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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정세랑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1년 6월
평점 :
{ 잠깐 머리를 식히려고 정세랑의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시작했다가 전혀 가볍지 않은 글에 살짝 밀어두었다. '버지니아 울프'를 마치고 나면 다시 시작하리라. 할 말이 꽤 많아지는 작가다.}라고 지난주에 적었다.
작가 정세랑. [나무위키]에서 소개되는 작가의 프로필은 이렇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단편소설을 많이 썼고 장편도 자주 책으로 내는 편이다. 초기엔 장르소설, 특히 SF에 주력했는데 이만큼 가까이 이후로는 일반적인 순수문학 작품도 병행해서 쓰고 있다.
1984년생이며 2010년에 등단하여 이쪽 작가 중에서는 신참인 편. 고려대학교 역사교육과 출신이며 국어국문학을 이중 전공했다. 판타스틱 2010년 1월 호에 드림, 드림, 드림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제7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이 작품은 2014년 '이만큼 가까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피프티 피플로 제5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덧니가 보고 싶어 (2011/11) 지구에서 한아뿐 (2012/6) 이만큼 가까이 (2014/3) 재인, 재욱, 재훈 (2014/12)
보건교사 안은영 (2015/12) 피프티 피플 (2016/11) 섬의 애슐리 (2018/6) 옥상에서 만나요 (2018/11)
청기와 주유소 씨름 기담 (2019/6) 목소리를 드릴게요 (2020/1) 시선으로부터, (2020/6)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 (2021/6) 아라의 소설 (2022/8)
이렇게 작품이 많은데 그동안 내가 읽은 건 고작 장편 하나, '이만큼 가까이'다. 소설, 그것도 한국 소설에 진심인 편이라고 떠들면서 이유야 어찌 됐든 부끄러운 결과다. 덧붙일 필요는 없지만 굳이, 스스로라도 납득될만한 이유를 대자면 '이만큼 가까이'를 읽고서 내 취향이 아니라고 접어버렸기 때문이다. 내게 읽힌 정세랑 작가는 젊고 명랑하고 환하고 밝았다. 태생적으로 어둡고 음침한 데다 부정적인 시선을 장착한 나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영역이 밝고 환함이다. 밝고 환한 곳에서는 어둠은 기생하기 어렵다. 하지만 작가 여행 산문집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를 읽으면서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다. 작가가 장착한 밝음은 가장 어두운 순간들을 외롭고 치열하게 통과해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내 앎은 그토록 얄팍했던 것이다.
책은 첫 번째 뉴욕에 가게 된 이유를 밝히면서 "여행을 왜 즐기지 않느냐면"으로 시작한다.
"어렸을 때 아팠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소아 뇌전증을 앓았다. 부모님은 수학여행이나 수련회를 갔을 때 내가 발작을 일으킬까 봐 걱정하시곤 했다.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길 바라셨던 듯한데, 이렇게 두 번째 챕터에서 시원하게 말해버린다. 문학 출판계에 들어와 가장 좋았던 건 사람들이 아팠던 이야기, 아픈 이야기를 무척 아름다운 방식으로 마구마구 해버린다는 점이었다. 첫 회사에서 한 시인의 인터뷰 자리에 갔던 적이 있는데 나와 같은 소아 뇌전증을 앓으셨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셔서 듣고 있다가 놀라움과 해방감을 느꼈다. 말해도 되는구나. 왜 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까? 약한 부분을 햇볕 아래 드러내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그때 알게 되었다. 전 연령대에서 천 명에 네다섯 명은 뇌전증을 앓고 있다고 한다. 머릿속에서 전기 신호가 다르게 달린다는 이유로 맞닥뜨려야 하는 위험과 오해는 남들이 상상하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다. 혹시 같은 병을 앓았거나 앓는 분이 이 책을 읽는다면 지지하는 마음을 보내고 싶다.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것은 내가 쓰는 글들이 다소 엉뚱하고 기괴하다 보니 혹 오해를 더할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깨어 있는 상태에서 쓰러지는 발작이 가장 위험하지 않을까 추측한다. 나의 경우 잠들었을 때 부분 발작을 일으켰다. 숨을 쉴 수 없어서 깼다. 마치 거인이 내 목을 밟고 서 있는 것만 같았다. 숨을 쉬기 위해 발버둥을 치면 아슬아슬할 정도로 위험한 시점에 다시 호흡이 돌아왔다. 오류가 난 컴퓨터를 억지로 껐다 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때로 얼굴 일부나 한쪽 팔이 마비되기도 했다. 누워 있을 때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상대적으로 부상의 가능성이 적었지만, 늦은 밤 혼자 겪으며 내면이 천천히 조각되었다. 치료를 위해 계절마다 대학병원의 층층을 엄마 손을 잡고 오락가락했다. 『 피프티 피플』을 쓴 것은 친지 중에 대학병원에서 일하는 이가 많아 인터뷰 대상자를 소개받기 쉬워서였지만,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뇌파검사를 위해 머리카락 속에 풀을 잔뜩 바르면 『프랑켄슈타인』에 나올 만한 헤어스타일이 되었고, MRI 기계 속은 몸이 굳도록 추웠다. 그런 유년의 기억들이 내 안에 남아 있어서 병원 이야기를 쓰게 된 것 같다. 혼자 느끼는 외로움도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친밀감도 극대화되는 공간을 소설 안에 세워본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즐기지 않았다. 낯선 상황에서 피곤하면 발작이 일어나곤 했으므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피했다. 치료를 받고 성장하며 발작은 사라졌고 다행히 아직 재발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재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렇게 돌아오는 발작이 더 위험할 수 있다고 한다. 뉴스에 그렇게 사망한 이의 사례가 보도되면 먼 나라의 모르는 사람인데도 슬퍼진다.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의 배우 캐머런 보이스가 겨우 스무 살의 나이에 뇌전증으로 인한 수면 중 발작으로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배우라서 알려진 것이지, 비슷한 죽음은 지구 곳곳에서 조용히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안정적인 현대사회에서도 모두가 평균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로 마주 본 사람들이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을 더 잘한다고 여기기도 한다. 어떤 일을 할까 말까 망설여질 때에 ‘만약 내가 4년 후에 죽는다면 후회할까? 8년 뒤라면?‘
하고 가정해 보는 것만으로도 한결 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아팠던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미래완료형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꿈은 마르그리트 뒤라스처럼 70대에도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50권까지 쓰는 것이지만, 충분한 수명을 누리지 못한다 해도 요절한 사람이 아니라 열한 살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지 않고 있는 힘껏 살았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뵐 때마다 무병장수를 빌어주시는 독자분들께 부응하기 위해 건강검진을 열심히 받고 있긴 하다.
어쨌든, 발작을 빼도 딱히 건강한 젊음이었던 적은 없다. 박카스 광고나 국토대장정 포스터에 좀처럼 이입을 못 하는 그룹의 일원으로, 의학의 혜택 속에 살아왔다. 전근대에 태어나지 않아 행운이었다고 안도하는 게 우선이었기에 여행에 대한 욕망이 약했다. 여행은 건강한 사람들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고 일상의 루틴을 유지하는 선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나머지 여행까지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큰 결심을 하고 여행을 갈 때는 바탕화면에 유서에 가까운 지시 사항을 남기고, 담당 편집자님께 그때까지 쓴 원고를 예약 메일로 전송해두기도 했다. 매번 살아 돌아와서 잘 취소했지만…….
생각해 보면 살아 있는 상태가 너무 신기하지 않은지? 꼭 개인적 얘기, 사람들 얘기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렇다. 지구가 초속 30킬로미터로 빙글 뱅글 날아가고 있는데 그 위에서 온갖 동식물이 38억 년 동안 생겨났다 멸종했다 하며 보글보글 지내왔다는 것이……. 우주는 죽어 있는 게 더 자연스러운 상태인데 어떻게 다들 살아 있지? 거의 매일 놀란다. 심장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뛰었다니? 신경을 쓰지 않는데 호흡이 계속된다니? 산책만 나가도 흥미로운 발견을 하고 화분에 새잎이 나면 기분 좋은 충격을 받는다. 다른 요인들도 있지만 환경 주의자가 된 것은 그래서일지도 모르겠다. 아팠던 청소년이 쉽게 경이로워하는 어른으로 자란 것이다. 경이의 스위치가 반발력 없이 딸깍딸깍 눌리고 말아서, 다른 아팠던 사람들을 조사해 보면 얼마나 비슷한 성향일지 궁금해진다. 나의 노래 부르며 행진하는 스머프 같은 성격이 (특히 동료 작가들에게) 좀 부담스럽다는 평을 들을 때도 있는데, 나름의 맥락이 있다. 어둡고 죽어 있는 우주에서 기적 같은 지구에 산다는 것이 신기해, 냉소와 절망에 빠졌다가도 빨리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보편적인 개념의 여행을 싫어한다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여행을 좋아하는 것에 가까웠다. 잘 쓰인 여행 책, 화질 좋은 여행 프로그램,
친구들이 다녀와서 들려주는 이야기와 보여주는 사진들을 즐기며 충분히 만족해버리는 편이어서 스스로 여행을 떠나는 편이 아니었다.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지 않다면 말이다. - P13~17"
작가, 정세랑. 새로이 알게 되었는데 담담하고 차분하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듯이 자신의 병력을 밝히는 순간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어둠과 참담함을 건너왔을까 싶어서 아득해졌다. 본인이 로또에 좀처럼 맞지 않는 것은 이미 로또 같은 부모를 가졌기 때문이라는데 아픈 아이를 지켜보고 손을 잡고 대학 병원 층층을 다녔을 엄마의 타는 속내가 보여서 먹먹하다.
'모든 원인이 상대방의 탓인 것만 같고, 다른 집 자식들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그저 팔자소관으로 내몰지도 않고, 그 분노를 폭발시키지도 않고' 보살핌과 치료와 믿음을 보여준 그 부모님은 작가의 로또가 맞다. 작가는 다른 뜻으로 말했는데 나는 어쩐지 그렇게 오독한다.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것은, 그러나 어쩌면 매우 환경과 훈련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에서 한아뿐』의 헌사에 ‘아무리 해도 로또가 되지 않는 건 이미 엄마 아빠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라고 쓴 것은 아부나 효도가 아니라 사실 진술에 가까웠다. 나의 부모님은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나 가난과 싸우며 고학했고, 결국 교육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났다. 경영대 캠퍼스 커플이었는데, 엄마는 과의 유일한 여성이었다니 1970년대 중반은 대체 어떤 세상이었는지…….
두 분은 경제성장기에 사회인이 되어 여유가 생기자 억눌렸던 것을 해소하려는 듯, 책 음악 공연 영화 전시 여행 등 문화적 경험에 탐닉했다. IMF 때를 비롯해 주춤거린 시기야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내 멈추지 않았다. 먹는 것에도 입는 것에도 집을 가꾸는 데에도 심드렁한 채, 신발은 길에서 만 원짜리를 사더라도 책은 매주 사들여 탑을 쌓았다. 그런 부모님 곁에서 자라는 동안 나 역시 예술을 사랑하고 즐길 수밖에 없도록 빚어진 것이다. 믿을 수 없이 큰 혜택을 받고 컸다. 무형의 것을 받아서 뒤늦게 깨달았지만, 복권 당첨이었다.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진 것이니 살면서 세상에 갚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p39,40"
나도 이런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면……. 부러움도 한가득이지만 그걸 시기하는 병을 극복해야 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더라면은 결국 같은 결과일 것이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만들어 온 결과이고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지금, 여기의 나. 지금 여기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나를 만들어 간다. 그런데 나는 왜, 복권 당첨 같은 부모님을 만나지도 못했는데 로또가 안 되는 걸까? 왜?
뇌전증, 간질이라 불리는 이 병은 나와도 무관하지는 않다. 중학교 때 급우의 발작을 본 적이 있다.
평소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존재감이 낮은 친구였는데 갑자기 쓰러져서는 몸이 비틀리며 떨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입에 거품이 가득하고 눈이 뒤집히는 놀라운 상황에 모두들 어쩔 줄 모르고 빙 둘러서있기만 했다. 아무 조치도 못하는 건 선생들도 마찬가지였는데 때마침 나타나신 양호선생님의 침착함이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었다. 그 친구의 경련과 경직의 순간은 길지 않았는데 그 상황의 여파는 오래갔다. 오후 내내 양호실에 누워있다가 연락받은 가족이 데리러 왔는데 할머니였을까? 엄마였을까? 왜소하고 까무잡잡하게 나이 드신 분이 당시의 우리들에 비해 한참 작은 그 친구가 당신보다는 훨씬 큰데도 어깨를 감싸 안고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그 후로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 없다. 장기간의 결석 이후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 병증의 충격을 직접 겪었다.
유독 내 주변에만 그랬던 건지 그 시절이 그러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 이후 발작을 목격할 일은 많았다. 시집간 큰언니가 세 들어 살던 안집의 몇 살 위 언니가 주기적으로 그랬고, 동갑의 한 동네 남자애의 경련을 목도하기도 했다. 유전이라고 쉬쉬하면서 끝끝내 숨기던 몹쓸 병이었기에 숨기다가 드러나면 더 깊숙하게 숨어버려야 하는 병이었다. 그때는 그랬다. 숨기는 것만이 능사였던 시절, 아픈 걸 견디며 일상을 사는 것만도 버거울 텐데 주변에서 누구라도 알게 될까 봐 전전긍긍하는 당사자와 가족들의 마음을 어찌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단지 가끔 그 친구 이름을 떠올려보았다. ㅍ.ㅅ.ㅅ. 내게 지나쳐온 세월만큼 그 친구도 세월을 지나왔을 것이다. 그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고 말도 섞어본 적이 없을지 모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수업 시간을 빼고는 교실에 붙어있지도 않았던 나는 몇 친구 말고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친구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속으로 혼자 안부를 묻고는 했다. 죄책감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아픈 엄마를 지켜보는 막막함을 견디고 있었다. 아픈 사람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는 속이 타들어가는 조바심과 안타까움과 치밀어 오르는 짜증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그 친구의 발작으로 팽창하던 분노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나만 특별하게 불행하지 않다고, 나보다 더한 친구도 있다는 생각이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아픈 친구한테……. 그런 몹쓸 생각이 오래 미안했다. 그래서 이름이나마 기억하면서 마음 안에 두었던 것이다. 오래 아프면서도 가끔 그 이름을 생각했다. 어딘가 고장이 나고 아프다는 건, 한편으로는 다른 어딘가를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기도 했다. 나는 아픈 시절을 건너왔기에 조금이나마 괜찮은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약만 잘 복용하면 조절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 그 병에서 자유로워져서 고만고만하게 늙어가고 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덧붙여서 나도 이렇게 그 친구를 놓아 보낸다.
"그날 살해된 사람들은 모두 개인이었다.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었을 비행기 승객들, 매일매일 출근하던 직장인들, 전망대에 올라 희열에 찼을 관광객들,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던 구조 대원들이었다. 메모리얼파크 바깥에는 그날 순직한 구조 대원들을 기리는 기념물이 있었다. 먼지 한 톨 내려앉지 않도록 닦는 사람은 사실 먼지보다 망각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죽은 자들을 모욕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억을 단단히 굳히지 못하는 공동체는 결국 망가지고 만다. 역사교육을 전공하며 공부한 자세한 내용들은 많이 잊었지만 그것 하나는 배운 것 같다. 배운 것을 자꾸 현실과 비교해 보며 다급함에 종종거릴 때가 있다. - P116"
우리 모두가 아는 뉴욕 무역 센터가 무너진 곳에는 '메모리얼 파크'가 있다. 그곳에 선 작가의 심경이, 작가의 정신과 삶과 글쓰기의 방향까지 짐작하게 한다. 작가, 정세랑을 응원하게 만든 감동적인 부분이 이 챕터였다. 집단의 이름으로 쉽게 사라지는 개인을 호명하는 일을 이 작가에게서 기대해 본다. 모든 시작은 개인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존중받을 때, 각각의 존재는 그 존재만으로 한 우주를 이룰 때, 세상은 조금씩 평화를 향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정혜윤 피디를 작가로서 좋아하고 모든 책을 찾아 읽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렇게 '세월호'를 다시 생각해 본다.
"그날 나는 앤서니와 헤어져 유리창을 찾아보았다. 추모관은 아주 넓었지만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창 앞에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잠시 머물렀다. 나도 유리창 앞에 서보았다. 그 유리창 앞에 서 있었을 성호 아버지 생각이 제일 먼저 났다. 성호 생각도 났다. 아이들 생각도 났다. 그리고 그날 어느 창가에 서 있었을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날 죽었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우리가 ‘삶‘이라 부르는 그것이 유리창 너머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간에서 내 눈앞에 있던 것은 9·11의 어두운 건물 파편들이었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처럼. 그 파편 너머, 삶이 어때야 하는지를 상상하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 폐허만을 보게 되리라는경고처럼. - 정혜윤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 P194"
"열네 살 된 딸아이가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아이는 난생처음 브루클린에서 맨해튼까지 지하철을 타고 갔다 - 혼자서, 딸아이는 오늘 밤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뉴욕에는 지하철이 운행되지 않으며, 아내와 나는 어퍼 웨스트사이드에 사는 친구들에게 딸아이를 재워 달라고 부탁해 놓았다.
딸아이가 세계 무역 센터 지하를 지나간 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쌍둥이 빌딩이 폭삭 주저앉았다.
우리 집 꼭대기 층에서 보면 연기가 도시의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다. 오늘은 바람이 브루클린 쪽으로 불어와서 화재현장의 냄새들이 집의 모든 방으로 들어왔다. 화염에 휩싸인 플라스틱, 전선, 건축자재, 시체들의 고약한 냄새, 코를 찌르는 그 악취, -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P430"
2001년 9월 11일을 우리는 지켜보는 사람이었다면 뉴욕의 작가 '폴 오스터'는 당사자다. 지금 막 마친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는 그랬기에 충격적이다. 배가 서서히 잠겨가면서 뒤집히는 걸 보고 있던 그때처럼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제대로 기억하지 않으면 나아가지 못한다. 공동체가 죽음을 똑바로 애도하고 기억하고 전하지 않으면……." 최근 서울 한복판에서 벌어진 물난리에 속절없이 죽어간 이들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다.
[지구인만큼 지구를 사랑할 순 없어]는 작가, 정세랑의 여행이야기이면서 사는 이야기고 친구들과 함께(여행 동행에서 인생의 동행이 된 남편까지 포함해서) 나누는 이야기이다. 한편으로는 여행을 권하지 않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가는 제주를 아끼면 제주에 가는 횟수를 줄이라 한다. 하와이가 너무 좋았지만 아마도 안 가게 되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심각하게 수긍되는 말이다. 좋아하면 아끼고 귀하게 대해야 한다. 좋아한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은 상대를 망가뜨리는 스토킹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려본다.
'떠나라'라고 등 떠미는 사회에서 지적질 받을 텐데 전혀 개의치 않는 태도들이 좋았다. 정말 지구를 사랑하는 우리는, 우리의 지구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까? 정치적인 거 말고, 보이는 거 말고, 진짜로.
소비를 줄여야 한다. 결국은 소로처럼 살아아 한다는 건데. 내가, 될까? (갸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