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스랑 씨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종이띠에 글씨를 쓰라 간밤을 새웠다. 동틀 무렵, 이른 아침의 오스스한 전율 속에서2000개를 채웠으니 6프랑을 번 셈이었다. 몇번이나 그는 버릇대로고개를 들고 혹시 옆방에서 사뛰르냉의 기척이 나는지 들어보려고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베르뜨 생각을 하니 일해야겠다는 새로운 열의가 샘솟았다. 가엾은 것, 새하얀 물결무늬 천으로 웨딩드레스를 해 입고 싶을 텐데. 어쨌든 6프랑이면 그 애가 들 신부 꽃다에 다만 꽃 몇송이라도 보탤 수 있을 테지.
-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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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로 주점>이후 에밀졸라는 처음이다. <패주>도 기다리고 있으니 이 작가에 한동안 빠져있을 듯 싶다.


이 응접실의 광적인 열기가, 훌륭한 사위를 얻겠다는 맹렬한 욕심이 천식을 앓는 듯한 피아노 소리를 타고 이 중산층 여인네들을 엄습하고 있었다. 처녀들은 몹시 지쳐 몸가짐을 똑바로 해야된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채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졸고 있었다. 처녀들을 우습게 보는 옥따브는 기혼인 발레리에게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검은 새틴으로 장식한 희한한 노란색 비단 드레스를입은 그 여자는 단연코 못생겼는데, 그럼에도 왠지 그는 마음이 끌리고 조바심이 나서 그녀를 자꾸만 돌아보곤 하였다. 한편 귀에 거슬리는 음악에 신경이 곤두선 그녀는 멍한 눈빛으로 아픈 여자 특유의 야릇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 P75

"내 말을 믿으실지 모르지만, 젊은 양반, 뷔욤 씨가 말했다. 내딸애는 열여덟살이 넘도록 소설 한편 읽지 않았어요. 안 그러냐, 마리"
"맞아요. 아빠."
‘내건, 그가 말을 이었다. "멋지게 제본된 조르주 상드의 소설이 한권 있는데, 쟤 엄마는 걱정을 했지만 결혼을 몇달 앞두고는『앙드레』를 읽어도 좋다고 허락하기로 난 마음먹었죠. 그 작품은위험하지 않으면서도 상상이 풍부해서 마음을 고상하게 만들어주지요. 난 말이오. 자유 교육에 찬성입니다. 문학은 분명히 가르칠만한 이유가 있어요. 그 책을 읽혔더니 재한테 놀라운 효과가 있었죠. 글쎄 밤에 자면서 울더라니까요.. 작품의 정수를 이해하는 데는순수한 상상력만한 게 없다는 증거지 뭐겠소."
"그 소설 너무 아름다워요!" 마리가 두 눈을 반짝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삐숑이 "결혼 전에는 소설 금지, 결혼 후엔 소설 전면 허용"이라는 논리를 내세우자 뷔욤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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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기에 내 모든 인생을, 내 모든 꿈을 길고 있다는 것,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완벽이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라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일곱번째공은 언제나 나의 노력을 벗어났다. 걸작은 도달할 수 없는 채 영원히 잠재 상태로 남아 있었고, 영원히 예감되었으며, 그러나 항상 능력 밖에 있었다. 나는 내 모든 의지를 다 기울였고, 내 모든 유연성과 내 모든 민첩성을 다 동원하였다. 공중에 던져진 공들은 정확하게 연달아 날아갔다. 그러나 일곱번째 공을 던지자마자 구성 전체가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체념도 포기도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망연히 거기에 서 있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시작하였다. 그러나 마지막 공에는 영원히 도달할 수 없었다. 결코, 결코, 내 손은 그것을 잡는 데 이르지 못했다. 나는 평생을 노력하였다.  - P133

이렇다 할 문학적 영향을 받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는 유머라는 것을 발견해내었다. 현실이 우리를 찍어 넘어뜨리는 바로 그 순간에도 현실에서 뇌관을 제거해버릴 수 있는 완전히 만족스럽고 능란한 방법 말이다. 유머는 살아오는 동안 내내 나의 우정어린 동료였다. 진정으로 적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순간들.
그 순간들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유머 덕분이었다. 누구도내게서 그 무기를 떼어놓을 수 없었다. 또한 나는 기꺼이, 그 무기가내 자신을 향하게 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나나 자아를 통해 그 유머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조건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유머는 존엄성의 선언이요. 자기에게 닥친 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의 확인이다.
완전히 유머를 잃은 내 친구들 중의 어떤 이들은 나의 글, 나의 말속에서 내가 이 중요한 무기로 하여금 내 자신을 향하게 하는 것을보고 슬퍼한다. 유식한 그들은 마조히즘과 자기 혐오에 대하여 말하며, 나아가서는 내가 가까운 사람을 이 해방 작업에 끌어들이기라도하면, 노출증과 상스러움에 대해 말한다. 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 사실인즉, 나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P165

이렇게 하여 나는 어머니가 이 년 동안 내게 숨겨왔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당뇨병 환자였고, 매일 아침, 일과를 시작하기전에 인슐린 주사를 맞았던 것이다.
비참한 공포가 나를 사로잡았다. 잿빛 얼굴, 약간 옆으로 기울어진 머리, 감긴 눈, 고통스럽게 가슴 위에 놓인 그 손에 대한 기억은그때부터 한시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내게 기대하고 있는것을 이루어내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 정의를 보지도 못한 채, 무게와 척도의 인간적 법칙을 하늘에 투영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어머니가 지상을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에겐 양식에의,
양풍에의, 순리에의 도전이요, 일종의 형이상학적 강도 짓이요,  - P179

서둘러야겠다는 것을, 어서 빨리 불후의 명작을 써야겠다는 것을느꼈다. 나를 전무후무한 최연소 톨스토이로 만들어, 즉시 어머니의고생을 보상해주고, 어머니 일생에 왕관을 가져다줄 수 있게 할 걸작을.
나는 사력을 다해 작품에 매달렸다.
어머니의 동의를 받아, 나는 학교를 잠시 쉬고, 완전히 내 방에틀어박혀 승부에 매진하였다. 나는 내 계산에 따라 <전쟁과 평화>와맞먹는 양인 삼천 장의 백지를 앞에 놓았고, 어머니는 옛날에 발자크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옷을 본떠 아주 헐렁한 실내복을 만들어주었다. 하루 다섯 번씩 어머니는 살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와 음식 접시를 테이블 위에 놓아 두고는 발끝으로 걸어나갔다. 그때 나는 프랑수아 메르몽이라는 가명으로 글을 썼다. 그러나 내 작품들이 편집자들에 의해 규칙적으로 반송되었으므로 우리는 그 가명이 나쁘다는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다음 책은 루시앙 브륄라르라는 이름으로 썼다. 그 가명 역시 편집자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당시N.R.F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던 높으신 양반들 중 한 분께서 다음과같은 말과 더불어 내게 원고를 돌려주었던 것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정부를 하나 만들고, 십 년 후에 다시 오시오. 내가 파리에서 배가 고파 죽어가고 있던 시기였다. 정말 십 년 뒤인 1945년 내가 다시 갔을 때, 불행히도 그는 이미 거기에 없었다. 누군가가 벌써 총살해버렸던 것이다.
- P180

그리고 그 갈망은 마침내, 그리고 처음으로 나를 내가 써야 할 작품의 발치에 던져놓았던 것이다. 그 갈망이 아들로서의 나의 애정에 그 고통스런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점점 자라고 커지면서 나의 전 존재를 포박하였다. 마침내 문학적 창조가 내게, 그것이 진정성을 갖는 위대한 순간이면 항상 그러한 바, 즉 견딜 수 없는 것에서 벗어나기 위한 허구요. 살아 남기 위해 영혼을 회복시키는 방법이 될 때까지 .
눈을 감고 옆으로 기울인 그 잿빛 얼굴, 가슴 위에 얹은 그 손을보았을 때, 처음으로, 삶이란 신용할 만한 유혹인가 하는 의문이 불현듯 떠올랐었다. 그 질문의 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아마도 나의생존 본능이 불러준 답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열에 들뜬 듯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진실‘이라는 제목의 단편을 썼다. 그것은 지금도 내게 프로메테우스에 대한 진실로 남아 있다.
- P181

그 단편소설로 나는 천프랑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그야말로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그 이전에 한 번도 그런 큰 액수의 돈을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내가 잘 알던 누구처럼 곧장 극단까지 가버려서는,죽는 날까지 돈의 필요에서 해방된 것처럼 느꼈다. 내가 처음으로한 일은 블라자 식당으로 가서 두 개의 양배추 절임과 커다란 비프스테이크를 음미한 것이었다. 나는 항상 대식가였으며, 내가 자신의가치를 하락시킨 정도에 따라 더욱더 많이 먹는다. 나는 거리를 향해 창이 난 육 층 방을 하나 얻어 어머니에게 매우 느긋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나는 내가 다른 여러 개의 작품 게재와 더불어 『그랭구아르와 영구 계약을 맺었으며 돈이 필요하거든 내게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하였다. 난 어머니에게 소포로 커다란 향수 한 병과 꽃다
발을 부쳤다. 나는 시가 한 상자와 운동복을 샀다. 시가는 심장을 아프게 하였지만, 잘살기로 결심한 나는 끝까지 피웠다.  - P223

나는 마침내 프랑스도 천 가지 얼굴로 만들어졌고, 아름다운 얼굴도 미운 얼굴도 있고, 고상한 얼굴도 흉측한 얼굴도 있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나와 가장 닮은 것 같은 얼굴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정치적 동물이 돼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노선을 정하고, 내게 행해지는 충성 서약과 성의 약속을 가려 선택하고, 더 이상 깃발에 눈이 어두워지게 하지 않으며, 그것을 들고 있는 자의 얼굴을 분간해내려 애썼다.
어머니가 남아 있었다.
나는 낙제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릴 결심이 서지 않았다. 어머니는 얼굴에 발길질을 당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고 아무리 되씹어 생각해도 소용없었다. 어쨌거나 그 발길질을 어떻게 요령 있게 하느냐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P262

나는 느리게 흐르는 나일을 굽어보며 내 발코니에서 이 편지를 백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그 편지 속에는 거의 절망한 것 같은 억양이, 전에 없던 장중함과 어떤 억제가 있는데다, 처음으로 어머니는프랑스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가슴이 죄어들었다. 무엇인가가 잘 되어가고 있지 않다. 무엇인가 말하지 않는 것이 이 편지 안에 있다. 그리고 또 이제 점점 더 어머니의 편지 속에서 강조되며 반복되는 약간 이상스러운 격려도 있었다. 그것은 약간 화가 나게 만들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전혀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 아닌가 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머니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이었고, 제시간에 어머니에게 도착하고자 하는 희망은 하루 해가 뜰 때마다 점점 커져만 갔다.
- P393

나는 비행 점퍼와 털 장화를 신고 침대 위에 앉아 새벽이 될 때까지 썼다. 손가락들이 곱았다. 입김은 얼어붙은 대기 중에 수증기 자국을 남겼다. 내 소설의 배경인 폴란드의 눈에 덮인 평원의 분위기를 재구성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새벽 서너 시경에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자전거에 걸터앉아 하사관 식당으로 가서 차 한잔을 마셨다. 그런 다음 내 비행기에 올라 잿빛 여명 속에 굳세게 방어되고 있는 목표물들과 싸우러 떠나는 것이었다. 거의 매일, 돌아올 땐 동료 하나가 빠지고 없었다.
한번은 샤를르루아를 향해 가던 중 연안을 넘다 한꺼번에 비행기 일곱 대를 잃고 말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문학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일이었다. 사실 난 그것을 불평하지 않았다. 나에겐 그 모든 것이 같은 투쟁의, 같은 작품의 일부분이었으므로, 동료들이 잠들어 있는 밤이면 나는 또다시 글쓰기에 몰두하였다. 프티 비행사가 격추되었을때 딱 한 번을 빼고는 한 번도 막사 안에 혼자 있어본 적이 없었다.

- P395

그리하여 어머니가 죽은 지 삼 년이 넘도록 나는 계속 내가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힘과 용기를 어머니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탯줄은 계속 기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끝났다. 빅서 해안은 텅 빈 채 백 킬로미터까지나 뻗어 있다. 그렇지만 가끔씩 고개를 들어보면 내 앞에 있는 두 바위 중 하나에 앉아 있는 물개들과 다른 하나에 앉은 수천 마리의 가마우지, 갈매기,
펠리컨들이 보이며, 또 때로 바다 가운데를 지나가는 고래들의 물기도 보인다. 그리고 이렇게 모래 위에 한두 시간을 꼼짝 않고 있으면 독수리 한 마리가 내 위를 느리게 맴돌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미 나의 추락이 다 끝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 P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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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혜윤의 <앞으로 올 사랑>은 두 번의 리뷰를 쓰긴 했는데 완전하게 마무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책이다. 하여 다시 소환되었다. 그 이후로도 <슬픈 세상의 기쁜 말>도 읽고서 리뷰는 쓰다 말고 미뤄 둔 상태다. 곧 마치긴 하겠지만. 지난 21년과 22년에 알라딘에서 구입한 책으로 한정된 100자 평 쓰기는 세 줄 문장으로 끝난다. 사실 저것도 140자로 한도 초과다. 앞으로도 20주, 마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책의 목록은 40여권, 안 산다 안 사다 하면서도 결국은 사게 되는.
   <앞으로 올 사랑>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이어서 쓴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다.
   ˝나는 이 디스토피아 시대에 유토피아적 열정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나의 사랑 이야기 안에는 우리의 실패한 사랑, 고독, 피로한 밤, 사랑을 나누는 밤, 깨끗한 사랑, 현실을 구한 꿈같은 사랑, 파괴와 창조가 함께 한 사랑, 우리가 한 번도 마음을 주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사랑, 아주 멀리 가는 헌신적이고 영원한 사랑, 이 모든 것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의 어딘가에서는 향기로운 바람이 불고 초록색 빛이 반짝이고 동물의 눈동자와 긴 꼬리가 얼핏 보일 것이다.˝
   --작가 서문 중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한 번도 마음을 주지 않았고 그럴 필요조차 느끼지 않았던 존재에 대한 사랑‘에 뜨끔했다. 그런 무관심과 몰이해와 무책임들이 만들어내는 왜곡된 관계들……. 또한 그 연관성에서 모른 척한 어른들의 무책임이 결국은 오늘의 환경 파괴를 가져온 것은 아닌지. 덜 손해 보려고 움츠리고, 내 것을 지키려고 악귀처럼 움켜쥔 손들로 세상은 점점 쪼개지고 좁아지고 있다.


   확진 4일차, 격리 5일차. 책이나 실컷 읽어야지 했는데 생각보다 심하게 앓았다. 어제 오후에야 컨디션이 조금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춥고, 무겁고, 멍한 머리와 쑤시는 삭신을 끌고 정해진 시간에 사전 투표를 하러 사브작사브작 걸어갔는데 찬바람 휭휭한 바깥에 이십여 분을 세워두었다. 사상 초유의 사태에 우왕좌왕 왔다 갔다만 하는 공무원들한테 뭐라고 말도 못 하겠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줄 선 앞사람들을 제치고 호명되어 투표지를 들고 서서 10여 분, (그 사이에 앞에 서 있던 청년이 항의하고, 줄은 한없이 길어졌는데 뒤쪽에서 소란이 일어 돌아보니 어떤 어르신이 법을 안 지키니 코로나에 걸린 걸라고 호통을 치고 계신다. 경직된 순간에도 웃음을 주는 어른들이 계셔 썩소를 짓는다.) 겨우 기표를 해서 봉투에 담아서 투표함이 아닌 그 공무원의 손에 봉투를 건넸다. (투표함에 넣고 싶어도 투표함은 없었다. 허~! 이건 무슨 상황인가. 그러나 그는 너무 바빠 보여서 망설일 수 없었다. 일을 하다 보면 시행착오야 있는 법이지만 이런 국가적인 중차대한 행사를, 선명하고 공정해야 하는 행사를 진행하려면 미리 시뮬레이션도 해보고 모든 상황에 대비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이해는 하지만 용납은 안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긴 줄을 헤치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부정 선거‘ 공방을 피할 수 없겠다고. 그러나 그렇게 어렵게 한 내 투표가 무효 표로 처리된다면 무척이나 억울하다. ‘안철수 법‘을 청원한 재외 국민들의 심경을 단번에 알겠다.
   내가 했던 사전 투표소만 그런 것은 아닌지 시끌시끌하다. 제발 본 투표일인 9일은 매끄럽게 진행되기를 바란다. 아, 무엇보다 산불이 진화되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우리에게 ‘앞으로 올 나라‘는 9일 이후로 알게 될 것이다.
   ˝ 보르헤스는 미래를 위해서 모든 사람이 모든 아이디어를 내는 세상을 믿었다. 희망은 모든 사람이 새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 속에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전과 같이 살기를 원치 않는 것‘, 이것이 이 시대 희망의 말이다. 우리를 둘러싼 인간 조건은 절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간 조건은 계속 가혹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의 얼굴 속에서 사랑을 보고 싶다. 이 위험한 세상 한가운데서 홀로 애쓰고 있는 사람은 늘 감동을 준다.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면서도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도 감동을 준다.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도 그렇다. 나는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p286

   ‘약간이라도 나아지려고 다시 시작하는 사람‘, ‘자신이 맡은, 해야 할 일을 해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 쓰는 사람‘ 나는 이런 것들에 속하는 사람이다.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럴 것이다. 나도 이런 것들을 사랑하면서 버티고 있겠다. 부디 버틸 힘을 가질 수 있는 결과를 기대한다.





간호사를 인터뷰하는 도중 ‘장의 매뉴얼‘ 이라는 것이사건 초기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다. ‘시신‘과 관련된 ‘장의 문제는 간호사들이 가장 힘들어하던 업무 중 하나였다.
인터뷰 두 달 뒤 나는 장의 매뉴얼을 구해 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내용의 일부분을 옮겨보겠다.
들것에 시신 백을 펼친다.
시신을 시신 백으로 옮기기 (시신 백 투명창에 얼굴이 위치하도록 주의).
시신 백 안의 방부제 팩을 오픈(방부제 팩이 없는 경우도 있음),
- P10

시신 백 밖 네임 태그에 환자 정보(이름, 생년월일, 주민등록번호, 성별, 나이) 기입,
시신 백의 외관에 소독제(물 400ml+락스 100ml)를 분무하여 소독,
시신 백의 커버를 닫은 후 소독제를 분무하여 소독.
들것에 시신 백을 싣고 건물 밖으로 이동, 소독제를 가지고 이동,
1층 건물 앞으로 이동하여 시신 백에 소독제를 분무하여 소독,

이 매뉴얼을 읽던 날 락스 냄새가 하루 종일 나를 따라다녔다. 시신과 락스는 슬픈 이야기다. 이럴 때 슬픔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그러나 슬픔으로 무엇을 하는가는 ‘자연‘과는 다른 이야기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 어떤 ‘문화‘에 사느냐에 달린 이야기다. 슬픔과 죽음을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면서 문명은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 -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한 - 가 남는다. 우리는 왜 죽음을 특별히, 특별히 슬퍼하는가? 죽음이 소중하다면 삶도 소중한 것 아닐까?
죽음과 삶을 차별할 이유가 있는가? 이미 우리가 삶을 잃고있다면 그것은 누가 애도하는가?
- P11

우리는 이런 이야기에서 미미하게나마 우리를 둘러싼관계망을 감지한다. 조금이나마 우리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그 안에서 나의 삶도 보이고, 타인의 삶도보이고, 동물의 삶도 볼 수 있게 된다. "인간과 고릴라, 말과다이커 영양과 돼지, 원숭이와 침팬지와 박쥐와 바이러스...
우리 모두가 하나" 라는 것은 상징적인 말이 아니다. 빈곤의문제가 인수공통감염병에도 영향을 미쳤고 그 빈곤이 식탁에 오르는 음식 때문이라면 슈퍼에서 음식을 한번 고를 때마다 머릿속이 꽤 복잡할 것이다. 도리가 없다. 먼저 알게된 사람들부터 음식을 고를 때마다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것이다. 프로스퍼 발로처럼 손에 든 것을 오래도록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인수공통감염병이든 기후위기는 알면 알수록 일상의 선택 하나하나에 찜찜함과 불편함이 깃든다. 그러나 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이 마음 불편해지는일이 되는 것에 희망이 있다. 뭔가를 불편하게 여기느냐 아니냐, 그것을 감수하느냐 마느냐, 전과는 다른 선택을 하느냐 마느냐가 우리의 행과 불행을 가르는 갈림길이 될 것이다. 아마존을 탐사했던 영국 작가 제이 그리피스의 말에 따르면 정글에서는 길을 잃기가 너무나 쉬운데 그것은 길이금방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글에선 길을 반복해서 걷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 P75

나는 처음에 당신을 하나의 이야기로 파악해보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숨은 질문이 있다. 당신에게는 끝까지 함께할 사람이 있는가? 끝까지 헌신할 만한 어떤것이 있는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게 있는가? 상황과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을 관계가 있는가?
이 사랑스럽지 않은 삶, 우리에게 살아갈 이유를 주는것은 우리가 사랑하는 그 무엇이다.
- P135

토비에게는 쓰는 것에 대한 열정이 있었다. 그녀는 잽이 구해다 준 노트에 그들 모두가 겪은 일을 적고 있었다. 그때 크레이커 소년 블랙 비어드가 묻는다. "상처가 뭐예요? 토비는 "상처는 네 몸에다 글쓰기를 하는 것과도 같아. 그것이너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말해줄 테니까" 라고 대답한다.
과연 이 말을 크레이커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상처가말을 해줘요? 그럼 상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말을하는 상처를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알려주세요."
‘말을 하는 상처‘가 책이다. 책은 상처들의 목소리다. 토비는 블랙 비어드에게 글자를 가르쳐준다. 블랙 비어드는 글자를 배워 살아남은 인류와 크레이크, 오릭스, 지미, 토비,
집, 그들 모두의 일을 노트에 기록하기 시작한다. 세상은 한권의 책이 되었다. 그들은 커다란 이야기 속에서 결국 만난다. 그 책은 새로운 인류의 탄생 신화였고 크레이크, 오릭스,
지미, 토미, 젭 모두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었다. 아마도우리 또한 커다란 이야기 안에서 만날 것이고, 그렇게 만난우리들의 이야기도 아주아주 커다란 한 권의 책이 될 것이고, 지구는 우리 모두가 함께 쓰는 책 중에 최고로 커다란 책이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책은 이제는 사라진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온기가 있는 다정한 곳이 되고 과거의 깊은 상처가 미래를 위해 의미를 획득하는 곳이 된다.
- P166

지금까지의 내용은 마이크 데이비스의 『조류독감』에나오는 이야기다.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야기는 이것이었다. 내가 필요로 했던, 알고 싶었던 이야기도 이것이었다.
 태국 시골 소년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많은 다른 삶이 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코로나로 숨진 백만 명 넘는 사람들 하나하나의 개인적인 죽음 앞에도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있을지아무도 모를 것이다. 몇 년이 지나면 우리들의 이야기도 약간이나마 라웽 분롯의 이야기처럼 재구성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살만 루시디가 『한밤의 아이들』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1001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전의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발현되지 못한 1001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또한 1001가지 종말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125만 명의생물학적 죽음, 125만 가능성의 죽음, 125만 이야기의 죽음을 살고 있다. 나는 내가 라웽 분롯이었으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어떤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를 수 없다는 말이 떠오른다. 이 어머니와 10대 소년의 이야기는 나의 개인적인 ‘사랑‘을 생각나게 한다. 내 가족을 향한 사람, 내가 어떻게든 살려내고 싶은 사람들을 향한 사랑.
- P185

진실은 거의 매순간 우리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실은 자신 만을 사랑하는 것도 피곤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지치는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다가 길을 잃는다. 이것이 나르키소스의 비애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환영 속에 있다. 우리는현실과 직접적으로 관계 맺는 법을 잃고 있다. 현실을 빈껍데기로 만들어버리고 그 껍데기 위에 외로이 위태롭게 떠있다. 그러나 자기애야말로 우리가 동물과 다르게 가지고있는 것이다. 동물적 생존본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가 있다는 것이 우리에겐 득도 되고 실도 될 수 있다.  - P188

내가 내 삶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는 중요한 문제다. 나는 발견되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누군가에게 발견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이 누군가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기애는 감사의 사랑을 보별 타인들이 곁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내가 좋지 않게 행동하면 슬퍼할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뜻이다. 사랑과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살면서 일어날 수있는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다.
- P189

어느 날 클루수크 마을에 불타오르는 듯한 일몰이 내려않았다. 믿을 수 없이 강렬한 일몰이었다. 이런 노을을 만드는 것은 빙모였다. 수백만 제곱킬로미터의 얼음이 수평선아래로 지는 태양을 위로 반사하며 만드는 일몰이었다. 빙모는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이다. 그 노을의 강력한 아름다움에 압도된 한 이방인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곳으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다가 그만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발밑의작은 만은 마을의 쓰레기장이었다. 수천 개의 쓰레기 봉투,
플라스틱 상자 더미, 부서진 카약, 하얀 냉장고가 절벽 너머로 두엄 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거울 밑에는 쓰레기가 살고 있었다. 키슈왁은 바라보는 사람을 밑에서부터 덮친다고 전해진다. 저 아래 깊은 곳으로부터, 키슈와의 정체는 지구 온난화로 비단처럼 얇아진 얼음이었다.  - P191

나는 정혜윤이고 오늘 나는 박쥐다. 나는 니파, 사스, 코로나 바이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5천만 년 전에 지금 이 모습이 되었다. 내가 인간에게 다가간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나에게로 왔다.
그 뒤로 많은 것이 파괴되었다. 나는 서식지에 애정이 있었다. 고향을 떠날 때마다 마지막으로 한번 돌아보지 않기란힘들었다. 하지만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내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니파 바이러스 때는 110만 마리의 돼지가 사살되었다. 사스 때는 사향고양이가 끓는 물에 던져졌다. 코로나 때는 밍크와 천산갑이 죽임을 당했다. 나는돼지와 사향고양이와 밍크와 천산갑을 통해 세상을 이해했다. 인간은 책임 전가의 왕이다. 나는 인간의 눈에는 혐오의 대상일 뿐이지만 그러나 내가 무엇에 대해 책임져야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며칠 전 새벽 나는 내 종족들의 곁을떠나왔다. 내가 사랑했던 밤꽃들의 향을 마지막으로 맡았다. 철새들이 길을 찾는 북극성을 바라보았다. 나 역시 길을 잃지 않기를 바라고 올바른 길을 가길 바란다. 나는 내본성을 거슬러 환한 대낮에 여기에 있다. 내가 하고 싶은말은 이것이다.
"나는 죽는다. 그러나 돼지와 사향고양이와 천산갑과 핑크와 그리고 다른 동물 누구도 더는 건드리지 말라!"
- P222

아름다움에 압도된다는 것은 그토록 힘이 세다. 나는 이후로 몇 번 더 열대의 바닷가로 여행을 갔다. 내게 열대 바다 여행의 의미는 점점 더 확장되었다. 향기에서 출발해 생명으로 이어졌다. 매번 나는 바다의 많은 것들과 부드럽게섞였다. 열대의 바닷가에서 책을 읽을 때, 바닷바람을 쐬며걸을 때, 해가 뜨고 지거나 바다에 별이 쏟아지는 것을 볼때, 스콜이 쏟아지면 읽던 책을 들고 맨발로 뛰어 숙소로 돌아갈 때, 소금기 묻은 머리를 감을 때, 그럴 때 삶은 참을 수없이 환했다. 내가 있던 곳들에서는 생명력이 넘쳤고 나는그것을 들이마시기만 하면 되었다. 세상엔 아직 아름다움이여기저기 분산되어 남아 있었다. 세상은 우리가 알아야 할 세부사항으로 가득했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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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올 사랑 - 디스토피아 시대의 열 가지 사랑 이야기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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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체 불가능한 작가, 정혜윤은 나에게 끊임없이 책을 사게 만들고 꾸준히 읽게 하고, 원 없이 사유하게 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라고 주문하고 부추긴다. 그것이 ‘앞으로 올 사랑‘이라고 나쁜 남자처럼 귀를 간질이면서 속삭인다. 달뜬 십 대 소녀처럼 책 속의 책들 사이의 유혹에 빠져 침 흘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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