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애의 기록을 통해
시와 예술 사이에 작은 길 하나를 내고 싶었다.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거느리고 있는가.
우리 몸과 영혼에도 얼마나 많은 주름과 상처가 있는가.
주름과 주름, 상처와 상처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파도처럼 일렁이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세계와 영혼의 주름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이러한 비틀림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처럼 세계와 영혼의 주름들을 해독하려 애를 쓰며몇 개의 겹눈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눈으로 읽어낸 예술의 옆모습이 모쪼록 독자에게도 고개 끄덕일 만한 것이 되면 좋겠다. ㅡ작가의 말p8

특히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2008)은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난다. 첫 장면은 유년기를 보낸 벨기에의 해변에 크고 작은 거울들을 설치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밀려오자 거울 몇 개가 물거품 속에 잠기고, 바르다의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런 우연성이 이미지에 생기를더해준다. 바르다는 제작진의 얼굴을 거울에 차례로 비추며 그들을 자신의 몽상에 참여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소개한다. 그렇다.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시적인 몽상과 즉흥적 만남, 유머와 재치, 그리고 따뜻한 우정으로 보는 이에게 행복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극적인 서사나 강렬한 액션, 선정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시인 발레리의 고향이기도 한 세트 바닷가와 부두 근처의 옛집, 첫 영화를 찍은 라 푸앵트 쿠르트 해변, 이십 대에 가출해서 뱃일을 했던 아작시오 해변, 자크 드미와 만나함께 살던 누아르무티에 섬, 중국이나 쿠바의 해변, - P19

 "영화의 움직임, 관점, 리듬, 그리고 편집 작업은 작가가 문장의 의미에대해 고민하고, 단어를 선택하고, 부사의 개수를 신경 쓰고,
챕터의 사용을 고려하는 등의 방식과 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보시면 돼요. 글쓰기에선 이러한 것들을 스타일이라 부르죠. 영화에선 스타일이 시네크리튀르예요."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에서 빛나는 내레이션은 시적인문장들로 가득하고, 벽이나 회화, 사진, 사물 등을 롱테이크로 잡는 숏들이 자주 등장한다. 벽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과 낙서와 벽화 등은 마치 그녀가 영화 쓰기를 해나가는 노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 아네스 바르다는 컬럼비아 픽처스의 제안을 받은 자크 드미와 함께 LA에서 몇 년간체류하게 되었다. 그 시절 바르다는 짐 모리슨이나 앤디 워홀 등과 우정을 나누고, 히피 문화나 블랙팬서 운동,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여자>(1976)에서 백인 남성 중심적 현실을 비판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주권이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한 것도  - P21

그녀는 34세의 사진작가이자 거리 예술가 JR과 함께 즉석 사진 부스가 딸린 트럭을 타고 시골 마을들을돌아다닌다. 키가 크고 늘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청년과 머리를 투톤으로 염색한 펑키 스타일 키 작은 할머니의 유쾌한 조합이라니! 바르다의 친화력과 호기심 덕분에두 사람은 거리의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고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해나간다. 낯선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서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낡은 벽에 붙여주는 이 프로젝트는 폐광이 된 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독신 여성, 부두 노동자들의 아내, 탄광 노동자 등에게자신의 얼굴을 재발견하도록 해주었다.
바르다는 이처럼 벽화나 사진을 통해 새로운 벽을 창조함으로써 벽 너머를 보게 한다. 상상을 통해서든 회상을통해서든 벽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장애물이 아니라 즐거운 몽상의 통로가 된다. 아무리 완강해 보이는 벽도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물렁물렁한 점토처럼 부드러운 물성으로변한다. 벽에 붙어 있는 해변 사진에서도 어느새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바르다 영화의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P23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그녀의 마지막 대화 또는 인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201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에요."라는 대사가 마음에 박혔다. 해변이 세계를 향해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면, 벽은시야가 차단되거나 전망을 잃어버린 현실을 상징한다. 해변이 자연의 평화로움을 느끼며 몽상하기 좋은 장소라면,
벽은 사람살이의 애환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장소다. 그렇다면 바르다에게 ‘영화 쓰기‘란 현실의 무수한 벽들을 넘어 마음의 해변에 가닿으려는 부단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 P26

이렇게 실시간 투사되는 시각적 형상들과 함께 음향효과 또한 인상적이다. 고감도 마이크로 포착해낸 거미의움직임과 먼지의 이동으로 생겨난 저음파는 알고리즘에 의해 소리로 변환되어 관객의 귀에 울려 퍼진다. 그 섬세한 소리들을 어찌 음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사라세노의 감각은 시인에 가깝다.
- P30

시를 쓸 때 류이치 사카모토Rimicati Sakinste, 1932~ 의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다. 사카모토는(마지막 황제〉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사랑〉 〈레버넌트 등의 영화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내가 즐겨 듣는 그의 음반은 (UTAU)와 플레잉 더 오케스트라 Playing the Orches-17 2015), 그리고 에이크 ASYNC) 등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2014년 새 앨범을 준비하던 중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앨범 작업을 중단하고 무언가 다른방식의 작업을 모색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코다Coda)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발병 이후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는과정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에 그의 젊은 시절 작업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십 대의 야심만만했던 뮤지션은 어느덧 머리 희끗하고 병색이 완연한 노년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거장들의 영화에 출연하거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백남준, 알바 노토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 P34

"꿈과 현실과 죽음도 파도 따라 가리라. 나는 무릎 꿇고,
고아처럼 간절하니..."
암세포가 자신을 언제 죽음으로 이끌지 알 수 없는 나날 속에서, 고아처럼 간절하게 살아 있는 소리들 앞에 무릎 꿇은 그의 모습에서 삶의 덧없음과 숭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결국 모든 게 사라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남은 시간 동안 "덜 부끄러운 무엇"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바로 이런 태도가 사카모토를 드물게 좋은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 P36

그중 하나의 방에는 사카모토가 작곡과 영상 작업을 할 때 참조한책들과 DVD,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헤드폰을 끼고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코너가 있는데, 사카모토가30년 전 참여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사랑(원제 더 셀터링 스카이 The Sheleting Sky)>의 원작자인 폴 보울즈 Paul Bowles 의 작품 한 대목을 여러 언어로 녹음한 것이었다. 오래전 영화 작업에서 접했던 그 문장들이 죽음에 가까워진 사카모토에게 다시 찾아와 〈풀문Fullmoon)이라는 곡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 P40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 폴 보울즈, 『마지막 사랑』 (부분)

영화 〈코다)의 마지막 대목, 겨울날 아침 사카모토는바흐의 평균율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연주한다. 손이곱아 오면 두 손을 비비거나 겨드랑이에 넣어 녹이면서 이것이 ‘나만의 코랄 연주곡‘ 이라고 말한다. 바흐가 살았던 시대는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로 인한 우울이 바흐의 음악에는 깔려 있다는 설명을 그는 덧붙인다. 사카모토 역시 현대 문명이 낳은 시대적 우울과 질병,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도 였다. 바흐의 단순하고 소박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그는 이내 손을 거둔다. "날마다 조금씩 치기로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피아노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 P41

그런데 두 사람은 왜 만리장성이라는 공간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는 여러모로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각각 성장한 두 사람은 일찍이 소련이 만들어놓은 ‘철의 장막을 경험했다. 중국의 만리장성 역시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거대한 성벽이자 배타적 경계선이다. 때라서 만리장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장벽을길로 여는 일이고, 냉전의 질서를 평화의 질서로 바꾸어내는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건기는 단순한 신체적 활동을 넘어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의미가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 서문에서 걷는 행위를바느질에 비유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라면 걸어가는사람은 실이 되고, 걷는 일은 대지를 꿰매는 바느질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걷는다는 것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인 셈이다. 아브라모비치가 수행해온 많은 퍼포먼스들이 세계의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제의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에서 개인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넘어선 사회 문화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 - P46

대지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실감하는것, 그때 비로소 ‘길‘은 죽음의 장소에서 생명의 장소로 바뀔 수 있다. 로드킬 연구자 최태영이 동물의 눈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물을 통해서든 영화를 통해서든 동물의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핸들을 잡을 때마다 그 눈동자를 조금이나마 의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이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얼마나 낮은 자세로 걸어가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맨발의 보행자에게 길은 생명을 발견하고 느끼는 터전이지만, 속도광에게 길은 끝없이 단축해야 할 공간적 거리에 불과하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더 부유하게 살려는 사람이나 사회에 있어서 ‘길‘은 오로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길‘의 윤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일처럼 보일 것이다.
- P56

새삼 ‘사람‘ 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은 ‘살나(生)‘라는 동사 어간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인 말로, ‘살아 있는 것, 곧 생명체‘를의미한다. 살다‘ 라는 동사는 다시 ‘살‘이라는 명사에서 왔으니, ‘사람‘ 이라는 말에는 ‘몸을 가진 존재 또는 힘이나기운을 지닌 존재‘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어로 ‘Man‘이나 ‘Human‘은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성서의내용처럼 ‘흙‘이라는 뜻의 라틴어 ‘Humos 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인간인 ‘Adam‘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흙‘을 뜻하는 ‘Adama‘에서 왔다고 한다. 일본어로
‘사람‘을 뜻하는 히토는‘는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어원들에 비추어본다면,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 그 속에 깃든 생명력을 그리는 일이다.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는 동양화의 전통에서도 강조되어온 바다. 그러고 보 - P60

면 ‘형이 형상의 닮음‘ 못지않게 신이, 정신의 닮음‘를 중시한 것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통용되는 인물화의 불문율이아닐까 싶다. 또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삶과 등을 맞대고있는 죽음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죽음의 인자들에 대항해 매 순간 싸우고 있다. 몸은 삶과 죽음이 싸우는 전쟁터이자, 욕망과 초월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도량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초상화에는 그의 몸이 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한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정영창의 개인전 한 사람〉에서 복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폭 전체가 오로지 한 인물의 극적인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호명된한 사람 한 사람의 이미지들은 한국의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검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얼굴들, 세계를 떠도는유령들의 귀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초상화들은 망각의 강에서 방금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죽음의 물기를 머금은 채 고통의 비늘을 파닥거린다.  - P62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길을 몸소 실천했다. 오늘 우리 앞에 도착한 그 서늘한 눈동자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정영창이 그린 초상화들은 세계에 대한 낙관과비관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얼굴에 포박된 어떤순간 속으로, 그 내면의 슬픔과 공포 속으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흡인력은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내면과 깊이 동화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거리 좁히기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 고통의 서사시 앞에서 우리는 ‘사람이란 어떤 - P65

존재인가‘ 다시 묻게 된다. 그리고 세계란 어떤 곳인가‘ 성찰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과 생성과 소멸, 인간의 삶과 죽음, 폭력과 전쟁, 사랑과 평화 등 인류 역사의 근원적 질문을 놓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탐색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그런의미에서 정영창이 기록하고 조형해낸 초상들을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한 ‘검은 빛의 환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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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운동은 백인 남성 악동들의 브로맨스를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공동 작업에 들뜬˝ 남자들, 이제 신성한 성지가 된 술집에서 ˝수십 년 진탕 퍼마신 남자들의 위업은 빠짐없이 기록되었다. 젊었을 때부터 이 남자들은 자신들이 남길 유산을 미리 예상하고 행동했으며 평론가들은 그 미술가들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기 전에 미리 그들의 작품을 열렬히 사들였다. 반면에 여성 미술가들은 중요성을 늦게 인정받는다. 여성 미술가의 명성은 사후에 소급하여 주어진다. 고고학자들이 지하묘지를 파헤쳐 생전에 과소평가된 또 한 명의 천재를 발견했다고 선언해야만 비로소 주목받는다.
마이크 켈리, 폴 매카시, 짐 쇼의 우정이나 데 쿠닝과폴록, 베를렌과 랭보, 브르통과 엘뤼아르의 우정에 관해 읽을때면, 나는 여성, 더 절실하게는 유색인종 여성이 우정을 통해 미
술가와 문인으로 성숙기를 맞은 이야기를 간절히 읽고 싶어진다. 지난 몇십 년 동안 수많은 페미니스트 문인과 미술가가 등장했지만, 그들이 함께 미적 원리를 기반으로우정을 맺는 이야기를 글로 접하기란 여전히 흔치 않은 일이다.
문학사와 미술사를 깊이 파면 팔수록 나는 더욱더 고독해졌다.
하지만 삶에서는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에린과 헬렌과의 우정을통해 이미 그런 종류의 유대감을 체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p160.161



부채 의식은 감사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로스게이는 자기 시에서 무화과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속살을맛보거나 녹슨 빨간 펌프로 끌어올린 차가운 물을 마시는순간처럼 삶의 소소한 순간에 감사한다. 그는 심지어 못생긴발에도 감사한다. 맨발일 때 못생긴 것이 너무 신경 쓰여 "스무마리의 꼬마 타조처럼 모래 속에 발가락을 파묻을 정도였는데도.
말이다.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낀다는 것은 현재의 밝은 빛속으로 팔다리를 마음 편하게 쭉 뻗는 것이다. 내 생각에는 그게행복이다.
부채 의식이 있으면 생각이 미래에 고착된다. 나는 어쩌다.
행운을 얻으면 쉽게 흥분하는 조그만 강아지처럼 긴장한다.
이 행운은 누구 것이지? 물론 내 것일 리 없어! 나는 행운을거저 받는 선물이 아니라 앞으로 매주 악운을 당함으로써 할부상환해야 하는 융자처럼 취급한다. 내가 이 모양인 것은 잘못키워져서 - 억지로 고마워하도록 욱지름을 당해서 - 그런 것이틀림없다. 저를 위해 인생을 희생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 대가로부모님을 위해 제 인생을 희생하겠습니다!
나는 그 모든 것에 반항했다. 그 결과 나는 배은망덕이라는최악의 인간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 책도 배은망덕한 책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부채 의식을 지닌 작가는 환심을 사려는이야기를 쓸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나라에 그야말로 빚을 졌지만나는 오히려 항상 배은망덕할 것이다.
- P248

1996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유리 고치야마는언명했다. "인민은 폭력 행동을 할 권리, 반항할 권리, 저항할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과 서구 세력이 제3 세계에 자행한일을 고려하면 … 그 나라들은 저항해야 합니다." 그를 인터뷰한 한노리미쓰 오니시 기자는 그 말에 바로 이어 고치야마가 "현재정치적 비주류 소수로 국한되는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라고언급함으로써 인용문의 의미를 축소해 버렸다.
나는 잘 알아보지도 않고 이런 설익은 논평을 전부포용했었다. 그들이 어떤 정치를 도모했는 지금은 한물갔다고생각했다. 고치야마의 국제적 인종 관계 정치는 결코 하찮지않건만 수많은 "전문가"가 정체성 정치의 하찮음에 대해거만하게 떠드는 소리만 듣고 운동가 선배들의 노고를 냉큼묵살했던 일이 나를 괴롭힌다. 미래가 걱정스럽고, 이 나라의타고난 망각 능력이 걱정스럽고, 항상 승리해 서사를장악한 자가 권력을 쥔다는 것이 걱정스럽다. 깨어 있다는것은 일회성 자각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평가를 통해 에너지를얻는 장기적인 서약일진대 "woke (깨어 있음을 뜻하는 형용사awake의 흑인 방언 - 옮긴이)라는 구호는 이제 조롱받는 일개해시태그로 전락했다.  - P255

생각 실험을 하나 해보자. 만일 백인이비백인에게 00(빈칸에 국가나 대륙을 기입)으로 돌아가라고소리 지를 때마다 그들의 소원이 즉각 이루어진다면 어떻게될까?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에콰도르인이 갑자기 멕시코에가 있거나, 내 경우에는 중국에 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나라를 정확하게 지목해서 갑자기 내가 서울로 순간 이동한다면어떻게 될까?
나는 2008년 이후로 서울에 가지 않았지만, 당시 100 세인할머니를 뵈러 갔더니 열악한 요양원에서 천천히 노쇠해지고계셔서 지금도 할머니만 생각하면 가족들에게 화가 난다. 그요양원은 기괴한 탁아소처럼 벽을 온통 분홍색으로 칠하고아이들이 합창하는 섬뜩한 찬송가 녹음을 온종일 틀어놓았다.
10인 1실로 꽉 찬 방에서 생활하는 노인들은 방문한 자녀들에게자주 좀 오라고 투정했다. 중증 치매인 우리 할머니를 돌보기에나머지 친척들은 너무 노령이었기 때문에 내 동생이 1년 동안서울에서 할머니를 돌봤다. "늙어서 가족이 나를 버리기 전에죽고 싶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나는 서울에서 못 산다. 그곳은 여자들이 살기 좋은 곳이 못된다. 많은 여성이 선천적으로 넓은 몽골형 얼굴을 성형수술로깎아 하얗게 표백한 하트형 얼굴로 만든다. 교육제도도무자비하다. 금융위기 수습을 위해 1997년에 국제통화기금이한국에 58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하면서 그 조건으로 - P256

국 투자자에게 시장을 개방하고, 노동시장 규제를 완화해노동자의 고용과 해고를 용이하게 하고, 탄소 배출 기준을해 미국 자동차 수입을 허용하도록 했다. 이제 실질 임금은체되었다. 실업률도 심각해졌다. 대학생들은 억압적 봉건체제였던 조선왕조의 이름을 따서 자기 나라를 "헬조선"이라부른다. 탁하고 뿌연 미세먼지가 서울 전역에 내려앉는다. 그먼지는 육안으로는 안 보여도 목 뒤로 느껴지며 장기적으로 암같은 병을 일으킨다. 한국인들은 특정한 몇 개월 동안은 밖에도잘 안 나가고 나갈 때는 수술용 마스크를 쓰지만, 그것도 그들을충분히 보호해주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미국에 사는 것을 은혜로 여겨.

테레사 학경 차는 "민주주의를 시행하는척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에 연속적인 굴절을 초래하는 장치를저지하라"고 적는다. 서구의 가장 파괴적인 유산은 누가 우리의적인지 규정하는 권력이며, 이 권력에 의해 우리는 남북한이그랬듯 동족을 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나의 적으로삼는다.
- P257

지도를 놓고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을 자의적으로 그었고,
과적으로 이 분단은 우리 할머니의 가족을 비롯해 수백만 가족을 갈라놓았다. 그 후 미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전역에서 일본군에게 투하한 것보다 더 많은 폭탄과 네이팜을자유의 기치 아래 좁은 우리 땅에 투하했다. 한국전쟁과 관련해잘 알려지지 않은 기막힌 사실 하나는 당시 한국에서 복무하며화상 피해자를 치료했던 미국 외과 의사 데이비드 랠프 밀러드가바로 아시아인의 눈을 서구적으로 만드는 쌍꺼풀 수술을 창시한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그 수술법을 한국 성노동자들에게시술하여 미군 병사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다. 오늘날쌍꺼풀 수술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성형수술이다. 내 조상의 나라는 당신이 영구적 전쟁과 초국가적자본주의를 통해 필리핀, 캄보디아, 온두라스, 멕시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 엘살바도르, 그 외에도 수없이 많은나라에서 저지른 살상과 자원 착취의 작은 예시에 불과하며,
이것은 주로 미국 국내 주식 투자자들의 배를 불렸다. 그러니까나한테 은혜를 논하지 말란 말이다.
- P259

미국에 돌아오니 공기가 희박했다. 숨이찼다. 학자 서영 주의 표현처럼 나는 기묘한 골짜기로 다시유배되었다. 거기서 나는 실리콘 틀 속에 다시 넣어졌으며, 그안에서 쌍꺼풀 없는 눈으로 바깥을 내다보았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곧 나를 내용물로 채우는 것이다. 나자신을, 그리고 나를 통해 대리되는 다른 아시아계 미국인을 더인간화하고 미국 문화에 좀 더 유의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
시는 영어와 힘든 관계를 맺어온 누구에게나 너그러운 표현매체다. 말을 더듬는 사람도 노래를 부를 때는 문제 없이 단어를발음하는 것처럼 이민자도 시를 통해서는 영어로 아름답게글을 쓸 수 있다. 시인 루이즈 글릭은 서정시는 폐허라고했다. 폐허로서의 서정시는 인종적 조건을 탐구하기에 최적의형식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형언하기 어려운 상실을 서정시의 - P260

파편 속에 담긴 침묵을 통해 포착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까지 그러한 침묵에 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의지해왔으며, 상실의 슬픔이 자칫 단어 몇 개로 축소되지않도록 늘 여백을 남겼다. 시인 조스 찰스는 "자본 안에서감지되는 것은 끔찍하다"라고 했다. 나는 내 고통을 소비용으로쉽게 요약하느니 차라리 여백으로 남겨놓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 산문체를 택함으로써, 인종 정체성에 대한내 감정을 해부하며 그 침묵의 빈자리를 어수선하게 채우는중이다. 그 감정을 검토할 때면 작가로서 특정 인종 범주에들어앉아 나를 외부와 차단해버리는 손쉬운 길을 택하고말았다는 초조함이 어김없이 뒤따른다.
- P261

나는 빚진 상태를 통째로 부인할 수는 없다.
나는 과거에 투쟁한 운동가들에게 빚지고 있다. 나는 학경차에게 빚지고 있다. 윤리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곧 역사에책임지는 것을 의미하므로, 나는 세상이 자기에게 빚지고있다고 여기는 부류의 백인 남자가 되느니 차라리 빚을 지겠다.
또한 나는 무리 부모님께 빚지고 있다. 하지만 내 삶을 비밀로유지하거나 내 것을 챙기는 사유화의 꿈을 뒤쫓는 방식으로부모님께 진 빚을 갚지는 못하겠다. 엄마는 내게 감사할 것을거의 매일 요구했다. 엄마는 내가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되도록미국에 온 거라고 거의 매주 말했다. 그러고는 물었다. "너는 왜그렇게 힘들게 사니?"
- P266

저자와 공감한다는 것은 저자와 동일한 체험을 공유한다고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런 주장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나는외국에서 생활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계 미국인은 아니다.
그러하니 저자가 한국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겪어온 일에 대해내가 과연 얼마나 잘 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물론 미국 생활을꽤 오래 했고 교포 친구들을 사귀었던 경험도 있으니 완전히문외한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히 내가 미국에서 삶을영위하는 한국계 미국인 공동체의 실태를 온전히 이해하는 척할수는 없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살아보고, 잠시 직장에도 다녔지만, 그과정에서 아무리 친숙해지고 정들었다고 해도 내게 미국이라는나라는 어디까지나 싫으면 떠나면 되는 곳이었지 소속감을갈망하거나 여기가 내 나라라는 의식은 별로 없었다. 그런의식이 없으니 소외나 차별에 좌절감이나 분개심이 일어도저자와 같은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체감하는 것과는 정도에 큰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 사회에 대한 저자의관점이나 감정을 이해하는 내 역량에도 분명히 한계가 있을것이다.
- P272

앞서 말한 대로 미국에서 생활할 때는 차별적인 언사를들거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선입견이 깔린 헛소리를 들어도 내, 내 나라에서 타자화되는 체험이 아니어서 상처가 덜했다.
그러나 외국인, 더 정확히 말하면 스위스 국적의 백인 남성과결혼하고 아시아 여성 이민자로서 백인이 절대다수인 남편의나라에서 몇 년 생활한 이후로 나의 외부자로서의 촉수는지극히 예민해졌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스위스를 제2의집으로 삼게 된 이후부터는 은근한 차별, 따돌림, 타자화가 미국시절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이 문제는 미국에 비해서 유럽이 전반적으로 소수자 집단과함께 살아가는 일에 덜 익숙하고, 소수자와 관련해 정치적올바름을 발휘하는 일에 훨씬 덜 예민하다는 점 때문에 한층더 현저히 발현됐다. 중국 관광객이 쓰는 돈이 도시의 엄청난수입원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대로에서, 성인 한 무리에게칭챙총 소리를 반복해대는 놀림을 받고서 나는 겉으로는 쿨하게무시하고 지나쳤지만, 속으로는 그 자리에서 한마디했어야 하는것이 아니었나 갈등이 일었다. 저자가 지하철에서 인종차별적언사를 한 남자를 대담하게 야단치는 대목을 번역하면서, 나도그때 그랬어야 했다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 P273

그것은 주류 다수 백인 남성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스트레스다. 바로 이 인구 집단에 속하는 남편은 지금이야나만큼이나 이 문제에 예민하지만 결혼 초기에는 내가 일상에서느끼는 바를 구체적으로 일일이 설명해주어야 비로소 그것을인식했다. 그렇게 설명하면서 느끼던 내 심정, 그것이 바로
"소수적 감정이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나는 저자가 겪은 일들을 내 일처럼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분명히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을 옮기는 동안, 저자의 이야기에 가슴을 졸이고, 슬퍼하고,
분개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에이는 마음을 추스르면서, 내가20~30대에 겪었던 미국 사회를 복잡한 마음으로 돌아보았다.
거기에 사는 한국 교포, 아시아 이민자, 그리고 다른 소수자집단들을 생각해보았다.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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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정들은 사소하지 않다

이 나라에서 아시아인으로 사는 굴욕은 잘 알려져 있지않다. 우리는 아시아인은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에 주눅이들어 있다. 근면성을 발휘하면 존엄성으로 보상받으리라 믿고묵묵하게 열심히 일하지만, 근면은 우리를 보이지 않는 존재로만들 뿐이다. 우리가 목청을 높이지 않으면 우리의 수치심은억압적인 아시아 문화와 우리가 떠나 온 나라가 초래한 것이되고 미국은 우리에게 오로지 기회를 주었을 뿐이라는 신화를영구화하게 된다. 아시아인이 좋은 처지에 있다는 거짓말은너무나 은근히 퍼져 있어서,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도 남들에비하면 나쁜 처지가 아니었다는 의심에 시달린다. 그러나 인종적트라우마는 누가 앞서고 뒤지는 스포츠 경기가 아니다. 문제는내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이례적이 아니라 실은 오히려전형적이었다는 데 있다.
- P112

시인 바누 카필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극우파가 득세하면어떻게 될지 상상하려면 그냥 눈만 감으면 된다. 그리고 내 어린시절을 회상하면 된다." 친구들도 그 심정에 똑같이 공감했다.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촉발되었다고했다. 아이들은 잔인하다. 아이들은 집에서 부모에게 들은인종차별적인 개소리를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직설적인 방식으로앵무새처럼 재생한다. 트럼프 행정부 밑에서 요즘 인종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것처럼 아이들 사이에서 인종주의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 기억의 촉발은 꼭 특정한인종차별 사건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되살린다.
한 오라기의 두려움과 수치심, 동물처럼 바짝 긴장한 경계심같은 것 말이다. 순수한 상태로 향수에 젖어 회귀하는 것이든불안과 걱정을 갑작스럽게 떠올리는 것이든 간에, 어린 시절은하나의 정신 상태다. 어린 날의 순수가 보호받고 위안받을때의 정신 상태라면, 어린 날의 불안은 그 사람이 최소한으로만보호받고 위안받는다고 느낄 때의 정신 상태다.
- P113

이런 일도 있었다. 동생이 아홉 살이고 내가열세 살일 때였다. 쇼핑몰에 갔다가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데어느 백인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려고 유리문을 열었다. 나는우리를 위해 문을 열어주는 줄 알고 남자가 마지못해 문을붙잡고 있는 동안 재빨리 그리로 나왔다. 문이 닫히기 전에 그가고함쳤다. "난 중국놈들한테는 문 안 열어줘!"
동생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 남자가 왜 그렇게 못되게구는지 동생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런 일은 처음 당해봐." 동생이울었다.
나는 쇼핑몰로 되돌아가 그를 죽이고 싶었다. 나는 어린여동생을 보호하지 못했으며, 증오 때문에 우리를 아이로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성인 남자에게 살인적인 분노가 솟구치는 - P116

내가 백인성 문제를 거론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 아시아게미국인들이 이 나라의 자본주의적 백인우월주의 위계질서 속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명명백백하게 따져봐야 하는데 여태그래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꼼꼼히 따져보기는커녕, 일부아시아인은 인종이 자신의 삶과 무관하고 "문제되지 않는다고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백인들이 하는 똑같은 소리 못지않게잘못된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인종 정체성 때문에차별만 받은 것이 아니라 혜택도 누렸기 때문이다. 인종을나와 무관하게 여기는 이 아시아인들이 바로 내 사촌이고, 내옛 남자친구이며, 브루클린에 안락하게 틀어박혀 맑고 포근한날 불현듯 나는 인종에 영향받지 않아도 되고 그저 자진해서 그문제를 생각할 뿐이라고 여기는 나 자신이다. 나 또한 오로지나와 내 직계 가족만을 위해서 살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을전부 누르고 앞서가라는 이 나라의 신자유주의 정신과 일치된생존 본능을 갖춘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자신을 옥죄는수치심은 묻어버린 채 말이다. 정도는 조금씩 달라도 미국에서자란 아시아인은 모두 내가 묘사한 수치심을 익히 알고 있으며,
그 기름진 불길을 느껴봤다.
- P122

가족이 과테말라에서 왔건, 아프가니스탄에서왔건, 한국에서 왔건, 1965년 이후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역사는 미국을 넘어서 각자의 출신국으로 확장된다. 그곳에서우리의 동족들은 서구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미국이 세우거나지원한 독재 정권에 의한 대량 살상을 겪었다. 미국의 일원이되기 위해서 애쓰느라고 우리는 인생에서 제2의 기회를 선사받은양 황송해한다. 그러나 이민자들이 공유하는 뿌리는 이 나라가우리에게 부여한 기회가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의 자본주의적확장이 우리의 조국의 피를 빨아 부를 챙긴 방식이다.
우리가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백인 순수의 유아론을 뒤집어,
우리의 국민 의식이 그 이란계 미국인 소년 같은 아이들의정신과 더 비슷한 모습이 되도록 일조할 작정이다. 그 아이의정신은 글도 깨치기 전에 벌써 이 나라가 어떤 폭력을 가할 수있는지를 인지하는 무방비 상태의 의식이며, 역사에 시달리는아이의 의식이 언젠가 다수를 차지할 때 새하얀 이미지들을퇴색시킬 것이 틀림없다.
- P126

서투른 영어는 한때 부끄러움의 원천이었지만,
이제 나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서투른 영어는 나의 유산이다.
나는 완벽한 영어에서 일부러 멀어질 것을 외치는 작가들과 -영어를 탈취해 도망자의 언어로 비틀으로써 영어를 어지럽히고,
뒤흔들고, 난도질하고, 괴랄하게 만들고, 타자화하는 작가들과 -문학적 계보를 공유한다. 영어를 타자화하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언어에 박힌 제국주의 권력을 알아차리도록 하는 것이며, 영어를절개하여 그 어두운 역사가 비어져 나오게 하는 것이다.
시인 너새니얼 매키는 에세이 타자 : 명사에서 동사로에서타자라는 명사는 사회적 의미를 띠고, 타자화하다라는 동사는예술적 의미를 띠는 것으로 구분한다.

예술적 타자화는 문화적 건실성과 다양성 증진의 기반인혁신, 발명, 변화와 관계 있다. 사회적 타자화는 권력,
배제, 특권과 관계 있다. 즉 한 명사를 중심에 놓고 그것을기준으로 타자성을 측정, 배분, 주변화하는 것이다. 나는후자에 예속되는 사람들에 의한 전자의 실천에 초점을둔다.
- P136

우리 부모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어떤공부를 하고 어떤 직업을 고를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해주신것이다. 빚과 일주일 내내 일하는 고된 처지에서 부모님을구제해야 한다는 의무를 느끼던 다른 한인 타운 아이들은 나와같은 처지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자녀의 도움이 필요 없는부유한 한국 부모들도 오로지 자랑할 권리를 누리고 싶다는이유로 자식들의 경력과 결혼을 가차 없이 관리했고, 그러다가애들의 인생을 망쳤다. 내가 운이 좋았던 것은, 아버지도 한때시인이 꿈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오벌린 대학에서 시과목을 수강하기 시작하자 처음으로 그 사실을 밝히셨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풀려서 내가 10대가 됐을 때 우리가족은 교외 백인 거주지 내 수영장 있는 집에 살았다. 나는참새가 염소 소독제 섞인 수영장 물을 한 모금 마시러 획내려왔다가 다시 획 올라가는 모습을 창문으로 내다보곤 했다.
거기로 이사했다고 해서 우리 집에 감돌던 불행이 지워지지는않았지만, 우리의 그런 고립된 생활 환경이 모종의 안도감을주었다. 내 사춘기 불행의 원인을 분석하려면 엄마에 관해 써야하는데, 이 책에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이 힘들었다. 엄마 이야기를하지 않고서 내 안으로 얼마나 깊이 파고들 수 있을까? 아시아계미국인의 내러티브는 항상 엄마로 귀결되어야 하나? - P164

"우리 사는 데 어딘지 알잖아." 내가 성이 나서 말했다.
헬렌이 말했다. "어디 가서 좀 앉자." 이상하리만치 따뜻한날이어서 우리는 콘크리트 우주선처럼 생긴 오벌린 대학교 도서관 바로 앞에 펼쳐진 와일더 보울 잔디밭에 앉았다. 헬렌이눈물을 글썽여가며 강의 시간에 쓰기에도 지나치게 지적으로다가오는 온갖 어휘를 동원해 내 시를 논했는데 걔가 그렇게말하니까 왠지 진정성 넘치고 심오하게 들렸다. 헬렌은 그토록감동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내가 시에서 뭔가 매우 핵심적인것을 포착했다고 했다. 영혼을 포착했다고 했다. 시 속에서내가 춤을 춘다고 했다. 그것이 헬렌에게 창작에 대한 영감을주었다고 했다. 걔가 밤새 내 시를 전부 읽은 다음 다시 반복해서읽으며 단어 하나하나를 음미했다고 했다.
나는 행복했다. 안도감이 밀려왔다. 누군가를 감동시키는것이, 헬렌을 감동시키는 것이, 바로 글을 쓰는 의의라고생각했다. 나는 다시 진정한 존재가 되었다. 우리는 진정했다.
나는 그 감정 속에서 헬렌과 잔디 위에 앉아 있었다.
- P197

「낯선 자들의 수직 심문에서 저자 바누 카필은 무작위로만난 남아시아 여성들에게 일련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와 같은 날카로운질문과 더불어 "당신은 어떤 체형입니까?"라고 질문한다. 나만해도 비소처럼 남은 어린 시절의 잔여물인 신체이형장애의흔적을 노출하지 않고서는 그 질문에 도저히 대답할 수가없다. 의기양양한 페미니즘 서사에서는 여성이 자신의 신체를탈환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신체를 일정한 거리를 두고조심스럽게 바라본다. 큰 머리통, 어쩌면 한때는 중성적으로깜찍한 매력이 있었을 수도 있는 아담한 몸. 하지만 이제 내 몸은무심하게 방치되어 늘어지고 있다. 유방은 소파에 누워서 서핑할때 쓰는 노트북 받침대다.
차라면 어떻게 답했을까? 가톨릭교도이자 한국인으로자랐으니 억압은 이중으로 작동했다. 공연 영상 속 그는 항상흰 옷을 입고 있다. 백색은 한국 문화에서 죽음을 뜻하지만,
무속 문화에서는 평화를 뜻한다. 차의 어머니는 차를 임신한 지8개월째에 가족과 부산으로 피난했다. 그날 앙고라 토끼처럼커다랗고 하얗고 탐스러운 함박눈이 내렸고, 차의 어머니는드물게 평화로운 순간을 체험했다. 차는 육체를 육감적으로현시하기보다는 소거하는 일을 더 흥미롭게 여겼다. 그래서자신을 희생하는 여성들에게 매료되었다.  - P234

슬픔은 우리 눈을 속이고 시각을 왜곡할수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잃어버린 소중한 사람들이 가까이있음을 재확인받는다. 물론 그들은 차가 아직도 현존하여 그들을그 방으로 인도했고, 차의 손의 기운이 여전히 그 장갑 속에,그들의 꿈속에, 『딕테 속에 남아 저승에서 그들을 부른다고주장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물론 그들은 차가 죽어서도여전히 작품을 만들고 있으며 그의 영혼이 참혹한 죽음을초월하여 존속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할 것이다. 장갑이발견된 바로 그날 아티스츠 스페이스에서 전시회가 열렸고 차가작업한 손 사진들이 유작으로 전시되었다.
- P238

살면서 내내 부채 의식의 무게를 느꼈다. 나는부모님의 죽은 아들을 대체할 아들이 아니고 딸이었으므로태어날 때부터 결손 상태였다. 이후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나는인생 선택을 할 때마다 내 가치는 계속해서 하락했다. 빚을졌으면 조심하고, 자제하고, 내 차례가 아니면 입을 다물어야한다. 내 선택이 전혀 아닌 선택에 의해 구속되는 삶을 살아야한다. 저녁 식사 모임에서 좌중을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편하게여기는 남녀는 긴 문장으로 말하면서 극적인 순간에 멈추어이야기의 효과를 고조시키고, 아무도 감히 중간에 끼어들지못하도록 한다. 그와는 달리 나는 그저 초대받은 것이 황송하여남이 끼어들기 전에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하려고 재빨리잘려지고 압축된 문장을 내뿜는다.
부채 의식을 지닌 아시아 이민자가 자기들이 이만큼사는 것을 미국 덕분으로 여긴다면, 그 자녀 세대는 자기들이먹고사는 것을 고생한 부모 덕분으로 여긴다. 따라서 부채의식을 지닌 아시아계 미국인은 이상적인 신자유주의적 주체다.
역사의 무게는 오롯이 내가 짊어지는 부담이고 부모님이 잃은것을 보상받는 일은 내게 달렸다고 받아들인다. 그러기 위해서불평은 접어두고 직업전선에서 내 능력을 증명해야만 한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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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인 아이들을 동물원의 동물 보듯 구경하며 머린 시절의대부분을 보냈다. 어떤 때는 친구 집을 방문하는 형식으로내부 입장이 허용됐으며, 나는 그곳에 존재하는 질서와 놀이의조화로운 균형에 감탄했다. 친구의 부모는 합리적인 어조로대화했고, 버릇없는 테리어견이 집 안으로 불쑥 들어와 비스킷을받아먹었다. 긴장감 돌고, 반려견도 없고, 퀴퀴한 냄새가 코를찌르고, 엄마는 세탁물을 진부 밖에 내다 걸고, 할머니는 폴저스커피 통에 당신의 소변을 모았다가 텃밭에 심은 파에 비료로주던 우리 집과는 전혀 달랐다. 나는 종종 밤늦게 내 이름을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 소리는 처음에는 희미하다가점점 커졌고, 그게 엄마의 목소리라는 것을 말았다. 나는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걷잡을 수 없는 부모님의 싸움을 또 한차례 말리기 위해 안방으로 뛰어갔다.
이튿날 학교에 갔을 때 11월 햇볕이 따스했던 것과석류나무에 석류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것이 유독 기억에남는다. 나는 점심시간에 거기에 앉았다. 같은 반 아이들의웃음소리가 멀찍이 들렸고, 잠을 못 자서 귀가 물 들어간것처럼 멍멍했다. 만약 현실이 하나의 부조 작품이라면, 나 말고다른 사람은 모두 양각이고 나는 다른 모든 사람을 돋보이게하는 음각처럼 느껴졌다. 어렸을 때 좋았던 기억이라고는서울에서 보낸 여름철밖에 없다. 내 손톱에 봉선화 꽃잎을 묶어주황색으로 물들여 주시던 할머니, 이모, 삼촌, 사촌들과 함께마룻바닥에서 자는 동안 습한 열기 속에 느릿느릿 돌아가던선풍기, 딱딱한 고무 슬리퍼를 신고 벌거벗은 채로 쪼그려앉으면 이모가 끼얹어주던 정신이 번쩍 들게 차가운 물.
- P99

나는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지 않고 항상옆으로 곁눈질했다. 어린 시절을 뒤돌아보는 일에 달콤한 영화같은 향수가 어린다면, 어린 시절을 곁눈질하는 일에는 희뿌연부러움의 실안개가 서린다. 그 부러움은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집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때, 온갖 광고와 TV 방송에서 아이는어떤 모습이어야 하고 어떤 가정에서 자라야 하는지 선명하게보여줄 때 내 속을 갉아먹었다.
퀴어 이론가 캐서린 본드 스톡턴은 퀴어 아동이 어떻게
"옆으로(sideways) 자라는지" 적으면서, 퀴어의 삶이 흔히 결혼과출산이라는 직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말한다. 스톡턴은 유색 인종 아동 역시 옆으로 자라는데 그들의어린 시절도 퀴어 아동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백인 아동이라는모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내 경우는 어린시절을 옆으로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지금도 그때를돌아보면, 어린 소녀가 내 시선을 피해 숨으면서 나의 기억들을깜박거리는 환상의 그림자놀이로 유도한다.
옆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것을 함축한다. "곁눈질"은 의심,
의혹, 심지어 경멸을 암시한다. 나는 사춘기 때 학교에서 온갖성장 소설을 잔뜩 접했다. 교사가 비타민 풍부한 채소처럼강권하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너새니얼 호손의 작품과는 달리,
- P101

흑인 아동은 역사적으로 "아동기에 머물러보지못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라고 학자 로빈 번스틴은 인종적순수 : 노예제에서 민권 시대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어린이가아동기를 보낸다는 것』에서 적고 있다. 번스틴은 백인 순수를상징하는 아이콘으로 해리엇 비처 스토의 『톰 아저씨의오두막에 등장하는 어린 소녀 에바를 예로 든다. 금발의곱슬머리와 파란 눈이라는 후광에 휩싸인 에바는 톰 아저씨의눈에 고결하게 비치지만, 노예 소녀 톱시는 엄마 없는 짓궂고삐딱한 아이로 보인다. 에바가 톱시를 포옹하며 애정을 표하자비로소 톱시는 순수한 아이로 거듭난다.
어린 에바가 이상화된 아이라면, 톱시는 "문제아, 검은 피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우스울 정도로 고통에 무감각한 상태"에의해 규정되는 그야말로 궁극의 "꼬마 검둥이" (pickaninny)이다.
스토는 톱시도 감정이 있지만 어린 에바의 손길을 통해서야비로소 아이로 변신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오로지백인 아이만 아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백인 아이와 노예 - P107

순수를 뒤집으면 수치심이 된다. 마담과하와가 순수를 잃었을 때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벗은 줄을 알고 수치심을 느꼈다. 수치심이란 원숭이의뻘건 엉덩이처럼 훤하게 노출되었다는 것을 매섭고 따갑게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 낸 신경증적인 상처다.
수치심을 일으킨 공격자가 내 삶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나는 계속 존재한다고 상상하고 내 그림자를 그자로 착각하여몸을 움츠린다. 수치심은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같아서, 집밖으로 잠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도 수용체가 자극받아 나는반응한다. 체면을 잃는 것과는 다르다. 수치심은 내 얼굴을 깔고앉아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수치심을 아시아적인 속성과 유교적인명예 체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가해한 수치심의 의례와 연결짓지만, 내가 말하는 수치심은 그 수치심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수치심은 문화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상호 관계에 영향을 주는 권력의 역학을 뼈아프게 인식하는것이며, 그 서열에서 내가 피해자 - 또는 가해자로서 점하는위치를 깨닫고 몸이 오그라들도록 느끼는 치욕이다. 나는 개들이목에 두르는 수치의 깔때기이다. 나는 남자 소변기에 부착하는수치의 변기 탈취제다. 이 감정이 내 정체성을 갉아먹어 결국몸은 껍데기만 남고 나는 하얗게 불타오르는 수치심 덩어리로화한다.
- P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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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0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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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04. 16.






깊은 일
안현미


그날 이후 누군가는 남은 전 생애로 그 바다를 견디고 있다

그것은 깊은 일

오늘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는 밤

아무래도 이번 생은 무책임해야겠다

오래 방치해두다 어느 날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마음처럼

오래 끌려다니다 어느 날 더 이상 쓸모없어진 어떤 마음처럼

아무래도 이번 생은 나부터 죽고 봐야겠다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삶을 살아야겠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혼자 밥 먹는, 혼자 우는, 혼자 죽은 사람으로 살다가 죽어야겠다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지만 침묵해서는 안 되는

그것은 깊은 일

시집 [깊은 일] 중에서


세월호못봇

끝내기 위해서는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끝날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쓴다 그리하여 개조해야 할 특별 대책과 특급 망언들만 부표처럼 떠 있는 맹골바다 속으로세월호는 침몰해야만 했다고 쓴다. 100일이 넘도록 오직 진실을 알고 싶다며 눈물의 입구에서 절망의 입구까지 애통하게 견뎌온 엄마들이 있다고 쓴다 이제 그만 유사 대책과 유사 눈물에 최선을 그만두자고 쓴다 최악을그만두라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희망 고문은 그만 닥치라고 쓴다 진보도 보수도 멀었다고 쓴다 제발 그리운이름 옆에서 살고 싶다고 쓴다 죽고 싶다고 쓴다 내 새끼가 너무 보고 싶다는 말이 못이 되어 박혔다고 쓴다.
돈이 되는 건 다 판다더니 정말 다 팔았다고 쓴다 지옥까지 팔았다고 쓴다 그게 뭐든 누구든 내 새끼가 보고싶다는 말에 못 박혀야 한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죽을수는 없다고 쓴다 죽어도 죽어도 다시 죽을 때까지 시작해야만 한다고 쓴다 - P10

수학여행 가는 나무

나무는 쓴다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고 겨울에도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수요일에도 떠나지 못할 거라고 쓴다 결국 떠날 수 있는건 없다고 쓴다 다만 울음이 바닥났을 뿐이라고나무는 운다 굴뚝 위에 독재 위에 칠탑 위에 올라간사람들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위해 나무는 운다 우리는 모두 까닭이고 바보라고나무는 간다 어둠을 뚫고 바위를 타고 계급을 넘어 나무는 간다 울음을 찾아 울음의 핵심을 향해 울음의 연대를 위해 나무는 간다 사월의 사월의 바다로 나무는 난다 세계는 늘 위독하지만 수학여행 다녀게요 기억하겠습니다 기록하겠습니다 살고 싶어요 엄마 사랑해요 특별해서 사랑한 것이 아니라 사랑해서 특별해진 그 사랑을 기억하며 기록하며 나무는 난다 나무는 날아오를 것이다.
- P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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