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힘이 없고 힘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치기 쉽다는 의미에서 취약한 vulnerable 상태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그때의 나뿐 아니라많은 여자아이나 젊은 여성이 이런 열망을 품는 듯하다. 이것은 남자를 갖고 싶은 갈망인 동시에 스스로 남자가 되고 싶은 열망, 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힘이 있는 곳에 있고 싶은 열망, 힘 있는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 힘에 정신적으로 매달리거나 아예 내 몸을제물로 바침으로써 힘이 내게도 옮아 오기를 바라는 열망이다. 갑옷이 되고 싶지, 그 속에 든 취약한 것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열망이다. - P96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에 속하는가? 이것은 보통 정치적 입장이나 가치를 묻는 질문이지만, 때로는 사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스스로 딛고 설 곳이 있다고 느끼는가? 당신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보기에 정당한가? 뒤로 물러날 필요도남을 공격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신에게는 그곳에 있을 권리, 참여할 권리, 이 세상이나 그 방이나 그 대화나 역사적 기록이나 의사 결정 기구에서 공간을 차지할 권리, 요구와 욕구와 권한을 가질권리가 있는가? 당신은 남들에게 자신을 해명하거나 사과하거나 - P97
변명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발밑에서 땅이 꺼질까봐, 코앞에서 문이 닫힐까봐 두려운가? 남들로부터 배척당했거나, 지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면 배척당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가?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말했을 때, 당신 스스로도 듣는 사람들도 그것을 공격이나 부담으로 간주하지 않고받아들이는가? - P98
이 문제를 결정짓는 한 요인은 사회에서 당신의 위치, 그리고으레 이런 문제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 인종, 계급, 젠더, 성적 지향 등이다. 또다른 요인은 자신감confidence 이다. 하지만 사실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이 성질을 가리키는 말치고 너무 번지르르하게 들린다. 그보다는 확신conviction이나 신념faith 이 더 나은 표현일 것 같다. 자신의 존재와 권리에 대한 신념. 자신의 견해와 진실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 욕구에 대한 신념. 자신이 선 곳이 자신의 자리라고믿는 신념.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신념. 이 신념들을 빠짐없이다 가진 사람은 드문 듯하다. - P98
어쩌면 나는 대답보다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공간은 어디인가? 당신은 어디에서 환대받는가? 당신에게 주어진 공간은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어디에서 저지당하는가? 길거리에서, 아니면 직업에서, 아니면 대화에서? 우리가세상에서 겪는 갖가지 분투를 제각기 자기 영토를 방어하거나 남의 영토를 합병하려는 영역 다툼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각자에게 허락된 공간과 거부된 공간의 차이가 말하고, 참여하고, 돌아다니고, 창조하고, 정의하고, 이길 공간이 얼마나 주어졌는가하는 차이가 사람들 간의 여러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 P99
라가 되는그 와중에도 나는 작가가 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주장하고, 문화라는 대화에 참여할 자격을 얻고, 내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 다른 경쟁도 벌여야 한다는 뜻이었고, 길거리에서의 위협 때문에 늘 두려움과 긴장에 시달리던 시절을 살아낸 직후에 나는 그런 싸움들도 벌이게 될 터였다. 나는 또 삶을 삶답게 살려고 애썼고, 삶답게 산다는 데에는 사랑도 포함되었으니, 그것은 곧 내가 상대에게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마음을 끌고, 나도상대에게 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가끔은 그 일이 즐거웠다. 가끔은 남자들도, 내 몸도, 나를 드러내는 일도, 사람들 앞에서 시간을보내는 일도 즐거웠다. 하지만 전쟁은 그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 P100
내가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위험과 잠재적 피해에 노출되었고, 수치심과 결점에 노출되었고,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이든, 노출되었다. 자신의 몸과 움직임과 소속감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나와 같은 젠더의 몸을갖는다는 것은 약점이자 수치인 듯했다. 그때 이 문제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요즘도 나는 몸을 방어할 방법을 궁리하고 20대 때 꿈꿨던 갑옷 같은 것을 상상한다. - P101
사실 진짜 문제는 몸 자체가 아니다. 남들이 우리 몸을 가차없이 검토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자라는 점이다. 혹은 남자에게종속된 여자라는 점이다. 나는 한때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여성의 몸의 기능과 형태에 대해서 품었던 깊은 수치심을 담뿍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종종 어머니의 몸을, 나중에는 내 몸을, 가끔은지나가는 여자들의 몸까지 시시콜콜 비판했던 것은 그 수치심을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우리 문화에서 드물기는커녕 일상적인 요소였다는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문화는 몸에 집착했다. 그 시절에는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정밀한 측정과 사이즈로 계량했다.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만족시키면 한없는 보상이 따를 테지만 만족시키지 못하면 끝없는 처벌이 따를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결국에는 모두를 처벌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 P103
우리는 남자를 만족시키도록 교육받았고, 그 탓에 스스로를만족시키기가 어려웠다. 세상은 우리에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욕망은 거부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내 몸은 외로운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늘 집 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자주 다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SF소설에서처럼 인간이 통에 든 뇌로만존재한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몸은 즐거움과 연결과 활력의 도구이자 존재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어쩌다 우리가 그 속에 처박히고만 가련한 무언가라고 여겼다. 그러니 내가 말랐던 것은 놀라운일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말랐다는 이유로, 공간을 최소한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거의 사라질 지경이라는 이유로 칭찬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여자들이 적게 먹음으로써 마치 영토를양도하는 나라처럼, 퇴각하는 군대처럼 사라지다가 결국 존재하기를 그치고 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P104
여윈 것, 딱딱한 몸을 갖는 것, 부드러운 살보다 단단한 뼈에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에는 금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상태는 생물체가 살기 위해서 수행할 수밖에 없는 지저분하고 질척하고 질금거리는 일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자기 몸을 몸 밖에서, 덜 유약하고 덜 유연한 다른 장소에서 지켜보는 듯한 상태다. 육신의 필멸성과 육체적 쾌락을 경멸하는 듯한 상태다. 남들에게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꼬투리 잡힐 일은 없는 상태다. 즉 마른몸은 부드럽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트집 잡히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다. 그리고 이 부드러움 Soft 이라는 단어에는 살이 물렁하고 푹신하다는 뜻과 도덕적으로 물러서 심약하다는 뜻이 둘 다 있으니, 이 경우에는 음식을 먹고 공간을 차지하는 행위가 심약함으로 이어진다고 간주되는 셈이다. - P107
여자의 몸은 건강할 때는 보통 부드럽다. 최소한 몇몇 부위라도 그렇다. 그런데 만약 부드러움이 도덕적 실패를 뜻하고 체질량이 낮아 딱딱한 몸이 미덕을 뜻한다면, 부드러움은 여자가 틀리는 또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따라서 여자들은 잘못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굶는다. 록산 게이Roxane Gay는 「헝거 사이행성 2018에서 이렇게말했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공간을 차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설령 남들의 눈에 보이더라도 귀에는 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보일 때도 남자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 세상은 여자들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사실을 목청껏 말하고 또 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에 저항해야 한다." - P108
가장 혹독하게 관습적인 형태의 여성성, 그것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행위다. 남자들에게 더 많은 공간을 내주기 위해서 여자가삭제되고 침묵하는 행위다. 그 공간에서 여자의 존재는 공격으로간주되고, 여자의 비존재는 우아한 순응으로 간주된다. 그런 전제가 우리 문화에 수많은 방식으로 깃들어 있다.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는 개인정보 보호용 질문의 답으로 사용자의 어머니의 결혼 전성을 묻곤 한다. 어머니의 원래 성은 비밀스러운 것, 삭제된 것, 남편성을 따른 순간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여자가 결혼하면서 자기 성을 버리는 일이 예전만큼 보편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결혼한 여자가 자식에게 자기 성을 물려주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이 또한 여자들이 사라지는 한 방법, 혹은 애초에 나타나지 못하는 한 방법이다. - P110
인식은 현실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자면 한둘이 아니겠지만, 당장 떠오른 것을 몇가지 말해보겠다. 의학계는 심근경색을남자들에게 주로 드러나는 증상 위주로 서술해왔다. 그러니 여자들이 주로 겪는 증상은 간과되기 쉬웠고, 그래서 많은 여자가 죽었다. 자동차 충돌 테스트용 인체 모형은 남성의 몸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차량의 안전 설계가 남자의 생존에 유리하게끔 이뤄졌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여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시된 감옥 실험은 유명하다. 그런데 그 내용을보면, 엘리트 대학 남학생들의 행동을 인간 전반의 행동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 실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영국인 남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인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1954년 소설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도 인간 행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어온 이야기다. 남자가 그렇게 모두를 대표한다면, 여자는 아무도 아니었다. - P112
장소에 이름을 붙일 때 여자가 아니라 (주로 백인) 남자의이름을 따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장소명을 모두 여자 이름으로 바꿔서 지도를 그려보는 프로젝트를 했던2015년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자란 세상에서 인명을딴 지명은산, 강, 마을, 다리, 건물, 주, 공원 등등―거의 모두 남자 이름이고 거의 모든 동상은 남자 동상이었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자 동상은 비유적인 존재를 구현한 것일 뿐 자유의 여신, 정의의 여신-실제 사람은 아니었다. 주변 경관에 여자이름을 딴 장소와 여자 동상이 흔했다면, 내게도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상당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름은 없었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 P113
그것은 내 미래가 미래가 없는 미래이자 더 나아갈 곳이 없는미래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현재에 일으키는 감정이었다. 지금끔찍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끔찍할 것이라는 확신, 지금이라는 순간이 늘 아무 지형지물 없이 밋밋하기만 한 평원일 것이라는 확신, 그 평원은 영원히 이어질 테고, 한숨 돌리게 하는 숲은 없을 테고, 불쑥 솟아난 산도 없을 테며,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나를 받아들여주는 문 따위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비롯한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그런가 하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테고 기쁜 일은 나를 배신할 테며 무서운 무언가가숨어서 나를 기다린다는 두려움이 희한하게 공존하는 상태였다. - P114
나는 열성적으로 읽었고, 몽상했고, 도시를 쏘다녔다. 그것은생각 속을 쏘다니는 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내 생각 자체가 늘 쏘다녔다. 대화, 식사, 수업, 일, 놀이, 춤, 파티 도중에도 생각은 자꾸만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한곳에 머물면서 사고하고, 숙고하고, 분석하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관련성을 쫓고, 새로운 의견을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생각은 자꾸만 내 덜미를 붙잡아서 처한 상황으로부터 멀리 함께 달아났다. 나는 대화 도중에 사라졌다. 지루해서 그럴 때도 있었지만, 상대의 말이 너무 흥미로워서 머리가 그생각을 쫓아가는 바람에 상대의 다른 말을 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나는 긴긴 몽상 속에서 살았다. 몽상이 끊이지 않고 며칠씩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것은 고독이 주는 한가지 선물이었다. - P117
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도 궁금했다. 어떤 때는 꿈이 조바심을 부려서 그런 것 같았다. 여기서 저기로 넘어갈 때 그 사이의공간을 지우고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탈출인 것 같았다. 또 어떤 때는 그것이 재능이었다. 그리고 재능이란것이 간혹 그렇듯이, 그 재능 때문에 나는 남들과 동떨어진 존재가되었다. 보통은 문자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날 줄아는 사람인데다가 보통 혼자 날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남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거나 남을 데리고 날기도 했다. - P119
그것이 글쓰기와 관계있지 않을까, 작가가 된다는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이제돌아보니, 왜 그것을 읽기의 은유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다. 내가읽는 법을 배운 뒤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쳐서 쉼 없이만성적으로 수행한 활동이 바로 읽기였는데 말이다. 읽기란 곧 내가 책 속에 있는 것, 이야기 속에 있는 것, 내 삶과 내 세계가 아니라 아니라 타인의 삶과 상상의 세계에 있는 것, 내 몸과 인생과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어쩌면 문제는땅으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P120
책은 새이자 벽돌이다. 나는 문 닫은 주류 판매점 앞에서 하나씩 훔쳐 온 플라스틱 상자를 착착 쌓아서 그 속에 낡은 페이퍼백책들을 꽂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찌어찌 나무 책장을 장만하면, 상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다놓았다. 나의 새들은 떼를 이뤘다. 나중에는 줄줄이 늘어선 책장 때문에 복도가 좁아졌다. 방도 반쯤책장으로 찼다. 그러고도 남은 책들이 책상 위에도 다른 바닥 위에도 불안정한 기둥으로 쌓였다. 우리는 집을 책으로 채우는 것처럼 독서로 마음을 채운다. 책이라는 물체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서 상상력의 장비가 되어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독서로써 나만의 문헌을 구축했고, 세상이라는 지도에서 기준점이 되어줄 사실들을 모았고,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도구들을 얻었 - P131
나는 물체로서의 책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상자이자새이자 세상으로 난 문인 책은 여전히 마법처럼 느껴진다. 요즘도서점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몹시 원하거나 필요한 무언가로 열리는 문을 막 넘어서는 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끔은 정말로 그런 문이 나타난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을 새롭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패턴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뜻밖의 도구를 얻는다는 점에서, 말의 아름다움과 힘을 느낀다는 점에서 계시와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목소리와 생각과 가능성을 만나는 일, 작게든 크게든세상을 좀더 조리 있게 이해하는 일, 세상의 지도를 좀더 넓히거나빈 곳을 메우는 일. 이런 일이 우리에게 주는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칭송해야 한다. 패턴과 의미를 찾는 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깨달음은 다행히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즐거움도 되풀이된다. - P132
"나는 글 읽는 법을 배운 해부터 죽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바람이 명확했지만 남에게 말하진 않았는데, 말했다가는 비웃음을 사거나 사기를 꺾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서였다. 20대까지는 학교숙제 이외의 글을 거의 쓰지도 않았다. 그래도 숙제로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 적은 가끔 있었다. 나는 다만 읽었다. 걸신들린 듯이 읽었다. 고전이든, 위로가 되는 책이든, 불편한 책이든, 현대 소설이든, 대중소설이든, 역사책이든, 신화든, 잡지든, 리뷰든 뭐든읽었다. 위로를 주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내 처지 혹은 나와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의 처지를 제대로 깨닫게 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위안을 주는 책도 있었다. 외롭고 불안한 것이 나 혼자가 아님을 아는 데서 오는 위안이었다. - P134
그글들덕분에 나는 여러가지가 섞여도 된다는 것,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번갈아 나와도 된다는 것, 서사가 간접적일 수 있다는 것, 산문도 시처럼 주제에서 주제로 건너뛰거나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배웠다. 장르란 선택일 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물론 내가장르들 사이의 벽을 뚫을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는 그로부터10년이 더 걸렸다. - P136
하지만 내가 갈구한 소멸도 있었다.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아니었고, 그 비존재의 상태를 약물처럼 갈구하며 삼켰다. 그 상태일 때 나는 부재하는 목격자였다. 그 세계 속에 있지만 등장인물은아닌 존재, 혹은 모든 단어이자 길이자 집이자 나쁜 징조이자 버려진 희망이었다. 책에 빠져 산 수천시간, 수년 동안 나는 모든 사람이었고, 아무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모든 곳에 있었다. 나는 안개였고, 연무였고, 박무였다.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 - P142
어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 방식으로 나를 잃음으로써 처음엔 아이로 다음엔 성인 여자로 존재하는 일의 버거움을, 나라는 아이와나라는 성인 여자로 존재하는 일의 버거움을 잠시나마 잊는 사람이었다. 흩어지고 뭉치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다양한 시대와 공간을, 세계와 세계관을 떠다녔다. 내가 작품을 숙지한 시인으로는 첫시인이었던 T. S. 엘리엇T. S. Eliot의 시구가 떠오른다. 그는 "당신이만나는 얼굴들을 만날 얼굴을 준비할 시간은 있으리라고 말했다. 혼자 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얼굴 없는 자였고, 모든 사람이었고, 특정 사람이었고, 한계가 없었고, 다른 곳에 있었고,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나도 사실은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얼굴과 자아와 목소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그 유예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다만 순간들이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다가 잠깐씩 쉬었던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생활이었고 내내 그렇게 지내다가 간간이 사람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 P143
"나는 책 속에서 살았다. 독서는 흔히 한 책을 골라서 그 속을처음부터 끝까지 여행하는 일로 묘사되지만, 내 경우에는 그것은물론이거니와 아예 그 속에 터를 잡고 산 책들도 있었다. 몇번이나 다시 읽었던 책들, 그러고는 이후에도 종종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 작가의 생각과 목소리를듣고 싶어서 아무 쪽이나 펼쳐 들곤 한 책들이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의 소설들이 그랬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어스시 Earthsea 시리즈, 프랭크 허버트 Frank Herbert의 「」 Drune, 더 나중에는E. M. 포스터E. M. Forster, 윌라 캐더, 마이클 온다치 Michael Ondaatje, 어른이 된 후 다시 읽은 몇몇 동화책, 더 이전에는 문학적 가치가 미미한 숱한 소설들이 그랬다. 사방 지리를 속속들이 아는 그 영토들속을 나는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줄거리를 알고자 딱 한번 읽고 마는 책에서는 낯선 감각이 보상이라면, 그 영토들에서는 친숙함이보상이었다. - P144
나는 언어의 강과 바다를, 그 주술적 힘 속을 헤엄쳐 다녔다. 전래동화 중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제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주술이란 우리가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말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가 세상을 만들고 우리를 그 속으로 데려간다는 것, 은유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직유가 다리를 놓는다는 것을압축적으로 표현한 한 예다. 책을 통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잘 표현된 대화와 생각을엿들을 수 있었다. 글에는 하지만 체온이 없었다. 글에는 내 몸을 만져줄 몸이없었다. 그리고 글은 영원히 나를 알지 못할 터였다. 책으로 사는삶에는 내가 깃들어볼 수 있는 여러 존재와 정신과 꿈이 있었고, 상상력 풍부한 가상의 내 존재를 확장시킬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비존재의 삶이었다. - P145
대학원에서 나는 엄청나게 귀중한 것을 배웠다. 기지를 총동원하여 정보를 찾는 법, 마감을 엄격하게 지키는 법, 이야기를 구성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언어를 엄밀하게 써야 하고, 데이터를 정확하게 써야 하고, 독자와 주제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각오를 새겼다. - P148
나는 순진하게도 그 비범한 작가를 다룬 책이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찾아보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버먼의 작품 세계를 조망한얇은 전시 도록이 한권 있을 뿐 책은 한권도 없었다. 바로 내가 몇년 뒤에 그 책을 내 나름대로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논문 주제로 버먼을 선택했다. 저널리즘 전공자가뉴스와 그렇게나 먼 주제로 논문을 쓰는 것이 통상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버먼은 유일하게 응한 인터뷰였다고 알려진 인터뷰의녹음 자료를 없애버린 뒤 1976년에 이미 죽었기에, 나는 남은 기록과 그가 어울렸던 예술가 친구들과의 인터뷰로 많은 부분을 재구성해야 했다. 내가 우연히 미술관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이미지를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 논문을 쓰게 되었다는 우연의연쇄를 떠올리면, 그 시절에 와인병을 잘 딸 줄 몰랐던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 P153
사람들은 글쓰기를 한번에 한편씩 무언가를 지어내는작업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글은 그것을 쓰는 사람으로부터,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진정한 목소리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거짓된 목소리와 틀린 말을 버려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글을 쓰는 작업에는 그보다 더 큰 작업, 즉 먼저 자신이 쓰려는 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작업이 선행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과정을 형식화한다. 목소리를 낼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 어떤 가치와관심사와 우선순위가 자기 앞날과 자아를 형성하도록 만들지 결정하는 과정이다. 글을 쓰려면 내가 어떤 말투를 취할지, 어떤 표현을 쓸지, 재밌게 쓸지 심각하게 쓸지 둘 다 할지 등등을 정해야 한다. 결과가 의도와 달리 나올 때도 많다. 막상 쓰고 보니 자신이 애초 의도와는 다른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사람임이 드러나는 것이다(한 작가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에 작가 자신도 잘모르는 다른 사람, 그의 예상과는 다른 관심사와 말투를 가지고서그를 찾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묘사하는 방식에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어떤 윤리가 담겼는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주제가 무엇인지, 달리 말해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발견하게 된다. 흔히 문체니 목소리니 어조니 하고 불리는 것을 발견하게 - P154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이면에 자아의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한 디프리마의 선언이 담긴 유명한 시 장광설」Rant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저 시구로부터 좀더 내려가서 이런 대목이나온다.
정신적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편들지 않을 방법은 없다 시poetics를 갖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배관공이든, 제빵사이든, 선생이든
당신은 그 일을 의식적으로 당신의 세계를 만들고자 혹은 만들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그 시절에 내가 여러 사람에게 말할 때, 종종 친구 하나에게말할 때도 썼던 목소리는 수백 킬로그램의 갑옷을 걸친 목소리, 감정이라면 그 어떤 감정도 직접적으로 말할 줄 모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거나 수많은 필터를 거쳐서 느꼈기 때문에, 내가 어떤 감정에 휘둘리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그 목소리, 그것은 내가 자라면서 익히 접하고 모방하려고 애쓰고그러다 쓰게 된 목소리였다. 그것은 영리하고 쿨하고 날카롭고 유쾌하려고 애쓰는 목소리, - P155
내 목소리에는 다른 종류의 유머도 있었다. 유머라기보다 묵직한 위트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비비 꼬인 목소리, 인용과 말장난과 관용구의 변주로 가득한 목소리, 실제 사건과 내느낌을 에둘러서, 아주 멀리 에둘러서 말하는 목소리였다. 발언은간접적이고 참조적일수록 좋다는 듯이, 내가 직접 진실히 느낀 반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였다. 영리함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몰인정한 태도는 상대뿐 아니라 말하는나 자신의 가능성도 해친다는 사실, 진심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긴 시간이흐른 뒤였다. 그 시절의 내 목소리는 아이러니를 많이 이용했고, 본심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방식을 썼다. 그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한 말은 사실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한 말일 때가 많았다. 내 진짜 생각과 느낌을 잘 모르면서 말할 때가 많았다. - P15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