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도 말할 수가 없는 마음,
너무 사랑해서 말할 수가 없고, 사랑하지 않아서 말할 수 없고, 가까워서 말할 수 없고, 멀어서 말할 수 없고, 말하고 나면 별게 아닌 게 되어버리는 얘기들.˝
<뒷 표지에서>

강윤희가 백아영의 몸의 변화를 안 건 백아영이 가슴이 아프다. 고 한 지 한 달이 지나서였다. 백아영의 가슴에 멍울이 잡혔다. 가슴에 멍울이 생겼다는 건 이 년 이내에 생리가 시작될 수도 있다. 는 얘기였다. 백아영의 두피에서 냄새가 나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부터였다. 아이 혼자 머리를 어설프게 감아서가 아니었다. 강윤희가 몇 번씩 씻기고 헹구어줘도 백아영의 두피에 기름이 끼면서 그동안 나지 않던 냄새가 났다. 멍울도 두피 냄새도 모두 십대 성장기 아이들한테서 나타나는 변화들이었다. 겨우 여덟 살인 아이한테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 P105
소아내분비과 전문의는 백아영의 황체형성호르몬 수치가 높기때문에 성호르몬 억제 주사를 사주 간격으로 맞아야 된다는 진단을 내렸다. 성조숙증 확진 판정이었다. 강윤희는 인터넷에 떠도는병의 원인과 치료 부작용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지만 되돌아온 답은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였다. "그럼 그럴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물었지만 의사도 이런 사태의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강윤희와 백은호가 그날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성호르몬 억제주사를 맞는 아이들이 성장호르몬 주사 치료를 함께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성장이 너무 빨라 억제제를 투여하면서, 억제제 때문에성장이 늦을까 다시 성장 치료를 하는 것이었다. "선택 사항이시고, 의료보험 안 되세요." 성장 치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간호사는 서둘러 다음 환자를 불렀다. 간호사도 의사도 너무 바빠 보였다. 접수와 대기, 진료, 수납을 위해 빠르게 돌아가는 소아내분비과 앞은 마치 컨베이어 벨트 같았다. - P106
그러나 강윤희가 가장 외로운 순간은 자신이 왜 그토록 완전한피임을 원하는지 백은호에게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였다. 백아영이 성조숙증 확진을 받았을 때도, 틱 증상이 생겼을 때도 아무도 자신만큼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강윤희는생각했다. 강윤희는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세상 한가운데서 혼자서만 노를 젓고 혼자서만 책임지며 혼자서만 비난받는 것 같았다. 강윤희는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겨울바람이 가슴골로들어와도 몸은 시원해지지 않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들고 앞 동의불빛도 거의 꺼진 밤이 되면 강윤희는 술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한참씩 찬바람을 쐬었다. 그러고 있으면 백아영의 문제에서도 백은호와의 관계에서도 도망치고 싶어졌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몸을 쓰는 데에만 열중하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다. 자신의 성격이나직업이나 가치관 같은 것을 따지지 않고 강윤희라는 여자의 몸 자체에 관심이 있는 남자, 강윤희는 그런 남자와의 원 없는 섹스를꿈꾸었다. 그 남자는 백은호만은 아닌 어떤 남자였고, 강윤희에게현실적인 피임의 문제는 오직 백은호하고만 관련이 있었으므로피임을 안 해도 상관없을 것만 같은 그런 남자였다. - P115
하지만 강윤희가 정말로 묻고 싶은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있다. 엄마는 어떻게 세상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인지 강윤희는궁금했다. 어떤 믿음이 열한 살 딸과 스물세 살 시동생 둘만 남겨놓고 여행을 갈 수 있게 했던 것인지, 강윤희는 살아생전에 그런얘기들을 엄마와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생각했다.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고 백아영을 임신했을 때 빼고는 소염진통제를 달고 살아왔다는 걸 백은호조차 알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강윤희의 말을 들어줄 사람은 정신과의사밖에는 없을지도 몰랐다. 강윤희는 친정엄마가 말한 대로 밀가루를 수제비 반죽보다 약간 되게 반죽해 비닐에 싸두고 신김치를 썰었다. 쫑쫑 썰라고 했기 때문에 쫑쫑 썰었다. 두부를 힘주어 짜고, 숙주나물을 데치고, 파와 마늘을 다져 넣어 소를 만들었다. 강윤희는 반죽해놓은밀가루를 치대고 길게 말아서 피 하나 크기만큼씩 잘라놓았다. 교자상을 펴고 밀대를 꺼내놓자 백아영과 강민서가 달려들었다. 강민서는 여러 번 해보았는지 밀대를 쓱쓱 움직여 만두피를 보름달처럼 만들어놓았다. 백아영은 자기도 해보겠다며 밀대를 밀었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지 끙끙댔다. 손목을 어떻게 돌리고 어느쪽으로 얼마만큼 힘을 줘야 하는지 강민서가 다시 시범을 보였다. 강민서의 손이 전날보다 많이 부어 있었다. 만두소를 넣은 양푼에숟가락 세 개를 꽂고 그들은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 P121
"다 내 죄야…..." 강중식은 그렇게 말하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벤지 끝에 걸터앉은 늙은 강중식이 몸을 공벌레처럼 만 채 울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때 내가 너한테." 강윤희는 ‘그때‘라는 말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윤희야." "그래도 나는" 강중식이 강윤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손가락밖에는 안 넣었다." 그러면서 강중식은 다시 울기 시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다는 듯이. 그 일이 없던 일이 되면 강민서의 병이 나을 수 있다는듯이. 최악까지 가진 않았는데 이런 형벌은 억울하다는 듯이. 그러나 강윤희가 놀란 것은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강중식이아직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쁜 꿈을 꾼 게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몸의 증상을 빼면 그만큼 그일은 현실감이 없었다. - P125
역대급 기록을 세웠다는 한파 특보는 오 일 만에 해세됐다. 주말이 지나고 백아영은 강윤희보다 일주일 먼저 개학을 했다. 백아영을 학교에 보내고 빈집에 혼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주사위가굴러가는 소리, 색종이를 접었다 펴는 소리, 강아지와 트리케라톱스와 소가 우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강윤희의 친정에 있는앨범 속에는 오래된 사진이 하나 있었다. 강윤희는 그 사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소년이 갓난아기를 업고 있는 사진이었다. 소년은 허리를 직각으로 꺾고서 쩔쩔매고 있었다. 아기가 흘러내릴까봐 양팔에 힘을 주어 뒤를 받치고, 그 와중에도 등에 매달린 아기를 보려고 고개와 눈동자를 뒤쪽으로 한껏 돌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아기를 받으려고 소년 옆에 바짝 붙어 있는 아기 엄마가 보였고, 환호를 하는지 말리는지 모를 손들이 보였다. - P126
야, 그러다 떨어지겠어.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칠게 솟아 있던 돌들이 소리 없이 자리를 낸다. 그 자리로 곳곳의 모래들이 모여든다. 물고기들은 숨을 죽이고 바람도 움직임을 멈춘다. 은석이는계곡이 만들어준 자리 위로 첨벙, 떨어진다. 계곡물에 다만 옷이무거워졌을 뿐이다. 은석이는 개헤엄으로 몸을 움직여 물 밖으로나온다. 은석이는 감기에 걸려 며칠을 앓는다. 은석이는 윗니 하나, 아랫니 두 개가 빠진 채로 유치원 졸업사진을 찍는다. 은석이는 초등학교 때 자전거를 타다 발을 삔다. 은석이는 중학교 때 체육복을 두 번이나 잃어버린다. 은석이는 고등학교 때 이과생이 되고, 은석이는 군대에 가서 대대장 당번병을 한다. 은석이는 대학고 3학년 때 여자친구를 처음 사귄다. 은석이는 어느 회사에 들어가 설비 엔지니어가 된다. - P214
산등성이에 걸쳐 있는 햇빛의 양을 보고 유정은 오후 네시쯤 됐겠구나 생각했고, 휴대폰을 보자 정말 네시였다. 어떤 감각들은기이할 정도로 끈질기게 잠복돼 있다. 이렇게 불쑥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미산의 산을 보며 오후 전체를 보내는 게 열두 살 이후로처음인데도 유정은 산등성이의 빛만 보고도 시간을 알아맞히는것이다. 이제 저 산에 얼마나 빨리 저녁이 오는지, 얼마나 빨리 땅이 그늘지고 얼마나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는지, 매캐하고 메마른공기가 어떻게 초겨울 대기를 채우며 어둠을 몰고 오는지 유정은잘 알고 있었다. 일 년 전 이맘때 그 산문을 발표한 이후로 유정은 재상이 삼촌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는 수상 축하 전화였다. 잘했다고, 장하다고, 재상이 삼촌이 말했다. 유정은 감사하다고답했다. - P246
유정은 이전을 생각했다. 그 산문을 쓰기 이전, 친족 성폭력 얘기를 쓴 자신의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모티프로 한 것임을 밝히기이전. 재상이 삼촌이 전화를 하면 받고 들렀다 가라고 하면 들르기 이전, 유정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족들이 그 글을 읽은 것인지, 읽었다면 누가 읽고 누가 못 읽은 것인지, 그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글로 써서 발표까지 해놓고 왜 자신은 가족들한테 정식으로 얘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직접 말은 못하지만 이렇게 썼으니 알아서 알아채주길바라는 것인지, 계속 모르길 바라는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 P247
분명한 것은 가족들은 모두가 이전의 상태에 있고 유정 혼자 이후의 상태로 와 있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쓴 뒤 유정은 더이상 이전처럼 그러려니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유정 자신을 제외한 모든상황은 이전 그대로였다. 그 불일치가 자신을 어떻게 휘저을지 유정은 그 산문을 송고할 때까지도 알지 못했다. 유정은 그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일단락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삼십 년이나 지난 일 따위 이제 자신은 치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고 작은 타격이 온다 해도 유정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럴 근력이 이제는 있다고 생각했다. 피해 사실을 말한 뒤 새로운 상황이 시작될 거라고는, 이 경우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P248
그때 유정이 붙는 생각은 하나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는 타인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스스로를 지킬 수없다는 것이었다. 삼십 년 전의 시간들도, 일 년 전부터 시작된 새로운 상황도 유정은 더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유정은 받아들여야 했다. 그동안 전전해온 육아 우울증과 부모 치료와 부부 상담과 만성적인 정신질환들이 아니라 어려서 받은 성학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마주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걸 받아들여야 했다. - P258
유정에게 미산은 너무도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그리운 곳이었다. 그곳의 많은 것을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애써왔지만 유정은 여전히 그곳의 많은 것들이 그리웠다. 이맘때의 마른 깻단 냄새가. 이맘때의 생무 냄새가, 새 공책 냄새가, 발을 씻던 따뜻한 물이, 어떻게 그리울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유정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서서 입김인지 소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 P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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