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라고, 자신을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 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성공을 목표로 삼아도 괜찮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돼.‘ (…)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학자이자 작가인 자넬 홉슨 Janell Hohson 이 아디치에를만났다. 두 사람은 페미니즘에 대해서,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 영화화에 대해서, 종교적 극단주의에 대해서, 흑인의 경험을 더욱 복잡한 것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서, 인터넷 문화에 대해서, 그리고 글쓰기로 다리를 놓는 것에대해서 이야기했다. p77



오콜로마는 내 어린 시절 가장 좋은 친구 중 하나였습니다. 오콜로마는 우리 집과 같은 골목에 살았고, 나를 친오빠처럼 돌봐주었습니다. 나는 좋아하는 남자아이가 생기면 오콜로마에게 의견을 묻곤 했지요. 오콜로마는 재미있었고, 지적이었고, 끝이 뾰족한카우보이 부츠를 신었습니다. 그리고 2005년 12월, 나이지리아 남부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 사고로 죽었습니다. 내 기분을 표현하기란 여전히 어렵습니다. 오콜로마는 내가 함께 논쟁할 수 있는 사람, 함께 웃을 수 있는 사람, 함께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처음으로 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른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열네살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우리는 오콜로마의 집에서 무언가에 대해 언쟁하고 있었습니다. 둘 다 책에서 배운 설익은 지식으로 가득 차 있던 때였지요. 논쟁의 주제가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한참 주장하고 또 주장했더니 오콜로마가 내게 이렇게 말했던 것은 똑똑히 기억납니다. "있잖아, 너 꼭 페미니스트 같아."
- P11

그는 내게 사람들이 내 소설을 두고 페미니즘적이라고수군거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충고하기를, 이 말을하면서 그는 슬픈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요, 나더러 절대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란 남편을 얻지 못해서불행한 여자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스스로를 ‘행복한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이지리아 여성인 웬 학자가 나더러페미니즘은 나이지리아 문화가 아닌 비아프리카적인것이며 내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일컫는 것은 서구의책에 영향받았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지적은 꼭흥미로웠는데, 왜냐하면 내가 어릴 때 읽었던 책 대부분이 분명 반反페미니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열여섯살까지 나는 당시 출간되었던 밀스앤분 Mills & Boson‘의 로맨스소설을 아마 한권도 안 빼고 다 읽었을 걸요. 그리고 "페미니즘 고전" 이라고 불리는 책들은 시도할 때마다 따분해져서 끝까지 읽으려면 안간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 P13

아무튼 페미니즘이 비아프리카적이라고 하니까, 나는이제 스스로를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친한 친구 하나가 나더러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일컫는 것은 남자를 미워한다는 뜻이라고 말해주더군요. 그래서 나는 이제 스스로를 ‘남자를 미워하지 않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로했습니다. 그러다 더 나중에는 ‘남자를 미워하지 않으며남자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위해서 립글로스를 바르고 하이힐을 즐겨 신는 행복한 아프리카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농담이었지만, 이것만 보아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함의가 깔려있는가, 그것도 부정적인 함의가 깔려 있는가를 잘 알 수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브래지어도 싫어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싫어하고, 늘 여자가 우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늘화가 나 있고, 유머감각이 없고, 심지어 데오도란트도 안쓴다는 거지요..
- P14

시험에서 이등을 한 아이는 남자아이였습니다. 그러니 그 남자아이가 반장이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더욱더 재미있었던 점은, 그 남자아이는 회초리를 들고 교실을 순찰하는 데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상냥하고 온화한 아이였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나는 너무너무 그러고 싶었지요..
하지만 나는 여자였고, 그 아이는 남자였으므로, 그 아이가 반장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 사건을 내내 잊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반복하면, 결국 그 일이 정상이됩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거듭 목격하면, 결국 그 일이정상이 됩니다. 만일 남자아이만 계속해서 반장이 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적으로라도 반장은 남자여야 한다고생각하게 됩니다. 만일 남자들만 계속해서 회사의 사장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 차츰 우리는 남자만 사장이 되는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기게 됩니다.
- P16

더 많이 받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자이기 때문에,
그러니 남자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는요. 당시에는 육체적 힘이 생존에 가장 중요한자질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남자가육체적으로 더 강합니다. (물론 예외도 많지만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지도자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 지적이고, 더 많이 알고, 더 창의적이고,
더 혁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질들을 좌우하는 호르몬은 없습니다. 남자 못지않게 여자도 지적일 수있고, 혁신적일 수 있고,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젠더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습니다.
- P21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 P23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들이 그들을 어떻게생각하는지 걱정하도록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쏟습니다. 하지만 거꾸로는 하지 않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호감 가는 사람이 될지 걱정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화내선 안되고 공격적이어선 안 되고 터프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나쁘지만 더구나 돌아서서는 똑같은 행동을 한 남자들을칭찬하거나 면책해줍니다. 전세계 어디에나 여자들에게남자의 마음을 끌거나 남자를 기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잡지며 책이 넘쳐납니다. 그에 비해 남자들에게 여자를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글은 훨씬 적습니다.
- P27

이것은 협박입니다. 결혼을 망칠 거라는 말, 아예 결혼하지도 못할 거라는 말은 우리 사회가 남자보다 여자에게 훨씬 더 많이가하는 협박입니다.
젠더는 세계 어디에서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지금 나는 여러분에게 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꿈꾸고 계획하는 일에 함께 나서자고 요청합니다. 지금보다 좀더공정한 세상을, 스스로에게 좀더 진실함으로써 좀더 행복해진 남자들과 좀더 행복해진 여자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우리 딸들을 지금과는 다르게 키우는 것입니다. 우리아들들도 지금과는 다르게 키워야 합니다.
- P28

그런데, 우리가 남자들에게 저지르는 몹쓸 짓 중에서도 가장 몹쓸 짓은, 남자는 모름지기 강인해야 한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그들의 자아를 아주 취약하게 만든다는것입니다. 남자들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수록 사실 그 자아는 더 취약해집니다.
또한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도 대단히 몹쓸 짓을 하고있습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남자의 그 취약한 자아에요령껏 맞춰주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자신을 움츠리라고, 자신을 위축시키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야망을 품는것은 괜찮지만 너무 크게 품으면 안 돼. 성공을 목표로 삼아도 괜찮지만 너무 성공해서는 안 돼. 그러면 남자들이위협을 느낄 테니까.  - P31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남자아이들이 그들을 어떻게생각하는지 걱정하도록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쏟습니다. 하지만 거꾸로는 하지 않습니다. 남자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호감 가는 사람이 될지 걱정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여자아이들에게 화내선 안되고 공격적이어선 안 되고 터프해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쏟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나쁘지만 더구나 돌아서서는 똑같은 행동을 한 남자들을칭찬하거나 면책해줍니다. 전세계 어디에나 여자들에게남자의 마음을 끌거나 남자를 기쁘게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잡지며 책이 넘쳐납니다. 그에 비해 남자들에게 여자를 기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는 글은 훨씬 적습니다.
- P37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은 페미니즘이란 개념에 위협을 느낍니다.
내 생각에 그런 반응은 남자아이들이 자라면서 받았던교육, 즉 그들은 남자니까 "당연히 우위를 차지해야 하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존감이 훼손될 거라는 가르침이 야기한 불안감 탓입니다.
- P44

문화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문화는 결국 사람들을 보존하고 영속시키기 위해서 기능합니다. 우리 집안에서우리 가문의 사연, 선조들이 살았던 땅 그리고 가문의 전통에 관심이 제일 많은 사람은 나입니다. 남자 형제들은나보다 관심이 적습니다. 그러나 나는 가문의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지는 모임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이보 문화는 남성 위주 문화이고, 그런 자리에는 남자만 참석할 수있지요. 그래서 나는 그런 일에 가장 관심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없습니다. 내게는 공식적인 발언권이 없습니다.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문화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문화를만듭니다. 만일 여자도 온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말 우리 문화에 없던 일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우리 문화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 P49

그리고 오콜로마가 오래전 했던 말은 옳았습니다. 그가 그날나를 페미니스트라고 불렀던 것은 옳았습니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그리고 오래전 그날 내가 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
내가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우리 증조할머니는 페미니스트였습니다. 할머니는 결혼하기 싫은 남자의 집에서달아나 자신이 선택한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할머니는자신이 여성이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소유권과 접근권을박탈당한다고 느끼자 그에 대해 거부했고, 항의했고, 나서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할머니는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를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스트가아니었던 것은 아닙니다. 좀더 많은 사람들이 이 단어를되찾아야 합니다. 내가 아는 가장 훌륭한 페미니스트는내 남동생 케네입니다. 케네는 다정하고, 잘생기고, 대단히 남자다운 청년입니다.  - P51

그것은 여성의 미덕과 여성의 수치에 관한 의식이었다. 따져 묻지 않고 제대로 수행하면 주류사회로부터 인정받도록 해주는 많은 의식 중하나였다. 여자답게 앉으라는 것은 더 큰 의식의 작은 예시일 뿐이었다. 여자답게 늘 조용하고 온화해야 한다. 큰소리 내지 말고, 화내지 말고, 터프하게 굴지 말고, 지나친 야심을 품지 말아라.
나는 그런 의식들을 수행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편한자세로 앉고 싶었다. 나중에 나는 친웨 아줌마의 온 인생이 그런 여성성의 의식들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는 생각이 들었다. 아줌마는 세상의 인정을 받았고, 그것을 제일 좋아하는 아리따운 드레스처럼 걸치고 있었다.
- P69

나는 열다섯살이었고, 순진했으며, 젊음 특유의 타협을 모르는 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나는 아줌마를 다시 존경하게 되었고, 인생의 굽이마다 아줌마의지혜를 구하게 되었다. 친웨 아줌마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문제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여자들이 자신을 움츠리는 것은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작용하는 힘 때문이었다. 친위 아줌마는 부유함도 여자를 그런 힘으로부터 막아주진 못한다는 사실을 내게 일깨워주었다. 교육도 아름다움도 그 힘을 막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아줌마의 영향 덕분에 나는 자랑스럽고 복잡한 내 여성성을 원래 모습 그대로 살아내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너는 여자니까"라는 말은 무엇에 대해서는 유효한이유가 아니라고 거부하겠다고, 나의 가장 진실되고 가장 인간적인 자아로 살고자 애쓰겠다고, 하지만 세상의인정을 구하기 위해서 나 자신을 억지로 변형시키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 P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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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팔순을 넘긴 엄마의 어떤 표정과 자태가 문득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남들에겐 평범한 노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엄마가 살아온 삶의 내력과 고통의 속내를 아는 나로서는 엄마의 표정 하나에도 무감하기가 어렵다. 오랜 시간의 빛과 그림자를 견뎌내면서 생겨난 그 무늬와 질감을 가만히 쓰다듬어본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아직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이 꽤 남아 있다. ‘엄마‘라고 발음할 때마다 그 말은 내가 아직 고아가 아니라는 것을, 엄마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존재가 늙고 쇠약해진 모습으로나마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준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엄마의 손이있다는 것이, 그리고 엄마의 기침 소리가 들리고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마음 놓인다. p127



롤랑 바르트는 어머니가돌아가신 다음 날인 1977년 10월 25일부터 「애도 일기』를 써내려갔다. 노트를 사등분한 쪽지에 2년 동안 남긴 메모들에는 ‘어머니Metre 보다 ‘엄마 Maman" 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마망‘ 이라고 부를 때마다 그 말을 둘러싼 온기와 슬픔에 바르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나의 롤랑, 나의 롤랑" 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스물두 살의 나이에 바르트를 낳고 이듬해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어머니, 그래서 롤랑 바르트의 애도는 더욱 간절했을 것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엄마의 다섯 살 때 사진을 책상 위에올려두고 그 순결한 소녀를 향해 한없이 빠져들었다. 애도일기』의 번역자인 김진영의 설명처럼 "사진은 말하자면 부재 속의 실재라는, 있을 수 없는 존재의 실존이 기술적으로그러나 마술적으로 구현된 이미지"다. 또한 죽었으면서도살아 있는 존재처럼 산 자에게로 귀환하는 유령 이미지다.
- P120

작가는 에필로그」에서 "엄마,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담고 있는 단어가 또 있던가. 이렇게 오래도록 울림을 간직한 언어가 또 있던가" 라고 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엄마‘는 가장 친밀한 호칭이고, 가장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르게 되는 단어일 것이다. 딸은 렌즈를 통해 엄마를 바라보면서 언제까지고 엄마 속의 엄마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엄마의 주름진 얼굴을 보며 김혜순의 시 「얼굴의 한 구절대로 자신을 부재자의 인질이라고 되뇌기도 한다. 엄마가 사라진 후의 시간을 자주 떠올리는 그녀에게 사진 찍기는 부재자의 현존을 앞당겨 불러올수 있는 제의적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사진 찍기란 숙련된 기술로 피사체를 다루는 일이 아니라, 그 대상을 혼신의 힘으로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워나간다.
- P126

사진의 제의적 가치가 남아 있던 마지막 보루가 바로인간의 얼굴이라는 것. 기술복제시대에 사진의 아우라가사라진 것은 사람의 모습이 뒤로 물러나고 전시적 가치가강해지면서부터라는 것. 벤야민의 이 예리한 통찰이 새삼놀랍다. 우리는 과연 그 잃어버린 인간의 얼굴을 되찾을 수있을까. 롤랑 바르트가 엄마의 빛바랜 사진을 보며 애도에몰입했던 것도, 한설희 작가가 엄마의 말년 모습을 찍으며이별 연습을 했던 것도 그 사라짐에 대한 저항이자 인간의아우라를 잡으려는 안간힘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아주 드물게, 누군가는 어디선가 셔터를 누르고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 멜랑콜리하고 그 어느 것과도 비교될 수 없는 아름다움을 향해,
- P132

〈로스 카프리초스) 연작의 마지막 작품인 80번의 제목은 때가 되었다‘이다. 여기에는 "동이 트면 마녀와 요정, 그리고 유령과 허깨비들은 각자 자신의 거처로 숨어든다. 이들이 밤과 어두운 때를 제외하고 우리 눈에 띄지 않는 것은참 다행스러운 일이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 반인반수의 괴물들은 사람들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 떠날차비를 하고 있다. 이렇게 고야의 동판화에 넘쳐나는 악마의 얼굴들은 고야의 핏속에, 본능 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어떤 절규를 들려준다.
말년에 귀머거리가 된 고야는 생을 마칠 때까지 칩거하며 집의 벽면을 온통 검은 그림Black Painling) 연작들로 채워나갔다. 자식의 몸을 움켜쥐고 뜯어 먹는 사투르누스를비롯해 고야의 말년작들은 한층 어두운 심연에 잠겨 있다.
그 그림들을 보면서 예술의 힘이란 쾌락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 P143

마지막 전시실 밖에는 자코메티의 문장이 적혀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그들은 무게가 없다. 어떤 경우든 죽은 사람보다도, 의식이 없는 사람보다도 가볍다. 내가보여주려는 건 바로 그것, 그 가벼움이다." 또 다른 벽에는이런 문장도 있다.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을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나는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만 한다." 이처럼 걷는 행위를 통해서만이 중력으로부터 잠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처음에 본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진과 걸어가는 사람의 형상이 자꾸겹쳐진다. 자코메티가 수많은 모델들 속에서 매번 발견하려고 한 것은 어쩌면 자기 자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P152

이따금 그림이 말을 하는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또는 그림 속에서 어떤 선율이 총러나오는 것 같을 때가 있다. 회화는 시각예술임이 분명하지만, 시나 음악에 한결 가까운 그림들도 있는 것이다. 예를들어 칸딘스키, 미로, 로스코 같은 화가들이 그러하다. 이들의 그림에서 말과 선율은 주어진 형상을 넘어 무한을 향해있다. 칸딘스키의 표현처럼 직선들의 차가운 긴장, 곡선들의 따뜻한 긴장, 엄격함에서 느슨함으로, 다수로부터 압축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추상적 형태에서도 아주 드라마틱하고 직접적인 느낌을 읽어낼 수 있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 ~ 1970 의 작품을 보았던 기억역시 내게는 강력한 청각적 체험으로 남아 있다. 화집에서만 보던 로스코의 그림을 처음 대면하게 된 것은 런던 테이트모던 갤러리에서였다. 미술관에는 세계 각국에서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지만, 이상하게도 ‘로스코의 방‘에서는 오직 나 혼자만이 그의 그림 앞에 서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이 - P164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인 2004년, 그의 일기에는 한 편의 시처럼 이런 탄식이 적혀 있다. "다들 죽었다. 이일도 죽고, 한창기도 죽고, 죠셉 러브 Joseph Love 도 죽고, 도널드 저드도 죽고, 황현욱이도 죽고, 나만 지금껏 살아 있고나. 내가좋아하는 친구들은 다 죽었구나." 홀로 남은 그에게 그림을그린다는 것은 살아 있는 한 생명을 불태운 흔적으로서, 살아 있다는 근거로서, 그날그날을 기록 하는 행위와도 같았다.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더 깊고 고요해진 검은 빛을 보며떠오른 시 한 편, 김현승의 「검은 빛을 윤형근의 그림 앞에서 천천히 읊조려본다.
- P178

근원 김용준1914 ~~1907 과 존 버거1926 ~ 2017. 얼핏 뜬금없는 조합인 것같지만, 찬찬히 생각해보면 두 사람에게서 적지 않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미술 이론 전공자로서 비평적인 작업과 함께 뛰어난 에세이와 그림을 남겼다는 점, 마르크스주의자로서 미술뿐 아니라 인문,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력과비판적 태도를 보였다는 점, 그러면서도 특정한 이념에 매몰되기보다 뛰어난 심미안과 균형 감각을 지녔다는 점 등이그러하다.
삶의 이력 또한 이채롭기는 마찬가지다. 김용준은 경북선산 출신의 동양화가로서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를 지내다가 1950년 월북했다. 존 버거는 영국 런던 출신이지만 중년 이후에는 프랑스 시골 마을로 이주해 농사와 글쓰기를 병행해 왔다. 이러한 월경이나 은거로 인해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본주의적 세계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 P214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계산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를 때까지 그것과 동행하는 것, 이를 위해 사물을 바라보고 또 바라봄으로써 대상 자체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사물과 사물, 또는 주체와 대상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구축하는 것. 오로지 선생에집중하면서 밀고 당기는 힘 사이의 역동성을 잃지 않는 것.
눈에 보이는 대상뿐 아니라 계속 움직이는 어떤 외곽선을따라 조금씩 연장되는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 드로잉을이런 발견적 행위로 정의한다면, 근원과 존 버거가 말년까지 드로잉을 멈추지 않았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듯하다.
김용준과 존 버거가 그리고자 했던 것은 단순히 매화와 붓꽃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린 꽃은 동양적 미의 표상인 매화와 서양적 미의 표상인 붓꽃이라는기호적 차원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대상 앞에서 그 불가해한 어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맨몸의 궤적이야말로 그들이 작은 스케치북에 담고 싶었던것이 아니었을까.
- P219

그런데 영화를 자세히 보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도무언가 조금씩 달라지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매일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조금씩 다르고, 침대 위에 누운 두 사람의 자제도 조금씩 다르다. 출퇴근하며 눈여겨보는 사물이나 풍경도 조금씩 다르고, 정해진 구간을 도는 23번 버스에 탄 승객들도 조금씩 다르다. 이란 여성인 아내가 매일 그려내는이국적 패턴도, 동네 바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도 조금씩 다르다.
무엇보다도 패터슨의 내면과 비밀 노트 속에 펼쳐지는시의 발걸음이 조금씩 다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시는완성을 향해 한 줄 한 줄 나아간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야말로 짐 자무시가 영화를 통해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 모른다.
"삶의 아름다움이란, 대단한 사건이 아닌 소소한 것들에 있 - P231

시작 노트를 잃고 폭포 앞에서 망연자실 앉아 있는 패더슨에게 월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고장 패터슨을 찾아온 일본인 시인이 말을 건넨다. 그 일본인의 손에는 『패터슨이라는 시집이 들려 있었다.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는 고향인 러더퍼드에서 평생 소아과 의사를 하면서 시를썼다. 특히 그가 뉴저지 지방의 ‘패터슨‘을 주제로 쓴 다섯권의 연작 『패터슨은 미국 시문학사의 대표적인 서사시중 하나다. 영화에서도 패터슨은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집을 자주 읽거나 그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때론 텅 빈 페이지가 가장 많은 가능성을 선사하죠."
일본인 시인의 이 말을 곱씹으며 패터슨이 터뜨린 감탄사는 ‘아하! 였다. 약간 진부한 결말이라는 인상을 지울 순 없지만, 이 감탄사 덕분에 패터슨은 다시 새로운 월요일을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들을, 또는 아직 오지 않은 시들을 새로운 노트에 적어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 P234

비즐러가 드라이만의 집에서 훔쳐 온 시집을 읽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그때 등장하는 시는 브레히트가 쓴 「마리A의 추억이다. 브레히트는 현실 비판적인 참여시를 주로쓴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시는 드물게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연애시다. 여기서 브레히트가 추억하는 ‘마리 A‘는 고향 아우크스부르크에 살던 시절의 애인 로자 마리 아만을가리킨다.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사랑을 나누었던 두 사람. 그러나 사랑의 아름다움은 덧없고, 그 덧없음으로 인해 오히려 더 아름답다. 영원한 사랑이란 없으며 그덧없음만이 영원하다는 사실 또한 이 시는 말해준다.
세월이 흘러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안부조차 알 수가없다. "사랑은 어떻게 되었느냐"는 질문에 시적 화자인 ‘나‘
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한다. 그녀의 얼굴은 기억나지않고, 키스를 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다.  - P243

조동진의 노래는 아주 멀리서 온다. 바람이 멀리서 불어오는 것처럼, 일몰과 여명,
비와 안개, 눈과 진눈깨비 등 대기가 가장 아름다운 때의 빛깔과 냄새와 물기를 머금고 그의 노래는 불어온다. 그의 노래는 들려온다 기보다는 ‘불어온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조동진의 노래가 일으키는 소리와 진동은 귀뿐 아니라몸 전체로 스며들어와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노래가 끝난 뒤에도 길게 이어지는 연주나 허밍은듣는 이를 암전의 여운 속에 오래 남아 있게 한다.
바슐라르는 예술가의 기질이 물, 불, 공기, 흙, 이 네 원소 중 어느 하나의 원소와 특별한 친연성을 지닌다고 했다.
이 네 가지 원소 중에서 조동진은 단연 ‘공기의 시인‘ 이다.
호프만슈탈의 말을 빌리자면 "공기처럼 투명하여 공기 속으로 경이의 말을 부지런히 전달하는 전령" 이다.  - P250

일찍이 "집을 읽는다"는 표현을 쓴 것은 가스통 바슐라르였다. 그는 『공간의 시학』에서 집이란 한 영혼의 상태를잘 보여주며 집은 인간의 사상과 추억과 꿈을 한데 통합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고 말했다. 그 통합에 있어서 연결의원리는 ‘몽상‘ 이다. "더할 수 없이 깊은 몽상 속에서 우리들이 태어난 집을 꿈꿀 때, 우리들은 물질적 낙원의 그 원초적인 따뜻함, 그 잘 중화된 물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장민숙의 회화에서도 집에 대한 원초적 충족감은 과거와현재와 미래를 넘나드는 몽상을 통해 잘 구현되고 있다.
- P261

그의 그림에 사람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집은 각사람의 삶을 대변하는 공간이자 오브제로서 역할을 충분히해낸다. 조금 낡고 오래된 집들은 녹록지 않은 내력과 기억을 들려준다. "나는 살아가고 있고, 삶과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색면으로 기록한다"는 작가에게 집과 거리는 도시의공간성과 시간성, 수직성과 수평성, 기억과 풍경을 동시에아우르는 상징이자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집을 읽어내고 기록하고 표현하는 행위가 바로
‘산책‘이다. 그에게 산책은 자기만의 집, 또는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단독자의 내면 탐구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필요로 한다.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타자의 내면을 열고 들어가는 것처럼 집의 표정을 살피고 집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침착하게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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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봄, 파울라 모데르존 베커 Paula Mouldersohn Becker, 1876 ~ 1907는 파리의 작은 스튜디오에서 몇 점의 자화상을 완성했다. 그녀는 독일 브레멘 근교의 화가촌인 보르프스베데를 떠나 혼자 파리에 왔다. 네번의 파리 체류를 통해 세잔과 고갱 등을 만나며 새로운 예술적 자극과 토양을 접할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보르프스베데에서 그리던 목가적 풍경화에서 벗어나 아주 개성적인인물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남성 화가들도 누드 자화상을거의 그리지 않던 시대에 여성 화가로서 누드 자화상을 그린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 반라의 자화상에서 커다란 호박 목걸이 아래 불룩한 배는 만삭에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는 실제로 임신한 상태가 아니었다. 가난과 싸우면서도 그림에대한 열정과 포부로 충만하게 차오른 모습을 만삭의 상태로 표현한 것이다. 둥근 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세상을 향해 ‘이게 나아"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그리고 굳게 다문 입 - P70

내면에서 발현되는 여성성에 힘입어 그녀는 그림 속 어머니와 아이라는 타자와 자연스럽게 하나가될 수 있었다.
이 무렵 파울라는 언니에게 돈을 보내달라는 편지를쓰면서 이렇게 적었다.
"나는 뭔가가 되어가고 있어.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격렬하게 행복한 순간을 살고 있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마음껏 그리면서 느끼는 말할수 없는 충일감이 이 그림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앞에서 말한자화상뿐 아니라 옆으로 누운 어머니와 아이 IⅡ> 역시 파울라가 아기를 잉태하기 전에 그린 것이다. 남편의 전처가 낳은 아기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를 갖고 싶었던 파울라의 소망이 이런 상상적 이미지로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얼마 후에 파리로 찾아온 남편과 지내면서 임신을한 그녀는 결국 남편과 함께 보르프스베데로 돌아가야 했다. 화가로서 어렵게 독립을 시도했지만, 파울라는 출산과경제적 조건 때문에 남편과 재결합할 수밖에 없었다.
- P74

책장에서 케테 콜비츠KtheKollwirp. 1867~1945에 관한 책들과 화집을 오랜만에 꺼내 든 것은 뮤리얼 루카이저의 시집 『어둠의 속도』를 읽으면서였다. 어둠의 속도에는 「케테 콜비츠」라는 꽤 긴 시가 실려있다. 뮤리얼 루카이저는 시인이자 저널리스트로서 1930년대부터 나치 체제나 스페인 내전에 관해 다양한 글을 썼고,
인종, 여성, 노동 분야의 사회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어둠의 속도는 옮긴이의 말처럼 "사적 발화로 여겨졌던여성의 목소리가 어떻게 정치적인 힘을 갖게 되는지에 대한 다양한 시적 탐색들이 수행되는 장" 이라고 할 만하다. 유대인이자 싱글맘으로서 미국 사회의 온갖 편견에 맞서 싸웠던 그녀는 다른 여성들의 체험에 공감하는 시를 여러 편남겼는데, 「케테 콜비츠」도 그중 한 편이다.
- P86

한 여자가 본다.
그 폭력을, 수그러들지 않는알몸의 움직임을
‘아니오‘라는 고백을위대한 연약함의 고백을, 전쟁을,
모두가 흘러 한 아들, 피터의 죽음으로,
살아남은 아들에게로, 반복적으로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로, 그들의 손자또 다른 전쟁에서 죽은 또 다른 피터에게로, 폭풍처럼번지는 불로어둠과 빛 , 두 개의 손처럼,
이 극과 저 극이 마치 두 개의 문처럼.
한 여자가 자기 삶의 진실을 말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세계는 터져버릴 것이다.
- 뮤리엘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부분) "
- P87

다시, 뮤리얼 루카이저의시 「케테 콜비츠」로 돌아가 보자. 루카이저는 이 시에서 특히 콜비츠의 피에타‘에 주목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콜비즈의 후기작들은 제목은 달라도 거의 모든 작품이 피에타의변주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 에서 어머니의 오른손은 아들의 군게 단힌 두 눈을 감싸고, 왼손으로는 축 서진손을 받아내고 있다. 나중에 원본보다 좀더 크게 제작되어베를린의 추모 시설 ‘노이에 바헤‘에 전시된 이 작품은 전쟁피해자들을 위한 추모관을 홀로 지키는 피에타상이 되었다. 전시장 천장에 둥근 구멍이 뚫려 있어서 이 청동상은 눈과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세월의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는 가장 고전적인 미켈란젤로의〈피에타>와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피에타 Pieta‘는 ‘슬픔, 비탄‘ 또는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이탈리아어로, 14세기부터 유럽 회화와 조각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안고 비탄에 빠진 성모마리아의 모습은 시대와 작가에 따라 그 자세와 표정, 비례와 구도 등이 다양하다.  - P93

어머니는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늙었지만 강인한 모습으로 아들을 품어 안고세상에 내어주지 않으려는 비장한 의지가 느껴진다. 거리감이 완전히 제거된 채 아들을 부둥켜안은 어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한 덩어리의 슬픔이다. 이런 포즈와 형상은 게테 콜비츠의 판화에서 익숙한 편이지만, 조각으로 표현되면서 좀더 입체적이고 둔중한 물질성을 지니게 된다. 나는케테 콜비츠의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견주어 검은 피에타‘라고 부르고 싶다.
- P94

1915년 7월의 일기에는 기도에 대한 언급도 나온다기도란 하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합일된 상태에 이르는것이라고 하지만, 자신은 간청하는 기도밖에는 할 줄 모른다고 고백한다. 전사한 아들 페터의 기념비를 만드는 일이케테 콜비츠에게는 추모의 기도였던 셈이다. 그녀는 죽은아들에 대한 애도의 마음을 모두 이 작업에 쏟아부었다. 그일은 마치 페터와 영성체를 나누는 것과도 같았다.
그런데 돌을 깎으며 죽은 아들을 떠올리는 일이 고통스러웠던 콜비츠는 결국 2년 동안 매달리던 페터의 조각상을 부수고 만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925년 콜비츠는 석고로된 부모 상을 가족도 모르게 만들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어머니 사이, 아들 페터의 모습이 사라진 그 자리에는 결코메꿀 수 없는 거대한 침묵이 자리 잡고 있다. 돌 속에서 죽은 아들의 형상을 꺼내는 일보다 자식을 앞세우고 남겨진부모로서 속죄와 기원을 담아내는 일이 그나마 정직하고실현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두 팔을 품에 숨겨 넣고 무릎 꿇은 아버지와 몸을 앞으로 숙인 채 두 손을 모은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종교적인 느낌을 받게 된다. 콜비츠는 평소 종교에 대해 불분명하거나 비판적인 태도를 보여 왔다. 하지만 전쟁으로 자식을 - P95

잃은 슬픔과 고난을 겪으면서 운명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절망을 간절한 기도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아들에 대한이 사적인 기념비는 청회색 화강암으로도 만들어져 1932년벨기에의 로게펠데 군인 평화묘지에 위령비로 세워졌다.
아들이 죽은 뒤 17년에 걸쳐 완성된 부모라는 조각상은
‘검은 피에타‘의 완결판이라고 할 수 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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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주름들 - 감각을 일깨우는 시인의 예술 읽기
나희덕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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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의 변방에서 늘 허기를 느낀다. 먹고 사는 일에 밀리는 현실에서 지적허영심을 책으로나 충족시킨다. 어떤 작품들에서든 시를 읽어내는 시인의 시선이 서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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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편애의 기록을 통해
시와 예술 사이에 작은 길 하나를 내고 싶었다.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거느리고 있는가.
우리 몸과 영혼에도 얼마나 많은 주름과 상처가 있는가.
주름과 주름, 상처와 상처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파도처럼 일렁이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세계와 영혼의 주름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이러한 비틀림이다.˝
질 들뢰즈의 이 말처럼 세계와 영혼의 주름들을 해독하려 애를 쓰며몇 개의 겹눈이 생겨난 것 같기도 하다.
시인의 눈으로 읽어낸 예술의 옆모습이 모쪼록 독자에게도 고개 끄덕일 만한 것이 되면 좋겠다. ㅡ작가의 말p8

특히 아네스 바르다의 해변>(2008)은 바다에서 시작해 바다로 끝난다. 첫 장면은 유년기를 보낸 벨기에의 해변에 크고 작은 거울들을 설치하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파도가 밀려오자 거울 몇 개가 물거품 속에 잠기고, 바르다의 스카프가 바람에 휘날리고, 그런 우연성이 이미지에 생기를더해준다. 바르다는 제작진의 얼굴을 거울에 차례로 비추며 그들을 자신의 몽상에 참여해준 고마운 사람들이라고소개한다. 그렇다. 아네스 바르다의 영화들은 한결같이 시적인 몽상과 즉흥적 만남, 유머와 재치, 그리고 따뜻한 우정으로 보는 이에게 행복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극적인 서사나 강렬한 액션, 선정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이렇게 멋진 영화를 만들 수 있다니!

시인 발레리의 고향이기도 한 세트 바닷가와 부두 근처의 옛집, 첫 영화를 찍은 라 푸앵트 쿠르트 해변, 이십 대에 가출해서 뱃일을 했던 아작시오 해변, 자크 드미와 만나함께 살던 누아르무티에 섬, 중국이나 쿠바의 해변, - P19

 "영화의 움직임, 관점, 리듬, 그리고 편집 작업은 작가가 문장의 의미에대해 고민하고, 단어를 선택하고, 부사의 개수를 신경 쓰고,
챕터의 사용을 고려하는 등의 방식과 기의 같은 개념이라고 보시면 돼요. 글쓰기에선 이러한 것들을 스타일이라 부르죠. 영화에선 스타일이 시네크리튀르예요."
그래서인지 영화 곳곳에서 빛나는 내레이션은 시적인문장들로 가득하고, 벽이나 회화, 사진, 사물 등을 롱테이크로 잡는 숏들이 자주 등장한다. 벽에 남겨진 세월의 흔적과 낙서와 벽화 등은 마치 그녀가 영화 쓰기를 해나가는 노처럼 느껴진다. 1960년대 후반, 아네스 바르다는 컬럼비아 픽처스의 제안을 받은 자크 드미와 함께 LA에서 몇 년간체류하게 되었다. 그 시절 바르다는 짐 모리슨이나 앤디 워홀 등과 우정을 나누고, 히피 문화나 블랙팬서 운동, 페미니즘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여자>(1976)에서 백인 남성 중심적 현실을 비판하고 여성의 몸에 대한 주권이 여성 자신에게 있음을 선언한 것도  - P21

그녀는 34세의 사진작가이자 거리 예술가 JR과 함께 즉석 사진 부스가 딸린 트럭을 타고 시골 마을들을돌아다닌다. 키가 크고 늘 검은 옷에 검은 선글라스를 쓴 청년과 머리를 투톤으로 염색한 펑키 스타일 키 작은 할머니의 유쾌한 조합이라니! 바르다의 친화력과 호기심 덕분에두 사람은 거리의 사람들과 쉽게 친구가 되고 세대 차이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이해해나간다. 낯선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을 찍어서 대형 사진으로 출력해 낡은 벽에 붙여주는 이 프로젝트는 폐광이 된 마을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독신 여성, 부두 노동자들의 아내, 탄광 노동자 등에게자신의 얼굴을 재발견하도록 해주었다.
바르다는 이처럼 벽화나 사진을 통해 새로운 벽을 창조함으로써 벽 너머를 보게 한다. 상상을 통해서든 회상을통해서든 벽은 더 이상 우리를 가두는 장애물이 아니라 즐거운 몽상의 통로가 된다. 아무리 완강해 보이는 벽도 그녀의 손길이 닿으면 물렁물렁한 점토처럼 부드러운 물성으로변한다. 벽에 붙어 있는 해변 사진에서도 어느새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이런 것을 바르다 영화의 마법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 P23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그녀의 마지막 대화 또는 인사와도 같은 작품이다. 201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야말로 죽기 직전까지 영화를 만든 것이다. 이 영화를 보다가 문득 "벽의 반대말은 해변이에요."라는 대사가 마음에 박혔다. 해변이 세계를 향해 탁 트인 전망을 보여준다면, 벽은시야가 차단되거나 전망을 잃어버린 현실을 상징한다. 해변이 자연의 평화로움을 느끼며 몽상하기 좋은 장소라면,
벽은 사람살이의 애환과 역사를 읽어낼 수 있는 장소다. 그렇다면 바르다에게 ‘영화 쓰기‘란 현실의 무수한 벽들을 넘어 마음의 해변에 가닿으려는 부단한 몸짓이 아니었을까.
- P26

이렇게 실시간 투사되는 시각적 형상들과 함께 음향효과 또한 인상적이다. 고감도 마이크로 포착해낸 거미의움직임과 먼지의 이동으로 생겨난 저음파는 알고리즘에 의해 소리로 변환되어 관객의 귀에 울려 퍼진다. 그 섬세한 소리들을 어찌 음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사라세노의 감각은 시인에 가깝다.
- P30

시를 쓸 때 류이치 사카모토Rimicati Sakinste, 1932~ 의 음악을 자주 듣는 편이다. 사카모토는(마지막 황제〉 〈전장의 크리스마스〉 〈마지막 사랑〉 〈레버넌트 등의 영화음악으로도 유명하지만, 내가 즐겨 듣는 그의 음반은 (UTAU)와 플레잉 더 오케스트라 Playing the Orches-17 2015), 그리고 에이크 ASYNC) 등이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2014년 새 앨범을 준비하던 중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앨범 작업을 중단하고 무언가 다른방식의 작업을 모색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코다Coda)에서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발병 이후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는과정을 만날 수 있다. 영화 중간중간에 그의 젊은 시절 작업들이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십 대의 야심만만했던 뮤지션은 어느덧 머리 희끗하고 병색이 완연한 노년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거장들의 영화에 출연하거나 음악 감독을 맡았으며, 백남준, 알바 노토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들과 컬래버레이션을 했다 - P34

"꿈과 현실과 죽음도 파도 따라 가리라. 나는 무릎 꿇고,
고아처럼 간절하니..."
암세포가 자신을 언제 죽음으로 이끌지 알 수 없는 나날 속에서, 고아처럼 간절하게 살아 있는 소리들 앞에 무릎 꿇은 그의 모습에서 삶의 덧없음과 숭고함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결국 모든 게 사라질 운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남은 시간 동안 "덜 부끄러운 무엇"을 보여주려고 애쓰는 것.
바로 이런 태도가 사카모토를 드물게 좋은 예술가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였다.
- P36

그중 하나의 방에는 사카모토가 작곡과 영상 작업을 할 때 참조한책들과 DVD, 악보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 옆에는 헤드폰을 끼고 낭독을 들을 수 있는 코너가 있는데, 사카모토가30년 전 참여했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마지막사랑(원제 더 셀터링 스카이 The Sheleting Sky)>의 원작자인 폴 보울즈 Paul Bowles 의 작품 한 대목을 여러 언어로 녹음한 것이었다. 오래전 영화 작업에서 접했던 그 문장들이 죽음에 가까워진 사카모토에게 다시 찾아와 〈풀문Fullmoon)이라는 곡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삶이 무한하다 여긴다.
모든 건 정해진 수만큼 일어난다
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어린 시절의 오후를얼마나 
더 기억하게 될까?
어떤 오후는 당신의 인생에서 - P40

절대 잊지 못할 날일 것이다
네다섯 번은 더 될지도 모른다
그보다 적을 수도 있겠지
꽉 찬 보름달을얼마나 더 보게 될까?
어쩌면 스무 번,
모든 게 무한한 듯 보일지라도
- 폴 보울즈, 『마지막 사랑』 (부분)

영화 〈코다)의 마지막 대목, 겨울날 아침 사카모토는바흐의 평균율을 아주 천천히 음미하듯 연주한다. 손이곱아 오면 두 손을 비비거나 겨드랑이에 넣어 녹이면서 이것이 ‘나만의 코랄 연주곡‘ 이라고 말한다. 바흐가 살았던 시대는 전염병과 굶주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로 인한 우울이 바흐의 음악에는 깔려 있다는 설명을 그는 덧붙인다. 사카모토 역시 현대 문명이 낳은 시대적 우울과 질병,
그리고 자신의 고통을 이렇게 위로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일종의 기도 였다. 바흐의 단순하고 소박한 멜로디가 울려 퍼지고, 그는 이내 손을 거둔다. "날마다 조금씩 치기로했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피아노를 떠나는 뒷모습에서 영화는 끝난다.  - P41

그런데 두 사람은 왜 만리장성이라는 공간을 선택했을까? 여기에는 여러모로 상징적 의미가 있어 보인다. 동유럽과 서유럽에서 각각 성장한 두 사람은 일찍이 소련이 만들어놓은 ‘철의 장막을 경험했다. 중국의 만리장성 역시 외적을 막기 위해 쌓은 거대한 성벽이자 배타적 경계선이다. 때라서 만리장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걷는다는 것은 장벽을길로 여는 일이고, 냉전의 질서를 평화의 질서로 바꾸어내는 상징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두 사람의 건기는 단순한 신체적 활동을 넘어 중요한 정치적·문화적 의미가 있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 서문에서 걷는 행위를바느질에 비유했다. 걸어가는 사람이 바늘이라면 걸어가는사람은 실이 되고, 걷는 일은 대지를 꿰매는 바느질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까 걷는다는 것은 찢어짐에 맞서는 저항의 행위인 셈이다. 아브라모비치가 수행해온 많은 퍼포먼스들이 세계의 전쟁과 폭력을 고발하고 그 상처를 치유하려는 제의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연인들, 만리장성 걷기>에서 개인적 관계에 대한 탐구를 넘어선 사회 문화적 메시지를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해석 - P46

대지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실감하는것, 그때 비로소 ‘길‘은 죽음의 장소에서 생명의 장소로 바뀔 수 있다. 로드킬 연구자 최태영이 동물의 눈을 좀더 유심히 바라보라고 권유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실물을 통해서든 영화를 통해서든 동물의 눈을 마주한 사람들은 핸들을 잡을 때마다 그 눈동자를 조금이나마 의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이란 우리가 어떤 속도로, 얼마나 낮은 자세로 걸어가느냐에 따라 매우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맨발의 보행자에게 길은 생명을 발견하고 느끼는 터전이지만, 속도광에게 길은 끝없이 단축해야 할 공간적 거리에 불과하다.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더 부유하게 살려는 사람이나 사회에 있어서 ‘길‘은 오로지 실용적이고 경제적인 가치를 지닐 뿐이다. 그들의 눈에는 ‘길‘의 윤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우스운일처럼 보일 것이다.
- P56

새삼 ‘사람‘ 이라는 말의 기원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람‘은 ‘살나(生)‘라는 동사 어간에 명사형 접미사를 붙인 말로, ‘살아 있는 것, 곧 생명체‘를의미한다. 살다‘ 라는 동사는 다시 ‘살‘이라는 명사에서 왔으니, ‘사람‘ 이라는 말에는 ‘몸을 가진 존재 또는 힘이나기운을 지닌 존재‘라는 뜻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영어로 ‘Man‘이나 ‘Human‘은 흙으로 사람을 빚었다는 성서의내용처럼 ‘흙‘이라는 뜻의 라틴어 ‘Humos 에서 유래했다.
최초의 인간인 ‘Adam‘은 히브리어로 ‘사람‘이라는 뜻이고,
이 말은 ‘흙‘을 뜻하는 ‘Adama‘에서 왔다고 한다. 일본어로
‘사람‘을 뜻하는 히토는‘는 ‘영혼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이다.
이 어원들에 비추어본다면,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사람의 몸과 영혼, 그 속에 깃든 생명력을 그리는 일이다. 인물의 외형뿐 아니라 정신까지 담아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는 동양화의 전통에서도 강조되어온 바다. 그러고 보 - P60

면 ‘형이 형상의 닮음‘ 못지않게 신이, 정신의 닮음‘를 중시한 것은 고대에서 현대까지 통용되는 인물화의 불문율이아닐까 싶다. 또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삶과 등을 맞대고있는 죽음의 그림자와 대면하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의 몸은 수많은 죽음의 인자들에 대항해 매 순간 싸우고 있다. 몸은 삶과 죽음이 싸우는 전쟁터이자, 욕망과 초월이 하루에도 몇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도량이다. 따라서 한 사람의초상화에는 그의 몸이 환경에 어떻게 대응해왔는지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사람을 그린다는 것은 한 세계를 그리는 일이다. 그리고 한순간을 그린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을 그리는 일이기도 하다.
정영창의 개인전 한 사람〉에서 복수의 인물이 등장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화폭 전체가 오로지 한 인물의 극적인순간을 포착하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개별적으로 호명된한 사람 한 사람의 이미지들은 한국의 현대사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폭력과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검은 허공에 떠 있는 듯한 얼굴들, 세계를 떠도는유령들의 귀환, 묵시록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이 초상화들은 망각의 강에서 방금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죽음의 물기를 머금은 채 고통의 비늘을 파닥거린다.  - P62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일이 값어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고, 그 길을 몸소 실천했다. 오늘 우리 앞에 도착한 그 서늘한 눈동자가 묻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렇게 정영창이 그린 초상화들은 세계에 대한 낙관과비관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그에 대한 해석은 온전히 보는 이의 몫으로 남겨놓는다. 그러면서도 하나의 얼굴에 포박된 어떤순간 속으로, 그 내면의 슬픔과 공포 속으로 보는 이를 끌어들인다. 이러한 흡인력은 자신이 그리는 인물의 내면과 깊이 동화되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거리 좁히기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이 고통의 서사시 앞에서 우리는 ‘사람이란 어떤 - P65

존재인가‘ 다시 묻게 된다. 그리고 세계란 어떤 곳인가‘ 성찰하게 된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생명의 근원과 생성과 소멸, 인간의 삶과 죽음, 폭력과 전쟁, 사랑과 평화 등 인류 역사의 근원적 질문을 놓지 못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세계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탐색은 결국 ‘사람‘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그런의미에서 정영창이 기록하고 조형해낸 초상들을 한 사람 한사람을 위한 ‘검은 빛의 환대‘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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