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사오년도 더 전 ‘국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국수‘ 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흔이라는 오묘한 나이를 소설을 쓰면서 건너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과 감사는 제게 실과 바늘처럼 한묶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의도도 있지만, 제 의도를 넘어서는 그 어떤..… 흐름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가 저를,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의자 위에 데려다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벽이 간직한 신비를 깨달은 것은 마흔이 되어서입니다.
자명하지만, 그 신비를 제대로 모르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싶습니다.
한편의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그 흐름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제 의지대로 소설이 쓰이고 제 인생이 전개되었다면, 기쁨과 감사를 몰랐을 것입니다.
요즘은 틈틈이 얼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얼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오래 실어증에 걸렸다. 말을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중얼거려봅니다.
새벽, 김숨의 국수를 꺼내 읽는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장들이 꾹꾹, 마음을 눌러와서 툭툭... 털어 버리려 읽고는 한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읽고나면 어김없이 황폐해지는 단편들 사이에 길을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게 된다. 그게 김숨의 힘일까?
진달래가 지천인 산길을 걷는 내내 끈같은 국수의 면들이 발을 칭칭 감왔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모금 두어 모금 서너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한덩어리로 뭉쳐야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르튼 발뒤꿈치 같을 덩어리가 밀크로션을 바른 아이의 얼굴처럼 매끈해질 때까지 이기고 치대야 하는 시간이지요. 여무지게 주물러야 하는...... - P49
소금알들이 마침내 녹아든 물을 조금씩, 인색하다 싶을 만큼 조금씩 부어가면서 밀가루를 뒤적뒤적 섞어줍니다. 밀가루가 축축이젖어들고 엉기면서 손가락에 들러붙습니다. 손아귀에 잡히는 대로밀가루를 주물럭거려 덩어리를 만듭니다. 손가락 마디들이 구근처럼 불거지도록 꾹꾹 눌러가면서 .… 껌처럼 덩이져 양푼에 들붙으려는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긁어가면서 .... 그래요. 언젠가 저에게이러한 시간이, 반죽의 시간이 찾아오리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굼뜬 손가락들을 오므리고 펴길 반복하면서 견뎌내야 할 반죽의 시간이 말이에요. 오후의 빛이으깨진 홍시처럼 널린 부엌 창.… 그 창을 무심히 등지고 앉아서이렇게 . - P51
반죽이 겨우 한덩어리로 뭉쳐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반죽이 너무 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죽을 국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넣어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벌써 이십구년 전이던가요? 당신이 우리와 살러 왔을 때 꼭 지금의 내 나이였으니 말이에요. 마흔 셋이던 당신은 일흔두살이, 열넷이던 나는 마흔세살이 되었으니.... - P53
혀에 이미 암이 상당히 퍼져 절제가 불가피하다던 의사의 설명을 당신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당신이 서너 젓가락이라도 국수를 건져 먹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꺼내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 꾹
반죽에 찰기가 붙어서인지, 한덩이의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응어리를 주무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단단하고 차지게 맺힌응어리와 한바탕 씨름이라도 하는 듯해요.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이기나 한번 해보자. 괜한 오기까지 뻗치는 게... 약이 오를 대로오른 내 손가락들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매달릴수록 이놈의 응어리는 더 차져만 가지 뭐예요. 그런데요… 글쎄 이놈의 응어리와 달리 말이에요, 제 안에서는 뭔가가 풀리는 것만 같아요. 이놈의 응어리처럼 뭉치고 맺힌 뭔가가 … 응어리라고밖에는 별달리 설명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 뭔가가 부드럽게.…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 P61
한시간이면 될까요. 숙성을 위한 시간으로 말이에요. 안달복달들복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은 차져지고 부드러워질것입니다. 반죽이 이느정도 치대지면 당신은 그것을 비닐에 싸고양푼째 보자기로 덮어서는 밀쳐두었지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때때로 반나절이 훌쩍 지나도록 잊은 듯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이 저 스스로 깊고 원숙해진다는 걸 당신은 잘 알아서였겠지요. 숙성의 시간을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침잠의 시간… 단절의 시간..… 내적 고요의 시간… 성찰의 시간……… 과학적으로 밀가루 반죽의 경우 네다섯시간이 숙성 시간으로 적당하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실온이 아닌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설명도요. 네다섯 시간이라.… 그렇지만 그렇게나 긴 시간 반죽을내버려둘 여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 P63
그러고 보니 국숫발이 모양으로만 보자면 끈 같기도하네요. 가늘고 기다란 게 하얀 운동화 끈 같기도.… 혹 당신이뽑아낸 국숫발들은 끈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자식이란 끈 대신밀가루로 반죽을 개어 끈들을 만들어냈던 게 아닐까요. 그 끈들이허망하게 불어터지고 늘어지는 게 싫어 꾸역꾸역 당신의 입안으로말아넣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결코 국숫발을 이로 끊어 먹지않는다는 걸, 내가 눈치 챈 게 언제였던가요. 당신은 건져올린 국숫발을 이로 끊지 않고 어떻게든 끝까지 젓가락으로 끌어올리고...당겨올리고… 말아올려 입속에 들게 했지요. 미끌미끌 늘어지는한가락까지. 그런 국숫발을 내가 숟가락으로 죄다 뚝뚝 끊어버렸으니…… 죄…. 서운하세요? - P69
간신히 걸쳐 있던 한가락의 국숫발마저도 흘러내립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혀가 국숫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듯해서나는 숟가락을 집어듭니다. 국숫발들을 뚝뚝 끊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당신이 내게 처음 끓여준 국숫발들을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냈듯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때 심정과, 지금 국숫발을 뚝뚝 끊어내는 심정은 분명 다르겠지요. 뚝뚝..… 뚝. - P81
노인은 간장에 조린 우엉 같은 골목을 두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노라도 젓듯 왼팔을 허우적거리면서, 과장되게 휘저어대는 왼팔과 달리, 사십도 정도 허공으로 들린 오른팔은 의수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노인은 성급히 발을 내디뎠고, 그녀는 노인이 저러다 앞으로 꼬꾸라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두 발을 부단히 엇갈려 내는데도 보폭이 짧아서인지 노인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대여섯발짝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 걷던 그녀는 갑갑함을 느끼다 못해 결국 걸음을 빨리해 못 본 척 노인을 휙 지나쳐버렸다. 골목 끝에 거의 이르러 그녀가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을때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노인이그 골목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디서도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지 이십분쯤 지나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선풍기를 주워들고 돌아왔다. - P135
그녀는 뚜껑을 꼭 닫고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밤새 틀어놓는다해도 오리 뼈 고는 냄새가 뿌리 뽑히지 못하리라는 걸 알지만 환풍기를 틀었다. 그녀는 노인의 영정사진을 한번 바라본 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인을 찾기 위해, 그녀가 노인을 찾아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202호 여자가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 P157
마다하지 그의 손가락 마디만큼 벌어진 입에서 피어오르던입김이 차츰 옅어졌다. 보랏빛과 푸른빛, 노란빛, 자줏빛 그리고 또다른 그 어떤 빛이 한꺼번에 그의 이마에서 감돌았다. 빛깔들은 뒤섞여 기묘한 빛을 발했다. 검보랏빛인 듯, 검푸른빛인 듯, 검노란빛인 듯, 검자줏빛인 듯, 혹은 그 어떤 빛인 듯한 신비로우면서도 섬뜩한 그 빛은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어느 결엔가 바짝 다가온 개가 그런 그의 얼굴 위로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개를 쫓아버리지도 덥석 끌어안지도 않았다. 개가 큼큼 내뿜는 콧김에 그의 머리카락 몇올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금이빨을 팔러 가자...… 그는 개를 끌고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전선줄처럼 가늘고 검은 골목들을 지나고, 젖은 낙엽이 날리는횡단보도를 건너, 셔터가 굳게 내려진 가게들을 지나… 사내는은수저와 금이빨이 널린 보자기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를기다리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는데도 순대국집은 간판을 노랗게밝히고 있었다. "금이빨을 팔러 왔소." "입을 벌려요." "거참, 늙은이더러 자꾸만 입을 벌리라고 하는 구만." "입을 벌리리니까요." - P193
고갯길 정점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그물처럼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그물에 걸려 끌어올려지듯 그녀는마저 고갯길을 올랐다. " "섬이었지.…그녀의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거칠어진 숨소리와 뒤섞여고갯길 정점에 떠돌았다. 그녀의 모습은 이미 고갯길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숲 저 너머 차를 그득 실은 카페리가 막 석모도를 떠나 강화도로향하고 있었다. - P230
환갑이 낼모레인데 돼지를 떼로 생매장할 구덩이나 파고 있다. 불현듯 자괴심이 복받쳐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저 밥벌이야, 밥벌이 .…..… 그렇지만 누굴 위한 밥벌이인가? 그것은 언제부던가 그가 스스로에게 자조적으로 묻곤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시방 누굴 위해 돈을 벌고 있나…… 도대체 누굴 먹여 살리려고 ... 오십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는 돈을 벌어도 신이 나지 않고 허무감만 들었다. 그나마 지갑에 만원짜리 몇장 들어 있다는 안도감, 그것 말고는 정말이지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날마다일이 있는 것도, 쓰고 남을 만큼 벌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일거리가 갈수록 줄어들어 만원짜리 한장, 천원짜리 서너장으로 일주일 넘게 버티는 날도 많았다. 더구나 지금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월세 보증금 천만원과 통장에 넣어둔 백여만원이 고작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에 올 때 그의 지갑에는 오천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네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보다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301
아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구덩이를 향해 서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좇는 사이에아들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없었다. 다급히 아들을 찾는 그의 눈에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재구가 아니라 저 자식이었나?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재구인지 청년인지 형 혼란스러웠다. 재구여도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는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목에 둘러진 수건이 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마침내 돈사에서 돼지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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