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윤

마술적 저널리즘을 꿈꾸는 라디오 피디. 세월호 유족의 목소리를 담은 팟캐스트 <416의 목소리> 시즌1. 재난참사 가족들과 함께 만든 팟캐스트 <세상 끝의 사랑: 유족이 묻고 유족이 답하다> 등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자살률의 비밀>로 한국피디대상을받았고, 다큐멘터리 <불안>, 세월호 참사 2주기 특집다큐멘터리 <새벽 4시의 궁전>, <남겨진 이들의 선물>, <조선인 전범 75년 동안의 고독> 등의 작품들이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삶을 바꾸는 책 읽기」, 「사생활의 천재들, 쌍용차 노동자의 삶을 담은 르포르타주 「그의 슬픔과 기쁨』,「아무튼, 메모」, 「앞으로 올 사랑」, 「슬픈 세상의 기쁜 말」, 「마음 편해지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워크숍등이 있다. 기후위기시대 예술창작집단 이동시 (이야기와 동물과 시) 일원이다.

부끄럽지만 내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지난 4월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에 부딪힌 나는 3미터를 날아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부서진 치아조각들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고 땅에 앉아 있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구급차와 경찰차가 달려왔다. 꼭 크리스마스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한 구절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한 달이 지나자 나는 어렵지만 양손으로 세수를 할수 있게 되었다. 한 달 반이 지나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봄이 한창이었다. 나는 병원 정문을 나와 횡단보도를 건너 처음으로 안양천에 가봤다.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노란 나비들이 꽃 사이를 팔랑거리며 날고 있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야생의 생명력이 가슴으로 흘러들어 왔다. "너무 예뻐!" 나는 전혀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자연과 그늘 없는 관계를 맺었다. 많은 것이 그리워졌 - P5

다. 스페인 내전에서 총상을 당한 뒤 조지 오웰이 한 말이생각났다. "따지고 보면 마음에 드는 것이 많은 세상이었다. 회복되려면 슬플 정도로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앞으로 또 슬픈 일을 겪게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는 기쁨을위해 태어났다. 나는 이 상처투성이 지구를 엉뚱하게도 회복의 장소로 경험한 셈이다.
돌이켜보면 교통사고가 난 날은 겸손을 배우기 딱 좋은 날이었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또 한 번 주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를 통해 묻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경이롭게 재생할수 있다면 나를 위해 슬퍼해준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될 것이다. - P6

시간이 흐를수록 ‘반복‘이 중요한 단어가 되었다. 나는 어렵게 세수를 배웠고 어렵게 이를 닦는 것을 배웠고어렵게 샤워를 하는 것을 배웠다. 어렵게 등 지퍼를 올려원피스를 입고(이것은 아직도 힘들다) 반복적으로 재활훈련을 하고 어렵게 책상에 앉아 컴퓨터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시간도 소중했다. 밀란 쿤데라의 말 - P6

이 생각났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순간을 살고 있다는것을 알아야 인간적인 것이다."
카탈루냐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는 수십 년간 아침에 일어나면 피아노로 바흐의 푸가를 두 곡씩 연주하곤 했다. 그것은 기계적인 ‘반복‘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었다. 그는 그것은 집을 축복하는 방식이자 세계를 재발견하는 방식이고 그 일부가 되는 기쁨을 누리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파블로 카잘스의 이 말을 읽은 것은 오래전 일이지만 잊은 적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똑같은 유리컵에 찬물을 한 잔 마실 때마다, 똑같은 빨간 컵에 커피를한 잔 마실 때마다 문득문득 생각나곤 했다. 일을 할 때도책을 읽을 때도 생각이 났다. - P7

사고가 나기 전, 나는 그의 말에 영향을 받아 「삶의발명』이라는 책을 거의 완성한 상태였다. 우리에게는 유일무이한 삶, 고유한 삶, 대체 불가능한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 하는 창조의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는 개별적인 존재이면서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정과 존중을, 사랑과 우정과 의미를 원하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누군가를, 공동체를찾아 헤맨다. 나는 이것을 관계의 에너지라고 부른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이야기는 관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 P7

가 쓰던 책 「삶의 발명은 창조의 에너지와 관계의 에너지가 균형 있게 만나 기쁘게 이 세계의 일부분이 되는 존재 방식을 찾고자 하는 이야기였다.

지난 몇 년간 내 열정의 대상이 바뀌면서 관계의 범위도 확장되었다. 오로지 인간, 인간, 인간만 생각하고 있던 내가 동물과 야생을 몹시 사랑하게 되었다. 어쩌면 동물의 눈에 담긴 다른 세상을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열정은 힘이 강해서 읽는 책, 듣고 싶은 이야기, 가고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레이첼 카슨의 말 같은 상황이었다. "우리는 행복해질 거예요.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사랑스러운 것들, 해돋이와 해넘이, 만에 비치는 달빛, 음악, 좋은 책, 지빠귀의 노랫소리, 지나가는 야생 거위의 울음소리를 함께 즐길 거예요."
그런데 하필이면 내가 자연에 빠져들 때가 기후위기와 동물 대멸종 시대이기도 했다. 이 말은 매 순간 아름답고 고유한 것이 사라지는 중이라는 뜻이다. 자연은 나를 웃게도 울게도 만들었다. 그래서 삶의 발명」은 기후위기와 동물 대멸종의 시대에 기쁘게 인간이 될 방법을 찾고 지구에서의 삶을 깊고 풍요롭게 누리는 방법을 찾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일이 가능할까? - P8

삶은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과 관련된 것이고 모든 생명체는 모두 자기 나름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고 언젠가 우리는 모두 이야기 속으로 사라진다.
내 평생 가장 많이 해온 말이 있다.
"그 이야기 참 좋다."
이 말의 힘을 나는 백 퍼센트 믿는다. 이야기가 좋으면 나도 모르게 감탄하면서 마음이 환해진다. 감탄할 때현실이 달리 보였고,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란 게 분명존재한다고 느껴졌고, 사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고 더 좋아지고 내가 뭘 해야 할지도 알 것 같았다. 그때는 세상은따라 해야 할 일투성이로 보였고 세상 또한 사랑할 만한것으로 보였다. 감탄 속에 있을 때 나는 잘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어디에 마음을 둬야 할지 잘 모르겠다.
힘이 필요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다르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어."
공허할 때는 이렇게 말했다.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
지겨울 때도 그렇게 말했다. 변화가 필요할 때도 그렇게 말했다.
선택이 어려울 때는? - P9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말을 해야 할 때는?
"어떤 이야기를 살아 있게 하고 싶어?"
가장 삭막한 사이는?
"만나도 할 이야기가 없는 사이"
사랑한다는 것은?
"오로지 그 사람 이야기만 하고 싶어 하는 것"
나에게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걸 빼면 이야기가 안 되는 것"
행복할 때는?
"내가 찾고 기다리던 이야기를 만나는 것."
내가 나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 곳은?
"좋은 이야기 속."
나 자신에 대해서 아는 법은?
"적어도 내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는지 안다."(나는있을 법하지 않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최선의 나로 사는 법은?
"감탄한 이야기에 나를 결합시키는 것."
사는 동안 반드시 해내야 할 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만나고 만드는 것"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 동물로 진화한 데는 분명히 이 - P10

유가 있을 것이다. 이야기가 아니면 우리에게 일어났던일을 이해하고 나눌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좋은 이야기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이야기하는 공동체로서 좋은 이야기를 돌려줄 수 있는 것보다더 의미 있는 것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들려주는이야기는 내적 정체성의 핵심이다.
나에게 삶은 좋은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에너지로 변해 나를 내 자아 바깥으로 끌고 나오고 움직이고 살아 있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에너지는 이야기가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향을 받는 이야기, 의미를 두는 이야기가 바뀌면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고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바뀐다. 창조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미를 둘 줄 안다는 뜻이니까.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
이라는 단어만 넣으면 삶은 갑자기 도전할 가치가 있는모험으로 변한다. 이것도 삶의 발명이다. 이럴 때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더 깊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가 어렵게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게 되자 다시 꺼낸 원고가 바로 이 책 『삶의 발명이다. 무엇이 나를 만들 - P11

어왔는지 아는 사람으로서, 언제 기쁨을 느끼는지 아는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순간들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만들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사람으로서, 살고 싶은 세상이 있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고 사랑할까라는 오래된 질문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야기를 하는 존재로서, 장미는 장미로서, 새는 새로서, 고래는 고래로서, 별은 별로서 존재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모두의 회복을 바라는 사람으로서, 변화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우선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햇살과바람을 즐겼으면 한다. 모든 생명이 지금보다 더 존중받고 자부심을 느끼고 기쁨을 누렸으면 좋겠다. 모든 생명이 자신의 힘을 찾고 자기 자신이 되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나는 이 글에 에너지를 쏟아부어보려고 한다. 물론 이야기들이 변신한 에너지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동안 하나의 이미지가 계속 떠올랐다. 수년 전 어느 비 오는 날 서귀포의 호텔에 묵었던적이 있다. 새벽 네 시와 다섯 시 사이 어디쯤에 눈을 떴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해 창가에 앉아 아침이 오는 것을 지켜보기로 했다. 비가 약간 뜸해지자 서귀포 걸매생 - P12

태공원 뒷산 상공에서 뭔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검은 새 무리였다. 새들은 무리를 지어 돌고 돌면서 나선형으로 점점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새들의 선회였다. 그리고 아침이 밝았다. 그 순간 행복했다.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그 반복 속에서도 나를 조금더 앞으로 가보게 해주는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마음이 흔들릴 때도 많았지만 마음이 향하는 방향은 있었다. 어두운 날도 저 밑바닥까지 어둡지는 않았다. 내가지금부터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들은 편의상 제목을 달긴 했지만 앎, 우정, 사랑, 연결, 회복, 경이로움, 아름다움, 자부심, 기쁨과 슬픔, 희망같이 우리에게 대체 불가능한가치를 갖는 단어들이 이렇게 저렇게 섞여 있는 이야기들이다. 내가 돌려주는 이야기들이 기쁘게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는, 더 나은 존재 방식을 원하고 만들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힘이 된다면 행복할 것이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 내가 원하는 삶이다. - P13

그 대화를 나눈 지도 벌써 3년은 흘렀다. 내 친구가 바빴던 것은 그때 만난 카리푸나족 추장의 형을 리스본에 초대했기 때문이다. 카리푸나족과 아마존의 운명을 어깨에 걸머진 추장의 형은 리스본 대학에서 두 차례 강연을 하고 언론 인터뷰도 했다.
"카리푸나족의 리스본 방문은 어땠어? 사람들이 질문 많이 했어?"
내 친구는 3년 전에 나에게 한 말을 거의 똑같이 들려주었다.
"세상에 원주민이 있어서 다행이야. 숲을 지키는 것은그들이야. 그래도 리스본 사람들이 카리푸나족이란 부족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성과라면 성과야. 카리푸나족이 우리 앎의 지도, 인식의 지도 안에 들어왔어."
그러고 나서 우리는 브라질 대통령이 바뀌면 아마존의 상황이 나아질까 같은 대화들을 조금 더 나눴다. 그런데어쩐지 내 마음은 조금 다른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아까 네가 한 말 중에 앎의 지도라는 말 있잖아. 그말 네가 만들었어?"
"뭐, 그냥 지금 생각났어." - P21

"그런데 네 말을 들으니 앎의 지도가 보물섬 지도 같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앎의 지도‘라는 말이 자꾸만 궛가에 맴돌았다. 카리푸나족이 앎의 지도 안에 들어왔다고 말하던 친구의 목소리는 얼마나 힘이 넘쳤던가? 희망으로 부풀어 오른 것 같았다. 평소에 "추해지지 말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내 친구는 원주민의 삶에서 우리가 아직 모르는 아름다움을 봤을 것이다. 그래서 친구에게 그들의 삶은 중요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내 생각에 아름다움이야말로 시간을 들여서 알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인류를 멸종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없애면 된다. 우리 인류는 아름다움을 좋아하고 추함을 견디지 못한다. 아름다움은 죽음만큼 오래되고 영원한 것이다.
어쨌든 앎의 지도라는 말을 들으니 소설가 존 쿳시가 생각이 난다. 그가 자주 쓰는 문장 중에 "앎을 살아낸다"는 문장이 있다. 그에게 삶은 그냥 삶이 아니고 어떤 앎과 - P22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아침 사과가 건강에 좋다는 앎을 살아내고 양배추가 위장에 좋다는 앎을 살아낸다. 소고기를 지금처럼 먹으면 아마존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라는 앎을 살아내고 오래가는 사랑에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앎을 살아낸다. 그런데 이 ‘앎‘이라는 단어 뒤에 ‘지도‘라는 단어가 붙으니 어떤 ‘앎‘은 우리를 중요한 곳으로 데려다줄 단서처럼 느껴진다. 그 반대의 경우도 가능하다. 어떤 앎은 길을 잃게 만든다. 덫이 되고수렁에 빠지게 한다.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약해지게 만든다. 사실 내 친구처럼 뭔가를 그냥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한 인간이 삶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이자 힘이다. 그런 일이일어난다면 우리 삶은 방향을 바꾸게 된다. 가만히 있는것보단 사랑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보단사랑할 것을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길을 떠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길을 만들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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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여학생에게 물어서 역 앞에서 공동묘지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묘지에 도착하자 예전에 본 기억이 있는 정문으로 많은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날씨 좋은 토요일이라묘지를 찾은듯했다. 장례식도 몇 건이나 치러졌다.
광대하게 펼쳐진 묘지로 들어가서 유대인 묘역을 향해 걸었다. 하지만 도착해보니 묘역 입구 철문이 닫힌 채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금요일과 토요일은 유대교 안식일에 해당하므로 묘역의 문을 아예 닫아버린다. 알고 있었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아 밀라노에서 하루 이틀 쉬다 보니 요일 감각이 헝클어져버린 탓이다. 모처럼 멀리서 찾아왔는데 프리모 레비의 무덤에 가볼 수가 없다니.
철책 너머로 예전에 본 적이 있는 그의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는 ‘174517‘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아우슈비츠에서 왼쪽팔뚝에 문신으로 새긴 죄수번호다. - P211

그러면서 유대인을 숨겨주거나 피신하도록 도와주는 활동을 펼쳤고 프리모 레비의 어머니와 여동생과도 계속 연락을 유지했다고 한다. 종전 후해도 아우슈비츠에서 생활한 프리모 레비와의 친분은 이어졌다. 그가 자살하기 며칠 전까지도 경치가 좋은 언덕으로 함께 산책을 갔다고 한다. 그녀는 우리에게 프리모 레비가 타자기로 쳐서 보내온 「회색지대」(『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수록)의 초고 상태의원고를 보여줬고 레비와 산책했다는 언덕으로 안내했다. 토리노를 둘러싼 흰 산들을 멀리 바라보면서 그녀는 "저 고개 너머가프랑스죠. 우리는 저기를 넘어가서 파르티잔에게 무기를 전달했어요."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녀는변호사로 활동하다가 80세에 은퇴했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에이나우디 출판사에서 프리모 레비의 담당 편집자로 일했던 발터 바르베리스 씨였다. 그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요약해서 조금 소개해본다.


프리모 레비는 단순히 소설가라기보다 ‘기억의 작가‘이며 무엇보다 우선 ‘중증인‘이었습니다. 현재 역사수정주의나 역사적 사건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 - P219

는 유럽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하나의위기라고 느껴집니다. 이러한 경향은 증언의 역할을 하는 문학에 대한 관심을 정반대쪽으로 향하게 하는 셈입니다. 그런의미에서 프리모 레비의 문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프리모 레비는 늘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했는데 지극히 검소한 생활을 했어요. 결코 상대를 불쾌하게 만들지 않는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역사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실히 이해하고 그 기억을 다음 세대에게 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만년의 그를 괴롭혔던 것은 어쩌면 개인적인 일.
가정 문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P221

또 하나 그를 힘들게 만든 것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였습니다. 그는 나치 독일이 폴란드 사람들에게 자행한일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똑같이 벌이는 게 아니냐고 우려했어요. 그래서 유대인 사회와 맺는 공식적인 교류나 관계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유대인 사회는 같은 유대인인 레비가 이스라엘의 정책에 반하는 생각을 갖고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를 비난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에게는 프리모 레비와 같은 인물이 전해준 증언을 - P221

이어나가야 할 윤리적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줄리아나 테데스키 씨와도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아우슈비츠의 생환자다. 프리모 레비의 친구였던 그녀는 1965년에열린 수용소 해방 기념식에 즈음해서 레비와 함께 아우슈비츠를다시 방문했다. 줄리아나 씨는 오랜 세월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했는데 앞서 언급한 레비의 담당 편집자 발터 바르베리스 씨도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의 왼팔에는 죄수 번호를 새긴 문신이 남아 있었다. - P223

이 숫자를 레이저 수술로 지운 사람도 있지만 나는 결코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날씨가 추워져도 반팔을 입고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게끔 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가죽을 때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의무니까요. 하지만 왜 그런곳에 전화번호를 메모해뒀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류가 앞으로 인종, 민족, 종교 같은 장벽을 극복하고 평화롭게 공존해갈 수 있을까요?" 나의 순진한 질문에 그녀는 절레절레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아니요.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무리일 테지요." - P223

전후에는 공화제를 실현한 진보적 운동의 지적·문화적 기반이장소다. 넓은 거리에 서서 살짝 고개를 들어 보면 하얗게 빛나는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 험한 산길을 반파시주의 투사나 망명자들이 넘나들었을 것이다.
"인간성의 이상으로 하얗게 빛나는 봉우리들." 다큐멘터리촬영을 위해서 토리노를 방문했을 때 주위를 둘러싼 험준한 산들을 가리켜 나는 그렇게 불렀다. 지금도 산들은 변함없이 거기에 있지만 이상의 광휘는 위협받고 있다. 반파시즘 투쟁의 사명을짊어지고서 전후 이탈리아의 풍요로운 지적 문화를 형성한 세대는 세상에서 거의 퇴장했다. 이제는 거칠고 천박한 포퓰리스트의사나운 목소리가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이탈리아만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현상이며 일본이야말로 한층 더 심각하다. 아우슈비츠의 해방 이후 40년도 더 지난 지금, ‘인간성의 재건을 위해 힘겨운증언자의 역할을 맡았던 프리모 레비가 살아있었다면 이사회를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리고 무슨 말을 했을까. - P231

프리모 레비가 자살한 자택은 레 움베르토 거리 Corso Reto 75번지에 있다. 이 거리는 로마 거리와 나란히 시내 중심부Umberto에서 남서방면으로 뻗어 있다. 길 양쪽으로는 19세기 말 무렵에솜씨 좋게 지어진 아파트가 늘어서 있다. 화려한 장식도 없이 실용적인 인상을 주는 안정감있는 풍경이다.
"이 거리의 기본적인 성격은 멜랑콜리다." 나탈리아 긴츠부르그가 쓴 말이다.


멀리 사라져가듯 흐르는 포 강은, 한낮에도 해질녘을 연상케 하는 보랏빛 안개로 싸인 지평선을 향해 아득히 멀어져간다. 어디에 있어도 매연이 내뿜는 우울하고 분주한 듯한 분위기가 풍겨 나오고 열차의 기적 소리가 들려온다. (......) 우리들의 거리는 이제는 모두가 깨닫고 있듯 잃어버린 벗. 이거리를 사랑했던 그 벗과 닮았다. 우리들의 거리는 그가 그러했듯 미간에 주름을 지은 채 성실히 일하며 열심히, 그리고 한결같이 활동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욕 없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나날을 보내며 꿈꾸는 듯도 보인다.(나탈리아긴츠부르그, 「어느 친구의 초상」, 1957년 『빛은 토리노에서」, 노르베르트 보비오 지음, 나카무라 가쓰미 옮김, 세이도사, 2003년)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가 잃어버린 벗"이 바로 체사레 파베세다. - P237

나중에 신부님 계신 곳에 가면 내가 묻힌장소를 가르쳐주실 겁니다."라고 남겼다. 예순한 살의 재봉사 주세페 안셀미는 세상에 남게 될 가족에게 이렇게 썼다. "오늘 밤, 처형된다고 들었다. (……) 잘들어라, 나는 죄가 없어. 단지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자들이 꾸민 덫에 희생된 것에 지나지 않아 그러니 너희들은 지금보다 더욱 가슴을 펴고 떳떳이 살아야만하는거야." 가구를 만드는 마흔한 살의 장인 피에트로 베네데티는 아이들에게 이런 글을 남겼다. "공부와 노동을 사랑하거라. 정직한삶이야말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며 인생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란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을 삶의 신조로 삼고서 너희들과 같은 사람들의 소망과 고통에 항상 마음을 쓰거라. 자유를 사랑하고이 보물을 위해서는 부단한 희생을, 때로는 목숨까지도 바쳐야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예의 삶이라면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 어머니 조국을 사랑하거라. 하지만 진정한 조국은세계라는점, 세상 어디에도 너희들과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그들이 바로 너희들의 형제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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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이 기마상을 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바람이 실현되어 가까이서보니 과연 페기 구겐하임이 썼던 그대로의 느낌이었다. 감탄이 나왔지만 그 부분만을 너무 응시해서도 안 되었다.
현대 세계의 고뇌를 진지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마리니는 한편으로는 장난기 넘치는 사람이기도 했다. 진지함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마리니의 표현이 가진 온화함과 풍성함의 비밀이며, 초상 조각에서 회화 작품까지 관통하고 있는, 쉽사리 도달하기 어려운 장점이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유머가 느껴진다. 파시스트에게 남편을 참혹하게 잃은 작가나탈리아 긴츠부르그의 문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성격을‘이탈리아적‘이라고 해도 좋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독일어 - P193

권의 예술가들에게서는 발견하기 힘든 특징일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특징이다.
뜻하지 않게 마리니의 작품을 만끽할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미술관가장 위층에 있는 두오모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좋은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탈리아를 위해 죽는 것은 죽는것이 아니다."

1937년의 크리스마스, 밀라노 대성당의 정면에는 불사를 약속하는 글귀를 크게 써넣은 거대한 장막이 걸렸다. 스페인 시민전쟁 당시 프랑코파 반란군지원에 파병된 이탈리아군 전몰자를 추도하기 위한 문구였다. 한편 이탈리아 각지로부터 인민전선파의용병으로 참전한 사람들도 수없이 많았으며, 이러한 투쟁이 훗날반파시즘 레지스탕스로 이어졌다.
지금 그 광장은 전 세계로부터 찾아온 관광객들로 붐빈다.중국인처럼 보이는 신혼부부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지금 내가보고 있는 것은 환영일까?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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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별의 강고한 벽에 균열을 내기위해서는 프랑스 혁명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예전에 베네치아의 옛 게토를 방문했을 때, 그곳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서 "게토의 문을 나폴레옹이 열어주었다."라는 취지를 담은, 주민들의 감사장을 본적이 있다.
중정에는 나치에 의해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어 희생당한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이곳 페라라에서도 같은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 사실을 녹슨 경첩이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게토에서 겨우 해방되었다고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않아 나치가 유럽의 점령지에 게토를 신설하여 전근대를 훨씬 뛰어넘는 학살 행위를 차례차례 펼쳐갔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이다. 최악의 형태를 띠고서. - P113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남아 있는 나치 강제수용소터에는 몇번이나 찾아갔다. 한국에 가면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종종 찾는다. 일부러 그런 장소에 발걸음을 옮기는 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인간의 잔혹함과 무자비함을 혐오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모순된 감정이다. 지적탐구심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 셰익스피어의작품(예를 들면 「멕베스』)에서 유발되는 감정과도 비슷하다. - P117

어머니는 1980년에 돌아가셨다. 60세의 나이였다. 한국의 감옥에 갇힌 아들 둘을 두고 석방의 희망도 갖지 못한 채 비참한 병으로 죽어갔다. 출혈이 심해 점점 체온이 떨어져가던 어머니의 귀에 입을 대고,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 아침까지 참아야돼. 아침이 되면 편해질 거야!" 그러자 이미 의식이 없는 듯했던 어머니는 희미하게 눈을 뜨고 이렇게 대답했다. "아침까지? 아직 아직 멀었잖아.." 겉치레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마, 그런 의미였을까.
몇 시간 후 차가워진 어머니는 숨을 거두었다. 3년 후, 아버지도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유럽 각지를 떠돌며 잔혹한 도상과 그림들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어느덧 길게도, 한순간처럼 짧게도 생각되던 그런 세월이 흘러버린 후 형들은 석방되었고, (행운이라고 말해야만 하겠지만) 나는 글쟁이가 되어 책을 내고대학에 자리를 얻어 그럭저럭 무난한 삶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이런 모든 상황에 대해 ‘진실은 이렇지 않아, 이럴 리는 없어.‘라는 - P137

감각이 떠나지 않는다. 부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도 훌쩍 넘겨버린 지금, 과연 나 자신의 인생은 이대로 괜찮을 걸까. 이 생각은 언제까지나 매듭지어지지 않는다.
꿈일지언정 오랜만에 어머니와 만났다. 그 꿈은 어머니가 저 세상에서 내려와 나에게 경고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네가 쓰고자 하는 소설에는 아직 번지르르한 겉치레나 자기보신적인 속임수가 있다고, 진실은 더욱, 더욱 어두운 것이라고. - P139

「이것이 인간인가는 전쟁이 끝나고 2년이 지난 1947년에 간행되었다. 1972년에 출간된 개정판에서 레비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였다.


지금, 파시즘은 패배했다. 이탈리아에서도 독일에서도, 자신들이 바랐던 전쟁에 의해 일소되었다. 두 나라는 완전히 새롭게 모습을 바꾸고 폐허로부터 일어나 힘겨운 재건의 길을 걷고자 했다. (......) 그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난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우리는 ‘안심하기에는 너무 이르지 않은가?‘
라는 걱정과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이런 말 뒤에 레비는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의 시구를 덧붙여 인용한다.


이런 괴물을 낳은 자궁은 여전히 건재하다.


그때로부터 또 8년이 지나, 볼로냐 역 대합실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 - P149

결국 모란디는 6일 동안 구치소에 갇혔다가 친구들이 당국을 상대로 벌인 탄원 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실제로 모란디는 행동당의 젊은이들과 단순한 친분 관계였을 뿐이었다. 다만 파시즘에 저항했던 젊은이들이 모두 모란디의 숭배자였고 볼로냐 대학에서 미술사 강좌를 열었던 로베르토롱기의 제자였다. 롱기는 이후 다음과 같은 분석을 내렸다. 행동당의 젊은이들에게 모란디는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 모든 웅변이나 과잉, 격렬함과 천박함에 대립하는 존재, 바꿔 말하면 파시스트적 신념이 전제로하는 폭력적 사고와 정신적인 퇴락과 대립하는 그런 존재"로서 커다란 버팀목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조 모란디는유서 깊은 도시 볼로냐에서 위대한 유럽 장인의 노래를 이탈리아풍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오카다 아쓰시, 앞의 책) - P167

모란디는 반파시즘 사상가는 아니다. 아무래도 실천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저 고난의 시대에, 10년을 하루처럼 병과 항아리를 계속 그려나갔던 ‘훌륭한 장인‘으로서, 파시즘과는양립할 수 없는 미적 실천을 관철해갔다.
그런데 ‘고전성‘, ‘고요함‘, ‘조화‘, ‘엄격‘과 같이 오늘날에는 폭넓게 받아들여지는 모란디의 이미지에 관해 근래 들어 비판적 주석이 덧붙여지고 있다. 모란디에 대한 이런 기존의 이미지는 화가 - P167

자신이 적극적으로 의도하고 개입함으로써 형성되었다는 지적이다.(오카다. 앞의 책) 다시 말해 ‘훌륭한 장인 모란디‘라는 이미지 자체가 그의 ‘작품‘이었다면, 모란디를 찬탄하는 나의 마음은 더욱 깊어진다. 모란디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과 예술운동의 동향에 무감각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거리‘를 두는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피렌체와 베네치아, 로마와 밀라노의 중간에 위치한 볼로냐의 예술가다운 ‘선택‘이었다고도 말할수 있겠다.
시청사를 나와 마졸레 광장 남쪽으로 걸으면 아르키진나시오궁Palazzo della Archiginnasio이라는 건물에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옛볼로냐 대학이 있다. 그곳에 들러 세계 최초로 인체 해부가 이루어졌다는 해부학 계단강의실을 구경했다. 현재 대학은 시내의 볼로냐 시립가극장 옆으로 이전했다.
역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왼편 몬테그라파 거리에 위치한 다넬로da Nello라는 오래된 레스토랑에 갔다. 수백 년 전부터 영업을 했을 법한 레스토랑 지하에는 손님이 가득했다. 산지의 신선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는 맛있었고 가격도 적당했다. 모란디는 때때로 금욕적인 수도사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거리 산책을 좋아했고 맛좋은 음식과 와인을 즐겼다고 한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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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타빌리 궁Palazzo Costabili(고고학 박물관)에서 스키파이아궁milanzo Schifanon으로 한 바퀴 돌았다. 에스테 가문의 옛 별장이던 스키파노이아 궁은 현재 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내부 ‘열두 달의 방Salone dei Mesi‘의 벽에는 페라라파 화가 프란del Cossa (c.1430~c.1477)와 코시모 투라Cosimo체스코 넬 코사 Francesco,
Turn(c.1430~1495) 등이 그린 훌륭한 프레스코화가 남아있다.
민박 주인이 추천한 레스토랑 라카노에서 점심을 먹은 후 페라라 공의 거처였던 에스텐세 성으로 향했다. 1385년에 지어진이성은 네 개의 탑을 갖고 있으며 건물 주위를 해자로 둘렀다. 성주변과 중정에는 천막을 친 노점상이 펼쳐져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여기서 쉬고 있었다. 내부를 구경한 후 지하 감옥에 다다랐다.
사실 이 성의 지하에 감옥이 있다는 것은 미리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 좋을지는판단하기 힘들었다. 이런 구경을 무서워하는 F를 배려하는 마음도 있긴 했지만 나 역시도 마음을 못 정한 상태였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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