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클라라 일이 잘 풀렸다고 생각한다니 다행이다."
"카팔디 씨는 조시 안에 제가 계속 이어 갈 수 없는 특별한 건 없다고 생각했어요, 어머니에게 계속 찾고 찾아봤지만 그런 것은 없더라고 말했어요. 하지만 저는 카팔디 씨가잘못된 곳을 찾았다고 생각해요. 아주 특별한 무언가가 분명히 있지만 조시 안에 있는 게 아니었어요. 조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카팔디 씨가 틀렸고제가 성공하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결정한 대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네 말이 맞을 거야, 클라라, 내 에이에프를 다시 만났을때 나는 바로 그런 말을 듣고 싶단다. 잘되어서 기쁘다는말, 후회가 없다는 말, 너 저쪽 먼 쪽에 B3들 있는 거 아니?
우리 가게에 있던 아이들은 아니지만, 네가 같이 있고 싶다면 사람들한테 너를 옮겨 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 거야."
"아뇨, 괜찮습니다. 매니저님, 여전히 친절하세요. 하지만저는 이 자리가 좋아요. 그리고 되돌아보고 순서대로 배열할 기억들이 있어서 괜찮아요."
- P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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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의 경우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죠. 전에 다 이야기했잖아요. 쌀을 가지고 만든 것은 인형이었어요. 애도 인형이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 이후로 아주 많은 발전이 있었어요. 이걸 알아야 해요. 새로운 조시는 모조품이 아니에요. 진짜 조시가 될 거예요. 조시가 계속 이어지는 거라고요."
"나더러 그걸 믿으라고요? 당신은 믿어요?"
"물론 믿죠. 진심으로 믿어요. 클라라가 저 안에 들어가서 본 건 아주 잘된 일이에요. 클라라도 우리와 함께해야 하니까. 이미 오래전부터 그랬어야 하죠. 그 차이를 만드는 게클라라니까. 이번에는 지난번하고 아주 절대적으로 다를 겁니다. 믿음을 가져야 해요, 크리시. 지금 와서 마음 약해지지 말고요."
- P304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내가 말했다. "새로운 조시가필요 없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기존의 조시가 건강해질 수도 있어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생각합니다. 물론 그렇게 만들 기회가 필요하긴 합니다만,
하지만 너무 괴로워하시니까 지금 이 말씀을 드려야 할 것같아요. 만약에 그런 슬픈 날이, 조시가 떠나야만 하는 날이 온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카팔디씨의 말이 맞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도울 테니 샐 때와는 다를 겁니다. 이제 왜 어머니가 조시를 관찰하고 배우라고 요청했는지 알겠습니다. 그 슬픈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그날이 온다면 제가 배운 것을 모두 동원해 저위에 있는 새로운 조시가 이전의 조시와 최대한 비슷해지도록 훈련하겠습니다."
- P305

우리는 감상적인 사람들이죠. 어쩔 수가 없어요. 우리 세대는 여전히 과거의 감정을 지니고 살..
마음 한편에서 그걸 붙들고 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내면에 가닿을 수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계속 믿고 싶어 해요..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는 고유한 무언가가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건 없어요. 누구나 아는 사실이죠. 당신도 알고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무언가 있다는 생각을 놓기 힘들어요..
하지만 그 생각을 버려야 해요, 그리시. 이 안에는 아무것도없어요. 조시 내면에 클라라가 계속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은아무것도 없어요. 두 번째 조시는 모조품이 아니에요. 정확히 똑같은 존재니까 당신이 지금 조시를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그 애를 사랑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사실 믿음이 필요한 것도 아니에요. 합리적으로 생각하기만 하면 되죠. 나도 그렇게 해야 했고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아주 좋아요.
당신도 그렇게 될 겁니다."
- P308

시내버스가 버려진 과일 상자 옆에 멈춰 섰다. 아버지가 멈춘 버스를 돌아서 가려 하자 뒤에 있던 차가 화난 듯 빵빵지렸다. 그러고 또 다른 빵빵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우리한테 화를 내는 건 아니고 멀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말씀하신 마음이요, 내가 말했다. "그게 가장 배우기 어려운 부분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방이 아주 많은 집하고비슷할 것 같아요. 그렇긴 하지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고에이에프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이 방들을 전부 돌아다니면서 차례로 신중하게 연구해서 자기 집처럼 익숙하게 만들수 있을 겁니다."
- P321

극장 사람들을 유리창을 통해서 보는 대신 직접 보면 더뚜렷하게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들 사이로 오니사람들 모습이 매끈한 판지로 만든 원뿔이나 원통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단순화되어 보였다. 옷에는 접히거나 주름진데가 없고 가로등 아래 얼굴도 마치 등고선처럼 평평한 판을 쌓아 만든 모양으로 보였다.
우리는 왁자한 소리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어느 시점에나는 걸음을 멈추고 조시의 팔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는데조시가 내 뒤에 없었다. 조시가 릭에게 "저기 엄마 있다."라고 하는 소리가 들려서 그쪽을 돌아보았지만 조시도 릭도없고 대신 매끈한 이마만 내 얼굴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밀었는데 거친 손길은 아니었다. 그때아버지 목소리가 들렸고 다시 돌아보니 아버지와 헬렌 씨가서 있고 그 옆에 낯선 사람의 팔꿈치가 있었다. 아버지가 하는 말이 들렸다.
- P344

내가 밴스 씨가 앉았던 자리에 앉았지만 헬렌 씨도 릭도눈을 들지 않았다. 나는 헬렌 씨를 보며 헬렌 씨와 밴스 씨가 한때는 서로 열렬했고 사랑했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다. 헬렌 씨와 밴스 씨도 지금 조시와 릭이 서로에게 그런것처럼 다정했던 때가 있었을지 궁금했다. 또 언젠가는 조시와 릭도 서로에게 저렇게 매정해질 수도 있을까 궁금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차에서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말하던 게 떠올랐고, 아버지가 야적장에서 나지막한 해바로 앞에 서 있는 모습, 아버지의 몸과 긴 그림자가 하나의길쭉한 형체로 이어지고 아버지가 손을 뻗어 쿠팅스 머신분출구의 뚜껑을 돌려 열고 나는 그 옆에 소중한 용액이 든플라스틱 생수병을 들고 초조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헬렌 씨가 물었다. "밴스가 어떻게 하려나? 도와주겠다는 건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말해 줄 수는 있었잖아."
- P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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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교류 모임이 우리 사이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어도조시는 나에게 전과 다를 바 없이 밝고 다정하게 대했다. 나는 조시가 교류 모임 이야기를 꺼내기를 기다렸으나 그런 일은 없었다.
말했듯이 나에게는 무척 유용한 교훈을 준 일이었다. 나는 조시에게 ‘달라지는 면이 있다는 것, 내가 그것에 적응할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런특성이 조시에게만 있는 게 아님도 알게 되었다. 매장 쇼윈도에 디스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기 위한 면을 마련해 놓으려 한다는 것,  - P130

교류 모임이 있고 3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조시의 자세와 숨소리를 보고 조시가 평소처럼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나는 비상 버튼을 눌렀고 어머니가 바로 올라왔다. 어머니는 라이언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뒤에 가정부 멜라니아가 다시 라이언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서두르라고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라이언 박사가 도착해서 조시를 조심스레 진찰하고는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안심했고 의사가 가고 난 다음에는 한층 활기차게 움직였다.  - P131

"제가 여기까지 본 게 얼마나 주제넘고 무레한 행동인지합니다. 당신이 화를 내는 것도 당연하고 제 부탁을 고려하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아주 넓은 마음이 있으니 한순간만 멈춰서 제 제안을 한번들어 봐 달라고 부탁드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당신을 기쁘게 할 무언가를 할 수 있다면요. 당신을 특별히 행복하게 만들 만한 일. 만약 제가 그런 일을 해낸다면 그때는 보답으로 조시에게 특별한 자비를 보여 주실수 있을까요? 거지 아저씨와 개에게 그랬던 것처럼?"
머릿속에 이런 단어들이 떠오르는 동안 주위에서 무언가가 뚜렷하게 달라졌다. 헛간 안은 여전히 밀도 높은 붉은빛으로 가득했으나 이제 어떤 부드러운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사방이 아직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 있긴 해도 부분 부분이 해의 마지막 빛줄기 속에서 둥둥 떠서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유리 진열대의 아랫부분이 진열대 다리 바퀴를보고 알아보았다. 천천히 떠올라 그 옆 칸 뒤쪽으로 들어가흐릿해지는 것을 보았다.  - P246

헛간 안쪽이 점점 어둑해지고 있었지만 다정한 어둠이었다. 이내 부분 부분 쪼개진 것들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실내공간이 나뉘어 보이지 않았다. 나는 해가 떠나갔음을 알았고, 그래서 접는 의자에서 일어나 처음으로 맥베인 씨 헛간뒤쪽으로 걸어갔다. 거기에서 나무가 울타리처럼 죽 늘어서있는 곳까지 펼쳐진 풀밭과, 해가 그 뒤로 피곤한 듯 이제흐릿한 빛을 내며 땅으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하늘이밤으로 물들며 별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해가 쉬러 내려가면서 나를 향해 다정하게 미소 짓는 걸 느꼈다.
마음에 고마움과 존경이 솟아서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해의 마지막 빛이 땅 밑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 P247

"나 죽고 싶지 않아, 엄마, 죽기 싫어."
"괜찮아, 괜찮아." 어머니 목소리는 아까 내 목소리만 큼작았다.
"죽기 싫어, 엄마
"알아, 할아, 괜찮아."
나는 조용히 뒤로 물러서 문으로 나가 어두운 복도로 갔다. 난간 옆에 서서 천장과 아래쪽 현관에 생긴 기이한 밤의무늬를 보면서 방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머릿속에서 곰곰이되새겨 보았다.
잠시 뒤에 어머니가 조용히 방에서 나와 내 쪽은 쳐다보지 않고 자기 방으로 가는 짧은 복도의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조시의 방문 안쪽은 조용했다. 내가 침실로 돌아가 보니이불과 침대가 단정히 정돈되어 있고 조시는 다시 새근새근숨을 쉬며 자고 있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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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사와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우리는매장 중앙부 잡지 테이블 쪽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도 창문이 절반 넘게 보였다. 그래서 바깥세상을 볼 수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무직 노동자, 택시, 조깅하는 사람,
관광객, 거지 아저씨와 개, RPO 빌딩 아랫부분이 보였다. 우리가 좀 적응이 된 다음에는 매니저가 매장 앞쪽 쇼윈도 바로 뒤까지 가도록 허락해 줘서 RPO 빌딩이 얼마나 높은지보았다. 딱 적당한 시각에 그 자리에 가면 해가 우리 빌딩이있는 쪽에서 RPO 빌딩이 있는 쪽으로 넘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 P11

렉스는 손님들이 나가기 전까지 계속 웃음을 짓고 있었고 손님이 떠난 뒤에도 슬픈 기색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렉스가 했던 농담이 떠올랐고, 문득 해의 자양분을우리가 얼마나 많이 받을 수 있느냐 하는 생각에 렉스가 전부터 골몰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는 에이에프가 렉스만이 아니었으리라는 걸 안다. 사실 그건 공식적으로는 문제조차 아니었다. 우리 모두 실내 어디에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사양을갖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몇 시간있다 보면 피곤한 느낌이 들거나 뭔가 문제가 생긴 건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했다. 자신에게 고유한 어떤 문제가 있는데 그게 알려지면 영영 집을 찾지 못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는 것이다.
- P17

내가 쇼윈도에 가고 싶어 한 데는 햇빛이나 선택받을 가능성과 무관한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아야겠다. 대부분의 에이에프나 로사와 다르게 나는 늘바깥세상을 아주 세세하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셔터가 올라가고, 바깥쪽 인도와 나 사이에 유리 한 장밖에 없어서지금까지는 가장자리나 귀퉁이밖에 못 봤던 수없이 많은 것들을 가까이에서 전체적으로 볼 수 있게 되자, 나는 순간 너무 들떠서 해와 해의 인자함조차 잊을 정도였다.
RPO 빌딩이 벽돌로 뒤덮여 있으며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흰색이 아니라 연노란색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높고(22층이었다.) 창문 아래마다 창턱이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 P19

그런데 그때 틈이 더 벌어져서 아이가 실은 에이에프와 같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년 메이에프였는데 세 걸음 뒤에서 아이를 따라가고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나는 소년 에이에프가 우연히 뒤처진 게 아님을 알았다. 아이가 늘 이런 식으로걸으라고, 자기가 앞에 갈 테니 몇 걸흠 뒤에 따라오라고 했고 소년 에이에프는 지시를 받아들인 거였다. 시나가는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면 소년 에이에프가 사랑받지 못한다.
는 걸 알 텐데도, 나는 소년 에이에프의 걸음걸이에서 고달픔을 느낄 수 있었다. 집을 찾았는데 나의 아이가 나를 원치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까 궁금했다. 이 둘을 보기전에는 에이에프가 자기를 멸시하고 싫어하는 아이와 같이살아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그때 앞쪽 택시가 횡단보도 앞에서 속도를 늦추고 뒤쪽 택시가 바짝 붙어 서는 바람에 더는 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횡단보도를 건너오지 않을까 싶어 계속 지켜보았는데, 횡단보도 위 인파 속에는 없었고 건너편 인도는 택시들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 P33

"클라라는 B2예요.. 4세대에 속하죠. 지금까지 나온 최고1의 버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B3가 아니라서."
"B3 모델의 혁신은 성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 성향의 아이에게는 최고급형 B2가 가장 적합한 짝이라고 느끼는 고객도 많습니다."
"그렇군요.."
"엄마, 나는 클라라가 좋아요. 다른 애 말고요."
"기다려 봐, 조시. 어머니는 매니저에게 물었다. "아티피셜프렌드(Artificial Friend, AF)는 하나하나 다 다르다죠?"
"그렇습니다. 특히 이 수준에 다다르면 개성이 확연합니다."
- P69

조시의 이 말에 교류 모임 동안 여러 상황에서 조시의 손 모양이 떠올랐다. 환영하는 손, 제안하는 손, 긴장한 손, 그리고 조시의 얼굴, 누군가가 왜 B를 고르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조시가 웃으며 말하던 목소리도 떠올랐다. 이제 그럴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데." 그러자 매니저가 한말이 생각났다. 아이들이 창가로 와서 약속을 하고는 다시오지 않거나 심지어는 다시 왔는데 다른 에이에프를 데려간다던 말, 나는 느리게 이동하는 택시 사이 틈으로 본 소년에이에프를 생각했다. RPO 빌딩 쪽 인도에서 아이보다 세걸음 뒤에서 풀이 죽은 모습으로 따라가던 모습, 조시와 나도 그런 식으로 걷게 될지 궁금했다.
"아마 이제 너도 알겠지." 해의 무늬가 드리워 있는데도 릭? HF "이 무리로부터 조시를 구해야 한다는 거."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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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뒷 표지에서>


강윤희가 백아영의 몸의 변화를 안 건 백아영이 가슴이 아프다.
고 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백아영의 가슴에 멍울이 잡혔다. 가슴에 멍울이 생겼다는 건 이 년 이내에 생리가 시작될 수도 있다.
는 얘기였다. 백아영의 두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아이 혼자 머리를 어설프게 감아서가 아니었다. 강윤희가 몇 번씩 씻기고 헹구어줘도 백아영의 두피에 기름이 끼면서 그동안 나지 않던 냄새가 났다. 멍울도 두피 냄새도 모두 십대 성장기 아이들한테서 나타나는 변화들이었다. 겨우 여덟 살인 아이한테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 P105

소아내분비과 전문의는 백아영의 황체형성호르몬 수치가 높기때문에 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사주 간격으로 맞아야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성조숙증 확진 판정이었다. 강윤희는 인터넷에 떠도는병의 원인과 치료 부작용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였다. "그럼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물었지만 의사도 이런 사태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윤희와 백은호가 그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성호르몬 억제주사를 맞는 아이들이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를 함께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장이 너무 빨라 억제제를 투여하면서, 억제제 때문에성장이 늦을까 다시 성장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선택 사항이시고, 의료보험 안 되세요." 성장 치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간호사는 서둘러 다음 환자를 불렀다. 간호사도 의사도 너무 바빠 보였다. 접수와 대기, 진료, 수납을 위해 빠르게 돌아가는 소아내분비과 앞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같았다.
- P106

그러나 강윤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은 자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피임을 원하는지 백은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백아영이 성조숙증 확진을 받았을 때도, 틱 증상이 생겼을 때도 아무도 자신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윤희는생각했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것 같았다.
강윤희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이 가슴골로들어와도 몸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고 앞 동의불빛도 거의 꺼진 밤이 되면 강윤희는 술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한참씩 찬바람을 쐬었다. 그러고 있으면 백아영의 문제에서도 백은호와의 관계에서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몸을 쓰는 데에만 열중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자신의 성격이나직업이나 가치관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강윤희라는 여자의 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남자, 강윤희는 그런 남자와의 원 없는 섹스를꿈꾸었다. 그 남자는 백은호만은 아닌 어떤 남자였고, 강윤희에게현실적인 피임의 문제는 오직 백은호하고만 관련이 있었으므로피임을 안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그런 남자였다.  - P115

하지만 강윤희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있다. 엄마는 어떻게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인지 강윤희는궁금했다. 어떤 믿음이 열한 살 딸과 스물세 살 시동생 둘만 남겨놓고 여행을 갈 수 있게 했던 것인지, 강윤희는 살아생전에 그런얘기들을 엄마와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백아영을 임신했을 때 빼고는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아왔다는 걸 백은호조차 알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강윤희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정신과의사밖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강윤희는 친정엄마가 말한 대로 밀가루를 수제비 반죽보다 약간 되게 반죽해 비닐에 싸두고 신김치를 썰었다. 쫑쫑 썰라고 했기 때문에 쫑쫑 썰었다. 두부를 힘주어 짜고, 숙주나물을 데치고, 파와 마늘을 다져 넣어 소를 만들었다. 강윤희는 반죽해놓은밀가루를 치대고 길게 말아서 피 하나 크기만큼씩 잘라놓았다. 교자상을 펴고 밀대를 꺼내놓자 백아영과 강민서가 달려들었다. 강민서는 여러 번 해보았는지 밀대를 쓱쓱 움직여 만두피를 보름달처럼 만들어놓았다. 백아영은 자기도 해보겠다며 밀대를 밀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지 끙끙댔다. 손목을 어떻게 돌리고 어느쪽으로 얼마만큼 힘을 줘야 하는지 강민서가 다시 시범을 보였다.
강민서의 손이 전날보다 많이 부어 있었다. 만두소를 넣은 양푼에숟가락 세 개를 꽂고 그들은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P121

"다 내 죄야…..."
강중식은 그렇게 말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벤지 끝에 걸터앉은 늙은 강중식이 몸을 공벌레처럼 만 채 울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때 내가 너한테."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윤희야."
"그래도 나는"
강중식이 강윤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가락밖에는 안 넣었다."
그러면서 강중식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듯이.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면 강민서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듯이. 최악까지 가진 않았는데 이런 형벌은 억울하다는 듯이. 그러나 강윤희가 놀란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강중식이아직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쁜 꿈을 꾼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몸의 증상을 빼면 그만큼 그일은 현실감이 없었다.  - P125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는 한파 특보는 오 일 만에 해세됐다. 주말이 지나고 백아영은 강윤희보다 일주일 먼저 개학을 했다. 백아영을 학교에 보내고 빈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주사위가굴러가는 소리, 색종이를 접었다 펴는 소리, 강아지와 트리케라톱스와 소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희의 친정에 있는앨범 속에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 있었다. 강윤희는 그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사진이었다. 소년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서 쩔쩔매고 있었다. 아기가 흘러내릴까봐 양팔에 힘을 주어 뒤를 받치고, 그 와중에도 등에 매달린 아기를 보려고 고개와 눈동자를 뒤쪽으로 한껏 돌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아기를 받으려고 소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아기 엄마가 보였고, 환호를 하는지 말리는지 모를 손들이 보였다.  - P126

야, 그러다 떨어지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솟아 있던 돌들이 소리 없이 자리를 낸다. 그 자리로 곳곳의 모래들이 모여든다. 물고기들은 숨을 죽이고 바람도 움직임을 멈춘다. 은석이는계곡이 만들어준 자리 위로 첨벙, 떨어진다. 계곡물에 다만 옷이무거워졌을 뿐이다. 은석이는 개헤엄으로 몸을 움직여 물 밖으로나온다. 은석이는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는다. 은석이는 윗니 하나, 아랫니 두 개가 빠진 채로 유치원 졸업사진을 찍는다. 은석이는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 발을 삔다. 은석이는 중학교 때 체육복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다. 은석이는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 되고, 은석이는 군대에 가서 대대장 당번병을 한다. 은석이는 대학고 3학년 때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다. 은석이는 어느 회사에 들어가 설비 엔지니어가 된다.  - P214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햇빛의 양을 보고 유정은 오후 네시쯤 됐겠구나 생각했고, 휴대폰을 보자 정말 네시였다. 어떤 감각들은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 이렇게 불쑥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미산의 산을 보며 오후 전체를 보내는 게 열두 살 이후로처음인데도 유정은 산등성이의 빛만 보고도 시간을 알아맞히는것이다. 이제 저 산에 얼마나 빨리 저녁이 오는지, 얼마나 빨리 땅이 그늘지고 얼마나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지, 매캐하고 메마른공기가 어떻게 초겨울 대기를 채우며 어둠을 몰고 오는지 유정은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이맘때 그 산문을 발표한 이후로 유정은 재상이 삼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수상 축하 전화였다.
잘했다고, 장하다고, 재상이 삼촌이 말했다. 유정은 감사하다고답했다.
- P246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자신의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기 이전,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P247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삼십 년이나 지난 일 따위 이제 자신은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타격이 온다 해도 유정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근력이 이제는 있다고 생각했다. 피해 사실을 말한 뒤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거라고는, 이 경우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P248

그때 유정이 붙는 생각은 하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킬 수없다는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유정은 더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걸 받아들여야 했다.
- P258

유정에게 미산은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그리운 곳이었다. 그곳의 많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지만 유정은 여전히 그곳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다. 이맘때의 마른 깻단 냄새가. 이맘때의 생무 냄새가, 새 공책 냄새가, 발을 씻던 따뜻한 물이, 어떻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유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서서 입김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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