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2008)은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난다. 첫 장면은 유년기를 보낸 벨기에의 해변에 크고 작은 거울들을 설치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밀려오자 거울 몇 개가 물거품 속에 잠기고, 바르다의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런 우연성이 이미지에 생기를더해준다. 바르다는 제작진의 얼굴을 거울에 차례로 비추며 그들을 자신의 몽상에 참여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소개한다. 그렇다.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시적인 몽상과 즉흥적 만남, 유머와 재치, 그리고 따뜻한 우정으로 보는 이에게 행복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극적인 서사나 강렬한 액션, 선정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시인 발레리의 고향이기도 한 세트 바닷가와 부두 근처의 옛집, 첫 영화를 찍은 라 푸앵트 쿠르트 해변, 이십 대에 가출해서 뱃일을 했던 아작시오 해변, 자크 드미와 만나함께 살던 누아르무티에 섬, 중국이나 쿠바의 해변, - P19
"영화의 움직임, 관점, 리듬, 그리고 편집 작업은 작가가 문장의 의미에대해 고민하고, 단어를 선택하고, 부사의 개수를 신경 쓰고, 챕터의 사용을 고려하는 등의 방식과 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보시면 돼요. 글쓰기에선 이러한 것들을 스타일이라 부르죠. 영화에선 스타일이 시네크리튀르예요."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에서 빛나는 내레이션은 시적인문장들로 가득하고, 벽이나 회화, 사진, 사물 등을 롱테이크로 잡는 숏들이 자주 등장한다. 벽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과 낙서와 벽화 등은 마치 그녀가 영화 쓰기를 해나가는 노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 아네스 바르다는 컬럼비아 픽처스의 제안을 받은 자크 드미와 함께 LA에서 몇 년간체류하게 되었다. 그 시절 바르다는 짐 모리슨이나 앤디 워홀 등과 우정을 나누고, 히피 문화나 블랙팬서 운동,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여자>(1976)에서 백인 남성 중심적 현실을 비판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주권이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한 것도 - P21
그녀는 34세의 사진작가이자 거리 예술가 JR과 함께 즉석 사진 부스가 딸린 트럭을 타고 시골 마을들을돌아다닌다. 키가 크고 늘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청년과 머리를 투톤으로 염색한 펑키 스타일 키 작은 할머니의 유쾌한 조합이라니! 바르다의 친화력과 호기심 덕분에두 사람은 거리의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고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해나간다. 낯선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서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낡은 벽에 붙여주는 이 프로젝트는 폐광이 된 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독신 여성, 부두 노동자들의 아내, 탄광 노동자 등에게자신의 얼굴을 재발견하도록 해주었다. 바르다는 이처럼 벽화나 사진을 통해 새로운 벽을 창조함으로써 벽 너머를 보게 한다. 상상을 통해서든 회상을통해서든 벽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장애물이 아니라 즐거운 몽상의 통로가 된다. 아무리 완강해 보이는 벽도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물렁물렁한 점토처럼 부드러운 물성으로변한다. 벽에 붙어 있는 해변 사진에서도 어느새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바르다 영화의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P23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그녀의 마지막 대화 또는 인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201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에요."라는 대사가 마음에 박혔다. 해변이 세계를 향해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면, 벽은시야가 차단되거나 전망을 잃어버린 현실을 상징한다. 해변이 자연의 평화로움을 느끼며 몽상하기 좋은 장소라면, 벽은 사람살이의 애환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장소다. 그렇다면 바르다에게 ‘영화 쓰기‘란 현실의 무수한 벽들을 넘어 마음의 해변에 가닿으려는 부단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 P26
이렇게 실시간 투사되는 시각적 형상들과 함께 음향효과 또한 인상적이다. 고감도 마이크로 포착해낸 거미의움직임과 먼지의 이동으로 생겨난 저음파는 알고리즘에 의해 소리로 변환되어 관객의 귀에 울려 퍼진다. 그 섬세한 소리들을 어찌 음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사라세노의 감각은 시인에 가깝다. - P30
시를 쓸 때 류이치 사카모토Rimicati Sakinste, 1932~ 의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다. 사카모토는(마지막 황제〉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사랑〉 〈레버넌트 등의 영화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내가 즐겨 듣는 그의 음반은 (UTAU)와 플레잉 더 오케스트라 Playing the Orches-17 2015), 그리고 에이크 ASYNC) 등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2014년 새 앨범을 준비하던 중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앨범 작업을 중단하고 무언가 다른방식의 작업을 모색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코다Coda)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발병 이후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는과정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에 그의 젊은 시절 작업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십 대의 야심만만했던 뮤지션은 어느덧 머리 희끗하고 병색이 완연한 노년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거장들의 영화에 출연하거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백남준, 알바 노토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 P34
"꿈과 현실과 죽음도 파도 따라 가리라. 나는 무릎 꿇고, 고아처럼 간절하니..." 암세포가 자신을 언제 죽음으로 이끌지 알 수 없는 나날 속에서, 고아처럼 간절하게 살아 있는 소리들 앞에 무릎 꿇은 그의 모습에서 삶의 덧없음과 숭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결국 모든 게 사라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남은 시간 동안 "덜 부끄러운 무엇"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바로 이런 태도가 사카모토를 드물게 좋은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 P36
그중 하나의 방에는 사카모토가 작곡과 영상 작업을 할 때 참조한책들과 DVD,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헤드폰을 끼고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코너가 있는데, 사카모토가30년 전 참여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사랑(원제 더 셀터링 스카이 The Sheleting Sky)>의 원작자인 폴 보울즈 Paul Bowles 의 작품 한 대목을 여러 언어로 녹음한 것이었다. 오래전 영화 작업에서 접했던 그 문장들이 죽음에 가까워진 사카모토에게 다시 찾아와 〈풀문Fullmoon)이라는 곡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 P40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 폴 보울즈, 『마지막 사랑』 (부분)
영화 〈코다)의 마지막 대목, 겨울날 아침 사카모토는바흐의 평균율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연주한다. 손이곱아 오면 두 손을 비비거나 겨드랑이에 넣어 녹이면서 이것이 ‘나만의 코랄 연주곡‘ 이라고 말한다. 바흐가 살았던 시대는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로 인한 우울이 바흐의 음악에는 깔려 있다는 설명을 그는 덧붙인다. 사카모토 역시 현대 문명이 낳은 시대적 우울과 질병,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도 였다. 바흐의 단순하고 소박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그는 이내 손을 거둔다. "날마다 조금씩 치기로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피아노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 P41
그런데 두 사람은 왜 만리장성이라는 공간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는 여러모로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각각 성장한 두 사람은 일찍이 소련이 만들어놓은 ‘철의 장막을 경험했다. 중국의 만리장성 역시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거대한 성벽이자 배타적 경계선이다. 때라서 만리장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장벽을길로 여는 일이고, 냉전의 질서를 평화의 질서로 바꾸어내는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건기는 단순한 신체적 활동을 넘어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의미가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 서문에서 걷는 행위를바느질에 비유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라면 걸어가는사람은 실이 되고, 걷는 일은 대지를 꿰매는 바느질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걷는다는 것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인 셈이다. 아브라모비치가 수행해온 많은 퍼포먼스들이 세계의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제의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에서 개인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넘어선 사회 문화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 - P46
대지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실감하는것, 그때 비로소 ‘길‘은 죽음의 장소에서 생명의 장소로 바뀔 수 있다. 로드킬 연구자 최태영이 동물의 눈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물을 통해서든 영화를 통해서든 동물의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핸들을 잡을 때마다 그 눈동자를 조금이나마 의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이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얼마나 낮은 자세로 걸어가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맨발의 보행자에게 길은 생명을 발견하고 느끼는 터전이지만, 속도광에게 길은 끝없이 단축해야 할 공간적 거리에 불과하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더 부유하게 살려는 사람이나 사회에 있어서 ‘길‘은 오로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길‘의 윤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일처럼 보일 것이다. - P56
새삼 ‘사람‘ 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은 ‘살나(生)‘라는 동사 어간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인 말로, ‘살아 있는 것, 곧 생명체‘를의미한다. 살다‘ 라는 동사는 다시 ‘살‘이라는 명사에서 왔으니, ‘사람‘ 이라는 말에는 ‘몸을 가진 존재 또는 힘이나기운을 지닌 존재‘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어로 ‘Man‘이나 ‘Human‘은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성서의내용처럼 ‘흙‘이라는 뜻의 라틴어 ‘Humos 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인간인 ‘Adam‘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흙‘을 뜻하는 ‘Adama‘에서 왔다고 한다. 일본어로 ‘사람‘을 뜻하는 히토는‘는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어원들에 비추어본다면,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 그 속에 깃든 생명력을 그리는 일이다.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는 동양화의 전통에서도 강조되어온 바다. 그러고 보 - P60
면 ‘형이 형상의 닮음‘ 못지않게 신이, 정신의 닮음‘를 중시한 것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통용되는 인물화의 불문율이아닐까 싶다. 또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삶과 등을 맞대고있는 죽음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죽음의 인자들에 대항해 매 순간 싸우고 있다. 몸은 삶과 죽음이 싸우는 전쟁터이자, 욕망과 초월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도량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초상화에는 그의 몸이 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한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정영창의 개인전 한 사람〉에서 복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폭 전체가 오로지 한 인물의 극적인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호명된한 사람 한 사람의 이미지들은 한국의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검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얼굴들, 세계를 떠도는유령들의 귀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초상화들은 망각의 강에서 방금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죽음의 물기를 머금은 채 고통의 비늘을 파닥거린다. - P62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길을 몸소 실천했다. 오늘 우리 앞에 도착한 그 서늘한 눈동자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정영창이 그린 초상화들은 세계에 대한 낙관과비관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얼굴에 포박된 어떤순간 속으로, 그 내면의 슬픔과 공포 속으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흡인력은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내면과 깊이 동화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거리 좁히기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 고통의 서사시 앞에서 우리는 ‘사람이란 어떤 - P65
존재인가‘ 다시 묻게 된다. 그리고 세계란 어떤 곳인가‘ 성찰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과 생성과 소멸, 인간의 삶과 죽음, 폭력과 전쟁, 사랑과 평화 등 인류 역사의 근원적 질문을 놓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탐색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그런의미에서 정영창이 기록하고 조형해낸 초상들을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한 ‘검은 빛의 환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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