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주제가 단순 명료한 문장을 요구할 때는 단순 명료하게쓸 줄 아는 언어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때로는 명료하기 위해서복잡성이 필요하다. 나는 때로 더는 줄일 수 없는 표현이 있다고믿고, 어떤 심상을 일으키거나 환기하는 언어가 있다고 믿는다. 쭉뻗은 고속도로 같은 문장보다 고불고불 오솔길 같은 문장이 좋다.이따금 경치를 감상하려고 둘러 가거나 잠시 멈춰서 주변을 둘러보는 길 같은 문장이 좋다. 오솔길은 포장도로가 가로지를 수 없는가파르고 굴곡진 지형도 누빌 수 있다. 가끔은 탈선으로 불리는 경로를 택해야만 배에서 떨어진 사람을 건져낼 수 있는 법이다. 나는영어라는 언어가 다양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되기를 바랐다. 글이 풍요하고 미묘하고 환기적이기를 바랐고, 사실과 견고한 사물만이 아니라 안개와 분위기와 희망까지 묘사하기를 바랐다. 온 세상이 패턴과 통찰과 유사성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지도를 그리고 싶었다. 세상이 부서지기 전에 존재했으나 지금은 사라진 패턴들을 발굴해내고 싶었고, 그 부서진 조각들로부터만들어낼 수 있는 새로운 패턴들을 알아내고 싶었다. p158, 159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은힘이 없고 힘에 접근할 수 없는 상태, 마음이 열려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다치기 쉽다는 의미에서 취약한 vulnerable 상태를 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랬다. 그때의 나뿐 아니라많은 여자아이나 젊은 여성이 이런 열망을 품는 듯하다. 이것은 남자를 갖고 싶은 갈망인 동시에 스스로 남자가 되고 싶은 열망, 힘과 하나가 되고 싶은 열망, 힘이 있는 곳에 있고 싶은 열망, 힘 있는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 힘에 정신적으로 매달리거나 아예 내 몸을제물로 바침으로써 힘이 내게도 옮아 오기를 바라는 열망이다. 갑옷이 되고 싶지, 그 속에 든 취약한 것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열망이다. - P96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에 속하는가? 이것은 보통 정치적 입장이나 가치를 묻는 질문이지만, 때로는 사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스스로 딛고 설 곳이 있다고 느끼는가?
당신이라는 존재가 스스로 보기에 정당한가? 뒤로 물러날 필요도남을 공격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신에게는 그곳에 있을 권리, 참여할 권리, 이 세상이나 그 방이나 그 대화나 역사적 기록이나 의사 결정 기구에서 공간을 차지할 권리, 요구와 욕구와 권한을 가질권리가 있는가? 당신은 남들에게 자신을 해명하거나 사과하거나 - P97

변명해야 한다고 느끼는가? 발밑에서 땅이 꺼질까봐, 코앞에서 문이 닫힐까봐 두려운가? 남들로부터 배척당했거나, 지금이라도 모습을 드러내면 배척당할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권리를 주장할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가? 원하거나 필요한 것을 말했을 때, 당신 스스로도 듣는 사람들도 그것을 공격이나 부담으로 간주하지 않고받아들이는가? - P98

이 문제를 결정짓는 한 요인은 사회에서 당신의 위치, 그리고으레 이런 문제에 영향을 미치기 마련인 인종, 계급, 젠더, 성적 지향 등이다. 또다른 요인은 자신감confidence 이다. 하지만 사실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이 성질을 가리키는 말치고 너무 번지르르하게 들린다. 그보다는 확신conviction이나 신념faith 이 더 나은 표현일 것 같다.
자신의 존재와 권리에 대한 신념. 자신의 견해와 진실에 대한, 자신의 반응과 욕구에 대한 신념. 자신이 선 곳이 자신의 자리라고믿는 신념. 자신이 중요하다고 믿는 신념. 이 신념들을 빠짐없이다 가진 사람은 드문 듯하다.  - P98

어쩌면 나는 대답보다 질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공간은 어디인가? 당신은 어디에서 환대받는가?
당신에게 주어진 공간은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어디에서 저지당하는가? 길거리에서, 아니면 직업에서, 아니면 대화에서? 우리가세상에서 겪는 갖가지 분투를 제각기 자기 영토를 방어하거나 남의 영토를 합병하려는 영역 다툼이라고 상상해보자. 그렇다면, 각자에게 허락된 공간과 거부된 공간의 차이가 말하고, 참여하고,
돌아다니고, 창조하고, 정의하고, 이길 공간이 얼마나 주어졌는가하는 차이가 사람들 간의 여러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 P99

라가 되는그 와중에도 나는 작가가 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내게 할 말이 있다고 주장하고, 문화라는 대화에 참여할 자격을 얻고, 내 목소리를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그것은 다른 영역에서 다른 경쟁도 벌여야 한다는 뜻이었고, 길거리에서의 위협 때문에 늘 두려움과 긴장에 시달리던 시절을 살아낸 직후에 나는 그런 싸움들도 벌이게 될 터였다. 나는 또 삶을 삶답게 살려고 애썼고, 삶답게 산다는 데에는 사랑도 포함되었으니,
그것은 곧 내가 상대에게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마음을 끌고, 나도상대에게 끌려야 한다는 뜻이었다. 가끔은 그 일이 즐거웠다. 가끔은 남자들도, 내 몸도, 나를 드러내는 일도, 사람들 앞에서 시간을보내는 일도 즐거웠다. 하지만 전쟁은 그 일을 어렵게 만들었다. - P100

내가 몸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생각되는 때도 있었다. 몸이 있기 때문에 나는 위험과 잠재적 피해에 노출되었고, 수치심과 결점에 노출되었고, 타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울릴 것인가 하는 문제에,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이든, 노출되었다. 자신의 몸과 움직임과 소속감에 대해서 자신감이 있는 사람들의 기분은 어렴풋이 상상해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나와 같은 젠더의 몸을갖는다는 것은 약점이자 수치인 듯했다. 그때 이 문제에 얼마나 시달렸던지, 요즘도 나는 몸을 방어할 방법을 궁리하고 20대 때 꿈꿨던 갑옷 같은 것을 상상한다. - P101

사실 진짜 문제는 몸 자체가 아니다. 남들이 우리 몸을 가차없이 검토한다는 점이다. 우리가 여자라는 점이다. 혹은 남자에게종속된 여자라는 점이다. 나는 한때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가 여성의 몸의 기능과 형태에 대해서 품었던 깊은 수치심을 담뿍 물려받았다. 아버지가 종종 어머니의 몸을, 나중에는 내 몸을, 가끔은지나가는 여자들의 몸까지 시시콜콜 비판했던 것은 그 수치심을누그러뜨리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우리 문화에서 드물기는커녕 일상적인 요소였다는 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우리문화는 몸에 집착했다. 그 시절에는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을 정밀한 측정과 사이즈로 계량했다. 우리에게 그 기준을 만족시키면 한없는 보상이 따를 테지만 만족시키지 못하면 끝없는 처벌이 따를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말해놓고 결국에는 모두를 처벌했다. 왜냐하면 그 기준은 누구도 만족시킬 수 없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 P103

우리는 남자를 만족시키도록 교육받았고, 그 탓에 스스로를만족시키기가 어려웠다. 세상은 우리에게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존재와 욕망은 거부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도망쳤다. 내 몸은 외로운 집이었다. 하지만 내가 늘 집 안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는 자주 다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SF소설에서처럼 인간이 통에 든 뇌로만존재한다면 좋겠다고 상상했다. 몸은 즐거움과 연결과 활력의 도구이자 존재의 필수 조건이 아니라 어쩌다 우리가 그 속에 처박히고만 가련한 무언가라고 여겼다. 그러니 내가 말랐던 것은 놀라운일이 아니었다. 여자들이 말랐다는 이유로, 공간을 최소한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거의 사라질 지경이라는 이유로 칭찬받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어떤 여자들이 적게 먹음으로써 마치 영토를양도하는 나라처럼, 퇴각하는 군대처럼 사라지다가 결국 존재하기를 그치고 마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 P104

여윈 것, 딱딱한 몸을 갖는 것, 부드러운 살보다 단단한 뼈에가까운 존재가 되는 것에는 금욕적인 측면이 있다. 그런 상태는 생물체가 살기 위해서 수행할 수밖에 없는 지저분하고 질척하고 질금거리는 일들로부터 벗어나 있는 듯 보인다. 자기 몸을 몸 밖에서, 덜 유약하고 덜 유연한 다른 장소에서 지켜보는 듯한 상태다.
육신의 필멸성과 육체적 쾌락을 경멸하는 듯한 상태다. 남들에게제 모습을 드러내면서도 꼬투리 잡힐 일은 없는 상태다. 즉 마른몸은 부드럽다는 이유로 남들에게 트집 잡히는 상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갑옷이다. 그리고 이 부드러움 Soft 이라는 단어에는 살이 물렁하고 푹신하다는 뜻과 도덕적으로 물러서 심약하다는 뜻이 둘 다 있으니, 이 경우에는 음식을 먹고 공간을 차지하는 행위가 심약함으로 이어진다고 간주되는 셈이다. - P107

여자의 몸은 건강할 때는 보통 부드럽다. 최소한 몇몇 부위라도 그렇다. 그런데 만약 부드러움이 도덕적 실패를 뜻하고 체질량이 낮아 딱딱한 몸이 미덕을 뜻한다면, 부드러움은 여자가 틀리는 또 하나의 방식인 셈이다. 따라서 여자들은 잘못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굶는다. 록산 게이Roxane Gay는 「헝거 사이행성 2018에서 이렇게말했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공간을 차지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설령 남들의 눈에 보이더라도 귀에는 들리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보일 때도 남자들을 만족시키는 방식으로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 대부분의 여자들이 이 사실을 안다. 세상은 여자들이 사라지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사실을 목청껏 말하고 또 말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대에 부응하려는 마음에 저항해야 한다." - P108

가장 혹독하게 관습적인 형태의 여성성, 그것은 끊임없이 사라지는 행위다. 남자들에게 더 많은 공간을 내주기 위해서 여자가삭제되고 침묵하는 행위다. 그 공간에서 여자의 존재는 공격으로간주되고, 여자의 비존재는 우아한 순응으로 간주된다. 그런 전제가 우리 문화에 수많은 방식으로 깃들어 있다. 은행과 신용카드 회사는 개인정보 보호용 질문의 답으로 사용자의 어머니의 결혼 전성을 묻곤 한다. 어머니의 원래 성은 비밀스러운 것, 삭제된 것, 남편성을 따른 순간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여자가 결혼하면서 자기 성을 버리는 일이 예전만큼 보편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결혼한 여자가 자식에게 자기 성을 물려주는 경우는 여전히 드물다. 이 또한 여자들이 사라지는 한 방법, 혹은 애초에 나타나지 못하는 한 방법이다. - P110

인식은 현실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자면 한둘이 아니겠지만, 당장 떠오른 것을 몇가지 말해보겠다. 의학계는 심근경색을남자들에게 주로 드러나는 증상 위주로 서술해왔다. 그러니 여자들이 주로 겪는 증상은 간과되기 쉬웠고, 그래서 많은 여자가 죽었다. 자동차 충돌 테스트용 인체 모형은 남성의 몸을 본떠 만들어졌다. 그것은 곧 차량의 안전 설계가 남자의 생존에 유리하게끔 이뤄졌다는 뜻이었고, 그래서 여자들의 사망률이 더 높았다. 1971년 스탠퍼드 대학에서 실시된 감옥 실험은 유명하다. 그런데 그 내용을보면, 엘리트 대학 남학생들의 행동을 인간 전반의 행동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고 가정한 실험이었다. 그보다 더 어린 영국인 남학생들에 관한 이야기인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의 1954년 소설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도 인간 행동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어온 이야기다. 남자가 그렇게 모두를 대표한다면, 여자는 아무도 아니었다. - P112

장소에 이름을 붙일 때 여자가 아니라 (주로 백인) 남자의이름을 따는 것은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런 장소명을 모두 여자 이름으로 바꿔서 지도를 그려보는 프로젝트를 했던2015년에 와서야 그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자란 세상에서 인명을딴 지명은산, 강, 마을, 다리, 건물, 주, 공원 등등―거의 모두 남자 이름이고 거의 모든 동상은 남자 동상이었다는 사실도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자 동상은 비유적인 존재를 구현한 것일 뿐 자유의 여신, 정의의 여신-실제 사람은 아니었다. 주변 경관에 여자이름을 딴 장소와 여자 동상이 흔했다면, 내게도 다른 여자아이들에게도 상당한 격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름은 없었고, 그것이 없다는 사실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없었다.  - P113

그것은 내 미래가 미래가 없는 미래이자 더 나아갈 곳이 없는미래일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현재에 일으키는 감정이었다. 지금끔찍한 일이 앞으로도 계속 끔찍할 것이라는 확신, 지금이라는 순간이 늘 아무 지형지물 없이 밋밋하기만 한 평원일 것이라는 확신,
그 평원은 영원히 이어질 테고, 한숨 돌리게 하는 숲은 없을 테고,
불쑥 솟아난 산도 없을 테며,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도록 나를 받아들여주는 문 따위도 없을 것이라는 확신으로부터 비롯한 감정이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그런가 하면 뭔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테고 기쁜 일은 나를 배신할 테며 무서운 무언가가숨어서 나를 기다린다는 두려움이 희한하게 공존하는 상태였다. - P114

나는 열성적으로 읽었고, 몽상했고, 도시를 쏘다녔다. 그것은생각 속을 쏘다니는 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내 생각 자체가 늘 쏘다녔다. 대화, 식사, 수업, 일, 놀이, 춤, 파티 도중에도 생각은 자꾸만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한곳에 머물면서 사고하고, 숙고하고, 분석하고, 상상하고, 희망하고, 관련성을 쫓고, 새로운 의견을받아들이고 싶었지만, 생각은 자꾸만 내 덜미를 붙잡아서 처한 상황으로부터 멀리 함께 달아났다. 나는 대화 도중에 사라졌다. 지루해서 그럴 때도 있었지만, 상대의 말이 너무 흥미로워서 머리가 그생각을 쫓아가는 바람에 상대의 다른 말을 못 듣는 경우도 많았다.
오랫동안 나는 긴긴 몽상 속에서 살았다. 몽상이 끊이지 않고 며칠씩 이어질 때도 있었다. 그것은 고독이 주는 한가지 선물이었다.
- P117

나는 것이 무슨 뜻인지 나도 궁금했다. 어떤 때는 꿈이 조바심을 부려서 그런 것 같았다. 여기서 저기로 넘어갈 때 그 사이의공간을 지우고 순식간에 장면을 전환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탈출인 것 같았다. 또 어떤 때는 그것이 재능이었다. 그리고 재능이란것이 간혹 그렇듯이, 그 재능 때문에 나는 남들과 동떨어진 존재가되었다. 보통은 문자 그대로 떨어져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날 줄아는 사람인데다가 보통 혼자 날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남에게 나는 법을 가르쳐주거나 남을 데리고 날기도 했다. - P119

그것이 글쓰기와 관계있지 않을까, 작가가 된다는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이제돌아보니, 왜 그것을 읽기의 은유로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다. 내가읽는 법을 배운 뒤로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바쳐서 쉼 없이만성적으로 수행한 활동이 바로 읽기였는데 말이다. 읽기란 곧 내가 책 속에 있는 것, 이야기 속에 있는 것, 내 삶과 내 세계가 아니라 아니라 타인의 삶과 상상의 세계에 있는 것, 내 몸과 인생과 시공간에 구속되지 않은 채 존재하는 것이었다.
나는 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생각해보니, 어쩌면 문제는땅으로 내려오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 P120

책은 새이자 벽돌이다. 나는 문 닫은 주류 판매점 앞에서 하나씩 훔쳐 온 플라스틱 상자를 착착 쌓아서 그 속에 낡은 페이퍼백책들을 꽂았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찌어찌 나무 책장을 장만하면,
상자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다놓았다. 나의 새들은 떼를 이뤘다.
나중에는 줄줄이 늘어선 책장 때문에 복도가 좁아졌다. 방도 반쯤책장으로 찼다. 그러고도 남은 책들이 책상 위에도 다른 바닥 위에도 불안정한 기둥으로 쌓였다.
우리는 집을 책으로 채우는 것처럼 독서로 마음을 채운다. 책이라는 물체가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와서 상상력의 장비가 되어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독서로써 나만의 문헌을 구축했고, 세상이라는 지도에서 기준점이 되어줄 사실들을 모았고, 세상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나를 이해하도록 해주는 도구들을 얻었 - P131

나는 물체로서의 책도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상자이자새이자 세상으로 난 문인 책은 여전히 마법처럼 느껴진다. 요즘도서점이나 도서관에 들어갈 때마다 내가 몹시 원하거나 필요한 무언가로 열리는 문을 막 넘어서는 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가끔은 정말로 그런 문이 나타난다. 그럴 때 나는 세상을 새롭게 볼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패턴을 발견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다루는 데 도움이 될 뜻밖의 도구를 얻는다는 점에서, 말의 아름다움과 힘을 느낀다는 점에서 계시와 희열을 느낀다.
새로운 목소리와 생각과 가능성을 만나는 일, 작게든 크게든세상을 좀더 조리 있게 이해하는 일, 세상의 지도를 좀더 넓히거나빈 곳을 메우는 일. 이런 일이 우리에게 주는 순수한 기쁨을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칭송해야 한다. 패턴과 의미를 찾는 일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런 깨달음은 다행히 되풀이되고, 그때마다 즐거움도 되풀이된다. - P132

"나는 글 읽는 법을 배운 해부터 죽 작가가 되고 싶었다. 바람이 명확했지만 남에게 말하진 않았는데, 말했다가는 비웃음을 사거나 사기를 꺾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서였다. 20대까지는 학교숙제 이외의 글을 거의 쓰지도 않았다. 그래도 숙제로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는 적은 가끔 있었다. 나는 다만 읽었다. 걸신들린 듯이 읽었다. 고전이든, 위로가 되는 책이든, 불편한 책이든, 현대 소설이든, 대중소설이든, 역사책이든, 신화든, 잡지든, 리뷰든 뭐든읽었다.
위로를 주는 책이 있는가 하면, 내 처지 혹은 나와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의 처지를 제대로 깨닫게 함으로써 다른 형태의 위안을 주는 책도 있었다. 외롭고 불안한 것이 나 혼자가 아님을 아는 데서 오는 위안이었다.  - P134

그글들덕분에 나는 여러가지가 섞여도 된다는 것,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이 번갈아 나와도 된다는 것, 서사가 간접적일 수 있다는 것, 산문도 시처럼 주제에서 주제로 건너뛰거나 날아오를 수 있다는 것을배웠다. 장르란 선택일 뿐이라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물론 내가장르들 사이의 벽을 뚫을 방법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는 그로부터10년이 더 걸렸다. - P136

하지만 내가 갈구한 소멸도 있었다. 책을 읽을 때 나는 내가아니었고, 그 비존재의 상태를 약물처럼 갈구하며 삼켰다. 그 상태일 때 나는 부재하는 목격자였다. 그 세계 속에 있지만 등장인물은아닌 존재, 혹은 모든 단어이자 길이자 집이자 나쁜 징조이자 버려진 희망이었다. 책에 빠져 산 수천시간, 수년 동안 나는 모든 사람이었고, 아무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모든 곳에 있었다. 나는 안개였고, 연무였고, 박무였다. 이야기 속으로 녹아들 - P142

어 사라지는 사람이었다. 그 방식으로 나를 잃음으로써 처음엔 아이로 다음엔 성인 여자로 존재하는 일의 버거움을, 나라는 아이와나라는 성인 여자로 존재하는 일의 버거움을 잠시나마 잊는 사람이었다. 흩어지고 뭉치고 흘러가는 구름처럼 다양한 시대와 공간을, 세계와 세계관을 떠다녔다. 내가 작품을 숙지한 시인으로는 첫시인이었던 T. S. 엘리엇T. S. Eliot의 시구가 떠오른다. 그는 "당신이만나는 얼굴들을 만날 얼굴을 준비할 시간은 있으리라고 말했다.
혼자 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얼굴 없는 자였고, 모든 사람이었고,
특정 사람이었고, 한계가 없었고, 다른 곳에 있었고, 만나지 않아도 되었다. 나도 사실은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얼굴과 자아와 목소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도 그 유예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했다.
다만 순간들이 옳은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평소에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살다가 잠깐씩 쉬었던 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이 생활이었고 내내 그렇게 지내다가 간간이 사람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 P143

"나는 책 속에서 살았다. 독서는 흔히 한 책을 골라서 그 속을처음부터 끝까지 여행하는 일로 묘사되지만, 내 경우에는 그것은물론이거니와 아예 그 속에 터를 잡고 산 책들도 있었다. 몇번이나 다시 읽었던 책들, 그러고는 이후에도 종종 그 세계에 들어가고 싶고, 그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고, 그 작가의 생각과 목소리를듣고 싶어서 아무 쪽이나 펼쳐 들곤 한 책들이었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의 소설들이 그랬다. 어슐러 K. 르 귄Ursula K. Le Guin의 어스시 Earthsea 시리즈, 프랭크 허버트 Frank Herbert의 「」 Drune, 더 나중에는E. M. 포스터E. M. Forster, 윌라 캐더, 마이클 온다치 Michael Ondaatje, 어른이 된 후 다시 읽은 몇몇 동화책, 더 이전에는 문학적 가치가 미미한 숱한 소설들이 그랬다. 사방 지리를 속속들이 아는 그 영토들속을 나는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줄거리를 알고자 딱 한번 읽고 마는 책에서는 낯선 감각이 보상이라면, 그 영토들에서는 친숙함이보상이었다. - P144

나는 언어의 강과 바다를, 그 주술적 힘 속을 헤엄쳐 다녔다.
전래동화 중에는 우리가 무언가를 제 올바른 이름으로 부르면 그것을 지배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가 흔하다. 주술이란 우리가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말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말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언어가 세상을 만들고 우리를 그 속으로 데려간다는 것, 은유가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 직유가 다리를 놓는다는 것을압축적으로 표현한 한 예다. 책을 통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얼굴을 맞대고 나누는 것보다 더 깊고 더 잘 표현된 대화와 생각을엿들을 수 있었다.
글에는 하지만 체온이 없었다. 글에는 내 몸을 만져줄 몸이없었다. 그리고 글은 영원히 나를 알지 못할 터였다. 책으로 사는삶에는 내가 깃들어볼 수 있는 여러 존재와 정신과 꿈이 있었고,
상상력 풍부한 가상의 내 존재를 확장시킬 방법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것은 비존재의 삶이었다. - P145

대학원에서 나는 엄청나게 귀중한 것을 배웠다. 기지를 총동원하여 정보를 찾는 법, 마감을 엄격하게 지키는 법, 이야기를 구성하고 사실을 확인하는 법을 배웠다. 언어를 엄밀하게 써야 하고,
데이터를 정확하게 써야 하고, 독자와 주제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일종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는 각오를 새겼다. - P148

나는 순진하게도 그 비범한 작가를 다룬 책이 당연히 있으리라고 생각하여 찾아보았다. 하지만 당시에는 버먼의 작품 세계를 조망한얇은 전시 도록이 한권 있을 뿐 책은 한권도 없었다. 바로 내가 몇년 뒤에 그 책을 내 나름대로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는 논문 주제로 버먼을 선택했다. 저널리즘 전공자가뉴스와 그렇게나 먼 주제로 논문을 쓰는 것이 통상적이지 않던 시절이었다. 버먼은 유일하게 응한 인터뷰였다고 알려진 인터뷰의녹음 자료를 없애버린 뒤 1976년에 이미 죽었기에, 나는 남은 기록과 그가 어울렸던 예술가 친구들과의 인터뷰로 많은 부분을 재구성해야 했다. 내가 우연히 미술관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이미지를 보게 되었고 그 덕분에 그 논문을 쓰게 되었다는 우연의연쇄를 떠올리면, 그 시절에 와인병을 잘 딸 줄 몰랐던 것이 고맙게 느껴진다. - P153

 사람들은 글쓰기를 한번에 한편씩 무언가를 지어내는작업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글은 그것을 쓰는 사람으로부터,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부터, 그의 진정한 목소리로부터 나오는 법이다. 거짓된 목소리와 틀린 말을 버려야 하는 법이다. 따라서 어떤 글을 쓰는 작업에는 그보다 더 큰 작업, 즉 먼저 자신이 쓰려는 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작업이 선행된다.
그리하여, 글쓰기는 우리가 살면서 누구나 겪기 마련인 과정을 형식화한다. 목소리를 낼 자아를 만들어가는 과정, 어떤 가치와관심사와 우선순위가 자기 앞날과 자아를 형성하도록 만들지 결정하는 과정이다. 글을 쓰려면 내가 어떤 말투를 취할지, 어떤 표현을 쓸지, 재밌게 쓸지 심각하게 쓸지 둘 다 할지 등등을 정해야 한다. 결과가 의도와 달리 나올 때도 많다. 막상 쓰고 보니 자신이 애초 의도와는 다른 말을 다른 방식으로 하는 사람임이 드러나는 것이다(한 작가의 ‘목소리‘라고 불리는 것은 처음에 작가 자신도 잘모르는 다른 사람, 그의 예상과는 다른 관심사와 말투를 가지고서그를 찾아온 사람처럼 느껴진다). 글 쓰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을묘사하는 방식에 암묵적으로든 명시적으로든 어떤 윤리가 담겼는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주제가 무엇인지, 달리 말해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발견하게 된다. 흔히 문체니 목소리니 어조니 하고 불리는 것을 발견하게 - P154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이면에 자아의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한 디프리마의 선언이 담긴 유명한 시 장광설」Rant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저 시구로부터 좀더 내려가서 이런 대목이나온다.

정신적 싸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편들지 않을 방법은 없다
시poetics를 갖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배관공이든, 제빵사이든, 선생이든

당신은 그 일을 의식적으로 당신의 세계를 만들고자
혹은 만들지 않고자 하는 것이다

그 시절에 내가 여러 사람에게 말할 때, 종종 친구 하나에게말할 때도 썼던 목소리는 수백 킬로그램의 갑옷을 걸친 목소리, 감정이라면 그 어떤 감정도 직접적으로 말할 줄 모르는 목소리였다.
나는 감정을 거의 느끼지 않거나 수많은 필터를 거쳐서 느꼈기 때문에, 내가 어떤 감정에 휘둘리는지조차 거의 알지 못했다. 하지만그 목소리, 그것은 내가 자라면서 익히 접하고 모방하려고 애쓰고그러다 쓰게 된 목소리였다. 그것은 영리하고 쿨하고 날카롭고 유쾌하려고 애쓰는 목소리,  - P155

내 목소리에는 다른 종류의 유머도 있었다. 유머라기보다 묵직한 위트였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비비 꼬인 목소리,
인용과 말장난과 관용구의 변주로 가득한 목소리, 실제 사건과 내느낌을 에둘러서, 아주 멀리 에둘러서 말하는 목소리였다. 발언은간접적이고 참조적일수록 좋다는 듯이, 내가 직접 진실히 느낀 반응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좋다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였다. 영리함에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 몰인정한 태도는 상대뿐 아니라 말하는나 자신의 가능성도 해친다는 사실, 진심을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은 용기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로부터 긴 시간이흐른 뒤였다. 그 시절의 내 목소리는 아이러니를 많이 이용했고,
본심과 반대되는 것을 말하는 방식을 썼다. 그 목소리로 누군가에게 한 말은 사실 남들에게 인상을 남기고 싶어서 한 말일 때가 많았다. 내 진짜 생각과 느낌을 잘 모르면서 말할 때가 많았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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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활동가 앤 스니토Ann Snitow는 2016년에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1969년에 만들어져서 널리 인용된 페미니즘 슬로건˝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의 원래 의미는 ˝이 구조는 개개인의 개별적 삶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여기에 대해 개인적 해법은있을 수 없다˝라는 것이라고요. 
영어권의 회고록은 개인적으로 어떤 역경을, 가령 끔찍했던 유년기나 중독이나 질병을 극복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규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 회고록은 세상을 바꾸는 것만이 유일한 해법인 문제를 중심에 놓고말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FernandoPessoa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길에 돌이 있다고? 나는 그것을 일일이 주워 간직한다. 그랬다가 언젠가 성을 지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걸려 넘어진 돌들로 지은 성입니다.
p9

물론, 여성혐오는 여러 불평등 중 하나일 뿐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젊을 때 흑인 이웃들과 게이 친구들과 살았던 이야기, 좀더 나중에 자신들의 토지권과 문화 보전을 위해서 싸우는 아메리카원주민들과 함께했던 이야기도 적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는그들이 겪는 억압뿐 아니라 그들의 뛰어남을 배웠습니다. 그들은내게 말하는 법, 생각하는 법, 물려받은 이야기들을 의심하고 더나은 이야기들을 찾는 법을 아주 많이 가르쳐주었습니다. - P7

지난 10년 동안, 세계는 이 만연한 폭력을 예전보다 훨씬 더많이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대화와 언어에서, 언론 보도와 문화적 재현에서, 사법 체계와 우리가 사는 공간의 규제에서,
그 밖의 여러 측면에서 그랬습니다. 내가 젊을 때 바랐던 대화가마침내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나 또한 가끔 열렬히 반가운 마음으로 대화에 참여해왔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이 폭력은 예외적인 것.
규범을 벗어난 것, 일상의 여느 원칙과 관습과는 동떨어진 것으로여겨질 때가 너무 많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출간되어 많은 여성 독자에게 읽힌 페미니스트 회고록 중 일부는 끔찍하고 예외적인 폭력을 직접 겪은 여성이 쓴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책들이자칫 폭력은 우리 중 일부에게만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사실로만들까봐 걱정되었습니다. 폭력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영향을 받은 여자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남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 P8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조차 회피하는 것이다. 혹은 이 모두를 동시에 겪는 것이다. "아름다운 여인의 죽음은 의심할 나위 없이 세상에서 가장 시적인 주제다"라고 말했던 에드거 앨런 포 Edgar Allan Poe는 죽기보다 살기를 바라는 여성의 관점에서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게 분명하다. 그 시절에 나는 다른 이의 시적 소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애썼다. 나의 시를 스스로 만들어보려고 애썼지만, 지도도 안내서도 달리 의지할 길잡이도 없는 터였다. 세상 어딘가에는 그런 것들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었다.
- P15

내가 무엇에 왜 저항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기 때문에, 나의반항은 또렷하지도 일관되지도 꾸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굴복만은 하지 않았던 시절, 혹은 늪에 빠져들면서도 몇번이고 다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수준으로만 굴복했던 시절의 기억이새삼스레 되살아난 것은 내가 현재 주변에서 같은 싸움을 치르는젊은 여성들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저 물리적으로 살아남기위한 싸움만은 아니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힘겹지만, 그것은 더 나아가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 참여할 권리와 존엄과 목소리를 지닐 권리를 가진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싸움이었다.
살아남는 것을 넘어서 살아가기 위한 싸움이었다. - P16

하루가 태어나고 죽는 무렵에, 오팔색 하늘은 가끔 뭐라고 묘사할 언어가 없는 색깔이 된다. 황금색이 녹색을 거치지 않은 채어느새 파란색으로 변한다. 타오르듯이 따스한 색깔은 정확히 살구색도 진홍색도 금색도 아니다. 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면서 하늘에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파란색들이 나타나서, 해가 있는 지점부터 저 멀리 다른 색들이 나타나는 지점까지 서서히옅어지면서 이어진다. 우리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았다가는 어떤색을 놓치게 되지만, 묘사할 언어가 없는 그 색 역시 다른 색으로,
또다른 색으로 변한다. 색깔들의 이름은 가끔 거기 속하지 않는 것들까지 담고 있는 철장과도 같다. 이것은 언어 전반에도, 이를테면여자, 남자, 아이, 어른, 안전함, 강함, 자유로움, 진실됨, 검은색, 흰색, 부유함, 가난함 같은 말들에도 종종 적용되는 이야기다. 우리에게는언어가 필요하다. 하지만 언어란 늘 넘치고 깨지기 마련인 그릇들이라는 점을 알고 써야 한다. 너머에는 항상 무언가가 더 있다. - P19

어른이라는 말은 법적 성년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단일한한 범주에 속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변해가는땅을 여행하면서 스스로 변해가는 여행자들이다. 그 길은 누더기같고 신축적이다. 어린 시절은 어떤 측면에서는 서서히 희미해지고, 또 어떤 측면에서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성인기는 설령 제대로 오더라도 작고 불규칙한 조각으로 나뉘어 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일정에 따라 움직인다. 아니, 어쩌면 성장의 많은 단계가 정해진 일정 없이 일어난다고 말해야 옳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전에 집이 있었어야 해당하는 말이지만, 어릴 때 살던 집을떠나서 당신만의 집을 꾸릴 때 당신은 거의 평생을 아이로 살아온사람이다. 물론 아이의 정의 자체도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 P25

젊은 그는 거듭 갈라지고 또 갈라지는 먼 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는 앞으로 중요하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낳는 결정을 무수히 내릴 테고, 그렇게 간 길을 되짚어 돌아가서 다시 다른 길을 밟는 경우는 아주 드물 것이다. 그는 무언가를 만드는 중이다. 삶을,
자기 자신을 만드는 중이다. 그것은 대단히 창조적일뿐더러 실패할 가능성이 없지 않은 사실은 조금 많은 아주 많은 비참하게 치명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있는 작업이다. 젊음은 위험한 사업이다. 영 씨의 건물로 이사했던 무렵, 시청 근처 광장을 걷다가 어느컬트 종교 집단의 신도들에게 붙들렸다. 1980년대 초는 1970년대내내 사회에 큰 해를 끼쳤던 컬트 종교 집단들이 싹 사라지진 않은때였다. 그들은 권위에 복종하도록 교육받은 사람들이 그 시대 특유의 무정부주의적 자유 속에 자유롭게 풀려났을 때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결과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겉보기에는 급진적이지만 실상 맹목적인 복종과 엄한 위계로 회귀하는 보수적 방식으로서, 그 시절에 존재했던 두가지 상반되는 삶의 방식사이에 쩍 벌어져서 길 잃은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크레바스와 같았다. - P26

가끔은 그들이 부럽다. 스스로 만들어갈 인생의 긴 여정에서이제 출발점에 선 그들, 갈라지고 또 갈라질 길에서 수많은 결정을내릴 그들. 그들의 여정을 상상할 때, 나는 실제로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을 머리에 떠올리곤 한다. 길은 나무가 우거져 어둑하다.
스스로 선택한다는 데에서 오는, 끝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한다는데에서 오는 불안과 흥분이 그 길에 어려 있다.
내가 걸어온 길에 후회는 없다. 다만 여정의 대부분을 앞둔시기, 우리가 앞으로 다른 많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단계에 이것이야말로 정녕 젊음의 장래성이 아닐까 향수를 좀느낄 뿐이다. 나는 이미 거듭 선택하고 선택했고, 한 길을 오래 걸으면서 다른 많은 길을 진작 지나쳤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되지 않은 다른 많은 존재가 앞으로는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것이 바로 가능성이다. 이것은 물론 무섭지만 짜릿한 일이다. 그리고젊었던 내가 맞닥뜨릴 갈림길들은 대부분 그 환한 집에서 살던 시절에 내 앞에 나타났다. 내가 영 씨 덕분에 살 수 있었던 집에서. - P29

(훗날 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현상을 알게 되었다. 그시절에 백인인 내가 그곳에 삶으로써 그 동네를 여유 있는 백인들의 구미에 맞는 공간으로 바꾸는 데 일조했으리라는 사실도 알게되었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젠트리피케이션이어떻게 작용하는지 몰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지어진 아름다운 목조건물들에는그 시대 고유의 풍성한 장식이 가득했다. 퇴창, 기둥, 선반으로 깎은 난간, 식물 문양이 많았던 장식용 몰딩, 비늘 모양 지붕널, 아치나 작은 탑이나 심지어 양파 모양 돔을 얹은 포치. 생물을 본뜬 곡선과 별난 세공이 많아서, 건물들은 꼭 유기물처럼 보였다. 지어진게 아니라 길러진 것처럼 보였다. 언젠가 뮤어우즈 국립공원의 산림 관리인이 내게 그런 건물을 보면 그것을 짓기 위해서 베어진 커다란 삼나무들이 떠오른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서해안에 자라는 그 큰 나무들도 우리 동네에 유령으로 존재했던 셈이다. - P42

내 사진가 친구 마크 클렛Mark Klet이 즐겨 하는 말마따나, 변화는 시간의 척도다. 시간이 흐르자, 작은 것들이 바뀌었다. 내가이사했을 때, 우리 건물에서 서쪽으로 한 블록 간 곳 모퉁이에는코닥 즉석사진 부스가 있었다. 필름으로 사진을 찍던 시절이었다.
길 건너편 주류 판매점 옆 모퉁이에는 유리로 된 전화 부스가 있었다. 부스는 나중에 주방용 후드처럼 생긴 덮개를 이고 판자벽에 설치된 공중전화로 바뀌었다가 더 나중에 휴대전화가 퍼지자 아예사라졌다.
- P43

변화는 시간의 척도다. 나는 우리가 변화를 보려면 그 변화보다 느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내가 한곳에서 사반세기를 산 덕분에 변화를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부터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서서히 그렇게 되었다. 내가 계속 머무른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왔다가 떠났다. 잠시 머물다 떠난 그들도 자신은 안정된 동네를 거쳐간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들자신이 동네를 변화시킨 요소였다. 공간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그곳을 흑인이 점점 더 적고 중산층이 점점 더 많은 동네로 바꿔놓은물결의 일부였다. 이후에 새로 온 사람들이 사는 공간은 그들이 돈으로 구한 장소일 뿐, 예전처럼 모두에게 소속된 장소는 아니었다.
동네는 그렇게 점점 덜 동네다워졌고, 활력은 사라졌다. - P46

가난은 가끔 과거를 보전하는 역할을 한다. 내 집은 처음 지어진 뒤로 변한 데가 거의 없는 공간이었다. 황금색 마룻널은 원래의 것이었고, 씩씩 김을 내뿜는 라디에이터도, 건물 뒤쪽 계단에난홈통으로 쓰레기를 버리면 두층 아래의 대형 쓰레기통으로 쓰레기가 곤두박질치는 활송장치도 그랬다. 부엌의 붙박이 사이드보드와 키가 천장까지 닿는 유리문 찬장 맞은편에, 그러니까 싱크대 옆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이미 오래전부터 쓰이지 않은 초창기모델의 소형 냉장고도 마찬가지였다. - P47

광대한 하늘, 바다, 먼 수평선, 창공을 맴도는 야생 새들에 견주면 내 근심과 고뇌가 하찮아진다는 점에서, 출렁이는 바다와 긴백사장은 또다른 집이자 피난처였다. 그 작은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 집은 내 피난처였고, 인큐베이터였고, 껍데기였고, 닻이었고,
출발대였으며, 낯선 이가 준 선물이었다. - P55

하지만 내가 앉아 있는 책상은 남자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여성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나와 같은 이들이 죽거나침묵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 자라는 것이 내게 어떤의미였는가, 내가 어떻게 목소리를 갖게 되었고 어떻게 그 목소리를홀로 책상에 앉아서 손가락으로 묵묵히 말할 때 가장 유창해지는 목소리를써서 이전에 말해지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말하려고 애쓰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할 시점인 듯하다.
- P63

이 문제는 내가 몸담은 사회에, 아마도 더 나아가서 세상에뿌리박은 문제였다. 이 문제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우선 문제를 이해해야 했고, 궁극적으로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상황을 바꿔야 했다. 그런데 고통의 일부이기도 한 침묵을 깨뜨릴 방법이라면 여러가지가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 나와 남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항이었고, 생기를 되찾는일이었고, 힘을 얻는 일이었다. 그것은 나무들의 숲이 아니라 이야기들의 숲이었고, 글쓰기는 그 숲을 통과할 길을 그리는 일이었다. - P64

전쟁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보통 우리의 적이다.
반면 여성살해 femicide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은 우리의 남편, 남자친구, 친구, 친구의 친구, 길에서 만난 남자, 일터의 남자,
파티에서 만난 남자, 같은 기숙사의 남자다. 이 글을 쓰는 주에 뉴스로 보도된 살인 사건 가운데 한두 사례만 고르면, 어떤 남자는리프트"로 차를 불렀다가 임신한 운전자가 오자 칼로 찔러 죽였고, 또 어떤 남자는 자신이 부모에게 쫓겨났을 때 받아주었던 젊은 - P66

여자를 총으로 쏴 죽였다. 모리스에 따르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자신의 가장 끔찍한 기억에 휘둘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모리스는 또 전쟁이 사람들로 하여금 공격과 부상과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게 하는 환경인데다가 꼭 우리 자신이 아니라도 주변인들이그런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설령 우리 자신은 육체적으로온전하더라도 그런 환경으로 인한 트라우마를 똑같이 겪을 수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그런 두려움은 원인이 되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다닌다고 한다. 젠더폭력의 트라우마를논할 때, 사람들은 그것이 단 한번의 끔찍하고 예외적인 사건이나관계였던 것처럼 묘사한다. 마치 별안간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평생 물속을 헤엄쳐왔다면 어떨까? 물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없었다면 어떨까?
많디많은 여성이 영화에서, 노래에서, 소설에서, 세상에서 살해되었다. 그 죽음 하나하나가 내게는 작은 상처, 작은 짐, 피해자가 나일 수도 있었다고 말하는 작은 메시지였다.  - P67

앞선 세대의 페미니스트들은 강간이 힘의 문제이지 성적 쾌락의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분명 세상에는 자신의 힘과 여자의 무력함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에로틱한 일로 여기는 남자들이 있다. 여자들 중에서도 소수는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이 무력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에로틱한 것으로 착각하고,
그에 따르는 자아 감각과 서사를 받아들여야 할지 물리쳐야 할지고민한다. 2018년에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이렇게 썼다. "성희롱은 대단히 남성적인 수행 행동이다. 남자는 그 행동을 통해서 대상에게 힘을 가진 쪽은 자신이라고 알리고 싶어하고 이것은 사실이다 나아가 그의 힘과 섹슈얼리티는 하나이자 같은 것이라고 알리고 싶어한다." - P71

사람들은 그런 현실을 자연스러운 것 혹은 날씨처럼 불가피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그것은 날씨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불가피하고 불변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화였다. 특정 사람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못 본 척하고, 성애화하여 해석하고, 봐주고, 무시하고, 묵살하고,
경시하는 사회 구조였다. 내가 볼 때 적절한 대응책은 문화와 상황을 바꾸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기 운명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몸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기 삶이 자기 것이 아닌 순간에 처한 여성은 어쩌면 나일 수도있었다. 나는 한동안 그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쫓기듯이 살았다. 그탓에 정신 구조가 달라졌는데, 이 변화는 영영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런 폭력의 핵심은 피해자에게 그가 완벽하게 자유로운 날은 영영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계속 상기하게끔 하는 것 - P74

"우리는 종종 누군가가 침묵당했다는 표현을 쓴다. 그런데 이것은 누군가가 말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내 경우에는 침묵당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이 저지된 일은 없었다. 내말은 아예 시작되지 않았다. 혹은 어떻게 저지되었는지 기억나지않을 만큼 일찌감치 저지되었다. 그때 내 머릿속에는 강요하는 남자들에게 내가 뭐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내가주장을 말할 수 있다는 생각, 상대에게 내 주장을 존중할 의무가있고 실제로 그럴 의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내 말이 사태를악화시키는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 P78

나의 자유는 걷기였다. 걷기는 나의 즐거움, 비용을 감당할수 있는 교통수단, 장소를 이해하는 방법,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
내 삶과 글을 통해서 생각하는 방법, 내가 선 위치를 아는 방법이었다. 안전하지 않으니까 걷기를 그만두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지만, 나대신 다른 사람들이흔쾌히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권했다.
죄수가 되라고. 자유롭게 다닐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은둔자처럼 처박혀 있으라고. 내가 늘 어딘가로 가고 싶어서 안달했던것은 한편으로는 내 삶을 만들고 싶고 다른 존재로 변하고 싶고 무언가를 해내고 싶다는 추상적 욕구의 발현이었지만, 움직인다는구체적 행위 자체가 그 열정의 표현이자 압박의 배출구가 되어주기도 했다. 나는 걷기를 포기할 마음이 결코 없었다. 걷기는 내가생각하는 수단, 발견하는 수단, 나 자신이 되는 수단이었다. 걷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그 모두를 포기한다는 뜻이었다. - P79

그래도 만약 갑옷을 입을 수 있었다면, 어떤 면에서는 자유로웠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 시절에 나는 실제로 갑옷을 입었고 그래서 자유와 옥죄임을 둘 다 느끼면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가끔은 그렇지만,
그 시절에 나는 정말로 딱딱하고 빛을 반사하고 안을 보호하는 갑옷 같은 존재였다. 우리는 자칫 그 갑옷의 표면에만 몰두하기 쉽다. 즉 기지와 경계심을 발휘하여 공격에 대비하는 데에만 몰두하기 쉽다. 혹은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은 나머지 근육이 딱딱해지고마음이 속박되는 지경에 이르기 쉽다. 자신에게 부드러운 깊이가있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인생의 중요한 일들은 대개 표면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진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 스스로 갑옷이되기란 오늘날에도 쉽게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죽임당하지 않기 위해서 줄곧 스스로 죽는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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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스퀘어
안드레 애치먼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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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고 서툰 시절의 나를 보아준 단 한 사람, 체커택시를 모는 칼라지에게 바치는 헌사로 가득한 소설이다. 돌아가고 싶지도, 돌아갈 수도 없는 그 시절의 부끄러운 행동들과 선택들도 결국은 자신에게로 향해있음을 깨닫기엔 나이만한 선생이 없다. 그시절 나의 멘토였던 명숙언니, 그립고 뼈아픈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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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작은 방 안에 울리는 꽃다발의 소리는 경이롭다. 꽃들은 나를 취하게 했다. 세상의 그 어떤 철학도데이지 한 송이, 가시나무 한 그루, 머리를 민 수도승같은 모습으로 태양과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며 웃고 웃고 또 웃는 조약돌 하나와 견줄 수 없다.

나는 하늘의 푸르름을 바라본다. 문은 없다. 아니면오래전부터 문은 이미 열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끔이 푸르름 안에서 꽃의 웃음과 같은 웃음소리를 듣는다. 곧장 나누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소리를.


그 푸르름을, 
당신을 위해 여기 이 책 속에 담는다.

나에게 이상적인 삶이란 책이 있는 삶이며 이상적인 책은 어느 여름날 쥐라‘의 길에서 마주친 사자상 분수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던 차가운 물과도 같다. 여름캠프‘라고 불리우는 즐거운 감옥살이를 하던 중이었다. 마치 수 세기 동안 그곳에 버려진 기분이었다. 나는불길한 노래를 불러대던 내 동료들과 함께 작은 부대에 속해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강제 행군을 하던 중반짝이는 거품을 뱉어내던 분수가 나타났다. 나는 얼른 사자의 입 아래로 달려가 입을 벌리고 차가운 물의바다를 삼켰다. 물은 몸속을 타고 심장까지 내려가 내몸을 황폐하게 하던 단념의 불을 꺼버렸다. 수십 년이지나도 그 차가운 물이 줬던 신비로운 위안을 기억한다. 사자상의 그 입을 책을 펼칠 때마다 찾아본다. - P93

그 배 위에서 보낸 세 번의 낮과 밤 동안, 내 심장이가슴에서 떨어져 나와 검은 두 눈에 비친 두려움의 심연속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은 얼굴이 되었다. 나와 별과 악마와 신과 그 모든 것들의 종말을 드러내는 얼굴 두려움 자신만은 제외였다. 나는 계속해서 말하고 먹었다. 다른 것을 생각했다. 그럼에도달콤하고 잔인한 두려움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붉은내 피는 검게 변해 갔고 밤은 심장까지 차올랐다. 밤은나무가 울어대는 이 낡은 배에 실린 화물이었다. 나는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별들이 비처럼 쏟아지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것,  - P95

‘믿음은 그 끝에 있었다. 아니, 그 끝이 아니라, 검은 덩어리의 안쪽에, 벌어진 어둠의 입안에, 노란 점의믿음이 있었다. 그랬다. 결국 어둠이라는 역경을 분명히 있을 난파라는 다음 시험을 통과해야만 했다. 사나운 눈으로 바라보는 두려움을 껴안아야만 했다. 두려움을 사랑하고 두려움을 건너야 했다. 다리를 잃고 심장을 잃어도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쇳가루를 흩뿌리는 듯 변해버린 하늘과 더러운 금빛 먼지처럼 떨어지는 별을 봐야만 했다. 그 순간, 재난이 완벽하게 완성되던 그 순간에 평화롭고 자신에 찬 아름다운 목소리가, 배를 항구로 데려다주겠다고 약속하던 밝은 황금빛 목소리가 들려왔다.  - P96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조지프 콘래드의 태풍을 막다 읽었어. 읽는 데 꼬박 사흘 밤낮이 걸렸네.
재밌었어? 네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책이란 등대의 불빛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까. 책은 황폐한 우리 머릿속 궁전에 불을 켜줄 뿐이지. 그렇지만 글은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건 확실해. 내가 사흘 밤낮을 들여서 알아낸 사실이야. - P97

부드럽게 반짝이는 금빛 풀밭에 머리를 파묻은 갈색 말이 삶에 무한한 안도감을 주는 하나의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그건 어린아이의 순수함에서 받는 감동,
천진난만한 아이를 볼 때 마음에 이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갈기를 두른 천사와 황금빛에 대한 커다란 갈망, 그 광경이 내 마음에 같은 바람을 일으켰다. 내가보고 있던 건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내린 비로 무성하게 자란 풀을 뜯고 있는 한 마리의 말일 뿐이었다. 하지만 기적은 거기에 있었다. 그 모습에서 나는 별을 먹는천사, 무위의 시간을 보내는 수도승을 보았다. 그건 삶이 우리에게 화가 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 P102

금빛 눈이 눈꺼풀 아래에서 자라나고 있다. 나는 그눈을 통해 바라본다. 그 순간은 금세 지나가고 지속되지 않는다. 어느새 말은 다시 말이 되고 꽃은 다시 꽃이된다. 금빛 눈은 광채를 잃거나 수영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물안경이 벗겨지듯이 떨어져나간다. 우리는 다시 원래의 눈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과연 평범할까? - P104

나는 알코올 중독자가 마신 술병보다 더 많은 수의책을 읽었다. 책과 멀어진 삶이란 단 하루도 생각할 수가 없다. 책이 가진 느럼에는 병을 고치는 사람의 방식이 녹아있다. 나는 눈부신 고요함이 있는 하얀 백악질의 절벽에 조각된 책이라는 시원한 예배당에서 수많은 여름을 보냈다. 성화상 빛깔을 띤 책장에서 천국과지옥의 공간을 새로 칠한 시인의 책들을 꺼낸다. 그 중『새로운 삶』이란 책을 무작위로 펼쳐 두 아이의 옷에쌓인 먼지를 떨어내 주고는 빛을 향해 달려 나가도록놓아준다. - P113

한쪽은 관자놀이에서죽음의 벌들이 진동하는 소리를 듣고 같은 순간 다른한쪽은 감미로운 것들을 읽으며 자신들 앞에 놓인 아특히 펼쳐진 시간을 음미하고 있는, 나는 이 삶이라는것을 더는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죄로 붉게 물든 두손으로 삶을 헤쳐나간다. 죽음의 홍수가 그 손을 하얗게 하리라. - P116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온 용감한 두천사, 메뉴인과 오이스트라흐"가 오래된 흑백 영화에서 바흐 협주곡을 연주한다. 두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는 너무도 강렬해서 마치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오이스트라흐는어머니가 갓난아기의 숨결을 살피는 것보다 더 열렬하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리를 듣는다. 천상에 소속된턱시도를 입은 두 사람이 길을 가로막는 돌을 집어 멀리 던져 버리듯 세상을 들어 올린다. 그들의 하얀 손이까마귀처럼 새까만 소매에서 날아오른다. 메뉴인은 생각의 무게에 눌려 눈을 감고, 그의 귀족 같은 얼굴을 침묵의 주인이 있는 무대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들어 올히파이다. - P125

세상은 성인들로 넘쳐난다. 순교자들 말이다. 나는저 두 단어를 구분하지 않는다. 우리는 날마다 늘고 있는 그들을 ‘알츠하이머‘라 부른다. 점점 더 늘어나는 그병이 우리에게 기본으로 축소된 삶을 선물한다. 고단하고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일들, 물건을 사고 타인을질투하고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전부인 현대 생활의 모든 질서에서 우리를 해방한다. 이들에게는 삶이아닌 삶, 한 번도 삶이었던 적이 없는 삶은 끝이 난 것이다. 그들의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두려울 정도로 열려있다. 그들이야말로 세상을 허물어뜨리는 형이상학적 질병의 먹잇감이다. 우리는 그들을살아있는 보물처럼 여겨야 한다. - P133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전쟁터 같은 그곳을 돌아다니며 훼손된 영혼과 체념의 끔찍한 상처를 봤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침묵의 경종을들었다. 내가 본 것은 숭고하고, 지겹고, 끔찍했다. 닫힌 얼굴들. 부재하는 말들. 그곳에는 모두 열댓 명의 노인들이 있었다. 식사가 카트에 실려 오면, 이들은 식탁에서 하루에 두 번 서로 마주한다. 그들이 서로를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들은 이 만남을 위해 길에 올랐다. 젊음, 아름다움 그리고 그들이 얻은 지위 앞으로 장막이 드리운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 - P135

우리는 모두 한 줌의 부스러기로 끝난다. 나는 더이상 화도 내지 않는 그들을 생각하면 화가 난다. 그들은 아무도 찾지 않는 숲속 노란 야생 수선화보다도 더버려져 있다. 그들도 어린 시절에는 이 꽃들보다 훨씬더 많은 빛을 영원히 약속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어떠한가? 바람은 단 한 번도 얼굴을 드러낸 적 없는 성인이다. 바람은 끊임없이 노란 수선화에게 말을 건다. 바람이 더는 말을 하지 않을 때도 꽃들은 계속 바람을 듣는다. 그런데 여기, 이 방 안에 바람은 어디 있는 걸까?
가여운 이들, 흔들리는 가여운 불꽃들. 더듬거리며 말 - P136

하는 별들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대한 사랑스러운 점은 바로 살아있다는 것이다. 황폐할수록더욱 아름답다. 나는 비천한 이들에게서 금을 진창에던져진 얼굴에서 보석을 보았다. 우리는 모두 한 줌 부스러기로 끝난다. 하지만 이 부스러기는 금으로 되어있고 때가 되면 천사가 그것으로부터 다시 온전한 빵을 만들 것이다. - P137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기 위한 확실한 방법은아름다움이 얼마나 미움을 받는지 헤아려보는 것이다.
광장 공포증이 있는 수도사가 조각을 채색하기 전까지 그리스도의 얼굴은 백금 같은 가래침으로 얼룩져있었다. - P145

가난한 자들은 그들이 가진 먼지처럼 보잘것없는 것들을 들어 그들의 핏줄 같은 별을 반긴다. 나는 크뢰조의 알르바르 길의 얼룩진 보도 위에 무릎을 꿇은 채로어린 소녀에게 낙엽의 장엄함과 외벽에 금을 긋고 돌아래에 이끼로 글씨를 새겨 넣은 시간의 풍부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었다. 멈춰있던 순간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 P146

신은 떠났다. 조금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는데, 이제는 정원 끝으로 멀어지고 있다. 나는 건축 용어에 나오는 아칸더스 잎이 악마와 성인을 구별하기위해 로마네스크 양식 석재에서만 피어나는 줄 알았는데 자연에서, 정글같이 무성한 정원에서 그 잎을 발견한다. 공작새들이 꽃 주변을 돌아다닌다. 공작의 울음소리에는 장엄한 애도가 깃들어있다. 간신히 살아있는 자들의 삶을 향한 울부짖음. 청명한 날에는 신의 형상까지 보인다. - P148

구관자놀이를 스치는 선선한 바람의 환희, 두 손안에고인 물의 비밀, 길에서 마주친 여우의 찬란함, 이것들중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이르지 않는다. 대부분은 목자나 어부, 포도 재배자들이 사는 인고의 세계에서 그들의 아름다움을 끌어온 몇 마디 말이 전해질 뿐이다. 이것이 가장 위대한 시인들의 땅에 남겨진 발자취의 전부이다. 실제로 시인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직접마주 보고, 공허한 마음속에 잠든 별들을 깨우는 것이 - P157

주석자들은 이 방랑자의 말들을 닳아 낡을 때까지사용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들은 끊임없이 저항한다. 단순한 것은 실로 마르지 않는 법이다. 풀밭에 떨어진 배 위로 모여드는 말벌들처럼 그의 얼굴 주위로 모여든 신학자들이 전율한다. 너무나도 인간적이어서 승고한, 비탄에 잠긴 얼굴이다. - P158

침묵하는 하느님의 대리석같이 차가운 얼굴을 향해 터질 이 외침으로 인해, 이 말을 내뱉은 자는 가까운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우리의 친구가 된다. 잘려버린 핏줄에서 피가 쏟아져 나가듯 믿음이 우리를 떠날 때, 우리를 죽이는 것들에게 계속해서 애정 어린 말을 건네는 우리 자신이 된다.

어둠이 짙어져야만 별은 드러난다. - P159

암컷 고양이가 새끼 고양이를 물어 안식처에 데려다 놓듯이 삶은 우리를 죽음으로 이끈다. 나비의 부서지기 쉬운 날개부터 죽은 이들의 근심스러운 얼굴에이르기까지, 우리가 탐구해야 할 동일한 비밀이 담겨있다. 새끼 고양이의 감춰진 두 눈이 이름 없는 계시로우리를 데리고 간다. 이 계시의 이름을 찾기 바라는 기대로 가장 순수한 시가 쓰이고, 소리 내어 말할 수 없는이름의 표면을 만지기 위해 우리는 책 위에 손을 올린다. - P168

우리는 때때로 멀리서부터 요란한 소리를 내지르는 파도 소리를 듣는다. 그 거대한 검은 파도 위에서 한걸음 나아가지만, 그러나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골길을 걷고, 책을 펼치고,
장미가 꽃을 피우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무엇이 의미 있는 일이겠는가? 새끼 고양이는침대의 갈색 이불 위를 걸을 때면, 작은 빛의 자국을 남겨두곤 했었다. - P169

신이 인간에게 지상을 점령하라고 명령한다. 모두가 달려가는데 한 집시만이 오디나무 앞에서 검은 뒷빛 열매를 응시하며 서 있다. 마침내 그녀가 달려가기시작할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다. 근원적이고 맹목적인 그녀가 바로 시인들의 어머니다. 세상의 모든라비아가 이 빛나는 느림보의 후손으로 오늘날 파리의 거리를 점령한 집시의 모습까지 이어진다. - P173

한 철학자의 책을 읽다가 웃음이 거대한 파도처럼밀려왔다. 고요히 진동하는 은밀한 웃음이었다. 얼굴위로 번진 웃음은 피부의 떨림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아래 심장은 불타올랐다. 내 가슴 안에서 격정이 일었다. 철학자는 비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풀숲에서 잃어버린 열쇠 꾸러미를 찾아냈다. 화려한 도시의 열쇠처럼 금으로 만들어진 크고 아름다운, 그러나 동시에 거의 쓸모없는 열쇠들이었다. 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열쇠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서 고요하고도 커다란 웃음이 났던 것이다. - P183

나는 이 철학자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의 문장은숨통을 틔게 해주는 밝고 자비로운 평화로 가득했다.
그러나 환한 웃음이 그보다 더 강렬했다. 그 웃음은 저먼 별들 끝에서 누군가 던진 돌처럼 내게 왔다. 철학자의 책들은 고무줄로 얼굴에 고정해 놓은 마분지 가면과 같다. 그 가면 아래에서는 공기가 부족해 숨쉬기조차 힘이 든다. 이것 봐, 향기로 방을 가득 채운 꽃이 내게 말했다. - P184

다른 세상이 바로 이 웃음인데, 왜 다른 곳에서 다른 것을 찾고 있어? 아이처럼 숨어있던 신이 본심을 드러내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옆을 지나가면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어. 그 웃음은 음악 안에서,
침묵 안에서 들을 수 있지. 꽃봉오리가 벌어질 때에도,
흘러가는 구름 뒤에서도, 이가 빠진 누군가의 입속에서도 들을 수 있고 말이야. 웃음은 세상 곳곳에 있어. - P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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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란 넘을 수 없는 벽에 문을 그린 후,
그 문을 여는 것이다.


당신만 괜찮으시다면 파랑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사월의 신선한 아침에 맞이하는 그 푸르름 말입니다. 벨벳의 부드러움과 눈물의 반짝임이담겨있는 푸르름이지요. 당신에게 이 푸르름만이 가득 담긴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편지는 앙베르나 로레르담의 보석 마을에서 다이아몬드를 고이 감쌀 때 쓰는 종이를 떠올리게 할 거예요. 결혼한 신랑의 셔츠럼 새하얀 그 종이에는 투명한 소금 결정, 동화 속 아이의 운명을 결정짓는 하얀 조약돌 갓난아이의 눈물 같은 다이아몬드가 담겨 있지요. - P17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죠. 다만 한 편의 시처럼 반짝이는 빛을 걸쳤을뿐이었습니다. 비로소 당신에게 말하려 했던 것에 가까이 다가섰네요. 오늘 내가 본 사소한 것, 죽음의 모든문을 여는 것, 바로 결코 멈추지 않는 삶 말입니다. 삶은 결코 붙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속 기둥 사이를빠져 달아나는 새처럼, 삶은 우리 앞에서 달아납니다.
우리는 이 삶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런것을 신경 쓰지 않죠. 오히려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살인자인 우리를 자신의 온화함으로 가득 채워줍니다. - P19

연못은 하늘 아래 꽃을 피우고, 하늘은 연못을 마주하며 곱게 단장하고 있었습니다. 새는 예언하는 듯한날갯짓으로 숲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어요. 잠시 동안나는 살아있음을 느꼈습니다. 이 편지가 당신에게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요. 오히려 어리석은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나는 단지 우리가 ‘화창한 날‘, ‘푸른 하늘‘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 P19

나는 페이지마다 하늘의 푸르름이 스며든 책만을좋아합니다. 죽음의 어두움을 이미 경험한 푸른 말이에요. 나의 문장이 미소 짓고 있다면, 바로 이러한 어둠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나는 나를 한없이 끌어당기는 우울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며 살아왔습니다.
많은 대가를 치르고 나서야 이 미소를 얻었어요. 당신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금화와 같은 이 하늘의 푸르름을 나는 글을 쓰며 당신에게 돌려드리고 있답니다. 이장엄한 푸름이 절망의 끝을 알려주며 당신의 눈시울을 붉게 만들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 P21

"마리아예요." 우리가 하는 말에는 더 이상 아무런의미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드러내는 겉모습은 우리를 눈멀게 했고, 우리를 불편하게하던 순수한 영혼의 얼굴을 우리 스스로 씻어내 버렸다. 갓난아기가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던 신은 이제 우리에게서 몇 광년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집시와 길고양이, 접시꽃은 우리가 더는 알지 못하는 영원한 것에 대해 알고 있다. - P32

무엇을 보느냐에 따라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가 보는 그것이 우리 자신을 드러내고, 이름을, 진정한 자신의 이름을 부여한다. 술라주의 그림 앞에서 나는 세탁실 빨랫줄에 널린 검은 침대 시트 앞에 서 있는 어린아이가 된다. 그림들은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은 무감각해진 채로 살아 엎드려 있는 거대한 짐승 같다. 하얗게 빛나는 빛이 짐승들의 옆구리를 비춘다. 그들의숨결은 무겁고 더디며 고요함에 젖어있다. 불멸의 검은 풀을 되새김질하는 짐승 앞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홍수보다 훨씬 더 위압적인, 술라주의 그림들이 내뿜는 짙은 정적에 휩싸여 몽펠리에는 사라지고 없었다. - P38

밤과 죽음이 우리 곁에 다가와 끝을 알려주듯 관리인이 다가와 곧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한다. 호텔로 되돌아가는 길, 몽펠리에의 플라타너스가 하얀 별이 지글거리는 은하수까지 내 머리를 들어 올린다. 누구도반박할 수 없는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마법처럼 하얗게 불탄 자국들. 나는 다시 스위스 시계 같은 호텔 방으로 돌아와 잠에 든다. 매일 밤 그러듯, 내일은 더 아름다운 일이 찾아올 거라 생각하면서. - P40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것은 결코 그 순간이 아니다. 죽음, 사랑, 아름다움, 이
‘모든 것들이 은총과 우연에 의해 불시에 나타날 때, 그것은 결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단지 시간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주 일찍 시작됐다는 걸 아는 것만으로도충분하다. 아주 일찍, 그의 삶에 죽음이 찾아왔다는 것을. - P50

나는 내 방식대로 연주합니다. 차갑고도 정열적인방식이죠. 내킨다면 나를 따라오세요. 악보라는 북극으로, 음악이라는 어두운 소나무 밑으로 할 수 있다면나를 따라오세요. 내가 가는 곳으로, 내가 연주하는 곳으로 오직 순백의 음악만이 있는, 아무도 없는 그곳으로 - P50

그러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이름이찍힌 음반만이 나올 뿐이다. 소나타 도입부처럼 생기있고 건조한 이름, 글렌 아다지오의 깊은 전율처럼 좀 - P53

더 둔한 소리의 성, 굴드. 소리의 북극여우이자 마멋인글렌 굴드, 그는 바흐를 연주한다. 연주하고 또 연주하며 바흐에만 매달린다. 사실 그는 어떤 곡이든 연주할수 있었고 그의 매력, 그가 연주하는 음표들의 끝에서나오는 젊은 왕자의 위엄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 P54

"우리는 말을 할 때 바로 그 말속에 머물며, 침묵할때면 바로 그 침묵 속에 머문다. 하지만 음악을 연주할때는 그 자리를 정리하고 벗어나, 말과 침묵의 고역에서 해방된 희미한 선율 속으로 멀어져 간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멀어져 가는 한 젊은 남자처럼, 우리도 멀어져 간다. 목적지를 안다면 멀어지는 것이 아니다. 음악 안에 있다는 건 사랑 안에 있는 것과 같다.
연약한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선 것이다. 우리는 A라는점에서 B라는 점으로, 한쪽 빛에서 다른 쪽 빛으로 건너간다. 어둠 속에서 비틀거리며 그사이 어디쯤에 우리가 있다. 불확실함을 견디고 주저함에 미소지으며,
다른 모든 것은 잊은 채로 우리 안의 희미한 생의 움직임에 주의하면서 말이다. - P54

사랑하는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대리석같이 단단한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것처럼느낀다. 여러 달 동안 숨을 제대로 쉴 수 없고 충격에뒷걸음질 친다. 더는 세상 안에 머물지 못하고 그저 멀리서 바라만 본다. 이상한 일이라는 듯이 그나마 덜 부조리한 것은 바로 꽃이다. 꽃은 모든 색들의 외침이다.
가장 작은 데이지꽃조차 자신의 말이 들려지기를 필사적으로 원한다. 꽃은 자신의 색으로 말한다.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꽃에 중독되었다. 집안 곳곳을 꽃으로 가득 채웠다. 당신의 죽음으로나와 멀어진 세상은 어둠 속 검은 구슬처럼 느리게 돌아갔으나 그곳엔 화려한 꽃의 오만함과 단조로운 허무에 맞서는 노랑, 하양, 빨강, 파랑, 분홍의 외침이 있었다. 수도원의 수녀들은 도자기 병 안에 있는 장미 한다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있다. - P69

결국 세상은 자기 자리를 전부 되찾는다. 아니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당신의 부재 속에서 꽃들이 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듣게 된 것이다. 삶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또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창밖으로 개머루덩굴이 보인다. 색색의 숨결이 풀밭을 가로지른다.
꽃은 영원으로부터 내리는 첫 빗방울이다.

두 눈은 영원에 둘러싸인 채 나는 신비로운 대기를삼킨다. 그리고 나는 쓴다. 이것이 대답 없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요, 함께 일어나는 선율이며, 시간의 잎사귀에서 들려오는 날갯짓 소리다. 당신이 더는 이 세상에없기에, 나는 당신에게 미모사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는 없지만 미모사는 당신에 대해 아주 잘 알려준다. 모든 고결한 것은 죽은 자들의 나라를 건너 우리에게 이르는 것이라고 - P70

너는 이 수첩을 열어볼 테고,
그 안에 담긴 것들이하늘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아볼 것이다. 우리 안에 머무는 감동적이고 야생적이며 침범할 수 없는 한밤중의 하늘을 이 푸른 페이지들 위에 담긴 별의 하얀 반짝임도 보게 될 것이다. 소금 결정이나 불꽃에서도 볼 수있는 하얀 반짝임을. 수많은 단어들이 네 두 눈의 아침에, 네 눈 아래로 지나갈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 같은단어들이 영혼, 햇볕에 보송보송하게 말려 정성스레개어 놓은 빨래. 검은 테두리를 폭풍우와 오로라의 머리글자로 수놓은 연인들의 잠자리를 위한 금빛 침대보 - P75

너와 함께 글을 쓴다. 밤과 낮의 단어들, 사랑의 기다림과 사랑의 단어들, 절망과 희망의 단어들. 나는 너와 함께 이 단어들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본다. 우리만이 알고 있는 이 깨달음 속에서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이 수첩뿐만이 아니라 내가 쓰는 모든 것 안에 네가 있다. 몽펠리에로 보내는 이 글의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있다. 단지 상황에 따른 것만은 아닌,
당신에 대해 말한다는 내가 처한 그 불가능성 안에 네가 있다. 네가 내 안에 있는 이 밤에, 단어들에서 비롯된 밤과 뒤섞인 네가 있는 빛나는 밤에 나는 글을 쓴다.
너에게 쓴다. - P77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후에도 읽을 수 있는책을 쓰고 싶다.

얼마 전 아내를 잃은 한 남자는 더 이상 책을 읽지못한다.
"나는 책에 속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이렇게 들린다.
"책이나 세상 그 무엇으로 인해 그녀에게서 단 일초라도 멀어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겼던 것들이 끝내 허무의 입에 삼켜지고 대리석처럼 단단한 이에 찢어 발겨지는 것을 바라보는 걸 방해 받고 싶지 않아요." - P81

단 한 편의 시라도 주머니에 있다면 우리는 죽음을걸어서 건널 수 있다. 읽고, 쓰고, 사랑하는 것이야말로우리를 구원하는 삼위일체다. 시는 불타는 돌들에 둘러싸인 침묵이며 세상은 별들에까지 이르는 차가움이다. 새벽 두 시, 여왕들은 죽고 나는 그들의 외침에 경탄한다. ‘항상 사랑하고, 항상 고통받으며, 항상 죽어가기를. 세상은 이 외침에 깃든 영감을 알지 못한다. 삶의 등불을 켜주는 이는 죽은 자들이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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