러일으킨 수학적 풍경은 아무리 급진적이었을지언정 인위적이라는 인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수학자의 훈련된눈으로 보면 이 풍경은 마치 자연환경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그로텐디크는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보다는 풍경이 스스로자라고 발전하기를 바랐다. 그 결과는 마치 각각의 개념이제 나름의 생명 충동을 따라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듯한유기적 아름다움을 발산했다. - 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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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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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정세랑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시작했다가 전혀 가볍지 않은 글에 살짝 밀어두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마치고 나면 다시 시작하리라. 할 말이 꽤 많아지는 작가다.}라고 지난주에 적었다.

작가 정세랑. [나무위키]에서 소개되는 작가의 프로필은 이렇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을 많이 썼고 장편도 자주 책으로 내는 편이다. 초기엔 장르소설, 특히 SF에 주력했는데 이만큼 가까이 이후로는 일반적인 순수문학 작품도 병행해서 쓰고 있다.

1984년생이며 2010년에 등단하여 이쪽 작가 중에서는 신참인 편.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출신이며 국어국문학을 이중 전공했다. 판타스틱 2010년 1월 호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2014년 '이만큼 가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피프티 피플로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덧니가 보고 싶어 (2011/11) 지구에서 한아뿐 (2012/6) 이만큼 가까이 (2014/3) 재인, 재욱, 재훈 (2014/12)

보건교사 안은영 (2015/12) 피프티 피플 (2016/11) 섬의 애슐리 (2018/6) 옥상에서 만나요 (2018/11)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2019/6) 목소리를 드릴게요 (2020/1) 시선으로부터, (2020/6)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021/6) 아라의 소설 (2022/8)

이렇게 작품이 많은데 그동안 내가 읽은 건 고작 장편 하나, '이만큼 가까이'다. 소설, 그것도 한국 소설에 진심인 편이라고 떠들면서 이유야 어찌 됐든 부끄러운 결과다.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스스로라도 납득될만한 이유를 대자면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읽힌 정세랑 작가는 젊고 명랑하고 환하고 밝았다. 태생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데다 부정적인 시선을 장착한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 밝고 환함이다. 밝고 환한 곳에서는 어둠은 기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작가 여행 산문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작가가 장착한 밝음은 가장 어두운 순간들을 외롭고 치열하게 통과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앎은 그토록 얄팍했던 것이다.

책은 첫 번째 뉴욕에 가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여행을 왜 즐기지 않느냐면"으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아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 부모님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 내가 발작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길 바라셨던 듯한데, 이렇게 두 번째 챕터에서 시원하게 말해버린다. 문학 출판계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이 아팠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무척 아름다운 방식으로 마구마구 해버린다는 점이었다. 첫 회사에서 한 시인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적이 있는데 나와 같은 소아 뇌전증을 앓으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셔서 듣고 있다가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전 연령대에서 천 명에 네다섯 명은 뇌전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전기 신호가 다르게 달린다는 이유로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과 오해는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혹시 같은 병을 앓았거나 앓는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지지하는 마음을 보내고 싶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것은 내가 쓰는 글들이 다소 엉뚱하고 기괴하다 보니 혹 오해를 더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쓰러지는 발작이 가장 위험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의 경우 잠들었을 때 부분 발작을 일으켰다. 숨을 쉴 수 없어서 깼다. 마치 거인이 내 목을 밟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한 시점에 다시 호흡이 돌아왔다. 오류가 난 컴퓨터를 억지로 껐다 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때로 얼굴 일부나 한쪽 팔이 마비되기도 했다. 누워 있을 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상의 가능성이 적었지만, 늦은 밤 혼자 겪으며 내면이 천천히 조각되었다. 치료를 위해 계절마다 대학병원의 층층을 엄마 손을 잡고 오락가락했다. 『 피프티 피플』을 쓴 것은 친지 중에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많아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기 쉬워서였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뇌파검사를 위해 머리카락 속에 풀을 잔뜩 바르면 『프랑켄슈타인』에 나올 만한 헤어스타일이 되었고, MRI 기계 속은 몸이 굳도록 추웠다. 그런 유년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어서 병원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다. 혼자 느끼는 외로움도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도 극대화되는 공간을 소설 안에 세워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피곤하면 발작이 일어나곤 했으므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했다. 치료를 받고 성장하며 발작은 사라졌고 다행히 아직 재발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발작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뉴스에 그렇게 사망한 이의 사례가 보도되면 먼 나라의 모르는 사람인데도 슬퍼진다.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의 배우 캐머런 보이스가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뇌전증으로 인한 수면 중 발작으로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배우라서 알려진 것이지, 비슷한 죽음은 지구 곳곳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현대사회에서도 모두가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 본 사람들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더 잘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에 ‘만약 내가 4년 후에 죽는다면 후회할까? 8년 뒤라면?‘

하고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70대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50권까지 쓰는 것이지만, 충분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요절한 사람이 아니라 열한 살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있는 힘껏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뵐 때마다 무병장수를 빌어주시는 독자분들께 부응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고 있긴 하다.

어쨌든, 발작을 빼도 딱히 건강한 젊음이었던 적은 없다. 박카스 광고나 국토대장정 포스터에 좀처럼 이입을 못 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의학의 혜택 속에 살아왔다. 전근대에 태어나지 않아 행운이었다고 안도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욕망이 약했다. 여행은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고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선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나머지 여행까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여행을 갈 때는 바탕화면에 유서에 가까운 지시 사항을 남기고, 담당 편집자님께 그때까지 쓴 원고를 예약 메일로 전송해두기도 했다. 매번 살아 돌아와서 잘 취소했지만…….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 30킬로미터로 빙글 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 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경이의 스위치가 반발력 없이 딸깍딸깍 눌리고 말아서, 다른 아팠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얼마나 비슷한 성향일지 궁금해진다. 나의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스머프 같은 성격이 (특히 동료 작가들에게) 좀 부담스럽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개념의 여행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잘 쓰인 여행 책, 화질 좋은 여행 프로그램,

친구들이 다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보여주는 사진들을 즐기며 충분히 만족해버리는 편이어서 스스로 여행을 떠나는 편이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13~17"

작가, 정세랑. 새로이 알게 되었는데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병력을 밝히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둠과 참담함을 건너왔을까 싶어서 아득해졌다. 본인이 로또에 좀처럼 맞지 않는 것은 이미 로또 같은 부모를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아픈 아이를 지켜보고 손을 잡고 대학 병원 층층을 다녔을 엄마의 타는 속내가 보여서 먹먹하다.

'모든 원인이 상대방의 탓인 것만 같고, 다른 집 자식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저 팔자소관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 분노를 폭발시키지도 않고' 보살핌과 치료와 믿음을 보여준 그 부모님은 작가의 로또가 맞다. 작가는 다른 뜻으로 말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렇게 오독한다.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 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 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 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 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나도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부러움도 한가득이지만 그걸 시기하는 병을 극복해야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라면은 결국 같은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온 결과이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나. 지금 여기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복권 당첨 같은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로또가 안 되는 걸까? 왜?

뇌전증, 간질이라 불리는 이 병은 나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급우의 발작을 본 적이 있다.

평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낮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쓰러져서는 몸이 비틀리며 떨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입에 거품이 가득하고 눈이 뒤집히는 놀라운 상황에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빙 둘러서있기만 했다. 아무 조치도 못하는 건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마침 나타나신 양호선생님의 침착함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그 친구의 경련과 경직의 순간은 길지 않았는데 그 상황의 여파는 오래갔다. 오후 내내 양호실에 누워있다가 연락받은 가족이 데리러 왔는데 할머니였을까? 엄마였을까? 왜소하고 까무잡잡하게 나이 드신 분이 당시의 우리들에 비해 한참 작은 그 친구가 당신보다는 훨씬 큰데도 어깨를 감싸 안고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그 후로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장기간의 결석 이후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병증의 충격을 직접 겪었다.

유독 내 주변에만 그랬던 건지 그 시절이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이후 발작을 목격할 일은 많았다. 시집간 큰언니가 세 들어 살던 안집의 몇 살 위 언니가 주기적으로 그랬고, 동갑의 한 동네 남자애의 경련을 목도하기도 했다. 유전이라고 쉬쉬하면서 끝끝내 숨기던 몹쓸 병이었기에 숨기다가 드러나면 더 깊숙하게 숨어버려야 하는 병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였던 시절, 아픈 걸 견디며 일상을 사는 것만도 버거울 텐데 주변에서 누구라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가끔 그 친구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ㅍ.ㅅ.ㅅ. 내게 지나쳐온 세월만큼 그 친구도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말도 섞어본 적이 없을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업 시간을 빼고는 교실에 붙어있지도 않았던 나는 몇 친구 말고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속으로 혼자 안부를 묻고는 했다. 죄책감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아픈 엄마를 지켜보는 막막함을 견디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속이 타들어가는 조바심과 안타까움과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발작으로 팽창하던 분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만 특별하게 불행하지 않다고, 나보다 더한 친구도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아픈 친구한테……. 그런 몹쓸 생각이 오래 미안했다. 그래서 이름이나마 기억하면서 마음 안에 두었던 것이다. 오래 아프면서도 가끔 그 이름을 생각했다. 어딘가 고장이 나고 아프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른 어딘가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는 아픈 시절을 건너왔기에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약만 잘 복용하면 조절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 그 병에서 자유로워져서 고만고만하게 늙어가고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덧붙여서 나도 이렇게 그 친구를 놓아 보낸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 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 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 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 현실과 비교해 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우리 모두가 아는 뉴욕 무역 센터가 무너진 곳에는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 그곳에 선 작가의 심경이, 작가의 정신과 삶과 글쓰기의 방향까지 짐작하게 한다. 작가, 정세랑을 응원하게 만든 감동적인 부분이 이 챕터였다. 집단의 이름으로 쉽게 사라지는 개인을 호명하는 일을 이 작가에게서 기대해 본다. 모든 시작은 개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을 때, 각각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한 우주를 이룰 때, 세상은 조금씩 평화를 향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정혜윤 피디를 작가로서 좋아하고 모든 책을 찾아 읽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세월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 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 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 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 P194"

"열네 살 된 딸아이가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 혼자서, 딸아이는 오늘 밤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뉴욕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으며, 아내와 나는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딸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딸아이가 세계 무역 센터 지하를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우리 집 꼭대기 층에서 보면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브루클린 쪽으로 불어와서 화재현장의 냄새들이 집의 모든 방으로 들어왔다. 화염에 휩싸인 플라스틱, 전선, 건축자재,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 코를 찌르는 그 악취, -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P430"

2001년 9월 11일을 우리는 지켜보는 사람이었다면 뉴욕의 작가 '폴 오스터'는 당사자다. 지금 막 마친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그랬기에 충격적이다. 배가 서서히 잠겨가면서 뒤집히는 걸 보고 있던 그때처럼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물난리에 속절없이 죽어간 이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작가, 정세랑의 여행이야기이면서 사는 이야기고 친구들과 함께(여행 동행에서 인생의 동행이 된 남편까지 포함해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권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제주를 아끼면 제주에 가는 횟수를 줄이라 한다. 하와이가 너무 좋았지만 아마도 안 가게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심각하게 수긍되는 말이다. 좋아하면 아끼고 귀하게 대해야 한다.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상대를 망가뜨리는 스토킹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려본다.

'떠나라'라고 등 떠미는 사회에서 지적질 받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들이 좋았다. 정말 지구를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정치적인 거 말고, 보이는 거 말고, 진짜로.

소비를 줄여야 한다. 결국은 소로처럼 살아아 한다는 건데. 내가, 될까? (갸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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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전날 밤 건강진단에서 의사들은 나치 지도자 헤르만 괴링의 손톱과 발톱이 새빨갛게 물든 것을 발견했다. 진통제 디히드로코데인을 하루에 백 알 넘게복용하다 중독된 것이었다. 작가 윌리엄 버로스가 묘사했듯 이 약물은 자극성은 코카인만큼 약하지만 효능은 코데인의 두 배로 헤로인과 맞먹기에 미국 의사들은 괴링을 법정에 세우기 전에 의존증부터 치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연합군에 체포될 당시 괴링이 가지고 있던여행 가방에는 2만 회 넘게 투약할 수 있는 디히드로코데인이 들어 있었다. 제2차세계대전 막바지 독일에 남아 있던 생산분의 사실상 전부였다. 그의 중독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 - P9

다. 독일 국방군 거의 전원이 페르비틴을 지급받았으니 말이다. 이 메스암페타민 알약을 복용한 병사들은 몇 주일 내리잠도 자지 않은 채 광적인 흥분과 악몽 같은 혼수를 오가며 정신 착란 상태에서 싸웠다. 과다 복용한 병사 중 상당수는 걷잡을 수 없는 희열에 사로잡혔다. "사위가 쥐죽은듯 고요하다. 모든 것이 낯설고 무의미해진다. 마치 내가 조종하는항공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무게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독일 공군의 한 조종사가 몇 년 뒤쓴이 문장은 치열한격전의 현장이 아니라 지복의 환상을 목격하는 고요한 환희를 회상하는 듯하다.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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