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켜준 편지를 한편씩 읽었습니다. 부산 원도심에서 책방을 운영하는 시인 김수우씨와 그곳을 드나들던 스물다섯 법대생 김민정씨가 무려 10년간 주고받은 편지들이 달빛처럼 은은한 울림을 주었어요. 긴 인연의 폭과 흐름이 담긴 이 서간집은 요즘 제 화두인 관계와 인연을 너른 폭으로 조망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잊은 듯 살다가도 문득 따뜻한 애정이 솟구치며 그리워지는 것, (…) 불가에서는 이를 좋은 인연이라 하더군요. 잊고 있다가도 만나면 더없이 기쁜 관계 말입니다." 
이런 대목에선 저의 이름 없는 관계들이 적합한 이름을 부여받은 듯했어요.
사실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찬찬한 관계로 기우는 마음이, 나이가 들어가며 끈끈한 관계의 부침을 감내하지 못하는 저에 대한 정당화 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달리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떡볶이 먹고 시시콜콜 잡담을 나누는 소소한 사이도, 다글다글 뒤엉켜 사느라 못난이 같은 내 모습을 들킨 징한 인연도 있듯이, 이렇게 조금은 멀리서 서로의 - P73

일상을 애틋하게 바라봐주는 고고하고 너그러운 관계도 필요하구나, 참으로 근사한 인연이구나, 수우님과 민정님 두사람의 서신을 보며 느꼈거든요.
우리도 이만하면 좋은 인연이겠지요? 서로에게 애틋한 먼 곳이 되어줄 수 있다면 경치 좋은 데에 세컨드하우스가있는 갑부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 마음의 별장은 심다책방을 비롯한 곳곳의 작은 책방입니다. 머물다보면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하는 질문이 밀려오는 장소이고, ‘삶의 근원이 환기되는 곳‘이죠.
주은이 둘째 아이를 임신한 모습을 보고 와서 좋았습니다. 중요한 생애주기를 함께 하는 특권을 누리는 기분이랄까요. 특히 헤어지며 우리가 안았을 때 태내의 아이까지 셋이서 포옹하는 느낌이 만월처럼 충만했습니다. 연말이라고 안부를 묻고 무슨 모임이라서 만나는 사이도 좋지만 언제 만날지 몰라서 설레는 인연들, 보면 반갑고 못 보면 그리운 얼굴이 둘레에 남아 있어서 제가 또 살아갑니다. - P74

쿤체는 원래 좋은 사람이라 좋은 시를 썼을까요. 아니면좋은 시를 쓰면서 좋은 사람이 되어갔을까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대가 시를 공부하려다가 겪은 이상한 방식은아니었으리라 짐작해봅니다. 시를 쓰고 싶어 찾아간 사설교육기관, "무슨 전공이세요?"라며 인사를 나누는 수강생들, ‘아무래도‘ 대학을 가야겠다 싶어 찾아간 문예창작과 입시전문학원, "네 시는 시도 아니야" 같은 원장의 말, 입시에 합격한 고등학생들 작품을 세번씩 노트에 필사시키는 학습법 같은 것들이요. 그대 말대로 도식화된 문장을 뽑아내며 노회한 교수들의 취향에 길들여지는 것이 시인의 자격증은 - P85

만들어줄 수는 있어도 시를 쓰는 몸을 길러주진 못하리라생각합니다.
쿤체가 이런 얘길 합니다. 한편의 시는 ‘네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가?‘라는 엄혹한 질문에 버텨낼 수 있어야 한다고요(「너는 누구길래, 시인아). 이보다 더 시적인 화두는 없지않은가, 저는 감탄하며 마음에 새겼습니다. 내가 세상에 무엇을 더하였는지, 이 엄정한 물음에서 도망치지 않는 한 우리는 시적인 것에서 아주 멀어지지는 않을 수 있지 않을까감히 생각해봅니다. 다시 감각의 재활훈련에 나선 그대, 쓰기 위해 준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정수의 건강을 빕니다. - P86

어쩌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아무 걸림 없이 ‘오직 읽고 오직 쓰는‘ 삶이란 누구에게나 불가능한 꿈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가 근무조건이 열악해도 책에서 양식을 구하라는 식의 자기계발논리는 아닙니다. 노동하는 인간이 자기 영혼의 본질을 지켜가고 사유하는 인간이 되어가는 여정의 숭고함, 자신이 숭배하는 대상을 파괴하는 모순된 상황에 처해서도 아름다움을 구하는 지성의 고귀함을 보여주죠.
여전히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살림과 육아와 집필이 늘 서로의 핑계가 되었던 어정쩡한 시기를 통과해 일에 몰입해도 좋을 시기가 되었는데 이제 체력이 따라주지 않고, 프리랜서 작가의 노동 환경은 일관된 체계가 없어서 일의 영역이 넓어질수록 현기증이 일어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탸가 꿈꿨던 ‘온전한 러브스토리‘를 저도 포기할 수가 없네요. 매번 바뀌는 동료를 무도회장의 파트너 - P91

처럼 다정하게 맞이하고, 동시에 인간을 부품화하는 업계구조엔 주저 없이 저항하며 작가의 노동권을 사수하고, 읽어야 할 것을 읽고 써야 할 것을 쓰는 삶을 살아가고 싶습니다. 한탸처럼 책더미에서 조용히 몰락할 수 있는 생이면 더바랄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대상 없는 하소연과 반성문을 이만 마칩니다. - P92

"내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면서, 『작은 것들의 신을 쓰면서 여러해 동안 누렸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이 시들기 시작했다. 책의 판매를 통한 금전적 이익이 몰려들었다. 내 은행계좌 잔고는 급격히 불어났다. 이미 가진 자들 사이에 세계의 부를 순환시키고 있는 거대한 파이프에 내가 우연하게도 구멍을 뚫었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그래서 그 파이프에서 어마어마한 속도와 힘으로 돈이 쏟아져 나오면서내게 상처를 입히고 있었다." 
소설의 한 장면처럼 강렬한 이미지가 
그려지죠. 작품의성공이 가져다준 부와 명예가 자신에게 상처를 내고 있다고 고백하는 작가라니! 와, 멋있어서 감탄했습니다. 돈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지만 병들게도 한다는 걸 고려하면, 작가 - P94

의 예민함으로 그걸 알아차리는 게 어쩌면 그다운 모습이기도 하겠지요. ‘시장의 심장부‘에 펜을 겨누면서도 그곳으로부터 부를 쌓는 자기모순에 빠지지 않기 위해 아룬다티로이는 눈을 부릅뜹니다.
"나는 작은 것들의 신속의 모든 감정, 모든 작은 느낌이 모조리 은화로 교환되어버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날 나 자신이 은으로 된 심장을 가진 은색의 형체가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하여 내 주변의 폐허화된 풍경은 그저 나 자신의 번쩍임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데 이바지할 뿐일 것만 같았다." 로이는 부커상을 받고 나서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말했대요. 자신을 ‘소설 공장처럼 취급하는 게 싫다고요. 소설을 영화화하자는 제의도 거절하고 긴급한 글들을 써내죠. 댐건설로 인한 심각한 자연 파괴, 이라크전쟁과 미국의 오만한제국주의 등 "공공연히 편을 들지 않으면 안 되는 정치적상황"에 대해 자비 없이 신랄한 언어를 구사합니다.
그리고 20년이 흐르고 나서야 두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문 - P95

를 출간해요.
멋지지 않나요? 글과 삶을 일치시키려는 염결성, 자기만의 속도로 밀고 나가는 의연함이요. 더 많은 것을 원하지 않는 점, 작가의 사회적 구실에 대한 치열한 고민, 글 쓰는 활동가의 모습까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작가 겸 활동가‘라는 딱지를 거부해요. 침대 겸용 소파라는 말을 연상시킨다고요. 하핫. 저는 이 대목에서 막 웃었는데요, 깊은 뜻이 있죠. 모든 저항적 운동을 직업적 활동가들만 하는 일로 여기도록 암시한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이런 사태에 누군가 관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작가나 활동가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로이는 글을 쓰는 이유도 작가라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일" 이기때문이라고 말하죠. 장르적 구분도 의미를 두지 않아요. "논픽션이건 픽션이건, 내가 주로 다루는 주제는 권력과 권력없는 자들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끝없는 순환적인 갈등입니다." - P96

버지니아 울프가 딱 그랬다. 『파도』라는 독백과 이미지로 된 형식의 소설에 도전하면서 "완전히 실패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작품을 쓰는 나 자신을 매우 존경한다"고 일기에 적었다. 자기 쇄신의 실행력이 존경스럽지. "포도송이에서 포도를 떼어내듯이 떼어내어 ‘받아요. 이것이 나의 인생이오‘라고 말" 하는 몽상적이고 아름다운 문장이 있는가 하면, 또 "인생은 즐겁고 좋은 것이다.
월요일 다음에는 화요일이 오고 그다음에는 수요일이 온다" 고 무심하게 삶에 순응하는 책을 마저 읽다가, 그날 너와의 대화를 복기하며 나는 좋은 늙음을 꿈꾼다. - P104

삶의 목표가 인간성 좋은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다만 친절을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친절에 대해 거듭 말하고 쓰고 고민하는데 희한하게 실천에는 자꾸 실패해서 반성하느라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사람. 친절한 사람이아니라 친절한 사람이 되기 어려운 구조를 파악하는 사람. 그렇게 용쓰다보면 주름이 늘듯이 말투와 표정에 친절의 함량이 높아지길 기대합니다. - P10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솔닛이 내어준 언어의 방에 머물면서 내 깊고 어둑한 곳에 묻어둔 이야기를 꺼내놓을 용기를 냈습니다. 음, 솔직히말하면 그가 네바다 핵실험장에서 장기간을 싸우고, 대뜸 트럭에 올라 몇주고 어디론가 떠나는 대목에서는 너무 부럽기도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기혼 유자녀 여성이었다면 집안과 밥상에서 전투를 치르는 이야기도 멋지게 써냈을지 모르겠습니다. 솔닛이 쓴 밥 이야기를 읽었다면, 나는 내 삶의 지배자 노릇을 하는 ‘밥‘에 끌려다니는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바라는 건 명절 철폐도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닙니다.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입니다. 엄마 제사를 간소화하자는 제안을 수용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나도 가족의 구성원이자 상 차리는 당사자로서 권한을 갖고 있음을 차분하게 말하고 싶은 거죠. 끊어내지 않고 연결하는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싶습니다. 솔닛이 말한 작가의 책무인 "이야기를 깨뜨리는 사람이자 어떤 이야기 - P37

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302) 일을 계속해보고 싶습니다.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을 두번 읽었습니다. 한번은 솔닛은 어떻게 오늘의 솔닛이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고, 한번은 그의 삶에 빗대어 나는 어떻게 오늘의 내가 되었나를 생각하며 읽었습니다. 선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전진한 것은 후퇴할 수도 있고, 닫힌 것이 다시 열리기도 한다는것. 한 사람의 긴 강물 같은 삶이 만들어내는 패턴이 보여주있습니다.
다시 써야겠습니다. 우리의 핵심 도구는 이야기니까요. "낮은 곳들로부터 벗어날 때 사다리로 쓴 논리와 서사를 다른 이들에게도 건네주고 싶"(15면)다는 솔닛의 자상함이 내 막힌 글을 뚫어주고 이야기를 끌어내주었듯이, 내 이야기도 누군가의 말문을 틔우는 입김이 되기를 바라면서요. - P38

‘가족‘이 삶의 화두가 됐다. 마치 공기처럼 삶에서 한번도분리된 적 없는 그것. ‘보호‘보단 ‘제약‘이 연상되는 단어. 『반사회적 가족』이라는 책은 제목부터 나를 자극했다. 모두가느끼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금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았지. 예감대로였다. 저자는 가족의 폐단을 세가지로 꼽는다.
첫째, 부와 빈곤을 세습하는 것. 둘째, 사생활권이라는 미명 아래 개인의 개성과 인권을 억누르고 갈등을 은폐하는것. 셋째,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여성을 속박하는 것.
난 한줄한줄 빨려들었다. 흙수저·금수저란 말도 있듯이 부모의 능력에 따라 자식의 신분이 결정된다. ‘계급 배치의 강력한 기관‘으로 가족이 기능하지. 우리나라에서도 가정폭력은 뉴스의 단골 소재잖아. 부모는 자식을 독립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 통제하고 간섭하지. 사람들은 그래도 가족밖에 없다고들 말하지만, 가족에게 가장 큰 상처를 받는 경우도 허다한 게 현실이다.
특히 가족이 ‘여성을 모성 역할과 가사노동에 속박한다‘ - P41

는 내용에 아무래도 난 공감했다. 너희들 성장을 지켜보는일은 과한 축복이자 더없는 행복이었지만 그 일상을 떠받치는 노동과 일상은 혹독했다. 육아는 퇴근과 퇴직도 없다고 하는데, 그 피할 길 없음과 미룰 수 없음이 가장 억압적인점이었다. 어떤 좋은 직업도 자기 의지로 쉬거나 그만둘 수없다면 끔찍하겠지.
어쩌면 너희들에겐 엄마의 손길이 부족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일을 시작하고는 체력이 달려서 양육에 전념하지 못했지만, 어떤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해서 마음이 편한 건 아니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순간에도 엄마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은 떨쳐지지 않으니까. 읽고 쓰고 강의하는 순간순간에도 불쑥 엄마 자아가 튀어나와 당황하곤 했다. 엄마 일과 작가 일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느라 어느 하나도 제대로 누리기 어려웠지.
내가 ‘자취‘를 해볼까 하고 결심한 이유다. 실은 너희들이 자취 이야기를 할 때 힌트를 얻었어. 흔히 자녀들이 다 커서 독립하면 중년 여성은 집에서 홀로 ‘빈둥지증후군‘을 겪 - P42

는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어. 왜 엄마는 꼭 남겨진 자의 역할이어야 하는가? 나도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었고, 떠나보고 싶었다. 젊어서 누리지 못한자유를 이제라도 되찾고 싶은 마음 같은 거야. 내가 세운 자취의 목표는 두가지다.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고요한 단독자‘의 시간을 늦게라도 살아보는 것. 그리고 반사회적 가족』을 교본 삼아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중산층 가족을 가족 외부에서 비판적으로 사유해볼 기회를 갖는 것.
늘 현실은 이론보다 앞선다. 요즘 한국사회도 혈연 중심의 가족에 대한 신비화와 과대평가가 사라지고 있지. 이미 독신, 생활공동체, 동성가구 등 다양한 가구 형태가 늘어나고 있고, 굳이 가족이 아니더라도 관계를 만들고 연결되고자하는 인간의 열망은 더 기발하고 긴밀해지고 있는 것 같아. 나는 내 가족도 못 챙기는 사람이 되는 것만큼이나 내가족만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두렵다. 우선 가족 바깥을 향해 몸을 틀어본다. - P43

『욕구들』에서 저자는 ‘딸‘의 목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가 결코 갖지 못했던 것을 어떻게 나 자신에게 허용할 수 있어?" 가슴이 철렁하면서도 뻥 뚫리는 말입니다. ‘하지 마‘ 의 세계에서 엄마를 구원하는 멋진 문장이죠. 사랑눈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나중에‘라는 시간은 영영 도래하지 않으며 지금 자신이 원하는 바에 따라 행동해도 된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증여이고, 원함에 관해 아이들이 본받을만한 모범이 된다는 점에서, 동화책을 읽어주는 일에 비해 모자람 없는 어머니의 일이라고 믿어도 좋을 것입니다. - P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리고 세상 속으로 돌아가는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나머지 여섯 날에 힘을 내어 일하고, 슬픔을 견디고, 화를 내고, 해야 할 싸움을 이어나갈지도 모른다고요. 전통음악에 담긴 정서로 ‘한‘을 이야기할 때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너무 강렬한 개념이 아닌가 생각했었는데 조금씩 수긍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꾸 억울하게 죽는 사회에서, 낫기도 전에 또 쌓이는 이 슬픔과 좌절의 응어리는 다 어디로 갈까요?
안부를 묻기가 조심스럽습니다. 바로 지난 편지에서버거 값을 치르지 못해 곤란해하다 담배 세 갑과 물물교환이라는 신박하고도 유쾌한 해결책을 만나는 늦은 밤의혼비씨를 상상하며 웃었는데, 그 노점이 있던 장소가 이대원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니 이제 마음이 저릿합니다.
물론 저의 이태원에서도 수많은 즐거운 에피소드가 있었습니다. 대체 우리 중 누구에게 그렇지 않겠어요?
혼비씨는 무엇에 기대어서 이 시간을 견디고 있나요? 담요님은 담배가 더 늘진 않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디 사소하지만 도움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단단히 붙드시길 바랍니다. - P94

몸과 마음을 바닥에 질질 끌듯 조금 힘겹고 무겁게 11월을 통과하고 있습니다. 여러 일정과 약속들을 취소했고, 과수면과 불면 사이를 끝없이 왔다갔다하고 있고,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책들과 긴 드라마를 골라폭식하듯 읽고 보았습니다. 친구들을 만난 이틀을 빼고는근 한 달 동안 술은 조금도 마시지 않은 대신 아침마다 보이차를 마시기 시작했고, 6.1킬로그램의 하리보를 먹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때는 근처관악산에 오르기도 했는데, 이번만은 생각보다 산이 그리위로가 되어주지 못했어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나무들이 유난히 쓸쓸해 보여서, [슬픔의 위안] (론 마라스코·브라이언 셔프, 김설인 옮김, 현암사, 2019)에서 한번 읽은 뒤로 머릿속에 가시처럼 박혀버린 앤 섹스턴의 시구가 자꾸 떠오르고야 말았습니다.


누군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나무들까지도 알고 있네.
_앤 섹스턴, 「애도 Lament」 중에서 - P97

이런 죽음들을 겪을 때마다 여전히 무엇을 어디에 놔둬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제 몸과 마음부터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울다가, 오늘의 세번째 하리보 봉지를 뜯어 초록색 젤리를 골라먹는 데에 몰두하다가 잠들기 위해 수면제 한 알을 입에 넣다가, 관련된 건하나도 놓치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찾아 읽다가, 관련된건 하나도 보지 않겠다고 기를 쓰고 책이나 드라마 속으로 도망치다가, 문득문득 어리둥절해집니다. 이보다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가도 때로는 이보다는 더 고통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날에는 슬픔에 휘둘려 아무것도 못하는 제가 나약하게 느껴졌다가 어떤 날에는 변함없이 일상을 꾸려나가는 제가 잔인하게 느껴집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온전히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슬픔이고, 그래야 한다고 학습된 슬픔인지헷갈리기도 합니다. - P100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느끼는 고통에 대해충분히 말하고 귀 기울이며 서로에게 ‘고통의 곁‘이 되어주어야 개별적 슬픔이 모여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는 말을 믿으면서도, 상담 선생님께 힘든 마음을 털어놓다가 이런 시기에 감히 고통이라는 단어의 주어 자리에 제가잠깐이라도 앉는 게 가당키나 한지 부끄러움이 몰려와 갑 - P100

자기 상담을 끊기도 합니다. 그것은 한 달째 완전히 멈춰있는 제 SNS를 보고 괜찮은지 걱정돼서 보낸다는 온-오프 친구들의 안부메시지를 받을 때마다 드는 죄책감과비슷합니다. 이 일로 걱정의 목적어가 되는 건 고통의 주어일 때보다 몇 배 더 무언가를 훔쳐낸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래도 될까?‘라는, 슬픔 속에서 어떤 유의 당위나 윤리를 가늠하려는 감정들이야말로 제가 이 커다란 비극의 중심에서 실질적으로는 거리가 먼,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감정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제가 유가족이었을 때 느꼈던 슬픔은가늠의 여지조차 없는 슬픔이었다는 걸 기억하고 있어요. 바깥의 사람이라는 이 거리는 온전한 공감을 불가능하게하겠지만, 이 거리가 가능하게 해주는 일을 하나씩 찾는게 애도의 시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슬퍼만 하는 시간에서 벗어나서요. - P1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꽃나무

성취 앞에서 저렇게 절제할 수 있을까 
시련 앞에서 저렇게 겸허할 수 있을까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
교만하지 않는 백매화처럼


단 한잎도 붙잡지 못하고 날려 보내면서
비통해하지 않는 산벚나무처럼

어떤 꽃나무


이쁜 날들은 갔어

그래도 널 사랑해

네가

어떤 꽃나무였는지 아니까

라일락



라일락은 왜 거기 있을까


사월이
간절하게 불러서
거기 있다


너는 왜 거기 있는가

좋은 나무



가지마다 굵은 열매를 매달아
주인이 흡족해하는게
자랑인 나무가 있다
이른 봄부터
희고 수려한 꽃을 피우는 게
생의 기쁨인 나무도 있다
그런 나무들 사이에서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 먼저라고 믿는
나무가 있다
작고 조촐한 꽃밖에 못 피웠지만
울퉁불퉁 못생긴 열매만을 키웠지만
향기 짙은 열매를 키웠다는
뿌듯함 하나로 사는 나무가 있다
잘난 나무는 아니지만
늘 좋은 나무가 되려고 애쓰는 나무
좋은 나무가 되는 일이 먼저라고 믿는
나무가 있다

철쭉꽃



철쭉꽃이 아침에 마시는 바람을
나도 마신다

철쭉꽃을 흔드는 바람에
나도 나부낀다

흔들린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사월에서 오월로 넘어가는
바람 좋은 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황선우


멋있으면 다 언니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여자 둘이살고 있습니다 퀸즐랜드 자매로드』를 김하나와 함께 썼다. 팟캐스트 <여둘: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를 제작, 진행하고 있다.


"우리가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편지 저편 ‘혼비씨‘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고 꽃이 피었다가 졌다.
시간이 사람에게 하는 일이 그사이 어김없이 우리에게 일어났다. 풍경 사이로 끊임없이 일상의 피로를 해결되지 않는문제들을 늙음과 죽음을, 죽은 사람들에 대한 생각을 흘려보내는 것 말이다."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을 쓰고, 전국축제자랑을 박태하와 함께 썼다. 못 견디게 쓰고 싶은 글들만을 천천히 오래 쓰고 싶다.


"당연히 최선을 다하겠지만 죽을 만큼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것을 실현하는 여러 방법이 있을 텐데, 그중 ‘함께 나눠서 하는 것‘도 있다는 것을, 꼭 물리적인 몫의 나눔이 아니더라도함께 꾸준히 일상을, 웃음을, 마음을 나누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잊지 않으려고 한다."

어려서부터 호칭 없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게 자연스러운 문화권 사람들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한국어 호칭이 상대방에 대한 나의 태도를 담는 그릇으로서 기능하는 것에 익숙해진 저 같은 사람은 머리로는 그렇지 않아도 마음에서는 이게 분리가 칼같이 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공식석상에서는 "김연경씨"라고 말하겠지만, 제 마음속에서는 ‘연경언니‘ ‘연느님‘인 것처럼 말이에요. 이럴 때 저에게 "김연경씨"는 의미의 누수, 존경심의 누수를 넘어 정체성의 누수가 생기는 단어가 되어버리고 말아요. ‘언니‘나 ‘선배‘ 같은 호칭에 이미 새겨진 위계가 싫으면서도, 호칭을 버리는 것이 언어적 평등의 시작임을 알면서도, 나이나 직함과 전혀 관계없이 순수한 존경심을 담아낼 명명법을 찾고 싶은 관습적인 욕망 또한 남아 있어서, 찾다보면 결국 위계적 호칭으로 돌아가게 되는 이 도돌이표. 현재우리가 갖고 있는 언어 체계 안에서는 존경심을 담는 호칭으로 ‘언니‘나 ‘선배‘의 의미를 확장하는 것 이상의 대안은 없으니까요. - P21

재미있냐고 자꾸 물어보는 선생님이 다음달 말일 자유 탁구 시간에 다른 반 풋내기들과 친선 경기를 가져보자고 하셔서 저희는 약간 흥분 상태입니다. 승부 vs. 상부상조의 혼란에다 경쟁자 vs. 같은 팀 복식조 파트너로서의 혼합된 감정까지 더해져 아주 파란만장한 한 달을 보내게 될 예정입니다. 어쨌거나 이 지름 40밀리미터짜리 가볍디가벼운 공이 만들어내는 ‘탕타당타당‘과 ‘통토동토동‘에 집중하는 동안만은 많은 시름을 잊고 있습니다. 천둥같이 발 구르는 소리에 놀라고 분하기도 하지만요.
누군가는 속이 빈 나무를 두드리는 데 집중하며, 또다른 누군가는 속이 빈 플라스틱 공을 쫓아다니는 데 몰두하며 자신만의 번뇌를 다스리는 거겠죠. 이 목- 탁 - 구가 어디로 나아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당분간은지속될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도재미가 있거든요. 재미와 (얄)미움이 승부와 상부상조처럼 공존하는 탁구입니다. - P55

혼비씨의 편지를 읽으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진되었다고, 지금 상태가 번아웃이 맞다고 혼비씨가 알아차렸다는 점 말입니다. 그걸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일 거예요. 일을 의식적으로 줄이는 것도, 작정하고 쉴 틈을 만드는 것도, 새로운 취미생활을 시작해보거나 뭐든 에너지를 채우는 활동도 말이죠.
한국 사회의 많은 일하는 사람들처럼 저 역시 번아웃으로 짐작되는 시기를 지나온 것 같아요. 짐작이라 말하는 건 그때 나에게 벌어지는 일이 뭔지 당시에는 스스로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험들은 한창 그가운데 있을 때는 진행중이라는 게 보이지 않다가 지나가고 나서야 그 시간이 뭐였는지, 그때 내가 어땠는지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 P6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