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와 돈과 가문끼리의 결속, 그리고 대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결혼
1380년대의 노르망디 귀족들은 저랬구나.

10066 년에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기사단을 이끌고 도버해협을 건넜고,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왕의 군대를 무찌른후 스스로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했다. 후세의 역사서에 정복왕 윌리엄으로 기록된 바로 그 인물이다. 잉글랜드왕이 된노르망디 공작의 위세는 프랑스 왕의 그것에 맞먹었다. 향후1세기 반에 걸쳐, 번창한 성읍들과 부유한 수도원들을 다수보유한 노르망디의 반은 잉글랜드 왕가의 소유로 남게 된다.
1200년대 초에 프랑스 국왕은 길고 힘든 전쟁을 치른 끝에노르망디 대부분을 잉글랜드 국왕으로부터 재탈환했다. 그러나 노르만인의 피를 물려받은 잉글랜드의 왕들은 여전히 노르망디 정복의 꿈을 버리지 못했다. 게다가 노르망디의 대 귀족가문 다수는 프랑스화하기 전에는 노르만인이었기 때문에 잉글랜드에 대해서는 여전히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고, 변화의 징조를 찾으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백 년 전쟁이 발발하고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를 재정복하기 시작하자 노르만인 귀족들 다수는 프랑스 왕을 배신하고잉글랜드의 침략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 P25

라스트 듀얼귀족들 사이의 혼인은 사랑이나 로맨스 따위가 아니라 영지와돈과 권력과 가문끼리의 결속, 그리고 대를 이을 후계자를 생산하기 위한 것이었다. 종기사인 장 드 카루주에게 이상적인신부란 귀족 출신에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의 재산을 늘려 주고 영지를 확장시켜 줄 지참금을 두둑히 가져올 수 있는 여성이었다. 건강한 아들을 여럿 낳아 줄 젊은 여성일 필요도 있었다. 신부가 처녀인 경우에는 반드시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또한 결혼 후 낳는 자식들이 적통임을 보장해 주는 고결하고 정숙한 여성일 필요가 있었다. 이에 덧붙여 미인이라면 금상첨화였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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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상태가 이렇게 좋아진 걸 네가 보고가서 다행이다.˝ 어머니 프랑스와즈가 보부와르에게 한 마지막 말이다. 우리 엄마한테도 비슷한 얘기를 마지막으로 들었다. 생일날 아침이었다. 단 한번도 생일을 챙겨준 적 없던 분이 ˝오늘이 니 생일인데...˝ 그러셨고 삼일 후 돌아가셨다.


 

우리는 이제 이 병원을 좋아하지 않았다. 항상 미소를 지으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간호사들은 형편없는 보수와 대우를 받다.
며 고된 노동으로 힘들어했다. 쿠르노 씨는 자신이 먹을 커피를 집에서 싸 오곤 했다. 병원 측에서 뜨거운 물만 제공했기 때문이다. 간병인들은 샤워실은커녕, 밤샘 근무 후 몸단장을 다시하고 화장을 고칠 수 있는 화장실조차 제공받지 못했다. 쿠르노씨가 충격받은 얼굴로 감독관과 다툰 일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어느 날 아침 밤색 구두를 신고 왔다는 이유로 감독관이 쿠르노 씨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굽이 없는 구두인걸요"라고 항의하자 "흰색 신발을 신어야만 합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쿠르노 씨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하루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피곤한 표정부터 짓지 마세요!"라고 소리 질렀다고도 했다.  - P104

푸페트는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로 지냈다. 나 역시 혈압이높아 얼굴이 붉어진 상태였다. 우리는 엄마가 임종 직전까지 갔다가 다시 회복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걸 보는 게 괴로웠다. 또한 그걸 지켜보면서 모순적 감정을 느끼는 우리의 처지로 인해특히나 힘들었다. 고통과 죽음 사이에 경주가 벌어지는 가운데,
우리는 죽음이 이기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죽은 듯 잠든 엄마의 얼굴을 바라볼 때면, 우리는 시계를 매달아 둔 검은색 리본이 미미하게나마 움직이는지를 확인하게 위해 엄마가 입고있는 하얀색 실내복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관찰하곤했다. 이게 마지막 경련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위가 쪼그라들 정도로 괴로워하면서,
- P105

"너무나도 불행하구나."
내 마음을 찢어 놓는 어린애 같은 목소리였다. 엄마는 완전히혼자였다! 엄마를 어루만지고 그녀에게 말을 걸어 줄 수는 있었지지만, 지금 엄마가 느끼는 고통을 함께 나누기란 불가능했다.
엄마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고 눈이 뒤집혔다. 나는 ‘돌아가시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정신을 잃을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마침내 공트랑 씨가 모르핀 주사를 놓았다. 소용이 없었다.
나는 다시 벨을 눌렀다. 아무도 곁에 없고 누군가를 호출할 수도 없던 그날 아침에 엄마가 이런 고통을 겪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서웠다. 한시도 엄마 곁을 떠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 P115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
엄마가 수요일 아침에 세상을 떠났더라면 알지 못했을 온갖 이미지와악몽, 슬픔을 내게 남겼다. 하지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슬픔을 터뜨렸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날 엄마가 돌아가셨을 경우 내가 느꼈을 심리적 타격이 얼마나 컸을지를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이 늦춰.
진 결과, 어떤 면에서 우리는 얻은 게 있었다. 그 덕분에 거의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잃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기슴을 도려내는 듯한 수많은 후회 속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한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우리는 그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독자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부재로 인해 완전히 소멸하는 동시에 반대로 자신의 현존 덕분에 온전히 존재할수 있는 이 세계만큼이나 거대한 존재가 - P136

그러나 자신에게 스스로 부과한 물론 한계의 범위를 정하는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 내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로서는 누군가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기란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우리자신을 비난할 여지가 여전히 남게 된다. 엄마와 관련해서 나와 동생은 특히나 비난받아 마땅했다. 말년에 접어든 엄마를 돌보길 게을리했고 자주 찾아뵙지 않았으며 심지어 피하려고 했기때문이다. 엄마에게 헌신했던 그 며칠로, 우리가 곁에 있다는사실 덕분에 엄마가 느낀 마음의 평화로, 그리고 두려움과 고통에 맞서 얻어 낸 승리로, 엄마를 등한시했던 지난 세월에 대한젖값을 치른 듯했다. 우리가 끝까지 정성을 들이지 않았더라면엄마는 더욱 고통스러워했을 테니 말이다.
사실 엄마는 비교적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나를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맡겨 놓지 마라.
이렇게 호소할 수 있는 이가 한 명도 없는 처지에 놓인 모든사람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무심한 의사들과 과로에 지친 간호사에 의해 좌우되는 일개 환자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느낄 때 그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 P137

그래서 다인 병실에서는 마지막 순간이 다가올 때면 빈사 상태에 빠진 환자의 침대를 칸막이로 가린다. 그런데 그 환자는 본 적이 있다. 그다음 날로비게 될 다른 침대들을 이 칸막이가 둘러싸고 있던 모습을, 그래서 그는 알게 된다. 나는 어디에서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는검은 태양으로 인해 몇 시간 동안 눈이 먼 상태로 있었던 엄마를그려 보았다. 벌어진 두 눈의 확장된 동공 속에 깃들어 있었을극심한 공포를 엄마는 아주 편안히 죽음을 맞이하셨다. 운이좋은 자의 죽음인 셈이었다.
- P138

털실 뭉치와 짜다 만 뜨개질감이 든 밀짚 핸드백, 압지, 가위, 골무를 앞에 두고 보니 격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잘 알려진바대로 사물은 힘을 지니고 있다. 삶이, 그것을 이루는 다양한순간 가운데 오직 현재의 모습을 한 상태로 사물들을 단단하게감싸고 있기 때문이다. 고아 또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 그물건들이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쓰레기가 되거나 프랑수아즈이모에게서 물려받은 내 필수품이라고 말해 줄 다른 새로운 주인을 만나길 기다리면서 말이다. 마르트에게는 손목시계를 주기로 했다. 검은색 가는 끈을 떼어 내면서 푸페트가 울기 시작했다.
- P142

어머니는 정신적인 것을 중시하며 살았다. 그러나 삶에 대해서만큼은 동물적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열정은 엄마에게 있어서는 용기의 원천인 동시에, 육신의 중요성을알게 된 그녀가 진실에 다가서는 걸 가능하게 한 한 요인이기도했다. 엄마는 그동안 자기 안에 있는 진실되고 매력적인 모습을 가려 있던 진부한 생각을 던지 버렸다. 그 결과 나는 엄마가품고 있던 나를 향한 사랑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질투심으로 인해 자주 왜곡되어 있고 서투름으로 인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이 지닌 따스함을 나는 엄마가 남긴 글에서 이를 보여 주는 여러 감동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었다. 엄마는 두 장의 편지를 따로 보관해 두었는데 하나는 예수회 사제가, 다른 하나는 한 친구가 쓴 것이었다. 두 장의 편지 모두 내가언젠가는 하느님 곁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며 엄마를 안심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엄마는 손으로 앙드레 샹송이 쓴 글귀를 옮겨 적어 놓았다. 그 내용을 요약해 보자면 내가 스무 살 때니체, 지드, 자유에 대해 이야기해 줄 만큼 제대로 위엄을 갖춘손윗사람을 만났더라면 아버지 쪽 집안과는 연을 끊을 수 있었을 거라는 거였다.  - P150

"돌아가실 만큼 연세를 잡순 거죠."
이 말은 노인들을 슬프게 하고, 또 그들을 유배된 것과 다를바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는다. 그런데 자기가 죽을 나이가 됐다.
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 역시 엄마에 관해서 그런 상투적인 표현을 쓴 적이 있다. 그때의 나는 일흔 살이 넘은 부모나 조부모가 돌아가셨을 때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제 막 돌아가신 어머니 때문에 몹시 슬퍼하는쉰 살가량의 여자를 만났더라면 나는 그 여자를 신경 쇠약증에걸린 환자로 치부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죽을 텐데, 여든 살이면 죽을 만큼 충분히 나이를 먹은 게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다. 사람이 죽는 것은 태어났기때문도, 살 만큼 살았기 때문도, 또 늙었기 때문도 아니다. 사람은 무언가로 인해 죽는다.  - P152

하지만 동시에 어머니의 헛된 노력은일상의 평범함이 만들어 낸, 불안을 달래 주는 장막을 찢어 버리기도 했다. 자연스러운 죽음은 없다. 인간에게 닥친 일 가운데 그 무엇도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인간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이는 그 자체로 세상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신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다. 심지어 자신이 죽으리라는 걸 알고 이를 사실로받아들인다 할지라도, 인간에게 죽음은 하나의 부당한 폭력에해당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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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중 한 명이 위암으로 수술을 받은 지난겨울에는 "나 역시 위암에 걸릴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암과 타마린 잼으로 치료 가능한 장 기능 장애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엄마의 강박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 그런데 훗날 프랑신 다이토는 엄마가 암에 걸리신 것 같다는 생가을 했었노라고 우리에게 털어놓았다. "얼굴을 보고 알았지요."
라고 말하면서 덧붙이길 "냄새에서도 느껴졌고요"라고 했다.
이제 모든 게 분명해졌다. 알자스에서 엄마가 일으킨 발작은 종양 때문이었던 것이다. 기절하고 넘어진 것 역시 암 때문이었다. 그리고 2주간 병상에 누워 지낸 탓에, 오래전부터 엄마를 괴롭혀 오던 장폐색증이 악화되었던 것이다.
- P35

그에 따르면 2리터 정도의고름이 복부에 가득했고, 복막을 열어 보니 커다란 좋양이, 그것도 가장 악성에 해당하는 암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수술을 맡은 의사가 떼어 낼 수 있는 만큼 암을 제거하는 중이라고 했다.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사촌 잔이 그녀의 딸샹탈과 함께 들어왔다. 리모주에서 막 도착한 참이었는데, 편안하게 누워 있는 엄마를 만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샹탈은 낱말 맞추기 책 한 권을 챙겨 오기까지 했다. 우리는 엄마가 깨어났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의논했다. 간단했다. 방사선 검사 결과 복막염으로 밝혀졌고 곧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고 하면 됐다.
- P40

정신이 혼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엄마가 돌아가신다 해도 마찬가지일 거야" 라고동생에게 말했었다. 이날 밤 이전까지 내가 느꼈던 슬픔은 모두이해 가능한 범위 내에 있는 것들이었다. 심지어 슬픔에 잠겨있을 때조차도 정신을 차린 상태를 유지했다. 하지만 이번에 느낀 절망감만큼은 나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었다. 내가 아닌 다른누군가가 내 안에서 울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르트르에게 엄마의 입에 대해, 아침에 본 모습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 입에서 내가 읽어 낸 그 모든 것에 대해 들려주었다.  - P41

내 얼굴에 엄마의 입을 포개어 놓고 나도 모르게 그 입 모양을 따라 했던 모양이다.
내 입은 엄마라고 하는 사람 전부를, 엄마의 삶 전체를 구현하고 있었다. 엄마에 대한 연민의 감정으로 나는 마음이 찢어지는것 같았다.
- P42

"적어도 난 이기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남을 위해 살았거든."
훗날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랬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한 삶을 살았던 것 역시 사실이다. 소유욕과 지배욕이 강했던 엄마는 우리를 자신의 손아귀에 완전히 가두어 두려고 했다. 그렇지만 엄마가 우리의 보상을 간절히 바라게 된 바로 그무렵, 우리는 자유롭게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을 원하기 시작했다. 갈등이 끓어오르다가 폭발했지만, 엄마가 마음의 안정을되찾는 데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나 끈질긴 사람이었다. 엄마의 의지가 이겼으니 말이다. 집에서는 모든 방문을 열어 두어야만 했고, 나는 엄마가 있는 방에서 엄마가 지켜보는 가운데 숙제를 해야만했다. 밤중에 나와 동생이 각자 침대에 누워 서로 수다라도 떨라치면,  - P51

잠에서 깨자마자 동생과 통화를 했다. 한밤중에 엄마가 의식을 되찾았다고 했다. 수술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으며 그로 인해 크게 놀란 것 같지는 않다고 했다. 나는 택시를 탔다. 매번 오고가던 길이었다. 햇살이 따사롭고 하늘은 푸른, 여느 때와 같은 가을날이었으며 같은 병원을 향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맞이하게 될 문제만은 달랐다. 회복기에 들어선 환자가 아니라 임종 직전의 환자를 보러 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전에 병원에 올 때면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무심하게 대기실을 통과하곤 했다. 비극은 닫혀 있는 저 문들 뒤에서 벌어지고 있을 뿐, 문 밖으로 새어 나오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내게 닥친 비극이 되고 말았다. 나는 될 수 있는한 빨리, 하지만 동시에 가능한 한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제 병실 문에는 "면회 금지" 라는 문구가 적힌 팻말이 걸려 있었다. 방 안의 풍경도 바뀌어 있었다.  - P59


사실이었다. 전문가들이 내린 진단과 즉, 그리고 결정을무력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악순환에 갇힌 셈이었다. 환자는 의사들의 소유물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니 그들의손아귀에서 환자를 빼내 와야 하지 않겠는가! 지난 수요일에는 수술과 안락사 중 양자택일을 해야만 했다. 당시로서는 굳어 가던 심장이 다시 힘차게 뛰게 되면 엄마가 장폐색증을 견다면서 지옥을 맛봐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게 변했다. 의사들이안락사를 거부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수요일 아침 6시에 내가 그 자리에 있었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랬다고 해도 용기를 내서 N 박사에게 "그대로 돌아가시도록 어머니를 내버려두세요" 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내가 "어머니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바로 이 것이었다.  - P79

 병으로 인해 엄마를 둘러싸고 있던 편견과 오만의 껍질이 깨어져 버린 것이었다. 아마도 이제는 자신을 방어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리라. 체념이나 희생은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엄마가 우선적으로해야 하는 일은 회복하는 것, 즉 자기 자신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원하고 좋아하는 일에 전적으로 몰두하면서 마침내엄마는 원망의 감정에서 벗어났다. 예전의 아름다움과 미소를되찾은 엄마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마침내 자신과 평화롭고 조화로운 관계를 맺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죽음의 기운이 뒤덮고 있는 이 병상 위에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기운이 피어나고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 P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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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날 쫓아오는 바람에 달리고 또 달리는데 말이다. 그러다가 벽에 부딪히게 돼. 벽을 뛰어넘긴 해야 하는데 그 뒤에뭐가 있는지 모르잖아. 그래서 난 무서워 하지."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죽음 그 자체가 무서운 건 아니야. 죽음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무서운 거지."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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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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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떤 단어가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 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아프리카 어느 마을 식수가 부족해 아이들은 아침 일찍 물동이를 지고 물을 길어 나선다. 몇 시간을 걸어가서 물을 길어 이고 지고 되돌아오는데, 아이들의 불완전한 걸음과 부실한 물동이 때문에 절반은 돌아오는 동안 흘러서 사라진다. 그 딱한 사정을 접한 디자이너가 사람들과 힘을 합쳐 큰 공(드럼통) 모양의 물통을 만들었다.

그 후 아이들의 삶은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을 꽉 채운 물동이를 놀이하듯 굴리며 돌아온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양의 물을 운반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저장도 가능하게 되었다. 마을 주민들의 삶도 달라졌다. 아이들은 물 긷느라 갈 수 없었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아주 간단한 물통 디자인 하나가 바꿔놓은 일상의 기적이다.

   흔하디흔한 적정기술의 한 사례다. - P11~12

   활자 중독자이기는 하지만 '자기를 계발하라' 라든가 하는 류의 책을 거의 접하지 않는다. 그런 종류의 책은 읽고 있노라면 스스로가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 계속 평가하게 만들어서 자괴감의 늪에 허우적 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거기에 더해 끝없는 각성을 요구한다. 그렇게 삼일쯤 지나면 읽을 때의 다짐과 각성과 반성들은 읽기 이전으로 사라지고 만다. 옳은 줄은 알지만 실행해지지 않는 그 무엇을 요구하는 도돌이표다. 그런 끈기가 없기에 '니가 요 모양 요 꼴'인 거라고 누군가 지적질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또한 무슨 저명한 박사란 타이틀이 눈에 띄는 책도 주저한다. 꼭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압박에 스스로 눈에 불을 껴고 읽지만 어김없이 한 사나흘 지나면 까맣게 잊힌다. '그래서 니가 무식한 거야'란 힐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 때, (그 시절 유행했던) 안병욱 박사나 김형석 박사, 또 이시형 박사 (이분의 책 중에는 '내성적인 너무나 내성적인'(제목이 이거 맞나, 갸웃~!)은 꽤 재밌게 읽었던 기억은 난다.) 크리슈나무르트, 칼릴 지브란 등등의 책을 접한 적 있다. 읽을 때도 도통 모르겠더니 읽고 난 후는 기억이 1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부터 조금씩 기피해 온 독서 대상들이 되었다.

   내게 책은, 읽는 동안 마구마구 호기심이 동하게 즐겁거나, 주변 상황에서 책 속으로 순간 이동이 가능할 만큼의 몰입이거나, 정신의 쉼이거나, 지친 마음에 위로이자 세상으로 나아가는 배다. 책 속에 빠져있는 시간은 언제나 모자라고 간절하지만 사람들과의 시간도 나에게는 소중하다. 꽤나 누군가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 능력도 뛰어난 편에 속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피 대상이던 저명한 분이지만 "당신이 옳다"는 선택된 책이다. 마침 탁월한 공감 능력이 필요한 일도 시작한 지 일 년 차다. 그런데 '적정 심리학'은 뭘까. 책 표지에 강조점까지 표시된 '적정'이란 단어의 뜻은 저 페이지에서 고스란히 나온다. 그런 쓰임새라면, '적정'은 참 좋은 뜻을 가진 단어가 된다. 맨 발의 아이들이 커다란 공을 굴리면서 돌아오는 행복한 표정의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저 아이들은 뭐가 저리 행복할까' 그런 의문 없이 주름살이 쫘악 펴지게 만드는 그런 영상이었는데 그 커다란 통들이 '물통'이었다는 것은 저 글을 읽고 알게 되었다. 그런 표정이 가능케했던 이유도.

   "사냥매처럼 마음속에 내리꽂히거나 저녁 강물처럼 흘러 들어올 때가 있다. '적정기술'이란 단어가 그랬다. 이런 사람 살리는 개념이라니. 심플하고 아름다웠다.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이 문장에 매혹당했다. 처음 만나는 저명한 이 분께 단박에 사로잡혔다. 나도 ' 매혹당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나는 결코 금사빠가 아닌데!!) 그렇게 쭉죽 읽어나간다. 밑줄 그을 부분이 늘어난다.

 

 

   세월호 참사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기에 많은 (심리치유) 전문가들이 현장에 왔지만 이내 거의 사라졌다. 대신 "집에 앉아만 있을 수없어서 무작정 왔다"는 자원활동가들의 숫자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들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며 울면서 무슨 일이든 했다. 피해자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했으며 한없이 무기력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슬픔과 분노, 무력감을 호소하면서도 유가족들 손을 잡고 함께 울었다.

   그들의 이런 마음과 태도는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다. 그들의 행동과 눈빛은 트라우마를 받은 이후 세상과 사람을 통째로 불신하게 된 피해자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결정적인 위로다.

   아무 자격증 없는 자원활동가들은 현장에서 그렇게 자신의 자리를 찾고 역할은 해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정부와 정치권력은 상처 입은 피해자들을 길바닥에 패대기치고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하지만 자원활동가들의 한결같은 일상적 활동과 그들의 공통 정서인 슬픔과 무기력이 만들어낸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동아줄이 되었다. - P14

   '세월호' 벌써 팔 년째다. 여전히 '세월'이란 단어만 보아도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고 '세월호'를 위해서 뭔가를 하지도 않았다. 단지 마음이 먹먹하고 죄스러울 뿐, 여전히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입으로만 '세월호'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무책임하고 무능한 어른인 스스로를 인정하고 묵인하는 장치로 '세월호'는 작동한다. 그날의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는 비겁함으로 말이다. 그런 비겁함을 보란 듯이 몸으로 뭔가를 행한 자원봉사자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언제나 몸을 움직여 행동하면서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평온한 일상을 포기하고 뭔가라도 도움이 되려고 찾아 나서는 언제나 행동으로 실천하는 그분들의 발걸음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 가는 동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어쩌다 우연히 '세월호'이야기가 나오면 '이제 그만하라고, 지겹다고' 말하는 이들도 꼭 있다. '그 당사자가 당신이어도, 희생자가 당신이 아는 누구였다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느냐'라고 묻는다. 그 느닷없고 공격적인 질문에 뜨악하고도 억울한 눈으로 흘겨보며 입을 다문다. 한결같이 재수 없다는 반응이다. 내게는 일어나지 않은 일일 때 얼마나 함부로 말을 하게 되는지 생각해 보게 만든다. 특별히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언론이 그렇게 말하면 그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학습된 시각을 가져서다. 실제로 그런 분들은 주변에도 비일비재한데 대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줄 모른다. 남의 이야기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언론에서 회자되는 사안들에 대해서만은 무척 신랄하다. 그것이 정치적인 것이든, 사회 문제이든, 100분 토론 속 참가자만큼 분석적이고 뼈 때리는 말들과 욕설도 서슴지 않는다. '정치적인 전문가'의 시선과 논조를 가졌다. 스스로 신념이라 생각한 것들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것이 틀린 건지 맞는 건지에 대한 생각은 없다. 그런 '재수 없는' 일이 내 것일 리는 없다고, 그런 물음을 듣는 것도 못마땅하고 '재수 없는'일이 되어버렸다. 그저 '나'만 비껴가면 되는 걸까?

   여전히 '세월호'에 준하는 참사는 곳곳에서 진행 중이고 원인 제공자는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인구감소는 걱정하면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들로 생명을 잃는 악순환이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일이 단지 '재수가 없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묵인하고 방관한 국가의 시스템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다. 아니 현재 진행형이다. 타인의 아픔에 무감한 채로 먹고살 만해서 목소리도, 소유권도 분명한 이들에게만 정치권력의 구애도 집중되는 이 현실이 우리가 그토록 꿈꾸던 대한민국의 오늘이긴 할까?

   모두 전문가가 되기를 원하고 그리 살려 하지만 저런 현장에서 쓸모없는 전문가만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도 지금 하는 일에서 전문가가 되고 싶다고 자주 생각한다. 어떤 돌발적인 상황 앞에도 흔들리지 않게 대처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전문가. 내가 생각하는 전문가란 그런 것인데, 머리만 있고 가슴은 없는 직업적인 전문가가 되고 마는 것은 아닌지 걱정 아닌 걱정도 있다. '자원봉사자'에서 시작한 생각이 삼천포로 빠져서 다시 허우적대고 말았다.

'슬픔과 무기력의 거대한 연대'는 피해자들을 구하는 공감의 시작이다.

 

 

  내 고통에 진심으로 눈을 포개고 듣고 또 듣는 사람, 내 존재에 집중해서 묻고 또 물어주는 사람, 대답을 채근하지 않고 먹먹하게 기다려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앓다. 그렇게 해주는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다. 그 한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산다.- P109

   한 사람의 힘이 그렇게 강력한 것은 한 사람이 한 우주라서 그럴 것이다. 근사한 수식이나 관념적인 언어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신비한 팩트다. 사람은 그 한 사람‘이라는 존재의 개별성 끝에서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은 세상의 전부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그래서 누구든 결정적인 치유자가 될 수 있다.

   ‘나‘ 이야기,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의 불씨가 지펴지면 희미하던 생명의 박동이 쿵쾅쿵쾅 돌아오는 소리가 들린다. ‘나‘ 이야기에 정확하게 두 손을 대고 있는 한 사람은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어도 심리적 CPR을 하는 사람이다. 사람 목숨을 구하는 사람이다. 두 손을 그의 나‘ 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한 존재와 이어진 것이다.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 P110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이문재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어떤 경우] 전문

   고통에 찬 누군가의 이야기를 그저 담담하게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그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얼마나 오만한 판단이었던 건지 지금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 생각들은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가위에 눌리게 만든다.

나는 같은 관심사를 공유한 사람들과의 대화와 토론도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같이 고민을 해결하기도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1인이지만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온라인 글쓰기 동아리방에서 만난 그 사람은 그곳의 중심에서 언제나 빛나는 사람이었다. 나와 다른 세상을 살고, 주변이 언제나 반짝반짝하던 그 사람이 자신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조언을 구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정확하게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세상에서 사는 사람에게 조언을 할 수도 없었지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밖에 다른 방법도 없었다. 그런 시절을 삼 년여, '존재와 존재의 연결이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일인 줄 알았으나 일방적인 듣기는 한계가 왔다. 많이 지치기도 했다. 힘든 일과의 끝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통화를 하고 있다 보면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고 제대로 성의를 다하지 못하는 죄책감에 시달리게 만들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럽고 따뜻한 사람이 나에게는 자신에게만 그런 사람이기를 바라는 모순을 지켜보는 심정은 복잡했다. '죽겠다, 죽겠다' 하면서도 본인의 일상은 평화롭게 유지하면서 내 일상은 엉망으로 만드는 나보다 훨씬 어른인 사람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서 갈팡질팡하기도 했다. 그런 감정의 줄다리기 끝에 절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고 결정하기까지가 어렵지 선택한 후에는 돌아보지 않는 나의 성품상 잊고 지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다 되어갈 때,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자신의 생명과도 바꿀 수 없다던 아이를 둘 남겨두고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나는 그 서늘한 결기를 마주하기가 두렵다. 한때는 사는 일이 너무 막막하고 고단해서 죽음의 유혹이 강하던 어느 시절을 지나왔다. 그때마다 내 발목을 잡은 건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남길 상처였다. '내가 뭐라고 그들에게 평생 그런 트라우마를 안긴단 말인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택을 하는 그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 그 결연함이 무섭다.

   아직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 아니 풀려고 했던 적도 없이 밀어두고 숨겨두고 감추고 있다. 솔직히 어째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아는 척한 순간, 그 상처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서 새로운 관계 맺기가 안 된다. 정말 나는 '재수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잊을만하면 슬금슬금 덮쳐온다.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 그 방식으론 상대를 끝까지 부축해 낼 수 없다. 둘 다 늪에 빠진다. 공감은 너를 공감하기 위해 나를 소홀히 하거나 억압하지 않아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군가를 공감한다는 건 자신까지 무겁고 복잡해지다가 마침내 둘 다 홀가분하고 자유로워지는 일이다.

   너를 공감하다 보면 내 상처가 드러나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나도 공감받고 나도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공감하는 사람이 받게 되는 특별한 선물이다. - P121

   공감은 그저 들어주는 것,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듣는 일이다. 정확하게라는 말은 대화의 과녁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공감에는 과녁이 있다. 과녁에서 멀어지는 대화는 지리멸렬해진다. - P132

   공감은 상처를 더 드러낼 수 있게 만들고 제대로 드러난 상처 위에서 녹아드는 연고다. 상처 위에 바로 스민다. 상처 부위를 덮고 있는 겉옷 위에 뿌리는 분무제가 아니라 옷을 젖히고 상처 난 바로 그 부위 맨살에 바르는 약이다. 정확하고 집중력 있는 공감은 문제 해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책임진다. 공감은 치유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관장하는 강력한 치유제다. - P158

   사람의 감정은 항상 옳다. 사람을 죽이거나 부수고 싶어도 그 마음은 옳다. 그 마음이 옳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기만 하면 부술 마음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어진다. 비로소 분노의 지옥에서 빠져나온다. - P167

   공감자는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니다. 너도 많이 있지만 나도 마음이 있다는 점, 너와 나는 동시에 존중받고 공감받아야 마땅한 개별적 존재라는 사실을 안다면 관계를 끊을 수 있는 힘도 공감적 관계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관계를 끊는 것이 너와 나를 동시에 보호하는 불가피한 선택일 때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울며 겨자 먹기로 관계를 이어가는 것은 나에게는 파괴적인 행위고 상대에게는 자기 행동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양쪽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결국 또 다른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모든 사람과 원만하게 지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에게 공감적인 사람도 불가능하다. - P170

   어떤 기간 동안, 어떤 특정 맥락과 상황 속에서는 내가 참고 견딜 수도 있지만 나는 항상 그래야 하는 존재,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자기에 대한 감각이 살아 있어야 공감자가 될 수 있다. 나와 너를 동시에 공감하는 일은 양립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와 너 모두에 대한 공감‘의 줄임말이 공감이다.- P194

   공감은 한 사람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공감은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는 감정적 교류다. 공감은 둘 다 자유로워지고 홀가분해지는 황금분할 지점을 찾는 과정이다. 누구도 희생하지 않아야 제대로 된 공감이다. - P266 

   "공감은 내 등골을 빼가며 누군가를 부축하는 일이 아니다"란 말이 좋았다. 어쩐지 언니한테 위로받는 듯한 말이다. 내 손해를 감수하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는 없이 상대방만 보이는 게 '공감'이 아니란 사실이 새롭다. 그동안 '공감'에 대한 공공연한 오해였다. '공감'은 언제나 옳다. 그러나 '나' 다음에 상대방이 있고 비로소 공감은 시작된다는 맥락으로 이해되어 홀가분한 기분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직은 두렵고 서툴지만 관계 맺기의 단절을 가져온 내 안의 상처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제 겨우 첫걸음을 뗀 것이지만 그동안의 경험으로 이미 안다. 시작이 어렵지 '첫'을 시작하면 그다음은 성큼성큼 나아간다는 것을. 내 안의 상처를 마주할 수 있어야 타인의 상처도 들여다볼 줄을 알게 된다. 지금 이 직업을 끌고 가기 위해서도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했다. '당신은 옳다. 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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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ro 2023-04-16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우적대도록