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그래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무직 노동자, 택시, 조깅하는 사람,
관광객, 거지 아저씨와 개, RPO 빌딩 아랫부분이 보였다. 우리가 좀 적응이 된 다음에는 매니저가 매장 앞쪽 쇼윈도 바로 뒤까지 가도록 허락해 줘서 RPO 빌딩이 얼마나 높은지보았다. 딱 적당한 시각에 그 자리에 가면 해가 우리 빌딩이있는 쪽에서 RPO 빌딩이 있는 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P11

렉스는 손님들이 나가기 전까지 계속 웃음을 짓고 있었고 손님이 떠난 뒤에도 슬픈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렉스가 했던 농담이 떠올랐고, 문득 해의 자양분을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생각에 렉스가 전부터 골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에이에프가 렉스만이 아니었으리라는 걸 안다. 사실 그건 공식적으로는 문제조차 아니었다. 우리 모두 실내 어디에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사양을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몇 시간있다 보면 피곤한 느낌이 들거나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했다. 자신에게 고유한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게 알려지면 영영 집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 P17

내가 쇼윈도에 가고 싶어 한 데는 햇빛이나 선택받을 가능성과 무관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 대부분의 에이에프나 로사와 다르게 나는 늘바깥세상을 아주 세세하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셔터가 올라가고, 바깥쪽 인도와 나 사이에 유리 한 장밖에 없어서지금까지는 가장자리나 귀퉁이밖에 못 봤던 수없이 많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자, 나는 순간 너무 들떠서 해와 해의 인자함조차 잊을 정도였다.
RPO 빌딩이 벽돌로 뒤덮여 있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흰색이 아니라 연노란색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22층이었다.) 창문 아래마다 창턱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 P19

그런데 그때 틈이 더 벌어져서 아이가 실은 에이에프와 같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년 메이에프였는데 세 걸음 뒤에서 아이를 따라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소년 에이에프가 우연히 뒤처진 게 아님을 알았다. 아이가 늘 이런 식으로걸으라고, 자기가 앞에 갈 테니 몇 걸흠 뒤에 따라오라고 했고 소년 에이에프는 지시를 받아들인 거였다. 시나가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소년 에이에프가 사랑받지 못한다.
는 걸 알 텐데도, 나는 소년 에이에프의 걸음걸이에서 고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을 찾았는데 나의 아이가 나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 궁금했다. 이 둘을 보기전에는 에이에프가 자기를 멸시하고 싫어하는 아이와 같이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때 앞쪽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늦추고 뒤쪽 택시가 바짝 붙어 서는 바람에 더는 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오지 않을까 싶어 계속 지켜보았는데, 횡단보도 위 인파 속에는 없었고 건너편 인도는 택시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 P33

"클라라는 B2예요.. 4세대에 속하죠. 지금까지 나온 최고1의 버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B3가 아니라서."
"B3 모델의 혁신은 성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 성향의 아이에게는 최고급형 B2가 가장 적합한 짝이라고 느끼는 고객도 많습니다."
"그렇군요.."
"엄마, 나는 클라라가 좋아요. 다른 애 말고요."
"기다려 봐, 조시. 어머니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티피셜프렌드(Artificial Friend, AF)는 하나하나 다 다르다죠?"
"그렇습니다. 특히 이 수준에 다다르면 개성이 확연합니다."
- P69

조시의 이 말에 교류 모임 동안 여러 상황에서 조시의 손 모양이 떠올랐다. 환영하는 손, 제안하는 손, 긴장한 손, 그리고 조시의 얼굴, 누군가가 왜 B를 고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조시가 웃으며 말하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이제 그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그러자 매니저가 한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창가로 와서 약속을 하고는 다시오지 않거나 심지어는 다시 왔는데 다른 에이에프를 데려간다던 말, 나는 느리게 이동하는 택시 사이 틈으로 본 소년에이에프를 생각했다. RPO 빌딩 쪽 인도에서 아이보다 세걸음 뒤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따라가던 모습, 조시와 나도 그런 식으로 걷게 될지 궁금했다.
"아마 이제 너도 알겠지." 해의 무늬가 드리워 있는데도 릭? HF "이 무리로부터 조시를 구해야 한다는 거."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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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뒷 표지에서>


강윤희가 백아영의 몸의 변화를 안 건 백아영이 가슴이 아프다.
고 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백아영의 가슴에 멍울이 잡혔다. 가슴에 멍울이 생겼다는 건 이 년 이내에 생리가 시작될 수도 있다.
는 얘기였다. 백아영의 두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아이 혼자 머리를 어설프게 감아서가 아니었다. 강윤희가 몇 번씩 씻기고 헹구어줘도 백아영의 두피에 기름이 끼면서 그동안 나지 않던 냄새가 났다. 멍울도 두피 냄새도 모두 십대 성장기 아이들한테서 나타나는 변화들이었다. 겨우 여덟 살인 아이한테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 P105

소아내분비과 전문의는 백아영의 황체형성호르몬 수치가 높기때문에 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사주 간격으로 맞아야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성조숙증 확진 판정이었다. 강윤희는 인터넷에 떠도는병의 원인과 치료 부작용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였다. "그럼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물었지만 의사도 이런 사태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윤희와 백은호가 그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성호르몬 억제주사를 맞는 아이들이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를 함께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장이 너무 빨라 억제제를 투여하면서, 억제제 때문에성장이 늦을까 다시 성장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선택 사항이시고, 의료보험 안 되세요." 성장 치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간호사는 서둘러 다음 환자를 불렀다. 간호사도 의사도 너무 바빠 보였다. 접수와 대기, 진료, 수납을 위해 빠르게 돌아가는 소아내분비과 앞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같았다.
- P106

그러나 강윤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은 자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피임을 원하는지 백은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백아영이 성조숙증 확진을 받았을 때도, 틱 증상이 생겼을 때도 아무도 자신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윤희는생각했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것 같았다.
강윤희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이 가슴골로들어와도 몸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고 앞 동의불빛도 거의 꺼진 밤이 되면 강윤희는 술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한참씩 찬바람을 쐬었다. 그러고 있으면 백아영의 문제에서도 백은호와의 관계에서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몸을 쓰는 데에만 열중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자신의 성격이나직업이나 가치관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강윤희라는 여자의 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남자, 강윤희는 그런 남자와의 원 없는 섹스를꿈꾸었다. 그 남자는 백은호만은 아닌 어떤 남자였고, 강윤희에게현실적인 피임의 문제는 오직 백은호하고만 관련이 있었으므로피임을 안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그런 남자였다.  - P115

하지만 강윤희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있다. 엄마는 어떻게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인지 강윤희는궁금했다. 어떤 믿음이 열한 살 딸과 스물세 살 시동생 둘만 남겨놓고 여행을 갈 수 있게 했던 것인지, 강윤희는 살아생전에 그런얘기들을 엄마와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백아영을 임신했을 때 빼고는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아왔다는 걸 백은호조차 알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강윤희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정신과의사밖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강윤희는 친정엄마가 말한 대로 밀가루를 수제비 반죽보다 약간 되게 반죽해 비닐에 싸두고 신김치를 썰었다. 쫑쫑 썰라고 했기 때문에 쫑쫑 썰었다. 두부를 힘주어 짜고, 숙주나물을 데치고, 파와 마늘을 다져 넣어 소를 만들었다. 강윤희는 반죽해놓은밀가루를 치대고 길게 말아서 피 하나 크기만큼씩 잘라놓았다. 교자상을 펴고 밀대를 꺼내놓자 백아영과 강민서가 달려들었다. 강민서는 여러 번 해보았는지 밀대를 쓱쓱 움직여 만두피를 보름달처럼 만들어놓았다. 백아영은 자기도 해보겠다며 밀대를 밀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지 끙끙댔다. 손목을 어떻게 돌리고 어느쪽으로 얼마만큼 힘을 줘야 하는지 강민서가 다시 시범을 보였다.
강민서의 손이 전날보다 많이 부어 있었다. 만두소를 넣은 양푼에숟가락 세 개를 꽂고 그들은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P121

"다 내 죄야…..."
강중식은 그렇게 말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벤지 끝에 걸터앉은 늙은 강중식이 몸을 공벌레처럼 만 채 울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때 내가 너한테."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윤희야."
"그래도 나는"
강중식이 강윤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가락밖에는 안 넣었다."
그러면서 강중식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듯이.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면 강민서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듯이. 최악까지 가진 않았는데 이런 형벌은 억울하다는 듯이. 그러나 강윤희가 놀란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강중식이아직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쁜 꿈을 꾼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몸의 증상을 빼면 그만큼 그일은 현실감이 없었다.  - P125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는 한파 특보는 오 일 만에 해세됐다. 주말이 지나고 백아영은 강윤희보다 일주일 먼저 개학을 했다. 백아영을 학교에 보내고 빈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주사위가굴러가는 소리, 색종이를 접었다 펴는 소리, 강아지와 트리케라톱스와 소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희의 친정에 있는앨범 속에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 있었다. 강윤희는 그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사진이었다. 소년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서 쩔쩔매고 있었다. 아기가 흘러내릴까봐 양팔에 힘을 주어 뒤를 받치고, 그 와중에도 등에 매달린 아기를 보려고 고개와 눈동자를 뒤쪽으로 한껏 돌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아기를 받으려고 소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아기 엄마가 보였고, 환호를 하는지 말리는지 모를 손들이 보였다.  - P126

야, 그러다 떨어지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솟아 있던 돌들이 소리 없이 자리를 낸다. 그 자리로 곳곳의 모래들이 모여든다. 물고기들은 숨을 죽이고 바람도 움직임을 멈춘다. 은석이는계곡이 만들어준 자리 위로 첨벙, 떨어진다. 계곡물에 다만 옷이무거워졌을 뿐이다. 은석이는 개헤엄으로 몸을 움직여 물 밖으로나온다. 은석이는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는다. 은석이는 윗니 하나, 아랫니 두 개가 빠진 채로 유치원 졸업사진을 찍는다. 은석이는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 발을 삔다. 은석이는 중학교 때 체육복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다. 은석이는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 되고, 은석이는 군대에 가서 대대장 당번병을 한다. 은석이는 대학고 3학년 때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다. 은석이는 어느 회사에 들어가 설비 엔지니어가 된다.  - P214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햇빛의 양을 보고 유정은 오후 네시쯤 됐겠구나 생각했고, 휴대폰을 보자 정말 네시였다. 어떤 감각들은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 이렇게 불쑥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미산의 산을 보며 오후 전체를 보내는 게 열두 살 이후로처음인데도 유정은 산등성이의 빛만 보고도 시간을 알아맞히는것이다. 이제 저 산에 얼마나 빨리 저녁이 오는지, 얼마나 빨리 땅이 그늘지고 얼마나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지, 매캐하고 메마른공기가 어떻게 초겨울 대기를 채우며 어둠을 몰고 오는지 유정은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이맘때 그 산문을 발표한 이후로 유정은 재상이 삼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수상 축하 전화였다.
잘했다고, 장하다고, 재상이 삼촌이 말했다. 유정은 감사하다고답했다.
- P246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자신의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기 이전,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P247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삼십 년이나 지난 일 따위 이제 자신은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타격이 온다 해도 유정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근력이 이제는 있다고 생각했다. 피해 사실을 말한 뒤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거라고는, 이 경우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P248

그때 유정이 붙는 생각은 하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킬 수없다는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유정은 더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걸 받아들여야 했다.
- P258

유정에게 미산은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그리운 곳이었다. 그곳의 많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지만 유정은 여전히 그곳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다. 이맘때의 마른 깻단 냄새가. 이맘때의 생무 냄새가, 새 공책 냄새가, 발을 씻던 따뜻한 물이, 어떻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유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서서 입김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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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세 번째 봄이다.
최은미의 <여기 우리 마주>는 이제는 과거형이 되어버린 첫 번째 봄의 이야기다. 처음 읽을 때는 생생한 감정선이 살아났는데 이만큼 지나고 나니 당시에 비해 어마 무시한 확진자 숫자들이 비현실적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을 상상하지 못했듯, 그때의 확진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게 향하던 표창 같은 비난들이 섬뜩하다. 우리들 마음이 다 그러했음에.

살구 꽃이 피었는데, 연락 없는 그들에게서는 소식이 왔을까?
모두 조금은 평안한 세 번째 봄이었으면.


맘 카페에 들락거리는 그 마음을 나 또한 모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구차하고 혼해서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힘내라는 댓글 딱 하나만 보고 내리려고 올리는 글들, 아무리 억지스러운 얘기를 올려도 수십만의 회원 중에 한 명은 호응을 달아주는 사람이있었다. 거기선 모두가 거침없었다. 재판관과 상담사와 의사와 친구 역할을 돌아가며 했다. 당장 이혼하세요. 안 봐도 뻔해요. 그런엄마 그냥 차단하세요. 그걸 왜 참으세요? 얼마나 속상하셨을까요. 에궁, 토닥토닥. 하트를 날리고 눈물을 글썽이며 격하게 껴안는 브라운과 코니, 즉각적인 공감과 위로를 받고 고개를 끄덕이며글을 내린다. 하지만 매일 얼굴을 보는 사람 앞에선 에어 프라이어에 뭘 해 먹을까만 얘기하는 것이다.
- P23

돌담 불빛을 따라 저만치 앞서 걸어가는 윤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직 유치도 다 안 빠진 것들이" 하며 조금 웃었다. 비슷한 길이로 자른 두 윤이의 머리카락이 어깨쯤에서 찰랑거리며 멀어졌다. 지금은 유치도 다 안 빠진 저 아이들이 어느 날부터는 영구적으로 써야만 하는 이를 가지고 살아가겠지. 지금보다 기다란 팔다리로 허우적거리면서 누군가한테 다가가고, 멀어지고, 사랑이 가져오는 것들을 모른 채로 사랑하고, 알고도 사랑하면서, 윤이들이시기마다 겪어갈 상실감의 무늬들을 생각하자 가슴 제일 깊은 곳이 아려왔다.
- P37

휴대폰으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진아씨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볼 생각이었다. 처음엔 진아씨, 라고 썼다.
지우고 다시 지나씨, 라고 썼다. 하지만 지나라고 부르자 아무 말도 써지지가 않았다. 내가 진아씨한테 갖고 있던 어떤 느낌도 살아나지 않았다. 세 살 윤이들을 어린이집에 들여보내고 출근길 지하철역으로 같이 뛰던 사람, 잠들기 전에 한 번씩 내 집 쪽을 살펴봐주던 사람, 작은 쪽지 하나도 그냥 버리지 못하던 사람, 폭염과태풍을 함께 겪은 사람이 진아이지 어떻게 지나란 말인가. 하지만 그 사람은 착한 모범생이던 시절에도 김팀장이던 시절에도 산모님이자 윤이 어머니일 때도 은행에서도 운전면허 시험장에서도
지나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
- P43

"살구꽃이 피면 톡 하겠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채로 고개를 끄덕인다. 기약만 있다면 더 오래도 기다릴 수 있다고, 겨울이 다가온
창밖을 보면서 생각하고 생각한다.
- P45

그리고 병원이 있다.
병원에 가던 날은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땐 5월이었다. 4월도황금연휴도 다 지난 5월, 병원까지는 자차로 팔 분이 걸렸다. 종합병원 앞 사거리, 병원 지하주차장, 병원 엘리베이터, 발열 체크대,로비에서 웅성이던 사람들, 지금도 나는 그 봄에 내가 받았던 질문들을, 혹은 받지 않아도 됐던 질문들을 떠올린다. 어디서부터였을까. 아이들 교과서가 일제히 학교에서 집으로 보내지던 때, 우리의 봄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을까? 아니면 수미의 딸이 새경프라자에 와서 울던 그날부터?
수미는 자신의 재난지원금을 나에게 와서 썼다.
그리고 나는 지금 수미를 만날 수 없다.
- P51

수미는 늘 여러 탕을 뛰었다. 서하를 내 홈 공방으로 처음 보내던 무렵에는 은채가 다니는 미술학원의 차량 기사를하고 있었다. 그때도 수미는 선 캡을 쓰고 있었다. 패딩 모자를 쓰는 한겨울을 빼고 수미는 늘 선 캡을 쓰고 다녔다. 각도를 조금만조정해도 코까지 빠르게 가려버리는 선 캡. 들키기 싫으면 고개만살짝 숙여도 되는 선 캡. 자기는 편할지 몰라도 주위 사람들은 속터지게 만드는 선 캡. 정수리가 뻥 뚫린 선 캡을 쓰고 어딘가를 빠르게 걸어가는 깡마르고 키 큰 여자가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수미일 것이다. 12인승 스타렉스에 아이들을 태우고 사거리에서 좌회전을 하는 여자가 선 캡을 쓰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수미일 것이다. 진료소에 갈 때도 수미는, 선 캡을 썼을 것이다.
- P57

죽음, 남편의 사망, ‘남편과 ‘사망‘을 연결시키다보면 그날이 떠오른다. 남편의 건강검진 결과표를 열어보던 임신 막달의 어느날이. 남편 몸의 각종 수치들을 보면서 내가 느낀 건 무엇이까. 이 남자가 쓰러지면 우리 가족은 다 같이 망한다는 공포였을까? 분명한 건 남편의 혈관 수치에 일희일비하며 야채주스를 갈아바치는 여자들을 내가 오랫동안 혐오해왔다는 것이다. 남편을 죽여야 할 때 죽이지 못하는 여자들, 죽여 마땅한 순간에 남편을 빠는 여자들, 남편을 죽이는 대신 애를 잡는 여자들, 정말이지 좆같은 여자들. 좆빨러라는 욕을 먹어도 싼 여자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건 자기혐오가 아니다. 좆빨러가 되지않으려고 피오줌을 싼다고 말하고 싶지도 않다. 그게 전부는 아니니까. 나는 외로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마음 붙일 곳 없는 낮에 대해서. 눈을 붙여도 잠들 수 없는 밤에 대해서. 남편과 노동을 나누기 위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에너지를 뺏긴 채로 ‘행복한 아이를 키워내는 다른 여자들‘과 ‘편하게 사는 다른 여자들을 가위눌리듯 떠올리던 것에 대해서.
우리가 서로를 욕심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어떻게 다시 고립되어갔는지, 그 외로웠던 봄에 대한 얘기를. - P72

곧 끝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잘 참아왔다. 이전의 일상을 이제는, 정말이지 이제는 반토막이라도 되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1차로 개학이 연기되었을때, 2차로 연기되었을 때, 3차 연기, 다시 4차 연기, 일정표에 쓴 개학/ 개학/ 개학/ 개학이 네 번 다 무효가 돼도, 어쨌든 지나왔다.
코로나 시대에 대한 진단 어디에서도 거론되지 않는, 아침밥/설거지 학교 온라인 수업/ 점심밥/설거지 / 학원 온라인 수업/ 저녁밥/설거지로 하루가 가도 어쨌든 지나왔다. 2020년 5월 4일, 교육부는 5월 13일부터 순차적인 등교 개학을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제 교과서를 다시 학교로 보낼 수 있었다. 이제 학모들은 미회신 알림 11 / 미확인 알림 39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에 혼자 있는 아이에게 배달의민족으로 밥을 시켜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드디어, 마침내, 아이들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너네들이 클럽에서 처놀지만 않았어도,
- P77

건물 외벽 사이 주차공간만한 어둑한 바닥에 접이식 의자 하나가 놓여 있던 것이 떠오른다. 전자 문진대 앞에서 모든 문항들에사실 그대로 답을 하자 내겐 위험 대상‘ 이라고 체크된 출입증이나왔다. 진료소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몇 개의 질문을 더 거친 뒤 나는 그 의자로 가라는 안내를 받았다.
검체를 채취하기 전, 아주 잠깐 나는 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중앙 출입구에서 허리를 숙여 무언가를 적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줄지어 선 택시들과 막 들어오고 있는 마을버스, 주차 꼬깔콘,
통화를 하며 지나가는 사람들, 센터 앞을 서성이는 사람들, 나는스물두 시간 전에 수미가 이 의자에 앉아 이 풍경을 봤을 거라고생각했다. 딱 십 초만, 이 의자가 저 풍경들로부터 나를 가려주는 - P88

곳에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때, 흰 방호복을 입은 의료진이다가와 말했다.
십초면 됩니다. 마스크를 내리고 고개를 젖히세요."
면봉이 콧구멍을 지나 비인두에 닿았을 때, 그러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이 고였다.

여덟 시간 뒤 나는 코로나19 음성 판정을 받고 자가 격리에 들어갔다.
수미는 기정시 67번 확진자가 되었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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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서 좋은 직업 - 두 언어로 살아가는 번역가의 삶 마음산책 직업 시리즈
권남희 지음 / 마음산책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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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펴자마자 ˝오늘은 열심히 해야지˝ 라고 매일 다짐하는 나를 만난다. 오늘의 권남희가 되기까지의 고군분투와 인내와 노력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좋은 번역자가 글을 잘 쓴다는 것 또한 진리다. 무엇보다 책 표지의 서재 사진이 압권. 그래서 낚였고 유쾌하고 흡족한 낚임이었다. 좀 얇긴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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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사오년도 더 전 ‘국수‘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고 발표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국수‘ 라는 제목의 소설집을 펴낼 수 있어서 기쁩니다.

  마흔이라는 오묘한 나이를 소설을 쓰면서 건너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행과 감사는 제게 실과 바늘처럼 한묶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제 의도도 있지만, 제 의도를 넘어서는 그 어떤..… 흐름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가 저를,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의자 위에 데려다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날이 밝아오고 있습니다.

  새벽이 간직한 신비를 깨달은 것은 마흔이 되어서입니다.
  자명하지만, 그 신비를 제대로 모르던 것들을 하나하나 알아가고 싶습니다.

  한편의 소설을 쓰는 동안에도, 그 흐름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그 무엇인가를 느낍니다.
  제 의지대로 소설이 쓰이고 제 인생이 전개되었다면, 기쁨과 감사를 몰랐을 것입니다.

  요즘은 틈틈이 얼굴에 대해 생각합니다. 얼굴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오래 실어증에 걸렸다. 말을 새로 배우는 사람처럼 중얼거려봅니다.



   새벽, 김숨의 국수를 꺼내 읽는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문장들이 꾹꾹, 마음을 눌러와서 툭툭... 털어 버리려 읽고는 한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읽고나면 어김없이 황폐해지는 단편들 사이에 길을 잃은 것처럼 우두커니 서있게 된다. 그게 김숨의 힘일까?
   진달래가 지천인 산길을 걷는 내내 끈같은 국수의 면들이 발을 칭칭 감왔다.
   성실하게, 한결같이.





그래요, 지금은 반죽의 시간입니다. 분분 흩날리는 밀가루에 물을 한모금 두어 모금 서너모금 부어가면서 개어 한덩어리로 뭉쳐야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부르튼 발뒤꿈치 같을 덩어리가 밀크로션을 바른 아이의 얼굴처럼 매끈해질 때까지 이기고 치대야 하는 시간이지요. 여무지게 주물러야 하는......
- P49

소금알들이 마침내 녹아든 물을 조금씩, 인색하다 싶을 만큼 조금씩 부어가면서 밀가루를 뒤적뒤적 섞어줍니다. 밀가루가 축축이젖어들고 엉기면서 손가락에 들러붙습니다. 손아귀에 잡히는 대로밀가루를 주물럭거려 덩어리를 만듭니다. 손가락 마디들이 구근처럼 불거지도록 꾹꾹 눌러가면서 .… 껌처럼 덩이져 양푼에 들붙으려는 밀가루를 손가락으로 긁어가면서 .... 그래요. 언젠가 저에게이러한 시간이, 반죽의 시간이 찾아오리라는 걸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내 굼뜬 손가락들을 오므리고 펴길 반복하면서 견뎌내야 할 반죽의 시간이 말이에요. 오후의 빛이으깨진 홍시처럼 널린 부엌 창.… 그 창을 무심히 등지고 앉아서이렇게 .
- P51

반죽이 겨우 한덩어리로 뭉쳐지는 것 같아요. 여전히 반죽이 너무 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요. 손님처럼 마루 한쪽에 옹송그리고 앉아 밀가루 반죽을 이겨대던 당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손바닥 안의 손금이 다 닳아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만큼 반죽을 국꾹 눌러대던 꾹꾹..... 당신이 반죽에 몰래 섞어넣어그렇게 꾹 누르고 눌러야만 했던 것.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벌써 이십구년 전이던가요? 당신이 우리와 살러 왔을 때 꼭 지금의 내 나이였으니 말이에요. 마흔 셋이던 당신은 일흔두살이, 열넷이던 나는 마흔세살이 되었으니....  - P53

혀에 이미 암이 상당히 퍼져 절제가 불가피하다던 의사의 설명을 당신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당신이 서너 젓가락이라도 국수를 건져 먹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가 꺼내는 게 나을까요? 아니면 ...… 꾹

반죽에 찰기가 붙어서인지, 한덩이의 밀가루 반죽이 아니라 응어리를 주무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단단하고 차지게 맺힌응어리와 한바탕 씨름이라도 하는 듯해요. 어디 네가 이기나 내가이기나 한번 해보자. 괜한 오기까지 뻗치는 게... 약이 오를 대로오른 내 손가락들이 악착같이 달려들고 매달릴수록 이놈의 응어리는 더 차져만 가지 뭐예요. 그런데요… 글쎄 이놈의 응어리와 달리 말이에요, 제 안에서는 뭔가가 풀리는 것만 같아요. 이놈의 응어리처럼 뭉치고 맺힌 뭔가가 … 응어리라고밖에는 별달리 설명할말이 떠오르지 않는 그 뭔가가 부드럽게.… 반죽의 시간이 당신·에게는 혹 가슴속 응어리를 달래고 푸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 P61

한시간이면 될까요. 숙성을 위한 시간으로 말이에요. 안달복달들복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은 차져지고 부드러워질것입니다. 반죽이 이느정도 치대지면 당신은 그것을 비닐에 싸고양푼째 보자기로 덮어서는 밀쳐두었지요. 한시간이고 두시간이고,
때때로 반나절이 훌쩍 지나도록 잊은 듯 거들떠도 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무심히 내버려두는 동안, 반죽이 저 스스로 깊고 원숙해진다는 걸 당신은 잘 알아서였겠지요. 숙성의 시간을 달리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침잠의 시간… 단절의 시간..… 내적 고요의 시간… 성찰의 시간……… 과학적으로 밀가루 반죽의 경우 네다섯시간이 숙성 시간으로 적당하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실온이 아닌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설명도요. 네다섯 시간이라.… 그렇지만 그렇게나 긴 시간 반죽을내버려둘 여유가 내게는 없습니다.  - P63

그러고 보니 국숫발이 모양으로만 보자면 끈 같기도하네요. 가늘고 기다란 게 하얀 운동화 끈 같기도.… 혹 당신이뽑아낸 국숫발들은 끈이 아니었을까요. 당신은 자식이란 끈 대신밀가루로 반죽을 개어 끈들을 만들어냈던 게 아닐까요. 그 끈들이허망하게 불어터지고 늘어지는 게 싫어 꾸역꾸역 당신의 입안으로말아넣었던 것이 아닐까요. 당신이 결코 국숫발을 이로 끊어 먹지않는다는 걸, 내가 눈치 챈 게 언제였던가요. 당신은 건져올린 국숫발을 이로 끊지 않고 어떻게든 끝까지 젓가락으로 끌어올리고...당겨올리고… 말아올려 입속에 들게 했지요. 미끌미끌 늘어지는한가락까지. 그런 국숫발을 내가 숟가락으로 죄다 뚝뚝 끊어버렸으니…… 죄…. 서운하세요?  - P69

간신히 걸쳐 있던 한가락의 국숫발마저도 흘러내립니다. 아무래도 당신의 혀가 국숫발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듯해서나는 숟가락을 집어듭니다. 국숫발들을 뚝뚝 끊기 시작합니다. 오래전, 당신이 내게 처음 끓여준 국숫발들을 숟가락으로 뚝뚝 끊어냈듯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때 심정과, 지금 국숫발을 뚝뚝 끊어내는 심정은 분명 다르겠지요. 뚝뚝..… 뚝.
- P81

노인은 간장에 조린 우엉 같은 골목을 두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노라도 젓듯 왼팔을 허우적거리면서, 과장되게 휘저어대는 왼팔과 달리, 사십도 정도 허공으로 들린 오른팔은 의수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노인은 성급히 발을 내디뎠고, 그녀는 노인이 저러다 앞으로 꼬꾸라지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두 발을 부단히 엇갈려 내는데도 보폭이 짧아서인지 노인의 걸음은 한없이 느렸다. 대여섯발짝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 걷던 그녀는 갑갑함을 느끼다 못해 결국 걸음을 빨리해 못 본 척 노인을 휙 지나쳐버렸다. 골목 끝에 거의 이르러 그녀가 슬쩍 뒤를 돌아다보았을때 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골목 구석구석을 살폈지만 노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는 노인이그 골목에서뿐만 아니라 세상 그 어디서도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만 같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녀가 집에 돌아온 지 이십분쯤 지나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선풍기를 주워들고 돌아왔다.
- P135

그녀는 뚜껑을 꼭 닫고 가스레인지 불을 껐다. 밤새 틀어놓는다해도 오리 뼈 고는 냄새가 뿌리 뽑히지 못하리라는 걸 알지만 환풍기를 틀었다.
그녀는 노인의 영정사진을 한번 바라본 뒤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빌라 계단을 내려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에서 길을 잃었을지도 모르는 노인을 찾기 위해, 그녀가 노인을 찾아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과 202호 여자가 돌아와 있기를 바라며,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 P157

마다하지 그의 손가락 마디만큼 벌어진 입에서 피어오르던입김이 차츰 옅어졌다. 보랏빛과 푸른빛, 노란빛, 자줏빛 그리고 또다른 그 어떤 빛이 한꺼번에 그의 이마에서 감돌았다. 빛깔들은 뒤섞여 기묘한 빛을 발했다. 검보랏빛인 듯, 검푸른빛인 듯, 검노란빛인 듯, 검자줏빛인 듯, 혹은 그 어떤 빛인 듯한 신비로우면서도 섬뜩한 그 빛은 그의 얼굴 전체로 번져나갔다. 어느 결엔가 바짝 다가온 개가 그런 그의 얼굴 위로 모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는개를 쫓아버리지도 덥석 끌어안지도 않았다. 개가 큼큼 내뿜는 콧김에 그의 머리카락 몇올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금이빨을 팔러 가자...… 그는 개를 끌고 사내를 찾아가고 있었다. 전선줄처럼 가늘고 검은 골목들을 지나고, 젖은 낙엽이 날리는횡단보도를 건너, 셔터가 굳게 내려진 가게들을 지나… 사내는은수저와 금이빨이 널린 보자기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그를기다리고 있었다. 영업이 끝났는데도 순대국집은 간판을 노랗게밝히고 있었다.
"금이빨을 팔러 왔소."
"입을 벌려요."
"거참, 늙은이더러 자꾸만 입을 벌리라고 하는 구만."
"입을 벌리리니까요."
- P193

고갯길 정점에 위태롭게 서 있는 남자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그물처럼 거대하게 드리워졌다. 그물에 걸려 끌어올려지듯 그녀는마저 고갯길을 올랐다.
" "섬이었지.…그녀의 탄식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거칠어진 숨소리와 뒤섞여고갯길 정점에 떠돌았다. 그녀의 모습은 이미 고갯길 너머로 사라지고 없었다.
숲 저 너머 차를 그득 실은 카페리가 막 석모도를 떠나 강화도로향하고 있었다.
- P230

환갑이 낼모레인데 돼지를 떼로 생매장할 구덩이나 파고 있다.
불현듯 자괴심이 복받쳐 그는 한숨을 내뱉었다. 그저 밥벌이야, 밥벌이 .…..… 그렇지만 누굴 위한 밥벌이인가? 그것은 언제부던가 그가 스스로에게 자조적으로 묻곤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시방 누굴 위해 돈을 벌고 있나…… 도대체 누굴 먹여 살리려고 ...
오십줄에 접어들면서부터 그는 돈을 벌어도 신이 나지 않고 허무감만 들었다. 그나마 지갑에 만원짜리 몇장 들어 있다는 안도감, 그것 말고는 정말이지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날마다일이 있는 것도, 쓰고 남을 만큼 벌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다. 일거리가 갈수록 줄어들어 만원짜리 한장, 천원짜리 서너장으로 일주일 넘게 버티는 날도 많았다. 더구나 지금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월세 보증금 천만원과 통장에 넣어둔 백여만원이 고작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에 올 때 그의 지갑에는 오천원짜리 한장과 천원짜리 네장이 달랑 들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보다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P301

아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뒤로 지나가는 것도 모르고 구덩이를 향해 서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좇는 사이에아들은 어딘가로 가버리고 없었다. 다급히 아들을 찾는 그의 눈에청년의 모습이 들어왔다.
재구가 아니라 저 자식이었나?
어스름이 짙어지면서 재구인지 청년인지 형 혼란스러웠다. 재구여도 어쩔 수 없지. 중얼거리는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의 목에 둘러진 수건이 피로 흥건히 젖어들었다. 그의 등줄기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마침내 돈사에서 돼지들이 몰려나오고 있었다.
- P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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